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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제라고 평범할까? >

산청시.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 본부가 있는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군사 특구 산청', 군이 도시의 행정 치안을 담당하기 때문에 군사 특구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민들도 군인들 가족, 아니면 군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서 인구도 그리 많지 않다.

태주는 산청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 본부에 혼자 왔다.

선주문받은 포자 독 해독제를 판매하기 위해.

백서연도 회사 조직 구성하느라 바쁘고, 백홍표도 드럭샵 운영하느라 바쁘고.

투타타타타타!

헬기가 연병장에 바로 착륙하자 미리 마중을 나온 오진형 중장, 태주가 가지고 온 해독제 1000세트가 든 상자들을 장교들이 부리나케 옮겼다.

"어서 오게."

"구매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멸마 정훈 교육관에서 자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바로 가시죠. 저도 할 일이 많아서."

정훈 교육관에 들어가자마자 반색하며 태주에게 모여드는 사람들.

"자네가 김태주인가? 난 백두산 전초기지 사령관 김동규 소장이네. 오중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네."

"반갑습니다. 연해주 주둔부대 홍정인 대령입니다."

"뉴서울 방위사령부 도경찬 2급 군무원입니다."

"만주 개척 보급창 관리부에서 나온 이상길입니다."

명함이 막 날아들었다.

하지만 태주는 줄 명함이 없었다.

"아직 명함을 만들지 않아서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만들면 하나 보내주게. 내 이름, 김동규만 기억해주면 돼."

"전화번호만 저장해 주십시오."

"언제든 연락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이 꼭 있었다.

"오! 김웅방 준장과 꼭 닮았군. 난 자네 아버지와 사관학교 동기 최두필 소장이야. 지금은 요동 남부 방어사단 지휘관이고···,"

그러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는 사람들.

최두필 소장도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

"어음, 내, 내가 말을 잘못했나?"

"제가 아버지 호적에서 파였거든요. 아마 그래서 그런 걸 겁니다."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포자 독 해독제 판매가 이뤄졌다.

한 세트 천만 원.

미리 공지했다.

정식 시판 전에 공급되는 물건이라 가격이 이렇다고, 네고는 절대 없다고.

그러나 비싸다고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는 100세트, 누구는 150세트, 200세트를 산 사람도 있었고, 돈은 즉시 계좌 이체로 결제됐다.

'이거도 쏠쏠하군.'

다만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엔···.

오진형 중장이 애절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싸게 달라는 의미겠지.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시게. 예산이 모자라."

요즘 살려달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한 세트 100만 원에 가져가세요."

"오오! 정말 감사하네!"

"그런데 이 사람들 참을성이 그렇게나 없어요? 몇 달만 기다리면 되는데···."

"자기들이 가져가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일부는 프리미엄 붙여서 되팔걸?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비싸게 주고 살 이유가 없지."

"어디다 되팔아요? ···민간?"

"맞네. 대부분 거기야."

포자 독 낙타 고라니 자생지는 제국 전역.

숲이나 산이 있는 지역엔 어김없이 존재한다.

"각성자 민간 길드에서 한 세트라도 구해보려고 안달이 났다더군."

"왜요? 사냥 연습이라도 하려고요?"

"고라니 고기 때문이겠지. 여기저기서 의뢰가 오지 않았겠나. 자네 회사로 아무리 연락해봐도 씨알도 안 먹히고, 결국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서 나한테까지 온 거지."

알만하다.

백홍표 사장도 엄청난 청탁 전화를 받았다고 들었다.

단호히 거절하거나 아예 전화번호를 차단했고.

대표적으로 고라니 고기로 배양육을 만들어 보려는 식품 업체, 재벌이나 돈 많은 부자들을 위해 고라니 고기가 필요한 요리사들.

세트당 천만 원?

뭐가 아까울까?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긴 하네."

"뭐가요?"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 전에 내가 저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했네. 절대 제약회사엔 팔지 말라고."

"아."

"하지만 약속을 지킬 것 같지는 않아."

아마 오진형은 걱정이 되는가 보다,

"제약회사들이 포자 독 해독제를 카피해버릴까 봐요?"

"그렇지."

태주는 피식 웃었다.

"과연 뜻대로 될까요?"

"응? 상당히 자신에 찬 표정이군."

"그쪽 기술력이 어떨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몇 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껄껄껄,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네."

오진형 중장이 짐짓 엄살을 떨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한숨 돌렸군. 그동안 어찌나 시달렸는지."

"이젠 예외는 없다고 전해주세요. 정식 판매 전까진 기다리라고."

"···너무 매몰차게 하지 말고."

슬슬 가봐야겠다.

돌아서려는 태주를 보며 말하는 오진형.

"태주군."

"네?"

"아까부터 이상했는데 말이야. 자네···, 뭔가 달라졌군."

"그런가요?"

"일취월장이라더니, 단 며칠 사이에?"

전부터 느낀 거지만 오진형은 확실히 눈치가 빠르다.

"이제는 이정학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군. ···아니, 벌써 굴복시켰겠지."

어떻게 알았지?

그래도 너스레 떨면서.

"아직 멀었습니다. 전 각성자도 아닌데요,"

"하하하, 다 알고 있네. 그리고 각성이 뭐가 중요한가. 마나의 힘이란 게 오직 시스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건 아니야. 비슷한 사례들도 많고, 중요한 건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러더니 은근한 눈초리로.

"한번 물어보는 건데, 자네 다시 군에 복귀할 생각은 없나?"

···뭐라고?

이 양반이!

"아니요. 전 전혀 그럴 생각이···,"

"아아아! 단언하지 말게. 세상일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글쎄요."

오진형의 말이 맞긴 하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그래도 군 복귀?

이건 아니지.

너무 황당한 이야기였다.

옛날 옛적.

그러니까 300년 전.

삼한제국이 대한민국 공화국이었던 시절.

20대 남자들이 꾸는 꿈 중에 가장 끔찍한 악몽이 군대를 두 번 가는 꿈이었다.

분명 제대했는데, 훈련소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그런 꿈 말이다.

지금은 모병제라 그런 게 사라졌다 해도 군대를 두 번 가라는 건, 선 넘었지.

"지금 당장 결정하란 말은 아니야. 그래도 생각은 해보게. 제국군이라고 다 우리 같은 야전군만 있나?"

삼한제국에서 제국군은 두 종류.

상명하복의 계급 체계가 엄격한 중앙군이 있고, 영지에 속해있어 지역을 방어하는 영지군이 있다.

물론 진급과 지원, 연봉은 중앙군이 유리하다.

대신 영지군은 자신의 지역이라는 이점이 있고.

"하하하. 절대 안 갑니다. 뭐, 바로 준장을 달아주고 황제 폐하께서 칙령을 번복해 구례 자유도시를 제 영지로 지정해주신다면 모를까."

"···그래? 구례를 가지고 싶나?"

"아뇨.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걸 돌려 말한 거예요."

"자네 잘 모르나 본데, 구례 자유도시는 영원하지 않아. 폐하께서 결심하시면 언제든 지정 해제가 가능해. 그분은 인재를 좋아하시지. 특히 자네 같은 실력자를."

"그, 그 뜻이 아니라."

"그리고 이정학이도 굴복시킨 자네에게 그깟 별 하나 달아주는 게 어렵지도 않을 테고."

갑자기 얘기가 이상한 곳으로 흐른다.

화제를 돌려야지.

"전 약 만들어 파는 거에 만족합니다. 참! 이번에 신제품도 하나 출시됩니다."

"···신제품? "

"명색이 제약회사인데 파는 약이 3개 정도는 되어야죠."

"약의 종류는?"

오진형 중장의 눈이 호기심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일종의 회복제입니다. 태홍 회복제라고, 마나 회복과 더불어 내부 장기 손상 같은 내상을 치료해 주는 약이죠."

"마나 회복에다가···, 내, 내상 치료도 겸하는 약이라고?"

"효과 검증만 남았습니다."

"아, 아니, 마나 회복은 그렇다 치고, 내, 내상 치료?"

"혈맥, 아니 마나 로드가 역류했을 때, 태홍 회복제가 도움을 준다는 말입니다."

원래 요상단이 그런 기능이다.

기혈을 진정시켜주고, 내공 운기도 도와주는 평범한 약.

"지, 진짜 외상이 아니라 내상 치유라는 거지?"

"···혹시 지금까지 이 비슷한 약이 없었나요?"

"있긴 했지."

깜짝 놀랐네.

회복제란 이름을 붙이고 팔리는 약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시중에 나온 회복제들, 다 효과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름만 회복제지 죄다 쓰레기고. 하지만 그···, 태홍 회복제는 자네가 만든 거라면서?"

"네."

"지금 가지고 있나?"

"몇 알 있습니다만."

"나하고 갈 데가 있네. 같이 가주게나."

"효과 검증 안 끝났다니깐요?"

"여기서 하면 되지 않나!"

오진형 중장은 빠른 발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군단 본부에서 운영하는 야전 병원.

"멸마!"

"멸마!"

"멸마!"

.

.

.

오진형이 갑자기 나타나자 군의관들과 의무병, 환자까지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환자들은 편히 쉬어, 그리고 군의관!"

"부르셨습니까?"

"현재 부상 정도가 심한 각성 장교가 있나?"

"네! 있습니다. 오크 토벌 도중에 협공을 당해 쓰러진 중위입니다. 둔기에 맞아 마나 로드에 충격을 받아 현재 정양 중입니다."

마나 로드 손상.

외부 충격을 받아 마나가 역류해서 혈관에 손상을 입었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몸도 잘 움직이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마나 거부자가 되는 셈.

"등급은?"

"비기너입니다."

"안내해!"

태주와 오진형은 군의관의 안내를 받아 집중 치료 병실로 갔다.

군단장을 보자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는 각성자 장교.

"며, 멸마···,"

그러나 부상의 정도가 심해서 머리를 떼지도 못했다.

"편히 누워있어."

"죄, 죄송합니다."

"용감히 싸우다가 다쳤는데, 죄송하다니! 그런 말 말게."

오진형 중장이 태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코트 속 주머니에서 까만색 알약을 꺼내 넘겨주는 태주,

"···토끼똥인가?"

"태홍 회복제입니다."

"어음, 하도 비슷하게 생겨서."

"이해합니다. 씹어서 삼키면 됩니다."

그러자 군의관이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상관이지만 자신은 의사.

할 말은 해야지.

"설마 이걸 먹이시려는 겁니까? 검증받지 못한 약을 함부로 환자에게 투여하면 무슨 부작용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내가 책임지지. 그래도 안 되는가?"

"···네, 알겠습니다."

오진형은 태주에게 받은 회복제를 다친 장교의 입에 물렸다.

"들었지? 씹어 삼켜보게."

누구 말이라고 거역할까?

군단장이 지시했으니 진짜 토끼 똥이라도 삼킬 판.

우물우물,

당장 극적인 변화야 있겠나?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좀 더 지나야겠지.

"차후 경과는 내일 중으로 알려주세요."

"음? 어디 가는가?"

"구례로 돌아가야죠."

"알았네. 이 토끼 똥의 효과는 나중에 전화로···,"

그때였다.

"아!"

갑자기 누워있던 환자가 외마디 탄성을 지르더니.

"마나가 움직여···,"

천천히 머리를 베개에서 떼어냈다.

"어?"

순간!

벌떡!

심지어 상반신까지 일으켜 앉았다.

"마, 마나가 움직입니다. ···오! 기운도 솟아납니다!"

병실에 모인 사람들이 경악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개 하나 끄덕이지 못했던 사람이 마치 사이비 종교 부흥회에 불려온 짝퉁 환자처럼 벌떡 일어났다고?

옆에 있던 군의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나 로드가 손상되었잖아. 마나가 움직였다면···, 아프지 않나?"

"전혀요!"

"심장은?"

"무리 없습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심지어 침대에서 내려서더니 쭉쭉 팔다리를 펴면서 스트레칭까지 한다.

"이 정도면 퇴원각인데요? 지금 당장 집에 가도 되겠습니까?"

"아, 아니, 그래도 검사는 해보고."

오진형 중장의 목소리도 떨렸다.

"···구, 군의관, 다른 환자는 없나?"

"있습니다. 이쪽으로."

총 3명의 환자에게 태홍 회복제를 먹였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모두 자리를 털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났다.

오진형 중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누가 만든 약인데."

솔직히 태주도 놀랐다.

'효과를 대폭 떨어뜨렸는데···,'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다니.

회복제에 들어간 자이언트 반달곰의 웅담의 양은 정말 미량이었다.

그냥 웅담이 묻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물론 마나 삼지구엽초나 변종 마황 같은 재료가 들어가긴 했지만.

군의관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이 약 언제 판매합니까? 살 수 있다면 다 사겠습니다."

군의관의 물음에 태주가 대답했다.

"흐음, 아마 몇 달 후에? 그런데 수량은 극히 적을 겁니다. 군납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그러자 정색한 표정으로 말하는 오진형.

"허어, 이 사람! 우리 사이에 그런 섭섭한 말을!"

야전 부대 지휘관으로서 오진형은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약의 효능도 효능이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회복 속도.

야전에서 부상 당해 뒤로 빠졌을 때, 이 약을 먹으면 즉시 재투입이 가능해진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전략 물자.

손실된 전력을 즉각 보충해준다.

군 지휘관으로서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까.

"진짜 이렇게 나올 텐가?"

"하하하, 중장님, 걱정 마세요. 어려웠을 때 도와준 은혜 절대 안 잊습니다.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엔 제가 잠을 자지 않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납품해 드릴게요."

"좋아! 아주 좋아! 잊지 말게 우린 깐부야, 깐부."

그리고 흥분한 기색을 애써 숨기고는 은근하게,

"진짜 재입대 생각 없는가?"

"···."

"자네가 원한다면 당장 뉴서울 황궁에 입궁해서 폐하께 상소를 올려보겠네. 결심만 해."

"천만에요. 가긴 어딜 가신다고! 그러다가 회복제 생산에 차질이 생겨도 전 모릅니다."

"끄응, 아, 알았네."

그래도 재입대는 아니지.

빨리 구례로 돌아가자.

여기 있다가는 발목 잡힐라.

< 회복제라고 평범할까?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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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계를 갖춰 나가는 태홍 바이오. >

태주는 영약에서 회복제 개발로 완전하게 방향을 틀었다.

다만 회복제는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생산이 가능하도록 프로세스를 짤 생각, 백창훈과 장순철이 생산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물론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은 직접 가공 처리해서 가져다줘야 한다.

이게 가장 핵심적인 부분, 가공되지 않은 웅담으로 아무리 약을 만들어봐야 제대로 된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또 침투경도 가르쳐야지.

압력솥 뚜껑을 열지 않고도 재료를 분쇄하는 기술, 현대 과학으로 대체 가능한 기술들이 있겠지만 침투경 정도는 배워두는 게 좋다.

"침투경이란 무엇이냐? 예를 들어 내가 손바닥을 네 갑옷에 가만히 댔는데, 갑옷은 멀쩡하고 몸만 다치는 거지. 벽이 있으면 벽 너머로 물리력을 전달하는 것."

"어, 어떻게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기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주기 전에 개념 정도는 잡고 가야 하니까.

"초음파 충격기 알지? 요로나 담낭, 신장에 결석이 생겼을 때 깨부수는 거, 마나 입자를 진동시켜서 초음파를 만들어내 목표물에 전달하는 거야."

"아!"

"침투경의 요체는 진동이야. 세상 만물은 다 물질로 되어 있어. 마나도 알고 보면 물질이란 걸 기억해."

"어음,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무, 물질이 맞겠죠?"

그러고 나서 마나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가르쳐줬다.

"일단 마나를 손바닥까지 오게 해서 이곳과 이곳의 혈도를 틀어막아."

"혀, 혈도요?"

"마나 로드 말이야."

"아하!"

"그리고 이렇게···."

찌이이이이이!

찢어질 듯한 소리.

"여러 개의 마나 입자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진동과 초음파를 만들어내는 식이야. 원래 소리는 나지 않아.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낸 소리고."

"오!"

"입자 충돌, 그리고 진동···."

둘은 열심히 따라 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나?

과연 익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침투경은 꽤나 고급 기술이라 쉽지 않을 건데.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침투경을 연마한 지 한 일주일쯤 지나자.

[스킬 : 음파 분쇄를 습득하셨습니다.]

"오!"

[스킬 : 음파 분쇄를 습득하셨습니다.]

"됐다."

백창훈과 장순철은 거의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를 띄웠다.

"음파 분쇄라고?"

갑자기 스킬이 생겨?

태주는 시스템 각성자가 아니다.

다중우주의 같은 영혼과 심령이 연결되면서 힘을 얻었다.

그래서 상태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었고,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스킬을 부여하는지 잘 몰랐다.

스킬 이름만 들으면 뭔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그럼, 침투경과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는지 한번 해봐."

"제가 해보겠습니다."

백창훈은 압력솥에다 약초를 넣고 음파 분쇄 스킬을 시전했다.

우웅!

츠파파파파파!

미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동하는 압력솥, 열어보니 약재들이 가루가 되어 있었다.

"···똑같네."

그럼 이젠 어떻게 회복제를 만드는지 알려줘야지.

영약 만드는 것과 방식은 똑같다.

다만 웅담과 마나 결정체의 양은 최소로 줄이고, 마나 삼지구엽초와 변종 마황, 마나 보릿가루의 양을 늘려야 한다.

온도와 시간을 조절해 가면서 오븐에다 아홉 번 굽고, 아홉 번 분쇄하고, 그 후에 꿀과 솔잎 가루를 섞어 동글동글하게 빚기.

"알겠지?"

"···너무 어려운데요."

"일단 해봐. 재료가 모자라면 계속 내가 구해줄게."

"넵!"

아마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편한가.

회복제 제조를 누군가 대신해 준다는 게.

열심히 굴리자.

영약 먹여준 값은 치르게 해야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 와중에 캐슬 앞 인공호수에서 조훈석의 시체와 자동차가 발견됐다.

사인은 음주로 인한 사고사.

자경단에서 그렇게 결론 내렸다.

진짜 사고사 맞나?

누가 죽였을까?

이정학? 아니면 군이 개입했을 수도 있고,

그러나 태주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파헤쳐봐야 좋은 것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고.

점점 회사 체계를 갖춰 나가는 태홍 바이오 제약회사.

공장이 완공됐고, 더불어 대량생산을 위한 장비도 들어왔다.

약제를 손질하고 1차 법제를 위한 기계들이었다.

물론 최종 법제는 태주가 직접 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일도 아니다.

약제와 정제수를 섞어 커다란 원액 탱크에 담아 놓으면, 태주가 직접 가서 혼원무상독령공으로 약기와 독기를 조율하고, 성질을 변환시키면 끝, 5성에 도달한 독공으로 시간도 매우 빨라졌고.

그리하여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과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의 양산 체제를 갖추고 시험 가동에 들어갔다.

공장 벽면에 쭉 늘어선 대형 물탱크.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달려 있었다.

태주는 탱크 뚜껑을 열고 만들어진 원액에 손을 넣어 확인했다.

"흐음, 이거 비율 조합 실패. 싹 버려요."

"···다시 재료를 투입해 비율을 맞추면 안 됩니까?"

"이미 화학 반응이 일어났어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공장 직원이 태주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 뭘 이걸 가지고 고개를 숙이세요? 처음이잖아요. 그리고 숙련돼도 언제든 실수할 수 있어요. 이까짓 실패, 수백, 수천 번 내키는 대로 하세요."

진짜 그러면 곤란하지만.

다음 탱크로.

"이건 잘됐습니다. 약 잘 나오겠네."

"감사합니다."

실패한 탱크의 원액은 버리고, 통과한 탱크 원액은 조금 있다가 혼원무상독령공으로 마무리하면 된다.

그렇게 마무리된 원액을 다시 희석과정을 거쳐 병입, 그럼 <태홍 모기 독 해독제>, <태홍 포자 해독 키트> 라는 상품명을 달고 정식 출시되는 거다.

그러나 원칙은 세웠다.

군납을 제외한 모든 약은 구례 안에서만 판매하기로.

외부에서 약을 사고 싶으면 구례까지 와서 약을 사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생긴 문제점.

약을 팔 곳이 한군데 밖에 없다.

드럭샵도 하나 더 지어야 하나.

"회장님."

"···."

"회장님?"

"어? 저 불렀어요?"

"네. 김태주 회장님!!!"

아아, 정말 생소한 직함이다.

이 젊은 나이에 회장님이라니, 노티가 잘잘 흐른다.

공장이 완공되면서 직급도 정했다..

백서연 CEO 총괄경영자.

백홍표 CFO 재무담당최고책임자.

김태주, 자신은 회장님이다.

달랑 회사 하나 차려놓고 무슨 회장이냐며, 연구소장 혹은 공장장 직함이나 달라고 했더니, 곧 재벌 대기업이 될 거라면서 바득바득 우기는데 어쩔 수 있나.

"현장 판매 건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백서연은 태블릿 화면을 태주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JH 약국 매장 인수건?"

"네,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조훈석 소유의 약국들입니다."

"아···, 매물이 나왔어요?"

"사실 장사가 안돼 부도 직전까지 몰린 상황이라서, 유족들이 점포와 건물들을 팔고 구례를 떠난다고 합니다."

현재 나온 JH 약국의 매장은 모두 11개.

"우리가 매입할 여력이 있습니까?"

"모자란 돈이야 대출을 받으면 되지만 법적인 문제가 복잡하다는 게 변수입니다."

"법적인 문제?"

"유족들 간에 소유권 다툼이죠."

"아!"

예컨대 하나의 매장에 여러 사람의 권리가 얽혀있겠지.

조훈석의 유족들, 그리고 그가 대리로 내세웠던 바지 사장들.

아무튼 매장을 늘리는 건 좋은 생각.

그렇지 않아도 태홍 드럭샵 직원들이 격무에 시달려 휴가조차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약의 판매가 분산되면 그만큼 여유도 생길 테고.

"백서연 CEO님."

"말씀하세요."

"노고단 길드에 가셔서 이정학 길드장을 만나세요."

"네?"

"법적인 문제에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아마 친절하게 도와줄 겁니다."

놀란 눈의 백서연.

이정학이라면 구례시를 지배하는 3명의 상임위원 중 한 명이다.

게다가 각성 마스터고.

"지, 진짜요? 하, 하지만 회장님과 이정학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한 걸로 아는데···,"

"일단 가보세요. 제가 미리 전화를 해둘 테니까. 그리고 매물은 되도록 제값을 치르고 구매합시다."

백서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둘이 대판 싸우지 않았나?'

자신이 구례에 오기 직전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미 들었다.

둘 사이에 칼부림이 있었다는 사실도 안다.

그런데 서로 전화도 하고 부탁도 하는 사이라고?

목숨을 건 혈투로 인해 결속된 상남자끼리의 우정, 뭐, 그런 거?

백서연은 태주와의 면담을 끝내고 곧바로 노고단 길드로 갔다.

길드장을 만나고 싶다고 전하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이정학의 방으로 안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길드장님. 태홍 바이오 제약 백서연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세요. 피차 바쁘니까 바로 용건으로 들어갑시다. JH 약국 인수를 염두에 두고 계신다고?"

"맞아요.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거 전부."

"어떻게 해드릴까요? 조훈석이 유족들에게 매점 포기 각서를 쓰게 할까요? 아니면 헐값에 후려칠까요?"

"···네?"

"법적인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시다시피 여긴 자유도시고, 또한 조훈석 유족들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구린 데가 많은 놈들이어서."

뜨악한 표정으로 이정학을 바라보는 백서연.

"아, 아니 그저 전 분쟁의 소지만 없애고 온전한 소유권만 넘겨받으면 돼요."

"흐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현재 나와 있는 매물들, 싹다 절반 가격에 사들이는 걸로."

"그건···, 동의할 수 없네요. 제값은 주고 사자는 게 김태주 회장님의 원칙이라서."

"절반 가격이 제값입니다. 죄다 2배로 부풀려 올린 겁니다. 그리고 장사도 안되는 약국, 누가 살 사람도 없어요."

"아!"

"지금 나가시면 부길드장 박정태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믿고 맡기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백서연이 나갔다.

이정학은 의자에 머리를 푹 기댔다.

살짝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다.

김태주가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해선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은 확고했다.

하지만 조금 전 김태주에게서 걸려온 전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두근대는 심장,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 본능적인 두려움.

'하아,'

아무래도 후유증이 오래갈 것 같다.

독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니다.

김태주라는 인간 자체가 남긴 후유증.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독으로 손상됐던 육신은 김태주가 주머니에 넣어준 회복제 덕분에 멀쩡하게 나았다.

이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먹자마자 효과가 오는 회복제라니.

'시중에 팔면 몇 개 사둬야겠군.'

그리고 단 3일 만에 JH 약국 11개 매장이 태홍 바이오 제약회사에 매각되어 간판을 바꿨다.

또 일주일이 지났다.

태홍 바이오 공장이 시험 가동을 마치고 본격적인 상업 판매에 들어갔다.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삼한제국 전체가 들썩일 정도.

사람들이 구례로 밀려왔다.

본점까지 합해 총 12개의 태홍 드럭샵에서 판매를 시작한 약품 라인업 3종.

5만 원짜리,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 해독제.

50만 원짜리, 낙타 고라니의 포자 독 해독제,

500만 원짜리, 내상 치유 및 마나 증가 효능의 태홍 회복제.

포자 독 해독제야 사람들이 워낙 기대했던 것이라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문제는 태홍 회복제였다.

처음엔 잘 팔리지 않았다.

개당 500만 원이란 비싼 가격, 마나 회복제라면 10만 원짜리 저렴한 제품들이 많은데 굳이?

그리고 내상 치유?

각성자와 적합자들은 기본적으로 회복력이 원래 높다.

다치면 사냥을 중단하고 집에서 잠시 쉬면 금방 나을 것을, 굳이 5백만 원 주고 회복제를 사 먹어?

하지만 곧 깨달았다.

태홍 회복제의 진정한 가치를.

단돈 500만 원으로 여분의 목숨을 살 수 있다는 걸.

※ ※ ※

기다랗게 늘어선 태홍 드럭샵의 오픈런 라인.

언제나 앞줄에 선 각성자가 있었다.

오랜 단골이자 모기 독의 효능을 몸소 보여준 사람.

"백사장님!"

"어이, 박프로 오셨는가."

레귤러 등급 박진수 각성자였다.

"오늘 새 약 들어왔다면서요? 모두 2세트씩 주세요!"

"흐음, 가격표 먼저 보시고."

"가격이요? 얼마···, 헉! 500만원?"

"태홍 회복제라고, 효과는 괜찮을 거요. 부상 당했을 때 얼른 먹으면 싹 나아."

"···."

박진수는 고민했다.

포자 독 해독제야 사두면 된다.

고라니 발견하고 나서 먹으면 되니까,

50만 원?

아까울 리가 있나?

고라니 한 마리에 얼만데!

'하지만 회복제라···,'

살까, 말까?

옆의 눈치를 보니 회복제를 사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나가 모자라면 10만 원짜리 마나 회복제로 떡을 치는데.

진짜 부상도 싹 낫게 해주나?

다른 약국이었다면 코웃음 치면서 흘려들었을 테지만···,

옜다! 모르겠다.

"백사장님! 한 병만 주십시오."

"허허, 잘 생각했어요."

호기롭게 500만 원 결제하고 회복제를 사간 박진수.

그가 다시 약국을 찾은 건 그날 저녁이었다.

군데군데 상처 난 얼굴, 피가 잔뜩 묻은 방어구를 입고 와서.

"백사장님! 백사장님!"

"어이, 박프로!"

"저, 저기 다름이 아니라···,"

"회복제 하나 더 줘요?"

"네!"

"400만 원만 내요. 박프로는 특별히 20% 할인입니다."

"감사합니다!!!"

모기 독에 이어, 태홍 회복제의 효능을 몸으로 겪은 첫 각성자 역시 박진수였다.

< 체계를 갖춰 나가는 태홍 바이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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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피약? 어림도 없지. >

삼한제국은 넓은 땅만큼 인구도 꽤 많은 수준, 망해버린 중국, 침몰하는 일본,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등, 아시아계 이민족들이 다수 흘러들어온 결과였다.

인구는 거의 북부와 중부에 밀집되어 있었다.

여기서 북부는 만주 위쪽, 시베리아 접경지역이고 중부는 옛 북한 땅을 지칭한다.

그래서 처음 모기 독 해독제가 출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변종 3줄 무늬 모기의 주요 서식지는 남부 아열대 밀림 지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명색이 마수라서 웨이브를 제외하면 자신들의 서식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변종 3줄 무늬 모기가 그렇게 성가신 마수였어?

이제부터 남쪽 촌놈들, 사냥 다니기 쉽겠구나, 하는 정도.

그러나 포자 독 해독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고기, 그것도 매우 맛있는 고기.

마나 침범 이후, 가축 사육도 변화했다.

대부분 죽었지만 살아남은 소, 돼지, 닭, 양, 개들도 마나의 영향을 받아 변이됐다.

일부는 과거처럼 가축으로 길러졌고, 일부는 야생성이 강화되어 마수처럼 변했고, 일부는 고기 맛이 변질하여 고무 씹는 것처럼 됐고, 나머지는 아예 멸종했다.

그래서 진짜 고기는 매우 비싸다.

실제로 길러서 도축한 고기 말이다.

서민들은 주로 배양육을 먹는다.

생산 업체도 많아 종류와 맛이 다양하고, 가격도 싸고, 품질이 좋은 건 과거 한우 투뿔 맛에 근접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

반면 돈 많은 사람들은 마수 고기를 찾는다.

추운 산속에 사는 철발굽 산양, 혹은 숲에 사는 외뿔 얼룩소···,

그중에서도 제일 별미는 역시 포자 독 낙타 고라니.

삼한제국 일대는 포자 독 낙타 고라니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개체수가 많지만 먹어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고라니 고기가 시중에 풀리기 시작했다.

<뉴서울 마수 고기 경매시장 연일 북새통.>

<제국 내 대형 음식점, 고라니 고기 확보에 열 올려.>

<해독제 개발로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졌지만 아직 비싼 편.>

<기자도 먹어봤습니다. 고라기 고기의 위엄, 글로 옮기기에 너무 강렬한 맛이었다.>

포자 독 고라니가 손쉽게 사냥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전문가들 고라니 남획 우려, 제국 정부도 고라니 사냥 금지 기간 설정을 고민 중.>

이런 기사까지 나올 정도.

하지만 고기에 대한 기사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수 웨이브에 대비해 포자 독 해독제는 가정상비약으로 준비해두자.>

<해독제 덕분에 웨이브가 일어나도 인명 피해가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

사람들이 구례로 몰리기 시작했다.

구례에서만 판매하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공급 물량이 달리기 때문이다.

판매 약국이 12개로 늘어났지만 오후가 되기 전에 하루 판매분 매진.

구매 제한을 걸어도 소용없었다.

공장에서 밤낮없이 생산했다.

그러나 군납 물량도 생산해야 하는 판국.

반면 태홍 회복제 같은 경우 언론에서 언급되기보다는 각성자들이 주로 모이는 커뮤니티를 통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제목 : 여기 500만 원짜리 회복제 사 먹는 흑우 없제?

- 이건 태홍 바이오 실수가 맞다. 10만원, 아니 5만 원 하는 저렴한 마나 회복제도 수두룩한데, 500만 원 주고 사 먹으라고? 해독제 개발한 덕분에 까방권이 있어서 욕은 안 하지만···, 그래도 너무 나갔다.

└ 그 돈으로 가성비 좋은 고라니 국밥 사 먹겠다.

└ 맞아, 회복제 사면 호구 인증이지

└ 크크크, 내 옆에 호구 새끼 한 명 있음.

└ 구례 놈들은 한 개씩 사 가는 것 같은데?

└ 해독제 개발에 대한 감사의 표현 아니겠냐?

그러나 태홍 회복제에 대한 사용 후기들이 속속 올라오면서 여론이 반전하기 시작했다.

제목 : 누가 감히 태홍 회복제를 폄하하는가?

- 이거 빨리 한 개씩 사둬라. 평범한 마나 회복제가 아니다. 우리 레이드팀 탱커, 폭풍 족제비에게 다구리 맞고 뻗어서 전장 이탈했는데, 태홍 회복제 하나 꿀꺽 삼키고 멀쩡하게 살아나서 다시 탱킹하더라.

- 이거 RPG 게임에 나오는 그 아이템하고 완전 같은 거야. 힐링 포션 알지? 마나 회복 효과는 덤이고, 엄밀히 따지면 종합 회복 포션 같은 거지.

└ 야야! 조용히 안 해?

└ 졸라 입 싼 새끼네. 나만 알고 있으려고 했는데.

└ 맞아! 물량도 별로 없다고! 너 때문에 사기 힘들어지면 책임질래?

└ 되팔이 새끼들, 또 몰려오겠네.

└ 미, 미친! 정말이냐?

└ 이거 한 알이면 여분의 목숨 하나 챙기는 거야.

└ 씨발, 사러 가야 하는 데 구례 기차표 매진이다.

태홍 회복제 반응도 실시간으로 폭발했다.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이 돈은 고스란히 재투자 되겠지만.

※ ※ ※

뉴서울 미리내 제약회사.

원래 미리내 그룹에서 제약은 주력 분야가 아니었다.

마나 결정 반도체를 생산하는 미리내 전자가 주력.

그러나 그룹 차남 이동우가 미리내 제약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제국 굴지의 제약회사로 키웠다.

특히 최고 품질의 미리내 명품 영약을 성공적으로 론칭하여 제약회사의 간판으로 만들어내면서 로열패밀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그런 이동우 사장이 두 손으로 책상을 꽝 치며 분노했다.

"이 버러지 새끼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밥만 먹고 똥만 싸지르는 새끼들, 월급 도둑놈들, 야근은 왜 해? 수당 챙기려고?"

임직원들은 고개만 수그리고 있었다.

태홍 바이오에서 신제품들이 출시되자마자 샘플을 입수하여 연구에만 매달렸다.

최첨단 장비로 분석도 해보고, 저명한 과학자들의 조언도 구해보고, 심지어 지리산에서 생산된 약재들을 직구매해서 똑같이 넣었는데도 비슷한 약을 만들지 못했다.

모기 독 해독제든, 포자 독 해독제든 죄다 실패.

그나마,

"회, 회복제는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치유 효과가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 그건 잘됐군. 언제 똑같이 만들 수 있나?"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래, 말해봐. 필요한 지원이라도 있어?"

"회복제 한 알 만드는데 자이언트 웅담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서···, 엘리트 마나 결정체도 소량 들어가고요."

"뭐?"

이동우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물었다.

"자이언트 웅담 도매가가 얼마지?"

"냉동 보존된 것 중에 품질이 괜찮으면 하나에 약 2,000만 원 정도 합니다."

"태홍 바이오에서 출시된 회복제는?"

"···500만 원입니다."

"꺼져! 이 개새끼야, 당장 나가!"

2,000만 원짜리 재료를 이용해서 500만 원짜리보다 효과가 떨어지는 약을 만들어 놓고도 비슷하다고?

엘리트 마나 결정체까지 들어간다면 재룟값만 해도 5천만 원이 훌쩍 넘는다.

"지금부터 전 직원 구례로 파견해! 가서 개발자를 구워삶든, 직원들을 빼돌리든, 훔쳐 오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레시피를 구해 와!"

※ ※ ※

구례 태홍 바이오 제약회사 본사.

백서연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전화기는 이미 꺼둔 지 오래.

하지만 사옥 앞은 기자들로 장사진.

삼한제국의 언론이란 언론은 다 모인 것 같다.

그나마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에서 보내준 군인들이 기자들을 막아줘서 사옥 건물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미치겠네."

퇴근도 못 하고 이게 무슨 꼴이람.

아버지는 일이 있다며 몰래 도망갔고, 김태주 회장님은 지리산 밀림으로 사냥갔다.

결국 회사에 남은 고위직은 백서연 혼자.

급기야 태홍 바이오 경비 임무를 위해 파견된 도민수 소령이 와서.

"간이 기자회견 정도는 하셔야 조금 조용해질 것 같습니다만."

"···네, 그래야겠네요."

"준비해드릴까요?"

"아유,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그건 우리가 할게요."

사옥 앞에 단상이 세워지고 스피커와 마이크가 준비됐다.

"멀리서 찾아와주셨네요. 태홍 바이오 제약회사 CEO 백서연입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처음엔 어떻게 개발했는지, 매출액이 얼마인지, 앞으로 또 나올 신약이 있는지···, 평범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실제로 태홍 바이오에 와보니 제약회사치고 규모가 꽤 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설비를 확장하실 계획이 있습니까?"

"당연합니다. 2공장, 3공장 설립을 위해 부지 매입 계획 중입니다."

"공장을 구례시 말고 다른 곳에다 지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약재 수급 문제도 있고, 당분간 이곳을 중심으로 생산량을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혹시 투자를 받을 생각은 없으신지?"

"없습니다."

"신약을 반드시 구례에서만 파는 이유는요?"

"약품 허가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차후 다른 도시에서도 약의 시판 허가가 떨어지면 판매가 가능하겠죠?"

그러다가.

"인류 평화를 위해서 신약 레시피 전체를 공개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순간 안색이 싸늘히 굳어져 버린 백서연.

"질문하신 분은 누구시죠?"

"은하 일보 강도철 기자입니다."

"강기자님, 참 좋은 말씀이시네요. 혹시 다른 제약회사 신약 발표회에서도 이와 같은 주장하신 적 있나요?"

"···."

"없으시겠죠. 그래서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네요."

은하 일보 강도철 기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아니면 OEM 방식으로 수주를 주는 건 어떻습니까? 생산 물량이 부족하다면 약품 대량 생산 설비를 갖춘 대기업과 합작을 통해···,"

"알겠습니다. 이만 기자회견은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은하 일보 기자님이 계신 곳에선 그 어떤 인터뷰도 없을 겁니다."

백서연은 뒤도 안 돌아보고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은하 일보?

배후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미리내 그룹 미래 전략실에서 근무한 그녀였다.

그룹 이미지 쇄신이나 신제품 홍보, 아니면 경쟁사를 흠집 낼 때, 제일 많이 애용하던 기레기 집단이 바로 은하 일보.

'누굴 바보로 아나?'

미리내 바이오에서 시켰겠지?

한번 찔러나 보라고.

사실 조금 걱정했었다.

카피 약을 바로 만들어낼까 봐.

물론 김태주 회장님은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면서 안심하라고 했다.

백서연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어렸다.

'못 베꼈구나?'

은하 일보가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짐작이 갔다.

길길히 날뛰고 있을 이동우 사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나저나 회사가 너무 좁다.

더 많은 건물이 필요하다.

현재 김태주 회장님이 기거하고 계시는 곳은 고작 5층짜리 건물, 그것도 한 층만 사용한다.

'이번에 들어오는 돈으로 회장님 저택이나 새로 지어야겠어.'

김태주 회장 덕분에 돌아가는 회사.

그래서 설비 투자보다 더 중요한 투자다.

※ ※ ※

삼한제국 중남부 파주 영지.

안주인 혼다 미쯔이는 항상 우울했다.

배다른 아들, 김태주의 성공을 듣고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였다.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의 군납기업으로 선정되어 승승장구하고 있는 김태주.

군부 내부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포자 독 고라니 해독제가 효과가 있다는 말, 황제 폐하가 직접 궁정 비서관을 보내 해독제와 고라니 고기를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

그럼 황제 폐하께서도 눈여겨보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그래서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접촉해볼 생각도 못 한다.

또 얼마 전 육본 참모부에 근무하는 일본계 장교인 모리츠미 대령에게서 불안한 전언이 들려왔다.

오진형 중장의 부관이 설악산 전초기지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캐고 있다고.

김태주의 암살 시도를 말이다.

장인동이 죽었다고 하지만 캐고 캐다 보면 놈에게 지시한 배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터, 그럼 자신도 위험해진다.

그렇게 노심초사하고 있을 무렵,

혼다 미쯔이에게 오랜만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의 배에서 나온 진짜 아들, 태평이, 태천이가 동시에 각성에 성공한 것, 휴가도 받아 집에 왔다.

"이리들 와라. 한 번만 안아보자꾸나."

"네, 엄마."

"아오, 전 다 컸다고요!"

참으로 든든한 두 아들이다.

마나 거부자인 쓰레기와는 차원이 다르지, 암! 그렇고말고.

"참! 엄마도 태주 소식 들었어요?"

"쉿! 당분간 이 집에서 그놈 이야긴 꺼내지 말 거라."

"아니, 걔가 뭐라고 이렇게···."

"꺼내지 말래도! 애미 말이 말 같지 않니?"

"그, 그게 아니라."

확실하게 못을 박으려는 듯 눈을 부라리며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혼다 미쯔이.

"관심도 가지지 마라. 너희들 미래나 신경 써. 각성이 전부니? 제국군 요직으로 배치도 받아야 하고, 등급을 올려서 진급할 생각도 해야지."

"···."

"네."

"설령 마스터가 되어서 별을 달았다고 한들, 끝나는 것도 아니야. 네 아버지를 봐라. 그 나이 되도록 파주 영지를 벗어나지도 못하는데."

김태평과 김태천은 엄마가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래봐야 시한부 마나 거부자인데.

김태평 23살, 김태천 22살, 연년생.

김태주와는 각각 6살, 7살 차이.

어릴 땐 곧잘 친하게 지냈다.

자신보다 더 크고 힘쎈 형아였으니까.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면서 깨달았다.

배다른 형은 마나 거부자,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의 낙오자란 걸.

그때부터는 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지나치다 마주쳐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겁쟁이, 쓰레기, 시한부 하루살이, 방구석 히키코모리.

성공했든 안 했든, 김태평과 김태천에게 있어 태주는 그런 존재였다.

한편 혼다 미쯔이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자신과는 피를 나누지 않은 남남이라 해도 남편과 김태주는 끊어낼 수 없는 혈연으로 묶인 몸 아닌가.

김태주는 해독제 개발 성공으로 군부에서도 주목하는 힘을 가졌다.

왜 남편 김웅방 준장은 그걸 이용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이용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물론 언젠가는 만나봐야 한다.

키워준 대가를 받아와야 하니까.

아직은 때가 아닐 뿐.

그나저나 아들이 둘씩이나 각성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다.

'어디 쓸만한 영약이라도 먹여야 하는데,'

이제 고작 유저 등급.

등급 상승이 절실했다.

남편에게도 기대할 것이 없고.

집안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영지를 운영할 돈도 부족할 판에, 영약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 카피약? 어림도 없지.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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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1) >

태주는 오늘도 자이언트 반달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와 깔끔하게 손질된 냉동 웅담을 약재 보관실 냉동고에 보관했다.

벌써 50개째.

웅담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회복제의 양은 몇 개일까?

영약을 제조하면 최대 8개.

하지만 500분의 1로 약효를 떨어뜨려 회복제를 만든다 치면 약 4,000개를 만든다.

그래서 하루에 웅담 하나씩, 태홍 회복제 4,000개만 한정 제조 판매.

판매량을 늘려달라고 아우성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다 수작업이라 얼마나 힘든데.

또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당분간 사냥만 다닌다.

그리고 혼원무상독령공의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5성에 오른 이상, 7성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린다.

7성의 의미는 매우 크다.

무사로 따지면 화경의 경지, 지구에선 마스터급.

7성에 이른 독정은 누구라도 중독시킨다.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뭘 해도 무섭지 않다.

게다가 암기도 모래 뿌리듯이 날려도 상관없다.

다 회수하면 되니까.

10성까지 대성하면?

아마 지구에서 자신을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을 터.

그게 각성자든, 마수든.

사실 10성으로도 부족하다.

절대독마 당군악도 혼원무상독령공을 10성까지 대성했다.

하지만 천마와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빌어먹을 악마 새끼.

결국 천신만고 끝에 독령(毒靈)을 깨달아 녹여 죽이긴 했지만.

'독령(毒靈)까지 갈 수 있을까?'

10성까지는 가능하다.

경험했으니까.

그러나 독령(毒靈)은 경험했다 하더라고 다시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지 의문.

한번 가봤다고 해서 또 갈 수 있는 경지가 절대 아니다.

독령은 그런 것이다.

독정(毒精)에 영(靈)이 깃드는 것.

필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것.

혼원무상독령공 구결에서 독령에 관한 내용 중 하나를 보면 그게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간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리라.'

그건 그렇고.

요즘 자신을 찾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언론 인터뷰, 제국 황실이나 군부, 의회 주요 인사가 자신과 대화할 목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공문을 보내고 있는 상황.

모조리 씹었다.

그래도 된다.

여긴 자유도시 구례, 다른 지역이었다면 소환장 같은 것도 받았을 것이다.

'슬슬 나가볼까?'

또 다시 밀림으로.

5성에 오르니 사냥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

삼두백호만 만나지 않으면 지리산에서 무서운 마수들도 없다.

레이드 팀이 제일 곤란해하는 대규모 오크 무리를 만나도 비폭(飛瀑) 한방이면 싹 다 걸레로 만들 수 있고,

코트를 입고 장비 창고에서 여분의 암기를 보충한 후,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회장님?"

하아, 들켜버렸다.

"···백서연 사장님."

"사장이 아니라 총괄경영자입니다."

"아, 총괄경영자님, 그런데 무슨 일로?"

"결제가 밀렸어요. 부동산 매입, 장비 구매, 매출과 순이익 보고도 받으셔야죠."

"그건 경영자님이 다 알아서···."

"제가 비자금이라도 만들어서 빼돌리면 어떡하시려고?"

"돈이 급합니까? 얼마나 드릴까요?"

"···후우, 아닙니다. 네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태주는 백홍표만큼 백서연도 믿었다.

몇 달간 같이 일해 보니 똑똑하고 영민할뿐더러 공명정대하고 배려심도 깊다.

그러니 원생 출신 아이들도 그녀를 믿고 따르는 거고,

벌써 태홍 바이오 직원이 500명이 넘었다.

능력이 아닌 인성 위주로 뽑았다.

일이야 배우면 되니까.

원생 출신뿐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 동창들, 훌륭한 인재들이 가지에 가지를 쳐서 들어왔다.

직원 대우?

최상급이었다.

삼한제국 전체에서.

"몇 가지 보셔야 할 게 있어서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다 알아서 처리하신다면서···."

"회장님이 직접 보셔야 하는 게 있어서요."

"네, 봅시다."

"우선 이것부터."

그녀가 먼저 내민 것은 수더분한 디자인의 하얀색 카드.

"축하 카드입니다."

뭘 축하한다고···,

하지만 카드를 보는 순간, 태주는 안색이 굳어졌다.

- 장하구나. 아들아. 성공을 축하하고 항상 응원하고 있단다. 언제 시간 나면 파주로 꼭 들리거라. 아버지 김웅방. -

아버지가 보낸 축하의 메시지.

'웃기고 있네.'

딱 봐도 안다.

이건 아버지가 보낸 게 아니다.

심지어 직접 쓴 것도 아니고, 자필 서명도 없다.

그저 프린트로 인쇄한 글자만.

아버지는 자신과 절연했다.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일단 결정한 부분에 대해선 번복하지 않는 사람.

그럼 누굴까?

당연히 새엄마 혼다 미쯔이지.

읽을 가치도 없다.

"이거 버려요."

찌이익!

태주는 축하 카드를 찢어버렸다.

"어머?"

"대신 휴지통에 넣어주시고, 다른 건 없어요?"

"···아, 초대장이 두 장 들어왔습니다. 먼저 이것부터."

태주는 백서연이 건넨 화려한 금박 카드를 받았다.

"···흐음, 노블 퍼플스 결혼정보회사?"

들어본 기억이 난다.

매칭 성공률 90%에 달한다는 최고의 결혼 정보 업체.

"왜 이게 저한테 와요?"

"자격이 있으니까요."

가입 자격은 엄격하다.

일단 각성자라면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적합자라도 집안이 좋거나 부모 중 한 명이 미들 익스퍼트 이상이어도 가입시켜주고.

"난 마나 거부자인데?"

"그걸 누가 믿어요? 뭐, 그렇다 해도 회장님은 제국 부자 순위 100위권에 오르셨잖아요. 1등 신랑감이시죠."

"···."

"회장님도 결혼하셔야죠. 가정도 꾸리시고, 그래서 노블 퍼플스 결혼정보회사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서연의 말대로 언젠간 하겠지만···, 사람들을 계층별로 나눠서 관리하는 결혼정보회사는 관심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마나 거부자, 마나 순응자, 마나 적합자, 각성자로 나뉜 후, 알게 모르게 마치 카스트 제도처럼 신분제가 고착화되고 있는 현실.

구례는 조금 덜한 편.

멀리 떨어진 지방이고, 또 자유도시라는 성격도 있어서 계층 나누기가 크게 심하지는 않다.

그러나 수도권만 가도 그렇지 않다.

중세 신분제 사회처럼 노골적으로 대우하진 않지만, 다른 계층은 물과 기름처럼 철저하게 분리된다.

결혼도 마찬가지.

마나 순응자는 마나 순응자끼리.

마나 적합자는 마나 적합자끼리.

각성자는 각성자끼리.

사다리 하나 정도는 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응자와 적합자가 결혼한다던가, 아니면 적합자와 각성자가 결혼한다던가.

물론 하위 단계의 모자란 점을 보충해줄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돈, 명예, 권력, 학위 등등.

이게 다 유전 때문이다.

부모가 각성자면 자식도 각성자일 확률이 높다.

당장 삼한제국 황실 계보도를 봐도 안다.

황제의 자식들, 황자와 황녀들, 그리고 황손들, 확실한 숫자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마스터들이 수두룩하다.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기기도 하지만.

마스터를 아버지로 둔 마나 거부자 김태주처럼.

태주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자 백서연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노블 퍼플스 결혼정보회사, 가입 추진할까요?"

"아뇨, 됐습니다. 전 자만추 타입이라, 다음 초대장은 뭐죠?"

"···네, 여기."

또 하나의 초대장.

전체를 금박으로 꾸민 화려한 카드였다.

"제국 리더스 클럽?"

"이건 고민 좀 해보세요."

"사교 클럽이잖아요."

"평범한 사교 클럽은 아니죠."

맞다.

평범하진 않다.

유명한 각성자 집안, 대기업 자재, 학계, 법조계, 군부, 부유한 영지 후계자, 심지어 황자, 황녀까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젊은이들이 모여 친분을 나누는 클럽.

"가입비가 얼마더라?"

"50억입니다. 월회비 1억은 별도로 하고."

"제가 여길 가입해야 하는 이유는?"

"곧 제국 최고 대기업 회장님이 되실 거니까요. 큰물에서 놀아야죠."

굳이 이런 델 왜 가?

"관심 없어요. 내가 노는 곳이 큰물입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도···,"

"아! 그러고 보니 백서연 총괄경영자님도 자격이 있겠네. 최고의 제약회사 CEO, 당장 가입하세요. 가입비와 월회비는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시고."

"네?"

깜짝 놀라는 백서연.

"우리 회사 미래에 보탬이 된다면서요? 당장 가입하세요."

"아, 으음, ···아, 알겠습니다. 다신 이런 초대장 가지고 오지 않겠습니다."

백서연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자신 대신 리더스 클럽 가입하라고 권유한 건 진심이었는데.

'그럼 사냥이나 가 볼까?'

※ ※ ※

태홍 바이오 제약회사의 확장은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건물을 샀던 장소가 백스 고아원과 가까운 곳이었다.

지리산 밀림과 가까운 곳, 그래서 땅값이 쌌다.

지금은 땅값이 올라갔지만.

그래도 적극적으로 땅을 사고 있었다.

그 땅에 제2공장과 약재 창고 용도의 건물들이 만들어졌다.

회사 매출이 한 달에 천억이 넘지만, 이익금은 그대로 재투자.

태홍 회복제를 만드는 설비도 최신식으로 바꾸었다.

압력솥 대신 마나 강철로 만든 밀폐 용기, 오븐 대신 마나 결정체를 원료로 한 가열기 등등.

생산 작업은 백창훈과 장순철, 이 두 명이 2교대로 돌아가면서 작업한다.

처음엔 허둥지둥 실패율이 매우 높았는데, 지금은 달인처럼 숙련되어 불량품 하나 없었다.

"창훈아, 오늘도 네가 작업하네? 어제도 했잖아."

"아! 회장님, 순철이가 오늘 일이 있다고, 대신 내일부터 이틀 연속으로 작업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래? 무슨 일인데."

"아는 친구가 있는데, 통 연락이 안 돼서 찾으러 간다고."

"원생 출신?"

"원생은 아니고, 슬럼가 달동네에 사는 동창 친군데, 친했나 봐요."

달동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그래서 범죄율도 높은 편.

아무리 각성한 놈이지만 살짝 불안하다.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태주 형, 슬슬 생산량을 늘려도 되겠어요."

"익숙해졌냐?"

"하루 8,000개 정도는 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당분간 한정 판매만 할 거야."

태홍 회복제는 엄청난 인기였다.

입소문만 퍼졌는데도 약국 문이 열리면 매진 사태.

수량 제한에, 각성자와 적합자만을 상대로 파는데도 이렇다.

수량을 늘리려면 생산자가 늘어야지.

창훈이와 순철이만으론 부족하다.

태홍 바이오 소속의 각성자 숫자를 늘리고, 믿을만한 놈이면 영약을 먹여 키우고, 또 창훈이와 순철이를 익스퍼트급으로 올려놓고, 열양공과 한음공도 가르쳐서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도 지들이 알아서 수급하고···, 한마디로 아직 멀었다.

"아무튼 오늘 늦었다. 벌써 밤이잖아. 빨리 집에 가서 쉬어."

"곧 끝나가···,"

그때였다.

지이잉!

품 안에서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음.

그런데 낯선 전화번호다.

"여보세요."

- 구례 중앙 의료원입니다. 환자 전화번호 보고 연락드렸어요.

병원?

"무슨 일인데요?"

- 그게···,

전화를 받던 태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 ※

구례에도 병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시설도 썩 좋지 않고, 의사들도 많지 않아 사람들이 자주 가진 않는다.

응급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쩔 수 없이 가는 곳.

태주는 백창훈과 함께 응급실을 찾았다.

"순철아!!!"

"···형."

온몸에 칭칭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있는 장순철.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 그게···,"

사연을 들어보니.

오늘 장순철이 찾으려 다녔던 동창 친구.

슬럼가에 사는데 얼마 전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아 부모님들이 걱정했더란다.

혹시라도 나쁜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전화해도 받지 않고, 자경단에 신고했지만 감감무소식.

아들의 친구인 장순철에게 연락했고.

"같이 있던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밀림 마수 레이드 갔다가 회식을 하고 집으로 간다면서 헤어졌는데, 그날 종적을 감췄다고···."

"레이드?"

"네, 그놈 적합자거든요. 드디어 빚 다 갚았다고, 곧 슬럼가에서 이사 갈 거라고 기뻐했는데."

"넌 왜 이렇게 됐어?"

장순철의 설명이 이어졌다.

슬럼가를 샅샅이 뒤졌단다.

사진을 들고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그러다가 달동네 골목에서 발견한 단서.

자신이 생일선물로 친구에게 사준 운동화 한 짝.

"제가 사준 게 확실합니다. 사이즈도 딱 맞고."

"어디서 찾았지?"

"구례 달동네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서요. 그래서 그곳을 중심으로 계속 탐색했죠."

"그러다 습격당했고?"

"네, 얼굴도 못 봤습니다. 어떤 비겁한 새끼가 뒤통수를···, 저도 정신없이 끌려가다가 몰래 회복제 먹고, 침투경 한방 갈기고, 가까스로 도망쳤어요."

태주는 여전히 안색이 어둡다.

자기 사람이 다치는 것은 가슴이 아프다.

그나마 침투경을 가르친 것이 다행.

마침 회복제도 있었고.

"등에 붕대는 왜?"

"이건 도망치다 당한 겁니다."

"상처 좀 보자."

"···네에."

태주는 장순철의 몸에 감긴 붕대를 풀어 상처를 확인했다.

"으윽! 사, 살살."

"참아!"

등이 갈라져 뼈가 보일 정도의 깊은 상처,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마치 짐승이 할퀸 듯한, 그래서 살이 찢겨나간, 어깨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5개의 세로줄 상흔.

'이거 혹시···,'

마수?

그럴 리가.

아무리 슬럼가지만 그곳은 구례 도시 안에 있다.

마수가 나타날 수 없는 지역.

마수가 아니라면 뭘까?

"습격당한 곳이 정확하게 어디냐?"

"칠흑동 달동네 중턱요."

슬럼가는 원래 동네 뒷산에서 만들어졌다.

자유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주인이 없는 산에다 집을 짓고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지역.

위험도가 높이에 따라 다르다.

산밑은 평범한 슬럼가지만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위험하다.

자경단원들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는 곳.

"제 친구는 죽었겠죠?"

"글쎄."

"빌런에게도 쉽게 당할 놈이 아닌데,"

장순철의 등에 난 상처로 보아 짐작 가는 구석이 있긴 했다.

이건 무기에 당한 것이 아니다.

검이나 칼이었다면 깔끔하게 잘렸어야지.

5개의 세로줄 상처로 보아 손톱이나 발톱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마인.'

인간에서 마수로 변한 놈.

마인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특히 적합자나 각성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마인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확인해봐야겠군.'

만약 마인이 맞는다면 절대 살려둬선 안 된다.

특히 자신이 자리를 잡고 사는 구례에선.

< 마인(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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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2) >

구례 칠흑동 달동네.

산등성이에 조잡하게 지은 나무판자 집들.

꼭대기에 제법 잘 지어진 집이 한 채 있었다.

슬럼가 집답지 않게 넓은 마당도 있고.

"막내는 어디 갔어?"

"밑에 내려가 있습니다. 자기 실수는 스스로 책임지겠다면서."

"어떻게 책임진다고? 그놈 도망갔다면서?"

"···혹시라도 도망친 놈이 자경단을 끌고 올까 봐 감시한다던데요."

"병신 새끼."

"에이, 대형, 막내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제 딴엔 열심히 해보려다 실수한 건데."

섭위당의 말에 왕안풍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납치하려다 실패했으면 그냥 보낼 것이지.

도망가는 놈을 죽이려고 '마수화'를 시전했다.

또 마수화 상태에서도 상처만 입히고 놓쳤고.

"구례를 뜰 준비해. 정리할 거 정리하고."

"좀 더 기다려보죠. 대형. 구례만큼 숨어있기 좋은 동네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심을 하는 게 맞아. 특히 우리 처지에선, 막내에게 헛짓거리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해."

"후우, 제기랄! 그동안 재미있었는데. 진짜 좋았지 않습니까? 우리 삼형제···."

삼형제.

친형제는 아니었다.

첫째 왕안풍, 둘째 섭위당, 셋째 천초량.

이들 셋은 중국계 출신 마인 의형제였다.

도원에서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결의한 사이.

원래는 삼한제국 서남부에 살았는데 마인마저도 살기 팍팍한 동네라 구례로 흘러들어와 정착에 성공했다.

마인은 제국, 아니 세계의 공적(公敵)이다.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

그래서 이웃들도 자신들이 마인이라는 걸 모른다.

그저 타락한 빌런 각성자 정도로 여길 뿐.

마인으로서 성장하려면 적합자 혹은 각성자의 심장이나 주요 장기를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욕심은 금물.

한 달에 한 명씩.

아무나 선정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져도 괜찮을 놈들, 예를 들어 슬럼가 일부 주민,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뜨내기나 양아치, 범죄자, 가끔씩 밀림에 나가 약한 각성자들 골라서 사냥하기도 했고.

그동안 들키지 않고 잘 해왔다.

들킬 이유도 없었고.

구례 빈민가에서만 한 달에 죽어 나가는 사람이 얼만데, 게다가 실종자까지 합하면···.

마인이 되면 인간이 가진 마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번에도 마나 향기를 유독 진하게 풍기는 놈을 발견해서 몰래 납치해 먹었다.

남은 시체야 늘 하던 대로 이 앞마당에 묻었고.

그런데 막내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정체가 드러나면 큰일, 무조건 떠나야 한다.

아무리 자유도시지만 마인에 관해선 공권력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가까운 곳에 제국군 마수 방어군단도 주둔해있지 않나.

"빨리 막내나 불러들여."

"전화해 보겠습니다."

왕안풍도 솔직히 아쉽다.

구례 자유도시는 마인이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이곳에서 힘을 길러 마인 마스터까지 올라가려고 했는데, 하다못해 익스퍼트까지만 올렸어도.

'제기랄!'

순간!

푸스스스스···,

왕안풍의 얼굴에 부숭부숭한 털이 솟아났다.

동시에 쑤욱, 솟아나는 송곳니.

그러더니 순식간에 평범한 얼굴로 돌아갔다.

※ ※ ※

대다수의 제국민과 마찬가지로, 태주 또한 마인과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대신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증오와 경멸, 악몽과 공포가 공존하는 마인에 대한 인식.

파주에 있을 무렵.

막 사춘기를 벗어난 배다른 동생 태천이가 지나가면서 했던 얘기도 생각났다.

'넌 마인 만나도 걱정 없겠네. 마나 거부자라서,'

이렇듯 등급 낮은 각성자와 적합자에겐 호환이나 마마 같은 무서운 존재.

제국은 그들을 무조건 공공의 적으로 규정한다.

마인을 죽여도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상을 받지.

평상시 마인은 여느 각성자들과 똑같다.

문신도 있고, 외모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상에서 마인을 구별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싸워보면 안다.

그리고 죽여보면 안다.

인간성을 벗어던지고 마수가 되어버린 놈들의 정체를.

"여긴가?"

장순철이 습격을 당했다는 장소.

달동네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계단이 이렇게 많아?'

여기도 계단, 저기도 계단.

하긴, 여긴 달동네다.

계단 많은 것이 뭐가 이상할까.

주위를 살펴보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태주.

사실 여기 온다 해도 뾰족한 수가 있을까?

그냥 시간도 남아돌고, 운이 좋으면 단서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한참을 그냥 빙 돌았다.

밤이라 그런지 사람도 없었다.

그저 비릿한 냄새들만이 주위에 가득 차 있다.

바닥에 깔린 쓰레기 냄새, 담벼락에 갈긴 오줌 냄새, 똥 냄새, 토악질 냄새···,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아까부터 묘한 냄새가 태주를 자극했다.

전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지역을 지나쳤을 때 특히 그랬다.

어디서 맡아본 매우 익숙한 냄새.

끈적하고 음습한, 맡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근데 왜 기분이 나쁘지?

똥 냄새를 맡아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뭔가 가물가물 기억이 날 것도 하는데.

태주는 그 기분 나쁜 냄새를 따라갔다.

특정 방향에서 냄새가 흘러나왔다.

쭉 따라갔는데.

순간!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분이시네요. 여기 주민이신가?"

높게 위로 쭉 이어진 돌계단.

그 중간쯤에서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 나타나 태주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뇨. 여기 살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곳엔 왜?"

"좀 알아볼 일이 있어서."

"아하! 그렇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제가 도와드리죠."

태주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하.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만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사실 보자마자 이상함을 느꼈다.

슬럼가에서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다고?

게다가 슬금슬금 풍기는 그 냄새.

이자에게서 유독 심하게 났다.

적대심을 가질 정도로 말이다.

'목욕도 안 하고 다니나.'

그나저나 진짜 못 참겠다.

'무슨 냄새가 이렇게···.'

혼원무상독령공 5성에 올라 감각이 민감해져서 그런가?

원래 개코이긴 하다.

자신도 그렇고, 절대독마 당군악도···,

'가만!'

태주는 머릿속에서 번뜩 떠오른 기억.

강호 무림에서도 오로지 당군악만이 맡을 수 있었던, 특정한 무공을 수련한 놈들만 풍기는 체취가 있었다.

'마기(魔氣)···,'

맞다.

마교도들이 가진 특이한 향기였다.

'왜 마교 종자들 냄새가 이놈에게서 나지?'

사실 똑같은 냄새는 아니었다.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말이다.

추악하고, 역겹고, 불쾌하고, 메스껍고···,

'이 새끼 설마···, 마인?'

생각해보니 마교도와 마인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마인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럼으로써 등급을 상승시킨다.

마교 새끼들이라고 다를까.

놈들이 익히는 내공 심법은 죄다 흡정마공 계열이다.

타인이 피를 깎아 수련한 내공을 흡정마공으로 낼름 낼름 빨아먹는다.

천마신공?

신공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그냥 궁극의 흡정마공이라고 보면 된다.

마교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놈들의 강함에 매료되어 그들을 추앙하기도 한다.

힘을 추구하는 강자들이라고 판단한 것.

그러나 그건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간교하고 야비한 인간쓰레기들.

남이 이룬 성취를 도둑질하고, 심지어 지들끼리도 서로 잡아먹는 미친 폐기물들.

그 결과 혼탁하고 불순한 내공을 가져 이곳저곳에 악취를 풍기고 다니는 시궁창 쥐새끼.

놈들은 악마다.

괜히 마(魔)자가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절대독마 당군악도 마교도를 대함에 있어 그 어떤 자비심도 가지지 않았다.

보이는 족족 쳐 죽였다.

포로로 잡을 생각도 안 했다.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마인과 마교도.

억지로 끼워 맞춘 걸까?

그러기엔 너무 비슷한 점들이 많다.

냄새도 그렇다.

엄밀히 말해 냄새라기보다 대상에게서 느끼는 기(氣)의 성질.

마교도의 기(氣)는 흡정마공으로 이 내공, 저 내공이 섞여 혼탁하다.

마인의 기(氣)도 여러 특성의 적합자, 각성자의 마나를 먹고 뒤섞여있다.

그런 이유로 눈앞에 이 남자.

의심이 간다.

아니, 거의 마인이라 확신했다.

태주가 말이 없자 남자는 다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말도 없이, 아무튼 여긴 생각보다 위험한 동네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사건이 하나 터졌어요."

"그래요?"

"아하, 모르고 계셨구나! 어쩐지···, 여기 살지 않는 사람은 위험해요. 따라오세요. 제가 지름길 안내해 드릴게요."

그러자 태주가 픽, 웃으며.

"따라오라고? 왜? 나도 먹으려고?"

"···네?"

"놀란 척하기는, 너 마인이잖아."

천초량은 당황했다.

회색 코트를 입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혹시나 해서 말을 걸어봤는데···, 어떻게 알고?

"처, 처음 보는 분이신데, 상당히 무례하시네요. 불쾌합니다."

"몇 명이나 잡아먹었냐?"

"너 미쳤어?"

"뭐, 자경단에 신고나 해야겠다. 여기 마인이 산다고."

태주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런, 씨발 새끼가!"

천초량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소용돌이치는 마나의 유동.

눈자위도 까맣게 물들었다.

뿌드드드드득!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

눈이 가로로 쭉 찢어진다.

입에선 송곳니가 삐져나오고, 가시 같은 털들이 얼굴을 뒤덮었다.

넓어지는 어깨.

팔이 길어졌다.

다리도 길어졌다.

마수화.

기존 가지고 있었던 힘이 두 배나 뻥튀기되는 마인만의 스킬.

"맞네! 마인."

"크르르르, 갈가리 찢어 주마."

"냄새나니까, 아가리 다물고."

태주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자, 따라 해봐. 김치이이···,"

찰칵!

쐐애액!

분노한 마인 천초량이 쏜살같이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내렸다.

동시에 날카로운 손톱으로 태주의 얼굴을 할퀴었다.

츠팟!

그러나.

"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태주.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순간, 천초량은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휘릿! 급하게 몸을 회전해 손톱을 긁었지만.

퍼억!

"크헉!"

이미 눈앞엔 빨간 손바닥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퍼벅! 퍼버버벅! 퍼퍼퍼퍽!

머리와 가슴, 복부, 옆구리, 눈 깜짝할 새 덮쳐오는 공격.

천초량의 마수화된 몸이 부르르 떨린다.

숨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고통.

한 대 맞을 때마다 마나가 뭉텅뭉텅 사라지는 것 같다.

대체 이놈은 누구지?

그제야 천초량은 후회했다.

둘째 형이 집으로 올라오라고 했을 때 갔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대형을 볼 낯이 없어 미적대고 있었다.

벗어나야 한다.

거리를 벌려야 한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덕택에 느슨해진 놈의 공격.

천초량은 계단에 발톱을 박아 넣은 채 뒷다리를 굽히며 총알처럼 계단 위로 뛰어갔다.

펄쩍, 펄쩍, 펄쩍.

천신만고 끝에 공격 범위를 벗어난 천초량.

"너, 너어···?"

단 몇 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자신은 마인이다.

각성 등급은 비기너지만 마수화로 익스퍼트의 육체도 갈라 버릴 힘을 가졌다.

그런데 각성자도 아닌 놈에게 이렇게 당해?

회색 코트의 놈은 여전히 저 계단 밑에 있었다.

"크륵, 크르륵."

거세게 숨을 몰아쉰 후, 천초량은 가만히 놈을 노려봤다.

'혼자선 안 돼.'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모르는 판에.

천초량의 장점은 빠른 판단.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휘청!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하늘이 빙빙 돌았다.

'왜?'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

무너진 몸이 균형.

숨이 차오른다.

'설마 독인가?'

저 뒤에서 회색 코트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초량의 의식에서 피어오르는 본능적인 두려움,

'도, 도망을···,'

대형들이 있는 곳까지 가면 산다.

비틀거리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고 천초량도 계단 위를 걸었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급기야 턱! 계단 끝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꽈당,

"제, 제기랄! 쿨럭, 쿨럭···,"

일어설 힘도 없다.

입에선 피가 섞인 기침이 터졌다.

천초량은 포복 자세로 엎드렸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 조금만.

그렇게 엉덩이를 들어 올린 채, 네발로 기어갔는데.

순간!

츠피릿!

푸욱!

"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무언가가 자신의 보드라운 엉덩이를 뚫고 들어왔다.

"뜨헉, 이, 이 씨발놈아!!!"

엉덩이에서 흘러내리는 선혈.

태주는 엎드려 기는 놈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말했다.

"살고 싶으면 계속 가."

"···너, 너 이 새끼, 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뼈까지 씹어먹어···."

츠핏!

푸욱!

박힌 자리 옆에 한 자루 더.

"끼아아아아아!!!"

칼이 거의 항문 근처에 꽂혔다.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나와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긴 원래 그런 곳이니까.

"가라! 개처럼 기어."

핏발 선 천초량의 눈.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수치감.

그러나 일어설 수 없었다.

하체는 거의 마비.

상체만 움직일 수 있을 뿐.

천초량은 팔 두 짝을 번갈아 가며 계단을 올랐다.

여전히 태주의 차가운 표정은 변화가 없다.

곱게 죽여줄 줄 알고?

세게 던지면 관통할까 아주 약하게 던졌다.

쉽게 죽이면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밖에 더 돼?

저 정도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겠나?

마인과 마교도.

똑같은 놈이다.

살려두면 다른 사람들이 죽는다.

츠핏!

푸욱!

또 한 자루.

총 3자루가 엉덩이 과녁에 적중했다.

"으아아아! 으아, 아파! 아, 아프다고!!!"

흥건하게 피에 절은 하체.

그런데도 천추량은 더더욱 힘을 내며 바득바득 기었다.

태주는 그저 따라만 갔다.

마인은 바퀴벌레다.

한 마리 발견하면, 한 마리 더 나올 확률이 높다.

그래서 유엽비도에 마약 성분을 집어넣었다

엉덩이 살점이 다 찢어져도, 창자가 끊어져도 놈은 쉴새 없이 움직일 것이다.

'아무튼 사진도 찍었겠다···, 메시지나 보내볼까?'

마인 신고는 113.

제국민으로서의 의무였다.

현상금도 챙겨야지.

< 마인(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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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3) >

마인 왕안풍은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다.

구례를 포기하는 것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들어 외부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마인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 아닌가.

멍청한 막내 놈이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솔직히 자경단은 무섭지 않다.

이정학만 빼면 다 헛방.

자경단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공권력의 부재를 보완하기 위해 3인 체제의 상임위원과 자치위원들이 정부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구례 자유도시.

권력이 3개로 쪼개졌다.

삼권분립을 흉내 낸 듯하지만 제각기 가지고 있는 속셈이 다르다.

특히 실질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이정학은 다른 두 상임위원, 민동열과 지광인에게 끝없는 견제를 받고 있었다.

노고단 길드원의 숫자를 제한했고, 외부에서 강한 각성자를 초빙해오는 것도 막혔다.

딱 구례시 치안 행정이 운영될 정도만.

그 이상의 힘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친 놈이 마인 의심 신고를 하면?

마인 출현은 국가의 중대사.

당장 옆에 있는 지리산 마수 군단 병력이 칠흑동 달동네로 들이닥칠 터.

"섭위당."

"네, 대형."

"막내는? 왜 아직 안 올라오지?"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한 번 더 전화해보겠습니다."

섭위당은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뚜우,

받질 않는다.

"전화 안 받아?"

"어···, 바쁜 일이 있나 봅니다."

"그래?"

왕안평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예감이 좋지 않다.

결정한 이상 바로 떠나야겠다.

그런데,

"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들리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

"응?"

"비명이···."

왕안평과 섭위당은 집 밖을 나갔다.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은 칠흑동 달동네에서도 제일 좋은 집.

집 앞엔 너른 마당이 있었고, 밑에서 마당으로 올라오는 비탈진 계단도 있었다.

그런데 그 계단에서 무언가 꾸물꾸물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헉!"

"저건 또 무슨···,"

마치 민달팽이처럼 말이다.

지나간 자리에 빨간 페인트로 칠한 자국이 남았다.

알고 보니 피였다.

하체 부분에서 샘 솟든 흘러나오는 피.

"크헉, 대, 대혀어엉···,"

그제야 왕안평은 저 민달팽이 같은 괴물이 누군지 알았다.

"···천초량?"

막내였다.

섭위당도 황당한 표정.

저놈이 왜 저 꼴로 기어 오고 있지?

심지어 마수화를 시전한 채.

"대, 대형, 사, 살려···,"

순간!

저벅저벅.

기어가는 천초량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는 한 남자.

무릎까지 내려오는 회색 코트.

"너, 넌 누구?"

혹시 자경단일까?

자세히 보니 아니다.

얼굴에 문신도 없다.

설마 저놈이 막내를 저렇게 만들었나?

익스퍼트에 필적하는 막내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그것도 마수화를 이룬 마인을?

"두 놈이 더 있었네?"

거기서 죽이지 않고 따라오길 잘했다.

그럼 이제 이놈은 보내주자.

"수고했다."

스슷!

태주의 코트 소매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물건.

츠피릿!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

은빛의 유엽비도가 아직도 바닥을 기어가는 천초량의 엉덩이를 파고들어,

푸욱! 파삿!

내부까지 관통한 후 입으로 빠져나왔다.

태앵!

그러고도 힘을 유지한 채 집 콘크리트 벽에 박혀버린 작은 단검.

당연히 천초량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이, 이런 씨발 새끼!!!"

막내가 눈앞에서 죽었음에도 왕안평과 섭위당은 움직이지 못했다.

대체 누구지?

태주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냄새가 나는구나. 냄새가."

저놈들도 악취가 풍긴다.

그럼 마인일 터.

자신도 강호 무림에서 마(魔)라고 불리었다.

절대독마(絶代毒魔) 당군악.

세상에서 마교도를 가장 많이 죽인 자.

마인은 죽어야 한다.

자비는 필요 없다.

장순철의 친구도 분명 저놈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고 대화도 나눈 적이 없지만 억울하게 죽은 청년의 영혼을 달래줘야 한다.

그렇다면 복수를 해줘야지.

죽은 사람도 만족해할 확실한 복수를.

복수의 끝은 찝찝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나 하는 얘기다.

악(惡)한 놈에게 베풀어지는 어설픈 온정은 결국 선(善)한 이들을 죽게 만든다.

자신과 영혼이 같은 절대독마 당군악의 방식으로.

죽는 순간까지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준다.

한편 왕안평과 섭위당은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갑자기 나타난 회색 코트의 남자.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살의.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기세.

눈만 마주쳐도 몸이 떨린다.

마치 천적을 만난 것 같은 기분.

천초량을 죽인 방식도 그렇다.

아마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을 것이다.

사냥감 몰 듯이 둥지로 몰아 자신들을 찾아냈고, 쓸모가 다한 천초량은 처참하게 죽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싸울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당연히 도망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극한의 공포는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섭위당이 먼저 반응했다.

"···이, 이, 이놈!!! 주, 죽어!"

뿌드득, 뿌득!

순식간에 마수화를 진행한 섭위당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태주에게 돌진했다.

태주는 피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갖가지 생각들.

어떻게 죽일까?

일섬(一閃)으로 탈명비도를 날려 죽이는 건 너무 자비롭다.

그럼 독(毒)으로?

고작 몇 분이나 견딘다고.

태주는 기억을 더듬었다.

절대독마 당군악이 익혔던 수많은 무공.

그중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것은?

'그거면 되겠네.'

생각을 마친 태주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덮쳐오는 마인의 손톱 찌르기를 고개 한번 까딱이는 걸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놈의 팔뚝을 잡아채고는 섬전 같은 속도로 회전.

우드드득!

팔 관절이 역으로 꺾였다.

"캬아아아악!"

떠오른 무공은 분골십이수(粉骨十二手).

말 그대로 뼈를 분쇄하는 금나수의 일종이다.

마수화가 되었더라고 기본 바탕은 인간.

그래서 관절기는 유효했다.

팔뚝을 꺾은 직후, 다른 쪽 손목을 잡아서,

우드득!

"끼아악!"

너덜너덜한 손목을 앞으로 쭉 당기자 그대로 끌려와 땅에 쓰러진다.

태주는 그 상태에서 놈의 등에 앉았다.

이번엔 다리.

놈의 엉덩이를 무릎으로 꽉 누른 후, 오른쪽 종아리를 옆구리에 끼우고 그대로 들어 올려 비틀어버리니,

빠드드득!

"끄···, 윽!"

그리고 마침내 허리춤에서 탈명비도를 꺼낸 태주.

왼쪽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서슴없이 그었다.

서걱!

"켁!"

반쯤 잘려 나간 발목.

그냥 자르지 않았다.

당연히 독을 발랐다.

산공독과 포자독.

이제 놈은 기동력과 회복력을 상실한 채 내부 장기부터 천천히 녹아버릴 것이다.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섭위당.

팔 하나는 역으로 관절이 꺾이고, 하나는 손목이 박살 나고, 오른쪽 다리는 무릎이 돌아갔고, 왼쪽 다리는 아킬레스건이 잘렸다.

섭위당은 천초량처럼 기어갈 수도 없었다.

그저 바닥에 쓰러져 꿈틀대기만 할 뿐.

"자, 잔인한···, 차, 차라리 주, 죽여···."

"잔인? 최소한 널 먹지는 않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고통 속에서 천천히 몸부림치다가 죽을 테니까.

'또 한 놈 잡았고.'

태주는 눈을 들어 앞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도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있었는데.

'웃기는군.'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

타닥! 타다닥!

저쪽에서 다급한 도망치는 소리가 들린다.

태주도 몸을 움직였다.

마인 사냥 시작이다.

왕안평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이게 무슨 꼴이지?

고작 한 놈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니.

마인으로 레귤러 등급까지 올랐다.

마수화를 실행하면 미들 익스퍼트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회색 코트 놈은···,

'최소한 슈페리어 익스퍼트야.'

혹은 마스터일지도.

마인의 길을 택하면서 왕안평의 꿈은 하나였다.

마인 마스터.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인가?

일반 각성자들이 마스터가 되는 것보다 마인으로 마스터가 되면 그 변화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극적인 변화.

체력과 스피드, 마나 보유량, 물리력, 그리고 암흑 강기.

그야말로 최고의 마인, 즉 마왕이 되는 거다.

마스터가 마수로 변신하면 몸 전체가 까만 강기 덩어리로 변한다.

스쳐 지나가는 것 모두를 부숴버릴 수 있다.

유럽의 한 마인 마스터는 마을 하나를 홀로 도륙한 적도 있었다.

지역 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모든 걸 죽이고 먹어 치웠다.

심지어 아직 잡히지도 않았다.

이제 조금만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마인으로서 익스퍼트에 올라, 마인의 정점이라는 마왕의 경지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회색 코트를 입은 놈이 천추량을 잔인하게 죽이고, 섭위당마저 팔과 다리의 관절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잔인하게 으스러뜨렸을 때 이미 깨달았다.

싸우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물론 마수화를 시전하면 상대해 볼 수는 있겠지.

적어도 동생들보다는 자신이 훨씬 강하니까.

그러면 뭘 하나?

이미 정체가 탄로 났다.

자경단이나 군대까지 합류한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

천초량과 섭위당과 의형제 결의를 맺었다.

한날한시에 같이 죽자고.

그러나 달달한 의리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내가 사는 게 중요하지.'

구례를 벗어나야 한다.

여차하면 삼한제국까지 뜰 생각도 염두에 둬야 한다.

꼭대기에서 내려는 길이라 속도가 붙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때로는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집과 집 사이를 뛰어넘고.

이 밑으로 내려가면 지리산 밀림으로 가는 초입.

밀림 안으로만 들어가면 그만이다.

이왕 구례를 떠나기로 한 거, 밀림으로 숨어들어 각성자나 적합자 몇 마리 먹어 치우고 힘을 보충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때였다.

섬뜩!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살기.

"이런!"

빠드드득!

순식간에 몸을 돌린 동시에 마수화를 시전해,

휘릿!

탱!

자신에게 날아오는 투척 무기를 손으로 후려쳤다.

'이 새끼가 언제···,'

파파팟! 파팟!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자신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드는 놈.

'뭐 저렇게 빨라?'

신발이 아티팩트라도 되나?

도망가려고 했지만 놈을 따돌리진 못할 것 같다.

'젠장···.'

어쩔 수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워야 한다.

'씨발 새끼, 도망쳐주니까 내가 만만한 줄 알아?'

왕안평에게도 위기를 타개할 한 수 정도는 늘 가지고 있었다.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작은 힙색 가방.

그 안엔 방독면 하나와 가스탄 2개가 들어있다.

하지만 보통 가스탄이 아니다.

안에 '강화 사린 가스'가 들었다.

그것도 마나 결정체로 몇 배는 강화된 치명적인 독가스.

해독 주사를 맞지 않는 한 들이마시면 마스터라도 몇 분 안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당장 죽지 않더라도 싸움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터.

다만 이렇게 탁 트인 야외에서는 효과가 급감하는 것이 문제.

'사방이 막혀있는 장소로 유인해서···.'

마침 적당한 곳이 있다.

여기서 매우 가깝다.

칠흑동은 원래 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 하나 있다.

입구가 하나밖에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라 터뜨리면 강화 사린 가스가 금세 안에 가득 차게 될 터.

들어가서 놈을 기다린다.

물론 방독면을 착용하고.

태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래서 충분히 뒤통수에 유엽비도를 꽂아버릴 수 있음에도 힘을 조절했다.

저놈이 두목 같았다.

당연히 특별하게 대우해 줘야 한다.

현재 태주의 고민은 이거다.

어떻게 죽이면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바로 그때!

추적 대상이 방향을 틀었다.

밀림 쪽으로 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동굴 비슷한 곳으로 쏙 들어가는 놈.

'저긴 어디야? ···동굴?'

제 발로 죽여달라는 건가?

아니면 숨겨둔 한 수라도 있나?

저놈도 특성을 가진 각성자.

어두운 곳에서 강해지는 특성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상관없다.

놈이 죽는 건 변함없다.

태주도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둡고 꾸불꾸불한 통로.

안쪽에서 놈의 기척이 느껴진다.

태주는 유엽비도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때!

"넌 정말 미친놈이구나. 잔인한 새끼."

동굴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음성.

"···사람 잡아먹는 너희들보다 잔인할 리가."

"클클클, 그 부분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없군. 하지만 어쩌겠나? 힘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데."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국어를 쓰긴 하지만 놈의 억양이 조금 이상하다.

방독면 같은 걸 쓰고 있어서 그런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다른 마인들도 억양이 비슷했다.

그렇다면···,

"중국계?"

"그래, 한때는 중화인민 공화국으로 불렸던 대국의 후손이다."

"대국은 개뿔, 나라도 없는 새끼가, 제국민이 되었으면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나 할 것이지, 마인이 돼?"

"···좋아. 이만 끝내자. 이걸 들이마시고도 계속 지껄일 수 있는지 궁금하군."

"뭘?"

어두운 동굴이지만 보일 건 다 보였다.

놈의 얼굴에 쓴 방독면.

왜 썼을까?

"뒈져라! 멍청한 놈아."

순간!

펑! 펑!

취이이익! 취이익!

좁은 동굴 통로를 가득 채우는 희뿌연 연기.

바닥엔 연신 연기를 뿜어내는 원통형의 물체가 두 개가 구르고 있었다.

사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크윽,"

역시 독이었다.

태주는 가스를 한껏 흡입했다.

"우욱!"

숨이 턱 막혔다.

폐가 녹는 기분.

실제로 기관지가 손상을 입었다.

물론 순식간에 재생했지만.

"쿨럭쿨럭."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

호흡기를 타고 들어간 가스가 혈관으로 녹아서 들어온다.

어질어질, 머리가 핑 돈다.

독에 취해 비틀거리는 태주.

급기야 무릎을 털썩 꿇었다.

"씨발, 진짜···,"

이렇게 짜릿할 수가.

혈관을 녹여버릴 듯한 매콤한 독의 기운.

술에 취했는지, 독에 취했는지 모를 정도.

도수 90도짜리 보드카 한 병을 통째로 마신 것 같다.

이 귀한 물건을 아낌없이 주다니,

혹시 저놈 착한 마인이었나?

당연히 독정(毒精)이 요동쳤다.

새로운 독 아닌가?

더구나 인간이 만든 화학 독.

생생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먹거리를 만난 독정의 기쁨이.

< 마인(3)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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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4) >

태주가 마인을 잡기 위해 칠흑동 달동네로 올라간 시각.

이정학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권력 다툼은 그만두고 구례시 치안에나 신경 쓰라는 김태주 회장의 말, 솔직히 부끄럽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폭력, 살인, 유괴, 강간 등의 강력 사건들이 구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한 달에 실종되는 사람의 숫자도 매우 많다.

그것도 신고되는 경우에만 집계되어서 그렇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지경.

'후우, 자경단 숫자가 너무 모자라.'

치안이 유지되려면 자경단 인원이 지금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필요하다.

하지만 천왕 그룹 민동열 회장과 제국 정부 파견 사무관 지광인의 견제, 그들은 자경단의 세력이 커지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다.

천왕 그룹은 구례에서 성장한 토착 기업.

민동열 회장도 비밀리에 무력 조직을 소유했다.

협정에 의해 길드는 만들지 못하지만, 자신의 경호원 신분으로 각성자들과 적합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걸 감시해야 할 지광인은 민동열과 밀착 관계라 모른 척 넘어가 주고.

'뭔가 수를 내야 하긴 하는데.'

순간.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부길드장 박정태.

"길드장님! 큰일 났습니다."

"하아, 또 무슨···, 살인사건이야?"

"아, 아닙니다. 이걸 보십시오. 방금 전에 113 신고로 들어온 메시지입니다."

"뭐?"

신고 전화 113이라면···.

"마인? 마인 신고라고?"

깜짝 놀란 이정학이 벌떡 일어났다.

"네, 마인 신고 맞습니다."

"신고자는 누구야?"

"그, 그게···."

"누군데?"

"김태주 회장입니다. 구례 칠흑동 달동네에서 찍은 마인의 사진과 메시지를 전송해왔습니다."

"···."

돌아버리겠다.

이 사람은 또 어디서 마인을 찾았을까?

부길드장 박정태가 태블릿을 열어 마인의 사진을 보여줬다.

맞다.

확실하다.

마수화된 인간.

의심의 여지 없이 마인이었다.

"이런 개새끼가!"

마인 새끼가 구례에 숨어있었다고?

놀람 다음에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적합자와 각성자들의 심장과 장기를 먹고 등급을 올리는 마인, 전 세계의 공적이다.

"당장 자경단 총동원해!"

"출동 준비 마쳤습니다."

"빨리 가!"

이정학은 자경단을 이끌고 서둘러 구례 달동네로 뛰어갔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이들이 있었다.

"이제 오셨군."

"너무 늦었소. 쯧쯧, 이러다 마인이 도망가면 어떡하려고."

자신의 경호원들을 잔뜩 끌고 온 천왕 그룹 민동열과 사무관 지광인.

'후우, 망할 것들.'

113 신고는 자경단에게만 전송되는 것이 아니다.

자치위원회는 물론 근처에 있는 민간 길드, 경찰국, 혹은 군부대에도 자동으로 전송된다.

이정학이야 자경단 병력을 이끌고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민동열과 지광인은 몸만 오면 되니.

'이 기회에 밥숟가락 얹어보겠다고?'

마인을 소탕하는 과정은 제국 정부에 상세하게 보고해야 한다.

황제가 읽을 보고서에 무조건 자신들의 이름이 들어가야 하니까,

"빨리 갑시다."

"우린 후방에서 따라가겠소. 자경단이 앞장서야지."

"···."

마음 같아선 욕 한바가지 쏴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런데!

투투투투투투투투···,

저 하늘에서 구례 달동네 입구로 접근하는 대형 쌍발 수송 헬기 3대.

'···씨발.'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의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수송 헬기가 착륙할 듯, 아주 낮게 내려왔다.

그러자 헬기에서 줄도 없이 그대로 뛰어내리는 군인들.

두두둑, 투두두둑!

"1소대 이상 무!"

"2소대 이상 무!"

"3소대···,"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이 자랑하는 대마수 특전 부대.

또한 어김없이 오진형 중장도.

"이정학이, 또 보네?"

"···네."

"마인은 어디에?"

"저쪽 칠흑동 달동네 꼭대기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이번엔 자유도시 운운할 수 없었다.

마인의 척결은 마수 웨이브에 준한다.

자유도시든, 지방 영지든, 마인이 나타나면 언제든, 누구라도 개입이 가능하다.

"참! 김태주 회장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마 마인과 싸우고 있을지도···."

"그렇군."

오진형은 이정학을 빤히 노려봤다.

"어이, 이정학이!"

"왜요?"

"이제 좀 정신 차렸나?"

"···정신이라뇨?"

"등급만 믿고 깝치다가, 죽다 살아나니 세상 무서운지 알겠지?"

이정학은 대답할 수 없었다.

틀린 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잘하자?"

"···."

민동열과 지광인도 후방에서 오진형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군단장님, 기억나시죠? 정부에서 파견된 지광인 사무관···,"

그러나 오진형은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부대 진격한다. 목표는 마인 섬멸이다! 멸마!"

"멸마!"

"멸마!"

.

.

.

※ ※ ※

왕안평은 방독면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강화 사린 가스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회색 코트의 애송이.

마인이라고 해서 어디 마수화만 믿고 싸울까?

강화 사린 가스는 신의 한 수였다.

해독제를 맞으면 버틸 수 있겠지만 평상시 그런 물건을 가지고 다닐 리도 없다.

물론 자신은 가지고 있고.

만약을 대비해 가방에 함께 넣어뒀다.

"어떠냐? 애송아! 짜릿하지? 강화 사린 가스라는 거다. 그거 귀한 거야. 여기서 써먹을 줄 몰랐지만."

대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경이 마비되어 숨을 쉴 수도 없을 테니까.

과거 중국이 그나마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을 때, 마수 웨이브에 대항해 만든 대량살상무기.

삼한제국으로 넘어올 때 몰래 챙겨온 물건이다.

사실 마수에겐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각성자와 적합자들에게 직빵.

"왜 말이 없어? 아까처럼 혀를 놀려봐."

급기야 회색 코트가 무릎을 꿇었다.

고개까지 푹 숙이면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엥? ···죽었나?"

이러면 너무 싱거운데.

그래도 왕안평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체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편, 태주는 그제야 자신이 흡수하는 가스의 이름을 알았다.

'아하! 강화 사린 가스였구나.'

화학 물질로 만든 독가스.

이건 진짜 귀한 것이다.

절대독마 당군악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새로운 독.

애초에 강호 무림에 이와 같은 독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혼원무상독령공이 운기됐다.

강화 사린 가스가 독정으로 흡수되면서 그 성질 또한 각인됐다.

태주는 연신 숨을 들이마셨다.

'스읍, 하! 스읍! 하!'

조금이라도 놓치면 안 된다.

가스탄이 왜 두 개밖에 없을까?

현재 동굴 입구로 빠져나가는 소량의 가스마저 아깝다.

혼원무상독령공이 5성에 이르러면 웬만한 독은 양식과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적응한다.

물론 극강의 독은 아직 무리.

강호에서 전설로 전해지는 인면지주, 혹은 독룡, 천년 이무기, 무형지독, 지구에선 방사능물질로 만든 독···, 이런 독만 아니면 다 먹는다.

가스를 기관지와 폐로 흡수하고, 혈맥을 통해 단전으로 이동시키고, 그에 따라 내부 장기들은 더 튼튼해졌다.

바로 그 순간!

찌이이이잉!

'···응?'

갑자기 진동을 시작하는 독정.

'이거 설마.'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독정이 성장하고 있다.

강화 사린 화학 독을 먹고 5성에서 6성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6성? 진짜?'

지잉! 지이잉! 지이이잉!

독정의 진동이 극에 달했다.

그에 따라 새로운 시야가 펼쳐졌다.

6성에 오르면 깨닫게 되는 용독술, 펼칠 수 있는 다양한 암기술.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6성.

이제 7성까지 불과 한 단계 남았다.

취이이이익, 취익!

그렇게 많이 빨아들였음에도 아직 퐁퐁 솟아 나오는 맛있는 독가스.

하지만 6성에 오르니 이젠 특별하지 않았다.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고 이제는 잠잠해진 독정.

가만히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둘이 같이 있는데 나 혼자만 먹는 건 예의가 아니다.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지.

"클클클, 허접한 놈, 아까는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놈이 가까이 왔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채를 손으로 잡으려고 하는데,

덥석!

"헉!"

태주는 마인의 손을 잡았다.

동시에 놈의 방독면을 움켜잡고.

"덥지 않아? 내가 벗겨줄게."

"이, 이놈이?"

왕안평은 기겁했다.

서둘러 팔을 빼고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발칵!

결국 방독면이 벗겨졌다.

"흡!"

실눈을 뜨면서 숨을 참아보는 왕안평.

"괜찮아, 숨 쉬어, 숨!"

"···!"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지? 왜 아무렇지도 않지?'

설마 가짜 사린 가스인가?

가짜가 아니고서는···,

쫘악!

순식간에 돌아가는 고개.

황당하다.

이 상황에서 뺨까지 맞았다.

"숨 쉬라고! 새끼야! 그게 네가 세상에 기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야."

쫘악! 쫘악!

연달아 두 방 더 맞고서 분노하는 왕안평!

뿌드드드득!

마수화.

왕안평이 핏발 선 눈으로 포효했다.

"이놈!!! 죽여버릴···, 읍!"

입을 벌리자마자 강화 사린 가스가 호흡기를 통해 들어왔다.

"이 씨···, 쿨럭, 너, 너···, 케엑. 크윽!"

가스는 진짜였다.

겨우 한 모금 들이마셨지만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구역질이 절로 나온다.

숨이 턱턱 막히고 경련이 일어났다.

'저놈은 왜···?'

해독 주사를 꺼낼 겨를도 없다.

오로지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

우우웅!

급하게 마나를 끌어올리는 왕안평.

쁘드드득!

마수화로 인해 강해진 육체로 동굴 밖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어딜 가려고!"

태주는 도망가려는 놈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으읍! 이, 이거 놔···, 쿨럭,"

"숨쉬기 편하게 해줄게."

"뭐···,"

퍼억!

복부에 작렬하는 혈인 독장.

"커허억!"

태주는 결정했다.

이놈은 때려죽인다.

마수화로 인해 몸집이 커진 탓인지 때릴 데도 많다.

"자, 잠깐! 으으흡!"

콰직! 콱!

태주는 동굴 벽에 착 달라붙은 마인의 몸을 샌드백 치듯 두드렸다.

굽혀지려는 상체를 어퍼컷으로 쳐올리며 바로 세우고는,

퍼억! 퍽퍽퍽퍽!

때리면서 말했다.

"니가 왜 맞는 줄 알아?"

"크힉? 커컥···,"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은, 청년에 대한 복수."

"큭! 이 개, 개새···,"

"욕하지 말고 비명을 지르라고! 넌 최대한 고통스럽게 뒈지면 돼!"

퍽퍽퍽!

태주의 주먹이 왕안평의 머리에 박혀 들었다.

콰지직! 콰악!

"끄아악!!! 케엑!"

독가스에 의해 죽는 것.

주먹에 맞아 죽는 것.

어느 것이 빠를까?

쓸데없는 물음이었다.

※ ※ ※

오진형은 대마수 특전 부대를 이끌고 칠흑동 달동네를 포위하면서 올라왔다.

뒤를 이어 이정학이 이끄는 자경단, 민동열, 지광인도.

달동네 전체가 조용했다.

군이 개입했는데,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올 리가 있나?

그래서 별다른 충돌 없이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아!"

"허어···,"

"이런!"

"후우,"

꼭대기 집 앞에 너른 마당.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현장이 펼쳐졌다.

"군단장님! 여기···,"

오진형은 부하가 부르는 곳으로 갔다.

엉덩이를 위로 들어 올린 채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있는 마인 하나, 마수화 상태로 죽어있었다.

"투사체가 항문을 통과해서 저 벽에 박혔습니다."

"그래? 관장 하나는 제대로 했군."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지만 속이 후련했다.

"여기도 있습니다."

또 다른 마인.

두 명씩이나 있었어?

이 시체 역시 끔찍했다.

팔다리 관절이 역으로 꺾여있었다.

한쪽 발목은 날카로운 칼에 반쯤 잘렸고.

게다가 복부에선 시꺼먼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시체 다룰 때 조심해. 맨손으로 만지지 마."

"네, 알겠습니다."

오진형을 제외하고 모두들 몸서리쳐지는 현장에 기가 질린 표정.

민동열과 지광인은 마당 한쪽에서 구역질하고 있었다.

누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이렇게 잔인하게···"

그러자 오진형 중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동정심 가지지 마라. 죽어도 싼 놈들이야."

그리고는,

"너, 그리고 너, 야전삽으로 마당을 파 봐."

"어딜 말입니까?"

"아무 데나! 파보면 알 거야."

특전 부대원 두 명이 야삽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사실 깊게 파지도 않았다.

그런데!

덜컥!

야삽에 걸려 나온 사람의 두개골.

"헉!"

"아아아···,"

"이 개 같은 마인 새끼들!"

마인은 이런 놈들이다.

여기 모인 자경단원들과 군인들도 똑똑히 목격했다.

그나저나 김태주 회장은 어디 갔을까?

혹시 집 안에 있나?

그때였다.

"구, 군단장님!"

특전대 장교가 손가락으로 산 밑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회색 코트의 남자.

"어···,"

혼자 올라오진 않았다.

시체로 보이는, 마수화된 마인의 한쪽 발목을 끌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마수화된 육체로 각성자와 적합자를 먹고 힘을 키운다는 마인.

그것도 무려 3명씩이나 홀로 해치웠다고?

태주가 꼭대기로 올라와 오진형에게 아는 척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아니, 늦게 온 거지. 자네 혼자 다 해버리면 우린 뭘 하라고?"

휘이익!

털썩!

태주는 가지고 온 마인의 시체를 마당 한쪽에 던지며 말했다.

"중장님."

"···왜? 마, 말해보게."

"이거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오진형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응? ···어, 그, 그렇지. 자네가 한 게 아니야."

그리고 이정학을 바라보는 태주.

"자경단과 군대가 합동 작전 한걸로 칩시다."

이정학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 3명을 한 번에 홀로 죽인 사람이다.

자신은 가능할까?

턱도 없다.

그 마인 학살자가 자신에게 조용히 입을 다물란다.

까라면 까야지.

< 마인(4)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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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수습과 준비 >

마인은 3명이 전부였다.

모두 태주의 손에 죽었고.

칠흑동 달동네에서 자경단과 대마수 특전부대가 한 일은 시신 수습 작업뿐이었다.

마인이 거주하던 집의 앞마당을 파보니 백골화된 시체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뿐인가?

집안에서도 나왔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소지품도.

"후우, 개새끼들."

해골의 크기는 각각 달랐다.

남녀노소 골고루 나왔다.

분노로 인해 얼굴이 붉어진 오진형 중장이 태주에게 물었다.

"김태주 회장, 하나만 말해주게. 놈들은 어떻게 죽었나?"

"보시다시피요, 곱게 죽여주진 않았습니다."

"잘했네. 잘했어.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숨을 붙여왔으면···, 오래오래 살려두고, 빼낼 거 빼내고, 제발 죽여달라고 사정하면 죽이는 척하다 또 살리고, 그렇게 하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자신보다 더 심한 사람이 여기 있었네.

"···다음에 마인 만나면 그렇게 할게요."

태주는 시신들이 다 발굴되는 걸 지켜봤다.

최근에 묻은 시신도 나왔다.

아마 순철이가 찾고 다녔던 친구겠지.

잠시 묵념하고.

그때!

"자네가 김태주 군인가?"

노년의 나이로 보이는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태주에게 다가왔다.

"누구신지?"

"천왕그룹 민동열이네."

구례 토착 기업 천왕그룹.

제국 전체 기업으로 보면 저 밑, 까마득한 순위에 있지만, 그래도 구례 최고의 대기업이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아는가?"

"아, 네네."

귀찮아도 대답은 해줬다.

"사업적으로 제안할 것이 있어 태홍 바이오 비서실을 통해 계속 접촉을 해왔는데, 많이 바쁜 모양이더군. 좀체 답장이 오지 않아서."

바빠서 그랬겠나?

백서연이 보기에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 보고도 하지 않았겠지.

"이런 데서 논의할 문제는 아니지만, 구례에서 함께 사업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아아,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뻔하다.

"해독제나, 회복제 생산 물량이 부족해 보이던데. 내가 도와주겠네. 우리 공장에서 위탁 생산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야. 로열티 계약도 좋으니 제조식을 공유해서···."

"죄송하지만 그 얘긴 다음에 하시죠."

"···음?"

"지금 피곤해서 얘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라서요."

"다, 다음에 언제?"

"글쎄요. 언젠가 기회가 있겠죠."

민동열 회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태까지 구례에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러자 누군가 눈알을 부라리며 오더니,

"젊은 사람이 예의가 없군. 민회장님께선 호의를 가지고 제안한 건데."

"그쪽은 누구시죠?"

"제국 정부에서 파견된 사무관 지광인이네."

진짜 성공하긴 했나보다.

별 이상한 것들이 찾아와서 어떻게든 콩고물이라도 뜯어 먹으려고 달려든다.

'이거 정신 좀 차리게 해줘야겠네.'

그냥 내버려 두면 조훈석, 그놈처럼 선을 넘어버릴 수도 있다.

그전에 처리해야지.

한번 당했던 경험이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바보다.

하지만 지금은 참는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민회장님 말을 경청하면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

그때였다.

"이 쌍놈의 새끼들아!"

철커덕!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들고 나타난 오진형 중장.

"지금 남들은 희생자 시신 수습하느라 바쁜데,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어어, 구, 군단장님 갑자기 왜?"

"왜긴 왜야? 네놈들 대가리에 총알 한 방씩 박아주려고 그러지."

"지, 지금 제국 정부 관리에게 총을···?"

"하아, 씨발 새끼가, 공무원 대가리는 총알이 안 박히나? 총알이 싫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줘? 요즘 캐슬 인공호수 물 온도 따뜻하던데, 물속 구경이나 시켜주면 되겠네."

지광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캐슬 인공 호수.

최근에 거기서 자동차와 함께 발견된 조훈석의 시체, 그럼 설마?

오진형은 이정학을 보며 말했다.

"이정학이!"

"네!"

"이놈들, 여기서 무슨 짓거릴 하고 있는지 낱낱이 보고서에 써서 올려. 아! 그리고 지광인, 이 새끼가 그동안 받아 처먹은 돈, 우리 군 정보부가 증거 확보하고 있으니까, 당장 수사하고,"

"···."

지광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민동열도 마찬가지였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두 사람.

오진형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나 보다.

"쯧! 구례 자치위원회 그대로 두면 안 되겠어. 물이 고이다 못해 썩어버렸어. 빨리 물갈이하든지 해야지."

태주는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귀찮은 놈들 처리해준 건 좋은데,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

조훈석도 군에서 처리한 것 같고.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막 나가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나쁜 새끼들을 착하게 대해주면 오히려 역효과다.

절대독마 당군악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말이다.

'나도 한번 막 나가봐?'

어쨌거나 슬슬 내려가자.

마인도 처리했으니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어, 그렇게 하게. 아참!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부탁?

"···재입대는 안 합니다."

"허어, 이 사람이! 싫다는 사람 억지로 권유하진 않아."

"그럼 뭡니까? 약이 더 필요한가요?"

"아니, 그게 아니고 부탁이 뭔가 하면, 드디어 지리산 밀림 대토벌 작전 날짜가 잡혔어."

"아!"

오진형이 은근하게 말했다.

"대규모 작전이 될 거야. 그래서 말인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자네도 참가해주면 좋겠군."

"제가요?"

"처음 해보는 대토벌 작전이야. 난 꼭 성과를 내고 싶어서 그래."

지리산 밀림 대토벌 작전.

해독제 개발로 방어가 아닌 공세 전략으로 수정했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태주는 잠시 고민했다.

군사 작전인데 민간인 참가를 요청해왔다.

구례 자유도시의 고질적인 문제.

바로 마수 웨이브.

약 5년 주기로 웨이브가 발생해왔다.

초기엔 엄청난 사상자가 났지만 도시의 대응도 점차 발전했다.

캐슬을 건설하고, 지하 대피소를 만들고, 인명피해가 전보다 대폭 줄었다지만 그래도 웨이브가 발생하면 도시가 파괴된다.

그래서 대토벌 작전은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태주는 결정을 내렸다.

"네, 참가하죠."

"오! 고맙네. 그리고 이번 토벌 작전은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 말고도 외부 인사들도 다수 참가할 거야."

"그래요? 누가?"

"황실 귀빈분들과 이번에 사관학교 임관 예정인 졸업반 생도들, 걱정 말게. 귀찮게 하진 않을 테니까."

황실이야 그렇다 쳐도.

'사관학교 생도?'

졸업반이라면 각성했다는 말인데, 갓 각성한 애들이 도움이 되나?

아마 견학 목적일 터.

그럼 준비를 해야겠다.

암기도 보충하고, 독정도 안정화시키고.

※ ※ ※

마인 출현의 여파로 구례는 발칵 뒤집혔다.

군부가 임시로 구례의 행정권을 넘겨받았다.

3일간 지리산 마수 레이드 전면 중단, 구례에 거주하는 모든 각성자들에 대해 적성 검사 실시, 주변에서 거동이 의심되는 자, 적극적인 신고 캠페인, 구례 기차역과 공항을 중심으로 검문 검색 강화.

이로 인해 구례는 한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러나 불만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인 출현은 마수 웨이브에 준하는 엄청난 사건이었으니까.

보여주기식 요식행위라는 비판도 받았다.

마인은 마수화한 상태에서만 판별할 수 있다.

작정하고 숨으면 어떻게 찾는다고?

3일이 지나 군대도 철수했고, 검문 검색도 축소됐고.

구례 자유도시는 예전으로 돌아갔다.

마인을 처단한 주체는 태주였지만 뒤로 빠졌다.

즉 공을 자경단과 대마수 특전부대에 넘긴 것, 괜히 알려져 봐야 좋은 것도 없고 오히려 성가시기 때문에.

단 마인 신고 포상금 1억 원은 받기로 했다.

태주는 그 1억 원에 자신의 사비 1억을 보태 병원에서 퇴원한 장순철에게 건넸다.

"이 돈은 희생당한 네 친구 부모님께 드려. 그 친구 때문에 마인을 발견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고맙습니다. 회장님."

몸은 다 회복되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겠지.

"휴가를 줄 테니, 며칠 동안 푹 쉬어."

"아뇨! 괜찮습니다. 전 멀쩡합니다."

"말 안 들을래?"

"···네."

이제 마인 사태도 일단락됐고.

태주는 조용한 곳에서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혼원무상독령공이 6성에 올랐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야. 조심해야 해.'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독공 성취가 너무 빠르다는 걸.

솔직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가야 하는 길을 이미 알고 있는데 일부러 돌아갈 수도 없고.

이왕 이렇게 된 거 7성까지는 무조건 달린다.

안정화는 포기하자.

그러고 나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정신의 깨달음과 육신의 깨달음을 조율해보든지 하고.

또한 마인.

비교적 등급이 낮은 놈들이라 그나마 다행.

마수화가 진행되기 전엔 익스퍼트에도 미치지 못했던 놈들이다.

그래서 마수화를 실행한 후에도 정신이 멀쩡했고.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

마교도들과 말이다.

흡정마공으로 타인의 내공을 빨아먹고, 그 때문에 광기에 노출돼 괴물처럼 변하고···,

'혹시 천마 같은 새끼도 있는 거 아냐?'

충분히 근거 있는 추측이다.

삼한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도 마인의 짓으로 추정되는 대참사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각성 등급이 높을수록 마수화는 비약적으로 강해진다.

마교도 소탕.

절대독마 당군악에 있어서 의무와도 같았던 것.

그렇다면 지구의 김태주는?

'마인 소탕으로 가야지.'

구례에 마인이 또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들이 다치는 게 싫다.

영약을 더 만들자.

쓸만한 무공도 가르치자.

'사천당가의 무공도···.'

원래 가문의 무공은 비전이라 함부로 전수하면 안 된다.

하지만 태주는 혼원무상독령공을 제외한 당가의 무공을 퍼뜨릴 생각.

뭐 어때?

'내가 당군악인데.'

물론 비인부전(非人不傳), 사람의 됨됨이가 바르지 못하면 전하지 않는다.

이 한 가지 원칙만 확고하면 된다.

'역시 심법은 오행기공(五行氣功)이 낫겠지?'

당가의 일원이라면 직계 방계 할 것 없이 누구나 익히는 기초 심법.

이 기공의 장점이라면 오행의 기운을 키워 5성 이상의 경지에 올랐을 때 약제조에도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행기공은 원래 독공의 기초.

절대독마 당군악이 오행기공과 여러 독공의 깨달음을 합쳐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혼원무상독령공이다.

당가의 자손들이라면 필수로 익힌다.

덕분에 직계든, 방계든 모두 약 제조에 능했고.

'암기술은 가르칠 필요가 없겠고.'

애초에 마수 사냥엔 가성비가 떨어진다.

'적당한 도검술이나 창술이 더 도움이 될 거야.'

마지막으로 경신법.

세 가지만 가르치자.

소수정예로.

현재 떠오르는 사람은 딱 2명, 백창훈과 장순철이다.

얘들 키워 잘 써먹을 생각.

숙련되면 무공 교관 역할도 할 수 있을 테고.

가르치다 보면 그 전처럼 스킬이 만들어지겠지.

백홍표와 백서연은?

영약 만들어 먹이면 충분할 것이다.

몸 건강하게 잘 살도록.

※ ※ ※

태주라고 해서 회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건 아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백서연, 백홍표와 함께 태홍 바이오의 향후 계획에 대해 논의를 한다.

일전에 민동열 회장과 지광인이 태주에게 한 짓에 대해 분노하는 두 사람.

"비리 공무원 자식이!"

"그냥 넘어가선 안 됩니다. 반드시 문제 삼겠습니다."

만만히 보이긴 했나 보다.

아무리 잘 나가는 태홍 바이오지만 그건 구례에 국한된 이야기.

전국구 대기업이라면 꼼짝도 못 했을 놈들.

"상임위원들은 제 선에서 알아서 할게요. 그리고 슬슬 약을 하나 더 추가해볼까 하는데···,"

"무슨 약이요?"

"지혈제 종류입니다. 상처 치료도 겸하는 거, 그리고 피로를 푸는 자양 강장제도."

"오!"

"···또, 또 개발하셨어요?"

"네."

금창약과 자양 강장제뿐인가?

정력제, 총명환, 특정 장기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보약···.

아직 선보일 것이 엄청나게 많다.

오래전 과거, 지구에서 퍼졌던 한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때는 마나가 없었으니까.

지구에 마나가 퍼진 이상, 강호 무림과 환경이 비슷해졌다.

채취하는 약재에 하나같이 마나, 즉 기(氣)가 함유되어 있다.

강호 무림에서 했던 제조 방식과 지구의 제약 기술을 결합하면 기존의 약을 훨씬 뛰어넘는 효과를 보여줄 터.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죠?"

"카피될 위험이 있어요. 성분만 분석하면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라서."

"아!"

"그래서 구례에서 허가를 받진 않을 겁니다."

원래 신약은 마음대로 베낄 수 있는 게 아니다.

구례니까 가능한 거였다.

신약의 허가와 판매가 자유로운 구례.

반면 특허권 보장이 어렵다.

애초에 특허청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다른 대도시에선 신약의 허가가 까다롭지만, 특허권이 제국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보장받는다.

"그럼 뉴서울로 진출을 하자는 말씀이네요."

"꼭 그럴 필요가 있나요? 예를 들어 대전에만 공장을 세워도···."

허가만 나면 특허권을 인정받으니까.

"네! 그러면 되겠죠. 하지만 대기업 견제가 들어오는 건 대비를 해야 합니다."

"견제는 어떤 식으로 들어오죠?"

"제가 대기업에 근무해서 그들의 사업 확장방식을 잘 알고 있거든요."

설명을 늘어놓는 백서연,

"남들이 애써 신약을 발명하면 특허 내는 걸 방해하고, 스파이를 집어넣어 제조식을 훔치고, 도둑질한 제조식으로 지들이 먼저 특허를 내고, 미래가 창창한 중소 제약회사는 적대적 인수 합병으로 먹고, 그렇게 인수한 회사가 만든 약의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하고···,"

뭐가 이렇게 다양해?

완전 개자식들이다.

평범한 개새끼가 아니라 그레이트 개새끼들이다.

"걱정하지 말고 진행시켜요!"

"네! 해보겠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 구는 것도 아니고.

그럼 슬슬 대토벌 작전이나 준비해보자.

그전에 지광인, 민동열, 두 사람 면담 좀 하고.

< 뒷수습과 준비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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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마의 방식. >

구례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역시 캐슬.

뒤에는 절벽, 앞에는 인공호수.

그리고 구역 전체도 굉장히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캐슬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곳.

거주민이 아니라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가는 수단은 인공호수 선착장과 캐슬 선착장을 왕래하는 대형 페리호 두 척, 자동차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거리도 가깝기 때문에 허가만 받으면 출입은 어렵지 않다.

작은 마을 크기의 캐슬에서 살아가는 소수의 주민들.

대부분 자치위원회 위원, 자치 관청 공무원, 고등급 각성자, 사업가, 건물주, 상가 상인, 혹은 지역 유지들이었다.

캐슬은 요새와도 같다.

웬만한 마수들은 절대 성벽을 넘을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행 마수에 대비한 방공망, 그리고 캐슬 안에도 대피소가 있다.

성벽이 1차 방어막.

내부 대피소가 2차 방어막.

웨이브가 일어나면 느긋하게 대피소로 들어가 토벌대가 진압하러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안전하다 싶으면 대피소에서 나온다.

그래서 초기를 제외하고, 최근 일어난 웨이브에서 마수로 인한 캐슬 사망자는 거의 없었다.

이렇듯 마수 웨이브 대처에도 빈부격차가 존재한다.

잘 사는 놈들은 안전하고 돈이 없으면 죽는다.

캐슬 안엔 생존을 위한 모든 기반시설이 다 있었다.

자체적인 전기 발전소부터, 식량 생산을 위한 스마트팜, 각각의 지하 대피소를 연결하는 통로, 위성 통신 장치···, 그리고 학교와 학원, 각종 상점에, 식당, 유흥주점까지.

캐슬에서 영업하는 유일한 유흥주점.

이름은 '천국의 궁전'

10층짜리 건물이 싹 천국의 궁전이다.

주점에서 봉사하는 접객 여성의 숫자도 100여 명에 육박하고, 종업원의 숫자도 셀 수 없을 정도.

바로 여기, 천국의 궁전에 지리산 방어군단 대마수 특전부대 박철기 중령이 종업원으로 신분을 숨기고 잠입해 있었다.

"목표물은?"

- 10층 1013호실에 둘이 함께 있습니다.

"접객 여성들은 몇 명?"

- 4명입니다. 양쪽에 두 명씩 끼고 놀던데요? ···개새끼들!

"부럽냐?"

- 전 이런 거 안 좋아합니다.

박철기 중령은 총 8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왔다.

그들은 청소부, 종업원, 심지어 접객원으로 변신했다.

쓰레기 청소 작전.

군단장 오진형은 이번 지리산 밀림 대마수 토벌 작전에 사활을 걸었다.

작전 예상 기간 한 달.

만반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은 무척 높다.

게다가 태홍 바이오 회장까지 지원을 약속했으니.

토벌에 성공해 지리산의 마수 웨이브 위험성이 사라지면 주변 도시들은 성장의 발판이 마련되어진다.

인구는 늘어나고, 기반시설도 추가로 건설될 것이고, 경제도 발달할 것이다.

특히 자유 도시 구례는 가장 많은 혜택을 보게 될 터.

그런데 그렇게 되면 누가 좋을까?

시민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면 괜찮겠지만 대부분의 이익은 오랫동안 구례를 주름잡아왔던 토호 세력들의 몫이 된다.

죽 쒀서 개 주는 꼴.

구례의 기득권자들이 조금이라도 공정하다면 모를까.

민동열과 지광인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권력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 저 버러지 새끼들, 행여나 자신의 힘이 축소될까 봐, 구례 치안력의 중심인 자경단마저도 견제하는 놈들.

치안이 약하니 슬럼가가 발생하고, 범죄도 늘어나며, 거기에 편승해 마인도 숨어들고.

오진형은 마인이 구례에 출몰한 원인에 민동열과 지광인의 책임도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놈들에게 휘둘리던 이정학 길드장은 더 멍청한 놈이고.

토벌 작전 전에 쓰레기부터 치운다.

그래서 대마수 특전부대 박철기 중령은 오진형의 특명을 받고 캐슬 안으로 잠입했다.

"쓰레기차는 준비됐지?"

- 대기하고 있습니다.

"1013호 작전 팀은?"

- 명령만 내리십시오.

- 바로 돌입하겠습니다.

작전계획은 간단하다.

안에 접객 여성들을 밖으로 불러내 방안에 둘만 남게 되면 요원들이 들어가 놈들을 제압한다.

미리 개조된 청소용 카트에 두 놈을 숨기고 엘리베이트를 타고 내려가 쓰레기차에 싣는다.

그리고 대형 페리호를 타고 유유히 캐슬을 빠져나간다.

사실 엄청나게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것도 자유 도시에 군이 개입한다?

밝혀지면 옷을 벗는 것을 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선 감수해야만 하는 일, 뼛속까지 군인인 박철기도 이것이 제국을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경호원들은 처리했나?"

- 네, 기절시켜서 묶어뒀습니다.

"잘했어. 자, 이제 실행하···,"

그런데 바로 그때!

- 잠깐만요! 벼,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무슨 일이야?"

- 김태주 회장입니다. 그분이 1013호 앞에 나타났습니다.

"뭐?"

아니, 그 사람이 뜬금없이 왜···,

"확실해? 잘못 본 거 아니야?"

- 김태주 회장 맞습니다. 회색 코트도 입었고, 헉!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박철기 소령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작전 취소한다. 병력들 모두 철수해!"

- 네!

김태주 회장이 나타난 이상 더는 작전을 진행할 수 없다.

두 놈을 납치하게 되면 그가 의심을 받는다.

'하필 이런 때에···,'

그런데 왜 왔지?

일단 군단장님께 보고하고 보자.

※ ※ ※

천국의 궁전 1013호실.

민동열 회장과 지광인 사무관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양쪽에 여성들을 안고, 입으로 먹여주는 안주를 씹으며, 불만을 늘어놓는 두 사람.

"오진형! 쌍놈의 새끼, 무지렁이 군바리 새끼! 얻다 대고 총을!"

"김태주 그놈이 더 문제입니다. 건방지게, 그까짓 신약 몇 개 개발했다고 사람 무서운 줄 몰라."

하도 씹어서 안주가 필요 없을 정도.

"오진형은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 제가 내일 육본에다 직접 항의할 겁니다."

"···오진형에게 먹히겠소? 그놈도 군부에 세력이 있는데."

"군부에도 파벌이 존재합니다. 반대 파벌을 이용하면 되지요."

"호오! 그렇군. 배운 사람은 달라."

"군바리 새끼보다는 똑똑하죠."

"하하하하! 한잔합시다."

그러다 주제가 지리산 밀림 마수 대토벌 작전으로 이어졌다.

"생각 같아선 작전이 성공하면 좋겠지만 또 마음 한편으론 실패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바로 그 마음입니다. 실패해서 웨이브가 일어나면···,"

"오진형이는 좌천되거나 옷을 벗어야 할 겁니다."

주거니 받거니 죽이 착착 맞았다.

"만약 웨이브가 발생해도 난 캐슬 문을 개방하지 않을 거요."

"그래요. 지난번엔 캐슬을 열어서 피난민들을 받아줬지만 결과가 어땠습니까? 은혜도 모르는 새끼들···, 자치위원회 욕이나 하고."

"천한 놈들이라 그런 겁니다. 이번엔 캐슬 밖에서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맙시다."

"뭐, 실패는 우리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되겠군요. 구례에 주인 없는 부동산들이 늘어날 테고."

"하하하! 역시!"

화기애애한 술자리.

며칠 전 경험했던 치욕이 깨끗하게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한사람이 들어오고,

쿵!

문이 닫혔다.

"헉!"

"너, 넌?"

태주였다.

"밖에서 들어보니 진짜 가관이네. 너희들은 양심도 없는 놈들이구나."

지광인과 민동열은 깜짝 놀랐다.

상상도 못 했다.

저놈이 왜 왔지? 또 어떻게 알고···.

"잠시만 나가 있어 주실래요?"

태주는 접객 여성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 네네. 저 나갈게요."

"저도···."

"그러지 않아도 나가고 싶었어요."

"···솔직히 돈 벌자고 이 생활하고 있지만 저 사람들, 진짜 인간쓰레기예요."

줄지어 밖으로 나가는 그녀들.

지광인과 민동열이 부들부들 떨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이, 이놈! 여기가 어, 어디라고!"

"···지금 나가면 어,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 다, 당장 나가!"

태주는 피식 웃었다.

"벌벌 떨면서 센 척하기는."

"이, 이, 가, 감히···."

"어쨌든 마수 토벌 작전이 실패하길 바라나 본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우린 그런 말 한 적 없어."

확실히 뻔뻔한 놈들이다.

거짓말 정도는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었다.

"그래, 그러시겠지."

오늘 태주는 태홍 바이오 회장으로 오지 않았다.

절대독마 당군악으로 왔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마보다 더 지독한 독마.

정파임에도 불구하고 강호의 무인들이 당군악에게 마(魔)라는 호칭을 붙인 이유.

태주는 탁자 위에서 깨끗한 빈 잔 두 개를 가져와 술을 따랐다.

쪼르르륵.

황금빛 액체로 채워지는 잔.

지광인과 민동열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 새끼 뭐지? 술 먹으러 왔나?

그러나 태주가 술잔 안에 까만색 알약을 하나씩 떨어뜨리자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자! 한 잔씩 마셔."

하지만 그들은 태주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할 뿐, 술잔에 손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김태주는 해독제를 잘 만든다.

당연히 독에도 조예가 깊겠지.

"안 마셔?"

"···눈앞에서 독을 탄 술을 마시라고?"

"괜찮아. 주기적으로 내가 주는 해독약을 복용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흥! 웃기지 마라! 입에도 대지 않을 거다."

"나, 나도."

억지로 먹이기엔 귀찮고.

"그럼 여기서 죽든가."

"···우릴 죽이겠다고? 너도 무사하지 않을 텐데."

"너, 널 본 사람들도 많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태주는 가만히 스마트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으음, 그래?"

"수사가 진행되고 넌 용의자로 지목될 거야."

"용의자라, 알았어. 지금 물어보자."

띡, 띡, 띡, 띡···,

스마트폰 번호를 누르는 태주.

딸칵!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이정학씨?"

- 네, 김태주 회장님.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런데요."

-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민동열씨와 지광인씨와 같이 있는데, 몇 분 후에 이분들이 시체로 발견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수사가 들어가나요?"

- ···아! 당연히 수사는 해야죠.

그것 보라는 듯, 태주를 매섭게 노려보는 지광인과 민동열.

"제가 용의자가 되는 겁니까?"

- 설마요! 태홍 바이오 회장님이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를 리가.

"그럼?"

- 아마 마인들 짓일 겁니다. 동료 마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구례시 상임위원들에 대한 복수? 물론 회장님께선 마인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놓쳐버렸고요.

"후우, 진짜 마인은 나쁜 놈들이에요."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보통 마인은 마수화로 상대를 죽이기 때문에, 몸에 손톱자국 비슷한 게 있어야 할 겁니다. 대충 4개에서 5개 정도만 표시해 주십시오.

"네, 다음에 뵙죠."

뚝.

전화가 끊겼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꿀꺽!

침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이윽고.

"우, 우리한테 왜 이러시오?"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좀 전에 했던 말은 본심이 아니오. 그저 화가 치밀어 올라서···."

"정 안 마시겠다면 뭐···,"

태주는 슬쩍 품속에서 유엽비도 다섯 자루를 꺼냈다.

"손톱자국 5개라···,"

순간 지광인과 민동열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칠흑동 달동네에서 처참하게 죽은 3명의 마인.

그게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 아니오! 마시겠습니다."

"저도···,"

벌컥, 벌컥!

약효는 알코올과 함께 금방 퍼졌다.

술잔을 입에다 털어 넣는 지광인과 민동열.

"커헉!"

"아악!"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심장이 따끔할 거야. 제때 해독약을 못 먹으면 결국 급성심근경색으로···,"

태주는 다시 품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각각 건네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 먹으면 괜찮아지지."

민동열과 지광인은 태주가 건네주는 알약을 허겁지겁 받아먹었다.

"한 달에 한 알씩, 정기적으로 복용해. 뭐, 하루 이틀 지나도 괜찮을 건데, 웬만하면 시간은 지키고."

"한 달 후에 직접 가져다주는 거요?"

"이정학 길드장 찾아가. 맡겨 둘 테니."

이제 구례를 바꿔볼 시간.

"자! 잘 들어. 오늘 이후로 캐슬은 일반 사람들에게 전면적으로 개방될 거야."

흠칫! 놀라는 두 사람.

"···네?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맞습니다. 거주민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해독약 먹기 싫어? 그럼 마음대로 하던가."

"···."

"···."

그냥 개방만으로 부족하지.

"그리고 자치위원회 예산으로 인공호수에 다리를 건설해. 최대한 빠르고 튼튼하게!"

적어도 구례에서만큼은 그 어떤 차별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

부의 대물림까진 이해한다.

제국은 자본주의 사회니까.

그러나 사람의 생명까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캐슬이 개방되면 내부 치안도 위험하겠네. 그럼 자경단 숫자도 늘려야 하고."

"그, 그렇지만 위원회 예산이···."

"돈? 그럼 사비를 털어. 돈 많이 모았잖아?"

태주는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걸 다행인 줄 알아. 조금만 늦었어도 너흰 그냥 죽었어."

"무, 무슨 소리요?"

"나중에 경호원에게 물어봐. 궁금하지 않아? 왜 경호원들이 조용한지."

"어···."

올라오면서 봤다.

1013호실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종업원, 청소부, 접객원···, 변장했지만 자신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그중 몇몇은 안면이 있고.

지리산 대마수 특전부대.

칠흑동 달동네에서 마주친 군인들.

아마 조훈석처럼 이들을 처리하려고 했겠지.

또 본의 아니게 자비를 베풀었다.

※ ※ ※

오진형 중장은 임무를 위해 구례시 캐슬로 잠입했던 박철기 중령의 보고를 받았다.

임무는 결론적으로 실패.

"그래, 두 놈은 멀쩡하게 돌아갔다고?"

"표정은 매우 썩었지만···, 부상 당한 곳도 없어 보였습니다."

김태주가 그들을 만난 이유가 뭘까?

타협이나 손을 잡는 건 아닐 것이다.

사실 이유가 뭐가 중요할까?

김태주가 개입했으면 물러나는 게 맞다.

그리고 또 좋은 신호.

어쨌든 그가 구례에 대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굳이 재입대 권유를 할 필요가 없겠어.'

생각 같아선 진짜 영지로 만들어 넘겨주고 싶다.

그러나 영지를 받으려면 별을 달고 제국군에 소속되어야 한다.

군에 뜻이 없는 김태주가 재입대하려고 할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재입대가 가능하다.

예정된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

김태주 회장의 공적 기여도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번 작전은 그가 만든 해독제와 회복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으니까.

< 독마의 방식.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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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 변화의 시작. >

드디어 제국군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의 작전이 대토벌 언론 지상에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 대마수 전략을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

<모기 독 해독제 개발로 토벌 전략 가능, 거기에 태홍 회복제까지.>

<오진형 군단장, 오래 준비했다.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잊힐 만하면 터지는 지리산 마수 웨이브, 이젠 막을 수 있을까?>

<관건은 엘리트 마수 공략. 그러나 해볼 만하다.>

<황실에서 전폭적인 지원 약속, 졸업 예정 사관생도 토벌 작전 참가.>

사실 마수 밀집 지대에서 군(軍)에 의한 토벌 작전은 특별한 것도 아니다.

지금도 제국 어디선가에선 대토벌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름의 이유로 대토벌 작전이 불가한 지역도 있었다.

지리산 밀림이 그중 한 곳.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모기 독 때문이다.

각성자와 적합자들이 마나 거부자처럼 변한다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모기 독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례 시민들도 들뜬 분위기.

경제가 웬만한 대도시 뺨칠 정도로 발전한 구례였다.

마수 부산물의 중심지 구례.

구례, 함양, 산청, 남원···, 하루에서 수백 개의 레이드 팀이 지리산을 드나든다.

채집된 지리산 마수 부산물들은 대부분 구례로 와서 유통되고.

심지어 지리산이 아닌 타지역 마수 밀집 지대의 부산물들도 구례로 온다.

왜?

마수 부산물 판매에 있어서 세금이 면제되니까.

그러나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일명 '구례 리스크'

도시가 발전해서 이제 살만하다 싶으면 도둑처럼 찾아오는 마수 웨이브, 파괴되는 기반 시설과 인명피해, 그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고질적인 병폐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옆에 끼고 살아가는 구례 시민들.

하지만 희망이 생겼다.

지리산 밀림 대토벌 작전.

시민들은 작전 성공을 간절하게 기원했다.

그 와중에.

구례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송출된 상임위원 지광인의 중대 발표.

- 앞으로 캐슬과 도시의 경계를 영구히 허물 예정입니다. 지금부터 누구나 허가 없이 캐슬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왕래의 편의성을 위해 인공호수를 지나는 다리를 건설할 예정이며···.

이것도 토벌 작전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캐슬 개방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다.

웨이브가 터지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대피소가 없는 시민들을 위해 한시적으로 개방한 적은 있었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다르다.

일시적인 개방이 아닌 영구적인 개방.

└ 걔들, 혹시 미친 거 아니야?

└ 캐슬에 살고 있다는 거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었는데, 그걸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 허가가 필요 없다면, 지금 캐슬로 놀러 가야지.

└ 맛집도 죄다 거기 모여있잖아. 좋아! 오늘 데이트는 캐슬이다!

└ 애인은 있고?

└ 만들어야지. 나랑 갈 사람?

└ 있겠냐?

└ 아무튼 웨이브가 일어나면 캐슬로 튀면 되겠구나.

└ 씨발! 말도 안 돼! 지가 뭔데 마음대로 결정해!

└ 너 캐슬 사는구나?

구례 시민들은 환영했지만 캐슬 거주민들은 아니었다.

지광인의 결정에 분노해 자치위원회 건물로 항의하러 온 주민들.

"내가 캐슬 아파트를 얼마에 샀는데? 집값 내려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지광인, 개새끼야! 나와!"

"누가 당신에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줬어?"

"민동열 회장, 당신 입장은 뭐요?"

일반 자치위원들도 난리가 났다.

"무효야, 무효!"

"이거 자치위원회 전체 표결에 부쳐야지."

"언제부터 구례가 자유도시에서 독재도시로 바꿨습니까?"

"우리 힘을 보여줍시다! 폭락한 집값을 원상태로 회복시킵시다!"

캐슬 거주민들과 일반 자치위원들이 합세했다.

닫힌 자치위원회 건물의 정문이 열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

거의 폭동 수준이었다.

"캐슬 개방 당장 철회하라!"

"실력행사가 뭔지 보여줍시다."

"감히 서민들이 마음대로 우리 동네 온다고? 범죄 생기면 책임질 거야?"

유리창이 깨지고, 가구들이 부서졌다.

난장판이었다.

그때였다.

무기를 들고 우르르 들어오는 노고단 길드 이정학과 자경단 각성자들.

"오! 이 길드장, 잘 왔소. 지광인과 민동열 상임위원 당장 체포해주시오."

"놈들을 직권남용죄로 고발합니다."

"말이나 됩니까? 캐슬 개방이라니!"

"이러다 우리 다 죽어!"

"맞아요. 벌써 집값이 절반 가까이 뚝 떨어졌어."

그러나 이정학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난동자들 모두 체포해!"

길드장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자경단.

"어? 왜, 왜 날 잡아가?"

"뭐야? 갑자기?"

"이정학, 당신도 한통속이지?"

그러나 이정학은 단호했다.

"반항하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 내가 책임진다."

그제야 캐슬 거주민들은 난동을 멈췄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자신은 안전할 거란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앞에 마주한 폭력에 공손해진 사람들.

"···내, 내가 여길 부수려고 한 게 아니라."

"잘못된 건 바로 잡자는 항의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지."

"이러지 말고 우리 대화로 풉시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알고 보니 상임위원 3명이 모두 같은 입장.

그럴 리가,

이정학은 민동열, 지광인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세 사람이 합심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뭣들 해? 당장 체포해서 구금해!"

"어어어?"

"백주 대낮에 이런 법이···,"

"아악! 야, 이 새끼들아! 니들은 법도 없어?"

"내가 누군지 알아? 사촌 형님이 중앙 정부 공무원이야!"

난동을 부린 사람들은 구례의 권력자들이었다.

신분을 나누고, 특혜를 받으며, 남들이야 웨이브에 희생되든 말든, 캐슬 안에서 기득권을 유지해온 자들.

그들이 자경단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구금됐다.

일반 시민들에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 와! 이거 혁명인데?

└ 살다 살다 자경단이 자치위원 잡아가는 거 처음 본다.

└ 난 솔직히 캐슬 전면 개방 안 믿었거든? 근데 내 생각이 틀렸네.

└ 뭔가 일어나고 있어!

변화가 시작된 구례.

이건 겨우 첫 단계일 뿐이다.

※ ※ ※

새로운 구례 자유도시를 위한 발판은 만들어 놨다.

태주는 당분간 조용해질 때까지 사냥이나 할 생각.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이나 채집하자.

독정은 6성에 올랐지만 육체의 깨달음은 아직 아니다.

열심히 수련해서 따라가야지.

앞으로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도 예정되어 있고.

오늘도 지리산 밀림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에 이사한 새집이었다.

백서연이 원래 살던 집이 형편없다고, 회장님 품위에 맞아야 한다며 지은 으리으리한 집, 위치는 태홍 바이오 공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넓은 정원, 정성을 들여 조성한 잔디밭과 조경, 물고기들이 노는 얕은 연못과 분수대, 그리고 철통같은 보안으로 만든 이 층짜리 집이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네, 고생이 많으십니다."

"당장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여러분들은 식사하셨죠?"

"네,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정원사에, 가정부, 요리사, 그리고 단기 알바들까지.

다 백서연이 구해줬다.

확실히 유능한 사람 밑에 두니 손발이 편하다.

이렇게 큰집에서 살면 처음 드는 생각이 난방과 청소는 어떻게 하지? 라던데···, 그런 고민은 전혀 할 필요가 없으니까.

삐걱,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나니.

"회장님!!!"

"삼촌이라 불러."

"에이, 그럼 아버지께 혼나요."

"괜찮아. 없는 데서 하면 돼."

고아원 원생 출신의 중고등학생들.

한창 사춘기에 사고 싶은 것도, 꾸밀 것도 많은 아이들이다.

원래는 백홍표 몰래 용돈을 챙겨주고 있었는데, 그러면 버릇이 나빠진다며 겨우 절충한 것이 바로 집 청소 알바.

매일매일 번갈아 가며 집 청소를 하고 알바비를 받아 간다.

물론 백홍표와 이야기한 것보다 조금 더 많이 주고 있었다.

"자! 받아!"

"···어, 너무 많은데요?"

"맛있는 거 사 먹어.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말고."

"넵!"

태주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여긴 자신만의 공간.

커다란 책상이 놓인 서재로 들어가 코트를 벗고 의자에 앉았다.

띠리링!

때마침 걸려오는 전화.

"여보세요?"

- 이정학입니다.

"아하,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 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 수고는 무슨, 다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요.

"자치위원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요?"

- 처리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체포해서 유치장에 가뒀고요.

불만이 엄청났을 것이다.

한순간에 특권을 빼앗기고, 집값 폭락이라는 악몽을 겪었을 테니까.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캐슬, 구례 자유도시 차별의 상징.

한 도시에 살면서 누구는 안전을 영위하고, 누구는 죽음의 위협에 떨어야 하나?

"알아듣게 설득해서 진정되면 풀어주세요."

- 안 됩니다. 말로 설득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과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서.

"그럼?"

- 굴복을 시켜야죠. 당신들도 알고 보면 남들과 똑같은 약자들이라는 걸.

"흠, 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세요."

이정학에게 강제적으로 지시한 일은 아니다.

지광인과 민동열을 만나기 전 그와 일대일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받아왔던 스트레스, 상임위원회에서 받은 따돌림, 그래서 매사에 화가 나 있었고, 상식이파 사건 때도 자신이 잘못했다며 다시 한번 사과하겠다고···,

한번 풀고 나니 나름 사이가 좋아졌다.

이정학도 구례의 문제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곪은 살을 뜯어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란 걸.

그래서 힘으로 억누르던 관계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손을 잡았다.

첫 단계는 캐슬 개방, 다음 단계는 구례 자치위원회 해체가 될 것이다.

선거를 통해 사람들을 다시 뽑는다.

그 시기는 지리산 밀림 대토벌 작전이 성공하고 난 이후.

태주는 이정학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내일부터는 지리산 대토벌 작전 대비를 해야겠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 ※

지리산에 주둔하고 있는 각 전투 부대들은 토벌 작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보급은 생명.

한번 밀림에 들어가면 최소한 한 달 가까이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품목이 바로 모기 독 해독제, 그리고 고라니를 만나면 무조건 잡아야 하니까 포자 독 해독제도.

또한 사냥 중 부상 당하면 바로 회복되어 전장에 재투입 할 수 있는 태홍 회복제는 필수.

뿐인가?

전투 식량에, 대형 텐트에, 침낭···, 무지막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는 대작전이다.

그래서 외부 인원이 참관하는 건 매우 성가신 일.

황궁에서 귀빈이 오는 건 그렇다 쳐도, 사관학교 아카데미 졸업 예정자들은 거의 짐 덩어리나 마찬가지다.

태홍 바이오 경계 임무를 위해 파견되었던 도민수 소령도 함양 방어 사단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에게 하달된 명령.

"네? 저보고 사관생도 그 애송이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라고요? 이제 막 각성한 놈들을?"

"부탁 좀 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설치고 다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니? 이것도 마수 토벌만큼이나 중요한 임무야."

"와! 저 주니어 익스퍼트입니다. 제 소원이 엘리트 한 마리 잡는 거라는 걸 알고 계시면서."

그러자 코웃음 치는 도민수의 직속상관.

"니가? 엘리트를 잡아? 만나면 오줌이나 안 싸면 다행이겠다. 주제 파악 먼저 하자."

"그, 그래도."

"나도 엘리트 근처에도 못 가. 최소 대령급, 혹은 참모님들이나 사단장님, 군단장님이 맡을 거야. 아! 그리고 김태주 회장님도 참가하신다고 하니."

직속상관의 말처럼 엘리트 마수 스페셜 레이드팀은 이미 구성이 끝났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지원팀에는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긴 지원팀도 경쟁이 치열할 터.

"우리도 생도들 안 받으려 했는데, 육본 지시사항인데 어쩌겠냐? 그리고 우리 사단장이 짬밥에서 밀렸어."

"하아,"

"잔말 말고 지시에 따라. 공적 점수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네."

하지만 여전히 언짢은 표정의 도민수 소령.

"민수야, 그래도 재미는 있을 거다."

"네? 무슨···,"

"이거 봐라."

툭!

도민수 소령은 상관이 던져준 서류철을 받았다.

"···이건, 생도들 신상정보 아닙니까?"

"맞아. 뒤로 쭉 넘겨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응?"

도민수는 눈을 번쩍 떴다.

서류에 적힌 두 명의 신상정보.

김태평 23살, 파주 영지 출신, 아버지는 김웅방 준장.

그리고 김태천 22살, 역시 파주 영지 출신에 아버지도···

"지, 진짭니까?"

"세상 참 재밌지 않냐?"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에서 김태주 회장은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었다.

해독제와 회복제를 발명해 군에 공급하고, 심지어 마인 3명을 홀로 처리한 사람.

그에 대해 당연히 궁금해했고, 웬만한 사람들은 그의 가정사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 둘과 김태주 회장은 남남이지."

"네.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가 없다.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 정보부에서 조사했던 내용들.

비밀인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안다.

도민수 소령도 구례 태홍 바이오 경비 임무로 파견되기 전에 숙지하고 있었고.

김태주 회장이 설악산 전초기지에서 구례까지 흘러온 이유, 그리고 그가 파주 영지에서 받은 대접.

이제야 깨달았다.

왜 자신에게 사관생도 통솔 임무가 내려왔는지.

"김태주 회장님과는 마주칠 일 없게 만들 거야. 그 두 놈들 얼굴 보면 얼마나 마음이 심란하시겠냐?"

"그렇습니다."

"적당히 굴리면서 데리고 놀아. 문제 될 일만 만들지 않으면 돼."

"네네, 적당히, 적당히···,"

도민수 소령에겐 그 '적당히'라는 말의 범위가 조금 넓었다.

< 구례 변화의 시작.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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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벌을 위한 준비 >

웨이브는 왜 일어날까?

때가 되면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반은 맞는 말이다.

밀집지대 마수들의 숫자가 늘어 밀도가 높아지면?

이것도 반쯤 맞다.

마수 웨이브의 주된 원인은 바로 엘리트 마수들 때문.

엘리트 마수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놈들의 영역이 서로 겹치게 되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광기에 휩싸여 지들끼리 전투가 일어난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순식간에 밀집지대 내 모든 엘리트 마수들이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엘리트 마수들이 뿜어내는 피어(fear), 혹은 살기.

그 영향은 일반 마수들에게도 전해지고, 그게 점점 쌓이다 보면 마수 무리 전체가 두려움에 떤다.

시간이 갈수록 집단 정신착란 현상처럼 마수 무리들을 변하게 하고, 놈들이 느낀 공포는 인간에 대한 공격성으로 변화한다.

급기야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의 거주지로 쳐들어가고, 살육의 시간이 벌어지는 것이다.

모든 마수가 미쳐 날뛴다.

심지어 마수 생태계 최하층에 있는 긴꼬리 쎅토끼도 인간만 보면 무조건 들이받는다.

선공 마수든, 비선공 마수든, 가리지 않고 마구마구 쏟아져 나온다.

인간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그러나 이때만큼은 무기 사용이 가능해진다.

이미 웨이브가 일어난 판에, 가릴 게 뭐가 있나?

총기와 대포, 미사일,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마수들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의 존재 이유.

물론 핵은 제외.

중국을 봐서 알 수 있듯이 핵을 사용하면 나라 전체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광기가 진정되고 마수들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되돌아가면 비로소 웨이브 종료.

이게 웨이브의 공식이다.

비슷한 주기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그래서 대토벌 작전의 주요 공략 대상은 바로 엘리트 마수.

얼마나 많이 엘리트 마수들을 잡느냐에 따라 토벌 작전 성공의 여부가 갈린다.

대토벌 작전은 부수입도 엄청나다.

엘리트 마수를 사냥하면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대토벌 작전이 진행되면 제국 전체의 제약회사들이 임원이나 책임자들을 파견해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구매해 간다.

태주도 몇 마리 잡아서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확보할 생각.

그럼 토벌 준비를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일단 회복제를 많이 만들어낸다.

태주가 보기엔 토벌 작전의 승패는 바로 이 회복제에 달려있었다.

그동안 많은 양을 군에 납품했지만 여유 물량은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자이언트 반달곰이야 지리산에 널려있다.

토벌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하루에 몇 마리씩 잡았다.

가공 처리한 웅담을 가지고 와서 회복제는 태주가 직접 제조했다.

백창훈과 장순철 대신에, 걔들은 할 일이 있으니까.

"혀, 형님! 자, 잠시 쉬었다가···."

"안돼! 순철이 봐라! 군말 없이 잘 따라 하잖아."

"···저도 조금 힘든데요?"

"응, 열심히 해."

오행기공의 수련은 기본적으로 마보 자세다.

하체를 튼튼히 하고 오행, 즉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스킬 생성이 안 됐어?"

"아직, ···영영 안 되면 어떡하죠?"

"될 때까지 해야지."

이제 며칠 했다고.

전에 침투경도 일주일은 걸렸다.

"너희들도 이번 토벌 작전 참가할 거야. 기본적으로 익스퍼트 정도는 되어야 쓸 만해지지 않겠니? 그때까지 눈 딱 감고 수련하자, 응?"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토벌 작전은 매우 위험해서 어설프게 준비했다간 큰코다친다.

태주는 영약도 몇 개 더 만들었다.

두 놈 다 미들 익스퍼트까진 올려놓을 생각.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이 이해된다.

경지에 오르는 것보다 어디 가서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행기공을 가르친 지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시스템 메시지가 잠잠하다.

벌써 열흘이 훨씬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백창훈과 장순철에게 들려온 시스템 메시지.

배운지 보름 만이었다.

[스킬 : 5원소 마나 심법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떴습니다!"

"오!"

5원소 마나 심법, 이건 이름 그대로 오행기공을 의미하는 듯하다.

"잘했다. 열심히 수련해! 스킬 등록됐다고 안심하지 말고."

그건 그렇고, 오행기공 배우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침투경은 일주일, 오행기공은 보름, 거의 두 배다.

생각해보면 오행기공은 기초 무공이긴 하지만 만만한 건 아니다.

그러니 당가의 자손들도 필수적으로 배우는 거고.

'흐음, 혹시?'

짐작 가는 구석이 있다.

"얘들아. 이번엔 쉬운 걸로 가르쳐줄게. 괜찮지?"

"네!"

"오히려 좋은데요?"

그래서 태주는 누구나 배우는 기초검법인 삼재검법(三才劍法)과 단순히 걸음을 빠르게 하는 삼재보(三才步)를 가르쳤다.

추측은 들어맞았다.

전수한 지 이틀도 안 돼,

"아!"

"됐다."

탄성을 터뜨리는 백창훈과 장순철.

"떴어?"

"네! 떴습니다."

"이름은?"

"그게···."

[스킬 : 트리플 포메이션 소드를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 트리플 포메이션 스텝을 습득하셨습니다.]

트리플 포메이션 소드는 삼재검법, 트리플 포메이션 스텝은 당연히 삼재보.

'결국 시스템도 한계가 있다는 건가?'

어려운 무공은 등록되는 데 오래 걸린다.

당장 기초심법 수준인 오행기공만 해도 보름.

빠르게 스킬로 등록하려면 구결이 쉬워야 한다.

반복 숙련만으로 익힐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삼재검법이나 삼재보도 잘 익히면 괜찮은 무공이지.'

이 정도면 맞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 ※ ※

함양 마수 방어사단.

도민수 소령은 졸업 예정 사관생도들의 신상 정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김태평, 김태천, 그리고 그들의 졸업 동기들.

사관학교 기간은 4년제다.

그러나 얼마든지 조기 졸업이 가능하다.

각성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이 서류에 나온 사관생도들은 학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다.

'하아, 금수저 새끼들.'

생도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재벌가 패밀리에, 고위 공무원에, 저명한 학자 가문에,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마스터의 자제, 그리고 지방 영지의 후계자들···,

그럴 수밖에.

결혼을 그런 식으로 하니까.

당장 도민수 소령도 결혼정보업체에서 가입하라고 매일 문자가 날아온다.

도민수도 사관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집안은 평범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적합자 출신.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20대 초반에 각성해 군에 입대했다.

'자, 그럼···,'

데리고 놀아볼까?

도민수는 시간 맞춰 함양 사단 본부, 연병장으로 나갔다.

마침 대형 버스를 타고 연병장에 도착한 생도들.

이번에 졸업 예정인 사관생도들은 모두 32명이었다.

재능이 뛰어나 2년 만에 각성해 조기졸업 예정인 놈들도 있고, 집안에 돈이 많아 영약을 처먹고 비기너 단계까지 만들어 온 놈들도 있다.

그러면 뭐 하겠나?

적합자 부사관들보다 더 못할 텐데.

"동작 봐라! 빨리 안 움직여? 이 핏덩이 새끼들아!"

도민수의 지시에 사관생도들이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려 연병장에 정렬했다.

"너흰 쓰레기들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명심해라.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마!"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관생도들.

그중에 태주의 배다른 동생, 김태평과 김태천도 있었다.

지루한 듯 하품하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서로 속삭였다.

'아씨, 처음부터 기강 잡기야? 졸라 꼰대네.'

'쉿! 조용.'

'그나저나 여기 구례와 가깝잖아. 태주, 그 새끼는 뭐 하고 있을까?'

'약이나 팔고 있겠지. 신경 꺼. 민간인 만날 일이 어디 있다고.'

'그렇겠지? ···씨발, 돈을 그렇게 처벌어놓고, 파주엔 연락도 안 해. 최소한 재워주고 먹여준 값은 해야지. 지금까지 돈이 어디서 나왔는데? 우리 외갓집이잖아.'

'그놈이 양심이 있으면 벌써 했지.'

도민수는 생도들에게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이제부터 토벌 작전 준비에 들어간다. 안타깝게도 너흰 굴러들어온 놈들이다. 따라서 생활할 장소가 없어. 그러면 만들어야겠지?"

도민수가 눈짓하자 대기하던 병사들이 한쪽에 뭔가를 쌓기 시작했다.

"저건 너희들이 생활할 텐트다. 밀림에 나가서도 텐트에서 생활해야 한다. 연습도 할 겸 연병장 한쪽에 설치한다. 걱정 마라. 노련한 병사들이 도와줄 거야. 이상!"

우르르르, 몰려가는 생도들.

제각기 텐트 하나씩을 들고 지정된 자리에서 설치를 시작했다.

2인용 텐트.

김태평과 김태천도 적당한 텐트 하나를 잡았다.

도와줄 병사도 붙었다.

"후아, 더워서 미칠 지경이네."

"맞아, 태평이 형, 확실히 파주하고는 달라."

"이런 뙤약볕에서 지내라고? 에어컨도 없이?"

"어쩌겠냐? 하라면 해야지."

텐트를 치다 말고 김태평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김태천에게 속삭였다.

"야 태천아, 저기 저 애 보이지?"

"누구? 아하, 정연희? 백두 자동차 딸 말하는 거구나."

"그래, 예쁘지 않냐? 집안도 빵빵하고."

"쟤 얼굴값 하는 애야. 내가 오면서 말 한번 슬쩍 걸어봤잖아. 대답도 안 하고 싸늘하게 노려보는데, 어휴!"

"하긴, 백두 그룹 딸이면 그럴 만하지, 쟤하고 사귀면 완전 팔자 피는 건데."

"꿈 깨. 우리에게 신경이나 쓰겠어?"

"혹시 모르지. 마스터에 오르면."

"흐흐, 당연하지."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병사가.

"빨리 텐트 설치하죠. 늦게 칠수록 식사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러자 불쾌한 듯 병사를 노려보는 김태천.

"하고 있잖아. 씨발! ···이건 왜 안 끼워져?"

"다른 폴대입니다. 이걸로 끼우세요."

"후우, 거지 같은 텐트 달랑 던져주고, 하여간 촌 동네답다."

"정식 보급 물자입니다. 사관학교에서 텐트 치는 법 배웠을 텐데요."

"뭐야, 이 새끼가, 지금 내가 못 배워서 이렇다는 이야기야?"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왜 욕을 하십니까?"

여긴 아열대 기후라 불쾌 지수가 매우 높다.

당연히 김태천도 그 영향을 받았다.

"하아, 야! 너 진짜 죽고 싶어?"

"쓸데없는 말다툼 그만하죠. 저 내일 모래면 전역입니다. 민간인이나 다름없다고요."

"너, 마나 순응자지? 짐이나 들고 다니는 주제에, 각성 장교가 만만하냐?"

"···."

병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태천을 바라봤다.

임관도 안 한 주제에 장교?

저런 놈들이 소위로 부임하면 적합자 행정 보급관에게 '자네가 행보관인가? 커피 한 잔만 타오게.' 라고 말할 놈들이다.

"네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폴대나 잡아주세요. 저도 할 일이 많아서."

"끝까지 바락바락 대드네?"

우웅.

김태천은 마나를 끌어올려 살기를 담았다.

"너 따위가 나와 맞먹으려 해?"

주위에 보는 눈이 많지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김태평도 동생을 막지 않았다.

한낱 병사 놈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도 보통이 아니다.

계급이 말년 병장.

게다가 모병제 생활을 마치고 군경력 우대 전형으로 뉴서울 시청 공무원에 합격해서, 내일 모래면 지리산을 떠날 몸이라 눈에 뵈는 것도 없다.

3년 동안 지리산 밀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저 정도 위협은 가소로울 지경이고.

그래서 눈을 부라리고 크게 소리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공격 의사로 봐도 되겠습니까?"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

김태천은 당황했다.

적당히 겁을 주면 숙일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대들어?

그것도 모두가 들을 만큼 큰소리로,

"너, 너 조, 조용히 말···,"

순간!

"동작 그만!"

어느새 나타난 도민수 소령.

병사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박병장,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따로 사과할게. 바쁠 테니까, 이만 가봐."

"넵!"

그리고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예의도 없고, 지능도 떨어지고, 분위기 파악도 안 되고,"

분노한 표정으로 김태평과 김태천을 노려보는 도민수.

"어, 그게 아니라 저놈이 먼저···,"

"머리 박아."

후다닥!

쿡, 쿡!

두 형제는 그 자리에서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 자세에서 열중쉬어."

그리고 도민수는 다른 사관생도들에게 소리쳤다.

"전원 집합!"

우르르르, 몰려오는 남녀 생도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머저리가 있어서 말한다. 갓 각성한 새끼들이 주제 파악도 안 돼? 너흰 전력감으로 온 게 아니고 귀찮은 짐 덩어리로 온 거야."

모두 고개를 푹 숙였다.

머저리들이 누군지, 어떤 사고를 쳤는지, 옆에서 지켜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병사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너희보다 짬밥도 오래됐고, 마수 사냥 경험도 많다. 선배로서 예우해,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생도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서 오늘 밥은 없다. 대신 우릴 위해 보급을 해주는 일반 병사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먼저 가진다. 식사는 그다음이야."

"···."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빨리 텐트 치고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그때 손을 번쩍 든 여자 생도.

"생도 정연희! 의견 있습니다."

도민수가 그녀를 지목했다.

"말해봐."

"멍청한 두 놈 때문에 우리 모두 밥을 먹지 못하는 건 부당합니다. 우린 머저리하고 다릅니다. 병사들에게 예의도 갖추었고, 도움도 받아 텐트도 잘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도민수.

"너는 사관학교도 다녔으면서 군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자, 잘못 들었습니다?"

"연대 책임져야지. 동기잖아? 니들은 괜찮을 줄 알았어?"

"···네?"

"박아!!!"

후다다다다다닥!

나머지 30명의 생도들이 그 자리에서 머리를 땅에 박았다.

"각성자라 힘도 안 들지?"

"아닙니다!!!"

"앞으로 전진!"

"···."

스윽, 스윽, 슥슥.

각성자들이다.

힘이 좋다는 의미.

지나간 자리에 깊은 밭고랑이 파였다.

인간 쟁기와 다를 바 없었다.

생도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민수 소령 때문에?

당연히 아니다.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김태평과 김태천을 향해서다.

'깝칠 때부터 알아봤다.'

'병신 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저 고문관 새끼들이 우리 동기라고? 누구 마음대로.'

'고작 파주 영지 출신 주제에, 눈에 뵈는 게 없나?'

'버릇없는 놈들, 우리 형도 장교지만 병사들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는데.'

'씨발, 병사에게 반말 찍찍할 때 내가 나섰어야 했어.'

김태평과 김태천은 죽을 맛이었다.

싸늘하다.

동기들의 속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형제의 고난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 토벌을 위한 준비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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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1) >

토벌 작전이 임박했다.

태주도 산청으로 가서 최종 브리핑에 참석했다.

산청, 함양, 남원 사단, 3개의 주력 부대.

거기에 4개의 스페셜 레이드 팀.

이미 계획은 다 세워놓았다.

마지막으로 빼먹은 건 없는지, 보급 계획은 완벽한지, 확인하는 절차.

태주는 오진형 중장과 함께 하나의 스폐셜 레이드 팀을 구성하고 구례 진입로를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중장님."

"응? 왜 그러나? 김회장."

"황실에서 귀빈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중장님은 그분들과 합류해야죠."

"내가 손님 접대할 짬밥인가? 그게 얼마나 귀찮은데, 준영이가 맡기로 했어."

"···아!"

"그리고 사관생도 핏덩이들은 필성이가 데리고 있을 거고."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산청부대 사단장 구준영과 함양부대 사단장 박필성의 안색이 좋지 않다.

반면 남원부대 사단장 홍준태는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아마 짬밥으로 치면 홍준태 소장이 셋 중에 제일 높은가 보다.

이래서 군대는 짬밥이다.

"흐흐흐, 김회장과 난 천천히 구례 밀림으로 진입하다가 어디든 지원요청이 오면 빠르게 달려가면 돼."

그리고는 은근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 둘이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하니까 처음부터 힘 빼면 곤란하잖아. 전력을 보존해야지."

"네? 으음. 중장님이야 가장 강한 건 맞지만 전 아직 사단장님들 보다···,"

"어허, 누굴 속이려고, 얼마 전에 또 강해졌지 않나? 마인 토벌 직후에 말이야."

"···."

이 양반 진짜···,

"이젠 나랑 맞먹겠는데, ···아니 독을 쓰면 나도 못 당할 것 같군."

눈치 하나는 엄청 빠르다.

태주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토벌 과정에서 획득한 엘리트 마수 결정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흐음, 군이 처리한 엘리트 마수 결정체는 당연히 군 소유고, 자네가 처리한 건 자네가 가져가면 되지."

"그래요?"

"왜? 필요하면 하나 정도는 챙겨줄 수도 있네."

"제가 알아서 가져갈게요."

고작 하나 가지고 얻다 쓴다고?

이걸로 만들 것이 있다.

영약?

'내가 먹지도 못할 걸 뭐하러.'

이미 쓰임새는 생각해뒀다.

그래서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드디어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 당일.

모든 준비가 끝났다.

태주는 구례 지리산 진입로에서 오진형 중장의 스페셜 레이드 팀과 만났다.

제국의 방송국과 취재진들이 몰려왔지만 접근 금지, 또한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민간 각성자 레이드팀도 사냥을 중단했다.

군 작전이 우선이니까.

오진형은 무전으로 작전 시작 명령을 하달했다.

치지직.

"간단하게 말한다. 작전 중 죽는 새끼들은 내 손에 뒤진다. 위험하면 도망가! 회복제 아끼지 말고, 그래도 절대 문책하지 않겠다."

태주도 백창훈과 장순철을 보며 말했다.

"알겠지? 너희들도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튀는 거야."

"네!"

"제가 도망치는 건 잘합니다."

오진형은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모두 모기 독 해독제 복용한다. 익스퍼트라고 해도 해독제는 무조건 마셔! 마스터인 나도 마신다. 피부 단단하다고 방심하지 말고, 변종 3줄 무늬 모기라고 다 똑같은 놈들이 아니다. 독한 놈들도 있다는 거 명심해라."

꿀꺽!

모기 독 해독제를 들이키면서.

"부대! 총진격!"

이로써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됐다.

※ ※ ※

부대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천천히 밀림을 향해 전진하는 제국군.

서두르면 안 된다.

공략의 기본 전술은 진지전.

본대가 특정 지역을 점령한 후, 주위 마수들을 사냥한다.

어느 정도 정리됐다 싶으면 다시 이동해서 진지 점령.

여기서 스페셜리스트 레이드팀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력 부대가 진격할 경로를 정해주고 엘리트 마수의 존재를 탐색한다.

보통 스페셜리스트 레이드팀은 부대에서 가장 강한 군인들을 위주로 선발된다.

산청 방어사단 구준영도 팀을 지휘하며 밀림을 나아갔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

불안해서 그렇다.

"사단장님. 너무 심려 마십시오.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습니다."

소위 계급장을 단 청년 장교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구준영에게 말했다.

"후우, 아니옵니···, 아, 아니다. 밀림을 만만한 곳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니 무조건 내 지시에 따라야 한다."

"네! 사단장님."

구준영이 데리고 다녀야 하는 황실 귀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바로 황제의 막내아들, 5황자, 류진철.

신분은 숨기고 왔기 때문에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누군지 다 안다.

정말 부담스럽다.

황자가 다치기라도 하면 옷을 벗는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황실에서 보낸 저 10대 후반의 어린 청년을 굳이 선발대에 합류시킨 이유는 있었다.

각성 등급이 무려 슈페리어 익스퍼트.

1, 2년 안에 마스터가 확실시되는 재능의 소유자.

실전 경험이 없다 해도 전력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황가의 무지막지한 DNA.

삼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현 황제에게서 비롯됐다.

원래 황제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지만 그가 황제가 되기 전의 이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성은 류, 이름은 태현.

황제 류태현

나이가 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외모를 봐도 모른다.

황제가 처음 제국을 세우고 즉위했을 때 모습이 지금 모습이었으니까.

삼한제국이 세워진 지는 60년.

그러나 제국의 기초가 되는 대진국이 세워진 지는 100년이 넘었다.

대진국을 세운 사람도 류태현.

즉 최소로 잡아도 100살 이상이 넘었다는 말.

다만 토종 한국계라는 건 확실했다.

초기 각성자일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류태현 황제는 원래 독신이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기 시작한 건 불과 30년 전.

황실의 적통을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끈질긴 호소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자와 황녀들은 보통 30세 미만.

그중 막내인 5황자 류진철도 겨우 21세였다.

그 와중에 전방에 나타난 붉은 털 늑대 한 쌍.

류진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단장님,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구준영은 류진철의 눈빛에 담긴 깊은 열망을 읽었다.

신중하고 부드러운 성격이긴 해도,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

"해보게, 뒤에서 받쳐줄 테니."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휘릿!

두 마리의 붉은 털 늑대에게 빠르게 다가가,

츠릿! 서걱!

"케켕!"

대뜸 한 마리를 죽여 버리고.

서거거거걱!

남은 한 마리도.

순식간에 두 마리 모두 죽었다.

광폭화고 나발이고, 그럴 시간도 주지 않았다.

정말로 미친 듯한 재능이었다.

※ ※ ※

한편, 지리산 함양 진입로를 통해 전진하는 함양 사단 본대.

마주치는 마수들을 모조리 처리하면서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여기에 진지를 구축한다."

선발대가 무전으로 정해준 지역이었다.

밀림 한복판이지만 임시 기지를 구축할 정도로 부지가 넓었다.

해가 슬슬 지고 있었다.

여기서 하루 이틀 정도 지내면서 주변 마수를 사냥할 계획이다.

"자자, 뭐하나? 텐트 치고, 숙영 준비해."

숫자만 해도 오백이 넘는 본대.

보급 역할의 일반 병사, 전투 지원 적합자, 각성자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띄엄띄엄, 간격을 띄워가며 땅을 고르고 텐트도 치는 병사들.

그중엔 따로 지역을 배정받은 사관학교 졸업 예정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씨발, 저리 안 가? 하필 우리 옆에서 텐트를 치고 지랄이야!"

서슬 퍼런 동기 사관생도의 신경질에 찔끔하는 김태평과 김태천.

"···다른 데는 자리가 없어."

"없긴 왜 없어? 저기 한군데 있네."

"화, 화장실 옆이잖아."

"하아, 그냥 꺼지라고!"

김태평은 열불이 치솟아 올랐다.

확! 엎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웬만한 동기들은 자신들보다 강하다.

김태평과 김태천은 겨우 유저 등급.

그러나 집안 좋은 사람들은 이미 영약 하나씩 먹고 등급을 올려놓은 상태.

완전히 고문관으로 찍혀버렸다.

동기들은 주위에 접근하지도 않았다.

특히, 백두 자동차 딸 정연희 생도는 자신들을 벌레 보듯 하는 판국.

대체 왜 이렇게 됐지?

이게 다 도민수 소령, 그놈 때문이었다.

매사에 트집을 잡고 있다.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전체 얼차려.

이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동기들도 저렇게 나오는 것이고.

뿐인가?

보급을 책임지는 병사들에게도 찍혔다.

현재 지급받은 텐트는 구형에 군데군데 찢어진 물건, 수통도 30년이나 지난 것, 군화는 못이 튀어나와 걸어 다닐 때마다 아프다.

심지어 군 보급용 개인 장비도 문제였다.

김태평, 김태천은 둘 다 검을 지급받았는데, 검신은 녹이 슬었고, 검날은 이가 다 나갔다.

"하아, 진짜 못 참겠네. 마음의 편지나 쓸까?"

"상부에 올라가기나 하겠냐? 한 달만 참자."

"내가 지리산 보고 오줌도 안 쌀 거야."

이런 따돌림은 처음 겪어본다.

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그들은 한마디로 왕이었다.

학교의 선생들도 자신들의 눈치를 봤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말만 툭 던지면 됐다.

'너, 요새 좀 거슬린다?'

그럼 알아서 정리됐다.

소위 일진이라 부르는 아이들에 의해 괴롭힘이 시작되는 거지.

그런데 거꾸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할 줄이야.

그것도 각성자가 되고 나서 찬란한 꽃길이 펼쳐진 이 순간에.

하지만 꾹 참는다.

한 달만 버티자.

임관해서 서북지방이나 동북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면 지리산에서 있었던 일은 금방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두 형제는 모르고 있었다.

군 내부 입소문 네트워크가 얼마나 빠른지.

※ ※ ※

구례 방면 지리산 밀림.

오진형 중장은 50명의 각성 장교로 최정예 스페셜 레이드 팀을 구성했다.

군단 본부 내 익스퍼트 이상의 영관급 장교.

짐꾼들도 최소 비기너 등급의 위관급 각성 장교들.

태주와 오진형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밀림을 걸었다.

오진형의 주무기는 톱니가 달린 커다란 대도, 등에 대도를 비스듬히 멘 모습이 생각보다 인상 깊었다.

"어떤가? 내 칼."

"멋있네요,"

"그치? 이거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칼이야. 원래 별을 달면 황제께서 영지와 함께 무기를 하사해주시는데···,"

"관심 없습니다."

이 양반 포기를 모르는 남자구나.

혹시 성이 오씨가 아니라 정씨인가?

오진형은 칼 자랑만 늘어놓았다.

그럼 사냥은?

가끔 앞에 나타나는 일반 마수들은 짐꾼들이 처리하고,

파바바박! 파박!

가끔 자이언트 반달곰이나 강철 깃 부엉이 같은 대형 마수가 나타나면 영관급 각성 장교들이 합류해서 함께 사냥하고.

벌써 밀림에 들어온 지 3일이 지났다.

군인들이야 밀림에서 자고 먹고 하지만 태주는 출퇴근, 밤에는 구례로 가서 약제조도 하고, 눈도 붙이고 새벽에 합류하는 식.

어때?

민간인인데.

다만 백창훈과 장순철은 팀과 행동을 같이했다.

열심히 경험을 쌓으라고.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데리고 온 저 두 청년, 원래 저렇게 강했나?"

"···으음, 딱 봐도 재능이 있잖아요."

백창훈과 장순철.

확실히 눈에 띈다.

츠리리릿!

검에서 뽑혀 나오는 검기, 빠른 몸놀림, 정확한 찌르기와 날카로운 세로 베기, 가로 베기,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이 아닌 절도 있는 몸놀림,

"저 청년 중 하나는 나와 안면이 있네,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백창훈을 말하나 보다.

맞다.

이정학과 충돌이 있었던 날, 오진형이 헬기를 타고 나타났을 때 백창훈이 거기 있었다.

눈썰미도 좋고, 눈치도 빠르고···,

"그땐 레귤러, 아니 비기너도 안돼 보이던데,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한들···,"

"···."

귀찮아 죽겠다.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지.

"스킬도 범상치 않아 보이고. 뭐, 영약이라도 먹였나?"

"네네, 영약 사 먹였습니다. 미리내 제약에서 최상급 라인으로."

"저, 정말인가?"

"돈벌어서 저놈들에게 다 들어갔어요,"

"···부럽군."

이렇게 둘러대자.

아니면 끊임없이 물어올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진행이 너무 느리다.

빠른 진행.

이건 태주만의 특기.

"잠시 저 앞에 가보고 올게요."

"응? 혼자서?"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하면 도망치면 되니까."

"마음대로 하게, 단! 무전은 항상 켜두고."

스팟!

순간 사라지는 태주의 신형.

'무슨?'

왜 저렇게 빠르지?

저 모습에 오진형은 확신했다.

'무공을 배웠음이 틀림없어.'

무공, 혹은 무술.

지구가 마나로 뒤덮인 지 300년이 지났다.

사람이 너무나 많이 죽어 망해버린 문명.

점차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문명이 복원되고, 완전 새롭게 정립된 것들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동양의 무공과 서양의 마법.

예를 들어 300년 전만 해도 단전호흡은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효과가 있었다.

일정 형식으로 호흡을 하면 단전에 기가 모인다.

무형의 에너지, 마나가 실재하니까.

단전호흡뿐인가.

가문의 비전으로 소수에게만 전해지는 호흡법을 통해 기를 쌓는 사람도 꽤 많다고 들었다.

당장 태권도만 해도 예전의 그 태권도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살상 무술로 발전하는 중이고.

실제로 열심히 수련하면 스킬 등록도 가능해진다.

'김태주 회장은 어떤 무술을 배웠지? 독을 쓰는 방법도 그렇고···.'

그가 키우고 있다는 저 두 청년도 무술을 배웠을 것이다.

'나도 하나 얻어 배웠으면 좋겠군.'

※ ※ ※

태주는 표홀질풍보로 밀림을 질주했다.

마수들이 달려들었지만 잡지 않고 그냥 피했다.

심지어 자이언트 반달곰도 피했다.

목표는 오로지 엘리트 마수.

잡을 수 있을까?

놈들은 강기(罡氣)를 사용한다.

심지어 강기의 수준도 제각각 다르다.

오래 묵은 엘리트는 마스터를 상회하는 강기를 구사한다.

당연히 마나 결정체도 품질이 좋고.

'혼원무상독령공이 7성만 되도 쉬울 텐데,'

강기(罡氣)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 6성의 경지.

그래도 자신 있다.

독인(毒人)의 주력은 독정을 기반으로 하는 독술이다.

파파팟!

꽤나 깊게 들어왔다.

여기까지 들어온 적은 처음.

그때였다.

"크르르르르르르···,"

폐부를 찌르는듯한 깊은 저음의 목울대 소리.

태주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트구나.'

일반 담비보다 훨씬 더 큰, 매끄럽고 아름다운 털가죽, 새빨간 눈동자,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주위에서 요동치는 마나.

엘리트 칼날이빨 담비였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진한 살기.

피어(fear).

피어? 그게 뭐?

자신은 절대독마다.

감히 영물 따위가!

우우웅웅!

태주의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독정이 깨어났다.

<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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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마수 대토벌 작전(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