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요마계.
불사의 요괴들을 가두고 있는 감옥.
제천대성이 따로 빼둔 분신 하나가 정신없이 요마계로 달려갔다.
그곳의 지배자를 만날 목적이었다.
바로 혼세마왕.
요마계 지하 깊숙한 동굴로 들어가 그를 만났다.
"뭐야? 돌원숭이? ···허나 분신이군. 왜 요마계로 왔지?"
혼세마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천대성의 분신에게 물었다.
"천도를 훔치는 데 성공했다."
"또? 너 미쳤구나. 이러다 긴고아로 대가리 터지면 어쩌려고? 뭐, 어쨌거나 알아서 처먹으면 되지, 왜 날?"
"방해자가 많아서, 그래서 제안할 것이 있다. 날 도와줘."
"흐흐흐, 웃기지 마라. 내가 그리 어리숙해 보였나?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는 모르겠다만···,"
"천도의 반을 주지. 그 정도면 너도 요마계를 탈출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
혼세마왕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진짜 천도를 확보했다고?"
"본체가 가지고 있어. 하지만 신선놈 때문에."
"흐음,"
절반의 천도라,
비록 온전한 한 개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면 요마계를 탈출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실패하면?
빌어먹을 신선들이나 서왕모가 가만히 있을까?
"빨리 말해. 시간이 없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좋다! 하지만 여기서 나갈 순 없어. 네가 요마계로 와, 그러면 도와주지."
"약속한 건가? 나중에 뒤통수치면 죽을 줄 알아."
"크크크,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혼세마왕이다. 입에서 나온 말은 무조건 지켜."
"알았어. 기다려라."
분신과 혼세마왕의 합의 사항은 즉시 본체, 제천대성에게 전달됐다.
이로써 요마계 참전 결정.
※ ※ ※
1차 탈출지가 정해졌다.
'좋아! 이제 요마계로 도망가면 돼!'
혼세마왕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요마계의 모든 요괴가 혼세마왕의 명령을 들을 테니까.
제천대성은 한 번 더 몸을 털었다.
우수수수수수···,
무수하게 쏟아지는 분신들.
"끼기기기긱!"
"케켁!"
"끄아아악!"
"꾸익."
.
.
.
분신들이 벼룩 떼처럼 당군악에게 달려들었다.
쐐애애액!
기회를 틈타 근두운을 소환해 요마계로 날아가는 제천대성.
츠피릿!
그 뒤를 집요하게 쫓아가는 철 주괴.
솔직히 제천대성은 혼세마왕에게 천도 절반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요마계 요괴들을 끌어들여 시간을 번 뒤에 혼자서 꿀꺽해야지.
도망치다가 틈이 생기면 바로 먹어도 되고,
쐐애애애애액!
구름 덩어리가 날았다.
근두운이 단숨에 도원을 벗어났다.
'···지금 먹을까?'
그러나!
"근두운이다!"
"저저저, 염치없는 원숭이 새끼!"
"씨발 놈아, 거기 안 서?"
"구름 먼저 치라고!"
피피피핏!
파팟!
콰앙!
"이런 젠장!"
신선들이다.
어떻게 한꺼번에 몰려왔지?
츠핏!
갑자기 날아온 검이 자신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으윽!"
검선도 왔다.
이기어검, 근두운을 바짝 쫓아오는 놈의 검.
또 한번 몸을 털어서 분신을 만들고.
그럼에도 무서운 속도로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신선들.
쐐애애애액!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과거 천군들과 싸울 때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것도 그렇지만,
'얘들 왜 이리 난리야?'
원래 신선들은 게으른 족속이다.
철저히 개인적이고,
이렇게 합심해서 달려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이 새끼들 약이라도 처먹었나?'
하지만 이제 다 왔다.
저 앞에 요마계의 경계가 보인다.
그때였다.
"안돼요오오! 원숭이님, 도둑질은 나쁜 거예요오오."
머리에 커다란 꽃을 달고, 선녀복을 입은 채,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의 앞으로 훨훨 날아오는 선녀 하나.
"복숭아 저한테 주세요오! 제가 주인에게 돌려···,"
미친년인가?
"비켜!"
제천대성의 근두운이 해맑 선녀의 몸을 치고 그대로 달아났다.
"아이코!"
꽃잎처럼 추락하는 해맑.
"뺑소니다아아아!!!"
대전투를 구경할 목적으로 지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던 강림차사.
그런데 해맑이 근두운에 치여 떨어지자 기겁하며 달려왔다.
"해맑, 안 돼!!!"
강림은 빠르게 슬라이딩해서 가까스로 해맑을 받아냈다.
"괘, 괜찮으시오?"
"넹! 안 아파요. 고맙습니다아아."
"이리 오시오,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테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천도는 내가 해결하겠소,"
급하게 안전한 곳으로 해맑을 옮긴 후, 놈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끝까지 확인했다.
방향은 요마계.
"씨발, 천한 원숭이 새끼가···,"
천인을 건드려?
그것도 해맑을?
강림은 황천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지이잉.
대왕에게 일러야지.
그가 얼마나 해맑을 아끼는지 원숭이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염라뿐인가?
판관, 차사, 저승사자, 각 지옥 관리자, 아마 황천계 전체가 들고일어나겠지.
"넌 뒈졌어."
※ ※ ※
태주는 여전히 태평양 한가운데 있었다.
자신에게 천도를 무사히 넘겨주기 위해 신선들이 이렇게나 고생하는데도 말이다.
알 리가 있나?
자신을 위한 천도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데.
< 전쟁 발발(3)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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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실수한 거야. >
황천계.
염라는 판관들과 함께 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오늘도 빠짐없이 열린 명부 회의.
"하아, 환생자들은 줄고, 죄인은 점점 늘어나고,"
"지옥을 더 확장해야 할 듯합니다."
"그거야 문제도 아니지, 흑암철 파다보면 지옥도 넓어지니까."
"맞습니다. 오히려 주괴 물량 맞추는 것이···,"
흑암철을 주괴로 만드는 일까지 해야 하니.
그런데.
"대왕! 어디 계십니까? 대왕!"
강림이었다.
틈만 나면 자리를 비우고 멀티플렉스로 놀러 가는 뺀질뺀질한 놈.
"야이, 개자식아! 넌 또 어디서 짱박혔다가···,"
"큰일 났습니다."
"뭔데? 말해봐. 별일 아니면 죽을 줄 알아!"
"지금 돌원숭이가 천도를 훔쳐서 요마계로 달아나는 중입니다."
"하하하."
어이없다는 표정의 염라.
"새끼야, 어쩌라고? 천도야 갈 놈에게 가겠지. 정해진 인연이 엉성한 것도 아니고, 고작 차사 따위가 천도의 행방에 관여해?"
"그, 그게 아니라, 우리 해맑 선녀가 돌원숭이를 막다가···,"
해맑이 원숭이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설명하는 강림 차자.
그러자 염라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씨발, 원숭이 요괴 새끼가!"
그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감히 천인을 쳐?
그것도 뺑소니?
염라의 옆에 있는 판관들도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마침 잘 걸렸다.
과거, 그놈이 명부책을 멋대로 지워서 얼마나 고생했나?
복수할 기회다.
"해맑 선녀는?"
"안전한 곳으로 모셨습니다."
그래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놈을 잡아다 갈기갈기 찢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
"요마계로 도망쳤단 말이지?"
"네!"
이 기회에 요괴들도 싹 쓸어버린다.
"수석 판관!"
"네, 대왕."
"요마계에 지옥문을 열겠소."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그리하여 황천계까지 참전했다.
※ ※ ※
당군악.
그가 인간계에서부터 깨우쳐왔던 독령.
등선했어도 어디 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술로 승화해 더더욱 신묘해졌지.
'선도 나무는 건들지 마. 도화궁 왕모와 선자들에게도.'
우웅.
독령이 응답했다.
독선과 독령이 함께 움직이는 만천화우.
암기 공격은 오로지 원숭이들에게 집중됐다.
'본체의 기운은 계속 추적하고 있지?'
우웅!
'그래, 잘하고 있어. 분신체는 적당히 대충 처리하자.'
우우웅,
'나머지는 본체 원숭이에게 집중할 거야. 놈이 절대 천도를 입에 넣지 못하도록, 죽여도 좋아. 독 기운도 최대로!'
우웅, 우웅,
자신을 도와주려고 신선들이 나타나자.
'신선들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
우우웅.
오차 범위 1cm도 안 되는 정밀 유도 공격.
암기가 원숭이를 집요하게 쫓았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놈도 만천화우를 기가 막히게 피하고 있었다.
'제기랄!'
당군악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만천화우를 저렇게 피해?
'과연 제천대성이라 할만하구나.'
무림 4대 거품이라는 게 있다.
무조건 뚫리는 천라지망, 절대 청부에 성공하지 못하는 살수 집단, 바보처럼 가문의 위세만 내세우다 당하고 마는 명가의 후기지수.
마지막으로 언제나 빗나가는 만천화우.
하지만 그건 오해다.
사실 그건 폭우침을 만천화우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만천화우는 원래 이론에서나 실현 가능한 무공이었다.
현실에선 그 누구도 완성하지 못했다.
당문 역사상, 실제 만천화우는 오직 당군악만이 실현해냈다.
이걸로 천마를 죽였고 마교도들을 몰살시켰다.
그런데 저 원숭이를 어쩌지 못하다니.
순간!
- 독선?
전투 과정에서 들려오는 하선고의 전음.
- 내 선술이 뭔질 알지? 그래서 묘안이 있는데···.
가까운 앞일을 예측할 수 있는 하선고.
그녀의 계획을 들은 당군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매섭게 원숭이를 몰아붙였다.
한편.
제천대성은 반쯤 혼이 나갔다.
자신이 누군가?
싸우면 무조건 이기는 투전승불, 제천대성이다.
상제든, 염라든, 용왕이든,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근데 일개 신선 따위에게 이렇게 쫓긴다고?
하늘에 뜬 수만 개의 금속체, 그냥 뿌리는 게 아니다.
하나같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쫓아왔다.
그뿐인가?
츠피릿! 피리리릿!
검선의 이기어검, 흩뿌려지는 검강과 검환.
신선들의 술법진은 어떻고?
갑자기 땅이 올라와 벽을 만들고, 짙은 안개가 생겨나 시야를 방해하며, 무수한 부적들이 화르륵, 화르륵, 불타면서 자신을 위협하고···,
'이런 망할···,'
순순히 당해줄 수 없다.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
맞서는 건 불가.
근두운과 분신, 몸을 벼룩처럼 줄였다가, 다시 늘였다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이제 다 왔다.
저기 저 앞이 요마계.
그곳엔 수십만 마리의 요괴들과 고위급 요마장군, 그리고 불사의 능력을 갖춘 혼세마왕이 있다.
대규모 요괴 군세.
한 마리, 한 마리로 보면 신선들에겐 쪽도 쓰지 못하지만 뭉치면 강해진다.
승산이 있다.
제천대성은 확신했다.
※ ※ ※
혼세마왕은 요마계 중심에서 제천대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마계도 독립된 차원.
이곳만 벗어나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요괴들은 요마계의 주인들.
침범해오는 자들은 적.
본진까지 깊게 끌여들여 싸운다.
여긴 자신의 영역 아닌가?
"흐흐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
그런데?
"어···,"
저 멀리에서 보이는 광경.
도망쳐오는 원숭이와 분신들.
하늘을 가득 뒤덮은 각종 무기와 암기들.
그리고 악다구니처럼 죽자고 추적해오는 다수의 신선들.
"무, 무슨?"
신선들이 떼로 몰려왔다.
한 명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이런 쌍놈의 돌원숭이 새끼가!"
속았다.
겨우 천도 반개 받고 해줄 일이 아니다.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지극히 개인적이라 자기 일이 아니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신선들 아닌가? 헌데 저렇게 필사적으로 원숭이를 쫓아?
그러나 여긴 요마계.
일단 이곳을 넘어오는 순간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다.
"야!"
"네, 마왕님."
"애들 싹 불러 모아."
"다요?"
"그래, 새끼야! 저거 안 보여?"
요마계의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
혼세마왕의 소집령에 숨어있던 모든 요괴들이 뛰쳐나왔다.
그러자 신선들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제기랄! 떼로 몰려온다!"
"저, 저글링인가?"
"핵무기 없소? 뉴클리어! 뉴클리어!"
"에잉! 핵이 어디 있다고?"
"내가 누누이 그거 배송받아 두자고 말했었잖소."
"핵무기 받아서 뭐 하려고? 상위 계 전체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오? 그냥 원숭이만 족칩시다."
"놈이 천도를 먹을 시간을 주면 안 되오."
단번에 수적 열세에 몰린 신선들.
그래도 당군악은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태주에게 천도가 가야한다.
"이 교활한 원숭이 새끼야! 거기 안 서?"
"낄낄낄, 잡아봐!"
제천대성은 또 한 번 몸을 털었다.
이번에는 매우 격렬하게.
몸에 붙은 털이 모조리 빠질 정도로.
우수수수수.
증식과 분열.
무한히 늘어나는 분신체.
오직 당군악에게만 달려들었다.
제천대성도 안다.
여기서 누가 제일 위협적인지.
요마계 중심에 도착하자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이 분산됐다.
이제 저놈만 족치면 자신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제천대성은 근두운에 올랐다.
두 손으로 품에 안고 있던 천도를 왼손으로 잡고.
귓구멍에서 아주 작은 금속 조각을 꺼냈다.
쑤우우우우우욱!
길어지는 여의봉.
"뒈져라!"
거의 100m 가까이 길어진 여의봉으로 당군악의 머리를 내려찍으려고 했지만···,
쐐애애애액!
어마어마한 기운을 뿌리며 신선 하나가 날고 있었다.
"헉!"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쭉 뻗어, 온몸엔 선기의 불꽃을 피워올리고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돌진.
"···검선?"
검과 신선이 하나가 되었다.
검선(劍仙)이 펼치는 신검합일.
콰콰콰콰콰!
날아오는 경로의 모든 요괴와 분신체들이 가루처럼 흩어졌다.
"···이런!"
제천대성도 긴장했다.
쑤우우욱!
적당하게 짧아지는 여의봉.
다시 길어지면서 검선의 검을 향해 마주쳐갔다.
째애애애애앵!
요마계를 휩쓸 정도로 터져나가는 강렬한 기의 폭풍.
검선이 튕겨 나갔다.
제천대성도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로 그때!
"독선! 지금이야!"
하선고가 외쳤다.
그러자 허공에 높이 떠 올라 조용히 기회만 엿보던 뾰족 흑암철 암기 주괴 수천여 개가,
츠피리릿! 츠피피피피핏!
마치 탄도미사일처럼 일직선으로 수직 낙하해,
콰콰콰콰콰콱!
천도를 든 제천대성의 왼쪽 어깨를 폭격했다.
"어허헉!"
아무리 금강의 육신을 지닌 제천대성이라지만 무거운 흑암철 암기의 충격을 완전하게 이겨낸다는 건 어려운 일.
그래서 결국 왼손에 든 천도를 놓치고야 말았다.
천도가 땅 밑으로 떨어진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천도다!"
"잡아!"
"끼끼긱?"
"크에에엑!"
천도를 향해 우르르 달려드는 요괴, 그리고 신선.
그러나 원숭이 분신 중 한 놈이 재빨리 천도를 집었다.
"분신이 가져갔다."
"씨발, 어떤 새끼야?"
"구분을 못 하겠어."
"저놈이다!"
제천대성으로선 분신이 잡은 건 그나마 다행.
그러나 빨리 넘겨받아야 한다.
분신은 천도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도를 가져간 분신에게 재빨리 지시했다.
"당장 천도를 이리 가져···, 흐익?"
콰콰콰콰콰!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암기의 폭포.
파파파파팟!
"아, 쫌!"
"이놈! 그만 단념해라, 네 것이 아니다."
"흥! 너나 포기해!"
일단 원숭이의 손에서 천도를 떨어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군악은 난감했다.
졸지에 목표가 두 개로 나뉘어졌다.
저 신출귀몰한 제천대성, 그리고 분신들의 손에서 손으로 패스되는 천도.
하는 수 없다.
둘 다 쫓아야지.
혼세마왕이라고 가만히 있었을까?
"쿠오오오오오오! 그동안 신선들에게 당한 설움을 씻을 때가 왔도다!"
요괴들이 화답했다.
"캬아악!"
"신선···, 죽인다."
"크르르릉!"
여기 요마계 요괴들 대부분은 신선들에 의해 잡혀 온 놈들, 인간계의 균형을 맞춘다는 목적으로 말이다.
언젠가는 복수할 생각이었다.
기회가 왔다.
한꺼번에 달려들면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와! 기가 차는구나!"
"요즘 재미난 게 많아서 요괴 새끼들, 내버려 뒀더니 이제 기어올라?"
"혼세마왕, 저 새끼는 우리가 맡는다. 곤륜, 매화, 삼봉은 검선과 함께 독선을 도우시오."
"할 수 있겠소?"
"허허, 우리도 등선한 신선이오."
"갑시다!"
난장판이었다.
신선들에 맞서는 요괴 무리, 제천대성과 그의 분신체.
대 혈투가 벌어졌다.
그러다 분신의 손에서 천도가 벗어나고, 그걸 다시 요괴가 줍고, 천도 주운 요괴가 흑암철 암기에 꿰뚫리고, 분신이 잡고, 놓치고, 잡고···,
문제는 역시 숫자.
신선 개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독선의 만천화우가 수많은 요괴와 분신들을 아무리 많이 쳐 죽여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적의 군세.
투욱! 퉁, 투툭, 툭툭툭툭!
천도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손에서 손으로, 던지고 받고, 놓치면 주워서 또 패스하고.
한번도 신선들의 손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쫓아만 갈 뿐,
순간!
턱!
누군가의 손으로 쏙 들어가는 천도.
"어?"
"헉!"
"크륵!"
"···뭐?"
"어, 언제?"
.
.
.
거짓말처럼 조용해지는 전장.
"와! 내가 잡았어요오오오!!!"
해맑 선녀였다.
신선들이 기절초풍했다.
"아, 아니, 이 위험한 곳에···,"
"해맑이를 누가 데려왔어?"
"천도고 뭐고, 해맑이부터 지켜!"
"씨발 놈들아! 우리 해맑이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땐 다 죽는 거야!"
천인.
상위 계를 통틀어 가장 사랑받는 존재.
모두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요괴들도 안다.
해맑을 건드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떡하지?
공격해야 하나?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미친년아! 천도 이리 가지고 와!"
쐐애애애액!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제천대성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그때였다.
지이잉! 해맑 선녀의 전면에 생겨난 투명한 문.
"헉?"
갑자기?
저거 뭐더라?
어디서 본 건데.
하나가 아니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곳곳에 열린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문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판관, 차사와 사자, 지옥 관리인.
그 뒤를,
꾸역, 꾸역, 꾸역, 꾸역···,
기괴한 형색의 죄인들이 나왔다.
끝도 없이 쏟아졌다.
지옥문이었다.
염라가 제천대성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명령했다.
"감히 해맑을 상하게 한 죄, 저 원숭이를 잡아다 내 앞에 꿇려라. 죽여도 좋다."
"···뭐?"
그뿐만이 아니었다.
펄럭펄럭.
어느새 요마계 하늘에 날개 달린 말을 탄 탁탑 신장이 나타났다.
"파렴치한 돌원숭이 놈아! 네가 정녕 우리 천인 선녀를 다치게 했단 말이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제천대성은 황당했다.
황천계와 천계가 개입한 건 그렇다 치자.
이런 일 처음 당해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천도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천도 때문이 아니었어?'
저 여인이 원인 같은데,
대체 누구길래···,
'가, 가만! 해맑이라고?'
미친!
이제야 기억났다.
'야단났군.'
정신이 아득해졌다.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필···,'
탁탑 신장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제천대성을 픽, 비웃으며 천군 소환 풀피리를 불었다.
삐이이이잇!
파아아아앗!
그러자 소환되는 대규모 군대.
천군이었다.
하늘을 가득 덮었다.
꿀걱,
혼세마왕도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된통 걸렸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
졸지에 천인 상해범으로 같이 엮이고 말았다.
다 저 돌원숭이 때문이다.
'···하아! 애초에 저 새끼, 제안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혼세마왕의 뒤늦은 후회.
지옥의 죄인들이 덮쳐왔다.
동시에 천군들 또한 한꺼번에 내려왔다.
당연히 신선들도.
"이놈! 모가지를 내어놓아라."
"천인이 다치기 전에 요괴부터 소멸시켜!"
요괴들이 잡혀 찢겼다.
분신들도 갈려 나갔다.
제천대성은 전의를 상실했다.
'하아,'
지금도 빼앗으려고 하면 할 순 있지만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해?
그냥 죽자.
차라리 그게 낫다.
사실 죽는 것도 불가능하다.
불사불멸의 격을 가졌기에.
전처럼 바위산에 깔려 수천 년을 꼼짝없이 지내겠지.
그제야 당군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맑이 해맑은 표정으로 독선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여기 있어요오오!"
천도를 내밀었다.
"···너무나 감사하오. 선녀."
"헤헤,"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독선님,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꼭 들어주세요."
"뭐든 들어드리리다. 맹세코!"
"고맙습니다아아아."
무슨 부탁인지는 나중에 듣고.
아무튼 천도를 받아 무한공간에 집어넣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절대 빼앗길 일 없다.
그런데 검선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독선."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음, 왜 그러시오? 혹여 잘못된 거라도···,"
그러자 조용하게 속삭이는 검선.
"스?"
"···."
콱 죽여버릴까?
※ ※ ※
지구도 한창 전쟁 중.
사실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다.
왕국군이 공화군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하지만 의외로 공화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
벌써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유럽 제국에선 즉시 참전을 결정했고,
태평양 한가운데.
태주도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쟁 속보를 접하고 있었다.
'미쳤구나. 미쳤어.'
너튜브나 SNS를 통해 퍼지고 있는 영상들.
정상적인 군대의 모습이 아니다.
시체 군대.
왕국군, 공화군 구분이 없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에서도 몸을 숨기지 않고 뻣뻣하게 걸어서 전진하는 군인, 팔이 떨어져 나가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수류탄을 던지는 군인, 목이 90도로 꺾여 달랑거리면서도 총을 쏘는 군인.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이 새끼들이 이젠 대놓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움직이기엔 뭣하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컨테이너선이 삼한제국 양산 항 가까이 근접했다.
이젠 안전하다.
엘리트 해양 마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렇다면?
태주는 만리비검을 꺼내 배에서 뛰어내렸다.
쐐애애애액!
목적지는 일단 구례.
모스크바로 가기 전에, 데리고 갈 사람, 아니 동물이 있다.
< 넌 실수한 거야. > 끝
ⓒ 꾸찌꾸찌
=======================================
< 한번은 봐준다. >
삼한제국 양산항.
아메리카를 출항한 컨테이너선이 이번에도 무사히 복귀했다.
뿌우우우우!
바닷길의 완벽 복원.
모든 의심과 우려를 불식시키는 뱃고동 소리.
무조건 아메리카 공화국보다 더 화려한 행사를 거행하라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양산은 대축제의 현장이었다.
배가 항구에 접안을 시작했다.
대낮임에도 하늘엔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제국군에서 차출된 군악대가 장엄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사방에 뿌려지는 꽃잎.
깃발과 팻말을 들고 환호하는 시민들.
그리고 화려한 카펫을 깔고 미리 마중 나온 황제와 고위 각료들.
박수와 함성이 이어졌다.
사다리차가 선박으로 접근했다.
선원들이 손을 흔들며 줄줄이 내려왔다.
견습 목적으로 승선한 사람도 있어서 숫자가 꽤 많았다.
일반 선원, 기관사, 항해사, 마지막으로 도민수와 장동조 선장까지 하선했는데,
"폐하! 티제이호 장동조 선장 및 선원 105명, 양산항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보고 합니다. 충성!"
"됐다. 이제 민간인이면서 보고는 무슨, 그건 그렇고, 김회장은?"
"아! 저, 그, 그게···,"
"응? 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입항하기 전까지 분명 배에 타고 계셨지만,"
"허어."
환영식이 부담스러워서 도망갔나?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했더니.
그러자 금수호가 슬쩍 옆에 붙어 소곤소곤 속삭였다.
"전 어디 갔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흐음, 혹시?"
"네, 모스크바 공화국이겠지요. 김회장도 영상을 봤을 겁니다. 수상한 점도 발견했을 테고."
"그렇군. 안 움직이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제정원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내전은 희한한 전쟁이었다.
초기에 왕국군과 공화군의 대립 전선은 이미 와해된 지 오래.
지금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를 정도로 대혼돈 상황이었다.
이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
죽은 인간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좀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들이 재현되고 있었다.
시체들의 세상, 언데드의 창궐.
그것이 김태주 회장을 움직였을 것이다.
대체 원인이 뭘까?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해답은 없었다.
마수와 마인처럼 마나의 부작용으로 일어난 현상? 혹은 특이한 스킬을 지닌 각성자의 짓? 그것도 아니라면 암중 세력이 퍼뜨린 질병?
그리하여 모스크바 왕국은 지옥이었다.
수많은 국민들이 왕국을 탈출했고 탈출 중이었다.
삼한제국 대사관도 교민들을 수습해서 모스크바 왕국을 벗어났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현재 정보가 단절된 상황.
유럽 제국이 개입을 선언했다.
제국 총동원령을 내리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솔직히 난 모스크바 내전보다 알렉스 카이사르, 그놈이 더 걱정돼."
"동의합니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전쟁이 확전되길 바라는 것처럼?"
"네, 동유럽 전체로요."
"뭐, 놈이 가만히 있겠나? 전쟁광인데."
물론 삼한제국도 전쟁 중이다.
그러나 오직 마수와 싸운다.
마수 밀집지대를 토벌하고 그곳을 삼한의 영토로 삼는다.
반면 유럽 제국은 국가가 대상.
인간끼리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목적.
"알렉스 그놈이 전쟁을 꾸몄을 수도."
"그건 아닐 거야. 그저 기회를 잡았을 뿐."
"···후우, 김회장이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이야. 원래 마수보다 인간이 더 무서운 법이라네."
※ ※ ※
태주는 구례에 잠시 들렀다가 일백이를 데리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쐐애애애액!
북서쪽을 향해 날아가는 만리비검.
조력자는 있어야지.
일이삼백이라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줄 테고.
지금은 삼백이였다.
"니아아아?"
"그래, 타이탄 이글, 흰색이었어. 깃털도 얼마나 탐스럽던지."
"니아옹!"
"참 멋지더라, 하늘을 날고 그 위에 사람도 태우고."
"캬아아악!"
삐졌구나.
하긴, 삼백이 면전에서 아메리카에서 봤던 펫 마수를 칭찬했으니.
순간!
"캭!"
태주의 품에서 하악질 한번 하더니.
스팟!
허공으로 점프해서 솟구쳐 올랐다.
자신도 하늘 정도를 나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오오!"
어느새 까마득한 점으로 변한 삼백이.
'난다, 고양이?'
하지만.
쓔우우우웅,
점프했을 때보다 더 빨리 떨어지는 삼백이.
"니앙?"
"···참나."
고양이가 날 리가 있나?
날개가 달렸으면 모를까.
쐐애애액!
태주는 만리비검을 움직여 떨어지는 삼백이를 받았다.
"니아아아···,"
"그래, 우리 부지런히 강해지자. 너도 언젠간 하늘을 날 날이 있지 않겠어?"
"니앙!"
태주는 일이삼백이를 차례로 불러내 선도 하나씩 먹였다.
물론 자신도 최상급 선도 하나 꺼내먹고.
한참을 날았다.
이윽고 도착한 모스크바 왕국 상공.
"···하아."
오자마자 알았다.
모스크바 전역에 널리 퍼진 끔찍한 마기의 기운을.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래서 흑마법사의 기운을 특정하기 힘들다.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어쩔 수 없었다.
태평양 안전 횡단이 우선이었으니까.
'이제라도 바로 잡으면 돼.'
타타탕! 콰쾅! 콰아앙! 쾅!
곳곳에서 총성과 포성만 들려왔다.
저 앞엔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
그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리 영토가 좁은 도시국가라 해도 말이다.
먼저 마기의 냄새가 가장 짙은 곳으로 가보자.
"냐앙?"
"그래, 저기지?"
"냐아아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붉은 광장의 남쪽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성당.
마기의 구덩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더러운 악취가 풍겨 나왔다.
태주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케륵!"
"키엑?"
"크에에에엑!"
대충 세도 백여 마리가 넘는 언데드들이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좀비와 구울, 그리고 뼈다귀만 남은 스켈레톤.
그러나 이들은 마수가 아니다.
그저 인간일 뿐이다.
"쯧."
죽기 전엔 아무런 죄도 없던 사람들.
하지만 안식에 들지 못하고 이렇게 끔찍한 언데드로 남았다.
이들이 성당 안에 있는 이유.
예배당 바닥에 그려진 불길한 마법진, 둥근 원형에, 안쪽은 오망성의 문양.
우우우웅,
짙은 마기를 뿜어내며 검푸른색으로 빛났다.
'아마 이걸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마기와 마나의 기운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일단 성당 안의 마법진은 부숴버리자.
태주가 다가서자 언데드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일백아!"
"냥?"
"편하게 보내드려. 그래도 생전엔 사람이었잖아."
"냐앙!"
쑤욱!
중간 크기로 몸을 키운 일백이가.
"크르르르릉,"
스팟!
언데드들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파삭!
앞발 공격 한방에 머리통이 날아갔다.
이미 선도를 꽤나 많이 먹은 놈.
일백이의 일격엔 삿된 것을 물리치는 선기의 힘이 담겨있었다.
언데드들은 일백이를 건들지도 못했다.
태주도 무한공간에서 신령비도를 꺼냈다.
이 역시 선기가 가득 담긴 무기.
마법진의 중앙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푸욱!
동시에 독정을 일으켜 독기를 주입하니,
파사사사사사사사···,
마법진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하나는 파괴했고.'
이거 하나뿐일까?
여전히 모스크바 왕국엔 짙은 마기가 가득했다.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천천히 살펴보니, 성당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검정색 선이 보였다.
지워진 마법진과 연결된 선.
'전기선이나 통신선 비슷한 건가?'
이를테면 마기 송신선.
마기가 이 선을 통해 어디론가 이어지는 것 같다.
태주는 성당 밖으로 나와 마기의 기운을 따라갔다.
마기는 커다란 건물로 이어졌다.
표지판을 읽어보니 모스크바 국립 도서관.
"씨발,"
도서관에도 다양한 언데드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도서관 로비 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마법진.
가슴이 아프다.
이미 죽었지만 영면에 들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
찢어 죽일 흑마법사 새끼들.
"일백아."
태주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그걸 느꼈는지, 일백이도,
"크르르르···,"
"보내드려."
"캬악!"
그렇게 또 하나의 마법진을 파괴하고.
성당에서처럼 도서관에서도 마기 송신선이 어디론가로 이어져 있었다.
도시국가 크기의 모스크바이지만 면적이 뉴서울의 3배 정도.
대체 몇 개의 마법진이 있는 걸까?
'계속 부숴보면 돼.'
그러다 보면 누군가가 나타나겠지.
이런 짓을 저지른 새끼 말이다.
도서관에서 나온 마기 송신선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크렘린궁?'
모스크바 행정의 중심.
국왕이 사는 거처.
왕궁도 당했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
왕궁이라면 분명 밖을 지키고 있어야 할 근위병이나 군대가 있어야 하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태주는 크렘린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
"냐아아아···,"
왕궁 정원에서 군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언데드.
소총 같은 개인화기도 들고서.
다양한 계급장의 군복도 입었다.
중간엔 얼굴에 각성 문양을 한 군인 언데드도,
그런데 계급이···,
'장군?'
최고 지휘관 계급.
그렇다면?
'마스터였어?'
마스터도 당했다.
심지어 생전의 무력을 그대로 언데드화 되었는지, 품고 있는 마기의 기운도 만만치 않았다.
"캬아악?"
태주를 발견한 모양.
권총으로 가리키는 언데드 마스터.
다른 언데드들도 개인화기를 들어 사격 자세를 취했다.
'설마···,'
타타타타타탕!
총탄이 빗발쳤다.
'헛!'
스파팟!
환영미리보로 피하고.
언데드가 총기를 사용한다니.
단순한 좀비가 아니다.
이제야 알겠다.
크렘린궁마저 당했던 이유를.
"일백아."
"크르릉!"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일백이.
태주도 표홀질풍보로 언데드 마스터를 향해 돌진했다.
"키켁?"
그러자 허리춤에 찬 검으로 맞서오는 놈.
파앗!
언데드답지 않게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여태까지 마주했던 그들과는 훨씬 강하다.
'···데스나이트라도 되는 거야?'
언데드의 지휘자, 최강의 데스나이트.
아니, 여긴 현대 지구, 기사가 아닌 장군이니까 데스제너럴이 맞겠지.
푸아아악!
선기가 가득 담긴 암기.
데스제너럴 바로 앞에서 비폭이 샷건처럼 발사됐다.
파바바바바박!
마스터 언데드의 몸체가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동시에 펼쳐진 폭우침.
만천화우의 열화판.
후두두두두둑!
독정에 독령의 씨앗이 자리 잡고 있는 터라 오백 개 이하의 암기는 충분히 조종할 수 있다.
푸푸푸푸푹!
맞자마자 언데드들이 치치치칙, 불타오르면서 재로 흩어졌다.
크렘린궁의 마법진도 파괴했다.
다음 장소로.
태주는 계속 움직였다.
그나저나 언데드들이 총기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강한 화력의 현대 무기들도 사용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핵무기까지 사용 가능한 건 아니겠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 ※ ※
요마계.
혼세마왕을 비롯한 요괴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다.
제천대성은?
신선들에 의해 제압당해 있었다.
요마계 중앙에 놓인 거대한 바위산.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신선들이 가져온 바윗덩어리를 쌓아 급조해 만들었다.
바위마다 덕지덕지 붙은 부적.
그리고 갈홍과 귀곡의 기문진도 새겨졌고.
제천대성의 몸체는 바위산 밑에 깔려 있었고 머리만 밖으로 쏘옥 나와 있었다.
머리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질하는 신선들.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제천대성이었다.
자신의 모든 거나 마찬가지였던 천도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으니.
"새끼, 눈깔 봐라!"
"뒈질래?"
"흐흐,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응, 약 오르쥬? 아무 것도 못하쥬? 킹받쥬?"
당군악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하마터면 천도를 빼앗길 뻔했다.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하지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오오?"
"···흐음, 그, 그게."
"제 부탁 들어주신다 했잖아요오오."
"···."
원숭이를 용서하고 풀어주라는 해맑의 부탁.
난감하다.
이놈 때문에 얼마나 식겁했나?
"다른 부탁 들어드리면 안 되겠소? 명품 가방은 어떻소?"
"이미 있는 걸요오."
"스포츠카는?"
"으음, 갖고 싶어요오오, 그, 그치만 원숭이님이 불쌍해서···,"
해맑도 고집이 있었다.
절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탁을 거두어 주시오. 풀어주면 또 사고를 칠 것 같아서 그러오."
"사고···, 아! 맞다! 제가 좀 전에 어떤 아줌마를 만났는데, 독선님에게 이걸 전해드리라고 했어요오오."
"···아줌마?"
"이거면 사고 쳐도 문제없데요오."
해맑이 품에서 둥그런 금속 머리띠를 독선에게 건넸다.
"이건?"
그러자 신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긴고아네?"
"맞아. 긴고아야."
"오! 제천대성은 긴고아를 써야 제맛이지. 당장 씌웁시다."
"근데 누가 전해줬다고?"
"아줌마라던데?"
"관음이겠지. 보살 주제에 음흉한 구석이 있어. 여래계 사고뭉치를 우리에게 떠넘기겠다는 수작 아니겠소?"
당군악은 긴고아를 들고 천천히 살폈다.
긴고아 안쪽에 새겨진 글씨가 보였다.
'이건 주문이겠군.'
어떡한다?
이거라면 꼼짝 못 할 것 같기도 하고.
해맑의 부탁도 있고,
마침 선계월드에 인력도 부족하니···,
"좋소. 풀어주지."
"감사합니다아아!"
한번은 봐준다.
제대로 부려 먹어주마.
당군악은 긴고아를 들고 제천대성에게 다가갔다.
"하아,"
제천대성은 긴고아를 보자마자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의 머리에 긴고아를 씌우려 하자,
"젠장! 차라리 날 죽여."
"너무 화내지 말 거라. 이게 너에게 복이 될 수 있으니."
"뭐? 복이라고?"
"선계 멀티플렉스라고 들어본 적 있느냐?"
"···멀티?"
"심심하진 않을 거야. 오히려 선계가 천국 같을 거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무, 무슨?"
"일단 나하고 같이 가서 드래곤볼이나 한편 때려보자. 정말 재미있을걸?"
어리둥절한 제천대성의 표정.
멀티플렉스라니, 드래곤볼은 또 뭐고.
그때였다.
찌르르르르.
당군악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송신호.
"떴군."
그러자 부리나케 달려오는 검선.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스?"
당군악은 공유창고를 확인했다.
"왔."
검선이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으하하하! 내가 누구? 검선? 아니다. 컨퍼터블 오픈카 오너로다!!!"
당군악은 공유창고 물건을 빼내고 천도부터 집어넣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오로지 천도와 그걸 복용할 때 주의점을 담은 편지만.
그리하여 당군악은 기어코 천도 지구 배송을 성공시키고야 말았다.
< 한번은 봐준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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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환의 마법진 >
모스크바 전쟁 기념박물관.
마츠모토, 욘슨, 아브라힘, 카르멘 등, 블랙 마피아 장로들이 그곳에서 은신 중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테러를 일으켜 기어코 내전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론 탄탄대로였다.
모스크바 전역에 깔아둔 흡수 마법진.
흡수 대상은 전쟁으로 사망한 인간의 영혼 및 사념.
흑마법 연성의 재료가 되는 귀중한 자원들이었다.
겸사겸사 시체들은 언데드로 만들고.
각 마법진은 서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흡수한 사념과 영혼은 드렉 카락스, 주인님이 계신 곳으로 전달되고.
그리하여 그분은 인간의 격을 초월하는 신이 되실 것이다.
이곳 전쟁 기념박물관은 모스크바 곳곳의 마법진에서 전해오는 기운을 한데 모아 최종목적지로 보내는 중간 거점의 역할.
그래서 자신들도 일부 수혜를 입었다.
비록 직접적인 영혼 연결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원념을 이용한 흑마법 계약으로 마계와 간접 연결했다.
아아아아!
경험하고야 말았다.
이전엔 결코 접하지 못했던 순수한 마기의 향연을.
또한 목격했다.
마계에서 살아가는 초월적 존재들을.
연결은 극히 짧았다.
하지만 덕분에 7클래스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던 흑마법 경지가 단번에 8클래스로 뛰어올랐다.
그럼에도 의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퍼즐만 맞추면 되겠군요."
"뭐, 할 일 다 했으니 기다리는 것만 남았습니다."
"알렉스 카이사르, 그놈이 완성해줄 겁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에요. 유럽 제국군이 모스크바로 진군해 올 때까진."
의식의 완성은 시간문제일 뿐.
그런데?
툭!
"어?"
"아!"
"이, 이런!"
"···모두 느끼셨습니까?"
모두가 알았다.
마법진 하나가 파괴됐다.
포탄이 명중돼도 끄떡없게 만들어졌는데.
"대체 왜?"
"우연한 사고일지도."
"천만에요. 마법진을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진 않았습니다."
"누가 직접 가서 살펴봐야···,"
그때였다.
툭!
"···또?"
"허어,"
"우연은 아니군요."
또 파괴된 마법진.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하나 더···.
툭!
"제기랄!"
"이번엔 크렘린 마법진이죠?"
"맞아요. 거긴 데스나이트가 지키는 곳인데."
3개가 연달아 파괴됐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누굴까요? 왕당파? 아니면 공화파?"
"제3의 인물일 수도, 보통 각성자로는 불가능해요."
"마스터가 3명 이상 포함된 레이드 팀이라면 가능할지도."
"천만에요. 고작 시스템 각성자가 부술 수 있는 마법진이 아닙니다."
"혹시?"
뭔가 생각난 듯 아브라힘이 고개를 번쩍 들면서 말했다.
"···김태주?"
"그럴 리가요. 그놈은 태평양에 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어제 양산항에 들어왔다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오려면 소요되는 시간이 있는데."
"김태주 말고는 없어요. 지금 전쟁을 일으켜 의식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그놈 때문이 아닙니까?"
변수가 생겼다.
의식이 실패할 수도 있는 크나큰 변수.
마츠모토 장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께 말씀드려야 할까요?"
장로들의 시선이 카르멘에게 집중됐다.
그분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그녀.
"안 됩니다. 현재 그분께선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절대 방해하면 안 돼요."
"그럼 놈이 마법진을 다 파괴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단 말입니까?"
마법진이 다 사라지면 의식이고 뭐고,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곰곰이 생각하는 카르멘.
그러다가.
"일단 제가 처리할게요."
"카르멘 장로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네, 여러분들은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르멘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주인님께선 의식이 끝나기 전까진 절대 김태주와 맞서지 말라고 하셨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마법진 연결선을 따라오는 거야. 앞에서 미리 기다려야겠어.'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무력만이 능사가 아니다.
카르멘이 8클래스에 올라서면서 계약한 마계의 존재는 서큐버스퀸.
꿈의 권능을 가진 대악마.
서큐버스퀸의 능력이라면 가능하다.
직접 부딪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은 꿈에서 이루어질 테니까.
특정 대상을 꿈속으로 인도하는 몽환의 흑마법진.
그 안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실패해도 상관없다.
자신만 죽으면 되니까.
혼자 죽나?
무조건 그놈을 끌고 간다.
하지만 영원히 죽는 건 아니다.
주인님께선 반드시 자신을 부활시켜주실 것이다.
※ ※ ※
태주는 계속 마기 송신선을 따라갔다.
매번 똑같다.
일익삼백이는 언데드 처리.
자신은 마법진 파괴.
'뭐가 이렇게 많아?'
곳곳에 마법진이 있었다.
주로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만 골라서.
백화점, 관공서, 대형 식당가, 학교···,
'이걸 어떻게 다 새겼지?'
오래전부터 계획했을 것이다.
아마 파주에서 자신과 접촉했을 때부터.
하지만 무조건 다 파괴했다.
그곳을 지키는 언데드도.
'이 정도면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텐데···,'
아직 모자라나?
그럼 계속 부수지 뭐.
이번에선 꽤 큰 선이 보인다.
그 선을 따라가는 태주.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군부대?'
하지만 군인 언데드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진은 총사령부로 추측되는 건물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이백아!"
"야아앙,"
"넌 나가서 언데드 있는지 찾아봐. 찾으면 보내드리고."
"앙!"
이백이가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후,
스슷!
태주는 신령비도(神靈飛刀)를 꺼냈다.
다른 어떤 암기보다 선기가 가장 많이 담긴 신선의 보패.
마법진 중앙에 꽂기만 해도 끝나버린다.
푸욱!
파사사사사사사!
힘을 잃고 사라지는 마법진.
'좀 싱겁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음?"
요동치는 마기의 기운.
찐득하고 추악한 악취.
냄새는 머리 위에서 풍겨왔다.
"천장···,"
태주는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봤다.
화아아악!
순식간에 천장에 그려진 마법진이 발동했다.
'뭐지?'
마기가 밑으로 엄습해왔다.
'어쭈?'
태주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마기를 느꼈다.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진 같은데···,
하지만 조잡하다.
허술하기 그지없다.
'부숴버릴까.'
선기를 일으키고, 신령비도를 한번 휘두르기만 해도 이런 엉성한 마법진은 단번에 파괴할 수 있다.
'···아니야.'
마법진을 부수고 다닌 이유 중 하나.
바로 이런 짓을 벌인 놈을 만나기 위해서다.
가만히 있으면 나타나 줄 텐데,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태주는 순순히 당해주기로 했다.
무슨 짓을 하는지 보자.
이윽고,
슬슬 흐려지는 시야.
살짝 졸린다.
반은 자고, 반은 깨어있는 상황.
'자각몽 같은 건가.'
순간!
촤라라라락!
변하기 시작하는 건물의 구조.
벽과 바닥이 넓혀지면서 둥그런 원형의 경기장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어느새 커다란 의자에 앉아있는 태주.
저 멀리 맞은 편에도 누군가 앉아있었다.
여자였다.
당연히 흑마법사일 테고.
드디어 만났다.
"네가 김태주로구나."
"넌? 에드워드가 말한 그분이란 새끼는 남자였었는데···, 블랙 마피아 장로인가?"
"···닥치거라! 한낱 인간 주제에 감히 그분을 입에 올려?"
"안 될 건 뭐가 있어? 뒤에서 숨어 부하나 보내는 겁쟁이 새끼인데."
"건방진 놈, 내 몽환의 마법진에 걸려들고도 입만 살았구나."
"당해준 건데?"
"깔깔깔, 그래, 당해줘서 고맙구나."
카르멘은 확신이 생겼다.
이번 싸움의 승패는 대상이 몽환의 마법진에 걸려드느냐, 아니면 벗어나느냐에 있었다.
만약 벗어났다면 그대로 도망쳐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지만, 걸려든 이상 자신이 승리한 거나 마찬가지.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글쎄, 경기장인 건 알겠네."
"여긴 우리가 함께 꾸는 꿈속이다. 더불어 각자의 전리품을 걸고 대결하는 전투의 장, 승리하는 자가 모든 걸 가지게 되지."
꿈속이라, 예상은 했다.
"어쨌거나 싸우자는 거잖아. 그럼 뭘 기다려? 어서 덤벼."
"흐응, 너무 급하게 달려들진 마. 먼저 전리품을 걸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 걸자. 근데 뭘 걸지?"
"먼저 계약부터 하자꾸나."
순간!
스르르륵!
경기장 중앙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카르멘이 결투를 요청해왔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오! 희한하네. 꿈속이라 그런가? 그나저나 네 이름이 카르멘이었어?"
"딴청 피우지 말고 답이나 해라. 왜? 겁먹었느냐?"
"에이, 설마, 좋아! 받아들이지."
[결투가 성립되었습니다.]
[전리품을 결정하십시오.]
카르멘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놈은 절대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다.
승리하기 전까진.
그러나 놈이 승리할 일은 절대 없다.
"내가 먼저 정할게."
[카르멘이 요구하는 전리품은 '김태주의 목숨과 육체'입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 이기면 가져가."
[성립되었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전리품을 요구하십시오.]
뭘 걸까?
"내가 원하는 건···,"
[김태주가 요구하는 전리품은 '블랙 마피아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직접 와서 털어놓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겨우? 네 목숨에 비해 조금 모자란 것 같은데."
"괜찮아. 그거면 돼."
"호호호, 좋다. 주겠다. 내가 지면 즉시 널 찾아와 모든 걸 말해주지."
카르멘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까짓 정보?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또한 절대 지지 않을 테고.
[전리품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스르르르륵,
태주의 가슴으로 스며드는 마기 한 조각.
그러더니 심장을 파고들면서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끈적하고 농밀했다.
여태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마기보다 더.
"이제 싸워볼까?"
빨리 끝내자.
이 웃기지도 않은 결투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얻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몽환의 마법진을 통한 대전사 결투가 곧 시작됩니다.]
[계약자 본인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대신 싸울 대전사를 지정해 주십시오.]
"···대전사?"
이건 또 뭐야?
직접 싸우지 않고 대신 싸워줄 사람을 정하라고?
"대전사 결투라는 말은 사전에 없었잖아?"
"으흥? 몰랐니? 이게 바로 악마의 계약이야."
"···불공정 계약이네."
"그게 본질이지. 그래서 악마와의 계약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란다."
비릿한 미소의 카르멘.
기어코 해내고야 말았다.
김태주는 이미 죽어있는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뿐인가?
'놈의 육신으로 언데드를 만들면···,'
그분이 얼마나 자신을 칭찬하실까?
"미천한 인간아! 가련한 영혼 연결자여, 네가 믿고 있는 다른 세상이 결국 인간의 세상에 불과하다는 걸 오늘 깨닫게 될 것이다."
카르멘은 손을 들었다.
"네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존재가 누구더냐? 그랜드마스터? 9서클 대마도사? 지혜를 깨달은 대현자? 아니면 드래곤?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
츠츠츠츠츠츳!
경기장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었다.
"난 악마의 세상을 보았다."
쿠쿠쿠쿵!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낸 카르멘의 대전사.
"인간계가 아닌 마계, 불사의 격을 획득한 초월 존재들이 수도 없이 널려있는 상위 차원, 소개하마. 마계의 도살자, 이모탈킹이다."
흉측한 모양의 머리통,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눈알이 머리통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려있었고, 집채만 한 몸체에, 길고 두꺼운 꼬리, 이족 보행이지만 달린 팔이 양쪽 합쳐 8개.
아아!
카르멘은 환희에 젖었다.
이모탈킹, 육체 능력으로만 따지면 마왕보다 더 강하다.
드래곤 로드도 갈가리 찢어버릴 힘을 가졌다.
인간이 상대하기엔 절대 불가능한 극강의 마계 괴수.
"내가 목격한 가장 강한 존재란다. 마계에서 실재하고, 너도 빨리 정하렴."
"어···,"
이미 승리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의 카르멘.
"여긴 가상이지만 실재이기도 하지. 그래서 실존하지 않는 존재나, 네가 경험하지 못한 존재는 불러올 수 없어. 그래도 발버둥 쳐보려무나. 어차피 네 빈곤한 경험이 발목을 잡을 테지만."
태주는 깨달았다.
대전사 결투의 방식을.
여긴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몽환의 마법진.
꿈속에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
그렇다면 눈앞의 저 괴물도 꿈속에서 생성된 허상.
하지만 어딘가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놈이다.
저 흑마법사 카르멘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마계라는 곳에서 말이다.
'실존하는 대상만 꿈속으로 불러올 수 있단 말이지?'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직접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함정을 팠던 것이고.
만약 대전사 결투에서 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 내 심장에 파고든 마기가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겠지.'
이제 선택해야 할 때.
아예 판을 엎어버리느냐, 아니면 꿈속 대전사 결투에 응하느냐.
엎어버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까짓 심장의 마기?
선기를 움직여 몰아내면 그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리품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블랙 마피아에 대한 모든 정보.
그래서,
"야! 하나만 물어보자."
"잔머리 굴릴 생각은 버려라."
"그게 아니라···, 이거 처음부터 불공정 계약이잖아. 그럼 전리품은? 내가 이겼는데 전리품을 얻지 못하면?"
"깔깔깔, 정말 이길 생각이구나. 허나 걱정하지 마라. 내 마나에 걸고 맹세하지. 네가 승리하면 온전한 전리품을 획득하게 될 거야."
"그래? 그럼 뭐···,"
대전사를 찾아보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일이삼백이.
본체로 변신하면 크기 정도는 이모탈킹에 뒤지지 않을 테고.
그러나 부족한 감이 든다.
카르멘의 대전사는 불사의 격을 획득한 초월적 존재라고 하지 않았나.
마계에서도 불러올 수 있다면···, 선계는?
'독선 당군악.'
[자기 자신은 직접 결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흐음, 나 자신이라서 안 된다는 거지?'
제법 정교한 흑마법진이었다.
어떻게 당군악과 자신이 같은 영혼인 줄 알았을까.
그래서 결정했다.
태주도 손을 들었다.
'될까?'
그러자,
스스스스슷!
이모탈 킹 앞에서 생성되는 한 명의 인간.
'오! 진짜 되네?'
태주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존재였다.
독선에게 이야기도 들었고, 동영상으로도 봤고, 세 번째 영혼 연결에서도 경험했다.
선계의 최강자.
태주의 꿈속 대전사는 바로 검선(劍仙)이었다.
※ ※ ※
선계.
멀티플렉스 1층은 여전히 신선들로 북적였다.
신선들의 사교 공간.
지구로 따지면 리더스 클럽 같은 곳.
주선이 운영하는 칵테일 바도 있고, 각종 간식을 파는 매점에, 연초를 피우는 흡연자들을 위한 전용 공간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푹신한 안마의자가 있어 신선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철장 선인이 1층 멀티플렉스로 들어왔다.
"주선, 검선 어디 있소?"
"저기 안마의자에···, 음? 자고 있나?"
"아니, 이 양반이! 일을 시켜놓고 자신은 퍼질러 자?"
"근데 무슨 일 때문에?"
"검선이 스포츠카 몰다가 접촉사고 냈잖소."
"아! 그···, 앞 범퍼가 긁혔다는 거? 내가 보기엔 표도 안 나던데."
"내 말이! 이물질만 묻었지, 페인트가 벗겨지지도 않았던데, 그래서 반들반들하게 광이나 내줬소."
스포츠카를 신주 모시듯 애지중지하는 검선이었다.
독선에게 받자마자 도로를 달리다 가드레일에 살짝 스쳤었다.
그래서 철장 선인에게 수리를 부탁한 거고.
철장이 안마의자에 누워 자는 검선을 흔들어 깨웠다.
"이보오, 검선! 일어나시오, 차 수리 다 끝났소."
하지만 싱글벙글 미소 띤 채 여전히 쿨쿨 자고 있는 검선.
"허허, 안 일어나네. 무슨 재미난 꿈이라도 꾸는가 본데."
"놔두시오. 때 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 몽환의 마법진 > 끝
ⓒ 꾸찌꾸찌
=======================================
< 여전히 선계는 변화 중 >
비록 꿈속이지만,
태주는 검선이 너무너무 반가웠다.
진짜 현실에서 검선을 만난 듯한 기분.
당군악이 보내준 스마트폰 영상 속 검선의 모습과 그대로였다.
짧게 자른 머리, 단정하게 정리한 수염, 그리고 핏이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양복, 명품구두와 손목시계.
거기에 검까지 등에 메고 있으니.
'누가 저분을 신선이라고 여기겠어?'
재벌 회장이면 몰라도.
아니면 현역 모델?
'이건 뭐, 당장 무대에서 워킹 시작해도 되겠네.'
완벽한 미중년의 모습.
웬만한 모델은 뺨 칠 정도.
'스포츠카는 잘 받았겠지?'
만리비검도 그렇고, 할리 바이크도 그렇고, 이번엔 스포츠카까지, 탈것을 너무나 사랑하는 검선이었다.
전에도 쭉 생각했었지만 저분은 선계가 아니라 지구에서 사는 게 더 잘 어울린다.
과연 검선은 꿈속에서도 자신을 알아볼까?
태주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봤다.
"안녕하세요, 검선님!!!"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손 인사를 해오는 검선.
"반갑네, 태주 대협!!!"
그러고는 이모탈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손날로 자신의 목을 긋는 몸짓을 보여주면서,
"죽일까?"
태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제가 직접 싸울 수 없는 처지라서."
검선이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랗게 만들었다.
"오케이!"
※ ※ ※
관전 모드로 한 손은 턱에 괴고, 다리를 꼰 채 의자에 편하게 앉아있는 카르멘.
그녀는 조소했다.
저것이 김태주의 한계였다.
놈이 꿈속 대전사로 불러온 존재는 결국 인간.
그것도 지구인이 분명했다.
명품 수트에 구두, 손목시계까지 착용한 걸 보면.
누굴까?
삼한의 황제? 아니면 2인자라던 황궁 비서관?
"호호호, 가소롭구나."
영혼 연결자이면서도 경험의 깊이가 저렇게 얕을까?
자신이 아는 절대자가 겨우 저 노인네?
게임은 끝났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이모탈킹을 상대해?
카르멘은 서튜버스퀸과 계약을 맺었다.
그녀에게 가장 적합한 대악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큐버스퀸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초극강의 악마.
그가 바로 이모탈킹.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만 남아 눈앞에 보이는 건 일단 파괴하고 만다.
육신은 그 어느 악마보다 강하더라도, 결코 고위 귀족, 혹은 마왕이 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
그래서 더더욱 좋았다.
몽환의 마법진 대전사로는 안성맞춤.
이모탈킹에 비해 김태주가 만든 꿈속 대전사는 얼마나 초라한지, 검 한 자루를 들고 있긴 하지만 저걸로 가죽이나 벨 수 있을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
김태주가 자신의 꿈속 대전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쳐도,
"···무슨?"
김태주의 대전사 노인도 화답하고 있었다.
그것도 직접 대화로서.
"···."
저게 가능해?
대전사 시스템.
실제 존재가 꿈속으로 소환되는 건 아니다.
저 이모탈킹도 카르멘, 자신이 경험한 기억이 몽환의 마법진 속에서 재구성되어 나타난 존재.
즉, 서큐버스 퀸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복사본 같은 거다.
진짜가 아니다.
그러므로 서로 교감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몽환의 마법진에서 꿈을 꾸는 존재는 2명이다.
자신과 저 김태주.
'설마···,'
카르멘은 몽환의 마법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여기 들어와 있는 존재는 몇 명이지?'
[현재 몽환의 마법진에서 함께 꿈을 꾸는 개체는 모두 3명입니다.]
잘못 들었나?
'3명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 ※ ※
검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경기장에 꼿꼿이 선 검선.
마계의 대악마라는 이모탈킹은 크게 포효했다.
"쿠오오오오!"
쿵쿵쿵쿵!
자신의 앞에 있는 건 무엇이라도 부수겠다는 듯, 거대한 두 다리를 움직여 걸어오는 이모탈킹.
나지막한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육체 능력으로는 마왕도 어찌하지 못한다는 파괴의 대악마.
하지만 검선은 태연했다.
저깟 요괴 따위가 뭐가 대수냐는 듯.
검이 허공에 띄워졌다.
손에 든 건 한 자루였지만,
슈웃, 슛! 슛! 슈슈슈슈슈슛!
무형의 기운에 의해 만들어진 검.
바로 선검(仙劍)이었다.
계속해서 띄워졌다.
백 자루, 삼백 자루, 오백 자루···, 천 자루, 이천 자루.
마침내 꿈속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제천대성과의 전투에선 이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독선이 비슷한 걸 이미 하고 있었으니까.
캐릭터가 겹치지 않나?
그건 절대 참을 수 없다.
또한 독선이 움직이는 암기 수가 더 많고.
그래서 일격필살의 이기어검이나 신검합일만 사용했다.
'자, 시작해볼까?'
태주 대협이 친히 부탁해왔다.
자신을 가장 믿고 있다는 의미.
그럼 깔끔하게 처리해줘야지.
꿈속이라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맛은 느껴질 터.
츠피피피피피핏!
강기로 만들어진 수천여 자루의 선검이 동시에 어검 비행했다.
마치 SF 영화에서나 나오는 레이저 광선 폭격 장면 같았다.
※ ※ ※
카르멘은 벌떡 일어났다.
보고 있는 광경이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 김태주가 꿈속 대전사와 서로 교감한 건 그렇다 치자.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같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도 넘어가자.
그런데 저 노인 정체는 뭐지?
지구에 저런 자가 있었나?
엄청난 능력이었다.
양복을 입은 채 무형의 강기로 검을 형상화해 자유자재로 움직여?
수천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폭격하듯 쏟아졌다.
콰콰콰콰! 콰콰콰콰콰콰콰콰!
수천 개의 벼락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저 빛이었다.
푸푸푸푹! 푸푸푸푸푸푸푹!
단 한 자루도 빗나가지 않고 이모탈킹에게 박히는 빛의 검.
머리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상체, 가슴, 허리, 하체···,
이모탈킹이 걸어가는 도중에 녹아내렸다.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했다.
이걸 결투라고 말할 수 있나?
김태주의 노인 대전사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검을 만들어 띄우고, 무심하게 손을 내려 떨어뜨렸다.
'···신?'
신이라고 가정해야 저런 위세가 가능하다.
그래야만 설명이 된다.
몽환의 마법진으로 난입한 이유도 알겠다.
서큐버스퀸의 권능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 걸 보면 최소, 반신, 데미갓이 틀림없다.
"이건 사기야! 사기! 계약은 무효야!"
카르멘이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몽환의 마법진을 통한 대전사 결투가 끝났습니다.]
[승리자는 김태주의 대전사입니다.]
[전리품 계약을 실행합니다.]
"안 돼!"
그리고,
째째재쟁!
몽환의 마법진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부서졌다.
※ ※ ※
태주는 잠에서 깼다.
그러자,
"냐앙!"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일백이.
"너 언제 왔어?"
"냐아아아아,"
"벌써 왔다고? 아하, 옆에서 지키고 있었구나."
"냐앙?"
"피곤해서 잔 건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돼."
아쉽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검선과 헤어졌다.
검선이 너무 빨리 이모탈킹을 죽였기 때문이다.
조금만 시간을 끌어주지.
그랬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아무튼 간에.
'후우, 무시무시했어.'
검선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강기 덩어리로 이루어진 수천 개의 검.
그것이 한꺼번에 내려꽂히는 광경이란,
'마치 만천화우와 비슷한 느낌이야.'
만류귀종.
각기 다른 흐름이라도 궁극에 이르면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진다더니.
그에 반해 이모탈킹?
마계의 대악마라고?
'대'자는 빼자.
그냥 좆밥 악마였다.
'참! 전리품은?'
그때였다.
쓔우우우웃!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와장창!
총사령부 방안 창문을 깨고 방안으로 데굴데굴 굴러온 여자 하나.
전리품이 신속 배달됐다.
"카르멘?"
"···으아아아! 마, 말도 안 돼. 넌 대체 뭐야? 그, 노인은 누구였지? 신? 정말 신이야?"
머리를 산발한 채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는 카르멘.
웬만하면 받아주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
"전리품 내놔."
"으아아아아,"
"빨리!"
"브, 블랙 마피아는···,"
카르멘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정보들.
두목의 정체와 이름, 어떻게 조직이 만들어졌는지, 무슨 일을 해왔는지, 그리고 왜 모스크바 내전을 일으켰는지, 의식의 진행 상황과 다른 장로들이 숨어있는 곳.
'흐음.'
카르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 진실이었다.
모든 걸 다 알아냈지만 하나가 빠졌다.
"드렉 카락스는 어디 있나? 영혼 연결자, 너희들 두목 말이야."
"그, 그건 나도 몰라. 모스크바 어딘가에 계시겠지."
"정말?"
"내가 아는 건 다 이야기했어. 맹세코."
판관의 반지가 잠잠하다.
카르멘이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가장 가까운 심복에게까지 자신의 거처를 숨기다니.
아무튼 카르멘은 어떻게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우우우우웅!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하는 그녀의 몸.
"허억!"
알만하다.
"너도 금제를 당했구나. 에드워드처럼."
"아아아아···,"
"쯧쯧, 그분, 그분 하더니, 결국 너도 버려진 거냐?"
전리품 계약이 끝난 직후, 발동해버린 금제.
카르멘이 필사적으로 태주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아, 아니! 난 살 수 있어. 부활할 거야. 그러려면 넌 여기서 죽어야 해. 가, 같이 죽자! 같이···,"
순간!
"캬악!"
어느새 도약한 일백이가 앞발로 카르멘의 관자놀이를 냅다 후려쳤다.
츠핏!
콱!
"악!"
머리가 한 바퀴 돌았다.
동시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벽으로 처박히는 카르멘,
꽈당!
그리고,
펑! 하고 터져버리고 말았다.
"으음···,"
"냥?"
"아니, 잘했다."
이제 다음 장소로.
나머지 장로 3명의 은신처라는 모스크바 전쟁 기념박물관.
거기 가보면 드렉 카락스의 은신처를 알아낼 수 있겠지.
어차피 마법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때!
쿠쿠쿠쿠쿠쿠쿠쿵!
"헛!"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드드드드드드드···,
모스크바 군부대 건물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뭐지?"
깨어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버섯구름.
"이런 미친 새끼가!"
핵폭발이었다.
방향은 모스크바 전쟁 기념박물관이 있는 곳.
꼬리 자르기를 이런 식으로?
"하아,"
이럴 때가 아니다.
스팟!
태주는 즉시 움직였다.
수초 후, 충격파가 덮쳐올 것이다.
일백이를 안아 든 태주는 표홀질풍보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만리비검에 올라탄 후, 핵이 터진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았다.
※ ※ ※
선계(仙界).
멀티플렉스 1층.
신선들이 소복하게 모여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정신없이 설명하는 검선.
"아니 글쎄, 슬슬 졸리기 시작하더라고."
"그런데?"
"이상하지 않소? 갑자기 졸린다니, 이게 말이나 되오?"
"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하선고요? 잠잘 시간도 아까운데,"
"뭐? 왜 날 끌어들여? 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뭐야?"
하선고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선은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다.
"딱 보면 모르겠소? 이건 누군가가 일부러 유도한 거야. 날 잠이 들게 하려고."
"그래서 잤소?"
"처음엔 안 자려고 했는데, 그냥 당해주기로 했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꿈에서 누가 보였는지 아오?"
"뭐, 인간계에서 만났던 첫사랑이라도 만났나 보군."
"어허, 내가 첫사랑이 어디···, 험험, 아무튼 누구였나 하면,"
"거참!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보시오."
"태주 대협이었소. 그가 날 꿈속으로 부른 거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바짝 다가오는 신선들.
"태주 대협?"
"그렇소."
"꿈에서 뭐 했는데?"
"요괴 하나 처리해달라더군. 그래서 처리해줬소."
"또?"
"뭐, 그게 끝이오. 하지만 너무나 생생했단 말이지."
앉아있던 신선들이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하나둘씩 일어났다.
"쯧쯧, 어디서 개꿈을 꾸고 와서는."
"잔뜩 기대한 내가 잘못이오."
"에이, 괜히 시간만 버렸네."
"꿈에서 요괴 잡은 게 뭐 대단한 거라고, 현실에서 잡아도 시원찮을 판에."
검선은 억울하고 답답했다.
"아니, 진짜 태주 대협이 꿈속으로 날 불렀다니까? 서로 인사도 했소."
"원래 그렇소. 개꿈일수록 더 생생한 법이지."
"허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이렇게밖에···,"
"됐고,"
귀곡이 손뼉을 짝짝 치면서 말했다.
"자자, 쓸데없는 검선 이야기 듣느라 시간 낭비했으니 이제 일이나 합시다. 오늘까지 설치 완료해야 하오."
얼마 전 지구에서 도착한 배송.
검선이 기다리던 스포츠카도 있었지만 선계 인트라넷 설치를 위한 통신 장비도 있었다.
당군악의 선계 발전 계획의 청사진.
신용패의 사용은 곧 중단될 것이다.
앞으로 굳이 멀티플렉스에 오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을 통해 결제도 하고, 영화도 보고, 물건 주문도 가능하게 할 생각.
일명 선계 페이.
그러려면 인트라넷 설치가 시급하다.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영상 매뉴얼을 통해서.
"태주 대협 동생이라는 김동훈이라는 청년 말이오. 아주 똘똘하더군."
"맞소, 혹시 귀곡과 같은 영혼 아니오?"
"허허, 어찌나 자세하게 설명해주던지, 우린 따라 하면 그만이잖소."
먼저 부분적으로 광통신 케이블을 깔아야 한다.
상위 계 전체를 무선으로 커버할 순 없는 일이니까.
메인 서버 건물은 멀티플렉스 옆쪽에 지어놨다.
그곳에서 광케이블이 선계와 천계로 뻗어나갈 것이다.
그럼 황천계는?
독선에게 인트라넷 계획을 들은 염라는 황천계 업화궁과 선계를 연결하는 문, 즉 상설 게이트를 설치했다.
닫히지 않고 언제나 유지되는 문.
그걸 통해 광케이블을 연결하면 그만.
남은 건 전용 앱과 어플이 깔린 스마트폰.
이미 태주와 이야기가 끝났다.
다음 배송 때 선계로 도착할 것이다.
"그나저나 원숭이는 뭐 하고 있나?"
"상영관에 틀어박힌 지 한참 됐소."
주선이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독선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죄인이나 다름없는 새낀데, 차라리 황천계로 보내버리지."
"맞소. 염라도 벼르고 있던데, 해맑이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대가리가 터졌을 거요."
"쩝, 벌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반대로 포상을 내리게 생겼으니."
"내 말이 그 말이오! 우리가 선계 발전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소? 헌데 그놈은 영화관에서 꿀이나 빨고 말이야. 이게 무임승차지."
"해맑이 봐서 참읍시다."
어쨌거나 선계의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 여전히 선계는 변화 중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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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대전쟁의 시작 >
모스크바 한가운데에서 핵이 터졌다.
유럽 제국 정보국 M-19가 그 사실을 인지했고, 국장 오거스트는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래?"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흐음,"
중국 멸망 이후.
핵무기 사용은 절대 금기였다.
그런데 모스크바에서 핵이 터졌다.
군대를 밀어 넣어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스 카이사르는 뭔가 부족한 듯한 표정.
살짝 실망스럽다.
언데드를 일으킬 것이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확대할 것이지.
게다가 핵은 또 뭔가?
네크로맨서답지 않게.
"모든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명령만 내리시지요."
알렉스는 주저하고 있었다.
지금 전쟁을 일으켜도 상관없다.
하지만 고작 모스크바에 국한된 언데드 무리와 핵폭발만으로 '무대'를 만들기엔 충분치 않다.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인 트릴리안 랜서는 황제이기 전에 영웅이었다.
마왕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 대륙민을 구원하면서 전 세계를 통일한 단일 제국을 건설했다.
자신도 영웅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협하는 악마를 물리치고, 인류를 구원해 세계 평화를 이룩하는 메시아.
그리하여 지구 통일 제국의 정당한 지배자로서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고.
영웅은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법.
그렇지만 고작 언데드 몇 마리와 핵폭발 한 번이 과연 납득할 만한 시련이라 부를 수 있을까?
'드렉 카락스, 이정도밖에 안 되나? 실망이군.'
그런데.
지이잉!
오거스트의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알림음.
확인해보니.
"···어."
"무슨 일이냐?"
"핵이 또 터졌습니다."
"위치는?"
오거스트가 황제의 집무실 벽에 걸린 지도에서 한 지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추정되는 장소는, 여기옵니다."
"거기라면···, 오!"
눈을 반짝 빛내는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
드렉 카락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렇지.
네크로맨서라면 저 정도는 해줘야지.
마침내 판이 깔렸다.
"오거스트."
"네!"
"전군 출진을 명령한다."
"네! 알겠습니다. 폐하께 영광을!"
영웅이 탄생할 무대가 완성되었다.
드렉 카락스는 그 밑거름이 되어줄 터.
놈이 아무리 힘을 키웠어도 소용없다.
소드카이저, 그건 자신이 가진 힘의 일부분일 뿐.
알렉스 카이사르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군대였다.
자신의 명령 하나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첨단의 현대 화기로 무장한 지상군과 공군.
언데드?
사르르, 녹여버리면 그만이다.
※ ※ ※
쿠쿠쿠쿠쿠쿵!
드렉 카락스는 카르멘이 금제에 걸려 사망한 걸 확인하자마자 주저 없이 단추를 눌렀다.
'문제없이 잘 터졌군.'
폭발은 실험일 뿐이다.
그저 잘 터지는지 확인하는 절차.
더불어 흑마기의 힘을 강화하는 것.
전쟁 기념관에 숨어있던 블랙 마피아 3명의 장로들은 핵폭발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장로들이 사망하자 계약에 의해 종속됐던 그들의 영혼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흑마기의 양분이 되어줬다.
'좋아.'
모두 8클래스에 올랐던 노예들이라 마기의 양이 쏠쏠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으니 가던 길을 변경해야지.
원래는 알렉스 카이사르의 유럽 제국군까지 끌어들여 의식을 완성하려 했지만···, 새판을 짜는 것도 괜찮은 방법.
드렉 카락스가 숨어있던 곳은 모스크바 동쪽의 마수 밀집지대 근처였다.
이곳의 마수 밀집지대는 모스크바 왕국보다 면적이 더 크다.
드렉 카락스는 아공간 가방에서 흑마법으로 제련된 언데드들을 꺼냈다.
모두 10기의 데스나이트.
또 다른 아공간 가방에선 전술 핵탄두를 꺼냈다.
모스크바 내전 과정에서 입수한 것만 무려 6개.
그중 하나를 터뜨렸으니 남아있는 핵탄두는 5개.
핵탄두 하나당 두 명의 데스나이트가 붙었다.
한 명은 핵탄두를 들쳐메고, 다른 한 명은 옆에서 호위하고.
이동하다 엘리트 마수를 만나면 핵탄두를 지켜야 하니까.
"가라!"
재빠른 속도로 마수 밀집지대 안으로 흩어지는 데스나이트들.
넓게 퍼졌다.
소형 전술 핵탄두라 위력이 그닥 별로.
그래서 배치를 잘해야 한다.
마수 밀집지대 전체에 골고루 영향을 줄 수 있게끔.
드렉 카락스는 안전지대로 대피했다.
그리고 자리가 제대로 잡혔는지 확인한 후,
쿠쿠쿠쿠쿠쿠쿵! 쿠쿠쿠쿠쿵!
핵탄두 5기가 마수 밀집지대에서 한꺼번에 터졌다.
피어오른 버섯구름이 5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드렉 카락스는 플라이 마법으로 하늘을 날아 폐허가 되어버린 마수 밀집지대 위에서 지팡이를 들었다.
스스스스스슷!
핵폭발로 생긴 방사능이 드렉 카락스에게 흡수되었다.
이 또한 에너지.
흑마기가 방사능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
"일어나라!"
네크로맨서의 정점.
마신과의 계약을 통해 불멸의 반신, 데우스 리치로 변한 드렉 카락스.
그의 지시에 따라 죽었던 마수들이 일어났다.
일반 마수들은 물론, 엘리트 마수와 비행 마수들까지.
죽진 않았어도 핵폭발에 휘말려 부상 당한 놈들도 언데드로 변했다.
멀쩡하게 살아남은 놈들 또한 드렉 카락스의 종복이 된 마수의 공격에 죽어 언데드가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뿌득, 우드득, 으득!
오랜 세월 동안 인간에 의해 토벌되어 묻혔던 수많은 마수도 새로운 몸을 얻어 땅에서 솟아 나왔다.
한마디로 마수 밀집지대 전체 마수가 다 언데드화.
그 수만 해도 수십만.
"가자."
쿵! 쿵! 쿵!
수십만 마리의 언데드 마수 군단이 진군을 시작했다.
데우스 리치, 드렉 카락스는 만족하지 않았다.
망해버린 도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이르러자,
"일어나라!"
손짓 한 번에 무덤을 뚫고 기어 나오는 인간 시체들.
군세가 점점 늘어났다.
온통 언데드였다.
※ ※ ※
태주는 핵폭발이 일어난 후, 모스크바 왕국 밖으로 멀찍이 피해 있었다.
만리비검을 탄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태주와 삼백이.
'치졸한 새끼들.'
명색이 흑마법사 아닌가.
제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까 냅다 핵을 터뜨려?
"니아앙!"
삼백이도 화가 난 듯했다.
드렉 카락스라는 네크로맨서가 벌인 일이 틀림없다.
'난감하네.'
핵은 좀 꺼림칙하다.
게다가 자살 폭탄 테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하는 언데드.
핵무기 하나 등에 지고 악착같이 달려들면?
'그래도 그냥 둘 순 없지.'
그때였다.
쿠쿠쿵, 쿠쿠쿠쿠쿠쿠쿠쿵, 쿵쿵쿵!
저 멀리서 들리는 폭음.
'또?'
그리고 피어오르는 버섯구름들.
'···.'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일단 피하고 보자.
만리비검을 움직여 좀 더 멀리.
저것들은 흑마법사인가?
아니면 핵폭발 성애자인가?
'이건 뭐 가까이 가서 조사할 수도 없고.'
자고로 미친놈들은 상대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삼백이도 같은 생각인가 보다.
"니아아아아···,"
"집에 가자고?"
"니앙!"
"조금만 기다려. 나도 생각 중이야."
고민이 길어졌다.
솔직히 핵폭발이 연달아 터진 판에 계속 추적을 진행하기도 부담스럽긴 하다.
삼한 제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태주는 무한공간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인들이 건 부재중 전화가 엄청났다.
그중에 황제의 직통전화도 있었다.
번호를 눌러서.
"여보세요."
- 제기랄! 이제야 연락이 되는군.
전화 걸자마자 욕이야?
"전원을 꺼놔서 못 받았습니다."
- 거기 모스크바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 자네가 갈 곳이 거기밖에 더 있겠나? 아무튼 핵이 터졌는데도 살아남았나 보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
- 대규모 지진파가 감지됐네. 시베리아 개척부대에서도 관측했고.
"아하, 맞아요. 핵폭발입니다. 한 대여섯 발 정도?"
- 지금 당장 돌아오게. 자네가 낄 판이 아니야. 현재 유럽 제국군이 모스크바로 이동 중이야. 곧 폭격이 시작될 걸세.
"흐음."
- 알렉스 카이사르가 전군 총동원령을 내렸어. 괜히 옆에 있다가 눈먼 폭탄 맞지 말고.
그럴까?
사실 남의 나라 전쟁이다.
또한 군대도 출동했고.
이런 상황에서 계속 남아있으면 그냥 오지랖일 뿐.
"일단 고민해볼게요."
- 빨리 와. 나도 그렇지만 수호도 걱정이 태산이야. 뿐인가? 백서연 사장도, 정연희 지점장도···,
"여, 여보세요? 잘 안 들립니다. 핵폭발 때문인···,"
뚝.
태주는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순간!
찌르르르.
'오!'
그 와중에 선계에서 배송 신호가 떴다.
공유창고를 열어보니.
'응?'
왜 이렇게 썰렁해?
들어있는 건 오직 복숭아 하나.
어쨌든 옮기고 보자.
오늘 보낼 건 잡다한 물건을 비롯해 선계 인트라넷 설치 장비 2차분, 이것까지 설치되면 선계에 무선 인터넷 환경이 완성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 배송에 전용 스마트폰을 보내면 끝.
동훈이가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
쇼핑몰 어플과 즉시 결제용 페이, 그리고 멀티 플레이 게임이라든지, 지구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어플들.
더불어 제작 툴과 관리 프로그램도 노트북 컴퓨터에 깔아 함께 보낼 예정.
'이제 확인해볼까?'
겨우 복숭아 하나다.
하지만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겉보기에도 윤기가 잘잘 흐르는 빛깔.
최특상급 선도라도 되나.
'편지도 있네.'
당군악이 직접 써서 보낸 모양.
태주는 편지를 먼저 읽었다.
동시에 읽자마자 복숭아의 정체를 깨달았다.
"···천도?"
동그래지는 눈.
"세, 세상에! 이걸 왜 나한테···,"
천도라니.
태주도 알고 있다.
서왕모가 관리하는, 선계 최고의 보물이 바로 천도 아닌가?
'혹시 착오가 생겼나.'
이를테면 배송 실수 말이다.
오지 말아야 할 게 온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돌려줘야 한다.
태주는 마저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실수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온 것이 맞다.
심지어.
'···머, 먹으라고?'
그랬다.
먹고 강해지란다.
복용 방법까지 적어뒀다.
아니, 선도로도 충분한데 천도까지?
너무 퍼주는 거 아닌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다시 돌려줄 수도 없고.'
어쩌겠나.
먹어야지.
※ ※ ※
멀티플렉스 상영관.
제천대성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영상물은 움직이는 그림, 애니메이션.
'다중 우주라더니,'
다른 세상의 손오공 이야기.
비록 제멋대로 내용이 왜곡되어 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에서 차용한 것이 분명했다.
이름도 손오공, 근두운도 있고, 여의봉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많다.
특히 여의주 일곱 개를 모아 용 새끼에게 소원을 비는 장면.
뭐가 아쉬워서 용 따위에게.
동해 용왕도 자신에게 쩔쩔매는 판에.
그리고 필살기 중 하나인 장풍.
자신도 할 수 있지만 잘 쓰지도 않는 기술.
힘 모을 때까지 적이 기다려주는 것도 우습다.
나중엔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이야기 흐름이 산으로 올라갔다.
아니, 우주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한 가지는···,
'변신이라.'
본신의 능력을 몇 배로 뻥튀기할 수 있는 기술.
기를 끌어올리면 몸에서 빛이 일어나 머리카락이 솟구친다.
자신도 못 할 건 없지.
먼저 기를 모으고, 밖으로 발산한 후, 빛으로 변환하면···,
화르르르륵!
제천대성의 몸이 찬란한 백염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하, 씨발, 누구야?"
"어떤 새끼가 극장에서 불을 피워?"
"제천대성이잖아? 애니메이션 보고 따라 한 거겠지."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아주 풍년이 났구나."
"누군 따라 하지 못해서 이러는 줄 아나."
"어휴, 단순무식한 원숭이 새끼."
사방에서 욕이 날라왔다.
황급하게 기를 거둬들이는 제천대성.
'평소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들이···,'
그냥 확! 엎어버리고 싶지만,
"원래 저놈들 종특이 따라 하는 거 아니오."
"저러다 선계까지 쪼개버리겠네."
"그전에 대가리가 터질걸?"
"저 새끼에겐 혹성탈출 같은 영화는 보여주지 맙시다. 그거 보고 딴짓할라."
선계와 황천계가 똘똘 뭉쳐 씹어댔다.
"저 원숭이와 같이 영화관에 있다는 것도 기분 나쁘오."
"게다가 공짜로 쳐보고 있잖소."
"조금만 참자고, 곧 있으면 독선이 여래계로 보낼 거라 들었소."
"빨리 보냈으면 좋겠군."
흠칫,
표정이 굳어지는 제천대성.
욕먹는 게 뭐라고.
다만,
'여기서 곧 쫓겨나?'
절대 안 된다.
그 지긋지긋한 여래계에 가서 뭘 한다고?
단 며칠 있었는데도 여기가 너무 좋았다.
영상물 몇 편 봤을 뿐인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선계는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탈출할 생각도 안 했을 터.
'무조건 눌러앉아야 해.'
그러기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문제.
후회스럽다.
시간을 다시 돌리고 싶을 정도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
넙죽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
'독선을 만나보자.'
제천대성은 상영관을 나와 멀티플렉스 1층으로 내려갔다.
신선들이 가득했다.
"뭐야? 원숭이네."
"어휴, 관음은 뭐 하나 몰라, 저 새끼 안 잡아가고."
"저저, 얼굴 뺀질거리는 것 보소. 요즘 아주 살판이 났지?"
"저놈에겐 바나나 우유 한 개도 주지 마시오."
쏟아지는 비난, 그러나 애써 참았다.
무조건 감당해내야 한다.
여기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멀티플렉스 밖으로 나가 선계 월드에 도착하니 독선이 보였다.
슬며시 다가가서.
"···독선."
"뭐요?"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당군악.
'이놈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 간 걸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지.
어차피 여래계로 다시 쫓아낼 예정.
상위 계의 유명한 사고뭉치 아닌가.
여래계에서도 감당하지 못해 자신에게 떠넘긴 놈이고.
물론 처음엔 선계에 받아들일까도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러려고 데리고 왔고.
인력도 부족한 판에 긴고아로 통제해서 일을 시킬 목적으로.
하지만 신선들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보기만 해도 마음에 안 든다고.
굳이 원숭이 힘을 빌릴 필요가 있냐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상영관에 박아두고 쫓아낼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내, 내가 잘못했소. 내가 원숭이라 무식해서 인간의 도리를 배우지 못한 탓이오."
"···."
"죽을 죄를 졌소.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청하오."
조금 놀랐다.
이놈이 보통 놈인가?
미후왕, 제천대성, 투전승불.
이게 다 저 원숭이를 부르는 칭호.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다니.
"제발 쫓아내지만 말아 주시오. 여래계로 갔다간 거기서 말라 죽을지도 모르오."
어떡하나.
이렇게 선빵을 치고 나오니 매몰차게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고.
한 번 더 기회를 줘볼까?
어쨌거나 천도도 무사히 배송했으니까.
"···그럼 일단 더 두고 보겠소. 절대 사고 치지 마시오. 만일 또 비슷한 사태가 발생하면 그땐 해맑이 부탁이고 뭐고, 국물도 없소."
"오! 감사하오."
제천대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용서는 받았고, 이제 남은 건 선계에 일원으로 녹아드는 것.
"말로만 반성하지 않겠소. 행동으로 보여드리고 싶소이다."
"행동?"
"선계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데···, 뭐든 시켜만 주시오. 다하겠소."
"흐음."
당군악은 곰곰이 생각했다.
좋다.
진짜 반성했는지 빡빡 굴려서 확인해보자.
< 유럽 대전쟁의 시작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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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
선계에서 천도가 배송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전쟁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져 버렸다.
천도가 무한공간에 떡하니 들어있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오나?
또한 유럽 제국군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군하고 있으니까 그쪽에서 잘 알아서 하겠지.
'천도 먹으려면 단단히 준비해야겠네.'
조용한 곳에서 폐관 수련이 필요하다.
또한 넉넉한 시간도.
과거 선계에서 보내온 독물, 만년오공 독단, 독각화망 독환, 선학 학정홍 독물.
이것들을 소화하기 위해 폐관에 들었을 때, 그 기간이 무려 거의 한 달이었다.
덕분에 혼원무상독령공 대성을 이뤄냈지만.
이번엔 천도.
역시 폐관해야 하고, 시간도 얼마나 걸릴지 예상할 수 없다.
'배송도 한 번 더 주고받고,'
이번엔 천도 하나뿐이지만 다음 차수엔 선계꽃과 흑암철을 가득 보내겠다고 편지에도 적혀있었다.
선계꽃과 흑암철은 받아두고 시작하자.
태주는 즉시 구례로 갔다.
곧바로 백서연을 만나서.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미안해요. 자꾸 자리를 비워서."
"괜찮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면 그걸로 된 거죠."
백서연도 모스크바에 핵이 터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멀쩡하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름이 아니라 제가 한 달, 아니 그 이상 수련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지도 몰라요."
"수련실이라면···, 전처럼?"
"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백서연은 오히려 안도했다.
툭하면 위험한 곳만 찾아다니시는 것보다 차라리 이게 훨씬 낫다.
다음으로 태주는 창훈이와 순철이를 불렀다.
부리나케 달려온 그들.
"싸부님!"
"그래, 별일 없었지?"
"지금 파주 레이드 준비하느라···,"
깜빡 잊었네.
파주 DMZ 마수 밀집지대 레이드 할 계획이었지.
어쩔 수 없다.
그건 좀 미룰 수밖에.
"전에 내가 수련실에서 한 달 정도 있었던 거 기억나지?"
"넵, 납니다."
"이번에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아! 그럼 레이드 미루면 되죠.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문 앞을 철저하게 지키겠습니다."
태주는 파주 정연희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지.
- 저도 하던 일 정리하고 구례로 내려갈게요.
"그럴 필요까지야,"
- 아니에요. 제가 가야죠. 이참에 티제이 길드원들 검술도 봐줄 겸,
황제에게도 전화를 걸어.
"저 구례에 왔습니다."
- 오! 잘 생각했어. 현재 그쪽은 깜깜한 상황이야. 대규모 웨이브가 일어났다는 소문도 있어. 확실한 정보가 알려지기 전까진 몸 사리자고.
"그래도 당분간은 연락이 안 될 겁니다. 급한 일 있으시면 서연씨와 이야기해주세요."
태주는 사람을 불러 자택 수련실 보안 공사에 들어갔다.
튼튼한 강철 문도 만들고, 잠금장치도 새로 달고.
그리고 금식도 해야 한다.
당군악이 편지로 이르기를 최소 5일은 물도 마시지 않는 게 좋단다.
천도의 흡수율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시간이 흘렀다.
찌르르르,
선계에서 온 배송 신호.
'왔네.'
공유창고엔 선계꽃과 흑암철 주괴가 가득 들어있었다.
물건을 교체한 후, 미리 써둔 안부 편지를 보냈다.
이제 폐관에 들어가서 천도를 섭취할 예정이라고,
그래서 배송이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고.
태주는 구례 태홍 바이오 대형 창고로 갔다.
평범한 창고가 아니다.
냉장 냉동 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
매번 거듭되는 쇼핑에 백서연이 창고 전체를 거의 백화점처럼 만들었다.
마지막 준비는 무한창고를 가득 채우는 것.
천도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미완성이었던 독령이 완성될지도 모른다.
더불어 4번째 영혼 연결도.
3번째 영혼 연결이 이루어졌을 땐 반짝 이벤트가 열렸다.
당군악과 자신의 무한공간 전체가 공유창고로 변했던 이벤트.
'4번째 영혼 연결에서도 반짝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빈틈없이 채워야지.'
태주는 선계꽃과 흑암철 주괴를 구례 태홍 바이오 전용 창고에 꺼내놓았다.
자신이 폐관에 드는 동안 MRC와 선박 제조에 차질이 없도록.
그 빈자리는 지구의 물건들로.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사 온 스포츠카.
백두 자동차에서 생산한 SUV와 대형 리무진.
그리고 창고 안에 보관된 상품들 모두.
태주는 자택으로 돌아왔다.
이제 천도만 먹으면 되는데···
순간!
"형님!"
태홍 바이오 보안 책임자이자, 화이트 해커 김동훈이었다.
'이놈을 빼먹었구나.'
부탁한 것도 있었는데.
"잘 지냈지?"
간단하게 안부를 묻고는,
"참! 말해줄 게 있다. 네가 설계해준 인트라넷 말이야. 거의 설치가 끝났어. ···그분들이 고맙다고 전해달라던데."
"흐흐, 그래요? 신경 좀 썼어요. 초보자도 쉽게 설치할 수 있게."
김동훈도 이 통신 장비들이 어디에서 쓰이는지 묻지 않았다.
백서연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이걸 어디로 보내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그저 시키는 대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지 않아도 드릴 것이 있어서요."
"뭔데?"
"전용 스마트폰 만들어왔습니다. 쇼핑몰 결제 시스템과 컨텐츠 소통용 SNS, 그리고 영화를 볼 수 있는 간단 플랫폼 연결 어플도 깔았습니다."
"오!"
선계 인트라넷의 화룡점정.
그곳에서 네트워크 통신이 가능한 기계.
"몇 개나 만들었어?"
"500개 정도···,"
"비용은?"
"백서연 CEO님이 주셨어요."
"지금 가지고 왔어?"
"차에 실어 왔습니다."
마침 잘됐다.
그것도 무한공간에 넣어두자.
태주는 수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백창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짐하듯 말했다.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잘 지키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일백이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일이삼백이도 바깥에 있을 테니까.
두꺼운 강철 문이 닫혔다.
혼자남은 수련실.
'휴우,'
배가 너무나 고프다.
5일 동안 굶었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천도를 꺼냈다.
그러나 방안에 상서로운 향기가 가득 찼다.
꿈틀,
냄새만으로도 독정이 반응할 지경.
천도를 입으로 가져가,
와그작!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미치겠네.'
너무나 맛있다.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과육.
그러나 과즙만은 엄청났다.
입술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물론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
※ ※ ※
선계 멀티플렉스 1층.
갈홍이 운영하는 선계 레스토랑.
"어이, 원숭아!"
"부, 불렀소?"
"그래, 선계 월드 회전목마 앞 8번 테이블에 치킨 하나 배달이야."
"맡겨주시오."
제천대성은 팔뚝에서 자신의 털 하나를 뽑았다.
그런데?
"동작 그만!"
"왜?"
"이 새끼가, 처음부터 수작질이야? 선계에 봉사하고 싶다며? 그럼 네 힘으로 해야지."
"분신도 내 힘이오만."
"죽을래? 여래계로 가고 싶어?"
"아, 아니오! 퍼뜩 다녀오리다. ···그럼 근두운은?"
"그건 타고 가도 돼. 신속 배달! 그게 배달원의 생명이야."
"으음, 알겠소."
"중간에 빼먹지 마라. 닭 모가지 하나라도 없어지면 죽는다."
"···."
제천대성의 선계 봉사는 간단한 심부름으로 시작됐다.
선계 무료 서비스.
일명 배달의 선계.
"원숭아! 저기 선계 카페로 가서 카라멜 마키아토, 시원한 걸로 한잔 말아오너라."
"···카라멜 마, 뭐요?"
"하아, 이 새끼가,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토!"
"아, 알았소."
"자, 이건 배달 팁."
주선이 바나나 한 개를 툭 던져줬다.
'···씨발, 진짜 내가 원숭이인 줄 아나.'
배달뿐만이 아니었다.
천인들이 돌아가고 선계월드가 문을 닫으면,
"깨끗하게 청소해."
황천계 흑암철 주괴 배달도.
"원숭이 왔다!"
"빨리 흑암철 주괴 옮겨. 분신 쓰지 말고."
도화궁.
"서왕모가 선도 밭 잡초 뽑아야 한다고 인원이 필요하단다. 어서 가."
천계.
"천인들이 천계꽃 따서 미니카 주차장에 쌓아뒀거든, 그거 싹 담아서 와."
아아.
스며드는 열패감, 그리고 수치심.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선계의 정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선 어떤 굴욕이라도 감내해야 한다.
'두고 보자.'
자신을 만만히 보면 큰 오산이다.
제천대성의 힘이 어디 물리력뿐인가?
교활하다고, 간교하다고,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이미 세워둔 계획도 있다.
선계 선인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흐흐흐, 멍청한 놈들.'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주제에, 감히 날 우습게 봐?
결국 후회하고 말 것이다.
무료 서비스에 익숙해지다 보면 점차 길들여지게 마련.
'지금은 공짜지만···,'
나중엔 유료서비스로 전환할 생각.
달달한 무료 맛을 충분히 봤으면 유료화된다 해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 염라와 서왕모가 최고 VIP라고?'
웃기고 자빠졌다.
배달의 선계가 유료화되면 선계 최고 부자는 바로 제천대성 자신.
'코인을 쪽쪽 빨아 먹어주지.'
그리고 쇼핑몰 물건을 싹다 사버릴 테다.
※ ※ ※
지구.
태주의 자택 수련장.
천도 하나를 통째로 먹었다.
과즙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태주는 잠에 빠져들었다.
긴 잠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천도는 천천히 소화되고 있었다.
기운도 느릿느릿 퍼졌다.
환골탈태나 벌모세수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독을 먹었을 때 느꼈던 고통 같은 것도 없다.
아주 평온했다.
몸속에 가득 찬 충만감.
태주는 서서히 잠에서 깼다.
정신은 아주 개운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빼면.
'뭐야? 가위눌린 건가?'
심장도 매우 느리게 뛰었다.
가사 상태에 빠진 느낌.
그러나 벽에 걸린 시계는 볼 수 있었다.
수련실에 들어온 지 닷새가 흘렀다.
달라진 점은?
특별한 건 없었지만 천도의 기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지할 수 있었다.
뱃속에서 소화된 천도가 혈관으로 그 기운을 전달했다.
심장으로 모이는 기운들.
쿵덕,
심장이 약동하면 기운은 아주 조금씩 혈관을 따라 온몸으로 퍼진다.
'너무 느린데.'
엿새째.
팔과 다리의 모세혈관까지 파고 들어가는 기운.
열흘째.
이번엔 내부 장기들로.
보름째.
기운이 상체를 지나 머리로 향했다.
혈관을 통해 뇌 전체를 감싸왔다.
'으음.'
황홀하다.
하늘로 붕 떠오를 것 같다.
그러나 천도의 기운은 독정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스무날째.
마침내 천도의 기운이 독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멀스멀 기어갔다.
가까이 다가오자 독정이 진동을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때였다.
느리게만 움직였던 천도의 기운이 계곡에 흐르는 급류처럼 빠르게 휘몰아쳤다.
'···무슨?'
찌이이이잉!
독정이 부풀어 올랐다.
독정 폭발의 징조.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해봤던 현상.
그러나 이번 건 다르다.
독정이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커져 나갔다.
태주의 전신으로.
그리하여 몸 전체가 독정이었다.
순간!
진동을 시작하는 독정.
웅! 웅! 웅! 웅! 웅! 웅!
'이런···,'
그리고 폭발을 시작했다.
팡! 팡! 팡! 팡! 팡! 팡!
몸속 이곳저곳에서 소규모 폭발이 진행되더니.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팡!!!
전신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아아아아아아···,'
태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현재 그가 느끼는 감정.
바로 합일감.
독정과 의식이 합쳐졌다.
자신이 독정이고, 독정이 자신이었다.
'독령이구나.'
혼원무상독령공 궁극의 경지.
심독일체(心毒一體).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암기가 쏘아지고, 의지를 발현하면 독은 이미 그곳에 있다.
영성을 획득한 독정.
곧 독령.
그리하여 만천화우도 펼칠 수 있다.
수십만 개의 암기를 한 번에 조종하면서도 모든 암기마다 각각의 목표물을 지정한다.
얼마나 대단한가?
웬만한 마수 밀집지대는 한 시간 만에 소탕한다.
비욘드 엘리트 마수는?
'가능할 것 같은데?'
아무리 강기 보호막이 대단한들, 만천화우로 펼쳐지는 집중 공격을 막을 수나 있을까?
기어코 독령을 깨우치고야 말았다.
하지만 독정 폭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퍼펑! 퍼퍼퍼퍼퍼펑!
충만해지는 천도의 기운, 천기.
사실 반의반만큼만 있었어도 독령에 오르는 데는 무리가 없었을 터.
그러나 과유불급.
천기가 너무 많았다.
독령을 깨우치고도 남아버린 천기는 여전히 태주의 육체에 치달아 흘렀다.
"으으윽!"
몸 안에 갇혀버린 천기.
심지어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출구를 찾지 못해 태주의 전신을 두드렸다.
결국,
"아!"
쩌엉!
백회혈이 열렸다.
용천혈도 열렸다.
태주는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천기가 정수리를 통해 막힌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
동시에 발바닥을 통해 땅 밑으로 흘러 들어갔다.
천지합일.
땅과 태주, 하늘이 하나가 됐다.
그리고,
스팟!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태주.
수련장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천도복숭아엔 매우 잘 알려진 효능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 ※ ※
선계(仙界).
단주 선인은 코인으로 산 트레이닝 세트와 운동화를 착용하고 가볍게 조깅 중이었다.
신선이 무슨 운동을 하겠냐마는,
해보니 의외로 좋다.
선계월드를 한 바퀴 돌아서, 도원 복숭아밭 입구를 지나, 천계로 가는 도로를 뛰었다.
이렇게 상쾌하게 달린 후, 환수계에 들러 부적에 필요한 괴황지 재료와 경면주사(鏡面朱砂)도 찾아서 채취하고.
늘 하는 루틴이다.
이걸 다 마치면 멀티플렉스로 출근한다.
멀티플렉스 식당에서 간단한 샐러드와 탄산수로 배를 채우고, 안마의자에서 한 시간 정도 누웠다가 드라마 한 편 보고.
순간!
저 멀리서 보이는 사람.
'많이 본 듯한 인상인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오! 안녕하시오! 태주 대협."
"···아, 네네."
"난 운동 중이었소. 신발이 푹신푹신해서 너무 좋구려, 하하하하! 참, 내가 준 부적은 잘 사용하고 있소?"
"자, 잘 쓰고 있습니다."
"모자라면 언제든 이야기하시오. 그럼 이만!"
태주를 지나쳐 다시 달리는 단주 선인.
그러다가,
멈칫!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
대체 무슨?
단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 마침내···.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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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 두기 >
태주가 수련실에서 한창 천도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을 무렵.
전 세계는 경악에 빠졌다.
그동안 확실한 정보 없이 풍문으로만 떠돌았던 모스크바 내전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유럽 제국 정보국 M-19는 언데드에 대한 정보를 언론에 공개했다.
핵이 어디에 터졌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모스크바 동쪽 마수 밀집지대에 터진 핵, 웨이브 대신 언데드가 나타났다.>
<좀비와 스켈레톤, B급 장르 문화가 현실에서 재현.>
<핵폭발, 언데드 범람, 아포칼립스의 징조? 모스크바는 시작일 뿐, 유럽이 위험하다.>
<모스크바 주변 국가 초긴장, 국민들 피난 행렬 잇따라.>
영상도 공개했다.
비록 1분도 안 되는 짧은 드론 촬영 영상이었지만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의 언데드 마수 군단.
모습도 각양각색, 비교적 형태가 온전한 놈, 피부가 벗겨져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놈, 팔다리 중 어느 한군데 떨어져 나간 놈, 절반은 멀쩡하지만 절반은 뼈다귀, 아예 뼈다귀만 남은 놈들도.
└ 그러니까 핵이 마수 밀집지대에 터졌고, 폭발에 휘말려 죽은 마수들이 언데드로 부활했다?
└ 무섭다. 말로만 듣던 언데드라니.
└ 애초에 모스크바 내전 자체가 수상했어.
└ 맞아. 모스크바 폭탄 테러범,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 많았잖아.
└ 나도 봤어. 테러범조차 언데드였지. 이거 계획된 전쟁이야.
└ 지금이라도 짐을 싸야 하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그랜드 마스터급 각성자의 스킬일 것이다, 그동안 고여있던 마나의 부작용이다, 지옥에서 악마가 강림했다, 등 전문가들 의견 엇갈려.>
└ 배후에 블랙 마피아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
└ 겨우 폭력조직 따위가? 마나 부작용이겠지.
└ 난 악마 강림설이 믿음이 가. 누군가가 악마 소환 의식을 벌였을 거야.
└ 세상이 마나로 뒤덮인 지 300년이 지났는데, 뭐가 불가능할까?
└ 평범한 마수도 무서운 판에, 언데드 마수라니.
<유럽 제국 언데드와의 전면전을 선포.>
<제국국 총동원. 모스크바에 폭격기 편대 출격.>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 제국군을 이끌고 직접 선봉에 나서겠다고 밝혀.>
<황실 지지율 폭등, 유럽 제국민들, 황제에 대한 무한한 지지를 보내.>
└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 폐하 만세!!!
└ 모스크바로 가즈아!
└ 탱크로 짓밟아버려!
└ 웨이브 걱정도 없겠다, 현대 무기 마음껏 써도 되겠네.
└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마수 밀집지대가 소탕된 거잖아.
└ 흐음, 막을 수 있다면 말이지.
전 세계도 모스크바를 주시하고 있었다.
모든 국가가 언데드 마수 군단에 대항하는 유럽 제국에 다양한 지원 의사를 밝혀왔다.
파병까지 검토하는 국가도 있었다.
삼한 제국도 마찬가지.
유사시 시베리아 개척군단을 전장에 투입할 수 있게끔 비상령을 내린 상황.
언제라도 요청이 오면 투입한다.
시베리아 개척군단은 삼한 제국군 중에서도 최정예 부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 그 새끼가 거절했다던데요."
황궁 비서관 금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류태현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럴 줄 알았어. 음흉한 새끼, 언데드 마수들보다 더 위험한 놈이야."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수작이죠. 더불어 영토도 넓히고, 판이 깔렸으니 엉덩이가 들썩들썩할 겁니다."
"맞아. 이 상황을 기다렸을 거야."
처음 블랙 마피아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을 때, 유럽 제국 정보국은 자신들도 아는 바가 없다면서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땐 정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모스크바 테러가 일어나고 내전으로 번졌을 무렵에도 유럽 제국 정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개입하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지껄였을 뿐.
누가 봐도 수상쩍은 테러 아니었나?
이미 그때부터 언데드의 존재는 드러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지경까지 온 거고.
"알렉스 그놈이 언데드 마수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렵긴 하겠지만···, 가능할걸. 그래도 군대가 있으니까."
"흐음, 하긴! 자신이 있어서 직접 나서는 거겠죠."
"얄밉긴 해도 전략 전술 면에선 탁월한 놈이야. 황제 지위를 고스톱 쳐서 땄겠나?"
어쨌거나 삼한 제국 입장에서 유럽 언데드 마수 군단 침공은 남의 일이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는 이어져 있다.
언데드 사태가 삼한 제국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참! 김태주 회장은? 아직 수련실에서 나오지 않았나?"
"제가 살짝 물어보니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다고."
"그렇군."
차라리 다행이다.
눈으로 봤다면 분명 그쪽으로 다시 날아갔을 터.
만약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김태주 회장의 가치는 무력뿐만이 아니다.
MRC를 비롯한 여러 신약, 그리고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선박.
그는 인류의 희망이다.
유럽, 혹은 삼한 제국이 망해도 김태주 회장만은 지켜야 한다.
※ ※ ※
선계(仙界) 멀티플렉스.
드디어 선계 인트라넷 구성이 완료됐다.
얼마 전 태주가 보내온 마지막 장비들을 무사히 설치했다.
'확인해볼까?'
당군악은 공기계 스마트폰을 열었다.
'흐음.'
[SG-GIGA-LINK]
선계 와이파이 이름.
신호가 잡혔다.
하지만 이 폰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선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선계 메인 서버에 들어있는 수많은 자료를 활용할 수도 없고, 쇼핑몰 이용도 불가능하며, SNS도 안된다.
전용 스마트폰이 있어야 한다.
추가 배송이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고.
"태주 대협은 천도를 무사히 섭취했겠지?"
1층에 모여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신선들.
"그까짓 것 한 입 거리 아니겠소."
"전에 독물을 먹었을 땐 소화하기 힘들었다고 했잖소."
"독물과 차원이 다르긴 하지. 명색이 천도인데."
천도가 보물인 이유가 있다.
선근(仙根)이 없는 일반인이라도 천도를 섭취하면 깨달음 같은 중간 과정 없이 바로 우화등선이 가능하다.
"그나저나 원숭이 새끼는 어디 있소?"
"황천계로 흑암철 주괴 나르러 갔지."
"에잉, 심부름이나 시켜볼까 했는데."
"허허허, 맞소. 요즘 놈이 없으면 왠지 허전해."
선계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는 제천대성의 노력이 점차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맹점을 보는 선인도 있었다.
예를 들어 갈홍 선인.
"너무 원숭이에게 의지하는 건 좋지 못하오."
"왜?"
"그러다 나중에 제천대성이 심부름을 유료화하면?"
"응? 그럴 리가···,"
"아니, 설득력이 있소.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아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니."
"허허, 역시 간교한 놈이로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게으르기로 따지자면 상위 계에서 으뜸가는 존재들이 바로 신선들 아닌가.
"뭐, 심부름이 유료화된다 해도, 코인만 적당하다면야."
"나중에 올리면?"
"그럼 쫓아내 버리지."
"맞소. 근본도 없는 원숭이 새끼가···,"
그때였다.
"독선! 도옥선! 크, 큰일 났소!"
멀티플렉스 바깥에서 들려오는 단주 선인의 호들갑 떠는소리.
"저 양반은 왜 또 저래?"
"아침 조깅한다고 나서더니만 못 볼 거라도 봤나?"
"선계에 못 볼 게 뭐가 있소?"
"있지, 예를 들어 하선고라던가,"
"흐음, ···난 좋던데?"
단주 선인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심지어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어이쿠야!"
"이건 웃겼소."
"과연 몸개그의 천재로다."
"박수나 쳐줍시다."
"잘하면 선계에서 최초로 사망한 신선이 나오겠네."
신선들이 비웃었지만 벌떡 일어나서.
"태, 태주···,"
"응? 태주라니, 태주 대협?"
"그렇소. 태주 대협이 왔소이다."
"오다니, 그게 무슨 원숭이 전신 제모하는 소리요?"
답답하다는 듯, 단주 선인은 가슴을 팍팍 치면서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그가 왔다니까?"
"지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혹시 노망이 났소?"
"저기 보시오! 다들 장님이요? 저기 태주 대협이···,"
신선들이 머리가 한꺼번에 돌아갔다.
시선이 향한 곳은 멀티플렉스 앞 주차장.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
"···."
"···."
"뭐?"
"으어···,"
검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또 꿈인가?"
그러더니,
"태주 대협! 또 뵙는군. 잘 있었소?"
"네, 그땐 고마웠습니다.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허허허, 우리 사이에 무슨···, 가만! 이거 꿈 아닌데?"
당군악도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맞다.
어떻게 모르겠나?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 자신이나 마찬가지인 인간, 김태주가 맞다.
"···태주?"
태주도 당군악을 보고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3번의 영혼 연결로 그와 하나의 의식이 합쳐져 기억과 경험을 공유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
'내가 늙으면 저 모습일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영상으로만 봤던 선계, 그리고 신선들.
진짜 할 말이 너무나 많다.
이게 다 천도를 먹은 덕택이다.
독령을 깨우치고, 그저 또 한 번의 영혼 연결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직접 선계에 와?
그래서 태주도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다른 세상의 나 자신에게.
"독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치지지직, 치직! 치지지직!
둘 사이에서 오고 가는 빛줄기들.
마치 물체를 옭아매는 사슬처럼 생겼다.
동시에,
스르르르륵!
당군악의 신형이 저절로 김태주 쪽으로 끌려갔다.
태주도 다를 바 없었다.
"헉!"
"무슨?"
스르르르륵!
당군악에게 이끌리는 신체.
그걸 보고 있던 귀곡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구의 학문에 통달한, 그 어떤 신선보다 영리한 그였기에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나의 세상에 같은 영혼이 둘.
그렇다면?
귀곡이 신선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마, 막아!"
"···누굴?"
"양쪽 다! 이러다가 서로 합쳐진다고!!!"
"합쳐져?"
"같은 영혼이잖아! 멀찍이 떨어뜨려!"
"아!"
검선이 먼저 움직였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스팟!
태주에게 달려가,
"잠시 실례하겠소."
그의 몸을 끌어안고선.
팟팟팟팟!
멀티플렉스 밖으로 벗어났다.
당군악에게도 신선들이 달려들었다.
"끄, 끌려간다아아아!"
"빨리 붙잡으시오!"
"어어, 바지 벗겨지겠네."
"아예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꽈당!
"올라타시오! 움직이지 못하게."
"···햄버거?"
"내리눌러!"
"아이고! 좀 살살···,"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스스스스스슷!
사라지는 빛의 사슬.
"이제 됐군."
"큰일 날 뻔했네."
"다들 명심하시오! 둘이 붙이면 안 되오. 격리가 최우선이오."
"허허, 무슨 코로나 거리 두기도 아니고."
태주와 당군악 사이의 거리는 약 100m.
그 정도 벌리니 이끌림이 사라졌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그래서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이었다.
※ ※ ※
하나의 차원에 두 개의 같은 영혼이 존재한다.
때문에 하나로 합쳐질 뻔했다.
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합쳐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빛의 사슬도 생겨나지 않았고.
그래서 거리 두기.
태주와 당군악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쓸쓸하게 외로이, 혼자 서있는 당군악.
반면 태주가 있는 쪽은 신선들로 가득.
신선들이 다 태주에게 몰려왔다.
신기한 듯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했다.
얼마나 신기한 현상인가?
다른 세상의 인간이 선계에 올라와?
귀곡과 갈홍이 태주의 옆에 붙어 진맥을 통해 그의 몸을 살폈다.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신선들.
"등선인가?"
"···아니겠지?"
"안 되는데."
"앞으로 지구 물건은 누가 갖다주나?"
"더는 지구 술을 마시지 못하나?"
"치맥은?"
이게 신선들이 가진 가장 큰 걱정.
태주도 얼떨떨하다.
진짜 등선이라고?
'그럼 지구는?'
태홍 바이오, 신약, MRC, 흑암철로 만들 선박.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또한 사람들,
백서연, 백홍표, 제자들, 정연희, 정욱철, 이고르, 류태현 황제, 금수호 비서관, 그리고 아버지···,
이들도 더는 못 보게 되고.
생각이 복잡했다.
이걸 어쩌지?
바로 그때,
쿡쿡쿡.
누군가 다리를 찌르는 느낌.
고개를 내려보니.
어느새 가까이 붙은 신선 하나가 작대기로 태주의 종아리를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왜?"
"아, 괘념치 마시오. 혹시 귀신인가 해서."
"···."
쿡쿡쿡쿡.
그 광경을 보고 멀리서 소리치는 당군악.
"지금 뭐 하는 거요? 태주가 실험실 쎅토끼인 줄 아시오? 다리를 왜 찔러?"
그러면서 다가오려 하자.
"미쳤고? 여기가 어디라고!"
"거리 두기!"
"가까이 오지 마시오."
아아아!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가까이할 수도 없는 상황.
순간!
귀곡이 태주의 손목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자자자, 결론이 났소."
다급하게 질문하는 신선들.
"등선이 맞소?"
"아니오."
"그럼 천도 때문에?"
"천도로 인해 여기 온 건 맞지."
"귀곡, 자세히 말해보시오."
"크험!"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차원 불일치, 다중우주라고는 하나 열역학 제2법칙에 의거, 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라 거시적 상태가 모든 미시적 존재의 질량을···, 그리하여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관측하기 전엔 파동으로 존재하지만 관측을 시작하면···,"
귀곡의 설명이 쭉 이어졌다.
"흐음."
"그렇구만."
"내가 생각했던 바야."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군."
"다 이해했소."
"나도."
사실 이해하지 못했다.
태주도 그랬다.
'···뭐래?'
귀곡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저 지식 자랑을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을 뿐.
태주의 등선은 과학 법칙과 별 상관이 없다.
"이러한 원리로 두 개의 같은 영혼이 한 차원에 함께 있을 수는 없소. 세상이 다르니 완전한 등선도 안 되고, 일시적인 현상이랄까, 천도의 기운 덕분에 잠시 여행 온 거라 보면 되겠군."
결국 천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주 대협이 앞으로 선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여섯 시간이라오. 남아있는 천도의 기운이 그쯤이면 사라질 거니까. 기운이 다하면 자연스레 지구로 돌아갈 테고."
6시간?
너무 짧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아쉽네.'
< 거리 두기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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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을 받았습니다. >
데우스 리치, 드렉 카락스는 모스크바 주변 마수 밀집지대만 골라서 찾아다녔다.
초기 언데드 군단을 형성할 땐 핵폭탄이 필요했다.
빠르게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눈덩이를 굴릴 충분한 병력이 갖춰졌으니까.
모스크바 동북쪽은 도시들이 별로 없다.
있다고 해도 이미 망해서 폐허가 된 도시들.
거의 마수들이 지배하는 지역.
드렉 카락스는 마수 밀집지대에 자신의 군단을 밀어넣었다.
일반 마수들은 언데드 마수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엘리트 마수들도 마찬가지.
마수들을 죽이고, 죽은 놈들을 언데드로 만들고, 더 거대한 마수 밀집지대를 공략하고,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이미 백만이 넘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드렉 카락스가 이끄는 언데드 마수 군단 백만이 모스크바 시내로 회군했다.
그가 처음으로 간 곳은 첫 핵폭발이 일어났던 전쟁 기념박물관.
왜 여길 폭파했을까?
자신의 충실한 종복인 블랙 마피아 장로들, 그리고 조직의 하위급 흑마법사들의 은신처였던 이곳을,
죽이지 않고 쓰면 되는데.
그러나 이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일어나라!"
뿌득, 뿌드드득!
핵폭발로 무너져 폐허가 된 전쟁 기념박물관에 일어나는 시체들, 모두 생전 자신의 종복들이었다.
시체가 남아있는 자들은 구울이나 듀라한으로, 혹은 스켈레톤,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자들은 유령 언데드 스펙터로, 그리고 장로들은···,
- 주인님.
- 불러주셔서 황공하옵나이다.
-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8클래스 흑마법사였던 마츠모토, 욘슨, 아브라힘이 언데드 네크로맨서로 다시 태어났다.
어차피 이들의 영혼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다.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스크바 방위 사령부 본부 건물로 가서.
"카르멘아!"
금제에 당해 몸이 터졌던 카르멘.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살점과 뼈가 다시 뭉쳤다.
역시 언데드 네크로맨서가 되어.
- 주인님, 기다렸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백만 규모의 언데드 군단.
혼자서 지휘하기엔 무리가 있다.
앞으로 이백만, 삼백만, 그 수가 점점 늘어날 텐데.
이들은 중간 지휘관 역할.
드렉 카락스가 명령을 내렸다.
"무기고에서 인간의 총과 대포를 확보하라, 충분한 탄약도."
-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군단엔 마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묘지에서 일으킨 수많은 인간 언데드들도 존재한다.
그들 모두 현대 과학 무기로 무장시킬 생각.
아직 모스크바엔 이런 군부대들이 많이 있었다.
인간형 언데드들이 무장을 하는 동안.
데우스 리치, 드렉 카락스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뭔가?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서?
지구를 언데드의 군세로 뒤덮기 위해서?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김태주 그놈에게서 말이다.
유럽 제국군 따윈 하나도 두렵지 않다.
드렉 카락스에게 있어 가장 큰 적수는 바로 김태주.
그래서 놈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카르멘과 김태주의 대결이 있었던 곳.
8서클 흑마법사인 그녀였지만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어이없이 패배했다.
김태주가 남긴 흔적들.
파괴된 마법진, 놈의 발자국.
드렉 카락스는 흑마기를 잔뜩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크 트레이스."
일종의 추적 마법.
찾고 싶은 대상이 대략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흑마술.
그런데!
'···응?'
뭐지?
흑마법이 잘못됐나?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분명놈이 있는 방향으로 흑마기가 움직여야 하는데.
"다크 트레이스. 다크 트레이스. 다크 트레이···,"
몇 번을 시전해도 마찬가지.
'···대체 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가.
그럴 리 없다.
아니면···.
'죽었을 수도.'
그것 말고는 달리 떠올릴 게 없는데.
또 하나 있긴 하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것.
'차원 이동이라도 했나?'
말도 안 되는 추측이지만.
그때였다.
슈우우우웃!
콰쾅! 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스르르릇!
허공에 뜬 채 미끄러지듯 움직여 바깥으로 나온 드렉 카락스.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니.
'제국군이군.'
쐐애애애액! 쐐액!
최신예 전폭기가 언데드 마수 군단에게 폭탄과 미사일을 퍼붓고 있었다.
"가소롭구나."
드렉 카락스는 지팡이를 들어 허공을 겨냥했다.
그러자 그의 지시를 받은 엘리트 언데드 비행 마수들이 날개를 움직여 전투기를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단순한 언데드 비행 마수가 아니다.
드렉 카락스도 현대 공중전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데우스 리치의 능력으로,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어낸, 자폭 능력도 갖추고 있어, 능히 전투기를 상대할 수 있는 마수였다.
콰콰콰쾅!
공중에서 불꽃과 폭발이 일어났다.
슈우우우웅!
추락하는 전폭기.
콰아앙!
이제 김태주도 무섭지 않다.
이 거대한 언데드 군세를 보라.
지상에서도, 공중에서도.
자신의 군단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유럽 제국 황제 알렉스 카이사르?
하찮은 쓰레기일 뿐이다.
"진군하라!"
군단이 모스크바 시내를 통과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했다.
구르면 구를 수록 더 커질 것이다.
유럽 전체가 언데드의 세상이 될 것이다.
※ ※ ※
선계(仙界).
등선이 일시적 현상이란 걸 알았다.
그럼 남은 숙제는 남은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내냐는 것.
태주로선 당군악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으하하하, 태주 대협, 내가 화선이라오. 그대의 초상화를 내가 그렸지. 그래서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오."
"어허, 고작 그림 하나로, 내가 만든 신령비도는 잘 쓰고 있소?"
"쯧쯧, 태주 대협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 내 부적이지."
"신선주 맛은 어땠소이까? 이따가 한잔합시다."
신선들이 도무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다양한 복색의 신선들.
트레이닝복에, 청바지와 셔츠, 멋들어진 수트, 등산복에···,
뭐, 지구의 패션이 선계로 들어왔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지구에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복색의 신선도 있었다. ···신선이 아닌가?
"안녕? 태주씨, 반가워. 나 하선고야."
"···네."
신선 맞구나.
겉보기엔 소녀였다.
야구모자를 쓰고, 머리는 양 갈래로 땋고, 크롭티에 엉덩이 밑살이 드러난 짧은 돌핀 팬츠, 흰 양말에 삼선 슬리퍼, 입에는 막대사탕을 물고 나타난.
"내가 천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 그건 모르지?"
"···은혜를 입었네요."
"아이참, 은혜랄 것까지야,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아아, 이분이 신선이라니.
그러나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저저저, 망측하게."
"태주 대협에게 못 볼 꼴을 보였어."
"스타킹이라도 당장 신어!"
"검스로!"
"망사가 좋겠군."
검선도 태주의 임시 등선을 매우 기뻐하며 자랑질을 해댔다.
"보시오. 내 말이 맞지? 개꿈이라고 무시하던 신선들 다 어디 가셨소? 왜 말이 없나, 다들 버로우 탔소?"
"꾸, 꿈속에서 요괴 하나 처리한 거 가지고선···, 유세 떨긴."
"유세 떨 만하지. 태주 대협이 날 그만큼 믿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소?"
"하아, 동빈아! 적당히 하자."
귀곡도 질 수 없었다.
"다 필요 없고, 태주 대협이 보낸 결정체 발전시설을 누가 만들었나? 응? 인트라넷도 다 내가 설치했는데."
"귀곡, 그거야 지구에서 만든 부품을 조립만 했을 뿐이잖소."
"허면 당신이 조립하지 그랬소?"
"내가 못 할 줄 아나···,"
"해보시오."
순간 태주는 귀가 솔깃해졌다.
'응?'
인트라넷 설치가 완성됐다고?
그럼 사용 가능하려나.
'실험해보자.'
무한공간에서 선계 전용 스마트폰 2개를 꺼내, 하나를 검선에게 건네면서,
"이걸 독선에게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스팟!
검선이 순식간에 당군악에게 달려가 스마트폰을 넘겼다.
그러자 스마트폰을 흔들며 소리치는 태주.
"케톡입니다. 케톡! 가입부터 먼저!"
당군악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회원 가입을 하고, 프로필을 생성한 후, 친구 목록을 열어서 대화방으로,
된다.
인트라넷이 작동한다.
케톡!
[태주] : 보고 싶었습니다.
[독선] : 동감이야. 아무튼 선계로 온 걸 환영하네.
[태주] : 실제로 보니 너무 많이 변했군요.
[독선] :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케톡!
[태주] : 글쎄요. 솔직히 천박한 지구 물건들로 이 고결하고 성스러운 선계를 어지럽히진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어요.
[독선] : 고결은 개뿔, 신선들을 보게. 걔들이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태주] : 에이, 그래도.
[독선] : 당장 하선고를 봐. 저 여인이 신선 같은가?
케톡!
[독선] : 지금도 그래. 이 스마트폰 하나 가져보겠다고 안달 난 표정들, 나도 신선이지만 신선들에게 속지 말게.
표정들이 어떻다고.
고개를 돌려보니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신선들.
"지, 지금 이걸로 대화를 나누는 거요?"
"네."
"사진도 찍어서 보낼 수 있고? 별스타 그램 같은 음식 자랑질도?"
"그렇겠죠."
"허어, 드라마에서나 보던걸, 그럼 쇼핑도 가능한가?"
"아마도."
신선들에게서 강렬한 열망이 느껴졌다.
이 스마트폰을 가고 싶다는 집념.
이해한다.
그전까진 사진 촬영이나 영상 저장용 공기계만을 접했을 테니까.
이렇게 작동하는 건 처음 봤겠지.
특히 하선고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 폰···, 두 개뿐이야?"
"아뇨, 넉넉하게 가져왔습니다만."
"흐응, 나 하나만 주면 안 될까? 태주씨, 오빠! 나중에 갚을게."
"···."
은근슬쩍 눈웃음도 치고, 그러면서 팔짱을 슬며시 끼어오는데,
신선들이 격분했다.
"저런! 염치도 없군."
"요망하다!"
"썩 떨어지거라!"
"속지 마시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년이요,"
"할망구 주제에."
그럴수록 바짝 달라붙어 오는 하선고.
사실 배송을 통해 나눠주려고 했던 스마트폰이다.
그래서 하선고의 팔에서 벗어난 후.
"드리는 건 상관없지만 회원 가입하셔야 하는데, 하실 수 있으세요?"
"태주씨가 가르쳐주면 되지."
"···네."
태주는 하선고의 이름으로 메신저 어플에 가입시켜줬다.
"나도 톡방으로 초대 좀,"
케톡!
[하선고] : 안녕!
[독선] : 허허허, 미치겠군.
찰칵!
케톡!
심지어 사진까지 찍어 올렸다.
실로 능수능란했다.
[하선고] : 어때! 괜찮아?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신선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다.
이 자리에서 나눠주자.
무한공간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하나씩 드릴게요."
"오오오!"
"역시 대협이로다."
"통이 커."
"같은 영혼이라도 쫌생이 독선과는 차원이 달라."
"그러니까 귀한 물건들을 때마다 보내줬겠지."
"새치기하지 마!"
"줄을 서시오."
결국 하나씩 다 나눠주었다.
케톡!
[독선] : 아니, 왜 그걸 공짜로? 단단히 뽑아먹을 수 있는데, 60개월 유이자 할부에 강제 약정도 걸어버리고,
정말 지구 물 많이 든 당군악이었다.
[태주] : 기계는 공짜로 뿌리고 서비스는 유료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독선] : 오! 그럼 되겠군.
선물 받은 신선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자, 귀한 걸 받았는데 입 닦으면 쓰나? 다들 뭐라도 가지고 오시오."
"암! 그래야지."
"잠시 기다리시오. 답례품을 가지고 오겠소."
"난 가진 게 없는데?"
"요마계로 가서 독물이나 뽑아 와!"
"약초 같은 것도 캐오던지."
팟팟팟팟팟팟!
신선들이 재빠르게 흩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진짜 선계가 이런 곳인가?
한편.
그 광경을 처음부터 가만히 지켜보던 존재가 있었다.
신선들이 사라지고 혼자 남은 태주에게 다가가,
스윽,
"저어, 혹시 태주님?"
"맞습니다만, 누구···, 헉!"
깜짝 놀랐다.
신선이 아니었다.
'원숭이?'
왠 원숭이가 선계에?
그때였다.
스스스스슷! 슈슈슈슈슛!
'음?'
허공에 가득 떠 있는 수많은 물체.
'···흑암철 주괴잖아.'
독선이 올렸나 보다.
이건 만천화우의 수법.
할 수 있는 건 자신과 독선뿐.
'그런데 갑자기 만천화우는 왜?'
원숭이가 접근하자마자 당군악이 쏘아 올린 것 같은데.
조준 대상도 이 원숭이였다.
허튼수작 보이면 그대로 내리 꽂아버리겠다는 기세.
독선이 이럴 정도면 상당히 위험한 존재 같았다.
'나도 만만치 않은데.'
무려 독령을 깨우친 자신 아닌가.
순간!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리는 원숭이.
"용서해주십시오. 감히 태주님에게 가야 할 천도를 훔치려 한 죄! 달게 받아 마땅하지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이 미후왕,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어어."
태주는 당황했다.
다짜고짜 엎드려 비니,
그런데 천도를 훔치려 했다고?
그런 일도 있었나.
어쨌든 미후왕이라니.
귀에 익은 이름.
가만!
생각났다.
"···혹시 손오공, 제천대성?"
"부끄러운 허명입니다. 그저 요괴들의 우두머리 미후 원숭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세상에!
선계에서 제천대성을 만나다니.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실제 손오공을.
다중우주답다.
"사죄의 의미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가슴팍에 난 털을 두 손으로 잡아 뜯은 손오공.
양손에 가득 잡혀있는 황금빛 털.
그 털에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후우우우우우,
그러고 나선 태주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쓸만하실 겁니다. 그러니 받아주시길."
"···."
털이라,
이걸 받아야 해?
무엇에 쓰는 물건이지?
범상치 않은 건 분명하다.
털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으니까.
"이 털은 제 요력으로 만든 분신체로서···,"
제천대성이 태주에게 설명을 시작하자,
스우우우우웃!
하늘에 떠 있던 흑암철 암기도 사라졌다.
눈빛을 반짝이는 당군악.
'저거 괜찮은데?'
원숭이가 이런 쓸모가 있을 줄이야.
저 털은 태주에게 매우 필요한 물건.
자신도 겪어봐서 안다.
털로 만든 분신체가 얼마나 무섭고 지긋지긋했던지.
'부피가 작아 배송 보내기도 딱 좋고.'
다만 지속적으로 보내려면 털을 풍성하게 길러야 한다.
'어디 보자, 발모제가 있던가?'
아쉽게도 강호 무림에서 발모제 같은 건 취급하지 않았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
아니면 태주가 만들어 배송으로 보내던가.
'발모제 같은 건 현대 의학이 더 좋겠지?'
애물단지에 불과했던 제천대성의 가치가 대폭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 털을 받았습니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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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계에서의 만남들 >
태주는 제천대성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냥 털이 아니다.
제천대성이 직접 몸에서 뽑아 요력을 집어넣은 털.
'뿌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
뿌리면 털이 분신 손오공이 되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단다.
털 한 웅큼으로 단 몇 초안에 태주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수십만의 분신 떼가 만들어지고.
그러나 온전하게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는 없다.
시간의 한계.
지속시간이 약 1시간 정도.
사라지면 완전히 소멸한다.
원래 제천대성은 분신 술법은 일회용이 아니다.
몸에서 털을 뽑아 분신을 만든 후에, 계속 요력을 공급해 분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면서, 이론상으로 무한대로 쓸 수 있다.
또한 분신과의 의식도 공유하고, 복잡한 지시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태주가 받은 털은 제천대성이 미리 넣어둔 요력으로 펼치는 것.
즉 일종의 건전지를 넣어 둔 거나 마찬가지.
요력이 다하면 사라진다.
간단한 지시만 내릴 수 있지, 의식의 공유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도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1시간 동안 지속되는 대규모 손오공 군단을 소유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이거 너무 큰 선물인데.'
비록 자신에게 넘어올 천도를 훔치려 한 제천대성이라고는 하나, 진심 어린 사과는 받았으니까.
그래서 태주는 답례로 선계 전용 스마트폰을 하나 꺼내 제천대성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가지실래요?"
"허억! 이, 이 귀, 귀한걸."
"그보다 털이 더 귀합니다."
"아아, 염치없지만 가, 감사히···,"
"회원 가입은 이렇게, 그냥 제가 해드리죠."
제천대성은 감격했다.
사과를 받아준 것도 모자라 이런 보물까지?
가만있을 수 있나.
"제 몸의 털을 더 뽑아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말릴 새도 없었다.
뭉텅, 뭉텅, 뭉텅, 뽑아서, 후우우우, 정성스럽게 불어 요력을 부여하고는.
"여기···,"
"···."
"받으시죠."
부담스럽지만 이미 뽑힌 털이라 안 받을 수도 없다.
"이젠 그만 뽑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또 뽑을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털이야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어디론가로 뛰어가는 제천대성.
그러자 당군악이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대성, 나 좀 봅시다."
"···무슨 일로."
"좋은 일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 그렇소? "
선계 배달꾼이자 털 제조기.
당군악은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게 다 해맑 선녀 덕분이다.
용서하라고 해서 용서해준 것뿐인데, 이런 행운을 얻을 줄이야.
"정말 그대를 다시 봤소."
"에? 나를?"
"제천대성의 이름이 허명이 아니었군. 그간의 오해는 풀고 우리 본격적으로 거래를···,"
그 시각.
태주가 선계에 왔다는 소식이 상위 계로 퍼져나갔다.
황천계에선 염라가,
"지, 진정 태주 대협이 등선했단 말이냐?"
"영원히 온 건 아니고, 곧 돌아갈 거라던데요."
"허어, 지금은 뭐하고."
"신선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있다고···,"
"뭐?"
벌떡 일어나는 염라.
"당장 가서 만나보자."
도화궁에서도 서왕모가,
"미호야."
"네, 왕모님."
"어서 선계로 갈 채비를 갖춰라. 잘 익은 최상품 선도도 바구니에 잘 담아 준비하고."
"알겠사옵니다."
천계(天界) 자미궁의 상제는,
"정녕 이런 일이···, 어떻게 인간이?"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선계에 등선도 하지 않은 인간이 올라와?
심지어 다른 세상의 존재가?
공유 공간을 매개로 한, 세상과 세상의 교류가 성사되었을 때 혹여 이런 일도 생길까 상상 정도는 해봤지만.
'역천 현상은 아닐는지···,'
상제는 고개를 들어 천기가 어그러지지 않았는지 점검했다.
그렇지는 않았다.
천지신명, 법칙의 운행은 여전히 순조롭다.
'직접 가볼 수도 없고.'
상위 계 대표자 회의에서 독선에 대한 처우 문제로 말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선계와는 사이가 틀어졌다.
하지만 천인들이 선계로 놀러 가는 건 막지 않았다.
천계는 천인들을 위한 세상이니까.
그들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이 천계의 역할이고.
'김태주라,'
그가 어떤 자이길래?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보내봐야겠군.'
상위 계가 태주로 인해 들썩이고 있었다.
※ ※ ※
지구.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는 최정예 기계화 사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이동하는 중.
도저히 질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현대 과학에서 언데드?
물론 언데드 범람이 질병에 의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건 매우 무섭다.
과거, 마나의 침범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어났던 코로나 팬데믹.
그 때문에 인류는 얼마나 많은 혼란을 겪었나.
이 언데드 범람이 그와 비슷한 팬데믹이라면?
세상은 악몽이 될 터.
그러나 드렉 카락스가 만들어내는 언데드는 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저 네크로맨서 흑마법을 이용해 시체를 일으켰을 뿐이다.
겪어봐서 안다.
자신과 같은 영혼이 사는 다른 세상에도 언데드들이 존재했으니까.
감염되지도 않고, 시체를 부숴버리면 소멸한다.
시전자를 죽여도 모조리 사라져버리고.
한마디로 드렉 카락스 한 놈만 죽이면 전쟁이 끝날 거란 의미.
물론 그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최근까지 드론 정찰로 언데드 군단의 수를 확인해본 결과, 그 수가 백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은폐엄폐 하지 않고 무리 지어 다니는 군대는 움직이는 과녁일 뿐, 중간중간에 고성능 미사일을 몇 방만 날려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생각할수록 쉽다.
오히려 너무 빨리 끝날까 봐 걱정.
될 수 있으면 오래 끌어야 한다.
언데드와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자신을 부각시키고, 주변 국가들을 복속해 유럽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
'일단 인사나 해둘까?'
그래서 전폭기 몇 대 보냈다.
가서 폭탄과 미사일 몇 개 떨어뜨리고 오라고.
현대 과학 무기의 위력도 보여줄 겸, 더불어 화력 시험도 하고.
그런데 이게 웬일?
"···추락했다고? 출격한 전폭기가 모두?"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언데드 비행 마수일 가능성이 매우 높사옵니다. 아마 자폭 공격을···,"
"전폭기를 따라올 속력을 갖췄단 말이냐? 언데드 마수가?"
"화, 황공하옵니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후우,"
생각지도 못했다.
'드렉 카락스, 그놈도 한 수가 있었군.'
갑자기 불안해진다.
'혹시 이러다가···,'
그럴 리 없다.
자신도 비장의 무기, 히든카드 한 장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질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 ※ ※
선계에 있을 시간이 점점 줄어갔다.
태주와 당군악의 이별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가까이 붙을 수 없다.
멀리 떨어진 채 대화를 나눴다.
어떤 식으로 소통했을까?
직접 입으로 크게 소리쳐서?
스마트폰 톡으로?
둘 다 아니다.
대화의 도구는 바로 만천화우였다.
각자 익힌 만천화우도 비교할 겸, 숙련도도 올릴 겸.
슈슈슈슈슛!
무한공간에서 꺼낸 암기를 독령으로 움직여, 허공에다가 글자를 짜 맞추는 태주.
[···그런 이유로 모스크바에서 마법진은 일부러 걸려들었습니다.]
당군악도 흑암철 주괴로 허공에 글자를 만들었다.
슈슈슈슛!
[저런! 그렇게 위험한 짓을,]
[흑마법사 놈들이 뭘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검선님이 꿈속에서 잘 도와주셨어요.]
[다시는 그러지 말게. 자넬 믿고 있긴 해도, 세상엔 절대라는 게 없어. 뜬금없이 치고 나오는 새끼들도 있다는 말이지.]
그건 당군악의 말이 맞다.
[앞으로 보는 즉시 죽여버려. 그게 속이 편해.]
제천대성의 털 이야기도 나왔다.
[드렉인지 뭔지, 그 네크로맨서라는 놈 만나면 제천대성의 털, 아낌없이 사용하게.]
[귀한 거라 아껴 써야죠. 만천화우면 충분합니다.]
[털 공급은 걱정하지 마. 주기적으로 뽑아서 보내주지.]
[제천대성이 허락해 줄까요?]
[허락하고 말 것도 없어. 이미 확답을 받았네.]
자기 털을 계속해서 뽑아주겠다고?
지금도 솔직히 믿을 수 없다.
분신을 만들어내는 제천대성의 털.
그들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참! 혹시 발모제를 만들 수 없나? 지구의 제약기술로.]
[그거야 연구해봐야죠. 왜요? ···어, 혹시?]
[맞네. 길러서 뽑아야지. 현대 어업의 대세도 양식이 아니던가.]
[와! 사악하십니다. 절대독마가 허명이 아니었네요.]
[뭘 새삼스럽게, 같은 처지에, 그리고 자넨 조금 물러. 더 악독해지게.]
그 와중에 부리나케 달려오는 신선들.
"태주 대협!"
"답례품을 가지고 왔소이다."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가지고 가시오."
"가지고 가면 쓸모가 있을 거요."
신선들이 물건을 태주 앞에 내려놓았다.
검선은 보기만해도 고풍스러운 보검을, 주선은 거대한 술 단지를 3개씩이나, 단주 선인은 부적책을, 화선은 자신이 그린 각종 그림을, 대목 선인은 목 자재를, 철장 선인은 각종 암기들을, 다선은 향기로운 차를, 그밖에 선도, 진귀한 약초, 요괴의 내단, 반짝이는 보석···,
갖가지 종류의 보패와 귀물.
무한공간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꽉 채워와서 자리가 없을···, 응?'
태주는 흠칫 놀랐다.
남은 공간이 무척 크다.
'무한공간이 엄청나게 커졌구나.'
기존 창고의 두 배 이상.
공유창고도 그렇고.
'천도 덕분이네.'
그래도 비우는 게 좋겠다.
[무한공간에 든 지구 물건들 여기 꺼내 놓을게요. 이따가 가져가세요.]
[아니, 절대 안 돼! 물건 교환은 나중에, 돌아가기 전에 하세.]
[왜요?]
[위험해. 승냥이 떼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네? 승냥이가 어디?]
그러자 당군악이 신선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마···,'
태주와 당군악은 서로 가까이할 수 없는 처지.
지구 물건을 옆에다 내려놓으면 당군악이 바로 집어넣지 못한다.
그 틈을 노려 신선들이 슬쩍 가지고 갈지도 모른다는 말.
'에이, 신선들이 도둑질할 리가.'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는데, 내 생각이 맞아. 무조건 털리게 되어있어.]
[그럼 신선님들이 가져온 보물들은요? 담을까요?]
[아니, 내버려 둬도 돼. 그런 허접한 것들 가져갈 신선은 아무도 없을 거야.]
신선들이 가져온 보물을 허접하다니.
공장에서 찍어낸 지구 물건들은 훔쳐도, 선계의 보패들은 관심도 없다는 건가?
신선들도 만천화우로 새겨진 허공의 글자를 읽었다.
"저건 뭐야? 지금 우릴 의심하고 있소?"
"누, 누굴 도둑놈으로 아나."
"나 등선한 사람이야!"
"커험! 절대 슬쩍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태주의 반지가 진동했다.
거짓말이었다.
'···.'
즉 기회가 생기면 훔치겠다는 뜻.
신선들이 거짓말도 하네.
그리고 도둑질도.
그제야 당군악이 왜 이러는지 알겠다.
"의심하려면 우리 말고 저 원숭이를 의심해야지."
"맞소. 원숭이가 제일 위험해."
"···어? 그러고 보니 저놈이 왜 저기 있어?"
신선들의 시선이 당군악 옆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제천대성에게 몰렸다.
"허허, 천도 도둑놈이 뻔뻔하기도 하지."
"감히 태주 대협 앞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태주 대협! 저 원숭이가 바로 천도를 훔친 놈이요."
순간!
"말조심하시오. 제천대성에게 원숭이가 뭐요? 원숭이가?"
당군악이 나섰다.
"또한 당사자끼리 이미 합의했소. 제삼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지."
이게 무슨 반전인가?
독선이 원숭이를 옹호해?
"음?"
"어,"
"···뭐?"
"왜?"
"허어."
"···."
이렇게 되자 신선들이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도 함께 원숭이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하던 사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공짜 심부름 부리는 것도 그만하시오. 정 시키고 싶으면 코인을 주고 부리던가. 신선들이 어째 브레이크가 없어!"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눈으로 보인다.
제천대성의 등을 토닥여주는 당군악.
득의만면한 미소의 제천대성.
항상 비굴하게 굽히고 다니는 허리도 어느새 꼿꼿하게 펴졌다.
독선이 제천대성을 끌어안았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노예와 다를 바 없었던 신분이 단번에 귀족으로 성큼 뛰어올랐다.
그때였다.
붕붕붕붕!
도로 위를 질주하며 태주에게 다가오는 전동 미니카.
작은 미니카 의자에 쪼그려 앉아서 능숙하게 운전하는 해맑은 소녀.
"반갑습니다아아! 소문 듣고왔어요오오!"
말로만 듣던 해맑 선녀였다.
"아!"
태주도 동영상이나 편지로 들었다.
'신기하네.'
과장인 줄 알았는데.
얼굴만 봤는데도 벌써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
마음이 사르르르, 녹는다.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이나 술법?
절대 아니다.
그거라면 신선들이 이미 눈치챘겠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모양.
주변 인물들에게 무조건 사랑받는.
어떻게 보면 신선보다 더 대단한 소녀.
"안녕하세요. 해맑 선녀님."
"넵! 태주님, 초상화에서 본 얼굴과 똑같아요오, 참, 제가 드린 꽃으로 사람을 많이 살렸어요?"
"덕분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세! 잘 됐다. 헤헤."
활짝 웃는 해맑.
태주도 함께 실실 웃었다.
"하하하!"
"헤헤헤,"
어떻게 안 웃을 수 있어?
"근데 태주님은 어떻게 선계에 오셨어요오?"
"네? 그게 알고 싶으세요?"
"전 아닌데, 상제님이 물어보라고 해서, 다른 세상의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 선계에 올라왔는지 궁금하시데요오."
상제라면···,
아무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여기 왔는지, 천도를 먹어서 그런가."
"넵! 알겠습니다아.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오."
가다니?
방금 만났는데,
"자, 잠깐!"
"왜오?"
"이거라도 가지고 가세요."
태주는 해맑에게도 전용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줬다.
"이거 비싼 거잖아요오. 나 돈 없는데."
"선물입니다. 회원 가입은 이렇게 하면···,"
"와아아아!"
해맑은 표정으로 태주가 스마트폰 조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해맑 선녀.
그러더니,
"···이거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꽃 많이 따다 드릴게요오."
"누구 주시려고?"
"상제님이요. 가지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안될 것 있나?
아예 10개를 꺼내 해맑에게 안겨줬다.
"···두 개면 되는데,"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제발 받아주세요."
"고맙습니다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이야.
그리고.
"태주 대협?"
선도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나타난 우아한 옷차림의 여인.
"반가워요, 서왕모라고 해요."
또,
"오! 이제야 실제 얼굴을 보는군. 나 염라라고 하오. 허허허, 흑암철은 쓸만하오? 우린 처치 곤란이라, 마음껏 가져가시오."
황천계 염라대왕도.
다 몰려왔다.
선계가 온갖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선계에 계속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로 돌아갈 때가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 선계에서의 만남들 > 끝
ⓒ 꾸찌꾸찌
=======================================
< 귀환 >
삼한 제국 구례.
태주의 자택 수련실 앞.
정연희는 파주에서 내려와 티제이 길드원들의 복마검법 수련을 봐주고 있었다.
"여러분들."
"네!"
군기 바짝 든 자세로 경청하는 길드원들.
오행신공은 태주에게, 복마검법은 검선의 동영상으로 배웠지만, 정연희도 제3의 스승이나 마찬가지.
"아직 복마검법을 대성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이래서 파주 DMZ 레이드를 제대로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
"유럽을 보세요. 뜬금없이 발생한 언데드 사태, 삼한 제국이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길드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구구절절, 다 맞는 말.
자신들보다 늦게 배웠음에도 벌써 대성한 그녀였다.
"올곧은 검격은 튼튼한 하체에서 나오는 법이죠. 그래서 지금부터 마보 2시간."
티제이 길드원들은 수련실 문 앞에서 마보를 시작했다.
한편,
일이삼백, 지금은 이백이는 수련실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심상치 않다.
안쪽에서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지?
주인이 거기 있을 텐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죽은 건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냄새도 없었다.
사라진 건가?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야앙!"
쿵쿵,
답답한 마음에 앞발로 강철문을 두드려보는 이백이.
스슷!
삼백이도 이백이와 교체하고 나와서,
"니아앙!"
쿵쾅!
스슷!
일백이도,
"냥?"
쾅쾅!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귀신이 된 것도 아닐 테고.
주인이 절대 들어오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확 부숴버릴까?
그러자 캔따개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일백아! 왜 문을 두드리고 그래? 조금만 참아. 곧 있으면 나오실 거야."
멍청한 암컷.
강해지면 뭘 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주인이 사라졌다는 걸 알기나 하나?
"캬악!"
"배고파? 캔 하나 따줄까?"
"···냐앙?"
"호호호, 그럴 줄 알고 내가 가져왔지."
딸각,
정연희는 최고급 고양이용 사료 캔 하나를 따서 일백이 앞에 놓았다.
밥 먹을 때도 됐다.
일단은 먹고 생각해보자.
날름날름.
몇 번 핥으니 금세 사라졌다.
"잘 먹네, 더 줄까?"
"냐아아아!"
그래, 캔따개야.
어서 하나 더 따보거라.
딸각!
확실히 입맛이 변했다.
예전엔 같은 마수만 씹어먹고 살았는데.
이젠 마수 따윈 냄새도 맡기 싫었다.
"냐아앙!"
주인?
기다리다 보면 문 열고 나오겠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인간인데.
※ ※ ※
선계(仙界).
모두가 함께 모여 잔치를 열었다.
무한공간에 챙겨온 각종 와인과 샴페인, 최고급 치즈와 싱싱한 냉장 연어, 고급 참치회, 과일 등을 꺼내 놓고.
"혹시 선계 전용 스마트폰 못 받으신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자꾸 공짜로 나눠준다고 독선에게 핀잔을 듣긴 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신선놀음, 오죽하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할까.
모두가 즐거웠다.
딱 한 사람만 빼고는.
아아아!
저 멀리, 100m 떨어진 곳에서 쓸쓸히 혼자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독선.
안타까웠다.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같은 영혼이라는 이유로, 합쳐짐 현상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그.
반면 이쪽은?
지금도 정신이 없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지구도 고부간의 갈등이 심해 보여요. 진짜 며느리를 김치로 때리나요?"
"에이, 그건 아니죠. 왕모님, 막장 드라마일 뿐입니다."
"호호호, 난 또,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김치뿐인가요? 미역 싸대기, 파스타 싸대기, 짜장 싸대기, 치킨 싸대기, 빈대떡 싸대기 등등 수많은 패러디도 있습니다만."
"잘하면 선도 싸대기도?"
"하하하, 그럼 감사히 맞아야죠."
보통은 드라마를 통해 본 지구의 이야기.
"지구로 돌아가면 드라마 배우들에게 참으로 훌륭한 연기였다고 대신 좀 전해주세요."
"어떤 드라마를 보셨는지···."
"제목이 영광의 날이었던가, 학교 폭력과 복수를 주제로 한 그 드라마."
"아!"
태주도 본 드라마.
하지만,
"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요?"
"다 죽었습니다."
"···주, 죽었다고? 정말?"
"그게 300년 전에 나온 드라마라서."
"으흠, 안타깝네요."
태주가 준 영상물의 70% 이상이 다 그렇다.
다 옛날옛적에 제작된 드라마.
지금의 지구는 마나 침범 이전의 문명을 복원하면서 발전하고 있었으니까.
"법정 드라마를 보니 강간을 저질러도 3년이면 나오더이다. 심지어 집행유예로 풀려나더군. 그곳은 원래 범죄자들에게 관대한 곳이오?"
"어음, 잘못되긴 했죠. 심신미약이 인정되면···,"
"말 잘했소. 심신미약! 아니 술 처먹고 강간했으면 더 엄벌을 내려야지, 형량을 깎아?"
"그렇다면 대왕님, 황천계에선 어떻게?"
"우린 무조건 색욕 지옥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태주도 동의했다.
강력 범죄자들은 죄다 황천계로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판관의 저울추나 판관의 반지 몇 개 챙겨드릴까? 지구 법원도 이 기물을 이용해서 판결에 적용한다면 도움이 되지 싶은데."
"흐음, 일단 이야기는 해보겠습니다."
물론 도움은 되겠지.
하지만 지구의 사법 체계가 마냥 엉터리는 아니다.
시스템 자체는 합리적이다.
사람이 문제지.
법을 악용하고, 공정한 판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족속들 때문에, 내로남불, 자신은 되고, 남은 안 되고.
"저어, 지구에도 구미호가 있나요?"
"글쎄요. 예전에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인간의 간을 빼먹고···,"
"으에? 전 간 안 먹어요. 치킨은 모를까, 누가 그런 헛소문을!"
"하하하, 그래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구미호는 최고 미인 배우들이 연기합니다."
"어머? 정말요?"
"찾아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이제 슬슬.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상위 계 사람들.
찰칵, 찰칵, 찰칵! 음식이나 셀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하고.
선계 메인 서버에 저장된 멀티 게임에 접속해 함께 게임을 즐기기도 하고.
"저 왔어요오!"
"해맑이다!"
"내가 오라고 불렀지. 케톡으로 말이야."
"허허허, 이리 오시오, 선녀, 우리 사진이나 한 장 찍읍시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슬슬 가야 할 시간.
느낌이 왔다.
뭔가 붕 뜨는, 더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태주는 독령을 움직여 만천화우로 글씨를 썼다.
[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아, 그렇군. 어쩔 수 없지.]
서운함이 가득 묻어나는 당군악의 표정.
태주도 그랬다.
선계에 올라왔지만 뭔가 빼먹은 듯한 생각.
가장 만나고 싶었고, 이야기를 나누길 원했던 사람과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
[준비됐는가?]
[네.]
"비키시오! 저리 물러나시오."
"어허, 알았대도."
"이 선을 넘으면 누구든 호된 여의봉 맛을 보게 될 거요."
이미 당군악의 심복이 된 제천대성이 분신들을 불러내 현장을 통제했다.
신선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태주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풀어놓게.]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지구의 물건들을 꺼냈다.
커지기 전에도 대형 식량 보관 창고 10개를 합친 크기.
그걸 꽉 채워 왔으니 나오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을까?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수십 대의 자동차를 비롯해, 스쿠터, 전자제품, 옷가지들, 패션 잡화, 식품들···, 없는 게 없었다.
끊임없이 나왔다.
쌓이고 쌓여 거대한 산으로 변했다.
당군악도 물건을 꺼내 놓았다.
흑암철 주괴와 천계꽃, 그리고 선도.
그러나 지구의 물건과 규모 자체가 달랐다.
너무나 소박했다.
물론 그 가치야, 백화점 몇백 개와 바꿔도 모자라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신선들.
"쯧쯧, 태주 대협은 귀중한 물건을 눈이 뒤어나올 정도로 많이 가지고 왔는데, 우린 저게 뭐요?"
"질도 못 따라가고, 양도 턱없이 부족하고."
"부끄럽군.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천도로 갚았다고 생각했지만 또 역전이군."
"다들 자존심이 상하지 않소?"
"이를 말인가?"
100m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태주와 당군악.
각자가 무한공간에서 꺼낸 물건을 담았다.
태주는 금방 담았다.
그냥 손 한 번 뻗어서 넣었다.
반면 당군악은 비교적 오래 걸렸고.
물건도 다 담았다.
태주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저 갈게요.]
[또 보세나.]
이별 인사는 질질 끌지 말고 간단하게.
스팟!
태주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갔군."
"갔어."
"또 기회가 있을까?"
"만들어야지."
"어떻게?"
작당 모의가 시작됐다.
"천도를 매개로 태주 대협이 일시 등선했잖소."
"맞지."
"만약 천도에 비견되는 보물을 또 넘겨주면?"
"오!"
반짝이는 눈빛의 신선들.
"천계 자미궁의 되살이꽃은 어떻소?"
"되살이꽃이라, 허나 태주 대협은 거의 신선이나 다를 바 없어서, 그게 필요가 있겠소?"
"혹시 모르지, 되살이꽃을 먹으면 또 한 번 등선을 이뤄낼지도."
되살이꽃은 죽은 사람도 살려주는 천계의 보화.
"동해 용궁은? 여의주 어떻소? 전에 태주 대협이 보낸 짝퉁 여의주가 아닌 진짜 여의주."
"용왕이 잘도 내어놓겠네."
"에이, 곱게 가져올 생각이었나?"
"그렇긴 하지. 슬슬 스페셜 팀 하나 만들어볼까? 마침 용궁에 대해 잘 아는 놈도 있으니."
신선들의 눈이 제천대성에게 향했다.
그가 여의봉을 가져온 것이 어딘가?
바로 용궁 보물 창고였다.
하지만,
"난 손 씻었소이다. 이제 건실한 사업가로 거듭날 거요."
"또 지랄한다, 지랄해."
"분신 우르르, 끌고 다니는 조폭 원숭이 새끼가 건실한 사업은 무슨!"
"독선이 이쁘게 봐주니, 아주 기고만장하셨어."
"헛소리 말고 하자면 해!"
"···."
완전히 인정받으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제천대성이었다.
※ ※ ※
스팟!
태주는 수련실로 돌아왔다.
선계에서의 6시간.
마치 꿈만 같았다.
'···돌아왔네.'
영영 선계에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언젠간 돌아와야지.
여기가 자신의 집이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허전함을 넘어 모든 게 허무한 느낌.
그래도 등선이라고 속세의 삶에 초연해진 건가?
다 부질없다.
아웅다웅 살아서 뭐 하나?
신선들처럼, 속세의 연을 끊고, 여유롭게, 게으르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자신의 선계 전용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금은 연결이 끊겼다.
다시 사용할 날이 있을까?
스마트폰에서 앨범을 실행했다.
많은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검선을 비롯한 여러 신선과 찍은 사진.
도화궁 서왕모와 선자들과도 함께.
염라와 판관들, 차사, 사자들.
그리고 해맑 선녀.
해맑과의 투샷은 굉장히 어렵게 찍었다.
아무리 태주라지만 해맑과 단둘이 사진을 찍으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자칫하면 못 찍을 수도 있었다.
간신히 건진 사진이었다.
머리에 커다란 꽃을 달고 활짝 웃는 해맑 선녀의 모습.
생각할수록 신기한 소녀였다.
단체 사진도 찍었다.
당군악도 함께.
저 하늘에 점처럼 보이는 게 바로 독선 당군악.
그래도 확대하면 얼굴 정도는 알아본다.
'어휴···,'
아무리 영혼 합쳐짐 현상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차라리 기억과 경험, 감정이 공유되는 영혼 연결이 나았다.
'밖으로 나가보자.'
일상으로 복귀해야지.
태주는 수련실 강철문을 열었다.
"냐아아아앙!"
일백이가 폴짝 뛰어올라 안겼다.
※ ※ ※
수련실을 나왔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당군악의 부탁도 있고.
"···바, 발모제를 개발하신다고요?"
백서연은 깜짝 놀랐다.
발모제라니?
"마수 레이드 도핑 물약이 완성되면 바로 발모제 연구로 들어갈 겁니다."
"가, 가능할까요?"
"해봐야죠."
어쩌면 MRC 발명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시중에서 팔리는 발모제가 있긴 하지만, 완전히 탈모가 진행된 사람에게는 효과가 미미했다.
진행 속도를 늦추는 정도?
"참! 회장님, 아메리카 백악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화이백이 완전하게 부도 처리되었답니다."
"아! ···그런데 왜?"
"공장을 인수할 의향이 있다면 우선권을 드리겠다고."
"흐음."
부도로 주식은 휴짓조각이 되었고, 공장 설비나 부지는 은행으로 넘어갔단다.
헐값에 사들일 기회.
"서연씨 생각은?"
"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수출만으론 생기불끈 물량을 대기가 힘들어서, 또 사내 보유금도 너무 많이 쌓였어요. 투자 여력은 충분합니다."
기적의 피로해소제.
언제나 모자란다.
삼한에서도, 아메리카 공화국에서도.
태주가 없는 사이 컨테이너선이 또 태평양을 건넜지만, 그래도 부족한 상황.
"우리가 삽시다. 서연씨가 전담해주세요."
"네!"
"인수하고 남은 사내 보유금은 직원들 성과금으로 돌려요. 그동안 약 만드느라 열심히 일했잖아요. 두둑히 챙겨줍시다."
"티제이 해운과 티제이 조선도 포함해서요?"
"당연하죠."
같은 그룹인데.
"그리고 제가 조만간 잔치를 열 계획인데···, 장소는 파주에서."
"알겠습니다. 참석 인원은 몇 명이나?"
"일단 백홍표 형님과 서연씨, 그리고 정연희씨, 티제이 길드원들도, 그리고 열사람 더 추가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태주는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불러 모임을 가질 생각이다.
서로 친목도 다지고,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면서.
'유럽 언데드 사태가 눈에 밟히긴 하지만···,'
전쟁은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서쪽으로 진군하는 언데드 마수 군단, 놈들을 막기 위해 출정한 제국군.
지상에서의 교전이 시작됐다.
밀고 밀리는 전투.
백만을 넘어서는 언데드 마수 군단이었지만, 제국군도 만만치 않았다.
신무기가 등장했다.
기존의 결정체 무기보다 훨씬 진보된 무기.
그래서 언데드 군단의 진군이 살짝 주춤했다.
그 결과 유럽 제국군은 잔뜩 고무된 모양.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도 타 국가의 그 어떤 지원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 귀환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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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유럽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