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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0화

49장 선의 나라

...뭐?

순간 말이 막혔다. 힘이 백성으로부터 나온다고? 무슨 민본주의 설명하는 건가?

"아까 위칸 시민이 100만 명 조금안된다 그랬지? 그중 5만 명은 항상 투사와 결속돼."

"결속?"

"응. 결속. 투사의 힘은 결속으로부터 나와. 그렇다고 혼자서 5만 명은 아니고, 투사가 총 다섯 명이니 한 명당 만 명씩."

"아니...."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걸까? 투사 하나가 만 명의 인간과 결속한다고?

"그러니까... 일종의 라이프 링크 같은 거야? 신성 마법 라이프 링크 알지?"

"응. 알아. 전에 황자님이 설명해 줬어. 근데 그거랑은 좀 다른데."

"달라?"

"투사가 싸울 때 결속된 백성들로부터 힘을 받아."

"아, 힘을 뽑아 쓴다는 소리구나. 그럼 만 명이니까 1만 마력, 아니, 1만 인력이야?"

"전부 빼오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톨라리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딱 지쳐서 주저앉을 정도로만 힘이 빠진대."

"오...."

대체 어떤 원리로? 무슨 메커니즘으로 그게 가능한 걸까?

"그렇다고 그 힘이 전부 온전하게 투사에게 가는 것도 아니야. 자세히 들은 건 아닌데 효율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아."

"효율?"

"응. 효율을 잘 내는 투사는 힘의 손실 없이 좀 더 강한 힘을 내고, 효율이 떨어지면 힘이 모이는 도중에 손실이 커서 그만큼 약해."

이야기만 들으면 무슨 전기 전도율 같구만. 그나저나 이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힘인데....

"그래서 투사가 그렇게 강한 힘을 내는 거야. 물론 지금 다비랑 싸우면 다비가 무조건 이길 거 같지만, 그래도 투사 다섯 명이 동시에 덤비면 제아무리 다비라도 쉽게 못 버틸걸? 후후. 하하하!"

톨라리는 팔짱을 끼고는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진짜 웃어야 할 건 톨라리가 아니라 바로 나다!

"그 투사란 애들, 혹시 우리가 빌려 쓸 수 없을까? 이계랑 전쟁할 때 완전 도움 될 것 같은데?"

"당연히 도움 될 거야. 그렇긴 한데...."

"네가 부탁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너 위칸의 왕녀라며?"

"내가 왕녀긴 한데, 그쪽 분야는 내가 부탁할 수 없는 처지야."

"왜?"

"내가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톨라리는 괴로워 보이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부턴 달라. 으쌰! 난 각오 했어.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는 거야."

"...근데 무슨 각오?"

"고생할 각오."

톨라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도망치듯 궁을 빠져나간 왕녀가 다시 돌아간다는데, 나 같아도 겁부터 나긴 할 것 같다.

분명 왕을 포함한 모든 왕족과 문무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비난을 퍼붓지 않을까?

"오오! 세상에나!"

그때 조용히 비행만 하던 테우스가 탄성을 질렀다.

"클로드! 저 앞에 육지가 보이네! 서대륙을 출발한 지 장장 사흘 만이군!"

"벌써?"

하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끝없이 펼쳐진 수면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도 금 독수리 코어를 먹긴 했는데, 그래도 테우스의 눈보다는 확실히 성능이 떨어지는 모양.

실제로 내 눈에 대륙이 보일 때까지는 30여 분의 시간이 추가로 필요했다.

"정말 사흘 걸렸네.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배 타고 3개월도 넘게 걸리는데."

톨라리도 감탄한 얼굴로 멀리 새로운 대륙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얘도 에이션트 이글 코어 먹었구나. 나랑 비슷하게 멀리 볼 수 있겠지?

* * *

동대륙에 도착한 우린, 일단 가까운 항구 도시에 들려 간단한 재정비를 마쳤다.

이곳이 티브스라는 제후국의 줌이라는 항구도시이며, 티브스는 동대륙의 제후국들 중에 인구가 가장 많으며, 제국을 떠난 무역선들이 1차로 도착하는 곳이 바로 이 항구도시 줌이라는 사실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줌을 떠난 지 약 열 시간 뒤, 나는 테우스의 등 위에서 멀리 보이는 두꺼운 산맥을 가리켰다.

"저 안에 위칸의 왕궁이 있나 보네."

모르는 척 말했지만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톨라리에게 경고했다.

"일단 왕궁에서 좀 먼 곳에 착지하는 게 어때? 대뜸 들이 닥치면 경비병이랑 트러블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웬 걱정? 괜찮아 황자님. 그냥 왕궁 앞마당에 바로 착륙하자."

톨라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 번 더 되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 도착하자마자 공격받는 거 아냐?"

"절대 아님. 나 이래 봬도 왕녀야."

"나라 버리고 도망친 방탕한 왕녀가 돌아왔다고 바로 포승줄부터 묶는 건 아니고?"

"어... 그건 조금 위험할지도?"

톨라리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스쳤다. 녀석은 급하게 표정을 단속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진 않을 거야. 5년쯤 전에도 한번 들렸어. 그때도 별문제 없었는걸."

"그렇다면 다행인데...."

위칸은 서대륙의 정확히 중심부에 위치한 산맥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나라.

그중에도 왕궁은 높은 산맥의 협곡 사이에 있는 좁은 분지에 위치했다. 분명 걸어서 여기까지 오려면 고생 깨나 하겠지....

"톨라리. 왕궁 앞마당이라는 게 풀이 없는 넓은 공터를 말하는 것인가? 사방이 담벼락으로 막힌?"

비행하던 테우스가 물었다. 톨라리가 그렇다고 하자 테우스는 곧장 고도를 낮추며 소리쳤다.

"바로 착륙하겠네! 모두 조심하게!"

말은 저렇게 해도 주변을 감싼 바람 쿠션 덕분에 튕겨날 걱정은 없다. 그저 말버릇 같은 것이겠지.

하지만 착륙 직후, 테우스는 또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두 조심하게...."

기와지붕이 얹혀진, 낮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터.

동시에 무수한 병사들이 담을 넘으며 공터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녀석들은 민첩하게 테우스를 포위하며 꼬나 쥔 창을 치켜세웠다.

"를카르!"

"를카르 쉔 에코!"

"다이르 를카르!"

그리고는 내가 모르는 동대륙어를 마구 쏟아내며 위협을 시작했다.

후. 이 익숙한 기시감이라니.

전에 비행 마법으로 이곳에 착지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모습.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통역이 가능한 톨라리는 물론이고, 이번엔 아예 자체적인 통역기를 준비해 왔다는 말씀.

"그게 어디 있더라...."

전에 사이크 차원의 반란군 리더 비렉스가 넘겨준 조그만 기계장치가 있다.

뇌파를 어떻게 해서 실시간 통역이 가능하게 해주는 물건이다. 저택 떠나기 전 배낭에 챙겨 넣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찾아서 꺼내 놓을걸.

"황자님 뭐 찾아? 일단 내가 나설까?"

톨라리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배낭 깊은 곳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 분명 여기 넣어 뒀는데...."

"라르쉬! 데타!"

그때 공터의 안쪽 문이 열리며, 근육질에 우락부락한 두 남자가 부리나케 달려오기 시작했다.

"를카르!"

녀석들 역시 다른 병사와 비슷한 단어를 외치며 위협했다. 앗, 찾았다. 나는 그제야 배낭 깊이 들어간 통역기를 꺼내며 안도했다.

"좋아. 이것만 있으면 나도...."

그런데 통역기를 머리에 댄 순간.

"오랜만이로구나. 셴. 뤄제."

"왕녀 님!"

두 남자가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녀석들을 내려 보던 톨라리는,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와서는 내 귓가에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저 두 명이 아까 말한 투사. 그나마 나랑 좀 친해."

"아, 그래?"

"황자님 여기 잠깐 있어. 내가 내려가서 먼저 상대할게."

그리고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순간 창을 쥔 병사들도 흠칫 놀라며 모두 같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공합니다 왕녀님! 저희들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괜찮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척!

순간 병사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창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오, 톨라리 대접이 생각보다 괜찮은데? 얘 집 떠난 탕아 아니었어?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왕녀님. 마지막으로 들리신 게 5년 전이셨습니다."

셴이라 불린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톨라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양손을 모은 자세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격조했다. 내 없는 사이 큰 일은 없었느냐?"

"물론입니다. 왕녀님. 궁에는 큰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태선부에...."

"태선부에 무슨 일이라도?"

"그것이...."

셴은 옆에 있는 뤄제라는 투사의 얼굴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태선부는 또 뭐지? 궁에 따로 붙은 별궁을 말하는 건가?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그나저나 타고 오신 독수리가 정말 웅장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살아 있는 짐승 같지 않은데...."

셴은 다소곳하게 앉은 테우스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다 여전히 위에 남아있던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위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혹 서대륙에서 부마를 모셔 오신 겁니까?"

"그런 게 아니니라."

톨라리는 고개를 저으며 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마도 내려오라는 뜻이겠지?

"여차...."

"이쪽은 서대륙을 제패한 페이우드 제국의 황자이시다."

"헛, 실례했습니다."

그러자 투사들이 내 쪽으로 경례를 붙였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감정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확인했다.

이 녀석들이 바로 예전 다비만큼의 실력자란 말이지?

종족 : 인간

현재 힘 : C+

잠재 힘 : S

현재 차원능력 : B+

종족 : 인간

현재 힘 : B-

잠재 힘 : S

현재 차원능력 : B+

...아닌데?

잠재적인 힘이 S등급이란 건 확실히 엄청나긴 한데, 당장은 뭐 그렇게 엄청난 수준은 아니잖아?

오히려 힘 보다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차원 능력.

이거 지금까지 후원자에게서만 확인된 능력 아니었나? 이쪽 세계 인간도 사용 가능한 거였어?

"곧 세상에 큰 일이 닥치려 하니, 내 특별히 태선(太仙)께 소개하려 이리 불러 모셨느니라. 뤄제?"

"네. 왕녀님."

"너는 먼저 태선부로 돌아가 내 여기 왔음을 알리어라. 내 곧 천천히 뒤따라갈 테니."

"알겠습니다. 왕녀님."

그러자 투사 중 한명이 몸을 돌려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톨라리 고향 말 쓰니까 말투가 완전 고풍스럽구만. 썩어도 준치, 아니, 썩어도 왕녀라 이건가?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왕녀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남은 투사인 셴이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가는 톨라리의 뒤에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선부가 뭐야? 별궁? 아니면 왕이 사는 궁을 말하는 건가?"

"앗. 그걸 설명 안 했네."

톨라리는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위칸의 궁은 '왕부'와 '태선부'로 나뉘어 있어. 왕부는 평범하게 나라 일을 처리하는 곳이야."

"그럼 태선부는?"

"바로 우리 목적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야."

"힘? 능력?"

톨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얘가 처음부터 고향에 돌아가는 목표가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지?

"근데 너 자세한 건 계속 감췄잖아? 그 태선부에 들어가면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는데? 그리고 무슨 힘? 마력이라도 확 늘릴 수 있다던가?"

"마력은 아님. 그리고 나도 정확히 어떤 힘을 얻게 될지는 몰라."

"모른다고?"

"응. 나도 모르고 태선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해봐야 암. 크흠, 지금부터 표정 관리해야겠다."

앞마당을 지나 내부의 정원 같은 시설로 들어오자, 톨라리는 순간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래서 여기 싫어. 사람들이 다 저렇게 반응해서."

정원에 있던 궁녀들과 시종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톨라리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대답했다.

"페이우드 황궁보다 여기가 더 한데? 왕족한테 원래 다들 저렇게 예절 차려?"

"그런 것도 있고, 내가 좀 유별나서 그래."

"뭐가?"

"왕가에 남은 여자가 없어서....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 먼저 태선부터 뵙자."

"태선이 태선부의 수장 같은 거야?"

"맞아. 그리고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왕이라며?"

"위칸의 국왕이자 태선부의 장이야. 암튼 난 더 설명 못 함. 직접 가서 아버지한테 이야기 들어."

그리고는 몇 개의 정원과 건물을 지나더니, 왕궁이 있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곳엔 높은 바위절벽과 연결된 커다란 입구가 세워져 있었다. 톨라리는 막혀 있는 입구를 잠시 바라보다 내 쪽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여기가 바로 태선부야."

그 순간, 닫혀 있던 문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궁....

그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이건?

안쪽으로는 그저 거대한 바위굴이 연결되어 있을 뿐, 특별히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심상치 않다. 군주의 눈을 열지도 않았는데 이런 느낌이라니.

나는 고인 침을 삼키며 즉시 군주의 눈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통로 안쪽으로 별천지가 펼쳐졌다.

"...."

압도적인 흐름.

문제는 저게 생명의 흐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력의 흐름도 아니라는 것.

예전에 저와 비슷한 걸 본적이 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수고했느니라. 셴. 그럼 지금부터 들어가겠다."

톨라리는 입구 앞에 고개 숙인 투사를 격려한 다음, 곧장 입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여전히 멈춰 있는 나를 다시 돌아보며 손짓했다.

"뭐해 황자님? 빨리 들어와. 지금부터 우리 아빠 소개해 줄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1화

50장 선옥

태선부로 이어지는 통로는 바위에 뚫린 동굴이었다.

일정 간격으로 횃불이 타고 있어 어둡진 않다. 동굴치고는 습도가 높지 않고, 서늘하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압박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동굴이 엄청 길구만.

경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수평으로 뚫려 있는데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대로 계속 가면 그냥 산 반대편을 뚫고 나가는 게 아닐까?

"...."

앞장선 톨라리는 말없이 계속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분명 긴장하고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그 바위산의 거대한 문에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이곳도 예전에 왔을 때 은신을 쓰고도 진입할 수 없던 곳. 막힌 입구를 제외한 그 어떤 출입구나 비밀통로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무려 이틀을 숨어서 지켜봤는데도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폐쇄된 창고려니 하고 넘어갔지.

이 위칸의 왕궁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회귀 동안 동대륙에서는 단 하나의 테크트리나 루트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실제로 온건 단 한 번뿐이지만, 그래도 물건이든 사람이든 뭔가 건질 걸 발견하지 못했다.

일단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갑의 존재 자체를 배척한다는 게 문제.

때문에 쓸모 있는 전사를 확보하기 어렵고, 딱히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마법 역시 환경적인 토대를 갖추지 못했다.

오죽하면 톨라리가 마법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났을까?

그래서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다.

내 목표가 이계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닌, 그저 세계 정복 같은 거였다면 동대륙은 손쉬운 사냥감이었을 거라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은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동대륙은, 그리고 동대륙의 핵심인 위칸이란 나라는 자신들의 비밀을 이렇듯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춰 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위칸의 국왕이 곧 태선이야. 황자님? 듣고 있어?"

톨라리가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깜짝이야, 얜 또 언제부터 말을 꺼내기 시작했대?

"응. 듣고 있어. 태선이 왕이라고."

"맞아. 왕부에 있을 때는 왕의 역할을 하고, 태선부에 있을 때는 태선의 역할을 해."

"그러니까 제정일치?"

"제정일치가 뭔데?"

"왕이 종교까지 지도하는 제도. 제국으로 따지면 황제가 대신관을 겸하는 거라고 할까?"

"좀 달라. 선은 수행이지 종교는 아닌데...."

톨라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태선이 정확히 뭔데? 어떤 일을 하는 직위야? 여기까지 왔는데도 안 가르쳐 줘?"

"어차피 다 왔잖아. 직접 물어봐. 난 아무 소리 안 한 걸로 해줘."

그때 겨우 통로가 끝나며, 처음과 비슷한 모양의 새로운 문이 나타났다. 색깔만 검은색인.

똑똑.

톨라리는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두께만 두 뼘은 될 법한 문이 저절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그러자 안쪽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형태는 같지만 색깔만 흰색으로 달랐다. 톨라리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이번에도 똑같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지만 이번엔 열리지 않았다. 톨라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 아버지가 또 심술 부리네...."

"무슨 문제 있어?"

"아니, 그냥 기다리면 열릴 거야. 이제 다 왔어. 저 안이 태선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예의상 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열어볼까? 요즘은 마갑 안 입어도 이 정도는 열 수 있을 것 같은데."

"억지로 열어 봤자 안 열려. 차라리 박살내면 모를까."

톨라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몇 번 헛기침 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불초 소녀가 이곳에 왔사옵니다! 톨라리가 여기 왔습니다! 부디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끼긱....

그러자 겨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위칸 왕도 심보가 좀 고약한가 보네.

그나저나 누가 문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열리는 거지?

"휴. 들어와 황자님."

톨라리는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째 동대륙어 쓸 때만 말투가 바뀌는 게 재밌구만. 번역기 머리에 꼭 붙이고 있어야지.

그렇게 진입한 태선부는, 어딘가 현실이 아는 것 같은 기묘한 풍경을 자랑했다.

"...어?"

우선 밝다.

여전히 조금 넓은 동굴일 뿐인데도 야외에 있는 듯한 광량이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지?

어디 창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장이 산꼭대기까지 뻥 뚫린 것도 아닌데?

"어서 오거라. 톨라리. 그리고 처음 보는 젊은이도."

그때 안쪽의 제단 같은 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하얗고 긴 수염의 신선 같은 풍모의 남자. 그런데 톨라리 아버지라고 하기엔 너무 노인 아닌가?

"우리 아빠 나이 많지? 60살에 날 낳으셨어."

톨라리가 작게 속삭였다. 그 나이에 자식을 보다니... 좀 놀랍네.

지금 톨라리가 25살이니 위칸 국왕은 85살쯤 되는 셈이다. 왕의 앞에 선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대륙 페이우드 제국의 제7황자인 클로드입니다."

"제국 황자?"

"공식적인 사절이나 방문은 아니니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왕녀의 초대로 잠시 들린 것뿐입니다."

"호오, 갑자기 돌아온 딸내미가 대체 어떤 남자를 데려왔나 했더니...."

왕은 내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다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예사 인물이 아니구나. 그나저나 머리에 댄 물건이 참으로 신통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서로 뜻이 통하게 만들어주는구나."

응? 설명한 적도 없는데 번역기가 뭔지 알아본다고?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다. 그저 이 공간 안에서는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있을 뿐이야. 그보다 소개가 늦었구나."

왕은 양팔을 펼치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태선부의 수장인 태선이다. 이 나라는 왕이 되면 이름이 사라지지. 그러니 그냥 태선이라 부르면 돼. 어차피 왕부의 일은 아들에게 맡겨 놓았기도 하고. 허허허...."

태선은 노인치고는 키가 무척 컸다. 그가 웃으며 톨라리에게 시선을 돌린 사이, 나는 재빨리 감정안을 사용했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

현재 차원능력 : A

물음표?

힘이 물음표로 보이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왜 이러지?

아무튼 확실한 것은 이 노인도 차원 능력 보유자라는 것.

방금 봤던 투사들보다 차원 능력은 더 높고, 대신 잠재적인 힘이 전혀 없다. 물론 현재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방법이 없고.

"오랜만이구나 톨라리. 그런데...."

태선은 순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주름진 눈을 껌뻑였다.

"방금 황자의 눈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특이하군. 상대의 능력을 읽는 힘? 세상에 그런 능력도 존재했단 말인가?"

엇, 설마 방금 감정안 쓴 거 알아낸 건가?

뭐야 이 할아버지. 어떻게 그걸 알지? 왜 모르는 게 없어?

아무리 톨라리 아버지라 해도 이쯤 되니 경계심이 생긴다. 그래서 곧바로 군주의 눈을 열어 감정을 살폈는데....

태선의 몸 주변에 흐름이 거의 안 보인다.

심지어 감정조차 명확하게 확인이 안 된다.

호기심? 대견함? 감탄?

일단 악감정은 거의 없는 것 같긴 한데.

"허어, 놀라워. 이번엔 또 새로운 힘이구나."

태선은 곧장 내 반대편 눈을 보며 감탄했다.

"이것도 무척 급이 높은 경지구나. 본질을 보는 눈이라. 실로 다재다능한 힘을 가진 젊은이야. 서대륙에도 인걸이 있었어. 껄껄...."

"제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딱히 경계하는 것 같진 않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태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나의 선이다. 선의 힘. 선술이라 불러도 무방해."

"선술...."

"그나저나 고맙구나. 지 애비 생일에도 고향에 안 돌아오는 딸내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

"아바마마, 황자께서 절 오게 한 게 아니옵니다. 제가 황자를 예까지 불러 모셨사옵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 여하튼 얼굴 보니 좋구나. 톨라리. 오랜만에 우리 딸 손 좀 만져보자."

그리고는 양손으로 톨라리의 손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흠, 딱 봐도 예상보다 부녀 관계가 꽤 좋아 보인다. 괜히 오면서 큰 소리 날까 봐 걱정했구만.

"흐음. 호오.... 서대륙에 참으로 풍파가 많았구나."

태선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내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서대륙에 기묘한 폭풍이 불어닥치는 걸 자주 느꼈다. 그런데 폭풍의 중심이 직접 내 앞에 와줄 줄은 몰랐어."

폭풍의 중심이라.

아무래도 이 할아버지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는 모양이다. 태선은 한 손으로는 여전히 톨라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쥐며 웃었다.

"그대가 이미 겪은 일들과 앞으로 계속 겪어야 할 일들이 궁금하구나. 내게 설명을 해다오. 그리고 나서 너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천천히 논하도록 하자꾸나."

* * *

"그렇구나. 다른 차원의 침공이라."

설명을 들은 태선은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느낀 그 흔들림이 그런 것이었다니. 실로 세계에 대란이 벌어지겠구나. 그것을 이 어린 황자가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니…‥‥."

그때 좌우에서 선녀풍의 복장을 한 시녀 둘이 다가왔다. 나는 내심 기겁하며 두 시녀를 번갈아 주시했다.

뭐지 이것들은?

땅에서 솟은 거냐 하늘에서 떨어진 거냐?

주변에 열린 문이나 통로나 창문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

시녀들은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태선이 직접 쟁반을 들며 미소를 지었다.

"귀한 손님이 왔는데 대접이 변변치 않아 부끄럽구나. 부디 이거라도 들어라. 차와 다과니라."

"감사합니다. 태선."

차에는 연한 녹차향이 났다. 태선은 꽃가루가 묻은 과자를 톨라리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너도 먹어라, 톨라리. 못 본 사이에 마음이 많이 평온해 졌구나. 전에 봤을 때는 심란함 그 자체였는데."

"원하던 걸 달성하여 그렇사옵니다."

톨라리는 가만히 웃었다. 태선도 함께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황자."

"네. 태선."

"톨라리가 자기 이야기를 좀 해 주었나? 이 아이는 선술에 큰 재능을 가졌으면서, 정작 그것을 잇기 싫어 서대륙으로 도망친 불효막심한 딸이지."

"아바마마, 너무하십니다. 저는 그저 서대륙에 마법을 배우기 위해...."

"그래서 아니라는 게냐?"

태선이 살짝 노려보자, 톨라리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아바마마 말씀이 맞습니다. 선술은 제게 있어 어려운 힘이옵니다."

"어렵다라, 사실이 그렇긴 하지."

태선은 고개 끄덕였다. 그나저나 방금 그 시녀들은 또 언제 사라졌대? 혹시 나처럼 은신이라도 사용하나?

"선술은 그런 힘이 맞아. 경건한 마음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큰 경을 치르지. 황자, 그대도 선술이 무엇인지 빨리 알고 싶겠지?"

"네. 알려주십시오."

물론 큰 맥락에서는 이미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바로 차원 능력.

감정안으로 직접 봤으니 이 둘을 연결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차원 능력 자체가 정체불명의 힘이긴 한데.... 확실한 건 위칸에서는 차원 능력을 선술이라 부른다는 것.

다만 후원자가 했던 것처럼, 실제로 차원을 넘어 다니는 능력은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그 역시 차원 능력의 여러 갈래 중 하나던가.

물어보면 알겠지?

"혹시 투사가 다룬다는 결속의 힘도 선술의 한 종류입니까?"

"앗! 황자님 그거 말하면!"

순간 톨라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태선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말해주다니, 네가 저 청년을 매우 신뢰하는 모양이구나."

"그것이 아니오라...."

"괜찮다. 믿을 만하니 알려주었겠지. 그 말이 맞다. 투사는 선술의 하나인 '결속술'을 터득한 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역시 그렇군요."

"결속된 자들에게 힘을 모아 자신에게 집중하는 능력이지. 이 위칸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방금 그 시녀들도 선술을 다루는 자들입니까?"

"그렇지. 은신술과 전이술을 동시에 쓰는 아이들이다. 다만 저들의 성취가 아직 약하여, 정상적인 세상에선 이만큼의 성과를 보이는 건 어렵다."

"그럼 이곳은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란 뜻입니까?"

"이곳 태선부는 태선의 힘으로 재구성되어 있지."

순간 환하게 밝던 태선부 내부가 삽시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엇...."

"이것이 본래 이곳의 모습이다. 이것을 내 '영역술'로 새롭게 만든 것이지."

그리고는 다시 원래대로 밝은 공간으로 회복했다.

"보다시피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그래서 이 안에 있는 것들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대의 능력도, 톨라리가 겪어온 지난 시간들도."

여기에 방금처럼 불도 껐다 키고, 저 거대한 문도 자유롭게 열고 닫고 말이지?

"전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선술의 한 종류일 뿐. 영역 밖으로 나가면 나 또한 그저 평범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지. 그대처럼 놀라운 힘을 가진 자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야."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힘을, 선술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쯤 되니 솔직하게 궁금해졌다. 태선은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선옥에 들어가야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2화

50장 선옥

선옥? 감옥 비슷한 건가?

태선은 자신의 뒤에 있는, 또 다른 커다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에 선옥이 있다. 선계의 감옥이지."

"선계...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혹시 다른 차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그대가 막아야 하는 적, 그들이 사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태선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저 선의 힘을 얻는 텅 빈 공간일 뿐이지. 이 태선부는 바로 그 공간과 연결된 틈을 지키고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태선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래. 태선이 대를 이어 해야 하는 가장 큰 임무가 바로 선옥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안정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도 모르지."

태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에는 그저 선계가 소멸한다고 하고, 혹은 선계와 연결된 이곳에 큰 위험이 온다고도 한다. 하나 정확한 건 나도 몰라. 그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매일 조정을 해줘야 해."

그러고는 피아노를 치듯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흐릿하게 보이는 흐름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뒤에 있는 문까지 어지럽게 이어지는 게 보였다.

그런데 저 문, 군주의 눈으로 보니 뭔가 이상한데? 실체는 없고 울긋불긋한 흐름만 어지럽게 엉켜 있잖아?

"저건 진짜 문이 아니군요. 뻥 뚫려 있는 곳을 마법 같은 게 막고 있는데.... 환영인가요?"

"거기까지 알 수 있나? 참으로 대단하군."

태선은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멈췄다.

"말했다시피 이곳은 내 영역이네. 이곳에서 자네의 능력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 그런데도 그 정도로 파악할 수 있을 줄이야."

그리고는 몸을 숙여 내 오른쪽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호. 이건 수천 년의 정수가 담긴... 무척 기묘한 힘이군. 게다가 내 영역의 압력을 돌파해서.... 헛, 그새 힘을 닫아버렸나?"

"죄송합니다. 계속 열고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확히는 군주의 눈이 영역 안의 정보를 어떻게든 확실하게 알아내려고 과부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긴 그렇게 삼라만상의 본질이 보이면 어지러울 만도 하지."

"아바마마. 이쯤 되었으면 그만 황자께 선옥에 대해 알려주시지요."

톨라리가 공손히 말하며 끼어들었다. 태선은 그제야 뒤로 한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톨라리 너도 잘 들어라."

"저는 어렸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사옵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라. 드디어 너도 마음의 각오를 다지지 않았느냐?"

"그것은.... 그렇사옵니다. 아바마마."

톨라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선은 나와 톨라리를 번갈아 보며 다짜고짜 본론에 들어갔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 번 저 선옥에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선옥 내부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지. 그래서 별로 설명할 것도 없어. 그저 선옥 안에서 오래 버티면 오래 버틸수록, 더 강한 선계의 힘, 바로 선술을 얻게 된다."

정말? 뭐가 그렇게 간단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나 같은 태선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개월을 정해 놓고 선옥에서 버텨야 해."

"정해 놓다니, 그럼 처음에 얼마나 버틸지 날짜를 지정하고 들어가야 합니까?"

"그렇지."

"그리고 일단 들어가면 미리 정한 날짜가 지나기 전까지는 못 나온다는 뜻입니까?"

"정확해."

태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그렇게 버틴다 해도 어떤 선술을 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네."

"선술이 모두 몇 종류가 있습니까?"

"크게 보면 다섯 가지네. 연결, 은신, 전이, 영역, 승천."

승천?

승천은 또 뭔데? 설마 그대로 죽어서 하늘에 올라간다는 뜻은 아니겠지?

"자신이 어떤 선술을 얻게 될지 정해진 것은 없네. 다만 태선인 나는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그리고 그대는.... 일단 은신이나 잠입은 아니야."

태선은 고개를 저으며 하나씩 설명했다.

"선계는 인간이 이미 가진 힘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도 은신은 몸을 숨기는 힘인데 그대에겐 이미 그 힘이 느껴지는군."

"...그렇습니다."

그야 은신의 각인을 받았으니 당연할 수밖에.

"전이는 막힌 공간을 넘어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힘이다. 벽 너머나 천장 너머로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 할 수 있지. 허나 이 역시 그대에겐 비슷한 힘이 느껴져."

"음...."

이건 아마도 그림자 잠입을 말하는 것 같구만.

물론 그림자 능력 중에 주특기는 잠입이 아니라 갑옷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림자만 있으면 짧은 공간은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그대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연결, 영역, 승천 중 하나다. 어쩌면 둘을 가질 수도 있고."

"연결은 투사가 쓰는 힘이고, 영역은 태선께서 지금 펼치고 계신 힘이라 들었습니다. 마지막 승천은 무엇입니까?"

"나도 몰라."

태선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승천은 초대 태선이신 위칸의 창업군주께서 유일하게 얻으셨던 선술이다. 어떤 능력인지 기록을 남기지 않으셔서 아무도 모르지. 그저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알 뿐."

"지금까지 선옥에 들어갔던 모든 사람 중 단 한 명만 얻었단 말입니까?"

"그러니 없는 셈 쳐도 좋지. 그대는 이미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 내 느낌엔 결속이 아닌 영역의 힘을 받을 것 같군."

"뭐든 얻을 수만 있다면 좋습니다. 이계의 침공을 막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렇지. 황자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군."

태선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옆에 있는 톨라리를 보며 놀리는 듯 안색을 바꿨다.

"반면 여기 있는 딸내미는 선옥 들어가는 게 무서워 다른 대륙까지 도망을 쳤는데 말이야."

"아바마마!"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 물론 이해는 한다. 네가 익힌 마법은 자연에 속한 힘이지. 반면 선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선계의 힘이고. 그러니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다.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경계하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소녀 마음이 상하여 잠시 생각을 달리 해 봐야겠사옵니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잡고는 뒤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못해 끌려가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어? 그냥 들어갔다 나오면 끝이라며?"

"그게 아니야 황자님."

톨라리는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장난 아님. 선술 최단 코스가 무려 10일이야."

"10일? 그게 어때서? 물론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라니 좀 지겨울 것 같긴 하지만."

"지겨움? 이건 생존 문제야."

"생존?"

"10일 동안 아무것도 없는 선옥에 들어가서 굶어야 해. 자칫 굶어 죽기 십상."

"굶는다고?"

"응. 굶어."

"선옥에 있는 동안 굶어야 선술을 얻을 수 있어?"

"그건 아니고, 아무리 먹을 걸 챙겨 가도 안에 들어가면 사라져. 끝내고 나온 사람들 이야기로는 먹을 수 있는 모든 게 사라진대. 선옥 들어가는 순간."

"...그럼 진짜 열흘 동안 쫄쫄 굶어야 해? 물은? 물도 못 마셔?"

"당연히 못 마셔."

톨라리는 캑캑거리는 시늉을 하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는 시늉을 했다.

"보통 죽으면 갈증으로 죽음. 그래서 선옥 들어가기 전에 식사와 물을 먹지 않고 버티는 몸 만들어야 해."

"아하."

"그래서 막상 선옥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몸 만들다 실패해서 죽거나 몸 망치는 사람도 꽤 있어. 이거 진짜 장난 아니야. 그리고 어떻게든 몸 만들어서 선옥 들어간다 해도...."

"셋에 하나는 죽고, 셋에 하나는 폐인이 되지."

그때 태선이 멀리서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딸아이의 말이 맞다. 그만큼 위험한 도전이야. 그래서 태선인 내가 사전에 미리 검열을 하지."

"검열이라면...."

"과연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열흘을 버틸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미리 단련해서 그런 몸을 만들 수 있는가? 과연 몸이 된다 해도 정신이 버티지 못해 광증이 생길 위험은 없는가?"

태선은 손가락을 하나씩 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철저히 검열을 하는데도, 막상 들어가면 온전히 성공할 확률이 3할에 지나지 않아. 그만큼 마음의 각오가 필요하다."

그리고는 톨라리를 바라보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톨라리, 네가 여기 왔다는 건 그만큼의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이겠지?"

"네. 물론이옵니다. 아바마마."

톨라리는 몸을 낮추며 조신하게 인사를 올렸다.

"소녀는 어떻게 해서든 더 강해져야 하옵니다. 그만큼 이계의 힘은 막강하옵니다. 또한 선옥에 들어가는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태선이자 왕이신 아바마마의 지원도 부탁드리려 하옵니다."

"지원이라, 서대륙으로 지원군을 보내라는 뜻이냐?"

"그렇사옵니다. 부디 투사를 서대륙으로 보내주시옵소서."

"투사는 자고로 위칸을 비워서는 안 되는 법인데...."

잠시 수염 쓰다듬던 태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이는 우리 모든 세계의 안위가 달린 일. 그런 고루한 옛 법에 얽매일 수는 없지. 알았다. 투사를 보내도록 하마."

"감사하옵니다!"

톨라리는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리며 절을 올렸다. 이거 나도 같이 옆에서 따라 해야 하나? 뭐 그냥 고개만 숙여도 상관없겠지?

"감사합니다. 이계의 침공을 막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지. 그나저나 톨라리야."

"네. 아바마마."

톨라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태선은 그런 자신의 딸을 가만히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래서 너는 선옥에 들어가 얼마나 수행을 하려 하느냐?"

"물론 열흘.... 아니, 한 달을 머무를 생각이옵니다."

"한 달!"

얘가 미쳤나? 나는 이를 악문 톨라리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야, 미쳤어? 한 달을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밥만 굶어도 죽을 텐데, 한 달 동안 물을 안 마시고 어떻게 버텨?"

"걱정 마 황자님. 다 방법 있어."

톨라리는 처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태선도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네가 그 정도 각오가 있을 줄은 몰랐구나. 하나 선옥에 한 달간 수행하려면, 적어도 내 지도하에 석 달의 몸을 만드는 기간이 필요하다."

"아바마마께 모두 맡기겠사옵니다. 석 달이 비록 긴 시간이지만, 그래도 차원의 침공 전에 시간 맞출 수 있으니 말이옵니다."

"과연.... 알겠다."

태선은 기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한 달 동안 쌩으로 굶으면서 버티는 게 가능하나? 3개월 몸 만들고 한 달 단식하기?

"톨라리, 그럼 너 여기서 넉 달 동알 머무를 생각이야?"

"넉 달은 아니고 석 달."

톨라리는 고개를 저었다. 뭐지? 얘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산수가 안 되나?

"준비에만 석 달 필요하다며? 그리고 한 달 동안 선옥에 들어가 있고. 그러니 둘 다 하면 넉 달이잖아?"

"선옥의 시간은 이쪽과 다르게 돌아간다."

그러자 태선이 대신 대답했다.

"선옥 안에서 몇 달을 있던, 밖으로 나오면 오직 하루가 지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몸을 만드는 시간만 신경 쓰면 돼."

"그게 정말입니까? 이거 완전 정신과 시간의...."

"으음?"

"아니, 아닙니다. 하루면 충분했군요. 과연."

그렇다면 톨라리에게 앞으로 필요한 시간은 석 달하고도 하루.

문제는 톨라리가 아니라 나다. 내가 과연 저 안에서 단 열흘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열흘 동안 굶을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긴 몸만들기 시간이 필요할까?

"그럼 황자, 그대는 선옥에서 얼마나 오래 수행할 생각인가?"

"저는...."

"열흘? 스무날? 아니면 딸내미처럼 한 달?"

"...그 전에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더 강한 선술을 얻게 되는 겁니까?"

"말해 무엇 하나?"

태선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 특별히 왕가에만 대대로 내려오는 특별한 몸만들기 비법을 전수하도록 하지. 물론 결과에 따라선 한 달은 어렵고 스무날에서 보름 정도로 타협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1년이옵니다."

순간 톨라리가 대뜸 끼어들며 선언했다.

1년?

지금 나보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차원에 들어가, 1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말고 버티라고 말한 거야?

"톨라리? 아무리 남 일이라고 너 그렇게 함부로 막 지르는 게 어딨냐?"

"그렇다 딸아. 허, 1년이라니. 지금 이 황자에게 선옥에서 1년간 수행하라 말한 것이냐?"

"네. 아바마마."

톨라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태선은 나보다도 더 내 심정을 정확히 대변해 주었다.

"넌 황자를 죽이고 싶은 것이냐? 실은 원수를 진 사이였던 게냐?"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그러겠사옵니까?"

"위칸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선옥에서 1년간 수행을 성공한 건 초대 태선뿐이다. 그마저도 전설 같은 일이고."

"알고 있사옵니다. 아바마마."

"그런데 네가 그런 말을 해?"

태선은 노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최근 300년간 6개월의 수행조차 버텨낸 이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1년이라니 대체...."

"황자님은 저 안에서 1년을 버틸 수 있사옵니다."

톨라리는 자신 있게 말하며 내 쪽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여자가 정신이 나간 걸까 잠시 고민하다, 퍼뜩 무언가를 깨달으며 탄식했다.

"아...."

드라이어드!

그래, 나한테는 나무의 정령인 드라이어드가 있다!

그리고 드라이어드는 내게 대량의 열매를 공급해 줄 수 있다. 그것도 끝내주게 맛있고 수분도 풍부한 과일을!

"...태선.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질문했다.

"태선께서는 정령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다. 이곳 라그란 대륙에도 정령이 있지. 그대가 다루는 능력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저는 정령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정령을 소환하는 능력이죠. 혹시 선옥 안에서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습니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선옥에서도 할 수 있다. 당연히 소환할 수 있지."

그렇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톨라리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어때 황자님? 내가 일부러 황자님 여기까지 끌고 온 보람이 있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3화

50장 선옥

선옥은 내일 들어가는 걸로 합의를 봤다.

대신 오늘은 위칸의 왕부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덕분에 섭정을 보는 톨라리의 큰오빠와도 인사를 나눴고, 낮에 잠깐 만났던 투사들과도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결속술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위칸을 위해 희생하는 인근 백성들과 직접 만나 결속의 예를 나눠야 합니다."

연회 도중, 셴이라는 투사가 자신의 힘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라에서도 그만큼 희생하는 백성들에게 덕을 베풉니다. 세금을 덜 거두거나 면제해 주기도 합니다. 자식들에게 관리로 진출할 기회를 주기도 하지요."

"나름 얻는 게 있구나. 그래서 어떻게 결속을 하는데?"

"서로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허락한다, 고 말하면 됩니다."

어째 라이프 링크와 비슷한 느낌이구만. 만 명의 백성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한명씩 악수를 하다니.... 시간 꽤나 걸리겠네.

"한번 결속하면 영원히 연결되는 거야?"

"그렇진 않습니다. 언제든지 해제가 가능합니다. 병에 걸리거나 몸이 약해지신 분들은 사전 통보 없이 바로 해제한 뒤에 나중에 알려도 됩니다."

"저쪽에서 해체할 수 있다고? 투사만 가능한게 아니라?"

"물론입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셴은 눈을 감고 잠시 침묵하다 미소를 지었다.

"여섯 분이 결속을 끊으셨습니다."

"그걸 바로 알 수 있어? 만 명 중에 여섯인데?"

"알 수 있습니다. 황자님께서도 만약 결속술을 얻으시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바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 참.... 그래서 만 명의 힘을 모아 직접 써본 적 있어?"

"그걸 이렇게 대 놓고 물으시다니...."

셴은 쓴웃음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서대륙에서 오신 분은 참으로 직설적이시군요. 물론 써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강해?"

"산이 갈라지고, 땅이 뒤집힙니다."

"오...."

이거 느낌이 팍 오는 묘사구만. 그런데 셴이 갑자기 바싹 붙더니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그나저나 황자님께서는 정말로 부마로 오시는 게 아닙니까?"

"아니래도? 지금 누가 결혼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야."

"저는 영락없이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왕녀님은 예전부터 취향이 그러셨는지라."

"취향? 무슨 취향?"

"왕녀님은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처음 독수리에 타고 온 황자님을 보았을 때, 드디어 부마될 분을 모셔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랬구나.

그래. 나 키도 작고 몸도 작다. 지금 대체 누가 누구보고 직설적이라고 하는 건지 원.

* * *

연회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안내받은 객실은 꾸밈없이 단출한 방이었다. 창가에 앉은 나는 멀리 밤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테우스를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쟨 오밤중에 왜 날아다니고 있지.... 심심한가?"

내일 선옥 들어가기 전에 만나서 밥부터 줘야겠네. 그나저나 준비물 뭐 필요 없나? 아무리 선옥에 먹을 걸 가지고 들어 갈 수 없다 해도....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황자님? 나야 나. 들어가도 돼?"

목소리가 톨라리구만. 들어오라고 하자 바로 톨라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막상 톨라리가 내가 알던 그 톨라리가 아니었다.

"그거...."

"옷 말이지? 위칸 옷이 원래 이래."

톨라리는 빙글 몸을 돌리며 치마를 휘날렸다. 연회 중반부터 어째 모습이 안 보인다 싶더니, 저런 선녀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구만.

여기서 선녀 같다는 건 예쁘다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 선녀 같은 느낌의 하늘거리는 옷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예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예쁘네. 잘 어울려. 너도 확실히 이쪽 동네 사람이었구나."

"당연한 말씀. 칭찬 고마워 황자님."

그런데 막상 표정은 별로다. 웃고 있는데도 우울함이 확 풍기는 느낌? 이건 굳이 군주의 눈을 안 써도 바로 알겠는데?

"연회 중간부터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아님. 따로 가족들 모여서 만났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표정? 그렇게 티나?"

톨라리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집에 돌아온 게 5년만. 그 새 큰일이 있었어."

"큰일?"

"할아버지 계셨거든. 성함이 주드라고 하는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거 유감이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다음 바로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라고? 전대 국왕 말이야?"

"아니, 할아버지는 국왕 안하셨어. 선옥에 안 들어가서 태선이 될 수 없었거든."

"태선이 아니면 왕도 못하는 거였지?"

"맞아. 그래서 아버지가 한 세대를 건너뛰고 바로 왕위를 이어받으셨어."

그러니까.... 당시에 세자가 아니라 세손이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뜻.

그나저나 그 주드라는 할아버지도 어지간히 선옥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했나 보구만.

하긴 태선이 되기 위해서는 석 달 코스로 선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석 달 동안 물 한 모금 안마시고 버텨야 하다니, 나 같아도 겁나서 도망칠 것 같다.

"나한테 잘해주시던 분이야. 그런데 몇 년 전에 선옥에 들어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대."

"그렇구나... 아니, 이제 와서 선옥에 들어갔다고? 대체 나이가 몇인데?"

"108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어."

"108세? 그 나이까지 잘 피하다가 갑자기 왜?"

"할아버지는 선옥을 피하신 게 아니야."

톨라리의 얼굴이 순간 왕녀의 표정으로 변했다. 이것도 참 색다르구만.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의 톨라리라니.

"오히려 반대야. 할아버지는 선옥의 가장 어려운 코스에 도전하기 위해 평생을 수행하셨어."

"1년짜리? 그게 가능해?"

나처럼 편법으로 사기를 치지 않는 이상,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1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버티는 게 가능할까?

"본인은 가능하다고 믿으셨어. 1년을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려고 평생을 바치신 거야."

"그 몸만들기라는 게 정확히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100세를 넘겨서 도전하는 건 너무 무모한 거 아닐까?"

"그게 보통 생각. 하지만 나이 먹고 도전하는 것도 장점이 있어."

"무슨 장점?"

"나이를 먹으면 몸이 필요한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어."

"그게 물론 그렇긴 하다만...."

솔직히 자살 행위 아닐까?

지금 얘가 기초열량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노인이 기초열량이 떨어진다 해도 그만큼 몸 상태도 약해지니 의미가 없다.

"황자님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 것 같아. 그래도 무작정 무모한건 아님. 나이에 맞춰 몸을 만드는 수행법이 따로 있어."

"그래?"

"물론 나이 한참 먹고 선술 얻어 봐야 의미 없음. 그래서 보통 그렇게 까진 잘 안 해."

"하지만 그 분은 뜻이 있으셔서 평생을 도전하신거구나. 위칸 역사 최초로 선옥에서 1년 버티기를 성공하기 위해서."

"맞아. 뜻이 큰 분이셨어."

톨라리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초대 태선이 1년짜리를 통과했다고 하긴 하는데, 그건 전설 같은 거라서. 할아버지는 전설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런데 안 돌아오셨구나."

"응. 아까 아무것도 모르고 만나러 갔는데.... 할아버지 방이 깨끗이 치워져 있더라."

그리고는 눈물을 주륵 흘렸다.

이것 참.

물론 안타까운 이야기긴 하다. 문제는 지금 내가 막 나서 뭐라고 말을 꺼내기 민망한 상황이라는 것.

그게 그렇잖아?

당장 내일 선옥에 들어가 1년 코스로 꿀을 빨, 아니 드라이어드의 열매를 빨아 먹을 입장인데?

"...그러니 황자님, 진짜 잘 부탁할게."

"응? 내가 뭘?"

"고인의 유지를 이어 받아 반드시 성공해 줘. 선옥에서 1년 버티기. 그러면 위칸의 모든 백성들이 기뻐할 거야."

"아니, 난 그냥 거기서 1년 쉬다 나오는 셈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톨라리는 부릅뜬 눈으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식량 있다고 맘 놓지 마. 그랬다가 큰일 나."

"...왜?"

"선옥은 무서운 곳이야. 오래 있다 나온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말했어. 시간 지나면 심마(心魔)가 찾아온대."

"심마?"

"헛것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대. 선옥 안에 혼자 오래 있으면 그렇게 되나봐.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톨라리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환각이나 환청에 시달린 건 분명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쫄쫄 굶다 보니?

"일단 난 뭘 먹으면서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보다 혼자라는 게 더 커."

"혼자?"

"선옥은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야. 그 와중에 대화할 사람도 없으니 정신이 더 궁지에 몰려. 그래서 도전한 사람들 중 일부가 미치는 거야."

"확실히.... 근데 걱정할 필요 없어. 그것도 난 상관없으니까."

"황자님 정신력 끝내줘서?"

"아니 대화할 사람이 있어서. 정확히는 사람 아니고 정령이지만."

"아."

그러자 한 없이 진지하던 톨라리의 얼굴이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황자님 완전 사기야!"

그리고는 갑자기 방안을 뛰어다니며 억울하다는 얼굴로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령 마법 완전 사기! 먹을 것도 주고 말동무도 되고! 못됐어! 나도 그거 있었으면 바로 옛날에 선옥 들어갔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나도 하나 줄 수 없어? 전에 보니 메르데스도 하나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순간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어휴 깜짝이야. 누가 보면 정령 강탈하려는 줄 알겠네.

"쉽지 않을 거야. 넌 정령마법에 적성이 없어서."

"웬 적성? 그냥 조건 맞춰서 정령 사는데 가면 계약 하는 거 아님?"

"조건도 조건 나름이거든. 일단 적성이 낮으면 정령과 말이 안 통해."

물론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 한 건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처음에는 정령마법에 대한 잠재력이 전혀 없었다. 일단 억지로라도 계약만 하면 적성이 올라가는 걸 생각하면....

"그래도 노력해 볼게. 동대륙 오는 김에 바람의 정령왕과 접촉할 거라 했잖아?"

"맞아. 그랬어."

"내일 선옥 들어갔다 돌아오면 바로 그쪽에 가 보자. 잘하면 거기 있는 급 낮은 바람 정령 하나쯤은 계약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확실한건 하나도 없지만 지금은 일단 지르고 봐야 한다. 그러자 톨라리의 표정이 확 풀리며 언제 그랬냐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 황자님!"

그리고는 냅다 달려와서 날 와락 껴안았다.

후.

뭔가 기쁘면서도 슬프다.

그동안 키 좀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해봐야 평범한 사람 가슴 정도 밖에 안 오는구만.

그나저나 고맙긴 나야 말로 더 고맙다.

덕분에 공짜로 차원 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으니까.

만약 투사처럼 결속술을 쓸 수 있게 되면? 나도 산을 가르고 땅을 뒤집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 *

"일찍 왔구나, 황자. 지금 그대로 선옥에 들어갈 생각인가?"

태선은 여전히 태선부의 중심에 있는 제단에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손에 하얀 신발 같은걸 들고 있는데 저건 뭘까?

"이대로 들어가면 문제가 생깁니까?"

"문제는 없다. 따로 가져갈게 없느냐는 뜻이다."

따로? 따로 뭘 챙겨?

"먹을 걸 챙겨도 선옥에 넘어가면 사라진다고 들었습니다만."

"가져갈게 꼭 먹을 것뿐이겠나? 하루 종일 심심할 텐데. 그대는 저 안에서 1년이나 있어야 한다는 걸 생각해야지."

"...혹시 책을 들고 가도 됩니까?"

"책도 사라지지. 종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같은 이유인지 가죽도 안 돼. 혹 가죽으로 만든 물건이 있으면 여기 놓고 들어가게."

"가죽이라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신발이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구나.

"신발을 벗고 가야겠군요."

"그럴 줄 알고 미리 한 켤레 준비해 놨다."

태선은 손에 들고 있던 하얀 짚신 같은걸 내밀었다. 저게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한 거였구나. 이 할아버지 진짜 무슨 신선 같네.

"신기해 할 거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으니까. 내가 미래를 예측하거나 한건 아니야."

"그래도 좀 놀랐습니다. 영역술로 그런 것도 할 수 있나 해서."

지금 이 공간 자체가 태선이 만든 영역술에 덮여 있다. 태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도 없진 않지. 자, 이제 신발 갈아 신고 따라오게."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입구의 반대편에 있던 문이 언제 있었냐는 듯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딸애가 어제 밤에 그대의 방을 찾아 간 것 같더군. 둘이 사이가 좋은가?"

"물론 사이는 좋습니다만.... 태선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내가 걱정? 그럴 리가?"

태선은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아이도 벌써 스물다섯이다. 일이 생기면 걱정이 아니라 기뻐해야지. 물론 그런 일이 없다니 아쉽다만."

그리고는 사라진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태선을 따라 걸으며 어제 투사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지금 누가 결혼하고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세계의 종말을 막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전쟁터에도 꽃은 피는 법이지. 그대는 전쟁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 어느 정도는 그 뒤의 세상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그렇습니다만...."

결국 이 또한 이계의 침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속 편한 소리일 뿐.

이 할아버지도 분명 세계가 멸망하는 모습을 아홉 번 정도 지켜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4화

50장 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