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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8화

38장 사령전쟁

-죽음의 땅이라.

테라직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곳에 딱 맞는 이름이다. 수백 년 끝도 없는 생명들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지. 이미 나의 영향력보다 죽음의 영향력이 더 강해진 땅이다.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사이크 차원이 죽음의 땅에 지진을 일으켰다고?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돌려 말하자면, 왜 내가 그것 때문에 더 강해져야 하는데?

-그곳에는 어둠과 죽음의 신, 퀸시의 성역이 존재한다.

"그런데?"

-죽음의 땅은 퀸시의 권능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지진으로 인해 그곳의 무언가가 어긋나버렸다.

"어긋났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데?"

-제어에서 풀려난 죽음이 흘러넘치고 있다. 나는 대지의 틈에서 그것을 감지했다. 수십만의 죽음이 산자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수십만?"

아이고, 머리야.

갑자기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구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잠시 고민하다 되물었다.

"결국 사령군이 다시 준동해서 엘스톤 백작령으로 넘어 오고 있다는 소리잖아? 그것도 수십만 마리가?"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 하나 클로드여,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아마 맞을 것이다.

그야 당연히 맞겠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온다.

이제 와서 사령군이라니!

분명 회귀 초반에 사령군주는 물론이고 본거지인 네크로폴리스까지 전부 박살을 내놨는데....

"...테우스?"

"그래 클로드. 자네 목소리를 들으니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군"

"생겨도 크게 생겼어. 목적지를 바꿔야 할 것 같아."

"저택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말인가?"

"거기서 더 동쪽으로. 엘스톤 백작령이 위험해."

만약 백작령이 무너지면 제국 수도인 엠퍼로드까지 평지로 뻥 뚫려있다.

아니지, 중간에 작은 숲이 하나 가로막고 있는데 그게 바로 루넨브레스 숲이다.

바로 우리 집.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양 손으로 꾹꾹 누르며 테우스에게 명령했다.

"최대한 빨리 날아 줘. 마력 공급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테니."

"맡겨두게."

테우스는 짧게 대답하며 속도를 높였다. 나는 내 손으로 제거한 사령군주, 크록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십만의 사령군이라니.

그런 게 가능한가?

사령군주의 명령이나 영향력 없이 그렇게 많은 사령군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이야?

애초에 수십만의 언데드 병사는 또 어디서 튀어나왔고? 죽음의 땅은 무슨 시체를 생산하는 농장이라도 되나?

* * *

"...여기다."

집채만 한 덩치의 하얀 늑대가 언덕 위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여기가 가장 많은 시체가 몰려오는 곳이다. 창을 얼마나 멀리 던질 수 있다고 했지?"

"300미터 쯤.... 저 아래 보이는 바위더미까지는 던질 수 있습니다."

대답한 것은 두꺼운 중급 마갑을 착용한 리넨이었다.

"후우...."

리넨은 심호흡을 하며 르갈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자 뒤에 타있던 바리스가 창 한 자루를 던져주며 소리쳤다.

"힘내십시오. 리넨 님. 당신의 힘으로 다섯 신의 섭리에 거역하는 죽음의 군대를 섬멸하는 겁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창을 받은 리넨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르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멀리서 몰려오는 사령군을 주시했다.

"긴장할거 없다. 넌 안전해. 처리 못한 시체들이 접근하면 바로 내 등에 올라타라. 안전한 곳으로 빠져서 다시 창을 던지게 해줄 테니."

"전에 저놈들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어서.... 그때는 황자님께서 턴 언데드 한방에 사령군을 전부 소탕하셨는데 말이죠."

이제 와서 없는 사람 아쉬워해 봤자 소용없었다. 바리스는 리넨의 몸에 근력을 높이는 신성마법, 스트렝스를 걸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리넨 님이 잘 해주시면 됩니다."

"그, 그래야겠죠?"

"그렇다고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전하신 다른 분들도 모두 강력한 분들 뿐이니, 걱정 말고 역할에 충실하면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다들 잘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르갈이 낮게 으르렁대며 경고했다.

"클로드가 말해준 그때와는 적의 규모가 다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도 넘겠군."

"그, 그 정도 입니까?"

"후각이 마비될 지경이다. 악취가 끝도 없이 몰려온다. 내가 한때 이 시체 속에 숨어 냄새를 감추려 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르갈이 캥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멀리 능선 아래서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으아...."

놀란 리넨이 손에 쥔 창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사령군.

해골과 좀비로 이뤄진 죽은 자의 군대. 바리스 역시 놀란 얼굴로 가슴에 다섯 신의 성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지와 생명의 신인 우렌이시여...."

"세상에, 저렇게 많은 병력은 처음 봅니다. 톨라리 님이 한번 쓸어버리셨을 텐데도 저렇게나 많이 남은 겁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뒤쪽으로 더 많은 시체가 몰려오고 있다."

"힉...."

"정신 차려."

르갈은 고개를 돌려 리넨의 어깨를 살짝 물었다.

"으악!"

"집중해라. 내가 신호하면 창을 던져."

"네, 넷!"

자세를 바로 잡은 리넨이 창날에 빛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한편 눈을 떼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던 르갈은, 사령군의 선두가 중간의 바위더미를 넘어선 순간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다. 아까 말한 바위더미로 던져."

"투창!"

리넨은 역동적인 자세로 창을 집어 던졌다.

슈욱!

창날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동안, 신관 바리스가 또다시 새 창을 던져주며 소리쳤다.

"리넨 님! 다음 창입니다!"

"감사합니다!"

리넨은 창을 받자마자 다시 홀리 랜스로 만들었다. 동시에 르갈이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말했다.

"다시 던져라. 내가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왼쪽으로 30도 정도.... 투창!"

그렇게 새로운 창을 던진 순간, 먼저 던진 창이 목표 지점의 상공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눈부신 빛의 폭발.

산산 조각으로 흩어지는 빛의 파편이 수백의 언데드 군세를 뒤덮었다.

파편에 휘말린 해골병사들이 춤을 추듯 관절을 마구 꺾어대다 한순간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아직 살점이 남은 좀비들은 좀 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파편에 맞자마자 온몸으로 누런 액체를 쏟아내더니, 이내 미라처럼 말라붙어 쓰러지며 온몸으로 하얀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하나 더. 이번엔 반대편으로."

르갈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반대로 꺾었다. 리넨은 이미 준비된 세 번째 홀리 랜스를 새로운 방향으로 투척했다.

번쩍!

그때 두 번째 홀리랜스가 폭발을 일으켰고, 잠시 뒤엔 세 번째 홀리 랜스도 폭발을 일으켰다.

강렬한 섬광이 순차적으로 전장을 뒤덮은 직후, 킁 하고 냄새를 맡은 르갈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량의 냄새가 사라졌다. 분명 500마리도 넘게 소멸했겠지."

"성공입니다 리넨 님! 역시 홀리랜스는 사령군에게 특효약이었습니다! 저 텅 빈 전장을 보십시오! 우와!"

바리스도 손짓발짓에 함성까지 지르며 환호했다. 리넨 역시 깔끔하게 쓸려나간 적진에 안도할 수 있었다.

"휴.... 이게 다 르갈 님 덕분입니다."

"겸손 떨지 마라.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르갈 님이 절 태우고 최적의 투창 장소를 찾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거리까지 재서 투창 시점까지 알려 주셨고. 게다가 저는 이 무거운 마갑을 입고 있는데...."

리넨이 착용한 건 기동성을 포기한 채 내구력만 높인 초중량 마갑이었다. 르갈은 그제야 아부가 거슬리지 않는 듯,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새 녀석처럼 하늘을 날지 못한다. 그러니 이 정도라도 해야지."

"리넨 님도 정말 굉장하십니다. 저토록 먼 거리에 창을 던지다니."

이번엔 바리스가 리넨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리넨 님이 얼마나 뼈를 깎는 훈련을 하셨습니까?"

"헤헤...."

리넨은 뒷머리를 긁으며 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것도 다 황자님께서 내려 주신 코어 덕분이죠. 그리고 신관님이 걸어주신 신성마법 때문이고."

"겸손이십니다. 그나저나 발목을 잡게 되어 죄송하군요. 제 역량으로는 저렇게 멀리까지 빠르게 빛의 방패를 보낼 수 없습니다."

홀리 랜스에 실드 오브 라이트 조합이면 지금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더 많은 빛의 파편을 뿌릴 수 있다. 리넨은 신관을 향해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적의 숫자를 줄여야 해서 이러는 것뿐이죠. 결국은 저희들이 힘을 합칠 순간이 오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때가 오면 저도 전력을 다해 리넨 님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 함께 연습 많이 했잖아요? 분명 힘을 합치면 더 좋은 성과를...."

"잠깐."

순간 르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이상하다."

"네? 무슨 일입니까?"

그때였다.

멀리 새롭게 몰려오는 적진을 뚫고, 무언가 거대한 것이 앞장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것은...."

"여자 마법사가 말했던 살덩이 괴물이군."

일반 언데드와는 급이 다른 존재로, 각종 시체를 짜 맞춰 만든 오우거만 한 덩치의 괴물.

톨라리가 사전 정찰을 통해 적의 규모와 구성에 대해 전해줬다. 르갈은 다시 올라 타라는 듯 몸을 낮추며 말했다.

"꼴을 보니 템페스트를 버티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정말입니까? 그 어마 무시한 톨라리 님의 마법을...."

"온몸이 난도질당했는데 잘도 달리는 군. 고작 한 녀석에 창을 던지면 아까우니 위치를 이동하자."

"네!"

"아니, 잠깐."

르갈은 순간 내렸던 몸을 쑥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녀석의 뒤로 엄청난 시체더미가 몰려온다. 여기가 최적의 장소다. 그러니 저 살덩이 괴물은 내가 상대하겠다."

그사이 살덩이 괴물은 빠르게 능선을 오르며 100여 미터 안쪽까지 접근해 있었다.

"덩치가 무지막지한데.... 저렇게 뚱뚱한데도 엄청 민첩하군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깟 걸로 위험하면 마수 칭호 버려야지."

르갈은 코웃음을 치며 아직 등에 탄 바리스에게 말했다.

"그러니 신관, 너도 일단 내려라. 내가 금방 저 시체를 제압하고 다시 돌아올 테니...."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른 편에서 아무 전조도 없이, 그야말로 갑자기 나타난 하얀 갑옷의 기사가 살덩이 괴물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이동경로에 하얀 선이 그어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단장님!"

리넨이 기사의 정체를 파악하고 소리를 지른 순간.

촤악!

다비는 한순간에 괴물의 목을 베어 날린 다음, 그대로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살덩이 괴물은 제가 맡겠습니다! 르갈 님은 계획대로 리넨과 신관님을 태우고 다니면서 최적의 요격 장소를 찾아 주십시오!"

"컹! 조심해!"

르갈의 경고와 함께, 목이 날아간 살덩이 괴물이 다비의 뒤통수를 향해 손에 쥔 도끼를 내리 찍었다.

슉!

물론 헛방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다비는, 이내 몸을 회전하며 녀석의 오른팔을 어깨부터 잘라 날려 버렸다.

촥!

내부에 단단한 뼈가 복잡하게 짜 맞춰 있건만, 나이트 마스터의 검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도 여간 내기가 아니었다.

머리가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비의 몸통을 향해 하나 남은 팔을 정확히 휘둘렀다.

촥!

다비는 그것마저 베어 날린 다음, 역동작으로 몸을 날리며 녀석의 가슴팍에 연속으로 찌르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심장이라도 터뜨려야 멈추려나?'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머리와 양팔을 잃은 흉물스런 녀석은, 이제는 온몸을 날리며 다비를 덮치려 했다.

"쳇."

쾅!

다비가 뒤로 몸을 뺀 사이, 녀석이 맨땅으로 엎어지며 엄청난 무게로 주변을 뒤흔들었다.

'이놈을 칼로 죽이는 건 체력 소모가 크겠군.'

남은 수단은 몸 전체를 완전히 박살내는 것뿐. 각오한 다비가 녀석을 향해 폭풍검을 시전하려는 순간.

쉬익!

오른편에서 화살 모양의 바람 마법이 날아들었다.

화살의 목표는 살덩이 괴물의 몸통이 아니었다. 이미 잘려 바닥을 뒹굴고 있는 괴물의 이마 정중앙을 정확히 꿰뚫었다.

퓩!

그러자 전혀 상관없는 괴물의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뭐지?"

고개 돌린 곳엔 귀가 긴 엘프 소년이 바람의 마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라니르!"

다비는 라니르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방금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한 방에 보낸 것이냐?"

"엘프는 희미하게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흐름?"

"네. 마력의 흐름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라니르는 살덩이 괴물의 잔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아직 어려서 정말 강한 흐름만 어렴풋이 보입니다. 저 거대한 놈에게도 그런 흐름이 있었구요."

"그래서?"

"모든 흐름이 이마의 안쪽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몸에서 잘려 나갔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곳을 노렸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다비는 고개를 돌려 살덩이 괴물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이렇게 멀리서 그 한 점을 정확히 노렸다고?"

"진짜 화살이면 힘들었겠지만, 이건 마법이니까요."

라니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새로 바람의 화살을 만들어 보였다. 다비는 문득 톨라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 엘프. 일단 마력이 엄청난 건 아님. 근데 컨트롤 대박이야.

"과연... 그분이 일부러 자랑하러 올 만했군."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9화

38장 사령전쟁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라니르, 네가 정말 큰일을 해줬다."

다비가 미소를 지으며 엘프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덕분에 살덩이 괴물의 약점을 알게 됐다. 앞으로는 훨씬 수월하게 상대 할 수 있겠군."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제가 아무리 발악해도 톨라리 님이나 리넨 님처럼 대규모의 적을 제거할 수는 없으니까요."

번쩍!

그때 섬광이 폭발하며 또다시 전장에 빛의 파편이 흩뿌려졌다.

"잘했다. 적들이 몰리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잠시 쉬어라."

"네. 르갈 님"

리넨은 르갈의 지시에 따라 양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광역으로 삭제된 홀리랜스의 영역을 뚫고, 새롭게 두 마리의 살덩이 괴물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단장님! 적진에!"

"내게 맡겨라!"

리넨이 소리치기 전부터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다비는 좀 더 앞에서 달려오는 괴물에게 뛰어든 다음, 이번에는 세로로 녀석의 머리를 쪼개 버렸다.

콰직!

'이렇게 하면 안에 있는 약점도 함께 잘리겠지?'

예측은 정확했다.

쿠극....

쪼개진 입으로 괴상한 신음을 내던 녀석은, 이내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약점을 파악한 이상 나머지 한 녀석도 순식간이었다. 다비는 또 다른 살덩이괴물을 제압하고는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깨달았다.

'빨리 이 정보를 다른 쪽에도 전달해야 해!'

막아야 할 영역이 너무 넓어 방어군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비는 급하게 라니르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당장 디디에게 가서 살덩이 괴물의 약점을 알려. 그리고 디디를 우익으로 보내 그쪽에 정보를 알리게 해."

"우익에 제가 직접 가서 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넌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없는 동안 리넨을 지원하며 살덩이 괴물을 처리 해. 그동안 나는 좌익으로 넘어가 약점을 알리겠다. 그럼 부탁한다!"

그리고는 곧장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라니르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다비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다...."

전투 전까지는 예비 병력으로 분리되어있던 라니르와 디디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급변했다. 라니르는 방금까지 후방에 함께 있던 디디를 찾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 * *

방어군의 좌익을 맡은 것은 엘스톤 백작의 군대였다.

문제는 이들이 백작령 전체의 수비군을 긁어모은 오합지졸이라는 것이었다.

병력은 그럭저럭 3천에 달했지만, 이들 중 최하급이라도 마갑을 착용한 기사는 불과 1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메르데스가 시작부터 좌익으로 넘어가 이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라고 몰려오는 모든 적을 혼자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엘스톤 수비군은 좀비와 해골병사를 막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적어도 이 괴물은 내 선에서 모두 잡아야 해.'

메르데스는 검을 거두며 산산조각으로 분해된 살덩이 괴물의 잔해를 주시했다.

"우와아아아아!"

"메르데스 님 만세!"

"저 끔직한 살덩이 괴물을 산산조각 내셨어!"

사령군의 일파를 막아낸 엘스톤 수비군이 메르데스를 향해 환성을 질렀다.

하지만 적은 계속해서 몰려왔고, 그 중엔 확연히 덩치가 큰 살덩이 괴물도 여럿 끼어 있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이트 스킬로 하나씩 날려 버리는 게 좋겠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몸을 절단하는 수고에 비하면, 차라리 그 편이 체력 소모가 적을 것 같았다.

"후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검을 쥔 팔을 들어 올리며 낚싯대를 뿌리듯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시간차에 의해 발생한 두 개의 충격파가 하나로 포개지며 날아간다.

목표는 앞장서 달려오는 살덩이 괴물.

녀석은 뭔가가 날아오는 것 까지는 감지했다.

하지만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날아오는 충격파가 자신의 머리 위로 넘어가는 궤도였다.

그런데 충격파가 녀석의 머리 위로 넘어가려는 순간.

우웅!

충격파가 급격히 아래로 꺾이며 녀석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콰과과광!

압축된 폭발이 수직으로 몸을 관통, 지면까지 뚫고 들어갔다.

남은 건 팔과 다리, 그리고 툭 튀어나온 뱃살의 일부뿐.

나머지 모든 부위는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흩어졌다. 메르데스는 마지막 순간 커브를 꺾기 위해 무리했던 손목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약간 욱신거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자신이 만든 '집중형' 폭풍검의 위력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뒤쪽에서 다음 전투를 대비하던 병사들 역시 그 압도적인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힉...."

"바, 방금 그건 또 뭐야?"

"나이트 스킬? 저런 말도 안 되는 나이트 스킬이 있었나?"

"몰라몰라. 난 풍압검밖에 못 봤는데."

"헉, 저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마스터 스킬 아니야?"

"모두 집중해라! 곧 적의 2파가 몰려온다!"

엘스톤 수비군의 지휘를 맡은 노인, 나이트 듀론이 검을 치켜들며 어수선한 병사들을 단속했다.

듀론은 원래 수호기사단의 단장.

하지만 당장은 전투 지휘를 카일이 맡고 있는 관계로, 지금은 위치를 옮겨 방어군의 좌익을 지원하고 있었다.

"나이트 메르데스에게 모든 걸 맡길 수는 없다! 적은 사령군이다! 단 한 놈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해 막아라!"

'하지만 적의 2파가 너무 밀집되어 있다. 한 번 정도는 내가 처리 하는 게 좋겠어.'

메르데스는 또다시 검을 들어 올린 다음, 몰려오는 적들이 가장 밀집된 곳을 향해 새로운 폭풍검을 뿌렸다.

이번엔 집중형이 아닌, 원래 방식인 분산형으로.

콰과과과과과과과광!

명중과 동시에 맹렬한 폭발이 터지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그 한방에 100마리에 달하는 사령군이 폭죽처럼 터지며 참혹한 시체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단번에 승기가 넘어온 건 아니었다. 그저 최전방에 가장 밀집된 돌출부 하나가 사라졌을 뿐.

그리고 진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천의 해골과 좀비 떼가 엘스톤 수비군을 덮치며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른다.

"막아! 녀석들의 공격은 단순하다! 막고 반격해!"

듀론 역시 선두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검으로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진열을 지켜라! 항상 자신의 라인을 확인해! 돌출되면 포위된다! 위험해!"

"크아아아악!"

"사, 살려줘!"

"거기! 대열 끝이 무너지고 있다! 분대를 맡은 기사는 뭐 하고 있나! 정신 차려!"

하지만 난전 속에 듀론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닿지 못했다. 그는 문득 자신을 대신해 수호기사단을 맡은 카일의 압도적인 재능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아무리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해도... 그 아이의 목소리는 분명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겠지.'

전열은 이미 붕괴되어 앞뒤 구분 없이 사령군과 뒤엉킨 상태.

후열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무너진 진형을 복구했지만, 그렇다고 엉망이 된 전열을 함부로 지원하기도 곤란했다.

'2파가 진짜였구나. 이번 전투로 3천의 병력 중에 1천은 사라지겠어.'

그나마 이 좌익은 적이 적게 몰려오는 전장을 맡고 있다. 지금쯤 중앙의 본대나 카일이 맡은 우익은 더 크고 끔찍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2파가 끝나도 강대한 적이 계속 몰려온다. 그에 비해 엘스톤 수비군은 허약하고. 저 아가씨가 아무리 잘 싸워줘도 한계는 명백해.'

그 와중에도 메르데스 혼자 적진에 파고들어 초 단위로 빈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촤악!

회전 베기 한 번에 십수 마리의 좀비가 썰리며 공백지대가 생기고.

크어어어!

순식간에 공백을 채우며 몰려오는 적들을 또다시 베어 날리고.

촥!

그렇게 반달 모양으로 생긴 공백지대에 해골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녹슨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촥!

촤악!

촤아악!

아무리 검을 빠르게 놀려도 부족했다.

흠집하나 없던 메르데스의 새 마갑에 좀비의 손톱 자국이 하나둘 늘어났다.

허리가 잘린 해골병사 하나가 악착같이 검을 휘둘러 강철 부츠의 굽을 찌그러뜨리기도 하고, 목이 잘린 좀비 머리가 날아가는 와중에 건틀렛을 물고 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

메르데스는 그 머리통째 주먹을 휘둘러. 달려오는 새로운 좀비와 입맞춤을 시켜주었다.

콰직!

두 머리통이 한 번에 박살나며 공중에 흩어진다. 그 와중에 적진한가운데 허리 위가 쑥 튀어나온 살덩이 괴물을 발견, 즉시 폭풍검을 준비해 시전했다.

콰과과광!

또 한 마리의 괴물이 정수리부터 원통모양으로 수직 붕괴되며 사방으로 폭발한다.

하지만 적들은 그 짧은 틈을 놓이지 않았다. 메르데스는 삽시간에 몰려든 수십 마리의 해골 병사를 향해 다짜고짜 몸통을 들이 받은 다음.

콰앙!

마차에 치인 것처럼 날아가는 해골의 다리 하나를 손으로 움켜쥐고, 왼편에 몰려오는 또 다른 좀비떼를 항해 패대기치듯 내리찍었다

우직!

동시에 서너 마리의 좀비가가 검을 쥔 오른손을 휘감으며 온몸으로 매달렸다. 메르데스는 풍차처럼 몸을 회전하며 녀석들을 전부 털어낸 다음, 눈으로 보지도 않고 온 사방을 향해 풍압검을 미친 듯이 쏟아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아앙!

검을 쥔 오른손의 정석적인 풍압검과, 아무것도 없는 왼손의 맨손 풍압검이 서로 어우러지며 주변 적들을 광역으로 삭제한다.

폭풍검을 쓰면 좋겠지만 적들이 너무 가까우면 자신도 충격파에 휘말린다.

'지금은 일단 간격을 만들자. 그 리고 한숨 돌리고 태세를 정비한 다음에....'

그런데 그 순간,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위협이 느껴졌다.

강한 존재.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대체 얼마나 강한지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에이션트 씰의 코어를 먹은 뒤로 문득 그런 감각을 느낄 때가 있다.

시선을 돌리자 50미터쯤 전방에 새로운 살덩이 괴물이 보였다. 메르데스는 본능적으로 녀석을 향해 폭풍검을 날렸다.

그리고 후방에 존재하는 강력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메르데스!"

사방 가득한 사령군을 뚫고, 클로드 기사단의 단장인 다비가 이미 메르데스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살덩이 괴물의 약점을 알려주러.... 음?"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살덩이 괴물이 보였다. 다비는 놀란 눈을 깜빡이다 상황을 파악했다.

"폭풍검을 날린 건가? 이 난전 속에서 집중형으로 정확히 녀석만 노려서?"

"네. 단장님."

메르데스는 몰려오는 사령군을 향해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다비도 함께 검을 휘두르며 내심 감탄을 거듭했다.

'이 아이는 정말 타고난 전사다.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궁금하군. 역시 다음 코어는 황자님께 부탁해서 메르데스에게 주어야....'

"단장님은 본대에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살덩이 괴물의 약점을 알아내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오신 겁니까?"

"음, 그래."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싸우니 몰려오는 사령군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다비는 적의 압박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느끼며 메르데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살덩이 괴물의 약점은 이마 정중앙의 안쪽이다. 그곳을 찌르거나 베면 바로 죽는다. 아니, 언데드에게 죽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겠군. 바로 무력화된다."

"...그런 약점이 있었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폭풍검으로 한 마리씩 처리하느라 오른팔의 소모가 극심했다. 다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확히 노리기 힘들면 그냥 머리를 반으로 쪼개라. 오히려 그게 더 쉽겠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다. 나 없이는 중앙 본대가 너무 엷어서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부탁한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겨우 적의 2파를 정리한 엘스톤 수비군이 달려가는 다비를 발견하고는 탄식하기 시작했다.

"와.... 저게 나이트 다비?"

"나이트 마스터다."

"갑옷은 그냥 하얀색인데? 백기사단 아니야?"

"이 멍청아. 다비 님이 원래 백기사단 소속이었잖아."

"아니,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잠깐, 나이트 마스터의 수제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저 아가씨였어?"

덕분에 혼자 남은 메르데스에게 더 큰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여유도 잠시, 또다시 접근하는 적의 3파에 모두 얼어붙기 시작했다.

'너무 막 싸웠어.'

메르데스는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갑옷 속에 챙겨온 체력의 영약과 설탕바를 대놓고 꺼내 먹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듀론 님. 지금부터는 저도 병력과 함께 열을 맞춰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고생했네. 그렇게 하게나."

온몸에 좀비 살점을 뒤집어쓴 듀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진형이 크게 뒤틀려 있는 수비군을 돌아보며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전군 대열을 갖춰라! 곧 적의 3파가 도착한다! 정신 바짝 차려! 한 순간만 깜빡해도 죽는다! 저 끔찍한 망자들에게 목숨을 내여 주지 마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0화

39장 격전

막상 페이우드 제국은 이번 전쟁에 큰 병력을 지원하지 못했다.

물론 제스가 생존해 있을 때처럼 본보기나 길들이기를 위한 계략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사단이 이계의 침공에 맞춰 개편과 훈련을 진행 중이란 게 문제였다.

훈련 장소 역시 대부분 큰일이 터졌던 엠퍼로드의 북쪽이나 서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오직 엠퍼로드의 북동쪽에서 훈련을 진행하던 카일의 수호 기사단만이 곧바로 반응, 엘스톤 백작령으로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었다.

'최근에 주둔지를 베리트 지방으로 옮겼으니 망정이지....'

카일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사단을 맡은 것까진 좋았지만,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루넨브레스 저택과 거리가 너무 멀면 이동이 까다롭다.

그래서 거리가 가깝고, 클로드의 영지이기도 한 베리트 지방으로 수호기사단을 옮긴 게 정답이었다.

물론 서두른다고 했지만 이미 엘스톤 백작령의 절반 이상이 밀린 상황. 클로드는 몰려오는 적을 보며 목청을 높였다.

"기사단은 들어라! 이곳 우익은 가장 중요한 전장이다! 가장 많은 적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된다! 포위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덕분에 처음부터 가운데를 비워둔 도넛 모양의 원(圓)진을 구축. 사방에서 쏟아질 적들을 상대로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니 포위당해도 겁먹을 필요 없다! 모두 훈련받은 대로 위치를 사수하고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

"오오!"

동시에 800여 기사들이 방패를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다. 카일은 가장 안쪽에 배치한 신입 기사들까지 전투에 동원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계속 해서 소리쳤다.

"너희들의 뒤에 누가 있는지 항상 떠올려라! 무려 100명의 신관님들이 원진 안에서 우릴 지원해 주고 계신다!"

"오오!"

"부상자는 즉시 내부로 빠져 치료를 받고 복귀해라! 결국 버티면 우리가 승리한다!"

"오오!"

원진 내부에 배치된 신관의 존재가 기사들의 사기를 한층 높였다.

사령군의 침공을 들은 대신전에서 급하게 50명의 신관을 파견해 주었다.

논의 끝에 이들 모두를 가장 위험한 전장인 우익에 배치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덕분에 수호기사단은 장기전을 버틸 수 있는 회복수단을 내부에 품고 전투에 임하는 셈이었다.

"적이 몰려온다! 동군은 방어와 함께 적을 좌우로 흘리는 데 집중해!"

아무리 원진이라 해도 적의 공격을 먼저 받을 전방인 동군을 훨씬 두텁게 쌓아 놓았다. 카일 본인은 30명의 신관과 함께 동군의 안쪽에 바짝 붙은 상태였다.

"적 충돌! 전군 충격에 대비하라!"

크어어어어어!

먼저 몰려온 수백 마리의 좀비가 수호기사단의 전방을 씹어 먹을 듯 들이받았다.

하지만 기사단의 방어는 완벽했다.

새로 지급된 넓은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대열이 밀리지 않도록 뒤쪽의 기사들이 몸을 붙여 함께 충격을 받아주며 압박을 유기적으로 분산시킨다.

크아악!

캬악! 캬아아악!

크아아아악!

괴성과 함께 방패를 마구 긁어대던 좀비들이 좌우로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말 위에서 타이밍을 기다리던 카일이 짧게 소리쳤다.

"찔러!"

순간 방어에 집중하던 기사들이 촘촘한 방패 틈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푸확!

한 번의 일제 공격으로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썩은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카일은 즉시 손을 들어 올리며 계속 지시를 내렸다.

"다시 방어! 틈을 좁힌다! 계속 방어 지속!"

"적들이 포위망을 넓힌다! 북군과 남군도 집중해!"

"지금이다! 동군 찔러!"

"서군! 진형이 찌그러지고 있다! 위치를 사수해! 페리온! 한발 앞으로 나서!"

"린! 지금부터 지칠 때까지 검을 찌른다! 분대 지휘해! 파날! 거긴 해골들이 몰려 있다! 무기가 틈으로 비집고 온다! 지금! 찔러!"

사관학교에서 끌고 온 동기들을 외곽에 배치, 각자 소수의 분대를 이끌고 공격 임무를 맡겼다.

물론 그 정도 피해는 압도적인 규모 앞에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적의 숫자를 줄이는 것은 적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지금부터였다.

'좋아. 이제 거의 포위됐다.'

혼자 말 위에 올라탄 채 안장까지 한껏 높인 카일이었다.

이미 수천의 적에 둘러싸였고, 그 이상의 적이 몰려오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이 또한 준비된 위기였다.

"방패 충각 준비!"

촥!

지시가 떨어진 순간, 원진의 외곽에 있는 모든 기사가 납검과 동시에 양손으로 방패를 움켜쥐었다.

"방패 충각!"

"충각!"

그 순간, 진형 전체가 물결치듯 출렁였다.

먼저 방패 기사가 몸 전체를 뒤로 당긴다.

동시에 바로 뒤에 있는 기사가 당겨진 방패기사의 몸을 전력으로 밀어버린다.

방패기사는 밀리는 가속도를 전부 방패에 싣고, 자신 또한 전력으로 앞발을 내딛으며 방패를 밀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거대한 징이 울린 듯했다.

방진 전체가 충격파라도 일으킨 듯, 포위한 적들을 일거에 으스러뜨리며 사방으로 튕겨낸다.

좀비나 해골병사 따위가 마갑을 입은 기사 둘의 전력이 담긴 방패를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한 방에 기사단을 포위했던 500여 마리의 언데드가 박살이 나며 날아갔다.

'성공! 성공이다!'

카일은 속으로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기뻐했다.

제국 사관학교에서는 기본으로 배우는 방패충각이지만, 수호기사단 대부분이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했다.

'귀하신 몸들 집에도 안 돌려보내고 계속 합숙 훈련시킨 보람이 있구나!'

사전에 기사들에게 스트렝스 마법을 걸어준 신관들에게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첫 충각이 제대로 통한 이상,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 반복하면 언젠가 모든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카일은 계속 말머리를 돌리며 사방의 적을 주시하고 있었고, 이내 동군 너머로 커다란 괴물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살덩이 괴물... 올 게 왔구나.'

왜 지금까지 안 오나 싶었다. 여기서부터는 이계의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섬세한 작전이 필요하다.

"동군 집중! 살덩이 괴물이 접근중이다! 번호를 부르면 바로 함정을 판다!"

"네! 부단장님!"

군기와 긴장이 절묘하게 섞인 좋은 반응이다. 그러게 쿵쿵대며 달려온 살덩이 괴물이 녹슨 도끼를 동군의 중심에 내리꽂으려는 순간.

"114번! 함정 개시!"

"개시!"

카일이 부른 건 기사의 투구 후면에 적힌 숫자였다.

114번 기사는 좌우의 다른 기사와 함께 즉시 뒤로 물러났고, 그들의 뒤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함께 물러나며 외곽에 푹 파인 함정을 만들어냈다.

크허!

헛방을 휘두른 살덩이 괴물이 그대로 직진하며 함정으로 밀려 들어왔다.

"됐다!"

"좁혀!"

"문 닫는다!"

그러자 카일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외곽에 있던 다른 기사들이 간격을 좁히며 홈의 입구를 닫아 버렸다.

"트리멈님!"

"준비 끝났습니다!"

카일이 이름을 부른 순간, 클로드의 경호신관인 트리멈이 함정으로 진입하며 양손을 뻗었다.

"악이여! 굴복하라!"

동시에 눈부신 빛이 뻗으며 살덩이 괴물의 몸을 휘감았다.

안티 이블.

보통 파사(破邪)마법으로 불리는 신성마법으로, 턴 언데드의 마이너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좀비나 해골병사 따위는 이 빛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하며, 급이 높은 강력한 언데드라면 적어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봉쇄를 할 수 있다.

크그....

발작하듯 사방의 기사를 후려치던 괴물이 순간 얼어붙은 듯 멈춰 버렸다. 카일은 즉시 손을 들어 지시를 내렸다.

"함정 공격!"

"공격!"

"공격!"

"공겨여여여역!"

그러자 방어로 일관하던 함정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치켜들며 살덩이 괴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어!"

"이 망할 괴물!"

"쑤셔! 잘라! 쑤셔!"

기사들은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이라도 맺힌 듯 검을 휘둘렀다.

마치 몸속에 들어온 병균을 집어삼킨 채 분해하는 듯하다.

그 거대한 살덩이 괴물이, 불과 10여초 만에 푸줏간에서 파는 저민 고기로 돌변해 버렸다. 카일은 그제야 손을 들어 올리며 지시를 내렸다.

"함정 중단! 모두 원위치로 돌아가 대열을 유지하라!"

"네! 부단장님!"

광기어린 칼질을 하던 기사들이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카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트리멈에게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신관님. 덕분에 저 괴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건 카일 님이십니다."

트리멈은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짧은 시간에 기사단을 이렇게까지 단련하시다니, 처음 지시를 들었을 땐 기사들이 제대로 움직여 줄지 걱정했습니다."

"실전이라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앞으로 몇 번 더 가능하십니까?"

"안티 이블 말씀이시죠? 방금처럼 짧게 끊어 치면 스무 번은 족히 가능합니다."

결국 살덩이 괴물이 스무 마리를 넘기는 순간부터 고통의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카일은 원진 중앙의 텅 빈 공간에 잔뜩 쌓아놓은 보급품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택에서 각종 영약에 설탕바까지 챙겨왔으니 틈틈이 드셔 주십시오. 어떻게든 한 마리라도 더 많은 살덩이 괴물을 멈춰 주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카일 님도 제 걱정은 말고 지휘에 집중해 주십시오."

마침 추가로 달려오는 두 마리의 살덩이 괴물이 보였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롭게 지시를 내렸다.

"동군! 다시 집중! 살덩이 괴물이 접근 중이다! 번호를 부르면 바로 함정을 판다! 그리고 방패 충각 준비! 방패 충각!"

그 와중에 전방위 공격도 추가로 지시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새 외곽에 달라붙은 수백 마리의 언데드가 육중한 굉음과 함께 튕겨 날아갔다.

동시에 두 마리의 살덩이괴물이 동군의 외곽에 붙었고, 카일은 처음처럼 신속하게 대응하며 하나씩 차례대로 처리했다.

"후...."

두 번째 괴물을 처리할 때는 카일도 함정에 뛰어들어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다시 중앙의 공터로 돌아온 카일은 식은땀을 닦으며 온 사방을 주시했다.

'생각보다 정신이 엄청 소모되는구나.'

원진의 내부에서 온 사방을 살피며 순간순간 적절한 지시를 내려야 한다.

한순간만 삐끗해도 한쪽 벽이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연쇄적으로 주변이 함께 무너지며 진형 전체가 모두 붕괴된다.

'침착해. 전투는 이제 겨우 시작이야. 신관님들의 힘으로 최대한 장기전으로 버티고 가야 해.'

그 와중에 살덩이 괴물 두 마리가 또 몰려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전과 달리, 두 마리가 상당히 먼 간격으로 달려온다는 것이었다.

'한 마리는 북군방향, 또 한 마리는 남군방향....'

이러면 살덩이 함정의 핵심인 트리멈의 이동거리가 그만큼 지체된다.

트리멈이 지체되는 만큼 함정에 빠진 괴물이 날뛸 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변을 포위한 기사들이 입게 된다.

"트리멈 님! 두 마리 동시에 오는데 서로 거리가 멉니다! 한쪽을 제가 맡을 테니 최대한 빠르게 돌아와 주십시오!"

"네! 카일 님!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트리멈과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순간.

"...응?"

카일의 눈에 기묘한 것이 보였다.

원진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숲이 있었는데, 누군가 마치 원숭이처럼 나뭇가지를 타며 민첩하게 전장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디디?"

후방에 예비 병력으로 있어야 할 디디가, 최하급 마갑을 대충 걸친 채 짐승처럼 숲을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는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양손으로 붙잡더니, 마치 체조라도 하듯 원을 그리며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저건 대체...."

카일은 디디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너덧 번을 회전하며 원심력을 쌓은 디디는, 어느 순간 손을 놓으며 화살처럼 전방을 향해 튕겨 날아갔다.

그것은 엄청난 도약이었다.

한순간 백여 미터를 날아간 디디는, 반대편에 달려오던 살덩이 괴물의 머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이받았다.

'칼?'

자세히 보니 손에 쥔 칼을 괴물의 이마 정중앙에 박아 넣은 상태.

"디디! 빨리 도망쳐! 그놈은 그 정도로 안 죽어!"

카일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예상대로 살덩이 괴물은 전혀 타격이 없는 듯, 머리에 달라붙은 디디의 몸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부웅!

디디는 극적으로 몸을 틀며 손바닥을 피했다.

그리고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박아 넣은 칼을 이리저리 후벼 팠다. 지켜보는 카일은 속이 까맣게 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소리쳤다.

"디디! 제발 도망쳐! 너 구하러 못 간다고!"

그런데 그때.

"...!"

손바닥을 마구 휘두르던 살덩이 괴물이,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을 떨며 경직되었다.

그리고는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제자리에 허물어졌다. 한편 디디는, 갑자기 앞에 있던 좀비의 머리로 몸을 날린 다음, 그것을 밟고 더 앞에 있는 또 다른 좀비의 머리를 향해 도약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1화

39장 격전

"아니...."

지켜보던 카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언데드로 가득한 적진 한복판에 뛰어든 다음, 그곳에 있는 가장 강력한 괴물을 암살하고는 적들의 머리를 밟으며 유유히 빠져나온다.

"...520번! 521번! 방패를 들어 올려!"

카일이 퍼뜩 놀라며 지시를 내린 순간, 이미 아군 진형으로 몸을 날린 디디가 방패를 밟고 원진 안쪽으로 단숨에 도약했다.

"...."

그리고는 마치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카일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디디!"

"...카일 님. 방패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카일은 반사적으로 녀석의 얼굴에 따귀를 날리려는 충동을 참으며 소리쳤다.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큭.... 전군 방패 충각 준비! 방패 충각!"

그 와중에도 타이밍에 맞춰 전군 공격의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디디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카일 님. 단장님으로부터 살덩이 괴물의 약점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약점? 저 괴물에 약점이 있어? 하긴 그러니 방금 한방에 쓰러졌겠지만...."

"이마 한가운데가 약점입니다."

디디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누르며 말했다.

"이곳을 찌르면 무력화됩니다. 멀리서 보니 마침 살덩이 괴물이 보여서 직접 해봤습니다."

"내가 못살아...."

카일은 현기증을 느끼며 손가락으로 눈 사이를 눌렀다. 디디는 다시 허리를 펴며 기사들로 꽉 찬 북쪽 진형을 돌아봤다.

"그럼 할 일을 다 했으니 이만 본대로 돌아가겠습니다. 그쪽이 사람 숫자가 워낙 적어 저라도 도움이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잠깐, 일단 여기 들어온 이상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방금처럼 중간에 있는 기사님께 방패를 한번 들도록 해주십시오. 그럼 제가 알아서 빠져나겠습니다."

이미 전군이 사령군에 포위된 상태인데도 저런 말을 태연히 한다. 카일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디디를 보며 물었다.

"정말? 그거 하나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좀비나 해골 병사는 머리 위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605번!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네 부단장님!"

전열에서 한참 떨어진 기사 하나가 즉각 방패를 들어 올렸다. 디디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가볍게 뛰어올라 방패를 밟고 원진 밖으로 한 번에 몸을 날렸다.

"몸이 아무리 민첩해도 저게 가능한가...."

카일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방금 디디가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들은 야생동물 그 자체였다. 카일은 자신과 디디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느끼며 생각했다.

'타고났다는 게 저런 거구나. 분명 앞으로 더 강해지겠지. 나도 엄청 먹고 싶지만.... 역시 다음 코어가 들어오면 디디를 먹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 * *

전투가 시작된 지도 꽤 긴 시간이 지났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가운데, 안개까지 자욱이 피어올라 전장의 시야가 빠르게 좁아지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에게 안식을!"

"모든 것은 다섯 신의 섭리대로!"

그 와중에도 두 명의 신관이 언덕 아래를 향해 투명한 빛을 연신 쏟아냈다.

치이이이이익!

빛을 뒤집어쓴 좀비들이 하얀 연기를 뿜으며 잿더미로 산화한다.

본대에 남은 두 명의 경호신관, 오스트와 자말은 정신없이 안티 이블을 쏟아내며 한계까지 적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자말! 안티 이블의 출력을 좀 더 낮추십시오. 급이 낮은 언데드에겐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네, 오스트 님. 최대한 힘을 아껴 더 많은 죽은 자를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비록 턴 언데드처럼 한 번에 광범위한 언데드를 쓸어버릴 수는 없다 해도.

좀비나 해골 병사 같은 급 낮은 언데드를 상대로는 마치 화염 방사기와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후우...."

잠시 여유가 생긴 신관들은 수통에 가득 찬 설탕물을 벌컥 들이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끝이 보일 것 같습니다. 기운 냅시다. 오스트 님!"

"물론입니다. 리치를 봉인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분들도 고생하고 계시니...."

쾅! 콰앙!

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 강렬한 폭음이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제국 황실 문양이 들어간 은색 마갑을 착용한 기사가 풍압검을 쏟아 내는 게 보였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라!"

기사는 한순간에 수십 마리의 언데드를 쓸어버리고는 뒤따라온 다른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왜 다들 꾸물거리고 있나! 내 아우가 자리를 비웠으니 우리라도 활약해야 하지 않겠나!"

"황태자님. 마음은 알겠으나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호위로 붙은 왕관 기사단이 황태자 아드릭스의 주변을 에워싸며 말했다.

"하루만 더 기다려 주셨으면 제대로 된 호위대를 꾸렸을 것입니다. 급하게 동원되는 바람에 다섯 명밖에 차출하지 못해 호위가 어렵습니다."

왕관 기사단은 황궁에 상주하는 황제 친위기사단이다. 아드릭스는 거구의 몸을 크게 들썩이며 검을 치켜들었다.

"어렵긴 뭐가 어렵다고 그러지. 내 걱정할 필요 없다. 클로드가 내 목숨을 구해주며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단 말이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황태자이십니다."

기사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황태자의 폭주를 제어했다.

"다음 황제가 되실 분께서 이런 곳에서 함부로 목숨을 거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두 신관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신관 분들도 싸우지 말고 뒤로 빠져 주십시오! 황태자께서 부상이라도 당하시면 바로 치료해야 합니다!"

"닥쳐라! 저 신관들은 클로드의 가신이란 말이다!"

순간 황태자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다들 중요한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게 안 보이나! 쓸데없이 끼어들어 방해하지 마라!"

"아닙니다! 혹시 부상자가 나오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신관 오스트가 투닥거리는 황태자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령군의 침공 직후, 거리나 시간 관계상 주력 기사단이나 고위 관계자 대부분 전투에 동원되지 못했다.

그나마 아무 곳에도 속해있지 않은 황태자 아드릭스가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번개같이 달려와 아슬아슬하게 전장에 도착했다.

이는 드넓은 전선을 극소수의 병력으로 막아야 하는 본대 입장에서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일이었다.

물론 황태자 일행이라 해 봐야 황태자에 왕관 기사단 다섯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이들 모두가 최소 나이트 익스퍼트 이상의 실력을 갖춘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특히 코어를 먹고 회복된 황태자는 이미 과거의 실력 이상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덩달아 황제가 급히 파견한 수도 방위군 1천이 후방에서 진열을 가다듬으며 빠져나간 사령군의 잔당을 처리하는 상황.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가 아닐 수 없었다.

"황태자님이 와 주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지금 본대엔 메르데스 님도 없고 다비 님도 계시지 않으니까요."

신관 자말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안티 이블로 정화된 전장 너머로, 육중한 거구의 괴물 둘이 기세 좋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살덩이 괴물...."

"어떻게 합니까 오스트 님? 저 흉물을 아까처럼 잡으려면 마력의 소모가 너무 큽니다."

안티 이블로 살덩이 괴물을 잡으려면 최대 출력으로 20초 이상을 퍼부어대야 했다. 오스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든 둘이 힘을 합쳐 조금이라도 마력 소모를 줄이는 수밖에...."

그런데 그때, 마갑조차 안 입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 날렵한 속도로 전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건 누구냐! 모자를 눌러 써서 얼굴이 안 보인다!"

멀리 황태자가 놀란 눈으로 소년을 가리켰다. 물론 두 신관은 소년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하고 있었다.

"라니르?"

"저건 라니르 님 아닙니까!"

두 신관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갑자기 질주를 멈춘 라니르가 바람으로 만든 두 발의 화살을 전장으로 쏘아냈다.

쉬익!

쉬익!

비록 크기는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속도 하나는 일류 마법사만큼 빠른 바람의 화살이 두 살덩이 괴물의 이마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푹!

그것으로 끝이었다. 살덩이 괴물은 발작하듯 경련을 일으키고는 그대로 축 늘어지며 쓰러졌다.

"아니...."

지켜보던 모두가 경악했다. 가볍게 숨을 몰아쉰 라니르는 곧바로 두 신관에게 달려와 물었다.

"이곳에 계셨군요. 단장님의 전언입니다. 두 분 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티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잠시만. 그전에 방금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살덩이 괴물의 약점은 이마 한가운데 있습니다. 정확히 노릴 수만 있으면 방금처럼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엘프 소년은 별것 아닌 듯 덤덤하게 말하고는 전언을 이어나갔다.

"르갈 님이 무언가 엄청난 냄새를 맡았다고 합니다. 온 사방이 사령군의 냄새로 뒤덮여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규모로 치면 지금까지 몰려온 것에 필적하는 새로운 적들이 또다시 저의 본대 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두 신관은 물론이고, 살덩이 괴물 하나를 잡고 돌아온 디디까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르갈이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적이 그렇게까지 많았다니.... 물론 톨라리 님이 정찰로 알려주셨을 때도 많기는 많다 들었습니다만."

그것을 감안해도 이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당장 이 본대만 해도, 르갈에 탑승한 리넨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얼마나 많은 언데드를 처리했는가?

여기에 나이트 마스터인 다비가 적진에 파고들어 폭풍처럼 베어 날린 적의 수가 또 얼마고?

물론 두 신관이 안티 이블로 처리한 죽은 자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처리한 만큼의 적들이 추가로 더 온다고?

"단장님께서 일단 방어진을 뒤로 물리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힘을 너무 많이 소모했습니다. 좌익의 수비군은 이미 전 병력의 3할이 날아갔습니다."

"무슨 일이지? 너도 클로드 기사단의 일원인가?"

뒤늦게 황태자 일행이 우르르 달려오며 물었다. 라니르는 귀를 감추기 위해 두건을 더 깊이 눌러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황이 불리해서 일단 본대를 뒤로 물리는 쪽으로...."

그때 라니르와 디디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향한 두 소년의 눈에, 삐쩍 마른 한 여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얘들아, 큰일 났어...."

여자는 바로 톨라리였다. 톨라리는 착지와 동시에 고개를 푹 숙이며 주저앉았다.

"톨라리 님!"

"남은 마력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턱도 없어서...."

톨라리는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 버렸다. 디디가 잽싸게 움직여 톨라리의 몸을 받은 다음 그대로 쑥 안아 들었다.

"이 여성이 아크 위저드 톨라리인가 보군."

황태자가 놀란 눈을 깜빡이며 디디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소리지? 남은 마력으로 뭘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저도 모릅니다."

디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자신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은 성인 여성을 안아 들었는데도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게 놀라웠다.

"톨라리 님은 정말 가볍군요. 식사량을 좀 더 늘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신관 둘이 동시에 톨라리를 확인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다치진 않은 모양입니다. 마력이 고갈되어 의식을 잃은 것뿐입니다."

애초에 이 전쟁은 톨라리가 적의 규모를 미리 왕창 줄여 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라니르는 톨라리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바로 의견을 말했다.

"톨라리 님은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마법만 따지면 엘프 군주보다도 뛰어날 겁니다. 그런 톨라리 님이 마력을 바닥까지 긁었는데도 당하지 못한 상대가 무엇일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살덩이 괴물이 떼로 몰려오는 게 아닐까요?"

신관 오스트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때.

그그그그그극....

괴상한 파열음이 전장을 울렸다.

동시에 지면이 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험을 느낀 모두가 전방에 자욱한 안개를 노려보며 천천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뭔가가 옵니다. 아주 큽니다."

라니르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빽빽한 안개를 뚫고 거대한 무언가가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