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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원 >

제국 황실 직속 기관의 의미는 바로 직속상관이 황제라는 뜻이다.

모든 보고가 다이렉트로 황제 폐하께 올라간다.

제국 황실 직속 기관은 몇 되지 않는다.

딱 2개.

제국 감사원과 제정원이다.

제정원.

제국 정보원.

안보와 군사기밀, 적국에 대한 정보 수집, 그리고 마인 수색, 마인 테러, 마인 범죄조직에 관한 정보를 주로 다룬다.

제정원 1차장 문경식은 마인 수색과 정보 수집을 담당한다.

요즘 문경식 차장이 들여다보는 사건은 미리내 제약 이동우와 그 일당의 실종 사건, 미리내 그룹에서 뉴서울 경찰로 수사를 의뢰해왔다.

제정원도 보고를 받았고.

원래 갑작스러운 실종 사건이 일어나면 항상 마인의 범행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한다.

경찰이 수사한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는 문경식.

'이동우와 이두창, 전경철, 조직원까지 모두 12명이라···,'

이두창은 마스터, 전경철도 익스퍼트.

이들을 어찌할 수 있는 자들이 몇이나 될까?

마인의 소행으로 의심되기 충분하다.

'진짜 마인일까?'

사실이라면 우습게도 마인도 사회에 조금 기여한 셈이다.

이두창, 전경철 패거리, 마인은 아니지만 어쩌면 마인보다 더 잔인한 놈들. 제정원에서도 주시하고 있던 빌런들이다.

수많은 살인과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상태다.

그러나 일 처리가 하도 교묘해서 증거를 찾지 못했기에, 걸리기만 해라면서 벼르고 있었다.

이런 놈들을 수족처럼 부리던 이동우는 또 얼마나 나쁜 놈인가?

제발 싹 뒈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미리내 그룹에서 수사해달라고 의뢰한 용의자 중 매우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바로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

의심한 이유는 바로 얼마 전 있었던 뉴서울 중앙역 사건이 근거였다.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상경한 김태주 회장 일행과 이동우가 중앙역에서 만나 서로 충돌했다.

그 과정에서 이동우는 시원하게 오줌을 지렸고.

이게 왜 유명하냐면···, 영상이 고스란히 찍혔다.

잊을 만하면 인터넷이나 SNS에 수시로 올라왔다.

미리내 그룹 법무팀에서 수시로 모니터링하면서 영상을 지우고 있긴 하지만.

'지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선···,'

이미 사실관계 파악이 다 끝났다.

엄한 사람 용의자로 몰 거면 증거라도 내어놓던가.

고작 갈등을 일으켰다는 사실과 그날 밤 전경철과 통화를 했다는 기록뿐.

'미친 새끼들이,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김태주는 평범한 제약회사 회장이 아니다.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오황자의 생명을 구했으며, 심지어 구례 3인조 마인을 척결한 인물이다.

세간에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정보를 다루는 쪽에서도 극소수만이 인지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유심히 보고 계신다.

어쩌면 입궁해서 폐하와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진출을 의식해서 찔러보는 걸 거야.'

설령 용의자라고 해도 수사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문경식은 제정원 마인 파트 1차장이다.

김태주가 구례 3인조 마인을 퇴치해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깟 마인 몇 명 잡은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그런 말 하는 놈들은 아가리를 확 찢어놓아야 한다.

괜히 제국에서 마인 출현을 마수 웨이브와 동일선상에 놓을까?

마인이 강하고 약하고는 둘째 문제.

탐색과 체포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마수화된 상태에서 추적하거나, 혹은 마인으로 의심되는 범죄 현장에 증거를 남기거나, 이 두 가지 경우에만 수사가 가능해진다.

평상시 인간의 틈에서 조용히 살면 누구도 못 찾는다.

또 매우 조심스러워서 증거도 남기지 않고.

예방은 될까?

어림도 없다.

신분증 검사?

신분증에 마인이라도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옆에 있는 이웃이 마인일 수 있다.

레이드 팀에서 함께한 동료가 마인일지도 모른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거동이 수상한 자는 마인 신고 113에 제보 바랍니다.'

이 정도?

그래서 제정원 마인 파트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부서.

바로 그때!

애애애애앵!

제정원 전체에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

"···응?"

이 소린 마인이 발견되었을 때 울리는 경보.

문경식은 급히 인터폰을 눌렀다.

"나야, 어디서 온 신고야?"

- 신압구정 리더스 클럽입니다. 현재 마인을 제압했으니 빨리 와달라고,

"리더스? 이런 젠장! ···그런데 제압?"

- 산 채로 잡았다고는 하지만,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추, 출동했어?"

- 네, 대마인 특수 요원들이 가는 중입니다.

"차 대기시켜! 나도 간다."

리더스 클럽이라니.

제국에서 난다긴다하는 인사들이 가입하고 있는 클럽 아닌가?

거기에 마인이 출현했다고?

그것도 그렇지만 제압이라니, 생포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

문경식의 마음이 급해졌다.

※ ※ ※

마인 세르게이의 마수화는 풀렸다.

지금은 척추가 부러진 상태로 정신을 잃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

그 등위에 발을 올리고 태주가 서 있었다.

각성자가 재생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척추가 다시 붙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혹시라도 재생 스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여차하면 다시 부러뜨려야지.

이고르 바라노프는 망연자실한 표정.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경호원이 마인?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다.

김태주 회장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황자가 친한 척하는 이유가 있었다.

리더스 클럽의 주요 사업 방향은 두 가지.

하나는 회비를 받고 사교 목적으로 회원과 회원을 연결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를 수집해 필요한 회원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회원들에 대한 사전 조사는 철저한 편이었다.

하지만 김태주 회장에 대한 정보 수집은 유독 미흡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를 단순한 제약회사 오너라는 틀 안에 가둬두고 판단한 것, 이게 가장 큰 실수.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시죠.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초기에 잡아서 다행입니다. ···혹시 주변에 실종된 사람은 없나요?"

"없는 걸로 알지만, 이제라도 파악해봐야죠."

"이놈 목적이 뭐였을 것 같아요? 숨은 붙여놓았으니, 나중에 수사관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그게···,"

이고르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추측되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마인들이 어디 사람만 잡아먹나?

놈들도 인간이기에 일반 빌런들이 하는 짓은 다 저지른다.

납치, 유괴, 암살, 절도···,

저 좆같은 세르게이 새끼가 여기 왜 왔을까?

클럽 회원 중 하나가 놈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조미영 클럽 매니저가 달려왔다.

"회원님!!! 스마트폰에 CCTV 영상 담아왔어요."

"잘 찍혔던가요?"

"그럼요! 저놈이 마수화해서 회원님을 공격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나왔습니다."

"나중에 경찰들 오면 그거 넘겨주면 됩니다."

"넵!"

이걸로 증거는 확보했고.

하지만 여전히 이고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태주는 그가 왜 저러는지 안다.

리더스 클럽 마인 출현.

소문이 퍼지면 아마 지금까지 쌓은 명성에 치명타가 될 게 뻔하다.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제정원 요원들.

그들을 맞이하는 조미영 매니저.

"마인 신고받고 왔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저, 저기 엎드린 놈이···,"

"응? 확실합니까?"

"증거 있어요."

조미영이 스마트폰의 영상을 실행해 요원들에게 넘겼다.

"으음···,"

영상을 시청하면서 요원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리고 마인 세르게이의 옆에 서 있는 태주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각성자는 아니시군요."

"보시다시피."

"···그런데 어떻게?"

"꼭 각성해야 마인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죠."

"잠시 조사에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성함이···?"

그때였다.

벌컥!

또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제정원 문경식 1차장.

"차장님!"

"마인 어디 있어?"

"여기 엎드린 놈입니다."

"이 새끼, 살아있지? 반드시 살아있어야···,"

멈칫!

문경식은 마인 옆에 서 있는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어?"

매우 익숙한 얼굴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특히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저 은회색 코트.

"···기, 김태주 회장님?"

"절 아세요?"

"하하하, 알다마다요. 인사드리겠습니다. 제정원 1차장 문경식입니다."

"반갑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문경식이 태주를 보며 물었다.

"이 마인 놈도 회장님께서?"

"네, 제가 잡았습니다."

"아···,"

문경식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친다.

'마인 전문 사냥꾼도 아니고.'

구례 3인조 마인에 이어, 뉴서울 리더스 클럽 마인까지.

왜 마인만 나타나면 이 사람이 있는 걸까?

우연? 그럴 리 없다.

구례에서도 김태주 회장이 혼자 마인을 추적해 잡았다.

'설마···?'

문경식의 뇌리에서 한가지 가설이 스치고 지나간다.

확인해보자.

"제정원 요원들, 다들 나가 있어!"

"네?"

"잠깐이면 돼. 그리고 이고르씨와 매니저님도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어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둘만 남은 걸 확인한 후,

문경식은 조용히 태주에게 물었다.

"혹시 마인을···, 파, 판별하실 수 있습니까? 마수화가 아닌 상태에서도 말입니다."

문경식의 질문에 태주는 잠시 뜸을 들였다.

되도록 숨기고 싶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어쩔 수 없다.

이미 눈치챈 것도 같고.

"네, 판별할 수 있습니다."

"어···, 어떻게?"

"제가 조금 개코라서, 냄새를 잘 맡아요."

꿀꺽.

문경식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냄새를 맡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몰라도 중요한 건 김태주 회장이 제 입으로 시인했다.

마수화가 아닌 상태의 마인을 판별해 낼 수 있다고.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문경식은 태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뭘···?"

"마인을 찾는 거 말입니다. 지금까지 마인으로 의심되는 단서를 발견하고 추적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마수화가 아니면 놈들을 찾을 수 없긴 하죠."

나 빼고.

"그렇습니다. 절대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편의를 다 봐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나실 때만···,"

"흐음."

"도움만 받는, 그런 염치없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제정원도 회장님을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간절한 문경식이었다.

태주는 잠시 고민했다.

아니, 하는 척했다.

사실 답은 나와 있다.

내키지 않았다면 끝까지 능력을 숨겼겠지.

좋은 기회다.

사람을 잡아먹은 식인귀들.

일전에 다짐한 적이 있다.

만나면 절대 살려두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섣불리 승낙하면 굉장히 귀찮아진다.

제국 땅이 얼마나 넓은데,

확실한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심심하면 불러댈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조금 시간을 끌고자 했는데,

바로 그 순간!

'음?'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뭔가가 느껴진다.

아주 미약한 신호 같은 것이.

'뭐지?'

이거 낯설지 않은데,

마치 당군악과 영혼이 연결될 때 느껴지는···,

'이건···,'

갑자기?

태주는 서둘러 무한공간을 열었다.

그러자 반짝반짝 빛나는 공유창고.

'떴다!!!'

드디어!

옆에 사람만 없었어도 소리를 크게 질렀을 것이다.

태주는 재빠르게 공유창고 안에 든 물건을 꺼내서 기타 구역으로 옮겼다.

'복숭아가 2개씩이나?'

전처럼 편지도.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물건들을 공유창고에 넣었다.

안 들어갈 때까지 꽉꽉!

'흐흐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제발 독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태주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문경식은 안달이 났다.

강제적으로 차출하지 못한다.

그러기엔 너무 큰 사람, 결국 그가 승낙해야 가능하다.

협조만 해주면 지금까지 답보 상태였던 마인 검거율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안 되겠습니까?"

애타는 문경식의 부탁에 태주는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가, 감사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환호하는 문경식.

"단! 그 전에 원칙은 세워야겠죠? 아무 때나 부르면 곤란합니다. 저도 바쁜 몸이라."

"당연합니다."

"이참에 계약서를 쓰시죠. 문 차장님도 상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사건은 비밀로 합시다. 괜히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네! 그래야죠."

"이고르 클럽 오너님에게도 입단속 시키시고요."

문경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주 회장의 말이 백번 맞다.

구례와 뉴서울 마인 사건에 모두 김태주 회장이 관련되어 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누군가는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김태주 회장이 마인을 판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는 사람이 극히 적어야 한다.

그게 마인 탐색에도 도움이 되고.

※ ※ ※

선계(仙界).

요즘 당군악의 고민은 하나다.

진정 태주에게 보낼 게 선도 복숭아밖에 없나?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많이 먹으면 질린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보패, 즉 보물.

선인들이 자신의 선기로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그런데 매우 귀하다.

그리고 비싸다.

별 기능이 없는 쓰레기 보패도 복숭아 5개에서 10개는 줘야 한다.

자신의 무한공간도 그렇다.

복숭아 6개는 있어야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

사실 태주의 무한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보내준 선기만 해도 약 선도 복숭아 100개 분량.

'쯧, 선기만 충분했어도 완전무결한 무한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선도 말고 다른 걸 보내자.

태주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것.

일단 준비는 해뒀다.

주선(酒仙) 태백 선인도 보패를 만든다.

그의 보패는 바로 술.

그냥 만들어 싸게 파는 술이 있고,

선기를 담아낸 술이 있다.

일명 신선주(神仙酒).

선도 50개짜리, 100개, 200개짜리 신선주가 있는데 지금은 선도가 부족하니 선도 50개짜리 한 단지 사뒀다.

안 판다는 걸 억지로 졸랐다.

모자라는 선도는 외상으로 달아두기로 하고.

'그동안 좋은 술 맛봤는데 선계의 술을 답례로 보내면 마음에 들 거야.'

이제 머릿속에서 찌르르르, 느낌만 오면 되는데.

그때였다.

찌르르르!

'오! 또 떴구나!'

당군악은 무한공간을 열었다.

과연 이번엔 뭐가 들어 있을까?

< 제정원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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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선계에 몇 명의 선인들이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계만큼은 안되지만 그래도 상당히 넓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주위에 선계뿐만이 아니라 영수가 사는 환수계도 있고, 요괴가 사는 요마계도 있다.

선인들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혼자만의 거처를 만들어 결계를 치고 산다.

한 번씩 나와서 동료 선인들과 함께 바둑을 두고, 선계의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도 즐기고.

노화 걱정도 없다.

생리적 욕구도 내키는 대로.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며, 싸도 되고, 싸지 않아도 된다.

심심하면 환수계로 놀러가거나 요마계에서 분탕질을 치고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지.

솔직히 재미가 있겠나?

인간계에서의 근심과 걱정은 사라졌다지만 무미건조하고 적적하며 따분하다.

그래서 처음엔 누구나 등선을 후회한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 이 무료함에 길들여지는 거고.

그런데 요즘 이 선계가 떠들썩하다.

독선 당군악 때문이다.

어디서 어떻게 입수했는지 몰라도, 무려 다른 세상의 술과 음식들을 선계에 선보였다.

또 너무나 정교하고 치밀해서 아름답기까지 한 손목시계도.

그걸 경험해본 선인들을 탄성을 질렀고, 경험해보지 못한 선인들은 후회했다.

과연 또 가지고 올까?

가지고 온다면 이번엔 어떤 물건이지?

이번엔 반드시 단맛 죽이는 초콜릿이란 물건을 사 먹어봐야지.

마음이 급한 선인들은 독선을 찾아다녔지만 그는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애타는 마음에 '이보오, 독선!' 하고 불러봤지만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당군악은 밖에서 자신을 부르든 말든 영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바깥에 나갈 시간이 있나?

태블릿을 빔프로젝터에 연결해 스크린으로 쏴서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다가, 배터리가 다되면 마나 결정체 전기 발전기에 충전시켜두고, 다른 태블릿으로 또 시청.

너무나 고맙게도 태주가 태블릿을 3개씩이나 보내줬다.

뿐인가?

소리가 잘 안 들릴까 봐 고성능 스피커도.

배가 고프면 팝콘 봉지 하나 꺼내 그대로 열양공으로 익히면 포폭! 폭폭폭폭폭, 옥수수 알갱이가 팝콘이 된다.

아그작 아그작 씹다가, 목이 마르면 콜라 한 캔 따서 마시고.

'음? 벌써 다 먹었나?'

아껴 먹어야 한다.

또 언제 연결될지도 모르니까.

"이보오! 독선!!! 거기 없소?"

또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

어림도 없지.

자신부터 충분히 즐기고 나서.

선인들은 그다음에.

여긴 천국이었다.

선계에 등선해 속세의 인연을 끊어버려 신경 쓸데도 없다.

그저 노닥거리기만 해도 된다.

지금이 당군악 인생의 최절정.

이게 다 김태주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2번의 영혼 연결로 인해 지구의 발달한 문화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전기와 통신이 없기에 생각도 안 했다.

그런데 이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기계를 다루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명서도 있었고, 태주가 보낸 서신에서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부족해.'

고작 선도 50개짜리 신선주로는 이 은혜를 보답할 수 없었다.

'슬슬 움직여볼까?'

사업을 해보자.

선도를 많이 벌어서 선인들에게 보패를 구입하고 그걸 공유창고로 보낸다.

사업의 종류는 바로 엔터테이너.

당군악은 극장을 차릴 생각이다.

일명 선계 극장.

걸림돌이 있긴 하다.

바로 언어 문제.

이들은 한국어를 모른다.

하지만,

'가르치면 돼.'

금방 배울 것이다.

나름 선인들이니 머리도 좋을 것이고.

선인들의 다수는 무림인이지만 학사들이나 시인, 화가처럼 예술가들도 꽤 많다.

그럼 한국어를 터득하기 전까진 극장 사업을 할 수 없나?

아니다.

대안이 존재한다.

마침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컨텐츠가 있었다.

지구의 중국어는 강호의 언어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유사하다.

대충 알아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터.

'첫 상영작으로는···,'

영웅전 3부작 최신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알았는지 김태주가 다운을 받아뒀다.

'이걸로 하자.'

특수효과도 제법 뛰어나고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고.

1부 사조 영웅기 50부작.

2부 신수협려 50부작.

3부 도룡검 의천도 50부작.

총 150부작.

이건 순한 맛이다.

정작 매운맛은 따로 있다.

자극적인 내용이 가득 담긴 막장드라마나 영화.

하지만 처음부터 매운맛으로 돌리면 나중에 순한 맛이 재미없을지 모르니 천천히 공개하기로 하고.

'가격은 어떻게 할까?'

너무 비싸면 좋지 않다.

선계에서 선도를 구할 방법은 몇 되지 않는다.

한 달에 하나씩 정기적으로 받는 방법과 가끔 태상노군이나 상제가 부여하는 임무를 완수했을 때 주어진다.

물론 선계의 선인들은 고인물들이 대부분이라 부족함 없이 가진 부자들이긴 하지만.

심지어 천도 복숭아를 소유한 선인들도 있었다.

사실 여기서 당군악이 제일 가난하다.

'하루에 3편에서 5편 정도 상영하는 걸로 하고.'

첫날은 공짜.

둘째 날부턴 유료 결제.

'정액제 시스템을 도입해야겠군.'

한 달에 선도 25개면 적당하겠지.

총 150부작이니 선도 25개면 영웅전 3부작을 한 달, 혹은 두 달에 걸쳐 모두 볼 수 있다.

선도가 없으면 다른 것으로도 받을 생각.

생각을 정리한 당군악은 자신의 거처를 나섰다.

그러자 그를 보고 반가움을 표시하는 선인들.

"오! 왔다."

"독선, 그동안 뭘 하고 지냈소? 궁금해 죽을 뻔했소."

"술 더 없소? 선도 몇 개 가지고 왔는데."

"어서 꺼내 보시오."

당군악은 씨익 웃었다.

그의 눈에는 선인들이 선도 복숭아로 보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도 안달이 난 모습들.

살짝만 맛을 보여줄까?

"보여드릴 것이 있긴 한데."

그러자 우르르 다가와 한마디씩 꺼내는 선인들.

"오오오! 뭐요? 궁금하오."

"무한공간에 있소?"

"보패인가?"

당군악은 밝은 선계의 하늘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바깥은 너무 밝군. 조금 어두우면 좋겠소."

흑암 선인이 재빨리 나서며 당군악에게 물었다.

"독선, 많이 어두워야 하오?"

"캄캄할 필요는 없소. 그리 넓지 않아도 되고."

흑암 선인이 옷소매를 스윽 휘저었다.

그러자 선인들이 선 장소가 금세 어두워졌다.

당군악은 먼저 이동식 스크린을 설치했다.

그리고 빔프로젝터를 조정하고 스피커와 태블릿을 연결.

총 50부작의 사조 영웅기 1편이 OST와 함께 시작됐다.

빠바바바밤! 빠바바밤!

"헉!"

"이, 이게?"

"···대체 무슨?"

"보패인가?"

"당연히 보패지."

"맞소, 저게 보패가 아니면 뭐가 보패겠소?"

"허허, 정녕 믿을 수가···,"

"쉿! 조용히들 하시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리오!"

비교적 인간계에서 금방 등선한 자신도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지금 모인 선인들은 고인물 중에 고인물, 선계의 지루함에 찌들고 찌든 자들.

그들의 무너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인다.

중독(中毒)의 시작.

해독제도 없다.

당군악은 장담했다.

지구의 엔터테이너.

자신이 여태껏 사용했던 독(毒)중에 가장 지독한 독이 될 거라고.

※ ※ ※

마인 세르게이는 척추가 부러진 채, 비밀리에 제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제 놈은 제정원에서 리더스 클럽에 숨어든 목적에 대해 심문을 당하겠지.

어쩌면 고문을 당할지도 모르고.

"그럼 최종 결재를 받아 빠른 시일 안에 방문하겠습니다."

"네, 기다릴게요."

제정원 문경식 1차장은 복귀하기 전에 이고르를 만나 이번 사건은 비밀 처리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김태주 회장님이 비밀로 처리하자고 건의하셨어요."

"아···,"

"또 리더스 클럽이 마인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따로 클럽에 제정원 요원을 파견할 계획입니다. 이것도 김태주 회장님이 특별히 부탁하셔서···,"

이고르 바라노프는 김태주가 너무 고마웠다.

마인을 처리해준 것도 모자라 비밀까지 지켜주면서 안전까지 생각해주다니,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 사람인가.

이고르는 태주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정말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저도 여기 회원인데."

"당분간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주일 정도 클럽 문을 닫을 생각입니다. 이대로는 염치가 없어서."

이고르는 클럽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손볼 생각이었다.

특히 안전 문제와 정보수집 체계를.

태주는 이고르, 그리고 조미영 매니저와 인사를 나눈 후,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안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던데."

"별일 없었어요. 신경 쓰지 마시고."

"···아! 어디로 모실까요?"

"호텔로 가죠. 저 내려주고 놀러 가세요. 자, 여기 보너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호텔로 가서 선도복숭아도 확인하고 당군악이 보낸 편지도 읽어야지.

그나저나 제국의 수도인 뉴서울에서도 마인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닌다.

'이 새끼들은 겁도 없나?'

마수화를 하지 않으면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터.

그 믿음, 확실하게 깨부숴준다.

태주는 호텔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숙소인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려는 그때!

'음?'

방문 앞에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몇몇이 서 있었다.

'누구지?'

제정원인가?

벌써 결재를 맡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태주는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님이십니까?"

"그런데요?"

"들어가 보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려?"

태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주인이 있는 방에 제멋대로 들어가서 기다린다고?

안에 있는 놈이 누구길래.

지가 황제라도 돼?

아니 황제라 해도 용납 못 한다.

'요것들 봐라.'

만나고 싶으면 미리 연락을 취했어야지.

기본적인 도리도 지키지 않는 것들.

예의 없는 놈들에겐 예의 없이 대하면 된다.

태주는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 방 안에 있는 새끼는 누군데?"

"···말이 심하십니다."

"그러니까 누구냐고?"

주인 있는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올 정도로 힘이 있는 놈일 것이다.

호텔 측도 어찌할 수 없는.

"들어가 보시죠."

참나, 웃기지도 않네.

뭐, 가만히 생각하니 물어보는 것보다 직접 확인하는 게 빠를 것 같기도 하고.

태주는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발을 들어 스위트룸 방문을 강하게 걷어찼다.

콰앙!

문짝에서 떨어져 나가는 나무 문.

"얼굴이나 보자? 누가 쥐새끼처럼 내 방에 몰래 들어왔을까?"

저벅저벅,

태주는 방으로 걸어갔다.

안에도 검정 양복들이 꽤 있었다.

특이한 건 얼굴에 각성 문신을 새기고 있다는 것.

방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중년, 한 명은 비교적 젊은 남자.

둘 다 각성 문신을 새겼고.

주인도 없는 방에서 턱 하니 소파에 앉아있었다.

누가 보면 지들이 방주인인 줄.

이렇게 무게 잡고 앉아있으면 누구십니까? 하고 정중하게 물어볼 줄 알았나?

그중 젊은 남자가 태주에게 말했다.

"네가 김태주?"

"그래, 내가 김태주다."

"···새끼, 듣던 대로 건방지네."

"남의 집에 허락도 안 받고 앉아있는 놈들보단 덜 건방지지."

"그래, 뭐, 나한테 몇 대 처맞고 나서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고."

젊은 놈이 천천히 일어났다.

태주도 성큼성큼 걸어갔다.

먼저 이놈부터 족친다.

그런데 그 옆에서 지가 뭐라도 되는 것마냥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중년 남자를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다.

핏줄은 못 속인다.

진짜 많이 닮긴 닮았다.

※ ※ ※

미리내 그룹 이기언 회장.

그가 다른 재벌 회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각성자라는 것.

로열패밀리에 각성자.

그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그룹의 지배자가 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인은 다른 재벌 가문의 적합자.

각성자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재벌이기에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많이 낳았다.

자식 중의 한 명은 각성자가 나오겠지.

본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은 4남 2녀.

하지만 각성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동우는 차남이었다.

기대했던 각성은 못 했지만 그래도 제약회사를 맡아 열심히 키워놨다.

비록 그 과정에서 강제 합병, 특허 빼돌리기, 말 안 듣는 놈들은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이런 불법적인 일이 있었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뭐든 된다.

자신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그런데 둘째 아들이 갑자기 실종됐다.

아들놈이 부리던 머슴들까지 모조리.

모두들 마인의 짓이라고 추측하지만 이기언의 생각은 다르다.

태홍 바이오 김태주.

둘째 아들은 뉴서울 중앙역에서 놈에게 수모를 당했다.

가만히 있었을까?

아들 성질에?

머슴 중 하나인 전경철의 통화기록만 봐도 안다.

그날 밤에 김태주와 분명히 전화했다.

반드시 둘이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겠지.

그걸 알아볼 참으로 여기에 왔다.

'하룻강아지만도 못한 놈.'

상황판단도 안 되는 놈이다.

손님으로서 여기 왔는데 대접할 생각은 안 하고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라니.

'성질을 죽여놓고 시작해야 하겠군.'

이기언도 혼자 오지 않았다.

그가 데리고 온 머슴들은 보통 각성자들이 아니다.

북경 거점 도시에서 수많은 마수와 싸우며 실전 경험을 쌓아온 각성자들.

엘리트 마수 사냥 경험도 가지고 있는 최고의 베테랑 각성자 민간 길드.

그 민간 길드를 이끄는 한대현 마스터.

마스터라고 다 같은 마스터가 아니다.

아들의 머슴이었던 이두창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기언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현재 일어나는 일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로.

실없이 먼저 나서지 않고.

머슴을 부리는 주인으로서의 위엄을 유지하면서.

머슴들이 모든 걸 다 처리해놨을 때 나선다.

이것이 주인의 품격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입술도 떼지 않았다.

저 철부지 놈이 무릎을 꿇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입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분도 지나기 전에 그 품격이 깨어지고 말았다.

"···어?"

퍼억!

이기언의 눈앞에서 한대현 마스터가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입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말이다.

< 중독 > 끝

ⓒ 꾸찌꾸찌

=======================================

< 가볍게 한 방 날려주고. >

같은 마스터라도 그 편차는 매우 극심하다.

엘리트 삼두백호도 혼자 때려잡는 무시무시한 마스터가 있는가 하면, 엘리트 마수가 두려워 사냥을 포기하고 재벌 망나니 똥구멍만 닦아주는 가짜 마스터도 있다.

그러나 시스템은 이 둘을 같은 등급으로 표시한다.

황제도 마스터이고, 이두창도 마스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공 길드 한대현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자신은 진짜다.

이두창 같은 버러지와는 근본부터 다른 마스터.

심지어 엘리트 마수 사냥 경험도 다수 있다.

엘리트 마수를 잡을 수 있는 민간 길드가 몇이나 될까?

그러나 길드를 운용하고 관리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당장 장비 가격과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다.

결국 대기업이나 재벌의 후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로 자신이 받은 엘리트 마나 결정체 무기.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거고.

무기도 받고 돈도 받았으니 일을 해야지.

또 개인적으로 각성도 하지 않은 새끼가 감히 저렇게 건방지게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꼴에 비싸 보이는 코트를 입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김태주.

제약회사 회장이라고 깝치고 다니면 누가 못 건들 줄 알고.

한대현은 자신이 데리고 온 길드원들에게 짧게 지시했다.

"저 새끼, 무릎 꿇려."

타아악!

파바밧!

창공 길드 각성자들이 달려들었다.

무려 엘리트 마수를 상대하면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정예 길드원들이.

휘릿!

쿵!

한 명이 날았다.

'···음?'

휘릿!

쿵!

또 한 명이 날았다.

'무, 무슨?'

휘릿! 휘릿! 휘릿···

쿵! 쿵! 쿵···,

믿었던 길드원들이 김태주가 슬쩍슬쩍 내지르는 손바닥에 맞아 정신을 잃고 넓은 호텔 방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이 새끼···,'

만만치 않은 놈이다.

각성도 하지 않았는데.

이기언 회장이 자신들을 데려온 이유를 알겠다.

'무술을 익혔나?'

그럴지도.

마나로 인해 변이된 세상.

한낱 스포츠에 불과했던 태권도도 살인 무술로 변했다.

각성자도 비전의 무공을 체계적으로 익히면 그 자체로 스킬이 되는 세상이다.

'꽤 강하군. 건방질 만해.'

인정해줘야지.

그럼 방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상대해준다.

한대현은 소파 옆에 세워둔 엘리트 강철검을 잡았다.

'팔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우우웅!

검집 전체에 두껍게 어린 마나 블레이드.

한대현의 주 스킬은 발검술, 그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앞에 있는 모든 것이 잘린다.

한대현은 자세를 바짝 낮췄다.

김태주란 놈이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올 때까지.

몸을 옆으로 비튼 채, 왼손은 검집 상단을 잡고, 오른손은 검 자루 위에 가만히 올려두고.

'들어왔어.'

한대현은 부드럽게 검 자루를 잡고 스킬로 발현한 마나가 이끄는 대로 손을 쭉 뻗었다.

바로 그때!

스팟!

탁!

"헉?"

검이 뽑히다 말고 중간에서 탁 걸렸다.

'···왜?'

어느새 앞에 서 있는 김태주.

"어, 언제···."

놈의 손이 자신의 검 자루 끝을 잡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시작하기도 전에 차단된 발검술 스킬.

뿌리치려고 했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이이익!"

태주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강한 놈이긴 하다.

이두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검이 뽑혔다면 마나 블레이드에 의해 코트가 갈라졌겠지.

그럼 또 수선해야 한다.

"이, 이거 놔!"

"좀 자라."

퍼억!

태주의 손바닥이 한대현의 얼굴에 작렬했다.

"우웁!"

푸확!

피 분수를 뿌리며 날아가는 한대현.

이제 다음.

이동우와 닮은 중년의 남자.

각성자이긴 하지만 익스퍼트정도.

'뭘 알고 왔나?'

아무튼 하는 짓이 지 아들과 다를 바 없다.

각성자들을 끌고 와서 다짜고짜 제압부터 하려는 거, 어떻게 이렇게 똑같지?

이동우가 그동안 벌인 짓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웠을 것이 분명하다.

태주는 소파 앞에 놓인 탁자 위에 걸터앉아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이기언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자, 그럼 말해보세요. 절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미리내 그룹 이기언 회장님."

이기언은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기세에 완전히 눌렸다.

하지만 자신도 각성자.

그것도 미들 익스퍼트급.

억지로 입술을 떼며 힘겹게 말했다.

"내, 내 아들···, 네가 죽였나?"

"글쎄, 그랬다는 증거는 가지고 왔어요?"

"···."

"증거도 없으면서 날 찾아온 이유는?"

"증거는 지금 확인했어. 네 그 강력한 힘이 증거 아닌가? 난 네놈이 아들을 죽였으리라고 확신한다."

"당신이 확신하면 내가 범인이 되는 건가?"

"내 확신이면 충분하지."

뭐, 죽인 건 맞지만.

태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내가 죽였다고 치자. 아니 내가 죽였다."

"이놈!!!"

"그리고 복수를 허락하지."

"···허락?"

"받아줄 테니까 뭐든 해도 돼. 경찰에 신고하든, 내 사업을 방해하든, 킬러를 보내든,"

황당하다는 표정의 이기언.

하지만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미리내 그룹을 우습게 보는군. 내가 가진 힘이 이것뿐이라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복수하라고."

"흐흐흐, 고작 오황자를 믿고 이렇게 날뛰다니."

이기언도 황실에 연줄이 있다는 말이다.

황자나 황녀 중 한 명이겠지.

혹은 황제일 수도.

"설마 군부를 믿고 나대는 것이냐? 나라고 군부에 끈이 없을까."

이기언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복수를 허락한다고? 좋다. 내가 여태껏 만들어 온 그룹의 모든 자산을 총동원해서 널 상대해주겠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빈다면 사정을 봐줄 수도 있고."

"내가 그걸 무서워했으면···, 음?"

태주는 뭔가 생각났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잠깐만 기다려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톡톡, 톡톡톡톡.

메시지를 보내자.

띠링!

바로 날아오는 답장.

한 번 더,

톡톡톡톡,

띠링!

톡톡, 톡톡톡,

띠링! 띠링!

됐다.

확인은 끝냈다.

태주는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이기언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서로 입이 닿을 정도로.

"무슨 짓이든 해봐. 기꺼이 상대해줄게."

"···."

"단! 목숨은 걸어야 할 텐데, 자신 있어?"

"···내 모든 걸 걸고 널 파멸시켜 주지."

"오! 재미있겠네. 그래, 싸움이 시작됐으니까, 가벼운 잽 한 방 날려줄게."

"재, 잽?"

찔끔하면서 몸을 움츠리는 이기언.

한대현도 한 방에 보낸 놈이다.

자신은 절대 상대가 되지 못한다.

"쫄 필요 없어. 주먹질하자는 게 아니니까."

태주는 스마트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고.

뚜우, 뚜우···, 딸깍.

"안녕하세요."

- 네, 김태주 회원님. 전화 받았습니다.

이고르 바라노프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 얼마든지요.

"미리내 그룹의 이기언 회장도 리더스 클럽 회원입니까?"

- 네, 다이아몬드 등급 회원님이십니다.

좀 전에 문자 메시지로 확인한 내용.

"오늘부로 그분하고 제가 철천지 원수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같은 클럽에 다니기가 좀 껄끄러워서."

- 아하!

"제가 나가거나, 이기언 회장이 나가거나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기언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난 또 뭐라고.'

고작 한다는 게 클럽에 연락해서 징징거리는 거?

같잖기도 하지만 어림도 없는 짓이다.

이고르 바라노프가 바보도 아니고, 구례 촌놈과 제국 굴지의 대기업 회장 중에 누굴 선택할까?

또한 자신을 내보내면 클럽 회원들 3분의 1이 함께 탈퇴할 것이다.

제정신이 박혔다면 절대 그런 짓은 하지 못하지.

그런데,

- 네, 김태주 회장님, 미리내 그룹 이기언 회장, 클럽 탈퇴시키겠습니다.

이기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대체 무슨?

"그래도 되나요?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른 분을 받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 이기언 때문에 클럽에 가입하지 않으신 회장님이 한 분 계십니다. 백두 그룹의 정욱철 회장님이십니다. 이기언이 나가면 바로 가입하실 겁니다. 정회장님 따라서 가입할 회원들도 매우 많을 거고요.

"아하,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가 보죠?"

- 이기언은 정욱철 회장이 가입하면 클럽을 탈퇴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했고, 정욱철 회장님도 이기언이 클럽에 있는 한 절대 가입 안 하겠다고 했고, 지금까지 이기언이 먼저 가입한 상태라 그냥 보고만 있던 차였습니다.

"뭔지 알 것 같네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데, 언제 한번 정욱철 회장님과 자리 한 번 만들어 주세요."

- 바로 연락드려 보겠습니다. 아마 정 회장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런가요?"

- 회장님 말씀대로 적의 적은 아군이니까요. 그나저나 미리내 그룹 주식 당장 내다 팔아야겠네요.

"하하, 네네, 그럼 이만."

-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언제든 다시 연락주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서 태주는 이기언 회장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너 이러고도···,"

"하여간 아들이나 애비나, 먼저 시작했으면서 도리어 얻어맞으니까 성을 내. 나쁜 짓은 지들이 다 해놓고."

"···."

태주는 이기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거대 재벌 미리내 그룹과 싸우는 건데, 될 수 있으면 아군이 많을수록 좋지."

자신감에 차 있었던 이기언의 표정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

정말 이놈의 정체가 뭘까?

군부, 황실, 리더스 클럽, 거기에 망할 놈의 백두 그룹까지 가세한다면?

'득보다 실이 많아.'

물론 마음만 먹으면 싸울 순 있다.

하지만 미리내 그룹도 무사하지는 못한다.

이기언은 고민했다.

아들의 복수.

과연 그것이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아들의 복수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자신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다.

더구나 놈이 한술 더 떠왔다.

"고민하지 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덤벼. 어차피 너와 네 그룹은 무사하지 못할 거니까."

"···이놈이!"

태주는 격노하는 이기언을 뒤로 하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여기서 놈을 죽일 수는 없다.

목격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전에 놈의 어깨를 두드릴 때, 이미 독을 집어넣었다.

독정이 마나를 지배해 8성에 오르면서 새롭게 터득한 독.

독이라고도 할 수 있고 독이 아닐 수도 있다.

독정에 의해 변이된 이형의 마나.

절대 검출되지 않는 미세한 독이 그 마나에 포함되어 있다.

이기언은 각성자.

그의 몸속에 존재하는 마나와 자신이 주입한 마나 독이 서로 섞여서, 천천히 놈의 몸을 갉아 먹을 것이다.

아마 한두 달이면 알아차릴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병원에 가도 소용없다.

태주가 주입한 건 그저 성질이 다른 마나니까.

방을 나오자마자 태주는 백서연에게 전화했다.

"오늘부터 이 호텔 방 다 빼세요. 네네, 싹 다! ···이따가 자세히 이야기해드릴게요."

설령 이기언이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실질적인 증거가 있어야지.

시체도 못 찾을 텐데.

※ ※ ※

고려 호텔.

태주와 일행들이 묵었던 호텔의 이름.

태주에게 방을 빼야 하는 이유를 듣고 분노한 백서연은 각성 장교 수행원들을 이끌고 호텔 지배인을 만났다.

방을 빼는 건 당연하고.

"지금 당장 CCTV 영상 주세요."

"···영상이라뇨?"

"김태주 회장님께서 안 계신 틈을 타 몰래 방에 침입한 사람들, 그리고 마스터키로 문을 열어준 호텔 관련자가 찍힌 영상 말이에요."

"아! 그 사건 말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 직원은 해고 통보했습니다. 현재는 잠적해서 찾을 수도 없고···,"

"알았으니까 영상 내놔요!"

어깨를 으쓱하는 지배인.

"개인정보라 영장을 가져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확인해보니 저장장치에서 이미 지워졌고요."

백서연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시 한통속이었다.

하긴, 미리내 그룹 회장이 호텔 지배인 하나 구워삶지 못했을까.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죠? 모든 법적 수단 강구해서라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고려 호텔 지배인은 빈정대는 투로 답했다.

"그건 알아서 하시고요, 호텔 집기 파손과 직원 폭행에 대해선 책임을 져주셔야 할겁니다."

"···뭐라고요?"

"제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아마 회장님 모시고 경찰서 가셔서 조사를 받아야 할걸요?"

"···."

입술을 잘근 깨무는 백서연.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도민수가 분노한 표정으로 나섰다.

"너 이 새끼, 양심도 없이···,"

하지만.

"소령님은 나서지 마세요."

"아닙니다. 제가 해결···,"

"가만있어요. 여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백서연이 도민수를 제지했다.

그는 군인이다.

민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면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바로 그때!

저벅저벅!

부산해지는 호텔 로비.

무장 경찰들이 호텔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도.

호텔 지배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백서연에게 말했다.

"어이쿠, 경찰이 직접 왔네요. 아마도 미리내 그룹 회장님께서 경찰에 힘을 쓰신 것 같은데···,"

백서연은 가만히 지배인을 노려봤다.

"너무 화내지 맙시다. 저라고 하고 싶어서 그랬겠습니까?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그 와중에 지배인 앞으로 다가온 검정색 양복의 남자.

"고려 호텔 지배인 되십니까?"

"네! 바로 접니다."

신분증을 꺼내더니,

"제국 정보원 마인 파트 특별 수사부에서 나왔습니다."

"···네? 제, 제정원?"

"네, 마인 관련 제보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어, 마인 신고한 적이 어, 없는데, 우리 호텔에 마인이라뇨!"

경찰이 아닌 제정원?

이게 무슨 일이지?

지배인은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부터 호텔의 모든 CCTV 영상도 압수하겠습니다. 수사에 협조 바랍니다."

"아, 아니 잠깐!"

"시작해!"

우르르르르!

호텔 관리실로 들어가는 경찰과 제정원 요원들.

제정원의 명분은 충분했다.

김태주 회장과의 협업은 이미 상부에서 결재를 받았다.

따라서 김태주 회장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제정원 마인 파트의 업무가 된다.

백서연은 어리둥절했다.

뜬금없이 제정원이라니.

그러자 특별 수사부 요원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김태주 회장님께서 전하셨습니다. 이 건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쓰지 마시고 회사로 가셔도 된다고."

"아!"

백서연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표정.

그런데 회장님께서 제정원에도 인맥이 있으셨나?

아니, 뉴서울에 올라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오황자와의 친분에, 리더스 클럽 다이아몬드 등급, 이번엔 제정원까지.

자신이 모시는 회장님이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뉴서울 일정이 아직 남아서 지낼 곳을 다시 구해야 하는데, 어디 적당한 호텔 없을까?

< 가볍게 한 방 날려주고.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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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골이 좋군. >

백두 호텔.

정연희는 자신이 묶고 있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외출 준비를 끝마쳤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지분을 넘겨주셔서 정연희는 호텔 대주주 신분.

사관학교는 졸업했다.

며칠 후면 장교 임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호텔에서 지내는 거고.

가족들은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괜히 집에 있다가는 아빠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이젠 이 세상에 없는 아빠다.

집엔 아직 아빠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아빠가 살해당하신 건 10년 전.

아직 범인은 잡지 못했다.

다만 마인이 저지른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복된 자동차, 그 자리에서 사망한 운전수와 경호원, 그리고 아빠, 그들의 시신에서 심장 및 내부 장기들이 사라진 상태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부근에서 찍힌 CCTV 영상, 마수화한 범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혔고.

지금도 정연희의 스마트폰엔 그 마인의 모습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녀는 다짐했다.

반드시 아빠를 죽게 한 마인을 잡아서 복수할 것이다.

그래서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각성에도 성공했다.

그녀가 1지망으로 써낸 임관 희망지도 '황도 방위 사령부, 대마인 특작 부대.'

제국 정보원 마인 수사팀과의 연계를 통해 마인을 추적, 체포, 섬멸하는 곳이다.

사관학교 수석 졸업이라, 거의 확정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정연희에게 마인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신문이나 언론에서 마인과 관련한 기사만 뜨면 샅샅이 찾아서 읽었다.

미진한 부분은 따로 사람을 풀어 조사하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구례 마인 사건을 접했다.

마인이 무려 3명이나 잡혔다.

그것도 한꺼번에.

어떤 놈들이지?

혹시 아빠를 죽게 만든 범인이 아닐까?

당연히 정연희는 따로 조사해봤다.

할아버지를 졸라 그룹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하지만 아빠를 살해했던 그 마인은 아니었다.

마인이 마수화를 하면 본래 얼굴과 체형이 다르듯, 마수화 상태의 모습도 각기 다르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빠의 복수는 자신이 직접 해야 하니까.

그런데 구례 3인조 마인 사건을 조사하다 알게 된 이름.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

구례의 노고단 길드와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이 마인을 잡은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그룹 정보팀의 의견은 달랐다.

추적에서 섬멸까지, 다 김태주 회장이 혼자서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진짜?

어떻게 한 명도 잡기 힘든 마인을 3명씩이나, 그것도 혼자서?

정연희는 마인이 얼마나 잡기 힘든 존재인지 안다.

그때부터 김태주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각성도 안 한 사람, 얼마 전까지 마나 거부자였던 사람, 그러나 해독제를 발명하면서 지리산 마수 밀집지대의 고민거리를 단번에 해결한 사람, 그리고 마인 소탕까지.

하나만 해도 까무러치게 놀랄 일들인데, 단 몇 개월 만에 저 일을 혼자 해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뭔가 있는 사람이다.

아마 마인을 추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만나봐야지 하면서 벼르고 있었고.

어쨌든 오늘은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날.

장소는 집이지만 할아버지가 부르니 가야지.

정연희는 스위트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비서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겠어요. 빨리 가요."

"네! 차가 대기 중입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로비를 가로질러 나가는 도중에.

'음?'

그녀의 시선을 끄는 한 사람.

'···저분이 왜 여기 있어?'

도민수 소령이었다.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 견학 당시 자신을 인솔했던 함양부대 장교.

양복을 입은 걸 보니 휴가를 받았나?

"도민수 소령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누군가 하며 뒤를 돌아보는 도민수.

"어? ···정연희 생도?"

"멸마! 휴가 나오셨어요?"

"아아, 으음, 휴가는 휴가지. 근데 정연희 생도는 여기 무슨 일로···, 아! 맞다. 여기 백두 호텔이었지."

"네, 여기서 묵고 있어요. 그럼 소령님은 여기서 왜."

"호텔에 방 잡려고 왔지. 하지만 방이 없어서 좀 어렵네."

정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상하네. 주말도 아니고 방은 충분할 텐데."

"그게···, 사장님이 고집을 부려서 말이야. 회장님 묵으실 방은 무조건 스위트룸이어야 한다네."

뭐지?

사장님과 회장님은 누구야?

도민수 소령은 군인이잖아.

정연희에게 프런트에 서 있는 두 명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깔끔한 오피스룩의 회사원인듯하고, 남자는 다부진 몸매에 은회색 코트를 입고···,

'잠깐!'

뭔가 깨달은 듯한 정연희의 표정.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 도민수 소령, 그리고 같은 군인들인듯한 수행원들, 회장님, 은회색 코트···, 단서를 조합해보니 저 남자가 누군지 알겠다.

또각또각!

프런트를 향해 걸어가는 정연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자 들리는 대화 소리.

"일반 스탠다드로 하세요. 여기 고급 호텔이라 그것만 해도 충분해요."

"안 됩니다. 솔직히 스위트룸으로도 부족합니다."

"아아, 서연씨, 고집 세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대화에 정연희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기···,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네?"

태주는 갑자기 나타난 젊은 여자를 보며 물었다.

"누구신지?"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님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

"전 정연희라고 합니다. 이번에 임관하게 될 장교 후보생이고요. 전에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에 생도 신분으로 참여했습니다."

"아! 전우시구나."

태주는 활짝 웃으며 정연희를 반겼다.

토벌 작전 함께 했으면 전우지.

"그런데 도움이라뇨?"

"저한테 맡겨주세요. 방 문제 해결해드릴게요."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만."

"아뇨, 저도 제 호텔에 훌륭한 손님을 유치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 호텔?

직원도 그녀가 누군지 아는 눈치.

"제 방을 스탠다드룸으로 바꿔주세요. 그리고 김태주 회장님은 스위트룸으로 옮겨주시고."

"···괘, 괜찮으십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직원 불러서 제 방 깨끗이 청소해주시고 짐도 다른 방으로 옮겨놓으세요."

그 와중에 태주는 정연희의 뒷모습에 꽂혔다.

단단한 엉덩이, 튼실해 보이는 허벅지, 가는 허리와 곧게 뻗은 등, 길죽한 팔다리···.

그러자 백서연이.

"회장님, 정연희 씨라면 백두 그룹 정욱철 회장의 손녀입니다."

"아하! 그래요? 어쩐지."

"네, 관심 있어 보이시는데, 친하게 지내시는 걸 권유해 드립니다."

"···제가 언제 관심 보였다고, 그, 그런 쪽 아닙니다."

직원과 이야기를 끝내고 정연희가 웃으며 다가왔다.

"제가 쓰던 방이라, 깨끗하게 청소하면 들어가세요."

"천만에요. 감사합니다."

"뭘요! 우리 호텔에 이렇게 유명한 분이 숙박해주시는 게 더 감사하죠."

그러고 나서.

"혹시 폐가 안된다면 호텔에 계실 때 제가 한번 찾아봬도 될까요?"

"어···,"

안될 것 없다.

지리산에서 함께 마수와 싸운 전우인데.

"네! 언제든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

태주는 돌아서는 정연희를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탐난다.

하지만 이성적 관심은 눈곱만큼도 없다.

강호 무림에선 저런 체형을 보통 '근골이 좋다.' 라고 표현한다.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 중에 최고의 무재(武才)를 지녔다.

흔히 천무지체니, 음양지체니, 건곤지체니···, 이런 거 말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가르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무인으로서의 또 하나의 기쁨인데.

'인성만 괜찮으면···.'

일단 두고 보자.

※ ※ ※

호텔 방을 옮기자마자 찾아온 제국 정보원 문경식 1차장이 계약서를 들고 찾아왔다.

일종의 프리랜서 계약

태주를 위한 최선의 편의가 다 들어있었다.

마인을 잡든 못 잡든, 건당 1억 원의 출동비 지급

출동 요청은 언제든 거절 가능.

장거리 이동 시 제국 정보원에서 이동 수단 제공, 등등.

건당 1억 원이야 태주에겐 푼돈.

하지만 제국 정보원 쪽에선 큰돈이다.

출동비가 1억 원이니, 확실한 단서를 발견했을 때만 부르겠지.

"여기다 서명하면 됩니까?"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모시긴 뭘 모셔?

같이 마인 잡으러 다니는 건데.

"고려 호텔은 곧 영업 정지 명령이 떨어질 겁니다. 지배인이 직접 마스터키로 회장님 방을 여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거든요."

백서연 혼자만으론 버거울까 봐 부탁했는데, 잘한 것 같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미리내 이기언 회장도 저희 쪽에서 처리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어떻게요? 그래도 나름 대기업 회장인데."

"그깟 재벌 회장, 휠체어에 태워 검찰로 보낼 정도의 힘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게 만들 수도."

"···."

문경식 차장이 저렇게 자신하는 걸 보면 분명 지은 죄가 많을 것이다.

"재벌이 망한다고 미리내 그룹이 망하겠습니까? 이참에 걷어내고 전문 경영인들이 회사를 맡으면 경제도 더 좋아지겠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태주는 고래를 절래절래 흔들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언제든 이야기해 주십시오."

제국 정보원에 자꾸 빚을 지는 건 좋지 않다.

그렇게 되면 끌려다니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참! 특허청에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아! 네."

곧 심사가 통과될 거라는 의미.

이제 공장을 돌릴 때다.

미리 생산해서 물량을 최대한 만들어 놓은 후, 식약청 판매 허가가 떨어지면 제국 전역으로 판매한다.

그럼 이제 준공식만 남았나?

※ ※ ※

선계(仙界).

당군악의 엔터테이너 극장 사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성공적이었다.

천막으로 둘러싸인 극장.

대목(大木) 선인에게 복숭아 10개를 주고 편안한 나무 의자 50개를 깔아놨다.

흑암(黑暗) 선인에겐 정액제 할인을 대가로 항상 어두운 조명을 유지하도록 했고.

귀곡(鬼谷) 선인에게 복숭아 15개로 주술진을 부탁해 천막 곳곳에 결계를 쳤다.

당군악이 허락한 사람만이 극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지만 당군악은 미칠 지경.

이렇게 장사가 잘되고 있고, 복숭아도 이미 1,000개 넘게 확보했는데도 말이다.

"제발 집에 좀 갑시다."

"···."

"···."

"···."

.

.

.

그의 호소를 들어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3일 밤낮을 극장에만 틀어박힌 선인들.

물론 진짜 눈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비유적 표현이다.

선인들의 눈이 피곤할 리 있나.

"아! 나도 좀 쉬자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여전히 묵묵부답.

진짜 왜들 이러나?

중독도 보통 중독이 아니다.

이래선 도저히 답이 안 나올 것 같고.

급기야 당군악은 빔프로젝터 전원을 내려버렸다.

픽!

"헉!"

"뭐, 뭐야?"

"꺼졌어?"

"어떤 빌어먹을 새끼야?"

"육시럴 놈!"

"허어, 미치겠군. 하필 이 장면에서."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곳곳에서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마치 영화 속 악역처럼 난폭하게 변해 버렸다.

"당군악! 그대가 했소?"

"그렇소만, 오늘만 10편 보셨잖소, 원래 하루에 5편씩 상영하기로 했는데, 각자 거처로 돌아가셔서 잡시다."

그러자 온갖 욕설과 불만이 당군악에게 향했다.

"허허, 갓 등선해서 어여삐 봐줬더니만, 이거 안 되겠군."

"썩을! 선도 복숭아 필요하면 말을 하지!"

"몇 개면 되겠소? 얼마면 되냔 말이오?"

"지금 잠이 오오? 구양 뭐시기 하는 놈이 우리 주인공을 저렇게 괴롭히는데."

"저놈 뒈지는 거 보고 집에 갑시다."

"고구마만 멕여놓고, 여기서 끊으시겠다?"

"하차하겠소!"

.

.

.

독선 당군악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전원을 켜고.

팟!

사조 영웅기 드라마가 이어졌다.

"오! 켜졌다."

"독선, 고맙소."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역시 독선밖에 없어."

"저런 인품이니 우화등선했지."

"음? 내 팝콘 누가 처먹었어?"

"쉿!"

"식선(食仙), 당신이지?"

"거참! 좀 조용히 합시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극장 안.

큰일이다.

이 추세라면 내일, 혹은 모래 1부가 끝난다.

물론 보여줄 컨텐츠야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속도 조절이 필요한데···.'

잠시 후,

또 한편이 끝났다.

"???"

"아니, 여기서 끝?"

"절단 마공이라도 익혔나?"

"쯧쯧, 이래서 무림 출신들은···,"

"연속 상영하시오!"

"연상!"

"연상 좀···,"

그러자 주선 태백 선인이.

"허어, 이 사람들이! 자꾸 공짜만 바라면 선기가 사라져! 대가를 줘야지. 그래야 독선도 계속 틀어줄 거 아니오."

"그건 그렇지."

"자자, 모두 선도 하나씩 더 내어놓읍시다."

당군악 앞에 또 복숭아 100여 개가 쌓였다.

스윽!

무한공간에 쓸어 담고.

다음 편이 시작됐다.

당군악은 체념했다.

'그래, 복숭아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실제로 들어갈 곳이 많다.

이번에 태주에게 보낼 물건들.

단주(丹朱) 선인의 보패, 부적 묶음.

부적 개수는 100장.

부적 한 장에 복숭아 3개.

한 묶음 사니 선도 300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철장(鐵匠) 선인에게 선도 600개를 주고 그의 보패인 신령비도(神靈飛刀) 한 자루를 샀다.

원래 같은 보패라도 술이나 부적 같은 소모품은 비교적 싸고, 도구처럼 오래 쓸 수 있는 보패는 매우 비싸다.

그 밖에도 주문해 놓은 것이 많다.

모두 태주를 위한 것이다.

'후우, 내가 고생 안 하면 누가 고생하겠어?'

당군악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선도 복숭아 하나를 꺼내 으적으적 씹었다.

선기가 점차 회복되고 있었다.

< 근골이 좋군.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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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공식 >

드디어 특허청 심사가 끝났다.

태홍 생기불끈과 태홍 새살쑥쑥의 특허권 인정.

태주는 백서연에게 말했다.

"이제 다 됐네요"

"아직 식약청 판매 허가가 남아서."

"그것도 잘될 겁니다. 이제 약 생산 들어가야죠?"

"준공식 준비하겠습니다."

최동일 지점장도.

"우리도 마케팅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유통과 판매망도 확보해야 하고,"

"방해가 들어올 수도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미리내 그룹 말이죠?"

"네. 조금 피곤할지도 모르니까···."

"까짓거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유통, 판매 방해? 우리 상품 약효 하나로 압살할 겁니다."

"오!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포커판에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들어왔는데 지면 멍청이죠. 무조건 최고액 베팅입니다."

그리하여 신공장 준공식이 진행됐다.

뉴서울 남쪽 변두리 농공단지.

이곳에 태홍 바이오 약품 제조 신공장이 있었다.

하지만 을씨년스러운 풍경.

원래 준공식이 있으면 떠들썩한 분위기여야 하지만 취재진조차 없었다.

직원들은 물론 난다긴다하는 귀빈들과 언론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의 사회자, 그리고 축하공연이라든지, 이렇게 동네방네 소문을 내도 모자랄 판에.

준공식 현장엔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 직원과 공장에서 일할 새로운 직원, 구례에서 파견되어온 숙련 기술자들만 모여 무대 앞 의자에 앉아있었다.

어림잡아 100여 명.

그중 새로 채용되어 공장에 입사한 직원들은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

그들은 대부분 뉴서울 출신들.

'뭐야? 기대하라면서 잔뜩 비행기만 태워놓더니.'

'그러게, 왜 이렇게 썰렁해?'

'야야, 대기업도 아니고, 이제 막 뉴서울에 진출한 회사 공장 준공식에 누가와?'

'태홍 바이오 회장이 구례 출신이라서 그래. 뉴서울에 인맥도 없잖아.'

'회사가 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조건이 엄청 좋은 곳이라 고민도 안 하고 지원했는데,'

그때!

저 멀리서 행사장 무대 앞으로 다가오는 자동차들, 이윽고 차가 멈춰서더니, 차에서 검정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먼저 내렸다.

수군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백서연과 최동일 지점장, 마지막으로 굉장히 젊어 보이는 청년이 자동차에서 내렸다.

저 사람이 김태주 회장?

'우리 회장님, 젊네.'

'그쵸? 얼굴도 잘생겼어요.'

'흐음, 차라리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면···.'

'돋보여 보이려고 각성자들 고용했나보다. 적어도 돈은 많은 사람이잖아'

'쉿! 조용.'

태주는 무대 위로 올라가 사람들 앞에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공장을 시작으로 우리 태홍 바이오는 뉴서울 약품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겁니다."

상투적인 말이었다.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

그래서 직원들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과연 잘 될까? 적자만 기록하다가 공장도, 지점도 문을 닫는 게 아닐까? 하지만 단호히 말씀드립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말로는 누구나 못할까?

결과가 나와야지.

"어, 그리고···,"

태주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백사장님이 써준 연설문이 있는데 다 못 외웠습니다. 뭐, 여러분들에게 제 진심을 전한다고 해도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저라도 안 믿을 텐데."

태주는 백서연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백서연.

그러자 도민수와 각성 장교들이 움직였다.

"굳이 준공식 같은 건 안 해도 되지만 여러분들 뵙고, 선물을 드리려는 목적으로 행사를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선물이라니,

어떤 대기업은 직원들에게 신형 스마트폰 한 대씩 돌린다던데.

우린 뭐지?

각성 장교들이 커다란 박스를 꺼내 앞에 놓았다.

태주는 그 안에서 작은 종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자, 한 명씩 오셔서 하나씩 받아 가세요."

태주에게서 손바닥보다 약간 큰, 납작한 종이 상자를 하나씩 받아 가는 직원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한 직원이 상자를 슬쩍 열어봤다.

그러자 보이는 보라색 종이 뭉치.

설마···,

"헉!"

처음 상자를 연 직원이 큰 소리로 기겁했다.

"도, 돈?"

안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10만 원권 종이 지폐가 무려 100장이나 들어있었다.

"으아, 천만 원···,"

"지, 진짜?"

"헐!"

"대박!"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태주.

"1차로 드리는 성과금입니다. 어차피 성공할 테니 선금받고 시작합시다. 그리고 2차 성과금도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하시고요."

신뢰는 돈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을 진리였다.

모든 직원에게 돈 상자 하나씩 돌렸다.

뉴서울 신종로 지점 직원들에게도, 새로 채용한 공장 직원에게도, 멀리 구례에서 파견 나온 직원에게도, 또한···,

"네? 우리도 받으라고요? 아, 아니 괜찮습니다."

태주가 돈 상자를 건네자 도민수를 비롯한 각성 장교 수행원들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다들 받아 가는데, 여러분들만 빈손이면 제가 마음이 찝찝해서."

"어···, 그, 그래도 너무 큰 돈인데."

바로 그때!

멀리서 행사장을 향해 다가오는 자동차들.

차 문이 열리고 제국군 정복을 입은 군인들이 줄줄이 내렸다.

"이거 벌써 끝난 건가? 시간 맞춰 왔는데."

오진형을 비롯한 군부의 장군들.

태주가 직접 마중나갔다.

"축전이나 보내시지, 왜 힘들게 직접 오셨어요?"

"흥! 나라고 뉴서울 구경하러 오면 안 되나?"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저 새끼들, 어떻게 놀고먹는지 감시하러 왔네."

찔끔하는 각성 수행 장교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크게 놀라진 않았다.

김태주 회장이 해독제 개발로 군부와 친한 관계라는 건 비밀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또 다른 자동차가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리는 백발 성성한 노인.

내리자마자 태주에게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욱철입니다."

"아! 백두 그룹 회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태주입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부담스러워서."

"허허허, 그런가? 어쨌거나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진출을 환영하네."

정욱철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태주도 그 손을 굳게 맞잡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더 감사하지. 이기언 그놈, 리더스 클럽에서 쫓아내 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럼 클럽 가입하신 겁니까?"

"나도 했고, 백두 계열사 사장들도 했고, 이제 같은 회원이니 잘 부탁해. 그리고···,"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말을 이어가는 정욱철.

"이기언 그놈, 조심하게. 만만히 보면 안 돼, 그 자식은 선이라는 게 없어. 제 욕심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는 놈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한 번씩 선을 잘 넘거든요."

한번 넘으면 과하게 넘어서 문제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이기언이다.

"듣자 하니, 내 손녀딸과 만났다던데···,"

"네,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잘 대해주게. 아픔이 많은 아이라."

"근골이 좋아···, 아니, 영민한 분이시더라고요. 사업적 재능도 있어 보이고."

"하하하! 그런가? 생각 같아선 곁에 두고 싶지만 닷새 후 군에 입대한다네. 뭐,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정욱철은 기분이 좋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 뵀으면 했습니다."

"응? 무슨 일로?"

"아시다시피 태홍 바이오가 뉴서울에서의 사업은 처음이라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아서,"

"아! 난 또 뭐라고, 내가 도와주지. 약품 판매도 우리 백두 그룹 유통망을 이용하면 문제없네."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면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사업 제휴나, 전략적 파트너 관계?"

"···파트너라."

태주는 새로 지어진 대형 공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솔직히 지금 지은 공장만으로는 물량을 치고 나가기 힘들 것 같아서요."

"응? ···그 정도로 성공을 확신하나?"

"네."

"호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코웃음 쳤을 텐데, 김 회장이 말하니 믿음이 가는군."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제안서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알았네. 언제든 찾아오게."

정욱철과 태주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별을 단 장군들이 우르르 나타난 것만 해도 놀라울 판에 백두 그룹 회장이 왔다고?

고작 약품 공장 준공식 참석하려고?

자기 계열사도 아니고, 남의 회사에.

게다가 길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굉장히 친밀해 보였다.

'이거 몰카 아니야?'

'그럼 저분들이 배우겠냐? 정욱철 회장님 맞잖아.'

'어어···, 또 차 한 대 들어온다.'

'이번엔 또 누구지?'

'자동차 번호판이···, 헉!'

부우우웅!

번호판 앞에 황실 마크를 탄 차가 행사장에 나타났다.

누구겠나?

"형님! 아직 행사 시작 안 했죠?"

오황자 류진철까지.

그리고 저 멀리서 또 다른 자동차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알고 보니 리더스 클럽의 정계, 재계, 학계, 문화계 출신 회원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법한 사람들이었다.

이고르 바라노프가 연락을 돌린 모양.

뒤를 이어 각종 언론사 기자들도 몰려왔다.

취재할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귀빈들이 움직인다는 소문을 접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

'와! 웅장하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 무슨 제국 황실 행사냐?'

'···이게 인맥 플렉스? 김태주 회장 뭔데?'

'나 회사 잘 들어온 것 같아.'

'난 천만 원 받았을 때부터 이 회사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어.'

'나도.'

신공장 준공식은 성황리에 진행됐다.

※ ※ ※

원래 등선한 신선에겐 속성이라는 것이 부여된다.

'독선(毒仙)'처럼 각기 인간이었을 때의 삶의 목표가 등선 과정에 작용하는 식으로.

그래서 가끔 중복되는 속성이 나오기도 한다.

독선이나 주선이 여러 명 나올 수도 있다는 말.

물론 아직 독선은 단 한 명뿐이지만.

그래서 선인들끼리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자신이 직접 정하면 된다.

예를 들어 무선(武仙)은 삼봉 선인으로 부르고, 주선(酒仙)은 태백 선인으로 불린다.

선계엔 '동빈 선인'이라는 고인물 신선이 있었다.

그가 등선할 시 부여된 선명은 바로 검선(劍仙).

검선(劍仙) 동빈 선인은 자신의 검에 올라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검을 타고 환수계에 가서 영수들과 교감도 나누고, 요마계로 가서 요괴들과 시원하게 한판 싸우고.

이 무료하고 적적한 선계에서 시간을 보내는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짓도 이젠 재미없다.

검선 동빈 선인은 선계로 다시 돌아왔다.

오랜만에 신선들하고 노닥거려보자.

바둑이나 한판 두든지.

그런데 발밑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응?'

네모난 형태의 천막.

전에 보진 못했던 설치물.

'···저긴 뭐 하는 곳이길래?'

검선은 검을 움직여 땅에 내려섰다.

천막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덜컥!

들어가지질 않는다.

'결계로군.'

그런데 천막 저 앞에 처량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은 몇몇 선인들이 보인다.

"이보시오들."

"어? 동빈 선인 아니시오? 오랜만에 보는군. 어디서 뭐 하고 있었소?"

"산책 좀 다녀왔지, 아무튼 저 천막은 뭐 하는 곳이요?"

"아아, 그게···,"

선인 한 명이 검선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당군악이라는 무림인이 독선으로 등선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가 가져오는 다른 세상을 기상천외한 물건들, 그리고 천막의 용도와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까지.

'무슨···?'

검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상이라고?'

하얀 천에 빛이 쏘아지면 그 안에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니, 굳이 인간계에 강림하지 않아도 그들이 사는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왜 이 선인들은 밖에 나와 있을까?

"그대들은 왜 안 들어가고 여기 모여 있소?"

"입장료 때문이요. 한 달에 선도 25개. 근데 우린 없어서."

"하아, 선도는 받는 족족 먹어버렸는데."

"에잉! 왜 독선은 내 보패를 사지 않겠다는 건지,"

"너무 비싸게 불렀나?"

"25개만 달라고 해도 안 사겠다고···,"

"무료 분을 괜히 봤어. 보지 않았다면 참을 수 있었을 텐데."

검선은 저 안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도 선도가 없다.

받는 족족 먹었고, 아니면 환수에게 나눠줬고.

'아무래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들어가지 못하면 힘으로 열어야지.

검선은 천막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우우우우우웅!

심검(心劍)을 넘어선 선검(仙劍)의 경지.

저깟 결계 따위는 일검에 갈라버릴 수 있을 터.

검선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그어졌다.

서거거거거걱!

파삭!

결계가 부서졌다.

천막이 갈라진다.

그러자 보이는 광경.

"아!"

듣던 그대로였다.

하얀 천에 보이는 강호의 모습.

생소한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

그걸 지켜보고 있는 선인들.

검선의 눈이 화면에 꽂혔다.

진짜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얀 천 안에서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자마자 충격받은 검선.

그러나.

"뭐야? 검선이잖아?"

"양심도 없군. 선도도 없이 공짜로 보려고?"

"뭐하시오? 귀곡 선인 빨리 처리하시오."

"흥! 감히 내 결계에 손을 대?"

기선(奇仙) 귀곡 선인이 화가 난 표정으로 소매를 떨쳤다.

순간!

"헛!"

휘잇!

뒤로 밀려나는 검선.

동시에 결계와 천막이 원상 복구됐다.

"이런!"

귀곡 선인이라니.

저자도 저기 있었나?

이러면 다시 보기 어려운데···.

검선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자 검선에게 슬며시 다가오는 선인들.

"큼큼, 검선, 저기 들어가고 싶소?"

"···당연하오. 궁금해 미치겠군."

"방도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시려오?"

"빨리 말해 보시오."

선인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원(桃園)을 털어버립시다."

"···도원이라면 선도와 천도가 열리는 과수원 말이오?"

"그렇소. 천도까지는 필요 없고 선도만 가지고 오면 되지."

"어떻게?"

"도원을 지키는 신장들은 검선이 상대하고, 그동안 우린 선도를 신나게 털어오는 거요. 훔친 선도는 똑같이 나누고."

"그 많은 선도를 무슨 수로 가지고 오려고?"

"내 보패면 충분하오. 어떤 물건이든 무한히 들어가는 호리병박! 독선에게 팔아보려 했지만 필요 없다고 퇴짜를 맞았소. 이 안에 담아오면 되오."

부처가 된 제천대성 이후로 도원이 털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쯤 선도가 수십만 개나 열렸을 텐데.

검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합시다."

"잘 생각했소."

신장들이야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

나중에 태상노군에게 한 소리 듣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다.

지금은 선도가 너무 급하다.

저 천막 안에 당장 들어가 보고 싶다.

제천대성도 도원을 털었는데, 그 양반은 선도 나무까지 뽑아버리고 천도 복숭아까지 탈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선도 정도 훔치는 건 죄도 아니잖아?

< 준공식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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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빈 교도소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준공식이 끝나고 보름이 금세 흘렀다.

그동안 태주는 거의 공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기껏 잡아놓은 호텔엔 가보지도 못했고.

준공식 끝나자마자 식약청으로 태홍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샘플을 넉넉하게 준비해 신청서와 함께 보냈다.

아마 지금쯤이면 성분 분석이 진행되고 있겠지.

재료 확보도 착착 진행되는 중,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에서 올라온 약재, 그리고 뉴서울 약재 시장에서도 약재 물량을 선주문해뒀다.

다 백서연이 도맡아서 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나?

그리고 각성 장교 수행원들도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대신해주었고.

태주는 신약 생산에 전념했다.

자신의 지휘 감독하에 생산되는 신약.

기대했던 약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전량 폐기하고, 완벽한 제품이 나올 때까지 철저하게 검수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점차 양질의 제품들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모두 창고에 보관하고.

'지친다, 지쳐.'

태주는 공장 휴게실에 홀로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무한공간이나 살펴볼까?'

당군악이 보낸 편지는 이미 읽었다.

물건을 보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앞으로 물건을 보내도 되고, 안 보내도 되지만 만약 보낸다면 꼭 고급일 필요는 없으니, 새로운 것만 보내달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독선님.'

어림도 없다.

무조건 최고급품으로 준비해놨다.

공장 일도 하면서 틈틈이 백화점도 갔다.

당군악에게 보낼 물건을 고민하는 건 얼마나 행복한지.

전에 보냈던 손목시계도 10개 정도 사뒀다.

선계엔 다른 선인들도 있으니 필요하면 선물로 주라는 의미에서.

초퀄리티 명품은 아니다.

진짜 고급 시계는 지금 주문한다 해도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래서 당장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것들로만.

그 밖에 발전기에 연결할 멀티탭, 영화를 보면서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는 필수적으로 챙기고.

그 와중에 쇼핑하다 발견한 게임기.

'어? 게임기를 왜 생각 못 했지?'

그래서 샀다.

컨트롤러도 넉넉하게 챙기고, 게임 타이틀도 왕창 사고, 다운받을 수 있는 건 받고, 도민수 소령에게 부탁해서 엘리트 마나 결정체 전기 발전기도 하나 더 구하고.

그런데 선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신선이 게임을 즐길 마음이나 있을까?

영화 시청하는 것과는 다르게 직접 컨트롤러를 조작해야 하고, 또 게임이 잘 안 풀리면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기 때문에 신선들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다.

근엄하고 고매한 신선이 옹기종기 모여 플스나 엑박을 즐기는 모습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구매한 게임 타이틀 중엔 자동차를 도둑질하고, 사람을 치고, 은행도 터는 그런 게임도 있는데.

신선에게 도둑질하는 게임이라니!

말이 되나?

그분들이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게임기는 일단 보류하고.

'다음에 보내자.'

대신 태블릿을 몇 개 더 사서 더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다운받았다.

다운 가능한 건 다 했다.

그중에 신선의 품위에 맞지 않는 영상은 독선이 알아서 안 틀면 되는 것이고,

태주는 무한공간을 열었다.

한구석에 보이는 공유창고.

지금은 반짝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짝일 때의 느낌을 알고 있다.

그때 열고 보내면 되니까.

그런데.

"응?"

어째 공유창고 크기가 조금 커진 것 같다.

"···진짜 커졌잖아."

그전 크기의 50% 정도.

'잘됐네.'

앞으로 더 많이 보낼 수 있겠다.

바로 그 순간!

찌르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짜릿한 느낌.

'혹시?'

반짝반짝.

"아싸!"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다니.

'운이 좋아.'

이번엔 뭘까?

공유창고엔 편지는 물론 복숭아 5개와 출렁출렁 액체가 담긴 단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선도가 무려 5개!

신선들만 먹는다는 복숭아다.

근데 이 단지는 뭘까?

이럴 때가 아니다.

재빨리 공유창고에서 물건을 빼고 미리 준비해둔 선물을 꽉꽉 채웠다.

전보다 크기가 넓어져서 더 많이 들어간다.

게임기는 빼고.

'이제 편지나 읽어볼까?'

태주가 보낸 물건들로 다른 신선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내용, 특히 손목시계를 부러워한단다. 그래서 선계 인싸로 등극했다고.

"흐흐흐, 시계 사서 보내길 잘했네."

또 편지엔 단지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나왔다.

'···신선주?'

진짜?

신선이 마시는 술?

'미치겠네!'

또 역전당했다.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아니, 신선주까지 받으면 답례로 뭘 줘야 하지?

하나를 주면 그 열 배를 주고, 열 개를 주면 그 백 배가 넘어온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이제 아무거나 막 사서 넘겨줄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뭘 보내줘야 하나?'

현재 태주에게 있어 제일 중대한 고민이었다.

'그나저나 이 선도 복숭아와 신선주는 혼자 먹지 말아야지.'

좋은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백서연은 말할 것도 없고, 구례에서 자신을 대신해주는 백창훈과 장순철, 언제나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오진형과 사단장들,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백홍표.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사람들.

순간!

지이이잉!

스마트폰으로 걸려온 전화.

제국 정보원 문경식 차장이었다.

아마 마인 관련 전화 같은데.

태주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김태주 회장님. 사업은 잘 진행되고 계시죠?

"덕분에요."

- 안 바쁘시면 저랑 함께···,

출동 요청이었다.

마침 바쁜 일도 다 끝났다.

그걸 알고 전화한 거겠지만.

"네, 바쁜 일은 없어요."

- 지금 신공장에 계시죠? 바로 헬기 보내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오세요."

바람이나 쐬고 오자.

겸사겸사 마인도 잡고.

※ ※ ※

투투투투투!

태주는 제국 정보원 요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하는 도중에 문경식은 태주에게 리더스 클럽에서 잡은 마인 세르게이의 수사 진행 상황을 알려줬다.

"심문은 하고 있지만 도무지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국에서의 놈의 행적을 역추적하고 있고요."

마인은 홀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만약 세르게이가 마인 조직에 속해있다면 끝까지 추적해서 조직 자체를 박살 내겠다는 의도 같은데.

"그럼 세르게이의 행적을 좇아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린 교도소에 갈 겁니다."

"···교도소?"

헬기의 도착 예정지는 뉴서울 북부 도시 '합빈.'

중국이 망하지 않았을 때 '하얼빈'이라 불렸던 곳.

삼한제국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종류는 세 가지다.

일반인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 각성자와 적합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 그리고 마인에 의한 범죄.

일반 범죄자들이야 평범한 교도소에 집어넣고, 마인은 교도소 수감 없이 정보를 빼내고 죽이면 그만이지만, 각성자와 적합자들은 특별한 교도소가 필요하다.

합빈에 각성자와 적합자들을 가두는 특수 교도소가 있다.

"그러니까, 합빈 교도소 빌런 중에 마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네, 그곳은 살인, 혹은 특수 폭력을 저지른 놈들만 가둬두는 곳입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바로 구금시킨 놈들이 대부분이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요."

마인과 빌런의 차이점.

마인은 마수화 스킬을 사용하고 빌런은 그냥 인간.

둘 다 악질적인 범죄자 새끼다.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되어야 할 놈들.

그런데 마인이 마수화 스킬을 발현하지 못하고, 인간 상태에서 체포당했다면?

마인인지 모른 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 마치 평범한 빌런처럼 생활하면서 출소할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저어, 가능하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합빈 교도소에 마인이 있으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알려만 주십시오. 그럼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늘 태주의 드레스코드는 제정원 요원 스타일.

검정색 양복에,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착용했다.

이건 극비 임무니까.

투타타타타.

헬기가 합빈 교도소에 내렸다.

헬기장에 장비와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도 와 있었다.

다 각성자였다.

그럼 장교겠고.

문경식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황도 방위 사령부 대마인 특작 부대원들입니다. 우리 제국 정보원과 항상 함께 움직이고요."

"아!"

그러고 보니 특작 부대원 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정연희라고 했지?'

그녀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자신은 알아봤지만 저쪽은 아직 모르는 눈치.

교도소장이 직접 마중 나왔다.

그리고 빌런들을 관리하는 각성자 교도관들도.

"어서 오십시오."

"수감자들은요?"

"각자 독방에 대기 중입니다."

제국 정보원 요원과 태주, 그리고 대마인 특작 부대원들은 교도소장을 따라 교도소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르륵!

강화 마나 합금으로 제작된 강철 문이 열렸다.

양옆으로 펼쳐진 독방.

철창 너머로 수감된 빌런 각성자들이 보인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한 태주가 독방 수감자 한명 한명을 확인하면서 걸어갔다.

조용히 뒤를 따르는 문경식.

아무리 생각해도 김태주는 희한한 사람.

냄새로 마인을 찾는다고?

솔직히 와닿지는 않았다.

진짜 그런 능력이 있는 걸까?

아니면 구례 3인조 마인 검거는 운이 좋았던 걸까?

이윽고 모든 방을 다 돌아본 태주.

급한 마음에 문경식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상한 점이라도···?"

"수감자 중에는 없습니다."

"···아, 제 예상이 틀렸네요."

태주는 빙그레 웃었다.

"근데 냄새가 납니다."

"네?"

"제가 아까 뭐라고 했죠?"

"수, 수감자 중에는 없다고."

"맞습니다. 수감자 중엔 없어요. 하지만···,"

태주의 눈이 문경식 뒤쪽으로 향했다.

교도소장과 각성자 교도관, 그리고 특작 부대원들.

그중 한 명에게 걸어가 명찰을 보면서.

"다이고 카츠야 교도관님?"

"···저, 저요?"

"그래, 당신, 사실 처음 보자마자 알았는데."

"뭐, 뭐를요?"

"얼마나 악취가 심한지, 혹시나 수감자 중에서도 한 명 더 있는지 확인해봤지만 당신 하나뿐이더라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다이고 카츠야 교도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린 문경식이 특작 부대원들에게 눈짓했다.

서서히 다이고 카츠야를 포위하는 각성 군인들.

그중에 신입으로 들어와 처음 작전에 투입된 정연희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목소리를 듣고서야 눈치챘다.

'기, 김태주 회장? 왜 여기에···?'

호텔에 찾아가도 매일 외출 중이라 볼 수 없었던 사람.

결국 만나지 못하고 입대했는데.

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문경식의 손짓에 멀찍이 물러나는 교도소장과 다른 교도관들.

이렇게 되자 다이고 카츠야 교도관이 태주를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설마 절 마인이라 보십니까?"

"그럼 아닌가?"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제가 일본계라서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반드시 무고죄로 고소하겠습니다."

"생사람이라니, 언제부터 마인이 사람이었어?"

"하! 장난 그만 치시고···,"

스팟!

"헉!"

빠득!

환영미리보로 놈에게 접근한 후 오른손으로 다이고 카츠야의 목을 움켜잡은 태주.

"컥! 왜, 왜 이러십니···, 사, 사람 살려어···."

"사람 살려? 아까부터 자꾸 사람이라 그러네."

"제발, 컥! 나, 나 마, 마인 아닙니···, 컥!"

그러자 교도소장이 발끈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절차에 따라 체포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민족차별입니다. 제정원이라면 이래도 돼요?"

문경식도 난감한 눈치.

이건 너무 나갔다.

사전 통보도 없이 저렇게 무식하게 달려들면 어쩌자고.

그래서 태주를 보면서 넌지시 말했다.

"저어, 일단 다이고 교도관 풀어주고 심문을···,"

태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놈의 목을 쥐고 번쩍 들어 올린 다음에.

쉬잇!

콰아아앙!

초크슬램 프롬 헬!

"커헉!"

등이 바닥으로 떨어진 충격이 입에서 피를 토하는 다이고 카츠야.

교도소장과 문경식이 동시에 부르짖었다.

"씨발! 뭐해? 저 새끼 막아!"

"안 됩니다! 멈추세요!!!"

안되긴 뭐가 안돼?

태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절차에 따른 체포?

이놈이 끝내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체포든, 심문이든 시작도 못 한다.

쓰러진 다이고 카츠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잘 들어. 누가 뭐라고 하든, 난 지금 널 죽일 거야."

"···크흑! 빠, 빠가야로!"

"네가 죽어도 그냥 인간이면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면 돼. 하지만···."

"끄극!"

"살아있을 땐 인간이지만 뒈지면 마수로 변하잖아? 그게 마인의 특징이지, 안 그래?"

보다 못한 제정원 요원이 문경식에게 말했다.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아니! 일단 지켜보고 있어."

"그렇지만,"

"믿어보자고."

태주는 다이고 카츠야를 향해 주먹을 치켜올렸다.

우웅!

손에서 일어나는 강기.

그때였다.

끔틀!

다이고 카츠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찌지지직!

찢어지는 교도관 유니폼.

맨살에서 솟아나는 징그러운 털.

"어?"

"뭐···,"

"헉!"

"이, 이럴 수가."

마수화 스킬이 발현됐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외통수에 몰린 판인데.

"캭!"

동시에.

쐐애액!

날카로운 손톱이 태주의 얼굴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지만.

덥석!

가볍게 제압하고는.

"아니라면서? 그런데 맞네?"

"캬아악! 주, 죽인다! 죽여버린다!!!"

뿌드드득!

태주는 다이고 카츠야의 팔을 비틀어버렸다.

꽈배기처럼 돌아간 놈의 팔.

"끄아아아아아악!"

그리고는 놈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서

으드드드득!

역시 마인 체포는 척추 골절이 최고.

"케엑···,"

죽었나?

다행히 살았다.

"미, 미친?"

"···다이고 카츠야 저 새끼, 마인이었어?"

"씨발 새끼, 누, 누굴 죽이려고!!!"

교도소장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총애하는 부하직원이었는데, 마인?

문경식도 마찬가지.

아니, 찾아낸 것도 경악할 노릇이지만 저렇게 쉽게 마인을···?

반면 정연희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확실히 김태주 회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 합빈 교도소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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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안 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