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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9)

그녀의 대장간에서 서쪽 국경으로 납품을 시작하겠다는 대금 결의서였다.

'역시 그렇게 됐나.'

나는 남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녀 정도 되는 걸출한 대장장이가 그렇게 무너질 리 없었다. 역시 그녀에겐 기회가 된다면 절망의 구덩이를 벗어날 힘이 충분했다.

힘차게 도장을 쿵 찍었다.

'디에고 킨드리얼.'

그녀와의 거래를 승인하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아닌, 영주로써.

'일이 이래저래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군.'

이번에 수호자의 건틀릿으로 상당히 이득을 봤기에, 다른 방어구를 걸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틀릿 말고 어떤 게 있으려나.'

가장 좋은 것은 장신구다. 방어구와 달리 몸에 여러 개를 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텅 비어있는 귓불을 매만졌다. 그리고 비어있는 손가락 사이를 더듬었다.

'장신구가 잘 어울리는 외모이기도 하니, 썩힐 필요는 없겠지.'

우락부락한 거한의 남자가 반지를 끼면 흉물스럽게 보일 테지만. 나 같은 미소년이 낀다면 무엇을 걸치든 그 자체로 하나의 걸작품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마정석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마정석을 세공해 박는다면 여러 가지 효과를 동시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은 총 열 개니까 말이다.

'좀 이르긴 하지만, 미리 손을 써둬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화이어 브랜디를 물처럼 들이키던 한 소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내 지워냈다.

그리고 필립을 향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마을에 도는 소문은 없나?"

필립이 멈칫,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었다. 그가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빤히 바라보곤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잠시 마그나 모르텐의 보수 작업으로 출입이 통제되긴 했지만, 그 후로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씩 웃으며 서류를 넘겼다.

필립의 대답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는 내일 돌아올 디에고 영주에게도 그렇게 대답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음 서류를 집어들던 내게 필립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왜?"

"카데르 영지에서 불길한 소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카데르.

내가 최근에 쓸어버린 노예상이 있는 그 영지였다.

'사창가, 도박장에 노예 거래까지. 생각해보니 거긴 정말 가지가지하는 동네군.'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물었다.

"언젠 거기가 그리 조용했다고. 무슨 소문인데?"

"그곳의 한 상점에서 시신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무더기라면, 어느 정도?"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필립이 생각만 해도 오싹한 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최소 열 구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체들의 상태입니다."

"상태가 어떤데?"

"그것이...."

필립이 입에 담기도 힘든지 잠시 말 끝을 흐렸다. 이윽고 그가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모든 시체들이 마치 몇 년은 무덤에 있던 것 같은 상태라고 합니다. 바싹 마른 좀비와 비슷하달까요.

"그래?"

"예.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멀쩡히 식기를 팔던 곳이라고 합니다. 몇 년간 폐건물이었던 곳이 아니란 말이죠."

필립이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게?"

"일단 평범한 식기 상점에서 왜 그렇게 많은 시신이 나왔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곳이 노예상을 하던 곳은 아닌지... 그런 의심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필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아니겠죠? 아니시죠?"

그의 눈가가 의혹으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최근 내가 노예상을 찾아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힐끗 보고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필립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도련님이 하신 거 아니죠? 제발 그렇다고 말해주십시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애타는 질문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할 말 있으면 해."

내 매몰찬 재촉에 필립의 잇새로 체념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게선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빠르게 이해한 눈치였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나는 그의 잘 빗어넘긴 정수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

"...경비대들이 시체를 확인하고선 이렇게 지독한 시체는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둘렀다는군요. 마치 저주가 내린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고... 그렇게 말이 돌고 있습니다."

"저주라."

"예, 그런데 이런 소문도 같이 돌아다닙니다. 사실 거기 저주가 내린 게 아니라, 어떤 마(魔)검사가 단신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나는 흥미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마검사?"

"예. 검은 머리, 검은 눈의 검사가 그곳을 쓸어버린 거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티나지 않게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훑었다.

누가 보아도 푸른 머리카락, 청보랏빛 눈동자.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색이었다.

"어.... 그래서,"

필립의 눈에서 서서히 의혹이 잦아들었다. 혹시 내가 이 불길한 소문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불법으로 노예상을 운영하던 그들을 응징한 것이다, 아니면 경쟁 업체의 소행이다, 등등.... 소문이 무성합니다."

"흐음."

"그런데 상점에 있던 돈이나 패물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강도거나 보복성 행동으로 보긴 또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어느새 완벽히 납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설마 도련님 혼자서 그 놈들을 다 해치웠을 리 없지.'

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랬군."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필립의 설명이 이어졌다.

"들으셨다시피, 단신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몰살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또 시체의 상태도 너무나 괴이쩍어서... 다들 헛소문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게 다인가?"

"예."

나는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다시 도장을 집어 들었다.

'괜히 살려뒀나.'

약에 취해 있어 손대지 않은 그 노예들. 그중에 몇몇이 정신을 차렸던 모양이다.

'내가 레퀴엠에 동화되었을 때 봤겠지.'

그래서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검사로 기억에 남았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이 행운에 감사하며 결심했다.

'다음엔 다 죽여야겠어.'

괜한 목격자가 생겨 내 신상이 들통나게 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아벨'의 행동반경이 줄어들면 여러 모로 불편해지니까.

'나중엔 조금만 죽여도 충분히 배를 불릴 수 있겠지.'

나는 미소 띤 얼굴로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당분간 여유롭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기꺼웠다.

필립이 내가 건넨 서류를 책상에 툭툭 두드려 정리를 마쳤다.

"다음은 오베스트 영지를 수신인으로 하는 서신들입니다."

그가 두툼한 편지 뭉치를 들고 다가왔다.

"쯧, 많기도 하군."

짧게 혀를 차며 그가 내미는 편지를 한 통씩 받았다.

"이건 남서쪽 에이크 영지에서 보내온 협조 공문입니다. 몬스터 출몰이 잦아서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는 군요."

"우리 코가 석자야. 다음."

"나르 영지에서 특산품 홍보 전단지를 보내왔습니다."

전단지를 대충 슥 훑은 뒤 와그작 구겼다.

"갖다 버려."

"다음은...."

필립의 말이 느려졌다.

나는 공 모양으로 구긴 전단지를 위아래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다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아."

필립이 뒤늦게 낮은 신음을 뱉었다. 그의 손에는 얇은 봉투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아하.'

곧바로 그 봉투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안 뜯고 뭐해?"

"아, 저, 이게...."

필립의 눈이 잠시 방황하다가, 이내 제자리를 되찾았다.

"지금 보니 잘못 온 봉투로군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곤 잽싸게 다른 봉투를 꺼내 들었다.

"다음은 수드 영지에서 개최하는 겨울 바다 여행 홍보 전단지입니다."

"줘 봐."

나는 별말 없이 필립이 내미는 다른 전단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내용을 보는 척하면서 힐끔 곁눈질로 필립을 살폈다.

"휴우."

필립이 몰래 한숨을 삼켜내는 게 보였다. 그의 주름진 뺨에 안도의 기색이 흘러내렸다.

'...하.'

속으로 쓴웃음을 삼켜냈다.

'아주 십년감수 했다는 얼굴이군.'

물론 지금이라도 그에게 명령해 봉투를 다시 가져오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열 생각도 없었고, 발신자가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미색 종이 위에 화려한 도안이 그려진 봉투에, 붉은 끈으로 꼼꼼하게 지은 매듭.

'황실에서 온 편지겠지.'

하지만 지금 저 편지를 열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편지의 수신인, 디에고 오베스트 킨드리얼.

황실에서 온 편지는 특별한 것으로, 디에고 외의 인물이 절대 펼쳐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아벨이 그런 걸 신경 쓸 위인은 아니고.'

그래서 필립이 허둥지둥 핑계를 대어가며 편지를 빼돌린 것이다. 행여나 편지의 정체를 확인한 아벨이 열어보기라도 할까 봐.

'흥, 쓸데없는 짓을.'

어차피 나는 편지의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저 매듭을 풀어내고 펼치면, 제일 먼저 상단에 큼지막한 황실의 인장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엔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쓰인 회의 일자 및 안건이 보일 것이다.

'정기 귀족 회의.'

이 편지는 일 년에 네 번, 각 영지로 날아든다. 각 영주들을 수도로 불러 모으기 위해서.

이 회의에선 각 영지의 상황을 보고하고, 그에 따른 정책을 결정한다. 제국의 실세들이 모이는 만큼 그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결정된 내용이 향후 영지 운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에고는 단 한 번도 본인이 간 적 없었지.'

그는 국경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매번 회의에 불참했다. 대신 제 소견을 적어서 직속 기사를 대리로 내보내곤 했다.

제 아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아벨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라는 이야기.'

원작의 아벨은 이런 봉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 했다.

만약 매해 4번씩이나 정기 귀족 회의가 있었고, 그때마다 아버지가 저 대신 다른 기사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진정한 패륜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

뭐, 그건 원작의 아벨 이야기니까 넘어가고.

지금의 나는 그럴 생각 따위 없었다. 이 상황에 화가 나지도, 딱히 서글프지도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할 뿐이었다.

'보자, 이번 회의가....'

지금으로부터 약 보름 뒤, 11월 1일에 개최될 것이다. 그리고 약 사흘간 진행된다.

하지만 원작에서 오베스트 영지는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레퀴엠의 등장 때문이었지.'

모든 영지민이 몰살당한 오베스트 영지의 소식이 수도까지 전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황실에서 변고를 알아차렸을 즈음, 아벨은 레퀴엠에 지배당한 채 서쪽 산맥에 진입한 뒤였다. 그는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죽여가며 서쪽 산맥을 초토화시켰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생명을 집어삼킨 아벨은 국가재난급 재앙이 되어버린다. 그런 그를 막아선 군대가 모조리 몰살당한 뒤에야, 황실은 긴급히 각 영지의 기사단을 소집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번에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지만.'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원작의 내용을 되짚었다.

"아."

그리고 명치를 두드리는 듯한 깨달음에 탄성을 흘렸다.

"카인."

이번 회의에는, 원작의 주인공인 그가 나타난다.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1)

"그만!"

중후한 남성의 외침이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크윽...."

바닥에 쓰러진 기사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그의 목에 겨누고 있던 검을 거뒀다.

"수고했어."

그는 부드러운 한 마디와 함께 짓궂게 미소 지었다.

청년의 눈동자는 진한 선홍색으로, 루비를 머금은 듯한 빛깔이 퍽 인상 깊었다.

남자답게 뚜렷한 이목구비는 몹시 준수했으며, 혈색 좋은 낯 아래 가지런한 이가 희게 빛났다.

지나가던 이가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외모의 남자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보면 수군대는 대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했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가 맥이 풀린다는 듯이 웃었다.

"카인 도련님."

그것은 그가 이 수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장자이자, 진홍의 귀공자로 유명한 카인 수드 아르단테이기 때문이다.

"봐주시는 법이 없군요."

기사의 푸념 아닌 푸념에 카인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기사는 카인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비록 대련에서 졌지만, 그의 낯에 패배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홀가분함, 그리고 도련님께 손수 지도를 받았다는 감동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이 빛나는 것은, 바로 눈앞의 도련님을 향한 진한 선망과 존경이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별말을 다 하네. 그리고 방금 대련 때 말인데."

"예, 말씀하십시오."

"그대는 움직일 방향으로 미리 몸을 트는 습관이 있어."

카인은 친절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상대하는 쪽에서 움직임을 예측하기 쉬워진단 말이야. 그러니 다음부터는...."

카인의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데도 기사는 그에게 조언을 듣는 것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카인과의 이 시간이 황금이라도 되는 듯이 굴었다.

몸은 카인 쪽으로 최대한 기울이고, 눈은 그를 향해 반짝였으며, 열성적으로 귀를 기울여 그의 가르침을 흡수하고자 애썼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대화가 끝나자, 기사는 허리를 직각으로 깍듯이 굽혔다. 그것은 권위로 찍어 눌러서가 아닌,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존경의 표현이었다.

"야, 이안 차례 끝났다."

"다음 누구냐?"

"나, 나 할래!"

"뭔 소리야. 아까 순번 정했잖아."

"그때 나 없었거든?"

주변의 기사들 사이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그들은 모두 카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그들의 얼굴은 카인의 앞에 선 기사와 별다를 게 없었다. 즉, 도련님을 향한 충정과 감탄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들 또한 카인의 열렬한 추종자였기 때문이다.

"싸우지들 말고."

카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든지 봐줄 테니까. 차례로 오면 되잖아."

카인이 오늘 대련한 기사가 벌써 다섯 명째. 그런데도 카인의 낯에는 어떤 피로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 모든 시간들이 즐겁다는 듯 환히 웃고 있었으며, 검을 움켜쥔 손은 떨림 없이 굳건하기만 했다.

"허허. 도련님은 여전하시군."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중후한 외모의 남성이 중얼거렸다.

수드 기사단의 단장 헥터.

그는 기사들이 카인에게 연이어 패배하는 데도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찬란하게 빛나는 카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잘 자란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것 참. 나날이 기대 이상이야."

카인은 타고난 근력이 좋았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키가 컸다. 거기에 검술을 습득하는 속도가 평균의 두 배 이상이었다.

그가 3살 생일 파티 때 엉금엉금 기어가 검을 움켜쥐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부터 검을 배운 그는, 결국 약관이 되지 않는 나이에 기사들을 상대로 지도 대련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련님 나이 때 디에고가 저 정돈 아니었지."

그는 젊은 시절 디에고와 함께 검술을 훈련했다. 때문에 그의 발언은 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지금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헥터가 멋지게 기른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디에고 킨드리얼이 그 직함을 내주어야 할 테지."

이는 도련님에게 푹 빠진 신하의 팔불출이 아니었다.

실제로 카인은 기사단의 빡센 훈련에 매번 성실하게 참여했다. 심지어 훈련 시간이 아닐 때도 연무장에 나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륙 최강자의 이름은 바뀔 때가 되었어."

세간에서는 곧 카인이 헥터를 넘어서서 수드 기사단의 단장이 되지 않을까 예측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전 대륙을 호령하는 최강자가 될 거라 점치는 이도 있었다.

사실상, 카인은 헥터보다 뛰어난 검사였다. 단지 헥터보다 경험이 적고, 노련함이 부족할 뿐.

헥터는 이미 그에게 진심으로 탄복 한지 오래였다. 따라서 카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제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영주님이 허락하시지 않겠지만."

헥터는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은 나!"

그렇게 기사들과 카인이 어우러진지 벌써 몇십분 째.

헥터는 보다못해 지고 있던 뒷짐을 풀고 연무장으로 내려섰다.

"이제 그만!"

그의 커다란 외침에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 단장님."

"한창 재밌는데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들의 눈에 못내 아쉬운 기색이 담겼다.

"언제까지 도련님을 귀찮게 할 생각이냐. 그만 해산하고 각자 훈련에 집중해라."

"단장."

카인이 검을 늘어뜨리며 난처한 듯 웃었다.

"난 아직 더 할 수 있어. 전혀 귀찮지도 않고. 기사들의 즐거움을 뺏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도련님."

헥터가 완고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대련하신지 벌써 몇 시간째십니다. 너무 시간을 많이 뺏기시는 듯해 죄송스럽군요."

말을 마친 그가 기사들을 쭉 훑었다. 칼날 같은 시선에 기사들이 몸을 움츠렸다.

"난 괜찮은데."

카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제 고집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도련님!"

성에서 나온 하인이 그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영주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

"아."

카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스릉.

그 동작 하나하나가 어찌나 우아하고 절도 있는지, 마치 검술 교본에 나올 것만 같았다.

특히 카인은 수려한 미모의 소유자라, 움직이는 모습 자체가 한 폭의 그림처럼 멋이 있었다.

"꺅, 도련님이다."

"하아.... 오늘도 너무 잘생기셨어."

그 증거로, 카인이 지나갈 때마다 성의 시녀들은 앓는 소리를 흘리곤 했다. 그녀들 사이에서 카인은 늘 동경의 대상이자 핑크빛 로맨스의 상대였다.

카인은 시녀들의 열띤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성으로 들어섰다.

수드 성은 몹시도 높고 화려했다. 외벽을 모조리 흰 대리석으로 장식했으며, 둥근 구 형태의 지붕은 청량한 파란색이었다.

이 성은 수드 지방의 남부 해안가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푸른 진주를 모티브로 삼았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이 건축물은 수드 지방의 자랑거리요, 한편으론 어마어마한 재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제국 금융의 절반이 수드 지방의 영주,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의 손에서 놀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카인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옆에 선 하인에게 물었다. 하인은 공손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집무실에 계십니다."

두 사람은 곧 집무실에 다다랐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드십시오."

그들의 낯에는 다른 사용인들과 마찬가지로 진한 선망이 어려 있었다.

수드 영지가 배출해낸 불세출의 천재이자 차기 영주 후보로 거론되는 진홍의 귀공자, 카인 아르단테.

신조차도 그를 부러워할 것이다. 그를 능가할 자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아버지."

카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왔느냐."

그의 아버지인 카를로 영주는 보고 있던 서신에서 눈을 뗐다. 그가 카인을 향해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보냈다.

"이쪽으로 오너라."

두 부자의 사이는 몹시 따뜻하고 또 가까웠다. 귀족 가문 중에서 이토록 부자 관계가 친밀한 사람은 드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카인의 시선이 카를로의 손끝을 스쳤다. 금박으로 장식한 종이 끝에 붉은 매듭이 달려 있는.

"혹시, 그건?"

"그래. 정기 귀족 회의가 곧 열리겠구나."

카를로가 턱을 톡톡 두드리며 들고 있던 서신을 내려놓았다.

"올해는 같이 가는 게 어떠하냐?"

"수도로요?"

"아니, 황성."

카인의 눈이 설핏 커졌다.

"그 말씀은...."

"귀족 자제들의 배움을 위한 참관인 제도가 존재하지. 해서 나는 네가 이번 회의를 참관했으면 좋겠구나."

카인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의 선홍빛 눈동자가 진하게 타올랐다.

카를로는 그런 아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가서 배울 게 많을 테지. 따라오겠느냐?"

그의 물음에 카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아버지."

❖ ❖ ❖

다음날.

"도련님. 식당으로 내려오시라는 전언입니다."

나는 아버지 디에고의 부름을 받았다.

'다 끝났나 보군.'

디에고가 성에 도착하고 얼추 몇 시간이 지났다. 그는 평소 일정대로 밀린 업무를 확인하고, 필립에게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뚜벅, 뚜벅.

식당으로 다가가던 나의 걸음이 문득 느려졌다.

쫑긋.

레퀴엠엔 귀가 없다.

하지만 녀석은 마치 귀를 쫑긋거리는 것처럼, 식당 너머로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식당 문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직 보이지 않는 존재가 보였고, 전엔 느끼지 못했던 존재가 느껴졌다.

저 문 너머에 있을, 내가 지금껏 봐 온 인간 중 가장 강한 남자가.

'디에고 킨드리얼.'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로 일컬어지는 남자. 혈혈단신으로 오베스트 영지를 일으켜 세운 뒤, 지난 30년간 서쪽 국경을 지켜온 철혈의 군주.

나의 아버지이자, 원작 공식 최강자인 그가 몇 미터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레퀴엠을 손에 넣고 나자 그의 존재감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안엔 10명이 넘는 인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흐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디에고가 뿜어내는 기운은 몹시도 선명하고 강렬했다.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을 환히 밝히는 등불 같은, 주변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감.

'기사들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만 하군.'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2)

기사들은 그를 구심점으로 뭉쳐 목숨 걸고 국경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제국은 서쪽의 광활한 영토를 몬스터에게 맥없이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 봐야 척박한 땅이긴 하지만.'

그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로써,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동부처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진 것도 아니고, 남부처럼 바다의 특산품을 채취하거나 해상 무역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북부는 비록 냉혹한 설산이긴 하지만 이는 몬스터 또한 살기 힘들다는 의미. 그래서 북부는 철광석 및 보석을 캐어 쏠쏠한 수익을 벌어들였다.

'그에 비해서, 이쪽 산맥은 그저 흉악한 몬스터만 가득하지.'

개발할 자원도, 발전시킬 기술도, 특출난 인재도 없다. 아마 제국 전역에서 서쪽 영지만큼 가난한 곳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원작에서 레퀴엠이 등장한 이후로 서쪽은 마치 죽음의 땅처럼 변해버렸다.

특히 오베스트 영지를 멸망시킨 아벨이 서쪽 산맥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제국에서는 감히 서쪽을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 카인이 등장해서 서쪽 섬멸전을 시작하게 된 거고.'

원래도 진홍의 귀공자로 유명했던 그는, 아벨을 물리침으로써 최강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전 최강자는 아벨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흐음."

나는 식당 문 앞에 도착하기 몇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이 만남도 원작에선 없었던 일이겠군.'

그 사실이 남다른 감상을 일으켰다. 원래의 운명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흡족했다.

'아주 순조롭구만.'

나는 치미는 웃음을 삼키며 식당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문을 열었다.

저벅.

식당 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디에고와 눈이 마주쳤다.

"아벨?"

순간, 디에고의 푸른 눈동자가 거칠게 확장했다.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나를 담았다.

'...뭐지?'

지금껏 디에고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영주의 급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하인들도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그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내게 날아들었다.

덩달아 당황한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혹시 뭔 문제라도 있나?'

슬쩍 몸 아래쪽을 살폈지만 눈에 띄는 이상은 없었다. 그러니까 머리카락이나 눈 색이 변했다던가, 몸 밖으로 검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옷차림도 멀쩡한데.'

나는 문가에 서 있던 하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야."

"예, 도련님."

하인이 황급히 몸을 수그렸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떠냐?"

내 질문에 하인이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겨우 훑은 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당당하고 잘생긴 모습이십니다."

"나도 알아."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뒤 다시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놀라움과 경악이 가신 눈은, 불신과 분노를 담고 요동치고 있었다.

"너...."

노기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입을 뗀 것도 잠시, 디에고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입을 멈추었다.

그가 입술을 사려 물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눈을 질끈 감았다.

"...."

심적 동요를 억누르는 듯한 적막한 시간이 이어졌다.

'아니, 뭔데?'

못볼 꼴을 봤다는 저 표정은 도대체.

이윽고 디에고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끓어오르기 직전의 용암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길 잠시,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디에고였다. 그가 곁에 서 있던 막스에게 손짓했다.

"음식을 내오게."

"예, 예에."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막스가 수레를 밀고 다가왔다.

"...."

디에고는 식전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식탁만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차갑게 가라앉은 호수 같았다. 내게 자리에 앉으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이군.'

나는 콧방귀를 뀌며 걸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막스가 샐러드 접시부터 내려놓기 시작했다.

"오늘은 신선한 토마토에 아보카도를 곁들인 농장식 샐러드를 준비했습니다."

막스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던 디에고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막스."

"예, 영주님."

"살이 좀 빠진 겐가?"

"아...."

막스가 흠칫하며 내 쪽을 바라보려고 했지만,

'쯧.'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의 눈알은 광속과 같은 속도로 다시 되돌아갔다.

"예, 저, 그게."

막스는 본능적으로, 지금까지의 일을 감히 영주에게 떠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 그게 요새 좀. 관리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있으니,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랬나?"

디에고가 빙그레 웃었다.

"잘 생각했네. 건강은 잃고 난 후에 후회해 봐야 늦은 법이지."

제 아들, 아벨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기꺼운 미소였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내 앞에 놓이는 샐러드 접시를 바라보았다.

"수고했네."

그의 한 마디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

두 부자 관계는 여전히 냉랭했고,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하인들이 오가며 나는 미세한 소음만이 잔잔히 들려올 뿐.

'여전하군.'

나는 포크로 토마토를 콕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맞은 편의 디에고를 힐끔 보았다.

디에고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음식에만 집중했다.

그의 눈매는 한겨울 서릿발처럼 매서웠고, 다물어진 입가는 단단한 바위처럼 억세 보였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토마토를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진한 조소를 머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을.'

원작에서 이 시점의 디에고는 저런 평온한 얼굴을 하지 못했다.

'아벨. 네가, 어떻게!'

그가 영지에 돌아왔을 때 아벨은 이미 죽음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오베스트 영지의 모든 생명이 한 줌의 재가 된 뒤였다.

'아버지, 오셨어요?'

새카만 공허의 검을 든 채, 아벨은 잔혹하게 웃었다.

그때 원작은 디에고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그 조각들은 결코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다고 묘사했다.

결국, 디에고는 곧 아벨의 손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벨.'

그는 끝내 제 아들을 베지 못했다. 제국의 서쪽 영지를 호령하던 위대한 영주는 초라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지금 누구 덕분에 이 자리에 멀쩡히 앉아있는 줄도 모르고.'

뭐, 그에게 알리기 위해서 한 짓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딱히 디에고의 애정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냉대하는 꼴을 보니 괜히 심통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흥.'

어차피 입맛도 없었다. 나는 대충 음식을 해치우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후식."

툭 내뱉자 곁에 머물던 하인이 다가왔다.

"더 안 드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는 식당에서 주로 상주하는 하인으로, '평소'의 내가 어느 정도로 먹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굴 세 그릇씩 처먹는 돼지로 알아? 이 만큼 먹었으면 됐지."

순간 식당의 하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내가 알던 후식의 의미가 달라졌나?'

'원래 다섯 그릇씩 드시던 분 아니었어?'

'혹시 음식이 맛이 없으셨던 게 아닐까?'

그들의 눈빛이 다채롭게 변화했다.

"???"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막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나의 무지막지한 식욕에 혹사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건 디에고의 앞에서까지 그렇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배가 그렇게 고프지도 않았고.

접시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퉁명스레 말했다.

"후식이나 내와."

"...예, 도련님."

하인은 잠시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벅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다른 하인들도 서둘러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내 앞에 즐겨 먹는 셔벗이 놓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디에고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는 내 쪽엔 눈길도 주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이대로 넘어가려나?'

나 또한 그를 무시한 채 느긋하게 셔벗을 입에 넣었다. 내가 셔벗을 거의 먹어갈 때쯤, 디에고도 입을 닦으며 물러섰다.

"식후 와인을 내오게."

"예, 영주님."

디에고의 앞에 빈 와인잔이 놓였을 때쯤, 나는 후식을 모조리 해치웠다.

그만 일어날 생각으로 의자를 드르륵 민 순간,

"아벨."

디에고의 묵직한 음성이 나를 멈춰 세웠다.

"-!"

막 접시를 집어 들던 하인이 몸을 휘청거렸다. 그는 물론이고 막 와인을 따르려던 막스도 삐끗해서 하마터면 와인을 흘릴뻔했다.

그만큼, 이것은 전례 없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식사 중 디에고가 아벨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무슨 일이지?'

나는 다리에 힘을 주던 것을 멈추고 대답했다.

"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

막스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 바람에 따르던 와인이 잔을 비껴가 식탁에 엎질러지고 말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막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식탁을 닦아냈다. 마저 와인을 따라낸 뒤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곧 닥쳐올 재난을 피하고 싶다는 듯 다급한 모양새였다.

"...."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디에고를 응시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디에고의 뒤쪽 벽에 서 있는 필립을 흘낏 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평소대로 보고했나 본데.'

뭣 때문에 저러는 거지? 내가 처음 식당에 들어왔을 때도 그렇고.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 왜 궁금해 하십니까?"

디에고는 내 불손한 말투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동안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대꾸가 돌아왔다.

나는 그 아래 깔린 잔잔하게 내리깔린 노여움을 읽어냈다. 순순히 말하면, 그래도 봐주겠다는 암시가 담긴.

'뭘 알고 있는 거지?'

나는 필립이 그에게 올렸을 보고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손가락을 꼽아가며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밥 먹고,"

조리장 살이 빠질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지만.

"잠 자고."

그 장소가 집이 아니라 마그나 모르텐이었지만.

"잘 놀았죠."

열 명이 넘는 인간의 목을 뎅강뎅강 썰어가면서.

말을 마친 나는 의자에 느슨히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팔짱을 꼈다.

"그게 답니다."

"...."

디에고의 눈빛이 한층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원래 서릿발과 같았던 그것이 이젠 휘몰아치는 눈보라 같았다.

"정말 그뿐이냐? 더 할 말이 없어?"

디에고가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필립한테 들으셨으면서,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러니 그만 빙빙 돌리고 하고 싶은 말이나 해.

뒷말까지 하진 않았지만, 나는 찌푸린 얼굴로 이 내용을 똑똑히 전달했다.

"...."

디에고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킨 뒤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

이제 식당은 완전히 고요했다. 디에고의 목으로 와인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모든 하인들이 숨을 죽인 채 나와 디에고의 신경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엔, 기어이 이 식당에서까지 고성이 울려 퍼지고 식탁이 뒤엎어지겠구나, 하는 불길한 상상이 이어지고 있을 터였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다들, 나가라."

디에고가 차가운 음성이 침묵을 깼다.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3)

영주의 명령이 내려지자 필립을 비롯하여 모든 하인들이 몸을 바로 세웠다. 그들은 지체없이 곧장 식당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식당엔 나와 디에고만이 남게 되었다.

"아벨."

디에고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바닥에 내리깔렸다. 나는 그에 비해 가볍기 그지없는,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가 무엇을 묻든 간에, 대답은 준비되어 있었다. 필립이 인지하고 있는 내 행동 범위 내에서라면.

그러나 디에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리암 슈미트."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였다.

"그에게 검을 배웠더구나."

"...."

나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 알았지?'

겉으론 태연한 얼굴을 한 채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누군가 나와 리암이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고, 디에고에게 일러바친 게 분명했다.

'그럴 놈이라면....'

역시, 피에르인가.

결론이 내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걸 가까이서 봤을 리 없어.'

그 정도의 거리만큼 다가왔는데 내가, 혹은 리암이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 그런 것치곤....'

디에고의 음성에 너무나 강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는 내가 리암과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더 생각을 이어나갈 틈이 없었다.

"하!"

디에고가 잇새로 비릿한 웃음을 흘렸기 때문에.

"발뺌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구나."

"...."

"보란 듯이 기운을 사방팔방으로 흩뿌리는 것을 보니."

아, 그거.

'왠지 그거일 것 같긴 했는데.'

필립이나 리암이 어렴풋이 눈치챈 것을 디에고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그 정도 되는 일류검사라면 눈치채는 게 당연했다.

세계 최강급의 검을 손에 넣었는데, 기운이 예전과 같을 리 없는 것이다.

'억누른다고 억눌렀는데 잘 안됐나.'

지금의 나는 타인의 기운을 잡아내는 것엔 능했지만, 반대로 나를 감추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다.

어쨌건, 이제 모르는 일이라 잡아떼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요?"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비릿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네 이놈!"

디에고가 식탁에 와인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쨍그랑!

얇은 유리로 이루어진 와인잔은 그것만으로 맥없이 부서져 버렸다.

"왜 네가 검을 쥐는 것을 금지했는지 잊었느냐?"

디에고의 낯에 폭풍과도 같은 분노가 휘몰아쳤다. 나는 그 폭풍에도 굴하지 않는 나그네처럼 태연히 웃었다.

"모르겠는데요."

사실 안다. 그건 원작에서 지겹도록 언급된 내용 중 하나였으니까.

디에고의 뺨이 분노로 미세하게 씰룩였다.

"5살 때의 일이라 잊었다는 것이냐?"

5살, 아벨이 처음으로 동물을 때려죽인 나이었다.

'이렇게 해도 날 수 있을까?'

아벨은 해맑게 웃으며 한쪽 날개가 꺾인 매를 하늘로 던졌다. 비틀거리던 매가 날아오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자, '저런. 노력이 부족하네.'

라고 낄낄거리며 반대쪽 날개도 꺾어버렸다. 매는 끝내 날지 못하고 바닥을 기어야 했다.

'쓸모없어, 너.'

아벨은 닥치는 대로 돌을 던져 매의 머리통을 깨부수었고, 쓰러진 매의 몸 이곳저곳을 돌로 짓이겨 완전히 고깃덩이로 다져버렸다.

매의 사체를 본 디에고는 극도로 분노함과 동시에, 아벨의 범상치 않은 잔혹성을 깨달았다.

"그 불쌍한 매의 시체가, 아직도 내 눈앞에 선한데!"

디에고가 씹어뱉듯이 외쳤다. 식당에 둘밖에 없으니 남의 시선 따윈 거리낌 없는 듯한 태도였다.

'아무렴, 그것 뿐일까.'

나는 시큰둥한 표정이 얼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했다.

그 이후로 이어진 아벨의 악행은 말하기엔 입이 아플 지경이었으니까.

출산이 임박해 배가 잔뜩 부른 암캐를 죽이고, 그 새끼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별일 아닌 것으로 하인들 괴롭혀서, 끝내는 직속 하인이 사라지게 만들기 등등.

"남의 피를 손에 묻히는 것을, 밥 먹는 것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네가."

디에고가 거칠어진 숨을 삼켰다.

"그런 네가, 감히 검을 배우겠다고?"

그의 눈동자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잠잠히 가라앉았던 용암은 이제 마그마가 되어 분출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에 선하구나! 그저 힘에 취해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거리낌 없이 타인의 피를 손에 묻히겠지!"

그거라면 이미 하고 있는데.

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그런 생각을 했다.

"검을 손에 쥐는 자는 누구보다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생명의 무거움을 알고, 언제나 엄숙한 태도로 임해야 하거늘!"

"...."

"그러니 어찌 네게 검을 허락하겠느냐!"

마지막으로 토해내듯 분을 표출한 디에고가 후,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 검을 버려라."

그가 말하는 것은 내 수중에 들어온 레퀴엠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지금껏 배운 검술을 잊고, 다시는 검을 손에 쥐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의미 또한, 내가 따를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다.

"싫다면요?"

나는 픽 웃었다.

"제가 왜 아버지 말을 따라야 합니까?"

"이놈이 정말!"

벼락과도 같은 노성이 내리꽂혔다.

"검을 좀 배웠다고,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냐!"

그가 거칠게 의자를 밀어젖히며 일어섰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네가 검을 배우면 이리 방만해질줄 알고 있었단 말이다!"

디에고의 손은 이미 허리춤에 올라가 있었다.

팟!

그가 검집 채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장 나를 향해 돌진했다.

'이런 미친!'

나는 기겁해서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디에고의 검이 이미 내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젠장, 너무 빨라!'

급한 대로 식탁 아래쪽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와장창!

놓여 있던 식기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흠."

디에고는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겨우 시간을 번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기로 쓸만한 게,'

깨어진 접시와 식기로 엉망이 된 바닥. 거기 아까 사용했던 나이프가 보였다.

'저건 안돼.'

저 자그마한 식기로 디에고의 묵직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한 번 부딪히는 순간 부스러지고 말겠지.

'레퀴엠도 안돼.'

건틀릿을 끼지 않았을뿐더러, 그것을 꺼냈다간 디에고의 눈이 뒤집힐 것이다.

"밥상을 엎다니, 버릇이 아주 고약하구나."

그사이 디에고가 느긋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태도와는 달리, 그의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번들거렸다.

'아니, 이미 뒤집혀 있나?'

암만 속을 긁었다지만 저렇게까지 하다니. 레퀴엠의 흉흉한 기운을 흩뿌리는 나를 보고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쐐액!

디에고가 검을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큭!"

나는 거의 구르다시피 해서 그의 검을 피했다.

단순히 검을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검격 하나가 어찌나 강력한지, 마치 공기를 찢어발기는 것만 같았다.

'스치기만 해도, 골절이다.'

검집에서 빼지 않은 검이 저 정도인데, 만약 검을 꺼내기라도 한다면....

'어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일 생각은 아닌 모양이군.'

어쨌건 계속 이렇게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화를 시도해봤자 소용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디에고는 내 팔을 분질러서라도 내 의지를 꺾을 기세였으니까.

'그냥 알겠다고 대충 둘러댈 걸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하는 것뿐이다.

상대는 제국 최강의 검사로 불리는 자다. 얄팍한 거짓말은 금방 실체를 들키고 만다.

'타인의 기운을 눈으로 읽어내는 경지니까.'

결국 그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은, 결국 내가 직면해야 될 것이기도 했다.

"아벨!"

디에고의 검이 다시 매서운 기세로 내게 휘둘러졌다. 나는 허리를 극도로 낮춰 그것을 피한 뒤, 옆으로 몸을 날렸다.

'젠장, 뭐라도 무기를...!'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이 한 곳에 멈추었다.

'저거다!'

유서 깊은 오베스트 성 곳곳에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벽에 검을 걸어두는 풍습이 있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국경의 몬스터가 쏟아져 들어올 경우, 이 검을 들고 나아가 맞서 싸울 것.

혹은 국경이 무너졌을 때, 더는 희망이 없으니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할 것.

'지금 아니면 언제 쓰겠냐!'

벽에 걸려 있던 검을 잡아챘다. 그리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맛이 영 별론데.'

객관적으로 봤을 땐 좋은 검이었지만, 레퀴엠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어. 적응하는 수밖에.'

당장 지금이 아니더라도, 아벨로 활동하는 동안엔 레퀴엠을 쓸 수 없으니까.

"...후우."

나는 검이 힘에 겹다는 듯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실은 가볍게 한 손으로 들 수 있으면서도.

'내 전력을 노출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양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며 몸에 익힌 자세를 잡았다. 본격적으로 맞설 준비를 한 것이다.

"...."

디에고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세는 나쁘지 않군."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다른 손으로 검집을 움켜쥐었다.

스릉!

그의 애검, 에보니가 청명히 울며 뽑혀 나왔다. 참고로 에보니는 아벨의 어머니이자, 디에고의 부인의 이름이다.

제 아내의 이름을 검에 붙이는 애처가, 디에고가 엄한 어조로 말했다.

"감히 아비에게 검을 겨누다니, 네 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저기, 아들한테 먼저 검을 들이민 건 그쪽 아닌지?

그렇게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뚜벅, 뚜벅.

디에고가 걸음을 옮겨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식당은 기본적으로 폭이 좁고 너비가 긴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도 충분한 공간이 나왔다.

밥 먹고 소화를 위한 대련을 하라고 이리 만들어두었나, 싶을 정도로 쓸데없이 넓긴 했다.

"오너라."

디에고가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가 감히 검을 쥘 그릇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마."

"아, 예."

일이 틀어진 마당에 저런 말을 반복해서 듣자 짜증이 치솟았다. 무엇보다, 그의 앞에서 위축되려고 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나는 그의 화를 돋울 겸, 그리고 나 자신을 포장할 겸 여유로운 음색으로 대꾸했다.

"아버지가 제게 주시는 첫 가르침이 되겠네요."

그간 아벨을 성에 방치했던, 그리고 늘 국경에서 싸우느라 바빴던 디에고를 비꼬는 한 마디였다.

"...."

디에고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스팟!

다음 순간, 그가 말도 없이 지면을 박차고 내게 덤벼들었다. 친절하게 공격하겠노라 예고해주던 리암과는 다른 시작이었다.

'날 조지고 싶어 안달이 났군.'

나는 냉소를 베어 물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검을 손에 쥐자 아까보단 비교적 심경이 차분해졌다.

'오른쪽으로 온다!'

리암과 비교했을 때 훨씬 빠르긴 했지만, 어쨌건 디에고의 움직임이 보이긴 했다.

'막을 수 있....'

나는 눈을 부릅떴다.

분명히 검이 날아오는 궤적이 보이고, 그게 내 몸 어디에 닿을지도 보였다. 그러니 검을 뻗어 막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묘하지만, 본능적으로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설마?'

다음 순간, 검이 믿을 수 없는 각도로 휘어졌다.

깡!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어발겼다.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4)

"윽!"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막아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방어에 가까웠다. 리암의 검을 막던 것처럼 모든 것을 꿰뚫고 예상하여 해낸 일이 아니었다.

"-!"

내가 정말 막아낼 줄은 몰랐는지 디에고의 눈에 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그가 즉시 검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제법이구나."

짧은 한마디에 속이 뒤틀렸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리암과 같은 검술이지만,'

다르다. 분명히 달랐다.

디에고의 움직임은 리암보다도 훨신 정교하고, 훨씬 안정적이었으며, 훨씬 묵직했다.

몬스터들은 검사들의 대련처럼 약속된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빈틈을 찾아 후벼 파고, 결코 봐주는 일 없이 상대를 몰아붙인다.

그런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디에고는 정석적인 검술에만 의존해서는 이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베스트 검술은 변칙적이고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곰 같은 움직임에 뱀과 같은 교활함, 여우와 같은 노련함이 더해진 검술.'

세간에서는 오베스트 검술을 이렇게 불렀다.

그리고 리암이 내게 가르쳐준 것, 그것의 절반의 절반도 안되는 양이었다.

'망했다.'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못 이겨.'

도저히 각이 안 나왔다.

디에고와 단 한 번 검을 맞대었을 뿐인데도 알 수 있었다.

'육체적인 조건은 비슷한데.'

그에겐 내겐 없는 풍부한 경험과 노련한 기술이 있었다. 고작 몇 주간 훈련한 것으론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차이였다.

'애초에 나랑 신체 능력이 비슷한 것도 말이 안 돼.'

훨씬 젊은 나이에 레퀴엠을 쥔 나와, 아버지뻘 되는 남자의 수준이 비슷하다니.

타고난 재능, 그 위에 얹어진 뼈를 깎는 노력과 피를 토하는 절실함 덕분일 터.

'정말이지 괴물 같은 아저씨군.'

과연 세계관 최강자.

20대의 나이부터 극한지에 내던져져,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온 경험은 녹록지 않았다.

만약 아벨이 아닌 디에고가 레퀴엠을 쥐었다면, 그리고 그가 레퀴엠에게 지배당했다면?

'그땐 제국이 멸망했겠지.'

이는 원작의 주인공 카인이 등장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재앙임에 분명했다.

아니, 이미 재앙은 내 눈앞에 닥쳐와 있었다.

디에고의 검이 벼락처럼 내게 꽂혀 들었다.

텅!

죽기 살기로 막아내자 둔탁한 소리가 흩어졌다.

"크윽."

나는 이를 악물며 힐트를 꽉 쥐었다.

'근력으론 지지 않는다고!'

서로 맞댄 부분에 힘을 주어 검을 아래로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고 했다.

"-?!"

분명 검은 무생물이다. 지금껏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디에고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더니 그대로 솟구쳐 올라왔다.

"욱!"

황급히 검을 떼고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뱀의 이빨에 물리지 않으려면.

'와, X발.'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디에고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직도 포기할 마음이 안 생기느냐?"

공격이 점점 혹독해질 것을 암시하는 말투였다.

'젠장. 이를 어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디에고와의 대결을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냉정히 결론 지었다.

'이길 수는 없지만, 죽일 수는 있다.'

레퀴엠을 꺼내 들고 죽기살기로 덤벼든다면 가능했다. 잔상처를 통해 착실히 생기를 깎아내면 결국엔 죽음에 이를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죽일 순 없지.'

영주의 자리에 오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 오베스트 영지를 다스리는 자는 목숨 걸고 국경에 나아가 그곳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디에고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서, 열심히 오베스트 영지를 다스려줘야 했다.

'그렇다면....'

디에고의 전신을 찬찬히 훑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

어차피 패배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모조리 챙겨야 했다.

바로 지금, 오베스트 검술의 창시자가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이건 못 참지.'

나는 혀를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디에고에게서 배운다면, 리암에게 배우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 물론 당사자는 가르칠 생각이 없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강제로 배움을 얻는 게 가능했다.

디에고와 예기치 못하게 맞붙게 된 지금,

'최대한 다 빨아먹는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느른한 미소를 잇새로 감추며 자세를 바로 했다.

'좋았어.'

그에게 내 실력을 과하게 드러낼 필요도, 과하게 위축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의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게, 약간의 빈틈만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다.

"가르침은 그게 끝입니까?"

그리고 나는, 이런 류의 도발에는 아주 도가 튼 사람이었다.

"이놈이!"

디에고가 일갈하며 몸을 날렸다.

쐐액!

날카로우면서 묵직한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손을 내밀어 눈앞으로 쇄도하는 검을 막아냈다.

깡!

단순히 검과 검이 부딪혔다기엔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디에고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는 뜻이었다.

"끝까지 해 보자는 거냐?"

맞댄 검 너머로 디에고의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성난 파도 같은 음성과는 다르게, 잔잔한 강물처럼, 아니 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은 눈빛이었다.

디에고는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럴수록, 내 가슴 속에선 그를 자극하고 싶은 마음이 몸집을 키웠다.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먼저 일을 벌이셨잖습니까."

"...."

"그러니 마무리도 지으셔야죠."

"...하!"

디에고의 잇새로 기가 막힌다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얼어있던 그의 눈동자가 퍼석 깨져나가는 동시에, 깡! 카강!

"큭."

날카로운 공격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그토록 분노했음에도, 그의 감정이 공격에 실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극도로 벼려진, 치명적인 검날만이 날아들 뿐.

'봐주는 일이 없네, 진짜.'

나는 이를 악물며 그의 공격을 막거나, 흘려내기 위해 애썼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곤란하긴 매한가지였다.

전자는 팔뚝이 부들부들 떨려 오래 버티기 힘들었고, 후자는 흘려내는 즉시 검이 영활하게 내 팔을 거슬러 올라왔다.

'젠장.'

이 상황은 단순히 근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놈의 검술이....'

온갖 몬스터들의 머리통을 양단하고, 완전히 숨통을 끊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검술.

어떤 덩치를 가졌건, 어떤 형태를 가졌건, 어떤 재질을 가지고 있던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숨쉴 틈도, 잠시 호흡을 고를 틈조차 내어주지 않는 악랄한 검술이었다.

저절로 호흡이 가빠지고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람을 몬스터 취급하는군!'

나는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 디에고의 검을 뗴어냈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 의도였지만,

"어딜!"

디에고는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득달같이 내게 따라붙었다.

쇄애액!

디에고의 검이 집요하게 내 팔뚝을 노렸다.

이게 어딜 봐서 아들을 훈육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야? 길에서 만난 몬스터도 이렇게 혹독하게 대하지 않겠다.

'지독하네, 정말.'

입술을 씰룩이며 그에게 맞섰다.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의 움직임과 검술은 착실하게 머릿속에 입력되고 있었다.

나중에 이걸 복기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을 하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더 많이 보여주라고.'

나는 미소를 감추지도 않고 호기롭게 내뱉었다.

"아직 가르침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여유를 가장한 것이기도 했지만,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꿈틀, 꿈틀.

한동안 잠잠했던 레퀴엠이 다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지금껏 상대했던 잔챙이들과는 급이 다른 강자가 눈앞에 있는 탓이었다.

생생하게 맥동하는 디에고의 심장, 힘차게 꿈틀거리는 근육, 활기차게 전신을 순환하는 피가, 군침이 도는 향긋한 냄새를 풍겨댔다.

지금껏 맛보지 못한 천하제일의 맛일 거라고, 레퀴엠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응, 아니야.'

나는 딱 잘라 내뱉었다. 레퀴엠이 궁시렁거리며 혀를 날름거렸지만 깨끗하게 무시했다.

'닥치고 얌전히 있어. 그동안 네가 처먹은 사람이 몇 명인데.'

오늘은, 아니 당분간은 살인을 저지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번 피 맛을 본 레퀴엠이 자꾸만 할딱거리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깡!

디에고의 검을 막아낼 때나,

"이크."

디에고의 검을 피해 몸을 구를 때나,

콱!

디에고의 검이 서슬 퍼렇게 벽에 내리꽂힐 때도.

레퀴엠은 쉴새 없이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속살거렸다. 그야말로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과 같은 상황에, 나는 진절머리를 내며 내뱉었다.

"좀 닥쳐."

그리고 아차했다. 디에고가 나를 향해 험악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아니라고 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긍정하자니 디에고를 너무 자극하는 것 같았다.

'이미 지금도 숨차 죽겠는데.'

나는 대답을 보류하며 디에고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디에고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디에고가 다시 눈을 떴다.

"...."

그와 시선을 마주한 나는 직감했다.

'X됐다.'

지금껏 디에고가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최소 살의를 품지는 않았다면.

"...."

지금 디에고의 얼굴은 감정을 도려낸 듯이 무표정했다. 나를 향하는 시선이 저와 전혀 관계없는 사물을 보듯 무기질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눈앞의 상대를 응징하는 데만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다.

'저 표정은....'

나는 아찔한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 표정은, 레퀴엠을 든 채 선득하게 웃는 아벨을 처치하기 직전, 디에고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표정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목숨을 내던져 저놈과 함께 나락으로 가겠다는 다짐이 담긴.

'그걸 왜 여기서 짓는데!'

나는 홀로 절규했다. 뒤늦게 레퀴엠을 다그쳐봤지만 이미 늦었다.

"...."

스멀, 스멀.

밀려드는 싸늘한 살기가 등골을 자극하고, 피부의 솜털들을 일어나게 했다.

저벅.

한 걸음을 내딛는 기세조차 달라졌다. 완벽하게 절제된, 오로지 상대방을 제압하는 데만 몰두한 움직임.

체스에서 신의 한수라고 불리는 움직임이 저러할까. 단 한 걸음만으로, 디에고는 도피로를 차단하고 나를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었다.

'지금이라도 레퀴엠을 꺼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디에고의 살기가 발밑을 축축하게 적셨다. 차가운 호수 속으로 서서히 잠겨드는 듯한 감각이 치밀어 올랐다.

"...후우."

디에고의 살기가 짙어질수록, 형체가 명확해질수록,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살기에 짓눌려서가 아니었다. 저보다 짙고, 깊으며, 광활한 공허를 맛본 내가 이 정도에 겁먹을 리 없었다.

내가 숨이 가쁜 이유는,

'진정해. 진정하라고.'

상대의 살기를 인지한 레퀴엠이 으르렁대는 탓이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오감이 예민해져, 디에고가 내뱉는 숨결 한올 한올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레퀴엠을 뽑아 들고 상대의 살기를 꺼뜨리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솟았다.

'...아니야.'

나는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5)

손바닥에 닿는 검의 차가운 감촉을 다시 되새겼다.

'지금은 건틀릿도 없잖아.'

지금은 아니다. 레퀴엠을 꺼낼 수 있는 상황도, 꺼내야 할 상황도 아니다.

"...."

거칠어졌던 호흡이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악-

디에고의 검이 휘둘러졌다. 그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전율했다.

'완벽하다.'

더없이 깨끗하고, 명정한 한 수. 그것은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지금의 내가 따라할 수 있을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미래에 과연 흉내낼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그런 공격.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검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외치는 레퀴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치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레퀴엠을 꺼내지 않는 데 성공했다.

땅!

디에고의 검이 명쾌한 소리와 함께 내 손목을 때렸다.

"크윽!"

억눌린 신음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목이 기괴한 각도로 비틀려 더이상 검을 쥘 수가 없었다.

캉, 쨍그랑.

손에서 놓친 검이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큿."

부러진 손목을 붙잡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 나를 응시하는 디에고의 시선은 여전히 무감정했다.

"앞으로 검을 쥘 생각 따윈, 버리도록 해라."

머리 위에서 툭 떨어지는 한 마디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검이 천천히 내 다리를 겨냥했다.

'X발, 설마?'

치를 떨며 디에고의 검 끝을 바라보았다.

'다리까지 부러뜨릴 셈인가?'

디에고의 냉혹한 눈빛이 그런 계획을 그리고 있었다.

"...."

그러나 그 검이 힘차게 내 발목을 내려찍는 일은 없었다.

디에고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다리는 봐 주마. 네 시중을 들 하인들을 위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저절로 이가 갈렸다.

나는 씹어뱉듯 대꾸했다.

"감사하다고 말해야 합니까?"

디에고는 내 시건방진 말투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차분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을 뿐이었다.

"두고 보겠다."

절그럭.

디에고가 내 손에서 벗어난 검을 주워들었다.

"다음에 보았을 때도 네가 이대로라면...,"

그는 검을 다시 벽에 걸고는 식당 문으로 다가섰다.

"그땐 다른 팔이 부러지겠지."

말을 마친 그가 식당 문을 열었다.

"여, 영주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의사를 부르도록."

디에고는 짧은 한 마디를 남긴 뒤 식당을 떠났다.

❖ ❖ ❖

"서둘러! 빨리!"

"네, 나가요!"

식당의 하인, 핀은 이마의 땀을 훔칠 새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뛰었다.

식당 입구에 도착한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낌없이 기름칠을 한 문은 소음 없이 몸을 젖혔다.

"...,"

식당 안은 적막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과한 고요함이었다.

그러나 식당에는 하인 여럿을 비롯해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영주인 디에고가 없는 지금, 폭군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아벨 킨드리얼이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막스 조리장이 손을 휘저었다.

'빨리 와!'

막스의 입 모양을 읽어낸 핀은 얼른 수레를 그쪽으로 밀고 갔다. 최대한 바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다음 순간,

"...."

아벨이 고개를 들어 핀을 응시했다.

'힉!'

핀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 멈추었다.

아벨의 눈이 수레를 향해 번득였다가, 다시 식탁 위로 되돌아갔다.

'괘... 괜찮은 건가?'

그것만으로도 핀은 가슴이 벌렁거려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막스가 마구 손짓하자 다시 걸음을 옮겼다.

'휴우....'

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식탁 옆으로 다가갔다.

아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프 접시를 집어 들고 있었다. 핀은 아벨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휴, 심장 떨려.'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낯이, 심사가 비틀렸을 땐 몹시도 흉포하게 일그러진다.

이 성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

핀은 제가 서 있는 바닥의 옆이 움푹 파인 것을 발견했다. 이는 어제, 아벨과 디에고가 크게 다툼을 벌인 흔적이었다.

'부자간에 무슨 검까지 겨눠가면서 다투는지.'

핀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도 그날 그 처참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장본인이었다. 뒤집힌 식탁, 전부 깨진 식기에, 음식으로 엉망이 된 카펫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총체적 난국이었다. 막스 조리장이 아끼던 접시 조각을 붙들고 눈물을 훔치는 것으로 그날의 재난은 끝이 났다.

"...."

핀은 회상을 마치곤 소리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혼탁한 기운이 이 식당 전체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 근원지는 식당 중앙에 앉은 아벨이었다.

탁.

아벨이 다 마신 수프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의 오른팔엔 부목을 댄 채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바로 며칠 전 디에고 영주가 그에게 내린 호된 가르침의 결과였다.

그래서 그는 수프를 접시째 들고 마셔야 했다. 잘 사용하지 않는 왼손으로 스푼을 쥐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의 수프 접시는 여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바닥을 보였다.

"다음."

낮게 도사린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막스가 얼른 수레에서 접시를 들어 옮겼다. 그가 접시 뚜껑을 들어 올리며 설명을 곁들였다.

"포도주로 조리한 돼지 혀입니다. 아주 부드럽고 풍미가 가득한 별미지요."

접시에 놓인 돼지 혀는 본디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포도주 특유의 빛깔로 물들었으며, 바삭하게 구워 낸 겉껍질이 몹시 먹음직스러웠다.

돼지고기 특유의 노린내를 완벽히 잡아낸 덕에, 접시에서는 포도주의 달콤한 끝향 밖에 감돌지 않았다.

아벨은 음식의 놀라운 자태와 막스의 설명에도 퍽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잘라."

그가 딱 한 마디를 뱉었다.

"예?"

두 손을 비비며 치하를 기다리고 있던 막스가 되물었다. 아벨이 왼손으로 턱을 받치곤 오른손을 슥 들어 올렸다.

"그럼, 내가 잘라?"

붕대로 친친 감겨 있는 오른손이 딸랑, 흔들렸다. 막스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얼른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고 아벨에게 다가갔다.

"소란 떨지 말고."

아벨이 낮은 음성으로 흘리듯이 한 말에, 막스가 눈알을 데굴 굴렸다.

"어...."

지금 아벨은 막스에게 귀족의 예법에 맞는 식사 예절을 요구하고 있었다.

"예, 예에. 알겠습니다."

막스는 긴장 어린 얼굴로 대답하고는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다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탓에 속도가 무척 더뎠다.

"아직 멀었어?"

"거의 다 됐습니다."

아벨의 재촉에 막스의 이마에 쏟아지는 땀이 많아졌다.

"아직?"

"고기 다 식겠군."

"나이프가 그리 무딘가?"

아벨은 막스가 칼질을 한번 할 때마다 그를 갈궈댔다. 덕분에 고기를 다 썰었을 즈음, 막스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도련님."

"그래."

아벨은 막스가 한 입 크기로 썰어준 고기를 냉큼 집어 먹었다. 막스는 그 옆에서 연신 이마를 훔쳐냈다.

맹세컨대, 그가 음식을 자르면서 이만큼 긴장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아벨은 접시를 다 비울 때쯤 다른 접시를 손으로 가리켰다.

"다음은 저거."

"예, 알겠습니다!"

막스는 그렇게 충실히, 평소와는 다른 음식 시중을 들었다. 그가 처리해야 할 접시의 양은 몹시도 많았다.

"다음, 다음, 다음."

아벨의 식욕이 돌아왔는지, 그가 '평소'처럼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엄청난 양을 위장에 쏟아부었다.

"쯧."

그러고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빈 접시를 보며 못마땅한 한숨을 흘렸다.

아벨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말이 없어졌다.

"더 가져올까요?"

막스가 그런 아벨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행여나 아벨이 제 음식에 불만족했을까봐 두려운 눈치였다.

"아니, 이제 그만."

아벨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필립에게 명령했다.

"목욕이 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핀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목욕 시중드는 애들 죽어나겠네.'

음식 먹는 것도 저리 까다롭게 구는데, 목욕을 하다가 실수로 생채기라도 내는 날엔....

아마 그 하인은 당장 죽은 목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 나가."

핀의 염려와는 다르게, 아벨은 욕조 앞에 서서 그렇게 명령했다.

"예?"

필립은 몇몇 하인들과 서 있다가 아연한 얼굴을 했다.

"혼자 목욕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아니, 그...."

필립은 몹시 염려스러운 얼굴로 아벨의 오른팔을 살폈다. 붕대가 친칭 감긴 팔은 부목을 댄 채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한쪽 팔로는 씻기 어려우실 겁니다. 번거로우시다면 제가 직접 시중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필립의 달래는 듯한 권유에,

"됐다고."

아벨은 뒤로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쏘아보았다. 청보랏빛 눈동자가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흉흉하게 빛났다.

"...알겠습니다."

필립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물러났다.

애초에 그가 목욕 시중을 들겠다고 한 것은, 팔의 불편함으로 인해 아벨이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필립이 하인들을 이끌고 방 밖으로 사라졌다.

❖ ❖ ❖

쿵.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후우."

짜증스러운 한숨이 김 가득한 욕조 위로 흩어졌다.

"X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손을 내렸다. 왼손으로 셔츠 단추를 푸는 대신, 오른팔에 감긴 붕대를 향해 가져갔다.

사락, 사락.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거침없이 붕대를 풀어냈다.

스르륵, 툭.

다 풀어낸 붕대가 바닥을 굴렀다. 다음으로 팔에 단단히 동여맨 부목을 잡고는,

파앙!

세게 뜯어냈다. 맥없이 뜯겨나간 부목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나는 투덜거리고는 오른 손목을 탈탈 흔들었다. 그리고 굳어 있던 팔을 이리저리 돌려주고 풀어주었다.

"진짜 다 붙었잖아."

헛웃음을 흘리며 내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양손을 이용해 셔츠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단추가 하나씩 풀려나갈 때마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아직 쓸만하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뒤 입고 있던 바지마저 훌렁 벗어 던졌다. 그리고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으으...."

나는 욕조 안에 완전히 몸을 누이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양팔을 욕조 위에 올린 채 푸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환자 흉내인지."

그렇다.

이미 내 손목은 정상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것도 고작 하룻밤 만에.

즉 디에고가 내 손목을 부러뜨린 다음 날, 나는 이미 완벽하게 몸을 회복한 뒤였다.

"그렇다고 이런 몸 상태를 알릴 수는 없으니."

그래서 식당에서 일부러 심기 불편한 척 온갖 짜증을 냈다. 목욕 시중을 드는 하인들도 쫓아냈다.

"어차피 이것 때문에 목욕 시중은 못 받았겠지만."

나는 어깨의 문양을 흘겨보고는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하, 젠장."

더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찌푸린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꾸르르륵.

내 뱃속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 때문이었다.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6)

"X발!"

나는 들고 있던 바가지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것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이걸 어떻게 잠재웠는데."

내 몸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회복시킨 것은 레퀴엠이었다.

사용자를 항상 최상의 상태로 만들려고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내가 조절할 수도, 억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 회복이 내가 그동안 비축해둔 생명력을 끌어다 썼다는 거다.

"못해도 일주일은 버틸 수 있었는데. 이걸 사흘 만에 도로묵으로 만들다니."

디에고의 공격은 나를 다시 허기에 시달리게 했다. 마치 처음 레퀴엠을 손에 넣었을 때처럼.

공허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음식을 먹는 중에만 조금 가라앉을 뿐, 다시 일어나 속을 긁어대었다.

"빡친다, 진짜."

다시 바가지를 주워들어 머리부터 물을 쏟아부었다. 매끄러운 얼굴의 감촉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얼굴은 안 건드렸군."

입술을 씰룩이며 천천히 몸을 씻어냈다. 천천히 심정이 차분해지고, 느릿하게 화가 식어 내렸다.

"이제 어쩐다?"

골치가 아팠다. 레퀴엠을 얻은 뒤엔 목숨을 위협받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세계관 최고 악당의 삶은 험난하군."

산 넘어 산이다.

원작에 없었던 내용이기에 미리 대처하지 못했다. 원작의 아벨은 레퀴엠을 쥐고 제정신인 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당분간은 병자 흉내를 내야겠군."

적어도 디에고가 성에 있는 동안엔 말이다. 문제는 디에고가 국경으로 나갔다 돌아왔을 때였다.

"기운을 감추는 법 따위, 모르는데."

레퀴엠을 버리면 모를까.

애초에 레퀴엠을 버린다는 선택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 버릴 수 있는지조차도 모르겠고.

"이건 리암에게 배울 수도 없을 테고."

내가 뭔가 달라졌다는 것만 겨우 눈치챈 그가, 기운을 감추는 방법을 알 리 없었다.

타인의 기운을 눈으로 볼 정도의 경지는, 디에고에 근접하는 수준의 강자일 때나 가능했다.

"그렇다는 건...."

디에고가 성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훈육을 빙자한 폭력에 노출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죽지야 않겠지만."

어떤 부상을 입든 레퀴엠이 마음대로 내 몸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감당해야 할 공허의 양도 늘어나게 된다.

"곤란한데."

머리에 비누 거품을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결국, 떠나야 하는 건가."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일단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댄 대가는 치르게 해줘야겠지."

눈동자를 스산하게 빛내며.

❖ ❖ ❖

야심한 시각, 카데르.

"술! 술 더 가져와!"

"아하하, 나리도 차암...."

"점잖지 못하시긴, 꺄르륵."

주점으로 즐비한 한 거리에서, 밤의 배우들이 소리 높여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붉은 빛을 띄는 은은한 조명, 느른하게 흐르는 음악, 그리고 여자.

"주문하시겠어요?"

홀에서 술을 나르는 매춘부들은 모두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배인에게 돈을 지불하면, 매춘부 중 마음에 드는 여성과 주점 안쪽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안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가는 신음과 환희의 비명이 울려 퍼지곤 했다.

끼이익.

주점 문이 열리고, 피에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건들건들한 걸음으로 들어와 바에 앉았다.

"샤를로트 한 잔."

그가 손가락으로 은화를 튕기자, 바텐더는 요령 좋게 동전을 받아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른 손님들이 제법이라는 듯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시킨 위스키가 이곳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술이었기 때문이다.

피에르는 그 시선을 즐기며 피식 웃었다.

'고작 싸구려 맥주를 시켜놓고 앉아있는 꼴들이라니.'

그도 불과 며칠 전까지는 여기서 싸구려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매춘부들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지.'

피에르는 입맛을 다시며 지나가는 매춘부들을 살폈다.

"여기 주문하신 샤를로트 나왔습니다."

바텐더가 공손히 건네주는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훗."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시간이 마치, 맡겨진 일을 잘 수행하고 자신에게 주는 상처럼 느껴졌다.

'네게 내릴 명령이 있다.'

디에고가 남몰래 그를 불러 일을 맡겼을 때, 피에르는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마치 왕명을 수행하는 비밀수사관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었다. 하지만 아벨의 악명은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들어온 바였다.

그런 아벨의 행동을 디에고에게 보고하는 것은 피에르의 정의감을 부채질했다. 공포에 떨고 있는 성의 사용인들을 자신이 구원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피에르는 더욱더 그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 얼마 전,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 뻔하긴 했지만.

'2주 전쯤이었나.'

아벨이 마을에 놀러 간 사이, 디에고가 예고 없이 성에 들이닥친 때였다.

최대한 시간을 끌려고 노력했지만 디에고의 눈치는 비상했고, 아벨은 결국 아버지에게 뺨을 얻어맞고 말았다.

'도련님, 부디 처분을.'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한 아벨의 앞에 꿇어 앉혀졌을 때, 피에르는 오늘이 제가 죽는 날인줄로만 알았다.

그는 사실 '그곳'이 어디인 줄도 몰랐다. 그저 하인들이 두려움에 떨며 쉬쉬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벌벌 떨며 아벨에게 싹싹 빌기만 했다.

그런데.

'알아들었으면 데리고 꺼져.'

웬일인지 아벨은 피에르를 그냥 내보냈다. 그리고 후에 따로 불러 손찌검을 하는 일도 없었다.

피에르는 겁이 많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빨리 잊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는 그날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했다.

'아, 다행이다.'

디에고 백작의 밀명을 수행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어서.

마치 자신이 사악한 적 앞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정작 자신이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동시에 다짐했다. 자신을 핍박한 저 악랄한 도련님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그래서 더더욱 아벨을 감시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 결과, 디에고에게 보고할만한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며칠 전.

국경에서 돌아온 디에고는 평소처럼 모든 하인을 불러 면담 시간을 가졌다.

'아벨 도련님께서... 어떤 기사님과 검을 맞대고 계셨습니다.'

디에고는 이어서 그 기사의 인상착의를 물었다. 피에르는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렇군.'

디에고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에르에게 주머니를 하나 건넸다.

'수고했다.'

라는 한 마디와 함께.

그 주머니에 담긴 두둑한 은화는,

'오늘 본 것을 잊어라.'

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또한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을 것까지.

그리고 몇 시간 뒤. 피에르는 아벨과 디에고가 식당에서 거친 싸움을 벌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것도 서로에게 검을 휘둘러 가면서.

그 순간 그는 직감했다.

'내가 올린 보고 때문이구나.'

해냈다.

자신이 내린 정의의 철퇴가 도련님을 향한 것이다. 성의 사용인들은 이제 도련님의 무자비한 폭력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자신은 두둑한 보상까지 받았다. 이보다 완벽한 결말은 없었다.

"후후."

피에르는 주머니 속에 묵직하게 담겨 있는 은화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는 이 돈으로 갖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예를 들면,

'마틸다!'

저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가는 매춘부라던지.

피에르는 돈을 모으는 데 소질이 없었다. 쉬는 날마다 여기 주점에 와서 술을 사는 데 돈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눈독 들이는 매춘부, 마틸다는 이곳에서도 몸값이 높기로 유명했다. 일개 하인의 월급으로는 선뜻 지불할 수 없는 금액.

그래서 그녀를 사지도 못하고 군침만 흘리던 나날. 그는 드디어 마틸다를 '구입'할 만한 돈을 모았다.

망나니 도련님의 일과를 보고하고 이런 부수입을 올릴 수 있다니 횡재가 따로 없었다.

피에르는 히죽 웃으며 바텐더에게 고갯짓했다.

"마틸다로."

이미 마틸다의 몸값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은화를 꺼내 쏟아부었다.

찰그랑, 찰랑, 찰랑.

은화끼리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어찌나 황홀하던지, 머리끝까지 오싹할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바텐더도,

"호오."

부러움에 가득 찬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뒤.

피에르는 마틸다와 함께 작은 방에 들어와 있었다. 방 안은 그 목적에 충실하게 침대, 작은 협탁, 그리고 전등뿐이었다.

"시작하실까요?"

마틸다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운 그를 거슬러 올라왔다.

"자아...."

마틸다를 보며 피에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

"-아! 막아!"

" —불러!!"

그리 방음 처리가 잘되지 않은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밀려들었다. 여러 사람의 고함과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뒤섞인듯했다.

"뭐지?"

피에르는 흠칫 손을 멈추었다. 마틸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지금 밖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잘 모르겠는데요?"

마틸다의 눈에 귀찮은 기색이 잠깐 스쳤다.

'빨리 끝내고 싶은데.'

그녀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이 주점에서 소란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남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곤 사고를 치곤 했으니까.

'어차피 금방 잠잠해지겠지.'

술을 판매하고 불법으로 매춘부를 사고파는 만큼, 주점은 보안에도 꽤 신경을 썼다. 곧 그녀가 잘 아는 건달들이 달려와 이 소란을 제압할 것이다.

'하아, 귀찮게.'

그녀에겐 그저 이 손님을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손님과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손님이 빨리 가버릴수록, 자신이 쉴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마틸다는 일부러 피에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계속해요, 어서요."

잠시 머뭇거리던 피에르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

"하아...."

마틸다의 탄성이 아스라이 쏟아졌다. 피에르가 좀 더 용기를 내려는 순간,

쾅!

[꺄아악!]

[뭐야?!]

바로 옆방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문이 거칠게 열어 젖혀지는 소리와, 그 방 안에 있던 두 남녀의 비명이었다.

피에르와 마틸다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멈추었다.

"방금 들었지?"

"아, 네. 옆방에서 들린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자주 있나?"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이것만큼은 진실이었다.

난동을 피우는 손님들이 이 지하의 방문까지 함부로 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매춘부들은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문을 잠그도록 교육받았다.

"그런데 왜...."

중얼거리던 피에르가 목소리를 죽였다. 소란스럽던 옆방이 갑자기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꺄아아아아악!]

갑자기 여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헉!"

피에르와 마틸다는 토끼눈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무, 무슨 일인지 한 번 알아볼게요."

마틸다가 침대 옆으로 내려섰다. 다음 순간,

쾅!

두 사람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꺅!"

마틸다가 놀라 물러서고,

"뭐, 뭐야?"

피에르는 당황해서 문가를 쳐다보았다.

문가에는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복도의 조명을 등지고 서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당신 뭐야?!"

피에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함쳤다.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7)

그 순간 남자가 눈을 번득였다.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안광이 몹시 매서웠다.

'어?'

피에르는 순간 쭈뼛하는 감각을 느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마틸다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배에 힘을 주고 용감하게 말을 뱉었다.

"당장 나...."

피에르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문가에 서 있던 남자가 어느새 제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남자의 손이 번개처럼 튀어나가 피에르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그리곤 피에르의 몸을 번쩍 들어 벽에다 밀어붙였다.

"크헉, 컥."

어찌나 손아귀 힘이 강한지,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노래졌다.

피에르는 두 손으로 남자의 손을 붙잡고 떼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벽에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 크윽."

있는 힘껏 발버둥쳤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다른 쪽 주먹을 들어 올렸다.

"-!?"

피에르의 눈이 커졌다.

남자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예상이 되어서였다.

"자, 잠."

꽝!

얼굴이 돌바닥에 찍히는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이 찾아들었다.

아니, 돌바닥은 아니었다. 지금 피에르의 얼굴과 충돌한 것은 남자의 주먹이었으니까.

피에르는 짧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제 코 아래로 무언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으, 으어."

끈적한 무언가가 입을 벌릴 때마다 안으로 타고 들어왔다. 씁쓸한 쇠맛이 느껴지는 걸 보니 피인 것 같았다.

"으으?"

피에르는 제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입안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며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의 치아였다.

"으브으으으!!"

피에르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부러진 앞니와 뭉개진 잇몸, 입안에 고인 피 때문에 평소에 내던 소리를 조금도 재현하지 못했다.

"으브, 으어."

그저 나약한, 바스러질 것 같은 신음만이 새어 나올 뿐. 마치 이가 빠지고 새로 나는 시절의 어린아이 같은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흐, 흐어. 슬르, 슬르즈스으...."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코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다.

그중 절반은 피에르의 목을 타고 넘어가고, 절반은 입에 고였다가 가득 차 줄줄 흘러내렸다.

"슬르즈스으, 즈블...."

피에르는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 머리가 팽팽 돌고,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본능만이 남아 그를 움직이게 했다.

"...."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직시했다. 새카만 눈동자가 넘실거릴 듯 타올랐다.

"즈, 즈블...."

피에르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남자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엄청난 압박감이 피에르를 짓눌렀다.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고, 입이 바짝 마르며, 발끝을 곱아들게 만드는.

피에르는 이런 기운을 처음 느껴보았다. 그럼에도 이것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독한 살의.

남자는, 그를 죽이고 싶어 했다.

"즈블, 즈블...."

피에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 꼭 이대로 졸도하고만 싶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피에르의 턱을, 남자가 덥석 붙잡았다.

"-!"

피에르는 흠칫해서 눈을 들었다. 남자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불길처럼 일렁였다. 마치 그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읍?!"

피에르는 화들짝 놀랐다.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제 입속을 파고든 탓이었다. 가죽 건틀릿의 거친 감각이 제 혀를 간질였다.

"으, 으브, 으."

"쉿."

남자가 조용히 속삭였다.

심연에서 거슬러 올라온 듯한, 폐부를 긁어내는 듯한 거칠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마치 동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그 속에서 오랜 기간 숨어 살던 괴물이 튀어나와 말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인간은 결코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없을 것이다.

"...."

피에르는 오들오들 털며 침을 꿀꺽 삼켰다. 침과 함께 피가 턱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가 너무 무서웠다.

'혀는 왜....'

남자는 느릿하게 제 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마치 이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찬찬히.

그러다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빼내었다.

"흐, 흐으...."

안도하기도 잠시, 피에르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변했다.

"-!"

제 턱을 틀어쥔 손아귀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설, 설마?'

피에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제야 남자가 왜 제 턱을 붙잡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즈, 즈끄, 즈끄므."

부러진 이 때문에 제대로 된 말은 나오지 않고, 온몸에 힘이 빠져 제대로 저항할 힘도 없었다.

"흐즈, 흐즈므으..."

피에르는 그저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비틀려고 애썼다.

도대체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

남자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요사스러운 미소가 어둠 속에서 활짝 피어난 순간,

빠드득!

피에르의 턱이 부서졌다.

"끄으으으!"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피에르는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털썩.

피에르의 몸이 바닥에 쏟아졌다.

툭, 데구르르르.

그의 입에서 빠진 피 묻은 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턱이 완전히 부서져 입안에 남아있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

마틸다의 몸이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녀는 한 사람의 얼굴이 주먹 한 방에 어떻게 뭉개지는지, 그리고 사람의 턱이 부서지면 어떻게 되는지.

또 인간의 이가 모두 몇 개이며 그게 전부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무, 무서워....'

향초 향이 가득하던 방이 순식간에 피냄새로 젖어 들고, 나름대로 아늑하던 방이 음산한 고문실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일어났다. 방금까지 저 손님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이, 이건 꼭... 그때 같아.'

마틸다는 이런 피로 낭자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다른 매춘부가 몰래 도망쳤을 때.

'아아악!'

그녀는 건달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다시 끌려 들어왔다. 옷을 입었을 때 가려지는 부위만 골라서 흠씬 얻어맞은 채로.

그 옆엔 매춘부와 함께 달아났다가 걸린 남자도 함께였다. 그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채,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남자 얼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사람의 얼굴을 부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남자는 해냈다. 맨손으로 사람의 얼굴을 빈대떡처럼 뭉개고, 턱뼈를 부스러뜨렸다.

마틸다는 이런 살벌한 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웠다.

'흐흑.'

자꾸만 울음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온 힘을 다해 입을 틀어막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죽고 싶지 않아.'

갑자기 이 방에 침입해 온 저 남자가, 이대로 자신을 잊고 나가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마틸다는 손가락 사이로 그를 겨우겨우 훔쳐보았다.

"흐음."

남자는 기절한 손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피 묻은 건틀릿을 낀 손으로 손님의 뺨을 툭 쳤다.

"약해 빠져가지곤."

남자는 아무래도 턱뼈가 부서지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혓바닥을 그렇게 놀릴 거면, 이런 일은 각오했어야지."

그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럴 때마다 동굴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틸다는 이제 입을 막아야 할지 귀를 막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아."

문득 멈추곤 손님의 팔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두 손 다 멀쩡하네?"

그리곤 손님의 양 손목을 잡아 올렸다.

"난 한쪽이 부러졌는데 말이야."

마틸다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떠올렸다. 아까 남자가 한 손으로 손님의 목을 틀어잡고, 다른 손으로 주먹을 갈겼다는 것을.

'두 손목 다 멀쩡하지 않았나...?'

어쨌건 그 사실을 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가 멀쩡한 손으로 손님의 손목을 붙잡았다. 또 다른 멀쩡한 손으론 손님의 손가락이 손등 쪽으로 꺾이도록 밀기 시작했다.

뚜둑, 뚜두둑.

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비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

날카로운 고통에 손님이 눈물로 짓무른 눈을 떴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린 순간 보인 것은,

"-!"

제 손목이 불가능한 각도로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

"—!"

손님은 또다시 기절해버렸다. 그 끔찍한 상황에도 남자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저런, 재미없게."

그리고 다른 손목을 찾아 같은 짓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또다시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으흑.'

마틸다는 이를 악물며 귀를 손으로 막았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움직인다 한들 저 남자를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문가에 서 있던 그가 여기까지 다다르는 것은 정말로 눈 깜박할 사이였다.

'제발, 누가 도와줘. 제발.'

마틸다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러다 사위가 고요해진 것을 깨닫고 눈을 떴을 때,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힉!"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뒤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더 움직일 곳이 없었다.

남자의 발치에는 양 손목이 꺾인 채 뻗어있는 손님이 보였다. 그의 입에서 거품이 줄줄 흘러나와 피와 뒤섞여 있었다.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꺾인 손목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을 보아 기절한듯 싶었다.

'...끝났구나.'

마틸다는 자신도 저 꼴이 될 것이라 직감했다. 길지 않은 인생, 그나마도 이런 뒷골목을 전전하는 초라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너무나 허무하고 비참하게.

그 사실이 못내 서글퍼진 그 순간이었다.

쿵쾅쿵쾅.

무겁고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에서 날아들었다.

'아, 설마?'

마틸다는 반색하며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어떤 자식이야?"

"어딘데?"

그녀가 잘 아는 목소리, 그리고 평소에는 너무나 두려워했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움츠리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까 분명 여기...."

"찾았다!"

"여깁니다!"

그 목소리들이 어찌나 반가운지, 저절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른바 건달 오형제들.

도망치는 매춘부를 잡아 오거나, 혹은 새로운 매춘부를 구해와 여기 집어넣는 자들.

그들의 험상궂은 얼굴이 차례로 문가에 나타났다.

"아오, 쉬고 있었는데 이 무슨 난리람."

"이렇게 신선하게 미친 새끼는 오랜만인데요?"

그나마도 문이 비좁아 두 명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머지 셋이 저 복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 아아. 다행이다.'

마틸다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8)

저들은 마틸다를 비롯한 매춘부들에게 툭하면 폭언을 일삼았고, 그녀들의 가녀린 몸을 악랄하게 굴리곤 했다.

"지금 저거, 얼굴 뭉개진 저거 혹시 손님이야?"

"어.... 그런 것 같은데요?"

"와, 이 육시럴 놈이?"

그중 맏이, 조셉은 특히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그가 화가 났을 땐 투실투실한 양 뺨이 흉포하게 떨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틸다는 제게 가해지는 폭력을 피하려고 억지로 웃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도하는 마음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살았다.'

아무리 저 남자가 날래고 힘이 세다고 해도, 저 다섯 명을 피해 여기서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건달 오 형제는 늘 몽둥이, 혹은 검을 소지하고 다녔다. 맨손으로 보이는 그가 저들을 이길 수 없을 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불리한 상황에 당황할 법도 했다.

"흐응."

그러나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낮은 웃음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그의 눈에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흘렀다.

"야, 이 새끼 보소. 태평하게 처웃고 있네?"

선두의 조셉이 뒷짐을 지곤 호기롭게 외쳤다.

"좋은 말 할 때 이리 기어 나와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지."

사실, 좁은 방안으로 차례대로 한 명씩 들어가는 것은 건달들에게 유리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보다도 난전, 그리고 자신들이 남자를 포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 정도 예상은 남자도 가능할 터. 그러니 이곳에서 농성하면서 한 놈씩 순서대로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당연히 이 안에서 버티겠지.'

마틸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

남자는 정말로 문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셉의 험악한 협박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듯, 건들건들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얼씨구? 진짜 오네?"

"저거 진짜 또라이구만."

건달들은 기가 찬 지 코웃음을 흘렸다. 마틸다 또한 저 남자가 드디어 미쳐버렸나, 이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

갑자기 남자의 몸이 흐릿해졌다. 그러더니 눈 깜박할 사이 건달들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도망친다!"

조셉이 벼락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다음 순간, 남자의 손에 갑자기 검이 나타났다. 손바닥에서 불쑥 솟아나듯이.

'아무 것도 안 들고 있었는데?'

마틸다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남자가 발검하는 동작 그대로 팔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스각!

조셉의 목이 천장을 향해 튀어 올랐다. 이어서 남자의 검이 방향을 바꾸어 옆에 선 둘째의 가슴을 꿰뚫었다.

"끅!"

둘째가 그대로 절명하고, 남자의 몸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으아악!"

셋째와 넷째가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남자의 검은 수박 따듯 간단하게 그들의 목을 떨구어 버렸다.

"...!"

마틸다는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숨을 두어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4구의 시체가 생겨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힘 좀 쓴다는 장정들이.

심지어 머리통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피 한 방울조차 튀지 않았다.

가장 조용하고 깨끗한 살인의 현장이었다.

"으, 으아아...."

혼자 남은 막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아아악!"

황급히 몸을 돌려 달아났다. 네 형제가 순식간에 명을 달리해 버리자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저런."

남자의 무심한 중얼거림이 흩어졌다. 그의 안색과 목소리는 그저 차분하기만 했다.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해낸 일에 놀라지도, 별 감흥조차 없어 보였다.

살인에 무감한 듯한 모습.

'사,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아니, 사실은 인간이 아닌 것 아닐까.

마틸다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뿜어내는 오싹한 존재감, 그가 만들어낸 잔혹한 광경, 그의 낯에 스치는 옅은 미소까지.

평생 마주할 일이 없는 초자연적 존재를 맞닥뜨린 듯이 현실감이 없었다. 사신의 칼날이 이 방을 할퀴고 지나간 듯했다.

"귀찮게 하네."

남자의 나직한 한 마디가, 느릿하게 귓바퀴를 감아 돌았다.

그가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을 타고 넘어가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뚜벅, 뚜벅.

죽음의 신이 방을 떠났다. 다음 희생자를 향해 그 싸늘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마틸다는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 움직였다간, 아직 남아있는 칼날에 목을 베일 것만 같았다. 자신도 바닥에 드러누운 저 시체들과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웠다.

스아아아-

"헉!"

그러다 문득, 귓가를 긁어내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마틸다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틀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흡!"

시체들에 심상찮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잘려나간 머리통은 이미 해골과 흡사한 몰골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목이 떨어져나간 몸뚱이가 목 부분부터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마틸다는 제 꿈, 아니 악몽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치를 떨었다.

사아악-

그 소리가 계속 될수록 시신에서 인간다운 부분들이 점차 사라졌다.

둘째의 가슴팍에 생긴 구멍이 점점 커지고, 그 주변의 살점이 사라져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마틸다는 그제야 깨달았다.

시신에 남은 기운이 빨려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곧 저 시신들이 몇십 년은 무덤에서 썩은 것처럼 변해버릴 것이라는 것을.

"아악!"

마틸다는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무덤 속 같은 곳에 더 이상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으으윽."

대충 옷가지로 몸을 가린 채 비틀비틀 걸었다.

하지만 곧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 방을 나서려면, 이미 반쯤 썩어버린 시체들을 넘어가야만 했다.

"...."

마틸다는 이를 악물어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이제 흰자위조차 보이지 않는 해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 꾹 감고 천천히 다리를 들어올렸다.

타박.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어찌나 반갑던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틸다는 그렇게 발끝으로 바닥을 더듬어 가며 걸었다. 그리고 익숙한 복도의 향을 느끼자마자 눈을 떴다.

"...하아."

복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이 방 저 방의 문이 열려있고, 가구와 장식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마치 폐가처럼 적막했다.

"...."

마틸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늘 감시하는 건달들과 매춘부로 가득한 이곳이, 이렇게 조용해질 줄은 몰랐다.

"아아악!"

멀리 복도 저 끝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녀도 익히 아는, 막내의 목소리였다.

"-!"

마틸다는 방금 소리가 난 반대 방향으로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죽을 둥 살 둥 내달리기 시작했다.

막 옆방을 지나친 순간, 그녀는 보았다.

"아!"

얼굴이 반쯤 짓뭉개진 채 기절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옆방에서 들려왔던 여자의 비명을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방을 차례로 지나치면서, 마틸다는 비슷한 풍경들을 목격해야만 했다.

'대체 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정체 모를 남자가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를.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 ❖ ❖

팔락, 팔락.

집무실 안은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쿵.

나는 왼손으로 도장을 힘껏 찍었다. 약간의 흔들림이 발생했지만 무시하고 말했다.

"다음."

"예, 도련님."

필립이 다가와 도장이 찍힌 서류를 챙겼다.

그리고 내 앞에 새로운 서류를 놓았다. 보기 편하게 반듯한 각도로.

"음."

나는 한 손으로 서류를 짚은 채 찬찬히 훑었다.

필립은 그런 내 옆에 서서 잠자코 기다렸다. 내가 서류 보기를 마치면 언제든지 반응할 수 있도록.

내 오른 손목이 부러진 후 생긴 변화였다.

나는 붕대가 감긴 멀쩡한 오른손을 힐끔 보고는 한숨을 삼켰다.

'당분간은 병자 흉내를 내야 하니 별수 없지.'

팔락.

서류가 넘어가고, 또 넘어갔다. 그러다 문득 필립의 손이 멈칫했다.

"무슨 일이지?"

나는 그의 망설임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물었다. 필립이 서류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가 순순히 내 앞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병가 신청서]

서류 상단을 확인한 나는 즉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작성자: 피에르]

'아하.'

예정되어있던,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든 상황이 도래했다.

나는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찬찬히 서류를 훑었다.

"피에르가 병가를?"

그러다 멀쩡한 왼손으로 서류 한 곳을 짚었다.

[기간: 10월 31일 ~ 11월 14일]

"무슨 병가를 이렇게 오래 내? 이건 그냥 그만두고 싶다는 거 아닌가?"

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필립이 애써 그의 편을 들었다.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합니다."

"뭐 죽을 병이라도 걸렸나? 아직 젊잖아."

"저, 그것이...."

필립이 송구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나는 비죽이 치미는 웃음을 애써 눌러 삼켰다.

"뭐야, 진짜 죽을병이라도 걸렸어?"

"그건 아니옵고, 그... 턱뼈가 바스러져서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뭐? 턱뼈가 바스러져? 드래곤 뼈라도 씹어먹었나?"

필립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었다.

"어차피 그놈이 하는 일이 주둥이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냉정히 일축했다.

"2주는 너무 길어. 일주일."

아마 그 턱뼈는 2주가 지나도 회복시키기 어려울 거다. 그 어떤 실력 좋은 의사가 와도 원상복귀 못 시키게끔 철저히 부숴놓았으니까.

"저, 도련님. 그것이...."

필립이 마른 침을 삼켰다.

"...사실은 양 손목도 부러져서, 2주는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도 부족할 것 같긴 하지만.

그는 뒷말을 웅얼거리며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나는 그 말을 못들은 척 물었다.

"뭐? 손목까지? 대체 그놈은 뭘 하고 다니는 거지?"

"그, 최근 카데르 영지에서 봉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무슨 봉변? 길 가다 강도라도 당했나?"

필립의 이마에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곳의... 사창가에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 휘말렸다고 하는군요."

"지나가다가? 운이 지지리도 없었군."

필립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뇨, 손님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하!"

나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하인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 통도 크군."

사실 놈이 가진 돈의 출처는 짐작하고 있었다.

'디에고겠지.'

내 행적을 보고하는 대가로 받은 돈.

그 돈을 가지고 고작 하는 일이 창녀를 사는 것이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하여간 병신이 따로 없네."

"그게... 도련님, 혹시 저번에 말씀드린 마검사 기억나시는지요?"

필립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잠깐 기억을 되짚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아, 저번에 시체가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다던 그때?"

"예. 그런데 이번 사건도 그 마검사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확실해?"

"사망자만 다섯에 부상자도 여럿. 무엇보다 시신의 상태가 저번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필립이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새카맣게 타 들어가 살점은커녕 뼈만 남았다고 하는군요."

Chapter5. 일부러 화를 돋운다. (9)

말을 마친 그의 시선이 내 손목을 향했다. 붕대로 칭칭 감아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곳을.

"...."

슬그머니 돌아가는 그의 눈동자는 '그럼, 말도 안 되지. 도련님이 어찌....'라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 비치는 뚜렷한 안도의 기색에, 나는 피식 비웃음을 삼켰다.

"아무튼, 피에르라고 했던가?"

"예."

"그놈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반년은 있어야겠군. 그냥 잘라."

필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자르다니요?"

"아니면 그놈한테 직접 그만두라고 전하든지."

"...."

"우리 영지의 재정 상태가, 그런 놈에게 유급 휴가를 허가할 정도로 여유로웠나?"

나는 피에르의 병가 신청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잘 생각해 봐.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인지."

필립의 눈앞에서 그것을 구깃구깃 구겨버렸다.

"...."

눈빛을 일렁이며 갈등하던 필립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피에르가 디에고의 세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의 고민은 짧았다.

무엇보다, 그가 보기에도 피에르의 상태는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침내 필립의 입에서 체념 어린 대답이 흘러나왔다.

"잘 생각했어."

나는 필립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 멀리 벽난로로 구겨진 서류를 던져버렸다.

타다닥.

불씨가 붙은 서류는 곧 재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마치 지금의 피에르처럼.

"후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기 어려웠다.

놈에게 결코 잊지 못할 하룻밤을 선사했으며, 놈의 앞길을 효과적으로 망쳐버렸다.

게다가 그날 여유롭게 포식까지 즐길 수 있었다.

'그 건달들, 진짜 맛있었지.'

평소에 왕성히 활동하던 놈들이라 그런지 체내에 생명력이 넘쳤다.

'베는 손맛도 죽여줬고.'

일격에 두 놈의 멱을 따는 것은 몹시도 신나는 일이었다. 놈들의 목엔 특히 지방이 많아 베는 감촉이 야들야들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오른손가락 끝을 까딱거렸다.

'점점 강해지는 게 느껴져.'

특히 디에고와의 대결 이후,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게 느껴졌다. 혼자 방에서 그날 그의 모습을 그리며 막아내는 훈련을 한 덕분이었다.

'아마 그와 같은 강자는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울 테지.'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 번 다시 건드려 볼까?'

더 강해질 기회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부채질했다. 그러다 시선이 손목의 붕대를 향했다.

'...아니지, 아냐. 그래도 이건 아냐.'

애써 디에고의 잔상을 머리에서 지워냈다. 다음에는 손목 하나로 끝나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흠."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강해지고 싶다. 지금보다 더, 더욱 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어렵게 얻은 새 삶을, 이 육체를 잃고 싶지 않았다. 원작의 흐름에 끌려가 죽고 싶지 않았다.

진정한 강자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떻게 할까...."

책상 모서리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주 많은 선택지 중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면서.

그러다 문득, 필립이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서신을 정리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 검토를 마친 서신 뭉치였다.

"잠깐."

나는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손가락을 까딱여 내 쪽으로 불렀다.

"그 서신 뭉치, 이리 내놔 봐."

"예에?"

필립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 이쪽은 정리가 끝난...."

"닥치고 내놓으라고."

결국 필립은 마지못해 내 앞에 서신 봉투를 내려놓았다.

"다 펼쳐."

내 강압적 어조에 그가 우물쭈물 편지를 부채꼴로 쫙 펼쳤다. 그의 동공이 나쁜 일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나는 한쪽 턱을 짚은 채 느릿하게 내뱉었다.

"개수가 늘어났군."

"...."

"내가 확인한 건 분명 11통이었는데, 지금은 12통이네."

내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펼쳐진 봉투 중 정확하게 한 봉투를 골라 집어 들었다.

"못 보던 봉투 같은데?"

"...!"

필립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 봉투를 필립의 앞에서 달랑달랑 흔들었다.

"국경에서 온 것 아닌가?"

흰 바탕에 푸른 테두리를 두른 봉투의 출처는 국경, 즉 디에고 킨드리얼이다. 거기 붉은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것은 '긴급'을 의미했다.

그리고, 봉투는 이미 뜯어져 있었다. 내가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도, 도련님...."

필립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스스로 제 잘못을 시인할 수 있도록.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윽고 필립의 잇새로 죽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말을 들은 체 만체하며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

필립이 안타까운 탄식을 뱉어냈지만 멈추지 않고 편지를 살폈다.

편지엔 디에고 특유의 엄하고 무게 있는 필체로 휘갈겨 쓴 글씨가 담겨있었다.

[수도로 갈 대리인은 기사 요나스 클라인으로 결정. 그에게 하룻밤 잠자리와 편안한 휴식을 제공할 것. 또 장거리 달리기에 능한 말과 식량을 준비하여 최대한 빠르게 수도로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

원작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흐름.

원작에선 불가능했던 회의 참석이 이번엔 이루어졌으나, 역시 참가자는 아벨이 아니었다.

'역시나.'

나는 비릿한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예측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못내 입맛이 썼다. 물론, 이는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행동하는 필립 때문이기도 했다.

"도련님...."

내 표정을 본 필립의 얼굴이 이젠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나는 그의 앞에 편지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어디, 변명이나 들어보지."

필립의 낯에 순간적으로 희망의 빛줄기가 스쳤다. 당장 뺨을 얻어맞긴커녕 말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가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핥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죄송합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 한 개조차 쓸모없다고 여기기 전에, 본론만 말해."

내 야멸찬 한 마디에 필립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가뜩이나 저번 일로 몸과 마음이 상하셨는데.... 더 심기를 어지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제 선에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감히 도련님을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돌려 돌려 말하고 있지만, 필립의 속내는 그러했다.

가뜩이나 디에고에게 훈육을 빙자한 폭력을 당한 아벨이, 아들인 저를 제치고 대리인으로 나서는 기사를 본다?

'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놈이 가냐며 길길이 날뛰겠지.'

하지만 상대는 훈련받은 기사. 그의 손에 들린 영주의 인장을 빼앗는 것을 불가능할 것이다.

정상적인 몸 상태여도 그러할 텐데, 한쪽 팔마저 자유롭지 못하니 결과는 눈에 보듯 뻔했다.

'애꿎은 사용인에게 화풀이를 할 거라 예상했을 테고.'

요새 나는 팔이 아프다는 이유로 더 악랄하게 굴었다. 사용인들의 불평불만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성의 살림을 총괄하는 집사로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필립은 기사 요나스를 맞아들여 잘 대접한 뒤 잡음 없이 내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되도록 아벨과 그를 만나지 않게 해야 했다.

'뭐, 그건 내가 이 편지가 올 거라는 걸 몰랐을 때의 얘기고.'

제 딴에는 정기 귀족 회의를 알리는 편지를 잘 숨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나에겐 소용없었다. 즉, 필립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 손바닥 위라는 뜻이었다.

툭, 툭.

손가락으로 턱을 가만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집중했을 때, 특히 필립을 곤란하게 할 만한 방향으로 집중했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

필립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필립이 스스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내버려 두곤 생각에 잠겼다.

'요나스 클라인.'

내가 알기로 지금껏 디에고가 자신을 대신해 수도로 보낸 기사는 그가 아니었다.

'왜 바꾸었을까.'

해답은 금방 나왔다.

'최근 서쪽 국경의 상황이 좋지 않을 테지.'

저번 트롤 20마리가 안긴 피해가 컸다. 성벽을 복구하고 부상자를 수습하는 데만 한참을 소요했을 것이다.

그 상황에 중요한 인력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요나스라.... 원리원칙주의자에 꽉 막힌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그가 선발된 것은, 실력보다는 성격과 정치적 능력을 고려한 듯했다.

그라면 아마 고위 귀족들이 가득한 자리에서도 거침없이 제 의견을 피력할 것이다. 이 자리에도 본인이 자원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순조롭게 참석하긴 힘들겠지만.'

까딱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필립을 지긋이 응시했다.

"필립."

"예, 도련님."

"그러니까 자네 말은, 오직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거지?"

"...예, 물론입니다."

필립이 몹시 절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네의 충정에 새삼 감탄했어."

"...."

"내 심기를 헤아릴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시킨 일을 잘 해내려는 모습까지. 정말로 감동적이야."

내 유려한 말투에 필립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내가 진정으로 감탄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도련님...."

"그래, 그럼 식량과 말은 잘 준비되었나?"

필립이 눈을 한 바퀴 데굴 굴리더니 대답했다.

"...예."

"양은 넉넉하게, 그리고 말도 튼튼한 놈으로 잘 골랐겠지?"

내 질문이 이어질수록 필립의 안색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는 쩔쩔매면서도 충실히 대답을 계속했다.

"...예, 예에."

"그래. 요나스가 묵을 곳은? 잘 봐뒀나?"

"...예. 지금 하녀들이 방을 치우고 침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호오."

나는 두 손을 들어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내 박수 소리가 이어질수록 필립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주, 잘했어. 아주 좋아."

"...."

"그럼 이 일도 해줄 수 있겠군."

"예?"

나는 필립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필립은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손을 꼼지락대기만 했다.

"저런. 겁먹지 말고 와 봐."

"...."

"어서."

내 말투가 살짝 낮아지자, 필립이 꼼지락대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느릿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옳지."

그가 비로소 내 옆에 서서, 찬찬히 몸을 기울였다.

"왜 겁을 먹고 그러나."

나는 그에게 손을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내가 자넬 때리기라도 할까 봐?"

필립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 그 대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가 다음에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그!"

필립이 눈을 부릅뜨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동자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 아로새겨졌다.

"왜,"

나는 한쪽 입가를 가린 채 악마 같은 미소를 흩뿌렸다.

"못하겠어?"

그것은 결코 필립이 뿌리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자 명령이었다.

"...아닙니다."

필립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꽉 쥐어지는 그의 주먹엔 지독한 무력함이 담겨 있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노래하듯이 대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나갈 거야."

"아, 예."

필립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

"오늘도 마차 없이 나가십니까?"

"어."

내 대답에 필립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도련님, 혹시... 마부가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요?"

"아니. 왜?"

"요새 마차를 안 타고 다니시길래 무슨 일 있으신가 했습니다."

"그런 거 없으니까 애꿎은 사람 잡지 마."

나는 무성의하게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었으면 외출 준비나 해."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1)

제국의 서쪽 산맥에는 수많은 종류의 몬스터가 서식했다.

그중 대부분은 인간보다 빠르고, 어떤 종류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자취를 감출 정도였다.

서쪽 땅의 대부분은 척박했지만, 그나마 비옥한 땅이 몇 군데 있었다. 디에고 영주는 이 귀한 땅의 일부를 목마장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혈통 좋은 말을 교배하여 품종을 개량하고, 더 나아가 이들을 군마로 육성했다.

그리하여 기사들의 기동성을 간단하고 효율적으로 높이는 데 기여했다.

"오호."

감탄을 흘리며 목마장으로 들어섰다.

"이 영지에 이런 곳이 있었네."

오베스트 영지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험악한 산과 거친 바위, 메마른 암석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 즉 나름대로 초목이 우거진 땅을 볼 수 있었다. 그 위에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은 썩 평화로워 보였다.

"어디 보자...."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멀리까지 쭉 내다 보았다. 목마장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전부 꼼꼼히 살폈다.

"음, 역시 없군."

내가 찾는 그것이.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겨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말에게 먹일 여물을 정리하는 청년이 한 명 보였다.

"이봐."

내가 부르자 청년이 여물통을 붙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아, 아벨 도련님?!"

청년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튀어나왔다. 그가 황급히 여물통에서 발을 빼다가 옆의 바가지를 걷어 차버렸다.

우당탕, 쿵.

바가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아이고!"

호되게 발등을 찍은 청년이 발을 붙잡고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저런."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우스운 꼴을 지켜보았다. 청년은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아낸 뒤, 겨우 파르르 떨리는 미소를 그려냈다.

"아벨 도련님을... 뵙습니다."

"그래. 네가 여기 총책임자인가?"

"아, 그건 아닙니다. 책임자인 벤님은 군마 이송을 위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흠, 그래?"

물론, 알고 왔다.

총책임자인 벤이 매주 목요일마다 국경으로 말을 전달하러 간다는 사실 정도는.

"도련님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청년이 경계 어린 기색으로 나를 살폈다. 공손한 태도지만, 내 소문을 익히 들은 모양인지 떨리는 눈을 감추지 못했다.

"말을 좀 보려고."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말이요?"

청년의 동그란 눈이 내 왼쪽 팔을 향했다.

"하지만 도련님 팔이...."

"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아, 그렇습니다만."

청년이 옆에 놓인 수건으로 손을 닦아냈다. 그리고 앞장서서 나를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따라오시지요."

그가 안쪽 문을 열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콱 찔렀다.

말똥 냄새와 털 냄새가 뒤섞여 몹시 역겨웠다. 오감이 예민해진 나에게는, 마치 말의 똥통을 퍼붓는 것처럼 느껴졌다.

"으윽."

내가 코를 부여잡고 멈춰서자, 청년이 송구스러운 듯 두 손을 비볐다.

"죄송합니다. 귀한 분이 걸음 하시기엔 좀 누추한 곳이라...."

"이 냄새 좀 어떻게 할 순 없나?"

"그, 사실 똥은 아까 다 치웠습니다만. 축사에 밴 냄새는 어쩔 수가 없네요."

"하아."

나는 마구간 안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중앙에 흙으로 된 바닥, 양 옆으로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구획이 보였다. 각 칸에는 말이 한 두 마리씩 서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히히잉."

"히힝."

말들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말은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기도 했다.

"할 수 없지."

나는 낮은 한숨을 흘린 뒤 코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마구간 안에 한 걸음 들어섰다.

그 순간,

"...."

마구간 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말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며 굳어버린 탓이었다.

"어, 어라?"

옆에 서 있던 청년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말들이 왜 이러지?"

그는 당혹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수상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떤 무기조차 들지 않고, 한쪽 팔엔 붕대를 칭칭 감은 나약한 모습으로.

"왜?"

내가 불퉁한 말투로 묻자,

"아, 그게."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 뒤쪽을 넘겨다 보았다. 물론, 그곳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마구간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나도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그렇게 말 옆을 지나치자,

"끼이잉."

"끼잉...."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말들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최대한 나와 멀어지려 애썼다. 몸을 복도 반대쪽 벽에 최대한 붙인 채, 네 다리를 달달 떨어대었다.

"어어?"

청년은 이 현상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야에 닿는 말들은 모두 겁에 질려, 혹은 움츠러들어 버린 뒤였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난 것처럼, 흉포한 맹수에게 위협당한 것처럼.

"이 녀석들이 왜...."

청년이 못내 찜찜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말들이 평소에 안 이러는데...."

그가 주변의 한 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에마, 진정해. 나야 나."

그러나 말은 푸르릉거리며 점점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쉬이, 에마. 착하지."

청년이 다정하게 속삭이며 달래도 말의 공포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히힝, 히히힝."

애처로운 울음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청년은 당황한 얼굴로 쩔쩔맸다. 그가 나를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영문을 모르겠네요."

"흐음."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동물들의 감은 예민하군.'

말들이 저토록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했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내 몸 안에는, 디에고마저 경악할만한 흉포한 기운이 잠들어 있으니까.

동물들은 인간이 듣지 못하는 거리를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하물며 지능이 높고 영리한 말은, 더더욱 나의 기운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다니지 못했지.'

아마 내가 마차에 탔다면, 그 마차를 모는 말들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을 테니까.

"됐고, 이 중에 제일 튼튼한 말이 뭐지?"

나는 심드렁한 어투로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내가 실망했다고 생각했는지 눈에 띄게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아, 저. 그러니까, 네 미아입니다. 좀 더 안쪽에 있어요. 따라오시지요."

청년의 뒤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마구간 내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가 생성되는 듯했다.

말들이 내게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계속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히힝...."

"히히힝."

마구간 안은 금세 말들의 처량한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많은 수의 말들이 전부 울어대니 그 소리가 퍽 귀에 거슬렸다.

"쯧."

미간을 찌푸리며 한쪽 귀를 막았다.

"시끄럽군."

다음 순간,

"...."

마구간 안에 맴돌던 말들의 울음소리가 싸그리 사라졌다.

말들은 마치 숨을 쉬는 것을 잊은 것처럼 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구슬프게 일렁이며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허어, 참."

그 상황은 청년을 더욱 깊은 황당함의 구덩이로 빠져들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마구간 안의 말들을 공포에 몰아넣으며 가장 안쪽에 도달했다.

"아이고."

청년이 딱하다는 듯 이마를 쳤다.

그의 앞에는 탐스러운 갈색 갈기, 그리고 윤기 나는 몸뚱이를 가진 훌륭한 말이 있었다.

"...."

문제는 그 말이 아예 등을 돌린 채 벽을 보고 서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이 녀석까지 오늘따라 말들이 왜 이러는 거야?"

청년이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미아가 사람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오면 늘 반겨주는데...."

그가 다가가서 부드럽게 말의 이름을 불렀다.

"미아, 미아?"

하지만 미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벽에 머리를 꼭 박은 채 필사적으로 그를 외면할 뿐.

말은 비상한 청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쩐지 미아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 보였다.

"아니, 이 녀석이 진짜?"

청년의 목소리가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그는 충격에 사로잡혀, 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아를 바라보았다.

"비켜봐."

나는 그를 제치고 미아가 있는 구역의 문에 다가섰다.

"헉, 도련님. 조심...!"

"비키라고."

허둥대며 막아서는 그를 막무가내로 밀어내고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린 순간, 미아의 몸뚱이가 크게 움찔했다.

저벅, 저벅.

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미아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미아?"

녀석은 내가 근처에 접근할 때까지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바들바들 떨며 그 자리에 굳어 있을 뿐.

나는 천천히 미아의 등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도, 도련님. 위험...!"

등 뒤에서 청년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면서.

아마 그의 머릿속엔 곧 말의 뒷발굽에 채여 날아가는 내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내 손이 미아의 등에 온전히 닿는 순간,

"푸르르르."

미아는 그 자리에서 사지를 길게 뻗으며 기절해버렸다.

"으헉?!"

청년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나는 손을 거둬들이며 미아에게서 물러났다.

'예상대로군.'

일반적인 말은 나를 태우기는커녕, 내 손만 닿아도 저렇게 정신을 잃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의 크기에 짓눌려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그 녀석뿐인가.'

나는 부산스레 미아를 챙기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봐."

"미아? 미아? 정신 차... 아, 도련님? 절 부르셨습니까?"

"그래. 그놈은 그만 내버려 두고 일어서."

"예? 하지만...."

"잠깐 기절한 것뿐이니 시간 지나면 일어서겠지."

"아, 예에."

청년이 걱정 어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미아를 흘끗흘끗 쳐다보는 그에게 말했다.

"이놈 말고 더 튼튼한 놈이 있잖아. 데려와 봐."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말이 아니던가?"

청년의 입이 툭 떨어졌다. 그가 제가 들은 것은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지금 뭐라고...?"

"블랙스타, 그놈 말이야."

"...!"

청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가 충격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그, 그걸 도련님이 어떻게...."

블랙스타.

이 마구간에서 아무도 모르게 몰래 키우던 말의 이름.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는 말의 형태를 한 몬스터의 종류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마구간의 책임자인 벤이 국경에서 돌아오는 길.

그는 숲 어귀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망아지를 발견했다.

다 자란 크기가 아님에도 전신에 탄탄하게 들이찬 근육, 밤하늘처럼 새카만 몸뚱이와 별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까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외모요, 도통 잊기 힘든 눈빛의 생물이었다.

벤은 녀석이 몬스터, '스크넬'임을 깨달았다.

엄청난 속도와 뛰어난 지구력으로 결코 인간에게 곁을 내준 적이 없다는 희귀한 개체.

늘 군마를 키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그는 생각했다.

'잘 키워서 교배해볼 수 있지 않을까?'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2)

벤은 고민 끝에 녀석을 데려와 '블랙스타'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블랙스타를 돌보았다.

과연 블랙스타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녀석의 성장 속도는 다른 말보다 2배는 빨랐으며, 거마(巨馬)로 유명한 품종을 훨씬 압도하는 우람한 덩치로 자라났다.

그때만 해도 벤은 녀석을 군마로 만들 생각, 혹은 교배하여 좋은 씨를 받아낼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문제는 녀석이 본색을 드러냈을 때.'

블랙스타의 성격은 감히 '사납다.'라는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녀석은 몹시도 호전적이었으며, 포악했고, '아무튼 성질이 더러웠지.'

블랙스타는 주변의 말을 괴롭히다 못해 물어뜯으려 들었다. 주는 여물을 죄다 물리고 강짜를 부렸다. 또한 저를 주워 돌봐준 이를 무시하고 쉴새 없이 반항했다.

'잠깐.'

나는 묘한 기시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꼭, 아벨을 묘사하는 것 같잖아?'

...말과 비교당하니 기분이 좀 그렇군.

아무튼, 벤은 그제야 녀석을 군마로 키우겠다는 계획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미 다 자란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마구간에 없었다. 또 감히 몬스터를 데려와 길렀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도 없었다.

결국, 블랙스타를 단단한 철창 속에 가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굶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를 주었다.

그렇게 갇혀 있던 블랙스타는 아벨이 오베스트 영지를 무너뜨린 날, 겨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번엔 다른 방법으로 자유를 얻게 될 테지.'

나는 녀석을 내 운송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녀석의 속도, 호전성 등은 내가 그리고 있는 계획에 꼭 필요한 열쇠였다.

"후후."

블랙스타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성격이 고약한 녀석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그런 녀석을 굴복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거지만.

"반응을 보니 맞나 보군."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를 그리자, 청년이 뒤늦게 제 입을 막았다.

"어, 어어어."

그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언어 능력을 잃어버렸다.

'블랙스타의 존재를 내가 알고 있으니 경악스럽겠지.'

이 사실이 디에고 영주에게 알려진다면 그는 물론이고 벤마저 처벌을 받을 것이다. 단지 마구간 일을 그만두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고.

"으, 으어어."

청년은 온갖 상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듯했다. 내가 그 상상을 실현시킬 생각이 전혀 없는 데도.

"이봐."

나는 보다못해 청년의 어깨를 툭 쳤다. 청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숙였다.

"아, 으. 죄송합니다."

"됐고, 그래서 놈은 어디 있지?"

"예?"

청년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몰래 몬스터를 키운 것에 대한 질책이 없자 당황한 듯했다.

"어... 지금요?"

"그래. 안내해."

청년은 그제야 내 낯에 미미하게 감도는 흥미와 호기심을 읽어냈다.

"그, 그러니까!"

청년의 낯에 급격히 화색이 돌았다. 내 비위를 잘 맞추면, 어쩌면 처벌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녀석은 마구간 안쪽에...."

그러다 뭔가를 생각했는지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그런데 그 녀석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닙니다. 저도 그래서 벤 영감님이 없을 땐 결코 우리를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래?"

나는 픽 웃으며 바로 돌아섰다.

"그럼 지금 당장 나가야겠네. 그리고 이 목마장에 금지된...."

"아아아 아닙니다!"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와 내 팔을 붙잡았다. 결국 그는 울며 겨자먹기로 나를 이끌 수밖에 없었다.

"여, 여깁니다."

그가 안내한 곳은 마구간의 가장 안쪽 깊은 곳이었다.

"으으, 잠시만요."

청년이 낑낑대면서 철문의 잠금장치를 들어 올리고, 팔을 부들부들 떨며 양쪽 문을 열어젖혔다.

'퍽 단단히도 막아두었군.'

끼이익-

철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널따란 내부가 드러났다.

"호오."

나는 탄성을 흘리며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푸르르."

안쪽에는 척 보기에도 위용이 남다른 말이 서 있었다.

새카만 비단 같은 몸뚱이와 탐스럽게 흩날리는 갈기가 퍽 멋진 녀석이었다. 금빛 안광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였다.

문제는 녀석의 얼굴에 쇠로 만든 고삐, 그리고 몸이 쇠사슬로 묶여 있다는 점이었다.

'쇠사슬을... 네 개나?'

고삐뿐만 아니라 안장에도 연결해서 말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해둔 것이다.

'이거 완전 괴물 취급인데.'

물론, 녀석의 정체와 능력치를 생각하면 괴물이 맞긴 하지만.

"저게 블랙스타로군."

나는 피식 웃으면서 한 걸음 내디뎠다.

"도, 도련님?!"

청년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막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녀석은 사람을 막 물려고...."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물...려고 하는데? 어라?"

블랙스타는 자신을 여기 가둬버린 인간을 몹시도 증오했다. 인간을 볼 때마다 제 성질을 못 이기고 길길이 날뛰곤 했다.

때문에 벤은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멀리서 장대로 겨우겨우 먹이를 줘야 했다.

하지만.

"...."

블랙스타는 날뛰기는커녕 얌전히 서 있기만 했다.

녀석의 금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꼭 나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

"호오."

몬스터 주제에 제법인데.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일단 나를 보고 겁에 질려 주저앉지 않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저 영민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상대방을 파악하기 위해 바삐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 역시 나를 태우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으로 하겠어."

"예?"

청년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흔들림 없는 어조로 다시 못박듯이 말했다.

"이 녀석을 타겠다고."

겨우 내 말을 이해한 청년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브… 브… 블랙스타를요?"

"그래."

"하지만 저 녀석을 타려 했다간...."

청년의 불안한 시선이 내 팔을 스쳤다.

"장정 넷이 달려들어도 못 이길 녀석입니다. 게다가 도련님은 팔까지 다치셨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저 쇠사슬이나 풀어."

"도련님,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물론 저 녀석을 몰래 키운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다치시면 저희는 더 경을 치르게 될...."

쉴새 없이 쏟아지던 청년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내 표정을 보곤, 결국 체념 어린 낯을 했다.

"자물쇠 열쇠는 벤 영감님이 갖고 가셨습니다...."

"그래?"

나는 벽에 단단히 고정된 쇠사슬을 붙잡았다. 힘을 주어 손목을 비틀자,

빠각!

쇠사슬이 그대로 뜯겨나갔다.

"헉!"

청년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러면 되지?"

나는 중얼거리며 나머지 세 개의 쇠사슬을 마저 뜯어냈다. 조각난 쇠사슬들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쿵, 쿵.

그러는 동안 블랙스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찰그랑!

마지막 쇠사슬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블랙스타가 고개를 한번 갸우뚱했다.

"푸르릉."

일반 말들보다 훨씬 무겁고 낮은 울음소리였다. 듣는 순간 찌르르 고막이 울리는 것이, 확실히 평범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릉."

블랙스타가 다리를 들어 바닥을 한 번 굴렀다.

쿵.

단단한 발굽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는, 몹시 위협적이었다.

"어, 어어? 설마?"

청년이 손가락으로 블랙스타를 가리켰다.

"푸릉."

블랙스타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돌리고, 다리를 가볍게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건 어떻게 보아도,

'준비운동?'

그리고, 블랙스타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도, 도련님!"

청년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튀어 나가기 직전의 준비 자세를 취한 블랙스타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하세요!"

다음 순간, 블랙스타의 몸이 내게로 돌진했다.

"으아악!"

청년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다음에 일어난 참상을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호오."

나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블랙스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흡족한 미소가 입가를 스쳤다.

지금 청년의 시야에선 블랙스타가 마치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정도로 블랙스타의 순간적인 가속 능력, 순식간에 도달한 최고 속력은 굉장한 수준이었다.

"마음에 들어."

특히, 나에게 단단히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 그 눈동자가.

입가를 때리는 쇠사슬도, 몸에 거추장스럽게 달라붙는 쇠사슬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목표만을 향하는 올곧은 그 시선이,

"아주 좋아."

정말 마음에 들었다.

촤악!

나는 씩 웃으며 오른팔에 붙어있던 부목을 잡아 뜯었다. 동시에 몸을 틀어 블랙스타의 돌진을 피해냈다.

후웅!

간발의 차이로 블랙스타가 내 옆으로 비껴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지나가는 순간 공기가 세차게 진동했다.

"푸릉!"

블랙스타는 곧바로 제동을 걸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뒤로 돌아 다시 나를 직시했다.

"푸르릉."

녀석의 콧잔등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녀석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인간 주제에 제법인데?'

나는 키득 웃으며 녀석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와라.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고."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블랙스타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녀석이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푸릉!"

기어코 이 인간을 들이박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울음소리였다.

나는 일부러 블랙스타가 코앞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녀석이 지척까지 접근한 순간,

까랑!

녀석의 머리 양옆에서 덜렁거리는 쇠사슬을 붙잡았다.

"-!"

블랙스타의 몸이 흠칫 멈추었다. 녀석은 급히 머리를 잡아채었지만 내 억센 손아귀 힘을 이기진 못했다.

"푸르릉!"

블랙스타가 분노 어린 외침과 함께 앞발을 들어 올렸다. 당장 나를 찍어누르려는 시도였겠지만,

"어딜!"

나는 녀석의 옆에 바짝 붙어 발길질을 피했다. 그리고 녀석의 몸을 박차고 올라 그 위에 올라탔다.

"세상에!"

곡예와도 같은 놀라운 움직임에, 뒤에서 청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비명이 들리지 않자 손을 치우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푸르르릉!"

블랙스타가 폭풍과도 같은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녀석은 온몸을 마구 뒤틀며 나를 떨어뜨리려고 애썼다.

일반적인 기수라면 아마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그 위에서 낙마했을 것이다.

"흠!"

하지만 나는 녀석의 머리에 연결된 쇠사슬을 붙잡고 꿋꿋이 버텨냈다.

"푸르륵!"

상황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블랙스타의 콧구멍에서 김이 뿜어져 나왔다.

"푸륵, 푸르륵!"

녀석은 급기야 뒷다리를 펄쩍펄쩍 들었다가 놓으며 말 그대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녀석의 반항은 제법 거셌다. 그리고 녀석이 그럴수록, 나의 도전욕은지지 않고 불타올랐다.

"한번 해 보자 이거지?"

나는 쇠사슬을 붙들고 있던 한 손을 놓았다.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리는 녀석의 몸 위에서 하기엔 퍽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손을 옆으로 휘저었다.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면서.

"찾았다."

손에 쇠사슬 끝이 잡혔다. 아까 녀석의 몸을 벽에 고정했던 두 개의 쇠사슬 중 하나였다.

블랙스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푸륵, 푸륵!"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는 눈에 불을 켰다.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