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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9화

6장 인재 선발은 과감하게

설탕바고 자시고, 턴 언데드는 다섯 번이 한계였다.

그나마 마력의 결정으로 한계치가 팍 오른 게 이 정도였다. 오히려 설탕바를 통해 집중력을 억지로 한계까지 쥐어짠 덕분에, 하마터면 의식이 끊겨 사령군이 득실거리는 지면으로 추락할 뻔했다!

덕분에 거대한 이동 요새였던 네크로 폴리스가 양 다리만 남은 흉측한 기둥이 되어 그곳에 고정되어 버렸고.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황자님. 간밤에 잠자리가 불편하셨습니까?"

마주보고 앉은 엘스톤 백작이 조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나는 거의 새벽 2시까지 네크로 폴리스와 벌인 사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체력이 형편없어서 오전엔 항상 이래. 매일 똑같이 벌어지는 일이야."

"저런. 부디 건강을 챙기시길 바랍니다. 이제 저희 영주민들이 기댈 수 있는 건 정말 황자님 뿐이니까요."

내가 이쪽저쪽을 오가는 사이, 백작은 제국 정부에 지원군이 아니라 아예 정규군을 배치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거절.

대신 클로드 황자에게 자유롭게 영지를 오갈 수 있는 재량권을 줄 테니, 사령군이 다시 침략한다면 황자와 의논하여 적을 막아내라는 권고문을 동봉해 보냈다.

물론 어젯밤에 몰래 나가 사령군의 핵심을 박살냈으니, 앞으로는 이 땅이 고통 받을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백작은, 갑자기 만찬 테이블 위에 슬그머니 상자를 올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음? 이건 뭐야?"

"식사가 끝나면 곧 돌아가실 텐데.... 힘든 귀향길에 여비라도 보태시라고 제가 준비한 성의입니다. 부디 다음번에 사령군이 쳐들어오면 제 얼굴을 봐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아, 뇌물?"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황자님은 제국 수도인 엠퍼로드에 거처하시니, 일이 터질 때마다 이 먼 곳까지 행차하시는 것만으로도 큰 수고가 아닙니까?"

"맞아. 수고는 수고지."

"그러니 이건 감히 황자님께 수고를 끼치는 데 대한 저희 영주민들의 감사의 표시일 뿐입니다. 얼마 되지 않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 주십시오."

돌려말하는 솜씨가 제법이구만. 상자의 크기를 보아 하니 저 안에 금화가 꽉 차 있다면.... 대략 500개쯤 이려나?

모르긴 몰라도 완전 쥐어짜서 마련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사령군에 시달리느라 재정이 쪼들렸을 텐데.

"괜찮으니 도로 가져가. 이런 데 쓸 돈 있으면 영주민들을 하나라도 더 챙겨...."

...응?

슬쩍 열어본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건 금화가 아니라 은화였다.

이거 실화냐?

은화 500개면 금화로 50개밖에 안 되잖아? 고작 금화 50개를 뇌물이랍시고 준거야?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진심인가 본데.... 나는 이곳의 절망적인 재정상황을 새삼 파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반대로 내가 돈을 줄게. 메르데스?"

"네. 황자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메르데스가 즉답했다. 나는 손목을 흔들며 명령했다.

"저택에서 여비로 챙겨온 거 있지? 그거 지금 당장 싹 가져 와."

"알겠습니다. 황자님."

메르데스는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사색이 된 엘스톤 백작은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연신 꾸벅였다.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저희가 너무 가진 게 없어 그만...."

"돈 적다고 비꼬는 거 아니야. 진짜 됐으니까 내 말 좀 들어!"

"예, 옛!"

백작은 깜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백작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 땅은 사령군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 1차 방어선이야. 당연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고. 내 말 맞지?"

"그, 그렇습니다."

"당연히 제국 정부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해. 물론 예전에는 지원도 많이 해주고 군대도 따로 주둔시켜 줬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그게 사라졌지?"

"그게 한 5년 전부터...."

정확히는 제스가 정권을 잡은 뒤로 엘스톤 백작령에 대한 지원이 뚝 끊겼다. 나는 앞으로 진행할 여러 개의 루트를 떠올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앞으로도 1년 정도는 그게 계속 이어질 거야. 이쪽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 조금만 더 참아줘."

"황자님...."

"대신 앞으로 사령군 걱정은 잊어도 돼. 이미 크게 당했으니 당분간은 잠잠할 테고, 뭔가 조금의 낌새라도 있으면 내가 곧바로 날아와서 처리해 줄 테니까."

"오오...."

"그러니 어제 말한 것만 확실히 지켜줘. 내성 말고, 외성 쪽에 내가 언제든지 들락날락거릴 수 있는 방을 하나 준비해 줘. 가능한 높은 층이면 높은 층일수록 좋고. 무조건 창문 달린 방으로.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동안 사령군에게 피해를 입은 영주민들을 잘 추스르는 거야. 어떻게든 생활이 가능하도록 최대한 지원해. 특히 아이들이나 젊은이들 위주로. 지금은 별거 아니라도 10년 후에는 다들 중요한 버팀목이 될 테니까. 알았지?"

"알겠습니다. 아니, 명심하겠습니다! 젊은이들이야말로 우리 영지의, 아니 모든 제국의 미래인 법입니다. 황자님의 말씀대로, 제가 가진 모든 사재를 전부 털어서라도 영주민들의 생활을 지원하겠습니다."

백작은 감격한 얼굴로 선언했다. 근데 이게 당신 감동시키려고 한 말이 아니야. 전부 10년 후에 벌어질 이계와의 전쟁을 위한 포석이라고.

어쨌든 뜻이 통했으니 아무래도 상관 없다. 나는 눈앞의 상자를 백작 쪽으로 힘겹게 밀며 말을 이었다.

"알았으면 이런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마. 그리고 제국정부쪽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일단 많진 않아도 내가 지원금을 따로 보내줄 테니까 그것도 보태고."

"이 은혜를 어찌.... 정말 감사합니다. 황자님."

백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코를 훌쩍였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마주친 백작의 눈 주변으로 감정한 정보가 제멋대로 떠올랐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D

잠재 힘 : D+

현재 마법 : F

잠재 마법 : C

감정안?

딱히 볼 생각도 없었는데 감정안이 백작의 능력을 제멋대로 읽어 버렸다. 이거 완벽하게 컨트롤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는데?

근데 힘이 D+면 어젯밤에 봤던 해골 병사랑 비슷한 수준이다. 백작도 보기보단 힘 꽤나 쓰나봐?

"그러고 보니 백작은 기사였던가?"

"그게.... 차마 기사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백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하급 마갑을 겨우 착용하고 움직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그마저도 입어보지 않았군요."

"그럼 하급 마갑은 D랭크...."

"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응? 아니야. 그런데 백작은 혹시 마법에 관심이 있어?"

이미 50살도 넘은 중년인 백작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은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백작은 놀란 얼굴로 머뭇거리다 털어놓았다.

"실은... 어렸을 때 어떤 마법사가 저희 영지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마법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마법 훈련도 받아보려 했는데, 당시에 영주였던 아버님의 큰 꾸지람을 듣고 그만두었습니다."

"왜? 엘스톤 가문은 마법을 배우면 안 된다는 가훈이라도 있나?"

"그보다는 제가 장남이었고,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기사가 되는 게 조건이었으니까요."

대부분의 고위 귀족가문이 이와 비슷한 승계 조건을 가지고 있다. 백작은 옛 추억이라도 떠올랐는지, 그윽한 눈빛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하신대로 마법에 관심이 있긴 했습니다. 다만 제가 가진 재주가 부족한지라, 기사 수업 하나만 매진해도 성과를 거두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기사 쪽에 올인했구나. 어쩌면 마법사 쪽이 성과가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잠재능력만 보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백작은 치켜세워줘서 고맙다며 웃었고, 그새 번개처럼 숙소를 다녀온 메르데스가 두툼한 가죽주머니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황자님, 말씀하신 여비를 가져왔습니다."

"수고했어. 자, 그럼...."

나는 가죽주머니를 테이블 위의 상자 옆에 툭 내려놓았다.

"금화 50개야. 많은 건 아니지만 앞으로 매달 최소 이 정도는 보내줄게."

은화와 금화 교환비가 보통 10 대 1이니, 이것만으로도 저 상자 안에 든 은화만큼의 가치가 있는 셈이다. 백작은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테이블에 이마를 묻었다.

"사령군을 퇴치해 주시는 것도 모자라 지원금까지.... 대체 황자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지를 잘 다스려. 그거면 충분해."

"황자님...."

"그럼 돌아갈게. 번거롭게 마중 나올 필요 없어."

"황자님!"

나는 고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백작을 응접실에 내버려 둔 채, 메르데스와 함께 복도로 나와 걸음을 옮겼다.

"황자님, 앞으로도 엘스톤 백작령에 계속 지원금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응. 근데 전에 받은 전승 포상금에서 빼 쓸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되."

이 아가씨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메르데스는 크게 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 다시 질문했다.

"그 돈을 제외하고도 매달 금화 50개씩을 이곳에 보내는 게 가능합니까?"

"당장은 불가능하지. 그래도 계획이 있으니까."

애초에 이 넓은 엘스톤 백작령을 생각하면, 금화 50개 따위는 갈라진 땅에 숟가락으로 물을 끼얹는 정도도 안 된다.

그러니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자금을 확보하는 테크트리를 진행해야 한다. 기왕 여길 살리기로 마음먹었으면, 매달 최소 금화 500개 정도는 지원해 줄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데 돈 버는 루트도 한두 개가 아닌데 그중 뭘 먼저 시작할까?

제국 최대의 도박장인 '골든 룸'벗겨 먹기?

아니면 이미 죽은 외사촌 페넬 백작이 그동안 뇌물로 쌓아 둔 돈을 싹 털어오기?

그것도 아니면 새로운 영약 상회를 개설해서 제대로 된 사업을 벌이는 루트로?

"...역시 루넨브레스 가문의 특기부터 살리는 게 좋겠다. 메르데스?"

"네. 황자님."

"저택에 돌아가면 라니아랑 그동안 쌓아둔 영약을 정리해서...."

그런데 그때, 갑자기 메르데스의 얼굴 주변으로 멋대로 읽어낸 감정 내용이 떠올랐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C

잠재 힘 : A+

현재 영약술 : A

잠재 영약술 : A+

현재 정령마법 : F

잠재 정령마법 : A+

뭔데 이건!

감정안이 또 제멋대로 감정을 해버린 건 일단 넘어아고.

이 아가씨, 무려 세 개나 되는 A+의 재능을 가진 괴수였잖아!

물론 예전에 몰랐던 기사의 재능, 그러니까 '힘'이 높다는 건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여기에 정령마법의 재능까지 최고라고?

대체 왜?

그동안 영약 재료 채집을 위해 야생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정령과의 교감이라도 쌓았나?

"왜 그러십니까 황자님? 혹시 제가 또 무언가 말실수를 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메르데스는 내 시선에 놀랐는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용서부터 빌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대충 생각난 대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가끔 널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되서."

"역시 그렇군요."

"역시?"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도, 어렸을 때부터 제 외모가 이상하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뭐? 갑자기 여기서 외모 이야기가 왜 나와?

"제 외모가 볼품이 없어 황자님께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무슨 헛소리야. 네가 왜 볼품 없는데?"

나는 딱 잘라 부정했다.

물론 생긴 게 엄청난 미인은 아니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큰 키와 균형 잡힌 체형이 인상적이며, 무엇보다 온몸에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매사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매력적이다.

애초에 별로였다면 예전에 이 아가씨와 관계를 발전시키지도 않았겠지? 나는 메르데스의 손을 잡고 직접 일으켜 주며 미소를 지었다.

"넌 외모에 자신감을 가져도 돼. 네 부모도 그저.... 여자아이 치고 체격이 커서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뿐이지 다른 뜻은 없었을 거야."

"제 몸이 커서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불편해?"

메르데스의 몸을 위에서 부터 아래까지 훑는 데만 장장 5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시원시원하니 보기 좋잖아? 내가 볼 때 넌 멋져. 그러니 웅크리지 말고 어깨 쫙 펴고 다니라고."

"...감사합니다. 아니, 황공합니다. 황자님."

"안녕하십니까. 황자님."

"안녕하십니까. 황자님."

당장 주변을 지나가며 인사를 하는 성의 시녀들과 비교해도 메르데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그런데 하필 시선이 그쪽으로 간 사이, 이 망할 놈의 감정안이 시녀의 능력을 또 읽어 버리고 말았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E-

잠재 힘 : E

이건 뭐, 메르데스와 비교하면 전투기와 세발자전거 정도는 차이가 나네.

그 뒤로도 성을 나설 때까지 여러 명을 감정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차에 올라탄 나는 마주보고 앉은 메르데스를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차에 마주보고 앉은 메르데스가 물었다. 나는 살짝 달아오른 왼쪽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네. 알겠습니다."

메르데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옆에 놔둔 바구니에서 무언가 새로운 영약을 꺼냈다.

"혹시 열이 나신다면 이걸 드시면 됩니다. 해열의 영약입니다."

"해열의 영약? 그런 것도 챙겨왔어?"

"시녀장님이 챙겨주셨습니다. 성장의 영약을 계속 드시다 보면 몸에 심한 발열이 생길지도 모르니 주의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역시 라니아가 꼼꼼하네. 잘 마실게."

나는 영약을 건네받아 목 안에 부어 넣었다. 근데 내 얼굴만 보고도 열이 나는지 알아내다니, 역시 얘도 최고등급의 영약사 맞구나.

그나저나 훗날을 위해서 이 아가씨의 다른 재능도 키워줘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정령마법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 유명한 기사를 따로 저택에 초빙해 기사 수업을 받게 할까?

아니면 곧 제국 사관학교에서 빼낼 인재들과 함께 합동훈련이라도? 힘에 대한 잠재력만 보면 메르데스가 그 녀석들한테 절대 안 꿀릴 것 같은데?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0화

6장 인재 선발은 과감하게

마차가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드 황자는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메르데스는 그런 황자의 몸을 가만히 살폈다.

'정말 작아. 성장의 영약은 언제쯤 효과를 발휘할까?'

이 작은 소년이, 한때는 제국 최고의 망나니에 제국의 수치로까지 불렸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이제는 사령군으로부터 제국의 영토를 지켜낸 전쟁영웅이자 살아있는 신의 기적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을까?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흥미로웠다. 그 전까지는 세상에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메르데스에게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건 오직 루넨브레스 가문과 라니아뿐.

특히 라니아는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둬주고, 어엿한 영약사로 키워주기까지 한 은인이었다.

그런 라니아가 황자를 자신의 목숨처럼 아끼며 보살폈기 때문에, 메르데스 역시 그녀를 위하여 명령에 충실히 따를 뿐이었는데....

그런데 최근 며칠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독약의 영향에서 벗어난 황자는, 지금까지 보고 들었던 그 망나니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여전히 황자 답게 누구에게나 오만한 말투를 사용하지만, 그 속에는 전에 없던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여기에 그 어떤 상황에도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반응하며 ,미리 세워놓은 계획대로 당연한 듯 움직인다.

그 와중에도 항상 호기심을 잃지 않고 질문을 던지며, 당황한 상대가 자신도 모르게 무례를 저질러도 전혀 개의치 않고 넘어가 준다.

메르데스에겐 황자가 턴 언데드라는 엄청난 신성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사물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라니아와 묘하게 닮았다는 것도 플러스 요인.

멀리서 둘이 있는걸 보면 마치 모자관계라 해도 될 만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런 모든 호감이 더해지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넌 외모에 자신감을 가져도 돼.

황자의 그 말 한마디가, 그녀가 품고 있던 마음의 벽을 단숨에 허물어 버렸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큰 키와 체격이 콤플렉스였다.

어린 시절 부모조차 이상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며 말싸움을 벌였고, 거리를 지나다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곁눈질로 쳐다보며 심상치 않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세상이 자신을 그렇게 보니, 그녀 역시 세상을 멀리하며 밖으로 나돌 수밖에.

대부분의 시간을 영약의 재료를 채취한다는 핑계로 산과 들을 쏘아 다녔다. 그렇게 자연과 가까워졌고, 대신 사람들과는 멀어졌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시원시원하니 보기 좋잖아? 내가 볼 때 넌 멋져. 그러니 웅크리지 말고 어깨 쫙 펴고 다니라고.

하지만 황자가 그렇게 말해준 순간, 메르데스는 전과 다른 새로운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난 정상이야. 그리고 이런 날 좋다고 해 주는 사람이 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외모를 멋지다고 평가해준 사람의 존재가, 평생 동안 스스로를 묶었던 봉인을 단숨에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분은 내 모든 걸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줬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데도.'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로워진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 작은 황자를 위해서라면, 설령 화산 속으로 몸을 던지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일까?

* * *

대략 일주일 만에 저택에 돌아와 보니, 전에 대신전 지하에서 봤던 봉인신관 네 명이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성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성자님 덕분에 저희 넷은 평생의 숙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부디 남은 인생을 성자님을 위해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미리 연습이라도 했나? 네 사람이 정확히 한목소리를 내는구만.

근데 이 녀석들, 기껏 자유의 몸이 된 주제에 벌써 여기 와서 이러고 있네?

"기왕 쉬는 거 한 달 쯤 푹 놀다 올 것이지. 그런데 한 사람은 처음 보네?"

"네. 저는 봉인신관 트리멈이라 합니다."

그러자 넷 중에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흑발의 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안타깝게도 성자님이 방문하셨을 때 다른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성자님이 리치를 소멸시키는 그 역사적인 광경을...."

"쉿. 그 일은 너무 떠들지 말고."

"...알겠습니다. 성자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위업을 다름 사람들이 모르길 바라시는군요. 그야말로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신을 섬기는 자의 귀감이라 할 만한 마음가짐이십니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감격한 얼굴의 트리멈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은 더 시끄러워지는 걸 피하고 싶어. 이미 엄청 주목받고 있거든. 근데 내가 너희를 거두면 신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데?"

"성자님의 신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 말고 너희."

"저희 역시 겉으로는 여전히 신전 소속의 신관일 뿐입니다. 매달 생활비도 나오니 그쪽으로는 조금도 신경 쓰시지 말고 거둬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맘에 쏙 드는 대답이구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네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 넷은 루넨브레스 저택의 경호원이야. 내 외가가 루넨브레스 가문인 건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성자님."

"앞으로는 성자 말고 황자라고 불러. 사람들 많은 곳이나 야외에서는 반드시."

"네. 알겠습니다. 황자님."

"좋아. 당장은 내 개인 경호나 저택의 경호 같은 일을 맡길게. 그보다 일단.... 라니아!"

나는 저택 정문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시녀장을 불렀다.

"이쪽이 저택의 시녀장인 라니아. 서로 인사해."

"라니아라고 합니다. 네 분 모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라니아의 권위도 세워 줄 겸, 살짝 심각한 표정으로 신관들에게 경고했다.

"이 저택에선 나 다음으로 높은 게 시녀장이야. 그러니 시녀장이 뭔가 명령하면 지체 없이 따라줘."

"명심하겠습니다. 황자님."

"그럼 네 사람 모두 자기 소개 부탁해. 트리멈 너부터."

"네. 저는 신관 트리멈이라 합니다. 네 명의 봉인신관, 아니 이제는 네 명의 호위신관 중 수석 신관을 맡고 있습니다. 고향은 요튼이고, 나이는 36살입니다."

"저는 신관 오스트라 합니다. 호위신관 중 차석 신관을 맡고 있습니다. 고향은 엘링턴이고, 나이는 29살입니다."

"저는 신관 자말입니다. 고향은 에른네스이고, 나이는 27살입니다."

"저는 신관 바리스라 합니다. 고향은 요튼이고, 나이는 26살입니다."

네 신관이 차례대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그중에 가장 강해보이는 트리멈을 감정하기 위해 시선을 집중했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D-

잠재 힘 : C+

현재 신성마법 : B

잠재 신성마법 : B+

어?

이 녀석이 대신관 빼면 거의 최고 수준의 신관 아니었나? 근데 신성마법이 왜 B등급 밖에 안 돼?

나는 혹시나 해서 옆에 있는 바리스라는 금발 청년의 능력도 감정했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E

잠재 힘 : D

현재 신성마법 : A

잠재 신성마법 : A+

엥?

신성마법은 얘가 더 급이 높네? 그냥 나이순대로 대장을 뽑은 건가?

"바리스라고 했지?"

"네. 황자님."

"혹시 이중에 신성마법은 네가 가장 강해?"

"아니, 그것은...."

넷 중에 가장 어린 바리스가 놀란 얼굴로 말을 흐렸다. 그러자 트리멈이 앞으로 나서며 감탄과 함께 말했다.

"신성마법에 대한 성취는 저희 중 바리스가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얼굴만 보고도 그걸 짚어내시다니. 과연 신의 기적을 받은 분은 다르시군요."

"그냥 느낌이 그래서. 근데 그쪽은 기사 수업이라도 받았나? 몸이 튼튼해 보이는데?"

트리멈의 체격은 어지간한 기사 뺨칠 만큼 크고 건장했다. 녀석은 멋쩍은 듯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는 가문을 잇기 위해 육체단련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 예기치 않은 일로 대신관님의 눈에 띄어 신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가문 어쩌고 하는 거 보니 귀족 출신이었나 보구만. 녀석은 보란 듯이 자신의 몸에 신성마법인 스트렝스(strength)를 사용하며 근육을 불끈거렸다.

"물론 전업기사에 비하면 싸움 실력은 많이 부족합니다만, 저를 포함한 모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자님의 옥체를 지켜낼 것입니다."

"전력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나머지 셋도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합창했다. 확실히 이 정도 급이 되는 신관이, 온갖 버프 마법으로 떡칠을 하고 싸우면 하급 기사 정도는 충분히 제압 가능하지.

여기에 트리멈 정도로 육체를 단련했다면 시너지가 더 살아날 것이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신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럼 당장 어디 좀 가야 하니까. 트리멈은 호위로 붙고 나머지 셋은 여기 저택을 지켜줘. 라니아?"

"네. 황자님."

"여기 세 신관에게 저택 안내를 해줘, 포인트를 나눠서 경호도 맡기고."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저택을 떠나 계신 동안 부고가 와서,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부고? 누구?"

"황자님의 사촌이신 페넬 백작의 부고입니다. 실종되신 지는 한참 되었는데, 최근에 사망이 확인되어 어제부터 장례식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페넬 백작이라면 내가 알베르트와 함께 죽인 지 열흘도 넘었는데, 지금까지 장례식을 하지 않을 걸 보면 제스가 정보를 숨기고 공개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만.

아무튼 이제 와서라도 페넬의 죽음을 인정했다는 건... 곧 알베르트의 장례식도 국장으로 열리려나?

"알았어. 나중에 시간되면 한번 가볼게."

"장례식은 앞으로 사흘간 백작의 저택에서 계속 열린다 합니다. 그럼 신관 세분 모두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라니아는 세 명의 신관과 함께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혼자 남은 트리멈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첨언했다.

"경호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자면, 아무리 강화마법을 써도 육탄전을 붙으면 최하급 기사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신성마법을 다른 쪽으로 활용하면 혼자서 웬만한 기사 너덧 명, 아니면 그 이상도 너끈히 막아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버스 그래비티나 홀리 체인?"

"그렇습니다. 황자님. 역시 신성마법에 무척 정통하시군요."

"기왕 쓸 수 있게 된 김에 이것저것 공부해 뒀지. 그런데 리버스 그래비티라...."

그것으로 바로 다음에 진행할 테크트리가 확정되었다. 나는 지난 사흘간 마차 안에서 계속 고민했던 여러 개의 후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 당장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그런데 행차하실 곳은 어디입니까?"

"제국 사관학교."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인재 발굴 시간이다. 나는 정원 밖에 세워둔 마차로 몸을 돌리며, 당장 확보해야 할 녀석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 * *

"전하께서 오실 거란 이야기는 며칠 전에 이미 공문으로 받았습니다만...."

제국 사관학교의 교장, 라이오넬 남작은 연신 진땀을 흘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생도를 그런 일에 동원하는 건 조금.... 교장인 제 입장에서 매우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다시 고려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생도 다섯 명보다, 차라리 정규군의 기사 한 명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안 돼."

나는 비서가 내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야. 사령군 전담반은 제국 사관학교의 졸업반에서 차출해야 해. 뽑힌 생도에겐 곧바로 졸업과 함께 정규기사 자격을 수여할 거고."

사관학교를 졸업한다고 바로 제국 기사가 되는 건 아니다.

먼저 훈련기사가 되어 최소 1년간의 검증기간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임의로 소속된 기사단 간부의 테스트까지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이 어찌나 험하고 고통스러운지, 생도의 절반이 기사를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진로를 변경한다. 그런데 이거저거 전부 생략하고 바로 정규 기사로 뽑아주겠다는 거잖아? 이거 나름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졸업반 중에, 장래가 유명한 생도 다섯 명을 제가 선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골랐어."

"네?"

교장실의 캐비닛을 향해 몸을 일으키던 남작이 움찔하며 되물었다. 나는 미리 선별한 리스트를 하나씩 정리하며 남작에게 말했다.

"누굴 뽑아 갈지 미리 정했다고."

"전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표정이 굳은 걸 봐서는 내가 진짜 유망한 녀석들을 뽑아 갈지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뽑은 명단을 들으면 금방 안색이 좋아지겠지.

"오늘은 일단 세 명만 데려갈 거야. 졸업반의 카일 구스프, 린 베르크, 파날 리프를 여기로 불러 줘."

"...네? 그렇게 세 명이면 되는 겁니까?"

예상대로 남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짜 유망한 생도는 이미 유명 정규 기사단에 보내 주기로 '합의'가 된게 뻔하다. 그중에 호명된 이름이 없자 안심을 했겠지.

"나도 이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아. 남작을 너무 괴롭힐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돼."

"아. 과, 과연 그렇군요. 전하의 영민하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하하하...."

남작은 어색하게 웃으며 캐비닛의 명단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 맘 같아선 유망주를 미끼로 기사단끼리 경쟁시키면서 뇌물 좀 작작 받아먹으라고 쏴주고 싶은데....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참자.

"그러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전하."

"뭐가?"

"말씀하신 세 명의 생도 중에 두 명이 휴가 중입니다."

남작은 캐비닛에서 세 개의 서류를 뽑아 들고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나는 남작이 내민 서류를 훑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휴가? 졸업반인데?"

"물론 졸업반 생도는 어지간하면 휴가를 내지 않습니다만, 베르크 생도는 가문에 생긴 큰 장례에 참석하느라 휴가를 나갔습니다. 리프 생도 역시 같은 이유로 사흘 뒤에 복귀할 예정이군요."

"장례식이라니 대체 누가.... 아."

서류에는 '페넬 백작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라는 휴가 사유서가 함께 끼워져 있었다.

이런, 이거였냐?

페넬 백작가는 제국에 황비를 배출할 만큼 유력한 문벌인 만큼, 휘하에 크고 작은 규모의 귀족 가문을 보유하고 있다.

베르크는 그곳에 곁다리로 낀 작은 방계 혈통으로, 가문의 큰 어르신이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추가로 리프는 애초에 귀족이 아니라 이 일에 상관없을 것 같지만, 집안이 운영하는 상점이 페넬 백작가의 영향력 아래 있어 억지로라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1화

6장 인재 선발은 과감하게

"두 명 모두 사흘 뒤에 학교에 복귀할 예정입니다. 전하께 번거로움을 끼쳐드려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바꿔 말하면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오란 소리.

하지만 사흘 뒤에 나는 이곳에 없을 예정이다. 페넬을 최대한 빨리 죽여 버린 게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오다니.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었구만.

"그럼 카일이라도 불러줘. 나머지는 나중에 시간 나면 찾아올게."

그나마 셋 중에 카일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그 녀석이 있어야 당장의 테크트리를 진행할 수 있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디디!"

디디? 그건 또 뭔데?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갈색 피부의 소년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교장실로 들어왔다. 남작은 갑자기 턱을 치켜들며 싸늘한 얼굴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래. 지금 바로 졸업반의 카일 구스프 생도를 교장실로 오라고 해.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그럼...."

소년은 고개를 꾸벅이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소년의 인상적인 피부색을 떠올리며 물었다.

"방금 그 녀석, 이름이 디디야?"

"네. 자그라 출신의 부랑자입니다. 작년부터 사관학교 주변에 얼쩡거리기에 데려다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자그라는 제국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가장 큰 슬럼가의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진행할 이벤트도 하나 있었지? 생각난 김에 이번 테크트리 다 올리면 그쪽도 진행해 볼까?

* *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님. 사관학교 졸업반인 카일 구스프입니다."

교장실로 들어온 금발의 소년이 정중히 경례를 붙였다. 나는 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카일. 내 소개는 따로 할 필요 없지? 이쪽에 와서 앉아."

카일 구스프.

이 녀석은 사실상 내 원년 멤버나 다름없다. 첫 인연이 무려 첫 번째 회귀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당시의 카일은 반제국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기사였다.

기사로서의 무력은 빈 말로도 최고 수준이라 말하기엔 거리가 있다. 대신 전투를 이끄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현장 지휘관 스타일이지.

의외로 제국에는 이런 쪽의 재능이 희귀하다. 힘이 센 놈은 많은데 정작 지휘 잘하는 놈은 드물단 말이지.

그래서 2회차 부터는 최대한 빠르게 인연을 맺고, 훗날 이계의 침공 때 웨이브를 막아내는 1선 방어군의 지휘관으로 육성했다.

사령군을 선택하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진 3회차 때는 제외하고, 4회차 부터는 이 녀석의 또 다른 재능인 '상재'까지 파악해서 잘 써먹었다.

상인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돈에 관련된 일이나 보급 쪽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이것도 대규모 전쟁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라 대체가 불가능했고.

여기에 5회차부터는 초반에 남는 시간에 특별한 기사 훈련을 시켰는데.... 심지어 그쪽도 대박까지는 아니라도 중박 정도는 건질 수 있었다!

"최근에 황자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먼저 엘스톤 백작령에서 거둔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마주보고 앉은 카일은 나이답지 않게 깍듯한 태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재차 침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사령군 전담반이라는 특별한 부대를 운용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곳에 저를 추천하여 뽑아주셨다는 사실에 큰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하지만'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저는 황자님의 부대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카일!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감히 어디서 전하의 제안을 거절해!"

옆에 서 있던 남작이 눈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나는 당장이라도 카일의 멱살을 잡으려는 남작을 제지하며 웃었다.

"괜찮아. 다 이유가 있겠지. 둘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으니 남작은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어?"

"네? 하지만 전하...."

"응?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 아닙니다. 그럼...."

남작은 머쓱한 표정으로 교장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덕분에 둘만 남은 나는 이후의 스케줄을 위해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래.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소식은 들었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고향인 요튼에 있는 너희 집. 원래 요튼에서 어업과 상업으로 엄청 잘나갔다며? 근데 몇 년 전부터 '시 서펜트(Sea Serpent)'가 바다로 나가는 만의 입구를 점령해 버렸잖아?"

요튼은 제국의 남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파도나 태풍을 막아주는 거대한 만의 존재 덕분에 오래전부터 항구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5년 전부터 요튼 만의 출구에 수백 마리의 시 서펜트가 출몰, 만을 빠져나가려는 어선이나 무역선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지금은 요튼의 지역 경제 전체가 마비된 상태다. 사실 이것도 섭정인 제스가 빨리 해결했어야 할 일인데, 녀석도 당장 마땅한 해결책이 안 보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 주변에 오우거 반란 같은 더 큰 문제도 많았고.

"...황자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카일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집안이 경영하는 무역상회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아버님은 어떻게든 저를 기사로 만들어 보려 사관학교까지 보내셨지만, 이제는 제 뒷바라지조차 힘에 부칠 정도입니다. 이미 주변에 빚을 많이 지셨고, 동생들이 보낸 편지에는 채권자들이 배를 차압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빚, 내가 다 갚아줄게."

카일의 가느다란 눈이 순간적으로 확 커졌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 말이야, 당장 사관학교를 그만 두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졸업까지만 하고 기사단 대신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었지?"

"그렇습니다만."

"그래서 나한테 못 온다고 한 거고. 걱정 마. 너희 집의 빚을 내가 다 갚아줄게."

"어째서...."

카일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어째서 제게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황자님과 저는 아무 연고도 없지 않습니까?"

"연고? 연고는 네 실력이 바로 연고야."

"실력이라 하셔도, 제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평균 성적은 졸업반 중에 중간 정도에 불과하고, 전투 쪽도 이제 겨우 최하급 마갑을 착용하고 훈련을 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실전 지휘 성적은 최고였지? 전술 시험도 3년 연속으로 만점 받았고."

"그것은...."

"거기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상업 감각도 있고, 직접 배도 몰아봤고, 그 나이에 벌써 다른 대륙까지 진출도 해 봤고?"

"직접 몰아본 배는 조그만 어선이었고, 다른 대륙이라고 해봤자 열 살 때 멋모르고 아버님을 따라 나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상업 감각이라 하셔도 저는 딱히...."

"동기들 돈까지 투자 받아 은괴를 미리 사뒀다가, 은괴 값이 올랐을 때 다시 팔아 생활비 정도는 직접 벌지 않았어?"

"아니, 대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어떻게 아냐고?

그야 너한테 직접 들었으니까. 우리가 임마 밥도 같이 먹고 전쟁도 같이 하고 사우나도 같이 한 사이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물론 현실의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카일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한동안 고민하다 물었다.

"황공하게도 제 뒷조사를 하신 모양이군요. 그런데 그보다 지금 말씀하신 것들이 황자님께 왜 필요합니까? 사령군과 싸우는 게 사령군 전담반의 일이 아닙니까?"

"물론 싸울 일도 생길 거야. 그래서 특별 강사를 초빙해 훈련도 시킬 거고."

말 나온 김에 카일의 능력을 감정했다. 아직 컨트롤이 좀 튀긴 하지만 원하는 인간을 감정하는 건 이제 완벽하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D

잠재 힘 : B-

음.

혹시나 했는데.... 역시 전투적인 면에서 다른 쪽의 재능은 전혀 없구만.

참고로 카일의 힘은 뛰어난 기사를 섭외해서 스승으로 붙여놓는다는 전제 하에, 기사의 세 번째 등급인 '나이트 익스퍼트'까지는 성장한다.

그럼 잠재력 B-를 나이트 익스퍼트급이라고 계산하면, 최고 등급인 '나이트 마스터'가 되려면 잠재력이 얼마나 더 높아야 되는 거지?

알파벳 성적은 A+가 끝이니 A+가 나이트 마스터란 소린가? 우리집 시녀인 메르데스가 A+긴 한데.

"아무튼 내가 너희 집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요튼 만을 봉쇄한 시 서펜트도 싹 걷어낼 거야."

"시 서펜트를 말씀입니까?"

"그래. 이렇게나 해 주는데도 안 올 거야? 혹시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나중에 동생들도 제국 사관학교에 입학시켜 줄까?"

짧은 순간 카일의 표정이 울긋불긋 다양하게 변했다. 뭐 이쯤 되면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이 녀석은 과거에 내 평판이 끔찍했을 때조차도, 지금과 똑같은 조건을 제시하자 결국 합류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영웅 소리 듣고 있는 상황에서 거절할 리가 있을까? 녀석은 한동안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이내 허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황자님의 사령군 전담반,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그럼 마차에서 기다릴 테니까 당장 짐 싸서 와."

"지금 당장 말씀입니까?"

"응. 오늘 저녁에 바로 요튼으로 떠나야 하거든."

"갑자기 요튼은 왜....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야. 방금 내가 조건 제시한 거 못 들었어?

"그래. 지금 당장 네 고향으로 달려가서 빚도 갚아주고, 바다 괴물도 함께 잡아버릴 거야."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돌아오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녀석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례를 붙였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창문 너머에 있는 연병장을 가리켰다.

"여기로 오지 말고 학교 정문 쪽으로 와. 거기서 신관이 지키고 있는 마차를 찾으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카일은 상기된 얼굴로 교장실을 빠져나갔다.

이걸로 오늘 할일은 다 끝인가? 원래는 세 명 모두 데려가려 했는데 장례식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남작한테 부탁해서 나머지 둘은 그냥 저택으로 오라고 할까? 아니, 괜히 스카우트 장소 변경했다가 조건이 바뀔지도 모르니 최대한 안전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교장실을 밖으로 나온 순간, 막 들어갈까 말까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남작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 이제 돌아가실 겁니까? 전하?"

"그래. 카일은 바로 데려갈 테니 그렇게 알고."

"알겠습니다. 바로 경호대에 연락해서 배웅을...."

"됐어. 번거롭게. 여기서 마차까지 얼마나 된다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몸을 틀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좀 전에 심부름꾼으로 왔다 갔다 하던 소년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이름이 디디라고 했던가?

그런데 갑자기 왼쪽 눈이 확 달아오르며 감정안이 제멋대로 튀기 시작했다. 아, 이거 또 이러네. 굳이 필요 없는 사람은 감정 안 해도 되는데....

종족 : 인간

현재 힘 : E+

잠재 힘 : B

현재 마수 친화력 : B+

잠재 마수 친화력 : A+

응?

마수 친화력? 이건 또 뭔데?

무려 아홉 번을 회귀하며 살았는데도 처음 보는 능력이다. 일단 마수라면 몇 종류를 알고 있긴 한데, 그 사나운 놈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게 가능이나 할 법한 이야기인가?

"전하? 혹시 이 녀석이 전하께 무례한 행동이라도 했습니까?"

낌새를 챈 남작이 부리나케 달려와 디디의 머리를 움켜쥐고 아래로 찍어 눌렀다.

"그렇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무튼 배운 게 없는 천한 녀석이라...."

"얘도 데려갈게."

"네?"

남작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수차례 눈을 깜빡였다.

"그.... 혹시 직접 벌을 주시기 위해 저택으로 데려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지하실 같은 곳에 감금하고...."

"하하 이 녀석. 남작도 보기보다 상상력이 풍부하네."

물론 불과 보름 전의 내 평판을 생각하면 남작이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나는 디디의 머리를 움켜쥔 남작의 손등을 쿡쿡 찌르며 경고했다.

"일단 이거부터 놓고."

"앗, 네, 넷."

"데려가서 시킬 일이 있어서. 지금부터 얜 사령군 전담반의 시종이니까 그렇게 알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혹시 몸값 필요해? 얘 노예였어?"

나는 남작의 눈을 노려보았다. 페이우드 제국은 원칙적으로 노예제도를 금지하기 때문에, 교장은 급히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일을 시키는 대가로 미리 선금을 지불해서...."

"선금? 누구한테? 노예상? 얼마 줬는데?"

"그게 은화 50개.... 아, 아니. 아닙니다. 이 아이는 그냥 사관학교 주위를 떠돌고 있기에, 제가 아이의 부모에게 고용 비를 내고 데려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럼 여기 돈."

나는 챙겨온 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개를 꺼내 남작의 손에 넘겨주었다.

"아니! 제가 어찌 전하께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도로 거둬 주십시오!"

엉겁결에 돈을 받은 남작이 경악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여기에 추가로 금화 스무 개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통째로 남작의 손에 쥐어주며 웃었다.

"그리고 이건 사관학교를 잘 운용해 준 남작의 수고에 대한 내 성의야."

"전하...."

"물론 제국 정부의 정식 명령이긴 하지만, 결국 남작이 훌륭하게 잘 키운 생도들을 내가 중간에서 빼가는 셈이잖아? 그러니 사양 말고 받아.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화... 황공합니다. 전하. 전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남작은 그대로 허리를 숙이며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역시 뇌물의 프로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소리 없이 품속에 집어넣는 저 솜씨 좀 보라지.

아무튼 지금의 남작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 앞으로도 빼내갈 생도들이 많으니까.

나는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가만히 서 있던 디디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디디라고 했지? 너도 따라와. 같이 가자."

"그럼 저는, 이제 황자님의 하인이 되는 겁니까?"

갑작스러울 텐데도 당황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드는구만. 역시 빈민가 출신답게 세상 돌아가는 걸 빠르게 배운 걸까?

"대충 비슷해. 근데 너 몇 살이야?"

덩치가 나와 비슷하다는 건 실제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리다는 소리. 디디는 빠른 걸음으로 내 옆을 따라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열두 살입니다."

"정확하지 않아? 왜?"

"저는 자그라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선 아무도 제 나이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슬럼가에 빈민가인 자그라 출신이자, 추가로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라는 뜻이다.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지금부터 루넨브레스 가문 사람이야. 누가 물어보면 루넨브레스 저택에 고용된 시종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저는 사관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마구간을 청소하며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고, 가끔씩은 교장선생님의 명령을 교관이나 생도에게 전달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말은 야무지게 했지만 눈빛 속에는 불안감이 엿보였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며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네?"

"널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니 너한테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고. 워낙에 처음 보는 능력이라.... 근데 힘도 나쁘지 않으니 이쪽만 해도 기본은 해 주겠지? 암튼 열심히 잘 해봐라."

디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한결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앞서 사관학교의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튼 이건 득템이다!

예정에 없던 인재 영입에 기분이 확 좋아졌다. 물론 마수 친화력의 정확한 효과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잠재력이 A+라는 건 그 분야에 최고가 될 재능이 있다는 소리겠지?

이거 어쩌면 나중에 한몫 단단히 하지 않을까? 이계와의 전쟁에서 예상 못할 활약을 해준다던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2화

7장 사냥과 협상

덜컹거리는 마차 안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6인승 마차에 다섯 명이 타고 있는데 서로 간에 대화가 거의 없다. 구성원이 워낙 제각각이라 아무래도 쉽게 말을 꺼내기 힘들겠지?

먼저 나는 제국에서 황제 빼고 가장 높은 신분인 황자.

나이는 16살이지만 키가 150cm도 안 될 정도로 작고, 피부는 무슨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창백하며, 눈 밑에는 항상 진한 다크서클이 맺혀 있다.

....

난 그저 자기소개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눈에 습기가 차는거지?

아무튼 내막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황자에게 최근 무슨 변화가 생긴 건지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온갖 말썽을 부리는 악당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갑자기 다섯 신의 기적을 받은 전쟁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니 모두들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못잡겠지.

그리고 내 왼쪽엔 저택의 시녀인 메르데스가 앉아 있다.

16살의 나이에 이미 최고등급에 가까운 영약사이며,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인재 중의 인재.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냥 키 크고 무뚝뚝한 시녀로 보일 뿐이겠지만.

반면 마주보는 왼쪽에는, 제국 사관학교 졸업반이었던 카일이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18살의 나이에 적당한 키와 살짝 마른 체격으로, 눈매가 좀 날카롭다는 걸 제외하면 외견상의 특징은 거의 없는 평범한 외모.

하지만 이 녀석의 진가는 두개골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나온다.

일단 암기력과 계산력이 좋고,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이 탁월하며, 상품을 팔고 사는 상인으로써의 능력도 수준급이다.

여기에 제대로 육성만 하면 기사로서의 잠재력도 상당하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올라운드 인재라 할 수 있다. 추가로 나랑 일하는 스타일이 비슷해서 상성이 잘 맞기도 하고.

그런 카일의 옆에 앉은 것은, 어제 처음 만나 금화 세 닢을 주고 데려온 12살 소년 디디.

키와 체격은 나와 비슷하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몸이 탄탄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스타일이며,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진한 갈색의 피부가 인상적이다.

회귀를 총 열 번이나 한 나조차도 처음 보는 '마수친화력'이라는 분야에 독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밖에도 잘만 키우면 기사의 세 번째 등급인 '나이트 익스퍼트' 정도는 될 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아예 있는지조차 몰랐던 녀석이라 어떻게 성장할지 감이 안 온다. 일단 지금처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시켜 봐야지.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직전 회귀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봉인신관의 리더, 트리멈이다.

나이는 36살로 이곳에서 최 연장자다. 다만 신관이 된 이후로 세상경험이 제로에 가까운 특이 케이스로,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계속해서 미소를 지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엠퍼로드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이지?"

제국 수도의 이름이 엠퍼로드다. 트리멈은 가볍게 박수를 치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황자님. 어려서 고향을 떠나 엠퍼로드에 온 이후로, 쭉 대신전 근처에서만 살았으니까요."

"고향이 요튼이라며? 간만에 고향에 돌아가니 기분이 어때?"

"아주 좋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는 건 거의 25년 만입니다."

"신관님도 요튼 출신이십니까? 저도 고향이 요튼입니다."

가까스로 공통 관심사를 찾은 카일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트리멈은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돌아간다고 반겨주는 가족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저는 요튼 남부에 있는 신전 고아원 출신입니다."

"아.... 그렇군요. 저도 몇 번 근처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요튼 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좋은 곳이죠."

"잘 아시는군요. 바다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희 집도 그 고아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도착하면 다들 저희 집에 모시려 합니다만...."

카일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주제 넘는 이야기라 황공합니다만, 전체적인 계획을 모르니 일정을 잡는 게 까다롭습니다. 요튼에 도착하면 무엇을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돈을 줘야지."

나는 비어있는 오른쪽 자리에 놓인 커다란 궤짝을 두드렸다.

"결국 너희 집이 구스프 상회잖아? 먼저 상회가 진 빚 중에 급한 걸 먼저 갚고, 곧바로 배를 타고 요튼만으로 나갈 거야."

"도착하자마자 바로 말씀입니까?"

"그래. 시 서펜트부터 잡아야지."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요튼 만의 입구에 자리 잡은 시 서펜트의 숫자는 최소 100마리 이상입니다."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

"혹시 그것을 위해 다른 신관님들을 함께 데려오신 겁니까?"

지금 우리 뒤에는 총 서른두 명의 신관을 태운 세 대의 마차가 함께 따라오고 있다. 고마워요 에식스 대신관.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흔쾌히 신관을 빌려준 대신관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 서펜트 잡는데 필요해서 데려온 건 아니야. 신관들은 그 뒤에 할 일이 있어."

"안티 커럽션(anti corruption)이 가능한 신관들로 부탁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러자 같은 신관인 트리멈이 손바닥 위에 투명한 빛의 구슬을 발동시키며 끼어들었다.

저게 바로 안티 커럽션으로, 효과는 일정 시간동안 목표의 부패를 막는다.

평소에는 장례식 정도에나 쓰이는 신성마법이지만, 상대가 좀비나 시체거인 같은 언데드 몬스터에게는 공격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혹시 이번 사건에 사령군이 개입한 겁니까? 안티 커럽션 정도야 저도 사용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아니, 사령군은 여기 없어."

나는 손을 뻗어 트리멈의 손바닥을 아래로 꾹 눌렀다.

"그보다 마력 낭비하지 마. 도착하자마자 할 일이 많으니까."

트리멈 말고도 봉인신관 두 명을 뒷 마차에 추가로 데려왔다. 트리멈은 급히 마법을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아무래도 밖에 나와 활동하다 보니 마음이 들뜬 모양입니다."

"황자님께서 신전과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것도 알겠고, 스스로 신성마법의 극에 달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일은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질문을 쏟아냈다.

"그걸로 시 서펜트를 어떻게 퇴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국 정부가 황자님께 내린 직위는 사령군 전담반의 지휘관인데, 저희들이 사령군을 상대하는 대신 이런 곳에서 다른 일에 동원되어도 되는지 의문입니다."

"왜? 고향 구하는 게 싫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령군은 당분간 개점휴업이야."

정확히는 완전 폐업에 가깝지만.... 뭐 아무렴 어때.

"내가 시간을 많이 벌었거든. 그러니 남는 시간과 자원을 활용해서 제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다른 문제를 해결해 보자."

"역시 황자님이십니다!"

순간 트리멈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정말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 자고로 다섯 신의 가호를 받은 자라면, 항상 무고한 백성들이 고통 받지 않도록 쉬지 않고 봉사에 임해야 하는 법입니다!"

"물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섭정 전하, 그러니까 제국 정부의 허락 없이 움직이면 아무래도 뒤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크, 이거지. 핵심을 찌르는게 역시 카일이라니까?

물론 카일의 방금 지적은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분석.

하지만 지금껏 수많은 녀석들을 키워본 결과, 정작 이 녀석처럼 옆에서 상황을 분석하고 거리낌 없이 정론을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항상 이 녀석부터 스카우트해서 끌어오는 이유기도 하고.

"당연히 생길 거야. 하지만 그것조차 다 뒤엎을 정도로 큰 공을 세우면 상관없어."

"시 서펜트 퇴치라면 분명 큰 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국 정부가 지난 몇 년 간 손도 못 쓰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일을 위해 어째서 이렇게 많은 신관들이 필요하며, 또 여기 있는...."

카일은 말을 끊고 자신의 옆에 앉은 디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디디는 왜 데려오셨는지, 저는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디디 본인도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지, 마차에 단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디디랑 친했어?"

물론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난 회귀 때 디디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꺼냈겠지?

"아닙니다. 마구간에서 몇 번 본 것을 제외하면, 어제 기숙사로 찾아와 교장선생님의 지시를 전달할 때 만난 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이름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단 말이지?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도 어제부터 사령군 대책반의 일원이야. 같은 소속이니 친하게 지내."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디디의 출신이 천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카일은 상관없다는 듯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카일 본인도 딱히 귀족 출신은 아니며, 전반적으로 출신보다는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인물이다. 물론 디디의 능력이 뭔지 모르는 상황이라 의문을 가지나 본데.... 실은 나도 몰라서 뭐라 해줄 말이 없네.

"황자님, 영약 드실 시간입니다."

그때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메르데스가 영약 바구니를 꺼내며 병 두개를 뽑아 들었다. 나는 끔찍한 냄새가 나는 해독 영약과, 그보다 더 끔찍한 악취가 나는 성장의 영약을 목구멍에 부어 넣으며 일갈했다.

"크악! 이거 맛이 더 이상해졌어!"

"시녀장님의 영약제조 능력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녀장님도 그 점을 아시고 따로 입가심으로 이걸 챙겨주셨습니다."

메르데스는 바구니에 담아둔 설탕바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설탕바 끝을 조금 부러뜨려 입안에 넣은 다음, 겨우 한숨을 내쉬며 메르데스에게 물었다.

"이거 몇 개 가져왔어?"

"설탕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시녀장님이 총 스무 개를 챙겨 주셨습니다."

"그럼 네 개 더 꺼내서 하나씩 나눠 줘. 다들 맛은 봐야지."

"알겠습니다."

메르데스는 바구니에서 설탕바를 추가로 꺼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나는 손안의 설탕바를 반으로 부러뜨려 먹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다들 먹으면서 잘 들어. 지금부터 이번 작전에 대한 모든 계획을 설명해 줄게. 우선 시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