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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이를 마치고 마나도 다 소모했으니,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인간 몬스터 사냥꾼들까지 나타난 이상 이 숲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밖에 나가기 전에 최선의 상태로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한참 쉬다가 깨어나자 마나가 4포인트 회복되어 있었다.

뱃속에 들어있던 음식도 제법 소화가 진행된 듯했다.

굴 바깥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살피자, 근처에 인간이 돌아다니거나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밖으로 나온 뒤 새롭게 얻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으음···

이 눈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군···

시야의 정중앙만 확대 기능이 적용된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시야의 주변부로 갈수록 점차 흐려지는 식이 아니라, 명확한 경계가 존재했다.

변이가 겹눈들 중 일부에만 적용됐고, 겹눈을 이루는 각각의 눈이 보는 영역이 서로 겹치지 않는 걸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멀리까지 초점이 맞는 방향이 따라서 바뀌었다.

언제나 시야의 중심 부분이었다.

···시야가 두 종류로 나뉘어 있는 상태에 익숙해지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군.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눈의 성능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그저 적응이 필요할 뿐이었다.

눈을 업그레이드한 덕분에, 나는 호수 건너편에 모여 있는 몬스터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거대 악어가 여전히 호숫가의 진흙에 엎드려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아마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혹시 내가 태어난 둥지에서 호수를 찾아온 개미가 있는지 열심히 살폈지만,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동족이 나타날 기미는 없었다.

한숨.

나는 호수의 물을 마셔서 MP를 회복한 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다.

인간 사냥꾼이 언제 또 들이닥쳐 불벼락을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호수 근처에 더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최대한 빨리 경험치를 모아서 진화할 필요도 있었다.

진화를 통해 능력치를 높이면 생존은 물론 바이오매스를 구하기도 더 쉬워질 터였다.

아주 큰 폭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면 좀 더 자신 있게 페로몬의 자취를 따라가서 둥지를 찾을 수도 있겠지.

지금으로서는 더 많은 정보를 얻는 일 그리고 적당한 사냥감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이상한 결정 같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문득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인간들의 야영지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이야말로 이 주변에서 가장 위험한 대상인데 내 발로 찾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그만큼 위험한 존재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변이한 눈이라면 인간들을 전보다 훨씬 더 멀리서부터 포착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선택을 할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솔직히 인간들을 찾고 나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 위험한 장소를 피해 다닐 수라도 있을 터였다.

좋아!

그럼 결정했다!

인간들의 야영지로 가자!

나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호수를 떠났다.

아마 숲 속 여기저기 몬스터가 잔뜩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내게는 여전히 은신이 생존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인간들이 사냥한 시체의 청소부 노릇을 한 덕분에 나는 아마 내 레벨의 다른 몬스터보다 훨씬 더 많은 바이오매스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경험치는 얻을 수 없었다.

지난 번 드래곤 늑대 무리와 지네들의 싸움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여전히 경험치를 얻기 위해서는 사냥감을 신중하게 고를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1대1로 싸워 이겨서 사냥에 성공하면 좋을 텐데···

지금 내게는 경험치만큼이나 자신감도 필요했다.

계속해서 이런 식의 요행을 바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최대한 은신 상태를 유지하고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 채, 엄폐물에서 엄폐물로 움직였다.

포식을 한 덕분에 HP가 최대로 회복되어 있었고, 더듬이도 완전히 다시 자랐다.

그리고 다친 다리도 이미 오래 전에 멀쩡해졌다.

이 숲은 정말 이상했다.

모퉁이를 볼 때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신기한 뭔가를 발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가지 끄트머리마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가 나타났다.

절대 건드리고 싶지 않은 촉수였다.

호기심 때문에 턱으로 돌을 하나 주워서 그 나무를 향해 던졌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생물이 건드렸을 때에만 반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양치 식물로부터 멀리 떨어진 뒤 계속 걸음을 옮겼다.

대충 인간들이 사라진 방향을 가늠해서 걸어가는 동안 몇몇 종류의 몬스터들과 마주쳤다.

특별히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 작은 원숭이 비슷한 생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은신 상태였지만, 놈들의 수가 너무 많다 보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도 저렇게 든든한 동족들이 있다면!

나만큼이나 작은 몬스터들이 다수로 무리지어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어슬렁거리는 늑대 드래곤 유생체들 몇 마리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사냥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내가 사냥할 수 있을 만한 몬스터를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사실에 조금 답답함을 느낀 나는, 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보기로 했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살피는 것이다!

적당한 나무를 찾은 뒤 발톱을 박아 넣고 잡기 스킬을 이용해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오오.

멀리까지 보인다!

역시 눈을 업그레이드하길 잘했어!

엇, 저건···

멀리 언덕 위에 거뭇거뭇한 형체들이 보였다.

천막인가?

그럼 그 인간들의 야영지일지도···

확인해 보자!

나는 목적지를 머리에 담아둔 뒤, 계속 주위를 경계하면서 멀리 떨어진 인간들의 야영지로 향했다.

근처에 저 인간들이 있을 때에는 어떤 몬스터와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혹시 정찰에 나선 인간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죽게 될 테니까 말이다.

마침내 나는 언덕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태까지보다 더욱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폐물에서 엄폐물로 이동하며, 다른 몬스터의 소리가 나거나 흔적이 보이면 무조건 피했다.

그렇게 반쯤 올라가자 언덕 꼭대기에 있는 인간 사냥꾼들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돌과 나무로 만든 임시 의자를 놓고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모닥불이나 화덕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걸까?

인간들의 주위로는 천막 세 개가 반원을 그리며 설치되어 있었다.

천막 사이로 커다란 배낭들과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던전에 흡수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몬스터의 잔해들이 보였다.

장대 두 개를 이용해서 쳐 놓은 줄에는 뭐가 잔뜩 걸려 있었는데, 처음에는 인간들의 옷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니 몬스터 가죽을 널어서 말리고 있었다.

이들은 여기서 몬스터를 사냥한 다음 코어와 부산물을 지상으로 가지고 나가는 게 분명했다.

나는 적당한 자리를 잡고 숨어서 인간들을 지켜봤다.

마침내 야영지의 위치를 찾아내자...

미친 아이디어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도둑

인내는 몬스터의 미덕이었다.

그건 내가 거의 이 세계에 태어나자 마자 배운 점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리자 인간들이 일어나서 장비를 챙기고, 다시 한 번 사냥에 나설 준비를 했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간들은 갑옷의 끈을 조절하고, 무기의 날을 확인하며 몸을 풀었다.

다음 순간 뭔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인간들이 모두 야영지 밖으로 나가 천막으로부터 10미터쯤 떨어진 위치에 섰다.

그리고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지팡이 주위에 룬 문자가 나타나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법사가 지팡이 끝으로 땅을 두드렸다.

그러자 야영지 주위의 몇몇 돌들이 잠깐 빛을 발했다.

알 수 없는 작업을 마친 인간들은 다시 몸을 돌려 야영지로부터 멀리 걸어갔다.

다시 호수 쪽을 향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인간들은 호수로 가서 모여 있는 몬스터들을 사냥한 뒤, 여기로 전리품을 가져와서 몬스터들이 다시 호수 주위에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는 아주 효율적인 사냥 방식 같았다.

인간들이 충분히 멀리 갔을 때쯤, 나는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와 야영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 동안 몬스터 코어를 잔뜩 모았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애써 모은 코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거 참 안타깝겠군.

구헤헤헤헤.

나는 마법사가 야영지를 떠나기 전에 시전했던 주문이 신경 쓰였다.

분명 내가 무턱대고 야영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경보를 울리거나, 그대로 녹여버리거나 아니면 그만큼 끔찍한 어떤 꼴을 당하게 만드는 마법일 터였다.

내가 그 경계를 무사히 통과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그 *아래로* 지나갈 수 있을 뿐.

보라!

레벨 5 땅파기의 위력을!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맹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호수에 가서 사냥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걸릴 터였다.

그 정도면 내가 작은 땅굴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땅파기 스킬이 발동하자 내 턱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커다란 흙덩이를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땅 밑을 통해 야영지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뭐든, 마법사가 걸어 놓은 주문을 무사히 통과해서 말이다.

음하하하하!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지체 없이 천막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코어를 찾았다.

이런저런 물건들과 함께 여러 개의 가방이 보였다.

그 중에는 식량이 든 가방도 있었지만 내가 찾는 물건은 아니었다.

나는 마치 성난 개처럼 턱으로 가방을 마구 물고 흔들었다.

뭐... 손이 없다 보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10분 정도 여러 가방을 흔들고 찢은 끝에 나는 겨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가방 하나에서 입구를 아주 단단히 묶어 놓은,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자루가 나온 것이다.

물론 내 턱을 당해낼 만큼 두꺼운 가죽은 아니었다.

턱으로 자루를 찢자, 안쪽에서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호환되는 몬스터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코어를 강화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나를 위해 애써 코어를 이렇게 많이 모아 놓다니···

수고했다, 인간들아!

자루 안에는 몬스터 코어가 스무 개도 넘게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코어들을 하나씩 차례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현재 진화 단계에서는 더 이상 몬스터 코어를 흡수할 수 없습니다.]

빌어먹을 시스템!

아직 열 일곱 개나 남았다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제 시간이 없었지만, 나는 눈 앞의 보물 더미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턱으로 최대한 많은 코어를 집었다.

내 턱은 크고 둔한데 코어들은 너무 작아서, 겨우 네 개밖에 집을 수 없었다.

피눈물이 날 만큼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후퇴다!

나는 마치 도둑놈처럼 보물을 들고 살금살금 천막을 나와서, 땅굴을 통과한 다음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곧장 숲 속으로 들어갔다.

유난히 커다란 나무 하나를 발견한 나는 땅 위로 드러나 있는 나무 뿌리 사이에 깊은 구멍을 팠다.

그런 다음 훔친 코어들을 구멍 안에 넣고 공들여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일단 진화부터 하고 나서 여기로 돌아와 나머지 코어들도 흡수할 계획이었다.

내가 웃을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웃다가 입이 찢어져 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후후후후.

...

이제 나는 진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레벨업을 해야 했다.

그래야 숨겨 놓은 몬스터 코어들을 이용해서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시간을 지체하면 인간들이 내가 모르는 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숨겨 놓은 코어들을 되찾거나, 혹은 다른 몬스터가 냄새를 맡고 가져갈지도 몰랐다.

나는 진화를 해야 했다.

당장!

그러려면 먼저 내가 사냥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마주친 몬스터들은 모두 내가 상대하기 어려운 놈들이었다.

여러 가지로 성장하기는 했지만, 아직 내 전투 능력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이오매스의 대부분을 투자한 시력은 전투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스킬들 중 대다수와 이제 MP가 20이 될 만큼 강화된 몬스터 코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몸 속에서 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는 몬스터 코어를 느낄 수 있었다.

크기 자체도 좀 더 커진 상태였다.

뭐랄까 마치 뱃속에 불타는 돌이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지만 당장 MP를 소모해서 뭔가 유용한 주문을 쓰지 못하는 이상, 몬스터 코어의 성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

아마 마나 조작 스킬을 레벨 5까지 올리고 난 뒤에야 뭔가 새로운 스킬을 구매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산성 용액과 턱으로 사냥을 성공해야 했다.

사실 미리 생각해 놓은 사냥감은 있었다.

어쩌면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듯한 상대였고, 아마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놈들은 결코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법이 없었다.

지네들···

호숫가에서 나는 발톱 지네들이 뭉쳐 있는 덩어리를 목격했다.

그 중 한두 마리가 따로 떨어져 있는 걸 찾는다면··· 어쩌면 세 마리까지는···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주위에 더 크게 진화한 지네들이 없는지 주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거대 지네와 마주치면 의심할 여지없이 죽음이었다.

결정을 내린 나는 크게 돌아서 호수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인간 사냥꾼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놈들이 야영지에 돌아갔을 때 어떤 얼굴일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흐흐흐.

나는 은신 상태로 호수, 정확히는 인간들이 몬스터들을 학살했던 기슭의 맞은편에 도착했다.

거대 악어가 아직도 엎드려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쪽이었다.

이 친구는 왜 이러는 걸까?

나가서 사냥을 하지 않아도 괜찮나?

어쩌면 내가 호숫가를 떠나 있는 동안 이미 사냥을 하고 왔을지도 모르기는 했다.

그래도 상당한 시간을 휴식을 취하며 보내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행히 이번에도 지네 한 무리가 보였다.

정말이지··· 나는 놈들이 서로 엉켜서 계속 꿈틀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다.

지네들은 서로의 몸으로 매듭이라도 지을 기세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거대한 악어 주위를 빙 돌아서 기슭으로 다가간 나는 호수의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마나를 가득 채운 채 지네들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지네들의 덩어리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모든 지네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지면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거의 놈들을 시야에서 놓칠 뻔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따라갔다.

이 놈들 정말 빠르잖아!

다행히 이제는 멀리서도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로 가까이 붙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몸을 드러내고 빠르게 달려서 지네 무리를 쫓아갔다.

이런 속도로 움직이면 근처의 적들로부터 몸을 숨길 수가 없다는 생각에 조금 불안했다.

저 빌어먹을 지네들은 떼로 뭉쳐 다니지만 나는 혼자니까 말이다.

다행히 지네들을 그리 오래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놈들의 목적지는 호수와 가까운 숲 속의 언덕이었다.

2미터 높이의 언덕 바깥쪽에는 몇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내가 쫓던 지네 무리는 거의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곧장 그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오호라.

놈들의 둥지를 발견한 것 같은데?

나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둥지 주위를 돌아보며, 특히 구멍을 주의 깊게 살폈다.

유독 큰 구멍이 없는 걸 보면 저 안에 거대 지네로 진화한 개체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나는 둥지와 숲을 동시에 경계하려고 노력했다.

사냥에 나갔던 지네들이 내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날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했다.

둥지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나는 언덕이 대략 5미터 지름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아마 지하로는 더 넓게 퍼져 있을 터였다.

이미 여덟 마리가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고, 둥지 안에는 아마 더 많은 지네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수많은 지네들이 뒤엉켜 있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정말 싫은 놈들이었다.

그러니 사냥해버릴 테다.

이제는 기다릴 차례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짜고짜 둥지로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소수의 무리가 호수로 향하거나 사냥에 나설 때를 노려야 했다.

수적으로 불리하다고 해도 2대1이나 3대1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인간의 지성이 있을 뿐더러 여러 차례 변이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둥지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은신 상태를 유지하면서 둥지의 모든 방향을 감시할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세 마리 안쪽의 지네들이 나타나면 곧바로 행동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좋아.

언제든지 나와라.

···

좀 나와, 이 멍청한 벌레들아!

몇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언덕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 많은 지네 놈들이 저 안에 처박혀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십 분을 더 기다리자 마침내 무슨 기척이 들렸다.

나는 잔뜩 기대했지만, 숲 쪽에서 여섯 마리의 지네 무리가 둥지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제기랄!

그 뒤에는 다섯 마리가 나와서 호수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일곱 마리가 사냥을 하러.

···

얼마 지나서 두 무리가 모두 둥지로 돌아왔다.

···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냐 이 지네 놈들아!?

대체 니들은 왜 그렇게 몰려다니는 거야?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때, 네 마리의 지네들이 언덕의 구멍에서 발톱을 딸각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리고 한 덩이로 뭉쳐서 숲 쪽으로 움직였다.

기회다!

여기 며칠이고 앉아서 완벽한 기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도무지 네 마리 이하로는 움직일 것 같지 않으니, 예상보다 불리한 상황이라고 해도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내려와 놈들을 쫓아갔다.

다행히 지네들은 호수에서 돌아올 때와 달리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으면서 사냥감을 물색하려는 것 같았다.

지네들이 둥지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둥지 안에서 지원군이 몰려나와 나를 포위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놈들이 사냥감을 발견하기 전에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적과 싸우느라 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둥지로 돌아가는 길에 덮쳐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보통은 기다리는 편이 더 낫겠지만···

지네들이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고 내가 상대할 수 없는 더 강한 몬스터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더 어려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저 네 마리의 지네들이 다른 몬스터와 마주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일단 결정을 내리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속도를 높여 놈들의 측면으로 나아갔다.

네 마리의 지네들은 내 왼쪽을 일렬로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놈들을 앞질러 갔다.

좋아, 이쯤이면 되겠군.

돌아서서 조준을 하고···

푸슝.

내 꽁무니에서 발사된 산성 용액이 세차게 공중을 가르고 날아갔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움직이는 목표를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스킬 레벨을 올린 덕분인지 가장 앞쪽의 지네를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선두의 지네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멈추더니 고통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를 따라오던 지네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사납게 발톱을 딸각거렸다.

푸슝.

두 번째로 발사한 산성 용액이 또다른 지네를 맞추자, 놈 역시 지글거리는 액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땅 위를 뒹굴었다.

두 마리의 지네를 무력화한 나는 몸을 돌린 뒤, 턱을 사납게 벌린 채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와 지네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덤벼라!

다윈을 위한 전투

두 마리의 멀쩡한 발톱 지네가 곧 내 도발을 눈치챘다.

갓 부화한 개미 한 마리가 혼자 있는 모습을 본 지네들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수많은 다리를 빠르게 놀리며 최대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내가 바란 대로였다.

나는 곧바로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멀리 달아나지는 않았다.

대신 미리 봐 둔 나무로 향한 다음, 발톱에 힘을 주고 위로 올라갔다.

두 마리의 화난 지네들은 내 뒤를 따라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집게 모양의 발톱이 내 뒤쪽 다리를 노리고 딸각거렸다.

멀리서는 내 산성 용액에 맞고 몸부림치던 다른 두 마리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지, 역시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내 바로 뒤에서 나무를 오르는 성난 몬스터를 시야에 담았다.

내 엉덩이 자태가 어때?

미안하지만 내 뒤태는 너무 '폭발적이라' 함부로 가까이 다가오면 큰일나거든?

푸슝!

지근 거리에서 쏜 산성 용액이 지네의 얼굴에 그대로 명중했다!

발톱 지네는 괴성을 지르며 나무에서 떨어지더니, 흙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이제 나무 위에는 한 마리의 지네만 남았다.

1대1의 대결이었다.

개미 대···

역겨운 벌레 놈의 싸움이다.

나무 위는 나에게 조금 유리한 환경이었다.

지네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인 꼬리 독침을 사용하기가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

놈이 독침을 머리 위로 날리기 위해 다리의 절반 이상을 놓고도 수직에 가까운 나무 표면에 계속 매달릴 수 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아닐 터였다.

그럼 이건 사실상 집게 발톱 vs 턱의 대결이었다.

마지막 지네는 계속 내 쪽으로 올라오며, 나를 향해 발톱을 찌르고 위협적으로 딸각거렸다.

평범한 지네보다 집게 발톱이 좀 더 큰 걸로 볼 때 아마 변이를 거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몸을 돌려 놈과 당당히 맞섰다.

잠시 나와 지네는 서로를 견제하며 기 싸움을 벌였다.

한 쪽이 전진하면 다른 쪽은 뒤로 물러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놈에게 다가가던 내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적은 내가 살짝 비틀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놈의 눈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승리감 그리고 타오르는 분노를 말이다.

지네는 치명타를 가할 의도로, 이빨과 발톱을 앞세워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은 텅 빈 허공을 때렸을 뿐이다.

하핫!

완전히 속았군!

내 연기 스킬은 레벨 9000이다, 멍청한 지네 놈아!

나는 지네가 공격했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잡기 스킬과 강화된 다리가 이 전장을 완벽한 내 편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공격이 빗나간 지네는 균형을 잃었고, 나는 턱을 크게 벌린 채 놈에게 달려들었다.

분노의 물기를 받아라아아아아!

다시 한 번 내 턱이 빛나더니 엄청난 힘으로 다물렸다.

깨물기 스킬이 지네의 갑각을 과자처럼 부쉈다.

내 턱은 놈의 머리를 완전히 짓이겨 버렸다.

목숨을 잃은 지네가 그대로 나무에서 떨어졌다.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이제 한 마리.

다행히 나머지 부상을 당한 사냥감들은 내 위용에 겁을 먹고 물러나는 대신 계속 공격을 시도했다.

놈들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아직 3대1의 싸움이고, 상대는 작은 개미 한 마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발톱 지네들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위험한데!

나는 재빨리 근처의 가지 위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위를 당해서는 안 된다!

가지가 충분히 굵지 않아서 단단히 잡기가 어려웠다.

겨우 매달려 있는 게 고작이었다.

다행히 적들 중 한 마리만 나를 따라 가지로 이동했다.

나머지는 나무의 몸통 부분을 휘감은 채 나를 향해 쉿쉿거릴 뿐이었다.

우지끈.

이런 젠장···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소리와 나와 지네가 모두 동작을 멈췄다.

그래도 내 쪽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죽어라, 지네!

나는 또다시 턱을 크게 벌렸다가 지네의 머리를 물었지만, 이번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뚝.

가지가 완전히 부러졌고, 나는 괴물 지네의 대가리를 입에 문 채 자유 낙하를 시작했다.

떨어지는 동안, 나는 몸을 틀며 지네를 나보다 아래쪽으로 가게 했다.

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면과 충돌했다.

으아!

아무래도 어디가 부러진 것 같은데···

나는 옆구리를 땅에 세게 부딪혔지만, 다행히 다리는 모두 보호할 수 있었다.

얼른 일어서!

멍하게 있을 여유가 없어!

겨우 추락으로 인한 충격을 털어내며 다리를 폈다.

발 밑에 함께 추락한 지네의 몸뚱이가 느껴졌다.

충격을 줄이지 못하고 땅에 부딪힌 지네의 다리 몇 개가 부서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을 턱으로 물어 마무리했다.

[레벨 2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이제 두 마리 남았다.

남아 있는 적들은 이제 전보다 확신이 덜해 보였다.

하지만 놈들에게는 나와 싸우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려면 어차피 나무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지네들의 움직임을 보니 나를 협공할 생각 같았다.

하지만 뾰족한 대처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두 마리의 지네들은 조심스럽게 나무를 내려오며,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수 있도록 집게 발톱을 높이 쳐들었다.

반면 나는 가만히 서서 놈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두 마리의 지네가 거의 동시에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줄행랑!

내가 재빨리 도망치는 모습을 본 지네들은 한 순간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사냥 충동에 사로잡혀 전속력으로 나를 쫓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들.

푸슝!

지네들이 내 꽁무니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더 앞에 있는 놈을 향해 또 한 발의 산성 용액을 발사해서 따끔한 맛을 보여줬다.

하하!

그 사이 산성 용액을 재충전했을 줄은 몰랐지?

같은 속임수에 두 번이나 속다니 정말 어리석군!

불쌍한 지네가 두 발 째의 +4 산성 용액을 맞고 괴로워하는 사이, 또다른 놈이 내게 다가왔다.

또다시 1대1의 대결 구도를 만든 것이다.

다른 적이 회복해서 끼어들기 전에 빨리 싸움을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싸움을 오래 끌면 적들에게 무시무시한 독침을 사용할 기회를 줄지도 몰랐다.

독침은 놈들이 가진 무기 중 한 방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네가 이빨과 발톱으로 나를 위협하고, 속임수 동작을 취하기도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놈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간다아아아!

깜짝 놀란 지네는 빠르게 반응해서, 한 쪽 집게로 내 다리 하나를 붙잡고 다른 쪽 발톱으로는 얼굴을 할퀴어서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나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보다 크고 강력해진 턱으로 다시 한 번 단단히 물기 스킬을 사용해서 적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깨물기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지네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발톱으로 내게 상처를 입혔지만 충분치 않았다.

단단히 물기!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지네는 내 산성 용액을 두 차례나 정통으로 맞은 탓에 이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턱으로 놈을 몇 차례 물어서 빠르게 끝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달콤한 소식이 찾아왔다.

[레벨 2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4가 되었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해냈다.

승리다!

나는 눈에 거슬리던 적들을 해치웠다.

4대 1로 싸우고도 지다니, 한심한 벌레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

나는 다친 다리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신나게 승리의 춤을 췄다.

HP를 확인해 보니 20으루 줄었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죽인 지네들의 바이오매스를 섭취하면 거의 완전히 회복될 테니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역겨운 놈들이긴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바이오매스 네 개를 얻고 배가 너무 불러서 잠시 숨을 돌리는데,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중급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발톱 지네]

드디어 이 놈들을 충분히 많이 먹어서 중급 정보가 열린 건가?

뭐, 그건 조금 있다가 확인해 보자.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성공적으로 레벨 4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레벨을 하나만 더 올리면 마침내 진화를 할 수 있다!

고지가 바로 눈 앞인 셈이다.

그러니 계획을 세워야 했다.

나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간 뒤,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기고 다음 행보를 고민했다.

지네들을 먹고 부풀어 오른 배 때문에 나무를 오르기가 어려웠지만 어찌어찌 해낼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제일 먼저 결정해야 할 건 스킬 포인트의 분배다.

5레벨에 이른 땅파기를 즉시 상위 스킬로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고, 혹은 마나 조작을 레벨 5로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법 관련 스킬이 나오면 구매할 수도 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땅파기를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대저 개미에게 있어 그 어떤 능력이 땅파기보다 우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땅파기 -> 굴착. 비용 1 SP: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양의 물질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합니다.]

구매!

스킬 포인트를 레벨업을 할 때마다 얻을 수 있다.

어차피 한 번 더 레벨업을 하기 전에 마나 조작 스킬이 레벨 5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레벨업을 위해 계속 지네들을 사냥해야 하니까 말이다.

일단 진화를 하고 나면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둥지로 이어진 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숨겨 놓은 몬스터 코어들도 흡수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럼 이제 바이오매스를 사용할 차례인데···

네 개는 너무 애매한 숫자다.

하나만 더 있으면 산성 용액을 +5로 만들 수 있는데!

하지만 지금 네 개를 전부 사용하면 턱을 +4로 올릴 수 있고···

아으!

결국 나는 당장 턱을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번 싸움이 내 예상처럼 아주 일방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사냥에 나서기 전에 전투력을 좀 더 높이고 싶었다.

[턱을 +4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4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좋아, 진행해!

그리고 즉시 얼굴에 불이 붙은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매번 하는 생각이지만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

변이가 끝나자 턱이 조금 더 커지면서 보다 무시무시한 모양으로 변했다.

내 턱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다.

+5가 되면 또 어떤 변화가 생길까?

기다리기 힘들었다.

바이오매스와 스킬포인트를 모두 쓰고 나자, 다시 사냥에 나설 준비가 거의 끝났다.

이제 커다란 자루를 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지 않도록 소화가 다 되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배가 꺼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마나 조작 스킬을 몇 차례 더 연습한 뒤 두통과 비슷한 느낌에 숨을 헐떡였다.

마나를 움직이는 일이 조금 쉬워진 것 같기도 했지만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주위의 무성한 나뭇잎이 내 모습을 꽤 잘 숨겨주고 있어서, 다시 싸울 만한 상태로 돌아오기 위해 짧은 낮잠을 자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 깨어난 나는 2라운드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네 둥지 근처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언덕을 감시했다.

이렇게 계속 나무를 타다가 베짜기개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짜기개미는 주로 나무 위에 살면서, 잎사귀를 접고 붙여서 둥지를 만드는 개미였다.

···뭐, 난 땅을 파는 편이 더 좋았다.

어쨌든 지금은 다시 한 번 기다려야 했다.

지네들은 그리 자주 드나들지 않았고, 네 마리의 동족들이 사라진 사실 때문에 무슨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사냥을 나섰던 무리가 다른 몬스터에게 당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몇몇 무리가 둥지를 떠나거나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무리보다 수가 적은, 네 마리의 무리가 언덕의 구멍에서 나와 호수 쪽을 향했다.

좋아!

마나 한 잔들 하러 가는 길인가, 응?

부디 다들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 좋겠군.

그게 너희들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네 마리의 지네들이 한참 멀어진 다음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지난 번과 달리 느긋하게 따라갈 수 있었는데, 놈들의 목적지가 호수인 이상 거기서 다른 몬스터에게 사냥을 당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근처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네들이 호수에서 돌아오는 길에 습격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지네들이 지나간 길목이 잘 내려다보이는 나무를 찾아서 올라갔다.

놈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미리 발견하고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기다리는 동안 발톱 지네들의 중급 정보를 한 번 들여다보기로 했다.

혹시 뭔가 유용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

발톱 지네, 강력한 발톱을 가졌고 꼬리에는 독침이 달렸다.

힘: 11

강인함: 14

영리함: 8

의지: 7

=====

흠···

이게 지네들의 기본 능력치인가?

힘과 강인함은 나와 비슷한 정도지만 영리함과 의지는 차이가 컸다.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모든 갓 부화한 개미들의 영리함이 25일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내 높은 영리함 수치는 인간의 지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내 진짜 무기였다.

추론하고, 계획을 세우고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한참 전에 죽었을 테니까.

게다가 극도로 멍청한 다른 몬스터들을 쉽게 이용할 수도 있었다.

한 시간쯤 뒤, 내 인내심이 마침내 보답을 받았다.

네 마리의 지네들이 한 줄로 서서 돌아오고 있었다.

아, 다음 손님?

어서 오세요!

밥 먹을 때는 개미도...

*회차 통합으로 앞부분에 기존 연재된 분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푸슝!

나무 위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스킬로 조준 보너스까지 받는 내가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길다란 지네를 맞추지 못할 리는 없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산성 용액이 정확히 목표물의 등에 안착했다.

완벽하게 명중이었다.

놈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자, 주위의 친구들이 즉시 화를 내며 상체를 치켜들고 사납게 몸을 흔들었다.

푸슝!

이번에도 명중이다!

또 한 마리의 지네가 내 강력한 산성 용액에 살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며 바닥을 뒹굴었다.

연달아 두 발을 쏘자, 나머지 두 마리의 멀쩡한 지네들이 내 위치를 눈치챘다.

나는 놈들을 향해 턱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더듬이를 흔들며 도발했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멍청한 벌레 놈들은 내 도발에 완전히 걸려서 건방진 개미를 잡기 위해 돌진했다.

놈들은 나무 둥치에 닿자 마자 수많은 다리를 이용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세 번째로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또 한 마리의 지네가 내 산성 용액의 세례를 받았다!

그 불쌍한 벌레는 몸부림치며 나무에서 떨어졌다.

지금까지는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나무를 오르는 지네는 한 마리였다.

나는 지난 번과 똑같이 연기력을 발휘해 발이 미끄러진 척 놈을 속였다.

그리고 상대가 완전히 속아넘어간 틈을 타서 턱으로 놈의 머리를 물었다!

비록 단번에 적의 숨통을 끊지는 못했지만, 지네의 부서진 갑각과 찌그러진 머리통이 내 턱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지네가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자, 놈의 발톱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단단히 물기를 사용했다!

[레벨 1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한 놈은 처치했고, 이제 세 마리 남았다.

나는 세 마리의 지네들이 나무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재빨리 상태창을 확인했다.

HP는 고작 1이 줄어든 상태였다.

좋았어!

세 마리의 지네들이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지난 번과 달리 가지로 이동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포위를 당할 수는 없으므로···

다른 종류의 위험을 감수했다.

지네 한 마리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그대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지네들은 내 행동에 충분히 빠르게 행동하지 못했고, 그래서 내가 놈들 중 한 마리를 단단히 물기로 붙들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지네와 나는 거칠게 몸싸움을 벌이며 서로를 물다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면에 부딪혔다.

지네의 독침에 찔리지 않기 위해, 나는 그대로 몸을 굴려 재빨리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자세를 잡지 못한 적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서 턱을 벌렸다.

단단히 물기!

나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턱으로 있는 힘껏 지네를 물었다.

[단단히 물기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레벨 4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이제 두 마리 남았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두 마리의 지네는 동시에 나무를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 안에는 더 이상 발사할 산성 용액이 남아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육탄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지네들은 땅에 닿자 마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양쪽에서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두 놈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이제야 겹눈의 장점이 드러나는군!

주도권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즉시 몸을 돌려 왼쪽의 지네를 향해 돌진했다.

지네는 발톱과 이빨로 나를 위협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멈췄다.

그리고 몸을 돌려 다른 놈에게 돌진했다!

뒤쪽에 있던 지네가 놀라서 동작을 멈췄다.

놈은 내가 제 친구를 향해 달려드는 걸 보고, 꼬리를 들어올려 독침을 겨누던 중이었다.

내가 다른 놈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찌르려고 했을 테지만···

그렇게 쉽게 당해줄 수는 없지!

지네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대로 꼬리를 내밀었다.

날카로운 독침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나는 독침의 움직임을 예측해서, 지면에 발톱을 박아 넣고 왼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독침이 내 왼쪽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지네가 균형을 되찾고 꼬리를 거두기 전에, 나는 몸을 돌려 독침의 바로 앞 부분을 있는 힘껏 물었다.

내 턱 아래에서 갑각이 산산이 부서지자, 지네가 분노로 쉿쉿거렸다.

이제 놈의 꼬리는 무용지물이었다.

다른 한 마리가 뒤쪽에서 접근하는 모습이 겹눈의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앞쪽의 부상당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이 사납게 발톱을 휘두르자 내 몸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떨쳐내며 또 한 차례 놈을 물어서 결정타를 먹였다.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이제 1대1이다.

상처 때문에 통증이 심했지만, 나는 턱을 악물고 마지막 지네를 향해 돌진했다.

놈이 독침을 날릴 여유를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빠르게 상태창을 확인하니, HP가 절반 가량 남아 있었다.

그 정도면 이 싸움을 끝내기 충분하지!

속임수는 없었다.

지네와 나는 서로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턱과 턱이 부딪히고, 발톱이 서로의 갑각을 할퀴었다.

하지만 적은 여태까지 쌓인 내 변이와 스킬을 당해내지 못했다.

[레벨 2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이겼다!

이 싸움으로 레벨 5가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네 개의 바이오매스를 확보했다.

치열한 전투였다.

내 HP가 10까지 떨어졌으니 말이다.

갑각 여기저기 움푹 파이거나 금이 간 자국이 나 있었다.

1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다.

먹자!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우걱우걱.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잠깐, 저게 무슨 소리지?

...

어쩌면 지네들이 둥지와 호수를 오가는 길목에서 싸움을 벌이고 곧바로 식사까지 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자, 멀리 숲 속에서 다섯 마리의 지네들이 한 줄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호수로 가는 중인 것 같았다.

놈들은 입 안에 죽은 지네의 살점을 가득 물고 있는 나를 보자, 걸음을 잠시 멈추지도 않고 곧장 돌진해 왔다.

이봐!

진정해 친구들!

최소한 해명할 기회는 줘야지!

그러니까 내가 왜···

너희 동족을 죽여서 먹고 있는가 하면···

제길 도망치자!

나는 돌아서서 빠르게 산성 용액을 발사해 가장 앞에 있는 지네의 흉측한 면상을 맞춘 뒤, 숲 속을 향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HP가 절반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다섯 마리나 되는 지네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호수 쪽으로 달아나면 평화 협정 때문에 놈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부상을 입은 상태로는 그 전에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싸워서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정면 대결은 절대 무리였다.

나는 숲을 통과해 달리면서, 뭔가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둥치가 굵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잽싸게 둥치 뒤로 돌아서 일단 적들의 시선을 피한 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나무를 올랐다.

어서어서어서!

개미 다리야 날 살려라!

오래지 않아 다섯 마리의 지네들도 나무에 도착했다.

산성 용액에 맞았던 놈은 조금 뒤쳐져 있었다.

지네들은 즉시 나를 쫓아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올라가서, 지면 근처의 가장 굵고 두꺼운 가지로 이동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적들의 행동을 살폈다.

지네들은 내가 있는 나뭇가지 쪽으로 다가왔다.

한 마리는 가지 위쪽으로, 또 한 마리는 아래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가지에서 뛰어내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착지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고 지네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놈들은 나를 따라 뛰어내리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다음 다시 나무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네들 중 지면에서 가장 가까운 놈은 처음 내 산성 용액에 맞는 바람에 동료들보다 한참 뒤쳐진 녀석이었다.

나는 나무 밑둥으로 달려가서, 놈의 머리가 가까워지자 마자 턱으로 물었다!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한 마리 해치웠다.

이제 다시 도망치자!

나머지 놈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동안 나는 숲 속으로 달아났다.

추적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계속 수풀 사이나 나무 뒤를 통과했다.

그리고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자리를 보자 마자 그 안으로 뛰어들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는 고급 은신 스킬이 위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지네들이 나타났지만,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네 마리의 지네들은 더듬이로 지면을 살피고 집게 발톱을 사납게 딸각거리며 내 옆을 지나쳤다.

그 중 한 마리가 5미터 거리까지 접근했지만, 나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기는커녕 숨도 쉴 수 없었다.

들키면 갈갈이 찢길 테니까!

지네들아 제발···

계속 멍청해라!

나를 찾지 못하자, 지네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수색을 시작했다.

한 마리는 내 왼쪽으로 또 한 마리는 내 오른쪽으로 멀어졌다.

나무로 다시 돌아가는 놈도 있었다.

이제 한 마리만 근처에 남아서, 내 냄새나 다른 어떤 자취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1대1 싸움이라면 이 지네들은 더 이상 내가 두려워할 필요 없는 상대였다.

지네는 여전히 나를 찾아서 이 방향 저 방향을 수색하고 있었다.

놈이 등을 보였을 때, 나는 숨어 있던 수풀 속에서 조용히 기어 나왔다.

그런 다음 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더 가까이.

그리고 공격!

나는 앞으로 뛰어들며 지네의 꼬리를 힘껏 물었다!

이 빌어먹을 독침부터 못 쓰게 만들어 주마!

지네의 반응은 느렸고, 나는 꼬리 부분을 재차 물어서 갑각을 깨뜨리고 독침을 못 쓰게 만들었다.

[깨물기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네의 꼬리를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놈의 발톱을 피하며 머리 뒤쪽을 물어서 마무리했다.

[레벨 1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아직 레벨 5가 아니야?!

아으!

그래도 다섯 마리의 적을 셋까지 줄였다!

나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방금 쓰러뜨린 지네의 시체를 먹기 시작했다.

바이오매스도 바이오매스지만 지금은 거의 바닥난 HP를 보충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다행히 식사를 마칠 때까지 다른 지네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1 바이오매스를 얻어습니다.]

재빨리 확인해 보니 HP가 16까지 올라 있었다.

아까보다는 낫군!

지네들이 흩어져서 한꺼번에 다수를 상대할 필요가 없어지자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가능하면 놈들을 모두 처치하고 5레벨이 된 다음 진화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체를 먹는 동안 산성 용액이 어쩌면 두 발까지 가능할 정도로 보충되었다.

이제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다.

감히 나를 사냥하려 들어?

어리석은 지네 놈들···

너희가 내 사냥감이 될 거다!

나는 속으로 사악하게 웃으며 원래 숨어 있던 장소의 왼쪽을 돌아봤다.

그러자 성과 없는 수색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네의 모습이 보였다.

날 찾고 있나, 친구?

여기서 쭉 기다리고 있었는데!

놈은 나를 보자 마자 쉭쉭거리며, 사납게 발톱을 딸각였다.

그리고 곧바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내 엉덩이를 향해서.

푸슝.

산성 용액이 놈의 얼굴에 명중했다!

지네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달려들어 턱으로 마무리 공격을 가했다.

[레벨 4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아직 머리 속에 울리는 가운데,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했다.

방금 뭔가를 본 것 같-

이런 제길!

나는 아주 개미답지 않은 동작으로 몸을 날려 옆구르기를 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독침이 바람을 가르며, 내가 조금 전까지 있던 자리에 날아들었다.

방금 죽인 지네와 뒤엉켜 싸우는 동안, 한 마리가 더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습 공격이 실패한 이상 놈에게 승산은 없었다.

다시 일어선 나는 지네가 독침을 다시 휘두를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달려들었다.

내 턱이 더 크다는 점을 믿고 곧바로 머리를 노려서, 두 차례 물기로 끝장냈다.

[레벨 2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5가 되었습니다.]

[레벨 상한에 도달해, 진화 메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예!

드디어!

나는 다시 한 번 개미로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기쁨의 춤을 췄다.

말해두지만 다리가 여섯 개나 되다 보니, 생각보다 꽤 볼만한 동작들이 가능하다.

일단 진정하자.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축하는 안전한 장소를 확보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주위를 둘러봐도 마지막 지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원을 낭비하기 싫었던 나는 방금 쓰러뜨린 지네의 시체를 먹었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이제 내가 가진 바이오매스는 네 개였다.

하나만 더 있으면 산성 용액을 +5로 만들 수 있었다.

나는 혹시 처음 죽인 지네의 시체가 아직 남아 있을까 싶어서 내가 뛰어내렸던 나무로 돌아갔다.

은신 상태로 숲 속을 지나 커다란 나무에 도착할 때까지, 마지막 지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죽인 지네의 시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운이 좋군!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정말이지 다시는 이 역겨운 벌레들을 먹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행복한 개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징그러운 적들로 배를 가득 채우자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나머지 두 개의 시체를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배가 가득 찼기 때문이다.

마지막 지네는 아무래도 도망친 것 같았다.

운 좋은 녀석 같으니!

나는 호수로 돌아가서 거대한 악어 괴물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은신처를 찾았다.

진화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간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를 이루니 기분이 정말 끝내줬다.

예전 은신처를 발견한 나는 입구를 넓히고 안쪽의 공간을 조금 더 확장했다.

진화를 하고 나면 덩치가 커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보처럼 은신처 안에 끼어서 죽는 사태는 피하고 싶었다.

작업을 마친 나는 땅 속으로 들어가서 입구를 막았다.

이제 큰 변화를 맞이할 시간이다.

드디어! 진화!

마침내!

마침내 진화를 할 수 있다!

정말이지 감개가 무량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침내 해냈다!

눈물이···

훌쩍.

···

좋아, 그럼!

나는 진화에 앞서, 확보한 바이오매스로 산성 용액부터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산성 용액을 +5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5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그래!

[이 레벨에서는 메뉴에서 고급 변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역시!

기다렸다!

곧 머리 속에 가능한 고급 변이들의 긴 목록이 떠올랐다.

그런데···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화염 산성?

농축 산성?

빙결 산성?

충격 산성?

이름만 놓고 보면 모두 근사했다.

하지만 변이의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니,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선택지들은 내 산성 용액에 화염이나 빙결과 같은 원소 속성을 부여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멋지기는 하지만···

내가 그런 방향성을 원하는지 좀처럼 확신이 들지 않았다.

속성 피해가 더해지는 만큼 강력하기는 하겠지만···

특정한 속성에 저항력을 가진 적을 상대로 싸울 때에는 그만큼 효과에 손해를 보는 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미 늑대 드래곤 유생체들이 열기 피해에 저항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놈들의 기초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화염 산성 용액으로 고급 변이를 한다면, 놈들을 상대로는 전투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언젠가는 아예 산성 자체에 저항력을 가진 몬스터와 마주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산성 용액을 주무기로 쓰는 만큼, 나는 이미 한 가지 약점을 가진 셈이다.

그 약점을 굳이 두 배로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금 망설이면서도 화염이나 빙결처럼 근사한 이름이 붙어 있는 선택지들을 모두 제외하고, 나머지로 눈을 돌렸다.

산성 용액을 발사할 때 공기 역학을 통해 사정거리를 크게 늘리는 선택지도 있었다.

흠···

그다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의 사정거리도 상당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또다른 선택지는 산성 용액이 더 오래 타오르게 만들었다.

즉 산성 용액이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지속 시간을 늘려주는 변이였다.

하지만 더 많은 피해를 입히기 위해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셈이니···

긴박한 상황에서 그렇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호!

흥미로워 보이는 게 하나 있군!

[구속 산성: 이 업그레이드는 산성 용액의 점성을 높여서 발사 후 굳어지게 만듭니다. 산성 용액이 적에게 달라붙어 움직임을 구속합니다.]

이건···

마음에 드는데!

산성 용액이 적에게 달라붙기만 해도 전체적으로 입히는 피해가 늘어날 터였다.

거기다 굳어져서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기까지 하다니···

커다란 적에게 세 차례 발사하면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작은 적들에게는 군중 제어 능력처럼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걸로 하겠어!

···

오 맙소사.

잊고 있었지만···

+5 변이는 그야말로 수준이 달랐다.

'간지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확장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난 견딜 수 있어!

···아마도!

으아앍!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복부 깊은 곳에서 느껴지던 끔찍한 느낌이 사라졌다.

휴···

좋아.

이제야 본론이로군.

진화를 할 차례였다!

[진화 메뉴를 사용하겠습니까?]

당연하지!

[현재 종의 레벨 한계에 도달한 걸 축하합니다. 진화는 몬스터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능력치를 증가시킵니다.

경고: 진화를 선택하면 앞으로 덜 진화된 생물을 섭취했을 때 얻는 경험치와 바이오매스의 양이 줄어듭니다.

다음과 같은 선택이 가능합니다:

- 성체 일개미로 진화 (포르미카)

- 몬스터 일개미로 진화]

흠···

새로운 선택지가 나타났네?

어째서지?

코어의 용량을 늘려서 새로운 진화가 선택 가능해진 건가?

그럼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는 지금 내 종족인 포르미카를 유지한 채로 성체가 되는 거고···

몬스터 일개미는 뭐야?

포르미카도 몬스터 개미 종족 아닌가?

···

그렇군.

특정한 종족명을 떼고 그냥 몬스터 일개미가 되는 거야.

진화를 통해 종족이 없어지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걸 선택해서 더 이상 포르미카가 아니게 되면, 아마 둥지로 돌아가도 다른 개미들이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곧 앞으로도 이 던전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할 뿐 아니라, 원래는 동족이었던 개미들까지 나를 적으로 여기고 사냥하려 든다는 의미였다.

너무 가혹하잖아!

그런 삶은 너무 가혹하다고, 시스템!

난 이미 마주치는 모든 존재를 경계하고 싸워야 하는 삶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날 잡아먹으려 들지 않는 동족과 만나기만 고대하는 중이었다.

아니, 지금 종족을 벗어나지 않겠어.

난 포르미카로 남아서 동족들과 만날 거야!

성체 일개미(포르미카)를 선택한다!

[몬스터 코어가 형성되고 확장되어 있습니다. 코어가 진화에 보너스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아하!

내가 코어를 만들고 업그레이드한 덕분에 진화를 할 때 능력치가 더 많이 성장하는 건가?

그럼 진화에 앞서 코어 압축부터 선택했던 내 결정이 옳았군!

[높은 영리함 수치로 인해 수동 진화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수동 진화를 하겠습니까?]

어···

그래?

갑자기 머리 속에 정보가 밀물처럼 넘쳐나며, 진화 단계를 표시하는 커다란 창과 능력치 분배 화면이 떠올랐다.

와우.

···왜 이렇게 선택지가 많은 거야!

이미 산성 용액 업그레이드 때문에 지쳤다고!

뭐···

그래도 모든 걸 수동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진화의 방향성을 좀 더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결국 좋은 일이겠지.

어디 한 번 보자···

그러니까 이 선택지들을 통해 코어로 증폭된 진화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 결과로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수동 진화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마 시스템이 알아서 모든 선택을 대신했겠지?

영리함 수치가 충분히 높지 못한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그런 식으로 진화할 터였다.

좋아, 일단 진화를 하면 새로운 기관인 페로몬 분비샘을 얻게 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럼 내가 전에 발견한 것과 같은 자취를 직접 남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였다.

잘됐다!

둥지로 돌아가게 되면 꼭 필요한 능력 같으니까.

이걸로 내가 발견한 식량의 위치나, 다른 여러 가지 정보를 동료들과 공유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하나의 기관을 추가로 선택할 수 있는데···

음, 새로운 신체 부위를 선택하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하군.

일단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 먼저 볼까.

···

농담이겠지.

목록의 길이가 그야말로 어마무시했다.

선택할 수 있는 기관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대체 몇 가지인지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추가 다리, 추가 눈부터 두 번째 턱, 날개, 보호색을 띠는 피부, 악취 분비샘 등등···

심지어 산호 민달팽이와 같은 점액질 피부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건··· 꼬리인가?

대체 개미한테 꼬리를 달아서 어쩌자는 건데?!

선택지들을 보니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다양한 신체 부위를 섞어서, 정말 기괴하고 악취미에 가까운 모습의 괴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개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로 하자···

선택지 중에는 외부 기관 말고도 수많은 내부 장기와 분비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대체 용도가 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이름이었다.

물론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선택지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드레날린 급속 자극 기관이라···

이건 분명 일종의 광전사 상태를 만들어 주는 용도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위험 부담이 높은 기관이라는 점도 말이다.

나는 십 분 정도를 소비해서 목록 전체를 확인한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선택지를 골랐다.

[재생 치유 분비선: 체내에서 순간적으로 대량의 치유 액체를 분비해, 짧은 시간 동안 빠른 재생을 가능하게 합니다.]

빠른 재생이라.

이 기관이 있으면 다른 몬스터와 서로 공격을 주고받으며 싸울 때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보험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까 부상을 당한 상태로 다섯 마리의 지네들과 마주쳤을 때, 이 분비선이 있었다면 HP를 조금이나마 회복해서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내가 이 분비선을 +5까지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대량의 HP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어 효율이 더욱 높아지겠지.

그리고 눈의 경우처럼, 유용한 추가 옵션이 생길지도 몰랐다.

나는 재생 치유 분비선을 선택한 뒤 능력치를 확인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능력치는···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이었다.

나는 먼저 힘을 확인했다.

힘 능력치를 높일 때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했다.

먼저 전체적인 근육의 양을 늘릴 수도 있는데, 그러면 내 덩치도 함께 커졌다.

혹은 근육의 밀도를 높이는 방식도 가능했다.

후자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대신 몸의 크기를 거의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다음은 강인함이었다.

강인함 역시 외골격의 강도를 높이거나, 내부의 저항력을 높이는 선택이 존재했다.

그리고 영리함은···

이런.

내 영리함 수치가 이미 높기 때문인지, 더 올리려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영리함 관련 선택지를 확인해 보니···

처리 속도를 높이거나 뇌 물질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고?

뭔가 소름 끼치는데···?

심지어 뇌를 하나 더 가질 수도 있어?

음···

자세히 알아보니 특정한 기능을 맡아서 수행하는 작고 독립적인 뇌를 추가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몇몇 동물들, 예를 들어 문어와 같은 경우 그런 식으로 각각의 다리를 움직이는 별개의 뇌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꽁무니에 별도의 뇌를 달아서 나 대신 산성 용액을 조준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자동 조준 기능이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영리함 능력치와 관련된 뭔가를 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러니 일단 지금으로서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의지를 높이면 마나 조작이나 마나 재생의 효율이 증가하는데···

내 의지 역시 꽤 높은 편이라 당장은 올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모든 진화 능력치를 힘과 강인함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각 능력치의 선택지는 5대5로 조율하기로 했다.

만약 힘 능력치로 근육량만 늘린다면, 덩치가 너무 커져서 은신이나 정찰이 그만큼 어려워질 터였다.

그렇다고 밀도만 높이려니 가성비가 너무 나빴다.

그래서 근육량과 밀도를 균형 있게 올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강인함 역시 외부적인 단단함과 내부적인 저항을 고르게 올리기로 했다.

흠···

잘한 선택이겠지···?

그렇게 능력치 분배까지 마치자 수동 진화 과정이 모두 끝났다.

어··· 이걸로 된 건가?

[선택지를 확정하고 진화하겠습니까?]

그래.

드디어!

진화!

다음 순간 내 시야가 온통 어두워졌다.

체키라웃

몬스터는 진화할 때 꿈을 꾸는가?

나는 원래 신체 구조상 잠을 자기는커녕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진화 도중에는···

시간의 흐름은 물론이고 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모든 선택지를 확정하고 나서···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내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마치 뇌가 완전히 꺼진 듯한 기분이었다.

···

그리고 다시 켜졌다.

후아!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느낌이···

다르다.

음···

이상한 기분이다.

몸 속에서 코어가 점점 식어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조금 전까지 불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꼭···

인간으로 살다가 처음 개미의 몸에 들어왔을 때.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본능적으로 내 몸이 전보다 훨씬 커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우선 능력치부터 확인해 보자!

=====

레벨: 1 (코어)

힘: 31

강인함: 22

영리함: 25

의지: 18

HP: 50/50

MP: 0/20

스킬: 굴착 레벨 1;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레벨 3; 잡기 레벨 4; 단단히 물기 레벨 2; 고급 은신 레벨 3; 깨물기 레벨 3; 터널 센스 레벨 4; 마나 조작 레벨 3

변이: 초점 겹눈 +5, 더듬이 +2, 구속 산성 용액 +5, 다리 +1, 턱 +4, 갑각 +1, 재생 분비선, 페로몬 분비선

종족: 성체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포인트:1

바이오매스:0

=====

흐음.

흐으으으음.

후후후···

하하하···

후하하하하하하하!!

보라!

내 힘을 보라!

나는 진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힘은 거의 두 배가 되었고 강인함도 상당히 증가했다.

이 세계의 몬스터에게 진화는 정말 중요한 일이 분명했다.

단 한 차례의 진화만으로도 능력치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물론 코어부터 형성하기로 했던 현명한 결정과, 인간들의 야영지를 털어서 진화 전에 코어를 최대로 강화할 수 있었던 행운 덕분이기도 했다.

성장한 코어가 제공한 보너스 에너지는 상당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화를 통해 이 정도로 강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 번에도 진화 전에 코어부터 한계까지 강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아직 내 변한 모습도 보지 않았는데 벌써 다음 번 진화를 생각하고 있군.

일단 밖으로 나가자!

나는 신이 나서 이제는 훨씬 더 좁게 느껴지는 은신처를 나와 다시 숲으로 향했다.

오호···

밖에 나와 다른 사물과 비교하자 내 크기 변화를 가늠할 수 있었다.

키가 전보다 적어도 두 배는 커진 것 같은데?

몸길이도 두 배 정도 늘어난 것 같고···

그럼 이제 높이 60센티미터에 몸길이 2미터 정도인 셈인가?

맙소사!

지구에 이만한 크기의 개미가 출현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거다!

단순히 크기만 커진 게 아니었다.

턱은 전보다 훨씬 더 커졌을 뿐 아니라,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아마 적의 방어를 뚫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몸 속의 산성 분비선도 커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산성 용액을 최대 다섯 발, 혹은 어쩌면 여섯 발까지도 연속으로 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배가 커진 만큼 아마 먹을 수 있는 양도 늘었을 것이다.

이제 바이오매스를 한번에 더 많이 섭취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거 정말···

신나는데!

나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고 나서 한 바퀴 돌았다.

뭐···

새로운 육체에 익숙해지려고 노력의 일환이었다.

정말이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기분이다!

얼른 내 강함을 시험해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차분해지려고 했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마나가 텅 빈 상태였다.

우선 호수의 물을 마셔서 MP를 보충하기로 했다.

호수에 도착하니, 거대한 악어 괴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내가 진화하는 사이 숲 속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이 중립 지대를 벗어난 곳에서 놈과 마주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삼십 분에 걸쳐 다섯 차례 호수의 물을 들이켰다.

천천히 마나를 회복하는 사이사이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는 연습을 했다.

자, 그럼···

이제 뭐부터 해야 할까?

나는 진화를 통해 몬스터 코어의 가치를 알게 됐다.

이제 더 많은 몬스터 코어를 확보하는 일이 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그러니까 첫 번째로 할 일은···

내가 숨겨 놓은 보물들을 되찾는 거였다.

호수 주위를 돌아 인간의 야영지 근처로 가는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계속 은신 상태로 움직였고, 인간들의 야영지와 호수를 직접 잇는 길에는 되도록 접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 아무 일 없이 내가 코어를 묻어 놓은 나무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코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네 개의 코어를 모두 파낸 다음, 즉시 흡수해서 MP를 28까지 늘렸다.

지난 번에는 다섯 개의 코어를 흡수하자 한계에 도달했다.

그럼 진화의 이번 단계에서는···

열 개?

아니면 스무 개까지 흡수할 수 있으려나?

몇 개가 됐든, 진화를 하기 전에 모두 얻어서 흡수해야 했다.

코어 성장이 주는 진화 보너스가 너무 달콤하니까 말이다.

코어 흡수를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남은 건 전투에서 새로운 육체의 성능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음···

솔직히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지네 둥지야말로 내 전투력을 시험할 완벽한 대상이었다.

진화하기 전에도 놈들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었던 만큼, 위험 부담이 낮기 때문이다.

좋아!

일단 가서 내 능력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나는 한 시간쯤 걸려 지네들의 언덕 근처로 이동했다.

그리고 바로 곁의 정찰용 나무에 다시 올라갔다.

전보다 훨씬 무거워진 탓에 나무를 오르기가 조금 더 어려웠다.

하지만 다행히 무게가 늘어난 만큼 근력도 늘어서, 익숙해지자 다시 능숙하게 몸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자···

이제 내가 지네를 몇 마리까지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까?

진화 전에도 세 마리는 거뜬했다.

그리고 네 마리일 때는 약간 고전했다.

다섯 마리일 때에는···

보자 마자 도망을 쳤는데도 거의 죽을 뻔했다.

음.

그럼 네 마리부터 시험해 볼까?

내가 그 동안 습격으로 꽤나 죽였는데도, 지네들의 수가 크게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둥지가 예전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많게는 열 마리에 이르는 대규모 무리가, 얼마 전 내가 지켜봤을 때보다 더 잦은 빈도로 둥지를 드나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새 지네 둥지에 베이비 붐이라도 일어난 건가?

그렇게 한참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숲으로 향하는 네 마리의 무리를 포착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즉시 나무에서 내려와 놈들의 뒤를 따라갔다.

다리가 길고 튼튼해진 덕분에 이동 속도도 전보다 빨라졌다.

그래서 지네 놈들을 쉽게 앞지를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과거에 놈들을 쫓을 때와 같은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제 나는 저 지네들보다 훨씬 더 컸다.

한때는 눈높이가 비슷했지만 이제 편안하게 내려다볼 정도였다.

뭔가 나보다 작은 놈들을 괴롭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지네를 동정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놈들의 앞을 막아섰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걸 환영한다!

푸슝!

놀랄 만큼 정확하게 날아간 구속 산성 용액이 맨 앞에 있는 지네의 등을 맞추고 한쪽 옆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재빨리 조준을 변경한 다음 두 번째를 발사했다.

푸슝!

어떠냐!

동료가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앞으로 나서던 두 번째 지네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어서 덤벼 보라고, 작은 벌레들아!

하지만 나머지 놈들은 전과 달리 곧바로 내게 돌진하지 않았다.

크고 진화한 개미와 마주친 지네들은 주저하는 기색으로 부상을 당한 동료들 주위에 머물며, 집게 발톱을 위협적으로 딸각거렸다.

아직 산성 용액을 세 발은 더 쏠 수 있겠지만, 나는 원거리 공격을 계속하는 대신 놈들과 근접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대로 계속 산성 용액만 쏜다면 새로운 육체의 성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내가 앞서 공격한 두 마리의 지네들은 움직이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버린 산성 용액이 놈들의 다리와 관절을 고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러면서 계속 타 들어가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저 두 마리가 싸움에 참여할 걱정은 없을 듯했다.

좋아, 그럼···

네놈들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지면을 박차며 돌진하자, 순식간에 기세가 실렸다.

마치 곤충 탱크처럼 진격하는 나를 보는 지네들의 둥글고 붉은 눈에 떠오르는 공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별다른 수작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지네를 향해 똑바로 달려갔다.

놈이 발톱을 들어 날 할퀴려고 했지만, 그냥 너무 약해서 별다른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내가 지네에게 달려들자, 더 크고 무시무시하게 변한 턱이 밝게 빛났다.

단단히 물기!

[레벨 2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한 방이로군.

심지어 머리를 노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무 데나 물었는데, 내 턱이 지네의 갑각을 부수고 몸뚱이를 반으로 잘라버렸다.

엄청난데!

마지막 한 마리의 멀쩡한 지네가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 다가왔다.

언제라도 독침을 찌를 수 있는 자세였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는 대신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꼬리를 공중에서 턱으로 잡아챈 다음, 단 한 번의 깨물기로 잘라내 버렸다!

그리고 한 번 더 물어서 지네를 마무리했다.

[레벨 1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산성 용액에 맞았던 두 마리의 지네는 아직도 바닥에 붙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아마 내 구속 산성 용액이 이 지네들에게 특히 치명적인 모양이었다.

수많은 다리와 관절을 가진 지네들에게, 몸의 절반이나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건 악몽 같은 일이겠지.

나는 그 두 마리를 각각 한 차례씩 물어서 숨통을 끊었다.

···

맙소사, 장난 아니잖아!

이 지네들은 내게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다섯 마리, 아니 여섯 마리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한 차례의 진화로 이런 일이 가능해지다니···

지난 번에 봤던 거대 성체 지네와 붙는다고 생각해도 두렵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지네들을 먹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바이오매스를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네 마리의 지네를 모두 먹어치우자 두 개의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었다.

지네들을 사냥해서 얻는 바이오매스가 예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아마 이게 진화한 몬스터가 더 약한 사냥감을 공격했을 때의 페널티일 것이다.

두 개의 바이오매스는 일단 아껴두기로 했다.

더 모아서 턱을 +5로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강해진 걸 확인하자 조금 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니까, 페로몬 자취를 따라갈 자신감 말이다.

이제 내 가족을 찾아갈 때였다!

개미 부대

나는 환희에 차서 호수 쪽을 향했다.

지네들을 상대로 한 전투 능력 테스트는 대성공이었다!

진화의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새로 업그레이드한 산성 용액의 특성도 예상보다 훨씬 더 쓸만했다.

물기 공격의 위력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직 상승했다.

지금도 이런데, 턱을 +5까지 만들면 얼마나 더 강력하게 물 수 있을까?

숲에 도착한 직후 느꼈던 막막함과 달리, 자신감이 온몸에 넘쳐 흘렀다.

하지만···

내 전투력 상승에 마냥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 차리자!

지금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 세계에서 내 새로운 가족이 되어줄 개미들을 찾는 거니까!

오래 걸리지 않아 호수에 도착한 나는, 더듬이로 땅을 두드리며 동족이 남긴 페로몬의 자취를 찾기 시작했다.

호수 주위에는 언제나처럼 수많은 몬스터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서로를 경계하면서 호수의 달콤한 마나를 들이키는 중이었다.

슬쩍 호수 안을 들여다보자, 어쩐지 얼마 전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 들었다.

물 속의 기이한 흐름이 더 빠르고 강해졌을 뿐 아니라, 푸른 빛도 더 밝아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세계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던전 안의 푸른 빛이 계속 밝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계절의 변화 같은 건가?

지하의 겨울이 끝나고 지하의 여름이 오는 그런 건가?

뭐, 아무리 고민해 봤자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며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곧 익숙한 페로몬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자취를 따라 호수에서 떨어진 숲 쪽으로 나아갔다.

며칠 전보다 페로몬의 자취가 조금 약해진 것 같았다.

그건 곧 한동안 개미들이 이 주위를 지나가면서 자취를 강화한 적이 없다는 의미였다.

내가 호수를 떠나 있는 사이 동족이 다녀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서는 기쁘기도 했다.

만약 내가 없을 때 개미들이 호수를 다녀갔다면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페로몬의 화학적인 신호가 전보다 조금 약해지기는 했지만, 숲 속에서도 계속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했다.

진화를 통해 강해진 덕분에 내 마음에는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낯설고 새로운 영역을 탐험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흥분되기까지 했다.

숲 속의 기이한 식물들은 계속해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숲의 이쪽에 있는 나무들은 키가 더 작아서 고작 몇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위쪽은 넓고 아래쪽은 좁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여러 층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각 층마다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잠깐, 여기는 바람이 불지 않는데?

나는 호기심에서 돌 하나를 턱으로 집어 나무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뭇가지가 저절로 움직이며 그 돌을 쳐냈다.

···

···좋아.

앞으로 저 나무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자!

평범한 몬스터들만 해도 감당하기 벅찬데, 굳이 정체 모를 나무들과 씨름할 필요는 없겠지!

계속해서 페로몬의 자취를 쫓아가다가 몇몇 몬스터 무리와 마주쳤지만, 은신 스킬로 들키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다.

페로몬의 자취는 일직선이 아니라,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었다.

아마 최초의 정찰병들이 주위를 살피며 지나간 경로를 그대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던 중,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육중한 몬스터들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주위 공기를 울렸다.

이런!

누군가 장난 아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무슨 일인지 되도록 멀리서 살펴보기로 했다.

이렇게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싸우는 놈들의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아직은 내가 상대할 엄두를 내기 어려운 두 마리의 몬스터가 서로 싸우는 중이었다.

하나는 거대한 악어 괴물이었다.

아마 호수에서 쉬고 있던 녀석과 같은 놈일 터였다.

또다른 하나는 호숫가에서 본 적이 있는, 박쥐 머리가 달린 고릴라였다.

하지만 이 고릴라는 내가 호숫가에서 봤던 녀석보다 훨씬···

훨씬 더 컸다.

아니, 너무 말도 안 되게 크잖아.

박쥐 고릴라의 왕이라도 되는 건가?

거대 악어는 놀랍게도 뒷다리로 일어서 있었다.

몸통 중간에서 흔들리는 한 쌍의 작고 두꺼운 중간 팔은 이 자세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악어 괴물은 일어선 자세로도 여전히 거대해서, 키가 족히 4~5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놈의 적수인 박쥐 고릴라도 비슷한 크기였다.

맙소사···

이건 그야말로 괴수들의 싸움이잖아!

저렇게 거대한 놈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한 차례만 진화한 생물이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저만한 크기가 되려면 적어도 두 번··· 어쩌면 세 번의 진화를 거쳐야 했을 것이다.

안 그러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응, 시스템?!

뒷다리로 일어선 악어 괴물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대신 거대한 앞발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다.

악어 괴물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팔을 휘두를 때마다, 칼날처럼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적을 위협했다.

박쥐 고릴라는 훨씬 더 민첩한 동작으로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며 악어 괴물의 발톱을 피했다.

하지만 고릴라의 털가죽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해 보였다.

반면 고릴라가 휘두르는 주먹은 악어의 두꺼운 가죽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쿵쿵.

성난 고릴라가 두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녀석의 피부 아래에서 두꺼운 혈관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어깨 주위에서 번개 같은 에너지가 일어나더니,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팔을 타고 내려갔다.

잠시 후, 놈의 거대한 두 주먹이 그렇게 모여든 에너지로 빛나기 시작했다.

고릴라의 꽉 쥔 두 주먹에서 연신 천둥 소리가 울렸다.

어···

저건···

멋. 지. 다!

번개 주먹이라니!

박쥐 고릴라의 두 주먹은 이제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괴수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대체 이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박쥐 고릴라가 다시 한 번 울부짖으며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더니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아무래도 두 주먹을 동시에 해머처럼 내리쳐서 악어 괴물을 공격하려는 듯했다.

악어 괴물은 여전히 두 발로 버티고 선 채,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박쥐 고릴라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곧 엄청난 에너지가 악어 괴물의 몸 속에 모이면서, 가슴 부위가 불룩하게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악어 괴물이 무시무시한 아가리를 벌리자···

그 안에서 불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악어 괴물이 토해낸 불덩어리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고릴라의 박쥐 얼굴을 직격했다.

하지만 고릴라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번개 에너지가 실린 두 주먹을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자 천둥 소리와 함께 물결치는 번개가 악어 괴물의 몸을 휘감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한 차례의 격돌 끝에, 두 괴수는 모두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나는 그제서야 참고 있는 줄도 몰랐던 숨을 다시 쉬기 시작했다.

맙소사!

정말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다!

난 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저런 일이 가능해지는 거지, 시스템?

입에서 파이어볼을 쏘다니?

주먹에서 체인 라이트닝이 나가?

한 번 더 진화하면 나도 저런 걸 할 수 있을까?

두 괴수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마치 오래 전부터 원한이라도 있는 사이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어째서인지 이 두 괴수가 전에도 여러 차례 서로 싸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살기를 교환한 두 괴수는 각각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은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단지 서로를 노려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어부지리로 경험치나 바이오매스를 노릴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만약 저 두 마리가 부상을 당한 것 같다고 해서 산성 용액을 쏘며 끼어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이지!

난 절대로 놈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저게 뭐지?

두 괴수가 대치하고 있는 건너편에 뭔가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내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저건 분명히···

더듬이잖아.

저기, 저기 또 있다!

그리고 내 가슴을 기쁨으로 뛰게 만드는 장면이 펼쳐졌다.

한 마리, 그리고 또 한 마리, 그리고 열 마리 더.

수많은 개미들이 이쪽으로 더듬이를 흔들며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내 친구들이다!

내 가족들이다!

내 동료들이다!

나는 개미들의 몸 색깔을 보고 포르미카 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와 똑같으니까!

마침내 둥지를 찾았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나와 비슷하면서 약간 더 작은 크기였다.

그리고 예전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갓 부화한 개미들도 몇 마리 섞여 있었다.

아마 마나 코어를 형성하기 위해 호수의 물을 마시러 가는 일행이겠지.

만나서 반가워 얘들아!

우리 둥지 만세!

그리고 다음에 펼쳐진 장면은 한껏 들떴던 내 가슴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개미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그 중 한 마리가 꽁무니를 높이 들고 서로 싸우는 두 괴수를 향해 산성 용액을 발사했기 때문이다.

···

뭐?

대체 무슨 짓이야?!

나는 내 백 개의 작은 눈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저 녀석들 뭘 하려는 거야?!

그래 너희들 수가 열 마리도 넘는 건 알겠지만···

이 괴수들은 너무 거대하잖아!

악어 괴물 혼자서도 2분 안에 너희 모두를 짓밟아버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다리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저 개미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안돼.

그렇게 찾아 헤맨 끝에 겨우 만났는데···

동족들이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어!

두 괴수가 개미들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숨어 있던 장소에서 뛰쳐나가 놈들 앞에 섰다.

그리고 다리를 지면에 꽂고 재빨리 몸을 돌려 꽁무니를 괴수들 쪽으로 향했다.

안녕, 커다란 친구들.

내가 아름다운 엉덩이를 소개하지!

푸슝!

푸슝!

푸슝!

나는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고 세 발을 연달아 쐈다.

어차피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기보다 괴수들의 주의를 끌어서 내 동족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나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세 줄기의 고정 산성 용액들은 두 마리의 거대한 괴수를 맞췄고, 그대로 놈들의 가죽에 달라붙어 살을 태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놈들이 너무 커서 대충 조준을 했는데도 세 발이 모두 명중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조준해서, 놈들의 관절 부위에 구속 산성 용액을 맞춰서 잠깐이라도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 의도는 먹혀들었다.

내가 주의를 끈 덕분에, 두 마리의 괴수들은 등 뒤로 다가오는 개미 부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악어와 박쥐 고릴라가 죽일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음···

이제 와서 사과해도 늦었겠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

내 눈 앞의 두 괴수는 아무리 봐도 이 숲의 일진 격이었다.

거대 악어가 성체 지네를 아무렇지도 않게 박살내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대체 동족들은 왜 이 놈들을 공격한 걸까?

나는 내 개미 형제 자매들도 낮은 영리함 수치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처지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심각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푸슝!

푸슝!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스킬의 레벨이 4가 되었습니다.]

나는 놈들이 내게 달려들기 전에 빠르게 산성 용액 두 발을 더 발사했다.

두 발 다 박쥐 고릴라를 겨냥한 발사였다.

둘 중에서 고릴라 쪽이 훨씬 더 민첩했기 때문에, 놈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제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발사할 수 있는 산성 용액은 단 한 발 남았다.

하지만 산성은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히니까, 어쩌면 앞서 발사한 용액들이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지···

운이 좋다면 말이다.

내 동족 개미들은 계속해서 두 괴수에게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한 마리씩 차례로···

난 정말이지 그 개미들에게 어그로가 끌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후회할 짓을 하고 말았다.

돌진!

날-봐-라!!

나는 마치 탑처럼 나를 굽어보고 있는 괴수를 향해 돌진했다.

놈들은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데다, 그 중 일부는 끈적거리며 굳어가는 탓에 잔뜩 열이 받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거슬리는 벌레들을 곤죽으로 만들 기세였다.

그리고 내가 달려드는 모습을 보자, 두 마리 모두 사납게 반응했다.

반사 신경과 속도가 우월한 고릴라가 먼저 반응해서, 나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놈이 주먹으로 지면을 두드릴 때마다 엄청난 힘에 땅이 흔들렸다.

고릴라의 박쥐처럼 생긴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주둥이 밖으로 튀어나온, 커다랗게 휘어진 송곳니가 쓸데없이 잘 보였다.

그러다가 고릴라가 갑자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조금 전에도 봤던 장면이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고릴라의 거대한 두 주먹이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놈의 무시무시한 힘에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쪼개졌다.

그 위력을 가까이서 목격하자 온몸이 저절로 떨렸다.

놈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칠 때 날린 파편이 내 몸을 두드렸다.

그것만 해도 내 갑각을 뚫고 실질적인 피해를 입힐 만한 위력이었다.

빌어먹을 고릴라 놈 같으니, 대체 힘이 얼마나 센 거야?!

간신히 고릴라의 주먹을 피한 내 겹눈에 뭔가 이글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저건···

점프!

나는 모든 에너지를 다리에 집중해서 위로 뛰어올랐다.

파이어볼이 내 바로 아래의 지면을 강타한 뒤 폭발하자, 뜨거운 열기가 훅 치밀어 올랐다.

저 망할 악어 놈이···

내가 고릴라의 주먹을 피하는 순간을 노려서 파이어볼을 쏘다니!

대체 언제부터 둘이 그렇게 손발이 잘 맞았냐?

니들 조금 전까지 서로 싸우고 있지 않았어?

내가 1초만 늦게 점프했다면 그대로 개미 통구이가 됐을 터였다.

심지어 직격을 피한 지금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고, 폭발이 일어났을 때 가장 아래 쪽에 있던 다리 하나는 크게 망가졌다.

좋지 않았다.

기동성을 잃어버리면 끝장인데!

결국 선택의 여지 없이 재생 치유 분비선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자 즉시 몸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일어나 혈관을 타고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으으으으!

기분이 너무 이상해!

마치 내 장기를 모두 꺼내서 냉동실에 넣은 듯한 기분이잖아!

아마 진화 설명에서 읽었던 치유 액체가 분비되는 느낌인 모양이다.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몇 초에 걸쳐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자, 그 전보다 몸 상태가 나아진 게 느껴졌다.

갑각에 난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고, 바로 조금 전 불에 구워졌던 다리도 거의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상태까지 돌아왔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5 HP가 회복되었다.

전투 초반에 써 버린 건 아쉽지만, 이 새로운 기관의 회복 능력은 인상적이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구매였다!

어쨌든 이렇게 난리를 치고도 고작 30초 정도밖에 벌지 못했다.

나는 나와 개미들의 산성 용액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니까!

두 마리의 거대한 괴수들은 조그마한 적수가 자신들의 협공을 당하고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마 여태까지 사냥을 하면서 문제를 겪었던 적이 별로 없었겠지.

이 숲에서 내가 본 몬스터들 중 놈들에게 대적할 만한 존재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개미 친구들은 계속 멀리서 산성 용액을 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몇몇은 근접전을 벌이기 위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너네 진심이야?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질 거라고!

몇 마리의 개미들이 다가오는 걸 본 두 괴수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내 다리는 이제 거의 멀쩡하게 나았다.

달려달려달려!

두 마리의 괴수가 다른 개미들 쪽을 쳐다보는 틈을 타서, 나는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젠장, 그 질주 스킬을 진작 사 놓을 걸!

더 빨리 뛰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고릴라의 바로 뒤까지 달려간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모두 굽혔다가 펴며 높이 뛰어올랐다.

크게 벌린 턱이 눈부신 하얀색으로 빛났다.

단단히 물기!

내 턱이 고릴라의 손목을 물자 *우직* 하는 소리가 났다.

놈의 손이 못쓰게 된다면 전투력이 크게 떨어지겠지!

몬스터가 팔을 세차게 흔들어 나를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다행히 나는 이런 상황을 최근에 몇 차례 연습할 기회가 있었다.

여섯 개의 다리를 모두 모으고 굴르르르르러!

나는 등부터 땅에 떨어지며 단단한 갑각으로 충격을 흡수했다.

그런 다음 계속 옆으로 굴러서 충격을 분산하며 상대적으로 취약한 다리를 보호했다.

구르는 속도가 느려진 뒤, 나는 벌떡 일어서서 곧장 다시 싸움터로 달려갔다.

1초도 낭비할 여유가 없다!

어느새 개미들 중 몇 마리가 싸움터에 도착해서, 자신들의 목숨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거대한 괴수들을 물거나 놈들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야 이 멍청이들아!

거대 악어가 거대한 앞발 하나를 치켜들고, 팔을 휘둘러 개미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젠장!

안돼!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 된 나는, 몸을 돌려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발의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다시 한 번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산성 액체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제대로 겨냥할 여유가 없었지만 기적적으로 거대 악어의 얼굴에 명중했고, 즉시 구속력을 발휘하며 끈적하게 굳기 시작했다.

거대 악어는 분노로 울부짖으면서도 원래 의도했던 대로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눈이 가려진 덕분에 방향이 살짝 빗나갔다.

그래도 운 나쁜 개미 한 마리가 몸통 부분을 정확히 얻어맞고, 무시무시한 발톱에 즉시 갈갈이 찢겨서 죽어버렸다.

하지만 살아남은 개미들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달려들어 악어의 두 다리를 물었고, 심지어 몇 마리는놈의 몸을 타고 올라가서 다른 부위를 공격했다.

왜 나는 저럴 생각을 못했지?!

괴수들은 아직 두 마리 모두 쌩쌩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악어에게 덤벼든 개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녀석들이 한동안 알아서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건 고릴라를 싸움에서 떼어놓는 것 뿐이었다.

아까 손목을 물었던 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고릴라의 흉측한 박쥐 얼굴은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놈의 검은 털은 온통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채 천천히 타 들어갔다.

그리고 내게 물린 오른 손목 때문에 사지에 제대로 체중을 싣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고릴라 쪽으로 달려가서 턱을 벌렸다가 닫으며 딱딱 소리를 냈다.

인간으로 치면 '나랑 1대 1로 싸우자, 개새야!' 라는 의사 표시였다.

그러자 고릴라가 아까와 다른,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몸과 머리 속을 파고들어 현기증이 나게 만들었다.

주위에 있는 다른 개미들이나 거대 악어도 모두 비틀거리며 동작을 멈췄다.

미친, 무슨 음파 공격 같은 건가?

박쥐 고릴라가 사방으로 쏘아내는 음파가 너무 강해서, 내 몸이 진동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위의 모두를 경직 상태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음파를 날리고 나서, 고릴라가 다시 한 번 높이 뛰어올랐다.

비명 소리로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 놓고 주먹으로 내리쳐 납작하게 만들 의도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될 거다!

고릴라가 착지하기 전에 나도 땅을 박차고, 놈이 결코 예상하지 못할 방향으로 뛰어올랐다.

바로 날아오는 고릴라 쪽으로 말이다!

방금 개미들이 악어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잡기 스킬은 이렇게 쓸 수도 있더라, 이 원숭이 놈아!

나는 무서운 기세로 낙하하는 고릴라를 향해 뛰어오른 다음, 놈의 팔 위쪽에 매달렸다.

그리고 모든 힘을 내 작은 발톱들에 집중했다.

진화로 힘 능력치가 엄청나게 높아진 덕분에, 고릴라가 굉음과 함께 착지할 때에도 나가 떨어지지 않고 매달릴 수 있었다.

강인함 능력치를 올릴 때 갑각만 단단하게 만들지 않고 내부 저항에 진화 에너지를 배분한 것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릴라의 음파 공격에 지금처럼 잘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재빨리 경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개미 피자가 되어 있을 터였다.

다른 개미들은 괜찮을지 걱정이 됐지만 고개를 돌려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고릴라를 물어야 하니까!

스킬을 사용하자 크게 벌린 턱이 점점 더 밝게 빛나며 엄청난 힘이 솟구쳤다.

단단히 물기!

[단단히 물기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고릴라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손바닥을 휘둘러 나를 때리거나 털어내려고 했다.

마치 모기에 물렸을 때 인간이 하는 동작과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미 고릴라의 다리 쪽으로 내려가서, 한 번 더 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우직*

맛이 어떠냐?

고릴라가 미친듯이 몸을 흔들며 나를 떨쳐내려고 하는 걸 보면 맛이 아주 매콤한 모양이었다.

물론 순순히 떨어져 줄 생각이 없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매달렸다.

[잡기 스킬이 레벨 5가 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완벽한 타이밍이군!

[잡기 -> 강화된 잡기. 다리가 물이나 가속도처럼 잡기 능력을 제한하는 효과에 더 잘 저항할 수 있게 됩니다.]

좋아!

업그레이드를 승락하자 내 발톱들이 고릴라의 털가죽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놈의 몸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연신 날아오는 커다란 손바닥을 피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릴라의 목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놈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힘껏 물었다!

[깨물기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스킬 레벨이 쭉쭉 오르는구나!

아마 강한 적과 싸우는 효과 같았다.

거대한 고릴라가 다시 한 번 고통으로 울부짖더니 몸을 웅크렸다.

다음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고릴라에게 매달려 있는 내 다리들이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잠깐···

뭔가를 떠올린 나는 주저없이 고릴라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점프!

파지직!

엄청난 양의 전기 에너지가 일어나서 고릴라의 온몸을 감쌌다.

눈부신 번개 때문에 순간적으로 내 시야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맙소사!

저 놈 스스로를 살아 있는 전기 파리채로 만들었군!

전대미문

아야야야.

고릴라 놈의 수작을 눈치채고 서둘러 뛰어내렸지만, 다리 두 개가 전기에 튀겨지고 말았다!

정말 아팠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박쥐 고릴라에게 당하고 말 테니까!

동시에 여러 방향을 살필 수 있는 겹눈 덕분에, 나는 거대 악어 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거대 악어는 땅에 쓰러져 있었다.

악어 괴물의 주위에 움직이는 형체들의 수로 볼 때, 개미들의 원군이 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쪽에 정신을 팔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두 마리의 괴수가 힘을 합치기라도 하면 우린 모두 개미 튀김이 될 처지였다.

이 시점에서 박쥐 얼굴의 고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탓에 몸 여기저기가 눈에 띄게 타 들어갔고, 내가 물어서 생긴 상처도 있었다.

게다가 박쥐 고릴라는 곤충 타입 몬스터처럼 단단한 갑각이 있거나, 도마뱀 혹은 악어 괴물처럼 비늘로 몸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전신에 빽빽하게 억센 털이 나 있기는 하지만, 그 아래는 곧바로 부드러운 피부와 근육이었다.

덕분에 내 단단히 물기가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지금쯤 아마 죽기 직전일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여기 있는 개미들은 내 동족, 같은 여왕으로부터 태어난 형제 자매들이다!

이 개미들은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이들이 없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숨고, 달아나고, 싸우고, 잡아먹는 일만을 반복해야 한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다른 모든 생물을 적으로 여기면서 지내야 한다.

그건 원래 인간으로 살았던 내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동료 개미들, 그리고 둥지야말로 내가 이 세계에서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개미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어쩌면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바보 같은 동족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고릴라, 너와 나 둘 중 하나만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뜻이지!

나는 박쥐 고릴라를 응시했다.

놈의 크게 벌린 입에서는 붉은 거품이 흘러내렸고,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넌 너무 냉정하지 못해, 고릴라.

그리고 그게 너의 패인이 될 거다.

번개의 영향으로 아직도 다리들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마 아직 재생 분비선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으면 꼭 그 기관부터 업그레이드해야지!

이제 산성 용액도 남아 있지 않아서, 턱으로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고릴라 쪽으로 다가가서, 놈의 다친 손 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았다.

아마 다음 번 격돌에서 승부가 결정될 터였다.

나는 매의 눈으로 고릴라를 주시했고, 놈도 분노와 고통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마주 노려봤다.

덤벼, 이 멍청하고 커다란 바이오매스 덩어리야.

내가 그 못생긴 박쥐 얼굴을 뭉개 주마.

그때 갑자기 내 다친 다리들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땅에 얼굴을 박았다.

그걸 본 고릴라가 환희에 찬 함성을 지르며 미친듯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멍청한 놈···

페이크다!

고릴라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자 거대한 그림자가 내 위에 드리웠다.

놈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나는 다리들로 몸을 밀며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고릴라가 내리치는 주먹을 몇 센티미터 차이로 피했다!

지금이다!

나는 고릴라의 다리 옆에서 벌떡 일어나 턱을 한껏 벌리고 달려들었다.

우직!

고릴라의 무릎 바로 아래쪽을 물자, 깨물기 스킬 덕분에 내 턱이 놈의 두꺼운 털가죽을 뚫고 들어갔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박쥐 고릴라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다친 손으로 어설프게 나를 내리쳤다.

놈의 공격이 내 복부를 스쳤지만, 나는 턱을 놓지 않았다.

물기!

물기!

물기!

내 턱이 느리지만 꾸준히 고릴라의 다리를 파고들었다.

점점 더 깊이···

그리고 마침내 딱 소리를 내며 양쪽 턱이 서로 만났다.

내가 놈의 다리를 완전히 잘라낸 것이다!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던 고릴라가 굉음과 함께 땅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다친 손을 휘둘러, 주먹으로 내 가슴 부위를 가격했다.

커다란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충격이 전신을 흔들었고, 시야가 흐려졌다.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친 주먹으로 날린 공격인데도 빌어먹게 강했다!

충격이 가해진 부위의 갑각이 부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았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여전히 시야가 흐렸지만, 나는 고릴라의 머리 쪽이기를 바라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턱을 벌렸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무는 것 뿐이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물어!

우직!

우직!

고릴라가 주먹으로 나를 때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 시야는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턱에 힘을 빼지 않았다.

우직!

우직!

더 이상 여기가 어딘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물어야 한다는 생각은 남아 있었다.

우지끈!

[레벨 13 푸그누스 풀구르 시미아를 처치···]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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