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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

9화 고블린 로드 (1)

다음 날.

두 사람이 새벽의 이슬을 맞으며 요새 내부로 들어왔다.

이전과 달리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복귀하는 도중 큰 전투는 없었다.

꼬질꼬질한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두 사람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달리 아주 밝았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돈을."

"이래서 인생 한 방이라는 거지."

준의 예상대로.

고블린들의 창고에는 온갖 금은보화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돈은 물론이고 다양한 보석과 반지, 목걸이 등이 넘쳐 났는데, 모두 용병들이 가지고 있던 재화들이었다.

에이든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뭐, 이게 다 죽은 용병들의 돈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죄책감이 듭니다, 선배."

이 돈을 쓰면 저주를 받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떠올랐지만, 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걸로 저주받으면 세상에 착한 사람밖에 안 남았지. 그리고 좀 껄끄럽긴 하지만, 우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토벌에 성공한 누군가가 챙겼을 거야. 아니면 무고한 희생자를 만드는 제물로 쓰였겠지. 차라리 우리가 쓰는 게 맞아."

"으음...."

여전히 죽은 사람의 돈을 챙긴다는 것에 대한 껄끄러움은 남았지만, 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에이든의 표정도 점차 다시 밝아졌다.

"그럼 이제 이 돈으로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에 회수한 금액은 자세히는 못 봤으나, 못해도 수백만 골드에 다다르는 금액이었다. 여타 장신구들까지 포함하면 그 금액은 훨씬 높아질 터.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지만, 하급 용병 둘이 쓰기엔 지나치게 큰 금액임은 분명했다.

"일단 네 장비부터 맞추자. 지금 상태로는 이후에 있을 전투에서 좀 힘들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뭘. 우린 이제 한 몸이나 마찬가지야. 전위인 네가 강해지는만큼 내 가치도 함께 올라간다고."

"선배...."

적잖이 감동한 표정을 짓는 에이든.

그 모습에, 준은 다시 한번 에이든에 대한 마음의 경계를 조금 더 풀 수 있었다.

'이런 돈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군.'

습관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린 준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틈만 나면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긴 건지.

그만큼 지난 1년 동안의 여정이 쉽지 않았음을 뜻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 돈으로 그렇게 대단한 장비는 맞추기 힘들 거야."

이 시대에 성능 좋은 갑옷은 농담 좀 보태서 자그마한 성과 맞먹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튼튼하게 만들 수 있어. 그리고... 나도 여러 가지 마법을 배울 수 있고.'

스승의 밑에 있을 시절에는 배우지 못했던 여러 마법들을 떠올리며, 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흥분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 * *

"세상에... 진짜 성공했잖아?"

클로이는 눈앞에 펼쳐진 용병패와 함께 한가득 쌓인 장물들을 바라봤다.

하나하나만 보자면 가격 자체는 그리 대단할 게 없는 것들이지만, 이만큼 쌓여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장물들을 판매한 나머지 금액은 모두 내 이름으로 만든 계좌에 넣어 줘. 쓸 곳이 있으니까."

"흐음... 괜찮은 투자 상품이 있는데, 생각 없어?"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이럴 때도 투자를 제의해 온다.

"아직은."

"뭐, 오늘만 기회는 아니니까."

빠르게 미련을 털어 버린 클로이에게, 준이 허리춤에 찬 고급스러운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그 과정에서 준의 표정에 퍽 아쉬움이 담겨져 있었는데, 이 가죽 주머니가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잘 썼다... 아공간 주머니."

"후후,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하네?"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준의 말처럼. 아공간 아티팩트는 적어도 3레벨에서 4레벨은 가야 얻을 수 있는 물품이었다.

이름처럼, 저 작은 주머니 안에는 마차 10대분의 공간이 존재했다.

만약 저게 없었다면 단둘이서 저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진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클로이가 가지고 있던 아공간 주머니는 중상품. 어디가서 돈 주고도 구하기가 힘든 물건이었다.

가뜩이나 허약한 마법사의 몸뚱이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조차 고역이건만.

'편리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공간 계열 마법이 심어져 있는 게 중요하지.'

아쉽게도 게임, <블랙아웃 > 내에서 공간 계열의 마법 학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공간 주머니를 입수하는 루트 또한 던전의 보상으로 얻는 것 말고는 없었기에 그 가치는 상상이상.

또한 준도 이젠 마법사인만큼, 마법사로서의 호기심도 강했다.

"뭐, 언젠간 너도 얻을 날이 올 거야. 아무튼 용병패들은 오늘 중으로 지노반 경에게 보낼 예정이야. 내일까지 시간 비워 둬. 아마 내일쯤이면 지노반 경이 우릴 부를 테니까."

"아무렴. 그 정도도 어려울까."

그러나 둘의 예상은 틀렸다.

"...지금 바로 와 달라는데?"

지노반은 바로 당일, 둘을 호출했다.

* * *

"솔직히 나는 자네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네."

지노반의 담백한 진심에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하급 용병 둘이서 골렘을 잡았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믿기 힘들겠죠."

처음 준에게 말을 들었을 당시만 해도, 지노반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준에게 기회를 준 것은 어디까지나 길레느 상회의 검은 숲 지부장인 클로이의 체면을 봐 준 면도 제법 컸다.

그러니 그사이 준이 사라졌다 한들, 지노반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클로이가 넘겨준 골렘의 핵은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

그러나 준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래... 이게 전부, 내가 펼친 작전에서 죽은 이들인가."

상자 안에 담긴 수십 개의 용병패들.

그걸 바라보는 지노반의 눈빛에 씁쓸한 감정이 떠올랐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이로써 지노반을 짓누르던 불명예는 어느 정도 사그라들 것이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는 지노반의 이름을 찬양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용병들에게 있어 용병패를 반납해 주는 것은 타인의 귀감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둘째치더라도, 지노반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게 준에게도 느껴졌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어도 마음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군.'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황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라 하더라도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멀쩡할 리 있겠는가.

'초보 용병들이 패닉에 빠져서 아군을 찌르는 것도 봤었는데.'

그만큼 전장이 주는 트라우마는 가볍게 여길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준이 그런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린 지노반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 만큼, 이번에는 내가 움직여야겠지. 그래, 자네가 바라는 게 무엇인가?"

"향후 있을 고블린 로드 토벌 작전에 한 자리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

"한 자리라... 원하는 건 명성인가?"

"그렇습니다."

용병인 준에게 필요한 것은 경력이다.

더욱이 그가 용병대장인 만큼, 앞으로 용병대를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용병대의 이름값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실력 좋은 대원들을 모집하려면, 대외용 경력은 필수적이야.'

그런 의미에서 고블린 로드의 토벌이라면 아주 훌륭한 경력이었다.

나름 고블린 로드는 필드 보스이고, 필드 보스 토벌 경력은 상당한 이점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고블린 로드 토벌전이면 벌이가 짭짤해.'

이미 클로이하고도 수익분배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마친 상황.

예정대로 고블린 로드를 토벌하면 해당 지역의 자원이 풀린다는 의미였기에, 클로이를 통해 꾸준한 수익이 발생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준은 이어지는 지노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또한 이번 상황을 재정리하며,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계산하는 듯 보였다.

"후우. 알겠네. 자네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군. 다만, 그전에 물어볼 게 있네. 굳이 따지자면 조언을 받고 싶군."

무려 황실 사관학교 출신의 지휘관이 고작 하급 마법사에게 지혜를 빌리겠다 말한다.

그러나 준은 그가 단순히 지혜만을 빌리기 위한 목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지는 질문에 준은 그 느낌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보기에, 지금의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으리라 보는가?"

'질문이라기보단 시험이군.'

질문의 의도는 간단했다.

이대로 고블린 로드의 토벌전이 시작되면, 자신이 어떤 포지션을 잡는 게 좋겠냐는 것.

그러나 저 눈빛은 자신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는 인물이 보일 만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감이 느껴졌달까.

마치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기 위해 하는 질문으로 보였다.

"제가 감히 지휘관님께 지혜를 나눠 드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겸손해할 것 없네.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해 주게."

그 짧은 사이 준이 조용히 혀를 핥으며.

"말씀하신 질문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기대에 걸맞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작전에서, 지휘관님은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

솔직한 심정으로 지노반은 준의 대답에 적잖이 감탄했다.

처음에는 허름한 옷차림에, 하급 마법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해도 재능이 부족해 마탑에서 쫓겨난 부랑자 정도로만 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법사라는 것일까. 아니면 뒤늦게 재능이 개화하기라도 한 걸까.

준의 대답은 지노반이 한 물음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바로 맞췄네. 내 생각 또한 자네와 비슷해."

지노반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되돌아 볼 줄 아는 사내였다.

잃어버린 명성을 어느 정도 되찾는 것까지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가 고블린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앞서 용병패를 용병 길드에 반납하는 것으로 '의리 있는 지휘관'이라는 이미지는 심어 줬겠지만, 실력 있는 지휘관이라는 그림은 아니었으니.

거기에.

"현재 이 요새에 있는 다른 두 지휘관은, 나와 다르게 여러모로 뒷배가 있는 인물들일세."

그러니 앞으로 일어날 고블린 로드의 토벌전에서, 요새 사령관은 한 번 실패한 지노반보다 다른 두 지휘관을 채용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준과 클로이의 입장도 애매해진다. 투자한 지휘관이 뒤로 밀려나면 덩달아 얻는 것도 적어질 테니까.

"해서, 내가 어디까지 봐야할지, 그리고 또 욕심을 부려야 할지 고민일세."

솔직한 지노반의 대답에 준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제 대답이 만족스러우실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방법이라.... 그 지혜를 내게 들려주겠나?"

"만약 저를 이번 토벌전에 기용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정찰대를 자원하십시오."

"정찰대라...."

그 말을 들은 지노반도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중요한 직책이지. 정찰대라는 보직은."

"물론, 지휘관님의 걱정 또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중요한만큼 위험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정찰대. 전쟁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이들이지만, 또 그만큼 사망률도 높았다.

거기에 아직 미지가 가득한 블랙아웃에서, 정찰대의 생환률은 정말이지 극악에 가까웠다.

평소 부하들을 아끼기로 정평이 난 지노반이기에,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 고향에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가. 재미있는 속담이로군."

준의 말처럼, 아마 토벌전이 시작된다면 지노반은 정찰대 임무를 배정받을 것이다.

아마 가장 큰 공을 쌓을 수 있는 공격대는 다른 두 지휘관이 차지할 터.

"어차피 배정받게 될 거, 차라리 자원하시는 게 좋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 생각하나?"

"첫 번째로, 이미지입니다. 먼저 나서서 한다면 사령관께서도 지휘관님의 선택을 앞선 실패를 만회하려는 의지로 볼 테지요."

"음."

"추가적으로 다른 두 지휘관에게 귀찮은 견제를 받을 확률이 줄어들 겁니다."

"알아서 경쟁자가 떨어져 나갔으니 말이지. 거기에 내가 욕심을 접었다고 판단할 테고."

"바로 맞추셨습니다."

거기까진 지노반도 생각이 미쳤던 단계다.

"두 번째로는, 위험성만큼이나 정찰 임무의 공이 결코 작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있다면, 단언컨대 그 위험성을 절반 이하로 내릴 수 있습니다."

"호오."

이번에는 흥미가 동한 듯했다.

고작 하급 마법사가 하는 자신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준은 두 차례나 검은 숲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또한 그에게 직접 들었던 노하우를 들어 보면, 준은 분명 검은 숲에 해박했다.

"확실히, 임무의 중요성이 대단하긴 하지."

앞서 몇 차례의 위기만 조기에 발견하더라도, 공격대에게 가해질 부담은 크게 줄어들 터.

"그리고 마지막 이유입니다만."

이어지는 마지막 조언은, 지노반에게 흥미를 넘어 순수한 놀라움까지 선사했다.

"결과적으로, 정찰대라고 해서 고블린 로드를 처리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0화

10화 고블린 로드 (2)

지노반이 요새 사령관, 도르타곤 남작에게 골렘의 핵에 대한 보고를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예상대로 용병들을 쓸어 모으고 있군."

창문을 통해 요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던 준이 툭, 내뱉었다.

사령관의 지령이 용병 길드에 내걸리자마자 검은 숲 요새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준이 그러하듯, 여타 용병들 또한 이번 토벌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상위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면, 모험가들도 보이는 것 같고. ...저건 마법사들인가? 저 양반들은 또 왜 왔지?"

준의 혼잣말에 옆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클로이가 답했다.

"그야 고블린 로드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왔겠지. 필드 보스가 떴다는 건 곧 에어리어 로드까지 등장한다는 거니까. 근데 아마 저 모험가들은 좀 힘들 거야. 지금 검은 숲에 '청운'이라는 모험단이 먼저 진을 쳐 놨거든."

"청운? 아. 3레벨에 영역을 둔 그 모험단?"

"맞아. 작년부터 에어리어 로드를 토벌하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거든. 이미 황실에서도 허가해 줬다던데."

"그럼 마법사들은?"

"평년보다 에어리어 로드의 출현 시기가 앞당겨졌어. 아마 그거랑 관련해서 온 거 아니겠어?"

클로이가 아닌 척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준은 마법사들과 여러모로 연이 좋지 않았으니까.

준도 그 사실을 알아채고 대답했다.

"애초에 내 스승이라는 작자는 내 존재를 철저하게 감췄어. 그러다가 뒈져 버렸고. 그러니까 그 부분에서는 별 신경 안 써도 될 거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그래도 편한 주제는 아니었는지, 준이 금새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말했던 물건들은?"

"가지고 왔어. 나름 가격도 싸게 맞췄고."

하던 서류 작업을 마친 클로이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준비해 둔 물건들을 하나둘 꺼냈다.

각종 포션의 재료들과 새로운 마법서였다.

"전부 다 합해서 720만 골드."

"젠장. 더럽게도 비싸네."

앞서 고블린 부락을 털어서 번 돈의 대부분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고블린 로드가 등장했고, 이후에 대비하려면 그에 걸맞는 마법들을 준비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울상이 된 준의 표정이 웃겼는지 클로이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투자하라니까. 가만히만 내버려 둬도 돈이 돈이 복사가 된다고? 거기에 아직 블랙아웃의 초기화 시기까지 한참 남았잖아? 투자하기 딱 적절한 시기야."

"돈 모아 뒀다 죽을 것도 아니고. 지금은 돈보다는 명성에 투자할 때야."

클로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인인 그녀의 시점과 용병인 준의 시점에서 돈의 쓰임새는 여러모로 달랐으니까.

"그나저나 마법서는 오랜만에 보겠네? 그때 이후로 처음인가?"

"뭐, 그렇지."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마법서를 매만지는 준의 표정은 어딘지 아련했다.

그것은 '이정준'의 기억이라기보단, 그가 들어온 이 육체의 본능이라고 봐야 했다.

'이런 걸 애증이라고 해야하나.'

준의 기억 속, 이 육체의 주인은 마법에 대한 학구열이 대단했다.

하지만 여러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그는 결국 마법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 사회에 대한 환멸이라 해야할까.

그 시점부터 이미 그는 자신의 스승이 심장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느낌적으로나마 알고 있던 것이다.

'뭐,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준이 처음 이 육체로 눈을 떴을 당시에 보였던 것은 천장에 매달린 끊어진 로프와....

'흠. 오랜만에 마법서를 만져서 그런가. 괜히 옛날 기억이 떠오르네.'

어찌 됐든 지금 와서 상관 없을 이야기다. 준은 조용히 매끈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마법서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갈게. 나중에 또 보자고."

* * *

시간이 흘러 지노반은 계획했던 대로 정찰대에 자원했다.

사망률이 높은 정찰대인만큼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는데, 지노반만은 달랐기에 사령관 도르타곤 남작이 크게 기꺼워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노반 경. 자네가 가장 열심이로군. 정찰을 잘 부탁하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아직 준비 단계인 두 공격대와는 달리, 정찰대는 먼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고블린 로드의 위치 파악.

그를 위해 준과 에이든이 포함된 정찰대가 검은 숲으로 향했다.

비교적 평화롭던 숲의 초입부와 다르게, 하루 정도 행군을 한 뒤부터는 전투가 급격히 잦아졌다.

"전방에 커로우 비 무리 출현!"

"방진! 다리에 힘 꽉 줘라!"

"창 들지마 이 자식아! 알아서 죽을 놈들이야! 방패만 빈틈 없이 들어!"

강아지만 한 크기지만,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부식성 독주머니를 달고 있는 커로우 비.

놈들의 공략법은 간단했다.

방패만 잘 들고 있어도 알아서 부딪혀 자폭하는 녀석들을 구경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바로 뒤에서 아우터 울프가 등장했다.

똑똑한 놈들답게 정찰대의 후방이 텅 비어 있음을 파악한 놈들이 움직이기 직전.

케겡―!!

근처 나무에서 은신하고 있던 에이든이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3마리의 아우터 울프 중 하나가 옆구리를 크게 베였다.

동시에 에이든이 부상당한 놈의 꼬리를 잡고 정찰대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크르르릉!!!

아우우우우――!!

무리를 지어다니는 녀석들답게 동료애가 대단한 놈들이라, 녀석들은 결국 에이든에게 달려들었다.

하나, 에이든도 이전과 달리 피하지 않고 놈들에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보인다!'

정찰대가 편성되기까지의 공백 기간.

그 시간에 에이든은 준과 함께 매일같이 검은 숲에 들어가 여러 몬스터들을 상대로 경험을 쌓았다.

준이 해 주는 조언은 하나하나가 금쪽같았고, 에이든은 마치 스폰지처럼 준이 넘기는 지식을 흡수하고, 체득해 나갔다.

그래서인지 아우터 울프들의 움직임이 훤히 읽혔다.

이젠 마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재능이 충만하다니까.'

그런 에이든의 활약을 잠시 바라보던 준은 이내 병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막 커로우 비 무리가 병사들과 맞딱뜨리는 중이었으니까.

단단한 방패 위로 놈들이 닿는 순간, 놈들의 육체가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치이이이익――!!

동시에 독주머니가 터지면서 방패 위로 살벌한 소리와 함께 지독한 악취가 퍼졌다.

"크윽!"

"야이, 등신아! 밀리지 마! 밀리지 말라고!"

"방패 빈틈 없애! 독 들어오잖아!"

그에 아직 적응이 덜 된 몇몇 병사들이 밀려나자, 고참 병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직 큰 피해는 없었으나, 여전히 전방에 많은 커로우 비들이 남아 있는 상황.

벌써부터 진영이 무너져선 안 됐다.

그때, 준의 [실드]가 병사들의 방패 위로 펼쳐졌다.

퍼버버벅!!

마력을 쏟아부어 강화한 게 아닌지라 뒤이어 달려든 커로우 비들의 육탄 돌격에 금방 파괴됐지만, 그래도 병사들이 자세를 고쳐 잡을 시간은 벌어다 주었다.

'당장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사실 저 자폭이 취미인 벌들을 죽이기에는 원거리 공격이 적격이었다.

'자폭이 주특기인만큼 방어력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윈드 커터] 몇 발이면 좋아 죽으려 할 텐데.'

하지만 준은 일부러 내버려 뒀다.

아직 병력들이 검은 숲에 적응할 단계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이미 지노반과도 합의해 둔 상황.

"됐다! 거의 다 죽었어!"

"한 번만 막으면 돼!"

"막았다!"

"와아아아아!"

끝내 모든 커로우 비들을 막아 내자, 병사들의 사기가 솟구쳤다.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전장이었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어서 지노반이 능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커로우 비들의 사체를 모아 야영지 주변에 뿌려 놔라. 그래야 다른 몬스터들이 꼬이지 않을 테니."

밤새 저 지독한 악취에 시달리기야 하겠지만, 그건 다른 몬스터들도 마찬가지다.

악취에 비례해 몬스터들이 습격해 오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야영 준비가 끝날 쯤, 지노반이 준을 불렀다.

"준. 자네가 보기에 현 상황은 어떻지?"

"아무래도 벌써부터 몬스터들의 서식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역시 그런가."

본래 커로우 비의 서식지는 좀 더 깊이 들어가야 등장한다.

이는 북동쪽에서 고블린들의 영역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봐야 했다.

아마 물량이 늘어난 고블린들에 의해 커로우 비 또한 서식지를 옮긴 것일 터.

어찌 보면 작은 정보 같지만, 하나하나 종합해 보면 나타내는 의미는 똑같았다.

"놈이 북동쪽에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군."

"그럼 정찰 속도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좀 늦추는 게 좋겠지. 저 녀석들도 아직 적응하기에 시간이 필요할 테니. 거기에 본대가 베이스 캠프에 자리를 잡기까진 제법 시간이 남았어."

확실히 수하들을 아낀다는 평이 있는 만큼, 지노반은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

준도 그의 결정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활약할 기회도 많아진다는 의미였으니까.

실제로 정찰대의 임무가 시작된 이후, 꾸준히 준과 에이든을 봐 왔던 지노반이 두 사람의 활약에 대해 언급했다.

"그나마 자네와 자네의 동료... 에이든이라 했던가?"

"예."

"덕분에 좀 시름을 놓았네. 시기적절하게 개입해 주더군."

지노반의 순수한 칭찬에 준도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혹시, 자네의 동료는 전문적으로 검을 배운 자인가?"

"...과거 연이 좀 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어쩌면 유명한 기사의 종자를 했었을지도 모르겠어."

설마하니 에이든이 황실의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그의 모습에 준이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는 만큼 눈에 들어온다고, 지노반 스스로도 기사인만큼 에이든의 움직임에서 느낀 게 있는 모양이다.

물론 관심도 딱 거기까지.

"지금처럼 후방에서 시간을 끌어 주게. 내 병사들도 금방 적응을 마칠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노반의 말처럼, 병사들은 머지 않아 검은 숲에서의 전투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앞서 고블린 토벌 작전에서의 경험과 매일같이 치러지는 전투는 병사들에게 노련함을 부여했다.

처음에는 나무로 가득한 숲의 지형에 진형을 갖추는 것도 버벅거리던 이들이,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각자의 위치를 찾아 움직였다.

하지만 검은 숲은 그런 병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쉽게 공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식인 식물인가...."

생각 이상으로 몬스터들의 영역 변화가 컸다.

지노반은 자못 심각해진 표정으로 병사들의 손에 죽은 식물형 타입의 몬스터들을 바라봤다.

비록 그가 초임 지휘관이긴 했으나, 황실 사관학교에서 엘리트로 졸업한 인물이다.

그만큼 검은 숲의 정보에 해박한 편이었고, 자체적으로 입수한 정보의 질도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현재 검은 숲의 이변은 이례적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리고 준 또한.

'이거... 느낌이 쎄한데.'

고인물로서의 감이 다시 한번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 * *

정찰을 시작한 지 3일차.

이젠 병사들의 전투감각도 날카롭게 벼려졌고, 그만큼 몬스터들의 습격도 잦아졌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정찰대는 어느 한 고블린 부락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부락의 근처로는, 과연.

예상대로 고블린 로드를 의미하는 토템 여러 개가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드디어!"

"놈들의 본거지를 우리가 찾아냈다!"

"저 망할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지, 하하핫!"

적의 본거지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으나, 고블린 로드의 유무를 확인한 것은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이제 이대로 요새에서 보내 온 본대가 오기만 하면 될 터.

적어도 검은 숲에서 필드 보스 토벌에 실패했던 것은 수십 년 전이 마지막이었기에, 병사들의 얼굴에서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너무 초입에 있는데."

하지만 그런 병사들의 표정과 대비되게, 지노반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동쪽의 초입부터 발견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저 너머에 펼쳐진 영역 모두가 고블린들의 것이라 봐야했다.

넓어도 너무 넓다.

"준. 그대의 생각은 어떻지?"

이곳까지 오면서 여러모로 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지노반이 그의 의견을 물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 이상의 낌새를 느낀 것인지, 줄곧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는... 이레귤러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노반의 예상대로, 준은 과거 자신이 플레이 했던 <블랙아웃 >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어느 정도 정답을 추려 냈다.

"고블린 로드의 이레귤러라...?"

돌연변이 몬스터. 이레귤러.

간혹 종의 한계를 뛰어 넘는 몬스터를 부를 때 쓰는 단어였다.

일반적인 몬스터가 이레귤러로 등장했다면, 나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일단 이레큘러 자체가 스킬북을 떨어뜨릴 확률도 존재하고, 만약 그렇게 얻게 된 스킬북은 성능적, 가격적 측면에서 초반 육성에 정말 큰 도움이 됐으니까.

'커뮤니티에서 아예 전문적으로 이레귤러만 사냥하던 유저들도 있었지.'

거기에 필드 보스가 이레귤러로 등장했다?

고인물 유저라면 일단 환호성부터 질렀을 것이다.

필드 보스가 스킬북을 100% 확률로 드랍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대박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병력으로 놈을 토벌할 수 있을 것 같나?"

지노반이 저렇게 말할 정도로, 토벌에 대한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고블린 로드의 이레귤러라면 저도 자료를 읽어 본 적 있습니다. 지금 병력 수준으로도 충분히 토벌은 가능할 테지요. 다만... 그것도 준비를 단단히 해 뒀다는 가정입니다."

"완벽히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지노반이 다시금 준에게 물었다.

"고블린 로드의 이레귤러는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아나?"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무려 72년 전일세. 고블린 로드의 토벌을 실패했던 것 또한, 그때가 마지막이지."

"...."

72년 전이면 블랙아웃 내에서 세대가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다.

"과연 사령부에서는,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일까?"

"...."

"후우. 머리가 아파 오는군."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상부에 보고를 올리는 것 뿐이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1화

11화 고블린 로드 (3)

이틀 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간 정찰대를 반겨준 것은, 지노반의 예상대로 베이스 캠프를 완성한 본대였다.

"지노반 에드밀러. 명하신 정찰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 지노반 경! 무사히 도착했군!"

제법 부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살이 오른 귀족, 도르타곤 남작이 지노반을 반겼다.

그런 남자의 곁에는 지노반과 마찬가지로 사관학교 출신의 두 기사들이 서 있었다.

"북동쪽 숲에서 발견한 토템입니다."

"으으음! 역시 예상대로야!"

지노반이 넘긴 기묘한 모양새의 토템.

어린 고블린의 머리를 잘라 햇볕에 말린 끔찍한 비주얼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잠시.

"그런데 지노반 경. 예정보다 빨리 돌아왔군?"

"그러게 말이야. 혹시 임무 자체가 좀 간단했나?"

그러던 중, 두 기사가 지노반에게 묻는 척하면서 그의 공을 깎아내리길 시도했다.

그에 도르타곤 남작도 똑같이 되물었다. 확실히, 지노반의 복귀가 예상보다 이틀 정도 빨랐던 것이다.

"그건 그렇군. 지노반 경. 혹시 실력이 일취월장한 건가? 하하하!"

"고용한 용병의 길 안내 실력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이 토템을 발견한 것은 북동쪽의 초입이었습니다, 사령관님."

"음? 아, 하하! 그렇군. 고블린 녀석들. 발 빠르게 영역을 넓힌 모양이야."

전문적인 군사 교육보다는 정치쪽에 치우쳤던 사령관은 토템의 위치가 초입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대수롭게 않게 넘겼다.

그것은 다른 두 지휘관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그들이 부족하기보단, 직접 현장에서 사태의 심각함을 느꼈던 지노반과 달리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지노반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오, 지노반. 무엇이 자네를 그토록 심각하게 만들었나?"

사령관의 물음에 지노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래도... 고블린 로드가 이레귤러가 아닐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 * *

"선배. 지노반 경의 설득이 먹힐 것 같습니까?"

에이든의 물음에 준은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예 무시하진 않을 거야."

1레벨의 요새 사령관은 이제 막 중앙 정치를 하다가 온 인물이다. 때문에 디테일한 군사적 지식은 사관학교 출신인 지휘관들에 비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밑에 있는 이들의 충언을 가볍게 듣지 않는다.

"하지만 그만큼 진지하지도 않겠지. 내가 걱정하는 건 오히려 다른 두 지휘관이야. 실질적으로 공격대 병사들을 지휘하는 건 그 두 사람이니까."

"아.... 그래도 그들 또한 전공을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지노반 경과 같은 사관학교 출신이기도 하고."

"뭐, 그렇긴 하겠지. 근데 현실만 두고 보자면, 가끔 어설픈 지식이 일을 더 망치는 경우도 있거든."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맹신하는 이들은 위험하다.

준의 말에 에이든도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앞서 가신 다른 선배님들도 비슷했지요."

"맞아. 딱 그런 케이스지."

일전의 고블린 토벌전에서 용병대가 전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고블린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맹신했다가 생각보다 독한 고블린들의 마비독에 당해 죽지 않았던가.

"다른 두 지휘관의 성격이 어떨진 모르겠는데, 지노반 경의 반응을 보면 글쎄...."

아마 두 지휘관 모두 지노반의 의견을 아예 묵살하진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

"혹시 모르니까... 우리도 따로 준비는 해 두자고."

* * *

상황은 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이레귤러의 상황을 어느 정도 상정하긴 했지만,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보급을 추가를 고려한다던가, 지원 병력을 추가한다는 일은 없었다.

단지 병사들에게 긴장을 풀지 말라는 조언을 하는 수준이랄까.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다행이었다.

아예 모르고 있다 당하는 것보단, 어느 정도 각오를 해 두는 게 나았으니까.

'이것도 그나마 앞서 지노반 경이 토벌에 실패했기 때문이겠지.'

다른 두 지휘관이 지노반을 무시하고 견제하긴 했지만, 사실 그들 또한 지노반과 함께 사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지노반의 실력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지노반이 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판단할 터.

따라서 공격대에 포함되어 있던 다른 두 지휘관도 이번 사태를 너무 가볍게 보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용병들의 분위기도 어째 좀 흥분된 것 같습니다."

"뭐, 쟤들 입장에선 웬 떡이냐 했겠지."

고블린 로드 토벌전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경력에 큰 도움이 될 텐데, 그 고블린 로드가 이레귤러라니!

목숨을 담보로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는 용병들이다보니, 긴장보다는 흥분하는 분위기가 더욱 큰 상황이었다.

"사실 쟤들이 저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냐. 난이도가 올라가긴 해도, 이쪽에는 기사 출신의 지휘관이 무려 셋이나 있으니까."

기사들은 <블랙아웃 > 세계관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것도 황실에서 직접 운영하는 사관학교의 기사들은 그야말로 재능의 끝에 다다른 이들.

"아무리 고블린 로드가 이레귤러라고 해도 타고난 종족값 자체는 결국 있기 마련이야. 기사들이 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오러 때문입니까."

"그렇지. 고블린 로드가 이레귤러가 된다고 한들 오러까지 쓸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오러.

모든 전사들의 염원이자, 전사 클래스의 낭만이기도 했다.

'이정준' 시절 전사 클래스를 키워 봤던 그는 오러가 가진 파괴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러를 배우기 전의 전사가 탱커 같은 느낌이라면, 오러를 배운 후의 전사는 그야말로 전투에 한해서는 만능이라고 봐야지.'

때문에 그들 중 대부분은 전투에 대한 걱정과 각오보다는, 이후에 떨어질 떡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용병들 입장에서는 똑같이 쩌리만 처리하는데, 무려 72년만에 등장한 이레귤러 토벌에 참여한 격이잖아. 경력이 훨씬 빛날 테지."

저렇게 흥분에 찬 모습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됐다.

"근데 쟤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게 아니거든. 필드 보스가 이레귤러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겁니까?"

"보통 필드 보스가 이레귤러로 등장하면 특유의 오오라를 가지고 있어. 주변 아군들을 강화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적들을 약화시키기도 하지."

만약 상대가 대전사 타입의 고블린 로드라면 일정 범위 내의 고블린들을 강화시킬 것이고.

주술사 타입이라면 반대로 적들의 신체 능력을 약화시키는 저주오오라를 내뿜을 터.

"사실 나도 지휘관들의 실력을 걱정하진 않아. 어쨌거나 그 양반들은 엘리트니까."

애초에 오러를 다를 줄 아는 기사들이니, 고작 1레벨 필드 보스를 상대로 쓰러질 일은 없을 터.

심지어 그런 기사가 셋이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기사의 오러 앞에서 대전사 고블린의 검은 이쑤시개처럼 부서질거고, 주술사의 주술도 종잇장처럼 베이겠지.'

하지만 기사도 사람이고, 눈 먼 돌에 머리를 맞으면 죽기 마련이다.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 사이에서 정확히 로드를 잡아 죽이려면, 그를 뒷받침해 주는 병력들의 존재가 가장 중요했다.

'게다가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기사들의 오러 유지 시간은 길어 봐야 30초에서 1분 정도.'

그러니 길을 뚫는 것은 병사와 용병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만약 거기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기사들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한계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지휘관들이 용병들을 확 휘어잡지 못하면... 아무래도 전투에 어려움이 많겠지."

"그, 그렇습니까."

"뭐, 그래도 괜찮을 거야. 여기에 용병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도 있잖아?"

제법 전투가 고될 것이 예상됐지만,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 준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저쪽 지휘에 관여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막 사령부에서 나온 지노반을 바라보며, 준이 입술을 훑었다.

"우리 신선한 뉴비님한테 떡밥이라도 던져 줘야겠네."

* * *

그날 저녁.

다음 날 있을 행군을 위해 각자 준비가 분주한 상황.

그러나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의 사령부에 지노반이 찾아왔다.

"사령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지노반 경. 무슨 일인가?"

"본격적으로 고블린 로드와 접전이 시작된다면, 저와 제 부대는 후방에 배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후방에? 지노반 자네가?"

뜬금없는 후방 병력 편성에 지노반이 지원하자, 도르타곤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자네가 후방에 지원할 필요가 있겠나?"

"물론 저 또한 최전선에서 검을 뽑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아무래도 고블린들의 영역이 생각 이상으로 넓은 것이 신경 쓰입니다."

"흐음...."

사실 72년만에 등장한다는 임팩트 때문에 그렇지, 그래봐야 고블린 로드에 불과하지 않던가.

기사 3명은 아무래도 과한 감이 있었다.

거기에.

"사령관님. 확실히 지노반 경의 의견이 맞습니다. 정찰대의 보고에 따르면 고블린들의 영역이 넓으니, 고블린 로드와의 접전 중 후방에 다른 세력이 난입해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노반 경이라면 후방에서 사령관님을 안전히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다른 두 지휘관도 이때다 싶어 지노반의 선택을 지지했다.

그야, 이런 공은 나눌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으니까.

더군다나 두 지휘관은 단둘이서도 충분히 고블린 로드를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 말에 도르타곤 남작이 빙긋 웃었다.

"그런가? 경들이 그렇다면 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군. 확실히 후방이 흔들리면 곤란하지. 암, 그렇고 말고. 지노반 경. 자네는 생각이 참으로 깊군!"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사령관의 결정에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숙인 지노반의 얼굴에는 옅은 피로감이 얹혀 있었다.

이런 정치적인 대화는 그의 성향과 제법 거리가 먼 편이었다.

'그래도 그자가 말한대로 진행이 되긴 했군. 부디 그가 말한 계획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물론, 지노반이라 해서 공적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느 꾀 많은 마법사의 조언을 믿고 있을 뿐.

* * *

거의 백오십에 육박하는 숫자의 병력들이 검은 숲을 통과했다.

정찰대가 앞장 서서 길을 뚫고, 간혹 그들만으로 벅찬 상대가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본대로 신호를 보내 처리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진군 속도가 빠르군?"

"예. 아무래도 지노반 경의 정찰대가 제법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정찰대와 후방부대를 지원한 덕일까, 다른 두 지휘관은 이전과 달리 적당히 지노반의 공을 인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공격대로서 고블린 로드를 토벌하게 되면 지노반의 공적은 자연스럽게 묻힐 테니까.

"허허! 지노반 경의 노고가 대단하군. 나중에 제대로 치하해 줘야겠어."

"크흠!"

"지노반 경도 사령관님의 결정에 명예를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지노반의 정찰대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의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준과 에이든이 많은 도움을 준 덕분이었다.

병사들 역시 시간이 지나며 둘의 존재감을 느꼈는지, 휴식이 주어질 때마다 둘의 칭찬을 하기 바빴다.

"마법사님이 있다는 게 이 정도로 편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왜 용병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쉿! 조용해라. 다 자신만의 뜻이 있으니 저러시는 거겠지."

한편 그 당사자인 준은.

"선배, 괜찮으십니까?"

"진짜 이 개 같은 숲길은 걸어도 걸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냐...."

저질 체력 때문에 활력 포션까지 마셔 가며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 * *

검은 숲 북동쪽 초입에 가까워질 무렵.

정찰대는 슬슬 숲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몬스터들의 등장도 줄어들고, 전반적으로 기묘한 침묵이 숲에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고블린들이 눈치를 챈 모양이군."

"백오십에 가까운 병력이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정찰을 왔을 땐 불도 피우지 않았고 흔적을 지우는 데 집중했었다.

하지만 본대는 자신들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에 따라 지노반은 따로 별동대를 추려 냈다.

"준. 자네의 동료를 좀 빌려도 되겠나?"

"말씀해 주십쇼."

"내 병력 일부와 자네 동료를 전방으로 보낼 생각이네. 아무래도 고블린들의 기습이 있지 않을까 싶네."

준은 대답 대신 에이든을 쳐다봤다.

"에이든. 할 수 있겠어?"

"예, 선배! 맡겨만 주십쇼."

에이든도 어느새 정찰대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던 만큼, 금방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별동대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으음."

마력으로 시각을 강화시킨 지노반이 나무 사이로 날아오른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새의 발에는 붉은 리본이 길게 달려 있었다.

앞에 적의 매복이 있다는 의미였다.

지노반은 즉시 이 사실을 사령부에 알렸고, 일망타진을 위해 부대가 둘로 나뉘어졌다.

복귀하는 동안 정찰대가 봐 뒀던 루트대로, 공격대를 맡은 기사 중 한 명이 부대를 이끌어 측면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정찰대가 먼저 매복 중이던 고블린들과 조우, 뒤이어 사령관이 이끄는 본대가 순식간에 들이닥쳐 고블린의 진형을 파괴했다.

생각 이상으로 인간들의 공세가 과격하자, 고블린 중 일부가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때마침 측면을 돌던 공격대의 존재로 인해 그 시도마저 실패.

전멸.

완벽한 대승이었다.

그에 병사와 용병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그들의 함성소리 속에서 도르타곤 남작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섞여들었다.

"하하하! 경들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사령관님."

"사령관님의 뛰어난 지시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휘관들의 겸손 섞인 아부에 도르타곤 남작의 어깨도 병력들의 사기처럼 치솟았다.

"그렇게 말해 주니 참으로 좋군! 특히 지노반 경. 자네의 정찰 실력이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네."

"감사합니다."

사실 지노반도 나름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만큼 작전이 잘 돌아갈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는 이번 일이 순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가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마법사의 지혜가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비록 지노반이 엘리트 사관학교 출신이라지만, 그 또한 사람이다.

올해 처음 검은 숲에 들어왔을뿐더러, 몬스터에 대한 지식도 전부 경험 없는 책지식에 불과했다.

때문에 당연히 어느 정도의 고전은 예상하고 있었으나. 생각과 달리 작전 자체는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지휘관님. 이 영역에는 푸른 곰팡이가 가득하군요. 아무래도 플랜트 언데드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여기 나무를 보면 아우터 울프가 남긴 영역 표시가 있습니다. 흔적을 보니 얼마 되지 않은 듯 합니다.'

'저기 있는 건 시체꽃인데... 커로우 비가 좋아하는 식물입니다.'

'흠, 저기 식물이 뜯겨져 나간 흔적이 보이십니까? 아무래도 고블린들이 독 제조를 위해 뜯어간 흔적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몬스터의 영역에 들어설 때면, 그의 곁에 있는 마법사가 귀신같이 조언을 해 줬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지노반도 지식으로는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고용한 하급 마법사만큼 빠르게 캐치하진 못했다.

'어딜 보나 다 똑같은 숲에 불과한데. 저 마법사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군.'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필드 보스의 등장으로 인해 몬스터들의 영역이 대대적으로 바뀐 지금.

준이 해 주는 조언은 하나하나가 금쪽같았다. 그가 툭툭 던져 주는 조언 덕분에 병사들을 미리 준비시킬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부상자도 현저히 적었으니까.

새삼 길레느 상회의 금지옥엽, 클로이가 어째서 저 하급 마법사를 끔찍이도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게 저런 부관이 있다면....'

슬그머니 욕심이 치고 올라왔다.

지휘관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었다.

그러나 그 욕심은 빠르게 갈무리됐다.

'다름도 아니고 그 길레느 상회의 후원을 받고 있는 마법사다.'

아무리 자신이 황실의 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라 하더라도 당장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 않나.

분명 자신이 아니더라도 저 마법사는 언젠가 날개를 펼치리라.

'그래도 인연을 쌓아 두는 건 괜찮겠지.'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법사를 후원해 주는 길레느 상회도 눈여겨 볼 만했다.

본래 지상에 뿌리를 둔 길레느 상회도 최근 블랙아웃에 슬금슬금 시선을 돌리는 추세였으니까.

아무튼, 이후에도 토벌대의 진격은 이어졌다.

슬슬 북동쪽의 초입과 가까워질수록 고블린들과의 전투는 잦아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들은 본격적으로 고블린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캬갸갸갸갸갸갸갸!!

캬르! 캬르! 캬르투가!

끼호루루루루루루!

곧이어 고블린 부락에 도착한 그들은, 수많은 고블린과 마주하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예상했던 숫자보다 두 배는 많았다는 것이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2화

12화 고블린 로드 (4)

거무칙칙한 숲에 진녹색의 물결이 내려앉았다.

저수지를 점령한 녹조처럼, 시야 가득 펼쳐져 있는 고블린들은 하나 같이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며 토벌대를 노려봤다.

어딜 봐도 일반적인 고블린들과는 다른 분위기에, 토벌대의 사기가 눈에 띄가 요동쳤다.

"무슨 고블린 주제에 눈빛이...."

"숫자가 뭐 저렇게 많아?"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딱 봐도 천 마리가 넘어가는데!"

병력의 숫자만 고려하면 거의 8배 정도 차이가 났다.

당연히 일을 쉽게 보고 있던 용병들부터 먼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닥쳐라! 지금 고작 고블린들에게 겁을 먹은 것인가!"

"너희가 그러고도 용병인가?"

"정신 차려!"

지휘관들, 그리고 각 부대의 십인대장들이 흔들리는 사기를 붙잡았다.

다행히 병사들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나마 이곳까지 오면서 사기가 썩 괜찮았던 덕분이다.

"그래! 고작 고블린들이야!"

"저런 놈들이 마차째로 와도 문제없다고!"

"우리에겐 기사님들이 계신다!"

일반적으로 용병들보다 실력이 뛰어난 병사들은 동료들을 믿었다.

반면 용병들의 사기진작은 생각보다 저조했다.

병사들과 달리, 그들은 최근 검은 숲에서 전멸한 용병들에 대한 소식을 떠올린 것이다.

"이거 재수 없으면...."

"소문에 죽었던 그 녀석들처럼 개죽음 되는 거 아냐?"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어떻든, 결국 상황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공격대를 맡은 두 지휘관이 돌진 명령을 내린 것이다.

"방패를 들어라!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라, 충성스러운 제국의 용사들이여!"

이제와서 뒤로 무를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용병들은 준비해 온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이어 인간의 군대가 녹색의 난쟁이들과 부딪혔다.

* * *

처음에 흔들렸던 사기와 달리, 전투 자체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사냥을 위해 나왔던 용병들은 이제 살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병사들 또한 쏟아지는 독침에 대비해 마비 내성 포션을 구비해 뒀다.

용병들도 각자 어떻게든 포션을 구비해 둔 상황.

고블린들이 자랑하던 마비독이 큰 위력을 보이지 못하자, 고블린들은 두 지휘관을 필두로 몰아쳐 오는 인간들에게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야. 클로이 그 녀석, 지금쯤 돈방석에 앉았겠는걸."

바닥에 널부러진 수많은 포션 병들. 다른 상표도 많았지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길레느 상회의 상표였다.

"역시 수완이 좋다니까."

또 한편으로 준은 [밝은 눈] 스킬을 통해 전장의 상황을 크게 살펴봤다.

치열한 열기 속에서, 병력들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 저 기세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적의 본대는 등장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슬슬 놈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

기본적으로 고블린들은 잔혹하고, 얍삽하다.

특히 고블린 로드쯤 되면, 그 얍삽함에 지혜까지 얹혀진다.

그러니 가장 완벽한 타이밍, 그것도 인간들의 기세가 한참 올라가고 있을 때 놈이 등장할 것이다.

캬르드가아아아아아아아――!!

기세등등한 인간들의 사기를 박살 내기 위해.

* * *

놈의 등장은 숲을 가득 메울 정도의 거대한 함성과 함께 시작됐다.

캬르드가아아아아아아――!!

인간들의 병력에 밀리고 있던 고블린들도 놈의 등장에 함성을 내뱉었다.

이제는 천이라는 숫자에서 조금 줄어든 고블린들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토벌대를 노려봤다.

동시에 토벌대는 기묘할 정도로 몸이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고블린들의 몽둥이를 막는 방패에 힘이 더 들어가고, 나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그들은 이내 이것이 고블린 로드의 등장으로 인해 생긴 변화임을 깨달았다.

거리만 따지고 보면 그리 멀지 않다.

준의 눈에도 확연히 띌 정도로 덩치 큰 고블린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연신 함성을 내질렀다.

몽둥이를 주 무기로 쓰고 있는 여타 고블린들과 다르게, 청동으로 이루어진 검과 방패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녹색의 마력을 전신에 두른 것으로 보아,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블린 대전사로군.'

이어서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블린답게 영악한 녀석은 강인한 기사들이 있는 중앙보단 측면을 파고들었다.

고블린 대전사과 함께 놈을 따르는 고블린 투사들도 투박한 창으로 토벌대의 방패의 틈새를 찔렀다.

"젠장! 방패 똑바로 들어!"

"개소리 하지마! 너나 창 제대로 찔러! 숫자가 안 줄어들잖아!"

"시발, 앞에 몇 마리가 있는데! 아악!"

"이런 젠장!"

고블린 대전사가 등장하면서 고블린들도 더욱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독침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비 내성 포션을 마셨더라도 계속해서 맞으면 반응이 오기 마련이었으니까.

끝을 모르고 달려드는 고블린 앞에서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용병들이었다.

며칠 간의 고된 행군도 행군이었지만, 용병들 대다수는 마력 사용자도 아니었으니.

반면 비교적 마력 사용자의 비율이 높은 병사들이 부족한 곳을 채워 주고 있었으나, 고블린 대전사 앞에서는 역시 일개 병사에 불과했다.

"크학!"

10살 전후의 아이 크기에 불과한 고블린들과 다르게, 고블린 대전사와 놈을 따르는 투사는 성인 남성보다 크거나 조금 작은 수준이었다.

거기에 고블린 대전사가 휘두르는 청동 검은 병사들의 나무 방패마저 갈라 버렸다.

고블린 로드가 내뿜는 광역 오오라와 수적인 우세. 그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기사들의 움직임까지.

반면 바다에서 헤엄치듯 날뛰는 고블린 대전사와 그를 따르는 투사들은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측면이 뚫렸습니다!"

"젠장!"

"마르딘 경! 놈들을 돌파해야 하오!"

"으으음!"

결국 두 지휘관들도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 전투가 길어져서 좋을 게 없다.

고블린들의 숫자가 저게 끝이라고 단정 짓기도 힘들었고, 끝없는 물량공세에 병력들의 체력도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체른 경. 그대의 명예를 믿겠네!"

"물론이오!"

두 지휘관 중 결심을 내린 것은 실력이 조금 처지는 이였다.

이대로 고블린 대전사에게 끌려다닐 바에, 차라리 한 명이 오러를 발동시켜 길을 뚫겠다는 계산이었다.

다만 그렇게 하면 고블린 로드를 상대하는데 남은 한 명이 전공을 독차지 하는 상황까지 나올 수 있었다.

오러 유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두 지휘관은 빠르게 거래를 마치고 기세를 되돌리기 위해 움직였다.

한편.

"오오... 저게 오러인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준은 묘한 감상에 휩싸였다.

게임 속 화면에서만 보던 오러를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은 그만큼 신기한 경험이었다.

"진짜 고블린이 무슨 두부처럼 썰리네."

한 번 오러를 발동시킨 기사는 마치 냉병기 전쟁에 나타난 전차 같았다.

눈앞에 있는 그 무엇도 발걸음을 막지 못했고,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들이 썰려 나간다.

단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동족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기 때문일까.

기세등등하던 고블린들도 기사들의 공격만큼은 피해 움직였다.

덕분에 뚫리고 있는 측면을 향해 기사들이 거의 근접한 상황.

"진짜 오러가 깡패라니깐."

과연 에이든이 저 정도 수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핫."

그런 생각에 옆을 돌아보자, 에이든은 마치 한 눈이라도 팔까 온 정신을 기사들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재능 충만한 녀석이라면 분명 머지않아 배우겠지.'

언제가 될 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이어가고 있던 준이 마찬가지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지노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되셨습니까, 지휘관님?"

"음. 언제든 말만 하게."

* * *

"지금일세, 체른 경!"

"하아아압!!"

수많은 고블린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체른이라 불린 기사가 오러를 발동시켰다.

목표는 녹색의 파도 사이, 자신의 존재감을 숨길 생각 따윈 일절 없는 고블린 대전사였다.

기세 좋게 인간들의 측면까지 파고든 것은 좋았으나, 고블린 대전사 또한 전장의 열기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뒤늦게 기사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뒤로 빠지려 했으나, 이미 퇴로는 막힌 상황.

그 뒤에 있던 고블린들이 어떻게든 길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한 차례 위기를 겪은 인간들도 최선을 다해 놈들의 퇴로를 막아섰다.

"놈! 이제 끝이다!"

오러를 발동시킨 체른이 순식간에 길을 막고 있던 고블린들을 베어 버리고 고블린 대전사의 앞에 도달했다.

그에 대전사도 쉽게 당할 생각은 없었는지 청동 검을 들었으나.

많은 인간들을 베어 버린 청동 검은 기사의 오러 앞에서 이쑤시개처럼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캬륵――!

동시에 놈의 목도 청동 검처럼 몸과 분리되어 허공을 날았다.

한 차례 인간들을 수세로 몰아붙였던 고블린 대전사의 허망한 최후였다.

"주, 죽었다!"

"고블린 로드가 죽었다!"

"기사님께서 적장의 목을 베어 버리셨다!"

"와아아아아아아!!"

그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과 용병들이 환호성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기세를 더욱 끌어올려 고블린들을 몰아쳤다.

두 기사 또한 자신들의 업적에 미소를 만면에 띄웠으나.

"음...? 왜 고블린들이...."

"물러나질 않지?"

가장 먼저 이변에 눈치를 챈 것은 체른과 마르딘, 두 기사였다.

비록 정보 수집에 있어서 지노반에게 밀리긴 했지만, 그들 또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엘리트들.

고블린 로드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수집을 해 둔 상황이었다.

그 얍삽한 성정에 걸맞게, 고블린들은 우두머리가 죽으면 삼삼오오 도망치기 마련이다.

두 기사가 오러까지 써 가며 최대한 빠르게 고블린 대전사를 쓰러뜨린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고블린들은 전혀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지휘관님, 후, 후방에!"

"후방에 고블린!"

"고블린들의 추가 병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를 머지 않아 깨달은 두 기사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방금 자신들이 죽인 고블린 대전사는, 고블린 로드 같은 게 아니었음을.

* * *

"힌트라면 여럿 있었지."

첫 번째로, 영악한 고블린치고 너무 정직하게 싸워 줬다는 것.

인간이 놈들에 대해 알고 있듯, 놈들 또한 인간에 대해 알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보다 강한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블린 대전사는 그런 것치고 너무 대놓고 나타났다.

상당한 포스를 드러내며 기사들의 진영을 피해 깊은 곳까지 파고든 것은 좋은 시도였으나, 아무래도 부족한 부분은 있었다.

결국 기사들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거기에 오오라도 고블린 대전사가 가지고 있는 속성과는 달랐어."

축 늘어지려는 팔에 억지로 힘을 쥔 준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고블린 주술사. 이번 대의 로드이자 이레귤러는, 그놈이야."

고블린 주술사의 오오라.

약화의 저주가 토벌대 전체에 퍼져 있었다.

만약 앞서 죽은 대전사가 로드였다면, 인간들의 약화가 아닌 고블린들의 강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마 최전선에서는 그 차이를 느끼기 힘들었겠지. 당장 눈앞에서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마당이니까."

방패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 게 단순히 피로감 때문인지, 아니면 대전사의 오오라에 힘입어 고블린들이 강해진 건지.

솔직히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준처럼 후방에 머물고 있던 인물이 아니고서야.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들이 걸어 뒀던 토템의 모양이 결정적이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토템.

준은 그 토템의 생김새를 유심히 관찰했다.

햇볕에 바짝 말린 탓에 알아보기 쉽지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

"어린 고블린의 머리로 만들어졌었지."

만약 고블린 로드가 대전사였다면 늙은 고블린의 머리로 만들어졌을 터.

어린 고블린을 재료로 만들어진 토템은 고블린 주술사의 시그니처였다.

"옛날 생각나네. 그 차이를 눈치 채고 나선 나름 고블린 로드 토벌이 한층 쉬워졌었으니까."

이건 <블랙아웃 > 내에 숨겨져 있던 요소로, 커뮤니티 공략집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오로지 '이정준'만이 알고 있던 작은 디테일이었다.

'그리고 대전사에 비해 고블린 주술사는 훨씬 더 영악하지.'

<블랙아웃 > 커뮤니티에 뉴비들의 원성이 자자할 정도로.

캬르르르르투타카――!

후방에서 들려오는 고블린들의 함성 소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진녹색의 물결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예상대로 거적떼기를 몸에 두르고 있는 고블린 주술사였다.

"어디 그럼 우리 뉴비 지휘관님이 활약하는 모습을 좀 봐 볼까."

물론, 준도 거기에 한 다리 걸칠 생각으로 가득했다.

* * *

후방에서 나타난 고블린 주술사.

그런 고블린 주술사의 주변에는 대략 삼백에 다다르는 고블린들도 함께 보였다.

아마 토벌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후방의 병력은 비교적 적게 배치한 모양이다.

하지만 삼백이라는 숫자 또한 위협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후방을 지키고 있던 병력은 고작해야 지노반의 지휘 아래 있는 스무 명 정도의 병사들이 끝이었으니까.

"전원 전투 준비!"

고참 병사 중 한 명이 소리치자, 병사들이 방패를 꼬나쥐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전방의 병력은 여전히 몰려드는 고블린들을 상대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후방에는 준과 에이든, 그리고 지노반의 병력이 전부였다.

그 위기를 알아차린 것일까.

"지지지, 지노반 경! 지노반 경!! 어디 있나, 지노반 경!!"

사령관 도르타곤 남작의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런 그의 곁에 지노반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도르타곤 남작은 후방보단 더 중앙에 있었기에, 고블린들이 단번에 그를 죽이기엔 쉽지 않았다.

물론, 도르타곤 남작은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왔나!!'

이럴 줄 알았으면 황실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을.

남작가의 한계를 깨부수겠다고 블랙아웃까지 찾아온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워진 것은 한 순간이었다.

한편, 방진을 펼친 병사들의 뒤에서 마력을 끌어올리던 준이 먼저 마법을 영창했다.

[디텍팅 타깃]

[라이트닝 윕(Lightning whip)]

비싼 돈 주고 배운 마법을 써 볼 기회였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3화

13화 고블린 로드 (5)

그려내는 심상은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수십 줄기의 번개.

폭풍우 속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알리는 거대한 현상이었다.

지직―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스파크.

그 위로 준이 만들어낸 마력 패턴이 짜여진다.

섬세한 심상이 짜여진 패턴 위로 덧씌워지고, 마력은 심상을 현현시키는 동원력이 된다.

작디 작은 스파크에서 시작된 현상이 점차 커지며 준의 손가락 끝에 모여들었다.

[라이트닝 윕]

쩌저저정!

분위기가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그의 손에서 터져 나온 번개의 채찍은 굉음을 내며 고블린들에게 쏟아졌다.

끼게게게게겍――!!

가장 앞에서 조악한 방패를 들고 있던 고블린들이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지만, 늦어도 한참 늦은 행동이었다.

번개로 이루어진 채찍 줄기가 고블린들과 맞닿는 순간, 가장 앞에 있던 고블린들이 경련을 일으켰다.

번개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뒤에 있던 고블린들에게 전염되듯 튕겨져 나갔다.

파괴력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져 죽음에 이르는 대미지는 줄 수 없었으나, 전신을 마비시키기엔 충분했다.

"...."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전방에 있던 고블린 수십 마리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자신이 만든 마법의 결과물을 잠시 바라보던 준이 짧게 혀를 찼다.

'배운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심상이 제대로 안 깃들었어. 마력 패턴도 너무 단조롭게 짰고. 개량할 필요가 있겠군.'

애초에 초커의 봉인도 해제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이상의 파괴력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준은 여기서 더욱 개선점을 찾아 볼 요량이었다.

한편, 그의 혀 차는 소리를 다른 의미로 알아 들었는지, 고참 병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뭣들 하고 있어! 달려들어!!"

거친 목소리에 병사들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몬스터 수십 마리가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으니 그들 입장에서도 놀랄 만했다.

물론, 고블린들의 상황은 더 심했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답게 번개가 내는 굉음에 놀랐고, 눈앞에서 동족 수십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 버렸으니.

가장 먼저 앞서서 달려야 할 놈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우와아아아아!"

"죽여 버리자!"

"너무 깊게 들어가진 마라! 간격을 유지해!"

고블린들은 바로 뒤에 있는 고블린 로드의 존재 때문에 도망은 치지 않았으나, 두려움에 이도 저도 하질 못했다.

그에 몇몇 고참 병사들은 최대한 고블린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반드시 급소만을 노렸고, 또 일부러 혈관이 있는 부위를 헤집어 피를 바닥에 흩뿌렸다.

사방에 동족의 피 냄새가 진동을 하자,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고블린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물론, 고블린 로드도 그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카르 투 다나카 사루 페타하――

"어...?"

고블린 로드가 주술을 외기 시작하자, 순간 준은 두 눈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밝은 눈]으로 고블린 로드를 집중하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지식이 머릿속에 멋대로 떠올랐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준이 본능적으로 외쳤다.

"뒤로 빠져!! 방어해라!"

"마법사님의 명령이다! 뒤로 후퇴! 휘퇴!"

"방패 들어!"

"진영을 넓게 퍼뜨려!!"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갔던 만큼 뒤로 빠져나가자, 고블린 로드를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아른거리며 모여들었다.

"[피의 폭주]...?"

고블린 주술사의 대표적인 주술 중 하나인 [피의 폭주].

이름에서처럼 알기 쉽게, 아군에게 광폭화를 거는 기술이다.

'플랜트 언데드가 아우터 울프한테 거는 것처럼 아예 이성을 잃게 만드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공포가 사라지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기에 고블린들의 흉포함이 제대로 발휘된다.

이건 생각보다 위협적이다.

전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긴장으로 인해 몸이 굳는 것이 일방적인데, 그런 부분이 전부 사라진다는 의미였으니.

쾅! 콰쾅! 쾅!

아니나 다를까, [피의 폭주]에 걸린 고블린들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정신 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병사들이 든 방패 위로 나무 몽둥이가 내려 꽂혔다.

번개의 채찍에 의해 몸이 굳어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몬스터가 가지고 있는 흉폭함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큭!"

"손에 힘 꽉 쥐어!"

"간격 제대로 유지해!!"

가장 앞에서 고참 병사들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시켰고, 그런 그들의 곁을 일반 병사들이 보조했다.

평소라면 일반 병사들도 충분히 버텨 낼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고블린 로드의 오오라에 약화된 상태라 그마저도 힘들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저 [피의 폭주]는 유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10초 정도 방패를 사정 없이 후려치던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는 지금처럼.

한계 이상의 힘을 뽑아낸 대가로, 몽둥이를 쥐고 있던 손은 가죽이 전부 찢겨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몽둥이를 떨어뜨리는 놈들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병사들이 반격에 나서려던 찰나.

"다시 온다! 힘 빼지마!"

준이 벼락처럼 외치자, 전장에 다시 한번 고블린 로드의 주술이 울렸다.

다카르 투 다나카 사루 페타하――

'왜 저놈의 주술이 해석 가능한 거지?'

처음 겪어 보는 현상에 준이 당황하기도 잠시.

이번에 움직인 것은 고블린 로드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발 빠른 고블린들이 바닥에 무언가를 꽂아 넣었다.

어린 고블린의 머리로 만들어진 토템이었다.

동시에 토템에도 붉은 빛이 어리기 시작하면서, 고블린 로드가 부리는 주술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키야아아아아아――!!

이전보다 두 배는 많은 고블린들이 [피의 폭주]에 노출되어 광기 어린 돌진을 시작했다.

'망할. 네놈도 마음이 급하다는 거냐?'

전방에 나가 있는 병력이 후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이쪽의 사령관을 죽인다.

그게 놈의 목표였던 만큼, 녀석 또한 시간이 촉박했다.

그러니 당장 모여 있는 고블린들을 소모품으로 쓰겠다는 의지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 탓에 놈들을 막는 병사들도 크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통도 잊은 채,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지 않은가.

고작 방패만으로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왜 놈의 주술이 해석 가능한지 모르겠다만... 지금 고민 할 일은 아냐. 지금 상황부터 해결해야 돼. 하지만 범위형 마법은 당장 쓰기 힘든데.'

이전과 달리 지금은 아군과 적이 뒤섞여 있는 상황.

이럴 때는 놈들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마법보다, 전방에 싸우고 있는 이들을 보조하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속사형 마법으로.'

[밝은 눈]을 통해 빠르게 전황을 살피고, 거기서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지원 마법을 펼쳤다.

[윈드 커터]

하급 마법사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마법.

때문에 심상을 섬세하게 넣을 필요는 없다.

[피의 폭주] 상태에 들어간 고블린들은 준의 마법을 방어할 겨를조차 없을 테니까.

굳이 마법을 강화하지 않더라도, 바람의 칼날은 연한 고블린의 살가죽을 뚫고 내장까지 헤집어 버릴 것이다.

'에이든. 그 녀석의 움직임이 어땠더라.'

그러나 단순히 마법만 쏘아 댄 것은 아니다.

에이든.

녀석의 움직임을 참고하여 마법을 펼쳤다.

평소 에이든은 배려심이 많은 성격답게, 전투에서도 그 성향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멀리서 전장을 한눈에 보는 준과 달리, 그때그때 자신이 필요한 자리를 찾아가 전장의 유리함을 이끌어 낸다.

그런 에이든의 움직임을, 녀석이 가진 심성을 마법의 운용에 담아 넣었다.

[디텍팅 타깃]

가장 앞에서 위협적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고블린들은 내버려 둔다.

어차피 적들은 숫자로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앞에 있는 녀석들보다 그 뒤에서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여유 병력들이다.

앞에 있는 놈을 처리해도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녀석이 무기를 휘둘렀으니.

'병사들에게 잠깐의 여유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렇기에 준은 바로 앞에 있는 녀석들보단,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녀석들을 노렸다.

혹은 그새 참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가려는 놈들도 그의 사냥감이 되었다.

쐐애애액- 캬아악!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윈드 커터]가 쏘아져 나가 전장에 한 줄기 여유를 만들어 낸다.

'에이든, 그 녀석이 곧잘 하는 일이지.'

그동안 준이 봐 왔던 에이든은, 아직 짧은 경력 때문인지 본인이 직접 전장을 휘어잡기보단, 지금처럼 보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준이 보이는 마법의 연속성 또한 그런 에이든의 움직임을 착안하여 즉석에서 만든 것이다.

'그 녀석처럼 파괴력이 나오진 않겠지만.'

대신 원거리 공격이라는 특성상 전장에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는 훨씬 넓었다.

'이게 바로 마법의 장점.'

배우기만 한다면 다양한 유틸리티로 전장의 불리함을 뒤집는다.

그 덕분일까.

고블린 로드로 인해 약화의 오오라에 영향을 받는 병사들이었지만, 꾸준히 고블린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확실히 황실 소속군다운 실력이었다.

"마법사님이 뒤에 계신다!"

"우린 앞에 있는 녀석들만 막으면 돼!"

쓰러지는 고블린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병사들의 사기도 단단하게 굳어졌다.

결국, 전장의 상황이 정체되자 먼저 움직인 것은 고블린 로드였다.

타루우라차!

고블린 로드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광폭화 주술만으로는 빠르게 병사들을 밀어 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병사들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주술을 사용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녀석이 앞으로 나오며 주술을 외우는 순간.

타탓!

줄곧 몸을 숨기고 있던 에이든이 움직였다.

에이든의 위치는, 정확히 고블린 로드의 머리 위였다.

* * *

마법의 장점은 다양한 사용법에 있다.

그것은 과거 준이 '이정준'이었던 시절, 화력 하나에만 몰빵했던 마법사를 키우며 절절히 느낀 결과물이었다.

'솔직히 딜 하나만 두고 보면 전사만 한 게 없지.'

훗날 고위력의 마법을 배우기 전까지, 마법사가 해야 할 일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다양한 유틸리티를 살려 팀원에게 도움을 주는 것.

때문에 앞서 준은 게임 <블랙아웃 >의 리메이크 출시까지 걸린 2년이란 시간 동안 마법으로 쓸 수 있는 여러 전략들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당시 이정준은 새삼 마법에 대한 재평가를 내렸다.

"조건만 갖춰지면 진짜 개사기 클래스다. 파티 시너지를 이렇게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니."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과 같은 기습 플레이였다.

[포그 오브 사일런스 (Fog of silence)]

기척을 줄이는 마법.

거기에 더해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덮인 망토로 은신해 있던 에이든이 나무 아래로 낙하했다.

목표는 고블린 로드의 머리.

하나, 고블린 로드 또한 평범한 고블린 주술사가 아니었다.

이레귤러.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놈이 미세한 기척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회심의 기습이 실패한 순간.

고블린 로드의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한 번 실패한 기습의 대가는 죽음뿐.

이미 에이든의 주변으로 고블린 로드를 호위하고 있던 고블린 투사들이 장창을 들어 에이든을 노리려던 찰나.

놈은 보았다.

자신처럼 얼굴에 여유가 깃든 에이든의 표정을.

"...!!"

애초에 기습을 시도한 인물은 에이든뿐만이 아니었다.

사락―

바로 옆에 있던 나무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왔다.

캬흐?!

고블린 로드가 옆을 돌아 본 순간 보인 것은 진중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지노반과.

그런 그의 검에 둘러진 푸른 빛의 오러였다.

카르투――!

죽음이 눈앞에 도래했다.

그 순간을 인지한 고블린 로드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찰나의 순간 죽음을 목도한 녀석이,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레귤러의 영혼이 외쳤다.

이대로 조용히 죽을 수만은 없노라고.

그 마지막 순간 놈의 독기가 발휘되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결코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독기가.

타나하――!!

마지막의 마지막. 선천적으로 타고난 주력(呪力)을 끌어올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영혼마저 바친다.

고작 찰나에 불과한 순간, 놈은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끝에는, 에이든이 있었다.

* * *

이토록 집중한 적이 있을까.

에이든과 지노반이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준은 자신에게 일어난 신기한 현상을 목도했다.

알 수 없는 기억의 파편이 뇌리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한 탓에 뇌가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 이대로 포... ...수 는 ...다!

그곳은 어느 한 지하실이었다.

오랫동안 정리를 하지 않은 듯, 눅눅한 공간 속에서, 허름한 거적떼기를 두른 누군가가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이건...?'

하지만 그 기역의 편린은 아주 잠깐만 스쳐 지나갔을 뿐.

다시금 준의 시선 끝에서 보이는 것은 독기에 가득 차 주문을 외우는 고블린 로드였다.

주술이 눈에 보인다.

단순히 주력에 의해 뭉친 붉은 안개 따위를 말함이 아니다.

주술에 얽힌 힘의 흐름과 그 안에 담긴 악독한 의지.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에 보였다.

'[영혼 사슬]...?'

스스로의 영혼을 바쳐, 타인과 고통을 분담하는 주술.

물리력은 없으나, 자칫 잘못하면 고통에 의한 쇼크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주술에 당한 대상의 뇌는 선명한 고통을 느낄 테니까.

실제로 과거 '이정준' 시절 그가 이끌던 파티의 인원 중 하나가 그런 죽음을 맞이했던 적이 있었다.

"...!"

마법사의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 준의 마력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디텍팅 타깃]

모여 만들어진 마력의 조준점.

그러나 그 조준점을 통해 쏘아진 마법은 없었다.

그럴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신, 아주 일부분.

그가 가진 재능이자 스킬인 [마신지체]가 반응했다.

마력의 조준점이 향한 곳. 신체 내부로 흡수한 마력이 아닌, 외부의 마력을 임의로 움직인다.

그것도 저 멀리 떨어진 고블린 로드의 일대 마력들이 준의 부름에 응답하려 했다.

그러자 초커가 멋대로 반응하며 그의 재능을 찍어 눌렀다.

무기력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으나, 그럼에도.

이빨을 꽉 깨문 준이 거기에 일말의 저항을 이어 갔다.

꿈틀―

아주 적은 마력만이 준의 의지에 반응했다.

하나,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마력이 멋대로 고블린 로드가 펼치는 주술에 섞여 들었다.

놈의 주술을 취소시킬 수는 없다.

주력은 마력과 다른 종류의 힘이었으니.

무릇 마법이란, 자연을 이루는 마력으로 현실을 비튼다.

그렇다면 주술은 다른가?

'과연 다른 걸까?'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멋대로 해석된 놈의 주술이 스쳐 지나갔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준은 또 다시 마법사의 관점과는 거리가 먼, 감에 의존한 확신을 품었다.

극히 적은 자연 속 마력이 준의 의지에 따라 고블린 로드의 주술에 섞여 들어갔다.

동시에 다양한 마법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다 폐기되고, 새로운 가능성이 자리를 잡았다.

회로판에 전기가 스며들 듯, 놈의 주술에 스며들며 영역을 확장한다.

본래라면 물리력이 담길 리 없는 마력에 물리력이 생기고.

꽉 쥔 준의 주먹처럼 놈의 주술에 스며든 마력이 아주 잠깐이나마 놈의 주술을 움켜쥐었다.

키르―?!

극히 찰나에 불과한 순간, 준의 [밝은 눈]은 놈의 얼굴에 스친 감정을 읽었다.

아마 그것은, 당혹감.

혹은 절망이나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영혼마저 바친, 악의로 점철된 주술이 무언가에 꽉 붙잡힌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놈에게 주어진 최후의 표현이었고.

촤악―! 툭.

지노반의 검은 끝내 놈에게 마지막을 선사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4화

14화 이어지는 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