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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8화

26장 타임 어택

드라이어드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군주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데자르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가 엘프의 은인인 당신을 죽이려는 걸 가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호를 풀고 그를 속박했던 것입니다."

"그 나무뿌리가 그럼 너였어? 아무리 그래도.... 그 강력한 놈이 어째 꼼짝도 못하던데?"

까놓고 데자르와 나무 정령이 1대1로 붙으면 데자르가 압도적으로 이길 것이다. 드라이어드의 빈약한 전투력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수천 년간 저의 가호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다른 엘프보다도 더 강력한 가호를 말이죠. 그래서 제가 가호를 푼 순간 일시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던 겁니다."

"그 가호란 게 정확히 뭔데?"

"저는 영원의 숲과 엘프의 수호신입니다. 숲에 있는 엘프의 능력을 높여주는 게 저의 숙명이죠. 그것이 바로 가호입니다."

진짜? 그런 것도 있었냐?

지난 9회 차 때까지는 엘프고 드라이어드고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드라이어드는 슬픈 얼굴로 군주의 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음의 병.... 너무 오래 살면 그렇게 됩니다. 군주는 다른 엘프보다 강한 가호를 받기 때문에 훨씬 더 장수하지요. 이것이 오히려 병폐를 일으킨 겁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더라. 자기 백성들을 싹 다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 안했어. 아, 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여전히 화끈거리는 오른쪽 눈을 가리켰다.

"이거 뭔지 알아? 데자르의 눈에서 튀어나오더니 나한테 흡수됐는데?"

"그것은 '군주의 눈' 입니다."

드라이어드는 깊은 갈색 눈으로 내 눈을 꿰뚫을 것처럼 마주보았다.

"수천 년을 산 엘프 군주에게 생기는 능력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해주지요. 다만 강제 계승은 저도 처음 보는군요."

"강제 계승?"

"군주를 죽인 자는 군주의 눈을 계승하게 됩니다. 그것이 강제 계승입니다."

아하.

결국 전에 사령군주를 죽이고 얻은 감정안과 비슷한 개념이구만.

물론 지금까지는 이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나저나 지금 이것 때문에 정신이 완전 사나워 졌다는 게 문제인데....

사물의 본질.

당장 눈앞에 있는 드라이어드의 본질만 해도 감당이 안 된다.

내가 기억하는 드라이어드는 인간 여성의 형태로 굴곡진,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고목.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더해, 고목 내부에 흐르는 엄청난 기세의 흐름이 현미경처럼 자세히 보인다!

으, 어지러워.

나무 정령 씨 말하는 거만 보면 엄청 나긋나긋한데, 속으로는 이런 엄청난 열정을 숨기고 있었구나.

반면 근처에 엎드려 있는 엘프를 보면... 흐름 중 일부가 완전 느리고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흐름의 속도들이 완전히 다른데, 심지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멋대로라 언밸런스 그 자체다. 덕분에 고개를 치켜든 엘프의 저 아리따운 얼굴이 추하게 보일 정도다.

어쩌면 거울을 보던 데자르도 나와 같은 걸 보고 있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나?

"이게 다 뭐 하는 거야? 본질? 뭐가 이렇게 많고 복잡해?"

"지금 클로드 님이 보고 계신 건 의식의 흐름이자 신경의 흐름이며, 생명의 흐름이자 마력의 흐름입니다."

"...뭐?"

"그것이 본질입니다. 아직은 어려우시죠? 자세한 건 제가 설명 드리지 않아도 곧 스스로 깨우치실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뭐든 좋으니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 이게 강제로 보이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 또한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엘프의 은인이신 당신이라면, 분명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발동시키는 경지에 금방 도달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당장 머리에 들어오는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주체가 안 될 지경이다. 이래가지고는 당분간 등급 높은 마법은 엄두도 못 내겠는데?

"그보다 날 자꾸 엘프의 은인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왜 엘프의 은인이야? 까놓고 나 때문에 죽은 엘프가 백 단위를 넘길걸?"

"저는.... 그 전투를 지켜보았습니다."

드라이어드는 가지처럼 뻗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둠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 이곳과는 다른 차원이 만들어난 끔찍한 악마들. 분명 내버려 두었다면 저의 엘프는 물론이고, 이쪽 세계의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넣었을 겁니다."

물론 그랬겠지. 내가 못 막았다면.

"그러니 당신은 살아남은 모든 과거 엘프의 은인이며, 또한 이곳에 남은 현재 엘프의 은인이며, 마지막으로 미래에 있는 모든 엘프의 은인입니다."

"미래?"

"그 것들은 분명 이 땅으로 다시 넘어 올 테니까요. 지금보다 더 큰 규모와, 더 강한 힘을 가진 채 말이죠."

정답이다. 그거야말로 변하지 않을 우리의 미래니까.

아니, 미래였어야 하는데....

시기가 변해 버렸다!

분명 앞으로 9년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게 단 1년으로 줄어들었다고!

"그러니 당신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만약 그곳에서 타락한 모든 엘프를 직접 목 졸라 죽이셨다 해도, 저는 이곳에서 당신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무슨 말?"

"저와 계약해 주십시오. 클로드 님."

드라이어드는 그 커다란 몸을 깊이 낮추며 머리를 숙였다.

"이미 저 같은 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대한 존재와 계약하신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 미약한 힘조차도 결코 헛되지 않게 사용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와 계약해 주십시오."

이것 참.

지금껏 수많은 정령을 찾아다니며 계약을 했지만, 반대로 정령 쪽에서 먼저 계약해 달라고 부탁해 오는 건 또 처음이네.

"계약 전에 테스트 같은 거 안 받아도 돼?"

"제가 어찌 엘프의 희망이신 존재를 테스트 하겠습니까? 원래대로라면 숲의 영역을 확장하고, 또 다른 지역의 엘프를 데려와 영원의 숲의 엘프와 교류를 하는 임무를 드렸겠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네. 저 임무들을 해결하려면 적어도 보름에서 한 달 이상 시간을 써야 했는데.

"좋아. 계약하자."

"감사합니다. 클로드 님.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저를, 당신의 뜻에 따라 정령마법의 형태로 소환할 것을 허락합니다."

슥!

순간 투명한 나무 조각이 날아와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내가 움찔하며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눈앞의 드라이어드는 평범한 고목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후...."

어째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만. 아무튼 덕분에 이 종족 루트는 클리어했네.

이것으로 훗날 벌어질 '반제국 전쟁'의 위험은 완전히 사라졌다. 엘프의 수호신과 계약했으니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나는 손에 쥔 분홍색 열매를 한입 베어 물며, 입 안에 퍼지는 복숭아 향기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1년이라."

남은 1년 동안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으로 이계의 진짜 웨이브를 막아 낼 수 있을까?

* * *

"악마 같은 놈. 잘 죽었다."

엘프 소년 하나가 군주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함께 군주의 방을 정리하던 다른 엘프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라니르! 뭐 하는 짓이야!"

"뭐 하긴요. 시체에 침을 뱉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군주님이시다!"

"그 군주 때문에 우리 모두 멸망할 뻔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퉷!"

소년 엘프는 다시 한 번 침을 뱉으며 뜯겨나간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엘프는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괴상한 놈이라니까.... 넌 경비도 아니라 경비 지망생이야. 원칙은 여기 들어와서도 안 되는 거다. 대충 다 치웠으니 빨리 나가기나 하자고."

"저도 이런 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군주의 시체는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 둬. 나중에 장로들이 와서 수습한 다음에 화장할 거다."

"제 손으로 태워 버리면 속이 다 시원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속마음을 대놓고 말하지 말라니까? 에휴, 됐다. 이제 대충 치웠으니 나가자. 뭐해! 라니르! 빨리 나가자고!"

"알겠습니다."

소년은 부모의 원수라도 보는 눈으로 군주의 시체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그렇게 청소부들이 다 나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 한쪽 구석의 그림자가 열리며, 온몸을 붕대로 감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 돼!"

남자는 데자르의 시체를 발견하자마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돼! 빌어먹을! 이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고!"

그의 정체는 새롭게 지위를 물려받은 후원자 2호였다. 2호는 데자르의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죽은 겁니까? 당신이라면 싸워 이길 수 있었는데 어째서! 으아아악! 이 찢어죽일 클로드 황자! 이런 개 같은 일이! 내가 늦었어! 내가 한발 늦었다고!"

증오, 분노, 허탈감.

붕대를 받은 사이크인은 이런 원초적인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2호는 속에서 들끓는 이런 감정들을 억제 할 수 없었다.

사이크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유일한 존재, 주재자.

바로 그 주재자가 자신을 믿고 맡긴 막중한 임무를 초장부터 망쳐버린 것이다.

"클로드... 당신은... 아니 너 이 자식...."

이는 너무도 치명적인 실패였다.

준비 과정이 길어진 게 잘못이었을까?

그렇다고 오래 시간을 끈 것도 아니다. 그저 1호의 일을 인계받기 위해 고작 몇 시간 정도를 지체했을 뿐.

그런데 바로 그 몇 시간 사이에, 클로드가 이곳에 날아와 데자르의 숨통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말이 됩니까? 그토록 격렬한 싸움을 끝내자마자? 휴식도 없이, 회복도 하지 않고 바로?"

상상도 못 한 행동력이다.

그토록 조그만 몸으로, 그 힘겨운 순간에 엘프 군주와 일전을 결심했단 말인가? 인간 따위가?

게다가 어떻게?

대체 어떻게 데자르가 후원을 받은 존재라는 걸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인계받은 정보에 따르면, 데자르는 물리적으로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하고 살았다.

드러난 정보는 고작해야 엘프들이 숲을 벗어나 제국의 영토를 침공했다는 사실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 짧은 순간에 데자르와 후원자의 존재를 파악했단 말인가?

여기에 클로드는 1호에게 막 고지를 받은 순간이었다.

앞으로 1년 뒤, 사이크 차원에서 이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공한다.

당연히 절망하지 않았을까?

현실을 부정하고, 고통에 침식당하고,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라며 자신들의 신에게 구원을 기도하는 게 당연한 행동이 아닐까?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단 1초도 쉬지 않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곳에 날아와 데자르를 제거했다고?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육체를 가진 존재는... 그런 불굴의... 불굴의 의지를 발현할 수 없어...."

외려 2호 자신이야말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2호는 순간 퍼뜩 놀라며 자신이 챙겨온 차원 잠재력 측정기를 바라보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14퍼센트였다.

하지만 현재, 잠재력 발현 수치는 16퍼센트로 올라 있다.

"말도 안 돼."

무려 2퍼센트가 올랐다.

이것은, 과거 1호 후원자가 엘프 군주를 포섭한 직후에 떨어뜨렸던 차원 잠재력과 동일하다.

"그런데 그 잠재력이 다시 발현되고 말았다고! 빌어먹을!"

2호는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나는 침공 전에 발현된 잠재력이 다시 한 자리 수로 돌아오길 기원한다.

주재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게 남아 있는데.

한자리는 고사하고, 오히려 잠재력 수치가 더 오르고 말았다.

"실수입니다. 이건 제 실수입니다. 이런 제길.... 으아아악!"

지금의 실패가 더 고통스런 이유는, 데자르야말로 알드 차원에 간섭이 가능한 존재 중 가장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클로드를 제거하기 위한 최고의 '원판'이 사라진 셈.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9화

26장 타임 어택

게다가 아무리 후원자라 해도 차원을 제집 드나들 듯 넘어 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원 능력에 극강의 재능을 가지고 있던 1호마저 한 번 알드 차원에 넘어갔다 오면 다음 차원문을 열 때까지 긴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심지어 자신은 1호보다 차원 능력이 한참 떨어진다. 아무리 에너지를 긁어모아도 10, 아니 20일은 필요하다.

만약 그 20일 동안 클로드 가 남은 피후원자를 처리한다면?

빠득....

2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입에 물고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손톱도 없고 입도 없다.

아주 오래전 육체를 버리기 전에 남은 습관일 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쓸데없는 습관이, 지금 육체를 버린 2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2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은 다섯 중 최소 둘은 클로드가 당장 처리할 수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일단 행방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고, 또 찾아낸다 해도 쉽게 죽일 수 없지요."

허풍이 아니었다. 이것은 1호가 남긴 정보를 토대로 분석한 확실한 예측이다.

애당초 남은 다섯 중 하나는 지성체가 아닌, 인간에겐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땅속 깊은 곳의 괴물.

그 1호조차 녀석을 포섭하는 데 엄청난 수고를 들였다고 한다. 다만 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애써 활용하기보다는 가능성 정도로 남겨 놓았고.

그러니 이젠 선택만이 남았다.

앞으로 20일 후, 대체 누굴 선택하여 사이크 차원으로 끌고 올 것인가?

잠재력은 낮지만, 말이 통하고 조작이 쉬운 인간?

아니면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괴물?

"아니, 뭐든 상관없습니다. 일단 데려오기만 하면 저는 자신이 있거든요."

붕대 너머로 비치는 2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1호의 특기가 차원능력이었다면 자신의 특기는 무기제작.

세부적으로는 목표의 특성을 파악, 핀 포인트로 목표를 무력화 하는 효과를 무기에 주입하는 것이 전공이다.

주재자가 자신을 2호로 선택한 것도 분명 그 전공을 높게 산 것이리라.

그렇다면 최대한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단숨에 클로드를 제거할 수 있는 완벽한 무기를 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 누구냐!"

그때 엘프 경비 몇 명이 문을 박차며 군주의 방으로 난입했다.

하지만 방안에 남은 건 오직 군주의 시체뿐이었다. 검을 뽑아든 경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방안을 살피며 중얼대기 시작했다.

"분명 소리를 들었는데?"

"누군가 여기서 소리를 질렀어! 내가 똑똑히 들었다고!"

"설마...."

경비들의 시선이 군주의 죽은 시체로 모아진 순간, 갑자기 한 경비가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라니르 그 자식이다! 그 자식이 감히 시체에 침을 뱉어 돌아가신 군주님이 노하신 거야! 틀림없어!"

"뭐? 정말이냐?"

"라니르! 어디 갔어, 라니르! 이 재수 없는 놈! 내가 반드시 네놈의 그 지긋지긋한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만다!"

* * *

"큰일이었네. 나도 가서 황자님 돕는 건데 그랬어. 그치 루네야?"

톨라리가 옆에 앉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루네는 톨라리와 내 눈치를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대기 시작했다.

"네. 하, 하지만 저는 황자님 안 계신 동안 톨라리 님이 마법을 가르쳐 주셔서 좋았는데.... 그, 그렇다고 황자님을 도우러 가신다는 게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

"며칠 안 지났는데. 그새 성과가 있었나보네?"

갈피를 잃은 루네의 말을 대신 끊어주며 감정안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톨라리가 루네의 양 볼을 손바닥으로 마구 비비며 활짝 웃었다.

"그게 눈으로 보여? 역시 황자님 대단해. 얘 완전 천재야. 매직 길드 있을 때 잠깐 가르쳤던 돌대가리들이랑 비교도 안 돼. 아휴 귀여운 것."

아무리 귀엽다고 그렇게 떡 주무르듯 주무르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러다 애 얼굴 찌그러지겠네.

종족 : 인간

현재 마법 : C+

잠재 마법 : A

전에 수중식으로 처음 마법을 발현했을 때 등급이 D+였는데 벌써 C+까지 올라왔다.

역시 나처럼 시간으로 쌓아 올린 사짜 말고, 진짜 아크 위저드가 가르치는 건 달라도 뭐가 다른가? 역시 톨라리는 톨라리구나 싶은데....

"왜 그래 황자님? 나 얼굴에 뭐 묻었음?"

톨라리가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감정안에 더해, 덩달아 발동해 버린 군주의 눈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네 얼굴이...."

아름답다.

물론 톨라리의 외모가 그새 변한 건 아니다.

여전히 깡말랐고, 여전히 눈 밑에 다크서클이 퀭한 추레함 그 자체.

하지만 군주의 눈을 통해 본 톨라리의 '본질'은 놀랄 만큼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조화 그 자체.

저 녹색 빛의 흐름은 아마도 생명이고.... 붉은색과 푸른색이 겹쳐 있는 건 마력이겠지? 유독 돋보이고 화려하게 빛을 내잖아?

여기에 다른 모든 흐름을 연결하며 선도하는 신경의 흐름의 선명함까지.

아, 약간 특이한 건 신경의 흐름이 좌우로 서로 다른 개별적인 흐름을 보인 다는 건데.... 그렇다고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서로가 나름의 조화를 이루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보이는 게 매력적이네.

이것이 바로 며칠 전 반갈죽 당한 엘프 군주가 보던 세상.

덕분에 외면의 아름다움과 본질의 아름다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일지는 모르지만, 영원의 숲의 엘프들은 본질적으로 매우 기형적인 존재였다. 보고 있으면 두통이 생길 정도로.

반면 저택에 돌아온 이후 확인한 부하들의 본질은....

"...."

"황자님? 무언가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눈이 마주친 메르데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는 표정을 감추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다들 얼굴 보니 좋아서."

와 세상에.

메르데스의 본질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특히 생명력으로 추정되는 몸 안의 흐름이 예술적으로 돋보이며 광채를 뿌린다.

어쩜 저렇게 생동감이 넘칠 수 있을까? 여기에 몸 곳곳을 완벽하게 움켜쥐고 있는 신경의 탄탄한 흐름은 또 어떻고.

음....

아니, 이거 뭔가 이상한데.

아무래도 아름다움에 대한 내 관념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자 변화를 눈치 챈 메르데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황자님. 그새 오른쪽 눈이 녹색이 되셨습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응? 응.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원래 내 눈은 양쪽이 다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왼쪽 눈은 감정안을 얻으며 금색이 되었고, 오른쪽은 군주의 눈을 얻으며 녹색이 되었다. 눈알 입장에서 보면 이것도 참 기구한 운명이라 할 수 있겠지.

아무튼 영원의 숲에서 나무 정령과 계약하고 돌아온 지도 이틀이 지났다.

어제는 수도에 복귀하자마자 황궁에 들려 황제와 대신들에게 일식 게이트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덕분에 대신들과 함께 하루 종일 그에 대한 대책 회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튼 중요한 건.... 그놈들이 다시 온다는 거야."

나는 응접실에 모인 부하들을 보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원자가 죽기 전에 말했어. 1년 후에 다시 게이트를 열고 이쪽 차원을 침공할 거라고."

침묵과 함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른쪽 눈을 감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도 아까 설명했던 일식 게이트 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규모로. 심지어 한번이 아니라 최소 다섯 번은 연달아 게이트를 열면서 우리가 멸망할 때까지 침공할 거라고 말했어."

물론 후원자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저 내가 겪은 과거일 뿐.

하지만 내 과거에 이번 같은 일식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짜 침공에 비해 규모 자체는 매우 작았다는 것.

녀석들이 심각할 정도로 소수 정예였다는 것만 빼면, 기존의 1차 웨이브에 비교해 10분의 1, 아니 20분의 1조차 안 되는 규모였다.

"카일의 보고에 의하면, 적들 중 가장 많은 규모를 차지했던 데스웜은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기사단의 집단적 대응만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다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상대한 공포 군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고작 서너 마리가 제국의 정예 기사단 하나를 순식간에 반파시켰습니다. 직접 상대한 바로는 정말 강합니다.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래도 결국 네가 이겼잖아?"

"저는 나이트 마스터니까요. 그리고 현 시점에서 싸울 수 있는 나이트 마스터는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오직 저 뿐입니다."

물론 한 사람 더 있긴 하지. 나이트 페르제카라고.

하지만 페르제카는 올해로 96살이 되는 까마득한 노인이다. 보통은 100살 전후로 숨을 거둬 웨이브를 막는데 전혀 도움이 안됐는데, 이번엔 당장 내년의 침공에 대비해 뭔가 활약을 할 수 있으려나?

"물론 기사단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을 겁니다. 워낙 갑작스럽고 대처가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물론 그 와중에도 공포 군주를 둘이나 제거한 건 인정할 만한 성과입니다. 하지만 적의 규모가 더 커진다면, 공포군주 같은 놈들이 수십 수백 단위로 넘어온다면 사실상 대처가 불가능합니다."

그야 당연하지.

나 같아도 공포군주가 백단위로 넘어 왔으면 바닥에 침부터 뱉고 포기했을걸?

하지만 그런 특수한 괴물의 숫자는 언제나 한정적이었다. 오히려 대량으로 쏟아지는 적의 '일반'적인 군대를 대처하는 게 1차적으로 더 중요하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인데....

"다음 침공은 시작부터 그런 강력한 괴물 위주로 구성되진 않을 것 같아. 그런 계시를 받았어."

"계시... 말씀입니까?"

"응. 신의 계시."

어쩔 수 없이, 당장은 신을 들먹일 수밖에.

"후원자가 침략계획을 늘어놓는 동안 새로운 계시가 보였어. 미래에 다시 게이트가 열리고, 우리가 그 놈들과 싸우는 모습이."

"오오. 신께선 역시 저희들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역시 성자님을 통해 역사하시기로 뜻을 굳히셨군요!"

경호신관 트리멈이 기도하는 자세로 몸을 낮췄다. 얼쑤 타이밍 좋고.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사는구먼.

"내 생각도 그래. 전에 봤던 어렴풋한 계시에 비해 이번엔 훨씬 선명해졌거든."

"정확히 어떤 장면을 보셨습니까? 저희 모두 그에 맞춰서 방침을 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비가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동안 수도 없이 반복해 봤던 1차 웨이브를 떠올리며 답했다.

"우선 이번처럼 게이트 한 개가 아닌, 여러 개가 동시에 열려."

"여러 개.... 혹시 정확한 숫자 는 모르십니까?"

"다섯 개 보다는 많고, 열개 보다는 적었던 것 같아."

정확히는 여덟 개다.

그중 세 개는 엠퍼로드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을 기준으로 열리고, 두개는 광장 북쪽에 열리며, 나머지 세 개는 엠퍼로드의 북문 밖에 있는 개활지에 열린다.

"다섯 개와 열개 사이라. 정말 중요한 정보입니다. 미리 대처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게이트마다 갑옷을 입은 이계의 병사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와."

"병사라면 보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보병이 아니야. 완전 밀폐된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어. 어지간한 하급 마갑만큼 단단한 느낌,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 단단해.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어."

"최하급도 아니라 하급이라니. 그렇다면 적의 병사는 전원이 기사란 말씀입니까?"

"응. 힘만 보면 우리 쪽 하급 기사에 필적해. 물론 갑옷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병사가 게이트마다 수백 명씩 쏟아져 나와."

"그렇다면.... 사실상 게이트마다 기사단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해야겠군요."

"근데 무기는 불이야."

"불?"

"응. 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설마 적병은 기사이자 동시에 마법사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다고 화염 마법을 쓴다는 소리가 아니라.... 갑옷과 연결된 관에서 불을 뿜어 내."

전원이 개인 화기로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셈이다. 다비는 놀란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 되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갑옷 속에 뭐가 들었기에?"

"난들 알겠어? 그냥 계시로 본 것뿐인데."

실제로 갑옷을 쪼개면 안에 생물은 들어 있지 않다. 뿌연 가스 같은 정체불명의 물체가 연기처럼 흩어 질 뿐.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0화

26장 타임 어택

"아무튼 녀석들이 뿜어내는 불도 어지간한 하급 마법사 수준의 화력은 나오는 것 같아. 따지고 보면 엄청 튼튼한 마법사인 셈이지."

"이야기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오는군요. 그럼 녀석들의 공격 방식은 오직 화염 방출뿐입니까? 육탄전은 어떻게 합니까?"

"가까이 붙으면 손발을 휘두르긴 하는데 따로 무기를 쓰는 것 같진 않아. 그만큼 화염 방출에 집중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시녀장에게 화염 저항 영약을 대량으로 제조해 달라고 부탁했어."

정확히는 회귀 직후부터 부탁했지만 굳이 그것 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다비는 탄식과 함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화염 저항 영약이 효과가 있겠군요. 하지만 정말 대량의 물량이 필요 할 겁니다. 기사단이나 군대에 보급하려면."

물론이지. 그래서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기존에 주문했던 '10년 이상 보관할 수 있는 영약'의 등급을 '1년 이상'으로 낮추라 지시했다. 라니아 역시 그렇다면 제작 개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답했고.

"어떻게든 많이 모아 봐야지. 카일?"

"네. 황자님."

나는 라니아에게 받은 몇 가지 레시피를 카일에게 내밀었다.

"앞으로 필요한 영약 재료야. 라니아 말로는 이쪽 대륙에선 싹싹 긁어모아도 한계가 있을 거래. 동대륙에 무역선이 뜨면 최대한 챙겨다 수입해줘."

"바로 상회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할게. 그리고 어제 회의하다 나온 이야긴데, 당장 썩혀두고 있는 제국 기함을 구스프 상회에 빌려주기로 했어."

"...제국 기함 말씀입니까?"

"군선이긴 하지만 상선으로 못 쓸것도 없잖아? 아, 황실 전용 상선도 두 척인가 있는데 그것도 넘겨줄게. 예산도 필요한 물건이 생길 때 마다 우선적으로 배정하기로 했으니 돈 걱정도 할 필요 없고."

"그것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황자님. 기존에 상회가 보유한 무역선이 이미 라그란 대륙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응. 꿀이나 보리 같은 거 잔뜩 싣고 돌아오는 거 아냐?"

"네. 지금쯤 물건을 싣고 돌아오는 항로에 있을 겁니다. 대략 열흘 안에 요튼만의 항구에 도착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한번 떠난 무역선이 돌아오려면 최소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니 제국 정부에서 아무리 많은 지원을 해준다 해도, 결국 남은 시간 동안 반복할 수 있는 무역의 횟수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과연 몇 번이나 왕복할 수 있을까?

"넉넉잡아 열 번이나 아홉 번이 한계일 겁니다. 그러니 수입 품목을 최대한 신중하게 정해야 합니다. 기회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이건 확실히 좋은 지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일의 손에 쥐어진 영약 레시피를 다시 빼앗았다.

"알았어. 이쪽도 다시 필요한 걸 다시 선별하고 추가해서 알려줄게."

"확정적으로 꼭 필요한 걸 수량까지 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기왕 말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제국 기사단이나 군대에 신경 끄기로 했어."

그러자 다들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주목했다.

그래. 니들은 모르겠지. 이게 나한텐 얼마나 큰 결심이었는지.

"앞으로 1년 뒤에 이계의 군대가 침공해 오잖아? 당연히 제국군이 막아야 하고, 적에 대비한 맞춤 훈련이나 강화는 필수인데, 거기에 내가 크게 관여하진 않겠다고 했어."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습니까? 계시를 본 황자님께서 최대한 제국군을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비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계시에서 본 내용이야 확실하게 전달 해 줘야지. 하지만 내가 직접 관여할 시간은 없어."

원래대로라면, 회귀 6년에서 7년차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나서 기사단 전체를 업그레이드하는 '군대 강화' 테크트리가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손 댈 시간이 없다.

남은 시간은 고작 1년. 그래서 이번에는 제국군을 포기하고(정확히는 그냥 기존의 군부 세력에 위임하고), 오직 나 스스로와 이곳에 있는 소수정예의 전력을 최대한 높이는 쪽으로 집중하기로 했다.

"근데 카일과 수호기사단은 빼고."

"네?"

"너 이번 전투 때 정말 잘 해줬잖아? 기왕 수호 기사단과 인연도 생겼고. 그러니 앞으로도 본격적으로 수호 기사단을 지휘해줘."

"하지만 수호기사단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나이트 듀론이 단장이야. 듀론은 평소에 기사단의 개인 역량을 높이는 훈련에 전념하기로 했어. 대신 이계의 괴물을 상대하는 전술 훈련 같은 건 네가 진행하고. 물론 침공이 시작되면 그때부턴 네가 진짜 단장이야."

"아...."

카일은 벙찐 얼굴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심정적으론 이해가 간다. 이제 막 사관학교를 나온 햇병아리에게 기사단 단장이라니.

하지만 카일의 당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번 전투로 저 역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비록 부족한 몸이지만, 기사단을 한 몸처럼 지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일식 전투 때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저 지휘의 쾌감을 알아 버린 걸지도?

아무튼 빼지 않고 받아주니 다행이네. 본격적으로 게이트가 열리면 땅속으로 쏙쏙 숨어드는 데스웜 전문 처리 부대가 꼭 필요하거든.

"자세한 일정은 내일 듀론이 와서 설명해 줄 거야. 물론 지휘관이 되었다고 개인 훈련 대충 넘기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제가 강해질수록 기사단도 그만큼 강해질 테니까요."

"여기 있는 모두다 앞으로 1년 동안 획기적으로 강해져야 해. 그걸 위해 준비한 것도 있고."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다비가 심각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다만 중요한 문제라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뭔데? 괜찮으니 말해."

"저는 공포 군주와 전투에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터득했습니다."

"감각? 무슨 감각?"

"전투의 흐름을 미리 읽는 감각입니다. 단순히 경험이나 기술적인 측면이 아닌, 실제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눈에 보입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릴까?

말을 좀 꼬긴 했지만.... 이것도 '부족한 힘은 기술로 커버 할 수 있다'라는 신념의 변주인가?

"확실한 건 황자님께서 주신 코어 때문에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겁니다."

"코어? 르갈의 코어?"

"네.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흡수하고 난 뒤로, 저는 후각이 놀랄 만큼 예리해 진 것을 느꼈습니다."

"후각?"

그러고 보니 코도 좋아졌긴 하지.

다만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가 주는 효과에 '후각 강화'를 따로 언급하진 않았다.

왜 그랬냐고? 후각이 좋아진다고 딱히 전투에서 뭐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덩달아 냄새를 통해 감각의 영역이 확장되며 기존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나이트 파이렌, 아니 공포군주의 무수한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며 적에게 결정타를 날린 수 있었습니다."

"정말? 냄새를 잘 맡는 게 싸움에 도움이 돼?"

"그렇습니다. 저도 모호한 개념이라 정확한 설명이 어렵습니다만.... 아, 마지막에 적의 약점이 어딘지 미리 알아낸 것도 후각 덕분이었습니다."

툭.

그때 옆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우 깜짝이야.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늑대 머리가 응접실 창문에 코를 박고 있는 게 보였다.

"르갈!"

근처에 있던 메르데스가 냅다 달려가 창문을 열어주었다. 르갈은 창문 안쪽으로 머리만 쏙 밀어 넣고는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너, 인간 여자."

"...네."

"전에 비해 느낌이 좋아졌다. 완전히 친숙한 느낌은 아니지만, 혹시 다른 마수의 코어를 흡수했나?"

"네. 에이션트 씰의 코어를 조금."

"에이션트 씰? 물개 말이군. 숲에 있을 때 소문 정도는 들었지."

르갈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메르데스의 손길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흠. 본의 아니게 엿들었다만, 방금 저 인간이 말한 능력의 정체는 공감각이다."

"공감각?"

그게 뭔데?

뭔가 자주 들었던 단어긴 한데....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었더라?

"서로 다른 감각이 합쳐지면서 생기는 능력이다. 나 같은 경우엔 청각과 후각이 동시에 공감각을 발휘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완벽한 어둠속에서도 사물을 보는 것처럼 움직일 수 있지."

아, 그래서 저 늑대가 캄캄한 하수도에서 그렇게 잘 달렸던 건가?

"여기에 시각까지 더하면 사물의 본질을 엿 볼 수 있다. 너희가 감염군주라고 부른 괴물의 위험을 파악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래서 앞뒤 자르고 나한테 쌩 달려 온 거야?"

르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구만.

그런데 사물의 본질이라니.

당장 내 오른쪽 눈에 박혀 있는 군주의 눈과 비슷한 건가?

"반면 내 코어를 흡수한 저 인간은.... 다비라고 했나?"

"네. 르갈."

"넌 인간 중에서도 극한까지 감각을 단련한 인간이지. 기존에 사용하던 그 감각에, 에이션트 울프의 후각이 더해져 새로운 공감각을 발현시킨 거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나?"

"과연....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다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르갈은 그제야 킁 소리와 함께 뭔가를 중얼대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코어를 먹은 녀석들에겐 아무래도 약해진단 말이지...."

"...."

르갈이 빠지자 열심히 쓰다듬던 메르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비는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말했다.

"방금 르갈 님이 말씀하신대로, 제게는 전투 때 활용 가능한 매우 유용한 감각이 새로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건 같은 코어를 흡수한 황자님과 디디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나도 너처럼 새로운 감각이 생겼을 거다?"

"당장은 아니라 해도 곧 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엔 급박한 육탄전이 능력을 발현하는 촉매가 될 것 같습니다만...."

텅!

순간 물러났던 르갈이 번개처럼 돌아와 창틀에 머리를 얹었다.

"그건 아니다."

"...!"

그러자 메르데스가 다시 환한 얼굴로 르갈의 목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거 무슨 촌극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근데 보고 있으니 좀 재밌긴 하네.

"네 공감각이 디디에게, 그리고 저 황자에게 반드시 같은 식으로 발현될 거라 장담 할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평생 쌓아온 감각이 다르니까. 그리고 디디는 이미 자신만의 공감각을 발현했다. 디디?"

"응. 맞아 르갈."

그러자 조용히 있던 디디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르갈과 비슷하게 어둠 속에서 사물을 구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 다닐 수 있습니다."

"나무?"

"여기 오고 나서 알게 된 능력입니다. 숲의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 다닐 수 있습니다. 굳이 눈으로 나뭇가지의 위치를 파악하지 않고서도 가능합니다."

"오.... 까만 애 너도 특별한 능력이 있었구나."

톨라리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디디를 보다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황자님은?"

"...나?"

그러게. 난 뭐 없나? 나는 킁킁대고 숨을 깊이 들이 마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없을 거야."

"왜? 황자님도 늑대 코어 먹었잖아?"

"내가 원래 코가 엄청 나빠."

지금은 라니아 특제 해독 영약에, 르갈의 코어가 더해져서 깨끗해진 몸이긴 하다만.

그 전까지는 제스의 독 때문에 사실상 후각이 망가진 상태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뒤로 서서히 좋아지긴 했지만, 빈말로도 특별한 후각을 가졌다고 할 수준은 아니다.

"너는 그저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온 수준에 불과한 모양이군. 그것도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왜?"

"정보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너는 마법을 다루니 알고 있지 않나?"

음.... 그건 그렇지.

특히 최근에 군주의 눈을 얻고 나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금도 오른쪽 눈을 뜨면 정보가 포화 상태가 되는데, 여기서 또 뭔가 강력한 감각이 더해진다면 대체 어떻게 될까?

"괜히 끼어든 게 아닌지 모르겠군. 더 귀찮게 굴진 않겠다. 그리고 여자."

"네?"

"넌 악력이 강해 보인다. 지금 부터 몸풀기로 숲을 달릴 건데, 내 등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나?"

"...!"

순간 메르데스가 뒤꿈치를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내 쪽을 돌아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허락을 구했다.

"황공합니다만 황자님.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 애는 르갈 같은 커다란 동물을 좋아한다고 했지. 자기가 워낙 덩치가 커서 그런 걸까?

"다녀 와. 전달 사항은 나중에 알려줄게."

"감사합니다. 그럼...."

메르데스는 즉시 창문 밖으로 몸을 넘겼다. 시야각 때문에 창문 밖의 상황이 잘 보이진 않는데.... 뭐 재밌게 놀다 오겠지. 잘됐네. 잘 됐어.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가 혼자 들떠서 확실하지도 않은 훈련을 성급하게 진행 할 뻔했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들은 다비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나쁜 뜻으로 한 것도 아닌데. 근데 훈련? 무슨 훈련?"

"실은 황자님과 디디의 숨겨진 공감각을 끌어내기 위해 특별 실전 훈련을 3개월 코스로 짜놓았습니다만.... 아쉽게도 폐기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 그거 진짜 아쉽네."

그거 정말 다행이다. 이 자식이 또 날 잡아먹을 새 훈련을 짜고 있었구만.

하지만 르갈의 경고가 아니었다 해도, 당장 한가하게 다비의 특별 훈련을 받진 못했을 것이다. 그 전에 해야 할일이 너무 많으니까.

"좋아. 소란이 좀 있었는데.... 아무튼 1년 뒤에 이계의 군대가 다시 침공을 시작할 테고, 그것을 대비해서 내가 짜 놓은 계획을 이야기해 줄게. 우리 모두의 계획 말이야.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내가 할 일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1화

27장 세 번째 코어

"오오...."

드워프 군주는 앞에 소환한 드라이어드의 웅장한 모습에 탄식을 쏟아 냈다.

"무슨 헛소린가 했는데 정말 나무 정령과 계약을 맺었군. 그럼 그쪽을 엘프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 물론 난 인간이지만."

"그래. 넌 인간이지. 페이우드 제국의 황자 클로드. 눈높이가 맞으니 정감이 가는군."

마주 본 드워프 군주의 키는 나보다 살짝 작은 정도.

대신 양 팔이 말도 안 되게 길고 두껍다. 전 부터 생각했지만 이거 밸런스가 너무 안 맞잖아? 덕분에 힘은 꽤 쓰는 것 같다만.

"전에 보내준 술은 잘 마셨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또 왕창 가지고 왔군."

"이번엔 품질이 좀 안 좋아. 엠퍼로드의 귀한 술 재고가 대부분 바닥이라."

지금 이 순간에도 드워프 야영지에 후속 짐마차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드워프 군주 게일은 침을 후릅 거리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선물에 품질까지 따지면 그게 바로 도둑놈이지. 우린 그런 세세한데 집착하지 않으니 걱정 말게. 보리로 만든 술이라면 또 모를까."

"맥주?"

"그렇지. 보리가 귀해서 자주 마시진 못하지만."

"실은 새로 개간한 땅에 보리를 잔뜩 심을 계획이었어. 시간이 부족해서 당장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1년의 리미트가 생긴 바람에 베리트 영지를 활용한 계획들은 전부 수포로 돌아갔다. 물론 이계의 침공을 막아낸다면 그 뒤에는 새롭게 의미가 생기겠지만.

"이계의 괴물이라.... 귀네스 평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도 들었네. 이쪽으로 도망친 엘프들이 꽤 있었거든."

게일은 심각한 얼굴로 내 눈을 노려보았다.

"1년 뒤에 그런 괴물들이 다시 침공한다는 뜻인가? 그것도 지금 보다 훨씬 큰 규모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후원자가 그렇게 말하고 죽었어."

"후원자? 방금 후원자가 죽었다고 말했나?"

"응?"

갑작스런 침묵과 함께 사방에서 드워프들이 고함을 치며 짐을 나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순간 게일은 자신의 양 팔을 치켜들며 고백했다.

"실은 내 이 두 팔도 그 녀석에게 받은 선물이네."

"응?"

"후원자 말이야. 지금 우리가 같은 후원자를 말하는 게 아닌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기분 나쁜 녀석?"

"맞아. 그렇긴 한데...."

드워프 군주도 인류의 배신자였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었는데?

물론 반제국전쟁에 드워프가 참전하긴 하지만... 군주인 게일이 독단적으로 폭주하거나 제국을 공격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젊었을 때 후원자가 찾아와 소원을 물었네. 나는 하루 종일 쇠를 두드릴 수 있는 강한 팔을 원했고. 그래서 이 팔을 얻었지. 나중엔 모두가 날 대장장이 군주라고 부르더군."

"그... 랬구나. 혹시 소원은 한 번만 빌었어?"

"그렇지. 그때 한 번뿐이었네."

그거 다행이네. 보통 본격적으로 이상해지는 건 두 번째 소원을 빌었을 때부터니까.

"혹시 최근에도 후원자를 만났어?"

"그래. 얼마 전에 내 대장간을 찾아 왔지. 갑옷을 부탁했는데 정작 가져가지 않고 사라져 버렸네."

"갑옷?"

"인간들이 말하는 마갑 말이지. 오우거가 착용해도 될 만큼 거대한 마갑을 부탁했네."

"왜?"

"난들 알겠나? 공포군주인지 뭔지 하는 영문을 모를 소리를 하더군."

뭐? 공포군주에게 마갑을 입힌다고?

"그게 가능한가? 이번에 게이트를 넘어온 네 마리는 딱히 마갑 같은 건.... 아, 애초에 안 가져갔다고?"

"여기 그대로 남아 있네. 아무래도 자기가 부를 괴물에게 입히려 했나 본데, 녀석의 목적이 우리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이었다니...."

"맞아. 이쪽을 멸망시키는 게 목표였어."

"솔직히 오싹 하구먼. 그런 녀석을 돕고 있었다니. 맞아. 그래서 그렇게 자꾸 이상한 소릴 해 댄 거였어."

"무슨 소릴 했는데?"

"내 성품이 뒤틀렸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더군. 마음이 뒤틀려야 더 강력한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다던가? 하긴 어지간히 뒤틀리지 않고서야 자기 세계를 멸망시키는 데 협력하진 않겠지."

"동감이야. 그래도 그쪽은 괜찮았나 보네?"

"나야 그 이상의 소원이 필요 없었으니까. 이렇게 쇠를 두드리고 갑옷과 무기만 만들 수 있으면 더 바랄게 없어."

그리고는 옆에 놓아둔 거대한 망치를 보란 듯이 세워들었다.

음, 그렇구나. 나는 톨라리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게일의 이야기를 종합하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강한 소원을 이루려면 성격이 꼬여 있어야 하나보구나. 삶에 만족을 못 느끼는 쪽으로."

"그런가보네. 아무튼 내 정신은 멀쩡하니 걱정 말게. 인간과 대적한 것도 동맹인 엘프가 강력한 요청을 보냈기 때문이야. 결코 인간에게 직접적인 원한은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드워프는 믿을 만 하지."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관계만 개선할 수 있다면 드워프는 언제나 든든한 제국의 우방이 되어 줬다.

"이제라도 진실을 알았으니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돕겠네. 나무 정령도 계속 해서 내 머릿속에 널 도우라 속삭이고 있고."

"드라이어드가 말을 걸고 있어?"

"또렷하게 들리진 않지만 그런 것 같네. 드워프는 정령을 공경하지만, 아쉽게도 정령에 대한 친화력은 부족해서 말이야."

게일은 아쉬운 얼굴로 드라이어드를 마주보다 말했다.

"그래서 우리 드워프가 뭘 하면 되겠나? 지금 당장이라도 주둔지를 철수하고 어둠산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제국의 군대에 합류할까? 말만 하게. 술 퍼주는 착한 인간 양반."

"지금은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계획을 말했다.

"여기 있어도 좋고, 원래 고향에 돌아가도 상관없어. 앞으로 1년 뒤에만 군대를 보내줘. 이계의 침공에 맞서 제국이 전쟁을 시작할 순간에. 그때가 되면 내가 미리 연락해 줄게."

"알겠네. 군대의 규모는 어떻게 준비할까?"

"최대한 많이. 어차피 지면 우리 모두 멸종당할 전쟁이니까."

"간단해서 좋군. 알겠네."

"그리고 마갑을 만들어 주면 좋겠어. 재료나 비용은 이쪽에서 전부 대줄 테니까."

"부탁만 하게. 몇 벌이나 만들까?"

"최소 500벌."

"500벌?"

"기사단 입힐 거라서. 비록 기사 축에도 못 끼는 반푼이들이지만...."

"그런데도 성능은 좋게 나왔으면 하고?"

척하면 척이구만. 물론 원래 계획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당장은 시간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부탁할 수밖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디테일한 사항을 주문했다.

"제국 규격으로 최하급 마갑이 뭔지 알지?"

"물론이네. 그게 우리 드워프 표준이니까. 우린 특별한 훈련 없이도 최하급 마갑을 착용하고 싸울 수 있지."

"그러니까 착용 조건은 최하급 마갑보다도 낮은데, 성능은 최하급 마갑보다도 높았으면 좋겠어.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그런 걸 만들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한걸 아니까 부탁하는 거다. 용도는 카일이 지휘할 수호기사단의 파워 업이고.

게일은 잠시 고민하다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네. 대신 비용이 많이 들 거야. 급이 높은 보석이 필요하거든."

"보석 원석 말이지? 이쪽에서 전부 부담할 테니 걱정 마."

당장 탈리스만 백작의 지하 금고에서 훔쳐온 보석 주머니만 해도 스무 개에 달한다. 게일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럼 맡겨 주게. 당장이라도 대장장이를 총 동원해 풀무질을 시작 해야겠군."

"고마워.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하나 더 있는데...."

나는 며칠 전 비명에 간 엘프 군주를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후원자를 만나서 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려줬으면 좋겠어."

"후원자? 하지만 이미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더 정보가 필요해. 정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괜찮아. 기억나는 걸 전부 알려줘. 지금 당장."

* * *

드워프 주둔지에서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영원의 숲 깊은 곳에 있는 엘프의 성역으로 곧장 날아갔다.

"다시 오셨군요. 클로드 황자님."

자신을 장로라 칭했던 엘프가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확실히 드라이어드와 계약했더니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구만. 전에는 보자마자 성역에서 쫓아내야 한다며 발악을 하더니.

"전에는 나도 반쯤 제정신이 아니라 금방 돌아갔어. 그새 수습 좀 됐나? 생존자들은?"

"일식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은 대부분 복귀했습니다. 다만 대부분 심신이 무너진 상태라 거동이 불편하니,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뜻? 무슨 뜻?"

"황자님이 떠나시기 전, 정령님께서 1년 후에 벌어질 마지막 전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전사를 미리 동원하러 오신 게 아닙니까?"

얘들이 지례 겁먹고 너무 앞서갔구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바로 목적을 설명했다.

"그래서 온 게 아니야. 너희 엘프들은 부여마법을 쓸 수 있지?"

"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부여마법."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드라이어드."

"아...."

장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물론 이번 10회 차의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7회 차쯤의 드라이어드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너희가 부여마법 다루는 게 비밀인 건 알아. 하지만 당장 세상이 망하네 마네 하는데 숨긴다고 무슨 득이 있겠어?"

"그것은 오랜 관습이라.... 뭐라 드릴 말이 없군요. 그저 정령의 계약자인 당신의 말씀에 따를 따름입니다. 황자님. 그래서 저희들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부여마법 중에 냉기 마법이 특기인 녀석들을 선별해서 제국에 보내 줘."

"하지만 전사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전사가 아니라도 엘프는 전부 마법을 쓸 수 있잖아? 부여마법도 마찬가지고?"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허나 냉기 속성을 가진 엘프는 드문 편입니다. 어째서 그 속성을 바라시는 겁니까?"

"기사들 갑옷에 냉기 부여마법을 걸 거야. 이계의 적들이 불을 쓴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그렇습니까?"

장로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형편이 너무 어렵습니다. 영원의 숲의 엘프는 전부 다 해도 3천 명이 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훈련받은 천여 명의 전사들이 이번에 참극을 당했습니다. 생존자는 고작 백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점은 나도 유감이야."

유감이고말고. 이계의 침공 때 써먹어야 할 엘프 전사가 전멸한 셈이나 다름없으니까.

"남은 2천을 전부 계산해도.... 그중에 냉기 속성의 부여마법이 가능한 엘프는 30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들이 하루에 부여할 수 있는 마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잘 해봐야 두 번이나 세 번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제국의 기사는 최소 수천 명을 넘을 테니...."

"괜찮아. 이쪽에서 설탕바를 무제한으로 제공해 줄 테니까."

"네?"

"입 벌려 봐."

나는 품속에서 설탕바를 하나 꺼내 장로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잘 먹이고 잘 케어해 줄 게. 마법 쓰다가 과열 되서 쓰러지지 않도록."

"음. 이건 아주 맛있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부여마법은...."

"짧은 시간이 아니야. 당장 지금부터 할 테니까."

"지금 말씀입니까? 괴물들이 다시 쳐들어올 1년 뒤가 아니라?"

"부여마법에 시간 제한은 없잖아? 그러니 마법에만 반응하도록 냉기 부여마법을 걸어줘. 앞으로 6개월쯤 하면 모둔 기사들이 최소 한 방은 버틸 수 있게 되겠지?"

여기서 한 방이란 적의 장갑병이 뿜어내는 화염 방사 1회를 뜻한다.

일단 마갑이란 물건 자체가 기본적인 항마력이 있고, 여기에 전투 전 화염 저항 영약을 전원 지급할 예정이며, 추가로 모든 마갑에 냉기 부여마법까지 걸어 놓는다면?

"...알겠습니다."

엘프 장로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신인 정령께서 당신을 도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황자님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할게. 나도 엘프가 이번 일로 엄청 타격 받은 건 알아. 그러니 전쟁 터졌을 때 전사들 보내라고 안 할게. 대신 갑옷에 부여 마법 거는 일만 잘 해줘."

"알겠습니다. 시키실 일은 그것뿐입니까?"

"혹시 에이션트 베어 알아?"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장로는 파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주변의 엘프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에이션트 베어라니, 어둠산에 사는 마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정령들은 고대종이라고 부르던데. 암튼 그 녀석들이랑 혹시 교류가 있어? 게일 말로는 드워프와 에이션트 베어는 사이가 안 좋은 거 같던데."

"게일이라면.... 드워프 군주 게일 말씀인가 보군요."

"여기 오기 전에 잠깐 이야기를 했거든."

대부분은 후원자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일부는 다음 목표인 에이션트 베어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