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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 꿈 꿔 볼 테야?

우리가 머무는 곳은 교실을 개조한 숙소였다.

앞뒤 문은 막아 버리고, 가운데 벽을 허물어 커튼을 달아 놨다.

그러니까 가운데 통로가 훤히 뚫린 가로로 긴 숙소란 말이다.

일렬로 놓인 간이용 침대를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을 딱 잡아 주는 고가의 매트리스는 바라지 않아도, 이건 좀 열악하네.

교관이 없는 사이, 한 달 동안 지내려면 몇 가지 규칙이 필요하긴 했다 생리현상 해결만 문제가 아니라 이거다.

일단 남녀가 유별함으로 생기는 트러블이다.

"훔쳐보지 마라."

셜록 홈즈 개나리가 말했다.

얼굴은 어지간한 걸그룹 옆에 세워 놔도 꿀리지 않을 미모지만, 난 이상하게 얘가 얄밉다.

"누가 본다고."

그래서 한마디 툭 던지니.

"이십 대 남자의 욕구를 가지고 눈앞에서 옷 갈아입는 여자를 안 본다는 건 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거다."

그걸 왜 날 빤히 보면서 얘기하냐?

나 문제없거든?

완전 왕성하거든? 거기에 미개봉이거든?

여길 만든 놈이 아까 그 교관 삼 남매인지, 아니면 회사의 다른 놈인지는 모르지만, 아예 생각이 없진 않았나 보다.

내부에 탈의실이 있었다.

'피팅룸'이라고 예쁘게도 써 놨네.

작진 않았다. 애초에 교실이다. 열 명이 지내기에도 충분히 크다.

탈의실도, 같은 방을 쓰는 여자 셋이 같이 들어가도 충분해 보였다.

난 쓱 하고 룸메이트를 확인했다.

잘생긴 개나리, 셜록 홈즈 개나리, 방귀태, 김요한, 나.

여기까지 다섯이다.

그리고 눈매가 축 처져 강아지상인 미남, 미녀가 눈에 들어왔다.

많이 닮았네.

부부 아니면 남매다.

남자는 곱슬머리라 복슬이, 여자 쪽은 유난히 피부가 하얘서 흰둥이란 별명을 붙였다.

다른 여자 하나는 불멸자치고는 평범했다. 혼혈에 불멸의 피가 옅으면 저리된다고 방귀태가 말해 줬다.

그녀는 말이 없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타입으로 보였다.

요한은 그새 나머지 남자 둘과 말을 텄다.

한 명은 잘생겼는데 눈매가 너무 깊고, 이목구비가 굉장히 진했다.

진해도 너무 진해서 톡 건드리면 기름이 쭉 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거기에 적당히 까무잡잡한 피부를 보니.

"만수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뭐?"

누가 불멸자 아니랄까 봐 작은 목소리도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알아듣네.

"풉."

그 말에 흰둥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 이걸 알아들어?

느끼하게 생겨서 얼굴에 기름이 흐른다. 기름이 많으니 석유왕, 거기서 연상된 게 만수르다.

이걸 알아듣다니, 센스가 보통이 아닌데.

"뭐냐? 그게?"

"아니, 만수르 닮았다는 말 안 들어 봤어?"

"안 들어 봤다."

불쾌해 보였다. 더는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다.

"응. 그래."

"내가 더 잘생겼지."

만수르가 중얼거렸다.

나름 제 얼굴에 자신감이 충만해 보였다. 그런 만수르도 개싸가지 생태계 파괴자 개나리를 볼 때면 주춤하긴 했다.

저 얼굴은 진짜 탈옥범으로 치면 신창원이요, 복싱 챔피언으로 보자면 메이웨더다.

마지막 한 명은 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한 친구다.

"친구, 숨쉬기 힘들지?"

옆에서 쉭쉭 하며 숨을 몰아쉬는데 굉장히 힘들어 보였다.

어림잡아 120kg의 거구에 아까 선착순에서 당당히 꼴찌, 그것도 압도적 꼴찌를 기록하고 아직도 숨을 고르는 친구다.

"괜찮아."

비만 불멸자라, 더럽게 안 어울리긴 하네.

얘는 어쩌다가 이리 살이 쪘을까.

"환복해."

밖에서 파랑새의 외침이 들렸다. 외침이라기보다는 평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지만, 다들 불멸자다.

듣는 데 문제는 없다.

"훔쳐보지 마. 자를 거다."

셜록 홈즈가 말했는데, 뭘 자를 건지 주어가 빠졌는데?

여자 셋이 피팅룸에 들어가고 우리도 잽싸게 옷을 벗었다.

아우, 찝찝해.

땀 흘려서 샤워하고 싶은데, 지금 그걸 바라면 사치겠지.

난 금세 녹색의 칙칙한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 나간다."

말수가 적은 여자애다. 귀에 꽂히는 목소리다.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시절이었다면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요.

요즘 시대 말로 하면 음색 깡패다.

얘 목소리 죽여주네.

"와, 너 노래 잘하겠다."

내가 말하자.

"개수작 금지."

셜록 홈즈가 날 향해 입을 열었다.

...넌 나랑 전생에 원수였냐? 개수작은 무슨 개수작이야.

물론 아주 조금, 호의를 얻고자 한 말이긴 하다만.

"고마워."

음색 깡패 친구가 눈웃음과 함께 말하며 지나쳤다.

그래, 내가 응, 이상형이 명확한 사람이야. 절대 개수작이 아니라고.

셜록은 날 무시하고 지나쳤다.

쟤는 진짜 언제 시간 되면, 몰래 뒤통수 한 대 호되게 후려쳐야겠다.

"나와라."

파랑새의 말에 우리는 전부 움직였다.

밖으로 나오니 엉거주춤 서 있는 이들이 보였다. 그 앞에 키가 큰 파랑새 하나가 모자를 눌러 쓴 채 말을 이었다.

"본 교관 기준 좌측, 식당이다. 오전 7시, 정오, 오후 6시. 식사 시간이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음식 섭취가 안 되니 식사 시간 꼭 지키길 바란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밥 먹는 시간도 정해 놓는 거냐.

마침 정오다.

점심때였다. 안 그래도 내 몸 안의 위장님께서 식료품을 주지 않으면 위액으로 내 몸을 불태울 거라고 협박 중이었다.

"각 숙소 열 명이 한 조다. 앞쪽부터 1조, 여기까지 10조다."

이런 부분은 일반 회사 오티랑 비슷하네.

조 짜고 어울리게 하는 거.

"그럼 식당으로 이동. 줄 맞춰서 가. 각 조는 이 열 종대로 움직인다."

군대도 아니고 걸으며 제식 훈련이다.

감각이 탁월할 불멸자를 모아놓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왼발, 오른발까지 맞춰가며 걸었다.

식당에 들어가자, 푸짐한 식사가 우리를 반겼다.

순서대로 자리에 앉자, 그 식사가 상에 놓였다.

수육이었는데 양이 많았다.

불멸은 잘 먹으니까, 이 정도는 줘야지.

다행히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철칙을 교관도 지켰다.

먹고 돌아가려는데, 파랑새 중 하나가 우리 식탁 옆으로 다가왔다.

"3조 조장 정해라."

다들 눈치를 살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네가 해."

셜록 홈즈 개나리다. 그녀가 가리킨 건 잘생긴 개나리였다.

"왜?"

"네 혈통 그쪽이지?"

이게 무슨 개나리 까먹는 소리인가 지켜보는데.

"그럼 네가 해야겠네."

복슬이도 동의하고, 흰둥이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상관없다는 듯한 음깡과 돼지는 마지막까지 먹기 바쁘고.

귀태와 요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롯이 나만 손을 들어 물었다.

"쟤 성격 나빠 보이는데? 자고로 리더란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게 너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고, 여기에 피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건 팩트지. 그러니까 네 의견은 무시하는 게 옳아. 조장은 이쪽."

셜록 홈즈는 교통정리를 잘했다.

강남 팔 차로 한복판에 던져 놓고 싶을 정도다.

내 의견은 무시당했다.

이 새끼들.

이제 2시간에서 4시간이 넘어감으로 진한 우정과 연대가 쌓인 귀태 형과 요한 형도 마찬가지다.

"너 자꾸 왜 나서냐?"

아니, 김요한 씨가 내 편은 못 들어줄망정 핀잔을 줬다.

아, 몰라. 그래.

니들 맘대로 해라.

먹고 대강 지킬 수칙을 외웠다.

별 건 없었다.

이곳의 일은 발설 금지고 퇴사는 자유라는 것과.

벌점이 50점 넘으면 경고, 100점 넘으면 자동 퇴사라는 거다.

바로 훈련할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옷에 맞춰 싸구려 워커와 몇 가지 물건을 받아야 했다.

백 명이 우르르 몰려서 보급품을 받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갔다.

씻고 조금 쉰 뒤에, 저녁 먹으니 금세 저녁 시간이었다.

"간단한 교육 후, 취침이다. 각 방에서 모두 화면을 봐라."

숙소에는 전부 40인치 크기의 모니터가 있었다.

그 모니터를 켜니 라떼 대머리 교관이 보였다. 그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 이름을 모르고 온 놈은 없겠지?"

나 모르는데.

"우리 회사 이름이 뭐야?"

옆자리 귀태에게 묻자, 그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넌 아는 게 뭐냐?"

"내가 쾌남이라는 거?"

"미친 거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미쳐 있는 거야."

개소리에 답하는 대신 귀태는 회사 이름을 말해 줬다.

"화림정보통신."

아, 그래. 이름 한 번 듣기 어렵네.

"너희가 무사히 이 신입 사원 훈련 과정을 끝내면 화림의 정규 직원이 된다."

그 와중에도 라떼 교관은 계속 말했다.

공무원이지만, 정부에서 지원하는 회사의 정규직이란 거다.

철밥통이란 점은 공무원과 같았다.

아버지가 공무원 시험이라고 한 건, 아무래도 어머니 때문에 뿌린 연막 같았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거야, 똑같지.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냐? 나 때는 입사하려면 칼날 구보 통과하지 않고는 엄두도 못 냈는데."

그가 중얼거리더니 교육을 이어 나갔다.

아니, 이게 교육은 맞나.

"너희도 다 알면서 왔겠지? 입사해서 뒈지기 싫으면 잘 배워 둬라. 끝."

"그렇게 끝내게요?"

"다 알고 온 애들한테 뭘 더 말해."

"그래도 이건 아니죠."

화면 속에서 단발머리 교관이 나왔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화림의 목적은 명확해요. 여러분이 불멸의 힘을 바르게 쓰게 하는 거죠. 그걸 명심하길 바라요."

네. 알겠습니다.

속으로 답하니, 모니터가 암전됐다.

"다들 취침 준비."

이때까지만 해도 난 내일 하게 될 게 어떤 훈련일지, 기대감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조금도 몰랐다.

그렇게 해가 떨어졌다. 깨끗하게 씻고 누우니 나름 편안했다.

애초에 난 아스팔트 위에서도 잠들 수 있는 위인이다.

그리 누운 채 자려고 하니.

"조용히 좀."

"너 손가락 움직였지?"

"숨 쉬는 소리 어떻게 안 되냐?"

"꼼지락거리지 말라고."

이런 염병할 예민쟁이들.

나야 잘 수 있지만, 한방을 쓰는 놈들이 줄기차게 불만을 터트렸다.

"제발, 숨 좀 쉬지 마."

압권이다. 김요한 이 새끼야.

바로 옆자리에서 그리 부탁을 하다니.

"죽어 주랴?"

"어, 나가서 죽어 줘."

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불멸의 예민함은 불면일 때 극에 달한다고.

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 새끼들은 다들 각성한 지 3년 내외다.

보통 불면을 이겨 내는 데 필요한 시간이 최소 3년이다.

그것도 산에서 면벽 수련 급으로 시간을 보내야 가능한데.

여기서 최고령자는 방귀태(23)다.

"오늘도 못 자겠지."

그는 뜬 눈으로 천장을 보며 반쯤 포기한 채, 말을 뱉는 중이었다.

그동안 잠이 푹 든 적이 몇 번 없을 거다.

"아예 못 자면 생활은 어떻게 하냐?"

내가 묻자, 요한이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말했다.

"안 되면 최후의 수단을 쓰지."

"목이라도 잘라?"

농담 삼아 말하자.

"비슷해. 쇼크를 일으켜 기절하는 것도 방법이지. 우리야 뭐, 불멸이니까 후유증이 없잖아?"

그래, 기절하든, 뭘 하든, 며칠이면 낫긴 하겠지.

나도 그 비슷한 얘기를 듣고 오긴 했다.

"아들아,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거 쉽다."

"그래요?"

"응. 그냥 이유 없이 잘해 줘. 그럼 돼."

"선물 공세 같은 거?"

"정답. 역시 내 아들."

난 웹툰 미생과 드라마 미생을 전부 완독하고 정주행했다.

거기에서 동기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하던가.

"근데, 이게 쉬운 게 아니야, 힘이 과하면 다음 날까지 데미지가 남아서 이틀 뒤에 깨어난 적도 있어."

요한의 말을 듣고 내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자는 사람?"

"닥쳐라."

묻자마자 조장 개나리가 말했다.

우리 비만 친구까지 잠을 못 자고 헐떡였다.

안 그래도 예민한데 열 명이 한방을 쓴다.

애초에 이걸 노리고 한방에 넣어 둔 걸 거다. 불멸의 훈련 기본 요지는 언제나 같구나.

괴롭힘이다. 과외 선생에게 신물 나게 당해 봤다.

"재워 줘?"

내가 요한에게 묻자, 요한이 눈을 깜빡였다.

"야, 기절 수면도 아무나 하는 게...."

말해 뭐해.

휘릭, 단숨에 요한의 팔을 잡고 당겨 등 뒤에서 안으며 오른 팔뚝을 목 밑으로 집어넣었다. 팔꿈치랑 턱을 일치시켜 목과 팔 사이 공간을 제로로 만든다. 그리고 반대쪽 팔을 걸어서 당겼다.

아름다울 정도로 깨끗하게 들어간 넥 초크다.

"끅!"

요한이 버둥거리려는 걸 양발로 허벅지를 잡아 고정했다.

"잘자, 내 꿈 꿔."

귀에 한마디를 남기자, 요한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미친."

방귀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귀태 형이 놀란 이유? 내가 한 짓이 가학적이라? 아니지.

이들은 불멸이다.

적당한 힘으로 기절해서 잠들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인데.

방금 내가 쓴 그라운드 기술과 완벽한 힘 조절에 놀란 거다.

변신족 훈련받으며 그라운드 기술 배운 보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변신족 육체를 다루는 나에게 허약한 불멸 기절시키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힘 조절도 마찬가지!

고로, 난 이들에게 안전한 수면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

"귀태 너도 내 꿈 꿔 볼 테야?"

"오, 완전, 네 꿈 꿀래."

귀태도 꿈나라로 보내고 하는 김에 강아지 남매와 비만 친구, 음깡도 보내고 나니, 둘이 남았다.

자, 잠들 거냐, 아니면 자존심을 세울 거냐?

개나리 둘이 날 바라봤다.

16. 넥 슬라이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구나. 나도 부탁해."

셜록 홈즈 개나리가 말했다.

"...내가 해 줄 것 같냐?"

"왜 안 해 줘? 이건 실리적인 문제야. 너랑 난 룸메이트고, 내가 잘 자게 되면 도움을 받은 거지. 그럼 나도 언젠가 도움을 주겠지? 산수 못 하니?"

그래, 너 참 실리적이다. 거기에 감정이란 두 글자가 쏙 빠진 것 같은데?

싫다. 해 주기 싫다. 그래서 거절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래."

넌 좀 다른 방법으로 가자.

"넥 슬라이스!"

쩍!

난 뒤돌아서는 셜록 홈즈 개나리의 연수를 손날로 후려쳤다.

경동맥에 흐르는 혈류를 막든.

미주신경성 실신이든.

상관없었다.

척수나 척추에 손상이 없을 정도로 힘 조절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보기에는 험악해도 나한테는 쉬운 일이다.

변신족 육체의 컨트롤을 위해 2년 동안 굴렀다. 이 정도야 뭐.

난 쓰러지는 홈즈의 목을 잡고 침대 위로 적당히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팔다리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놔뒀다. 속이 후련했다. 이건 폭력이 아니라 잘 자라는 배려이니.

"다음?"

잘생긴 개나리는 날 보더니 말없이 몸을 돌려 누웠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러든가.

나도 자리에 누웠고 곧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꿈조차 꾸지 않는 꿀잠을 잤다.

"코 골지 마라."

아침에 잘생긴 개나리가 말했다. 나한테 한 말이 아니라 우리 거구의 불멸 친구한테 한 말이었다.

옆으로 퍼진 뱃살을 가진 비만 친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번 흘겨보고 넘어간 게 전부다.

둘째 날 아침부터는 정신없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식사!"

시간 되면 식당에 모여서 밥 먹고 돌아와서 씻은 뒤, 바로 밖으로 나가서 훈련이다.

뛰고 구르는 그런 종류의 훈련이 기초란다.

그래서 이게 힘드냐고 묻는다면.

보통 사람이야 힘들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그러니까 워밍업 수준이다.

변신의 육체와 처절한 과외로 단련 받은 나다. 이건 유치원 학예회 수준이라 이거다.

오전 구보와 웨이트 트레이닝을 포함한 기초 체력 단련 이후, 점심을 먹은 우리는 다시 연병장에 모였다.

단발머리 박다람 교관님이 단상 위에 서서 물었다.

"격투기 경험 있는 사람?"

기술 단련 시간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녀는 간단하게 교과 내용을 설명했다.

어려운 건 없었다.

주먹 쓰는 법과 스텝, 그라운드 기술을 통틀어 그녀는 근접 전투의 전문가였고, 그걸 가르친다는 거니.

고로 기술 교관 담당이란 건 싸우는 법을, 그것도 근접전 위주로 가르치겠단 거였다.

몇몇이 격투 경험이 있다고 손을 들었다.

그중 멍청하지만 잘생긴 훈련생과 파랑새의 대련이 있었다.

"불멸의 육체는 무적이 아니에요. 주의해야 할 약점이 많아요."

단발머리 교관이 말했고 곧 둘이 붙었다.

순식간이었다. 교관의 인스텝, 당황한 훈련생의 스웨이, 상대가 물러난 만큼 발을 앞으로 길게 뻗은 뒤 내친 파랑새의 주먹이 훈련생의 턱을 때렸다.

쩍.

훈련생의 눈이 풀리며 모로 쓰러졌다. 쿵 하고 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턱, 첫 번째 약점입니다."

쓰러진 훈련생을 폴짝 뛰어넘으며 단발머리 교관이 말했다.

하하하.

절로 웃음이 나오네.

부드러운 미소로 말하는 단발머리 교관의 얼굴 뒤로 악마가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몸으로 직접 약점을 배웠다.

난 나서지 않고 관찰만 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부터 새로운 곳까지 꼼꼼히 외우는 암기 시간 같았다.

"기본부터 하죠. 원투부터."

약점 파악 이후는 복싱의 기초를 배웠다.

몸 다루는 재주가 없는 애들은 힘들어했다.

난 어땠냐고? 놀면서 했다. 굳이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뒤처지지도 않는 딱 그 수준.

오히려 적당히 힘 빼고 하는 게 더 어려웠다.

자세가 어느 정도 잡히자.

"으잇차!"

무튜브로 레슬링을 배웠다는 잘생긴 멸치와 훈련 겸 대련을 했다.

근데 이건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태클한다고 내 허벅지에 부비부비하고 있다.

"앗, 넘어질 뻔."

적당한 연기와.

톡.

적절한 타격으로 물리쳤다.

"좀 하네?"

가슴 큰 파랑새가 그걸 보고 말했다.

난 생긋 웃어 줬다.

네, 제가 좀 합니다.

자세 잡고 이론 몇 가지 때려 박으면 대부분 몸으로 배우라는 식의 기술 훈련이다.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대망의 세 번째 시간이자, 전부 죽여 버리겠다는 양초남의 시간이 도래했다.

그의 훈련은 어떻게 보면 작대기 과외 선생과 비슷했다.

그래, 불멸 훈련에 이런 게 빠지면 섭하지.

"불멸 전통 칼날 구보다."

그가 말하며 훈련장을 선보였다.

구보란 소리에 뛰란 말이 함유되어 있으니, 훈련생 하나가 멀뚱히 보다가 물었다.

"...여길요?"

"기어가고 싶으면 기어가도 좋다."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고 일부는 이미 안다는 듯 마인드 컨트롤하며 심호흡을 했다.

그래, 갑자기 칼날 위를 뛰라고 하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난 짧지만 굵은 구보 코스를 봤다.

전체 길이는 대략 50m.

칼날 수직 길이는 한 3cm나 되려나.

왜 난 처음부터 15cm가 넘는 칼날 위를 달린 걸까.

나한테 왜 그랬어요? 작대기 선생님?

그렇게 시작된 훈련, 다들 피 튀기며 달렸고 난 아픈 척하며 뛰었다.

"아얏, 너무 아픈걸."

내가 중얼거리자.

"고통에 익숙해져라."

구보 코스 끝에 선 양초 교관이 말했다. 근데 죽여 버린다고 한 것치고는 이건 좀, 준비가 빈약한 거 아닙니까.

사실 이 정도가 정상이다.

변신족의 육체가 없는 불멸자에게는 고통을 이겨 내는 것 자체가 일이다.

난 적당히 즐겼다.

과장 좀 섞어서 말하면 지압 발판 뛰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자, 이제 슬슬 대강 훈련 과정을 알겠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애초에 불멸의 육체를 어떻게 쓰는지 몸에 붙이는 과정이다.

나는 뭐, 음. 왜 선행 학습이 중요한지 몸소 깨달았을 뿐이다.

과외 만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뛰어라."

아침이면 라떼 교관, 이제는 다들 그리 부르기로 했다.

이 교관은 '나 때는 말이야'가 입버릇이었다.

대머리 라떼의 말과 함께 다들 구보를 시작했다.

오전 8시에 시작해서 10시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코스다.

"이게 지옥이라고 생각하나? 이건 워밍업일 뿐이다."

라떼 교관이 말했고 난 동의했다.

이게 워밍업이 아니면 뭔데.

물론 나 외에는 다들 죽을 맛이었다.

숨을 헐떡이고 침 흘리는 놈도 있다.

혼혈임이 분명한 한눈에 봐도 120kg이 넘어 보이는 3조, 그러니까 나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다.

주변에 어지간하면 선남선녀만 있기에 심미안이 천상계에 머물렀는데, 가끔 내 눈높이를 지상으로 끌어내려 주는 친구이기도 했다.

"끄어어거."

그 친구가 고어 영화에서 나올 법한 신음을 흘렸다.

난 적당히 속도를 조절해 그 옆에 붙었다.

이렇게 시작하면 얘가 또 꼴찌다.

그럼 라떼 교관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요새 불멸자는 체중 조절도 못 한다. 그건 게으름이냐? 아니면 반항이냐?"

따위의 말을 뱉겠지.

내가 또 불쌍한 사람 보면 외면하지 못하는 성인군자이자, 착한 사마리아인 되시겠다.

그동안 본 결과, 얘 그냥 놔두면 분명 쓰러진다. 오전 구보 중에 벌써 두 번이나 기절한 몸이니.

난 거구의 비만 불멸자 옆으로 붙었다.

"호흡 잡아. 왼발에 들이마시고, 다시 왼발에 뱉어."

"끄어억."

그럴 정신이 없어 보이긴 하는군.

"호흡 크게, 발밑 보지 말고 멀리 봐."

내 얘기가 귓등으로도 안 들리니?

"너 여유가 넘치는구나."

후위 쪽에서 같이 달리던 수컷 파랑새 한 마리가 지저귀었다.

"아닙니다. 아우, 힘들어. 아이고 내 다리."

"넌 포기해라."

내가 엄살을 부리자, 파랑새가 비만 불멸 친구에게 말한 뒤, 휙 하고 앞으로 뛰어갔다.

고놈 참 날쌔네.

"우에에엑!"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만 친구가 옆으로 빠지더니 나무 기둥에 기대고는 그 나무에 거름을 줬다.

듬뿍 줬다.

피자와 김치전의 중간쯤 되는 작품을 보면 내 속도 같이 뒤집힐 거다.

일단 냄새부터 지독했다.

"미친."

냄새에 민감한 훈련생 하나가 뛰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너 그런 말 써도 되니?

팟.

언제 나타났는지, 잽싸게 옆에 붙은 라떼 교관이 입을 연다.

"미친? 내 귀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내 머리가 이상한 건가? 훈련생에게 묻겠다. 미쳤나?"

"후, 우, 아닙니다."

"그래, 아닌 줄로 알겠다. 오늘 선두로 들어와라. 아니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저건 위협이 아니라 진실이다. 손가락을 잘려도 훈련 과정에 큰 이상은 없을 테니까.

후위의 마지막 무리가 눈앞에서 멀어져 간다. 라떼 교관이 뒤를 슬쩍 봤지만, 그도 별말 없이 그대로 떠났다.

후위를 지키는 파랑새 하나만 우리를 주시했다.

그들에게 시선을 떼며 내가 말했다.

"괜찮아?"

토악질하고 나니 좀 괜찮아졌는지, 비만 친구가 비틀거리는 몸을 나무에 기대고 말했다.

"상관 말고 가."

그 눈빛에 보이는 포기라는 두 글자에 난 안타까움을 느끼고 말했다.

"슬램덩크 봤냐?"

"그거 안 본 사람도 있냐?"

"정대만이 되어라. 친구."

포기라니 이르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가 되어라!

비만의 눈빛에서 '이 미친 새끼는 날 놀리나?'라는 의문을 읽었다.

"뛰어, 뛰다 보면 견딜 만해."

"맞는 말이다."

우리를 지켜보던 파랑새, 가슴 큰 파랑새였다.

"여기서 포기할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내용은 나쁘지만, 말투에는 배려가 느껴졌다.

오전 구보는 2시간 내내 뛰는 거고 코스도 정해져 있다.

그걸 완주하지 못하면 벌점이다.

그래서 이 친구는 그동안 꾸준히 벌점을 먹었다.

"전 피해만 줄 겁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우울하다. 암울함의 극치, 자아비판의 끝판왕 느낌이다.

"그래서 포기할 거야?"

파랑새가 물었고 난 비만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려다가 포기했다.

이 새끼 땀 봐라.

대신 어깻죽지 옷을 잡고 들었다.

자, 호랑이 아니, 변신족의 힘이여 솟아라.

적당히 힘든 척하며 비스듬히 그를 일으켰다.

"도와줄게, 오늘은 완주하자."

내가 말하자.

"왜?"

비만 친구가 물었다.

"내가 의리 빼면 시체라서. 우리 룸메이트잖아."

딱히 이유가 필요한가.

쓰러진 사람을 돕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데 이유는 필요 없는 법.

"가자고."

이유 따윈 듣지 않겠다. 난 그의 팔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페이스를 조절하며 말했다.

"호흡, 호흡만 잡아."

내가 또 변신 과외 중에 24시간 마라톤 경험이 있는 몸이시다.

중요한 건 호흡이다. 일단 호흡으로 심장박동을 잡아야 나머지도 되는 거고.

"발 끌지 마. 그게 더 지친다. 너무 힘들며 차라리 빨리 걸어."

적당히 다그치고 달래며 뛰었다.

그래도 완주는 실패다.

결승선을 앞두고 두 시간이 끝났다.

덕분에 나도 완주 실패.

"둘이 사귀냐?"

라떼 교관은 그 말만 한 채, 우리 둘을 무시했다.

평소 독설에 비하면 양반이네.

물론 그 한마디에 몇몇 놈이 킥킥거리긴 했다.

새끼들, 얼굴 다 기억했다.

비만 친구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 눈치를 봤다.

"미...."

"괜찮아."

뭘 미안하다고까지 말하냐.

"...쳤냐?"

미안한 게 아니고 내 정신 상태에 대한 의문이었냐?

"내 멘탈은 무척 건강하니, 걱정 노노."

비만 친구는 날 힐긋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땀이 주르륵하고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떨어졌다.

그의 발밑이 금세 젖었다.

이 자식도 노력했다. 아직 몸이 받쳐 주지 못했을 뿐.

"내일은 완주하자."

"...굳이 왜."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냐고 물은 건 낯부끄러워 그런 거지, 사실은 미안한 걸까.

그런 낌새가 보였다.

뒤에서 따라온 파랑새가 그런 우리 둘을 보고 윙크했다.

"의리 좋네."

네, 제가 의리 좋다니까요.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먹고 뛰고 싸고, 다시 기술 배우고 먹고, 육체의 내구도 시험하고.

하루가 이렇게 빠른 줄은 처음 알았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여느 날과 같이 애들을 재워 주는 나날이겠지.

오늘도 잘생긴 개나리 놈은 거절하려나. 그럼 두 번 더 물어보고 자야겠다.

그 새끼가 대답 안 하고 몸을 돌릴 때마다, 희열이 느껴져 행복했다.

그리 생각하며 샤워를 하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너 3조냐?"

눈썹이 진한 혼혈이다. 불멸의 피가 섞였으니 얼굴은 나쁘지 않은데, 그와 별도로 거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어깨에 용도 몇 마리 감았고, 등에는 귀신 모양 문신도 했다.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빽빽하게도 했다. 네 몸이 도화지냐?

신체발부 수지부모 모르냐?

"사우나에 전신 문신 출입 금지 아니냐?"

내가 머리에 샴푸 거품을 내며 묻자, 새끼가 피식 웃는다.

"겁먹지 마라."

겁? 누가 겁을 먹어?

제일고 원펀맨으로 날릴 때, 나한테 덤빈 놈 중에 조폭 꿈나무도 몇 있었다.

불멸치고는 튼튼한 몸이긴 하다만.

너한테 겁을 먹기에는 내 몸이 너무 무기다.

"어릴 때 한 거다."

자식이 말을 이었다.

누가 물어봤냐?

대충 답하고 씻으니, 주변 시선이 느껴졌다.

"쟤 3조란다. 쟤가 걔야?"

"쟤는 버스 방귀인데."

"오늘 뚱땡이 끼고 벌점 먹은 애잖아."

"혼혈이네."

날 향한 시선이고 날 지칭한 말이다.

"나는 불멸 아니냐? 다 들린다."

그렇게 한마디 하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시선은 계속 느껴졌다. 탐색과 호기심, 경계심의 시선이다. 이 새끼들 뭐지?

씻고 방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뭔가 찝찝했다.

놈들은 3조를 콕 집어 말했다.

예민한 놈들이 모인 곳답게 요 며칠 곧잘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이 일어나곤 했다.

다쳐도 빨리 낫지, 신경은 예민하지.

싸우기 딱 좋은 환경이긴 하다.

물론 우리 조는 좀 별개였다. 다들 잘 자니, 예민함이 반으로 줄었으니까.

"우리 방 애들 어디랑 시비 붙었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요한에게 묻자, 그가 답했다.

"몰랐어?"

"뭐?"

"어젯밤에 우리 잘 때...."

엄청 소곤거리네. 요한 형이 말하면서 앞자리 눈치를 봤다.

정확히는 잘생긴 개나리 눈치를 봤다.

저 새끼, 며칠 못 자더니 다크써클 생겼던데.

눈치 보면서도 요한 형은 할 말은 다 했다.

그동안 말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나 모를 정도로 시시콜콜하게 내용을 전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 내 손길을 거부한 우리 잘생긴 개나리가 잠이 오지 않아 나갔다가 옆 방에 잠 안 오는 놈들과 시비가 붙었고.

- 평소 말하는 싸가지로 봐서는 분명 잘생긴 개나리 잘못일 확률이 높다.

- 몇 놈 쥐어 패줬단다.

그 와중에 싸움은 잘했나 보네.

맞은 놈들도 불멸이니 육체에 생긴 상처는 금세 사라졌지만, 마음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는지, 오늘 유독 3조인 날 향한 말이 많은 거였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점호가 끝난 뒤, 몇 놈의 발걸음 소리가 우리 방을 향했다.

예민한 청각, 나 외에도 다들 그걸 알았다. 적당한 긴장감이 방안을 감돌았다.

"싸우면 네가 선두. 방패로 딱이야."

그 와중에 셜록 홈즈 년이 속을 긁었다. 요게 딱 꼬집어서 우리 비만 친구를 집고 말한 거다.

"내 문제다. 나서지 마."

그걸 보고 잘생긴 개나리가 말했다.

아, 네, 이기주의 끝판왕님아.

나서는 놈을 보며 가만히 구경이나 해 주마, 하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 문신 놈하고 몇 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고 싸늘한 비수가 심장에 날아와 꽂힌 그런 기분이다.

침묵 속에서 문신남이 입을 연다.

"유광익이 누구냐?"

그는 날 찾았다.

...나?

내 눈이 잘생긴 개나리에게 향했다.

혹시 저 새끼가 내 이름 팔았니? 여기서 왜 날 찾아?

17. 넥광익

"난데."

날 찾기에 손을 들어줬다.

숨길 게 뭐 있나.

온 놈은 아홉, 다 덤벼도 나한테는 안 된다.

그동안 기술 단련 받으며 느낀바.

내가 제대로 실력 발휘하면 17 대 1의 전설을 찍을 수도 있을 거다.

"너냐? 유광익이?"

"아하."

불현듯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셜록 홈즈가 나와 문신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아낸 눈치인데.

넌 또 뭘 혼자 알아내고 그러냐.

뭐, 궁금하면 물어보면 그만이지.

"난 왜?"

내가 일어나며 묻자, 문신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턱턱 몇 걸음 걸어와 거리를 좁힌다. 거 새끼, 화끈하네.

나랑 싸우자는 거지?

그래, 어디 주먹다짐 한번 해 볼까나.

벌점 몇 점이 뭐가 중요하랴.

애초에 싸워도 벌점이 적은 이유가 적당히 싸워 보란 거로 보였다.

어딜 부러뜨려 줄까 고민하던 차다.

"나도 부탁 좀 하자."

저자세다. 부끄러워하진 않고 당당하긴 해도 날 향해 부탁조로 말했다.

...음?

"...앙?"

당황스러워 되묻자.

"나도 네 꿈 꾸고 싶다."

아, 시발, 뭐야.

다 큰 사내새끼한테 이런 말 들으니까 오만 정이 다 떨어지잖아.

"나 여자 좋아해. 존나 좋아해."

놀라서 급히 말했다.

"그걸 자랑이라고."

셜록 홈즈 넌 닥쳐.

"아니, 재워 달라고. 너희 방은 다들 편히 잔다며? 정말 뒈질 것 같아서 그런다. 우리 방 애들도 좀 부탁하자."

...아, 너 방장이구나. 그러니까 조장.

되게 안 좋은 쪽으로 오해할 뻔했잖아.

"몇 조?"

"1조다."

"...가자."

재워 달라는데, 그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싸우러 온 게 아니었네.

그럼 아까 샤워장에서 3조 나불거린 것도 싸가지 개나리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어?

"어떻게 알고 왔냐?"

슬쩍 묻자.

"왜 모르겠냐? 벌써 소문이 파다한데."

문신이 친근한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호감 가득이다.

"그래?"

"김요한이 이게 좀 싸."

말하며 문신이 손을 제 입으로 갖다 대고 엄지와 검지로 주둥이 여닫는 표시를 한다.

아, 김요한이가 범인이구나.

"왜? 곤란한 부탁이었냐?"

"아아아니."

고개를 크게 가로저어 주었다.

곤란은 무슨.

"가자고."

그의 방으로 가, 그들의 소원대로 넥 슬라이스를 먹여 줬다.

"꼭 네 꿈 꿔야 해?"

순진해 보이는 여자애가 묻길래.

"강동원 꿈꿔라."

하고 축복도 내려줬다.

그게 시작이었다.

첫날은 1조, 다음 날은 2조도 합류했고.

개중에 적당히 적응해서 잠들 수 있는 놈을 제외하면 다들 날 찾았다.

"3조 유광익한테 넥 슬라이스 맞아 봤냐?"

"어? 아니, 우리 조에도 있어. 힘 조절 잘하는 애."

"캬, 얘가 뭘 모르네, 걔한테 한번 맞아 봐, 아주 아침이 상쾌해. 후유증이 제로야. 꿀잠 제조기야."

이런 말들이 떠돌았다고 한다.

입 싼 김요한이 전해 준 이야기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난 상대의 몸 상태를 보고 숙면 코스로 보내 줬다.

덕분에 밤이 바빴다.

이 새끼들 다 재우려면 최소 한 시간은 걸리잖아.

교관도 딱히 말리는 눈치는 아니고.

하다 보니 요령이 더 붙었다.

내 앞에서 줄을 서면 내가 때려서 재우고, 기다리는 몇 놈이 알아서 침상에 날라 줬다.

불면이 만든 협동의 현장이다.

난 그러면서도 끝까지 마지막 루틴을 잊지 않았다.

"오늘도?"

바비킴 노래로 묻자, 우리 잘생긴 개나리께서는 몸을 돌렸다.

그래, 오늘도 불면의 밤을 보내렴.

며칠 내내, 난 다시 비만 친구를 붙들었다. 벌점이 좀 쌓였지만, 그와 별개로 난 이 친구의 완주를 도왔다.

"...너 진짜 왜 이러냐?"

"왜라니, 우리 룸메이트잖아."

내가 착한 사마리아인이라 그래.

본래 떨어진 지갑을 주우면 꼬박꼬박 우체통에 넣어 주는 양심 그 자체라 그렇다고.

"너 살 좀 빠졌잖아. 이제 될걸."

"그런다고 네가 이럴 필요는 없잖아."

"신세 한번 진다고 생각해, 나중에 밥 한번 사든가."

"...그래."

비만은 고개를 끄덕였고.

"혼자는 힘들지, 반대쪽 내가 붙든다."

그동안 친해진 문신 친구가 비만의 반대쪽 날개가 되었다.

"힘들면 뒤에서 밀어주랴?"

다른 놈들도 몇몇 와서 한마디씩 건넸다.

"미치겠네."

비만은 그 말을 끝으로 호흡을 조절하더니, 완주했다. 첫 완주였다.

"...."

라떼 교관은 그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응하고 나니, 이 생활이 꽤 재밌었다.

밤에 몰래 야식도 먹고 무서운 얘기도 해가며 동갑내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훈련과 교육은 꼬박꼬박 받았다.

"블랙홀이 뭔지 모르는 놈은 없겠지? 그거 모르는 놈이면 인베이더다."

라떼 교관과 단발머리, 양초 교관이 번갈아 지식을 전해 줬다.

첫 시간은 인베이더 넘버링 교육이었다.

"넘버 원부터 이름이 붙은 놈이고, 패드에 이미지와 상대하는 법이 기재되어 있다. 마지막 날에 간단한 테스트도 있으니까 외워라."

인베이더는 블랙홀에서 이곳을 침공한 놈들의 총칭이고 한 종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넘버링 시스템은 그런 놈들을 분류한 거였다.

'넘버 1'부터 시작해서 숫자가 높을수록 나중에 나타난 놈들이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혹은 우리 톨킨 선생님이 사실은 마법사라 이쪽 세계를 여행한 건지, '오크'라는 놈도 있었다.

놈은 '넘버 12' 그러니까 '넘버 12 오크' 이런 식으로 표기되는 인베이더다.

육체의 힘을 믿고 덤비는 놈으로, 집중 사격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부연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 외에도 슬라임, 슈퍼 머쉬룸, 눈먼 개, 휠 나이트 등등.

패드에 저장된 놈들만 쉰 개가 넘었다.

"거기 저장된 놈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놈들이다. 방심하면 불멸자라고 해도 죽는다."

교관이 감정 없이 사실만 전달했다.

그래, 불멸자도 죽지.

그리고 이제까지 받은 교육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 교육의 목적, 이 회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앞뒤 상황을 유추하면 뻔했다.

행정안전부 소속 공기업 화림정보통신은 화이트홀에 진입하거나 블랙홀에서 나온 인베이더를 제압하는 회사라는 걸.

뭐, 대부분 일반인도 안다. 이런 일을 하는 집단이 있다는 걸 말이다.

올드포스도 엑스큐라시도, 초능력협회 사이오닉도.

전부 그런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사실 인터넷 창 조금만 뒤지면 나오는 정보다.

불멸, 변신, 초능, 마법.

이 네 개의 힘을 지녔거나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이 인베이더와 싸우고 화이트홀을 넘어 이세계를 탐험한다는 걸 말이다.

모든 도시에는 비상시 대피할 쉘터가 있었고 그런 훈련도 1년에 한 번씩은 지역별로 받는다.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인베이더의 위협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고로 그걸 상대할 이들도 있어야겠지.

화림정보통신도 그중 하나였다.

역시나 고액 연봉은 아무나 주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걸 알고 유추한 순간, 솔직히 난 반겼다.

어머니는 반대하시겠지만 말이다.

UDT를 갈 이유가, 군대에 갈 이유가 진짜 없어졌다.

그래서 만족한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다 알고 보내신 것 같은데.

정말 아들을 이런 위험에 몰아넣으시려고 한 건가?

이런 상황을 반기긴 하지만, 아버지의 저의가 의심스럽긴 하다.

그래도 고민해서 뭐 하나.

나중에 여쭤보면 될 일을.

"넘버링 인베이더는 주의하면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마주치는 순간 무조건 퇴각해야 할 인베이더도 있다."

라떼 교관은 패드의 다음 페이지를 보라고 했다.

거기에 적힌 세 글자.

네임드.

넘버링의 숫자가 그 종을 뜻한다면 네임드는 홀로 이름을 가진 존재를 칭한다.

대형 게이트 사건, 거대 블랙홀이 출현했을 때, 오백에 가까운 무장 전투 인원을 베어 버린 놈도 패드에 있었다.

블루 나이트, 일명 '청기사'다.

자연스레 시선이 네임드 청기사에 관한 설명을 훑었다.

[양발에 호버 추진기로 추정되는 기구가 달렸고, 등에는 두 장의 금속 날개가 달렸다.

그 속도는 순간 시속 150km/h에 육박하고, 그 갑주는 전신 모두 휠 나이트의 전면부 갑주 이상으로 튼튼하다.

소화기, 유탄발사기, 화염방사기, 수류탄, 크레모아 등 화기 공격에 흠집만 난 전적이 있다.

양팔에 솟는 푸른 에너지 블레이드는 크롬 합금 방패도 가른다.]

거창하네.

"마주치면 도망가라. 네임드는 악몽이다."

교관이 말했다.

청기사 외에도 이제까지 세상에 나타난 놈이 몇 있었다.

우리는 그런 걸 배웠다.

이후에는 단발머리 교관에게 불멸의 서포트 아이템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건 블러드 젝이라고 하는 건데, 위험하면 팔뚝에 꽂으면 돼요. 그럼 알아서 혈관 찾아서 수혈해요."

말하며 보여 준 건, 한 손으로 감싸기도 힘든 두툼한 원통형 도구였다.

뚜껑을 돌려서 까는데, 그걸 까면 삐죽한 침이 있었다.

허벅지나 팔뚝에 꽂아 수혈하는, 과외 선생이 말했던 이동형 수혈팩이었다.

"이건 순간 신체 능력을 높여 주는 건데, 코카인하고 헤로인을 일정 비율로 섞고 거기에 엥거 잎을 빻아서 만든 겁니다. 우리는 흔히 전투 뽕이라고 부르는데, 공식 명칭은 'BB-8'이고. 유럽에서는 오딘의 축복 따위로 불리기도 해요."

플라스틱의 긴 막대 모양인데 주사기는 아니고, 힘줘서 꽂으면 공기 압력으로 피부를 뚫고 약이 들어가는 거란다.

그런데 내 귀를 의심했다. 마약이 잔뜩 섞인 것 같았는데?

"너무 과하게 쓰지 않으면 중독까지 가진 않지만, 과하게 쓰면 불멸이라고 별수 있나요. 평생 금단증상 달고 사는 거지."

그런 말 생긋 웃으면서 좀 하지 말지.

섬뜩하다. 섬뜩해.

"독일에서 개발한 거라 뭐 보탄의 축복이니, 오딘의 축복이라 하는데. '마인드 칵테일' 계열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 중 하나예요."

단발머리 교관이 이어서 설명했다.

마인드 칵테일, 전투 중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고양감을 주는 약을 칭하는 말이었다.

그 외에도 피지컬 칵테일이나 다른 칵테일 드럭도 몇 개 있었다.

완전히 약쟁이 세상이다.

다음은 양초 교관의 총기 적응 훈련이다.

"모르는 거랑 알면서 안 하는 거랑은 완전 다르다."

평소와 똑같은 냉기 풀풀 날리는 어투였다.

그렇게 PRI(Preliminary Rifle Instruction) 사격 예비 훈련을 받았다.

자세 잡고 쏘는 법만 배우면 금방이었다.

이쪽은 불멸, 감각 특화의 신인류다.

뭘 던져서 맞추는 건 기가 막히게 잘했다. 쏴서 맞추는 것도 마찬가지고.

수류탄부터 시작해서 몇 가지 전장 병기를 배우고.

다시 구보와 웨이트 트레이닝, 기술, 육체 내구도 단련의 반복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밤에 꿈나라로 보낼 친구의 숫자는 줄었다.

다들 과격한 생활에 점점 적응했다.

나는 2주 차 이후부터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수면제, 내 꿈 꿔, 넥 슬라이스, 다양한 별명으로 날 부르던 놈들은 언제부턴가 전부 다 날 넥광익으로 불렀다.

이 새끼들이 부모님이 주신 성을 갈아 버리네.

"넥광, 먹을래?"

그래, 어쩌겠나. 고만고만한 나이대의 놈들이 모여 사는 게 이런 것을.

"당연한 말을."

난 1조 문신남이 준 초코바를 받았다.

제일 좋아하는 종류였다.

트믹스.

비스킷과 캐러멜의 조화를 초콜릿으로 감싼 희대의 발명품이 날 행복하게 했다.

"개좋아."

말하며 야금야금 씹어 먹자, 잘생긴 개나리가 날 흘겨봤다. 눈이 마주쳤기에 한마디 건네줬다.

"요즘 잠은 잘 자고?"

다들 적응하는 와중에도 이 새끼는 유독 늦다.

"꺼져."

아, 여전한 반응.

이래서 널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늘 새로워, 짜릿해, 멈출 수가 없어.

"아니, 잘 자라고. 내 꿈 꾸고."

놈은 더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하루하루 반복된 훈련에 체력이 붙어 동기 애들도 오전 구보 따위는 이제 손쉽게 넘어갔다.

우리 비만 친구도 이제는 도움 없이 완주하고.

꼴등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몸 쓰는 일에 재능이 있는 놈도 있고 없는 놈도 있지만, 총기 숙련도는 다들 놀라울 정도였다.

나야 뭐.

이미 배운 거 복습하는 수준이었다.

난 그것보다는 다른 거에 집중했다.

패드에 나온 회사 내 계급 구조나 인베이더 넘버링, 네임드 놈들을 숙지했다.

그렇게 마지막 쪽지 시험이 다가왔고.

"다들 수고했다."

나 때는 어땠느니 하던 라떼 교관이 먼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버텼으면 전부 통과한 거나 다름없다. 벌점으로 탈락한 사람도 없고. 마지막 날이니까, 담배 태우는 사람?"

그가 대충 둘러보며 흡연자를 파악하고 담배를 돌렸다.

아는 형이 군대 다녀와서 말한 적이 있었다. 훈련소 마지막 날 교관은 더없이 천사가 된다고.

여기도 그랬다.

"한 대씩 피워."

라떼 교관을 시작으로 다들 친절하게 변했다.

"고생했어. 후배들."

파랑새도 마찬가지다.

쪽지 시험은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됐고.

금세 끝났다. 애초에 문제가 몇 개 안 됐다.

모든 일정이 끝난 참이다.

양초 교관이 단상 위에 올라 모인 우리를 보고 말했다.

"오티 결과를 발표하겠다."

다들 뭔가 싶을 때, 순위를 나눈다는 설명이 뒤따랐고 그에 따라 부서 배정이 되리란 말도 나왔다.

그래, 이렇게 사람 모아 놓고 신입 교육을 했다.

벌점을 줬으니, 당연히 상점도 있겠지.

그걸 토대로 순위를 매기는 건 당연한 일.

부서에 배정하려면 적성 파악도 하고 평가가 필요한 거 아닌가.

훈련이라고 해도 오티다.

점수를 토대로 신입도 원하는 부서를 택할 자유가 생기겠거니 했다.

"상위 세 명에게는 포상금이 있다."

와아아아!

그 말에 다들 환호를 내질렀다.

세상에 돈 만큼 좋은 건 없지.

나도 나름 기대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3등, 기효민."

누구냐, 넌.

처음 듣는 이름이네.

그 말에 누군가 단상 위로 향했다.

촐랑거리며 뛰어가며 올라가는 놈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부서에 지원하면 최대한 고려해 줄 거다."

"어, 그럼 전 보안팀이요."

"지금 말고 나중에."

"아, 넵."

어벙해 보이는데 용케 3위네.

"2위는...."

그리고 재차 양초남이 말을 이었다.

2위는 예상 안이었고, 1위는 모두의 예상을 깼다.

18. 1등 따윈 필요 없어

"2위 정기남."

단상 위의 교관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난 지난 한 달 동안 깨달은 사실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는 듣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그 첫째가 바로 순혈과 혼혈의 차이였다.

이 둘 사이에는 격차가 있었다. 혈통 우월주의 따위가 아니라, 어떤 피를 이었냐에 따라 편차가 있다는 거다.

순혈은 혼혈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고 감각이 더 예민했다.

그건 곧 불멸의 육체를 다루는 능력으로 이어졌고.

그 능력의 차이가 곧 훈련 성적의 차이로 이어진 건 당연했다.

그러니까 저 위에 단상으로 올라서는 정기남, 내가 잘생긴 개나리 새끼라고 부르는 놈은 순혈 중의 순혈.

이 땅에 있는 불멸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손꼽히는 세 혈통 중 하나였다.

다 전해 들은 얘기다. 저 새끼랑은 대화 따위 나눠 본 적이 없으니.

하여간 그래서 저놈은 제대로 잠도 못 자면서도 모든 훈련에서 상위 랭크의 성적을 거뒀다.

근접 격투.

체력 측정.

총기 관리.

인베이더 대응법.

불멸 육체 활용도.

모든 수업에 임할 때마다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 줬다.

내가 보기에 능력도 능력이지만, 의지가 더 대단해 보이긴 했다.

눈 밑이 검은 채로 잘도 날뛰더라.

그러니 총 성적 2위는 당연한 거다.

"설마 내가 1위 아니야?"

귀태 형이 김칫국물을 거하게 자셨다.

"우리 귀태 형, 아픈 사람이었구나."

그리 속삭여 주니.

"그래. 형은 아니지."

요한 형이 옆에서 말했다.

난 이미 1등을 알고 있다.

난 아니다.

아마 훈련생 중 이미 눈치챈 놈도 꽤 있을걸?

"아오, 이런 것들도 친구라고."

방귀태가 핀잔을 주는 사이, 단상에 있던 교관이 1등을 호명했다.

"우미호."

"네."

내 앞앞에 서 있던 여자가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간다.

땋은 머리를 뒤로 늘어뜨린 관찰력 좋은 3조의 룸메이트다.

내가 셜록 홈즈 개나리라 부르던 여자였다.

키 165cm, 추정 몸무게 50kg.

공감 능력은 형편없고, 말하는 건 재수 없지만, 머리는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점수를 모았고 벌점은 줄였다.

상점과 벌점의 적용 방식을 파악했고, 그에 따른 프로세스로 움직였다.

"박수."

교관의 말에 훈련생이 손뼉을 쳤다.

앞에 셋이 나란히 선 게 보였다.

1등 우미호, 2등 정기남, 3등 기효민.

그들을 보며 난 저 셋과 어떻게든 엮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내일 오후 2시까지는 자유시간이다."

교관이 말했다. 이 말뜻이 뭐겠나.

이제 할 거 다 했으니, 뒤풀이하란 소리겠지.

훈련생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나도 귀태와 요한,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이자, 내가 비만 불멸자라고 불렀던 강푸름과 함께했다.

의외로 저 차디찬 정기남에게도 일행이 붙는다.

나와 이 셋을 제외한 나머지 룸메이트였다.

"마지막이네."

"그래."

"또 보겠지."

"보겠지."

냉정하지만, 그래도 대답은 한다. 바람직한 사회생활 태도라고 볼 순 없어도 의사소통은 원활한 편이다.

그리고 1등, 우미호.

별명 여우년, 사이코패스.

현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혼자 멀뚱히 패드를 조작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기다.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녀도 아무에게도 다가가지 않는다.

그게 이제까지 우미호의 포지션이었다.

이걸 보고 누가 나에게 저 친구는 왕따냐고 묻는다면, 난 그 반대라 말하겠다.

"후, 또 혼자네. 오늘이야말로."

방귀태가 호흡을 가다듬고 미호의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 마지막 날인데...."

예민한 불멸의 청각은 그가 쏟아내는 말과 우미호의 답을 그대로 내 귀에 전달했다.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자신의 부족한 소양을 채워."

방귀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두 번 당했어야지.

처음부터 우미호를 눈여겨보더니, 한 3주 차부터 줄기차게 들이댔다.

교관이나 파랑새도 그건 말리지 않았다.

따로 연애 금지란 말도 없었고, 오히려 훈련에 익숙해지고 서로 친해지는 걸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방귀태도 용기를 냈었지.

"예쁘다. 너."

"넌 아니야."

난 분명히 기억한다. 이게 둘의 첫 대화였다.

이 말을 끝으로 우미호는 쌩하니 지나갔다. 그날 귀태 형은 충격으로 평소 먹던 것의 반만 먹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방귀태란 인간은 멘탈이 참 튼튼하다는 거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다."

"있어. 많아. 그런 나무."

내가 의젓하게 조언했지만.

"안 들려."

귀태는 무시했다. 우리 불쌍한 귀태는 그렇게 저 개싸가지에게 반했다.

우미호의 연수 성적은 1등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꼴찌였다.

합동 훈련에서는 점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동기 내팽개쳐.

자기를 보고 접근하는 애들한테 그 시간에 부족한 능력이나 키우라고 해.

아니, 모든 훈련에서 개싸가지 우미호 양의 스탠스는 같았다.

사람을 필요와 불필요로 나눈다.

물론 모든 사람은 다 그런 경향이 있을 수 있지만, 쟤는 그걸 너무 티를 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태도를 보이니 다가오는 사람이 없고.

그걸 뚫고 저리 다가가는 사람이 있어도 쳐 내니.

당연히 혼자다.

영원히 혼자 살 것 같은 여자다.

"그래, 부족한 소양은 채울게. 그건 그거고 오늘 마지막인데 나랑 한잔할래?"

방귀태, 우리의 방귀태 선수는 오늘도 굳건합니다.

몸쪽 꽉 찬 직구를 날렸습니다!

안 그래도 다들 냉장고에서 맥주, 소주, 위스키 따위를 꺼내 마시고 있다. 전부 성인이고 마지막 날이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한 방귀태는 벌써 열다섯 번쯤 저 나무를 후려갈겼다.

하지만 나무는 굳건했다.

"알코올 섭취는 인지 능력을 떨어뜨려. 불필요해."

아이고, 똑똑이 나셨네.

술을 뭐, 머리 좋아지라고 마시냐.

"16전 16패. 그것도 전부 KO."

사내 방송에 버금가는 입 싼 요한이 말했다.

"그래도 용기에 난 박수를 보내겠다."

내가 말하자.

"됐어."

귀태가 몹시 우울한 얼굴로 돌아와 답했다.

처진 모습을 보니 보기 안쓰럽다.

까득.

"입사하면 다시 간다."

귀태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말했다.

그래, 지치지 마라. 방귀태.

포기를 모르는 남자, 방귀태.

그 뒤는 적당한 곳에 모여 마시고 먹는 파티가 벌어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기도 하지.

파티라고는 해도 조용하다.

그저 소소하게 얘기나 나누며 지나간 날을 기억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감각이 익숙해진 친구도 있었고 아닌 녀석도 있었다.

불멸이 모인 뒤풀이는 일반인 기준으로 보자면 조용했다.

먹고 마시고 적당한 시간을 보냈을 때다.

"48번 훈련생?"

파랑새 하나가 날 찾았다.

방에서 시시덕거리던 중이었다.

"네."

"잠깐 면담."

난 순순히 따라 나갔다. 중간중간에 이런 면담은 수없이 있었다.

뭐, 누가 가장 좋은 인상을 줬느니,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였느니, 따위를 묻는 그런 면담.

마지막까지 참 충실하기도 하지.

그런 면담이라 생각하고 숙소 뒤편으로 나갔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여긴 가로등도 없었다.

그래도 불멸의 눈이다. 약간의 빛으로 주변을 보는 건 문제 없었다.

내 앞에 선 파랑새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슬쩍 담뱃갑을 들이밀었다.

"피우나?"

"안 피웁니다."

"굳이?"

불멸자는 담배로 인해 몸이 상하지 않는다. 그러니 흡연의 이득은 취하면서 단점은 배제할 수 있다.

그래서 흡연자가 많았다.

"냄새가 별로라서요."

"음. 뭐."

파랑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혹시 가고 싶은 부서 정했나?"

기본적으로 훈련생은 희망 부서를 적을 수 있었다.

화림은 인사, 파견, CS, R&D 총 네 개의 큰 분류로 팀을 나눈다.

패드를 보고 열심히 공부한 덕에 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인사 쪽 어떠냐?"

담배를 문 채로 파랑새가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끌고 오고 말을 건다는 건, 나한테 관심을 보인다는 거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난 대답을 미뤘다.

"그래? 잘 생각해 봐. 인사는 회사의 핵심이다."

그렇게 말하고 파랑새가 떠났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다른 파랑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 좀 하지?"

글래머 파랑새였다.

아까의 그 장소였다. 희미하게 담배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변신족의 후각으로는 느껴지지만, 불멸은 못 맡으려나?

다시 불멸의 귀로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뒤, 난 두 번째 제안을 받았다.

"너 파견으로 올래?"

"파견이요?"

"관심 없어?"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다.

"네,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답을 건넸다.

"...너 무슨 사고 쳤냐?"

돌아오니 요한이 물었다. 두 번이나 불려 나가는 걸 보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아니."

사고는 무슨.

사실 예견된 결과지.

난 처음 들어온 날부터 이 오티를 왜 하는지부터 관심을 뒀다.

그냥 성적으로 줄 세우기라면 굳이 한 달이나 필요할까?

아니지. 그 한 달이란 시간이 참 애매했다.

굳이 한 달을 한곳에 모아 놓고 굴릴 필요가 있을까?

패드를 통한 정보와 간간이 떠드는 교관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어차피 입사해도 훈련은 계속된다.

굳이 이렇게 모아놓고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회사가 바라는 건 무엇인가. 이 오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합동 훈련, 단체 체력 단련 시간, 팀을 이뤄 싸우는 격투 훈련 따위를 하다 보니 자연히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성적을 매기기 위한 자질 측정과 불멸의 기본 소양을 키우기 위한 오티였지만.

내심 이걸 계획한 사람은 다른 걸 바란다는 것.

신입 사원에게 가장 바라는 것.

그건 상점과 벌점의 적용 방식을 읽고 그에 맞춰 행동하는 게 아니었다.

머리 좋은 우리 꺾이지 않는 나무, 우미호 양은 여기까지는 머리를 굴린 모양이지만.

이건 사회성의 문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구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매가 함께한 가정 교육을 통해 체득한 것이다.

다른 사람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고 싶고, 그걸 익히게 해 주고 싶단 거다.

그러니까 대외적으로 밝힌 줄 세우기 성적보다 중요한 건, 사실 성적표 뒷면에 적힌 교관의 한 줄 평이란 거다.

"덕분에 그동안 잘 잤다. 적응도 빨랐고."

1조 문신남을 시작으로.

"밖에서 한번 보자."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주는 2조의 여자.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이미 화림에 있어. 또 보자."

제 아버지의 소속을 몰래 밝히고 호감을 밝히는 동기.

참으로 많이도 날 찾았다.

1등? 점수를 많이 따서 할 수 있는 거? 마음만 먹었으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딴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눈치챘으니 굳이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

그래서 우리 비만 불멸 친구 강푸름을 두들겨 일으켜 이끌었고.

감각을 컨트롤하는 법도 공유했으며.

그래도 못 자는 놈들을 꿈나라로 보내 줬다.

전부 다 계산하고 한 짓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이게 계획이었다.

난 오티 기간에 깊은 인상을 남긴 훈련생으로 남은 채로 입사하면 되는 거였다.

동기에게도 점수를 와장창 따 놨으니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것 같고.

기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리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다.

"전원 주목."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어라? 언제 들어왔지?

열 명 전원의 이목이 한곳으로 모였다. 아무리 긴장감을 풀어 놨다고 해도 이제 어느 정도 감각을 조율하는 불멸자 10명이다.

순혈과 혼혈이 섞여 그 감각의 예민함이 다르다지만, 그 열 전부를 속이고 방 안에 몰래 들어온다?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난 반사적으로 상대가 쓴 기술을 알았다.

불멸 비전, 기척 죽이기.

과외 선생에게 배운 기술이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금테 안경을 쓴 채로 뒤를 향해 말했다.

"여깁니다."

슬쩍 뒤를 보니, 누군가 있었다.

이번에는 기척을 숨기지 않은 상대다.

이건 또 뭔데.

뭔가 싶어 보고 있으니, 누군가 또각또각 구둣발 걸음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빼어난 미모의 얼굴은 불멸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보는 것보다는 나이가 많겠지.

"이번 기수에는 훌륭한 인재가 많다고 들었다."

그가 말했다. 다들 멀뚱히 보자, 그가 말을 잇는다.

"아, 내가 누군지 말 안 했구나."

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린다. 모두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서 홀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남명진."

어,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일동 기상."

그의 뒤에서 파랑새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그 작은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닿았고.

나를 비롯한 전부 일어났다.

"경례."

파랑새가 말하고 우리는 거수경례를 했다.

말이 회사지, 이곳은 군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난 왜 이 작자의 이름이 익숙한지 알았다.

패드에서 봤으니까.

직속 상관 맨 꼭대기에 있던 이름이었다.

남명진.

현 올드포스 한국지부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불멸자이자.

화림정보통신의 사장이었다.

그러니까, 거물의 출현이다.

19.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