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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0화

35장 반란군과 변절자

톨라리는 과거 탈리스만 백작과 전투를 벌인 서쪽 숲으로 날아갔다.

숲 한복판에 대형 운동장만 한 땜빵이 뚫려 있다. 여기도 새로 나무를 심었어야 하는데 정신 없다보니 신경을 못 썼구만.

"잘 봐!"

톨라리는 도착과 동시에 공터를 향해 다짜고짜 템페스트를 날렸다.

더블 매직으로.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압축에서 풀려난 바람의 칼날이 온 사방으로 흩어진다.

만약 저곳에 나무가 있었다면, 거짓말 좀 섞어서 톱밥 수준으로 갈려 나갔을 것이다.

두 개의 템페스트가 서로 교차하며 바위를 깎아내는 굉음을 울린다.

동시에 가장 먼 곳부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흩어진 바람의 칼날을 내부로 끌어모았다.

그야말로 손색없는 완벽한 더블 매직.

"진짜 되네?"

코어 때문에 후원자가 투여한 주사 효과가 사라진 거 아니었나?

"한 번 감 잡은 걸 왜 못 씀? 어림없지."

톨라리는 콧대를 한껏 치켜들었다.

"이미 그 이상 영역까지 갔다 왔잖아. 뇌가속 영약 마시면 트리플 매직도 가능해. 대신 사용하던 영역이 사라져서 집중력 좀 더 필요한 건 어쩔 수 없고."

"다행이네. 난 또 확 퇴보한 줄 알고."

"마력 살짝 줄은 셈이지만 괜찮아. 코어 먹고 늘어난 걸로 비긴 셈 치면 됨."

톨라리는 명랑하게 말하다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응? 으응? 어쩌면 뇌가속 영약 안 마셔도 트리플 매직 될 듯?"

"정말?"

"머릿속에 후원자 선물 사라졌잖아? 덕분에 빈 영역이 더 생김."

"영역?"

"전에 뇌가속 영약 먹고 제3의 영역을 만들어서 트리플 매직 사용했어. 지금 빈곳으로 그거 재현 가능할 듯."

...뭐?

반백년을 마법사로 살아온 나도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비었으면 그냥 빈 거지, 거길 어떻게 하면 트리플 매직이 가능한데?

원리를 모르겠는데?

당장 내가 쓰는 트리플 매직이든, 퀸터플 매직이든 전부 리치의 마력결정 때문이다. 순수하게 내 머리만 굴려서는 못 쓴다.

"일단 쓰고 나서 설명해 줄게. 그러니까...."

톨라리는 눈을 감고 한동안 끙끙대기 시작했다. 나는 옆으로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겠어? 일단 마력 부족하지 않아?"

"템페스트 다섯 발까진 넉넉해. 조금만 기다려 줘, 황자님. 그러니까...."

그때 톨라리의 코에서 코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헉, 너 코피 난다."

"응? 이거 원래 그래. 좋은 징조."

코피뿐만 아니라 입에서 침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음.... 이거 뭔가 심각한 거 아닌가?

하지만 말리기엔 이미 늦었다.

이미 펼친 양손에 각각 템페스트가 완성되었고, 명치의 앞쪽으로 세 번째 템페스트까지 휘몰아치며 압축을 시작했다.

"으...."

집중하는 톨라리의 눈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순간 동공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정면에 집중됐다.

그리고 세 발의 템페스트가 총알처럼 날아갔다.

우우우우우우웅!

성공이다.

와, 멋져. 저게 진짜 맨정신으로 되는구나.

감탄한 내가 박수를 치려고 손을 모은 순간, 멀리 공터 한가운데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뭔가가 열렸다.

차원문.

아니 저게 갑자기 왜? 얼핏 봐도 젝트바이아의 몸속에 열린 것과 비슷한 크기의 차원문이다.

"...!"

하지만 끼어들 시간이 없었다. 마법을 날린 톨라리도 당황해서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순간.

"...."

밀폐된 갑옷으로 몸을 감싼 이계의 병사.

녀석이 우리 쪽 차원으로 넘어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화염병?

저거 화염병이잖아? 게이트 열렸을 때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이계의 기본 병력?

그리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폭발했다.

휘몰아치는 폭풍이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까드드드드드득!

폭풍 안쪽으로 중심점이 세 개인 바람의 칼날이 초고속으로 회전한다.

소름끼치는 울림은 칼날들이 서로 충돌하는 소리로, 이미 그 안에 있던 화염병 같은 건 형체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뭔가 아쉽네.

어째서 갑자기 차원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고작 화염병 한 마리가 넘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강력한 트리플 템페스트가, 고작 화염병 하나를 갈아버리고 끝나는 게 안타까울 지경.

"방금 그거 봤어? 황자님 그거 봤어?"

톨라리가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갑자기 사람 튀어나옴! 어떡해! 나 사람 죽였어!"

"진정해. 저거 아마 사람 아닐 거야."

"응? 응?"

"차원문 열고 나왔으니까 아마도 후원자... 는 아닌가? 붕대 안 감았으니까. 대충 사이크 차원의 병사 아닐까?"

"병사? 그럼 적?"

톨라리는 그제야 안도한 듯했다. 하지만 서서히 걷히는 템페스트 폭풍을 보며, 우린 둘 다 경험한 적 없던 공포에 사로잡혔다.

적은 멀쩡했다.

저게 말이 돼?

고작 일개 화염병 하나가 트리플 템페스트를 직격으로 맞고 멀쩡하다고? 광전사도 저거 맞으면 그냥은 못 버틸 텐데?

"...일단 물러나 있어."

나는 톨라리를 뒤쪽으로 밀며 앞으로 나섰다. 물론 거리가 꽤 멀긴 하지만, 적이 언제 어떤 공격을 날릴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

녀석은 급하게 투구를 벗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 ...!!"

"뭐?"

소리가 작아서가 아니다. 실제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

그런데 투구 속에 사람 머리가 들어 있네?

...인간?

녀석은 수염을 거칠게 기른 중년의 남자였다.

급하게 군주의 눈을 열어 확인했는데 우리 쪽 인간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어째서?

사이크인은 전부 에너지 덩어리 같은 게 아니었나? 게다가 화염병은 갑옷 내부에 정체불명의 연기만 차 있었을 텐데.

그런데 살아 있는 인간?

"...."

녀석은 벗은 투구 안쪽으로 손을 넣은 다음,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장치를 꺼내 자신의 머리에 가져가 댔다.

"...난 적이 아니다!"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남자는 거의 항복하는 자세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난 적이 아니다! 도우러 왔다! 시간이 없으니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다...."

그새 거리를 좁힌 나는 녀석의 머리에 손을 겨누며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 넌 누구냐? 그 갑옷은 뭐고?"

"갑옷? 이것은 황금시대의 마지막 남은 유물 중 하나다. 배틀 아머라고 하지."

"...배틀 아머?"

"그래. 끙...."

남자는 갑옷의 건틀렛 부분을 해체해 바닥에 떨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쿵!

"휴, 덕분에 깡통이 되 버렸군. 혹시나 해서 충전을 꽉 채운 게 정답이었어. 안 그랬으면 오자마자 죽을 뻔 했다."

"갑옷의 힘만으로 트리플 매직을 버틴 거야?"

함께 날아온 톨라리라 내 옆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남자는 우리 둘은 번갈아 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거 참. 이토록 생생한 젊은이들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이 갑옷은 앞으로 너희들이 엄청 보게 될 물건이다. 열화판을 변절자들이 다수 생산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변절자?"

"인간의 몸을 버리고 영생을 택한 놈들. 지금은 그놈들이 사이크인이다."

남자는 남은 갑옷을 하나씩 해체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반란군의 사령관인 비렉스다."

반란군? 그건 또 뭔데?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지금 너희들의 차원을 공격하는 곳을 사이크 차원이라 부른다."

"그건 나도 아는데."

"사이크 차원은 지금 변절자 사이크인이 지배하고 있다. 다만 모든 사이크인이 녀석들처럼 육체를 버리고 영생을 얻는데 동의한 것은 아니다. 처절한 전투가 있었지. 결국 우리들은 반란군이 되어 땅속 깊은 곳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뭐?

"안타깝지만 자세한 역사를 설명할 시간이 없다. 부디 지금은 날 믿고 따라주길 바란다."

잠깐,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뭘 보고 널 믿겠냐? 차원문 열고 사이크 차원에서 넘어온 녀석을?

...라고 말하기엔, 군주의 눈에 보이는 남자의 감정이 너무도 진실하고 절실했다.

극도의 다급함.

안타까움, 고통.

그리고 나와 톨라리를 향해 쏟아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대. 그리고 희망.

심지어 애틋함까지.

적대감이나 분노, 의심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도 안 보이는구만.

저기요? 비렉스 씨? 우리 방금 만난 사이 아닌가요? 어떻게 차원을 넘어오자마자 처음 만난 사람을 이렇게 신뢰하실 수 있습니까?

"먼저 확인할 게 있다. 그쪽 중 하나가 얼마 전 우리 쪽에 넘어와 경기장을 휩쓸고 간 인간이 맞나?"

"맞아. 내가 그랬어."

"오. 그래. 좌표가 다행히 맞았나 보군."

비렉스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반란군은 가까스로 네 고유 주파수를 포착했다. 그것을 분석해 마지막 남은 간이 차원문 발생 장치에 집어넣어 근처로 차원문을 열었지. 일부러 살짝 떨어진 곳으로 잡았는데 정답이었군. 딱 붙었으면 무슨 공격이 날아왔을지 모르니까."

"미안. 어쩌다 보니 타이밍 최악. 고의 아니었어."

톨라리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간이 차원문 발생 장치? 세상에 그런 것도 있었어?

"괜찮다. 그리고 이것이 간이 차원문 발생 장치다."

비렉스는 머리에 대고 있는 조그만 기계 장치를 가리켰다.

"이 안에는 뇌파 리딩을 통한 번역 기능까지 들어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연결해 주지."

"뭔가 만능이네. 근데 사이크인과는 그냥 말이 통하던데?"

"녀석들은 이게 기본 탑재되어 있으니까. 아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우린 세부적인 규정을 모른다."

"그 사이크 놈들도 맨날 규정 탓하던데 대체 그게 뭐야?"

"지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비렉스는 흉갑 안쪽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며 질문했다.

"혹시 변절자와 직접 접촉했나?"

"그래. 후원자라는 놈이랑."

"그놈이 혹시 네게 뭔가가 적혀 있는 종이를 넘긴 적이 있나?"

"종이? 전혀."

"전혀?"

규정이 어쩌니, 고지가 어쩌니 하면서 말로 줄줄 늘어놓긴 했는데, 종이든 뭐든 넘겨준 적은 없어."

"다행히 선수를 치진 않았군. 그럼 이걸 받아라."

비렉스는 손에 쥔 A4용지 같은 종이 몇 장을 넘겨주었다.

흠, 여기 뭔가가 잔뜩 적혀 있는데... 근데 처음 보는 문자라 하나도 모르겠네?

"다음으로, 변절자 녀석들이 어떤 장치를 넘겨준 적이 있나?"

"장치? 그럴 리가."

"확실히 말해주면 고맙겠다. 정말 없나?"

"없어. 우릴 멸망시키려는 놈들이 장치 같은 걸 왜 넘겨주는데? 애초에 그런 건 왜 물어?"

"규정상 한 개까지는 가능한 일이라 그렇다. 녀석들이 쓸모없는 걸 미리 넘겨 혹시 모를 후환을 방지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안 그러면 내가 넘기는 것들이 규정 위반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웅!

그때 뒤쪽에 있던 조그만 차원문이 크게 일렁였다. 비렉스는 혀를 차며 몸에 유일하게 남은 금속 부츠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벌써 시간이 다 됐군. 규정에 반하지 않고 넘길 수 있는 정보는 모조리 그 종이에 적어 놨다. 물론 우리가 모든 규정을 확인한 게 아니라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잠깐.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못 읽겠어."

"괜찮다. 차원문 발생장치에 번역 기능이 들어 있으니까. 남은 소량의 에너지로 번역 기능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거다. 비록 차원문은 새로 못 만들겠지만."

"응? 응?"

비렉스는 내 쪽으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부디 너희 알드 차원이 변절자들의 침공을 막고, 이번 차원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길 기원하겠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반란군이 보여준 성의를 잊지 말아 주길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마지막 장에 적어 놓았다."

그리고는 머리에 대고 있던 장치를 떼어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 ...!!"

그리고는 못 알아먹을 인사말을 추가로 남기고는, 다시 차원문 너머로 몸을 던지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차원문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

"...."

톨라리와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 짧은 시간에 엄청난 이야기가 쏟아진 것 같은데?

침묵을 깬 것은 멀리서 날아온 금독수리의 중후한 목소리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이쪽에서 강력한 바람 마법의 기운을 감지했네!"

"테우스...."

녀석은 방금까지 차원문이 열려 있던 자리에 착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런, 설마 맨땅에 마법을 낭비했는가? 그럴 거면 내게 사용하지 그랬나! 이 정도면 한 달은 버틸 것을!"

테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내가 손에 쥔 조그만 장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거... 아주 요상한 힘이 느껴지는군. 자네의 검에 깃든 힘과 약간의 동질성이 느껴지네. 대체 무엇인가?"

그러게. 이건 대체 뭘까?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변절자? 반란군? 간이 차원 이동장치?

그리고 자칭 반란군 지도자가 벗어놓고 가버린, 트리플 매직을 가볍게 버텨낸 정체불명의 갑옷까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1화

36장 해방과 파괴

본의 아니게 회의를 자주 열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안이 중대하니 어쩔 수 없지.

"사이크 차원은 두 세력으로 나귄 것 같아. 육체를 버리고 영생을 얻은 변절자. 그리고 변절자에 반대해 육체를 지키려고 맞서 싸우고 있는 반란군."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이 변절자인 모양이군요. 사이크 차원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변절자일 테고."

다비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종이를 두드렸다.

"여기 적힌 것만 보면 그래. 반란군은 지금 수세에 몰렸어. 거의 멸망 직전이라는데, 우리가 변절자의 침공을 막고 승리해서 자신들을 구해 주길 바라고 있어."

이미 각자에게 한 부씩 반란군 지도자가 넘기고 간 정보를 배포한 상태.

물론 원본은 다른 곳에 있다. 여기 있는 건 번역 장치를 머리에 대고 번역한 일종의 사본.

"덕분에 중요한 의문이 해결되었습니다. 저들이 어째서 우릴 침공하는지에 대한 원인 말입니다."

다비의 말대로다. 변절자는 '영생의 핵'이라는 물질이 있어야 육체를 버리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차원 침공을 통해 승리를 거둘 때만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우릴 멸망시켜야 종족 번식이 가능하단 소리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넘겨받은 정보에 '위대한 게임'이라는 단어가 몇 번 등장하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설명이 안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 같군요."

다비가 눈살을 찌푸렸고, 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가장 문제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정보에 따르면 사이크 차원 역시 더 거대한 무언가에 소속된 채,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긴다.

"종합해보면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는 '위원회'라는 게 있는데... 그게 사이크 차원 전체보다 더 높은 존재인 것 같아. 물론 확실한 건 아니고."

"사이크 차원마저 더 상위의 차원에 지배 받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마도?"

물론 확실한건 우리가 차원 침공에서 승리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정보에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적혀 있었다.

우선 차원 침공은 게이트가 열리고 사이크 차원의 공세, 즉 1차 웨이브로 시작된다.

이것을 막으면 일정 시간 뒤에 2차 웨이브가 열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 막다 보면 최종적으로 7차 웨이브까지 열리게 된다.

그래. 7차 웨이브.

드디어 알게 됐다. 그 망할 놈의 웨이브의 끝이 어디인지.

"여기엔 웨이브가 총 일곱 번 이어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나만 막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데 총 일곱 번이라니. 거짓 정보 아닐까요? 이걸 정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카일이 가장 먼저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래. 나라고 네 마음 왜 모르겠냐. 나야말로 진짜 믿고 싶지 않은걸.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사본엔 1차 웨이브만 세부 정보를 적어 놨지만, 원본에는 모든 웨이브마다 등장하는 적의 종류, 심지어 규모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실제로 경험한 지난 1차에서 5차 웨이브까지와 사실상 완벽하게 동일하다.

그러니 경험 못 한 6차, 7차 웨이브 역시 여기 적힌 그대로 이어지겠지?

"계시를 통해 본 것과 초반 웨이브가 일치해. 일단은 믿는 걸로 하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허락만 해주신다면, 회의가 끝나자마자 대신전에 돌아가 대신관님께 이 정보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경호신관 트리멈이 물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사본 몇 장을 더 넘겨주며 말했다.

"그렇게 해. 나중에 내가 직접 찾아가 대신관을 뵙겠다고 말씀도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당장 10개월도 안 남았는데 큰일이군요. 전국에 있는 모든 신전에 비상체제를 가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국은 이미 비상체제로 돌아가고 있어. 암튼 이걸 근거로, 침공이 시작되면 어떤 방식으로 막아낼지는 체계를 잡아 놓을게. 모두 그때까지는 정신 바짝 차리고 개인 훈련에 집중해 줘. 이걸 끝까지 막아내려면 너희 모두가 완벽히 역할을 해 줘야 해."

"네! 알겠습니다."

회의실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래. 진짜 너희들만 믿는다. 비렉스의 정보대로라면 이거 진짜 너무 빡세....

* * *

하지만 말을 이렇게 했을 뿐, 결국 차원 침공을 막는 핵심은 내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10회 차에 준비한 모든 루트를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가정 하에, 전력비는 7대3이었다.

제국의 모든 기사단과 보병 병력과 마법사단.

제국은 물론이고 서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용병 기사(돈이 허락하는 한)에, 신전이 보유한 신관 전원.

여기에 오우거와 야만족.

추가로 엘프와 드워프 병력까지 다 합치고, 서쪽에 국가들이 보유한 깨알 같은 마법사들도 전부 끌어들인다.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클로드 기사단까지 합친 것이 전력의 70퍼센트.

그리고 내가 나머지 30퍼센트를 담당한다.

이 둘을 적절히 조합하면 5차 웨이브는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하지만 '시간'관계상, 모든 계산이 완벽하게 틀어졌다.

이로써 나를 제외한 어나더 전력은 대부분 약화된 셈.

그나마 클로드 기사단이 코어 빨로 전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 위안. 예정에 없던 메르데스, 리넨을 통해 강력한 한 방을 노려볼 수 있다는 것도 크고.

물론 기존 계획대로라면 50여 명의 잠재력 있는 기사들을 7~8년에 걸쳐 육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섯 명뿐. 이건 소수 정예도 소수 정예 나름이지.... 좀 너무한 것 같은데.

물론 톨라리의 합류도 큰 변수다.

하지만 상수로 잡아 놨던 트롬본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결국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물론 개개인의 실력은 톨라리가 훨씬 위지만.

결국 새롭게 발생한 이 모든 전력 부족과 변수들을 내가 채워야 한다. 휴, 지금까지도 바빴지만 앞으로는 진짜 여유 없이 날아 다녀야겠구만.

"6차 웨이브는 일단 게이트가 3개가 열리고...."

"3개면 많은 것인가?"

혼잣말로 복습을 하는데 테우스가 끼어들었다. 나는 퍼스트클래스급의 승차감을 자랑하는 금독수리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많은 게 아니라 적어. 3차까지는 다섯 개가 열리고, 4차와 5차는 네 개가 열리니까."

"하나 더 줄어든 셈이군. 적이 쏟아지는 장소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싶네. 그만큼 아군도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 테우스의 몸이 크게 기울며 공중에서 60도쯤 선회했다. 그 와중에도 기운 몸을 바람의 쿠션이 안정적으로 받혀주었다.

"맞아. 그래야 빠르게 게이트 사이를 이동할 수도 있고.... 근데 주변에 바람 마법 깔아 놓고 실시간으로 조종하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승차감이 좋을 수 있지?"

"내 임무가 이것인데 발전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요 며칠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한 비행이 될지 연구를 좀 했다네."

그것참 서비스 정신 투철하구만. 감동적이야. 이러다 한번 잠들면 침대에 누운 것처럼 곯아떨어지겠네. 이 까마득한 하늘에서 말이지.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전에 라이프 링크를 얻기 위해 한번 들렸던 나이피아 지방.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왔을 때 싹 다 경유해서 볼일을 봤으면 좋았을 것을... 싶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다.

일단 나이피아 지방 자체가 무지하게 넓은 고원 지대.

내가 아무리 날아다닌다 해도, 이 복잡하고 광활한 땅을 구석구석 뒤지며 장기간 체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챙겨 다닐 물과 식량도 한계가 있고. 나라고 몇날 며칠을 설탕바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

하지만 우리의 금독수리, 바로 테우스를 얻은 뒤로는 그런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녀석의 목에 묶어 놓은 커다란 짐가방에 손을 넣고 종이에 싼 쿠키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래. 사람이면 좀 사람답게 먹고 살아야지.

빠득!

"음.... 이거 너무 딱딱해졌어. 라니아가 처음 챙겨줬을 때는 촉촉했는데."

"미안하네. 내가 아직 습도까지는 조절하지 못해서."

"그걸 조절하면 네가 신이게? 목 안 말라? 설탕물 줄까? 아니면 꿀물?"

"괜찮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때 가서 마시도록 하지."

당장 저 아래로 무수한 절벽과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나무들이 보인다. 저기 어딘가에 우렌의 성역이 있겠지.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면 풀하나 나지 않는 민둥산 협곡지대가 나온다. 그곳에 바로 이번 장기출장의 첫 번째 목적지인 '바람 협곡'이 있다.

"그나저나 강화 화염병이라니.... 그냥 화염병보다 얼마나 강한 걸까...."

"6차 웨이브부터는 적의 기본 병력 구성이 변하는 건가?"

테우스에게도 사본 정도는 보여 줬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다. 오히려 내가 계속 꿍얼거리며 복습을 하고 있으니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려나?

"맞아. 5차까지는 그냥 화염병인데, 반란군이 준 정보에는 '강화'라고 적혀 있어."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몸에서 불을 뿜는 게 화염병이라 했지. 강화가 붙었다면 갑옷이 더 단단해지던가, 혹은 뿜는 불이 더 강력해지겠군."

"아니면 둘 다 일지도 모르고. 그런 강화 화염병이 게이트마다 100명씩 나오고...."

"그나마 숫자가 줄어 다행이네. 5차까지는 게이트마다 300명씩 나온다 하지 않았나?"

숫자가 3분의 1로 줄었으니 개개인은 3배 더 강해졌다고 계산해야 할지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에 상황을 굴려보았다.

"여기에 순서도 중요해. 화염병이 먼저 나오면 차라리 편한데, 먼저 괴물들이 쏟아지거나, 아니면 괴물들과 화염병이 섞여 나오면 처치곤란이거든. 그런데 대뜸 폭탄 마인이 게이트 당 다섯이라...."

"폭탄 마인이 그렇게 잡기 힘든 괴물인가?"

"잡는 건 그나마 쉬운 편. 대신 빨리 안 잡고 내버려 두면 이쪽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제거순위 1위란 거군."

"맞아. 근데 내가 모르는 것들이 새로 나오는 게 문제인데...."

반란군의 정보에 의하면, 6차 웨이브부터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괴물들이 추가된다.

우선 그림자 악귀.

이름 한번 살벌하기 그지없구만.

내가 임의로 정한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물론 번역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자 악귀는 그림자만 있으면 자유롭게 공간을 오갈 수 있는 생체병기입니다.

크기는 인간보다 두 배쯤 크고, 매우 빠르며 주로 물리적인 공격을 합니다.

'이성의 붕대'에 감겨 있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마법 공격에 면역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반란군과의 교전경험이 거의 없어 이보다 상세한 정보를 알지 못합니다.

...이게 끝.

정보가 이것뿐이라 도대체 얼마나 강한 괴물인지 가늠이 안 간다.

좀 알기 쉽게 표현하면 안 되나? 버서커보다 더 강함, 혹은 타락군주보다는 약함. 대신 그림자를 타고 다녀서 신출귀몰함. 뭐 이런 식으로.

상대 비교가 안 되니 우선순위를 정하기가 까다롭다.

과연 이 그림자 악귀가 폭탄 마인보다 먼저 제거해야 할 만큼 위험한 녀석일까?

후.... 이거 골 아프네.

그렇다고 반란군을 탓할 순 없다. 오히려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지경.

우선순위는 둘째 치더라도, 이런 게 있다는 걸 미리 알고 모르고는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림자 악귀는 게이트 당 세 마리씩 나온다고 한다.

여기에 타락 군주도 세 마리.

키메라는 다섯 마리.

광전사도 다섯 마리.

공포 군주는 열 마리.

....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5차 웨이브보다 6차 웨이브가 더 빡센 게 당연한 이치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규모가 너무 뻥튀기됐잖아!

보통은 나머지가 버텨주는 동안 내가 게이트 하나를 전담해 처리하고, 급하게 다른 게이트로 이동해 함께 하나씩 처리하는 게 패턴이었는데.

이래가지고는 혼자서 게이트 하나 정리하는 게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아, 이그니스 빙의하면 가능하려나? 근데 빙의 풀리면 사실상 전투불능인데?

"갑자기 말이 없어졌군. 상황이 그렇게나 절망적인가?"

"응?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반란군 생각했어."

아니, 사실은 그게 맞아. 하지만 괜히 말해서 미리부터 기죽일 필요는 없지.

"반란군 상황이 진짜 안 좋은 것 같아서. 우리가 차원 침공 다 막을 때까지만 버텨주면 좋겠는데."

비렉스는 정보의 마지막 장에 반란군이 처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적어 놓았다.

-변절자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우리 반란군은 깊은 땅속에 숨어 수백 년의 시간을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태양도 없는 고립된 환경에서 장기간 버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식량과 물 부족은 한계에 이르렀고, 여자들은 임신이 안 되어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그나마 태어난 아이들은 신체나 정신에 문제가 있으며, 문제가 없더라도 전 세대에 비해 몸이 약해 변절자와 싸울 전사로 키울 수가 없습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2화

36장 해방과 파괴

후.

진짜 끝장에 막장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안 망하고 버틴 게 신기할 지경.

그 와중에 어떻게든 희망을 걸고 차원문을 열어 우리에게 정보를 넘겨준 것이다. 게다가 상황에 따라선 자신들이 돕겠다는 선언까지 했고.

"그 번역문이라면 나도 읽었네. 헌데 함께 싸운다는 건 무슨 뜻인가?"

"내가 전에 그쪽 차원에 한 번 넘어가서 싹 쓸고 왔다고 했지? 그런 식으로 내가 또 넘어가서 공격하면 그때는 자기들도 밖에 나와서 함께 반격하겠다는 이야기."

"그런 일이 가능한가? 당시엔 우연히 차원문이 열렸다고 들은 것 같네만."

"맞아. 불가능해."

이쪽에서 사이크 차원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으니.... 사실상 의미 없는 이야기다.

물론 비렉스가 남긴 간이 차원문 발생장치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작동을 안 하는 것 같다. 어떻게 충전할 방법 좀 없나?

"한데 차원 전쟁에서 패배하면 차원이 소멸한다고 하는데, 반란군은 그래도 상관없는 건가? 자신의 차원이 소멸해도?"

"그거 한 장에 다 담으려고 마지막 페이지를 안 적어서 그래."

-최종적으로 알드 차원이 승리하면 사이크 차원이 소멸합니다.

-부디 소멸 전에 우리 반란군을 알드 차원에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알드 차원의 주민이 되어서도 폐를 끼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흐음, 그런 내용이 있었군."

설명을 들은 테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을 버리고 이곳을 새 터전으로 삼을 계획이군.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그들을 받아줄 생각인가?"

"못 받을 것도 없지. 상황 보니 거의 자연 소멸 직전인 거 같은데. 많아 봐야 숫자가 얼마나 되겠어?"

그러니 제국민으로 받아도 되고, 본인들이 원한다면 어디 빈 땅을 마련해 작은 독립국처럼 살게 해줘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이크 차원은 딱 봐도 기술과 과학이 발달한 차원 같다. 그러니 시간 내서 천천히 대화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옛날 지구 생각도 나고.

하지만 이 모든 건 결국 차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의 일.

여기에 반란군은 '차원 침공'과 '차원 전쟁'을 구분해서 적어 놓았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어쩌면 웨이브를 다 막은 뒤에도 계속 전쟁이 이어지는 게 아닐까?

거기까지 다 이겨야 차원 전쟁에서 승리 하는 거고?

"인구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 에이션트 이글도 좀처럼 숫자가 늘지 않아 걱정이었네. 그리고...."

테우스는 기수를 내려 천천히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군. 바람의 정령이 머무는 협곡이."

* * *

바람의 정령 사일런스.

지금껏 계약했던 모든 정령을 통틀어, 전투 능력이 전무한 건 이 녀석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 녀석 없었으면 지난 9회 차 때 4차 웨이브 못 뚫었다.

키메라.

4차 웨이브부터 등장하는 이계의 지옥 같은 괴물.

생김새부터 끔찍한 이 녀석은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도 소리 방벽을 펼쳐 자신에게 날아오는 모든 마법을 전부 받아내는 게 골치 아프다.

한 마디로 마법사의 숙적.

아크 위저드인 트롬본이 키메라 한 마리랑 싸우다 목숨까지 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으, 그때 생각하니 혈압이 쭉 오르는구만.

물론 이번 일식 게이트 때는 불의 여왕을 소환, 소리방벽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짓눌러버리긴 했지만.

그것도 넓게 보면 자원 낭비다. 키메라 한 마리 잡으려고 정령왕 하나를 소모한다? 당연히 수지타산이 안 맞지.

덕분에 사일런스가 활약할 무대가 만들어진다.

녀석의 능력은 주변 일정 공간에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것.

사일런스를 소환한 순간, 소음으로 가득 찬 전장이 한순간 고요한 도서관으로 돌변한다.

덕분에 키메라의 소리방벽도 함께 사라진다. 추가로 '혼돈의 영약'을 뿌려 놓으면 수십 개의 머리 중 몇 개가 혼돈상태에 빠져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쯤 되면 사실상 공략 완료.

다만 사일런스의 활용법은 그때가 사실상 유일.

어지간하면 따로 쓸 일이 없기 때문에 미리 얻을 필요가 전혀 없다.

평소라면 게이트 열리기 직전에 계약해도 충분한 녀석인데....

"지금은 평소가 아니라 비상이니까."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언제부터인가 했는데 이미 진입해 있었구나.

바람 협곡.

수많은 절벽이 촘촘히 들어 찬 미로 같은 협곡 사이로, 다채로운 바람이 협주하듯 흐르며 얼굴을 스친다.

이 복잡한 바람이 바로 정령 사일런스와 계약할 수 있는 힌트.

정보를 처음 얻은 건 3회 차 때였다. 그때는 사령술에 올인해서 정령과 계약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지만.

-클로드. 역시 너의 사령술은 천부적이다. 벌써 이렇게 정교한 살덩이 괴물을 완성할 줄이야.

-잠시 쉬는 게 좋겠다. 네 육신은 평범한 인간이니.

-갑자기 오래 전 일이 하나 떠오르는군.

-나는 사령군주가 되기 전에 평범한 인간이었다.

-당시는 마법과 정령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 수십 년의 시간을 소모했지.

-결국 실패했지만.

-그나마 가장 근접한 것이 바람의 정령이었다.

-정령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나이피아의 서남쪽 끝에 있었다.

-수많은 봉우리와 절벽이 들어찬 곳이다. 주변에 소리가 사라지면 녀석의 영역에 들어갔다 생각하면 된다.

-난 정령을 발견했다. 녀석은 구름으로 만든 회오리처럼 생겼지. 하지만 내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계약할 수 있는지 끝없이 물어보고 소리쳤다. 하지만 내 목소린 들리지 않았고, 정령의 목소리 역시 들을 수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 겨우 그곳을 찾아냈는데 성과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한참동안 협곡을 떠나지 않고 정령에게 울분을 토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문득 바람의 소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협곡에 끝없이 부는 바람이 정령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녀석은 계속해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그게 뭐였냐고!

후....

사령군주 크록과 이런 정다운 이야기를 나눈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덕분에 훗날 나도 똑같이 바람 협곡을 찾아가 1년을 낭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난 1년 반 걸렸다. 아무래도 크록의 마법 속성이 바람이었던가, 아니면 의외로 정령 친화력이 꽤 높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6회 차 때 이곳에 와서 1년 6개월을 허비했을 때(완전히 허비한 건 아니다. 대부분 마력 향상을 위한 훈련이나 신성마법을 위한 명상 같은 걸 하며 지냈으니), 나 역시 이곳에 흐르는 바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난 바람의 정령이자, 침묵의 정령이다.

-내 이름은 사일런스. 나와 계약하고 싶다면 먼저 나를 침묵시켜라.

사일런스는 이 소리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협곡 전체를 침묵시키고 있는 주제에 널 추가로 침묵시켜 달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냐? 침묵에 침묵을 더한 슈퍼 침묵이라도 해달라는 거야 뭐야.

후.

당시에 엄청 당황했던 기억난다. 어떻게든 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려 고민한 끝에, 나는 기어이 녀석을 침묵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찾았다."

역시 내 목소리를 포함한 모든 소리가 안 들린다. 멀리 한층 깊은 협곡 사이로, 가만히 휘몰아치고 있는 정령의 모습이 보였다.

구름으로 만든 회오리.

크록이 했던 말 그대로다. 높이가 2미터쯤 되는, 마치 솜사탕 기계에서 막 뽑혀 나온 덩어리가 회전하며 조그만 토네이도를 만들고 있다.

"...."

녀석에게 접근하자 협곡에 흐르는 바람이 살짝 더 강해졌다. 뭐 똑같은 말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거겠지? 나랑 계약하고 싶으면 우선 날 침묵시켜라~

그래. 지금 당장 침묵하게 해주지.

나는 즉시 얼음으로 벽마법을 발동, 녀석의 몸을 빈틈없이 휘감았다.

마치 입구 없는 이글루처럼.

"...."

지금쯤 빠득거리며 얼음이 맺히는 소리가 울려야 하는데....

역시 이걸론 효과가 없구만. 나는 이글루와 바닥이 닿는 지점을 가벼운 화염 마법으로 녹인 다음, 다시 냉기를 뿌려 지면과의 틈을 빈틈없이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그렇다면 2단계다. 나는 정령을 가둔 감옥보다 한 사이즈 더 큰 감옥을 만들어 추가로 덮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지면과 용접.

그리고 또다시 한 사이즈 더 큰 감옥으로 기존의 것을 덮으며 새롭게 용접.

그렇게 마트료시카를 만들 듯 계속해서 감옥을 덮어씌우는 사이, 협곡에는 어느새 소리가 돌아와 있었다.

"휴. 이제 겨우 들리네. 여보세요? 거기 안에 계신 분? 이걸로 조건 달성 끝났죠?"

얼음 감옥을 두드리며 소리치자, 잠시 후 느슨한 바람이 불며 정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완전히 고립되어 침묵하게 되었다.

-나는 바람의 정령이자 침묵의 정령 사일런스. 이 고립에서 해방되면 그대와의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좋아. 출구 만들어줄 테니 거기로 나와."

곧바로 감옥의 정수리에 불덩어리를 투척, 동그란 구멍을 뚫어주었다.

화륵!

동시에 사일런스가 구멍으로 솟구쳐 나오며 내 옆으로 천천히 착지했다.

-나는 그대가 바람을 이해하는 속도에 놀라움을 느꼈다.

"응? 속도?"

-협곡에 도착하자마자 바람의 목소리를 이해하고 곧장 날 감옥에 고립시켰다.

-마치 정령 그 자체. 그대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흠. 역시 얘는 인간형이 아니라 그런가? 대화가 좀 겉도는 기분이구만. 입으로 직접 말도 못 하고 계속 바람만 후후 불고.

-그대라면 이미 모든 계약 조건을 갖추었다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위대한 정령왕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있으니, 나는 그에 따라 다음 조건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어. 나 사일런스와 계약을 원하는가?

"응. 원해."

-그렇다면 그대가 정령에 속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라.

-방법은 간단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정령 둘과 계약하라.

-그들을 내 앞에 소환해 보여준다면, 나는 다른 아무 조건 없이 그대와 계약을 맺도록 하겠다.

다른 아무 조건 좋아하시네.

그 자체가 완전 까다로운 조건이잖아!

덕분에 6회 차 때 기껏 수수께끼를 풀었는데도 울분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계약한 정령이 하나밖에 없었거든.

-언제라도 다른 정령과 계약을 맺으면 내게 돌아와라. 그대가 돌아오면 침묵의 장막을 풀고 환영 할....

"룩카르!"

쿠궁!

순간 거대한 바윗덩이가 왼편에 소환됐다. 작별 인사를 하려던 사일런스는 움찔하고 몸을 떨며 룩카르의 모습에 집중했다.

-대지의 중급 정령.... 바위 정령 룩카르. 그대는 이미 정령과 계약을 맺고 있었군.

안 그랬으면 귀찮게 여길 왔겠냐?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진도 빨리 빼야지.

"나와 이그니스."

화륵!

동시에 불꽃에 휩싸인 아름다운 장신의 여성이 오른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봐서 행복하구나. 클로드. 기왕이면 이번에도 몸과 몸을 겹치고 싶었건만."

이그니스는 내 쪽을 돌아보며 가볍게 교태를 부리며 물었다.

"어째서 그냥 소환한 것이냐? 이런 곳에 내가 싸울 적이라도?"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

동시에 사일런스의 회오리 안으로 불꽃이 휘감겨 들었다. 녀석은 흠칫 몸을 떨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바람의 정령? 어쩜 허약하기도 하지. 그런 곳에 있었느냐? 존재감이 약해 눈치도 못 챘구나."

이그니스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사일런스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녀석은 이그니스가 접근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지 크게 몸을 떨며 말했다.

-불의 정령왕이시여, 부디 그 자리에 멈춰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으응?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그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일런스는 급하게 오른편으로 빙 돌아 이그니스를 제치며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계약자여. 내가 그대의 진가를 못 알아보고 큰 실례를 저질렀다. 미안하다. 부디 용서해다오. 그리고 부디 지금 계약한다고 말해주길 바란다. 안 그러면 내가 버티지 못한다. 제발 빨리!

그리고는 애걸복걸하며 반대로 계약을 부탁했다. 그러게 힘도 약한 게 뭘 그렇게 조건을 까다롭게 걸었냐? 이그니스 앞에선 이렇게 오금도 못 펴는 주제에....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3화

36장 해방과 파괴

높게 솟은 탑, 크고 작은 충전소, 빽빽하게 들어찬 거주구역.

그 모두를 붉은 뇌전에 휘감긴 검은 폭풍이 휩쓸며 지나갔다.

콰과과과과과광!

휩쓸리는 순간 아무리 단단한 건물도 마치 종이컵처럼 구겨지며 박살난다.

폭풍의 높이는 약 60미터.

범위는 최소 100미터에서 최대 300미터까지 확장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것은 사이크인의 기술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재난이었다.

주재자.

폭풍의 정체가 바로 주재자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이크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존재의 폭주 앞에,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대다수의 사이크인은 저항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도망쳐!"

"휩쓸리면 소멸한다!"

"그쪽으로 가지 마! 주재자님의 이동 방향이잖아!"

"모, 몰라. 난 그냥 이쪽으로 도망칠... 갸갸갸갸갹!"

수많은 사이크인들이 폭풍에 휘말리거나, 혹은 박살난 건물에 깔려 존재를 잃고 흩어졌다.

"주재자님!"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현장에 나선 청색 붕대, 바로 집정관이 거대한 폭풍을 올려보며 소리쳤다.

"이성을 찾으십시오, 주재자님! 이대로는 하이 시티가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집정관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도시의 치안을 맡은 회색 붕대의 치안관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소리쳤다. 집정관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찢겨나간 자신의 붕대를 애써 고쳐 매기 시작했다.

"주재자님이 알드 차원의 정신공격에 직격을 당하셨다."

"세상에!"

"알드차원이라면, 이번에 연결된 하위차원이 아닙니까?"

"하위차원 주제에 어찌 주재자님을!"

치안관들이 기겁하며 서로를 살폈다. 집정관은 마지막 순간에 화면에서 꺼져버린 톨라리의 신호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감정 증폭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어...."

문제는 그 최악의 타이밍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집정관 자신이라는 것.

설마 클로드가 이쪽 사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죄는 그 순간에 주재자를 자신의 공간에 초대한 집정관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정관은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는 클로드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클로드... 이 가증스러운 악마 같은 놈... 네놈 때문에 이 무슨 끔찍한 일이..."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순간 도시의 방송 네트워크를 책임지는 탑이 검은 회오리에 휩쓸려 무너졌다. 집정관은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안 돼. 내 힘으론 해방된 주재자님을 막을 수 없어.... 적어도 나 역시 힘을 해방시켜야...."

"안됩니다!"

그러자 뒤늦게 따라온 녹색 붕대의 관리자들이 집정관의 주변을 포위하듯 둘러섰다.

"자의건 타의건 상관없이, 집정관께서는 절대 힘을 해방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집정관께서는 차원 침공의 마지막 단계를 책임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해방하면 그 순간에 강림하실 수 없습니다. 차원침공이 최악의 상황까지 갈 것을 대비하셔야 합니다."

"너희들...."

집정관은 자신보다 훨씬 엉망이 된 관리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주재자님이 도시를 전부 박살내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건가?"

"주재자님도 언제까지 해방 상태를 유지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분노를 배출하면 다시 이성의 붕대에 영향권으로 들어오실 겁니다."

지이이이이이잉!

순간 검은 회오리가 자신을 감싼 뇌전을 하나로 집중하며 동쪽을 향해 방출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목표는 양산형 배틀 슈트를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단 한방에 거대한 공장이 그보다 거대한 붉은 폭발에 휘말리며 산산 조각으로 박살났다.

"아...."

집정관은 온 도시에 뿌려지는 공장 파편에 넋을 놓아 버렸다.

"흐... 어... 하필 저 공장이...."

"고정하십시오. 집정관님. 괜찮습니다. 이미 차원침공에 투입될 화염병의 제작은 완료되었습니다."

"뭐? 하, 하지만 완성된 화염병이... 후원자가 공석이라 침공 병력이 그대로 남아 있을 텐데?"

"며칠 전 집정탑의 권한으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완성된 화염병은 이미 무기고로 보내졌습니다."

"전부?"

"네. 전부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걸 보십시오. 뇌전을 뿜어낸 덕분에 주재자님의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실제로 폭풍의 크기가 한결 작아진 상태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집정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리고는 급히 자신을 부축하는 관리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내가 했어야 할 일인데.... 너희 덕분에 큰일을 피할 수 있었다. 모두 감사한다."

"아닙니다. 집정관님. 집정관님께서는 주재자님의 명령을 따로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거기에 너무 몰두한 게 이런 참사를 만들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클로드 자식.... 아니 젠장!"

순간적으로 집정관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관리자들은 그런 집정관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육탄방어에 돌입했다.

"진정하십시오! 감정을 억제하셔야 합니다!"

"부디 고정을! 이대로는 주재자님처럼 강제 해방되십니다!"

"안 돼! 저걸 봐라! 저것만은 안 돼!"

집정관은 관리자들 틈으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이미 폭풍 그 자체가 된 주재자는, 새롭게 몸을 감싼 뇌전을 또다시 하나로 모으며 새로운 목표를 조준하고 있었다.

지잉....

"저 건물은...."

"헉!"

"아니 저건...."

덕분에 관리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폭풍이 겨눈 목표는 다름 아닌 '차원집정소'.

외관은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건물로, 거창한 이름답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바로 빨대.

차원 전쟁이 승리로 마무리되면, 패배한 하위 차원에 빨대를 꼽고 차원에너지를 흡수하는 시설이다.

그렇다고 진짜 빨대를 꼽는 건 아니고, 차원 에너지만 빨아들이는 특수 게이트 생성 장치라고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물론 지금 당장 빨아들이는 건 규정 위반.

하지만 어차피 훗날 승리할 것을 가정, 미리 중간이 막힌 빨대를 꼽아 놓은 상태였다.

"안 됩니다, 주재자님! 지금 차원집정소를 파괴하면.... 연결된 알드 차원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이건 명백한 규정 위반입니다! 위원회가 제재를 가할 겁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예전의 주재자님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집정관은 애써 이성을 찾으며 감성에 호소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망망대해에 조약돌 하나 던지는 수준에 불과했다. 모든 것에 해방된 주재자는 그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다.

그렇게 압축된 뇌전이 쏘아졌고.

지이이이이이이잉!

눈에는 보이지 않는 통로로 알드 차원과 연결되어 있던, 하이 시티의 가장 거대한 시설 중 하나인 차원집정소가 일격에 파괴됐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검은 불꽃이 하늘에 닿을 듯 치솟는다.

"...."

붕대를 몸에 감은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온 도시가 박살 난 채 연기를 뿜어대고, 끝도 없는 먼지와 잿가루로 뽀얗게 뒤덮였다.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무너진다! 다 무너지고 있어!"

"히익! 제발! 죽기 싫어!"

"정신 차려! 우린 죽지 않아!"

"하지만 소멸한다고! 소멸하면 영영 끝장이야!"

붕대를 받지 못한 일반 시민들은 끝없는 흥분과 공포를 발산, 평소 크기에 절반 이하로 작아진 채 혼란스런 도시를 유령처럼 배회했다.

하지만 모든 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큭...."

마지막 일격으로 단번에 수축한 검은 폭풍이, 어느 순간 헐렁이던 붕대 속으로 몸을 압축하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주재자님!"

주재자가 추락한 곳으로 집정관과 관리자들이 몰려왔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주재자는 마치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큰 소모였다. 이런 실책을... 대체 모아놨던 에너지를 얼마나 날려버린 거지?"

"주재자님! 무사하십니까!"

먼저 도착한 집정관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재자는 형편없이 찢긴 집정관의 붕대를 보며 잠시 침묵했다.

"...미안하군."

"아닙니다. 제가 주재자님이었다 해도 그 순간에 해방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도시가 엉망진창이다. 피해를 보고할 수 있나?"

"집정탑을 중심으로 3번 구역이 일자로 파괴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틀 슈트 공장도 파괴되었습니다만, 이미 제작된 화염병은 모두 무기고로 보내진 상태입니다."

"천만다행이군. 하마터면 차원 침공에 차질이 생길 뻔했다."

"그렇습니다. 다만 마지막에 주재자님께서...."

그 순간, 하늘에서 검이 떨어졌다.

콰광!

도시에서 가장 높은 주재자의 탑만큼이나 거대한 검.

그 압도적인 칼날에, 위대한 게임에 속한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차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이크 차원의 명백한 규정 위반이 확인됨.

-사이크 차원의 규정 위반에 의한 간섭으로 인해, 알드 차원의 일부 지각에 큰 변동이 발생.

"맙소사."

거기까지 읽은 주재자가 탄식하며 물었다.

"설마 차원집정소가 파괴된 것인가? 그토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시설인데?"

"...."

"빌어먹을! 어째서 이런 일이! 이러면 알드 차원에 지진을 일으킨 꼴이 아닌가!"

집정관은 나오지 않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연결된 특수차원문이 함께 파괴되었을 테니.... 분명 알드 차원에 지진이나 해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해방된 주재자님의 힘이 워낙에 규격을 초월하셨습니다."

"...."

주재자는 없는 이를 갈며 칼날에 새겨진 위원회의 통보문을 계속 읽었다.

-확인 결과, 알드 차원의 변동이 해당 차원의 잠재력이나, 전체 밸런스에 심각한 영향은 끼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됨.

-이 점을 고려하여, 사이크 차원의 규정 위반에 대한 제재사항을 통보함.

-사이크 차원은 이후 알드 차원과 최종 결투가 발생할 시, 1패를 미리 적립하는 패널티를 받았음.

문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집정관은 서서히 흐릿해지는 검을 보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제재가 약해 다행이군요. 침공 단계 생략이라도 떨어졌으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잠시 후에 도착한 관리자들도 서로를 보며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주재자의 기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게 좋은 게 아니다."

"물론 좋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그래도 최종 결투에서 패널티를 받은 게 차원 침공 단계에서 받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사이크 차원이 치른 모든 차원전쟁을 통틀어, 하위 차원이 침공을 막아내고 최종 결투까지 넘어간 경우는 단 1회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침공 단계에서 모조리 정리되었으며, 그마저도 1차 침공조차 막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만약 알드 차원이 침공을 버텨내면?"

"...네?"

"만약 그렇게 되고 최종 결투로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극도로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단 한 번도 질 수 없어."

최종 결투는 3판 2선승제.

이미 1패를 안고 시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은 결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저희들에겐 결투자가 있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오직 최종 결투를 위해 힘을 축적한 세 명의 결투자 말입니다."

집정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주재자 역시 이쪽 결투자가 패배한다는 상상 자체를 구체화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결투자는 강하다.

하지만 단판승부라면.

어떻게든 한 번만 이기면 되는 상황이라면, 알드 차원에서 대체 어떤 수를 쓸지 가늠할 수 없다.

"시작부터 클로드를 내보낸다면...."

"주재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아무리 클로드라도 그 결투자를 상대로 승리 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주재자는 또다시 온몸에 붉은 뇌전을 뿜으며 대꾸했다.

"녀석이 자폭이라도 해서 1승을 따내면 우리가 멸망한다. 그렇지 않나?"

"주재자님. 부디 고정을...."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최종 결투까지 안 가도록 막아야 한다. 침공 단계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고. 내 말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당장은 고개를 숙이고 주재자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주재자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클로드의 얼굴을 움켜쥐며 선언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규정 위반으로 새로운 패널티를 얻거나, 혹은 우리가 받은 '특수권한'을 도로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반드시 그 전에 끝장을 내. 알겠나? 절대로 최종 결투까지 가게 해선 안 된다! 절대로!"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4화

37장. 대지의 주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