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7

***

화로의 사원에 인접한 마을은 흔히들 대장장이 마을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루 엔테르의 가호를 받아 따듯한 편인 데다가 마물의 습격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원이 쇠퇴하고 있는 지금도 상당한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안이 기억하던 살풍경한 마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광경.

어쨌건 덕분에 주점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이안을 따라 들어온 샬롯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마을 사람들은, 뒤따라 사제들이 우르르 들어서자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줬다.

곧 음식과 술이 자리에 깔렸다.

사제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에 놓인 것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축제 분위기가 따로 없었다.

루 엔테르의 사도가 될 불씨가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몰락하던 교단에서 루시의 존재는 희망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난쟁이들이랑 섞여 살면서 수인을 보고 놀라다니….'

그 한복판에 묵묵히 앉은 이안은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실소했다.

그의 눈엔 난쟁이나 수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떠시오?"

그의 건너편에 앉은 미구엘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술맛을 뜻하는 것이리라.

"좋군."

이안이 진심으로 내뱉었다.

식도가 탈 것 같은 독주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그는 높은 저항력과 정신력 덕분에, 어지간한 술로는 취기조차 느낄 수 없었으니까.

"북부의 술은 다 그 정도요. 맥주도 나쁘진 않지만, 종종 그리웠단 말이지."

미구엘이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의 볼은 벌써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구엘은 왜 북부를 떠났던 거예요?"

그의 곁에서 따듯한 수프를 입에 넣던 루시가 문득 물었다.

미구엘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하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별거 아닌 얘긴데."

"그래도요. 궁금해요."

"으음… 그렇다면야. 나는 북부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다. 그때는 아직 마족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지…."

이안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미구엘의 과거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음식을 음미했다.

질긴 고기, 그리고 정체 모를 건더기가 떠다니는 수프였지만 지금은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검은 벽이 미구엘의 고향을 앗아간 거네요."

"그런 셈이지만. 떠난 시간이 길어서 그런가, 지금은 그냥 북부 자체가 고향처럼 느껴지는군."

이안이 식사를 끝낸 건 미구엘의 과거사가 끝을 맺을 무렵이었다.

루시는 안타까운 눈빛이었지만.

이안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여긴, 비극적인 사연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드문 세상이었다.

'심지어 난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미구엘이 이안을 바라본 건 그때였다.

"그래서… 형씨는 어디로 가실 거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곧장 제국으로 가실 거요? 그러니까, 직할령으로?"

"글쎄…."

"북부에 들른 김에 트라벨가로 가시는 건 어떻소? 형씨 능력이면, 거기서 떼돈을 벌 수 있을 텐데."

트라벨가는 북부 자치령의 수도였다. 이안의 옆에 앉은 샬롯이 귀를 쫑긋댔다.

그가 어딜 가든 따라다녀야 하는 만큼 신경이 쓰이는 것이리라.

"트라벨가도 들르긴 해야지."

술잔을 놓은 이안이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그 전에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지만."

"엥…? 할 일이 남으셨다고?"

루시는 물론, 그녀의 옆에 앉은 체르윈까지도 이안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한 이안이 내뱉었다.

"우리가 지나온 숲, 북부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는 모양이더군. 거기 도사린 놈과 맹약을 맺었어. 그러니까, 놈을 찾아가야 돼."

"뭐라고…? 그 얘길 왜 지금까지 안 하셨소?"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아니, 고대의 존재와 맹약을 맺은 게 어떻게 별 게 아니오? 그게 형씨한테 원하는 게 뭘 줄 알고."

다들 경악한 표정이었다.

샬롯조차 이안을 돌아볼 정도.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날 원하겠지. 상관없어. 죽이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이안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환영을 보내 댔을 놈이었다.

덕분에 버려진 땅을 평화롭게 지나쳤으니, 손해 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안이 맺은 맹약의 내용은 놈을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그를 손에 넣을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물론 그런 주제에 자신의 정체도 위치도 알려 주지 않은 건 좀 열 받았지만.

그놈의 케케묵은 골통을 박살 내 주면 씻은 듯이 후련해 지리라.

"버려진 땅에서부터 북부까지 이어진 숲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체르윈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턱을 만지며 읊조렸다.

"서고를 찾아보면 관련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혹, 다른 단서는 없으신지요?"

"있소."

이안은 왼손의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아귀에 흐릿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체르윈이 그 문양을 뚫어질 듯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얼마나 더 머무실 건가요?"

"이틀. 길면 사흘."

"그 안에 최대한 알아보도록 하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더한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군요."

"뭐든 거절하진 않겠소."

"그럼 내일 사원에 들러 주십시오. 외부인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러분들은 예외로 두겠습니다."

"뭘 주시려고…?"

"화로의 축복을 청하겠습니다."

"...!"

이안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게임에선 냉기 저항과 체력 회복 속도를 상승시켜 주던 루 엔테르의 축복.

북부의 춥고 삭막한 야전을 누비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터였다.

"떠나기 전에 부탁드려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여신께서도 불씨의 운반자인 이안 경에게는 축복을 아끼지 않으실 겁니다."

이안이 옆을 까딱였다.

"여기 이 녀석도 부탁드리겠소."

"...!"

샬롯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체르윈이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목이 타는 듯한 감각에 기분 좋은 숨을 내쉰 그가,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는 샬롯을 돌아보았다.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재빨리 시선을 거둔 샬롯이, 문득 혀로 입가를 핥고는 내뱉었다.

"전에도 그런 고대의 존재와 싸워 본 적이 있는 거냐? 아주 익숙해 보이는데."

"전에도? 푸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대답은 미구엘 쪽에서 나왔다.

눈이 설핏 풀린 미구엘이 이안을 턱짓하며 소리치듯 말했다.

"이 형씨가 내 눈앞에서 쳐죽인 고대 마물과 망령, 타락자의 숫자만 해도 수십은 가뿐하게 넘는다고. 괜히 아겔 란의 구원자라고 불리는 줄 알아?"

"...!"

샬롯의 귀가 뾰족해졌다.

미구엘이 실실댔다.

"왜. 넌 그런 종류의 괴물들은 상대해 본 적은 없는 모양이지?"

"…제기랄."

시선을 돌린 샬롯이 술잔을 들었다. 애송이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게 수치스러운 모양.

"앞으론 지긋지긋하게 겪게 될 거다. 난 그런 놈들 전문이니까."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무심한 눈길로 샬롯을 돌아보았다.

"물론 너도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거야. 내게 진 빚을 다 갚아야, 꼬리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

이안을 마주 보는 샬롯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어이없게도, 그녀의 눈에 번지는 건 기대감이었다.

혀로 입술을 축인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것만으로도 언젠가 꼬리를 돌려준다면. 기꺼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내심 실소하면서도, 이안은 말없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즐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루시와 미구엘, 그리고 사제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사원으로 향했다.

이안은 함께 가자는 부탁을 거절하고 마을에 남았다.

이곳이 여정의 종착지인 저들과 달리, 그는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이 여럿 남아 있었다.

***

샬롯이 볼 때, 이안은 확실히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별난 구석이 있었다.

꼬박 한나절을 자고 일어나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목욕이라는 것부터가 그랬다.

심지어 그는 한 시간이 넘게 공들여 몸을 씻었다. 뜨거운 물을 몇 번이나 돈을 들여 바꾸면서.

그녀가 아는 인간들은, 심지어 귀족이라 할지라도 씻는 것에 저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텐데.

그 후로 이안은 마을을 돌며 필요한 물건을 샀다.

북부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방한복과 각종 병장기 위주였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고, 굳이 가격을 흥정하지도 않았다.

이안이 돈이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진짜 놀라운 건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많은 걸 어떻게 들고 가려는 거지? 마차에 실을 건가?"

숙소로 돌아와 물건을 분류하는 이안을 보며, 샬롯이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허공에서 물건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였다.

"어떻게 한 거지…?"

"잘."

"...."

무성의한 태도에도, 그녀의 의문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건 네 거다."

이안이 곰 가죽을 덧대 만든 망토와 갑옷 안에 입을 방한 장비들을 그녀에게 던져 준 것이다.

"내… 거라고? 왜…?"

샬롯은 당황한 나머지 되물었다.

자신은 그의 노예나 다름없는 데다, 보통 인간들은 수인이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왜라니? 네가 얼어 죽으면 그만큼 내가 할 게 늘어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

다음날도 이안은 그녀를 끌고 다니며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샬롯이 주목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비 마족 년이라니, 불길한 걸 데리고 다니는군."

"이미 예비가 아닌지도 모르지. 저런 것들은 죄다 죽여서 가죽을 벗겨 버려야 되는데."

이런 시선과 대우는 그녀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것들이었다.

천칭 상단의 경호병이 된 후로 대놓고 말하는 자들은 줄었었지만, 본질적으론 달라진 적이 없었다.

하비에르 같은 몇몇 괴상한 작자들을 제외하고는, 인간들은 언제나 그녀를 특이한 노예나 불길한 마족으로 취급했다.

물론 법은 언제나 인간들의 편.

보는 눈이 많을 땐 무시가 답이었으므로, 샬롯은 늘 그렇듯 보란 듯이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수인 가죽은 특히 질기고 따듯하다던데. 이봐, 비싸게 쳐 줄 테니 우리에게 넘기는 게 어때?"

상인 중 하나가 그렇게 제안한 순간, 그의 얼굴 한복판에 곧바로 주먹을 꽂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마을의 건달들을 전부 다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망치나 집게 따위를 집어 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그는 보란 듯 마지막 건달의 팔을 부러뜨리고는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또 수인 가죽 필요한 사람?"

나서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그 행동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마차를 몰고 마을을 떠날 때까지.

"어제, 왜 그런 거지?"

결국, 먼저 물은 건 샬롯이었다.

"어제…?"

"그것들 두들겨 팬 것 말이다."

"아. 그거. 난 개소리를 그냥 들어 주는 편이 아니라서. 그게 왜?"

샬롯은 진심인가 싶어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게 다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죽인 타락자는 죄다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인간을 전부 예비 타락자라고 부르진 않지."

평소처럼 의자에 기대 있던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너희 수인도 그렇겠지."

"...."

샬롯은 눈을 끔뻑였다.

솔직히 말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처럼 아주 굴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이 이어질 줄 알았건만.

요 근래 이안의 행동을 돌아보면, 그저 그녀를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꾸 그에게 빚을 지는 듯한, 그걸 넘어 은혜를 입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설마, 이것도 꼬리를 잘린 여파인가…?'

"다음부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내 귀에 개소리 들리지 않게."

이안의 말에 움찔, 귀를 떤 샬롯이 이윽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그들은 화로의 사원에 도착했다.

체르윈과 제법 긴 대화를 나눈 그는, 사원 중앙에 놓인 거대한 화로 앞으로 샬롯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정말 화로의 축복이 내렸다.

몸속 어딘가에 열기가 들어찬 것 같은, 나쁘지 않은 느낌.

샬롯이 그 감각을 내심 즐기는 사이, 이안은 마중 나온 루시, 미구엘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루시는 이안을 꼭 껴안았다.

심지어 미구엘도 그랬다.

"수련이 끝나면 제국으로 갈 거예요. 그때 다시 만나요. 이안 님."

"또 봅시다. 형씨."

질색하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는."

루시와 미구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이안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탄 샬롯이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거지?"

"북쪽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뒤에서 루시와 미구엘이 뭐라 소리쳐 댔지만, 이안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자에 깊이 몸을 묻을 따름이었다.

그게 떠돌이의 방식이라는 듯이.

#069화

"...."

말발굽 소리만이 이어지는 고요함에, 이안은 새삼 말 많은 용병과 호기심 많은 소녀의 빈자리를 느꼈다.

아주 조금의 허전함.

하지만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았고, 남은 삶을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이어갈 기회를 손에 넣었으니까.

자신과 계속 함께해 봐야, 싸우고 죽이는 기술만 늘어날 터였다.

끝내는 죽음이 기다릴 테고.

'…혹은 그보다 더 나빠지거나.'

이런 여정을 이어나가는 건 그처럼 선택권이 없거나, 샬롯처럼 목숨 건 전투를 삶의 목표로 삼는 부류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이제 잊자. 다시 만날 일이 없으면 그게 더 좋고.

또다시 같은 결론을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관도를 따라 이어진 황량한 전경.

그늘마다 얼어붙은 눈의 흔적들.

북부의 전형적인 날씨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몸속에 깃든 신성력 덕분이었다.

게임에서와 달리, 체르윈은 축복이 열흘가량 이어질 것이라 했다.

루 엔테르가 더 많은 신성을 내렸다고도 했으니, 어쩌면 더 오래 지속될지도 몰랐다.

'…혼돈력을 조금씩 흘려 넣으면, 지속 시간이 더 늘어날지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가정.

하지만 이안은 축복이 끝나가는 시점에나 실험해 보기로 했다.

축복이 어그러져서, 아까운 혼돈력만 날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혼돈력이 회복되는 속도는 마력보다도 훨씬 더 느렸다.

혼돈의 파편을 더 키우거나 회복 속도를 빠르게 만들 필요성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능력치를 올려 높일 수 있는 마력량에는 한계가 명확했고, 범용성도 혼돈력이 더 뛰어났다.

공허의 힘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떻게든 계속 강해져야 하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능력치 분배도 더 망한 지금은 더더욱.

'…방어력만큼은 확실히 올라갔지만.'

그가 새로 구비한 방어구들은, 대부분 사슬과 얇은 철판을 덧대 만든 것들이었다.

입어 본바, 가죽 방어구를 착용한 것과 움직임에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적어도 그가 마법사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코앞에서 마법을 부려도, 눈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마법 무구나 유물을 가지고 있으리라 판단하리라.

'…마을에서 바이저 달린 투구라도 하나 살 걸 그랬나.'

이러다 언젠간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치고 양손검을 들고 있을지도.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치는 그때.

"…이안."

그를 더 강하고 빠르게 만든 주범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안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눈빛까지 감춘 것은 아니어서, 샬롯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그게…."

이안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샬롯이 초조해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종속되어 가는 과정인 것같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애초부터 빚을 지거나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성격인 것으로 보였다.

아마 수인족 특유의 자존심 때문일 터.

"그러고 보니, 식사 때가 지났군."

내뱉은 이안이, 옆에 놓여 있던 육포 덩어리를 그녀에게 던졌다.

점원 말로는 곰 고기라는데, 사실은 쥐 고기였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맛을 가진 녀석이었다.

"더 필요하면 말해라."

샬롯은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게 될 터였다. 당연히 평상시의 컨디션 관리 정도는 신경 써 줘야 했다.

그녀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면 귀찮고 피곤해지는 건 그였다.

"어… 아니, 음. 그래. 잘 먹겠다만."

육포를 받아 든 샬롯이 당황한 듯 주절댔다.

이안의 미간이 결국 구겨졌다.

"또 뭐.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라.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그…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언제쯤 야영지를 꾸려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내가… 마부로 살아 본 적은… 없어서…."

틈만 나면 잔소리를 해대던 미구엘의 빈자리를 그녀 역시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기본적인 걸 묻다니.

이안이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화로의 사원에서 받아 온 물건이었다.

마법이 담기지도, 축척이 정확하거나 자세한 물건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근의 지리만큼은 알아볼 수 있게 그려져 있었다.

"조금 더 가다 보면 바위가 솟은 갈림길이 나올 거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 야영은 때가 되면 말해 줄 테니, 귀찮게 하지 마라."

"…그래. 알았다."

샬롯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짤뚱해진 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코웃음 친 이안이 다시 지도를 눈에 담았다.

화로의 사원에서 먼 북쪽. 장벽처럼 이어진 아히고른 산맥의 서쪽 끄트머리 너머에, 체르윈이 남긴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버려진 땅에서부터 이어진 얼음 숲의 위치였다.

그 주위와 내부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건, 물론 알려진 바가 없어서였다.

지도와 함께 두꺼운 역사책을 들이밀던 체르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귀하의 손에 새겨진 건 고대 북부 왕국 중 하나의 표식일 거예요. 다만, 고대 북부 왕국들의 문양은 국가뿐 아니라 통치자에 따라서도 조금씩 달라지는 특징이 있죠.

-그래서, 같은 건 찾았소?

-비슷한 건요.

그녀가 보여 준 건, 북부 거인 왕국의 문양이었다. 확실히 이안의 손에 새겨진 것과 비슷했다.

-거인 왕국의 정확한 이름은, 지금에 와선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거인 왕국의 마지막 여왕이 공허의 힘을 탐구한 초기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로만 알려져 있죠. 불사의 군단과 불멸의 힘을 손에 넣으려 했다는데.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말씀드릴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불사와 불멸이라. 전형적이군.

-그녀는 자신의 별궁에서 연구에 매진했다더군요. 그녀와 왕국의 최후에 대해선 기록이 모호해요. 혹자들은 아직도 아히고른 산맥 어딘가에, 불사의 거인 군단이 잠들어 있다고도 하더군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안은 게임에서, 산맥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고대 거인 왕국의 유적을 탐험한 적이 있었다.

지성과 기억을 잃고 잠들어 있는 거인 대장군과 그의 군단이 봉인된 곳이었다.

-이따금씩 산맥 인근에서 검은 벽의 광기를 머금고 되살아난 거인 전사가 발견되곤 하는 걸 보면, 아예 없는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숲은….

-산맥 옆으로 이어져 있는 거군. 이해했소.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긴 하지만, 아예 동떨어지진 않았지.

-그 저주받은 숲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만. 귀하 덕분에 고대 거인 왕국과 관련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으리란 사실이 밝혀지게 된 셈입니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게임에서 겪어 보지 못한 건 물론이고, 공략글에서도 관련된 부분을 읽은 적이 없었다.

공략글을 필요한 부분만 훑어 댈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어야 했다는 부질없는 생각만 다시 한번 곱씹을 따름이었다.

'…위치라도 알게 된 것에 감사할 수밖에.'

생각하며, 이안은 의자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

마찬가지로 이 적막한 평온 역시,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야 했다.

북부의 밤은 특히 혹독하기로 유명했으니까.

언제 어디서 평화를 깨뜨릴 무언가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

"이런…."

샬롯이 어설프게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문득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후, 입김 섞인 한숨을 내쉰 그가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의 문양이 울리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옅은 마력의 파장이 신호를 보내듯 번졌다.

이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준비 해라."

이안이 내뱉은 말에,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세 번째 시도에 들어가던 샬롯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준비?"

"네가 좋아하는 걸 할 준비."

대답한 이안이 손을 털었다.

그의 손끝에서 튀어나간 불꽃이, 단숨에 장작에 불을 붙였다.

잠시 허탈한 듯 모닥불을 응시하던 샬롯이, 이내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싸움? 싸움이 일어난다고?"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드디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순간이 왔다는 듯한 얼굴.

이내 귀를 쫑긋댄 그녀가 어둠 너머를 돌아보았다.

"그렇군…! 온다…!"

"…벌써 느껴진다고?"

이안이 되묻자, 샬롯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놀랄 것 없다. 수인족의 감각은 대륙의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하니까. 게다가 난 유독 더 그런 편이지."

"아, 그래."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마차 바퀴에 돌부터 잔뜩 괴어 놔라. 혼자 도망간 마차를 되찾으러 가고 싶지 않으면."

"…아. 그렇군."

샬롯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신이 이안이 시키는 걸 순순히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이안은 이리저리 몸을 풀며 주위의 어둠을 돌아보았다.

아직 그의 눈에는 짙게 깔린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북부는 온갖 마물의 천국이었다.

북부 자치령의 백성들은 대부분 화로의 사원이나 트라벨가 같은 거점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미구엘의 말에 따르면, 검은 벽의 광기가 잠들어 있던 고대의 존재들도 죄다 일깨우면서, 가뜩이나 살기 힘든 동네가 더 위험해졌기 때문이랬다.

휘이이-

황량한 어둠 너머.

비척대며 기척을 드러내기 시작한 놈들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았다.

마차 가장자리에 훌쩍 올라선 이안의 동공이 올빼미처럼 확장됐다.

누더기를 걸친 언데드들.

되살아난 고대 북부의 망자 군단일 터였다.

'매일 밤 이러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든 이안은, 과거 메브가 그랬던 것처럼 검날 아랫부분을 움켜쥐고는 몸을 날렸다.

쉬하악-!

내달리는 발걸음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비척대던 해골 한 마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겔 란에서 본 것들과 다른 점이라면, 이놈은 이안을 보자 방어 자세부터 취했다는 사실이었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언데드는 아니라는 의미.

다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퍼석-!

단죄의 검이 언데드의 낡아 빠진 검과 함께 두개골까지 박살 냈다.

그 안의 망령이 잠시 번쩍이다 흩어지는 사이, 이안은 이미 다음 언데드의 두개골을 후려치는 중이었다.

빠각-!

또 한 마리. 그리고 다음.

이안은 막힘 없이 언데드 병사들의 머리를 박살냈다.

콰직! 빠악-!

옆에서도 소란이 이어졌다.

득달같이 달려온 샬롯이 날뛰고 있었다.

쌍검을 움켜쥔 그녀는 자신의 야성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되살아난 망자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전투 방식이었다.

기세는 더 흉험해졌지만, 훨씬 비효율적인 방식.

'어그로는 확실히 끌겠군.'

하지만 장차 그녀가 맡게 될 역할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언데드 부대가 뼈 무더기로 되돌아가는 데에는 불과 십여 분이면 충분했다.

"…후."

검을 되돌린 이안이 짧게 숨을 골랐다.

몸이 상쾌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미 이쪽 세계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게 분명했다.

손아귀의 울림은 어느새 잦아들었지만.

같은 현상이 반복되리라는 확실한 징조로 느껴졌다.

'찾아오라고 해 놓고 마물들을 불러 모으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짓 아닌가?'

선택받은 자의 시련, 뭐 그딴 거라도 내리고 싶은 건가.

생각하며 모닥불 앞에 앉은 이안은, 샬롯이 아직도 어둠 속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전투 내내 이안을 힐끔댔고, 지금은 그가 쓰러뜨린 망자 사이를 돌며 두리번대고 있었다.

"뭐 하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샬롯이 모닥불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충격받은 듯한 눈빛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모닥불을 멍하니 응시하던 샬롯이, 문득 내뱉었다.

"어떻게 한 거지?"

"뭘."

"어떻게 네가… 나보다 더 많은 마물을 쓰러뜨린 거지? 분명히 근접전만큼은 내 쪽이 조금 더…."

그거에 그렇게 충격받은 거라고?

이안은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지만, 샬롯은 여전히 진지했다.

"어떻게…?"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볼 때 넌, 전사보다는 암살자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뭐라고…? 나는 태생부터 전사였고, 지금도 전사다."

샬롯이 자존심이 상한 듯 말했다.

뭐, 그러시다면야.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계속 그렇게 싸워라. 난 상관 없으니까."

"...."

***

샬롯은 밤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날 밤에는 그 전날 같은 대규모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맴돌다 찾아온 마물 몇 마리가 습격의 전부였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그랬다.

그리고 마침내 그다음 날, 언데드 부대의 습격이 있었다.

샬롯은 기다렸다는 듯 온 힘을 다해 날뛰었다.

"어째서…?"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고작 이안과 비슷한 정도의 공적을 올렸을 뿐이었다.

"대체 그런 걸 왜 신경 쓰는지 모르겠군."

"...."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녀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싸움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말이 퍼져 버릴 때까지 쉬지 않아서 전진이 오히려 늦어지기도 했고, 야영지로 삼을 만한 위치를 제대로 찾아내지도 못했다. 여전히 모닥불 피우는 건 어려웠고, 심지어 육포조차 태워 먹기 일쑤였다.

그러니 꼬리의 반환을 정당하게 요구하려면, 전사로서라도 제 몫을 넘치게 해야 할 판이건만.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실수와 부채심만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야성이 더 빠른 속도로 꺼지고 있다는 것까진, 그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뿐.

그렇게 종일 한계까지 바짝 곤두선 그녀의 감각에 적당한 기회가 포착된 건,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

불침번을 서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던 샬롯의 귀가 문득 쫑긋댔다.

그녀의 시선이 마차 너머의 어둠으로 돌아갔다.

동공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확정되고,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한층 민감해진 그녀의 후각에 옅은 피 냄새가 스며들었다.

또 그 기척이 분명했다.

샬롯이 이 기척을 처음 느낀 건 사흘 전이었다.

처음은 지금보다 노골적이었다.

다급함과 두려움이 섞인 숨소리. 조금 더 짙은 패 냄새.

상처 입은 마물의 기척과도 흡사했고, 이내 사라져서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그 기척이 얼핏 느껴진 순간, 얘기가 달라졌다.

놈은 샬롯 조차 어렴풋이 느낄 거리까지만 다가왔다가, 이내 다시 사라졌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샬롯은 비로소 저 기척이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놈이 왜 따라오다 멀어지는 건지는 뻔했다.

습격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이쪽이 눈치챘으리란 생각 따윈 하지 않은 채로.

하긴. 이런 은밀한 기척을 느끼는 건, 수인 중에서도 그녀처럼 특출난 부류가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느껴지지 않나?"

"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묻는 이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샬롯의 입술이 송곳니가 드러나게 말려 올라갔다.

그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다면, 그건 상당히 큰 공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잠시 다녀오겠다."

"...?"

#070화

샬롯이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는 살기를 드러내거나 무기를 뽑아 들지도 않았다.

그저 땅에 깔리듯 낮은 자세로,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달려 나갔다.

"...."

홀로 남은 이안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오감을 예민하게 일깨워 그녀의 기척을 쫓았지만, 벌써 어디로 간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전사보다는 암살자가 어울리는데. 본인은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구운 육포를 입에 물었다.

요 며칠간 샬롯이 보이는 이상 행동에 완전히 적응한 그였다.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반대로 마음에 들고 싶어 애쓰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냥 놓아두기로 한 것이다.

적어도 요령을 피우려고 눈치를 보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야밤에 혼자 사냥이라니….'

키우는 고양이가 자꾸 벌레를 잡아다 머리맡에 두고 간다던, 과거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하니 그녀가 노리는 게 벌레는 아닐 테지만, 헛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쩌엉-!

저 멀리서 날카로운 굉음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짐가방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이안이 상체를 일으켰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시 범위를 넘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콰직-! 쩌엉- 콰르르-

심상치 않은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옆으로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안의 시선이 소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돌아갔다.

저 멀리, 어둠을 머금은 앙상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들썩이고, 한밤의 소란에 놀란 북부의 날짐승들이 소스라치게 날아올랐다.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모닥불 옆의 마차에 가로막혔다.

'…혼자서도 괜찮은 거 맞나.'

전력 이탈될 일은 없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옆에 풀어 둔 검집을 쥔 순간 거짓말처럼 소음이 멎었다.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느껴지는 적막.

이윽고 절뚝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뭔가를 질질 끌고 오는 듯한 소리가 마차 뒤편에서 가까워졌다.

코를 스치는 피 냄새.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가운데, 샬롯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조금 늦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귀 아래부터 턱까지 할퀸 듯한 상처가 길게 새겨져 있었다.

철철 흐른 피가 주위의 털을 적시며 응고되는 중이었다.

한쪽 팔의 보호대도 날아갔고, 그 아래의 팔에도 긁힌 잔 상처가 남았다.

갑옷의 마석들이 흐릿하게 일렁이는 걸 보니 마력을 거의 다 소모한 모양.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상태를 먼저 지적하지 않았다.

"…호오?"

그녀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는 시신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피 묻은 은발과 헐벗은 가녀린 몸.

낯이 익은 실루엣이었다.

"널 따라오던 계집이다. 괴상한 짓거리를 하더군. 도망치려 해서 끝까지 따라가서 죽였다."

내뱉은 샬롯이 그의 앞에 시체를 툭 던졌다.

시신의 뒤통수에 단검이 자루만 보일 정도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 사이로, 미간에 단검 날이 삐죽 튀어나온 얼굴이 드러났다.

"테사이아…."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내뱉었다.

얼굴의 피를 손으로 훑어 날름대면서, 샬롯이 곁에 주저앉았다.

"아는 계집인가?"

"그래. 봐서 알겠지만, 마족이다."

"마족…?! 마족이었다고?"

샬롯의 주황색 눈이 커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흡혈 요정이지. 전에 아겔 란에서 잡혀 가는 걸 구해 줬었다. 내 목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그럼, 그 서부 변방부터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건가."

"그런 모양이군. 또 만나자더니."

이안은 아겔 란에서 미구엘에게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사냥개의 피를 빨던 괴인의 소문.

그때도 설마 하긴 했었는데.

'북부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라오고 있었을 줄이야.'

샬롯이 만족스럽다는 듯 가르릉댔다.

"그럼 그렇게 오래 눈치채지 못한 위협을 내가 처리한 거군. 심지어 마족을."

"그래. 네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한 건지 이제 알겠지."

"별거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하룻밤이면 멀쩡해질 거야."

누가 전사 아니랄까 봐, 허세는.

코웃음 친 이안이 가방에서 천과 붕대를 꺼냈다.

그가 얼굴에 붕대를 감아 주기 시작하자, 샬롯이 눈을 치켜뜬 채로 굳어졌다.

"다음부턴 혼자서 날뛰지 마라. 네가 죽으면 내 손해야."

덧붙인 말에, 굳어져 있던 샬롯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럴 일은 없다. 괴상한 계집이긴 했지만, 내 적수는 아니었어. 죽이기 어렵지도 않았고."

"그거야 죽인 게 아니니까 그렇지."

"뭐…?"

샬롯이 휙 그를 돌아보았다.

그럴 리 없다는 듯한 시선.

이안은 붕대를 더 꽉 압박해 감으며, 널브러진 테사이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미간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단검 날이, 어느새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밀려나고 있었다.

"뱀파이어는 이 정도로 죽지 않아. 목을 자르거나 몸을 양단해도 살아 있지."

"...."

붕대질을 마무리한 이안이, 굳어 있는 샬롯의 팔에도 천을 대고 붕대를 감으며 말을 이었다.

"마족이란 놈들은 대부분 목숨줄이 엄청나게 질기지. 네가 저 단검을 뽑은 채로 가지고 왔다면, 끌고 오는 도중에 기습당했을 거다."

"그런…."

샬롯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족을 상대해 본 건 처음이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방심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사실 이안에겐 오히려 이쪽이 더 잘된 일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편해지긴 했지. 이 녀석의 몸을 제압해라. 마족을 죽이는 법을 알려 줄 테니까."

테사이아를 직접 죽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녀라면 상당한 경험치를 줄 테고, 어쩌면 받은 적 없는 퀘스트까지 완료될지도 몰랐다.

물론, 그 전에 대화 몇 마디 정도는 나눌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그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몇 마디 정도는 이죽거려야 속이 시원해질 테니까.

"…그래. 알았다."

샬롯이 시무룩한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테사이아의 몸을 툭 발로 차 완전히 엎드리게 뒤집었다.

붕대가 감긴 팔을 이리저리 돌린 샬롯이, 무릎으로 테사이아의 등을 찍어 누르고는 양팔을 뒤로 꺾어 움켜쥐었다.

둘의 체격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에, 어른이 아이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계집, 손발톱이 길어지더군. 하지만 이러면 소용없을 거다."

"자신의 피를 무기처럼 쓰기도 할 테니까. 방심하지 마라."

"알았다. 걱정 마라. 꿈틀대는 게 고작일 테니."

샬롯이 그르렁댔다.

이젠 말을 참 잘 듣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테사이아의 뒤통수에서 조금씩 스스로 밀려나고 있는 단검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스르륵-

단검 날에 맺혀 있던 피가 테사이아의 상처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뒤통수와 얼굴에 이어진 관통상이 스르륵, 빠르게 아물었다.

동시에 탁하게 풀어져 있던 그녀의 동공에 빛이 되돌아왔다.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자신을 결박한 손길을 느낀 듯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놓고 다시 붙어. 이 피도 맛대가리 없는 짐승아."

낭랑하지만 약이 바짝 오른 목소리였다. 샬롯이 비웃었다.

"이미 한 번 뒈진 귀쟁이가 입이 험하군. 한번 빠져나와 보시든가."

샬롯의 무릎과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팔의 붕대가 붉게 물들었다.

테사이아가 이를 갈며 바둥댔다.

"내가 조금만 더 기운이 있었어도 이까짓-"

푹.

테사이아의 악다구니가 순간 끊어졌다.

얼굴 앞의 땅에, 자신의 뒤통수를 꿰뚫었던 단검이 박혔기 때문이다.

등 뒤를 노려보던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가 비로소 위로 향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 서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오랜만이야, 이안."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얼굴에도 배시시, 요사한 미소가 번졌다.

소녀 같기도 여인 같기도 한, 아주 공을 들여 빚어낸 듯한 미모.

물론 이안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이군. 테사이아."

"내가 너한테 내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있던가…?"

"내가 너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 준 기억도, 없는 것 같은데."

"네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거든. 뭐, 무슨 상관이야. 반가워. 일단, 이 짐승부터 치워 놓고 이야기 나눌까? 사실,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난 지금 이 자세가 딱 좋아 보이는데. 집념이 대단하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네 체취는 대륙 끝에서도 맡을 수 있어. 게다가, 네 뒤를 따라다니면 먹을 게 알아서 떨어지더라고."

그런 거였냐.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하긴. 피비린내 나는 여정을 거쳐 온 그였다. 그가 죽인 인간과 마물의 잔재만 주워 먹어도 굶주릴 걱정은 없었으리라.

그녀의 머릿결과 얼굴을 훑어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런 것치곤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말했다시피, 사실 너한테 그 문제로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 그런데 겁이 나서 좀처럼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었거든. 어쨌든 이렇게 자리가 마련이 됐네."

테사이아가 창백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마주 앉아서 얘기 나누면 안 될까? 이 짐승의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말야. 요즘 토끼나 다람쥐 같은 것만 먹었더니, 짐승 피 냄새는 맡기만 해도 토할 것 같거든."

얘기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코웃음 친 이안이 단검을 뽑아 들며 샬롯을 바라보았다.

"잘 봐 둬라. 이런 평범한 날붙이로는 흡혈귀를 죽일 수 없어."

콰직-

"캬아아악-!"

단검이 테사이아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무시한 채, 이안이 말을 이었다.

"이런 건 그저, 잠깐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하거나 고통을 줘서 헛짓을 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지. 물론 그렇다고 이것들이 불사는 아니야. 죽일 수 있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지."

"...!"

테사이아가 숨을 헐떡였다.

설마, 하는 눈빛.

샬롯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가장 간단한 건 은이 섞인 무기로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르는 거다. 하지만 은으로 만든 무기는 구하기도 어렵고, 쓸 일도 많지 않지. 그러니까 보통은…."

화륵, 이안의 손아귀에서 불길이 솟았다.

"피가 전부 타 버릴 때까지 불을 지르거나, 신성력으로 뇌나 심장을 녹여 버려야 하지."

"…잠깐만. 이안? 잠깐만 얘기를 나누자. 응?"

테사이아가 타이르듯 내뱉었다.

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깨달은 모양이었다.

휙, 불길을 길가의 눈더미에 털어 버린 이안이 옆에 놓인 단죄의 검을 집어 들었다.

"불태우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지금은 신성력으로 죽이는 게 간단하겠지."

"이, 이안? 이안. 잠깐만. 제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샬롯이 손을 움직여, 테사이아의 양팔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혀를 날름댄 그녀가 테사이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덕분에 좋은 걸 배웠군, 귀쟁이 년아. 다음부터 네 동족을 사냥할 때 명심해 주지."

"닥쳐, 짐승아. 난 동족 같은 거 없어. 이안, 제발 부탁이야, 응? 살려 줘. 난 널 죽이려고 따라온 게 아니야. 물론 처음엔 그랬지만, 얼마 전부턴 아니었어. 네가 해낸 것들을 보면서, 내 힘으론 절대 널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래서 그냥 네가 남긴 잔재만 주워 먹기로- 아아악-!"

테사이아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샬롯이 그녀의 어깨에 박힌 단검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테사이아의 절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야, 이안! 제발 살려 줘. 난 정말 널 죽일 생각이 없어. 그럴 수도 없고.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안 된다구!"

"하나같이 식상한 유언이군. 테사이아."

말을 자른 이안이 천천히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테사. 테사라고 불러 줘. 너는 괜찮아."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한 테사이아가 온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샬롯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버둥대는 그녀의 손에서 손톱이 길어졌다가 짧아지고, 발톱이 툭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길 반복했다.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삐죽댔다.

"정말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 말을 들어 줘. 이안. 제발."

이안은 그녀의 절박한 붉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힘이 거의 없어 보였다.

샬롯과 싸우는 데 이렇게까지 힘을 소진한 걸 보면, 게임에서보다 턱없이 약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당연히 그때 같은 보상이나 경험치를 기대할 수도 없으리라.

하지만 벌충할 수 있는 존재들은 있었다.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

게임에선 대부분이 테사이아에게 잡아먹힌 후라 그와 싸울 수 있는 놈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닐 터였다.

공략에도 테사이아가 그들을 죽이기 전에 미리 가서 정리하면, 그녀를 약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험치와 전리품도 더 많이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었다.

그러니 아예 테사이아를 미리 죽인다면, 그런 시간 제한 없이 뱀파이어들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내 피를 끝내 먹지 못한 건 참 애석하게 됐군, 테사."

"거짓말이 아니야! 제발 잠깐만 내 말을 들어 줘. 응? 제발!"

"잘 가라."

이안이 검을 들었다.

테사이아가 왈칵 피눈물을 토하며 소리쳤다.

"도망치거나 반항하지 않을게. 그냥 잠깐만 얘기를 들어 줘, 제발! 부탁, 아니, 의뢰! 그래! 너한테 의뢰할 게 있단 말이야!"

머리 위로 치켜든 이안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의뢰라고?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 가운데.

"넌 용병이잖아, 이안. 의뢰가 들어오면, 들어는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의뢰인이 인간이 아니라도?"

눈가가 피범벅이 된 테사이아가 간청하듯 덧붙였다.

#071화

"...."

이안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샬롯이 설마 이 개소리를 들을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테사이아의 말이 아예 억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들어 보고 정말 개소리면 그때 목을 날려 버려도 늦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안도인지 뭔지 모를 숨을 내쉬는 그때.

푹.

이안이 단죄의 검을 옆의 땅에 꽂았다.

정확히 테사이아의 목 앞.

날을 그녀의 목으로 향한 채였다.

그 옆에 주저앉은 이안이 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내뱉었다.

"들어는 주지. 하지만 개소리를 하거나 개수작을 부리면, 이게 작두로 변할 거다."

테사이아의 시선이 적당히 얇고 길게 이어진 검날로 향했다.

서슬 퍼런 예기.

침을 삼킨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정말 알아줘. 난 네 피를 빠는 걸 포기했어. 말 탄 인간들이 잔뜩 몰려가서 너랑 싸운 날 이후로는 특히. 그전에는 조금만 더 참으면 널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는 상상만 해도 등에 소름이 돋고 무서워졌거든."

…내가 능력치를 올린 그날이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안은 내심 놀랐다.

감으로 그 변화를 눈치채다니.

"그렇다고 널 따라다니지 않을 이유는 없었어. 말했다시피 굳이 내가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요전 마을에 들렀을 땐, 상황이 조금 달랐어. 마을 근처로 갈 수가 없었거든. 밤에는 그래도 버틸만 했지만, 낮이 되면 몸속이 끓고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지. 역겨웠어."

화로의 사원 인근을 말하는 것이리라.

거긴 루 엔테르의 권역이니, 뱀파이어인 그녀에겐 흉지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이안이 미간을 좁힌 건 다른 이유였다.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네가 떠드는 말이 의뢰랑 무슨 상관이지?"

"이, 이제 본론이야. 네가 그 마을에 있는 동안, 나는 멀리 나와서 숨어 있었어. 네가 거길 떠나면 다시 따라갈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며칠 뒤에, 그자가 날 찾아왔어. 자기를 일족의 심판자라고 했지."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심판자…?"

"그래. 규율을 어긴 일족과 일족의 공적을 처단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댔어. 그러면서 잡종 실험체 주제에 자길 만나게 된 걸 영광으로 알라더군."

테사이아가 잠시 헐떡였다.

그때 느낀 공포와 분노를 다시 한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놈은 내 앞에 작은 관 세 개를 꺼내서 보여 줬어. 팔다리를 내 몸과 분리해서 따로 가져갈 거랬지. 돌아가면 다시 조립해 줄 테니 걱정 말라면서. …나는 당연히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그 실험실로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거긴 정말 끔찍했거든. 지금도 가끔 꿈에-"

"본론만."

"…그래서 싸웠어. 하지만 엄청나게 강했지. 내가 알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힘을 다루더라고. 하지만 나도 무작정 당하진 않았어. 네 덕분에 힘을 차곡차곡 비축해 뒀거든. 거기다 놈의 술수들을 따라 할 수도 있었고. 이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놈이 본 실력을 발휘하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지."

이안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가 기억하는 테사이아는, 뱀파이어들의 진혈을 삼키며 여왕의 자리까지 오른 대마족이었다.

그때도 심판자의 추적은 있었으련만.

'…혹시, 이것도 나 때문인가.'

짚이는 변화는 그뿐이었다.

테사이아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면서, 본래라면 홀로 투쟁하며 일깨웠을 잠재력과 전투 기술을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도 나비 효과라고 해야 하나.

그가 생각하는 사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나한테도 살아남기 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어. 그건 통했지. 물론 나도 무사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었어."

"추적을 뿌리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머리를 썼지. 난 짐승들을 많이 사냥했으니까. 그것들을 홀리는 건 숨 쉬듯이 할 수 있었거든. 보이는 짐승마다 내 피를 묻혀서 무작정 흩어지게 했어. 피 냄새로 날 추적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테사이아가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네 냄새를 따라갔어. 네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 너라면 날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전에도 날 구해줬었으니까. 근거 없는 생각이란 건 널 보고 나서 깨달았지. 그래서 일단, 숨어서 짐승들을 잡아먹으면서 힘을 회복하기로 했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망은 칠 수 있어야 했으니까."

"개소리하지 마라. 네가 며칠이나 지켜보던 걸 알고 있다."

샬롯이 으르렁댔다.

테사이아가 곧바로 내뱉었다.

"그건 무서워서 그랬어. 네가 만나자마자 나한테 칼부터 들이댈 것 같았다구. 넌 날 죽이는 방법도 알 것 같았고. 몇 번 네게 다가가려고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겁이 나서 더 다가갈 수가 없었어. 이 짐승이 날 눈치챈 건 그래서일 거야. 알았어? 네가 잘나서 날 찾은 게 아니야. 날 이긴 것도 아니고. 내 힘이 온전했다면 네까짓 건 지금 산산조각 나서 굴러다니고 있을 거라고, 이 짐승아!"

이게 그라데이션 분노인가 하는 그건가.

이안은 샬롯을 죽일 듯 노려보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샬롯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그런 가정은 무의미한 거다, 귀쟁아. 지금 내 밑에 깔려 있는 건, 결국 너니까."

우득, 샬롯이 테사이아의 팔을 더 강하게 눌렀다. 테사이아가 고통스러운 듯 움찔댔지만,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자랑이나-"

씹어뱉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단죄의 검이 그녀의 목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일말의 동정심도 담기지 않은 검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심판자를 죽여 달라는 거냐?"

"그자가 전부는 아닐 거야. 그자가 나한테 그랬거든, 일족은 날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차라리 그냥 지금 자기한테 잡히는 게 나을 거랬지. 그러니까 그자를 죽이더라도, 또 다른 심판자가 내 뒤를 쫓아 오겠지."

"...."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테사이아가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하지만 놈들은 그저 하수인일 뿐이야. 날 이런 괴물로 만든 것들은 여전히 루 사드에 도사리고 있지. 난 그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안, 내 복수를 도와줘. 이게 내 의뢰야."

솔직히 말해,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테사이아를 곁에 두면, 언젠가 찾아가 죽여야 할 뱀파이어들이 제발로 찾아오리란 거였으니까.

어쩌면 게임에서 테사이아가 힘을 키워 간 방식도, 자신을 찾아온 심판자들을 죽여 그들의 진혈을 흡수하는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테사이아를 돕는다면, 심판자들이 줄 경험치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테사이아가 더 강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으리라.

겸사겸사, 언젠가 죽여야 할 뱀파이어들의 전력도 줄일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테사이아를 내려다볼 뿐.

"나 혼자선 도저히 놈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날 도와준다면 얘기가 달라질 거야. 난 네가 해낸 것들을 봤어. 넌 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의뢰를 포기하지 않지. 그러니까 부탁이야, 이안. 내 의뢰를 받아 줘."

테사이아가 간청했다.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네 사정은 알겠다, 테사이아."

"테사. 부디."

"그래. 테사. 어쩌면 네 말대로 내가 널 따라오는 심판자와 싸워 줄 수도 있겠지. 네가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너라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하지만 의뢰라는 건, 이런 부탁만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다. 물론 나도, 알량한 동정심 따위로는 움직이지 않지."

"...!"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검 자루를 쥔 손을 까딱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의뢰에는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네 말대로면 나는 흡혈 일족 전체와 싸우게 될 텐데. 넌 어떻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지급할 거지?"

"뭐, 뭐든지. 뭐든지 줄게. 뱀파이어들은 돈이 아주 많아. 내 복수를 도와주면, 전부 다 네 거야. 난 그런 거엔 관심도 없어."

"확실하지 않은 보상이군. 게다가 그건, 널 돕지 않더라도 내가 응당 손에 넣게 될 전리품이기도 하지. 의뢰의 보수는 네가 가진 걸 줘야 하는 거다, 테사."

말을 자른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테사. 내가 네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테사이아의 눈동자가 떨리다가, 이윽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신이 잃게 될 것과 자신이 내놓아야 할 것 모두,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날 줄게, 이안."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안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지금 내 목숨밖에 없으니까."

"네 목숨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날 마음껏 부려. 네가 하라는 건 전부 할게. 지금 네가 하는 일도 도울 거야. 대신 네가 하려던 일들이 끝나면, 내 복수도 도와줘. 영원히 이 북부에서 살 건 아니잖아. 그때까지 날 곁에 두고 써 줘."

"내 노예가 되겠다고?"

"뭐라고 불러도 좋아. 어차피 나는 다른 대안이 없어, 이안. 이대로는 결국 루 사드로 다시 끌려가게 될 테니까."

"...."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짐승처럼 다뤄지다 죽고 싶지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네 의뢰인이자 노예로 살면서 복수를 꿈꾸겠어."

아예 멍청하진 않군.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타산이 맞지는 않는군."

내뱉으며, 이안은 테사이아의 붉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심판자들로부터 얻게 될 전리품은 전부 내 거다."

"알았어."

"그리고 넌, 놈들에게서 단 한 방울의 진혈도 얻지 못할 거야."

"...!"

테사이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진혈을 탐하는 건 흡혈귀의 본능.

그걸 참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알았어."

이윽고 테사이아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앙상한 어깨에 아직 박혀 있는 단검을 단숨에 뽑았다.

"계약은 성립됐다."

그가 샬롯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냐는 듯 눈을 치켜뜨면서도, 샬롯이 테사이아를 제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손목을 어루만지며 일어선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 이안. 진심이야."

"명심해라.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치면, 심판자들뿐 아니라 나도 널 추적하게 될 거다."

"물론이지. …그런 의미에서."

테사이아의 시선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는 샬롯에게로 향했다.

"이제 이 짐승은 쓸모없을 것 같은데. 내가 죽여도 될까?"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게 아니면 조용히 앉아 있어라."

"…알았어."

샬롯에게 날 선 시선을 보내면서도, 테사이아가 순순히 모닥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본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정말 저런 귀쟁이 마족의 약속을 믿으려는 거냐, 이안?"

"우린 약속을 한 게 아니야. 계약을 했지. 너도 이제 용병이니 그 차이를 알아 둬라."

"분명히 우릴 배신할 거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네가 죽일 수 있게 해 주지. 네가 잡아 온 녀석이니까."

"...! 정말인가?"

샬롯의 눈이 번뜩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저 녀석을 믿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감시해라. 헛짓하지 않게."

순간 움찔했던 샬롯이, 묘한 기대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헛짓거릴 하면, 그냥 칼로 찔러 버려도 되나?"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 정도론 죽지 않을 테니까.

샬롯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홱 몸을 돌려 모닥불 옆으로 갔다.

"지켜볼 거다, 귀쟁이 년아. 부디 헛짓거릴 해 줬으면 좋겠군."

"나도 들었으니까 말 걸지 말아 줘. 입 냄새나."

샬롯이 으르렁댔지만, 테사이아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안의 얼굴에, 이윽고 헛웃음이 스쳤다.

티르 엔의 성기사. 그리고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아이와 동행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건만.

지금은 수인과 흡혈 요정이 동행이라니.

'…정말이지 앞날은 알 수 없는 거군.'

속으로 읊조리며 모닥불로 다가간 이안은, 모포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로브를 집어 테사이아에게 내밀었다.

"...?"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저렇게 보는 건가.

혀를 찬 이안이 내뱉었다.

"앞으론 항상 걸치고 있어라. 네가 계속 벌거벗고 다니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072화

테사이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샬롯과 싸우고 이안에게 심문당한 여파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채 야생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녀가 다시 꿈틀댄 건,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시점이었다.

"…아."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던 그녀는, 건너편에 앉은 이안과 눈을 마주치고는 한 박자 늦게 탄식했다.

"왜 놀라냐."

이안이 단죄의 검으로 모닥불을 쑤시며 내뱉었다.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곁에 누가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미안."

그녀가 로브 안으로 꿈지럭대며 쪼그려 앉았다.

몸에 뭘 걸치고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이안이 준 게 아니었다면 진작 벗어 던졌으리라.

"까슬까슬해."

"참아라. 마을에 들르면 네가 걸칠 옷을 사 줄 테니."

"옷…?"

질색하듯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이내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네가 입던 옷을 주면 안 될까, 이안?"

"너한텐 클 텐데."

현재 일행의 최장신은 샬롯이었다. 이안은 그녀보다 머리 반 개 정도가 작았고, 테사이아는 이안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났다.

"상관없어. 네 냄새가 나니까."

테사이아가 로브 자락을 킁킁댔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반짝였다. 붉은 눈동자에 갈증이 감돌았다.

"냄새 맡는 것까진 막지 않겠다만. 나한테 헛짓을 하려 했다간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그렇게 멍청한 짓은 안 해."

본능을 이길 수 있는 동안에는 그렇겠지.

이안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피를 빨려 줄 생각은 없었다.

피와 함께 무엇까지 빨아 먹힐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이안의 시선이 동쪽 하늘로 향했다.

주위가 밝아지는 걸 보니, 곧 해가 떠오를 게 분명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테사이아에게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로브를 킁킁대던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왜? 냄새는 괜찮다며."

"곧 해가 뜬다."

"그런데?"

"...?"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햇빛을 맞아도 괜찮은 거냐?"

"좋진 않아. 약해지거든. 아하. 내 걱정을 한 거구나."

테사이아가 빙긋 미소 지었다.

허리를 쭉 편 그녀가 머리에 눌러 쓴 후드를 벗었다.

"보여 줄게."

그 순간 동녘에서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의 산 능선을 타고 뻗어 나온 빛이 단숨에 테사이아의 옆얼굴을 비췄다.

눈을 감은 테사이아가 따가운 것처럼 미간을 움찔댔다.

곧 그녀의 은발이 빛을 잃기 시작했다. 잿빛에 가까운 회색.

창백하던 피부 역시 완전히 푸석하게 생기를 잃었다. 입술 위로 불룩하던 송곳니가 사라졌다.

"빛을 제대로 쐬는 건, 역시 아프네."

읊조리며 테사이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어느새,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래 묵은 늪에서나 볼 법한 색이었다.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을 느끼며, 이안이 물었다.

"그게 네 본 모습인 건가?"

"모르겠어. 그냥, 낮에는 이렇게 돼. 힘을 거의 쓸 수 없지. 지금은 그냥 칼에 찔려도 죽을지도 몰라."

선선히 대답한 테사이아가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회색 머리카락에 진녹색 눈동자.

지금 그녀는 조금 덜 자란 평범한 요정처럼 보였다.

"그래서 낮에는 거의 그늘에 숨어 있어. 이 상태로는 곰 한 마리도 이기기 힘들다구."

"다른 흡혈 일족도 낮에 그렇게 되는 거냐?"

"모르겠네. 낮에 다른 뱀파이어를 본 적이 없어서."

"잠은?"

"어제 같은 경우가 아니면… 사흘에 한 번 정도로 충분해. 보통 낮에 동굴이나 풀숲 속에 숨어서 자는 편이지. 이 상태로 그냥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잖아."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몰랐던 사실들이었다.

만약 다른 뱀파이어들도 이런 식이라면, 낮에 상대하는 것으로 손쉽게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약점을 알려 줘서 고맙군."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잠에서 깬 그녀가 하품하며 몸을 일으켰다. 덩치만 큰 고양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마른 혀로 입 주위를 핥은 그녀가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네년을 죽여야 할 때, 기쁜 마음으로 참고해 주지."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짐승아. 그리고 언제든 덤벼 줘. 반대쪽 얼굴도 똑같이 긁어 줄 테니까. 균형이 맞게."

테사이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역겨운 귀쟁이는, 마족이 되어서도 똑같이 역겹군."

"몸은 괜찮나?"

이안이 물었다. 샬롯이 팔과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아주 괜찮다. 아프지도 않군."

"이리 와라. 붕대를 갈아 줄 테니."

또? 하는 표정으로 움찔하던 샬롯이, 이내 테사이아를 힐끔대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안 앞에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감긴 붕대를 푼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이건 좀 놀라운데."

"...?"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을 만져 본 샬롯도, 이내 놀란 얼굴이 됐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서 손톱이 지나간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수인의 회복력이 빠르다고 해도,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축복의 효과가 상상 이상이군."

이유를 깨달은 이안이 말했다.

화로의 축복이 가진 효과 중 하나가 체력 회복 속도를 높여 주는 거였으니까.

"놀랍군. 어쩐지, 몸이 가볍다 싶었어."

팔에 감긴 붕대도 푼 샬롯이 감탄했다. 팔의 상처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붕대를 더 감을 필요는 없겠군. 아침 식사를 준비해라. 먹고 바로 출발할 거니까."

"알았다."

샬롯이 몸을 돌렸다.

벌떡 일어난 테사이아가 마차로 몸을 돌리며 읊조렸다.

"아쉽네. 좀 더 깊숙이 파 줬어야 했는데."

마차로 기어 올라가는 그녀를 노려본 샬롯이, 이내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혀만이라도 자를 수 있게 허락해 다오, 이안."

"안 돼."

대답하면서도 묘한 기시감을 느낀 이안은, 이내 피식대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네게 부탁하도록 하지."

***

마차가 관도를 천천히 나아갔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이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수많은 추적자들에게 쫓기며 이동한 지난 의뢰의 여파였다.

게다가 당장은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가뜩이나 게임에서보다 이른 시점이었는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그보다 더 빨리 북부에 발을 들이게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변방 왕국간의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전쟁이 무르익어야 비로소 나타나게 될 메인 이벤트들까지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테사이아의 합류 역시, 여정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물론, 모든 게 평화롭진 않았다.

"마부석에 앉은 모습이 참 잘 어울리네, 샬롯."

"이름 부르지 마라, 귀쟁아. 역겨우니까."

"어머.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이름으로 불러 주고 싶은걸, 샬롯."

"한마디만 더 하면 정말 네 혀를 자를 거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여전히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이안만 곁에 없다면 바로 다시 한번 서로의 목숨을 노릴 분위기였다.

이안은 일단 놓아두고 있었다.

이게 오래 갈 악감정인지, 한때 서로의 목숨을 노렸던 적수가 가까워지는 과정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까 말할까 하다 말았는데. 내 혀는 잘려도 밤이면 다시 돋아나, 멍청아."

"그럼 매일 네 혀를 자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겠군. 역겨운 귀쟁아."

"궁금한 게 있는데."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안이 문득 내뱉었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둘이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악당 우두머리가 된 기분이군.

생각하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샬롯, 넌 테사이아가 뱀파이어라서보다 요정이라서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맞나?"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마족인 것도 물론 역겹지만."

"왜지?"

"이건 나도 궁금한데. 왜야, 샬롯?"

테사이아가 이안 쪽으로 붙으며 거들었다.

샬롯이 미간을 좁혔다.

"진심으로 묻는 거냐, 귀쟁아? 전형적인 고위 요정 주제에, 요정과 수인 사이의 일을 모른다고?"

"그래? 내가 고위 요정이야?"

테사이아가 오히려 되물었다.

이안이 자신의 발치에 찰싹 기대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 정체를 모르는 거냐?"

"응. 말 안 했나? 난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몰라."

테사이아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내 첫 기억은, 그 끔찍한 실험실에 묶여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거거든. 그 전의 기억은 없어. 내 이름도 겨우 떠오른 거라고."

진혈의 여제가 기억상실이었다니.

하긴, 생각해 보면 어제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내가 절대 죽을 수 없는 이유야. 복수도 해야 하지만, 내가 누군지도 알아내야 하니까."

"하…! 역시, 요정의 본질은 기억에 있는 게 아니군. 태생적으로 비열한 거야. 타고난 배신자랄까."

샬롯이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테사이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욕을 할 거면 이유라도 알려주고 하지 그래."

"너희 요정들은 과거, 우리 수인과 동맹 관계였다. 함께 인간에 맞서, 영토를 지켜 냈었지."

샬롯의 목소리에 그르렁대는 저주파가 섞였다.

"마족들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인간들은 수인들이 모두 마족의 편에 섰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수인은 인간과 마족, 양 측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건 너희 요정도 마찬가지였어. 다른 건 그저 너희가 더 많이 인간의 편에 섰고, 조금 더 약삭빨랐다는 것뿐이지."

샬롯이 테사이아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스스로를 고위 요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족들의 편에 선 자들은 흑요정이라 불렀고,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지. 마족의 편에 선 자들도 신념에 따라 갈라 선 동족이라 여긴 우리와는 달랐어. 그리고 어느 날, 검은 벽이 대륙을 갈랐지. 그 후에 너희가 가장 먼저 한 게 무엇인지 아느냐?"

"뭐였는데?"

"남부에서 수인들을 쫓아내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마족의 편이 아니었다. 그저 너희처럼 인간의 편에 붙어서서, 그들과 권력을 나눠 가지지 않았을 뿐."

역사 깊은 악감정이었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도 그때 제국인이 된 거냐?"

"나는 운이 좋았다. 어렸고, 루 솔라를 섬겼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동족이 훨씬 많았다."

샬롯의 눈빛이 목소리만큼이나 가라앉았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남부를 손에 넣었다며 으스대던 귀쟁이들의 미소를. 만약 내가 그때 성체였다면, 한 놈이라도 더 저승길의 길동무로 삼았겠지. 다른 많은 동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루 솔라의 신도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저들의 야성과 투쟁심은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에 가까웠다.

"듣고 보니 심하긴 했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내 동족의 일은 사과할게. 샬롯."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였다.

샬롯이 혀를 날름대며 미소 지었다.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 네 처지는 나보다 더 나쁠 테니까."

"…그건 무슨 의미야?"

"네가 기억을 찾은들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 귀쟁이들은 절대 너를 동족이라 여기지 않을 거다. 마족이 된 요정이라니. 오히려 죽이려 들겠지. 네가 기억을 잃은 게 애석하군."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억이 있었다면 삶이 더 괴로웠을 텐데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 스스로 기억을 지운 걸지도 모르지. 마족이 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말이야. 너희들의 나약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

테사이아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그녀가, 이윽고 다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 아무래도 저 짐승의 말이 사실 같아. 본능이 자꾸 저걸 죽이라고 속삭이거든. 그냥 그 본능에 따르면 안 될까?"

"부디 허락해 다오, 이안. 지금이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다."

샬롯도 기다렸다는 듯 내뱉었다.

둘을 번갈아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피식했다.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군. 그래, 너희 둘은 한 명이 죽어야만 만족하겠지."

"맞아…!"

"드디어 알아주는군."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희 둘은 한 몸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둘이 동시에 굳어졌다. 어리둥절한 시선.

이안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볼 때, 너희는 실수인 척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서로를 죽이고도 남을 것들이야. 하지만 난 그 꼴은 못 보겠거든. 하나를 잃을 바엔, 차라리 다 잃는 게 속 편한 쪽이지. 테사?"

"응… 으응?"

"샬롯이 죽으면 넌 내 손에 죽어. 네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 죽더라도, 넌 죽는다."

"뭐…? 아니…."

눈을 부릅뜬 채 이안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우묵하게 가라앉은 이안의 눈빛은, 어떤 반항이나 거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완고했기 때문이다.

"…알았어."

"좋아, 그리고, 샬롯."

이안의 시선이 샬롯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을 잠시 마주하던 샬롯이, 이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다. 이안의 냉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눈을 봐라. 당장."

"읏…."

샬롯의 시선이 끌려오듯 이안의 눈에 고정됐다.

주황색 눈동자에 파장이 번졌다.

"너에겐 죽음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겠지. 그러니 난 널 죽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손을 자를 거야. 영원히 무기를 잡을 수 없도록. 물론 날 벗어나지도 못할 거다."

"...."

샬롯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에게 완전히 압도된 것처럼.

이안이 미소 지었다.

"대답."

"…알겠… 다…."

"좋아."

이안이 미소 지었다.

샬롯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 적막이 내려앉았지만, 이안은 홀가분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젠 정말 악당 두목이 된 것 같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금까지 의뢰인이나 일행을 설득하던 방식은 솔직히, 꽤 귀찮고 피곤했던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가 만족스럽게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는 사이.

"운명 공동체가 된 기분이네, 샬롯."

테사이아가 마부석에 속삭였다.

샬롯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뱉었다.

"넌 닥치는 방법을 모르나?"

"혼자 보낸 시간이 길어서 말야. 그동안은 거의 짐승들하고만 얘기했거든. 아쉽게도 걔들은 말을 못 해. 너와 달리."

"제기랄…."

샬롯이 탄식하는 사이, 이안이 지도를 접으며 내뱉었다.

"아마 내일 낮 정도엔, 도시를 거치게 될 거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것들을 데리고 마을에 들어가야 하다니….'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적어도 거기선, 둘다 싸우지 말고 닥치고 있어 줬으면 좋겠군."

이것들 때문에 마을에 들르는 걸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따듯한 잠자리와 그나마 먹을 만한 식사는 더더욱.

#073화

관도를 가로질러 동쪽의 먼 산기슭까지 이어진 장벽은, 아주 오랜 세월 이곳을 지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다른 곳들이 으레 그렇듯, 고대의 성벽을 개조하고 증축해 만든 관문인 모양이었다.

성벽 위, 쇠뇌를 든 경비병들이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건조한 눈길로 샬롯을 응시하던 경비대장이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신분을 밝히시오."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얇게 말린 양피지를 건넸다.

"용병, 이안 호프요."

양피지를 펼친 경비대장의 눈매가 이내 가늘어졌다.

"화로의 사원…? 이게 위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소?"

"없소만. 신분을 위조할 거였다면 그 이름을 붙이진 않았을 거요."

"하긴. 그야 그렇군."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화로의 사원을 살뜰하게 이용해 먹었다. 지도나 축복뿐 아니라, 그의 신분을 보증해 줄 문서까지 부탁한 것이다. 아공간에서 썩어 가던 오염된 정수의 정화는 덤이었다.

사원은 당연히 은인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었다.

그 결과, 이안은 체르윈 아스트레이아의 인장이 찍힌 신분 보증서를 가지게 되었다.

북부는 물론이고 제국에서도 먹힐 이름이었다.

"사원과 각별한 관계이신 모양이군. 화로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소만."

"그 불길을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 여기 이 이안이오."

내뱉은 건 샬롯이었다.

이안의 눈길을 받은 그녀가 무표정하게 혀로 입가를 훑었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는 듯.

어떤 녀석들이 묘하게 겹쳐지는 그 모습에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하긴, 범상치 않다 여기긴 했소만. 그게 좋은 의미여서 다행이오. 일행은 모두 귀하의 부하들이시오?"

"…그렇소."

일단은.

"용병단이라… 여기선 귀한 손님이시군."

중얼댄 경비대장이 품에서 도장을 꺼내 양피지의 한쪽에 찍었다.

도장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그가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해서,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트라벨가?"

"지금은 북쪽으로 가고 있소."

"얼마나 북쪽? 이 닝글로슬도 충분히 북쪽이오만."

궁금한 게 많은 양반이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더 먼 북쪽. 아히고른 산맥 근처로 가고 있소."

이안 자신이 보기에도, 이 마차와 마차에 탄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호기심이 들 만했기 때문이다.

제국제 검은 마차. 마찬가지로 검은 마갑을 덧입은 혈통 좋은 전마.

마부석에는 수인이, 이안의 발치에는 로브를 눌러 쓴 앙상한 체구의 여인까지 기대앉아 있었으니까.

이만하면 이 제정신이 아닌 세계에서도 충분히 특이한 조합이라 할 수 있었다.

"아. 진짜 북쪽을 말씀하시는 거군. 거긴 사람이 발을 들일 곳이 아닌데. 지금 같은 계절엔 특히 더. 의뢰라도 받으신 거요?"

"화로의 사원에서."

이안은 태연하게 사원의 이름을 팔았다. 설사 그들의 귀에 들어간들, 이 정도로 쪼잔하게 굴지는 않으리라.

"정말 대단한 실력자들이신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면 그런 무모한 의뢰를 청할 리 없으니."

"북쪽의 상황이 그렇게 안 좋소?"

"…혹시 북부는 초행이시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대장이 잠시 침음했다. 괜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갈등하는 눈치.

"무슨 얘길 하셔도 달라질 건 없으니, 편히 말씀하시오. 오히려 도움이 될 거요."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아주 안 좋다 할 수 있소. 북쪽 전체가 북부 자치령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땅에 눈이 덮이지 않은 지역까지만 북부로 쳐야 하오. 그 너머는 백색 마경이나 다름없소. 그 인근에 살던 자들도 죄다 가까운 남쪽으로 이주한 지 오래요. 이 닝글로슬도 그중 하나고."

잠시 말을 멈춘 경비대장이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였다.

"나라면 최소한 봄까진 이곳에 머물거나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겠소. 카링기온까지 갈 것도 없이, 트라벨가만 해도 실력 있는 용병단을 필요로 하는 일거리가 아주 많을 테니까. 여긴… 조금 심심하겠지만 말이오."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이 물었다.

"그럼 사실상 여기가 북부 최북단 도시 중 하나란 말씀이시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오. 해가 지날수록 점점 추위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으니. 윗동네까지 눈이 덮이는 것도 머지않았지. 그래 봐야 이 위로 있는 건, 여기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마을들일 거요. 사실, 거기서 아직도 버티는 자들이 제정신일 것 같지도 않소."

"그럼 여기서 보급을 충분히 하고 떠나야겠군…."

"급한 의뢰인 모양이군."

"봄까지 기다린다고 그렇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서 말이오."

"그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군."

경비대장이 양피지를 말아 건네며 덧붙였다.

"도시 서쪽 너머에는 광산이 있소. 그 인근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오. 성 근처도 마찬가지고. 웬만하면 시가지를 벗어나지 마시오. 문제 생길 일은 만들지 않으시리라 믿겠소."

"걱정 마시오. 푹 쉬면서 돈만 잔뜩 쓰고 떠날 거니까."

"훌륭하군."

경비대장이 뒤로 물러섰다.

관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길을 텄다.

샬롯이 느긋하게 마차를 몰아 관문을 지나쳤다.

계절을 증명하듯 황량하게 방치된 밭과 상당히 넓게 형성된 도시의 전경이 드러났다.

이안의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이었다.

사실 여긴, 게임에선 본 적도 없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게임에 없던 마을이 튀어나오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만한 규모는 처음이었다.

'퀘스트가 없으리란 게 갑자기 좀 아쉬워지는군… 여유도 있는데.'

어쨌건 이런 도시라면 흡혈귀 심판자가 따라붙는다고 할지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난동을 피우지는 않을 터였다.

자치령 도시 한복판에 마족이 출몰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곧바로 제국의 추적을 받게 될 테니까.

그때, 테사이아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었다.

지난밤에 사냥을 한 덕에, 그녀의 얼굴에는 한결 윤기가 돌았다.

"언제나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 거야?"

"자유 도시가 아닌 경우에만."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당당하게 관문을 통과해 본 건 처음이거든."

"그러시겠지."

"안에서도 잘해 볼게. 이상하게 전엔 항상 관심을 끌었었거든."

"그야 네가 벗고 다녀서 그런 거겠지."

"아하…."

하는 짓도 평범하진 않았을 테고.

이안은 몰랐다는 듯한 테사이아의 반응에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어쨌건 지금은 샬롯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그녀가 관심을 받을 일은 많지 않으리라.

"어딜 가장 먼저 들러야 하지?"

그때 샬롯이 물었다.

또다시 기본적인 질문.

이안이 턱짓했다.

"여관이나 도시 어딘가에 마구간이 있을 거다. 거기부터 들러."

"알았다."

"아까는 왜 끼어든 거지? 너답지 않은 짓이었는데."

"아, 그거. 화로의 사원에서… 배웠다."

샬롯의 목소리에 머쓱함이 묻어났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구엘?"

"네가 대사제와 대화 중일 때 다가와서 말을 걸더군. 너를 소개하는 방법부터, 시종으로서 대행해야 할 덕목들을 떠들어 댔다. 그게 생각이 나더군. 어쨌건 지금 나는… 네 시종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계속 전승하고 있었다니.

테사이아가 눈을 빛낸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을 소개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 뭔데?"

"그자가 말하길-"

"그만."

말을 자른 이안이 싸늘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싸우지 말랬지 친한 척하란 얘긴 아니었다. 그리고 샬롯, 그 개소리는 잊어라. 필요 없으니까."

"그러면 나는 더 편하다만… 네 공적을 알리는 건 필요할 것 같다, 이안. 용병단은 소문과 평판이 중요한 법이니까."

"고작 셋인데 용병단은 무슨…. 필요 없어. 평판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야."

"왜. 난 용병단, 마음에 드는데."

테사이아가 히죽댔다.

그러시겠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걸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지금처럼 요정 마법사인 척이나 잘하도록 해."

"알았어. 그럴게."

마차가 도시로 접어들었다.

칙칙한 검은 땅과 벽돌 건물들.

마구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자를 운송하는 일이 잦은 듯, 상당히 큰 마구간이 대로변에 따로 위치해 있었으니까.

여관에서 멀지도 않은 위치였다.

"굉장히 좋은 말이군요, 나리."

마구간지기가 마차와 말, 그리고 샬롯을 번갈아 힐끔대며 말했다.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내뱉었다.

"짧으면 이틀, 길면 며칠 더 묵을 수도 있다. 최대한 좋은 걸 먹이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라. 북쪽으로 갈 거니까."

"북쪽이면, 얼마나 북쪽이요?"

또 이걸 묻는군. 하긴, 여긴 이미 제국 기준으로는 북부였다.

"아히고른 산맥 근처까지."

"그 정도면… 돌아오실 땐 말이 없어지실 텐데요."

"가는 동안에라도 버틸 수 있도록. 그리고 청소도 부탁하지."

이안이 건넨 은화 몇 개에 마구간지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그의 뒤로 나란히 걸었다.

행인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한 번씩은 머물렀다.

이안은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별로 눈에 띄고 싶진 않지만….'

샬롯과 함께 하는 이상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었다.

대장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리 하나가 온통 대장간이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잡아라, 멍청한 놈아! 내리칠 때 자꾸 튀잖아!"

"풀무질 제대로 해!"

인간과 난쟁이들이 뒤엉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여기서 만든 물건들을 북부 전선으로 보내는 모양이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긴 하네.'

이 세계가 가상이 아니리란 사실을 새삼 곱씹게 하는 광경이었다.

게임에선 본 적 없는 도시에서 느낀 활기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세계가 실존할 수 있는 건진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어쩌면 이런 것도, 그가 선진국 축에 드는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지는 의문일지도 몰랐다.

전쟁이나 가난이 휩쓸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처음부터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지도.

가판에 늘어선 물건들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거리를 지나친 이안이, 이윽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가판 너머에 시큰둥하게 기대앉은 중년 난쟁이에게로 향했다.

"저기가 가장 실력이 좋은 것 같군."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잘."

저 가게의 물건이 가장 정보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넌 선택권도 없어. 돈은 내가 내니까."

"…나도 돈이 있긴 하다만."

"네 돈도 내 돈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이안이 가판에 다가섰다.

그가 단검을 비롯한 물건을 몇 개 집어 들자, 비로소 난쟁이 장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목이 상당하시군."

"종종 듣는 말이지. 얼마요?"

"꽤 비싼데. 돈은 있으시고?"

물론 그의 입은, 이안이 가판에 제국 금화를 몇 개 놓은 순간 곧바로 닫혔다.

이안이 금화를 향해 뻗어 나오는 짧고 두꺼운 손을 막았다.

"이건 맞춤 제작비까지 포함된 돈이오."

"맞춤 제작?"

이안이 손목 아래가 찢겨 나간 샬롯의 팔 보호대와 금이 간 견갑을 그의 눈앞에서 벗겼다.

"이것들을 보수하고, 사이에 들어갈 것도 만들어 주시오."

"오… 이건 마법 무구로군…."

장인이 물건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난쟁이 장인의 솜씨고… 재질도 보통 제국 강철이 아니오. 새겨진 마법도 정교하군. 똑같이 재현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소만."

"움직이기 편하고 견고하기만 하면 달라도 상관없소."

"그러시다면야… 이리 오시오."

샬롯이 가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대장간 구석에서 코를 골며 잠든 도제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친 난쟁이 장인이, 이윽고 그녀의 팔 치수를 재며 중얼댔다.

"수인을 보는 건 오랜만인데. 거기다 요정과 함께라니. 괴상한 조합이군."

샬롯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내 눈엔 댁들도 괴상하긴 마찬가지요."

"…수인과 요정을 함께 데리고 다니는 그쪽이 가장 괴상하오.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 건가?"

태연하게 내뱉은 장인이 앞의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하며 덧붙였다.

"내일 다시 오시오. 그리고 비용이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걸 준비하는 게 좋을 거요. 바가지를 씌우는 만큼."

이안이 금화 한 개를 더 가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을 힐끔댄 장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도 당해 주는 손님에겐 그래야지."

이안이 몸을 돌렸다.

장인이 아직도 자고 있는 도제를 깨우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샬롯이 중얼댔다.

"무례하고 돈독 오른 땅딸보들…."

"걱정 마라. 내일 제대로 된 게 안 나오면, 저 반 토막은 반의반 토막이 될 테니까."

"…그래. 그… 또 나 때문에 돈을 쓰게 된 건…."

샬롯이 문득 더듬댔다.

차마 뒷말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

"알면 돈 값해라."

이안이 덧붙인 말에, 샬롯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테사이아가 걸칠 옷까지 몇 벌 샀다.

테사이아가 입고 싶지 않다고 속삭였지만, 물론 그녀에게도 선택권 같은 건 없었다.

마지막으로 건조 식량까지 구매하고서야 비로소, 일행은 여관에 들어섰다.

"...."

테사이아가 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린 이안은, 뒤늦게 그녀가 흡혈 일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것들은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데는 도가 텄군.'

샬롯과 테사이아 둘 다, 솔직히 말해 루시보다도 손이 많이 갔다.

테사이아는 이안이 여급을 불러 들어오라고 말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북부의 집은 죄다 벽돌로 지은 것들이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판잣집보다 훨씬 따듯했다.

1층의 식당은 저녁이 되기도 전인데 이미 주정뱅이들로 북적였다.

난쟁이와 인간들이 뒤엉켜 독주를 마셔대는, 꽤 볼 만한 광경.

테사이아가 2층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올라간 사이, 이안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도시의 여관에 들르면 늘상 그렇듯, 이쪽을 힐끔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적의가 담기진 않았기에,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주문했다.

"여러분들이 그, 산맥 쪽으로 가신다는 용병분들이시죠?"

주문을 다 받은 여급이, 샬롯을 무서운 듯 힐끔대면서 물었다.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

"벌써 소문이 났다고?"

"돈을 뿌리고 다니셨다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왜 거기로 가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용병이 다른 일이 뭐가 있겠어? 마물 때려잡으러 가는 거지."

이안이 피식대며 말했다.

여급이 반색했다.

"역시…! 그렇다면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여긴 저뿐만 아니라 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거든요. 부디 한 마리의 마물이라도 더 줄여 주세요. 언젠가, 우리가 다시 고향을 되찾을 수 있게."

꾸벅, 고개까지 숙인 여급이 금방 음식을 가져다주겠다며 달려갔다.

"별…."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머잖아 마물들과 박 터지게 싸울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양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건지, 슬슬 알 것 같았으니까.

이건 무작정 파장을 흩뿌리는 게 아니었다.

인근에 불러들일 수 있는 마물이 있을 때만 작동했다.

어쩌면 반대로 그것들이 공명을 이끌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정답이건 달라질 건 없으리라.

'이걸 해결하고 나면… 봄 전에는 트라벨가에 갈 수 있겠지.'

이안의 시선이 기억을 헤집었다.

이미 그가 기억하던 흐름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그렇다 해서 큰 흐름이 뒤바뀌진 않았을 터였다.

필수적인 퀘스트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

북부에 발을 들였으니, 해야 할 것들은 끝내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아마 변방의 전쟁도 절정에 이르렀으리라.

'…말도 안 되는 변수만 없다면 말이지.'

"…불편해."

그때, 가장 큰 변수 중 하나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쓴 테사이아는, 안에 받쳐 입은 옷이 어색한 듯 연신 몸을 꿈틀댔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녀석인데.'

이안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애초에 이 동행 자체가, 게임에선 없던 상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퀘스트가 뜨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지금 그는, 아예 새로운 길을 나아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물론 이 녀석 하나가 전체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냥 지금이라도 쳐 죽이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아닐까.

"…왜 그렇게 무섭게 봐, 이안?"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해가 지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많이 담았어요."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불편하다고 옷 벗지 마라."

태연하게 내뱉으며, 이안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

딱딱한 침대 위.

"...!"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컴컴한 천장을 잠시 응시한 그의 미간이, 이윽고 구겨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아무래도 일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074화

아무런 전조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불길한 마력이 사방에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힉...!"

옆에서 숨 삼키는 소리와 파드덕대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천장 구석의 벽면에 등을 대고 붙어 있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입술을 떨며 내뱉었다.

"놈이야…! 놈이 왔어…!"

"알고 있다."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으며 일어섰다. 바닥에서 주황색 안광이 번졌다. 샬롯이 나지막히 물었다.

"심판자가 왔단 말이냐?"

"이게 느껴지지 않아?"

테사이아가 도리어 되물었다.

샬롯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감각은 이런 마법적인 부분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을 하나만 빌리길 잘했군.'

이안은 방어구들을 착용하기 시작하며 생각했다.

저 둘이 헛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불편을 감수한 게 이런 식으로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소리 없이 단숨에 몸을 일으킨 샬롯도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너희 둘은 서로를 지키는 게 우선이야. 잊지 마라."

이안이 내뱉었다. 샬롯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둘을 멍하니 지켜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속삭였다.

"뭣들 하는 거야? 그냥 여기에 있자. 저 괴물도 결국은 뱀파이어야. 이 안까진 들어올 수 없다고."

"겁에 질려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흉갑 착용을 끝낸 샬롯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무슨 방법이 있다는…."

"방법이야 여럿 있겠지."

각반의 사슬 이음매를 차례로 잠그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네 위치를 특정하면 건물을 부숴버리거나. 마을 주민을 홀릴 수도 있고… 나라면 그냥 주민 몇을 죽여서 널어놓을 거다. 네가 저지른 짓인 것처럼. 그것만 해도 넌 더는 여기 있을 수 없겠지."

"그럼 그냥 새벽까지 숨어있다가 곧바로 도망치면 안 돼?"

정말 마족이 할 법한 생각이군.

이안은 부츠를 발과 종아리에 딱 붙게 조이면서 싸늘하게 되물었다.

"왜 그래야 하지? 여기서 저놈을 쳐 죽이면 그만인데."

"…그러고 나면, 뒷감당은?"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검을 허리춤에 찬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네가 날 찾아온 이유를 잊지 마라. 정말 복수를 이루고 싶은 거라면, 도망치려는 습관부터 버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린 테사이아의 눈빛이 이윽고 가라앉았다.

"…알았어, 이안."

한 번만 더 이딴 식이면, 심판자가 하려던 것처럼 팔다리를 잘라서 가지고 다닐 거니까.

속으로 읊조리며 걸음을 옮긴 이안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

"...."

여관 문을 연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발아래, 그림자처럼 새카만 연무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주위 건물의 지붕 아래 드리워진 어둠마다 박쥐들이 흑요석 같은 안광을 흘리며 매달려 있었다.

뱀파이어 아니랄까 봐. 박쥐라니.

생각하며 이안은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발목을 스치는 서늘한 한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마법의 진원지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관에서 이어진 대로 너머.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한복판에, 새카만 형체 하나가 불쑥 솟아 있었으니까.

초승달 아래에서도 그의 모습만큼은 이질적일 정도로 선명했지만.

살아있는 존재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온기나 숨결,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 핏기없는 흰 피부. 제국의 정복으로 보이는 검은 옷. 적당히 곱슬 거리는 흑발.

심판자의 붉은 눈동자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살의는커녕 느긋한 여유와 기품마저 느껴지는 눈길.

"이 한복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닐다니. 대단한 용기를 지녔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넌 이런 도시 한복판에서 정체를 드러낼 만큼 정신 나간 마족이고."

심판자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이안의 비아냥이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었다.

"용기와 배포를 모두 지녔군. 요즘 같은 시대에는 드문 인재로다. 난 너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 내가 필멸자이던 시절을 떠오르게 해."

고풍스럽게도 미친 놈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주위의 지붕에 매달린 박쥐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여관 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여관을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지만, 어쨌건 나란히 움직이고 있기는 했다.

심판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사를 표하마. 너희들의 용기 덕분에 오늘 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게 됐군."

"그렇지. 오늘 밤 죽음은…."

내뱉은 이안이 검을 뽑아 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너 하나로 충분하니까."

달려오는 그를 응시하는 심판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음에 드는 인간이군. 너는 돌아가는 길의 양식으로 삼아주마."

그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마도구…?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솟구칠 찰나, 그가 곧바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편히 잠들거라, 인간아."

꺄-아아아아아-!

상자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

저항할 틈도 없이 휩쓸린 이안이 추락했다.

그의 정신력과 저항력으로도 견디기 힘든 저주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온몸의 힘이 빠지며 수마가 몰려들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에도 뒤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짚단처럼 쓰러지는 샬롯과, 귀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지르는 테사이아.

철퍽, 떨어진 이안이 연무 사이로 쓰러졌다.

도시 전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든 생명체를 잠재운 심판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푸드드득-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박쥐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놈들이 가뜩이나 희미하던 주위를 더 어둡게 물들였다.

"오늘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잡종아. 저번 네가 선보인 잔재주는 귀여웠다만. 두 번 통하리란 기대는 하지 말거라."

"웃기지 마…!"

주저앉은 테사이아가 소리치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벌렸다.

그대로 쓰러진 샬롯의 팔뚝을 깨문 그녀가 피를 삼켰다.

검붉은 눈동자가 번들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입을 뗀 그녀가 일어섰다.

파스스-

연무에 파묻혀 있던 그녀의 그림자가 매의 형상으로 변하며 날아올랐다.

심판자가 탄성을 흘렸다.

"이젠 그림자 사역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내는군. 확실히, 너는 지금까지의 실험체들과는 달라."

"그딴 칭찬 필요 없거든? 이안…! 설마 이 짐승처럼 기절한거야? 이안!"

씹어 뱉은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그 사이 두 마리로 변한 그림자 매가 그녀의 주위를 호위하듯 맴돌았지만, 주위를 뒤덮은 박쥐들에 비하면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이렇게 어이없게 쓰러진 거냐고!"

건물 벽까지 뒷걸음질 친 테사이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심판자의 웃음이 이어졌다.

"소용 없을 것이다. 이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느긋하게 이어지던 그의 걸음이 멎었다.

심판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솨아아아-

휘몰아치는 돌풍이 주위의 연무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퉤, 입에 물고 있던 살점을 뱉어낸 그가 내뱉었다.

"…잘난 척해서 미안하군."

"이안…!"

테사이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심판자의 탄성이 이어졌다.

"이건 증폭한 인어의 비명인데…. 대단하군. 이걸 듣고 잠들지 않은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아, 그래. 덕분에 누가 끼어들 걱정 없이 싸울 수 있겠군."

이안이 태연하게 내뱉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입안을 깨문 고통 덕분에 정신만큼은 명료했지만, 몸의 감각은 아직도 온전하지 않았다.

"기어코 싸울 생각… 호오. 이건…?"

내뱉던 심판자가 별안간 눈을 감더니, 음미하듯 숨을 들이켰다.

그의 입가를 타고 송곳니가 삐죽 돋아났다.

입술 끝이 귀 아래까지 찢어졌다.

"그래…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참을 수 없는 향기로군."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그 직후였다.

그림자의 심판자.

이것들은 퀘스트를 준단 말이지. 잘 됐군.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닥쳐! 이안은 내 꺼야! 건드리기만 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잡종아."

손짓하며 심판자가 눈을 떴다.

여관 건물 주위를 날아다니던 박쥐들이 테사이아에게 달려들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가 번들대는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날 끝이 초승달처럼 앞으로 구부러진 기형검이었다.

"운명이란 재미있는 것이지. 저 잡종이 이토록 특별한 피를 가진 자를 곁에 두고 있을 줄이야. 너를 먹으면 더 강해지리란 확신이 드는군."

"비슷한 입장이네. 나도 널 죽이면 경험치를 얻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대답 대신 투척용 단도가 파공음을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옆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한 심판자가 왼손을 들었다.

치솟아 오른 검은 연무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푸악-!

돌개바람이 연무를 흩어버린 건 그 직후였다.

그 사이를 뚫고 이안이 쇄도했다.

싸늘하게 번뜩이는 눈빛.

"하하...!"

참지 못하고 웃음을 토해낸 아스콜드가 마주 몸을 날렸다.

자욱한 연무가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치솟으며 밀려났다.

쩌엉-!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서로를 향해 돌진하던 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손아귀를 타고 전해지는 묵직함.

쉬학-

먼저 뒤로 물러난 건 이안이었다.

아스콜드가 손목을 살짝 당긴 순간, 초승달 검의 검 끝이 어깨를 찍을 것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아스콜드는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었다.

그의 손이 쉬지 않고 이안을 향해 움직였다.

채앵! 쩌엉-!

공방이 연달아 이어졌다.

검을 휘두르는 아스콜드의 눈동자에 점점 더 희열이 넘실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잘 숙성된 와인 같은 피 냄새가 숨결마다 번졌고, 검격을 주고받는 중에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검술 솜씨는 기대보다 떨어졌지만. 체구보다 월등하게 강한 힘과 빠른 움직임, 마법 무구로 보이는 바람 마법의 도움. 그리고 빈틈을 과감하게 찌르는 담대한 판단이 그 부족함을 상쇄하고 있었다.

촤르륵-

때때로 초승달 검이 놈의 팔다리를 감싼 사슬 위를 긁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옅게 번지는 피 냄새가 점점 더 아스콜드를 희열로 몰아넣었다.

여유와 기품으로 덮여있던 광기가 그의 붉은 눈에 넘실댔다.

자욱하게 깔린 연무가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출렁댔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몇 년만 더 갈고 닦았다면 필시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검객이 되었을 터!"

쉴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아스콜드가 소리쳤다.

"허나 상심치 말거라. 네 의지와 용기는 이미 능히 그들과도 견줄만한 수준이니!"

그는 수비 일변도인 와중에도 동요 없이 고요한 이안의 눈동자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이 싸움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또한, 이 자리에서 단숨에 먹어 치우기엔 아까운 진미이리란 확신이 들었다.

저 무표정한 얼굴이 공포와 절망에 물들고, 눈동자에 맺힌 의지의 빛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그래서 더는 피가 향기롭지 않게 될 때까지 살려둔 채 음미할 생각이었다.

쩌엉-!

서로를 향해 내리친 검이 맞부딪쳤다.

카가각, 단죄의 검이 초승달 검의 검날 위를 긁으며 불똥을 튀겼다.

손목을 움직이려던 아스콜드는, 재차 이어진 압력에 일순간 뒤로 밀려났다.

검에 실린 힘이 더 강하고 유연해진 것 같은 느낌.

아스콜드의 미간이 꿈틀댈 찰나.

"…이제야 몸이 가볍군."

검을 맞댄 채로 이안이 읊조렸다.

아스콜드의 눈을 응시하며 그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감사를 표하지. 네가 날 죽일 생각이 없었던 덕분에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

"뭐라…? 하하!"

"부디 이게 전부가 아니길 바란다. 그럼 네 놈이 줄 경험치는 형편없을 것 같으니까."

"그 경험치라는 게 대체 뭐냐?"

퍼엉-!

대답은 이번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일순간 놈의 검으로 엄청난 인력이 느껴지더니, 다음 순간 그보다 더 강력한 무형의 폭발이 그를 덮쳤다.

영문도 모른 채 튕겨 나가던 아스콜드의 눈앞으로, 어느새 이안이 따라붙었다.

쩌엉-!

부자연스럽게 내리치는 검을 아스콜드는 팔을 들어 막았다.

오랜 시간 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이런 정직한 공격은 부지불식간에도 막거나 흘려낼 수 있는 것이었다.

치지직-

검과 검을 맞댄 채 밀려나던 그가 멈춰 설 때쯤. 연무를 머금은 돌개바람이 이안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아스콜드는 휘몰아치는 장막에까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의 동공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 이렇게까지 강한 힘과 뛰어난 검술을 지닌 마법사가 존재할 수…?

콰아아아-!

의문을 채 끝맺기도 전에, 아스콜드의 발아래에서 불기둥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075화

불길은 넓게 번지지 않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따라 솟구쳤다.

장막 밖으로 튕겨져 나간 이안이 자세를 다잡으며 착지하는 가운데.

콰르르르-

타오르는 불길 주위로 검은 연무가 뒤섞였다.

잦아드는 불길을 바라보며, 이안은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곧 연무를 뚫고 피부가 조금 타들어 간 아스콜드가 튀어나왔다.

"재미있구나!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야!"

소리치며 그가 왼손을 내리치자, 그의 뒤로 휘몰아치던 연기 폭풍이 이안에게 역류하듯 쏟아졌다.

카드드득-

늦지 않게 형성된 서리 방패가 쏟아지는 연무를 막아냈다.

방패 표면이 미세한 칼날에 갈리듯 순식간에 깎여나갔다.

이안이 훌쩍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로 착지한 아스콜드의 손에, 어느새 손가락 길이의 병이 들려 있었다.

그가 안에 든 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가로 붉은 액체가 흘렀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딱 봐도 피 같은데.'

체력 회복은 반칙 아닌가?

실없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콜드의 신체가 수복되기 시작했다.

주위로 휘몰아치던 연무가 한층 진하게 넘실댔다.

이제는 연기가 아니라 안개나 구름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 전력을 보고 싶다면 기꺼이 그리해 주마."

내뱉던 아스콜드의 고개가 튕기듯 뒤로 꺾였다.

투척용 단검이 그의 얼굴 한복판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사이로 검은 연기가 푸스스 번지고, 아스콜드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졌다.

챙그랑.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때, 밀려 나온 단검이 땅에 떨어졌다.

아스콜드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이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죽이기… 아깝군…!"

쿠확-!

말과 달리 그가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올려 치자, 바닥에 깔려 있던 연무가 솟구쳐 이안을 후려쳤다.

튕겨 오른 이안이 허공에서 회전하면서도 손을 치켜들었다.

화르르륵-

그의 주위로 일제히 피어오른 불꽃이, 동시에 쏟아졌다.

아스콜드가 치켜들었던 손을 내뻗었다.

퍼버버벙-!

연기 장막이 불길을 집어삼켰다.

허공에서 간신히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바람 칼날을 전신에 두른 채 그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이 순간에도 그는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날아드는 박쥐들에게 씹히고 긁히면서도 역으로 움켜쥐어 찢어발기고 씹어 대고 있는 테사이아. 그녀가 날려 보낸 그림자 매가 지키고 있는 샬롯. 장벽 너머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아스콜드. 그리고 불꽃과 맞부딪히며 함께 연소되고 있는 검은 연무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 상태에서의 인지 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푸확-!

다음 순간, 연무가 폭발하듯 이안을 향해 밀려들었다.

역시, 비슷하네.

이안은 게임 속 진혈의 여제 테사이아를 떠올렸다.

그녀의 공격 패턴 중에도 이와 흡사한 것이 있었으니까.

연무가 붉은색이었다는 걸 제외하면 사실상 똑같았다.

그때는 아스콜드의 진혈을 삼키고 손에 넣은 능력이었던 모양.

그러니까….

'파훼법도 같겠지.'

손아귀 한복판. 어느새 마력을 머금고 회전하던 하급 정수가 준비된 마법을 뿜어냈다.

푸화악-!

쏟아지던 연무가 터져 나온 광풍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돌풍. 게임에선 그저 강력한 바람을 뿜어내 넉백 효과만 일으키던 이 기본 회색 마법은, 한 줌의 혼돈력과 정수의 증폭이 더해지자 말 그대로 거대한 바람의 해일이 되어 연무를 흩어 버렸다.

이안이 허공에서 일순간 부유하듯 멈춘 가운데.

그 너머로 눈을 치켜뜬 아스콜드의 모습이 드러났다.

치켜든 이안의 오른손에서 푸른 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아스콜드의 눈동자가 떨릴 찰나.

푸확-!

신성력의 분출을 추진력 삼아 쇄도한 이안이, 허공에 푸른 호선을 새기며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아스콜드가 초승달 검을 치켜든 건 거의 동시였다.

오랜 기간 검술을 수련한 이 뱀파이어의 육신은, 이 와중에도 그동안 연마한 기술을 본능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카가가가가- 콰직!

단죄의 일격을 흘려내려는 시도는 검날이 부러지면서 실패했다.

하지만 아스콜드에겐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쇄골을 가르고 오른쪽 어깻죽지가 벌어질 정도로 깊이 박힌 이 일격을 머리나 왼쪽 어깨에 맞았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치이이-

검신에 남은 신성력이 그의 살을 태웠다.

지독한 고통에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내면서, 아스콜드는 흩어진 그림자 안개와 사역마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생사가 걸린 위기 상황에서만 발휘되는 극도의 집중 상태 속.

아스콜드는 자신이 죽음에 이를 만큼의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는 판단을 끝냈다.

글루미르로 돌아가 요양해야겠지만, 몇 년이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연무와 그림자 사역마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모이고 있었고, 몇 초 후면 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선보인 인간을 휩쓸어 버릴 터였다.

그리고 놈의 피는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여기까지 이어진 판단은, 고통으로 잠시 찡그렸던 눈을 뜬 순간 산산이 흩어졌다.

"...!"

그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동자가 붉은 마력을 가득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속셈을 꿰뚫고 있다는 듯 싸늘하게 번쩍였다.

비로소 그는, 이안의 시간이 자신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로선 눈앞의 이 인간이 한때 게임의 캐릭터에 불과했음을.

그 생성 과정에서 기사나 야만 전사에게 걸맞은 특성인 집중력을 선택했음을 알 길이 없었다.

특성이 유의미하게 발휘될 만큼의 고레벨인 터라 전투 중에는 언제나 고도의 집중력을 끌어 올릴 수 있으며, 인지력과 유지력을 뒷받침할 지능과 정신력 수치를 가졌다는 사실은 더더욱.

'어떻게…?!'

아스콜드가 한 건 그저, 극소수만이 타고난 검의 달인이 될 재능을 마법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이안의 주문은 빠르게 완성되고 있었다.

슈화아아아-

사방에서 연무와 박쥐들이 밀려들었다.

세상이 완전한 어둠 속에 빠진 것처럼 어두워진 한순간.

'…설마.'

이안이 쥐고 있던 검을 놓아버리며 왼손을 치켜들었다.

힘없이 뒤로 쓰러지는 아스콜드의 눈에, 새빨간 마력을 머금고 타오르는 정수가 아로새겨졌다.

작은 태양 같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칠 찰나.

콰아아아-

정수에서 샛노란 불길이 봇물 터지듯 사방으로 토해져 나왔다.

콰르르-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화염 물결이 밀려드는 연무와 그림자 사역마들을 집어삼키며 번져나갔다.

끝도 없이 토해져 나오는 화염의 해일.

사방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도시를 전부 불태워 버릴 생각인가…?'

땅이 아스콜드의 등에 닿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연무와 사역마들을 불태우며 번져나가는 불길의 장막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아름답군.'

철썩, 파도치듯 번진 불의 물결 한줄기가 그에게도 쏟아졌다.

'이래서 플랜 B가 중요한 거지.'

이안은 연무와 박쥐들을 불태우는 불길을 응시하며 손을 뻗었다.

상위 적색 마법, 화염 해일.

이안이 새로 익힌 스킬 중 하나였다.

시전 속도도 빠르고 범위도 넓어 보여서 선택했는데, 화력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증폭하느라 마력 소모량도 장난 아니고 통제도 어렵지만….'

지금처럼 사방팔방에 적이 있을 때는,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법이었다.

이안은 정신을 집중해 불길을 최선을 다해 통제했다.

화르르르-

화염의 물결이 거칠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캬아악-!"

테사이아가 바닥에 납죽 엎드린 채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림자 사역마들과의 전투가 어지간히 급박했던 듯, 들짐승이나 다름없는 몸놀림이었다.

기특한 건, 그 와중에도 쓰러진 샬롯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르르르-

모든 연무와 박쥐를 집어삼킨 불길이 허공에서 한 번 크게 솟구치고는 증발하듯 사라졌다.

모든 것들이 이안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소(一掃)였다.

파스스….

탈 것처럼 회전하던 정수가 한 줌의 연기와 함께 빛을 잃고 떨어졌다.

어둠과 적막이 함께 찾아왔다.

이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아스콜드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숯덩이가 되고 오른쪽 가슴에 단죄의 검이 박힌 채로도, 아직 살아 있었다.

"여기가… 내 기나긴… 삶의…."

다가서는 이안의 발걸음을 느낀 듯 아스콜드가 입을 달싹였다.

피부 조각들이 툭툭 떨어졌다.

"내가… 끝이리라… 생각지…."

속삭이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이 놈의 가슴팍에서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달아오른 검은 손아귀를 태울 것처럼 뜨거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편이 좋았다.

"너희는… 결국…."

아, 새끼. 끝까지 말 많네.

혀를 찬 이안이 망설임 없이 아스콜드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었다.

퍼슥, 주위가 함께 으깨지며 검날이 심장을 꿰뚫었다.

치이이- 뭔가 타들어 가는 감촉이 전해졌다. 한 줌 남은 진혈이 남김없이 타 버리는 소리였다.

아스콜드의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곧, 잿더미가 되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

한숨 쉰 이안이 검을 뽑을 찰나.

파드득-!

"...!"

잿더미를 뚫고 무언가 날아올랐다. 그림자가 뭉쳐 만들어진 검은 박쥐.

최후의 발악인가? 아니면 본인도 모르던 일족의 대비책?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멀어지는 놈에게 화염구를 날렸다.

불덩이가 박쥐에 정확히 명중했다.

화르륵-

불길이 허공을 빛냈다.

뜻밖에도, 화염구는 박쥐를 모조리 불태우지 못했다.

아주 작은 그림자 조각이 불덩이를 뚫고 튀어나오더니, 끝끝내 어둠 너머로 멀어졌다.

"…쯧."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퀘스트가 완료된 것으로 봐선 아스콜드는 확실히 죽었고, 저 작은 조각이 뭐건 본래의 소임을 다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으니까.

털썩-

비로소 이안이 주저앉았다.

욱신거리는 두통과 현기증. 그리고 초승달 칼에 찍혔던 몸 곳곳의 통증이 비로소 느껴졌다.

하지만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퀘스트가 완료되면서 능력치 포인트를 하나 얻었고, 경험치도 유의미하게 올랐으니까.

심지어 이제 레벨업이 머지않은 시점이었다.

이대로면 조만간,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처음으로 레벨업을 경험하게 될 터였다.

"끝난, 끝난 거야…?!"

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던 테사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며, 이안은 아스콜드였던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수북하게 쌓인 재 사이로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잿더미 속으로 손을 뻗은 그는, 곧인어의 비명이 담겼던 마법 상자와 피를 보관했던 병.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상자와, 불길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를 차례로 발굴해 냈다.

다들 불에 타고서도 용케 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목걸이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력과 몇 가지 저항력, 그리고 희귀한 옵션인 마력 회복력을 조금 높여주는 희귀 등급의 오팔 장식 목걸이였다.

"믿고, 믿고 있었다고…! 이안! 넌 정말 최고야…!"

테사이아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목걸이를 아공간에 챙긴 이안이 내뱉었다.

"샬롯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어. 이 쓸모없는 짐승 같으니!"

깔깔대며 샬롯을 발로 걷어찬 테사이아가 이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이 홱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지 마라."

"응…? 왜?"

"피를 흘렸다. 거리 유지해."

"아, 응…! 알았어. 그럴게."

그는 이번 일로, 자신의 피에서 뱀파이어가 이성을 잃게 하는 냄새가 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이유나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애초에 중요하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테사이아가 슬며시 덧붙였다.

"한번 핥아 보기만 하면 안 돼?"

"되겠냐?"

"사실, 기대도 안 했어."

어깨를 으쓱인 테사이아가 넝마가 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녀의 시선이 고요해진 밤거리를 돌아보았다.

푹푹 파인 대로와 불길이 핥고 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건물들.

대로가 교차하는 광장도 개판이 되어 있었다.

히죽,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그럼 이제, 이 도시 인간들이 깨어나기 전에 잽싸게 튈까?"

"튈까는 무슨…."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변방 왕국들이었다면 그래도 큰 문제 없었겠지만.

여긴 자치령이긴 해도 엄연히 제국의 영토였다.

그의 신분까지 기록된 마당에 이대로 튀었다간, 범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리라.

"샬롯 챙기고 방에 틀어박혀 있어라. 옷도 다시 걸치고."

"이안은?"

"여기서 해 뜰 때까지 기다릴 거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오해도 빨리 풀겠지."

사실 주변이 개판이 된 건 대부분 그의 마법 때문이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아스콜드에게 덮어씌우면 끝날 문제였다.

"너랑 샬롯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거다. 잠들어서."

"뭐, 알았어. 그럼 난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게. 고생해."

냉큼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기절한 샬롯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관 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그녀가, 문득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안에 들어가서 초대 좀 해 줄래?"

"...."

#076화

"으음…."

샬롯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요정의 진녹색 눈동자였다.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잘 잤어, 쓸모없는 짐승아?"

"…헉!"

숨을 들이켠 샬롯이 튕겨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뇌리로 흐릿한 기억들이 두서없이 스쳐 지나갔다.

자욱한 검은 연무. 그림자에 가려진 수많은 시선. 어둠 위를 홀로 걷던 이안의 뒷모습.

그리고 대로가 교차하는 한복판, 기척도 없이 서 있던 마족.

"심판자…! 놈은 어떻게 된-?"

"진정해, 샬롯."

꾹, 그녀의 어깨를 누른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다 끝났으니까."

"끝… 났다고?"

"그래. 다 끝났지. 네가 코 골며 자는 동안에."

"...."

샬롯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훤히 드러난 팔뚝으로 멍하니 내려갔다.

정확히는 그 위에 삐뚤빼뚤하게 대충 감긴 붕대 위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네 피를 조금 빨았어. 나도 별로 먹고 싶진 않았지만,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거든. 물론 넌 까맣게 모르겠지만."

"...."

"설마 그걸로 화를 내진 않겠지? 이래 봬도 목숨 걸고 너까지 지켰는데 말야."

"...."

샬롯은 테사이아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반박할 말도 없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흔들리던 주황색 눈동자가 이윽고 퀭하게 풀어졌다.

거대한 자괴감의 폭풍에 완전히 휩쓸린 자의 눈빛이었다.

"어머. 귀 쳐진 것 봐. 가엽게도. 그렇게까지 충격받은 거야, 샬롯? 신경 쓰지 마. 보다시피 결국 우리가 이겼으니까."

테사이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적어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확실히 즐기고 있었다.

"이안이 그 빌어먹을 뱀파이어를 잿더미로 만들었거든."

"…이안."

샬롯이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녀가 망연자실한 눈으로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이안은 지금 어디에 있지?"

"뒤처리할 게 있다던데. 아까 병사들에 잔뜩 둘러싸여서 어디론가 갔어. 아마…."

창가로 걸어간 테사이아가 창문을 가린 나무판자를 열었다.

구름 낀 하늘과 난장판이 된 거리. 그리고 그걸 수습하고 있는 주민들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귀족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든 광경을 훑은 테사이아의 시선이 건물들의 지붕 저 너머, 삐뚤빼뚤하게 솟은 칙칙한 회백색의 성에서 멈췄다.

"지금쯤 저기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좀 늦네. 벌써 꽤 지났는데."

마찬가지로 성을 응시하는 샬롯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상쾌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좀 더 잘래? 이안이 돌아오면 깨워 줄 테니까."

"...."

***

회의실 내부의 적막이 점점 무거워졌다.

문 앞에 나란히 선 경비병들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탁에 홀로 앉은 이안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들 중에 도시 중심부가 어떤 몰골이 됐는지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은 시종일관 협조적이었고, 그 개판을 만든 건 마족이라고 증언했지만.

이들의 눈엔 그런 마족을 홀로 때려잡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이 용병도 똑같은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한 시간도 넘게 방치되고 있으니, 병사들의 초조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

하지만 정작 이안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감옥에 잠시 수감될 각오까지 했건만. 수감은커녕 족쇄도 차지 않은 데다가, 회의실은 따듯하고 먹을 만한 식사까지 대접받았다.

그가 마족을 죽였다는 증거가 명확할 뿐 아니라, 그의 신분을 보증한 것이 화로의 사원인 덕분일 터였다.

반나절 정도는 더, 이렇게 여유를 만끽하며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철컥, 철컥-

그때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회의실로 들어선 건, 판금 갑옷을 걸친 갈색 머리의 기사였다.

많아야 20대 중반. 전형적인 제국인처럼 생긴 자였다.

그가 이안의 건너편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이안 경. 글루미르 방위군을 지휘하는 루카스 램필드라고 합니다."

"…반갑소, 루카스 경."

이안이 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물론 경어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의 눈매가 가늘어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 이자를 다 보다니.'

루카스는 게임에서 그에게 크고 작은 퀘스트를 여럿 준 주요 NPC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트라벨가와 카링기온에 있었는데.

'이 외곽 지역의 지휘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올라간 건가…?'

그가 생각하는 사이, 미소 지은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경이 제출하신 증거물의 확인을 끝냈습니다. 병에는 술처럼 만든 것으로 보이는 피가 남아 있었고, 불온한 마도구에도 사용 흔적이 역력하더군요. 잔재 역시 기록에 묘사된 뱀파이어의 유해와 일치하고요. 제가 온 것은, 다시 한번 증언과 의문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협조는 당연히 하겠소만…."

"...?"

"나는 기사가 아니니 그렇게 부르실 필요 없소."

루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겸손하시군요, 이안 경. 귀하가 사용하신다는 검을 봤습니다. 그 안에 깃든 신성이 느껴지더군요. 전에도 비슷한 신성을 느낀 적이 있었죠. 엄정한 여신의 축복에서요."

"그건 의뢰의 보수로 받은 거요."

"저 역시 엄정한 여신을 섬깁니다, 경. 여신께서 자격이 없는 이에게 신성을 허락할 분이 아니시죠. 차라리 분노를 내리시면 모를까. 경께서 기사가 아니시더라도, 여신의 성전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게다가…."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루 엔테르의 성화를 되살리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던데요. 제가 경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경비대장에게 들으셨소?"

"경의 신분을 확인한 사람이니까요."

하여간, 기사들이란.

이안은 결국 입맛을 다셨다.

"편할 대로 하시오.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마족의 저주에서 무사하셨던 건, 여신의 성물 덕분이었던 겁니까?"

정신력이었는데.

생각과 달리,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의 증언에는 날조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나 더 추가된들 크게 달라지지도 않으리라.

"여신의 신성으로 놈을 처단하셨고요."

"그렇소."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빠르게 오갔다. 이윽고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지며 침음했다.

"그 마물이 닝글로슬을 방문한 이유만큼은… 여전히 의문이군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뭔가가 있지 않겠소."

"그 부분은 본국의 교단에서 밝혀내겠지요. 경의 증언과 증거물들은 본국으로 보내지게 될 겁니다."

"알겠소."

"감사를 표합니다, 경. 그 저주받은 마족의 목적이 무엇이건, 경이 아니었다면 여러 무고한 희생이 뒤따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조사에도 최선을 다해 협조해 주시다니,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될 겁니다."

귀감은 무슨, 더 귀찮아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되겠소?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오."

"아, 용병으로 활동 중이라고 하셨죠."

"활동 중인 게 아니라 본업이오."

"그럴 리가요. 그저 용병일 뿐이라면, 마족의 마법이 도시를 뒤덮은 것을 알고도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지 않으셨겠죠. 아무것도 얻는 게 없으니까. 이런 귀찮은 결과들도 뒤따르고 말입니다."

점입가경이군.

거의 순례 여행 중인 티르 엔의 사도 취급이었다.

이안은 헛웃음을 눌러 삼켰다.

그의 일당에 뱀파이어가 섞여 있고, 경험치와 퀘스트라는 보상 때문에 싸웠다는 걸 알고도 이 젊은 지휘관이 이런 눈빛을 보낼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그 사실을 내뱉지는 않았다.

루카스와는 앞으로도 또 만날 일이 있을 테니까.

"불필요한 말이 너무 많았군요. 경께 아첨하려 꺼낸 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용무가 있으신 거요?"

"혹, 트라벨가나 카링기온을 방문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있긴 하오만…."

"그러시군요."

루카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는 내달, 트라벨가로 전출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한동안 근무한 후에 카링기온에 합류할 예정이죠."

카링기온은 사실상 북부의 최전선에 위치한 요새였다.

멀지 않은 곳에 검은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검은 벽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여러 변화가 눈에 띈다더군요."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벌써 그럴 리가 없는데.

"해서, 전선 전체가 긴장 중이라더군요. 침공이나 광기의 침식이 또다시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식과 침공은 모두 일어나게 될 일이었다.

짧으면 1년, 길면 1년 반쯤 후에.

그리고 전선은 무너지리라.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해서, 모든 병력이 검은 벽 인근에 배치될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북부에는 그 외에도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죠."

"도움의 손길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실 거란 말씀이시군."

"예. 아마도, 분명히."

"경의 뜻은 알겠소만, 당장은 해결해야 할 의뢰가 남아 있소."

"들었습니다. 산맥 쪽으로 가신다고요."

경비대장 그 인간, 신나게도 떠들어 댄 모양이군.

루카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용무를 끝내고 트라벨가에 들르실 때, 저를 찾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퀘스트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젊은 사령관.

'이런 식으로 연계 퀘스트가 시작될 수도 있는 건가.'

퀘스트가 없을 줄 알았던 도시에서 벌써 두 번째 퀘스트였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초면인 용병에게 다짜고짜 의뢰 예약이라니. 과감하시군."

"북부의 지휘관들은 언제나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니까요. 이미 저마다의 세력도 형성하고 있죠. 저 같은 젊은 지휘관들이 북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건, 그런 기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이 두려워서가 가장 클 것 같소만."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만. 최선은 다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카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안은 게임에서의 그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닳긴 했어도, 북부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모습을.

"의뢰가 끝나면 트라벨가에 들르겠소. 이 문제는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벌써 할 얘긴 아닌 것 같군."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실력과 책임감을 모두 갖춘 용병은 흔치 않으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렇게 혀가 잘 굴러가는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안은 결국 피식 웃음 지었다.

"내가 몇 달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아시오."

"엄정한 여신께서 가호하실 겁니다. 그럼, 조사는 끝났습니다. 이안 경."

루카스가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서며 이안이 물었다.

"내 무기들은 어디서 찾으면 되겠소?"

"준비시켜 뒀습니다. 나가시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루카스의 말대로였다.

무기를 전부 품에 안은 경비대장이 복도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웃음 지었다.

"푹 쉬면서 돈만 잔뜩 쓰고 떠날 거라고 하지 않으셨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

***

"이안…!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이안이 방문을 열자, 테사이아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미간을 좁힌 이안이 내뻗은 팔을 쳐 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댔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끝냈어?"

"그래."

대충 대답하며 문을 닫은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와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샬롯이 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있지?"

대답은 테사이아가 대신 했다.

"왜겠어. 면목이 없으니 저러고 있겠지."

"...."

그녀를 돌아본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어지간히 갈궈 댄 모양이군.

그는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겨, 이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은 괜찮나?"

샬롯이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 너희들이 싸울 동안… 나는… 잠만… 잤는데…."

"...."

이안의 시선이 다시 한번 테사이아를 스쳤다.

최전방에서 싸워야 할 녀석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다니.

"받아라."

입맛을 다신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을 던졌다.

엉겁결에 받은 샬롯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건을 바라보았다.

붉은 돌이 박힌 목걸이.

오래전, 코볼트 족장을 사냥하고 손에 넣었던 혈안석 목걸이였다.

새 목걸이가 생겼으니 필요 없어진 물건이기도 했다.

"차라. 네 정신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거다."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 떴다.

"뭐…? 목숨 걸고 싸운 건 난데, 왜 선물은 저 짐승을 줘?"

무시한 채 이안이 덧붙였다.

"같은 일 겪지 말라고 주는 거니까, 차고 다녀라. 그리고 다음번에 큰 싸움이 있을 땐, 널 가장 위험한 적에게 보낼 거다. 몸으로 벌충해."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혈안석 목걸이를 내려다본 그녀가,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우겠다."

누구 마음대로 자꾸 버려?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일어섰다.

"따라와라. 반 토막의 운명을 결정지으러 갈 거니까."

"이안? 내 건? 정말로 내 건 없는 거야? 아니지…?"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내려다보던 목걸이를 비로소 목에 건 샬롯이 걸음을 옮겼다.

짧아진 꼬리를,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흔들면서.

#077화

"흐음…."

난쟁이 장인이 내놓은 물건을 응시하며, 이안이 침음했다.

물건이 구리면 키가 더 작아지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장인의 실력이 그가 기대한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색까지 재현하진 못했지만.

팔목 보호대는 형태를 자연스럽게 이어 붙였고, 사슬 갑옷까지 이어질 팔뚝의 사슬 보호대는 촘촘하고 이음새도 견고했다. 견갑은 어디가 찌그러졌었는지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걸 다 했지.

"말했듯이 주문 회로는 되살리지 못했소. 무게도 조금 더 무겁고 내구성도 떨어질 거요. 하지만 지금 재료로는 이게 최선이오."

"…그래 보이는군."

이안이 물건을 내려놓았다.

장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서 구경하던 도제가 달려왔다.

"팔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인간인 그가 샬롯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사슬 보호대는 상의와 어깨 부위를 세밀하게 연결해야 하는 공정이 남아 있었다.

샬롯이 순순히 부탁에 응했다.

그녀도 물건의 품질에 불만이 없어 보였다. 사실, 있더라도 표출할 상태도 아니었지만.

"듣자 하니 큰 사고를 치셨던데."

그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난쟁이 장인이 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고는 마족이 쳤지. 난 그걸 막았고."

"지휘관이 그 얘길 순순히 믿어 줬소?"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이안은, 장인의 눈을 보고 그가 정말 그저 궁금해서 물은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댁한테 칼을 휘둘러 댔다고 치지. 댁이 그걸 막다가 반대로 날 죽이면, 그건 누구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오?"

"그야 먼저 휘두른 놈 잘못이지."

"내가 쓰러지면서 옆 가게 가판을 다 엎어 버렸다면, 그건?"

"그야… 흠, 그래. 이렇게 납득시키신 거군. 수완이 상당하시오."

"그게 사실이니까."

"정말 소문대로 뱀파이어였소?"

북부인은 다 무뚝뚝하다더니, 그것도 옛말인가 보군.

하긴, 이런 도시에선 뭐든 떠들 거리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래 보이더군."

"그걸 정말 댁 혼자 때려잡으셨고?"

"그런 셈이지."

"흠… 산맥 인근으로 가신댔나."

이안은 대답 대신 다시 난쟁이 장인을 돌아보았다.

장인이 태연하게 그의 몸을 턱짓했다.

"댁의 장비 상태가 쓰레기 같아서 묻는 거요."

이게 본론이었군.

비로소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말했다.

"수완은 그쪽이 더 대단하시군. 수리라도 해 주실 거요?"

"그러니 얘길 꺼냈지. 벗어서 올려 두시오."

이안은 사양하지 않고 입고 있던 방어구들을 하나씩 벗었다.

그의 사슬 방어구들은 초승달 검에 찍힌 부위마다 죄다 고리가 떨어져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판금을 덧댄 부위들도 구겨진 곳이 한둘이 아니었고.

솜씨가 상당한 장인이니, 본래보다 더 튼튼하게 보완해 줄지도 몰랐다.

"얼마면 되겠소?"

"필요 없소. 저번에 준 돈이 상당히 많이 남았으니까."

"...?"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시선에 장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왜 그렇게 보시오?"

"돈을 거절하는 난쟁이를 본 건 처음이라서."

"흥정 실력은 영 꽝이시군. 받을 생각 없던 돈도 받고 싶게 해."

혀를 찬 그가 이내 덧붙였다.

"산맥은 본래 우리 난쟁이들의 땅이었소. 마족을 혼자 때려잡은 양반이니, 그 근처에 눌러사는 빌어먹을 것들도 잔뜩 때려죽여 주시겠지. 그런데 개떡 같은 걸 입혀서 보낼 수는 없지 않겠소?"

"내가 듣기론 거긴 예전에 거인 왕국이었다던데."

"그것들이 노예로 부린 게 우리와 인간들이었다더군. 거인 왕국이 멸망한 뒤로 난쟁이와 인간이 나뉘어 살게 됐고. 뭐, 그땐 서로 피도 많이 봤지만, 이젠 옛날얘기요."

"그러시군…."

별 관심 없는 사연이었지만,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들을 무료로 수리해 준다는데 이 정도 얘기 정돈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리겠소?"

"나흘… 아니, 사흘 반. 저 수인의 물건은 크기도 작고 마침 준비된 사슬도 있어서 쉬웠지만, 손님 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오."

별수 없이 며칠 더 묵어야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 뒤 오전에 찾으러 오겠소."

***

여관으로 돌아온 이안은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니 한밤중이었다. 아래층이 아직 떠들썩한 걸 보니 그리 늦은 시간까진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여긴 방음이란 게 전혀 안 되는군.'

희미한 차 배기음만으로도 잠을 설치던 과거의 삶이 새삼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이제는 오히려 꿈이나 환상처럼 느껴지곤 하는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즘은 본래 세상의 꿈을 꾸는 일도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무의식은 이미 이 빌어먹을 세계가 자신의 세상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긴, 아예 틀린 얘긴 아니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할 테니까.'

더럽고 냄새나고 야만적인 건 둘째치고, 목숨을 잃을 위협이 산재한 이 세계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초능력에 가까운 힘과 능력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따듯한 집. 대단하지 않아도 먹고는 살 수 있는 직업.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소박하지만 안온한 삶.

아직도 그는,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달은 그 모든 것들을 언젠가 되찾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이안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 뇌까렸다.

넘어온 방법이 있으니, 돌아갈 방법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그걸 찾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이고. 유일한 단서대로,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는 이 빌어먹을 세계의 결말도 볼 것이다.

만약 그러고도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신이란 것들을 찾아가서 멱살이라도 잡아야겠지.'

그게 가능한 일인진 모르겠지만.

벌써 수없이 반복해 온 우울한 생각을 떨치며, 이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 너머, 다른 이방인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집중됐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황색 눈과 붉은색 눈을 차례로 돌아본 이안이 내뱉었다.

"다 깨어 있었냐."

"배가 고파서."

"…난 잠이 안 오더군."

"넌 그럴 만하지. 낮에 많이 잤으니까."

"...."

테사이아의 핀잔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어디가, 이안?"

"식사하러 간다."

샬롯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따라가도 되겠나? 술 한잔하고 싶은데."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나도 갈래. 내가 먹을 건 없겠지만."

"넌 남아라."

"뭐…?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이안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술 아래로 튀어나온 송곳니. 굶주림으로 번들대는 붉은 눈.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흡혈 마족의 습격이 있었던 직후에는 더더욱.

"넌 떠나기 전까진 낮에만 밖으로 나와라. 네가 먹을 건, 이따 샬롯이 잡아다 줄 거다."

"내가 먹을 건 내가 구할 수 있어, 이안."

"마족이 또 있다고 소문나고 싶으면 어디 해 봐."

"...."

테사이아의 말문을 막아버린 이안이 문을 열고 나섰다.

뒤따라 나가던 샬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박혀 있어라. 비쩍 마른 쥐새끼를 먹고 싶지 않다면."

"…두 마리. 최소 두 마리여야 돼. 네가 은혜를 아는 짐승이라면-"

"내가 네 먹이를 챙기는 거로 빚은 다 갚은 거다."

일방적으로 내뱉고는 문을 닫은 샬롯이 이안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내려오자, 소란스럽던 주점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곧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칼부림 날 일은 없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샬롯과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곧 여급이 테이블 위에 음식과 술을 올려놨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주문도 안 했는데."

"알아요. 이건 그냥 저희가 드리는 거예요."

"…왜?"

"마을에 들어온 마족을 처리하셨다면서요.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건진 몰라도, 나리가 주민들을 여럿 살린 거라던데요."

"누가 그런 소릴 하냐."

"다들요. 괜히 산맥 쪽으로 가신다는 게 아니구나, 하면서요."

"아, 그래…."

이안은 주위를 슥 돌아보았다.

다들 이쪽에는 관심도 없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게 북부식 배려인가.

"뭐, 사양하지 않지. 고맙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싱긋 미소 지은 검은 머리의 여급이, 이내 슬쩍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 하나 더 드려도 될까요?"

"그래라."

"혹시, 작은 의뢰도 받으시나요?"

"받지. 하지만 여긴 날 필요로 할 만한 일은 없어 보이던데."

"그렇진 않아요. 도시 외곽으로 가면 유령이 나온다는 집도 있고, 광산 근처에 마물이 숨어 산단 얘기도 있고…. 저주가 깃들었다고 버려진 갱도도 있고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아서 방치해 둔 문제들이, 제법 있는 편이죠."

"그래…?"

시간 보내기엔 딱 좋은 것들이군.

생각하며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난 공짜로는 일 안 해."

"그거야 당연하시겠죠."

"하지만 당장은 돈이 필요 없다. 이미 충분히 있기도 하고."

"그럼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북부가 초행이야. 눈 덮인 지역은 더더욱 가 본 적이 없지."

샬롯이 무슨 생각이냐는 듯 바라보는 가운데, 이안이 느긋한 눈길로 여급을 바라보았다.

"너희 중엔 이주민들이 많댔지. 그러니까 보수는, 우리가 눈 덮인 지역을 지날 때 필요할 만한 것들로 받겠다. 크건 작건 상관없어. 물론 보수가 좋으면 일도 더 정성껏 처리해 주겠지만."

"...!"

여급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가서 전해라, 의뢰가 있는 놈들은 물건을 들고 직접 찾아오라고. 그리고 우린 나흘 뒤에 떠날 거다. 의뢰는 내일 오전부터 받을 거고. 이해했나?"

"네. 제대로요. 감사합니다…!"

내뱉는 여급의 표정이 밝아졌다.

벌써 생각나는 것들이 있는 모양.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알면 술이나 몇 잔 더 가져와."

"당연히 그래야죠."

여급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곧 그녀가 다른 주정뱅이들 사이를 돌며 이야기를 전했다.

주정뱅이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주로 추위 속에서 이동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갑론을박이었다.

온갖 경험담이 다 나오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느긋하게 술잔을 들었다.

화로의 사원에서 받은 축복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북부인들이 가져올 물건들은, 척박한 북쪽에서의 여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주리라.

술을 홀짝이던 이안은, 이내 자신을 응시하는 샬롯을 마주 보았다.

"왜?"

"놀라고 있었다. 넌 정말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꾀를 다 지녔군."

뭔 소릴 하려나 했다.

"별 것 아닌 요령이야. 의뢰인들이 정말 쓸만한 걸 듣고 올지는, 두고 봐야 알 테고."

"고향에서 가져온 물건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법이지. 그게 이제는 쓸모가 없을지라도."

덤덤하게 말한 샬롯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계기가 생긴다면 미련 없이 놓아줄 것이다. 언제나 현재가 과거보다 중요한 법이니까."

"경험담처럼 말하는군."

이안이 피식대며 말했다.

샬롯은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생각에 잠긴 눈빛.

과거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지금의 처지를 곱씹는 것 같기도 했다.

좀 전의 자신이 문득 겹쳐졌다.

"되찾고 싶나."

이안이 툭 내뱉자,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되물었다.

"과거의 삶? 아니면 꼬리?"

"둘 다."

"…혹시, 날 쫓아낼 생각인가?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게 네가 바란 것이었을 텐데."

"그랬지. 지금도 그렇지만…."

술잔을 쥐는 그녀의 눈빛이 복잡한 속내를 머금고 일렁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야."

"왜지?"

"…네가 하비에르 같은 자였다면, 나는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정당하다 여겼겠지. 하지만 너는 전사다, 이안."

그녀가 이안을 다시 마주 보았다.

"서로의 가장 중요한 것을 두고 싸운 끝에 빼앗긴 것이니, 반환 역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른 후에 요청할 것이다. 하물며 네게 목숨까지 빚진 지금은, 꼬리를 돌려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평생의 수치로 남겠지."

이건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일까, 아니면 내게 종속되어 가는 자신을 합리화하려 내린 결론일까.

잠시 생각한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 쪽이건 달라질 건 없었다.

"내가 꼬리를 돌려주지 않으리란 가정은 하지도 않나 보군."

"네가 하비에르 같은 자라면 했겠지. 그럼 내 내면에 자리 잡은 이 공포를 이겨 내고 널 죽일 방법을 찾으려 애썼을 것이다. 그 결과로 내가 죽게 될지라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군."

"하비에르를 어지간히 싫어했군."

이안이 피식댔다. 어쨌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샬롯을 영원히 끌고 다닐 생각까진 없었으니까. 언젠간 꼬리를 돌려줄 날이 오게 될 터였다.

그때까지 그녀가 살아있다면.

"그러니 얼마든지 나를 가장 위험한 전투로 밀어 넣어도 좋다. 그러길 바란다. 설사 그러다 죽더라도, 내겐 나쁘지 않은 결말이야."

"걱정 마라.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거니까."

샬롯이 미소 지었다.

곧 술잔을 말끔하게 비운 그녀가 일어섰다.

"그럼, 쥐를 잡으러 가겠다."

"내일부턴 바빠질 수도 있어. 테사가 문제 일으키지 않게 신경 써라."

"기꺼이."

샬롯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이안은, 이윽고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주점이 고요해진 새벽까지. 홀로.

#078화

다각- 다각-

마차가 닝글로슬의 북부 관문으로 가까워졌다.

"호오…."

경비대장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스쳤다.

마차는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살이 오른 두 마리 전마는 마갑 위로 털가죽을 덮어썼고, 마차의 네 바퀴에는 넓적하게 다듬은 사슬 띠가 감겨 있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마부석에 앉은 수인. 이제는 닝글로슬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샬롯의 행색이었다.

사냥꾼들이나 쓰는 여우 털모자와 부츠, 장갑에 늑대 가죽으로 만든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으니까.

온갖 짐승의 털가죽을 두른 수인은, 경비대장이 보기에도 꽤나 괴상했다.

"정말 오늘 떠나시나 보군."

마차가 멈추자, 경비대장이 옆으로 다가서며 내뱉었다.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닝글로슬의 관문은 댁이 다 지키나?"

"순환식 근무라서 말이오."

경비대장의 시선이 이안이 머리에 쓴 검은색 털모자와 설표 털가죽을 이어 붙인 망토를 훑었다.

"얼어 죽을 일은 없으시겠소."

"다들 그러더군. 검사할 게 남았나?"

"없소만. 차별을 둘 순 없어서 말이오."

온갖 털가죽이 푹신하게 깔린 마차 내부. 빵빵하게 들어찬 짐 가방.

마지막으로 늑대의 머리 가죽을 고스란히 남겨 만든 로브를 눌러쓴 테사이아까지 눈으로 훑은 경비대장이 웃음 지었다.

"돈을 안 받는다기에 무슨 소린가 했는데. 남는 장사셨군."

"강요한 적 없어. 다들 알아서 들고 온 거지."

"알고 있소."

이안의 방식은, 이 암흑시대의 인간들에겐 파격적인 것이었다.

보상만 마음에 들면 창고의 쥐 떼를 잡아 달란 식의 하찮은 의뢰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의뢰의 접수와 해결이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이안에겐 당연했지만, 현지인들의 눈엔 아니었다.

거기다 폐가에 깃든 망령처럼 병사들조차 겁을 내거나, 갱도에 깃든 저주처럼 해결할 방법을 몰라 방치해 둔 문제들도 별반 다를 바 없이 뚝딱뚝딱 해결해 버렸다.

이튿날부턴, 소문을 들은 병사들까지 집에 보관 중이던 물건을 들고 찾아갔을 정도였다.

이안은 아예 의뢰 접수를 몰아서 받았고, 그 후엔 받은 의뢰를 기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했으니, 마차가 이런 호화로운 모습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아쉬워하겠군…."

"아닐 거야. 당분간은."

"저 북쪽에서도 무사하시길 바라겠소."

"댁들도 그러길 바라지."

"뭐, 이 동네에 별일이야 있겠소?"

경비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웃지 않았다.

이윽고 경비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별일이 있을 것 같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뭐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

"나라면 이 북쪽 장벽의 수비를 더 강화할 거야."

무책임한 말투였지만, 경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가 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북쪽으로 떠나는 지금은 더더욱.

"명심해 두겠소."

내뱉은 경비대장이 턱짓했다.

병사들이 비켜서고, 마차가 느긋하게 관문을 지나쳤다.

마차 뒤로 늑대 머리 가죽을 뒤집어쓴 테사이아가 고개를 내밀어,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이안이나 샬롯과는 달리 아름다운 외모와 괴상한 언행으로 입소문을 탔다.

마법사보다 괴상한 건 요정 마법사란 농담이 생겼을 정도였다.

"근무가 끝나면 곧바로 보고부터 올려야겠군…."

중얼거리며 성벽 위로 올라간 경비대장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마차가 완만하게 이어진 황량한 언덕을 지나, 이윽고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

마차가 관도 위를 나아갔다.

중간에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이 있었지만, 일행은 진입하지 않고 나아갔다.

보급도 충분했고 경비대장의 조언을 잊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안은 물론 샬롯도 말없이 육포만 씹어 댔다. 어느새 그녀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 한다는 이안의 지론에 감화된 상태였다.

이어지던 차분한 적막을 깨뜨린 건, 널브러져 있던 테사이아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고개만 이안 쪽으로 돌린 채, 그녀가 말했다.

"산맥 쪽으로는 왜 가는 거야?"

"...."

"...."

이안과 샬롯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샬롯이 내뱉었다.

"진심으로 묻는 거냐?"

"당연하지. 왜 아니겠어?"

"하… 누가 귀쟁이 아니랄까 봐, 제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군."

"그럴 거면 대답을 하지를 마, 야옹아."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동안 테사이아의 관심사는 생존뿐이었을 터였다.

심판자는 물론이고, 이안과 샬롯도 여차하면 그녀를 죽일 기세였으니까.

문제들이 어느 정도는 해결된 지금에야 비로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긴 것이리라.

테사이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왜야, 이안?"

"…우린 지금 산맥이 아니라, 그 옆으로 이어진 숲으로 가고 있다."

"숲? 거기 뭐가 있는데?"

"몰라."

"모른다고…?"

테사이아가 되물었지만, 이안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테사이아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역시 불친절하네. 괜찮아, 그것도 매력적이니까. 야옹아, 네가 대신 알려 줄래?"

"그래. 알려 주지.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밤까지 혀가 없어질 거다."

"알았으니 알려 줘, 샬롯."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하지 않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가면 알게 될 테니까. 뭐가 있건, 난 싸울 수만 있으면 돼."

"짐승다운 대답이네. 그래… 어쨌든… 위험한 뭔가가 있다는 거네. 너희 반응만 봐도 바로 알겠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샬롯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살 만해지니 다른 생각이 드나 보지? 부디 행동으로도 옮겨 주면 좋겠군. 기다리고 있겠다."

"그냥 난 위험한 게 싫을 뿐이야. 내가 딴생각이 없단 건 이안이 제일 잘 알걸? 같이 목숨 걸고 싸운 사이니까. 안 그래 이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안…? 알고 있지?"

"...."

진심으로 묻는 건가.

이안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말했다.

"왜 아무 대답이 없어?"

"테사."

"응?"

"우리가 함께한 지 얼마나 됐지?"

"글쎄. 한… 열흘… 쯤?"

"네가 내 목숨을 노린 시간은?"

"…에이, 뭐야. 그래서 아직도 날 못 믿는단 얘기야?"

"아니."

"역시 그렇지?"

"한 번도 믿은 적 없단 얘기다."

"응…?"

"난 계약을 맺은 거지, 널 믿는 게 아니야."

순간 벌어졌던 테사이아의 입이 다시 꾹 닫혔다.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 해서 없던 신뢰가 생기는 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이 세계에서 그가 믿는 사람을 다 합쳐도, 고작해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 계약이랑 믿음은 아무 상관도 없지. 네 말이 맞아."

이윽고 읊조린 테사이아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난 정말 널 배신할 생각이 없어, 이안. 늘 말했듯이."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 하지만 그녀를 돌아보는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테사."

"...!"

"내가 널 믿게 되길 바란다면, 스스로 증명해."

"널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네가 다른 마족과는 다르다는 걸."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안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본 바로는 착한 마물은 죽은 마물뿐이었고, 그건 마족이나 타락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애초에 필요에 의해 살려 두었을 뿐. 본래라면 테사이아는 보자마자 죽였어야 할 존재였고, 그 사실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을 모두 죽이고 난 후엔 그녀의 차례이리라.

그전에 그녀가 배신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다른 뱀파이어의 진혈을 흡수하지 못한 테사이아는 결코 이안의 적수가 될 수 없을 터였다.

테사이아가 살아남을 길은, 그러는 게 그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뿐이었다.

메브나 루시처럼, 게임에선 그에게 죽었던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이 녀석이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거나, 아직 테사이아에겐 남은 시간이 제법 많았다.

이런 말을 해 준 것 자체가 이안의 입장에선 기회를 준 셈이었으니, 남은 건 그녀의 몫이었다.

"어려운 말이네…. 하지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읊조렸다.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아. 해 볼게, 이안."

그보다 한밤중에 도망쳐 버리는 게 더 빠를지도.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육포를 입에 물었다.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은 듯 기대 있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문득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안 믿으면서 설마 샬롯은 믿는 건 아니겠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군. 이안과 나는 서로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사이다, 건방진 귀쟁아. 나한테 잡혀 온 너하고는 시작부터가 달라. 안 그런가, 이안?"

"...."

샬롯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내 믿음이 왜들 그렇게 중요한 거야?

눈을 치켜뜬 샬롯과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는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집착들 하지 마라. 내가 뭐라 한들,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

샬롯이 충격받은 듯 입에 물고 있던 육포를 떨어뜨리는 가운데. 눈을 가늘게 뜬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결국, 우린 같은 처지네. 샬롯."

"...."

***

그늘이 아닌 곳에도 눈이 덮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상의 끝이라고도 불리는 아히고른 산맥이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물론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난 관심도 없지만.'

이제 길어야 며칠이면 산맥 인근에 접어들 터였다.

지도대로라면, 저지대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들어서야 하리라.

날이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버려진 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폐허나 다름없겠지만, 야영지를 꾸리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눈이 덮인 지역부터는 마경이나 다름없을 테니, 야간에 이동을 욕심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하늘에 점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혹시 모를 눈보라를 피할 공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마을은 본래의 형태가 어느 정도는 보존된 상태였다.

목책도 대부분 무사했고, 버려진 집들도 눈이 쌓이거나 일부 무너진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냉큼 안으로 들어서진 않았다.

이안과 샬롯이 먼저 폐허 내부로 진입했다.

이런 버려진 마을은 마물이 둥지를 틀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운이 좋군."

"아쉽군. 아무것도 없다니."

다행히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북부의 마물은 소굴을 만들 필요 따위는 없는지도 몰랐다.

마을로 마차를 몰고 들어온 샬롯은, 한쪽 벽면이 무너진 집 안까지 마차를 들였다.

어차피 버려진 마을이니, 이왕이면 마차를 가장 안전한 위치에 보관하려는 생각이었다.

샬롯이 의뢰의 보수로 받은 말린 콩을 말들 앞에 던져 놓는 사이, 테사이아가 모닥불로 쓰기 위한 장작들을 주워 왔다.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

그 사이 이안은 모닥불에 구워 먹을 건조 식량이나 준비하고 있었다.

한결 능숙하게 모닥불을 피운 샬롯이 건물 앞의 공터로 나섰다.

한동안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으니, 미리 감각을 일깨워 두기 위해서였다.

아스콜드와의 전투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충격도, 그녀가 다시 수련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로는 충분했다.

"또 하게? 열심이네, 야옹아."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샬롯은 신경도 쓰지 않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았다.

이내 그녀가 춤을 추듯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은 느리다 빨라지기도 했고, 묘기를 부리듯 움직이거나 때로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물러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듯이.

묘한 기시감에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나랑 싸우는 거 아닌가.'

그녀에게 패배를 안긴 유일한 상대이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눈이 하늘하늘 내리기 시작했음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검무를 이어갔다.

"…오늘은 그쯤 해도 될 것 같다, 샬롯."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이안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본 샬롯이, 그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혹시?"

"…그래."

이안이 손을 펼쳤다.

"시작됐다."

손아귀의 문양이 공명하고 있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079화

"뭐가 시작된 건데? 그 불쾌한 마력은 또 뭐고."

모닥불을 쬐던 테사이아가 물었다.

이안은 망토를 벗어 아공간에 넣고 느슨하게 풀어 뒀던 방어구의 끈들을 조이기 시작했다.

"테사. 넌 여기서 마차를 지켜라. 한 마리의 말도 잃지 마."

덤덤하게 덧붙인 그가 목과 어깨를 풀었다.

"그러니까 설명을 좀…. ...!"

투덜대던 테사이아의 고개가, 그들이 진입했던 마을 입구 쪽으로 득달같이 돌아갔다. 잠시 멈췄던 테사이아의 눈동자가 옆으로 천천히 움직여, 이윽고 반대쪽에 있는 또 다른 입구까지 돌아갔다.

"포위… 당한 거야?"

"네 역할만 잊지 마라."

내뱉은 이안이 공터로 향했다.

쌍검을 늘어뜨린 채 숨을 고르던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 곧 시작될 전투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고여 있었다.

"많다. 그리고… 뭔가 이전과는 다르군."

"그래. 통솔하는 놈이 있는 거다."

이안의 시선이 그들이 들어선 입구 쪽으로 문득 돌아갔다.

"그놈은 내가 맡을 거다. 하지만 그동안엔 다른 곳까지 신경 쓰지는 못할 수도 있어."

"나머지는 내가 상대하지."

"혼자서는 쉽지 않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안."

이안이 샬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여러 감정을 읽어 낸 그가, 이윽고 내뱉었다.

"여기서 죽을 생각은 마라."

"노력해 보지."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심드렁하게 중얼대며 일어선 테사이아가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두 마리 전마는 벌써 뭔가를 느낀 듯 불안하게 콧김을 뿜어 대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녀석들의 겁먹은 눈을 응시하며 중얼댔다.

"괜찮아… 쉬고 있어. 안 잡아먹을 테니까."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한복판에서부터 동심원이 번지듯 일렁였다.

번들거리던 말들의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숨소리가 가라앉고, 두 녀석 다 바닥에 주저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쯤 잠든 것 같은 최면 상태.

테사이아가 싱긋 미소 짓는 사이.

휘익- 타탓-

몸을 날린 이안과 샬롯이 서로 다른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망토를 벗어 버린 테사이아도 몸을 날렸다. 구석에 숨어드는 털쥐 한 마리를 낚아챈 그녀가, 그대로 옆의 담벼락을 타고 지붕 위로 솟구쳤다.

손아귀의 쥐가 바둥거리는 가운데, 버려진 마을의 초라한 전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삐죽삐죽 솟은 목책 너머.

"...."

마을을 포위한 채 멈춰 선 것들을 눈에 담은 테사이아가, 이윽고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과 난쟁이 언데드들이었다.

낡아빠진 장비로 무장한 채, 무정물처럼 우두커니 선 놈들 수십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눈송이 사이, 고요하게 일렁이는 푸른 안광들은 뱀파이어의 눈에도 으스스했다.

"힉…."

언데드들을 훑던 테사이아가 문득 숨을 들이켰다.

놈들의 한복판, 불쑥 솟은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주위 언데드들보다 배는 큰, 새카만 피부의 거인이었다.

넝마 같은 바지만 걸친 채 손에는 거대한 양날 도끼를 쥔 놈의 머리는, 다른 부위와 달리 미라처럼 비쩍 말라 두개골의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텅 빈 눈구멍에 일렁이는 푸른 안광이, 다른 놈들과 달리 감정을 가진 것처럼 불규칙하게 일렁였다.

검은 벽의 광기를 머금고 되살아난, 거인 전사.

"멋지군…."

놈을 멍하니 응시하던 테사이아의 귓가로, 샬롯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거인 전사를 응시하는 샬롯의 얼굴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미친년이 따로 없…."

중얼대던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녀의 뇌리로 한 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저게 샬롯의 상대라면….

'이안은 뭘 상대하는 거야…?'

휘이이-

때마침 눈송이와 함께 밀려든 바람에, 테사이아의 몸이 굳어졌다.

바람에 섞인 오염된 마력. 그 안에 끈적하게 눌러 담긴 집착과 광기에 일순간 휩쓸렸기 때문이다.

손아귀의 쥐가 뼛소리와 함께 축 늘어지고,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춘 테사이아의 시선이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처음 보인 건 건너편의 지붕에 선 이안의 등이었다.

"저게 왜…."

읊조리는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아래로 향해 있었다.

테사이아의 시선이 그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

이내 그녀의 눈이 커졌다.

마을로 들어서는 관도 한복판.

낡고 구멍 난 갑옷을 걸친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갑옷 내부가 어두운 건 착각이 아니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새카만 실루엣이, 놈의 본모습이었으니까.

온전한 형태를 갖출 만큼 강대한 망령.

새카만 사념 덩어리 사이로, 놈의 이목구비가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테사이아를 휩쓸었던 감정은 놈에게서 번지고 있었다.

코까지 가린 투구 아래로 짙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위태로운 적막.

이 모든 상황에 관심도 없다는 듯 내리는 눈이 주위를 조금씩 하얗게 물들이는 가운데.

"■■… ■■■■...!"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낮은 음성이 마력의 파장을 머금고 번져 나갔다.

온몸을 진동시키는 듯한 불쾌함.

망령 거인을 노려보는 테사이아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뭐라는 거야…?'

이안에게서 낮은 숨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그가 뭔가를 비웃을 때 내는 특유의 소리.

저걸 알아들어?

생각하며, 테사이아는 이안의 등을 바라보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묘한 위압감이 감도는 뒷모습.

"■■■- ■■■■...!"

망령 거인의 외침이 이어졌다.

"아, 그러셔?"

읊조린 이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망령 거인의 푸른 안광이 일렁이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그-아아아- 갸아아아악-

사방에서 귀곡성이 메아리쳤다.

우두커니 서 있던 언데드들이 턱을 덜그럭대며 울부짖고 있었다.

놈들의 안광이 몸부림치듯 휘청대며 타올랐다.

거인 전사 역시 포효하고 있었다.

다른 언데드들과 달리 분노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솨아아아-

이안의 전신을 타고 바람이 번졌다. 떨어지던 눈송이들이 그의 주위로 빨려들어 맴돌다가 하늘로 솟구쳐 흩어졌다.

망령 거인이 등에서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든 건 그때였다.

일격에 건물도 쪼갤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 ■■■-!"

소리치는 놈의 전신에 푸르스름한 마력이 번져 나갔다.

"말이 많아졌네. 듣기 싫게."

씹어뱉듯 읊조린 이안이 놈을 향해 몸을 날린 건 그 직후였다.

무모해 보이는 돌격. 하지만 테사이아는 그와 망령 거인이 맞부딪치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망령 거인의 외침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벌써부터 위험한 건데…!"

내뱉은 테사이아가 손에 쥔 쥐를 으적, 입에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번들대고 은발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한 가운데.

"마차 똑바로 지켜라, 귀쟁아."

쌍검을 움켜쥔 샬롯이, 그녀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난 저 거인의 목을 따 올 테니까."

"뭐…? 너까지 나가면-"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렸을때, 샬롯은 이미 지붕 위를 내달려 멀어지고 있었다.

"…미친 짐승 같으니."

탄식한 테사이아의 시선이, 밀려드는 언데드들에게로 돌아갔다.

멀리서 지켜보거나 이안이 휩쓸고 간 잔재만 마주했던 그녀는, 그가 어떤 여정을 이어 왔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이안을 따라다니는 게… 사실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이제 와선 늦은 깨달음이었다.

꾸득, 꾸드득-

그녀의 손끝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

파삭-!

내뻗은 검 끝에 걸린 언데드가 산산이 부서졌다. 착지하며 바닥을 구른 샬롯이 그대로 튕겨 오르듯 몸을 날리며 질주를 이어갔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뚫고 안광을 흩뿌리며 달려오는 언데드들.

샬롯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면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콰직-!

난쟁이 언데드가 던진 도끼를 몸을 옆으로 한 바퀴 돌려 피한 그녀가, 마주 달려오는 놈의 두개골을 무릎으로 후려쳤다.

투구와 함께 산산 조각나 튀어 오르는 뼛조각. 푸른 안광이 폭발하듯 흩어지고, 그대로 놈을 뚫고 지나간 샬롯이 검을 고쳐 쥐었다.

갸- 아아아악-

귀곡성을 내지르며 뒤따르던 언데드 전사 둘이 달려들었다.

샬롯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콰직-! 퍼억-!

양팔에서 만들어져 검 끝까지 이어진 곡선이 그대로 놈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놈들이 휘두른 녹슨 검은 샬롯의 견갑을 스쳤을 뿐이었다.

"...!"

내뻗었던 팔을 회수하던 샬롯이 불현듯 바닥을 굴렀다.

쒸에에엑- 콰앙!

정수리를 쪼갤 듯 떨어진 양날 도끼가 땅에 깊숙이 박혔다.

치솟는 흙먼지. 작은 인간만 한 크기의 도끼였다.

자세를 바로 한 샬롯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인 전사의 비쩍 말라붙은 머리가 거기 있었다.

놈은 도끼를 내리친 상태에서도 그녀를 내려다봤다.

순간 웅크렸던 샬롯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나선을 그리며 솟구친 쌍검의 궤적이, 이윽고 도끼를 움켜쥔 놈의 팔뚝으로 교차하며 떨어졌다.

카드득-!

샬롯의 힘으로도 거인의 검은 팔을 잘라낼 수 없었다. 얼어붙은 땅을 내리친 것 같은 느낌. 쌍검이 틀어박힌 놈의 팔뚝에서 타르처럼 검은 체액이 번졌다.

그 순간 반대편 손을 도낏자루에서 뗀 거인 전사가 그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쒸에에엑-!

주먹이 만들어 내는 파공음이 심상치 않았다.

거대한 덩치 탓에 둔해 보일 뿐. 검 자루를 쥐고 있던 팔을 굽힌 샬롯은, 그대로 팔을 펴 튕겨 오르면서 자루를 쥔 손을 놓아 버렸다.

후우웅-!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공중제비를 돈 샬롯이 정확히 뛰어올랐던 자리에 다시 착지했다.

검 자루를 움켜쥔 그녀가, 힘껏 날을 뽑아 들며 주먹을 휘두르느라 교차된 거인의 팔뚝 위로 뛰어올랐다.

피부만 뼈에 붙은 형상인 거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분노로 타오르는 듯한 푸른 안광.

"아- 아아아아-!"

입을 쩍 벌린 놈이 포효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충격파가 샬롯을 휩쓸었다. 검 한 자루를 놓치며 튕겨 나간 샬롯이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며 착지했다.

거인 전사가 땅에 박힌 도끼를 뽑아 들었다. 팔뚝에 흐르던 체액은 어느새 끈적하게 응고되어 본래의 피부처럼 보였다.

쒸에에엑-!

놈이 또 한 번 휘두른 도끼가 샬롯을 쪼갤 듯 떨어져 내렸다.

도끼날을 응시하던 샬롯이 한순간 옆으로 비켜섰다.

콰드득-!

도끼가 땅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치솟는 흙먼지 사이. 샬롯의 안광이 주황색 선을 그리며 도낏자루로 쇄도했다.

양손으로 움켜쥔 검이 그대로 거인의 손목을 내리쳤다.

꽈드득-

검날이 거인의 손목을 반 이상 잘라냈다. 샬롯의 팔이 근육이 돋아나듯 일순간 부풀었다.

콰직-!

기어코 거인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잘린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체액이 샬롯의 머리에도 튀었다.

"오- 오오오오…!"

거인이 잘린 손을 치켜들며 울부짖었다.

"하… 하하...!"

놈을 올려다보는 샬롯의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그녀가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다시 자세를 낮춘 찰나.

쩌어어엉-!

저 멀리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그녀의 전신을 울렸다.

샬롯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대검을 내리친 망령 거인의 모습이었다.

대검 주위로 일어난 거대한 폭발.

핑그르르 회전하며 날아가는 검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저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안…?"

탄식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일어선 거인 전사가 그녀를 향해 도끼를 내리치려 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이안을 걱정했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샬롯은 다시 거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