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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검고 탁한 시야.

물에 잠긴 듯 먹먹한 귓가.

털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함.

그 더할 나위 없는 몽롱함 가운데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여럿 들려왔다.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용사님.」

「…그쪽에서 또 보지. 파트너.」

「허허이...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인석아. 후딱 가거라.」

「…고마웠소. 오라버니.」

「얼른 가라냥.」

피식-

자동으로 웃음이 지어졌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캐릭터가 뚜렷한 이들이었다.

소중한 친구.

의지할 수 있는 전우.

그리고....

「....」

「....」

귓가에 들려오던 반가운 목소리들은 곧이어 멀어지기 시작했다.

'....'

마치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아웃트로(Outro) 음악처럼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

「꼭....」

점점 옅어지던 목소리는 결국 아예 멎어 버리고 말았다.

소리가 멎어 버리자 오롯한 공허가 찾아왔다.

어떤 소리도, 냄새도, 시야도, 느낌도 없는 오롯한 공허(空虛).

그 가운데서.

나는 떨어짐을 계속했다.

아래로 아래로.

아득히 아득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무(無)의 심해 속으로.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씨!」

'응?'

문득 들려온 목소리는 제대로 알아듣기에 너무나도 작고, 또 멀었다.

「…신 차....」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이번에도 역시나 작고 멀었다.

그래서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첫 번째보다 조금은 더 가까이서 들린 것 같았다.

「지금… 죽고… 어요?」

그렇게 세 번째로 들려온 목소리는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고.

'죽는다고?'

"피하라니까!!!"

또렷하게 들려온 마지막 목소리와 함께, 차단됐던 오감(五感)이 깨어났다.

화아악-

"...!"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나는 가능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사방의 정보를 받아들였다.

찐득한 진흙 냄새에 섞여 들어오는 비릿한 혈향.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몸을 스쳐가는 강력한 바람.

어금니에 씹히는 모래 알갱이.

내 발 어림께를 가리는 그림자.

그리고 결정적으로.

쐐액-

내 머리통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뭉툭한 몽둥이.

"서우진 씨!!! 아까부터 뭐 하는 거예요! 정말 죽고 싶...."

그 오감(五感)의 범람은 꽤나 벅찼지만.

서걱-

나를 노리는 몽둥이와 고블린 족장의 목을 동시에 썰어내며, 나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성공했다.'

…내가 회귀에 성공했다는 것을.

1화

EP0. 회귀자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

"아니, 서우진 씨. 계획이 있었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잖아요. 레이드 매니저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그러게요."

"아무리 팀장이라도 그렇게 멍하니 서 있으면 보통은 걱정을 한다고요. 안 그래도 이번 고블린 부락 레이드는 인원수가 적어서 서우진 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는데 그렇게...."

"네네"

"아니...."

2021년 11월 3일.

층계초월이 일어나기 하루 전.

그러니까, 함경남도 검덕산 줄기에 자리 잡은 고블린 부락 레이드의 마지막 날.

일단은 <층계초월> 전으로 돌아가겠다는 회귀 시점 목표에는 어찌저찌 성공한 모양이었다.

…여유 날짜가 하루밖에 없다는 것은 좀 아쉽긴 했지만.

나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돌아오면 좀 쉬고 싶었는데… 쉴 시간은 없겠네.'

"제 말 듣고 있기는 하신 거 맞아요?"

"네네… 네?"

"하.... 이미 끝난 마당에 더 이야기하기도 그렇지만… 베테랑이시잖아요. 이 일 1, 2년 하신 것도 아니고 올해로 5년 차 헌터이시면서 도대체 왜 이러세요. 까딱하면 사람 죽는 판인 거 서우진 씨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내가 정말 위태로워 보이긴 했는지, 레이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음에도 레이드 매니저가 계속해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헌터판에서는 일반적인 일이기는 했다.

레이드를 하다가 사람이 죽어나갔을 때, 길드의 인사평가에서 제일 큰 피해를 입는 건 그 팀을 맡았던 레이드 매니저이니까.

아마 회귀 전의 나였다면, 진심으로 미안해했겠지.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뭐, 물론…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이야기였지만.

"안 되겠어요, 서우진 씨. 모레 예정되어 있는 강릉 레이드는 상부에 보고해서 취소를 하겠습니다. 지금 서우진 씨 상태로 레이드를 속행했다가는 서우진 씨만 문제가 아니라 팀원들도 위험해질 것 같아요."

고개를 가로저은 레이드 매니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잡힌 레이드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그래서.

"네."

"…알겠습니다. 서우진 씨 팀 평가에도 반영되는 부분이니 그럼 취소가 아니라 날짜를 조금 후일로 조정하는… 네? 뭐라고요?"

그러라고 했다.

"취소하자고요."

"…아니."

레이드 매니저의 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여자는 아마 진짜로 취소할 생각 없이 말한 것일 테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미 잡혀 있는 레이드 일정이 취소되면 소속 매니저나 팀장이나 좋을 게 없었다.

위약금 부분도 걸렸고, 역시 길드 내 인사 평가에서도 좋은 영향일 리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레이드 매니저가 취소를 하자고 강짜를 부린 것은 아마 팀 내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의도.

이번에 내가 멍한 기색을 보인 것을 핑계 잡아 레이드 팀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기싸움'을 건 것.

아마 내가 사정해서 취소만은 물러 달라고 하면 일정 유예 정도로 봐주는 척을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 게 이 여자의 의도겠지.

하지만, 나는 굳이 거기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나는.

"그럼 그렇게 알고 가보겠습니다."

"아니, 서우진 씨!"

"아, 맞다. 그리고 나 사직서 길드에 팩스로 보낼라니까 말 좀 잘 해줘요. 오늘로 은퇴할 거라."

"네? 서우진 씨 잠깐만요!! 사직서라니 그게 무슨...."

여기 없을 테니까.

* * *

할 일이 많았다.

회귀하기 전 약속한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닌지라.

그것들 다 처리하면서 회귀 전보다 항마전의 양상을 좋게 끌고 나가려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쓸데없이 오지랖은 넓어 가지고...."

물론 굳이 따지자면 약속에 강제력은 없었다.

회귀한 건 나뿐이고, 나와 약속을 한 그네들은 기억도 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또 나만 믿고 모든 걸 맡긴 녀석들과의 약속을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내 인생의 신념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마 그래서 그놈들도 회귀할 한 명을 나로 정했겠지.

"…이 정도면 얼추 되려나."

무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버킷리스트>의 형태로 정리했다.

항마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해야 할 일과, 녀석들과의 약속을 포함한 목록을 대충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서 적은 것.

그렇게 적고 보니, 검은색 수첩 하나를 빼곡히 채운 519개의 버킷리스트 항목이 완성되었다.

나름 요약하고 묶어서 적은 것이었는데도 그만한 분량이 나왔다.

"이게 진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맞기는 한가...."

특히 항마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항목을 보기만 해도 자동으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무지막지한 것들이었는데.

"…역시 괜히 돌아왔어. 그냥 다른 놈 보냈어야 했는데."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회귀하기 전의 나라면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을 일들이었다.

거기에 적힌 것들은 대부분, 항마전의 선봉에 섰던 녀석들이 목숨을 바쳐 이룩했거나, 혹은 그럼에도 이루지 못한 것들이었으니까.

"하… 빡센 거...."

…물론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가 포기해 버린다면,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고.

그럼 애초에 회귀한 이유 자체가 사라져 버릴 테니까.

[Bucket List]

그것은 오직 하는 수밖에 없는.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들의 목록이었다.

"일단은 그럼… 가볼까."

할 일이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회귀한 첫날부터 온몸에 힘 빡 주고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고, 항마전의 패전으로 지구라는 차원을 말아먹고 싶지 않다면 내 멘탈을 관리하는 일도 꽤나 중요한 항목이었으니까.

때문에 층계초월까지 남은 하루 정도는 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항마전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나름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돌아오긴 했다만.

나도 회귀하면 꼭 이것부터 하겠다고 정해 놓은 일 정도는 있었으니까.

후우-

그렇게 한반도 북부 몬스터필드를 떠나 서울로 돌아온 나는, 이내 내가 목적한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건물 앞에서 한숨을 쉬고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익숙한 안내 인사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스X벅스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도대체 얼마만의 별다방이던가.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카운터 앞으로 걸어가자 매니저가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바칩 프라푸치노."

"네. 자바칩 프라푸치노 주문하셨구요. 드시고 가시나요? 테이크 아웃 하시나요?"

"먹고 가겠습니다. 몇 가지 추가 사항이 있는데...."

"아, 네! 말씀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주문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오래된 레시피를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어… 자바칩 올려 주실 때 반은 갈고 반은 통으로 넣어 주시고, 위에 올라가는 휘핑크림은 에스프레소 휘핑크림으로 바꿔 주세요. 헤이즐넛 시럽 3펌프 모카 시럽 2펌프 추가해 주시고 마무리도 헤이즐넛 드리즐로 해주세요."

"...."

"아, 머그잔은 손잡이 없는 걸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긋-

직원은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주문하기 전과 하나 달라진 게 있었는데,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포스기를 향한 시선과,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방황하는 오른손 검지손가락.

그녀는 조금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손님, 죄송한데 한 번만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

.

.

매니저에게 주문을 두어 번 더 되뇌어 준 후에야 가까스로 카운터를 벗어난 우진은 버킷리스트 수첩을 펴들었다.

"일단 하나는 했네."

그리고 그 첫 번째에 적혀 있는 항목에 X 표시를 남겼다.

[Bucket List#1]

『스X벅스 자바칩 푸라푸치노 반은 갈아서, 반은 통으로 에스프레소 휘핑 올려 먹기.(사이즈는 그란데. 모카 시럽 두 펌프, 헤이즐넛 시럽 3펌프 추가. 마무리는 헤이즐넛 드리즐로).』 X

2화

EP1. 관문지대 (1)

후득 후드득-

다 먹은 프라푸치노 밑바닥에 자작한 얼음 알갱이가 깔렸다.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맛이 없다.

유일하게 별다방 프라푸치노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십 년 만에 먹은 내 특제 자바칩 프라푸치노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일단 하나는 했네. 버킷리스트."

[Bucket List#1]

『스X벅스 자바칩 푸라푸치노 반은 갈아서, 반은 통으로 에스프레소 휘핑 올려 먹기.(사이즈는 그란데. 모카 시럽 두 펌프, 헤이즐넛 시럽 3펌프 추가. 마무리는 헤이즐넛 드리즐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프라푸치노를 먹은 후에야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몸으로 실감되었다.

전혀 연결성이 없어 보이는 두 요소였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일종의 평화롭던 시기의 상징이랄까.

고작해야 8,000원 정도 하는 이 얼음 알갱이가 뭐라고, 가슴께에서 간질간질한 평화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뭐 물론 그래 봐야,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하루밖에 남지 않은 평화였지만.

그래서 더 달콤했다.

"할 수 있으려나."

차오르는 평화로움을 누르고 버킷리스트가 적힌 수첩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는데....

문득, 옆자리의 대화가 귓바퀴를 타고 들려왔다.

- 야, 들었냐? A랭크 장한우 헌터도 이번에 실종되었다던데....

- 허… 큰일났네. 이거 진짜 무슨 일루미나티나 어디서 큰일 치르고 있는 거 아니야?

- 모르겠다 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까지 단서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게 이상한데.

- 아니 이거 진짜 이상하다니까. 균열 15주년부터 이런 일이 발생한 것도 맞고....

'…그래 이런 분위기였지.'

<고위 헌터 연쇄 실종 사건>

2020년 초, 최초의 균열이 일어난 지 15년이 되는 해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고랭크 헌터들의 원인 모를 실종.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었지만, 그 어느 국가에서도 그 현상의 원인과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넷상에서 가장 유력하게 꼽혔던 추측은 '균열 이전 기득권 집단으로 추정되는 반(反)헌터 집단의 청부살인', '지하 헌터 세계의 확장으로 인한 신분 말소' 정도가 있었지만, 미래를 보고 온 입장에서는 그 두 개가 다 아니라고 답해 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랑은 전혀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이 사건의 원인은 경험해 보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 없었다.

고랭크 헌터가 사라진다는 엄청난 일에도 전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만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건 무려 <상위차원계>와 관련된 일이었다.

균열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하위차원계>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추측을 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

"…누가 알았겠냐고. 우리가 목숨 걸고 막아 낸 균열이 고작해야 위에서 새어 나온 몬스터 열화판에 불과할 줄."

아마 이 시점에 매스컴에서는 우리가 '몬스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떠들어 대고 있을 것이다.

북한이나 남미처럼 최초의 균열 때 아예 괴멸 수준으로 당했던 국가들도 몬스터필드로나마 어느 정도 수복을 했고, 겉으로만 봤을 때 이제는 전쟁보다는 말 그대로 사냥에 가까운 양상으로 몬스터를 해결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마석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마나공학 기술도 개발을 시작해 이제는 '4차 마나 혁명'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던 시기였으니 인류가 얼마나 기고만장하게 콧대를 높였을지는 알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이 이겼다며 자고하는 그 몬스터들은 상위차원계의 입구, '관문지대'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만도 못한 열화판이라는 것을.

하위차원계에서는 나름 '고랭크 몬스터' 취급을 받는 몬스터들도 상위차원계에서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받지 못한 잡종 취급을 당했다.

그 단적인 예가 고블린이나 놀 같은 경우였다.

고블린이나 놀은 헌팅 난이도 B랭크, 그리고 조금 특별한 '고블린 족장'이나 '고블린 메이지' 혹은 '푸른갈기 놀' 같은 경우는 A랭크로 분류되었다.

즉, 나름 하위차원계에서는 팀 단위로만 사냥이 허가되는 고랭크 몬스터에 해당하는 것.

하지만 상위차원계에서의 취급은 달랐다.

오크 종족의 녹색 피부와 일그러진 얼굴.

엘프 종족의 긴 귀.

드워프 종족의 작은 키.

상위차원계 세 마물 종족의 단점들을 기워 붙여 만들어진 저열한 교배종.

그게 바로 '고블린'이었고.

수인족의 압도적인 육체와 전투본능을 버리고 조잡한 지능을 끼워 넣은 잡종 마물이 바로 놀이었다.

애초에 차원균열이 일어났을 때, 하위차원계로 강제 전이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 존재가 가진 성질이 하위차원계에 더 어울린다는 방증이었으니.

하위차원계로 내려온 몬스터들이 얼마나 저열한 것들인지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 지금 각 국가에 20위권 헌터 중에 남은 사람도 몇 없다던데....

-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 모르겠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고위 헌터 실종 사건은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최초의 균열 이후 상위차원계에서 흘러내린 마나에 적응하여, 그 가진 성질이 이곳보다 상위차원계에 더 어울리는 인간들이 상위차원계로 이동하는 것.

그게 이맘때쯤 일어난 고위 헌터 실종 사건의 전말이었다.

…다만 차이가 하나 있다면, 하위차원계에서 상위차원계로 올라가는 <층계초월>의 경우에는 인위적인 이해관계가 조금 끼어 있다는 점이 달랐지만.

그 맥락과 양상은 거의 비슷했다.

뭐, 무튼 그런 맥락에서.

"내가 층계초월을 했을 때가… B랭크 말미였지, 아마."

나도 이제 올라가게 된다.

"…자정이었으니까. 딱 4시간 남았네."

항마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위차원계로.

* * *

층계초월은 딱히 장소나 다른 요소들에 구애받지 않았다.

대상만 확실히 정해져 있다면, 어디에 있든 몸이 알아서 이동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이 화장실에 있든 밥을 먹든 뭘 하든.

그 상태 그대로 몸이 이동하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아마 족발 다리 들고 이동했었지.'

피식-

회귀 전에는 팬티 바람으로 족발 대자 하나 시켜 놓고 다리 하나를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이동해서 억울해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상태에 비하면 지금은 양호하다 못해 호화스러울 정도였다.

다른 뭐 대단한 것은 없더라도, 헌팅 기본 장비와 복장 정도는 챙겨 갈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관문지대는 무기가 좋다고 다 통과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상위차원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위차원계의 장비는 의미가 없어진다.

굳이 아득바득 다른 짐들을 챙겨가는 것은 오히려 몸을 둔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고.

[11:59]

시계가 시간의 임박을 가리켰다.

"놓고 가는 건 없겠지?"

빠트리고 가는 것은 없는지 대강 체크를 하고, '관문지대'에 대한 기억을 더듬기를 잠깐.

익숙한 알림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System이 활성화됩니다.]

[명단 확인.... 서우진. 등록 완료.]

[층계초월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차원의 균열'에 입장합니다.]

"...."

동시에, 눈앞의 시야가 흐릿한 흑백으로 물들며 점멸했다.

* * *

잠깐의 아득함을 넘어 눈을 뜨자, 시야에는 순백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비도 높이도 알 수 없이 오직 눈부실 정도로 하얀 백색만이 존재하는 어색한 공간.

갑작스레 나타난 그 기이한 배경에 전생에는 참 당황했었지만… 지금은 딱히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이 아니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이야."

당황스러움 대신 내가 느끼는 감정은 꽤나 복잡했다.

다시 만날 친구들에 대한 반가움.

이제는 나만이 가지고 있을 기억들에 대한 오묘한 외로움.

약간의 호기심.

긴장, 설렘, 처절함, 끔찍함.

그리고… 막막함.

여러 감정이 너나 할 것 없이 밀려들었다.

"...."

뒤적뒤적-

본능적으로 이 오묘한 감정을 밀어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미리 챙겨둔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칙- 후우-

그리고 회한이 더 차오르기 전에, 하얀 담배 연기와 함께 감정들을 몰아내었다.

벅차오르던 가슴을 담배 연기로 적셔 버리자, 익숙한 몽롱함과 함께 감정의 일렁임이 잦아들었다.

"…회귀땡은 또 처음이네."

…그럼에도 이 빌어먹을 운명에 대한 씁쓸함이 얼마간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정도야 뭐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해야지… 어떻게든."

그렇게 모든 감정을 몰아내고 내 안에 남은 오롯한 책임감이 목을 조여들었지만, 별수 없었다.

감당하고, 감내하고, 어떻게든 해내야지.

어차피 내가 못 하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해야지… 해야...."

그때였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하는 내 앞에, 돌연 빛무리가 서렸다.

형형색색으로 일렁이던 그 빛무리는 이내 하나의 인영(人影)을 만들어 내었다.

흑발의 긴 생머리, 새하얀 의복을 갖춰입고 나타난 그 인영은 또렷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층계초월자 서우진. 당신은 상위차원계의 항마전에서 활약할 용사로 선택되셨....]

그리고 그 인영의 목소리는.

"...."

더없이 익숙하고, 그리운.

"오랜만이야."

내 첫 번째 동료의 목소리였다.

3화

EP1. 관문지대 (2)

이엘리야 폰 데이나 머큘루르트.

수호십자교단 소속의 수행 사제이자, 상위차원계에 올라와서 만난 내 첫 번째 동료.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마나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교단의 형상구현 마법은 이엘리야의 당황스런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오랜만이라니.... 저희가 본 적이 있었나요?]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상위차원계의 존재와 하위차원계의 존재가 구면이라는 것은 문장 그 자체로 성립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묻는 이엘리야도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글쎄."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반가운걸.

녀석에게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층계초월자로 첫인상이 각인되는 걸 감수하더라도, 지금의 이 반가움과 그리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녀석은 내가 초면이더라도.

내 머릿속에 있는 회귀 전의 기억들.

「반갑습니다. 층계초월자 서우진. 저는 수호십자교단의 소속사제로 당신의 수행을 맡은 '이엘리야 폰 데이나 머큘루르트'라고....」

「아니, 죽으면 죽지라뇨!! 용사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야 이 미친 양반아!!! 누가 지옥을 제발로 걸어 들어가!!!」

「하나만…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딱 한 가지만....」

처음 만나 소개를 하던 순간부터… 이미 수첩에 적어 놓은 녀석의 마지막 부탁까지.

녀석과의 기억은 여전하고 또렷했으니까.

"...."

…그나저나 아무리 당황해도 이제 막 올라온 층계초월자한테 질문이라니.

용사의 수행사제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도 어리숙한 녀석의 모습에 자동으로 웃음이 나왔다.

피식-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오른손을 휘휘 저으며 그리 말하자, 이엘리야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용된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일단은 넘어가도록 할게요. 이 일은 차후에 다시 묻겠습니다.]

[일단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저는 수호십자교단의 수행사제 '이엘리야 폰 데이나 머큘루르트'라고 해요.]

"나는 서우진. 28세. 무직."

[하위차원계에서 헌터… 라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오늘부로 은퇴했거든. 그래서 무직이야. 이렐리아."

[이렐리아가 아니라 이엘리야라니까요.... 그리고 초면에 줄여서 부르실 거라면 성에 해당하는 머큘루르트 쪽으로 호칭하는 것이 예의....]

"오케이. 머쿠르트로 통일."

[....]

이엘리야가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 싶은 표정이었다. 확실히 지금 내 반응과 여유는 일반적인 층계초월자에 해당하지는 않았으니까.

아마 대부분의 층계초월자로 간택된 헌터들은 긴장을 잔뜩 하고 있거나, 낯선 상황에 적어도 이야기 정도는 순순히 듣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 줬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회귀했다는 것을 동네방네 떠들어 댈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는 분명 그렇게 행동할 만한 동기가 충분했고.

하지만.

[대체....]

피식-

저렇게 리액션이 적극적인데, 어떻게 이걸 안 골려 먹냐고.

[이건 뭔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데.... 하위차원계의 인물이라면 당황하는 반응을 보여야 정상인데....]

"내가 비정상인가 보지."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이엘리야는 체념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할 말을 시작했다.

[아마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실제로 와 있는 게 아니에요. 서우진 씨를 안내하기 위해 형상만을 따다 놓은 거죠. 실제 제 몸은 다른 공간에 있고요.]

끄덕-

당연한 이야기다.

녀석의 상위차원계에 있고, 여긴 아직 상위차원계가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1.5층쯤 되는 상위차원계와 하위차원계 사이 어딘가니까.

관문지대를 통과할 때까지는 아직 '상위차원계'라고 명명할 수 없었다.

[마법…의 일종이지만 일단은 하위차원계에서의 '홀로그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그래."

[…잘 아시겠지만, 최근 십수 년간 일어난 몬스터의 출현과 각성자의 등장은 본래 하위차원계의 상식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일들이에요. 본래 하위차원계에 작용하는 '물리 법칙'에 의하면 그런 일들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어난 건 사실이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난 이유는 간단합니다. 상위차원계와 하위차원계의 경계에 균열이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그렇구나."

[본래 상위차원계와 하위차원계는 차원벽에 의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어요. 하지만 최근, 상위차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마전'이 급박하게 흘러가면서 차원벽에 균열이 생겼어요. 그게 하위차원계에 영향을 준 게 바로 최근 변화의 전말입니다.]

"대단하네."

[그래서 상위차원계에서 항마전을 이끌고 있는 저희 수호십자교단에서는 하위차원계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두각을 드러내는 자들을 선정해서 상위차원계의 항마전을 이끌 용사로....]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가던 이엘리야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끄응-

아마 내 일관되고 덤덤한 반응에 다시 한번 뭔가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이엘리야는 미간을 조금 더 모으며 물었다.

[혹시 제가 이 설명을 두 번째 하나요?]

"음… 아니?"

[…서우진 씨의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일반적인 경우라면 두어 번 되묻거나 부정을 해야 정상인데....]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앞의 한 대목 한 대목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내용일 테고.

회귀 전의 나만 해도.

「니들이 뭔데 용사고 나발이고 마음대로 올리고 지랄이야. 항마전이면 전쟁이잖아. 2년 군대 갔다 와서 예비군 들락거리는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윗동네 전쟁통에 뛰어들으라고? 누구 좋으라고! 지랄 말고 빨리 돌려놔. 먹던 족발이나 마저 먹게.」

…라고 했었지 아마.

그게 대부분에 해당하는 일반적 반응이었을 거다.

그거 달래라고 이렇게 따로 형상구현 마법에 수행사제까지 붙여 주며 설명하는 구간이 존재하는 거고.

"당황에 인색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해 줘."

[....]

"뭐 대충 위에서 인력 부족이라 손 좀 더해 달라는 이야기 같은데… 거기까지 오케이. 그럼 설명은 다 끝난 건가?"

[아니. 그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가....]

물론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회귀 전과 180도 달랐다.

좀 착잡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항마전에 참전하는 것이 억울하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어차피 상위차원계의 항마전을 막지 못하면 차원벽이고 하위차원계고 나발이고 다 뒤진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떨떠름한 표정의 이엘리야가 입을 뻐금거리다가 말을 더했다.

[아뇨. 설명이 끝난 건 아니고 <관문지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좀 더 하기는 해야 되는데....]

벙한 표정의 녀석에게 편의를 더해 주려 나는 짐짓 모른 체를 하며 중얼거렸다.

"관문지대라.... 뭐 대충 위로 올라가는 데 필요한 튜토리얼 느낌인 것 같은데. 아래에서 겪은 것들보다 좀 더 강한 몬스터들 있고."

[어....]

"지대라는 거 보니까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것 같고.... 관문이면 대충 스테이지 형식으로 하나 깨면 쉬는 텀이랑 보상 같은 것도 있는 건가."

[....]

"아! 그리고 아까 수호십자교단이라고 했었나?"

[아, 네....]

"교단이면 대충 여러 종교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거고.... 상위차원계라 했으니까 혹시 신 같은 것도 있으려나?"

[어… 아니, 그, 네. 그죠. 아무래도....]

"그럼 뭔가 관문 이런 데에 관여를 할 수도 있겠네. 약간 성좌물(?) 느낌으로다가. 미리 점찍어 놓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

그쯤 되었을까.

이엘리야의 정신이 대략 멍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아마 머리가 복잡한 것을 넘어 어질어질한 수준에 도달한 것 같았다.

녀석은 자기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그리 익숙한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 좋은 머리로 꽤나 맹한 구석이 있어서, 회귀 전에도 종종 전두엽이 고장난 듯한 얼굴을 보여 주곤 했다.

그때마다 이렇게 브레인스토밍을 하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특유의 멍청한 행동을 보였고.

[어라… 이건… 병풍?]

[나는… 나는 이렐리아 폰 머쿠르트… 용사의 수행 광대...?]

그때에는 꽤나 진귀한 광경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조금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틀어막으며,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멍청모드를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다 됐네.'

아쉽게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관문 입성까지 마련된 면담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녀석에게 운을 띄워 주었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그제야 팟- 하고 정신을 차린 듯, 눈에 생기가 돌아온 이엘리야가 되물었다.

[…어? 네? 무슨 시간이....]

"<제1관문>에 들어갈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여기 마나 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옅어지고 있어. 대충 15초 정도 남은 것 같은데."

[....]

내 간단명료한 대답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이엘리야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형상구현 마법이 펼쳐지고 있는 저쪽에서 시계가 있는 방향을 본 모양.

…분명했다.

곧이어 '힝약?!' 하는 요상한 비명 소리와 함께 울상을 지은 이엘리야의 얼굴이 보였으니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아직 제1관문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나도 못 했는데....]

이엘리야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교단에 선택된 층계초월자들은 아무리 하위차원계의 인간이라고 해도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인물들이었으니까.

실제로 관문지대를 통과한 대부분의 층계초월자들은 '항마전'에서 적잖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상태였고.

교단에서 '용사'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수행사제를 붙여 가며 지원하는 것도, 결국 그런 차원에서 최대한 층계초월자의 재능을 꽃피우기 위함이었으니.

한창 항마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위차원계에서는 층계초월자 한 명 한 명이 귀한 재원이었다.

그런 귀한 재원을 제대로 된 대비도 없이 '관문지대'에 던져 넣게 되다니.

아마 항마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교단의 입장에서는 큰일도 이런 큰일이 없을 것이다.

…뭐 물론.

"제1관문 통과하면 또 보는 건가?"

[네? 아, 네.... 일단은 제가 서우진 씨의 수행사제로 배정되었으니 통과하기만 하면 그렇기는 한데, 제가 제대로 설명도 못 드....]

관문지대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문제였지만.

"오케이 그럼, 끝나고 보자고."

[아니....]

"야쿠르트."

.

.

.

"야쿠르트가 아니라 머큘루르트라니까요...."

이엘리야가 우진의 잘못된 호명을 정정해 주었을 때, 우진은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관문지대의 통과율을 높이기 위해, 우진을 공간에 붙잡아 두던 교단의 마법이 효력을 다했기 때문.

형상투사 마법진에서 내려온 이엘리야는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이 멍청아… 도대체 뭘 한 거야...."

이엘리야가 자신을 자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위차원계에서 활약할 용사를 보필하는 것이 수행사제가 해야 할 임무의 전부였고, 특히 관문지대에서는 용사 일신의 능력보다 수행사제의 공략법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엘리야도 제1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11가지 공략법을 준비해 놓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젖혀 두고 혼자 당황해서 중얼거리다가 시간을 다 보내 버렸으니, 멍청하단 말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염치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무사히 제1관문을 통과하시길 빌어야....'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책하던 이엘리야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만."

바로 관문지대에 들어가기 전, 우진이 한 말이었다.

그는 분명 이엘리야에게 '마나의 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옅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직 관문지대를 통과하지도 못한 하위차원계의 인간이 '마나의 농도'를 가늠했다고?"

물론.

하위차원계에 흘러내린 마나가 아무리 미량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도 일단 마나가 있으니 재능만 있다면 마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나의 존재'를 느끼는 것과 '마나의 농도 변화'를 느끼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농도 변화를 느끼는 것은 일단 재능도 필요하긴 했지만, 적어도 '마나농도'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야 했다.

많은 경험에 의해 '기준'과 '감'이 명확히 잡혔을 때나 가능한 일.

게다가,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는 거라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도 마나의 농도가 옅어지는 걸 가늠하는 것은 그보다 수배는 힘든 일.

"아니-."

거기에.

우진은 무려 '15초'라고 잔류한 마나를 통해 마법의 지속시간까지 명확히 유추했다.

이엘리야가 생각했을 때 그건-

"뭐야, 대체 이 사람...?"

절대 이제 막 하위차원계에서 올라온 초심자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4화

EP1. 관문지대 (3)

관문지대는 <수호십자교단>에서 예비 용사들의 자격을 시험하기 위해 차원의 틈새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일종의 튜토리얼 지역이었는데, 서로 다른 3개의 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3개의 관문은 모두 상위차원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지역이었는데, 그 첫 번째는 상위차원계 대륙 북부에 존재하는 '오크산맥'을 따다 놓은 곳이었다.

['관문지대: 제1관문'에 입성하셨습니다.]

['제1관문'에 부여된 시련을 확인합니다.]

+

[시련: 오크 사냥]

■개요: 상위차원계의 대륙 북부에는 항마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마물 종족 '오크 종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위차원계에 나타난 몬스터, 고블린의 조상 격 마물로 비슷한 외모에 더 강한 힘과 체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암살하고 용사로서의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오크의 증표를 획득하여 관문의 끝에 도달하기.

■난이도: [Unranked]

■제한시간: 5시간.

■보상: '???'

+

'…오랜만이구나. 여기도.'

강남의 테헤란로 고층빌딩들에 그대로 나무를 씌워 놓으면 이런 배경일까.

다시 한번 점멸한 시야에 나타난 공간은 단순히 크다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한 삼림 속이었다.

"하… X발 진짜 짜증 나네. 항마전이고 나발이고 누구 멋대로 이 지랄이야."

"졸려...."

"…저기요? 여러분, 일단 통성명부터."

그 공간으로 이동된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내 근방에 3명의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는 욕지거리를 하며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차는 팬티 바람의 남성이었고, 또 하나는 실눈을 뜨고 고개를 까딱이며 조는 파자마 차림의 남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명은 그나마 멀쩡한 원피스 차림의 여성이었다.

대충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여기에 자리한 이 세 명 모두 하위차원계에서는 A랭크에 해당하는 헌터들이었고, 국내의 A랭크 헌터는 2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안 그래도 좁은 업계에 오가며 본 얼굴들이었다.

오히려.

"이쪽 팬티 분은 CK길드의 최강혁 헌터시고… 베개 들고 계신 파자마 분은 에이스 길드의 오찬영 헌터신 것 같은데.... 혹시 그쪽 분은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서우진입니다. 아마 중견길드 B랭크여서 잘 모르실 거예요."

저들 입장에서 내가 생소하겠지.

"그쪽은 김시아 헌터 맞죠?"

"아, 네.... 한강 길드에 속해 있는 김시아예요."

이 셋은 회귀 전에도 국내에서 나와 같이 층계초월을 했던 이들이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각자가 다 A급에서도 상위 티어로 꼽히는 인물들이었기에, 굳이 이게 아니어도 업계에 있던 나로서는 알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었고.

"일단은 다들 저같이 설명은 들으셨을 거라 생각해요. 아무래도 최근 일어난 '고위 헌터 실종 사건'도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요. 저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인데… 다들 이거 보이시죠?"

김시아 헌터가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시스템창을 통해 보이는 시련의 내용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일단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그 '오크'라는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는 것 같은데.... 혹시 그 '교단의 수행사제'라는 분에게 뭔가 더 정보를 들으신 분 있나요? 저 같은 경우는 간단한 공략 노하...."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려는 김시아를 향해, 저쪽에 있는 팬티 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정보는 무슨. 김시아 네가 헌터랭킹 38위지."

"네? 아 네… 일단은."

"그리고 여기 오찬영이가 25위쯤 됐던 것 같고."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쪽 찌끄래기는 B랭크라 했으니까 랭킹까지 볼 필요도 없고."

그 기고만장한 말투에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지만, 나는 간신히 참아내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최강혁이 김시아의 말을 끊고 저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럼 여기서 내가 제일 세네?"

그가 살아온 방식대로, 서열 정리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팀의 분위기나 레이드의 효율성보다, 오직 힘에 따른 서열만을 중시하는 패도적인 성향의 헌터였으니까.

"제일 센 사람 말 듣자고. 어차피 다들 그편이 익숙하지 않나?"

"아니...."

김시아가 그의 말에 반박을 하려 했지만, 최강혁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 싫으면 말고. 나는 혼자 따로 움직여도 되니까."

"...!"

"근데… 오찬영이나 너나, 헌팅 도구도 없이 혼자 레이드하긴 어렵지 않나?"

전생에도 최강혁이 주도권을 잡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는 신체의 근력을 강화하는 고유능력을 가진 탱커계열 헌터였고.

오찬영과 김시아는 굳이 따지자면, 버퍼계열의 고유능력을 가진 헌터였으니까.

김시아의 힐링 능력과 오찬영의 버프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헌팅 도구도 없이 일신의 무력만으로 탱커계열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활용도면에서 단순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맨몸 상태에서는 탱커계열만큼 생존하기 적합한 고유능력도 없었으니까.

자신만만한 표정의 최강혁이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최강혁 님께서 캐리해 줄 테니까. 둘 다 뒤에 딱 붙어서 버프랑 힐이나 하고 있으라고."

"...."

"거 B급 찌끄래기는 같이 가고 싶으면 주변에 잘 보면서 먹을거리라도 있나 찾아보고."

꽤나 불편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는 세 사람 모두 달랐다.

김시아는 일단 상황을 관망하며 더 나서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고.

나는 어차피 저 녀석의 끝이 어떨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고.

"…졸려."

오찬영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따라와. 딱 보니까 이쪽으로 가야 나올 것 같은데, 그 오크라는 몬스터나 관문의 끝이나."

대충 동의하는 분위기가 나오자, 최강혁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숲이 깊어지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래도 일단 전략이나 정보를 종합해서 조금이라도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 오크라는 몬스터를 만나 본 적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랄 말고 따라와 그냥. 뭐 좀 읽어 보니까 고블린 조상 격이라던데, 그럼 어차피 그것보다 조금 세거나 크거나 하겠지."

"...."

"내가 지금껏 모가지 꺾은 고블린 족장만 해도 수백 마리야. 뭘 걱정해."

그렇게 김시아의 만류에도 최강혁은 막무가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머지는 그걸 따라갈 뿐이었고.

그렇게 10여 분 정도를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몬스터 특유의 불쾌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크르락.

고블린 특유의 키륵-거리는 울음소리보다는 훨씬 무겁고 가라앉은 톤의 울음소리.

최강혁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구만."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순전히 저 너머에 있을 오크를 사냥 대상으로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투.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업으로 살아온 인물이고, A랭크라는 헌터랭크는 앞서 말했듯 그리 흔한 랭크가 아니었으니까.

아래에서는 어딜 가도 환영받고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 보니 생각보다 귀엽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하위차원계에서나 적용되는 얘기였고 아직까지 상위차원계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아마 곧.

그러니까, 저 오크를 마주친 순간에는 깨닫지 않을까 싶었다.

상위차원계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 상위차원계에서 '최강혁'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위치인지를.

* * *

최강혁.

그는 꽤나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균열이 일어나기 전 초등학교 시절부터 체육 분야에는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최초의 균열과 함께 각성을 한 후에는 자신이 각성한 고유능력 <파워 바디>를 이용해 A랭크를 달성했을 뿐 아니라.

얼마 전, 세계헌터랭킹 100위 안에 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물론 헌터계 전반을 통틀어서 '최강'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지만, 대부분의 자리에서 그는 최강이었다.

그렇기에 최강혁은 생각했다.

아마 이번에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아무런 헌팅 장비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이동해 오긴 했지만, 자신의 능력은 김시아나 오찬영처럼 헌팅 도구에 의지해야 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능력이 아니었다.

맨몸으로도 동일한 성능을 구현할 수 있는 탁월한 고유능력.

'오크'라는 몬스터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떠오른 창의 설명처럼 고블린의 조상 격이라면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고작 그것보다 조금 센 정도라면, 공략법이 없어 애는 좀 먹을지 몰라도 절대적인 강함으로는 당연히 이쪽이 우위일 테니까.

[<고유능력: 머슬업>이 활성화됩니다.]

[머슬업: 신체의 근력, 근지구력, 순발력, 민첩함 등 종합근력 일반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킵니다.]

우득-

전투 중 종합근력을 강화시켜 주는 이 고유능력이라면,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힘을 보여 줄 거라고.

"…어?"

…그렇게 생각했었다.

- 크르륵?

오크를 마주친 최강혁의 몸이 얼어붙었다.

"이게...."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

고블린보다 훨씬 짙은 암녹색 피부.

3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키.

딱 보더라도 고블린과는 격이 달라 보이는 육중한 근육.

사람 키만 한 거대 도끼.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오크의 강함에 압도된 것이다.

이미 수년간 몬스터를 사냥하고 구르며 축적된 그의 전투 감각이 머릿속에서 경고를 마구 울려대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도망치라고.

절대, 절대 싸워서 이길 수 없는 대상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만났던 몬스터들과는 말 그대로 격이 다른 대상이었다.

굳이 공격을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육중한 몸에 주먹을 대는 순간, 근력 강화고 뭐고 자신의 오른팔은 통째로 뜯겨 나가리란 걸.

"이, 이, 이게 무슨 고블린의...."

말을 더듬으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머지 그와 비슷하게 패닉에 빠져 있었다.

B급 찌끄래기 하나는 이미 튀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김시아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으며, 오찬영도 그 작던 실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오크를 목도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오크의 강함에 압도되고 있었다.

쿵-!

오크가 최강혁을 향해 한 걸음을 내걸었다.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도끼를 든 오크의 오른팔이 들어 올려졌다.

"아, 안 돼...."

쿵-!

다가오는 오크를 보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최강혁은 난생처음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깨닫는 중이었다.

아무리 발을 떼어 보려고 해도, 뇌에서 신호를 보내도, 공포에 절어 경직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쿵-!

다가오는 오크를 보며 최강혁은 자신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내리쳤다.

퍽- 퍽- 꽈악-!

"움직여… 움직여. 이 X팔- 좀 움직이라고!!!"

그렇게 자신의 다리를 전력으로 내리치고 조이며, 조금이나마 감각이 돌아온 최강혁이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사...."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의 눈앞에서는 오크가 양손으로 도끼를 내리찍기 직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살려...."

그렇게.

부웅-

자신의 몸을 향해 내리찍히는 도끼를 바라보다, 삶을 체념하고 눈을 질끈 감은 그때에.

푸욱-!

돌연, 피륙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자신의 몸이 오크의 도끼에 찍힌 것이 아닌가 싶었던 최강혁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몸에서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분명 맞으면 즉사임을 장담할 만한 공격이었는데 정신도 나름 멀쩡한 것 같았으니까.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에 이어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지리시면 곤란한데."

"...?"

"가진 거라곤 팬티밖에 없으신 분이."

조심스럽게 눈을 뜬 최강혁의 눈앞에는, 여전히 오크가 서 있었다.

…다만.

좀 전과는 달라진 점이 두 가지 정도 있었다.

하나는 오크가 흰자를 까뒤집은 채 거품을 물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거기 지리면 갈아입을 것도 없잖아요. 발가벗고 다니는 꼴을 보고 싶진 않은데."

도망친 줄 알았던 B랭크 헌터 서우진이, 오크의 어깨에 올라타 그 정수리에 헌팅 대거(Dagger)를 꽂아 넣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크도 옷은 입고 다니는데 말이야."

5화

EP1. 관문지대 (4)

오크는 최하급으로 분류되는 마물종족이었다.

확실히 마나 적응력이 높은 신체를 가져 근력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신체 조건이 우월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마물 종족들처럼 특별한 마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변수가 적다는 점에서 마물 종족 중에는 크게 상대하기 어려운 점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마물 종족 중 제1관문의 희생양으로 선정된 것이었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위차원계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

하위차원계에서 고블린 같은 반쪽짜리 마물들을 사냥하다 올라온 초심자에게는 오크도 충분히 벅찬 대상이었다.

그래서 각각 개별로 흩어 놓은 것이 아니라 몇 명을 모아 같은 장소로 이동시킨 것이고.

"거기 계속 있으면 깔립니다?"

"…어?"

"비키라고요."

"어, 아, 응."

벙찐 표정을 지은 채 엉거주춤 서 있던 최강혁에게 턱짓을 해주자, 그가 떨리는 손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나왔다.

나는 그대로 오크의 목에 걸린 증표 목걸이의 뒤쪽을 잡아당기며, 오른발로 오크의 머리를 밀었다.

그러자, 쿠웅-! 소리와 함께 오크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자연스럽게 십자모양 증표가 내 손에 들어왔다.

촤악-!

그대로 쪼그려 앉아, 오크의 두개골에 꽂혀 있던 단검을 빼낸 나는 최강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방금 몸이 안 움직였던 건 마나적 현상이에요."

"...?"

"마나는 밀도가 높고 무거울수록 강한 관성을 가지는데, 이 오크의 체내 마나가 상대적으로 당신보다 높아 영향을 받은 거죠."

"...!!"

"그럴 때는 일단 아무 능력이나 대충 사용해서 마나의 흐름을 만들어 놓는 게 좋습니다. 사실 이 정도 차이는 적응만 되면 신체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뭐 적응하는 데는 사람마다 시차가 있으니까."

"...."

"거기 두 분도 참고하세요."

빼꼼- 고개를 빼어 뒤쪽에 있는 두 사람에게 말하자, 오찬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조언… 감사해요."

김시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대답 대신 끄덕임으로 답해 준 나는 다시 오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팔뚝에 새겨진 두 줄짜리 흉터에.

'…겨우 2살배기한테 이렇게 애를 먹어서야 원.'

오크는 해가 지날 때마다 오른 팔뚝에 흉터를 남기는 고유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들 나름 힘의 척도를 나타내는 징표였다.

마나 적응력이 우월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지라, 마나가 풍부한 상위차원계에서는 해마다 자동으로 신체가 강력해지기 때문에 유지되는 전통.

고로 이 두 줄짜리 흉터의 오크는 이제 막 2살이 된 꼬마(?) 오크였다.

상위차원계에 있는 오크산맥에 가게 되면, 고작해야 도끼로 나무나 패고 있을 비전투원에 해당하는 것.

"어휴...."

고작 이 정도 마물에도 당황해서 삶을 체념할 정도라면, 앞으로 이 최강혁이라는 인간의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일지.

자동으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띠링-!

['오크'를 처치하셨습니다.]

[처치대상의 체내 마나를 일부 흡수합니다.]

[전투경험치의 상승에 따라 신체 조건이 강화됩니다.]

[물리력(Physical Force)이 미량 상승합니다.]

[마력(Mana Force)이 미량 상승합니다.]

오크의 죽음이 확실시되자, 시스템창의 알림소리와 함께 전투 승리의 전유물이 돌아왔다.

기분 좋은 고양감과 함께 느껴지는 전신 근육의 세밀한 조정.

"스읍… 하아."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숨과 함께,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신체 정보를 확인합니다.]

+

<상태창>

■이름: [서우진]

■용사 등급: [-]

■물리력: [7.1/균형]

■마력: [4.1/균형]

■고유능력: [절대구현(絶對具現)]

■특성: [-]

■스킬: [-]

+

텅 비어 버린 상태창을 보고 있자니, 처음에 느꼈던 막막함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뭐 어쩌겠어.'

방법이 없었다.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클리어해 나가며 다시 채워가는 수밖에.

나름 높았던 레벨도, 스킬 특성도 모두 사라졌지만, 그래도 이 비어 있는 창이 전생보다 더 좋은 것들로 채워지리라 생각하며 나름 위안을 삼았다.

그때였다.

"후, 후, 훌륭하네!"

돌연 어색한 미소를 지은 최강혁이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녀석의 시선을 끌고, 네가 뒤를 치는 전략. 아, 아주 헌팅의 정석이었어."

"...?"

"딱 보니까 그 금색 십자가 모양이 증표 같은데, 이제 내 거 챙기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 뒤에 찌끄래기 두 명 것까지 3개만 더 챙기면 되겠네. 하.하.하."

속이 뻔히 보이는 말에, 어느새 내게 붙어 있던 찌끄래기 칭호가 김시아와 오찬영에게 돌아갔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기존 하위차원계에서 통용되던 헌터랭크가 그닥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짐작했거나.

어쨌든 확실한 건, 이 인간.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편의주의적인 인간인 것 같았다.

"이봐요, 최강혁 씨!!"

그 빠른 태세 전환에 김시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최강혁 이름을 외쳤지만, 최강혁은 오히려 그녀의 말을 일갈했다.

"닥쳐! 도구 새끼야. 도구는 도구답게 찌그러져 있어."

"네...? 아니 뭐...."

"힐링포션이랑 별다를 바도 없으면서 어딜 근접계 대화에 껴들어."

"하… 진짜 상종 못 할 인간이네, 저거."

그리고는 아랑곳없이 나에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귀찮으면 내 것만 챙겨서 둘만 가도 돼. 아니, 그렇게 하자. 솔직히 고민할 것도 없지."

"...."

"알잖아. 어차피 헌팅 비중의 8할은 탱커랑 딜러인 거. 왜 너같이 눈치 빠르고 요령 있는 딜러가 아직까지 B랭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자, 아까 더듬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유창한 변명들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 다급하고 절실하게 말이다.

"내가 방금은 좀 절었는데, 솔직히 잘하면 한 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거든"

"...."

"피하거나, 뭐 아니면… 막거나. 그러면 네가 한 마리 더 잡는 것쯤은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하면 방금보다 훨씬...."

그래서.

피식-

"꺼져."

"…응?"

나는 그의 말을 끊고, 그에게 필요한 한마디를 해주었다.

그러니까-

"이 팬티 새끼야."

어느 정도 내 진심이 들어간.

* * *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최강혁의 동행 요구를 거절하고 자리를 떠났다.

뭐 당연히 말한 것처럼 팬티밖에 안 입은 새끼랑 동행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바쁘다는 이유가 더 컸다.

제1관문에서밖에 할 수 없는 버킷리스트가 하나 있었으니까.

제한시간이 정해져 있기도 하고, 두 번째 버킷리스트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남의 증표나 구해다 줄 수 있을 만큼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진작 움직이지 않고 첫 번째 오크를 잡을 때까지는 동행하며 시간을 버렸느냐?

이유는 간단했다.

'씨앗 뿌리기' 전략.

"일단 두 명 정도인가."

회귀 전 동료 녀석 중 하나가 이야기한 전략을 위해서였다.

「씨앗 뿌리기? 그게 뭔데.」

「일단 네가 회귀에 성공하게 되면, 어차피 미래는 달라질 거 아니야. 우리가 항마전에서 말아먹은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그치. 아무래도.」

「그럼 괜히, 미래 예측을 위해 큰 흐름을 바꾸지 않는다고 소극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대놓고 영향력을 뿌리고 다니라고.」

「....」

「싹수 보이는데 일찍 죽은 놈들. 키우기만 하면 괜찮을 것 같은 놈들을 미리 건드리란 말이지. 네 말에 껌뻑 죽게 하든 아님 뭘 가르치든.」

'씨앗 뿌리기' 전략은 쉽게 말하자면, '적극적인 인재양성' 방식이었다.

항마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메인 재료가 '회귀한 서우진'이라면, 그것을 보조할 부가적인 재료들을 미리 챙겨 놓는 것.

이 경우에는 '김시아'와 '오찬영'이 해당되었다.

아마 다른 곳에서 열심히 오크를 사냥하고 있을 타국의 인원들을 포함하여, 이번 131기 층계초월자 중 관문지대를 통과하는 녀석들은 꽤 여럿 되었지만.

항마전에 본격적으로 접어들 때까지 살아남은 인물은 그 둘 정도였으니까.

…뭐 결국에는 그 둘도 얼마 안 가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둘 다 싹수는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생존이 곧 실력인 상위차원계에서 그 정도면 나름 훌륭했으니까.

"그럼 그 둘을 어떻게 키워먹을지는 차차 생각을 해보고...."

멀지 않은 곳에서 오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목과 어깨를 돌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아무리 회귀해서 모든 스탯이 초기화되었다고 해도, 항마전 물을 좀 먹은 나에게 '오크'가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오크의 특징, 약점, 특성, 문화, 전통까지 모두 꿰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과의 오랜 전투로 몸이 자동으로 움직일 만큼의 경험치가 쌓여 있었으니까.

심지어.

회귀 전, 대륙 북부전에서 우리를 애먹였던 오크들의 왕.

패도적이고, 강력하며. 오직 힘만으로 모든 오크들을 찍어누르고 왕위에 오른 불사의 오크로드 '네드쿨'의 심장을 터트린 장본인이 바로 나였다.

처절한 사투 끝에 터트렸던, 그 심장의 찐득한 감촉은 아직도 손끝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고작해야 일반 오크.

그것도, 관문지대에 잡아다 떨궈 놓은 2살배기 꼬마 오크들은 절대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백이면 백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할 수 있으려나."

…싸워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문제지.

사락-

나는 수첩을 펴 두 번째 버킷리스트를 확인했다.

[Bucket List#2]

『제1관문에서 오크 100마리 사냥하기.』

"하… 진짜 미쳤지. 그 인간."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문장이었다.

"나야 회귀해서 뭐가 떨어졌었는지라도 알고 하지.... 이제 막 올라온 초심자가 오크 100마리를 때려잡는 게 진짜 말이라도 되는 일인가."

「아, 우진아. 너 돌아가게 되면 그것도 좀 해봐라.」

「음? 뭐요?」

「내가 제1관문에서 오크 100마리 잡아서 특성 하나 얻고 시작했거든.」

「뭐… 뭘 했다고요?」

「나 이후로 그런 놈이 있다는 소문이 없어서, 그 성좌가 또 던져 줄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해봐. 뭐, 특성 안 주면 뭐라도 하나 던져 주겠지.」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성좌들이 관문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교단의 원칙상 제2관문부터니까.

아마도, 그 성좌가 규칙 위반의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 삿갓아재가 탐났던 모양이었다.

…뭐, 내가 그 양반 입장에서 규칙을 깰 만큼 탐이 날지는 모르는 법이었지만.

정 안 주면 100마리 이상으로 잡으면 되겠다 싶어 적어 놓은 버킷리스트였다.

둑- 두둑-

"후우...."

몸을 다 풀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아마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부터는.

파앗-

숨 한번 못 돌리고 오크 모가지를 따야 할 것 같으니까.

6화

EP1. 관문지대 (5)

반 피에르.

프랑스의 헌터랭킹 33위이자, 세계헌터협회 근접전투계 고문을 맡고 있으며, 올해로 헌터생활 15년 차에 접어드는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1세대 최강의 헌터 중 하나였다.

하지만, 관문의 끝에 도달한 그는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오크를 사냥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태는 단순히 '다쳤다.'고 표현하기에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도끼가 스쳐 움푹 파인 오른팔.

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나온 오른쪽 정강이.

그 외에도 일일이 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생채기.

당장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터덜터덜-

풀썩-

"제기랄… 운도 없군."

딱 봐도 관문의 끝을 의미하는 듯한 십자 문양의 거대한 석조문에 기대앉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최근 일어났던 '고위 헌터 연쇄 실종사건'의 원인도 몰랐던 입장에서, 층계초월의 시기를 가늠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하필 오늘....'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지끈-

"크윽-."

아침부터 술을 진탕 마신 날이 아니었으면, 그래도 같이 올라왔던 프랑스 헌터들 중 한 명은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자신은 만신창이로라도 살아남아 오크의 목을 따내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같이 올라온 헌터 중 3명이 오크라는 괴물의 거대한 도끼날에 썰려 나갔다.

에반 까미유, 루 비비엔느, 뷔노시 마르땅

모두 몬스터 필드에서 한 번쯤은 등을 맞댄 적 있는, 친구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하나하나가 프랑스에서는 내로라하는 최강의 헌터들이었고.

솔직히 피에르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A랭크 상위에 등재된 그들이, 고작 하나의 몬스터를 잡아내다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충격.

살아남아 다행이라는 안도감.

이게 고작 시작이라는 데서 오는 미지의 두려움.

그 여러 생각과 정서들이 반 피에르의 머리를 어지러이 뒤섞었다.

그때였다.

"…이게 누구신가. 거 왜 그리 만신창이가 되셨소. 그 반 피에르도 이제 다 늙은 건가."

"...?"

누군가 반 피에르의 옆으로 와 걸터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쪽도 별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알렉세이."

"에이 그래도 나는 양다리는 멀쩡한데."

알렉세이. 러시아 헌터랭킹 26위.

그도 피에르와 같은 1세대 헌터 중 하나였다.

친분이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계헌터협회에서 만든 자리에서 몇 번 정도 안면을 튼 사람이었다.

"…그 수행사제라는 사람한테 미리 듣기는 했다만. 역시 신기하군. 번역을 거치지 않아도 프랑스어가 이해된다는 게."

"그쪽도 당신 하나 남은 거요?"

"둘은 죽었고. 하나는… 모르겠소.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투가 끝나고 보니 없더군."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알렉세이에, 피에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거 그래도 우리보단 낫군. 우린 몰살이거든."

피에르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다음 단계를 위한 잠시간의 휴식을 위함인지.

아니면, 먼저 간 이들의 애도를 위함인지 알 수 없는 무거운 정적.

그 정적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알렉세이였다.

"혹시 그쪽도 봤소? 그 괴물."

"괴물?"

알렉세이의 질문에 피에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오크는 괴물이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무지막지한 몬스터였지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피에르는 이미 오른손에 증표를 들고 있었고, 그 말은 즉 오크를 보았을 뿐 아니라 전투에서 승리까지 했다는 의미.

이 타이밍에 알렉세이가 굳이 그걸 다시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특별한 개체가 있었던 건가? 더 강력한.'

즉, 지금 알렉세이가 말하는 괴물은 조금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뜻.

피에르의 반문에 알렉세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 못 봤나 보군. 괴물이 하나 있었네."

"오크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보다 더한 괴물이 있었다고?"

허허-

피에르의 반응에 알렉세이가 낮게 웃었다.

"그럼.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지. 모든 공격과 저항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하고 단번에 급소를 공략하는."

"…그런 괴물이 있었다고?"

피에르가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물었다.

"외관은 어떻게 생겼던가? 오크랑 비슷한가?"

"피부는 황색인데 좀 흰 편이고, 머리는 짙은 검은색이었네."

"...."

"그리고 단검을 사용하고 굉장히 재빨랐지. 정확한 타이밍에 약점을 공략하는 능력이 탁월했네. 아, 나무도 잘 타는 것 같더군."

피에르는 알렉세이의 말에 그 괴물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단검을 사용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무를 타는 알비노 오크라는 말인가?"

그리고 얼추 유추되는 모습에서 이름을 붙였다.

래피드 알비노 오크.

이름에서 느껴지는 기운부터 무지막지하기는 했다.

일반 오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함이라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릴 정도.

하지만 이어진 알렉세이의 말에 피에르는 다시 한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내가 언제 그 괴물이 오크라고 이야기했나? 이 친구 제대로 넘겨짚었군."

"음...?"

"오크는 오히려 그 괴물의 사냥감에 속했지."

오크가 사냥감?

알렉세이의 말을 따라 뇌까리며 잠시 대화를 되짚어 본 피에르.

곧이어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알렉세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확답과도 같은 알렉세이의 말은-

"괴물, 괴물이었네. 그건 분명 모든 오크의 씨를 말려 버리려는 흉포한 괴물이었지."

"...."

"근데 이제...."

다시 한번 둘 간의 정적을 가지고 왔다.

"사람의 탈을 쓴."

* * *

푸욱-!

"…이 양반 이거 되게 짜네. 벌써 목표치는 한참 넘긴 것 같은데."

또다시, 오크 한 마리의 미간에 단검을 꽂아 넣자 몸이 이제 정말 한계치를 넘었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몸에서 느껴지는 힘이라고 해봐야 단검을 들고 있는 정도가 한계였고, 손발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술이나 경험치 같이 정신적인 부분은 전생 이 시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지만, 몸만큼은 그때 그 시절 만년 B랭크 서우진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아마 항마전을 겪으며 '한계' 자체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진작에 기절을 했어도 너덧 번은 했을 몸 상태였다.

"…삿갓아재 이거 구라 친 거 아니야? 백 넘긴 지는 한참 된 것 같은데."

버킷리스트에 작성된 100마리의 오크를 잡은 지는 이미 한참 된 상태였다.

100마리를 넘긴 시점부터는 굳이 새지 않아 정확히 몇 마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체감상으로는 족히 그의 두 배는 잡은 것 같은 느낌.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을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상황에 맞닥뜨리니 꽤나 막막한 감정이 차올랐다.

'이거 이러다 못 얻고 2관문으로 넘어가는 거....'

그렇게 혹시나 싶은 맘에 속으로 중얼거리는 찰나.

띠링-!

[제한시간까지 10분 남았습니다.]

놀리듯 정확하게 제한시간을 표기하는 시스템창의 알림이 떠올랐다.

"…타이밍 봐라. 아주 예술이네, 예술...."

남은 시간은 10분.

이젠 정말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속도대로라면 5마리는 더 잡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족한 시간.

실상 그 안에 이변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하지만-

'꼭 얻고 가야 되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성의 존재 유무는 초반부일수록 특히 더 중요했고.

하위차원계 조무래기끼리 투닥거리는 관문지대에서는 <특성>이 희귀하다 못해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저 '아쉽지.' 하고 넘어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고작 두 번째부터 포기할 순 없지.'

시작부터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고.

스릉-

'…제1관문에서 쓰기에는 조금 과할 수도 있긴 하지만.'

결국 쟁여두었던 주머니를 열기로 결론을 내린 나는, 오크의 피가 잔뜩 묻은 단검을 허리춤에 납도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아직 미미한 수준에 불과한 체내의 마력회로를 활성화시켰다.

움푹-

아직 여물지 않은 마력회로가 꿀렁거리며 마나를 밀어내고, 회로 가득 눌어붙은 찐득한 불순물을 씻어내었다.

그리고.

띠링-!

[<고유능력: 절대구현(絶對具現)>이 활성화됩니다.]

절대구현(絶對具現).

마나가 흐르는 체내 마력회로를 보정하여, 강제로 스킬을 구현하는 내 고유능력.

겉보기에는 굉장히 좋은 고유능력이었다.

남들은 평생 3개만 사용해도 많다고 하는 스킬을 익히기만 한다면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고유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상 사용 난이도를 생각하면 그리 좋다고만 하기도 어려운 능력이었다.

이걸 제대로 사용하려면, 일반적인 수준을 한참 상회하는 스킬 이해도를 가지고 있어야 했으니까.

'…회귀 전에는 아마 용사 후보생 딱지를 떼고 정식 용사 훈장을 받을 때까지도 이 고유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었지....'

마력회로와 그 계열에 대한 이해도.

구현스킬과 그 특성에 대한 이해도.

거기에 마나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까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고유능력이 바로 이 '절대구현(絶對具現)'이었다.

심지어 그만큼 이해를 한다고 해도 오리지널만큼 효율을 만들어 내기는 어려웠고.

콰아악-

[마력회로의 구동이 감지됩니다.]

[마력회로의 패턴을 분석합니다....]

기억 속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어느 스킬의 마력패턴을 하나씩 짚어 나가자, 마력회로가 터질 듯이 차올랐다.

그 팽팽함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신을 긴장시켰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패턴을 계속 짚어 나갔다.

하나씩 하나씩.

떠오르는 심상을 구체화시키며.

「자, 잘 보거라. 스킬(Skill)이란 것은 결국 체내의 마력회로를 동력으로 삼아 특정한 '마나적 현상'을 강제하는 기술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구현하고자 하는 현상에 알맞은 마력패턴을 회로 위에 그려 내는 것이 스킬사용의 핵심이지.」

「'고유능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결국 스킬의 일종이다. 단지 타고난 마력회로에 최적화된 패턴인지라 배움이나 수련없이 마나를 흘려 내기만 하면 사용할 수 있기에 그리 부르는 것이고.」

「해서 이론적으로 본다면 너는 타인의 고유능력에 대한 이해만 있다면 마력패턴을 모방하여 언제든지 그 능력을 구현할 수 있다는....」

「당최. 계열의 경계가 없는 마력회로라는 게 말이나 되는 건지.... 이게 거 네가 말했던 '운빨망겜'이라는 거냐? 이 괴이한 것아.」

'…됐다.'

그렇게 마력패턴을 완성하는 마지막 방점을 찍자, 스킬 구현의 성공을 알리는 시스템창의 문장이 떠올랐다.

[싱크로율에 따라 <스킬: 머슬업(★☆☆)>을 강제로 구현합니다.]

[주의! 시전자의 수준에 맞지 않는 스킬입니다. 최대 시전시간이 3분으로 제한됩니다.]

"…3분이면 좀 빠듯할 것 같긴 한데."

구사한 마력패턴에는 오류가 없었음에도 턱없이 줄어든 시전시간.

1성 난이도 스킬에 대한 이해도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었으니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마력과 물리력의 부족 정도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 완성도면....'

+

<스킬 설명>

■이름: [머슬업(★☆☆)]

■계열: [강체계-강화]

■설명: [신체의 근력, 근지구력, 순발력, 민첩함 등 종합근력 일반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킵니다.]

■특이사항: [강제로 구현한 스킬입니다. 최대 시전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3분)]

+

[신체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원판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스킬 구현의 성공을 알리는 알림창과 함께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털끝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한결 가볍게 느껴지는 몸의 무게.

나는 곧바로 눈을 뜨고, 몸을 움직였다.

파아앗-!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속도.

단순 100m 주파 속도로만 따진다면 족히 2배는 빨라진 느낌이었고, 가속도가 붙는 빠르기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걸리적거리던 저항감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느낌.

달리기만 해도 고양감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런 것들은 느낄 새도 없이 나는 기감을 곤두세웠다.

- 키르락!

"…일단 하나."

첫 번째 오크의 위치를 감지하고 그 오크의 미간에 단검을 꽂아 넣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0초.

- 쿠륵!

"둘."

그다음은 15초.

"…셋."

그다음은 그보다 더 짧아졌다.

더 이상 증표를 챙기지도 않았다.

챙겨가면 도움이야 되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으니까.

오직 오크를 찾고 미간과, 뒷목의 연수 중 더 가까운 곳에 단검을 찔러넣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

그렇게, 단순히 숫자 세기나 다를 바 없는 반복이 열댓 번 정도 지났을까.

띠링-!

기분 좋은 시스템창의 알림음과 함께-

[한 성좌가 당신의 이례적인 행보에 관심을 표합니다.]

씨익-

입질이 왔다.

7화

EP2. 관심종자 (1)

관문의 경계.

관문지대를 통과하는 층계초월자들을 위해 교단에서 마련한 특수 공간.

온통 백색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상위차원계에서 직접 관여하는 공간 중 하나였다.

물론 관문지대 자체가 교단 차원에서 설계한 공간이기는 했지만, 본래 차원벽을 넘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

시스템(System)과 더불어 그 대가를 최소화하고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 바로 이 '관문의 경계'였다.

[침착해… 침착해… 이엘리야.]

그런 관문의 경계 형상구현 마법진 위에서, 이엘리야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한시간에 거의 임박했음에도, 자신에게 배정된 층계초월자 '서우진'이 관문의 경계로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제한시간 05:12]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5분 남짓.

[하아… 진작 오셨어야 했는데....]

그녀의 말처럼, 사실 통과를 하려면 진작 통과를 했어야 했다.

관문지대 전체의 난이도를 보았을 때, 제1관문은 그리 어려운 난이도의 관문이 아니었으니까.

일종의 '솎아내기'를 위한 관문으로, 탈락률이 가장 높기는 하지만 일단 통과할 사람이라면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릴 이유가 없는 간단한 시련.

때문에 이엘리야는 생각했다.

혹시 그가 탈락한 건 아닐까… 하고.

아니, 사실 제한시간이 10분을 남긴 시점부터 그 생각은 어느 정도 확신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두 시간 늦는 수준이라면 모를까, 통계적으로도 그때부터는 탈락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으니까.

[하… 내가 제대로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이엘리야는 자책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아무리 초임이더라도, 층계초월자에게 휘둘려서 공략법 하나 설명하지 못하고 관문에 들여보내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라고 말이다.

[아니, 실수라고 할 수도 없어. 이건 그냥 내가 멍청한....]

물론 우진의 태도는 누구라도 얼을 탈 만큼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이엘리야에게 굳이 그런 점을 짚어 생각하지 않았다.

[하… 이 멍청아....]

그런 걸 핑계 삼는 것은 더더욱 스스로를 멍청이로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그녀가 자책을 하며 제자리에 쪼그려 앉으려는 순간.

파아앗-!

백색으로 가득한 관문의 경계에 돌연 붉은색의 덩어리가 떨어졌다.

[...!!!]

그 붉은 덩어리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한번 배정된 관문의 경계에는 해당 층계초월자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었으니까.

[서우진 씨!!]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우진을 보며 이엘리야가 처음 떠올린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거의 체념을 하고 있던 터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그 감정을 억눌렀다.

또 그런 쓸데없는 감정에 취해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이엘리야는 우선 우진의 상태를 살폈다.

[맙소사… 피가.]

겉으로 보이는 우진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사제 후보생 시절, 나름대로 항마전의 전장 여기저기를 답사 다녔던 이엘리야로서도 생전 처음 볼 정도의 출혈량.

그냥 '피가 묻었다.' 수준이 아니라, 거의 피에 담갔다 뺀 사람처럼 온몸을 피로 적시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가만히 서 있는 우진의 속눈썹에서 뚝뚝- 하고 핏방울이 떨어질 정도였고.

'침착해, 이엘리야.... 이 정도는 항마전에 참전하게 되면 일상처럼 봐야 할 모습이야.'

생각보다 심각한 우진의 상태에 놀랐지만, 이엘리야는 애써 덤덤한 척을 하며 우진에게 말했다.

[서우진 씨! 일단 오크의 증표를 저에게… 아니, 여기 아래에 놓아 주세요. 그걸 코인으로 교환해서 당장의 출혈을 막을 수 있는 물건을 교단에서 구매....]

하지만 우진의 반응이 이상했다.

"음? 출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우진.

[지금 온몸이 피범벅인데 무슨 남 일처럼 되물어요!! 출혈량이 1L의 수준을 넘었을 때 당장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저체온증 및....]

버럭- 하고 소리를 지르며, 우진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시키려던 이엘리야는 돌연 말을 멈추었다.

또다시, 우진이 '관문의 경계'에 처음 들어왔었던 때처럼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생각보다 목소리가 멀쩡하달까.

분명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엘리야가 예상하던 고통 섞인 쇳소리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든 그녀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아. 이거?"

[....]

"남의 일 맞아."

우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오크 피야, 이거. 내 피는 한 방울도 없는데."

* * *

[아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녀석에게, 나는 오크의 증표를 넘겨주었다.

"읏-차."

쩍-

한두 개 들고 있을 때는 찰랑- 하며 이쁜 체인 소리가 났었는데. 이리저리 엉킨 덩어리를 한 번에 던지자 웬 납덩어리 소리가 났다.

"그거 몇 갠지 정확하게 세어 보지는 않았는데, 대충 200개쯤 될 거야. 맞춰서 정산해 줘."

[....]

"그리고 출혈 막는 아이템은 필요 없고… 몸 씻을 만한 거로 좀 부탁해. 오랜만에 피로 젖으니까 좀 찝찝하긴 하네."

예전에는 이 정도가 기본값이었는데 말이지.

[아니....]

또다시 이엘리야의 정신이 대략 멍해지려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짝- 하고 손뼉을 쳐 녀석의 정신머리를 붙잡았다.

"빨리. 이 꼴로 제2관문 들어갈 수는 없잖아."

[....]

녀석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확실히 어이가 없을 것 같기는 했다.

내가 생각해도 제1관문에서 오크를 백 마리 단위로 잡아 오는 것은 정상인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으니까.

[그, 아니… 그래요 일단 정산할게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이엘리야.

그녀의 중얼거림과 함께, 시스템창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제1관문의 통과 보상을 산정합니다.]

[오크의 증표(×193)을 193Coin으로 정산합니다.]

그 문장과 함께, 순간 눈앞에 있는 오크의 증표들이 사라졌다.

[정산대상: 서우진… 193Coin]

[정산완료.]

[주의! 관문지대에 있는 동안은 수행사제를 통해 코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굳이 하나면 될 오크의 증표를 수백 개나 챙겨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 제1관문에 정해져 있는 오크의 증표 하나당 보상 정산비율이 무려 1코인이나 되었으니까.

코인은 쉽게 말하자면 화폐의 단위였다.

상위차원계 어느 지역에서나 통용되는 통화로, 수호십자교단에서 보증하는 <수호주화(Gurdian Coin)> 한 닢을 칭하는 말.

물론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으니 하위차원계의 달러(USD)나 원(KRW) 같은 종이쪼가리와 비교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뭐, 대충 상위차원계에서 1코인은 서민 한 가족이 한 달 정도를 먹고살 금액이었다.

[시작부터 수호주화가 193개나 되다니....]

이엘리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증명하듯, 193코인은 결코 이제 막 시작한 초심자가 손에 쥘 수 있을 만한 돈은 아니었고.

정산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이엘리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빨리 찝찝해 죽을 것 같아. 몸 씻을 수 있을 만한 거… 없어?"

맘 같아서는 그냥 내가 직접 구매를 하고 싶었지만, 시스템창에 떠올랐듯 관문지대에 있는 동안은 직접 교단과 거래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 어차피 상위차원계로 올라가고 나서도 그런 잡다한 일들은 수행사제가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재촉하는 내 말에 멍하니 있던 이엘리야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아! 네에… 몸을 씻어내시려면 사실 클린즈 마법이 부여된 메모라이즈 페이퍼가 제일 적합할 것 같은데 무성급으로 해도 가격은 1코인으로 좀 비싸....]

"오케이. 그걸로 줘."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아… 네! 그럼 바로....]

정확히 그게, 내가 원한 것이었으니까.

따악-

그렇게 이엘리야의 손가락 튕김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종이 한 장이 나타났고.

펄럭이며 내려오는 종이를 붙잡고 찢자마자, 허공에 기하학적 그림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나타났다.

[메모라이즈 페이퍼를 사용합니다.]

[내장 마법: 클린즈(☆☆☆☆☆)]

떠오르는 시스템창의 간단한 설명과 함께.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간지러운 물줄기가 내 온몸을 덮었다.

그리고 그 뜨뜻미지근한 물줄기를 마지막으로.

풀썩-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그때의 내가 대답한다.

「왜.」

다시, 목소리.

「정말로 오라버니가 돌아가시는 건가요?」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남부 마경의 토벌전 도중에 나눈 대화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회귀해야 한다는 결론이 어느 정도 지어진 뒤에.

「모르지. 나야 까라는 대로 까야 되는 입장이니까.」

「....」

「내 생각에는 오히려 네가 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너 조만간 나보다 세지지 않을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전력을 다한 단순 전투라면 소녀가 지금도....」

「아아. 잠깐. 거기까지만 해. 더 말하면 내 마음이 아플 것 같으니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라버니.」

「왜.」

「약속 하나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약속? 무슨 약속.」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냥… 돌아가시게 된다면.」

「...?」

「돌아가서. 그때의 나와 다시 만나게 되면-」

진지한 녀석의 얼굴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곱게 땋은 머리, 툭 튀어나온 짱구이마, 올망졸망한 눈코입, 오색저고리.

「나에게 다시 잘해 주지 마세요.」

짧고 별거 없어 보이는 한 문장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정말 단순히 '잘해 주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나 오랜 고민 끝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어떤 마음으로 말했는지를.

녀석의 표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부디 그리해 주시길.」

「…생각해 보고.」

그때의 나는 답변하지 못했다.

부탁이랄지 약속이랄지.

녀석이 한 말에 뭐라 답변을 할 수 있을 만큼 머릿속에서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뭐 지금은 어느 정도 답이 나왔지만.

「꼭 약속....」

거기까지였다.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먹먹하게 젖어 들었던 오감이 조금씩 돌아왔다.

8화

EP2. 관심종자 (2)

"으음...."

깜빡-

[…정신이 좀 드세요?]

온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찌뿌둥한 느낌과 함께 눈을 뜨자,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엘리야의 얼굴이 보였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임의로 E급 힐링 마법이 부여된 메모라이즈 페이퍼를 구매하느라 1코인 더 썼어요.]

"...."

[체내 마나도 과소진이고 근육은 죄다 찢어져 있는지라 그대로 냅뒀으면 며칠은 기절해 있을 수준이라서 그랬으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돈도 많으시니까.]

피식-

어쩐지. 상태가 좀 낫더라니.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버킷리스트에 적어 둔 대로 100마리 정도였다면 대충 버티고 넘길 수 있었을 테지만, 생각보다 입질이 늦게 오는 탓에 확실히 무리를 하긴 했으니까.

…그렇다고 고유능력 찔끔 썼다고 기절할 줄은 나도 몰랐지만.

"훌륭하네, 이리야."

[…그러니까. 한 글자 빼먹고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제 이름은 이엘리야라고요.]

"미안."

[…그게 다예요?]

"미안 미안?"

[하아… 진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 이엘리야는 다시 고개를 들어 물어왔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제1관문에서 뭘 하신 거예요?]

"음? 뭘 했냐고?"

[그래요. 도대체 뭘 하셨길래 오크의 징표는 193개나 들고 오시고, 몸 상태는 무슨 3일 내리 전속력 달리기를 한 사람 같은 데다가… 또 그렇다고 격렬한 싸움을 했다기에는 상처 하나 없고....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그냥 뭐… 거기 시련이라고 써져 있는 데서 시키는 대로 했지."

[쓰여 있는 대로 했다고요? 교단에서 발송한 시련 안내에는 분명 현재 항마전의 기조에 맞춰 사냥을 기반으로 한 오크의 암살이라고 적혀 있을....]

"응. 그거 맞아. 암살이지. 근데 이제...."

[....]

"머릿수를 좀 늘린 거지."

이엘리야의 얼굴이 다시 벙찐 표정으로 물들었다.

[그니까… 뭐, 대량 암살(?)을 했다. 그런 주장을 하시는 건가요, 지금?]

"그런 셈이지."

[…제가 이제껏 잘못 살아온 게 아닌 이상, 대량 뒤에는 암살이 아니라 '학살'이 들어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뭐 그거나 그거나 아니야?"

으쓱-

"목격자만 없으면 암살이지, 뭐."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단 혼자서 193마리를 다 잡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고… 아무래도 뭔가 교단의 설계 과정에서 오류가 난 모양인데.... 한번 알아봐야겠네요. 이거 잘못되면 골치 아픈데....]

그리고 녀석은 더 이상 묻는 걸 포기하고, 나름대로 추측을 내놓았다.

굳이 그 추측에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실제로는 내가 잡은 게 사실이지만, 그건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납득이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뭐, 사실 '과정'이야 어떻게 정의되든 나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특성 목록>

■학살자(★☆☆)

[학살자는 연속으로 개체를 처치할 때마다, 학살 중첩이 쌓입니다. 최대 5번까지 중첩되며 중첩당 공격속도가 10% 증가합니다.]

+

학살자.

제1관문에서 성좌에게 뜯어 낸 그 특성이 내 특성창에 박혀 있다는 '결과'가 중요했지.

.

.

.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이례적인 행보에 관심을 표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에게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고 묻습니다.]

규칙을 무시하는 성정.

제멋대로 행동하는 기질.

막무가내식으로 내지르는 어투.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올림포스의 망나니'는 그에게 딱 잘 어울리는 이명(異名)이었다.

'군신(軍神) 아레스.'

제1관문의 말미에서 [성좌는 제1관문에 개입할 수 없다.]는 교단의 룰을 깨고, 나에게 말을 건네온 성좌는 무려 '군신 아레스'였다.

고대로부터 수많은 성좌가 존재하는 상위차원계에서도 정통성만큼은 최고로 치는 '올림포스'의 12성좌 중 하나.

그가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지만, 문장이 떠올랐을 때 나는 짐짓 모른 체를 하며 그에게 답했다.

"누구신지."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이름은 말하지 못하지만, 당신이 평생 한번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귀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그런 것들은 차치하고 우선 전속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에게 막강한 힘과 능력을 줄 수 있다 약속합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는 다짜고짜 사탕발림과 함께 전속계약을 권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건,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성좌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제2관문으로 넘어가게 되면, 다른 성좌들도 접근할 것이 기정사실이었으니, 뭘 더 얹어 주더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층계초월자와 미리 계약을 해 놓으려는 것.

사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평범한 층계초월자였다면, 지금 전속계약을 하는 것이 맞았다.

올림포스의 12성좌는 그리 엉덩이 가벼운 양반들이 아니었고.

성좌와의 전속계약 자체도, 층계초월자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에이, 계약이라니. 통성명도 없이 무슨 계약을 어떻게 합니까. 내가 댁이 누군 줄 알고."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저 살아남는 것.

나는 고작 그런 것을 하기 위해 회귀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답답한 발언에 가슴을 두드립니다.]

답답함을 표하는 문장.

아레스의 조급함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확실히 그로서는 답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1관문의 통과 제한시간이 고작 3분 남짓 남아 있었고, 대가를 감수하며 개입해 버렸는데 내가 '통성명' 같은 같잖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었으니까.

자칫하다 내가 탈락하기라도 하면, 아레스의 입장에서 그만큼 억울한 상황도 없을 것이다.

교단의 룰을 어긴 대가는 대가대로 치르고 얻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뭐, 물론 객관적으로 따져서 아레스급이 되는 성좌가 계약자 하나 놓친다고 그리 큰 손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다급함에 화가 끓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법.

그는 내면의 불같은 성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문장들을 던져왔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후회를 장담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고구마 기질에....]

…그리고 그게.

정확히 내가 노린 것이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에게 빠른 계약을 요구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자신의 밑에 들어오게 된다면 돈, 명예, 권력 그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그… 뭔진 잘 모르겠지만 이름만 보면 별 볼 일 없는 양반인 것 같은데.... 내가 무슨 사형수도 아니고 어떻게 망나니 밑으로 들어갑니까."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분노의 콧김을 내뿜습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발언 취소를 요구합니다.]

"아니 뭐… 내가 본 거라고는 이 시스템창의 문장밖에 없는데 댁이 대단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요."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치욕을 참지 못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자신의 특성장부를 확인합니다.]

그렇게 일방적인 실랑이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

내가 기다리던 문장이 떠올랐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에게 '특성'을 후원합니다.]

"...!"

…아레스는 본디 불같은 성정으로 상위차원계에서 유명했다.

특히 자신을 무시하거나, 명예를 깎아내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편이었고.

그리고 전생에도 그랬다면, 이번에도 똑같을 터.

회귀 전, 아레스와는 꽤나 교류가 있었기에, 아레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눈 감고도 훤히 보였다.

그러니 이미 입질이 온 순간부터, 아레스는 뭐 하나라도 내놓고 돌아가게 될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됐다.'

[<특성: 학살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특성 획득을 증명하는 시스템창의 문장.

그 문장이 사라지기 무섭게 아레스의 기고만장한 문장이 올라왔다.

마치, '내가 이렇게까지 한 이상 너는 나와 계약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아주 일부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느껴....]

뭐 물론.

…그걸 끝까지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어이쿠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웁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원인 모를 불길함을 직감합니다.]

"그… 선생님."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장 그 입을 막을 것을 요구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시간이 다 돼서 가보아야 할 것 같은데...."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대화도 안 끝났는데 어딜 가는 거냐며 당신에게 묻습니다.]

"주신 건 일단 잘 먹을(?)게요."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을 붙잡습니다.]

"허허… 그럼 이만."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벙한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뭐 이런 개망나니 같은 놈이 다 있냐며 당신을....]

.

.

.

[서우진 씨… 서우진 씨...!]

"…음?"

[지금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아요?]

상념을 깨우는 이엘리야의 목소리.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제2관문부터는 '성좌'님들이 개입한다는 부분까지.... 하아. 서우진 씨 또 안 들었죠.]

"하하.... 내가 원래 뭘 꼬박 듣고 있는 데에는 잼병이라.... 실전에는 강하니까 걱정 마."

[그게 할 소리예요?! 당장 제1관문에서 죽어 나간 사람만 몇 명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정보 정도는 알아 가셔야죠.]

"미안미안. 그럼 지금부터 1분 정도는 집중해 볼게."

[아니… 도대체 제1관문은 어떻게 통과한 건지....]

"한숨 좀 그만 쉬어. 땅 꺼지겠다."

[…딱 1분 안에 끊을 테니까 잘 들어요, 그럼.]

검은 생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이엘리야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1관문의 핵심 키워드가 '사냥'이었다면, 제2관문의 핵심 키워드는 '생존'이에요.]

"...."

[하위차원계에서 '사이클롭스'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시죠?]

"알지. 외눈박이 거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그럴 거예요. 하위차원계에 만연한 신화들은 본질적으로 상위차원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까.]

숨도 안 쉬고 이어지는 녀석의 말.

[제2관문의 배경은 '사이클롭스의 포도농장'이에요. 그 괴물의 농장에 떨어져서 정해진 시간 동안 살아남는 것이 서우진 씨가 해야 할 일이죠.]

[농장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예요. 농장주인 '사이클롭스', 그가 기르는 '포도나무', 그리고 그 포도나무들을 지키는 사이클롭스의 '사냥개'. 이 세 가지 핵심요소를 파악하는 게 제2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핵심....

녀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역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다 아는 내용들이었으니까.

서울대 막 졸업한 사람이 초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가서 눈높이 수업을 들으면 좀 비슷한 느낌일까.

말하는 이의 성의와는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머리가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제2관문은 상위차원계의 성좌 분들이 참여를 시작하게 되시는....]

그니까 그 성좌도 이미 앞에서 만나고 온 참이고.

[…제가 생각해 둔 공략법을 말씀드리자면....]

공략법도 이미 생각해 두었으며.

[…도대체 아래서 어떻게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요행은 한 번뿐....]

아마 이번 공략법도 녀석이 말하는 '요행'의 범주에 들어갈 것 같았는데.

'이걸 들어서 뭐 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그럼 여기까지. 제2관문의 중요성부터 공략법까지 최대한 요약해서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다 이해되셨어요?]

약속대로 1분의 설명을 마친 녀석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뭐랄까.

소풍 가는 자녀에게 삼단도시락을 싸준 엄마의 표정이랄까.

아마 짧은 요약 안에 생각했던 것들을 성공적으로 눌러 담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내가 생각해도 당장의 '제2관문 통과'가 중요한 초심자에게 이보다 나은 공략법은 없을 것 같았고.

단적으로 말해, 녀석의 공략 브리핑은 훌륭했다.

초심자가 가져야 할 주의사항과, 제2관문의 핵심을 잘 짚어낸 요약.

"응. 이해됐어."

[이번엔 정말 믿어도 되죠? 그니까 쉽게 말해서 어차피 제2관문에서는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어차피 성좌들이 최종적으로 계약을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3관문이니까.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

"그러니까...."

뭐, 물론.

"대충 다 때려잡으면 된다는 거잖아."

이번에도 역시 내가 초심자가 아니라, 기각이었지만.

9화

EP2. 관심종자 (3)

"나 간다?"

[…가든가 말든가요. 어차피 제 말은 듣지도 않으실 거면서. 서우진 씨가 알아서 다 잘 하시겠죠. 대충 때려잡든, 대충 때려맞아 죽든.]

"삐졌어?"

[삐진 게 아니라. 공략법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게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판단하에, 불필요한 대화를 거부하는 것뿐이에요.]

피식-

"삐졌네."

[삐진 거 아니라니까요!]

쪼그려 앉아 있던 이엘리야가 일어나며 내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녀석은 기분이 상했을 때 쪼그려 앉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고로 말은 아니라고 해도 저건 삐진 게 맞았다.

그리고 녀석이 언제 삐졌는지를 아는 만큼, 나는 녀석이 어떻게 해야 감정이 풀리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녀석의 기분을 푸는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그… 이엘리야, 내가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하나 있는데."

[뭐요.]

"내가 아래서 통과하기 전에 이런 시스템창의 문장이 떠올랐거든.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훌륭한 업적에 공중제비를 돕니다.]…였나?"

[...!!]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이었다.

[뭐, 뭐라고요? 군신 아레… 아니 '올림포스의 개망나니'요?]

"어… 그러니까 개망나니가 아니라 망나니였던 것 같긴 한데 일단은. 응."

이엘리야는 전형적인 지식탐구형 인간이었다.

쉽게 말해, 학자형 인물상이랄까.

새로운 지식,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논리.

이런 머리 팽팽 돌아가는 것들이 체질적으로 부합하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아마, '제1관문에서 성좌가 접근한 층계초월자가 이전에도 있었느냐.'는 꽤나 녀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주제일 터.

이 정도 토라짐은 사과의 말을 한다든가, 선물을 한다든가 하는 편보다 이쪽이 훨씬 나은 해결 방안이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양반이 '학살자'라는 특성도 주고 갔는데...."

학살자를 언급하자 녀석의 미간이 호두껍질처럼 변했다.

미간은 모이고 입은 벌어진다.

[서, 서우진 씨, 일단 저에게 특성창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본래 타인이 시스템창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본인이 허락할 때에는 수행사제에 한해 공유를....]

띠링-!

[수행사제, '이엘리야 폰 데이나 머큘루르트'에게 일시적으로 특성창을 공유합니다.]

"이렇게 하는 거 맞나."

짐짓 모른 체를 하며 녀석에게 특성창을 공유해 주자, 이번에는 안 그래도 큰 녀석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맙소사… 이게 가능한… 이러면 아레… 아니 그 올림피아드의 개망나니가 분명 교단의 룰을 어긴 대가로 권한 행사에 제약을 받을 텐데....]

"...."

[아니지… 오크 193마리를 잡은 게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말 실력이었다면… 그랬다면… 용사님에게는 어쩌면 이상하지 않은 일일 수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교단의 서적에서 선례를 찾아보는 편이....]

어느새 내 칭호가 '서우진 씨'에서 '용사님'으로 바뀌었다.

아직 관문지대도 통과 못 했고… 용사 후보생 딱지 떼고 정식으로 교단에서 용사 훈장을 수여받을 때까지는 단계적으로도 한참 남았는데....

"그 일단 주길래 받기는 받았는데, 괜찮은 건가 싶어서."

어깨를 으쓱이며 묻자 즉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무조건 괜찮아요!!]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무조건 괜찮은 건 또 뭘까.

피식-

확실한 건.

그 시점에 녀석은, 방금 전까지 자기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일단은 적극적으로 특성을 운용하세요, 용사님. 이것과 관련해서는 제가 제2관문을 통과하실 때까지 선례랑 이모저모로 알아본 뒤에 다시 설명을 드릴 테니까.]

"오케이."

[아! 그리고… 혹시 '전속계약'은 안 하셨죠?]

"어, 그 양반이 뭐 하자고 하던데… 뭐 시간도 없었고 설명도 제대로 안 해주길래 안 한다고 했지."

[역시.... 잘하셨어요. 일단은 또 다른 성좌가 접근하더라도 그렇게 하세요. 생각해 보고 말해 준다든가, 아니면 제 이름 팔아서 수행사제랑 이야기해 보고 결정하겠다든가.]

"그래."

역시.

빠른 상황판단력과 유연한 뇌를 가진 녀석이었다.

본래 제1관문의 클리어를 얻어걸린 1회성 요행이라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교단의 룰을 깨고 성좌가 접근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생각을 바꾸었으니까.

나쁘게 말하자면 태세전환이었지만…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생각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가장 높게 치는 이엘리야의 능력 중 하나였다.

상식(常識)이라는 단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항마전에서는, 고정관념이 곧 한계였고, 잘못된 선택을 불러오게 되었으니까.

전생에, 그러니까 내가 훨씬 미숙했던 시절에는 녀석의 그런 성향이 내게 도움을 준 적이 적지 않았고.

[일단은 제가 알기로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한데… 저도 아직 초임인지라 교단의 모든 책을 읽어 본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확실한 거죠? 그 시스템창에 '올림포스의 개망나니… 아니 그러니까 망나니. 하여튼 그게 떠오른....]

[역시… 처음부터 좀 달랐어요. 뭐랄까. 좀 다른 느낌이 났다니까요! 재수가 지지리도 없어 보였다고 해야 되나....]

그렇게 녀석이 정신없이 말들을 쏟아내고, 시간이 더 지나 잦아들.

그즈음에.

관문의 경계에 마나 농도가 잦아드는 것이 은근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또 관문의 경계에 마련된 1시간의 텀이 모두 소진된 것 같았다.

"그, 이제… 시간 얼추 된 것 같은데."

이번에는 녀석도 미리 알아챈 것 같았고.

[아… 네. 확실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내게 이엘리야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 다른 필요한 건 없으세요? 190코인이면 제2관문에 쓸 만한 물건 많이 구매할 수 있을 텐데....]

도리도리-

"놉. 그건 일단 쟁여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제 막 제2관문 들어가는 층계초월자가 하기에는 오만한 대답이었지만, 이제는 신뢰한다는 의미일까.

녀석은 굳이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갔다 올게."

한 손을 들어 녀석에게 인사를 하자, 이엘리야가 상체를 꾸벅하고 숙여 보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

[기다리고 있을게요.]

군말은 더 붙지 않았다.

* * *

['관문지대: 제2관문'에 입성하셨습니다.]

['제2관문'에 부여된 시련을 확인합니다.]

+

[시련: 농장에서 살아남기.]

■개요: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는 상위차원계 대륙 남부 끝자락에서 특별한 포도를 키우는 마물 종족입니다.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그들은 낮에는 직접 경비를 서고, 밤에는 그들의 사냥개를 풀어 놓습니다. 그 끔찍한 농장에서 살아남아 스스로의 가능성을 증명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사이클롭스의 포도농장에서 48시간 동안 생존.

■난이도: [Unranked]

■제한시간: 48시간.

■보상: '???'

+

제1관문과 그리 다를 것 없는 배경.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한 공간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뽑자면, 늘어선 나무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 나무들에는 모두 포도를 닮은 검은 알갱이 과일들이 달려 있다는 점 정도였다.

"사이클롭스의 포도농장…이라."

관문지대의 모든 관문은 상위차원계의 실재하는 공간을 모델로 한다.

제1관문이 대륙 북부의 오크산맥을 본떠 만든 것처럼.

하지만 상위차원계에는 '사이클롭스의 포도농장'이라는 지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긴다.

그럼 이곳은, 이 제2관문을 조성하고 있는 '사이클롭스의 포도농장'이라는 곳은 대체 상위차원계의 어느 공간을 본떠 만든 곳일까.

답변은 간단했다.

"아르고스의 흑색장원."

…사이클롭스가 그러하듯, 아르고스 역시 그리스 신화에 잠깐 등장하는 괴물이었는데.

100개의 눈이 달린 거인으로, 그 괴기한 외관 때문에 위에서나 아래서나 꽤나 유명한 편이었다.

그 본디 출신은 올림포스에서도 '신들의 여왕'이라며 떠받들리는 '헤라'의 심복으로, 올림포스의 편에 서서 마왕군 토벌에 앞장서야 했지만.

제우스와 헤라의 부부싸움에 휘말려 목이 잘렸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되살아난 뒤에는 올림포스에 환멸을 느끼며 마물의 길을 택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교단을 떠나 마왕군으로 진영을 이동한 뒤, 녀석은 소싯적 헤라 밑에서 올리브나무 기르던 실력을 살려 대륙 남부 모퉁이에 특별한 약초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 '특별한 약초'의 효용을 깨달은 마왕군이 아르고스에게 '남작' 작위를 내리며 그 규모가 거대해졌고.

그렇게 대륙 남부에 자리하게 된, 아르고스의 약초밭을 일컬어 '아르고스의 흑색장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시에 흑색장원으로 작위를 받은 아르고스에게 마왕군은 세력을 하나 붙여 주었는데, 그게 바로 당시에 딱히 지도자가 없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이클롭스 종족'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이클롭스의 포도농장'이라는 것은 아르고스의 흑색장원에서 '소작농' 노릇을 하는 사이클롭스를 데려다 만든 '흑색장원의 축소판'인 것이었다.

뭐 당연히 마왕군에서 '남작'씩이나 되는 아르고스를 매번 층계초월자가 올라올 때마다 데려다 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관문지대를 조성하는 교단의 입장에서는 그 이름을 바꿔 가며 축소판을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완성도가 있는 편이기도 했고, 애초에 사이클롭스 정도만 해도 한 개체로 따지자면 오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마물이었으니.

굳이 그런 걸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두둑두둑-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말이지."

그저 나는.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제1관문에서 보았던 당신의 믿을 수 없는 행보를 기억합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이 사용한 눈에 익은 스킬의 출처를 묻습니다.]

[성좌, '역귀를 물리친 춤꾼'이 당신에…+★]

[관문지대에 참관하는 101성좌 중 98성좌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 98/101]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Bucket List#3]

『관문지대에 참관하는 모든 성좌의 관심 모으기.』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할 뿐.

10화

EP2. 관심종자 (4)

관문지대는 교단에서 판단한 필수적인 중간과정이었다.

층계초월자가 곧바로 상위차원계로 올라오면 적응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죽어 나갈 것이라는 판단하에 억지로 조성한 차원 틈새의 비자연적 공간.

쉽게 말해 '생존율 향상을 위한 튜토리얼 지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는 그러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제1관문에서 보았던 당신의 믿을 수 없는 행보를 기억합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이 사용한 눈에 익은 스킬의 출처를 묻습니다.]

[성좌, '역귀를 물리친 춤꾼'이 당신에…+★]

[관문지대에 참관하는 101성좌 중 98성좌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 98/101]

'많이도 왔네, 이 양반들.'

사실, 이 관문지대를 이미 한번 겪어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곳이 '튜토리얼지대'로서 가지는 의미는 미미했다.

물론 아예 의미가 없진 않을 테지만, 중학교에서 전교 꼴등하던 꼴통이 겨울방학 때 선행학습 깔짝 한다고 해서, 고등학교 전교 1등을 할 수는 없는 법.

항마전에서 살아남는 것이 전교 1등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에서, 그 의미나 영향력이 크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관문지대의 역할은… 사실 성좌들의 '계약자 선정'에 있었다.

'아흔여덟이라....'

항마전은 기본적으로 마왕연합군과 교단연합군 간의 전쟁이었다.

단순히 한 세력과 한 세력의 전쟁이 아니라.

성단 올림포스, 성단 피라미드, 오크 종족, 리자드맨 종족 등.

상위차원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력의 연합이 다투는 대전쟁(大戰爭).

그러니 한 지역의 전투에서 이겼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세력 내에서도 정쟁(政爭)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항마전이 한두 해를 두고 일어난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물자와 지원병력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고.

…층계초월자는 그중 하나에 해당하는, 일종의 지원병력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연합군을 위해, 교단이 하위차원계에서 직접 수혈해 온 새파란 젊은 피들.

각 세력이 치르고 있는 국지적인 전쟁에 단비와도 같은 신규 병력이었던 것이다.

물론 층계초월자들의 입장에서는 강제로 징용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수호십자교단이라고 하더라도 층계초월자들을 필요한 전쟁 지역에 맘대로 팔아넘길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윤리적 명분은 지켜야 했고, 애초에 자발적이지 않은 군인은 없는 것만 못한 법이었으니까.

때문에 용사 칭호를 주고 훈련을 지원해 주는 등 갖은 후원 아래 층계초월자를 양성하고 '용병 형태'로 대가성 의뢰를 받아 각 지역에 층계초월자를 파견하는 것이 교단의 '용사양성 프로젝트'의 대략적인 틀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어차피 돈 주고 쓸 용병이라면, 관음증 걸린 정신병자도 아니고 뭐 하러 성좌들이 관문지대를 들여다보고 있느냐.

그 정답은 바로 '선점권'에 있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망자의 사념을 다루는 기술을 약속하며 전속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탁월한 재생 능력를 약속하며 전속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성좌, '역귀를 물리친 춤꾼'이 역귀를 다루는 능력을 약속하며 전속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맞아 뒤지기 싫으면 당장 전속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

"자자, 성좌님들. 일단 제2관문에서는 전속계약 안 맺을 거니까. 진정하시고요."

전속계약이라고 해서, 원천적으로 타 성좌의 의뢰를 차단하는 노예계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교단의 방침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으니, 원칙적으로 교단에 속한 층계초월자들이 그런 계약을 맺어 봤자 어차피 교단의 정당계약심판에 따라 무효화가 가능한 일.

다만, 여기서 말하는 전속계약은 '선독점' 요건을 특약으로 하는 계약을 말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횟수에 제한을 두고 그 횟수에 한해서는 다른 의뢰보다 우선하여 계약 성좌의 의뢰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

여기에 모인 모든 성좌는 그 '선독점 권한'을 얻기 위해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용사 후보생과 미리 계약을 맺어 두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었지만, 원래 인간이라는 게 단순한 동물인지라 첫 의뢰를 받은 성단의 의뢰를 더 자주 수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랜 기간 관문지대를 경험하며, '첫 의뢰인'이 가지는 의미가 작지 않다는 것을 성좌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니, 그런 귀납적 요소에 따라 성좌들이 몸소 이곳까지 자리해 전속계약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몇몇 성좌가 당신의 오만한 발언에 침음을 흘립니다.]

"죄송합니다만 우선은 관문을 통과하는 데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속계약과 관련해서는 제3관문이나 그 이후에 저희 수행사제와 상의하에 결정하도록 할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고요."

[일부 성좌가 당신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 그리고 따로 사정이 있어서 아직 후원 기능도 막아 두고 있는데, 좀 이따 풀릴 거니까 참고하시고요."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벙찐 표정을 지으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진작 후원을 막지 않은 당신의 저의를 의심합니다.]

아마 후원 기능을 막아 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 눈앞에 수많은 코인이 날아다녔을 것이다.

제1관문에서 보인 퍼포먼스가 다른 층계초월자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이었을 테고, 무려 그 올림포스의 12성좌가 '특성'을 후원한 층계초월자였으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급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들어올 돈은 어떻게든 들어오는 법.

우선은 제2관문에서 내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잠시 후원창을 닫아 둘 필요가 있었다.

[★: 98/101]

"…세 명이라."

관문지대를 참관하는 101성좌.

그중 나에게 관심 표시를 달아 놓은 성좌는 총 98명이었다.

즉, 3명을 제외한 모든 성좌가 나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

…물론 그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성좌가 나와의 전속계약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건 곧 많은 후원과 상위차원계에서 내가 가지는 '용사로서의 가치'까지 연결이 되니까.

하지만.

하지만 나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전속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었고, 버킷리스트를 수행해야 하는 내게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관심'이 아니라 '모두의 관심'이었으니까.

좀 너무할지는 몰라도, 나 좋다는 아흔여덟 성좌의 관심보다 내게 볼일 없는 나머지 세 성좌의 관심이 더 중요했다.

[★관심 성좌 목록]

- 개머리 심판자

-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

- 올림포스의 망나니

- 흰 상아를 가진 소년

.

.

.

나는 내게 관심 등록을 한 성좌들의 이명을 확인하며 나머지 세 성좌가 어떤 자들인지를 가늠했다.

그리고 곧이어, 꼭 있어야 하는 한 성좌의 이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지개다리의 파수꾼.'

현재 그 어떤 성단보다 지원 병력이 절실한, 아스가르드 성단의 성좌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명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항마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앙대륙과 신들의 땅 아스가르드를 연결하는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

그 무지개다리를 여닫는 권리는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양도된 적이 없었으니까.

하얀 신 '헤임달(Heimdall)'.

그의 이명이 보이지 않았다.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었다.

라그나로크를 겪으며 괴멸 수준으로 망해 버린 아스가르드 성단에게 급한 지원군은, 나같이 일선에서 몸 던져 싸우는 타입이 아닐 테니까.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스가르드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여러 퍼즐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지능형 캐릭터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제1관문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가 남다르긴 했으니 관심 정도는 가질 수 있었지만… 아스가르드의 재정 상황은 여러 계약자를 두는 것이 사치일 만큼 여유롭지 않았으니까.

아마 관심 표시조차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단수의 후계자.>

여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성좌였다.

굳이 회귀 전의 기억이 아니더라도, 중학교 때 배운 역사적 지식만으로 이명 추측이 가능한 성좌.

'단군왕검.'

고조선의 초대 군주이자,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

여기도 나름 이해가 되는 맥락이 있었다.

올림포스 같은 거대 성단들과 다르게, 성단 형성은커녕 별다른 기반이 없기도 하고.

단군왕검 본인 자체가 성좌에 오르게 된 지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함부로 처신하지 않고 분위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도 역시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도 고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못 먹어도 고' 식으로 관심표시를 할지, 아니면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다른 계약자를 찾아보던지.

뭐 그래도… 일단 여기까지도 예상범주 내로 오케이였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였다.

'…누구지?'

아무리 회귀를 했다고 해도, 회귀 전 관문지대에 참관했던 모든 성좌의 이명을 외워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기억에 남는 이명들을 정리해 머리에 넣어 두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6-70% 수준.

내가 회귀하는 시점에는 사라진 성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성좌는 기억 속에 없는 성좌였고.

…아마 미리 정리해 둔 70% 성좌에 포함되지 않는, 회귀 전에도 알지 못했던 성좌일 가능성이 높았다.

즉, 다시 말해.

손아귀 밖의 일이었다.

어차피 가만히 앉아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리가 없는 일.

때문에 나는.

[현재는 '낮'입니다. 사이클롭스가 직접 자신의 농장을 경계합니다.]

[밤까지 남은 시간 11:57:59]

['사이클롭스의 포도농장'은 12시간을 주기로 밤과 낮이 바뀝니다.]

우선 내가 계획해 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11화

EP2. 관심종자 (5)

한국 출신의 A랭크 헌터 김시아.

그러니까… 이제 막 제2관문에 들어선 층계초월자 김시아는 새삼 자신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아래에서 경험한 균열 이래의 수많은 레이드 경험보다도, 지금 이 관문지대에 들어와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훨씬 더 버거웠으니까.

심지어, 수행사제에게 언뜻 듣기로는 이 관문지대가 고작 도래할 상위차원계의 튜토리얼 버전에 불과하다고 하니, 절망스런 감정이 차오를 수밖에.

까득-

물론 그런 버거움, 절망감과 상관없이 그녀는 제2관문에 적응하고 통과해야만 했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여기서 죽는 것은 역시 사절이었으니까.

'…서우진. 그 사람을 찾아야 해.'

탁탁탁탁-!

수행사제의 조언에 따르자면, 사이클롭스가 활보하는 일명 '낮' 시간 동안은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사이클롭스의 사냥개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더라도, 사이클롭스의 눈에 띄는 것은 죽음밖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사이클롭스는 오크처럼 잡으라고 가져다 놓은 마물도 아니었고, 아직 마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초심자 수준에서 머리 좀 굴린다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저열한 마물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 혼자서 이번 '밤'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제1관문에서는 오찬영과 함께 오크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운 좋게도 누가 사냥만 해놓고 수거하지 않은 오크의 징표를 발견해, 제한시간이 거의 끝나 갈쯤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런 요행을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수행사제의 말로는 2번의 낮과 2번의 밤을 겪으면, 아무리 열심히 몸을 숨겨도 필연적으로 한 번쯤은 사이클롭스의 사냥개를 만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이클롭스가 직접 경계를 서는 낮 동안은 움직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발견될 확률이 현저히 적어지지만, 사냥개는 그 이름답게 냄새로 체취를 추적하기도 하고 개체가 사이클롭스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그러하다고.

그걸 싸워 이기거나, 다시 낮이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어야지만 이 제2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김시아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게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일컬어 '도구 새끼'라고 칭한, 최강혁의 말에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긴 했지만, 실상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그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힐러형 고유능력으로 분류되는 그녀는 육체계열 능력자들이 하는 것처럼, 혼자서 몬스터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빠르게 인정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발견 위험'이 적은 낮 시간 안에 동료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확실히 무언가 달라 보였던 우진이었던 것이고.

물론, 이 광활한 포도농장에서 우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수행사제가 조언해 준 것처럼 농장의 '낮' 시간에는 움직이지 않고 몸을 숨기는 것이 정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라고 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우진을 찾아나선 것은 아니었다.

[특성, '정찰대(★☆☆)'가 활성화됩니다.]

[정찰대: 주의를 집중할 시, 오감(五感)의 민감도가 500%까지 상승합니다.]

그녀는 무려, 제2관문에서 특성을 얻은 몇 안 되는 층계초월자 중 하나였다.

물론 우진처럼 제1관문에서 얻었거나, 아무런 대가 없이 특성만 뜯어 낸 것은 아니었고.

제2관문에 들어선 뒤, 그녀의 회복형 고유능력을 높이 산 한 성좌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해당 성좌에게 특성을 후원받은 것이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구석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찾아내야 하는데.'

어렴풋이 기억하는 우진의 냄새를 포착하여 그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것.

사실 그 자체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탐색'에 한해 뛰어난 효과를 보여 주는 정찰대 덕에 적은 가능성이라도 바라보고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파앗-

그렇게 방향조차 짐작하지 못하는 우진을 찾아 2시간 정도 헤매던 어느 순간.

그녀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킁킁-

"…어?"

서늘한 바람을 타고, 낯설지 않은 냄새가 풍겨 왔다.

'드디어....'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감격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김시아는 그것을 억누르며 더더욱 후각(嗅覺)에 집중했다.

확실했다.

그건 우진의 냄새가 맞았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꽤 짙게 명확한 방향에서 풍겨 오는 것이 한동안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고, 또 왜인지 좀 꺼림칙한 냄새가 같이 풍겨 왔지만.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김시아는 곧바로 냄새가 풍겨 오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턱턱-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후각보다는 시각과 청각에 집중하며, 그의 위치를 특정했고.

'…나무 밑동?'

오감을 더듬어 근방에 도착한 시아는, 어느 유독 커다란 나무의 뿌리 부근에서 우진의 냄새가 짙게 풍겨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레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시아.

사뿐-

사뿐-

사뿐-

낙엽소리 하나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다가간 시아는, 결국 나무 밑동에 형성된 거대한 옹이구멍 안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우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데 이제....

꾸벅- 꾸벅-

"아니...."

졸고 있는.

"이걸 깨워야 돼 말아야 돼...."

* * *

「우진아.」

「왜요. 삿갓아재.」

누더기 차림에 삿갓을 얹은 익숙한 모습이 흑색 시야 위로 떠올랐다.

그가 나에게 묻는다.

「…준비는 얼추 했냐?」

「뭐… 딱 얼추 정도 한 것 같은데.」

「…그러냐.」

평소처럼 스승이랍시고 잔소리나 해댈 줄 알았지만, 회귀를 얼마 남기지 않고 찾아온 그는 평소와 다르게 차분했다.

「…잘난 것도 참 문제야. 그치?」

「...? 뭔 소리예요. 갑자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좀 대충 가르칠 걸 그랬어.」

「....」

「나도 몰랐지. 내가 직접 몸 굴리는 것보다 가르치는 데에 더 재능이 있을 줄은.」

긁적긁적-

「그러니까 뭐… '네가 회귀자로 결정된 건 결국 다 내가 뛰어난 덕분이다.' 같은. 그런 찌질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하러 온 겁니까 지금?」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흘린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건 아니고… 그냥 돌아가서 벅차면, 혼자 한숨 쉬지 말고 내 탓이나 하라고.」

「....」

「아. 그 인간 잘못 만나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구나.」

「....」

「그 삿갓 쓴 누더기 아재 때문에 이리도 꼬여 버렸구나. 하라고.」

「....」

「그러라고 하는 소리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말.

「별....」

「그렇게 안 들렸냐?」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고, 이럴 시간 있으면 가서 마물 대가리나 하나 더 깨요.」

읏차-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그가 무릎을 짚어 일어났다.

그리고 짐짓 주제를 돌렸다.

「애들 다 울더라 인마.... 거 하여간 오지랖은 쓸데없이 넓어 가지고. 여기저기 다 흘리고 다니고 말이야.」

이번엔 내가 되물었다.

「운다고요? 걔네들이?」

「그래 인마. 아주 죄다 대성통곡을 하던데.」

믿지 못하며 다시 한번 묻자 욕지거리가 돌아왔다.

「청이도?」

「몰라 이 새끼야. 나한테 묻지 마.」

「…아니,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

「하여간… 마물 대가리가 아니라 네놈 아직 약할 때 네 대가리를 몇 번 깨줬어야 됐는데.」

그렇게.

그가 「하여간 잘난 게 문제야. 잘난 게 문제.」를 중얼거리며 자리를 뜨는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 속 장면이 검게 물들었다.

.

.

.

"흐으읍-."

상쾌한 기분과 함께 기지개를 펴며 잠에서 일어나자, 돌연 시야 위로 낯설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

"어."

"…안녕하세요."

긁적긁적-

"어어… 그러니까. 구면이죠?"

"아, 네… A랭크 헌- 아니 김시아라고 해요."

"또 보네요."

왜일까.

왜 이 여자가 여기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걸까.

물음표를 띄우는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우선 그 생각들을 제쳐 두고 시스템창을 열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생각보다 지루한 당신의 행보에 실망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설마 처(?)자려고 후원창을 닫아 둔 거냐며, 당신에게 묻습니다.]

[성좌, '여덟 뱀의 원수'가 당신의 계획을 묻습니다.]

[성좌....]

이런저런 불평들을 늘어놓은 성좌들의 알림창을 퍼 올리고, 시간을 알리는 알림창을 확인했다.

[현재는 '낮'입니다. 사이클롭스가 직접 자신의 농장을 경계합니다.]

[밤까지 남은 시간 00:05:59]

"생각보다 푹 잤네, 계획이라도 한 번 더 정리하려 했더니...."

"...."

"혹시 뭐… 저 깨우신 거예요? 볼일 있어서?"

김시아에게 묻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양손을 내저었다.

"아뇨아뇨! 사실 깨울까 말까 한참 고민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주무신 건 아닐 것 같아서 기다린 거예요."

"어… 뭐, 그래요. 잘했어요?"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 표시를 해왔다.

"감사해요."

"...."

긁적긁적-

…뭐랄까.

이 여자, 왜인지 굉장히 저자세였다.

굳이 그 말에 이렇게까지 감사 표시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는 상대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쪽으로 추측을 하는 게 옳았다.

뭐 그래도, 일단 적대감이 있진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가 보인 과하게 공손한 태도에 대해 곱씹어 보는데.

문득, 그녀의 고유능력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러니까… 회복 능력자였죠? 김시아 씨가."

"아, 네! 맞아요. 시간은 좀 걸리지만 그래도 다른 치유능력보다 제약조건이 적어서 나름 쓸 만해요!"

순간 밝아지는 얼굴.

갑자기 적극적으로 바뀌는 자세.

대충 와꾸가 나왔다.

"보아하니, 대충 같이 팀 먹고 '으쌰으쌰' 해보자… 뭐, 그런 차원에서 찾아오신 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그래요. 물론 제가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유일하게 생각난 방법이 서우진 씨를 찾아오는 거라… 그리고...."

말끝을 흐린 그녀가 얼굴을 진지하게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당연히 맨입으로 부탁드리는 건 아니에요… 50코인."

"...."

"지금 제 손에 있는 게 아니라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제가 가진 전 재산을 드릴 수 있어요."

순간 앙다물어진 입술.

그게 그녀의 의지를 보여 줬다.

뭐 당연히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그녀만 아는 거지만, 저 정도 표정이라면 거짓이라도 속아 줄 만할 것 같았다.

'50코인이면… 벌써 전속계약을 맺었나 보네.'

제2관문이 채 반의 반도 지나가지 않은 시점에서 50코인은 아무나 쥘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층계초월자가 자력으로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액이었으니 그녀가 전속계약을 맺은 게 자명해 보였다.

전생에도 그랬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제2관문의 초입이면 꽤나 빠르게 전속계약을 맺은 편이었다.

거의 9할이 넘어가는 대부분의 전속계약은 제3관문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으니까.

뭐, 그거야 어찌 됐든.

…살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는 충분히 보았다.

나를 찾아온 게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하지만.

"어… 일단은 알겠으니까. 코인 얘기는 넣어 두세요. 어차피 저도 달고 있는 물주는 많아서 코인은 필요 없어요."

"…아, 네. 그럼...!"

그 전에 그녀가 알아 두어야 할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근데 이제…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긁적긁적-

"일단은 끝까지 보면 잘 찾아오신 것 같긴 한데, 김시아 씨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온 거예요?"

그녀의 고개가 모로 기운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있는 위치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네? 제2관문 아닌가요?"

"허허… 그… 혹시 지금 소리 들리세요?"

"네? 소리요? 무슨...."

내 말에 되물어 오던 그녀가 목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서서히 동공을 확장시키며 숨을 들이켰다.

"허업...!"

쿵- 쿵-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발걸음 소리.

김시아가 손을 떨며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유독 이 나무가 다른 나무에 비해 크지 않던가요? 달린 열매도 실하고."

"설마 여기가...."

끄덕-

그랬다.

이 나무는 무려.

"여기가 저 자식 숙소거든요."

사이클롭스가 밤 동안 수면을 취하는 장소였다.

12화

EP2. 관심종자 (6)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지식에 더더욱 의구심을 품습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여전히 당신의 계획을 묻습니다.]

쿠웅-

[현재는 '밤'입니다. 사이클롭스가 사냥개를 풀어 자신의 농장을 경계합니다.]

[낮까지 남은 시간 11:59:58]

나무 건너편에서 사이클롭스가 기대앉는 소리가 들리자 사색이 된 김시아가 잔뜩 몸을 움츠렸다.

"맙소사...."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확실히, 김시아가 이렇게까지 놀라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공들여 찾아온 곳이 괴물의 아가리 속이라는 전개는 동화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잔혹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도… 잘 찾아왔어요."

"…잘 찾아왔다고요? 아니… 지금이라도 도망쳐야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뭔가 계획이라도...."

"확실히 사이클롭스가 일어날 낮에는 가장 위험한 곳이겠지만. 일단 밤에는 안전할 거예요."

"...."

하지만, 내가 괜히 김시아의 선택을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제2관문의 두 번째 '낮'이 오기 전까지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여전히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흘렸다.

"김시아 씨도 시련 읽었죠? 낮에는 사이클롭스, 밤에는 사냥개가 이 열매를 지킨다고."

미리 따서 구석에 놓아 둔 검은 열매를 들어 보이자 김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사이클롭스는 잠에서 깨우는 걸 극도로 싫어합니다. 수면을 방해하는 존재는 이유 불문하고 녀석의 분노를 사게 되죠."

"...."

"…설령 그게 자기가 키우는 사냥개라 하더라도요."

짤막한 설명을 남기자 김시아가 '아-!'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밤 동안에는 사냥개가 이 근처로 오지 않을 거라는 거죠?"

"그렇죠. 아무래도. 뭐, 사이클롭스가 직접 사냥개를 부르지 않는 이상은요."

"…그럼 서우진 씨 계획은, 여기서 밤을 지샌다는 거죠?"

"일단은요."

내 설명에 조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김시아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긴장을 풀어 주는 차원에서, 그리고 씨앗뿌리기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잘 통과하셨네요."

"아, 네. 운이 좋았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오크를 잡고도 증표를 안 가져간 사람이 있어서."

"…그,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것 참 훌륭한 사람이네요. 남을 위할 줄도 알고."

"아… 역시 그런 거겠죠? 누군지 알면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할 텐데."

…아무래도 내가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포장을 해보려 했는데.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에게 양심의 행방을 묻습니다.]

어림도 없다는 듯 아레스의 문장이 떠올랐다.

으쓱-

"뭐, 어쨌든. 통과하신 거면 됐죠. 같이 있던 다른 분은요?"

"아! 오찬영 씨는 저랑 같이 통과하셨고… 최강혁 그 개같은 새… 아니, 그 인간은 모르겠어요. 그 길로 갈라져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이었는지 내뱉은 말을 정정하는 김시아.

일단.

두 사람 다 제2관문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뭐 애초에 내가 개입한 부분이 그닥 크지도 않았고, 회귀 전에도 항마전에서 나름 활약했던 이들이니만큼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속계약은… 제2관문에 올라와서 하신 거예요?"

"아, 네… 저를 좋게 봐주신 분이 계셔서. 운이 좋았죠."

"흠… 그렇군요."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어느 성좌와 계약을 했는지를 묻고 싶었다.

전생에도 주로 한 성단의 파견의뢰만 수행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그때와 같은 성좌인지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묻는다고 알려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전속계약서에는 성좌의 이름을 비밀에 붙이는 발설 금지 조항이 들어가 있으니까.

…어차피 그거야 받은 특성을 보게 되면 대충 붙은 성좌가 어딘지 추릴 수 있었으니 급한 게 아니었다.

"훌륭하네요. 벌써부터 전속계약이라니."

"아, 아뇨! 저는 그냥… 그냥 운이 좋았죠."

피식-

아무래도 이 사람은 운이 좋다는 말이 버릇인 모양이었다.

겸손의 미덕을 어필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항마전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그건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부분을 말해 주려 하는데-

"운도 실력이다 뭐 이런 말 못 들어 봤어요? 계속 운이 좋다고만 말할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운이 찾아왔는지를 분석해야...."

"운이 좋았죠… 운이...."

그녀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

"운이...."

눈이 흐리멍덩하게 멀어 있었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내 우측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미리 따 놓은 흑색 열매를 보고 있었다.

이내 손을 들어 올리며 이어지는 나지막한 중얼거림.

"…배고파."

거기서 나는 확신했다.

그녀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나는 우선 김시아의 뺨을 올려쳤다.

짜악-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예상치 못한 급전개에 두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언젠가 보았던 아침 드라마를 떠올립니다.]

"배고… 어?"

잠시 돌아온 동공.

"정신 차려요. 김시아 씨."

"네? 제가… 아니."

"…미안한데 한 대만 더 때릴게요."

혼미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르려 했지만.

휙-

"서우진 씨...!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

그녀가 기민하게 반응하며 내 손을 피했다.

"…맞네."

그걸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녀가 '중독'이 되었다는 것을.

본래라면 그녀가 내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첫 번째는 확실히 가볍게 후려친 것이었지만, 두 번째는 맞추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휘두른 손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녀가 하위차원계에 있을 때 A랭크 헌터였고, 내가 B랭크 헌터였다 하더라도.

+

<상태창>

■이름: [서우진]

■용사 등급: [-]

■물리력: [15.5/균형]

■마력: [9.1/균형]

■고유능력: [절대구현(絶對具現)]

■특성: [학살자(★☆☆)]

■스킬: [-]

+

제1관문에서 내가 오크를 잡으며 끌어올린 물리력과 마력은 독보적인 수준이었으니까.

아마 대부분의 층계초월자들은 15는커녕 10도 달성하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시아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럼에도 그녀는 내 공격을 피했다.

그렇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력과 마력의 차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제3의 요소가 개입했다는 뜻.

그건 아마 내 옆에 둔 이 '검은 열매'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요."

"…네? 아니 갑자기...."

"당신 지금 마약(痲藥)에 중독됐어요."

"…네?"

마약(痲藥).

아르고스의 약초밭이 '흑색장원(黑色莊園)'으로 불리는 이유이자, 그가 마왕군으로부터 남작이라는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

포도처럼 생긴 이 검은 열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약(痲藥)이었다.

"마약이라니 그게...."

"어려울 것 없어요. 방금 정신이 멍해지고 식욕만이 들끓어 올랐을 겁니다. 이상하게 오감은 더 예민하게 각성되었을 거고요."

"…그걸 어떻게...!"

그 정식 명칭은 '흑감람 열매'로 아르고스가 올리브나무와 여러 나무들을 교배시켜 만든 교잡종 나무의 열매인데, 그 효능은 하위차원계에서 취급하는 '마약'의 표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을 혼탁하게 만들어 '억제력'을 저하시키고, 가진 본성의 농도를 짙게 만들어.

떠오른 생각이 이렇다 할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나오도록 하는 마약(痲藥).

안 그래도, 흉포한 마왕군의 마물들을 더욱 흉포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는 일종의 전투도핑제였다.

"그게 이 마약의 역할이에요. 쉽게 말해 본능에 충실한 동물로 만드는."

"...."

"지금은 그나마 제정신이 있는 상태라, 이렇게 이성을 찾을 수 있는데 얼마 안 지나면 제가 뺨을 수백 대를 때려도 소용없을 겁니다."

김시아의 입이 벌어졌다.

대충 납득한 모양.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은 퍼즐이 하나 있었다.

"김시아 씨, 이거 직접 섭취한 적은 없죠?"

"네? 아, 네… 분명 직접 먹은 적은 없는데...."

으쓱-

"뭐, 사실 당연한 이야기긴 해요. 이게 직접 복용하면 흡수 속도가 훨씬 빨라서 바로 풀 도핑(Full doping) 상태로 들어가니까… 아마 그렇게 됐으면 저 자는 사이에 제 손이라도 물어뜯었겠죠. 그냥 확인차 물어본 거예요."

본래 이 제2관문에서 마약 중독 증세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두 번째 날부터다.

당연히 여기에 있는 모든 '흑감람 열매'는 상위차원계의 열화판이었고, 그 냄새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증세가 올라오는 데에는 대략 하루 정도가 걸렸으니까.

직접 복용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낮에 중독 증세가 시작되고, 두 번째 밤에는 중독 증세가 정점에 달한다.

그래서 관문지대를 겪어 본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제2관문의 두 번째 밤을 일컬어 '광란의 밤'이라고도 했다.

인간의 상징인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생존욕, 식욕, 수면욕, 성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만이 수면 위에 존재하는 날것의 밤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렇기에, 김시아의 '중독 증세'가 발현된 시점은 애매했다.

직접 복용했다고 하기에는 중독 정도가 낮았고, 향취에 중독되었다고 보기에는 증세 발현 시점이 너무 빨랐다.

그 애매모호한 중간 어딘가.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김시아 씨 전속계약 하면서 받은 특성이 혹시… '정찰대'인가요?"

"...!!!"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추리에 감탄하며 전속계약의 날짜도 맞춰 볼 것을 권유합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의 추리력에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

소스라치듯 놀라는 김시아의 반응을 통해, 나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특성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감각의 민감도를 최대 5배까지 끌어올려 주는 <특성: 정찰대>의 평균값을 대충 2~3배 정도로 가늠했을 때 얼추 시기도 들어맞았고.

'…전생이랑 같은 성좌인가 보네.'

그녀는 전생에도 '정찰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아...."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정찰대 특성이 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직접 사용한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녀의 떨리는 눈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열린 입에서는 당연히-

"저 이제 어떡하죠...."

하는 도움을 구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읏-차."

그런 애타는 목소리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림이 더 좋아졌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자, 성좌님들. 긴히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자, 그 고귀하신 성좌님들이 개떼 같이 모여들며 문장을 띄워 올렸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에게 미리 작성해 둔 전속계약서를 자랑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그럼 그렇지.'하고 구겨 버린 전속계약서를 다시 펼칩니다.]

[성좌, '여덟 뱀의 원수'가 전속계약을 위한 총알은 충분히 준비되었다면서 당신에게....]

기다린 시간이 있는 만큼 아무래도 전속계약을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아, 전속계약은 아니고 이제 후원 기능 연다는 말 하려고 불렀는데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속계약을 맺게 되더라도 후원 액수는 고려하지 않을 겁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그럼 그렇지.'하고 펼쳤던 전속계약서를 다시 구깁니다.]

[성좌, '여덟 뱀의 원수'가 그럼 무엇을 위한 후원이냐고 당신에게 묻습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의 알 수 없는 발언에 고개를 기울입니다.]

"대신 곤경에 빠진 친구를 위해서 이벤트를 하나 하려고 하는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김시아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이유 역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제2관문의 두 번째 '낮'이 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씨익-

"300코인 후원 모이면, 여기 있는 싸이클롭스… 제가 직접 한번 잡아 보겠습니다."

…싸이클롭스가 있는 두 번째 '낮'은 아마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13화

EP3. 선택받은 자 (1)

싸이클롭스(Cyclops).

올림포스 신족보다도 먼저 지배자로 군림했던 태초의 거인족, '티탄(Titan) 신족'의 후예이나.

세대를 거슬러 내려오며 열화되고 퇴화한 끝에 하등 마물이 되어 버렸다고 전해지는 상위차원계의 외눈박이 거인 종족.

눈깔이 하나밖에 없는 그 우스꽝스러운 외관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모르게 얕잡아 볼 수밖에 없는 마물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고작해야 이제 막 아래서 올라온 용사 후보생 나부랭이가 힘 좀 준다고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의 오만한 발언에 코웃음을 치며 3코인을 후원합니다…+3C]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의 발언 근거를 의심하며 2코인을 후원합니다…+2C]

물론, 세력을 기준으로 따지자면 아르고스를 필두로 한 싸이클롭스 종족은 마왕군 최하위에 속했다.

아마 이 시점에서는 그냥 그 축에 든다가 아니라, 말 그대로 마왕군 세력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작은 세력일 것이다.

아르고스의 출신이 출신인지라 마왕군 진영에서 이모저모로 밉보일 구석이 많았고, 싸이클롭스 종족은 오랜 지도자 부재로 세력이 감소 추세에 들어서 있었으며.

본래부터 싸이클롭스 종족은 개체 수가 많은 종족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력'이란 본래 '개체의 강함'과 '머릿수'의 곱으로 산출되는 법.

세력이 약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개체가 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희석되었다고 해도, 싸이클롭스는 그 '거인족'의 후예였으며 미량이나마 몸속에 그 피가 흐르는 마물.

단일 개체의 힘으로 따지자면 싸이클롭스는 절대 최하위에 속할 만한 마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고.

[후원 내역을 확인합니다.]

<후원목록>

- [개머리 심판자]: 3Coin

-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 2Coin

- [흰 상아를 가진 소년]: 5Coin

- [올림포스의 망나니]: 50Coin

- [여덟 뱀의 원수]: 7Coin

.

.

.

[총 후원 내역: 223Coin]

사실 내가 진작에 후원 기능을 켜 두지 않았던 것은 아레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수면을 취하기 위함이 맞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숙면(熟眠)'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성좌들이 지들끼리 떠들어 대는 것은 무시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신규 관심 등록이나 후원 같은 경우에는 휴대폰 진동 울리듯 기감을 건드리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이엘리야가 힐링(Healing) 마법이 담긴 메모라이즈 페이퍼를 사용하긴 했지만, 고작해야 30분 정도 잔 걸로 몸이 완전히 회복될 리는 없었기에 추가적인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어차피 낮 동안에는 싸이클롭스를 잡는 것도 불가능했고.

'거의 다 모였네.'

목표 금액 300코인은 다른 기준이 있어 모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제3관문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는 대강 500코인 정도가 필요했으니 현재 있는 190코인에 맞춰 불렀을 뿐.

상당 부분 채워진 액수를 보며 나는 성좌들을 한 번 더 부추겼다.

"자… 후원 속도가 더뎌지는 것 같은데… 달성 안 되면 시도하는 시늉도 안 할 거예요. 환불도 당연히 안 되고요. 팍팍 좀 씁시다 우리."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돈독이 오른 당신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싸이클롭스 사냥의 가능성을 의심합니다.]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성좌들 입장에서 이건 전혀 할 필요가 없는 후원이었다.

그 이유를 정리하면 대충 2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우선, 나는 앞서 이 모든 후원이 '전속계약'을 하는 데 반영되지 않을 거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성좌들이 한창 바쁜 항마전의 전장에 신경을 쏟지 않고 관문지대에 개입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어디까지나 '계약자 선점'.

관망 자체에 대한 호오(好惡)나 취미 성향에 따라 부차적인 요인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건 '이유'라고 언급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후원도 '계약자 선점'이라는 본질적인 이유를 떠나 고려될 수 없는 법.

그러니 만큼, '계약자 선점'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 후원 공모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대부분의 성좌들은 내가 후원 공약으로 내건 '싸이클롭스 사냥'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앞서 말했듯 싸이클롭스는 애초에 잡으라고 가져다 놓은 마물이라기보다는, 이 '제2관문'을 구성하는 일종의 규칙에 가까운 존재.

그래.

쉽게 말하자면 싸이클롭스는, RPG의 보스라기보다는 돌 피하기 게임의 돌에 가까운 위치였다.

당연히 이 이전에 이곳을 통과한 층계초월자들은 싸이클롭스를 잡기는커녕 시도를 고려해 본 적도 없을 테고.

그야말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인 것이다.

그러니 관문지대를 통과하여 현재 항마전에서 활약하고 있는 수많은 층계초월자 출신 용사의 재능을 직접 보아 온 성좌들의 입장에서.

내가 그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라고 생각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후원은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까....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2코인을 후원합니다…+2C]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못 먹어도 묻고 더블로 간다며 50코인을 후원합니다…+50C]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성좌, '흰 상아를 가진 소년'이....]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이다.

…[총 후원 내역: 321Coin]

씨익-

"오케이. 접수 완료."

원래 소비란 비합리적인 법이었다.

특히, 액수가 얼마 되지 않을 때는 더더욱.

단일로 보자면, 고작해야 관문지대에서 전속계약도 아닌 일에 300코인이나 쓰는 것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를 목록에 추가하고 관망하는 성좌만 아흔여덟이었다.

이들이 1코인씩만 후원해도 무려 98코인.

그래도 성좌인데, 그 정도 푼돈은 버리는 셈치고 후원할 수 있는 양반들이었다.

게다가.

원래 사람이라는 게 일말의 가능성만 있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상상을 부풀리는 동물이었다.

…성좌라고 그렇게 다를 것도 없었고.

제1관문에서 내가 보여 줬던 독보적인 퍼포먼스는, 아마 이들에게 '혹시....'하는 생각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혹시, 혹시라도 정말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무리 그래도 계약에 참작 정도는 되겠지.'하는 내심(內心)의 생각까지 이어져 후원 심리를 자극했을 것이고.

뭐, 나는 애초에 어떤 성좌와도 전속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었지만.

"읏-차."

…물론 그렇다고 내가 성좌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싸이클롭스는 잡을 것이다.

어차피 나에게 코인 후원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Bucket List#3]

『관문지대에 참관하는 모든 성좌의 관심 모으기.』

이쪽이 본론이었으니까.

아직까지 관심 등록을 하지 않은 세 성좌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는 싸이클롭스를 잡아야만 했다.

아마 제2관문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 중 그것보다 임팩트가 큰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시아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 정말...."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흐려졌지만, 대충 정말 잡을 수 있는 거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했다.

"몰라요, 저도. 처음 해보는 거라."

"...."

그게 사실이었다.

회귀 전에도, 관문지대에서 싸이클롭스를 잡아 본 사람은 없었고.

싸이클롭스는 확실히 어려운 상대였으니까.

나름 준비는 했다만, 어느 정도 운도 따라 줘야 하는 일이었다.

"근데...."

다만, 내가 하나 자신할 수 있는 일은.

"아마 해 뜨기 전에 끝날 겁니다."

내 버킷리스트가 이루어지든, 아니면 내가 이루지 못하고 죽든.

그 결론은 낮이 오기 전에 날 거라는 사실이었다.

* * *

- 그르르 커엉-!

프랑스의 1세대 헌터 반 피에르.

그는 자신이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몸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밤이 된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싸이클롭스의 사냥개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탁탁탁탁-!

사실 발각이 되기는 했지만, 처음 수풀 사이에서 기척을 느꼈을 때까지만 해도 반 피에르는 사냥개를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크를 잡으며 관문지대의 몬스터들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아무런 방비가 없었던 제1관문에서와 달리 지금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철제 숏소드]

수행사제를 통해 코인으로 구매한 철제 숏소드는 특별한 능력이 부가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검'으로 사용하기에는 딱히 부족함이 없었고.

1세대 헌터로서 꽤나 오랜 시간 검을 잡아 온 반 피에르에게 검의 유무는 큰 차이를 주었다.

그렇기에.

반 피에르는 어떻게든 사냥개 한 마리쯤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대체 저게 어디가 '사냥개'라는 거야!"

- 크아악!

…어디까지나, 그 '사냥개'라는 것을 직접 목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온 사냥개를 직접 본 순간 반 피에르는 전의(戰意)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 안광.

검은 갈기.

인간 하나는 족히 씹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머리통.

그리고, 입가에 이미 묻어 있는 붉은 피와 찐득한 살점까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1관문에서 간신히 잡아 낸 오크보다, 고작해야 '사냥개'에 불과한 이 괴물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

그렇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던 어느 순간.

뒷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느낌에, 반 피에르는 곧장 허리를 숙이며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뒤쪽 허공에서 들려오는 콰득- 하는 소리.

타닥-!

균형을 잡으며 뒤를 돌아보자, 사냥개가 마치 비소를 짓는 듯한 얼굴로 나뭇가지 하나를 씹어 물고 있었다.

"...."

그 즈음에 그는 깨달았다.

이 사냥개는 지금 필사적으로 자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임을.

말 그대로 '사냥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치잉-!

더 이상 도망가 봤자, 그 끝이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반 피에르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내었다.

'…기회는 한 번.'

그리고 체내의 마나를 서서히 끌어올렸다.

반 피에르의 고유능력은 [재도약].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한 번 더 허공을 짚어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를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대처가 쉽지만, 알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창출형 고유능력.

오랜 기간 함께해 온 능력이기에, 그 한계와 효용은 반 피에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저 정도의 몬스터라면, 일단 한번 간파당하는 순간 반 피에르에게 기회는 없었다.

'들어오는 공격을 위로 피하고 다시 허공을 박차서 반탄력을 얻는다. 약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포유류의 특성상 단발성 공격으로 가장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부분은 아마 경추(頸椎).'

후우-

간단히 계획을 세운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가는 척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또다시 느껴지는 뒷덜미의 오싹한 느낌.

타앗-!

이번에는 구르지 않고, 허리를 활처럼 튕기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 크르?

예상치 못했다는 위로 올라간 붉은 눈동자를 확인하며, 반 피에르는 마나가 담긴 발길질로 허공을 다시 한번 박찼다.

[<고유능력: 재도약>을 사용합니다.]

파앗-!

위에서 아래로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각도의 도약을 하며, 반 피에르는 사냥개의 목덜미를 향해 숏소드를 꽂아 넣었다.

"뒈져!!!"

중력과 함께,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불어넣으며.

움푹-

성공적으로 파고드는 그의 검.

검날은 물론이고 코등이의 일부까지 파고들 정도로 그의 숏소드는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 크르....

"...?"

분명 쇳소리를 내며 나자빠져야 할 사냥개가 멀쩡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냥을 즐길 때의 울음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낮은 울음소리.

분명한 적대감과 적의(敵意)가 서린 소리였다.

그렇게.

듣는 것만으로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적의 어린 소리에 반 피에르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망했-."

그때였다.

- 크와아아아악!!!

"...!!!"

어디선가 돌연 터져 나온 우레와 같은 소리.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트릴 듯한 거대한 비명이 세상을 멈추었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메아리치는 그 소리는 숲을 뒤흔들었고.

뒤이어, 싸아아- 하고 나무 비비는 소리가 이어지며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대략 2초 정도가 지났을까.

파바밧-!

"…어?"

반 피에르는 돌연 모든 피가 뒤통수로 쏠리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끄드드득-!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사냥개의 몸에 꽂아 넣은 숏소드를 더 안쪽으로 기울이며 자신의 몸을 다시 앞으로 당겼다.

'대체-.'

피에르의 몸이 뒤로 쏠린 이유는 간단했다.

소리에 반응한 사냥개가 곧장 발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목구멍에서 피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건지, 정신이 팔린 채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사냥개.

본능적으로 방금 세상을 울린 울음소리가 이 포도농장의 주인 '싸이클롭스'의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로서는 작금의 상황을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낮에는 싸이클롭스.

밤에는 사냥개.

그게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원칙이었으니까.

싸이클롭스가 밤에 활동한다는 것은, 그의 예상 범주 한참 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사냥개의 등에 올라탄 채, 어디인지도 모를 목적지를 향해 하릴없이 이동한 지 1분여.

돌연, 반 피에르의 눈앞에 붉은색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부웅-

"…어?"

분명 굉장히 빠른 속도였지만, 그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머릿속에서 되새김 되었기에.

반 피에르는 그 덩어리가 사냥개의 머리에 부딪히기 직전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 분명 사람-."

그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붉은색의 덩어리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콰드드득-!

그 중얼거림과 함께 사냥개의 머리와 충돌한 붉은 덩어리.

세상이 뒤집어지는 드문 경험과 함께 바닥에 나뒹군 반 피에르는, 먼지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피투성이의 남성을 보았다.

"아… 아파 뒈지겠네 진짜."

반 피에르가 방금 전 보았던 '사람의 형상'이 거짓이 아니었던 것.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더니 반 피에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뭐라 해야 하냐. 거기 금발 미소년 아저씨?"

"…네, 네?"

"이거… 당신이 잡던 거예요?"

엄지로 뒤쪽을 가리키며 말하는 그 당황스런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던 반 피에르는 애매한 답변을 남겼다.

"아뇨… 사냥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얼떨결에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서...."

으쓱-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이거 경추를 노리신 거 같은데. 맞아요?"

"아, 네. 아무래도."

"흠...."

"...?"

경추를 노렸다는 반 피에르의 답변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널브러진 사냥개에게 다가갔다.

"…얘네는 흑감람을 하도 처먹어서 뇌가 다 녹아 내린 놈들이라, 경추에 있어야 할 소뇌-연수부가 한참 앞에 있어요."

"...."

"뇌 크기도 훨씬 작아져서 제대로 노리기도 어렵고. 그래서-."

그리고는.

푸욱-

사냥개의 가슴께에 손을 꽂아 넣으며 생긋-하고 웃어 보였다.

울컥-!

"이렇게 6번째 갈비뼈 아래 공간으로 심장을 노려 죽이는 게 제일 쉬워요. 오케이?"

"허업… 오, 오케이..."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반 피에르와, 그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 의문의 남성은.

"그- 제가 얘까지 잡아야 5스택이라 일단 죽여 버렸는데. 사냥감 뺏은 건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아니, 저도 어차피 사냥이 아니라 그냥 살려고-."

"할 일 끝나고 나면 제가 더 큰 놈으로 앞에 딱 가져다 줄게요."

"괜찮...."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아니 그러니까 전혀 괜찮-."

생긋-

"그럼 갑니다."

파아앗-!

사양하는 반 피에르의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줄곧 어느 방향을 바라보며 제 말만 내뱉던 그 남성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날아왔던 그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그가 떠나고 나서 반 피에르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는 그 자신이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이었고.

또 하나는.

"그러니까… 하얀 피부에, 흑발. 그리고 괴물 같은 속도...."

방금 보았던 그 의문의 남성이 바로, 제1관문의 끝에서 러시아 헌터가 이야기했던 그 괴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래피드 알비노 오크?"

14화

EP3. 선택받은 자 (2)

뻐근한 눈가를 어떻게든 견뎌 내며, 뿌연 피안개 사이로 시야를 확보했다.

부웅-

'왼쪽.'

바람을 가르는 육중한 주먹질이 내가 있던 자리를 향해 꽂혀 들어온다.

나는 녀석이 공격해 들어오는 방향으로 비스듬히 뛰며, 단검으로 작은 생채기 하나를 남겼다.

츠팟-!

쿠웅-!

동시에, 가공할 충격에 흔들리는 지면.

세찬 바람과 함께 걷힌 피안개 사이로, 붉은 눈을 부여잡은 채, 피칠갑을 하고 있는 싸이클롭스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눈이 원래부터 붉은색인 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내 작품이었다.

자는 녀석의 눈꺼풀 위로 칼침을 한 대 놔주었기에, 동공을 비집고 피가 흘러나온 것.

"…아쉽네. 역시 5스택을 마저 채우고 개겼어야 했는데."

원래 계획은 시각 기능을 완전히 앗아 가는 것이었지만, 눈을 감지 않고 뜨고 있는 걸 보면 아예 시야가 차단된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공격이 조금 얕았던 모양.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울컥-

- 크롸아악!

녀석의 목 부위 경동맥을 끊어 놓고, 눈까지 공략하기에는 현재 신체의 능력치가 많이 부족하긴 했으니까.

급한 마음에 4스택을 쌓고, 바로 움직인 것도 패착이었지만.

원래 한 대 맞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만큼 처음의 공격 기회는 중요했고.

"쿨럭- 퉤-!"

울컥하고 올라오는 핏덩어리 사이로 비릿한 살점이 씹히는 걸 보면, 나름 정통으로 맞는 건 피했어도 속에서 장기 어디 하나가 터져 나간 것 같았다.

"거 뒈지게 아프네 진짜...."

통증을 참고 움직이는 것 자체는 이미 익숙하다 못해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지만.

회귀를 통해 리셋된 몸이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긴 기간 동안 쌓아 온 내구도와 내성이 모두 사라진 몸이었으니까.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화끈함에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의 과감함에 침음성을 흘립니다.]

내가 죽을 맛을 겪는 것이 그리도 좋은지, 성좌님들은 아주 신나서 문장들을 띄워 올리고 있었다.

'…신나시겠지.'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항마전의 진행에 따라, 관문지대의 시련 내용도 바뀌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교는 불가했지만.

관문지대에서 '싸이클롭스'를 잡으려 드는 층계초월자는 내가 처음일 테니까.

쓸 만한 층계초월자가 올라왔다는 기대감과 함께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특히 아레스처럼 싸움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전쟁광들은 아마, 좋아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피식-

물론 당사자의 입장에서, 전생에는 그런 관음하는 듯한 성좌들의 태도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하지만 이제는.

나름 항마전에 참전해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얼추 이해가 갔다.

가장 오랜 전쟁의 당사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으니.

아마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번 층계초월자 '서우진'은 뭔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그 기대 하나만으로도 이 장면을 즐길 즐거움이 넘쳐 날 것이다.

[<특성: 학살자(★☆☆)>가 적용 중입니다…+50%(공격속도)]

[제한시간: 01:31]

[<스킬: 머슬업(★☆☆)>이 적용 중입니다…+5(종합근력)]

[제한시간: 02:10]

"빡세다 빡세...."

- 크와아악!

쿵- 쿵- 쿵- 쿵-!

잠깐의 틈새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달려드는 싸이클롭스.

부웅-

다시 녀석의 주먹이 날아오고.

츠팟-!

나는 다시 녀석의 몸에 생채기를 남겼다.

일단 학살자 5스택과 머슬업이 적용되는 동안은 빠듯하더라도 이 정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공격을 피하고 약간의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유의미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정도의 대치 상태를 말이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내가 싸이클롭스를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호십자교단이 어디 시골 경로당 모임도 아니고, 시스템의 '물리력', '마력' 수치는 그리 대강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수백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항마전을 지휘하며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전투능력을 표기하는 가장 객관적인 수치가 바로 '물리력'과 '마력'이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아마 싸이클롭스가 가진 물리마력과 현재 내 물리마력의 차이는 대략 2배가량.

근소한 차이도 아니고, 2배가 넘는 수치적 차이에는 '변수'나 '가능성' 따위가 개입할 틈이 없었다.

실제로도 이쪽에서는 무의미한 생채기를 내는 정도가 한계인 데 반해, 나는 녀석의 주먹에 한 대만 더 맞더라도 골로 갈 몸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 컹!

"으랏차-!"

이렇게 이따금씩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드는 싸이클롭스의 사냥개 '흑광견(黑狂犬)'의 공격도 피해 내야 했고.

푸욱-

- 끼잉!

뭐, 이쪽은 학살자의 특성을 알아서 갱신해 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니까.

띠링-!

[<특성: 학살자(★☆☆)>의 제한시간이 갱신됩니다.]

[제한시간 04:59]

싸이클롭스를 잡기 위한 내 계획은 간단했다.

'과다출혈.'

싸이클롭스의 과다출혈을 불러일으키는 것.

내가 가진 평범한 헌팅 대거로는 거인족의 약점인 심장을 공략할 수도 없고, 단단한 뼈가 특징인 싸이클롭스의 두개골을 뚫어 낼 수도 없었기에,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굳이 첫 기습 때 한 대 맞아가면서까지 동맥을 끊고, 시야를 차단한 것이었다.

물론 이 시점에서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럼 더 싸울 필요 없이 그냥 도망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동맥을 끊은 것으로 출혈은 이미 일어나고 있으니 충분한 거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아물아물-

'…벌써 반은 아문 것 같은데.'

아무리 저열한 마물로 전락했다고 해도.

싸이클롭스 역시 올림포스를 지배했던 '티탄 신족'의 피가 흐르는 몸.

거인족 특유의 강력한 생명력을 그 특성으로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여기서 도망쳐 버린다면 아마 몇 시간 되지 않아 싸이클롭스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리 붙어서, 조금씩이라도 생채기를 내며 녀석의 피를 바닥에 뿌려야만 과다출혈을 유도할 수 있었다.

쿵- 서걱-!

쿵- 파앗-!

쿵- 찌익-!

그렇게.

녀석의 공격을 피해 내며 생채기를 새기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자, 어느새 성좌들의 의문 어린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이 세운 계획의 성공률을 의심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생각보다 따분한 전개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들도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이다.

이 계획에 한 가지 맹점이 있다는 것을.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의 사냥 실패를 짐작합니다.]

그 맹점은 바로 시간이 저쪽의 편이라는 것이었다.

파앗-!

생명력을 포함해 신체능력 전반을 증진시키는 거인족의 특성은, 대기 중 마나활동성에 영향을 받는 특성.

마나 엔트로피(Entropy)가 높아지는 아침-낮 시간에 가까울수록 거인족의 힘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시간이 지나 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 즈음이 되면, 지금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근소한 우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지금의 공격속도로 그 전에 싸이클롭스를 쓰러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였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크윽-."

내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비릿한 핏덩어리가 계속해서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고, 통증은 점점 강화되고 있었다.

솔직히 통증을 참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만약 실수로 한 대를 더 맞아 버리게 된다면 내가 참는 것과 상관없이 뇌에서 셔터를 내리며 블랙 아웃(Black Out)상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일종의 '필름 끊김' 상태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대로 기절을 할 수도 있었고.

그러니 이 맹점을 해결할 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다면, 싸이클롭스의 사냥은 실패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즉, 다시 말해.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나에게는 이 두 가지를 해결할 만한 방법이 있었다.

[현재는 '밤'입니다. 사이클롭스가 사냥개를 풀어 자신의 농장을 경계합니다.]

[낮까지 남은 시간 9:01:58]

내가 그간 싸이클롭스 앞에서 쫄랑대며 몸만 피해 대고 있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마나의 활동성이 바닥을 치는 시점.

싸이클롭스의 힘이 가장 약해지는 해시(亥時, 21~23시)를 기다린 것이다.

사냥의 성공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어디 보자....'

앞서 기술한 맹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했다.

낮이 되면 위험하니 낮이 되기 전에 싸이클롭스를 잡으면 되었고, 한 대를 더 맞으면 안 되니 맞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언뜻 듣기에는 말장난 같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 두 가지를 실제로 가능하게 해줄-

뒤적뒤적-

'묘약(妙藥)'이 있었다.

"여기 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이 꺼낸 물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머리를 좌우로 가로젓습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합니다.]

성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꺼낸 '묘약'은 바로, 저 싸이클롭스가 사랑을 듬뿍 담아 키운 '흑감람 열매'였으니까.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흑감람에 대한 경고를 남깁니다.]

사실 그들의 반응처럼 이런 상황에서 동물적 감각을 끌어올리겠답시고 흑감람을 먹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 맞았다.

흑감람은 인간의 이성을 억제하고, 동물로서의 본능을 이끌어 내는 마약(痲藥).

이걸 섭취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있는 계획과, 합리적인 판단 같은 이성적 기능은 소멸된다.

대신, 동물적 본능이 추구하는 욕구대로 움직이게 될 터.

배가 고프다면 먹을 것을 찾아 움직일 것이고.

피곤하다면 잠을 잘 것이고.

어쩌면 그보다 기저에 있는 생존 욕구에 따라, 꽁지가 빠져라 도망갈 수도 있었다.

본능만이 남은 사람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그 자체로 행동의 동기가 되니까.

그러니 그들의 만류는 당연한 것이었다.

[생존욕구]-[3대욕구]-[그외의 것].

동물의 DNA에 각인된 이 욕구 피라미드의 서열은 아주 견고하고 굳건해서, 어떠한 욕구도 이 서열을 무시하고 개입할 수는 없었으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내가 이제껏 보인 행보가 남다르다고 해도.

동물적 감각을 끌어올리는 흑감람의 좋은 기능만을 취하고,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는 단점을 정신력만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지만 한 가지.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걱정들 마셔요. 도망 안 가니까."

딱 한 가지.

욕구 피라미드의 위계를 무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근본 없는 자신감에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장 그 행동을 그만 둘 것을 경고....]

"…이래 봬도 내가 사연이 좀 깊은 사람이거든."

기억이 쌓이고, 감정이 에워싸며 형성된 일련의 감정선.

그 감정선이 얽히고 꼬여 한 인간의 생애를 이뤄 낼 정도가 되면.

행동 원칙으로 작용할 정도로 자리 잡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축적된 트라우마(Trauma).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뇌에 겹겹이 각인된 감정의 덩어리.

그 찐득하고 무거운 감정의 덩이는 DNA에 새겨진 생존 욕구조차 무시하고 작용할 수가 있었다.

와득-!

흑감람의 속껍질을 씹어 터트리자, 몽롱한 기운과 함께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덩어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의! <아이템: 흑감람(Black Olive)>을 섭취하셨습니다.]

나조차도 평소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무의식의 저편.

그 깊숙한 곳에 위치한 원초적인 감정의 덩어리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약효에 따라 이성이 억제됩니다.]

[주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능이 행동을 유발합니다.]

동료를 잃는 공포.

마물에 대한 증오.

지키지 못한 분노.

자기혐오, 환멸, 죄책감, 좌절.

그 모든 것이 쌓아 올린… 마물 그 자체에 대한 살의(殺意).

까드득-!

'…한 마리도 남김없이.'

그게.

내 무의식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제1의 행동 원칙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15화

EP3. 선택받은 자 (3)

칠흑같이 어두운 시야 위로 오랜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대륙 남부의 최종 토벌전.

21일 차.

피비린내 나는 어느 전장의 간이 막사 안.

「용사님.」

「왜. 이엘리야.」

천막을 걷으며 들어온 이엘리야가 내 대꾸에 멈칫- 한다.

「…웬일이세요. 제대로 이름을 다 불러 주시고.」

「아.」

「....」

「그러게. 정신이 없긴 한가 보다 내가.」

「…이 경우에는 평소에 정신이 없다가 잠깐 제정신이 돌아왔다는 게 맞는 표현인 것 같은데요....」

으쓱-

「뭐 그거야 대충 넘어가고. 왜 불렀어?」

「지휘부에서 전투 규모 산정이 완료되어서 보고드리러 왔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엘리야가 종이를 넘기며 숫자로 점철된 차트를 읊어 주었다.

「적군-.」

백작급 둘 사살.

남작급 다섯 사살.

9개 마물 종족 토벌 완료.

「아군-.」

랭커 32명 사망.

이외 1성~5성급 용사 800여 명 사망.

십자군 2개 마법여단, 2개 사단 병력 전멸.

「…많이도 죽었네.」

전장을 나다닌 지도 시간이 꽤 흐른 즈음이라, 죽음 자체에는 이미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한 상태였지만.

역시 그 수많은 인생이 고작 숫자 몇 개로 결말지어질 때 허탈함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읏차-

잠시 흐르던 어색한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자.」

「…네.」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이엘리야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유는 간단했다.

피해 규모가 산정되었다는 것은, 전장에서 죽은 녀석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도 준비되었다는 의미.

전투 규모 보고보다는, 그쪽이 본론이었다.

.

.

.

쏴아아-

배경이 바뀌고, 빼곡히 쏟아지는 비가 눈앞 시야를 가린다.

「비가… 오네요.」

「그러게.」

「잠깐만요. 용사님. 제가 차폐 마법을....」

「…그냥 가자.」

「네? 하지만 비가-.」

「맞으면 좀 어때.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

「어차피 너 그거 주 종목도 아니잖아. 괜히 구석에서 골머리 싸매지 말고.」

「잠시만요! 용....」

녀석을 뒤로한 채 내가 먼저 빗속으로 몸을 옮긴다.

터벅- 터벅-

도착한 간이 장례식장.

이미 시작한 모양인지 우중충하게 젖어 있는 장내.

그 일렬을 두리번거리다, 모퉁이 끝에 비어 있는 자리에 섰다.

「....」

쏴아아-

그 장면을 이리 보고 있자니 문득, 왜 영화 속 합동 장례식 날 클리셰처럼 비가 내리는지를 알 것 같았다.

…아마, 그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꽤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절함.

우천임에도 진행해야 할 만큼의 엄중함.

눈물과 비의 모호함.

이따금씩 새어 나오는 흐느낌.

어두움.

먹구름.

등등.

진부함에도 항상 그리 표현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 뭔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빗속에는 얼마간 내포되어 있었으니까.

「....」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빗속에서는 한층 증폭되었으니까.

「헌화하시면 됩니다.」

「....」

식순에 따라 헌화 행렬이 이어지고, 끄트머리에 있던 내 차례가 왔다.

아무래도 마지막 순서인 모양이었다.

터벅터벅-

커다란 묘비에 익숙한 이름들이 몇 보인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헌화는 왜 하는 걸까. 이 사람들은 천국에 갔을까. 천국은 있을까. 저들이 죽은 이유는. 내가 산 이유는 뭘까. 운이 좋아서일까. 이걸로 위로가 되는 걸까. 죽은 자를 기린다는 게 뭘까.

하지만 이내 나는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닫고 생각을 그만두었다.

죽은 자를 기린다는 이 요식 행위는.

사실 본질적으로는 산 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저, 백색의 국화꽃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묘비 중앙의 글귀가 보인다.

[영웅들의 묘]

영웅이라는 보통명사로 뭉뚱그려지는 꼴이, 뭔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굳이 지금 그걸 말한다고 저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끝을 잊지 않는 것.

그 정도.

「일동- 묵념.」

식순에 따른 담당자에 지시에 따라.

사람들의 고개가 숙여진다.

나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이려는데.

툭-

누군가가 내 머리 위에 널찍한 방수천 하나를 얹었다.

「…주변에서 보면 제가 욕먹어요.」

「....」

「지 담당 용사도 안 챙긴다고요.」

「…그래.」

이엘리야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우비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을 찾으러 갔다 온 것 같았다.

잠시간 묵념이 끝나고.

고맙다는 의미로 천 앞쪽을 살짝 들어 올리자, 녀석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을 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똑같이 고개를 기울여 주며 물었다.

「왜.」

「…용사님 이번 '아르고스 남작' 레이드 때 또 혼자 달려들었다면서요.」

「아.」

뭔가 했더니.

누군가 또 꼰지른 모양이었다.

「들었어?」

어깨를 으쓱이며 이번에는 무슨 핑계를 댈까 고민을 하는데, 녀석의 날카로운 속삭임이 귀에 꽂혔다.

「미쳤어요 용사님? 남들은 5성 용사 훈장 받아놓고도 뒤로 빼기 급급하구만 무슨 3성 따리가 혼자서 남작한테 달려들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힘들게 딴 훈장인데 3성 따리라니....」

「3성 따리가 아니면 뭐예요! 브실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알아요?」

「....」

막힘없이 쏟아 내는 걸 보니, 장례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동장, 은장, 금장까지는 용사로 안 친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모해요 사람이.」

「아니… 뭐 그 아르고스라니까. 나도 모르게.」

하아-

「…어쩐지. 그 잘난 회복력으로 왜 삼 일이 넘게 누워 있나 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 이엘리야는 다시 한번 눈썹을 모으며 조곤조곤 다그쳤다.

「매번 제가 부탁하는 게. 다른 게… 아니잖아요, 용사님.」

「....」

「딱 한 가지. '조심히 다녀오라고.' 그거 하나 지키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확실히 녀석이 항상 나에게 부탁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매번, 토벌전 같은 큰 전장에 참여할 때마다 인사처럼 내뱉는 부탁.

'조심히 다녀오세요. 용사님.'

근데 그게 참.

지키는 입장에서는 그리 쉬운 부탁이 아니었다.

「이따가 봐요. 지금이야 내가 식장이라 자제하고 있지만 막사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엘리야의 잔소리와.

얼굴과.

오감으로 기억하는 그 당시의 장면이 희미해지며, 시야가 점차 거뭇하게 물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