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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는 입술을 뗴어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벤데타 길드를 갖고 싶어."

잠시 선술집에 또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결의 침묵이었다.

굳은 듯이 서서 눈을 껌벅거리던 덱스터가 중얼거렸다.

"완전히 돌았...."

펑!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내가 테이블의 포크를 던져, 그의 옆에 있던 병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유리병의 파편이 산산조각나서 사방으로 터지듯이 흩어졌다. 속에 들어있던 술과 유리 조각을 온 사방에 흩뿌리면서.

"윽!"

덱스터가 입을 다물고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가 질린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힘이...."

술병이 퍽 소리가 나면서 깨는 게, 보통 강한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 눈치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직원들이 입이 헤프군."

엘리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해주세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

"이런 경우? 길드 하면서 그렇게 평화로울 리가 있나."

"그 뜻이 아니라,"

엘리체는 소리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서 난동을 부리는 경우는 왕왕 있었죠. 그런데 이런 황당한 소리를 하시는 분은 처음 봐서요."

말을 마친 그녀가 덱스터를 향해 손짓했다. 의미를 이해한 덱스터가 투덜거리며 청소도구를 가지러 갔다.

"근데 가게 물건은 그만 부숴주세요. 다 물어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공격은 그쪽에서 먼저 했어."

"하아, 아무튼."

엘리체가 어깨를 으쓱하곤 말을 이었다.

"저희 길드는 사고 팔고 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일단 정보를 주요 상품으로 삼고 있으니 조직원 사이 신뢰가 중요하죠. 그래서 외부인에겐...."

"어허, 선수들끼리 이러지 말자고."

나는 보다 직설적으로 말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마레 길드도 실 소유주는 따로 있잖아."

"...당신, 정말 고급 정보를 갖고 계시는군요? 그건 꽤 손에 넣기 힘든 기밀인데."

"서쪽 영지에서 온 것 치곤 제법이지?"

내가 한 술 더 뜨자 엘리체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추측을 일부 긍정했음을 깨닫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그 소유주처럼, 저희 길드를 소유하고 싶다는 뜻이군요."

"그래."

마레 길드.

제국의 모든 곳에 지부를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단 하루면 길드장의 손에 들어간다고 하는 곳.

제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혈관과도 같은 이 길드의 길드장은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실제로는 소유주를 대신해 이 길드를 굴리고 있을 뿐.

'실 소유주는 카인의 아버지,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

그는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마레 길드를 키웠으며, 많은 정보를 손에 넣고 제국을 마음껏 주물렀다.

'나라고 그걸 못할 건 없잖아?'

벤데타 길드.

나는 이 길드를 마레 길드에 맞설만하게 키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체가 입을 뗐다.

"저희 길드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신데요?"

Chapter8. 속을 살살 긁는다. (4)

마침 적절한 질문이 들어왔다. 나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정보 수집이 먼저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더하면, 아마 지금보다 손에 쥘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을 거야."

"음, 네. 그렇죠."

"너도 알다시피, 이 바닥에서 남들보다 빠르게 정보를 선점한다는 건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니까."

엘리체가 동의한다는 듯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재정을 좀 확보해야겠지. 이 낡은 선술집은 일종의 거점, 혹은 접선책으로만 사용하고 본점은 큰 저택으로 옮길까 해."

순간 엘리체의 고개를 끄덕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녀는 내가 이 선술집을 그렇게 부른 것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낀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이 가게는...."

"아, 알고 있어. 네가 어린 시절부터 가꾸고 꾸려왔다는 거."

"...."

"그리고 네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느라 재정이 쪼들린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 그 점은 염려하지 마. 치료법이 있으니까."

"지금 뭐라고...?"

"그리고 일단 시작할 땐 내 자본을 투자할 생각이야."

엘리체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의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그녀가 골치 아픈 기색으로 이마를 짚었다.

"크루델레 병의 치료법은 없어요."

"현재까진 그렇지."

엘리체의 얼굴이 설핏 흐려졌다. 그녀의 낯에 옅은 기대감이 스쳤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엘리체가 크루델레 병에 걸린 것은 3년 전.

불과 3년의 시간 만에 청초한 미녀였던 그녀는 현재처럼 중년의 여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그렇다고 해두지요. 뭘 믿고 그리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체가 씁쓸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주제로 나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리고 거기까지 알고 계신 걸 보니, 확실히 정보력은 굉장하시네요. 자본금도 넉넉히 갖고 계신 듯 하고요."

"물론이지. 이 수도에서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꿰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걸?"

내 자신감 가득한 대답에 엘리체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나를 누구라고 추측하는지 알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추측을 깨주기 위해 다음 말을 꺼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노리는 목표가 있어."

"어떤...?"

엘리체의 눈이 강렬한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티는 내지 않지만 카운터의 윌리엄이나 바닥을 쓸고 있는 덱스터도 이쪽에 귀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충분히 주목할 만큼 뜸을 들인 다음, 천천히 말했다.

"마레 길드를 칠 거다. 그 뒤에 있는 가문까지 모조리."

"...."

엘리체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그녀는 한참이나 자신이 뭘 들었는지 제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경악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이 나를 향했다.

"지금, 수드 가문을 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잘못 들은 거지요?"

"아냐, 제대로 들었어."

"허...."

엘리체가 입을 가리며 탄식했다.

"어때, 기대되지?"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순간 엘리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드르륵.

엘리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요. 지금까지 꾹 참고 들은 시간이 아까울 지경입니다.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릴 하셔야죠."

거친 목소리에 분노와 황당함이 뒤섞여있었다.

"오늘 들은 제안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하는 것이겠죠."

엘리체가 매몰차게 홱 돌아섰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그녀가 막 한 걸음을 뗀 순간, 나는 그녀가 들을 수 있게 중얼거렸다.

"엘리체 바네스."

우뚝.

엘리체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엘리체."

윌리엄이 놀란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시선은 엘리체의 얼굴에 콕 박혀 있었다.

"네가 정보 길드를 시작한 이유를 알고 있어."

나는 태연스레 말하며 손가락 끝을 살짝 비볐다.

"가문에 복수하고 싶어서잖아. 그렇지?"

엘리체 바네스. 평생 숨겨왔던 그녀의 진짜 이름.

그녀는 바네스 백작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어미에게도, 아비에게도 버림받고 혼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독기를 품고 성장한 그녀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바네스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정말,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엘리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감정을 도려낸 듯이 얼어붙은 얼굴에서, 입술만이 움직였다.

"죽어 마땅할 정도로."

스팟!

카운터 쪽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하앗!"

동시에 덱스터가 검을 뽑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흐응."

나는 콧소리를 흘리고는 고개를 휙 틀어 암기를 피했다. 그리고 내게 달려드는 덱스터 대신, 앞에 서 있는 엘리체를 향해 뛰어들었다.

"엘리체!"

덱스터가 급격히 내 쪽으로 몸을 틀고, 카운터에 서 있던 윌리엄이 그 위로 몸을 날렸다.

"어딜!"

엘리체가 허벅다리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예리하게 잘 갈린 날은 평소에 사용을 게을리하지 않은 듯 날카로웠다.

"제법인데."

재빠른 동작이나 단검을 쥐는 자세에서 숙련된 느낌이 났다. 아마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많은 훈련을 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어림없지."

내게 그녀의 동작은 너무나 느리고, 단순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이야압!"

가슴을 노리고 날아드는 엘리체의 손목을 콱 붙잡았다. 엘리체가 몇 번 팔을 비틀다가 옴짝달싹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엘리체!"

엘리체가 몸을 푹 숙이고, 그 공간으로 덱스터의 검이 궤적을 그렸다.

"오호?"

나 또한 엘리체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엘리체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윽!"

몸의 중심을 잃은 엘리체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틈을 타 엘리체의 손을 강하게 가격했다.

"악!"

찰그랑!

엘리체의 손이 펴지면서 단검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것을 발로 휙 걷어차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좀 쓸게?"

"뭘...."

내 속삭임에 엘리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말 대신 동작으로 그녀에게 설명했다.

"윽!"

그녀의 팔을 역으로 꺾어 뒤로 보내고, 다른 쪽 팔마저 뒤로 꺾어 교차시켰다. 그리고 뒷걸음질로 물러서며 벽을 등지고 섰다.

"크윽."

엘리체가 상황을 깨닫고는 신음을 삼켰다. 내가 자신을 방패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이거 놔!"

엘리체가 있는 힘껏 어깨를 비틀었다.

하지만 나는 한 손만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여유롭게 잡고 있었고, 그녀의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윽...!"

반항할수록 자신의 관절만 뻐근하게 아플 뿐이었다. 엘리체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이런 비겁한!"

덱스터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당장 놔드려!"

"싫은데?"

히죽거리며 받아쳤다.

"이런 좋은 방패를 놔두고 안 쓰는 게 멍청한 거지."

"엘리체님!"

덱스터가 다급하게 외치며 내게 접근했다. 엘리체가 그가 나를 공격하기 쉽도록 몸을 옆으로 홱 틀었다.

"저런."

하지만 내가 엘리체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내 앞을 가로막는 탓에,

"쳇!"

덱스터는 급히 검을 거두어야 했다.

"뭔 힘이 저렇게 세?"

그가 내 팔뚝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평균 체형보다 조금 단단해 보이는 내 체격에서, 성인 여성 한 명을 가볍게 들었다 놨다 하는 힘이 나오는 것이 신기할 법했다.

나는 엘리체를 정말 물건처럼 까딱 흔들며 웃었다.

"이거, 하극상 아닌가?"

"이 자식이!"

덱스터가 열 받은 얼굴로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엘리체를 방패 삼아 뒤로 몸을 숨긴 내게 유효한 공격을 넣지 못했다.

어떻게 단검의 각도를 조절해도, 내가 절묘하게 몸을 틀어 엘리체를 내 앞에 나오도록 조절했기 때문이다.

"엘리체님!"

급기야 윌리엄까지 공격에 가세했다. 그는 카운터 속에 숨겨 두었던 장검을 들고 있었다.

"오, 2:1이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스쳤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정말 즐거웠다.

'간만에 사람이랑 싸우려니 재밌는데?'

하도 몬스터만 상대했더니 지겨웠던 참이었다.

몬스터들이랑은 도통 말이 통하질 않아서, 내가 뭐라고 말해봐야 크르르, 혹은 으르렁! 소리만 듣기 일쑤였다.

'뭐 싸우는 재미는 몬스터가 더 컸지만.'

확실히 이 녀석들은 몬스터들에 비해서 상대하기 정말 쉽다. 속도도, 힘도 뒤떨어지고 무엇보다 감정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시시한 도발에 발끈해서 달려드는 꼴이라니.'

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들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일단 덱스터.

엘리체는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얻어맞고 쓰러져 있는 녀석을 구했다. 그 후로 덱스터는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푸른 빛 도는 손톱을 보고 짐작했지만, 이 녀석은 독을 사용한다. 사용하는 모든 무기에 독이 발려있어 스치기만 해도 위협적이다.

'내가 다치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 진다고.'

레퀴엠이 해독 능력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내 피를 보는 일은 피해야 했다.

그리고, 사장인 척하던 남자 윌리엄.

그의 낯짝엔 흐려진 지 오래긴 하지만 옅은 기품이 내비쳤다. 그리고 보법이나 검을 휘두르는 방식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기사 출신이었지, 이 녀석.'

정확히는 엘리체의 가문 소속 기사.

그는 어린 엘리체를 가엾게 여겼고, 자신을 잘 따르던 그녀가 홀로 버려지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과연, 대단한 충성심.'

함께 숱한 어려움을 헤쳐온 덕에,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예를 들어서.

스슥!

덱스터가 횡으로 휘두르면,

사악!

윌리엄이 종으로 휘둘러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던가.

"음!"

각자 피하기 어려운 각도로 검을 휘둘러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가는 합동 공격이라던가.

양쪽에서 공격이 쉴 새 없이 들어오니 무기조차 꺼내 들 틈이 없다. 그저 피하기에만 급급해진다.

'오, 제법 머리를 쓰는데.'

게다가 그들은 내가 일부러 벽에 붙지 못하도록 몰아붙이고 있었다. 내가 피하는 방향을 조절해서 홀 중앙으로 오게 유도하는 것이다.

어느샌가 내 몸은 벽에서 떨어져 홀 중앙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게 되었다.

앞뒤로 공격이 들어오면 확실히 지금처럼 피하기만은 힘들 것이다.

"...."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자신들이 조금씩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들에겐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으윽."

엘리체가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억눌렀다. 억지로 힘을 준 관절이 슬슬 아파 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부하들이 자신을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신이 잘못 움직였다간 오히려 서로의 손이 엇갈려 상처입고 말 테니까.

두 남자끼리 합동 공격은 자주 해봤어도, 엘리체를 끼워서 해본 적은 없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많이 아픈가 봐?"

나는 한 걸음 크게 뒤로 뛰어 물러나며 말했다.

"그래도 참아. 참기 싫으면 네 부하들한테 물러서라고 하던가."

능청스레 웃으며 그녀를 위로하듯 혹은 놀리듯 말했다. 그리고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왜 사장을 뻔하니 손 닿기 쉬운데 놔둬? 대놓고 인질로 잡으라는 뜻 아닌가?"

Chapter8. 속을 살살 긁는다. (5)

"이 새끼가 진짜!"

덱스터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 고함쳤다.

"그 손 안 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열 받은 덱스터가 달려들었다. 감정이 실린 단검이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어이쿠, 조심해야지. 그러다 네가 아끼는 엘리체가 다치겠어?"

내가 이죽거리며 엘리체로 그를 막아내는 동안,

"흡!"

윌리엄이 내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막기 어려운 각도로 내 얼굴을 그어 내렸다.

"이건 못 피해!"

덱스터가 자신만만하게 외친 순간,

스릉!

귓속을 갉아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깡!

"?!"

윌리엄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검은 어느새 내가 꺼내든 검의 날에 가로막혀 있었다.

"무슨... 컥!"

그의 얼굴을 폼멜로 콱 찍어버린 뒤, 비틀 물러서는 그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우욱!"

억눌린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휘청이는 그의 검을 강하게 후려쳤다.

"윽!"

코뼈를 얻어맞고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윌리엄은 순간적으로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찰그랑!

그의 검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윌리엄이 손을 뗐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본 그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헉...!"

엘리체가 내게 붙잡힌 와중에도 숨을 들이켰다.

"윌리엄이, 검을...."

나는 몸을 옆으로 틀어 다른 부하 쪽을 바라보았다.

"윌리엄...!"

덱스터 또한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나를 휙 돌아보았다.

"감히...!"

"감히 뭐? 아, 혹시 그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기사 출신이라던가? 왜, 기사들은 검을 놓치는 걸 되게 수치스러워하잖아?"

"이...!"

덱스터는 또 발끈했는지 이를 드러냈다. 그의 벌름거리는 콧구멍은 내 말이 정곡을 찔렀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저런. 못 쓰겠는데.'

이런 싸구려 도발에 일일이 반응해주다니. 아무래도 저 녀석은 훈련이 좀 필요하겠는걸.

"다들 동작 그만."

나는 나직이 속삭이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검날이 엘리체의 목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

엘리체가 황급히 목을 위로 치켜들었다. 하지만 내 손에 붙잡혀 있는 탓에 움직일 공간이 많지 않았다.

물론, 나 또한 정말 그녀를 벨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엘리체님!"

덱스터가 기겁해서 굳어버리는 꼴을 보니, 이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말했지?"

나는 엘리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입이 헤프다고."

"...."

엘리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검날이 그녀의 가냘픈 목덜미를 겨누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제 부하의 방정맞은 입에 분노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잠시 뒤,

"...이만 놓아주십시오."

엘리체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흐응, 소리를 흘리며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네 명줄을 붙잡고 있는 쪽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굳이 저를 인질로 잡지 않더라도, 저희 셋 정도는 충분히 제압하실 수 있으시잖습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게 조금 까다로울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이 셋을 모두 쓰러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굳이 레퀴엠을 쓰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정하겠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잘 아네."

나는 픽 웃으며 붙잡고 있던 엘리체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하아."

엘리체는 붉게 변한 제 손목을 감싸쥔 채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비어있는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시했다.

"하아, 하아."

엘리체가 숨을 할딱이며 이마를 훔쳤다. 양 손목을 붙잡힌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퍽 힘들었는지, 그녀의 낯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치심이 가득한 얼굴로 검을 주워드는 윌리엄과, 단검을 다시 부여잡으며 자세를 잡는 덱스터까지.

그들의 기세는 처음과는 달리 한풀 꺾여있었다. 나의 압도적인 실력에 기가 죽고 만 것이다.

"당신...."

나를 향하는 엘리체의 눈동자에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

의혹, 경계, 두려움, 호기심.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마지막 것이었다.

짝!

"자자, 주목."

나는 손바닥을 한번 부딪혀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서로를 보며 눈치를 살피던 세 사람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선택해. 내 제안을 따르든지, 아니면 여기서 죽든지."

세 사람의 사이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두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엘리체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

엘리체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갈등으로 일렁였으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녕 이 길드를 손에 넣고자 하신다면, 이런 방식으로는 소용이 없을 겁니다."

엘리체가 선명하고도 새파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죽이고 싶다면 죽이십시오.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잠잠했지만 날선 분노를 담고 있었다.

"게다가, 죽고 싶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인간이 과연 정보를 제대로 물어오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나 또한 벤데타 길드를 이런 식으로 손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뒤통수 맞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엘리체, 이 여자가 이대로 물러설 인간이 아니다.

내게 정보를 물어오는 척하면서 역으로 날 궁지로 빠뜨릴 게 분명했다. 그녀에겐 그럴 능력도, 의지도, 이유도 충분했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그녀를 의심하며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려 드는 건 너무나 시간 낭비, 심적 낭비다.

'그런 식으로 같이 일할 순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경고를 날린 것은.

짝짝짝....

고요해진 선술집 안에 나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합격."

내 뜬금없는 말에 엘리체의 표정이 흔들렸다.

"...네?"

"아, 시험 좀 해봤어. 혹시 살려고 다 털어놓는 유형의 인간인가 싶어서."

나는 픽 웃으며 덧붙였다.

"보아하니 잡혀도 정보를 불 것 같진 않네. 안심이야."

"뭐, 이런...."

엘리체의 눈썹이 마구 꿈틀거렸다.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서 조금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엘리체님!"

"...괜찮아."

덱스터가 황급히 다가왔으나, 엘리체는 옆의 테이블에 손을 짚고 버텼다.

저런. 아무래도 내가 너무 짓궂게 군 것 같은데.

그녀 딴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한 이야기가, 이리도 간단하게 끝나니 좀 허탈하긴 하겠지.

하지만 상대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다.

"장난은 그만두지."

나는 가벼운 어투로 말하며 쓰고 있던 로브를 끌어내렸다.

"...!"

한순간 엘리체에게 쏠렸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했다. 테이블을 짚고 있던 엘리체마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엘리체가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의 시선이 내 푸른 머리카락을 스치고, 시원시원한 이마와 그린 듯한 눈썹을 거쳐,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길이 머무른 곳은 보석처럼 빛나는 내 청보랏빛 눈동자였다.

"당신은...."

엘리체가 탄식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내 정체를 곧바로 알아챈 눈치였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두 남자만이 거북이처럼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왜, 카인이 아니라 실망했나?"

엘리체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곁에 서 있던 덱스터가 그녀의 눈치를 슬슬 보며 윌리엄에게 귓속말을 했다.

"누군데요?"

세 사람이 모두 과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었기에, 그의 속삭임은 결국 모두에게 들렸다.

"-!"

덱스터의 얼굴이 터질 듯이 벌겋게 변했다. 엘리체가 그런 그를 힐끗 보곤 한숨을 삼켰다.

"이 제국에, 쪽빛 머리칼을 가진 귀족은 단 두 명 뿐이죠."

엘리체가 조용히 읊조리며 나를 응시했다.

"디에고 오베스트 킨드리얼. 하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 제 앞에 서 계신 분은...."

나는 엘리체의 말에 동조하듯 빙그레 웃었다.

"...오베스트 영주의 외동아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이겠군요."

"헐."

덱스터가 눈을 부릅떴다.

"아벨 킨드리얼이라면 서쪽의 그 망나...."

다행히 그의 경솔한 발언은 윌리엄이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세상 밖에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입꼬리가 더욱 쭉 찢어졌다.

"맞아, 그 망나니가 나다."

"...."

덱스터의 얼굴이 땅을 향했다.

그는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당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엘리체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벨님께서 이토록 실력이 뛰어나신 줄은 몰랐습니다."

"뭐, 내가 좀 뛰어나긴 하지. 여러 가지로 말이야."

"...."

나는 두 팔을 머리 뒤로 둘러 깍지를 꼈다.

"내 제안은 아직 유효해."

"...저는,"

"잘 생각해. 내 목표와 네 복수는 방향이 같다는 걸."

수드 가문과 바네스 가문은 긴밀한 협약 관계에 있다. 결국 엘리체가 바네스 가문을 친다는 것은, 수드 가문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같았다.

"실질적인 운영은 네가 하게 될 거야. 지금과 별다를 건 없어. 단지 내 후원을 얻는 것뿐."

"...."

테이블을 짚은 엘리체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직감에 의해 움직이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확실한 가능성을 계산하여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해 봐."

"저희 길드가 왜 필요하신 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길드의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뭐, 그렇긴 하지.

실제로 벤데타 길드의 현재 규모는 마레 길드와 비비기엔 너무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지금 이대로 부딪혔다간, 바위에 부딪힌 계란처럼 박살날 게 뻔해.'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벤데타 길드의 주인, 엘리체 바네스가 얼마나 집요하고 지독한 여자인지. 지금도 내가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저 점원들이 얼마나 목숨을 바쳐 그녀에게 충성하는지.

적절한 기회와 자본만 주어진다면, 저들의 수탉 모양 로고가 전제국 곳곳에 은밀히 새겨질 수 있다.

'원작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는 사실이지.'

실제로 이들은 마레 길드에 비견될 만큼 강력한 길드로 성장했었다. 그리고 거의 바네스 가문을 무너뜨릴 뻔했다.

물론 그때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았지만.

"뭐, 벤데타 길드의 잠재력을 믿고 있다고 해둘까."

원작에서 네가 성공하는 미래를 보았다는 말은 못 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예전에 마레 길드의 영입 제안을 거절했었잖아. 그만하면 네 실력은 충분히 입증된 거지."

"그건 또 어떻게.... 아니, 그보다도."

엘리체는 몹시 곤혹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킨드리얼 가는 오베스트 영지를 다스리기에도 공사다망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 와중에 제국 수도에서 길드까지 운영하기엔 손이 모자라실 것 같은데요."

우아하게 돌려 말했지만, 엘리체의 말뜻은 이랬다.

님 영지 좀 가난하지 않아요?

"...."

Chapter9.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쓴다 (1)

이 사실은 그녀만 알고 있는 게 아닐 터였다. 오베스트 영지가 늘 돈에 쪼들린다는 것은 전 제국민이 알고 있지 않을까.

"오베스트 영지랑은 상관없어. 이건 아버지의 의사와는 별개로 내가 진행하는 일이라."

"아...."

디에고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엘리체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하긴,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겠지.'

검 좀 쓰는, 스무 살의 파릇한 애송이가 대뜸 나랑 손 잡으면 제국 최고의 길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이건 누가 뭐라고 해도 사실이었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을 뿐인 미래.

'그렇다면 이제 믿게 해줘야겠지.'

나는 품 속에 손을 넣었다. 선술집의 몇 안 되는 촛불 빛이 내 품에서 나타난 무언가를 비췄다.

"그건...!"

"그래, 영주의 인장이지."

나는 반지를 조금씩 굴리며 말을 이어갔다. 각도를 틀 때마다 반지의 겉이 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할 테지?"

"아.... 네."

엘리체의 얼굴이 아까보단 밝아졌다. 나는 인장을 품에 집어넣고 다른 자루를 꺼냈다.

쿵.

자루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예전에 카지노 칩이 들어있을 때와는 달랐다. 훨씬 더 묵직하고, 황홀한 울림을 품은 금속성이 내려앉았다.

"이건 투자금."

"투자요?"

"그래. 아마 내일 오후 3시쯤, 중앙 경매장에서 경매가 열릴 거다. 주택, 미술품, 장신구의 순서대로."

"...네. 보통 그렇죠."

"경매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다 참여해. 마지막인 장신구까지 보고 나오면 돼."

"그게 끝입니까?"

"그래,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혹시 장신구 중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도 좋아."

"어머나. 여자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흥분해버리는데."

엘리체가 야릇하게 웃으며 반지 없이 텅 비어있는 손을 들어 올렸다.

"아까 한 말이 신경 쓰이시나 보죠? 제가 터무니없는 걸 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글쎄."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건 가보면 알겠지."

"아직 간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엘리체가 입술을 쭉 내밀며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돈 자루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결국 경매에 참여하리라는 사실을.

장신구를 사기 위한 욕심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나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크겠지.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보지."

나는 손을 흔들며 선술집을 떠났다.

물론 내 말 뜻은, 이 선술집에서 보자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체는 곧 제 발로 나를 찾아오게 될 테니까.

❖ ❖ ❖

길거리의 소년, 잭은 두 손을 비볐다.

"자자, 오늘 영업을 시작해 볼까."

그는 이 거리의 소유권 이전 전문가였다. 즉, 행인들의 주머니에 담긴 것을 쏙 빼어가는 데 도가 텄다는 뜻이다.

"어디 돈 냄새 그윽하게 나는 손님 없나?"

잭은 주근깨 박힌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건물 사이의 그늘로 숨어들었다.

타인의 것을 훔친다는 가책은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익혀온 일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누구로 할까나."

따라서 잭은 그저 오늘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것처럼, 사냥감을 물색했다.

그가 사냥감을 선택할 때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일단 첫째, 귀족은 건드리지 않는다.

잘못 걸려서 치안대에게 끌려가 곤혹을 치를 수도 있고, 대부분은 주변에 호위 인력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옷차림을 잘 살핀다.

겉에 치렁치렁한 보석을 달고 있는 게 다가 아니다. 고급 원단을 사용하거나, 박음질이나 마무리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게 알짜배기였다.

마지막으로 셋째, 어딘가에 한눈을 팔고 있는 상대를 고른다.

그 경우 물건을 슥삭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오호?"

한참이나 사냥감을 물색하던 잭이 눈을 번득였다. 그의 시선이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쓴 채 걸어오는 한 인물에 고정되었다.

"저 사람으로 할까?

잭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허탕을 치는 일이 적었다. 일단은 손기술이 뛰어났고, 몸이 재빨랐으며, 마지막으로는....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코가 아주 예민했다.

잭이 목표로 한 인물에게선 아주 진한 돈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의 품속에 금화가 가득한 자루가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어우, 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있으면 냄새가 이렇게 진동을 해?'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썼지만 남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키가 훤칠했으나 체격이 호리호리해 썩 위협적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긴 후드 망토 아래로 드러난 바짓단, 그리고 신발은 아주 고급품이었다.

'귀족은 아니겠지.'

귀족들은 이런 저잣거리에 나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바짓단에 흙 알갱이 한 점이 튀는 것조차 굉장히 불결하다고 생각해, 되도록 마차를 타는 것을 선호했으니까.

'그럼 어디 길드의 접선책인가? 아니면 심부름꾼?'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몇 대 좀 얻어맞는 것쯤이야, 며칠간 배를 곪는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누굴 상대로 하더라도 물건을 슬쩍하는 데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 남자....'

그는 이 수도에 처음 온 것처럼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잭은 저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인가 보네.'

귀족이라면 시종을 물리치고 혼자 구경을 나왔을 것이고, 아니라면 수도의 휘황찬란함에 기가 질려버린 촌놈일 것이다.

'눈 깜박할 새 코 베어 간다는 말도 모르나?'

잭은 그에게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기로 했다. 마기오레의 유명한 명언을 체감하게 하는 것으로.

'오늘은 좀 두둑하겠어.'

잭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골목에서 뛰쳐나갔다. 급한 용건이 있는 것처럼 내달리다가, 정확히 각도를 맞추어 후드에게 부딪혀갔다.

"윽!"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손을 움직였다. 후드의 품에 있던 돈주머니를 꺼내며 바닥에 우당탕 고꾸라졌다.

"아이고고고!"

한 바퀴 요란하게 구르면서 주머니를 품으로 슬쩍 숨겼다.

몇 년간 이 거리를 전전하며 익힌 솜씨는 아주 교묘하여, 그 누구도 진실을 알아채기 어려울 터였다.

"죄, 죄송합니다!"

잭은 어느새 비어버린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몹시 당황한 얼굴을 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

후드의 남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잭과 부딪힌 것에 조금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잭을 찬찬히 훑고 있었다.

후드 너머에서 뻗어 나오는 시선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꼭 잭이 품에 뭘 숨겼는지 아는 것처럼 꿰뚫는듯했다.

'에이, 설마. 착각한 거겠지.'

잭은 엄습하는 기묘한 위화감을 물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습관처럼 두 손을 모았다.

"제가 너무 급한 나머지.... 천한 것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요."

있는 힘껏 파리처럼 비벼대며 빌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남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지자, 머쓱해진 잭은 슬그머니 눈알을 들었다.

"...!"

그리고 꿀에 발을 담근 파리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후드의 그림자 아래로 남자의 유려한 턱선이 슬쩍 비치고, 분홍빛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옳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건 마치, 잭을 기다렸다는 듯한 미소였다. 꼭 덫을 놓은 사냥꾼 같은.

'뭐, 뭐지?'

잭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막상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돈 냄새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뭐지?'

난생 처음 맡아본 냄새였다.

아주 음습하고 고약한, 밑바닥부터 사람을 잠식하는 듯한, 평소에 쉽게 맡기 힘든. 꼭 형태가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냄새였다.

잭은 곧 이 냄새가 자신처럼 예민한 이가 아니고선 인식하기 어려운 종류임을 깨달았다.

'...느낌이 안 좋아.'

이럴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한 가지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힘껏 외친 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수밖에.

잭은 온힘을 다해 내달리면서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자신을 쫓아올 줄 알았건만, 의외로 남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많은 인파에 횝쓸려 금방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헉, 헉."

잭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길을 요리조리 뛰어갔다. 그리고 안전해진 것 같았을 때 걸음을 늦췄다.

"휴우, 성공이다."

약간의 잡음은 있었지만 여느 때와 같은 성공적인 작업이었다.

잭은 어두운 골목길로 몸을 슥 숨겼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발길을 재촉했다.

"과연 얼마가 들었을까."

이 중요한 개봉박두의 순간을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

자루의 광택이나 재질은 고가의 것이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기가 막히게 황홀했다.

"어휴, 이게 얼마만의 대어냐."

잭은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디 보자...."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자루의 입구를 열어젖혔다.

"...어?"

잭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자루 속에는 동전이 가득했다. 문제는 그 동전의 종류가,

"동화잖아?"

모두 동화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잭은 자루 속에 손을 넣어 동전을 마구 헤집었다.

짤그랑, 짤랑, 짤랑.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되도록 조용히 작업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야, 설마. 그럴리 없어...."

잭은 달빛에 비추어 자루 속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믿기 싫은 결론에 이르렀다.

"...진짜 다 동화야?"

정말이었다. 자루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동전의 크기, 그리고 무게는 일치했다.

"이런 젠장!"

잭은 차마 자루를 바닥에 내던지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진짜. 미친놈 아니야? 무슨 동화를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녀?"

짤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몇 골드는 벌 줄 알았는데. 정작 수중에 들어온 것은 몇 실버에 불과했다.

"젠장, 젠장!"

잭은 자루를 품에 집어넣으며 연신 욕설을 내뱉었다.

"한 번에 오늘 장사 끝내려 했는데. 이러면 또 나가야 하잖아."

생각할수록 속에서 열불이 끓었다. 게다가 이 돈자루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으윽, 무거워."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뛸 수조차 없었다. 이대로는 다음 작업에 들어갈 수 없다.

"할 수 없지. 일단 처분을 하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돌아선 잭은,

"...젠장."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욕을 입으로 삼켰다.

"여어. 꼬맹이. 오늘 수입이 좀 짭짤한가 봐?"

"돈 세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리네."

두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골목 어귀로 나타난 탓이었다.

톰과 제리.

이 골목 일대를 나름대로 주름잡고 있는 건달 중 하나였다.

Chapter9.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쓴다 (2)

그중에서도 이 둘은 잭처럼 어린아이들만 괴롭히는 아주 야비한 족속들이었다. 사소한 손찌검은 물론이오, 아이들의 돈을 몰래 가로채곤 했다.

"헤헤, 형님들. 안녕하십니까."

잭은 비굴한 미소와 함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동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뭘 잘못 들으신 거 아닐까요? 제가 무슨 재주로 그리 큰 돈을...."

"어허."

톰이 대뜸 말을 자르고,

"쪼끄만 게, 어디서 우릴 속이려 들어?"

제리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닥치고 그 자루 이리 내놔."

그는 허리춤을 툭툭 두드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허리에는 흉악스럽기 그지없는 메이스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잭은 메이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에 맞아 눈두덩이가 퍼렇게 된 아이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형님들, 제발...."

"아, 새끼야!"

제리가 버럭 외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성질이 급해 먼저 앞에 나서는 편이었다.

"어이어이, 살살 해라."

그리고 톰은 그런 그를 말리기는커녕,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뒤따라왔다.

"처맞아야 정신 차릴래, 어?"

"형님들 말 들어."

잭은 순식간에 두 남자에게 둘러싸였다. 원래도 어두웠던 골목이 이젠 암흑처럼 시커멓게 느껴졌다.

"하, 하지만...."

"이 새끼가 진짜!"

기어이 제리의 팔이 허공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으윽."

잭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웅크렸다. 이어질 손찌검을 각오하며 숨마저 삼켰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잭은 당황해서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두 남자가 제 뒤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덩달아서 뒤를 돌아보았다.

"-!"

잭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왠지 눈에 익은, 새카만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뭘 보냐? 눈 안 돌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가던 길 가쇼."

제리와 톰이 사납게 말하며 턱짓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면 보통 사람들은 겁에 질려 냉큼 돌아서곤 했다. 하지만 후드의 남자는 그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뚜벅 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미쳤나?"

제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쯧쯔."

톰이 혀를 차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이 애용하는 무기인 블랙잭을 슬그머니 움켜쥐었다.

걸어온 남자가 잭의 뒤에 멈춰 섰다. 그는 이제 잭을 사이에 둔 채 톰과 제리를 마주 보게 되었다.

'우욱.'

잭은 남몰래 울상을 지었다.

'이 냄새는 설마?'

세상에 저런 색의 후드를 쓴 사람은 많지만, 이런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또 있을리 없었다.

'진짜? 진짜 아까 그 사람인가?'

후드의 그림자 속에서 찌를 듯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거기 무참하게 찔린 뒤에, 잭은 맥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망했다. 오늘 일진 진짜 조졌네.'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돈자루를 도둑맞은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이 사람이 여긴 왜 있는 거지?'

남자가 몸을 슬쩍 틀어 톰과 제리를 응시했다.

"이 꼬맹이한테 볼 일 있나?"

후드 속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없으면 꺼지고, 있어도 꺼져."

몹시도 오만한 명령조의 말투였다.

"참, 내 살다살다 별 꼴을 다 보네."

제리가 콧방귀를 뀌며 바지춤의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형님, 아무래도 좀 두들겨 줘야 정신을 차릴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톰이 응수하며 바지춤에 매달린 블랙잭을 움켜쥐었다.

"매운맛 좀 보여주자고."

둘은 남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양쪽에서 압박하며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춰온 만큼, 둘의 포위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들은 이런 길거리 개싸움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하아."

남자는 몹시 지겹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꼭 말로 하면 안 듣는 건지."

"닥쳐!"

발끈한 제리가 달려들었다.

후웅!

제리의 메이스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남자의 안면으로 내리꽂혔다.

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머리가 빵 반죽처럼 납작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쾅!

예상했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커헉!"

예상치 못했던 비명이 들려왔다.

'어? 이 목소리는?'

잭은 감았던 눈을 조금 떴다.

제리의 얼굴이 반죽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반죽을 내려친 것은 남자의 무쇠 같은 주먹이었다.

"너나 닥치시고."

남자가 몹시 얄밉게 이죽거렸다.

주륵.

제리의 납작해진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 으으."

제리가 눈을 까뒤집으며 비틀거렸다. 순간적으로 뇌가 흔들린 듯 균형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퉁!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제리는 메이스를 지팡이처럼 땅에 짚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다른 손을 머리에 가져가려고 했다.

"어지러워?"

남자의 조소가 공기를 가르고, 그보다 빠르게 손이 뻗어 나갔다.

콱!

남자가 제리의 손을 움켜쥐었다.

"윽?!"

제리가 흠칫 놀라 멈춘 순간,

꽈드득!

"끄아악!"

제리의 손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잔뜩 곱아든 손등 위로 흰 뼈가 작살처럼 튀어나왔다.

"끄, 끄아아아악!"

제리가 만신창이가 된 손을 붙잡고 쓰러졌다.

"아악, 아아악! 내 손!"

그는 몹시도 고통스러운 듯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제리야!"

놀란 톰이 허겁지겁 제리를 향해 뛰어갔다. 그가 바닥에 쓰러진 제리를 안아 올렸다.

"손, 손이...!"

제리가 손목을 꽉 붙잡고 신음했다.

"너, 너 손이...."

톰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노름판에 돈을 내던지고, 여자를 희롱하며, 무기를 움켜쥐던 그 손.

혈관이 생생하게 맥동하고,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움직였을 그 손이.

지금은 볼품없이 우그러들어, 손의 뼈가 몇 개 있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끄으윽...."

제리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그의 주먹은 피로 범벅이 되어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니, 그것은 이제 주먹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한 때 손이었던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뭔 놈의 힘이...."

톰이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한 손으로 주먹을 으스러뜨릴 수 있다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할듯했다.

후드의 남자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악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괴물 같지 않은 음성으로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누가 손 대래?"

몹시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말투. 거나하게 사고를 쳐 놓고, 머쓱한 듯 중얼거리는 어린아이 같은.

잭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토록 악랄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제리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두 번 움직였을 뿐인데.

"이 새끼가 감히!"

톰은 그런 남자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제리를!"

몇 년간 동고동락한 동생이 화를 입었다는 분노가 더 컸다.

"죽어!"

그가 울분을 터뜨리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후웅!

톰의 블랙잭이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호선을 그렸다.

남자는 간단히 스텝을 밟는 것만으로 그것을 피해버렸다. 그리곤 손을 뻗어 톰을 그대로 벽에 들이박아버렸다.

쾅!

"커헉!"

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벽과 강하게 부딪힌 뒤통수가 아찔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사이 느슨해진 다른 손을 남자가 콱 잡아 비틀었다.

"크윽!"

톰은 반항하지 못하고 블랙잭을 놓치고 말았다. 블랙잭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남자의 손이 그것을 낚아챘다.

"이 무기는 이렇게 써야 제맛이라고."

어쩐지 신이 난 듯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퍼억!

블랙잭이 톰의 그곳을 가격했다.

"...!"

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뒤통수의 고통조차 잊은 듯한 표정이었다.

"...."

그는 숨을 가늘게 몰아쉬며, 바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그곳을 감쌌다. 그것은 의식조차 없는,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털썩.

톰의 무릎이 바닥을 향했다. 그는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 조용히 꿈틀거리기만 했다.

"...."

싸늘한, 그리고 오싹한 침묵이 흘렀다. 그 자리의 모든 남성들-후드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세상에 맙소사....'

잭은 남자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물론 톰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몰골을 보고 있자니 괜히 그곳이 서늘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톰은 이제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꿈틀거림조차 멈춘 것을 보니 기절한 듯싶었다.

"이, 이 미친놈이...."

겨우 정신을 차린 제리가 더듬거렸다. 그는 톰을 흘끗흘끗 보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너도 때려줘?"

남자가 키득거리며 블랙잭을 휘휘 돌렸다. 그것이 붕붕 소리를 내며 원을 그리자 제리의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말하지 그랬어. 양쪽 다 두들겨줄 수 있는데."

"저 새낀 사람도 아냐...."

제리가 기절할 듯한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그곳을 보호하듯 가렸다.

"큭."

그러다 잊고 있던 고통이 되살아났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사그라들었던 분노가 되살아났다.

"너 이 새끼! 사람 잘못 건드렸어!"

제리가 악에 받쳐 버럭 소리쳤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

순간 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톰과 제리. 그들이 이 골목에서 활개 치고 다닐 수 있는 이유.

그들은 이 수도에서, 아니 전국에서 가장 세가 큰 마레 길드에 속해 있었다.

사실 정확히는 마레 길드의 지저분한 뒷 일들을 처리해주는 것이었지만. 어린 잭은 그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틈만 나면 마레 길드를 들먹이고, 그 마레 길드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다는 것밖에는.

이 저잣거리의 지저분한 꼬마조차 그 길드의 이름이 갖는 무게를 안다.

하물며 저 남자는 당연히....

"알게 뭐냐."

후드의 그림자 속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걔네가 지금 너희 구해준대?"

"이 미친 새끼가...."

제리가 씨근거리며 욕설을 뱉었다.

"후회할 거...."

"아니, 됐고."

남자가 귀찮은 듯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몹시도 몸에 익은 듯한 거만한 몸짓이었다.

"그만 귀찮게 하고 꺼져라. 내가 배부른 것에 감사하고."

그는 기묘한 말을 하더니 덧붙였다.

"꼬맹이는 남아있어."

남자의 말이 끝난 순간 잭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X됐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이라고 치고 싶었다. 남자의 손 끝에서 흉물스럽게 흔들리는 블랙잭을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

제리는 콧김을 뿜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핏발선 두 눈이 이글거리며 후드의 남자를 담았다.

잭은 저런 악에 받친 눈빛의 제리를 처음 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남자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게 똑똑히 전해졌다.

그야말로 살 떨리는 분노요, 살기였다.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눈을 돌리게 될 만큼.

"하하."

남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태연히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 깔아."

그의 목소리가 180도 돌변했다.

가을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버석하게 말라붙은, 일말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냉랭한 명령이었다.

"-!"

제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나갔다.

Chapter9.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쓴다 (3)

'어어?'

잭은 순간 당황했다. 그가 아는 제리는 이 정도의 협박에 굴한 위인이 아니었다.

제리가 어린 시절 자신을 부려먹은 두목을 죽여버린 일화는 유명했다.

어찌나 성정이 거친지, 이 골목에서 한 끝발 한다는 이들도 '저 쥐새끼는 더러워서 안 건드리고 말지.'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데.

"...큭."

제리는 갑자기 덫에 걸린 쥐처럼 꼼짝도 못 했다.

"큭, 크윽...!"

그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저항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꿈틀거리던 눈가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악다물어진 입가가 스르르 허물어졌다.

털썩.

이윽고 제리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힘에 겨운 듯 땅을 짚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 으으...."

그는 완전히 굴복하여 아래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완전히 제압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뭐... 뭐지?'

잭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그저 한마디 했을 뿐인데, 제리는 마치 칼에 찔린 듯이 굴고 있었다.

'내가 못 본 사이에 무기라도 던졌나?'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가,

"-!"

잭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 냄새가.'

아까 남자에게서 났던 정체 모를 고약한 냄새.

그 냄새가 갑자기 강해졌다. 아까보다도 짙어지고, 지독해져서 자신의 코를 찌르고 있었다.

마치 남자의 전신에서 그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우욱."

잭은 그만 코와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이제 알 수 있었다. 남자에게서 나던 냄새의 정체를.

그것은 밑동마저 썩어버린 나무에서 날 법한, 파리와 구더기만이 들끓는 동물의 몸뚱이에서 날 법한, 거죽을 잃고 뼈만 남은 시체에서 날 법한 냄새였다.

죽음의 냄새.

"꼬맹이."

이 골목을 죽음의 냄새로 가득 채운 장본인이, 잭을 향해 손짓했다.

"따라와라."

"...."

지금 도망치면 살 수 있을까?

잭은 재빨리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그리고 몇 초도 안 되어 결론을 내렸다.

'택도 없어.'

남자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두 성인 남자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것은 그가 톰과 제리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잭이 그에게서 도망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잭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남자는 휙 등을 돌려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잭은 찍소리도 내지 않고 그런 그를 따라 걸었다. 사신의 뒤를 따라 지옥으로 향하는 듯하여 금세 온몸이 차가워졌다.

다행히 남자는 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잭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

잭의 고개가 땅을 향했다. 도저히 그와 시선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 인간을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함이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사람이 많은 저잣거리에서부터 자신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따라왔다.

남자가 이 골목에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잭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이가 절로 딱딱 부딪힐 것 같아서였다.

그윽한 동전 냄새에 속아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파리지옥의 꿀인 줄 알았어야 했는데.

'...잠깐, 혹시?'

잭은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누가 동화를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녀?]

수상할 정도로 많았던 동화.

그리고 몸이 부딪혔던 순간, 너무나 태연했던 그 태도.

'설마... 알고서 일부러?'

잭은 영리하고 눈치가 빨랐다. 그 능력은 다른 소년들보다 더 많은 돈을 손에 쥐게 해주며, 그에게 생존을 보장해주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 파리지옥이 우연히 길에 놓여 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노리고 아가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는 것을.

"...!"

잭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잘못 걸렸다. 큰일 났다. 하지만 도대체 왜? 길거리에 나 같은 애들은 널렸는데?

해결되지 않을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어느 하나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다음에 해야할 행동을 알 수 있었다.

뚜벅.

남자가 제게 한 걸음 다가서는 순간,

"죄송합니다!"

품에 있던 자루를 꺼내 두 손으로 받치고 들었다.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동전이 가득 든 자루가 무거워서만은 아니었다. 잭은 실제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동전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눈앞의 남자가 어떤 목적을 갖고있는 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처럼 작고 연약한 꼬맹이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버릴 수 있다는 공포.

무엇보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한기를 머금은 죽음의 냄새.

"정말?"

남자의 미성이 잭의 정수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모를 비밀스러운 음색이었다.

"진짜로 손 안 댔어? 지금 바로 세 본다?"

아니, 그 동전 개수를 다 알고 있다고?

어쩐지 이 남자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잭은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를 깨달았다.

"사, 사사 사실은 손댔습니다! 근데 속에 뭐가 들었는지 만져보기만 한 겁니다!"

오로지 진실만을 다해, 공손하고 비굴하게 굴어야 했다. 그래야 살수 있었다.

"근데 정말 단 한 개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세어보셔도 돼요!"

"솔직한 꼬마군."

남자가 픽 웃으며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 무게가 멀어지는 만큼, 잭의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두려움이 조금 덜어졌다.

"휴우...."

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남자의 질문이 칼날처럼 날아들어 잭의 목을 겨누었다.

"아깐 왜 코를 막았지?"

아니, 그새 그걸 봤어?

잭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 그게 이상한 냄새가 나서."

"무슨 냄새?"

"나으리한테서 뭔가...."

엉겁결에 대답하려던 잭은 문득 이 상황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앗, 그게 나으리께 불쾌한 냄새가 난다는 게 아니고요. 나으리께서는 아주 고급스러운 향이 납니다."

"아깐 냄새 난다며?"

"아이고, 그게 아니고."

졸지에 제 무덤을 파게 된 잭은 진땀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남들보다 코가 좀 많이 예민합니다. 그래서 나으리한테서 뭔가 독특한 냄새를 느꼈습니다."

"어떤 냄새인데?"

"그게 좀, 뭔가 축축하고 오싹한 냄새였는데요. 제가 말해놓고도 좀 그러네요."

순간 잭은 후드 속에서 남자의 안광이 번득인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듯, 이내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아니, 그 나으리한테서 물에 젖은 빨래 냄새가 난다는 게 아니고요, 제 말은 그러니까-"

"일어나."

"예, 옙."

잭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그런 잭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

잭은 어찌할 줄을 몰라 두 손만 비볐다. 초조하고 무섭고 불안해서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이 더러운 길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지만, 이 남자만큼 압박감을 주는 이는 만나보지 못했다.

남자의 앞에 서 있으면 자꾸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이 났다. 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

남자는 계속해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견디다 못한 잭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이제 가도 되나요?"

"가도 될 것 같아?"

"...아니요. 아닌 것 같습니다."

잭은 잘 훈련된 개처럼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보였다.

"혹시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뭐든 시켜만 주십쇼, 나으리."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잘 생각했어."

그가 잭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길안내를 해줬으면 하는데."

"어디로...?"

"암시장."

"아."

잭은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흘렸다. 남자가 팔짱을 끼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수도가 길이 워낙 복잡해야지. 안내 없인 힘들 것 같군."

"거기라면 알고 있어요."

잭은 자신 있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손님이 제게 길잡이를 요구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암시장.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곳. 5일장처럼 날을 정해 열지 않는, 오로지 판매자들이 원할 때만 슬그머니 물꼬를 트는 곳.

복잡한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수도의 길에서, 혼자 암시장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게 맡기세요. 자신 있어요."

"좋아, 앞장서라."

남자의 대답에 잭은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이거 괜찮은 걸까.'

과연 길안내가 끝나고 자신이 무사할지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예요."

잭은 앞서서 길을 나아갔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을 지나치고, 하수구를 뛰어넘어 요리조리 걸어갔다.

초행인 남자에겐 퍽 버거운 길일 수도 있었다.

'앗, 나 걸음이 너무 빠른가? 혹시 뒤쳐졌으면....'

아차 싶었던 잭은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안 가고."

그리고 남자와 자신과의 거리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아닙니다."

사실은 방금 살짝 기대했다. 남자가 길을 잃고 자신을 놓치는 그런 상황을.

'역시 어림도 없구나.'

잭의 바람과는 별개로, 둘은 곧 순조롭게(?) 암시장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 이 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잭이 가리킨 곳은 좁디 좁은 골목 틈새였다.

"아, 여기로군."

의외로 남자는 의아해하는 일 없이 바로 수긍했다. 그가 손으로 골목 옆의 벽을 더듬었다.

"이렇게 열리는 곳 주변에 표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네."

그의 손가락이 벽 구석에 그려진 표식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어, 알고 계셨어요?"

"응. 근데 여기까지 오는 길은 몰라서. 덕분에 편하게 왔군."

남자의 목소리에 흡족한 기색이 서렸다.

'지금이다!'

남자가 만족하고 있는 틈을 타서 얼른 사라져야 했다. 잭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잠깐."

그럼 그렇지.

잭은 탄식을 삼키며 자리에 멈춰 섰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심부름을 시킬 게 있는데."

잭의 두 손이 번개 같은 속도로 공손하게 모아졌다.

"어떤 심부름인데요?"

"5번지 거리의 벤트 선술집을 알고 있나?"

"지금은 모르지만 곧 알 것 같습니다."

"솔직해서 좋군."

남자가 히죽 웃더니 말했다.

"거기 가면 여자가 딱 한 명 있거든. 그 여자한테 다가가서 누나라고 불러 봐."

"누나요?"

"어, 누나."

남자는 상상만 해도 재밌다는 듯 연신 웃어댔다.

"그럼 누가 보냈냐고 물어볼 거다."

"그럼 그땐...."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 해. 날 어떻게 만났는지."

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말하면 저는...."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이 종이를 주면 돼. 이해했나?"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투성이었지만, 잭은 충실하게 그의 말을 따랐다.

"유일한 여자에게 누나라고 부르고, 어떻게 나으리를 만났는지 이야기하고, 종이를 준다. 맞나요?"

"정확해. 기억력이 좋군."

남자의 손이 잭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그렇게 하면, 오늘 일은 잊어주지."

그 순간 잭은 생각했다.

'그냥 튈까?'

Chapter9.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쓴다 (4)

이 넓은 수도 한복판에서 남자가 어찌 자신을 찾아내겠나 하는 심산이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고."

그 순간, 남자가 잭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말했다.

"아까 그 두 놈이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테니까."

"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톰과 제리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고 있을 터였다.

잭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으리. 혹시...."

"네 입장은 내 알 바 아니지."

말을 대뜸 자르는 남자의 태도가 어찌나 무심한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암담한 심정에 잭의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그런 잭을 남자가 힐끗 쳐다보았다.

"일단 시키는 일부터 잘해 봐. 혹시 모르지, 그럼 누나가 널 마음에 들어 할지도."

"네...."

남자가 선심 쓰듯이 던진 말에도 별 힘이 나지 않았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는 길거리의 소년인 제 인생이 그럼 그렇지 싶었다.

'집에 가기 전에 옷 속에 두를 거나 찾아보자....'

잭은 긴 숨을 삼키곤 물었다.

"시키신 일은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내일 오후 2시에 찾아가."

"어, 근데 보통 선술집은 그 시간에 안 열려 있을 텐데요?"

잭의 질문에 남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열려있을 거야."

말을 마친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 가 봐."

❖ ❖ ❖

"맹랑한 꼬마 같으니."

나는 피식 웃으며 멀어져가는 꼬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나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들오들 떨면서도 할 말은 한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재빠르게 계산을 하고 생존 전략을 짠다.

그런 녀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원래 밑바닥부터 시작한 애들이 살아남는 법이지."

아직 어리기에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어려 보이는 겉모습을 활용해 상대방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냄새가 난다고."

녀석의 후각은 비상하게 뛰어났다. 특히 내가 내뿜는 살기를 냄새의 형태로 인식하는 게 독특했다.

그 능력을 활용한다면 내가 계획한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때에 잘 나타났군."

어차피 길드의 인력도 늘리려던 참이었다. 손기술도 제법이고 눈치도 빠르니, 이래저래 활용할 구석이 많아 보였다.

"뭐, 엘리체가 알아서 잘 써 먹겠지."

사람의 재능을 파악하고, 그것을 키울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니까.

엘리체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엘리체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지금쯤 그녀가 무얼 하고 있을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내 뒤를 캐느라 정신이 없겠군."

물론 털어봐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라는 정보나 얻으면 다행일까.

"그래도 어디까지 알아낼지 좀 궁금하긴 한데?"

과연 그녀가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아낼 수 있는지 기대해보기로 했다.

"이제 가 볼까."

나는 꼬마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몸을 돌렸다. 이제는 여기 찾아온 목적을 달성해야 할 때였다.

꼬마가 안내해준 골목 틈은 무척 좁았다. 겨우 사람 한 명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

"뚱뚱한 놈은 못 지나가겠는데?"

투덜거리며 골목 끝으로 나오자, 아까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사방이 건물로 가로막혀 있어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간.

그곳에는 촛불 하나만을 켜놓은 가판대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마차의 형태를 한 것도 있고, 돗자리 위에 물건을 펼친 경우도 있었다.

"일부러 불을 환히 밝히지 않는 모양이군."

그 뒤에는 밤거리에서 만나면 도망칠 법한, 아니 낮에 보아도 영 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인상의 상인들이 서 있었다.

거뭇한 얼굴과 사람을 가늠하는 듯한 눈빛, 불법 물품을 거래하는 사람 특유의 비겁한 태도까지.

"아주 얼굴에 대놓고 암시장 상인이라고 써 붙였구만."

나는 혀를 쯧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정체를 알리기 싫은 것처럼.

"그래, 이래야 암시장이지."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형태의 암시장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존재해왔다. 나라에서 판매권을 독점하거나 판매를 금한 물건을 어떻게든 빼돌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 총각, 혹시 마약에 관심 없수?"

"동방에서 들여온 후추입니다, 후추! 정가보다 훨씬 싸요!"

정식 경로를 통해 들여온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질을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정가로 구입하기에 너무 비싼 물건들, 그리고 제국에서 판매를 통제한 물건들이 이곳에서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령,

"싸요, 싸! 오크의 발가락! 어제 채취해서 신선합니다!"

"고블린 손톱도 있어요! 단단하기론 쇠에 버금갑니다!"

듣기만 해도 역겨운 재료들이 버젓이 판매되고 있었다. 정력에 좋다던가,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데 쓰인다는 핑계로.

"이렇게 어두운 데 뭘 보고 사는 거지?"

나는 투덜거리며 암시장을 향해 나아갔다.

이곳에서는 제품의 품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구입 후에 하자를 발견하거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판매자에게 따져 물을 수 없다.

절대적으로 귀책 사유가 구매자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곳, 암시장의 규칙이었다.

"애초에 다시 온다고 해서 그걸 판 놈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불법적인 물품 거래가 다 그렇지 뭐.

"흠."

나는 장사치들의 호객 행위를 대충 흘러넘기며 여러 가판대를 지나쳤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내 시력은 거리의 어둠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대낮처럼 보고 있었다.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일 테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목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내 목표는 가판대 위에 놓여 있지 않을 터였다. 그보다는 아마 판매자의 주변에 있을 확률이....

'찾았다.'

목표를 발견한 내 눈이 반짝였다.

성급해 보이지 않도록 느긋한 걸음걸이로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 녀석이 진짜, 썩 뱉지 못해?!"

내가 향하는 곳에는 한 노인이 돗자리 뒤에 앉아 화를 내고 있었다.

"뱉어, 뱉으라고!"

손가락만한 굵기의 작은 뱀을 붙잡고.

뱀은 자신의 머리통보다도 훨씬 큰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리고 끅끅대며 그것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려 애를 썼다.

"아이고, 이놈아. 그거 먹는 거 아니어야!"

노인은 그런 뱀의 목 아래를 붙잡고 뱀이 삼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이놈의 뱀 새끼가, 왜 자꾸 먹으라는 건 안 먹고 이상한 걸 처먹는 거여!"

말은 거칠었지만 뱀은 잡은 노인의 손길은 퍽 조심스러웠다. 자칫 뱀의 뼈가 부러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힘을 조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뱀의 몸이 워낙 작은 데다, 녀석이 계속해서 목을 꿀렁거리는 탓에 퍽 애를 먹고 있었다.

"내가 니 살리려고 그런다, 이놈아! 아이고 속 터져!"

그렇게 노인은 뱀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내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봐."

조용히 그를 불렀지만 노인은 뱀에게 온전히 집중한 듯 듣지 못했다.

탕!

보다 못해 발을 한 번 구르자,

"허이구 깜짝이여!"

노인이 화들짝 놀라 펄ㅉ?ㄱ 뛰었다. 그 탓에 뱀의 목으로 무언가가 조금 넘어가 버렸다.

"아이고 이놈아 안된다고야!"

노인은 황급히 뱀의 목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이마의 진땀을 닦아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옵쇼! 아이고, 미안허이. 내가 요놈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노인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뱀을 쥔 손을 풀지 않았다. 한 손으로 뱀을 잘 부여잡은 채 앉은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려, 맘에 드는 물건은 있슈?"

나는 노인의 질문에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켰다.

"이거."

"...?"

노인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가리키는 방향이 가판대 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 손가락 끝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으잉?! 이 놈 말이여?"

그 끝은 그가 쥐고 있는 뱀에 닿아 있었다.

"아니, 거시기. 이 놈은 파는 게 아닌디라."

"키우는 건가?"

"그렇제. 내가 이런 미끈미끈한 동물을 좀 좋아하거든."

노인이 킬킬 웃으며 뱀을 쥔 손을 내게 내밀었다.

"어뗘, 이쁘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의 만면에 웃음이 맺혔다.

"크으, 보는 눈이 있구먼! 누군가는 이 차가운 생물이 뭣이 좋냐고 하지만, 그것은 이놈들의 귀여움을 몰라서 하는 소리여!"

노인은 갑자기 흥분해서 침을 튀겨가며 파충류의 귀여움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알겠고."

사족이 길어지자 나는 그의 말을 얼른 잘라버렸다.

"그 뱀은 왜 계속 꽉 잡고 있는 건데?"

"먹지도 못할 것을 처먹었으니 그렇제. 아니, 왜 자꾸 돌덩이를 꿀떡꿀떡 삼키냐고!"

노인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먹이 구하기가 번거로운 께 에그이터 스네이크를 구했는디."

에그 이터 스네이크.

살아있는 생물 대신 알을 주식으로 삼는 뱀의 종류다. 알을 통째로 삼킨 뒤 몸속에서 껍질을 깨서 내용물을 섭취한다.

"이놈이 자꾸 엉뚱한 것만 처먹어서 골치가 아파 죽겄어. 어쩐지 싸게 팔더라니."

그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감히 나한테 사기를 쳐? 어떤 놈인지 몰라도 다음에 만나면 아주 조져버릴 것이여."

그가 그렇게 화를 내는 동안, 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눈망울을 끔벅였다. 여전히 입에 문 돌덩이를 뱉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얼마에 샀는데?"

"요놈? 글쎄, 50실버쯤에 산 것 같은데."

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 뱀, 나한테 팔아."

"엥? 이건 파는 게 아닌...."

딸그랑.

노인의 시선이 가판대 위로 떨어지는 물건으로 쏠렸다. 금빛을 뿜어내는 동전이 몇 바퀴 빙그르르 돌다가 멈췄다.

"근데 요놈은 내가 꽤 멀리까지 가서 사 온...."

짤그랑.

"지금까지 내가 한 고생을 생각하면...."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얼른 데려가슈."

노인이 공손하게 양손으로 뱀을 붙잡고 내게 내밀었다.

"잘 생각했어."

나는 뱀의 목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살짝 붙잡았다. 자칫 힘을 주면 뱀의 목이 부러질 수 있으니 조심해서.

노인의 경우와는 달리 내게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내 악력은 그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차갑네."

"원래 뱀이 그렇제 뭐. 근데 그거 쓰다듬다 보면 은근히 중독되는 맛이 있당께."

뱀의 몸이 몇 번 꿈틀거리다 천천히 내 손을 감아 돌았다.

"호오."

손등부터 손목까지 뱀의 미끈한 몸통에 휘감겼다.

생각만큼 소름 끼치거나 하진 않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한 느낌이 꽤 마음에 들었다.

"정말 그러네."

"그렇제? 그 맛에 뱀 키운당께. 게다가 얼굴도 을매나 귀여운지 몰러. 눈도 동글동글허니 순해가지고."

나는 뱀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다.

새카만 유리구슬처럼 눈에, 독이 없는 개체 특유의 동그란 머리, 그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노란 비늘이 반짝였다.

"확실히 예쁘긴 하군."

Chapter9.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쓴다 (5)

"험험, 손님이 보는 눈이 꽤 있구먼. 아무튼 여기 규칙 알제?"

"알고말고."

"그려.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환불하거나 그런 건 읎어. 고놈 이상하다고 난 다 말했응게. 그거 알고도 사 갔으니 손님 책임이여."

노인은 몇 번이고 내게 신신당부를 한 뒤에야 물러났다.

"환불하러 올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

나는 손을 휘저으며 뒤돌아섰다. 노인에게 더 이상 볼 일은 없었으므로.

"허 참, 특이한 손님이구먼."

노인은 그런 나를 곁눈질로 보며 작게 궁시렁거렸다.

"뭐, 아무튼 다른 놈으로 다시 사야겄어. 이번엔 제대로 된 놈으로다가...."

나는 노인을 뒤로 한 채 그곳을 벗어났다. 암시장의 한구석으로 가서 뱀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제대로 찾았네."

놈의 배 쪽에 푸른 반점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이놈이 내가 찾던 목표가 확실하다는 증거였다.

"어디 보자...."

나는 뱀의 척추뼈를 찾아 슬슬 문질렀다. 위에서 아래쪽으로 훑어 내려가다가,

"여기군."

손가락 끝에 느껴진 돌기를 눌렀다.

"꿰엑!"

뱀이 희한한 소리와 함께 입을 벌렸다.

툭.

미리 펼쳐둔 손바닥에 뱀이 물고 있던 돌이 떨어졌다.

"호오."

나는 그 돌을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자세히 관찰했다.

매끈한 조약돌 같은 모양. 탁한 회색의 표면은 조금도 특별한 점이 없었다.

"정말 평범한 돌 같군."

돌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딱히 특별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 반응해 뭔가 변화가 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돌은 사실....

"이게 마정석이라니."

마정석.

아주 드물게 채취되는, 마력을 품고 있는 진귀한 광석.

마정석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세공을 마쳐야 한다. 정확한 각도, 일정한 굴절률을 통해 내면의 힘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문제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경우 이렇게 평범한 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수한 감별 도구가 없이는 길거리에 내다 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녀석이 있다면 다르지."

나는 시무룩하게 축 늘어진 뱀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녀석의 배 쪽에 있는 푸른 반점은 녀석의 출생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녀석은 북부 쪽에서 서식하는 포인트 에그 이터의 일종이다. 따라서 녀석에겐 이 수도의 기온이 퍽 덥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녀석은 제 몸을 차갑게 해줄 무언가를 열렬히 탐한다.

"그게 바로 이 마정석이고."

즉, 녀석은 천연 마정석 감별 도구인 것이다. 정확히는 냉기의 기운을 품은 마정석밖에 찾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손에 넣은 게 어디야."

이 녀석은 사실 원작에서 카인이 손에 넣었던 뱀이다.

카인은 우연히 암시장에 흘러들어왔다가, 노인의 손에서 죽어가는 뱀을 발견한다.

노인이 날뛰며 뱀을 짤짤 흔들어대는 꼴을 참지 못하고 그 뱀을 사버리고 만다.

"근데 그 뱀이 마정석만 골라 처먹는 놈이었다니."

역시 다 가진 놈답게, 운빨 한 번 끝내준다.

우연히 그렇게 찾기 어렵다는 암시장을 들어가고, 우연히 거기서 희귀하기 짝이 없는 특수종 에그 이터 스네이크를 만나고, 우연히도 그 놈이 냉기의 마정석만 골라서 입에 무는 놈일 줄이야.

"그것도 자기한테 꼭 필요한 것으로 말이지."

며칠 뒤, 제 영지로 돌아간 카인은 거대한 재앙을 맞닥뜨리게 된다.

제 영지의 한 가운데에 출연한 여름의 검, 카덴챠.

이명은 화염검. 이 검은 손에 쥔 이를 뼛속까지 불태우는 불길을 선사한다.

카인은 이 검을 쥐는 순간 지옥불 같은 불길에 휩싸인다.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는 가망이 없었으나, 그 순간 주머니에 들어있던 돌이 그를 보호한다.

"기가 막힌 우연이로군."

뱀의 입에서 꺼낸, 평범한 돌인 줄 알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이 실은 마정석이었다니.

냉기의 마정석은 카인이 카덴챠의 화염을 버텨낼 수 있게 도와준다. 그 덕에 카인은 카덴챠를 지배하는 데 성공하고, 여름검의 소유자가 된다.

"이번엔 그렇게 안 될 거다."

그 마정석, 내가 미리 다 털어가 버릴 거니까.

"크크크크."

나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뱀의 턱을 긁어주었다.

슈륵, 슈륵.

뱀이 입 사이로 혀를 낼름거렸다. 턱을 긁어주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움직임이 조금 살아났다.

나는 오늘 하루 아주 큰 일을 해줄 뱀을 보며 씩 웃었다.

"잘 부탁한다."

이 녀석과 함께라면, 이 암시장의 마정석을 다 입수하는 것이 너무나 쉬울 것이다.

가판대에 잠깐 풀어주고 녀석이 꿀떡꿀떡 삼키려 드는 돌만 집어 들면 되니까.

상인들이 질겁하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금화 하나 던져주면 그만이지."

아까 그 노인처럼 말이다.

"자, 가볼까?"

나는 뱀을 팔뚝에 감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높게 솟은 건물 사이로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뒤면 카인이 여기 도착하겠군."

그때쯤 나는 이미 암시장을 벗어났을 것이다. 원래의 목적, 마정석을 싹쓸이해서.

"과연 네가 마정석 없이 카덴챠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카인은 그저 검술이 뛰어날 뿐인 귀공자에 불과하다.

나는 그를 점점 더욱 평범하게 만들어갈 예정이었다. 그에게 예비된 수많은 미래를 빼앗고, 그 길을 앞서가는 것으로써.

"아, 그러고 보니."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멜리나도 불러야겠군."

획득한 마정석들을 잘 활용하려면 말이다.

"후후후."

내딛는 걸음마다 입가에 스미는 웃음이 짙어졌다.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 ❖ ❖

벤트 선술집의 홀.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보통 선술집은 오후 늦게부터 영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홀 중앙의 테이블엔 엘리체가 홀로 앉아 있었다.

툭, 툭.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에 놓인 목걸이를 건드렸다.

은색 목걸이줄 중앙에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공된 로켓이 걸려 있었다.

툭.

엘리체의 손가락 끝이 로켓에 닿았다.

"...."

엘리체는 손가락을 멈추고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로켓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엘리체의 목소리가 꺼질 듯이 잠겨 들었다. 그녀는 로켓을 바라보며 축축하게 젖은 눈빛을 했다.

어린 시절, 그녀가 홀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 때.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유품을 팔았다. 얼마 안 되는 돈을 받아 마른 빵 조각을 겨우 구했다.

그것을 입에 넣은 후에야 깨달았다. 어머니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을 잃었다는 것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충분히 힘을 기른 후에, 그녀는 그 마을을 다시 찾아갔다. 겁에 질린 장물아비는 다른 상인에게 팔아버렸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놈을 죽여버렸지만 후련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는 그 물품을 볼 수 없음에 회한이 들 뿐이었다.

"이게 왜 거기 있었을까."

아벨이 말한 경매장.

엘리체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거기 참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리체는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왜 왔는지 싶어 한숨만 나왔다.

장신구 경매에 나타난 그 목걸이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저건...!"

틀림없었다. 마지막으로 본지 10년이 넘었지만,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어린 시절 그녀가 장물로 팔아버린 바로 그 목걸이라는 것을.

"10만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목걸이의 가격은 정말이지 눈이 튀어나오게 비쌌다. 그녀가 10년 전 저 목걸이를 고작 1골드를 받고 팔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장물아비가 얼마나 가격을 후려쳐서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더 고통스럽게 죽여줄 것을."

엘리체는 그놈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목걸이가 보인 순간, 저것을 사야겠다는 생각 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5만 골드!"

그녀는 애타는 심정으로 경매에 참여했다.

그 목걸이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아벨이 준 자루 속의 돈을 모조리 써야 했다. 아벨은 정말로 딱 목걸이를 살 만큼의 금액을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목걸이가 거기 나타날 줄 알고 있었을까. 이게 얼마에 팔릴 줄 알고 돈을 준비했을까.

도대체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실마리조차 없는 의문이었다.

엘리체는 로켓을 손에 쥔 채 중얼거렸다.

"나에 대해선 어떻게 알아낸 거지?"

불과 엊그제, 서쪽 영지에 콕 박혀 있던 망나니 도련님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줄줄줄 쏟아냈다.

그날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엘리체는 내심 분노했다. 어디선가 정보가 샌 게 틀림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벨이 떠난 이후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 대해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어떻게?"

경매장에 다녀온 이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과거가 까발려지고,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증거가 눈앞에 나타났기에.

"말도 안 되지만...."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지금껏 그녀가 정보를 입수하고 다루었던 방법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무언가가.

"이게 전부가 아닐 테지."

엘리체가 맛본 것은 아벨이 손에 쥐고 있는 수많은 정보 중 일부일 뿐.

그는 선심 쓰듯 자루를 열어 약간만을 내보이고, 그 나머지를 갖고 싶지 않으냐고 영리하게 묻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제 엘리체는 아벨이 황제의 엉덩이에 점이 몇 개 있는지 알고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그런 엉뚱하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넌, 여전히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잖아.'

불현듯이 아벨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낮게 속삭이던 그 음성과 짓궂게 반짝이던 눈빛도 함께.

"-!"

엘리체는 얼른 손을 내저어 아벨의 잔상을 지워버렸다.

"하아."

또래의 남성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괜히 마음이 더 술렁이는 걸지도 모른다.

달칵.

엘리체는 열려 있던 로켓을 닫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엘...."

그런 그녀에게 덱스터가 말을 걸려다가,

"쉿."

윌리엄에게 가로막혔다.

"아니, 밥은 드셔야죠."

덱스터가 인상을 찌푸리며 항변했다. 그의 손에는 늦은 점심 식사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혼자 계시게 놔 둬."

윌리엄이 굳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시선이 엘리체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향했다.

"저게 어떻게...."

그는 낮게 침음했다.

Chapter9.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쓴다 (6)

그때 엘리체가 얼마나 그것을 애타게 찾았는지, 끝내 찾지 못함에 얼마나 깊은 상실감을 느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거 그거죠? 엘리체님이 어릴 때 팔아버렸다는 목걸이."

덱스터가 소리 낮추어 속삭였다.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자, 덱스터는 턱을 북북 긁었다.

"그게 왜 수도 경매장까지 흘러온거죠?"

"나도 모른다. 지금까지 흔적도 못 찾았었는데."

"근데 어제 그 망... 아니, 아벨이 딱 가라고 하니까 있었단 말이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짜 이상한 놈이네."

"이상한 일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비슷하지만 다른 말을 했다. 머쓱한 듯 코를 긁적인 덱스터가 입을 삐죽였다.

"아니 근데, 그 사람 진짜 아벨 킨드리얼 맞아요?"

그는 손등에 남은 잔 상처를 긁으며 투덜거렸다.

"뭔 귀족가 도련님이 그렇게 불량스러워요?"

그 상처는 아벨이 술병을 깨뜨렸을 때 파편이 지나가면서 낸 상처였다.

"하는 짓만 보면 무슨 뒷골목에서 몇 년씩 구른 놈 같아. 말투며 행동도 껄렁해 가지곤."

"너는...."

"아, 알았다고요! 입 조심!"

덱스터는 손으로 주둥이를 막는 시늉을 하다가,

"아, 근데 여기 없잖아요?"

다시 손을 뗐다.

"원래 나랏님 없는 데서는 욕도 막 하는 거랬는데. 뭐 어때요?"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촐싹대는 것은 덱스터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의 도발 아닌 도발에 열이 받아서 정보를 분 목표가 꽤 많았다.

"아니, 형님도 솔직히 말해봐요. 나만 그 인간 꼴보기 싫었냐고요, 예? 나만 속이 좁은 거예요?"

윌리엄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덱스터 앞에서는 비교적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었다.

"솔직히... 예의가 바르진 않았지."

"에이, 너무 좋게 말해주신다. 거의 뒷골목 건달 수준이죠."

덱스터가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처음에 엘리체님 손목을 턱 잡는데, 허. 미친 놈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 손목을 확 분질러버리려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만큼은 윌리엄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한 뒤 곧 다른 의견을 덧붙였다.

"하지만 정말 분지르긴 불가능했을 거다."

"아, 뭐. 그랬을 거 같긴 해요."

오래 합을 맞춰온 만큼, 윌리엄과 덱스터는 서로의 실력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두 사람의 합동 공격으로 무찌르지 못한 적은 없었다.

"굉장한 강자더군."

"세긴 세더라고요."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벨 킨드리얼의 무용은 놀라웠다.

성인 여성을 한 손으로 들었다 놨다 하는 괴력에, 재빠른 몸놀림과 검술은 고작 스무 살의 애송이가 보일 법한 수준이 아니었다.

"범의 자식이 살쾡이일 수는 없는 건가...."

윌리엄이 턱에 손을 짚고는 중얼거렸다.

그 또한 무의 길에 몸담았던 자이기에, 디에고 킨드리얼의 위명은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었다.

그는 먼발치에서 디에고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자세한 생김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푸르른 창공 같은 머리칼만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아벨이 처음 얼굴을 드러냈을 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꼭 그때의 디에고 킨드리얼이 눈 앞에 서 있는 것 같아서.

"근데 그 먼 데서 여기까진 왜 온 걸까요?"

덱스터가 말을 돌리자 윌리엄도 상념을 접었다.

"곧 있을 귀족 회의 때문이겠지."

"헐. 그렇게 어린데 벌써 가문 대표로 출석한다고요?"

"아마도. 그보다...."

윌리엄이 시선을 들어 엘리체 쪽을 바라보았다.

엘리체는 여전히 그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목걸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섬겨온 충실한 종복인 그는 알 수 있었다. 엘리체의 옆얼굴, 눈빛만 봐도 그녀의 속을 알아챌 수 있었다.

"결단을 내리신 것 같군."

"엘리체님이요?"

윌리엄은 덱스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엘리체의 옆에 조용히 선 채 그녀를 기다렸다.

"...윌리엄."

이윽고, 엘리체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 여느 때보다도 또렷하고 명정한 음색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윌리엄은 이제 엘리체가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번민을 온전히 걷어냈다는 것도.

"어제의 제안,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

긍정하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윌리엄과 달리,

"에엑!? 진짜요?"

덱스터는 그 자리에서 1미터는 폴짝 뛰어올랐다.

"아, 엘리체님! 진심이세요?! 진짜 그 망둥이 같은 놈을 주인으로 모시게요?"

호들갑을 떨며 엘리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아 진짜 싫어요! 귀족 나부랭이들은 하나같이 다 재수가 없다고요! 그중에서 아벨인가 하는 놈은 더 그렇고요!"

"덱스터."

윌리엄이 주의를 주었지만 덱스터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지금도 잘하고 있잖아요! 굳이 그놈 밑에서 일할 필요는 없다고요!"

덱스터가 오만상을 쓰며 엘리체에게 징징거렸다.

"솔직히 엘리체님이 왜 그놈한테 굽히고 들어가야 해요? 그놈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그는 푸른 손톱을 바짝 세워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런 거라면 저한테 맡기세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드릴게요! 네?"

덱스터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가 다루는 극독들은 정말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사람을 황천길로 보낼 수 있었다.

그가 목표에게 몰래 접근하여 그의 접시, 혹은 잔에 독을 타 암살한 대상이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덱스터."

엘리체의 부름에, 덱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엘리체님! 지금 출발할까요?"

"넌 귀족들을 싫어했었지."

덱스터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굳어졌다.

그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것은, 귀족에게 가문을 잃고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싫어하다마다요."

덱스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증오하지요."

엘리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복수심이 너의 것보다 크면 컸지 작지는 않다는 것도 알겠지."

"물론이죠."

"그렇다면, 대의를 위해 내가 그와 손을 잡는 것도 이해하겠네."

덱스터가 방금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벌렸다.

"...진심이세요?"

"그를 봐.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나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꿰고 있었어. 내 병도, 내 출신도."

"그건 그 자식이 엘리체님의 뒷조사를...."

"그가 그렇게 해서 얻을 이득이 무엇이지? 또한, 그 영지에서 그가 어떻게 나에 대한 정보를 얻었겠느냔 말이야."

덱스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누구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떠들 수 있는 주둥이의 소유자였지만, 엘리체 앞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경매장에 이 목걸이가 나올 것을 알고 있었어."

엘리체가 목걸이를 쥐고 살짝 흔들었다. 속에 담긴 은빛 로켓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달랑거렸다.

"내가 수년간 찾아 헤맨 목걸이를 말이야."

덱스터가 입술을 꿈지럭거렸다.

"우연의 일치 일수도...."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야. 그랬다면, 어찌 목걸이의 금액까지 정확히 맞추어 돈을 주었겠어?"

덱스터는 비로소 침묵했다.

그 또한 상황의 이상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 아벨이라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덱스터는 어렵게 입을 뗐다.

"전 그래도 엘리체님이 최우선인데요. 그놈한테 굽히는 꼴 보기 싫다고요."

엘리체는 그런 덱스터가 귀엽다는듯 픽 웃었다.

뒷골목의 음식쓰레기를 주워 먹던 그를 거둔 그날부터, 덱스터는 그에게 못 말리는 남동생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무어 있겠어. 그게 적의 발뒤꿈치를 핥는 일이라도."

엘리체의 말에 두 남자의 얼굴에 아까와는 다른 빛이 흘렀다.

그렇다. 이들이 모여 이날 이때껏 함께 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복수.

복수를 위해서라면, 염치도 양심도 모두 버려야만 했다.

윌리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문하시면 따를 뿐입니다."

그가 덱스터를 바라보자, 덱스터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근데 그놈이 한 번만 더 엘리체님한테 수작 부리면, 그땐 진짜 죽여버릴 거예요."

잠시 생각한 뒤 덱스터가 덧붙였다.

"...죽일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만 안 둘 겁니다."

이에 질세라 윌리엄도 나섰다.

"저도 그놈... 아니 그 사람이 엘리체님께 손을 댄다면."

윌리엄의 한 마디는 덱스터의 그것보다도 더욱 무게가 있었다. 그는 한번 결정한 일은 되돌아보지 않았고, 망설임조차 없이 행했다.

"그래, 그래. 알겠어."

엘리체는 빙그레 웃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이들과 일궈낸 이 길드를 지키고, 원하던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게 새파란 애송이에게 무릎 꿇는 일이라고 해도.

"그럼...."

엘리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인의 뜻을 이해한 덱스터가 곧장 따라붙었다.

"어디 사는지는 알아뒀습니다. 1번가의 최고급 숙소에 묵고 있던데요."

"오베스트 가문은 수도에 소유한 저택이 없으니까."

"잠입할 루트도 확보해뒀습니다."

엘리체가 덱스터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잘했어, 덱스터."

"뭘요, 기본이죠."

"그리고 앞으로는,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

"...노력할게요."

엘리체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푸른 눈동자에 엄한 기운이 서렸다.

"나처럼 귀엽다, 귀엽다 하고 봐줄 분이 아니셔."

"그 대신 손가락이나 꺾어버리겠죠 뭐."

덱스터가 투덜거리며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알았어요, 주의할게요."

윌리엄이 엘리체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가서 아벨님을 모셔올까요?"

엘리체의 태도를 빠르게 인식한 호칭 변화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엘리체가 싱긋 웃었다.

"아니. 직접 갈게."

"예? 하지만 엘리체님께서 굳이 직접...."

"가봤자 나더러 직접 오라고 할 테지. 또...."

엘리체의 손가락이 목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선물을 주셨으니 직접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 아니겠어."

윌리엄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그는 언제나 엘리체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쪽이었다.

"그럼 언제쯤...."

똑똑.

세 사람의 시선이 선술집 문을 향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엘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들어오세요!"

덱스터가 눈치 빠르게 외쳤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고개를 쏙 내민 것은,

"어... 안녕하세요."

고작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년이었다.

"뭐야, 꼬마잖아."

덱스터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짐짓 친절한 척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니?"

"어... 그게."

꼬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엘리체를 발견하곤, 아. 소리를 냈다. 곧이어 소년의 얼굴에 해괴한 표정이 떠올랐다.

"...?"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년이 짓는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저래?'

엘리체가 입 모양으로 묻자 두 사람은 다들 고개만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글쎄요.'

엘리체는 할 수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들어오렴."

Chapter10. 이길 수 있는 도박만 한다 (1)

나긋하게 말하며 손짓하자 소년이 쭈뼛쭈뼛 들어왔다. 그리곤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

최근 겪은 일련의 사태로 인해 윌리엄은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그가 엘리체의 앞을 가로막듯이 움직이자, 엘리체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괜찮아."

윌리엄은 못마땅한 눈빛을 했으나, 엘리체의 명령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

엘리체의 앞에 다가온 소년이 손을 꿈지럭거렸다.

지저분한 옷과 오랫동안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한눈에 보아도 길거리를 전전하는 집 없는 소년이었다. 스스로 이런 곳을 찾을 이유가 없는.

그래서 엘리체는 질문을 바꾸었다.

"누가 널 보냈니?"

"어....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소년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엘리체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척 보면 알지. 그래서, 누구인데?"

"사실 그건 잘 몰라요...."

소년은 지저분하게 엉킨 머리를 긁적이더니 덧붙였다.

"그냥 누나를 찾아가랬어요."

"...."

"누나라고 말하면 알아챌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엘리체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누나라고?"

겉보기에 그녀는 그렇게 불릴 모습이 아니었다. 누나보다도, 이모나 아줌마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진 참이었다.

'아벨님이로군.'

엘리체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와 비슷한 속도로 윌리엄과 덱스터도 시선을 교환했다.

'아벨님이네.'

'그런 것 같다.'

엘리체가 소년을 향해 물었다.

"그분은 어떻게 만났니? "

"우와."

갑자기 소년이 입을 떡 벌렸다.

"왜?"

"아뇨, 그게. 정말 그분이 말한 거랑 똑같이 말씀하셔서...."

소년이 감탄하는 투로 말하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아벨이 이 모든 상황을 안배했음에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엘리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마저 말해주렴. 그분을 어떻게 만나게 된 거니?"

소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뭔가에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혼내지 않을게. 편히 이야기해 보렴."

엘리체가 다정히 말하자 소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정말이죠?"

"그럼, 약속할게."

"사실은 제가 그분의 지갑을 털다가...."

"뭐, 지갑?!"

옆에서 듣고 있던 덱스터가 배꼽을 잡았다.

"와하하! 이 녀석 골 때리네!"

"덱스터, 조용히 해."

"아, 진짜 웃기다.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지? 운이 좋았나 보다?"

결국 덱스터는 엘리체가 등을 찰싹 후려친 후에야 조용해졌다.

"...그래서, 이걸 전하라고 하셨어요."

소년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끝에 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두 세 번 접혀 있는 쪽지였다.

쪽지를 펼친 엘리체가 미간을 좁혔다.

"...이걸 왜 구해오라고 하는 거지?"

"뭔데요?"

엘리체는 대답 대신 쪽지를 보여주었다. 내용을 확인한 두 사람이 눈썹을 모았다.

"뭐... 이미 정리된 서류가 있긴 한데요."

"좀 많긴 한데 못 구할 정도는 아닙니다."

"근데 왜 굳이 이 꼬마를 시켜서 전달하셨을까요?"

엘리체는 쪽지 하단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엔 아벨이 작게 적어둔 문장이 있었다.

"잘 써먹어 봐."

그건 쪽지를 전달한 소년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짓궂으시군...."

엘리체가 나직히 중얼거리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두르자. 아벨님께서 내리는 첫 번째 임무니까."

"사실은 두 번째 아닌가요? 첫 번째는 경매장...."

윌리엄의 투박한 손이 덱스터의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을 돌아본 엘리체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정확히는 두 번째가 맞지."

엘리체의 미소를 본 덱스터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는 엘리체가 언제 저런 화사한 미소를 짓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윌리엄은 나를 따라오고, 덱스터 너는...."

엘리체의 손가락이 소년을 향했다.

"저 꼬마가 지낼 곳을 구해줘. 우리 숙소 끝방이면 되겠네. 너, 이름이 뭐니?"

갑작스레 흘러가는 상황에 소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꼬마야?"

"저, 저요? 제 이름이요?"

"그래. 네 이름."

"어.... 저는 잭이요."

"그래, 잭."

엘리체가 웃으며 덱스터를 가리켰다.

"이 형을 따라가렴. 네가 지낼 곳을 알려줄 거란다."

"네에?! 제가 왜요?"

덱스터가 빼액 소리를 지르고,

"바, 방이요?"

잭이 어버버 거리며 입을 벌렸다.

엘리체는 덱스터 쪽은 본체만체 한 채 상냥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래. 넌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할 거란다."

"네? 갑자기 왜요?"

"왜긴. 네가 들고 온 게 소개장이란 걸 모르니?"

"소...소개장이요?"

잭의 눈빛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혹시 집이 따로 있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엘리체의 질문에 잭이 천천히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건... 없어요."

강 하류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천막.

그건 집이 아니었다. 그저 지친 몸을 누이고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곳일 뿐.

"그래. 그럼 앞으로 여기에서 살면 돼."

엘리체가 미소 지으며 잭의 어깨를 두드렸다.

"벤데타 길드에 온 걸 환영한다."

❖ ❖ ❖

"흠. 이거 괜찮네."

나는 가면을 쓴 채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 딱 들어맞는 크기로, 정확하게 얼굴 반을 덮어 뺨과 턱만 노출시켰다.

새카만 표면에는 섬세한 금빛 세공이 들어갔다. 그리고 상단 부분에 내 머리칼보다 조금 짙은 푸른색의 깃털을 달았다.

"이게 특히 마음에 든단 말이지."

움직일 때마다 깃털이 살랑거리며 부드럽게 이마를 간질이는 게 좋았다.

"카데르에서 썼던 거랑은 질이 다르네."

얼굴에 와닿는 감촉이나, 단단하고 가벼운 재질. 이런 것들을 고려했을 때 꽤 가격이 나갈 듯했다.

무엇보다 이 가면은 아무 상점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정하셨습니까?"

수도 마기오레의 한 중앙에 버젓이 위치한 카지노, [피아세레] 에서만 판매하는 것이니까.

입장해 신분패를 보이자마자 이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직원의 깍듯한 안내에 따라 가면을 골랐다.

"이걸로 하지."

곁에서 나를 지켜보던 직원에게 손짓했다.

"예, 알겠습니다."

직원이 내게 다가와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가면의 양 끝을 잡고 단단히 결착시켰다.

"벗을 때는 이 고리를 당기시면 됩니다."

"이해했어."

"예, 그럼."

직원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허리춤에 시선을 멈추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검은...."

아, 맞다. 여기 무기 반입 금지였지.

오베스트 영지를 떠나서 여기 오기까지 항상 차고 다녔던 것을 몸에서 떼놓으려니 좀 어색했다.

"여기 두면 되나?"

하지만 별말 않고 허리춤의 검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내 본 무기는 따로 있기도 하고.

"예, 감사합니다."

직원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안내를 시작했다.

"이제 입장하시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나는 그를 따라가며 거울처럼 매끄러운 벽에 나를 비춰보았다.

중부산 고급 원단으로 짠 상의에 수도의 의상실에서 유행하는 최신 방식으로 박음질한 금실이 오묘하게 빛났다. 알맞게 허릿단을 잡아 내린 바지는 탄탄한 하체의 선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나쁘지 않네.'

누가 봐도 중부 출신의 신흥 귀족처럼 보인다. 아마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쉽사리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손에는 늘 가지고 다니는 건틀렛을 착용했다. 워낙 고급 가죽을 쓴 탓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검이 없으니 좀 허전하군.'

뭐, 애초에 검은 필요 없을 것이다.

여기는 카데르의 불법 도박장처럼 질 나쁜 자들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니까.

"도착했습니다."

복도의 끝에 도달한 뒤 직원이 문을 열어젖혔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나는 그를 지나쳐 문밖으로 나왔다. 새로운 공간에 발을 내디딘 순간, 밝은 조명이 눈을 찔렀다.

"...호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절로 시야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넓은 공간이 보였다.

기본적으로 사용한 색채는 화사한 베이지 톤과 고급스러운 붉은 색. 천장 높이 달린 샹들리에가 환히 아래를 비추고, 곳곳에는 값비싼 장식을 배치해 화려함을 더했다.

고급 연회장이라고 봐도 넓을 정도의 구성이요, 규모였다.

홀 중앙에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파티 음식과 음료를 배치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목을 축이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좀 어때요?"

"말도 마세요. 오늘은 승리의 여신께서 절 외면하는 날인가 봐요."

"아까 21번 방 보셨어요? 오셨던 가요?"

"아직 안 오셨더라고요. 곧 오실 것 같긴 해요."

그들은 옷차림도, 생김새도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얼굴 절반을 가리는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바로 나처럼.

"아, 공통점이 하나 더 있지."

그들의 말투와 걸음걸이에선 잘 갈고 닦은 예법이 흘러넘쳤고, 드레스를 장식한 보석들 하나하나가 몹시도 값비싼 것들이었다.

즉, 그들은 모두 귀족이었다.

"과연, 공인된 귀족 놀이터."

그것도 황실에서 운영하는.

물론 대외적으로 알려진 운영자는 귀족이지만, 사실 그게 바지사장이라는 걸 모르는 귀족은 없다.

"게임 테이블만 있다 뿐이지, 실은 사교 클럽이랑 별다를 게 없으니까."

이곳에서는 다양한 도박을 즐길 수 있다. 그러다 지치면 안쪽의 고급 라운지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룸서비스를 요청해 식사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수도에 놀러 온 귀족들은 이곳에서 놀고먹으며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하여간 돈 많은 것들의 유희란."

나는 찬찬히 계단을 내려와 1층의 중앙 홀을 살펴보았다.

중앙 홀의 바깥쪽에는 각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다. 그 위에는 방의 번호가 있고, 아치형으로 환히 뚫려 있어 안이 잘 보였다.

"난 홀수에 걸겠어."

"이번엔 검은색으로."

"호호, '늑대 가면을 쓴 분'께서 마음이 급하신가 봐요."

"글쎄. 그건 '붉은 보석 가면을 쓴 분'도 마찬가지 같은데?"

귀족들은 딜러가 운영하는 테이블에서 신나게 도박을 즐겼다. 그들의 손에서 한 장당 1만 골드의 가치를 가진 칩이 구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참, 귀족들 속은 알 수가 없어."

나는 그들의 얼굴을 가린 가면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에서는 결코 같은 종류의 가면을 판매하지 않는다. 다양한 색깔, 그리고 이런저런 장식으로 상대를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여성의 경우 가면 위에 보석을 촘촘히 박기도 했고, 남성의 경우 가죽을 잘 보존시킨 동물 가면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정체를 숨기고 노는 게 좋은가?"

이들은 본인의 이름과 가문을 밝히지 않는다. 그저 '무슨 가면을 쓴 분.'이라고 서로를 지칭할 뿐.

그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직원들 뿐이었다. 물론 철저하게 비밀 유지 조항을 지키는 조건으로 그곳에 배치된 거지만.

"이 방식이 카지노를 더 흥하게 만드는 비결이겠지."

복잡한 계급 체계와 까다로운 예법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를 정말 몰라보는 것은 아니다.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면 모를까."

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

Chapter10. 이길 수 있는 도박만 한다 (2)

귀족의 눈썰미라면 가면 위로 드러난 머리카락, 그리고 체형, 혹은 입은 옷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

"뭐, 알아도 서로 말 하진 않겠지."

서로의 유희를 위해서 철저히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 이곳의 예의라면 예의다. 그리고 혹시 모를 후환을 대비해 막장 짓은 하지 않는다.

"핀볼은 어디에서 할 수 있지?"

"이쪽입니다, 마담."

"좀 쉬고 싶은데, 발코니로 안내해줄 수 있겠나?"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드넒은 홀에서는 직원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귀족들의 다양한 요구에도 당황하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응대했다.

"전반적으로 직원들 수준이 높네."

직원들은 모두 흰 셔츠에 붉은색 조끼를 갖춰 입었고, 귀족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의 예법을 갖췄다. 이 말은 물론 외모가 단정하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의 한 손에는 늘 쟁반이 들려 있어, 귀족들이 마음껏 샴페인을 마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저걸 용케 안 떨어뜨리고 빨리 움직이는군."

나는 픽 웃으며 쟁반을 든 직원에게 다가갔다.

"한 잔 줘."

맑은 유리 글라스 속에서 황금빛을 띠는 샴페인이 찰랑거렸다. 조금 들이켜 입속에서 굴리자, 상쾌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꽤 고급이네, 이거."

나는 픽 웃으며 쟁반을 든 직원에게 다가갔다.

"한 잔 줘."

맑은 유리 글라스 속에서 황금빛을 띠는 샴페인이 찰랑거렸다. 조금 들이켜 입속에서 굴리자, 상쾌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만족스레 웃으며 홀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각 방을 둘러보며 어떤 종류의 게임이 있는지 살폈다.

"1번부터 15번까지는 테이블 게임, 16번부터 30번까지는 카드 게임인가 보군."

일단 게임의 종류가 카데르 영지보다 훨씬 많았다. 방이 30개나 되니 말이다.

특히 룰렛처럼 규칙이 단순한 게임을 많이 놓아, 도박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 귀족들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한 게 보였다.

"확실히 제국 최고의 카지노답네. 머리를 잘 썼어."

그렇게 내부를 쭉 둘러보는 척, 조용히 감각을 확장시켰다.

"이번 회의 때 무슨 안건이 나오는지 들었어요?"

"황제 폐하께서 잔뜩 벼르고 계신다던데...."

"그 소문 들었어요? 바네스 가문에서...."

순식간에 여러 가지 정보가 오감을 통해 밀려들어 왔다.

대화 내용, 말하는 귀족의 생김새, 목소리 등을 꼼꼼히 살폈다.

예의를 차린답시고 소리 낮춰 속이고 있지만, 내 청력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덕분에 그 어느 곳보다도 다양한 양질의 정보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천천히 느긋하게 샴페인을 3잔쯤 비웠다.

"통 취기가 안 올라오네."

아벨의 몸은 술에 참 강한 것 같았다. 아니면, 레퀴엠을 손에 넣은 덕분일지도.

덕분에 전생에서는 입에 대지도 못했던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어 좋았다.

"한 잔 더."

그쯤 되자, 쟁반을 나르던 점원이 나를 유심히 살피는 게 느껴졌다. 혹여나 내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릴까 염려하는 듯했다.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오늘의 난동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릴 가능성이 컸다.

이를테면,

"왔군."

저기 나타난 여자라던가.

어느 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슬그머니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특히 직원들은 그녀가 나타난 순간부터 바짝 긴장한 티가 났다.

하도 사람들이 많은 탓에 여자의 모습은 사람들 틈 사이로 보였다 안 보이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여자의 뒷모습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21번 방."

방 번호를 눈으로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시작해 볼까."

먼저 내 걸음이 향한 곳은 홀 중앙의 환전소였다.

"안녕하세요. 환전하시겠습니까?"

"십만 골드. 칩은 전부 1000단위로."

"예, 알겠습니다."

환전소의 직원은 거액의 돈이 오가는 데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기계적이지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칩을 계산해 건네주었다.

잘그랑.

나는 그렇게 100개의 칩을 가지고 환전소를 떠났다.

"여기선 그렇게 쪼잔하게 놀 필요가 없단 말이지."

카데르 영지에서는 고작 몇천 골드를 번 것으로 딜러의 안색이 창백해졌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한판의 판돈이 무조건 천 단위. 많게는 한 판에 만 단위씩의 돈이 오가기도 한다.

이곳의 귀족들은 이만한 거액이 오가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 이하 단위의 돈은 돈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자들만 모였으니까.

"실버 이하의 돈은 본 적도 없는 놈들이 태반이겠지."

나는 아까 확인해두었던 방으로 향했다.

"19… 20… 21번 방."

예상대로 이곳엔 내가 무척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블랙잭.

운과 속임수보다는 개인의 지능과 두뇌 회전이 더 우세한 게임. 내게 승리만을 가져다 준 바로 그 게임.

"역시 이 게임을 골랐군."

내가 아는 그녀라면 그럴 것 같았다.

피식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방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대부분의 방에서는 약간의 웃음, 시끌벅적한 분위기, 누군가의 환호성과 탄식이 뒤섞여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버스트, 패배하셨습니다."

"블랙잭."

그런데 이 방의 분위기는 희한할 정도로 차분했다.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귀족들도 쉽사리 그 방에 들어서지 못했다. 참여하려고 들어갔다가도, "...힉!"

하고 놀란 뒤 다시 뒷걸음쳐 나오는 귀족도 있었다.

그 현상은 특히 테이블의 중앙에 앉아있는 한 여성을 본 뒤 일어나고 있었다.

"딱 원작에 나온 그대로군."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갔다.

"스테이."

"힛."

각자의 선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난 여기까지."

화려한 푸른빛 가면을 쓴 남자가 카드를 내려놓았다.

"흐응, 그만하려고?"

테이블 중앙에 앉은 여성이 물었다. 완벽히 새카만 가면 아래 붉은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왜, 조금 더 하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잖아."

"아아, 더는 힘들어서.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겠군요."

남자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칩들은 이미 바닥을 보였다.

반면, 여성의 앞에는 그야말로 산더미 같이 칩이 쌓여 있었다. 그것도 천 단위 칩으로만 있으니, 얼추 몇십만 골드는 되어 보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여성이 손을 내젓자, 남자는 마치 그것이 허락이라도 되는 양 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생긴 빈자리.

그곳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이 앉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누구 새로 참여할 사람은 없어? 자리가 비면 재미없는데."

여성이 그렇게 한 마디 떼자,

"이번엔 제가!"

"아니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자리에 앉으려고 들었다.

마침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가장 처음 목청껏 외친 남자였다.

"좋아, 시작하자고."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딜러가 비로소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가면 속의 내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주 왕처럼 군림하고 있군.'

서로의 정체를 감추는 것은, 이곳에서만큼은 신분의 차이 없이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곳의 인물들은 한 여성의 눈치를 과할 정도로 살피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여성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이 카지노에서 그럴 만한 권한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도....'

여성의 외모를 찬찬히 살폈다.

가슴골이 언뜻 비칠 정도로 환히 패인 드레스 상의, 하지만 그 위에 놓인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천박함은커녕 매혹을 더한다.

"난 7."

카드를 내려놓는 손가락 위에는 값비싼 반지가 몇 개씩 끼워져 있었다. 또한 예법이 뼈에 박힌 듯 완벽한 몸가짐을 선보였다.

어깨까지 훤히 드러낸 매끄러운 팔에서 진줏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전신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관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테이."

손짓은 거침없었고, 목소리에는 날 때부터 사람을 부리는 것이 당연한 오만함이 느껴졌다.

가면을 썼지만 총기로 반짝이는 자줏빛 눈동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원작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묘사한 바로 그 눈빛이었다.

'비올렛 마기오레 임페로.'

그녀는 테오도어 황제의 딸, 그중에서도 첫 번째인 제 1황녀였다.

'머리 색이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군.'

분명 황제의 것과 똑같은 흑발이라고 알고 있는데.

보석이 달린 핀을 빽빽하게 꽂아 틀어 올린 황녀의 머리카락은 선명한 금빛이었다.

'가발을 쓴 건가?'

흑발이 황족의 상징이다 보니 일부러 감춘 것 같았다. 그래봤자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말이다.

'저 눈동자를 가리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을 텐데.'

전 제국에 손꼽힐 정도로 드문 빛깔. 제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를 온전히 물려받지 못한 자줏빛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올렛 황녀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만큼 황제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자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자가 아니기도 하고.'

현 황가의 자식 중엔 아들이 없다. 본래 황가의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큰 오점으로 여겨지나, 이 경우엔 그렇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테오도어 황제가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현 황제 테오도어는 그런 남자였다. 제 손에 쥔 권력을 절대 놓을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평생, 그리고 영원토록 제 권력을 누릴 생각이었다.

'늙지도 죽지도 않을 테니까.'

세레나드의 주인, 성녀 라헬을 손에 쥐고 있는 한은.

그래서 그에겐 아들이 필요 없었다. 아들은 제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테오도어 황제의 이런 추악한 뒷면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는 성녀 라헬, 그리고 나 정도일 터였다.

'아무튼.... 비올렛 황녀가 매일 카지노를 제집처럼 들락거린다는 게 사실이었군.'

여기 머무르고 있으면 그녀를 만나게 될 거라는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원작의 카인은 이곳에서 비올렛 황녀를 처음으로 만난다. 카드 게임을 하며 옥신각신하고 난 뒤,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고 만다.

'비올렛 황녀는 꽤 인기가 많은 캐릭터였지.'

완벽에 가까운 미모, 뛰어난 두뇌와 처세술, 그리고 절대적인 권력까지.

물론 성격은 결코 좋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면이 매력을 부가시켰다. 평소에 툴툴거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나서서 카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츤데레라고 하던가.'

카인은 그런 비올렛 황녀의 원조를 등에 업고 제국을 손에 넣는다. 사랑에 눈이 먼 황녀란 그토록 치명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방해할 예정이었다.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가 경기가 진행되는 양상을 지켜보았다.

비올렛 황녀는 순조롭게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 이거 안 되겠네요. 전 포기하겠습니다."

"쩝. 저도요. 이번 판은 영 패가 안 좋네요."

주변 귀족들이 이미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선을 다해 게임에 참여하지만 기를 쓰고 이기려 들지 않았고, 또 너무 대놓고 져주는 척도 하지 않았다.

'과연, 처신의 제왕들이로구만.'

황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옆에서 어울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간혹, 물정 모르는 귀족이 황녀를 이기려고 들 때도 있었다. 대개는 수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경우였다.

그는 황녀의 앞에 쌓인 칩을 보고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 저 칩을 모조리 꿀꺽할 생각에 이성을 상실한 것이다.

"페어 벳, 하겠습니다!"

그가 호기롭게 외친 순간, 비올렛 황녀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Chapter10. 이길 수 있는 도박만 한다 (3)

"꽤 자신 있나 봐?"

흥미로워하면서도 자신만만한 기색으로 가득한 미소였다.

"재밌네. 어서 시작하지."

사람들이 흘깃흘깃 서로를, 그리고 황녀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이길 수 있을까요?"

"당연히 새카만 가면께서 이기시지 않을까 싶은데."

"괜히 칩만 잃고 끝나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렇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셔 시작된 판은 결국,

"졌습니다...."

물정 모르는 귀족의 참패로 끝났다. 그는 가지고 왔던 칩을 모두 잃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일련의 승부들을 지켜보며, 나는 비올렛 황녀에 대한 판단을 수정했다.

'잘하긴 하네.'

귀족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연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다.

'카드 카운팅을 하고 있어.'

그녀는 신중하게 생각한 뒤 패를 골라 내려놓았다. 그리고 게임 참가자나 딜러가 내려놓은 카드를 꼼꼼히 살폈다.

그것은 그녀가 현재 공개된 카드를 파악해서, 다음에 어떤 카드가 나올지 확률을 계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과연 원작에서 공인된 두뇌파 설정.'

냉정하고 빠른 판단, 비상한 기억력까지.

그녀는 확실히 지금까지 참가한 그 어떤 귀족들보다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게임 자체를 즐기고 있고.'

그녀에게 칩을 잃고 얻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게임에 집중해서 전략을 짜고, 상대를 완전히 짓눌러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자 보상이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온전히 거머쥔 승리.

'하긴, 제국의 1 황녀로 태어났으니 그럴만 하지.'

날 때부터 손만 뻗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이가 제게 머리를 조아리는 환경.

덕분에 그녀는 웬만한 자극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게 되었다.

룰렛류 게임보다는 카드류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전자는 순전히 운에만 의존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비올렛 황녀의 독무대나 다름없는 게임을 지켜보았다.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저, 저도 여기까지."

그녀에게 돈을 잃고 테이블을 떠나는 귀족들이 속출했다.

"아, 시시하네."

자리가 비게 되면 황녀는 여지없이 불편한 속내를 표출했다.

"여긴 죄다 바보들밖에 없는 거야?"

혹은 다른 귀족들을 향해 도발적인 말을 날리기도 했다.

그럼 그 중압감을 견디다 못한 다른 귀족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가진 돈을 잃을 때까지 황녀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런 황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경기, 진행하겠습니다."

딜러조차 기계적인 미소를 지은 채 경기를 진행할 뿐이었다.

'귀족들 지갑을 모조리 거덜 낼 셈인가?'

비올렛 황녀는 귀족들의 돈을 강제로 뜯는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계속해서 달콤한 승리를 거머쥐는 한, 그녀는 저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황녀 곁에 서 있는 두 남자를 살폈다.

고급 연미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근육질의 몸매, 그리고 잘 단련된 게 분명한 날렵한 기운.

'호위 기사인가.'

따라서 황녀에게 몰래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게임에 집중하기 위해서인지 어떤 음료도 손에 대지 않고 있었다.

'슬슬 나서 볼까.'

나는 칩을 거의 소진한 귀족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일어서면 바로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였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귀족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빈 의자에 멎었다. 저길 또 누가 채울 것인지 서로 눈치를 살피는 순간,드륵.

"참여하겠어."

나는 망설임 없이 의자에 앉았다.

"호오."

비올렛 황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더니. 이제야 참여하네?"

흥미 가득한 음성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해주었다.

"모든 일엔 때가 있거든."

순간 기묘한 침묵이 테이블 위로 내리깔렸다.

황녀의 곁에 석상처럼 서 있던 호위 기사도, 카드를 정리하던 딜러도, 테이블에 앉아있는, 혹은 주변에 옹기종기 서 있던 귀족들도.

"-헉!"

"...!"

가면 속 눈동자를 크게 떴다. 다들 무엄하게도 반말을 내뱉는 내 입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 한 명, 비올렛 황녀를 제외하고.

"...흐응."

그녀의 입가가 깊이 패였다.

나의 뻔뻔한 태도를 기분 나쁘게 여기긴커녕,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이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자세를 정돈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 치며 딜러를 보았다.

"참여 선언 안 하고 뭐 해?"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딜러가 흠칫 놀랐다. 지금껏 황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딜러에게 말을 걸지 못하던 참이었다.

"...."

딜러의 시선이 황녀를 향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는 듯한 눈빛.

황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딜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푸른 깃털의 가면께서 게임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카드를 참가자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탁.

두 장의 카드가 내 앞에 놓였다. 나는 능숙한 태도로 그것을 집어 들며 말했다.

"준비됐으면 빨리 시작하지."

사람들 사이로 기묘한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들은 어느새 이 테이블의 주도권을 내가 가져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딜러가 나직히 게임 시작을 알렸다.

나의 청보랏빛 눈동자와 황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채도를 가진 눈빛. 그것이 어떻게 흐트러질지 상상하자 퍽 즐거웠다.

"해 보자고."

나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몰래 입술을 핥았다.

❖ ❖ ❖

"어.... 흠흠. 실례하겠습니다."

마지막 참가자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딜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테이블에 남은 유일한 참가자인 나, 그리고 비올렛 황녀를 쳐다보았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비올렛 황녀의 입매가 슬쩍 일그러졌다. 그녀가 내 앞에 쌓인 칩을 바라보았다.

"...그쪽, 좀 하네."

내 앞에 쌓인 칩은 황녀보다는 덜하지만, 상당히 많은 양이 쌓여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다른 참여자들의 칩을 쓸어 담은 결과였다. 물론 그중에는 황녀의 칩이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과연 씀씀이가 남다르군.'

한번 판돈을 걸 때마다 남들의 두 배, 많게는 다섯 배씩 걸었다. 덕분에 그녀의 앞에 쌓여 있던 칩의 상당량이 내 앞으로 이동했다.

'얼추, 30만 골드쯤 되려나.'

순식간에 처음 들어왔을 때 환전한 칩의 3배 이상의 돈을 쌓았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승률이었다.

여유롭게 옆에 놓여 있던 샴페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술 맛이 꿀 맛이네.'

그건 비단 이것이 고급 샴페인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승리의 향기가 더해져 달콤한 맛을 더하고 있었다.

비올렛 황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딜러 출신이야?"

귀족에게 던지긴 퍽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닌데."

그런 시시한 도발에 일일이 응해줄 필욘 없었다.

"흐응, 그래?"

비올렛 황녀는 내가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곤 눈을 번득이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잔을 굴리는 손목의 각도,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는 자세 등.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귀족의 기품 같은 것들을.

비올렛 황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귀족 맞는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곤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나를 보고도 너무 태연한 게."

나는 샴페인 잔을 슬쩍 얼굴 옆으로 치웠다. 곡선을 그리는 입가를 낱낱이 보이며 대꾸했다.

"태연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그냥 참가자 대 참가자로 만난 건데."

그게 이 카지노의 규칙 아니냐는, 고상한 돌려 묻기였다.

"그건 맞지만. 그렇다고 눈이 없는 건 아니니까."

"오, 맞는 말이야. 눈이 있어야 카드도 보고 그렇지 않겠어?"

"봐, 이렇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한단 말이지. 건방지게."

그렇게 말하곤 있지만 썩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비올렛 황녀가 턱을 괴고 지긋이 나를 응시했다.

"머리도 꽤 좋은 것 같고. 마음에 든단 말이야."

그녀의 시선이 내 머리카락,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 그리고 턱을 스쳤다.

"얼굴도 미남일듯한데. 아아, 궁금하네."

비올렛 황녀가 혀를 느릿하게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가면 속 얼굴이."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이 긴장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 진짜 누구야?"

"몰라, 여기서 처음 보는데."

"저런 머리 색의 남자가 귀족 중에 있던가?"

"있기는 한데.... 설마, 아닐 텐데. 그럴 리가?"

소리 낮춰 수군거리고 있지만, 그들의 말소리는 전부 내 귀에 들려왔다.

비올렛 황녀도 그런 주변의 소리를 들은 듯 탐색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짐작이 가긴 하는데 확신이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러니 가면을 벗겨 확신을 얻고 싶겠지.

탁.

빈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대부분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좋아. 더 이상 참여할 사람은 없는 것 같군.

딱 내가 원하던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그 그림의 마지막 점을 찍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안을 하지."

"어떤?"

"솔직히 지금까지 해봤으면, 대충 상대방 실력은 가늠이 될 거 같은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황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이번 판에 모든 판돈을 거는 거지. 어때?"

"단판승을 하자고?"

"그래."

"...하!"

황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칩이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내가 너무 손해 보는 장사 아닌가?"

"어차피 돈은 목적이 아니잖아?"

나는 지나가던 직원을 향해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한잔 더."

"예, 알겠습니다."

직원이 내 뺨을 힐끔힐끔 살피며 아까와는 색이 다른 주홍빛 샴페인을 따랐다.

그는 아까부터 내 옆에 머물러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껏 마신 잔이 6잔을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내 육체는 여전히 취기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 말이 맞지?"

나는 가득 찬 잔을 내려놓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이기는 게 재미있어서 시작한 거잖아."

비올렛 황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면 끝을 슬쩍 긁을 뿐.

'정곡을 찔렀나 보군.'

저 행동은 그녀의 심중을 정확히 짚었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이기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시작한 거지."

나는 양손을 깍지낀 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손등 위에 턱을 얹은 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혹시 쫄려서 그러는 건가?"

"감히...!"

으르렁거리며 튀어나온 것은 황녀의 옆에 서 있던 호위 기사였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만."

비올렛 황녀가 손을 내저어 그를 막았다. 기사는 황녀의 제지에 별수 없이 뒤로 물러났으나, 여전히 시선을 내게서 떼지 않았다.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면, 관두고."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기세로 여유롭게 말했다.

"중요한 건 이긴 쪽이 원하는 것을 갖게 될 거라는 거지."

"흠."

"이기면 돼. 쉽잖아?"

그렇게 나는 비올렛 황녀의 자존심에 불을 붙이고 마구 부채질했다.

비올렛 황녀의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의 칩이 아니라.

'그래, 돈에는 관심이 없겠지.'

그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거머쥐는 승리,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에게 안겨줄 좌절감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 승부를 받아들일 것이다.

"재밌네."

마침내 비올렛 황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Chapter10. 이길 수 있는 도박만 한다 (4)

"사람을 도발할 줄도 알고."

그녀의 긴 손가락이 가면 끝에서 떨어져 나갔다.

"흥미를 끌려고 한 거라면, 제법 성공했다고 말해두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한다고, 안 한다고?"

"하자."

내 불퉁한 태도에도 비올렛 황녀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리고 딜러 쪽을 향해 손짓했다.

"시작해."

딜러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카드를 움켜쥐었다. 황녀가 있을 때부터 진땀을 빼고 있던 그는 이제 이 자리를 몹시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주변의 동료 딜러 중 그 누구도 그와 자리를 바꾸어줄 것 같진 않았다.

"휴우."

딜러가 긴 한숨을 삼키고는 카드를 펼쳤다.

"패 돌리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 주변에도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황녀님과 1:1 대결을...."

"보통 배짱이 아니네."

"어느 가문 사람이래?"

대부분은 내 정체를 모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황녀, 그리고 어느 정도 급이 있는 가문의 사람들은 대충 내 정체를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수런수런하던 사람들의 대화는, 어느샌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라면 글쎄, 황녀님이 지신 걸 본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저쪽도 제법 잘하는걸? 이제껏 돈을 전혀 잃지 않았다고."

나와 비올렛 황녀 중 누가 이길지에 대해서.

귀족들은 언제나처럼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지만 내 귀에는 다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큼 청력이 좋지는 않지만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비올렛 황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교계에 오랫동안 몸담게 되면 여러 가지 특별한 기술들을 익히게 된다.

입 모양만으로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기. 혹은 그 반대로, 입 모양만 보고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우치기.

"쯧."

비올렛 황녀의 입술이 비틀리듯 올라갔다.

"감히 날 두고 내기라."

나직한 한 마디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그제야 제가 누구를 대상으로 입방아를 찧었는지 깨닫고 몸을 움츠렸다.

"왜, 재밌잖아."

나는 씩 웃으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참에 양쪽의 승패를 걸고 내기판을 여는 건 어때?"

"흥. 굳이? 결과가 뻔한 내기를 왜 해?"

비올렛 황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아무래도 큰 착각을 하고있는 모양인데. 내기라는 건 결과가 뻔한 것 같을 때 뒤집혀야 재밌는 거라고.

나는 딜러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내기판을 열 순 없나?"

"저, 그, 그건."

딜러가 어깨를 움츠리며 비올렛 황녀의 눈치를 살폈다. 비올렛 황녀가 쌀쌀맞게 일축했다.

"헛소리 그만해."

"흠, 뭐.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는 어깨를 으쓱여 한 걸음 물러났다.

"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딜러가 게임 시작을 선언했다.

나는 카드를 보며 어떤 패를 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올렛 황녀도 신중하게 자신의 카드를 살폈다.

"7."

"5."

게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점점 테이블에 펼쳐진 카드가 많아졌다.

주변 사람들은 나와 황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만둘래?"

입을 여는 것은 오직 비올렛 황녀. 그리고,

"아니? 내가 왜?"

빈정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나뿐이었다.

지금 판은 기존의 판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으음."

바로 비올렛 황녀가 어떤 카드를 내려놓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걸린 판돈,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 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그래도 그렇지 너무 오래 걸리는데. 내가 쓰는 시간의 거의 2배가 소요되고 있다.

"아직이야?"

"조용히 좀 해. 생각 중이니까."

"그래, 그래."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몸을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희미한 미소를 슬쩍 감췄다.

'어련하실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단순히 비올렛 황녀의 신중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으음...."

비올렛 황녀는 묘하게 불안정한 태도를 보였다.

한 손으론 카드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론 쉴새 없이 가면의 끝을 톡톡 두들겼다. 저러다 가면 끝이 헤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괜찮으십니까?"

호위 기사가 황녀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그는 애타는 시선으로 그녀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가면 위로 드러난 황녀의 매끄러운 이마에 은은한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호위 기사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말없이 내밀었다. 비올렛 황녀는 기사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깨달았다.

"...괜찮아."

그녀가 얌전히 손수건을 받아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닦아냈다.

호위 기사가 한 걸음 물러서서 물었다.

"물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필요 없어."

비올렛 황녀의 단호한 대답에도 호위 기사는 계속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꼭 제 주인을 지키는 강아지 같군.'

훨씬 덩치가 더 큰 기사가 저보다 더 작은 황녀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묘한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뭐, 내 눈엔 행여나 황녀의 심기가 불편해질까 조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건 육안으로 보기에도 황녀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춥지?"

비올렛 황녀가 카드를 내려놓고는 양팔을 감싸 쥐었다. 붉은 립스틱을 발라 보이지 않겠지만, 그녀의 입술은 이미 보랏빛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다들 안 추워?"

비올렛 황녀가 의아한 시선을 주변에 흩뿌렸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왜 나만 추운 거야?"

정말로, 이 장소에서 추위를 느끼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숄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보다 못한 호위 기사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다른 호위 기사가 지나가던 직원에게 손짓했다.

"샴페인이라도 드시는 게...."

"아냐, 그건 됐어."

비올렛 황녀는 결국 숄까지 한 겹 더 걸치고 경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유 모를 추위를 느끼는 듯했다.

"너무 긴장했나 봐?"

나는 피식 웃으며 비올렛에게 한 마디 질문을 던졌다.

"입 다물어."

비올렛 황녀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척 카드를 골라 테이블 위로 던졌다.

하지만.

"읏."

손이 땀으로 젖은 탓에 카드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볼품없이 그녀의 앞에 철퍼덕 떨어졌을 뿐.

"왜 이래?"

비올렛 황녀가 카드를 다시 집어 들며 짜증을 냈다.

'저런, 애쓰네.'

나는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비죽이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췄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비올렛 황녀의 상태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살기는 처음이지?'

바로 은밀한 살기를 내뿜어 그녀를 위협하는 것.

원래 검의 길을 가지 않는 평범한 이는 이러한 기운을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무려 레퀴엠의 소유자다. 녀석과 동고동락하며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했다.

평범한 일반인이 느낄만한 강도의 살기를, 피부를 살금살금 간지럽힐 정도로만 흘려보낸 것이다.

비올렛 황녀는 자꾸 오한을 느끼고, 뒤통수가 당기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게임에 집중이 될 리가 없지.'

침착함이 부서지고 판단력을 잃는다. 앞서 나왔던 카드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릿해진다.

비올렛 황녀가 승리할 확률은, 철저하게 현저히 낮아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좀 예민한 편인가?'

굉장히 옅게 살기를 흘려보냈는데도 반응이 극적인 편이었다. 이 정도면 그냥 조금 불안해하는 정도에 그칠 줄 알았는데.

'황가의 핏줄을 타고 나서 그런가.'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대체로 황가의 인물들은 자기 목숨줄을 붙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어차피 강한 살기를 흘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호위 기사가 눈치채면 곤란하지.'

나는 이 모든 일을, 카드를 움켜쥔 채, 다음에 나올 카드를 계산하고, 샴페인을 마시면서 해내고 있었다.

이제 레퀴엠의 기운을 이용해 살기를 일으키는 것은 그토록 쉬운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슬슬 막바지 같은데?"

절반쯤 마신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이 방에 들어온 후론 다른 맛으로 시켜봤는데 꽤 괜찮았다. 혀끝에 스치는 맛이 깔끔하고, 그러면서도 달콤한 여운을 남긴다.

'역시 황실에서 운영하는 카지노답군.'

샴페인을 혀 안에서 굴리며 비올렛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쪽 차례야."

"...후우."

비올렛 황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곤 다음 카드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이제 이번 턴이 마지막. 이번에 서로 카드를 내려놓고 나면 승패가 결정된다.

꿀꺽.

극도로 조용해진 가운데,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딜러도, 그리고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

결정이 쉽지 않은 듯, 비올렛 황녀는 쉽사리 카드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 끝이 고민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지금껏 나온 카드가 기억이 안 날 테지.'

나는 비올렛 황녀를 빤히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더 힘들텐데.'

내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이 길수록, 내 살기가 그녀의 목덜미를 조이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결국 입술을 꽉 깨문 채 고민하던 비올렛 황녀는,

"스페이드."

한 끗 벗어난 수를 놓고 말았다.

'좋았어.'

나는 환호성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하지만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내 표정을 읽어낸 비올렛 황녀의 입매가 굳어졌다.

"잠...."

"이제 내 차례군."

내 손가락이 다음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블랙잭."

완벽한 나의 승리였다.

"이런!"

"세상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너무나 확연하고도 절대적인 승리. 돌이킬 수 없는 결과.

결코 뒤집힐 수 없는 승패가 지금 테이블 위로 드러난 것이다.

"...이건, 이건."

비올렛 황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등에 힘줄이 시퍼렇게 돋아났다.

"자, 결과 선언해야지?"

나는 그 모습을 못 본척 딜러에게 말했다.

딜러는 동요가 역력한 얼굴로 나와 황녀를 번갈아 보았다. 과연 결과 선언을 했을 때 제 목이 남아 있을 것인지 점치는 듯했다.

"어서."

내 채근에 결국 딜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푸른 깃털의 가면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져나갔다.

"맙소사, 진짜 이겼어?"

"세상에, 비올렛 황녀님이...."

"여기 걸린 판돈이 다 얼마야?"

여성 귀족들은 부채질을 하며, 남성 귀족들은 잔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내 앞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올렛 황녀 쪽으로 다가갔다.

"...."

비올렛 황녀가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자줏빛 눈동자가 열기로 들끓자 흡사 황혼처럼 붉어 보였다.

'혹시 판을 엎진 않겠지?'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 불타고 있어, 나는 순간 그런 우려가 들었다.

'엄청 화난 거 같은데.'

여태 연전연승으로 이겨오던 무패의 기록이 무참하게 깨어졌으니 그럴만 했다.

지금까지야 참가자가 여러 명이라 패배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이번엔 1:1 대결이라 졌다는 느낌이 유난히 클 터였다.

'저 자존심에 가만있으려나?'

Chapter10. 이길 수 있는 도박만 한다 (5)

그렇지만 비올렛 황녀가 정말로 판을 엎을 가능성은 적었다.

우리 둘의 판돈만 해도 몇십만 골드다. 그걸 전부 걸었으니 오늘 카지노에서 손꼽히게 거대한 규모의 게임인 게 분명했다.

'아무리 황녀라도 그런 판을 무작정 엎을 순 없지.'

그랬다간 이 카지노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게다가 그 모든 과정을 많은 귀족들이 지켜보았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쉽게 말을 무를 수 없을 것이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뒤, 나는 비올렛 황녀의 칩을 모두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촤르르륵.

어찌나 칩의 양이 많던지, 옮기기만 하는데도 마치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거대한 칩의 산이지.'

나는 히죽 웃으며 내 앞에 옮겨진 칩을 바라보았다.

기존에 내 앞에 있던 칩과 합쳐지니 그 모습이 참으로 웅장하고도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이...!"

비올렛 황녀는 잠시 언어 능력을 상실한 듯 이를 악물기만 했다.

"대체 왜...!"

그녀는 자신의 칩이 내 앞으로 옮겨갔다는 것보다도, 그 어마어마한 돈을 잃었다는 사실보다도.

"왜 진 거지?"

내게 졌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난 듯했다.

"나는 분명...!"

그래, 나도 안다. 비올렛 황녀의 기억력이 상당히 좋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녀의 기억력은, 아벨의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린 듯이 그대로 외워버리는 것과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니까.

'내가 방해한 것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이 사실은 나 외엔 누구도 모를 터였다. 앞으로도 몰라야 했고.

"꽤 재밌었어."

나는 칩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여기까지."

"무슨...!"

비올렛 황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렇게 홀랑 털어먹고 가겠다는 거야?"

꽤 흥분했는지 황족답지 않은 걸쭉한 단어가 섞였다.

"자리에 앉아. 한 번 더 해!"

"글쎄. 몇 번을 해도 결과는 같을걸?"

나는 여유롭게 응수한 뒤 테이블에서 몸을 돌렸다. 비올렛 황녀가 발끈해서 벌떡 일어섰다.

"거기 안 서?"

그녀의 부름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방을 떠났다.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전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실제로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환전소가... 아, 저기 있군."

빨리 돈으로 바꿔야지.

아까와는 다른 목적으로 환전소를 찾는 중,

"거기 서라고 했지!"

등 뒤에서 비올렛 황녀의 새된 고함이 커졌다.

"뭐야?"

"비올렛 황녀님 아냐?"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방에서 뛰쳐나오는 비올렛 황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이쿠."

그 드레스를 입고 잘도 쫓아왔군.

나는 황녀의 부름을 착실히 무시하며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거기... 악!"

뒤에서는 비올렛 황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다.

"황...!"

호위 기사가 황급히 그녀를 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나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계속 살기에 위협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러울 만하지. 아마 다리에 힘이 풀려서 당분간 제대로 걷기 힘들 거다.

"환전."

환전소에 다가가 자루를 건네자 직원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아무리 날고 긴다는 귀족이라도, 이만한 양의 칩을 한 번에 바꿔간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걸 다요?"

"어. 당장. 빨리해."

지금 내 뒤에 분노한 황녀가 쫓아 오고 있으니까.

내가 싸늘한 눈길을 던지자 직원의 손길이 빨라졌다.

"여기, 있습니다."

금화가 든 자루를 건네는 직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루의 무게가 상당한 탓이었다.

"수고."

철그렁.

자루를 받아들자마자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음, 이 돈이면 당분간 활동 자금으로 쓸 수 있겠네."

나는 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시선을 멀리 뻗어 비올렛 황녀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디 갔어?"

비올렛 황녀가 씩씩대며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여기야, 여기.'

나는 그녀를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게!"

비올렛 황녀가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심하십시오!"

그녀를 만류하는 호위 기사들의 손까지 뿌리쳐가며.

"흐음."

나는 느긋하게 아까 살펴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어도 비척거리는 지금의 황녀보다 훨씬 빨랐다.

"비켜!"

"누구...! 헉!"

비올렛 황녀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쳐 가며 내게 다가오려 했다. 사람들이 워낙 북적북적하게 몰려 있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동안 나는 진작 목표했던 곳에 도착했는데도 말이다.

'여기야.'

발코니 앞에 멈춰서서 비올렛 황녀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저게 진짜!"

비올렛 황녀가 점점 가까워졌다. 호위 기사들은 쩔쩔매며 그녀를 따라왔지만, 그녀의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좀 마실게."

나는 지나가던 직원의 쟁반에서 샴페인 두 잔을 챙겼다. 그리고 발코니 문을 열어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탁.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밖은 새카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호오."

수도 마기오레는 특유의 아름다운 야경으로도 유명하다. 높이 쌓아 올린 기하학적인 건축물 사이로 달빛이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모습이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여기가 수도 관광 패키지 상품에 포함된 곳이던가.'

아마 야경 핵심 코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이 카지노의 발코니에서 수도 마기오레의 야경을 감상하는 것이.

'우연히 하나는 달성했네.'

내가 그렇게 야경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하는 순간,

탕!

발코니 문이 거칠게 열어 젖혀졌다.

"야! 내 말 안 들려?"

가면 아래로 붉어진 뺨을 한 채 씩씩대고 있는 비올렛 황녀였다.

'어이쿠, 이젠 호칭도 다 갖다 버렸네.'

하여간 제국 1황녀 아니랄까 봐. 저 황녀가 깍듯하게 존칭을 붙이는 것은 제 아버지뿐일 거다.

"들렸는데."

"뭐?"

내 시큰둥한 대답에 황녀가 눈을 부라렸다.

"지금 내 말을 듣고도 무시했다 이거야?"

"그건 아니고."

나는 테라스 난간에 올려두었던 샴페인 잔을 가리켰다.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부른 거지."

"그런 거라면 아까...!"

"글쎄."

비올렛 황녀가 발끈하는 것을 끊고 말했다.

"아깐 이야기 할 상황이 아닌 것 같던데. 내 멱살이나 잡지 않으면 모를까."

비올렛 황녀가 팔짱을 꼈다.

"멱살이라니! 내가 그리 무식한 사람으로 보여?"

내심 찔렸는지 입술 끝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려 했던 모양인데.'

하지만 굳이 여기서 그 사실을 지적해 비올렛 황녀를 또 열 받게 할 필요는 없었다.

"뭐, 아니라면 다행이고."

나는 샴페인 잔을 하나 들어 비올렛 황녀에게 내밀었다.

"이제 게임도 끝났는데, 한 잔 하지?"

"하."

비올렛 황녀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잔을 바라보았다.

아마 제국에서 자신에게 이토록 방만하게 굴었던 이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황녀의 흥미를 돋게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올렛 황녀는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일부러 안 마시는 줄은 알고 있었나 봐?"

"술 약하잖아."

짧은 대꾸에 비올렛 황녀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잔을 휙 채갔다.

"흥, 누가 그래? 내가 술이 약하다고."

작게 투덜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면 끝을 긁고 있었다.

아니긴, 정곡을 찔렸으면서.

나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비올렛 황녀가 손에 든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후우."

이번에 내가 고른 것은 푸른 빛이 도는 샴페인이었다. 지금까지 마신 것중에 가장 도수가 낮았다.

그것만으로도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지 비올렛 황녀의 입가에서 아스라한 한숨이 쏟아졌다.

"...하아."

비올렛 황녀는 재차 샴페인을 삼켰다.

그녀의 뺨이 금세 붉어졌다. 희미한 달빛에 비추어 그 색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아, 더워."

비올렛 황녀는 금세 입고 있던 숄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숄을 내밀었다.

나는 눈앞에 들이 밀어진 붉은 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사람을 하인 취급하고 있네.

"언젠 춥다더니."

내가 숄을 받으며 핀잔주듯 말하자 비올렛 황녀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희한한 일이야. 아깐 대체 왜 그렇게 추웠던 거지?"

"그러게."

나는 건성으로 대꾸해준 뒤 숄을 발코니의 난간에 대충 얹어놓았다. 그 모습을 본 비올렛 황녀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걸 왜 거기다 올려둬?"

"팔 아파서. 너무 무거워."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팔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아까 그 많은 칩은 잘만 들고 가더니."

"그거 때문에 팔이 아픈 거지."

"하!"

비올렛 황녀는 대꾸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시 샴페인을 한 입 머금은 그녀의 볼이 조금 더 붉어졌다.

"흥. 맛은 제법 괜찮네."

"지금까지 세 종류 마셔봤는데 다 괜찮았어."

"맛있는 게 당연하지. 내가 골랐는데."

"정말?"

설마 했는데 카지노의 운영까지 관여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비올렛 황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끝내 샴페인 잔을 비워냈다.

"아, 덥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그녀가 별안간 머리카락을 붙잡아 확 떼어냈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금빛 가발이 벗겨지고, 그 속에 올려 묶었던 새카만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후우."

비올렛 황녀가 머리를 몇 번 매만지자,

촤르륵.

밤하늘을 재단하여 가공한 듯한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펼쳐졌다.

세간에 전해지는 말로, 비올렛 황녀는 황제의 고압적인 성격과 황후의 아름다운 미모를 쏙 빼닮았다고 한다.

과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황족 특유의 고귀함이 철철 흘러넘쳤다. 아니, 오히려 가면을 쓰고 있으니 신비감이 더해져 효과가 더 강해졌다.

"역시,"

비올렛 황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내가 누군지 알긴 아는구나?"

"글쎄."

나는 일부러 애매한 답변을 흘렸다. 내 두루뭉술한 반응에 비올렛 황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건방지게 굴길래, 어디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 나부랭이인 줄 알았는데."

비올렛 황녀는 가면 위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휙 쓸어넘겼다.

"입고 있는 옷이나, 하는 짓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아직 술기운으로 흐려지지 않은 선명한 시선이 나를 훑었다.

"이름이 뭐지?."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샴페인만 홀짝였다. 비올렛 황녀가 충분히 초조해지도록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지금 당장 가면을 벗겨보고 싶을 정도로. 그럼 좀 고분고분해지지 않겠어?"

"어휴, 무서워라."

나는 엄살 가득한 투로 말하며 반쯤 빈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황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지금이라도 예를 갖추길 원하십니까? 비올렛 마기오레 임페로 황녀님."

"...."

비올렛 황녀는 제 앞에 공손히 숙여진 내 정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칙적으로 황족보다 계급이 낮은 이는 황족이 인사를 받아주기 전까지 고개를 들 수 없다.

"어때?"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저 천진하게, 무해한 듯이.

"이쪽이 마음에 드나?"

"...하, 참."

비올렛 황녀는 그런 나를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입술을 씰룩였다.

Chapter11. 궂은 일은 남에게 시킨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