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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2화

33장 이글 스피릿

"왜? 그놈 체액도 독이야?"

"정확히 어떤 독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염된 땅에 자라던 모든 식물이 말라 죽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진짜? 거기가 제국 최대 곡창지역인데?

"이미 주변 농토의 3할 이상이 오염되었습니다. 내년 농사는 물론이고 그 뒤에도 어떻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덕분에 당장은 피해 규모를 산정하기도 어렵습니다."

"해독 영약으로 어떻게 안 되나? 베리트 영지에 성장의 영약 뿌리는 것처럼?"

"해독영약을 땅에 붓는다는 말씀입니까? ...잘은 모르지만 돈이 엄청나게 들 것 같군요. 일단 마탑에서 회수한 돈을 모두 쟁여 놨다가 복구 작업에 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할게. 이런 건 원래 제국 정부가 처리해야 하는데 그쪽도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현재 제국 정부는 10개월 뒤에 있을 전쟁을 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손실된 기사단과 군대의 결원 보충, 여기에 대규모 실전 훈련과 보급물자 비축이 더해지니 재정과 행정력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

"알겠습니다. 그럼 제 보고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테이블 반대편에 있는 신관 트리멈에게 시선을 돌렸다.

"트리멈? 부탁한 정보 수집은?"

"네. 황자님. 안타깝지만 아직입니다."

트리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아침부터 오늘 오후까지, 저를 포함한 호위 신관 전원과 '도서관'의 존재를 아는 모든 신관 분들이 총동원되어 책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아직까지 성과는 없습니다."

흠, 그건 좀 실망인데.

젝트바이아의 몸속에 있던 정체불명의 장치 덕분에, 나는 사이크 차원에 넘어가 녀석들에게 한방을 먹일 수 있었다.

대충 경기장에 있던 사이크인 만 명쯤 죽인 것 같지?

사실 그 정도가 얼마나 큰 피해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이크 차원의 인구가 한 10억쯤 되면 새 발의 피 밖에 안 될 테고.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처음으로 발견한 이 짜릿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격.

우리 제국이 처음으로, 아니 우리 세상이 처음으로 녀석들의 세상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다만 어떻게 하면 다시 차원문을 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젝트바이어 같은 재앙덩어리가 또다시 출몰하길 기대하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래서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호위신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차원', '차원 이동', '사이크', '사이크 차원' '게이트'.

대충 이런 키워드와 관련된 게 뭐라도 있으면 찾아 달라고 했다. 명색이 대신전의 비밀 지하 도서관인데, 싹싹 뒤져보면 뭔가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죄송합니다, 황자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신관의 숫자가 워낙 제한적이라.... 차원과 관련된 검색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만, 대신전의 규정도 워낙 엄한지라."

"괜찮아. 아직 시간 있으니 서두를 건 없어."

나는 가볍게 넘어가며 트리멈을 안심시켰다.

"부탁한 지 이제 겨우 이틀 지났잖아? 며칠 더 뒤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송구할 따름입니다. 저를 포함한 호위 신관 전원이 밤을 새서라도 작업에 전념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흐흥.... 차원이라."

그때 톨라리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코어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귀가 밝아져서 참 큰일이네. 저런 걸 그냥 넘길 수도 없고.

"톨라리? 뭔가 의견이라도 있어?"

"응? 나? 왜?"

톨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다 퍼뜩 옆에 앉은 루네를 돌아보며 화제를 바꿨다.

"맞아. 요즘 루네 마력 엄청 오름. 그렇지 루네야?"

"네. 정말 많이 올랐어요. 이게 다...."

루네는 그 와중에도 품에 안고 있던 퍼런 대형 구슬을 번쩍 들어 올렸다.

"황자님께서 주신 얼음의 핵 덕분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황자님."

"성과가 좋으니 다행이네. 그런데 톨라리...."

"맞다 황자님. 회의 끝나면 에이션트 이글 코어 얻으러 간다고 했지?"

"맞아. 독수리 코어."

애당초 바이아를 제거한 다음 곧바로 그쪽으로 넘어가려 했다. 바이아가 젝트바이아가 되는 바람에 일이 커져서 일단 저택으로 돌아왔지만.

"근데 간다고 무조건 얻어 올 수 있을지는 몰라."

"왜?"

"친해질 방법을 모르니까? 곰돌이들이 꿀 좋아하는 것처럼 뭘 좋아하는지 모르고. 그래도 일단 코어를 많이 먹었으니 문전박대하진 않을 것 같은데."

현재 내 마수 친화력은 B-등급까지 올라왔다. 톨라리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황자님. 잘 다녀와. 혹시 코어 많이 얻으면 나 하나 꼭 주고."

"그건 두고 봐야지."

그렇게 나도 대충 넘어가 주는 척했지만....

톨라리 녀석.

말 돌리면서 은근 슬쩍 회피하려는 것 같은데 내 눈은 못 속인다.

아무래 뭔가 숨기는 거 같지? 군주의 눈으로 무슨 감정을 숨기고 있나 살펴볼까?

흠....

약간의 아쉬움. 이건 아마도 코어 관련된 문제일 테고.

거기에 뿌듯함? 얜 내가 뿌듯하나? 무슨 막냇동생이 대견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나 원 참.

그리고 절제와 인내? 이건 또 뭔데? 나한테 뭔가 말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있는 건가?

마지막으로.... 부끄러움?

야! 너 내가 부끄러워?

아.... 아니지. 아니구나. 이건 감정의 방향이 내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네.

그렇다면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건데, 대체 왜? 대체 무슨 못할 말을 참고 있기에 자기 자신에게 창피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 * *

저택을 떠나기 전, 나는 한적한 숲으로 몰래 디디를 불러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감히 황자님을 기다리시게 만들다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괜찮아. 나도 여기 온 지 얼마 안됐어."

한 30분 기다렸나? 약속 시간 지났는데 안 와서 뭔 일 생겼나 궁금했네.

"실은 황자님께서 숲으로 부르시기에 르갈도 함께 찾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르갈?"

"네. 그래서 한참 찾았는데 르갈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르갈이 사라지다니,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이상합니다."

"그거. 내가 다른 일을 시켜서 그래."

아, 이게 이렇게 엇갈렸구나.

"르갈에게 따로 일을 시키셨습니까?"

"좀 전에 드워프 주둔지로 보냈어. 전달할 이야기가 있어서. 르갈 말로는 드워프들이 에이션트 울프를 꽤 신성하게 생각한다더라. 그럼 말이 통하겠지."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리고 너한테도 부탁할 게 있고."

나는 뒤꿈치를 쭉 들어 디디와 시선을 맞췄다. 그새 애가 또 쭉쭉 컸네? 원체 키가 클 유전이었나? 그동안은 밥을 너무 못 먹어서 못 큰 거고?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황자님."

디디는 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올렸던 뒤꿈치를 다시 내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게 그러니까.... 톨라리를 경호해 줘."

"...."

디디는 고개를 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찌 톨라리 님을 경호하겠습니까? 저 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 가지고 놀 분입니다."

그야 나도 알지. 근데 이게 좀 까다로운 이야기거든.

"정확히는 경호 겸 감시야."

"감시라면."

디디는 순간 고개를 돌리며 멀리 저택 쪽을 살폈다.

"문제가 생긴 겁니까? 톨라리 님을 믿을 수 없게 되신 겁니까?"

"아니아니, 톨라리는 믿어. 배신 때릴 거 같으니 감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

디디는 귀에 거의 안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얘가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만약 톨라리가 작정하고 깽판을 놓기 시작하면 세상에 녀석을 막을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어쩌면 후원자가 다시 톨라리를 찾아올지도 몰라."

"...!"

"후원자 1호는 내가 죽였는데, 새로 2호란 녀석이 설치기 시작했어. 젝트바이아도 그 녀석이 만든 거고."

"융합한 아크위저드 괴물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확실한건 후원자가 건드릴 수 있는 게 인류의 배신자뿐이라는 거야."

"인류의 배신자가 무엇입니까"

"접촉해서 소원을 들어준 사람. 젝트와 바이아가 바로 인류의 배신자였어."

"그렇게 따지면.... 톨라리 님도 인류의 배신자이겠군요."

디디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속 말하는데 톨라리는 괜찮아. 하지만 후원자는 안 괜찮으니까, 언제라도 톨라리에게 접근해서 강제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후원자는 톨라리 님보다 강합니까?"

"아마도. 일단 너무 빨라서 마법사들은 반응조차 못 하고 당할 위험이 커."

"...하긴, 톨라리 님은 실수로 떨어뜨린 컵을 발로 받아내시지도 못합니다."

그건 나도 못 할 거 같은데? 코어를 많이 먹어서 어쩌면 가능하려나?

"알겠습니다. 어째서 경호와 감시라고 하셨는지. 톨라리 님 주변에 후원자가 나타나는지 감시하라는 뜻이었군요."

"되도록 그 녀석 방 주변을 자주 순찰해줘. 꼭 방문 열고 안 들어가도, 방 안에서 뭔가 일이 생기면 기척을 느낄 수 있지?"

"네. 다른 건 약해도 그런 감각은 확실합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냅다 뛰어 들어가서 톨라리를 지켜. 후원자는 다른 인간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것 같으니 반격 걱정은 말고."

"전에 후원자는 무언가 규칙 같은 것에 종속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이겠군요."

"며칠만 수고해줘. 곧 르갈이 돌아올 테니 그때부터는 교대로 하고."

"명령 받들겠습니다. 르갈이 드워프 주둔지로 떠난 이유도 어쩌면 이와 같겠군요."

오, 척하면 척이네. 얘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드워프 군주 겔리도 후원자에게 소원을 빈 접촉자니까. 본인은 평생소원을 성취해서 여한이 없는 것 같지만...."

후원자의 눈에는 또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젝트바이아를 경험한 이상 가볍게 넘어갈 수야 없지.

"하지만 르갈은 곧 돌아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마음 같아선 한동안 드워프 군주 옆에 붙여 놓고 싶은데, 본인이 그건 또 안 되겠다고 하더라. 드워프 주둔지가 영원의 숲과 너무 가깝다고."

"영원의 숲에는 에이션트 울프가 살고 있으니까요. 르갈 입장에선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러게 말이야. 탈취의 영약 꾸준히 먹여서 이제 냄새 안 난다고 하는데도."

한때 하수구의 검은 늑대 르갈이었던 시절도 이젠 옛말. 털 색만 하얗게 돌아온 게 아니라 몸에서 거의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황자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최선을 다해 톨라리 님을 경호하겠습니다."

"잘 좀 챙겨줘. 너도 알지? 톨라리가 마법은 끝내주는데 일상생활이 좀...."

"어설프시죠. 알겠습니다."

디디가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그 밖에도 톨라리가 뭔가 숨기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뭐 거기까진 상관없겠지.

뭔진 몰라도 나한테 뭔가를 말하고 싶어 끙끙대는 모양이다. 대충 알아서 고민하다 나중에 결국 고백하지 않을까?

* * *

에이션트 이글의 서식지인 화살촉 봉우리.

자이루트 산맥의 최북단에 위치한 이곳은, 험준한 산맥에서도 가장 높은 산들이 자리 잡은 천혜의 비경이다.

"조금만 더 날아가면 슬슬 보이려나...."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통틀어 화살촉 봉우리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사나운 독수리 마수가 이곳에 서식한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딱히 도움 될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나저나 독수리 코어는 무슨 효과가 있을까?

어떤 효과든 좋으니 여왕의 빙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주면 좋겠다. 그래야 사이크 차원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만큼 불의 정령왕과의 빙의는 압도적이었다.

단순히 육체능력만 강해진 게 아니다.

가만있어도 주변을 태워버리는 열기를 방출함과 동시에, 마치 화염 전용 프로텍션 매직 같은 투명한 오러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분명 불과 관련된 모든 마법에 면역 상태였겠지?

여기에 반사 신경도, 판단력도, 심지어 계산력까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느낌이었다. 한순간이지만 마치 세계 최고의 천재가 된 듯한 느낌이랄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3화

33장 이글 스피릿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때 못해 봐서 아쉬운 게 좀 있다.

특히 빙의 순간 스스로의 힘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나이트 스킬을 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만약 그 상태로 풍압검이나 다른 나이트 스킬을 쓰면 어떻게 될까?

그냥 칼을 휘두르기만 해도 열선이 방출되어 멀리 있는 상대를 절단하고, 추가로 화염의 파도를 쏟아내며 광범위한 적을 태워 버린다.

"이것저것 테스트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뭐 그땐 그럴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나이트 스킬 없이도 압도적이라 큰 상관은 없었다. 그나저나 어찌나 강하던지, 마법 빼고 육탄전으로만 다비와 붙어도 내가 이기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고 여왕 빙의해서 다비와 대련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까딱하면 우리 소중한 다비 목숨 날아갈라.

그때 멀리 전방에 곤두선 기둥 같은 게 보였다.

저게 화살촉 봉우리인가?

-높은 산의 정상 부근에 수십 개의 가느다란 봉우리가 모여 있다. 한번 보면 절대로 착각하지 않을 모양이니 찾긴 쉬울 거다.

르갈이 그렇게 말했으니 저게 맞겠지?

근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아직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봉우리마다 독수리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네? 그리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데?

* * *

얘들은 왜 이렇게 날 째려보는 걸까?

원래 눈매가 날카로워서 그런가? 크기가 2미터쯤 되는 독수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공중에 둥둥 떠 있는데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어쩌면 마수 친화력 B-등급 정도로는 에이션트 이글에게 어필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디디라도 데려 올 걸 그랬나? 하지만 그 녀석에겐 톨라리 감시를 맡겨서....

펄럭!

그 순간, 혼자 까마득하게 높은 봉우리 위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아래로 내려왔다.

바로 다른 녀석들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에이션트 이글.

"오...."

보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나온다. 펼친 날개 길이만 대략 10미터 정도? 진짜 어마어마하네.

"안녕? 날개 멋지네. 혹시 에이션트 이글 족장이야?"

"...."

녀석은 내 인사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녀석들보다 한층 더 위협적인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혹시 몰라 군주의 눈을 살짝 떠봤더니....

으악.

이건 뭔 놈의 경계심이냐? 진짜 순도 100퍼센트짜리 어마어마한 경계심이 쏟아지는데?

하긴 마수란 원래 이런 건지도 모른다. 곰돌이가 좀 많이 특이한 경우였고.

그나마 다행인 건 적대심이나 분노 같은 게 느껴지진 않는다는 점. 나는 최대한 위협적이지 않게 보이려 몸을 웅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난 너희 적이 아니야. 비록 인간이지만 에이션트 울프의 추천도 받았고."

"...에이션트 울프?"

그때 거대한 독수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응. 에이션트 울프. 르갈이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 여기 와서 너희랑 교류도 좀 하고 그랬다던데? 암튼 난 적이 아니야. 인간이지만 좀 친근하지 않아? 코어도 몇 개 먹어서 이미 반쯤은 마수랑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독수리의 음성은 마치 쇠줄로 돌을 갈아내는 듯 스크래치가 섞여 있었다. 이거 상당히 불편한데, 그렇다고 대 놓고 말하면 실례겠지.

"내가 누군지 알아?"

"정확히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다. 얼마 전, 저 멀리 영원의 숲 남서쪽의 황무지에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을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벌인 인간이지."

"일식 게이트를 봤어? 근처에 있던 거야?"

"아니. 난 이곳에 있었다."

"여기? 여기서 귀네스 지방의 황무지가 보인다고?"

직선거리만 해도 수백km는 떨어져 있을 텐데?

"그리고 남쪽에 있는 넓은 밭에서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것도 보았다."

"방가르 지방? 거긴 귀네스보다 더 멀 텐데?"

"그러고 보니 공통점이 있군. 두 장소 모두 근처에 인간이 세운 높은 탑이 있지."

그건 그렇긴 하다만, 암만 그래도 둘 다 여기서 너무 멀잖아?

아무리 여기가 인근에서 가장 해발이 높은 곳이라 해도, 이건 너무 규격을 벗어난 것 아닌가?

"내가 먼 곳을 볼 수 있는 게 놀라운가? 하지만 방금 말한 에이션트 울프는 그보다 더 먼 곳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

그야 그렇긴 하다만.

암튼 이 독수리 녀석, 어째 초장부터 분위기를 꽉 잡고 놓아 주질 않는데? 이거 딱 봐도 거래가 만만치 않겠어.

"대단하네. 독수리라 그런지 눈이 엄청 좋구나."

"난 에이션트 이글의 족장인 레텝이라 한다."

거대한 독수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 우리 모두 너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클로드라고 불러. 근데 무슨 의문?"

"우리 세계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건 의문이 아니라 질문이겠지. 사용하는 어휘가 뭔가 이상하구만.

"상황이 좋지 않아. 사실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고."

"그 무시무시한 칼에 대해 알아보러 온 것인가?"

"응? 칼?"

갑자기 뭔 소리래? 칼?

"이거 말이야?"

나는 허리에 찬 엘프 군주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족장인 레텝을 포함한, 백여 마리의 독수리 전체가 날개짓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흉악한 물건을 함부로 꺼내지 마라!"

"어.... 미안."

아니, 고작 칼 하나 보고 저렇게 놀란다고?

칼이란 게 물론 흉흉한 물건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오버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멀리서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 싶었다. 가까이서 보니 온몸의 깃털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그 정도야? 엘프 군주가 만든 명검이라고 듣긴 했는데."

"...."

독수리 군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살폈다. 그러다 검과 나를 번갈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몰랐나 보군."

"몰라? 뭘 몰라?"

"네가 쥐고 있는 그 검에는...."

독수리는 다시 한번 내 칼을 집중해서 노려보았다.

"...1만이 넘는 정체불명의 힘이 응축되어 있다."

"뭐?"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힘이다. 놀랍고 두렵다. 내 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만큼은 정확한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이건 또 뭔 소리래? 이 칼이 뭐가 어쨌다고?

급하게 군주의 눈으로 살폈지만 딱이 이상할 건 없다.

칼날도 칼날이지만 주변의 흐름도 정상이다. 뭐지 이놈들? 혹시 집단으로 사기 치는 건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며 굿판이라도 벌이려는 거야?

"그렇군. 이건 겹쳐 있는 힘이다. 그래서 내 눈으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던 거다."

"뭐?"

"이곳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힘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등급이라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군. 한 등급 높은 차원에 겹쳐 있는 힘. 분명 우리 에이션트 이글이 아니면 그 힘을 눈치조차 채기 힘들 것이다."

잠깐, 여기까지 말하니 뭔가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그러니까 다른 차원의 힘이라고?"

"정확히는 이곳 차원에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힘이다."

그래서 군주의 눈으로도 본질이 안 보이는 건가? 혹시 불의 여왕과 빙의해서 여왕의 눈이 더해지면 새로운 게 보이려나?

"뭔가 알 것 같기도 한데.... 그 힘이 낱개로 1만 개나 이 칼에 깃들어 있다고?"

"정확한 숫자까지는 알 수 없다. 1만.... 아니, 1만 2천 개쯤 될 것 같군. 반은 이곳에 있고, 반은 다른 차원에 걸쳐 있다."

"다른 차원이라."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클로드, 너는 이것을 대체 어떻게 얻었나?"

처음엔 감도 안 왔지만, 이젠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것 같다.

1만2천의 정체불명의 힘?

그렇다면 사이크인이지. 딱 그 정도 죽였으니까.

아마도 저쪽으로 넘어가 사이크인들을 학살한 순간, 녀석들을 구성하던 어떤 에너지가 이 검에 흡수된 것이리라.

"그건 또 상상도 못 했네. 군주의 눈에도 안 보이는 힘이라니."

"군주의 눈? 엘프 군주의 눈 말이냐?"

"응. 그거. 어쩌다 보니 나한테 왔어."

"그 또한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본질을 꿰뚫어 볼 뿐이다. 아예 존재한 적 없는 힘은 알아챌 수 없겠지."

"그런가 봐. 근데 너희들은 그게 보이는구나."

"그것이 에이션트 이글이다."

독수리 군주가 가슴을 뻣뻣하게 세우며 유세를 떨었다. 그래봤자 방금 호달달 떨면서 뒤로 도망치는 거 다 봤거든?

"일종의 영혼 같은 건가? 사이크인 1만2천의 영혼? 이거 활용할 수 있을 엄청 날거 같은데. 혹시 방법 없을까?"

"그것을 왜 나한테 묻는 것인가?"

"그야 너밖에 못 알아봤으니까?"

"...."

독수리 군주 레텝은 몸을 웅크리며 침묵했다. 그러자 시끄럽게 끽끽대던 다른 독수리들도 숙연한 모습으로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음.... 갑자기 왜 그래?"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다오."

"응. 그러지 뭐."

일단 한발 물러났지만 생각은 뭔 생각이냐? 난 아직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놈들 마이페이스가 심각한데.... 이그니스? 내 목소리 들려?'

짬이 난 김에 머릿속으로 불의 여왕을 불렀다. 여왕은 긴 하품소리와 함께 바로 대답했다.

-하으으음. 들린다. 무슨 일이냐 클로드?

'쉬고 있었나 본데 미안. 이 칼 보여?'

손에 쥔 엘프 군주의 검을 보며 살짝 흔들었다. 여왕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이상해? 역시 너도 보여? 여기 깃들었다는 다른 차원의 에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뭔가 보여서 이상하다고 한 거 아니야?'

-그 검이 처음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게 이상하다는 뜻이다. 신기하구나. 당연히 녹아 휘어지거나 형체가 무너졌어야 하는데.

'엥? 왜?'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래?

-전에 그 거대한 이계의 괴물과 싸울 때 그 칼이 내 힘을 받아내지 않았느냐?

'그랬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는 내 힘을 견딜 수 없다. 고작해야 1분, 아니 수십 초를 버틸 뿐이지.

'진짜?'

-아무리 훌륭한 명검이라도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안에 무너진다. 지금쯤 못쓰게 되어 버렸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곳에 멀쩡히 있구나.

그러니까 말하자면....

원래 이 칼은 여왕의 힘을 받고 천천히 고철덩어리로 변했어야 했다.

그런데 방금 독수리 군주가 말한 정체불명의 에너지 덕분에 원형을 잃지 않고 버텨 냈다?

'여왕? 아무래도 사이크 차원 넘어갔을 때 이 칼이 그 녀석들 영혼 같은걸 흡수했나봐.'

-그랬느냐?

여왕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내 눈에는 딱히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만. 아니지, 이상이 없는 게 이상이긴 하겠구나.

'덕분에 네 힘을 버틸 수 있는 특수 소재로 변한 것 같아.'

-신기하구나. 그런 묘한 일이 벌어지다니.

여왕은 기분이 좋아진 듯, 흥에 겨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흐응.... 그렇다면 정말 잘 됐다. 그 칼이라면, 어쩌면 내가 아껴 놓은 힘을 전부 해방해도 버텨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껴 놓은 힘? 그럼 그때가 100퍼센트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었다. 그랬다간 검도 검이지만 네 육체가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아, 그랬구만.

'그럼 결국 마찬가지 아냐? 이번엔 검이 버텨도 내 몸이 버티지 못할 텐데?'

-그러니 빨리 더 강해지거라. 내 사랑스러운 클로드.

여왕은 귓가에 입김을 불 듯,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너는 더 크고 단단해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함께 즐길 시간이 늘어 날 테니까.

'그거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어떻게 들리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이미 영혼을 섞고 한 몸이 된 사이끼리.

거 참 묘사 한번 끈적하기는. 물론 틀린 말은 하나도 없긴 하지만.

-볼일이 끝났으면 나는 들어가겠다. 제 컨디션을 내려면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해. 그래도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부르거라.

그리고는 연결이 끊어졌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독수리 족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시간 더 필요해?"

"...고민은 끝났다."

레텝은 고요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클로드. 넌 분명 도움을 청하러 이곳에 왔을 것이다."

"응? 어, 응."

"앞으로 닥칠 다른 차원과의 전쟁에 우리 에이션트 이글이 참전하길 바라고 있겠지. 이는 결코 쉽게 결정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네? 뭐라고요?

난 그냥 코어를 하나 얻으러 온 것뿐인데? 물론 두 개나 세 개나 네 개면 더 좋고.

하지만 이쪽도 엄청 중요한 이야기니 쓸데없이 태클 걸 필요는 없겠지?

"...그래. 함부로 선택할 수 없는 문제긴 해."

"마음 같아선 바로 거절하고 싶었다. 살아있는 에이션트 이글은 이곳에 있는 게 전부니까. 섣불리 전투에 참가했다 종족 전체가 멸망할지 모른다. 그래서 짧게나마 이곳에 있는 모두의 의견을 들었다."

"그랬구나.... 음?"

모두의 의견을 들었다고?

여기 있는 백 마리쯤 되는 독수리들? 근데 방금까지 모두 침묵하지 않았나?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4화

33장 이글 스피릿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아무것도. 계속 말해."

"결국 세상의 존망과 관련된 문제에 무작정 발을 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니 우리 에이션트 이글은 조건부로 차원 전쟁에 참가하겠다."

"조건부? 무슨 조건?"

"네 도움이 필요하다. 클로드."

레텝은 독수리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에이션트 이글의 숨겨진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우리는 보물을 되찾아야 한다."

"보물?"

"이글 스피릿(eagle sprit)이라 부르는 보물이다. 에이션트 이글의 정수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엄청 귀한 물건인가 보네?"

"귀한 정도가 아니다. 물건도 아니고."

방금 보물이라며? 어떻게 보물인데 물건이 아닐 수 있어?

"300살 이상 생존한 에이션트 이글은, 10년마다 몸속에 강력한 힘을 가진 결정을 생성할 수 있다."

그래. 나도 알아. 원래 그거 구하러 왔다고.

"우리들은 그것을 코어라 부른다. 보통은 다른 고대종과 드물게 교류할 때 사용하지만, 에이션트 이글은 어느 순간부터 코어를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결합?"

"토해낸 코어들을 잘 모아 놨다가 결합시킨다. 서너 개까지는 모아 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다섯 개부터는 서로가 서로의 힘에 반응하며 하나로 뭉쳐 거대 코어가 된다."

거대 코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먹어온 코어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이야.

"처음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계속해서 코어를 결합했다. 내 현조부이신 당대의 족장부터 시작해서, 고조부, 증조부, 조부, 그리고 내 아버지까지 모든 족장이 대를 이어 코어를 결합했다."

"...그게 다 몇 개인데?"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다만 결합된 코어가 100개를 넘자 이변이 발생했다."

레텝은 먼 하늘을 보며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코어가 우리 에이션트 이글의 형태로 변하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말 그대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종족의 정수. 바로 위대하고 고귀한 이글 스피릿이다."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 번갯불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 살려주십시오! 황자님! 황금 독수리에 대한 소문은 헛소문입니다! 소문에 혹해 찾아오는 멍청이들을 낚아채기 위해 만든 헛소문이란 말입니다!

...그게 언제더라?

그래. 5회 차다. 소문에 낚인 멍청이(나)가 클러스터 암살단의 본거지를 급습해 홧김에 그곳에 있는 모든 걸 싹 쓸어버렸다.

-페이우드 제국 서북쪽 국경에 있는 가도 너머의 동굴지역 어딘가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독수리가 숨겨져 있다. 날개폭만 10미터에 달하는.

날개폭이 10미터라잖아? 그만한 크기의 금독수리를 녹이면 제국 금화를 10만 개도 만들 수 있겠구만!

"저기요, 레텝 씨?"

"왜 갑자기 존칭을 쓰는 것이냐?"

"그럼 그냥 레텝. 암튼 방금 말한 그 이글 스피릿, 혹시 색깔이 황금색이야?"

"...어떻게 알고 있지?"

독수리 족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했다. 후, 이거 괴롭구만. 실패한 과거의 나와 마주하려니.

"소문을 들었어. 저기 북쪽에 있는 동굴 어딘가에 황금 독수리상이 숨겨져 있다고."

"독수리상이 아니라 에이션트 이글이다."

"그렇다고 진짜 살아 있는 건 아니지? 밥 먹고 잠자고?"

"그렇진 않다. 정령에 가까운 존재이니. 다만 마력을 주입하지 않으면 평소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마력?"

"이글 스피릿의 동력은 우리 에이션트 이글의 마력이다. 물론 다른 누구의 마력이라도 기본은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날갯짓으로 허공에 바람의 화살을 쏘아냈다.

촥!

이 독수리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네? 그것도 비행이 기본 탑재된 마법사라니!

"그런데 10년 전, 한 젊은 독수리가 가장 높은 봉우리에 모셔져 있던 이글 스피릿에 대량의 마력을 주입하고 말았다."

"그래서?"

"많은 동력을 얻은 그분은, 갑자기 폭주를 일으키며 먼 하늘로 날아오르셨다. 어찌나 빠른지 우리들의 힘으로도 쫓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 클러스터 도적단의 본거지인 동굴로 들어갔고?"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레텝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분은 그곳에 감금되었다. 뒤늦게 내가 도착했지만, 좁은 동굴까지 기어들어가 녀석들과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하긴 그 동굴이 워낙 깊고 복잡해야 말이지. 나도 처음 갔을 때는 거의 하루종일 헤맸다고.

"동굴이 좁아서 날개를 펴기도 힘들잖아. 거기서 안 싸우길 잘했어."

"그렇게 우리는 종족의 보물이자 정수를 잃고 말았다. 그러니 클로드, 만약 그곳에서 이글 스피릿을 구해 준다면 훗날 반드시 차원 전쟁에 전사들을 이끌고 참전하겠다."

레텝은 맹세라도 하듯 날개 끝으로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래. 이제야 대충 그때 상황이 어땠는지 납득이 가는구만.

난 두 번 속았다.

클러스터 도적단의 본거지에는 정말로 거대한 황금독수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독수리를 넘기는 게 싫었을까? 본인의 죽음과 도적단의 괴멸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게 그냥 금독수리가 아니라는 게 문제인데.... 흐음."

"어떠냐 클로드. 우리 종족의 소원을 이뤄 주겠느냐?"

"잠깐. 그전에 확인하고 넘어갈 게 있어."

나는 주먹을 내밀며 손가락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우선 그 이글 스피릿, 진짜 금덩어리 아니지?"

"당연히 아니다. 말했듯이 우리 종족의 코어로 만들진 존재다."

"다음은 그 이글 스피릿이 마력만 주입하면 알아서 동굴을 빠져나올까?"

"반드시 그럴 거라 생각한다. 녀석들에게 감금당한 이유는 그곳에서 마력이 떨어졌기 때문일 테니까."

"처음에 폭주해서 날아갔다며? 혹시 또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흐음.... 그렇다면 그냥 끌고 나와도 좋다."

"내가? 이 몸으로?"

이럴 땐 또 몸이 작은 게 쓸모가 있지. 레텝은 한쪽 눈을 감고 내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쉽지 않겠군. 그렇다면 안에 있는 인간들만 제거해다오. 그 뒤에 우리가 진입해서 그분을 끌고 나오겠다."

"동굴이 좁은데 괜찮겠어? 너 덩치 엄청 큰데?"

"어차피 그분과 나는 덩치가 비슷하다. 그분이 들어갔다면 나도 들어갈 수 있겠지."

그게 꼭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나중에 넓은 통로를 좁히거나 메워 버렸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시작부터 전부 따지고 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단 도적 소굴을 싹 소탕한 뒤에 고민해도 늦지 않겠지.

"그럼 마지막 질문. 혹시 남는 코어 있어? 내가 그 코어 독수리, 아니 이글 스피릿 구해가지고 돌아오면 남는 코어 좀 줄래?"

"그건 어렵지 않다. 다만 한 개밖에 없지만."

"딱 한 개밖에 없어?"

"생성되는 족족 이글 스피릿과 융합시켰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7년만 더 기다려라. 그때쯤 하나 더 만들어질 테니까."

7년이라.

이게 예전 같았으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아니야. 당장 하나라도 있으면 됐어."

나는 족장 독수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주저하던 녀석은 내 뜻을 이해하고는 날개 끝을 앞으로 내밀었다.

"좋아. 협상 끝. 바로 다녀올게."

나는 날개 끝을 가볍게 움켜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레텝은 물론이고, 뒤에 있던 백여 마리의 독수리들이 몸을 들썩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클러스터 암살단의 두목 벤트는 올해로 50살이 되는 깡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으... 으으...."

벤트는 어둠 속에서 관자놀이를 누르며 신음했다.

"으.... 아니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사방에 꺼진 횃불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대낮처럼 환히 밝힐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빛이라곤 방구석에 테이블에 놓인 작은 촛불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동굴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어둡게 해 놓고 살 필요가 있을까?

덕분에 암살단의 고민도 깊어졌다. 본거지 곳곳에서 최근 두목의 정신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쑥덕거림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내가 흔들리면 우리 모두 무너진다.... 흐.... 흐흐...."

벤트는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한쪽 벽을 응시했다.

오래된 동굴 안쪽에 자리 잡은 두목의 방은 수많은 재화와 잡동사니의 천국.

하지만 벤트가 보는 곳은 유독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텅 빈 공간이었다.

"그 광채.... 아니, 아니야. 말도 꺼내면 안 돼. 내 보물.... 그건 나만의 것이다. 그곳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해. 그래야 다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고...."

"맞아. 그때도 넌 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어."

한참을 보다 못해 그냥 뒤에서 말을 걸었다. 벤트는 순간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 누구냐!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냥 문 열고."

"뭐?"

"방금 문 열고 들어왔잖아? 나 은신 안 썼다? 근데도 눈치 못 채던데?"

"크, 크악!"

녀석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내 칼이 먼저 녀석의 명치를 꿰뚫었다.

푸확!

"컥...."

"어때? 나 좀 하지? 요즘은 마갑 안 입어도 이 정도 움직임은 나오더라."

"으...."

벤트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나는 라이트 마법으로 방에 불을 밝히며 기념 삼아 녀석에게 감정안을 사용했다.

종족 : 인간

현재 힘 : C-

잠재 힘 : C+

"오, 아직도 잠재력이 꽤 남아 있네? 그래 봤자 별거 아니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두뇌파라며? 그래서 불만 가진 녀석들이 좀 있더라."

"쿨럭...."

"여기 오기 전에 다른 도적단 간부 방에 들렀거든. 진상은 그쪽에서 대충 확인했어."

"도적단... 아니다. 우린 암살단...."

"그게 그거지 뭐."

나는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불로 좀 지져주니까 다 토해내더라.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내가 니놈들한테 좀 맺힌 게 있거든."

"큭...."

"10년 전에 큰 사건이 있었다며? 거대한 금독수리가 제 발로 본거지에 기어 들어왔는데, 간부들이 그거 가진다고 엄청 싸웠다더라."

"어, 어떤 놈이 그걸...."

"미안. 이름은 안 물어봤어. 암튼 간부들이 서로 나죽네 너죽네 하며 싸우려는데, 두목인 당신이 나타나서 깔끔하게 해결했다며?"

나는 이토록 넓은 방 안에, 유독 텅 비어 있는 한쪽 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갑자기 두목이 금독수리를 끌고 가 어딘가에 집어 던지고는 쿨하게 선언했다고 하더라. 그깟 보물 하나에 무슨 짓이냐! 분쟁의 소지가 될 바에 그냥 버리는 편이 낫다! 모두 돌아가!"

"으...."

"그러자 눈이 돌아갔던 간부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으로 돌아왔고. 짜잔! 그렇게 클러스터 도적단은 다시금 평화를 찾게 되었답니다. 잘됐네 잘됐어."

"쿨럭...."

"약 올리는 건 이쯤 하고."

나는 군주의 눈을 열고 방안을 천천히 살폈다.

"두목 방에는 뭐든 숨길 수 있는 비밀공간이 있다며? 아, 잠깐. 어딘지 말하지 마. 내가 알아서 찾을게. 오, 이쪽에 뭔가 본질적으로 흐름이 쏠려 있는 게...."

고개를 돌리자 벤트는 이미 죽어있었다. 뭐.... 어차피 죽을 사람 너무 괴롭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겠지.

"참고로 넌 몇 년 뒤에 소문을 퍼뜨려. 이 광활한 동굴지역 어딘가에 황금 독수리가 숨겨져 있다고. 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면 적어도 날 두 번 속이지 말던가."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유독 텅 빈 공간의 벽을 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도 여길 한참 수색하긴 했는데.... 이런 데 숨겨져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본질의 흐름이 살짝 끊겼다가 이어지는 부분이 보인다. 나는 가볍게 뛰어올라 천장 부근에 튀어나온 돌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벽이 열렸다.

쿠구구구구구구....

얼핏 보면 말도 안 되는 마법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안쪽에 금속으로 된 단순한 기계장치가 들어 있다.

아마도 드워프가 만든 물건 아닐까? 나중에 겔리를 찾아가서 한번 물어봐야지.

그런데.

열린 문의 건너편이 텅 비어 있다.

정확히는 아래쪽으로 텅 빈 공간이 끝없이 뚫려있다.

"이건 뭐 빠지라고 만든 함정도 아니고...."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바람이 슝슝 불어온다. 이거 비밀창고인 줄 알았더니 비밀 쓰레기 투척장이었네?

"슬슬 피곤한데...."

클러스터 도적단 아지트에 잠입, 간부 하나를 붙잡고 진상을 캐낸 다음 두목의 방까지 도착하는 데만 세 시간이 걸렸다.

맘 같아선 이대로 바닥에 누워 한숨 자고 싶다. 그 전에도 꼬박 반나절을 쉬지 않고 화살촉 봉우리까지 날아갔는데, 거기서 또 두 시간을 날아 여기까지 오고, 여기서 또 세 시간을 투자해서....

아오, 생각을 말자.

일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겠지? 지금쯤 독수리들도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테니, 얼른 저 쓰레기통에서 코어 이글부터 끄집어내자.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5화

34장 마인드 어택

잠깐, 코어 이글?

어둠속을 내려가는데 의문이 들었다. 코어 스피릿? 이글 코어? 그거 이름이 정확히 뭐였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뭔가가 터졌다.

작열하는 폭발이 기사단을 덮친다. 단 한 방에 수십 명의 기사가 날아가고,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아니...."

고개를 돌리자 새까만 돌덩어리 같은 게 보였다.

폭탄 마인.

자신의 몸을 마구 뜯어내 사방으로 던지고, 뜯겨나간 몸은 빠르게 재생하며 다시 복구된다.

뭐지 여긴? 엠퍼로드 중앙 광장?

한가운데 뚫린 게이트로 무수한 괴물과 화염병이 쏟아져 나온다. 그때 상처투성이인 카일이 수십 명의 백기사단을 이끌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황자님! 몸을 피하십시오! 다른 두 곳은 완전히 뚫렸습니다!"

"어, 아니...."

"2번 게이트를 맡은 나이트 다비가 사망했습니다! 이제 곧 몰려옵니다!"

뭐? 다비가 죽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무슨 일이고? 나 방금 전까지 깜깜한 어둠 속으로 내려가고 있지 않았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도망쳤다. 왜 도망치냐 하면....

그랬었으니까.

아니, 그랬었다고? 언제?

이게 지금 현실인가? 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커으으으으윽!"

"막아! 막아라! 이곳을 사수해!"

"커헉! 트, 틀렸습...."

"조금만 버티면 마법사단이 지원 온다! 잠시만 더.... 크악!"

온 사방에 비명과 괴성이 쏟아진다. 나는 악몽에 사로잡힌 기분으로 은신을 걸고 계속 달렸다.

안 돼, 느려.

이러다간 전투에 휩쓸려 죽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해. 도망쳐서 루아의 성역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 이번은 망했다.

쓸데없이 육체 단련을 한 게 실수였다. 10년을 투자했는데 결국 중급 마갑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니.

내 판단 착오로 인해, 그토록 고생했던 모든 부하들이 개죽음을 당한다.

아니, 이건 한 번쯤은 반드시 했어야 한 선택이다. 안 그랬으면 회귀 직전마다 힘의 각인을 아쉬워 했을 걸? 다른 필요한 능력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결과가 좋았다.

처음으로 3차 웨이브를 불러냈으니까. 하지만 처음으로 쏟아져 나온 이계의 괴물들에게 이토록 무참히 휩쓸렸다.

바로 지금처럼.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폭탄마인이 집어던진 돌덩이 하나가 근처에서 터졌다.

"큭!

아파!

아파! 아파 뒈지겠네!

"으아아아아아악!"

왼팔! 내 왼팔 어디 갔어!

피폭지점과 꽤 거리가 있는데도 한참을 튕겨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살점과 쇳조각들.

"히익!"

몸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는다. 안 돼. 움직여야 해. 그런데 잘린 팔에서 끊임없이 피가 새어 나온다. 아파, 이거 너무 아파....

"히, 힐링...."

하지만 회복 마법이 안 써진다.

왜?

마력을 다 썼나? 아니, 그 어떤 상황이라도 힐링 한번 쓸 마력 정도는 남아 있을 텐데?

아, 맞아.

나 이번에 회복의 각인을 선택 안했지.

제로부터 다시 쌓아 올렸기 때문에 신성 마법 제대로 못 쓴다. 왜 이걸 잊었지? 정신 차려 클로드! 너 이러다 죽는다고!

"플라이...."

다행히 비행 마법은 된다.

몸이 하늘로 떠오르자 쑥밭이 된 엠퍼로드의 풍경이 보인다.

모두가 죽고 있다.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눈을 감고 싶지만 눈을 돌리면 안 된다. 내 선택 하나로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한다.

벌써 5회 차가 다 끝났다. 앞으로 다섯 번밖에 기회가 안 남았다고.

"으...."

눈물이 흐른다.

차라리 저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뛰어 들고 싶다. 그럼 이렇게 괴롭지 않아도 될 텐데.

죽으면 되는데.

죽으면 이거 또 안 해도 되는데....

그때 다 자란 루네가 화염에 휩쓸리며 까만 잿더미로 변하는 게 보인다.

폭탄 마인 하나를 가까스로 죽인 톨라리도, 뒤를 이어 뛰어드는 광전사에 휩쓸리며 산산조각으로 흩어진다.

아니 잠깐.

루네?

루네는 지금 없어야 하는데? 미리 마중 나갔다가 발견 순간 죽었잖아?

그리고 톨라리라니, 톨라리는 6년 전에 내가 직접 죽였다. 그러니 지금 저 곳에서 이계의 군대를 상대로 싸우다 죽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순간 이계의 병사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들며 불꽃을 쏟아냈다.

푸확!

뜨겁다.

순식간에 피부가 녹아내리고, 근육이 까맣게 타오르며 견딜 수 없는 작열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건 환상이다.

정말 아파 뒈질 것 같지만 그래도 환상이다. 나는 하나 남은 오른팔과, 존재하지 않는 왼팔을 같이 들어 올리며 마법을 전개했다.

퓨어 매직.

맘만 먹으면 고속으로 발동시킬 수 있지만, 일부러 예전 버전으로 천천히 만들었다.

물론 손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애당초 이때는 퓨어 매직을 쓸 수 없었고, 설령 쓸 수 있다 해도 한 손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아무 문제없이 만들고 있겠지.

"이거 풀어."

나는 여전히 불을 뿜고 있는 이계의 병사를 노려보았다.

"당장 이거 풀어. 안 풀면 이거 날린다."

"...."

"넌 코어로 만들어진 마법 생물 이라며? 그런데 이건 스펠 브레이커야. 네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릴 거야.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

"경고한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해. 에이션트 이글들한텐 미안하지만 나도 더는 못 참겠어. 5, 4, 3, 2, 1...."

-그만!

그 순간, 세상을 덮고 있던 환영이 사라졌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사방이 막힌 함정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정면에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독수리가 앉아 있었다.

-변명할 기회를 주게. 이건 결코 고의가 아니었어.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손에 만든 퓨어 매직을 해체했다.

"진짜 있었네. 황금 독수리 동상."

-난 동상이 아니네. 이래 뵈도 고귀한 에이션트 이글의 정수가 모여 만들어진....

"됐어. 설명은 레텝에게 다 들었으니까."

-레텝을 만났나? 그렇다면 녀석들이 날 구하러 널 보낸 건가?

"그 전에 하려던 변명부터 해."

-음?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방금 너 때문에 내가 진짜 떠올리기 싫은 베스트 3위 안에 드는 기억을 떠올렸거든. 아니지, 떠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다시 체험해 버렸어."

-그것은....

"수틀리면 코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너 날려 버릴 거야. 빨리 상황 설명해."

-진정하게. 난 자네가 그 도적 집단의 두목이라 생각했어.

동시에 동상처럼 굳어 있던 이글 스피릿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10년 전 이곳에 떨어진 뒤로 오늘 만을 기다렸네. 마력이 부족해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을 향해 끊임없이 염파(念波)를 날렸지.

"염파? 텔레파시?"

-비슷하지만 다르네. 머릿속에 계속 부정적인 목소리를 흘려 넣었지. 어떻게든 내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아하, 그래서 도적단 두목이 그렇게 미친놈처럼 중얼대고 있던 거구만.

"10년 동안 두목한테 꾸준히 그 짓을 한 거야?"

-정확히는 마력을 아껴야 했기에 특정 인물에게 날릴 수가 없었네. 그저 무작위로 퍼뜨릴 뿐. 물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이 두목일 테니 녀석이 모든 염파를 뒤집어썼을 거라 생각했지.

"흠, 그래서?"

-그러다 보면 결국 견디다 못한 녀석이 이쪽으로 내려올 거라 믿었네.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지난 10년간 계속해서 마력을 모으며 한 방의 강력한 정신공격을 준비했지.

"그리고 그 지독한 원한을 나한테 뿌린 거다?"

-저 위의 문이 열린 것 자체가 5년만의 일이네. 사람이 아래로 내려온 건 처음이고. 그래서 당연히 두목이라 생각하고 즉시 정신공격을 날렸어. 미안하네. 급한 마음에 상대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실수를 저질렀네.

삐걱...

녀석은 기름칠 안 된 톱니 같은 소리를 내며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오, 진짜 이걸 확 잡아다 목을 비틀어 버릴 수도 없고.

-정말 미안하네. 이런 캄캄한 곳에 혼자 10년 동안 갇혀 있었더니 마음이 조급해졌네. 내가 원래 이런 허투른 존재가 아닌데,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야.

"솔직히 나 완전 빡 쳤는데...."

아니, 그 생각은 아예 하질 말자.

이럴 땐 좋은 생각.... 그래 좋은 생각이야. 좋았던 기억으로 기분을 전환해야지.

전에 메르데스한테 기댔을 때 냄새 좋았지? 맞아, 정말 편한 기분이었어. 잠 들 것 같은.

떠나기 전에 다 같이 식사 했을 때 분위기 좋았던 것도 기억나지? 아, 그전에 톨라리가 나 껴안고 날아올랐을 때 의외로 쿠션감이 있어서 놀랐던 것도 기억나고?

"...됐어. 봐줄게. 근데 한 번만 더 나한테 이딴 짓 하면 널 삭제 해 버릴 거야."

-위대한 에이션트 이글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겠네. 앞으로 평생 동안 결코 자네에게 바늘만큼의 위해도 끼치지 않겠어.

"후...."

마이너스 기억과 플러스 기억이 서로 상쇄되며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미동도 안하는 금독수리를 보며 물었다.

"지금은 마력 떨어져서 못 움직이는 거야?"

-그렇네.

"지난 10년 동안 모은 마력으로 정신공격 날렸다며? 그냥 그걸로 탈출하면 안 됐어?"

-그것으로는 날갯짓 몇 번 하면 끝이야. 나는 자연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존재가 아니네. 내가 움직이려면 에이션트 이글의 마력이 필요하지.

"아니면 인간이라던가?"

-인간의 마력도 괜찮을 거야. 아직 한 번도 흡수해 본 적은 없지만.

"도적 두목한테 정신공격 걸고 어쩌려고 했어?"

-일단 정신을 무너뜨리고 나서 내가 조종하려 했네.

"진짜?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건가?"

-실제로 해 본적은 없어서 장담하긴 어렵네. 그저 그 가능성에 모든 걸 걸었지.

"해 봤으면 재밌었을 텐데. 근데 방금 내가 죽였어."

-두목을?

"응."

-그렇군. 어떻게든 두목을 조종해서 날 이곳에서 끄집어 낸 다음, 마법을 쓰는 부하를 선별해 내 몸에 마력을 주입시킬 계획이었네.

"클러스터 도적단에 마법사.... 가 있긴 있지. 다들 허접한 수준이지만. 아무튼 난 너 구하러 온 거야. 밖에 독수리들도 대기 중이고."

-에이션트 이글이 밖에 대기하고 있다고? 나를 구하기 위해?

"응. 내가 부르면 바로 들어올 거야. 아니지, 내가 마력 좀 나눠줄까? 네가 알아서 나가게?"

-그렇게만 해준다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네.

"그 전에 확인하고 넘어갈게 있는데. 너 전에 독수리가 마력 주입했더니 폭주해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다며? 이번에도 똑같이 폭주안하리란 보장 있어?"

-그것은 진실이 아니네.

이글 스피릿은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발로 이 깊은 지하 동굴까지 기어 내려 온 것이 아니야. 입구 근처에서 마력을 다 쓰고 추락해 기절한 것을, 도적단 녀석들이 끌고 들어 온 것뿐이네.

"폭주는?"

-그것은 사연이 있지. 네 마음이 평온한 이상, 이번엔 결코 폭주하지 않으리라 장담하네.

"마음? 마력 주는 사람 마음에 영향을 받아?"

-그렇다네.

"흠.... 뭐 알았어. 근데 마력 어떻게 나눠주는데?"

-그냥 바람 계열 마법을 쓰면 된다네.

"응?"

-나는 주변에 깔린 약한 바람 마법을 흡수할 수 있어. 그러니 그냥 마법을 날리면 되네. 날 공격하듯.

마법 흡수? 그건 또 몰랐네.

우웅!

시험 삼아 마법으로 가벼운 바람의 기류를 일으키자, 말 그대로 순식간에 기류가 사라지며 이글 스피릿의 몸에 휘감겼다.

"...좋군."

녀석은 직접 입을 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마력이야. 다만 양이 좀 부족하니 몇 번 더 사용해 줄 수 있겠나?"

"얼마든지."

위이이이이잉!

나는 한순간에 십여 개의 바람의 창을 만들어 냈다. 이글 스피릿은 게 눈 감추듯 그 모든 걸 빨아들이며 몸을 들썩였다.

"잘 먹었네. 인간의 마력은 맛이 정말 훌륭하군. 아니, 이 느낌은...."

"응?"

"인간과 고대종의 중간적인 맛이 나."

"뭐?"

"이 처음 느꼈지만 처음 느낀 것 같지 않은 풍경...."

"풍경?

"그러네. 마치 영원의 숲 늑대. 사슴을 사냥하는 늑대, 하지만 그 늑대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맛이야."

이건 또 뭔 놈의 미식가 같은 소릴 하고 자빠졌냐. 근데 영원의 숲 늑대라고?

"너 에이션트 울프 본 적 있어?"

"직접 본 적은 없네. 하지만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코어에 남은 기억을 통해 알 수 있지. 흠, 게다가 에이션트 울프뿐이 아니군. 이것은 곰인가? 저 깊은 어둠산을 뛰어다니는 하얀 곰. 그 곰이 꿀을 따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알았으니까 그만. 내가 그 고대종들 코어를 먹어서 그래."

"그런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설명하자면 길어. 그럼 이제 너 혼자 나올 수 있지?"

나는 즉시 비행마법을 사용해 위로 떠올랐다. 이글 스피릿은 다급히 날개를 퍼덕이며 내 쪽으로 소리쳤다.

"잠시 기다리게! 너무 오래 굳어 있어서 날개를 풀어야 해! 그리고 함께 나가야 하네! 내가 길을 모르지 않나? 아니, 그전에 우리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는 게 어떻겠나? 그리고 마력도 더 있으면 좋겠네! 좀 더 주게나!"

...이놈은 뭐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아? 확 저 아래로 템페스트 날려 버릴라?

후.

근데 또 내가 정이 많아 문제다. 그냥 친절하게 중간 중간 바람의 벽 마법을 깔아주며 소리쳤다.

"시끄럽고! 빨리 올라오기나 해! 마력은 올라오면서 흡수하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6화

34장 마인드 어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