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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2화

27장 세 번째 코어

-에이션트 베어? 그거라면 엘프에게 묻는 게 빠를 걸세. 우리와는 껄끄러운 사이라서.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드워프의 본거지 역시 어둠산이라 서로 서식지가 겹치니.... 아니 실례. 서로 사는 환경이 겹쳐서 사이가 나쁘다 들었습니다."

서식지라. 이 엘프 놈들이 평소에 드워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알거 같구만. 서로 동맹까지 맺은 주제에.

"반면 저희 영원의 숲 엘프와는 관계가 나쁘지 않습니다. 가끔 채취한 꿀을 보내 말린 물고기과 교환하기도 합니다."

"잘됐네. 그럼 몇 사람 좀 같이 가자."

"네? 그게 무슨...."

"지금부터 어둠산에 가야 하거든. 이미 그쪽에 보낼 꿀마차가 어둠산으로 가고 있어. 드워프 주둔지 쪽으로 우회해서."

"꿀마차? 그게 무엇입니까?"

"꿀을 가득 실은 짐마차. 근데 예정보다 한참 모자라. 무역선이 아직 도착 안 해서."

"...?"

하긴 이렇게 말해봐야 뭔 소린지 모르겠지?

"에이션트 베어의 환심을 사야 하는데 거기다 줄 꿀이 모자란다고. 그러니 친분이 있는 엘프라도 몇 명 같이 가서 분위기를 만들어 주면 좋겠어. 초면에 막 들이 닥치면 분위기 험악해 질 거 아냐?"

"어째서 에이션트 베어의 환심을.... 아니, 아닙니다."

장로는 심정이 복잡한 듯 고개를 크게 저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시겠죠. 알겠습니다. 에이션트 베어와 안면이 있는 엘프를 바로 선발하겠습니다."

"장로님."

그러자 장로를 뒤에서 수행하던 엘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10년쯤 전에 어둠산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마수들에게 꿀을 좀 많이 가져다 줄 수 없냐는 부탁을 받은 걸 기억합니다."

"라니르 네가? 이거 잘됐군. 황자님. 이쪽은 라니르입니다. 군주의 성 경비병 지망생이지요."

소개받은 엘프는 기껏해야 열다섯쯤 되는 어린 소년이었다. 물론 저것도 엘프니까 실제로는 그보다 몇 배의 나이를 먹었겠지만.

근데 어째 눈에 멍이 들어있네? 누구랑 싸웠나?

"라니르라 합니다. 외람되지만 어둠산에 갔을 때 마수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뭔데?"

"마수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오래 전 자신들의 족장이 엘프 군주, 그러니 지금은 죽은 데자르에게 어떤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데자르? 그래도 명색이 자기네 군주였는데 이름을 막 부르네?

"무슨 부탁인데?"

"족장이 다룰 수 있는 검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합니다. 그래서 검을 만들어 가져갔더니, 부탁했던 족장이 이미 죽은 다음이라 다시 검을 가지고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검?

곰이 어떻게 검을 다루지? 앞발의 구조상 검을 쥘 수 없는 거 아닌가?

"재밌는 이야기네. 근데 그게 왜?"

"그 이야기가 마수들의 족장 대대로 내려오고 있고, 지금의 족장도 그때 검을 받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그 검을 가져다주면 환심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다. 뭐든 에이션트 베어에게 통하는 선물이 있다면 전부 챙겨 가는 게 도움이 되겠지?

"근데 그 검이 어디 있는데?"

"군주의 성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아마도 데자르의 방안이 유력하지 않을까요?"

"데자르의 방? 전에 갔을 때는 딱히 그런 거 안보였는데...."

나는 당시의 풍경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한번 다시 가서 찾아보지 뭐."

"황자님!"

그때 성역의 입구 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미리 와 계셨군요. 숲이 험해서 제가 도착이 조금 늦었습니다."

도착한 것은 다비를 포함한 몇 명의 백기사단 기사였다. 나는 엘프를 노려보는 기사들의 분노어린 시선을 느끼며 다비에게 속삭였다.

"아니, 왜 하필 백기사단을 여기 데려 온 거야?"

"황자님께서 맨 몸으로도 힘 꽤나 쓰는 기사를 몇 명 데려 오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백기사단의 생존자가 딱입니다. 엘프들에게 힘자랑을 시키실 거라면 특히 말이죠."

"힘자랑은 엘프가 아니라 나중에 곰돌이들한테 할 거야."

"...네?"

"엘프 마을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고. 저 녀석들 괜히 흥분해서 날뛰지 않게 해. 곧 여길 떠날 거니까."

시간이 없어 제대로 설명 못한 내 잘못이지 뭐. 다비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뒤쪽에 있는 기사들에게 달려가 주의를 주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엘프 소년을 돌아보며 웃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칼 좀 찾으러 가 볼까?

* * *

다시 찾은 군주의 성은, 그 며칠 사이에 거의 폐가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나무 정령의 수호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처럼 돌아다니는 경비병이나 잡일하던 엘프도 없고.

"여기가 제일 심하구만...."

특히 데자르의 방은 벽과 바닥의 원목이 전부 뜯겨 한층 더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여전히 검붉게 물든 바닥을 보며 물었다.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어?"

"군주의 시체는 화장해서 버렸습니다. 아니, 그딴 괴물에겐 군주라 불러주는 것도 사치입니다."

라니르가 치를 떨며 대답했다. 하긴 그놈 때문에 엘프 전사 천명이 몰살당했으니 저럴 만도 하지. 소수의 생존자도 트라우마가 큰 것 같고.

"데자르를 직접 본 적 있어?"

"전에 얼굴만 봤습니다. 오래 전에는 무척 동경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 뭐 그건 그런데...."

드넓은 데자르의 방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어째 청소도 되어 있는 것 같고.

그 와중에 데자르가 생전에 바라보던 거울을 보다 반대편 벽에 둥그런 물체가 달린 걸 발견했다.

그것은 문고리였다.

문도 없는 곳에 웬 문고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가서 손에 쥐고 옆으로 당겨보았다.

드르르르....

그러자 곧바로 숨겨진 벽이 열렸다.

"오."

멋져.

벽장에는 한눈에 봐도 엄청나 보이는 검들이 최소 스무 자루 넘게 진열되어 있었다. 라니르 역시 놀란 얼굴로 검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데자르는 직접 만든 검을 이곳에 보관하고 있었군요."

"이게 다 직접 만든 거야?"

"데자르는 엘프 최고의 검 제작자입니다. 최근 몇 백 년은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았지만, 그 전에는 자주 대장간에 들려 검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녀석 이런 재주도 있었나... 다비!"

살짝 목소리를 높이자, 밖에서 쾅 소리와 함께 다비가 창문 안으로 순식간에 몸을 날려 들어왔다.

"네. 황자님. 부르셨습니까?"

"여기 3층인데...."

엘프 소년이 움찔하며 당황했다. 나는 다비를 향해 손짓하며 데자르의 무기장을 가리켰다.

"이게 엘프 군주가 그동안 만든 칼 인가봐."

"확실히 엘프가 좋은 칼을 만들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군주가 직접 말입니까?"

"응. 네가 볼 땐 어때?"

"일단 좀 살펴보겠습니다."

검을 둘러보던 다비의 눈이 한순간 진지하게 번득였다.

차례대로 검을 뽑아 칼날을 확인하고, 또는 가볍게 휘두르기도 하더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굉장하군요. 지금까지 제가 본 모든 칼 중에 최고입니다."

"그 정도야?"

"제국 기사단이 지급하는 것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물론 기사에게 중요한 건 본인의 힘과 기술이지 검의 성능이 아닙니다만...."

다비는 몸을 빙글 돌리며 옆쪽의 벽을 향해 두 번 검을 휘둘렀다.

촥! 촥!

동시에 벽에 X자 형태의 균열이 생기며 벽 너머로 통풍구가 이어졌다. 다비는 손가락으로 칼날 근처를 쓰다듬으며 혀를 내둘렀다.

"적어도 나이트 익스퍼트까지는, 동일한 실력이라면 이 검을 가진 쪽이 무조건 이길 겁니다."

"잘 됐네. 몽땅 챙겨가자. 그런데 곰돌이가 쓰기엔 뭐랄까...."

작지 않나?

물론 사람이 쓰기엔 적당하지만

하지만 에이션트 베어는 일반적인 곰보다도 덩치가 훨씬 크다. 이런 걸 쥐어 봤자 간에 기별이나 갈까?

"마수들의 전설에 의하면, 데자르가 들고 온 검의 사이즈는 자신의 키보다 컸다고 합니다."

"데자르 본인보다 컸다고?"

라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키가 대략 180cm정도 됐지? 그렇다면 곰돌이를 위해 만든 칼은 최소 2m는 된다는 소린데?

"아마도 이곳에 진열되어 있었나보군요."

다비는 진열장의 가장 안쪽에 있는 빈 공간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먼지를 보니 최근까지 이곳에 뭔가 놓여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즈라면...."

"왜?"

"...제가 일식 전투 때 싸운 공포 군주의 정체는 파이렌이었습니다."

뜬금없이 웬 파이렌 이야기?

"응. 전에 이야기했어. 그런데 왜?"

"녀석은 다른 공포 군주와 달리 커다란 칼을 쥐고 있었습니다. 길이가 2미터를 넘는.... 어쩌면 그게 이것이 아닐까 싶군요."

진짜?

그럼 후원자가 여기 들린 다음, 그 칼을 챙겨 파이렌에게 넘겨 준 걸까?

"덩치에 비해 만듦새가 극도로 정교한 칼이었습니다. 특히 손잡이가 묘하게 생겼던 게 기억납니다."

"손잡이가 어쨌는데?"

"일반적인 손잡이도 있지만, 그 주변에 따로 무언가를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습니다. 파이렌은 거기 촉수를 끼워 넣고 움켜쥐었지만.... 원래는 에이션트 베어가 손가락이나 손톱을 끼워 넣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닐까 싶군요."

그 정도면 따로 확인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시체로 가득한 일식 전투의 전장을 떠올리며 다비에게 물었다.

"아직 전장에 그대로 버려져있으려나?"

"뒷정리 하는 와중에 제가 직접 전리품으로 챙겼습니다."

"설마 저택에 가져다 놓은 건 아니지?"

"아닙니다. 중간에 보급품을 저장하던 마탑에 보관했습니다. 저도 잊어버렸는데 지금 생각났군요."

"마탑? 톨라리 마탑?"

휴. 그거 다행이네. 여기서 아주 멀지 않아서.

"네. 당장 제가 달려가 챙겨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갈게."

이쯤 되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눈에 선히 보인다.

만약 곰돌이가 손에 쥐고 싸울 무기를 원했다면, 분명 몸에 착용할 갑옷 역시 바라지 않았을까?

"마탑은 내가 날아갔다 올게, 너는 드워프 주둔기지로 가서 거기 있는 갑옷을 챙겨줘."

"어떤 갑옷 말씀입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갑옷. 드워프 군주에게 후원자가 부탁한 갑옷이라고 말하면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거야. 그거 챙겨서 어둠산으로 먼저 출발 해."

* * *

꿀을 가득 실은 짐마차 열대가 어둠산에 도착할 때까지, 출발한 날짜를 기준으로 총 15일이 걸렸다.

휴.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천금 같은 상황에 보름이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남은 인류의 배신자도 가능한 빨리 찾아 족쳐야 하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 동안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먼저 에이션트 베어에게 엘프들을 보내 경계심을 풀었고, 다음으로 직접 운반한 파이렌의 검을 넘겨주었다.

-이게 바로 그 전설로 내려오던 엘프 군주의 검! 고맙다! 정말 고맙다! 이것으로 몇 대째 내려오던 가문의 한이 풀렸다!

에이션트 베어 족장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추가로 다비가 가져온 초대형 마갑까지 넘겨줬더니....

-내, 내 몸에 맞는 갑옷이라니! 이런 건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해 부탁할 엄두도 못 냈다! 너무 기쁘다! 기뻐서 춤을 춰야겠다!

마지막으로 열대의 꿀마차가 마을에 도착하자, 부족 전체가 밖으로 뛰쳐나와 내 몸을 번갈아 가며 헹가래 치기 시작했다.

-만세! 인간 꼬마 만세!

-지금부터 우린 영원한 동반자다!

-꿀이다! 드디어 다시 꿀을 먹을 수 있어!

그리고 해가 저문 지금까지, 무려 100마리가 넘는 거대한 곰돌이들이 산기슭에 모여 축제의 춤을 추고 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덕분에 산이 다 뒤흔들릴 지경.

이건 농담도 아니고 과장 섞인 비유도 아니다. 정말로 땅이 울려서 시야가 흔들린다니까?

"역시 기쁠 땐 춤이 최고다."

두 발로 선 에이션트 베어 족장의 키는 대략 5미터. 정면에서 보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얘 이름이 밥돌이라고 했던가?

"어.... 춤 잘 추더라. 밥돌 족장."

"밥돌이 아니라 밥-달이다. 칭찬 고맙다. 춤 실력은 족장이 갖춰야 할 의무지. 너도 같이 추는 게 어떠냐?"

"난 충분해. 정말로."

방금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아슬아슬한 스텝을 밟았다. 저 거대한 덩치들 사이에 깔려 죽을 위기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그러자 밥돌, 아니 밥달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알겠다. 그러면 잊어버리기 전에 아까 말했던 부탁부터 들어주겠다. 우.... 우웩!"

그리고는 바닥에 뽀얀 사기구슬을 토해냈다.

"후, 이게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다. 우린 친구가 되었으니, 네겐 이것 흡수할 자격이 있다. 자, 당장 먹어라."

"당장? 그러지 뭐."

고민 없이 구슬을 주워 입안에 넣었다. 내가 이 짓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거든.

"잠깐!"

그러자 밥달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다고 그거 한 번에 꿀꺽 삼키면 안 된다!"

"움. 나도 알아. 처음 해본 거 아니야."

"우엉?"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3화

27장 세 번째 코어

"이걸로 세 번째야. 코어 먹는 거. 이미 에이션트 울프랑 에이션트 씰의 코어를 먹었어."

"우워? 정말이냐?"

밥달은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눈망울을 계속 껌뻑였다.

"그렇군.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친근감이 든 거였다.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선물 줘서 그랬던 거 아니고?"

"물론 선물은 최고였다. 하지만 클로드, 너한테서도 좋은 냄새가 났다."

"냄새?"

"그렇다. 우리와 완전히 같진 않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어찌나 친근한지 보자마자 꽉 한번 껴안아 주고 싶었다."

아니, 하지 마. 그랬다간 나 죽어.

암튼 마수 친화력 C등급인 내가 이 정도라면, B+등급인 디디는 완전 물고 빨고 난리가 났었겠는데?

그 와중에 입안에 코어가 조금씩 녹으며 흡수 되는 게 느껴졌다. 옆에 앉은 엘프 소년이 묘한 눈으로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황자님. 입과 코에서 하얀 연기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있습니다."

"맞아. 코어가 원래 그런 식으로 흡수되더라고."

"몸은 괜찮으냐? 잠시 동안은 힘들지도 모른다. 그 뒤엔 우리 에이션트 베어의 힘을 얻겠지만."

하얀 곰돌이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 털색이 눈처럼 하얀 게 좀 쇼크였지. 자기들이 무슨 북극곰도 아니고.

"곰 같은 힘이여 솟아라? 정확히 뭐가 좋아지는데?"

"인간에게 먹여본 적이 없어 정확한 건 모르겠다. 확실한 건 힘, 강해지고. 몸, 튼튼해진다."

전에 르갈도 그렇게 이야기했었지. 뭐 다른 건 없나?

"으헉!"

그때 멀리서 인간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씨름판에서 나가떨어진 기사가 등을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 욕심 많은 곰들에게 당장 퍼줄 꿀이 부족하다면....

-일단 힘이 강력한 인간을 몇 명 데리고 가라. 마갑 없이 맨몸으로.

-그리고 끝까지 코어를 안내주면 힘겨루기를 하자고 제안해라. 여기서 이기면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코어를 내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르갈의 조언으로 다비와 기사 몇 명을 데려 온 거였는데.

막상 부족한 꿀은 칼과 갑옷으로 충분히 커버가 되었다.

무엇보다 곰돌이들은 저택의 10분의 1도 못 채울 양의 꿀에도 엄청나게 감격하며 기뻐 해 주었다. 어찌나 감격들을 하는지 이쪽이 더 민망해질 정도로.

아무래도 르갈이 에이션트 베어의 특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것 같지?

덕분에 동행한 기사들은 축제의 여흥으로 씨름 비슷한 힘겨루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저 인간들 강하다. 인간이 우릴 상대로 저만큼 할 줄이야. 그것도 맨몸으로. 나도 가서 같이 한판 즐겨야겠다!"

밥달은 손을 휘휘 흔들며 다시 씨름판이 벌어진 쪽으로 내달렸다. 그러자 라니르가 코웃음을 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션트 베어가 저렇게 반길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게. 나도 몰랐어."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마수의 코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습니다.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살짝 어지러운데 괜찮아. 이것도 벌써 세 번째라."

처음이 힘들었지 두 번째 부터는 일도 아니었다. 라니르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실은 먼저 돌아온 전사들에게 그곳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식의 전장. 그 끔찍했던 순간에 대해서 말입니다."

"맞아. 진짜 끔찍했어."

"한 전사가 도망치는 와중에 황자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끔찍한 괴물들을 앞에 놓고,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우는 모습을 제게 전해 주었습니다."

정말?

그 와중에 그걸 지켜본 엘프가 있었다고?

"저는 감격했습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앗, 실례했습니다. 저희들끼리 하던 말이 입에 붙어서."

"괜찮아. 편하게 말해."

"지금 저는 결코 인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군주를 지키는 경비병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고 말입니다."

"그러게. 어쩌다보니 네 꿈을 꺾어 버렸네."

"아닙니다. 지금은 누가 경비병 하라고 절을 해도 안할 겁니다. 군주가 독을 풀어 엘프가 멸망할 뻔 했으니까요. 그런 군주를 처단하신 황자님은 엘프의 은인입니다."

그래. 확실히 죽어 마땅한 놈이긴 했지.

"그리고 저는 바깥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군주의 경비병이 되려 했던 것도, 가끔씩이라도 영원의 숲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드워프 쪽에 사신으로 가던가, 혹은 인간 쪽에 가던가 말입니다."

확실히 데자르는 모든 일을 경비병을 통해 시켰지? 나는 별 대꾸 없이 라니르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하지만 이젠 군주는 없고, 저는 영원의 숲에서 탈출하고 싶습니다. 부탁인데 황자님께서 저를 거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것 봐라?

엘프는 보통 이런 식으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데.

하지만 이 녀석은 너무 대 놓고 솔직하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그전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너 몇 살이야?"

"올해로 93살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겉모습은 한 열다섯쯤 되 보인다만.

"숲에 너 같은 엘프가 많아?"

"저 같은 엘프라는 게 어떤 뜻입니까?"

"숲을 빠져나와서 바깥 세상에 살고 싶어 하는 엘프가 많으냐고."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물론 저처럼 솔직하게 드러냈다가 다른 엘프들에 기피당하는 게 두려워서 그런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지금껏 내가 본 모든 엘프를 통틀어 가장 솔직한 녀석이다. 엘프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다만 이런 저런 성격을 떠나, 미래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 하나는 확실히 맘에 든다.

종족 : 엘프

현재 힘 : D+

잠재 힘 : B

현재 마법 : C

잠재 마법 : B

현재 부여마법 : D+

잠재 부여마법 : A+

잠재 정령 마법 : B

이 정도면 훌륭하고말고.

그동안 다비나 톨라리 같은 괴물들만 봐서 그렇지, 힘과 마법의 잠재력이 동시에 B등급이라는 건 상당한 가치가 있다.

정령 마법에 대한 잠재력이야 엘프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부여마법 잠재력이 A+라는 것도 강력한 미래가치.

물론 앞으로 남은 게 1년뿐이라 이걸 제대로 키워줄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다.

특히 엘프의 성장속도가 인간에 비해 한참 느리다는 걸 감안하면....

"그런데 왜 한쪽 눈을 감고 계십니까? 가끔 뜨는걸 보면 특별히 다치신 건 아닌 듯합니다만."

"아, 이거?"

나는 감고 있던 오른쪽 눈을 깜빡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별거 아냐. 그냥 이쪽 눈 뜨면 정신이 좀 없어서."

"와.... 이쪽은 눈동자가 녹색이군요. 군주님, 아니 데자르도 그런 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하지. 이게 바로 너희 군주의 눈이었으니까.

그런데 군주의 눈으로 본 라니르의 모습이 뭔가....

기묘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분명 본질의 흐름만 보였었는데?

지금은 그 흐름에 더해 방향성, 특히 흐름의 세부적인 성격이 보인다.

...성격?

아니, 이건 감정이다.

품고 있는 마음, 기분, 뭐라고 하든지 그런 종류의 것.

덕분에 날 보는 라니르의 기분이 읽혀졌다.

강력한 호기심과 기대감.

그리고 그 모든 걸 뛰어넘는, 극단적으로 높은 경외심.

어우, 얘가 겉으로 보이는 이상으로 나한테 푹 빠졌나 보구만.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닌데....

어째서 이런 걸 알 수 있게 된 걸까?

군주의 눈은 그냥 사물의 본질만 보는 거 아니었어?

대체 뭐가 달라졌지?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라니르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걱정과 두려움이 번졌다. 표정으로 읽은 게 아니라 진짜 감정 자체가 눈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 감정의 흐름이 정확히 내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까지. 이렇게까지 군주의 눈의 효과가 변했다는 건....

아, 맞아.

나 방금 코어 먹었지?

전에 다비가 그랬다. 코어의 힘에 기존의 감각이 더해져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고.

그러니 지금 원래 가지고 있던 군주의 눈에,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각이 더해져서....

새로운 공감각을 얻은 건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그것도 감정의 대상까지?

"...라니르?"

"네. 황자님."

"저기 곰돌이들이랑 힘 싸움하는 키 큰 인간 보이지?"

나는 다비를 가리켰다. 그러자 라니르의 시선이 다비를 향하며 새로운 감정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약간의 두려움.

약간의 경외.

그리고 강한 호기심.

"네. 이름이 다비라고 했던가요? 전에 군주의 성 3층까지 한 번에 뛰어 올라왔던 걸 기억합니다."

"역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다비가 곰돌이들 상대로 잘 싸운다 싶어서."

그 와중에 다비는 상대인 에이션트 베어를 거의 농락하다 시피 상대하고 있었다. 마갑도 안 입고 맨몸인 주제에.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 분은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간이라 들었습니다. 나이트 마스터라고 하던가요?"

"맞아. 나이트 마스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전환했다.

감정 파악 능력이라.

왜 하필 이런 능력이 발현된 걸까?

물론 있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이런 건 이계의 군대와 싸울 때 전혀 쓸모가 없잖아? 그 괴물 놈들 감정을 파악한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어?

"좋아! 인간 장사! 이번엔 내가 상대해 주마!"

그때 다비의 상대가 족장인 밥달로 바뀌었다.

제아무리 다비라 해도, 키가 5미터에 체중은 자신의 열 배도 넘는 곰돌이 족장을 상대로 승리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래도 1분정도 엎치락뒤치락 하며 잘 버티던 다비는, 이내 상대의 밥상뒤집기 같은 움직임에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윽!"

물론 그 와중에 다비와 밥달이 서로에게 내뿜는 투쟁심과 흥분, 경계심과 우월감이 화려하게 교차하는 게 보였다.

감정의 목표와 흐름.

"흠...."

잠깐, 이거 봐라?

어쩌면 감정파악능력이 보기보다 전투에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쿠워어!"

다비를 날려버린 밥달은 긴 포효와 함께 다시 내 쪽으로 달려왔다.

"재밌었다! 네가 데려온 저 호위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인간이라 부르기엔 말도 안 될 정도다."

"그야 나이트 마스터니까. 마갑 없이 기술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나이트 익스퍼트는 제압할 수준이야."

"나이트 마스터? 나이트 익스퍼트?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하다. 인간이 무기와 갑옷도 없이. 대단하다. 대단해."

밥달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무기와 갑옷 이야기가 나와서 드는 생각인데.

왜 이 녀석들은 그토록 엘프의 칼에 집착했던 걸까?

"밥달?"

"밥달이 아니라 밥-달이다. 그런데 왜 그러냐?"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그 칼이 그렇게 중요해?"

"그 칼? 엘프 족장이 만든 칼 말이냐? 네가 낮에 내게 선물로 준거?"

"응. 그거. 그리고 갑옷도. 갑옷도 칼 받았을 때만큼 기뻐했잖아? 다행이 사이즈가 딱 맞기도 했지만."

"그래. 기뻤다. 갑옷도 엄청 기뻤고. 고맙다 클로드."

"선물 준 입장에서 좀 그렇긴 한데, 그게 왜 기쁜 거야? 어디 장식할 것도 아닐 테고, 왜 에이션트 베어가 검과 갑옷이 필요해?"

"궁금한가?"

밥달은 갑자기 내 쪽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 밀었다.

"큼큼. 흠. 냄새 좋군. 이젠 완전히 우리 부족의 냄새가 난다."

군주의 눈을 통해 약간의 경계와 강한 유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엄청난 비장감과 숙연함, 심지어 경건함까지.

아니 뭔데 이거?

왜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거야?

"그러니 네겐 알려주마. 우리 에이션트 부족의 오랜 숙원을."

* * *

땅벌레.

에이션트 베어의 둥지인 어둠산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땅벌레라 불리는 괴물이 출몰했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단단한 껍질에 괴력을 가진 괴물이었지만,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에이션트 베어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둠산에 더불어 살던 드워프가 일을 터뜨렸다.

어둠산 곳곳을 파고들며 광맥을 뚫던 와중, 땅속 깊은 곳에 있던 땅벌레의 둥지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리고 고통의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대규모의 땅벌레가 출몰, 산에 있는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에이션트 베어의 터전인 숲과 먹잇감인 동물이 사라졌고, 덩달아 가장 중요한 자원인 꿀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막상 일을 터뜨린 드워프는 어둠산의 외곽으로 본거지를 옮기며 나몰라했고.

덕분에 독박을 뒤집어 쓴 에이션트 베어는, 최근 천년동안 땅벌레 소탕에 종족의 모든 여력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를 다 들은 내 솔직한 심정은....

"맙소사."

그래. 정말 세상에 맙소사다.

그래서 드워프와 에이션트 베어의 사이가 나빴던 거구나. 이건 뭐 못 죽여 안달 난 원수가 안 된 게 다행이네.

"드워프는 무책임한 놈들이다. 그나마 녀석들은 바깥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니, 어떻게든 꿀을 좀 구해달라고 했는데 그 부탁도 들어 주지 않았다."

"꿀? 그 와중에도 꿀이야? 너희 진짜 꿀 좋아하는구나."

"에이션트 베어에게 꿀은 단순히 먹는 게 아니다. 우린 꿀 먹으면 강해진다. 싸울 때 꿀을 먹어야 제 실력 낼 수 있다. 물론 맛있어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꿀을 먹으면 강해진다고?"

"그렇다."

"기분 상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

"그렇다. 진짜로."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마을 한쪽에 쌓아둔 꿀통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린 많은 꿀이 필요하다. 땅벌레와 최후의 전투를 치르려면. 그리고 무기도 있어야 한다."

"굳이 무기가 필요해? 그렇게 엄청난 손톱이 있는데?"

에이션트 베어의 손톱은 어지간한 칼보다 단단하고 날카롭다. 밥달은 자신의 손톱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손톱 강하다. 어지간한 땅벌레는 으깨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걸로는 여왕 껍질을 못 뚫는다."

"여왕?"

"땅벌레 여왕은 단단하다. 지금까지 우리 부족은 세 차례나 땅벌레 굴속으로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여왕을 잡지 못했고, 여왕의 반격에 많은 이들이 죽었다. 우리 아버지도, 우리 할아버지도."

"전대 족장들? 족장들이 전부 땅벌레 사냥하다 죽었어?"

"그렇다. 그래서 엘프 군주의 칼이 필요했고, 네가 가져온 저 두꺼운 갑옷도 필요했다. 죽지 않고 버티려면. 그래서 너무 고맙다."

밥달은 갑자기 앞발을 치켜들며 허공에 포효하기 시작했다.

"쿠어어어어어! 그러니 모두 이 축제를 즐겨라! 내일 아침! 우린 여기 있는 꿀을 다 마시고 땅벌레 굴로 원정을 떠날 것이다!"

"쿠어어어어어어어어!"

그러자 뒤쪽에서 춤추고 힘 싸움 하던 모든 에이션트 베어들이 앞발을 치켜들며 함께 포효했다.

"쿠워어어어어!"

"쿠워! 쿠워어어어!"

"내일 우린 천년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다! 족장인 내가 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앞장 설 것이다! 어둠산은 우리의 것이다! 고대의 영광을 위해! 쿠워어어어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4화

28장 언더 더 마운틴

"일어나셨군요. 잠은 편히 주무셨습니까?"

눈을 뜨자마자 다비가 인사를 올렸다. 으.... 대체 지금이 몇 시야? 해가 중천인데?

"생각도 안했는데 푹 잤네. 이거 완전 물건이야."

일단 에이션트 베어들이 깔아준 사슴모피 침낭에서 몸을 끄집어냈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촉감이 어찌나 일품인지, 속에 쏙 들어가서 눈을 감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침낭이 정말 훌륭하더군요. 저도 다른 기사들에게 불침번을 부탁하고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엘프들과 꿀을 교환하려고 만들었다고 하더라. 근데 라니르는?"

"짐을 챙겨 온다며 새벽에 영원의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비는 멀리 산기슭 아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황자님께서 그 엘프 소년을 기사단원으로 받아준다고 약속하셨다더군요. 정말입니까?"

"맞아. 우리 기사단에 엘프 한명쯤 있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 왜? 엘프는 가르치기 싫어?"

"그저 얼마 전까지 적대하던 세력이라, 조금 걱정이 될 뿐입니다."

다비의 얼굴엔 '엘프를 믿어도 될까요?'라는 의문이 그림처럼 떠올라 있었다. 나는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다른 엘프는 몰라도 라니르는 믿어도 돼."

"알겠습니다. 황자님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시니까요."

다비는 토 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실은 군주의 눈으로 속마음을 읽었기 때문이긴 한데.... 뭐 아무렴 어때. 말나온 김에 다비의 마음도 확인해 볼까?

"...."

약간의 경계.

약간의 불안.

그리고 나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충성.

"와, 이거 라니르는 댈 것도 아닌데?"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별거 아냐. 그보다 곰돌이들은 다 어디 갔어?"

어제까지만 해도 왁자지껄 모여 있던 에이션트 베어가 지금은 어째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설마 벌써 땅벌레 소탕하러 떠났나?

"마을 북쪽에 광장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그곳에 모여 전투 준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

"원정을 떠나기 전에 제게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땅벌레라니, 에이션트 베어에게 그런 숨은 고충이 있는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어. 물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에이션트 베어라는 종족 자체를 몰랐지만."

"저는 어렴풋이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명령만 내리시면 저도 가서 전투를 돕고 싶습니다만."

"나도 돕고 싶어. 근데 어제 물어보니 대 놓고 거절하더라."

덕분에 어제 밤 밥달과 했던 대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암만 갑옷을 입어도 육탄전이 위험한 건 똑같잖아? 전투 도중에 다른 곰들이 죽을 지도 모르고. 그러니 이번엔 내가 앞장서서 뚫고 들어갈게. 괜찮으면 그 여왕도 잡아 줄 수 있고. 어때?

-안 된다.

-안 된다고? 왜?

-이 전투는 부족 대대로 내려오는 숭고한 사명이다. 반드시 우리 에이션트 베어의 힘으로 뚫어야 하고, 최후의 순간에 족장인 내가 여왕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결코 외부인의 힘을 빌려 앞장세울 수 없다.

"...그래서 직접 싸우진 않을 테니, 뒤에서 부상 입은 곰돌이들 회복해 주는 정도만 하기로 합의했어."

"정말 그 것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싸우는 것만 빼고 다 할 거야. 광역화 마법으로 스트렝스 뿌리고, 위험하다 싶으면 빛의 방패 만들어서 맨 앞으로 보내고, 여차하면 정령도 소환해야지."

"정령마법은 너무 직접적인 수단이 아닐까요?"

"아무렴 어때. 내가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항의하면 그때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뭐."

"황자님께서는 저 곰들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다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응. 맞아. 나 저 곰돌이들 엄청 맘에 들었어. 털도 새하얀 게 북극곰 같아서 좀 귀엽고.

"기특하잖아? 특히 족장인 밥달이가 맘에 들었어. 천년동안 고생했으면서 외부의 도움 안 받으려는 것도 그렇고. 라니르도 어제 그런 말 하더라. 그렇게 오래 에이션트 베어와 교류를 했는데도, 엘프 역시 녀석들에게 그런 고충이 있는지 몰랐대."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해야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어둠산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한 종족입니다."

"맞아. 그러니 너도 너무 나서지 마."

"알겠습니다. 저 역시 뒤에서 황자님을 호위하는 역할만 하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해. 아, 그전에 나랑 대련 좀 하자."

감정 파악.

이번에 새로 생긴 이 능력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다비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제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훌륭하십니다. 황자님. 이런 곳에서 훈련을 먼저 부탁하실 줄이야. 정말이지 제국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훈련 말고 대련."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그거 아니야. 확인 해 볼게 있어서. 그러니까...."

나는 침낭 옆에 세워 놓았던, 며칠 전에 군주의 성에서 가져온 가장 작은 보검을 집어 들었다.

"내가 코어를 먹고 뭔가가 변했거든. 실전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당장 테스트 해 보자."

* * *

나는 칼을 뽑아들며 말했다.

"시작해. 물론 너 진심으로 하면 내가죽으니까 살살. 하지만 그런다고 너무 봐주진 말고. 최대한 내 쪽으로 감정을 쏟아내면서."

"...조건이 무척 까다롭군요."

다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칼을 뽑았다. 동시에 내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완전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의.

아무런 증오도 적개심도 없는, 순수한 전의가 내 몸을 덮친다.

으.... 이거....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몸이 짓눌린다....

"왜 그러십니까 황자님?"

다비가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역시 나이트 마스터는 대단하다 싶어서."

검을 뽑아든 다비는 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우 숨 막혀. 이러면 군주의 눈으로 상대의 감정이나 의지를 확인하는 게 오히려 더 마이너스일지도?

"역시 황자님은 대단하십니다.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게 기사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죠."

미소 짓는 다비의 몸에서 경외심과 흐뭇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더 강렬한 전의까지.

"그럼 갑니다!"

목소리보다 먼저 날카로운 흐름이 쏟아졌다.

이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살기?

촥!

살기를 피했을 뿐인데, 뒤따라온 칼날이 함께 피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 몸에 집중된 다비의 눈에는, 앞으로 계획된 모든 공격의 흐름이 살기라는 형태로 방출되고 있었다.

그래서 뒤따라온 가로 베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고.

채앵!

연속으로 파고드는 찌르기를 튕겨냄과 동시에, 빠른 스텝으로 이어지는 다비의 몸통 박치기를 온몸을 날려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진심으로 몸을 날린 덕분에, 바닥을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구르며 흙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후...."

하지만 다비도 너무 진심이었다고! 방금 그렇게 안 피했으면 내가 죽었을지도 몰라!

"...이럴 수가."

다비는 놀란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군요. 마지막 공격은 황자님께서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습니다."

"그래? 어후. 아니, 살살 하라고 했잖아! 그렇게 진심으로 들이 박으면 어떻게 해!"

"당연히 충돌 직전에 힘을 뺄 생각이었습니다."

"아니야! 너 끝까지 힘 안 뺐어! 달려든 속도가 그대로였다고!"

"물론입니다. 황자님이 피하셨으니까요."

"응?"

다비는 검을 거두며 또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자님. 저는 감격했습니다. 제가 전에 드렸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응? 뭐?"

"상대의 공격을 미리 읽어내는 능력. 르갈 님이 말씀하신 공감각.... 저는 단지 말로만 설명 드렸을 뿐인데, 결국 황자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깨우치셨습니다."

"아."

"역시 제 눈을 틀리지 않았습니다. 황자님의 재능은 최고입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존경과 감탄의 맹렬한 폭풍.

으.... 이거 감당 안 돼! 남사스러워서 못 버티겠어! 차라리 군주의 눈을 감아 버리자!

"그거랑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고.... 어제 새로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를 먹고 생긴 거 같아. 넌 일종의 미래가 예측된다고 했지?"

"네."

"난 의지가 보여. 전투 의지. 방금도 의지가 향하는 곳으로 공격이 오더라고."

물론 세부적인 감정까지 보인다는 이야기는 안 꺼내는 게 좋겠지? 다비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과연.... 그렇군요. 르갈 님이 말했듯이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게. 암튼 이것도 전투에 도움이 되네."

물론 압박감을 버텨 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의지? 살기?

이런 게 눈으로 보인다고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만약 날 부모의 원수처럼 생각하는 놈과 마주친다면....

"거기 인간!"

그때 멀리서 에이션트 베어 한 마리가 두발로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제 곧 땅벌레 소굴로 출발한다! 따라고 오고 싶으면 뒤에 붙어!"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비가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좋아. 그럼 기분도 전환할 겸 곰돌이들 서포트하러 가 볼까?

* * *

9회 차 때의 나는 이계의 다섯 번째 웨이브를 불러냈다.

물론 최종 결과는 실패.

다섯 번째 웨이브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했으며, 거기까지 오는 동안 소모된 자원 역시 끝내 복구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원이란 나를 제외한 모든 것.

가장 가까운 부하들.

그리고 제국의 군대.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으며, 괴멸당한 부대는 짧은 시간에 복구할 수 없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내 스스로의 힘이다. 누가 뭐래도 웨이브를 막아내는 주체는 바로 나였으니까.

하지만 제국의 군대가 소멸하고 부하들이 하나둘씩 숨을 거둘수록, 내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깨달았다. 나 혼자 아무리 강해져 봤자 한계가 있다는 걸.

그래서 5차 웨이브에 밀려 도망치는 와중, 그동안 생각만 하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성공이냐 실패냐.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최후의 10회 차를 위해 아껴놓은 히든카드.

그중 하나를 뽑자면....

제국의 각 기사단에서 차출한, 엘리트 기사 100명을 추려 새로운 기사단을 만든다.

그리고 드워프가 제조한 특수 마갑을 이들에게 제공한다. 마갑의 효과는 외부에 전해지는 마법의 효과가 내부까지 전달되지 않게 하는 것.

단순히 안티매직나이트가 착용하는 항마력 쩌는 마갑과는 결이 다르다.

항마력은 마법의 위력 자체를 죽이지만, 이건 마법의 위력이 안쪽으로 파고드는 걸 막는 것뿐.

그런 효과가 왜 필요하냐고?

계약할 수 있는 정령 중에 번개의 정령 '일렉스'라는 녀석이 있다.

일렉스는 여타 번개 정령처럼 번개를 뿜어 적을 공격하는 대신, 적의 몸에 직접 뇌전을 충전해 살아있는 번개폭탄을 만든다.

다만 적이라고 잠자코 폭탄이 되는 걸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

이상을 느끼고 미리 도망치거나, 아니면 폭탄이 완성되기도 전에 전기충격으로 죽어버린다.

혹은 기껏 폭탄으로 만들었더니 제국 기사들 사이로 뛰어들어 자폭해 버리는 참사가 터지기도 하고.

후, 아마 그게 6회 차였지? 그 뒤로 나는 단 한 번도 일렉스와 계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워프의 특수 마갑을 기사에 입히고 이들을 번개폭탄으로 만들면?

파직!

이론상으로는 진짜 엄청난 물건이 탄생한다. 일명 '번개 폭탄 기사단'

온몸으로 번개를 방출하며 적진에 파고드는 광역 구축병기라고 할까?

예측대로 흘러간다면 번개폭탄 기사 다섯이 게이트 하나를 깨끗하게 정리할 정도.

다만 이 특수 마갑 100벌을 제작하는데 약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드워프들이 낸 견적에 의하면 말이지.

여기에 마갑이 완성 됐다고 끝나는 것 도 아니고.

기사단에 직접 입히고 적응 훈련까지 해야 한다. 이것도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이상 걸린다는 예측이 나왔고.

추가로 번개 정령 일렉스와 계약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번개 정령과 적대관계인 바람 정령 룬드가의 계약을 포기해야 한다.

활용법이 까다로운 일렉스에 비해, 룬드가의 능력은 적진에 무수한 바람 칼날을 투척하는 심플 그 자체.

그래서 6회 차를 제외하면 항상 일렉스 대신 룬드가와 계약했다. 결과도 그게 좋았고.

이것이 9회 차 때까지 번개 폭탄 기사단 테크트리를 포기한 이유다.

하지만 이번 10회 차에는 밀어 붙일 생각이었다. 나 하나에 모든 자원을 몰빵해 봤자, 결국 5차 웨이브를 돌파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예 특수 마갑을 만들 5년의 시간조차 사라졌다.

그 망할 빌어먹을 거지같은 후원자 놈 때문에!

덕분에 번개 폭탄 기사는 시작도 못해보고 사라졌다.

안녕. 잘 가. 내 작은 기사단아. 물론 현실에 존재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흑흑.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5화

28장 언더 더 마운틴

며칠 전 드워프 군주에게 수호 기사단에게 필요한 마갑을 부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건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물론 꿩 대신 닭, 아니 고래 대신 멸치 정도의 다운 그레이드지만.

후....

그래서 준비한 히든카드가 이것뿐이냐고?

물론 아니다.

이계의 괴물은 여러 가지 효과를 가진 독을 뿜어낸다.

그것이 가스의 형태건, 아니면 주사를 질러 직접 주입하는 형태건, 혹은 그저 근처에만 있어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오라의 형태건 간에.

바로 이런 모든 종류의 디버프를 견뎌낼 수 있는 이뮤니티 나이트(immunity knight). 즉 면역 기사단을 만드는 테크트리도 계획했다.

여기에 아크 위저드인 트롬본의 인맥을 활용, 옆 나라 알비어스 왕국의 마도사단을 끌어들여 게이트 전용 마법부대로 개조하는 테크트리도 준비했다.

하지만 면역 기사단을 만드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 건 매한가지.

게이트 전용 마법부대 역시 호흡을 맞추며 훈련시키는데 몇 년이 걸릴지 가늠이 안 간다. 실제로 해 본적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일식 게이트 때 튀어나온 폭탄 마인....

그 폭탄 마인에 트롬본의 얼굴이 달려 있었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으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장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다. 아무튼 그 양조가 아저씨와 관련된 모든 테크트리는 패스할 수밖에.

아무튼 이런 식으로 내가 강해지는 기회비용을 조금 줄이는 대신, 강력한 다수의 군대를 육성하는 쪽으로 많은 준비를 했다.

재밌는 건 정작 10회 차를 시작하자 예정에 없던 리치의 마력결정, 혹은 고대종의 코어 같은 개인 강화 능력을 얻었다는 것.

덕분에 최종적으로는 나도 예정보다 강해질 듯 했고, 기존의 계획대로 강력한 군대 역시 많이 육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강력한 군대는 없다.

남은 시간은 1년.

그 짧은 시간에 챙길 수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카일에게 맡긴 수호기사단 정도?

그러니 이젠 정말 나뿐이다.

어떻게든 계획보다 더 강해져서 5차 웨이브 때 집중될 모든 압박을 커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우워어어!"

"저기 또 떼로 온다! 들이박아!"

"죽어라! 죽어라 땅벌레!"

"크릉! 한 마리 박살냈고!"

"동시에 몰아붙인다! 절대 물러서지 마!"

우리 곰돌이들 잘도 싸우는구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에이션트 베어의 전투가, 이런 나의 고통과 고충을 눈 녹듯 씻어준다.

남은 시간이 1년밖에 없어 강력한 엘리트 군대를 못 만들게 되었다고?

그게 뭐 어때서? 대신 이 에이션트 베어를 활용하면 되잖아!

그만큼 곰돌이들의 전투력이 내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다고 상대가 약해서 비교적 강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땅벌레는 가장 흔한 일벌레만 해도 사이즈가 대략 5미터로, 에이션트 베어 족장인 밥달에 필적할 정도.

생긴 건 땅강아지에 쥐며느리를 합체한 것처럼 생겼다. 외모의 끔찍함만 따지면 이계의 마물에 절대 꿀리지 않을 지경.

그렇다고 덩치만 크고 내실이 약한 것도 아니다. 특히 껍질이 엄청난데, 다비는 깨진 조각 하나를 주워 들더니 대략 중급 마갑에 필적할 정도의 단단함이라 했다.

그런데 곰돌이들이 후려치는 앞발 한방에, 이 단단한 갑주가 산산 조각으로 박살난다!

"황자님, 혹시 에이션트 베어에게 신성마법을 시전하셨습니까? 제가 모르는 사이에?"

다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빈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하나도 버프 안줬어."

"과연.... 실로 타고난 전투 종족이군요. 저렇게 까지 잘 싸울 줄은 몰랐습니다."

다비도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이 녀석들은 그저 힘만 세고 전의만 높은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지하 깊숙한 곳으로 이어진 땅굴.

땅벌레의 덩치가 워낙 크니 땅굴의 크기도 상상초월이다. 에이션트 베어는 이 굴의 폭과 높이에 맞춰 열다섯 마리, 혹은 스무 마리씩 대열을 갖춰 다양한 진형을 전개하는 노련함마저 보여주었다.

"전투벌레! 전투벌레다! 모두 준비해!"

그때 선두에 있는 밥달이 소리치며 곰돌이들의 진형이 빠르게 재조립됐다.

뒤에서 보니 잘 안보이긴 하는데.... 대충 T자였던 진형이 V자로 변한 것 같지?

그리고 V자의 움푹 들어간 곳을 향해, 전방에서 뭔가 커다란 것이 쑥 돌진해 들어온다.

전투벌레.

일반적인 땅벌레보다 덩치가 더 크고, 날카로운 앞발도 훨씬 도드라지게 튀어 나온 괴물.

외견에서 풍기는 위압감만 따지면 거의 광전사급이다. 생체갑옷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거의 동급 아닐까?

곰돌이들 중 녀석과 덩치로 비벼볼 만한 건 족장인 밥달뿐.

그런데 밥달은 맞상대를 피하며 V자의 한쪽 축으로 빠졌고, 대신 나머지 곰들이 스크럼을 짜고 전투벌레의 몸을 순식간에 에워싸기 시작했다.

스스스슷스스슥!

전투벌레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뒤틀었다.

날카로운 앞발이 짧은 호를 그리며 곰들의 몸을 난도질한다.

하지만 녀석이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하기엔, 이미 쫙 달라붙은 곰돌이들이 공간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크웡! 절대 떨어지지 마!"

"베였다! 큭! 하지만 버틸 수 있어!"

"몸으로 압박한다! 조금만 더!"

"버틴다! 더 버틴다!"

바로 그때, 진형의 한쪽 끝에 빠졌던 밥달이 녀석의 배후로 돌아들며 거대한 칼을 휘둘렀다.

콰직!

그 일격에, 거대한 전투벌레의 몸이 꽁무니부터 절반으로 쪼개졌다.

푸확!

땅벌레 특유의 청색 혈액이 온 사방으로 튀며 곰들의 털을 파랗게 물들였다. 나는 사방에 띄워 놓은 라이트(light)마법을 앞으로 밀어 넣으며 소리쳤다.

"다들 괜찮아? 피 너무 뒤집어 쓴 거 아냐?"

땅벌레의 혈액은 공기와 닿으면 냉기를 뿜으며 얼어붙는다. 그러자 밥달이 몸에 붙은 얼음조각을 대충 털어내며 소리쳤다.

"괜찮다! 부상자는!"

"족장! 나는 빠진다!"

"나도!"

그러자 전투벌레의 앞발을 담당했던 곰 두 마리가 뒤로 물러났고, 동시에 뒤 있던 예비 곰 두 마리가 앞으로 나가며 빈틈을 메웠다.

"좋아! 다시 전진한다!"

"쿠오오!"

맹렬한 함성과 함께 더 깊은 땅굴을 향해 진격이 시작됐다. 나는 일단 뒤에 남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부상 곰들의 상처를 살폈는데....

으, 세상에.

이 어깻죽지 갈라진 거 봐라. 상처 틈으로 내 팔뚝이 들어가고도 남겠네. 빨리 두 마리 다 동시에 치료해야지.

"이거 아프겠다. 좀만 기다려. 힐링! 페인 킬러!"

"커흥...."

"큼.... 음? 인간? 혹시 방금 뭔가 했냐?"

얜 또 뭔 헛소리야? 당연히 회복 마법 썼지.

"이게 회복마법이야. 상처가 곧 아물 테니 조금만 참아."

"아니, 방금 뭔가 통증이 줄어들었다."

"통증?"

"그래. 통증이 줄어드는 마법을 쓴 거냐? 그럴 필요 없다."

뭐? 진통이 필요 없다고?

"왜?"

눈을 크게 뜨며 되묻자, 상처가 좀 더 심한 왼쪽의 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정도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좋다. 투쟁심 끓어오른다. 쿠워!"

"쿠워! 나도 그렇다!"

덩달아 오른편의 곰도 상처 난 팔을 치켜들었다. 으 저거 아플 텐데. 이놈들 깡다구가 진짜 장난 아니구만.

인간이 이정도 중상을 입으면 사실상 전투불능이다. 쇼크로 즉사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너희들 진짜 강하네. 상처에서 피도 많이 안 나고."

"우린 상처 나면 자동으로 지혈된다. 그래도 덕분에 더 빨리 좋아졌다. 고맙다 인간."

녀석은 내 얼굴에 볼을 부비며 천진하게 웃었다. 동시에 먼저 내려간 전방에서 밥달의 고함이 희미하게 울렸다.

"냉기벌레다! 모두 일자로 모여!"

냉기벌레? 그건 또 뭔데?

뭔 일인가 싶어 다비와 함께 급히 달렸다. 그러자 엠퍼로드의 중앙 광장만한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고, 그중 가운데 뭉쳐 있는 곰돌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방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처음 보는 파란 갑각의 땅벌레.

녀석들은 내가 광장에 진입하자마자 곰들을 향해 바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냉기 브레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술.

덩달아 브레스 속에 결정화된 얼음칼날이 쏟아지며 곰들을 휘몰아치려는 순간.

"모두 내 뒤로!"

덩치가 가장 큰 밥달이 선두에서 몸을 부풀렸다.

곧바로 열댓 마리의 에이션트 베어가 밥달의 뒤에 일자로 늘어서며 서로의 몸을 받힌다.

푸화아아아아아악!

"큭...."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브레스가 밥달의 몸 하나에 집중됐다.

으아.

저거 저래도 괜찮나? 몸 전체가 얼어붙고 있는데?

"족장! 괜찮으냐! 진형이 밀린다!"

"푸하! 난 괜찮다!"

밥달은 얼굴에 붙은 얼음을 털어내며 소리쳤다.

"내 갑옷 튼튼하다! 신호 하면 바로 흩어져 공격이다! 셋! 둘! 하나!"

바로 그 순간, 끝없이 쏟아내던 얼음벌레의 브레스가 멈췄다.

동시에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곰들이 그림처럼 좌우로 흩어지며 적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와, 멋져.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 저런 일사불란함이라니.

대체 평소에 얼마나 합을 맞췄으면 저런 움직임이 나올까? 아니면 그냥 에이션트 베어의 종특?

콰직!

콰직!

콰지지직!

돌진한 곰들은 순식간에 얼음벌레의 전면 갑각을 박살냈다.

벽에 뚫린 구멍에 상체만 내밀고 있던 얼음 벌레는, 박살난 조각 사이로 파란 액체를 쏟으며 단숨에 절명했다.

그래. 이거다.

이 녀석들을 이계와의 전쟁에 반드시 끌어 들여야 한다.

에이션트 베어 100마리, 아니 50마리만 있어도 영영 사라져 버린 번개폭탄 기사단이 전혀 그리울 것 같지 않다!

"에이션트 베어는 저항력이 엄청나군요. 저 앞쪽은 여기보다 훨씬 추울 텐데 말입니다."

다비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데 저항력? 놀라는 포인트가 좀 이상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다비 녀석.... 어느새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네?

"얼굴이 왜 그래? 추워?"

"황자님은 춥지 않으십니까?"

다비는 외려 신기하다는 얼굴로 날 내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황자님은 마갑조차 착용하지 않고 계십니다. 옷도 두껍지 않고. 대체 이 추위를 어떻게 버티고 계신 겁니까? 마법입니까?"

"나 마법 쓴 거 없는데? 그보다 딱히 안 춥잖아? 저 앞에 냉기벌레 브레스 쏟아진 곳이라면 또 모를까.... 어?"

그런데 입김이 하얗게 변하고 있네?

모르는 사이에 땅굴 내부 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모양이다. 다비의 반응을 보면 그것도 꽤나 심각할 정도로.

"난 하나도 안 추운데.... 이거 혹시 코어 때문인가?"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 말씀이십니까?"

"응. 그게 냉기에 대한 저항력도 올려주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차이가 날 리 없지. 진짜 코어가 끝내주긴 끝내주는구만.

전에 먹은 고대 물개의 코어는 전반적인 마법 저항력을 올려줬는데. 이번 고대 곰 코어는 냉기 저항하나를 콕 집어 추가로 올려주는 것 같다.

"쿠워! 계속 올라온다!"

그때 광장의 아래로 연결된 통로에서 새로운 땅벌레들이 무더기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밥달은 이마저도 부하들과 함께 능숙하게 처리하며 함성을 질렀다.

"쿠워어어어어! 여기 여왕이 없으니 더 아래로 내려간다! 오늘 반드시 땅벌레 여왕을 죽이고 이 모든 전쟁을 끝낸다! 모두 돌진!"

"쿠워어어어어!"

일선의 곰들은 물론, 뒤에 빠져있던 예비대까지 함께 포효하며 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

오른쪽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곰들이 향하는 어둑어둑한 통로의 벽면에, 갑자기 빠르게 점멸하는 무지개색의 흐름이 생겼다.

마치 생물처럼. 혹은 마력의 흐름처럼.

저건 뭐지? 방금 전까지 그냥 평범한 벽일 뿐이었는데?

하지만 흐름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생명 감지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다.

멀리 통로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괴물.

수십 마리의 조그만 땅벌레를 호위로 거느린,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의 덩어리.

어찌나 압도적인 생명인지, 몸이 닿는 모든 곳에 흐름의 일부가 퍼질 지경이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생명체가 존재했다고? 내가 열 번이나 회귀한 바로 이 세상에?

"피해!"

얼떨결에 소리쳤지만 에이션트 베어는 오히려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이 냄새! 여왕이다!"

밥달은 눈이 뒤집혀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 일족의 원수! 내가 돌아왔다! 300년 만에!"

동시에 사이즈가 작은(그래도 인간 보단 훨씬 크다) 땅벌레 수십 마리가 위쪽으로 올라왔고.

"수행벌레다! 모두 위치로!"

다른 곰들이 물결처럼 퍼지며 즉각 대응하는 사이, 겨우 모습을 드러낸 여왕을 향해 밥달이 홀로 몸을 날렸다.

"크웡!"

밥달의 포효가 지하 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기세로 엘프 군주의 검을 내려찍는 순간.

콰직!

여왕은 두 개의 집게발을 교차하며 그 공격을 받아냈다.

빠득....

집게발에 실금이 가는 게 멀리서도 보인다.

하지만 여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게발을 앞으로 튕기며 밥달의 거구를 광장의 중심부까지 날려 버렸다.

콰앙!

"컥...."

쓰러진 밥달은 일어나지 못했다. 방금 내가 본 게 맞아? 집게발을 튕기면서 동시에 수십 개의 충격파가 쏟아지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