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1. 제가 누굽니까?

1. 제가 누굽니까?

미련이 남는 죽음이었을 듯싶다.

이렇듯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도는 걸 보면.

느낌도 감정도 없는 난 정처 없이 흘러간다.

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끝없이 끝없이 흘러 흘러간다.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컥! 커컥!"

숨이 막힌다.

밧줄이 내 목을 조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밧줄을 손으로 잡아당겨도 소용없었다.

내 몸무게에 눌린 밧줄은 더 강하게 내 목을 옥죄고 있었다.

눈앞이 노래지며, 의식이 멀어진다.

'죽음? 제길, 죽음인 건가······.'

그럴 순 없다!

다시 그 허무의 공간엔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살기 위해 몸을 흔들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

그때 뭔가 발끝에 걸렸다!

난 있는 힘껏 발을 휘둘렀다.

빡! 우지근!

쿠웅!

"커헉!"

막혔던 숨이 터졌다.

"콜록! 콜록!"

답답함에 내 목을 감싸고 있던 밧줄을 벗었다.

올가미 밧줄?

그리고 내 옆엔 부러진 사다리.

'뭐야? 방금 사다리에 목을 맨 거야?'

사다리가 부러져 쓰러지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따끔거리는 목을 잡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자, 주변이 보였다.

'여긴 어디지?'

높은 천장. 바닥 곳곳엔 은은한 빛을 내는 수정구가 박혀 있어 많이 어둡진 않았다.

바닥에 놓인 램프를 들어보니, 좌우로 늘어선 수십 개의 선반이 보였고.

그 선반엔 똑같은 크기의 상자 수백 개가 놓여 있었다.

여긴 거대한 창고였다.

생경한 환경에 살짝 당황했다.

그런데 난 누구지?

"윽!"

순간 머리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죽기 전에 기억이.

'하아! 결국, 막지 못했나······.'

거대한 섬광과 수백 개의 버섯구름.

천 명이나 되는 헌터 결사대.

내 마법인형 군단으로도 막지 못했다.

뭐가 인류 최강의 헌터들이란 말인가.

최악의 재앙, 초거수 카르마탄!

그 앞에 우린 그저 바람 앞에 등불이었을 뿐이었다.

'지구는 끝장났겠지?'

후회는 없었다.

20년이나 쉼 없이 싸웠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으니까.

어차피 동료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진작 다 죽었고.

'근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왠지 어색한 내 몸을 살폈다.

난 빳빳한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단추는 모두 은색에 검은 가죽 벨트를 하고, 검은 가죽 부츠를 신었고, 어깨엔 하나의 은색 줄이 그어진 견장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꽤 멋들어진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만든 헌터의 몸은 어디 가고, 깡마른 몸에 근육도 부실했다.

다만 오른손엔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여 있었다.

검을 썼었나?

분명한 건 이 몸은 원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이었다.

'설마, 환생? 아니 빙의인가······?'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진 평화로운 시절에 읽었던 웹소설이 떠올랐다.

아무렴 어때?

다시 살았는데!

헌터로서 인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나 아쉬움보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것이 기뻤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는가.

난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솔직히 인류의 존망을 책임지고 싶지도 않았다.

차원 균열이 열리며 어쩌다 보니 헌터가 됐고, 살려고 발악하며 버티자 S급 끝자리에 올랐을 뿐이었다.

'상태창!'

[타일러 빈스(23)]

[클래스 – 인형술사(F)]

[레벨 – 1]

[고유 스킬 – 운명의 실타래(lv.1), 기사회생(lv.1), 영혼 이동(lv.1), 병렬사고(lv.1)]

[인형의 집]

일단 상태창이 뜨자,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생소한 이름.

다행히 클래스는 그대로고, 헌터 등급은······.

'뭐? F급이라고?'

순간 당황했다.

헌터가 되고 20년간 괴수와 죽기 살기로 싸우며 올렸던 능력이 전부 초기화됐다.

게다가 내 마법인형들에게 흡수한 수백 개의 스킬도 전부 사라진 상태.

그 말은 지금 난 평범한 F등급 헌터 수준도 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휴우!"

하지만 괜찮다.

살아만 있다면, 등급이나 스킬은 얼마든지 올릴 수 있으니까.

내 헌터 클래스는 인형술사.

하지만 스킬은 흑마법사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헌터로 각성했어도 왕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

[운명의 실타래(lv.1) : 살아있는 생명체에 술사와 연결된 운명의 실을 부착한다. (0/300)]

사람의 몸에 가벼운 접촉만으로 가능했기에 이건 어렵지 않았다.

이 스킬로 연결된 사람을 인형처럼 조종할 수 있었다면 정말 최고의 클래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저 300미터 내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기사회생(lv.1) : 술사의 기력을 소모해 인형의 상처를 회복시킨다. (성공확률 – 25%)]

살아 있는 사람은 내 인형이 아니었기에 운명의 실로 연결되어 있어도 기사회생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의 실이 연결된 상태로 사람이 죽으면 기사회생 스킬을 쓸 수 있었고, 스킬에 성공하면 내 마법인형이 된다.

이 스킬 때문에 헌터들이 날 네크로맨서나 중국의 강시술사로 오인했었다.

[인형의 집]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인형의 집을 선택했다.

반투명한 창이 뜨면서 내 중심으로 작은 공간이 펼쳐졌다.

대궐 같은 인형 수납 아공간은 어디 가고 3평 남짓한 초라한 오두막 내부가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아!'

헌터 레벨과 등급이 올라가면 인형의 집도 자연스럽게 커지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나 내 마법인형은 하나도 없었다.

'한 번 가본 길이니, 크게 걱정은 없지만······.'

수족 같았던 마법인형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가슴 아팠다.

허수아비나 꼭두각시 인형이야 전장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지만, 자동인형이나 토우인형, 분신인형 등은 수년 이상 고생하며 키워온 것들이었다.

'뭐, 이젠 상관없나?'

새로운 몸을 얻었으니, 새로운 마법인형을 만들면 되는 일이다.

과거보단 미래에 집중하자.

'내 이름이 타일러 빈스······.'

상태창에 이름과 나이를 다시 확인했다.

23살.

무려 20년이나 젊어졌다.

개이득!

"윽!"

다시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늦게 자살하려던 이 몸뚱이 주인의 기억이 밀려왔다.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찌질한 자식, 여자 때문에 자살이라니······.

타일러 빈스.

테레니스 영지의 영주인 개리 해링턴 빈스 백작의 장자였다.

하지만 사생아.

사냥에 나갔다가 폭우를 피해 들른 마을의 처녀와 정을 토하고 나온 부정의 열매.

뒤늦게 아들로 인정받아 장자가 됐지만,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며 암살 위험을 피하고자 석 달 전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타일러가 죽을 이유는 많았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 엄마는 병으로 죽었고, 백작부인과 배다른 동생들은 대 놓고 자신을 무시했으며, 가신이나 기사는 고사하고 병사들이나 시녀들조차 아무도 자신을 빈스 가문의 핏줄로 인정하지 않았다.

매일 검을 잡고 죽을 만큼 노력했지만, 재능이 없었기에 무예도 별로였고, 마나도 깨우치지 못해 기간트에 타지 못하니 전략적 가치도 없었다.

게다가 머리도 좋지 않아 글만 겨우 깨우쳤고, 세상 물정에도 매우 어두웠다.

처음에 타일러를 장자의 자리에 앉히고 유심히 지켜보던 개리 해링턴 영주 역시, 전장의 검은 사자라 불리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자 방관했고, 이제 이 세상에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타일러가 진짜 자살을 결심한 것은 한 장의 파혼 통지서였다.

공작가의 파티에서 단 한 번 봤을 뿐인데, 영혼까지 빼앗아 가버린 여자.

샤를린 위네즈.

그녀는 톰 위네즈 자작의 다섯째 딸로 타일러가 사생아임을 알면서도 빈스 가문과 사돈이 된다는 말에 청혼을 허락했고,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하지만 최근 타일러가 후계에서도 완전히 밀리고, 자진해서 입대까지 하자, 파혼을 요구했다.

'병신!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여자가 반인데, 자살이라니······.'

게다가 암살이 두려워 도망친 곳이 군대.

전생에 만기제대하고 하루 만에 차원 균열이 발생했고, 괴수와 쉼 없이 20년을 싸웠다.

그런데 다시 군대라니!

타일러가 성격이 나쁜 사람이나 망나니는 아니었지만, 소심하고 찐따 같은 녀석이었기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제 내가 타일러고, 타일러가 곧 나인 것을······.

타일러의 기억을 온전히 내 것으로 인정했다.

저벅! 저벅!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서류 하나 찾아오라고 했더니, 뭘 이렇게 꾸물거려?"

견장에 2개의 은색 줄.

날카로운 인상에 작은 눈.

그는 내 상관인 더블란 중위였다.

"어?"

더블란이 나를 보곤 멈칫했다.

그가 내 옆에 놓인 올가미 밧줄과 부서진 사다리를 번갈아 보더니 인상을 확 찡그렸다.

"야! 너 이 새끼, 지금 누구 인생 망치려고 작정했어? 여기서 네가 죽으면, 씨발! 사수인 내가 좆 되는 거야! 우리 대장도 망하는 거고. 아! 혈압 올라!"

더블란은 정말 혈압이 올랐는지 자기 목덜미를 잡았다.

난 잔뜩 흥분한 사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누굽니까?"

"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뭐라고?"

내 말에 더블란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난 기억상실증을 연기하기로 했다.

솔직히 나도 내 과거가 쪽팔렸으니까.

2. 전출.

2. 전출.

"그러니까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단 말이야?"

"네. 제가 누군지, 이곳이 어딘지, 부모님과 가족이 누군지도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하아!"

더블란은 땅이 꺼질 정도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평소 타일러는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는 어리숙한 사내였기에 내 말이 거짓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는듯했다.

"쓰벌, 좆 됐네. 난 더블란 중위다. 네놈 상관이고, 너는 타일러 빈스 소위다. 기억해라."

"네."

"너 이 새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앉아 있어. 아무래도 대장님께 보고해야겠다."

더블란은 날 혼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여긴 3층 구석에 있는 내 집무실.

내부는 좁았으나 깔끔했고, 책상과 의자, 책장, 옷걸이가 하나씩 있었다.

더블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일어서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와! 공기 죽이네."

이런 신선한 공기가 대체 얼마 만인가.

마치 숨만 쉬어도 건강해지는 느낌.

'개새끼들 핵은 쓰지 말라니까!'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부아가 치밀었다.

초거수를 공격한 수백 개의 핵폭발 위력은 강력했지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지구 멸망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문제는 폭발의 영향으로 지구 곳곳에 화산이 터졌고, 지진이 발생해 피해가 몇십 배나 커졌다는 것이다.

백두산이 터져 한반도가 화산재에 뒤덮이고, 중국과 일본의 화산들이 연이어 터지고, 지진과 쓰나미로 초토화된 것도 이때였다.

게다가 카르마탄은 죽지도 않았고.

'멍청한 정치인들부터 싹 다 죽였어야 했는데······.'

녀석들 때문에 지구 멸망이 가속화됐기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일을 떠올려서 뭐하겠는가.

이제 난 헌터 고강해가 아니라 타일러 빈스 소위다.

내 이름을 다시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중세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이 들어왔다.

건물 바로 앞엔 넓은 정원이 있었고, 담장 너머엔 커다란 광장이 보였다.

광장 가운데 분수가 뿜어지고, 주변엔 찻집이 줄지어 있었다.

사람들은 찻집 테라스에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대화하고 있었다.

'세상 평화롭네······.'

푸드드득!

광장 위로 비둘기 무리까지 날아오르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왠지 이런 세상이라면 여유롭고 즐거운 중세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긴 전생에 그만큼 싸웠으니, 이젠 좀 쉴 때도 됐지.'

이번 생은 욕심부리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저 내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헌터 능력.

그리고 수도에 3층짜리 저택 하나와 땅도 조금 사고.

집안일은 해야 하니까 하인도 몇 명 두고, 결혼도 해야 하니까 돈도 좀 벌어 놓고, 번화가에 찻집이나 몇 개 차려, 노후 대책도 좀 하고.

아니면 영주나 한번 해봐?

이 몸의 아버지도 영주였다.

그가 옆에서 본 영주는 한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었으니, 전생에 해보지 못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기로운 이계 생활을 그려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내 몸뚱어리 수준으론 중세 라이프를 즐기긴커녕 뒷골목 강도를 만나도 죽을 판이었다.

게다가 영지에서 도망쳤다고 해도 백작부인이 날 가만히 놔둘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우선 나를 지킬 마법인형부터 만들어야 했다.

나머진 그다음이었고.

문제는 마법인형을 만들기 위해선 운명의 실에 연결된 상태로 방금 죽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걸 어디서 구하지?'

전생엔 사방이 전쟁터였기에 어디나 상관없었지만, 이곳은 제국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제2의 수도라 불리는 할데가르.

황제의 직할 영지이자, 헬다임 장벽에서 나오는 괴수 부산물과 마석을 가공해 기간트를 만드는 황실 공방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추밀원 소속의 정보국 본부가 있는 곳으로 치안이 매우 안정된 곳이다.

한 마디로 마법인형을 만들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쓰읍! 장벽으로 가야 하나?'

전생에 괴수와 지겹게 싸웠지만, 마법인형을 만들기 위해선 사람이 죽어가는 전장으로 가야 했고, 여기서 제일 가까운 전장이 헬다임 장벽 너머였다.

하지만 난 정보국 소속 장교.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데······.

쾅!

"동작 그만!"

더블란 중위가 발로 문을 차고 들어왔다.

"너, 이 새끼! 방금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지?"

"아닌데요."

"아니긴, 창문에서 물러서!"

내가 한발 물러서자, 더블란 중위가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당장 여기서 나가!"

종이를 건네받았다.

[전출명령서]

헬다임 장벽 도시로 가라는 명령서.

내 소속 부대장인 슈나인 중령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지금 가는 겁니까?"

"그래! 광장을 가로질러 가면 기차역이 있다. 그곳에서 2시간 후에 헬다임으로 가는 열차가 있으니, 그걸 타라!"

"하지만 짐을 챙기려면 시간이······."

"네놈 숙소에 있는 짐은 따로 부쳐주겠다. 그러니 당장 이 도시에서 사라져!"

옷걸이에서 정모를 꺼내 쓰고, 허리에 검을 찼다.

그리고 도끼눈으로 노려보는 더블란에게 경례했다.

"충! 그럼 가보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꺼져!"

난 그길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어째 일이 잘 풀리네.'

하긴 슈나인 중령도 똥줄이 탔겠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은 치워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여기서 시한폭탄은 나고.

지금 제국의 실세는 추밀원이었고, 정보국은 그런 추밀원의 중추 기관.

이곳은 황제의 눈과 귀가 되어 제국 전역을 감시하고 정보를 모으는 곳으로 미국의 CIA 같은 곳이었다.

황립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 내가 엘리트들만 온다는 정보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슈나인 중령의 의도였다.

내 아버지는 제국 남부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

최근 테레니스 영지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었기에 장자인 내게 영지의 정보를 빼낼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장자였지, 사생아에 힘도 능력도 없는 타일러가 영지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계속된 회유에도 알아내는 것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치워버렸을 테지만, 그래도 개리 해링턴 빈스 백작의 핏줄이니, 볼모로서 이용 가치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자살을 시도하고 기억상실증까지 걸리자,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잘못되면 모두 슈나인 중령이 책임져야 할 테니까.

'열차 여행이라······.'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

[할데가르 역]

수도 에르가드와 8개의 대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는 그야말로 제국의 젖줄이었다.

마력 엔진 열차 한 대로 수백 톤의 물자를 나를 수 있었고, 수십 톤이나 나가는 기간트를 여러 대 옮길 수도 있으며, 제국에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이용 가격이 비싼 편이라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지만.

'으리으리하군.'

망하기 전 서울역이 이 정도였을까?

철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제국 최대 규모의 기간트 공방이 같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역 규모는 매우 거대했다.

"헬다임, 삼등석 한 장 주세요."

역무원이 날 보고 움찔한다.

솔직히 기분이 별로였다.

역으로 오는 내내 사람들은 나를 보면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여기 있습니다."

열차표와 거스름돈을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등석 표를 잘못 주셨네요."

"아, 아닙니다. 정보국 장교의 경우 이등석에 남는 자리가 있을 땐, 업그레이드해드리는 것이 관행입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정보국이 좋은 점도 있구나.

출발 시각은 좀 남았지만, 바로 열차로 향했다.

"거기 조심해!"

"천천히!"

치이이익! 쿵! 철컥!

일꾼들이 1.5m 길이의 묵직해 보이는 원통을 엔진 옆에 꽂는다.

마석 배터리다.

저게 없으면, 이 커다란 열차는 그저 깡통에 불과하다.

그건 기간트도 마찬가지.

인간의 마나만으론 한계가 있으니까.

'마석 배터리가 열여섯 개나 들어가네.'

열차가 비싼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열차는 폭이 상당히 넓었고, 바닥에 레일이 3개였다.

이건 기간트 때문이었다.

제국의 철도와 열차는 기간트를 쉽게 옮기고자 만들어졌고 발전해왔다.

'무슨 병사들이지?'

플랫폼에 많은 병사가 보였고, 그들은 열차를 타는 사람들의 신분증과 짐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 열차에 아주 높은 사람이 탄다.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더 안전하고 좋지.

"충! 실례하겠습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십시오."

신분증을 꺼내, 병사에게 내밀었다.

병사가 내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장교가 다가와 병사에게서 내 신분증을 뺏어 들었다.

"정보국 장교께서 이 열차엔 무슨 일이십니까?"

군청색 제복에 은색 줄이 3개.

대위였다.

"헬다임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전출명령서를 꺼냈다.

대위는 명령서와 신분증을 자세히 살펴봤다.

"할데가르에서 헬다임 장벽으로 전출이라······."

말끝을 흐렸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좌천이냐는 거겠지.

할데가르는 정보국 본부가 있는 곳이고, 헬다임은 제국 최변방 오지였으니까.

"이제 됐습니까?"

"아! 여기 있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네. 그럼."

내 계급은 소위였지만, 대위도 함부로 하진 않았다.

난 열차로 올라와 자리에 앉았다.

이등석은 방처럼 되어 있었다.

한 방에 총 4명이 쓸 수 있었고, 의자가 침대나 마찬가지였기에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도 있었다.

헬다임까진 일주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고, 당연히 열차에서 먹고 자고 해야 했지만, 삼등석은 자리도 좁고 퀴퀴한 냄새도 살짝 났다.

이 세상도 서민은 고달픈 인생.

물론 이 열차에 탔다는 것은 그래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참고로 가도를 따라 이동하는 역마차를 이용하면 이십 일이나 걸린다.

'근데 내가 무슨 괴물인가······.'

이등석까진 지정 좌석이 따로 없었기에 먼저 앉는 것이 임자.

그런데 난 혼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날 보자 움찔거리며 다른 자리로 이동했고, 반경 10미터 이내엔 사람이 없었다.

어째 추밀원의 정보국이 미국의 CIA가 아니라,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 같은 느낌인데?

아무튼, 덕분에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삐이이이익! 삐이익!

출발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열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한번 둘러볼까.'

자리에서 일어서 삼등칸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신분증을 다시 검사했다.

정보국 장교가 좋긴 좋아.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졸지에 신분증 검사를 2번이나 받은 똥 씹은 표정의 승객들과 일일이 악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운명의 실타래(lv.1)를 연결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안전제일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백작부인이 군대에 있는 날 죽이려 사람을 보내거나 감시자를 붙였을 수도 있으니까.

이등석과 삼등석, 역무원까지 주변의 사람들과 운명의 실을 연결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운명의 실타래 – 219/300]

생각보다 승객이 많진 않았다.

이제 난 나와 연결된 200여 명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헬다임까지 중간에 서는 역은 단 하나.

이들은 당분간 나와 기차 여행을 함께 할 사람들이었고, 운명의 실을 연결만 하고 있어도 스킬 경험치가 오른다.

일등석도 한번 구경해보고 싶었지만, 입구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그냥 돌아왔다.

철컹! 철컹!

'기차 여행이라, 낭만 있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자, 폐허가 된 지구와 끔찍했던 전생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떴다.

그만 좀 떠올라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열차는 빠르진 않았다.

시속 60km 정도?

전생에 KTX를 타본 사람들이라면 답답해 속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 풍경을 보기엔 딱 적당한 속도.

푸른 숲과 저 멀리 우뚝 솟은 산들이 보였다.

북부의 산과 숲은 타일러의 고향인 남부의 평야와 다른 멋이 있었다.

'어라? 이것들은?'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삼등칸에서 두 명이 움직였다.

화장실을 가는 사람도, 식당칸에 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뭐야? 스파이더맨이야?'

하나는 열차 지붕에서 다른 하나는 열차 바닥에 매달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검 손잡이를 잡았다.

아무리 지금 내 몸뚱어리가 허접스러워도 20년이나 헌터로 구르며 괴수와 싸운 나였다.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여차하면 일등칸으로 도망갈 수도 있고.

최단 루트라면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려나?

스르릉!

검을 뽑고 잔뜩 긴장했다.

'어라? 그냥 지나가네?'

두 놈은 내 자리를 지나쳐 식당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 일등칸으로 향하는 거구나!

이 열차엔 상당히 높은 사람이 탄 것은 분명했다.

이놈들은 그 귀빈을 노리고 있었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아니지! 이럴 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다면?'

진급이란 두 글자와 슬기로운 이계 생활이 눈에 아른거렸다.

3. 귀빈.

3. 귀빈.

어차피 입대한 이상 팔다리가 잘리거나 전사하지 않는 한, 앞으로 3년 9개월은 꼼짝없이 군대에 있어야 했다.

계급이 높아지면, 이동도 자유롭고 좀 더 편해지겠지?

지금 내 몸 상태로 암살자 놈들을 직접 상대하는 건 위험하니, 병사들에게 암살 정보를 알려주는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았다.

검을 집어넣고, 놈들을 뒤쫓았다.

그러다 식당칸 입구에서 멈췄다.

'어라? 이 녀석들도 한패야?'

식당칸은 2개였고, 중간에 칸막이로 막힌 주방이 있었다.

그런데 열차 위아래 있는 스파이더맨들이 이 주방 위치에 멈춰 안에 있는 두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기를 건네는 건가?

나와 운명의 실타래로 연결되어 있으면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자세한 동작까지는 알 수 없었기에 긴가민가했다.

잠시 후.

주방에서 흰옷을 입은 두 종업원이 나와 캐리어에 음식을 담고, 일등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놈들을 따라 움직였다.

'확실히 이놈들도 수상해!'

스파이더맨들이 종업원들과 위치를 맞춰서 이동하고 있었기에 이놈들도 한패가 분명해 보였다.

일등칸 앞엔 다섯 명의 병사가 있었다.

"정지!"

두 병사가 캐리어 내부를 수색하고 종업원들의 몸을 뒤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통과시켜."

아무 이상 없다고?

무기가 어디 있을 텐데?

두 사람이 일등칸으로 들어가자, 나도 더 기다릴 순 없었다.

내 등장에 병사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앞을 막아섰다.

"장교님, 이 앞으론 갈 수 없습니다."

"너희 상관을 불러라!"

"네?"

"암살이 있을 거라는 첩보를 받았다. 어서 상관을 불러!"

"암살이요?"

드르륵!

그때 일등칸 문이 열리고 한 장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열차에 타기 전 나를 검문했던 그 대위였다.

"응? 당신은?"

"저기다! 저놈들이 암살자다!"

난 두 문 사이로 살짝 보이는 종업원들을 가리켰다.

이미 두 종업원은 일등칸을 거의 지나 특실이 있는 특등칸 문 앞까지 간 상태였다.

"암살자?"

대위가 고개를 돌려 문을 활짝 열었다.

"거기! 잠깐 멈춰라!"

대위가 소리치자, 특등칸 앞을 지키던 세 병사가 두 종업원 앞을 막아섰다.

"자! 이제 무슨 일인지 설명을······."

그때였다.

두 종업원이 캐리어 손잡이를 돌려 당겼다.

그러자 끝이 뾰족한 칼날이 딸려 나왔다.

푸푹! 푹!

"컥!"

"크헉!"

목에 칼침을 맞은 병사들은 허무하게 쓰러졌다.

"암살자다!"

대위가 소리치며 총알처럼 달려나갔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이미 특등칸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잡아라!"

나와 병사들도 검을 뽑고 특실을 향해 달렸다.

생각보다 암살자들의 실력이 뛰어났다.

'이거 귀빈이 죽으면 나가린데!'

암살자들이 들어가고 특등칸 문이 닫혔지만, 난 안에 상황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종업원 둘이 빠르게 앞으로 달렸고, 지붕과 바닥에 있던 두 암살자가 좌우 창문을 깨고 열차 안으로 동시에 진입했다.

그런데!

'뭐야? 다 죽었어?'

암살자들과 연결된 운명의 실이 모두 검은색으로 변했다.

이건 죽음을 뜻한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서 깜짝 놀랐다.

'안에 뛰어난 실력자가 있었군.'

난 병사들과 특등칸 앞에 도착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먼저 들어간 대위가 바로 나왔고, 하사관 둘만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난 다른 병사들과 문밖에 있어야 했다.

***

잠시 후 특등칸 문이 열리며 대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 들어오시오."

특실로 들어갔다.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 과하게 뿌린 것 같았다.

시체는 모두 치워졌고 내부는 깨끗했다.

척!

뒷덜미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내 뒤에 있던 대위가 칼을 겨눈 것이다.

"무기를 압수하겠소."

하사관이 다가와 내 칼을 뺏었다.

"가까이 오게."

열차 중간에 앉아 있던 사내가 내게 손짓했다.

창문은 모두 강철로 덮여 있었고, 내부는 등이 환하게 켜진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앉아 있는 사내의 견장이 먼저 보였다.

금색 별이 세 개!

"충!"

"정보부 장교라고?"

"네! 그렇습니다."

"자네 부대 대장이 누구지?"

"슈나인 중령이었습니다."

이름을 듣자마자, 중장의 인상이 살짝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과거형이군."

"할데가르에서 헬다임 장벽으로 전출 가는 중입니다."

"전출? 하필 내가 열차에 타는 날 말이지."

중장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중장 뒤에는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홀로 기립해 있었다.

어깨에 금색 줄 2개.

아마도 저 여 중령이 암살자들을 순식간에 처리한 실력자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슈나인 중령인가?"

"네?"

"날 암살할 거란 정보 말이네. 사실 오늘 내가 이 열차에 타는 것은 기밀이었네."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중장은 날 삐딱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전 그저 3등칸에서 수상한 자들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열차에 타기 전에 병사들이 승객들을 일일이 검문검색을 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 높으신 분이 이 열차에 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옛말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불온한 자들이 있을지 몰라 제가 이등석과 삼등석의 사람들을 다시 검문했습니다. 그런데 신분증을 내민 두 사람의 손이 수상했습니다."

"손이?"

"복장은 상인인데, 손은 검을 오랫동안 단련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뭐?"

중장은 대위를 쳐다보았다.

"홀든 대위, 자넨 왜 그걸 몰랐나?"

"죄, 죄송합니다."

홀든 대위의 얼굴이 붉어졌다.

중장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 때문에 수상하게 여겼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시하고 있던 그 두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입니다. 삼등칸에서부터 쭉 거슬러 식당칸까지 왔는데 보이지 않았고, 마침 식당 종업원 둘이 일등석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소리친 겁니다."

난 조금 전에 생각해둔 거짓말을 둘러댔다.

운명의 실이 어쩌고저쩌고 사실을 말할 순 없으니까.

삼등칸과 이등칸에 사람들이 내가 검문했던 행동을 증언해 줄 것이고.

"하하하! 자네처럼 능동적이고 열성적으로 일하는 정보국 장교를 보니, 제국의 앞날이 밝아."

"감사합니다."

중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자, 대위가 검을 집어넣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후후! 월리엄 호세스네. 오늘 자네가 누굴 구했는지는 알아야지."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별로 없긴, 여기 엠버 중령의 검술이 뛰어나긴 해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넷이나 되는 암살자가 기습했다면 막기 힘들었을 거야."

그건 사실이었다.

갑자기 창문을 깨고 암살자들이 난입하고, 지척에서 음식을 꺼내는 척하면서 동시에 공격했다면 암살은 막았을지 몰라도 최소한 중장은 다쳤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내가 윌리엄 중장을 구하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했다.

"참! 자네 이름이 뭔가?"

"타일러 빈스 소위입니다."

"음. 빈스?"

중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스 가문과 무슨 관계가 있나?"

"제 아버지께서 개리 해링턴 빈스 백작이십니다."

"뭐? 자네가 개리 백작의 아들이라고?"

"네."

"혹시 장남인가? 그 사생아?"

"맞습니다."

윌리엄 중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와 빈스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세간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

중장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홀든 대위, 일등석에 타일러 소위의 자리를 마련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난 속으로 웃었다.

의자와 침대가 따로 있는 일등석이라니!

귀빈을 도와준 효과를 바로 보는구나.

"그리고 타일러 소위도 저녁 식사를 함께할 것이니 준비해 주게."

"네!"

***

"이베리아 평원에서 우린 놈들과 사흘 밤낮을 치열하게 싸웠네. 그때 자네 아버지인 개리 대위가 비숍급 기간트로 가디안 제국 마장기를 무려 일곱 대나 파괴했지. 전선의 검은 사자란 별명은 그때 생긴 거야."

윌리엄은 전투 장면이 떠올랐는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그땐 정말 치열했지. 두 제국군의 전력이 비슷했기에 우리가 밀릴 경우 이베리아 평원과 제국 동부 일대까지 내줘야 할 판이었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승리했지. 그때 내가 작전 장교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밀리는 척하면서 적들을 매복지로 유인해 기습하는 작전은 정말 완벽했네. 그 덕분에 내가 소령으로 진급하기도 했고. 하하!"

윌리엄 중장은 수다쟁이 영감이 된 것 같았다.

특히 나를 보고 떠들고 있었기에 스테이크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윌리엄의 이야기는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고, 밤늦게 술을 마실 때도 계속 이어졌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

그리고 헬다임 장벽 도착 10분 전까지도.

"참! 내가 트와이트 대마경에서 괴수를 토벌한 이야기를 했었나?"

응! 했어!

다섯 번이나!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한두 번이지,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으면 짜증이 나는 법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으면 진급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버텼다.

설마 별 3개 장군을 구해줬는데 일등석으로 입을 씻지는 않겠지?

내 옆에 앉은 엠버 중령은 이미 중장의 소음 테러에 단련됐는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설마 눈을 뜨고 자는 경지에 도달했나?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찔러보려다가 참았다.

'근데 중장은 누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는데, 걱정도 안 되나?'

참 느긋한 양반일세.

"내가 트와이트에서 3년을 있었지. 그곳 밀림은 말이지 괴수도 괴수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와 벌레가 아주 극성이야. 50도에 육박하는 날씨는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지옥에서 방금 나온 것 같은 전투 모기가 사방에서 덤비는데······."

아씨! 이제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아!

"그만."

"뭐?"

중장이 나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지금 나한테 그만이라고 했나?"

끊임없는 고막 테러에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젠장!

"그, 그만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곧 열차가 도착합니다. 혹시나 암살자들이 플랫폼에 기다렸다가 기습할 수도 있으니, 제가 먼저 내려서 주변을 살펴보겠습니다."

내 마음을 알았을까?

홀든 대위가 끼어들었다.

"열차가 헬다임 시내에 들어왔습니다. 장군님께서도 내리실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허허! 벌써 도착했다니, 나이를 먹으니 시간이 참 빠르단 말이야."

시간이 빠르다고?

난 한 달 같은 일주일을 보냈는데!

"충! 그럼 가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일등석으로 가려 했다.

"잠깐. 자넨 나와 같이 내리지."

"······네."

거부할 순 없었다.

계급이 깡패였으니까.

열차가 도착했지만, 우린 바로 내리지 않았다.

아마도 승객이 모두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곧 답답한 열차 생활도 끝이었다.

창문이 2개나 깨졌기에 강철로 된 창문을 일주일 내내 닫고 있어야 했다.

덕분에 바깥 풍경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방공호에 갇혀 살았던 전생의 기억까지 밀려왔기에 더 답답했다.

잠시 후 대위와 병사들이 먼저 내렸고, 우리도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수백 명의 병사가 플랫폼 앞에 도열해 있었다.

바닥엔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뭐야? 이 병사들은?'

"윌리엄 호세스 신임 사령관님께 경례!"

"충!"

빰빠라빰! 빰! 빰빠밤!

군악대의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격하게 울려 퍼졌다.

'이 수다쟁이 노친네가 헬다임 장벽의 사령관이라고?'

순간 눈앞에 꽃길이 펼쳐진 것 같았다.

4. 파견.

4. 파견.

[정보국 헬다임 지부]

장벽 도시 중앙에 있는 7층 건물.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충! 타일러 빈스 소위······."

"됐어!"

눈앞에 중령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내 상관이 될 사람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책상 위엔 바닥을 비운 술병과 잔이 있었고, 재떨이엔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얼마나 골초인지 그는 지금도 입에 담배를 물면서 내 전출명령서를 보고 있었다.

"본부에 있었네. 여긴 무슨 사고를 치고 왔어?"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

그가 충혈된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며칠 전 사고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저 자신이 누구인지, 과거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하아!"

중령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렇지. 여기가 무슨 폐품 창고인 줄 아나, 인원을 보충해달라고 했더니 죄다 쓰레기만 보내고."

듣는 쓰레기는 기분이 나쁘지만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다.

중령은 자신의 양쪽 관자놀이를 두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난 프레디 중령이다. 여기 헬다임 지부 부지부장이고. 집무실 하나 내줄 테니까, 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짱박혀 있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래 살려면 정보국 장교라고 설치지 마. 여긴 심심하면 칼을 뽑아 드는 미친놈들 천지니까."

"네."

"집무실은 부관이 오면 안내해줄 테니까. 소파에 잠깐 앉아 있어."

난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고개를 처박고 서류를 보는 프레디 중령은 30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가운데 머리가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

제복을 입지 않았다면 노숙자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네.'

역시 기억상실증은 이곳에서도 유용했다.

이곳 지부에서 처리하는 일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그걸 내게 몰아줬다면, 꼼짝없이 일에 파묻힐 뻔했다.

이제 이곳에서 조용히 인형술사 스킬 레벨이나 올려야겠다.

다다닥! 덜컹!

"헉헉! 중령님!"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뭔데 호들갑이야?"

"아직 소식 못 들으셨죠? 신임 사령관 말입니다."

"나도 조금 전에 들었어. 윌리암 호세스 중장이 부임했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할데가르 역에서 출발 두 시간 만에 사령관 암살 시도가 있었답니다."

"뭐? 암살 시도? 사령관은 괜찮나?"

"다행히 무사하답니다."

"젠장! 그 소식이 왜 이제야 들어온 거야?"

"이곳 도착 전까지 사령관실에서도 몰랐답니다."

프레디 중령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암살자는?"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어떤 미친놈들이야?"

"아직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쫓겨난 전임 사령관이 아닐까요?"

"그렇게 단순하겠냐? 신임 사령관이 죽으면 당연히 가장 먼저 의심받을 텐데, 그리고 삼황자께서 과격하시긴 하지만 그렇게 멍청하신 분은 아니야."

"그럼 설마, 그 장물아비 새끼들이?"

"쓸데없는 소리!"

프레디 중령이 뒤늦게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소위, 자넨 밖에 나가서 기다리게."

"네!"

일어서 나가려는데, 하사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지사장님, 사령관실에서 협조 공문이 왔습니다."

"뭐?"

프레디 중령이 공문을 받아서 읽었다.

난 얌전히 나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귀를 기울였다.

대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협조 공문이라니 뭡니까?"

"사령관실에서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하다니 특이한 일이군."

"우리 정보국 사람을 말입니까?"

"그래, 타일러 빈스 소위를 보내라고 지명까지 했는데, 우리 쪽엔 그런 사람이 없지 않은가?"

"타일러 빈스요? 저도 처음 들어 봅니다."

대위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나 여기 있는데!

내가 사령관을 구하는데 크게 한몫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날 부를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기로 했다.

그런데 왜 사령관실에서 나를 보내 달라는 거지?

그냥 진급을 시켜주는 게 아닌가?

"어? 잠깐, 타일러 소위라고?"

그때 프레디 중령이 자기 책상 위에서 내 전출명령서를 발견했다.

그리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

"그러니까 자네가 신임 사령관님을 구했다는 거야?"

"직접 구한 것은 아니고, 암살자들의 존재를 알렸을 뿐입니다."

난 할데가르 역에서부터 사건이 일어난 상황을 상세히 말했다. 물론 윌리엄 사령관에게 했던 설명과 동일했다.

그러자 프레디 중령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진짜 바보는 아닌가 보군."

옆에 있던 대위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헬다임 장벽 사령관을 구하다니! 엄청난 일을 한 것이 아닙니까."

대위가 날 부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자네, 곧 진급하겠군. 난 파블로 대위네. 나중에 나보다 계급이 높아지면 잘 좀 부탁하네."

"실없는 소리 그만하게."

프레디 중령은 공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위가 물었다.

"근데 왜 타일러 소위를 파견해 달라는 거죠?"

"글쎄. 옆에 끼고 상을 줄 모양이지."

프레디 중령이 날 쳐다봤다.

"일단 사령관실의 협조라 우리도 거부하긴 힘드네."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칙칙한 이곳 골방에서 짱박혀 있는 것보다야 사령관실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곳엔 이미 내 마법인형도 하나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자넨 우리 정보국 사람이야. 그걸 잊지 말고, 수시로 보고하게."

"네!"

***

마차를 타고 가는 길.

창문 커튼을 젖히자, 저 멀리 헬다임 장벽이 보였다.

산맥을 연상시키는 까마득한 높이.

그리고 그 길이가 수만 킬로미터에 달하고, 2개의 제국과 5개의 왕국에 걸쳐져 있다고 들었다.

'만리장성은 댈 것도 아니네.'

당연하다.

만리장성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헬다임 장벽은 거신들이 만든 것이니까.

대수림, 그 끝이 어딘지 아무도 모르는 녹음의 바다.

그곳엔 거대 괴수들이 산다.

고대에 이 땅에 살았던 거신들은 대수림의 괴수들과 끊임없이 싸워왔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와 끝도 없이 확장하는 대수림 때문에 밀리고 밀리다가 결단을 내렸다.

대수림을 벽으로 막자!

그래서 쌓은 것이 헬다임 장벽이었다.

고대 거신들은 키가 5미터에서 12미터 사이로 매우 거대했고, 마법에 능통했으며, 손기술이 매우 뛰어났다.

그랬기에 괴수가 넘을 수 없는 수백 미터의 마법 장벽을 쌓을 수 있었고, 드디어 대수림의 확장을 막았다.

장벽이 세워지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 거신은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았다.

대수림의 거대 괴수를 잡아먹어 체격을 유지했던 거신들은 괴수가 사라지자 극심한 배고픔을 느껴야 했고, 극단적으로 식사량을 줄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거신이 죽었고, 살아남은 거신들도 괴수와 싸우기 위해 몸집이 클 필요가 없었기에 점점 체격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지금의 인간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많은 학자가 인간으로 진화가 아니라 퇴화라고 말했다.

체격이 줄어들고 뇌가 작아지자, 마법 수준과 지식수준도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일러가 배운 역사책의 첫 장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기에 이 시대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

[헬다임 사령부]

"도착했습니다. 손님."

마부에게 은화 하나를 건네곤 사령부 요새 입구로 향했다.

여자 하사관이 다가와 경례했다.

"2등 하사관 글래디스입니다."

"타일러 빈스 소위네."

"사령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앞서 성큼성큼 걷는 글래디스 하사는 갈색 단발머리에 베레모를 옆으로 눌러 썼고, 나보다 큰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모습이 여전사 같았다.

'분위기가 차가운 것이 꼭 엠버 중령 같군.'

윌리엄 사령관의 호위인 엠버 중령과 어딘가 닮아 보였다.

똑똑똑!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충! 타일러 빈스 소······."

"오! 타일러! 이리와 앉게."

윌리엄 호세스 사령관이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자리에 앉자, 살짝 불안했다.

엠버 중령이 사령관 뒤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러지?'

분명 기차에서는 날 대하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그래, 타일러 소위 짐은 풀었나?"

"아직 숙소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요새에 방을 하나 내주지."

"아닙니다!"

"응?"

밤마다 날 얼마나 괴롭히려고!

그리고 퇴근 후라도 상관들이 없는 곳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선 사람들과 가까운 곳에 숙소를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시내 중심지에 구할 생각입니다."

"역시, 정보국 장교다운 발상이군."

윌리엄 사령관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자넬 부른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에게 한가지 임무를 맡기려고 하네."

"······?"

"내 암살미수 사건의 조사를 맡아주게."

"네?"

윌리엄 사령관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고민됐다.

내가 정보국 소속이긴 하지만, 일단 헬다임 사령부에 파견됐으니 명령을 거부할 순 없었다.

"물론 정식 수사는 팀을 만들어 따로 할 거네. 자네는 비밀리에 움직이는 거지. 열차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이곳 사령관으로 부임하는 것은 기밀이었네. 그리고 그 기차에 타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내 측근들과 이곳 사령부의 고위직 몇 명뿐이었지. 그런데 암살자들이 미리 열차에 타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이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사령관실 내부 인사나 측근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정보가 안에서 샜다는 의미니까.

"그런데 왜 접니까?"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자넨 정보국 소속이고 오늘 나와 이곳에 도착했으니, 헬다임 장벽과 아무런 접점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중립을 잘 지킬 것이라 믿네. 그리고 열차에서 보여줬던 자네 통찰력이면 범인을 반드시 찾을 것이라 믿고 있어."

윌리엄 사령관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잘 처리한다면, 큰 보상을 약속하지."

사령관이 나를 좋게 봐준 것은 좋지만, 부담감이 밀려왔다.

암살자들의 정체를 파악하거나 암살을 사주한 사람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장벽 사령관의 비호가 있다면 이곳에서 남은 군대 생활을 아주 편하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거부할 위치도 아니었고.

"제 수사 권한은 어디까지입니까?"

내 물음에 윌리엄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엠버 중령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특별 통행증이네. 그거 하나면 헬다임에서 자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을 거야. 방문 기록도 남지 않고. 그리고 장벽 수비군 2개 중대를 언제든 데려다 쓸 수 있게 준비해 주지."

단순히 종이 한 장이었지만, 사령관 직인이 찍혀 있었기에 권한은 상당했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권한은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한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저기 활동비는 없습니까?"

"활동비?"

"마침 금화가 다 떨어져서요."

"아!"

윌리엄이 부관인 엠버 중령을 쳐다봤다.

"뭐 하나? 금화를 내주게."

엠버 중령이 서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얼마나 줄까요?"

"그냥 다 줘."

"네? 100골드를 전부 말입니까?"

사령관이 살짝 노려보자, 엠버 중령이 주머니를 통째로 넘겼다.

"뭘 이렇게 많이······. 감사합니다."

난 사양하지 않고 넙죽 받았다.

어느 세계든 주머니가 두둑해야 마음이 든든한 법이었다.

신임장교 한 달 급료가 5골드였으니, 상당한 금액이었다.

엠버 중령이 말했다.

"밖에 있는 글래디스 하사관이 자네를 따라다니며 보필할 거네. 내가 직접 발탁한 유능한 친구니까 도움이 될 거야."

"네."

보필은 무슨, 감시겠지.

사령관과 다시 한참을 이야기하고,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충!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

사령관실을 나오자 글래디스 하사가 다가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네, 싸움은 좀 하나?"

"엠버 중령님 정도는 아니지만, 웬만한 장정 대여섯 명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든든하군.

지금 내 호위로 쓰긴 적당해 보였다.

"소위님, 어디부터 조사할까요?"

글래디스는 상당히 의욕이 넘쳐 보였다.

"숙소부터 구해야지. 며칠 못 씻었더니 죽겠군."

뜨끈한 탕 속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아! 암살자들의 시체는 여기에 있나?"

"지하창고에 있습니다."

"거기부터 들르지."

난 글래디스 하사관과 요새 지하로 향했다.

삼엄한 경비의 지하창고.

이곳은 기간트 재료인 괴수 부산물들을 보관한 냉동 창고였다.

입구 근처에 4구의 암살자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혼자 살펴볼 테니까. 자넨 밖에서 기다리게."

"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시체 하나의 손을 잡았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에 운명의 실을 연결합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사령관 암살 사건이 있었던 날.

나와 운명의 실이 연결된 암살자들은 모두 엠버 중령에게 죽었다.

그때 난 네 명의 암살자에게 기사회생 스킬을 사용했다.

셋은 실패했지만, 열차 바닥을 기어서 이동했던 암살자를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 열차에서 내리며 거리가 멀어지고, 마법인형과 운명의 실이 끊어졌다.

운명의 실이 끊어지고 다시 연결할 수 있는 기간은 하루였기에 오늘이 지났다면, 내 허수아비 마법인형은 사라졌을 것이다.

'일단 꼭두각시 마법인형으로 업그레이드시키자.'

내 첫 번째 꼭두각시론 암살자가 제격이었다.

5. 꼭두각시.

5. 꼭두각시.

[메리골드 호텔]

헬다임 장벽 도시에서 제일 좋은 호텔을 잡았다.

그것도 전망이 제일 좋은 스위트 룸으로.

역과 광장,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산맥처럼 펼쳐진 거대 장벽도 보였다.

물론 수도나 할데가르의 호텔에 비하면 급이 떨어지지만, 하루 숙박료가 3골드나 할 정도로 고급진 곳이었다.

"전망 좋네."

천으로 꽁꽁 싸맨 내 허수아비 마법인형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들어온 글래디스.

힘이 정말 세다.

"이건 어디다 놓으면 되겠습니까?"

"거실에 내려놔."

글래디스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암살자 시체는 어디에 쓰시려고요?"

"다 수사에 필요해서야."

내 인형의 집에 넣으면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내 마법인형 수납 아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자넨 그만 내려가게."

열쇠를 내밀었다.

"이 열쇠는 뭡니까?"

"아래층에 자네 방을 하나 더 잡았어. 물론 여기보단 싼 방이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저도 이 호텔에 묵는 겁니까?"

"날 호위하려면 가까이 있어야지. 내일 조식 때 보자고."

"네······."

[운명의 실타래(lv.1)를 연결했습니다.]

글래디스는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열쇠를 받아서 나갔다.

[운명의 실타래 – 26/300]

호텔 직원들에게 일일이 팁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운명의 실을 연결했고, 방금 글래디스와도 열쇠를 주면서 손가락이 살짝 닿아 운명의 실이 연결되었다.

이제 글래디스가 날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글래디스를 24시간 감시하는 것이다.

난 천을 벗기고 내 허수아비 마법인형을 일으켜 세웠다.

[허수아비(lv.1) – 가장 기초적인 마법인형.

운명의 실타래 범위 내에서 어디든 배치할 수 있다.

한번 배치하고 다시 인형의 집에 넣을 때 딜레이가 발생한다. (600초)]

사실 허수아비 자체론 거의 쓸모가 없다.

팔다리 등 신체를 전혀 움직일 수도 없어 그저 빳빳하게 서 있는 나무토막과 같았다.

하지만 운명의 실 하나로 마법인형 하나를 배치할 수 있었기에 허수아비 숫자가 많을 땐 적의 눈을 속이기엔 그만이었다.

'꼭두각시라, 초급 마법인형은 오랜만에 만드네.'

허수아비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과정은 그리 어렵진 않다.

인체의 관절과 근육 등에 추가로 운명의 실을 연결하면 된다.

[운명의 실 – 76/300]

난 허수아비에게 운명의 실을 추가로 연결했다.

"꼭두각시 제작!"

그 순간 허수아비와 연결된 50개의 실이 일제히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꼭두각시(lv.1) 마법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

좋았어!

드디어 내 첫 번째 꼭두각시를 만들었다.

꼭두각시는 흐느적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꼭두각시(lv.1) - 술사의 명령을 수행하는 마법인형.

운명의 실타래 범위 내에서 이동과 공격, 방어 등 구체적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꼭두각시의 레벨이 오를수록 보다 복합적인 동작과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운명의 실타래 범위 내에서 어디든 배치할 수 있다.

한번 배치하고 다시 인형의 집에 넣을 때 딜레이가 발생한다. (600초)]

이제 움직여 볼까?

오랜만에 꼭두각시를 움직이는 것이라 살짝 긴장됐다.

"일어서라!"

명령을 내리고 운명의 실을 일일이 잡아당겼다.

그러자 꼭두각시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 앞으로 움직여!"

쓰윽! 쿠웅!

걸음을 떼자마자, 대가리를 처박았다.

'이것도 오랜만에 하려니 잘 안 되네······.'

S급이 된 후로는 하급 마법인형은 만들 필요가 없었다.

전생에 함께 했던 자동인형이나 분신인형들이 그리웠다.

지금 이 꼭두각시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같은 백지상태.

반복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여러 가지 동작을 가르쳐야 충분히 전력으로 쓸 수 있다.

천천히 줄을 하나씩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고, 걸으라고 반복해서 명령을 내리며 움직였다.

사실 인형의 집에 넣고,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해도 경험치도 올라가고 동작도 자연스러워진다.

하지만 지금 내 인형의 집은 너무 좁았기에 걷기 훈련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세 시간가량 걸음마를 가르쳤을 때였다.

[꼭두각시 마법인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꼭두각시(lv.1) -> 꼭두각시(lv.2)]

오! 렙업!

원래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암살자라 그런지 걸음마도 빨리 끝났고, 레벨업도 예상보다 빨랐다.

"좋아! 계속 원을 그리며 걸어!"

꼭두각시는 거실을 계속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걸었다.

아직 걸을 때 팔이 흔들리고 조금씩 휘청거리지만, 술 취한 사람이나 좀비 걸음걸이 정도는 됐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이렇게 계속 훈련하다 보면 전투 인형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다만 꼭두각시의 단점은 살아 있을 때 이상으로 신체 능력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 뜨끈한 욕조에 몸을 넣었다.

"오오! 바로 이 맛이지."

몸이 풀리는 기분.

욕실 창문 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반짝였다.

이만한 도시를 모두 밝히려면 마석 배터리가 몇 개나 필요할까?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원은 마석이었다.

마석은 대수림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광물이었고, 괴수의 몸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현 인류가 고대 거신들이 막아 놓은 헬다임 장벽 너머로 가는 가장 큰 이유가 마석 때문이었다.

몸이 노곤해지자, 전생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끔찍한 세상이었지만, 동료 헌터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회귀가 아닌 건 다행인가?'

S급 괴수도 마법인형만 충분하면 혼자서 비벼볼 만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초거수 카르마탄은 내가 100번쯤 회귀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아니! 천 명의 헌터 결사대가 한꺼번에 회귀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살아 있는 내내 절망감에 몸부림쳤겠지.

근데 왜 난 이 세계에 떨어진 걸까?

그것도 헌터로 각성한 상태로.

잠깐! 지구는 멸망했을 텐데······.

'헌터 시스템은 지구의 신이 침략자에 대항해 만든 것이 아니었나?'

잠시 혼란이 왔다.

누구도 헌터 시스템의 근원은 알지 못했다.

다만 차원 괴수들의 침략과 동시에 헌터 시스템이 발현됐기에 다들 우리 세계의 신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짐작했을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다른 세상에서 헌터 능력을 쓸 수 있는 거지?

게다가 난 거의 매일 전생의 악몽을 꾼다.

"에이 모르겠다!"

계속 생각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해, 사령관에게 인정도 받고 보상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내 첫 번째 꼭두각시의 역할이 중요했다.

***

[카페 블랑]

번화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노천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돈이 주는 여유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곳은 살만한 세상이었다.

"글래디스, 이런 카페 하나 차리는데 금화가 얼마나 들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맞은 편에 앉은 글래디스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늦은 오후였지만, 광장 주변 노천카페엔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곳은 헬다임에서 신분이 높거나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내가 있는 메리골드 호텔도 가까웠고.

"벌써 나흘째입니다. 대체 사건 조사는 언제 시작하는 겁니까?"

"기다려 봐.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계속 이렇게 놀고 계시면 저도 위에다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 난 내 일을 할 테니까."

가소롭네.

벌써 다 보고했으면서.

그녀는 매일 밤에 호텔을 나가 10분쯤 누군가를 만나고 들어온다.

십중팔구 내가 농땡이 치고 있다고 보고했겠지.

나와 운명의 실타래로 연결되어 있으면 반경 300미터 내에선 무슨 짓을 하든 어디에 있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넨 어쩌다 군인이 됐나?"

"······."

대답이 없다.

동료 간의 유대는 필수.

게다가 그녀는 내 호위였다.

"가족은 있고? 어디에 살고 있나?"

"······."

"참! 결혼은 했어?"

"······."

"엠버 중령님이 하사관으로 발탁했다고 들었네. 중령님과는 어떻게 만났지?"

"왜 자꾸 제 사적인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그야 자네와 친해지려는 거지."

"네?"

"그래야 내가 위험할 때 목숨을 걸고 날 지킬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목숨을 잃어도 제 임무를 수행할 겁니다. 그러니 더는 개인적인 것은 묻지 마십시오."

글래디스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참 재미없는 군인이었다.

"일어나지."

"또 산책하러 가시는 겁니까?"

"아니, 놈들이 미끼를 물었어."

"미끼요?"

난 글래디스와 길을 걸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냥 조용히 따라와."

내가 무슨 셜록 홈즈도 아니고 100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암살단이나 암살자를 사주한 놈들을 어떻게 찾겠는가.

그래서 난 내 꼭두각시를 번화가 광장으로 들어서는 대로에 세워두었다.

이곳 대로는 제국 최대의 괴수 부산물 시장이 있는 곳으로 과거 대한민국의 청계천 같은 곳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이곳 시장을 한번 돌면 룩급 기간트를 조립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며칠 전 정보국 헬다임 지부에서 사령관 암살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대위의 입에서 장물아비란 단어가 튀어 나왔다.

아직 괴수 부산물 장물아비가 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사해볼 필요는 있었다.

장물을 팔려면 이곳밖에 없었고, 혹시나 장물아비가 암살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내 꼭두각시를 시장 입구에 세워둔 것이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조금 전에 여러 명이 달려들었고, 꼭두각시는 순식간에 납치됐다. 그리고 지금은 지하 하수도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 난 300미터 내에서 천천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일부러 길을 돌아가네······.'

놈들은 미행이 있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냄새나는 하수도를 빙빙 돌더니, 다시 한참을 이동했다.

그리고 드디어 멈췄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으리으리한 3층짜리 저택이 보였다.

"글래디스, 여긴 어디지?"

글래디스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바로 대답했다.

"이곳 시장님이신 쟝 볼타 백작님 사저입니다."

"시장이라고?"

뭐야? 신임 사령관 암살사건에 시장이 연루되어 있단 말인가?

아직 단정지을 순 없지만, 왠지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근데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글래디스, 헬다임 장벽 사령관이 높아? 여기 시장이 높아?"

"네?"

글래디스가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사령관님께서 높으시죠. 시장은 단지 장벽 도시의 살림을 맡아서 하는 분이고, 사령관님은 장벽 사령부와 대수림 전진 기지, 헬다임 전체의 방위를 책임지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래, 그럼 들어가자."

"예?"

난 품에서 사령관이 발급한 특별 통행증을 꺼내 들었다.

6. 타초경사.

6. 타초경사.

"정지!"

내 앞을 막아서는 조무래기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경비가 앞으로 나서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보국 장교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너와 할 이야기는 없다. 상관을 불러라."

"뭐요?"

고참 병사가 인상을 확 구겼다.

똥개도 제집 앞에선 50점 먹고 들어간다는 거냐?

할데가르나 수도였다면, 내 검은 제복만 봐도 슬슬 꼬리를 내리지만 이곳은 장벽 도시 헬다임.

나를 향해 눈까지 부라리는 것이 정보국의 힘이 생각보다 많이 약한 것 같았다.

그럼 다른 명함도 있지.

"상관이 누가 찾느냐고 묻거든. 윌리엄 호세스 헬다임 장벽 사령관님께서 임명한 특별 수사관이라고 전해라!"

"네?"

고참 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 누구라고요?"

"헬다임 사령관께서 임명한 특별 수사관이다! 어서 가서 전해라."

"네······."

고참 병사는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더니 정문 바로 뒤쪽에 있는 2층 건물로 들어갔다.

글래디스가 다가오더니, 이를 악물며 조용히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여긴 시장님 사저라니까요!"

"나도 알아."

"알면서 대체 왜 그러십니까?"

글래디스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때 건물에서 푸른색 경찰 제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나왔다.

그러자 글래디스는 한숨을 쉬고 내 팔을 놓았다.

"험! 치안대 소속 그렌스만 경사입니다. 저택의 경비책임을 맡고 있지요. 특별 수사관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타일러 빈스 소위입니다."

난 사령관 직인이 찍힌 특별 통행증과 신분증을 건네줬다.

그렌스만은 통행증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내게 내밀었다.

"됐습니다."

통행증을 건네받으며 살짝 손가락을 스쳤다.

[운명의 실타래(lv.1)를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특별 수사관께서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난 주변을 한번 살피며 말했다.

"전 지금 신임 사령관님 암살미수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네? 사령관 암살미수 사건이요? 그게 무슨?"

그렌스만 경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 놀랠 것은 없습니다."

난 일부러 이번에 열차에서 있었던 암살미수 사건 내용을 흘렸다.

그렌스만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사건 수사 때문에 시장님께 긴히 전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시장님께요? 하지만 시장님께선 시청에 계십니다. 시청에 가서 물어보십시오."

나도 안다.

평일 오후에 시장이 집에 있을 리가 없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시청엔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같은 일개 소위를 시장님께서 만나 주실 정도로 한가하신 분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 그저 시장님께 제 말을 전해 주실 분을 만나고자 합니다. 혹시 안에 그러실만한 분이 계십니까?"

그렌스만 경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렌스만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하! 이 새끼들 똥줄이 탔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다.

사령관 암살미수 사건 특별 수사관이라고 했더니, 그렌스만 경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내 암살자 꼭두각시를 급하게 지하로 옮기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이놈도 한패였어.'

잠시 후.

그렌스만 경사가 밖으로 나왔다.

"타일러 소위님, 안으로 드시죠. 쟝 시장님의 장남이신 쟈크 볼타 남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난 몸을 돌려 글래디스 하사를 쳐다봤다.

"자넨 마차를 구해오게."

"네? 마차요?"

"다리가 아프니 숙소로 돌아갈 땐 마차를 타고 가야겠어. 어서 가보게."

내가 손을 휘휘 젓자, 글래디스 하사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내가 저택 안에 있는 걸, 외부의 누군가가 알아야 헛짓거리를 하지 않겠지.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내 명령을 거역하진 않았다.

"그럼 들어가시죠."

난 그렌스만 경사와 저택으로 들어갔다.

***

배불뚝이 중년 사내가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타일러 빈스 소위입니다."

"쟈크 볼타 남작이네."

쟈크 볼타가 거만한 자세로 날 쳐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상당히 젊군. 특별 수사관이라고 해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나이 많은 소위인 줄 알았네."

병사로 시작해 하사관을 거쳐 소위가 된 베테랑 수사관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졌나?

쟈크 볼타는 살짝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제가 경험은 부족하지만, 주변에 친구는 많습니다."

"친구라······, 혹시 내가 알만한 사람도 있나?"

"윌리엄 호세스 중장께서 제 부친과 허물없는 친구 사이십니다."

"허! 신임 사령관님 말인가?"

"네. 사령관께서 이곳에 부임하실 때에도 할데가르에서부터 열차를 함께 타고 왔습니다."

"그래?"

쟈크 남작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부친이 누구신가?"

"개리 해링턴 빈스 백작이십니다."

"테레니스 영지의 그 빈스 가문?"

"그렇습니다. 제가 그 빈스 가문의 장남입니다."

"아! 어쩐지. 특별 수사관을 아무나 임명하진 않겠지."

쟈크 남작이 입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니스 영지는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영지였고, 내 아버지는 추밀원과 더불어 현 제국의 실세라 불리는 영주 회의의 상임 위원이었다.

이미 가문에서 버린 몸이지만, 이렇게 써먹을 순 있지.

쟈크 남작이 자세를 바로 세우더니 손짓했다.

"어서 이리 앉게."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자, 쟈크 남작이 문 앞에 서 있던 시녀를 향해 말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최고급 차를 내와라!"

"네."

가문의 이름을 팔았더니, 대우가 달라졌다.

잠시 후 차가 나오고, 난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오! 차향이 아주 좋네요."

"비싼 차가 제값을 하니 다행이군."

연거푸 차를 마시고, 맛있어 보이는 쿠키도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슬슬 본론을 말해보지 그러나? 우리 시장님께 은밀히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쟈크 남작은 내가 왜 찾아왔는지 정말 궁금한 모양이었다.

난 슬쩍 그렌스만 경사를 쳐다봤다.

"조용히 이야기할 순 없을까요?"

"괜찮네. 그는 우리 가문의 일을 도와주고 있어."

"그렇군요."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이곳 부산물 시장에 대대적인 수색 작전이 벌어질 겁니다."

"응?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도시 경비대나 치안대가 아니라 장벽 수비대가 움직일 테니까요."

"장벽 수비대가 부산물 시장을? 거긴 우리 관할인데?"

쟈크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이번에 열차에서 신임 사령관님을 암살하려 했던 암살자 하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아무리 고문해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일부러 풀어주고 은밀히 뒤를 쫓았는데, 두어 시간 전에 부산물 시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 뭐라?"

쟈크 남작의 눈동자가 배로 커졌다.

지금, 이 저택 지하에 그 암살자가 있으니 얼마나 불안할까?

그는 긴장했는지 마른침까지 삼켰다.

"그래서?"

"그래서 당연히 부산물 시장을 수색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아!"

"그러니 이 소식을 시장님께 전해 주십시오."

갑자기 쟈크 남작이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이 소식을 시장님께 전하라는 거지?"

"왜긴 왜겠습니까? 이곳이 어딥니까, 제국 최대의 괴수 부산물 시장이 아닙니까. 모르긴 몰라도 각종 이권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고, 시장님 관할이시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상점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도망친 암살자 한 놈 때문에 선량한 상인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하하하!"

쟈크 남작을 향해 실없이 웃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

"내일 수색을 지휘하는 것이 접니다."

"자네가?"

"네. 그런데 저희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진 않을 겁니다. 그냥 시끄럽게만 보여주기식으로 수색할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병사들에게 술 한 잔씩은 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금화가 필요하고······."

머리를 긁으며 슬쩍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쯤 되면 대 놓고 뇌물을 달라는 이야기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아듣겠지.

"아하! 하긴 상인들이 장사하는데, 병사들이 시장을 뒤집어 놓으면 싫어하겠군."

"맞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쟈크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기다리게."

"네."

쟈크 남작과 그렌스만 경사가 옆방으로 이동했다.

이쯤 되니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장물아비가 만연한 제국 최대의 괴수 부산물 시장.

그 시장을 관리하는 도시의 시장이 뒷돈을 챙기지 않을 리 없었다.

어쩌면 직접 이권에 개입했을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전임 사령관의 비호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부산물은 장벽 너머에서 나오고, 장벽 입구는 전적으로 사령관이 관리했으니까.

아마도 그들은 사령관이 바뀌면서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차라리 신임 사령관에게 뇌물을 주면 되지 않나?'

왜 암살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실패한 암살자를 이 저택으로 잡아 온 것부터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곧 그렌스만 경사가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들고 먼저 들어왔다.

쿵!

"이게 뭡니까?"

따라 들어온 쟈크 남작이 말했다.

"얼마 되진 않네. 그냥 병사들 술값이나 하게."

"뭘, 이런 걸······."

금화를 챙겼다.

묵직한 것이 최소 100골드는 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부하들에게 면이 섰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시게. 배웅은 그렌스만 경사가 할 걸세."

난 문을 향해 걷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렸다.

"참! 친구가 된 기념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암살자를 사주한 자가 장물업자와 결탁한 이 도시의 귀족이라는 정보국의 제보가 있었습니다. 아마 내일부턴 이 도시의 귀족들을 감시하는 눈이 제법 많아질 겁니다. 참고하십시오."

"하하! 고맙네."

"뭘요. 귀족끼리 서로 도와야죠."

난 나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쟈크 남작이 날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잊으신 거 없으십니까?"

난 머리를 긁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 잠깐 기다리게."

20골드를 더 챙겼다.

어떤 세상이든 돈은 필수였고,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 했다.

***

밖으로 나오자, 벌써 주변이 어두워졌다.

난 글래디스가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다.

"그게 뭡니까?"

글래디스 하사관이 내가 가져온 주머니를 쳐다봤다.

"뭐긴, 약소한 선물이지."

"설마 뇌물을 받은 겁니까?"

그녀가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나중에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출발하지."

"꼭 해명하셔야 할 겁니다."

글래디스가 천장을 한번 치자,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을 벗어나 마차가 길을 꺾었다.

"여기 건물 뒤에 마차를 세우게."

"네?"

"어서!"

글래디스가 마부에게 말해 마차를 세웠다.

"갑자기 왜 서시는 겁니까?"

"기다려봐. 풀을 두드렸으니, 뱀이 놀라 튀어나올 거야."

"네? 뱀이요?"

늦은 밤.

저택에서 검은 마차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그 마차 안엔 내 꼭두각시가 들어있었다.

"마차를 출발시키게."

"네."

"천천히 북쪽으로 마차를 몰아!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지시한 대로 이동하게."

글래디스 하사관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내 지시를 따랐다.

검은 마차는 곧 도시를 벗어나 헬다임 장벽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우린 일정 거리를 두고 뒤를 쫓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더니 검은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를 멈추게!"

"워어!"

마차에서 내리자, 약 100여 미터 앞에 불빛이 반짝이는 야영지가 보였다.

놈들이 저곳으로 내 꼭두각시를 데리고 들어갔다.

"글래디스, 저긴 어디지?"

글래디스가 잠시 살피더니 말했다.

"안에 있는 기간트 형태를 보니, 살루스 왕국의 야영지입니다."

"살루스 왕국? 왜 타국의 야영지가 이곳에 있지?"

"정말 정보국 장교가 맞습니까?"

글래디스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엔 제국의 영지뿐만 아니라, 살루스 왕국같이 대수림과 인접하지 않은 왕국에서도 해마다 병력을 파견합니다."

"왜지?"

"당연히 괴수 부산물과 마석을 채취하기 위해서죠."

"아!"

이곳 살루스 야영지는 5미터 정도 되는 높은 통나무 울타리가 처져 있었고, 안에는 이십여 개의 크고 작은 천막이 있었다.

또한, 울타리 주변을 지키는 경비가 매우 삼엄했고, 안에는 기간트가 4대나 있었다.

"내가 가진 특별 통행증으로 저기도 들어갈 수 있나?"

"네? 미쳤습니까? 저긴 절대 안 됩니다!"

글래디스가 기겁하며 손을 흔들었다.

"살루스는 우리 제국에 대가를 지급하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잘못하면 외교 분쟁으로 번질 겁니다."

사실 나도 저길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잠입했다가 잘못해 잡히면 어쩌려고.

"근데 저긴 왜 들어가시려고 합니까?"

"증거를 찾으려고."

"증거요?"

글래디스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떴다.

"설마, 저자들이? 흡!"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글래디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확신할 순 없어. 그래서 증거가 필요한 거야."

"하지만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저길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너고.

난 방법이 있다.

이미 저 안엔 내 꼭두각시 마법인형이 있으니까.

게다가 최악의 순간에도 내 마법인형이 당하는 거지, 내 목숨은 안전하다.

"마차를 저기 나무 뒤로 옮기게."

먼저 마차를 잘 안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난 들어가서 한숨 잘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깨우지 말게. 마차를 옮기지도 말고."

"뭡니까? 증거를 찾는다면서요?"

"기다려보게. 내 정보원이 가져올 거야"

"정보원이요?"

난 마차 안에 들어가 의자에 누웠다.

그리고 상태창을 열었다.

[영혼 이동(lv.1) : 운명의 실타래로 연결된 마법인형에 내 영혼을 옮긴다. (성공 확률 – 50%)

성공 시 60분 동안 마법인형을 조종할 수 있다.

실패 시 600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진다.]

성공 확률은 반반.

한 번에 성공하길 빌었다.

실패했다간 시간만 날리는 거니까.

[영혼 이동(lv.1)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의식이 흐려진다.

***

퍽! 퍽!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고통이 느껴진다.

마차에 누워 있어야 할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스킬이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영혼 이동에 성공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59:59]

[영혼 이동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영혼 이동(lv.1) -> 영혼 이동(lv.2)]

대박!

50% 확률의 영혼 이동도 성공하고, 단번에 스킬 레벨까지 올랐다.

아무래도 암살자 꼭두각시 마법인형이 나와 궁합이 매우 좋은 것 같았다.

'이정도면 1년 안에 자동인형으로 만들 수 있겠어······.'

전생에 첫 자동인형을 만든 것이 각성하고 5년 후였으니, 엄청나게 빠른 것이었다.

기대감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시야가 밝아지며 나를 때린 놈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단장님······."

"왜?"

"이 새끼, 웃고 있는데요?"

"뭐?"

7. 영혼 이동.

7. 영혼 이동.

눈을 뜨자 엄습한 고통.

내 꼭두각시는 고통을 전혀 못 느낀다.

하지만 인형의 몸으로 영혼 이동에 성공한 나는 일부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 강렬한 고통이 느껴질 정도의 싱크로율이면, 이 암살자 꼭두각시를 정말 자동인형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고통스러우면서도 계속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 이런 미친놈! 웃어?"

암살자 꼭두각시를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던 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단장님, 어떻게 할까요? 더 팰까요?"

"됐다. 오늘은 그만해라! 저러다 정신을 놓으면 곤란하지."

"네!"

다행히 모진 매질은 끝났다.

단장이 나가자 몽둥이를 든 놈이 나를 노려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카악! 퉤! 암살에 실패하고도 뻔뻔스럽게 살아와? 넌 우리 페르딘 암살단의 수치다!"

퍼억!

"크윽!"

놈은 몽둥이로 내 배를 때렸다.

순간 배속이 뒤집히는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일단 오늘은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시작하자."

놈은 비릿한 웃음을 짓곤 밖으로 나갔다.

'젠장, 더럽게 아프네!'

오랜만에 느낀 고통.

그래도 다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변태라 그런 건 아니다.

방금 암살단의 정보를 얻었으니까!

페르딘 암살단이라고 했지.

새끼들 간도 크다.

대륙 2강이라 불리는 아베르크 제국의 장벽 사령관을 노리다니.

그런데 살루스 왕국의 야영지 안에 암살자들이 있다니, 왕국에서 직접 훈련시킨 놈들인가?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영혼 이동 유지 시간은 60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서 증거를 찾아야 했다.

'뭐야? 운명의 실이 10개나 끊어졌네······.'

짧은 시간에 얼마나 처맞았으면 운명의 실이 끊어졌을까.

운명의 실은 나 외에는 보이지도 않았고, 강제로 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법인형과 연결한 부위에 큰 타격을 받으면 실이 끊어진다. 그리고 운명의 실이 강제로 모두 끊어지면, 꼭두각시 마법인형은 시체로 돌아가고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좌우로 몸을 움직여 봤다.

대형 천막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탈출할 방법은 있다.

[인형의 집]

인형의 집을 열었다.

'수납해!'

순간 난 오두막 같은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몸에 걸쳐진 밧줄은 함께 들어갔지만, 기둥은 들어가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결박은 풀렸다.

문제는 다시 밖으로 나가려면 600초를 기다려야 한다.

'오랜만에 들어오네.'

좁긴 하지만 내 마법인형 수납공간에 들어오자, 고통이 조금 줄어들었다.

이대로 하루만 가만히 놔두면 웬만한 상처는 자연스럽게 치유된다.

'지금 누가 천막으로 들어오면 나가린데······.'

아침에 다시 시작하자고 했으니 괜찮겠지?

긴장한 채 600초가 지났다.

난 꼭두각시가 묶여 있었던 대형 천막으로 다시 나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상처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힘겹게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울타리 안에 울타리가 또 있네.'

천막 입구 주변을 살피자, 대형 천막 주변으로 3미터 정도 높이의 추가 울타리가 처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울타리 입구는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이건 이곳에 뭔가 중요한 것을 보관한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 뭐가 있을까?'

천막 안엔 상자와 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때 한쪽에 아직 뚜껑이 닫히지 않은 상자들이 보였다.

톱밥?

상자 안엔 톱밥이 가득했고, 하나를 치워 봤다.

그러자 드러난 초대형 알.

긴 쪽의 지름이 무려 50cm는 되어 보였다.

이건 괴수 알이 분명했다.

'괴수 알이 왜 여기에?'

수십 개의 상자엔 모두 괴수 알이 들어있었다.

잠깐, 괴수 알을 장벽 안으로 가지고 나와도 되는 건가?

내가 알기론 불가능했고,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설마, 이 알을 빼돌려 자국으로 가져가 부화하려는 건가?'

조금 전에 글래디스 하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대수림과 인접하지 않은 왕국들은 마석이나 괴수 부산물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대륙 곳곳에 대마경이라 불리는 특수한 지역에서도 괴수가 출몰하지만, 대수림의 괴수처럼 숫자가 많지도 않았고, 마석을 품고 있는 괴수도 매우 드물었다.

그랬기에 이 먼 아베르크 제국 끝까지 와서 대수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마석과 부산물을 구해도 막대한 세금이 붙었기에 큰 이익을 거두진 못했다.

마석은 검사하는 장비가 있었고, 괴수 부산물은 워낙 부피가 컸기에 사실상 몰래 들어오기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정도 크기의 알이라면, 입구에 누군가 눈감아 준다면 얼마든지 몰래 들어올 수도 있었다.

'괴수를 부화해서 사육하려는 게 분명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어이가 없었다.

괴수를 직접 키우고, 사냥한다면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고, 운송비도 거의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육 환경을 만들어야 했고, 엄청난 먹이를 공급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괴수가 탈출하기라도 한다면, 그 일대는 다른 대마경들처럼 새로운 재앙이 될 것이다.

'미친것들!'

대체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하는 걸까?

괴수에 멸망한 인류와 지구가 떠오르자, 치가 떨렸다.

생각보다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것 같았다.

이제 이 알 하나만 가져가면 증거론 충분해 보였다.

묵직한 알을 힘겹게 들고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인형의 집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

아쉽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인형의 집엔 내 마법인형이 들고 있는 물건이나 무기, 입고 있는 옷은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는 불가능했고, 알도 생명체였다.

'이 큰 걸 들고 밖으로 나갔다간 금방 붙잡힐 것이고.'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괴수 알을 몰래 옮길 방법이 없었다.

크득! 크드득!

'응?'

고민하고 있는데 천막 안쪽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알을 내려놓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동했다.

'미친! 살아 있는 새끼들도 옮기는 거야!'

천막 구석에 수십 개의 작은 철창이 있었고, 그 안엔 몸길이가 30, 40cm 정도 되는 사마귀 새끼 괴수가 있었다.

"끼이아!"

"끼릭!"

쿵! 쾅!

새끼 사마귀들이 나를 보자마자 흥분해 철창 밖으로 앞발을 내밀며 공격했다.

새끼긴 하지만 사나운 괴수.

놈들은 나를 잡아먹고 싶은 것 같았다.

'이놈도 하나만 가져가면 증거가 될 텐데······.'

아쉽게도 이 새끼들 역시 살아 있었기에 내 인형의 집에 넣어서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죽은 걸 가져가 봐야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을 거고.

아!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괴수도 생명체니까 마법인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괴수로 마법인형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

[운명의 실타래(lv.1)가 연결됐습니다.]

이번엔 다른 새끼들보다 유독 작아 보이는 사마귀 괴수와 운명의 실을 연결했다.

퍽! 퍽!

"끼악!"

'좀 죽어라!'

몽둥이 한쪽을 철창 사이에 넣고 창처럼 사정없이 찔렀다.

새끼라고 해도 껍질이 단단했기에 잘 죽진 않았다.

하지만 이십여 대나 계속해서 때리자, 겨우 쓰러졌다.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지금이다!

[인형에게 기사회생(lv.1)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제발! 이번엔 성공해라!'

25%의 확률.

하지만 계속된 실패로 벌써 십여 마리가 죽었다.

아마도 형태가 같은 인간형 마법인형보다 괴수형 마법인형의 스킬 성공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또 실패냐?

심장을 졸이며 지켜봤다.

그 순간 운명의 실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오! 성공이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없었기에 곧바로 사마귀 허수아비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이제 증거 수집은 끝났다.

[영혼 이동 남은 시간 – 00:07:32]

7분 정도 남았다.

'조금 더 뒤져볼까?'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힘겹게 열었다.

'어라? 이건!'

희미한 녹색 빛을 뿜어내는 바위.

마석이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지만, 성인 몸통만 한 크기였기에 가격이 제법 나갈 것 같았다.

다른 상자에도 커다란 마석이 들어있었다.

하나라도 챙겼으면 좋겠지만, 인형의 집엔 마법인형이 들 수 있는 물건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기에 포기해야 했다.

이걸 옮기기 위해선 작업용 기간트가 필요했다.

아쉬움을 삼킬 때였다.

안쪽에 50cm 정도 되는 금속상자가 하나 보였다.

단단한 자물쇠로 잠기기까지 했다.

뭔가 귀한 것이 들어있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

'그래 이걸 가져가자!'

내용물을 모르니 랜덤박스 느낌도 나고.

들어보니 무게도 매우 묵직했다.

금덩이라도 들었나?

시간이 없었기에 상자를 챙겨서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

[헬다임 요새 사령부]

"무슨 일인가?"

"타일러 소위가 찾아왔습니다."

"허! 이 새벽에 날 찾아왔단 말이지."

문 안쪽에서 윌리엄 사령관과 엠버 중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래디스 하사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충! 타일러 빈스 소위······."

"이리 오게."

윌리엄 사령관이 내게 손짓했다.

"그래, 이 시간에 온 걸 보면 매우 중요한 일이겠군."

"그렇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엠버 중령을 쳐다봤다.

그러자 엠버 중령은 내 뒤에 있는 글래디스를 쳐다봤다.

지금 글래디스 표정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암살을 사주한 놈들을 찾았습니다."

"뭐라?"

왠지 심드렁한 사령관의 표정.

윌리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내게 거짓을 고할 생각이면 그러지 말게."

"······."

"휴! 솔직히 말하지.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일 보고를 받고 있었네. 지난 며칠간 자넨 아무것도 한 일 없이 호텔과 레스토랑, 카페를 오갔다고 들었네. 그런데 어떻게 범인을 찾았다는 건가?"

"그야 제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응? 무슨 말이지?"

"아주 유능한 정보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 정보원이 따로 수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정보원? 하지만 자넨 그날 이곳을 나간 후부터 누구와도 접촉이 없다고 들었네만."

난 글래디스 하사를 한번 슬쩍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그걸 글래디스 하사가 알았다면, 이미 유능한 정보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그리고 글래디스 하사관이 매일 밤 자정에 10분씩 호텔을 나가서 보고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그랬군."

윌리엄 사령관이 크게 웃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 놈들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늦으면 제 정보원이 찾은 증거가 전부 사라질 테니까요."

"그래 암살을 사주한 범인이 누군가?"

"살루스 왕국입니다."

윌리엄 사령관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물론입니다. 증거도 가지고 왔습니다."

"증거가 있어?"

난 내 사마귀 꼭두각시를 가방에서 꺼냈다.

"헉! 괴수가 왜 여기에?"

사령관은 놀라 움찔하고, 엠버 중령은 검까지 뽑아 들었다.

난 살루스 야영지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마차에서 운명의 실을 추가로 연결해 사마귀 허수아비를 꼭두각시 마법인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가방을 하나 빌려 그곳에 넣었다.

난 목을 잡은 사마귀 꼭두각시의 앞발을 운명의 실을 이용해 살짝 흔들었다.

아직 훈련되어 있지 않아 이게 최선이었다.

"다 죽어가는 놈이지만 보다시피 이 새끼 괴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제 정보원이 죽음을 무릅쓰고 살루스 야영지에 잠입해 빼돌린 겁니다."

난 새끼 괴수를 다시 가방에 넣고는 부산물 시장에서부터 시작해, 시장 저택, 그리고 살루스 야영지까지 있었던 일을 차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정보원은 변신의 귀재입니다. 제가 암살자 시체 하나를 빼돌린 것은 놈의 얼굴과 체형을 완벽히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 정보원은 암살자로 변장하고 일부러 사로잡힌 겁니다. 그리고 제게 몰래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내 정보원이 알아 왔다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마법인형은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갈 내 밑천이었으니까.

"허허! 그러니까 쟝 볼타 시장과 살루스 왕국이 결탁해, 날 죽이려고 암살자를 보냈다는 말이군!"

윌리엄 사령관은 눈을 똥그랗게 떴고, 웬만한 일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엠버 중령 역시 입을 살짝 벌렸다.

"하하하! 정말 범인을 알아 오다니 대단하군!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윌리엄 사령관은 크게 웃으며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웠다.

아무래도 난 헬다임 장벽 사령관에게 제대로 찍힌 것 같다.

최고의 수사관으로!

"어서 놈들을 잡으러 가시죠. 아침이면 증거가 사라질 겁니다."

8. 기간트.

8. 기간트.

"잠깐 기다리게."

윌리엄 사령관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

그가 손을 들자, 엠버 중령이 책상 서랍에서 시가를 꺼내 건넸다.

사령관은 시가를 입에 물곤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이 빨아 당겼다.

"휴우우!"

뻐끔거리며 연기가 피어오른다.

윌리엄 사령관이 시가를 재떨이에 올리곤 입을 열었다.

"자네 노고는 알지만, 그들을 체포할 순 없네."

"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암살을 사주한 정황도 분명해 보였고, 그들이 불법적으로 괴수 알과 새끼를 빼돌린 증거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살루스 왕국이 괴수 알과 새끼 괴수들을 가져온 곳이 어딘가?"

"장벽 너머 대수림이 아닙니까."

"맞네. 그럼 그 장벽 관리는 누가 하고 있나?"

"그야 우리 제국이······."

"그게 문제가 되네. 그들을 체포하려면 전임 장벽 사령관과 시장도 체포해야 하고, 그럼 우리 제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거야."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국의 위신?

그것 때문에 범죄자들을 체포할 수 없다고?

게다가 그들은 신임 사령관인 자신을 죽이려고 암살자까지 사주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전임 사령관과 시장은 모두 빠져나갈 거네."

"증거가 명백한데도요?"

"그게 암살을 사주한 증거는 아니지 않은가."

"그럼 살루스 놈들의 자백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사령관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게 쉽지 않아. 물론 살루스 놈들을 체포하면 증거가 있으니, 장벽 입구를 지키던 말단 병사들과 지휘관 몇 명은 처벌을 받겠지. 하지만 정작 윗대가리들은 전부 다 빠져나갈 거야. 그들은 삼황자님 사람이거든."

삼황자?

뭐야? 무슨 라인이 있는 거야?

듣고 있던 엠버 중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변방에 있던 내가 왜 제국의 요직인 장벽 사령관이 된 줄 아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까?

윌리엄 사령관이 변방에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그건 황태자 전하와 삼황자 저하의 싸움이 격해져서였네."

복잡한 정치인들 싸움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 정치인 놈들이 핵무기를 써서 지구 멸망을 가속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사령관의 이야기는 계속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고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전임 사령관을 잘랐단 말씀이시군요."

"정확히는 삼황자 저하의 힘이 너무 세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그럼 윌리엄 사령관님께서는 그 두 분의 라인이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뭐, 그렇지."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물론 나도 지지하는 황자 저하가 있네. 권력 계승 순위는 한 7위쯤 될까?"

"아닙니다."

엠버 중령이 끼어들었다.

"윌리엄 중장님께서 장벽 사령관이 되셨으니, 단숨에 5위까진 올라가실 겁니다."

"뭐, 그렇다는군."

윌리엄 사령관은 시가를 다시 집어들었다.

시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 사이로 그의 주름진 눈가가 보였다.

나이는 이제 50대 중반.

하지만 세상의 풍파 때문인지, 그는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럼 결국 범인을 알아도 체포할 수 없다는 말이군요."

"아쉽게도 그렇네."

실망감에 짜증이 치밀었다.

결국, 지난 며칠 동안 헛짓거리만 한 것이 아닌가!

그때 윌리엄 사령관이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실망하진 말게. 체포는 할 수 없겠지만, 그들에게 경고는 할 순 있지."

"경고요?"

경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숨만 나온다.

"왜 경고로 부족할 것 같나?"

"아닙니다."

"그럼 경고하러 가지."

"네? 지금 말입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엠버 중령! 명을 받게."

"네! 사령관님."

엠버 중령이 사령관 앞에 섰다.

"자네 기간트를 꺼내오게."

"충! 명을 받았습니다."

엠버 중령이 경례하곤 밖으로 나갔다.

"글래디스."

"네! 사령관님!"

"홀든 대위에게 당장 장벽 수비대 1개 대대를 준비하라고 하게."

"충!"

글래디스 하사관도 밖으로 나갔다.

"소위, 자네도 함께 가지. 아주 좋은 공부가 될 거야."

"네······."

나도 윌리엄 사령관과 집무실을 나갔다.

***

쿵! 쿵! 쿵!

어둠을 뚫고 육중한 기간트 2대가 나란히 걸었다.

땅이 울리는 걸음걸음마다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하나는 엠버 중령이 탄 기체고, 다른 하나는 홀든 대위가 타고 있었다.

'저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건담처럼 조종하는 건가?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마나를 느끼지 못했기에 기간트는 꿈도 꾸지 못했고, 가까이서 구경도 못 해봤다.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던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자네, 기간트가 신기한가?"

"아쉽게도 마나를 느끼지 못해 한 번도 타보지 못했습니다."

"허! 개리, 그 친구가 매우 아쉬워했겠군."

엄청나게 아쉬워했다.

아들을 버리기까지 했으니까.

하기야 사자의 몸에서 똥개가 나왔으니, 제 새끼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

그래도 제 핏줄인데 보호는 해줘야지.

오죽하면 암살이 두려워 도망친 곳이 군대였겠나.

"너무 실망하진 말게. 뒤늦게 마나를 깨우치는 사람도 있으니까."

"네. 그런데 기간트 2대 가지고 되겠습니까? 살루스 야영지엔 기간트가 4대나 있던데요."

"응? 자네 기간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군."

"따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두 기간트의 차이를 알고 있나?"

"하나는 비숍급이고, 하나는 나이트급이 아닙니까."

나도 기본적인 것은 안다.

룩급 기간트는 11미터에서 9미터 사이, 비숍급은 9미터에서 7미터, 나이트급은 7미터에서 5미터 크기의 기간트를 말한다.

5미터에서 3미터 사이는 폰급이며, 3미터 이하는 등급이 없는 작업용 기간트였다.

물론 작업용 기간트도 마나가 있어야 탈 수 있었다.

"후후! 역시 모르고 있었어. 비숍급이라고 해도 다 같은 등급은 아니네."

"······?"

"엠버 중령이 탄 기체는 오리지널 기간트고, 홀든 대위가 탄 것은 양산형 기간트네. 쉽게 말해 짝퉁이지."

"네? 짝퉁이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기간트도 짝퉁이 있어?

"기간트의 기원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군?"

"네······."

윌리엄 사령관이 열차에서 봤던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그러니까 거신들의 갑옷이 기간트란 말씀입니까?"

"그래, 고대 거신들은 매우 뛰어난 마법과 연금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 그들은 괴수를 사냥하고 부산물을 이용해 갑옷을 만들었고, 갑옷에 마법을 새겼지. 그리고 그 오랜 세월을 견디고도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지. 그 갑옷을 인간이 탈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 오리지널 기간트고, 그 기술을 흉내 내서 인간들이 만든 것이 양산형 기간트네."

"아!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과거 거신들은 정말 뛰어난 능력자들인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 헬다임 장벽도 만들었지.

"성능 차이가 조금 있겠군요."

"조금? 후후! 기체에 따라 다르지만, 적게는 1.5배, 많게는 3배까지 차이가 나네."

"3배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잘은 몰라도 기체 성능이 3배면 일대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일 테니까.

"재료는 같은데 만드는 기술이 다른 거지. 특수한 고대 마법이 새겨진 것도 있고. 그래서 오리지널 기간트는 등급에 상관없이 매우 귀하다네. 우리 아베르크 제국에도 27대밖에 없고."

그 귀한 것을 엠버 중령이 타고 있는 거고!

"그리고 기체 성능도 중요하지만, 기간트와 싱크로율이 더 중요할 때도 있지. 특히 오리지널 기간트는 기체와 싱크로율이 70% 이상 되야 탈 수 있으니까."

"기간트에 싱크로율이라는 것도 있습니까?"

인형술사와 마법인형의 싱크로율과 비슷한 건가?

"싱크로율을 간단히 설명하면 기체와 인간과 감응도를 말하는 거네. 기간트 성능이 100이라면 그 성능을 100 다 쓸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단언하네. 많이 써봐야 70 정도지. 보통은 50 이하고, 60이 넘어가면 상급 기체로 갈아타지. 옛날에 자네 아버지가 이베리아 평원에서 비숍급 기간트로 비슷한 등급의 마장기를 7대나 물리친 적이 있는데, 그때 탄 기간트가 오리지널이 아니라 양산형이라서 전설이 된 거야. 개리 백작은 기간트와 싱크로율이 매우 뛰어났지."

그런데 이 몸뚱어리는 왜 이 모양일까?

마나도 느끼지 못하고······.

윌리엄 사령관은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나 설명해 주지 못하는 기간트의 기원에 대해 들었다.

나이 많은 사령관과 친하게 지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아! 그리고 룩급까진 인간의 기술로 만들 수 있지만, 퀸급과 킹급은 오리지널 기간트밖에 없네. 그래서 더더욱 귀하지."

쿵! 쿵!

그때 앞서던 두 기간트가 자리에 멈춰 섰다.

"벌써, 다 왔군!"

윌리엄 사령관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접근하는 기간트의 육중한 진동을 들었는지, 어깨와 가슴, 장갑이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살루스 왕국의 비숍급 기간트 2대와 나이트급 기간트 2대가 야영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쿠웅!

엠버 중령의 푸른색 기간트가 9미터의 육중한 몸을 돌려 사령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윌리엄 사령관이 근엄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기간트 사용을 허가하네. 저들에게 새로운 장벽 사령관이 누군지 확실히 깨닫게 하게."

[충! 명을 받았습니다.]

엠버 중령의 푸른색 기간트가 일어서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경고한다고 하더니 뭘 하려는 거지?'

갑자기 푸른 기간트가 살루스 기간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살루스 기간트들도 야영지를 지키기 위해 창과 검을 들고 마주 달렸다.

우우우웅! 쿵쿵쿵!

굉음과 함께 울리는 거대한 진동!

지축이 울린다.

쿠웅! 콰앙!

'어? 방금 어떻게 된 거야?'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방금 푸른 기간트가 몸을 숙이더니, 비숍급 기간트의 한쪽 다리를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비숍급 기간트는 땅에 곤두박질쳤다.

특이한 것은 푸른 기간트는 마치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비숍급 기간트는 로봇처럼 동작이 딱딱 끊어져 투박해 보였다는 거다.

'저게 사령관이 말한 싱크로율 차이인가?'

"엠버 중령이 탄 기간트의 이름은 베가스네. 고양이 같은 민첩한 마법이 새겨져 있지. 검을 잘 다루는 엠버 중령과 싱크로율이 특히 좋아."

"아!"

기이이잉! 쿵쿵!

또 다른 비숍급 기간트가 베가스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렀다.

[새끼! 죽어!]

그곳엔 탑승자가 타고 있었기에 죽이겠다는 의도.

하지만 왠지 베가스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창이 날아오는 순간 몸을 옆으로 틀더니, 손바닥으로 창을 밀면서 궤적을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콰앙! 쩌어억!

베가스가 내려친 검이 비숍급 기간트의 한쪽 어깨를 가르고 들어가 가슴팍에 박혔다.

실로 귀신 같은 솜씨였다.

베가스는 검을 뽑기 위해 비숍급 기간트를 발로 걷어찼다.

쿠왕!

비숍급 기간트는 뒤로 밀렸고, 뒤쪽에서 달려들던 나이트급 기간트와 충돌해 같이 쓰러졌다.

[건방진 것들! 감히 제국의 사령관을 노려!]

분노에 찬 엠버 중령의 고함이 들렸다.

그녀의 베가스는 쓰러진 나이트급 기간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칼로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허! 웬만한 괴수 대가리도 단번에 잘리겠어!'

거대한 것들의 전투에 내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덤벼라!]

엠버 중령이 마지막에 남은 나이트급 기간트를 향해 검을 겨눴다.

하지만 상대 기간트는 이미 창을 옆에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항복하겠다는 의사였다.

[놈들을 제압하라!]

뒤쪽에 있던 제국군의 나이트급 기간트에서 홀든 대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와아아아!"

살루스 야영지를 포위하고 있던 1개 대대 병사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들어 갔다.

전투는 예상외로 싱겁게 끝났다.

"어떤가? 기사들의 싸움이?"

"기사요?"

"옛날부터 전장을 지배하는 자들을 기사로 불렀지. 지금도 마찬가지네. 기간트는 이 시대의 기사지."

크고 웅장한 기간트의 싸움을 보자, 나도 가슴이 뛰었다.

"저, 그런데 경고를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경고가 아니라 제압이 아닙니까?"

"경고란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지. 거의 정리가 끝나가니 우리도 들어가지."

난 사령관을 따라 살루스 야영지로 들어갔다.

살루스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나 귀족으로 보이는 자들까지 모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야영지 중간에 괴수 알과 새끼 괴수가 들어있는 철창들이 쌓여 있었다.

"이곳 책임자를 데려오게."

사령관이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이 한 뚱뚱한 사내를 끌고 왔다.

"난 살루스 왕국의 아칼룸 백작이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아칼룸 백작, 그대 눈에는 저기 쌓여 있는 괴수 알과 새끼 괴수들이 보이지 않는 건가?"

"하지만 저건 전임 사령관이······."

"그만!"

윌리엄 사령관은 그의 말을 끊었다.

"살아 있는 괴수는 크건 작건 절대 장벽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선 안 된다. 맞나?"

"마, 맞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손짓하자, 엠버 중령이 육중한 기간트로 쌓여 있는 상자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알은 터지고 새끼 괴수들은 납작해졌다.

"이곳에 있는 마석과 부산물도 불법 장물일 가능성이 크니 모두 압수하도록!"

"네!"

작업용 기간트까지 동원되어 그들이 본국으로 가져가려던 물건까지 압수하기 시작했다.

"제발! 저걸 다 가져가시면 전 죽습니다."

아칼룸 백작이 애원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난 장벽 사령관으로 불법 장물을 파괴하고 압수할 뿐이다."

이미 벌인 짓도 있고 증거도 있으니, 아칼룸 백작도 더는 매달리지 못했다.

윌리엄이 내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봤나? 이 정도면 저들에게 경고가 되겠지?"

"나중에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령관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괜찮네. 살루스 왕국의 힘으론 이 일을 따지지 못할 거야. 뭐, 따지고 들면 갖은 이유를 붙여서 장벽 출입을 금하거나 물건을 계속 압수하면 그만이네. 그게 장벽 사령관의 힘이지."

"이곳 세상도 힘으로 움직이는군요."

내 말을 듣자 윌리엄 사령관이 환하게 웃었다.

"그거 보게, 내가 좋은 공부가 될 거라고 했잖은가."

법과 규칙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세상.

그리고 그 힘의 정점은 기간트였다.

검을 든 엠버 중령의 육중한 기간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전생의 S급 헌터 능력을 찾아도 저런 기간트를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강한 마법인형을 만들어도 저 크고 강한 기간트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결국, 기간트네!'

헌터 전사들이 달려들고, 마법사가 마법을 난사하고, 내 마법인형 군단이 떼거리로 공격해야 잡을 수 있었던 괴수.

하지만 저 기간트가 달려가 칼질 몇 번 "쓱!" 하면 끝이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강해지고 살아남으려면 결국 기간트에 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잠깐! 엠버 중령 같은 기사를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면, 마법인형이 기간트를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9. 이계 난민.

9. 이계 난민.

마나를 다루는 인간을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어 기간트를 조종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니 가능하다!

전생에도 전투 중 괴수에게 죽은 동료 헌터 마법사를 마법인형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생전에 마법사가 익힌 마법 스킬들은 모두 사라져 초기화되지만, 몸속에 마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난 그 마법인형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꾸준히 훈련해 아주 기초적인 마법부터 다시 배우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둘 익힌 마법을 영혼 이동 스킬을 통해 사용하다 보면 나도 배울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내가 인형술사로 S등급 헌터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먼저 마나를 가진 인간을 마법인형으로 만들고, 영혼 이동을 통해 직접 기간트를 조작하고 가르친다면, 마법인형으로 기간트를 조종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러다 보면 나도 이 세계의 마나를 깨우칠 수도 있고.

그럼 기간트도 탈 수 있으리라!

성공하든 못하든 시도해볼 만했다.

물론 지금은 마나를 익힌 마법인형도 기간트도 없기에 아직 먼 이야기였지만.

'우선 내 몸을 지킬 마법인형을 늘리고, 기간트에 집중하자!'

슬기로운 이계 생활이 다시 머릿속에 그려졌다.

"모든 천막을 다 뒤져라! 모두 압수해!"

"마석을 마차에 실어라!"

한쪽에선 마석이 들어있는 커다란 상자를 작업용 기간트로 계속해서 나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마석은 제일 중요한 광물이었다.

도시의 불을 밝히기도 하고, 열차를 움직이고, 냉난방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구의 석유와 쓰임새가 비슷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간트에 필수란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인간이 거신의 후예였지만, 기간트에 탈 수 있는 것은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극소수였다.

하지만 지금 인간의 마나 수준으론 저 거대하고 육중한 기간트를 조종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필요한 것이 마석 배터리였다.

마나를 품고 있는 돌, 금속, 거신목까지.

그걸 정제해 만든 것이 마석 배터리였고, 이걸 기간트에 장착하면 인간의 필요 마나를 1/20 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고, 더 오랜 시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이번에 거의 반년 동안 대수림에서 모아왔던 마석까지 모두 압수당한 것은 살루스 왕국엔 큰 타격이었다.

새삼 장벽 사령관의 힘이 실감 났다.

'어? 저 새끼는 날 신나게 팼던 놈이네!'

영혼 이동했을 때, 내 마법인형을 패면서 페르딘 암살단의 수치라고 말했던 놈과 단장이란 놈이 보였다.

난 윌리엄 사령관에게 다가가 페르딘 암살단에 대해서 말했다.

"허허! 살루스 암살자들이 내 구역에서 설치는 꼴은 못 보지."

윌리엄 사령관은 살루스 왕국 책임자인 아칼룸 백작을 다시 불렀다.

"이 캠프에 있는 암살자들을 모두 내놓게."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암살자라니요?"

아칼룸 백작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모르는척했다.

증거가 없으니 연기를 하는 것이다.

"후후! 제국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는군. 페르딘 암살자들이 이곳에 있는걸 알고 있네. 그러게 날 암살하려면 더 많은 암살자를 보냈어야지."

사령관이 암살단 이름까지 정확히 말하자, 아칼룸 백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암살자들을 전부 데려오면 이쯤 해서 이번 일은 덮도록 하겠다. 아니면 내가 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제국의 장벽을 통해 마석을 들여오는 일은 포기해야 할 거야."

"휴우! 알겠습니다."

아칼룸 백작이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여기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6명을 데리고 왔다.

'어쭈, 이 새끼 봐라!'

내 마법인형을 팼던 놈과 단장을 쏙 빼놓았다.

그 두 놈이 암살단의 중추인물이었다.

"글래디스, 병사들과 날 따라오게."

"네?"

글래디스가 사령관을 쳐다보자, 사령관이 고개를 끄떡였다.

글래디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날 따라왔다.

"여기, 이놈을 사로잡게."

난 먼저 내 마법인형을 신나게 팼던 놈을 지목했다.

"잡아!"

병사들이 달려들자, 암살자가 울타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다다닥! 퍼억!

하지만 글래디스의 어깨치기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여기 이놈도 묶어라!"

그리고 단장을 지목했다.

단장은 순순히 포박을 받았다.

"이놈이 페르딘 암살단의 단장입니다."

윌리엄 사령관은 아칼룸 백작을 노려봤다.

"이런, 내 호의를 무시했군."

백작은 사령관의 말에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아, 아닙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앞으로 6개월간 살루스 왕국의 사냥팀이 가지고 들어오는 마석과 부산물은 모두 압수하겠다."

"헉! 그것만은 제발!"

"억울하면 우리 황제 폐하께 정식으로 항의해라! 그럼 난 이번 암살미수 사건과 불법 장물 사건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리겠다."

윌리엄 사령관은 단호했다.

아칼룸 백작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은 날 향해 뒤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후후! 자넨 정말 모르는 게 없군."

"아닙니다. 모두 제 정보원이 알아낸 것입니다."

"언제 나도 그 정보원을 한번 보고 싶군."

"제 정보원이 드러나면 가치가 떨어질 겁니다. 워낙 낯을 많이 가리는 친구기도 하고······."

"하하! 무슨 말인지 알았네."

그때였다.

하사관 한 명이 다가왔다.

"사령관님, 토굴에서 이계 난민들을 발견했습니다."

"뭐? 데리고 오게."

이계 난민은 또 뭐야?

잠시 후 병사들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작은 키에 튼튼한 몸,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

그들은 인간이 아닌 드워프였다.

'드워프가 여기 왜 있지?'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종족이 아닌가?

나도 살짝 당황했다.

드워프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사령관님, 어떻게 할까요?"

"모두 마차에 태우고, 일단 요새 감옥에 가두게."

"네!"

궁금증이 밀려왔다.

"사령관님, 저 드워프들은 뭐고, 이계 난민은 또 뭡니까?"

"응?"

사령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넨 범인은 귀신같이 잡으면서 세상일엔 모르는 것이 왜 이렇게 많아?"

"죄송합니다."

"후후! 괜찮네. 내가 알려주면 되지."

윌리엄 사령관은 이번에도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지었다.

"20여 년 전쯤이야. 갑자기 장벽 너머 대수림에 난민들이 나타났지.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고,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괴수에게 멸망했다며 도움을 청했네. 그래서 그들을 이계 난민이라 부른다네."

"대수림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차원 균열이라고 했나? 사실 나도 거기까진 모른다네. 대수림엔 우리도 모르는 일이 너무 많아. 아무튼, 그들과 우리 언어 체계가 너무 달라 학자들도 의사소통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들었네. 그리고 처음엔 그 숫자가 몇 명 정도였는데, 나중엔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나타난 적도 있고. 게다가 최근엔 드워프뿐만 아니라 엘프와 오크까지 종족도 다양해졌네."

엘프와 오크도 있다고?

그런데 타일러는 왜 영지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아니 수도나 할데가르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린 그들을 장벽 안으로 데려오진 않았네. 그들이 불순한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고, 숫자가 늘어나면 관리하기도 힘들 테니까. 대신 대수림의 몇몇 전진 기지에 그들이 살 수 있게 허락했네. 이계 난민들은 우리 일을 돕고, 우린 기간트로 그들을 보호하며 상부상조하는 거지."

"아! 그렇군요."

타일러 빈스가 세상 물정을 몰랐다곤 하지만, 정말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런데 드워프가 왜 여기에 있는 건가요?"

"글쎄, 가끔 엘프를 장벽 너머로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황족이나 귀족들의 노리갯감으로 말이지."

"불법 아닌가요?"

"내가 말했잖은가. 힘이면 안 되는 일이 없네. 황족이나 귀족이 보증한다면 가능하지. 하지만 드워프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사령관이 말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뛰어난 광부들이라 대수림에서 마석을 캐는 데는 좋지만, 그 외에는 어디에 쓰지?"

"그럼 저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허가 없이 불법적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테니, 확인해보고 대수림 밖으로 추방해야지."

"추방이요?"

"아! 물론 그냥 저들만 보내진 않을 거야. 영지의 사냥팀이나 이번에 정기 물자를 보낼 때, 함께 보낼 걸세."

오늘도 사령관에게 많은 정보를 얻었다.

"타일러 소위, 오늘 수고했네."

"네, 감사합니다."

이날 윌리엄 사령관은 살루스 왕국의 야영지를 완전히 탈탈 털어버렸다.

***

[요새 사령부]

"사령관님, 제가 드워프들을 심문하고 싶습니다."

"심문?"

"드워프들이 왜 이곳에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그래서 펜과 노트를 준비했습니다. 말은 안 통해도 그림은 어느 정도 통할 겁니다."

"그림이라······, 알겠네. 허락하지."

사령부 요새로 돌아오자, 드워프들은 지하 감옥에 갇혔다.

탈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난 글래디스와 먼저 부엌에 들러, 수프와 빵을 넉넉하게 챙겨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문을 열게."

"네!"

철컹!

쇠창살 문이 열리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횃불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지하 감옥은 매우 어둡고 눅눅했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철창 안에 드워프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난 따뜻한 수프와 빵을 철창 안에 넣어줬다.

"글래디스, 담요를 가져다주겠나?"

"네? 담요요?"

"여긴 편히 앉을 자리도 없으니, 바닥에 담요를 깔아주려고. 저들이 범죄자는 아니잖아."

"아! 알겠습니다."

글래디스가 올라가고 난 쇠창살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먹으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난 수프 그릇 하나와 수저를 들고 먹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먹지 않자, 직접 수프를 떠서 먹었다.

"%$!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

"%$! @#$%[email protected]

?"

그러자 지금까지 침묵했던 드워프들이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언어를 탐지했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역시 갓태창!

내가 굳이 이들의 심문을 맡겠다고 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헌터 상태창이 좋은 점 하나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지구의 헌터들은 국적이 달라도 막힘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드워프 말도 알아듣겠지.

뭐든 아는 것이 힘이다.

"%$! %[email protected]

#@&."

"%$! %#[email protected]

$#@?"

"%$! @#[email protected]

##!"

한 드워프가 손을 번쩍 들고는 앞으로 나와 수프를 먼저 먹어보았다.

그리고 빵도 먹었다.

아무런 이상이 없자, 다른 드워프들도 달려들어 허겁지겁 배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

[언어 분석이 끝났습니다.]

"확실히 인간들의 음식 솜씨는 드워프보다 낫다."

"맞다! 수프가 아주 맛있다."

'좋았어!'

난 이제 드워프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엘프와 오크 언어도 배우면, 정말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언어 학자가 되면 되니까.

드워프들은 며칠은 굶은 것 같이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때 나이 많은 드워프가 나를 보곤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드워프다! 인간 앞에서 품위를 잃지 마라!"

"알았다."

그들은 배부르게 먹고, 각자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때 한 드워프가 말했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가 있던 대수림 기지로 돌아갈 것이다."

"제길! 다시 또 그놈들의 밑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젊은 드워프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나이 많은 드워프가 달래듯이 말했다.

"왕자여! 진정해라! 위대한 드워프 선조들께서 우릴 인도하실 거다!"

왕자라고 저 젊은 드워프가?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왕자치고는 너무 볼품없어 보였다.

"맞다! 드워프는 위대하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른 드워프들도 왕자를 위로했다.

쾅!

갑자기 왕자가 일어서 벽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글러드 왕자여! 무슨 짓인가?"

"괜찮은가?"

드워프들이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글러드 왕자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드워프는 위대하지 않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형제를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괴수를 막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키지 못했다. 드워프는 나약하다!"

왕자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자, 초토화된 지구가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멸망한 것도 우리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린 서로 힘을 뭉치지도 못했다.

갑자기 괴수가 출몰하자, 인류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생긴 헌터의 힘.

새로운 힘으로 괴수를 때려잡자, 너무 안일하고 나태해졌다.

그것이 거대한 댐에 생긴 작은 구멍인 줄도 모르고.

'하아! 저 드워프들의 처지가 나와 같구나!'

타일러 빈스의 몸에 들어와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어도 내 본질은 헌터 고강해.

저들은 나와 같은 아픔이 있었고, 그런 드워프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이제 우리만 믿고 기다리는 형제들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이제 드워프의 미래는 없는가······."

나이 많은 드워프가 왕자를 보며 말했다.

"왕자여! 아무래도 우리가 인간들에게 괴수 부산물을 가공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실수인 것 같다."

"자모크여! 내 실수는 인정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들이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땅만 팔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이다."

둘의 대화가 점점 심각해졌다.

잠깐만!

방금 드워프가 괴수 부산물을 가공했다고 했다.

그럼 기간트도 만들 수 있을까?

10. 포상.

10. 포상.

부임한 지 보름이나 지나 열린 사령관 취임식은 꽤 화려하고 떠들썩했다.

그리고 취임식이 끝나고 열린 환영 연회.

이곳 3층 대강당엔 이십여 명의 악사가 아름다운 선율의 곡을 연주하고, 테이블엔 고급 포도주와 먹음직한 음식이 가득하다.

천장엔 십여 개의 샹들리에가 영롱한 빛을 반짝이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에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축하 연회였지······.'

샌님에 찐따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청혼을 하다니.

타일러가 평생 낼 용기를 그때 다 쥐어짠 것이었다.

응? 뭐지?

지금 샤를린 위네스를 생각하는 건가?

파혼당한 주제에······.

애써 고개를 흔들어 타일러의 옛 기억을 날려버렸다.

창밖을 보자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산맥처럼 펼쳐진 거대한 헬다임 장벽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 장벽 너머엔 괴수들이 득실대는데 여긴 파티가 벌어졌네.'

인류도 저런 장벽을 만들 기술이 있었다면, 멸망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새삼 고대 거신들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창문에 살짝 기대 천천히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상류층이었다.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 외교관들.

장성도 몇 명 보였고, 장교도 영관급 이상이었다.

하급 장교는 부관이나 보좌관 정도였고, 그마저 소위 계급장을 단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 때문인가?

아까부터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음에도 나 혼자 고립된 섬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이방인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원래 인형술사는 혼자 놀기 장인이지.'

상태창을 열었다.

[타일러 빈스(23)]

[클래스 – 인형술사(F)]

[레벨 – 4]

[고유 스킬 – 운명의 실타래(lv.2), 기사회생(lv.1), 영혼 이동(lv.2), 병렬사고(lv.1)]

[인형의 집]

인형술사 레벨이 4로 올랐다.

확실히 전생보다 속도가 빠르다.

사실 아무것도 없을 때가 힘들었지, 꼭두각시 마법인형을 만든 다음부턴 가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스킬 레벨이 올랐다.

[운명의 실타래(lv.2) : 살아있는 생명체에 술사와 연결된 운명의 실을 부착한다. (369/400)]

마법인형을 늘리려면 기본적으로 운명의 실타래가 많아야 한다. 어제 스킬 레벨이 오르면서 운명의 실타래가 100개 추가됐다.

그리고 난 오늘 연회 준비를 맡은 장교들과 하사관, 연회장 내부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운명의 실을 연결해 그들을 감시했다.

사령관 암살미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또 사령관을 노릴지도 모르고.

이곳에 오진 않았지만, 쟝 볼타 시장 패거리가 건재했고 사령부 내에 첩자가 누군지도 아직 모르니까.

인형의 집을 열었다.

인형술사 레벨이 오르자, 5미터로 넓어진 공간.

한쪽에선 암살자(lv.3)가 좌우로 몸을 움직이며 허공에 단검을 휘두르고 있고, 사마귀(lv.4)는 벽과 천장을 타고 다니며 양 앞발을 칼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두 꼭두각시가 저렇게 인형의 집에서 계속 훈련하면 레벨과 경험치가 오르고, 마법인형의 레벨이 오르면 내 레벨과 경험치도 오른다.

'귀여운 녀석들!'

전생과 다른 점이라면 역시 사마귀 새끼 괴수 꼭두각시였다.

암살자 꼭두각시보다 일주일이나 늦게 만들어졌지만, 레벨은 더 빠르게 올랐고, 이젠 앞질렀다.

괴수 마법인형이 처음이라 신경 쓴 것도 있지만, 운동신경과 반사신경이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 이제 대결을 시켜볼까.'

인형술사의 혼자 놀기 진수.

아직 두 꼭두각시가 레벨도 낮았고, 가르친 동작이 많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대결은 아니었지만, 시간 보내기엔 그만이었다.

'일단 암살자는 계속 공격하고, 사마귀는 피하기만 해!'

두 꼭두각시의 대결이 벌어졌다.

암살자가 단검을 열심히 찔러 보지만, 사마귀가 폴짝폴짝 뛰면서 잘 피한다.

인형의 집을 축소해서 보자, 마치 TV 속 인형극을 보는 기분.

아직 목각인형처럼 동작이 부자연스럽지만, 둘 다 일반 병사 한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준이었다.

"왜 구석에 계십니까?"

"응?"

깜짝 놀라 인형의 집을 닫아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글래디스 하사였다.

"글래디스, 복장이 그게 뭐야?"

그녀는 남자들이 입는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저도 가슴이 너무 꽉 껴서 죽겠습니다."

보는 나도 답답해 보였다.

"다른 여자들처럼 드레스를 입지 그래?"

"드레스를 입고 경호할 순 없지 않습니까."

"여성용 연미복도 있을 텐데?"

"제 체격에 그런 걸 입으면, 너무 눈에 띌 겁니다."

"아! 하긴."

여성용 연미복은 대부분 몸에 착 붙는 스타일이라 몸매가 날씬한 장교가 입으면 멋있지만, 글래디스처럼 큰 체격에 근육질 여자가 입으면 시선을 강탈당할 것이다.

그런데 혼자 있는 날 생각해서 다가와 준 건가?

"전엔 죄송했습니다."

"뭐? 아! 상부에 보고한 것 말인가?"

"네. 사실 제가 본 그대로만 보고했기에 윗분들께서 소위님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나도 정보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옆에 있자, 조금은 연회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글래디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제복에 별 하나.

"충! 타일러······."

"어허! 목소리를 낮추게. 여긴 연회장이다."

"네, 알겠습니다."

내 앞에 선 것은 정보국 헬다임 지부장인 클린드 준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반보 뒤엔 부지부장이자, 내 직속 상관인 프레디 중령이 서 있었다.

"자네 활약은 잘 들었다. 장벽 사령관을 구한 것도 훌륭한데, 범인도 찾았다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고?"

클린드 준장이 피식 웃었다.

"난 운이 좋은 사람이 좋더군."

지부장이 프레디 중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중령이 작은 상자를 열어 뭔가를 건넸다.

"장소가 마땅친 않지만, 공을 세웠으니 상을 줘야지!"

"네?"

클린드 준장은 은색 줄 2개가 달린 견장을 내 어깨에 직접 달아 주었다.

"축하하네! 타일러 빈스 중위!"

"충! 감사합니다."

솔직히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보통 1년 걸리는 진급을 4개월 만에 했으니, 초특급 승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지부에 자네 같은 인재가 들어와서 다행이네."

클린드 준장은 나와 악수하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면서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딜 보는 거지?'

나도 지부장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윌리엄 사령관과 엠버 중령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사령관이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

"클린드 지부장, 뛰어난 부하를 두셨소."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희 헬다임 지부가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는데, 이번에 신임 사령관님을 돕게 되어 다행입니다."

"타일러 중위를 칭찬했는데, 헬다임 지부도 묻어가시려고?"

"하하! 타일러 중위가 정보국 소속이니 당연하지요."

"그건 그렇군.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네."

윌리엄 사령관과 클린드 지부장은 발코니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난 프레디 중령과 엠버 중령 사이에 껴서 뻘쭘하게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건 프레디 중령이었다.

"긴장 풀고 편히 있게. 이야기가 길어질 거야."

"네."

프레디 중령은 주머니를 뒤지며 입맛을 다셨다.

"젠장, 담배를 놓고 왔군. 타일러 중위, 우리도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네."

난 엠버 중령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프레디 중령을 따라 이동했다.

"너무 기대하진 말게. 지부장님이 자넬 보내주진 않을 거야."

"네? 그게 무슨?"

"저분들이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겠나? 윌리엄 사령관께선 자네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아! 그렇군요."

윌리엄 사령관이 날 사령부로 스카우트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자네에 대해 좀 알아봤지. 본부 서류 창고에서 자살 시도를 했다고?"

"그날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후후! 그래? 기억상실증이라니, 아주 참신해! 하긴, 천하의 슈나인 중령을 속이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다고 해두지."

프레디 중령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령부로 가는 게 자네한텐 좋겠지만, 지부장님은 이번 기회에 헬다임에서 우리 정보국의 영향력을 넓히려 하고 있어 힘들 거야."

수도나 할데가르에선 정보국의 힘이 막강했는데, 왜 헬다임 장벽에선 힘을 못 쓰는 걸까?

그런 의문이 다시 들었다.

내 표정을 읽었을까?

"이곳은 제국의 다른 직할령과 달라. 38개 영지의 사냥팀이 모여 있는 곳이라 우리 정보국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지. 그렇다고 인력을 늘리거나 규모를 늘리려 한다면, 영주 회의의 반발이 심할 거고. 하지만 장벽 사령부와 함께 움직인다면 다른 영지들도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할 거야. 괜히 사령관에게 찍히면 괴롭거든."

프레디 중령이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해 줬다.

그만큼 장벽 사령관의 힘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우리 지부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자금이나 정보원이 필요하면 말하게. 훈련받은 요원을 붙여 줄 수도 있어. 그리고 사령부 내에 특이 동향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프레디 중령 역시 날 보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날 이용하려고 하겠지.

그러고 보면 같은 중령인데, 나이 차가 꽤 나네.

엠버 중령은 20대 후반이었고, 프레디 중령은 30대 후반으로 두 사람 나이 차이는 적어도 10살 이상.

프레디 중령의 진급이 느린 것이 아니라, 엠버 중령이 대단히 빠른 것이다.

그녀는 기간트를 타는 기사였으니까.

십중팔구 별을 다는 것도 엠버 중령이 훨씬 빠를 것이다.

"그만 가지. 윗분들 이야기가 끝난 것 같네."

두 장성의 대화가 끝나자, 클린드 지부장은 급한 일이 있는지 프레디 중령에게 몇 마디 남기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프레디 중령이 내게 말했다.

"자넬 앞으로 반년 동안 장벽 사령부에 파견하기로 했네."

"네."

"그리고 새로운 임무는 특히 조심하게."

"새로운 임무요?"

"그건 사령관님께 듣게. 돌아오면 바로 보고하고."

"네!"

프레디 중령은 윌리엄 사령관에게 경례하곤, 자리를 떠났다.

새로운 임무라고?

왠지 불안한데······.

중령이 사라지자, 윌리엄 사령관이 다가왔다.

"타일러 중위, 혹시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게 싫은가?"

"아닙니다. 윌리엄 사령관님 밑에서 일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후후! 그럴 줄 알았지. 그리고 정보국이 놓아주지 않는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저들도 자네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나면 별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까진 내가 이곳 사령관으로 있지 않겠나?"

"아닙니다. 10년, 아니 20년은 거뜬하실 겁니다."

"하하! 자네 아부도 잘하는군."

사실 정보국보다 장벽 사령부에 있는 것이 나한테 유리했다.

마법인형을 만들 기회는 이곳이 아니라, 장벽 너머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도 나쁘지 않다.

사령부에서 근무하면 장벽을 오갈 수도 있고, 내가 활약하면 오늘처럼 정보국에서 내 계급을 빠르게 올려줄 테니까.

"원래는 자넬 데리고 다니면서 귀족들과 장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시킬 생각이었네. 장벽 사령관을 구한 것이 누구인지 만천하에 알려줄 생각이었지."

날 제대로 키워주려고 했다는 거네?

갑자기 윌리엄 사령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방금 새로운 비밀 임무가 생겼으니, 한 번 더 고생을 해줘야겠어."

"비밀 임무요?"

"연회가 끝나면 내 집무실로 올라오게."

"네······."

아무래도 방금 클린드 지부장이 뭔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그 정보를 알아보는 임무를 맡기겠지.

쉬운 일이면 좋겠는데······.

***

환영 연회가 끝나고, 곧바로 사령관 집무실로 올라갔다.

"고생했네. 먼저 자네 포상을 줘야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급은 그냥 기본 옵션이었고,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 포상.

윌리엄 사령관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1,000골드네. 제국의 어느 은행에 가도 금화로 환전할 수 있지."

그렇지!

어느 세상이나 돈이 최고다.

중위 한 달 급여가 6골드.

1,000골드면 한 푼도 쓰지 않고 거의 15년을 모아야만 만질 수 있는 큰돈이었다.

"감사합니다."

1,000골드를 받았다.

주머니가 두둑하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 살루스 야영지에서 벌어들인 수입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금화네. 그냥 성의라고 생각하게."

"아닙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지."

윌리엄 사령관이 손짓하자, 엠버 중령이 상자를 하나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렸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게."

윌리엄이 또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상자를 열자, 회색 조끼가 보였다.

"이번 암살미수 사건을 어떻게 아셨는지, 황제 폐하께서 내게 하사하신 물건이네. 웬만한 창과 칼로는 흠집도 나지 않지. 이걸 가져가 입게."

"이 귀한 물건을 왜 제게?"

"나야 사령부 요새에서 나갈 일이 없잖은가? 여긴 지키는 병사들도 많고, 게다가 엠버 중령도 있고. 하지만 자넨 앞으로 위험한 일을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보다 자네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야."

상태창을 열어 아이템을 살폈다.

[로트거너의 비늘로 만든 조끼(방어력:★★★☆등급)]

별 3개 아이템이라니!

전생에도 B등급 이상의 헌터들이 쓰는 희귀템이었다.

그것도 방어구라 몸뚱어리가 허접한 지금 내겐 딱 좋은 포상이었다.

기쁨도 잠시.

순간 이 선물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거 앞으로 죽어라 굴리겠다는 뜻인데!'

아니나 다를까.

"아! 물론 진짜로 주는 건 아니네. 아무래도 황제께서 주신 하사품이고, 모르긴 몰라도 그 조끼 가격이 수만 골드는 할 거야."

"네, 저도 그 정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맡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땐 진짜로 주지."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다.

게다가 수만 골드짜리 물건을 준다는 뜻은 새로운 임무가 매우 어렵다는 방증.

윌리엄 사령관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대수림으로 가야겠어."

"대수림이요?"

썩을!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거부할 선택지는 없다.

군인이 명령을 거역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나도 장벽 너머로 갈 생각이었다.

물론 준비가 된 다음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임무겠군요."

"물론이네. 그리고 기밀을 요하는 임무기도 하고."

"임무를 듣기 전에 한 가지 개인적인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부탁? 말해보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지하 감옥에 있는 드워프 난민들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드워프를?"

11. 아지트.

11. 아지트.

"드워프 난민을 맡겨달라니?"

탁!

윌리엄 사령관이 자기 무릎을 쳤다.

"아! 자네가 그 이계 난민들을 챙긴다는 말은 들었네. 그들을 직접 살루스 전진 기지로 데려다주려는 거군."

"그건 아닙니다."

"아니야?"

"드워프 난민들을 이곳 헬다임에 데리고 있고 싶습니다."

"뭐? 이곳에?"

윌리엄 사령관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어디에 쓰려는 건가?"

"드워프들의 언어를 배우고 싶습니다."

"언어 학자도 아닌데 자네가 왜?"

"앞으로 장벽 너머에 이계 난민들은 더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럼 분쟁이 생길 수 있고, 장벽 사령부에도 난민들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제가 그 일을 맡고 싶습니다."

"허허! 자네답게 정말 기특한 생각을 했군."

윌리엄 사령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드워프 한 명 정도는 내가 빼줄 수 있지."

"모두 제가 데리고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일곱 명, 모두?"

사령관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실은 그들의 처지가 딱해서 그렇습니다. 마치 얼마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립니다."

"자네 모습이라니?"

"이미 아시겠지만, 전 사생아에 반쪽짜리 귀족이고, 마나도 다루지 못해 가문에서 버려진 처지입니다. 그리고 후계에서도 완전히 밀리며 암살 위협에 어쩔 수 없이 군대에 자원입대한 겁니다."

사령관도 이미 내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열차에서 제 목에 난 상처가 뭔지 물으셨죠? 그땐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 버려진 제 처지를 비관해 목을 매 자살하려고 했고, 실패했습니다. 그 때문에 정보국 본부에서 쫓겨나 헬다임 지부로 온 것입니다."

"그래, 그건 나도 짐작했지······."

"지금 드워프들의 처지가 꼭 저와 같습니다. 자신들의 세상은 망하고 기껏 도망쳐왔는데, 인간들에게 잡혀 토굴에 갇히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겨우 구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을 가둔 인간들에게 다시 보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슬쩍 사령관의 눈치를 살피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전 운이 좋아 헬다임으로 가는 열차에서 윌리엄 사령관님을 만나 수사관으로 재능도 찾았고, 뛰어난 정보원도 생겼습니다. 지금 드워프들에겐 사령관님이 제게 해주셨던 것처럼 따스한 배려가 필요하고, 그걸 제가 하고 싶습니다."

"어허! 이거 참! 그래서 드워프들을 살뜰히 챙겼구먼."

"헬다임 도심지에 살 생각은 없습니다. 헬다임에서 남서쪽으로 50분 정도 떨어진 곳에 큰 바위산이 있습니다. 그 산 앞에 낡고 오래된 목장이 하나 있습니다. 주변에 인적도 없고, 매우 조용한 곳입니다. 그곳을 매입해 쥐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물론 드워프의 언어도 진짜로 배우겠습니다."

"이미 살 곳까지 알아봤군."

"죄송합니다. 그들의 처지가 하도 딱해서······."

윌리엄 사령관이 엠버 중령을 쳐다봤다.

"일곱 정도면 괜찮겠지?"

"네. 이계 난민들의 존재를 아는 것은 살루스 왕국뿐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이니, 어디서 떠들진 못할 겁니다."

대답하는 엠버 중령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뭐지?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런 일엔 감수성이 풍부한가?

잠시 고민하던 윌리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네에게 드워프 난민들을 모두 맡기지. 하지만 명심하게! 그들은 전적으로 자네의 책임이네. 이곳 헬다임을 떠났다가 잡히면, 그땐 나도 자넬 도와주지 못해."

"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벌떡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드워프들을 얻었다.

어찌 보면 이게 진정한 포상이었다.

드워프들의 말처럼 그들이 괴수 부산물을 가공할 수만 있다면, 기간트를 직접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준비할 것이 많긴 하지만, 다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임무를 말해주지."

윌리엄 사령관의 말에 몸이 잔뜩 긴장했다.

사령관은 30분이나 이번 임무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자 부담감이 몰려왔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네요. 이런 큰일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네. 자넬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게. 알다시피 날 죽이려는 놈들의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 100여 명의 수사팀을 꾸렸네. 하지만 범인을 알아낸 것은 자네 혼자야. 그것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지.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클린드 지부장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고."

"지부장님이요?"

아무래도 임무를 거부할 순 없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차피 드워프들 때문이라도 대수림에 갈 일이 있었다.

단지 시기가 좀 많이 빨라졌을 뿐······.

***

평지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

높이는 200여 미터로 높진 않지만, 산 대부분이 바위로 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앞에 목장이 있었다.

"워어!"

마차에서 내린 드워프 원로 자모크가 물었다.

"타일러여! 여긴 어딘가?"

"집. 나, 드워프 집."

단답형으로 어눌하게 대답했다.

이미 드워프 언어를 100%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었지만, 배우는 척을 하며 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또 그들에게 지난 열흘 동안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을 직접 가져다주고 친밀감을 쌓았기에 나를 대함에 적개심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여느 말 목장처럼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말은 겨우 5마리.

그리고 목장 가운데 낡고 허름한 2층짜리 집이 있었다.

무려 300골드나 주고 산 집과 목장이었다.

바가지를 썼지만, 급하게 매입하다 보니 흥정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이 세상에 마련한 내 첫 번째 집이었기에 기분은 좋았다.

"왕자여! 정말 우릴 장벽 밖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타일러가 드워프에게 약속을 지켰다."

드워프들은 내게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자유! 저기, 아냐!"

울타리 바깥을 가리키고 손으로 엑스 표시를 했다.

그렇게 손짓·발짓까지 동원해 설명하자, 그들도 내 말을 알아들었다.

"타일러여!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우린 갈 곳이 없다."

난 드워프들에게 마차의 짐을 꺼내라고 시켰고, 글러드 왕자를 따로 불렀다.

"드워프, 집 고쳐."

"알았다. 타일러여!"

왕자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장벽 너머로 돌아가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아직 완벽한 자유는 아니었고, 살루스 전진 기지에 200명이나 되는 드워프 난민들이 있었기에 걱정이 많아 보였다.

난 바닥에 나뭇가지로 헬다임 장벽을 그리고 드워프들을 그렸다.

"타일러, 드워프 온다."

"뭐라고?"

"살루스 드워프 많아. 집, 커야 한다."

글러드 왕자의 눈동자가 똥그래졌다.

"타일러여! 그러니까 살루스 기지의 드워프 형제들을 이곳에 데려온다는 말인가?"

"타일러, 드워프 모두 온다! 반드시."

난 주먹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에서 종이를 몇 장 꺼내 글러드 왕자에게 보여줬다.

"이, 이건!"

내가 그린 건 일종의 비밀 아지트 설계도였다.

집 지하를 뚫어서 바위산으로 연결한 통로를 만든다.

그리고 바위산 안에 드워프가 살 마을을 만든다.

'드워프니까. 이정도는 할 수 있겠지?'

"타일러여! 그래서 마차에 공구와 목재를 잔뜩 실어온 건가!"

고작 이층집을 수리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다.

석재는 바위산을 깎아 쓰면 되고.

부족한 나무는 지천에 있었다.

그것이 내가 이곳에 아지트를 만들려는 이유였다.

그런데 내 설계도를 본 글러드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가?"

그는 왕자답게 의심부터 하는 것 같았다.

"나! 타일러, 드워프 친구! 친구 서로 도와."

내 말을 들은 글러드 왕자가 눈물을 글썽였다.

"타일러여! 고맙다! 나 토그족 왕자 글러드는 선조들 앞에 맹세한다. 우린 이제 형제다!"

글러드 왕자는 눈물까지 흘리며 내 손을 꼭 잡았고, 짐을 내리던 드워프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토그는 드워프들이 섬기는 도구의 신이고, 이들은 토그를 섬기는 드워프족.

주로 중요한 맹세를 할 때, 상징적으로 내세우는 신이기도 했다.

난 왕자와 드워프들을 향해 씨익 웃어줬다.

그래 지금은 내가 너희를 도와줄게.

'나중에 기간트나 만들어줘!'

제국엔 100여 개나 되는 크고 작은 영지가 있었다.

이 영지들이 전부 기간트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황실과 대영지를 포함해 기간트 생산이 가능한 곳은 단 다섯 군데뿐이었다.

괴수 부산물과 마석 배터리가 필요했기에 기간트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었지만, 담합이라도 했는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일반 영지들은 대수림의 괴수를 직접 잡아, 부산물과 마석을 생산지에 넘겼다.

그럼 원재룟값은 절약할 수 있었으니까.

이런 실정이니, 드워프들이 작업용 기간트라도 만들 수 있다면 초대박이었다.

이건 일종의 장기 투자였다.

그리고 드워프들과 내 처지가 정말 똑같았기에 마음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사는 차원도 망했고, 드워프가 사는 차원도 망했다.

우리 모두 이 세계에선 이방인.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렇게 비밀 아지트 건설을 드워프들에게 맡기고, 난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헬다임으로 돌아갔다.

***

[아베르크 제국 헬다임 관문]

이른 아침.

룩급 기간트 2대와 비숍급 기간트 7대, 나이트급 기간트 12대, 폰급 기간트 28대가 장벽 관문 앞에 섰다.

그 뒤로는 수십 대의 마차와 20대의 작업용 기간트, 할버드 병 500명, 궁수 300명, 기간트 정비병 300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기간트와 행렬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꼭 어디 전쟁하러 가는 것 같군요."

옆에 있던 엠버 중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전쟁터로 가는 거지. 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

시작부터 겁주기 있기 없기?

전생에 20년이나 지겹게 싸웠기에 괴수와 전투는 익숙했다.

다만 아직 내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긴장감이 몰려왔다.

지금 장벽 앞에 모여 있는 무리는 제국의 가장 큰 전진 기지인 카야킨 요새로 향하는 행렬이었다.

5개의 영지 사냥팀이 함께했고, 카야킨 요새 수비대와 교대를 위해 가는 병력과 보급 물자도 있었다.

난 명목상 신임 장벽 사령관의 명령으로 전진 기지의 실태를 조사하는 조사관으로 파견 가는 것이다.

"글래디스 하사가 옆에 있겠지만, 그래도 모르니 항상 조심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워프들을 잘 챙겨 주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자네 말대로 자주 찾아가 식량과 물자를 전달하지. 그리고 드워프들은 지금 자네와 장벽을 나가는 것으로 서류처리를 할 테니까, 살루스 놈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네."

"감사합니다."

내가 대수림에 가 있는 동안 엠버 중령이 드워프들을 챙겨 주기로 했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마중 나온 엠버 중령과 헤어지고, 글래디스와 마차에 올라탔다.

잠시 후.

새로 임명된 관문 책임자인 알렉킨 대령이 소리쳤다.

"마석 배터리를 장착하라!"

"마석 배터리 장착!"

기이잉! 쿵! 철컥!

쿵! 철컥!

작업용 기간트들이 관문 앞에 있는 구멍에 30여 개의 마석 배터리를 꽂았다.

"제1 관문을 열어라!"

"제1 관문을 열어라!"

높이 30미터, 넓이 40미터의 거대한 문이 푸른 빛에 휩싸이며 번쩍거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드르르르르!

"오!"

무게가 수백 톤도 더 나갈 것 같은데!

저게 올라가네.

"어떤 원리로 이 관문을 움직이는 것인지 학자들도 정확히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300여 년 전 마석 산업혁명 당시 빌헬름 뢰트켄께서 마석 배터리를 이용해 관문에 동력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내어 지금 우리가 대수림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아! 그 기간트를 처음 만들었다는 마법사 말이군."

"맞습니다.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이자, 역대 가장 존경받은 대석학이시죠. 그분 덕분에 우리 아베르크 제국의 기간트가 지금까지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는 겁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아는 글래디스가 옆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쿵! 쿵! 쿵!

관문이 열리자, 기간트들이 먼저 들어갔다.

우리 마차가 관문 밑을 지날 때였다.

와! 문 두께가 10미터는 되겠어!

그리고 관문 바닥에 뭔가 알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새로운 언어를 탐지했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언어 분석 진행률······ 0.1%]

[언어 분석 진행률······ 0.2%]

[언어 분석 진행률······ 0.3%]

.

.

"글래디스, 저건 어떤 언어지?"

옆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글래디스가 위를 쳐다봤다.

"고대 거신들의 언어입니다."

"거신의 언어?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네?"

글래디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기간트 공학자도 아니고······."

그녀가 말하길 고대 거신의 언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했다. 그리고 접하기도 매우 어렵다고 했다.

그 이유는 거신의 언어는 고대 거신 마법과 관련이 있고, 기간트 제작에 필수였기에 기밀 사항이었다.

아베르크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제국이나 왕국도 권력가들이 거신 자료와 고대 유적을 독점하고 있었고, 절대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거신의 언어만 알아도 이 세계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구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고.

그래도 기간트 제작에 필수라고 하니, 무조건 배워야 했다.

상태창이 드워프의 언어는 듣자마자 금방 분석했는데, 거신들의 언어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상태창아! 힘내라!

.

.

[언어 분석 진행률······ 1.3%]

[언어 분석 진행률······ 1.4%]

[정보 부족으로 언어 분석이 중지됩니다.]

'뭐?'

[언어 분석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선 추가 표본이 필요합니다.]

아쉽게도 1.4%에서 멈췄다.

하지만 샘플만 더 있다면 거신의 언어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는 말.

'그럼 이번 임무를 맡은 건 행운이네!'

윌리엄 사령관이 받은 정보가 사실이라면 고대 거신들의 언어를 원 없이 볼 수 있을 테니까.

12. 대수림(1).

12. 대수림(1).

"제2 관문을 열어라!"

드르르르르륵! 쿠웅!

선두 기간트가 200미터쯤 이동하자, 통로 중앙에 있는 2번째 관문이 열렸다.

2관문 주변엔 기간트와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행렬이 길다 보니, 통로를 빠져나가는 것도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그럼 장벽 폭이 400미터란 말이네!'

장벽이 엄청 높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두꺼운 줄은 몰랐다.

이런 게 수만 킬로미터나 이어져 있다니!

새삼 거신들의 능력이 경이로웠다.

2관문 밑을 올려다봤지만, 첫 번째 관문에 적혀 있던 것과 똑같은 문구였다.

아쉽게도 새로운 거신의 언어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장벽 반대편에 있는 3번째 관문이 열렸다.

우리 마차가 마지막 관문을 나가자, 뜻밖에 광경이 펼쳐졌다.

'허! 관문 입구에 또 성을 지었네.'

높이 50미터의 거대 성벽이 병풍처럼 관문을 둘러싸고 있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높고 커다란 규모의 성이었다.

하지만 수백 미터가 넘는 헬다임 장벽 아래에 있자, 성벽이 매우 초라해 보였다.

"글래디스, 여긴 뭐지?"

"일종의 임시 보호소 같은 곳이죠. 관문은 일주일에 단 두 번, 해가 있을 때만 열리니까요."

"그런 것 치고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행렬의 규모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성벽 위엔 커다란 대괴수용 발리스타도 있었고, 할버드병과 궁수들도 제법 많았다.

그리고 성벽 아래엔 부산물들을 쌓아놓고 파는 장사꾼들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죄를 지어 돌아가지 못하는 자도 있고, 돌아갈 수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대수림은 제국에서 가장 큰 유배지입니다. 죄를 지은 자나 전쟁 포로를 대수림 전진 기지 건설에 동원하는 것은 300년 전부터 시행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범죄자들을 이곳으로 보낸단 말이야?"

"네. 그리고 진짜 강력범들은 전진 기지로 보내고, 이곳은 돈 많은 죄인이나 고리대를 빌려서 들어왔다가 갚지 못해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나름 장물 시장도 형성되어 있어 잘만 하면 큰돈을 만질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물 시장도 있어?"

글래디스가 피식 웃었다.

"물론 장벽 너머로 물건을 보내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요."

그녀는 이번까지 대수림이 세 번째였고, 과거 영지의 병사로 있을 때 와봤다고 했다.

우리 행렬이 다 나오자, 이번엔 관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행렬이 장벽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문 통로엔 검문검색을 위한 병사들과 기간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살루스 전진 기지의 드워프를 빼돌린다고 해도 여길 통과하기가 쉽지 않겠네······.'

드워프 이계 난민이 200명이나 됐다.

난 드워프 왕자에게 그들을 데려온다고 약속했다.

사실 그 정도는 해줘야 드워프들이 날 신뢰하고 기간트를 만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장벽 너머로 어떻게 통과시킬지 고민스러웠다.

그러다 문뜩 뻥 뚫려 있는 하늘을 보았다.

"글래디스, 저기 장벽 위엔 어떻게 올라가는 거지?"

"네?"

글래디스가 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젠 놀랍지도 않습니다. 장벽에 대해서 너무 모르시네요. 이건 기본 상식인데······."

"그래서 대답은?"

글래디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긴 올라가지 못합니다.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마법?"

"대수림엔 하늘을 나는 괴수도 많습니다. 그리고 벽을 쉽게 기어오를 수 있는 괴수도 많고요. 그런데 왜 장벽을 넘어오지 못할까요? 그건 장벽 위쪽엔 생명체가 다가가면 마법이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법인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고대 거신들이 만들었으니 강력한 마법이겠죠."

"거신의 마법이라······."

어떤 마법이 걸려 있을까 궁금했지만, 괴수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라면 인간은 스쳐도 사망일 것이다.

너무 위험한 실험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문을 열어라!"

끼기기기긱! 쿵!

관문 밖에 있는 마지막 성문까지 열렸다.

그러자 눈 앞에 펼쳐진 대수림.

[출발!]

"출발하라!"

우린 저 어둡고 깊은 녹색의 바다로 출항했다.

***

태양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대낮인데도 햇빛이 직접 비추는 곳이 거의 없었다.

수백 미터의 나무와 거대하고 울창한 수풀이 가득했기에 마치 심해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쿵! 쿵! 쿵!

'기간트가 앞서는 이유가 있었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괴수로부터 행렬을 보호하는 것도 있었지만, 지금 기간트는 거대한 칼과 도끼로 잡목을 베고, 걸으면서 육중한 기체로 땅과 작은 풀들을 다지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뒤에 있는 마차와 병사들이 손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대수림의 땅은 도구가 없으면 파기 힘들 정도로 매우 단단하다. 그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온 식물들은 성장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빠르다고 했다.

한 달만 지나도 성인 키의 2, 3배를 훌쩍 넘어 버리니 길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랬기에 대수림으로 향하거나 장벽으로 돌아가는 행렬은 반드시 길을 지날 때마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이동한다.

갑자기 행렬이 멈췄다.

"벌써 쉬는 건가?"

이제 2시간을 행군했을 뿐이었기에 물었다.

"표지석 주변을 정리하는 겁니다."

"표지석?"

"대수림에선 생명석이라고도 하죠."

궁금증에 글래디스와 앞으로 가봤다.

기간트들이 100여 미터 높이의 거대 기둥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있었다.

"대수림에서 길을 잃으면 저 표지석부터 찾아야 합니다. 표지석을 찾지 못하면 죽는다고 봐야죠."

"저것도 거신들이 만든 건가?"

"물론이죠."

그때 기둥에 적혀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추가 표본을 발견했습니다.]

[언어 분석을 계속합니다.]

[언어 분석 진행률······ 1.5%]

[언어 분석 진행률······ 1.6%]

.

.

'오! 좋았어!'

거신의 언어를 보자, 상태창이 다시 분석을 시작했다.

난 표지석 주변을 돌아보며, 적혀 있는 언어를 모두 눈에 담았다.

"대수림에 이런 표지석이 많아?"

"많겠죠. 얼마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인간이 처음 대수림에 왔을 때 표지석을 발견했고, 그곳을 기준으로 길을 냈다고 들었습니다."

거신들도 대수림에선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언어 분석 진행률······ 4.3%]

이번엔 글자가 꽤 많아서인지 상태창이 4.3%까지 분석했다.

표지석 주변 정리가 끝나자,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크앙!"

파팟!

"으아악!"

비명이 들리자마자, 우리 마차 뒤쪽으로 세 번째 마차의 마부가 위로 끌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창문을 열자, 몸길이 3미터 정도 되는 표범형 괴수가 마부를 물고 나무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괴수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마부를 내려놓고, 뜯어먹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앞쪽에서 거대한 룩급 기간트가 다가왔다.

[왈레드 영지 기간트!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룩급 기간트에 탄 기사는 이 행렬을 지휘하는 장벽 수비대 소속 커널 대령이었다.

커널 대령은 카야킨으로 부임하는 중이었고, 그가 전진 기지의 새로운 사령관이었다.

[죄송합니다.]

마차 행렬 좌측에는 왈레드 영지 사냥팀의 기간트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가 수십 대에 달했기에 모든 구역을 커버할 순 없었고, 지금처럼 작은 괴수가 풀숲에 바짝 엎드려 있다가 튀어나오면, 손 쓸 시간이 없었다.

그건 전생에도 마찬가지.

헌터도 방심하면 저렇게 잡아 먹히는 것이다.

표범 괴수를 올려다봤다.

'저런 놈을 이기려면 꼭두각시가 10개는 필요하겠어······.'

이곳 대수림에선 최하급 괴수고 전생에도 저 정도면 E등급 괴수 수준이었다.

지금 내 상태론 상대하기 버거운 놈이었다.

내 주변에 있는 마부나 병사들은 나와 운명의 실로 연결된 상태.

그랬기에 잡혀간 마부에게 기사회생 스킬을 쓸 순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 기사회생에 성공하더라도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 순 없었다.

이미 몸이 갈기갈기 찢겨 있을 테니까.

그저 명복을 빌어줄밖에.

'다시 태어나거든 괴수가 없는 세상에 가길 빌겠소.'

마차는 곧바로 다른 마부가 몰았고, 행렬은 곧바로 출발했다.

대수림에서 인간 하나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

"찜질방이 따로 없군."

"찜질방이 뭐죠?"

"그런 게 있어."

마차 창문과 문까지 모두 열고 이동하고 있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습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숨까지 턱턱 막혔다.

그랬기에 글래디스는 마차에 타지 않고 옆에서 걷고 있었다.

"글래디스, 괜찮아?"

"어쩌겠습니까? 그냥 견뎌야지요."

글래디스가 갑자기 상의를 훌러덩 벗더니 비틀어 짜기 시작했다.

땀이 한 바가지는 나오는 것 같다.

속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저렇게 여자가 옷을 막 벗을 만큼 이곳은 살인 더위였다.

그녀 성격이 털털하기도 했고.

"험! 물을 자주 마셔."

"네. 그러고 있습니다."

글래디스는 옷을 툭툭 털곤 다시 입었다.

그녀도 날 따라온다고 고생이 많다.

사실 난 마차 안에 있어도 덥지 않았다.

사령관에게 받은 조끼 때문이었다.

로트거너의 비늘로 만들었다는 별 3개짜리 조끼.

비늘 자체에 냉한 기운이 깃들어있었는지, 아니면 조끼로 만들면서 냉기 마법을 입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체는 매우 시원했고 덕분에 땀도 거의 흘리지 않아 늘 쾌적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시 비싼 값을 한단 말이야······.

진짜로 이 조끼를 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문제는 병사들이었다.

언제 괴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병사들은 투구에 갑옷까지 입고 있었기에 탈진해 쓰러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자주 쉬어야 했고, 전진 기지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

어젯밤엔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정말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마차 안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병사들의 텐트는 무너졌고 다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시 전진.

하지만 행렬은 얼마 가지 못해 멈춰야 했다.

"무슨 일이지?"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글래디스가 말했다.

"전에 없었던 강이 생겼답니다."

"뭐? 강?"

지나가야 할 길 위에 강이 생기는 기이한 현상.

대수림에선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한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표지석을 찾아 이동하는 것과 강 수위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중 선택할 겁니다."

결국, 우린 강의 수위가 낮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강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있었고, 다른 표지석도 강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벌레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끔찍한 사흘을 보냈다.

상황을 알아보러 간 글래디스가 마차로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뭐래?"

"강 수위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며칠은 더 걸릴 거랍니다."

"휴우! 완전히 고립됐군."

"그래도 우린 마차가 있어 다행입니다. 어제오늘 벌레에 물려 11명이 죽었고, 18명이 혼수상태라 합니다."

"끔찍하군."

밤에도 마차 안은 찜통처럼 더웠지만, 문을 열고 잘 순 없었다. 이곳의 벌레들은 웬만한 천은 그냥 뚫고 들어올 정도였기에 모기장도 소용없었고, 병사들은 텐트 안에서 잘 때도 갑옷을 입을 정도였다.

새삼 조끼를 빌려준 윌리엄 사령관이 고마웠다.

"더 큰 문제는 어젯밤에도 불침번 하나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또, 그놈이 물고갔군."

첫날 마부를 끌고 간 표범 괴수가 인간 고기에 맛을 들렸는지 행렬을 계속 쫓아왔고, 벌써 일곱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도 이 근처에 숨어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고 있었다.

"워낙 약삭빠른 놈이라 기간트가 있으면 그 근처론 가지도 않고, 추격하면 나무 위로 도망쳐 몇 번이나 놓쳤답니다."

차라리 크고 강한 괴수라면 인간을 보고 달려들 텐데, 이 작고 영악한 놈은 자신보다 기간트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 사흘 사이에 벌레에게 더 많은 인간이 죽었지만, 벌레는 인간이 눌러 죽일 수도 있고, 옷을 몇 겹씩 껴입거나 조심하면 그래도 살 가능성이 컸기에 상대적으로 공포심이 덜했다.

하지만 괴수는 병사가 맨몸으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

"불침번들이 매우 불안해하겠어."

"이미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정신을 놓는 병사도 생길 겁니다."

냉기 조끼를 입은 나도 이렇게 짜증이 나고 견디기 힘든데, 일반 병사는 오죽할까!

갑자기 거신들이 왜 장벽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대수림의 가장 큰 위험은 그냥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었고, 대수림 그 자체였다.

'이대론 좋지 않아······.'

카야킨 전진 기지에 도착한다고 해도 병사들은 큰 피해를 볼 것이고,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전진 기지의 신임 사령관인 커널 대령의 입지에 좋지 않다. 그는 윌리엄 장벽 사령관의 최측근이었으며, 앞으로 대수림에서 임무를 진행할 때,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글래디스, 작업용 기간트 하나와 할버드병 1개 분대만 데려올 수 있겠나?"

"그 정도는 아무 때나 가능합니다만, 그런데 뭘 하시려고요?"

"고양이 사냥을 해야겠어."

"네?"

인형술사 헌터의 싸움을 보여주지!

그동안 꾸준히 훈련한 꼭두각시들을 써먹을 때였다.

13. 대수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