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리온 영지]
집무실에 기사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지금 상황을 모두 알아야 하기에 모이라고 했네. 시작하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펠릭스 단장이 지도를 펼쳤다.
"지금 확인된 록체스터 가문의 기간트는 헬다임 장벽 도시에 70기. 발루아 영지에 약 160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비공정으로 수송할 수 있는 기간트가 100기 정도입니다. 그리고 오리지널 기간트는 모두 4기고 룩급이 둘, 비숍급이 하나, 나이트급이 하나입니다."
록체스터 대영지의 병력 규모를 듣자, 기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난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자! 다들 이제 우리 영지 상황을 정확히 알겠지? 지금이라도 떠나고 싶은 기사가 있다면 당장 집무실을 나가 기차를 타고 영지를 떠나게. 말리지 않겠네."
기사들은 서로를 힐끔 보면서도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눈치 보지 말고, 나가라니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싸움이네. 수치상으론 우리가 완전히 불리한 싸움이고."
그때 한 기사가 손을 들었다.
"우린 발레리온의 기사입니다. 적이 많다고 물러선다면, 죽어서도 후회할 겁니다. 그리고 펠릭스 단장님께서 숫자는 그저 내가 쓰러트려야 할 적을 표시한 것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영주님과 선배 기사님들은 엘프 차원에서 단 10기의 기간트로 수백 마리의 거대 괴수를 죽이고 포위를 뚫어 많은 기사를 구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도 자신 있습니다."
눈이 맑고 또랑또랑한 젊은 청년은 잘 벼려진 칼 같았다.
"자네 이름이 뭔가?"
"라하트라 합니다."
"펠릭스 단장이 잘 가르쳤군."
"감사합니다. 영주님!"
난 다른 신임 기사들을 쳐다봤다.
말이 신임이지, 벌써 1년 넘게 함께 훈련한 기사들이었다.
내가 오크 차원 원정에 다녀오는 동안 두 기사단장과 선배 기사들이 훈련을 아주 잘 시킨 것 같았다.
"다른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그동안의 훈련 성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다 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응? 카고르?"
"오랜만입니다. 영주님."
"자넨 언제 우리 기사가 됐나?"
"한 1년쯤 됐습니다."
그는 케니스 영지 출신의 기사로 웨슬리 슈나이더의 부하였다.
다리 부상으로 바이마르 원정팀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운이 좋게 목숨을 건졌다.
팀원들이 모두 실종됐다고 알고 있었기에 대수림을 수색하다가 포기하고, 1년 전에 장벽을 넘어온 것 같았다.
카고르는 대수림 최고의 사냥팀 출신이었기에 기간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몰았다.
"마키아스 단장, 그대가 기사로 뽑았나?"
"네! 나이는 좀 많지만, 지원자 중에서 실력이 제일 좋아 뽑았습니다."
"잘했군."
난 타냐 블랙과 트라스의 개 기사들을 쳐다봤다.
"모두 열심히 해야겠어? 서열이 밀리지 않으려면."
갑자기 대머리 월터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뭐야? 벌써 3위까지 올라간 거야?"
카고르는 월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명백한 상위 포지션이었다.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형성된 실력 위주인 트라스의 개 기사단의 서열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자! 그럼 도망치는 기사가 없으니, 계속하지."
펠릭스 단장이 말했다.
"동쪽에서 접근하는 기간트는 70기뿐이지만, 모두 록체스터 대영지의 정예병력입니다. 반면에 발루아 영지에 집결한 기간트는 30기만 록체스터 영지의 기간트고 나머진 북부의 각 영지에서 강제로 긁어모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등급이 낮고, 구형 기간트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동쪽은 트라스의 개 기사단이 상대하고, 남쪽 에일 영지의 방어는 숫자가 많은 하얀 악마 기사단이 맡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트라스의 개는 신임 기사까지 19명이 있었고, 하얀 악마 기사단은 저번에 황립 사관학교 출신 신임 기사를 많이 뽑아 33명의 기사가 있었다.
펠릭스 기사단장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희가 에일 영지를 지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마키아스 단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영주님, 저희 기사단에 비공정 2척을 지원해 주십시오."
"응?"
"헬다임에서 우리 영지까지 기간트를 타고 진군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립니다. 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숫자를 줄여 보겠습니다."
"치고 빠지려는 작전이라, 괜찮은 생각이군. 2척을 내주지."
"감사합니다."
난 펠릭스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영지를 방어해야 하는 하얀 악마 기사단이 힘들 거야."
"최선을 다해 방어하겠습니다."
"좋아! 믿고 맡기지."
하얀 악마 기사들의 기세는 나쁘지 않았다.
원래 황립 사관학교 출신들이라 기본기는 되어 있었고, 지난 1년간 베테랑 기사들과 훈련했기에 실력도 많이 늘었으니, 여기저기 영지에서 강제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하지만 숫자가 좀 많이 차이 났기에 걱정이 됐다.
그럼 질적으로 전력을 올려줘야겠다.
"워버린, 폴린!"
"네! 영주님."
"두 사람은 앞으로 나오게."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워버린과 폴린이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얼음 계곡 원정부터 비행석 원정까지 에테나를 빼곤 나와 가장 오래 함께했고, 대수림에서 괴수를 잡으면서 기간트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긴장하지 마. 상을 주려는 거니까."
"상이요?"
"두 기사에게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지급한다."
워버린과 폴린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네?"
"저, 정말이십니까?"
"룩급 기간트에도 오래 탔고, 마나량도 많이 늘었으니, 충분히 타고 싸울 수 있을 거야."
"충! 감사합니다. 영주님!"
"와! 내가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다니!"
두 사람은 매우 기뻐했고, 기사들은 부러운 모습으로 쳐다봤다.
"타냐 블랙, 앞으로!"
"네? 저도요?"
"타냐 블랙에게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지급한다."
타냐 블랙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143. 양과 질의 싸움.
143. 양과 질의 싸움.
"가, 감사합니다!"
트라스의 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타냐 블랙을 축하했다.
그때 타냐 블랙이 손을 들었다.
"영주님, 그런데 우리 영지에 오리지널 기간트가 많이 있습니까? 한꺼번에 비숍급을 3대나 주시다니요?"
난 피식 웃어줬다.
"다른 기사들도 능력이 된다고 판단되면 우선 지급할 테니 열심히 노력하게. 오리지널 기간트는 아직 많으니까."
"오오! 타일러 영주님! 만세!"
"오리지널 기간트야! 기다려라!"
"와아아!"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리지널 기간트를 타는 건 모든 기간트 기사들의 꿈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난 오리지널 기간트가 많았고.
기사들이 모두 출정 준비를 하러 우르르 몰려나가고, 곧바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영주님, 저희도 출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맞습니다. 개조한 오리지널 기간트를 시험해 봐야지요."
두 사람은 아리칸 왕국의 비에르 후작과 원탁의 기사 리오넬 대령이었다.
"허허! 비공정 한 대 내줄 테니까 개조된 오리지널 기간트를 가지고, 돌아가라니까."
"그래도 전투가 있는 걸 아는데 어찌 그냥 가겠습니까. 그리고 우린 동맹이 아닙니까."
두 사람은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는 기사들로 아리칸 왕국의 최상급 기사들이었다.
당연히 큰 도움은 되겠지만.
없어도 될 거 같은데······.
"어차피 기간트에 타면 얼굴은 보이지 않으니, 누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맞습니다.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왠지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하긴 내 원정이 길어지며, 우리 영지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에 실전 감각을 끌어 올리고 싶은 것 같았다.
"휴! 알겠소. 그럼 두 사람은 하얀 악마 기사단에 배치할 테니, 에일 영지를 방어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펠릭스 단장이 비록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지만, 지휘관이니 명령을 따라야 하오."
"물론입니다."
"기간트를 꺼내 오라고 할 테니, 지금 기사단에 합류하시오."
"네! 영주님."
두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풀기 시작했다.
리오넬 대령이 말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요."
"참모, 우리 누가 더 많은 기간트를 부수는지 내기합시다."
"좋습니다. 지는 사람이 술을 사는 겁니다."
두 사람에게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리칸 기사들이 나갔다.
방금 두 아리칸 기사까지 합류했으니, 이제 우리 영지에 오리지널 기간트는 모두 9기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지금 기간트 공방에서 대기 중인 4명의 영웅 기사들에게도 룩급 기간트 2기와 비숍급 기간트 2기를 지급할 것이다.
그럼 우리 영지군의 오리지널 기간트는 13기가 된다.
거기에 암 드로운이 있었고, 두 거신 기사가 있었다.
그럼 겉으로 보이는 발레리온 영지의 오리지널 기간트는 총 16기가 된다.
우린 양보단 질이다.
난 가만히 지도와 작전판을 쳐다보았다.
'발루아 영지라······.'
난 어설프게 내 영지를 지키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원래 주변 영지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영지에 할 일이 태산이었고, 막대한 금화가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발루아 영지는 내 영지를 공격하려는 록체스터 대영지에 땅을 빌려주고, 기간트까지 파견했다.
한 마디로 내가 공격할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발루아 영지를 먹으면 내 영지가 거의 2배로 커진다.'
그럼 대영지까진 아니지만, 북부에서 록체스터 대영지 다음으로 큰 영지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발루아 남서쪽에 시에라 영지는 바로 록체스터 대영지와 붙어 있었다. 그러니 거기만 점령하면······.
'이왕 시작한 전쟁, 차근차근 다 씹어 먹어주마.'
솔직히 록체스터 대영지만 꺾으면 제국 북부에선 아무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기간트 생산도 독점할 수 있었기에 내가 원하는 강한 영지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를 공격한 기간트를 모두 챙기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이번 영지전 이후론 아무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대영지라도 말이다.
***
[발레리온 기간트 공방]
"드워프들이 고생이 많네."
"타일러여! 왔는가!"
글러드 왕자가 날 반갑게 맞이했다.
난 주변을 둘러봤다.
"공방은 거의 완공됐군."
"그렇다! 타일러여! 이제 양산형 기간트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괴수 부산물이 부족하다."
"그건 나도 알아. 당분간 기간트를 만들지 말고, 수리하는 데 중점을 둬. 곧 부서진 기간트가 쏟아져 들어올 테니까."
"응? 또 전쟁이 벌어지는 건가?"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맡긴 구형 기간트는 어떻게 됐어?"
"건설과 채굴 기간트로 개조했다. 그리고 일부는 기간트 조립용으로 개조했고."
"잘했어."
"우리 드워프도 기간트에 타면 좋을 텐데, 작업이 쉽지 않군."
마석 산업 혁명으로 많은 것을 마석 배터리로 대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석 배터리 자체가 비싸고, 괴수 부산물로 만든 것들은 사용자가 마나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이곳 세상의 마나를 다룰 수 없었기에 작업용 기간트를 사용하지 못했기에 작업 속도가 매우 느렸다.
이것도 뭔가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일이 힘들진 않아?"
"힘들긴 하지만,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드워프가 만든 것으로 우리 모두를 지키는 것이니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을 한 바퀴 돌고, 케네스 영감님을 찾아갔다.
"잘 되고 있습니까?"
케네스 영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대기의 마나 파장을 이용해 신호를 보내는 것은 성공했는데, 도무지 거리가 늘어나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치매가 다시 도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기존에 있는 기술이 아니니까요."
난 원정 출발 전에 케네스 영감에게 기간트와 비공정에서 사용할 무선 통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케네스는 부서진 기간트도 고치고, 기간트 개조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나와 마법진의 이해도가 가장 높기에 부탁했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휴! 앨리슨이 옆에 있다면 빨리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학기 중에 불러올 순 없지 않습니까."
"그까짓 거 사관학교에 다녀서 뭐 하려고요? 배우는 것도 별로 없을 겁니다."
"친구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케네스의 눈이 똥그래졌다.
"혹시 남자친구?"
"아쉽게도 그건 아닌 거 같고요. 나이는 2, 3살 많은데, 친하게 지내는 언니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긴, 한참 친구도 만나고 놀 나이지요."
케네스가 미소를 지었다.
손녀 이야기만 나오면 바보가 된다니까.
"이 일은 어떻게든 제가 만들어 보겠습니다."
케네스가 다시 얼굴을 파묻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린 인재가 부족하기에 기간트 숫자나 비공정 숫자보단 기술력으로 앞서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인재도 덩달아 늘어날 것이고.
난 한창 오리지널 기간트에 적응 중인 영웅기사들을 찾았다.
그들은 기간트 공방 한쪽에 마련된 테스트 훈련장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뛰어라!"
기이잉! 쿵쿵쿵!
"검을 내려칠 땐 무자비하게."
부웅! 부웅!
쩍! 쩌쩍!
철검으로 내려치자, 11미터의 기간트 더미가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암 드로운이 소리치고, 오리지널 기간트들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내가 다가가자, 암 드로운이 고개를 숙였다.
"주군, 어서 오십시오."
"다들 좀 쉬라고 해!"
"네!"
암 드로운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다들 쉬어라!"
[네!]
기사들이 해치를 열고 내렸다.
다들 마나를 극한까지 소모했는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갈라그란트가 투구를 벗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갈라그란트, 넌 계속 훈련해라!"
"네?"
유일한 거신인 갈라그란트가 불쌍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자기도 쉬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난 딴 곳을 쳐다봤다.
그러자 갈라그란트가 투덜거리며 검을 들었다.
암 드로운은 갈라그란트에게 유독 심하게 훈련했다.
"실력이 어때?"
"다들 적응력이 빠릅니다. 다만 움직임 아직도 투박해 반복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다른 오리지널 기간트에 탄 기사들과 비교하면 네 기사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무공 훈장을 받을 만큼 뛰어난 기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암 드로운은 자신의 기준으로 보기에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싱크로율 100%의 거신이니까 그렇고, 기사들은 기껏해야 60, 70% 수준이기에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자네들은 행운인 줄 알게. 거신 기사가 직접 훈련해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 영지밖에 없으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드네요."
크리스티나는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훈련이 힘들면 말해. 그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고 싶은 기사들이 줄을 섰으니까."
"아,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때 라이너가 손을 들었다.
"저희도 전선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숫자가 부족하니, 저희도 나서야죠."
"아니, 너희와 거신 남매는 별동대야. 놈들의 비공정은 반드시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어. 그리고 여기 기간트 공방을 가장 먼저 노릴 거다. 그때 놈들을 격파한다."
"그런데 100기나 되는 기간트를 우리끼리 잡을 수 있을까요?"
"나 못 믿어?"
"아, 아닙니다."
기사들의 불안이야 안다.
내 그림자 기사단이 모두 투입되고도 적의 숫자가 2배 이상이니까.
하지만 난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플레임 더스트!"
파파파파파팟!
퍼퍼퍼퍼퍼펑!
릴리안이 쏜 불꽃들이 폭발하며 연기가 훈련장 가득 퍼졌다.
"윽! 또 연기야."
암 드로운이 소리쳤다.
"전투에서 저 연기는 적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자! 휴식 끝이다! 기간트에 올라타라!"
영웅기사들이 다시 오리지널 기간트에 올라탔다.
이들 중에서 실력이 가장 빨리 늘고 있는 것은 내 제자인 릴리안이다.
마법사가 출전한 첫 전투에서 그녀가 얼마나 활약할지 벌써 기대가 된다.
***
[에일 영지]
쿵! 쿵! 쿵!
지축이 울린다.
지평선 멀리 수많은 기간트가 몰려오고 있음이다.
"거참! 많이도 몰려오네."
오리지널 비숍급 기간트 팔 위에 앉아 있던 워버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봐야 오합지졸이야. 오늘 우리 기간트의 위력을 보여주자고!"
폴린이 말했다.
두 기사는 이번엔 받은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고 활약할 생각에 벌써 아드레날린이 치솟고 있었다.
치이잉! 철컹!
[다들 전투를 준비해라!]
펠릭스가 명령하자, 기사들이 일제히 기간트에 올라탔다.
[두 분은 우측 숲으로 오는 기간트를 막아 주십시오.]
[네! 맡겨주십시오. 단장.]
아리칸의 두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는 숲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에일 영지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너른 들판이 이어지다가 끝에 숲과 작은 산이 만나는 곳으로 이곳은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산은 높진 않지만, 절벽이 있었기에 기간트가 오를 순 없었고, 숲은 그래도 나무를 베지 않아도 기간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있었다.
[정지하라!]
[정지!]
록체스터 대영지의 기간트와 북부 영지의 기간트들이 조잡하게 만든 관문 500미터 앞에 멈춰 섰다.
파든 록체스터의 부관인 피터 남작이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입니다. 저걸로 우릴 막으러 하다니요.]
관문은 고작 10여 미터로 기간트는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저기! 저쪽에 오리지널 기간트가 3대나 있는데요?]
[뭐?]
기사의 말에 해치를 연 파든 록체스터가 망원경으로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3대를 발견했다.
파든 백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쉽게도 자신들은 오리지널 기간트가 없었다.
"상관없다! 우리 기간트는 저들의 5배다! 밀고 들어가 상대를 넘어트리고 해치를 집중공격하면, 오리지널 기간트라도 버틸 수 없을 거다!"
[맞습니다. 파든 공자님.]
지키는 기간트는 겨우 30여 기.
반면에 이쪽은 기간트가 160기가 넘었기에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파든은 다시 기간트에 탔다.
[공자님, 저길 보십시오.]
[응?]
오리지널 기간트 세 기가 관문 100여 미터 앞까지 나왔다.
그리고 무기를 꺼내지도 않고, 손을 까닥거리며 어서 공격하라고 도발하고 있었다.
[총공격할까요?]
[아니야! 4군을 먼저 보내 저 오리지널 기간트를 잡으라고 하게!]
[네!]
[4군! 공격하라!]
피터 부관이 명령을 내리자, 5개 영지가 모인 4군의 기간트 40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총공격을 준비하게.]
[네!]
파든 록체스터 백작은 오리지널 기간트를 4군 기간트가 포위하면 곧장 총공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오리지널 기간트를 구형 기간트가 잡기는 쉽지 않았다.
적당히 힘이 빠지는 시점에 자신이 데려온 록체스터 가문의 기간트를 보내 처리할 생각이었다.
오리지널 기간트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힘으로 밀어붙이면 끝이었다.
'이거 너무 쉽잖아!'
그때였다!
기세 좋게 도발하던 오리지널 기간트가 등을 보이며 관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 어이가 없군요.]
[놈들이 겁을 집어먹었다! 모두 총공격을 감행하라!]
[모두 총공격하라!]
[와아아아!]
본대의 기간트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쿵! 쿠쿠쿠쿵!
앞서 달리던 기간트들이 갑자기 땅으로 푹 꺼졌다.
[뭐야? 모두 멈춰라!]
[정지하라!]
기간트들이 겨우 멈췄지만, 이미 4군의 기간트 30기가 추락한 상태였다.
아래에는 괴수 부산물로 만든 창들이 박혀 있었고, 구형 기간트들이 그 창에 찔린 상태였다.
[함정이라고? 말도 안 돼! 방금까지 오리지널 기간트 3기가 서 있던 곳이었는데?]
파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관문에 도착한 펠릭스 단장은 속으로 웃었다.
방금은 이번에 드워프들이 오리지널 갑옷에 적용한 비행석 낙하 장치를 이용한 유인책이었다.
그렇게 전투 시작 전부터 적에게 피해를 주고 사기를 떨어트렸다.
[젠장! 3군은 숲으로 들어가 공격하라!]
144. 일장춘몽.
144. 일장춘몽.
기이잉! 쿵! 쿵! 쿵!
비좁은 숲길을 일자로 가는 거대 병기들은 록체스터 대영지의 3군 기간트들이었다.
[이쪽이다! 나를 따르라!]
선두의 비숍급 기간트엔 오웬 베르가니 백작이 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아!'
오웬 백작은 지금 이를 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원래 베르가니 영지의 기사들이었다.
발레리온 영지의 너른 경작지를 가져가려고 했다가 영지전을 벌였고, 전투에서 완패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영지 감옥에 기사들과 갇혔다.
하지만 황제의 중재로 겨우 풀려나 장인인 베닝 록체스터 공작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눈칫밥의 연속이었다.
장인이란 작자는 과거엔 영지의 철광석을 헐값으로 사가더니, 금화를 달라고 하면 고물 기간트만 잔뜩 주었다.
하지만 북부의 대영주였기에 뭐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젠 영지가 없다고 자신과 기사들을 무시했다.
'아직 기회는 있어······!'
물론 그 기회는 장인에게 있다.
장인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더라도 원래 자신의 영지인 베르가니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 기회가 왔다.
선두의 기간트가 함정에 걸리는 바람에 자신과 3군이 숲을 통과해 발레리온 영지군의 후미를 칠 기회를 얻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이 전투의 일등 공신은 바로 나······.
오웬 백작의 기간트가 멈춰 섰다.
[어? 오, 오리지널 기간트?]
눈앞에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도끼를 든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기드온!
아리칸 왕국 원탁의 기사이자, 참모인 리오넬 대령의 기간트였다.
[여! 오래 기다렸다고.]
상대 오리지널 기간트의 중압감에 오웬 백작은 위기감을 느꼈다.
[저, 저놈을 공격해라!]
[네!]
기이잉! 쿵쿵쿵!
자신은 뒤로 빠지고 3군의 기간트들이 차례로 달려나갔다.
부아앙! 촤악!
[크윽!]
단 일격에 나이트급 기간트 머리통이 날아가더니, 곧바로 해치를 향해 거대한 도끼가 휘둘렸다.
부웅! 쩌억!
안에 탄 기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뒤를 따라간 기간트 역시 발길질 한 번에 나무 위로 쓰러졌고, 역시 거대한 도끼로 마무리.
그러자 세 번째 기간트는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뭐해! 계속 공격하라!]
오웬 백작은 부하들을 다그쳤다.
부하가 다시 달려가 보지만, 앞선 기사들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좁은 숲길이었다.
기간트 한두 기가 겨우 지나갈 길이었기에 상대 룩급 기간트를 포위 공격할 수도 없었다.
아니 포위하려면 주변의 나무를 베야 했는데, 상대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놈도 사람인 이상 지칠 것이다! 공격하라!]
쩌엉!
[크악!]
전면에서 비명이 들릴수록 오웬 백작은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부하 기사들을 계속 앞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크하하! 이놈들 이쪽에도 있다!]
후미에 11미터의 검은색 오리지널 룩급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기간트는 기체와 장갑이 온통 검은색이라 크로우란 이름이 붙었고, 지금은 비에르 후작이 타고 있었다.
크로우는 긴 창을 들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들어와!]
하지만 상대 기간트들은 겁을 먹고 달려들지 않았다.
[그래? 안 오면 내가 가지!]
기이잉! 쿵쿵쿵!
쉐엑! 파앗!
크로우가 창을 찌르자, 맨 뒤에 있던 나이트급 기간트의 해치가 한 방에 뚫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기간트를 공격했다.
촤악!
[크악!]
다음 기간트도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젠장! 앞뒤로 막혔다!'
오웬 백작은 불안했다.
3군의 기간트는 30기.
자기 부하들이 주축이라 제일 좋은 기간트가 비숍급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포위 공격을 하더라도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2기를 이길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는다.
그의 촉이 말해주고 있다.
[계속 공격하라! 몰아붙여라!]
기사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한쪽 나무를 검으로 베기 시작했다.
부웅! 촤악!
기간트의 힘으로 거대한 검을 휘두르자, 나무가 한 번에 두세 그루씩 잘렸다.
그리고 자신은 그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크악!]
[사, 살려줘!]
[으악!]
오웬 백작은 부하 기사들의 비명을 뒤로하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내가 이런 데서 죽을 줄 알아!'
그런데 그는 점점 더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반대쪽으로 가야 했어!'
이제 와 뒤로 가긴 늦었다.
최선을 다해 가다 보면, 끝이 보일 것이다.
곧 나무 사이로 밝은 빛이 보였다.
'저기다! 곧 숲이 끝난다!'
촤악!
마지막 나무 두 그루를 베고 밖으로 나갔는데······.
'이런······.'
하필 그곳은 발레리온 기사들이 있는 관문이었다.
오웬 백작은 급히 기간트를 뒤로 돌렸다.
그런데.
[어이! 기껏 도망친 곳이 여기야?]
상대 오리지널 기간트 2기가 뒤에 서 있었다.
벌써 부하들을 다 죽이고, 쫓아온 것이다.
이젠 결정을 내려야 했다.
기체의 손을 들었다.
[하, 항복······.]
쿠쿠쿵! 콰앙!
끝말은 맺지 못했다.
비에리 후작의 기간트가 달려들어 넘어트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창으로 기간트 해치를 찔렀다.
파앗!
[크헉!]
오웬 백작의 기간트는 축 늘어졌다.
[하, 항복인데... 쓰벌!]
비에리 후작이 창을 뽑으며 말했다.
[부하들을 버리고 온 놈에게 항복은 사치지.]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오웬 백작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을 뜨고 죽었다.
펠릭스 단장이 소리쳤다.
[놈들에게 밀리지 마라! 검을 찔러라!]
지금 이곳 관문은 올라오려는 기간트과 막으려는 기간트가 싸우고 있었다.
[펠릭스 단장, 우리도 합류하겠습니다!]
[좋소!]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기드온과 크로우가 합류했다.
[으아아!]
촤악!
콰앙!
[으아악!]
겨우 2기가 합류했지만,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였기에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펠릭스는 그들을 보며 자신도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 비숍급 오리지널 기체도 마음에 들지만, 더 크고 강한 기간트를 갖고 싶은 것은 모든 기사의 본능이었다.
[놈들이 후퇴한다!]
[와아아아!]
파든 록체스터는 병력을 물렸다.
방금 공격에 40기나 되는 기간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간 30기의 기간트는 소식이 없었다.
[대체 3군은 어떻게 된 거야? 진작에 후미를 공격했어야지!]
[아무래도 뒤늦게 나타난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들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부관인 피터 남작의 말에 파든 록체스터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아! 병신 같은 놈!]
파든이 뒤를 돌아 관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저놈들은 오리지널 기간트가 왜 이렇게 많아? 영지 전체에 4기라고 하더니, 여기만 5기잖아! 게다가 룩급이 2기에 비숍급이 3기야.]
[아무래도 정보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젠장! 이제 어떻게 하지?]
파든 백작은 고민했다.
첫 공격에 너무 많은 기간트를 잃었다.
이제 남은 것은 록체스터 영지의 기간트 30기와 다른 영지군 34기뿐이었다.
이젠 정면 대결을 펼쳐도 이길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저쪽엔 오리지널 기간트가 5대나 있었으니까.
[후퇴하시죠.]
[뭐라? 아버지가 내가 실패한 걸 아시면 가만있지 않으실 텐데······.]
[실패는 아닙니다.]
[응? 무슨 말인가?]
[우리가 저들을 뚫지 못해도 오리지널 기간트 5기와 최정예 기간트들이 이곳에 있으니, 우리가 저들의 발목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가레스 기사단장께서 저놈들의 공방을 부수고 영주를 사로잡으면 전쟁은 승리로 끝날 겁니다.]
[그러니까 전투엔 졌지만, 전쟁에선 이긴다?]
[네, 좋게 생각하십시오. 지금쯤이면 우리 록체스터의 비공정이 발레리온 영지로 날아가고 있을 겁니다.]
파든 록체스터는 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그런데 오웬 백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숲에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그 인간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냥 뒈지게 놔둬.]
[네.]
[후퇴하자.]
[네! 모두 후퇴하라!]
록체스터 기간트와 북부 영지군의 기간트는 발루아 영지를 향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파든 록체스터 백작의 비숍급 기간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휴! 저놈들이 저렇게 강할 줄 몰랐어.]
[그건 다 오리지널 기간트 때문입니다. 여기에 발레리온 영지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다 모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하나의 군대가 아니라 여기저기 모인 병사들이라 단합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이곳에 오리지널 기간트가 다 모여 있다면, 다른 곳은 좀 수월하겠지?]
[맞습니다.]
파든과 피터 부관이 애써 위로를 할 때였다.
기이이잉! 쿠쿠쿠쿵!
뒤쪽에서 기간트가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 영지를 공격한 놈들이다! 살려 보내지 마라!]
[공격하라!]
발레리온의 기간트들이 언제 뒤를 따라왔는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마, 막아라!]
[대형을 갖춰라!]
파든과 피터 부관이 소리쳐 보지만 이미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콰앙! 콰콰콰쾅!
[으악!]
[크악!]
록체스터와 북부 영지의 기간트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펠릭스 단장은 적 기간트를 찌르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 베닝 공작의 장남인 파든 백작이 그곳에 있다.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
출정 전에 타일러 영주의 당부가 있었다.
그래야 돈을 왕창 받아낼 수가 있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 영지는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간트 사이에 보호를 받는 비숍급 기간트를 발견했다.
[저놈이 대장이다! 워버린!]
펠릭스 단장이 파든 록체스터를 가리키며 자신의 오른팔인 기사를 불렀다.
[예! 제가 잡겠습니다!]
워버린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쏜살같이 달렸다.
[비켜라!]
파든 백작의 부관이 앞을 막아보지만!
콰앙! 쿵!
힘에서 밀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받아라!]
채앵! 챙!
워버린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파든 록체스터가 비숍급 기간트로 막아보지만, 힘 자체가 달랐다.
파앗!
내지른 검날에 어깨를 찔렸고, 검을 든 팔이 떨어져 나갔다.
콰앙!
그리고 워버린이 밀어서 넘어트리더니, 발로 가슴을 밟고 검을 해치를 향해 겨눴다.
[다들 움직이면 이놈이 죽을 줄 알아!]
[헉! 파든 공자님께서 잡히셨다!]
[무기를 버려라!]
베닝 록체스터의 장남이 잡히자, 록체스터 영지의 기간트들은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록체스터 기간트가 투항하자, 북부 영지의 기사들은 당연히 검을 버렸다.
자신들의 전쟁도 아닌데 이곳에서 죽고 싶은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와아아아! 이겼다!]
하얀 악마 기사단과 아리칸의 두 기사가 적장을 사로잡고, 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것도 큰 피해 없이 해냈다.
잠시 후.
발레리온의 보병들이 와서 포로들을 끌고 갔다.
[다들 전열을 정비해라! 우린 지금부터 발루아 영지와 영지전을 벌인다.]
[네? 발루아 영지로 진군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 우리 영지를 노린 록체스터 놈들에게 길을 빌려주고, 자신들도 기간트를 동원해 공격했다. 타일러 영주께서는 우리에게 발루아 영지를 접수하라고 하셨다! 진군하라!]
[가자!]
[와아아아!]
그들은 그 길로 발루아 영지를 향해 진군했다.
***
[솔버리 백작님, 저희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젯밤에도 한숨도 못 잤습니다.]
동쪽에서 발레리온 영지로 진군 중인 록체스터 기사들은 지금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지난 5일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솔버리 백작은 그들의 말을 흘려들었다.
[시간이 없다. 우리가 약속대로 발레리온 영지 동쪽 경계에 도착해야 적들의 기간트를 유인할 수 있고, 가레스 기사단장께서 비공정을 타고 적들의 심장을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어제도 불침번을 서던 기사 넷을 잃었습니다.]
[맞습니다. 벌써 야금야금 21기나 기간트를 잃었고 앞으로 이틀을 더 가야 합니다.]
[어쩔 수 없다. 병력을 잃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들 움직여라!]
솔버리 백작의 말에 기사들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기사였고, 자신들은 나름 록체스터 영지의 알아주는 기간트 기사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저들의 비공정과 기간트를 자신들이 잡아두면, 가레스 백작의 병력이 좀 더 수월하게 발레리온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비공정 2척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며 수면과 휴식을 방해했다.
문제는 저러다가도 갑자기 기간트가 내려와 자는 기사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기사들은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기간트에 타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건 아주 피곤한 짓이었다.
그리고 6일째 새벽엔 야영지를 대놓고 공격했다.
145. 그게 다 돈이야.
145. 그게 다 돈이야.
기이이잉! 쿵! 쿵! 쿵!
[트라스의 개 기사단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공격해라!]
[썩을 놈들! 다 죽여!]
사방에서 발레리온 기간트가 공격했다.
[일어나라! 적습이다!]
쾅! 콰콰콰쾅!
숫자는 록체스터 기간트가 배 이상 많았지만, 기사들은 기습에 당황했고 너무 피곤했다.
아무리 장사라고 해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힘을 쓰지 못하는 법이다.
그건 기사들도 마찬가지.
기습 공격에 록체스터 대영지의 기간트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적은 우리보다 적다! 밀리지 마라!]
솔버리 백작이 소리쳤다.
[아론 백작! 놈들을 막으시오!]
[네!]
그때 솔버리 백작을 보호하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나메드가 적 기간트를 향해 달렸다.
기아아앙! 콰앙!
[크헉!]
서열 4위 대머리 월터의 비숍급 기간트가 어깨치기 한방에 힘없이 날아가 꼬꾸라졌다.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는 역시 강했다.
나메드가 쓰러진 기간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검을 들고 달려갈 때였다.
[멈춰라! 네놈의 상대는 나다!]
쿠쿠쿵!
타냐 블랙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레드독이 검을 휘둘렀다.
부앙! 태앵! 태태탱!
그녀의 비숍급 기간트가 룩급 기간트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두 오리지널 기간트의 무기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레드독은 타냐 블랙의 붉은 머리를 보고 타일러 영주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기간트 보호 장갑이 모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허! 제법이구나!]
아론 백작은 상대의 기세에 살짝 밀렸지만, 곧 마나를 뿜어내며 나메드의 속도를 높였다.
나메드는 록체스터 대영지에서도 단 2기밖에 없는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였다.
하나는 기사단장인 가레스 백작이 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베닝 록체스터 공작의 둘째 사위인 아론 백작이 타고 있었다.
[건방진 것 죽어라!]
부앙! 쾅! 쾅!
나메드의 검이 내려칠 때마다, 레드독은 뒤로 한 걸음씩 밀렸다.
아론 백작은 록체스터 가문의 데릴사위였지만, 황립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20대 후반에 근위 기사단의 대령까지 올라간 엘리트였다.
하지만 주색을 좋아하고 타고난 난봉꾼이라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잠에서 깨 보니, 한 저택 안이었고, 옆에서 자는 여자가 북부의 대귀족 베닝 공작의 차녀였다.
문제는 전혀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문에 힘이 없던 아론 백작은 결국, 록체스터 공작의 둘째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사냥개가 되어 있었다.
[죽어!]
쉐엑! 쉐엑!
검이 연거푸 찔러지자, 레드독은 힘겹게 쳐냈다.
탱! 탱! 탱!
오리지널 기간트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완벽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반면에 아론 백작은 원래 엘리트였고,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탄 지도 4년이나 됐기에 매우 익숙했다.
나메드가 검을 내리치며 밀어붙이다가 발로 레드독의 배를 찼다.
콰앙!
[크윽!]
레드독이 뒷걸음질 치다 튀어나온 바위에 걸려 넘어졌다.
쿠웅!
[크하하! 끝났구나!]
아론 백작은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검을 겨눴다.
[멍청한 놈! 끝난 건 네놈이야!]
[뭐라?]
기이잉! 쿵! 쿵! 쿵!
아론 백작의 나메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록체스터 대영지의 기간트들은 이미 쓰러지고 제압당해 있었고, 자신은 10기의 기간트에 포위당한 상태였다.
타냐 블랙이 끈질기게 아론 백작을 잡아둔 사이에 마키아스와 기사들이 상대를 모두 제압한 것이었다.
[웃기는군! 아무리 네놈들이 숫자가 많아도 내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아론 백작은 자신 있었다.
한때 근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후보까지 올랐던 자신이었다.
제국에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수 있는 몇 안 되는 실력자였고.
[다들 물러서라! 내가 상대하겠다.]
마키아스 단장의 오리지널 기간트 드라우켄이 앞으로 나섰다.
드라우켄이라는 이름 역시 타일러가 지어준 것이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독보적인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인간 중에선 가장 강한 것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드라우켄이 나서자, 다른 기간트들이 포위를 풀고 뒤로 물러섰다.
[응? 넌 그동안 계속 도망쳤던 놈이군.]
아론 백작은 피식 웃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자신들을 괴롭힌 장본인이 서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면 꼬랑지를 말고 도망만 치던 놈이었다.
[어리석군. 한꺼번에 덤볐다면 기회가 있었을 텐데!]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만 없다면, 나머지 기간트들이야 하나씩 상대하면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상대가 일대일로 싸우자고 한다.
[간다!]
기이잉! 쿠쿠쿵!
쉐엑! 부웅!
'어? 피했어?'
두 기간트는 같은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성능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럼 검술의 실력과 싱크로율이 높은 쪽이 이긴다.
[죽어!]
붕! 부아앙!
나메드는 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드라우켄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검을 피하고 있었다.
[이 생쥐 같은 놈이!]
드라우켄이 타냐 블랙의 레드독을 보며 말했다.
[접근전을 벌였을 땐, 상대의 어깨와 팔의 움직임을 살펴라! 그럼 검이 어디로 날아올지 보일 것이다.]
[뭐?]
아론 백작은 황당했다.
눈앞에 이놈은 자신과 싸우면서 자기 기사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감히! 나를 물로 보다니!]
캉! 카카캉!
나메드는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러자 드라우켄은 한발 크게 물러섰다.
[거기 서라!]
[지금처럼 거리가 조금 벌어져 있을 때는 달려드는 상대의 다리와 허리를 먼저 봐라!]
부앙! 캉!
드라우켄이 나메드의 검을 막아냈다.
[그럼 상대의 공격 방향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힘으로 밀어냈다.
기잉! 쿵쿵!
'뭐, 뭐지? 출력에서 밀린다고?'
나메드가 뒤로 밀리자, 아론 백작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자신과 싸우면서 여유롭게 부하에게 강의하는 상대를 보고 부아가 치밀었다.
[네놈! 반드시 죽인다!]
기아앙! 쾅! 쾅!
나메드가 인정사정없이 드라우켄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드라우켄은 적의 공격을 정확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주겠다. 전장에서 절대 흥분하지 마라! 그럼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지.]
내려치는 나메드의 검을 드라우켄이 검으로 흘리며 주먹을 날렸다.
콰앙!
[크헉!]
얼굴에 주먹을 강타당한 나메드는 중심을 살짝 잃었다.
그러자 드라우켄이 달려들어 나메드의 허리를 잡더니, 뒷다리를 걸고 넘어트렸다.
쾅! 콰앙!
뒤로 쓰러진 나메드!
위에 올라탄 드라우켄이 가슴과 배를 향해 주먹을 내려쳤다.
쾅! 쾅! 쾅!
큰 충격을 받았지만, 아론 백작 역시 그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나메드가 드라우켄의 머리를 향해 검을 찔러왔다.
쉐엑!
하지만 허공을 찔렀다.
[누워 있는 상태에서 공격은 눈에 뻔히 보이지.]
자리에서 일어선 드라우켄이 검으로 나메드의 검을 날려 버렸다.
휘익! 타앙!
[헉!]
검을 놓친 아론 백작은 신음을 흘렸다.
자신도 한때 천재 소리를 듣던 인재였지만, 눈앞에 상대는 자신과 차원이 달랐다.
[놈을 잡아라!]
타냐 블랙과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팔과 손을 제압했다.
그리고 드라우켄이 검으로 나메드의 해치를 뜯어냈다.
[이놈을 끌어내라!]
타일러 영주가 말했다.
기간트는 최대한 멀쩡히 뺏고 기사는 사로잡으라고, 그게 다 돈이라고 했다.
자신은 지금 돈을 벌었다.
***
[발레리온 영지 상공]
"적 비공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둘러 하강하라!"
10척의 록체스터 비공정이 기간트 공방 북쪽 공터에 내렸다.
[내려라!]
[서둘러라!]
기이잉! 쿵! 쿵! 쿵!
기간트들이 차례로 내렸다.
그동안 강하 훈련을 꾸준히 한 덕분에 100기의 기간트가 무사히 지상에 내렸다.
너무 순조롭게 강하에 성공했기에 가레스 단장은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순찰하는 적 비공정도 보이지 않았고.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란돌프!]
[네! 가레스 기사단장님!]
[타일러 후작이 영주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기간트 40기를 이끌고 가서 영주를 사로잡아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네! 가자!]
란돌프 부기사단장이 기간트를 이끌고 동쪽의 영주관을 향해 달렸다.
[나머진 저들의 공방을 부순다!]
[가자!]
록체스터 영지군이 기간트 공방 위쪽에 지어진 저택에 도착했다.
그런데 지하 공방으로 통하는 거대한 격납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왜 문이 열려 있을까요?]
[혹시 함정이 아닐까요?]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기사들이 물었다.
[시끄럽다! 우리 비공정을 보고 도망친 것이다! 제국 북부에 기간트 공방은 록체스터 공방 하나면 충분하다! 모두 부숴라!]
[가자! 부숴라!]
록체스터의 정예 기간트들이 공방 안으로 하나둘 들어갔다.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불을 밝혀라!]
기간트들이 양어깨와 머리에 라이트를 켜고 들어갔다.
그렇게 대부분 기간트가 안으로 들어가자!
팟! 파파파팟!
기간트 공방 천장에 라이트가 켜지며,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곳은 기간트 성능 테스트 장소로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자신들 앞으로 4기의 기간트가 서 있었다.
[응? 오리지널 기간트가 여기 다 있었군.]
가레스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럼 다른 방향의 전선엔 오리지널 기간트가 없다는 소리였기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뭐해? 안 덤빌 거야?]
4기의 오리지널 기간트는 일자로 서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가자!]
록체스터의 정예 기간트들이 앞으로 내달렸다.
기이이잉! 쿠쿠쿠쿵!
팟! 파파파파팟!
펑! 퍼퍼퍼퍼펑!
갑자기 사방에서 불꽃이 치솟더니 순식간에 연기가 자욱해졌다.
"적들을 쓸어버려라!"
"네! 스승님!"
암 드로운과 그의 제자 갈라그란트가 마나를 눈에 뿜어내며 연기에 휩싸인 록체스터 기간트들을 공격했다.
촤악! 콰앙!
[앞이 안 보인다! 크헉!]
[크악!]
기간트 기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화염 연막 마법을 사용한 릴리안은 마나를 집중했다.
그녀는 커다란 마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팡이에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나를 절반이나 쏟아부은 릴리안은 적 기간트들 사이로 지팡이를 뻗었다.
그리고 마법 주문을 시전했다.
"파이어! 버스트!"
기간트들이 서 있던 바닥에 거대한 붉은 마법진이 번쩍였다.
퍼어엉!
화아아아아아!
폭발과 함께 거센 화염이 치솟고 그 위에 있는 4기의 기간트를 삼켰다.
[으아아!]
[뜨, 뜨거워! 아아악!]
화염이 사그라들고 연기가 열려 있던 공방 입구로 빠져나가자,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십여 기의 기간트가 쓰러져 있었고, 4기는 새카맣게 불에 그을린 상태였다.
"주군의 영지를 침범한 자들이다! 모두 죽여라!"
[가자!]
[으아아아!]
상대가 당황할 때, 영웅 기사들의 기간트가 달려들었다.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2대와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2대가 달려들자, 숫자가 훨씬 많음에도 록체스터 기간트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이어 에로우!"
화르르르!
영웅 기사들 뒤에 있던 릴리안이 화염의 화살을 만들었다.
휘익! 퍼엉!
[크아악!]
나이트급 기간트가 화염에 휩싸였다.
앞에선 오리지널 기간트들이 사정없이 공격하고, 마법 기간트가 뒤에서 화염 화살을 날리자, 록체스터 기사들은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점점 격납고 입구를 향해 밀려났다.
문이 닫혀 있었다면, 어쩌면 그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망칠 길이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아르몽! 편대를 이끌고 저 여자 마법사를 죽여라!]
[네!]
그래도 가레스 기사단장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지금 록체스터 기사들의 사기를 가장 많이 떨어트리는 것은 저 화염 마법을 쓰는 기간트였다.
아르몽의 기간트 편대가 한쪽을 돌아 릴리안을 향했다.
하지만 그 앞에는 갈라그란트가 검을 겨누고 서 있었다.
"파이어 에로우!"
화르르! 펑!
화아아!
화염 화살이 하나 더 날아가 달려들던 비숍급 기간트 하나가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2기의 기간트는 갈라그란트가 상대했다.
찔러오는 검을 손바닥으로 밀어 방향을 틀더니 비숍급 기간트를 어깨로 밀어버렸다.
기간트가 넘어지자, 곧바로 뒤쪽에 기간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릴리안을 겨누던 아르몽의 룩급 기간트는 손목이 잘리며 검을 떨어트렸다.
갈라그란트가 달려들어 상대 기간트를 쓰러트렸다.
그리고 해치에 검을 찔러넣었다.
'오! 암 드로운이 제대로 가르쳤네.'
역시 갈라그란트의 움직임은 기간트보다 기사에 가까웠다.
난 지금 공방 입구 쪽에서 눈으로 마나를 뿜어내며 안쪽에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영주관으로 달려오던 40기의 록체스터 기간트들은 벌써 처리한 상태였다.
입구에 내 마법인형이 타고 있는 40기의 기간트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공격시키진 않았다.
암 드로운과 기사들이 너무 잘 싸우고 있었기에 투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도망치는 놈들이 있으면 그때나 투입해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이제 나 없어도 영지를 잘 지키겠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경험치 더럽게 안 오르네.'
방금 40기의 기간트를 무찔렀지만, 경험치는 거의 쌓이지 않았다.
그건 대수림의 괴수를 잡아도 마찬가지.
A등급 괴수를 잡으면 그래도 경험치가 조금 늘어났지만, 레벨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가장 레벨이 많이 올랐을 때는, 오크 차원에서 화염 괴수를 잡았을 때와 엘프 차원에서 그곳 괴수를 잡았을 때였다.
'렙업을 빠르게 하기 위해선 다른 차원의 괴수를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문제는 그 괴수들은 대수림의 괴수와 달라서 괴수 부산물을 쓸 수 없었기에 돈이 안 된다.
일단 이번 영지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장벽에서 가까운 곳에 생긴 차원 균열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3개 차원 균열에 들어가서 많은 이득을 챙겼다.
드워프 차원에서 드워프들을 잔뜩 데려왔고, 오크 차원에서도 오크를 무려 12,000여 명이나 데려왔다.
그리고 엘프 차원에선 엘프와 비행석을 대량으로 얻었다.
새로 생긴 차원 균열에서도 뭔가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새로운 이계 난민을 구하는 것이든 아니면 비행석 같은 특별한 물질이든.
'응? 대장끼리 대결이네!'
그때 우리 영지의 최고 기사인 암 드로운과 록체스터 대영지의 최고 기사이자, 기사단장인 가레스 백작의 룩급 기간트가 서로 검을 겨눴다.
146. 전격 마법.
146. 전격 마법.
먼저 움직인 것은 암 드로운이다!
그가 가레스 백작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향해 달렸다.
쿵쿵쿵!
[어딜!]
가레스의 기간트가 커다란 대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부아앙!
하지만 눈앞에 상대가 갑자기 사라졌다.
터엉!
갑자기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가 휘청였다.
[뭐야?]
암 드로운이 완전히 몸을 뒤로 누이며 바닥을 슬라이딩하면서 검으로 상대의 발목을 후려치고 지나간 것이다.
이번 공격으로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는 발목 보호 장갑이 날아간 상태였다.
'암 드로운을 기간트로 보니까 그런 실수를 하는 거지.'
기이잉! 쿠쿠쿵!
[간다!]
이번엔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가 먼저 달려가 대검을 찔렀다.
쉐엑! 쉑!
긴 검날을 이용한 찌르기는 꼭 창과 같았다.
하지만 암 드로운은 그 찌르기를 뒤로 물러나면서 피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자, 가레스 백작이 대검을 회수하며 앞을 막았다.
부웅! 터엉!
[크윽!]
이번엔 룩급 기간트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암 드로운이 검을 휘둘러 룩급 기간트의 어깨를 후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공격으로 어깨 보호 장갑이 떨어졌다.
[어, 어떻게 한 거지?]
가레스 백작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니 암 드로운이 다가가자 점점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주군의 이름으로!"
쿠쿠쿠쿵!
암 드로운이 다시 달려들자,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가 움찔거리며 대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부아앙! 태앵!
암 드로운은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보통 기간트 검보다 1.5배는 길어 보이는 대검을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움찔한 가레스의 기간트가 검을 회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옆으로 휘둘렀다.
부아앙!
[잘려라!]
대검의 검날을 암 드로운은 자신의 검으로 막았다.
태앵! 치이익!
검과 검이 만나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암 드로운은 이미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 코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콰앙!
[크윽!]
고관절을 보호하는 커다란 보호 장갑이 반으로 잘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3번의 공격에 3개의 보호 장갑이 떨어져 나갔다.
만약 보호 장갑이 아니라, 머리나 관절 부위를 집중적으로 노렸다면 치명상을 입혔을 것이다.
[네놈! 지금 날 봐주는 것이냐?]
그리고 가레스 백작도 그걸 알고 분노하고 있었다.
"주군의 영지를 공격한 죄!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오리지널 기간트를 최대한 손상입히지 않아야 주군께서 돈을 버신다!"
[뭐?]
'뭐?'
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가레스 백작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난 암 드로운에겐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아! 내가 마키아스 단장에게 상대 오리지널 기간트를 최소한의 손상으로 포획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옆에서 들었나 보다.
이제야 왜 기간트의 보호 장갑만 노리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에게 절망감을 줘서 항복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그럼 본체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끝낼 수 있으니까.
전투 상황이었지만, 왠지 피식 웃음이 났다.
난 암 드로운에게 말했다.
'암 드로운, 저들을 공방 밖으로 밀어내!'
'네, 주군!'
암 드로운이 가레스 백작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게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적들을 공방에서 밀어내라!"
[가자!]
[놈들을 밀어내자!]
암 드로운은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를 몰아쳤고, 네 명의 영웅 기사들과 거신 기사들이 록체스터의 기간트들을 밀어냈다.
곧 가레스 백작의 오리지널 기간트와 20여 기의 록체스터 영지의 기간트는 공방 밖으로 밀려났다.
[뭐, 뭐야?]
밖으로 나온 그들을 기다리는 건 40기의 기간트였다.
그리고 공방 안에서 암 드로운까지 7명의 기사가 나왔다.
그들이 보기엔 7기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입구를 막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너희는 포위됐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면 살려줄 것이다.]
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순순히 항복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공정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이미 내 비공정이 공격했으니까. 그리고 날 죽이려고 보낸 40기의 기간트는 이미 다 처리했으니까, 그들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크윽!]
가레스 백작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날 노려봤다.
[타일러 후작! 네놈의 함정이었구나!]
[솔직히 이건 함정도 아니지. 눈에 뻔히 보였잖아?]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가 뒤에 있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렇게 된 이상! 모두 최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라!]
가레스 백작은 투항할 생각이 없었다.
[가레스 백작! 그러지 말고, 일대일은 대결은 어떠냐?]
[뭐라?]
[그대와 내 기사가 싸워서 이기면 부하들과 보내주겠다. 물론 기간트도 함께.]
가레스 백작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는 암 드로운을 쳐다봤다.
[반대로 그대가 지면 모두 투항하는 거다. 어떠냐?]
가레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계속 형편없이 밀렸으니, 자신이 없어 보였다.
[왜 자신 없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정 나와 싸우고 싶으면 네놈이 나서라!]
[그래?]
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좋다! 나와 대결하지. 조건은 똑같고.]
[정말이냐?]
[그렇다니까.]
[그럼 영주의 명예를 걸어라!]
난 고개를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어서 나와!]
난 기간트를 타고 앞으로 나섰다.
[푸하하! 건방진, 비숍급 기간트로 날 상대하려 하다니, 방금 한 약속을 지켜라!]
가레스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앞으로 나섰다.
난 지금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레오파드에 타고 있었다.
원래는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생각이었다.
내 실력으론 이제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조종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전에 아리칸 왕국에서 받아 개조한 오리지널 기간트에 특이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 기간트에 일부러 탄 것이다.
레오파드는 날렵하게 생긴 기체였고, 9미터보다 조금 작은 8.5미터 크기의 비숍급 기간트였다.
[모두 물러서라! 거리를 벌려라!]
내 명령에 기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기간트 등급이 한 단계 낮긴 하지만, 다들 내 실력을 아니까!
[타일러! 죽여주마!]
기이잉! 쿠쿠쿵!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달려들었다.
가레스 백작은 날 빨리 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죽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부아앙!
태앵!
[크윽!]
11미터 크기의 룩급 기간트가 휘두르는 대검을 받자마자, 기체가 휘청였다.
엄청난 위력에 기간트가 디딘 땅까지 파인 것 같았다.
난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딜!]
룩급 기간트의 주먹이 날아온다.
레오파드의 최대 장점은 민첩성이었다.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하면서 가슴에 왼손을 댔다.
[라이트닝 스파크!]
손바닥 위로 밝은 하늘색의 마법진이 번쩍였다.
지속 시간은 겨우 2초!
난 상대 기간트의 허벅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탁!
파지지직!
푸른 전격이 룩급 기간트를 휘감았다.
'됐다!'
하지만 상대 기간트의 팔꿈치가 등을 향해 날아왔다.
휘익! 쿠웅!
기체를 옆으로 날려 피했다.
기이잉! 쿵! 쿵!
상대 기간트는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전격 마법은 마나를 매우 많이 소모했는데 효과가 없자, 살짝 실망했다.
'오리지널 기간트엔 소용없나?'
전격 마법진은 아직 직접 테스트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스킬을 써서 검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응?'
가레스 백작의 기간트가 조금씩 비틀거렸다.
'아! 기간트는 멀쩡해도 안에 탄 기사에겐 효과가 있구나!'
기이이잉! 쿵쿵쿵!
난 다시 달려들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탱! 탱!
룩급 기간트가 대검을 들어, 내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처음보다 반응속도가 조금 느려진 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일격에 상대를 굴복시킬 순 없지만, 상대 기간트의 몸에 닿을 수 있다면, 전격 마법으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부아앙!
수평으로 휘둘린 대검을 피해, 기간트의 몸을 옆으로 굴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부앙! 쾅! 쾅!
룩급 기간트가 수직으로 검을 휘둘러보지만, 충분히 피할 만했다.
레오파드는 빠르고 민첩하니까.
그리고 싱크로율이 높은 내게 아주 적합한 기체였다.
게다가 전격도 쓸 수 있었다.
콰앙!
상대 검을 피하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룩급 기간트가 대검을 옆으로 휘둘렀지만, 난 기간트의 기체를 앞으로 굴리면서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라이트닝 스파크!]
몸을 일으키면서 이번엔 상대 기간트 해치에 손을 댔다.
파지지지지지직!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의 기체가 부르르 떨더니, 이내 무릎을 꿇었다.
쿵!
난 기간트를 어깨로 밀어버렸다.
기이이이! 쿠앙!
가레스 백작의 룩급 기간트가 힘없이 쓰러졌다.
[타일러 영주님께서 이겼다!]
[타일러 영주님 만세!]
[와아아아!]
내 기간트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20여 기의 록체스터 기간트들이 약속대로 하나둘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겁 없이 내게 덤비긴 했지만, 기사의 명예를 완전히 버린 놈들은 아니었다.
아니 죽고 싶지 않은 거겠지.
[놈들을 사로잡아라!]
대결도 끝나고 전투도 끝났다.
큰 위기는 없었다.
기사들이 너무 잘해줘서 이젠 영지의 방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근데, 이 기간트에 새겨진 전격 마법진이 조금 약하긴 하네.'
메제트의 탑 중에서 전격 속성 탑은 글론 왕국의 장벽 관문에 있었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지만, 나중에 한번은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더 강력한 전격 마법진을 새겨 넣을 수 있겠지.
어쩌면 대지 마법처럼 광역 공격이 가능한 전격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격 속성 마석도 만들고.
다른 속성 마석은 이데아 발굴지에서 좀 챙겨서 여유가 있었지만, 전격 속성 마석은 3개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장 전격 마법진을 다른 기간트에 새길 순 없었다.
어쩌면 알리사 엘가 마법사를 데리러 내가 직접 가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녀가 가진 속성 마석이 몇 개나 남았을지 몰라도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속성 마석을 아껴야 했다.
지금 난 3번 정도 차원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 차원 마법진을 종이에 그려왔기에 굳이 발굴지까지 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물론 마법진을 그리려면 최상급 마석이 필요하지만.
위이이잉! 철컹!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해치가 열리고, 가레스 백작이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몸에서 연기가 살짝 나는 것 같지만 죽진 않은 것 같았다.
'이 전격 마법이 괴수에게 통할까?'
그건 대수림에서 제대로 시험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암 드로운과 기사들이 다가왔다.
"주군, 모두 포로로 잡았습니다."
난 기간트 해치를 열고 영웅 기사들을 쳐다봤다.
"모두 잘했어! 오리지널 기간트를 준 보람이 있군."
[감사합니다. 영주님!]
[아직 몸에 익지 않아서 제 실력 발휘를 못 한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때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 빛은 뭔가요? 번개처럼 번쩍이던데요?]
"이건 전격 마법이야. 마나 소모량이 많으니까, 너희는 안 쓰는 게 좋아. 효과도 기대보다 약하고, 타이밍을 잡기도 쉽지 않고."
난 S등급 스킬로 사물이 느리게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었기에 상대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의 공격을 피하면서 기막히게 타이밍을 잡았지. 다른 기사가 전투 중 기간트 팔을 뻗어 상대 기체에 대려고 했다간 먼저 황천길로 갈 것이다.
그보다 오늘 수확이 꽤 좋다.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본체 손상 없이 얻었고, 방금 20여 기의 기간트 역시 멀쩡한 채로 얻었으니까.
고오오오! 휘이이잉!
'응?'
바람이 느껴지자, 하늘을 쳐다봤다.
비공정이 내려왔다.
그런데 숫자가 많다!
"타일러 영주님! 성공했어요!"
에테나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9척을 보냈는데, 16척이 돼서 왔다.
적의 비공정을 7척이나 나포한 것이다.
"아쉽게도 3척은 도망쳤어요."
"7척이면 아주 많이 잘한 거야."
"엘프들과 오크 해병대가 힘을 합쳐서 해낸 거예요."
"나도 알아."
남부와 동부, 그리고 여기. 마지막으로 하늘까지!
4개의 전장에서 벌써 2개는 승리했다.
나머지 2개도 이변이 없는 한 이겼을 것이다.
"에테나, 비공정 한 척 준비해줘!"
"네!"
난 이곳 정리를 기사들에게 맡기고, 다른 전장을 살피러 갔다.
***
마키아스 단장이 이끄는 트라스의 개 기사단은 기간트 7기만 손상된 상태로 대승을 했다.
포로가 서른 명이 넘었고, 록체스터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기간트를 무찌르고, 파손된 기간트를 모두 모아 놓아서 쉽게 영지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남쪽 전선으로 향했다.
147. 발루아 영지.
147. 발루아 영지.
[발루아 영지.]
에테나와 발루아 성에 도착했다.
"충!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펠릭스 단장과 기사들이 경례했다.
"벌써 영지를 점령했다니, 대단하군."
내가 남부 전선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발루아 영주성을 점령한 상태였다.
"다친 사람은?"
"가벼운 부상자가 몇 명 있을 뿐입니다."
"주변이 깨끗하군. 여긴 벌써 정리한 건가?"
"아닙니다. 저희가 성에 도착하자마자, 성문을 열고 투항했습니다."
"응? 기간트가 하나도 없었나?"
"그건 아닙니다. 50기 가까운 기간트가 남아 있었습니다."
"50기나? 그런데 그냥 투항했다고?"
"네."
공격하는 기간트가 35기인데 50기가 투항했다는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난 이곳에서도 크게 한바탕할 싸울 줄 알았다.
물론 우리에게 오리지널 기간트가 5기나 있었고, 기사들이 베테랑들이었기에 상대에게 승산은 없었겠지만.
"주력이 구형 기간트였나?"
"10여 기는 구형 기간트였고, 나머진 저희와 같은 기종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싸워볼 만했을 텐데······."
"저도 좀 의아했습니다."
"영주는 지금 어디 있지?"
"성 내에 감금시켜 놓았습니다."
"한 번 만나볼 테니까. 알현실로 데려오게."
"네!"
[발루아 성 알현실.]
"발루아의 영주 오를레앙이 타일러 후작님을 뵈옵니다."
중년 사내는 들어오자마자,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시오. 오를레앙 백작."
그는 40대 중반의 점잖게 생긴 사내였다.
"내 기사들이 왔을 때, 투항했다고 들었소. 기간트가 50기나 있었는데, 왜 그냥 포기한 거요?"
오를레앙 백작이 짧은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발레리온 영지군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록체스터 대영지와 싸워서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까. 대영지도 어찌하지 못하는 군대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없으니, 기사들의 목숨이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소? 대영지에 영지를 빌려주고, 발루아의 기간트도 20기나 참여했던데?"
오를레앙 백작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이 다 기간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석 산업 혁명 이후로 300년간 기간트 생산 기술은 대영지가 독점했고, 전력 차는 꾸준히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중급 영지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영지를 지켜야 하는 처지에서 대영지의 편을 드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기사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주시길 간청합니다."
오를레앙 백작은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나도 이해는 한다.
제국에 내 소문이 퍼지긴 했겠지만, 대영지와 견줄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어떠시오?"
"네?"
"이젠 내 힘을 알았으니, 내 편에 서겠소?"
오를레앙 백작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절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냥 기회를 주려는 거요. 왜 싫소?"
"그, 그건 아닙니다."
오를레앙 백작이 눈을 반짝였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약속은 해줘야겠소."
"말씀하십시오."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소. 힘 있는 자들이 다가와 나와 척을 지라고 시킬 것이오. 그땐 어떻게 하시겠소?"
오를레앙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그때도 힘 있는 자들과 나를 비교할 것이 아니오?"
"죄송합니다. 기사들과 영지민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난 피식 웃었다.
"이번에 나와 록체스터 대영지의 싸움에서 우리 전력을 어느 정도로 보고 있었소?"
"저도 사실 정보원을 보내 발레리온 영지의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기간트가 40기에 비공정이 11척이었습니다."
"그럼 지금 그 정보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겠군."
"물론입니다. 록체스터 대영지군은 300기나 넘는 기간트를 동원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졌다는 것은 발레리온 영지에 그보다 강한 전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소. 물론 보여주지 않은 전력이 더 있지만,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었지."
내 의미심장한 말에 오를레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게 말하지 않겠소. 지금 내 전력은 록체스터 대영지를 넘어섰소. 그러니 어떤 상대와 비교할 때,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난 주변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여기 오를레앙 영주가 앉을 의자를 가져와라."
"네!"
병사들이 나가자 오를레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를 영주라고 불렀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아니라, 조카에게 하시오."
"조카요?"
의자를 가져오자, 오를레앙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전 조카가 없습니다."
"오를레앙 백작에겐 조카가 있소. 위니어 엘리엇을 모르시오?"
순간 오를레앙의 눈동자가 커지고 손을 떨기 시작했다.
"위니어가 살아 있습니까?"
"아니오. 죽었소. 그리고 경의 여동생도 조카를 낳고 죽었소."
오를레앙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그리됐군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케니스 대영지로 보낸 것은 나쁜 선택은 아니었소. 하지만 케니스 대영지도 힘이 없긴 마찬가지가 아니오. 결국, 록체스터 암살자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위니어가 죽었고, 부인은 암살자들을 피해 시아버지가 있는 대수림으로 건너갔소. 거기서 아이를 낳고 죽었고."
이 이야기는 케네스 영감과 앨리슨의 이야기였다.
케네스 영감의 아들인 위니어는 집을 나갔다.
빛도 들지 않는 대수림 전진 기지의 삶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위니어는 케네스 영감보다 기간트 수리 실력이 뛰어났다.
그의 손을 거치면 웬만한 기간트는 새것처럼 만들 수준이었으니까.
헬다임 장벽 도시로 온 위니어는 부산물 시장에서 기간트 부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곳을 방문한 발루아 영주의 아들인 오를레앙은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영지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기간트 생산 기술을 연구했다.
능력 있는 위니어와 영지의 후계자인 오를레앙이 만났으니, 기간트 개발 속도는 진척이 있었고, 거의 기간트를 직접 만들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위니어와 오를레앙의 여동생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행복했고, 희망이 넘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발루아의 기간트 생산 정보는 록체스터 대영지의 귀에 들어갔다.
오를레앙은 부랴부랴 두 사람을 케니스 대영지로 보냈다.
하지만 케니스도 록체스터에 비하면 힘없는 영지였다.
그나마 케니스 가문이 황족의 후예라 록체스터가 건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결국, 케니스 대영지도 두 사람을 지키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도망쳤고, 위니어는 암살자의 손에 죽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여동생은 장벽 너머 대수림으로 향했고, 목숨은 구했지만, 앨리슨을 낳고 건강이 좋지 못해 생을 마감했다.
"크흐흑! 내 욕심 때문에 그 두 사람을 죽인 겁니다."
두 사람의 생사를 모르던 오를레앙 백작은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발루아의 기간트 생산 공방은 파괴되고, 자료는 모두 소각처리 됐다. 그리고 영주인 아버지는 이 일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고, 영주 자리는 오를레앙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마저 석 달 후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막냇동생은 록체스터에 볼모로 잡혀갔고 몇 년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기간트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주변 사람이 모두 죽은 것이다.
그 이후로 오를레앙 백작은 희망을 잃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서 발루아 영지를 묵묵히 지킬 뿐이었다.
"제 조카가 정말 살아 있습니까?"
"물론이오. 지금은 내가 잘 데리고 있소."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앨리슨은 아버지보다 뛰어난 천재로 잘 자랐지.
그 이후로도 난 오를레앙과 긴 대화를 나눴다.
희망을 잃은 사람치곤 대화가 잘 통했다.
"기사들과 귀족들도 모두 풀어줄 테니, 일단 영지를 안정시키고, 록체스터 대영지와 전쟁에 대비하시오."
"록체스터를 직접 치실 생각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싸우면 내가 이기겠지만, 지금은 저들의 영지를 고스란히 삼킬 내 세력이 부족하오. 기간트 공방도 모두 가져가야 하고, 그들이 관리하는 도시와 영지들도 모두 손에 넣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재가 필요하지."
척!
오를레앙 백작이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 발루아의 영주 오를레앙 블루아 백작은 타일러 후작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 맹세를 가슴 깊이 새기시오. 내가 기회를 주는 건 한 번뿐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난 오를레앙 백작을 일으켰다.
오를레앙 영주는 곧바로 영지의 귀족들과 기사들을 모아 회의를 시작했다.
난 하얀 악마 기사단과 병력을 철수시켰고, 비공정에 타고 발레리온 영지로 향했다.
"에테나, 어때 보여?"
"오를레앙 백작의 표정에서 희망이 엿보였습니다."
"희망이라, 좋은 징조군."
발루아 영지와 오를레앙의 사정은 모두 정보국에서 챙긴 기록에 잘 나와 있었다.
그랬기에 잘하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았기에 이곳에 직접 온 것이었다.
내가 영지를 점령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믿을 만한 부하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오를레앙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앨리슨에게 삼촌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
[발레리온 영지]
하늘에서 본 발레리온은 그 어느 때보다 부산했다.
기간트 공방으로 연신 부서진 기간트를 나르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엘프들의 거주 구역을 만든다고 바빴다.
영지전 때문에 한 달여를 쉬었기에 도시 건설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착륙장에 16척의 비공정이 꽉 차 있었고, 한 척은 접안할 곳이 없었기에 밧줄을 땅에 고정한 채 둥실 떠 있었다.
내가 탄 비공정 역시 접안하지 못하고, 영주관 앞 연병장에 착륙했다.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프레디 시장이 마중 나왔다.
"잘 됐어. 혹시 모르니까 발루아 영지를 감시할 사람을 보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
난 곧바로 내 집무실로 향했다.
"클린드 부국장, 오랜만이오."
"부국장이라니요. 정보국에서 잘린 지 6개월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오셨소? 내가 진작 사람을 보냈는데."
"그냥 맨입으로 갈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을 데려왔습니다."
클린드 뒤쪽엔 네 사람이 서 있었다.
둘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타일러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다들 이리와 앉게.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난 상석에 앉았고, 클린드와 네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도슨 대령, 자네도 잘렸나?"
"네! 클린드 부국장님 라인을 탔다가 같이 잘렸습니다."
난 피식 웃었다.
그때 클린드 부국장이 도슨 대령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슨, 말은 바로 하게. 내 라인이 아니라 타일러 후작님의 라인을 타서 잘린 거지."
"응? 내 라인이라니?"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국에서 타일러 후작님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은 다 잘렸습니다. 그게 타일러 후작님 라인이 아니고 뭡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보로스 추밀원장이 시안 7황자 라인에 한 발 걸쳐져 있는 나를 견제하기 위해, 나와 인연이 있는 정보국 내 사람들을 모두 잘랐다.
내 세력이 커질 것을 막으려는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이 모두 내 영지로 왔으니, 날 도와준 셈이었다.
"사실 타일러 후작님 라인을 제일 먼저 탄 것은 접니다."
파블로 중령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지?"
클린드가 물었다.
"제가 타일러 후작님의 능력을 가장 먼저 알아봤습니다."
"자네가?"
"헬다임 정보국 지부에 타일러 후작님이 소위 계급장을 달고 처음 왔을 때, 제가 그랬거든요. [자네 곧 진급하겠군. 나중에 나보다 계급이 높아지면 잘 좀 부탁하네.]라고 했죠. 그러니까 그때부터 전 타일러 후작님 라인을 탄 겁니다."
"뭐? 푸하하!"
다들 크게 웃었다.
기억이 난다.
내가 윌리엄 사령관의 눈에 들어 장벽 사령부로 파견됐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땐 그는 대위였었다.
"그런데 이제 백수가 됐네요."
파블로 중령이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앞으로 어디 가서 라인을 잘 탔다고 말하게 될 거야."
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들을 불러 모은 건 영지에 인재가 없어서였고, 함께 일했던 기간이 길었기에 그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클린드를 쳐다봤다.
"그대는 발레리온 영지의 백작이 될 거네."
"오! 백작의 작위를 주시는 겁니까?"
"물론이네. 그리고 외부 정세와 외교를 중점적으로 맡게."
사실 난 협상을 잘하진 못했다.
협박이라면 자신 있지만.
하지만 클린드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이용해 윌리엄 장벽 사령관과 거래해 헬다임 정보국 지부를 키웠고, 또 나를 이용해 찰스 정보국장 거래해 대수림 정보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부국장이 됐지.
그러면서 내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대수림 정보대가 잘 유지될 테니까.
"그리고 도슨은 남작의 작위를 주지."
"저도요?"
"클린드 백작의 평가가 좋아. 자넨 에일 영지로 가서 그곳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게 될 거야."
"제가 그런 중책을 잘할 수 있을까요?"
"처음엔 힘들겠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거네. 여기 파블로를 부관으로 임명할 테니, 함께 가게."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제 좀 영지가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인재가 너무 부족했기에 영지 운영은 사실상 프레디에게 맡기고 손을 놓고 있었다.
프레디는 잘하고 있지만, 능력에 한계가 오고 있었고.
앞으로 영지 내부 일은 프레디에게 외부는 클린드 백작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영주께서 영지전을 압도적으로 이기셨으니, 곧 황태자 측에서 대규모 사신단을 보낼 겁니다."
클린드에게 일을 맡기자마자, 그가 의견을 말했다.
148. 또 다른 세상으로.
148. 또 다른 세상으로.
"사신단이라······."
내 생각에도 황태자 측에서 사신을 보낼 것 같다.
록체스터 대영지가 우리를 계획적으로 노렸고, 그들이 다른 대영지보다 비공정도 빨리 받았으며, 심지어 2척이나 더 안겨줬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건 황태자 측이 방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부추긴 것이 틀림없었고, 차도살인의 계책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지전의 뚜껑을 열어보니, 록체스터 대영지는 우리 상대가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우리가 이겼으니, 어떻게든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어 할 거다.
그래서 사신단을 보낼 것이고.
"황태자 측에서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내 질문에 클린드 백작이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영주님을 회유하려 할 것입니다."
"다른 세력을 시켜서 날 죽이려 해 놓고, 회유를 한다?"
"원래 미운 놈 빵 하나 더 준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영주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았으니, 이것저것 많이 내놓을 겁니다. 금화도 주고, 십중팔구 공작의 작위와 함께 록체스터 대영지의 지위도 영주님께 넘겨준다고 할 겁니다. 어쩌면 6황녀와 혼담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6황녀?"
"황태자의 동생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몇 년 전에 시집갔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에 이혼했습니다. 그러니 타일러 영주님을 부마로 삼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허! 자기들이 벌써 황제가 된 것처럼 여기는군."
"수도와 황실을 장악했으니, 그리 생각할 겁니다."
이혼녀를 내게 붙여 줄 수도 있다는 말이네······.
씁쓸했지만, 권력을 갖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사람들이다.
살짝 머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황태자가 사신단으로 누굴 보낼지 알 것 같았다.
"보로스 추밀원장이 오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내가 고민하자, 클린드가 물었다.
"황태자와 손을 잡기 싫으신 겁니까?"
"당연하지! 누가 내 등에 칼을 꽂았어. 자넨 그런 자들과 함께하고 싶겠나?"
"하지만 지금 세력은 황태자 쪽이 제일 큽니다. 그 말은 황태자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제일 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거야. 한 4, 5년만 잘 버티면 황제도 무시하지 못할 힘이 생기는데, 지금은 조금 부족하거든."
"그럼 시안 황자 쪽에 서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영주님의 능력이 더해진다면 그쪽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7황자 세력이 제일 작으니, 그만큼 영주님을 우대할 거고요."
"그건 맞아! 내게 장벽 사령관 자리를 주겠다고 하더군. 그것도 10년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클린드 백작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질적으로 이득을 많이 챙길 수 있는 자리네요. 우리 영지에서도 아주 가깝고요."
"윌리엄 원수가 날 잘 알아. 난 자리나 명예는 필요 없고 당장 이득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좋거든."
"그럼 뭘 고민하십니까?"
"아직은 전면으로 나서고 싶지 않아서 그래. 당장 할 일도 많고."
"결과적으론 시안 황자의 편에 서서 황태자를 공격하겠지만, 당장은 아니란 말씀입니까?"
"맞네. 당장 할 일이 너무 많아! 남은 오리지널 거신 갑옷도 기간트로 만들어야 하고, 오크 거주지와 엘프 거주지도 완성해야 하고, 이번에 포획한 기간트도 수리해야 하고, 괴수 부산물도 벌어야 하네."
영지에 할 일이 많은 걸 클린드 백작도 알기에 나처럼 고민하고 있었다.
"잠깐! 내가 자리에 없으면 답을 주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네?"
"사신단이 올 동안 대수림에 가 있으면 되잖아."
도슨 남작이 물었다.
"혹시, 영주님이 없는 사이에 황태자 측이 우리 영지를 공격하진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 사신단을 보내는 이유가 뭐겠어. 당장 우리를 공격할 수 없기에 사신을 보내는 거야. 삼황자가 지금 바이마르 대영지의 병력과 2군단을 거느리고 수도 남쪽 도시에 주둔하고 있네. 황태자의 병력이 수도를 비운다면, 당장 밀고 올라올 텐데 병력을 움직일 수 있겠어?"
"아! 그렇군요."
지금 황태자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신단을 보내 날 귀찮게 하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자리에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럼 당분간 대수림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난민 기지로 연락을 넣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클린드 백작, 그대가 직접 가서 록체스터 대영지에 전후 복구 비용을 내라고 하게."
클린드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영지에 피해가 있습니까? 프레디 시장은 피해가 전혀 없다고 하던데요?"
"왜 없어? 내 마음이 아프잖아. 내 영지가 공격을 당했으니까."
"아!"
"최대한 받아내! 없는 피해도 만들고, 만약 주지 않으려 하거나 시간을 끌려고 하면 며칠에 한 번씩 10척의 비공정으로 저들의 영주성과 도시를 비행하면 알아서 줄 거야."
클린드 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제 보니 협상을 잘하시네요."
"이건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지."
"협상이나 협박이나 같은 겁니다. 힘이 있으면 협박이 낫죠."
"그런가? 그리고 이번에 기간트를 한 대라도 보낸 영지엔 전부 사신을 보내. 그리고 전쟁 복구 비용을 받아내도록. 거기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공정을 보내고."
"네! 이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뼛속까지 우려내겠습니다."
클린드 백작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기지 방어는 내 기사들에게 맡길 수 있었다.
오크 해병대를 태운 비공정도 있으니, 당분간은 하늘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고.
난 이번에 난민 기지로 가서, 혹시 모를 후계 전쟁과 가디언 제국과 전쟁에 대비해 오크 해병대와 드워프 포병대도 추가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현재 이곳엔 쿠훌린과 오크 해병대가 100명 정도였고, 난민 기지에 200명이 더 있었다.
그들도 이제 강습 갑옷을 지급 받았고, 충분히 연습했기에 실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워프 포병대는 내 영지에서 연습할 수 없었기에 난민 기지로 와서 계속 연습하고 있었기에 이번에 전부 데려갈 생각이었다. 이젠 실전이었다.
다음 날.
비에리 후작과 리오넬 대령은 개조한 오리지널 기간트 10기를 싣고 아리칸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제 오리지널 기간트 전력이 대폭 상승했고, 최신형 마석 배터리를 쓸 수 있었기에 기간트 효율도 좋아졌다.
동맹국이 강해져야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일의 대가로 난 14기나 되는 오리지널 마장기를 챙겼지만.
며칠 후.
난 엘프 비공정과 4척의 비공정을 인형의 집에 넣고, 에테나와 헬다임 장벽으로 향했다.
장벽 사령관인 매러덕 중장은 날 막지 않았다.
그리고 이계 난민들의 출입도 다시 허가했다.
이제 내 눈치를 보는 거지.
***
난민 기지로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장벽 가까이에 생긴 새로운 차원 균열에 들어가 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차원에 들어가 위험했던 적이 많았다.
세 곳 다 거의 멸망해 황폐해진 상태로, 대수림에 차원 균열이 생기고 거의 20년이 흐른 후였다.
그랬기에 괴수들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후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들어가려는 차원 균열은 생긴 지 몇 달 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니 아직 저쪽 세상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곳에서 얻을 것이 있다면, 미리 선점해야 했다.
그래야 다른 세력보다 앞서갈 수 있었다.
[차원 균열]
수백 미터 넓이의 이글거리는 거대한 차원 균열이 눈앞에 있었다.
이걸 다시 보자, 나도 살짝 긴장됐다.
"휴! 여기는 또 얼마나 황폐해졌을까요?"
차원 균열을 바라보는 에테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아직 이계 난민이 나온 건 아니니까. 오크 차원보단 덜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혹시 모르니까. 기간트에 타고 들어가자."
"네!"
오리지널 기간트를 꺼내서 타고, 차원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기이잉! 쿵! 쿵!
우린 또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 기간트 발이 푹푹 빠져요.]
여긴 사방이 모래였다.
[사막이네.]
우린 기간트에서 내려야 했다.
그러자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고 끈적한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기간트를 넣고, 괴조인형을 꺼내려다가 아예 엘프 비공정을 꺼냈다.
이런 태양 아래 괴조를 타고 다니다간 열사병에 걸리거나 머리가 타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비공정을 타고 무작정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공기는 맑은데요?"
"아직 이곳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희망을 품고 있을 때였다.
"저기 좀 보세요."
에테나의 뛰어난 시력에 뭔가 보였다.
사막 한가운데 큰 오아시스와 집들이 보였다.
그런데······.
적어도 수백 명이 살았을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건물 곳곳이 부서져 있었고, 도시 외곽에 나무로 만든 방책과 울타리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도 보였다.
특이한 것은 이곳 집의 크기가 인간들의 집보다 2배는 크다는 거였다.
"여긴 너무 늦었네요······."
"더 찾아보자! 아직 멀쩡한 마을이나 도시가 있을 수 있어."
비공정의 고도를 다시 높였다.
"어? 왜, 저기 대수림이 보이죠?"
나도 순간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사막이 끝나고 거대한 대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난 순간 이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내 생각엔 여긴 수인족들의 차원인 것 같아!"
"네? 하지만 아리칸 관문 근처에 차원 균열 내부는 폐허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아마 그쪽은 이미 괴수의 공격으로 인해 황폐화가 됐고, 이곳은 놈들의 공격이 이제 막 시작된 곳이겠지."
"이젠 어디로 가죠?"
한쪽은 사막, 한쪽은 대수림이었다.
"일단 사막과 대수림 경계를 따라가 보자."
자동인형들이 비공정을 몰았다.
"여기 대수림도 어마어마하게 크네요."
우리가 사는 대수림보다 더 원시 자연림처럼 보였다.
어떤 나무는 대수림의 거신목보다 컸고, 처음 보는 괴이한 거대 식물도 보였다.
그리고 암 드로운의 말처럼 이곳은 우리 차원의 대수림과 환경이 비슷했기에 마나가 사방에서 느껴졌다.
그럼 수인들도 기간트를 탈 수 있을까?
한참을 비행하다 대수림 초입에 개척촌을 발견했다.
"저기로 내려가!"
가까이서 본 개척촌은 처참했다.
원래 20여 미터의 거대 나무 울타리로 마을 전체를 둘렀다.
하지만 곳곳에 구멍이 뚫렸고, 바닥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수인족 차원이 맞네······."
시체의 정체는 3미터 크기의 뱀 수인과 2미터 크기의 토끼 수인들이었고, 괴수는 3미터 크기의 전갈 괴수였다.
개척 마을을 전갈 괴수들이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끔찍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괴수가 휩쓴 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린 괴수의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영주님! 검은 연기가 보입니다."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우린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메케한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그리고 대수림과 1km 정도 떨어진 사막 위에 커다란 붉은 성벽 도시가 보였다.
검은 연기는 붉은 성벽 도시 외부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벽 외부엔 해자가 있었고, 그 해자에 기름을 뿌려 불을 붙인 것 같았다. 그리고 불에 타서 죽은 수백 마리의 전갈 괴수가 보였다.
"괴수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어요!"
대수림에서 붉은 성벽 도시를 향해 수천 마리의 전갈 괴수가 달려들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
성벽 위에는 키가 2.5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여우 수인들이 전갈 괴수를 향해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성문이 부서졌고, 그 문을 향해 전갈 괴수들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영주님! 저기 보세요! 대군주에요!"
에테나가 경악했다.
대수림 끝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20미터 크기의 거신 괴수가 보였다.
"젠장! 여기도 시작됐군."
149. 수인족 차원.
149. 수인족 차원.
암 드로운이 우리 세상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저쪽 세상에 차원 균열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저들은 그 차원 균열을 통해 이곳 세상도 침공한 것 같았다.
성벽 안쪽엔 3.5미터 크기의 커다란 낙타 수인들이 긴 창을 들고 전갈 괴수들을 막고 있었고, 한쪽에선 3미터 크기의 사슴 수인들이 방패와 검을 들고 전갈 괴수를 막고 있었다.
눈에 마나를 뿜어내며 수인들을 쳐다봤다.
아쉽게도 수인들의 몸에선 마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수인들은 체격도 크고 무기도 능숙하게 잘 다루고 있었기에 괴수를 잘 막고 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괴수 숫자가 많아지자, 점점 밀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저대로 두면 전멸할 거예요!"
에테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키는 병력은 수백인데, 성벽 밖에서 달려오는 전갈 괴수가 수천이었기에 이들이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래 일단 저들을 돕자!
저 수인들이 나중에 내 이계 영지민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가자!"
난 비공정을 성벽 도시 안쪽에 착륙시켰다.
오늘은 저들이 죽을 운명이 아닌가 보다.
내가 왔으니까!
"모두 기간트를 꺼내라!"
괴수인형을 이용해 마법인형 기간트 군단을 꺼냈다.
그리고 비공정에 타고 있던 마법인형들을 모두 내리게 하고 기간트에 태웠다.
나와 에테나도 오리지널 기간트에 올라탔다.
[지금부터 우린 수인들을 도와 괴수를 막는다!]
[네! 주군!]
기이이잉! 쿵! 쿵! 쿵!
땅이 울리며 40기의 기간트가 성벽 입구를 향해 걸었다.
"@&#$^%?"
"@#$^!"
뒤에서 우리가 나타나자, 놀란 수인족들이 소리쳤다.
[새로운 언어를 탐지했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기아앙! 콰앙!
난 앞으로 달려가 전갈 괴수를 검으로 잘라버렸다.
3미터의 전갈 괴수는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새로 지급한 에테나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역시 달려드는 전갈 괴수를 날렵한 몸놀림으로 잡아내고 있었다.
[주군의 명이다! 괴수를 처단해라!]
[괴수에게 죽음을!]
쾅! 콰직!
웨슬리의 룩급 기간트가 전갈 괴수를 발로 짓밟았다.
11미터 기간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전갈 괴수는 몸통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마법인형의 기간트들이 괴수를 죽이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괴수를 죽이고 자신들을 돕는 것을 수인들도 알고 있었다.
"@#$@@!"
"&@#$#!"
[언어 분석이 끝났습니다.]
역시, 갓태창!
난 이제 수인족의 말을 할 수 있었다.
"거신 기사들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왔다! 힘을 내라!"
"괴수를 막아라!"
이들이 거신을 알아?
우리를 거신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암 드로운과 알리사 엘가가 말한 수인 차원이 분명했고, 거신들의 왕국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이제 알리사를 찾기 위해서 차원 마법진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차원 균열이 생겼으니까.
[우리가 입구를 막겠다!]
내가 수인족 말을 하자, 수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사들은 모두 성문 입구로 집결하라!]
나와 기간트들은 성문 앞에 2열로 서서 몰려오는 괴수를 찌르고 베어 넘겼다.
간혹 우리를 넘어간 괴수들은 뒤쪽에서 수인족 전사들이 처리했다.
그리고 성벽 위에선 여우 수인들이 계속해서 화살을 쏘고 있었다.
전갈 괴수의 몸통은 단단했기에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밀리지 마라! 버텨라!]
에테나가 소리쳤다.
기이잉! 쿵! 쿵!
열심히 거대 병기가 검을 찌르자, 기간트 앞으로 전갈 괴수의 시체가 높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기간트 높이 이상으로 쌓이자, 시야가 방해됐다.
[뒤로 물러나라!]
10미터 뒤로 물러서 시체의 언덕을 넘어오는 괴수를 막아섰다.
그렇게 몇 차례 뒤로 물러서면서 전갈 괴수를 죽이자, 점점 몰려오는 괴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
멀리서 거신 괴수의 울음이 들리자, 전갈 괴수들이 몸을 돌려 썰물처럼 물러갔다.
"괴수가 물러간다!"
"와아아아!"
수인들이 함성을 질렀다.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투에서 승리하자, 수인들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숙였다.
"거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거신을 찬양하라!"
위이잉! 철컹!
치이이이!
난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 거신이 아니네!"
"하지만 생긴 건 거신과 똑같은데?"
그들은 인간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때 수염이 덥수룩한 낙타 수인이 다가왔다.
그 역시 날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작은 거신이시여! 고맙습니다. 전 이곳의 시장인 퀜텀이라 합니다."
"반갑소. 난 타일러요. 차원 균열을 통해 이곳 세상에 넘어왔소."
"뭐요? 차원 균열에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퀜텀과 수인들이 경악했다.
"차원 균열에선 괴수만 나오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차원 균열은 2가지가 있소. 하나는 괴수가 들어오는 곳이고,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균열이오."
수인족이 자기들끼리 쑥덕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우리 차원으로 연결된 균열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이곳을 정리합시다. 괴수는 다시 올 것이오!"
"알겠습니다!"
이곳 수인들은 예의가 밝았다.
처음엔 우리를 거신들로 봤다가 지금은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으로 보고 있었다.
나와 마법인형들은 수인들과 힘을 합쳐 전갈 괴수의 시체를 치우고, 성문부터 보수했다.
대군주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괴수가 넘어왔다는 뜻이었기에 이곳 성벽 도시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나와 에테나는 퀜텀 시장의 집으로 향했다.
***
이곳은 3천여 명의 수인이 사는 성벽 도시 아르만.
대수림에서 나오는 괴수를 막고, 개척촌에 보급을 담당하는 거점 기지였다.
대수림 개척촌에선 주변 괴수를 잡고, 그 피와 부산물을 거점 기지로 옮기면, 이곳에선 그것들을 모아 거신들의 왕국인 코린트로 보내는 일을 했다.
퀜텀 시장은 매우 지쳐 보였다.
"전갈 괴수의 공격은 언제부터였소?"
"벌써 몇 달 됐습니다. 처음엔 작은 개척촌을 공격하다니, 이젠 주변 오아시스와 이곳까지 공격하고 있습니다."
"코린트 왕국에 도움을 청하지 그러셨소?"
"거신들은 세상일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신 용병도 있다고 들었소.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겠소?"
릴리안과 갈라그란트도 용병이었고, 거신 용병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 거신들이 우리와 섞여 살지만, 그 수는 매우 적습니다. 대부분 거신은 코린트 왕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코린트 왕국은 어디에 있소?"
"이 사막을 건너면 여러 개의 도시 왕국이 있고, 코린트는 그 도시 왕국 너머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마법사 알리사 엘가가 그 코린트 왕국으로 간 것 같았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모두 죽을 것이오. 그러니 모두 피신해야 하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그리고 아직 대수림엔 개척촌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버리면 수많은 개척촌이 보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대수림의 개척촌도 모두 철수해야 하오. 오늘 공격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괴수가 밀려올 거요."
"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내 말에 퀜텀 시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막 너머에 괴수들을 막을 만한 도시가 있소?"
"테오아칸은 성벽 길이가 수 km에 이르고, 이중 성벽에 성벽 높이도 50미터나 됩니다. 성벽 앞에 깊은 해자도 있고요."
"거기가 좋겠소. 개척촌과 다른 거점 도시에 연락해 테오아칸으로 피신하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제 말을 들을지는······."
"이미 다른 곳도 공격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오. 그러니 그들도 다가오는 위험을 알 것이오. 괜히 버티다간 차례로 무너질 것이오. 오늘만 해도 우리가 돕지 않았다면, 여기도 괴수를 막지 못했을 것이오."
"그건 그렇습니다."
퀜텀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거점 도시와 개척촌에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래도 퀜텀 시장이 내 말을 알아들어 다행이었다.
"그럼 난 코린트 왕국에 가서 거신들을 설득해 보겠소."
"거신들은 아마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이번엔 다를 거요."
이곳 차원이 망할 테니까.
난 에테나와 비공정에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바람도 잘 불고 마석 엔진도 풀로 돌렸기에 엘프의 비공정은 최고 속력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사막은 엄청나게 넓었다.
그랬기에 가끔 오아시스가 보이면 쉬었다가 가기도 하고, 사막을 오가는 수인 상인들도 만났다.
상인들은 괴수의 위협을 느끼고, 벌써 철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
[테오아칸]
그렇게 퀜텀이 알려준 방향으로 보름을 비행하자, 거대한 도시 왕국 테오아칸이 보였다.
이곳의 높은 도시 성벽은 어쩌다 불어오는 모래 폭풍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늘 위에서 본 테오아칸은 길고 거대한 도시였다.
테오아칸 도시 뒤쪽으론 푸른 숲과 들이 펼쳐져 있었고, 가끔 작은 마을이나 경작지도 보였다.
그리고 저 지평선 끝에 퀜텀 시장이 말한 코린트 왕국이 있다는 구름 산맥이 보였다.
저기까진 또 얼마나 걸릴까?
우린 일단 이곳 분위기도 살피고, 테오아칸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비공정을 인근 숲에 내리고, 인형의 집에 챙겼다.
그리고 에테나와 오리지널 기간트를 타고 도시로 향했다.
이곳에선 인간의 모습보단 기간트에 타고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퀜텀도 우릴 거신이라고 알고 있었고, 거신족은 어느 곳에나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척!
"거신이시여! 들어가십시오."
3미터 늑대 수인 경비가 고개를 숙였다.
나와 에테나는 성벽 안쪽으로 들어왔다.
성문은 거대했고, 거신이 드나들기에도 충분했다.
이곳엔 정말 다양한 수인족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 인구가 수만 명은 되겠어!'
테오아칸 남쪽으로도 마을과 도시가 있을 테니, 생각보다 수인들의 인구가 상당이 많아 보였다.
이 중에서 수천 명만 손에 무기를 들고 공격한다면, 웬만한 괴수는 그냥 잡을 수 있어 보였다.
길을 걷다 보니, 햇볕을 쬐며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 닭 수인도 보였고, 골목에서 뛰노는 개와 고양이 아이 수인도 보였다.
빨래를 널고, 저녁을 준비하는 여자 수인도 있었고, 근육질 맹수 남자 수인들이 무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종족은 달랐지만, 생활 방식은 인간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가끔 거리를 활보하는 거신들도 보였다.
그들은 릴리안이 말한 용병들이었다.
[느낌이 이상해요. 제가 전혀 다른 세상에 있다니!]
나도 느낌이 괴이하긴 마찬가지였다.
보름 만에 대수림에서 수인들의 대도시에 오다니.
아직 분위기에 적응하지도 못했다.
특이한 것은 수인들이 나와 에테나를 보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는데, 거신 용병들에겐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타일러님, 이제 어디로 갈까요?]
[저기가 좋겠어.]
난 인적이 많은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3미터의 표범 수인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지?]
"저희 테오아칸의 수왕께서 거신 기사님들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좋아! 가보지. 앞장서게.]
그들이 정중하게 부탁했기에 저들의 왕궁으로 향했다.
수인들이 크긴 했지만, 거신과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건물이 마치 거신에 맞춘 듯이 높고 넓었다.
왕궁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높은 천정이 우릴 맞이했다.
9미터의 기간트가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왕궁이라니!
난 아직 이곳 세상을 파악 중이었다.
수인족들이 과연 다른 차원을 멸망시킨 대군주들과 괴수들을 막을 수 있을까?
막을 수 없다면, 수인들을 영지로 옮겨야 하나?
이곳에서 내가 얻어 갈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쉴새 없이 밀려왔다.
4미터 크기의 사자 수인이 왕좌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거신 기사들께서 저희 왕국에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테오아칸의 수왕 라이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라이진 수왕이시여!]
"바쁘신 분들이니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마석 광산을 정체불명의 괴수들이 공격했습니다. 수백 명의 경비과 광부들이 죽었습니다."
이곳에도 마석 광신이 있다고?
일단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기간트 같은 거대 병기의 숫자가 늘어나고 비공정까지 마석 배터리가 필요했기에 마석 수요가 엄청나게 늘었지만, 점점 대수림에서 나오는 마석은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난민 기지 지하에 대량의 마석 광산이 있었기에 난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수백 미터 크기의 거대 비공정과 25미터의 초거대 기간트를 운용하려면 마석이 정말 많이 필요했다.
만약 이곳의 마석 광산을 내가 선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거대 괴수가 그곳에 알을 낳고 있습니다."
[거대 괴수요?]
150. 동맹은 어떠십니까?
150. 동맹은 어떠십니까?
테오아칸 왕국의 라이진 수왕이 말하길 거대 괴수의 크기는 무려 100미터.
그냥 어림짐작이란다.
광산 생존자들은 대부분 무지하게 크다고 입을 모았을 뿐이었고, 라이진 수왕은 놈이 둥지를 튼 내부 광산의 공동 높이가 300미터 정도 되고, 괴수의 키 높이가 동공의 삼 분의 일 정도 되기에 그리 짐작한 것이다.
실제론 더 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엄청난 크기군요.]
"그리고 거대 괴수를 지키는 작은 괴수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천여 마리 수준이지만 점점 그 숫자가 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빨리 토벌하지 않으면 그것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고, 이곳까지 몰려올 겁니다."
라이진 수왕의 이야기를 듣자, 난 놈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괴수는 여왕개미와 개미 군단.
크기만 봐도 여왕개미는 최소 SS등급 괴수다!
난 아직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 괴수였다.
그리고 SS급 괴수는 이쪽에선 멸망급 괴수라는 악명이 붙어 있었다.
멸망급은 단 한 마리로 한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거신들이 저희 수인들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론 왕국이 위험합니다. 토벌대에 두 분이 함께한다면 거신 용병들도 더 많이 지원할 것이고, 수인 병사들도 더욱 용기를 낼 겁니다."
멸망급이라면 이건 나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신 용병들이나 수인족 병사들이 토벌대에 함께 한다지만, SS급 괴수를 상대론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 정체를 밝히기로 했다.
위이잉! 치이익!
기간트에서 내렸다.
"전 수왕께서 생각하는 거신 기사가 아닙니다."
라이진 수왕은 날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 이계 거신이로군요."
"이계 거신이요?"
"동쪽에 오탈리마 왕국에 이계 거신들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키와 체구는 작지만, 거신과 같은 크기의 갑옷을 타고 다닌다고 해서 우린 이계 거신이라고 부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저 말고 이런 거신 갑옷을 타는 이계인이 있다는 말입니까?"
"네. 저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오탈리마 왕국에 꽤 많은 이계 거신이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난 순간 에테나의 기간트를 쳐다봤다.
에테나의 기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난 그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가디언 제국이 벌써 차원 균열로 들어왔구나!'
내가 가장 빠른 줄 알았건만······.
하긴 아리칸 왕국 장벽 근처에도 차원 균열이 생겼고, 가디언 제국 장벽 근처에도 차원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다른 왕국의 관문 근처에도 생겼을 거고.
그러니 나보다 먼저 차원 균열을 탐색한 자들이 있을 수 있었다.
실제로 아리칸 왕국의 사냥팀도 균열 내부에 들어가 둘러봤다고 했으니까.
라이진 수왕이 간절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쪽 분들이 거신이 아닌 건 이제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 거신 갑옷을 타고 다니니, 우리를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거신 갑옷에 타면 거신과 같은 힘을 쓸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이 거신 갑옷을 우린 기간트라고 부르죠. 이 기간트는 어떤 면에선 거신보다 더 낫습니다. 안에 탄 거신 기사만 살아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거신 갑옷에 탈 수 있으니까요."
라이진 수왕은 내 말을 듣고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혹시 그 이계 거신들이 왜 이곳에 온 건지는 아십니까?"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르지만, 소문엔 오탈리마 왕국과 마석을 거래한다고 들었습니다."
마석이란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가디언 제국이 왜 좋은 기회를 잡고도 아베르크 제국을 공격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지 알 것 같았다.
'마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어!'
이곳 차원 균열이 생긴 지 몇 달이라고 하지만, 발견된 것이 몇 달 전이지 훨씬 전에 생겼을 거다.
그리고 엘프 차원에서 비행석을 대량 확보했기에 차원 균열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안드레아스라면 이미 균열 안에 탐험대를 보냈을 것이다.
놈들은 이곳 차원에 마석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수왕의 말처럼 이미 거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쩐지 마석은 신경도 쓰지 않고, 비공정과 마장기를 마구 찍어내고 있더라니!'
이곳에서 마석을 수급해 마석 배터리를 대량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두 제국의 전쟁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짧아도 몇 주, 길면 몇 달, 어쩌면 몇 년이 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난 300년간 전쟁의 역사를 보면 한쪽이 멸망에 이를 정도로 길게 전쟁한 경우는 없었다.
마석 배터리나 전쟁 물자도 만들어야 하고, 부서진 기간트나 마장기도 수리해야 하니까.
'안드레아스가 이번엔 아예 끝장을 보려는 거군.'
장기전이라면 마석 배터리를 많이 가진 쪽이 훨씬 유리하다.
그리고 대수림의 마석 공급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고.
한 가지 궁금증이 더 생겼기에 라이진 수왕에게 물었다.
"오탈리마 왕국의 마석 광산의 매장량은 얼마나 됩니까?"
"저도 자세한 매장량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곳의 마석 광산들은 다 소형입니다. 대형 마석 광산은 우리 테오아칸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의 마석 광산이 훨씬 더 크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거대 괴수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데 수인들이 왜 마석을 캐는 겁니까? 보니까, 저희 같은 기간트도 없고, 마석을 쓸 만한 장치도 안 보이는데요?"
"마석이나 괴수 부산물을 코린트 왕국에 가져다주면, 우리가 쓰는 무기와 도구, 농기구, 가구, 각종 생필품 같은 것과 교환을 할 수 있습니다."
"아! 마석을 화폐처럼 사용하는군요."
"그렇습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대수림에 개척촌을 건설하고 탐험을 하는 이유 중에는 마석 광산을 찾아내기 위함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괴수를 잡고, 부산물도 얻고요."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또 물었다.
"무기나 도구 같은 것은 직접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라이진 수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밀어 보여줬다.
"우리 수인족의 손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겨우 무기를 들고 싸울 수준입니다. 도구를 만들고, 가구나 생필품을 만들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거신이 만든 무기는 매우 단단하고, 날카로워 괴수를 죽이기에 적합합니다. 그리고 도구나 생필품 또한 우리 손에 딱 맞춰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경제 시스템은 코린트 왕국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니 수인족 일에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기술도 모두 독점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가디언 제국은 코린트 왕국으로 들어갈 마석을 자신들이 가져가려는 것이다. 가디언 제국도 이들에게 무기나 도구, 생필품 등은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나중에 거신 왕국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어······.
"테오아칸의 마석 광산은 어디 있습니까?"
"이곳에서 일주일 거리에 커다란 오아시스와 암석 지대가 있습니다. 그곳 지하에 광산이 있습니다."
"일주일 거리면 매우 가깝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매장량도 상당합니다."
난 이제야 라이진 수왕에게 대답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는 먼저 그 광산과 거대 괴수를 확인하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산 입구를 보는 건 가능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순 없기에 거대 괴수를 보지는 못할 겁니다."
"일단 위치만 알려주십시오. 제가 입구만 보고 오죠."
"사막의 길은 찾기 어렵습니다. 제가 안내자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난 한 시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에테나와 왕국을 나왔다.
***
"배, 배가 하늘을 난다!"
"헉! 세상에 이런 일이!"
수인족들이 비공정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거신 용병들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우릴 쳐다봤다.
그들도 이런 건 처음 볼 테니까.
난 왕궁 앞 광장에 비공정을 착륙시켰다.
라이진 수왕이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게 대체?"
"이 비공정을 타면, 일주일이 아니라 하루도 안 돼서 광산 입구에 도착할 겁니다."
"오! 대단합니다. 내가 함께 가겠습니다."
라이진은 원래 길잡이를 따로 준비해 뒀지만, 비공정을 보자 우리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고오오오오! 위이이잉!
4미터에 체격이 큰 수왕은 갑판에 서 있지 않았다.
잘못하면 갑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수왕은 선미 갑판에 앉아서 사막을 내려다봤다.
"저쪽 차원의 기술은 훨씬 발전했군요."
라이진은 신기한 듯 비공정을 둘러봤다.
"만약 제가 거대 괴수를 퇴치하는 데 도움을 드린다면,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그래만 주신다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동맹은 어떠십니까?"
"동맹이요?"
"테오아칸 왕국과 제가 동맹을 맺는 겁니다. 그리고 마석 광산 개발을 저희가 독점하겠습니다."
"하지만 마석은 저희도 필요한 거라······."
라이진 수왕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테오아칸 왕국에 필요한 물자를 모두 제가 제공하겠습니다. 무기와 도구, 생필품도 만족할 만큼 드리지요. 마석은 지금 날고 있는 비공정에도 필요하고, 기간트를 움직일 때도 필수로 들어갑니다. 저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질입니다."
라이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곧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은 이번에도 우릴 돕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동안 한 번도 도운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계 거신들이 우릴 도와주고, 물자도 제공해 주신다면 마석 광산을 통째로 넘기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는 마석으로 필요한 물품을 사는 것뿐이니까요."
라이진 수왕은 흔쾌히 허락했다.
***
비공정이 광산 입구에 도착했다.
난 괴조인형을 꺼냈다.
"헉! 괴, 괴수가!"
거대한 괴조를 보자 라이진 수왕은 경악했다.
"제 명령 없인 헤치지 않습니다."
난 웃으며 괴조인형에 타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눈으로 마나를 뿜으며 지하를 살폈다.
그리고 머지않아 거대한 괴수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예상대로 거대 여왕개미였다.
여왕개미는 SS급 괴수답게 마석도 품고 있었고, 전신에서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컸다.
몸길이가 130미터 정도로 컸고, 주변을 지키는 20여 미터 크기의 병정개미도 보였다.
그리고 수천 마리의 거대 개미가 있었는데, 개미 괴수 한 마리가 3미터에 달했다.
'쩝. 이걸 다 잡으려면 내 마법인형으로 부족하겠는데······.'
그리고 여왕개미 후미에 푸른빛이 가득했다.
전부 마석 광맥이었다.
한 일 년만 꾸준히 캐내도 상당한 마석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을 살피고 괴조인형을 타고 비공정으로 향했다.
'이곳 차원을 지키는 게 이득일까?'
지금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거대 괴수를 잡고 마석만 캐고 끝이 아니었다.
라이진 수왕의 말로는 테오아칸만 십만 명의 수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후방에 마을과 도시, 거점 도시와 개척촌까지 인구를 더하면 수십만 명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시 왕국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거기에 옛날에 코린트 왕국에서 추방되거나 왕국에서 쫓겨 거신들의 후예인 거신 용병들도 있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
그들의 힘을 모두 모으면 이곳 차원을 지켜낼 수 있을까?
난 지금 이들을 도와 이곳 차원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적당히 이득만 챙기고, 살아남은 수인들을 데리고 영지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겠지······.'
조금 더 고민해볼 문제였다.
비공정으로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괴수가 예상보다 너무 큽니다. 어설픈 병력으로 공격했다간 당할 겁니다."
내 대답에 라이진 수왕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 방법이 있는 겁니까?"
"일단 제 병력을 불러와야겠습니다."
파이가 크니, 나눠 먹을 것이 많았다.
테오아칸으로 돌아가는 길.
선수 갑판에서 사막을 내려다봤다.
생각이 많아진다.
지금 나와 수인들만으로 저 SS급 여왕개미 괴수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신 용병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마나는 생각보다 형편없었다.
물론 제법 강한 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변변한 갑옷도 없었고, 무기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거신 용병이 도움은 되겠지만, 여왕개미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어.'
힘이 더 필요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마르틴 국왕의 아리칸 왕국이었다.
나와 동맹이고, 그들도 마석이 필요할 테니까.
물론 그것만으로 마르틴 국왕이 자신의 수족 같은 기사들을 동원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151. 거신의 후예.
151. 거신의 후예.
"영주님, 저들을 도와주세요."
"응?"
에테나가 내 옆에 섰다.
"고민하고 계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휴! 이번 일도 문제지만, 앞으로가 더 큰 문제야."
"그래도 수인들은 우리나 드워프, 오크들보다 훨씬 나은 상황입니다. 그들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자신들을 지킬 힘이 있습니다. 영주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괴수들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영주님께 충성을 다할 겁니다."
에테나의 말뜻은 알아들었지만,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엘프와 드워프, 오크 차원을 멸망시킨 놈들이다.
그런 놈들하고 싸워서 이겨야 했다.
과연 내가 돕는다고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곳 차원이 무사할 수 있을까?
성공만 한다면 지속적인 마석 공급도 가능하고, 수십만 명의 수인들이 내 명령을 따를 것이다.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당장 급한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숫자를 늘리고 있는 개미 군단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일단 수인들과 거신 용병들의 능력을 봐야겠어.'
여왕개미와 개미 군단과 싸우다 보면, 그들의 의지와 전투력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난 테오아칸에 돌아가자마자 라이진 국왕에게 병력을 이끌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에테나와 괴조인형을 타고 차원 균열로 향했다.
그리고 아리칸 왕국의 관문을 향해 날아갔다.
***
[아리칸 왕국]
"지금 마석이라고 하셨소? 마석이야 우리도 항상 부족하긴 한데······."
마석 이야기가 나오자, 마르틴 국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수인들의 차원에 마석 광산이 있습니다. 그들을 도와 거대 괴수를 잡는다면, 그 마석 광산을 제가 독점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그럼 아리칸 왕국에 마석을 저렴하게 공급하겠습니다."
마르틴 국왕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성공만 한다면야 우리에게도 이득이지만, 그 상대가 멸망급 괴수라면 너무 위험하오. 나와 기사들의 목숨을 걸기에는 충분하지 않소."
예상대로 마르틴 국왕은 마석 만으론 움직이지 않았다.
동맹의 영지를 지키는 일도 아니고, 원정 임무에 죽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동맹이라도 참전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비공정 3척을 더 드리지요."
마르틴 국왕의 눈빛이 살짝 반짝이긴 했지만,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하지만 아리칸 왕국을 움직일 결정적인 카드는 있었다.
"록체스터 대영지의 기간트 생산 공방을 그대로 아리칸 왕국으로 옮겨드리죠."
그 순간 마르틴 국왕과 기사들이 눈이 배로 커졌다.
협상은 이미 끝났다.
마르틴이 물었다.
"영지전에서 이겼다는 소식은 들었소. 하지만 대영지를 차지할 수도 있는 거요?"
"록체스터 대영지는 이미 우리 상대가 아닙니다. 기간트도 100여 기밖에 없고, 비공정이 단 3척뿐이지요. 물론 지금도 열심히 기간트를 만들고 있겠지만, 그 기간트에 탈 기사들이 부족합니다."
"그들을 언제 도모할 생각이시오?"
"길게 끌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에 수인족 차원에서 여왕개미를 잡고, 마석 광산을 안정시키면 바로 움직일 겁니다. 그러니 아리칸 왕국에 기간트 공방이 생기는 것은 늦어도 2년 안이 될 겁니다."
난 마르틴과 원탁의 기사들을 쳐다봤다.
"원탁회의가 필요하다면, 기다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소."
그때 마르틴 국왕이 벌떡 일어섰다.
"나와 크루세이더 기사단이 모두 출정한다. 기간트와 비공정을 준비하라!"
"네! 전하!"
아리칸 300년간의 오랜 염원이다.
그걸 내가 이루어 준다고 했으니, 기간트 100기가 문제겠는가.
사실 동맹의 강화를 위해 적당한 이득만 취하고 아리칸 왕국에 기간트 공방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 기간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난 영지에 들려서 비공정을 추가로 챙겼다.
그리고 거신들과 영웅 기사들, 트라스의 개 기사단, 엘프, 오크 해병대까지 이끌고 아리칸 관문을 넘어서 기다렸다.
그리고 장벽을 넘어온 아리칸의 크루세이더 기사단을 태우고 곧장 차원 균열로 향했다.
***
[테오아칸]
14척의 비공정이 테오아칸 상공에 나타나자, 도시의 수인들과 거신 용병들이 거리에 몰려나왔다.
전에 비공정 한 척을 본 것과는 달랐다.
고오오오! 위이잉!
비공정들이 차례로 지상으로 향했다.
기이잉! 쿵! 쿵!
기간트들이 연이어 왕국 앞 광장에 내리자, 그 모습을 본 수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마르틴 국왕의 13미터 퀸급 기간트 우가스를 보자,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비공정과 기간트가!"
라이진 수왕과 수인 지휘관들 역시 경악했다.
"제 병력이 이 정돕니다. 물론 저쪽 차원에는 더 많지요."
난 일부러 이 병력이 모두 내 것인 양 말했다.
어차피 수인들의 언어는 나밖에 모르니까.
암 드로운과 두 거신 기사도 내렸고, 영웅 기사들도 비공정에서 내렸다.
그리고 트라스의 개 기사들도 비공정에 내려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들도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수인들이 신기한가 보다.
"테오아칸의 병력은 얼마나 준비하셨습니까?"
"수인족 최고 전사 3,000명을 뽑았고, 거신 용병 100여 명을 고용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광산에 들어갈 수 있는 병력은 한계가 있었다.
이들은 광산 입구에서 개미 군단을 유인할 것이다.
그 틈에 크루세이더 기사단과 우리가 여왕개미를 칠 계획이었다.
테오아칸의 병력은 그날 바로 출발했고, 우리 병력은 비공정으로 이동할 예정이었기에 6일 후에 출발하기로 했다.
***
그날 밤이었다.
"타일러 주군을 뵈옵니다."
10미터 크기의 여 마법사가 내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알리사 엘가, 드디어 다시 만났군.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2년이 훌쩍 지났다.
그녀는 내게 거신들의 후손이 살아 있다면 그들은 데려오겠다고 했었다.
"죄송합니다. 그들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괜찮네. 이미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에 관해선 이야기를 들었네. 산맥 위에 자기들의 왕국을 만들고, 신처럼 군림하며 내려오지 않는다고?"
"휴! 그렇습니다."
그녀는 내게 코린트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알리사는 코린트 왕국에 도착하고, 그곳이 과거 이데아 제국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집들과 넓고 반듯한 도로가 있었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100미터 높이의 거대 장벽이 왕국 전체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인구는 많지 않았다.
코린트 왕국의 거신은 대략 1만 명 수준.
그들이 이곳 차원으로 건너온 숫자가 수백 명이었다.
정상적으로 인구가 늘었다면, 최소 그 수십 배는 있어야 정상이었다.
아무래도 코린트 왕국은 철저히 인구를 조절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왕궁으로 가지 않았다.
이곳은 왕궁이 없었다.
그리고 왕도 없었다. 그런데 왕국이란다.
코린트 왕국을 통치하는 그룹은 마탑이었다.
그리고 마탑의 원로들이 서로 이견을 조율하는 곳이 원로회였다.
알리사는 그 원로회에서 12명의 원로와 이야기를 나눴다.
알리사는 먼저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녀는 그들의 선조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그것이 궁금했었다.
코린트 원로들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과거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일부 기록이 남아 있었기에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순 있었다.
수백 명의 거신은 이곳 차원에 들어오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들이 사는 세상처럼 이곳도 마나가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쫓기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곳은 대수림이었고, 그곳엔 괴수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들 일행 중에는 거신 기사와 마법사들이 있었기에 괴수를 죽이고, 대수림을 벗어날 순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사막이었다.
이들은 대수림에서 괴수를 잡고 식량과 물을 준비해 사막을 건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푸른 땅에 도착했고, 그곳엔 어느 정도 지능을 가진 수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대 장벽처럼 거대한 모래사막이 대수림의 괴수로부터 이 수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물론 어쩌다 사막을 건너온 괴수들도 있었다.
수인들은 괴수를 막기 위해 나름 나무와 바위를 깎아 만든 무기로 대항했지만, 그 피해가 컸다.
그 모습을 본 거신들은 수인들을 돕기 시작했고, 이들과 함께 모여 살기 시작했다.
초기 거신들은 이곳이 집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들렸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다.
이데아 제국이 멸망하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거신들도 있었고, 메제트의 탑도 있었기에 차원 마법진을 이용해 자신들을 구하러 올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100년, 200년, 300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거신들의 수명이 길긴 하지만, 영원히 살 순 없었다.
거신들은 원래 세상의 거신들이 자신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 세상에 살기 위해 적응했다.
수인들은 굳이 대수림의 괴수를 잡아먹지 않아도 열매나 곡식, 그리고 작은 사냥감만으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거신들은 수인들보다 훨씬 많이 먹어야 했다.
특히 거대한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괴수의 피와 살을 먹어야 했기에 꾸준히 사막을 건너 대수림으로 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또 많은 거신이 죽었다.
숫자가 많지 않았던 거신들은 이대로 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숫자가 많은 수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수인들에게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주고, 그들이 대수림에서 괴수를 사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수인들은 평균적으로 3미터나 되는 키에 힘도 강했기에 잘만 훈련하면 중급 괴수까지는 충분히 사냥할 수 있었다.
처음엔 거신들도 수인들이 말을 듣게 하기가 쉽진 않았다.
수인들은 대수림과 괴수들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무집 대신에 벽돌집을 지어주고, 울타리 대신 괴수와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막을 수 있는 거대 성벽도 지어주었다.
지금 수인들의 도시는 대부분 그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수인들도 작은 무리로 모여 사는 것보다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큰 도시에서 뭉쳐 사는 것이 괴수로부터 자신들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인들은 이곳을 유지하기 위해 거신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수 세대가 흐르고, 거신들은 더는 사냥할 필요도 없었고, 성벽을 짓고 성벽 마법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마석을 채굴할 필요도 없었다.
수인들의 지능도 점점 진화했기에 이제 힘을 모아 괴수를 사냥했고, 그 괴수 부산물을 거신들에게 넘기고 도구와 무기 등을 받으며 스스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신들은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늘 기온이 일정한 구름 산맥 위에 터를 잡고, 성벽을 짓고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점점 발전했다.
거신들의 인구는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일을 주도한 자들이 리더가 됐다.
마법사들!
처음엔 기사들의 숫자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거신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마나의 재능을 보인 거신들도 늘어났다.
그랬기에 기사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마법사는 마나의 재능만 가지곤 될 수 없었다.
스승으로부터 철저한 교육과 마법의 재능이 합쳐져야 한 명의 마법사가 탄생했기에 마법사의 숫자는 많이 늘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대장장이의 일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유지했다.
마석을 다루고 마법진을 갑옷과 무기, 성벽에 새기는 등의 중요한 일을 마탑의 마법사들만 공유했고, 외부엔 절대 비밀로 했다.
그리고 이것은 꽤 효과적이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다시 수 대가 지나서였다.
거신들의 인구가 너무 많아진 것이다.
수인들이 잡아 오는 괴수 부산물의 양은 일정했기에 당장 늘릴 순 없었다. 그랬다간 황금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가르는 꼴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마법사들은 대수림으로 거신 기사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거신 기사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에 노출됐기에 괴수를 사냥하다가 죽은 거신들이 많아졌다.
거신 기사들의 숫자가 줄어들자, 마법사들은 권력을 유지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한쪽에만 부당한 압력이 계속 가해지자, 거신 기사들이 폭발했다. 그들은 마법사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고,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마법사들의 승리.
왕궁에 남아 있던 기사들이 마법사들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기를 들었던 거신 기사들은 모두 숙청됐고, 그 가족들도 죽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아이들까진 차마 죽일 순 없었다.
아이들은 추방됐고, 수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때 함께 떠난 거신들이 지금의 거신 용병들이었다.
코린트 왕국은 그 이후로 철저히 인구 조절을 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모든 마법과 기술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마법사들이 수인족들을 둘러보다가 마법에 자질이 있는 거신 아이를 발견하면 그들에게 마법을 몰래 가르쳐 주기로 했다.
코린트 왕국을 지배하는 마법사들끼리도 서로 다툼이 있었고, 마탑의 원로원 수장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능력 있는 마법사가 많아야 힘을 받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기에 가끔 외부에서 마나의 재능이 넘치는 제자를 찾기도 했다.
"그 마법사들이 내게 협력하길 거부했다는 거지?"
알리사 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법사지만 옛날부터 마법사들은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권력까지 가지고 있기에 아예 귀를 닫고 있습니다."
"씁쓸하군. 이 세계가 무너지면 자신들도 무너지는 것을······."
"그래도 그곳에서 장시간 머물면서 한 명의 원로를 포섭했습니다."
"응?"
"혹시나 주군께 필요할지도 모를 것 같아서요."
"그건 잘했군."
설득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다.
"고생했어. 며칠 후에 여왕개미를 잡아야 하니까, 그대도 철저히 준비하게."
"네! 주군께 제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번엔 거신 마법사의 실력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SS급 괴수를 잡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152. 개미 사냥.
152. 개미 사냥.
개미굴이 되어 버린 마석 광산으로 가는 길.
내가 탄 비공정엔 거신이 넷이나 타고 있었다.
긴장을 풀어줄까 생각해 에테나와 아래 갑판으로 내려가는데 거신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들은 긴장도 안 되나?'
SS급 괴수를 잡으러 가는 길인데······.
한 마디로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아래 갑판에 내려가 보니, 릴리안이 오빠 갈라그란트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도 피식 웃었다.
갈라그란트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상태로 기도하고 있었고, 여동생이 갈라그란트의 앞 머리카락을 뿔처럼 뾰족하게 세우고 있었다.
영지에서 비공정 강하 훈련을 여러 번 했음에도 그의 고소공포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알리사."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알리사가 활짝 웃었다.
"네."
"얼음 좀 만들어줘."
"네! 주군."
알리사는 정신을 집중하곤 입을 중얼거렸다.
"아이스 볼!"
쩌쩌적! 슈욱!
알리사 엘가의 손바닥 위로 지름이 50cm나 되는 얼음 덩어리가 떠올랐다.
"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마법이 실현되는 거죠?"
릴리안의 눈동자가 똥그래졌다.
알리사는 얼음을 내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곤 대답했다.
"평소에 한 가지 마법을 집중적으로 연습하면 돼. 특히 형상화하기 쉬운 마법을 하루에 한 100번쯤 시전하다 보면, 자다가도 바로 마법을 쓸 수 있지."
"허! 100번이요?"
릴리안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마나량으로는 100번은 어림없었으니까.
"릴리안,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다른 마법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일단 파이어 에로우만 줄기차게 연습하라고 했잖아."
"네······."
릴리안은 주둥이를 삐쭉 내밀며 대답했다.
난 알리사를 향해 살짝 윙크했다.
알리사도 날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릴리안이 얼음 마법이나 다른 마법도 배우고 싶다길래, 알리사와 미리 입을 맞춘 것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놈이 달리려고 하다니...
난 단검으로 알리사가 만든 얼음덩어리를 잘게 부쉈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얼음을 커피가 담긴 컵에 넣었다.
아이스 커피가 완성됐다.
얼음 마법사가 있어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거지.
시원해진 커피를 마시며 바닥에 앉았다.
"근데 다들 걱정되진 않아? 우린 지금 멸망급 괴수를 잡으러 가는 거야."
"주군께서 계시는데 무슨 걱정입니다."
바로 대답한 것은 암 드로운이었다.
그리고 알리사 엘가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도 타일러 주군을 믿습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움직이는 분이 아니니까요."
첫 만남에 내 의식을 들여다본 알리사는 이 중에서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이 가장 짧았지만, 날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계획은 있지만 통할지는 잘 모르겠어. 멸망급 괴수와 싸우는 건 나도 처음이니까."
"잘하실 겁니다."
알리사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스 볼!"
짜짜작! 슈욱!
"어? 성공했어요!"
"응?"
"어?"
우린 일제히 에테나를 쳐다보았다.
야구공 크기였지만, 에테나가 얼음 마법을 성공시켰다.
"뭐야? 에테나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방금 알리사님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했는데, 됐어요."
난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에테나는 거신 언어로 마법을 외친 게 아니었다.
그건 제국어였다.
알리사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
"마법을 펼치는데 시동 언어가 꼭 거신어일 필요는 없습니다. 언어가 주는 힘은 마법을 형상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거지. 필수도 아니고요. 그리고 에테나 경은 원래 정령 마법을 펼쳤던 경험이 있기에 마법을 형상화하는데, 유리한 것 같습니다."
"아! 맞아요!"
에테나가 맞장구를 쳤다.
"정령도 원래 이쪽 세상에선 형체가 없기에 계약자가 원하는 형상으로 나타나거든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수림에서 얼음이 필요하면 에테나에게 부탁하면 되겠구나!
마법 이야기가 나오자, 평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난 거신 갑옷에 있는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데, 다른 기간트 기사들은 왜? 사용을 못 하는 거지?"
난 오리지널 기간트에 탄 마키아스 단장과 펠릭스 단장에게 마법진 사용을 설명했다. 그들이 탄 기간트엔 내가 전에 새겨진 마법진이 있었고, 그들이 마법을 사용하면 당연히 우리 전력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법진을 사용하지 못했다.
거신 마법 시동어도 알려줬지만, 마법을 사용하긴커녕 감도 못 잡는 것 같았다.
"그건 마나의 재능이 다른 겁니다."
"하지만 마키아스는 나보다 더 마나량도 많고, 기간트를 움직이는 재능도 더 많은데?"
"하지만 마법은 다르죠. 그리고 주군께서는 암 드로운 경의 마나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았기에 몸속에 마나를 자연스럽게 기간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지만, 보통 기사들은 마나로 기간트를 움직이는 것이 한계입니다."
"아! 싱크로율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바로 납득했다.
난 암 드로운이 꼭두각시 마법인형이었을 때, 그의 몸에 자주 영혼 이동해 마나를 느꼈고, 또 그때 마나량이 몸에 많이 쌓였었다.
그러니까 난 마나의 재능을 암 드로운에게 받은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 마나를 보는 능력도 생겼고.
결과적으로 기간트에 새겨진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나와 여기 있는 거신들밖에 없었다.
그건 하나 아쉬웠다.
마나의 재능 있는 거신 용병들을 키우는 것도 괜찮겠네.
마법병단 같은 느낌으로······.
"영주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엘프 비행사가 알려왔다.
"다들 준비해!"
***
우린 광산 입구가 보이는 가까운 암벽 지대에 내렸다.
마지막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먼저 이틀 전에 이곳을 정찰하고 새로 그린 지도를 펼쳐 보였다.
"여왕개미가 있는 공동으로 향하는 길은 모두 세 군데입니다. 광산 입구와 여왕개미가 뚫은 구멍. 그리고 여기 우리가 새로 뚫을 구멍."
내 설명에 마르틴 국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타일러 경, 지금 암석 지대를 뚫겠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여왕이 있는 공동까진 300미터고, 알이 있는 방은 200미터밖에 안 됩니다. 기간트로 파면 한나절이면 가능합니다."
"개미 괴수들이 가만히 있겠소?"
"물론 놈들은 가장 가까운 광산 입구를 통해서 공격해 올 겁니다. 그래서 광산 입구에 우리 기사들과 오크 해병, 엘프 궁수, 거신 용병들과 수인들을 배치할 겁니다."
"그럼 우린 뭘 하면 되오?"
난 여왕개미가 주변 오아시스에서부터 사선으로 뚫고 들어간 구멍을 가리켰다.
"크루세이더 기사단이 들어갈 곳은 이곳입니다. 130미터 크기의 여왕개미가 파고 들어간 만큼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으니, 이곳을 통해 들어가 여왕개미를 잡는 겁니다."
"쉽진 않겠군."
"그럴 겁니다. 그곳은 병정개미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강력한 저항이 예상됩니다. 그리고 전 별동대를 이끌고 새로 뚫은 구멍을 통해 위에서 들어가 여왕개미를 공격할 겁니다."
마르틴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동작전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광산 입구로 개미 괴수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입구에 있던 병력도 여왕의 방으로 전진할 겁니다."
난 자세한 작전을 모든 지휘관에게 설명해줬다.
마르틴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작전은 타일러 후작만 세울 수 있는 작전이요. 나였으면 그냥 밀고 들어가서 어떻게든 결판을 냈을 텐데······."
"그럼 병력 피해가 더 커졌을 겁니다. 타일러 경의 작전은 지금 상황에선 최고의 방법입니다."
원탁의 기사이자, 마르틴 국왕의 아들인 비에르 후작이 말했다.
"하하! 내 아들놈이 타일러 후작에게 푹 빠져 있소. 왕궁에서도 어찌나 타일러 경과 발레리온 영지 이야기만 하던지······."
마르틴은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런 장남을 왠지 좋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알겠소."
난 크루세이더 기사들을 쳐다봤다.
"잘 들어라! 이건 아리칸 왕국의 후작으로 말하는 거다. 만약 전투 중 기간트가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개미굴 밖으로 나와야 한다. 기간트야 얼마든지 수리할 수 있으니 목숨을 소중히 해라."
"네!"
마르틴은 옆에서 미소를 지었다.
동맹이기도 하지만 아리칸 왕국 후계 서열 4위의 후작이니, 이럴 때 써먹으면 좋지.
"자! 그럼 모두! 위치로 이동한다!"
"개미 사냥을 시작하자!"
다들 작전 위치로 흩어지고.
자동인형과 꼭두각시가 탄 기간트 40기가 광산 위에 자리를 잡았다.
"시작해!"
[네! 주군!]
부웅! 콰앙!
웨슬리 자동인형의 기간트가 커다란 곡괭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다른 룩급 기간트들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쿠웅! 파팍!
땅이 파이고 바위가 깨졌다.
지금 이들이 가진 장비는 원래 난민 지기의 마석 광산을 파기 위해 만든 기간트용 채굴 장비였다.
우린 작업용 기간트를 탈 작업자가 부족했고, 마석 광맥은 지하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었기에 드워프의 힘만으론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일반 기간트를 동원했다.
그때 땅을 뚫기 위해 괴수 부산물로 만든 곡괭이와 삽, 망치를 이렇게 다시 쓸 줄은 몰랐다.
"좋아! 계속해!"
11미터의 거대 병기가 땅을 파기 시작하고, 9미터의 기간트들이 열심히 부서진 돌을 나르기 시작하자, 실시간으로 땅이 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 목적지는 개미 알이 있는 방이었다.
마석 배터리는 왕창 챙겨왔으니, 걱정은 없었다.
***
[광산 입구]
쩌엉! 쩡! 쩡!
땅을 내려찍는 진동이 광산 동굴 안쪽에서 계속 울렸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개미 괴수는 보이지 않았다.
[마키아스 단장, 이 정도면 개미들이 다른 데로 나간 거 아닙니까?]
타냐 블랙이 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 타일러 영주께서 이쪽으로 온다고 했으니,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런데 벌써 30분이 넘은 것 같은데, 아무 반응이 없잖습니까.]
[맞아! 타일러 영주님도 가끔 헛방을 칠 수도 있는 거지. 그냥 우리도 공격해 들어갑시다.]
서열 4위의 월터가 말했다.
그러자 서열 3위인 카고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대수림에서도 그렇게 먼저 설치는 놈이 가장 먼저 죽는다.]
[카고르의 말이 맞는다! 우린 명령에 따르는 기사다! 영주님의 명령은 이곳에서 나오는 개미 괴수를 잡는 거다!]
마키아스 단장이 말했다.
[근데, 그 개미가 안 보인다니까요.]
[아니! 온다!]
카고르의 말에 일제히 동굴을 쳐다봤다.
거대 동굴 안쪽이 점점 검은 물결로 가득 찼다.
그건 개미 괴수들의 그림자였다.
[와씨! 더럽게 많네!]
가장 먼저 정찰대 개미 괴수들이 몰려나오는 것이다.
"끼르륵!"
"따따다닥!"
광산 입구 밖으로 3미터 크기의 개미 괴수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마키아스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검을 높이 들었다.
[트라스의 개 기사들이여! 검과 방패를 들어라!]
[하아!]
입구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20기의 기간트와 거신 용병들이 반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그 바로 뒤쪽엔 수인족 전사 2천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늘엔 4척의 비공정이 100미터 높이에 떠 있었고, 비공정 갑판에 엘프들이 활과 화살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미들이 뚫어 놓은 작은 구멍도 있었는데, 그곳도 남은 수인족 전사 1,000명이 맡아서 지켰다.
"끼드득?"
개미 괴수들은 계속되는 진동에 더듬이를 새우며 소리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앞을 막고 있는 기간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탁탁! 우르르르!
"공격하라!"
"화살을 쏴라!"
엘프들이 먼저 비공정 위에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피슉! 피슉!
탱! 탱! 푹!
"끼악!"
화살에 뒷다리를 맞은 개미가 뒤뚱거리며 달렸다.
수십 개의 화살 중에서 개미 괴수의 몸에 박히는 화살은 많아야 두세 개.
정확도는 높았지만, 외골격이 단단하기에 대부분은 튕겼고, 힘이 제대로 응축된 화살만 박혔다.
그것도 깊숙이 박히지 않았기에 치명상은 아니었다.
이처럼 정령의 힘이 깃들지 않은 엘프의 화살은 약했다.
"계속 쏴라! 눈을 맞춰!"
마르실 족장이 계속 소리쳤다.
엘프들은 쉬지 않고 화살을 쐈다.
세계수의 씨앗이 발아하여 대수림의 거신목 위에서 빠르게 자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신목의 영양분을 세계수가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계수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는 날 정령 차원과 연결되고, 엘프는 정령의 힘을 되찾게 된다.
그때를 대비해 실전 속에서 옛 궁수의 실력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화살에 맞은 개미들은 속도가 느려진다.
우르르르!
화살 비를 뚫고 3미터의 개미들이 몰려온다.
[쓰벌! 더럽게도 많이 몰려오네!]
[정신 차려!]
[놈들이 온다! 막아라!]
마키아스 단장의 외침에 기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서며 방패로 막았다.
쾅! 콰콰쾅!
[공격하라!]
기이잉! 촤악!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검으로 개미 괴수의 머리를 갈랐다.
그리고 발로 또 다른 개미 괴수를 걷어찼다.
개미 괴수는 십여 미터를 날아가 꼬꾸라졌다.
기간트의 화력은 3미터의 괴수가 어찌할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개미 괴수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153. SS급 여왕개미.
153. SS급 여왕개미.
[거신 용병들이여! 전진하라!]
"괴수를 죽여라!"
"와아아아!"
쿠쿠쿠쿵!
100여 명의 거신 용병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트라스의 개 기사단의 뒤를 받쳤다.
거신 용병들은 창을 찌르고, 뭉툭한 철퇴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개미를 공격했다.
그들 대부분은 마나를 다루지 못했기에 기간트보다 위력은 약했지만, 거신의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괴력에 개미들의 몸이 뚫리고 머리통이 짓이겨졌다.
'잘만 훈련하면 기사들처럼 쓸 수 있겠어!'
마키아스는 괴수를 잡으면서도 거신 용병들의 움직임과 위력을 살피고 있었다.
이는 타일러 영주의 명령이었다.
발레리온 영지는 기간트는 많아도 늘 기사가 부족한 곳이었다.
개개인의 실력을 올릴 순 있어도 당장 기사 수를 대폭 늘릴 순 없었다. 하지만 영주의 말처럼 거신 용병들에게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주고 훈련해서 쓸 수 있다면 큰 전력이 될 것 같았다.
[놈들이 빠져나간다! 더 몰아쳐라!]
광산 입구는 매우 넓었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개미 군단을 기간트와 거신 용병이 전부 막을 순 없었다.
개미들은 대형을 뚫고 후미로 빠져나왔다.
그때 후미에 있던 라이진 수왕이 커다란 도끼를 들고 외쳤다.
"수인 전사들이여!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괴수를 잡아라!"
"와아아아!"
수인 전사들이 창과 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쉐엑! 푹! 푸푹!
개미 괴수 하나에 서너 명의 수인들이 붙었다.
3미터의 수인 전사들은 제법 잘 싸웠다.
타고난 힘과 민첩함으로 개미의 턱 공격을 피하거나 방패로 막고, 그 사이 뒤나 옆에서 창을 찌르고 도끼를 내려치면서 개미 괴수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마키아스 단장은 영주의 명으로 수인들의 움직임까지 확인하고 있었다.
***
그 시각.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사단은 반대편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기이잉! 쿵! 쿵!
육중한 기간트가 100기나 움직이고 있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여라!]
그들의 발소리가 거대한 동굴을 울리고 있지만, 그래도 타일러와 기간트들이 지상에서 곡괭이와 망치로 땅을 파고 바위를 부수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진군 소리가 조금은 희석되고 있었다.
[마르틴 전하! 우리가 여왕개미를 잡아야 합니다.]
마르틴 옆에서 나란히 걷던 비에르 후작이 말했다.
[타일러 후작에게 우리 아리칸의 힘을 확실히 보여줘야 합니다.]
[나도 안다. 그래야 이번처럼 우리를 필요로 할 테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기간트 공방도 중요하지만, 비공정을 더 얻어야 합니다.]
마르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틴의 오리지널 기간트 우가스가 반대쪽을 쳐다봤다.
[리오넬 대령, 타일러 후작이 비공정을 더 가지고 있나?]
그러자 리오넬 대령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비공정이 더 있을 겁니다. 그리고 비행석을 이용해 오크 해병대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 비행석도 더 있을 것이고, 최근엔 오리지널 기간트에 비행석을 장착한 것도 확인했습니다.]
[기간트에 비행석을?]
[행군 시에 기체를 가볍게 하여, 마석 배터리 소모량을 줄이는 기술입니다.]
[허! 그걸 그렇게도 쓰는군.]
[타일러 후작의 기술력은 머지않아 아베르크 제국이나 가디언 제국을 능가할 겁니다. 그러니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가야 합니다.]
발레리온 영지에 1년이나 있었던 두 기사의 말이었다.
[우리를 배신할 가능성은 없나?]
[전하께서도 타일러 후작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먼저 배신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마르틴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기간트의 힘만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비공정이 나타나 대비행 시대를 열었고, 이젠 다른 차원에 와서 마석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앞으로 또 어떤 신무기가 등장할지도 몰랐고,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몰랐다.
그리고 그 변화에 가장 빨리 적응하는 것은 타일러 후작이었다.
'그와는 끝까지 가야 해!'
마르틴은 그것이 아리칸 왕국이 이 변화의 시대에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다가옵니다!]
마르틴의 기간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라이트 불빛에 20미터 크기의 거대 병정개미들이 자신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크루세이더여! 눈앞에 괴수를 섬멸하라!]
[가자!]
기이잉! 쿠쿠쿠쿵!
우가스가 먼저 달려들어 기다란 낫으로 거대 병정개미의 다리를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그 뒤로 이번에 개조한 오리지널 기간트 5기가 도끼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리칸 왕국의 최정예 기사단에 오리지널 기간트 5기가 더해지자, 그 위력은 가히 태산을 가를 정도였다.
[후미는 놈들을 마무리해라!]
[공격하라!]
오리지널 기간트들이 앞서서 거대 병정개미들의 다리를 공격하고 뒤를 따르던 기간트들이 달려들어 몸통에 검과 창을 찔러넣어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는 거대 병정개미를 상대하기 위해 크루세이더 기사들이 생각한 작전이었다.
그렇게 이십여 마리의 병정개미들을 처리했다.
[휴! 이놈의 턱에 물리면 기간트도 잘리겠는데요!]
거대 괴수를 상대한 기사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쿠쿠쿠쿠!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개미 괴수와 병정개미가 섞여서 동굴 가득 몰려오고 있었다.
[자! 화끈하게 놀아보자고!]
마르틴 국왕의 우가스가 겁도 없이 낫을 들고 먼저 달려들었다.
왕이 저리 앞서서 달리니 뒤에 있는 기사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우리도 가자!]
[괴수를 잡아라!]
아리칸 왕국은 가장 강한 자가 앞서고, 가장 지위가 높은 자가 늘 선두에 섰다.
그것이 거대 제국과 큰 왕국들 사이에 살아남는 그들만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오늘 동맹과 함께 하는 전투는 아리칸 왕국이 한 걸음 더 앞으로 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