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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6화

24장 불의 여왕

그런데 정령왕을 만나는 건 고사하고, 섬 자체가 내 접근을 거부했다.

푸확!

섬에 접근한 순간 화산섬 곳곳이 갈라 터지며 상공으로 불꽃과 용암을 분출한다.

뭐지 이건? 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어떻게든 숙련된 비행솜씨로 솟구치는 장애물을 피하며 눈앞에 보이는 높은 봉우리 안쪽으로 커브를 튼 순간.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악!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분화구에 대폭발이 일어났다.

"으악!"

솟구치는 용암과 화산탄보다 더 끔찍한 것은 바로 고온의 증기.

저길 맨몸으로 들어갔다간 오븐 속에서 푹 익은 칠면조 꼴이 나겠지?

프로텍션 매직에 바람의 벽을 동시에 펼쳐 몸을 보호하고, 추가로 벽 안쪽에 냉기 마법까지 시전하며 분화구 안쪽으로 진입했다.

으, 근데 매연과 증기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는데....

그런데 어느 시점을 지나자, 공간을 꽉 채운 탁한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타난 용광로. 분화구의 밑바닥은 새빨갛게 들끓는 거대한 용암 호수였다.

미친 듯이 출렁이는 그 용암호수.

그 호수의 중심에, 까만 덩어리 하나가 돌출되어 있는 게 보인다.

어째서인지 혼자만 굳어버린 까마득한 덩치의 용암바위.

그 거대한 바위 위로, 마치 불길로 짜 맞춘 듯 화려한 옥좌가 놓여 있다.

하지만 옥좌가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그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자의 눈부신 자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난 바위에 착지했고, 여자는 날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바로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다.

외형은 키가 3미터쯤 되는, 거대하지만 완벽한 비율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마치 작게 압축한 태양을 박아 넣은 것 같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긴 머리카락이 무중력 상태인 듯 자유롭게 공간을 일렁거리고....

"...."

그 경이로운 자태에 잠시 압도된 순간, 여태까지보다 더 지독한 열기가 바람의 벽을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대체 뭔 놈의 열기가...."

바로 그때.

일그러진 것조차 아름다운 여왕의 입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대받지 못한 자...."

소리가 열기를 뚫고 고막을 파고든다.

으, 어째 머릿속이 혼미해진다.

방금 뭐라고 했지?

아직 정령친화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여왕의 목소리가 제대로 안 들리는데?

"...죽음을. 내 기분을.... 죽음을. 감히 인간이...."

목소리가 얼핏 들릴 때마다 정신이 녹아 버릴 것 같다.

안 돼!

여기서 시간 끌면 죽는다! 정신이 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 몸이 물리적으로 녹아버린다고!

"잠깐!"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일단 선전포고부터 했다.

"불의 여왕 이그니스! 당신과 계약하고 싶다! 그러니 싸우자! 내가 이기면 나와 계약하는 거야!"

그러자 여왕의 눈빛이 한순간 돌변했다.

"가소로운!"

응?

어째 방금보다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거 같기도?

"감히 나와 싸워 이기겠다고? 하! 하하! 인간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소릴. 그 조그만 몸에 겨우 미세한 힘을 품었다고 기고만장하는 것이냐? 감히 힘의 근원 그 자체에게 도전해?"

아니, 그렇다고 진짜로 싸우자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간 나 진짜 죽어.

그보다 너 원래 하던 레퍼토리 있잖아? 빨리 승리 조건을 부르라고!

"...."

"하지만 눈빛은 마음에 드는군. 좋아. 그 무모함에 어울려주지."

여왕은 옥좌에 누운 자세 그대로 한쪽 손을 까딱였다.

"그럼 어디 덤벼 봐라. 어리석은 인간. 여기서 날 한 발이라도 움직이게 만들면 너의 승리를 인정해 주지."

그래 이거지. 진짜 이 말만 나오길 기다렸다!

"약속 지켜!"

짧은 대꾸와 동시에, 나는 앞뒤 재지 않고 양손에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이스 오브 템페스트.

물론 이 정도로는 불의 여왕의 눈썹 하나 까딱하게 만들 수 없지만.

그래도 여기에 리치의 마력결정 세 개를 동시에 움직인다면?

우우우우우웅!

정면의 빈 공간에 새롭게 맺히는 냉기의 덩어리들.

그 모두가 일순간 소용돌이치며 압축을 시작한다.

그렇게 손 안 대고 만든 템페스트가 모두 세 발.

여기에 이미 양손에 완성된 두 발의 템페스트까지.

그렇게 총 다섯 개의 얼음 구체를 일제히 정면으로 쏘아냈다.

이름하야 퀸터플(quintuple) 매직.

그러자 급락하는 주변 온도만큼이나 여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화륵!

한순간 여왕의 몸 주변으로 맹렬한 불길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내가 날린 다섯 발의 템페스트가 동시에 명중하며 폭발한 순간.

꽈드드드드드득!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거대한 얼음에 갇힌 불꽃.

그리고 얼음 주변을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맹렬한 냉기의 폭풍.

푸화아아아아아아악!

"룩카르!"

동시에 내가 소환한 바위의 정령이 그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밀어! 통째로 밀어붙여! 한 발짝만 움직이게 만들면 우리 승리..."

콰광!

"아니!"

왜 거길 들이박는 거야 이 멍청아! 박살내는 게 아니라 밀라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쟤 뭐하는 거지? 명령 거부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얼음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

달리던 기세 그대로 얼음에 몸을 들이박은 녀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덩어리를 뒤로 밀기 시작했다.

아. 처음부터 이 정도로는 얼음이 박살나지 않을 거라고 계산한 거구나.

"그래! 그대로 밀어! 확 뒤로 밀어 버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발의 템페스트가 만든 거대한 얼음덩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마법이 너무 강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발 줄여서 네 발만 쏠 것을.

하지만 그랬다간 자칫 여왕이....

콰광!

이렇게 폭발하듯 얼음을 박살 내고.

화르르르륵!

이렇게 온몸에 불꽃을 뿜으며.

푸화아아아아악!

이렇게 녹음 얼음이 끔찍한 수증기를 발생.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순간적인 압력에 못 이겨 증기 폭발을 일으킬 텐데?

"너! 감히 날 얼음 따위에!"

마지막으로 여왕의 분노가 폭발한 순간, 나는 이미 바위 끝으로 튕겨 날아가 쓰러진 상태였다.

"으...."

죽는 줄 알았네.

그 한 번의 폭발에 모든 가드가 해체되며 맨몸이 되어버렸다. 역시 불의 정령왕이 다르긴 다르구나.

마침 뒤쪽으로 용암호수가 출렁이는 소리가 울렸다. 1미터만 더 날아갔으면 그대로 뒤쪽의 용암에 풍덩했겠네.

"용서 못해! 내게 이런 수치를 안기다니! 죽음으로 사죄해라 어리석은 인간!"

여왕은 소리를 지르며 양손에 새로운 불덩어리를 일으켰다.

저거 얼핏 보면 그냥 불덩어리처럼 보인다. 근데 위력은 템페스트보다도 살짝 더 강하다는 게 함정.

심지어 저 무시무시한 걸 연속해서 끝도 없이 계속 집어 던진다. 나는 그 참극이 벌어지기 전, 악착같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그만! 내가 이겼어!"

"뭐라? 이 건방진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이겼어! 너 움직였잖아!"

곧바로 여왕의 다리 쪽에 삿대질을 하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내 승리라며! 그러니까 내가 이겼어! 약속은 지켜야지!"

"뭐.... 뭐라?"

여왕은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옥좌에서 일어난 그녀는, 이미 한 발도 아니라 여러 발을 앞으로 내딛은 채 서 있었다.

"아니...."

"자기가 한 말은 지켜야지! 명색이 정령왕인데!"

"그것은.... 하."

여왕은 어느 순간 표정을 풀며 웃기 시작했다.

"하, 하. 하하하하...."

그리고는 발동시킨 불덩어리를 거두며 계속 웃었다.

"후후.... 하하. 하하하! 그래. 움직였다. 확실히 움직였어. 옥좌에서 몸을 일으킨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럼...."

"그래. 너의 승리다 인간. 약속은 지켜야지."

여왕은 자신이 언제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는 듯, 갑자기 돌변한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끝났다! 불의 정령왕 루트 성공!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이군. 네 덕분에 실컷 웃었다. 이름이 뭐지 인간?"

"페이우드 제국의 황자인...."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몸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기울어졌다.

"...클로드. 그냥 클로드라고 불러."

"그래 클로드.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행동한 것 같구나. 모든 것이 너의 계산대로 이뤄진 것이냐?"

여왕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원래는 당신을 얼려 놓고 밀어서 위치를 옮기려고 했어."

하지만 룩카르는 임무에 실패했고, 여왕이 폭발하는 순간 직격에 휩쓸렸다. 그러고 보니 룩카르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그러니까....

세상에.

바닥에 자갈 수준으로 분해된 룩카르의 잔해가 보였다. 저거 다시 멀쩡해지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리겠구만.

"그랬나? 아무튼 놀라웠다. 이 내가, 얼음에 갇히게 될 줄이야."

"그래봤자 고작 5초뿐이지만."

"고작 5초가 아니라 무려 5초나 날 가둔 것이다. 그것도 나의 고향인 불의 정점에서.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여왕은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가능케 한 존재가 이렇게 작고 어린 존재일 줄이야."

"잠깐! 멈춰!"

뜨겁다고!

나는 재빨리 프로텍션 매직과 각종 방어마법을 다시 전개했다. 여왕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 이글거리는 화기를 최소한으로 낮추며 웃었다.

"후후. 미안하구나. 한순간 네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그걸 잊으면 안 되지...."

"앞으론 잊지 않겠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걸음을 멈춘 여왕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조그맣구나. 클로드."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당신이 큰 거야. 여왕."

"내 이름은 이그니스다. 하지만 여왕이라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군."

그리고는 입을 동그랗게 내밀며 내 얼굴을 향해 숨을 내뱉었다.

"후우."

순간 그녀의 입에서 작은 불씨가 날아들었다.

슉!

그것이 내 이마를 관통하며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순간 온몸이 작열하는 느낌을 받으며 모르는 척 물었다.

"으. 방금 뭐야? 설마 그게 계약?"

"그래. 너는 날 이겼다. 그러니 마땅히 힘을 빌려줘야지."

여왕은 다시 허리를 펴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지금부터 너는 모든 불꽃의 정령을 다스리는 존재. 바로 나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를 소환할 수 있다. 이 계약은 너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효할 것이다. 이미 다른 정령과 계약 한 듯하니 따로 설명은 필요 없겠지? 그저 주의사항을 하나 미리 전하마."

"주의사항?"

이건 또 뭐래?

전에 계약했을 때는 그냥 계약하자마자 슥 하고 사라졌는데?

"날 소환할 때는 최대한 거리를 두고 소환해라. 안 그러면 방금처럼 계약자인 네 몸에 해를 끼치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 명심할게."

뭐, 이건 확실히 중요한 주의사항이긴 하지.

안 그래도 저번 회귀 때 대놓고 소환했다가 반대로 내가 먼저 죽을 뻔했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나는 불에 해를 입지 않는다는 걸."

"응?"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설마 불의 정령왕이 불에 타 죽겠어?

"반대로 불 속에서 더 큰 힘을 얻는다. 그러니 내게 불의 마법을 사용하면, 짧은 순간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기억해라."

그래? 이쪽은 처음 듣는 이야긴데?

애초에 저번 9회 차 때를 떠올려 보면, 여왕은 계약한 이후로 나와 거의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왜 이럴까?

계약도 끝났는데 사라지지 않고 별별 이야기를 다 해주잖아? 완전 친절하게? 저거 보라지. 지금도 날 내려다보는 표정이 완전....

"후후. 여하튼 보면 볼수록 마음에 쏙 드는 인간이다. 정말이지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뭐?

여왕은 다시 몸을 숙이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저기요? 지금 내 키의 두 배쯤 되는 분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니, 정말로요.

"가까이서 보니 네 안에 깃든 것들이 보이는구나. 처음 했던 말을 사과해야겠군. 네가 품은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이런 나약한 몸으로 이 정도의 힘을 품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칭찬 고마워. 근데 방금 계약 끝난 거지? 그럼 이만 정리하고...."

"잠시 기다리거라."

순간 여왕의 붉은 눈이 노란 빛의 섬광으로 휘몰아쳤다.

"음. 그래. 조금 특별한 것이 섞여 있군. 이 기운은... 고대종인가?"

고대종? 혹시 에이션트 울프를 말하는 건가?

"어.... 내가 얼마 전에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먹었어. 그거 말하는 거야?"

"그렇구나. 역시 고대종의 힘을 받아들였어. 그래서 이런 독특한 느낌이 나는 거였다."

여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종은 아직 생물과 정령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을 때 생겨난 존재다. 그래서 정령과 친숙하지."

그래? 그건 나도 몰랐는데.

"내가 이토록 끌리는 것도 그 영향이 있는지 모르겠군. 그렇다면 하나 더 흡수하면 더 좋은 느낌이 되려나? 날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네?"

이런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어째 방금 뭔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연속으로 털어 놓은 것 같은데.... 대체 이 여왕님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클로드. 괜찮으면 당장 하나 더 흡수해 보지 않겠느냐? 네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새로운 코어를 하나 준비할 수 있다만."

"코어? 무슨 코어?"

"이곳 불의 군도에 살며 나를 섬기는 고대종이 있다. 혹시 에이션트 씰(seal)이 뭔지 알고 있느냐?"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7화

24장 불의 여왕

물론 알고 있다.

에이션트 씰. 일명 고대 물개.

물개라고 하면 대충 귀엽고 친숙한 이미진데, 현실에 존재하는 이 고대의 물개들은 그런 말랑말랑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에이션트 울프가 그랬던 것처럼. 이 녀석들도 보통 물개에 비해 몇 배나 큰 덩치와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 불의 군도에 배를 타고 넘어올 수 없는 이유기도 하고.

만약 인간들이 배를 타고 섬에 접근하면, 그 거대한 물개 수십 마리가 떼로 몰려와 다짜고짜 배를 침몰시켜 버린다!

비슷한 예로 요튼 만을 점거했던 시 서펜트가 있는데, 이놈들은 그 시 서펜트보다 한층 강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훨씬 더 까다롭다.

그래도 온 바다에 출몰해 인간들의 골치를 썩게 만드는 시 서펜트와 달리, 에이션트 씰은 이곳 불의 군도에만 서식한다.

그래서 먼저 섬에 접근하지만 않으면 큰 위험은 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안녕?"

나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물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대꾸는 없었다. 덩치가 못해도 6미터는 훌쩍 넘는 물개들이 무심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킨다.

그만! 뭔가 반응 좀 해!

이렇게 거대한 놈들이 떼 지어서 날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뜩이나 작은 내가 더 조그맣게 느껴진다고!

"그래. 다들 모인 것 같구나."

함께 온 여왕은 섬의 북쪽 해안에 집결한 물개들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집에 응해주어 고맙다. 나의 권속들아. 우리의 속성이 이토록 다른데도 내게 충성을 바치는 너희들의 충정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자 다른 물개보다 월등하게 큰 초대형 물개가 앞으로 슥슥 미끄러져 나오며 말했다.

"위대한 여왕의 뜻에 따를 수 있음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비센트. 오랜만이다. 에이션트 씰의 족장이여."

여왕은 그런 물개의 콧등에 손가락을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거 이름이 비센트구나. 의외로 어감이 세련된 느낌인데?

"지금 코어를 꺼낼 수 있는 건 족장인 너뿐이겠지?"

"방금 코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여왕이시여."

"좋아. 그럼 지금 이 인간에게 너의 코어를 내어 주기 바란다."

여왕은 다짜고짜 내 쪽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그러자 물개 족장은 매우 불쾌한 기색으로(사실 물개 표정은 잘 모르겠지만)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왕의 지엄한 명령,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코어는 신성한 것. 저희 부족과 깊은 인연을 맺은 특별한 존재에게만 넘길 수 있는 특별한 상징입니다."

"그래? 그거 잘 됐구나."

화륵!

순간 여왕이 자신의 몸에 가벼운 화기를 일으키며 웃었다.

"이곳에 있는 인간은 방금 나와 계약을 하였다. 어찌 보면 나를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존재가 된 셈이지."

"그런.... 감히 여왕님을...."

"그리고 너희는 대를 이어 이런 나를 섬기는 권속들이지. 그렇다면 이자와 너희 역시 아주 특별한 관계로 묶인 것이 아니냐? 이 정도면 코어를 넘겨 줄 충분한 인연 같은데?"

"여왕이시여...."

물개 족장이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흠, 여왕이 생각보다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네? 처음엔 그냥 힘이나 권위로 찍어 눌러 코어를 강탈하는 줄 알았는데.

"...알겠습니다. 그렇게 바라신다면."

한동안 꿈틀거리며 괴로워하던 물개는, 어느 순간 꿀렁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뭔가를 바닥에 토해냈다.

"쿠웨엑!"

그러자 점액에 둘러싸인 푸른빛의 구슬이 바닥에 떨어졌다.

근데 냄새가!

전에 르갈이 코어를 토해냈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무슨 생선 썩은 비린내 같은 게 진동하잖아?

"...잘 들어라 인간."

물개 족장은 자신이 토한 구슬을 노려보며 고통스런 목소리를 냈다.

"이것이 바로 코어다. 오직 300년 이상 생존한 에이션트 씰만이 몸에서 코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 나도 알아. 전에 르갈도 똑같은 소릴 했거든.

"여왕께서 명하지 않았다면 결코 네게 이걸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린 인간을 싫어하니까. 그나마 네 녀석은 다른 인간에 비해 약간은 괜찮은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건 아마도 마수 친화력 이야기겠지?

원래는 나도 친화력이 형편없는 인간이었지만, 전에 르갈의 코어 먹은 뒤로 꽤나 등급이 올라갔으니까.

"그래도 코어를 인간 따위에게 넘기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러니 빨리 코어를 흡수해라. 그렇다면 넌 우리와 가까운 존재가 될 테고, 그렇다면 나 역시 더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니까... 이걸 당장 먹으라고?"

코어를 집어 들자 뜨끈뜨끈한 열기와 소름끼치는 악취가 진동했다. 옆에 선 여왕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클로드. 어서 먹어라. 네가 얼마나 더 좋은 느낌으로 변하는지 기대되는구나."

후....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난 분명 불의 정령왕과 계약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건데.

어쩌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관객들을 앞에 두고 예정에도 없던 괴식 먹방을 찍게 된 걸까?

"...."

지금 이 순간. 수십, 어쩌면 수백 개일지도 모르는 새까만 눈동자들이 내 작은 몸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것도 코어는 코어니까 먹으면 몸이 좋아지겠지? 나는 입속에 코어를 넣고 숨을 멈춰버렸다.

"흡...."

"오오!"

"정말 저 인간이 코어를...."

"족장님의 코어가 인간의 몸에...."

지켜보던 물개들의 입에서 탄식이 나오는 사이, 나는 입안의 구슬이 점점 작아지는 걸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기분 더러워!

입속의 코어가 점점 작아지면서 가스 같은 걸 내뿜는데, 그 가스가 다시 몸속으로 흡수되면서 숨을 참으려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숨을 마실 때마다 썩은 생선 비린내 같은 악취가 콧속을 파고들고!

"으아아...."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렸으면.

하지만 전에 르갈의 코어를 먹었을 때처럼 의식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흑흑. 나 이제 정말 건강해졌구나. 몸에 쌓인 독소가 하나도 없어.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30분은 걸릴 거다. 하지만 흐음...."

물개 족장은 덩치에 맞지 않게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뭔가 귀여운 동작을 반복했다.

"이미 느낌이 매우 좋아지고 있다. 환영한다. 인간이여. 너는 이제 우리 에이션트 씰과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 고마워. 나 정말 행복해."

나는 국어책 읽듯 대답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콧속을 파고드는 이 썩은 내.

와, 이러다 정말 미치겠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정신적인 해독제다. 그래서 재빨리 설탕바가 있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는데....

"...!"

녹았다.

시럽처럼 녹아버린 설탕바가 품안의 주머니 속에서 찐득거렸다.

아 젠장.

그래도 시럽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입속에 넣으니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원망하는 눈으로 옆에 선 여왕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방금 뭐라 했느냐?"

여왕은 잽싸게 몸을 숙이며 억지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보다 벌써부터 느낌이 좋아졌구나. 친숙하면서도 사랑스런 느낌이야. 클로드. 네 몸에서 행복의 향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생선 썩은 내가 아니라?"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

전에 알고 있던 불의 정령왕과, 지금 눈앞에 있는 정령왕이 정말 같은 존재인가?

9회 차의 이그니스는 이런 식으로 살갑게 대하기는커녕, 아예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를 만한 것 자체가 전혀 없었다.

그저 소환하면 나타나서 잠시 싸우고 사라지는 포켓몬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의 이 태도 변화는 뭐지? 왜 이렇게 날 못 챙겨줘서 난리야?

"...원래 이렇게 계약자한테 잘 해줘? 따로 부탁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고대종의 코어까지 챙겨주고."

"그럴 리가. 계약자와 난 그저 남남일 뿐이다."

근데 지금 날 대하는 게 전혀 남남이 아니잖아?

여왕은 그 순간에도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니까."

"달라? 뭐가 다른데?"

"원래대로라면 이런 식의 계약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나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당연히 정상적인 계약 방법은 따로 존재한다."

"그게 뭔데?"

물론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여왕은 반대편 손을 멀리 뻗으며 허공에 불꽃을 일으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륵!

"어.... 혹시 도마뱀?"

"그래. 이것이 나의 수하인 사리프다. 불의 정령이지. 원래대로라면 너는 사리프와 먼저 계약을 맺고, 이 녀석의 인정을 받은 다음에야 나와 만날 수 있었다."

"그래?"

"그렇다. 나는 사리프에게 추천받은 인간에게 임무를 내리고, 만약 그 인간이 임무를 달성하면 정해진 법칙에 따라 계약을 맺게 된다."

"원래는 그런 거였어?"

"그렇다. 지루하지만 어쩔 수 없는 법칙이지. 내 마음과 상관없는 자연의 섭리다. 지금까지 두 명의 존재가 이런 방식으로 나와 계약을 했었고, 난 그들에게 결코 사적인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근데 나한테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넌 힘으로 제압했으니까."

순간 여왕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가늘고 부드러워졌다.

"날 힘으로 제압해서 계약을 맺은 최초의 존재다. 비록 옥좌에서 겨우 한 발 움직이게 만든 것뿐이라 해도. 이는 정해진 규칙과 섭리를 벗어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

"내가 영원이 누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벌어진 거야. 그래서 흥미가 생겼다. 반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약했다면... 난 그냥 정령계로 사라져 버렸겠지."

여왕은 순간 싸늘하게 식은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래. 이 표정.

부르면 나타나서 싸우고, 시간이 다 되면 바로 사라져 버리는 정령왕. 바로 저번 회귀 때 내가 보았던 여왕의 모습이다.

결국 정상 루트를 밟은 게 아니라 싸워 이긴 게 답이었다.

덕분에 예상에도 없던 고대 물개의 코어를 얻어서 좋긴 한데....

문제는 이 정령 여왕의 관심 자체가 인간의 몸으로는 대단히 부담스럽다는 것.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찜통 속에 있는 것처럼 후덥지근하다. 그나저나 얘는 대체 언제 사라지는 건데?

설마 계속 이렇게 소환된 상태로 돌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아까부터 왜 자꾸 나한테 딱 달라붙어서 몸을 만지는 거야?

"암튼 관심이 있는 건 고마운데.... 그런데 여왕?"

"왜 그러느냐?"

"아까부터 자꾸 스킨십을 하려는 거 같은데. 솔직히 뜨거워."

"뜨겁다고? 너도 흥분되는 것이냐?"

여왕의 적극적인 의사표현에 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뜨거워서 화상 입을 거 같다고. 아무리 화기를 억눌렀어도 넌 불의 정령왕이니까."

"아, 이거 말이구나."

여왕은 그 와중에도 내 목덜미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팠다면 미안하다. 그저 네 육체를 느끼고 싶었다."

"아니...."

"흥미가 생긴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 육체에도 관심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어쩌면 내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줄지도 모르니까."

아니, 잠깐.

솔직히 천지가 뒤집혀도 내가 너한테 그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긴 힘들지 않을까?

일단 종족도 다르고 사이즈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후후. 표정이 볼만하구나.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아니, 솔직히 걱정되는데...."

"빙의다."

"응?"

"내가 말하는 경험은 빙의를 말하는 것이다. 정령은 계약자에게 빙의하여 일시적으로 생명의 정수를 체험할 수 있지."

아.

난 또 뭐라고.

그 경험이란 게 정령빙의를 말하는 거였어?

"그리고 난 지금껏 한 번도 계약자에게 빙의해 본 적이 없다. 그랬다간 분명 모든 게 끝장날 테니까."

"정령빙의 말이지? 하지만 대부분의 정령은 정령사와 빙의가 불가능한 거 아냐? 육체가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그때, 이미 육체가 소멸해버린 룩카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니. 난 빙의해 본 적 있다.

"야! 아까는 인간이랑 정령빙의 못하는 게 당연하다며!"

-물론 인간은 그렇다. 하지만 내 계약자 중에는 오우거가 있었다.

음, 오우거라.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자이루트 산맥 오우거들의 수호신 같은 거였지?

"오우거 중에도 정령사가 있어?"

-그래. 있다.

하긴 뭐.... 뭐가 어쨌든 오우거의 튼튼한 몸이라면 빙의도 버티겠지.

"그런가? 바위 정령은 경험이 있는 듯하구나."

그 와중에 손가락을 넘어, 아예 커다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 여왕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했듯이 나는 못 해봤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첫 경험을 선사해 줄지도 모르고. 흐음.... 그런데 역시. 네 몸은 여전히 너무 약하구나."

"여전히?"

"에이션트 씰의 코어를 흡수했음에도... 여전히 날 받아들이기엔 부족하다. 이대로 빙의하면 넌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 거야."

그야 어쩔 수 없지.

코어 하나 더 먹었다고 당장 나이트 마스터 급의 육체로 바뀌는 것도 아닐 테니.

"그러니 네게 임무를 주마."

"임무? 그런 거 안 해도 이미 계약 끝났잖아?"

"계약을 위한 임무가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네게 내리는, 아니 네게 바라는 목표이지."

내 몸에서 손을 뗀 여왕은, 그대로 몇 발 뒤로 물러나더니 억눌렀던 화기를 방출시켰다.

화륵!

"으악! 뭐해! 그러다 나 죽어.... 응?"

근데 막상 별로 안 뜨겁네?

그 어떤 방어마법을 전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이 코앞에서 불타오르는 여왕의 열기를 버텨내고 있다!

"좋아. 비록 살짝 올리긴 했다만. 그래도 이 정도는 버티게 되었구나."

"어떻게...."

살이 익지 않고 버텨주네? 여왕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는데도?

"이것이 에이션트 씰의 코어가 가진 효과다. 흡수가 완전히 끝나면 좀 더 강한 열기도 버텨낼 수 있겠지. 후후."

화기를 가라앉힌 여왕이 갑자기 다시 달려들며 내 몸을 푹 껴안았다.

"컥! 숨 막혀! 뭐 하는 거야!"

"클로드."

"...응?"

여왕은 내 귓가에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많은 고대종의 코어를 흡수해라. 그래서 날 받아들일 만큼 강력한 인간이 되는 거다. 그것이 내가 내리는 임무다."

"뭐?"

"세상엔 아직 많은 고대종이 존재한다."

겨우 포옹을 풀고 마주본 여왕의 눈은, 말 그대로 불꽃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존재한 이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생명의 기쁨을 선사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된다면?"

"너 역시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

이계의 침공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하는 거?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데?

난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속 입술만 꽉 깨물었다. 여왕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겨우 내게서 떨어지며 천천히 허공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날 소환해라. 클로드. 내 모든 힘을 다해 네 앞의 적들을 불태워 줄 테니...."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8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섬을 떠나기 전, 나는 에이션트 씰의 족장에게 매우 신사적인 방법으로 코어를 더 얻어냈다.

-야야. 물개 족장? 너 코어 몇 개 더 있지?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토해 내.

-어허. 내가 누군지 몰라? 너희들 불의 여왕 섬기는 종족이라며? 확 여왕 다시 불러내서 일러바친다?

-방금 못 봤어? 내가 여왕이랑 계약도 하고, 포옹도 하고 할 거 다한 사이라고.

-자자. 그러지 말고. 우린 이미 한식구잖아? 내가 네 코어를 먹었으니, 따지고 보면 자식 같은 거 아냐? 그러니 코어 좀 더 줘. 내가 진짜 좋은데 쓸게. 응?

음....

돌아보니 그렇게 신사적인 방식은 아니었던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코어 2개를 추가로 확보했다.

이걸로 내가 확보한 코어는 에이션트 울프 1개, 그리고 에이션트 씰 2개다.

일단 내가 이미 먹은 코어를 더 먹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러니 부하들 중에 선별해서 먹여야지.

처음 르갈의 코어를 얻었을 때는 최대한 길게 시간을 두고 부하들의 성장이나 능력을 더 확인한 다음에 먹이려 했다. 코어는 여러 번 얻을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광전사, 데스웜. 그리고 감염 군주까지.

부하들이 훈련으로 강해지는 속도가 이계의 괴물들이 등장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형편.

그러니 남는 코어를 최대한 빨리 먹이고 파워 업을 시켜줘야겠지?

나는 또다시 비행 마법으로 바다를 건너며 코어의 배분을 고민했다.

역시 메르데스한테 두 종류의 코어를 다 몰아주는 게 좋으려나?

메르데스의 육체적 잠재능력은 최고 수준.

당장 최하급 마갑이라도 입으면 하급을 넘어 중급 마갑을 착용한 나이트 익스퍼트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 코어 두 개를 동시에 먹이면?

곧바로 나이트 익스퍼트, 아니면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면 이미 나이트 마스터인 다비에게 먹이는 것도...."

이것 또한 기대되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다비는 이미 자신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발현한 상태. 어쩌면 코어를 먹여도 별다른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반대로 가장 약한 카일에게 먹이는 건?

물론 이것도 든든한 보험이 될 것이다.

당장 카일에게 의지하는 분야가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그러니 녀석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많은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일단 코어를 먹여 놓으면 앞으로 어떤 사건이 터져도 생존 확률이 올라가겠지?

물론 이런 비즈니스적인 입장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사심도 있다.

카일이 괴물 같은 녀석들 틈바구니에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으면 그것도 보기 좋을 것 같다. 녀석과는 가장 오래 알고 지낸 관계라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아니지. 이 와중에 사심까지 챙길 수는 없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어디까지나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해야 해."

코어가 남아돈다면 또 모를까.

그러고 보니 불의 여왕이 내린 임무도 이것과 연결이 되는구나.

-더 많은 고대종의 코어를 흡수해라. 그래서 날 받아들일 만큼 강력한 인간이 되는 거다.

-그러면 너 역시,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여왕이 뭘 어디까지 알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불의 정령왕과 정령빙의를 하고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육체적 힘을 손에 넣는다면, 당연히 이계의 침공을 끝까지 막아내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이미 회귀 1년차라곤 상상 못할 만큼의 성과를 올리긴 했는데...."

이번 10회 차를 위해 준비한 초반 테크트리와 루트를 이미 대부분 달성하거나 돌파한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안으로 스스로를 확인해 보면....

종족 : 인간

현재 은신 : S+

현재 힘 : D

현재 마법 : S+

현재 신성 마법 : S

현재 영약술 : C

잠재 영약술 : S

현재 정령 마법 : A+

현재 마수 친화력 : C

잠재 사령 마법 : S

보라, 이 찬란한 스펙을.

이 정도면 9회 차 때 마지막에 도달했던 스펙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가 아닐까?

물론 그 전까지는 감정안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9회 차와 비교해서 육체 능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

고작 D등급 가지고 뭘 그러게 으스대냐고? 전에는 안 봐도 E나 F였을 게 확실하거든.

마법 역시 리치의 마력결정을 통해 다중 마법이 가능할 만큼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이것도 9회 차 때 최종적으로 A+ 정도였는데, 이번에 S+로 올라간 게 아닐까?

특이한 게 있다면 잠재 능력이 남은 게 몇 개 안 된다는 것.

이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추가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힘... 그러니까 육체능력을 더 끌어 올리려면 역시 코어밖에 없겠지?"

당장 다음 타깃인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를 먹는다면, D등급인 힘이 C나 B 정도로 확 올라가지 않을까?

여기에 마수 친화력 역시 코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올라가는 거 같다. 이것도 나중에 만렙 찍으면 다른 쪽으로 활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마수들을 설득해 이계와의 전쟁에 참전시킨다던가?

"좋아.... 아주 좋아...."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이계의 스파이 세력, 즉 후원자가 내 예상과 다르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이지 완벽한 스타트가 아닐 수 없는데....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나도 여기서 더 속도를 높일 수 있지 않나?

-그러니 '끓는 강'으로 돌아가 그곳에 사는 '용암장어'를 전부 제거해라. 그 임무를 해결해야 나와 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으아, 그건 너무 힘든데....

-힘들다고? 그럼 다른 방법도 있다. 나와 싸워 승리해라. 만약 날 이 옥좌에서 한 발 짝이라도 움직이게 만들면 너의 승리로 인정해 줄 테니.

이것이 저번 9회 차 때 불의 여왕과 나눴던 대화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이번에 불의 여왕과 빠른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거고.

다음은 8회 차 때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과 나눴던 대화.

-내가 내리는 임무는, 자이루트 산맥에 있는 모든 오우거의 숫자를 세 배로 늘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와 계약을 해 주겠다.

-잠깐, 앞으로 2년 남았는데? 그건 불가능해!

-2년? 기한은 상관없다. 왜 2년이라고 네 스스로 기한을 두는가?

-그야 2년 후에 게이트가.... 아니, 이건 2년이 문제가 아니라 10년을 투자해도 불가능해! 어떻게 10년 안에 인구를 3배로 늘릴 수 있어!

-10년? 이번엔 왜 또 10년이지? 말했다시피 기한은 상관없다고 했을 텐데?

-넌 상관없을지 몰라도, 난 한 번에 10년 이상의 시간을 쓸 수 없어.

-그런가? 그럼 다른 방법도 있다. 내 주먹을 맞고 살아남아라. 그럼 계약해 주마.

-어.... 마법이나 신성마법 써도 돼? 아니면 둘 다?

-둘 다 안 된다. 추가로 너희들이 착용하는 그 갑옷도 입으면 안 된다.

-마갑도 없이 맨몸으로 버티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참고로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은 그 아래 등급인 바위 정령 룩카르에 비해 덩치가 두 배 이상 큰 보라색의 강옥(鋼玉)덩어리. 심지어 팔도 네 개가 달려있다.

일단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시의 나는 테라직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보았다.

-어떻게 공격할지 보여줄 수 있어? 어떻게 날 팰 거야?

녀석은 거침없이 몸을 뒤로 젖힌 다음, 한순간 네 개의 주먹을 풀 스윙하며 허공을 내리찍었다.

하나만 맞아도 피떡이 될 텐데 네 주먹을 동시라니.

당연히 정상적인 인간이 맨몸으로 녀석의 풀 스윙×4를 버텨내는 건 불가능하다.

이건 설사 나이트 마스터인 다비라 해도 자살행위다. 기사라고 해봤자 마갑의 힘을 잘 끌어내는 거지, 자체적으로 몸이 단단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건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 먹은 코어의 효과를 생각하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1. 강력한 기본 항마력.

2. 강력한 기본 내구력.

3. 강력한 심폐지구력(체력)

이것이 에이션트 씰의 코어가 가진 능력이다. 여기에 4번...도 있는데 이건 뭐 쓸데가 없으니 언급할 필요는 없고.

아무튼 몸이 엄청 튼튼해진 게 느껴진다.

여기에 가시권에 들어간 또 다른 마수,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 역시 추가로 내구력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어쩌면 이번엔 테라직과 계약이 가능하지 않을까?

맨몸으로 녀석의 주먹을 딱 한 번만 버텨내면 되는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다음으로 직행할 루트는 '이종족연합'루트로 결정했다.

여길 뚫어야 에이션트 베어가 서식하는 어둠산과 육로로 연결이 가능해진다. 육로가 뚫려야 저택을 꽉 채울 만큼의 꿀도 수송할 수 있을 테고.

추가로 엘프와 관련이 있는 나무 정령과의 계약도 가능하다. 이쪽은 일이 좀 더 복잡해질 가능성도 있지만....

덕분에 아크 위저드 트롬본 얻기는 이번에도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트롬본 아저씨 미안. 아니지, 본인은 오히려 이게 행복하려나?

그 아저씨는 지금쯤 다른 나라의 시골 작은 마을에서 자신만의 술을 담그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좀 더 평화를 즐기고 계시기를. 내가 불러서 마구 부려먹기 전까지 말이지.

* * *

영원의 숲 동쪽에 자리 잡은 드워프 주둔지.

이곳은 제국의 병력이 숲을 우회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만 제국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엘프.

비록 임시로 엘프와 연합을 맺은 드워프였지만, 그렇다고 제국과 전면전을 감수할 만큼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 건 아니었다.

"흠, 술맛 나쁘지 않군."

드워프의 대장장이 군주, 겔리는 커다란 나무잔에 담긴 독한 술을 입안에 털어 놓고는 수염을 씰룩거렸다.

"인간 놈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걸 다 바치는 거지? 클로드는 또 누구고?"

겔리는 자신의 위명답게 주둔지에서조차 대장간을 차려 놓고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거하게 술을 마신 드워프 군주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두꺼운 팔로 망치와 집게를 집어 든 순간.

"오랜만입니다. 군주님."

이글거리는 화덕 반대편의 그림자에서, 붕대로 몸을 감은 남자가 홀연히 떠오르며 인사를 건넸다.

"허, 후원자 양반인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재주도 좋구만. 어떻게 그런 데서 쑥쑥 튀어나오는 거지?"

"연결된 생명을 매개체로 하는 차원이동이죠. 제가 가진 특수한 속성인 '그림자'에 기반한 편법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쉽게 이해하긴 힘드시겠지만요."

"그래. 하나도 모르겠어. 그보다 술 한 잔 할 텐가? 좋은 선물을 준 은인에게 함부로 푸대접할 수야 없지."

겔리는 옆에 놓인 커다란 술통을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후원자는 고개를 저으며 대장간의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쪽에선 식사가 금지되어 있어서 말이죠.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보다 그 큰 술통을 한 손으로 잘도 드시는군요. 군주님보다도 큰 술통인데 말입니다."

"이거? 이것도 다 그쪽이 들어준 소원 덕분이지."

통을 내려놓은 겔리는 보통 드워프의 두 배가 넘는 거대한 팔뚝을 과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그럼 끝없이 담금질을 할 수 있는 팔을 줘. 지금 내 팔로는 원하는 걸 만들 수가 없으니까.

겔리가 빈 소원은 단순했다.

덕분에 인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양팔만 이상할 정도로 길고 두꺼운 괴상한 체형의 드워프 군주가 탄생했다.

만약 인간 세상이었다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기피했겠지만.

하지만 호쾌한 드워프 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런 특이한 외모가 큰 호응을 이끌었다. 덕분에 게일은 그냥 군주에서 '대장장이 군주'라는 자랑스러운 위명으로 불리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반면 너무 만족하신 바람에 추가적인 뒤틀림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죠. 뭐 상관없습니다. 제가 군주님께 기대하는 건 다른 분야니까요. 전에 부탁한 마갑은 완성되었습니까?"

"그래. 저기 완성됐네."

겔리는 대장간 한편에 세워 놓은 거대한 마갑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런 커다란 마갑이 왜 필요하지? 드워프나 인간 사이즈는 절대 아니고, 어디 오우거한테 입히기라도 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문어를 집어넣을 생각이죠."

"문어?"

"아,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공포 군주라고 했어야 하는데. 아무튼 이 정도 사이즈는 되어야 파이렌 님의 몸이 전부 들어갈 겁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9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공포 군주?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구만. 파이렌이란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페이우드 제국의 나이트 마스터였던 인물입니다."

"오! 맞아. 나이트 마스터. 전쟁 나면 경계해야 한다는 소문을 들었지. 파이렌과 다비라는 인간을 말이야."

"바로 그 파이렌 님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지금은 다른 존재가 되었지만, 그래도 마갑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을 활용하면 좀 더 큰 전력이 될 거라 생각해서요. 그래서 신경을 더 쓰고 있습니다."

"역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하하! 하지만 뭐 내 은인이니 이 정도 부탁이야 가볍게 들어드리지. 자, 그럼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후원자는 거대한 마갑 앞에서 잠시 주저하다 물었다.

"혹시 검도 만드셨습니까?"

"검? 검은 안 만들었는데. 설마 이 갑옷에 맞는 사이즈의 검도 필요한가?"

"함께 부탁했어야 하는데 깜빡했군요. 새로 의뢰를 드리면 얼마나 걸릴까요?"

"그야 완성도에 따라 다르지. 그 파이렌이란 양반 힘이 얼마나 강한가?"

"무서울 정도로 강합니다. 명색이 공포 군주니까요."

"흐음.... 그럼 좀 까다롭겠는데. 검은 갑옷과는 달라. 어중간하게 만들면 금방 이가 빠지거나 날이 부러질 텐데.... 아! 그렇지."

겔리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며 물었다.

"후원자 양반, 당신 혹시 엘프와도 연이 있나?"

"엘프? 갑자기 엘프는 왜 말씀하시는 겁니까?"

"망치나 도끼라면 나도 질 생각이 없지만, 아쉽지만 검만큼은 그놈들이 나보다 잘 만들거든."

"호, 어째서입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전에 한번 기회 있을 때 수치를 무릅쓰고 물어봤는데 안 알려주더라고. 동맹을 맺긴 했지만 오만하고 기분 나쁜 놈들이야."

"흐음.... 그렇군요."

후원자는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침 엘프 쪽도 다녀오는 길인데, 미리 알았으면 같이 부탁했을 텐데 아쉽군요."

"음? 엘프 쪽을 다녀왔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군주님!"

그때 대장간이 열리며 전령 하나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군주님!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바, 방금 영원의 숲의 엘프들이 자기들 멋대로 출격했습니다! 큰일입니다!"

"뭐? 출격?"

겔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옆에 놓인 커다란 망치를 집어 들었다.

"대체 왜? 인간 놈들이 기습이라도 했나? 그 뭐더라, 백기사단?"

"아닙니다! 엘프들이 무턱대고 숲을 벗어나 백기사단이 주둔하는 곳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엘프들이 인간 제국 영토를 먼저 공격했단 뜻이냐?"

"그렇습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제국과의 전면전입니다!"

전령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겔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후원자 양반. 미안하지만 지금 큰일이 터져서 당신이랑 이야기할 시간이 없군. 음.... 후원자 양반?"

하지만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겔리는 주름진 눈을 껌뻑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출귀몰한 양반이구만. 갑옷이나 챙겨 갈 것이지. 그나저나 그 엘프 놈들.... 왜 갑자기 미쳐서 날뛰는 거지? 동맹인 우리와 상의 한마디 없이?"

* * *

"색깔이 영롱하군요."

다비는 테이블에 놓인 구슬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대 물개의 코어라, 분명 정령과 계약하러 가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런 걸 들고 돌아오신 겁니까?"

"정령과 계약도 했어. 이건 그 부산물."

"흐음."

"아무튼 지금부터 경매타임이야. 자자, 먼저 하나 남은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부터. 금화 500개부터 시작할 건데 들어올 사람?"

"...."

쳇, 기껏 농담을 던졌는데 반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냐?

"황자님 나! 내가 살게! 당장 돈은 없는데 외상도 돼?"

정작 기사도 아닌 톨라리가 유일하게 호응해 주었다. 근데 고맙긴 한데 넌 안 돼....

"미안하지만 마법사는 빼고."

"앗, 너무해. 근데 능력이 뭔데?"

"지금부터 설명할 거야. 경매 이야기는 농담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나는 응접실에 모인 기사단원들을 한 명씩 둘러보며 말했다.

"먼저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는 체력이 좋아져. 관절의 유연성과 탄력이 올라가고. 여기에 대부분의 독에 면역이 돼."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이 귀한 물건을 저희에게 내려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카일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녹색 구슬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대신 오늘 코어를 받지 못한 사람도 너무 실망하진 말고. 당장 내일부터 새로운 코어 얻으려 출발할 거니까. 거기서 얻은 건 오늘 못 먹은 사람한테 줄 거야."

"와!"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리넨이 반사적으로 탄성을 지르고는 주변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녀석 들뜨긴. 나는 르갈의 코어를 집어 들고는 침착하게 서 있던 기사단장에게 내밀었다.

"자, 다비. 이건 네 거야."

"네? 저 말씀입니까?"

다비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만, 저보다는 아직 성장 가능성이 높은 다른 단원들에게 내려 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인데. 네가 항상 이야기했잖아? 모자란 힘은 기술로 커버 할 수 있다고."

"물론 그것이 제 기사로서의 좌우명입이긴 합니다만."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는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 그러니 이거 먹고 그 기술이란 걸 좀 더 업그레이드 시켜 봐. 어때? 괜찮을 것 같지 않아?"

"확실히.... 몸이 유연해지면 전투에서 더 다양한 기술을 응용할 수 있을 겁니다."

다비는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나. 이거 내가 즉석에서 대충 지어낸 이론이거든. 어떻게든 너한테 코어 먹이려고.

물론 여기서 더 강해지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하지만 안 그래도 상관없다. 지난 9회 차만 떠올려 봐도, 다비는 이계와의 전쟁에서 이미 다른 누구보다 최전선을 누비며 최고의 활약을 해 줬으니까.

핵심은 코어가 가진 마지막 능력, 바로 독 면역.

당장 9회 차 때 다비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키메라였다.

순수하게 힘 대 힘으로 붙었으면 어떻게든 다비가 이겼을지도 모르지만.

키메라의 수많은 대가리 중 몇 개가 주변에 독을 뿜으며 다비의 움직임을 크게 제한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죽은 다비가 키메라에게 뜯어 먹히던 모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으, 그 꼴은 정말이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반대로 다비가 독에 면역이 된다면 훨씬 더 자유롭게 전장을 누비며 활약할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기대하며 코어를 앞으로 내밀었다.

"암튼 이건 네 거야. 다른 코어는 단원들에게 나눠 줄 테니 부담 가지지 말고."

"...황자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비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한 자세로 양손을 내밀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 손수 코어를 쥐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먹어."

"지금 당장,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꿀꺽 삼키진 말고. 입 안에 넣고 가만있으면 알아서 흡수 돼."

"알겠습니다. 그럼...."

다비는 코어를 입 안에 넣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카일이 한쪽 손을 들며 질문했다.

"그런데 황자님. 방금 단장님이 드신 코어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드신 바로 그 코어가 아닙니까?"

"응. 나랑 디디도 먹었고."

"일단 황자님과 디디는 둘째 치고.... 그렇다면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코어의 능력을 얻으신 겁니까?"

"그렇겠지? 물론 황제 폐하는 연로하고 몸도 안 좋으시니까. 그거 하나 드셨다고 다시 전장에서 활약할 만큼 좋아지진 않을 거야."

하지만 황태자의 경우는 다르다. 코어의 능력도 더해 원래 기사의 재능이 뛰어난 인간이니, 잘만 육성하면 미래의 나이트 마스터가 되지 않을까?

"물론 큰형님,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는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지금도 가끔 다비를 보내서 훈련도 시켜 드리고 있고."

"과연. 그렇군요."

"그럼 다음으로...."

나는 테이블에 남은 푸른색의 구슬 두 개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건 에이션트 씰의 코어야. 대부분은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불의 군도에 서식하며 접근하는 배를 침몰시킨다는 마수가 아닙니까? 뱃사람들이 가끔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만."

오, 카일 녀석은 알고 있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맞아. 효과는 내구력이 좋아져.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마법적으로도 그렇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지? 나는 테이블에 미리 올려둔 나이프를 집어 들고 손바닥을 가볍게 그었다.

"황자님!"

순간 조용히 있던 메르데스가 번개같이 달려들며 내 손목을 낚아챘다. 세상에, 얘 반응속도 봐라. 다비조차도 가볍게 움찔거렸을 뿐인데.

"괜찮아 메르데스. 자, 어때? 멀쩡하지?"

나는 흉터 하나 없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메르데스는 부릅뜬 눈으로 한참동안 손바닥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숙였다.

"호들갑을 떨어 죄송합니다. 정말로 상처가 남지 않았습니다."

"방금 진짜로 그은 것 같던데? 그게 고대 물개의 효과야?"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톨라리도 놀란 표정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항마력도 엄청 올랐어. 당장 급이 낮은 마법이라면 맨몸으로도 버틸 수 있을걸?"

"마갑도 없이 맨몸으로?"

"왜? 너도 이거 땡겨?"

"아니. 그건 아니고.

톨라리는 재깍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황자님이 주는 건 뇌가속 영약만으로 충분해. 내가 몸 튼튼해져서 뭐 해? 다 마법으로 해결되는데."

"추가로 폐활량도 좋아져. 고대 물개 말로는 잠수할 때 좋다던데, 뭐 달리기를 하던 전투를 치르던 무조건 좋겠지?"

그러자 초조하게 지켜보던 카일의 눈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녀석, 이야기만 들어도 이게 엄청 땡기나 보구만.

"그럼 먼저... 하나는 카일이 먹어."

"황자님."

카일은 감격한 얼굴로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황자님. 이 은혜는 죽어서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응 안 돼. 너 죽지 말라고 이거 주는 거야.

고대 물개 코어의 핵심은 결국 내구력.

아무리 기사단 최약체인 카일이라도, 이걸 먹으면 어지간한 일을 당해도 목숨이 날아가진 않을 것이다.

"기왕이면 죽지 말고 갚아. 그리고 나머지는 메르데스, 네 거야."

나는 하나 남은 코어를 메르데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메르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코어를 움켜쥐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황자님. 하지만 이건 저 말고 다른 분들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응? 왜?"

"저는 정령빙의가 있으니까요. 조약돌 정령과 빙의를 하면 짧은 시간이나마 높은 내구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응. 나도 알아. 그러니까 이것도 먹어."

"네?"

"정령빙의에 코어의 힘까지 더해지면 시너지 확 올라갈 거 아냐?"

"하지만...."

메르데스는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리넨을 바라보았다. 혼자 코어에서 소외된 리넨은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닙니다요. 메르데스 아가씨. 저 같은 것보다는 메르데스 아가씨가 훨씬 더 잘 어울립니다."

"그래. 신경 쓸 필요 없어. 리넨한테는 다음에 얻는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를 줄 거니까."

"...알겠습니다."

메르데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코어를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받은 코어를 들고만 있던 카일도 얼른 입안에 집어넣었다.

"만약에 또 이상한 게 저택에 쳐들어오면, 그때도 이번처럼 활약해줘. 알았지?"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새로운 코어를 먹고 더 강해지시기 전까지는, 제가 목숨 걸고 모두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메르데스는 사탕을 입에 문 듯한 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먼저 코어를 먹었던 다비는 어떻게 됐지?

"...."

다비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쯤 됐으면 코어가 꽤 흡수됐을 텐데, 혹시 변화가 생겼는지 체크를 해볼까?

종족 : 인간

현재 힘 : A

잠재 힘 : A+

생겼다!

원래 남아 있는 잠재능력이 없었잖아? 그런데 생겼다고!

하지만 기쁜 마음에 막 떠벌리는 것도 이상하게 보이겠지?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비에게 예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다비? 너도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어. 기왕 코어도 먹었으니, 무조건 기술에만 전념하지 말고 다른 쪽으로도 도전해봐."

"다른 쪽이라 하심은...."

다비는 아직 입안에 코어가 남아있는지 말을 우물거렸다. 그런데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시녀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황자님. 방금 백기사단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백기사단? 아니, 다비 빨리 올라오라고 전령까지 보냈어?"

"그게 아닙니다. 지금 북부의 엘프들이 국경을 넘어 제국령을 침공했다고 합니다."

"엘프가 말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다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국경을 지키던 백기사단의 전위부대는 이미 무너졌다고 합니다. 엘프들은 이미 영원의 숲을 벗어나 제국 영토 내부로 파죽지세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방금 황궁에서 보낸 전령이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황자님을 찾고 계신다 하니, 최대한 빨리 입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당황한 부하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애써 표정을 컨트롤하며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건 또 무슨 일인데!

하필이면 이제 막 엘프들이랑 잘 해보려고 새로운 루트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그런데 엘프가 국경을 넘었다고? 게다가 백기사단을 섬멸했어?

설마 반제국 전쟁이 벌써 시작된 건가?

그것도 고작 회귀 1년차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놈들은 아무리 빨라도 내가 스무 살이 넘어야 전쟁을 시작했다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