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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화

2장. 예상 못한 호재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새벽부터 집무실에 나온 제국의 둘째 황자, 제스는 사건 피해 보고서를 읽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제국 마법사단 단장 켄드릭이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를 이어나갔다.

"어젯밤 녹사슴궁의 최상층인 8층과 7층, 그리고 6층의 일부까지 동시에 날려버린 것은..., 위력을 최대한 줄인 '템페스트 급'화염 마법이 확실합니다."

"파이어 오브 템페스트(fire of tempest)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제스는 보고서를 탁자 위로 집어던졌다.

"혹시 네가 벌인 짓인가? 녹사슴궁을 날려버린 게?"

"예?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제가 어찌 황궁을.... 그것도 황자님께서 거주하시는 별궁에 불경한 짓을 벌이겠습니까?"

켄드릭이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했다.

"마법의 정체가 템페스트라며? 이 주변에 그 정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지 않나?"

"아, 아니, 송구스럽지만 저도 불가능합니다. 템페스트는 아크 위저드나..., 혹은 거기에 근접한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입니다."

"자기가 무능하다는 이야기를 쉽게도 털어놓는군."

제국 마법사단은 수적으로는 우수하지만 질적으로는 수준 미달이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제스는 입을 다문 단장을 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당장 제국령에 있는 아크 위저드를 소환해라. 모두 몇 명이지?"

"두 명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환에 응할지는...."

"만약 응하지 않거나 도망치는 놈이 있다면, 곧바로 제국의 이름으로 지명수배를 건다.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어 주지. 안티매직 나이트(anti-magic knight)를 얼마든지 동원해도 좋으니 전부 데려오도록."

"그게.... 알겠습니다."

안티매직 나이트는 대 마법 전용으로 제작된 특수한 마갑을 장착한 기사단이다. 켄드릭은 불안한 표정으로 제스의 눈치를 살피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하온데 전하. 탑을 파괴한 마법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으로 봤을 때, 분명 흉수는 비행마법으로 달아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행마법도 아크 위저드나 돼야 쓸 수 있는 고위 마법 아닌가? 결국 용의자는 그 녀석들 중 하나라는 뜻이지."

"그게 아니오라... 조사 결과, 템페스트는 탑밖이 아닌 탑 내부에서부터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게 어쨌다고?"

"그렇다면 흉수도 탑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녹사슴궁은 5층부터는 창문이 없으니, 아마도 4층의 창문으로 진입해 알베르트 전하께서 계신 7층까지 난입한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니...."

"결론만 말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템페스트급 마법을 터뜨리면 시전자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뭐라?"

"만약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최고 등급의 방어마법을 거의 동시에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심지어 그러고도 무사할지 의문입니다. 템페스트가 워낙 집요하게 주변의 사물을 휘감는 특징이 있어 어지간한 벽마법, 그러니 원소 마법의 방어마법조차...."

"그래서 위력을 줄인 거 아니겠나?"

제스는 켄드릭의 말을 끊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튼 너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더욱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아크 위저드뿐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지 않나? 아니면 다른 의견이 있나?"

"제 생각엔.... 아니, 아닙니다."

결국 켄드릭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사건은 심지어 아크 위저드에게조차 쉽지 않은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대체 아크 위저드 보다 위에 뭐가 있단 말인가?

켄드릭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제스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침묵하던 제스는 옆에 선 기사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파이렌."

"네. 전하."

"오늘부터 경호 기사의 숫자를 두 배로 늘리도록. 안티매직 나이트를 동원해서."

"알겠습니다. 전하."

기사는 주먹을 가슴에 얹으며 대꾸했다. 제스는 기사의 갑옷에 새겨진 세 개의 별 문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널 못 믿는 건 아니다. 나이트 마스터(knight master) 하나만 있어도 경호는 충분하지.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또 모르는 거니까."

"염려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국의 중심인 이곳 황궁이 습격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놈들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줄은.... 게다가 하필 노린 게 그 멍청한 알베르트라니. 목적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알베르트가 원한을 사기라도 했나?"

현재 페이우드 제국에 존재하는 네 명의 아크 위저드 중, 무려 두 명이 제스와 동일한 '후원자'를 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사건도 그 두 녀석 중 누군가가 벌인 짓이리라. 이들은 후원자와 상관없이 각자의 꿍꿍이로 움직였기 때문에, 결국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이상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결국 언젠간 다 죽여야 할 놈들이야. 그런데 파이렌?"

"네. 전하."

"아크 위저드와 일 대 일로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제가 이깁니다."

얼굴까지 포함해,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기사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내리신 은혜로 완전히 새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내린 건 아니고, 내 후원자가 내린 거지."

"전하께서 연결해 주셨으니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상대가 그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일 대 일의 승부라면 저를 꺾을 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 여차하면 너만 믿겠다. 내가 제위에 오르는 그날까지."

"이미 제국은 전하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파이렌이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제스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녹사슴궁에 페넬도 있었다고 했던가?"

"시종들의 증언으로는 그렇습니다. 폭발이 일어나기 한 시간쯤 전에 별궁에 도착했다 합니다."

"그럼 이번 일은 알베르트가 아니라 페넬을 노린 짓일지도 모르겠군. 그 녀석도 뒤가 구린 놈이라.... 아니면 둘 다 노린 건가? 그 두 녀석의 공통점이 뭐지? 무능하다는 거 말고?"

"전하! 급보입니다!"

그때 전령이 문을 두드리며 집무실에 들어와 급한 보고를 올렸다.

"방금 엘스톤 백작령에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사령(死靈)군의 진격으로 엘스톤의 수비대가 또다시 패배했다 합니다! 백작으로부터 지금 당장 지원군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결국 무너졌나."

제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금방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오며 물었다.

"시간을 끌면 사령군의 규모는 점점 더 늘어나겠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적들이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언데드로 일으켜서...."

"알았다. 오늘 바로 지원군을 편성해 보낼 테니, 너는 먼저 백작령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라."

"명에 따르겠습니다!"

전령은 경례를 붙이며 집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파이렌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엘스톤 백작은 의도적으로 황실과 거리를 두는 호족입니다. 이번 기회에 버릇을 좀 고쳐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앞으로 1년쯤 시간을 끌면 태도가 완전히 바뀔 거야.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줄 테니 지원군을 달라고 애원하겠지."

"그런데 어째서...."

"내가 오늘 클로드를 황궁에 부른다 하지 않았나?"

"...클로드 황자를 완전히 끝장내실 생각이군요."

밀폐된 듯 보이는 파이렌의 투구 속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제스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충분히 즐겼으니까. 이제는 대단원의 마무리를 지어야지."

자신의 오랜 계획으로 인해, 클로드 황자는 이미 제국의 유명한 악당이자 망나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마지막을 장식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전설적인 오명이 필요했다.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신음이 절로 쏟아졌다.

"으어.... 으어어.... 이거 죽겠...."

엄살이 아니라 정말 죽을 것 같다!

온몸의 근육이 쑤셔서 꼼짝도 못하겠는데 바짝 마른 목은 계속 타들어 가고, 여기에 편두통으로 관자놀이 부근이 사정없이 지끈거린다.

이거 어젯밤 나들이가 예상보다 격렬했던 모양이구만. 고작해야 비행마법으로 왕복 한 시간을 날아다녔을 뿐인데.

회귀 직후의 몸 상태가 개판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여태까지는 적어도 첫 일주일, 아니면 최소 사흘 정도는 최대한 힘을 쓰지 않고 해독을 하며 몸을 요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훨씬 타이트한 일정 속에 움직여야 한다. 그것을 위해 선택한 마법과 신성마법의 각인이니까.

문제는 여전히 몸이 개판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이 당장의 육체적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

'블레스(bless).'

먼저 고갈된 체력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키는 신성마법을 걸어주고.

'페인 킬러(pain killer).'

몸이 느끼는 통증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신성마법을 더한다.

"으아...."

그제야 꼼짝도 안 하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후, 이거 무슨 고장 난 기계에 기름칠 해주는 것도 아니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화

2장 예상 못한 호재

문제는 제아무리 신성마법이라 해도, 이것들이 저질 체력과 허약 체질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진 못한다는 것.

결국 충분한 휴식과 육체의 단련 없이, 이런 편법으로 계속 돌려막기만 하다간 어느 순간 훅 가버리게 된다.

그나마 영약까지 섞어 마시면 최대 한 달은 버틸 수 있다. 그동안 계획했던 것들을 싹 몰아 처리하고 한 동안은 좀 쉬어야지.

"괜찮아. 다 계획대로 잘 되고 있어. 당분간은 이대로 쭉 진행하면 돼."

습관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문득 어젯밤 녹사슴궁에서 쓸데없이 떠들었던 기억이 살아났다.

처음에는 곧 죽을 놈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도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내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입 밖으로 털어 놓는 게 핵심이 되어 버렸다.

왜냐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까.

모든 비밀을 혼자 꽁꽁 싸매고 있다간 우울증 비슷한 증상이 발생한다. 그러니 이런 식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작전도 가끔씩 해 줄 필요가 있단 말이지.

추가로 그런 허약한 놈들을 죽이는데, 하필 최고 등급의 템페스트를 쓴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범인이 '아크 위저드'라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참고로 제국엔 '배신자'가 존재한다.

배신자가 뭐냐고?

작게는 이 페이우드 제국을 배신한 자들이고, 크게는 인류 전체를 배신한 놈들이다.

이계의 군대는 앞으로 10년 후에 게이트를 열고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우리 쪽으로 스파이를 파견했고, 유력한 힘을 가진 자들을 포섭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이것들의 활동이 어찌나 교묘하고 비밀스러운지, 지난 아홉 번의 회귀로도 배신자를 전부 찾아내진 못했고.

그나마 확실한 건 둘째 황자인 제스가 배신자라는 것.

그리고 현존하는 네 명의 아크 위저드 중 최소 두 명도 배신자라는 것이다. 어쩌면 세 명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배신자는 각자의 생각으로 움직일 뿐 서로 연대하거나 힘을 모으진 않는다.

그러니 제스와 아크 위저드 사이에 균열을 만들어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움이 된다.

이것은 최근 세 번의 회귀 때마다 실행한 주요 초반 전략이었다. 평균적인 결과도 꽤 괜찮았고.

그래서 이번엔 지금까지 중 가장 빨리, 바로 회귀 첫 날에 실행한 것이다.

물론 배신자 자체를 빨리 죽이면 죽일수록 좋긴 한데.... 그놈들은 어젯밤 알베르트처럼 초반부터 간단히 제거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

특히 제스는 그놈의 '나이트 마스터'를 호위기사로 항상 끼고 다니는 게 골치가 아프다. 망할 놈의 파이렌. 인류의 배신자들 중에 유일한 진짜 괴물.

"황자님, 기침하셨습니까? 물수건과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시녀장인 라니아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나는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대충 닦은 다음 쟁반에 놓인 물 컵부터 집어 쭉 들이켰다.

아침 식사는 반숙으로 추정되는 알 요리와 껍질을 바삭하게 구운 생선 반 토막, 드레싱을 뿌린 각종 허브 샐러드, 그리고 갓 구운 흰 빵과 또 다른 컵에 담긴 정체불명의 하얀 액체였다.

아침부터 이런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다니.... 눈물이 날 것 같다.

이계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로아의 성소로 도망치는 몇 주 동안은 거의 굶다시피 지낼 수밖에 없다.

나한텐 그 몇 주가 바로 엊그제까지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 모든 음식이 하나하나 전부 소중하단 말이지.

"아침 식사라 조금 간소하게 차려 봤습니다. 황자님께서 생선을 특히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마침 새벽시장에 물이 좋은 녀석이 들어와서 한번 구워봤습니다. 이건 생선 중에 비교적 비린내가 덜 나는 생선입니다. 전에는 흔했지만 요즘엔 무척 귀해진 고기입니다. 이름은...."

"이거 돌고기잖아? 잘 먹을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바로 포크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라니아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고기 맞습니다. 정식 명칭은 크라운 블랙피쉬지만 대부분 그냥 돌고기라 부르죠. 껍질이 돌처럼 생겨서.... 그런데 황자님께서 이걸 알고 계시다니, 워낙 흔한 고기라 황궁에서 취급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응? 아니야. 가끔 나와서 먹었어. 먹었으니 알지."

나는 대충 둘러대며 생선살을 능숙하게 발라내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황궁에서 이런 흔한 생선이 식사로 나온 적은 없지만.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자님이 이렇게 식사를 잘 드시니 미천한 제가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라니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불쌍한 우리 이모님. 나로 바뀌기 전의 클로드는 입이 엄청나게 짧아 대부분의 음식을 기피했기 때문에, 식사를 내오는 라니아는 항상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뭐든 잘 먹을 테니 걱정 마. 그런다고 키가 다시 자라진 않겠지만."

"아니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응? 뭐?"

"황자님께서는 분명 앞으로 많이 성장하실 겁니다. 그래서 영양이 풍부한 우유를 준비해 봤습니다. 분명 훌쩍 키가 크실 겁니다."

응. 아니야.

앞으로 10년 동안 난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다. 아홉 번을 반복하는 동안 항상 그랬거든.

물론 정성으로 날 챙겨주는 라니아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쟁반에 놓인 하얀 액체를 쭉 들이켰다.

으, 누린내.

오래 전 지구에서 마셨던 우유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누린내가 올라온다.

그래도 못 마실 정도는 아니다. 누린내만큼이나 풍미도 진해서 나름대로의 매력도 있고.

암튼 이거 마신다고 앞으로 키가 자랄 일은 없다. 그 망할 제스의 독이 한창 자라야 할 시기의 내 몸의 성장을 멈추게 해 버렸거든.

문제는 제스의 독이 이쪽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바로 이계를 근원으로 한 특수한 독이라는 것.

덕분에 이쪽 세계의 신성마법으로는 해독이 안 된다.

내가 아크 프리스트 급의 신성마법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완치 상태로 회귀를 시작할 수 없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황자님, 식사를 마치셨으니 바로 해독 영약을 드시지요."

라니아는 뒤쪽의 다른 시녀가 건네준, 아래쪽이 통통한 유리병을 양손으로 쥐고는 공손하게 내밀었다. 나는 두 말 없이 영약을 들이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으아.... 이거 진짜...."

맛 한번 끔찍하네!

태운 진흙과 나무뿌리를 한참동안 고온에 달이면 이런 맛이 날까?

그래도 꾹 참고 계속 마셔야 한다. 최고등급 신성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제스의 독이 영약으로 해결되는 이유는, 이것이 몸에 쌓인 독을 해독하는 게 아니라 아예 밖으로 배출하는데 특화되어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실 때마다 시커먼 코피가 터지기도 하고, 몸에서 꿀처럼 달콤한 땀이 흐르기도 하며, 어쩔 때는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기도 해야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한 달쯤 고생하면 제스의 독이 몸에서 완전히 빠지게 된다. 그제야 겨우 아침의 두통이라던가, 갑작스런 손발의 마비나 저림, 혹은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짜증이나 흥분에서 해방되고.

그런데 그때, 라니아가 또 다른 영약 병을 슬그머니 앞으로 내밀었다.

"황자님, 다 드셨으면 이번엔 이쪽 영약도 드셔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뭔데?"

두 번째 영약? 지금까지 이런 건 없었는데?

"어제 황자님이 토해내신 독을 연구해서 만든 새로운 영약입니다. 말씀드리기 황공하지만...."

라니아는 괴로운 얼굴로 한참 고민하다 말했다.

"실은 식사가 문제가 아니라, 황자님께서는 지난 몇 년간 드신 독약의 영향으로 인해 몸의 성장이 완전히 멈춰버린 상태입니다."

"아.... 그... 그래?"

실망한 모습을 보여주느라 연기를 좀 했다. 라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풀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단순히 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돌아올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새로 제작한 이 영약이라면, 멈춰버린 황자님의 성장을 다시 돌이킬 수 있습니다."

뭐?

정말?

제국에 단 세 명밖에 없는 '나이트 마스터'인 파이렌이 인류의 배신자란 걸 알았을 때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다!

아니,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라니아가 내 키를 다시 자라게 해줄 영약을 개발했다고? 지금까지 아홉 번의 회귀 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게... 가능해?"

"가능합니다. 저는 영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확신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습니다. 전부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입니다만. 여하튼 황자님을 위해 특별히 만든 영약이니, 부디 저를 봐서라도 꼭 드셔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라니아가 최고 등급의 영약사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하지만 나 역시 같은 등급에 오른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 키를 다시 자라게 만드는 영약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걸까?

회귀를 시작한지 고작 2일차인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지?

"근데 이거...."

먼저 마신 해독 영약이 진한 갈색이었다면, 이번 것은 마치 석탄을 끓인 것처럼 새까만 검은색이었다.

"색깔이 끔찍하네. 이름이 뭐야?"

"영약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던 영약이라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성장의 영약'이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완전 신약? 진짜?

라니아가 날 상대로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 그렇다면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영약사의 경지로 올라섰다는 뜻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회귀 이틀 만에 라니아에게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걸까?

설마 회귀 첫날에 알베르트와 페넬을 제거한 게 라니아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켰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일단 접점이 없잖아? 라니아는 지금 알베르트와 페넬이 죽었는지도 모를걸?

아니면 알베르트가 준 영약을 마시고 잠시 후에 토한 거? 그건 전에도 세 번이나 똑같이 했는데?

아니면 내가 그 전에 하지 않은 다른 이야기를 했나? 혹시 저녁 밥 먹을 때 뭔가 키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던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화

2장 예상 못한 호재

...아니, 잠깐.

그 전에 이걸 알아낸다고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이게 마지막 회귀라 다음에 써먹을 일도 없는데?

"...마실게."

나는 숨을 참으며 문제의 영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들이키는 도중 라니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 성장의 영약은 반드시 효과가 나올 겁니다. 그런데 마신 직후에 약간의 트러블이 생길 수 있으니 너무 놀라진 말아 주세요. 얘들아!"

"음?"

순간 밖에 대기하던 시녀 네 명이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동시에 약병을 비운 나는 찌릿하고 사지가 저리는 듯한 감각에 전율했다.

그것은 뒤에 찾아올 폭풍의 전조였다.

"으.... 으아아악!"

곧바로 뼈마디가 갈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한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죄송합니다 황자님!"

"빨리 붙잡아! 어서!"

몰려온 시녀들이 내가 날뛰지 못하도록 사지를 움켜 안았다. 동시에 라니아가 손수건으로 감싼 손가락을 내 입에 집어넣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괜찮으니 꽉 무세요!"

"으읍...."

"황자님! 아프신 거 압니다! 그러니 부디...."

"으브브. 으브브브."

나는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라니아는 깜짝 놀라며 내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 그게... 이건 마시면 신경에 강한 통증이...."

"괜찮아. 잠깐 아팠는데 이제 수그러들었어."

정확히는 미리 걸어놓은 '페인 킬러'의 효과와 상쇄되며 통증이 사라졌다. 그러자 라니아를 비롯한, 사지를 움켜쥐고 있던 시녀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나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저희들이 죽을죄를...."

"됐어. 내가 날뛰다 다칠 거 같아서 미리 잡아준 거지? 괜찮으니까 그만 일어나."

"황자님...."

시녀들은 감격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다만 라니아는 어딘지 착잡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통증이 예상보단 약한 것 같아 다행이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황자님의 몸을 다시 성장시키고 싶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나 좋으라고 한 건데 용서하긴 뭘 용서해. 그보다도...."

통증은 사라졌지만 속에서 코를 마비시키는 독한 향이 계속 올라온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연신 몸서리를 쳤다.

"냄새 진짜 끔찍하네. 죽을 때까지 먹고 싶지 않은 맛이야."

"하지만 황자님, 성장의 영약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적어도 하루에 한번 이상은 드셔 주셔야 합니다."

"이걸 매일?"

매일은 너무 심하잖아! 아무리 키가 다시 자란다 해도.

...아니, 아니지.

현재 내 키는 대략 145cm 정도.

이런 체격으로는 제아무리 육체를 단련한다 해도 제대로 된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미 다섯 번째 회귀 때 해봤는데 어중간한 수준에서 멈춰 버렸고 .

하지만 175cm, 아니 최소 165cm만 되더라도?

그렇게 되면 희망이 있다!

덕분에 지난 회귀 동안 아예 포기하거나 생략하고 지나갔던 육체와 관련된 기연들이 대체 몇 개던가? 어쩌면 이번에는 그 모든 토끼를 한 번에 다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시녀장님."

그때 키가 엄청나게 크고, 눈매가 날카로운 새로운 시녀가 방안으로 쑥 들어왔다.

"방금 황궁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황자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아직 침소에 계신다 하니 이것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메르데스. 황자님이 계실 때는 황자님께 먼저 인사를 올리세요. 큰 무례입니다."

라니아가 주의를 주자, 메르데스라 불린 시녀가 내 쪽으로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가 어리석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죄까지야. 근데 넌 누구야? 처음 보는데?"

"저는 메르데스라 합니다. 평소엔 저택의 지하에서 일하고 있어 밖으로 잘 나오지 않습니다."

메르데스는 사교성이 부족한 듯, 딱딱한 말투로 천천히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실제로는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루넨브레스 가문의 시녀는, 대부분 라니아가 영약사의 재능을 가진 아이들 중에서 직접 선발한다.

그중에도 메르데스는 영약의 재료를 수집하는데 특출한 재능을 가진 시녀였다.

덕분에 대부분의 시간동안 숲과 야생을 떠돌아다녔고, 저택에 돌아와서도 지하실에 틀어박혀 자신이 채집한 재료를 손질하는데 몰두했다.

그러니 영약사 루트를 타게 된다면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되는 아가씨다.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회귀 때 메르데스와 꽤나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던 걸 떠올렸다.

"메르데스구나. 반가워. 근데 뭘 가져왔다고?"

"이것은... 섭정을 맡고 계신 제스 황자께서 보내신 서한입니다."

라니아가 대신 두루마리를 받아 들며 입술을 깨물었다.

"황자님, 무례한 일이지만 제가 먼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응. 맘대로 해."

"감사합니다. 그럼...."

라니아는 심각한 얼굴로 두루마리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동안 나한테 독약을 먹인 게 제스라는 걸 알았으니, 혹시 이번에도 뭔가 독수가 들어 있지 않나 조사하는 거겠지?

"이것은 소환장이군요."

그러다가 내용물까지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쓸데없는 내용이 잔뜩 섞여있었지만, 결론은 오후 3시까지 황궁 대전(大殿)에 있는 '제국의 방'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제국의 방은 황제가 신하들을 모아 놓고 국정을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어째서 황자님을 그곳으로 소환하는 걸까요?"

"나도 모르지. 근데 오후 3시면 바로 준비해야겠네."

저택에서 황궁까지 마차를 타고 가면 세 시간 이상 걸린다. 어젯밤처럼 하늘을 날아가면 30분도 안 걸리는데 말이지.

"지금 황궁은 섭정인 제스 황자의 천하입니다. 그리고 황자님께 독을 먹인 흉수가 바로 그분이고 말이죠."

"그래. 넷째 형님은 그저 전달책이었고, 진짜는 둘째 형님이지."

"소환장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없지만... 절대로 좋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다만 분하시더라도 독약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은 정면으로 충돌하면 황자님만 다치십니다."

라니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당부했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소리도 안 할게.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다 오면 되지?"

"무슨 소리를 들으시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알았어. 욕하면 욕하는 대로 듣고, 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게. 내 평판이 말이 아니잖아? 이제 정신 차렸으니 조금씩 바꿔봐야지."

정확히는, 이번 한방에 모든 평판을 뒤집어 버릴 셈이다.

지금 제스가 날 황궁으로 소환한 이유는, 바로 제국이 파견할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위해서다.

일명 '엘스톤 전쟁' 이벤트.

이것은 회귀 초반에 반드시 벌어지는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

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엘스톤 백작령은 이미 1년 전부터 '사령군'이라 불리는 세력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계속해서 제국 중앙 정부에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그동안 의도적으로 무시하던 제스는 마지막 순간에 날 물 먹이기 위해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여기서부터 다양한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일단 첫 회귀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받아들였다가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두 번째 회귀 때는 중간에 뛰어 들어온 알베르트에게 사령관 자리를 겨우 넘기고 시간을 벌 수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번엔 알베르트가 죽었으니 중간에 난입도 못하겠네?

아무튼 계획은 미리 다 세워놨으니 그대로 실행만 하면 된다. 이 한방으로 나는 '제국 역사상 둘도 없는 망나니'에서 '신의 선택을 받은 구원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 * *

제국의 2황자인 제스는 올해 26살로, 16살인 나보다 딱 열 살 위다.

쓰러진 황제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황태자마저 원인 모를 중병으로 자신의 별궁에서 두문불출하는 지금, 섭정 자리를 꿰찬 제스는 중신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제국의 국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것이 회귀 초반에 제스를 바로 죽여선 안 되는 첫 번째 이유.

이미 이계의 스파이에게 포섭당한 배신자라는 걸 알아냈고, 그동안 나한테 몇 년 동안 독약을 먹인 천하의 죽일 놈이라 당장 잡아 족치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대책 없이 냅다 죽여 버리면 안 된다. 제국의 국정이 무너져버려 더 큰 피해가 발생하거든.

"암튼 죽여야 할 놈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들릴 듯 말듯 불평을 늘어놓으며, 나는 황궁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제국의 방'으로 입장했다.

바로 그 순간, 제국의 방에 집결해 있던 대신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저분은... 클로드 전하?

-무슨 일이지? 오늘 있을 중요한 일이라는 게 클로드 전하와 관련이 있나?

-저분은 염치도 없나? 1년 전에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잘도 돌아왔군.

-어디 구석에 있는 저택에 근신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여전히 콩알만 하군. 황가의 피를 이은 주제에 어찌 저렇게 왜소할 수 있지?

-소문에는 저 나이에 하루 종일 유흥가에 살면서 방탕하게 지낸다던데....

아오, 이 대놓고 수군거리는 놈들.

이 빡치는 느낌도 오랜만이구만. 회귀를 열 번을 반복했는데도 이런 뒷담화는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아니지, 대놓고 수군대니 이건 뒷담화가 아니라 앞담화인가?

"신료들은 정숙하시오."

황좌에 앉아 있던 둘째 형, 제스가 몸을 일으키며 장내를 가라앉혔다.

정확히는 황좌가 아니라 황좌 앞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의자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전권을 쥔 제스의 모습은 꽤나 위압적이었다.

"오랜만이구나 클로드. 그동안 건강하였느냐?"

"네 형님. 신경 써 주신 덕분에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나는 광대뼈 부근에 경련이 일어나려는 걸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가증스러운 놈.

나한테 몇 년 동안 독약을 먹여 놓고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냐?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화

2장 예상 못한 호재

"건강이 좋아졌다니 다행이구나. 급하게 불렀는데 바로 와주어 고맙다."

"형님께서 부르셨는데 바로 달려오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면서 들으니 어젯밤 황궁에 큰 소란이 벌어진 것 같아 걱정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강녕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여전하시다. 아직 병석에 누워 계시지."

"형님들과 누님들의 안위도 걱정됩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무슨 일은 무슨 일이야, 내가 알베르트와 사촌형을 별궁째 함께 날려버렸지.

제스 너도 실은 불안해서 속이 타고 있지?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어젯밤 소란은 나중에 피해가 확인되면 정리해서 발표하겠다. 당장은 크게 염두에 두지 마라."

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왼편에 석상처럼 세워 놓은 나이트 마스터 파이렌이 있고, 후방에는 제국 마법사단의 마법사 스무 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절실하게 느꼈지만, 제스의 이런 신중함이 참 골치 아프단 말이지.

키는 알베르트보다 조금 작고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 하지만 선이 날카로운 얼굴과 차가운 시선이 앞에 선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매사에 치밀하고 냉혹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여기에 권력까지 쥐고 있으니 누구도 함부로 굴 수 없다.

여기에 제국의 다양한 고위 귀족들과 연이 닿아 있고,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군부의 지지도 받고 있으니 적으로 돌리면 가장 피곤한 타입이다.

바로 그런 놈이 날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며, 동시에 황제와 황태자를 몰락시킨 범인이다.

-뭐지? 클로드 전하가 저렇게 정상적으로 말을 하는 분이셨나?

그때 대신들끼리 서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음, 전처럼 횡설수설도 않고 말도 더듬지 않는 군.

-1년 전과 딴판이야. 몰라볼 정도로 차분해졌는데?

-그래 봤자 그 악당이 어디 가겠나? 난 작년의 그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그새 평가가 살짝 좋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비난하고 멸시하는 말투는 여전하다.

물론 대신들의 이런 태도는 당연하다. 실제로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

지금으로 부터 1년 전.

당시 황궁에 살던 15살의 클로드는(내가 소환되기 전 이야기다), 불현듯 테이블 위에 놓인 파란색 병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고급으로 추앙받는 술이었다. 누가 무슨 생각으로 그걸 클로드의 방에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목이 말랐던 클로드는 별 생각 없이 뚜껑을 따고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문제는 그 술의 도수가 40도를 넘었다는 것.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어째서인지 빈 병을 바닥에 내려쳐 깼던 거 같은 희미한 감각만 남아 있고.

아무튼 그 뒤는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순식간에 인사불성이 된 클로드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황궁을 뛰어다녔고, 갑자기 회의실에 난입해 모여 있던 대신들을 덮치며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대신 두 명이 중상을 입었고, 급히 말리던 시종 하나가 과다출혈로 죽다 살아났다 한다.

그러니 악당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물론 제스의 독약과 독한 술이 결합해서 발작이 일어난 거겠지만.

하지만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클로드가 술에 취해 깨진 병을 들고 황궁에서 깽판을 부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에 중상을 입은 대신은 충격을 받고 정계를 은퇴해 버렸다. 선황제부터 모시던 명망 높은 귀족이었는데, 은퇴한 이후에 매우 적극적으로 '클로드 황자는 손쓸 수 없는 개망나니 악당이다!'라는 이야기를 사방에 퍼뜨리고 다녔다.

망할! 그렇다고 제스가 나한테 독약을 먹였다 고발할 수도 없다!

한쪽은 황제와 황태자의 자리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유능하고 촉망 받는 황자.

그리고 한쪽은 어려서부터 사고만 치고 다닌 골칫덩이 망나니다.

당연히 내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사방에서 노골적인 십자포화가 쏟아지는 거고.

-그래봤자 곧 밑천이 드러날 거요. 한번 망나니는 영원한 망나니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 황궁에 입궁하는 것 자체가 제국 황실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니까.

점점 심해지는 비난과 욕설에, 나는 무심코 마법을 발동시키려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참아, 내 안의 아크 위저드.

마음 같아서는 템페스트를 마구 쏟아 부어 대신들은 물론이고 만악의 원흉인 제스와 파이렌까지 몽땅 날려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 마지막 10회 차를 시작부터 망쳐버리고 말겠지?

"클로드. 오늘 널 이 자리에 부른 것은 네가 실추시킨 황가의 명예를 직접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제스의 입주변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저 자식, 저거 내가 제국 최초로 기사단을 말아먹는 오명을 뒤집어쓸 걸 상상하면서 웃음을 참고 있는 거다.

"오늘 새벽, 제국의 동쪽 영토를 수호하고 있는 엘스톤 백작으로부터 지원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알다시피 엘스톤 백작령은 작년부터 '사령군'과의 전면전을 시작했으며, 현재 전황이 매우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한다."

여기서 사령군이란 제국의 변경을 괴롭히는 네크로 아미(necro- army). 즉 언데드로 이뤄진 세력을 말한다.

그 실체는 '크록'이라는 이름의 사령술사가 이끄는 죽음의 군대.

이쪽으로 파고들어가는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테크트리다. 물론 이번에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접촉하게 되겠지만.

"요청을 받은 제국 정부는 곧바로 엘스톤 백작령에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클로드, 바로 네가 이 지원군의 대장이 되어 사령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라."

"제가 군대를... 말입니까?"

제스는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마음에 드는 듯,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대를 이끌고 외적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 것은 예로부터 황자들에게 주어진 책무다. 그러니 전력으로 전쟁에 임하여 네가 떨어뜨린 명예를 스스로 회복하도록 하라."

동시에 사방에서 탄식의 소리가 울렸다.

-말도 안 돼‧....

-저 망나니 황자에게 군대를?

-섭정 전하께서 동생을 과하게 챙기시는군. 막내 황자의 명예를 세워주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두다니.

-어차피 전쟁은 기사들이 치르는 것 아닌가? 클로드 황자는 안전한 곳에서 전공이나 받아먹게 하려는 거지.

대신들의 여론은 막내 동생인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는 제스의 인품에 대한 감탄과, 반대로 이런 중책을 절대 맡으면 안 되는 나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아니, 근데 이거 생각해보니 너무한 거 아닌가?

욕을 하려면 나한테 일을 맡긴 제스도 같이 욕해야지, 왜 제스는 칭송하고 나만 혼자 욕을 먹는 건데?

여기에 더해, 이 대신 놈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마치 지원군을 보내기만 하면 전쟁에서 당연히 이기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 엘스톤 백작령을 침공한 사령군의 전력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다. 허접한 기사단 따위는 순식간에 전멸시킬 정도로.

"...부족한 몸이지만, 형님께서 맡겨주신 임무를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일부러 심하게 떨며 제스의 시선을 피했다. 이 녀석, 감이 예리해서 괜히 마주보다간 내 몸에서 독약의 약효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단 말이지.

"각오가 좋구나. 너를 위해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기사단을 붙여 주겠다. 선전을 기대하마."

"감사합니다. 형님."

참고로 그 명망 높은 기사단의 이름은 '제국 수호 기사단'이다.

멀쩡한 건 그저 이름뿐이고, 내용물은 실력도 안 되는데 기사 계급장 달고 싶어 하는 귀족가문 떨거지들의 집합체.

이딴 거 쥐어주면서 생색내지 말란 말이지.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몸을 더 깊이 숙이며 말했다.

"그럼 일단은 저택에 돌아가 출전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제스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원군의 편성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니 돌아갈 필요 없이 황궁에서 대기하고 있다 준비가 끝나면 바로 합류하여 출전하라."

이 자식, 한시라도 빨리 나를 전장으로 보내고 싶어 아주 그냥 안달이 났구만.

물론 이것도 다 예정된 수순이다. 이럴 줄 알고 저택을 나올 때 마차에 이것저것 실어 왔다. 예를 들면 라니아가 제조한 해독 영약이라던가.

"알겠습니다. 그럼 황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출진하겠습니다. 쿨럭, 쿨럭...."

마무리로 폐병 환자처럼 연신 기침을 토했다. 제스는 짐짓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맘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몸 관리를 잘 하고 무사히 돌아 오거라. 승리하고 귀환하면 그때는 내 권한으로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 주겠다."

"감... 감사합니다. 형님. 쿨럭...."

좋아. 이번에도 잘 통하는구만.

지난 회귀 때도 이런 식으로 연기해서 공수표를 남발하게 만들었다. 물론 제스의 머릿속에 내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시나리오는 없겠지만, 나는 이미 저 녀석에게 뜯어낼 구체적인 소원과 이후의 구상까지 완벽하게 끝낸 상태.

그럼 이제 빌드 업은 다 끝났으니, 엘스톤 백작령으로 마음 편히 평판 작업이나 하러 가볼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화

3장 평판 작업

그것은 종말의 시작이었다.

무채색의 먹먹한 광채와 함께 여러 개의 게이트가 열리고, 크롬색의 갑옷을 입은 이계의 병사들이 광장을 향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녀석들은 갑옷과 연결된 긴 호스에서 끊임없이 불꽃을 쏟아냈다. 광장 주위의 건물들이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제도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쳐나온다.

"으...."

이것이 바로 이계의 첫 번째 침공, 바로 1차 웨이브의 풍경이다.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만 여덟 번이며, 머릿속으로 세세한 장면을 떠올린 건 셀 수조차 없을 정도.

그래서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번 10회차 때 꾼 첫 번째 악몽이다. 앞으로 10년 뒤 진짜 침공이 시작될 때까지,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악몽에 시달리게 될까?

"으.... 으극?"

정신을 차리자 말 위에서 몸이 휘청이고 있었다.

으,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 나는 급하게 균형을 잡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행군하다 졸아서 낙마하면 대체 무슨 망신이냐...."

"황자님?"

바로 그때,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노인이 내 쪽으로 붙으며 공손하게 물었다.

"불편하신 곳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후방에 마차가 있으니 잠시 들어가 쉬셔도 됩니다."

노인의 정체는 명망만 높은 제국 수호 기사단의 단장, 듀론이었다. 나는 뒤를 따라 행군 중인 500여 명의 기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문제없어. 그보다 전장이 가까워진 것 같은데 기사단의 분위기는 어때?"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불안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제국 수호 기사단은 여러모로 부족한 기사단이니까요."

듀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한눈에 봐도 실력이 부족하고, 훈련 상태도 엉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기사단에 '제국 수호'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저 제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이우드 제국은 최하층의 천민을 제외하고, 모든 남자가 최소 3년간 병역의 의무를 치러야 한다.

문제는 지체 높은 귀족가문의 자제들이 다른 평민과 함께 일개 병사로 병역을 치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이들이 명예롭게 병역을 치를 수 있도록 특별한 기사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제국 수호 기사단이다. 앞에 제국은 빼고 보통 수호 기사단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어쨌든 기사의 기본 조건은 마갑을 입는 것이고, 마갑을 입으려면 신체능력을 일정 이상으로 단련해야 하며, 이것은 가문과 상관없이 개인의 타고난 자질과 노력 없이는 달성이 불가능하다.

결국 수호 기사단의 정체는, 기사로서 갖춰야할 최소한의 커트라인조차 넘지 못한 귀족집안 아들들이 어떻게든 기사 흉내를 내기 위해 만든 가짜 기사단이다.

"기마에 능숙하지 않은 자들도 많아 행군속도가 느린 것도 문제입니다. 그에 비해 황자님께서는 능숙하게 말을 타시는군요. 말을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처음이야."

물론 이번 회귀 때 그렇다는 거다. 특별한 능력이 없던 1회차 때는 엉덩이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끝없이 말을 몰아야 했으니까.

"과연.... 역시 외견만 가지고 기사의 역량을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거로군요. 그러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노인이 당황한 모습으로 사죄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작고 말라서 말조차 제대로 못 탈줄 안 모양인데,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항상 똑같은 반응이라 이젠 발끈할 생각조차 안 든다.

오히려 여기서 대처를 잘 하면 듀론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에게 추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번엔 6회차 때 했던 방식을 그대로 해봐야지.

"음...."

나는 일부러 인상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듀론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가 눈치 없이 불경한 이야기를 꺼내어 황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말을 오래 탔더니 허벅지가 아파.... 음? 불경한 이야기? 그게 뭔데? 방금 무슨 이야기를 했어?"

"네? 아니 그러니까...."

듀론은 눈을 크게 뜨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대범하신 분이시군요."

좋아. 별거 아니긴 하지만 하나 패스.

아무튼 사실에 의거한 편견에 빠진 다른 대신들과 달리, 이 노인이 내게 특별한 악의가 없다는 건 지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지금 시점에선 그것만으로도 매우 특별한 인재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나는 제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악당이며, 모두가 색안경을 쓰고 보는 골칫덩어리니까.

아무튼 과거에 자주 함께했던 이 듀론이란 인물을 평가하자면....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매사에 거짓 없이 솔직하며, 높은 수준의 다양한 지식을 갖춘 인격자다.

문제는 장점이 이것뿐이라는 것.

일단 전쟁이 터지면 그가 가진 높은 인품과 다양한 지식은 전투에 있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일신의 무력이 기사단장 자리를 맡기엔 매우 빈약한 수준이며,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 역시 기대 이하.

그러니 잘 써먹으려면 무관이 아니라 문관 쪽으로 돌려야 하며, 굳이 전쟁에 동원하려면 후방에서 참모를 맡기는 게 좋다.

그러고 보니 6회 차 때 전군 보급 담당을 맡겼더니 꽤 잘 해냈던가?

"황자님께서는 그동안 제가 들은 이야기와는 정말 많이 다른 분이시군요."

"그래?"

나는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악명이 좀 자자하지? 대신들 중에 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실제로 좋은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황자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무래도 소문이 과장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황궁에 있을 때 사고치고 다닌 건 사실이니까. 아무튼 좋게 봐줬다니 고마워"

"황공한 말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듀론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다시 옆으로 물러났다. 나는 황무지에 가까운 주변 풍경을 보며, 문득 아주 오래된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바로 첫 번째 회귀 때의 일이다.

당시에도 얼떨결에 지금처럼 전장을 향하던 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 실패와 여전히 몸에 쌓여 있는 독약의 부작용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기사단의 선두를 달리던 애송이는, 막상 정면에 몰려오는 언데드 대군을 발견하고는 겁에 질려 말머리를 돌려 버렸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뒤로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느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지휘관인 내가 적을 눈앞에 두고 튀어 버린 바람에 뒤에 있던 기사단과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고 진형이 붕괴되었다고 한다.

기사단장인 듀론이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러 분전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몰려든 적의 군대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고, 기사단과 군대는 저항 한번 못해보고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당시에 동원된 2,500의 병력 중 사상자만 무려 8할을 넘었다고 한다.

그것은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패배였다.

은신의 각인으로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돌아온 나는 이후 평생 동안(그래 봤자 10년이지만) 이 일로 가루가 될 때까지 까이며 저택에 유폐되었다.

"그것도 진짜 오래전이네."

어째 옛날 일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오는구만.

그런데 그때, 뒤쪽 진영에서 작은 소란이 생기며 투구를 깊이 눌러쓴 기사가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황자님. 시녀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메르데스?"

목소리의 주인은 루넨브레스 저택의 시녀인 메르데스였다.

엥? 이 키 큰 아가씨가 왜 지금 여기 있어?

지난 회귀 동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메르데스는 영약사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마갑을 입고도 저렇게 멀쩡하지? 훈련 안 된 일반인이 마갑을 입으면 10분도 못 버티고 쓰러질 텐데? 그게 아무리 최하급 마갑이라 해도?

"메르데스 맞지? 여긴 웬일이야? 그 갑옷은 또 어디서 났고?"

"황자님이 전장으로 향하신다는 소식에 시녀장께서 급히 파견하셨습니다. 수호 기사단의 갑옷을 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무슨 일입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듀론이 내 쪽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목소리를 낮췄다.

"라니아가 날 보호하라고 여기까지 보냈어?"

"제가 무슨 재주로 황자님을 보호하겠습니까. 그저 시녀장께서 만드신 '성장의 비약'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아, 그거...."

"지난 이틀 동안 못 드셨으니, 오늘은 한번에 3회 분량을 드셔야 합니다."

"진짜? 그렇게 많이 먹어도 괜찮아?"

"...."

메르데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문제가 있다고 느낀 듯, 허리에 찬 수통을 뽑아들고는 잠시 동안 고민에 잠겼다.

그보다 어떻게 마갑의 힘을 버티고 있는 거지? 일반인이 입으면 순식간에 체력이 빨려나가 쓰러질 텐데?

"메르데스? 혹시 전에 기사 훈련 받은 적 있어?"

"...제 느낌으로는 한 번에 3회 분량을 드셔도 생명의 위험은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방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기사 훈련 받은 적 있냐고."

"없습니다. 그런데 기사 훈련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보통 체력 훈련하고, 무기 휘두르고, 마갑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적응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 기사 지망생들 모여서 으쌰 으쌰 하는 거. 정말 한 번도 안 해봤어?"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마갑을 입은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괜찮아? 갑자기 힘이 빠지고 그러지 않고?"

"멀쩡합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힘이 솟는 느낌입니다. 지금이라면 아주 무거운 것도 들 수 있고,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야 마갑의 효과가 원래 그런 거니까...."

이거 봐라?

첫 마갑 착용에 이 정도라면 완전 특급 재능인데?

참고로 지금 내가 최하급 마갑을 착용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최소 3년동안 신체 단련과 마갑 적응 훈련을 마쳐야 한다.

근데 메르데스는 영약사로도 거의 최고등급 찍는 애잖아?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다재다능할 수 있지? 아직 나이도 어린데?

"지금 네가 몇 살이지?"

"저는 16살입니다."

"나랑 동갑이네. 그런데 훈련도 없이 마갑을 입었어. 너 대단하구나?"

"...저는 영약 재료를 채집하는 걸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산속 깊은 곳까지 자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이 건강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메르데스는 무뚝뚝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에요 이 아가씨야. 마갑이란 게 고작 산 좀 탔다고 착용할 만큼 말랑말랑한 물건이 아니라고.

결국 타고난 힘과 근골이 강력하단 소리다. 그러고 보니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면... 이 아가씨가 확실히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고 온몸의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지.

그렇다고 기사 쪽으로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세상에. 아홉 번을 반복해도 모르는 게 있을 줄이야."

"방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투구를 쓰고 있어서 작게 말씀하시면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너 앞으로 나 좀 자주 봐야겠다고."

"저를 비롯한 루넨브레스 가문의 모든 시녀는 언제나 황자님의 명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메르데스가 갑자기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뭔가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 앞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연기? 음.... 아, 저거?"

정말로 멀리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얘는 눈도 엄청 좋구나. 말하지 않았으면 모를 뻔했네.

"슬슬 시작이네. 혹시 모르니 넌 뒤로 물러나 있어."

"알겠습니다. 성장의 물약은 전투가 끝나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황자님? 이 기사와 아시는 사입니까?"

그때 듀론이 옆으로 다시 붙으며 물었다. 나는 빠르게 반응하며 멀리 전방을 가리켰다.

"아니, 잠시 물어볼 게 있어 불렀어. 저 앞에 연기가 나만 보이는 건가해서."

"네? 연기라니.... 오, 정말 저기 멀리서 연기가 올라오는군요."

듀론은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탄식했다. 나는 메르데스에게 뒤로 빠지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적들이 몰려오나봐. 연기가 나는 걸 보니 마을이나 도시가 공격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과연... 황자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지금 당장 전군의 진로를 동남쪽으로 돌려! 어서!"

듀론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며 기사단에 명령을 내렸다. 나는 천천히 물러나는 메르데스에게 살짝 웃음을 지은 다음, 연기가 올라오는 방향으로 직접 말머리를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화

3장 평판 작업

지옥.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요새의 풍경은 지옥이었다.

정확히는 요새라기보다는 사방에 적당한 높이의 방책을 세운 마을이었다. 엘스톤 백작은 사령군으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변경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을 저런 식으로 야전 요새처럼 개조해 놓았다.

하지만 압도적인 적의 공세 앞에선 무의미한 저항일 뿐.

시체를 엮어 만든 거대한 살덩이괴물이 방책을 단숨에 박살내고.

콰아아아아앙!

내부로 진입한 해골 병사들이 수비 병력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뒤를 이어 물밀듯이 밀려든 수천의 좀비 떼가 본격적인 학살을 시작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주민들은 쏟아지는 좀비의 대군에게 산채로 뜯어 먹히며 죽기 직전까지 비명을 질렀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이 요새의 뒤쪽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적의 물량은 요새 전체를 포위할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퇴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슬라임이 먹잇감을 몸속에 가두고 서서히 녹여 먹는 듯한 풍경.

으윽.

역대 회귀 중에 가장 빨리 왔더니 이 장면을 직접 보게 되는구나. 지금까지는 항상 사령군이 요새를 끝장낸 다음에 싸움이 시작 됐는데.

"황자님!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적의 일부가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뒤에서 듀론 단장이 내 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너무 앞서 나가셨습니다! 전투는 저희가 할 테니 황자님께서는 침착하게 후방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실제로 요새를 포위한 사령군의 일부가 이쪽을 발견했고, 곧바로 맹렬한 기세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뼈만 남은 해골과 아직 썩은 살점이 붙어 있는 좀비. 그리고 입에 담기조차 싫은 끔찍한 형상의 언데드 괴물들.

일반인이 저 꼴을 보면 공포에 심장이 요동칠 것이다. 물론 나야 워낙 많이 봐서 특별한 감흥은 없다. 사령술사가 되어 직접 언데드 군대를 부린 적도 있고. 무엇보다 이계의 괴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들 장난 수준이지.

그보다 내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드는 것은,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요새 안의 사람들.

살려야 한다!

나중에 5차 웨이브까지 막으려면 백성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그러니 빨리 가서 저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고!

"이랴!"

나는 곧장 말을 달렸고, 등 뒤로 듀론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황자님! 큭! 전군 돌격! 황자님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돌발행동을 하는 나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쪽은 무거운 갑옷 안 입고 체중도 누구보다 가벼웠으니까.

* * *

"전군 돌격! 황자님을 지켜야 한다!"

듀론은 돌진하는 클로드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클로드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황자를 태운 군마는 마치 아무것도 태우지 않은 듯 바람처럼 내달렸다.

'갑옷도 안 입은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돌진하는 거야!'

적의 모습이 육안에 들어오면 뒤로 빠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황자는 예상과 반대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질주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보다 멀쩡했는데.... 막상 일이 터지면 앞뒤 안 가리는 망나니였나? 소문처럼?'

물론 그렇다 해도, 내심 가슴 한구석이 울컥하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 저 돌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의 만용.

하지만 제국에서 가장 귀한 신분 중 하나인 황자가, 저 끔찍한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치는 대신 앞장서 달리고 있다.

제국의 신하된 입장에서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 또 있을까?

듀론은 어떻게든 황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황자가 적진 한가운데 고립되지 않도록 기사단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황자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막상 돌진하는 황자의 진로가 예사롭지 않았다.

'황자님은 접근하는 적의 분대를 피해... 외려 포위당한 요새 쪽으로 달리고 있다. 어째서?'

덕분에 적과의 충돌은 잠시 후로 미뤄졌지만, 이대로라면 적의 본진과 분대 사이에 끼어버리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설마 포위망을 뚫고 요새 내부로 들어가려고? 자기가 무슨 나이트 마스터인 줄 아나?'

나이트 마스터는커녕, 기초 체력이 부족해 마갑은 물론이고 아무 효과도 없는 일반 갑옷조차 착용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몸이 너무 작아서 사이즈가 맞는 갑옷도 없었고.

그때 한 기사가 유달리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듀론은 기사를 발견하고는 급히 소리를 질렀다.

"거기! 어떻게든 황자님을 보호해라! 본대가 따라잡을 때 까지 시간을 벌어!"

"...."

기사는 대꾸 없이 클로드의 뒤를 추격했다. 하지만 앞서간 클로드가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기도 전에 이미 마을을 포위한 사령군 본대와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망할!"

그 사이, 수호 기사단 본대는 돌출한 적의 분대에 막혀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기사단의 역량이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나 역시....'

듀론은 이대로 별군을 이끌고 클로드의 뒤를 추격할지, 아니면 본대를 지휘해 충돌한 적의 분대와 싸워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황자를 선택하면 기사단의 피해가 막심할 테고, 반대로 기사단을 선택하면 황자는 반드시 죽는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모두의 운명을 가를 절체절명의 순간. 하지만 듀론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기도 전에, 적진을 들이받은 클로드의 몸으로 부터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