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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

14화 이어지는 보상

"아이고 두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준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바로 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괜찮으십니까?"

"에이든?"

"휴우...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뭐야. 나 언제 쓰러졌었지?"

그와 함께 자신이 왜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의문이 든 준의 모습에, 에이든이 걱정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선배, 토벌전이 끝나기 무섭게 쓰러지셨습니다."

"으음...?"

에이든의 말에 잠시 굳어 있던 머리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뜻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이다.

"아, 맞다. 고블린 로드가 죽고...."

에이든과 지노반은 고블린 로드의 암살에 성공하기 무섭게 곧장 뒤를 돌아 도주를 선택했다.

근처에 있는 투사들은 지노반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 뒤에 몰려 있는 이백여 마리의 고블린들까지 상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때문에 두 사람이 분노한 고블린 투사들을 데리고 도주하는 사이, 준은 병사들과 함께 남은 고블린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다행히 우두머리가 죽자 고블린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 두려움이 퍼져 나갔고, 놈들이 와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쓰러졌었지...."

고블린 로드의 주술에 간섭하는 과정에서 몸에 걸린 부하가 생각 이상으로 컸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 정신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흩어지기 시작하는 고블린들의 모습과 동시에 준의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이런 미친...?"

워낙 위험한 상황이었던만큼, 준 또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고블린 로드를 상대로 내가 뭔 짓을 했던 거지?'

본래 타인의 마법에 간섭하는 것은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고블린 로드는 주술사이지 않은가.

마법도 아니고, 아예 다른 계열인 주술에 자신이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마법적 지식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

준은 당시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사람을 구하려고 목숨까지 걸었다니.'

머리에 걸려 오는 부하를 알고 있었음에도 준은 에이든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망설임 없이 행동에 나섰다.

자신에게 이런 이타적인 면모가 있었던가.

어쩌면 지난 1년 동안 제대로 의지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일까.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동료로 에이든을 맞이하며 정신이 느슨해졌던 것일지도 몰랐다.

'뭐, 그때로 돌아갔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긴 한데.'

당시에는 위험에 빠진 에이든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래도 새삼 스스로의 감정 상태에 괜히 씁쓸한 감정이 일었다.

불과 1년만에 인간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게 박혀 버린 자신에게, 아직까지 '이정준'의 감성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게 썩 나쁘게 다가오진 않았다.

"저, 선배. 괜찮으십니까?"

재차 이어지는 에이든의 물음에 준이 괜찮다는 듯 팔을 흔들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보다, 지금 상황은 어때?"

"선배가 쓰러지고 반나절 정도 지났습니다. 당장은 주변에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고 휴식 중입니다."

"그런가... 아, 그건 그렇고. 너도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에이든 또한 위험을 감수한 건 마찬가지였다.

지노반과 함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으니.

"저는 괜찮습니다. 지휘관께서 활약해 주신 덕분에."

에이든의 설명에 의하면, 고블린 로드를 암살한 직후 숲으로 도주한 두 사람은 금새 뒤따라온 고블린 투사들을 처리했다고 한다.

"지노반 지휘관께서 보여 주신 검술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

"예. 덕분에 많은 배움을 얻은 것 같습니다."

재능이 넘치는 녀석답게, 기사들의 실전 검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놈이 주술을 펼쳤을 때 그 현상은 도대체 뭐였지?'

마치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적, 이 몸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받았을 때처럼 타인의 기억이 강제로 주입되는 듯한 경험과 비슷했다.

당시에도 준은 처음 쓰는 마법을 본능적으로 다루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 봤으나, 그때처럼 자연 상태의 마력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가 가진 가능성이 멋대로 발휘된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지만, 아쉽게도 그 이상 생각을 이어 가진 못했다.

"일단... 더 쉬어야겠다."

아직, 그의 육체는 휴식을 강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 * *

주변 정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어차피 고블린 로드가 죽은 지금, 사방으로 퍼져 나간 고블린들은 알아서 개체 수가 조절될 것이다.

우두머리를 잃은 고블린들은 갑작스레 비어 버린 자리를 탐내며 싸울 것이고.

약해진 녀석들의 결집력을 눈치 챈 다른 몬스터들이 생태계의 빈자리를 알아서 찾아갈 테니.

덕분에 토벌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요새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황실 이름으로 나온 보상이야."

그렇게 요새로 복귀하고 며칠이 지난 시점.

오랜 행군과 전투로 지친 심신을 회복한 준은 곧바로 클로이를 찾았다.

그녀에게 받을 게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금액이 대단치는 않은데."

가죽 주머니에 한가득 담긴 금화.

모두 계산해 보면 얼추 900만 골드 정도일까. 이 세계의 돈이 원화와 거의 비슷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목숨 걸고 일한 것 치고는 정말 얼마 안 되는구나. 이마저도 에이든과 나눠야 할 거고.'

그래도 고작 브론즈 등급의 용병대가, 그것도 단둘이 참여한 것치고는 꽤 큰 리턴을 받았음은 틀리지 않았다.

"관행이라는 게 있으니까. 거기에 황실의 짠돌이들이 쉽게 돈을 풀진 않을 거고. 그나마 그것도 많이 받은 거다? 골렘의 핵 가격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너도 애초에 이런 쪽을 기대한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임무 완수금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보상은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먼저, 이번 일을 계기로 준이 이끄는 흰고래 용병대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다.

'세상 어떤 용병대가 첫 임무부터 필드 보스를 토벌했겠어.'

더 나아가 녀석이 72년만에 등장한 이레귤러였으니, 그 무게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 이 정도에 만족하고 용병대원들을 뽑을 생각은 없다만.'

그거야 차차 진행하면 될 일이었고.

보상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던전 소유권은 어떻게 됐어?"

수입이 불안정한 필드와는 달리,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한 던전.

때문에 던전은 모든 용병과 모험가들에게 사랑받는 블랙아웃의 요소 중 하나였다.

일정 주기마다 초기화되는 특성 덕분에 몬스터 수급도 안정적이고.

무엇보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스킬북과 아티팩트를 획득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급처 중 하나였으니.

"후후후...."

그리고 클로이는 이번 토벌에 여러모로 투자를 진행하면서 바로 그 던전의 소유권을 우선해서 구매할 권한을 챙겼다.

경매로 넘어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돈을 크게 아낄 수 있는 것이다.

"놀라지나 말라고. 무려 일곱 채나 받았으니까!"

"일곱 채? 생각보다 많이 받았는데? 황실에서 그걸 허락해 줬어? 독점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녀석들인데?"

"하! 물론 쉽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 요새 사령관이 애초에 중앙 정치에서 나온 인물이잖아."

"아하... 그쪽 인사들까지 포섭한 거야?"

"뭐, 이래저래 떼 주기로 한 게 좀 있긴 하지. 그래도 이득이 훨씬 커!"

향후 클로이가 사들인 던전은 다양한 모험가와 용병들이 사용할 터.

당연히 그에 대한 수수료로 클로이가 벌어들일 금액은 적지 않았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스킬북이나 아티팩트가 발견된다면, 우선 구매권을 얻게 되니 이 또한 훗날 경매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클로이는 이제부터 앉아만 있어도 돈이 들어오게 됐다는 의미였다.

"역시 돈이 돈을 부른다니까? 얼마나 편해?"

"그래그래. 거기에 내 이름도 들어간 거 잊지 말라고."

"흠흠. 물론이지! 상인의 생명은 신용이니까."

애초에 이번 투자 계획을 시작한 것은 준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뼈대는 모두 준이 세웠고, 클로이가 살을 덧붙인 것이다.

당연히 거기에 대한 준의 몫도 포함되어 있었다.

"순수익의 5%. 던전 운영이 시작되는 대로 네 이름의 계좌에 들어갈 거야."

매년 대대적인 초기화가 이루어지는 블랙아웃인 만큼, 그 기간은 길어 봐야 1년이 좀 안 되는 수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기서 모인 금액을 바탕으로 투자해 금액을 계속해서 불려 나가면 될 테니까.

또한, 1년 동안 꾸준히 들어오는 수입은 심적으로 안정감을 가져다 줬다.

준이 생각한 보상은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아직 클로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후후후... 그리고, 보상이 이게 끝은 아니지."

"무슨 소리야?"

"짜잔! 이걸 보시라!"

그런 클로이가 꺼낸 것은, 고급스러운 원목과 황금색 띠로 잘 포장된 상자였다.

"이건?"

"물어볼 시간에 열어나 봐. 참고로 지노반 지휘관이 보내 준 거야. 기대해도 좋을걸?"

"음...."

텐션이 높은 클로이의 반응에 준도 살짝 기대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마치 아주 어릴 적, 생일 선물의 포장지를 뜯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허?"

그리고 그 안에는, 준의 생각을 뛰어넘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이건...."

고블린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진녹색 커버의 책. 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스킬북이잖아?"

"맞아. 네가 토벌한 고블린 로드한테서 나온 거지."

"이걸 어떻게...?"

"도르타곤 남작이 지노반 지휘관한테 내린 포상이야. 그 사람 입장에선 지노반 경이 직접 고블린 로드의 머리를 베어 버린 덕분에 살았잖아. 그리고 그 지노반 지휘관이 너한테 이걸 넘겨줬지."

"이걸 대가도 없이 그냥 준다고?"

"네가 그 사람한테 해 준 게 많은데 그냥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들어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이번 토벌전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준과 클로이, 그리고 지노반이었으니까.

"스킬북이라."

스킬북의 가격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다.

아무리 싼값의 스킬북이라도 수십만 골드는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억 골드를 호령하기도 한다.

'어디보자, 주술사 계열의 고블린 로드가 떨어뜨리는 스킬북이 뭐였지?'

몇몇 스킬이 금방 그의 머릿속에 리스트화되어 떠올랐다.

"감정사들한테 감정까지 끝냈어. 스킬명은 [중급 주술]이야."

"아... 그렇군."

순간적으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컸다.

주술은 마법에 비해 아무래도 마이너한 분야라 큰 인기는 없었은까.

그만큼 가격도 많이 나가는 편은 아니었고, 준이 배우기도 애매했다.

마력을 쓰는 그가 주력을 사용하려면 충돌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고블린 로드의 주술을 해석했던 게 좀 걸리긴 한데... 그렇다고 무모한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당장은 그런 도박보다는 팔아서 새로운 마법을 배우는 게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

'그래도 좀 아쉽긴 하군. 만약 약화의 오오라 같은 게 떴다면 대박이었을 텐데.'

물론 그랬다면 지노반이 넘겨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못해도 가격이 수십 배는 뛰었을 테니까.

"그래도 [중급 주술]이면 사용처가 꽤 많아. 마탑에서도 관심을 가질 거고."

"당연하지. 경매가만 잘 붙으면 천만 골드까지는 갈 수 있을걸?"

천만 골드면 분명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며칠 전만해도 용병 길드 앞에서 60만 골드를 썼다고 손을 덜덜 떨지 않았던가.

"그럼 이번 토벌전으로 번 순수익은 대략 1,400만 골드인가?"

에이든에게 나눠줘야 할 돈도 있었고, 스킬북의 경우에는 경매로 넘어가면 클로이에게도 수수료가 떨어질 테니, 그 정도 금액이 나올 터.

직접 용병대를 이끌며 얻은 첫 수익치곤 상상 이상의 금액이었다.

"아, 그리고 지노반 지휘관이 따로 불렀어. 내일 오후쯤 가 봐."

"또?"

보상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 * *

다음 날 오후.

클로이의 말대로 준은 지노반을 만나기 위해 요새로 향했다.

지노반은 그간 좀 바빴는지 피곤함이 엿보였으나 이전과 달리 생기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이군, 준. 잘 지냈나?"

"지휘관님 덕분입니다. 보내 주신 스킬북은 잘 받았습니다."

"하하, 무얼. 자네가 내게 해 준 걸 생각하면 더 못 챙겨 줘서 아쉬울 따름일세."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이번 토벌전에서 지노반이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았으니까.

우선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고, 성공적으로 정찰대를 이끌었으며, 동시에 고블린 로드를 직접 처단하지 않았던가.

몰락 귀족으로서 명예에 목이 말랐던 지노반에게는 돈보다 소중한 전공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길레느 상회와 사령관의 큰 지지도 받고 있는 상황.

따라서 그 모든 것을 가져다준 준이기에, 그 정도 보상은 지노반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해 볼 만한 투자였다.

지노반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로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이렇게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닐세. 바로 이것 때문이지."

"이건...?"

지노반이 건네는 서류를 살펴 본 준이 두 눈이 희둥그래졌다.

"공략전의 추천장일세."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5화

15화 공략전

공략전.

게임 <블랙아웃 >에 존재하는 대형 레이드 컨텐츠 중 하나로, 필드 보스 이벤트의 상위 격 컨텐츠였다.

보통 필드 보스 이벤트가 끝나면 진행되는 이벤트로, 최근 고블린 로드가 등장했을 당시에도 여러 모험가들이 요새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가.

'공략전을 맡게 된 게 '청운'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여긴 최소한 2레벨은 돼야 참가 할 수 있을 텐데.'

설마하니 그걸 벌써부터 접하게 될 줄은 준도 모르고 있었다.

'지휘관의 추천서라.'

게임 내에서는 이런 이벤트가 없었던 만큼, 준은 지금의 상황이 이례적임을 인지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이해득실이 스쳐 지나갔으나,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노반의 배려 덕분이었다.

"이걸 어떻게 쓸지는 자네가 선택하게. 팔아도 되고, 직접 사용해도 괜찮네."

그러니 일단 챙겨 가라는 그의 순수한 호의에 준은 짧게 감동을 느끼며 받아들였다.

"이렇게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공략전?!"

다시금 돌아온 클로이의 사무실.

"너, 아직 1레벨이잖아? 2레벨도 안 된 사람한테 추천장을 넘겨줘?"

보통 각 계층의 공략전은 해당 계층의 레벨에 한 단계 높은 이들을 위주로 편성한다.

가령, 1레벨 공략전의 경우에는 2레벨 유저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더 나아가 공략전의 핵심인 공대장의 팀은 최소 3레벨은 되어야 했다.

당연히 1레벨 유저에게 돌아갈 자리 따윈 없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클로이의 저런 반응이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 그런데 선배. 공략전이 정확히 어떤 겁니까?"

한편,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에이든의 질문에 클로이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블랙아웃에 내려온 사람이 그런 것도 몰라요?"

"아... 하하."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애초에 황실에서 살다 온 온실 속 화초가 알면 얼마나 알겠나.

준은 자연스럽게 공략전에 대해 설명했다.

"짧게 말하자면, 대규모 던전 레이드야."

"던전 레이드, 말입니까?"

최소 5개 이상의 던전이 뭉쳐 있으며, 레이드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둔다.

당연히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참여할 수 없었고, 준도 2계층 필드로 올라간 후에나 노려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지휘관에게 그런 권한이 있었을 줄이야.'

만약 참여할 수만 있다면 여러모로 초반이 편해지는 것은 분명했다.

'특히 1레벨, 그것도 검은 숲 공략전이면 전사들한테 큰 도움이 될 테지.'

그곳에 있는 다양한 히든피스들을 떠올리며 준이 에이든을 바라볼 때, 클로이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비췄다.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클로이가 저런 반응을 보일 만큼, 공략전은 만만한 컨텐츠가 아니었다.

아주 넓긴 하지만, 공략전은 어찌됐든 대형 던전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던전은 기본적으로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외부로 나오지 못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당연하게도, 실패는 죽음이었다.

"에이든. 네 생각은 어때?"

"음... 저희 실력에 못 미치는 게 아니라면, 솔직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이런 쪽에 나름의 낭만을 가지고 있는 에이든은 눈을 빛냈다.

"뭐, 사실 우리가 거기서 민폐를 끼칠 정도는 아냐."

일단 에이든은 2레벨 유저의 필수 조건인 마력 사용자다.

당연히 평균 이상은 될 것이고, 준도 3서클 마스터에 다다른 만큼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

"하아... 그래. 뭐, 이번 건은 너희가 직접 물어 온 거니까. 내가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지. 그래도 조심해. 공략전은 필드 토벌이랑 다르게 불리하다고 물러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냥, 네가 쓸모 있어서 그런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클로이는 필요한 게 있으면 돈과 함께 부르라며 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 * *

밖으로 나오고, 요새의 거리를 거닐며 준이 말했다.

"뭐, 저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해. 들었던 것처럼, 공략전은 실패하면 그대로 끝이니까."

"외부와 차단됐기 때문입니까?"

"맞아.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거나, 전멸하거나. 던전의 출입구가 열리는 건 두 가지 경우뿐이니까."

"으음...."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차근차근 준비하면 못할 것도 아니고."

그 뒤로 준은 경매장에 올린 스킬북을 판매하고, 에이든의 장비를 보강, 동시에 필요한 마법서를 구매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클로이가 모아 온 정보를 토대로 향후 계획을 짜고, 에이든과 함께 검은 숲에 들어가 합을 맞추며 팀 워크를 키워 나갔다.

또 밤에는 새롭게 구한 마법서를 통해 마법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후우.... 쉽지 않네."

특히 이전에 아쉬웠던 [라이트닝 윕]의 위력을 보강하는 한편, 고블린 로드와의 전투에서 겪었던 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그나마 전자는 진전이 있는 편이었으나, 아쉽게도 후자의 경우 제대로 된 정보가 없던 만큼 온갖 추측이 난무 할 뿐이었다.

'결국 비슷한 현상을 또 겪어 보기 전까진 답이 없는 건가.'

생각해도 답이 없는 문제를 길게 붙잡아 봐야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결국 준은 이에 대한 해답을 뒤로 미뤄 두고,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망할 놈의 수능이랑 대학원 진학 이후로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나마 이 몸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마법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스킬 [기초마법재능] 덕분에 3서클까지의 마법서는 이해가 어렵지 않았다.

다만 4서클부터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개념들이 난무했기에, 준도 아직 거기까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법서의 가격도 마찬가지.

거기에 4서클 이후부터는 학파 또한 명확히 결정해야 했다.

속성 학파 혹은 부여, 그것도 아니면 소환 등.

지금처럼 닥치는 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스킬 강화권을 얻어서 [기초마법재능]부터 강화하던가 해야지 원."

물론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다시피,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기에 현재로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당기는 게 맞아. 4서클부터는 중급 마법사로 취급해 주니까.'

하급 마법사와 중급 마법사가 가지는 위상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이번처럼 명성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결국 실력이 받쳐 줘야 하는 일이었으니.

"결국 지금처럼 차근차근 성장하는 수밖에 없겠지."

잠시 머리를 식히던 준이 다시금 마법서에 코를 파묻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라이트] 마법으로 밝혀진 그의 방 틈새로 빛이 사라질 때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 *

시간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보름이라는 시간이 흐른 이후.

"포레스트 가디언 공략전에 참가하는 이들은 이쪽으로 오시오!"

어느덧 공략전의 날이 밝았다.

"각 그룹의 대표자들은 모두 총본부로 모여 주시오!"

한 안내인의 외침에, 공략전에 참가한 그룹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거대한 막사 내부에는 총 스무 명의 인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모험가들도 있었고, 준처럼 용병대를 이끄는 용병대장들도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2레벨 유저들이라 그런가. 장비들이 꽤 뛰어나.'

짧게나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장비를 쭉 훑어 보던 준은, 문득 자신에게도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뭔 거적떼기를 입고 왔군."

"마법사인가?"

"그리 대단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아하. 이번 요새 지휘관의 추천서가 들어왔다더니. 그 사람인가?"

"듣기로는 고블린 로드를 토벌하는데 꽤 공을 쌓았다던데...."

"그런 것치곤 장비가 썩 대단하지도 않아. 마탑 출신은 아닌 모양이야."

준이 장비를 통해 남들을 평가하듯, 그들 또한 준을 보며 평가를 내렸다.

사실 그들의 말처럼, 준은 변변찮은 장비도 구해 두지 않았다.

있다면 바람을 잘 막아 주는 로브 정도일까.

마법사가 쓸 만한 장비는 기본적으로 아티팩트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사실 낙하산 취급받아도 할 말이 없긴 하지.'

거기에 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한 1레벨 유저이지 않은가.

때문에 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에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실력으로 보여 주기 전에 아무리 설명해 봐야 들어먹을 양반들도 아니고.'

이보다 더한 무시도 겪어 봤기에, 준은 더더욱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머지않아 한 인물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 공략전을 담당한 공대장이었다.

"모두들 반갑소. 나는 이번 공략전을 책임지게 된 벤자민 브리스턴이오. 3레벨에서 작게나마 '청운'이라는 이름의 모험단을 운영하고 있소."

확실히 공략전을 책임지는 그룹답게 전원이 3레벨로 이루어진 모험단이었다.

작다는 말과 다르게 제법 이름이 있는 것일까.

몇몇 용병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운이라. 듣기로는 야수의 사원에서 제법 활약하고 있다 들었는데."

"꽤 넓은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쓰고 있다지."

"그런데 최근엔 재정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풍문이 있던데...."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걱정이 부자들 걱정일세. 귀족들에게 지원도 받는 마당에 무슨?"

"하긴, 그것도 그렇군."

각 그룹에서 모인 이들은 짧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에도 벤자민의 말이 이어졌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번 공략전의 대상은 포레스트 가디언이오. 타락한 숲의 정령이지."

그렇게 시작된 설명에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들이 입을 다물에 그에 집중했다.

비록 1계층의 공략전이긴 했지만, 여러 가지 기믹들을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면 그들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각각 존재하는 5개 던전의 특성을 설명하고, 합류 지점은 어떻게 할것인지 등 상세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그렇게 대략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각 그룹 대표들의 질문도 끝이 났다.

"그럼 마지막으로, 팀 선별을 하겠소. 참고로 팀은 무작위로 선정할 예정이오. 혹여 있을 불상사에 대비한 결정이니 따라 주길 바라오."

한 마디로 공대장 마음대로 정하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공략전에서 공대장의 권력은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결정된 준은 4팀의 멤버가 되었다.

"쯧, 그쪽이로군."

4번째 던전을 맡게 된 그룹장 중 한 명이 불만스럽다는 듯 준을 바라봤다.

딱 봐도 낙하산처럼 보이는 준을 반길 이유가 없던 것이다.

다른 이들도 그리 반기는 모양은 아닌 듯 했지만, 준은 여전히 얼굴에 철판을 깐 채 입을 열었다.

"3서클 마법사 준이다. 1계층에서 흰고래 용병대를 이끌고 있다."

"하, 꼴에 그래도 강단은 있군. 콜튼 카터요. 2레벨이고. 칼날 독수리 용병대를 운영하고 있수다."

콜튼에 이어서 남은 두 팀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호박색 눈동자를 한 여인이었다.

"2계층에서 모험가로 활동하고 있는 루시 마크너에요. 루시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여긴...."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그녀와 똑 닮은 청년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음! 마찬가지로 루크 마크너야! 잘 부탁할게?"

그들은 쌍둥이 남매로, 자신들을 프리랜서 모험가라고 소개했다.

"흐음... 혹시 두 사람은 진랑족이신가?"

그런 둘을 바라보던 콜튼이 물어보자, 자신을 루크라 소개한 청년이 두 눈을 희둥그래 떴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반짝거리는 흑발에 주황색 눈동자는 흔한 게 아니잖수. 거기에 음...."

콜튼이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거릴 게 없는 용병이라지만, 앞으로 함께 던전을 클리어해야 하는 입장이지 않은가.

쓸데없는 말로 벌써부터 내분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런 그의 기색에 루시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체구가 좀 작은 편이지요. 익숙합니다."

"큼큼."

루시의 말대로, 진랑족은 작은 크기의 신체가 특징 중 하나였다. 젋은 외모 덕분일까, 10대 중후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진랑족이라. 이름만 들어보면 꼭 수인족 같은데.'

사실 <블랙아웃 > 세계관에는 여러 종족들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짐승의 귀나 꼬리를 달고 있는 종족은 없었다.

대부분 신체적 능력이나, 몸집의 크기 차이에 불과하다.

"우리 진랑족이 그리 흔한 편은 아닌데. 아저씨 똑똑하네!"

"아저씨라니. 이름으로 부르세요, 루크."

"알겠어, 누나!"

제법 하이텐션인 루크와 조신한 성격의 루시.

여러모로 눈에 띄는 두 사람에게 시선이 돌아가기도 잠깐.

콜튼이 입을 열었다.

"그럼 뭐야. 인원 수로는 이쪽이 제일 많잖아?"

확실히, 콜튼의 말처럼 이곳에 있는 그룹장들 중 콜튼이 이끄는 그룹의 인원수가 가장 많았다.

준은 에이든과 유령 대원, 즉 둘뿐인 용병대였고, 루시와 루크는 프리랜서였으니까.

따라서 6인의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콜튼 쪽 인원이 가장 많았다.

"그렇다면 이번 던전 탐사에서는 콜튼 님이 리더를 맡아 주시면 되겠군요?"

"나도 동의할게! 사람 많은 게 짱이니까."

먼저 양보한 쪽은 두 모험가였다.

이렇게 되면 준도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애초에 앞으로 나설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쪽도 동의하지."

"큼큼. 보기와 다르게 보는 눈들이 있군. 뭐, 잘들 부탁하겠수다."

마치 조별 과제의 조장처럼 맡아지긴 했지만, 팀장이라는 지위가 그 정도로 이미지가 나쁘진 않았다.

일단 공략전에서 팀장을 맡았다고 하면 어딜 가나 대우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저런 식으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훗날 공대장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아무튼 까칠했던 콜튼의 첫인상과 다르게 이후 진행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럼 출정을 준비하겠소! 다들 건투를 빌겠소이다!"

그리고 다음 날. 던전 탐사의 진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 *

하루 정도 휴식을 마치고 공대장을 필두로 각 팀이 배정받은 던전으로 향했다.

"쯧, 필드형 던전은 아니군."

던전 내부의 풍경을 바라본 콜튼이 그리 중얼거렸다.

사방이 꽉 막힌 어둠 속.

희미하게 발광하는 이끼들 사이로 보이는 곳은 누가 봐도 필드형 던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라이트(Light)]."

준의 마법으로 주변이 밝혀지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풍경이 드러났다.

땅굴로 이루어진 이곳엔 중간중간 진녹색빛을 띠는 나무뿌리가 벽 밖으로 드문드문 튀어나와 있었다.

"미로형 던전, 거기에 녹색 나무뿌리. 땅굴까지. '썩은 나무뿌리' 던전으로 추정되네요."

쌍둥이 모험가, 루시의 말에 콜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마법사. 괜히 넘어져서 어디 다치지나 말라고. 여긴 땅에도 뿌리가 드문드문 튀어나와 있어서 한눈 팔면 넘어지기 십상이니까. 어디 부러져도 우린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콜튼의 말에 용병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에이든이 욱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은 조용히 그런 에이든의 팔을 붙잡는 것으로 만류했다.

"충고 고맙군."

"흥, 알았으면 됐수다. 그럼 이제 가자고."

"선배...."

여전히 표정에 철판을 깔고 있는 준과 다르게, 에이든은 여간 분한 게 아닌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물론 준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저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기에 침착할 수 있었다.

'그만큼 하급 마법사들은 1인분을 하기 힘드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러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은 편이지.'

기본적으로 모든 마법사들은 마탑 출신이다.

그러기에 보통의 하급 마법사들은 마탑에서 스승을 모시며 마법을 배우지, 준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지는 않는다.

'하급 마법사가 밖으로 나온 경우는 딱 한 가지 뿐이긴 해.'

바로 마탑에서 퇴출당하는 것.

능력 부족이 이유일 수도 있고, 다른 사고를 일으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능력도 없으면서 콧대만 높다는 점이다.

당연히 반평생 마탑에서 삶을 보내 온 이들이 바깥에서의 삶에 쉽게 적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주제에 마탑에서의 삶에 익숙해져 반쯤 귀족처럼 꺼드럭거리니 용병들 입장에서는 좋게 볼래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중급 마법사부터는 마탑에서 파견을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적당히 존중해 주지만, 하급 마법사가 어딜 가도 무시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나도 마법사를 키울 때 비슷했는데.'

스킬북을 산다고 포션 값도 아껴 가며 파티원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던가.

덕분에 명성치가 수직 하락하며 망캐의 전조를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용병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용병들은 단순해. 자신의 가치만 보여 주면 알아서 인정하거든.'

즉, 말이 아닌 실력을 보인다면, 저들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히듯 바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기에, 준은 자신에게 향하는 모멸을 담담히 받아 냈다.

"선배...."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에이든이 준을 걱정하듯 바라봤지만.

"기다려 보라고. 내가 괜히 비싼 돈 들여서 마법서를 구매한 게 아니니까."

여러모로 제약이 많이 따르지만 순수하게 이론만으로 봤을 때, 마법사는 게임 <블랙아웃 >에서 가장 사기캐로 취급받는다.

괜히 다회차 클래스가 아닌 셈이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6화

16화 전조 (1)

던전의 초반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몸에 독버섯을 피운 포이즌 아우터 울프라던가, 무리를 지어 다니는 스틸버그가 튀어나오며 앞길을 막았지만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포이즌 아우터 울프의 경우, 일반적인 아우터 울프의 변이종이라 독을 내뿜기도 하지만 이 녀석은 기존의 아우터 울프와 다르게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스틸버그는 튼튼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지만 1레벨 유저들에게나 상대하기 어렵지, 마력 사용자인 2레벨 유저에겐 그 방어력도 별 소용이 없었다.

"우와. 확실히 던전이라 그런지 마석의 순도도 높네?"

가느다란 쌍검으로 마지막 남은 스틸버그를 처리한 루크가 반짝이는 푸른 빛의 마석을 가리켰다.

"이런 거라도 있어야 이 고생을 하는 거지. 물론, 우리가 원하는 목표는 더 큰 거지만."

한 용병의 말에 루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그러니 앞서 합의한 대로 분배는 제대로 해 주길 바랄게요."

루시가 말한 분배란, 앞으로 나올 전리품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반적인 던전과 달리, 레이드 던전은 다른 던전에 비해 마석이나 아티팩트 혹은 스킬북의 등장 빈도가 높았다.

그리고 그 모든 전리품은 각 그룹의 활약에 따라 차등 분배된다.

"걱정 마쇼. 그런 부분은 놓치지 않으니까."

팀의 분열이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그런 분배에서부터기에, 콜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문제 없이 던전을 진행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던전은 그 흉악한 속내를 점차 선보이기 시작했다.

"전방에 변종 아우터 울프다!"

"4시 방향에서 다수의 스틸 버그 무리 확인!"

"6시 방향에서 스틸 버그 무리 추가 등장!"

난데없이 시작된 전투.

하지만 팀원들은 몬스터들의 기습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계획된 것처럼 나뉘어져 움직였다.

전방의 포이즌 아우터 울프는 준의 보조를 받은 에이든이, 4시와 6시는 콜튼의 용병대와 두 모험가가 처리했다.

무사히 끝마친 전투.

그에 다른 용병들이 전리품을 챙기는 사이, 콜튼이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준에게 말했다.

"탐색 마법이라는 게... 이렇게 편리한 것인 줄은 몰랐군."

방금 있던 전투에서 준의 도움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었다.

* * *

'열심히 배운 보람이 있네.'

지난 보름의 시간 동안 배웠던 탐색 마법, [스캔(Scan)].

덕분에 언제 몬스터들의 기습을 미리 알아차린 준이 팀원들에게 알렸다.

그에 팀원들은 곧바로 진형을 갖춰, 다가올 전투에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법에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보게. 자네 마력은 괜찮나?"

"이렇게 도와 준 건 고마운데, 괜히 나중에 마력이 부족하다고 짐짝 취급이 되면 곤란해!"

일단 3서클 마법 주제에 어지간한 공격 마법보다 마력을 많이 잡아먹었고, 무엇보다 그 범위가 생각보다 좁은 탓에 자주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물론, [마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준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 부분은 걱정 마라. 나름의 방법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럴 때를 대비해 준도 만들어 둔 대안이 있었다.

"그건?"

준이 내민 반지에 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반지.

세련되게 세공된 반지는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물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마법사가 쓰고 있다면 더욱 그런 이미지가 남으리라.

"아티팩트인가?"

콜튼의 물음에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물건이야. 흡수율도 좋아서 스캔 몇 번 쓴다고 쓰러지진 않아."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건 단순히 고블린들의 창고를 털 때 나온 평범한 반지에 불과했으니까.

[마신지체]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야...."

"크흠.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자자, 어서 전리품이나 챙기자고."

준의 계획이 생각보다 잘 들어먹혔는지, 용병들은 금방 잿빛으로 화한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챙겼다.

준도 후방에서 그런 그들을 따라갔는데, 에이든이 슬그머니 다가오며 물었다.

"선배."

"응?"

"그런 방법이 있는데 왜 이전에는 쓰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쟤들은 이번에 만나고 말 애들이잖아."

"아...?"

아티팩트는 일단 기본적으로 비싸다.

준이 에이든의 장비는 맞춰 주면서 정작 자신을 위한 장비를 못 맞춘 이유가 바로 돈 때문이지 않은가.

1계층에서 활동하는 용병들에겐 눈이 돌아갈 만큼 비싼 게 바로 아티팩트였다.

아무런 백도 없는 하급 마법사 쯤이야 쓱싹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로.

"그, 아무리 그래도 같은 용병들끼리...."

"내가 당했던 거야."

"예?"

"내가 직접 당해 봤던 거라고."

괜히 준이 이곳에 온 지 고작 1년만에 인간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게 아니다.

이 방법도 언젠가 한 번 썼던 방식이었는데, 당시에는 목걸이를 아티팩트라 속였다가 자던 도중 그대로 목이 잘려 나갈 뻔했다.

진짜 아티팩트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샀던 싸구려 목걸이 하나 때문에.

"...."

"괜히 그런 분란을 일으킬 바에야, 차라리 적당히 못났으면서 적당히 써먹을 곳이 있는 마법사로 사는 게 편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까진."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방법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2계층에서 활동 중인 유저들이었고, 그들 입장에서 아티팩트는 비싸긴 해도 평생 구경조차 못할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말, 살아가는 게 팍팍한 것 같습니다."

"길 가다가도 코 베이는 게 이쪽 바닥이야. 적응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우울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지만, 금방 시작된 전투가 이런 분위기를 날려 버렸다.

"페어리들이다!"

"우드 엔트도 같이 있어!"

"조심해! 정면에서 받아 내면 방패째로 부서진다!"

숲에서 봤던 골렘처럼 몸체가 튼튼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페어리가 깃든 나무 거인, 우드 엔트는 경시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다.

'기본적인 스팩만 보자면 골렘보다 낮은 수준이지만....'

던전의 특성이 녀석을 강하게 만들었다.

숲의 요정인 페어리들이 나무로 이루어진 엔트들의 몸체를 강화시킨 것이다.

거기에 페어리들은 물리 대미지에 면역이라는 사기적인 특성까지 가지고 있다.

"이봐, 마법사! 밥값 할 차례다!"

때문에 물리 대미지가 아닌 마법을 쓸 수 있는 준이 나설 차례였다.

'밥값은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만.'

콜튼의 외침에 준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곧바로 마법을 영창했다.

'그럼 일단 여기서는... 새로 배운 마법부터 써 볼까.'

[부여계: 엘리멘탈 아머리(Elemental armoury)]

[부여 속성:전기]

준의 마력이 사방으로 퍼지며, 전방에서 전투를 치르던 팀원들의 무기에 속성부여 마법이 깃들었다.

치치치직―!

"어어, 망할 뭐야!"

"무기에서 스파크가...!"

당연히 준이 공격 마법으로 페어리들을 처리할 거라 생각했던 용병들이 혼란에 빠졌으나, 이내 그들의 귓가에 에이든의 외침이 들어왔다.

"당황하지 말고 싸우세요! 인챈트 마법입니다!"

"이런 젠장. 그런 건 일찍 말하라고!"

전방에서 방패를 든 전사들이 우드 엔트를 상대로 버티는 사이, 양 사이드로 돌아간 이들이 후방에 있던 페어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번개 속성이 깃든 무기가 페어리들에게 통하자, 용병들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물리 속성 면역이라는 특성을 제외하면, 페어리는 그저 나방에 불과했으므로.

――!!

그렇게 하나둘 페어리들이 쓰러지자, 강화된 우트 엔트도 점차 그 위력을 잃으며 용병들의 맹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후우. 깜짝 놀랐군, 마법사.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나?"

모든 전투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사이. 콜튼은 새삼스럽게 준을 바라봤다.

탐색 마법이야 하급 마법사들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마법이다.

유용함에 비해 많이 쓰지 못하는 게 단점이었을 뿐.

그러나 방금 펼쳤던 부여 마법은 아니었다.

이만한 인원들에게 한 번에 거는 마법이 평범하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방금 마법은 3서클이 마법이 맞아요. 단지 마법 자체가 워낙 난해한 종류의 것이라 대부분 3서클 마법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편이죠. 동료에게 그런 걸 해 줄 시간에 스스로 해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그게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는 방법 중 하나기도 하고."

콜튼의 말에 대답한 것은 쌍둥이 모험가 루시였다.

'오, 이걸 알고 있네.'

루시의 말처럼, 이번에 준이 쓴 마법은 상당히 난해한 종류의 것이었다.

고블린 로드 토벌을 하기 전, 클로이를 통해 구매한 마법서였는데 최근에서야 활용할 수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흐음...."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꼬던 루시가 침착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아티팩트 내에 마력은 어느 정도 남아 있나요?"

"방금 마법을 끝으로 70퍼센트까지는 사용했어. 다 채우려면 대략 10시간 정도 필요하겠군."

"단순 계산으로만 따지면 일주일 이상은 버틸 수 있겠네요."

"내가 나설 순간이 더 많아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지."

"훌륭한 아티팩트에요. 하지만...."

그에 무언가 생각하듯 루시가 고개를 숙였고, 옆에서 콜튼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흠! 아무튼 1인분은 충분히 해 주는 것 같구만. 이대로만 해 달라고. 마법사 양반."

괜히 첫만남 당시 줬던 핀잔이 마음에 걸렸는지 콜튼이 어색하게 다가와 준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뜨려 할 때, 루시가 그런 그를 붙잡았다.

"팀장님. 던전의 진행도는 어떻게 되죠?"

"글쎄. 지금 속도로 봐서는... 마법사 양반 덕분에 3일 정도로 보고 있는데."

본래라면 전투를 펼칠 때 더 많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당장 아까 준의 탐색 마법 덕준에 적들의 기습에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았던가.

보통 그런 전투가 일어나면 부상자가 나오기 마련인데, 그렇게 되면 당연히 공략이 지연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체될 일도 없었다.

"클리어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마법사님의 마력을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빨리 클리어해서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도 좋지만... 여긴 일단 공략전이잖아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마법사의 마력은 아끼고 싶다는 의미였다.

루시의 말에 콜튼도 제법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금방 수락했다.

"뭐, 그쪽 말대로 언제 또 마법사 양반이 필요해질지 모르니까. 그럼 그런 걸로 알라고, 마법사 양반."

"...배려에 감사하지."

그렇게 이야기가 일단락됐을 때.

에이든이 말을 걸어왔다.

"선배, 다행히 일이 조금은 쉽게 돌아가는 것 같군요."

준이 가진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에이든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선배?"

"...."

정작 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도무지 일이 쉽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 * *

'왜 아무도 그 히든피스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거지?'

나름 게임의 고인물이라 자부하는 준답게, 그는 <블랙아웃 > 내에 다양한 히든피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준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국에서 블랙아웃이 발견된지도 어느덧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지 않았던가.

당연히 이곳 주민들도 다양한 히든피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준이 지금 떠올리고 있는 히든피스는, 황실에서도 공식적으로 언급했던 정보였다.

'분명 황실에서 제대로 된 검증을 통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왜?'

불안감이 점차 증폭되고 있었다. 그 불안감이 어느 수준이냐 하면, 앞서 흰고래 용병대가 고블린 토벌에서 전멸했을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씩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지극히 마법사다운 관점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 불안감을 만들어 내는 원인은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 있을 터.

그리고 그 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불안감의 원인을.

그것은, 게임과 현실의 괴리감에서부터 발생했던 것이다.

"이런 젠장."

"선배?"

피이이이이....

누군가에 의해 짓밟히는 잡초에서 나는 특이한 소리.

이 던전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고서부터 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바로 저 소리가, 준의 불안감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있던 원인이었다.

"에이든."

"...예."

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음일까.

에이든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이번 공략전. 쉽지 않겠다."

* * *

던전 탐사 1일차에는 큰 위험 없이 지나갔다.

야영 준비를 하던 와중 준은 동료들과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콜튼에게 다가갔다.

"크크, 그래서 그때... 음? 뭐야. 우리 마법사 양반이로군.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

나름 준의 활약에 깊은 감명을 느낀 걸까, 콜튼은 더 이상 준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게 미소까지 지었는데, 실력 없는 마법사는 배척해야 할 존재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무조건 인연을 쌓아 두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리 말을 걸어 주는 걸 보니 내가 제몫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음? 아, 하하하! 그렇지. 내 살면서 당신 같은 하급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본론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말을 거는 거지?"

"그룹당 분배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왔다."

"호오...."

그러자 방금까지 친근하던 콜튼의 표정이 냉철하게 바뀌었다. 전형적으로 이득을 쟁취하기 위한 용병대장의 것이었다.

"이쯤되면 우리 용병대가 그저 낙하산은 아니라는 걸 증명한 것 같은데. 어떻지?"

"뭐, 저 예쁘장한 댁 동료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마법사 양반. 당신이 최소 3인분 이상 하고 있다는 것을 내 부정하지 않지."

"그럼 당연히 수익 분배도 다시 측정해야겠지?"

"흐음...."

그러나 콜튼도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본래 준이 이끄는 흰고래 용병대는 반쯤 짐짝 취급을 받았다. 때문에 전리품 중 가장 중요한 스킬북에 대한 권한은 제외 대상이었다.

지금 준은 그 스킬북에 대한 획득권을 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글쎄... 분명 그쪽이 3인분 정도 하는 건 맞지. 하지만 그게 우리 용병대나 저쪽 모험가들이랑 같은 수준이냐 하면, 솔직히 고민되는군."

그 말에 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말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용병들이야 최전선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모험가에게마저 공적치에서 밀리는 것이다.

'쯧. 망할 모험가 버프.'

전투력만 보자면 콜튼의 용병대원들과 실력 차이가 거의 없는 모험가들.

하지만 모험가들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모험의 여신 헤르메테스의 권능이다.

"[순례자의 여명] 때문인가...."

놀랍게도 이 세계에는 실제로 신이 존재한다. 직접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신자들에게 권능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헤르메테스의 권능은 간단하다.

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것.

위기를 감지하는 것.

얼핏 들어도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지도 아이템을 소지하고 있지 않은 경우 미니맵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모험가가 있다면 달라졌지.'

게임 <블랙아웃 >에서는 모험가가 파티 내에 있다면 던전의 클리어 목적지까지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미니맵이 생성됐었다.

물론, 생각만큼 편리한 기능은 아니다.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하루에 단 한 번뿐이었고.

그것도 길을 안내하느냐, 위기를 감지하느냐 둘 중 하나로 귀결됐으니까.

그리고 그 능력은 반드시 '모험'이라는 테마 아래서만 발휘가 되었다.

'그래도 이런 던전 같은 경우 클리어 시간이 몇 배나 줄어든다고 봐야겠지.'

그렇기에 여러 방면으로 팀에 도움을 줬던 준도 그들에 비해 조금 부족한 감이 있던 것이다.

콜튼은 과연 팀장의 역할을 맡은 만큼, 그리고 이득에 민감한 용병답게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했다.

그에 따라 준도 빠르게 욕심을 접었다. 애초에 본론은 그쪽이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정정하지. 개별 탐사 권한을 요구한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7화

17화 전조 (2)

늦은 밤. 다른 팀원들이 잠에 빠져든 시각.

준과 에이든은 팀원들로부터 떨어져 개별 탐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는 준이 수익 분배에 대한 것을 포기하는 대신, 콜튼에게 구한 권한이었다.

물론, 콜튼도 여러 조건을 걸어 두긴 했다.

허락된 시간은 하루에 단 1시간.

팀의 일정 중에는 불가능.

단 한 번이라도 몬스터 어그로가 끌려 팀에 위협이 된다면 권한 회수 등.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엇, 선배! 여기 책입니다!"

"스킬북은 아니고... 에휴. 그냥 고서인가."

에이든이 나무 뿌리 사이에 얽혀 있는 책을 발견하고는, 신기하다는 듯 먼지를 털어냈다.

"정말 모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모험이 맞긴 하지."

다만, 아쉽게도 벌써 탐사를 진행한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찾은 것은 방금 막 발견한 책 한 권뿐이었다.

"고대어인데... 어라."

책을 살펴보던 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처음 보는 글자, 마치 지렁이가 뒤섞인 듯한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원정 일지라고? 뭐지? 왜 이게 읽히는 거지?"

"왜 그러십니까, 선배?"

"어... 아냐. 아무것도."

짧은 혼잣말을 마치고, 준은 먼저 책을 챙겨 뒀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준도 이미 알고 있던 것 중 하나였다.

게임 <블랙아웃 >을 플레이 하던 와중에 얻을 수 있는 서적이었으니까.

고대어를 배우면 알아서 번역되는 책이었는데, 처음에는 스킬북인 줄 알고 커뮤니티에 물어봤다가 그냥 고대 서적임을 알고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이걸 읽으려면 [고대어] 스킬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하지만 준에게 [고대어] 스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앞서 고블린 로드의 주술을 이해했던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에 찝찝함을 느끼기도 잠시.

'뭐,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게 마냥 나쁜 건 아니니까.'

어쩌면 이 책을 통해서 자신에게 생긴 이변에 대해 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애써 찜찜함을 넘기며, 준은 계속해서 탐사를 이어 갔다.

"[행운] 스킬은 쓰레기인가?"

그러나, 고서 이외에 다른 히든피스를 발견하는 일은 없었다.

"진짜 운빨X망겜."

* * *

"어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오늘은 진짜 위험했어."

"어째 저번보다 던전의 난이도가 올라 간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고, 저번부터 계속 들리는 이상한 소리는 뭐야?"

"아, 그거? 이거 말하는 거 아냐? 이 꽃을 밟으니까 그런 소리가 나던데."

삐이이이....

던전 공략 5일 차.

아직, 이변에 대해 알아차린 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 * *

"역시 쓰레기 맞는 것 같은데. [행운] 스킬...."

"예?"

"아니, 아무것도 아냐."

탐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이전처럼 준이 알고 있는 루트를 토대로 움직였지만, 그 안에서 발견된 히든피스는 없었다.

'원래부터 히든피스라는 게 막 흔한 게 아니긴 한데. 이 정도로 안 뜬다고?'

워낙 운에 기대는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물론, 그렇다한들 억울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공략대에 참가해 놓고, 얻은 게 고작 고서 한 권이라면 너무 서운하지 않겠는가.

"하아...."

"그... 너무 낙담하지 마십쇼, 선배. 아직 레이드 대상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선배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좋은 보상을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애써 에이든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위로하자, 준도 표정을 풀었다.

"그래, 뭐. 기회가 이번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히든피스도 있고."

"정말입니까? 이번에는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그런데 이건 너만 구할 수 있어."

"예?"

뜬금없는 말에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력 사용자면서 검을 배운 사람이거든."

하지만 이 히든피스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주 큰 문제였다.

"그런데, 만약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어."

"예?"

"그건 일종의 시련 같은 거거든. 그 안에서 제시되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면, 정신적인 충격이 돌아올 거야."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세이브와 로드 시스템이 없는 만큼,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만 했다.

"선택은 네가 직접 하는 거야."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할 것 같으면 말도 안 꺼냈지. 하지만 꼭 갈 필요는 없어. 달리 강해질 방법은 많으니까. 좀 돌아가면 될 뿐이지."

"...저는——."

그에 에이든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찰나, 변화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윽?!"

어디선가 들려오는 끔찍하고도 날카로운 비명 소리.

그러나 그것은 고막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비명에 에이든이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선배!"

"...결국 시작됐나."

"예?"

"일단 검 내려놔. 당장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까."

"바, 방금 그건 도대체...."

공기가 무거워졌다.

단순히 느낌으로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기묘할 정도로 몸이 무거워진 것이다.

"히든 스테이지야."

"히든... 스테이지 말입니까?"

<블랙아웃 > 커뮤니티 내에서는, 일명 하드 모드라 불리는 현상이었다.

"어. 이곳 검은 숲 공략전에는 몇 가지 숨겨진 비밀이 있거든."

"혹시 며칠 전부터 계속 표정이 좋지 못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마법사인 준을 지켜야 하는 만큼, 에이든은 준을 살펴 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번 던전 탐사 내내 준은 때때로 심각하거나 혹은 고심하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처음 준이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것은, 밟을 때마다 기묘한 비명을 지르는 꽃을 발견했을 때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꽃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준의 표정도 덩달아 안 좋아졌다.

"방금 그 비명은... 잠들어 있던 페어리 퀸이 깨어났다는 소리야."

* * *

"페어리 퀸? 그런 몬스터가 공략전에 있었습니까?"

"본래는 없는 몬스터야. 다만, 몇 가지 조건을 갖추면 페어리 퀸이 깨어나. 그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이거지."

검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는 꽃.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흔한 꽃에 불과했는데, 비명이 들린 순간부터 꽃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꽃은 '흡정의 꽃'이야. 주로 흑마법사나 마녀가 저주 아티팩트를 만들 때 사용하지."

"흡정의 꽃... 처음 들어 봅니다."

"뭐, 그렇게 흔한 꽃은 아니니까. 오로지 이곳 블랙아웃 내에서만 자생하는 꽃이거든."

차분한 준의 설명에 에이든도 그에 귀를 기울였다.

블랙아웃은 황실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지형이 파괴되고 몬스터가 죽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복구가 되는 기묘한 공간.

때문에 이곳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달라붙었는데, 준 또한 그것과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던 모양이다.

물론, 준의 경우에는 단순히 이정준이었던 시절 공략 글을 찾다가 발견했던 내용에 불과했다.

"숲의 여왕인 페어리 퀸은 숲 전체와 연결되어 있어. 그리고 이 흡정의 꽃은 그녀의 타락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이름 그대로 타락의 힘을 흡수하고 있던 거야."

"그럼 여태까지 저 꽃이 밟힐 때마다 표정이 좋지 않던 이유가...."

"이 공략전 내에 존재하는 꽃의 일정 수가 밟혀 죽으면, 타락한 페어리 퀸이 깨어나게 돼."

"...많이 위험합니까?"

"적어도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준은 절대 아니지."

최소한 공대장을 제외하고 다른 던전을 탐사 중인 인원들이 모두 3레벨 유저라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지. 안전하게 가려면 최소 4레벨 유저들로 가득 채워야 하는 난이도인데.'

그럼에도 준이 이 사실을 공략대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거, 아마 '청운'에서 자의적으로 일으킨 일일 거야. 제대로 된 목적이야 모르겠지만, 아마 공적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이미 공대장 측에서는 계획을 세운 상황.

그러나 공대장이 가진 압도적인 권력을 생각하면, 일개 하급 마법사인 준이 이에 대해 말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아남아야지.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재앙 앞에서."

현재로서는 그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부터 이어 하자고. 어떻게 할래?"

"아... 히든 피스에 관한 것 말입니까?"

"맞아."

"제가 그걸 한다면, 저희가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뭐, 그렇지."

사실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다. 어쩌면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키 카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획득하기 위해서는 에이든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

괜한 말로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가 보려 했습니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황실에서 살았던 에이든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쥐어지지 않았다.

세상의 풍파에 강제로 떠밀려야만 했던 삶.

에이든은 더 이상 강요되는 선택 속에서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경험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후... 좋아. 그럼 가는 길에 히든피스에 대해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들어."

* * *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나오는 막다른 길.

그러나 이곳에 도착한 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봤다.

"제대로 찾아왔네."

반지름 1미터 크기의 원형 꽃밭.

준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 원형의 중심에 반투명한 가루를 뿌렸다.

페어리를 잡고 나온 전리품, '페어리의 가루'였다.

뒤를 돌아보자 호기심이 가득한 에이든의 얼굴이 보여 준은 피식 웃고 이에 대해 설명했다.

"이렇게 원형으로 난 꽃은 페어리들의 통로였다고 해. 페어리의 가루는 이 통로를 열기 위한 일종의 트리거인 셈이지."

"뭔가, 정말 모험을 한다는 기분이 듭니다."

"상황이 그렇게 낭만만 있진 않겠지만 말이야."

페어리 가루를 흡수한 꽃들이 이내 보랏빛을 흘리며 없던 통로를 만들어 냈다.

"가자."

은은하게 빛나는 통로를 통해 들어가니, 과연.

숨겨진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겁니까?"

"응."

방의 가장 끝자락.

거대한 대검이 꽂혀 있는 공간을 향해 에이든이 다가갔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검에 마력을 씌우고 집중해."

"...예. 다녀오겠습니다, 선배."

굳은 표정으로 거대한 대검에 손을 올린 에이든이 두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런 그의 주변으로 마력의 파장이 일어났다.

주변으로 퍼져 나가던 파장은 점차 둥근 막을 형성하더니, 에이든과 거대한 대검을 완전히 둘러싸며 형태를 만들어 냈다.

일종의 결계였다.

"후우...."

결계가 완전히 에이든을 집어삼킨 것을 확인한 준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은 그 순간.

"어? 뭐야. 우리보다 먼 저 온 선객이 있었네?"

준과 에이든이 왔던 통로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꿈을 꾸는 듯한 부유한 감각 속에서 눈을 뜬 에이든은 주변을 둘러봤다.

여태까지 봐 왔던 어두운 통로는 어디로 가고, 초록이 가득한 푸른 숲이 그를 반겼다.

"...선배의 말대로야. 정말 현실감 넘치네."

금방 사라진 몽롱한 감정을 뒤로하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에이든은 이곳이 환영 속 세상임을 깨달았다.

"손님이 오셨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도 중후한 목소리는 어쩐지 짐승의 으르렁거림을 떠올리게 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존재가 서 있었다.

마치 사자가 두 발로 서서 걷는다면 저런 형태일까.

"당신이 이곳의 주인입니까?"

"바로 맞추셨소. 헤르린테의 기사단장 프라이드요."

스스로를 프라이드라 소개한 남자는 풍성한 사자 갈기를 지닌 수인(獸人)이었다.

거기에 기사단장이라는 직함에 맞게 두꺼운 갑옷으로 전신을 보호한 차림새다.

"...블랙아웃에서 지성체를 발견하다니."

저런 형태의 인종은 적어도 그가 살던 세상에는 없던 형태의 것.

따라서 에이든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때, 수인이 말했다.

"아아,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소. 그쪽 세계와 이쪽 세계는 본래 완전히 단절되어 있어야 했으니."

"...?"

"굳이 이해할 필요 없소. 우리의 세상은 이미 끝났고, 당신들의 세상은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을 뿐. 그것만을 인지하면 되오. 그리고 이 시험대에서, 당신은 나를 이겨야 하고."

마치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듯, 그가 대검을 쥐어 들었다.

환영 속에 들어오기 전, 에이든이 잡았던 대검이었다.

"오시오. 이방인이여. 그대가 내 검술을 체득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할 것이오. 하나 주의하시오. 나의 시험은 굉장히 냉혹할 테니."

비록 환영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죽는다면 현실에서의 에이든도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에이든이 무거운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일단, 내가 불리해.'

프라이드는 2미터를 훌쩍 넘기는 거한이다. 당연히 리치가 짧은 에이든이 훨씬 불리한 상황.

천천히 마력을 체내에 돌리는 사이,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낮은 자세로 몸을 숙이며 들어오는 하상단 베기.

저 거대한 덩치에서 낼 수 있는 속도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섬뜩하리만치 빠르게 들어왔다.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해 낸 에이든이 뒤이어 반격을 하려 했지만, 상대의 발차기가 보다 빨랐다.

후웅!

발조차 에이든의 머리만큼 거대했다.

"흡!"

그에 아예 몸을 굴려 발차기를 피한 에이든이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힘이...."

상당히 거리를 벌리고 피했음에도 엄청난 풍압이 얼굴을 강타했다.

만약 저 공격을 정통으로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굳이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뒤이어 프라이드의 검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으니.

"큭...!"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이어지는 맹공을 피해 낸다.

때로는 피할 타이밍이 나오지 않아 공격을 흘리려 했으나, 뼈마디가 울릴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이 느껴졌다.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이 고작.

전투는 명백히 에이든에게 불리했다.

거리를 좁히자니 매서운 발차기가 그 경로를 방해하고. 심지어 검술마저 심상치 않았다.

마치 검과 몸이 하나가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계 동작이 에이든의 눈을 현혹시켰다.

"후우...!"

카강!

프라이드의 일격을 막아 낸 검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 명심해. 상대는 너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날 거야.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어서 포기하지 마. 그곳에서의 목적은 놈을 죽이는 게 아니니까. 그건 시험이야. 그러니 놈의 검술에 집중해.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던 준의 조언.

섬전처럼 그 한마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선배의 말에 담긴 저의가 무엇일까.'

에이든은 비스트 나이트, 프라이드의 검술에 집중했다.

'아예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괴력 하나만 두고 보자면, 검은 숲에서 마주쳤던 골렘의 주먹질보다 가볍다.

그러나 그때도 자신의 몸은 이토록 무거웠던가?

'아니.'

다시 한번 준이 했던 조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준은 마법사다. 그는 언제나 세상을 탐구한다. 에이든은 언제나 그런 그의 시선이 부러웠다.

하면, 자신은 그를 따라 할 수 없는 걸까.

그러나 준은 언제나 자신의 행위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뿐.

그에 따라 에이든도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을 관측했다.

덕분에 에이든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내몰린 이유에 대해 깨달았다.

'살기.'

압도적으로 강한 적수가 내뿜는 살기가 그의 마음을 천천히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멋대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 두려움이 가라앉고, 그의 눈동자에 차분함이 깃들었다.

'검술에 집중하라고 하셨지....'

프라이드의 검을 다시 한번 힘겹게 막아 내면서, 에이든은 검술에 대해 생각했다.

과거, 남들 몰래 바라봤던 기사단의 훈련장.

그곳에서 훈련을 담당했던 기사는 뭐라고 했던가.

- 검술은 땅에 가까울수록 기본기가 탄탄해진다.

발걸음 하나에 적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고, 허리의 방향은 전신에 들어간 힘을 알아 볼 수 있으며, 어깨는 검로를 그려 낸다.

스치듯 들었던 그 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그 순간, 놀랍도록 신기한 현상이 에이든에게 찾아왔다.

"아...!"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이었고, 재능의 발현이었다.

그간 쓸 일이 없어서 잊고 있던 기억의 편린이 수면 위로 올라옴과 동시에 번뜩이는 영감.

적의 하단, 중단, 상단이 한 눈에 들어오는 그 찰나의 시간, 마치 미래를 내다본 듯 적의 움직임이 예측됐다.

후웅—!

매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비스트 나이트의 대검.

고작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다.

물리력이 담긴 풍압에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무시한다.

에이든의 신체가 섬광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방어에만 급급하던 지금까지와 다르게, 마력을 발끝에 모아 터뜨린다.

카앙—!

비록 놈의 무릎 보호대에 의해 공격은 무산으로 돌아갔지만.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적의 몸에 그의 검이 닿았다는 것이다.

"호오."

그러자 짐승의 눈을 한 프라이드의 눈빛에 흥미가 떠올랐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8화

18화 증거

"설마하니 이곳을 우리보다 먼저 찾아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어!"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쾌활한 성격의 모험가, 루크 마크너였다.

평소 사람 좋은 모습으로 웃는 모습 그대로 그가 준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네? 마법사님은 원래 그 잘생긴 형이랑 같이 다니지 않았나? 이름이... 에이든이었지?"

"몰라서 묻는 것 같진 않은데."

준이 뒤로 펼쳐진 장막을 가리키자 루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

"글쎄...."

"에휴. 마법사들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신비주의를 고집하는지 모르겠어. 아하하."

넉두리처럼 내뱉는 루크의 말에, 반대로 준이 물었다.

"넌 왜 내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았지?"

"아... 그것 때문에 그리 경계하고 있던 거야?"

별거 아니라는 듯 루크가 허리춤에 손을 넣는 순간.

[실드]

카앙!

순식간에 생겨난 푸른 방어막 위로 주홍빛 불꽃이 튀었다.

툭, 소리를 내며 방어막 아래로 떨어진 것은 한 발의 볼트였다.

"하아, 루크. 당신은 순진하고 멍청한 게 문제예요."

"아니, 저 마법사님이 눈치 빠른 걸 나한테 돌리면 어떻게 해?"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루크의 뒤에서 등장한 인물은 루크의 쌍둥이인 모험가, 루시였다.

"방금 자기 입으로 '우리'라 했던 걸 까먹은 건가요?"

"아? 어어, 그랬던가? 아하하... 맞다. 그랬었지."

이어지는 핀잔에 루크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네요. 이곳에 어떻게 온 건지."

"내가 물은 질문에 답하면 못 말해 줄 것도 없지."

"탐색 마법 말인가요?"

당연한 말이지만, 준은 에이든과 단둘이서만 활동하는 만큼 다른 팀원들도 경계하고 있었다.

대단한 보물을 찾아낸다면 언제 배신이 이뤄질 지 알 수 없었으니까.

때문에 탐색 마법은 빈틈없이 써 왔다고 생각했는데.

"숙련된 모험가라면 이런 것 하나쯤, 들고 다니지 않겠어요?"

그런 루시의 손에는 보랏빛을 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기존에는 보지 못했던 물건임을 봐서는, 여태까지 숨겨 두고 있던 아티팩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준은 저 반지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쯧. [은둔자의 반지]인가."

암살 계열의 클래스들에게 유용한 아티팩트로, 이름처럼 기척을 줄여 주고 일정 거리 이상의 탐색 마법을 파훼해 주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서 빨리 상위 탐색 마법을 배우던가 해야지.'

아직 마법 관련 서적을 대량으로 구할 정도는 되지 못 했기에, 준은 아쉬운 생각을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럼 이번엔 이쪽에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이곳에 찾아올 수 있던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지식이라는 게 반드시 너희 모험가들의 고유 재산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말해 두지. 예를 들면... 너희 '청운'에서 구한 야수의 사원 속 고서 같은 거 말이야."

"...?!"

이에 두 모험가가 경악에 빠진 사이, 준이 은밀하게 끌어올리던 마력을 단번에 쏟아냈다.

[디텍팅 타깃]

[윈드 커터]

* * *

볼트를 먼저 날린 것은 저쪽이었다. 물론 그 방향이 급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공격 의사는 쌍둥이 모험가 쪽에서 시작됐다.

이미 대화의 여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

그에 준이 부지불식간에 터뜨린 마법이었지만, 루크의 반응은 기민했다.

왜소한 몸을 한 번에 가릴 정도의 방패를 들어 올려, 준의 마법을 막아 낸 것이다.

'이미 저 방패를 들고 있다는 것부터 마법사인 나를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던 거겠지.'

본래 쌍검을 활용한 날렵한 전투 스타일을 가졌던 루크지 않은가.

하지만 방패를 활용함에도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것일까.

루크가 들고 있는 방패가 준의 마법을 완벽히 막아 냈다.

콰과과과과광!!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광풍이 방패를 무자비하게 후려친다.

뒤로 조금 밀려난 것을 제외하면, 루크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시. 이게 하급 마법사가 낼 수 있는 위력이야?"

"...그럴 리가요."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버린 방패.

위력 자체는 오버히트 상태를 각오하고 한 번에 많은 마력을 때려붓는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영창해서 쏘아 낸 마법이 이 정도 수준이라고?

적어도 그런 게 가능했다면 하급 마법사들이 그토록 얕잡아 보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후우. 아슬아슬했네.'

하지만 이는 두 사람의 착각이었다.

준은 이미 루크의 목소리가 들린 그 순간부터 몰래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스승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던 도중 배운 재주였다.

"아무튼 이 방패는 더 이상 못 쓰겠네."

망가진 방패에 미련을 갖지 않고 바닥에 내던진 루크가 그대로 자신의 쌍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두 검 위로 피어오르는 푸른 빛의 오러.

'역시 3레벨 유저였군.'

청운이라는 모험단 자체가 3레벨 필드에 본거지가 있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3레벨부터는 간혹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오러를 깨우치기도 했으니까.

'이러면 도망도 치지 못하겠어.'

애초에 상대가 출구를 꽉 틀어막기도 했지만, 저 오러는 자신의 뒤에 있는 결계를 찢어발기기에 충분했다.

"아하하, 너무 무서워할 건 없어. 죽이진 않을 테니까."

오러가 담긴 검을 든 루크가 달려들 준비를 하고, 그사이 루시가 석궁의 시위를 당겼다.

이에 [실드]를 펼쳤지만, [밝은 눈] 스킬을 가진 준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즉시 준이 마법을 재차 영창했다.

[부여계:엘리멘탈 아머리]

[부여 속성:바람]

바람에 휘감긴 준의 발이 재빠르게 그 자리를 이탈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처음 루시의 볼트를 막았던 [실드]가, 이번에는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뚫려 버렸으니까.

방금까지 준이 있던 자리에 꽂힌 볼트의 화살촉 끝에 갈색 액체가 번들거렸다.

"바실리스크의 혈액까지? 준비 하난 철저하군."

기본적으로 마법에 저항력을 지닌 바실리스크의 혈액인 만큼, 방금 준의 방어막이 손쉽게 뚫린 것이 설명됐다.

"...정말 눈치가 빠른 마법사네요."

준이 낌새를 느낀 이유엔 여태껏 본 적 없던 볼트의 깃에 있었다.

평소에는 파랑색 깃 볼트를 썼던 그녀가, 갑자기 붉은색 깃 볼트를 쟀으니까.

화르륵!

준이 땅에 처박힌 볼트를 재활용이 불가능하도록 태워 버리는 사이, 루크가 움직였다.

"하지만 내 오러 앞에서 마법은 소용없을걸?!"

확실히.

이런 좁은 공간에서 오러를 쓰는 검사는 그만큼 마법사에게 치명적이다.

다가오는 루크의 움직임에 맞춰 준도 윈드 커터를 펼쳤으나, 여기서 오러를 가진 전사의 강점이 발휘되었다.

사아아아아아아-

날아간 바람의 칼날이 오러가 담긴 검에 의해 찢겨 나갔다.

이게 마법사가 오러를 가진 검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힘든 이유였다.

기껏 발현한 마법이 오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으니까.

'상위 마법을 배운다면 또 모를까.'

당장으로서는 저 오러를 파훼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루크는 준의 생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검사였다.

땅을 박차는 거리로 봤을 때, 육체도 마력으로 강화한 상태였다.

'보통 오러를 막 배운 검사들은 오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는데.'

그에 비해 루크는 비교적 여유롭게 마력을 분산시켜 운영할 줄 알았다.

그 짧은 사이 거리가 좁혀지려던 그때, 준이 마법을 영창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록 홀드]

쿠르르르-

과거 아우터 울프를 상대로 일으켰던 대지의 속박 마법.

그때만큼 영창에 심상을 투영할 시간은 없었기에 위력은 약했으나, 루크의 발걸음을 잠시나마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앗! 루시, 도와줘!"

붙잡을 수 있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이미 준의 마법이 재차 날아오고 있는 상황.

한번 바람의 칼날을 갈라 버렸지만, 루크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오러를 각성한 지 얼마 되지 못한 탓에, 지금처럼 신체를 강화하고 마법을 베어가며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20초 내지 30초 정도가 한계였다.

때문에 어떻게든 루시가 멀리서 원거리 사격을 하며 준의 시선을 분산해야 했는데, 어째서인지 루시의 도움이 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영악한 마법사예요!"

루시의 말처럼, 준은 지형의 이점을 계속해서 활용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좁은 일직선 통로, 그것도 출구는 루크와 루시가 점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준 또한 아까부터 루크와 루시의 일직선 방향으로만 서 있던 탓에, 루시의 공격 경로도 번번히 막히고 있었다.

그렇다고 루크가 한쪽 벽에 붙자니, 준의 표적이 될 뿐이다.

"저도 붙을게요!"

원거리에서는 별다른 도움을 주기 힘들다고 판단한 루시가 석궁을 집어넣고 한 자루의 숏 소드를 뽑아 들었다.

루크처럼 오러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산들바람]

스킬북을 통해 배운 스킬이 있었다.

저 뒤에 있던 그녀의 신형이 바람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루크의 바로 뒤까지 도달했다.

아무리 준이라고는 해도 저 둘이 붙으면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더군다나 뒤에 있는 에이든의 결계도 지켜야 하는 상황.

"후우."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에서 작은 플라스크를 꺼내 들어 두 사람이 달려오는 경로에 내던졌다.

쨍그랑!

그간 개별 탐사 시간 동안 몰래 만들어 둔 맹독 포션.

공기와 맞닿는 순간 기화되도록 제조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깨진 유리병에서 보랏빛 연무가 흘러나와 좁은 통로를 가득 메웠다.

"독이에요!"

"악! 비겁해!"

설마하니 이런 수까지 쓸 줄은 상상도 못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둘은 숙련된 모험가였다. 황급히 품에서 다갈색 구슬을 꺼내는 것을 보면.

'역시 피독주(避毒珠) 정도는 들고 있었나?'

그저 입에 물고만 있어도 독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아티팩트.

등급에 따라 천차만별의 가격을 자랑했지만, 가장 낮은 등급도 상당한 가격이었다.

1레벨 유저라면 꿈도 꾸지 못할 수준.

그러나 3레벨 모험가답게 둘은 이것저것 들고 있는 게 많았다.

하지만 준의 계획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으니까.

마법을 영창한다.

그리고 그곳에 심상을 담기 시작한다.

상상 속에 그려지는 풍경은 무엇인가.

"루시! 또 마법 날아온다!"

"말할 시간에 어서 달리기나 해요!"

독무를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오러를 가지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루시는 준의 마법을 파훼할 방법이 없다.

때문에 루크는 그나마 남아 있던 오러를 끄고 발 아래로 마력을 터뜨렸다.

루시 또한 연속해서 [산들바람]을 사용하며 앞으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독무를 뚫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준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순간.

씨익.

"늦었어."

[디그(Dig)]

두 사람의 검이 준의 머리와 가슴을 향하기 직전, 부유감이 두 사람을 덮쳤다.

"...?!"

"아!"

부유감의 정체는 사라진 땅이었다.

저 밑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깊게 파인 땅이 어느새 두 사람을 향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추락하는 두 사람.

이윽고 뻥 뚫린 구멍에 또 다른 마법이 이어졌다.

[록 홀드]

대지의 속박 마법.

이윽고 점차 구멍이 메워지며 보이는 것은, 머리만 지상으로 올라온 채 정신을 잃은 루크와 루시였다.

* * *

제법 무리를 했다.

하루 종일 던전을 탐사하며 몬스터들과 전투를 펼친 후, 쉬지도 않고 개별 탐사를 진행하며 탐색 마법을 썼다.

그 이후에는 쌍둥이 3레벨 모험가들까지 상대해야만 했던 상황.

'그나마 저치들의 장비가 구려서 망정이었지.'

두 모험가가 쓰던 장비는 실력에 맞지 않게 2레벨 수준에 불과했다.

청운 소속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꾸민 게 준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쉽게 저 두 사람을 제압하진 못했을 터.

"그러니까... 저 두 사람은 청운 소속의 모험가고, 던전이 이 지랄이 난 이유가 바로 그 청운 때문이란 말이요?"

"맞아."

"그리고 3레벨 유저 둘을 제압했다는 거고. 하급 마법사인 댁 혼자서."

"그렇지."

"허, 참...."

수십 분 후.

급변한 던전의 분위기와, 갑자기 사라진 루크와 루시를 찾기 위해 흔적을 쫓아 온 콜튼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저런 반응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급 마법사는 1레벨 전사에게도 당할 만큼 대인전에 취약하니까.

물론 준의 경우에는 영창의 속도가 상당히 빨랐지만, 그럼에도 3레벨 유저, 그것도 오러 사용자를 이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마법사 양반은 중급 마법사요?"

"거의 그쯤에 근접해 있겠지."

[마신지체] 스킬을 제외하더라도, 주관적으로 준의 마법 실력은 중급에 다다른 상태였다.

'중급 마법사들이 배우는 4서클 마법서를 구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정식 시험을 치르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나, 당장의 문제점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마법사 양반은 뭘 알고 있는 거요?"

"이번 공략전에 일어난 전반적인 문제부터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문제에 대한 것까지."

"끄응."

콜튼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일이 복잡하게 됐구만 그래. 그런데 저 친구는 언제 나오는 거요?"

콜튼이 가리킨 방향에는 준의 너머에 있는 검은 결계가 있었다.

그에 준이 삐죽 식은땀을 흘렸다.

"하루 정도... 걸리려나?"

그야, 그조차도 정확한 시간까지는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하루 전에는 나올 거다. 그건 확실해."

시간까진 정확히 알려 주진 않았으나, 그래도 게임 속 시간으로 하루가 채 지나지 전에 나왔던 것은 확실했다.

"알겠수다. 그럼 이제 마법사 양반이 아는 것들 좀 풀어보쇼. 또 이 작자들은 어떻게 할 건지도 들어 봐야겠고."

사실상 이번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이지 않은가.

콜튼의 입장에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험가들 따위, 죽여 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번 사태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준이었기에 먼저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일단은 살려 놔야지. 이 작자들이 벌인 일과는 별개로, 살아남으려면 결국 공격대의 힘이 필요하거든."

"쯧...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망할 놈들이 왜 갑자기 이런 지랄을 해서...."

"아마 후원해 주던 귀족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모양이야."

루크와 루시에게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준은 청운이 가지고 있는 사정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래 돼서 잊고 있었네. 청운이면 게임 속 설정에도 나왔던 모험단이었는데.'

게임의 스타트 시점보다 몇 년 전의 이야기였기에, 게임 내에 존재하는 설정을 따로 조사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게임 속 스토리에 별 관심이 없던 준이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였다.

"청운이 겉으로는 귀족의 후원을 받는 튼실한 모험단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여러모로 다르더라고."

연이은 탐사 실패에,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는 단원들.

후원해 주던 귀족의 관심이 사그라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청운에서 귀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물을 것도 없이 이번 공략전이 바로 거기에 대한 답이었다.

수백년 간 밝혀지지 않은 검은 숲 공략전의 히든 스테이지를 클리어 하는 것.

이보다 후원 귀족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 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이것도 게임 속에서 읽은 역사서에서 알게 된 거라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현재 공략전에 일어난 변수의 진범이 청운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셨다?"

"그런 셈이지."

물론 준이나 콜튼 둘 다 청운의 속사정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단지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 자체에 분노할 뿐.

"후우... 그런데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됐수다. 우리가 알아낸 거랑 별개로, 이걸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니요?"

그리고 콜튼 또한 왜 여태까지 준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향후 다른 팀들에게 지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칫 잘못하면, 공대장에게 반기를 드는 꼴이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증거라면 준비해 놨으니까."

손에 들린 고서를 흔들거리며, 준이 미소를 지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9화

19화 설득 (1)

히든 스테이지가 시작된 것과 별개로, 이들 4팀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탈출을 주 목표로 둘 거야."

"공략전에서 탈출이라는 게 그리 쉽게 되는 거였수?"

콜튼이 대략적인 설명을 자신의 대원들에게 풀어 준 뒤.

마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 준은 콜튼과 함께 향후 계획에 대해 짧은 회의를 진행했다.

"원래 모든 현상에는 과정이 존재하는 법이거든."

"갑자기 뭔 뜬구름 잡는 소리요?"

"말 그대로야. 공략전이어서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현상 따윈 없어. 그저 공략전에 탈출을 막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 뿐."

흔히 알려진 공력전의 탈출은, 토벌 대상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진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 걸맞은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즉, 과정에 대해 알게 되면 해법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에 대한 근거로, 모든 공략전에는 도중에 탈출할 수 없는 이유가 전부 다 달라."

"음...? 듣고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로군."

몇몇 생각나는 공략전이 있는지 콜튼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검은 숲의 공략전은, 출입구가 검은 결계로 가로막혀 있지. 그런데 그 검은 결계, 우리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

"...아! 당신네 동료가 같힌 결계! 그것과 흡사하군?"

"그래. 하지만 저 결계를 풀 방법이 페어리 퀸을 죽이는 것만은 아니지."

저 안에 있는 비스트 나이트, 프라이드의 인정을 받게 된다면 알아서 결계는 사라진다.

이렇듯, 결계를 없앨 방법은 다양하다는 말이었다.

"으음...."

"공략전의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결계를 풀 방법. 그건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있어. 놈을 죽여야 해."

"결국 공략 대상에게 있다는 말이로군. 그나마 다행인가? 페어리 퀸이라는 괴물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녀가 막 깨어났을 때의 비명이 떠올랐던 탓일까, 콜튼이 어깨를 떨었다.

"저 모험가 놈들을 죽이지 말자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겠군?"

"뭐가 됐든 3레벨 유저잖아. 막말로 우리끼리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말이 없구먼."

그에 대해서는 콜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해야 한다라... 그럼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어."

"그래. 던전을 클리어 해야지."

던전의 보스들을 처리하면 포레스트 가디언의 힘이 줄어든다.

그렇기에 이런 사달이 났음에도, 던전의 클리어가 목적이 되었다.

"후우... 빌어먹을. 그럼 바로 출발해야겠구만."

그렇게 3시간가량 던전을 진행하던 끝에 도달한 보스 룸.

본래라면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페어리 퀸의 각성 이후 몬스터들의 등장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난 탓에 이만큼 늦어졌다.

다들 얼굴에 피곤함이 엿보였지만,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이 녀석들아. 전부 들었지? 어차피 우린 싸워야 한다. 안 그럼 개죽음이야."

"그럼 어서 다 죽여 버리고 맥주나 한잔합시다, 대장!"

"언제는 우리가 안전하게 일한 적 있수?"

"가서 전부 박살 내 버리자고!"

다행히 용병들의 사기도 생각만큼 떨어지진 않았다.

이유도 없는 상황은 두려움을 가져다주지만, 명확한 해법이 존재하는 이상 결국 인간은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항상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용병들 특성상, 그들은 해야 할 일을 미뤄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가 보자고."

준의 [라이트] 의해 밝혀진 공동.

그 안에는, 거대한 덩치의 스틸 버그가 오연히 팀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 끔찍하게도 생겼군...."

자이언트 스틸 버그.

숲의 정기를 흡수한 돌연변이종.

이 던전의 보스이자, 포레스트 가디언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끼리리리릭.

8개의 다리 중 6개는 땅과 붙은 하체를 지지하고, 남은 두 다리는 거대한 블레이드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다른 스틸 버그와는 생김새부터 달랐지만, 콜튼은 다른 부분을 언급했다.

"마법사 양반 말대로 저놈, 곰팡이를 온몸에 뒤집어썼군그래."

자이언트 스틸 버그의 관절마다 나 있는 보랏빛 곰팡이.

본래 녀석의 몸에는 없던 특징으로, 페어리 퀸의 각성으로 인해 생긴 변화였다.

작은 충격에도 사방에 독 포자를 퍼뜨리는 터라, 그야말로 성가신 패턴이었다.

다만, 준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놈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준이 마법을 영창했다.

[아쿠아(Aqua)]

그 안에 담긴 심상은 거대한 산에 위치한 폭포.

준의 심상에 호응하며 발현된 마법은 자이언트 스틸 버그 위로 거대한 물줄기를 생성시켰다.

키르르르르?!

"좋아! 달려들어!"

난데없는 물벼락에 놈이 놀란 듯 온몸을 털어 내는 사이, 그에 맞춰 콜튼이 명령을 내렸다.

각자 천으로 입과 코를 막은 용병들이 안심하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포자는 허공을 날아다니지 못할 테니까.

'후우. 저 녀석들이 잘 버텨 줘야 할 텐데.'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하기 위해 영창을 준비하는 한편, 준은 자이언트 스틸 버그를 향해 달려드는 용병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변종 자이언트 스틸 버그의 위험성은 곰팡이 포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신체 능력 자체도 이전보다 월등해진 상태인 만큼, 놈의 시선을 끄는 용병들에게 가해질 부담도 늘어났을 것이다.

"무조건 피해라! 무리해서 공격할 생각 말고! 시선만 끌어!"

그 사실을 준에게 전해 들은 콜튼 또한 현란하게 움직이며 자이언트 스틸 버그의 시선을 끄는 데 집중했다.

그들의 목적은 준이 다음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한 번에 끝내야 해.'

지금이야 용병들의 노력 덕분에 준에게 시선이 끌리지 않았으나, 만약 한 번에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준도 무사치 못한다.

분노한 놈이 달려들면 저 용병들만으로는 저지가 불가능할 테니까.

[언령 해석 중....]

[해석 완료.]

[언령,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의 영향력을 10퍼센트 하향합니다.]

목에 걸린 초커에 올렸던 손을 떼고, 마력에 집중한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용병들의 소리조차 사라지고, 오로지 마력의 배치와 스스로가 그려 내는 심상에 빠져든다.

그려내는 것은 쉼 없이 휘몰아치는 폭우 속 내려치는 번개.

그리고 그런 번개의 주변에 둘러진 피뢰침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하늘의 분노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피뢰침을 향해 내리꽂힌다.

[이중 영창]

[부여계:엘리멘탈 아머리]

[부여 속성:금(金)]

자이언트 스틸 버그의 주변으로 용병들이 꽂은 여분의 무기들 위로 금속성 인챈트를 마치고.

[디텍팅 타깃]

그 위에 이후 펼쳐질 마법을 위해 마력의 조준점이 자이언트 스틸 버그와 바닥에 꽂혀 있는 무기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라이트닝 윕]

준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번개가 앞으로 쏘아졌다.

키릭?

마력의 파동을 느낀 자이언트 스틸 버그의 시선이 준에게 아주 잠깐 향했으나, 늦어도 너무 늦은 판단이었다.

뇌격을 품은 채찍이 순식간에 놈의 몸에 적중했다.

이미 앞서 맞춰 둔 물벼락으로 인해 파괴적인 뇌격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상황.

거기서 그치지 않고, 준은 계속해서 [라이트닝 윕]에 마력을 부여해 효과가 지속되도록 만들었다.

"큭...!"

고블린 로드하고의 전투 중에 펼쳤던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파괴력.

그러나 충분히 개량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일까. 생각 이상으로 많은 마력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바다와 같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을 감당하는 준의 마력회로가 붉게 달아올랐다.

'제발 좀 죽어라!'

준의 바람과 다르게, 녀석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벗어날 구멍이 없었다.

놈의 주변으로 용병들이 꽂아 넣은 금속성 무기에는, [라이트닝 윕]이 감싸져 있었으니까.

키이이이이이이이——!!

마치 뇌신이 만든 감옥처럼, 푸르게 점멸하는 번개 우리 안에서 놈이 비명을 질렀다.

끝내 뇌격의 감옥이 사라진 것은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은 후였다.

* * *

자이언트 스틸 버그의 죽음이 확인되자 생성된 푸른 게이트.

'이것도 한번 조사를 해 봐야겠단 말이지.'

준은 그런 푸른 게이트를 지그시 바라봤다.

'저쪽 세계에 있을 때 판타지라고 하면 워프 마법은 게임이나 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던데.'

하지만 정작 <블랙아웃 >의 세계관 속에서 공간계열 마법에 관한 정보는 극히 희귀했다.

지금의 준으로서는 근접한 소문도 듣기 힘들 정도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면 공간 계열 마법이 가장 접근하기 좋겠지만... 쓰읍.'

이정준 시절에도 <블랙아웃 > 내에서 공간 계열의 마법은 흔적도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렇듯 던전에서 생성되는 정체 모를 워프 게이트 정도뿐.

'당시에는 그저 게임의 편리성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워프 게이트를 바라보던 있으려니,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런 준에게 콜튼이 말했다.

"안 갈 거요?"

"...가야지."

용병들이 워프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고, 뒤이어 준도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자 보이는 광경은 던전으로 출발하기 전에 보았던 공터였다.

여전히 각 그룹들의 막사가 보였지만, 그때와는 영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당장 공대장 나오라고 해!"

"도대체 어쩌다 던전이 이 지랄이 난 건데?!"

"우리쪽 피해가 얼만지나 알아?! 그런데 공격대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게 말이 되냐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고함을 내지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고생한 모양인지 온몸에 부상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숫자가 줄어든 걸 보면... 사망자들도 나온 모양이야.'

물론 준도 어느 정도 피해가 있으리라고 감안하긴 했다.

아무리 청운에서 준비하고 있었다지만, 클리어를 위해 한 팀당 2명씩 배정된 모험가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

실제로 4팀에 배정된 쌍둥이 모험가들이 피독주를 들고 있긴 했지만, 그 둘만으로 과연 자이언트 스틸 버그를 온전히 처리 할 수 있었을까?

만약 준이 없었다면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저, 저도 모르겠다고요! 게다가 벌써 캠프에 몬스터들이 5번이나 습격해 왔어요!"

한편, 남아서 캠프를 지키고 있던 안내역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아무래도 저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모양인지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으나... 그런다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용병들의 눈에 들어 올 리 만무했다.

"지금 당장 공대장에게 연락해. 안 그러면 이번 토벌전이 끝나고 길드에 정식으로 고발할 테니까!!"

"아, 아으... 선생님들, 그러지 마시고 일단 진정 좀...."

"진정은 지랄 맞을 진정!"

점차 온도가 올라가는 캠프에 차가운 변화가 찾아온 것은 팀장 중 한 명이 안내역의 멱살을 틀어쥘 때였다.

"저, 전령...!"

캠프장 입구에 등장한 사내의 절규 섞인 목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됐다.

무언가에 의해 뜯겨져 나간 듯, 한쪽 팔에서 울컥울컥 피를 토해 내고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부, 부단장님?!"

피를 흘리며 찾아온 사내를 다른 이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것도 잠시.

멱살을 잡힌 안내역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자 웅성거림이 캠프장 안을 가득 메웠다.

"부단장이라고?"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설마... 공격대가 실패했나?"

다른 안내역 중 한 명이 서둘러 막사에서 포션병을 꺼내와 부단장이라 불린 사내에게 달려갔다.

"부단장님! 도대체 이게 무슨...."

"토, 토벌에 실패... 전멸...."

"고, 공격대가 전멸이라고요?!"

"괴멸, 적인 피해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부단장이라 불린 사내는 의식을 잃었고, 이제는 웅성거림마저 사라진 캠프에 싸늘한 침묵이 무거이 내려앉았다.

* * *

"이거... 우리가 알고 있는 걸 풀어 낼 분위기가 전혀 아닌데?"

공격대에 있던 부단장이 전보를 전한 이후, 캠프 내의 분위기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일반적으로 공략이 실패하면, 결과는 죽음뿐이었으니까.

전멸이라는 단어는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니, 공략대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웃기지 마! 내가 여기서, 여기서 죽는다고? 이따위로?"

"말이 안 되잖아, 말이! 남들 다 성공하는, 고작 1레벨 공략전 따위에서...!"

누군가는 횡설수설하고, 또 누군가는 남겨진 가족들을 떠올리며 걱정한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분노에 집어삼켜져 의미 없는 고함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확실히, 지금 이 상태로는 어림도 없겠네."

"사실 우리 쪽도 지금 불안불안해."

콜튼의 말대로 그의 대원들 또한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반면 콜튼의 표정은 굳어 있긴 했지만 자포자기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해 물어보자.

"왜 아니겠어. 마법사 양반의 표정이 아직 멀쩡한데. 뭔가 믿는 게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본대가 전멸했으면 준도 방법이 없었다.

이는 에이든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마 본대가 완전히 전멸하진 않았을 거 같아서."

"무슨 의미야?"

"일단 부단장이라는 작자를 좀 만나러 가 봐야겠어."

콜튼에게 그 말을 남기고 부단장이 옮겨진 막사 내부로 들어가자, 안에서는 치료사로 보이는 남자가 부단장의 팔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포션을 퍼부어 봐야 소용없어."

"누, 누구시오? 여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아니되오!"

"부단장의 팔. 그리고 의식도 회복 안 되고 있지? 포션이랑 성수를 쏟아부어도 소용없을 거야."

한쪽 선반에 올려진 투명한 병 위로 그려져 있는 신성 문양.

치유의 신으로 유명한 아리클로토스를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그건 어떻게?"

"일단, 이 양반부터 살려 보자고."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찌 됐든 부단장을 살려야만 했다.

그리 판단한 준은 양팔의 소매를 올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0화

20화 설득 (2)

"저, 정말 깨어났다...!"

어떻게 해도 깨어날 생각을 않던 부단장의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본 치료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준이 말한 처방대로 처치하자 정말 부단장이 눈을 뜬 것이다.

딱히 준이 치료사보다 뛰어난 의술을 지녔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한 정보의 차이였지. 타락한 페어리 퀸에게는 [치유 불가] 계열의 능력이 있으니까.'

치료 방법은 간단했다.

상처의 회복을 막고 있는 타락의 힘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다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힘들었다. 타락의 힘에는 강력한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옮기려고 하면 그냥 전염될 뿐이다.

그래서 성수를 사용해 타락의 힘을 옮길 대상인 '페어리 가루'를 정화하고, 상처 부위에도 성수를 뿌려 타락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타락한 힘이 깃든 상처 부위에 페어리 가루를 가져다 대면, 타락의 힘이 멋대로 페어리 가루에 옮겨 가는 것이다.

"이봐. 정신이 좀 들어?"

"쿠, 쿨럭!"

하지만 흘린 피가 많은 모양인지 부단장은 눈을 뜨고도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포션."

"예!"

치료사에게 받은 포션을 입에 천천히 흘려 넣자, 점차 부단장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다, 당신은...?"

"마법사야. 그보다 할 말이 있어. 페어리 퀸. 그게 깨어났지?"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댁들이 뭘 하려고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거든. 페어리 퀸을 깨운 것도 당신네들이잖아."

"...!"

"놀라는 건 됐고, 이제부터 하는 말이나 들어. 어쩌면, 댁네 단장하고 팀원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희망 덕분일까, 부단장의 눈빛이 보다 뚜렷해졌다.

"공격대 전원이 몬스터한테 죽은 건 아닐 거 아냐. 그치? 그냥 몬스터들한테 둘러싸인 것만 본 거야. 맞아? 아니야?"

마치 그때 상황을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준의 태도에 부단장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변했다.

그때의 상황은 정말 준이 말한 대로 흘러갔었으니까.

"...마, 맞소. 나는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다른 동료들은 그러지 못했소."

그 뒤의 일은 부단장도 몰랐다. 단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 무리에 둘러싸인 동료들이 죽었다고 판단했을 뿐.

"페어리 퀸한테 일격을 가한 것도 맞지? 하지만 생각이랑 다르게 죽지 않았을 거고."

"...그렇소. 그런데 그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그 물음에 준은 자신의 가방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그건?"

"'타락한 숲 원정 일지'. 이 숲을 찾아왔던 고대 수인족들이 남긴 일지야. 당신네들이 야수의 사원에서 발견한 '타락한 숲의 탐사 일지'의 후속편 격이라고 봐야겠지."

"...?!"

눈앞에 있는 사람이 탐사 일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놀랐지만, 그것의 후속편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 그건 어떻게?"

"그건 알 거 없고, 여기 적힌 내용에 의하면 페어리 퀸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생명력을 뽑아 회복하다고 적혀 있어. 그러니까, 아마 당신네 동료들은 아직 살아 있을 거야. 당신들한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면 생명력이 필요할 테니까."

"...!"

이게 바로 준이 공격대의 생존 가능성에 힘을 싣고 있는 이유였다.

'얘들도 페어리 퀸의 공략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거야.'

페어리 퀸은 처음 깨어났을 때 굉장히 약해진 상태다.

제대로 된 공략법만 안다면, 본래의 토벌 대상인 포레스트 가디언을 사냥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토벌이 가능할 정도다.

아마 청운 또한 자신들이 얻은 탐사 일지의 정보를 토대로 페어리 퀸이 처음 깨어났을 때 총공세를 쏟아부었을 터.

'그런데 페어리 퀸은 그런 방법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지.'

문제는 '탐사 일지'가 완벽한 공략집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로 정해져 있는 루트대로 하지 않는다면, 페어리 퀸은 빈사 상태에는 빠질지언정 죽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바로 준이 들고 있는 '원정 일지'에 적혀 있었다.

'이 인간들은 그걸 몰라서 패배했을 거고.'

이를 몰랐던 공격대는 페어리 퀸의 비명에 이끌려 온 몬스터들에 의해 패배했을 것이다.

도저히 공격대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물량이었을 테니까.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당신의 동료들이 살아있다는 거."

"...거기까지 알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거요?"

"여기서 당신네들을 죽여 봐야 내가 무슨 이득을 보는데?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지."

물론 준도 지금의 상황이 짜증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노에 이성이 잠식되어,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그보다 멍청한 짓은 없다.

'물론 나만 이런 건 아니지. 바깥에 있는 녀석들도 자기 목숨 하나만큼은 중요할 테니까.'

부모를 죽인 원수가 아니고서야,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는 감수를 해야만 했다.

"대신 법의 철퇴는 피하지 못할 거야. 그 정도는 알아 둬."

"...알겠소. 감옥에서 구르더라도 이승이 나은 법이지."

"당장 움직이는 건?"

"힘들긴 하지만, 못할 수준은 아니오."

"좋아. 그럼 바깥에 나가서 저 녀석들을 설득하자고."

* * *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캠프의 사람들은 어느새 단상 위로 올라온 부단장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달려왔다.

죽음의 공포 때문일까, 그들은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아 들 기세였는데, 실제로 한 용병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자 근처에 있던 콜튼이 외쳤다.

"일단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좀 듣자고! 이봐, 부단장 양반! 지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그러자 다른 용병들도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시선으로 부단장을 노려봤다.

죽을 땐 죽더라도 그 이유 정도는 알고 싶다는 게 그들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우선... 지금의 상황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올리겠소. 정말 미안하오."

"지금 장난하나! 우리가 그딴 사과나 들으려는 줄 알아?!"

"옳소! 당장 무슨 상황인지부터 설명하시오!"

성난 용병들의 살기 때문인지, 가뜩이나 부상으로 인해 핼쑥하던 부단장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쿨럭! 이, 일단. 현 상황은 잠들어 있던 페어리 퀸이 깨어나면서 일어난 일이오."

그러면서 부단장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페어리 퀸이 깨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 * *

용병들은 분노했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에게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채, 히든 스테이지를 발동시켰으니까.

본래 히든 스테이지를 발동시키려면, 본국에 정식으로 신청서를 보내고 충분한 합의를 거쳐 오랜 시간 준비를 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의 청운으로서는 제국에 신청서를 낸다 하더라도 통과될 확률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정보만 빼앗길 수도 있던 상황.

'사실 그 정보를 상위 단체에 판매했으면 꽤 짭짤하게 벌고 명성도 제법 얻었겠지.'

하지만 청운은 그런 선택을 배제했다.

여기서부터는 준도 모르고 있던 청운의 내부 사정이었다.

'기존에 후원을 해 주던 귀족의 관심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후원 귀족 자체에게 불만을 품었던 거였군.'

부단장의 말에 의하면 청운을 후원해 주던 귀족의 가문은 제법 역사가 오래된 남작 가문이었다.

문제는 이번 세대에 가주가 된 남작의 야심이었다.

그는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득을 보기 위해 청운에게 무리한 탐사를 주문했고, 결국 실력 있는 단원들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제대로 된 인재를 수급하는 데 차질이 생겼던 것.

이런 상황이 몇 년째 이어졌고, 청운의 단장인 벤자민 브리스턴은 후원 귀족에게 큰 불만을 가졌다.

이대로라면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정보를 팔더라도 미래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남작가에서도 부담스럽게 생각할 정도의 공을 쌓기로 결심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다른 후원 귀족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

"이런 씹...."

한 용병의 중얼거림은 지금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만큼 용병들의 눈빛에서 진득한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아까까지 준에게 도움을 줬던 콜튼마저 극도로 분노한 모양이었다.

앞서 준에게 대략적인 사정은 들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것은 전혀 다른 감상을 가져다주었으니.

"여러분께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한 마음뿐이오."

그나마 용병들이 당장 검을 뽑지 않는 이유는, 부단장이 단 하나의 정보도 숨김없이 공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어정쩡한 변명만 나불거렸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이성적 판단뿐.

이런 준의 설득을 받아들인 것이, 부단장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가까스로 분노를 삼킨 콜튼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있는 거요?!"

그의 질문에 다른 용병들도 부단장을 바라봤다.

겨우겨우 그들의 분노를 미뤄 두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기서 방법이 없다면 곧 검을 뽑아 들어 부단장의 목부터 캠프 목책에 올려 둘 심산이었다.

그리고 부단장에게는 정말 다행히, 방법이 존재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아닌 여기 이자가 설명할 것이오."

부단장이 뒤로 물러서자 단상에 올라온 것은 준이었다.

허름한 차림의 마법사가 단상 위로 올라오자, 몇몇 용병들은 금방 준을 알아봤다.

본격적으로 공략전이 시작되기 전, 작전 회의에서 봤던 준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인상이었으니까.

"낙하산?"

"낙하산 마법사가 지금 이 일에 대해 해결법을 알고 있다고?"

"고기방패로 삼은 건 아니고?"

이에 용병들의 목책 장식 목록으로 준의 목까지 올라갈 무렵, 준 또한 용병들의 표정을 빠르게 간파했다.

'아주 살기가 번들거리는군.'

하지만 준도 어느덧 이 세상에서 살아간 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살아남기 위해 용병들의 생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파악했던 그는 지금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준비하시고.'

팔을 하늘 위로 올리며.

'쏘세요!'

단상에 올라오기 한참 전부터 준비해 둔 마법을 쏘아냈다.

[라이트닝 윕]

던전 내에서도 몇 번이고 잘 써먹은 전격 계열의 마법을.

쩌저저저저정—!

마치 번개가 솟아나듯 뻗으며 엄청난 굉음을 터뜨리자, 용병들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도저히 하급 마법사가 낼 수 있는 위력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았으니까.

불신으로 가득한 용병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방법은, 바로 기선제압이었다.

* * *

"다들 궁금한 게 많을 테니까 내 소개는 차차 하도록 하고. 다들 여길 보라고."

뇌격의 채찍이 남긴 잔상을 보던 것도 잠시, 용병들의 귀에 준의 목소리가 꽂혔다.

"이건 이곳 검은 숲 공략전에서 발견한 '타락한 숲 원정 일지'라는 고대 서적이야. 일종의 공략집이라고 보면 돼."

공략집.

준에 대한 선입견은 둘째 치고, 그가 들고 온 공략집에 모든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아까 저 부단장이 말했던 '타락한 숲 탐사 일지'랑 비슷한 건가?"

"들어 보면 1권과 2권으로 분리된 것 같은데...."

"저기에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이 있다는 건가?"

용병들의 추측대로, 준은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탈출할 수 없는 이유는 공략전의 결계 때문이지. 그런데 이 서적에는 결계의 파훼 방법이 적혀 있어. 포레스트 가디언의 토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레스트 가디언이 품고 있는 숲의 정기를 파괴하는 거지."

사실, 이는 따지고 보면 본래의 공략전과 다르지 않다.

정상적인 공략전에서는 포레스트 가디언이 토벌 대상이었으니까.

다만 여기 모인 이들 모두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결계의 정확한 출처를 모르고 있었기에, 당연히 페어리 퀸을 토벌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의 수준으로는 페어리 퀸을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고.

"그, 그럼 원래처럼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근데 이 문제도 쉽지는 않을 거야. 이곳에 모인 인원들만으로는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테니까."

그나마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용병들은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검토했다.

준의 말마따나, 그들끼리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거기에 지금 포레스트 가디언은 페어리 퀸에 의해 강화까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공격대는 전멸했다고 들었소. 그러면 어떻게?"

"그나마 희소식이 바로 그거야. 공격대는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게 정말이오?"

용병들의 물음에 준은 처음 부단장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 용병들의 얼굴은 희망보단 찝찝함이 남았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생겨났지만, 결국 자신들을 이런 위험에 빠뜨린 장본인들을 구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보통 성격이 불 같은 용병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 당신들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않겠어? 아니면, 이대로 죽을 거야?"

준이 내뱉은 말이 결정적이었다.

아무리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지만, 이들 모두 몸이 재산인 이들이다.

목숨 하나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하는만큼, 살아남을 방법이 있다면 가릴 이유가 없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1화

21화 구출 작전

긴급 회의가 이어졌다.

부단장은 공격대가 전투를 펼쳤던 지형의 특성에 대해 말했고, 준도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아낌 없이 풀어냈다.

공략전이 처음 시작됐을 당시,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것과 다르게 준은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의 중심에서 서슴없이 발언했다.

"3팀이 없다고? 젠장. 실패한 모양이네. 다른 팀들은 공략한 던전한 던전 이름 좀 알려줘."

처음 준을 얕잡아 보던 시선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용병들은 침착함을 되찾고 준의 설명에 집중했다.

"지금부터 우린 페어리 퀸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공격대를 구출하고,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해야 해. 그러니까, 시간이 얼마 없단 말이지."

만약 페어리 퀸이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고 포레스트 가디언과 합류하게 된다면, 전원이 3레벨 유저로 이루어진 공략대도 성공을 점칠 수 없게 된다.

당연히 공격대를 제외하면 2레벨 유저에 불과한 이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

때문에 준도 에이든의 귀환을 기다리지 못한 채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속전속결로 진행된 회의가 끝나고, 짧은 휴식을 마친 이들은 곧바로 구출 작전을 실행했다.

"부단장님. 앞에서 몬스터 무리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페어리들도."

앞서 준에게 한 차례 제압당했던 모험가, 루시가 보고를 끝내자 부단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른 팀 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모험가들도 청운의 소속임을 숨기지 않고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용병들이 또 폭발할 뻔했지만....'

다행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표 앞에서 용병들이 한 발 물러섰고, 덕분에 준은 모험가들의 지휘권까지 얻을 수 있었다.

"숫자는?"

"몬스터는 못해도 수백 마리에 가깝고, 페어리들의 숫자도 서른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내가 봤던 그 무리가 확실하군."

그러면서 부단장은 자신의 곁에 있는 하급 마법사, 준에게 물었다.

"작전을 실행할 것이오?"

"그래."

"...무운을 빌겠소."

"당신이나 맡은 일 잘하라고. 혹시라도 당신네 단장이 허튼 짓 못하게 잘 감시하고."

"그렇게까지 우둔한 자는 아니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

할 말을 잃은 부단장을 뒤로하고, 준은 빠르게 움직일 채비를 하고 있는 모험가들을 바라봤다.

던전 공략에 실패한 3팀을 제외하고, 남은 네 팀에 소속되어 있던 모험가들이었다.

"지도는 잘 숙지했지?"

"...네."

그중에는 루시와 루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어그로를 잘 끄냐에 따라 당신네 단장하고 동료들을 살릴 수 있는지 판가름 돼. 괜히 허튼짓 하지 말라고."

"알겠어!"

"...."

"...크흠!"

활기차게 대답했던 루크가 준의 시선을 받고 헛기침을 뱉었다.

준에게 먼저 검을 뽑았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좋아, 그럼 가자고."

* * *

구출 작전의 핵심은, 뭉쳐 있는 몬스터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수백에 다다르는 몬스터를 고작 수십에 불과한 2레벨 유저들끼리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

3레벨의 모험가들까지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앞으로 포레스트 가디언과의 전투를 준비해야 하는만큼, 벌써부터 힘을 빼게 만들 수는 없어.'

때문에 준은 발 빠른 모험가들을 데리고 직접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기로 했다.

"그런데 몬스터들은 페어리의 명령을 듣고 있지 않소?"

회의를 했던 당시, 준의 설명을 들은 용병 중 한 명이 했던 질문이었다.

공략전의 몬스터 대부분이 페어리들의 명령을 받는다.

당연히 어그로를 끌고 싶어도, 놈들은 일정 범위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할 터.

그리고 그건 준도 이미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페어리들의 명령이 반드시 먹히는 건 아냐."

이 숲에는 몬스터들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뺨을 한 대 얻어맞은 플랜트 언데드가 숲이 떠나가라 울어 댔다.

준의 작전대로, 용병 중 한 명이 수급해 온 녀석이었다.

"뛰어!"

준의 외침에 모험가들도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은 이 몬스터들이 페어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거리까지 달리는 것.

이곳에 모인 모험가들도 장비는 2레벨의 것이었지만, 실력마저 2레벨인 것은 아니다.

모두 3레벨의 실력자들.

거기에 준의 마법이 더해졌다.

[부여계:엘리멘탈 아머리]

[부여 속성:바람]

인첸트 마법이 발휘되자, 모험가들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나무 사이를 뛰어다녔다.

이어서 준도 그런 그들의 뒤를 뒤쫓아 달렸지만.

'젠장!'

마법사로서의 육체가 발목을 잡았다.

민첩성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보기 힘든 게 바로 마법사였으니.

그나마 마법으로 이동속도를 높였지만,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마법사님! 잠깐 실례할게!"

그런 준에게 달려온 것은 루크였다.

그는 단숨에 준의 허리를 감싸고,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차게 튀어 나갔다.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한데, 이럴 땐 또 든든하군!'

아까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자가, 이제는 동지가 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그 정도는 이해하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게, 지난 1년 동안 준이 배운 생존법이었으니까.

* * *

꽉 막혀 있던 던전과 달리, 사방이 탁 트여 있는 필드에서 모험가들은 과연 엄청난 속도로 숲을 돌파해 나갔다.

심지어 루크는 그 작은 체구로 한 사람을 들고 뛰고 있음에도 확연히 몬스터들보다 속도가 빨랐다.

'몬스터들도 광란 상태에 빠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하군.'

3레벨 유저의 신체 능력을 새삼 느끼며, 준이 외쳤다.

"너무 빨라!"

매달려 있는 탓에 길게 말하진 못했으나, 모험가들은 준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들의 목적은 몬스터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지, 완전히 도주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마력도 아껴야 하는 만큼 체력 안배를 도모하며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길 얼마.

그들은 본래 생각하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후열은?"

"바로 뒤따라오고 있어!"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살기를 뿜으며 달려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오금을 떨리게 만들 정도였으나.

이내 그들은 도착한 공간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3팀이 토벌에 실패한 던전 내부로.

* * *

앞서 준과 에이든이 찾아갔던 4팀의 '썩은 나무뿌리' 던전과 비슷한 테마의 던전.

그러나 이제는 검은 숲에 어느 정도 적응한 이들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시체꽃 지하'가 원래 이 정도였나?"

"그럴 리가. 아마 페어리 퀸이 깨어난 것과 관련이 있겠지."

두 모험가의 잡담처럼, 이 던전의 이름은 '시체꽃 지하'.

플랜트 언데드가 서식하는 지하던전이다.

외부에 있는 몬스터가 던전 내부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활용한 도주로였다.

이대로 던전을 빠르게 주파하고, 보스 룸에서 보스를 처치. 워프 게이트를 통해 구출팀과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대로 달려갈 건가?"

"그래야지."

"젠장. 많이도 뛰겠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던전의 이름과 다르게 '시체꽃 지하'는 필드형 던전이라는 점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를 밝히는 거대한 꽃이 저 멀리서 보이자, 준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보스 룸까지는 갔던 모양이네."

시체꽃 지하의 보스 몬스터는 플랜트 언데드에게 잠식 당한 짐승형 타입의 몬스터, '플랜트 와르그'다.

놈이 깨어났을 때 비로소 중앙에 있는 거대한 꽃이 개화하니, 앞서 3팀이 보스 룸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바로 일직선으로 가면 얼마나 걸리지?"

"반나절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한 모험가가 [순례자의 여명]을 쓰며 대답했다.

확실히 이럴 때 모험가가 쓰는 권능의 힘은 유용했다.

"좋아, 그럼 조금만 휴식을 취하고 바로 움직이자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지만, 준은 더 멀리 보기 위해 잠깐의 휴식을 명령했다.

현재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각자의 던전을 클리어 하고 나온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방금도 마력을 써 가며 숲을 달리지 않았던가.

지은 죄가 있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지만, 여기 모인 모험가들의 피로는 상상 이상이었다.

'거기에 와르그를 처리하고 밖으로 나가면 곧바로 포레스트 가디언과 싸워야 하지.'

때문에 준은 어쩔 수 없이 잠깐의 휴식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포레스트 가디언과의 전투에서 주축을 이뤄 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준의 명령에 따라 모험가들도 짧게나마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그나마 이 주변은 앞서 3팀이 토벌한 지역이었기에 따로 불침번도 필요 없는 상황.

그렇게 준도 자리에 앉아서 피로를 달래고 있을 무렵.

루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준이 툭 물었다.

"안 쉬나?"

"흠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체력에는 자신이 있거든."

확실히 루크의 체력은 상당한 편이었고, 오러를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전사이기도 했다.

'하긴, 오러만 깨우치면 마력 회복 속도도 상당히 빨라지니까.'

어떤 면에서는 마법사보다 마력 회복력이 좋은 게 바로 전사였다.

명상을 해야 하는 마법사와 다르게 전사는 단순히 호흡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마력이 회복 됐으니.

"그래서, 무슨 일로 왔지?"

"그...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사과를 하고 싶어서 왔어."

"...."

"그런 눈으로 봐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 우리가 한 짓이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데?"

"으으.... 그냥, 내 이기심? 맞아, 이기심 때문이야. 이렇게라도 말을 해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

저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딱히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렇게라도 해서 컨디션이 좋아진다면 못 들어 줄 것도 없었다.

준에게 중요한 건 그의 사과가 아니라 목숨이었으니까.

"미안해. 어째 마법사님을 이용한 것 같네."

그렇게 루크가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자, 때마침 그 근처에 있던 루시도 준과 눈을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원거리 포지션인 만큼 귀가 밝아서인지, 방금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그녀 또한 준이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

'이런 짓을 벌였으면 차라리 성공이라도 하던가.'

아무튼 그렇게 불편한 침묵 속에서 짧은 휴식은 빠르게 흘러갔고, 정해진 시간이 되자 이들은 다시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저쪽에 플랜트 언데드의 사체가 있어요."

"처음 발견했던 거랑 비교하면 죽은 시간은?"

"흔적으로 봤을 때 대략 하루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공략법대로 처리하면서 나아간 건 확실하네."

준과 에이든을 위시한 4팀이 갔던 미로형 던전과 다르게, 필드형 던전은 공략법이 조금 다르다.

미로형 던전은 몬스터를 피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단점이 있는 대신, 난입 이벤트의 등장 빈도나 난입하는 몬스터의 수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러나 필드형 던전은 길을 잃을 일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한 번에 수십 마리가 난입하는 이벤트도 발생할 수 있었다.

때문에 외곽부터 빙빙 돌아 토벌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3팀도 공략대로 실행했을 테니까, 여기까지는 정석대로 진행됐다는 의미야.'

그 뒤로도 준은 모험가들에게 중간중간 죽어 있는 몬스터들의 사체를 확인하며 정보를 얻었다.

처음부터 공략하는 던전이 아닌 만큼 이런 정보들은 굉장히 중요했다.

'예상대로... 반나절이면 도착하겠어.'

던전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만큼, 모험가들이 전력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보스 룸이 위치한 던전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냄새가 더 심해졌군."

"전투에 방해될 정도야."

"후우."

피로가 극에 달한 만큼, 던전에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악취는 고통스럽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지만.

이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모험가들은 저 멀리서도 보이던 대형 꽃 아래에서 이쪽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한 마리의 늑대를 발견했다.

단지 그 늑대는 일반적인 아우터 울프가 아닌, 이족 보행의 거대한 늑대라는 점이 틀렸을 뿐.

'예상대로 눈이 검붉어.'

새삼 확인할 것도 없이, 페어리 퀸에 의해 강화된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목 뒤에 달린 꽃을 휘날리며 먼저 다가왔다.

조금씩 눈치를 보며 달려드는 짐승과 다르게, 이성은 없고 오로지 광기만이 가득 찬 녀석다운 행동이었다.

크르르르——!!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게,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녀석의 움직임은 마치 광폭한 바람과도 같았다.

그에 맞춰 준에게 버프를 받은 모험가들이 일제히 갈라졌다.

준 또한 루크의 도움을 받아 녀석의 공격 범위 내에서 벗어났다.

'젠장. 어서 체력을 늘리든지 기동 마법을 배우든지 해야지 원.'

자신보다 작은 이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준의 이런 고생과는 다르게, 전투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페어리 퀸에 의해 강화가 되긴 했다지만, 패턴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고, 이곳에 모인 모험가들은 모두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몇 달 동안 훈련을 해 왔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마법 준비 시간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루크의 물음에 준이 외쳤다.

"3분!"

이미 진작부터 마법을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루크의 옆구리에 매달려 이동하고 있던 탓에 평소보다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굳건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심장] 스킬 덕분에 이 정도였지, 다른 마법사들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기예였다.

"다들 들었지?! 3분! 그때까지만 버텨!!"

이곳에 있는 무력이면 플랜트 와르그를 토벌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모험가들은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고, 후에 있을 포레스트 가디언과의 전투를 위해 어느 정도 체력의 안배를 해 놔야 하는 상황.

때문에 준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큰 마법을 활용해 놈을 일격에 죽일 심산이었다.

"이제 내려 줘!"

"알겠어!"

적당히 플랜트 와르그와의 거리를 벌린 후, 땅에 내린 준은 곧바로 모아둔 마력으로 패턴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수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다.

캬르아아아아아아——!!

"어?"

"어, 언데드다!"

"젠장, 왜 벌써?!"

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수십에 다다르는 언데드들.

본래는 없던 플랜트 와르그의 패턴으로, 오직 페어리 퀸의 영향을 받아 강화되었을 때만 추가되는 패턴이었다.

다만 이 소환 패턴이 되려면 플랜트 언데드에게 대미지를 어느 정도 쌓아 놔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는데....

'젠장, 깜빡 잊고 있었다!'

이 플랜트 와르그는 준과 모험가들만을 상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앞서 3팀과의 전투도 치른 상황이었고, 그동안 모험가들이 쌓아 둔 대미지가 소환 패턴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하필이면 부상의 정도를 구분하기 힘든 언데드였던 탓에 놓친 디테일이었다.

"조심해!"

바로 곁에서 루크가 땅을 뚫고 기어 나오는 언데드의 목을 쳐 냈지만, 하필 둘이 있던 땅에서 가장 많은 언데드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준은 머지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저 복장은...!'

일반적인 짐승형 언데드와 다르게, 확연히 차이나는 외형. 거기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그 모습은....

앞서 토벌에 실패한 3팀의 시체였다.

"으윽! 마법사님! 뒤에!"

앞에서 준을 노리는 언데드는 루크가 막아 내고 있었지만, 어느새 뒤에서도 언데드들이 등장하고 있는 상황.

준은 [밝은 눈]을 통해 빠르게 전장의 상황을 훑었다.

'이미 진형은 무너졌어.'

예상치 못한 복병에 모험가들의 진형도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고, 플랜트 와르그는 무리에서 떨어진 모험가, 루시에게 달려가고 있는 상황.

바로 뒤에서는 피에 절여진 검을 든 모험가의 시체가 준의 등을 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냉철하게 현 상황과 이후의 교전까지 예측한 준이 결단을 내렸다.

[언령 해석 중....]

[해석 완료.]

[언령,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의 영향력을 10퍼센트 하향합니다.]

그려 내는 심상은 불꽃.

용광로 안에서 활활 타오르며 강철마저 녹이는 초고열의 화염이 들어오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녹여 버린다.

[틴더(Tinder)]

고작 1서클에 불과한 마법이지만, 한 번 허공에 점화된 불꽃은 광활한 마력의 파도에 휩쓸려 단번에 그 덩치를 키웠다.

키아아아아아아——!!

모험가를 노리고 있던 틈을 타 불식간에 소환된 마법이 플랜트 와르그의 몸에 휘감기고.

[이중영창]

[윈드]

그런 불꽃의 중심에 자그마한 바람의 공이 생성됐다.

"크으...!!"

그러나 만들어진 바람은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준의 마력을 듬뿍 받아먹고, 한계까지 압축된 바람이었다.

한계치까지 타오른 화염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바람은 화염의 크기를 배로 키우며, 그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마치 산불이 번지듯 플랜트 와르그의 몸을 집어삼키는 것도 모자라 허공 위로 치솟아 오르는 화염의 기둥.

"저게 무슨 마법이지...?"

"세상에...."

설마하니 이게 1서클 마법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결과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모험가들은 상황의 급박함마저 잊고 불의 기둥을 바라봤으나.

"마법사님!!"

"커흑!"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한 것은 준뿐만은 아니었다.

플랜트 와르그에 의해 깨어난 언데드의 검이 준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2화

22화 가능성과 선택

준은 운에 기대는 상황 자체를 싫어했다.

'이정준'으로서 살아오며 겪었던 삶도 그러했지만, 준으로서의 삶도 운에 기대기에는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상황 속에서 준은 행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행운이라는 녀석이 준의 손을 들어 준 것일까.

뒤를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급소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찌르며 들어오는 탓에, 준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정신을 잃었다.

허약한 마법사의 신체로 던전을 탐사하고, 몇 차례나 오버히트 상태에 들어가며 몸을 혹사했던 결과, 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던 것이다.

아무리 회복 포션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정신적 피로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플랜트 언데드의 일격은 그런 준의 정신을 끊기에 충분했다.

타닥—

따뜻한 온기와 함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주홍빛의 불빛이었다.

"음...."

"앗, 마법사님!"

그러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준의 의식을 완전히 일깨웠다.

"...여긴?"

"후아! 다행히 정신 차렸구나!"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자, 루크가 준이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앉아 있었다.

"상황은?"

"와, 일어나마자마자 그것부터 묻는 거야?"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까."

"으음. 미안해. 다행히 일은 잘 해결됐어. 플랜트 와르그가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워프 게이트를 타고 돌아왔고, 구출팀도 잘 해결됐다고 해."

"그런가... 운이 좋았어."

그렇게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올려 보니 루크가 그를 복잡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

"왜 그러지?"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랬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모르겠는데."

"하하, 어쩌면 맞을지도. 옛날부터 루시한테 호기심 좀 죽이라고 잔소리를 많이 들었거든."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그게.... 왜 뒤에 있던 언데드를 내버려 두고 와르그를 향해 마법을 쓴 거야?"

준은 순간 루크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새삼 진지한 그의 표정에 헛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야 살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살 가능성?"

"거기서 내가 플랜트 와르그를 죽이지 못했으면, 남은 미래는 최악밖에 없었어."

준은 천천히 자신이 예측했던 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땅에서 올라온 언데드들로 인해 모험가들의 진형이 파괴되어 있던 상황.

이미 와르그는 루시에게 일격을 가할 기세였고, 아무리 3레벨 모험가라지만 장비 자체는 2레벨 수준에 불과했다.

당연히 와르그의 일격을 허용하면 남는 것은 죽음 뿐.

언데드를 정리할 타이밍에는 최소한 삼분의 일 정도의 피해를 각오해야만 했다.

그만한 병력으로 와르그를 죽일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설사 죽인다 한들 이어지는 포레스트 가디언의 토벌작전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멸이다.

이 세계를 게임으로 접했던 '이정준'의 시절, 아직 뉴비였던 그가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수십 번 깨지면서 도출해 낸 결과였다.

"반면에 나 혼자 언데드 하나를 감당하고, 플랜트 와르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건 남는 장사였어."

"...우리가 마법사님을 죽일 거란 생각은 안 해 본 거야?"

"물론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

청운에게 있어서 준은 자신들의 계획을 망친 원인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에 대한 원한도 있을 터.

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모험가들의 입장에서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이미 준은 자신이 알던 사실을 모든 용병들에게 알린 상황이었고, 얄팍하게나마 그들의 구심점이 되어 준 준이 죽는다면 그들의 단합은 다시금 무너질 수도 있던 상황.

혹여 어찌어찌 넘어간다 하더라도, 포레스트 가디언의 토벌전에서 용병들의 사기는 최악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용병들은 준의 죽음에 의심을 품었을 테니까.

"결국 내가 와르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 죽음은 확정적인 결과고, 반대로 내가 놈을 죽인다면 너희들이 날 살린다는 선택지 정도는 남잖아."

물론, 준도 모험가들의 인간성을 믿었기에 그런 도박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개뿐이었고, 그나마 살 수 있는 확률이 있는 곳에 베팅했을 뿐.

"계산적인 판단이었어."

"그래.... 운이 좋다고 말했던 건, 그런 이유였구나."

"그런 점도 있지. 그런데 도대체 이런 게 왜 궁금한 거야?"

시체꽃 던전에 입장했을 때도 그렇고, 저런 질문을 하는 저의를 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궁금했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고."

플랜트 와르그가 마지막 순간 노렸던 것은 분명 그의 쌍둥이 남매, 루시였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루크가 쓴웃음을 짓고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준도, 이내 몸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세계가 현대 사회보다 좋은 몇 안 되는 부분이 바로 포션이지.'

현대 사회에 등장했다면 희대의 명약이라 불릴 법한 포션의 힘.

물론 품질에 따라 부작용이 천차만별이지만, 다행히 루크가 먹여 준 포션은 상당히 질 좋은 중급 포션이었다.

잠깐이나마 눈을 붙인 덕분인지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을 무렵.

"선배!!"

드디어 에이든이 복귀했다.

* * *

복귀한 에이든은 이전과 별달라진 점은 없었으나, 딱 하나.

무기가 달라졌다.

이전에 쓰던 철검은 옆에 두고, 원래 철검이 있던 자리에 진한 회색빛의 검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무사히 왔구나."

"예! 선배는 괜찮으십니까? 방금 막 도착했는데...."

준이 가슴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모습 때문에 놀란 것일까, 에이든의 눈빛이 당황한 듯 흔들렸다.

"뭐, 네가 없는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고작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라기엔 지독히도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일어난 일들이었으니.

"제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큰 일 아니었습니까!"

"당장 거동에 문제는 없어."

내상까지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준이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된 거야?"

"아, 저는...."

에이든은 결계 속에 갇힌 후, 환영 속에서 자신을 헤르린테 기사단장인 프라이드라 소개한 수인족을 만난 것부터.

그가 내린 시련에서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설명했다.

"그건... 정말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단순히 육체를 움직이고, 누군가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마치 프라이드의 경험 그 자체가 스스로에게 스며들었다는 느낌이었다며, 에이든은 그때의 감상을 내뱉었다.

'오케이. 스킬도 얻었군. 무기도 잘 가지고 나왔고.'

에이든이 들고 나온 검은 '운광검'이라는 이름으로, 운광석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검이다.

'6티어 장비임과 동시에 유니크 계열이라는 게 가장 커.'

6티어 장비면 게임의 중반까지 써도 괜찮을 정도의 장비다. 거기에 유니크 계열이면, 거의 5.5 티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성능을 자랑한다.

'범용성이 좋은 것도 한몫하지. 진짜 전사X망겜이라니까.'

보통 상위 티어 장비는 저레벨 전사에겐 하등 쓸모가 없다.

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라는 말이 딱인데, 저 운광검의 경우에는 달랐다.

일단 마력 전도율이 굉장히 좋아 항상 마력 부족에 시달리는 전사들에게 사랑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장점이 있고, 굉장히 가벼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강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단단함까지 갖췄다.

'이래서 전사들이 뉴비한테 추천되는 직업이었지. 초중반에 저 검 하나만 얻어도 중후반까진 무리 없이 쓸 수 있으니까.'

물론 후반에는 비교적 마력에 여유가 생긴다거나 대체제가 나오는 만큼 끝까지 쓸 무기는 아니었지만....

'유니크 계열의 장비는 던전이 초기화된다고 해서 복사가 되는 것도 아니니, 희소성도 높고.'

덕분에 이후 더 좋은 장비를 구하는데 금액적인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준다.

그야말로 전사 유저들이라면 누구나 걷는 정석 중의 정석 루트를 에이든이 걷고 있었다.

'내 파티원이 저렇게 성장한다는 건 좋은 일이야.'

스킬도 얻었고, 지금으로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6티어 장비까지 얻었으니 당분간 에이든은 추가적으로 큰 투자는 하지 않아도 됐다.

'아직 방어구 쪽은 손봐야 할 게 많긴 한데....'

당장은 그것도 살아 나가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때문에 둘은 곧바로 구출된 공격팀의 막사로 향했다.

그 숫자가 제법 되는 만큼 막사 밖에서도 치료를 받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바깥에서는 앞서 준에게 조언을 받았던 치료사가 이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모험가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마법사님."

앞서 준의 도움으로 부단장을 치료하고, 준의 지휘 아래 공격대도 무사히 구출한 덕분인지 치료사는 더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준을 맞이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행히 생명력을 빨린 것 외에는 큰 이상 없습니다."

"그래? 안쪽에서는 어때?"

"사제님께서 간부들을 치료 중이십니다."

"사제라...."

인게임 내에서는 선택이 불가능했던, NPC 전용 클래스.

치료사가 쓰고 있는 성수의 교단이 아리클로토스인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같은 교단의 사제로 예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치료사의 안내에 막사 내부로 들어가자 한 여인이 청운의 간부들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좀 특이하게 생겼네.'

새하얀 옷과는 대비되게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린 사제는, 은은하게 빛나는 신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묘한 느낌이야.'

이 세계에 정말로 신이 실존한다는 현실감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이 세계에 온 게 그 신이라는 작자들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

그녀의 치유 실력은 독특한 외견만큼이나 상당히 뛰어났다.

페어리 퀸의 저주는 성수에도 해소가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다.

그런 만큼 어지간한 사제들도 쉽사리 페어리 퀸의 저주를 해소하기 힘들어하는데, 그녀의 신성력은 그런 페어리 퀸의 저주를 확실하게 소멸시키고 있던 것이다.

부상자들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된 것만 보아도 그녀가 상당한 실력의 사제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엘레노어 님."

치료사의 부름에 사제도 하고 있던 일을 마치고 시선을 돌렸다.

"예의 말씀드린 그 마법사님이십니다."

"아. 그쪽이?"

신성한 빛을 다루던 모습과 달리, 제법 걸걸한 말투로 이쪽을 바라본 여인, 엘레노어가 치료를 멈추고 준을 바라봤다.

"꽤 독특하게 생겼네."

"...?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그런가? 피차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야. 그나저나, 고마워. 이야기는 들었어. 당신 덕분에 무구한 생명을... 아, 이 인간들이 무구하진 않지. 아무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렸으니까."

"치료 진척은?"

"시기적절하게 구출해 줘서 큰 이상은 없어. 아마 그 상태에서 반나절만 더 생명력을 뽑혔어도 가망이 없었을 거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을 전할게."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였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아직 의식을 차린 건 아닌가? 바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나?"

"곧 의식은 차릴 수 있을 거야. 치료를 위해서 지금은 일부러 재워 둔 거고. 전투는... 하아. 좀 무리를 해야겠지만, 전투 자체는 가능해. 완벽한 컨디션까진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해. 이 인간들도 살고 싶을 테니까."

"...하긴, 누군들 살고 싶지 않겠어."

"그럼 마저 치료를 부탁하지. 한시가 급한 상황이거든. 못해도 한 시간 안에는 깨어나야 돼."

"좀 빡센데, 노력은 해 볼게."

저만한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라면 허언은 아닐 터.

준은 안심하고 에이든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런 둘을 반긴 것은, 많은 수의 용병들과 그 사이에 껴있는 콜튼이었다.

콜튼이 먼저 앞장 서서 물었다.

"이봐, 마법사 양반! 무사했군. 작전 도중에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직 불편하긴 한데,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너희 쪽은 어때?"

"우리야 뭐, 위험한 건 그쪽이 다 부담해 줘서 몇몇 경상자 말고는 없어."

"그건 좋은 소식이군."

"안 그래도 다들 모여서 회의를 한 번 할 생각이었는데. 마법사 양반이 있어서 다행이야."

제법 작전대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니, 용병들 사이에서도 생존에 대한 가능성을 본 것일까.

이전보다는 감정의 날이 조금 무뎌진 것 같았다.

때문에 준도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이어 가고자 콜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공격대가 정신 차리기 전까지 짧게나마 해 보자고."

그렇게 의욕을 다지고 회의실로 모여 이번 작전에 대해 얼마나 대화를 나누었을까.

나름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고, 준을 중심으로 회의가 이뤄지고 있던 그때, 그런 회의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이 등장했다.

"마법사?"

벤자민 브리스턴.

이번 공략전의 공대장인 그가 불만이 가득한 눈초리로 준을 바라봤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3화

23화 포레스트 가디언

회의 자체는 제법 순조롭게 흘러갔다.

여러 작전들이 이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내 처분되기도 하고, 새로운 작전이 그대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준을 중심으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등장한 것은 어느 정도 회복을 마치고 정신을 차린 청운의 모험가들이었다.

엘레노어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그들은 정확히 1시간 정도 흘러서 찾아왔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벤자민의 얼굴에는 자책이 가득했다.

과연 저 모습이 진실된 모습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정말 면목이 없소. 이번 일에 대한 독단은 내 분명 길드에 자백할 것이오."

저자세로 숙이며 들어오는 벤자민의 모습에서는 진정성이 보였다.

때문에 용병들은 분하다는 표정은 지었지만, 직접적으로 입을 열진 않았다.

물론 현 상황에 대한 분노가 풀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들의 가슴속에는 벤자민의 멱살을 틀어잡고 싶다는 마음이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참는 것은, 오로지 생존에 대한 열망, 그리고 준의 활약 덕분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준의 말처럼 살아남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 아무래도 됐어. 이번 일에 대한 처벌은 황실에서 결정하겠지. 우리의 관심사는 생존이야."

"...옳은 말이오. 해서, 지금이라도 회의를 진행할까 하오."

"당신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이미 하고 있었어. 자세한 내용은 저 마법사 양반한테 들으라고. 당신들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을 짠 것도 저 양반이니까."

콜튼의 말에 벤자민은 그제야 회의장의 중심에 서 있는 준을 바라봤다.

그 또한 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번 공략전에 참가한 유일한 1레벨 유저 그룹이었으니.

때문에 벤자민의 눈썹이 꿈틀거린 것은, 아주 찰나에 스쳐 지나간 일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을 놓친 이들은 적어도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는 없었다.

"마법사?"

"그래. 당신네들이 싼 똥을 치운 마법사지. 댁네 모험가들을 살리겠다고 칼침까지 맞았고."

"...그렇군. 이야기는 들었소. 덕분에 살았군.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오."

"그런 인사치레는 됐어. 나도 살려고 한 일이니까."

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싹 가라앉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렇다면, 이제 지휘는 다시 내가 맡아도 되겠소?"

"뭐?"

그런 벤자민의 말에 대답한 것은 준이 아닌 콜튼이었다.

그가 사정없이 구겨진 표정으로 벤자민을 노려봤다.

"이봐.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 당신네들이 실패한 걸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저 마법사 양반이야."

본래라면, 콜튼이 이렇게까지 나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준이 보여 준 탁월한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분명 입증됐다.

지금 눈앞에 있는 벤자민은 실패했지만, 여태까지 준은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둘 사이의 사회적인 지위는 까마득할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당장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콜튼은 벤자민에게 지휘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소. 하지만 이제 와서 지휘 체계가 둘로 나눠져도 곤란할뿐더러, 우리는 직접 페어리 퀸을 상대한 적이 있소."

"형편없이 처발린 걸 지금 자랑이라고 우리한테 말하는 건가? 게다가, 지금 우린 그 빌어먹을 나방 년을 잡으러 가는 게 아냐. 망할 나무 새끼지."

"...맞는 말이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나서야 하는 게 맞다고 보고 있소. 적어도 난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한 전적이 있으니."

이어지는 설전 속에서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벤자민에게 이미 한 차례 당한 용병들은 그를 신뢰 할 수 없다고 버텼고.

어쨌거나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시 한 번 지휘권을 잡아야 한다는 벤자민의 반론이 이어졌다.

당연히 서로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지금, 슬슬 부모님의 안부를 물어도 이상함이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격화되자, 준이 나섰다.

"지휘권은 당연히 지휘관인 당신이 가져가야지.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딱히 반대하진 않아."

"뭐? 이봐, 마법사 양반!"

먼저 준이 나서서 한 발 양보하자, 콜튼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준은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 현실적으로 나는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상 실전에서 포레스트 가디언을 토벌한 적은 없어. 이런 내가 지휘를 하는 건, 여러모로 맞지 않아."

"하지만...."

"물론, 작전권까지 넘기지는 않겠어. 공략전에 대한 지식은 나한테 있으니까."

그러면서 품에서 꺼낸 '타락한 숲 원정 일지'를 흔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나?"

"...."

지휘권만큼이나 큰 게 작전권이다. 사실상 둘 사이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그에 벤자민이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저 마법사의 말이 맞아, 벤자민 단장. 이 정도 선에서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엘레노어 사제."

어느새 천막 안으로 들어온 검은 안대의 사제, 엘레노어가 말을 얹자 벤자민이 입술을 씹었다.

일개 사제에 불과했지만,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바깥세상이면 모를까, 이곳 블랙아웃에서 사제가 가진 권한은 그야말로 막강했으니.

거기에 만약 살아 나간다면 법정재판에서 사제가 가진 발언권은 상상 이상이라는 점도 한몫하고 있었다.

"이미 시간이 꽤 지체됐어. 저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페어리 퀸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너무 큰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후우. 알겠소."

그렇게 서로간의 합의가 이뤄지자 다시금 회의가 진행됐다.

* * *

"그럼, 모두들 고생 많았소. 남은 포레스트 가디언까지만 잘해 봅시다."

"그쪽만 허튼 짓하지 않는다면 다 잘될 거요."

콜튼의 통렬한 한마디를 끝으로, 구체적인 작전 모의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작전 개시까지 짧게나마 가지는 휴식 뿐.

막사로 가던 중, 콜튼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굳이 마법사 양반이 양보할 필요가 있었나? 아닌 말로 다른 놈들도 댁이 지휘를 잡는 걸 선호했을 텐데. 댁한테는 기회이기도 하고."

콜튼의 물음에 준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욕심을 내면 얻을 게 있기야 했겠지. 하지만 얻는 것보다 잃을 게 큰 상황이었어. 모험가들의 사기도 신경 써야 했고."

준이라고 벤자민이 두려워서 피했을까.

물론 무력적인 측면이나, 사회적인 지위만 두고 보자면 벤자민이 지금의 준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은 맞았다.

준의 여론이 압도적으로 좋았던 상황이기도 했고.

억지를 부렸으면 지휘권조차 받아 올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준이 한 발 물러선 것은, 벤자민의 노림수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노림수?"

"어. 그 양반, 아마 아직 자신들한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하! 그게 말이 되는 일이요? 다름도 아니고 공략전을 이렇게 말아먹었는데?"

"뭐, 사실 그 양반 입장에서는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거든."

그만큼 공략전의 히든 스테이지는 모험가로서의 명성에 큰 도움이 된다.

무려 수백년 동안 밝혀지지 않은 히든 스테이지였으니까. 누구보다 그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게 벤자민이다.

'실제로 게임 내에서 밝혀지지 않은 히든 스테이지를 발견하면, 엄청난 명성치가 올라갔었지.'

만약 청운이 이번 히든 스테이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면, 그들은 역사에 이름이 남았을 것이다.

'실패한 지금에서야 이야기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기서 활약하면 할수록 명성에 큰 도움이 되긴 할 거야.'

벤자민은 아마 그 명성을 무기로 새로운 후원 귀족의 힘을 받아 향후 자신들에게 일어날 재판에서 이기거나 하다못해 형량이라도 적게 받을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이라도 벤자민은 이번 일에 대한 매듭을 본인이 직접 짓고 싶어 한 것이다.

"아마 이런 구실로 단원들의 사기를 올렸을 테지. 그래서 내버려 둔 거야. 한 차례 실패를 겪은 모험가들에게 사기진작은 작전에 도움이 되니까."

"아...."

그쯤 듣자 콜튼도 입을 벌렸다.

그 잠깐의 시간, 자신은 고작 감정에 취해 노발대발했을 뿐이었으나, 준과 벤자민은 서로의 노림수를 파악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개인적인 감정은 제쳐 두고, 둘의 행동은 콜튼에게 여러모로 깨달음을 알져다 주었다.

"물론, 저건 너무 허황된 꿈이긴 해. 어쨌거나 벤자민이 저지른 짓은 황명을 거역한 거니까."

"아...!"

"작금의 제국은 황실, 그것도 황제의 권력이 압도적이야. 귀족들이 열심히 분발하고 있긴 하지만...."

고작 3레벨 모험가의 명성을 챙겨 보겠답시고 황제의 눈에 날 귀족은 아무도 없을 터.

물론 블랙아웃은 제국과 여러모로 분리된 공간이고, 때문에 이런 위험 지역을 탐사하는 용병 길드 혹은 모험가 길드의 목소리는 제법 강한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벤자민에게는 명분이 부족했다.

"이미 인명 피해까지 생겼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황명을 거역해서 생긴 인명 피해는 의미가 좀 달라. 당연히 모험가 길드에서도 청운을 대변해 줄 명분이 없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저 양반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건가."

"이미 가슴까지 빠져 버린 늪이지."

그렇기에 준은 굳이 거기서 감정을 앞세워 불화를 야기하기보다, 실리를 챙긴 것이다.

"이래저래 마법사 양반에게 많은 걸 배우는군."

"뭐, 그쪽 덕분에 내가 본 이득도 많으니까."

"하하! 그런가?"

처음 서로를 향해 날을 세웠던 것과 다르게 막사 내에서는 제법 훈훈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배...."

에이든 또한 그런 준의 태도에 여러모로 배웠다는 듯 눈빛을 보내 왔지만... 사실 준은 그들의 눈빛이 여러모로 거북했다.

'이미 묫자리 펼친 놈 불쌍해서 봐준다는 정도였는데. 저런 눈빛까지 받을 일인가?'

실상 준이 입만 다물고 있었더라면 벤자민이 그 정도까지 몰릴 일은 없었다.

물론, 죄를 지었으니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겠지만.

직접 일을 이렇게까지 키운 준의 마음도 여러모로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튼, 이제 마지막 전투만 남았어. 이것만 잘 이겨내 보자고."

"크아아아! 젠장! 빨리 집에 가고 싶다!"

"그 망할 요새가 그립긴 처음이라고!"

그런 용병들의 포효와 함께, 머지않아 포레스트 가디언의 토벌 작전이 시작됐다.

* * *

육중한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숲이 진동하듯 흔들린다.

수백 년의 나이를 먹고 자란 고목보다 거대한 크기의 나무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포레스트 가디언.

공략대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토벌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젠장. 두 발로 걸어 움직인다더니. 더럽게도 크군."

한 용병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본래 고정형 보스로 유명했던 녀석이니만큼, 놈이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자 그 크기가 상상이상이었다.

그리고 벤자민을 필두로 그의 모험단은 그런 포레스트 가디언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피해라!"

벤자민의 외침에 따라 그 일대에 있던 모험가들이 일제히 해당 지역에서 벗어났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포레스트 가디언의 거대한 발이었다.

땅을 내려찍은 발에서부터 나무의 뿌리가 순식간에 대지로 스며들어, 이내 지상 위로 치솟아 올랐다.

만약 벤자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있던 모험가들은 꼬챙이에 찔린 개구리처럼 됐을 터.

"지금이다! 올라타!"

"심장부를 최대한 벌려야 돼!"

"다리를 노려!"

누군가는 수직에 가까운 다리를 평지처럼 타고 올라가고, 또 누군가는 고정된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흔히 3레벨부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은 초인 반열이라 말하는데, 그다운 움직임이었다.

'확실히, 내가 상대했던 쌍둥이랑은 또 다르군.'

막 3레벨에 오르고, 장비 또한 2레벨 수준에 불과했던 쌍둥이들과 달리, 벤자민을 필두로 한 최전방의 모험가들은 그 실력부터가 달랐다.

'만약 내가 만났던 게 그 두 사람이 아니라 저기 있는 녀석들이었으면....'

아마 준도 그 자리에서 살아남긴 힘들었을 것이다.

'역시 구출한 보람이 있어.'

크기만 보더라도 어지간한 빌딩보다 거대한 괴물이 휘두르는 공격.

그러나 모험가들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대부분의 공격을 회피했다.

'문제가 있다면 용병들인가.'

포레스트 가디언의 공략전에서 공격대만큼 중요한 게 바로 그 밑을 이루고 있는 하위 팀들이었다.

이유는 현재 용병들이 상대하고 있는 몬스터, 엔트들에게 있었다.

"젠장! 한 놈 빠져나갔어!"

"놓친 놈들은 냅둬! 다른 놈들부터 처리해!"

용병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간 엔트 한 마리가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다가갔다.

이내 근처에 있던 포레스트 가디언의 뿌리가 엔트를 그대로 흡수해 버렸다.

포레스트 가디언의 회복 패턴이었다.

이를 본 모험가들이 용병들을 향해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아무래도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묵묵히 공략에 집중했다.

'어쩔 수 없지. 당장 3팀도 없는 마당에, 용병들의 컨디션도 최악이니까.'

오랫동안 준비해 온 '청운'과 달리, 용병들에게 이번 사태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포레스트 가디언의 거대한 크기는 알게 모르게 용병들을 위축 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몇 번이고 위험한 상황이 나타났지만.

"흡!"

그때마다 에이든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있었다.

'저 녀석, 평소보다 움직임이 가벼운데. 스킬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딱히 스킬을 활용하고 있지도 않았다.

물론 이전과 달리 보법에서부터 차이가 느껴지긴 했으나....

'내가 전사에 대해 잘 아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좀 더 자신감에 차 있다? 보법도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원래부터 게임 속 설정에서도 재능이 엄청나다고 했었지.'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지만, 사실 준의 생각은 에이든의 상황과 거의 일치했다.

히든피스 속 네임드 몬스터, 프라이드와의 전투 중 얻은 깨달음이 에이든의 재능을 개화시켰으니까.

'그래도 예상보다 흘리는 숫자가 많아.'

본래의 공략법과 판이하게 달라진 결과였다.

최대한 준과 에이든이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거기에 전투의 양상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전투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단장! 이대로는...!"

"좀만 더 버텨라!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젠장! 부상자는 뒤로 빠져 있어!"

"안 돼! 놈에게 이 이상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그때, 뒤에서 신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함께 따라온 엘레노어의 신성력이었다.

신성한 신의 힘이 타락한 숲에 현현하여 부상을 입은 모험가들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준과 에이든이 부족한 전력을 채워 주고 있었다면, 엘레노어는 이번 전투가 지속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신성력도 평소보다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망할 광역 디버프.'

포레스트 가디언의 광역 디버프 오오라.

타락의 기운을 온몸에 두른 포레스트 가디언의 공격은 치유를 방해하고, 상처를 악화시킨다.

그나마 엘레노어의 강력한 신성력이 그 부분을 대체해 주고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평범한 사제였다면 전투의 밸런스는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벤자민이 왜 저 여자 앞에서 저자세였는지 알 것 같군.'

저 정도의 실력자라면 보다 상위 레벨에서도 모셔 갈 정도의 능력이다.

실력만 보면 금방 고위 사제로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뛰어났다.

'문제는 전투가 점점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는 건데.'

사제의 신성력이 만능은 아니다.

소모된 마력을 채워 주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피로까지 해결해 주는 게 아니었으니.

그만큼 공략대 전체의 움직임은 삐걱거리고 있는 반면, 포레스트 가디언은 점점 더 난폭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변수가 아니라, 그저 전력 부족에서 생기는 차이였다.

'시간이 너무 오래 끌리고 있어.'

이쯤 되면 슬슬 페어리 퀸도 포레스트 가디언이 공격 받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움직이고 있을 터.

결국 준도 선택의 기로에 섰다.

'어쩔 수 없어. 나도 공격에 나선다. 모험가들이 대미지는 어느 정도 쌓아 놨으니, 그걸 믿어야 돼.'

본래라면 준이 나서는 것은 공격팀이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충분한 대미지를 넣은 이후였다.

하지만 슬슬 용병들 측에서도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

아무리 엘레노어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제라지만, 홀로 용병들까지 감당할 재주는 없었다.

만약 여기서 용병들의 피해가 늘어나고, 포레스트 가디언이 흡수하는 엔트의 숫자가 늘어나면 그나마 남은 타이밍마저 놓치는 수가 있었다.

"에이든! 공격보단 수비로!"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전력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작전을 틀고, 준도 마력을 전력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초커에 손을 올리고, 몰아쳐 오는 마력을 제어한다.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안 돼.'

기본적으로 포레스트 가디언은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고 있다.

때문에 속성력이 담긴 마법은 큰 재미를 보기 힘들다.

물론 화속성의 경우에는 제법 잘 먹히는 편이었지만....

'화력만큼이나 아군에게 피해가 갈지도 몰라.'

그러니 타격 계열의 마법을 위주로 준비한다.

떠오르는 심상은 강철.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허물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련되어 세상에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는 무기.

'이미지는....'

단 한 번의 휘두름에 바위마저 부서뜨릴 거대한 망치다.

[아이언 피스트(Iron fist)]

마력에 반응한 대지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허공으로 솟구쳐 뭉치기 시작했다.

주먹만 한 크기에서 점차 그 크기를 부풀려 나가더니, 이윽고 집채만 한 크기에 도달했다.

그리고 완성된 형상은 거대하고 뭉툭한 주먹.

그 위로 다시 한번 준의 마력이 코팅되었고, 흙과 완전히 일체화된 마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라!"

우우우우웅——!!

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거대한 강철의 주먹이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향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4화

24화 페어리 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