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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2황자궁에서는 어김없이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각국에서 초청된 50인의 왕녀와 영애들이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우아한 전쟁을 개시했다.

오가는 와인잔과 미소.

달콤한 음악과 디저트.

레이디들의 볼이 향긋한 취기에 살짝 물들어가는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묵묵히 구석에 있던 라키엘이 움직였다. 연회장 단상 위로 올라갔다. 모두의 관심 밖에서, 천천히, 눈짓을 보냈다.

"...."

그의 눈짓을 받은 2황자궁의 시종들이 움직였다. 웬 기다란 테이블을 들고 와서 연회장 단상에 놓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호화로운 상자를 줄줄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그 모든 일들이 일사불란하게 착착 이루어졌다.

덕분에 연회장 모든 이들의 춤과 대화가 멎었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과 그 위에 쌓인 화려한 디자인의 상자, 그리고 라키엘에게로 쏠렸다. 그 순간, 라키엘이 모두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흠흠, 다들 오늘도 이렇듯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쿨룩... 콜록! 아울러, 저는 오늘 이곳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아름다운 특혜와 기회를 드리고자, 이렇듯 귀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웅성웅성....

모두는 숙덕거리며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한편으로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저 비리비리한 황태자는 뭘 하려는 걸까. 특혜와 기회? 그게 뭐길래 테이블 위에 상자를 잔뜩 쌓아둔 걸까.

궁금해졌다.

관심이 갔다.

라키엘의 입가에 이기적이고 보람찬 미소가 빵긋 맺혔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통하여, 근래 제가 개발한 체중 조절의 혁명, 다이어트 특효약, '더 슬림'을 여러분께, 사상 최초로 소개합니다."

빠밤!

라키엘의 눈짓과 함께 악단이 웅장한 트럼펫을 불었다. 그가 서 있는 단상 뒤로 드리워진 커튼이 확 걷혔다. 걷힌 커튼 뒤에서 균형 잡힌 엘프 피지컬을 뽐내는 오늘의 광고 모델, 엘프 실비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모두의 시선!

실비아는 애써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이를 갈았다.

'황태자... 연회에 참석해서 가만히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던 말이... 이런 뜻이었어?'

그렇게, 기적의 다이어트 약품이라 불리게 될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농축액, 더 슬림의 본격 홈쇼핑 판매가 연회장을 기습 강타했다.

157화. 값비싼 진료비 (2)

하루가 지났다.

홈쇼핑 타임의 결과는 매출 대박, 완판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약팔이 수완에 야유와 갈채를 동시에 보냅니다.]

[심장 : 크어어 뻑 예ㅋㅋㅋ]

[허파 : 허허허? 파하하핰ㅋㅋㅋㅋㅋ]

[대장 : 이 인간 약을 파는 게 아니라 아주 빨고 다니지 말입니다ㅋㅋㅋ]

[간장 : 이게 되네ㅋㅋㅋㅋㅋㅋㅋㅋ]

[위장 : 근데 다이어트 약품을 엘프 모델로 광고하는 건 허위광고 사기 아님?]

[콩팥 : 그럼 한국 사람들 얼굴이나 비율이 전부 이징재나 원반이라서 걔들 명품 광고 보고 옷 사입겠냐고 아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교묘하고도 야비한 수법에 감탄하였습니다.]

[오장육부가 미운 놈한테 떡 주듯이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2,900]

"...."

머릿속에서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오장육부. 녀석들의 수다를 들으며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내심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후우. 다이어트 약품 그거, 설마 하룻밤 만에 다 팔릴 줄은 몰랐는데.'

어젯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었던가. 연회에 참석한 영애들의 볼이 향긋한 칵테일의 취기에 살짝 물들어 오르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기적의 한타(?) 구도 타이밍이 왔구나 싶었다. 즉시 움직였다. 단상 위에 올라서서 테이블을 마련하고, 일사불란하게 홈쇼핑 판매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소개했다. 커튼을 걷고서,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광고 모델 실비아의 모습을 공개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오랜 실전과 운동으로 다져진 실비아의 황금 비율 피지컬이 그 자체로 설명서였고, 개연성이었다.

덕분에 어젯밤, 심드렁하던 영애들의 눈빛이 그토록 활활 불타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다들 상담 테이블에 줄을 섰다. 예약구매 서류에 서명하기 바빴다. 그렇게 50인의 영애는 물론이고, 그녀들을 수행하던 수행기사들에게마저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농축 다이어트 보조 약품, 더 슬림을 팔아치웠다.

특별히 퍼스트 로열 패키지 에디션이라는 이름까지 붙이며, 바가지를 팍팍 씌워서!

"...밤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지. 그거, 엄연한 사기 행각이 아닌가?"

한창 지난밤 아름다운 완판의 기억에 잠겨 있던 무렵이었다.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와 고막을 푹 쑤시고 들어왔다.

라키엘은 기억의 서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완판 모델님?"

"...."

선선한 바람이 부는 아침 산책 정원.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냉랭한 인상의 엘프, 실비아의 얼굴이 한밤중에 물 마시러 주방에 나왔다가 바퀴벌레와 마주친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즉, 이쪽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경멸의 이모티콘이 백만 개쯤 떠올랐다.

그녀가 미간을 콱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어제 말이야. 어린 인간. 너는 내게 말했지. 진료비를 낼 수 없다면 대신 다른 일을 해달라고. 연회장에 초청할 테니, 그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예,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 그런 사기 행각에 동참하라는 뜻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사기 행각이요? 제 약품 판매가?"

"그래. 그쪽이 저지를 짓이 그런 거짓과 기만의 술수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거절하셨을 거다?"

"당연하지."

그녀가 짓씹듯 말했다.

"그렇기에 의심이 드는군. 숲을 불태운 보상을 넉넉한 금전으로 해주겠다던 그쪽의 제안 말이야. 그거, 정말로 지킬 생각은 있는 거겠지?"

"당연하지요."

라키엘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인심 좋은 미소가 한껏 맺혔다.

"어젯밤에 실비아 님이 완판 모델로 나서 주신 덕분에 큰돈을 벌었으니까 말입니다."

"...."

"정말입니다. 설마하니 다이어트 약품이 하룻밤에 다 팔릴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그거, 스페셜 패키지라서 더 비싸게 받았거든요. 하지만 뭐, 타겟으로 삼은 구매층이 워낙 지갑 빵빵한 분들이셔서."

"...."

"덕분에 보상을 드리고도 돈이 조금 남을 것 같습니다?"

"...."

그거, 전부 내 진료비인 거잖아, 이 사기꾼아.

실비아가 가자미눈으로 라키엘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 힐난의 눈빛에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곤 해도 제가 마냥 사기만 친 건 아닙니다."

"어떻게? 나는 그 다이어트 약품인지 뭔지는 먹어본 적도 없는데."

"압니다. 덕분에 제가 사기꾼 약장수처럼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제가 파는 약의 효능만큼은 진짜니까 말입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진짜다. 베스파로스 여왕벌주 엑기스의 효과와 부작용 등등의 모든 데이터를 일찌감치 수집하고 분석했으니까 말이다.

"2황자 녀석에게 열심히 먹였거든요. 덕분에 살을 왕창 뺄 수 있었고. 물론 그 약만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살이 빠지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당연히 식단과 운동이 빡쎄게 병행되어야 한다. 거기에 더 슬림을 먹으면? 식단 조절과 운동의 효과를 한층 증폭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약효는 진짜입니다. 물론 약의 복용 방법과 용량, 복용 시의 주의점은 패키지 안에 최대한 상세한 설명서로 첨부될 거고 말이지요."

"...."

"아, 그리고 예약 구매 서류에는 사후지원 서비스의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사후지원?"

"예. 약품을 꾸준히 복용하며 식단을 지켰다는 증명이 되는데 살이 안 빠질 경우, 약품 구매 비용을 전액 환불해 주겠다는 조항입니다."

"식단을 지켰다는 게... 증명이 되나?"

"뭐, 아쉬운 쪽이 꼼꼼히 준비해야죠?"

"...."

이놈 이거, 암만 봐도 사기꾼 맞는 거 같은데.

실비아는 마뜩잖은 눈초리를 차마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어젯밤에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 부분을 엘프에게 보상금으로 안겨줄 거니까. 그게 약속이니까.

'그리고 남은 돈은... 앞으로의 일에 써야겠지.'

최근 설계하고 있던 계획을 떠올렸다. 남은 돈은 그 계획을 실현시키는 자금으로 쓰일 것이다.

"어쨌건, 그래서 말입니다. 저는 이만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봐야겠습니다."

"황제를?"

"예. 절 부르셨거든요. 아침 일찍부터."

"어째서?"

"모르죠. 아마 혼쭐이 나게 될 것 같지만."

"혼쭐이라. 그런 것치고는 걱정이 없는 듯 보이는데."

"오늘 혼이 나야 제 다음 계획이 원활하게 진행이 될 거라서요?"

"다음 계획이라니?"

"별궁 한의원을 종합병원으로 더 크게 키워보려고 말입니다."

"...."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고, 실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종합병원? 그걸 위해서 오늘 황제한테 혼이 나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인간,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움직이는 걸까. 허세인 걸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한데.

'내가 어쩌면... 얽히지 말았어야 할 인간과 얽혀 버린 건 아닌지.'

그녀의 입가에서 후회의 입김이 새어나왔다. 다른 집행자에게 일을 떠넘길 것을, 괜히 자신이 이번 일을 맡았구나 싶기도 했다.

그 사이, 라키엘은 태연하게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그럼 지급해드릴 보상금의 규모와 파견할 숲 복구 인력이 확보되는 대로 다시 알려드리기로 하지요. 그동안 별궁에서 편히 쉬시길."

그는 실비아를 남겨두고 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황제를 알현할 때였다.

"대관절, 너는 어찌하여, 짐이 전해준 구혼장을 그따위로 장난처럼 다루었더냐?"

광활할 정도로 드넓은 집무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처음 날아온 것은 황제의 진노한 목소리였다. 환영 인사 따위는 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엄격한 눈빛만이 가슴에 파파팍 꽂혀 왔다.

즉, 황제는 완벽하게 전투적인 갈굼(?) 모드였다. 아마도 이쪽이 구혼장을 2황자에게 짬처리하려고 벌인 일을 질책하는 것일 테지.

라키엘은 내심 태연하게 웃고 말았다.

'후우. 역시나 예상대로네.'

솔직히 이젠 황제의 까칠한 모습을 보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전에는 엄청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황제의 저러한 갈굼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지금의 저 갈굼 또한 일종의 '테스트'라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괜찮다. 오히려 이 갈굼이 반갑다. 이 테스트를 무난히 넘기면? 흡족해진 황제는 이쪽이 꺼내는 요구를 흔쾌히 허락할 거다.

'그러니까 제발! 2인분 같은 갈굼 1인분 낭낭하게 때려 주세요!'

라키엘은 오히려 열망했다. 그런 소원이 통한 것일까. 황제의 따끈따끈한 훈계 융단폭격이 쏟아져 내려왔다.

"가소롭고 또한 가소롭도다. 감히 너는, 최근 네가 벌여온 일들을 짐이 모르고 있으리라 여겼더냐? 짐은 큰 기대를 품고서 너에게 구혼장을 직접 전하였다. 네가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랐다."

황제의 목소리에 점점, 빡침이 그라데이션(?)으로 깃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건 이쪽의 반응을 떠보려는 연기다. 그걸 아는 라키엘은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도 갈굼은 계속해서 더욱 맹렬하게 쏟아졌다.

"한데 너는 어찌하였더냐. 감히, 황실의 중대한 혼사를 장난처럼 여기며 그걸 2황자에게 떠넘기려 들고 있지. 심지어 어젯밤에는 연회에 참석한 각국의 영애와 기사들에게 괴이하기 짝이 없는 약까지 팔았다지? 상스럽기가 짝이 없게, 연회장에서 계약서까지 주고 받아가며 말이다. 짐의 말이 맞지 않느냐?"

"예, 맞사옵니다. 저는 폐하의 말씀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사옵니다."

"그래?"

"예, 폐하."

"한데 어찌하여 그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더냐."

"제가 황실의 혼사를 조금도 장난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당연하다는 듯.

다 알고 있다는 듯.

평범한 말 속에 뼈를 잔뜩 넣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황실의 혼사를 장난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게 무슨 뜻이더냐."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떨어져 내려오는 황제의 시선이 묵직해졌다.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묵묵히 받아냈다. 이내 서서히,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의 눈빛과 기색에 놀라움과 흥미가 깃들었다.

"...설마."

"예, 폐하. 그 설마가 맞을 것이옵니다."

"정녕, 너는 짐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었더냐?"

"예, 폐하."

물론이다.

"언제부터였느냐?"

"폐하께 구혼장 다발을 건네받고 약간의 시일이 지난 때부터였사옵니다."

"하면, 네가 짐작한 짐의 의중을 대신 말해볼 수 있겠느냐?"

"물론이옵니다, 폐하."

...사실은 말이지요.

그 질문만 오매불망 기다렸사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황제의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며 흡족함 포인트를 듬뿍 따내고, 종합병원 개원 허락까지 얻어낼 쇼타임, 스타트.

기회를 포착한 라키엘의 혓바닥이 현란촉촉농염한 트월킹을 추기 시작했다.

158화. 황제와의 담판 (1)

추억이 춤을 춘다.

지금도 눈을 감을 때마다.

아니, 눈을 뜨고 있어도 항상.

이 아비는 추억에 잠겨든다. 미소를 참는다. 아비가 아닌 짐이기 위해 애써 굳은 마음을 다진다. 너를 볼 때마다 작은 아기였던 너를 안아 들던 첫 순간이 떠오르기에, 아비는 항상 이렇듯 번민하다 미소를 지운다. 끝내 아비 아닌 짐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지금도, 짐은 그렇다.

"...."

황제는 가만히 눈길을 들었다. 엄격해 보이는 눈동자로, 그 속에 담긴 본심을 꾹 눌러두고서, 냉철함과 혹독함을 애써 가장하며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 라키엘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를 잃었던 아이. 타고나길 연약하여 뜀박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였던 아이. 하여 볼 때마다 마음을 두 갈래로 찢어놓던 아이였다.

아비의 마음은 언제나 저렸다.

황제의 마음은 항상 참담했다.

아비의 눈으로 볼 적에는 애타게 응원을 하였다. 황제의 눈길로 볼 때에는 엄하게 독촉해야 하였다. 상반된 두 마음 사이에서 항상 번민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이기는 것은 황제의 마음이었다.

지금도 그리 하여야 할 터인데.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로서 분명 냉정해져야 함이 마땅한데. 요즘은 그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자꾸만 아비의 마음이 가슴을 흔들었다. 저 아이를 조금만 더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아 주라고, 달래듯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였다.

황제는 눈에 힘을 주었다. 짐짓 더욱 엄격해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감히, 네가 짐의 의중을 파악하였노라 자랑스레 떠들 수 있겠느냐? 정녕코?"

"예, 폐하."

"자신은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폐하."

"...."

사실일까.

과연 저 아이가 자신의 뜻을 처음부터 파악하고 헤아렸던 것일까. 묘한 기대감 속에서 황제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첫째, 라키엘을 굳은 눈길로 굽어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 담긴 일말의 흐뭇함을 미처 모두 감추지는 못하였다.

덕분에 라키엘은 눈치챌 수 있었다.

'저 양반, 엄청 기뻐하네.'

그냥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다. 보는 사람이 없다면 주먹을 휘두르며 환호성이라도 지를 기세다. 그걸 열심히 억누르는 황제의 본심이 얼핏 느껴졌다. 꾹 쥐고 있는 주먹과,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눈꼬리의 주름을 보자니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오히려 마음이 착 가라앉음을 느꼈다. 묘하게 가슴 한쪽으로 스며드는 죄책감. 내게 저런 눈길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사실 난 당신의 아들이 아닌데.

하지만 그는 작은 감정의 물결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지금은 쓸데없는 감상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도 아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쇼타임.'

마음을 다졌다. 죄책감이 밀려난 빈자리를 자신감 스민 미소로 채웠다. 황제를 바라보았다. 정성껏 준비한 말들을 혓바닥 위에 촵촵 올렸다. 발사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폐하께서 제게 구혼장 다발을 직접 건네주셨을 때부터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사옵니다. 그것을 보다 명확히 알아챈 것은 시일이 조금 더 지난 이후부터였고 말이옵니다."

"흐음, 무엇을?"

"폐하께서는 그 구혼장 전부를 거절할 생각이지 않으셨사옵니까?"

"짐이? 그것들을 전부?"

"예, 폐하."

"가당찮구나."

"아니실 텐데요."

"그리 건방진 짐작을 품은 근거가 무엇이더냐?"

"폐하께서 저를 일찌감치 혼인시키지 아니하셨기 때문이옵니다."

"...뭐?"

황제가 멈칫했다.

라키엘은 내심 미소를 삼켰다.

'빙고.'

역시나 예상대로다.

어째서 소설 속 황태자 라키엘은 일찍 혼인을 하지 않았는가. 사실 그동안 나름 많이 생각하고 궁리했던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라키엘의 건강이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해도, 혼인의 상대로 매력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일단은 황태자였다. 만약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반 강제로라도 짝을 찾아 맺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

처음엔 아리송했지만, 요즘은 알 것 같았다.

"만약 저를 일찍 혼인시켰다면, 지금쯤 벌써 황손을 얻으셨을 겁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저를 건너뛰어 안정적으로 폐하의 뒤를 이을 황손을 말입니다."

사실이다. 그렇게 황손을 일찌감치 얻었다면 황태자 라키엘의 건강이 폐급이라 해도 문제가 없다. 황제가 건재한 사이에 황손이 충분한 나이로 자라줄 테니까. 과감한 라키엘 패싱(?)을 감행하고 황손에게 황위를 물려주면 되니까.

"하오나 폐하께서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으셨지요. 그 뜻은 자명하옵니다. 어쨌거나 처음부터 저를 건너뛸 생각이 없으셨다는 것. 그렇기에 대신... 제게 보잘것없는 가문의 짝을 맺어줄 뜻이시겠지요."

"허. 건방진 추측이로구나."

"동시에 정확한 추측이겠지요."

"감히 확신을 하는 것이더냐?"

"예. 그렇기에 감히 짐작할 수 있었사옵니다. 구혼장을 제게 넘기신 것 자체가 하나의 테스트라고 말이옵니다."

"테스트라...."

"제가 구혼장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지켜보며 제 역량을 시험하고 가늠하시려던 것, 아니시었사옵니까?"

"...."

"하여 폐하께서 가늠하시던 정답대로 행하였을 뿐이옵니다."

"...짐의 의중에 따라, 모든 구혼장을 거절하며, 동시에 비난을 받지 않을 적절한 행사와 명분을 마련하였다?"

"예, 폐하."

라키엘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사실 연회는 광역(?) 거절을 시전하기 위한 적당한 핑계일 뿐. 2황자가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맺어지면 당연히 더 좋은 거고.

황제의 눈길이 굳었다.

"참으로 알량한 자신감이로구나. 너는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짐이 너를 빈한한 가문의 여식과 맺어줄 생각을 품었으리라 짐작한 것이더냐?"

"그것 또한 간단한 문제이옵니다."

"...고하여 보거라."

"예, 폐하. 그 답은 저의 건강이 아직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건강?"

"그렇사옵니다, 폐하.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저는 아직 나약하옵고, 언젠가 중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눈을 감을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시겠지요."

"...."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들의 단명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것이 수백, 수천 번이었다. 황제로서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아비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외면할 수는 없는 가능성이기도 하였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하여 만일의 경우 제가 중년의 나이에 쓰러졌을 때. 그때 황손의 나이가 애매하게 어리다면... 저의 짝이 될 황후의 가문이 매우 중요해지지 않겠사옵니까?"

"...."

"만약 황후가 강성한 가문의 출신이라면, 황후와 그 외척들은 어린 황자를 허수아비로 앉히고서 황가의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겠지요. 아마 폐하께서는 그런 외척의 발호를 바라지는 않으실 것이옵니다."

"과연, 그리 생각하였느냐?"

"예, 폐하. 그렇기에 저를 일찍 혼인시켜 후사를 일찍 준비한 것도 아니니, 분명 제 짝은 빈한한 가문의 여인이 될 것이라 짐작을 하였사옵니다. 그러니 이번에 구혼장을 보낸 영애들은 모두 후보가 아닐 것이라 보았고 말이옵니다."

"할 말은 거기까지이더냐?"

"예, 폐하."

"듣자하니 혀 놀림이 제법 예사롭지가 않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라키엘은 태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능글맞을 정도로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황제는 내심 침음을 삼켰다.

'이 아이는... 언제 이렇게 성장하였단 말인가.'

정답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자신의 속내를 확실하게 짚어냈다. 아예 반박할 여지마저 없을 정도로, 빈틈없는 추측과 분석이었다.

놀라웠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를 잃었던 아이. 타고나길 연약하여 뜀박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였던 아이. 하여 볼 때마다 마음을 두 갈래로 찢어놓던 아이였다.

그렇듯 언제나 병상에 누워만 있던 아이가, 차츰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갖가지 일을 벌이더니... 어느샌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름이 돋았다.

뛸 듯이 기뻤다.

그렇기에 황제는 더욱 표정을 굳혔다.

"감히 세 치 혀 놀림으로 짐의 의중을 짚어낸 듯이 기고만장해하는 꼴을 보자니, 참으로 가당치 않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제는 겁을 내지도 않는 것이더냐?"

"저는 그저 폐하의 뜻에 따라 몇 마디 어지러운 말씀을 꺼내었을 뿐이옵니다."

"끝까지 알량한 혀 놀림에 의지하려 드는구나."

"그 또한 송구하옵니다, 폐하."

"허."

황제의 헛웃음이 집무실을 채웠다. 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사실은 오른쪽 왼쪽 콧구멍이 흐뭇함의 메들리 박자로 벌렁거리려는 것을 힘껏 참아내며, 황제가 말했다.

"잡설은 되었다. 오늘 네가 짐을 찾아온 것은 분명 원하는 바가 있어서이겠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어디 말해보거라."

"제 청을 들어주실 생각이시옵니까?"

"감히, 청을 말하기도 전에 떼를 쓸 참이더냐?"

황제의 눈빛이 엄해졌다.

그러나 라키엘은 진실을 알았다.

겉으로는 화가 난 듯이 구는 황제. 그러나 사실 속으로는 엄청나게 흐뭇해하고 있다고. 자신의 의중을 정확히 맞춘 이쪽에게 상을 내리려 하고 있다고. 그 상이 바로....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것이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줄 것이다. 그럴 각을 만들기 위해 황제를 힘껏 구워삶은 거니까.

라키엘은 짐짓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하오면 폐하께, 감히 청을 드리옵자면...."

그의 머릿속이 재빠르게 착착 돌아갔다. 최근 품고 있던 장기 계획을 떠올렸다. 그것은 별궁 한의원을 종합병원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그래야...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으니까.'

앙부아즈에 있던 무렵이었던가.

군의관 리한으로 위장 복무를 하며 은근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혼자서 모든 병원 진료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실은 그러면 안 되지. 효율이 너무 떨어져.'

생각해보면 그랬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진료를 해도, 하루에 진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별궁 한의원이 커지고 명성이 높아질수록 몰려드는 환자가 많아질 것이다.

그래서였다.

'나 혼자서 그걸 다 진료할 수는 없어. 사실은 요즘도 이미 충분할 만큼 벅차. 가르딘 경 외에 다른 의사들이 필요해.'

내과, 외과,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등등. 여러 다양한 의사를 고용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러면 자신은?

'나는 보너스 수명을 확실하게 줄 수 있을 중환자만 맡고, 나머지 자잘한 환자들은 고용된 의사들에게 토스하는 거지.'

그러면 된다. 보너스 수명 좀 얻어보려다가 무한 진료에 짓눌려 과로사 당하는 팔자(?)를 모면할 수 있다. 훨씬 효율적으로 보너스 수명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쌓아온 실적을 근거로, 제게 황도 마젠타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 자격을 주십시오."

라키엘의 도전적인 요구가 황제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159화. 황제와의 담판 (2)

"제게 황도 마젠타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 자격을 주십시오."

"...무어라?"

질렀다.

요구를 던졌다. 과감하게 내민 요구가 황제의 표정을 희미하게 흔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명예 교수의 지위는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니까.'

필수 요소.

살다 보면 무엇을 하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준비물이 있다. 컴퓨터 게임을 하려면 컴퓨터가 있어야 한다. 대학원생이 되려면 인류의 존엄을 포기할 각오가 필요하다. 퇴근을 하려면 출근을 해야 한다.

이번에 자신이 품은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명예 교수의 자격이 반드시 필요했다.

"짐이 하나 묻자꾸나.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라. 어찌하여 너는 그런 황당한 지위를 요구하는 것이더냐?"

과연, 황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이쪽을 굽어보았다. 기다렸던 질문이다. 라키엘은 미리 준비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제가 운영하는 별궁 한의원이 아직 불법 의료시설이기 때문이옵니다."

"흐음."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제겐 아직 의사 면허가 없사옵니다. 그렇기에, 제국의 의료법상 저를 대표로 삼고 있는 별궁 한의원 또한 엄밀히 따져 미등록 시설, 무자격 의료 시설에 해당합니다."

"...그러하였더냐?"

"예, 폐하."

"짐은 거기까진 미처 몰랐다만."

"...."

"하면 황태자가 공공연한 위법을 자행하고 있었으니 당장 별궁 한의원을 폐쇄...."

"아니, 그게 아니옵고!"

재빨리 황제의 말을 잘랐다.

"마젠타 의료대학의 명예 교수는 의사 면허 소지자와 같은 지위와 자격을 지닌다고 들은 바가 있사옵니다."

"허?"

"그렇기에, 제가 명예 교수의 자격을 얻는다면 의사 면허를 소지한 것과 법적으로 동일한 상태가 되어, 별궁 한의원도 불법 의료 시설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한가?"

"예, 폐하."

"단지 의사 면허와 동일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이런 무리한 요청을 하는 것은 아닐 테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고개를 숙이며 내심 감탄했다. 역시 황제다. 이쪽의 요구에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럼 이쪽도 어느 정도는 패를 공개해야겠지.

짧은 계산을 마친 후에 말했다.

"저는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고 싶사옵니다."

"더 많은 의사를?"

"예, 폐하."

"흐음. 그런 이유라면... 그래. 정식 의사 면허를 소지한 의사들이 굳이 불법 의료시설에 취업하려 들지는 않겠지."

"바로 그렇사옵니다, 폐하."

황제의 짐작이 정확했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제국의 의료법상, 미등록 불법 의료시설은 의사 면허를 소지한 의사를 고용할 수 없사옵니다. 또한, 의사들도 고용되는 것을 꺼릴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불법 시설에서 일한 경력을 다른 곳에서 인정받긴 어려울 테니까. 설령 그것이 황태자가 운영하는 곳이라 하여도 말이야."

"정확한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그래서였다.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려면, 별궁 한의원이 법적으로 인정받는 의료시설이 되어야 했다. 그러자면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내가 의사 면허를 따는 것. 다른 하나는, 의사 면허와 동일한 자격을 지닌 의료대학 명예교수 지위를 얻는 것.'

그중에서 매력적인 쪽은 단연코 명예교수의 지위였다. 시간이 들지 않으니까. 약간의 심사만 거치면 곧바로 손에 거머쥘 수 있으니까.

반면에 의사 면허를 따려면? 입학과 졸업을 해야 한다. 최소 4~5년은 걸릴 거다. 그건 싫었다.

"한데 말이다. 짐은 또 한 가지가 궁금하구나."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황제의 묵직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살짝 시선을 올려보니, 황제가 가늘어진 눈매로 관찰하듯 이쪽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었다.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고 싶다는 네 뜻은 알겠다. 한데 어째서이더냐?"

"예?"

"어째서 더 많은 의사를 고용하겠다는 것이더냐. 혹여, 독특한 취미생활을 더욱 크게 키워보겠다는 뜻이더냐?"

"그것은 아니옵니다. 그리고 제가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는 것 또한, 단순한 취미가 아니옵니다."

"하면?"

황제의 더욱 가늘어진 눈길. 라키엘은 그 시선을 받아내며 말했다.

"저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사옵니다."

...사실은 '보너스 수명을 더욱 효율적으로 팍팍 챙겨서 무병장수 만수르형 라이프를 즐기고 싶사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기에, 적당히 뻔하고 그럴듯한 모범답안을 꺼냈다.

한데 돌아오는 황제의 대답은.

"거절한다."

"...예?"

설마 진짜?

라키엘은 미간을 콱 찡그렸다. 어느새 황제는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는 지금까지 불법으로 의료시설을 운영한 것도 모자라, 그 행위를 무마하고자 세 치 혀를 놀리며 짐에게 명예교수의 지위를 요구하려는 것인가?"

"...."

"참으로 알량하고 또 얄팍하도다.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사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수많은 의료대학 학생의 피와 땀, 눈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더냐?"

"하오나, 폐하?"

"고하거라."

"제겐 이미 수많은 실적이 있사옵니다."

"알고 있노라."

"한데 어찌하여 제게 명예교수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하시옵니까?"

"네가 조금 더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니라."

"...커허."

어오 씨.

라키엘은 입술을 박차고 나오려는 욕설의 뒷덜미를 가까스로 붙잡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황제의 심리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이 양반 또 이러네, 또 이래. 한동안 잠잠하더니 고질병 도졌네, 또.'

세상에 황제 이 양반만큼 후계자들의 자립심 함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인간이 또 있을까. 어째 자식들이 편하게 가는 꼴을 못 보는 저 성격도 참 병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미 황제는 즐기는 자의 모드(?)로 진입해 있었다.

"황태자라는 타고난 지위. 그것만을 휘둘러 편한 길만 택하였을 때. 과연 훗날의 고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겠느냐? 황가의 존폐를 결정할 국난의 가시밭길을 묵묵히 헤쳐나갈 수 있겠느냐? 아니다. 짐은 아니라고 본다."

"...."

아 쫌.

"하여 짐이 너에게 권하노니, 명예교수의 지위 대신에, 의료대학 졸업반에 편입학을 하여 정정당당히 졸업시험을 치르는 것은 어떻겠느냐?"

"예?"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졸업반 편입? 졸업시험을 치르라고?'

라키엘은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마침 지금 시기는 졸업반이 마지막 학기를 이수하는 기간이었다. 졸업까지 남은 시간도 불과 4개월 남짓. 그런데 지금 졸업반에 편입을 하고 졸업시험을 치른다면?

'해볼 만하겠는데?

각이 나왔다. 이득이 될 제안은 일단 받아야 한다. 라키엘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사옵니다, 폐하."

"좋은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래. 네가 만족한다니 짐도 기쁘구나."

"...."

사실 만족스럽진 않았다. 명예교수직을 받으면 즉석으로 해결될 일이, 4개월쯤 걸리는 일로 대체되었으니까.

'하지만 저 깐깐한 양반한테서 이 정도를 받아낸 거면 선방은 한 거지.'

최소한 평타는 쳤다.

그렇듯 얻을 것은 얻었으니, 이제는?

"하면, 저는 이만 물러가 볼까 하옵니다."

"설마, 용건만 해결하고 가려는 것이더냐?"

"...예?"

"아니다. 물러가거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행여나 또 꼬투리가 잡힐까, 라키엘은 빛의 속도로 물러났다. 잠깐이나마 대화가 오갔던 황제의 공간이 다시금 적적해졌다. 그러나 황제는 혼자가 된 공간을 어느새 머금은 흐뭇한 미소로 채우고 있었다.

"후후. 허허허."

흐뭇했다.

이제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자신에게 요구를 하는 아들의 모습이.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일을 벌이는 저 모습이 볼 때마다 흐뭇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이 요구하던 명예교수의 지위를 거절했다. 과연 스스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오래 기다리는 것은 싫었다.

하여 녀석에게 졸업반 편입을 허락하여 주었다.

'그리고 짐은... 의료대학의 학장에게 따로 가혹한 언질을 넣을 셈이니라. 네가 과연 그 불가능할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 어디 지켜보자꾸나.'

너무나 기다려진다.

결과가 기대된다.

아들이 더욱 성장하길 바라는 황제의 어깨가 남몰래 덩실덩실 기쁨의 바운스를 그렸다.

"의료대학의 학장, 벨버디어가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하를 뵙습니다."

불곰이 허리를 숙였다.

아니, 의료대학 학장이 인사했다.

"...."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상하로 출렁이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앙부아즈에서 쟈빌론을 봤을 때도 엄청난 덩치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인사를 올리는 의료대학 학장은 그보다 훨씬 더했다.

키는 어림짐작으로 봐도 2미터 이상. 심지어 등빨마저 장난이 아니었다. 비주얼로만 봐서는 저기 어디 동구권 스트롱맨 대회에 출전하는 아재를 데려다 놓은 줄로만 알았다. 가히 우랄산맥 떡멧돼지 스타일이랄까.

"반갑군. 이리 반겨주어서 고맙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전하."

다시금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학장. 하지만 딱 보니까 알겠다. 이 학장은 날 반기는 기색이 아니다. 아니, 좀 더 날것으로 말하자면, 싫어하는 듯하다.

'극혐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눈빛인데?'

보고 있자니 느껴졌다.

이쪽이 황태자이기에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처 모두 숨기지는 못한 부정적인 감정이 눈치로 감지됐다. 한편으로는 학장이 이쪽을 싫어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아마도 내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꼼수를 쓴다고 여기는 거겠지.'

황제에게 부탁해서 졸업반에 편입을 하게 됐다. 말이 졸업반이지, 최소 5년 이상을 의료대학에서 공부한 이들과 단숨에 같은 자격을 받게 됐다. 저들이 기울였을 노력을 생각한다면, 형평성에 심히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근본 없는 이상한 의술을 사용한다고 여기고 있을 거고.'

황도에 가득 퍼진 별궁 한의원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마냥 좋은 소문만 있는 건 아니었다. 황태자가 괴상한 가시로 사람의 온몸을 푹푹 찌른다더라, 뭉쳐서 말린 풀을 생살에 올려두고 태우며 괴롭힌다더라, 등등.

은근한 비방과 의혹의 시선이 약간이나마 존재하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이해는 갔다. 이곳의 시각으로 보자면 한의학의 모습이 많이 괴상하게 비칠 테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학장의 입장에서 보기에 나는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며 근본 없는 괴상한 의술로 졸업장을 따가려는... 의료대학의 역사와 전통, 명예를 무시하고 먹칠을 하려는 개싸가지 없는 황족수저인 셈인 거네.'

역시 인생은 역지사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라키엘은 학장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음에도, 자신의 태도를 딱히 바꾸진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학장에게 살갑게 대한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하면 이제부터 안내를 부탁할까."

"예, 전하. 의료대학을 둘러보실 생각이십니까?"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근본 없는 이상한 의술을 쓰는 게 아니라고. 모든 것을 실력으로 증명하고, 보여주면 될 일이다.

"우선, 내가 치르게 될 졸업시험부터."

미리 말하자면, 졸업이라면 자신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데. 나, 이한이 바로 서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대학교 한의학과 차석 졸업생이란 말이다.'

라키엘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슬그머니 맺혔다.

160화. 원인 불명의 마비 (1)

"이쪽입니다, 전하."

의료대학은 생각보다 꽤나 넓었다. 단순히 건물이 큰 게 아니었다. 제법 널따란 부지에 여러 개의 3, 4층 건물들이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대학 캠퍼스랑 비슷하네.'

어느 건물은 실습동. 어떤 건물은 입원 병동 등등. 갖가지 용도와 목적에 맞는 건물의 구분과 배치가 돋보였다.

덕분에 잠깐 추억이 돋아났다. 한국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당시엔 혼자서 썸만 몇 차례 타다가 결국 연애는 한 번도 못해봤던가.

'....'

왜 갑자기 한숨이 나오는 걸까.

라키엘은 가슴 시린 솔로 연대기(?)를 애써 머릿속 서랍 속으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 현생에 집중하고자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커다란 4층 건물의 어느 널따란 실습실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전하."

"...."

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실습실로 들어갔다. 순간, 30여 명의 시선이 이쪽으로 날아와 꽂혔다. 새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는 이들.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다양했다. 보자마자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졸업반 학생들이구나.'

곧 정식 자격을 취득할 예비 의사들이었다. 한데 어쩐지 이쪽을 보는 시선이 별로 따뜻하지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차갑고 배타적이었다. 더 날것으로 말하자면, 까칠했다. 마치 자격 없이 이곳에 들어온 이방인을 쳐다보는 눈빛이랄까.

그 눈빛들을 보자마자 딱 알 수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내 소문이 퍼졌나 보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저 학생들의 반응이 아까 학장의 것과 똑같았다. 마치 그 스승의 그 제자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반응들이었다.

'아마도 황태자가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졸업장만 쏙 빼먹으려 든다는 소식을 들은 거겠지. 그래서 다들 기분이 나쁜 거겠지. 자신들이 몇 년씩이나 공부하고 노력해서 이제 겨우 따내려고 하는 결실을,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편리하게 취하려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저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충분히 그렇게 여길 법도 했다. 그래서였다. 저들이 눈빛으로 은근한 까칠함을 내보이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학장을 돌아보았다.

"소개를 부탁할까?"

"예, 전하."

학장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예비 의사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주목. 여러분에게 소개하지. 제국의 황태자이신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하이시네. 미리 소식을 들은 이들도 있겠지만, 전하께서 앞으로 함께 졸업 과정에 참여하시게 되었으니 많은 도움을 부탁하는 바이네."

학장이 영혼 없는 말투로 말했다. 예비 의사들이 영혼 없는 표정으로 의례적인 박수를 쳤다. 그 모습들을 보자니 다시금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들 날 의사로 취급할 생각이 1그램도 없는 거구만.'

딱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학장은 이쪽을 그저 황태자라고만 소개했다. 의료대학의 학장이라면, 아니, 황도 마젠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별궁 한의원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런 언급은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이쪽의 졸업 과정을 잘 거들어 주라는 당부까지 했다. 즉, 이쪽이 혼자서 졸업 과정을 완수할 수 없으리라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예비 의사들의 태도 또한 그러했다.

"하면, 학장님? 전하께서는 지금까지의 과정 없이 곧바로 우리와 함께 졸업시험을 치르시게 되는 것입니까?"

예비 의사 중에 한 사내가 나서며 물었다. 회갈색 더벅머리를 한, 딱 봐도 공부깨나 할 것 같은 인상의 예비 의사였다.

"아, 켈로드? 마침 좋은 질문을 했네."

'켈로드'라 불린 더벅머리 예비 의사의 발언에 학장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우리의 모든 수업 과정을 낯설게 느끼실 것이네. 그러니 다 함께, 서로 도울 것은 도우며 졸업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학장님? 방금 하신 말씀은 지금까지 제가 배우고 실천하려 애를 써 온, 우리 대학의 설립 취지와 결이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책임을 짊어지려면 자격부터, 라는 취지 말인가?"

"그렇습니다."

"자격을 따는 방법이야 꼭 정해진 것만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켈로드가 못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장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어처구니를 잃고서 허허 웃어야 했다.

'허허, 이 사람들 보소.'

멀쩡히 내가 여기에 있는데 대놓고 멕이는(?) 대화를 나누다니. 황태자의 권력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의료대학 학장이 굉장히 강직한 원칙주의자라더니, 정말로 그렇구만.'

그러니 권력과 지위 앞에서도 나름의 저런 반항을 슬쩍 엿보이는 것일 터다. 그의 제자인 예비 의사들도 그런 그에게서 확실히 영향을 받은 것 같고.

그래서 라키엘은?

'다들 마음에 드네.'

오히려 좋았다.

만일, 학장이 자신에게 노골적인 아첨을 했다면 오히려 역겨웠을 것이다. 의료인은, 사람 목숨을 다루는 사람은 모름지기 저렇게 강직해야 한다. 권력에 쉽게 굴하거나 타협하기보다, 자신의 이상과 신념에 따라 고집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라키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때 한국에서도 저렇게 강직한 어느 응급외과 의사분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 그런 분들이 잘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였다.

자신을 앞에 두고서도 은근히 대담하게 호박씨를 까는 학장과 학생들이 멋지게 보였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살짝 탐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납치(?)해서 별궁 한의원에 취직시키고 싶어졌다.

그 사이, 학장의 말이 이어졌다.

"각설하고, 그럼 이제부터 모두에게 졸업시험 과제를 공개하겠네."

삽시간에 실습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다들 눈을 반짝거리며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린 걸까. 그런 모두를 향해 학장의 발표가 떨어졌다.

"매번 졸업시험의 내용이 바뀌어서 다들 짐작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올해의 졸업시험 과제는 '조별 진료'가 될 것이네."

...조별 진료?

설마, 조별과제?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어지는 학장의 설명을 듣자니, 과연 그 짐작이 맞았다.

"이제부터 자네들은 6명이 한 조가 되어 환자 하나를 공동으로 담당할 것이네. 목표는 다 함께 책임을 지고서 환자를 효율적으로 집중진료하여 완치시키는 것일세. 자, 그럼, 이제부터 조 편성을 위해 제비를 추첨하겠네."

학장이 눈짓했다. 지금껏 말없이 한쪽에 있던 조교수가 함을 들고 나섰다.

"함 안에 색이 입혀진 종이가 있을 것이네. 같은 색깔의 종이를 뽑는 사람들이 한 조가 되는 것이니, 각자 부담 없이 뽑아보도록. 그럼... 전하? 부디 전하부터, 부탁드립니다."

설명을 마친 학장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함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히는 수십 장의 종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뽑았다.

'녹색인가.'

뒤이어 졸업반 예비 의사들이 차례로 종이를 뽑았다. 추첨 결과에 따라 소리 없이 희비가 교차했다. 어떤 이는 친하거나 능력이 뛰어난 자와 한 조가 되어 기뻐했다. 또 어떤 이는 같은 조가 된 멤버를 보며 절망했다.

특히, 이쪽과 같은 녹색 종이를 뽑은 이들의 눈빛에 낭패감이 떠오르는 게 확실히 보였다.

"...."

다들 망했다는 눈빛이다. 그렇게나 싫은 걸까. 라키엘은 같은 조가 된 나머지 5명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아까 그 더벅머리 의사도 있네.'

아까 나서서 학장에게 살짝 항의를 하던 회갈색 더벅머리의 사내가 마침 이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일순간 그의 눈빛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혐오의 감정. 이내 그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뚜렷하게 전해져 온 그 감정의 여운만큼은 확실히 전해져 왔다.

'그 외에는, 으음. 남자 둘, 그리고 여자 둘...은 일란성 쌍둥이인가?'

그러니까 이쪽을 포함해서 남자 넷, 쌍둥이 자매 둘이 한 조가 되었다.

학장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다들 조가 정해졌으면 이동하도록 하지. 전하, 전하께서 계신 조가 1조입니다. 우선, 1조부터 담당 환자를 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학장의 안내를 따라 실습실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 계단을 오르내리고, 옆 건물로 들어갔다. 옆 건물은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동이었다.

"이곳입니다."

학장이 안내한 곳은 그중에서도 중환자가 모여 있는, 어느 1인 병실이었다. 그곳에 중년의 사내가 누워 있었다. 한데 그 환자는 중환자임에도 의식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학장이 환자에게 다가갔다.

"미구엘 씨? 오늘은 좀 어떠십니까?"

"뭐... 여전합니다. 제 다리는 오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는군요."

환자가 자조적인 미소를 애써 머금었다. 학장이 환자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졸업시험 1조원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이 환자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네. 하지만 전하께서 새로 참여하셨으니만큼 특별히 다시금 설명을 하지. 이 환자는 하지 마비 환자일세. 다만, 아무런 사고나 충격, 부상이 없는데도 어느 날부터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

"...."

조원들은 그저 묵묵히 학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들이 다들 이상했다. 저들이 짓고 있는 표정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ㅈ됐다는 표정인데?'

아주 그냥 폭망의 예감을 느낀 듯, 다들 안색이 창백해져서 쫙 굳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학장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우선, 환자는 마비가 시작되기 4주 전부터 설사를 동반한 장염 증세를 보였다네. 그리고 며칠간 발끝에서 따끔거림과 저림을 조금씩 느꼈고, 그 빈도가 늘어감 또한 느꼈지. 그러다가 마침내 엿새 전부터 발가락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이후로 마비의 범위가 점차 위로 번져 올라오며 현재는 두 다리 전체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네. 여기까지는 다들 알고 있겠지?"

"...예."

켈로드가 대표로 대답했다. 학장이 의미심장하게 모두를 쳐다보았다.

"자네들의 손에 이 환자의 미래가 달렸다네. 자네들은 열심히 협력해서 이 환자의 마비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게."

거기까지 설명을 겸한 당부를 건넨 학장이 병실을 떠났다. 다른 조원들에게 환자를 배정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학장이 떠난 병실의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내 다른 조원들의 눈짓을 받은 켈로드가 대표로 나섰다.

"전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밖에서?"

"예, 전하."

공손한데 여전히 아까보다 한결 까칠하게 느껴지는 켈로드의 태도는 그저 기분 탓일까.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켈로드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섰다. 다른 조원들도 뒤를 따라왔다. 켈로드는 병실에서 제법 멀어지고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 전하. 솔직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를 위해 뭔가를 해주시겠다는 생각은 제발, 품지 말아 주십시오."

"...."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켈로드의 한숨 섞인 말이 이어졌다.

"방금 학장님의 설명을 들으셨겠지만, 우리가 배정받은 저 환자분은 아직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마비증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학장님조차도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셨지요."

"음, 그래서?"

"아마 우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할 겁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감히 전하께 당부를 드리는 겁니다."

"뭔가 해주겠다는 생각을 품지 말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내가 뭘 해준다는 건데?"

"권한을 이용해서... 우리 조 전체가 졸업시험을 통과하도록 만드시는 것 말입니다."

"음?"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이제는 켈로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다.

"그러니까, 권력 남용을 하지 말아 달라?"

"그렇습니다, 전하."

"내가 그랬다간, 졸업생 전체가 공평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니까?"

"역시 그렇습니다, 전하."

"하하. 이 친구 좀 보게."

라키엘은 그만 파핫 웃어 버렸다.

"난 또 뭐라고. 심각한 얼굴로 할 이야기가 있다길래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하지만 전하. 저희는 심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켈로드의 표정은 정말로 진지했다. 그 눈빛을 보자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놈 이거, 볼수록 마음에 드네?'

그러니까 켈로드와 조원들은 자신들이 해결 불가능한 과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중인 거다. 그게 이쪽 때문일 거라는 원망도 조금은 품고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쪽이 행여나 권력을 남용하는 꼼수(?)를 쓸까 걱정부터 하고 있다.

'자신들의 실력을 정정당당하게 평가받고 싶다는 거겠지. 설령 졸업시험에서 떨어진다 해도 꼼수는 싫은 거야. 다른 조의 졸업생에게 피해를 주기도 싫은 것일 테고.'

그런 이야기를 이토록 걱정을 담아서, 진지하게 꺼내는 놈들이라니. 어디서 이런 인재가 굴러왔나(?) 싶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안타까움의 이유는 간단했다. 라키엘은 켈로드에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그런데 우리가 배정받은 환자 말이야. 마비의 원인을 아직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그래? 한데 어떡하지. 나는 원인을 알겠는데."

"...예?"

살짝 찡그려지는 켈로드의 눈썹. 이쪽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 그런 켈로드를 향해 라키엘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난 학장이 설명하는 거 듣자마자 바로 짐작했거든."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정말로 당연하다.

장염 증세와 함께 시작된 발끝의 저림. 그리고 하지의 끝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올라오는 마비 증상. 그런데 사고나 부상, 충격이 전혀 없었다는 증언까지.

"환자가 겪는 하지 마비의 원인은 바로...."

라키엘은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161화. 원인 불명의 마비 (2)

"환자가 겪는 하지 마비의 원인은 바로...."

꿀꺽.

켈로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곁의 다른 예비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라키엘의 입으로 모였다. 그 순간, 라키엘의 입꼬리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희미하게 맺혔다.

"공짜로는 안 알려줄 거야."

"...예?"

"못 들었어? 그냥은 알려주기 싫다고."

"...."

켈로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은 못 알려주시겠다니, 전하께서는 설마 저희를 희롱하려는 것이십니까?"

"희롱?"

"예."

켈로드가 강직한 눈빛을 던져 왔다.

"전하께서는 원인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저 환자가 겪는 마비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가는 곳이 있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밝힐 순간이 되니 다른 말씀을 하며 발뺌을 하려는 것이십니까?"

"흠, 발뺌이라."

라키엘은 능청을 떨며 되물었다.

"내가 왜 정답을 아무런 대가 없이 알려줘야 하지?"

"하지만 전하."

"환자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고?"

"예."

"너희한테는 안 알려줄 거지만, 치료는 내가 알아서 해줄 건데?"

"그렇지만...."

"아, 조별 과제라서? 설마, 다 같이 책임과 결과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켈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더 이상한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예?"

"맞잖아. 생각해봐. 다 함께 책임을 지고 결과를 공유하는 조별 과제인 건데, 어째서 내가 일방적으로 대가 없이 너희한테 정답을 알려줘야 하는 거냐고."

"...."

"솔직히 말해봐. 조별 과제 안 해봤지? 이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나만 자료 준비하고, 정리하고, 발표까지 싹 다 하는 거랑 뭐가 달라."

"...."

켈로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듣다 보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만일, 상대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진즉 대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힘껏 참았다.

신분이 다르니까.

상대는 권력자니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 나름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 전하께서는, 저희와 따로, 독자적으로 졸업시험을 진행하시겠다는 겁니까?"

"일단은? 너희가 지닌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를 좀 봐서."

"...알겠습니다."

켈로드는 내심 이를 갈았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상대의 실력에 의문을 지닌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며 우리 사이에 낀 주제에.'

사실 그는 황태자가 싫었다. 이렇게 편법을 쓰며 자신들 사이에 끼어들기 전에도 그랬다. 황도 곳곳에 파다한, 황태자의 별궁 한의원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별궁 한의원? 사람 몸을 가시로 찔러서 아픈 곳을 치료한다고? 게다가 뭐? 말린 풀뭉치를 살갗 위에 올려두고 태워? 그런 걸로 병이 사라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사이비다. 돌팔이나 쓸 치료법이다. 절대로 제대로 된 의술이라 부를 수 없다. 한데도 환자가 모이는 건, 그저 별궁 한의원이 공짜이기 때문이다. 갈 곳 없는 환자들이 황태자의 권위와 공짜라는 유혹에 굴복한 결과일 것이다.

'게다가 풍문으로 도는 소식 중에는 더 황당한 일도 있었지....'

켈로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황태자가 궁정마법사의 전격마법을 맞았다고 했다. 그 전격마법을 아이의 목덜미에 꽂은 가시를 통해 주입했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의 발작이 멎었다고도 했다.

'거짓말.'

아마 황태자가 과장된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저 정도 권력과 지위를 지닌 자라면 별달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명성은 모두가 왜곡된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해. 물론 그것까진 괜찮았어. 황족의 조금 괴상하고 특이한 취미생활 정도로 이해해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당신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우리와 나란히 시험을 치르고, 졸업자격과 의사 면허를 따내는 건 아니지. 그건 선을 넘는 것 아닌가?'

물론 사이비 의술이나 사용하는 황태자의 실력 따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정식 면허를 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서가 안 됐다.

"...."

으드득.

켈로드는 남몰래 이를 갈았다. 그를 보며 라키엘은 내심 빙긋 웃었다.

'이야. 이 친구 깡다구 보소.'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 앞에서 은근히, 아니, 대놓고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반감을 보이는 켈로드. 볼수록 대단했다. 켈로드가 품은 반감의 이유가 짐작이 되기에 더욱 기꺼웠다.

'이 친구는 볼수록 더 마음에 드네.'

자신이 익혀온 배움, 의술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 의술을 함부로 침해하고 더럽히려는 자에 대한 순수한 분노 또한 느껴졌다. 물론, 지금은 그 분노의 대상이 이쪽이라는 점이 좀 난감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친구를 평가할 좋은 기회는 되겠군.'

그는 흥미로운 눈길로 켈로드를 비롯한 조원들을 살폈다. 그들은 병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자신들끼리라도 환자를 진단하고, 진료할 생각인 듯했다.

'그럼 실력부터 좀 볼까.'

일단 태도 점수는 매우 합격.

다음은 실력을 평가할 차례.

라키엘은 진료실 한쪽의 의자에 앉았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서, 훗날 별궁 한의원에 스카웃(?)할 인재를 물색하는 마음으로, 시험 감독관의 자세로 빙의하며 조원들의 진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흐음.'

켈로드와 조원들은 환자의 이전 병력 등을 문진했다. 혹시 지병이 있느냐, 최근 충격을 받거나 심하게 넘어진 적이 있는지, 혹은 머리를 다친 적은 없는지 등등. 하지만 환자의 대답은 아니오, 였다.

뒤이어 조원들은 수제 청진기로 환자를 진찰하고, 열을 재어보기도 했다.

'그런다고 뭐가 나오지는 않을 텐데.'

라키엘은 환자의 마비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들의 방식으로는 원인을 진단하지 못하리란 사실 또한 잘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 봐야 할 것은, 조원들의 태도였다.

'...호오.'

가늘게 뜬 눈으로 조원들을 관찰하던 라키엘은 내심 감탄했다.

'그런데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아마도 막막할 거다. 절망적이기도 할 거다. 환자를 문진해도, 진찰해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로 답답할 거다. 게다가 상황 또한 저들을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이건 그냥 환자를 진료하는 게 아니라, 졸업이 걸린 시험이니까.'

몇 년 동안 이곳에서 구르며 배운 것들을 평가받는,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한데 이런 시험에서 답안지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기분을 느낀다면, 그 사람의 멘탈은 어떻게 될까.

'당황스럽겠지. 흔들릴 거고.'

분명 저들도 그럴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켈로드와 조원들은 아무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표정도, 눈빛도, 목소리도 시종일관 침착하기만 했다.

라키엘은 저들이 저럴 수 있는 비결을 알 것 같았다.

'환자 때문이겠지, 아마도.'

의료인은 저래야 한다.

아무리 난치병, 불치병인 환자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렇다. 설령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과 맞닥뜨려도 그렇다.

최소한, 절대로, 환자 앞에서 의료인의 멘탈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불안하고 확신 없는 모습을 보여도 안 된다. 아무리 후달려도, 환자 앞에서는 끝까지 태연하고 침착해야 한다. 설령 마음속에 지옥도가 펼쳐지는 상황이라도 그렇다. 그것이 의료인의 숙명이다.

'의료인의 불안해하는 모습은... 그대로 환자에게 옮아가니까.'

그냥 옮아가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수십 배는 증폭되어 옮아간다.

그러면 환자는 무너진다. 자신을 돌봐주는 의료인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 버리는 순간, 환자는 더는 믿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고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 절대로, 의료인은 환자 앞에선 흔들리면 안 된다. 아주 단순하지만 지키기가 어려운 수칙이었다.

한데 지금 켈로드와 조원들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이거, 계속 탐나는데?'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멘탈적으로는 합격이다. 실력은? 어차피 학장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마비 환자이니, 지금 상황에서 더 무엇을 기대할까.

'이만하면 볼 건 다 봤군.'

라키엘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이제는 슬슬 자신이 나설 때가 됐다. 우선은 자신이 짐작한 환자의 마비 원인을 확인하는 것부터. 그는 조원들을 슬며시 비집고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깐 내가 좀 볼까."

"...아, 예, 전하."

켈로드와 조원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라키엘은 환자의 침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자에게 싱긋, 미소부터 보냈다.

"반갑습니다, 미구엘 씨."

"저, 전하를 뵙습니다."

환자가 긴장한 기색으로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라키엘은 그를 제지했다.

"그냥 누워 계세요. 그리고 지금은 황태자가 아니라 의료인으로서 당신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

"뭐, 부담을 갖지 말라고 당부를 해도 그게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일단 이야기부터 좀 들어보죠. 마비 증상이 오기 전에 한동안 장염을 앓았다고요?"

"예... 예, 전하."

"그 후에는 발끝이 따끔거리고 저리는 증상이 나타나다가, 서서히 발가락부터 마비가 번졌고요?"

"예, 그렇습니다, 전하."

"머리나 목, 등이나 허리에 심한 충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고 했죠?"

"물론입니다, 전하. 넘어지거나 다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환자, 미구엘이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게 된 두 다리.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싶었다. 발가락이 잘 안 움직여질 때까지는,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점점 마비가 심해졌다.

처음엔 발가락부터 둔해지고 피부 밑으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지더니, 다음엔 발 전체와 발목을 지나 종아리까지 증상이 번졌다. 급기야 이제는 두 다리 전체와 골반 언저리까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겁이 났다. 이곳의 의사들마저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더욱 두려웠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자다가도 악몽에 시달리며 몇 번이고 깨어나는 요즘이었다.

"하면, 마비가 시작된 건 정확히 얼마쯤 전이였죠?"

"그게... 대략 엿새쯤 됐습니다, 전하."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진맥을 해보죠. 잠깐 손목을 좀."

라키엘은 환자가 머뭇거리며 내미는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환자가 움찔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진맥 스킬을 발동했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라키엘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그곳에 검진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부를 수 있는, '종합소견' 항목이 있었다.

[종합 소견 : 기본적으로는 대체로 건강한 신체입니다. 그러나 일부 염증에 의한 운동 신경세포의 수초(myelin)가 벗겨진 상태인, '급성 염증성 탈수초성 다발성 신경병증(Acute Inflammatory Demyelinating Polyneuropathy, AIDP)이 감지됩니다.]

...역시.

'빙고.'

예상이 맞았다. 라키엘은 미소를 삼키며 켈로드와 조원들을 돌아보았다.

"잠깐 밖에서 이야기를 좀 할까."

모두를 복도로 불러냈다.

켈로드가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전하께서는 뭔가 진단을 하셨습니까?"

"왜? 궁금해?"

"...."

"물론 궁금하겠지. 그런데 어째서 궁금한 걸까."

"궁금한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환자의 회복이 걸린 일입니다."

"그래?"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하나 묻지. 여기서 내가 이 환자가 겪는 마비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면, 이후에 치료를 마쳐도 그 모든 공을 내게 돌릴 수 있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켈로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라키엘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너희는 모두 진단에 실패했으니까. 그러니 내가 원인을 밝혀내고 치료를 완료하면, 그 모든 공적을 내게 양보하고 졸업시험의 실패를 인정하겠느냐는 말이지."

"그럼 설마, 전하만 시험을 통과하고, 저희는...."

"어. 모두 탈락. 졸업 실패."

"...."

"그래도 괜찮겠어?"

"...."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켈로드와 조원들은 망설였다. 서로를 돌아보며 잠시 눈길을 나누었다. 이내 모두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켈로드가 모두를 대표해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전하의 제안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정말로?"

"예, 전하."

"그러면 이 환자의 회복 여부와 상관없이 졸업을 위해 1년을 다시 기다려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어째서?"

"저희 모두가, 이곳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 말입니다."

켈로드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선택을 철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졸업 여부보다도 환자의 회복이 더욱 중요하다는 대답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거지.'

바로 이런 놈들을 원했다, 자신은. 그래서 일부러 모진 테스트를 해본 거였는데. 조원 전체가 이렇게나 마음에 드는 대답을 꺼낼 줄이야.

"좋아. 전원 별궁 한의원행 확정."

"예?"

"각설하고, 어쨌건. 앞으로의 치료를 위해 환자의 마비 원인을 알려주자면-"

라키엘은 숨을 골랐다. 켈로드와 조원들이 쫑긋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라키엘은 자신의 기억 속 지식의 서랍을 열었다. 진맥 결과, 지금 환자가 앓고 있는 마비의 원인은 확실하니까.

국제 질병분류 기호로는 G61.0.

대한민국의 산정특례 코드로는 V126.

정식 명칭은 바로....

"길랭-바레 증후군(Guillain-Barre syndrome)이야. 그리고 내겐, 이걸 고칠 방법이 있어."

그의 입가에 자신감 서린 미소가 맺혔다.

162화.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때 (1)

"길랭-바레 증후군(Guillain-Barre syndrome)이야. 그리고 내겐, 이걸 고칠 방법이 있어."

라키엘의 입가에 자신감 서린 미소가 맺혔다. 그는 기억의 서랍 속 내용을 살폈다.

길랭-바레 증후군.

이건 매우 희귀한, 신경에 발생한 염증이 근육의 마비를 불러오는 질환이었다. 한데 문제는 현대 의학으로도 염증의 정확한 최초 발생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라키엘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뭐, 이 증후군의 증상은 지금까지 모두가 환자에게서 본 모습 그대로야. 본격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1~3주쯤 전에 감기나 호흡기 질환, 장염 등의 위장 질환이 먼저 시작되지. 혹은 외상을 입거나 수술 후의 후유증에 의해 증상이 시작되기도 하고. 그 후엔 사지의 말초에서부터 서서히 마비가 진행돼. 아, 그리고-"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가끔씩은, 백만분의 1 정도 확률로는 독감 등의 백신을 맞고 나서 후유증으로도 증후군에 당첨될 수 있다나."

"...백신, 이 뭡니까?"

"그런 게 있어."

라키엘이 능청을 떨었다.

켈로드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럼 이게 왜 생긴 겁니까?"

"원인?"

"예."

"몰라."

"예에?"

"아무도 모른다고."

"...."

"그나마 추측되는 대로만 알려줘? 가장 유력한 가설로는 면역질환과 바이러스설이 있어. 캄필로박터, 마이코플라스마성 폐렴, 혹은 장염, 헤르페스4형 바이러스, 인플루엔자, 간염, HIV, 엡스타인-바 바이러스, 루푸스, 호지킨 림프종, 그리고... 제일 엿 같은 코로나19도 있네."

"...."

"번외편으로는 백신도 잘못 맞으면 당첨이야. 예를 들자면 H1N1형 돼지독감 백신, 파상풍, 광견병, 뇌수막염, B형 간염까지. 어쨌건, 대강 그런 드러운 것들에 걸리거나 백신을 맞고 운이 나빠서 후유증 당첨으로 면역 체계가 꼬이는 경우가 있어. 그러면 꼬인 면역 체계가 착각을 일으키거든."

"...."

"일부 바이러스나 세균의 외피 분자 구조가 사람 신경세포 수초(myelin)의 구조랑 비슷해서, 살짝 맛이 간 면역계가 신경세포의 수초를 바이러스나 세균인 줄 알고 착각해서 공격을 하는 거지. 팀킬 말이야, 팀킬."

"...."

"뭐, 대략 그러해서 신경세포가 맛이 가고, 결과적으로 마비가 일어난다... 그 정도쯤 되려나. 그런데 확실하게 결론이 난 정설은 아니고, 그냥 아직까지는 유력한 가설이야, 가설."

"...."

"그런데 왜 조금 전부터 말이 없어?"

"죄송합니다."

"응?"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응 괜찮아. 별로 기대 안 했어. 사실 방금도 엄청나게 많이 줄여서 설명한 거였지만."

"...."

졸업 예비의사, 켈로드는 말을 잃었다. 그의 굳은 눈길이 황태자를 향했다.

'이 사람,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볼수록 미심쩍다. 방금 황태자가 줄줄 꺼내놓았던 이야기도 그랬다.

'길랭-바레 증후군? 백신? 헤르페스4형 바이러스? 신경세포 수초? 분자 구조는 또 뭐지. 황태자는 대체... 저런 말들을 어떻게 지어낸 걸까.'

전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말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으니,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조원들을 현혹하기 위해 꺼내는 화려한 언변으로만 느껴졌다.

'교수님도 주의하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지. 원래 사기꾼, 사이비, 돌팔이들이 설명을 그럴듯하게, 복잡하게 하는 법이라고. 그런 자들을 조심하라고.'

지금도 그런 듯했다. 황태자의 주장과 진단이 신뢰가 가지 않았다. 자연 말대꾸를 하는 켈로드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았다.

"그럼, 결국은 전하께서도 원인을 잘 모른다는 말씀이신 거로군요."

"대강은?"

"하면, 치료법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은... 기만이었습니까?"

그의 물음이 날카로워졌다.

원인을 모르는데 치료할 수 있다니. 말이 안 된다. 헛소리다. 그는 다른 조원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눈길을 받은 조원들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황태자는 지금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치고 있다고.

'당연하지. 저런 이상한 지식은 어디서도 접해보지 못했으니까.'

어떤 문헌에서도 보지 못했다. 교수님들도, 학장님도 저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당연하다. 존재하지 않는 허황된 말들일 테니까.

그런 그의 노골적인 의심 덕분에 라키엘은?

"기만이라. 허허허."

그저 웃어 버렸다.

"내가 허풍을 쳤다고 생각하는 거구만. 그렇지?"

"예.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너무 솔직하네."

"환자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예. 송구하지만 방금 언급해 주신 지식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어려울 것도 없지."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태연하게 진실과 거짓을 촵촵 섞어서 척척 내놓았다.

"황궁 비고에 보관된 고대 문헌에서 봤어."

"고대 문헌, 말입니까?"

"그래. 거기에 사라진 고대 초문명 국가의 수많은 지식이 담겨 있더군. 그중엔 이제는 잊힌 고대의 의술도 있었고."

"그게 무슨...."

"거기서 봤어."

"...."

"안 믿기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든가."

라키엘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덕분에 켈로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궁 비고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라니. 거긴 황족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곳이었다. 한데 자신이 어떻게?

'황태자, 이렇게 치사한 인간이었나?'

그는 자신이 품고 있던 인류애의 한 조각이 처참하게 뭉개지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이 그렇든 말든 라키엘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훨씬 시급한 사안이 있으니까.

"어쨌건, 지금은 내 말의 신뢰성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야. 환자를 위한다면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준비해야 할 일이 따로 있어."

라키엘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쪽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눈빛들. 그러나 상관없다. 곧 알아서 바뀌게 될 테니까. 싫어도 이쪽에게 의지하게 될 테니까.

확신을 품고서 말했다.

"곧 환자의 호흡에 이상이 올 거다."

"...예?"

켈로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호흡에 이상이 온다니요? 전하. 환자는 현재 하지 마비 증상만을 겪고 있는...."

"알아. 아직까지는 하지에만 마비가 왔지만, 조만간 호흡마비가 올 거야. 그게 제일 큰 고비가 될 거고."

"그게 무슨...."

"보통 길랭-바레 증후군을 앓는 환자의 약 40%에서 횡격막 신경 마비에 의한 급성호흡부전을 겪으니까. 더 심하면 사지마비나 자율신경 실조 등의 증상까지 겪을 수도 있고. 물론 나도 그런 일이 생기길 바라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저 환자는 거기까지 증상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진맥을 했으니까."

사실이었다.

아까 진맥을 하던 도중이었다. 평소처럼 오장육부가 환자의 오장육부와 상담을 했다. 그러다가 허파가 환자의 허파에게 중요한 제보를 들었다.

'환자의 허파가 그랬다지. 요즘 들어서 자꾸만 횡격막이 찌릿찌릿 뻐근하다, 라고.'

그거, 암만 봐도 급성호흡부전에 의한 호흡마비 증상의 전조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오장육부의 말을 들어보니, 거기서 더 심해질 여지도 살짝 엿보였다.

당장 대비를 함이 옳을 듯했다.

"그래서야. 기계 환기(Mechanical Ventilation)가 필요해."

"예?"

"쉬운 말로는 인공호흡기. 그러니 일단 환자 좀 지켜보고 있어. 내가 인공호흡기 가져올 때까지."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

켈로드를 비롯한 조원들의 미간이 또 찡그려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러건 말건 복도 저편으로 휘적휘적 떠나 버렸다.

남겨진 조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황태자는 답이 없는 것 같다고. 우리끼리라도 잘해보자고.

모두의 오가는 눈빛 속에 조별과제 폐급 멤버를 감지한, 서글프고 비장한 감정이 스몄다.

"후우."

서글프고 비장해진다. 오늘, 이렇게 또 HP를 왕창 써먹으려 하자니 절로 영혼의 밑바닥까지 착잡해진다.

라키엘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겠지?'

그가 조원들을 버리고(?) 찾아온 곳은 빈 병실이었다. 문을 잠그니 은밀한 짓거리를 몰래 벌이기에 썩 괜찮아 보였다. 예를 들자면, 세상에 없는 환상종을 뽑는다든가 하는 그런 짓들 같은.

'의사 면허 한 번 따기 더럽게 어렵네.'

설마하니 의료대학 졸업시험 통과를 위해 이런 짓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까 조원들에게 말한 대로, 환자는 급성호흡부전의 뚜렷한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빠르면 이삼 일 안에 시작될 수도 있어.'

한데 인공호흡기가 없다면? 큰일이 난다. 손도 못 쓰고 환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할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졸업시험에 떨어지게 될 거고, 의사 면허도 따내지 못할 거다. 그러면 별궁 한의원을 정식 의료시설로 등록할 수 없고, 의사들을 고용하지도 못하게 될 테니....

'별궁 한의원을 종합병원으로 키우려는 내 계획도 바닥부터 흔들리는 거지. 그건 안 돼.'

그러니까 이건 투자다.

쭉쭉 융성하는 별궁 한의원. 자동으로 팍팍 쌓이게 될 보너스 수명. 그걸 통해서 십장생처럼 즐기게 될 만수르 라이프를 위한, 통 크고 현명한 투자일 뿐이다. 그럴 뿐이다. 그러니까 울지 말자.

'...아이고 배야!'

라키엘은 살살 쓰려 오는 아랫배를 애써 달래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환상종 선택 뽑기 메뉴를 선택했다.

딩동!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항목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소정의 H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선택 뽑기 (3회차) 비용 = 2,7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2,900]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익숙한 선택창이 떠올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합니다.]

안내문과 함께 피 같은 HP 2,700이 뭉텅 깎여 사라졌다. 덕분에 안구에 차오르는 눈물 사이로 홀로그램 안내문이 떠올랐다.

파핫-!

[선택 뽑기에 앞서, 당신이 환상종에게 원하는 기능을 밝혀주세요.]

[선택 뽑기에서 제시되는 환상종 후보군은 당신이 원하는 기능에 맞추어 세팅될 것입니다.]

기다렸던 안내 문구가 떠오르는 순간, 라키엘은 미리 생각하고 있던 요구 사항을 꼼꼼하게 말했다.

'위급한 호흡곤란 및 호흡정지의 경우, 혹은 대사성산증(metabolic acidosis)이나 호흡근(respiratory muscle)의 피로, PaO2 < 70mmHg의 저산소증, 혹은 PaCO2 > 50mmHg의 과탄산혈증의 경우에, 동맥내이산화탄소분압(PaCO2)과 동맥내산소분압(PaO2)을 능동적으로 계산해서 환자에게 필요한 흡입산소농도(FiO2)와 호기말양압(PEEP)을 세팅하여 호흡량과 공기압력을 능동적으로 보조하고 보장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환상종으로.'

[....]

'어이?'

[...당신의 요구 사항이 너무 지랄맞습니다.]

'....'

[그리고 우리 시스템은 이걸 '진상'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

[당신이 환상종에게 원하는 기능을 '가급적 심플하게' 밝혀주세요.]

'쩝.'

알겠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참으며 다시 말했다.

'호흡이 곤란한 환자의 호흡을 능동적, 자율적으로 도와주는 능력을 지닌 환상종을 원해.'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좀.]

'....'

왜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걸까.

[당신의 요구 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딩동!

안내문이 광채로 휩싸였다. 광채가 회전하며 세 갈래의 카드로 변했다. 이윽고 각각의 카드에 간단한 소개 프로필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란.

'...뭐냐, 이건.'

세 장의 카드 속 내용을 확인한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대뇌피질이 PT 8번 온몸비틀기를 시전하는 듯한 난감함을 느껴야 했다.

163화.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때 (2)

난감하다.

이럴 때는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아니,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할 단어가 사전에라도 있긴 할까.

"...."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의 3호 요원은 침묵을 지켰다. 의료대학 입원병동의 천장 위에 몸을 숨긴 채, 아래쪽 빈 병실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황태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또다. 또야. 또 허공을 쳐다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 아니,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닐까.

혹은 여타의 영적인 존재라거나.

아니면 정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짐작을 해보자면, 황태자는 어떠한 영적인 신비한 존재와 소통을 하고, 때로는 환상종을 선물 받기도 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모습은 설명이 안 되니까.

"...."

문득, 3호 요원은 추억에 잠겼다. 자신이 황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며 관찰한 지도 벌써 얼마나 되었던가.

'거의 10년쯤 됐나.'

문득, 선임 요원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후 처음 임무를 맡았던 신입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일하는 게 참 편했다. 황태자는 온갖 지병을 버라이어티하게 앓으며 병상에만 누워 있었으니까. 활동하는 것이라고 해봐야 복도나 정원을 깨작깨작 힘겹게 산책하는 것이 다였으니까.

덕분에 그 시절 황태자의 일상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일은 거의 단순 반복노동에 가까웠다. 거의 타성이라 부를 수 있을 손쉬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달라졌어....'

3호 요원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순수한 인간적인 마음으로 황태자가 건강해지길 응원한 적이 있는 그였다. 그런데 이제는 황태자가 너무 움직인다. 도무지 쉬지를 않는다.

난데없이 검투사를 만나겠다고 지하 검투장에 내려가질 않나. 크레모에 다녀오질 않나. 심지어는 앙부아즈의 내전에까지 끼어들질 않나.

"...."

앙부아즈 내전에까지 황태자를 따라가서 관찰 임무를 수행한 거, 장기 출장 수당 꼭 받아내야지. 황태자가 반란군과 접촉하던 때에는 잠시 거취를 놓쳐서 시말서를 쓰긴 했지만, 그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3호 요원은 나름의 야물딱진 다짐을 삼켰다. 제국 최고의 잠입, 은신, 정보수집 전문 요원답게 차분한 시선으로 황태자 관찰을 이어갔다.

난감하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할까.

라키엘은 자동으로 PT 8번 온몸비틀기를 시전하려는 대뇌피질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눈앞에 떠오른 세 장의 카드를 살펴보았다.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시스템으로부터 3마리의 후보를 제시받았습니다.]

[세 후보는 당신의 요구사항을 각각 100%, 50%, 0%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한번 선택한 후보는 환불이 불가능하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세요.]

...그래.

저 안내문은 다 좋다.

무슨 뜻인지도 이미 겪어서 다 안다.

그런데 말이지.

'인간적으로 말이야. 문제를 이렇게 내면 어떻게 맞추란 거냐?'

라키엘의 난감함에 휩싸인 눈길이 각각의 카드에 쓰인 문구를 훑었다.

<후보 1 : 오늘 밤도 뜨겁게! 열정의 풍선 노래방!>

<후보 2 : 비벙!>

<후보 3 : 그의 따뜻한 콧김에 마음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포근했다. 위로받는 것 같았다. 아아, 이대로면 숨이 콱 멈춰 버려도 좋아.>

"...."

자, 일단 추리부터 시작해보자.

'첫 번째부터 난관이네.'

라키엘은 미간을 콱 찡그렸다.

'오늘 밤도 뜨겁게? 열정의 풍선 노래방?'

노래와 관련된 능력이 있는 동물이라는 뜻일까. 그럼 풍선은 또 뭘까. 풍선을 부는 능력? 몸에 풍선이라도 달렸나?

'풍선을... 부풀리면서 노래를 하는 습성?'

라키엘은 문득 뭔가가 짚이는 걸 느꼈다. 그의 머릿속 뉴런이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고구려 시대의 권위 있는 멜론도에 수록된 단서를 탐구해냈다.

'몸을 부풀리면서 노래하는 동물이라면, 뭐가 있지? 코가 큰 원숭이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구애할 때 노래를 부르는 비슷한 새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한데... 그런데 오늘 밤도 뜨겁게? 그럼 밤에만 노래하나? 아, 혹시?'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라키엘의 눈빛도 반짝.

'...개구리!'

마침내 떠올랐다. 그는 첫 번째 카드를 쳐다보며 나름 추론한 내용을 정리했다.

'그래. 이건 아마 개구리겠네.'

문득, 한국에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특히, 그때 살던 투룸 전셋집 뒤편의 작은 공원이 떠올랐다. 그 공원에는 연못도 있었는데, 매년 5월쯤 되면 밤마다 수백 마리의 개구리 우는 소리를 거실에서 들을 수 있었다.

가히 개굴 콘서트였달까.

'그놈들, 특이하게도 낮보다는 밤에 엄청 울어댔지. 그러니까 개구리 맞네. 몸을 부풀리면서 밤에만 노래하는 놈들. 그런데....'

개구리가 인공호흡기 능력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 걸까.

'혹시 볼을 부풀리면서 공기를 저장하고, 그걸 인공호흡에 써먹나?'

쓰읍.

좀 애매한데.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직 카드는 둘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의 눈길이 두 번째 카드로 옮겨갔다.

<후보 2 : 비벙!>

"...."

이건 딱 보니까 알겠다.

'비버네, 비버.'

어쩐지 다른 건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애초에 추측할 근거나 건덕지 자체가 없어 보였다.

'인공호흡과 비버. 거의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럼 3장의 카드 중에서 이놈이 내 요구가 0% 반영된 쪽박이구만.'

그럼 마지막 카드는 뭘까.

세 번째 후보의 프로필을 본 그의 눈길이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후보 3 : 그의 따뜻한 콧김에 마음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포근했다. 위로받는 것 같았다. 아아, 이대로면 숨이 콱 멈춰 버려도 좋아.>

...어째서 이놈만 장르가 멜로로 급발진되는 거냐고.

'아 씨. 애매해서 미치겠네.'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살펴볼수록 뭔가 아침 막장 드라마스러운 저 내용으로는 도무지 추측되는 게 없었다. 어떤 동물을 베이스로 하는 환상종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최대한 키워드를 추려보자. 따뜻한 콧김. 마음이 녹아. 포근하고. 위로받고. 숨이 콱 멈춰도 좋... 아오 썅.'

추리할수록 머리만 더 아파졌다.

그래도 대강은 알겠다.

'콧김이 주요 능력이라는 건데, 그 콧김을 쐬고 있으면 숨이 멈춰도 좋다는 거지? 이거, 어쩌면....'

인공호흡기와 관련된 능력을 언급하는 게 아닐까. 살짝 희망회로가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

'문제는 저 표현이 그냥 비유인 거라면, 곤란해진다는 거지.'

그러면 된통 낚시질에 걸리는 셈이다. 그건 싫었다. 그렇기에 더욱 계산하기가 빡쎄졌다.

'자, 그럼 환상종 선택 뽑기의 규칙을 다시 상기해보자. 주어지는 카드는 세 장. 각각의 카드가 내 요구사항을 반영하는 비율은 0%, 50%, 100%. 즉... 쪽박, 중박, 대박.'

그 기준으로 지금 주어진 세 장의 카드를 보자면?

'일단 2번 카드가 0% 쪽박인 건 확실하고.'

그러니 2번은 잊고.

문제는 남은 1번과 3번이었다.

'둘 중의 하나가 100%, 나머지가 50%. 그런데 어느 쪽이 100% 대박인지를 모르겠어. 판단이 안 돼.'

특히 3번 카드가 제일 애매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콧김을 지녀서 숨이 콱 멈춰도 좋다는, 저 인공호흡기를 떠올리게 하는 문구가 실제 능력을 설명한 건지, 아니면 그저 비유적인 낚시인 건지가 판단이 되지가 않았다.

'환장하겠네.'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려 2,700 HP를 투자하는 뽑기였다. 이번에 실패하면 재시도도 어렵다. 게다가 당장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냥 콱 1번 카드를 뽑아?'

그의 눈길이 개구리형 환상종일 것으로 추정되는 1번 카드에 머물렀다. 볼을 부풀리는 능력이라면 분명 공기와 연관이 있을 것인데, 그게 과연 인공호흡에 활용될 수 있을까?

"...아니."

그는 카드에 쓰인 소개말에만 순수하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자 자연히 결론이 나왔다.

'1번 카드에 쓰인 글귀에는 호흡과 관련된 언급이 없어. 노래만 있지. 그렇다면 결론은... 1번 카드는 공기를 활용해서 노래하는 능력에 특화된 환상종이라는 것.'

공기 활용은 확실한데.

목적이 인공호흡이 아니라 노래다.

그렇다면 1번 카드가 50%, 중박 카드다.

'후우.'

추리 끝에 결론을 내린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나름 궁리를 했지만,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확률의 싸움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각이 더 보이는 쪽에 올인.'

라키엘은 과감하게 3번 카드로 손을 뻗었다.

딩동!

[당신은 후보 3 : <그의 따뜻한 콧김에 마음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포근했다. 위로받는 것 같았다. 아아, 이대로면 숨이 콱 멈춰 버려도 좋아.> 를 선택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눈앞을 채웠다.

선택된 3번 카드가 광채로 물들었다.

화아악-!

카드가 확 뒤집혔다. 뒷면에 새겨진 검은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날개와 촉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윽고 실루엣이 환하게 빛났다.

파츠즈즈즛! 파칙!

카드에서 발산되는 스파크!

마법진이 발동했다. 새로운 존재가 자신의 탄생을 알리며 카드를 뾱 박차고 튀어나왔다.

파츳!

자그마한 충격파와 함께 맹렬히 쏘아져(?) 오는 사과 크기의 덩어리!

"코몽!"

"...컹헝!"

빠악!

미처 받지 못했다. 아니, 안면으로 받아(?)냈다. 스트레이트에 얻어맞은 느낌. 콧등이 얼얼했다. 쌍코피가 터지진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겨를은 없었다.

'환상종부터!'

받아내야 한다. 행여나 바닥에 떨어지면 다칠 테니까. 콧등이 찡한 아픔 속에서도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이쪽의 얼굴을 때린 반동으로 도동실 떠올라 있는 덩어리가 보였다.

손을 뻗었다.

몸을 날렸다.

슬라이딩을 하며 타구를 극적으로 잡아내는 외야수처럼, 새로운 환상종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잡을 수 있었다.

콰당탕!

세이프.

"...거억."

하지만 한낱 고깃덩이 육신의 아픔 따위엔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는 환상종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어떤 녀석이야?'

"코몽!"

마치 대답하듯 손바닥 위에서 해맑게 외치는 새로운 환상종.

그건 바로....

"코끼리?"

"코모몽! 코몽!"

마치, 정답이라고 말하듯 빵긋 웃는 환상종. 그 모습은 바로 사과 크기의 작고 통통한 아기 코끼리였다. 한데 녀석이 이쪽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몽? 코모몽?"

"...응? 나 괜찮냐고?"

"코몽!"

"괜찮은데? 왜?"

"코몽코몽! 코모몽!"

"뭐? 쌍코피?"

되묻는 순간이었다.

...주르륵.

삽시간에 코 아래쪽이 찝찝해졌다. 방금 마법진에서 쏘아져 나온 녀석에게 얻어맞으며 기어코 쌍코피가 터진 듯했다.

"어오, 씨."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코피가 제법 많이 나왔다. 옷에 묻으면 안 되는데. 생각하는 사이에도 코피가 바닥으로 뚝뚝, 점점이 떨어졌다. 코가 왕창 막혀서 입으로 숨을 쉬어야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코몽!"

아기 코끼리 환상종이 외쳤다. 이쪽을 향해 자그마한 코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후우욱!

콧김을 빨아들였다.

이쪽의 코피가 쑥 빠져나갔다. 코피로 막혔던 콧구멍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처럼 뻥 뚫렸다. 그러나 놀랄 겨를은 없었다. 이번엔, 이쪽이 놀라기도 전에 아기 코끼리 환상종이 콧김을 훅 불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후우욱?

뻥 뚫려서 시원해진 이쪽의 콧구멍 속으로, 대자연의 신선하고 상쾌한 1급수 공기가 훅 불어 들어오며 허파 꽈리를 구석까지 야물딱지게 적셨다. 순식간에,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딩동!

[당신의 허파가 능동 지능형 석션 기능을 겸비한 인공호흡에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뜻밖의 신선한 공기를 원샷한 허파가 기쁨의 훌라춤을 춥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300]

'...대박.'

빙고.

고심 끝에 뽑은 환상종, 아기 코끼리 '코몽이'의 능력을 깨달은 라키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164화.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때 (3)

'...미친.'

대박.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한 충돌 때문에 왈칵 나오던 쌍코피였다. 덕분에 코로 숨을 쉬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의 환상종이 그걸 해결해 줬다?

'코를 내 쪽으로 뻗더니 숨을 빨아들였어.'

심지어 코를 접촉하지도 않았다.

눈앞의 아기 코끼리 환상종은 이쪽을 향해 코를 뻗은 채, 허공에 대고서 콧김을 빨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흡입력이 원격(?)으로 이쪽의 콧구멍 속 압력을 조절했다! 코피를 쏙 빨아내듯 콧구멍 바깥으로 뽑아 버렸다!

'석션이잖아, 이거.'

비염 때문에 이비인후과에 가본 사람은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의사쌤이 가느다란 빨대 비슷한 기구를 콧구멍에 넣는 거. 그러면? 콧구멍 안에 들어차 있던 고인물, 아니, 콧물이 쏙 빨려 나가는 시원한 경험 말이다.

'딱 그거네. 석션이네. 게다가 석션은... 인공호흡기 사용에도 필수적인 건데.'

사실이었다.

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건 마냥 편한 일은 아니다. 특히, 기도(trachea)에 가래 등의 분비물이 줄줄 고이곤 한다. 그렇기에 때에 맞춰서 석션으로 분비물을 빼줘야 한다. 안 그러면 자칫 폐렴이 생길 수도 있다.

'그 귀찮고 신경 쓰이지만 꼭 필요한 석션을 이렇게 쉽게, 심지어 원격으로 해준다고?'

미쳤다, 미쳤어.

그런데 눈앞의 아기 코끼리 환상종의 더 미친(?)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닌 듯했다.

"이봐?"

"코몽?"

"너 이름이 코몽이야?"

"코모몽! 코몽!"

"응, 그래. 나도 반가워. 그런데 코몽아? 하나만 좀 물어보자."

"코몽!"

"너 방금, 내 코피를 빨아낸 다음에 말이야. 혹시 내 기관지에 콧김을 불어넣어 준 거야?"

"코모몽! 코몽!"

"그러면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으니까?"

"코몽!"

"...."

알겠다.

확실하다.

방금 코몽이가 이쪽의 콧구멍에 불어준 콧김, 정말로 인공호흡이었던 거다. 그런데 심지어 이것마저도 원격이었다!

'미친. 이건 무슨 와이파이 인공호흡도 아니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가운데, 코몽이의 능력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디테일하게 알고 싶어졌다.

"그럼 코몽아. 너도 혹시 설명서 가지고 있어?"

"코몽!"

녀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서 뭔가를 되새김질하듯 우물거렸다. 그러고는....

"퉤!"

철퍽!

설명서 뭉치를 뱉어냈다.

"...."

라키엘은 설명서를 펼쳐보았다.

[코몽이 사용설명서]

[코몽이는 귀여운 아기 코끼리입니다. 사랑으로 보살펴 주세요.]

[코몽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코몽이는 함께 동봉된 두 가지 종류의 해바라기씨를 먹음으로써 덩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 : 코몽이를 거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 = 12시간]

[파란 해바라기씨 : 코몽이를 아담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먹여 주세요. 거대화 상태에서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지 않고 12시간을 넘기면 꼬슴이는 자동으로 아담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대신, 탈진 상태에 빠져 24시간 내에는 다시 거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2색 해바라기씨 세트 구매 비용은 1 HP입니다.]

[코몽이는 소형화 / 거대화 상태에서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코몽이 보유 스킬 목록>

[코머즈 모드 (패시브) : 코몽이는 크고 밝은 귀를 지녔습니다. 덕분에 호흡 소리를 통해 환자의 1회 호흡량(tidal volume) x 1분간 호흡수 = 분당 환기량(minute ventilation) 및 환자의 흉강내압(intrathoracic pressure) 등의 호흡 컨디션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힘찬 흡입 (Lv. 1) : 원격으로 환자의 기도 및 비강에 고인 분비물을 빨아낼 수 있습니다.]

[신선한 숨결 (Lv. 1) : 원격으로 신선한 콧김을 보내 환자의 호흡을 보조합니다. 이는 코머즈 모드(패시브)와 연계되어 환자의 컨디션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이 데이터에 따라 최적의 인공호흡 패턴 및 모드를 능동적으로 세팅합니다. 또한, 이를 통하여 빈호흡(tachypnea), 기흉, 호흡근 피로 등의 인공호흡기 사용의 부작용 현상을 효율적으로 예방합니다.]

"이건 무슨...."

라키엘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고 말았다. 이건 진심으로 미쳤다. 만약 현실 대한민국에 이런 녀석이 있다면? 유수의 종합병원에서 돈다발을 싸들고 달려와서 영입하려고 들 것이다.

'당연하지. 자기가 알아서 AI처럼 환자의 호흡 컨디션을 감지해서 분석하고, 그거에 맞춰서 최적의 세팅으로 인공호흡을 한다는 거잖아. 그것도 실시간으로 세팅값을 계속 바꿔가면서.'

단언컨대, 이런 능력을 지닌 인공호흡기는 없다.

그러니까 오늘의 뽑기는....

'초대박이네.'

라키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3연속 텀블링을 뛰고 싶은 충동을 자제했다. 그리고 품속의 다른 환상종 선배(?)들을 꺼냈다.

"자, 그럼 다들 인사하자."

"꼬슴?"

"뽀복?"

안주머니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다가 나온 꼬슴이와 뽀복이가 졸린 눈에서 눈곱을 떼어냈다. 그러다가 새로운 친구의 모습을 목격했다.

"꼬슴?"

"뽀복?"

"...코몽?"

코몽이도 두 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활짝 웃었다. 꼬슴이와 뽀복이도 해맑은 웃음이 귀에 걸렸다. 이내 세 환상종이 서로를 향해 통통한 궁디를 방실방실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꼬스슴?"

"뽀보복?"

"코모몽?"

"꼬!"

"뽀!"

"코!"

'...잘 노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뽑은 환상종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째 세 번의 뽑기를 하면서 한 번도 꽝이 없었다. 우연일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난 덕분인 거지!'

세 가지의 카드 중에서 하나를 뽑는 선택이 항상 현명했던 거다. 그는 자부심의 콧김을 풍, 뿜어내며 병실에 비치된 수건을 꺼냈다. 얼굴에 남은 쌍코피 자국을 열심히 닦아냈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어디 계시지?"

별안간 병실 밖 복도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조원인가?'

졸업시험을 위해 하나로 묶인 조원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숙덕이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중에 저런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이어지는 바깥의 대화를 들어보자니, 과연 그 추측이 맞았다.

"못 봤어. 자네는?"

"나도 못 봤어. 켈로드 말로는 아까 이쪽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혹시 다른 행선지를 들은 사람은? 없나?"

"나도 못 들었어."

다들 다급한 목소리로 이쪽을 찾는 듯했다. 무슨 일일까. 자신이 없을 때 저들은 어떤 뒷담화를 할까. 궁금한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조원들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도 들려왔다.

"젠장, 그럼 어쩔 수 없어. 흩어져서 각자 병실을 전부 둘러보자."

"그런데 병실에 안 계시다면? 이 건물에 안 계신 거면?"

"내가 건물 밖을 찾아보지. 학장님께도 알려서 다른 사람들을 더 동원해볼게."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자리를 비우다니. 환자 호흡에 이상이 올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놓고, 그걸 맞춰놓고, 정작 본인은 모습을 안 보이면 어쩌자는 거야?"

'...뭐?'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호흡마비?

벌써?

'환자한테 호흡마비가 왔다고?'

상황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라키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 환상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꼬슴아? 뽀복아? 코몽이도, 가자."

"꼬? 뽀? 코?"

"환자를 봐야지."

"꼬! 뽀! 코!"

녀석들을 챙겼다. 병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마침 근처에 있던 조원 하나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엇?"

"엇은 무슨. 환자 상태는?"

"그게, 음, 숨소리가 이상합니다. 숨 쉬는 걸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급성호흡마비네. 더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예."

"뭐해? 뛰어."

"아, 예!"

환자의 병실을 향해 뛰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조원들도 이쪽을 보고는 황급히 합류했다. 그렇게 일행의 선두에서 달리며, 라키엘은 자신의 안주머니가 있는 곳을 툭툭 두드렸다.

'준비 됐냐?'

내심 물었다.

마치 대답하듯, 안주머니 속에서 나직하고도 야물딱진 속삭임이 돌아왔다.

"코몽!"

그래, 됐다.

급성호흡부전? 한번 해보자. 살려보자. 그러니까....

'호흡 마비, 딱 대.'

라키엘은 뜀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코몽이의 능력은 굉장했다.

이 아기 코끼리 환상종은 투자한 HP 값을 톡톡히 해냈다. 아니, 능히 초과달성이라 말할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보였다.

"코모몽! 코몽!"

마비 증상이 횡격막까지 침범하여 급격한 호흡마비를 겪던 환자였다. 병실에 갓 도착했을 때는, 거의 안색이 새파래져서 호흡이 멈추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코몽이가 나서는 순간, 그 모든 위기가 싹 날아갔다.

"코몽!"

팔랑!

코몽이가 귀를 활짝 펼쳤다. 패시브 스킬인 '코머즈 모드'로 환자의 호흡 상태를 순식간에 판별했다. 이윽고 뻗은 코로는....

"코모모모모몽-!"

후우우우욱!

상쾌한 콧김을 환자에게 뿜어냈다. 마치 스나이퍼의 총탄처럼, 섬세하게 조절된 콧김 덩어리가 환자의 콧구멍에 원격 다이렉트로 총알 배송되었다. 정확한 호흡량(vilume targeted)과 공기압력(pressure targeted)으로 환자의 허파꽈리를 토닥토닥 보듬어 주었다.

덕분에... 환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혈색을 찾았다!

"이게 무슨...."

조원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휘둥그레진 시선을 교환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거, 혹시 코끼리인가?'

'코끼리처럼 생겼지만... 너무 작은데?'

'그런데 지금 저 코끼리가 콧김을 불어넣고 있는 거야? 환자에게?'

'환자의 호흡이... 안정되고 있어.'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호흡이 멈춘 사람의 호흡을 도와주는 사과 크기의 코끼리라니.

'설마 이게 소문으로 떠돌던 환상종이라는 건가.'

조원들은 문득 떠올렸다. 일전에 듣기로는, 황태자가 작고 아담한 환상종 여럿을 데리고 다닌다고 했다. 어떤 환상종은 가시를 제공하고, 또 어떤 환상종은 독극물을 거침없이 먹어치운다고 했던가.

'그럼 저 작은 코끼리도 그런 환상종이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사람의 호흡을 도와주는... 뭐, 그런?'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상상도 못 했어.'

모두가 황태자와 코몽이를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단 한 명, 켈로드만은 단순히 환상종의 모습이나 능력에 감탄하지 않았다. 그는 조원들과 다른 관점에서 황태자에게 경악하고, 감탄했다.

'황태자의 말이... 정말로 맞았다. 진짜로 호흡 곤란이 왔어.'

문득, 아까 자신만만하게 환자의 병명을 밝히던 황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길랭-바레 증후군이라고 했던가. 신경 세포인지 뭔지에 염증이 생겨서 마비가 일어난다고. 조만간 환자에게 호흡마비가 올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당연히 믿지 않았다.

환자는 그저 하지 마비만 겪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체가 마비된 것과 호흡곤란이라니. 그런 일은 없을 듯했다. 도저히 연관성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였다.

황태자가 그저 잘난 체를 위해 허세를 부린다고만 여겼다. 선뜻 믿기가 어려웠다. 하여 추궁하듯 따져 물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황태자의 말이 맞았어.'

우연일까.

혹은 진짜일까.

켈로드는 자신이 내면에 쌓아둔 황태자에 대한 불신의 탑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앞으로 자신과 조원들 모두가 황태자의 활약을 보며 느끼게 될 경악에 비하자면, 이건 그저 귀여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165화. K-맛 가시의 위력 (1)

'황태자는 어떤 사람일까.'

마젠타노 의료대학의 졸업예정자, 예비 의사 켈로드는 내심 경악감을 삼켰다.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그저 허세를 부리는 줄 알았어. 자신의 사이비 의술을 포장하려고, 우리 앞에서 잘난 체를 하려 드는 줄로만 알았어.'

하지 마비 환자에게 곧 호흡마비도 올 거란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정말 황태자의 말대로, 환자의 호흡이 순식간에 불안정해졌다.

"...."

아까의 위급했던 상황을 떠올리니 다시금 손아귀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갑자기 컥컥대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던 환자. 그런 환자 앞에서 당황하여 얼어 버렸던 자신.

무력했다.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심 지니고 있던, 의료대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말이다.

'그런데 황태자는 달랐어.'

위급한 환자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수백 명의 중환자를 이미 겪어본 사람처럼 침착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환상종을 꺼냈다. 덕분에 환자가 위급한 상태를 넘길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

결국엔 황태자가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를 몰아붙이듯 대했던 자신은 정작 아무것도 못 했다. 생각할수록 얼굴에 벌게졌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환자를 살리는 데에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니까.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전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앞으로의 치료?"

"예."

궁금했다. 앞으로 황태자가 어떻게 치료를 진행할 것인지. 자신도 미리 숙지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켈로드의 태도 덕분이었다.

'허허. 이 친구 좀 보게.'

라키엘은 더욱 흐뭇함을 느꼈다.

'보통 이런 경우엔 부끄러워서라도, 아까 했던 자신의 언행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더 못나게 구는 놈들이 많은데.'

이 친구는 다른 듯했다. 자신의 자존심보다 앞으로의 원활한 치료가 더욱 중요하다고,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글쎄. 염두에 둔 치료법이 있기는 한데, 그보다는-"

켈로드를 보는 라키엘의 눈빛에 묘한 탐욕이 서렸다. 마치 굴리기(?) 딱 좋은 대학원생 후보를 바라보는 교수님 같은 눈빛으로, 그가 시험하듯 물었다.

"나한테만 의지하지 말고 그쪽 의견도 밝혀보는 건 어떨까?"

"...."

켈로드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름 의연하게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

"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보다 솔직히 대답을 드리자면, 제가 나름 지니고 있는 약초 레시피를 사용해볼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처방이 꺼려집니다."

"어째서?"

"자칫 무지한 상태에서 잘못된 치료법을 강행하다가 오히려 환자에게 해를 입히진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흐음,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태도인 것 같은데."

"제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켈로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진단을 정확하게 해낸 이도, 돌발적인 응급상황을 예견한 이도, 그에 적절한 대처를 보인 이도 모두 전하이십니다. 물론 아직은 전하의 진단을 완전하게는 신뢰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직도 의심을 해?"

"세상에 100%는 없으니까요."

"신중하네."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은 개뿔."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뭐 어쨌건, 일단 길랭-바레 증후군의 치료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정맥 면역글로불린(Intravenous Immunoglobulin; IVIG) 주사, 그리고 혈장분리교환법(Plasmapheresis) 정도가 있긴 한데. 그걸 여기선 쓸 수 없고."

"...."

"왜 그래?"

"아뇨, 또 처음 듣는 용어를 쓰셔서."

"신경 쓰지 마. 나도 배운 거 되새기는 기분으로 말하는 거니까."

"...."

"어쨌건, 방금 말한 치료법은 여기선 쓸 수 없겠고. 대신에 대안적으로는 신경 우회 침술 정도가 있겠지."

"신경... 우회 침술 말입니까?"

"어. 혹시 소문은 들어봤나? 내가 웨어울프 간호사들 꼬리를 마비시킨 거."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내심 비웃었습니다. 가시 따위를 꽂아서 웨어울프의 꼬리를 마비시켰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선 말입니다.

켈로드는 뒷말을 삼켰다. 그땐 그저 비웃음만 지었는데. 이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사이, 라키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때 썼던 방법을 조금 응용해볼까 싶군. 이미 염증을 일으켜 마비된 신경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신경의 경로를 자극으로 일깨워서 하지 마비를 해결하면 될 거 같아서."

"그게... 가능합니까?"

"아마도?"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도였다.

'경혈 스캐닝이 있으니까, 가능해.'

자신은 환자의 몸속 경혈의 흐름을 모조리 관찰할 수 있다. 덕분에 어떤 경혈을 어떻게 자극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가능하다.

한국에서 한의원을 꾸리던 시절이었다면, 평범한 한의사였던 당시였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시도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가능한 각이 보였다.

'게다가 사람의 신경은 실제로도 그렇게 회복이 되기도 하니까.'

특정한 기능을 하던 신경이 죽거나, 소실됐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전혀 엉뚱한, 다른 기능을 하던 신경의 경로가 상실된 기능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그걸 이용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시신경 손상으로 시력을 잃은 분들. 그런 분들의 미각 신경을 이용해서 시력을 되살려 주는 기기도 연구되고 있지.'

카메라 역할을 하는 안경. 그 안경에 연결된 전극 센서를 혀에 대는 방식이었던가. 그러면 미각 신경을 통해 후두엽의 시각 중추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연구진조차도 어떻게 미각 신경을 통해 시각 정보가 전달되는지 그 원리를 100%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아직은 극초기 단계의 연구라서 오직 흑백으로만, 엄청난 저화질로만 간신히 사용이 가능하다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처럼, 인체의 신경이라는 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가능성이 많은 영역이었다. 하여 자신은 그 가능성을 십분 활용해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라지만, 일단 좀 쉬었다가."

"예?"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당장은 환자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자연회복을 좀 기다려야 할 단계라서. 나도 엄청나게 피로하기도 하고."

그의 미소에 지친 기색이 살짝 배어났다. 사실 그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정말로, 진짜로, 굉장히 피곤했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 쓰러지고 싶을 정도였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생각해보면 그동안 너무 못 쉬었다. 앙부아즈 내전을 치르고 황도에 돌아오자마자 바쁘게 지냈다. 2황자의 다이어트를 감독하고, 연회 준비를 했다. 엘프의 폐흡충을 치료하고, 의료대학에 오게 됐다.

한데 그 사이에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휴일 없이 하드코어 주 7일 근무를 최소 3개월은 강행한 느낌이었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마나를 흡수하며 버티는 게 아니었다면... 아마 몇 번은 몸져누웠겠지.'

라키엘은 짐짓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난 좀 쉬었다가 올게. 그동안 환자 호흡은 코몽이가 도와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 부르고."

켈로드와 조원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더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아까 코몽이를 뽑았던 빈 병실로 다시 돌아왔다. 짱박혀서(?) 쉬기에 딱 좋았다.

물론 그는 단순하게 휴식만 취하지는 않았다.

"꼬슴아?"

"꼬슴!"

"우리 오랜만에 호흡 좀 맞춰볼까?"

"꼬스슴?"

"셀프 시침."

이렇게 피로할 때는? 셀프로 푹푹 찌르는 게 제일이다. 그렇게 막힌 순환 좀 뚫어준 뒤에 낮잠을 자면 피로가 더욱 제대로 풀리리라.

"그럼 가시 좀 빌릴게?"

"꼬슴!"

이쪽의 뜻을 깨달은 꼬슴이가 선뜻 통통한 궁디를 내밀었다. 알아서 원하는 가시를 뽑아 가라는 뜻이었다.

"고마워."

뾱!

첫 번째 가시를 뽑았다.

'후우. 온몸이 물 먹은 신문지처럼 무겁네. 피곤해. 이럴 때는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 우선이겠지.'

족궐음간경.

다른 말로는 간족궐음지맥(肝足厥陰之脈)이라 불리는 십이정경의 한 갈래. 수태음폐경과도 연계가 되는 이 경맥은, 특히 간에 쌓인 피로를 다스림에 있어 으뜸인 혈자리의 조합이었다.

'시작은 대돈혈(大敦穴)부터.'

그는 신발을 벗어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노려보았다. 엄지의 발톱뿌리, 둘째 발가락이 있는 방향의 귀퉁이에 대돈혈이 있었다. 일찍이 동의보감에서 이르길, 이 대돈혈이야말로 족궐음간경맥이 출(出)하는 정혈(井穴)이라 하였던가.

톳!

하얀 가시를 대돈혈에 3푼의 깊이로 찔렀다.

다음 차례는 행간혈(行間穴)이었다.

'엄지 뿌리와 둘째 발가락 뿌리가 만나는 사이 지점.'

그곳의 오목한 지점을 가만히 짚어보면 살며시 맥이 뛰는 자리가 있다. 족권음간경맥이 류(流)하는 곳이며, 이른바 형혈(滎穴)이 되는 자리였다.

툿!

이번엔 조금 더 강하게 6푼 깊이로 찔렀다.

"후우."

두근, 두근.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발가락의 경맥이 작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상쾌한 기운이 다리를 통해 올라왔다. 내부의 장기, 특히 간장을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딩동!

[당신의 간 기능이 아주 조금 활성화됩니다.]

[당신의 간장이 오랜만에 받는 침술에 작은 기쁨의 소박한 헤드뱅잉을 시전합니다.]

[간장이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400]

오랜만이다, 이 감각은.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이 느낌은.

'예전 생각나네.'

희미한 미소가 절로 맺혔다. 문득, 처음 라키엘의 몸으로 들어왔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에도 이렇게 셀프 침술로 수태음폐경을 다스리다가 처음으로 오장육부의 후원을 받았는데.

'후우. 다음은 태충혈(太衝穴).'

손을 뻗었다. 꼬슴이의 궁디에서 가시를 뽑았다. 태충혈을 조준하고, 시침했다. 그런데....

톳!

'...어?'

시침을 한 라키엘은 흠칫했다. 갑자기, 너무나 별안간, 시침을 한 태충혈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 엄습했다!

'어억?'

대체 뭐지. 혹시 시침을 잘못한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라키엘은 황급히 태충혈이 있는 발등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태충혈에 꽂힌 가시가 시커먼 색깔이라는 것을.

'허?'

비로소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시침에만 너무 몰입해서, 피로감에 찌든 채 잠깐 딴생각을 하며 추억에 잠겨서, 무심결에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색깔의 가시를 꼬슴이에게서 뽑아 버렸다는 사실을.

한편으로 기억도 났다.

꼬슴이의 가시는 세 가지 색깔이 있었다. 흰색은 무자극 무통증, 갈색은 제법 따끔하고 아픈 자극용, 그리고 검은색 가시는 정체불명의 K-맛.

'난리 났....'

황급히 태충혈의 검은 가시를 뽑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시를 잡기도 전에, 더욱 극한의 고통이 몰려왔다!

'...그와아아아악!'

영혼 출타를 부르는 K맛 고통!

너무나 아찔한 통증 때문에 라키엘은 그만 혼절할 뻔했다. 자극이 너무나 심했다. 가시를 뽑으려 뻗던 손을 더 움직이지도 못하고서 온몸을 덜덜덜 떨어야 했다.

'그으읏, 이거, 뭐, 이런 게 다 있....'

세상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번갈아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지독하게 고약한 조명을 마구잡이로 뒤섞어서 껐다가 켜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딩동!

청명한 알림음과 함께,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K-맛 효과를 지닌 검은색 가시를 셀프로 시침하였습니다.]

[지옥과 같은 고통을 이겨낸 당신에게 K-맛의 진정한 효과가 적용됩니다.]

[K-맛 가시 효과 발동.]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 됩니다.]

166화. K-맛 가시의 위력 (2)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 됩니다.]

후우욱...?

'헙?'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순간 시야가 울렁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눈앞의 세상에 투명한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한 느낌. 그 일렁이는 파문과 번지는 투명한 잉크가 시야 한구석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쿠쿠! 쿵! 쿵!쿵! 쿵!

'...어어어억?'

제어할 수가 없었다. 마치 3천 톤만큼 석탄해! 를 외치며 폭주하는 증기기관차가 된 것 같았다. 혈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급발진을 시전하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혈류의 파워! 동맥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판막이 바람개비처럼 탭댄스를 추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여기까지였다면 아 좀 심장이 벌렁벌렁 나대는구나 하고 말았을(?) 것이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심장을 포함한 신체의 모든 장기가 날뛰어댔다!

딩동!

[오장육부가 신진대사 '8282 모드' 급가속 상황에 정신줄을 놓고 있습니다!]

[심장 : 나는... 달린다! 폭주기관차! 트라하하하!]

[허파 : 허파파파파팦파팦ᄑᆞ파팍!]

[대장 : 융털돌기 한계 가속! 제어 불가! 괄약근 사출을 시도하지 말입니다!]

[간장 : 어머 나 괄약근한테 따귀 맞았어.]

[위장 : 그럼 방금 내가 맞은 건 뭐임?]

[콩팥 : 히히히 결석 발사!]

[오장육부가 처음 경험하는 신진대사 가속에 극흥분 상태로 진입하였습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HP를 후원하려다가... 말았습니다!]

"...."

뭘까, 이 상황은. 대체 뭘까, 이 미친 감각은. 진짜로 이건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세상이 느려진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은.

'미쳤다. 미쳤어!'

혈관이 폭주했다. 뇌세포가 모조리 벌떡 깨어났다. 근육과 신경도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힘이 불끈불끈. 지금은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완전히 낯선 기분은 또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런 기분... 대략 십몇 년쯤 전에....

'한의대생 시절에, 공부하고 과제 하느라고 밤 지샐 때. 딱 그때... 고농축 카페인 음료 마셨을 때 이런 기분이었는데?'

딱 그러했다.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그때 마신 게 정상적인 카페인 음료였다면? 지금은? 핫세븐 100캔에 고농축 에스프레소 액기스를 얍얍촵촵 섞어서 대뇌피질에 다이렉트로 꽂아넣은 기분이었다!

'무슨... 이런....'

급격히 빨라진 신진대사 때문일까. 덕분에 뇌세포도 더욱 활성화된 걸까. 생각의 속도가 경이롭도록 빨라졌다. 감각의 속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우우웅!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

라키엘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그는 허공에 날아다니던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날파리였다.

그런데 날파리의 날갯짓이 이상했다. 펄럭이는 날개가 선명하게, 느릿하게 보였다. 원한다면 날갯짓 횟수를 눈으로 보며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슬로 모션으로 세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건?'

그는 손을 뻗었다. 손이 경이로운 속도로 움직였다. 날파리 앞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장애물(?)을 감지한 날파리가 비행 방향을 바꾸었다.

그 앞을 또 막았다. 날파리가 회피를 시도했다. 다시 막았다. 날파리가 급커브를 틀었다. 또 막았다. 자연히 손이 가상의 원을 그리게 되었다. 날파리가 계속 날면서도 원 안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원의 크기가... 테니스공 정도밖에 안 됐다!

스스스스슷!

'허허, 허허허.'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자신의 한 손! 그걸 보며 라키엘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거, 어쩐지 콱실버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가진 못했다.

딩동.

[K맛 가시의 효과가 떨어졌습니다.]

[신진대사 '8282 모드'가 종료됩니다.]

눈앞에 서슴없이 떠오른 메시지.

그와 함께 예고도, 얄짤도 없이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급속도로 가속되어 있던 신진대사가 확 느려졌다. 아니, 원래의 정상적인 속도로 돌아왔다.

...후우욱.

'컷?'

시속 500km/h로 달리고 있다가 풀브레이킹을 꽉 밟는 기분! 오장육부도 덩달아 또 난리가 났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8282 모드' 종료의 후폭풍에 또 정신을 못 차립니다.]

[심장 : 기야아아아아아악.]

[허파 : 허퍄아아아아아악.]

[대장 : ...끄응!]

[간장 : ...차아!]

[위장 : 님들 뭐하심?]

[콩팥 : 아 눈치 좀ㅋㅋ 리액션 찰져야 밥값 하는 거라고ㅋㅋㅋ]

[오장육부가 경이로웠던 경험에 감탄하며 현타를 체감합니다.]

[오장육부가 '8282 모드' 그거 참 좋았는데, 라는 은근슬쩍한 눈빛을 당신에게 보내며,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500]

"...허억, 훅, 헉."

라키엘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찔했다.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닌가 싶었던 풀가속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니, 현기증이 전두엽과 후두엽을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후려쳐 왔다.

한마디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와 씨.'

이건 대체 뭐였지.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현기증을 억지로 털어냈다. 손을 뻗어 아까 태충혈에 잘못 꽂았던 검은색 가시를 뾱 뽑아냈다. 한편으로는 방금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검정색 가시의 효능, K맛에 대해 생각했다.

'이거, 전에는 그냥 짐작으로 엄청 아플 거라고만 여겼는데.'

겪어보니 단순히 아픈 게 아니었다.

체감해보니 알겠다.

'엄청난 고통 뒤에, 그걸 참아내면 더 엄청난 효력이 있는 거였어.'

신경 가속.

신진대사 급발진.

설마 그런 효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누군가가 말로만 해줬으면 절대 안 믿었을 것이었다. 한데 자신은 그걸 직접 체험까지 해버렸다.

'어이, 다들 무사하냐?'

혹시 신체적으로 문제나 후유증이 찾아오진 않을까.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신진대사 폭주였기에, 절로 걱정이 되었다. 오장육부를 향해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반응이라는 게....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을 그윽한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어이 라씨, 한 대 더? 츄라이, 츄라이.]

"...."

이놈들, 미쳤구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일단 오장육부의 반응을 보아하니 딱히 큰 부작용은 없는 듯했다. 만일 신체적으로 이상이 있다면 제일 먼저 그것부터 알릴 녀석들이니까. 이 몸의 건강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진심인 녀석들이니까.

'그럼 부작용은 걱정 안 해도 될 거고.'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검정색 가시를 집어들었다. 아까의 그 엄청났던 체험? 또 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엄청 아팠으니까.'

진짜로 아팠다.

생각만 해도 또 아팠다.

진심으로 영혼이 출타해서 마실 한 바퀴 찍으며 동네방네 막걸리 한 잔씩 걸치고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딱 그만큼 아팠다.

"...."

생각하지 말자.

시도하지도 말자.

'누구랑 싸울 때나 좀 써먹어 볼 수 있겠구만.'

예를 들자면, 쟈빌론 같은 엄청난 굇수급의 적이라든가. 그런 놈들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신진대사 풀가속으로 위기를 모면하기엔 나름 괜찮을 듯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당연히 사양이다.

'내가 무슨 고통을 사서 즐기는 변태도 아니고.'

라키엘은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흔들리게 되었다. 예고도 없이 눈앞에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 내용 때문이었다.

딩동!

[당신의 침술 경험치가 임계점을 돌파하였습니다.]

'...어?'

이건 또 뭘까.

난데없이 떠오른 메시지를 빼꼼 쳐다보았다. 후속 메시지가 손에 손잡고 세트메뉴로 좔좔좔 떠올랐다.

[당신은 그동안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그 과정에서 수천 대가 넘는 침을 놓았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모두 당신에게 피와 살 같은 경험으로 축적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금 전의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가시를 자신의 몸에 꽂음으로써 경험의 지평을 폭발적으로 넓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경험이 술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술 한 방울이 되었습니다.]

[모든 경험은 임계점을 넘는 순간, 현실의 벽을 초월하는 재능으로 발현되며, 마침내 적절한 스킬로 개방될 수 있습니다.]

[농염하게 농축된 침술 경험이 '침술 스킬'로 개방됩니다.]

'뭐어?'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침술 스킬?'

언젠가는 개방하리라 마음먹고 있던 스킬이었다. 한데 지금 이게 딱 맞춰서 스킬로 열리다니.

'설마, 방금 검은색 가시를 꽂으면서 느꼈던 극한체험 때문에?'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라키엘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며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를 훑었다.

딩동!

[스킬명 : 침술 Lv. 3]

[대상의 몸에 가느다란 바늘을 꽂아넣어 기혈의 흐름을 조절하고 각종 효과를 일으킵니다. 이는 마음을 먹기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도, 악독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현재 레벨에서 제공하는 침술 효과의 증가량 : 15%]

[스킬 전용 옵션 ① : 시침 시뮬레이션]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500]

[현재 보유 중인 HP : 500]

"...."

이건 진짜다. 착각도, 환각도 아니다. 명백한 실화이며, 현실이다.

라키엘은 눈두덩을 거칠게 부비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기쁨의 트월킹을 덩실덩실 추려는 이성을 꽉 붙들었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스킬의 효과와 옵션 내용에 주목했다.

'침술 효과 15퍼센트 증가.'

꿀꺽.

얼핏 보기엔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15퍼센트라는 수치.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점은 따로 있었다.

'HP를 투자해서 스킬 레벨을 올리면, 저 스킬 효과 퍼센티지도 같이 올라가겠지.'

그게 중요한 점이다.

투자하기에 따라서 스킬 효과가 100%, 200%, 혹은 그 이상까지도 증가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후우, 이러다가 침 한 방 꽂았는데 불로장생, 뭐 이러는 거 아닌지 몰라.'

라키엘은 불끈불끈 피어나는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푸른 바다 저 멀리 날려보냈다. 대신 옵션의 내용에 집중했다.

'시침 시뮬레이션?'

가늘어진 눈매로 옵션을 주시했다. 옵션의 내용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딩동!

[침술 스킬 전용 옵션 ① : 시침 시뮬레이션 - 당신이 기존에 지닌 진맥 스킬의 '경혈 스캐닝 옵션'과 연계됩니다. 경혈 스캐닝으로 확보한 환자의 데이터를 시뮬레이션 모드로 불러올 수 있습니다. 데이터를 통하여 환자의 몸에 가해질 영향과 생겨날 변화를 관찰하고, 실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푹푹 찔러보세요?]

"...."

오늘 무슨 날인가.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안 그러면 환호성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겠어. 길랭-바레 증후군 완전 극복.'

침술 스킬의 내용을 보면서, 옵션인 시침 시뮬레이션의 내용을 보자마자 떠올릴 수 있었다.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길랭-바레 증후군에 시달리는 환자의 치료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찾아낼 묘수가 머릿속을 환하게 밝혔다.

그것은 바로....

'시침 시뮬레이션.'

나직하게 되뇌었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파츠즈즈즛!

시야가 검게 물들며 시뮬레이션 공간이 떠올랐다. 그 속에 아까 스캔했던 길랭-바레 증후군 환자, 미구엘 씨의 경혈 데이터를 불러왔다.

그 직후, 라키엘의 손이 움직였다.

척.

검은색 K맛 가시를 쥐었다. 자신의 장딴지를 조준했다. 그는 단순히 시뮬레이션 옵션만 활용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건 비효율적이니까. 같은 시간 내에 훨씬 빠르게, 효율적으로 시뮬레이션을 할 방법이 있으니까.

바로, 검정색 K맛 가시와 시뮬레이션 옵션을 연계 조합하면 될 테니까.

'지극히 효율적인 방법이 있고 그걸 아는데, 그걸 안 쓰면 내가 한국인이 아니지.'

그는 각오를 다졌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얘들아, 준비 됐냐?'

딩동!

[오장육부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냅니다!]

머릿속에 힘차게 울리는 오장육부의 화답.

그걸 들으며, 라키엘은 자신의 종아리 외구혈(外丘穴)에 검정색 K맛 가시를 야물딱지게 꽂아넣었다.

167화. 길랭-바레 증후군 치료술 (1)

"느어어어어...."

"...."

"느우어어...."

"...."

마젠타 의료대학의 졸업예정자, 예비의사 켈로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황당함을 억누른 눈길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황태자가 퀭한 얼굴로 화답(?)했다.

"느워러어어...."

"...."

황태자가 푹 쉬겠다며 자리를 비운 게 어제였는데. 그 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길래 정말로 제대로 쉬는 줄 알았는데. 황태자는 하룻밤 사이에 무슨 짓을 벌였기에 이토록 만신창이가 됐을까.

"저기, 전하?"

"느어어?"

"...."

황태자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특유의 은발 머리칼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당장 까치가 두어 마리쯤 날아와서 알 낳고 알콩달콩 신혼집으로 삼아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은 더했다. 피부는 온통 푸석푸석. 눈가는 퀭하니 움푹 들어가 있었다. 다크써클은 아예 턱까지 내려올 기세였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모습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후으, 깜짝이야. 좀비가 출몰한 줄 알았잖아.'

켈로드는 남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이었던가. 한창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이었다. 뒤에서 슬며시 기척이 들려왔다. 무심결에 돌아보았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진짜로 때아닌 좀비라도 출몰한 건가 싶어서, 하마터면 얼결에 옆에 놓인 꽃병으로 머리를 후려칠 뻔했다.

"...."

만약 그 충동을 행동으로 옮겼다면, 지금쯤 자신은 황족 시해 미수의 죄명을 덮어쓰고 황실 지하 0층 감옥 특실로 모셔졌겠지.

그는 슬며시 팔뚝에 피어오르는 소름을 털어내곤 황태자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느어어, 후욱, 그럭저럭?"

"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딱히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후욱, 훅."

"그럼...?"

"고민을 좀 했어."

"...."

아니, 사람이 고민을 얼마나 맹렬하게 하면 하룻밤 사이에 그런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겁니까. 켈로드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라키엘은 그저 힘없이 웃었다.

"고민이 좀 치열한 편이었거든."

사실이었다.

문득,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우연히 발견한 꼬슴이표 검은색 K맛 가시의 효과. 신진대사 8282 모드. 실로 엄청났다. 신체의 모든 기능을 급가속시켰다. 두뇌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각과 사고처리의 속도마저도 급발진이 가능했다.

그래서 자신은?

신진대사 8282 모드를 발동한 채, 침술 스킬의 옵션, '시침 시뮬레이션'을 사용했다.

'그거, 시너지가 상상 이상이었지.'

예상은 했다. 그래서 조합을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시너지가 났다.

'거의... 밤새도록 32배속으로 영화 수십 편을 본 느낌?'

정말로 그랬다.

초고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수십, 수백 번을 돌려볼 수 있었다. 온갖 시도를 다 해봤다. 개중에는 말도 안 되는, 실로 변태적(?)인 시도마저 있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K맛 가시의 약빨이 생각보다 짧았기 때문이었다.

"...."

덕분에 검은색 가시를 얼마나 많이 푹푹 찔러대야 했던가. 약빨이 떨어지면 찌르고. 영혼을 출타시키는 고통을 이 악물고서 참아내고. 그 보상으로 신진대사 8282 모드로 진입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그 과정의 무한 반복이었다.

정신과 몸이 다 함께 피폐해지는 건 필연이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래 이런 일이 그런 거거든. 한번 흐름을 탔을 때 쭈욱 밀어붙여야지.'

계속 강행했다.

덕분에?

마침내 찾아냈다.

'미구엘 씨, 완치시킬 수 있어.'

수백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찾아낸, 길랭-바레 증후군의 마비를 극복할 수 있을 시침법. 그걸 떠올리며 라키엘은 보람차게 씨익 웃었다.

"그래서 환자는?"

"아, 예. 어제부터 계속 잠들어 있습니다. 호흡은... 많이 안정되었고요."

대답한 켈로드가 잠깐 망설이더니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예."

"괜찮아. 안 죽어."

라키엘의 미소가 쓰리게 변했다. 사실은 별로 안 괜찮다. 당장 쓰러질 것 같다. 어제도 피곤했는데, 그래서 쉬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론 하나도 못 쉬었다. 오히려 핫세븐 100캔을 퍼마시듯이 날밤을 지새어 버렸다.

"그래도 해야지.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예?"

켈로드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어 왔다. 라키엘은 다시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람의 몸은 시시각각 변하니까."

그렇다.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또 다르다. 길랭-바레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 미구엘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시뮬레이션에 사용한 스캔 데이터는 어제의 것이었다. 당연히 지금 시점과는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는다. 컨디션이 미세하게 변했을 테니까. 덕분에 아주 미세한 오차가 생겨나 있을 테고.

'물론 아직은 그 오차가 크지 않아. 즉, 밤새도록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찾아낸 시침법을 적용할 수 있어. 적어도 아직은.'

아직은 가능하다.

오차가 크지 않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면? 내일, 혹은 모레가 되면?

'어젯밤에 찾아낸 시침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게 되겠지. 그걸 무시하고서 강행했다간? 난리가 날 거고.'

분명 그럴 것이다.

하니 시뮬레이션 자체를 다시 돌려야 할 거다. 어젯밤 장딴지를 푹푹 찔러가며 기울인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였다.

"지금 해야 해."

조금이라도 일찍 해야 한다. 그래야 오차가 적어질 것이다. 라키엘은 외투를 벗고 몸을 풀었다. 켈로드와 조원들은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다물었다.

"...."

저러다가 당장 쓰러질 거 같은데. 정말로 괜찮은 걸까. 그런데 황태자는 어째서 저토록 애를 쓰는 걸까.

'우리처럼... 의술에 인생을 건 사람이 아닐 텐데.'

그런 줄 알았다.

황족이니까.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이니까.

별궁 한의원인지 뭔지를 운영하는 것도, 그곳에서 무허가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도, 전부 좀 특이한 유희나 취미생활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할 거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지금 황태자의 모습을 보면....

'취미생활을 저렇게... 목숨 걸듯이 하는 사람이 있나?'

없다.

그런 사람은 못 봤다. 다소 위험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은 있더라도, 저토록 절박하게 모든 것을 걸듯이 매달리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대체 왜, 우리보다 더 절박한 걸까.'

켈로드와 조원들은 반성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 사이, 라키엘이 심호흡을 마쳤다.

"좋아. 꼬슴아?"

"꼬슴!"

꼬슴이가 뒤로 돌아섰다. 통통한 궁디를 내밀며 뿌르르 힘을 주었다.

"꼬스슴!"

표표푝!

흰색 가시 10가닥이 준비되었다.

라키엘의 시선이 인공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아기 코끼리, 코몽이를 향했다.

"시침하는 동안 호흡량이나 컨디션이 변할 수 있을 거야. 놓치지 말고 잘 체크해줘."

"코몽!"

이렇게 인공호흡 유지도 OK.

"시작하자. 다들, 이제부터는 내가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니까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로 말을 걸거나 내 시침에 간섭하지 말고."

라키엘은 조원들에게 신신당부하고는 환자의 상의를 벗겼다. 가시를 집어들었다. 스킬 옵션을 발동했다.

'경혈 스캐닝.'

츠즈즈즈...!

경혈 스캐닝이 발동되며 환자 미구엘 씨의 전신 기혈이 맵핵을 띄운 것처럼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체내에 흐르는 기혈의 움직임, 조화, 그 결과까지 모두가 실시간으로 관측되었다.

라키엘의 손이 움직였다.

스윽.

그가 겨누는 첫 번째 경혈은....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의 청회혈(聽會穴).'

일명, 후관(後關)이라고 불리는, 담족소양지맥(膽足少陽之脈)의 혈자리. 위치는 귓구멍 앞쪽, 입을 크게 벌리면 오목하게 들어가는 지점.

한 손으로 환자의 입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청회혈이 오목해졌다. 그곳을 취(取)하듯 가시를 찌르고 뽑았다.

정확한 보사법으로. 환자의 들숨이 들어가는 순간에 맞추어. 살짝 비틀듯이 3푼.

톳!

그 순간, 라키엘의 눈이 빛났다.

'보인다.'

시침한 청회혈을 중심으로, 살짝 변화된 기의 흐름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시뮬레이션으로 수없이 실험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기억을 되살렸다. 거듭 실험하며 암기한 시침 순서를 그대로 재현했다.

톳!

두 번째 가시로 찌른 자리는 특정한 혈자리가 아니었다. 청회혈에서 번져 나온 여러 기맥 중의 하나를 포착해서, 실시간으로 기맥의 허리를 찔렀다.

그러자 기맥이 꿈틀거렸다.

자극에 반발하듯 구슬처럼 뭉쳤다.

'됐다.'

시뮬레이션했던 그대로다. 그럼 이제부터....

톳! 토돗. 톳!

라키엘의 손이 바빠졌다. 뭉친 기맥을 한쪽으로 몰아가듯 연달아 시침했다. 기맥이 자극에 꿈틀거리며 이동했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혹은,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버전의 지뢰찾기 게임을 하듯.

'이거, 아무리 봐도 지뢰찾기랑 핑퐁을 합친 거 같단 말이지.'

잠깐 배어나는 쓴웃음.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더욱 집중력을 높였다. 살아 숨 쉬듯 활발하게 뭉쳐서 움직이는 기맥의 흐름을 드리블하듯, 한결 신들린 시침을 선보였다.

토톡! 톡! 톳!

눈꼬리의 동자료혈(瞳子髎穴)을 지나, 관자놀이 어름의 현리혈(懸釐穴)을 짚고, 귓바퀴 위쪽의 천충혈(天衝穴) 어름을 통과했다.

둥글게 뭉친 기맥이 핑퐁처럼 튀며 계속 이동했다. 라키엘의 가시도 표적을 추격하듯 계속해서 신들린 움직임을 보였다.

이윽고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의 목덜미 천정혈(天鼎穴)과 부돌혈(扶突穴)을 지나쳤다. 넷째 갈비뼈 어름에 있는,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의 천지혈(天池穴)을 두드렸다.

토톳! 톳!

이마에 진땀이 온통 배어났다. 꼬슴이가 계속해서 제공하는 가시를 재빠르게 받아서 찌르고, 또 찔렀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엇나가면 안 돼.'

이런 침술은 라키엘도 처음이었다. 이런 조합도 처음이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위험한 조합의 시침 위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믿었다.

경혈 스캐닝을 믿고,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믿었다.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려 갔다. 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층 스스로를 격려했다.

한데 그때였다.

덜컹!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창백해진 학장이 병실로 들어왔다.

"이건...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전하?"

학장의 경악한 시선이 환자와 라키엘에게 꽂혔다. 그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맙소사.'

환자의 얼굴이며 목덜미, 가슴에 적어도 스무 개는 넘는 가시가 꽂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가시가 꽂히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 짓을 하는 사람이... 바로 황태자였다.

'소문으로는 저런 식으로 사람을 치료한다고는 들었지만.'

설마하니, 의료대학에서 저런 근본 없는 사이비 치료법을 버젓이 쓸 줄은 몰랐다. 모욕감이 느껴졌다. 신성한 의술을 닦는 의료대학에 대한 기만과 조롱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저런 근거 없는 치료법이라니. 환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리라.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군.'

최대한 부드럽고 정중한 말투와 태도로, 그러나 선을 긋는 마음가짐으로, 황태자에게 지금 시행하고 있는 치료법의 부적절함을 말씀을 드려야겠다. 의료대학의 설립 이념에 어울리는 정상적인 치료법의 필요성을 강조해야겠다.

학장은 각오를 다졌다.

자칫 권력자에게 대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의료인으로서, 학자로서 물러날 수 없는 의무감을 품고서, 입을 열었다.

아니, 열기 직전이었다.

텁!

갑자기, 난데없이, 누군가의 손이 불쑥 내밀어져 왔다.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읍?"

놀란 학장이 눈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사람을 확인하고는 더욱 놀라야 했다.

'켈로드?'

이번 졸업 예정자 중에 가장 우수한 인재. 최근 10년간 자신이 본 가장 촉망받는 예비의사. 자신의 수제자나 다름없는 켈로드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단호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쉿. 정숙함을 유지해 주십시오, 학장님."

"...읍, 으읍?"

켈로드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눈빛으로 물었다. 켈로드가 낮게 속삭이며 환자와 황태자를 가리켰다.

"저길 보십시오. 치료가 잘 진행되는 중입니다."

"...."

치료? 저렇게 환자의 몸을 가시로 찔러대고 있는데? 그게 치료라고? 학장은 잔뜩 찌푸린 눈길을 환자에게 던졌다.

그때였다.

톳!

황태자의 가시가 환자의 골반 어름을 찌르는 순간.

...움찔!

환자의 엄지발가락이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168화. 길랭-바레 증후군 치료술 (2)

...움찔?

환자의 엄지발가락이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움찔거렸다. 평소였다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였을 정도로 미약한, 하찮은 꿈틀거림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치를 향한 거대한 첫걸음이었다!

'허엇?'

마젠타 의료대학의 학장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움찔!

"...."

또 움직였다. 진짜다.

'어떻게?'

학장의 시선이 환자 곁에 있는 황태자를 향했다. 물론 황태자는 전혀 그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오직 완전한 집중 상태로 또 하나의 가시를 신중하게 치켜들 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환자의 다리에 가시를 꽂을 뿐.

톳!

이번에 가시가 꽂힌 곳은 허벅지의 넙다리근막긴장근(tensor faciae latae muscle) 상부, 다리를 들어 올리면 골반과 허벅지가 만나며 움푹 파이는 경계 지점.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비관혈(髀關穴)이었다.

그 정확한 침술에 다시금 환자의 엄지발가락이 꿈틀, 희미하지만 확실한 시그널을 보내어 왔다.

'이게 무슨....'

단순한 반사작용일까. 가시를 찌른 덕에 생겨난 일시적인 반응일까. 혹시나 그런 눈속임에 자신이 속고 있는 건 아닐까.

일말의 의구심을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모조리 긁어모았다. 최후의 의심을 불태웠다. 그러나 학장은 곧, 자신의 의심마저도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움찔... 꿈틀... 꼼지락... 꼼틀...!

이제는 가시를 찌르지 않아도 환자의 엄지발가락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치, 긴긴 겨울잠을 자다가 갓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미지의 생명체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학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켈로드, 자네는 알고 있었나?"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속삭이듯, 황태자의 시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었다.

"전하께서 사용하시는 저런 방식의 치료가... 저렇게 효과가 있으리란 사실을 자네는, 자네 조원들 모두가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아뇨."

켈로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한 번쯤은 믿어보자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믿어보자고? 근거도 없이?"

학장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켈로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학생이었다. 한데 황태자의 근본 없는 치료법을 근거도 없이 믿어보자고 생각했다니.

"자네답지 않은 결정을 했군."

"아, 그건 아닙니다."

"어째서?"

"저도, 조원들도 모두 봤으니까 말입니다. 전하께서 온통 퀭한 모습이 되도록 밤새도록 치료법을 고민하고 오시던 모습을 말입니다."

"...."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전하의 모습을 보십시오."

켈로드가 조용히 라키엘의 옆모습을 가리켰다.

"당장 쓰러지실 것 같습니다. 겉모습으로만 보면 지금 치료를 받는 환자보다 더 환자 같은 모습이십니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안색은 핏기조차 없이 창백하고, 눈은 움푹 들어가고. 지금 저 모습은 황태자 전하라기보다는 그저... 옷만 바꿔 입혀놓으면 어딘가 뒷골목에 내던져진 가장 형편없는 술주정뱅이도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

학장은 조용히 생각했다. 켈로드의 이 발언은 칭찬인가, 욕인가. 켈로드의 잔잔한 말이 이어졌다.

"한데 전하께서는 저토록 초라한 몰골이 되도록 치료법을 고민하셨습니다. 그러고도 휴식을 취하기보다, 환자부터 최우선으로 치료하길 선택하셨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아까보다 훨씬 추레한 안색이 되셨고, 치료하는 내내 진땀을 흘린 덕에 더욱 엉망진창인, 하수구에서 구르다가 갓 뛰쳐나온 생쥐만큼이나 볼썽사나운 몰골이 되셨지요."

"...."

이보게 자네, 몰입한 거 같은데. 학장은 조용히 고민했다. 이 친구를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건 말건 켈로드의 소신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입니다. 저는 한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전하께서 보이신 치료에 대한 의지와 자세를 말입니다.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는 넝마만큼이나 너덜너덜한 안색이 되셨지만, 흡사 10년쯤 묵은 먼지를 방금 툭툭 털어낸 카펫 같은 몰골이 되시는 것을 마다치 않으며, 환자부터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동력...."

"...으로 맞고 싶지, 아주?"

난데없이 불쑥, 라키엘의 목소리가 켈로드의 발언을 자르고 들어왔다. 모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곳에 미간을 콱 찡그린 라키엘이 있었다.

"아주 내가 정신 다른 데 팔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본심이 술술 나온다?"

"...."

켈로드의 입이 다물렸다. 학장과 다른 조원들이 켈로드와 은근슬쩍 한 발짝 거리를 벌렸다. 쩌저적(?) 굳은 켈로드가 물었다.

"혹시, 기분 나쁘셨습니까?"

"어. 당연하지."

"하지만 제 본심이었는데 말입니다."

"응. 날 믿겠다고 생각해준 본심은 고맙긴 한데."

라키엘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역시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본 게 맞다. 켈로드 이 친구, 딱 자기 일과 본분에만 엄청 충실한 타입이다. 사람에게 아부하거나 정치질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래서 오히려 믿고 일을 맡길 만한 타입.

조금 전에도 그랬다.

학장이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가. 순간,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럴 법도 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며 움직이는 기맥을 따라 시침을 하고 있던 터라, 1초의 타이밍도 어긋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데 옆에서 학장이 계속 말을 걸어온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집중력이고 뭐고 다 깨졌을 터다. 기껏 공들여 해오던 기맥 드리블(?)도 삑사리가 났을 거다. 그러면? 치료고 뭐고 아사리판이 났겠지.

한데 그런 사태를 켈로드가 나서서 막아줬다. 설마 저 고리타분한 우등생 녀석이 학장을 제지해줄 줄이야.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켈로드를 보는 라키엘의 눈동자에 은근슬쩍한 흐뭇함이 배어났다.

'넌 한의원 취직 당첨.'

그는 내심 음흉한 미소를 숨기며 말했다.

"어쨌건, 오늘의 시술은 여기까지. 결과는 보시다시피 성공적이야. 신경 일부를 살렸으니까."

그가 환자의 발가락을 가리켰다. 그때 마침, 환자의 발가락이 또 한 번 힘차게 움찔거렸다.

학장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전하? 외람되오나, 이게 어떤 치료법인지... 조금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알려주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 염증에 의해 손상된 기존의 신경을 대체할, 우회로를 찾아서 개통했어."

"우회로...를 말입니까?"

"으음."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하자면, 산사태가 나고 무너져서 산길이 끊겼으니까, 새로 자그마한 오솔길 정도를 뚫은 거랄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쉽지는 않지만."

"...."

"산에 새 길을 뚫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나. 무성한 수풀도 쳐내야 하고. 땅도 골라야 하고. 물론 큰 길은 아니야. 정말 급하게 뚫은 경로라서 당분간은 조금씩 움직이는 정도가 다일 테지."

라키엘은 설명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 뚫은 신경의 새로운 경로는 말 그대로 임시 오솔길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마저도 아직은 완전히 뚫은 게 아니었다. 여전히 발가락 일부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 앞으로가 더 중요해. 매일 시침을 하고, 길을 더 뚫어야지."

"하면... 마비가 해결되는 겁니까?"

"아마도? 대략 2주에서 3주는 걸리겠지만."

원래 길랭-바레 증후군은 마비가 진행되다가도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 환자는 아니었다. 자연 치유를 기대하기엔 예후가 너무 안 좋았다.

"아마 3주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천천히 걷는 정도는 가능해질 거야. 그 뒤는 환자 본인의 재활 의지에 달렸겠지만."

"재활이라시면...."

"새로 뚫은 운동신경을 계속 사용해야지. 산속 오솔길과 똑같아. 사람의 발길이 계속 다녀줘야 오솔길이 유지가 되고, 더 넓고 평탄해지는 거잖아. 반대로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금방 수풀이 무성해지며 길의 흔적조차 사라지는 법이겠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이해해준다니 고맙고."

라키엘은 빙그레 웃었다.

고집이 세고 강직한 학장이었다. 의료대학에서 가르치는 의술에 엄청난 자부심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 학장이 자신의 침술을 어떻게 볼까.

'아주 세상 말아먹을 돌팔이 사이비 잡술로 보겠지.'

그런데도 지금, 학장이 오늘의 치료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일 터다.

그런 덕분이었다.

이후의 시술은 한결 편안하고 쉬웠다.

학장을 비롯한 의료대학의 태클 걱정이 사라졌다. 시침으로 신경 경로를 활성화하는 과정도 난이도가 내려갔다.

톳! 토돗! 톳!

매일 꽂히는 가시 속에 환자의 발가락이, 발목이, 종아리가 차례로 움찔거렸다. 날마다 신경이 꾸준히 살아났다. 어느새 의식도 되찾았다. 환상종 코몽이의 인공호흡도 필요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시침 이후 17일째 되는 날.

톳!

처음으로 갈색 가시가 환자의 야들야들한 장딴지를 푹 파고들었다. 동시에 환자의 입에서 시침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구성진 7옥타브 환상의 하모니가 터져 나왔다.

"...끄으으앙아아악↗ 뿌다아아얄갸!"

그 순간.

완치를 알리는 힘찬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시침 시뮬레이션으로 정밀하게 설계한 계획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혈맥에 맞춘 새로운 기법의 시침법을 선보였습니다.]

[환자 : 미구엘은 길랭-바레 증후군으로 인하여 하지마비를 겪었고, 더 나아가 호흡마비로 사망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시의적절한 인공호흡법과 시침법 덕분에, 그의 신체는 급성호흡부전에 의한 사망을 모면하였을뿐더러, 기존의 경로를 대체할 새로운 신경의 경로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환자 : 미구엘이 당신 덕분에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 2)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미구엘은 당신의 인공호흡법과 침술 치료를 통하여 총 31년 3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31년 3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5.76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6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357일]

'나이스!'

눈앞 가득 떠오르는 완치 보증서(?)를 보며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냈다. 처음 길랭-바레 증후군임을 알았을 때는 솔직히 좀 막막했는데. 이렇게까지 제대로 치료를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는데.

'그런데 해낸 거야.'

한국에서였다면 상상도, 엄두도 못 내었을 일이었다. 그 시절에 침술로 길랭-바레 증후군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상대를 사이비, 혹은 돌팔이로 여겼을 것이다.

자신이 한의사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순한 침술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저 망상의 영역에나 머무를 일이니까.

'하지만 이젠 달라.'

기혈과 기맥을 경혈 스캐닝으로 볼 수 있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느낄 수 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기혈과 기맥을 체크하며 시침을 할 수 있다. 그 작은 차이가, 이토록 망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이게 됐으면 떼돈 벌었을 건데.'

어쩌면 자신의 한의원이 있던 빌딩을 통째로 샀을지도. 묘하게 드는 아쉬움에 그는 쓴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눈길을 들었다.

딩동!

한국에서 빌딩 사는 꿈이 부럽지 않을 보상이, 실시간 메시지로 힘차게 떠오르고 있었다.

169화. 길랭-바레 증후군 치료술 (3)

"누우우!"

"꾸꺄!"

"누우!"

"꾸!"

"누!"

"꺄-!"

이곳은 별궁 정원.

초봄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우루스가 정원 한가운데를 방방 뛰어다녔다. 신이 나서. 방금 씹은 풀이 역대급으로 맛있어서. 앞으로 그걸 되새김질할 생각을 하니 더 기분이 좋아져서.

방방 뛰며 거대한 뿔을 휙휙 휘둘렀다. 그러자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 꾸꾸도 덩달아 신이 났다.

"꾸꺄꺄! 꾸!"

"누우우! 우!"

꾸꾸가 눈짓했다. 우루스가 풀밭에 벌러덩 누웠다. 운동장만큼이나 널따란 우루스의 배 위로 꾸꾸가 폴짝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우루스가 풀밭에서 뒹굴고, 꾸꾸는 우루스의 뱃살 위에서 뒹굴었다. 덩달아 별궁 정원사들의 눈물이 초봄의 쌀쌀한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리고 데미안은 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마음이 갑갑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내가 혼자 별궁에 남아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문득, 얼마 전에 황태자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 떠올랐다. 황태자는 자신이 당분간 마젠타 의료대학에서 지낼 거라고 했다. 그러니 넌 그동안 별궁에 남아서 꾸꾸를 돌봐라, 라고 했던가.

'...내가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아기 애벌레나 돌보며 시간을 때워야 한다니. 왜 그래야 하는지, 어째서 자신이 황태자를 따라 의료대학에서 곁을 지켜주지 못하게 된 건지. 도통 납득이 되지가 않았다.

'심지어 세르지오 씨를 비롯한 다른 특근대원들은 모조리 다 데려가 놓고선.'

그게 문제였다.

검투사 시절부터 함께 굴렀던 특근대원들. 그중에 자신만 별궁에 남았다. 다른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의료대학에서 철통 경비를 자랑하며 황태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겠지. 다른 근위대원들과 함께 말이다.

"...."

혹시 황태자는 나한테 서운한 게 있나. 아니면, 여기 남아 있으라던 명령에 덧붙인 말처럼 오랜만의 휴식을 누리라는 걸까.

'이런 휴가, 필요 없는데.'

어쩐지 나만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황태자가 자꾸만 자신을 안전한 곳에만 애지중지 가두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거 섣부른 착각일까. 혹은 날카로운 직감일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갑갑하다.

'게다가 역혈의 마나 심법... 그걸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해.'

문득, 앙부아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반란군의 수장, 소드마스터 쟈빌론과 대적하던 때였던가. 최후의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역혈의 심법을 사용했다. 마나하트가 깨지는 것쯤은 각오를 해두었던 터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마나하트에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았다. 후유증마저도 없었다. 게다가 역행하던 마나가 발산하던 폭발적인 힘은 어떠했던가. 혈맥이 터질 듯하던 그 짜릿한 감각.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던 기분.

"...."

그립다.

또 느껴보고 싶다.

황태자의 신신당부만 아니면 역혈의 마나 심법, 조금 더 연구해보고 싶은데. 더 가다듬고 싶은데. 그의 입에서 다시금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꾸꺄!"

통통한 덩어리가 빠꾸 없이 날아왔다. 보송보송 새하얀 솜털이 가득한 해맑은 몸매, 꾸꾸였다. 녀석이 우루스의 뿔을 박차고 뛰어올라 이쪽으로 온몸을 던져오고 있었다.

"...."

또 아까처럼 놀아달라는 건가.

데미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 한결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