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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0화

42장 융합

하이 시티의 시가지 곳곳에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복구가 느려...."

집정관이 도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집정탑은 얼마 전 주재자의 폭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새 전파탑에 자리를 잡고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침공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도시 복구에 힘을 집중할 수 없는 형편이지.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침공까지의 시간을 줄여 버린 1호의 희생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것 같군."

집정관은 바로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하얀 붕대의 사이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나? 3호?"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후원자로 뽑힌 사이크인이 무감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집정관은 자신의 몸을 감싼 파란 붕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인격이 정착되지 않은 모양이군. 이성의 붕대를 받은 지 얼마나 되었지?"

"62개월이 되었습니다."

"고작 62개월짜리가 새로운 후원자로 뽑혔단 말인가? 안타깝군. 지난 수백 년간 1호가 워낙 잘해준 바람에.... 후계자 육성에 소홀히 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어."

"부족한 제가 뽑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어쩔 수 없지. 일어나라."

집정관은 새 후원자와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지금 사이크 차원은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다. 도시는 엉망이 됐고, 규정을 어긴 것 때문에 여러 불이익을 받기 시작했으며 주재자께서는 크게 몸을 상하셨다. 여기에 다수의 영생의 핵이 소멸해 영구적인 인력을 상실해 버렸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위대한 게임으로 연결된 알드 차원 때문이다. 현재 알드 차원에 발현된 잠재력은 무려 34퍼센트. 지금껏 이런 압도적인 수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오늘 확인한 바로는 36퍼센트이었습니다."

"바로 그거다."

집정관은 주재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제까지 34퍼센트였는데 오늘 36퍼센트가 되었다. 단 하루 만에 2퍼센트가 오른 것이다. 대체 어떻게? 지금 알드 차원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윽...."

순간 3호가 괴로운 듯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집정관은 급하게 손을 떼며 나오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군. 62개월짜리에게 이런 감정은 견디기 쉽지 않겠지."

"...집정관님께서 얼마나 고통받고 계신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3호는 즉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집정관은 골치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육체를 버리고 영생을 얻었는데도 아직도 예전 일에 휘둘리다니.... 웃기지도 않군. 3호 너도 인격이 정착되기 시작하면 생전의 습관이 떠오를 거다."

"아직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붕대를 받은 영광과 대의를 위한 사명감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 그게 좋지."

집정관은 자신의 손가락을 감싼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는 안에 넣어둔 푸른빛의 덩어리를 꺼내 3호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을 네 안에 넣어라."

"집정관님의 일부를 말씀입니까? 그렇게 하면 저는 며칠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입니다."

"그 전에 일을 끝내면 돼."

집정관은 스크린이 설치된 벽으로 몸을 돌렸다.

삑!

그러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드워프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집정관은 속이 빈 손가락 붕대를 천천히 접으며 말했다.

"저것이 알드 차원에 간섭 가능한 마지막 존재다."

"알고 있습니다. 드워프라는 종족의 군주인 겔리입니다."

"그리고 넌 저자와 융합해야 한다."

"...."

후원자 3호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저 드워프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가진 힘이 너무 약해. 감정의 뒤틀림도 최하 수준이고."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새 후원자로 임명받고 기존의 후원자들의 기록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드워프를 이곳으로 데려와, 인위적으로 감정의 뒤틀림을 만들어 높은 등급의 생체 병기로 만들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의미 없다. 2호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만든 '젝트바이아'도 클로드에겐 통하지 않았다. 설령 저 녀석을 '그림자 악귀'로 만든다 해도 충분히 제압하겠지."

그림자 악귀는 사이크 차원이 만들어낸 표준 생체병기 중 가장 등급이 높은 것이었다. 집정관은 3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런데 넌 그림자 악귀보다 강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제 능력은 후원자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도 매우 부족합니다. 단지 그림자 능력 하나에만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널 뽑은 거다."

집정관은 3호의 손위에 있는 자신의 일부를 가리켰다.

"네게 준 것은 생물과의 융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에너지다. 생물과 반생물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하지.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하지만."

"그 전에 클로드를 제거하란 말씀이군요."

"그렇다."

집정관은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3호를 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너의 희생으로 사이크 차원의 승산을 높일 수 있다. 이것이 침공 전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다. 할 수 있겠나?"

"그저 따를 뿐입니다."

3호는 가슴 쪽의 붕대를 살짝 풀었다.

그리고는 손바닥 위에 넘실대는 푸른빛의 에너지를 몸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클로드를 죽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집정관께서 훗날 차원 침공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래. 반드시 승리하겠다."

"그럼...."

3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집정관의 방을 나섰다. 집정관은 곧바로 스크린에 타이머를 작동시키며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72시간.... 과연 그 안에 클로드를 찾아내 죽일 수 있을까? 아니, 그 녀석이라면 어떻게든 귀신같이 알아내서 먼저 찾아올 거다. 그렇다면 죽일 수 있다. 최악의 경우라도 사실상 죽음에 맞먹는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을 테고...."

* * *

데스 울프 족장 파가브가 경직된 얼굴로 되물었다.

"방금 여왕 시체 벌레를 죽였다고 말 한 건가?"

"응."

"큰일이다. 이러면... 이러면 결국 우리 식량이...."

파가브는 나라 잃은 얼굴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왕 벌레는 죽기 전 다음 여왕 벌레를 낳고 죽는다. 그런데 그 전에 죽어버렸으니.... 결국 시체 벌레 무리도 멸종할 것이다.

그러게. 거기까진 차마 생각 못했다.

기껏 고생해서 시체벌레 굴을 빠져나왔더니 새로운 문제가 생겨 버렸다.

으아 이젠 나도 몰라. 당장이라도 어디 죽은 듯 쓰러져 잠을 자고 싶다. 근데 그러면 진짜 꼴불견이겠지.

"미안.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여왕벌레 안 치우면 봉인석에 손도 못 댈 상황이라."

"후우...."

파가브는 늑대답지 않게 한숨 푹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어찌 널 질책하겠나? 넌 잘못한 게 없다. 어차피 너 아니었으면 우린 몰려오는 시체벌레들을 막다 멸종했을 테지."

"그래. 그렇지만...."

다짜고짜 맞장구치기엔 검은 늑대들의 분위기가 너무 침울했다. 그러자 늑대 무리에서 혼자 하얗고 덩치 큰 르갈이 킁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수고했다 클로드. 하루가 지나도 나오지 않아 걱정했다."

"하루? 벌써 24시간이 지났어? 어째 졸려 죽겠다 싶더니만."

"그보다 훨씬 지났다. 그런데 네 몸에서 강력한 고통의 냄새가 풍긴다."

고통이라.

확실히 아파 죽는 줄 알았다. 대책 없이 정령왕과 빙의한 바람에.

"지금은 괜찮아. 진통 효과가 있는 마법에 영약까지 잔뜩 마셨어."

"...그거 정말 괜찮은 게 맞나?"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아무튼 봉인석 복구했으니 다시 퀸시에게 돌아가야 할 텐데...."

하지만 길안내를 해줄 데스 울프 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뒷걸음쳤다.

이거 큰일이구만. 본의 아니게 데스 울프의 먹을거리를 끊어 버렸으니.

이것도 퀸시가 해결해 줄 수 있으려나? 해결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기분 엄청 찜찜할 것 같은데?

* * *

"봉인이 회복된 것을 느꼈다. 놀랄 만큼 순식간에 해결했군."

퀸시는 정말 놀란 것처럼 검은 빛을 사방으로 쏟아냈다. 나는 양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힘들었어. 하루 넘게 걸렸는걸."

"중요한 건 그대가 나의 임무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코어를 흡수하진 않은 것 같다만."

"아, 이거?"

나는 그때까지 가지고만 있던 데스 울프의 코어를 꺼내 입안에 넣었다. 퀸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클로드. 너는 나 퀸시의 신성을 부여받을 조건을 갖추었다."

"우움."

"나의 권속인 데스 울프의 코어를 받은 인간이여, 그 모든 시련을 뚫고 여기까지 온 너에게, 어둠과 죽음의 신인 나 퀸시가 권능을 내리겠다. 너는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래. 받아들일게."

입안에 넣은 코어가 조금 줄어들어 말하기 수월해졌다. 순간 퀸시의 몸으로부터 빛이 새어 나와 검은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림자다. 생명을 가진 자는 이 능력을 온전히 다룰 수 없을 테니, 한정된 생을 버리고 영원한 죽음의 품에 안기는 것을 추천하겠다."

"싫어. 나보고 언데드가 되라고?"

"그런 길도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너의 자유다."

순간 검은빛의 덩어리가 빠르게 몸을 휘감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본격적인데? 회귀 직전에 로아한테 각인받을 때랑 거의 비슷하잖아?

우우우웅!

그렇게 회전하는 덩어리가 몸 안으로 빨려간 순간, 나는 눈앞이 까맣게 변하는 걸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앗...."

하마터면 아직 입안에 남은 코어를 떨어뜨릴 뻔했다. 나는 벌어진 입을 꽉 닫으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가?"

퀸시가 물었다. 그야 괜찮긴 한데.... 뭔가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어지러웠어. 이거 뭔가 부작용 있거나 하진 않겠지?"

"신체적인 부작용은 없다."

퀸시는 고개를 저었다. 신체적? 그럼 정신적인 부작용은 있다는 소린가?

"그렇다고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개인차는 있겠지."

퀸시는 마치 내 맘을 읽은 듯 말했다. 나는 몸 안에 깃든 새로운 힘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개인차? 무슨 개인차?"

"너는 루아의 사도이니, 루아가 네게 내리는 힘을 알고 있겠지. 마찬가지로 이 또한 나의 사도에게 내리는 힘이다."

"사령군주?"

"그렇다. 본래 언데드의 정점인 사령군주에게 내리는 힘을 평범한 인간인 네게 부여한 것이다. 아예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지. 나 역시 살아있는 인간에게 이것을 내린 적은 처음이라 정확한 결과는 모른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나?"

"음.... 딱히?"

당장은 기분이 좀 차분해졌다는 정도?

"아, 어째 주변 공간이 의식되는데? 당장 내 등 뒤에 깔린 그림자도 그렇고."

"그것은 그림자 능력에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다. 주변이 의식되는 건 이곳이 대부분 어둠이라 그렇고."

"그래? 그럼 일단...."

감정안으로 능력 좀 확인해 볼까?

종족 : 인간

현재 은신 : S+

현재 힘 : C-

현재 마법 : S+

현재 신성 마법 : S

현재 영약술 : C

잠재 영약술 : S

현재 정령 마법 : S

현재 마수 친화력 : B

잠재 사령 마법 : S

현재 그림자 : C

잠재 그림자 : S+

오, 확실히 그림자 능력이 생겼구만.

그것도 잠재력이 최고등급이다. 당장 쓸 수 있는 건 C등급 정도에 불과 한 것 같지만.

"...이건 어떻게 하면 강해지는데?"

"그림자 능력을 어떻게 하면 더 높일 수 있냐는 질문인가?"

"맞아."

"너 스스로를 죽음과 어둠에 더 자주 노출시키면 된다."

"...뭐?"

"그 정도 조언이면 충분하겠지. 애당초 내 사도도 아닌 녀석에게...."

순간 퀸시가 목소리 톤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널 부른 기억이 없다. 왜 이곳에 왔는가?"

"죽음의 신, 퀸시시여."

그러자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파가브가 몸을 납작 엎드렸다. 아니, 얜 또 언제 여기까지 왔대? 시체벌레 멸종 위기에 풀죽어 있던 거 아니었어?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일족에 큰 위기가 닥쳐 당신의 뜻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러나라. 지금은 임무를 달성하여 나의 신성을 부여받은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아니아니, 난 됐으니까."

나는 급히 한발 물러나며 손을 펼쳤다.

"편하게 이야기 나눠. 진짜 심각한 문제 같은데."

"...."

퀸시는 윤곽만 있는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이 녀석들 어째 후원자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알았다. 그럼 말해라. 나의 권속아."

"시체벌레 여왕이 죽었습니다. 시체 벌레 없이는 저희들도 이곳에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성역을 나가라."

퀸시는 단숨에 대답했다. 파가브는 순간 몸을 번쩍 일으키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죽음의 신이시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 일족은 오직 죽음을 곁에 모시기 위해 이 지하생활을 견디며...."

"그게 아니다."

퀸시는 어딘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성역을 나가라는 말이지, 날 떠나라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퀸시시여, 그 말이 곧 그 말 아닙니까?"

"이제 곧 세상 모든 곳에 죽음이 도래할 것이다. 마지막 축제의 때가 다가왔다."

"오오...."

검은 늑대가 다시 배를 깔며 고개를 푹 숙였다. 퀸시는 몸을 빙글 돌리며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그것을 목격하고 참가하라. 죽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죽음의 권속이 그곳에 없어서야 되겠는가?"

"퀸시시여...."

"나의 권속들아. 만약 모든 세상이 죽음에 뒤덮이면 너희 또한 안식을 얻으리라. 그러니 내 곁이 아니라 그 어디에 있어도 죽음이 함께할 것이다. 개의치 않고 나서라. 세상으로."

동시에 퀸시가 모습을 감추며 사라졌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부들거리고 있는 늑대를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죽음을 섬기는 권속답게, 그에 걸맞은 최후의 임무를 받은 걸까?

그나저나 이 불길한 느낌은 뭐지? 어쩐지 앞으로 매일 수백인 분의 고기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이 강렬한 부담감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1화

42장 융합

"군주님! 군주님! 큰일 났습니다요."

젊은 드워프가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한밤중에 화로를 켜고 망치질을 하던 드워프 군주, 겔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고 개를 저었다.

"잠시만. 이제 곧 끝나니 잠시만 기다려라."

"그럴 때가 아닙니다요! 방금 숲에서 늑대들이 대거 밖으로 빠져나오는 게 목격됐습니다!"

"뭐?"

겔리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에이션트 울프가 영원의 숲 밖으로 빠져나왔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요.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왜?"

"저한테 왜냐고 물으셔도...."

젊은 드워프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겔리는 손에 쥔 망치를 놓으며 잠시 생각했다.

"흠. 어쩌면 전에 온 그 녀석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그 녀석이라니, 누구 말씀이십니까?"

"르갈 말이야. 내가 경호가 필요하다며 난리 쳤던."

"오, 그 덩치 큰 에이션트 울프 말씀이군요."

얼마 전 르갈이 드워프 주둔지에 들려 후원자에 대한 경고를 하고 돌아갔다. 겔리는 그보다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션트 울프 안에 일족의 배신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 아무래도 그게 르갈이 아닌가 싶다. 혹시 몰라 당사자한테는 이야기를 안 꺼냈지만."

"헛, 저도 그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요. 늑대들과 접촉한 녀석들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그 와중에 다시 영원의 숲 근방인 이곳까지 와서 내 신변을 걱정해 준 건가?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알고 보니 그 늑대가 엄청난 위험을 무릅썼어."

"그렇다면.... 늑대들이 숲에 가까이 온 르갈의 냄새를 맡아 추적을 시작했단 말씀입니까?"

"그렇지. 이거 안 되겠어."

겔리는 다시 망치를 들고 만들던 물건을 계속 두드리기 시작했다.

깡! 깡! 깡! 깡!

"...군주님?"

"황자에게 전령을 보내야겠다. 마침 만들던 게 거의 완성됐으니, 마무리만 하면 이걸 선물로 들려 보내야겠군."

"선물이라니, 그보다 한시라도 급히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르갈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뭐 그렇긴 한데...."

겔리는 신명나게 망치질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지금 서두른다고 그 늑대들을 쫓아갈 수 있겠나?"

"어.... 힘들 겁니다. 인간들처럼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 있어도 못 쫓아가.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알고도 모른 척했다고 욕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을 보내긴 보내는데, 혹시 일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 선물을 딸려 보내면 황자의 분노를 사진 않을 거다."

"오.... 역시 군주님이십니다."

젊은 드워프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겔리는 완성된 갑옷 앞판을 집게로 들어 옆에 놓인 물통에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익!

"이 마갑은 아주 특별한 거다. 전에 황자에게 부탁받은 걸 만들다 영감이 떠올랐지."

"부탁받은 거라면.... 이미 납품중인 그 개량 마갑 말씀입니까? 힘이 약한 기사들도 착용 가능한데, 오히려 어지간한 최하급 마갑보다 더 큰 힘을 내게 해주는?"

"그래. 그거. 그런 걸 만들려면 마갑에 핵이 되는 보석이 중요하지."

"물론입니다. 마갑은 언제나 보석이 중요하죠."

"특히 크고 불순물 없고 등급이 높아야 해. 황자가 보내온 보석 중에 정말 끝내주는 보석들이 있더라고. 고작 개량 마갑 따위에 달기엔 아까운 보석들 말이야."

겔리는 옆 테이블에 높인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예전 클로드가 탈리스만 백작의 지하 금고에서 훔쳐낸 보석 주머니였다.

"그래서 그 작은 황자를 위해 특별한 마갑을 만들어 봤지. 우선 매우 튼튼한 데다 가벼워."

"오, 그것만으로도 좋아 보입니다."

"여기에 몸에 부담도 거의 안주는데 힘을 대폭 늘려주지. 무엇보다 화염에 대한 엄청난 내성을 가진 특별한 마갑이야."

그리고는 주머니 안에서 눈알만 한 크기의 커다란 루비를 꺼내 들었다. 젊은 드워프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멋진 보석이군요. 그런데 화염 내성은 왜 필요합니까?"

"소문 못 들었나? 영원의 숲 엘프들이 대거 뽑혀간 거. 그 녀석들 제국 기사들 갑옷에 냉기 속성 부여마법을 건다고 하더라고."

"오, 그렇다면...."

"이계의 괴물들 중에 불을 쓰는 놈이 있다는 소리지. 그럼 아예 화염 내성을 높인 마갑이 쓸모 있지 않겠나?"

"과연, 군주님께서는 정말 현명하신 것 같습니다. 황자가 정말 좋아하겠군요."

"이계와의 전쟁에서 지면 모두 끝장이야. 일식에서 살아남은 엘프들 정신 나간 거 봤지?"

"지옥의 악마들이 튀어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황자.... 인간치고는 몸이 정말 조그맣다던데, 만드신 마갑은 좀 사이즈가 큰 것 아닙니까?"

"그런가?"

겔리는 물속에 담가 둔 마갑 앞판을 꺼내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크군. 뭐 그 황자도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시간이 지나면 몸도 더 커지지 않을까?"

"하긴 올해로 16살인가 17살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인간은 그 나이면 한창 자랄 때라고 하죠."

"덩치가 커진다고 갑옷을 키울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이제 조립만 하면 끝이다. 그때까지 저 녀석들 데리고 잠시 나가 있어."

겔리는 막사 안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호위병을 가리켰다. 그러자 젊은 드워프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르갈이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막사 안에 절대 혼자 계시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요."

"아주 잠시면 돼. 마갑에 보석 결합하는 마지막 작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잖나? 특히 이건 최고의 보석이지. 신경이 분산되면 곤란해."

"그렇지만...."

"밖에다 전령을 대기시켜 놔라. 다 끝나면 부를 테니 잠시만 나가 있어."

게일의 태도는 완강했다. 젊은 드워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뭐 르갈이 돌아간 뒤로 지금까지 별일 없었으니까요. 그럼 최고의 마갑이 완성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호위 둘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겔리는 입구를 가린 두꺼운 천막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양손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우선 마갑 앞판을 뒤집고, 안쪽에 미리 파놓은 아홉 개의 홈에 붓질을 했다.

붓에 발린 것은 보석가루와 접착액이 섞인 반짝이는 액체였다. 이것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특별 배합으로, 어지간한 인간 대장장이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보석 가루의 배합이 특히 중요하지. 피해 없이 힘을 끌어내려면... 그것도 각 보석마다 다르게...."

콧노래와 함께 혼잣말을 흥얼대며 작업을 하던 게일은, 외곽에 있는 여덟 개의 홈에 차례대로 색색의 보석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여덟 개의 보석도 하나 같이 끝내주지만... 흥흐흥.... 역시 이 가운데 들어가는 이 녀석이 최고라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커다란 루비를 중심에 있는 마지막 홈에 집어넣었다.

철컥.

마치 찍어낸 것처럼 정확히 맞는 홈과 보석은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겔리는 마지막으로 얇은 철판에 접착제를 발라 홈을 막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 끝났다!"

그리고는 미리 완성해 놓은 모든 파츠를 조립, 하나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완성해 냈다.

"멋지구만...."

얼마나 멋진지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겔리는 갑옷 주위를 빙빙 돌며 한참 동안 감상을 반복했다.

"이거 너무 엄청난 걸 만들어 버렸는데? 이 정도면 그 오만한 엘프군주한테 자랑해도 되겠어. 물론 이걸 들고 그 녀석의 집까지 찾아가야겠지만.... 앗."

겔리는 뒤늦게 엘프 군주의 죽음을 떠올리고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 녀석은 이미 죽었지. 못된 놈이긴 했지만 대장장이로서는 일류였는데."

"군주님! 아직입니까?"

그때 막사 밖에서 젊은 드워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겔리는 헛기침을 하며 소리쳤다.

"거의 다 됐다!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는 입맛 다시며 조립한 갑옷을 다시 해제하기 시작했다.

"이걸 황자에게 보내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테니.... 그 전에 한 번만 입어봐야겠다."

갑옷의 사이즈는 클로드 황자보다 오히려 지금 자신에게 딱 맞는 수준이었다.

"흐음, 가슴과 배, 그리고 팔뚝이 좀 끼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투구까지 착용하자,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엄청난 힘이 온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맙소사. 힘이 넘치는군. 내가 대체 뭘 만들어 버린 거지?"

어쩌면 이게 최상급 마갑의 힘이 아닐까?

인간들 사이에 극소수만 존재한다는 최강의 기사, 바로 나이트 마스터만 착용할 수 있다는 마갑.

하지만 육체에 극심한 부담과 함께 체력을 순식간에 빼앗아 가는 부작용이 있다. 그래서 그 정도 등급의 마갑은 지금껏 한 번도 만들지 않았는데....

"이건 체력의 소모가 거의 없어. 정말 무시무시하군. 마법사인 황자도 이 갑옷만 있으면 반드시.... 음?"

순간 바람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막사 문은 여전히 그대로 닫혀 있었다.

"뭐지? 방금 분명 소리가...."

"좋은 걸 입고 계시는군요."

순간 정면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일이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촥!

붕대에 감긴 커다란 손바닥이 그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후원자.

붕대를 보자마자 그 생각이 들었다. 게일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옆에 놓아둔 망치를 집어 들고 녀석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네놈!"

푸확!

단 일격에 허리를 감싼 붕대가 찢기며 몸통이 박살났다. 하지만 후원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체를 끌어당겨 게일의 투구를 감싸 안았다.

"엄청난 힘이군요. 제가 받은 정보와는 전혀 다릅니다. 혹시 착용 중인 그 갑옷 때문입니까?

"네놈.... 어찌 허리가 잘리고도...."

다시 망치를 휘두르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쉬익....

후원자의 몸에서 검푸른 기운이 새나와 투구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게일은 한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발작을 일으켰다.

"큭, 크윽...."

"정말 훌륭한 갑옷이지만 완전 밀폐는 아니군요. 물론 살아 있는 존재가 완전 밀폐된 갑옷을 착용하면 호흡을 할 수 없어 죽게 되겠습니다만."

"네, 네놈.... 내가 알던 그놈이 아닌 거냐?"

후원자의 목소리는 마치 책을 읽듯 딱딱했다. 녀석은 그 와중에 겔리의 등 뒤에 맺힌 그림자를 끌어 당겨,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붕대를 꺼내 허공에 풀기 시작했다.

휘릭....

"저는 3호입니다. 위대한 게임, 차원 전쟁의 승리를 위해 봉사하는 세 번째 후원자입니다."

"세 번째...."

"제가 그 역할을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융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갑옷 속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컥, 헛, 으윽, 으억...."

게일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경련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네놈! 내 몸에서, 아, 아악! 아니 내 리에서 나가라! 으아, 으아악!"

"저라고 좋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사이크를 위해, 대의를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할 뿐입니다."

붕대 속의 후원자는 게일의 갑옷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동시에 새로 꺼낸 붕대가 게일의 몸을 자연스럽게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군주님?"

참다못한 젊은 드워프가 문을 열고 막사 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습니다. 아무리 좋은 갑옷이라 해도 그렇지.... 으헉!"

드워프는 순간 기겁하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막사 안에 있는 것은 드워프 군주 게일이 아니었다.

그저 갑옷 위에 붕대를 감은, 괴상한 모습의 변질자가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클로드...."

녀석은 천천히 몸을 돌려 쓰러진 드워프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클로드를 당장.... 녀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크헉! 으아아악!"

"구, 군주님?"

순간 변질자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안 돼! 도망쳐! 모두 도망쳐라! 이 녀석은 우리 모두를 죽일 거야! 당장 도망쳐! 도망쳐서 황자에게 전해라! 큰일이 났다고! 그 망할 후원자 놈이...."

그러다 갑자기 잠잠해지며, 다시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융합이.... 예상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드워프의 잠재력을 너무 얕본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생각보다 높은 정신력.... 비대한 자아와 자신감...."

"으아아아아악! 후원자!"

순간 젊은 드워프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대기시켜 놓은 전령에게 달리며 소리쳤다.

"달려! 당장 달려! 클로드 황자에게 가서 난리가 났다고 전해!"

"네? 하지만 군주님의 선물을...."

전령은 산양이 끄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젊은 드워프는 잽싸게 그 옆에 올라타며 고삐를 빼앗아 휘둘렀다.

"달려! 달려라!"

"앗! 대체 무슨 일입니까!"

"르갈이 경고했던 그 일이 벌어졌다! 달려! 빨리 달려야 해! 이건 절대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없다! 클로드 황자에게 알려야 해!"

그리고는 달리는 산양 마차 위에서, 한밤중의 드워프 주둔지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소리를 질렀다.

"모두 일어나! 나는 군주님의 부관인 하륨이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도망쳐! 군주님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빌어먹을! 역시 르갈의 경고를 철석같이 지켰어야 했어! 단 한순간도 눈을 떼선 안 됐다고! 모두 주둔지를 버리고 도망쳐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2화

43장 하룻강아지

엘스톤 성에 돌아오자, 테이블 위에 메르데스가 남긴 편지가 놓여 있었다.

-톨라리 님은 무사히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모두 저택에 복귀해 있겠습니다.

죽음의 땅으로 넘어가기 전에 침대에 남겨 놓은 편지를 발견한 모양이다. 다행이네. 톨라리가 무사히 회복 했나보구만.

-일이 있어서 며칠 나가 있어야 할 것 같아. 톨라리만 회복되면 먼저 저택으로 모두 복귀해.

옆에는 내가 썼던 편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두 편지를 접어 품속에 넣으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으아 죽겠다...."

침대에 눕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거의 사흘 동안 잠 한숨 못 잤구만. 오늘은 여기서 푹 쉬고 저택엔 내일 돌아가야지.

하지만 그전에, 마지막으로 처리 할 문제가 있다.

"...거기 있어?"

눈을 감은 채 묻자, 방구석 쪽에서 사령군 장로인 게르니트의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귀인이시여."

"성역 상황은 어때?"

"데스 울프들의 동요가 무척 큽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요. 파가브는 사나흘 정도 정비를 한 다음 일족을 이끌고 밖으로 나올 거라 합니다."

수백 년간 살아온 고향을 버려야 하니 고민이 클 것이다. 물론 그 녀석들을 받아주기로 나 역시 고민에 빠진 건 마찬가지고.

"모두 몇 마리인지는 확인했어?"

"268마리입니다. 그중 150마리 정도는 성역을 나서도 죽음의 땅에 남기로 했습니다."

"죽음의 땅에 늑대들이 먹을 게 있나?"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죽음의 땅과 엘스톤 백작령을 오가며 음식을 확보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죽음의 땅과 이어진 백작령의 동부는 이미 사령군의 침공으로 쑥밭이 된 상황이다. 아무래도 내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겠구만.

"돌아가면 거기 남는다는 늑대들한테 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백작령의 인간들과 충돌하지 말라고."

"네. 알겠습니다."

"대신 내가 먹을 걸 구해 엘스톤 성 근처에 뿌려 놓을게. 당분간은 그걸로 버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녀석들을 제외하더라도, 며칠 뒤엔 백 마리가 넘는 데스 울프가 루넨브레스 숲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 녀석들 먹일 고깃값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나마 에이션트 울프에 비하면 덩치가 작아서 다행이려나?

그래도 나름 고생 많이 한 녀석들이니.... 숲에 도착하면 일단 넉넉하게 먹여 놔야지. 식비가 얼마나 깨지는지는 그다음에 계산하고.

"그리고 게르니트."

"네. 귀인이시여."

"요 며칠 동안 수고했어. 잠깐이지만 장로들에게 그림자 능력 배운 것도 좋았고."

"황공한 말씀이십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은 귀인께서 다 하셨지,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아무튼 미리 말해둘 게 있는데."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난 제국의 황자야. 그리고 대신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그러니 너희와 함께한 게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지? 이쯤에서 각자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귀인이시여."

게르니트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그러나 곧 세계의 종말이 찾아올 것입니다. 모든 게 소멸할지 모르는 마지막 전쟁 말이죠. 그때가 되면 저희도 미약하나마 잔당을 모아 참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히 왔다가 골치 아파질지도 몰라. 나랑 관계를 의심받을지도 모르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임의대로입니다. 귀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병력은 좀 있고?"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갈무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언데드 대군을 몰고 오면 곤란해. 엘스톤 백작이 눈이 뒤집혀서 막으려고 할 테니까."

"그것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할 테니 그날이 언제인지만 알려주십시오."

그날이라.

나는 남은 시간을 계산해서 적당히 알려줌. 장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동안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8개월이라. 꽤나 빠듯하겠군요."

"뭐가 빠듯해? 병력 모으는 데?"

"그것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게르니트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말을 숨겼다. 나는 오래 전 3회 차를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사령군 입장에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 아냐? 우리가 이계의 침략을 막지 못해 전멸하든 말든."

"죽음을 영속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게르니트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산자들의 죽음이 이어지지 않으면 죽은 자들의 세계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계가 멸망하면 결국 언젠가 언데드도 멸망하겠죠."

그래. 그렇겠지.

3회 차 때 사령군 루트를 탔을 때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세계의 멸망 앞에서는 산자와 죽은 자가 힘을 합치는 아이러니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훗날 다시 뵙겠습니다. 그날까지 퀸시의 가호가 가득하시기를."

게르니트는 인사를 건네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숨과 함께 다시 침대로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아 버렸다.

* * *

다음날 늦은 오후, 금독수리의 등에 올라타 저택으로 복귀하는 도중에 이상한 게 보였다.

멀리 숲 한가운데 루넨브레스 저택이 보이고, 그 옆으로 기사단 본부가 보인다.

그리고 기사단 본부 앞으로 넓은 훈련장이 펼쳐져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데....

"...르갈?"

훈련장 주변으로 르갈이 보인다.

물론 먼저 돌려보냈으니 저곳에 있는 게 이상하진 않다. 문제는 르갈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

"내 눈이 이상한가? 훈련장 주변으로 르갈이 많이 보이는데?"

"나도 보인다네. 실은 한참 전부터 보이고 있었지."

테우스가 대답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점점 가까워지는 훈련장을 주시했다.

"근데 왜 말 안 했어?"

"처음엔 나도 무슨 일인가 싶었네. 물론 지금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겠군."

르갈이 분신술을 익혔을 리도 없으니, 저것들은 모두 또 다른 에이션트 울프다.

영원의 숲에 있어야 할 놈들이 이곳까지 와 있다는 건 이미 진상을 파악했다는 뜻이다. 나는 비행 마법을 발동하며 곧장 테우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근처에서 대기해 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부디 온건하게 해결하게나! 저들 모두가 같은 고대종이니...."

테우스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나는 속도를 높여 급강하하며 단숨에 훈련장 중심에 착지했다.

푸확!

바람 마법으로 강한 브레이크를 건 바람에 사방으로 폭풍이 휘날렸다. 그러자 르갈을 중심으로 둥글게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황자님!"

"다들 안녕?"

전혀 안녕하지 못한 목소리로 대꾸한 다음,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는 르갈의 목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놈들이 네 냄새를 맡고 몰려온 거야?"

"...그런 모양이다."

르갈은 명백히 위축된 모습으로 대답했다.

"죽음의 땅에 다녀온 뒤로 내 코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 녀석들이 여기까지 오는데도 감지하지 못했다."

여기서 저 녀석들이란, 르갈의 일족인 에이션트 울프를 말한다.

새하얀 털을 가진 대형 늑대들.

녀석들이 온 사방에서 훈련장을 포위한 채 흉흉한 기세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그나저나 탈취의 영약은 완벽했을 텐데 어떻게 알아낸 거지? 역시 최근에 영원의 숲 근처로 심부름 보냈던 게 실착인가?

"황자님, 돌아오시자마자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러자 기사단 대표로 다비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짧게 물었다.

"대치한 지 얼마나 지났어?"

"한 시간 정도 됐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만, 역시 르갈과 같은 종족이라 당장 칼을 쓰는 건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잘했어."

나는 다비의 등을 두드리며 호위망 밖으로 나섰다.

크르....

그러자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일제히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 가장 덩치가 큰 늑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네가 족장이야?"

"...."

녀석은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덩치가 조금 작은, 하지만 거의 르갈에 필적하는 간부급 늑대 네 마리가 녀석을 호위하며 함께 나왔다.

"비켜라, 조그만 인간."

"이분은 우리 에이션트 울프의 족장이신 다미갈이시다."

"인간에겐 볼일 없다. 당장 배신자를 내놓아라."

"저 뒤에 있는 건 일족의 배신자인 르갈이다."

"인간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방해하지 마라."

족장을 제외한 네 마리의 늑대들이 서로 번갈아 으르렁대며 위협을 시작했다.

그래. 물론 나도 니들 사정이 뭔진 잘 알고 있지.

저 족장 늑대와 르갈은 쌍둥이다.

원래대로라면 둘이 결투를 벌이고, 산 녀석이 차기 족장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르갈은 형제와 목숨 건 사투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숲을 떠나 엠퍼로드의 지하 하수도에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인데....

이 자식들 하는 짓이 열 받잖아?

니들 규정이 그렇게 중요하냐? 이제 8개월만 지나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는데, 그 와중에 이렇게 떼로 몰려와서 배신자 내놓으라고 협박을 한다고?

"...하나 물어볼게. 너희들 일식 게이트 열리고 이계의 괴물들 쳐들어 왔던 거 몰라? 앞으로 몇 달 뒤엔 더 많은 적들이 몰려오고?"

마지막으로 예의상 질문해 봤다. 족장 늑대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대신 간부 늑대 하나가 좀 더 앞으로 나서며 대꾸했다.

"알고 있다. 가끔 접촉하는 엘프들이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지랄이야?"

"뭐라고?"

"지금 우리 세계가 아작 나게 생겼는데, 이렇게 떼로 몰려와서 깡패 짓이나 하고 있냐고."

"...물러나라."

녀석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안 그러면 그 연약한 몸뚱이를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죽기 싫으면 비켜라. 뒤에 있는 인간들 모두 다."

순간 머릿속이 찡하고 울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주둥이 앞으로 팔 하나를 내밀었다.

"어디 한번 물어 봐."

그리고는 곧바로 정령 빙의를 발동했다.

'바위 정령 룩카르, 지금 당장 나한테 빙의 해.'

-알겠다.

한순간 온몸이 전율했다.

마치 거대한 바위들이 온 사방에서 내 몸을 짓누르는 느낌.

동시에 격통이 쏟아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늑대새끼들이 날 얼마나 빡돌게 했는지, 이정도 아픈 건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이 하찮은 꼬맹이가!"

순간 녀석이 앞으로 내민 내 팔을 물어버렸다.

파직!

하지만 뜯어내진 못했다.

어느새 내 몸을 덮은 투명한 형상이 녀석의 이빨을 막아주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틀며 부들거리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뭐 해? 날 물어뜯겠다며?"

"크극...."

"큰소리 빵빵 쳐 놓고, 고작 이 쬐끄만 꼬맹이 팔 하나도 못 뜯어내는 거야? 응?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그그그극!"

얼마나 힘을 주는지 녀석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팔을 덮은 투명 바위갑옷에도 금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빠득....

-계약자여, 이 대로면 방벽이 뚫린다. 주의하라.

룩카르의 경고가 뇌리를 울렸다. 하긴 에이션트 울프도 한 끝발 하는 녀석들이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 지금 바로 내게 빙의해.'

-룩카르가 이미 빙의되어 있다. 덮어씌우란 뜻인가?

'응. 상관없지?'

-상관없다. 클로드여.

그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마치 온몸이 작은 모래조각으로 갈라져 흩어지는 기분.

비록 한순간이지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듯했다.

대신 작은 바위가 그곳에 있었고, 단단한 나무가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넓은 대지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경이로운 감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그니스와 빙의했을 때처럼 완전히 새로운 체험은 아니었다.

난 대지가 되지 않았다.

대신 대지의 가호가 내 몸에 깃들어 있음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팔을 덮고 있던 룩카르의 방벽이 깨졌다.

콰직!

동시에 늑대의 이빨이 내 살을 파고들며 박살났다.

내 살이 아니라, 늑대의 이빨이.

뿌득!

"커흥!"

녀석을 발작하듯 온몸을 뒤틀며 뒷걸음쳤다.

"뭐냐 이건! 돌덩이! 아니 모래? 흙? 내가 대체 뭘 씹은 거야!"

나는 팔에 박히지도 못한 이빨 조각을 털어내며 웃었다. 넌 지금 대지의 정령왕을 씹은 거야. 영광으로 알아라.

"뭐 해? 빨리 이 연약한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않고? 아직 성한 이빨 많이 남았잖아?"

양 팔을 펼친 채 녀석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왼쪽에 있던 간부 늑대가 벼락같이 뛰어들어 내 상반신을 한입에 물었다.

콰득!

한순간 세상이 캄캄해지고 연약한 이빨들이 바스러졌다.

"캐갱!"

녀석은 박살난 이빨을 사방에 뿌리며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이놈들 멍청한 거 보니 학습능력이 전혀 없구만. 내가 일부러 나서서 도발하긴 했지만.

"다음? 아직 많이 남았잖아? 스무 마리? 서른 마리? 여기 온 늑대들 몽땅 한 번씩 씹어봐야 하지 않겠어? 이 건방진 인간을 가만 내버려 둘 거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3화

43장 하룻강아지

그러자 훈련장을 포위하고 있던 모든 늑대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 와중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간부 늑대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크르...."

"크르르...."

"안 올 거야?"

알았어. 그럼 내가 가지 뭐.

한달음에 지면을 박차며 돌진, 왼쪽에 있는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빠각!

늑대의 거대한 얼굴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일그러지며 돌아간다.

박살난 왼쪽 이빨들이 오른쪽 이빨 라인을 뚫고 반대편으로 날아간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던 몸 성한 늑대가 내 쪽으로 몸을 날리며 앞발을 휘둘렀다.

온몸의 탄력을 그대로 살린 역동적인 후려치기. 게다가 내 손가락보다 긴 날카로운 발톱들이 잔뜩 성을 내고 있다.

물론 피하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 몸을 이빨로 맛볼 게 아니라면, 최소한 손톱으로라도 맛보게 해줘야지.

그 날카로운 흉기가 내 얼굴에 닿는 순간.

빠찍!

손톱이 반대방향으로 꺾이며 단숨에 부러져 날아갔다.

"캥!"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치켜든 앞발에서 피가 솟구친다. 나는 그대로 녀석의 품으로 파고든 다음, 새하얀 가슴팍을 향해 움켜쥔 주먹을 올려쳤다.

푸확!

그러자 녀석의 몸이 초승달처럼 뒤로 꺾였다.

그대로 몸 전체가 붕 뜨며 수십 미터를 뒤로 날아가 숲에 처박혔다.

뭔가 대단한 기술을 쓴 것도 아닌데.

그냥 어퍼컷 한 방 날렸을 뿐이다. 그런데 르갈만 한 덩치의 늑대가 마치 나뭇잎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이게 대지의 정령왕의 힘인가?

이그니스와 빙의했을 때처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생전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이 깃들었다는 건 확실했다.

물론 테라직을 직접 소환, 녀석이 사용하는 대지의 분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도 당장의 내 분노를 표출하기엔 충분하다. 나는 처음 날 물었던 간부 늑대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도 이리 와. 마저 끝내야지."

"크르...."

녀석은 부러진 이빨을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실제로 뛰어들진 못했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큰 늑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 넌 어때? 에이션트 울프의 족장님?"

이 녀석 어찌나 덩치가 큰지, 만세를 불러도 치켜든 턱에 손이 닿지 않는다.

"...."

녀석은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깔아 내린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얘 좀 봐라?

건방진 녀석. 너도 일단 좀 맞고 시작해야겠다. 나는 살짝 뛰어올라 녀석의 콧잔등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빠악!

동시에 거대한 머리통이 밑으로 내리꽂히며 지면에 처박혔다. 가볍게 착지한 나는 바닥에 깔린 녀석의 주둥이를 향해 공을 차듯 발을 날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안 된다!"

순간 또 다른 하얀 늑대가 나와 족장늑대 사이로 끼어들었다.

"르갈!"

그 거대한 몸을 좁은 틈으로 비집어 넣는 게 애처로울 정도였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멈추며 급히 한발 물러났다.

"안 된다 클로드. 다미갈을 죽이면 절대 안 된다."

르갈은 쓰러진 족장을 감싸며 애처로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에이션트 울프의 족장이다. 그리고 내 형제다. 부디 죽이지 말아다오."

"르갈...."

그러자 눈이 풀려있던 족장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하... 항복한다.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뭐? 항복?

"웃기시네. 방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날 깔아본 주제에 이제 와서 항복이야?"

"그것은.... 너무 놀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응?"

"나는 겁이 많아... 너의 움직임에 기가 죽어 버렸다. 도망치려 했지만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

그러니까.... 방금까지 고개 빳빳이 치켜들고 꼼짝도 안 하던 게 무서워서 몸이 얼어붙은 거였다고?

"클로드, 다미갈은 이런 녀석이다. 내가 영원의 숲을 떠난 것도 이토록 여린 녀석을 차마 내 입으로 물어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디 용서해다오. 무례는 내가 사과하겠다."

르갈이 고개를 숙이며 대신 사과했다. 나는 한창 끓던 기분이 팍 식는 걸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덩치는 산만해 가지고.... 넌 진짜 르갈한테 감사해라."

"미안.... 미안하다. 내가 강단이 없어 휘둘릴 뿐이라...."

다미갈은 부끄러운 듯 양 앞발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지면에 파묻었다. 나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며 사방으로 흩어진 네 마리의 부관 늑대들을 돌아봤다.

"야, 너희들."

숲으로 날아간 녀석을 제외하면 모두가 시선을 마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나는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

"지금 당장 여기 모여서 배 깔고 엎드려. 안 그러면 내가 오늘 여기 있는 에이션트 울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때려죽인다."

녀석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는 손가락 다섯 개를 들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5초 준다. 너희 목숨 앞으로 5초 남았어. 하나...."

둘을 셀 필요도 없었다. 세 마리 모두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달려와 온몸을 바닥에 깔며 납작 엎드렸다.

* * *

어퍼컷을 맞고 숲으로 날아간 녀석도 금방 정신을 차리곤 맨 뒤로 달려와 배를 깔았다.

십중팔구는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놈들 생각보다 몸이 엄청 튼튼하구만.

"트리멈, 오스트, 자말. 여기 다친 늑대들 치료 좀 해줘."

"네. 황자님."

뒤에서 대기 중인 신관들에게 회복마법을 부탁한 다음, 나는 센스 좋게 카일이 가져온 의자에 걸터앉으며 늑대들을 비난했다.

"아무튼 네놈들 생각하는 게 글러먹었어. 내가 지금 르갈 노리고 여기까지 왔다고 이러는 게 아니야. 지금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라고. 엘프들한테 들었다니 알거 아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네놈들 생각만 하고 무력 행동에 나설 수 있냐?"

"...내가 선동했다."

그러자 간부 늑대 하나가 고개만 살짝 들며 말했다.

"난 에이션트 울프의 수석 장로인 가우스라 한다."

"당신도 수석이군요. 저도 호위 신관들 중 수석 신관을 맡고 있는 트리멈이라 합니다."

마침 녀석을 치료하던 트리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트리멈을 옆으로 물렀다.

"괘씸한 놈이니까 친한 척 해주지도 마. 근데 장로? 에이션트 울프도 장로가 있어?"

"족장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산 넷이 장로가 된다."

옆에 있던 르갈이 귀띔해 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칭 수석장로인 가우스에게 물었다.

"그래 가우스. 족장은 싫다는데 네가 선동해서 여기까지 르갈 잡으러 온 거야?"

"그렇다. 족장은 심지가 약하다. 나는 이 모든 게 배신자와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족장이 되었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르갈을 잡아 죽이면 저 녀석 심지가 굳건해질 거라고?"

그 와중에도 족장 다미갈은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는 짓이 무슨 겁 많은 대형견을 보는 것 같구만. 발언도 모두 장로한테 맡겨 놓고.

"...적어도 책임감이 생길 거라 생각했다."

"책임감?"

"앞으로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이 시작된다. 그때 일족을 이끌고 전투를 치르려면, 지금의 저 정신상태로는 곤란하다. 족장은 일족을 배신한 배신자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새롭게 태어나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었다."

"그 배신자가 내 친구인 건 알고 있었고?"

"몰랐다."

가우스는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엘프들에게 클로드라는 이름을 듣긴 했다. 그 인간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장차 이계의 괴물들을 막아낼 때 큰 역할을 할 것이란 이야기도 들었고. 다만 그 인간과 배신자가...."

"르갈."

"음?"

"이름으로 불러. 확 조져버리기 전에."

손바닥을 치켜들자 녀석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르갈이 그 인간과 친구라는 사실은 몰랐다."

"이젠 알았지?"

나는 고개를 돌려 온 사방에 엎드려 있는 수십 마리의 늑대들을 살폈다.

"내가 맘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너희 전부 멸종시킬 수 있어. 그러니 앞으로 다시는 까불지 마."

"아, 알겠다."

"내가 진짜 르갈 체면 봐서 살려준 거야. 너희 모두 고맙다고 절해야 해."

"배신자에게 절을...."

"뭐라고?"

"아니다. 아무것도. 부탁이니 손바닥 위에 그 동그란 마법을 치워다오. 뭔진 몰라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졸아든다. 제발."

녀석은 내가 만들기 시작한 템페스트를 보며 애걸하기 시작했다. 녀석, 건방진 주제에 마법을 보는 눈은 있구만.

"알았으면 신경 거스르지 마. 너희 모두 르갈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니까."

순간 르갈이 앞발을 치켜들고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가우스는 템페스트가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다. 그런데 역시 내가 들은 이야기가 맞는 것 같은데."

"뭐?"

"엘프들은 네가 마법사라 했다. 말도 안 되는 마법을 마구 쏟아낸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방금은 맨주먹으로 우리 에이션트 울프를 제압한 것인가?"

"그건 대지의 정령왕과 빙의해서 그래."

"대지의 정령왕!"

그러자 온 사방의 늑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우스 역시 경악한 얼굴로 내 몸을 살피며 물었다.

"정말이냐?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님과 계약했다고?"

얼씨구. 이름도 알고 있어? 어떻게?

"맞아. 근데 넌 어디서 테라직이란 이름을 들었는데?"

"우린 엘프들 몰래 엘프의 수호정령과 접촉해 대화를 나누곤 한다."

"드라이어드? 그 녀석도 나랑 계약했는데."

"그, 그렇지. 그 이야기도 엘프에게 들었다."

녀석은 주변의 다른 장로 늑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무튼 드라이어드와 대화할 때 대지의 정령왕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테라직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알게 되었다."

드라이어드가 알려줬구나. 그럼 뭐 그럴 수 있지.

"인간의 몸으로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하다니... 대단하다. 게다가 빙의라니, 육체가 버틸 수 있는 것인가? 보통은 극심한 고통과 탈진으로 기절하거나 죽는다고 하던데."

그러게. 이번엔 나도 좀 신기하네.

먼저 빙의한 룩카르를 해제할 때도 몸에 충격이 거의 없었고, 나중에 테라직과의 빙의를 해제할 때도 놀랄 만큼 아무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빙의를 오래 안하고 금방 해체한 것도 크겠지만.

그래도 드라이어드를 소환해 라이프 링크 연결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그러니 클로드여, 네가 나를 받아들이면, 너 또한 네게 가해지는 많은 피해를 대지에 흘려보낼 수 있게 된다.

아 맞아.

테라직이 전에 그렇게 말했었지? 빙의한 채로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 그게 어떤 피해든 절반 이상을 땅이 흡수해 준다고.

그러니 정령 빙의에서 오는 후유증 역시 땅이 흡수해 준 셈이다.

아니 잠깐.

따지고 보면 이거 진짜 엄청난 거 아닌가?

여러 정령과 동시에 빙의하더라도, 결국 테라직을 마지막에 해제하기만 하면 어지간하면 버틸 수 있다는 소리잖아?

"오.... 이거 완전 개꿀...."

"으음?"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지금 부터는 저 숫기 없는 족장님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입 꽉 다물고 눈치만 살피는 다미갈을 보며 물었다.

"여보세요. 다미갈 씨?"

"으, 으음."

"네가 아무리 심약해도, 일단 족장이긴 하지?"

"그, 그렇다."

"지금부터 잘 들어."

나는 녀석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줏대 없이 장로들에게 끌려와서 이 사달을 벌인 것까지는 용서해 줄게. 대신 앞으로 누가 뭐래도 르갈 해코지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열 받으면 확 껍질 벗겨서 모피코트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아, 알겠다. 절대 안 하겠다. 잘못했다."

"잘못한 거 알면 코어 내놔."

"코어?"

여기서 부터가 본론이다. 뒤에 있는 기사단원들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구만.

"너도 르갈과 동갑일 테니 속에 코어 쌓아 두고 있을 거 아냐? 다섯 개 쌓여 있지? 그거 전부 토해내."

"아니, 잠깐. 잠시 기다려라."

다미갈은 장로들의 눈치를 살피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어는.... 코어는 지금 하나뿐이다."

"하나? 왜?"

"8년... 아니, 9년쯤 전의 일이다. 한밤중에 에이션트 터틀의 사절이 영원의 숲을 찾아왔었다."

에이션트 터틀?

갑자기 그 고대 거북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데?

"그리고는 자신들의 족장이 보내온 코어를 내밀며 교환을 요청했다. 에이션트 터틀 코어 네 개와 에이션트 울프 코어 네 개를 교환해 달라고 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4화

43장 하룻강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