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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

"...다시 말해 보게."

늙수그레한 음성에 남자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다시 말해 보라는 말은, 정말로 말뜻을 이해 못 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들은 말이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네 목숨을 왜 살려두어야 하는지 말해 보라는 질책이었다.

"...죄송합니다, 로웰님."

남자는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쿵.

땅에 이마를 한 번 박은 뒤 절절하게 외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 상황을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습이라."

로웰은 의자를 한 바퀴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이, 수습 가능한 상황이긴 한가?"

"...."

"운영하던 비밀 경매장이 제국군에게 탈탈 털리고, 심지어 그 주동자가 비올렛 제1황녀이며, 고가치 상품들을 잃은 이 상황이?"

서늘한 음성이 칼날처럼 몸을 쑤시는 것 같았다. 남자는 땅바닥에 머리를 댄 채 이를 악물었다.

"...죄송합니다."

로웰은 남자를 쏘아보다가 눈을 감았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올 정도로, 그는 깊이 분노하고 있었다.

"허...."

로웰의 눈가가 피로감으로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제국군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흔적을 지우는 데만 꼬박 밤을 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밀 경매에 참석한 귀족들의 명단을 손에 넣은 비올렛 황녀가 미쳐 날뛰는 탓이었다. 귀족들은 그야말로 수확철 옥수수 털 듯이 쓸려나가고 있었다.

혹자는 이번 일이 진정한 의미의 수확제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다시 귀족들과의 거래 경로를 확보하고, 신뢰를 심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소모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골이 다 아팠다.

"...에단은 요새 왜 이렇게 조용한가?"

로웰은 한참 만에 다시 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쥐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어 올렸다.

"저, 사실 그게...."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 말해라."

로웰이 다그치자,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며칠 전부터 에단 님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뭐라고?"

"급하게 인력을 차출해 나가신 것까진 파악했는데, 그 후로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로웰의 무시무시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를 계속했다.

"사람을 풀어 찾고 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

"대신, 수도 외각에서 거점으로 활용하던 창고에서 수상쩍은 시체들을 발견했습니다."

남자가 꺼림칙한 말투로 말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 사용하던 곳인데, 몇십 년은 된 듯한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경위를 파악하는 중입니다."

"-!"

로웰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시체들 꼴이 어땠느냐?"

"저, 그게."

남자는 로웰의 기세에 짓눌린 채 더듬더듬 말했다.

"대부분 몸의 한 두군데가 절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막에서 절인 것처럼 시커멓게 타버렸습니다. 몇몇 것은 벌써 뼈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쾅!

로웰은 기어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말았다.

"에단 이 어리석은 놈이...."

그는 몇몇 상황만 듣고도 정황을 유추해냈다.

에단이 그 새카만 검을 쓰는 자의 행적을 발견하고, 놈을 치러갔다가 당했다는 사실을.

'그 놈이 에단까지 죽였다고?'

실력이 대단할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설마 에단까지 이길 줄은 몰랐다.

에단은 로웰이 손에 꼽는 강자이자, 직접 길러낸 수제자이기도 했다.

"왜 보고를 않고...."

로웰은 가슴 깊숙이부터 치미는 탄식을 삼켜냈다.

에단이 어떤 생각으로 급히 달려갔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명줄을 재촉하고 말았지만.

"허...."

로웰은 연신 한숨을 흘려댔다. 그 또한 다른 일로 머릿 속이 복잡했다.

'어서 주인님께 보고드려야 하는데.'

아벨 킨드리얼의 뒤를 캐는 일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얼굴을 비치는 것은 보았으나, 그를 추적하는 데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꼭 알고 따돌리는 것처럼....'

이렇게 신출귀몰한 인물은 처음이었다. 따로 알려진 거주지가 없다는 것이 더욱 조사를 더디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로웰은 실로 오랜만에 입에 잘 담지 않았던 욕설을 짓씹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책상에 놓인 다른 서류를 향했다.

'푸른 진주 및 붉은 산호 수급량.'

이와 같은 제목으로 시작하는 긴 서류의 핵심은 간단했다.

수드 영지의 대표 특산품 수급량이 기이할 정도로 급락했다는 것.

이는 곧 마레 길드, 더 나아가 아르단테 가문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채굴하는 인원 쪽에서 빼돌리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유통 과정에 문제라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태양의 주변으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뀐 세법으로 인해 타격이 크건만.'

미간을 잔뜩 모은 채 서류를 노려보던 로웰의 귓가에,

똑똑.

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웰님, 수드 영지로부터 온 급보입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조직원이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그것을 펼쳐 읽은 로웰이 침음을 흘렸다.

"이것은...."

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님을 만나 뵈어야겠다."

문고리를 잡는 로웰의 낯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 ❖ ❖

며칠 전, 오베스트 영지.

"허, 참."

디에고는 집무실에 앉아 영지에 온 공문을 읽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진 건가?"

하지만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공문의 글자는 그대로였다.

[...하여, 앞으로의 세금은 비율제로 산정한다. 각 영지의 수입과 지출 항목은 다음과 같다. 수입은 영지의 총....]

디에고는 눈을 끔벅거리며 공문의 비율 공식에 숫자를 기입해 보았다.

계산이 틀리거나, 힘 조절을 잘못해 잉크가 튈 때마다 몬스터를 잡을 때 내뱉던 욕설을 써 가면서.

"...이럴 수가."

마침내 계산을 끝낸 후, 디에고는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세금을...이것밖에 안 낸다고?"

혹시 계산을 잘못 한 건가 싶어 한번 더, 그러고도 의심스러워 또 해보았다. 하지만 약간의 금액 차이만 있을 뿐, 느껴지는 바는 그대로였다.

"맙소사.... 이게 어찌 된 일인고?"

디에고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의자 위로 몸을 기댔다.

지난 며칠간 세금 문제로 골머리를 썩혔는데, 이게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그간 위태롭게 흔들렸던 영지 운영에도 숨통이 트일 듯했다.

"아니, 이런 혁신적인 방안을 누가 제안한 거지?"

일단 그 고집불통 황제나 카를로는 아닐 것 같았다. 베니퍼 영주도 그럴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 미켈 콘첼라레가?"

디에고는 헛다리를 거하게 짚어가며 다음 문서를 꺼내 들었다. 공문에 첨부된 회의록 전문이었다.

"-?!"

회의록을 일던 디에고의 눈이 터질 듯이 튀어나왔다.

"아니, 아벨 이놈이 뭘 어쩌고 저쨌다고?"

Chapter 21. 미래를 예비한 포석을 깔아둔다. (2)

놀랍게도, 회의록엔 이번 회의에서 아벨이 뭐라고 말을 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회의 후반에 영주들을 폭격한 내용은 다소 축소되었지만.

"이게 무슨...."

회의록을 다 읽은 디에고는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아는 아벨 킨드리얼이 두 명인가? 동명이인?"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뿐이었다.

옛날부터 제 아들놈이 말을 참 잘하며-안 좋은 방향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재주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처음 나간 회의에서 이걸 다 했다고?"

풀리지 않던 의문은, 몇 시간 뒤 하인이 소식을 전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아벨이 없다고?"

시중 없이 홀로 석찬을 들던 디에고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왜 필립과 요나스만 왔다는 게야?"

하인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두 분만 안으로 모셨습니다."

"바로 들어오라고 하게."

잠시 기다리자, 지저분한 옷을 갈아입은 필립과 요나스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

디에고는 그들을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아니, 필립 자네. 안색이 왜 그런가? 거의 반 죽어가는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필립이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 옆의 요나스는 상태가 더 심각했다.

"자네 이마에 그 혹은 무엇인가? 오다가 어디 부딪히기라도 한 게야?"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졌습니다."

대답들이 석연치 않았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 더 궁금한 사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벨은?"

디에고의 질문에 필립과 요나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알게 모르게 눈싸움이 벌어지고, 거기서 패배한 필립이 품에서 무언가를 꾸물꾸물 꺼냈다.

"아벨 도련님께서 이 서신을...."

디에고는 필립이 내미는 편지를 확 낚아챘다. 대충 봉투를 잡아 뜯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

편지를 읽는 디에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탁.

편지를 소리 나게 접은 뒤, 디에고가 필립과 요나스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 보게."

또다시 소리 없는 눈치싸움이 벌어지고, 또 패배한 필립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

도적에게 붙잡혔다는 이야기는 쏙 빠진 요약된 이야기가 디에고에게 전달되었다.

"아니, 그럼...."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디에고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번 회의 결과가, 정말 아벨의 작품이다 이 말인가?"

"예에, 그렇습니다."

"허어, 참."

평생 속만 썩이던 이 천덕꾸러기 아들놈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디에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공문과 편지의 내용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이게 진짜란 말인가?"

아벨이 인장을 훔쳐 몰래 수도로 갈 때만 해도, 디에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었다.

하지만 막상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눈에 보이니,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게 느껴졌다.

"험, 험. 이 녀석이, 참."

게다가 편지 하단의,

[추신. 카를로 영주를 놀려먹는 건 꽤 재밌었습니다.]

라는 문장이 기분을 한층 좋게 만들었다. 그 재수 없는 카를로에게 한 방 먹여줬다는 사실이 못내 기꺼웠다.

아무래도 아벨이 돌아오면 자세히 이야기를 해 봐야할 듯 싶었다.

"그래서 아벨은 언제 돌아온다는 겐가?"

디에고의 질문에 필립이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자세히 말씀을 안 해주셔서."

"그럼 영주의 인장은?"

필립의 낯이 새파랗게 질리고, 요나스가 흠칫 자세를 바로 했다.

"...자네, 설마?"

디에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필립이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숙였다.

빠각!

디에고가 쥐고 있던 포크가 두 동강 났다.

"아벨, 이놈의 자식을 진짜...."

식탁 위로 디에고의 깊고 진한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 ❖ ❖

그리고 현재. 비토리아 상단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내 집무실.

"잘 되어가고 있군."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서류를 빠르게 훑으며 결재했다.

비토리아 상단의 눈부신 등장을 위한 문서들이었다. 최고급 자재와 최고급 보석들이 아낌없이 투여되는.

비인간적인 처리 속도에 곁에 서 있던 엘리체가 혀를 내둘렀다.

"주인님이 일하시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하지? 나도 알아."

자신만만한 대꾸에 엘리체가 베시시 웃었다.

크루델레 병이 나은 이후로 그녀는 웃음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고 그녀가 웃을 때면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곤 했다.

"인기가 많던데."

"...설마요. 착각하신 겁니다."

엘리체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업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엘리체에게 반해 고백했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오곤 했다.

그 덕분에 덱스터와 윌리엄은 날이면 날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녀 주변을 감시해야 했다.

"급한 건 대충 처리된 것 같군."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쿵 찍은 뒤 내려놓았다. 엘리체가 서류들을 집어 들며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어제 일로 다들 떠들썩하더군요."

"무슨 일?"

모르는 척 반문하자 엘리체가 못 말리겠다는 듯 풋 웃었다.

"어제 오후 내내 비올렛 황녀님과 함께 계신 분이 주인님이신데, 제가 모르겠습니까."

엘리체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서류들을 가려내고 정돈했다.

"어제 비밀 경매에 참여했던 상당수의 고위 귀족이 비올렛 황녀에게 고발당했다고 합니다."

"음."

"그중에 바네스 백작 부인도 있다던데...."

엘리체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제 친부께서 당분간 바빠지실 것 같더군요."

친부를 발음하는 그녀의 음성은 그저 싸늘하기만 했다.

"또한 그 경매를 누가 주관했는지도 색출해 내느라, 제국군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호오."

"마레 길드도 참 안 됐습니다. 곧 더한 재앙이 찾아들 텐데 말입니다."

"그런 것 치곤 동정하는 표정이 아닌데?"

내 지적에도 엘리체는 전혀 타격 없는 얼굴이었다.

"그들의 모든 수족을 다 끊고, 머리통을 잘라내도 제겐 부족하답니다."

제 나이를 되찾은 아름다운 얼굴이 냉혹하게 빛났다. 이윽고 엘리체가 감정을 거둬내곤 조용히 말했다.

"안쪽 방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에 쭉 늘어선 방들 중 한 곳 앞에서 잭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주인님!"

나를 발견한 잭이 울상을 지었다.

"뭐하냐."

"식사를 가져왔는데 문을 안 열어줘요."

잭의 들고 있는 쟁반 위에 야채수프와 부드러운 빵 등이 올려져 있었다.

"줘 봐."

쟁반을 받아든 뒤 문을 두들겼다.

똑똑.

"나다."

잭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들어오세요."

에카로트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헐...."

잭의 얼굴에 배신감이 와락 떠올랐다.

"내가 열 번 넘게 부를 때는 대답도 안 해주더니!"

"너랑 내가 같냐."

잭의 이마를 살짝 튕긴 뒤 손짓했다.

"고생했어. 그만 가라."

"네에."

잭이 입을 비죽 내밀며 돌아섰다. 집무실로 쪼르르 달려가는 걸 보니 엘리체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려는 모양이었다.

달칵.

문고리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푹신한 침대와 소파 등 가구를 들여놓고, 바닥에는 두툼한 러그를 깔았다.

하지만 에카로트의 모습은 그 중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에카로트는 딱딱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작고 가느다란 등이 슬쩍 움직이더니, 소년의 시무룩한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오셨어요."

서운한 감정을 다 감추지 못한 말투였다.

"삐졌냐?"

피식 웃으며 에카로트에게 다가갔다. 에카로트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곤 대꾸했다.

"아닌데요."

"삐진 거 맞잖아."

"...어젯밤부터 여기다 가둬두셨잖아요."

"가둬두긴. 내가 밖에서 문을 잠그길 했어, 굶기길 했어, 걸레를 입혀놨어?"

조목조목 짚으며 말하자 에카로트는 시럽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네가 원한다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시도를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

"그리고 가둬둔 게 아니라, 쉬게 해 준 거지. 내 말이 틀려?"

"...아뇨, 맞아요."

에카로트는 결국 투정을 멈추고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먹어라. 몸에 잘 받는 거로 준비했으니까."

그는 내가 내민 음식을 보고도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어제부터 굶은 탓에 많이 허기졌을 텐데도.

'의심이 많군.'

아예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직접 빵을 한 조각 뜯어 입에 넣고, 스프까지 한 입 먹었다.

"자, 됐지? 뭐 이상한 거 안 탔다."

"-!"

내 행동에 에카로트가 눈을 크게 떴다. 이어서 에카로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죄송해요."

"아냐, 의심하는 건 좋은 습관이야."

노예상에 끌려가는 과정에서, 음식에 대한 의심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킥킥 웃으며 쟁반을 툭 쳤다.

"확인했으면 얼른 먹어라."

에카로트는 그제야 쟁반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음식을 흡입했다.

"...체하겠다."

보고 있던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혹시 나도 저렇게 먹었나?'

레퀴엠 때문에 굶주렸던 시절의 내가 저랬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냠냠, 쩝.

제 몸에 맞는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에카로트는 어제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날 때부터 귀족 가문에서 자란 듯한 고귀함이 풍기기까지 했다.

꿀꺽꿀꺽.

저 걸신들린 듯한 모습만 아니라면 말이다.

에카로트가 배를 채울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사람은 배가 부른 상태에서 훨씬 부드러워지는 법이니까.

탁.

마침내 에카로트가 다 핥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완전히 깨끗해진 접시를 힐끗 보곤 말했다.

"다 먹었으면 가지."

"어디로요?"

"네가 앞으로 지낼 곳."

에카로트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저 여기서 지내는 게 아니에요?"

"응, 아니야."

히죽 웃으며 손을 튕겼다.

"네 재능을 피울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제국 내 유일한 마법사들의 거주지, 마법사의 탑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 ❖ ❖

"제가 마법사라고요?"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 에카로트는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래."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못 느꼈어? 주변의 공기가 네게 몰려드는 느낌."

"아, 그거요."

에카로트가 인상을 한껏 찌푸리더니 중얼거렸다.

"...지금은 안 그러는데요. 아무 것도 안 느껴져요."

"나도 정확힌 몰라. 겪어본 적 없거든."

"그럼 어떻게 아시는데요?"

"들은 게 있어서."

에카로트는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몸을 들썩였지만, 내가 시선을 한 번 주자 얌전해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 수 있을 거다."

"네."

에카로트는 이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조용한 걸 보니 제 딴에 그 힘을 다시 써보겠다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어려울 텐데.'

어제의 일은 격해진 감정으로 인해 찔리듯이 튀어나온, 무의식적 반응일 뿐이었다.

보통은 그 힘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금방 배우겠지. 원작에서 워낙 천재로 칭송이 자자했던 녀석이니.'

제대로 된 훈련을 받기만 한다면 녀석의 재능이 개화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문제는 마법사의 탑, 줄여서 마탑에 순순히 들어갈 수 있느냐인데....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에카로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긴... 탑이 아닌데요?"

그의 말대로, 마법사의 탑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1층짜리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마법사의 집, 마법사의 숙소, 라고 하면 이상하잖아."

피식 웃으며 녀석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

"네!"

건물 앞의 경비초소엔 경비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에카로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저 사람도 마법사에요?"

"아니, 그냥 일반인."

"마법사가 아닌데 여기 있어요?"

"딱 저 일만 하니까. 애초에 별로 할 일도 없고."

속삭이며 경비원 앞에 다다랐다. 그는 무료한 듯 하품을 한 번 하곤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쇼? 방문 목적은?"

마법사 집단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데다, 대부분 성격이 까다롭고 예민하다. 그래서 귀족이고 뭐고, 타인의 방문 자체를 꺼렸다.

그런 그들의 견고한 문을 열어 젖히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음식 배달 왔습니다."

딸랑딸랑, 들고 온 바구니를 흔들어 보였다.

'밥은 못 참지.'

속으로 히죽 웃으면서.

Chapter 21. 미래를 예비한 포석을 깔아둔다. (3)

마법사의 탑 가장 안쪽, 마탑주의 방.

나와 에카로트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탑주와 마주 앉았다. 바구니에서 꺼내 탁자에 올려둔 음식이 식어가고 있었다.

"왜 안 드십니까? 일부러 좋아하시는 것으로 골라왔는데."

"...."

내 질문에 마탑주, 미드넬은 침묵했다. 눈 감은 얼굴을 우리 쪽으로 향한 채로.

미드넬 하이스트.

마법사의 탑을 설립한, 제국 내 최초이자 최고의 마법사.

그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으나, 강대한 마력을 품고 태어났다.

'원작에서 묘사한 거랑 똑같네.'

남자치고 긴 황갈색의 머리카락과 이지적인 낯. 입가의 미세한 주름이 그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마른 체격이 언뜻 유약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몇 초 만에 이 주변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남자니까.'

최강의 마법사다운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얕은 개울물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발조차 닿지 않는 호수와 같은. 투명하고 짙은 생명력이.

"내가 이것들을 좋아한다는 건 어찌 알았소?"

미드넬이 손가락을 들어 음식들을 가리켰다.

여러 재료를 넣고 다진 완자, 야채들을 갈아 만든 스프, 부드럽게 졸인 생선살 등. 씹지 않고도 바로 넘길 수 있는 형태의 음식들이었다.

"마탑주님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

미드넬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마탑 소속의 마법사나 알 수 있는 극비 정보긴 했다.

마탑주 미드넬이 밥 먹는 시간을 귀찮아해, 대충 입에 흘려 넣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한다는 것은.

"이런 잔꾀를 쓰다니...."

미드넬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에도 끄떡없이 웃었다.

"이 방법이 아니라면, 공사다망하신 마탑주님을 어찌 뵙겠습니까."

"다음부턴 이러지 마시오. 몹시 불쾌하군."

"알겠습니다."

흔쾌한 대답엔 확신이 있었다.

먼 후일에, 미드넬은 발 벗고 뛰쳐나와 나를 반기게 될 테니까.

"일단 그대의 이름부터 밝히시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미드넬의 얼굴엔 별 변화가 없었다.

"...귀족이었군."

태연한 말투로 그리 중얼거릴 뿐.

그 속에는 마땅히 예를 갖춰야겠다던가, 깜짝 놀랐다던가 하는 감정은 없었다.

"따로 예를 취하진 않겠소. 황제가 온다고 해도 내 태도는 같을 것이니."

무심한 말투에는 그만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사실, 테오도어 황제와 미드넬의 관계를 군신 관계라 보긴 어려웠다.

'굳이 표현하자면 협력 관계겠지.'

서로를 우호적으로 대하며, 존중의 뜻으로 수도에 그들의 영역을 만들어주었을 뿐.

마법사 집단과 척을 지느니, 이쪽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씩 웃으며 한 대답에 더 놀란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네? 귀족이요?"

에카로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귀족이셨어요?"

"그럼 뭔줄 알았냐?"

"음...."

에카로트의 반응을 보니 대답을 듣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달라질 건 없어. 네게 대접받을 것도 딱히 없고."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아벨."

흔쾌히 떨어진 대꾸에 에카로트의 눈이 흠칫 떨렸다.

"그건, 좀...."

"너 편한 대로 해."

"...."

에카로트가 고개를 푹 수그려 버렸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표정을 감추고 싶은 눈치였다.

우리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미드넬이 나섰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지. 사람 배달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턱짓으로 에카로트를 가리켰다.

"말 그대로입니다. 마탑주님께서 찾고 계시던 사람을 데려왔거든요."

"...내가 찾고 있던?"

미드넬의 음성에 의혹이 서렸다.

"네, 이 소년, 에카로트를 마탑에 맡기고자 합니다."

에카로트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청천벽력이라는 듯 에카로트의 낯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날 여기 버리고 가겠다는 거에요?"

"버리는 게 아니라 맡기는 건데."

"그게 그거잖아요!"

드르륵.

에카로트가 의자를 밀어젖히며 벌떡 일어섰다. 핏기 없는 얼굴에 불안감이 들불처럼 번졌다.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날 데려간다고! 그게 여기다 처박아두는 거였어요?"

쿠구궁-

방 안의 물건들이 크게 진동했다. 탁자 위의 음식은 물론이고, 벽에 걸려 있던 옷과 책장마저도.

"허어."

미드넬의 낯빛이 변했다. 그가 놀랍다는 듯 에카로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쟁이!"

에카로트가 버럭 외쳤다.

그 순간부터, 주변의 물건들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진정하거라."

미드넬이 조용히 손을 뻗어 에카로트의 어깨를 쥐었다.

"여기서 이러는 것은 좋지 않아."

순간, 허공에 떠있던 물건들이 주춤 멈추었다. 미드넬이 에카로트에게 힘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

에카로트가 미드넬을 홱 돌아보았다. 곧이어 선명한 금안이 난폭하게 일그러졌다.

빠각-

탁자 한 귀퉁이가 우그러들었다. 잠시 멈춰 있었던 물건들이 더 빠르고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미드넬이 놀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에카로트가 자신의 제압을 떨쳐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듯했다.

"...."

미드넬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온순해 보이던 얼굴이 한순간에 냉정히 굳어버렸다.

"-윽."

에카로트가 작게 신음했다.

두 사람의 힘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분출하려는 자와 그것을 억누르려는 자와의 싸움이었다.

쿠구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미드넬의 집무실이 진동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방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에카로트."

내가 에카로트의 손을 감싸 쥐기 전까지는.

"-!"

에카로트가 흠칫 놀라 나를 보았다. 창백한 낯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쓸데없는 데다 힘쓰지 마."

에카로트의 이마와 콧잔등을 쓸어낸 뒤, 양손을 꽉 힘주어 잡았다.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뭐라 그랬지?"

"...."

"네 재능을 피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잖아. 그게 가능한 건 여기뿐이야."

에카로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축축히 젖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왜 나만 여기 두는 건데요?"

"...."

"못생긴 꼬맹이, 얼굴만 반반한 여자, 힘만 쓸줄 아는 무식한 남자들. 그런 사람들은 곁에 두면서."

비토리아 상단에 있는 녀석들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만한 소리였다.

"떽."

에카로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부여잡았다.

"싫으면 여기 남지 않아도 돼. 돌아가자."

에카로트의 얼굴에 확 화색이 돌았다가,

"대신 넌 평생 자신의 힘을 모르는 채 살아가겠지."

이어지는 말에 다시 꺼져버렸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타인까지 지킬 수 있는 그 힘을."

"...."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잖아?"

에카로트에게서 손을 떼며 말했다.

"멍청하고 약하면 당하기만 한다는 것을. 스스로를 잃고 끌려 다녀야만 한다는 것을."

녹아내린 황금이 범람하듯, 에카로트의 눈이 끓어올랐다가 식어 내리길 반복했다.

"네가 우습게 보는 그 사람들도 나름의 고난을 이겨내고 거기 있는 거야."

"...."

"네가 결정해. 선택은 네 몫이야."

에카로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알았어요."

침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잠잠해졌다.

달각, 탁. 덜컹.

허공에 떠올랐던 물건들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말 잘 들을게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에카로트는 목이 메는 듯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눈을 감는 순간,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를,"

"뭐가 불안한 건데?"

에카로트의 말을 가로막으며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턱 아래 고여 있는 눈물방울을 훔쳐내며 말했다.

"내가 널 여기 두고, 영원히 안 돌아올 것 같아?"

"...."

"그럴 거면 널 구해오지도 않았겠지."

물기에 젖은 속눈썹을 가볍게 쓸었다. 엄지 끝에 묻어난 수분을 문지르며 말했다.

"알겠어? 널 노예 삼으려고 데려온 게 아니라고."

"...."

"네 주인은 너야. 중심을 남에게 두지 마."

에카로트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주고, 힘을 주어 의자에 다시 앉혔다. 에카로트는 순순히 내게 몸을 맡겼다.

"어차피 난 당분간 수도를 떠나 있을 거야. 몇 달 후에나 돌아올 예정이고."

"...어디로 가시는데요?"

"북부로. 너 같은 꼬맹이가 얼어 죽기 딱 좋은 곳이지."

"...."

"나랑 같이 다니고 싶으면, 지금보다 강해지도록 해."

에카로트의 이마를 살짝 튕기며 씩 웃었다.

"밥 잘 먹고, 키도 좀 크고."

원작의 에카로트는 후에 장신의 미남이 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

미드넬은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에카로트의 기운을 잠재울 때는 나직히 탄성을 흘리기까지 했다.

"자, 그럼."

그런 미드넬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우리 꼬맹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미드넬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 아이는 어찌 찾았소?"

"우연이었죠."

철저하게 준비하여 맞닥뜨린 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하지 않은 아이인 듯하여, 그 아이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찾아왔습니다."

"...과연."

미드넬이 에카로트를 지긋이 응시했다.

"이런 자질은 처음 보았소. 여기 외에 저 아이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없을 테지."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그의 낯엔 갑작스러운 행운으로 인한 놀라움이 가득했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 거대한 진주를 덥석 안겨준 기분이겠지.

'다른 제자를 키울까 고민하던 차였을 테니.'

원작에서의 그는 이맘때쯤 꽤 골머리를 앓았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그에 반비례하는 인성의 1대 제자, 시에나 크루엘티 때문에.

시에나는 다음 마탑주 후보로 주목받았으나, 미드넬은 그녀가 만들어갈 미래를 의심했다. 그래서 그녀의 독주를 견제할 다른 제자를 찾았다.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심지를 갖고, 옳은 방향을 바라보는. 그러면서 범접할 수 없는 재능으로 타인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그게 바로 에카로트였지.'

카인과 함께 나타난 에카로트는 불꽃처럼 다음 마탑주 후보로 급부상했다. 거기에 카인이 폭포처럼 쏟아부어주는 재력은 에카로트를 향한 지지를 단단하게 굳혔다.

"받으십시오."

미드넬을 향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제가 이 아이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서약서입니다. 이 아이를 건드리는 것은 킨드리얼 가문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죠."

미드넬이 종이를 펼쳐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보는 것처럼 사물을 인식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의식주든, 필요한 연구 재료가 됐든 간에."

"...."

"아낌없이 지불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비용은 이곳-"

손가락으로 종이 하단의 한 곳을 가리켰다.

"-비토리아 상단에서 지불할 것입니다. 추가로 마법사의 탑에 막대한 후원금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탁.

미드넬이 종이를 소리 나게 접으며 나를 응시했다.

"마탑에 입성한다는 것은 한 가족이 된다는 의미와 같소."

바위처럼 단단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대가 그리 협박하지 않아도, 내가 이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협박이라니요."

히죽 웃으며 뒤쪽으로 몸을 물렸다.

"당부를 드린 것뿐입니다."

"그런 것 치곤 눈빛이 꽤 험악하던데."

"기분 탓이겠지요."

의자에 몸을 느슨히 기대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요."

Chapter 21. 미래를 예비한 포석을 깔아둔다. (4)

"...말해보시오."

미드넬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에카로트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은 숨겨주셨으면 합니다."

"...."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함입니다. 어떠신지요."

미드넬이 얼굴을 한결 편안하게 풀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내 그리하리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에카로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자, 이제 잠깐 헤어져 있을 시간이네."

"...."

에카로트가 나를 빤히 보더니 갑자기 내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엇."

뜻밖의 행동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손을 뻗었다.

툭툭.

에카로트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나이에 비해 참 왜소한, 날개뼈가 두드러지는 그곳을.

"잘 지내라. 아까 네가 뒷담한 사람들한테 자주 보러오라고 할게."

"...."

"혹시 나한테 연락하고 싶으면 그 사람들한테 부탁하면 돼."

맞닿은 따스한 체온 너머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만났을 땐,"

에카로트가 코를 한 번 훌쩍이곤 말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쭈, 이 녀석이?

싶었지만 이내 하하,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그러든지."

녀석과 나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니니까. 억지로 잡아둔다 해서 잡힐 녀석도 아니고 말이다.

에카로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열심히 배우고 있을게요."

"그래."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낄 수 있을 정도로 크면 된 거다. 알겠지?"

"...네."

에카로트는 반지를 두 손으로 조심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품 속에 넣었다.

"인사도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미드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섰다.

"배웅은 하지 않겠소. 그런 방식으로 들어오면서 기대한 건 아닐 테지."

"물론이죠."

고액 후원자가 되었다 한들 그의 태도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어떤 면에선 참으로 한결같은 남자였다. 그래서 더 믿음직스러운 거였지만.

"가자꾸나."

미드넬이 에카로트를 이끌고 방을 나섰다. 나 또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에카로트가 고개를 꾸벅한 뒤 점점 멀어졌다. 딸랑,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 돌아섰다.

돌아온 길을 되짚어 현관으로 향했다. 바로 나가 상단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

현관에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보곤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정말 놀랍군요. 레이디께서 이 이 마탑 소속의 마법사셨다니."

부드럽게 웃으며 상대를 바라보는 카인과,

"별것 아닌 재주일 뿐이에요."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여자 한 명.

'카인을 여기서 또 만난다고?'

우리 둘을 마주치게 하려는 모종의 힘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저 여자는 누구지? 카인이 마탑에 인맥이 있었나?'

에카로트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마탑과 인연을 맺게 되는 카인이었는데. 때문에 어제 만났을 때보다도 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별것 아닌 재주라니,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카인이 짐짓 놀란 척 너스레를 떨었다.

"마탑주님의 1대 제자라는 직함이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자가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녀는 카인이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자지러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눈치였다.

"것도 모르고 어제 실례를 범했군요. 감히 위대한 마법사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아니, 아니에요. 카인님이라면 괜찮아요."

여성이 손사래를 치며 베시시 웃었다.

"그냥 시에나라고 불러주세요."

쿵, 가슴에 무거운 돌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시에나라고?'

설마 내가 아는 그 시에나 크루엘티?

원작에서의 그녀는 에카로트에게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는 2인자 캐릭터였다.

그녀에 대한 묘사는 많지 않았다. 그저 어린 시절 부랑자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이후 강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뿐.

마법사의 재능은 결핍에 기인한다. 결핍의 구덩이가 깊고 넓을수록 더욱 강대한 마력을 다룰 수 있다.

시에나가 강력한 마법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왜 카인과 같이 있는 거지?'

이것은 원작에 없었던 전개였다. 내가 예상한 범주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시에나 양 같은 위대한 마법사를 건드리려고 했다니. 그놈들을 좀 더 엄하게 응징할 걸 그랬군요."

카인이 한숨 쉬듯 말을 흘리자, 시에나의 미소에 슬쩍 금이 갔다.

"아니에요. 제가 그때는 좀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어요."

듣고 있던 나는 기가 찰 뿐이었다. '그' 시에나가 당황해서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정황상 카인이 구해준 모양인데. 그래서 손을 쓰려다 만 건가?'

대충 둘의 상황을 짐작해보고 있던 중 문득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어제 축제에서 카인이 구하러 간 여자가?'

...이런 쓰벌.

주인공 카인의 어처구니 없는 행운에, 그리고 기가 막히도록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이 상황에.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났다.

"-아."

시에나가 나를 발견하곤 짧은 탄성을 흘렸다.

"왜...."

시에나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린 카인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어졌다.

"아벨."

그가 몸을 완전히 돌려 나를 보았다.

"또 너인가."

"내가 할 말인데, 그건."

지지 않고 대꾸하며 카인에게 다가갔다.

뚜벅, 뚜벅.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카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깎아낸 조각처럼 날카롭고, 한편으로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는.

아니, 정확히는 냉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마탑엔 무슨 볼일이지?"

나를 향해 날아드는 음성조차 북풍처럼 쌀쌀맞았다.

'...얼씨구?'

원작에서의 그는 한없이 너그럽고 관대하지만, 제 적이라고 판단한 이에게는 가차 없었다.

그것이 흔들리지 않고 한 방향을 바라보며, 올곧게 정의를 추구하는 그의 원동력이었다.

적을 상대할 때의 그 모습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카인의 모습이었다.

'그럼 이제 날 적으로 본다, 이건가.'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허탈한 웃음이 치밀었다.

'이제서야?'

그간 내가 해온 행동들이, 카인에겐 그저 약간 거슬리는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드래곤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 도마뱀처럼.

'이제서야.'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카인은 정작 그런 것들은 가볍게 넘기고, 자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맞선 후에야 나를 '대등한' 적으로 인정한다.

"...."

뱃속이 쥐어뜯기는 듯이 뒤틀렸다. 레퀴엠으로 인해 느꼈던 허기와 다른 통증.

자존심에 가해지는 타격은, 그간 내가 겪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고통스러웠다.

'...역시 난 네가 싫어.'

아니, 지금부로 더 싫어졌다. 역시 그와 나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그 감정을 감추지 않으며, 카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한 비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네가 알아서 뭐하게."

"...."

카인의 입가에 피식, 비웃음이 스쳤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었군."

카인이 팔짱을 느슨하게 끼곤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마탑과는 접점이 없을 네가 여기 있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내가...."

"말하기 싫으면 관둬. 나도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까."

카인이 몸을 홱 돌려 뒤에 서 있는 시에나를 보았다. 얼어붙어 있던 얼굴이 삽시간에 녹아내리며 봄처럼 따스한 미소를 자아냈다.

"제가 잠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시에나 양."

...이 새끼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는 새, 시에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전혀요. 뭐가 부끄러우시다는지 잘 모르겠는걸요."

그녀의 남청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다처럼 어둑한 빛깔 위로, 경계의 물결이 잔잔히 번졌다.

"이 사람은 누구죠?"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이라고 합니다."

"친우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물론."

그 말에 시에나는 곧장 나에 대한 관심을 접고 카인에게 집중했다. 경계의 물결이 가라앉고, 잔잔해진 눈동자 위로 선망의 감정이 번졌다.

'...이런 기분이었군.'

카인이 비올렛 황녀 앞에서 느꼈을 기분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기분이다.

"마탑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부디 자주 놀러 와 주세요."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마법사님들이 연구에 힘을 쏟느라 바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카인은 보란 듯이 나를 무시하며 시에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긴 하지만... 카인 님이라면 괜찮아요."

"정말 듣기 좋은 말이로군요. 게다가 귀한 선물까지 주시니, 뭐라고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귀가 쫑긋했다.

'뭐? 귀한 선물?'

대체 시에나가 뭘 준 거지?

"감사는 제가 해야 하는걸요. 그냥 마음 편히 받아주시면 돼요."

"시에나 양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인은 일부러 선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은 쏙 빼놓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마치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약 올리고 싶은 것처럼.

'재수 없는 자식.'

그렇게 카인이 가질 것을 빼앗거나 망가뜨리며, 그가 가질 수 없도록 애를 썼건만.

'또 이런 식이냐.'

어느 순간 튀어나온 행운들이 안배되있던 것처럼 자연스레 그에게 안겨든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마치 온 우주가 간절하게 카인의 성공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내가 실패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이지 역겹고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

차가운 얼굴로 카인과 시에나의 옆을 지나쳤다. 두 사람은 끝까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탁.

마탑의 문을 닫고 나오자,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처럼 호흡이 편안해졌다.

"...하."

카인과 시에나를 맞닥뜨린 후부터, 나도 모르게 숨이 조여든 모양이었다.

"후우...."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한결 쌀쌀해진 공기를 폐 안으로 힘껏 들이켰다.

점차 답답했던 속이 풀리고 바짝 당겨졌던 신경이 이완된다.

"...꼴사납네, 정말."

그동안 잘해왔으면서, 고작 하나의 변수가 등장한 것으로 이렇게 동요하다니.

정말 나답지 않았다.

"괜찮아."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질리 없었다. 내가 그동안 준비한 게 얼만데, 또 앞으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할 수 있어."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번쩍 떴다. 막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덜컥-

등 뒤에서 문이 열리고 카인이 걸어 나왔다.

"...."

카인은 나를 힐끗 보곤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그때였다.

"카인 도련님!"

젊은 남자 하인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이냐?"

"카를로 영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카인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아버지께서? 왜?"

"수드 영지에 뭔가 심각한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지금 돌아가실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뭐라고? 지금 말이냐?"

"예, 그러니 당장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카인이 우뚝 멈추어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나를 한 번 힐끗 보곤 몸을 돌렸다.

탁.

카인과 하인이 마차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장 출발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심각한 일이라면 역시 그건데."

덩그러니 남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벌써?"

카인이 수드 영지로 돌아가는 것은 오늘이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일주일 간 열리는 수확제가 모두 끝난 후에야, 영지에서 일어난 변고를 알아채고 급히 돌아간다.

거기서 여름의 검 카덴챠를 만나게 되고, 지니고 있던 냉기의 마정석 덕분에 카덴챠를 지배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번엔 마정석을 얻지 못했으니까,'

실패할 것이다. 실패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마치 카인이 기가 막힌 행운으로 인해 끝내 카덴챠의 주인이 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카덴챠는 레퀴엠 못지않게 혹독한 검이다. 그런 녀석을 마정석 없이 맨손으로 쥐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게다가....

"또 바뀌었어."

내가 알고 있던 원작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것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러다가 혹시...."

잔뜩 찡그린 눈으로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불안한 예감은, 다음날 현실이 되었다.

[급보: 북쪽 산맥에서 몬스터 대량 출몰. 민가 약탈 급증. 지원 요청.]

황실로 급히 휘갈겨 쓴 전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1)

"북부의 추위는 몹시도 혹렬하기에, 두꺼운 털가죽으로 된 옷을 입는 게 좋소. 천으로 된 옷을 입었다간 얼음 인형이 되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될 거요."

"식량은 어떤 종류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북부의 기후에서는 보존이 의미가 없소. 굳이 말린 걸 챙기지 않아도 되며 지방이 풍부한 고기들로 준비하는 게 좋소."

주변을 둘러보던 미켈이 천천히 입을 뗐다.

"질문은 이게 끝이오?"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을 뿐 더 이상 손을 들어 질문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불을 피우기 위한 연료를 넉넉히 챙기고. 구급품과 기타 물품도 잊지 않도록 하시오."

미켈이 눈을 한 번 느릿하게 감았다 뜬 뒤 마무리했다.

"북부가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니 말이오."

말을 마친 그가 테오도어 황제 쪽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미켈 영주가 말한 대로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서둘러서 이번 주 안에 마무리하도록."

"예, 폐하."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각 영지의 기사단이 모두 집결하는 대로,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다. 단...."

테오도어 황제의 시선이 한 자리를 향했다.

"수드 영지의 기사단은 다소 늦을 것 같군. 안 그런가?"

"황송합니다, 폐하."

카를로의 자리에 앉아 있던 대리인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영주님께서 되도록 빨리 일을 처리하신 후 바로 북부로 향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이번 토벌에 필요한 물자 일부를 아르단테 가문에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그가 제시한 물품의 양과 금액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테오도어 황제가 만족스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영지에 급한 일이 있다니 어쩔 수 없네만, 너무 늦지는 말아야 할 것이야."

그의 붉은 눈동자가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혹시 모르지. 수드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토벌전이 끝날지도?"

특히 마지막 단어를 말할 때, 테오도어 황제의 시선이 내게 길게 머물렀다.

"각 영지의 기사단들이 모두 참여하는 만큼, 두각을 드러내는 이가 있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시선 또한 황제를 따라 내게 모였다.

"그래도 그렇지 수드 기사단의 세력이 상당한데...."

"하지만 오베스트 기사단 아니오. 그 위명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지."

작은 수군거림이 귀를 간질였으나, 나는 무표정한 낯을 한 채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흠."

테오도어 황제가 의미 모를 미소를 흘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이것으로 임시 회의를 파하도록 하겠다."

그가 휘하 시종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 후에야 귀족들은 일어서서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연단에 굳은 듯이 서 있던 미켈이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다 바닥을 헛짚었는지 순간 휘청거렸다.

"조심-"

얼른 내가 팔을 뻗어 붙들어준 덕분에 어디 부딪히는 불상사는 면했다.

"-하십시오. 미켈 영주님."

"...고맙네."

미켈의 낯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수척해져 있었다. 급보를 받고 고작 며칠 만에 얼굴이 저리 상해버린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겠나. 북부에서 몬스터의 습격은 흔한 일이라네."

"하지만 이렇게 잦진 않았겠지요. 대량으로 출몰한 것도 처음이고요."

내 대꾸에 미켈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런 일로 영주님을 공격할 인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

미켈이 이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새로 긴 한숨이 흘러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딸이 가장 걱정이네."

"레아 양, 말씀이십니까."

"그래. 북부의 주민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고, 단결력 또한 높지. 우리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다네."

미켈의 눈빛이 한층 깊어지고 짙어졌다.

"그렇기에, 레아는 그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네. 본인이 더 괴로워하며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나서겠지."

"...."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어, 제 몸을 상하게 할까 몹시 두렵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야."

미켈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부디 내가 도착할 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렇다고 무작정 나 혼자 출발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미켈 영주님께서 선두에서 이끌어주셔야 나머지 인원이 노드 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지리 및 물품 보급 기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계시니까요."

그를 안심시키듯 천천히 말했다.

"함께 가야 피해를 입은 민가도 잘 수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이 다 맞네. 다 맞는데...."

미켈이 창밖으로 보이는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리 불안한 건지 모르겠군. 그저 늙은이의 기우일 뿐이면 좋겠네만."

미켈의 육감은 예민했다. 전례 없던 재난이 닥쳐오고 있음을 기민하게 알아채는 것을 보니.

"별일 없을 겁니다."

그리 속삭이며 미켈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사실, 나 또한 속이 그리 편하진 않았다.

'북부의 급보가 이렇게 빨리 날아들 리 없는데.'

몇몇 상황이 원작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카인이 카덴차를 얻은 후, 북부의 급보가 날아들어서 북부 토벌전이 시작되었었다.

내가 앞당긴 사건과, 예상보다 빨라진 상황들이 맞물려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중하게 움직여야겠어.'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2안, 3안의 방책을 준비해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네. 내 아벨 공자를 꼭 저택에 초대하고 싶었네만...."

미켈이 침울한 낯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보다시피, 상황이 이러하여 내 도통 정신이 없다네. 그러니 자네를 초대하지 않는다고 너무 섭섭해하진 말게."

"물론입니다. 온갖 행사마저 축소된 상황 아닙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군. 오베스트 영지에서도 기사단을 보내겠지? 이미 공문이 갔을 테니 말일세."

"아마 그럴 겁니다."

"누가 올지는 알고 있는가? 혹시?"

미켈의 눈동자가 옅은 기대를 품었으나,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께서 오실 가능성은 현저히 낮습니다."

"그래? 그럼 누가 올 것 같은가?"

"대충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만...."

내 입가로 쓴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 ❖ ❖

"요새 바빠 보이던데."

"잠잘 시간도 부족한 상황이에요. 지금도 겨우 짬을 낸 겁니다. 주인님이 오셨으니까요."

엘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뿌듯한 미소가 자리했다.

"비올렛 황녀님께서 그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몸에서 떼 놓질 않으신다더군요. 덕분에 홍보 효과가 어마어마합니다."

엘리체가 손을 들어 길게 쭉 늘어진 종이를 보여주었다.

"이게 전부 세공을 의뢰한 귀족들의 명단입니다. 장담컨대, 수도 귀족의 절반 이상이 멜리나 양의 커팅법에 관심을 갖고 있을 겁니다."

"유력한 가문들의 이름이 꽤 보이는군."

"네. 푸른 진주와 붉은 산호의 공급이 끊긴 바람에,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보석으로 눈길들을 돌리고 있습니다."

엘리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심지어 몇몇 귀족은 멜리나 양이 불러온 새로운 물결을 적극적으로 찬양하더군요. 이대로라면 아르단테 가문을 밀어내고 저희 상단이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러려고 시작한 일이니까."

호기로운 말투에 엘리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덕분에 요새 하루하루가 정말 즐겁습니다."

"어련하겠어."

픽 웃으며 손가락으로 엘리체의 귓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멜리나 특유의 세공법이 두드러지는 작은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이건...."

엘리체가 쑥스러워하며 귓가를 매만졌다.

"그냥 홍보 수단입니다. 상단의 주인이 착용하고 있으면 노출이 잘 되니까요."

"글쎄. 멜리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든 것 같던데. 그 녀석, 공짜로 자기 작품을 잘 안 내주거든."

잭이나 멜리나도 그렇고, 엘리체에겐 주변의 사람을 잘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믿고 떠날 수 있겠군."

내 한 마디에 엘리체의 낯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북부의 몬스터들은 털이 빳빳하고 두꺼운 데다가, 근육도 단단해서 잘 안 베어진다고 하던데요."

"걱정되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주인님께서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계신다지만, 몬스터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그래?"

손을 까딱거리며 검을 쥐는 시늉을 하자, 엘리체의 눈가가 흠칫 떨렸다. 에단에게 납치 당했다가 구해진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하긴, 주인님이 몬스터를 패면 팼지 맞고 오실 거 같진 않습니다."

"정확해."

"그래도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간 북부 쪽으로 정보원을 파견했지만, 혹독한 기후 탓에 유지가 어려웠기도 하고요."

"이젠 다를걸. 내가 갈 테니까."

손가락을 딱, 튕긴 뒤 엘리체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북부 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할 거야. 미리 물자와 인력을 확보해둬."

"역시 주인님...!"

엘리체가 이젠 습관이 되어 버린 감탄사를 중얼거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차질 없게 단단히 준비해두겠습니다."

"토벌전 준비는?"

현재 각 가문의 하인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물품을 매입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털가죽, 지방이 많은 살코기 등등 추운 지방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의 가격이 폭등했다.

"안정적으로 확보했습니다. 지금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싼 값에 매입해 두었죠."

북부 토벌전을 제안한다는 계획을 세운 그 날, 바로 엘리체에게 일러두었다. 덕분에 물자를 구하지 못해 허덕이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이것이 미래를 아는 자의 행운이자 일 보 빠른 전진이었다.

"구입한 물자는 최근 구매한 저택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좋아."

착실히 쌓인 재화, 그리고 카인에게 당한 울분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최고급 저택을 하나 구매했다.

"좋아, '그거'는?"

"아, 여기 있습니다."

엘리체가 준비했던 자루를 꺼내 내밀었다.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안에서 울려 퍼졌다.

"좋아, 슬슬 가볼까."

자루를 품에 넣은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엘리체가 덩달아 일어나며 배웅 준비를 했다.

"저택으로 가십니까?"

옷깃을 가다듬으며 씩 웃었다.

"손님 맞이를 해야지."

❖ ❖ ❖

'어려움에 빠진 북부의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강 영지의 기사단들이 출정한다.'

는 소식은, 제국민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이들이 실패할 거라는 예상은 들어있지 않았다.

"페상트! 페상트!"

"모테일! 모테일!"

수도로 입성하는 기사단의 이름을 환호하며, 승리를 기원할 뿐.

"오베스트...?"

"오베스트다! 오베스트 기사단이야!"

이어서, 오베스트 영지의 기사단도 수도 안으로 입성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기사단의 등장에 제국민들은 모두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오베스트 기사단은 곧장 황제 폐하를 알현한 뒤, 대기하고 있던 하인의 안내에 따라 한 주소로 향했다.

"헐.... 우리가 머물 곳이 여기라고?"

"잘못 온 거 아닐까? 우리 영주님한테 이런 휘황찬란한 저택이 있었어?"

몹시도 크고 웅장한, 고풍스러운 대저택이 보이는 정문 앞에서. 그들의 말이 차례로 멈추었다.

"주소가 여기 맞습니까, 부단장님?"

기사단의 시선이 선두의 한 사람을 향했다. 거대한 말을 타고 갑주를 착용한, 붉은 빛을 띄는 금발의 남성에게.

"주소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오베스트 기사단의 부단장, 콘라드는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않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저택의 중앙 홀에 들어선 순간, "여, 왔냐?"

중앙 계단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년을 맞닥뜨렸다.

"...아벨 도련님."

제 주인이자 스승인 디에고 킨드리얼의 외동 아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었다.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2)

"오느라 고생들 했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뚜벅, 뚜벅.

내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콘라드를 비롯한 기사단원들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피로해 보이는 단원들의 낯에 각양각색의 감정이 내비쳤다. 당황, 곤란, 얼떨떨함....

대개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그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아벨 킨드리얼'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50명 정도 왔군. 그게 최대로 차출한 인원인가 보지?"

눈으로 각 단원들의 얼굴을 훑은 뒤 완전히 홀로 내려섰다. 천천히 걸어가 콘라드의 앞에 섰다.

"콘라드 부단장."

콘라드는 나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깊은 늪처럼 가라앉은 녹색 눈에 복잡한 심사가 담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윽고 그가 특유의 쇳소리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내 산뜻한 대답에 콘라드의 한쪽 미간이 일그러졌다.

'대충 디에고에게 상황을 들은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남자라면 아마....'

콘라드 뮐러.

용병 출신이지만 디에고의 신임을 얻어 부단장까지 진급한 남자. 실력은 두말할 것 없이 최상위권.

그는 디에고가 국경을 비울 경우, 대신 그 자리를 수행하는 위치에 있었다. 평소에 디에고와 함께 할 땐 오른팔의 역할을 맡았고.

'과연 들은 대로네.'

짙은 눈썹과 잔상처로 가득한 뺨, 마구 깎아지른 바위산처럼 거친 외모.

그는 인상을 한 번 쓰는 순간 주변 사람들을 모두 얼어버리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래, 요나스는 어떻게 됐나?"

내 태연한 물음에 콘라드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영주님의 문책을 들은 뒤 기사단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영 내키지 않는 질문이었으나,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 마지못해 한다는 대답이었다.

"그걸로 끝? 아무 처벌도 없이?"

"처벌은 이미 도련님께서 내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요나스를 그 꼴로 만든 건 당신이 아니냐는, 돌려묻기였다.

"부하의 실패에 속이 좀 쓰린 모양이야?"

"...."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안 들어? 요나스가 갔다면 내가 가져온 결과를 얻어올 수 있었을까, 하는."

콘라드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낮게 수그러드는 턱은 그가 내 말에 동요한다는 의미였다.

'예상대로군.'

그가 디에고처럼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검사였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도적보다 더 험악한 외모에 조야한 성품을 지녔을 것 같은 그는 사실....

'오베스트 기사단 내 상식인 포지션.'

을 맡고 있다.

고지식 빼면 시체인 단장, 그런 단장을 점점 닮아가는 단원들. 허구한 날 쳐들어오는 몬스터들과 팍팍하기 그지없는 상황.

그 사이에서 콘라드는 어떻게 하면 제 자리를 잘 보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곤 했다.

저리 보여도 굉장히 머리가 좋고, 합리적으로 상황 판단을 잘하는 자였다.

'그러니 이 자리까지 올라와 지금껏 버텼겠지.'

애초에 디에고 같은 상관을 둔 자들의 속이 편할 리가 없다. 필립처럼 비위를 맞춰가며 살거나, 콘라드처럼 융통성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이 자리에서 드릴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콘라드가 묵직하게 내리깔리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등 뒤에 부하들이 있는 이상, 그 또한 편히 말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래, 그렇겠지."

픽 웃은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다른 걸 묻지. 아버지께서는 잘 계신가?"

"...예."

"나한테 전하는 말씀은 없으셨고?"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콘라드가 말했다.

"일단... '편지는 잘 봤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에 많은 말이 생략된 듯 했지만,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 듯 생략되었다.

"그리고?"

"제게 단원들을 내어주며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임무를 잘 수행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또한...."

콘라드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인장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순순히 인장을 내놓지 않으면 폭력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피식 웃은 뒤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나직이 흘러나온 음성은 낮았으나, 목을 겨누듯이 날카로웠다. 그것을 느낀 콘라드가 얼굴을 굳혔다.

"도련님의 선택에 달린 일입니다."

점점 싸늘해지는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에 단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푸훗."

작게 웃음을 터뜨려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렸다.

"뭘 그리 긴장하고 그러나."

"딱히 긴장한 적...."

"어차피 인장은 아버지의 손에 돌아가게 될 거야."

팔짱을 끼며 비스듬하게 섰다.

"토벌전이 끝나면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니."

콘라드의 굳어졌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러셨군요. 그럼 저희가 북부에서 돌아오는 대로 모시고 가면 되겠습니까."

"아니? 처음부터 같이 갈 건데?"

의외의 대답에 콘라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잘못 들었습니다?"

그를 정확히 이해시켜주기 위해, 음절마다 강세를 주어가며 또박또박 말해줬다.

"이번 토벌전, 내가 전권을 갖고 기사단을 지휘할 예정이다."

"...."

콘라드의 콧등에 주름이 선명하게 잡혔다. 지금 제 귀가 잘못됐나, 하는 의혹이 서린 얼굴이었다.

"너도 들었냐? 나만 들은 거 아니지?"

"전장의 뭘 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서쪽 국경에 한 번도 얼굴 비친 적 없으면서."

단원들이 소리 죽여 쑥덕거렸다. 그간의 훈련으로 인해 대열은 유지되었지만, 분위기는 온통 흐트러져버렸다.

"조용!"

콘라드가 힘있게 소리치자 대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자세를 바로 한 뒤 언제 떠들었냐는 듯 먼 곳을 보았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콘라드가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디에고 단장님께서 저를 보낸 것은 전선에서의 경험 때문입니다. 설마 이 부분에서 저보다 앞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그건 아니지."

"다행이군요. 북부의 몬스터들은 서부 못지않게 포악하고 사납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상대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콘라드는 내 동의에 힘을 얻은 듯 말을 이어갔다.

"토벌전이 끝나고 저희가 돌아올 때까지 수도에 계시거나, 아니면 먼저 영지로 돌아가십시오. 도련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싫은데."

"도련...."

"기사단에 머리가 둘 일 필요는 없지 않나?"

길게 늘어지려는 콘라드의 말을 뚝 끊어냈다.

"가뜩이나 어려운 토벌전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길이지."

얼음 결정이 박힌 듯이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전선에서의 지휘는 자네가 맡도록 해.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늘 나에게 있어야 한다."

콘라드가 턱을 악다문 채 나를 바라보았다. 늪처럼 어두운 빛깔의 눈동자 위로 다른 감정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지금 몹시 유혹적인 방법이 떠오르는군요. 여기서 도련님을 제압하고, 인장을 가져간다는 방법 말입니다."

"그래?"

"되도록 그 방법은 안 택하는 게 좋겠지요. 그래야 도련님의 안위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떠십니까?"

진정 폭력 사태를 벌이겠냐는, 제게 인장을 빼앗기고 굴욕적으로 돌아가겠냐는 질문이었다.

'자식, 겁주기는.'

말은 그리하지만, 실제로 콘라드가 검을 뽑을 가능성은 적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놈이 정말!'

버럭 성을 내던 디에고처럼 가타부타 않고 검부터 뽑아 들었을 테니.

혈기왕성해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그는 피 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이 짧은 편이군?"

키득 웃으며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정 그러면, 직접 와서 가져가 봐."

인장의 위치를 가르쳐주고,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스릉-뽑아냈다. 검으로 콘라드를 겨누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성에가 낀 듯이 싸늘하고, 피로 얼룩진 것처럼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콘라드가 당황한 듯 짧게 숨을 들이켰다.

"부단장님, 뭘 봐주고 계십니까! 그만하고 가시죠!"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검을 뽑을 일도 아닙니다! 그냥 대충 몸으로 때우십쇼!"

기어이 단원들 사이에서 분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죽하겠어.'

그들 눈에는 전장에 나가본 적도 생명을 베어본 적도 없는 핏덩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설치는 상황이니 말이다.

가뜩이나 먼 길을 온 데다, 어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기도 바쁜 와중에.

"다들 조용히 하라고 했다."

콘라드가 단원들을 한 번 뒤돌아 본 뒤 다시 나를 보았다.

"도련님, 검을 집어넣으십시오."

엄중한 경고가 날아들었다. 콘라드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강한 시선을 보냈다.

"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리시면, 저도 더 이상은 봐드릴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봐주는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빈정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은 내가 아니라 '네' 안위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거 아냐?"

과감한 도발에 기사단원들의 낯이 와락 일그러진 반면,

"...."

콘라드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용병 생활을 하며 거칠게 살아온 만큼 그는 이런 종류의 모욕에는 퍽 익숙한 듯했다.

'점점 마음에 드는데.'

사실 내가 이렇게 콘라드를 도발하는 데는, 토벌전을 앞두고 기사단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실리적 이유 외에도.

'무려 그 콘라드 뮐러라고.'

콘라드 개인의 실력에 대한 호기심과 호승심이 있었다.

오베스트 기사단 내에서 디에고 다음으로 여겨지는 실력자. 그를 꺾는다는 것은, 현재 최강의 검사인 디에고를 꺾는 것에 몹시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나는 항상 내 실력이 얼마나 올랐는지, 강자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인지 늘 궁금했다.

나의 강함을 입증할 때, 그와 동시에 찾아드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훙!

신속하게 날아드는 검격에, 콘라드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급히 몸을 날려야 했다.

"오, 제법."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선 내가 피식 웃었다.

"아벨 도련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제정신이 아니야!"

단원들 사이에서 비명이 솟았다. 그들은 이 망나니가 정말 검을 휘두를 줄은 몰랐는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일찍이 아버지께 배우지 않았나?"

곤혹스럽다는 듯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콘라드에게 말했다.

"사람이 언제 몸을 굽혀야 하는지."

디에고와 콘라드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상기시키는 한 마디에, 그의 안색이 변했다.

"...하아."

콘라드가 이마를 짚었다.

"그 이야기는 언제 들으셨는지, 또 일을 왜이리 크게 벌리시는지 모르겠지만...."

스릉-

마침내 그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도련님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넓적한 검날이 조명 빛을 받아 서슬 퍼렇게 빛났다.

"되도록 빨리 끝내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었음에, 그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어떻게 놀아줘 볼까.'

승패에 대한 고민 따윈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콘라드를 어떻게 무릎 꿇려야 가장 굴욕적일지, 단원들이 내 말에 복종할지에 대한 고민뿐.

상대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꼭 밟아줘야 말을 듣는단 밀이지.'

그동안 아벨 킨드리얼이 차곡차곡 쌓아둔 악명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사실 상관없었다.

'합법적으로 조져주지.'

나는 그 악명의 역사를 갈기갈기 찢어주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

콘라드는 바로 달려들지 않고 신중하게 나를 살폈다. 나 또한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콘라드와 대치했다.

저벅, 저벅.

우리 둘은 서로를 면밀히 살피며 옆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을 그리고 한 바퀴 다시 돌아왔을 때였다.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저거 설마?"

기사단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허."

탄식을 내뱉는 것은 콘라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검을 배운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내 전신이 빚어내는 완벽한 오베스트 검술의 자세가,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3)

저벅.

내 자세에서 아무 허점도 찾아내지 못한 콘라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허공을 부유하던 입자들이 갑자기 몸을 바짝 세우고,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콘라드가 내게 살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의미였다.

"...."

레퀴엠이 저를 건드리는 살기에 눈을 떴다. 녀석은 콘라드를 힐끗 보고 군침만 한 번 삼킬 뿐, 당장 달려들려고 들썩이진 않았다.

'-좋아.'

이것은 콘라드의 생명력이 먹음직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느끼도록 내가 레퀴엠을 잘 억누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충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감이 오네.'

내가 자신보다 몇 수는 앞서있음을, 그 현격한 차이를 느끼도록 해줘야겠다.

할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노골적인 도발, 그리고 여유로움에 콘라드의 눈가가 설핏 찡그려졌다.

후웅!

콘라드의 검이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미 겪어본 바 있는, 오베스트 검술 1식이었다.

카각!

검의 옆면으로 막아낸 뒤, 검을 반 바퀴 돌려 곧바로 하단을 노렸다.

"-!"

콘라드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 이어지는 공격을 피했다.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동시에 스쳤다. 내가 1식의 약점을 바로 알아챈 것에 놀란 눈치였다.

"흠."

콘라드가 어깨를 뚜둑 풀고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곤 곧바로 다음 공격을 개시했다.

'오베스트 검술 제2식!'

하단의 취약점을 보약한 이 검술또한, 일찍이 리암과의 대련에서 파훼한 적이 있었다.

이번엔 막으려 들지 않았다. 손목을 노리며 파고 들어오는 검 앞에 내 검을 가볍게 갖다 댔다.

깡!

콘라드의 검이 빨려드는 듯이 내 검 끝에 맞닿았다.

"-!"

콘라드가 눈을 부릅뜨는 순간, 손목을 비틀어 그의 검을 가볍게 밀쳐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그의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훙!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검이 콘라드에게 쇄도했다. 콘라드가 급히 밀쳐졌던 검을 회수해 방어로 돌렸다.

깡!

서로의 검이 거세게 맞부딪힌 뒤, 우리 둘의 몸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

콘라드가 입술을 씰룩였다.

몹시 할 말이 많아, 무엇부터 입 밖에 내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반면 기사단원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와 콘라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긴, 내가 부단장과 대등하게 싸우리라곤, 예상조차 못 했겠지.

"...다시, 가겠습니다."

이윽고 콘라드가 무섭도록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검을 들어 내게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공격들은 의도가 너무나 명백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으십니까?'

라는 묻는 듯이. 오베스트 검술의 3식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모든 검술이 내 앞에 펼쳐졌다.

카각!

헛된 움직임을 만들어 지치게 하는 공격은 신속하게 막아내고,

깡!

역으로 그 반동을 이용해 콘라드에게 반격을 가했다.

"큿!"

기어이 콘라드의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체격과 나이, 경험. 모든 것에서 나보다 우세한 그가 내게 밀리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사악!

콘라드의 검은 번번이 허공을 갈라야만 했다.

"저걸 저렇게 막을 수가 있었어?"

"아니, 저 공격이 피해지는 거였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벨 도련님이 이기고 계시는 건데?"

"디에고 단장님 아들이라고 봐주시는 거 아니야?"

그동안 기사단원들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얼굴로 수군거리기 바빴다.

'아주 좋아.'

호흡은 여유로웠고, 팔다리엔 힘이 넘쳤다. 그 어떤 공격이 언제, 어디서 들어오든 막을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넘쳤다.

"...."

대신 콘라드는 점점 여유를 잃어갔다.

안색이 풀을 먹인 셔츠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혹은, 무언가 갈등에 빠진 것처럼 복잡하게 일렁이기도 했다.

타악!

몇 번의 첨예한 공방 끝에, 콘라드가 뒤로 물러났다. 그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혹은 내게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 나를 자세히 살폈다.

"...후우."

그가 깊게 숨을 들이쉬곤, 검을 들어 제 앞에 세웠다. 그의 기도가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해지고, 냉기 어린 살의가 배어들기 시작했다.

"설마 그건가?"

"나왔다, 나왔어."

"부단장님, 그쯤 해두는 게...."

단원들이 전율하며 이를 달달 떨었다. 반면, 나는 느긋하게 콘라드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걸 쓰려는 모양이군.'

내 살점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오베스트 검술의 궁극.

일찍이 디에고가 내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데 사용했던 그것이, 지금 콘라드의 검 끝에서 발휘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 궁금하겠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말이야.

콘라드와 검을 맞대면서,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모든 검술을 다 펼친 그에게 남은 선택은 이것뿐이었다.

"후우."

예전에 디에고와 맞붙었을 때와는 심정이 달랐다.

그때는 아들에게 그딴 기술을 시전하는 디에고에게 치를 떨었다면, 지금은....

'재밌네.'

그저 즐거웠다.

디에고의 것보다는 다소 약하지만, 꽤 수준 높은 강자의 그것을 꺾어볼 기회가 와서.

'와라.'

콘라드가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떴다. 늪 같은 눈동자가 한번 첨벙, 하더니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압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스팟!

콘라드의 몸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의 검이 소름끼칠 만큼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전율했다.

'막을 수 있어.'

그저 막막하게 느껴졌던 과거와는 다른, 그런 뚜렷하고도 확고한 예감이 찾아들었다.

검을 든 손에 힘을 준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상대의 흐름에 집중한다.

거칠게 파헤쳐지는 공기를 느끼고,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읽는다.

'지금.'

그리고 손을 움직인다. 물 흐르듯이 유려하게,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쾅!

그의 검과 내 검이 부딪히며 굉음을 만들어냈다.

"...."

맞댄 검 사이로, 콘라드의 얼굴이 지척에서 보였다. 내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내 검을 받아내는 콘라드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면, 내 팔에는 미동도 없었다.

최후의 한 수조차 가로막혔다. 그에겐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그런 고민을 하며 스산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배배 꼬인 심사를 반영하듯, 내 기운이 한층 진득해지고 서늘해졌다.

냉혹한 살기가 뻗어나가 콘라드를 덮쳤다.

"-!"

콘라드의 눈가가 꿈틀, 움직였다. 다음 순간,

퉁!

갑자기 그가 내 검을 거세게 밀쳐냈다. 나는 못이기는 척 물러난 뒤,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위에서 내리찍어 무릎을 꿇리려던 참이었다.

철컥!

별안간 그의 검이 검집 속으로 사라졌다. 주변의 살의도 함께 검집에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추었다.

"응?"

"뭐야?"

지켜보고 있던 단원들이 얼빠진 물음을 흘렸다.

털썩.

콘라드의 한쪽 무릎이 땅을 내리찍었다.

"부디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도련님."

주군을 대하는 완벽한 예를 갖춘 채, 그가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도련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

단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얼마나 입이 크게 벌어졌던지, 저러다 턱이 땅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들 뭣들하고 있나. 도련님께 예를 갖추지 않고."

그들을 향해 콘라드가 조용히 윽박질렀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부단장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겁니까?"

"아까 먹은 식량에 뭔가 문제라도?"

정신을 차린 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마치 콘라드가 내게 굴복해 자신들을 배신하기라도 했다는 모양새였다.

"그 무슨 망발들인가!"

콘라드가 벌떡 몸을 일으켜 등 뒤의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누굴 천지분간도 못하는 얼간이로 아는 건가! 내 정신은 몹시도 멀쩡하다!"

그렇게 외치는 콘라드의 낯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 ❖ ❖

'이 얼간이들이!'

콘라드는 할 수만 있다면 기사단원들의 입을 모조리 틀어막고 싶었다.

"우리의 주군은 디에고 단장님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다니, 기사의 긍지도 없습니까!"

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단원놈들이 타들어가는 제 속도 모르고 외치고 있었다.

'제발 좀 닥쳐!'

비록 단순할지언정 의리는 있던 놈들이, 지금 보니 그저 멍청하기만 한 것 같았다.

"...."

등 뒤에 서 있는 아벨에게서 찌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어, 다른 단원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무슨 놈의 살기가....'

손끝이 잘게 떨리고 등 위로 식은땀이 흐른다.

기사들은 살기에 철저히 감응하도록 훈련받는다. 그 탓에 콘라드는 자신을 푹푹 쑤시다 못해, 아예 도려내는 듯한 아벨의 섬뜩한 살기를 너무나 잘 느끼고 있었다.

'이건 꼭....'

그동안 온갖 몬스터를 상대하며 다양한 살기를 느꼈지만, 아벨의 것은 그것보다 더 괴물 같았다.

몬스터보다 더 흉악한 무언가를 맞닥뜨린 듯한 느낌. 거대하고 혼탁한 기운이 자신을 찍어누르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뚫린 입이라고 마구 떠들어대네?'

아벨의 살기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부단장님! 지금 이 상황 이해가 안 됩니다!"

"이걸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단원들이 한 마디 한마디씩 할 때마다, 아벨의 살기는 더욱 응축되어 터지기 일보 직전의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죽는다. 죽이시고도 남는다.'

이대로라면 기사단원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할 것이다. 지금 자신과 단원들이 전부 덤벼도 아벨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벨과 검을 맞대며, 콘라드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날 데리고 노시는군.'

아벨은 충분히 자신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봐주면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꺼내 보이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분명 단장님께서 검을 쥐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는데.'

허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속이 뒤틀린 아벨이 자신과 단원들의 다리 한 짝씩은 부러뜨릴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무릎 꿇을래? 아님 뒈질래?'

그렇게 묻는 듯한 아벨의 살기가 파도처럼 높이 솟아올라 그를 덮치기 직전,

"다들 입 다물어라!"

콘라드의 힘 있는 목소리가 홀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눈이 있다면 보지 않았느냐! 아벨 도련님께서는 나보다 몇 단계 뛰어나시며,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한 검사이시라는 것을!"

단원들의 입이 멈추었다.

정녕 콘라드가 이것을 제 입으로 인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아벨 도련님은 명실상부한 디에고 단장님의 장자이시다. 마땅히 섬겨야 할 정당한 주인께 예를 표하는 것이 무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의 강한 시선을 받은 단원들이 차례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나 몇몇은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고집불통들 같으니.'

어째서 상사나 부하나 똑같은 건지. 하긴 이런 성정이니 그 혹독한 오베스트 국경을 지켜온 거겠지만.

'그렇게 기개를 지키다 개죽음당하면 무슨 소용인가.'

콘라드는 후일을 위해 목숨을 아끼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똥밭을 구르더라도 살아있는 게 훨씬 나았다.

"헤이든."

콘라드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단원 한 명을 손으로 지목했다.

"오베스트 영지에서 출발할 때 단장님께서 무어라 하셨느냐?"

지목받은 남자, 헤이든의 얼굴이 굳었다. 이윽고 그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콘라드 부단장님을 자신처럼 여기고, 철저히 명령에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모든 전권은 나에게 있다. 이것은 오베스트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철저히 숙고하고 내린 결정이다."

콘라드가 턱을 높이 쳐들고 마지막 통첩을 내렸다.

"불응하는 자는 내가 손수 무릎을 꿇리겠다."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4)

일단은 아벨의 명을 따르는 척하다가, 상황을 봐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의 판단은 몹시 현명했다. 단원들은 몰랐지만, 지금 콘라드의 선택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구했다.

"...."

기사단원들이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권위를 내세운 강한 발언에, 불만을 품은 자도 있을법 했지만.

털썩, 털썩.

단원들의 무릎이 차례로 바닥에 꿇려졌다.

"...명령을 받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하게 상급자에게 복종하는 것.

오베스트 영지와 같은 극한지에서는, 사소한 균열이 결국 목숨을 앗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아벨 도련님, 오베스트 기사단이 다시 인사드립니다."

콘라드는 몸을 돌려 아벨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콘라드를 포함한 모든 오베스트 기사단원은 모두 아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작은 수군거림조차 없는 철저하고 신속한 복종이었다.

"...."

아벨의 싸늘한 시선이 콘라드의 정수리를 거쳐 단원들을 훑었다.

"...흐음."

아벨이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철컥.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가 다가와 콘라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일어나게."

콘라드가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아벨이 콘라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보니, 생각이 아주 짧지는 않은 것 같군."

"...."

"앞으로 두고 보도록 하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뱀의 그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런 면은 단장님을 똑닮으셨군.'

제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짓밟는 완고함.

눈앞의 아벨은 딱 디에고의 축소판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디에고보다도 더 혹독하기까지 했다.

"자네가 할 일이 아주 많아."

아벨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주변에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키웠다.

"무엇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콘라드는 있는 의욕, 없는 의욕을 다 끌어내며 말했다. 여차할 경우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아벨을 저지할 생각을 품으면서.

"일단 물자 보급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일정이 길어 넉넉히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 그건 다 되어 있으니 할 필요 없어."

아벨이 의외의 대답을 한 뒤 씩 웃었다.

"단원들 전원 뒤뜰에 대기시켜."

"잘못 들었습니다?"

아벨의 손이 허리춤의 검집을 다시 움켜쥐었다.

"오늘부터 한 명씩 나랑 일대일로 붙을 거다."

오베스트 기사단원들이 지옥의 3일이라고 부르는, 특훈의 시작이었다.

❖ ❖ ❖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아...."

"난 허벅지가...."

오베스트 기사단원들의 곡소리가 앞뜰을 가득 채웠다. 문을 열기 직전,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사람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패는 게 어딨냐...."

"차라리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더 쉬울 거 같다...."

"우리가 이러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게 아닌데...."

단원들의 투덜거림을 엿들으며 피식 웃었다.

'놀고들 있네.'

기사단원들의 행동 변화는 놀라웠다.

처음엔 어떻게 도련님께 검을 들이밀겠냐며,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퍽! 쿵! 땅!

몇 대 두들겨 맞고 나자 정신을 차렸다. 곧장 눈이 돌아가서는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물론 그들이 나를 한 대라도 때리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았다.

쩍! 퍽! 빠각!

팔꿈치, 허리, 허벅지, 발목 등을 골고루 자근자근 밟아주었다.

내가 단원마다 조져준 부위는 조금씩 달랐는데, 지금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곧 토벌전에 들어가면 알게 될 테지.'

그때 되면 내 가르침에 몹시 감사하게 될 터였다. 지금이야 저런 불퉁한 얼굴로 투덜대고 있지만.

"내 그래서 미리 말해두지 않았느냐. "

콘라드가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한심하다는 의미가 다분한 질책에 단원들이 소리 높여 항변했다.

"아니, 그게 준비를 한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까?"

"지금 안 맞아보셨다고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콘라드는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억울하면 더욱 정진하면 될 일이다. 도련님께서 왜 직접 대련을 지도하셨는지 정녕 모르는가?"

단원들의 불퉁한 대답이 이어졌다.

"저희가 아니꼬우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게 거슬려서 패신 것 같습니다."

"심심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콘라드는 그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내가 제 명에 못 살겠군...."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슬슬 나가볼까.'

벌컥!

문을 열고 앞뜰에 내려서자, 소음이 일제히 멎었다.

척!

단원들은 콘라드의 명령이 없어도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숱한 폭력에 노출된 그들의 뇌는 그들이 여유를 갖도록 두지 않았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고요해진 앞뜰 위로 내려앉았다. 웃음을 삼키며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나오셨습니까."

콘라드가 고개를 한 번 숙인 뒤, 기사단원들을 향해 외쳤다.

"아벨 도련님께 경례!"

척!

모든 단원이 일사불란하게 자세를 취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단 한 명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오베스트 기사단, 전원 준비되었습니다."

군기가 빡세게 들어간 모습도, 이어지는 콘라드의 공손한 보고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볍게 인사를 받아준 뒤 단원들 앞에 멈추어 섰다.

한 명 한 명씩을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다들 안색이 별로 안 좋군."

내 한 마디에 콘라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가 황급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단속에 힘쓰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뒤로 돌아섰다.

"다들 표정 관리 못 하나?! 도련님 앞에서 이리 덜떨어진 모습만 보일 것일 건가!"

따가운 질책에 단원들이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얻어맞은 부위가 아픈 듯 흠칫거리거나, 퉁퉁 부은 얼굴을 채 감추지 못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 녀석들이 정말...!"

콘라드가 속이 타는 지 입술을 짓씹었다.

"그만, 그만."

당장이라도 화를 낼듯한 그를 제지하고 나섰다.

"그만두게. 자네가 그런다고 얼굴의 멍이 사라지진 않으니까."

콘라드의 얼굴에 순간 의아함이 스쳤다.

'왜 갑자기 관대한 척을 하시지?'

내 눈이 가늘어지자, 그가 얼른 감정을 감추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송구합니다, 도련님.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알고 있으면 됐고."

"...."

벙쪄있는 그를 지나쳐 단원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보아하니 불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들을 둘러보며 거만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억울하면 안 맞으면 될 일 아닌가? 그러게 왜 빈틈을 보여서 처맞고들 그러는 건지."

단원들이 일제히 이를 악물었다. 나를 몹시 때리고 싶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주먹만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기사단원 중 한 곳을 가리켰다.

"네? 저? 저요?"

"저 말씀이십니까?"

그곳의 단원들이 모두 우왕좌왕했다. 차마 내게 지목받고 싶지 않다는 듯 애처로운 반응들이었다.

"아무나 상관없으니, 말해보도록."

내가 굳이 그들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단원들 중 가장 젊고 단순한, 그리고 국경에서의 경험이 짧은 축들.

"나와의 대련을 제외하고, 이곳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

"오베스트 국경에서 머물 때와 비교해서 말해보게. 솔직하게."

좀더 나이 있는 단원들의 표정이 굳고, 콘라드 또한 나와 단원들을 심각해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솔직하게, 라는 말 만큼 군대 혹은 기사단에서 무서운 말은 없을 것이다. 그 어느 곳보다도 보안에 철저해야 하니까.

"어서 말해보게. 내가 알아야 앞으로의 일정에도 참고하지 않겠나?"

젊은 단원들의 눈이 데굴 굴렀다. 이윽고 그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식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다 먹고 또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먹을 수 있는 가짓수가 다양해서 좋았습니다!"

한번 입이 터지자, 그들은 어느새 긴장을 잊고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이 잘 나와서 정말 편했습니다!"

"거품이 잘 나는 비누로 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침대도 정말 푹신했습니다!"

"방도 따뜻해서 자고 일어난 후 뼈가 쑤시지 않았습니다!"

국경에서 험난한 생활을 해온 그들에게, 이곳 저택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천국일 수밖에 없었다.

수다스러운 새처럼 떠들어대는 그들의 모습을 힐끗 보곤, 비교적 나이가 많은 다른 단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허...."

"저런...."

그들은 지금 말하는 단원들을 마치 배신자 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물질적인 것에 훌러덩 넘어갈 수 있냐고 묻는 듯한 경악 어린 표정들.

"그만, 그만."

나는 적당히 손을 들어 단원들의 말을 멈추게 했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서 좋군. 그럼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해 둔 게 누구지?"

순식간에 단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눈알이 또르르 굴러 나를 향했다. 이윽고 그 위로 갑작스레 생성된 충성심이 떠올랐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도련님이십니다!"

"그렇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이 많은 다른 단원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무작정 헌신을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누구를 겨냥하고 하는 말인지 깨달은 그들의 낯이 붉게 변했다.

'하여간, 디에고바라기들 같으니.'

물론 절대적으로 반발하는 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

개중에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내 말에 깊게 공감하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다.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두지."

기사단원들 모두를 둘러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모두가 자의로 인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좌천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겠지."

단원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내 말에 귀 기울였다.

"나는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을 좋아한다.

"...."

"또, 능력 있는 사람이 대우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힘 있는 음성으로 선언하듯 말했다.

"이번 토벌전에서 공훈을 세운 자는, 오베스트 영지로 돌아갔을 때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봉급 인상, 무기와 갑옷 수선, 숙소 개선까지."

콘라드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단원들 또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아버지가 아닌 나,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 약속하는 바다."

기사단원들은 내 선언이 가져온 무게에 짓눌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질문, 해도 되겠습니까."

미동 없는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손이 높이 들어 올려졌다. 아까 가장 목소리가 컸던 자였다.

"말해보게."

고개를 까딱이자, 그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공훈이라는 것은, 몬스터를 많이 처치하는 것을 말합니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

고개를 끄덕인 뒤 덧붙였다.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오베스트 기사단의 긍지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

"오베스트 기사단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

사실은 내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발목 잡거나 쪽팔리는 짓거리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

내 말뜻을 정확히 이해한 콘라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공훈'이다."

하지만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엄숙하게 끝맺자, 내 말은 기사단을 소중히 아끼는 말로 포장되었다.

"...."

저절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몇몇 단원들은 감동을 받은 듯이 코를 찡긋거리기도 했다.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5)

무작정 기사단원들을 몰아세워봤자 이탈만 늘어날 뿐이다. 이는 이미 오베스트 영지에서 검증된 사항이니까.

그러니 그들이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유혹적인 조건을 내세워 꼬드겨야 했다.

과연 내가 던진 미끼는 효과적이었다.

"몬스터를...."

"무조건...."

공훈을 세울 생각에 눈을 반짝이는 젊은 단원,

"봉급 인상이라고...?"

"도련님이 그걸 어찌 장담한단 말인가?"

갑작스레 던져진 현실적인 제안에 깊이 갈등하는 경험 많은 단원들까지.

단원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화했다.

"자, 그럼."

손뼉을 딱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제 출정식을 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할 것이다."

눈을 번득이며 단원들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마주했다.

"두고 보도록 하겠다."

너희들의 행동에 따라 포상이 달라질 거라는 암시.

내 뜻을 알아챈 단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네, 알겠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힘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콘라드가 눈에 들어왔다.

턱.

그의 어깨를 꾹 쥐며 작게 속삭였다.

"봤나? 적절한 당근의 효과를?"

"...."

"마냥 채찍만 휘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네."

콘라드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벨 도련님."

흉악한 얼굴로 웃는 데도 썩 나빠 보이지 않는 것은, 그의 눈가에 선명히 보이는 찬탄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탄복한 듯, 어떤 불만도 없는 말투로 말했다.

"저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나는 픽 웃으며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럼 이만 출발하지."

그렇게 오베스트 기사단의 출정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황궁 앞은 출정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북적했다.

양쪽으로 갈라진 인파 사이로, 각 영지에서 모여든 기사단이 차례로 행진했다.

각 기사단은 과시라도 하듯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가문의 상징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페상트에게 영광을!"

"모테일이여 영원하라!"

떠들썩한 환호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온 사방에 가득했다.

그러다 우리가 등장했을 때,

"오베스트 기사단이다!"

사람들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초콜릿처럼 진한 갈색의 말 위에 올라 입장하는 나. 그리고 그 옆을 호위하듯 바짝 붙은 콘라드.

그 뒤로 절도있게 걸어 들어오는 기사단원들까지. 아까 다리의 고통을 호소하던 이조차도,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멀쩡한 척 걷고 있었다.

"오베스트 기사단...."

"과연...."

우리가 착용한 갑옷이나, 타고 있는 말의 수준은 그 여느 기사단보다도 뛰어났다.

전자는 돈을 쏟아부어 해결했고, 후자는 오베스트 영지에서부터 그들과 함께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오베스트! 오베스트!"

"오베스트를 위하여!"

오베스트 기사단의 위풍당당한 모습, 그리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존재의 실제를 확인한 사람들의 환호가 커졌다.

"그런데 수가 좀... 많이 적은데?"

"다른 기사단과 너무 비교되는군."

거기 쑥덕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확실히, 우리 기사단의 수는 다른 영지에 비하면 가장 적은 축에 속했다.

'쯧쯧. 양보다 질이거늘.'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승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이번 북부 토벌전은 더욱 그랬다.

'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테지.'

그래서 그런 수군거림은 가볍게 귓등으로 넘겨버렸다.

황궁의 중앙에 마련된 넓은 공터에는 이미 도착한 기사단들이 고요히 서 있었다. 중앙에는 황궁 기사단을 두고 그들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 뒤로 줄을 맞추어 늘어섰다.

'우리 자리는 저기겠군.'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자리를 향해 기사단을 이끌었다. 황궁기사단의 왼쪽을 차지한 미켈을 바라보며, 찬찬히 오른쪽에 멈추어 섰다.

"...."

나를 확인한 황궁 기사단장, 조슈아가 나를 향해 간단히 고개를 까딱였다. 인사를 받은 뒤, 그 너머로 꼿꼿이 서 있던 미켈과 눈이 마주쳤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자 미켈이 알겠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운이 좋군.'

원작에서는 수드 기사단이 이 자리에 섰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재로 당연하다는 듯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오베스트 기사단이 왜 저길...."

"우리 기사단의 수가 더 많은...."

다른 기사단이 얼굴에 옅은 불만을 피워올리긴 했으나, 내가 시선을 한 번 주자 그마저도 곧 잠잠해졌다.

'카인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차지하네 마네 한바탕 갑론을박을 벌여야 했을 텐데.'

그 사실이 기껍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지금쯤 카인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서둘러 영지로 돌아갔으니 지금쯤 문제를 파악하고 원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을 터였다.

'과연 어찌 되었으려나.'

다시 뇌 한쪽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밀어내고 조용히 앞을 보았다.

모든 기사단의 입장이 끝나자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붉은 장막이 젖혀지고, 그 사이로 테오도어 황제가 입장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든 기사단이 무릎을 꿇었다. 높은 단 위에서 기사단을 내려다보던 테오도어 황제가 손을 들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기사단은 황제의 명에 따라 고개를 들었으나, 법도에 맞게 황제를 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노드 영지의 어려움을 모른체하지 않고, 기꺼이 발걸음한 이들이 자랑스럽도다."

청명한 가을 하늘, 부서지는 햇살과 함께 테오도어 황제의 격려가 쏟아졌다.

"모든 제국민들은 그대들의 노고와 용기를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을 세운 자에겐 그에 걸맞는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말을 마친 그가 단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주교가 나섰다.

"출정식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한 성녀님의 축복이 있겠습니다."

늘 기름진 음식만 먹은 탓에 풍만한 체형의 그였으나, 어쩐지 오늘은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눈가에는 짙은 그늘마저 드리워져 있었다.

"시간상 한 기사단이 대표로 축복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주교가 접혀 있던 종이를 펼쳤다. 말라붙어있던 입술을 한 번 적신 뒤,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대표로 축복을 받을 기사단은...."

사람들의 긴장된 시선이 교차했다. 다들 눈에 힘을 주고 대주교의 입을 주시했다.

"...."

대주교가 입을 떼기 직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나.'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엘리체에게 지시해 둔 일이 훌륭하게 성공했음을.

"...오베스트, 기사단입니다."

대주교의 말이 끝나자 희비가 엇갈렸다.

"이걸 오베스트 기사단이?"

"왜 우리 기사단이 아니라?"

몇몇 기사단은 몹시 실망하거나, 오베스트 기사단에게 질시의 눈길을 던졌다.

"이 상황엔 노드 기사단이 받아야 하지 않소?"

"어떤 기준으로 선정된 거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대주교를 노려보는 이도 있었다.

"공정하고도 적법한 기준에 의해 선발된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장내의 웅성거림이 커지자 대주교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리곤 줄행랑치듯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간 옆의 장막이 다시 위로 밀려 올라가고,

뚜벅.

그 틈으로 성녀 라헬이 들어섰다.

"...성녀님이시다."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군."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만큼 제국 내에서 성녀 라헬이 갖는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공정하고도 적법한 기준이라.'

나는 대주교의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제 명성을 잃고 싶지 않은 대주교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고 있자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게 왜 뒤로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녀서는.'

그가 어린 소년들의 몸을 탐한다는 것은 제국 내에서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기밀 정보였다. 물론 원작을 읽었던 나에겐 더 이상 기밀이 아니었지만.

나는 어린애한테 몹쓸 짓하는 인간을 혐오한다. 그러니 저 대주교 놈의 말로는 썩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에카로트에게 좀 유하게 군 것도 있었지.'

아직 어린 녀석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위해 일해주면 좋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뿐. 그저 녀석이 카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즐겨 사용하던 협박이라는 카드 대신 녀석에게 선택권을 주었던 거고.

'잘하고 있으려나?'

지금쯤 미드넬과 고된 훈련을 하고 있을 터였다. 과연 이 토벌전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녀석이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오베스트 기사단, 앞으로."

짧은 상념은 대주교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끊겼다. 콘라드에게 턱짓을 한 번 한 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내 걸음에 맞추어 오베스트 기사단이 앞으로 걸었다.

온갖 다양한 시선들이 날아와 옆얼굴을 할퀴어댔다. 오만한 얼굴로 그것을 무시하며 정면의 연단 앞에 멈추어 섰다.

"대표로 한 분이 위로 올라오십시오."

대주교의 말에, 콘라드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올라가시지요."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소 띤 얼굴로 연단 위로 올라섰다.

"...."

성녀의 상징과도 같은 베일 너머로, 라헬의 녹색 눈동자가 비쳤다.

"이쪽으로 가까이."

나긋한 음성과 함께 라헬이 내게 손짓했다.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먼 길을 떠나는 그대들의 앞길에 부디 신의 보살핌이 함께 하기를."

라헬이 성녀로서 다른 이들을 감화시킬 때 주로 사용하는, 여러 겹으로 중첩되는 목소리였다.

"이 심장의 뜨거운 박동을 잃지 않길,"

라헬의 손이 움직여 내 가슴을 살짝 짚었다.

"앞을 가로막는 어려움을 물리치고 쓰러진 이의 손을 붙잡아주길,"

이어서 내 팔뚝을 스치고,

"끝내는 찬란한 승리와 함께 돌아오소서."

마지막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디오 베네디카."

기도를 마침과 동시에,

파앗!

라헬의 손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투명하고 맑은 세레나드의 생명력이 맞닿은 살갗에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

라헬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으나, 테오도어 황제를 의식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흰 빛을 꺼뜨리고 손을 거두어 냈다.

"축복의 말씀 감사합니다, 성녀님."

라헬이 뒤로 물러서기 직전 입을 열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법이지요. 혹독한 겨울을 잘 이겨내고 돌아오겠습니다."

"...."

"그리하여 끝내는 이곳에서 봄을 맞이하고 싶군요."

다른 이가 듣기엔 이번 토벌전을 잘 끝내고 봄이 되기 전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이었으나.

"...."

라헬에게 전달된 의미는 달랐다. 라헬의 눈이 일순 커지더니, 이내 옅은 눈웃음과 함께 허물어졌다.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사단 대표의 호기로운 선언에 화답하는, 몹시도 보기 좋고 그럴싸한 장면의 완성이었다.

"와아아!"

"디오 베네디카!"

"모두 무사히 돌아오길!"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모두 소리 높여 환호했다.

라헬이 몸을 돌려 뒤쪽으로 걸어갔다. 대기하고 있던 테오도어 황제의 옆에 선 순간, 그가 라헬에게 속삭였다.

"정말 축복한 건 아니겠지?"

라헬에게만 들릴 만한, 하지만 청력에 집중한 내겐 충분히 들리는 소리였다.

"물론이야."

라헬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냥 빛만 강하게 비춘 거야. 저번에 축복해 줬는데 굳이 또 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운이 좋은 녀석이로군."

테오도어 황제가 입가에 비웃음을 걸쳤다.

"비올렛의 뒤를 따라다니며 제법 콩고물을 주워 먹는단 말이지."

그의 붉고 차가운 시선이 날 훑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며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잘 속여 넘겼군.'

속으론 태평히 그런 생각을 하면서.

테오도어 황제가 다시 연단 앞으로 나섰다. 그가 두 팔을 위로 쳐들며 위엄 있게 소리쳤다.

"이상으로 출정식을 마치겠다. 모든 기사단은 북부를 향해 출발한다!"

그가 팔을 힘차게 내리자 미켈이 이끄는 노드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선두로 한, 북부 토벌전의 시작이었다.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6)

솨아아-

거대한 함선이 바닷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갑판 위에는 카를로와 카인, 그리고 수드 기사단장 헥터를 비롯해 아르단테 가문을 섬기는 가신들이 서 있었다.

"흠."

카인이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눌렀다.

"날씨는 좋네."

그는 이렇게 수드 영지 주변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듯한 푸른 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코끝을 적시는 바닷가 특유의 짠 냄새까지.

게다가 이 주변은 귀족들이 별장을 짓기 위해 구입한 섬이 많아, 이곳을 찾아든 귀족들과 친목을 다지기도 좋았다.

"...후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심경이 아니었다. 휴양 목적으로 배를 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첨벙!

기사 중 하나가 바닷물에 두레박을 빠뜨렸다가 다시 끌어올렸다.

"한 번 손을 담가 보십시오."

푸른 진주와 붉은 산호의 주요 생산지인 페를라 섬을 관리하는 가신, 아서가 말했다.

카인과 카를로가 동시에 손을 뻗어 두레박에 넣었다.

"따뜻하군요."

"목욕물 정도의 온도로군."

아서가 두레박을 거두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원래는 이 정도가 평균적인 수드 지방 근처 해안가의 수온입니다. 하지만...."

그의 낯에 근심이 어렸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도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곁에 서 있던 수드 기사단장 헥터가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에 명령했다.

"속력을 좀 더 높여라!"

노잡이들에게 명령이 전해지고, 함선이 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작은 점으로 보이던 페를라 섬이 눈에 잡힐 듯이 커졌다.

"저건!"

페를라 섬을 확인한 카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반응은 그의 주변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닌데...."

"저 색은?"

본디 페를라 섬 한 가운데엔, 푸른 초목으로 가득 덮여 푸릇푸릇한 산이 솟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거뭇하게 죽어버린, 마치 불에 타버린 듯한 정경이 모두를 맞이했다.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을 실은 함선이 멈추었다.

덜컹!

카를로를 선두로 다들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이상이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으나, 직접 눈으로 보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런데 선착장 앞의 건물엔 개미 한 마리 비치지 않았다. 채집한 진주와 산호를 다듬고 분류하던 일꾼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기서 일하던 인원들은 전부 철수시켰습니다."

모두의 의문 어린 시선에 답하듯, 아서가 나서서 대답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해변을 가리켰다.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모두 해변으로 다가오자, 아서가 두레박 속에 무거운 바위를 넣고 바닷물에 던져 넣었다.

첨벙!

두레박은 금세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서의 손길을 따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두레박에 집중된 순간,

치이익-

두레박 속의 물이 지글지글 끓으며 뜨거운 김을 뿜어냈다.

"저런!"

"어째서?"

사람들이 모두 경악한 얼굴로 물을 바라보았다.

"보시다시피, 섬 주변 바다 깊은 곳의 수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상태입니다."

"그렇다는 건 진주와 산호도...."

카를로가 침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그렇습니다."

넬슨이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정도의 고온에서는 진주와 산호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가 꺼내든 것은 처참하게 녹아내린 진주와 산호의 잔해였다.

"채집하러 깊이 잠수한 일꾼들이 도저히 버티지 못해, 화상을 입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을 철수시킨 것인가?"

카를로의 질문에 아서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의 손가락이 페를라 섬의 한 가운데 높게 솟아오른 산을 향했다.

"본디 이 산은 제국에서 가장 활동이 격렬했던 화산이었으나, 이제 활동을 멈추고 휴화산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로 아서의 말에 집중했다.

"저희는 일단 채집을 멈추고 이 사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꾼들 사이에서 이상한 말이 돌더군요."

아서의 목소리가 괴담을 속삭이듯 낮아졌다.

"저 산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말이."

"목소리?"

"남자도 여자도 아닌, 노인도 어린아이도 아닌. 알 수 없는 목소리라고 합니다."

아서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사실 몇 달 전에 일꾼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그저 환청을 들은 거라 생각하고 넘겼지요."

"...."

"그런데 최근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꺼번에 많은 이들이 같은 현상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위로 얼음물을 끼얹은 듯이 사람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몇몇 이들이 산을 파고 들어가려는 등 이상 증세를 보여, 할 수 없이 일꾼들을 철수시켰습니다. 동시에 조사 활동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서가 무릎을 깊게 꿇고 카를로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곳까지 오시게 만들어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희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서의 떨리는 손가락이 산을 향했다.

"저 산 안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의 말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산속에 있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 사태의 원인일 것입니다."

❖ ❖ ❖

능선 너머로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전원 정지!"

미켈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부관이 소리 높여 외쳤다. 명령을 받은 기수가 깃발을 특정 모양을 그리도록 흔들었다.

"전원 정지!"

"정지하라!"

깃발의 움직임을 읽은 각 기사단에서 똑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이윽고 모든 기사단이 서서히 멈추어 섰다.

미켈이 고개를 옆으로 길게 움직여 전체를 살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쯤에서 다들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듯하군."

사람들은 땀과 먼지, 모래로 엉망이었다. 다들 지친 얼굴을 한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파직!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튀고, 황궁 기사단장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저희 기사단은 아직 여유롭습니다만."

"마찬가집니다. 아직 한참은 더 달릴 수 있습니다."

이에 질세라 다른 기사단들도 자존심을 내세웠다.

"다들 씩씩한 모습 보기 좋네만."

미켈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소. 아직 갈 길이 머니 말이오."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이 옆의 숲에서 묵도록 하겠소. 각자 야영 준비를 시작하시오."

각 기사단 대표들이 서로 눈치를 슥 살피더니, 이내 돌아섰다.

"야영 준비를 시작하라!"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엔 이 상황에 퍽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은 그리 했어도 다들 상당히 지쳐 있었던 것이다.

"허세들하고는."

피식 웃고는 콘라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의미를 이해한 콘라드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다들 시작해라!"

그의 외침에 기사단원들은 서둘러 말에서 내린 뒤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각자 할 일들을 하는 모습은 다른 기사단과 몹시도 비교되었다.

"아니, 물자 담당 누구야? 제대로 안 묶어서 다 쏟아졌잖아!"

"그거 아까 아론이 확인하지 않았어?"

역할 분담이 잘 되지 않아 생기는 혼란들.

"감자는 껍질을 벗긴 다음에 씻는 것 아닌가?"

"그걸 다 잘게 썰어버리면 어떡하냐...."

요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생기는 문제.

"말뚝을 거기다 박으면 어떡해!"

"천막 양쪽을 꽉 잡고 있으라고!"

야영용 천막을 한 번도 펴보지 않아 생기는 혼란까지.

그간 몬스터의 습격이 거의 없는 평화로운 영지에서, 자기들끼리 대련을 하기에만 바빴던 기사단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들은 요리나 천막 설치 같은 일들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천한' 일은 영지에 상주하는 그들의 종자와 하인들이 도맡아 했던 탓이다.

반면.

"야채 다 씻었습니다. 여기 놓고 갑니다."

"불이 약하니 장작을 더 가져와."

우리 기사단의 야영지에서는 금세 재료 준비가 마무리되고,

"천막 설치 완료하였습니다. 새벽이슬을 대비해 방수용 가림막도 설치했습니다."

"불침번 순서도 정하겠습니다."

순식간에 말뚝이 박히고 천막이 펼쳐졌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본인이 해야 할 다른 일을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허어, 참."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미켈이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내가 도울 일이 없어 보이는군."

이미 그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고 그에게 웃어 보였다.

"노드 기사단은 벌써 끝난 겁니까?"

"어련히 알아서들 잘할 거라 믿고, 다른 기사단들이 잘하고 있는지 둘러보는 중이지."

미켈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현재 천막 설치 및 야영 준비를 모두 마친 건 오베스트 기사단뿐이라네. 다른 곳은 아직 헤매고 있거나 시작도 못 했지."

조용한 어조였으나, 그간 나태하게 살다가 이제 와 쩔쩔매는 기사단들을 한심해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돌아다니며 조언을 해주던 참이라네. 아벨 공자의 기사단엔 필요 없는 도움이었겠군."

"마음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켈이 빙그레 웃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이만 다른 곳을 도와주러 가야겠군. 과연 제시간에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오늘 안엔 끝나겠지요."

"대충 식사가 마무리되면 회의를 열 생각이네. 그때 보세."

"나중에 뵙겠습니다."

미켈을 보내고 나자, 대기하고 있던 콘라드가 다가왔다.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벌써?"

"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콘라드를 따라가자, 이미 모닥불 주변에 둥글게 모여 앉은 단원들이 보였다.

다들 그릇을 든 채 입가의 침을 닦으며, 모닥불 위에 놓인 솥단지를 눈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벨 도련님이시다."

그러다 누가 중얼거리자,

척!

다들 언제 침을 흘리고 있었냐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태세 전환하는 속도가 그야말로 번개와 같았다.

"도련님의 식사는 천막에 따로 넣어드리려고 지금 담고 있습니다."

솥단지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음식 담당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여기서 먹을 거니까."

"예?"

"빨리 줘. 배고프다."

잠시 머뭇거리던 음식 담당은 내가 시선을 한 번 주자, 허겁지겁 음식을 마저 담았다. 그가 가득 찬 그릇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도련님 덕분에 육류 재료를 넉넉히 썼습니다. 그래서 푸짐하게 담을 수 있었습니다."

"흠."

그의 말대로, 정말 내 그릇에는 질 좋은 고깃덩이가 가득했다.

"수고했다."

옅게 미소 지으며 건넨 인사에 음식 담당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내 뒤를 이어 콘라드와 다른 단원들도 음식을 배급받았다.

"...."

벌써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는 우리를 보며 주변의 다른 기사단들이 부러움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어서들 들지."

잠시 눈치를 보던 단원들은 곧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음식에 달려들었다.

"스튜에 고깃덩이가 이렇게 많다니...."

"국물이 이렇게 진한 스튜는 처음 먹어 봐."

"맙소사.... 야영 중 이렇게 푸짐한 식사를 하게 될 줄이야."

다들 감탄 반 눈물 반으로 게걸스레 그릇을 비우는 동안,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콘라드가 풀밭에 앉은 나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천막 안에 의자와 탁자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드시는 편이...."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숟가락으로 그릇을 툭 치곤 말했다.

"보살펴야 할 도련님 취급받으려고 온 게 아니다."

손가락을 들어 멀리 보이는 다른 후계자들을 가리켰다.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왜 안 되는데?"

"아, 이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들은 허둥거리며 다른 기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날 저런 얼간이들과 똑같이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콘라드를 돌아보자, 그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7)

몇몇 후계자들은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몸을 지킬 수준의 검술을 갖췄을 뿐.

그들은 이 북부토벌전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가문의 대표로 따라왔다.

그 결과 저런 덜떨어진 모습들을 보이는 것이다.

콘라드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심 내가 저런 꼴을 보이리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야영 경험이 없으셔서 도련님이 힘들어하실 거라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뺨을 긁적였다.

"그런데 웬걸, 굉장히 능숙하시더군요. 야영을 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내가 어떻게 인장을 들고 수도까지 갔는지 들었을 텐데."

내 답변에 콘라드가 아, 소리와 함께 이마를 때렸다.

"그러셨군요. 어쩐지 기마술도 수준급이시더군요.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

"종일 말을 타고 달려왔는데도 안색 한 번 변함이 없으시던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내 몸 상태에 대한 걱정이 많은 것 같군."

그를 향해 보란 듯이 웃어 보인 뒤, 목소리를 키웠다.

"부단장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식사를 마친 뒤 대련을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화기애애했던 모닥불 주변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럼 내 몸이 멀쩡하다는 증명이 될 테지."

툭, 투둑.

몇몇 단원들이 손에서 숟가락을 놓치고,

"부단장,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우리한테 왜 이래요?"

원망 어린 시선이 화살처럼 콘라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오늘 대련엔 부단장도 포함이다."

그러다 내가 한 마디 하자,

"아벨 도련님 만세!"

"역시 도련님! 믿고 있었다고요!"

아까와는 다른 열광적인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도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콘라드가 울상을 지었다.

❖ ❖ ❖

식사를 마친 뒤 각 기사단의 대표들끼리 모여 짧은 회의를 가졌다.

물론, 다른 기사단들이 지체된 덕분에 우리 기사단은 넉넉히 특훈까지 마칠 수 있었다.

"저것들이 준비만 빨리 했어도...."

"이렇게 처맞는 일은 없었을 건데...."

주변 기사단을 향한 오베스트 기사단의 원성이 높아진 것은 덤이었다.

회의 장소는 미켈의 천막. 북부산 가죽 제품과 털로 엮은 가구가 가득한 독특한 분위기 속에.

가문의 후계자와 기사단장들을 포함한 스무 명의 인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너른 벌판을 쭉 달려갈 것이오. 북부 산맥의 초입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런 일정이 계속되겠지."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약 사흘 정도로 예상하고 있소. 지금 속도라면."

눈에 띄게 파리한 얼굴을 한 청년, 베넷이 손을 들었다.

"내일도 이 속도로 가는 겁니까?"

그의 녹안이 피로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오늘 일정이 곱게 자란 도련님이긴 그에겐 다소 힘겨웠던 모양이다.

"베넷 공자에겐 미안하지만...."

미켈이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산맥에 들어서면 더욱 일정이 지체될 거요. 달릴 수 있을 때 최대한 시간을 단축해두어야 하오."

"...알겠습니다. 미켈 영주님의 마음 이해합니다."

베넷은 금세 표정을 가다듬곤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어오르는 쓴웃음을 감추었다.

'그래도 귀족이라고 체면치레는 하는군.'

조금 더 볼썽사납게 억지를 부리거나 떼쓰기를 기대했건만.

카인의 절친한 친우인 그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자신들의 클럽에 들어오라고 말을 걸 때 보여준 이미지도 별로였고.

'뭐, 두고보면 밑바닥을 드러내겠지.'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 예의라는 겉껍질을 벗어던지고, 제 본성을 보이기 마련이니까.

"...."

시선을 돌리기 직전, 나를 바라보는 베넷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며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유치하긴.'

그나마 카인이 여기 없어서 망정이지, 있었다면 둘이 함께 나를 약올리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럼 주의 사항은 이 정도로 해두고,"

미켈이 회의를 마무리했다.

"각자 불침번을 세운 뒤 내일을 위해 푹 쉬도록 하시오."

"이렇게 인원이 많은데 굳이 불침번이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몬스터라도 이런 곳은 습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몇몇 대표들의 태만한 질문에 미켈의 입가가 설핏 굳었다.

"지금-"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정 그러면 불침번 없이 주무시지요."

내 신랄한 목소리가 공간을 걷어쥐었다.

"그러다 푹-잠들어서 눈먼 칼에 맞아 죽어도, 뭐 어쩌겠습니까."

비뚜름한 미소를 베어 물며 이죽거렸다.

"그 수준이면 발목만 잡을 테니 지금 사라져주는 게 좋겠죠."

"지금 뭐라고...."

대놓고 면박을 받은 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탕!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두드렸다.

"아벨 공자, 지금 말 다 했소? 우리 기사단의 실력을 의심하는 거요?"

"아무리 오베스트 기사단이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라 이름 높다 해도, 방금은 말이 지나쳤소!"

덩달아 발끈한 다른 기사단 대표마저 목소리를 높였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게 실력을 향한 의심이 된다니 놀랍군요."

그들의 이글이글 들끓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사한 미소를 꽃피웠다.

"당당하다면 그런 생각 따윈 안 할 텐데 말입니다."

서로를 향한 눈길이 험악해진 순간,

"그만하시오."

조슈아 단장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갈랐다.

"만약 불침번이 필요치 않았다면, 미켈 영주님께서 말씀하셨을 거요."

그가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며 한 명 한 명에게 엄중한 눈빛을 던졌다.

"이번 행군의 책임자는 미켈 영주님이오. 다들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더 이상 반박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단호한 마무리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났고, 다른 이들 또한 입술을 짓씹으며 물러났다.

하지만 다음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날카로운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어련하시겠어.'

카인의 편에 선 가문들.

그들을 보란 듯이 들쑤신 것은 고의였다. 이성을 잃고 흥분할수록 실수를 하게 되니까.

현재 카인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그들을 더욱 조각내고 파헤쳐, 다시는 붙을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하는 꼴들을 보니 조만간 자멸할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타박을 줄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감추며 시선을 내리까는 순간,

"...."

나를 향하는 몇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적대적이기라기보다는 탐색에 가까운 시선.

고개를 들어 근원지를 찾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냉큼 시선을 돌렸다.

'아하.'

아무래도 조만간, 저들과의 만남을 가져야 할 모양이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회의에 모였던 인원들이 흩어졌다. 막사로 돌아오자 콘라드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단원들은?"

"불침번 순대로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좋아. 첫날부터 별 탈 없이 지나가서 좋군."

치하의 의미로 콘라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나 혼자 쓰는 막사 입구의 천을 들어 올린 뒤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별일 없이 깨우거나 천막 안으로 들어오지 마라. 절대로."

마지막 단어에 강세를 주자, 콘라드가 눈알을 한 번 데굴 굴리고는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편한 밤 되십시오."

천막 천을 내린 뒤 안을 둘러보았다. 동물의 털로 만든 푹신한 침낭, 간이 탁자와 의자 등.

"그래도 제법 구색을 갖춰놨네."

다른 기사단원들이 한 막사 안에서 여럿이 붙어 자는 것에 비하면 대단히 호사로운 생활이었다.

"아무렴, 내가 이번에 들인 돈이 얼마인데."

나 혼자 편히 잔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부끄럼 따위는 없었다. 일개 기사와 기사단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의 위치는 명확히 다른 것이니까.

자고로 나의 평안이 오베스트 기사단의 평안인 법이었다.

침낭에 바로 들어가는 대신, 막사 중앙에 꿇어앉았다.

"...."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차분히 숨을 가라앉혔다. 막사 주변으로 감각을 확장시켰다.

[타닥, 탁.]

중앙에 피워둔 모닥불이 장작을 태우는 소리와,

[뚜벅, 뚜벅.]

각 기사단의 불침번들이 순찰을 도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않겠습니까. 당장 내일부터라도....]

[-가 좋지 않아.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어.]

내가 잘 아는 목소리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그렇게 부지런히 내일을 위한 회의를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드르렁-푸우.]

[크르릉, 킁.]

사방에서 시커먼 사내들이 코를 골아대는 소리가 진동하기도 했다.

[아, 새끼들. 코에다 나팔을 달았나.]

그 옆에서 자는 이들이 짜증스레 중얼거리는 소리까지도.

참으로 평화로운 밤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야, 교대하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불침번끼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천막 아래를 들추고 재빨리 빠져나왔다.

아까 미리 말뚝을 느슨하게 만들어두었기에, 그 틈으로 몸을 빼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뒤, 소리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절대영역을 켠 채였기 때문에 순찰하는 인원에게 들키는 일은 없었다.

조용히 걷는 동시에 다시 청력에 집중했다.

[...이 없잖아.]

[...라면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야 할지도.]

과연, 기대했던 목소리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게 느껴졌다.

그곳의 천막을 향해 걸었다. 아예 기척을 드러내고 보란 듯이.

내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자,

"-!"

"-헉!"

천막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단원들이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벨 킨드리얼님."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몹시 당황한 그들을 향해 태연한 음성을 건넸다.

"안에 볼일이 있어서."

"지금 이 안엔...."

"알아, 알아. 다 모여 있겠지."

그들을 제치고 입구로 성큼 다가섰다.

"잠깐-"

단원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펄럭!

내가 천막 입구를 들추는 게 더 빨랐다.

"여어."

천막 안에는 6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아, 아벨 킨드리얼?"

"당신이 여긴 왜...."

탁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면면을 눈에 담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뚜벅, 뚜벅.

단단한 발소리가 천막 안의 침묵을 갈랐다.

"무례하군."

누군가 입을 열었다.

강아지의 그것처럼 북슬북슬한 갈색 머리카락, 끝이 약간 처진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데릭 그레이엄."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데릭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렇게 무턱대고 들어오지 말라고 사람을 세워둔 건데."

"말하고, 안에다 알리고, 허락받고. 그러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아벨 공자를 여기 초대한 적은 없어."

"알아."

유들유들 대꾸하며 다가가 남아 있던 의자 하나를 드륵 당겼다.

털썩.

거기 걸터앉은 뒤 빙그레 웃었다.

"지금 초대한 걸로 하면 되잖아. 안 그래?"

내 뻔뻔한 태도에 주변 이들이 모두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니 나가보게."

데릭이 나직한 한숨을 쉬더니, 입구에 엉거주춤 서 있는 단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다들 앉아."

나를 바라보며 차마 앉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한 뒤,

털썩.

그 또한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앉았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꽤 거친 소리였다.

"순순히 나갈 것 같지도 않고. 차라리 대화를 하는 게 더 빠르겠지."

데릭이 푸른 빛이 도는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데릭 그레이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자, 정계의 다툼을 싫어해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그레이엄가의 장자.

마찬가지로, 그의 주변에 모인 인물들 또한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가문의 후계자들이었다.

'즉, 내 우군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지.'

아직 수도에서의 내 힘은 미약했다.

이번 회의에서 오베스트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지만, 본격적으로 세력이 구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토벌전을 계기로 내 뒤를 지원해줄 귀족 가문들을 포섭하는 게 내 계획 중 하나였다.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Chapter 22. 한 걸음씩 차분히 전진한다. (8)

"무슨 말이지?"

"감출 필요 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데릭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으며 말했다.

"물자를 넉넉히 챙겨오지 못한 데다, 이번 토벌전을 잘 마칠 수 있을지 고민이 많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데릭은 물론이고 주변의 후계자들마저 안색이 변했다.

"게다가. 토벌전 후의 일도 남아있잖아?"

이번 토벌전에서 공훈을 세웠느냐의 여부는 향후 가문 간의 세력 다툼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것이 많은 가문에서 이번 토벌전에 신경을 기울이는 이유였고.

"...흠."

아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그레이엄 가문 등이 고민하는 이유였다.

탁자 위의 공기가 절로 팽팽해졌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복잡한 눈빛들이 속내를 대신했다.

"정치적 입장을 말하는 거라면."

이윽고 데릭이 팔짱을 끼며 느릿하게 말문을 뗐다.

"아벨 공자도 썩 여유롭진 않을 텐데."

그의 눈길이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이번 회의만으로 판도를 뒤집을 순 없어. 킨드리얼 가문이 득세하기엔 턱없이 모자라."

다른 후계자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이번 회의에 참여했던 부친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진 그랬지."

여유로움을 내보일 때 으레 그랬듯이. 깍지낀 두 손을 탁자 위로 내렸다.

"이번 토벌전이 끝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될 거야."

느슨하게 풀어진 눈매를 데릭에게 향했다.

"그때를 위해. 나와 손을 잡는 게 어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데릭이 미묘한 눈빛을 보였다.

"동맹이라."

그가 고개를 옆으로 슥 기울였다.

"거절하면. 우리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건가?"

회의에서의 내 모습을 꼬집는 한 마디였다.

"어쩌나? 우린 그렇게 뒤가 구린 일은 안 하는데."

"응. 정말 깨끗하더라. 이렇게 청렴히 살면 숨 안 막히나 싶을 정도로."

순순히 인정하자 데릭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우리 뒤를 진작 캐본 모양이군. 왜 그런 짓을 하지?"

"재밌잖아."

태연한 대꾸에 데릭의 눈 끝이 삐죽 올라갔다. 그래봐야 워낙 순한 눈매라 그리 무섭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너희만 골라서 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난 뒤가 구린 사람들만 건드리니까."

"그것 참 위안이 되는 말이군."

데릭의 투덜거림에 아랑곳않고 키득 웃었다.

"무작정 거절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보지 그래."

"지금으로선 딱히-"

"식량 한달 치."

잠시 침묵하던 데릭이 의심 가득한 말투로 반문했다.

"...별 쓸모없는 마른 식량만 잔뜩 들어 있는?"

"비계가 잘 붙은 신선한 육류로. 알이 굵은 곡류도 골고루 넣어서."

"...."

"추가로 기름과 소금도 제공하지. 특히 기름이 부족한 걸로 알고 있으니."

데릭은 비교적 표정 관리를 잘했으나. 나머지 인물들의 눈가엔 감출 수 없는 탐욕이 흘렀다.

"또한 각 가문의 기사단이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

"협조라니 뭘 어떻게...."

"내 가문의 이름이 무엇인지 잊었나 본데."

자신감 넘치는. 아니 오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이었지만.

"오베스트, 킨드리얼...."

내 이름에 담긴 단어가 갖는 무게는 남달랐다.

데릭은 그제야 내 뒤에 버티고 선 기사단의 그림자를 깨닫고 전율했다.

"오베스트라면...."

"충분히 다른 기사단을 도우면서도 싸울 수 있거든."

너무나 구미가 당기는 조건들이었다. 도무지 군침을 삼키지가 않을 수 없는.

"...그럼 대가는?"

그러나 데릭은 그 먹이에 곧바로 달려드는 대신, 손가락으로 푹 찔러보길 택했다.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퍼주는 데는 원하는 게 있겠지. 그걸 듣고 판단하겠어."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데릭 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계산적이군?"

"뭐라...."

"그냥 서로 돕고 살자는 의미로 건네는 호의일 뿐이야."

데릭과 나머지 후계자들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지금 내 앞에서 말하는 게 '그' 아벨 킨드리얼이 맞는지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식량은 내일 기사들 편에 바로 보내지. 그럼 의심이 풀리려나?"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 기다려."

데릭이 되려 다급해진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정말로 그것뿐인가? 나중에 먹은 만큼 뱉어내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면, 두 배로 뱉어내라 할 생각인가?"

"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왜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데?"

짜증스레 반응하자, 데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럴 일 없으니까 마음 편히 쓰도록 해."

한 마디 툭 던지곤 터벅터벅 천막 입구쪽으로 향했다.

"이게 끝? 지금 가려는 건가?"

등 뒤에서 데릭의 얼빠진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래, 끝. 내일 또 보지."

짤막하게 대꾸한 뒤 천막 입구를 열어젖혔다. 아까의 그 기사들이 더욱 뻣뻣한 자세로 보초를 서고 잇었다.

"고생이 많군."

"...."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자. 기사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와 천막 속의 사람들을 뒤에 두고 그곳을 떠났다.

'대가라니, 귀여운 소리를 하네.'

지금쯤 서로 격렬하게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데릭과 나머지 후계자들을 생각하며 웃었다.

현재의 나는 그들에게 받을 만한 것이 없었다.

물자와 식량, 말과 기사도 모두 내가 앞선다. 재력 또한 마찬가지.

다만 그들에게 마음의 짐을 얹어줬을 뿐이다.

'아벨 킨드리얼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무시할 수 없는 짐을.'

저들은 염치를 알기에 내 도움을 받고도 모른 척 입을 싹 씻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내가 그들의 암묵적 지지와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때.

이번 토벌전의 기억은 그들이 내 편에 서도록 등을 떠밀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나를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번 토벌전이 끝나고 나면 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뒤집히겠지.

그를 위해 미리 처리해 둘 일이 있었다. 야영장 밖으로 소리죽여 걸음했다.

탁.

아영장을 완전히 벗어나 순찰을 도는 이들에게 걸리지 않을 거리까지 멀어진 뒤.

스륵.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손에 쥐었다. 오랜만에 블랙스타를 만날 때였다.

삐익!

호루라기를 불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불어대자, 어느 순간 블랙스타의 존재감이 절대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삐익! 삐익!

힘차게 두 번 불어 녀석에게 내 위치를 알렸다. 그리고 자리에 멈춰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푸르릉!"

반가운 울음소리와 함께 블랙스타의 몸이 나타났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드는 대신 녀석의 주둥이부터 살폈다.

"흠."

블랙스타의 입가엔 먹이 대신, 바쁘게 달려오느라 스며 나온 콧김만이 가득했다.

"자식, 말 잘 듣네."

픽 웃으며 다가온 녀석의 콧잔등을 긁어주었다. 그대로 손을 뒤로 넘겨 목덜미를 스치고 상체까지 살폈다.

"살은... 여전하군."

역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다웠다.

아무튼 안색이 좋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걸 보니 잘 먹고 다녔던 것 같았다.

"잘 지냈어?"

부드럽게 쓰다듬기를 계속하자 블랙 스타가 목젖을 가볍게 울렸다. 기분이 좋은 듯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당분간 계속 이동할 거야.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라."

"푸릉?"

"지금껏 안 먹어 본 별미를 먹을 때가 됐지. 아니, 특식이라고 해야 하나?"

"푸르릉?"

블랙스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너무 어려운 말을 썼나."

피식 웃고는 녀석의 궁둥이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내일 이 시각쯤에 또 부를게. 그때 보자."

매일 비슷한 거리만큼 멀어지면서 부르면, 영리한 녀석은 금세 규칙을 알아채고 따라올 것이다.

"푸르릉?"

블랙스타가 이걸로 끝이냐는 듯 투레질을 했다. 눈에 왜 자신을 태우고 달리지 않느냐는 의문이 담겼다.

"며칠만 지나면 그만 부르라고 하게 될 거다."

웃으며 녀석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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