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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화

4장 연쇄효과

"후우....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신관들이 급하게 빛의 강도를 조절하자 막 붕괴되려던 리치의 육체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녀석은 혀를 차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조금만 더 했으면 됐는데."

"이제 아시겠지요? 저희들은 이곳에서 수백 년 동안 리치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봉인하고 있었습니다."

에식스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새로운 이벤트로 잔뜩 신난 기분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거 무서운 이야기네. 그럼 여기 신관들이 매일같이 리치의 힘을 억제하고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들'봉인신관'의 희생으로 저희 모두가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이죠."

그것 참.... 인생을 바친 숭고한 희생이라 해야 겠구만.

확실히 리치 하나가 제대로 날뛰기 시작하면 정규 기사단을 동원해도 막기가 힘들며, 설사 리치의 몸을 파괴한다 해도 몇 년쯤 뒤에 어딘가에서 다시 부활해서 집요하게 공격을 반복한다.

"리치는 불멸이니까 여기서 평생을 바치는 거네. 그럼 밥이나 화장실 같은 건 어떻게 해?"

"봉인신관은 모두 네 명입니다. 한 명이 휴식을 취하고 볼일을 보는 동안, 나머지 셋이 이곳에서 리치를 상대합니다."

"나중에 나이를 먹어 일하기 힘들어지면?"

"그때를 대비해서 봉인신관 후보자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들은 7대째 봉인신관입니다."

"7대째?"

"이곳에 리치를 봉인한 게 벌써 200년 전의 일입니다. 봉인신관의 사명은 워낙 고된 일이라 30년 이상 버티기 어렵습니다."

까마득한 이야기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내가 회귀를 아홉 번 반복했어도 고작 90년인데, 이 신관들은 이런 지하실에서 대를 이어 200년 이상을 버틴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고통과 희생도 마지막입니다. 턴 언데드로 이곳에 있는 리치의 육체를 소멸시키는 순간, 이자가 세계 어딘가에 감춰 놓은 생명의 단지까지 함께 파괴되니까요."

물로 나도 기록을 읽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선 당연히 모른 척해야겠지?

"정말로?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어?"

"상관없습니다. 리치의 육체와 생명의 단지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사슬로 묶여 있으니까요. 기록엔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턴 언데드의 힘이 사슬을 타고 리치의 정수를 파괴한다 말이죠. 그에 대한 증명으로, 지금까지 턴 언데드를 맞고 소멸한 리치는 두 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극은 그만하라니까 에식스? 이런 꼬맹이가 턴 언데드를 쓸 수 있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하하!"

리치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 이쯤 됐으면 새로운 이벤트도 충분히 만끽했고 하니, 여기서 그만 마무리를 지어 볼까?

"캭! 좋은 말로 할 때 썩 꺼져라 꼬맹이! 내가 이 꼴이 되었어도 네깟 놈 하나는 단숨에 시체로 만들 수 있으니!"

"그래? 그럼 턴 언데드."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입 밖으로 마법의 이름을 읊은 순간.

봉인의 방의 모든 것이 빛에 휩싸였다.

이거 야외에서 사용했을 때는 몰랐는데.... 빛 자체는 내 몸으로부터 방출되는 거였구나.

아마도 몸에서 방출된 빛이 하늘로 솟구친 다음, 일정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언데드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시스템인 모양.

하지만 이곳은 지하의 좁은 공간이기 때문에, 그냥 거대한 빛이 통째로 리치의 몸을 향해 직선으로 쏟아졌다.

"캬, 캬아아아아아악!"

리치는 비명과 함께 몸을 비틀었다.

확실히 급이 높은 언데드라 그런지, 요새마을에서 한순간에 잿더미가 된 다른 녀석들과 달리 꽤나 긴 시간을 버텼다.

대충 5초 정도.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네요? 이를 어쩐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잿더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벽 쪽으로 물러나 있던 세 명의 신관이 갑자기 바닥에 몸을 던지며 오체투지를 했다.

쿵!

"성자님!"

"진짜 성자님이시다!"

"오오! 다섯 신의 영령이여!"

감격한 신관 하나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눈물까지 쏟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직되어 있던 에식스가 급하게 신관들을 일으키며 모두를 안아 주었다.

"그렇습니다. 다섯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우리 세대에 드디어 성자께서 강림하신 겁니다."

"대신관님...."

"드디어.... 훌쩍."

"저, 이게 정말인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크흑...."

"그동안 다들 괴로웠을 텐데,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니, 대신관님이야말로 고생하셨습니다. 닷새가 멀다 하고 저희들에게 휴가를 주시기 위해 그 노구를 끌고 여기 오셔서...."

아, 그럼 대신관이 어지간하면 신전을 떠나지 않던 게 이거 때문이었나? 집돌이로 소문난 양반이었는데.

아무튼 이 신관들은 지금까지 평생을 바쳐왔고, 앞으로도 평생을 바쳐야 할 숙업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러니 펑펑 울고 기뻐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도 왠지 보고 있으니 코끝이 찡해지네.

그런데 그때, 바닥에 흩어진 잿더미 안에서 뭔가가 위로 쑥 떠올랐다.

뭐냐 이건? 반짝거리는 커다란 소금 결정처럼?

그것은 내가 어떤 반응을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날아와 몸속으로 쑥 들어왔다.

"...어?"

머리가 아찔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신관들과 기쁨을 나누던 에식스가 번개같이 달려와 내 몸을 부축해주었다.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역시 턴 언데드의 마력 소모가 너무 심했나 보군요."

"아니... 괜찮아. 근데 방금 뭔가...."

잠깐, 이거 여기서 말해도 되나?

상황이 심상치 않은데? 리치를 퇴치한 직후에 튀어나온 뭔가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 거잖아?

"...방금 뭐 번쩍이는 결정 같은 거 못 봤어? 저기 리치의 잿더미 속에서 튀어나왔는데."

"결정 말입니까? 아! 무언가 결정 같은 것이 올라와 황자님의 몸으로 흡수되었습니까?"

"...."

"아무래도 리치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에식스는 기억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런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마력 결정'이라 합니다."

"마력 결정?"

"그렇습니다."

에식스는 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이미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리치를 소멸시킨 자는 리치가 쌓아온 마력의 일부를 결정의 형태로 얻게 된다고 말이죠."

진짜? 그런 게 있었어?

하긴 알 턱이 있나.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리치를 생명의 단지까지 완벽하게 소멸시켜본 역사가 없으니.

"하지만 리치의 마력이라니, 이름부터가 너무 불길한데?"

"이것은 사악한 리치와는 상관없는, 말 그대로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입니다. 적어도 기록엔 그렇게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몸 안에 들어온 새로운 힘의 느낌을 파악했다.

마력의 결정이라.

확실히 다른 불순물이 전혀 없는, 그저 증류한 물처럼 순수한 느낌의 힘.

하지만 마력의 실체는 계산을 처리하는 두뇌의 한계와 집중력의 종합적인 표현이다. 나는 그 사실을 감안해 내 안에 들어온 마력의 결정을 잠시 동안 분석했다.

아하,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추가 연산장치.

뇌 속의 또 다른 뇌라고 하면 어감이 좀 그렇고, 순수하게 마법을 위해 연산만 하는 추가 장치가 머릿속에 자리 잡은 기분이다.

암튼 완전 득템인데?

간단히 마력으로 표현하자면... 이거 하나로 마력의 한계가 최소 30%는 확장된 느낌.

"...나쁜 기분은 아니야."

세상에 아직도 이런 것들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 식으로 파워 업이 가능하다니. 어쩌면 미리 짜놓은 초반 테크트리를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겠는데?

* * *

정리를 대충 끝내고 올라오는 계단에서, 에식스는 먼저 돌아간 봉인 신관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봉인신관들은 성자께서, 아니 황자님께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왜?"

에식스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로 답했다.

"원래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봉인신관 규정이 그래?"

"일종의 불문율입니다. 봉인신관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은 성자가 재림했다는 이야기와 같으니까요. 그 뒤로는 성자의 호위신관으로 역할이 바뀌는 게 당연합니다."

호위 신관? 호위 기사 같은 걸로 쓰라는 이야긴가?

"물론 기사처럼 육체가 강하진 않습니다만, 저들 모두가 앞으로 10년 안에 아크 프리스트가 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뛰어난 신관들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안티 이블'이라는 급이 높은 신성마법을, 저렇게 연한 농도로 컨트롤하며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신관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바로 이 사실이, 심지어 방금 얻은 마력 결정보다도 날 더 행복하게 만든다.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존재 자체를 몰랐던 강력한 신관을, 그것도 무려 네 명이나 활용할 수 있게 되다니!

그렇다고 너무 대놓고 기뻐하면 안되겠지.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모르는 척 물었다.

"나야 좋긴 한데, 기껏 평생 속박에서 해방됐는데 다시 새로운 일에 묶이면 불쌍하지 않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에식스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성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모든 봉인신관들이 꿈꿔왔던 목표이자 행복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엔 봉인신관이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관도 봉인신관이었어?"

"부끄럽게도 20년쯤 전에 기력이 쇠해 은퇴했습니다. 여하튼 당장은 아니고, 하루 정도는 준비를 마친 다음 네 사람 모두 황자님의 저택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는 좀 심한데. 이렇게 된 거 몇 달 정도 길게 휴가를 주는 게 어떨까? 어디 바다라도 가서 실컷 놀다 오면 좋을 것 같은데."

"바다라.... 흠, 그렇군요. 저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습니다. 황자님은 정말 속이 깊은 분 같습니다."

에식스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계단이 끝나며 기존에 내가 알던 신전의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여기...."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여기서 확인하고 넘어갈 게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복도 끝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뭐가 나와? 혹시 봉인신관들 휴식하는 장소?"

"아닙니다. 저쪽엔 도서관이 있습니다."

"도서관?"

"방금 말씀드렸던 여러 기록들이 담겨 있는 도서관입니다. 한번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래? 그러지 뭐."

대답은 가볍게 했지만 속으론 나름 놀랐다.

정말 이렇게 간단히 들어가도 된다고?

원래대로라면 여러 개의 미션과 기부 같은 걸 해서 신전과 최고 수준의 관계를 쌓아야 한다.

다음으로 삼엄한 몸수색 절차를 거치고, 고작 10분의 체류시간에, 그것도 단 한권의 책만을 골라 읽을 수 있다고 신신 당부를 들어야 한다.

바로 대신전의 비밀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자. 이제 열렸습니다."

에식스는 도서관 입구의 복잡한 장치를 직접 가동하 문을 열었다.

"그럼 들어가시죠."

"와, 안이 엄청 넓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도 이젠 달인이 다 됐다. 에식스는 횃불이나 등잔 대신, 자신의 손에 빛을 내는 신성마법을 발동시키며 어둑한 도서관 내부로 들어갔다.

"이곳은 신전의 천년 역사가 담겨 있는 도서관입니다. 외부인은 절대 들어갈 수 없으며, 강제로 들어가려 하면 도서관에 화재가 발생하며 천장이 무너지는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거라면 나도 아주 잘 알지.

세 번째 회귀 때 한번 강제로 들어가 보려다 모든 걸 활활 태우고 무너뜨려 먹었거든. 그때 내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원....

"왜 그런 장치를 해놨어? 신전의 역사가 불에 타 버리면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냐?"

"그보다는 이곳에 쌓인 정보가 악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어디보자...."

에식스는 입구를 시작으로 아홉 번째 책장에 꽂힌 검은 장정의 책을 뽑아 들었다.

"이것이 바로 리치와 성자에 관한 여러 기록이 담긴 책입니다. 무려 350년 전, 당대의 성자였던 대신관 크리베울러의 손에 쓰였습니다."

"엄청 옛날이네. 그때도 턴 언데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성자가 된 거야?"

"보통은 기적이 동반되어야 합니다만, 일단 극대신성주문이 성자 칭호의 기준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구나. 근데 성자가 대신관이었어?"

"보통은 그렇게 추대됩니다. 지금도 황자님이 황족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신전으로 모셔와 제 자리를 넘겨 드리려 노력하고 있었겠죠."

그렇게 잠시 책을 넘기던 에식스는, 어느 페이지에서 갑자기 손을 멈추며 내게 물었다.

"여기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읽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감사합니다. 그럼.... 결국 인간이 욕망을 가진 이상 리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다섯 신을 섬기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지어다. 비록 내가 명을 다한다 하여도, 또 언젠가 신의 기적을 받은 성자가 다시 세상에 나타나 우리의 적을, 세계의 적을 섬멸할 것이다."

"그게 나라고?"

"그렇습니다. 황자님께서 바로 저희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성자입니다."

에식스는 미소와 함께 책을 닫았다. 나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 다음, 바로 뒤에 있는 열 번째 책장에 있는 책을 하나씩 건드리기 시작했다.

"난 그냥.... 사람들이 괴물의 손에 찢겨 죽는 걸 내버려 둘 수 없었을 뿐이야."

"황자님의 그 선한 마음이 다섯 신의 성소에 닿아 기적을 일으킨 겁니다. 자, 오늘은 많이 늦었으니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이곳에 오셔서 마음껏 책을 읽으셔도 됩니다."

에식스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귀가를 권했다. 그 사이 책 한권을 뽑아들고 내용을 확인한 나는, 다시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주 들릴게. 여기 재밌는 책이 많은 것 같으니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화

5장 네크로 폴리스 습격

이런 세상에.

일어나자마자 온몸이 쪼개지는 것처럼 마구 쑤신다!

"으악 죽겠...."

이놈의 저질체력 하고는. 얼마나 아픈지 입에서 말도 잘 안 나온다.

밤에 좀 무리했다고 아침부터 이렇게 격통에 시달리는 게 정상이냐?

"블레스, 페인킬러. 으음...."

심지어 신성마법을 사용해도 상황이 완벽히 나아지지 않았다. 이건 또 왜 이러지? 설마 신성마법에 내성이 생긴 건 아닐 테고....

아, 나 어제 영약 마셨지.

대신전에 가기 전 라니아가 준 체력의 영약이 떠올랐다. 영약은 대부분의 경우에 좋은 효과를 발휘하지만, 지속시간이 끝나면 일정 시간 동안 신체에 부하를 일으킨다.

특히 나 처럼 몸이 약하고 기본 체력이 부족한 사람에겐 더더욱.

결국 오늘은 오전 내내 골골대야 한다는 소리다.

이것도 라니아가 만든 영약이 최상급이라 짧게 끝나는 거다. 만약 시중에 유통되는 최하급 영약이었다면 하루 종일 근육통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겠지.

하지만 뭐....

그만한 가치가 있는 밤나들이였다.

대신전 지하 루트에 숨겨진 비밀이라니. 거기에 네 명의 강력한 신관과 마력 결정까지 손에 넣었고.

여기에 신전의 비밀 도서관에서 중요한 정보까지 재확인한, 그야말로 1타 3피의 뜻 깊은 밤이었다.

-이렇듯 사령군주는 대를 이어 불멸하는 존재이며,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능력을 꿰뚫어 보는 '감정안'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제왕의 힘이며, 모든 뜻 있는 자들의 위에 설 수 있는 궁극의 권능이다.

-그러니 뜻 있는 자여, 부디 사령군주를 격파하고 그 힘을 전승하라. 감정안은 죽은 자가 아닌, 살아있는 자를 위해 쓰여야 마땅하다.

이것이 어제 열 번째 책장에서 은근슬쩍 꺼내 읽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

책 이름은 '사령군주'인데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지더니, 결말은 '사령군주가 가진 감정안이란 능력이 끝내준다!'로 마무리 된다.

근데 왜 이 책에 주목하냐고?

모든 일의 시작은 세 번째 회귀 때로 돌아간다.

당시의 나는 처음으로 1차 웨이브를 돌파한 상황.

그런데 막상 다음에 쏟아진 2차 웨이브가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그것을 막으려면 기존의 방식으론 안 된다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걸 제국의 힘만으로 막아내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나는 발상을 바꿔 '사령군 우호 루트'라는 새로운 테크트리를 떠올렸다.

1. 우선 사령군의 본거지인 네크로 폴리스에 은신을 통해 잠입, 사령군주의 환심을 살 정보를 최대한 확보한다.

2. 충분히 정보가 모였으면 최종적으로 사령군주에게 모습을 드러내 담판을 짓는다.

처음에는 그저 사령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이계와의 전쟁에 동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직접 대면한 사령군주 크록이 문제였다. 녀석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다짜고짜 역제안을 걸었다.

3. 클로드 황자(나)는 알고 보니 사령술에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재능충이었다!

4. 그 재능을 꿰뚫어본 크록은 자신이 직접 사령술을 가르쳐 주겠다 제안한다.

5. 만약 클로드가 최고의 사령술사인 '마스터 오브 언데드'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성장한다면, 사령군은 클로드의 제안을 받아 훗날 이계와의 전쟁에 개입한다.

이렇게 예상에 없던 새로운 루트가 열려버렸고, 나는 즉석에서 제안을 받아들이며 사령군과 손을 잡게 되었다.

그 뒤로 크록의 제자가 되어 고작 5년 만에 사령술의 최고 수준에 도달했고.

하지만 최고의 사령술사가 된 나를, 정작 제국은 같은 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신전 측에서 기를 쓰고 내 존재를 지우려 발악을 했다. 아침부터 대놓고 신관들이 쳐들어오고, 나중엔 막 암살자를 고용해 밤낮으로 괴롭히는 끔찍한 나날들.

덕분에 사령군을 제외한 다른 전력을 끌어 올리는데 실패했고, 결국 2차 웨이브는커녕 1차 웨이브조차 막아내지 못한 채 세 번째 회귀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래서 다음 회귀부터는 아예 '사령군 우호 루트'를 머릿속에서 삭제해 버렸다.

문제는 사령군 이놈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결국 중간에 벌어지는 '반 제국전쟁'에서 반제국 진영으로 무조건 참전한다는 것.

그러니 가능하면 암살 같은 수단을 동원해 사전에 머리를 잘라 놓는 편이 좋겠지만....

결국 이것도 안 된다.

사령군주나 리치 같은 사령군 간부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죽여도 다시 부활한다는 특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 녀석들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릴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사령군에 대한 정보는 도무지 쉽게 확보하기가 힘들었다. 그게 왜냐 하면....

1. 사령군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신전이 통제한다.(사령술에 혹한 인간들이 그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 그중에도 특히 사령군주의 정보가 담긴 책은 신전이 모조리 수거해서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나마 제국의 도서관이란 도서관을 싹 뒤져서 찾아낸 정보에 의하면, 지금은 전승이 끊겼지만 과거에 모든 언데드를 한방에 소멸시키는 '턴 언데드'라는 신성마법, 일명 극대신성마법이 존재했다는 것.

추가로 수백 년 전에 사령군주와 사투를 벌였던 엔툼이란 이름의 신관이 존재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는 결국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바로 죽지 않고 며칠을 버티며 사령군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책으로 남겼다고 한다.

3. 그러니 어떻게든 신전과의 관계를 끌어올려, 신전이 보관하고 있을 엔툼의 책이나, 혹은 턴 언데드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대신전 지하 루트'라는 새로운 테크트리가 시작되었다.

이미 은신을 통해 대신전 지하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3회차 때 강제로 지하에 있는 문을 박살내고 들어갔다가 불이 붙고 폭발이 터지며 도서관 전체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한 상태.

아무튼 4회차의 막바지에 겨우 신전과의 관계를 최상까지 쌓았고, 이를 통해 도서관의 출입과 함께 단 한권의 책을 열람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이때 엔툼이 집필한 '사령군주'와 '턴 언데드'의 정보가 담긴 책 중에서 고민을 했는데... 결국 사령군주를 완전 제거할 가능성이 있는 턴 언데드의 책을 선택했고.

바로 그때부터 턴 언데드를 습득하기 위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결국 완성된 건 아홉 번째 회귀의 막바지에 가서였지만.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로 직전이었던 아홉 번째 회귀 때, 나는 없는 시간을 쪼개 대신전 지하루트를 진행해서 결국 엔툼이 집필한 '사령군주'까지 열람했다.

그런데 정작 책의 내용에 사령군주에 대한 약점 대신, 대신 녀석이 가진 '감정안'에 대한 정보만 수두룩했다 이 말이지.

감정안 : 눈앞에 있는 존재가 현재 가진 능력은 물론,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능력까지 파악한다.

딱 봐도 엄청 좋아 보이지?

하지만 끝도 없이 회귀를 반복한 내 입장에선 효과가 약간 겹치는 감이 있다.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앞으로 활약할 대부분의 사람들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해 버렸거든.

물론 이걸 첫 번째 회귀 때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지금은 뒤가 없는 마지막 회귀라 유용함이 떨어진다.

물론 얻어놔서 나쁠 건 없다. 그래서 사령군의 본진에 쳐들어가 녀석들을 소탕하는 계획을 조금 나중으로 미뤄 놓았다.

빠르면 3년, 늦으면 5년 뒤 정도?

결국 6년 후에 터지는 반제국 전쟁 전까지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젯밤의 경험이, 이런 계획들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황자님, 기침하셨습니까? 실례지만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문을 두드린 라니아가 세면세트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뜨거운 수건에 얼굴을 파묻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고마워 라니아."

"별말씀을요. 괜찮으시면 제가 다른 곳을 닦아 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알아서 할께. 그보다도...."

나는 옷 속으로 수건을 넣고 상체를 대충 닦으며 물었다.

"어제 그 영약 효과 좋더라. 직접 만든 거지?"

"그렇습니다. 약소하지만 저택 지하에 영약을 제조하는 공방이 있거든요."

"언제 내려가서 구경해 볼게. 그보다 그런 영약 하루에 몇 개씩 만들 수 있어?"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모르는 척 차근차근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 라니아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체력의 영약이라면 열다섯 병 정도일까요? 여기에 재료 함량을 어떻게 배분하는지, 또 얼마나 집중해서 만드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집중해서 만들면 그만큼 효과도 좋아져?"

"물론입니다. 어제 황자님께 드린 영약들은 제가 정말 정성을 다해 만든 거라.... 그 정도 퀄리티라면 하루에 다섯 개도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렇구나. 혹시 퀄리티가 올라가면 보관기간도 올라가?"

보통 영약은 제조일로부터 5개월이 지나면 효과가 떨어진다.

다만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약사가 최고의 집중력으로 영약을 만들면 최대 10년 이상까지 장기 보관이 가능해진다. 라니아는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더 고민하다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얼마나 길게 보관할 수 있는지 까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들면 아마도 10년은 보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좋으니, 10년 이상 보관할 수 있는 '화염 저항의 영약'을 만들어 줄래?"

"화염 저항의 영약 말씀입니까?"

순간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았니?'는 표정을 짓던 라니아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자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하루에 한 개 정도만 가능합니다. 지금은 황자님 드릴 성장의 영약이나 해독의 영약을 꾸준히 만들어야 하는 처지라...."

"하루에 한 개면 충분해. 딴 일로 급한 날이 있으면 중간에 건너뛰어도 되고."

이것도 10년 후에 닥칠 이계와의 전쟁을 위한 대비책 중 하나다. 초반 웨이브 때 가장 골치 아픈 게 바로 화염 뿜어내는 녀석들이거든.

"알겠습니다. 그런데 화염 저항의 영약이라면 재료가...."

"왜? 문제 있어?"

라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안 봐도 뻔하지.

"요즘 황궁에서 돈 안 오지?"

"네?"

라니아는 정곡을 찔린 듯 주저했다.

"아니, 그게 실은.... 6개월쯤 전부터 황궁의 지원금이 끊겼습니다."

"원래 얼마씩 왔는데?"

"매달 금화 80개씩 왔습니다."

"그럼 저택은 어떻게 운용해? 시녀들 급여나 영약 재료비는? 내 생활비는?"

"지금은 루넨브레스 가문에 남은 자금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시녀들도 대부분 영약사라, 저희가 제작한 영약을 취급해주는 도매상에 넘겨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거기, 지금 당장 관계를 끊어버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화

5장 네크로 폴리스 습격

"네?"

라니아는 순간 당황하며 되물었다.

"어째서.... 아니,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장 저택을 운영할 자금이 부족해질지도 모릅니다."

"어제 대신전에 가서 들었어. 루넨브레스 가문이 거래하고 있는 영약 도매상은 완전 사기꾼들이래."

신전에서 들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지만 도매상이 사기꾼이라는 건 진짜다. 라니아는 놀란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사기꾼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신가요?"

"영약 값을 후려치고 있어. 예를 들어 체력 회복 영약 한 병을 은화 다섯 개에 사가서는, 자기네는 은화 서른 개에 판다던가."

"그것은... 그쪽 세계가 원래 그렇게 돌아갑니다만."

그래. 나도 알지. 지금 어떤 상회 하나가 영약 유통 독점권을 먹고 떼돈을 모으고 있다는 거.

다만 중요한 건 돈을 더 벌고 안 벌고 가 아니라, 이곳 루넨브레스 가문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영약을 외부로 유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하더라. 아무튼 여기서 나오는 영약 팔지 말고 전부 창고에 보관해줘. 돈은 내가 어떻게 해볼게."

"황자님께서 돈을...."

"황자님?"

바로 그때, 움직임이 거의 야생동물 수준인 메르데스가 커다란 궤짝을 들고 민첩하게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황궁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황자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아직 침소에 계신다 하니, 황궁에서 보낸 하사품이라며 이것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얼굴이 상기된걸 보니 내용물이 뭔지 짐작한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궤짝에 꽂혀 있는 공문서 편지를 뽑아 들었다.

"전승 기념 은상.... 이걸 벌써 준다고?"

지난 회귀의 경험에 따르면, 제스는 내가 공을 세울 때마다 어떻게든 포상금을 늦게 주려 발악을 했다.

그런데 이걸 고작 하루 만에 지급했네? 역시 성자 칭호 덕분에 여론이 좋아져 압박을 받은 건가?

"황자님, 이건 대체...."

"전에 전쟁에서 승리한 포상금이야. 금화 3천 개."

"금화 3천 개!"

덜컹!

궤짝을 열자 눈부시게 빛나는 금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니아는 순간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어, 어쩜 이렇게 많은 돈이...."

"정확히는 절반인 1,500개를 먼저 보냈고, 나머지는 한 달 안에 마저 보낸다고 써있네."

"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금화는 처음 봅니다."

지켜보던 메르데스도 한마디 했다. 그만큼 이 루넨브레스 가문이 금전적으로 쪼들렸다는 소린데, 여기엔 클로드가 도박과 유흥으로 한 재산 날려 먹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이거, 시녀장이 가져가서 저택 운용하는데 써."

"네?"

라니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많은 돈을 전부... 말씀인가요?"

"응. 돈 나갈 데 많지? 저택 운영비에, 아까 말한 영약 재료비도 있고. 시녀들 한동안 고생했을 텐데 월급이든 용돈이든 더 챙겨줘도 좋고."

"저는 괜찮습니다. 루넨브레스 가문에서 거둬주신 것만으로도 평생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갑자기 메르데스가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궤짝에서 금화 서너 개를 꺼내 직접 손에 쥐어 주었다.

"...!"

"너도 무슨 야생짐승처럼 살지만 말고, 시장 나가서 돈도 좀 쓰고 그래. 시녀 복 말고 사복이 한 벌도 없다며?"

아차, 이건 그동안 회귀를 반복해서 알아낸 정보긴 한데.... 괜히 말했나?

"...시녀장님?"

"괜찮습니다. 황자님께서 내리신 은혜니 받아 두세요. 메르데스."

하지만 라니아도 별다른 의심 없이 메르데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얼굴이 빨갛게 된 메르데스는 그대로 허리를 깊이 숙이며 내 쪽으로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황자님. 반드시 목숨 걸고 좋은 사복을 마련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전쟁 나가듯이 부담 가지진 말고. 아, 라니아?"

"네. 황자님."

"어제 말한 그 설탕바는 어떻게 됐어?"

"그거라면 견본품으로 몇 개 만들어 놓았습니다. 메르데스? 가서 황자님의 아침 식사와 만들어 놓은 설탕바를 가져와 주세요."

"네. 시녀장님."

메르데스는 곧바로 밖으로 돌아나갔다. 그리고는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쟁반을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황자님."

쟁반에는 아침 식사와 함께, 작은 접시에 담긴 손가락 사이즈의 설탕바가 놓여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설탕 졸임에 꿀과 우유를 넣고 반죽한 다음, 견과류를 섞어서 틀에 넣고 굳혔습니다."

"음.... 맛있네."

물론 오래 전 고향에서 먹었던 초코바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맛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애초에 대량의 포도당을 뇌에 때려 박는 게 목적이니까.

"이거 열 개만 따로 포장해서 싸줘. 오후에 엘스톤 백작령에 가야 하거든."

"엘스톤 백작령 말씀입니까? 거긴 또 왜.... 아니, 그렇군요."

라니아는 어제 일이 떠올랐는지, 급하게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앞으로 사령군 전문 대책반을 운영하게 되셨다 하셨죠. 당연히 엘스톤 백작을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셔야겠군요."

"아주 중요한 건 아니고 잠시 이야기만 하고 올 거야. 왕복 엿새 정도 걸리려나?"

비행마법으로 날아가면 여섯 시간이면 왕복이 가능하지만, 이번은 대외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라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 없다. 라니아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차분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사이 드실 성장의 영약과 해독의 영약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6일 분이라면 조금 아슬아슬하겠군요. 메르데스?"

"네. 시녀장님."

"저는 영약 제조실에 잠시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황자님의 식사 시중을 맡아 주세요. 그럼...."

그리고는 내 쪽으로 인사를 한 뒤 총총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은 다음 포크를 집어 들며 물었다.

"밥 먹었어? 메르데스?"

"아직입니다."

"왜?"

"요즘 주변 숲에 전에 없던 인기척이 늘어나 경호를 늘렸습니다. 저도 오전 시간에 숲을 순찰하는 일을 맡아 지금까지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황궁에서 보낸 사람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달려온 거겠지. 나는 연한 고기찜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저택의 경비도 전부 시녀들이 보는 거야? 경비원을 따로 고용할 돈이 없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저택엔 저희 시녀들밖에 없습니다."

"그거 큰일이네. 사람을 적재적소에 운용해야지. 예를 들면...."

어젯밤 리치의 봉인에서 해방된 네 명의 봉인 신관들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휴가를 받아 바닷가에라도 놀러 갔을까?

아무튼 내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저택 주변에 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하는 건 당연한 수순.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주로 사기꾼 투자자, 사기꾼 기사교관, 사기꾼 영약사, 사기꾼 부동산업자. 사기꾼 외판원.... 이거 죄다 사기꾼뿐이네. 암튼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이 이 외딴 곳에 있는 루넨브레스 저택까지 슬금슬금 몰려온다.

여기에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내 목숨을 노리는 다양한 이벤트들이 시작되고.

이번엔 그게 좀 더 빠르게 시작되었을 뿐이다. 당장 큰돈이 들어온 것도 있고 하니, 봉인신관들이 도착하면 일부는 저택 경호로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아까부터 메르데스의 시선이 쟁반 위의 설탕바에 꽂혀서 움직이질 않네?

"메르데스?"

"네. 황자님."

"이거 먹을래?"

설탕바를 집어 들고 메르데스의 눈앞에 내밀었다. 메르데스는 순간 습! 하는 침 삼키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심지어 내가 이미 한입 베어 먹었던 음식인데 거리낌이 없구만. 다른 시녀라면 기겁을 하고 물러났을 텐데, 얘는 역시 산에서 약초 캐며 뛰어 놀던 천연답게 매사에 빠꾸가 없다.

"그래. 먹어. 라니아한텐 비밀로 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메르데스는 주저 없이 설탕바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우물거리다 갑자기 부엉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맛있습니다. 혀가 녹는 것 같습니다."

그래. 설탕과 꿀로 만들었는데 맛이 없을 리가 없지.

그러고 보니 설탕바도 원래는 1년쯤 후에나 만들 계획이었지? 아직 회귀한 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이렇게 빨리 활용할 일이 생길 줄은 나도 몰랐네.

* * *

네크로 폴리스(Necropolis).

그곳은 하얗게 삭은 거대한 뼈로 골조를 세우고, 썩어가는 살점으로 벽을 바른 시체의 성이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살덩이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명령을 내리면 실제로 이동이 가능한 움직이는 요새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거인의 엄청난 크기의 눈구멍 속에서, 붉은 망토를 걸친 리치가 지팡이를 치켜들며 말했다.

"군주시여,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네크로폴리스는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 제국의 땅에 근접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제가 바로 군단을 이끌고 넘어가 거점을 마련하겠습니다."

"경솔한 행동이다. 아즈란."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리치가 앙상한 팔을 펼치며 끼어들었다.

"군주께서 요새를 이곳까지 움직인 것은, 먼저 산자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루인. 그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나?"

"우린 아직 저들이 어떻게 선발대를 섬멸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번엔 성급히 움직이는 대신, 적들을 이 요새로 끌어들여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습니까 군주시여?"

두 명의 리치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는 가운데, 중앙의 해골옥좌에 앉은 회색 피부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즈란, 루인."

"네. 군주시여."

"지금 네크로 폴리스의 눈을 사용하는 게 안 보이나? 둘 다 정신 사나우니 조용히 해라."

그가 바로 사령군의 우두머리인 사령군주 크록.

그러자 아즈란이라 불린 리치가 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군주시여. 하지만 이대로 가면 요새가 곧 산자의 땅을 넘어가게 됩니다."

"내가 네크로 폴리스를 여기까지 끌고 온건... 네크로 폴리스의 눈으로 적의 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바로 옆 공간에 박혀있던 집채만 한 눈알이 꿈틀거렸다. 크록은 온몸으로 차가운 냉기를 뿜으며 해골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엘스톤 백작에겐 우릴 막을 힘이 없다. 아마도 제국에서 지원군을 보냈겠지. 분명 제국 최강인 백기사단이나 장미기사단을 보냈을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녀석들은 보이지 않는다."

"엘스톤 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선발대를 격파하고 다시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기사단이 아니라 아크 위저드나 신관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녀석들은 소수로 움직일 테니 요새의 눈에도 잡히지 않겠지요."

"...그럴 가능성도 있군."

크록은 다시 왕좌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둘 다 잘 들어라. 정확한 위치까진 알 수 없지만, 저 제국 어딘가에 우리의 마지막 열쇠인 라블츠가 있다."

"네. 군주시여."

"라블츠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200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게든 흔적을 찾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야 해. 아즈란?"

"네. 군주시여."

"너의 결정은 완성되었느냐?"

"그러합니다. 10년 전에 완성되었고, 지금은 완숙의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붉은 망토를 입은 리치가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크록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리치를 향해 물었다.

"루인, 너의 마력 결정은 완성되었느냐?"

"물론입니다 군주시여.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그래. 그런데 정작 너희 중 가장 먼저 결정을 완성한 라블츠가 내 곁에 없구나."

크록은 고통스런 표정으로 옥좌의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두 명의 리치는 그런 군주의 표정을 살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어둠과 죽음의 신인 퀸시의 은총을 받아, 이곳 죽은 자의 세계에 홀로 서게 되었다."

"그러합니다. 군주의 존재로 인해 죽은 자의 세상이 열렸고, 저희들도 아크 위저드 너머 더 깊은 마도의 세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길게 남지 않았다. 퀸시의 은총이 내 몸을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길어야 30년.... 짧으면 15년도 채 안 남았다."

"군주시여...."

"그러니 그 전에 라블츠를 되찾아야 한다. 다 함께 퀸시의 성소를 찾아, 그곳을 막고 있는 벽을 너희들의 결정으로 통과한 후에야... 나는 새로운 은총을 받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놈들과 같은 편을 먹었던 세 번째 환생 때조차 듣지 못했던 정보였다. 나는 탄성과 함께 은신을 풀며 말했다.

"뭐야 그거, 너희 그런 비밀도 숨기고 있었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8화

5장 네크로 폴리스 습격

"누구냐!"

순간 두 마리의 리치가 동시에 불과 얼음을 날렸다.

마치 혹한의 남극과 가스폭발 사고의 현장이 동시에 눈앞에 재현되는 듯한 광경이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미리 준비한 방어마법으로 몸을 감쌌다.

"역시 강해. 근데 실내에서 이래도 되겠어? 거인이 아파하잖아?"

쿠오오오오오오!

순간 네크로 폴리스가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리치들은 새로 날리려던 마법을 급히 거두며 새파란 안광을 번뜩였다.

"프로텍션 매직! 아크 프리스트인가?"

"이런 꼬마가 어찌.... 산자 주제에 대체 어디서 여기까지 들어온 거냐!"

"어디긴 어디야, 저기 눈구멍으로 들어왔지."

나는 해골옥좌 너머 멀찌감치 뚫려있는 거대한 구멍을 가리켰다.

"네크로 폴리스의 눈알은 하나 뿐이잖아? 뭐 그거 말고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지만."

"헛소리 마라! 네놈이 어찌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숨어들었는지를 묻는 거다!"

"그건 은신."

"은신?"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충격적인데? 퀸시의 성소에 숨겨진 비밀이라. 여길 이렇게 빨리 오면 이런 정보도 듣게 되는구나."

추가로 대신전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리치까지 더해서, 이런 장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럼 나도 나중에 거기 가야 하나? 퀸시의 성소는 아예 예정에도 없었는데."

"이 꼬맹이 자식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여기서 결정을 두 개 더 먹으면 자연스럽게 열쇠가 전부 모이는 거잖아? 어째서 결정이 열쇠로 작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할 게 너무 많네. 진행할 다른 테크트리도 엄청 많은데."

"이 녀석이 영문 모를 소릴!"

"감히 살아있는 인간 주제에 옥좌를 더럽히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때 붉은 망토의 리치, 아즈란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엔 원소마법 대신 검은 기류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사령술을 전개했다. 소울 러쉬(soul rush)라. 저거 꽤 골치 아픈 마법인데.

그런데 그때.

"모두 그만!"

사령군주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즈란은 자신이 일으킨 검은 기류를 급하게 거두며 대꾸했다.

"군주시여! 당장 침입자를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그만 하라고 했지? 죽여도 내가 죽일 테니 전부 비켜라."

크록은 두 리치를 제치고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시체 같은 피부색을 가진 중년 남자.

하지만 그 정체는 수백의 시체를 압축해서 짜 맞춘 일종의 시체인형이다. 죽음의 신인 퀸시의 권능을 받아 언데드의 군주가 된 시체인형.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녀석의 눈이 금색과 푸른색의 오드아이라는 것.

분명 저 둘 중 하나가 책에서 본 그 '감정안'이겠지?

"내 눈도 파란색이니, 기왕 티 안 나려면 푸른색 쪽이면 좋겠는데...."

"네가 뭐라고 말을 하는지, 또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크록은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알 수 있다. 너의 마법은 이미 극에 달했고, 너의 신성마법 역시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걸. 분명 그것을 활용해 여기까지 들어왔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라...."

크록은 색이 다른 두 개의 눈을 부릅뜨며 내 얼굴을 주시했다.

"네가 가진 또 다른 잠재력이다."

"잠재력?"

"너는 사령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인간도 너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 못했지. 그러니 살고 싶다면...."

"아. 됐어. 거기까지."

"음?"

"그러니까 너한테 직접 사령술을 배워서, 나중에 저어기 멀리 사령군의 본진에 있는 언데드 장로들에게 '마스터 오브 언데드'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사령술의 달인이 되라는 거지?"

"그걸 어찌...."

다가오던 크록의 발걸음이 멎었다. 나는 양손으로 천천히 마법을 준비하며 말했다.

"암튼 엘스톤 성에 도착하자마자 날아온 게 대박이었네. 너무 피곤해서 하루 쉬고 나서 움직일까 했는데."

"뭐라?"

"그렇잖아? 하루 늦게 왔으면 이런 중요한 정보를 놓쳤을 테니까. 실은 네크로 폴리스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 한 것도 몰랐어. 덕분에 왕복시간이 짧아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요즘 수면시간이 줄어들면 아침이 너무 힘들거든."

"...넌 결코 이곳에서 그냥 돌아갈 수 없다."

우우웅!

순간 크록의 등에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동시에 방출한 검은 연기가 네크로 폴리스의 눈구멍을 막았다. 녀석은 칼날 같은 날개를 천천히 퍼덕이며 경고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선택해라. 죽음과 함께 언데드로 다시 태어날지, 아니면 내게 복종하고 내게서 사령술을 배울지. 물론 본진이나 장로들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들었는지도 당장 토해내는 게 좋을 거다."

"어휴 무서워라."

나는 찌를 듯이 다가온 날개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꾹 밀며 웃었다.

"확실히 네가 강하긴 해. 사령군주 크록. 전에 웨이브 하나를 거의 혼자서 막기도 했고. 암튼 끝내기 전에 조금만 시간을 줄래?"

"죽음을 선택할 작정인가?"

순간 크록의 입 주위에 뿌연 연기가 새어 나왔다. 앗, 이거 소울 브레스(soul breath)? 이 녀석 진짜 모든 기술을 한 번에 쏟아낼 생각인가?

"나는 시간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부터...."

"오래 안 걸리니까 좀 들어봐. 암튼 이번에는 초반부터 너희들 잡을 생각은 없었어. 그 감정안이란 능력도 후순위였고."

"감정안까지 알고 있다고?"

크록은 순간 움찔하며 입 주위에 연기를 거두었다.

"어떻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거의 다."

"거의 다?"

"너희에 관한 거라면 거의 다 알고 있어. 물론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것도 많아 살짝 불안하긴 한데, 암튼 적이든 아군이든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대부분 알고 있지."

"...네 녀석도 감정안을 가지고 있나?"

"아니, 그냥 경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마력 결정은 엄청 땡기더라. 넌 좌우에 항상 리치를 두 마리씩 데리고 다니잖아? 그러니 한 번에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를 얻을 기회라 어떻게든 빨리 시간 냈지."

"설마 우리 셋을 동시에 상대할 생각이었나? 하하...."

크록은 비웃음과 함께 거대한 양 날개를 내 쪽으로 서서히 휘감았다. 그래서 나도 함께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희 셋이 한군데 뭉쳐있을 때를 노린거야. 괜히 한 마리씩 잡다가 소문 퍼지면 절대 내 앞에 안 나타날 테니까."

"소문?"

"그러니까... 턴 언데드라고 들어봤어?"

나는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모든 죽은 자를 영원한 안식으로 돌려보내는 극대신성마법을 발동시켰다.

동시에 네크로 폴리스의 눈구멍에 들어 있던 모든 것들이 빛에 휩싸였다.

"으...."

"악...."

"컥...."

죽은 자의 비명이 빛에 먹히며 흐릿한 그림자로 사라진다.

동시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네크로폴리스의 머리통 전체가 잿더미로 산화했다. 덕분에 발밑의 공간이 사라지는 바람에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슬로우 폴(slow fall).'

이럴 땐 마력 소모가 큰 비행마법 대신 저속 낙하마법이 제격이다. 나는 한참 아래 물컹거리는 지면에 착지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잿더미.

그리고 그 잿더미 너머로, 반짝거리는 마력 결정 두 개가 순식간에 날아와 내 몸에 흡수되었다.

"으...."

살짝 어지럽긴 한데 버틸만 하다. 좋아. 이걸로 리치의 마력 결정 두 개 추가 득템 완료.

한편 멀리 쏟아지는 또 다른 잿더미 속에 금색의 동그란 구슬 같은 게 희미하게 반짝였다. 저게 아마 사령군주의 감정안이겠지?

근데 푸른색이 아니라 금색이네?

그 자리에서 3초쯤 고민하던 나는 결국 비행마법을 다시 발동시켜 문제의 구슬을 낚아 채 돌아왔다.

"이러면 눈 색이 달라질 텐데.... 근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하는데?"

구슬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사람 눈알이다. 아니 잠깐, 설마 내 눈알을 뽑아내고 이걸 끼워 넣어야 하는건 아니겠지?

그런데 뭔가를 고민할 시간도 없이, 손에 쥔 눈알이 금색의 연기로 산화하며 흩어졌다.

"엥?"

그리고 확산된 연기가 다시 내 몸을 감싸며 흡수된다.

마치 마력 결정 처럼.

하지만 별다른 부작용이 없던 마력 결정과 달리, 이번엔 왼쪽 눈이 심하게 쑤시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으, 이거 뭔데.... 응?"

바로 그때, 바로 아래쪽의 뚫린 구멍에서 녹슨 칼을 쥔 해골병사 하나가 위로 올라왔다.

종족 : 언데드

현재 힘 : D-

잠재 힘 : C

현재 사령술 : D

잠재 사령술 : D

아, 이게 감정안이구나.

심지어 능력이 학점처럼 알파벳으로 보이네? 고향에서 조교로 일할 때 학생들 답안지 채점하던 기억 때문에 그런가?

암튼 해골병사 녀석이 칼을 휘두르기 전에 바람 마법으로 날려 버리고.

부웅!

녀석이 기어 올라온 구멍 속으로 '파이어 오브 템페스트'를 집어던진 순간, 아래쪽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며 온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화염을 뿜어냈다.

"후...."

함께 올라오려던 백여 마리의 언데드가 불길 속에서 증발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한숨 돌리고 주변을 살폈다.

내가 떨어진 곳은 거인의 쇄골 부근.

녀석의 덩치가 어찌나 큰지, 턴 언데드의 범위 안에 고작 머리통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역시 살아 움직이는 네크로 폴리스, 아니 언데드니까 죽어 움직이는 네크로 폴리스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이 녀석의 몸통 안에만 수천의 사령군이 종류별로 대기하고 있다. 대가리를(사령군주 포함) 잘랐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나중에 엘스톤 백작령이 더 큰 피해를 입겠지.

그러니 방금처럼 개미굴에 살충제를 집어 던지는 느낌으로 소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잡다간 밤을 꼬박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 전에 뇌에 당분 좀 채우고...."

일단 허리에 찬 포켓에서 라니아가 챙겨준 설탕바부터 뜯었다. 크, 이거지, 한입 베어 먹을 때마다 아주 그냥 온몸에 에너지가 스며드는구만.

그 사이 크고 작은 언데드가 서로 낑겨대며 위로 올라오려 발버둥 치는 게 보였다.

"많기도 해라...."

나는 세 개째의 설탕바를 우물거리며, 저 녀석들을 통째로 소멸시키려면 대체 턴 언데드를 몇 번 사용해야 할지를 계산했다.

"여섯.... 아니 일곱 번 정도면 되려나?"

이래가지고는 설탕바 열 개를 전부 먹어치워도 모자라겠다. 기왕이면 한 스무 개쯤 싸달라고 할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