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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4화

이안은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가는 마법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달렸다.

'설마 이 정도로 죽진 않겠지.'

청색 마법이 사거리가 짧기 때문이라고 해도, 마법사 주제에 아무런 대책 없이 이렇게 앞에 서 있었을 리 없었다.

철컹, 철컹-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든 기사가 앞을 가로막으며 달려오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저놈은 내가 맡겠다."

내뱉은 샬롯이 앞질러 달려갔다. 몇 걸음 만에 도약한 그녀가 치켜든 전투 도끼를 내리쳤다.

쩌엉-!

기사가 지지 않고 양손으로 쥔 검을 후려치며 맞부딪혔다.

타타탓-

이안은 미끄러지듯 놈을 지나쳤다.

이안이 기습을 선택한 건, 이놈들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놈들은 게임에선 상대해 본 적 없는 놈들이었으니까.

몸으로 비집고 들어가 전력을 탐색하는 건 물론 위험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저들의 역량을 그만큼 빠르게 가늠할 수 있었다.

현혹 마법을 소리 없이 펼칠 때부터, 저 프레야라는 뱀파이어의 전투력이 그다지 높지 않으리란 계산도 어느 정도는 깔린 채였다.

물론 그녀의 마법은 충분히 강력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잠깐의 충동. 그의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엔, 한참 부족한 마법이었다.

'…꼭 이렇게 자신만만하다 한 번씩 큰코다치던데.'

생각하며, 이안은 가까워지는 프레야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쓰러지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야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너…!"

인상을 찌푸린 채 뭐라 내뱉으려던 그녀의 목으로, 단죄의 검이 날아들었다.

콰직-

잘려 나간 프레야의 머리가 허공을 돌았다.

"저 녀석과 함께하는 건 의뢰 때문이 아니야. 그게 너흴 다 죽이는 데 도움이 되어서지."

이안이 떨어진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마력이 맺히는 사이.

"…일족에 원한이라도 있나 보네. 아쉬운걸. 조사가 부족했어."

프레야의 잘린 머리가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푸스스-

그녀의 몸이 그림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의 시선이 꿈틀대는 그림자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쩌적-

그의 왼팔 주위로 서리 칼날이 피어올랐다. 칼날 같은 얼음 결정이, 스멀스멀 번지는 그림자를 쫓아 뿜어져 나갔다.

쩌저적-!

땅을 타고 번진 얼음 막이 그림자를 가린 건 그 직후였다.

퍼버벅, 형성되던 서리 방패가 이안이 쏘아 보낸 칼날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이안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지는 가운데.

"불사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지 아나?"

쓰러진 채로 서리 방패를 펼친 마법사가, 그림자에 떠밀리듯 푸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그의 얼굴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마법사가 마력이 가득 맺힌 퀭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마력을 축적하고 주문을 연구할 시간이 무한하단 것일세."

쩡-!

마력 맺힌 지팡이가 땅을 찍었다.

쩌저저저적-!

얼음 가시가 수없이 솟구치며 이안을 향해 밀려들었다. 혀를 차며 물러난 이안이 곧바로 서리 방패를 펼쳤다.

쾅-!

폭발과 함께,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쩌저저저적-

방패 위를 두드리는 얼음 파편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일렁였다.

'이런 식인 거군.'

비로소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현혹의 심판자.

이안의 머릿속에 떠다니던 정보의 파편들이 빠른 속도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를 현혹하거나 변절하게 만드는 게 1순위 목표였다 해도, 프레야는 무력으로 진압할 상황까지 착실하게 대비한 게 분명했다.

적색 마법사를 대비한 청색 마법사 하수인과, 그를 지킬 기사 하수인까지. 거기다 프레야까지 그림자에 숨어 보조한다면, 어떤 의미에선 아스콜드보다도 까다로운 상대일 터였다.

'두 놈과 동시에 싸웠다면 말이지.'

이안의 시선이 샬롯과 전투 중인 기사의 뒷모습을 훑었다.

"훌륭하구나, 짐승아…!"

둘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완전히 싸움에 몰입하고 있었다.

프레야의 그림자가 스며든 이후로는, 기사의 갑옷과 검이 검게 물들어 흐릿한 잔상을 흘렸다.

흡혈 일족만이 다루는 모종의 흑마법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샬롯이 그와 호각을 이루는 건,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테사이아 덕분이었다. 기사의 그림자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그림자 가시를, 테사이아는 손톱을 휘둘러 베어낼 수 있었다.

'주문쟁이부터 조지기엔 최적의 환경이네.'

이안의 시선이 서리 방패 너머로 돌아갔다. 가라앉는 폭발 너머, 청색 주문쟁이가 우두커니 다음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타탓-!

이안은 더 지켜보지 않고 질주했다.

청색 마법은 대부분 사정거리가 짧은 편이고, 그렇기에 근접전은 보통 현명한 선택이 아니지만.

지금 저놈은 그를 청색 마법사로 오해하고 있으니, 그 오해에 최대한 부응해 주어야 했다.

'내가 적색도 쓸 줄 아는 걸 알면 태세를 바로 바꿀 테니까.'

본래 적색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온 자였다.

이안이 적색도 사용한다는 걸 알면, 지금처럼 득의양양하게 공격 마법만 펼쳐 대진 않을 터였다.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만 전념하면서, 기사나 프레야의 지원을 받으려 들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럼 개 피곤해지겠지.'

그렇기에 접근전으로 승부하면서, 단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이었다.

불사신처럼 굴고 있어도, 하수인에 불과한 이상 그럴 리는 없었으니까.

쉬쉭-!

이안이 왼손을 털었다.

번쩍이는 날붙이가 마법사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슈확, 마법사의 발아래에서 먹물 같은 막이 치솟으면서 단검을 막아냈다.

마법사의 시야가 차단된 사이, 이안이 훌쩍 솟구쳤다.

슈학-!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든 이안이 장막을 뛰어넘으며 솟구쳤다.

마력이 아른거리는 마법사의 느긋한 시선이 그를 맞이했다.

"예상했다네. 후배님."

쩌저적-

내뱉은 지팡이 앞으로 서리 칼날이 뭉텅이로 피어올랐다.

이안이 볼 때, 이만하면 상위 마법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오래 살았단 말이 빈말은 아닌가 보네.'

몸을 비틀며, 이안이 내뱉었다.

"나도."

"...!"

푸확, 허공에서 터져 나온 돌풍이 이안의 몸을 옆으로 힘껏 떠밀었다.

퍼버벙-!

폭발과 함께 방사된 얼음 파편이 텅 빈 허공을 갈랐다.

놈을 지나친 이안이 묘기를 부리듯 착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쒸엑-!

다급하게 솟구친 그림자 가시가 뻗어 나왔다.

프레야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던 듯, 어설픈 궤적이었다.

이안은 옆으로 두 바퀴 몸을 돌리는 것으로 간단히 피하고는, 그대로 일어서며 검을 사선으로 올려 쳤다.

쩌엉-!

간신히 피어오른 서리 방패에 검날이 비스듬하게 박혔다.

놀람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의 마법사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자넨 아마 내 후배 중에 가장 검을 잘 다루는-"

내뱉던 마법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든 이안의 눈동자가,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같은 선배, 둔 적 없는데."

"이게 무슨…?"

바람 빠지듯 내뱉는 마법사의 눈에 마력이 휘몰아쳤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마법을 펼치려 할지는, 마찬가지로 청색 마법사이기도 한 이안에겐 뻔한 부분이었다. 냉기 파동.

하지만 이미 이안은 주문을 완성한 상태였다.

콰아아아아-!

서리 방패에 박힌 검을 중심으로, 샛노란 화염의 폭발이 치솟았다.

일점 폭발.

"갸- 아아아아악-!"

폭발 한복판에 놓인 마법사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아아아악-!

그림자에서도 비명이 이어졌다.

불이 붙은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도망치듯 허둥지둥 기사 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거, 원래는 저 그림자 속의 본체를 먼저 노리는 게 공략법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춤추는 불꽃을 시전해 그대로 마법사에게 내뿜었다.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퍼버버버벙-!

폭발에 휩쓸린 마법사가 너덜너덜해진 채 튕겨 나갔다. 전신이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타들어 간 끔찍한 상태였지만, 아직 죽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타타탓-! 콰직-!

"...!"

질주해 놈을 따라잡은 이안이, 마법사의 가슴 한복판에 역수로 쥔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검에 꿰여 땅에 박힌 마법사의 입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그대로 자루를 놓으며 물러난 이안이, 단죄의 검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콰아아아-!

다시 한번 일점 폭발. 숯덩이처럼 변한 마법사가 비로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불길이 가라앉기도 전에 놈의 앞으로 걸어간 이안이, 달궈진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이 정도면 되살아 나는 게 오히려 고통일 거다."

콰직-!

이안이 그대로 마법사의 머리를 잘라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떨어진 마법사의 머리통을 발로 차서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아무리 뱀파이어의 흑마법이라도 더는 살려 내지 못하리라.

'주문쟁이랑 싸운 건 오랜만인데.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콰앙-!

이어진 상념은, 뒤에서 터져 나온 굉음에 깨끗이 밀려 사라졌다.

"...!"

뒤를 돌아본 이안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목덜미에 전투 도끼가 박힌 채로도 검을 내리친 흑기사의 뒷모습. 검 끝에서부터 마구잡이로 솟구친 수많은 그림자 가시들. 거기 휩쓸려 산산 조각난 마차와 고기 토막이 된 말들. 그리고 그 옆, 갑주가 다 찢겨 나간 채 피를 흩뿌리며 튕겨 나간 샬롯과, 그녀를 구하려다 함께 휩쓸린 게 분명한 테사이아까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푸스스….

말과 마차를 토막 낸 그림자 가시가 사그라들었다.

-알드리치…! 내 불쌍한 여덟 번째 사랑….

다행히도, 흑기사는 더 이상 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목덜미에 박힌 도끼를 뽑아 던져 버린 흑기사가 몸을 돌렸다.

-복수해 줘, 스텔란…!

프레야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그림자에 완전히 뒤덮인 흑기사, 스텔란이 검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의지만이 남은 듯, 안면 가리개 너머의 불그스름한 안광이 타올랐다.

'하나를 처치하면 2페이즈인 패턴이군….'

이안은 단죄의 검을 고쳐 쥐었다.

동시에 스텔란이 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넘실대기 시작한 찰나.

쉬학-! 쉬학-!

질주를 멈추지 않은 채, 스텔란이 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검날에서 토해져 나온 새카만 궤적이 초승달처럼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원거리 공격까지 한다고…?'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몸을 날려 궤적을 피했다. 바닥을 구른 그가 곧바로 기사를 향해 마주 달렸다.

저런 식이라면 시전 시간이 긴 마법은 어차피 사용할 수 없었다.

쉬학-!

그림자 칼날이 다시 한번 날아들었다.

화르륵-!

몸을 비틀어 피한 이안의 주위로 불덩이들이 피어올랐다.

"훗…!"

기사, 스텔란이 싸늘하게 비웃으며 그 한복판으로 달려들었다.

이어진 폭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한 그는, 이안이 내리치는 검을 향해 마주 검을 올려 쳤다.

둘의 체구와 힘의 차이는 명확했고, 흑마법의 도움까지 받고 있으니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파스스슷-

이안의 검에 새파란 신성력이 치솟기 전까지는.

"...!"

콰아아아- 콰지직-!

폭발하듯 터져 나온 푸른 궤적이 그대로 스텔란의 검을 부러뜨리고, 그 너머의 두꺼운 갑주마저 가르며 훑고 지나갔다.

검의 달인이었던 흡혈 일족의 심판자조차 막지 못했던 일격을, 뱀파이어의 하수인에 불과한 기사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아아…."

낮은 탄식과 함께, 목덜미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잘려 나간 스텔란의 몸이 비스듬하게 허물어졌다. 피와 내장이 치솟지는 않았다. 그저 푸른 불꽃 같은 티르 엔의 신성력이 살을 불태울 뿐.

-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건, 그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프레야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신성력 때문인지, 또 다른 하수인의 죽음이 비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콰직-!

발작하듯 꿈틀대는 그림자 위로, 아직 신성력의 잔재가 남은 검날이 자비 없이 박혀 들었다.

찢어지는 비명. 푸스스, 복부를 꿰뚫린 프레야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너나 네 하수인들이나 왜 이렇게 안일한 건지 모르겠군. 난 이미 너희 일족의 심판자를 하나 죽였는데."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숨겨진 한 수도 없을 만큼?"

"무슨… 방심 따윈 하지도…!"

콰아아아아-!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찢어지는 비명. 자루를 놓아 버린 이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그냥, 너희가 좀 내 기대 이하인 거군."

"...!"

프레야는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말하려고 했다. 검을 쓰는 적색 마법사도 괴상한데, 거기다 청색 마법까지 다루리란 걸 누가 예상할 수 있겠냐고. 마법사의 검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리란 걸 세상 그 누가 알 수 있겠냐고.

애초에, 그녀의 현혹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내는 건 신실한 사제나 성기사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게 가능한 건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수준의 마족뿐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런 사실을 이안에게 알려 줄 수 없었다.

콰직!

물결 같은 무늬가 맺힌 단검 날이, 심장을 꿰뚫어 버렸으니까.

#105화

단검 날을 타고 불꽃이 번졌다.

퍼억-!

심장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화염구가 생성과 동시에 폭발했다.

눈코입으로 불빛이 번쩍인 프레야가, 그대로 재가 되어 폭발과 함께 흩어졌다.

남은 건 붉게 달아오른 단검 날과, 땅에 박힌 단죄의 검 뿐.

푸스스….

단죄의 검에 맺힌 신성력이 모두 흩어졌다.

이안은 검 자루를 쥔 채, 물끄러미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그랬듯, 또 뭔가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으로 퀘스트의 완료를 알리는 확인창만이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전부 그런 주문을 걸고 다니는 건 아닌 건가…?

생각하며, 비로소 검을 회수한 이안이 상태창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경험치가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저번의 아스콜드와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냥 상성이 좋았던 건가…. 하긴. 정말 강한 놈 하나 보단, 적당히 강한 놈 여럿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하긴 하지.'

몸을 돌린 이안은, 이내 걸음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박살난 마차와 토막난 고깃덩어리로 변한 말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제 남은 길은 꼼짝없이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탄식을 삼키며, 이안은 길 가장자리에 기대 앉은 샬롯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테사이아는 아직 의식이 없어 보였다.

샬롯은 사슬 갑옷이 다 찢겨져 나가고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도, 그런 테사이아의 입술에 자신의 피를 찍어 바르는 중이었다.

"괜찮나?"

이안의 물음에, 샬롯이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면목이 없군. 갑자기 그런 괴상한 짓거리를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 마차까지 잃다니…."

"내가 마법사를 먼저 죽여서 그렇게 된 거다. 애초에 처음부터 뱀파이어만 노렸어야 했는데."

마차의 잔재를 뒤지며,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졌다. 마지막 남은 술병이 완전히 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껴 먹던 건데, 시발.

그의 말이 위로라 여긴 듯, 샬롯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세상은 넓고, 강한 것들은 정말 많군. 난 마법 무구 없이는, 별 것 아닌 전사였을지도 몰라."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

그나마 멀쩡한 짐가방 하나를 들고 돌아온 이안이, 그녀의 앞에 가방을 내려 놓으며 코웃음 쳤다.

"증명은 이미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헛소리 마라."

"...."

샬롯은 그럴 리 없다는 듯 미간만 꿈틀댔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이안은 게임에서도 용병을 종종 고용해 데리고 다녔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던전 두 개를 넘기지 못했다. 별 것 아닌 마물에게 맞아 죽거나, 보스에게 피떡이 되거나, 괴상한 상태 이상에 걸려 자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이름 있는 조연 캐릭터들 정도였다. 그나마도 뻑하면 죽거나, 미치거나, 타락하기 일쑤였으니, 지금 샬롯이면 충분히 제 몫을 다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가 이 정도로 맘 편하게 보스 전의 일부를 맡기는 건, 메브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을 꺼내 아직 뜨거운 운철 단검의 날을 닦은 이안이, 갑옷이 통째로 찢겨나간 샬롯의 옆구리를 살폈다.

가죽이 푹 파여 분홍빛 속살이 보이고, 깨진 사슬 파편이 주위에 잔뜩 박혀있었다.

"내장까지 상하진 않았군. 참아라."

이안은 단검 끝으로 사슬 고리를 하나씩 꼼꼼하게 파냈다. 섬세한 손길. 움찔댈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던 샬롯은, 이윽고 그가 허리에 붕대를 감겨주기 시작하자 머쓱하게 내뱉었다.

"그, 나도 할 줄 안다만…."

"그걸 몰라서 해 주는 게 아냐."

나한텐 응급 처치 스킬이 있거든.

지금까지의 경험상, 스킬 효과는 분명히 적용되고 있었다. 상처가 곪거나 덧나지 않는다는 부분에선 특히.

단단하게 붕대질을 끝낸 이안이, 이번에는 그녀의 팔뚝을 살폈다.

"당분간 왼팔은 조심히…."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테사를 지키고 있어라."

내뱉은 그가 일어섰다.

샬롯이 영문도 모른 채 상체를 뻣뻣하게 세우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마차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말들의 잔해로.

철퍽, 찌걱-

살덩이와 내장들이 꿈틀대며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단죄의 검을 뽑아 찍어버리지 않은 건, 저 역겨운 짓을 벌이는 오염된 마력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다. 꿈틀대며 모여든 내장과 살덩이가, 곧 하나로 뭉쳤다. 부풀어 오르거나 변이되지는 않았다.

그저 농구공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타원형으로 단단하게 뭉칠 뿐이었다. 내장과 살점의 형태가, 굉장히 징그럽게 빚어낸 얼굴처럼 보였다.

내장들이 달싹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아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중간에 으깨 버리셨으면, 같은 주문을 다시 반복해야 했거든요. 이건, 보기보다 어려운 주문이랍니다."

눅진한 기포가 터지는 것 같기도, 질척한 내장을 비비는 것 같기도 한 아주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뭐야, 시발. 진짜 머리였어?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궁금했거든. 이런 짓거릴 하는 게 누구인지. 이제 알겠군. 흡혈 여제."

"어머. 바로 알아봐 주시고, 그렇게까지 불러주시니 영광이군요. 저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이안 호프. 출신 불명의 용병이자, 아겔 란의 구원자. 그리고 벨 론데의 학살자."

…학살자? 나도 모르는 악명도 있었군. 이안이 콧방귀를 뀌는 사이, 여제가 덧붙였다.

"일족의 심판자를 둘이나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됐지만요. 사실 아스콜드 경이 당한 건 방심해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분은… 자신만의 미학 같은 걸 추구하는 분이었으니까."

"이번에 보낸 녀석들이 더 얼뜨기 같던데."

"글쎄요. 프레야와 그녀의 애인들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처음 듣는군요. 어쨌든… 프레야가 죽었다는 건, 당신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겠고요."

"그래서, 복수라도 하러 오셨나?"

"그럴리가요. 그럼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겠죠. 저는 그저…."

내장과 살점으로 이루어진 얼굴이 미소짓는 걸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당신과 직접 대화를 나눠 보고 싶을 뿐이에요."

"…흠."

이안은 검 자루에 한 손을 얹은 채,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머리는 그저 통신 수단 정도밖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그냥 반으로 썰어버리기만 해도 본래의 살덩이로 돌아가리라.

"난 당신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어요, 이안 호프. 오히려 그 반대죠. 과거가 베일에 싸인 마검사 용병. 멋지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엮였다는 걸 알았을 때 많이 애석했답니다."

"애석함을 담아서 심판자를 하나 더 보내셨나?"

"들으셨을 텐데요. 당신을 설득하라고 보낸 거예요. 무력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쓰라고 했죠."

"만나자마자 냅다 마법부터 갈기던데."

"어머. 그랬다니 대신 사과하죠. 일족의 심판자들은, 쉬운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어쨌든, 저는 지금도 당신이 싫지 않아요, 이안. 서로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이유도 없고요."

은근히 이름으로 부르네. 하긴, 상대는 최소 수백 년은 살았을 뱀파이어였다. 어떤 의미론 그에게 존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리라. 콧방귀를 뀐 이안이 내뱉었다.

"나도 너한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이유는, 이미 충분히 있는 것 같군."

"저 아이 때문인가요? 그 아이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요, 이안. 오히려 그 반대죠. 그저 일개 실험체에 불과해요. 대가로 무엇을 약속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나도 해 줄 수 있어요."

얼굴이 질척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가 약속한 보상보다 더 많은 걸 줄 수도 있고요. 당신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죠. 우리의 일원이 되지 않더라도요.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후원하는 분들도, 적지는 않으니까."

그래, 프레야가 한 것 보단 확실히 더 좋은 제안이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제가 속삭였다.

"잘 생각해 봐요, 이안. 당신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예요. 설사 정말 우리 모두를 죽인다 해도, 당신에게 좋은 일은 없을 거고요."

"너희 뒤를 봐 주는 존재가 나를 노릴 테니까?"

이안이 툭 내뱉은 말에, 머리통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정체 모를 내장이 겹쳐져 만들어진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요?"

"추측한 거지. 너희가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런 뒷배 없이 제국 바로 옆의 나라에 붙어살 수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네 반응을 보니, 제대로 맞췄나 보군."

자존심이 상한 듯 잠시 꿈틀댄 얼굴이 이내 내뱉었다.

"그래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눈에 띄었어요. 여기서 우리까지 건드려서 좋을 건 없을 겁니다."

"글쎄… 그건 네가 걱정해 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내뱉은 이안이 피식댔다.

사실 그 뒷배가 뭔지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원탁 의회.

타락한 귀족과 성직자, 마법사, 그리고 마족들에게서 때때로 언급되던 이름. 하지만 놈들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어떤 새끼들이 모여 있는지 까진 그도 알지 못했다.

놈들과 마주치려면 특정한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그저 스토리를 다 진행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4챕터 에서야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었을지도.

"말씀하시는 걸 보니, 끝내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단 거군요."

이윽고 여제가 내뱉었다. 그 선홍색 머리통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이안이 말했다.

"어차피 넌 내가 원하는 걸 줄 수도 없어."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

이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너희들을 죽일 때마다 얻게 될 경험치와 퀘스트 보상."

"…그게 어느 나라의 언어죠? 전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너희 전부의 죽음을 원한다는 거다. 테사는 거기 도움이 되지만, 너희는 아니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차라리 우리가 마족이라 죽인다는 거면 모를까. 하지만 알았어요, 이안."

머리통이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이안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우릴 찾아올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이안이 발을 들었다.

"그래. 나도 기대하겠다."

콰직!

이안이 그대로 얼굴 한복판을 짓밟았다. 머리를 구성하던 내장과 살점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구린내와 피비린내가 번졌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방금 나눈 대화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마족들도 나를 알고, 그 뒷배도 이미 나를 알고 있다니.

말하는 걸 봐선, 심판자를 죽이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뒷세계의 명성이라도 생긴 건가….'

어쨌든,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직접 얼굴을 들이밀고 구구절절 설득하려 들지 않았을 테니까.

이안은 눈만 끔뻑이고 있는 샬롯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샬롯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건 대체…."

"뱀파이어 여제 같아. 진혈의 주인."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깨어나 있었냐?"

"응, 조금 전에."

테사이아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다시 샬롯의 앞에 주저앉는 이안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덧붙였다.

"감동이네."

"...?"

가방에서 새 붕대를 꺼내던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사이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날 팔아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안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난 또 뭐라고.

"널 위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한 거지. 쓸데없는 착각 하지 마라."

"하지만 내가 볼 때, 뱀파이어 전체를 적으로 돌려서 이안이 얻을 게 없는 걸."

없긴 왜 없어. 오를 경험치가 몇이고 클리어할 퀘스트가 몇 개인데.

콧방귀를 뀐 이안이, 붕대를 들며 내뱉었다.

"헛소리 말고 땔감이나 모아 와라. 오늘은 여기서 잘 거니까."

"그래!"

튕겨 오르듯 일어선 테사이아가, 문득 샬롯과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마워. 둘 다."

"...?!"

샬롯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사이아는 이미, 부서진 마차의 잔해를 주우러 달려가는 중이었다.

#106화

글루미르, 미로 저택.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니그리안테 백작 부인이 화들짝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맺혀 있던 자주색 광망이 사그라들었다.

"대체…."

놀란 얼굴로 읊조린 그녀가 앞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양손을 얹고 있던 건,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몇 가지 짐승의 뼈를 이어 붙인 듯한 끔찍한 형태의 작은 두개골이었다.

법구였다. 아는 자들은 암흑 성물이나 심연의 우상이라 부르는.

그녀가 북부까지 의식의 파편을 보내 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이 법구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

작은 눈구멍 속의 심연을 응시하는 검붉은 눈동자에, 비로소 잠시 밀려났던 피로와 상념이 몰아쳤다.

"…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셨나 보군요."

어둠 너머에서 나지막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륵, 창가의 커튼이 조금 벌어지고, 그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내리쬈다.

핏기없는 노인의 얼굴이 설핏 드러났다. 대외적으론 그녀의 남편이나, 실상은 그녀의 가장 오래되고 충실한 시종인 백작이었다.

"벌써 심판자를 둘이나 잃으셨습니다, 이 이상의 피해는…."

백작의 입이 닫혔다. 백작 부인이 피로한 얼굴로 검지를 입술 위에 얹은 까닭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속삭였다.

"…차가운 분노와 그 아래 억눌린 광기가 느껴졌어요. 아주 찰나였지만. 날 압도할 정도로 엄청났죠."

"그게 무슨…."

"주문이 깨지면서 의식의 파편이 잠시 흩어졌어요. 다시 심연의 틈으로 빨려들어 돌아오기 전에. 그때 느껴지더군요. 아마 공허의 마력이 어떤 상호 작용을 일으킨 거겠죠."

"...."

그제야 그녀가 놀란 것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음을 깨달은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어떤 존재였습니까?"

"글쎄요. 알고 싶지 않네요. 다만."

백작 부인의 입가에 흐릿한 호선이 스쳤다.

"머잖아 북부에 큰 혼란이 찾아오리란 건 확실히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시선이 노인에게로 향했다.

"자매를 보내겠어요. 그 아이들이 가장 신중하고 교활하니까. 은밀하게 지켜보면서, 실험체를 회수할 기회를 노리라고 하세요."

기다리겠다는 백작 부인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이안이 자신들을 찾아올 때까지 실험체를 마냥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사제의 다음 방문까지 남은 시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본래는 이안이 제안을 거절하면 가장 강한 심판자들을 여럿 보낼 계획이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이다.

"혼란의 폭풍이 휘몰아칠 땐, 누구라도 빈틈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그리 전하겠나이다."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직 백작 부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루 사드에도 혼란이 필요할 것 같군요."

"...!"

"이 땅을 피와 죽음으로 충분히 적셔 둬야겠어요. 필요해질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내 도시가 비탄에 잠기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백작 부인은 뒷말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안 호프에게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그저 검을 잘 다루는 마법사라는 특이한 이력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특별한 무언가가.

그렇지 않다면 일족의 심판자를 둘이나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개인에 불과한 용병이 일족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백작이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장내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빛나는 건 오직 검붉은 눈동자뿐.

이윽고, 씁쓸함과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번져 나왔다.

"…그 역겨운 작자의 일을 돕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일행은 관도를 따라 나아갔다.

황량한 평야와 잿빛 숲, 계곡. 그 끝에 또 하나의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금이 간 낡은 성벽. 그 너머의 산 능선에 솟은 요새 역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드문 일이군. 여긴 보통 방위군이나 이주민들이 오가는 관문인데. 거기다 증명서부터 면면까지 특이하지 않은 게 없으시군. 용병단이시오?"

중년의 관문 대장이 이안이 내민 증명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눈빛에 호기심과 흥미를 감추지 못한 채였다.

근무가 어지간히 지루했나.

"그렇소."

"장벽을 넘어갔다 돌아온 용병단이라… 보통 분들이 아니시군. 하긴, 딱 봐도 그래 보이지만. 그래서, 트라벨가로 가시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오?"

"남동쪽 관도를 타고 사흘 정도만 더 내려가면 도착할 거요. 당신들을 따라 복귀하고 싶군…."

관문 대장이 고개를 주억대며 읊조렸다.

확인이나 빨리해 줄 것이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트라벨가 소속이신가 보군."

"그렇소. 한 달씩 돌아가며 근무하지. 보다시피 상주할 이유가 없는 곳이라서 말이오. 말이 벨리움 요새지, 여긴 그냥 관문이나 초소라고 부르는 게 맞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이 관문 이름이 벨리움이오?"

"그렇소. 이 동네 이름이기도 하고. 왜, 사연이라도 있으시오?"

"…아니오, 아무것도."

심드렁하게 대꾸한 것과는 달리, 이안은 차근히 좌우로 이어진 성벽을 눈에 담았다.

'어쩐지 뭔가 낯이 익더라니.'

이 낡은 관문은, 게임에선 주요 퀘스트의 배경이 되는 장소였다.

검은 벽을 기준으로 하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설원 지대를 중심으로 하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장벽을 돌파한 언데드 군단이 남하하던 시점.

루카스를 포함한 소수의 방위군은, 트라벨가로 들어서는 길목인 이곳에서 결사의 항전을 펼쳤었다.

루카스가 가장 신뢰하는 용병이었던 이안도 물론 이곳에 있었다.

카링기온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관문을 지키는 게 목표였다.

'진짜 빡셌는데….'

보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반 마물과 정예 마물이 섞여 밀려오는 것뿐인데도 몇 번이나 게임 오버 화면을 봤었다.

물론 지금의 그는 그때보다 훨씬 강하고, 이번엔 장벽이 뚫릴 일도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여길 통과하면 이제 자치령 중심부라 할 수 있소. 트라벨가에서 괜찮은 의뢰를 건지시길 바라겠소."

관문 대장이 양피지를 건넸다.

어쩌면 이자도 그땐 관문을 지키려 싸웠을지도.

내심 피식댄 이안이 덧붙였다.

"트라벨가 인근에 야인 정착지가 있다고 들었소만."

"가는 길목에 있소. 하루쯤 더 가면 숲으로 꺾이는 갈림길이 나올 것이오. 그 안에 있지."

관문 대장이 냉큼 대답했다. 턱을 긁적인 그가 덧붙였다.

"고마운 자들이지. 그들이 이주하고 나서 인근의 마물이 거의 사라졌으니까. 모피 가격도 싸졌고. 어쨌건 외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접근하지 마시오."

"알아 두겠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친절한 사람이네. 보통 우릴 보면 경계부터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멀어지는 관문을 돌아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내뱉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만큼 지루했던 거겠지."

게다가 여기까지 온 이들은 사실, 굳이 신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어쨌든 잘됐네. 이제 사흘만 더 걸으면 된다니. 안 그래?"

이안은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게임에선 불과 몇 분 거리였지만.

이런 변화는 이제 일상적인 부분이었다.

기대된다, 하고 중얼대며 헤실대던 테사이아의 시선이, 문득 옆의 샬롯 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야옹이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며칠째."

"…신경 쓰지 마라."

샬롯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몸 상태가 안 좋나? 열이 난다거나. 옆구리가 욱신거린다든가."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거의 다 아물었다. 솔직히 당장 싸워도 괜찮을 정도야."

"그럼 뭔데? 뭘 해도 뚱하고, 많이 먹지도 않고."

테사이아가 덧붙이자, 샬롯이 슬쩍 인상을 구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넌 왜 실실대는 거냐? 정신 나간 것처럼."

"내가 그랬나…? 하긴, 뭐.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테사이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망할 놈의 심판자도 또 하나 죽었고. 앞으로도 너희들이 날 버릴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이보다 좋을 수 없지."

"…그래. 거참 잘됐군."

샬롯이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야, 재미없게. 우리 야옹이 고민이 뭘까. 응?"

"친한 척하지 마라. 귀쟁아."

"운명 공동체끼리 이런 얘기도 못 해?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탄식을 삼키듯 잠시 눈을 감았던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전사로서의 고민이 있을 뿐이다."

"드디어 날 죽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거야?"

"...."

"어머. 정말인가 보네."

"…날붙이만으로 죽일 수 없는 적들을 상대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너도 예외는 아니지."

멍하니 눈을 끔뻑인 테사이아의 입가에,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긴 넌 별거 아닌 마법에도 픽픽 쓰러지고, 혼자선 망령 한 마리도 제대로 못 때려잡긴 하지."

"...."

샬롯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어쨌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대신 넌 다른 걸 잘 때려잡잖아.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렇게 타협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거다, 귀쟁아."

"그래서, 답은 찾았어?"

샬롯이 멈칫했다.

"…아직은."

"그러면서 말은.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 더 못생기게 하고 있지 말고, 네가 못 하는 건 나한테 맡겨. 어차피 우린 한 몸이잖아?"

"...."

그게 싫은 거라는 듯, 샬롯이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가 놀리듯 싱글댔다.

…저것들도 많이 친해졌네.

이안은 둘을 슬쩍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만하면 그의 조치는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었다. 강제적이라도 서로의 목숨을 몇 차례 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료 의식이 싹튼 것이다.

이제는 그가 곁에 없다 해도 서로의 목숨을 노릴 일은 없으리라. 그걸 넘어, 당연하게 서로를 지킬 터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트라벨가에 도착하면."

이안이 입을 열었다. 투덕대던 둘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마법 무구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지. 네 갑옷의 주문 회로를 되살릴 방법은 없는지도."

샬롯의 눈이 설핏 커졌다. 사실 그녀가 고민하는 부분의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법을 택할 수 없는 이유도 명확했다.

"구할 수 있다 해도, 그걸 살 돈이 없다, 이안."

"나한테 있어."

"...!"

"교회에서 왕관 대금을 곧바로 치른다면 더 넉넉해질 테고."

"난 이미 도끼도 받았는데, 네가 또 돈을 쓰게 할 수는…."

눈을 치켜뜬 샬롯이 더듬대는 사이, 테사이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안, 그럼 나는? 난 뭐 없어?"

"너한테는…."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대답했다.

"신발을 사 줘야겠군. 새 옷이랑."

"아니… 왜 난 자꾸 그런 것만 사 주는 거냐고…."

왜겠냐?

망토 아래론 넝마를 걸친 거나 다름없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은, 이윽고 말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흐릿한 먹구름이 일행을 뒤따르듯 번지고 있었다.

***

관문 대장의 설명은 정확했다.

이안은 숲 한복판, 듬성듬성한 목책을 두른 마을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단 큰 것 같은데….'

이안은 인근에 트라벨가 같은 대도시를 두고도, 굳이 따로 마을을 만들어 생활하는 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통은 문명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지켜 낼 수 있건만.

물론 이것 역시, 그가 현대인이기에 가지는 생각일 터였다.

저들에겐 이게 생존을 위해 최대한 타협한 결과이리라.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다, 외지인. 여기서부턴 너희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땅이다."

마을 입구. 일행을 빤히 응시하던 두 전사 중 하나가 내뱉었다. 둘 다 창을 언제든 내뻗을 수 있게 콱 움켜쥔 채였다.

멈춰선 이안이 경고한 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전하러 온 거다. 머잖아 다른 야인들이 이주해 올 테니까."

"…어느 마을에서?"

"검은 숲 언덕 마을."

"검은 숲 언덕…? 기다려라. 말을 전하겠다."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은 전사가, 이내 휙 몸을 돌렸다.

이안이 남은 하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전할 말은 다 했다만."

"네가 정말 검은 숲 언덕 마을에서 온 거라면,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뭔 책임.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말을 전하겠다 한 건 그였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곧 전사들 여럿이 다가왔다. 한복판에 우르드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늙은이를 앞세운 채였다.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 이주해 온다는 게 사실이오?"

멈춰선 노인이 물었다. 그 역시 얼굴 곳곳에 깊은 흉터가 있었다.

"그렇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상하군. 그들이 성상을 버리고 이주할 리가 없는데. 외지인에게 소식을 전달하게 할 리도 없고."

더럽게 따지는 것도 많네.

이안이 할 말을 고르는 찰나, 뒤에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이안은 외지인이 아니거든. 대전사니까."

"대전사…?"

이안을 돌아본 노인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우리뿐 아니라 검은 숲 언덕 마을까지 모욕하는군. 북부인 같지도 않은 외지인이 대전사라니…."

"거짓말이 아니다, 늙은이."

이번엔 샬롯이었다.

낮게 으르렁댄 그녀가, 이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너희들의 신이 이안을 선택했지."

이안이 테사이아와 샬롯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사실인데 뭐가 문제냐는 표정들.

"...."

내심 한숨을 삼킨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노인은 물론, 전사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107화

"카르하께서 인정한 대전사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군. 마족 주제에 북부의 전사들을 모욕하다니…."

전사들이 씹어뱉는 크고 작은 목소리가 번졌다.

'…그냥 지나치긴 글렀군.'

말만 전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카르하가 멋대로 날 선택한 건 사실이오. 당신들에게 대전사로 인정받을 생각은 없지만."

"저 미친 놈이 끝까지…?"

"혀부터 잘라 내야겠군. 그건 내가 하겠다."

전사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분위기가 흉흉해진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지금 이안한테 뭐라고 한 거야?"

"죽여 달라고 한 거다, 귀쟁아."

"그런 거 맞지?"

샬롯과 테사이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노골적인 살의가 감도는 가운데, 이안이 팔을 살짝 들어 둘을 저지했다.

여기서 싸우게 된다면 전사들은 물론이고 정착민들을 전부 다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드센 북부 야인들이 전사들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런 꼴은 최후의 최후에 봐도 충분했다.

다행히 노인 역시 이안과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전사들을 돌아보며 잠시 진정시킨 그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분노를 꾹 억누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그 말을 증명하는 게 좋을 것이오. 카르하께서 직접 축복을 내린 대전사라면, 그 증거가 새겨졌을 텐데."

"…하."

졸라 귀찮게 하네, 진짜.

짧게 한숨 쉰 이안은, 이내 왼쪽 견갑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정착지를 피바다로 만드는 것보단, 어쨌건 이게 더 나은 선택지였다.

팔목 보호대와 사슬 갑옷의 한쪽 고리까지 풀어헤친 그는, 안에 받쳐 입은 두툼한 누비옷의 소매에서 왼팔을 빼냈다.

이어 옷 밑단을 비스듬하게 어깨 위로 걷어 올리자, 왼쪽 팔과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안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어깨를 훑었다.

어깨 뒷부분에서 시작돼 팔꿈치 위 절반쯤까지 이어진 문신. 타오르는 불길이나 몰아치는 폭풍을 간결하게 형상화한 듯한 형태의 문양이었다.

'남의 몸에 멋대로 낙서하고 지랄이야. 개 같은 백정 새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생각이 뒤를 이었다.

북부의 대전사 퀘스트가 완료된 순간 팔뚝을 타고 열기가 느껴진 건, 이 문양이 새겨지고 있어서였다.

이런 게 생긴 이유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축복을 내리려면 신성을 받아들일 매개가 필요하니, 영혼 대신 육체에 남긴 것이리라.

"됐소?"

이안이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노인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노인은 충격과 불신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이건 분명 전투 문신인데…? 혹시 검은 숲 언덕의 전사들이… 그럴 리가… 그럼 이건…."

주문을 외우듯 중얼대는 노인을 잠시 바라본 이안은, 이내 벗었던 옷과 갑옷을 다시 착용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알아본 것 같으니, 오래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순간 손을 내밀었던 노인이, 이안의 싸늘한 시선에 다시 팔을 내렸다. 이안의 팔뚝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혼란과 갈등이 묻어나는 사이.

"이보쇼. 크바사르 영감, 왜 말이 없어?"

"설마 저 개소릴 믿으려는 건 아니겠지? 마족을 데리고 다니는 자가 북부의 대전사일 리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전사들이 으르렁댔다. 묵묵히 다시 장비를 착용하는 이안을 노려보던 그들 사이로, 누군가 앞서 나왔다.

"비키시오, 영감. 저 이방인의 말을 판별할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

기다란 창을 들고 적당히 곱슬대는 장발을 풀어헤친 거한이었다. 견갑을 다시 어깨에 맞게 고정하던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

전사가 서늘한 눈으로 내뱉었다.

"결투다. 이방인. 네 놈이 정말 카르하께서 인정한 대전사라면, 결투를 거절할 리도 패배할 리도 없겠지."

노인, 크바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이안의 눈매도 순간 가늘어졌다. 저 멍청한 전사의 말에 놀라서가 아니라,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져서였다.

대전사의 권위. 또 다른 야만 전사 전용 퀘스트였다.

보상이 또 힘 능력치 하나라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스쳤다.

그래, 이젠 놀랍지도 않군.

크바사르가 전사들 쪽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다들 기다리게. 어쩌면 이 자는 정말-"

"입 닫아, 영감."

"...!"

말을 자른 건 이안이었다.

전사들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받아주지. 번호표 뽑아서 덤벼라."

"번호표…?"

"순서 정해서 덤비라고. 아니면 전부 한꺼번에 덤비던가."

장발 전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대답만큼은 전사답군, 외지인. 하지만 신성한 결투를 그런 식으로 더럽힐 순 없지. 기다려라."

신성하긴, 지랄.

이안이 코웃음을 치는 사이, 전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내가 처음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단번에 끝나리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잊지 말고 혀를 자르길 바란다, 이안. 아니면 내게 맡겨다오. 전부 벙어리로 만들어 주겠다."

"그리고 그건 전부 나 줘. 씹어 먹어 버리게."

샬롯과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이안이 싸늘한 눈으로 둘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둘 다 입 닫아. 내가 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마라."

이 녀석들의 입방정 덕분에 퀘스트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일을 더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우르드와 아스켈이 살게 될 장소였다. 괜히 전사를 여럿 죽여 원한을 남기고 가면, 뒷맛이 구려질 터였다.

"후...."

이안은 몸을 이리저리 풀며, 떠들썩하게 순서를 정하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검을 뽑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무기를 사용한다면 죽이지 않고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빡셀 것 같으면, 몰래 바람 칼날 같은 걸 쓰지 뭐.'

생각하며 양손을 깍지 껴 장갑을 손에 꽉 맞게 조이던 이안이, 문득 크바사르를 바라보았다.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초인이시여…."

그가 탄식하듯 읊조렸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신성력이 아른대며 번지고 있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발휘된 적 없던 투쟁의 축복이, 하필 지금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후손들 앞에서 체면 구기지 말란 건가."

어쩌면 게임에선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벤트인지도.

진위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법 없이도 전부 두들겨 팰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입을 달싹이던 크바사르가 전사들 쪽을 돌아보았다.

"다들 멈추게, 이 분은- 읍?!"

"입 닫으라고 했을 텐데?"

크바사르의 입을 손으로 움켜 쥔 이안이 서늘하게 내뱉었다.

누구 마음대로 멈춰?

퀘스트를 받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받은 이상, 결투를 멈추는 건 퀘스트가 완료된 다음이었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 영감 옆으로 치워. 그리고 아무도 결투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라. 저지만 해. 죽이진 말고."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그대로 크바사르의 멱살을 쥐었다.

그녀가 혀를 날름대고는 속삭였다.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늙은이. 전사들의 결투에 끼어들지 마라."

"쉿. 쉿."

검지를 입술 앞에 가져다 댄 테사이아가, 샬롯에게 질질 끌려가는 크바사르의 뒤를 따라갔다.

꾹 주먹을 움켜쥔 이안이 조용해진 전사들을 마주 보았다.

노인과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 줄 생각 따윈 없었다.

맨 앞의 전사를 향해 턱을 까딱인 이안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순서대로 와라. 시간 끌지 말고."

"...."

굳은 낯이 된 전사 하나가 손에 쥔 창을 휙 던져 버리고는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회색 계곡 출신의 볼베르다."

"이안."

고개를 끄덕인 볼베르가 주먹을 치켜든 찰나, 이안이 굽혔던 무릎을 박찼다.

쒸에엑-!

"...?!"

볼베르가 눈을 치켜 떴다.

이안이 한순간에 커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그게 단숨에 코앞까지 쇄도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쯤엔, 이미 턱에 이안의 주먹이 닿고 있었다.

쩌억-!

***

콰당탕탕-

"끄… 억…."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 전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그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샬롯이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와 쓰러진 전사를 질질 끌고 갔다.

"후…."

숨을 내쉰 이안이 장갑에 묻은 피를 털며 팔을 내렸다.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북부 야만인들과 엮인 후로, 벌써 힘 수치가 두 개나 더 올랐다.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이제 정말 힘은 그만 올라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끄으...."

그 증거들이 목책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안은 기절하거나 숨만 헐떡이는 전사들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에게 퀘스트를 안겨줬던 장발의 전사는 앞니가 몇 개 사라진 채 팅팅 부은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확실히, 발동 되기만 하면 엄청 좋은 축복이긴 한데.'

이안은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셨다.

지금 그의 전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파괴적인 위력을 가진 무기나 다름없었다.

투쟁의 축복을 받은 그의 힘과 민첩성은, 가장 용맹한 야만 전사보다도 한참은 뛰어났다.

저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는 굳이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대부분 이안의 주먹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했고, 전투 기술이 뛰어나거나 맷집이 강한 자들조차 고작 몇 번을 버티는 게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야만 전사를 했어야 됐는데. 시발….'

새삼스러운 탄식을 삼키며, 이안은 마을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몰려나온 주민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처음에는 적개심과 분노를 불태우던 그들은, 이제 더는 그를 향해 고함이나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경외의 눈빛과 크고 작은 탄식, 감탄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장벽 너머의 여러 마을에서 모인 자들이었다.

이안과 싸운 전사 중에는 각 마을의 대전사도 섞여 있었을 터. 붉은 신성력을 흩뿌리며 그들을 죄다 두들겨 패는 이안의 모습에서 신적인 전사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리라.

"더 덤빌 사람?"

이안이 내뱉었다. 물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 나온 몇몇 전사들이 그의 시선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야. 피식한 이안이 테사이아와 나란히 선 크바사르를 돌아보았다.

"말했듯, 난 그저 소식을 전하러 왔을 뿐이야. 이제 내 말을 믿나?"

"...."

크바사르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향해 턱짓한 이안이 정착지의 주민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오늘 있었던 일로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주민들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일은 없으리라 믿겠다."

이만하면 깔끔한 끝맺음이지.

생각하며,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아직 신성력이 아른대는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왜 축복이 안 사라지지.

"아니, 이안. 그냥 이대로 간다고?"

엉겁결에 뒤따라온 테사이아가 이내 속삭였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 찰나.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목소리가 따라 붙었다.

크바사르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귀찮게 굴 것 같아서 그냥 가려던 건데.

혀를 찬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내 볼일은 끝났는데."

"무례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대전사여."

멈춰 서며 내뱉은 크바사르가 숨을 고르고는 덧붙였다.

"저희는 그저, 북부인이 아닌 대전사가 탄생했음을 믿기 어려웠을 뿐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피식한 이안이 내뱉었다.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군. 난 대전사 같은 거엔 관심도 없어. 말을 전하러 온 거고, 용무가 끝났으니 가는 거다. 너희랑 뭘 어쩔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그야말로 대전사다운 말씀이십니다."

크바사르가 웃음을 흘렸다. 이안의 태도가 명예나 권력 따위에 초연한 것으로 비춰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안은 북부 야인 전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따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에 뒤따를 귀찮은 책임과 의무를 짊어질 생각은 더더욱.

"이 노구가 드리려던 말씀은, 그저 하루만 마을에 묵어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이내 크바사르가 덧붙였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정말 그거면 되나?"

"저흰 모두 고향을 떠난 자들입니다. 새로이 탄생한 북부의 대전사께서 정착지를 들르지도 않고 떠나신다면, 카르하께 버림받았다 여기겠지요."

"...."

이래서 신성력이 안 사라진 건가.

생각할 찰나,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대전사의 발자취.

이안은 정착지를 둘러보라는, 현실이 된 지금은 아주 귀찮을 게 분명한 내용을 눈에 담으며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건너 뛸 수는 없었다.

보상이 무려 스킬 포인트였으니까.

'이게 마지막 연계 퀘스트인 건가.'

아직도 마을 입구에 모여 있는 정착지의 주민들을 눈에 담은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하룻밤이다. 대신, 그놈의 대전사 소리는 내 귀에 안 들리게 해."

#108화

다음 날 아침. 일행은 말 두 마리에 나눠 탄 채 정착지를 떠났다.

정착민들은 이안이 내미는 말 대금을 끝내 받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전사들은 그들을 따라가려 하기까지 했다. 전부 이안에게 두들겨 맞은 자들이었다. 이안은 그들을 말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주먹을 들어야 했다.

"진짜 용병단이 될 뻔했네."

깔깔대는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멀어지는 정착지를 돌아보았다.

겉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을이었다.

이주민들이 건설 중인 통나무집.

벌목만 끝낸 채로 방치된 공터와 목책도 없이 숲으로 곧장 이어지는 외곽 지역들까지.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주민들이 이주할 여력은 충분하단 뜻이었다.

'그거면 됐지, 뭐.'

이안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더는 연계 퀘스트가 있지도 않을 테니, 이제 다시 저 북부 야만인들과 엮일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왜 난 항상 야옹이랑 말을 같이 타야 하는 거야?"

테사이아가 불쑥 내뱉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 냄새를 계속 맡으면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겠냐?"

"자신 있어. 시험해 볼래? …아, 안 된단 얘기였구나. 알았어."

테사이아가 재빨리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이번엔 샬롯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 이 녀석을 그냥 걷게 하면 안 되겠느냐? 자꾸 갈기를 잡아당기는데."

"잡기 좋게 생긴 걸 어쩌라고. 이게 자세가 편하단 말야."

정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군.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친 이안이, 말 고삐를 고쳐 쥐었다.

***

꼬박 하루 반나절을 더 이동한 끝에, 마침내 트라벨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에 요새처럼 솟은 성과, 몇 겹으로 이어진 건조한 성벽.

장식이나 색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회색 도시의 전경은 구름 낀 하늘과 어우러져 칙칙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규모만큼은 자치령의 중심지답게 거대했다.

심지어 성벽 밖의 관도 주위로도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수많은 행인이 대로를 오갔다.

지금까지 본 북부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번화하고 번잡한 광경.

하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트라벨가가 황량하다면 자치령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뜻일 테니까.

게임에서 그랬듯이.

"...?"

성의 북쪽 관문으로 들어서던 이안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관문을 지키고 선 자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관문 대장 역시 이안을 알아본 듯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었다.

이윽고 멈춰 선 이안이 내뱉었다.

"자치령의 대도시는, 전부 댁이 관리하나?"

닝글로슬의 관문을 지키던 경비 대장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가 내뱉었다.

"여기선 북문만 관리하오. 언젠가 다시 볼 줄은 알았지만, 막상 만나게 되니 반갑군."

그가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도 눈인사를 건네는 사이, 말에서 내린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 있는 거요? 댁은 처자식도 없나?"

"없소. 잘된 일이지. 있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을 테니까. 어쨌든 내가 여기 있는 건… 굳이 말하자면…."

관문 대장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 덕분이라 할 수 있소."

"...?"

이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깨를 으쓱인 관문 대장이 말을 이었다.

"난 루카스 경을 따라 여기로 왔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아니면 카링기온으로 끌려갔을 테니까. 댁이랑 안면이 있는 사이라 함께 묻어온 거거든."

"그러니까, 날 아는 게 왜?"

"루카스 경이 댁한테 관심이 아주 많던데. 댁이 트라벨가로 오면 바로 알아보고 보고해 줄 사람을 필요로 했소. 마침 그게 나였지."

"하…."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이것도 나비 효과라고 봐야 하나.

이유야 어쨌건, 아는 얼굴을 마주친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게 짬이 좀 되는 방위군 소속의 병사라면 더더욱.

"덕분에 오자마자 북쪽 관문을 맡게 됐소. 그리고 이렇게 만나게 됐군. 난 사실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살아서 돌아오셨군. 그래서, 의뢰는 완수하셨소?"

관문 대장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셈이지."

"넌 상상도 못 할걸. 우리가 산맥에서 뭘 봤- 읍."

제 업적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던 테사이아의 입을 샬롯이 틀어막았다. 붉은 눈과 주황색 눈이 서로를 번쩍 노려보는 사이, 관문 대장이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 뭐,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히 됐소. 그보다… 애석하게 됐군. 하필 지휘관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오시다니."

"루카스 경이라면 이미 만났소."

양피지를 건네며 이안이 말했다.

증명서를 펴보지도 않은 채, 관문 대장이 눈을 끔뻑였다.

"이미 만나셨다고…?"

"장벽 관문에서. 나눌 얘기도 다 나눴지. 흐음… 이제 보니."

턱을 긁적인 이안이 덧붙였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댁한테 애석한 상황인 것 같은데."

"내가 애석할 일이 뭐가 있겠소?"

"루카스 경은 지금쯤 카링기온으로 가고 있을 테니까."

"엥…?"

"거기 눌러앉을 것 같던데. 아마 당신을 불러들일지도."

"하, 이런."

눈을 질끈 감은 관문 대장이 한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그 저주받은 동네로는 가고 싶지 않은데… 거긴 마법사들도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이안의 미소가 묘해졌다.

"마법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군."

"누가 좋아하겠소? 그 작자들이 카링기온에 있는 건, 그저 검은 벽이 가깝기 때문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남몰래 검은 벽을 연구하는 자들이 제정신일 리 없잖소."

혀를 찬 경비 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초에 저들의 소굴 위치조차 밝히지 않는 자들이오. 난 사실 마탑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의심스럽소. 탑이 그렇게 여러 개 있다면, 하나쯤은 위치가 알려져야 하지 않겠소?"

그건 땅속이나 호수 아래로 지하실을 엄청나게 지어 놓고, 거꾸로 지은 탑이라고 우겨서 그런 거고.

"하긴. 그 작자들이 제정신이 아닌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속내와 달리 태연하게 내뱉으며, 이안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샬롯과 테사이아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실소를 삼킨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빛의 신의 교회가 있다던데. 어디로 가야 하오?"

그제야 증명서를 대충 펼쳐 보던 관문 대장이 말했다.

"성벽을 하나 더 넘어가야 있소. 교단에도 용무가 있으시오? 이건 좀 궁금한데…."

"모르는 게 좋을 거요. 그럼, 용병이나 상인들이 많이 묵는 여관은?"

"두어 개 있소만. 남서쪽 골목을 돌아가다 보면 나오는 설산 두꺼비라는 여관만 가지 마시오. 거긴 주로 이 동네에 오래 산 용병들이 머무는 곳이라, 외부인이 오면 종종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럼 거기로 가야겠군."

"...?!"

관문 대장이 눈썹을 치켜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양피지를 받은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정보에 발 빠른 자들과 안면을 틀 생각이라서 말이오. 서로 주먹이 오가다 보면 금방 친해지겠지."

잠시 입을 뻐끔거린 관문 대장이, 이윽고 심각한 표정이 됐다.

주위를 살핀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주먹다짐 정도로 끝나면 상관없겠지만, 누굴 죽이진 마시오. 만약 그런다면, 들키지 마시고."

"걱정 마시오. 그럴 일 없으니까."

피식 웃으며 말한 이안이,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말을 이끌고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죽일 일이 없다는 거야, 아니면 들킬 일이 없다는 거야?"

여전히 특이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중얼댄 관문 대장이, 이윽고 다시 앞을 바라보며 한숨 쉬었다.

"카링기온이라…."

지금은 사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

말을 맡긴 이안은 곧바로 테사이아가 입을 새 옷부터 샀다.

"그래서, 또 싸우는 거야?"

신발이 어색한 듯 어기적대며 테사이아가 물었다. 이안이 골목으로 들어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필요하면. 일단은 그럴 필요 없는 방식부터 써 볼 거다."

"그럴 필요가 없는 방식…?"

샬롯이 그런 게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묻는 건가,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보통은 그걸 대화라고 부르지."

"…아. 그렇군."

"그 전에 식사부터 하고."

"나도 배고파."

테사이아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번들대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에 눈을 깜빡인 그녀가, 이내 주섬주섬 가죽 안대를 꺼내 뒤집어썼다.

슬쩍 그 앞으로 나서면서 샬롯이 내뱉었다.

"헛짓 말고 기다려라. 자기 전에 쥐라도 몇 마리 잡아다 줄 테니까."

"적어도 두 마리. 통통한 놈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안을 돌아본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말란 거지?

피식한 이안이 두툼한 여관의 문을 밀었다. 위에 두꺼비 그림이 그려진 작은 나무 간판이 흔들렸다.

지린내와 구린내가 뒤섞인 퀴퀴한 공기와 뜨끈한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이안이 장내로 들어섰다.

"...."

장내의 소음이 순간 잦아들었다.

제법 넓은 1층의 주점은, 이른 저녁임에도 꽤 붐비고 있었다. 곳곳에 자리한 이들의 시선이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로 모였다.

'이젠 이런 게 반가울 지경이군.'

생각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이안이, 한쪽 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곧 일행이 들어 온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던 여급이 다가왔다.

키가 크고 한 성격 할 것 같은, 전형적인 북부인 느낌의 여급이었다.

"여긴 뭐가 맛있지?"

이안의 질문에 잠시 눈을 끔뻑인 그녀가,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초행이신 것 같은데, 웬만하면 나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왜. 여기 모인 게 죄다 골목대장들이라?"

이안의 물음에 여급이 묘한 미소를 지은 여급이 덧붙였다.

"아직은 한가하지만, 한두 시간만 지나도 더 시끄러워질 거거든요. 그럼 아마도…."

그녀의 시선이 테사이아와 샬롯을 훑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좋네. 이런저런 얘길 많이 들을 수 있겠어. 그래서, 여긴 뭐가 맛있지?"

뭘 믿고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본 여급이, 이윽고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뱉었다.

"…무난한 건 콩과 고기가 들어간 스튜에 호밀빵, 계란이고요. 비싼 건 구운 고기죠, 뭐."

"그럼 둘 다 각각 2인분씩. 술도 한 잔씩 가져오고. 제일 독한 거로."

"네. 혹시, 묵고 가실 건 아니시죠?"

"맞는데?"

"...."

여급이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다시 한번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 여기 놈들이 어지간히 사고를 치긴 하나 보군.

"제일 큰 방으로 하나 줘. 목욕도 할 수 있나?"

"…네. 끓는 물 한 냄비마다 돈을 받긴 하지만요."

"그럼 그것도 부탁하지."

이안이 은화를 몇 개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여급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무 많은데요."

"남는 건 너 가져."

"혹시, 가게 기물값을 미리 치르시려는 건 아니죠?"

"...."

눈치가 보통이 아닌 녀석인데.

이안의 시선에, 여급이 가볍게 관자놀이를 주무르고는 속삭였다.

"무기를 뽑으시는 건 안 돼요. 살인도 안 되고요. 바로 방위군을 부를 거예요."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너도 여기서 바깥소식을 자주 듣는 편이냐?"

"뭐,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얘긴진 모르지만요."

"여기서 며칠 묵을 거니까, 차근히 듣도록 하지."

이안이 은화를 하나 더 테이블에 얹어 여급 쪽으로 밀었다.

심사 복잡한 표정으로 은화를 쥔 여급이 한숨 쉬었다.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당장 오늘 밤 여기서 정말 묵으실 수 있으실지도 모르는데."

"있으니까, 받아. 가서 식사나 가져와라. 출출하니까."

"...."

잠시 이안을 바라본 여급이, 나도 모르겠다는 듯 홱 몸을 돌렸다.

샬롯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또 벌써 여급과 친해졌군."

"친해지긴. 매수한 거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전부터 느꼈는데, 이안은 종업원들한테 유독 친절해."

"고생이 많으니까."

피식댄 이안이 무심한 눈길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주정뱅이. 무뢰배. 용병. 뭐라 불러도 비슷하게 통용되는 인간 말종들.

저딴 것들과 매일 부대끼며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종업원들에게 친절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여러 아르바이트로 점철된 과거를 가진 입장에선 더더욱.

이쪽을 힐끔대는 시선들을 차분히 가늠하던 이안의 앞으로, 곧 음식이 잔뜩 놓였다.

"이건 제가 드리는 거예요."

술잔을 하나 더 놓으며 속삭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를 돌아본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이렇게 가끔, 돌아오는 게 있기도 하고."

그는 산뜻하게 술로 입을 축이고는 포크를 들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이 따듯한 음식들과 식도를 후려치는 술 한 잔뿐이었다.

'정말 현지인 다 된 느낌인데. 이게 맛있게 느껴지다니.'

때때로 헛웃음을 지으며 음식에 몰두하는 이안과 달리, 샬롯의 안색은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저 건너편의 테이블에 모여 앉은 대 여섯이, 그들을 상대로 한 상스러운 음담패설을 떠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대상은 테사이아였다. 장님 요정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아서, 일행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어올 정도였다.

'저 녀석들부터 시작해야겠군.'

일단 이건 다 먹고.

생각하며, 이안이 열심히 입을 놀리던 그때였다.

"…이안, 잠시 다녀와도 되겠느냐?"

포크를 내려놓은 샬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다녀올 생각인데."

"부디 내게 맡겨 줬으면 좋겠군."

"흠…."

잠시 침음한 이안이 빵을 스튜에 찍어 입에 넣으며 내뱉었다.

"기억하지? 무기는 뽑지 말고, 죽이지도 마라."

"부러뜨리는 건?"

"그건 뭐. 말만 할 수 있는 상태면 돼."

"명심하겠다. 네 식사가 방해 받지 않도록 신경 써 보지."

싱긋 미소 지은 샬롯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입 벌리고 있어라. 눈먼 피가 튀어들어 올 수도 있으니까."

"너한테 들은 말 중에 가장 멋진 말인걸."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몸을 돌린 샬롯이 태연한 걸음걸이로 장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한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테이블에 내리찍었다.

#109화

꽈직!

테이블이 그대로 박살났다.

기절한 놈을 놔버린 샬롯이 그대로 옆의 또 다른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벌떡 일어서던 같은 테이블의 대머리는 옆얼굴로 날아든 수인의 발뒤꿈치에 피와 부러진 이빨을 흩뿌리며 날아갔다.

그대로 몸을 돌린 샬롯은, 마지막 놈이 발작적으로 내뻗는 단검을 회전력이 실린 팔뚝으로 후려쳐 날려버렸다.

튕겨 나간 단검이 벽에 박혀 팅, 하는 짧은 떨림을 흘렸다.

고통보단 놀란 표정으로 덜렁대는 팔목을 바라보던 놈의 얼굴에, 새카만 주먹이 틀어박혔다.

콰당탕탕-!

요란하게 바닥을 구른 놈이 벽에 처박혀 축 늘어졌다. 모든 게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쉴 정도의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지켜보던 주점 내부의 건달들이 비로소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저런 미친 마족 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토해내며 일어섰다.

아까 전 여급의 말이 무색하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고 작은 날붙이를 손에 든 채였다.

"…하."

샬롯은 무기를 꺼내 들지 않았다.

가르릉 대며 목을 풀듯 슬쩍 옆으로 꺾은 그녀가, 그대로 가장 가까운 테이블로 몸을 날렸다.

"죽여 버려!"

"뭣들 보고 있어? 담가!"

빠각! 콰장창-!

고함과 욕설,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순식간에 장내를 뒤덮었다.

"흠…."

왜 죄다 잔챙이 같지.

고기를 우물대며 그 광경을 눈에 담던 이안이, 이내 구석의 여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병 하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칼을 든 건 아니었고, 여급도 올 게 왔다는 듯한 표정일 뿐 그다지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슬쩍 보니 주방 쪽에 무덤덤한 인상의 거한이 식칼을 든 채 우두커니 여급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래. 저자가 주인장이군.

어쨌든 여급에게 불똥이 튄다거나 방위군이 몰려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미미하게 주억거리며, 이안은 다시 소란이 한창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흔들리는 등잔 불빛 아래, 원초적인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콰직-!

샬롯은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날붙이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그저 전사의 본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먹, 발, 무릎을 포함해, 때로는 머리까지 무기처럼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테이블을 뒤집거나 예고 없이 물러나는 식으로 아예 포위당하지 않게 상황을 주도했다.

'도와줄 필요는… 없겠네.'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한 그녀의 표정과 눈빛을 안주 삼아, 이안이 술을 한 모금 들이킨 그때였다.

"이 새낀 뭔데 계속 처먹고 있어?"

"저 마족 년이랑 한패인 거 보고도 모르냐? 이 새끼들도 조져!"

후미에 있던 몇몇 놈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다가왔다.

번들대는 눈빛과 불빛을 흐릿하게 반사하는 날붙이들.

입맛을 다신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은 찰나였다.

쉬학- 뻐억-!

은발을 펄럭이며 튀어 나간 테사이아가 맨 앞 놈의 복부를 그대로 걷어찼다.

발을 박차 놈을 날려버리며 그 반발력으로 제동한 그녀는, 그대로 옆 놈의 목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땅에 내리찍으며 착지했다.

"억…."

출렁이며 튀어 오른 머리칼이 뒤엣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낮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린 테사이아가 그대로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건달이 앞으로 넘어졌다. 테사이아는 쓰러진 놈의 머리채를 붙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한 번 더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셋을 제압한 그녀가 손을 탁탁 털며 자리로 돌아왔다.

안대 아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먹어, 이안. 오는 애들은 내가 막아 줄 테니까."

…거참 든든하네.

실소를 흘리며 포크를 집어 든 이안이 덧붙였다.

"흥분하지 마라. 먹지도 말고."

"걱정 마. 그럴 만큼 힘을 써야될 놈들도 아니니까."

대답한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는 다른 용병들에게 와 보란 듯 턱을 까딱댔다.

이안과 샬롯에 비해 다소 전투력이 떨어질 뿐, 그녀도 엄연한 뱀파이어였다. 동시에 요정이기까지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의 용병 전부를 상대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샬롯이 엄청난 속도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으니까.

뒤집히고 박살 난 테이블과 의자.

산산 조각난 접시와 술병들 사이, 어느새 열 명을 훌쩍 넘는 용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후우…."

난장판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샬롯이 숨을 골랐다.

검은 털과 갈기 곳곳이 피에 젖어 반짝였다. 눈가의 피를 눌러 닦는 손길에 묘한 후련함이 묻어났다.

"이런 시발…."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어느새 네다섯밖에 남지 않은 용병들이 주춤대며 탄식을 흘렸다.

처음의 흉흉한 전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저 초조한 눈길로 샬롯과 옆쪽을 번갈아 힐끔댈 뿐.

스튜에 찍은 빵을 우물대던 이안의 시선이 그들이 힐끔대던 방향으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곧 그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그래… 이놈들이 전부일 리가 없지.'

이제는 놀란 표정으로 변한 여급 너머.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발소리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일련의 용병 무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게 뭔… 시벌…."

"저것들은 또 뭐야…?"

개판이 된 장내를 눈에 담은 그들이 하나둘씩 탄식을 흘렸다.

용병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한복판의 샬롯에게로 모였다.

그녀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서 합류하라는 듯.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려는 찰나, 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움직이지 마."

용병들 사이를 비집고 덩치 큰 사내가 걸어 나왔다. 중 무장을 하고 얼굴 곳곳에 흉터가 선명한,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북부인이었다.

"멍청한 놈들이, 시비 걸 상대를 잘못 골랐군…."

한숨 쉬듯 읊조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샬롯 쪽이 아니라 이안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누가 우두머리인지 단박에 알아 본 모양이었다.

이윽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선 그가,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빵을 우물대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이놈들을 데리고 있는 트루드요."

"이안."

이안의 대답은 무성의했다.

트루드의 눈매가 꿈틀댔다.

하지만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 들지는 않았다. 부하들을 죄다 때려눕힌 예비 마족을 거느리고 있는 자가 평범할 리 없었으니까.

이 난장판을 앞에 두고도 식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를 신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보아하니 내 부하 놈들 때문에 시작된 싸움 같은데, 무의미한 칼부림은 여기서 그만합시다."

"칼부림은 너희 부하들이 했지. 우리가 아니라."

"...."

트루드는 이안의 건너편에 앉은 은발의 장님과 심드렁하게 서 있는 수인을 다시 한번 번갈아 눈에 담았다.

비로소 그들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 그가 다시 한번 탄식을 삼켰다.

이들이 무기를 든다면 자신들 모두 죽은 목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이윽고 그가 말을 이었다.

"보통 분들이 아니시란 건 충분히 알겠소.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괜히 높으신 분들 귀에까지 얘기가 들어가면 피차 피곤해질 텐데, 일 크게 만들지 맙시다. 같이 칼 밥 먹고 사는 처지에, 대화로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소?"

"좋지. 대화. 나도 그러려고 온 거니까."

남은 빵 조각을 툭 내려놓으며, 이안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트루드의 눈을 빤히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전에 사과부터 제대로 해."

"…그러지. 부하들의 무례는-"

"나 말고."

말을 자른 이안이 테사이아와 샬롯 쪽을 턱짓했다.

"네 부하들이 모욕한 당사자들에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

순간 트루드가 이를 악물었다.

양 볼에 턱 근육이 선명하게 꿈틀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도, 뭐라 말을 내뱉지도 못했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우묵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 그가 흥분하거나 분노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트루드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자들은 정말 자신들의 숫자나 뒷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이런 괴물 같은 자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부터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린 건가…? 설마, 우릴 접수하기라도 하려고?'

하필 이런 시기에.

아니, 오히려 이런 시기이기에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혔지만,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지금은 숙이고 들어간 뒤에, 나중을 기약하는 게 현실적이리라.

거기까지 생각하며 마른 침을 삼킨 트루드가,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본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하들의 무례를… 사과하겠소."

잠깐의 적막. 이윽고 짧게 가르릉 댄 샬롯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움찔대는 용병들을 그대로 지나쳐 테사이아의 등 뒤에 멈춰 섰다.

훅 풍기는 피 냄새와 체취에 트루드가 한쪽 눈썹을 움찔댈 찰나.

"그래. 이제야 대화라는 걸 나눠 볼 수 있겠군."

건조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내뱉은 이안이, 남은 의자를 턱짓했다.

"앉아."

"...."

이제 용병단을 넘길 차례인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트루드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

샬롯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병들이 널브러진 동료를 위층으로 옮기고 엉망이 된 장내를 정리했다.

"…내가 듣기론, 가장 위기인 건 아겔 란이오. 영주들이 더 이상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더군. 지금쯤이면 독립을 선언했어도 이상하지 않소."

트루드가 술술 말을 이었다.

이안이 원하는 게 변방 전쟁에 대한 정보뿐임을 알고 나선, 아는 이야기들을 죄다 늘어놓고 있었다.

"지금 다들 주목하는 건 메네르와 벨 론데요. 처음엔 연합하던 두 나라의 관계가 아예 틀어졌다고 들었소.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셈이지."

"흠. 확실히…."

이안은 술을 홀짝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역시. 여기로 오길 잘했네.'

용병은 상인과 함께 외부의 소식에 가장 발 빠른 자들이었다.

돈 냄새는 빨리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전쟁은 용병들에게 단연 최고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 돈뿐만 아니라 작위까지 얻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변방의 전쟁은 트라벨가의 용병들에겐 군침이 도는 소식일 터였다.

여기선 방위군의 뒤나 닦아 주는 처지지만, 그쪽에선 아닐 테니까.

이안이 이들에게 변방의 소식을 듣기로 한 건 그래서였다.

물론, 이 인간 말종들을 상대하는 게 가장 쉽고 편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여기도 그렇지만, 트라벨가 곳곳에서 용병단이 결성됐소. 아마 다들 머잖아 여길 떠날 거요."

"대공께서 서운해 하시겠군."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장군들이 던져주는 푼돈만 받아 먹으며 살 순 없잖소.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사실… 난 댁들도 그래서 여길 찾아 온 건줄 알았소만."

"...?"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트루드를 바라보았다. 트루드가 그의 내심을 살피듯 덧붙였다.

"용병들을 접수하러 오신 건 줄 알았단 얘기요."

이안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저런 놈들은 너나 가져.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트루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덧붙였다.

"내 뒤통수를 칠 궁리만 했을 거잖아?"

"…그럴리가. 나도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오."

잠시 숨을 멈췄던 트루드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가 본 북부인 전사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머릿속까지 근육인 전사와 그런 척만 하는 곰 같은 여우.

트루드는 어딜 봐도 후자였다.

이안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슬쩍 눈을 피한 트루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무튼, 북부의 용병단이 변방에 합류하면 전쟁의 판도가 또 완전히 달라질 것이오. 검은 이리단이니 붉은 형제들이니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나 계곡의 여우나 복수의 대행자 같은 자들이 소문을 몰고 다니지만. 그땐 북부 출신들의 명성만 돌게 되겠지."

"복수의 대행자…?"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이안이, 다시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약탈당하거나 폐허가 된 지역을 떠돌아다닌다는 자요. 도적이 된 용병들을 소탕하거나, 전쟁을 틈타 헛짓을 일삼는 귀족들 목을 따고 다닌다던데. 전부 사실인진 모르겠소. 영 믿기 어려운 얘기잖소."

어깨를 으쓱인 트루드가 용병 특유의 음험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돈도 안 받고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이고 다닐 이유가 없잖소?"

"글쎄…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닌 모양이지."

묘한 눈빛이 된 이안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읊조렸다.

트루드가 미간을 좁혔다.

"뭐, 아는 거라도 있으시오?"

"네 알 바 아니야. 그보다, 루 사드에 대해선 언급이 없군. 그쪽에 대해선 아는 게 없나?"

"거긴 워낙 조용한 동네니까. 국경 근처의 요새에 병사들이 모여있다고만…."

잠시 말을 멈춘 트루드가 묘한 눈으로 이안을 마주보았다.

"혹시, 루 사드의 소식이 제일 중요하셨던 거요?"

돈이 될 얘기인가 하는 눈빛.

하여간, 용병이란 것들은.

내심 피식한 이안이 넌지시 말했다.

"입 조심하고 다녀라."

그거면 충분했다. 호오, 하고 짧게 탄식하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트루드가 이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조용히 한 번 알아보겠소. 댁한테도 소식 알려 드리지."

"자세할 필요 없어. 난 전반적인 상황만 알면 되니까.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냐?"

"뭐가… 말이오?"

"우리가 네 부하들을 죄다 두들겨 패서 전력에 손실이 생겼을 텐데. 복수도…."

이안의 눈매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하고 싶을 테고."

"…그럴 리가."

침을 삼킨 것도 잠시, 트루드가 보란 듯 고개를 저었다.

"댁들 목숨을 노리다가 아예 다 망할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내 진짜 측근들은 거의 손실이 없소. 우린 2층에서 계획을 짜고 있었거든. 저 녀석들은 우리 뒤를 따르면서 빵가루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놈들이오."

이안을 설득하듯 구구절절 내뱉은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애초에 먼저 시비 걸고 칼까지 뽑았으면,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지."

"그래… 뭐, 그렇다니 다행이군."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루드가 내심 안도하듯 어깨를 늘어뜨리는 사이,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말을 계속 믿을 수 있게, 아랫놈들 관리 잘 해. 누가 우릴 습격하면, 네 명령이겠거니 생각할 테니까."

"...!"

트루드의 어깨가 굳어졌다. 이윽고 그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걱정 마시오."

"말이 참 잘 통하는 친구로군. 좋아. 그럼 다음 얘기로 넘어가지."

이안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트루드는 교회의 정확한 위치는 물론, 트라벨가에서 가장 실력 좋은 공방의 위치 같은 이안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전부 알려줬다.

아쉽게도 주문 회로를 다루는 장인은 없었다. 주문 회로를 다룰 줄 아는 장인이나 마법사는 제국 직할령에만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교단에서의 일만 잘 마무리 지으면 되겠네.'

비로소 만족스럽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은 이안이,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주점 주인과 여급이 그의 손짓에 테이블로 다가왔다.

"음…?"

고개를 갸웃하는 트루드를 돌아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돈 좀 꺼내 봐."

"돈은… 갑자기 왜…?"

"너희 부하들이 부순 기물값은 물어 내야지."

"아니… 기물은… 솔직히…."

"솔직히, 뭐?"

"…아니오."

체념한 듯 한숨 쉬며 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던 트루드가, 문득 다시 이안을 곁눈질했다.

"혹시… 기사 출신이시오?"

이거, 그만큼 악독하단 얘기지?

피식한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그럴 리가."

#110화

"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이안이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재정비 겸 휴식에 들어선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루 사드와 장벽 요새의 소식을 기다리며, 지난 여정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마냥 늘어져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할 건… 해야지."

이안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물 위를 소리 없이 헤엄치던 늪지의 원한이 쏜살같이 그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홀로 목욕할 때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안은 몸의 물기를 닦으며 텅 빈 방으로 나섰다. 본래는 트루드가 쓰던 여관에서 가장 큰 방.

이안의 시선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옷과 장비들을 훑었다.

"방금 씻었는데…."

입맛을 다시면서도, 그는 기계적으로 옷가지들을 걸치기 시작했다.

대부분 새로 산 것들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오늘은 페르마 사제를 만나야 했다. 트라벨가에 도착한 다음 날 교회를 방문했지만, 그를 바로 만나지는 못한 것이다.

평사제가 대신 나와 용무를 전해 듣고 서신들까지 받아 든 채로 돌아갔고, 하루가 지나서야 만남을 요청하는 답신이 도착했다.

유물의 보증이 확실하고 소유권도 인정하겠으니, 유물을 감정하고 처분에 대해 논의하자는 내용이었다.

'논의할 게 뭐가 있다고.'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혹시나 했건만. 페르마도 다른 사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작자가 분명했다.

루카스의 소개를 받았으니, 이안 역시 신실하고 등쳐 먹기 좋은 기사이리라 여긴 것일지도 몰랐다.

'뭐… 사실, 그냥 주는 대로 받아도 크게 상관없긴 하지만.'

두툼한 누비옷 위로 새로 산 사슬 갑옷을 걸치며,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속 편한 결말이기도 했다.

루카스 덕에 귀찮은 과정을 다 생략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

아무리 후려쳐도 금화를 수십 개는 줄 테니까. 지금 가진 돈까지 더하면, 제국에 발을 들일 때까지는 충분히 쓰고도 남을 터였다.

그 이후의 돈 걱정은 어차피 할 필요도 없었다.

하비에르에게 얻은 강철 금고의 열쇠가 있으니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금고 안에는 수수료를 떼고도 칠백 개가 넘는 금화가 잠들어 있었다.

거기다 사제를 잘못 건드렸다간 아주 귀찮은 부작용도 뒤따랐다.

교단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건 기본이고, 수배령이 내려지거나 신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교단과의 관계는 아무래도 좋지만, 다른 페널티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게임에선 한 번 죽으면 풀렸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

하여간, 여러모로 짜증나는 작자들이었다.

퍽 하면 교단을 끌어들이는 그들에 비하면, 머리를 열어보겠다고 달려드는 마법사 쪽이 차라리 뒤끝이 없었다.

'입씨름할 생각만 해도 벌써 피곤하네. 씁….'

단죄의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은, 이윽고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내부의 왕관을 확인한 그가, 비로소 느긋하게 방을 나섰다.

"어… 그… 안녕하시오."

그의 등장에 복도를 어슬렁대던 몇몇이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복수하겠답시고 나서는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용병들은 다들 그를 두려워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겐 악마나 다름없던 샬롯이, 그에겐 말대꾸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거기."

이안이 툭 내뱉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용병들이 멈칫댔다.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다 싶은 놈, 와서 이거 들어라."

"…예."

찰나의 눈치 싸움 끝에, 한 놈이 달려왔다. 얼굴 한쪽이 아직도 부어있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샬롯과 싸운 놈들 대다수는 강냉이 몇 개 털린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방에 몸져 누운 놈들의 앓는 소리가 복도를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물론 이안은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시비를 건 것도 날붙이를 들고 덤빈 것도 저쪽이었으니까.

"떨어뜨리거나 엎으면 네 인생도 그렇게 된다."

봉인함을 받아드는 이 놈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앳된 얼굴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싹수가 노랗다는 뜻이었다.

"예, 예…!"

보아하니 이놈은 조만간 그만 두겠네.

바싹 얼어붙은 얼굴을 보며 내심 콧방귀를 뀐 이안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

흐릿하게나마 빛이 내리쬐는 대낮의 주점은 밤과 달리 고요하고 고즈넉했다.

"식사 금방 내올게요."

기다렸다는 듯 말한 여급이 주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이 온 이래로 주점의 분란이 사라진 덕에, 주인장과 여급 모두 이안 일행을 아주 좋아했다.

피식댄 이안은, 이내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앉은 테이블에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군. 듣기론 한 시간이 기본이시라던데."

덩치 큰 북부인 용병, 트루드였다.

"그러게. 빨리 나왔네, 이안."

안대를 한 테사이아가 배시시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샬롯이 매일 쥐를 잡아다 준 덕에, 낮임에도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던 샬롯도 고개를 들었다.

이안에게 눈인사를 건넨 그녀가, 뒤따라 온 용병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는 지금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방어구는 말 그대로 넝마나 다름없는 상태여서, 새로운 물건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는 신체 구조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쓰는 몇몇 방어구는 맞춤으로 제작해야 했다.

그렇다고 기존의 물건들을 버리거나 팔아 넘긴 건 아니었다.

샬롯은 본래 쓰던 장비를 방에 잘 모셔 두었다.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닐 거라는데, 그녀의 성격상 빈말은 아닐 터였다.

어쨌건, 샬롯의 무장 여부는 그녀에게 두들겨 맞은 녀석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였다.

"좋은 시간… 되십쇼."

남은 의자에 봉인함을 공손하게 내려놓은 녀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장내에 남은 건 그들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일찍 나오신 모양이군. 교회로 가신댔지…."

봉인함을 바라보며 중얼댄 트루드가, 자리에 앉은 이안을 힐끔댔다.

"이 안에 뭐가 들었기에 교단에 들고 가시는 거요?"

"모르는 게 네 신상에 좋을걸."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샬롯도 고개를 끄덕였다.

"귀쟁이 말이 맞다. 주제넘은 호기심은 명을 단축하는 법이지."

"...."

트루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여급이 식사를 대령한 건 그때였다. 계란과 구운 고기, 따듯한 스튜와 독한 술 한잔.

"충분해. 가서 쉬어라."

대낮부터 술이라니, 좋군.

술잔부터 집어 든 이안이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기다리던 이유나 말해 봐. 루 사드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고 왔냐?"

"맞소. 이 두 분께는 좀 전에 대충 말씀 드렸소만."

트루드가 냉큼 입을 열었다.

"루 사드도 전쟁을 선포했단 얘길 들었소. 이제 변방의 모든 왕국이 전쟁 중인 거요."

그가 말하는 사이, 테사이아는 다른 테이블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샬롯은 다시 음식을 씹으며 맹하니 자신만의 생각에 잠겼다.

턱을 긁적인 트루드가 덧붙였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오. 다른 나라들도 굳이 루 사드는 안 건드리고. 지금 전쟁에 끼어들어서 이득 볼 게 없어 보이는데 말이오. 윗분들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그렇겠지.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 자체가 목적일 테니까.

이안은 묵묵히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흡혈 일족은 루 사드의 백성들을 흑마법의 제물로 바치거나 하수인으로 만들고 있을 터였다.

전쟁보다 그런 짓거릴 눈에 띄지 않게 할 방법은 많지 않으리라.

게임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아마도 그때는 테사이아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루 사드도 혼란스러워 지리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진혈의 여제는 그 사이에서 이안의 방문을 착실히 대비하고 있을 터였다.

"어쨌든, 이게 어젯밤에 들어온 소식이오. 마침 그 근처를 거쳐 온 상인이 있어서 얘길 들었지. 불과 얼마 전 일이라더군. 이 얘길 끄집어내느라 술을 여러 잔 샀소."

"...."

고기를 우물대면서, 이안은 트루드를 쓱 바라보았다.

트루드가 재빨리 미소 지었다.

"달란 얘긴 아니오. 형씨 덕분에 나도 좋은 정보를 미리 알았으니까. 결국엔 다들 알게 되겠지만, 미리 대비하는 쪽이 언제나 한 푼이라도 더 버는 법이잖소."

"전쟁이 커져서 좋은 모양이군."

"왜 아니겠소? 혼란이 커질수록 우리 몸값도 오를 텐데. 줄만 잘 잡으면 금화를 궤짝으로 받을 수도 있을 거요."

그래, 그러시겠지.

싸늘하게 코웃음 친 이안이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라."

"몇 개만 묻고 가겠소."

"뭐."

"그쪽들은 루 사드로 가실 거요?"

"글쎄. 아마도."

"전쟁에도, 참전하시고?"

이게 본론이군.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건조한 눈으로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어떨 것 같냐?"

"흠… 그래. 하긴. 댁들이 귀족들 비위 맞추면서 촌놈들이나 찔러 죽이고 다닐 것 같진 않소."

움찔한 트루드가, 이윽고 혼자 납득한 듯 중얼댔다.

"그럼, 일 잘 보시오. 난 올라가서 좀 자야겠소. 아침까지 마셨더니 피곤하군."

능청스럽게 내뱉으며 일어선 그가 쌩하니 멀어졌다.

…저런 것들이 죄다 모여서 서로 죽여 대다가 그 사달이 난 건가.

트루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한 이안이, 이내 시선을 거두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게임에서 본 대로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면, 저것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다고 말릴 생각은 없었다.

저들의 선택이니까. 그가 나설 명분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렇게 죄다 죽어 나가는 거지.

생각하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샬롯에게서 멈췄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냐?"

이어진 말에 그녀가 움찔, 눈을 깜빡였다.

"…별 것 아니다. 오늘은 교회에 네 시종 자격으로 동행하는 거니까."

그녀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널 소개할 문구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을 꾸미는 건… 어렵군. 네 전 시종들은, 말재간이 대단한 자들이었어."

"...."

뭘 그렇게 고민하나 했더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이안은, 이내 턱을 긁적였다.

딱 질색하는 짓이긴 했지만.

이번 같은 경우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용도로.

"…이왕 할 거면, 네 장기를 조금 더 살려 볼 생각은 없냐?"

이안이 포크를 놓으며 말했다.

샬롯의 눈을 마주 본 그가, 옆의 계단을 턱짓했다.

"일단 올라가서, 갑옷부터 걸치고 와라."

"...?"

***

"…늪지대의 용 사냥꾼."

이안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교회. 개인 집무실에서 이안을 맞이한 페르마 사제의 능글맞은 미소는, 뒤따라 들어온 중무장한 수인을 본 순간 굳어졌으니까.

그녀가 책상 위에 봉인함을 내려놓자 어깨를 떨기까지 했다.

"무덤 숲 마경의 정화자. 아겔 란의 마물 참수자."

샬롯은 그런 사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주파 섞인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아겔 란의 구원자이자 벨 론데의 학살자. 불씨의 운반자이자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며…."

페르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불과 1분 남짓이면 충분했다.

"…거인 왕국의 종지부를 가져온 징벌자이자, 하얀 악마를 참살한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이안 호프 경입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기나긴 소개가 마침내 끝났다. 철컥, 봉인함의 뚜껑을 여는 샬롯의 손끝에 날카로운 손톱이 반짝였다.

페르마를 바라보며 흐릿하게 미소 지은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설핏 드러난 송곳니를 빤히 응시하던 페르마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선 이안이 비로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으로 페르마를 빤히 바라볼 뿐.

페르마는 그제야, 무시무시한 건 수인의 목소리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카스가 쓴 서신에는, 방금 그가 들은 내용의 반도 담겨있지 않았다.

"훌… 륭한 업적을 많이 쌓으셨군요, 이안 경."

이윽고 페르마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부분 피로 쌓은 업적이니, 자랑스러울 일도 아니오. 기사도 아니니 경이라 부르실 필요도 없고."

물론 내용까지 부드럽진 않았다.

페르마의 어깨가 다시 한번 굳어졌다. 이안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감정은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사제님."

"...!"

그제야 페르마의 고개가 득달같이 봉인함 쪽으로 돌아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들을 마주 보느니, 이 왕관을 들여다 보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루카스 경이 말하길, 사제님이라면 공정하게 감정해 주실 거라더군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이안과 그의 바로 뒤에 선 샬롯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페르마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식은땀을 흘리던 그가, 이윽고 감정서에 숫자를 재빨리 휘갈겨 내밀 때까지.

***

'이게 되네.'

걸음을 옮기며, 이안은 다시 한번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교회에서 받아낸 금화는 백 오십 개였다. 강철 금고의 열쇠를 제외하면, 이 세계에서 떨어진 이래 가장 큰돈을 얻은 셈이었다.

"…사제님께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군."

합류 이래 최대의 실적을 기록했음에도, 샬롯은 정작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루 솔라의 신도라더니. 그녀에게조차 사제는 존중의 대상인 모양이었다.

"네가 한 건 최선을 다해서 날 소개한 것뿐이야. 협박을 한 것도,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지."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사제님이 멋대로 겁먹는 것까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루 솔라께서 도우셨다고 생각해라."

"음… 그래. 틀린 말은 아니군."

혀를 날름대는 샬롯을 돌아보며, 이안은 기분 좋게 주점의 문을 열었다.

가장 비싼 술을 몇 모금 마시면, 그녀도 루 솔라의 은총에 감사하게 되리라.

"...?"

분위기가 묘하다는 걸 깨달은 건, 장내로 몇 걸음을 들어섰을 때였다.

묘한 표정의 용병들.

이안의 표정 역시 묘해졌다.

"이안! 야옹아! 여기 봐!"

소리치며 손을 흔드는 테사이아의 옆으로, 북부 야인 전사 몇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켈과 합죽이 입이 된 발레리를 비롯한,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었다.

"대전… 아니, 이안 님…!"

다가오는 이안과 눈이 마주친 전사들이 차례로 고개를 까딱이며 예의를 표했다.

이안은 이윽고 아스켈을 마주 보았다. 평소처럼 무덤덤해 보이지만 다소 굳은 얼굴.

그래.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니군.

생각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멈춰 선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냐?"

#111화

"한 시간쯤 됐습니다."

아스켈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안이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얼마 전이건만. 이안은 녀석의 얼굴이 묘하게 더 의젓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덩치도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이러다 금방 다른 놈들처럼 우락부락해지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이주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정착지에 저희가 쓸 공간을 마련해 뒀더군요. 이안 님께서 다녀가셨단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래? 잘 됐군."

"정착지의 전사들이 이안에게 도전했었다. 물론 전부 두들겨 맞았지만."

전사들과 반가움의 눈빛을 주고받던 샬롯이 덧붙였다. 발레리와 눈빛을 교환한 아스켈이 피식댔다.

"저희도 들었습니다. 뭐든, 직접 겪어 봐야 믿을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무튼…."

아스켈이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저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모두?"

"예. 설원 지대를 지나는 동안 마물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거든요. 다들 카르하께서 지켜주셨다 여겼지만, 글쎄요. 제가 볼 땐 여러분들이 저희가 갈 길을 미리 정리해 주신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다들 감사하고 있지만요."

어깨를 으쓱인 아스켈이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이주를 하지 않았거나 조금만 늦었다면, 저희 모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거든요."

"...."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대는 사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스켈이 입을 열 찰나였다.

"그건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군."

이안이 말을 자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엿듣던 용병들이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2층에 있는 놈들 전부 내려보내."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스켈을 제외한 나머지 네 야인 전사에게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덧붙였다.

"아스켈과 오붓하게 대화하고 싶은데. 아무도 2층에 못 올라오게 계단을 지켜 줄 수 있겠나?"

"예…!"

전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발레리가 맡겨만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 이제 눈빛에 잔머리 굴리는 게 안 보이네.

이안이 낮게 피식대는 사이.

우당탕-

계단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을 둘러업은 용병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

부상자의 숫자가 수상할 정도로 많다는 걸 깨달은 듯, 전사들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샬롯과 테사의 작품들이다. 난 구경만 했어. 올라가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그가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는 그를 향해 여급이 재빨리 덧붙였다.

"술 한 병 올려 드릴까요?"

"좋지."

대답하며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튕긴 이안이, 소란스러운 장내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야인 친구들 식사도 챙겨주고, 여기 있는 놈들한테도 전부 술 한 잔씩 돌려."

***

"확인 끝났어. 계단 앞은 덩치들이 지키고 있고."

여급의 뒤를 따라 들어온 테사이아가 침대에 펄쩍 뛰어올랐다.

샬롯이 마주 앉은 이안과 아스켈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여급은 능숙하게 술병과 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이안은 아스켈이 쥐려는 잔을 빼앗아, 그 안에 물을 채우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하려던 얘기나 해봐라."

"…예."

고개를 끄덕인 아스켈이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이안 님이 떠나시고 한 주쯤 지나서 곧바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불만이 많았죠. 물건들을 많이 버리고 왔거든요. 영감님은 들은 척도 안 하셨지만요."

노인네, 어지간히 밀어붙인 모양이군.

우르드를 떠올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간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장벽 요새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엔, 불만을 가지던 사람들도 오히려 영감님께 감사하게 됐습니다."

아스켈이 천장에 등잔 불빛을 따라 일렁이는 이안과 샬롯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북쪽 저 먼 하늘에 새카만 먹구름이 가득했거든요. 눈보라가 칠 건 알았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래가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죠. 밤이 밀려오는 것처럼요."

"...?"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현상 같진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희 마을도 그 어둠에 삼켜졌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 안에 계속 있었다면 좋은 꼴을 보진 못했겠죠."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에선 그런 걸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용의 마법인가.'

이름 모를 고대의 용이 깨어났으리란 건, 망령들이 산맥으로 집결 중이란 얘길 들었을 때부터 예상하던 부분이었다. 여왕과 악마가 모두 죽은 이상, 거인 왕국의 망령들을 지배할만한 건 놈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놈의 존재 자체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어쨌건 당장 놈과 마주칠 일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괴물이 등장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으니까.

게임에서 그가 다른 용과 싸운 건, 3 챕터 막바지 무렵이었다.

그놈은 형벌에 가까운 봉인을 당한 터라,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약점도 훤히 노출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끔찍하게 강했다.

이안에게 가장 많은 게임 오버 화면을 선사한 보스 중 하나일 정도였다.

심지어 약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데미지를 입힐 수도 없었다.

물리 저항은 물론 속성 저항력도 엄청나게 높았으니까.

그러니 2 챕터에 불과한 지금 용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형평성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퀘스트라도 없었으면 모를까.

어쨌건 거인 여왕은 엄연히 게임에도 존재하던 보스였으니까.

하지만 용이 모종의 마법으로 망령 군단을 지원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전개였다.

물론 이것도 이안의 예상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거인 여왕을 죽였으니, 그 나비 효과가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조건부 보스를 죽였는데 메인 퀘스트가 오히려 더 어려워질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하냐고….'

게임에서도 이랬던 거라면, 제작자는 악마 같은 새끼였을 게 분명했다.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치면서 쾌감을 느끼는.

'하긴. 애초에 그런 요소가 한둘이 아니긴 했지만….'

이런 건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며 이안이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는 사이, 아스켈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관문 요새에서, 이안 님을 알고 있다는 분도 만났습니다."

"…루카스 경?"

"예. 아시는군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곧 카링기온으로 갈 거라 했었는데."

"그 말씀을 하시더군요. 운이 좋았다고요. 저희가 도착했을 때, 그분은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거든요. 아무튼, 이안 님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경고하신 바가 현실이 된 것 같다고. 최대한 대비해 두었으니, 염려 마시라고요."

"흠…."

이안은 침음을 삼키며 술잔을 들었다.

그가 경고한 건 정신 나간 망령 군단이지, 알 수 없는 마법과 함께 밀려오는 망령 군단이 아니었으니까.

"…느낌이 좋지 않군."

묵묵히 듣던 샬롯이 읊조렸다.

동의하듯 그녀를 돌아본 아스켈이 입을 열었다.

"저도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쯤, 그 먹구름이 장벽에 닿았을지도 모르고요. 물론 장벽이 뚫리는 일은 없겠지만…."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아스켈은 물론 샬롯도 잠시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장벽 요새가 함락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스켈이 이윽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았다.

"어쩌면. 아마도."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

"내가 왜?"

"...?"

아스켈의 어리둥절한 시선에, 이안이 나지막히 코웃음을 쳤다.

"난 일개 용병일 뿐이야. 그런 거대한 문제는 자치령에서 해결할 일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 카링기온에 주둔 중인 군단이 절반만 나오더라도, 망령 군단 따윈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정말 북부가 위험해진다면 제국에서도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스켈을 안심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다지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지원이 오더라도, 북부가 난장판이 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면, 대비해야지. 너희 터전을 지킬 수 있도록."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물론 내게 의뢰한다면 거절하진 않을 거야. 너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탁, 술병을 내려놓은 이안이 아스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어쩔 테냐?"

"...."

이안의 눈을 마주 보며 잠시 입을 뻐끔댄 아스켈이,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군요. 이안님 덕분에 목숨을 구해놓고, 또 당연하게 의지하려 하다니. …새로운 터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다시 떠날 수는 없죠."

읊조리듯 말한 그가, 이윽고 이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희는 저희대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겠습니다. 만약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이안님께 의뢰하는 건 그때 다시 고민해 보겠습니다."

냅다 받아들여서 퀘스트가 생길 줄 알았더니. 헛다리 짚었군.

생각과 달리, 이안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물론 그는 망령 군단과 싸울 생각이었다. 다만 거기에 정의감이나 사명감 같은, 어떤 거창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싸우려는 건 그저, 퀘스트와 경험치 때문이니까.

'기다리다 보면 뭔가 굴러들어오겠지. 지금까지 그랬듯이.'

생각하며 술잔을 비운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출하군. 내려가자."

"…예."

아스켈과 야인 전사들은 다음 날 오전 곧바로 정착지로 돌아갔다.

다급한 얼굴의 파발이 트라벨가를 가로지른 건, 그로부터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상인들이었다. 내성으로 들어간 파발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것인지 알려지기도 전에, 그들은 채비를 꾸려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상인들은 위험을 돈 냄새만큼이나 빠르게 감지하는 자들이니까.

이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저들의 생각은 뻔했기 때문이다.

일단 불바다에 휩쓸리는 건 피하고, 불이 다 타면 돌아와 그 사이에서 이문을 챙기려는 것이리라.

상인의 뒤를 이어 반응을 보인 건 용병들이었다. 그들 역시 트라벨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기 남아있다간 정체 모를 괴물들을 상대하게 될 테니까.

차라리 변방 전쟁에 합류하는 게 생존과 수익에 모두 유리하단 계산일 터였다.

그런 변화가 휘몰아치는 건, 이안 일행이 머무는 설산 두꺼비 여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오…."

정오쯤 느지막이 방을 나선 이안을 맞이한 건, 짐을 들쳐 맨 일련의 용병 무리였다.

밤중에도 우르르 눈치를 보며 도망을 나가더니. 오늘은 아예 죄다 짐을 싸서 방을 빼고 있었다.

"야, 임마. 골론, 진짜 날 두고 그냥 가는 거냐?"

"미안하게 됐다. 그렇다고 걷지도 못하는 널 업고 그 먼 길을 갈 수는 없잖냐. 걱정 마. 방위군도, 팔다리 부러진 놈까지 동원하진 않을 테니까."

"이 의리 없는 새끼…! 그래, 썩 꺼져라! 촌놈들 눈먼 칼에나 맞아 뒈지길 루 솔라께 기도하마!"

"축복 고맙군. 잘 살아라."

아주 의리가 넘치고 훈훈하네.

복도 곳곳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촌극을 한 귀로 흘리며 가로지른 이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점도 이미 떠날 준비를 끝낸 용병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장, 정말 같이 안 갈 거요? 지금 결정 안 하면, 우린 이대로 조시프네 패거리로 붙을 거요."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고, 그냥 같이 가자니까? 당장 내일부턴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게 될 수도 있다고."

몇몇 용병들이 말을 건네는 건, 구석 테이블에 앉은 트루드였다.

놀랍게도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으로 술만 마셔대고 있었다.

콧방귀를 뀐 트루드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개소리들 그만하고 빨리 꺼져라. 너희 아니라도 기분 개 같으니까."

"왜 그렇게 개 같은 건데?"

그의 건너편에 걸터앉으며 이안이 물었다.

바로 옆 테이블의 용병이 튕겨 오르듯 일어서 자리를 비켰다.

움찔한 건 트루드도 마찬가지였다.

야인 전사들이 다녀간 뒤로, 이안을 보는 그의 눈빛은 또 한 번 달라졌다. 무슨 역사에 나올 위인을 대하듯 어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북부의 대전사라는 말을 들은 것이리라.

"그게… 파발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건지 다들 알게 됐소."

주저하며 말한 트루드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여급이 새로 가져다준 술잔에 술을 따르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장벽이 무너졌나?"

"...?!"

놀란 눈으로 술잔을 내려놓은 트루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소?"

#112화

"추측이다. 야인 전사들에게 북쪽이 심상치 않단 얘길 들었으니까."

"하… 어쩐지. 그날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난 또 오늘 아침에 새로 들어온 전령이 가져온 소식이라도 알아내신 건가 했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트루드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걸 미리 아시고서도, 왜 아직도 안 떠나고 계셨소?"

"그러는 너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린 트루드가, 이윽고 하나둘씩 여관을 떠나는 용병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술잔을 들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북부인인 모양이오. 머리로는 저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발이 안 떨어지는군, 시벌…."

"흠…."

이안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떠나는 용병들 사이에 북부인도 있긴 했지만, 어쨌건 남는 자들은 전부 북부인이었다.

돈벌레처럼 굴던 것들이 막상 북부에 문제가 생기니 남겠다니.

그야말로 모순된 짓거리였지만, 이안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뱉었다.

"들은 얘기나 해 봐."

"먹구름과 어둠이 장벽을 집어삼켰다더군. 그게 첫 파발이 들고 온 소식이오. 그자 말로는 일식이 일어나는 것 같았더군. 그리고 장벽 너머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수없이 들렸다고 했댔소. 요새를 나와 말을 몰고 달리는 내내 계속. 장벽이 무너지는 걸 직접 보진 못한 모양이지만… 아마도… 시벌…."

술을 벌컥 들이킨 트루드가 덧붙였다.

"옛 북부 왕국들의 전설이 전부 사실이었던 거요. 정말 거인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망자 군단이 있었던 거지. 아… 북부의 초인이여…."

마지막엔 혼잣말처럼 탄식한 트루드가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안은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장벽 요새가 얼마나 버텼을지는 몰라도, 지금쯤이면 함락되고도 남았으리라.

"오늘 아침에 온 전령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온 건진 모르지만, 좋은 소식은 아닐 거요. 낯이 당장 뒈질 것처럼 파랬다니까."

"곧 알게 되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점을 떠나는 용병들을 눈에 담던 이안의 눈빛이, 이내 묘해졌다.

"…어쩌면 바로 알게 될지도 모르겠군."

"...?"

고개를 갸웃하던 트루드도 다시 주점의 문을 바라보았다.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짐을 꾸린 용병들을 경멸하듯 돌아보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이안에게서 멈췄다.

이안의 행색을 훑어본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혹시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자 거인 여왕의 징벌자인 이안 호프 경이 맞으시오?"

"...?!"

트루드를 비롯한 주변의 용병들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부르는 걸 보면, 교회에서 나온 작자인가?

"맞소만. 기사가 아니니 경이라 부르실 필요는 없소."

기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엄정한 여신께서 인정하셨는데 서임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반갑습니다, 이안 경. 저는 자치령 2군단에 소속된 기사, 밀드레드 아니스라고 합니다."

"반갑소, 밀드레드 경. 그런데, 무슨 일로?"

"경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만…."

말을 흐리며, 밀드레드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용병들이 눈을 돌렸다.

방금 내려와서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시발….

생각하며 작게 한숨 쉰 이안이, 트루드의 술병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올라갑시다."

***

"떠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역시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께선 다른 용병들과는 다르시군요.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꼬리를 흔들어 대더니, 정작 정말 북부에 위기가 닥치니 죄다 꼬랑지를 말고 도망치는 꼬락서니라니-"

"나도 다를 바 없는 용병이오."

이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떠들어대는 밀드레드의 말을 잘랐다.

밀드레드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가 잔에 술을 따르며 덧붙였다.

"내가 남아 있는 건 돈 될 일이 생길 것 같아서일 뿐이지. 지금 경과 마주 앉아있는 것도, 그래서고."

밀드레드의 입가에 억지로 빚은 미소가 번졌다.

"하, 하하… 들은 것처럼 단호한 분이시군요."

이안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얘긴 어디서 들으셨소?"

"교회에서 들었습니다. 페르마 사제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거인 왕국 최후의 여왕을 참수한 징벌자가 이곳에 있으니, 도움을 청하라고요. 엄청난 업적을 이룬 분이니 백인대에 버금가는 전력이 되어 주실 거라 했습니다. 용병들을 이끌 구심점이 필요하니까요."

비로소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아무래도 페르마 사제가 원한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이 도움이지,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에 그를 밀어 넣으려는 게 분명했으니까.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퀘스트만 있다면야.

'다음 전리품 정리도 그 사제를 찾아가야겠군. 거인 머리라도 들고 갈까….'

술잔을 들며 이안이 내뱉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오. 나 같은 일개 용병에게도 손을 벌려야 할 만큼."

밀드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그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젊은 기사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감정선이 들쭉날쭉한 언행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일 터였다.

"…혹시, 북쪽의 상황이 어떤지 들으신 바가 있으십니까?"

"대충은. 장벽이 어둠에 먹히고, 망자들이 울부짖고…."

"그렇다면 대화가 편하겠군요. 오늘 들어온 소식입니다. 장벽을 뒤덮었던 어둠이 남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너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상태는 아니겠죠. 앞으로 어둠에 덮일 도시와 요새들도 그럴테고요. 그러니까-"

"본론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본론만 간결하게 하시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나도 아니까."

"…울라프 대공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부정한 것들이 트라벨가 인근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고요. 해서 용감한 겔루드 장군이-"

이 자는 말을 짧게 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군.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하긴, 이런 미친 명령을 짧고 간결하게 설명하면 아무도 설득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경의 말은."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밀드레드의 장광설을 잘랐다.

"트라벨가가 아니라 길목인 벨리움 요새에서 망령 군단을 막을 거고, 병사가 부족하니 함께 싸우다 죽을 용병들이 필요하단 말씀이시군."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는 겁니다. 성벽이 함락될 것 같으면 퇴각할 거고요. 어쩌면… 망자들보다 지원군이 먼저 도착할지도 모르죠."

잠시 굳어졌던 밀드레드가 이윽고 덧붙였다. 목소리가 공허한 건, 그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이안은 낮게 실소했다.

사실 이 명령 자체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대공은 게임에서도 같은 명령을 내렸었으니까.

'그래놓곤, 정말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는 식이었지. 그 늙은 대머리 새끼.'

이안의 표정을 오해한 듯, 밀드레드가 재빨리 덧붙였다.

"이미 출정 준비를 거의 끝마쳤습니다. 늦어도 내일 오후에는 본대가 출정할 겁니다. 몇 시간 뒤에 용병들에게도 동원령을 내릴 예정이지만, 그들이 도망치는 것까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이안 경께서 이룩한 업적은 들었습니다. 분명 큰 힘이 되어 주실 겁니다. 뜻을 함께할 용병들을 모아서-"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무려 두 개였다.

지원군 모집. 벨리움 항전.

루카스가 주던 퀘스트인데, 이런 식으로도 받을 줄이야.

생각하며 퀘스트 창을 닫은 이안은, 아직도 떠들고 있는 밀드레드를 바라보았다.

불안을 잊기 위해 필사적인 젊은 기사.

"밀드레드 경."

"루 솔라께서도 우리를- 예?"

"경도 함께 가시오?"

"…예."

"그럼 헛소리 그만 하시오. 경도 이게 죽으러 가는 거랑 다를 바 없단 건 이미 아시잖소."

"...."

밀드레드가 입을 몇 번 달싹였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피식한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그러니 차라리 현실적인 제안을 하시오. 살아 돌아오면 받게 될 보수라던가."

밀드레드의 눈이 커졌다.

비로소 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이안 경께는 최소한 제국 금화 오십 개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경이 모집한 이들에게도 스무 개씩 드리겠습니다. 모두, 공평하게."

"최소라면 더 받을 수도 있단 건가?"

"공적에 따라서 충분히요."

"그래… 하지만 진짜 공평하려면 전부 오십 개씩 주셔야지. 어차피 살아 돌아와야 받을 수 있을 텐데."

"맞습니다. …그렇게 하죠. 교단의 지원이 있으니, 허락될 겁니다."

"그리고?"

"또요…? 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트라벨가의 병기고에는 제국 강철로 만든 물건들이 많다던데."

"…그건 군에 요청해야 될 일인데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없던 일이 될 계약인데. 그 정도도 자신 없으시오?"

"...."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된 밀드레드가, 이윽고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이안 경뿐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용병이 하나씩 받을 수 있도록요. …또 이 조건을 붙이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훌륭하군. 이제 마지막 절차만 남았소."

"마지막… 절차요?"

"방금 한 계약을 문서로 써 오시오. 군단의 인장이나 교단의 인장까지 찍어서."

"...."

이렇게까지 하리라곤 예상 못한 듯 밀드레드가 입을 뻐끔댔다.

이안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는 귀족이나 교단과의 구두 계약은 전혀 믿지 않았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의 계약은 특히나.

방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또 초대할 때 뜸 들이기만 해 봐. 이안한테 다 이를…."

샬롯에게 내뱉으며 들어서던 테사이아가 멈칫했다. 안대 두른 얼굴을 밀드레드 쪽으로 돌린 그녀가 덧붙였다.

"손님이 있었네."

"...."

밀드레드가 당황한 듯 둘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약서 준비해 오시오. 의뢰는 그때부터가 시작이니까."

"…아!"

화들짝 일어선 밀드레드가 곧바로 방을 나섰다. 다급하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저거?"

"의뢰인이다."

그녀를 지나쳐 느긋하게 복도로 나서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이번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은 어디 가?"

"식사하러. 둘 다 따라와라."

***

어느새 주점은 고요했다.

트루드를 비롯해 말없이 앉아 있던 몇몇이, 이안의 턱짓에 두 말 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괜찮은 걸까요?"

음식을 놓으며 여급이 물었다.

그녀를 흘깃 올려다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여기 잘 붙어 있으면, 죽지는 않겠지."

"그렇겠죠?"

"아마도."

여급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몸을 돌렸다. 그녀가 주방 너머로 멀어지자, 테사이아와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거리 분위기 장난 아니야. 다들 축 쳐져서, 관문은 바글대고 병사들도 엄청 바쁘게 움직여."

"출진을 준비하는 것 같던데.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이해 안 되는 짓에, 내가 동참하게 됐다."

스튜를 퍼먹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샬롯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라고…?"

"방위군을 따라 벨리움으로 갈 거다. 용병들을 모아서."

"벨리움이라면… 그때 우리가 지나친 그 계곡?"

"그래. 너희는 자세히 알 필요 없어. 너희 둘은 이번 일에서 빠질 테니까."

이어진 말에 샬롯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빠지다니. 네가 가는데 내가 어떻게 빠진단 말이냐?"

"맞아. 우리 셋은 한 몸이잖아."

"한 몸은 너희 둘이지, 내가 아니라."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나무 수저를 테사이아를 가리켰다.

"몇이나 살아남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중 누군가는 이 녀석이 싸우는 걸 보게 될 거다. 그럼 뒷수습이 피곤해져."

"그럼 귀쟁이만 두고 가는 건…."

"알 텐데. 너희 둘은 한 몸이야. 네가 곁에 있어야 내가 안심하고 싸울 수 있을 거다."

"...."

샬롯의 입이 닫혔다.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너도 샬롯과 있는 게 더 안심될 테고."

"사실 야옹이가 나 없인 안 되는 거지만."

"그러니까 당장 짐을 싸라. 곧바로 야인 정착지로 가. 그 녀석들은 반겨줄 거다. 그리고 정착지를 함께 지켜. 벨리움이 뚫리지 않더라도, 성벽을 넘어가는 것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냥 여기 조용히 있으면… 읍."

테사이아의 입을 틀어 막은 샬롯이 그대로 그녀를 들고 일어섰다.

"그렇게 하겠다. 다만… 무사히 돌아와 주면 좋겠군. 반드시."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걱정 마라. 네 꼬리를 안고 죽진 않을 테니까. 올라가는 김에, 트루드도 내려오라고 해."

"…꼬리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다."

나지막이 덧붙인 샬롯이, 반항을 포기한 듯 축 늘어진 테사이아를 든 채로 몸을 돌렸다.

이젠 걱정을 다 해 주네.

낮게 실소한 이안은 다시 묵묵히 앞에 놓인 음식을 입에 넣었다.

트루드가 배를 긁으며 내려온 건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였다.

잠들었다 깬 듯,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부르셨소…?"

빈자리에 걸터 앉은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씹던 고기를 삼킨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계속 남을 거냐?"

"…그러니 아직 있는 거요."

"병사들이 벨리움 요새로 떠난 거다. 아마 오늘 오후부터 물자부터 옮기기 시작할지도 모르지."

"벨… 리움 말이오?"

"그래. 아마 도시에 남은 용병들도 동원할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아니, 너희에게 남은 선택지는 세 개야."

스튜를 우물대며, 이안이 세 손가락을 펼쳤다.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헐값에 따라가거나, 또 하나는 밤중에 튀거나."

"…마지막 하나는 뭐요?"

"나한테 미리 자원해서 함께 가거나."

"...?!"

"위험할 거다. 난 너희 사정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싸울 거니까. 대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살아 돌아오면 금화 오십 개와 제국 강철로 만든 병장기를 손에 넣을 수 있지."

"제국제라고…?"

"선택은 네 몫이야."

트루드의 입이 벌어졌다. 잠은 이미 진작 달아난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안은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그가 다시 트루드를 마주 본 건, 앞에 놓인 접시를 전부 깨끗이 비운 다음이었다.

"어쩔래?"

술로 입을 헹군 이안이 물었다. 그때까지 수많은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던 트루드가, 이윽고 내뱉었다.

"대장… 을 따르겠소."

"좋아."

주점의 문이 열린 건, 이안이 싱긋 미소 지은 그때였다.

숨을 헐떡이는 밀드레드가, 손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계약서… 가져 왔습니다."

오늘은 타이밍이 잘 맞는군.

일이 잘 풀릴 징조인가, 생각하며 트루드를 마주 본 이안이 턱짓했다.

"보이지? 그럼 당장 일어나서, 도시에 남은 놈들에게 죄다 말을 전해라. 살아 돌아오는 놈들은, 모두 같은 보수를 받게 될 거야. 숫자가 많을수록 살아 돌아올 확률도 높아지겠지."

"...! 알겠소!"

눈을 치켜뜬 트루드가 우당탕, 의자를 밀치며 달려 나갔다.

그 사이 느긋하게 일어나 밀드레드에게 다가간 이안이, 그의 손에서 받아든 계약서를 차근히 눈에 담았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주점으로 내려온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래, 훌륭한 계약서군."

비로소 계약서를 말아 든 이안이 밀드레드를 마주 보았다.

"내 친구 둘을 북문 밖으로 먼저 내보내 주실 수 있으시겠소, 밀드레드 경?"

"…예. 못 할 것 없지요."

밀드레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안이 비로소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용병들에게도 동원령이 내려진 건, 마차 여러 대가 북부 관문을 넘은 오후였다.

그날 밤 남아 있던 용병들 몇이 몰래 성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이안은 스무 명 남짓한 용병들을 이끌고 북문을 나섰다.

벨리움으로 향하는 행렬의 가장 끝 열이었다.

#113화

먹구름 자욱한 하늘 아래.

"어머니…."

"루 솔라여… 부디 찬란한 광명으로 필멸자를 굽어 살피시고…."

벨리움으로 향하는 급속 행군에 들어선 병사들의 사기는, 시작부터 바닥을 치고 있었다.

기도와 중얼대는 목소리가 연신 이안의 귓가를 스쳤다.

"생각 잘 못 한 것 같은데…."

"무조건 죽겠군… 제기랄…."

그건 이안의 뒤를 따르는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 한들 바꿀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닌 데다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임에선 고작 10분만 버티면 도착했던 지원군이, 현실이 된 지금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반나절. 한나절. 어쩌면 하루도 넘게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거기다 지금은 용이라는 큰 변수도 존재했다.

'놈이 원하는 게 왕국의 재건이 아니라 복수일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망자 군단의 목표는 왕관이 있는 트라벨가나 여왕의 목을 벤 이안일 터였다.

그건 벨리움 요새로 밀려오는 망자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지리란 의미였다. 게임에서처럼 북부 전역으로 흩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사실이라 한들,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병력이 게임보다 늘어났지만, 망자 군단도 그렇겠지. 그래도 아예 큰 틀이 바뀌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거인 전사 위주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멈추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뿐.

게임에서의 기억과 스치듯 본 공략 글의 내용, 그리고 북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이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행군은 새벽이 되어서야 멈췄다.

기진맥진한 병사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냄비 여러 개에 보존 식량을 때려 넣은 스튜를 끓였다.

기도할 기운도 남지 않은 병사들이 줄지어 스튜를 배급받았다. 용병들과 함께 줄에 선 이안은, 천막도 치지 않고 모여 앉은 겔루드 장군과 수뇌부들을 힐끗 눈에 담았다.

'저쪽도 초상집이 따로 없군.'

밀드레드를 포함한 기사들이 그에게 연신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마법사인 게 분명한 두툼한 로브를 걸친 남자도 때때로 뭔가를 첨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표정했지만, 희망적인 얘기가 오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알아서들 하겠지.'

저자들도 죽고 싶진 않을 테니까.

용병들이 피운 모닥불에 자리를 잡은 그는, 꿀꿀이 죽이나 다름없는 스튜를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는 곧바로 장비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를 연신 힐끔대면서도, 용병들은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와 직접 엮인 적은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어쨌든 소문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벨가에 발을 들인 첫날 설산 두꺼비 여관의 용병들을 죄다 두들겨 팬 폭군. 야인 전사들의 존경을 받는 전사. 방위군 소속의 기사가 직접 찾아와 의뢰를 제안할 만큼 뛰어난 실력의 용병.

티르 엔의 성전사라던가 북부의 대전사 같은 믿기 힘든 소문들은 차치하더라도, 용병들의 존중과 두려움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그… 대장."

용병들의 시선에 떠밀려 입을 연 건, 결국 트루드였다.

단검 날을 닦고 있던 이안이 시선도 주지 않고 내뱉었다.

"뭐."

"술이라도 한잔하고 자면 안 되겠소? 다들 말은 안 해도, 불안해하고 있소. 그냥 두면 새벽에 최소 몇은 도망칠 거요."

"...."

이안은 비로소 몇 개의 모닥불에 나눠 앉은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눈빛들.

"…내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대로들 해라."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튀고 싶은 놈은 튀어도 돼. 병사들에게 걸리면 목이 매달리겠지만, 적어도 나는 막지 않을 거다. 그러니 알아서들 해."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인 듯, 몇몇 의 인상이 구겨졌다.

트루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대장, 아무리 그래도-"

"목숨이 중요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살아남을 자신이 없고 두렵다면 그렇게 해야지. 대신 끝까지 따라오고 살아남은 놈들의 보상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받게 해줄 거다. 계약대로."

가라앉은 눈으로 용병들을 대충 돌아본 이안이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알아서들 해. 귀찮게 하지 말고."

그가 다시 손에 든 운철 단검을 기름 먹인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무심함을 넘어 무책임한 모습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용병들의 표정은 오히려 풀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안은, 그들 모두가 죽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

"…그렇다면야, 뭐."

서로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이던 용병들이, 이윽고 하나둘씩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육포를 비롯한 보존 식량들이 담긴 포장지도 꺼내져 나왔고, 두런두런 이야기가 번졌다.

"이보쇼. 대충 나눠 드시오."

몇몇은 곁을 지나가는 초병들에게 술을 건넸다.

평소라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을 테지만. 바로 며칠 뒤면 다 같이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은 그런 경계 따윈 의미 없었다.

"…고맙소."

술을 받아간 병사가 자신의 모닥불로 가 동료들과 나눠 마셨다.

용병들로부터 시작된 느슨한 분위기가 조금씩 주위로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취기가 오른 용병 몇몇이 나지막한 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우렁차기보단 애잔한 느낌이 드는 가락이었다.

북부에서 전해 내려오는 노래인 듯, 인근의 다른 용병들은 물론 북부인 병사들까지도 중얼대듯 노래를 따라 불렀다.

겔루드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굳이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든 술잔을 홀짝이며 야영지의 병사들을 눈에 담을 뿐.

"...."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는 건 이안 뿐이었다.

죽으러 간다고 광고들을 하는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트루드의 술을 한 모금 빼앗아 마시고는 그대로 모포에 들어갔다.

모닥불 타들어 가는 소리 만큼이나 잔잔하게 이어지던 돌림 노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다.

곯아떨어진 자들의 요란한 코골이가 그 빈 자리를 채웠다.

***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행군이 예고 없이 멈춘 건,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숲길 한복판.

"저건 또 뭐야…?"

"야인들 같은데. 지원군인가…?"

앞에서부터 이어진 술렁임에, 이안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열 엎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저것들이….'

행렬 앞을 막아선 일련의 무리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등에 멘 활과 허벅지의 화살집. 모피를 이어붙여 만든 옷과 망토. 저마다 기다란 장창이나 도끼를 손에 쥔, 야인 전사들.

"그러니까, 벨리움 요새에 함께 가고 싶단 말인가?"

겔루드 장군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산맥에서 저주받은 망자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대전사께서 허락하신다면요."

대답하는 건 다른 전사들보다 작은 체구의 소년, 아스켈이었다.

"대전사…?"

"장군께 허락받는 게 아니라…?"

말에 탄 기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용맹한 전사들이 합류한다면 환영할 일이지. 북부의 정신이 아직 살아 있음이 감격스럽군."

기꺼운 얼굴로 말한 겔루드가, 이내 덧붙였다.

"헌데 그대들이 말하는 대전사는 누구를 뜻하는 것이지?"

"그건…."

"아마 나를 말하는 걸 거요."

대답은 아스켈 대신, 겔루드의 뒤쪽에서 이어졌다.

"...?"

고개를 돌린 겔루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용병들의 우두머리인 이안 호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 님…!"

전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한 건 그때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들이 이안을 향해 고개를 슬쩍 숙였다.

"...."

겔루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멈춰 선 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에 대한 정보는 휘하의 밀드레드를 통해 알고 있었다.

교단이 그 이름이 기록될 정도의 업적을 쌓은 유능한 용병이자,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

그럼에도 곁에 둘 생각을 하지 않은 건, 내심 정말 고귀한 자가 떠돌이 용병 일이나 할 리가 없다 여겨서였다.

물색을 밝히는 모습 역시,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하지만 이 순간, 겔루드는 그 평가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 자존심 강한 북부의 야인 전사들이, 진심으로 그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북부인 같지도 않은데….'

이안이 그를 올려다본 건 그때였다.

"잠시 이들과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겔루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끝내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럴 겁니다."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전사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움찔한 몇몇이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에 선 둘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

"…면목이 없군."

샬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옆에 선 테사이아가 그녀의 팔뚝을 때렸다.

"없긴 뭐가 없어. 우린 말렸어, 이안. 얘들이 멋대로 난리를 치더니, 대전사를 따라야 한다고 뛰어나온 거라고."

"...."

그래, 그랬겠지. 생각하며, 이안이 비로소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아스켈이 결연한 눈으로 내뱉었다.

"대전사께서 망자들과 싸우시는데, 저희들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따르게 해 주세요."

"하…."

한숨과 함께, 이안이 다른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죄다 두들겨 패서 어디 하나쯤 부러뜨리는 게 아닌 이상, 말이 통하지는 않을 것 같은 눈빛들이었다.

'말은 대전사 어쩌고 하면서, 순 제멋대로라니까.'

왜 이렇게 못 죽어서 안달인지.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북부의 전사들. 이들과 함께 벨리움 요새로 가는 게 첫번째 목표였다.

야만 전사는 북부에서 끝까지 날로 먹었나 보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내뱉었다.

"너희가 다 나오면 마을은 누가 지키고."

"전사들을 제법 남겨 뒀습니다. 정당한 승부를 통해 결정지었죠. 게다가 노인부터 여인까지 모두 싸울 줄 아니, 별일 없을 겁니다."

"별일 없긴…."

이안은 아스켈을 잠시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이 놈을 비롯한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 분위기를 주도한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이들이 합류하면 큰 힘이 되긴 할 터였다. 이미 병사와 지휘관들의 기대에 찬 눈빛이 뒤통수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기다려라."

내뱉은 그가 몸을 돌려 겔루드에게 다가갔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저들이 합류하면 정착민들은 위험에 노출될 겁니다. 그러니 남은 주민들은 트라벨가에 들여보내고 싶습니다만."

"관문을 닫아 버렸을지도 모르니, 통행증을 써 달란 건가?"

"예."

뜻밖의 제안이라는 듯 겔루드가 턱을 긁적였다. 물론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는 부탁이었다.

곧바로 말에서 내린 그가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보아하니 저들은 자네 말만 들을 것 같은데. 임시 백인 대장으로 임명하겠네, 이안 경. 오늘부턴 회의에도 참여하게."

"…그러죠."

이안이 한숨을 삼키며 대답하자, 겔루드가 한쪽 장갑을 벗었다.

중지에 인장이 새겨진 반지가 드러났다.

"통행증은 바로 만들어 주지."

겔루드가 기사들에게로 몸을 돌리는 사이, 다시 전사들에게 돌아온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들었겠지. 정착민들은 전부 트라벨가로 보낼 거다."

"감사합니다, 대전사님…!"

이안은 대답하는 아스켈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이끌고 가는 건 네 역할이다, 아스켈."

"예…? 하지만-"

눈을 치켜뜨는 아스켈을 무시한 채,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 녀석을 도와라. 바로 움직여. 반항하면 끌고라도 가."

"그러지."

대답한 샬롯이, 망설임 없이 아스켈의 뒷목을 후려쳤다.

휘청 쓰러지는 녀석을 그대로 붙잡아 어깨에 들쳐 맨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트라벨가에서 기다리겠다."

"무사히 돌아와야 돼. 이안."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테사이아가, 겔루드에게로 향하는 샬롯의 뒤를 따랐다.

"...."

이안은 남은 전사들을 눈에 담았다.

발레리는 물론, 회색 계곡 출신이라던 볼베르도 끼어 있었다.

나한테 얻어터진 놈들 투성이군.

"명령 똑바로 따라라. 멋대로 굴면 어디 하나 부러질 줄 알아."

이윽고 내뱉은 말에 전사들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농담 아닌데.

생각하며 한숨 쉰 이안이, 행렬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따라 와라. 우린 맨 뒤니까."

***

벨리움에 도착한 건 이른 새벽이었다.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곧바로 쉴 수는 없었다.

겔루드 장군은 곧바로 요새의 상태를 확인하고 수성을 준비했다.

굳게 닫힌 관문 위로 몇 겹의 빗장이 더 덮였다. 해자에는 오물 대신 땔감과 기름이 부어졌고, 성벽과 망루 위에는 투척을 위한 바위가 켜켜이 쌓였다. 준비해 온 몇 개의 노포도 적당한 위치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망자 군단을 맞이할 최소한의 준비가 끝나고서야, 이안을 비롯한 병사들은 간이 막사에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물론, 휴식은 길지 않았다.

"...!"

불현듯 눈을 뜬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두운 막사를 돌아본 그가, 이내 발치의 트루드와 발레리를 걷어찼다.

화들짝 깨어난 그들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전부 깨워. 당장."

"갑자기 그게 뭔…."

멍하니 되묻던 트루드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설마…?"

"그래."

느슨하게 풀어뒀던 흉갑의 이음새를 조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놈들이 온다."

서로를 돌아본 트루드와 발레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튀어 올랐다.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데엥- 데엥- 데엥-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114화

막사 앞.

'몇 시쯤 된 건지 전혀 모르겠군.'

이안은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하늘을 볼 여유가 있는 건 그뿐이었다.

"어서 집결해! 꾸물대지 마라!"

"장비를 점검해라! 빠뜨려도 다시 막사에 돌아갈 여유는 없으니까!"

다급한 지휘관들의 외침과 허둥지둥 집결하는 병사들. 각종 보급품을 운반하는 병사들까지, 사방이 어지러웠으니까.

집결한 병사들은 그대로 줄지어 성벽으로 향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몸에 새겨진 대로 움직이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어이! 빨리들 모여!"

"이러다 우리가 제일 늦겠네, 씁."

가장 먼저 준비를 시작했던 용병과 야인 전사들은 정작 이제야 모여들고 있었다. 개개인은 쓸 만할지 몰라도, 군단의 관점에선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겔루드가 이안을 백인 대장으로 임명한 건, 이것들을 알아서 잘 통제하라는 의미였을 터였다.

물론, 끝까지 이것들을 지휘할 생각은 없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지.'

"용병들 다 모였소."

"전사들도 모두 모였습니다."

트루드에 이어 발레리가 우물대며 말했다.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눈빛이 이안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을 덤덤하게 마주 보면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성벽 위로 올라가면 뿔뿔이 흩어져라. 알아서들 적당히 빈 자리를 찾아가. 그리고 가까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라."

"그럼, 대장은…?"

트루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가장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싸울 거다.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무모한 짓도 하지 마라. 특히 너희들."

이안이 야인 전사들을 싸늘하게 훑었다.

"내 뒤를 따라다닌다든가, 흥분해서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다든가 하는 짓거리는 절대 하지 마라. 자리를 지켜. 그러기만 해도 성벽을 기어오르는 놈들의 골통을 원 없이 쪼갤 수 있을 거다."

용병과 야인 전사를 번갈아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너희 개개인의 능력은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뛰어나. 그러니 너희가 병사들을 지킨다고 생각해라. 잊지 마. 우린 지원군이 도착하는 게 목표야. 알아들었나?"

"예!"

전사들과 용병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대답들은 참 잘하는데….

못 미더운 듯 혀를 찬 이안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계곡 저 너머까지 이어진 성벽이 가까워졌다.

전에도 느꼈지만, 게임일 때보다 훨씬 길고 높았다. 그만큼 지켜야 할 범위가 넓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확실히, 혼자 전부 감당하긴 쉽지 않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은 성벽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올라갔다. 사방이 침침한 와중에도 횃불 하나 없이 도열 한 병사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장궁을, 한 손에는 화살을 든 그들이 떨리는 숨을 골랐다.

이안은 계단 끝에서 뒤를 돌았다.

"선두는 제일 끝으로 가라. 잊지 마. 너희가 지키는 거다."

그는 곁을 스쳐 지나가는 용병과 전사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멋대로인 것들에게 사명감을 조금이라도 심어 줘야 했다.

마지막 하나를 바로 옆으로 보낸 그가, 비로소 성벽 위에 발을 들였다.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선이, 비로소 성벽 너머의 풍경을 훑었다.

"...."

어둑어둑한 잿빛 계곡 저 너머, 이상할 정도로 낮게 깔린 새카만 먹구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웠다.

안개처럼 꿈틀대는 질감을 가진 어둠이었다.

'검은 벽이 따로 없네….'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게임에선 본 적 없는 현상이라는 게 더 확실해졌다.

어쩌면 단순히 난이도만 어려워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거인 여왕을 죽여야만 해금되는, 벨리움 항전 퀘스트의 진면모가 아닐까. 물론, 이제 와선 중요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어둠을 뚫고 튀어나오고 있는, 저 수많은 푸른 안광들.

거인은 물론 인간과 난쟁이가 뒤섞인 언데드들이, 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짐승처럼 땅을 내달리고 있었다.

어두침침하고 칙칙한 환경과 어우러져, 수많은 푸른 반딧불들이 꿈틀대며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덤덤한 감상을 느끼는 건 이안뿐일 터였다.

"루 솔라여… 부디 이 필멸자를 가엽게 여기시어…."

"제기랄… 시발… 뭐가 저렇게…."

병사들의 겁에 질린 속삭임과 거친 숨소리가 쉬지 않고 귓가를 스치고 있었으니까.

"이안 경."

그 사이에서 번진 익숙한 목소리에, 비로소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밀드레드였다.

검을 든 그가 태연한 얼굴로 이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용병과 야인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던데. 왜 혼자 움직이시는 겁니까?"

"한곳에 모여 있는 것보단 그게 더 도움 될 것이오. 나도 마찬가지고."

내뱉으며 이안이 멈춰 섰다.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관문 중앙에 툭 튀어나온 망루에, 겔루드 장군과 경호병 몇, 그리고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보였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눈앞에 두니 느낌이 다르군요. 어쩌면 오늘이, 루 솔라의 곁으로 가게 될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계곡으로 달려오는 망자들을 눈에 담으며, 밀드레드가 내뱉었다.

싸우기 전부터 죽음을 받아들이다니. 나약했지만,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저런 광경을 마주하면 아마 대부분은 비슷한 결론을 내릴 테니까.

"난 죽을 생각 없소. 우린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거요."

덤덤하게 내뱉으며, 이안은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물론 당장 쓸 일은 없었지만, 전투 태세는 갖춰 둘 생각이었다.

어느새 선두의 망자들이 계곡에 접어들고 있었으니까.

"...?"

검을 고쳐 쥐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신성력이 번지고 있었다.

투쟁의 축복.

'이놈이 웬일로 도와주네.'

이안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마력을 아껴서 사용해야 하는 지금, 투쟁의 축복이 활성화되는 것만큼 좋은 상황은 많지 않았다.

밀드레드의 놀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이안 경, 그건 대체…?"

"카르하가 축복을 내리고 있는 거요."

"카르하가…? 그럼, 귀하가 정말 북부의 대전사란 말씀이십니까…?"

"이건 그저 카르하가 멋대로-"

내뱉던 이안이 멈칫했다.

신성력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미간을 찌푸린 그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신성이 그의 몸속으로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후끈한 열기가 아랫배에 응축되면서 점점 더 뜨거워졌다.

'아니, 이게 대체, 시발…?'

배 속에서 용암이 들끓는 듯한 느낌에, 이안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안 경, 괜찮으십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데요…?"

밀드레드가 더듬대며 물었지만, 그는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몸속이 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비명을 내질렀을 터였다.

그리고 그때, 한없이 뜨겁게 응축되어 있던 열기가 천천히 위로 솟아올랐다. 용암이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죽이기라도 할 셈이냐고. 시발아.'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열기를 억누르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건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빨라졌고, 거칠게 분출되려 했다.

결국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이안은, 움츠렸던 몸을 활짝 젖히며 솟구치는 열기를 토해냈다.

"오오오오오-!"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함성이 대기를 울렸다.

***

"...?!"

망루에 서 있던 겔루드 장군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몸이 울리는 듯한 전투 함성.

"저건…?!"

그 근원지를 확인한 겔루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붉은 신성력의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폭발하듯 번지고 있었다.

그 중심부에 선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하는 이안 호프였다.

신성력의 파장이 성벽 위를 휩쓸고, 겔루드가 선 망루도 스치고 지나갔다.

파장에 담긴 열기에 겔루드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사이.

"오오… 오오오오-!"

"카르하여-!"

야인 전사들의 포효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는 그들의 전신에도 붉은 신성력이 맺혀 있었다.

붉은빛은 심지어, 몇몇 용병과 병사들에게도 감돌았다.

"북부의 초인이여-!"

장궁을 움켜쥔 북부인 병사가 울부짖는 광경을 묘한 눈으로 지켜보던 마법사, 멘데스가 이윽고 내뱉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정말 말로만 듣던 북부의 대전사인 모양입니다. 흥미롭군요. 카르하의 축복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나 역시 믿지 못했었네만…. 사실이었군…."

탄식하듯 읊조리며, 겔루드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포효를 끝낸 그는, 인상을 와락 구긴 채 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카르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면, 역사에 남을 만한 전투가 될지도 모르겠군."

이윽고 읊조린 겔루드가 결연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계곡을 가득 채우며 밀려드는 푸른 안광들이 눈에 들어왔다.

루 솔라 교단으로 개종하긴 하였으나, 그 역시 카르하의 업적을 듣고 자란 북부인이었다.

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손에 쥔 검을 으스러질 듯 움켜쥔 그가,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전군, 사격 준비-!"

***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화살을 재장전하는 병사들의 뒤에 선 이안이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백정 새끼 같으니.'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전투 함성이라니.

아마도 퀘스트에 딸려 오는 부가 이벤트 같은 것일 터였다.

투쟁의 축복은 광역으로 적용되는 스킬이 아니었으니까.

짐작 가는 바는 북부의 전사들 퀘스트뿐이었다. 아마도 이건 일련의 야만 전사 전용 퀘스트의 대미를 장식하는 퀘스트일 터였다.

부가 이벤트 역시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준비되어 있던 것이리라.

'현실이 된 지금은… 변덕을 부린 거겠지.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었거나.'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어쨌건 결과적으로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야인 전사들까지 전부 축복을 받은 상태였으니까.

몸에 깃든 신성력의 밝기로 미뤄 볼 때 그의 축복만큼 강하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망자 군단을 상대로는 유의미한 전투력 상승을 기대할 수 있었다.

'누군 받고 누군 아니라는 건… 자기를 섬기는 자들한테만 축복을 내린 건가. 신도도 필요 없는 놈이, 쪼잔하게 구는군.'

성벽 위의 모든 병사들에게 축복을 내렸다면, 전투가 아주 쉬워졌을 텐데.

"발사!"

그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겔루드가 또다시 외치자 화살이 일제히 솟구쳤다.

흐릿한 포물선이 쏟아져 내렸다.

효율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두개골이 깨져 사그라드는 안광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화살은 망자들에게 별다른 대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드문드문 섞인 거인 전사들에게는 아예 의미가 없었다. 놈들에게 타격을 주려면 노포를 쏴야 했다.

다행히 지휘관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지, 몇 대 없는 노포는 오로지 거인 전사들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두 병사가 양쪽에서 온 힘을 다해 도르래를 돌려 사위를 당기고, 화살을 장전하는 병사는 위로 삐죽 튀어나온 실루엣만을 겨냥했다.

"재장전!"

"재장전!"

어쨌거나, 일제 사격도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거기다 조준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망자 군단은 어느새 계곡을 득시글하게 뒤덮고 있었으니까.

먹구름 아래 드리운 어둠은 아주 천천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왜 같이 오지 않는 거지. 속도에 제약이 있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안이 게임에서 경험한 망자들의 공격은, 현실이 된 지금은 1페이즈에 불과할 터였다. 저 어둠이 요새를 뒤덮은 다음부터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리라.

'그러니까 미지의 영역에 접어들기 전에 최대한….'

이안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은 병사와 지휘관들이 활약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머잖아 개인의 용력이 전투의 균형을 좌우하는 순간이 오게 될 터였다. 이안이 움직이는 건 그때였다.

'나 혼자서 다 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가까워진다! 조준해서 쏴!"

몇 번의 일제 사격이 반복된 후, 마침내 지휘관들이 성벽 앞에 다가섰다.

망자 군단이 계곡 중턱, 관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까지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화르르르-

허공에서 피어오른 불덩어리들이 주위를 밝힌 건 그때였다. 겔루드 앞에 나선 마법사가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안의 그것과 비슷한 크기의 춤추는 불꽃이 연달아 쏘아져 나갔다. 폭발이 망자들의 물결을 뒤덮었다. 산산이 흩어진 뼛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마법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화르르- 콰앙-!

화염구가 달려오는 거인 전사 하나의 머리통을 불태웠다.

병사들도 쉬지 않았다. 손에 피가 맺히도록 화살을 쐈고, 그 사이의 야인 전사들과 용병들도 장궁과 쇠뇌를 쉬지 않았다.

"불을 붙여라!"

지켜보던 지휘관들이 소리쳤다.

불붙은 화살 몇 발이 연달아 해자 위로 떨어졌다.

화르르르-

미리 쌓여 있던 기름 먹은 장작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이 번지면서 장벽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끝내 살아남은 선두의 언데드 몇이 그 앞에 도달했다.

주춤대며 멈춰서는 놈들의 머리통으로 화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끝끝내 해자를 뛰어넘은 언데드 몇몇이 성벽에 들러붙었다. 놈들은 벌레처럼 성벽을 기어올랐다.

몇몇 병사들이 활을 내려놓고 옆에 쌓여 있던 돌을 들어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콰지직-

하나하나가 상당히 묵직한 바위였다. 언데드들의 낡은 두개골 정도는 충분히 박살 내고도 남았다.

훌륭한 대응의 연속이었다. 이들이라면 망자들이 끝끝내 성벽을 기어오르더라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게임에서도 그랬다.

'…저것들만 없다면 말이지.'

가라앉은 눈으로 성벽으로 밀려드는 물결을 훑던 이안의 시선이, 마침내 한 곳에서 멈췄다.

저만치, 노포 사격과 마법 공격에서 끝끝내 살아남은 거인 하나가 성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게임에선 저것들이 성벽에 닿으면서부터 균형이 무너졌었다.

현실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그러니까… 이번에는 한 놈도 붙지 못하게 만들 거다.'

생각하며 단죄의 검을 고쳐 쥔 이안이, 비로소 몸을 날렸다.

붉은 궤적이 성벽을 가로질렀다.

#115화

"막아-! 화살을 쏴!"

사색이 된 지휘관이 성벽 아래로 다가오는 거인 전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성벽은 놈들을 막기 위해 쌓았음을 증명하듯 더 높았지만. 그 사실이 지금 병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두개골 위에 살점만 얇게 펴 바른 듯한 끔찍한 머리가, 그들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놈이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으아아아-!"

병사들이 놈의 머리를 향해 화살을 날려 댔지만 역부족이었다. 거인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비켜라-!"

소리친 건 전신에 붉은 신성력을 머금은 야인 전사였다. 투창 자세를 잡은 그가, 어금니가 으스러지게 이를 악물며 창을 내던졌다.

쒸에엑- 퍼억-!

도끼를 내리치려던 거인의 몸이 기우뚱 뒤로 밀려났다. 치켜든 놈의 얼굴 한쪽에 창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죽은… 건가…?"

병사 하나가 내뱉을 찰나, 거인이 자세를 다잡았다. 놈이 분노한 숨소리를 내며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광대를 꿰뚫은 창대에서 부스러진 살 가루가 떨어졌다.

"…힘이 부족했나."

야인 전사가 혀를 찰 찰나였다.

"아니. 잘했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이안이 내뱉었다. 그가 그대로 거인을 향해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단죄의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지지직-

검날이 거인의 머리를 갈랐다. 정수리부터 턱 윗부분까지 완전히 쪼개진 거인의 몸이 휘청대며 허물어졌다. 몸을 움츠린 이안이 놈의 머리를 힘껏 박찼다.

붉은 궤적이 포물선을 그렸다.

촤아악-!

성벽 위에 미끄러지듯 착지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입을 떡 벌린 기사를 바라본 그가, 곧바로 내뱉었다.

"던질만한 창, 더 없나?"

"이, 있을 겁니다. 인원수 몇 배로 챙겨 왔습니다."

기사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야인 전사를 턱짓한 이안이 내뱉었다.

"그럼 최대한 전부 성벽 위로 올리라고 해. 이 녀석들이 거인을 저지해 줘야 하니까."

내뱉은 이안의 시선이 야인 전사에게로 돌아갔다.

"하나로 안 되면, 여러 개 던져라. 그러다 보면 내가 올 거야."

"예, 대전사…!"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이안은 이미 저만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또 다른 거인이 성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콰직-! 퍼엉-

'또 한 놈….'

거인의 눈두덩이 깊이 찔러 넣은 검날에 진공 폭발을 시전한 이안이, 그대로 놈의 머리를 박차고 솟구쳤다.

투쟁의 축복과 바람 칼날에 더해 집중력과 육감까지 고도로 발휘된 그는, 지금 보통 사람은 불가능한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면 엄청난 근육통과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무기력감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것도 살아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터억-

성벽 끝에 착지한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발레리.

이안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분의 창이 성벽 위로 올라올 거다. 거인이 다가오면 그걸 집어서 대가리가 부서질 때까지 던져. 시간만 끌어도 돼. 내가 올 테니까."

이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는 멈추지 않고 성벽 앞의 상황을 훑었다.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성벽에 도끼를 박아 넣는 데 성공한 거인 전사는 나오지 않았다.

게임의 벨리움 항전 퀘스트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거인 전사들이었다.

놈들은 성벽을 부수려 하는 데다가, 성벽에 붙어 있기만 해도 언데드들이 놈들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와 성벽 위로 뛰어들기 때문이었다.

계속 방치하면 끝내 이 낡아빠진 성벽을 부수는 데에 성공했고, 그때부터는 상황이 더 피곤해졌다.

언데드들이 그 사이로 기어들어 가 요새 내부로 침투하는 데다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 뒤에서도 병사들을 덮쳤으니까.

그때쯤 되면 게임 오버 화면을 보게 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안의 일 순위 목표는 처음부터 거인 전사였다.

그것만 제대로 수행해 내더라도, 전투의 균형을 유지하는 무게추의 역할을 해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셈이었다.

콰직-!

"돌을 계속 떨어뜨려! 이봐 보급대! 돌 계속 운반해! 우릴 다 죽일 셈이야?!"

"기어 올라온 놈들과 싸울 때는 야인 전사들 옆에 붙어! 보조만 맞춰라!"

사방이 고함과 비명, 폭음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전황은 전혀 나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야인 전사들도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콰직-!

"카르하여-!"

전신에 신성력을 머금은 그들은, 말 그대로 야만인처럼 날뛰었다.

이안이 그들을 넓게 퍼뜨린 덕분에, 언데드들이 기어오르는 상황 속에서도 전선에 구멍이 뚫리는 일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소 위기에 처한 전선이 있더라도, 그 상황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콰직-! 빠각-!

붉은 궤적을 흩뿌리며 달려온 이안이 망자들을 말 그대로 분해해 버리고는 지나쳤으니까.

"저것이 북부의 대전사…."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조차 듣지 않고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뇌리에, 불과 한 시간쯤 전까지만 해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 번지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

'저 새낀 언제까지 주문만 외우려는 거지.'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준비하기에.

바닥을 구르며 혀를 찬 이안이, 관문 망루 위의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화염구를 연신 날려 대던 놈은, 좀 전부터 지팡이를 치켜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력의 응집이 느껴지는 걸 보면 주문을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넋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북부의 초인이여-!"

저만치의 성벽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거인과, 놈을 향해 창을 내던지는 야인 전사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으니까.

'시발, 하필 또 반대편이야….'

이를 간 이안이 성벽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내달렸다.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높아진 민첩과 집중력, 육감을 믿고 움직일 수밖에.

퍼석- 콰직-!

성벽 위로 올라온 언데드 몇을 박살 내며 도착한 이안은, 이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이번에는 조금 늦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벽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을 때, 거인 전사는 이미 머리 위로 치켜든 도끼를 내리치고 있었다.

둔탁한 궤적을 그리는 도끼날을 응시하던 이안의 눈매가, 이윽고 가늘어졌다.

'한번 해 봐?'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아래로 비스듬하게 화살처럼 몸을 날린 이안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후우웅-

커다란 도끼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이 회전하던 그대로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카드득-

검날이 도끼를 움켜쥔 거인의 손목을 비스듬히 가르며 떨어졌다. 잘린 손목을 매단 도끼가 성벽에 움푹 틀어박혔다. 중간에 손목이 날아간 덕에 힘이 끝까지 실리지는 않은 채였다.

그사이 회전하는 이안은, 거인의 얼굴 한복판에 부딪히고 있었다.

퍼억, 끔찍한 촉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짧은 순간. 이안은 단죄의 검을 냅다 내리찍었다.

콰직, 거인의 입술 옆에 검날이 틀어박혔다. 놈의 새파란 안광이 얼굴에 매달린 이안을 좇았다.

검 자루를 쥔 채 훌쩍 몸을 돌려 놈의 입술에 발을 얹은 이안이, 잿빛 마력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퍼엉.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거인의 안면이 움푹 바스러졌다. 거인의 머리를 박찬 이안이 성벽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턱,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성벽 끝에 걸렸다.

"대전사…!"

야인 전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재빨리 끌어당겼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이었다. 회색 계곡의 볼베르.

"하아… 하아…."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이안이 숨을 헐떡였다.

'개 힘드네, 진짜….'

입에서 벌써 단내가 나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저릿했다. 전투의 한복판이라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뿐, 아마 지독한 편두통이 이어지고 있을 터였다.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때 나타나는 흔한 부작용.

투쟁의 축복은 분명 그의 신체 능력을 초인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려 줬지만, 그렇다고 정말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게 발동된다는 건, 그만큼 개 빡센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인 거 아니야…?'

지금까지 본 카르하의 성격상,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순간에야 축복을 내려 주고서, 대전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게임의 요소가 억지스럽게라도 현실성을 갖춘다는 사실을 미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낮은 확률이라는 모호한 문구가 있는 스킬이니 더더욱.

"괜찮으십니까? 저희한테는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그때 볼베르가 그를 일으켰다.

"꼬우면 네가 대전사 하든지."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이안은 그가 건넨 수통을 받았다. 어쨌건 무모한 짓을 한 보람은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거인의 도끼는 성벽에 얌전히 박혀 있는 게 아니라, 성벽 윗부분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을 테니까. 아마 이 녀석은 물론이고 주위의 병사들도 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을 터였다.

헐떡이며 술통을 입에 가져간 이안은 이내 눈썹을 치켜들었다.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오히려 좋은데…?'

좋은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가 술을 들이켜는 사이.

콰르르르르-

마법사의 주문이 마침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통을 입에 댄 채 그 광경을 돌아본 이안의 입꼬리가, 비로소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가 했더니.'

지팡이 끝에서 뚝뚝 떨어져 번져나가는 샛노란 불길은, 틀림없는 화염 해일이었다. 적어도 그와 비슷한 마법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이안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파도였다. 혼돈력과 정수의 증폭을 모두 거쳐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법한.

주문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주문의 위력을 최대한 증폭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콰르르르-

넘실대는 불길이 주위를 대낮처럼 밝혔다. 성벽으로 밀려들던 망자들이 해일에 휩쓸려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

망루 끝에 선 마법사가 피를 토하며 휘청댄 건, 해일이 성벽 앞을 한차례 전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밖으로 떨어지려는 그를 경호병들이 간신히 붙잡아 안아 들었다.

'그전에도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었을 텐데. 애썼군.'

수명이 몇 년은 줄었겠는데.

피식한 이안이 통제를 잃고 마구 날뛰는 불길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사가 마력 탈진을 무릅쓰고 상위 마법을 펼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남은 망자 군단 대다수가 불길에 휩쓸려 사라졌고, 지금도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다들 멈추지 마라! 저 저주받은 괴물들의 끝이 보인다!"

겔루드 장군이 소리쳤다. 살아남으리란 희망에 찬 함성을 내지르며, 병사들이 다시금 무기를 들었다.

"...?"

이안이 문득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본 건 그때였다.

흔적만 남은 손바닥의 낙인이, 문득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마력의 흔적도 없는데…?'

미간을 찌푸리던 이안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내내 성벽 인근에만 집중한 터라 보지 못했던 저 너머의 풍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어둠과 넘실대는 먹구름.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이윽고 구겨졌다.

"어느새…?"

새카만 먹구름이 요새 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토록 선명하던 어둠의 장막이, 정작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드리운 것이다.

"저, 저기…!"

"맙소사, 루 솔라여…."

변화를 눈치챈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염 해일이 잦아들자, 병사들도 주위가 어느새 한밤중처럼 어두워졌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계곡의 나무들이 활활 타들어 갔지만,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병사들이 탄식한 건, 그저 어둠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런… 미친…."

계곡 저 너머에 일렁이는 수많은 푸른 안광들.

지금까지 상대한 것만큼이나 많은 숫자의 망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아주 천천히.

"하하, 시발. 끝이 없잖아…?"

"우린 다… 죽을 거야…."

찾아올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채 저 계곡 너머의 망자들을 응시하는 가운데.

오직 이안만이 넘실대는 먹구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아귀의 낙인이 욱신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혼돈의 파편 역시 꿈틀대고 있었다.

무언가에 공명하는 것처럼.

"...!"

이안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숨이 턱 막히는 거대한 마력이 불현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다가 한순간에 생겨났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설마….'

먹구름 한복판을 응시하는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지는 가운데.

-■■내… 찾았노라….

뇌리를 울리는 사념이, 전장을 침묵으로 물들였다.

그 사념의 의미를 일부나마 이해한 건 이안뿐이겠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고오오오-

갈라지는 먹구름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미동도 없던 그 한복판에서 푸른 빛이 푸스스, 피어올랐다.

거대한 안광이었다.

"하…."

이안이 헛웃음을 흘린 다음 순간.

눈을 뜬 용이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