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6

짙은 예감이 든다.

이건 리얼 진짜다.

딩동!

귓가에 맑은 알림음이 울리는 순간, 라키엘은 눈길을 들었다. 눈앞을 알차게 채우는 메시지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당신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기혈의 흐름과 기맥의 상태를 민감하게 진단하며 시침을 하는, 최초의 실시간 능동형 침술을 성공적으로 펼쳐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특수한 자질과 조건을 갖춘 이만이 실행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하고도 대담한 종류의 시술이었습니다.]

[이러한 대담하고도 적극적인 시도가 당신의 침술 스킬에 커다란 경험적 자산으로 축적되어, 당신의 스킬을 대폭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침술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오옷.'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라키엘은 기대감으로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스킬명 : 침술 Lv. 6]

[대상의 몸에 가느다란 바늘을 꽂아넣어 기혈의 흐름을 조절하고 각종 효과를 일으킵니다. 이는 마음을 먹기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도, 악독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현재 레벨에서 제공하는 침술 효과의 증가량 30%]

[스킬 전용 옵션 ① : 시침 시뮬레이션]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100]

[현재 보유 중인 HP : 500]

'후아.'

침술 스킬이 한 큐에 3단계나 올랐다. 덕분에 침술 효과도 15%에서 30% 증가로 급증!

'이 정도면 진짜... 건물주 안 부럽네.'

탕약이건 침술이건.

달랑 몇 퍼센트라도 효과를 끌어올리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특히, 시중에 파는 약의 효과를 5%라도 개선하기 위해 제약사들이 들이붓는 천문학적인 연구 자금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게다가 나한테는 보너스 수명의 획득이 걸린 일이니까.'

침술의 효과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무조건 이득이 된다. 환자가 회복될 확률이 높아지니까. 보너스 수명을 얻을 가능성도 올라가니까. 그만큼 황족의 권한을 있는 대로 누리는 무병장수 만수르 라이프가 실현될 확률도 높아지리라!

물론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이? 이봐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딩동!

역시나 반응이 왔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노골적인 탐욕에 감탄합니다.]

[심장 : 야 이 인간 이제 대놓고 HP 달라고 눈치 주네ㅋㅋㅋ]

[허파 : 허허허허허ㅋ 파하하 tlqkf]

[대장 : 저도 대놓고 괄약근 트위스트 조질 수 있는데 말입니다?]

[간장 : 와나? 우리 이렇게 HP 자판기행임?]

[위장 : 자판기한테는 동전이라도 먹이는데 ㄹㅇㅋㅋ]

[콩팥 : 열등한 유기체는 동전 섭취를 못 한다구요 아ㅋㅋ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탐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오장육부가 옛다 먹어라 하며 당신에게 800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1,300]

'...후후후.'

역시 보상은 두루두루 풍족할수록 좋은 법이다. 보상이 살짝 모자란다 싶으면 적당히 눈치를 주면 만사형통! 라키엘은 입 끝에 걸리려는 탐욕의 승천 라인을 애써 억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자를 살폈다.

"미구엘 씨? 어떻습니까?"

뾱!

환자, 미구엘의 장딴지에 박혀 있던 갈색 가시를 야물딱지게 뽑아냈다. 그제야 살짝(?) 흰자위를 드러내며 돌아가고 있던 환자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헉, 허억... 헉."

"괜찮습니까?"

"어, 엄청, 엄청나게 아팠습니다?"

"그래서요?"

"좋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 들었다면 단단히 오해(?)를 빚었을 법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병실에 있는 그 누구도 오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움과 감탄을 삼키며 환자와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라키엘이 환자의 발등을 꾹꾹 주물렀다.

"많이 아팠다니 다행입니다. 그만큼 감각이 돌아왔다는 뜻이라서. 여기, 느껴집니까?"

"예, 예!"

"그럼 이곳은요?"

"거... 거긴!"

"어때요?"

"간지럽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한번 일어나 봅시다."

"...예?"

환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어나 보자니. 그게 될까? 감각의 복구에 기뻐하던 환자는 멈칫했다.

최근 며칠간 황태자에게서 신기한 침술 치료를 받으며 약간씩 다리가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가시에 찔릴 때만 발가락이나 다리가 움직여지는 정도가 최대였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나 보자니. 망설였지만, 고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황태자의 팔이 자신의 겨드랑이 아래로 쑥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자자, 천천히, 조심조심."

"뎃?"

마음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감행된 전격적인 부축이었다. 덕분에 환자, 미구엘은 얼결에 황태자의 어깨에 기대어 침상 옆으로 몸을 돌렸다. 침상 아래로 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리고 불쑥... 일어나졌다?

"...어?"

세상이 갑자기 낮아졌다.

아니, 자신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한동안 병상에만 누워서 지내느라 익숙해져 있던, 딱 병상에 맞는 눈높이가 아니었다.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을 올려보기만 했던 그 눈높이가 아니었다.

미구엘은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같은 눈높이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럼 천천히. 한 걸음씩. 해봅시다."

황태자의 격려에 힘을 받았다. 여전히 황태자에게 거의 기대다시피 하고서, 한 발짝씩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부들부들, 오랜만에 움직이는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가능했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여졌다! 형편없이 떨리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다리가 땅을 딛고, 밀어내고, 내뻗어졌다!

"흑, 흐흑...!"

그의 눈매가 삽시간에 젖었다.

라키엘이 미구엘을 달랬다.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이제 시작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갑자기 걸어서 조금 힘드셨겠지만, 이제 꾸준히 재활 치료를 받으면 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흐, 흐윽, 감사, 가, 감사... 합니다! 흐흑...! 이 은혜를 어떻게...."

"안 갚아도 됩니다. 그저 앞으로의 재활에만 힘써 주세요. 전 그거면 됩니다."

"흑, 흐흑...!"

미구엘의 울음이 더욱 격해졌다. 환자 스스로도 자신의 치료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고 라키엘은 생각했다.

'실제로 회복 가능성이 낮았으니까.'

길랭-바레 증후군 치고도 굉장히 예후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까딱하면 호흡마비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을 뻔했으니, 말 다했다. 설령 운이 좋아서 호흡마비의 고비를 넘겼다 하더라도?

'아마 영구적인 장애가 남아서 평생 걷지 못했을 거야.'

진행되던 예후를 보자면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기존의 마비된 신경을 대체할 새로운 신경 경로가 개척되었으니, 앞으로 재활만 꾸준히 하면 남은 인생을 알차게 살아갈 수 있겠지. 그 생각에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물론 그는 혼자만 뿌듯함을 느끼고 끝낼(?) 생각 또한 전혀 없었다.

"다들, 봤지?"

그가 조원들을 돌아보았다. 남몰래 잔잔한 감동과 감탄에 젖어 있던 조원들이 라키엘의 물음에 찬물을 덮어쓴 것처럼 흠칫, 정신을 차렸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보다시피 우리, 전부 졸업시험에 통과한 것 같다?"

"...!"

듣고 보니 그랬다.

환자가 성공적으로 치료가 되었으니, 졸업시험도 대성공이다. 그러니 의사면허도 따낼 수 있으리라.

'이게, 꿈인가.'

조원들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원래는 거의 반쯤 포기하고 있던 졸업시험이었다. 난데없이 권력을 이용해서 졸업반에 편입한 황태자와 같은 조로 묶이던 때부터,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마비증 환자의 치료를 덜컥 맡아 버렸던 때부터였다.

이건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막막하고, 암담했다. 한편으로는 황태자를 원망하기도 했다.

처음엔 분명 그랬다.

한데 보다 보니 아니었다.

'황태자 이 사람의 치료법은... 처음 보는 괴상한 방식인데 분명히 효과가 있어.'

자신들은 짐작도 못 하던 환자의 마비 원인을 밝혀내고, 호흡마비를 예견해서 대처하고, 마침내 환자가 걷게 만들었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감사의 마음도 들었다.

말 그대로....

"내 활약이 아니었다면 졸업시험에 실패했을 테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

본심을 정확하게 지적당한 켈로드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머지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향해 라키엘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너희들, 나한테 은혜 좀 갚자."

"...예?"

은혜?

무슨 은혜?

모두가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너희 모두, 나 덕분에 따게 될 의사 면허로 별궁 한의원에 취직하자?"

라키엘의 폭탄 선언, 아니, 납치(?) 선언이 떨어졌다.

170화. 친절한 진료가 필요한 이유 (1)

"너희 모두, 나 덕분에 따게 될 의사 면허로 별궁 한의원에 취직하자?"

라키엘의 납치 선언이 떨어졌다. 켈로드와 조원들의 눈썹이 꿈틀, 저도 모르게 멸망의 트월킹을 추었다.

"...예에?"

"예에, 는 무슨. 말귀 못 알아들어? 너희 전부 별궁 한의원에 취직 확정이라고."

"별궁 한의원에요?"

"어."

"저희가요?"

"응."

"왜요?"

켈로드는 진심으로 되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황태자 덕분에 졸업시험을 편안하게 통과했다는 건 아는데, 분명 고맙게 생각하는 건 맞는데.

'...그게 어째서 별궁 한의원 취직과 이어지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난... 고향에 돌아가서 시골 마을의 의사가 되려고 했는데? 거기서 고향 사람들을 돌보며 보람을 느끼고 싶었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별궁 한의원 취직이라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예상한 적도, 딱히 갈망한 적도 없는 진로였다. 하지만 황태자의 뻔뻔한 말은 당연하다는 듯이 잘도 이어졌다.

"왜라니? 이유를 모르겠어?"

"예...."

"허. 이 친구 뻔뻔한 것 좀 보게."

"예에?"

"생각 좀 해봐. 너희들 전부 말이야. 나 아니었으면 졸업시험 통과가 가능하기라도 했겠어?"

"그건...."

"아니지? 내 말 맞지?"

"...."

"솔직히 따져보자고. 너희들 이번 졸업시험 과정에서 한 게 있나?"

"...."

"황태자 전하, 마비 원인을 모르겠어요. 아무도 못 밝혔대요. 으아아 황태자 전하, 환자가 숨을 안 쉬어요. 헉 황태자 전하, 지금 뭐하시는 것이신지. 어엇 환자 발가락이 움직였어. 등등, 등등."

"...."

"실직적인 치료 행위는 내가 다 하고, 너희는 옆에서 추임새 넣은 거 빼고 한 거 없지 않나?"

"하, 하지만...."

"하지만 뭐."

"전하께서 첫 침술을 펼치실 때 난입하려던 학장님을 제가 성공적으로 제지했는데 말입니다."

"어, 그건 공로로 인정."

"그렇다면...."

"네가 별궁 한의원 신입 인턴의사 대표 해라."

"...."

"좋지? 기쁘지? 이제부터 네가 반장이야. 일동, 박수."

"...."

"어쨌건, 빡쎄게 캐리한 나 덕분에 편하게 버스 타면서 졸업장 따낸 거잖나. 안 그래?"

"버스가 뭡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

"원래는 불가능했을 너희 졸업을 내가 성공적으로 시켜준 건데. 그냥 아주 대놓고 업어준 건데. 그럼 인간적으로 은혜 좀 갚자. 응?"

"...크흡!"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태자의 명령을 거절할 구실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켈로드도, 나머지 조원들 모두도 그랬다.

그렇게, 라키엘은 졸업과 동시에 앞으로 야물딱지게 굴려먹을 인턴 의사들을 대량으로 포획(?)하는 데에 성공했다.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라키엘은 의료대학 졸업장과 함께 공식적인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다른 조원들과 함께였다. 거기에 더해서....

"별궁 한의원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

켈로드를 비롯한 예비 의사 10인은 별궁 한의원 원장실에 쭈뼛쭈뼛 섰다. 라키엘의 입가에 보람찬 미소가 떠올랐다.

'딱 좋아.'

자신이 의료대학에서 잡아온 예비 의사들. 일단 같은 조원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납치했다. 거기에,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마음속 장바구니에 찜(?)을 해두었던 다른 조의 예비 의사 다섯을 추가로 잡아왔다.

다들 나름의 떡잎이 튼실해 보이는 인재들이었다.

"우선, 모두의 졸업과 의사 면허 취득을 축하한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 인사하지. 다들 알겠지만 나는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다. 하지만 여기 이곳, 별궁 한의원에서 가운을 입고 있는 동안은 아니다."

탁, 탁.

원장실 책상을 손으로 소리 나게 쳤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그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 자리에 있는 동안, 나는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별궁 한의원의 원장이다. 너희와 함께 환자를 돌보고, 치료의 결과에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될 거다. 알겠나?"

"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몇몇은 표정이 밝지 못했다. 특히, 졸업시험 과정에서 이쪽과 다른 조원이었던 예비 의사들이 그러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아직 내 치료법이나 별궁 한의원에 대해 단단히 편견을 품고 있을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침술이며 뜸 같은 치료법이 생소할 테니까. 이곳의 의술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니까. 당연히 근본 없는 치료법이라며 경시하는 인식을 지니고 있겠지. 하지만 이쪽의 신분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그걸 차마 티를 내지는 못하는 것일 테고.

과연 그들의 표정을 보니 그랬다.

'아주 죽겠다, 죽겠어.'

몰래 한숨을 푹푹 삼키는 모습이 너무 잘 보였다. 나름 숨기려고는 하는데 티가 팍팍 났다. 아마 자신이 원하지 않던 곳에 끌려왔다고 여기고 있겠지. 자신은 이런 곳에서 썩으려고 의술을 배운 게 아니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겠지.

'하지만 뭐,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어차피 편견이나 오해는 저절로 풀어지게 마련이다. 심지어 충실한 가르딘 경조차도 처음엔 이쪽의 치료법에 매번 기겁하고 의문의 시선을 보냈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쪽은?

원래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면 된다. 저들이 한의원의 체계와 환경에 적응하도록 지켜봐 주면 될 일이다.

"어쨌건, 당분간 너희는 별궁 한의원의 진료 체계를 익히기 위한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러기 위해 1개월 동안은 각자 웨어울프 간호사 한 사람과 짝이 되어 진료와 간호 과정에 동참하게 될 거야."

"웨어울프 간호사와... 말입니까?"

켈로드가 떠듬거리며 물어왔다.

"음. 혹시 두렵나?"

"...."

"괜찮아. 우리 간호사들은 안 물어요. 빡치게 하면 찢을 순 있겠지만."

"...."

"어쨌건, 앞으로 수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향후에 근무할 과가 배정될 거야. 다들 그렇게 알도록."

앞으로는 진료 과목에 따라 과를 나눌 생각이었다. 정형외과는 골절이나 관절 전문. 일반외과는 외상 치료 전문으로. 나머지 각종 질환은? 전부 일반 내과로 통합해서 운용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이 정도 구분만 해두는 게 그나마 제일 효율적일 거야. 안과니 이비인후과니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여기 의사들이 전문화되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첫 수련의 10명을 재능과 적성에 맞는 과로 배치하고, 자신은 저들이 감당할 수 없을 중환자나 희귀병 환자를 도맡으면 된다. 큰 수술이 필요할 때는 앙부아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르딘 경이 합세하면 될 테고.

"하니 다들 이만 해산. 원장실을 나가면 너희의 선배인 가르딘 경이 있을 거야. 그를 따라가면 당분간 짝이 될 간호사를 배정받을 수 있을 테니, 다들 나가보도록."

그렇게 예비 의사들을 험난한 별궁 한의원의 세계(?)로 내보냈다.

그리고 기대했다.

'후후후, 후흐흐흐.'

혼자서 모든 환자를 몽땅 진료하던 고단한 시절은 끝났다. 앞으로는 더욱 조직화 된 별궁 한의원의 성대한 도약만이 남았을 뿐이다.

원장실 책상에 앉은 라키엘은 대학원생에게 현실 자동전투(?)를 돌리는 교수의 심정으로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예비 의사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별궁 한의원의 체계에 적응해나갔다. 다들 의료대학에서부터 나름 두각을 드러냈던 인재들이었다. 또한, 라키엘이 일찌감치 점찍어둔 인재들이기도 했다.

"...라는 덕분에, 예상외로 다들 잘해주고 있지, 후후후."

"그렇습니까?"

"으음."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처럼 별궁을 찾아온 2황자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넌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라니요."

2황자 테오도르가 쑥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제 말입니다. 드디어 끝났습니다."

"끝났다고? 아, 설마?"

"예. 연회 말입니다."

"벌써?"

"...벌써라고 말씀하시기엔 굉장히 오래 연회를 했는데 말이지요."

"뭐, 하긴."

정말로 그랬다.

첫 연회가 시작되고 장장 한 달이 넘도록 이어졌던가. 하루 연회를 열고, 하루를 쉬고, 그렇게 격일로 치열하게 진행된 연회 일정이었다.

"듣기로는 연회에 참석한 레이디들의 평균 체중이 극적으로 상승했다는 소문도 있던데?"

"격일로 먹고 마시는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2황자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격일로, 그것도 저녁 늦은 시간마다 음주와 달콤향긋한 디저트를 즐긴 레이디들이었다. 굉장한 특이체질이거나 인류의 굴레(?)를 벗어던진 사람이 아닌 이상, 체중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럼 나야 좋지. 다이어트 약은 더 많이 팔리겠네."

"...."

"어쨌건, 그래서 결과는?"

"예? 결과라시면...?"

"연회의 결과 말이야. 격일로 레이디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을 텐데. 그중에 누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느냔 말이지."

라키엘이 노골적인 눈으로 2황자를 돌아보았다. 초봄 정원의 햇볕 아래에서 2황자 녀석의 볼이 살짝 익었다.

"으음, 그게...."

"그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고?"

"예, 있긴 한데...."

"그래? 다행이네. 누구야?"

"그건...."

2황자는 난처하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자신이 연회에 참석한 레이디가 아닌, 전혀 다른 엉뚱한 이에게 관심이 생겨 버렸다는 걸 밝혀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한데 그때였다.

때마침 다행스럽게도(?) 정원 한쪽에서 뜻밖의 실랑이 소리가 들려왔다.

"음?"

2황자의 대답을 기다리던 라키엘의 주의가 한의원 정문을 향했다. 그쪽에서 뭔가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누구지?'

별궁 한의원 정문에서 실랑이라니.

이상하게 여긴 라키엘은 정원 수풀 너머로 그쪽을 빼꼼 쳐다보았다. 세 사람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별궁 한의원의 예비 의사였다. 졸업시험 시절에 다른 조원이었던 남자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환자로 보였다.

'연세 많은 노부인과 중년의 아들...인가.'

그런데 조금 이상한 건, 중년의 아들이 예비 의사에게 연신 굽신거리며 무언가를 애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온 중년의 남자가 한참 어린 예비 의사에게 굽신거리며 애원을 하게 되는 걸까. 그리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예비 의사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거절을 하는 걸까.

어쩐지 쌔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한의원에서 생겨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잠시만?"

라키엘은 2황자를 내버려두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가까이 가보니 오가는 말소리가 차츰 또렷하게 들려왔다.

한데 그 내용이....

'...뭐라고. 장난해 지금?'

고막을 두드려 오는, 예비 의사가 지껄이고 있는, 멍멍이도 번역기를 요구할 개소리를 들으며,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빠지직 갈았다.

171화. 친절한 진료가 필요한 이유 (2)

'뭐냐. 장난해, 지금?'

고막을 쿡, 쿡, 건드려 오는 이야기. 들으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다른 곳도 아닌, 내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날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으니까.

"...."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까득 갈았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조금 더 들어보자. 어떤 상황인지 살펴보자. 그것 또한 신입 의사에 대한 평가의 수단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귀를 기울였다. 저쪽, 노부인과 중년 남성, 그리고 젊은 예비 의사는 이쪽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듯했다.

때마침 제일 먼저 들려온 말소리는 예비 의사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안타깝지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예? 하지만 의사 선생님? 제발 부탁입니다. 부디,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미안합니다. 여기선 불가능할 것 같군요."

"의사 선생님, 제발...."

예비 의사는 뭔가 자꾸 안 된다는 이야기만 했다. 중년 남성은 거의 매달릴 기세로 애원하고 있었다.

'혹시 둘이 아는 사이인가.'

라키엘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중년 남성이 돈이라도 빌리러 왔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 예비 의사의 완강하게 거절하는 단호박스러운 태도가 딱 설명이 되니까.

한데 계속 들어보니 아니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보세요, 파비오 씨? 저도 파비오 씨와 어머님의 사정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정말로 안 되는 겁니다. 떼를 쓴다고 해서 치매가 치료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곳 별궁 한의원이 겉으로는 제법 규모가 커 보이지만, 그럼에도 보유한 병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치료도 불가능한 파비오 씨의 어머님을 위해 그 한정적인 병상 중에 하나를 내어줘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러니까 검사라도 좀...."

"진단은 조금 전에 드렸지 않습니까. 치매라고. 노망이 드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럼, 약이라도 좀...."

"없습니다."

예비 의사가 자르듯이 말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치매에는 약이 없습니다. 있으면 벌써 드렸겠지요. 그런데 없는 걸 자꾸만 내놓으라고 하시고, 치료가 불가능한 어머님을 위해서 귀한 병상을 내어달라고 하시는 의도가 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이기적인 겁니다, 그런 요구는."

"...예에?"

파비오 씨라 불린 중년 남성이 흠칫했다. 예비 의사의 뾰족한 일침이 이어졌다.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이곳의 병상은 한정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시죠. 그런 병상에, 치료될 가망이 없는 파비오 씨의 어머님을 눕혀드린다면 말입니다. 정말로 그 병상이 필요한 절박한 환자가 왔을 땐 어떡하실 겁니까?"

"...."

"파비오 씨는 그저 본인들의 어려움만 생각하면 되시겠지만 말입니다. 이곳은 많은 환자가 다 함께 사용하는 의료시설입니다. 부디 그 점을 유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자, 잠깐만요?"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죄송합니다."

예비 의사가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파비오 씨가 무슨 용기를 낸 건지, 몸을 확 숙였다. 아니, 무릎을 대뜸 꿇었다. 그리고 손을 내뻗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파비오 씨의 손아귀가 예비 의사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때마침 돌아선 의사가 걸음을 성큼 내딛고 있던 터라, 가운이 찢어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우우욱!

"...엇?"

"아앗?"

가운이 찢긴 의사가 흠칫했다. 파비오 씨도 찢어진 가운 자락을 움켜쥔 채로 사색이 되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예비 의사의 말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파비오 씨가 다급히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었으면, 뭐지요?"

"아니, 그게, 정말로 죄송합니다. 전 그저 의사 선생님께 더 드릴 이야기가 남아서... 그래서 그저 조금 붙잡으려고만...."

"후우. 진짜."

"정말로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래도 제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게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께는,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정말입니다."

급기야 파비오 씨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선생님 말씀대로 제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신 게 맞습니다. 흔히들 노망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제대로 된 병원에서 진찰이라도 한번 받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예?"

"하지만 파비오 씨, 제가 누차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미 진단은 했다고요."

"그래도... 앞으로 어머니의 증세가 더 심해지지 않을 방법이라든가, 뭔가 더 잘 돌보아드릴 수 있을 방법이라든가... 병원에서 지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약 비슷한 음식이라든가... 조금이라도 좀...."

"...."

"그런 것이라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의사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돈이... 모자라서 말입니다."

파비오 씨가 고개를 떨구었다.

"시내의 병원들은 하나같이 너무 비싼 진료비를 요구했습니다.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병원을 찾아갈 때마다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파비오 씨? 아까는 이야기가 다르셨지 않습니까?"

"...예?"

"어머니를 치료해드리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진료비를 모으지 않았습니까?"

"그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하루 벌어서 하루를 겨우 먹고 산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진료비가... 제 열흘치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못 삽니다. 당장 어머니를 열흘이나 굶겨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

"그럼 일을 더 많이 하셨어야죠."

"...예?"

파비오 씨가 울먹이는 얼굴을 들었다. 예비 의사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났다.

"그럼 찢어진 제 가운을 배상해줄 돈도 없으시겠군요. 맞지요?"

"예에? 그건...."

"파비오 씨는 모르겠지만, 이건 제가 의료대학을 졸업한 기념으로 약혼자가 선물해준 가운입니다. 아직 열흘도 입지 못했지요. 그런 귀한 걸 찢어 버리신 겁니다, 파비오 씨께서는."

"가운에 관련된 일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선생님. 보시다시피 우리 아이가 이렇게 못 말릴 개구쟁이라서 말이지요."

사죄를 한 이는 놀랍게도 파비오 씨가 아니었다. 지금껏 묵묵히 있던 그의 어머니, 노부인이 나서서 예비 의사를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래서였다.

더는... 못 보겠다.

"그만. 거기까지. 그 잘난 가운 값은 내가 2배로 변상해주도록 하지."

라키엘이 정원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대로 뚜벅뚜벅 움직여 예비 의사와 모자 사이에 섰다. 그제야 이쪽을 본 예비 의사의 눈길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전하?"

"개원 시간에는 전하가 아니라 원장님."

"...."

"의료대학에서 눈여겨볼 때는 이런 태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학생일 때와 의사일 때 사이의 인격의 갭이 조금 큰 타입인가 봐?"

"그, 그건...."

예비 의사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를 보는 라키엘의 눈길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화가 났다.

예비 의사의 거만한 갑질 때문에? 아니었다. 단순히 거만을 떨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거나 실망감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내 한의원에서 환자를 내쫓아? 제대로 된 상담도 없이 진료를 거부해?'

의료인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환자를 문전박대해서는 안 된다. 설령 의료가 불가능하여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 이유를 환자가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선의 형태로, 배려심을 토대로 해서 말이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서부터 그렇게 해왔다.

종종 일개 한의원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질환을 안고 오는 분도 계셨다. 그럴 때면 자신은? 환자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여기선 치료가 안 된다고. 꼭 큰 병원으로 가셔서 검사와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고.

그게 도리라고 여겼다. 그냥 여기선 치료가 안 된다며 성의 없이 돌려보내면? 그 환자가 결국엔 다른 '한의원'으로 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랬다가 자칫 귀중한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될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설득해서 큰 병원으로 보내드렸다. 2~3일쯤 지난 뒤에는 개인적으로 확인 전화까지 드린 적도 있다. 그게 자신의 한의원을 믿고 찾아온 환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예비 의사 놈은?

'그런 노력을 전혀 안 했어.'

심지어 눈썰미도 없다.

진짜다.

정말로 눈썰미가 없는 놈이다. 혹은, 자신이 내린 성급한 진단 하나만을 믿고 다른 가능성을 보려 들지 않는 놈이거나.

"그쪽, 이름이 뭐였지?"

"발렌티노입니다, 전... 원장님."

"그래 발렌티노. 의료대학에서 졸업시험을 치를 때는 나와 다른 조였지. 당시에 나는 그쪽을 눈여겨봤어. 왜였을까?"

"...."

"모두가 잠든 밤에, 아무도 없는 시간에, 환자 옆에 붙어서 죽을 후후 불어 떠먹이고 있더라고.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더란 말이지."

"그건...."

"단지 졸업시험을 위한 거였나?"

"...."

"뭐. 감상적인 이야기는 됐고. 실무적인 내용으로 넘어가지. 여기 환자분을 입원시켜드려."

"...예?"

라키엘이 파비오 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비의사 발렌티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비오 씨를 말입니까?"

"으음."

"그게, 대체...."

발렌티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치매를 앓는 노부인이야 황태자가 변덕에 가까운 동정심을 발휘했다고 치면 그나마 이해가 되긴 할 텐데... 그 아들은 왜?

"어째서 말입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라키엘이 한쪽 입술로 웃었다.

"모르겠나?"

"예? 예.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으음... 파비오 씨의 안색이 조금 누런 기미가 있다는 것만 빼면...."

"진찰 안 했지?"

"...."

"그럼 지금 기회를 줄 테니 진찰해봐."

"아, 알겠습니다."

발렌티노는 쭈뼛쭈뼛 파비오 씨를 일으켜 세웠다. 파비오 씨도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 때문인지 온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발렌티노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진찰이 시작되었다.

"저, 으음, 그럼, 파비오 씨? 혹시 요즘 아프거나 불편한 곳이 있으셨습니까?"

"...예에? 어, 그게, 저, 조금 피곤하긴 한데."

"그리고요?"

"종종 입맛이 없으면서 배가 당기듯이 아프고, 얼굴이 살짝 누렇게 뜨고는 하는데 말입니다."

"많이 아프거나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입니까?"

"아뇨.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다른 증상은 없습니까?"

"예에. 딱히는...."

"...."

발렌티노는 조금 막막해졌다. 한편으로는 괜한 억측도 들었다. 사실은 파비오 씨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건데, 황태자가 자신을 혼내기 위해 괜히 진찰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슬쩍 부아가 났다.

내키지 않던 별궁 한의원 근무였다. 자신은 의료대학을 수료한 우수한 인재였다. 한데 이런 근본도 없고 역사도 없는, 한의원이라는 괴상한 곳에서 자신의 촉망받는 미래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안 그래도 불만이 많았는데, 이제는 아무런 병이 없는 환자를 진찰해보라며 괴롭힘을 가하다니. 이게 갑질이 아니면 뭔가 싶었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그런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일단 위기만 모면하자 싶었다. 황태자를 돌아보며, 내심 떠올린 정답을 자신 있게 말했다.

"진찰 결과,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

"예."

확실하다.

아주 미약한 황달 증상, 그리고 피로감. 이런 것들이야 사실 뻔하니까.

"매일 이어지는 노동과, 막노동 근무 환경에서 접하는 술 때문에 간이 피로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당분간 휴식을 조금 취하면서 술을 멀리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애?"

"예."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황태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땡. 틀렸어."

"...예?"

"틀렸다고."

"...."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대뜸 파비오 씨에게 불쑥 다가갔다. 움찔 놀라는 파비오의 눈을 가리켰다.

"이거 보여?"

그가 가리킨 곳. 파비오의 푸른 눈동자 테두리를 따라 금색 선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고리처럼 눈동자를 감싼 모양이었다. 그 황금색 고리를 가리키며 라키엘이 말했다.

"발렌티노? 그쪽이 알고 있을진 모르겠는데. 이건 카이저-플라이셔 고리(Kayser-Fleischer Ring)라고 불리는, 윌슨병(Wilson's Disease)의 전형적인 증상이야."

172화. 환자와 의료인 (1)

윌슨병.

국제질병분류기호(ICD-10)로는 E83.0.

대한민국의 산정특례코드 V119.

이건 hepatolenticular degeneration이라고도 불리는, 체내의 비정상적인 구리 대사를 불러오는 유전질환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전자에 발생한 돌연변이 때문에 신체가 구리를 밖으로 배출하지 못하게 되는 질환이다.

'원래 구리는 비타민만큼이나 인체에 필수적인 성분이지. 하지만 사람 몸이 당연히 그렇듯이, 구리도 과도하게 섭취될 경우엔 신체가 자연스럽게 구리를 배출하게 되어 있거든.'

보통은 간에서 만드는 담즙(bile)으로 구리가 빠져나가게 된다. 그런데 윌슨병 환자는? 체내에서 구리의 운반을 담당하는 세룰로플라스민(ceruloplasmin)이 모자라거나 거의 없다. 그래서 구리를 옮기지 못하고,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

즉, 구리를 전담하는 택배가 무기한 파업을 선언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신체에 구리가 쌓이면 많은 문제가 생기지.'

주로 간 질환이 나타난다.

담즙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구리가 간세포에 축적된다. 지속적인 세포 손상을 일으키며, 마침내 간경변증을 동반하는 만성간염, 세뇨관 기능장애 등을 불러온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신경증상이 일어나기도 하지. 주로 대뇌기저핵이 영향을 받아서 구음장애, 연하장애, 비정상적인 눈의 움직임, 미세운동장애 등이 생길 수 있어. 더 심해지면 근육 긴장 이상이라든가, 무도증, 정서불안, 조울증, 조현병까지 생길 수도 있고.'

그렇게 증상이 발현되었는데도 치료를 하지 않으면? 금방 위험해진다. 전격성 간부전이 발생하는 경우엔 치사율이 70%까지 치솟기도 하니까.

라키엘의 시선이 파비오 씨를 향했다. 파비오 씨의 푸른 눈동자 둘레를 따라서 만들어져 있는 황금색 링. 저것이 바로 윌슨병의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이건 카이저-플라이셔 고리라고 불리는, 윌슨병의 전형적인 증상이야."

라키엘의 말에 파비오가 움찔했다.

예비의사 발렌티노 또한 흠칫했다.

'윌슨병? 카이저-플라이셔 고리?'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의료대학에서는 배운 적 없는 증상이기도 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으음. 잘 믿기진 않겠지만. 파비오 씨?"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파비오가 허겁지겁 어색한 동작으로 예를 갖추었다.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예를 표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황태자와 백성이 아닌,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니까 말입니다."

"하, 하지만...."

"쓸데없이 예를 차리고 뭐하고 하다 보면 언제 진료를 합니까? 그런 거 질색입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격식이니 예의니 찾는 건 실제로 진료에 너무 방해가 됐다. 환자를 한두 명 진료하면 모르겠는데,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상대하다 보니, 예를 차리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만 모아도 은근히 제법 됐다.

'댁들은 본인 예의만 차리면 되지만, 나는 그걸 매일 수십 번씩 받아줘야 한다고 이 사람들아.'

그래서였다.

환자를 진료할 때에는 철저하게 의료인으로서. 황태자의 신분은 저 우주 너머로 훌쩍 던져놓는 게 편했다. 진료의 능률도 눈에 띄게 올라갔다.

라키엘이 물었다.

"어쨌건 파비오 씨? 당신의 눈동자 말입니다. 자각은 하고 있었습니까?"

"그... 카이즈...."

"플레이셔 고리. 당신의 눈동자 테두리에 새겨진 금색 고리 말입니다. 생긴 지 얼마나 됐습니까?"

"저, 그게...."

잠시 기억을 더듬던 파비오가 천천히 말했다.

"처음 이걸 발견한 건...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막일을 하는데 동료 중에 하나가 제 눈을 가리키며 이상한 게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거울을 봤더니... 눈동자 위쪽에 초승달처럼 금색 선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후에는요?"

"금색 선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눈동자 아래쪽에도 생기더니, 앞서 위쪽에 생겼던 금색 초승달과 합쳐지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둥근 고리가 눈동자를 둘러싸게 됐다는 거지요?"

"예, 예, 황태자 전하."

파비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엔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눈이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요. 한데 별다른 불편함 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뒀겠지요. 당장 일하는 게 바빠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보살피려면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맞죠?"

"예, 전하...."

"그럼 잠깐 손 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예에?"

"잠깐이면 됩니다."

"제가...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파비오가 손을 바지춤에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이런 깨끗하지 못한 손을 감히 황족에게 내미는 행위가 죄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은살로 가득한 파비오의 손을 덥석 잡고는 손목을 짚었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은근슬쩍 돌린 진맥 스킬의 결과가 나왔다. 라키엘은 검진표의 핵심이라 부를 수 있을 '종합소견' 항목으로 시선을 던졌다.

[종합 소견 : 만성적 피로에 찌든 신체입니다. 윌슨병이 감지되었습니다. 환자가 34세 무렵 증상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하였으며, 13번 염색체의 ATP7B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체내의 구리 배출에 장애가 생겼습니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증상의 첫 발현으로부터 약 2년 7개월이 경과되었으며, 구리 축적으로 인한 간세포의 괴사, 혈장(plasma)으로 배출된 구리의 신장, 각막, 뇌 축적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입니다. 이대로 방치 시, 구리 축적으로 인한 전격성 간염(치사율 70%)으로의 진행이 강력히 예상됩니다.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치료와 케어가 필요합니다.]

"...."

생각보다 심한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곧바로 오장육부의 경고성 메시지도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간장이 환자의 간장과 상담을 마치고서 경악하고 있습니다.]

[간장 : 나 오늘 개쩌는 간장 만났음....]

"...."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건데.

라키엘은 자신의 내면(?)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간장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간장 : 저 아저씨 간장, 구리로 무장했더라? ㄹㅇ 청동기 시대 수준ㄷㄷㄷ]

'...청동기? 어느 정도길래?'

[간장 : 장난 아냐. 간 조직 1g당 구리 수치가 0.25mg을 한참 초과했어. 광산 파면 구리 채굴도 가능할 듯.]

"...."

그렇다면 확실하게 윌슨병이 맞다. 진맥 스킬의 종합소견, 그리고 오장육부 간장의 상담 결과가 명확한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 전하?"

파비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콕 찌르고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제가, 뭔가를 잘못해서 몹쓸 병에 걸린 겁니까?"

"...."

잘못했느냐라.

파비오의 질문을 받은 순간, 라키엘은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이내 상대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서 말했다.

"잘못이라니요.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습니다. 그저 불운했을 뿐인 거지요."

"그, 그렇습니까...?"

"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이게 유전병이라는 말은 못 하겠다. 특히 유전병을 진단받는 환자 옆에 환자의 어머니가 계시다면, 더더욱 그렇다.

'분명 엄청나게 자책하실 테니까.'

세상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을까. 자신이 물려준 유전자 때문에 자식이 아프게 됐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미안해할까.

그래서였다.

윌슨병이 유전질환이라는 사실도, 발병률이 3만 명당 1명꼴이라는 정보도, 윌슨병 발병 보인자 수가 90명당 1명 정도라는 이야기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대신 훨씬 중요한 일에 집중했다.

"어쨌건, 이걸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치료를 위해 당장 입원하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발렌티노."

"...예?"

발렌티노가 어깨를 움찔했다.

라키엘이 그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파비오 씨의 어머니를 보살피도록."

"...예?"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치매 할머니를?

"그건... 치료나 진료가 아니라 간병의 영역 아닙니까?"

"어. 맞아."

"저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어째서 의사가 간병 같은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그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키엘이 칼로 자르듯 말했다.

"환자와 그 가족을 보살피는 것도 못 하는 의사가, 의료인으로서의 자격이 있나?"

"...."

"지켜볼 거야.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 알겠습니다."

발렌티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윌슨병이라는 게 뭔지. 정말로 그런 병이 있긴 한 건지. 황태자가 괜히 자신을 혼내기 위해 저러는 건 아닌지. 상황 자체가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근로계약서만 아니었어도....'

까드득!

의료대학 졸업과 동시에 반강제로 취직하게 된 별궁 한의원. 이곳에 오며 서명한 근로계약서 내용이 떠올랐다.

넉넉한 보수? 적당한 복지? 그런 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최초 출근일로부터 3년 동안은 다른 병원에 취직하지 못한다는 조항은 너무나 악랄하게 느껴졌다. 별궁 한의원이 싫다고 여길 때려치워도 3년은 백수로 지내야 할 테니까.

'그거 너무 독소조항 아닌가?'

실로 악랄한 조항이다.

고용주의 횡포다.

하지만 항의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상대가 황태자니까. 제국 전체에서 황제를 제외한 일인지하 만인지상, 권력의 최정점에 군림하는 존재니까.

"...이쪽으로 가시죠, 부인."

시무룩해진 발렌티노는 입원 병동으로 노부인을 모시고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속에 불만만 쌓여 갔다.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엇?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응? 식사."

"그렇다고 화분의 꽃을 드시면 안 됩니다!"

...라거나.

"우리 파비오 어디 갔어?"

"예? 아드님은 다른 입원 병동에...."

"우리 아들 어디 갔어?"

"입원해 있습니다. 이러지 말고 잠깐 앉아 계시죠."

"우리 아가 어디 갔어?"

"...."

"우리 아기가 집에 올 때가 됐는데. 내가 선물도 사뒀는데."

"선물이라니요?"

"우리 파비오가 생일날 장난감 목마를 갖고 싶댔거든. 그런데 형편이 안 좋아서 못 사줬어. 그거 사줘야 해."

"예에? 지금 아드님 나이가...."

"일곱 살."

"...."

"우리 아가 어디 갔어? 선물 사뒀는데. 왜 안 와?"

"오늘은 안 올 겁니다. 입원 병동에서 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하지만 여보? 당신, 저와 아이만 남겨두고 왜 그렇게 일찍 떠나셨어요?"

"...예?"

"말해봐요, 여보. 저 혼자 아일 키우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

발렌티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러다간 끝도 없고 답도 없겠다.

'그냥 무시하자.'

결심한 그는 간병인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할머니가 뭐라고 하건 대꾸하지 않고 창밖만 구경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체가 의미가 없을 테니까, 차라리 이게 낫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멍해졌다.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신경을 너무 많이 썼군.'

치료도 안 되는 치매를 치료해달라며 매달리는 환자. 찢어져 버린 귀한 가운. 황태자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이렇게 치매 할머니나 상대하게 되고.

피곤한 하루였다.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만....'

눈 좀 붙일까. 어차피 할머니는 당장 아픈 곳도 없으니까. 그것이 발렌티노가 졸음에 빠지기 전, 얼핏 스스로에게 안겨준 면죄부였다.

"...엇."

창가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던 발렌티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 해가 저물었을 무렵이었다.

'너무 많이 잤나.'

그는 창밖으로 저물어 가는 노을을 보며 피로에 찌든 눈꺼풀을 비볐다. 시간으로 보아 이제 곧 입원 병동의 저녁 식사가 시작될 터다.

'음식이나 받아와야겠네.'

치매 할머니에게 식사를 시킬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푹 흘러나왔다.

"할머님, 이제 제가 음식을 받아올 테니 잠깐만 여기서 얌전하게...."

그는 고개를 돌리며 당부했다.

그러다가 그대로 멎어 버렸다.

차마 말끝을 맺지 못했다.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병실에 자신과 함께 있던 할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

뒤늦은 깨달음이 몰려왔다.

발렌티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173화. 환자와 의료인 (2)

'...어?'

발렌티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황급히 병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없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아까, 자신이 졸기 전까지만 해도 병실에 함께 있었던 할머니였다. 치매 환자치고는 그래도 사납진 않으셔서 안심을 했더랬다. 거동이 제법 불편해 보이기도 해서 더더욱 마음을 놓았던 터였다.

그런데 없다.

어디로 간 걸까.

'큰일 났다.'

발렌티노는 자신의 심장이 급격히 뛰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른 초봄의 밤은 쌀쌀하다. 얇은 겉옷만 걸친 노인이 버티기에는? 무리다. 동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곳 별궁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넓다. 특히, 정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과연 밤이 오기 전에 할머니를 찾을 수 있을까.

"...."

콰당탕!

그는 의자를 박차고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쩌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러기를 빌었다.

'제발. 그냥 병동 안에서 헤매고 있는 거여야 할 텐데.'

그러면 괜찮을 거다. 별일 없는 해프닝으로만 끝나겠지. 그러기만 빌었다. 복도를 뛰고,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병실, 저 병실을 이 잡듯이 살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힐끔 창밖으로 엿보이는 하늘은 어느새 보라색에 가깝게 물들어 있었다. 곧 해가 진다. 이마에 흥건하던 땀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나 혼자서는 안 돼.'

그는 깨달았다.

혼자서는 못 찾는다. 그러기엔 남은 시간은 촉박하고, 바깥은 점점 더 쌀쌀해지고 있으며, 찾아야 할 범위는 절망적으로 넓다.

지금 계속 고집을 부리다간?

'안 돼.'

결심했다.

곧바로 간호실로 뛰어갔다.

"저기!"

덜컹!

벌컥 뛰쳐 들며 소리쳤다. 간호사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거리낌 없이 외쳤다.

"환자가 사라졌습니다!"

"네?"

이쪽의 외침에 수간호사, 아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라졌다고요? 환자가? 어떻게요?"

"그게...."

아주 잠깐 망설여졌다.

치매 할머니를 보살피다가 피곤하다며 깜빡 졸아 버린 자신. 그사이에 사라진 할머니. 이게 알려지면 자신은 비난받겠지. 황태자에게 엄청나게 깨지겠지. 어쩌면 별궁 한의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를 찾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 그게 책임을 지는 방법이니까.

결심한 발렌티노는 빠르게 말했다.

"치매 환자입니다. 연령은 60대 초반의 할머님이시고... 키는 160센티미터 중반에 마른 몸매, 회백색 머리칼을 목 뒤로 묶으셨고요. 낡은 회색 스웨터를 입었습니다. 바로... 제가 보살피기로 했던 분입니다."

"가죠. 보살피던 병실 위치와 사라진 시간은요?"

아니스는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지만 예비 의사를 책망하는 말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책망할 시간도 없으니까. 환자를 최대한 빨리 찾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래서였다.

아니스도, 다른 간호사들도 전혀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다들 알지?"

"네!"

아니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웨어울프 간호사들. 그녀들의 눈빛에 살벌한 야성의 빛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콰드드득!

근무하던 20명의 웨어울프 간호사들이 모조리 늑대인간의 형상으로 변신을 감행했다.

"크르릉! 크릉!"

"워우우우우-!"

그녀들의 전격적인 변신 덕분이었다. 고요하며 정갈하던 별궁 한의원 복도는 삽시간에 와일드한 야성미가 흘러넘치는 저녁 6시 동물의 왕국으로 변모했다.

"...헉."

발렌티노는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난생처음으로 웨어울프의 단체 변신을 보았으니 압도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할머님이 사라지기 전에 계셨던 곳은 3층 B1 병실이었습니다. 사라진 시간은... 최소한 30분은 된 것 같고 말입니다!"

"크릉!"

늑대인간으로 변신한 아니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간호사들에게 턱짓과 눈빛으로 명령했다.

"크르릉! 컹컹!"

"월월!"

"워우우!"

20명의 간호사들이 순식간에 4인 1조의 울프팩(wolf-pack) 그룹 5개로 편성되었다. 그녀들은 조금도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룹을 편성하자마자 3층 B1 병실로 달려갔다. 차례로 병실에 들어가 코를 연신 킁킁거렸다.

"킁킁킁! 킁킁!"

"킁킁! 킁!"

늑대인간의 경이로운 후각이 병실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할머니의 체취를 감지했다. 기억했다. 그때부터였다.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되었다.

"킁킁! 킁킁! 헥헥헥!"

간호사들이 바닥에 코를 박고 빠르게 이동했다. 복도에 뿌려진 갖가지 냄새 속에서 할머니의 체취를 가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 발렌티노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 때문이야.'

피곤하다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게 아니었다. 치매 환자가 곁에 있는데 그런 식으로 눈길을 떼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과연 사람을 돌볼 자격이 있는 걸까. 그럴 준비가 되어 있던 걸까.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건방을 떨었던 게 아닐까.

처음으로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헥헥?"

앞서 가며 냄새를 맡던 수간호가 아니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쪽을 돌아보았다.

"끙끙!"

"예? 뭔가를 찾았습니까?"

정말일까. 아니스는 대답조차 없이 우다다 뛰어갔다. 발렌티노는 허겁지겁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참을 오르내렸다. 그렇게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았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뛰었을 무렵, 아니스가 어떤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아까 자신이 혼자 할머니를 찾을 때 지나친 적이 있는 병실이었다.

'여기? 할머님이 계시다고?'

아니스의 눈짓으로 보아 그런 듯했다. 발렌티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열리는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우리 아기, 참 예쁘게 자죠?"

"...!"

할머님 목소리다!

발렌티노는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끼며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그렇군요. 정말 그렇네요."

할머님의 물음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려던 걸음을 다급히 멈추었다.

익히 아는 목소리.

'...황태자가 왜 여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잃어버린 할머님이 황태자와 함께 있었다니, 소름이 좍 끼쳤다. 그동안 병실에선 할머님과 황태자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 아기가 말이죠.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좀처럼 자다 깨서 울거나 보채거나 하지도 않고. 아빠를 찾으며 칭얼거리지도 않고."

"그런가요."

"네에. 가끔은 남편이 함께 있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원망이 들 때도 있거든요."

"남편분께서 멀리 떠나신 겁니까?"

"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죠."

"...아, 저런. 죄송합니다."

"아녜요. 괜찮답니다. 제 남편도 떠나고 싶은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가요."

"네."

잠시 내려앉는 침묵.

발렌티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이 들어가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런 생각에 걸음을 들이려던 때였다.

"...."

어느샌가 황태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금 덜컹 내려앉는 가슴. 그러나 어쩐지 황태자의 눈길은 까칠하지 않았다. 책망하는 기색도 달리 보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아주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는.

쉿.

"...."

조용히 있으라는 걸까.

그 사이, 할머님이 말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우리 아기가 많이 아픈가요?"

"아뇨. 그냥 약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듣고 있던 발렌티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야 깨달았다. 이곳이 파비오 씨가 입원한 병실이라는 걸. 지금, 저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

정작 본인은 치매를 앓고 있으면서, 대체 어떻게 아들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온 걸까. 그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운이 좋아서 찾아낸 걸까.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할머님이 오직 자신의 아들만을 지극히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 꼭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들, 안 아프게 해주세요."

"네.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님."

"그런데 여보, 당신? 언제 돌아왔어요?"

"...어, 으음, 방금 돌아왔소?"

"어휴. 난 또. 당신이 영영 못 돌아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잖아요."

"그, 그랬소?"

"네에. 다시는 그 배 타지 마요. 아무래도 그 선장, 인상이 좀 이상해요."

"하, 하하하. 그런가?"

"하여간. 매일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허허허, 허허."

할머님의 말투가 순식간에 남편을 대하는 신혼 아내의 것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살짝 당황하는 황태자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당황도 잠시, 황태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할머님의 말투에 맞추어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보였다.

할머님이 상처받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것도 나름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황태자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인데. 이런 병원 놀이 따위는 그저 유희거리밖에 안 될 텐데. 그런데 어째서 저토록 열심히,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 걸까. 대체 왜, 자신의 권력이나 명성에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일개 치매 할머니를 저렇게나 성심껏 마음으로 대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겠다.

"...."

아까의 나는 어땠던가. 의료대학을 졸업했다고 기고만장했던 자신은, 앞으로 재능을 마음껏 펼치리라고 자신만만했던 자신은, 어떠했던가.

발렌티노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웠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를 보았다.

'어?'

자신이 입고 있는 가운. 의료대학 졸업 기념으로 약혼녀가 선물한 가운. 하지만 아까 파비오 씨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찢어지고 말았던 가운 아랫자락이....

'기워져 있어?'

얼기설기.

비뚤비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빽빽하게 기워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깜빡 잠들기 전에 벗어서 곁의 의자에 걸어둔 게 다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찢어진 채였는데. 혹시 그사이에 누군가가 기워준 걸까. 어설프게 비뚤비뚤, 그런 와중에도 정성껏 꼼꼼하게.

언제?

누가?

"...."

설마.

그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눈길을 던졌다. 황태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치매 할머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손끝에 거즈가 감겨 있었다. 아까는 저렇지 않았다. 마치, 어설픈 바느질을 과하게 열심히 해보려다가 바늘에 찔리고 찢겨서, 그 상처를 누군가가 방금 돌보아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본 순간, 발렌티노는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통렬하고 시린 깨달음이었다.

'오늘 나는....'

어째서 그랬던 건가.

아까의 대응이 최선이었나.

정녕, 겨우 그것밖에 할 수 없었나.

그는 기워진 가운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불현듯 떠오른 자각과 죄책감 앞에 스스로도 어쩌지 못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런 신입 의사를 바라보는 라키엘의 시선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 좀 의사다워졌네.'

라키엘은 흐뭇한 심정을 애써 감추었다. 쌀쌀한 바람 부는 초봄의 포근한 저녁이었다. 이제는, 파비오 씨의 윌슨병을 본격적으로 치료할 때가 왔다.

174화. 노가다는 나의 무기 (1)

'윌슨병 이거, 쉽지가 않네.'

하루가 지났다.

지난날 과감한 탈주(?)를 감행하셨던 치매 할머니는 자신의 병실로 돌아갔다.

조금은 전과 달라진, 제법 의료인다운 각오를 품게 된 예비 의사 발렌티노의 적극적인 간호를 받으면서 말이다.

덕분에 이제 이쪽엔 온전한 책임만이 남게 되었다.

'아드님을 건강하게 보살펴드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라키엘은 전날 파비오 씨의 어머님과 새끼손가락 걸고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메모지에 낙서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윌슨병 치료의 핵심은, 지금까지 했던 치료들과는 접근 방법과 개념을 달리 가져가야 한다는 거야.'

욕심을 내어선 안 된다.

완치를 시키겠다며 덤벼도 안 된다.

왜냐.

'윌슨병에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애초부터 유전자의 이상 때문에 생긴 질환이 윌슨병이다.

그런데 사람의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평생 병을 지닌 채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건 치료라기보다는 평생에 걸친 관리의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거지. 마치 당뇨처럼.'

발병 원리와 질환의 종류가 완전히 다르지만, 치료에 대한 접근 자세는 당뇨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터다.

질환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가 없다. 그러니 질환을 인정하며 평생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건강한 일상을 누리려면? 적절한 약과 조절된 식단을 통한 평생 관리가 핵심이 될 것이다.

'그게 제일 문제야. 딱 하나, 약.'

라키엘의 미간에 주름이 쑴펑쑴펑 새겨졌다.

'윌슨병 치료에 쓰이는 D-페니실라민(d-penicillamine)을 여기서 만들거나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D-페니실라민은 페니실린을 통해 얻는 아미노산이다.

어쨌건 이게 체내에 과도하게 축적된 구리를 제법 잘 패는(?) 편이다. 직빵이란 소리다.

하지만 여기선 그걸 구할 수 없다.

'그럼 미련 없이 패스.'

라키엘은 메모지에 x표를 죽죽 그었다. 현대 의학에서 쓰이는 윌슨병 치료제를 구하거나 만들 수 없다면? 답은 하나다.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구만.'

미간의 주름이 파이다 못해 그랜드캐니언 뺨을 왕복으로 후려쳤다.

할 수만 있다면 화타건 허준이건 모조리 데려와서 자문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선배님들, 아니, 선생님들께선 탕약을 창안할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라고.

'뭐, 그 시절엔 더 답이 없었겠지. 민간에서 쓰이는 방법을 참고하면서 직접 마셔보든가. 환자한테 먹여보든가. 몸으로 때워가면서 연구를 했겠지?'

하지만 자신에게는 더 좋은, 믿을 구석이 있다.

탕약 조제 스킬이었다.

'내가 직접 조제한 탕약에 한해서, 자동으로 성분과 효능, 부작용까지 싸그리 파악해 주는 기능이 스킬에 붙어 있으니까.'

그러니 몸으로 때울 필요가 없다. 열심히 만들어보면 된다.

메모지 위를 거니는 라키엘의 손이 바빠졌다. 자신만의 윌슨병 치료 탕약을 야물딱지게 디자인했다.

'이제부터 만들 탕약의 가장 필수적인 효능은... 구리의 배출 촉진. 그리고 장내 구리의 흡수 억제. 구리 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간부전을 해결하기 위한 간 기능 개선과 회복 독려. 거기에 장기적인 탕약 복용에 따른 부작용의 최소화까지.'

이 모든 요소를 다 잡아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평생 먹어야 할 탕약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들어가야 할 약재는 아마도... 대황(大黃), 황련(黃連), 황금(黃芩), 단삼(丹蔘), 아출(莪朮), 그리고 계혈등(鷄血藤).'

결론이 나왔다.

라키엘은 가르딘 경을 불렀다.

"가르딘 경? 우리 어쩐지, 제법 오랜만인 것 같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

"왜 그렇지? 사실은 매일 얼굴 보고 있는데?"

"정말로 그렇지 말입니다, 전하."

"그러게 말야. 참 이상한 기분이야."

"...."

"어쨌건, 오랜만에 탕약 좀 같이 만들어보자. 재료부터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전하."

이제는 탕약 조제에 제법 짬(?)이 찬 가르딘 경이었다. 덕분에 탕약에 투입될 약재의 기본적인 손질과 준비까지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물론 탕약을 달이는 건 직접 해야 했다.

'당연하지. 이게 제일 핵심이니까.'

같은 약재를 쓰더라도, 약재의 비율이 달라지면 약효가 바뀐다. 약재의 투입 순서에 따라서도 효능이 달라진다.

심지어 탕약을 달이는 방법만 바꾸어도 약의 성질이 변하거나, 달이는 시간, 초탕인지 재탕인지에 따라 효과가 갈리기도 한다.

그래서였다.

약재의 배합과 비율, 투입 순서, 달이는 방법의 차이까지. 그 모든 변수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비교하기 위해서는 직접 불 앞에 쪼그려 앉아야 했다.

'아. 라면 끓여 먹고 싶다.'

불 앞에 쪼그려 앉아서 보글보글 끓는 약재를 멍 때리면서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라면 생각이 났다.

'냄비에 물 보글보글 끓이고... 스프부터 털어 넣고... 면 넣고... 모자란다 싶으면 대파 좀 송송 썰어 넣고... 살짝 덜 익었을 때 불 끄고 냄비 채로 김치랑 후루룩. 면 다 먹으면 밥 말아서 또 후르릅. 남은 국물에 쏘주 한잔하면서 티비에 축구 틀어놓으면... 후우, 미치겠네.'

한국에 있던 때가 떠올랐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꿈이다.

라키엘은 입가로 흐르려는 침을 서둘러 닦아내고는 탕약 조제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시험 탕약을 완성했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답은 예스였다. 라키엘의 시선이 왼쪽을 향했다. 성분 분석 옵션이 잽싸게 발동되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딩동!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소리. 그 직후, 시험 탕약에 대한 내용이 주르륵 떠올랐다.

[시험 탕약 Ver.1]

[유효 성분 : 안스라퀴논, 피시올, 센노시드 A, 살비아노릭산, 기타 등등... 바이칼린, 우고닌, 베타시토스테롤, 어쩌고저쩌고...이거저거... 블라블라... 등등]

[성상 : 적갈색의 액상]

[효능과 효과 : 극도의 쓴맛을 선사함. 그 외 미약한 간장 보호, 위십이지장궤양 억제, 확실한 미각 멸망 등등]

[용법, 용량 : 1회 200ml, 1일 3회 식전에 복용]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 환자에게는 가급적 투여하지 말 것 - 모든 인류]

[부작용 : 본 탕약은 미약한 간장 보호와 위십이지장궤양 억제를 위해 인간의 미뢰돌기를 스턴 상태로 만들어 미각을 멸망시키는 효력을 지녔으므로, 제정신을 지닌 인간이라면 투여를 즉각 중지하여야 함]

[저장 방법 : 알아서 잘]

[사용 기간 : 자기 인생에 더 이상 미각이 필요 없겠구나, 인생의 쓴맛을 통해 삶의 의지를 하드코어하게 확인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대환영♡]

[제조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빌어먹을.

'역시 한 큐에 쉽게 갈 수는 없구나.'

눈앞에 떠오른 시험 탕약 1차 버전의 정보를 보며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거였다.

아무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심지어 화타나 허준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윌슨병 치료 탕약을 창조하는 일이었다.

쉬울 리가 없다.

편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정도는 충분히 각오했다.

'겨우 한 번의 실패야. 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벌써부터 실망하진 말자.'

그래도 먹고 죽는 약이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라키엘은 곧바로 두 번째 시험 탕약을 준비했다.

아까와 배합을 살짝 다르게 하였다. 열심히 달였다. 적절하게 식혔다. 따라내고, 탕약이 담긴 용액을 노려보았다.

역시나 또 반응이 왔다.

딩동!

온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탕약을 감지했다는 메시지와 선택창이 떠올랐다. 예스를 선택했더니 곧바로 성분 분석이 발동되었다.

'이번엔 어떨까.'

그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시험 탕약 Ver.2]

[유효 성분 : 크리소파놀, 알로에 에모딘, 밀티론, 기타 등등... 시토스테롤, 베타시토스테롤, 어쩌고저쩌고... 잡다한 거... 이거저거... 등등]

[성상 : 흑갈색의 액상]

[효능과 효과 : 아주 미약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하강, 극도의 떫은맛을 선사함, 복용한 인간의 띠꺼움 수치 5,000배 증가]

[용법, 용량 : 먹고 싶은 대로]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 환자에게는 투여하지 말 것 - 인간 및 유사종족 전체]

[부작용 : 본 탕약은 콜레스테롤 살짝 때려잡자고 극한의 떫은맛을 선사함으로써, 인간의 띠꺼움 수치를 5천 배 증폭시켜 인간관계의 극적인 단절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5cm 두께로 얼굴에 바른 썬크림보다 확실하게 인간관계를 차단시켜 줍니다. 아싸 지망생이라면 망설임 없이 원샷! 당신도 될 수 있어요, 인류 No.1 아싸!]

[저장 방법 : ...굳이?]

[사용 기간 : 인생에 환멸이 느껴질 때, 절대적인 고독을 맛보고 싶을 때면 24시간 츄라이 츄라이ㅋ]

[제조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나는 대체 뭘 만든 걸까. 사실 난 약보다는 독약 제조에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닐까.

두 번째 시험탕약의 정보를 보며 라키엘은 사무치는 회의감에 스며들었다.

귓가에는 오장육부 놈들의 와글와글 쑥덕거림도 들려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이 창조한 시험탕약을 보며 '매우' 즐거워합니다.]

[심장 : 야야 다들 웃지 마라. 표정관리 해. 잠깐 당장 드러나는 결과만 가지고 사람 함부로 평가하는 거 아니다. 그래서 예전엔 성적표에도 아름다운 뜻을 각각 담아서 수우미양가를 붙여주고 그랬잖냐.]

[허파 : 흐프흡... 빼어날 수?]

[대장 : 우수할 우?]

[간장 : 아름다울 미?]

[위장 : 양호할 양?]

[콩팥 : 사람인 가?]

[심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파 : 흐퍼흐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장 : 앜ㅋㅋㅋ 뼈 부러지네ㅋㅋㅋㅋㅋㅋㅋㅋ]

[간장 : ㅋㅋㅋ사람인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위장 : 팩트로 패지 말라고ㅋㅋㅋㅋㅋㅋㅋ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을 보며 엔돌핀을 마구마구 생산합니다.]

[오장육부가 성원의 마음을 담아 당신에게 500 HP를 옛다 먹어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1,800]

...나는 진심으로 니네가 쟈빌론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해.

'이 독한 새x들....'

그렇게 이 악물고 사람을 패야 했냐.

라키엘은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아라비아 유전처럼 쑴펑쑴펑 터진 눈물샘을 꽉 붙들어야 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결코 포기하지 말자고. 이제 겨우 두 번의 실패라고.

'실패? 오히려 좋아. 두 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배합이 바뀌면 효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그게 가장 값진 결과물이니까. 그러니까 계속 시도하면 될 거야. 할 수 있어. 가보자고.'

긍정의 힘을 꾹꾹 담았다.

시간은 있다.

돈도 있다.

자신의 의지만 꺾이지 않으면 된다.

굳은 일념으로 계속 시도했다. 탕약을 달이고, 결과물을 확인하고, 실패의 쓴맛을 다시며, 다시금 불가에 쪼그려 앉아서 다음 재료를 준비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엿새, 열흘이 지났다. 계속해서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그동안 탕약 조제 스킬의 레벨이 몇 번인가 상승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딩동!

또다시 실패를 경험한 직후였다. 성분 분석표를 보며 98번째의 쓰린 입맛을 다시는 순간.

[탕약조제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다시금 레벨 상승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난 며칠 사이에 몇 번인가 본 내용이었다.

한데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이... 조금 달랐다?

[탕약조제 스킬이 11레벨에 도달함에 따라, 스킬의 등급이 상향됩니다.]

'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사이, 계속해서 메시지가 눈앞을 채웠다.

[스킬명 : 탕약 조제]

[단계 : Lv. 11 (중급)]

"...."

레벨 표시 뒤쪽에, 예전엔 없던 등급 표시가 생겼다.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수많은 경험과 탕약 달이기 노가다를 통하여 탕약 조제 스킬을 중급의 경지로 올려놓았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 특전이 부여됩니다.]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 - 탕약 조제를 실행하기 이전에, 준비한 약재의 배합과 비율에 따라 어떠한 효능의 탕약이 만들어질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미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뭐어어?'

98번째 연이어진 실패. 수많은 배합과 비율을 조합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던 윌슨병 치료 탕약의 레시피. 막막함에 지쳐 가던 라키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175화. 노가다는 나의 무기 (2)

눈이 번쩍 뜨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식 수술을 받은 심봉사의 기분이 이런 걸까. 혹은, 아무 기대 없이 샀던 로또가 콱 1등으로 당첨되는 느낌이 이런 걸까.

'미친. 대박.'

라키엘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눈두덩이를 부볐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 - 탕약 조제를 실행하기 이전에, 준비한 약재의 배합과 비율에 따라 어떠한 효능의 탕약이 만들어질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미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미친. 미친. 진심 미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11레벨을 찍으면서 중급의 단계로 올라선 탕약 조제 스킬. 이놈에게 새로 붙은 옵션의 내용을 살펴보자니, 절로 침샘이 탐욕의 세레나데를 불러제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탕약 만들기 노가다를 안 해도 된다는 뜻?'

지금까지는 노가다를 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탕약 조제 스킬의 한계였으니까. 내가 직접 만든 탕약에 한해서만 자동으로 성분을 분석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환상종 뽀복이를 동원해도 성분 분석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단점이 있었다. 뽀복이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과정을 몇 번만 거치면 금방 지친다는 것이었다.

'부활에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소진되는 듯했으니까. 많아 봤자 하루에 세 번? 그 이상은 좀 힘들어 보였어.'

그리하여 결국, 탕약 조제 스킬만 열심히 써야 했다. 셀프로 만든 탕약에 한해서는 성분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믿고서였다.

물론 힘들었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빡쎘다. 온종일 불 앞에 쪼그려 앉아 탕약을 달이고, 결과를 확인하고, 실망하고, 또 새로운 배합을 짜서 달이고의 반복이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만들기 전에 미리 배합의 결과를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는 거지?'

이런 꿀 옵션이 또 있을까. 라키엘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재료를 착착 꺼냈다.

'일단은 내가 생각한 가장 기본적인, 클래식한 배합부터 다시 가보자.'

일명 장군풀이라고 불리는 대황. 깽깽이풀이라는 별명을 지닌 황련. 만주나 아무르, 몽골과 동시베리아 지방에서 잘 자라는 황금. 적색 뿌리를 지닌 단삼. 거기에 파혈거어(破血祛瘀)와 행기지통(行氣止痛)에 효능이 있는 아출까지.

거기에 몇몇 자잘한 약재를 소량씩 섞어 보았다.

'자, 시작은 이렇게.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면 옵션이 발동되는 거지?'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정리되어 조제 준비를 마친 약재가 포착되었습니다. 해당 약재의 배합으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하지!'

응답은 곧바로 왔다.

[탕약조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를 실행합니다.]

[포착된 약재를 조합하여 만들어질 탕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계산합니다.]

[로딩 중]

[...1%]

'오, 오오.'

두근두근, 콩닥콩닥. 심장이 탭댄스를 추는 가운데 라키엘은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꼴깍꼴깍, 꿀떡꿀떡. 마른침을 삼켜가며 자신이 생각한 기본 배합의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딩동!

[로딩 중]

[...1.1%]

"...."

뭐지, 이 속도는.

뭔가 쌔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한데 어째서 불행한 예감은 매번 그림처럼 찰싹 들어맞는 건지. 쌔하던 느낌은 곧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딩동!

[로딩 중]

[...1.2%]

'야이 씨!'

울화통이 울컥. 라키엘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거 로딩 속도가 개판이구만.'

거의 1분에 0.1% 정도씩 깔짝대며 오르는 듯했다. 보고 있자니 1분마다 시시각각 늙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건 운영체제가 윈도우 98도 아니고. 지가 무슨 도스(DOS)야? 8비트 컴퓨터야?'

어린 시절, 동네 컴퓨터 학원에 처음 갔던 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동시에 위기감도 쑴펑쑴펑 치솟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거, 그냥 쓰기엔 너무 쓰레기 옵션이 아닌가 말이다.

'1분에 0.1 퍼센트 로딩이면... 결과를 보는 데에 1,000분이 걸린다는 소리니까... 1,000분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16시간 30분 이상... 차라리 그 시간에 탕약 끓이고 말지!'

비로소 깨달았다.

이 옵션, 이대로는 못 쓴다.

장점이라고는 불을 피워 탕약을 직접 끓이는 귀찮음을 덜어주는 것밖에 없다. 그나마 다른 일을 하면서 계속 로딩을 돌려놓을 수 있다는 정도? 그것 외에는 별다른 장점이 보이지가 않았다.

'시간이 너무 걸려. 이건 좀 아니야. 하지만....'

내게는 그걸 극복할 방법이 있지.

...꿀꺽.

라키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득 떠오른 기막힌 해결법 때문이었다.

'그거, 엄청 아파서 싫은데.'

하지만 지금은 달리 뾰족한 수가 없겠다.

딩동!

[로딩 중]

[...1.3%]

어오, 로딩 메시지를 차라리 끄고 말지. 이거 100% 되기까지 기다리다간 환갑 잔칫상이 차려져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심한 라키엘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안주머니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던 꼬슴이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기, 꼬슴아?"

"...코올... 꼬슴...?"

"응, 잘 잤어?"

"꼬슴! 뿌르르르! 꼬슴!"

"괜히 자는 중에 깨워서 미안한데, 가시 하나만 빌려줄 수 있어?"

"꼬슴?"

"검정색, K-맛 가시로."

"꼬스슴? 꼬슴?"

"알아, 엄청나게 아픈 거. 그런데 지금은 그게 꼭 필요해서. 부탁해."

"꼬슴!"

힘차게 대답한 꼬슴이가 통통한 궁디에 힘을 빡 주며 뿌르르 떨었다. 이내 검정색 가시 하나가 뾱, 하고 떨어져 나왔다.

"꼬슴! 꼬스슴!"

"고마워. 넌 임무 완료했으니까 다시 들어가서 코 자자."

"꼬슴!"

"그래, 굿나잇."

꼬슴이를 다시금 안주머니 속 꿈나라로 돌려보낸 라키엘은 검정색 가시를 집어들었다. 절로 심호흡이 나왔다.

"후우."

검정색 가시를 찌르기 전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피어난다. 어쩔 수가 없다. 진짜 차라리 뒈지고 싶을 정도로 아프니까. 온몸을 와플 기계에 집어넣고 꽉, 해 버리는 기분이 드니까.

딩동!

[로딩 중]

[...1.4%]

"...."

저 로딩창 속도계, 내가 박살 내고 만다 진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은 라키엘은 검정색 가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허벅다리 살이 많은 부위를 향해 가볍게 내리꽂았다.

푝!

'...거어어엉어억!'

찌르자마자 허벅다리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왔다. 그야말로 영혼 덤블링 출타를 부르는 K맛 고통!

하지만 참았다. 헛되이(?) 기절할 수는 없었다. 이를 꽉 깨물었다. 시야가 온통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춤을 추었다. 빨간색과 파란색과 노란색이 초록색을 집단으로 폭행했다. 조명이 켜졌다가 꺼졌다가.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암흑의 우주가 펼쳐졌다.

'으그읍! 그급!'

그렇게 얼마나 고문 같은 고통을 견뎠을까. 마침내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됩니다.]

후우욱-!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혈류량이 전신을 휘감았다. 모든 세포가 잠에서 깨어나 우사인 볼트로 빙의했다. 뇌세포가 스파크를 튀겨댔다. 생각의 속도가 경이로운 급가속 급발진을 선보였다.

그 결과는....

딩동! 딩동! 딩동동!

[급가속 로딩 중!]

[8.5%... 11.7%... 21.2%... 53.8%...!]

[로딩창이 한계를 초월한 속도에 찢어집니다!]

'이거지!'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걸 위해 견뎠던 고통이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보람 속에서 눈을 부릅뜨며 로딩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100%!]

[로딩 완료]

딩동!

[탕약조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의 로딩이 완료되었습니다.]

[포착된 약재의 배합으로 만들어질 탕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안내합니다.]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라키엘은 결과창에 주목했다.

[약재 배합 미리보기]

[예상되는 효능 : 간장 보호, 항균, 항진균, 생리불순 완화 등등]

[예상되는 부작용 : 변비 유발, 장내 유익균 전멸 등등]

"...흐음."

라키엘은 결과창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결과물이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원하는 효능을 제대로 담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럼 이건 폐기. 다음 배합으로는....'

슥슥, 슥!

다음 재료를 쓸어 담았다. 저울에 올려 가며 배합과 비율을 조절했다. 스킬 옵션을 발동했다. 메시지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는 장인정신 뺨치는 고집을 담고 있었다.

'황금배합, 오늘 안으로 반드시 찾아낸다!'

...라는 집념 덕분이었다.

"저기, 제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곳은 탕약 조제실 창문 바깥. 네 명의 의사가 창틀 주변에 두런두런 모여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의료대학 졸업시험에서 라키엘과 다른 조 소속이었던, 그래서 그동안 라키엘의 의술을 사이비라고만 여기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창문 안쪽의 라키엘을 향해 있었다.

"전하께서는 왜 저렇게 애를 쓰시는 겁니까?"

신입 의사 한 사람이 물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창문 안쪽, 탕약 조제실에서는 황태자가 갖가지 한약재를 소쿠리에서 꺼내고, 저울에 달아 보고, 뒤섞은 후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허공을 노려보는 걸까. 혹은 집중하며 무언가를 고뇌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이 가는 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황태자가 진심으로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푹!

"...흡!"

가시로 스스로의 허벅다리를 찔러가며 졸음을 참고 있는 저 모습만 보아도 확실하다. 게다가 가시가 얼마나 아픈지, 황태자는 얼굴이 벌게지며 식은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혹시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른 신입 의사가 물었다.

그러자 아까부터 질문세례를 받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마치, 황태자에 대해서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는 듯이.

"아니. 전하께서 저러실 때는 누구도 못 말리네. 어설프게 말리려고 말을 걸었다간 오히려 혼만 잔뜩 날 테니까."

가르딘 경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내가 그랬으니 말이지."

"가르딘 경께서요?"

"으음."

가르딘 경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의 까마득한 의료대학 후배들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나도 전하의 치료법에 많은 의문을 품었지. 놀라고, 경악하고, 의심하기도 했네. 하지만 지켜보니 느껴지더군. 내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말일세."

"편견... 이라시면?"

"자네들은 의료대학의 가르침만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옳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틀린 건 아니지 않겠는가."

"아."

신입 의사들의 눈빛에 작은 놀람과 깨달음이 서렸다. 가르딘 경의 말이 이어졌다.

"결국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지식과 기술을 연마한 사람들이야.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것이라는 뜻이지. 그런데, 그 길이 오직 하나만 있는 외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전하께서 걸으시는 길도 우리와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겠지. 저 모습을 보면 느낄 수 있지 않나?"

"...."

신입 의사들은 다시금 창문 안쪽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황태자가 검정색 가시로 자신의 허벅다리를 야물딱지게 찌르고 있었다.

푸욱!

"긥!"

"...."

암만 봐도 자해 같은데.

하지만 누구도 가르딘 경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의료대학의 까마득한 대선배니까. 게다가 저토록 연구에 매진하는 황태자의 모습을... 부정할 수가 없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조금 편협한 시각으로 이곳을 보고 있던 건 아닐까.'

별궁 한의원이라는 이곳. 어쩌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을지도. 의술을 펼치는 데에 학파와 근본부터 따지는 것이 어쩌면 오만한 자세였던 것일지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모두의 황태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이날 오후.

라키엘은 불타는 집념과 고집 끝에 마침내, 윌슨병의 체내 구리 축적을 해결할 사상 최초의 특효 한약, '구리멸망탕(copper-滅亡湯)'을 개발해냈다.

176화. 노가다는 나의 무기 (3)

딩동!

언제 들어도 반가운 소리. 자다가 들으면 졸음이 번쩍 구만리 장천까지 달아나다가 멀티버스로 튕겨 나가게 만드는 소리. 맑고 고운 알림음이 달팽이관을 땅 때렸다.

정신이 띵 하고 깨어났다.

'...허, 허헛?'

라키엘은 헛숨을 삼키며 눈앞에 새록새록 떠오르는 메시지를 살폈다.

[당신은 집요한 실험정신과 근면한 집념을 발휘하여 역사에 없던 새로운 타입의 탕약인 체내 구리 대사 보조제, '구리멸망탕(copper-滅亡湯)' 레시피를 개발하였습니다.]

[새로운 레시피의 결과물로 '구리멸망탕-양산화 Ver.1 시제품'이 성공적으로 조제되었습니다.]

[이 도전적인 시도가 당신에게 커다란 경험이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경험이 당신의 탕약 조제 스킬에 건설적인 성장을 선사합니다.]

[탕약 조제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스킬명 : 탕약 조제]

[단계 : Lv. 12 (중급)]

[당신이 조제하는 탕약은 기존의 탕약보다 약효가 21% 증가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성분 분석 -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에 한하여, 탕약 성분이 인체에 미칠 약효, 부작용, 독성 등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 - 탕약 조제를 실행하기 이전에, 준비한 약재의 배합과 비율에 따라 어떠한 효능의 탕약이 만들어질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미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900]

[현재 보유 중인 HP : 1,800]

"...."

미쳤다.

이건 진짜로 미쳤다.

동시에 확신이 빡 하고 들었다.

'성공이다.'

메시지가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방금 만들어낸 탕약이 체내 구리 대사를 보조해주는 약품이란다. 즉, 원하는 목적에 맞는 효능을 지녔다는 뜻이다.

물론 그럼에도 라키엘은 쉽사리 들뜨지 않았다. 그는 환호하는 대신, 더욱 긴장하며 눈앞의 탕약을 노려보았다. 옵션의 발동은 순식간이었다.

딩동!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물론!'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딩동!

"...."

꿀꺽, 긴장감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라키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두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됐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침내, 원하던 배합이 제대로 만들어졌다.

'내가 제일 핵심으로 생각했던 약재인 대황이 마침내 제 역할을 해서... 체내의 구리 배출을 촉진시키고 있어. 황련도 마찬가지야. 자체적으로 품고 있는 풍부한 아연 성분을 바탕으로 장내의 구리 흡수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게 됐어.'

비유하자면, 이번 탕약에 들어가는 약재 중에서 대황은 공격수였다. 체내에 쌓인 구리의 배출을 촉진시키며 딜링을 하는 역할이었다. 반면 황련은? 풍부한 아연 함유량을 바탕으로, 신체의 구리 성분 흡수를 방해하는 수비수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됐다.

탕약을 고안하며 바랐던 역할 그대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탕약에 함께 들어간 황금, 단삼, 아출, 계혈등과 그 밖의 극소량의 약재들이 골고루 조화를 이루게 됐다. 덕분에 간에서의 담즙 분비를 촉진시키고, 간의 섬유화에 저항하는 항섬유화 능력을 발휘하게 됐다.

또한, 약간의 신경 안정 역할을 통해 윌슨병이 초래하는 신경학적 문제에 대한 대응 능력도 갖추게 되었다. 심지어 장기 복용에 따른 체내의 독소 누적 등의 부작용도 최대한 줄이는 데에 성공했다!

'해냈다. 해냈어.'

언젠가 학회에서 접했던 연구 결과가 떠올랐다. 대황과 황련, 황금, 단삼 등을 활용한 연구에서 윌슨병 환자의 98.11%가 대조군에 비해 간 기능이 개선되었거나 안정을 유지했다는 발표였다.

'그걸 기억해두길 잘했지.'

덕분에 이번 시도를 해낼 수 있었다. 물론 검정색 K맛 가시로 수차례나 허벅다리를 찔러대야 했지만.

"...."

굳이 우울한 자해(?)의 기억은 떠올리지 말자. 하여간 검정색 가시의 '8282 모드'가 더 오래가면 참 좋을 텐데.

'어쨌건. 아직은 들뜨지 말자. 그러기엔 일러. 웃어도 땅 보고 웃자.'

함부로 건방져지면 안 된다. 자칫 들떴다간 될 일도 망한다. 그러니 환자의 경과가 실제로 호전되기 전까지는 절대 긴장을 풀지 말자.

라키엘은 인생의 진리를 새삼 되새기며 구리멸망탕을 소중히 안고서 병실로 갔다. 마침 윌슨병 환자, 파비오 씨는 깨어 있는 듯했다. 한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선생님, 제 어머니를 돌보아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부끄럽군요, 파비오 씨."

병실 문을 열려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환자인 파비오 씨와 신입 의사 발렌티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제가 파비오 씨에게 사죄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 제가 파비오 씨와 어머님을 너무 모질게 대했습니다. 정말로 철없던 제 행동을 뒤늦게나마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래도 그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린 부분은 없었습니다. 조금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희를 다른 병원이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강압적으로 내쫓지도 않았고 말입니다."

"그,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부끄러워지네요."

"하하. 아닙니다. 그날 선생님이 제 억지를 그렇게라도 받아주고 계셨기 때문에 황태자 전하께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거 참.

듣고 있자니 민망해져서 안 되겠다. 그러니 이쯤에서 전격적인 입장.

"똑똑?"

"엇?"

"헛?"

이쪽을 돌아보며 깜짝 놀라는 파비오 씨와 신입 의사 발렌티노. 한쪽에는 파비오 씨의 어머님이 간병인 침상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라키엘은 그들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약 배달 왔습니다아."

"...예?"

"좀 드셔 보라고 말입니다."

행여나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소중하게 가지고 온 탕약을 파비오 씨에게 내밀었다. 파비오 씨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이게 뭡니까?"

"뭐긴요. 약이지."

"약이요?"

"이름은 구리멸망탕?"

"...."

"이상한 거 아니니까 믿고 잡숴 보세요."

"...."

파비오는 황태자가 내미는 탕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릇에 담겨 모락모락 뜨끈한 김을 피워내는 물약. 온통 시커먼 색깔만 보자면 꼭 구정물 같았다. 게다가 냄새도 굉장히 낯설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던 어머니와 나를 받아주셨으니까.'

이렇게 무료로 입원까지 시켜주었다. 자신조차도 모르던 질병을 파악하고, 이렇게 약까지 손수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무려 제국의 황태자가! 자신이 감히 우러러볼 생각도 못 할 귀한 분께서!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삽시간에 젖어드는 파비오 씨의 감수성, 아니, 눈물샘! 하지만 그의 살랑살랑 피어나던 감동은 덧없는 일장춘몽의 꽃잎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황태자에게서 받은 구리멸망탕을 딱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순간.

꿀끄억.

"...급?"

파비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면 온몸이 덜컥 굳어 버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하였던가. 그 언젠가 들었던 어르신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지금이 딱 그랬다.

'아.'

나는 죽은 건가. 그런 건가. 혹은 벌써 지옥에 떨어졌나. 그렇다면 내가 떨어진 지옥은 미각멸망의 지옥인 거겠지. 그러니까 내 입속에서 지옥 악귀나 즐길 법한 이런 맛이 혓바닥을 마구잡이로 유린하며 쑤셔대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뭐해요?"

지옥왕, 아니, 황태자의 물음이 날아왔다. 그제야 파비오의 눈동자에 잠깐 가출했던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삐거걱, 고개를 돌렸다. 몹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황태자를 쳐다보며 무언의 항의를 보냈다.

전하, 끝끝내 저를 죽이려 하시나이까.

"안 죽어요. 삼켜 봐요."

"...꿀꺽."

"참 잘했어요. 한 모금 더."

"저, 전하!"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입원시켜 달라고 고집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딱히 나쁘게 살지도 않았지만 어쨌건 착하게 살겠습니다!

파비오는 진심으로 빌고 싶었다. 정말이었다. 방금 황태자가 건넨 탕약이 너무나 맛이 없었다. 진짜로 처음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을 땐 거의 영혼의 발가락 하나쯤은 지옥의 문지방을 살포시 찍고 온 것만 같았다.

즉,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았다. 이걸 이대로 계속 더 마셨다간? 미각을 영원히 잃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자비(?)가 없었다.

"괜찮아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입니다."

"하, 하지만, 전하."

"너무 심하게 쓰다고요?"

"예...."

"그럼 몸에 더 좋은 거겠네."

"...."

"미안해요. 이렇게 쓰게 만들어서. 다음부턴 감초(甘草)라도 좀 넣어 볼게요. 그럼 쓴맛이 다소 줄어들 테니까."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설마하니 맛 때문에 이렇듯 격렬한 반응을 얻을 줄은 몰랐는데. 너무 약효에만 몰두한 나머지 환자의 미각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감초를 첨가한 버전은 새로 개발해야 하는 거고. 일단은 지금 버전의 탕약으로 치료의 가닥부터 잡아야지.'

결국, 그는 파비오 씨를 어르고 달래야 했다. 탕약을 마시는 내내 파비오 씨의 곡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며칠 후, 파비오 씨를 진맥한 라키엘은 구리멸망탕의 효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딩동!

[종합 소견 : 누적되어 있던 만성적 피로가 조금씩 개선되고 있습니다. 윌슨병이 감지되었습니다만, 체내의 구리 성분 배출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적절한 처방과 식단의 결과로 보이며, 현재의 치료와 케어를 유지할 시 원활한 상태의 회복을 기대해볼 수 있겠습니다. 화이팅♡]

'...해냈다!'

라키엘은 환호했다. 구리멸망탕의 효능이 확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거기에 구리가 많이 함유된 음식물인 버섯, 동물의 간, 조개 등의 어패류, 견과류, 말린 과일, 바나나, 토마토, 포도, 땅콩, 감자 등등의 섭취를 제한한 식단의 구성도 효과적인 듯했다.

"됐습니다, 파비오 씨. 경과가 제법 좋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라키엘은 파비오 씨의 손을 꼭 붙들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 티가 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계속 관리를 하면 돼요."

"그러면 퇴원을...."

"할 수 있겠지요. 간에 쌓인 구리의 수치가 정상으로 내려오면 말입니다."

"그럼 그 후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계속 주기적으로 통원치료와 진찰을 받으셔야 합니다. 약도 계속 복용해야 하고, 지금처럼 식단도 꼼꼼하게 관리해야 할 테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잘 지켜주면, 평생 같은 질환으로 아플 일은 없을 겁니다. 건강하게 어머님을 돌봐드릴 수도 있을 테고요."

"하, 하하...."

파비오의 얼굴에 물기 서린 웃음이 피어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마음을 황태자께 전할 수 있을까.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눈치도 없는 눈가만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동안 라키엘의 눈앞에는 소리 없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집념이 서린 연구와 노력 끝에 개발한 새로운 탕약으로 환자 : 파비오의 윌슨병을 평생 관리할 방법을 정립하였습니다. 비로소 그는 심각한 유전적 질환을 훌륭히 극복하게 될 것이며, 남은 평생을 건강하게,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윌슨병은 기본적으로 완치가 불가능하여 평생에 걸친 관리가 필요한 질환이며, 이에 따라 기대 수명의 정확한 계산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상기의 이유로 '진료비 청구' 스킬이 발동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당신의 오장육부가 보상을 챙겨줍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심장이 당신의 등을 토닥입니다.]

[허파가 당신의 등을 토닥입니다.]

[대장이 당신의 똥을 토닥입니다.]

[간장이 뭔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위장이 뭔가 잘못됨을 느낍니다.]

[콩팥도 커다란 착오를 느낍니다.]

[오장육부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한 대장을 척추에 거꾸로 매달아 본보기로 삼습니다.]

[잠깐의 혼란을 잠재운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따스한 격려와 성원이 담긴 7,0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8,800]

"...."

무려 7,000 HP가 들어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쉽게 기뻐하지도, 티를 내며 환호하지도 않았다. 대신, 울음을 삼키는 파비오 씨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파비오 씨의 어머님을 든든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며칠이 더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행복한 미래를 조심스럽게 꿈꾸어 보았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품어보았다.

별궁 한의원이 날로 활기를 띠어가는 모습을 보자면, 의료대학에서 잡아온(?) 신입 의사들이 나날이 한의원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자면, 절로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

'할 수 있어. 내 생각대로 되어가고 있다.'

이대로 한의원의 종합병원식 체계가 잡히면 된다.

그러면 보다 안정적으로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 있고, 그중에 확실하게 보너스 수명을 안겨줄 환자만 자신이 도맡을 수 있다. 더욱 효율적으로 보너스 수명을 늘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충분히 가능해.'

그러면 자신도 남들처럼 넉넉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안정적으로 황족의 삶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어렴풋한 희망의 촛불이 가슴속에 켜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하? 큰일이 났습니다?"

"음?"

평소처럼 진료로 평범한 아침을 시작하던 중이었다. 첫 환자를 내보내고 다음 환자를 받으려는데, 들어오라는 환자 대신 별궁의 시종장이 원장실로 들어왔다. 한데 시종장의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그게, 실은... 한의원에 납품이 들어오기로 했던 약재가... 며칠째 들어오지가 않고 있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일일까.

한창 안정적인 행복을 누려보려던 라키엘의 가슴에 쩌정, 생각지 못한 약재 수급난의 아픈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177화. 끊어진 거래 (1)

아프다. 이런 사태는 진짜 아프다. 혹시 하늘은 내가 누리려는 안정적인 만수르 라이프가 그렇게나 부럽고 배가 아픈 걸까.

"...그러니까, 약재 납품이 안 들어오고 있다고?"

"예, 전하."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신 황송하고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덕분에 쌔한 예감이 스멀스멀 옆구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냥 단순히 납품이 늦어지거나 하는 사태면 저런 표정을 보이진 않을 테니까.

"조금 더 자세히."

"예에, 전하. 그것이...."

시종장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실은 며칠쯤 되었습니다, 전하. 특정 몇몇 약재가 며칠 전부터 납품이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당연히 거래하던 약재상에 문의를 넣었고 말입니다. 독촉도 했습니다. 하온데, 오늘 답이 오기로는...."

"어떤 답이 왔지?"

"당분간 약재 납품이 계속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이 왔습니다, 전하."

"뭐?"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몇몇 약재라니. 당분간이라니.

"어떤 약재가 언제까지 납품이 어렵다는 거지? 구구절절 미사여구는 넣지 말고 사실만 말해보도록."

"예, 전하. 황기와 마황, 아위와 감초 등등입니다. 그리고 납품이 다시 가능해지는 시기는... 아직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

"아직 알 수 없다고?"

"예, 전하. 다만-"

시종장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최소 반년, 어쩌면 그 이상까지 계속 납품이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최소 반년이라니. 더 길어질 수도 있다니. 심지어 그중에 감초가 있다는 점이 가장 최악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감초는 공급이 끊어지면 안 되는데.'

사실이다.

이건 심각한 사태다.

흔히들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감초가 오만가지 처방에 다 들어간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당장 별궁 한의원에서 조제하는 탕약 중에 감초가 들어가는 처방만 해도 족히 수십 가지는 된다.

'위령탕(胃苓湯), 온경탕(溫經湯), 월비가출탕(越婢加朮湯), 황기건중탕(黃耆建中湯), 황금탕(黃芩湯), 황련탕(黃連湯), 을자탕(乙字湯), 갈근가출부탕(葛根加朮附湯), 갈근탕(葛根湯), 가미귀비탕(加味歸脾湯), 감맥대조탕(甘麥大棗湯), 길경탕(甘麥大棗湯), 궁귀교애탕(芎歸膠艾湯), 거기에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수십 가지 더.'

실로 탕약 이름만으로 노래 10절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감초가 들어가는 처방은 실로 다양하고 방대했다.

이는 감초 특유의 성질 때문이었다.

'함께 들어가는 여러 약재의 독성을 완화하는 작용을 하니까. 감초가 없으면 나머지 약재들의 성질이 제각각 미친 듯이 날뛰면서 따로 놀게 되거든. 주요성분인 글리시리진산이 독성물질에 의한 간 손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특히나 달달한 감미(甘味)가 있어서 한약재 특유의 쓴맛을 잡아주는 데에는 감초만 한 놈이 없으니까.'

그런데 감초가 없으면?

공급이 끊어지면?

'망하는 거야.'

최소 현재 처방 중인 탕약의 절반 이상은 조제할 수가 없게 된다. 환자들의 회복지수와 자신의 행복지수 그래프가 손에 손잡고 나란히 음차원의 하드코어한 시궁창으로 3.5회전 트리플악셀 다이빙을 시전하게 될 것이다.

즉, 별궁 한의원 운영에 심각한 악영향이 생기리라. 하지만 라키엘은 금방 대안을 떠올렸다.

"흐음. 그럼, 약재를 납품받는 거래처를 바꾸면?"

그러면 된다. 약재상이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한데 물음을 받은 시종장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

"물론 그 방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전하. 하지만...."

"하지만?"

"다른 약재상들을 모조리 수소문했지만 역시 황기와 마황, 아위와 감초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설마, 황도 시내의 모든 약재상에서?"

"예, 전하."

"그럼 황도에 출입하는 상단은? 조사해봤나?"

"물론입니다, 전하. 하오나, 그 어떤 상단의 운송 품목에서도 저 약재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

이건 좀 심각해지는데.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종장의 말을 들으니 사태의 윤곽이 얼마나 커다란지가 감이 잡혔다.

'황도를 출입하는 모든 상단의 운송 품목에 저 약재들이 없다는 말은 즉, 황도와 이곳 지방 전체의 감초 유통이 끊겼다는 건데.'

그거다.

그거 외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째서?"

라키엘이 물었다.

시종장이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으면 조사해올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그래, 부탁해."

시종장이 물러났다. 진료실에 적막이 남았다. 그 빈 공간을 라키엘의 한숨이 채웠다.

"후우."

하필이면 감초라니.

왜? 무슨 일 때문에?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감초는 여기 정원에서 재배도 안 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재배를 시도하기는 해봤다. 감초가 원래 잘 자라는 만주나 시베리아 몽골 등지와 비슷한, 한랭하고 건조한 정원 구역에서 재배를 시험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토질이나 물이 달라서 그랬던 걸까. 납품받는 감초에 비해 약효가 반의반도 안 나왔다. 약으로 쓸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괜히 재배하느라 손만 많이 가고, 약효는 떨어졌으니까. 그냥 양질의 감초를 약재상에서 납품받는 게 효율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막히면 이젠 어떡해야 할까.

"...후."

깊은 한숨이 진료실 책상 위로 흘러내렸다.

시종장은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간에야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조사 결과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전하. 황도뿐만이 아닙니다. 제국 영토 전체의 감초 유통이 씨가 말랐습니다."

"뭐?"

그게 가능한 일일까.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시종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제국에 유통되던 감초가 거의 모두 서북부 변경지대인 크라노스크 지방에서 산출되었다는 점은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그 지방의 감초가 최고니까. 기후마저도 감초 재배에 너무나 적합하니까."

사실이었다.

마젠타노 제국의 북서부에 위치한 크라노스크 지방은 지구의 시베리아나 만주, 몽골과 기후가 거의 흡사한 한랭하고 건조한 지대라고 했다. 그만큼 감초 재배에 적합했다. 문제는 너무나 척박해서 사람이 살아가기에 빡쎈 동네라는 점이었지만.

"그래서 오크 부족이 그 지방에 모여서 살고 있다고 했지. 맞나?"

"예, 전하. 크라노스크 지방은 척박하고 험악한 황무지이기에, 오크 부족이 특별자치령을 이루어 대대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무슨 일이 있나?"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고 궁금해졌다. 크라노스크 지방에서 주로 산출되는 감초가 제국 전체에 유통이 되지 않고 있다니. 왜일까.

"그곳에서 반란 같은 게 일어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혹시 대규모 마적이나 산적 떼가 발호해서 설치는 통에 상단의 거래나 통행에 차질이 생겼나? 아닌데. 마적이나 산적 따위가 설쳐봐야 오크 전사들한테 싸그리 썰릴 테고."

사실이었다.

듣기로 오크 종족의 피지컬은 대륙의 유사 인류 중에 으뜸이라 했던가. 그만큼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굳이 그런 곳에서 설칠 산적 떼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런 이쪽의 추측을 증명하듯,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전하. 반란이나 도적 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조사 결과,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들과 독점적으로 거래를 하던 상단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상단? 독점 거래?"

"예, 전하. 이걸 보시지요."

시종장이 가방에서 꺼낸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오늘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크라노스크 지방과 툴룬 상단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

서류를 살폈다.

비로소 이번 감초 수급난 사태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잠깐. 이거, 툴룬 상단이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들과 유일하게 거래를 유지하던 상단인데, 그 상단장이 최근 깊은 실의에 빠져서 식음을 전폐하고 상단 운영에서 손을 놓아 버렸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툴룬 상단장이 실의에 빠진 이유가... 하나뿐인 외손녀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하고 있어서이고?"

"역시 그렇습니다, 전하."

시종장이 첨언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그 외손녀는 툴룬 상단장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툴룬 상단장의 외동딸과 남편이 몇 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어서입니다. 그 외손녀가 사망한 외동딸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라고 들었습니다."

"...쯧, 그러면 실의에 빠질 만하네."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하나뿐인 딸이 사고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외동딸. 그 아이가 상단장의 유일한 혈육인 거다. 한데 그런 아이가 중병에 걸려서 오늘내일하고 있다면? 어느 외할아버지가 온전하게 버틸 수 있을까.

"그럼 의사는? 안 불렀나?"

"근방에서 유명한 이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지만, 다들 고개를 젓고는 물러났다고 합니다.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군요."

"흐음."

라키엘은 보고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툴룬 상단이 크라노스크 지방 오크와 독점적인 거래를 하던 상단인 이유가 쓰여 있었다.

'외부인을 배척하는 지극히 폐쇄적인 오크들의 성향 때문이로군.'

툴룬 상단장도 오크들과 거래를 트기 위해 거의 6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공을 들였다고 보고서에 쓰여 있었다. 그걸 보니 이 사태가 이해가 됐다.

'워낙 척박한 곳이라 다른 상단이 굳이 탐을 낼 거래처가 아니었고, 그나마 툴룬 상단이 독점적인 거래와 유통을 도맡고 있었는데, 상단장의 멘탈이 나가 버린 상황이란 거네. 하나뿐인 외손녀가 위독해져서.'

정리하자면 그러했다.

라키엘은 시종장에게 물었다.

"그럼, 내 권한으로 명령이나 제의를 하면 어떨까?"

"명령이나 제의라시면...?"

"그곳 지방의 오크들에게 말이야. 툴룬 상단을 거치지 말고 이곳, 별궁 한의원과 직접 거래를 하자고."

"하오나 전하,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크 전사들이 지극히 폐쇄적이라서?"

"예, 전하."

"황태자의 권력으로도 안 될까?"

"그들은 제국의 권력을 추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크라노스크 지방도 제국의 영토인데?"

"엄밀히 따지면 제국 변방의 특별자치령입니다."

"황제 폐하께 부여받은 자치권이 있기에, 내 입김이 소용없을 거란 뜻이군. 맞나?"

"정확하십니다, 전하. 그렇기에 행여나 오크 전사들을 과도하게 압박하게 되면, 그들은 곧바로 반기를 치켜들 것입니다."

"에이, 설마."

"150년 전에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하."

"...정말?"

"예, 전하. 당시의 어느 황족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오크 전사들을 과도하게 압박하였고, 그 결과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 부족 전체가 반발하며 북서쪽 국경 너머의 앙가르스크 왕국과 친교를 다지려 하였지요."

"...."

그래. 알겠다.

'그곳의 오크들, 제국 황실과 공유하는 이득 때문에 국경 완충지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생 관계인 거로군. 그들에게 제국은 충성의 대상이 아닌 셈이고.'

라키엘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는 해법이 얼핏 보였다.

"그래. 알겠다. 그럼 마차를 준비하도록."

"예? 이 늦은 시간에 어딜...."

"폐하를 뵈려고."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오크 특별자치령이 오직 황제의 권위만을 존중하는 곳이라면? 답은 간단하다. 황제가 별궁 한의원과의 약재 직거래를 권고해 주면 된다. 그들은 황제의 말은 들을 테니까.

그런데 웬걸?

황제가 이 몸의 아빠다.

"그러니까 써먹어야지. 아빠 찬스."

라키엘은 뻔뻔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었다.

178화. 끊어진 거래 (2)

"짐이 한 가지 묻겠노라. 너는 짐이 편안하더냐?"

"...예?"

"너에겐 짐이 부탁만 하면 다 들어주는 존재로 느껴지더냐?"

"그건...."

"아니겠지. 아니어야겠지. 그렇지 않더냐?"

"...."

망했다.

이번 아빠 찬스는 망했다.

아직 부탁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저토록 까칠한 눈빛으로 꼬장꼬장하게 철벽을 치는 황제라니. 저 양반, 언제나 느끼는 건데 눈치 빠르기가 사기급이란 말이지.

'뭐, 저러니까 제국 정치의 정점에서 수십 년이나 버틴 거겠지.'

아무래도 그럴 거다.

라키엘은 나직한 한숨을 삼키며 지금의 사태(?)를 인정했다. 자신이 안일했다. 역시 저 양반에게 아빠 찬스는 쉽게 쓸 카드가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전략 수정.'

그는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크라노스크 지방 오크들에게 별궁 한의원과의 직거래를 명해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그걸 단순하게만 부탁했다간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폐하. 폐하께서는 제가 스스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더욱 경험을 쌓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시겠지요. 맞사옵니까?"

"물론이다."

황제가 집무실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 톡 짚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그가 엄격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한데, 그걸 잘 아는 너는, 무슨 일만 생기면 짐에게 부탁부터 하려고 쪼르르 달려오는 것이더냐?"

"그저 제가 지닌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 함입니다."

"자원?"

"그렇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더욱 뻔뻔하게. 황제 저 양반이 좋아할 법한 논리와 사고방식으로.

"폐하의 지원 또한 엄연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자 자원이 아니겠사옵니까?"

"손쉽게 끌어다 쓸 카드로 보이지는 않는다만."

"제가 지닌 가장 유용한 카드이기도 하지요."

"노골적이로구나."

"솔직하다는 뜻도 되옵니다."

"그래? 하면, 보다 솔직해지는 것은 어떻겠느냐."

황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감초가 필요하여 짐을 찾아온 것이 아니더냐."

"...."

역시.

다 알고 있구나.

라키엘은 새삼 황제의 정보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는 놀라는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오히려 더욱 능글맞은 미소를 입가에 장착했다.

"부정하지 않겠사옵니다, 폐하."

"그래?"

"예, 폐하. 저는 감초가 필요합니다. 하여 폐하의 지원이 필요하옵니다."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들에게 별궁과의 거래를 명해달라는 것이겠지."

"이미 짐작하고 계셨군요."

"충분히."

황제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별궁의 시종이 종일 바빴더구나. 황도의 약재상이란 약재상은 다 뒤집으며 다녔다고도 하고. 온종일 그 난리를 피웠는데 짐이 어찌 너의 일을 모를까."

"마치 직접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황도에서 짐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은 없느니라."

...물론, 너도 포함해서 말이다.

황제 아스테리온은 뒷말을 삼켰다. 한편으로는 내심 그동안 받았던 보고를 떠올렸다. 그것은 황태자가 혼자서 허공을 매만지거나,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그저 아들에게 꼴사나운 습관이 생겼겠거니 싶었다. 한데 계속 보고를 받다 보니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의 심장이나 간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고도 하였지.'

심지어 제 뱃속의 내장과 대화를 나누며 환자의 상태를 보고받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잘못된 보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계속해서 그런 보고가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고민에 휩싸여야 했다. 그 끝에 결론을 얻었다.

'어쩌면 이 아이가, 기이한 기연을 통하여 자신의 심장 등의 장기로부터 의술을 습득하고 있는 것도 같고.'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다.

미친 인간이나 해볼 법한 생각이다.

한데 아들에 관한 보고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러한 추측이 더욱 확신으로 굳어간다. 믿기 어려운데 믿을 수밖에 없어진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어찌 그런 기이한 일이 가능할까.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황제는 마냥 혼란에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들이 무언가 신비로운 기연을 얻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기연을 통해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 백 배, 천 배는 중요하다.

그러니 지금은?

'담금질이 필요한 때일 터.'

황제는 내심 결론을 내렸다. 미지의 기연을 얻었을 자신의 큰아들. 녀석이 다시금 무언가 일을 벌이려 들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녀석이 더욱 단단해지고 질겨지도록 단련될 기회를 선물하여야 할 터. 그것이 후계를 위하여 제왕이 취해야 할 길일 터.

결심한 황제는 입을 열었다.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에게 별궁과의 거래를 명해달라는 너의 요청은 거절한다."

"예?"

휘둥그레지는 아들의 눈매.

미안하다. 이로써 아들이 한바탕 겪어야 할 어려움을 생각하면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렜다. 자신의 아들은 이제부터 마주할 어려움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또 어떤 성과를 이룩할까.

'더 크거라. 그리하여야 비로소 너의 어깨 위에서 제국의 신민들이 보다 평안해질 것이니.'

황제는 명검을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마음으로 말하였다.

"못 들었느냐? 너의 요청을 거절한다 하였노라."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없다."

"...예?"

"네가 짐을 찾아왔다고 해서, 짐이 너의 요청을 굳이 들어주어야 한다는 법이 있느냐?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더냐?"

"...."

"다만, 거절의 대가로 짐은 너에게 한 가지만은 허락하려 한다."

"무엇을 허락하심이시옵니까?"

"크라노스크 지방으로의 여정을 허락하노라."

"...."

"이만하면 짐의 뜻을 알아들었으리라 여기겠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알겠다. 황제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알겠다.

'자기한테 와서 부탁하지 말고 크라노스크 지방에 직접 가서 일을 해결하라는 거로군.'

이쯤이면 뻔하다.

이유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놈의 담금질. 어오.'

후계자를 단련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황제. 저 양반의 종특(?)이 또 유감없이 발휘된 거겠지. 덕분에 라키엘은 가슴 깊이 차오르는 시린 현타를 느꼈다.

'이놈의 아빠 찬스는 쓸 때마다 성공을 못하냐.'

생각해 보니 성공한 적이... 아이스 갈근탕 제조를 위해 황궁비고 출입을 했던 때를 빼곤 거의 없었던 거 같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어디 가서 써먹지도 못할 타율이다.

'인생 진짜.'

황태자면 뭐하나.

황제 지원도 못 받는데.

라키엘은 출발 드림팀을 외치려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오크족과의 거래를 부탁하려던 마음을 싹 접었다. 대신, 여기까지 온 김에 물어보고 확인할 일을 떠올렸다.

"폐하의 뜻을 알겠사옵니다. 하온데 제가 달리 여쭈어볼 일이 있사옵니다."

"또 무엇이 궁금하더냐?"

"예, 그것이...."

말을 꺼내기 전에 좌우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듣고 있겠지. 그런 이쪽의 기색을 황제도 알아차린 것일까.

"들어도 무방한 짐의 그림자만 있으니 고하거라."

...그렇다면 기꺼이.

"알겠사옵니다, 폐하. 일전에 제가 알려 드리었던, 폐하께 혈전이 생기는 독을 먹인 흉수에 대한 일은 어찌 되어가는지요."

"그 일이라면, 흐음, 추적 중이니라."

"아직 가닥이 잡히지 않았사옵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다."

황제의 고갯짓이 무거워졌다.

문득, 자신이 쓰러졌던 때가 떠올랐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뇌졸중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창 회복에 매진하던 무렵이었던가. 당시 라키엘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더랬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독을 먹인 것이란다. 그것 때문에 혈전이 생긴 것이었노라 하였다. 그때부터였다. 아들의 조언에 따라 흉수에 대해 은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하는 수확도 있었다.

한데 거기까지였다. 더 남은 흔적이나 단서가 없었다.

"좀처럼 꼬리가 잡히질 않는구나. 하지만 언젠가는 그 간악한 몸통을 붙잡아 수레바퀴에 매달고 갈가리 찢어놓을 것이니 너는 너무 심려치 말거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조금 안심했다. 확인차 물어본 건데, 황제가 여전히 정체 모를 흉수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 그러면 됐다.

'그래야 안 당하니까. 사실 나도 그 흉수의 정체가 짐작도 가지 않으니까.'

하여 불안했다.

황제를 시해한 흉수라니. 소설 마검황에서는 언급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더 생각을 해보면, 은근 섬뜩한 지점이 있었다.

'바로 소설 마검황에서도 황제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는 거지. 소설에선 단순한 뇌졸중으로만 묘사가 됐는데, 사실은 그게 흉수의 짓이었다면?'

그런데 소설에선 그게 표현이 안 된 거라면? 작가가 떡밥으로 써먹으려다가 그냥 폐기한, 일종의 맥거핀이라면?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어쩌면 소설 속에도 흉수가 있었는데, 그게 드러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황제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절대로 방심할 수가 없다. 주기적으로 황제의 경각심을 자극해 줘야 한다. 그래야 안 당할 테니까.

'어쨌건, 오늘의 목표는 절반만 성공이구만.'

황제의 경각심 자극은 성공.

아빠 찬스는 실패.

'후우.'

라키엘은 황제 앞에서 물러났다. 아빠 찬스가 실패한 이상,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그는 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종장을 불렀다.

"마차와 호위대, 여장을 준비해. 총 수행 인원은 30인 정도로. 목적지는 크라노스크 지방이다."

이제는, 그곳의 상단장 외손녀를 치료하기 위해 직접 움직일 때였다.

출발은 금방이었다.

황제의 허락을 받아낸 마당에 어영부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모든 출발 준비가 다음 날 정오가 되기 전에 완료되었다. 곧바로 출발했다.

"...라지만, 전하?"

"응?"

"저는 내버려두고 가시는 겁니까?"

마차에 막 오르려는데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가르딘 경이 비 오는 날 전봇대 아래에 있는 강아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내버려 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일 중요한 일을 맡겨 두는 건데."

"...예?"

"내가 없는 동안은 경이 여길 책임져야지, 별궁 한의원을."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경이 부원장이라고."

"예에?"

"공식적으로 임명하는 거다."

"...."

가르딘 경은 입을 다물었다. 공식적으로? 별궁 한의원의 부원장직을 맡긴다고? 처음엔 황태자가 농담하는 건 줄 알았다. 한데 듣다 보니 아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은 경이 이곳의 책임자다. 공식적인 부원장으로서 별궁 한의원 업무에 관련된 모든 인사권을 비롯한 권한을 지니는 거야."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먼 길 떠나는 마당에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할까."

피식, 라키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경이 가장 믿음직하니까. 그러니 한시도 한의원 관리에 소홀하지 말도록.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라키엘은 마차에 올랐다. 데미안과 특근대, 근위대, 수간호사 아니스, 우루스 등의 수행인원을 이끌고서 별궁을 출발했다.

그때까지도 가르딘 경은 쩌저적 굳은 채였다.

"...."

내가... 가장 믿음직하다고....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가르딘 경의 가슴에 저도 모를 감격이 벅차올랐다.

그 후로도 마차는 계속해서 굴러갔다. 수행단의 말발굽과 우루스의 소발굽도 쉼 없이 땅을 박찼다. 북서쪽으로 꾸준히 이동했다. 마차 창밖을 스치는 풍경이 매일 조금씩 바뀌었다. 어느덧 계절은 완연한 봄인데, 바깥의 풍경은 시간을 역행시킨 것처럼 나날이 황량해졌다.

꽃이 사라지고, 무성하던 수풀이 드문드문해졌다. 포근한 봄바람이 메마르고 시린 칼바람으로 변해갔다. 어느새 나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한랭한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크라노스크 지방에 도착했다.

그 후에도 일행은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크라노스크 지방의 중심 도시, 크라노스로 입성했다. 그곳이 툴룬 상단의 근거지였다. 크라노스 시에 도착하자마자 상단 본부로 직행했다.

한데 뜻밖에도 상단 본부에서는...

'이거, 뭐지?'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장거리 여행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풀며 마차에서 내리던 라키엘은 상단 본부 건물에서 벌어지고 있는 뜻밖의 행사에 미간을 콱 찡그려야 했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 행사의 정체는....

'대체 왜, 상단 본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는 거지?'

179화. 전사로 인정받는 법 (1)

'이거 뭐지.'

라키엘은 미간을 콱 찡그리며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을 던졌다. 툴룬 상단 본부 건물 곳곳에 검정색 천이 내걸려 있었다. 향을 피우는 듯한 향기도 났다. 그걸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왜, 상단 본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는 건데.'

확실하다.

장례식이다.

전이었다면 몰랐겠지만, 이곳 세계에서 1년 넘게 지낸 짬(?)이 있다 보니 이제는 알아볼 수 있었다. 건물 곳곳에 두른 검정색 리본과 은은한 향냄새. 이건 건물 안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의?'

가슴속 가득 시커먼 암운이 겨울철 풀가동시킨 가습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불길한 예상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뇌피질에 원투 어퍼컷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설마....

'상단장의 외손녀가 잘못된 건가?'

처음 소식을 들었던 때에도 이미 많이 아픈 상태라고 했다. 아픈지도 제법 되었노라 하였다. 한데 별궁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거의 보름이 걸렸으니, 그사이에 일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젠장.'

라키엘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그 사이, 상단의 관계자들이 건물에서 분분히 나와 예를 표하였다.

"제국 황가의 합당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습니다."

라키엘은 직급이 높아 보이는 이에게 물었다.

"그쪽이 이곳의 책임자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한데 여기서 누구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는 거지?"

겉으로는 침착하게, 속으로는 불길함으로 쿵덕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제발 상단장 외손녀의 장례식이 아니면 좋겠다고, 제발 아이가 무사하길 바란다고 기원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간절한 기원이 통한 것일까.

이내 돌아온 대답은....

"저, 그것이... 저희 툴룬 상단장의 장례식입니다."

"...뎃?"

뭐?

뭐어?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아프다던 외손녀가 아닌 상단장이 죽었다니. 하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여서 놀라 되물었다. 한데 대답은 눈앞의 젊은 사내가 아닌, 또 다른 이가 돌려주었다.

"툴룬. 그는 외손녀의 안위를 너무나 걱정하고 염려한 나머지 괴로움을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다가 이틀 전에 쓰러졌습니다. 좌우의 이들이 다급히 부축하였지만, 어찌 손을 쓰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고 말입니다, 꾸익."

걸걸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쿡, 두드려 왔다. 돌아보니 엄청난... 근육질 녹색 피부의 거구가 있었다.

'오크?'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 마검황의 일러스트에 나오던 오크족의 인상착의(?)가 저랬으니까.

키는 2미터를 충분히 넘길 듯했다. 전신에 근육이 가득했다. 아니, 터질 듯 빵빵했다. 당장 동네 헬스장에 던져놓으면 트레이너 앞에서 고인물 훈수질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나름 거구를 자랑했던 쟈빌론도 저 옆에 세워두면 아담해 보이게 만들 듯한, 엄청난 체격이었다.

그토록 거대한 오크가 수박처럼 커다란 머리를 정중하게 숙였다.

"얼음바위 부족의 부족장, 브라쉬가 인간의 황태자를 뵙습니다, 꾸익."

"...아, 그래."

일단은 당황하지 않고 예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가득 피어났다. 툴룬 상단장이 급사했다는 것도 황당한데, 그 장례식장에 찾아와 있는 오크 부족장이라니.

그런 이쪽의 의문을 눈치챈 것일까.

족장 브라쉬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툴룬은 제 오랜 친우이자, 부족에게 인정받은 전사였습니다. 부족장 된 이로서 훌륭한 전사를 추모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꾸익."

"...."

돌겠네.

여전히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기껏 보름이나 시간을 들여서 변방까지 달려왔는데, 불과 이곳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상단장이 죽어 버렸다니.

다른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재수 없는 농담하지 말라는 대답부터 나왔을 것 같았다. 혹시나 이런 내용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있다면, 그 작가한테 개연성 좀 챙기고 상하차나 하라고 악플을 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고약한 농담도, 성격 나쁜 작가의 망나니 전개도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고 실화다. 다른 이도 아닌, 오크 부족장마저 이렇게 추모를 하러 장례식장에 와 있는 걸 보니 오히려 실감이 확 났다.

그런 덕분이었다.

"후우."

계획이 박살 났다.

원래는 상단장의 외손녀를 치료하려 했다. 그러면 상단장이 희망을 느끼고, 기운을 차리고, 상단의 활동을 재개할 거라고 보았다. 하면 중단되어 있던 감초의 유통도 재개될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한데 이제는 그 방법이 사상의 지평선 너머로 멀리멀리 사라졌다. 상단장이 죽었으니까. 생각할수록 절로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흔들리려는 멘탈을 꽉 붙잡았다. 냉정함을 유지했다. 덕분에 상황을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상단장이 죽었어. 황당하긴 한데 그건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인정하자. 어쩔 수 없는 거야. 다르게 생각해. 그나마 상단 자체는 아직 남아 있을 테니 상황이 암울하지만은 않아.'

상황을 파악하니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상단장은 죽었지만, 상단은 남아 있다. 그게 중요하다. 라키엘은 오크 족장 브라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차츰 플랜 B가 즉석에서 떠올랐다.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네. 한데, 한편으로 따로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잠시 여기서 기다려줄 수 있을까? 우선은 여기까지 온 의미를 되새기며 상단장을 추모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인간의 황태자시여, 꾸익."

족장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라키엘은 족장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아주 잠깐 떠오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살짝 놀라며 호감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역시.'

할 이야기에 앞서 상단장부터 추모하겠다고 말하길 잘했다.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예의라는 것이니까. 그런 건 한국이나 여기나 비슷할 테고.

라키엘은 상단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커다란 홀에 놓인 관이 보였다. 관뚜껑은 굳게 닫혀 있으되, 그 뒤로 놓인 초상화를 통해 상단장의 생전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제법 괄괄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를 향해 몇 초간 예를 갖추며 묵념했다. 속으로 기원했다.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B플랜이 잘되도록 좀 도와달라고.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크 족장 브라쉬에게 돌아갔다.

"우선, 오랜 친우를 잃은 일은 유감이야. 그 고통을 내가 어찌 감히 위로할까 싶기도 하고. 다만 잠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제의할 일이 있어서."

"제의라고 하시면, 꾸익?"

"이번 장례식이 끝나면 거래를 다시 시작하고 싶군."

"예, 꾸익?"

족장 브라쉬가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쪽의 제의가 무슨 뜻인지 감을 못 잡은 걸까. 라키엘은 살짝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감초를 비롯한 약재의 거래 말이다."

"약초 거래 말입니까, 꾸익?"

"그래."

된다.

잘하면 제안이 통할 것 같다.

오크 족장의 반응을 보며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살짝 엿보인 가능성을 더 확실하게 거머쥐기 위해 솔직하게 말했다.

"실은 나는 황도의 별궁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환자를 보살피며 그들에게 약을 달여주기도 하지. 한데 그러던 중 최근 곤경에 처하게 되었어. 이 지방의 약재 거래가 끊어지는 바람에."

"거래를 통해 약재를 구하고 싶다는 뜻입니까, 꾸익?"

"그래. 굳이 내가 직접 사들이지 못해도 좋아. 내가 듣기로는 툴룬 상단장이 이곳 부족과의 거래를 트기 위해 몇 년이나 공을 들였다고 하더군. 그러니 그가 남긴 상단 조직을 통해 중단되어 있는 거래를 재개해주기만 하면 돼. 어떤가."

물었다.

당연히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 그대로 툴룬 상단장은 죽었지만, 그의 상단 조직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유통망도 살아 있을 테니까. 그러면 된다. 그의 상단을 통해 감초를 사들이면 만사 오케이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합니다, 꾸익."

"...."

생각지도 못한 단호한 거절이 카운터로 명치에 팍 꽂혔다. 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내 이어지는 족장 브라쉬의 말을 듣고서야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부족은 오직 인정받은 전사와만 거래를 합니다, 꾸익."

"전사? 인정을 받은?"

"그렇습니다. 인간의 황태자시여, 꾸익."

족장이 콧김을 풍, 강렬하게 뿜어내며 말했다.

"인간의 황태자께서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는 듯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부족은 툴룬이 운영하는 상단과 거래를 하던 것이 아닙니다, 꾸익."

"그럼? 잠깐, 설마."

라키엘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족장을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다 보니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다.

"상단이 아닌, 툴룬 상단장 개인과 거래를 튼 거였다는 뜻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꾸익."

족장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는 오크입니다. 용맹한 전사인 우리 부족은 오직 전사로 인정받은 이와 교류하고 거래를 합니다. 툴룬은 전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상단에는 전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약골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꾸익."

"...."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정리를 해보자면, 남은 상단의 조직이나 유통망이 멀쩡하건 말건 지금은 무용지물이라는 거구만.'

이유는 딱 하나.

인정받은 전사가 없어서.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저들에게 '전사'로 인정을 받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상단을 거치지 않아도 직거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편리하게 안정적으로 약초 공금을 받게 되는 셈이다.

'가능할까.'

라키엘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문득, 아까 장례식장에서 본 툴룬 상단장의 초상화 덕분이었다.

'노인이었어. 조금 괄괄해 보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늙은이였지.'

한데 그런 늙은이가 인정받은 전사였단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저들이 말하는 전사가 단순히 싸움을 잘한다거나 하는 의미만은 아닐 거라는 뜻이지. 오히려 일종의 명예직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툴룬 상단장 같은 노인이 당당히 전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

예를 들자면 그런 거다.

업체에 건물 한 동쯤 세워주고 명예이사 자리를 얻는다든가.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려준 공로로 명예국민이 된다든가.

아마 노인인 툴룬 상단장도 그러한 모종의 공로를 통해 전사라는 명예직을 얻었으리라. 그가 6년 넘게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명예직을 따내려고 공로를 세운 과정이었겠지.

'바로 그거지. 그거 맞네. 딱 봐도 그렇네.'

라키엘은 내심 싱긋 웃었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자신감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오크족이 수여하는 전사라는 호칭이 명예직 같은 것이라면, 충분히 따낼 자신이 있다.

돈도 권력도 넘쳐나니까. 오크족이 원하는 무엇이든 뚝딱 제공해주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럼...."

저들이 원하는 조건은 뭘까.

"그대들에게 전사로 인정을 받으려면 뭘 해주면 되지?"

라키엘이 은근하게 물었다. 오크 족장 브라쉬가 진짜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전신의 근육을 불끈거리며 대답했다.

"3대 700, 꾸익."

180화. 전사로 인정받는 법 (2)

"3대 700, 꾸익."

"...."

휘이잉.

북방의 삭풍이 불어왔다. 살갗을 저미는 바람에 콩닥거리던 심장 한쪽이 서슴없이 쑹컹쑹컹 썰려나갔다. 라키엘은 대뇌피질을 살살 긁어오는 쌔한 불길함을 애써 지르밟아 눌러두며 반문했다.

"700...?"

"그렇습니다. 인간의 황태자여, 꾸익."

"뭐가 700이라는 거지? 설마... 토익 700인가?"

제발 그렇다고 해줘.

그럼 나 프리패스라고.

하지만 오크 족장 브라쉬는 이쪽의 아름다운 기대를 아롱사태 씹듯이 저버렸다.

"토익이 뭡니까, 꾸익?"

"아, 그럼 한컴 타자 속도 700?"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꾸익."

"...."

현실부정이 안 통하는구나. 역시나 돌아오는 족장 브라쉬의 대답은 불길했던 예상 그대로였다.

"3대 700이라는 것은 3대 운동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의 총합입니다, 꾸익."

"...."

아 씨.

어째서 쌔한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는 걸까. 라키엘은 전면 개방을 외치려는 눈물샘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설마 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 스쿼트?"

"정확하십니다, 꾸익!"

"...."

"무릇 전사라 불리고 싶은 존재라면 그 정도는 솜방망이 다루듯이 들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실 우리 오크 전사들은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해야 진정한 전사로 불릴 수 있습니다, 꾸익."

"700보다 더? 얼마나?"

"1톤, 꾸익!"

"...."

어우야 미친.

기겁하는 사이, 족장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1톤은 오크족 전사의 기준이고, 인간에게 전사의 자격을 시험할 때는 700킬로그램을 제시합니다. 종족의 신체에 따른 차이를 감안한 기준이지요, 꾸익."

"그게 가능한 건가?"

"물론 가능합니다, 꾸익."

"어떻게?"

"그 정도면 지푸라기 아닙니까, 꾸익?"

"...."

응, 내 멘탈이 지푸라기처럼 바사삭.

라키엘은 버석거리려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한편으로 깨달았다. 안타깝게 죽은 툴룬 상단장, 그가 이곳 오크 부족과 거래를 트기 위해 6년이 넘도록 공을 들였다는 일이 바로....

'헬스장 죽돌이 짓을 한 거였구만!'

확실하다.

이제는 알겠다.

툴룬 상단장, 오크족과 거래를 트기 위해 6년이 넘도록 쇠질을 하며 근육을 키웠던 거다. 그러한 인간극장 뺨치는 노력 끝에 마침내 3대 700을 들어 올리고 전사로 인정받았겠지. 비로소 오크들과 본격적인 거래를 시작했던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3대 700이라니. 내가 그걸 어떻게 들어.'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아무리 인생이 하드코어한 시궁창이라지만, 이런 병약가련한 육체로 3대 700이라는 무식한 미션에 도전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릴 줄은 정말로 몰랐다. 3대 700이라면 최소한 스쿼트로 250킬로그램은 짊어져야 한다는 소리인데.

'...차라리 바벨이 나를 들겠다.'

3대 700이라면 지구에서도 최상위권 인류에게나 가능한 수치다. 어지간한 사람은 약을 한 사발로 드링킹하면서 운동을 직업으로 삼아도 평생 도달할 수 없는 수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걸 이 몸으로?

병약가련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육체로?

'차라리 북극곰이랑 강강수월래 하고 살아남는 편이 쉽겠구만!'

그렇다.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미션이다. 아니,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거다. 최소 5년, 아마도 훨씬 더 이상이 걸릴 테니까.

그 사이에 감초 공급이 끊긴 별궁 한의원은 망하고, 제국이 무너지고, 이곳엔 가련한 3대 700 헬스쟁이 한 놈만 팬티 쪼가리 한 장 걸치고서 덜러덩 남아 있게 되겠지. 아니, 그 전에 예상 기대수명이 먼저 소진될 거다.

'그건 안 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키엘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대안이 있었다. 그는 족장 브라쉬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말이야. 꼭 내가 3대 700을 달성할 필요가 있나?"

"예, 꾸익?"

"이 친구 말이지."

묵묵히 곁을 따르던 데미안을 가리키며, 한층 은근해진 목소리로 족장에게 물었다.

"이 친구가 겉으로는 호리호리하게 보여도, 사실은 제법 강하거든. 아마 조금만 연습하면 3대 700쯤은 금방 달성할 거고. 그럼 이 친구를 전사로 인정한 뒤에 거래를 시작하면 어떨까?"

바로 그거다.

굳이 내가, 직접 거래의 주체가 될 필요가 없다. 일행 중에 누구라도 3대 700을 찍고, 전사로 인정받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감초 거래를 시작하면 된다!

'바로 이거지! 가만 보면 기업들도 해외로 진출할 때 현지 법인을 따로 세우잖아? 그 현지 법인을 통해 판매며 사업이며 벌이잖아? 그거랑 똑같은 거지.'

라키엘은 내심 무릎을 탁 쳤다. 생각할수록 단순하면서도 적절한 묘수였다. 한데 이내 돌아오는 족장 브라쉬의 대답은....

"안 됩니다, 꾸익."

"...어?"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런 꼼수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꾸익."

"어째서?"

이해가 안 됐다.

족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콧김을 풍 뿜었다.

"남자는 직접 하는 겁니다, 꾸익!"

"...."

"감초를 사고 싶은 자가 이 호위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황태자께서 감초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직접 해야 합니다. 특히 우두머리라면, 스스로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꾸익."

"아니, 이 친구도 사실은 같이 필요해서 말이지."

"거짓말은 안 통합니다, 꾸익!"

"...."

망했다.

6번 척추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파르르 떨리며 댄스타임에 돌입했다. 눈물이 앞을 가릴 것 같았다. 한데 그때, 뜻밖의 말이 족장 브라쉬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두 가지 예외도 있습니다, 꾸익."

"뭐?"

예외?

정신이 번쩍 들었다.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단 두 가지의 예외에 한정해서, 3대 700의 전사 자격을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꾸익."

"그게 뭔데?"

"하나는 만인의 지배자인 황제입니다, 꾸익."

"그럼 나머지 하나는?"

제발 황태자라고 해줘!

라키엘은 간절하게 빌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달랐다.

"전사로 인정받은 자의 피를 이어받은, 3대 이내의 혈육입니다, 꾸익."

"...뭐?"

잠깐.

그렇다는 건.

"혹시, 툴룬 상단주의 3대 이내의 혈육이라면 전사의 자격을 시험받을 필요 없이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꾸익."

"...."

머릿속에 섬광이 쳤다.

확실한 답이 나왔다.

그건 바로.

'툴룬 상단장의 외손녀.'

외손녀라면 3대 이내의 혈육이다. 그러니까 된다. 그 아이를 통한다면 이곳 지방의 오크들과 약초 거래를 재개할 수 있다. 별궁 한의원의 감초 공급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살려야 한다.

'그 아이, 원래부터 여기 온 김에 한 번은 살펴보려 했지. 양심상, 도의상 말이야.'

정말로 그랬다.

기왕 여기까지 온 길이었다.

툴룬 상단장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곤 하지만, 아픈 아이를 살펴보지도 않고서 황도로 휙 돌아가기엔 양심이 조금 찜찜했다. 하여 한 번은 진료를 보아주리라 내심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한데 이제는?

양심과 도의상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무조건 살려야 해.'

결론이 나왔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툴룬 상단장의 외손녀는 어디에 있지?"

"그 아이를 살려주실 겁니까, 꾸익?"

"물론. 그걸 바라고 일부러 예외의 경우를 입에 담은 것일 텐데?"

"맞습니다, 꾸익.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역시.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족장 브라쉬의 뒤를 따랐다. 족장은 상단 본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그마한 별채가 있었다. 툴룬 상단장이 생전에 자택으로 쓰던 건물인 듯했다.

"이곳입니다, 꾸익."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자마자 들려오는 것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격한 기침 소리였다.

"콜록, 콜록! 쿨룩! 커윽, 콜록, 씨익씨익...!"

...심한데.

소리만 들어봐도 심상치가 않았다. 기침이 격한 것은 둘째치고, 호흡 사이에 날카로운 피리 같은 소리가 섞여 있었다.

'기침이 너무 연달아 이어지는 까닭에 허파와 기관지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다 빠져나가 버리는 거야. 그렇게 생긴 공기의 압력 차이 때문에 바깥의 공기가 기관지로 확 몰려 들어가면서 저런 소리가 나는 거고.'

문득, 예전에 처음 황태자 라키엘의 몸에 들어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이 몸에서 딱 저런 피리 소리가 났던가. 많이 괴로웠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길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앞이 확 노래졌다가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걸 지금은 아이가 겪고 있는 거다.

"...."

냉정해지자. 진료에 앞서 감정을 죽이자.

라키엘은 다짐하며 별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관과 응접실을 지나, 가장 안쪽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때마침 문이 열렸다. 하인으로 보이는 자가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들고 나오다가 이쪽과 마주치고는 흠칫했다.

"네일라를 치료하러 온 분이시다. 잠시 물러나 있도록, 꾸익."

아마도 족장 브라쉬는 생전의 툴룬 상단장과 제법 교류를 나누었던 듯했다. 물수건을 들고 있던 하인과, 방에 남아 있던 간호인들 모두가 족장의 명에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비로소 라키엘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가 보였다.

나이는 대략 열한두 살쯤?

'상태가... 좋지 않네.'

라키엘의 표정이 굳었다.

한눈에 봐도 아이의 예후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연신 터져 나오는 격한 기침과 피리 소리에 가까운 호흡음, 게다가 얼굴 곳곳에 불긋불긋한 반점이 생겨나 있었다. 단순히 피부가 붉어진 거? 아니었다.

'점상출혈(petechia)?'

마치, 바늘로 피부를 찌른 자리에 피가 고인 듯했다. 좁은 범위에 새빨간 점이 새겨진 모습 같았다.

'바이러스 감염인가.'

볼수록 심상치가 않았다. 격한 기침 등의 폐 질환, 거기에 점상출혈까지 보인다면 혈액 응고 능력이 약해졌다는 뜻이니까.

'일단 진맥부터.'

조심스럽게 아이의 침대 옆에 앉았다. 마침 아이가 간신히 뜬 실눈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구...? 할아버지?"

잔뜩 쉰 목소리. 아이는 눈을 뜨고는 있으되, 반쯤은 의식이 없는 듯했다. 라키엘은 섣부른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펄펄 끓는 열감이 느껴졌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제발. 치료할 수 있는 상태였으면.'

그저 단순한 열병이길. 내가 감당해줄 수 있는 질환이길. 그리하여 이 아이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기를.

라키엘은 간절히 바라며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그곳에 검진표의 핵심인 '종합 소견' 항목이 있었다.

[종합 소견 : 심각한 발작성 기침과 레프리제(Reprise) 증상을 보이는 신체입니다. 보르데텔라 백일해균(bordetella pertussis)이 감지되었습니다. 전형적인 백일해 환자입니다. 경고! 즉시 감염 예방책을 마련한 후, 다시 진료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

종합 소견 메시지가 경고성 붉은 색채로 물드는 순간, 라키엘의 뒷목에 소름이 좍 돋아났다.

181화. 끝없는 기침의 질병 (1)

백일해(百日咳, pertussis)는 전염병이다.

현대 세계에서야 예방접종이 널리 보급되어 찾아보기 어려운 질병이 되었지만, 전근대 시대까지만 해도 수많은 목숨을, 특히 어린아이들을 무수히 희생시킨 강력한 전염병이다.

'특이하게도 바이러스가 아닌, 세균으로 전염되는 병이지. 그람음성균인 보르데텔라 백일해균. 이게 사람의 몸으로 침투하면 약 1~3주의 잠복기를 거쳐 증식하고, 마침내 인체를 숙주로 삼아서 독감과 비슷한 증세를 발현시켜.'

그 뒤로 카타르 기간(catarrhal pahse)과 발작성 기간(paroxysmal phase) 등을 거치며 증세가 강력해진다. 특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격렬한 기침을 연발하게 만든다.

이때 나오는 기침은 그냥 평범한 기침이 아니다. 발작성 기침이다. 목에서 출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지독한 호흡곤란과 통증, 각종 합병증을 유발한다.

기관지 폐렴,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무기폐, 기관지 확장증, 폐기종, 중이염은 기본이다. 심하면 두개골 내부에 출혈이 일어나기도 한다. 경련, 속발성 뇌염, 비출혈, 각혈, 경막하 출혈, 뇌출혈이 일어날 수 있으며....

'너무 심한 기침 때문에 구토나 탈장, 심지어 탈출성 치핵이 올 수도 있지. 말 그대로 항문에 이어져 있는 대장의 일부가 항문 밖으로 빠져나와서 되돌아가지 못하는 상태까지 되는 거야.'

그만큼 지독한 기침을 동반하는 질환이었다. 끝이 없는 기침의 지옥이라 할 만했다. 그렇기에 조상들은 이 질환에 100일 동안의 끝이 없는 기침이라는 '백일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딩동!

[WARNING!]

[환자에게서 보르데텔라 백일해균(bordetella pertussis)이 감지되었습니다. 전형적인 백일해 환자입니다. 경고! 경고! 즉시 감염 예방책을 마련한 후, 다시 진료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

소름이 좍 돋아났다.

하지만 라키엘은 가까스로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기겁해서 놀라거나,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품속의 손수건을 꺼내어 코와 입을 가렸다.

'내가 놀라는 반응을 보이면 안 돼.'

환자인 아이가 보고 있다.

반쯤 인사불성인 상태라지만, 그럼에도 환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 한데 의료인인 자신이 기겁하며 놀라는 반응을 섣불리 보이면 환자가 더 놀라게 된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품게 된다.

아, 의사마저도 저렇게 놀랄 정도로 내 상태가 심각하게 안 좋구나... 라고.

'그건 절대로 안 돼.'

진료에 임하는 순간만큼은, 의료인이 환자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기둥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며, 철칙이다. 그것을 저버리는 순간, 환자와의 신뢰 관계는 무너진다. 라키엘은 그 사실을 되새기며 곁의 데미안과 족장 브라쉬를 돌아보았다.

"다들, 각자의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도록."

"꾸익? 어째서입니까, 인간의 황태자여, 꾸익?"

"이거, 호흡기를 통해서 전염되는 병이니까."

...마치, 코로나19처럼.

라키엘은 무의식중에 붙이려던 뒷말을 억눌렀다. 그리고 백일해의 전염성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환자가 기침을 하면 침방울이 튀겠지? 그게 공기 중에 퍼져서 날아다니다가 다른 사람의 코와 입으로 들어가면 병이 옮겨지는 거야. 혹시, 여기 다른 사람들은 기침을 심하게 하는 병을 앓지 않았나?"

"나약한 몇몇이 기침을 심하게 하기는 했습니다, 꾸익."

브라쉬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아이를 간호한 하인들은 거의 다 한 번씩 겪었고, 툴룬 그 친구도 마지막에는 기침을 제법 심하게 했습니다만, 그게 큰 문제입니까, 꾸익?"

"문제지. 당연히."

큰 문제다.

백일해는 특히 전염력이 강력한 질병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질병의 감염 능력을 표기하는 '기초감염재생산수(R0)'의 수치가 무려 12~18에 달한다. 간단히 말해서 일반적인 독감(R0, 1.4~1.6)의 10배 이상이다. 코로나 델타 변이(R0, 5~9)마저도 가볍게 압살한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방역이나 마스크 같은 건 하지도 않고 있다!

'난리 났네.'

절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불안감과 공포심도 살짝 밀려왔다.

'이건 나도 위험하겠는데.'

보통의 건강한 성인이야 백일해에 걸려도 고생은 할지언정 쉽게 죽지는 않는다. 어지간하면 그렇다. 그러나 이 병약한 몸뚱이는? 자신이 없었다. 자칫 백일해에 걸렸다간 손도 못 쓰고 심각한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라키엘은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말했다.

"방금 말했듯이, 이건 전염력이 강력한 질병이야. 이름은 백일해. 기침을 통해 나오는 미세한 침방울을 통해 병이 번지지. 그러니 지금부터 당장,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다녀야 해."

"꾸익?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꾸익?"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의아해하는 사이, 족장 브라쉬가 말했다.

"인간의 황태자께서는 이곳 지방이 처음이라 잘 모르시나 본데, 이곳에서 이 기침병은 제법 흔합니다, 꾸익."

"흔하다고?"

"예, 누구나 어릴 때나 자라나는 사이에 한 번쯤은 겪습니다, 꾸익. 이걸 이겨내야 진짜 어른으로 대우를 받지요. 물론 이 아이도... 그 시험대에 오른 것일 테고 말입니다, 꾸익."

"...."

백일해가 아예 풍토병이라는 건가. 그럼 이곳 사람들은 다들 어느 정도 백일해에 저항력을 갖추고 있겠구나. 그 와중에 이 아이는... 저항 능력이 좀 떨어지는 편일 테고. 아마도 그런 사실이 생전의 툴룬 상단장을 절망하게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응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라키엘의 말투가 단호해졌다.

"그래도 안 돼. 무조건 실행해."

"정말입니까, 꾸익?"

"당연하지."

그래야 내가 산다. 다들 마스크 대용품인 수건이라도 잘 감고 다녀야 비말을 덜 튀길 테니까. 이쪽 일행이 백일해에 걸릴 확률이 내려갈 테니까.

"그리고 데미안? 너도 지금 당장 나가서 수행원단 전부에게 내 지시를 전달해. 다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음식과 물을 섭취하도록. 당장."

"알겠습니다."

그렇게 데미안과 족장 브라쉬를 밖으로 내보냈다. 잠깐 코로나19의 광풍에 휩쓸리던, 한국의 부경한의원 시절이 떠올라서 PTSD가 도질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억눌렀다. 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눈앞의 환자에게 집중했다.

"후우."

여전히 반쯤 인사불성인 아이. 그 와중에도 연신 격한 기침을 토해내며 괴로워하는 아이. 살펴볼수록 예후가 좋지 않았다.

아이를 살펴보는 라키엘의 눈빛도 무거워졌다.

'안일한 치료법으로는 안 돼.'

그날 저녁, 라키엘은 고민에 잠겨 찌푸려진 미간을 펴지 못했다. 거듭되는 고민을 끝낼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내가 저 아이를 살릴 수 있을까?'

이번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아까 살펴본 바로는 아이의 예후가 너무나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일해에 시달린 지 벌써 제법 됐어. 그 사이에 체력이 너무 소진됐고. 체내에서 증식하고 있는 백일해균을 스스로 몰아내거나 극복할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미 아이 스스로는 그걸 해낼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적절한 치료제의 조력이 절실하다.

'원래 백일해에 걸리면... 잠복기, 혹은 발병 14일 이내에 에리스로마이신(Erythromycin)을 쓰는 게 제일 적절하지. 그러면 임상 경과를 완화하거나 감염 전파를 예방할 수 있으니까. 혹은 클라리스로마이신(Clarithromycin)이나 아지스로마이신(Azithromycin)을 쓰기도 하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곳에는 그런 현대적인 치료제가 없다.

그럼 한방 치료법으로는?

'맥문동탕(麥門冬湯).'

라키엘은 기억 속의 이름을 떠올렸다. 맥문동탕은 가래가 끈끈해서 끊어지지 않는 기침, 기관지염, 기관지천식, 심한 기침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점상출혈, 기침에 피가 묻어나오는 질환에 주로 사용하는 처방이었다.

'맥문동(麥門冬)과 반하(半夏), 찹쌀과 대추, 인삼과 감초가 주로 쓰이지. 특히 맥문동은 점막을 자윤하고 영양을 보급하며 체액의 보충을 도와. 진해, 거담, 소염의 역할까지 해주지. 거기에 인삼과 감초가 신진대사를 증진하고, 반하는 점막의 자극의 줄여주어 기침을 멎게 해주면서 오심과 구토도 치료하지.'

그밖에 함께 곁들여지는 대추와 찹쌀이 기본적인 영양을 보급함으로써, 여섯 가지 약재가 조화를 이루어 자음익기(滋陰益氣), 보익폐위(補益肺胃)의 작용으로 들뜬 기를 달래어 폐의 양허증을 치료하는 원리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약해. 사실 한방 치료의 탕약은 현대적 치료제와 성능을 견주기에는 개념부터가 완전히 다르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한방 약재가 좋다고 해도 현대적 치료제를 이길 수는 없다. 한방의 탕약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평범한 증기기관차가 자기부상열차보다 빠르다고 외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애초에 분야와 방식부터가 달라.'

현대적 치료제는 말 그대로 특정한 질환을 표적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약품이다. 반면 한방의 탕약은?

'전문 치료가 아닌, 자양강장(滋養强壯)의 개념이지.'

환자의 체질을 강성하게 북돋고, 스스로 병마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 환자가 스스로 기력을 되찾을 수 있게 등을 살짝 밀어주는 역할. 그것이 라키엘이 냉정하게 바라보는 한방 탕약의 개념이었다.

'즉, 환자의 면역력 증진을 북돋아 주는, 회복 가능성 부스터인 셈이야.'

그래서였다.

'그 아이, 이름이 네일라라고 했지.'

네일라를 살리기 위한 이번의 치료에는 일반적인 한방 탕약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과가 이미 너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한약을 안일하게 먹이며 안심하다간... 시기를 놓칠 거야. 맥문동탕? 아무리 먹여도 그걸로는 아이가 스스로 병마와 싸울 만큼의 기력을 일으킬 수가 없어.'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왔다.

그 결론이 라키엘을 더욱 괴롭게 하였다.

'쉽지가 않구나.'

그만큼 상황이 좋지가 않다.

이걸 극복하려면? 아이가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백일해를 이겨내게 하려면?

현대적 치료제의 효과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묘수를 떠올리거나, 혹은 기존의 탕약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정도는 해야 지금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아직은 모르겠다.

괴로웠다. 머리를 쥐어짰다. 모든 기억의 서랍과 발상의 근원을 채찍질했다.

그렇게 얼마나 밤이 깊도록 생각에 잠겼을까. 덕분에 그는, 누군가가 느닷없이 자신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야 했다.

쾅쾅쾅-!

...노크 맞나.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라키엘은 생각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 사이, 데미안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지?"

"나요, 꾸익!"

...목소리만 들어봐도 알겠다. 오크 족장 브라쉬였다. 이내 열린 문틈으로 브라쉬의 거대한 얼굴이 불쑥 내밀어졌다.

"죄송합니다, 인간의 황태자시여. 사실은 방금 자다가... 아까 낮에 깜빡 빠뜨린 이야기가 뒤늦게 떠올라서, 꾸익...."

"깜빡 빠뜨린 이야기?"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깜빡하면 자다가 기겁하며 깨어나서 일국의 황태자가 기거하는 방문을 쾅쾅 두드리게 되는 걸까. 일단 들어나 보자는 생각부터 들었다.

"무엇을 깜빡했길래?"

"그게, 네일라를 치료하는 데에 도움이 될 이야기입니다, 꾸익."

"도움? 좀 더 자세히."

라키엘은 앉은 자세를 고쳤다. 족장 브라쉬가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져왔다.

"혹시 인간의 황태자께서는, 이 지방에서만 지극히 희귀하게 발견되는 긴뿌리 감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꾸익?"

182화. 끝없는 기침의 질병 (2)

"혹시 인간의 황태자께서는, 이 지방에서만 지극히 희귀하게 발견되는 긴뿌리 감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꾸익?"

"...."

걸걸하게 울리는 족장 브라쉬의 물음.

라키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긴뿌리 감초? 그런 걸 내가 들어본 적이 있던가.

결론은 쉬웠다.

"없지, 당연히."

금시초문이다.

라키엘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족장 브라쉬가 수박보다 커다란 머리를 의미심장하게 끄덕였다.

"아마도 그러실 겁니다, 꾸익. 그건 이곳 현지의 인간이나 오크도 아는 이들만 아는 그런 풀이니까 말입니다, 꾸익."

"혹시... 엄청난 약효를 지닌 약재인 건가?"

마치 산삼처럼?

기대하며 물었다.

브라쉬가 벌쭉 웃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꾸익."

"아마도?"

"예, 꾸익."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부족의 어르신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더욱 까마득한 조상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시대의 이웃인 강철모래 부족에 아로쉬라 불리던 미남 오크 족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꾸익."

"그런데?"

"하루는 그가 황야를 거닐다가 감초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보이는 감초이긴 했는데, 아로쉬는 옳다구나 하고 감초를 캐내기 시작했지요. 그 시절부터 우리 오크들은 겨울이면 감초를 끓인 차를 물 대신 마시는 걸 즐겼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감초를 캐기 시작한 아로쉬는... 뭔가가 이상함을 금방 깨달았다고 합니다, 꾸익."

"이상함? 어떤?"

"뿌리가 땅속으로, 아래쪽으로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더군요, 꾸익."

"...얼마나?"

좀 흥미로운데.

감초 뿌리는 원래부터 땅속으로 깊이 자라기는 한다. 그런데 끝도 없이 땅속으로 뻗어 있었다면 대체 얼마나 깊었다는 걸까.

라키엘은 귀를 활짝 열었다.

브라쉬가 말했다.

"족히 10미터가 넘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15미터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꾸익."

"헐."

"그뿐만이 아닙니다. 깊고 깊은 뿌리 제일 아래에 주먹만 한 덩어리 수십 줄기가 감자처럼 뭉쳐 있는데, 아로쉬는 뿌리 전체와 아래의 덩이를 조심스럽게 파내어 부락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일족과 다 함께 그걸 끓여서 마셨더니...."

"마셨더니?"

"3대 10톤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꾸익!"

"...."

"실로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꾸익?"

"...."

응 퍽이나.

'그거 그냥 헬스맨 주스잖아?'

라키엘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는데, 듣고 보니 그저 오크들 사이에 잔뜩 뻥튀기가 되어서 내려오는 무안단물급 도시전설, 아니, 헬스 전설이 아닌가 말이다.

절로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그래서, 혹시나 그 긴뿌리 감초를 찾아내기라도 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습니다, 꾸익!"

"어째서?"

"네일라는 제 친우이자, 제가 인정한 인간 전사의 하나뿐인 혈육이니까 말입니다, 꾸익."

브라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러니까 그 아일 꼭 좀 살려주십시오, 꾸익."

"...."

그래서 그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려고 이 밤중에 달려온 거구나. 적어도 진심으로 말이다.

문득, 브라쉬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라키엘도 브라쉬가 해준 이야기를 한 번쯤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일말의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게 되었다.

"하면, 그대가 말한 긴뿌리 감초라는 것 말이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지?"

"열심히 채집해야 찾을 수 있습니다, 꾸익."

"열심히? 어떻게?"

"감초 1만 뿌리 중에 하나의 비율로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꾸익."

"...뭐?"

라키엘은 순간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면봉을 찾고 싶어졌다.

"1만 뿌리 중에 하나? 1만 분의 1?"

"그렇습니다, 꾸익."

"엄청나게 희귀하군. 그럼 긴뿌리 감초를 구분할 방법은?"

"없습니다, 꾸익."

"...."

"지면 위로 드러난 줄기나 잎은 보통의 감초와 똑같다고 했습니다. 오직 뿌리만 다릅니다, 꾸익."

"그럼, 일일이 뿌리를 캐면서 확인을 해야 한다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꾸익."

"...."

그걸 언제 다 캐고 확인해.

라키엘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말이 1만 뿌리지, 수십 수백 명을 동원한들 그만큼을 캐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감초는 다른 작물처럼 밭에서 반듯하고 빽빽하게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드넓은 황야 곳곳에 자연적으로, 불규칙하게, 드문드문 자생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그걸?

광활한 황야 곳곳을 이 잡듯이 뒤져서?

'어느 세월에?'

답이 없다.

라키엘은 결론을 내렸다. 냉정하게 따져보니 그랬다. 설령 1만 뿌리를 다 캐낸다고 해도? 그 속에 긴뿌리 감초가 있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아니, 없을 확률이 더 크다.

'게다가 만약에 그런 식으로 끝끝내 긴뿌리 감초를 찾아낸다고 해도, 그때쯤엔 아이의 치료 시기를 놓친 후가 되겠지.'

그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족장 브라쉬의 이야기 덕분에 잠깐이나마 희망회로에 불을 피웠는데, 아무리 봐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안이었다.

"알겠어. 좋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군. 앞으로의 치료에 참고하도록 하지."

'우리 언제 다음에 밥이나 한번 먹자'와 동급인 영혼 없는 이야기로 브라쉬를 만족시키며 돌려보냈다. 돌려보낸 후에도 계속 고민을 이어갔다.

'긴뿌리 감초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제치고. 현실적으로 따져보자. 증상이 심각한 백일해를 치료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탕약과 침술, 뜸을 조합해야 할까. 조금 더 극단적인 치료법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혹은 안정적인 치료를 이어가며 상태를 지켜봄이 옳을까.

'긴뿌리 감초 같은 비현실적인 방안보단 확실히 그게 옳겠지.'

정말이다.

환자를 치료하며 도박을 걸면 안 된다. 진료는 장난이 아니니까. 최대한 안정적인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니까 긴뿌리 감초 같은 건 제발... 떠올리지 말라고, 이 멍청아.'

라키엘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생각을 이어가려 해도, 방법을 고민하려 해도, 계속해서 족장 브라쉬가 남기고 간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족과 다 함께 끓여서 마셨더니 3대 10톤을 치게 만들었다는 신비의 감초.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얼마나 엄청난 성분을 지니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걸 탕약으로 만들어서 아이에게 먹이면 어떨까. 기대도 됐다.

그러니까... 그 궁금함과 기대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어오, 미치겠네.'

그렇지 않아도 막막한 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른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암담한 와중이었다. 한데 허황되지만 매력적인 약재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찰싹 달라붙어 버리니,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주 그냥 수능 전날 밤에 수능 금지곡 시리즈를 메들리로 들어 버린 기분이었다!

'어쩔 수가 없겠네.'

라키엘은 결국, 인정했다.

'조금 터무니없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겠어. 만에 하나 정말로 긴뿌리 감초라는 걸 찾아낸다면, 그 약효가 실제로 뛰어나다면, 이번 치료의 가장 확실한 게임 체인저가 되어줄 테니까.'

그것만은 확실하다.

어차피 무조건 아이를 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야 오크 부족과 감초 거래를 재개할 수 있고, 별궁 한의원을 무리 없이 운영할 수 있다. 이번 치료에 자신의 안정적인 보너스 수명 획득이 달린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라키엘은 진리의 '둘 다'를 떠올렸다. 일단 안정적인 치료법인, 보통의 맥문동탕을 달여 아이에게 먹이면 된다. 그렇게 일반적인 탕약으로나마 아이의 기운을 북돋으며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긴뿌리 감초를 탐색하면 어떨까.

'가능성이 있겠어.'

비로소 각이 서고 견적이 나왔다. 결심이 새겨졌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 잠시 문밖을 지키도록."

"전하?"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싶구나."

적당한 핑계로 데미안을 쫓아냈(?)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시스템창을 열었다.

'스킬 개방 목록을 불러줘.'

반응은 금방 왔다.

딩동!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합니다.]

화아악-!

눈앞에 가상의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부항]

[2. 뜸]

[3. 약재 감별]

[4. 약초 탐색]

[5. 약술 주조]

[6. 추나 요법]

'추나 요법?'

목록 제일 아래에 예전엔 없던 스킬 후보가 하나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놀라지 않았다. 예전, 앙부아즈에서 '내 손은 약손' 스킬을 개방할 때도 이랬으니까. 전에는 없던 후보가 목록에 슬그머니 추가되어 있곤 했으니까.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라키엘은 시스템창을 열기로 결심했던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스킬 후보를 주시했다.

'약초 탐색.'

지금은 긴뿌리 감초를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니 저 '약초 탐색' 스킬이라면?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쏠쏠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개방한 모든 스킬이 그랬으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유용한 옵션을 제공했으니까.

결심한 라키엘이 되뇌었다.

'4번. 약초 탐색.'

긴뿌리 감초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과장 섞인 도시전설급 소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겠다. 그토록 매력적인 가능성을 그냥 포기하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니까.

딩동!

[목록 4번. 약초 탐색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 (3회차) 비용 : 8,000 HP]

[스킬을 개방하시겠습니까?]

[YES / NO]

"...."

무려 8천.

하지만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마침 보유한 HP도 저걸 커버할 정도가 된다.

'가즈아!'

고민은 짧고, 결단은 과감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딩동!

[한국의 한의원을 운영하던 시기의 당신은, 인맥을 통해 알고 지내던 몇몇 심마니 지인들과 종종 산행을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고인물 심마니 아재들의 어깨너머로 전수받은 지식과 경험이 당신의 피와 살 같은 지식으로 새겨졌습니다.]

[당신이 지닌 재능과 지식이 스킬로 변환됩니다.]

[<약초 탐색> 스킬이 개방됩니다.]

[스킬 개방 (3회차) 비용으로 8,000 HP가 소모됩니다.]

파앗!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800]

소중하게 모아두었던 HP가 쑴펑 깎여나가고 달랑 800만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스킬명 : 약초 탐색 Lv.1]

[야생 약초의 탐색 / 채집에 버프를 받습니다. 스킬 발동 시, 주위 10미터 이내의 약초를 탐색하는 <심마니 모드>로 진입합니다. '심마니 모드'에서는 약초가 지닌 성격, 약효의 강도에 따라 주위의 약초가 색깔로 구분이 됩니다.]

[환자에게 유용한 약효를 지닌 약초는 형광성 연녹색으로 표시됩니다. 약초가 지닌 약효가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환자에게 유해한 독성을 지닌 독초는 형광성 붉은색으로 표시됩니다. 독초가 지닌 독성이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베일을 벗은 약초 탐색 스킬의 내용을 살펴보는 순간.

'미친, 대박.'

눈이 번쩍 뜨였다.

새로운 스킬을 활용할 방법이 대뇌피질 가득 빛의 속도로 떠올랐다.

183화. 감초가 힘을 숨김 (1)

"자, 여기 맥문동탕 받으시고."

"...."

데미안 카이엔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탕약을 내밀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자신을 고용한 이이자, 자신을 최근접 호위로 두고 있는 제국의 후계자. 한데 이 사람은 어째서 지금,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탕약 그릇을 자신에게 건네고 있는 걸까.

"뭐해. 받어."

"...."

받았다.

황태자의 당부가 이어졌다.

"우린 이제부터 출발할 거니까, 넌 여기 남아서 아이한테 이걸 좀 먹여줘야겠다."

"제가 말입니까?"

"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 또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는 그의 말들.

"네가 제일 믿음직하니까. 그러니까 새벽부터 일어나서 정성껏 달인 탕약을 너한테 맡기는 거야. 행여라도 절대 쏟지 말고. 그걸 마셔야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버티면서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전하."

"응?"

"제가 믿음직하다고 하시면서, 어째서 저만 여기에 남겨두고 다른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네가 믿음직하니까 남기는 거지. 멍청하게 탕약을 쏟진 않을 테니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빠르게 달려와서 위급 상황을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제가 전하를 어떻게 찾습니까?"

"지평선을 훑어보면 될 거야."

황당해서 꺼낸 물음에,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여긴 지형의 고저차가 적어서 사방이 탁 트인 평원이니까. 나무라 봤자 키가 작은 관목이 드문드문 있는 게 다니까. 날 찾으려면 흙먼지가 어디서 피어나는지부터 찾아. 그곳에 높다란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면, 거기가 내가 있는 곳이겠지."

라키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부터 그는 일행을 모조리 끌고 나가 황야를 이 잡듯이 수색할 계획이었다. 긴뿌리 감초를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여러 안전장치도 준비했다. 그중에 하나가 우루스였다.

"우루스를 타고 다닐 거다. 나머지 일행은 말을 탈 거고. 모두가 제법 빠르게 달릴 거야. 그러니 자연히 흙먼지가 피어나겠지. 게다가 우루스에게 붉은 깃발이 달린 높다란 장대를 들게 할 테니, 날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대꾸도 하고 싶었다. 제가 믿음직해서 여기에 남겨둔다는 건 궤변인 것 같다고. 저는 당신의 곁을 지킬 때 비로소 가장 믿음직해져야 하는 존재가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 황태자는... 나에 대한 신뢰를 접은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앙부아즈에서도 효율적으로 곁을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역혈의 심법을 어찌어찌 일깨우기 전까지는, 쟈빌론에게 처절하게 밀리며 제 역할을 못 했으니까. 물론 상대가 소드마스터이긴 했지만, 그건 변명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

서운하고 야박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했다.

"하지만 저 말고도 아니스 양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스는 웨어울프이자 수간호사다. 아이를 보살피고, 응급 상황을 캐치하여 일행에게 알리는 일에 더욱 적합하지 않은가.

한데 황태자에게선 뜻밖의 대꾸가 돌아왔다.

"아니스도 같이 남을 건데?"

"예?"

"생각을 해봐. 만약에 정말로 아이한테 응급상황이 생겨서 그걸 알려주러 네가 뛰어오면, 그 사이에 누가 아이를 돌봐야 할까?"

"...."

"그래서 너와 아니스 둘을 남기는 거야. 그럼 아이를 잘 부탁한다. 아, 꾸꾸도 같이. 알지? 꾸꾸는 끼니 놓치는 거 싫어하니까 챙겨온 꿀물 잘 챙겨주고."

라키엘은 그 말만 남기고는 방을 나섰다. 물론 그는 데미안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한테 서운하다고 느끼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별궁에서의 일상적인 호위 상황이 아니기에, 수많은 불확실성과 변수가 존재하는 황야로 나가는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행여나 황야의 몬스터가 습격하는 돌발적인 상황에서 녀석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안 된다.

데미안이 위험해지면, 덕분에 녀석의 내면에 있는 존재가 각성해 버리면 모두가 망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녀석은, 온실의 화초로 남아 주어야 한다.

'앞으로는 황도에서만 녀석을 근접호위로 데리고 다녀야겠어.'

이곳 같은 타지에서는 최대한 안전한 곳에 녀석을 짱박아(?) 둠이 나을 듯했다. 녀석이 지닌 잠재력과 능력을 생각하면 심히 아깝긴 하지만, 그거 좀 써먹겠다고 세상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건, 그럼 다들 출발."

"누우우우우-!"

우루스의 워낭소리 충만한 포효와 함께 일행이 변경도시를 출발했다. 관문을 지나 황야로 나왔다. 그때부터였다. 우루스의 소발굽과 일행의 말발굽이 트롯(trot)과 켄터(canter)의 중간 속도로 땅을 박찼다.

다가닥, 다닥!

'승차감, 아니, 승우감 좋고.'

라키엘은 안정적으로 달리는 우루스의 어깨 위에서 고개를 쭉 빼들었다. 그리고 지난밤에 얻은 새로운 스킬을 발동했다.

'약초 탐색.'

딩동!

[약초 탐색 (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심마니 모드 HUD>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주위 10미터 이내의 약초를 자동으로 탐색하여 결과물을 시야에 표시합니다.]

[환자에게 유용한 약효를 지닌 약초는 형광성 연녹색으로 표시됩니다. 약초가 지닌 약효가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환자에게 유해한 독성을 지닌 독초는 형광성 붉은색으로 표시됩니다. 독초가 지닌 독성이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보물찾기 타임, On!]

메시지가 좌르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눈알이 살짝 뻐근해졌다. 시야가 살포시 변했다. 마치 눈동자에 증강현실 필터 렌즈를 끼운 것처럼, 지면에 드문드문 자라난 식물들에 외곽선이 새겨졌다.

'오오오.'

라키엘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결과는 과연 스킬 안내 그대로였다. 눈길이 닿는 곳, 그중에서 10미터 이내 범위의 식물들에 인공적인 색상이 덧씌워졌다.

'대부분은 회색에 가깝구나.'

주변에 보이는 이름 모를 잡풀이 그러했다. 녹색이나 적색의 색상이 아주 희미하거나, 거의 회색에 가까웠다. 즉,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닌 잡초인 셈이었다.

반면, 정말로 약효를 지닌 풀은?

"정지!"

라키엘이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곳, 바위틈에 선명한 녹색으로 표시되는 식물이 자라나 있었다. 라키엘은 절로 가슴이 쿵쿵쾅쾅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녹색이 엄청나게 선명한데. 설마 첫 빠따에 바로 긴뿌리 감초를 찾아낸 건 아니겠지?'

그는 얼른 우루스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조심스럽게 약초를 살폈다. 1미터 정도로 곧게 자라난 줄기와, 난형으로 7개씩 엇갈리며 자라난 이파리. 전형적인 감초였다.

'파볼까.'

콩닥콩닥 탭댄스를 추려는 가슴을 억누르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이걸 파보도록.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알겠습니다, 전하."

근위대원들이 삽과 호미를 들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영광스러운 황가의 갑옷을 걸치고서, 몸빼바지 입은 시골 할머니 같은 자세로 감초 뿌리와 한참을 씨름했다. 덕분에 곧 감초가 뿌리째로 뽑혀 나왔다.

"...쯧, 그냥 평범한 감초였구나."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족장 브라쉬의 말에 따르면 긴뿌리 감초는 땅속으로 최소한 10미터는 뻗어 있다고 했다. 반면, 이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했다.

'그럼 스킬로 표시되는 녹색의 진하기가 이 정도면... 이곳 지방에선 평범한 감초라는 거겠지. 어쨌건 알겠다. 스킬 성능 확실하구만.'

비록 첫 채집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덕분에 스킬이 표시해주는 색깔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그럼 긴뿌리 감초는 이것보다 훨씬 진한 녹색으로 표시되겠지.'

한번 기준을 잡았으니 됐다.

라키엘은 다시 우루스의 등에 올랐다. 일행과 함께 흙먼지를 마셔가며 황야를 내달렸다. 눈이 빠지도록 사방을 둘러보며 심마니 모드를 활용했다.

'기준을 잡았고, 함유된 약효의 정도가 확실하게 표시가 된다는 것도 확인했어. 이러면 돼.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찾을 수도 있겠어.'

거기에 우루스의 지치지 않는 체력도 제법 긍정적인 요소였다. 이대로 온종일 꾸준히 뛰어다니며 사방을 관측하면? 어쩌면 이른 시일 내에 긴뿌리 감초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새로 전입신고를 한 아라비아 유전처럼 쑴펑쑴펑 솟구쳤다.

"그러니까, 가즈아-!"

"누우우우우-!"

힘차게 달렸다.

열심히 달렸다.

점심 먹고 달렸다.

춘곤증 참으며 달렸다.

해가 기울도록 달렸다.

그런데... 보이지가 않았다!

'역시 하루 만에 찾는 건 무리인가.'

라키엘은 뻐근해진 눈알을 힘겹게 굴렸다. 여전히 심마니 모드는 쌩쌩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노을이 지는 황야 어디에도 긴뿌리 감초는 보이지 않았다. 가끔 녹색으로 표시되는 녀석이 보여서 반갑게 달려가 보면? 그냥 평범한(?) 감초였다.

'이 동네 감초는 다들 약효가 강력해서, 그게 오히려 문제야.'

하나같이 다들 짙은 녹색으로 표시됐다. 특A급 감초였다. 그래서 오히려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것보다 더 진한 녹색이 과연 존재할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이러면 난감해지는데.'

라키엘은 피로감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오늘은 허탕이다.

'곧 해가 질 테니 슬슬 돌아가야겠네.'

첫술에 배부르랴.

옛말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랬다. 내일, 어쩌면 모레쯤엔 긴뿌리 감초가 기적처럼 보이지 않을까 희망회로를 열심히 태웠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으음?"

우루스의 발길을 도시 쪽으로 돌리려던 때였다. 바로 아래쪽 지면에 뭔가가 보였다. 바위틈에 평범하게 자라난 감초였다. 그런데 심마니 모드에 표시되는 색깔이 조금 이상했다. 회색이었다.

'허. 쓰읍.'

처음으로 보는, 회색으로 표시되는 감초였다. 덕분에 라키엘의 눈빛도 회색으로 물들었다.

'하필이면 하루 허탕치고 돌아가려는 마지막에 약효도 없는 회색 감초가 탐색이 되는 건 또 뭐냐.'

운이 나쁜 하루인 건가.

괜히 찜찜해졌다.

내일도 나쁜 운이 이어질 것만 같은 미신적인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무시하고 지나갔다. 한참을 멀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잠깐만.'

뭔가, 머릿속에서 섬광 같은 번득임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 떨렸다. 벼락 치는 깨달음. 무의식중에 떠올린 가능성.

"우루스! 잠깐만 정지!"

다급히 우루스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바빠진 걸음을 돌렸다. 조금 전에 무시하며 지나왔던 감초를 향해서였다.

다시금 감초를 살펴보았다. 심마니 모드에는 여전한 회색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즉, 약효가 아예 없는 완벽한 쓰레기 잡초라는 뜻이다.

하지만....

'감초가 그게, 가능한가?'

어떠한 감초라도, 설령 하급이나 폐급이라고 해도 아주 약간의 약효는 지니는 법이다. 그게 당연한 이치다. 길가의 이름 모를 잡풀도 미약한 약효는 지니고 있으니까. 실제로 근처에 보이는 잡풀들도 회색에 가까울 뿐이지, 자세히 보면 아주 희미한 녹색 정도로는 표시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감초는 다르다.

완벽한 회색이다.

불가능한 색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이 떨린다.

'어쩌면....'

라키엘은 회색으로 표시되는 감초 앞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지극히 신중한 손길로 뿌리 옆의 흙을 파내었다. 심마니 모드에 온통 회색으로만 보이는 줄기의 아래쪽. 뿌리의 색깔을 확인했다.

몇 초가 흐른 후, 그의 함성이 해 저무는 황야를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심봤다아아아아아-!"

184화. 감초가 힘을 숨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