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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 111화

111. 제111화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자하신공(紫霞神功) ]

- 화산파의 내공심법으로 장문인과 소수의 애제자 이외에는 전수하지 않는다는 상승무공. 극양의 속성을 띄어 강력한 열기를 자아낸다.

세운이 새로운 내공심법을 사용하자마자 열매를 꿀꺽 삼켰다.

농익은 나무 열매. 3층의 시련에서 '메마른 나무'라는 히든 퀘스트를 통해 얻은 일종의 영약이었다.

영약이기에 당연히 쓸 줄 알았는데, 진한 단맛이 혀부터 시작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특정 수련법의 사용으로 '반짝이는 열매'의 마나 흡수율이 대폭 상승합니다.

효과는 그 즉시 나타났다.

열매를 통해 흘러나온 마나가 범람했다.

세운은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며, 자하신공을 통해 범람하는 마나를 차분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화륵-

극양의 속성을 띤다는 자하신공의 특성 때문일까? 내공을 흡수하고 있는 단전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따뜻한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기가 더욱 강해졌다.

이러다가 단전이 터져 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삼재공의 묘리로 양기를 진정시킨다.'

우웅!

세운이 괜히 삼재공을 가장 처음에 배운 게 아니었다.

그토록 광폭하다는 파극심공의 특성마저 잠재운 게 바로 삼재공이었으니,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불길처럼 타오르던 기운이 삼재공의 묘리 아래 진정되고, 파극심공의 묘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럴수록 세운의 몸은 옅은 자줏빛으로 물들어 갔다.

자하신공을 발휘할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열매의 기운을 전부 불태워 단전으로 흡수한다.'

자하신공의 수련법은 다른 수련법과 차이가 있었다.

그런 만큼, 이미 내공을 다루는 데 익숙해진 세운으로서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오고, 단전의 열기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열매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빠르게 갈무리되어 모두 단전에 흡수되는 순간.

-자하신공을 통해 단전에 일 갑자의 내공을 쌓았습니다.

-상승한 내공의 수치에 따라 사용하는 모든 무공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자하신공의 묘리에 따라 사용하는 무공에 극양의 기운이 발현됩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며, 세운을 둘러싼 보랏빛 기운이 사라져 갔다.

무려 일 갑자의 내공.

기존에 쌓아둔 일 갑자의 내공과 합하면, 무려 이 갑자에 해당하는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열매에 깃든 기운의 양이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이러면 살짝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아무리 삼재공이 뒤를 받쳐준다고 해도, 극양의 내공을 무리하게 쌓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아슬아슬하게 한계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이상 양기가 늘어나면 단전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음 내공심법으로는 음기를 쌓아야겠어.'

양기와 음기를 동시에 쌓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운 행동이다.

하지만, 삼재공으로 바닥을 탄탄하게 쌓은 세운으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양기를 진정시키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음 수련법에 대해 계획하던 세운이 고개를 들어 마을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마을 이상인데.'

-성좌, '검은 새'가 완성된 거주지를 만족스럽게 내려봅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훨씬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 거라며 조금 아쉬워합니다.

쌍둥이 자매의 놀라운 실력 덕분에 거주지는 세운이 보아온 그 어떠한 클랜의 거주지보다 좋아 보였다.

아직 길드에 미치지 못해 대지의 면적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클랜이 성장해 나감에 따라 면적은 자연스럽게 커질 것이다.

그쯤 되면 다른 클랜이나 길드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성벽이나 수성 병기도 갖춰야겠지만....

'아직은 너무 이르니까.'

다음 쉼터에 올라가 봤자, 거주지조차 가지지 못한 클랜이 대부분이다.

본격적으로 큰 클랜이나 길드가 생겨나고 각자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건 아직 나중의 일이었다.

"후, 오늘도 힘들었어."

"서아 씨, 훈련 때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엄하다니까."

"그게 다 우리를 위해서 아니겠어? 얼른 씻으러 가자고."

"그래! 정말, 요즘은 목욕탕 덕분에 살맛이 난다니까?"

더 이상 시련에 도전하지 않고 이곳에서 살면 어떠냐는 사람들은 유서아가 세운의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잘 다독여주었다.

좌절할 줄 알았던 사람들도 생각보다 빨리 현실을 인지했다.

덕분에 지금은 모두가 다음 층을 대비하여 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하신공으로 내공을 쌓으며 흐른 식은땀도 씻어낼 겸, 세운 역시 그들과 함께 목욕탕을 이용하였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자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세운도 잠시나마 모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 * *

그로부터 5일이 지났다.

사람들은 충분한 휴식을 즐기며 다음 시련을 대비하여 훈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창석이 장비 손질에 이어 새로운 화로를 이용해 사람들의 장비를 한 단계 강화해 주었고, 이하늘은 3층의 시련 도중에 모은 약초로 전보다 많은 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다들 준비되셨나요?"

"물론입니다!"

"어르신이 만들어 준 장비에, 하늘 양이 만들어 준 약까지. 이거, 실패하려 해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디아블로 클랜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장비를 착용하며 전투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난 것이다.

물론 한 테마의 시련이 끝나면 다시 거주지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세운이 기억하기로 6층부터 10층까지는 쭉 하나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니 다음에 거주지에 입장하는 건 10층까지의 시련을 완료한 이후였다.

그 때문에 일부러 휴식 시간을 길게 잡았던 것이다.

"다들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화이팅!"

"가자아!"

전처럼 긴 연설은 필요 없었다.

모두 의욕이 넘치고 있었기에, 유서아의 짧은 외침과 함께 다음 층을 향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 * *

-6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제 : 사막 횡단

-시간 제한 : 30시간

-사막을 헤매는 동료를 찾아 서쪽의 오아시스를 향해 이동하십시오.

-현재 '디아블로 클랜'에 소속 중입니다. 동료는 클랜 내에서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회귀 전의 기억 그대로, 6층에 도전하자 주위가 5층까지의 지형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막.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금빛 모래알뿐이다.

시야를 키워 보여도 사막으로 굴곡진 지평선만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건조한 바람에 모래알이 섞여 피부를 때려오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와 모래를 달구었다.

'여기서 내 고유 스킬의 강점을 깨달았었지.'

회귀 전에 세운이 가지고 있던 고유 스킬, 여정의 지침표.

그것은 단순히 히든 피스를 알려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어딘가로 나아가라는 시련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사방이 똑같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는 사막에서 길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회귀 전에도 큰 어려움 없이 6층의 시련을 통과했었다.

'일단은 동료부터 찾아볼까.'

이번 시련 역시 동료와 함께하는 층이었다.

다만, 3층과 다른 점이라면 처음부터 같이하는 게 아니라 동료를 알아서 찾아내야 한다는 것.

그래봤자 저층의 시련답게 동료의 위치는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이번에도 박정필만 아니면.... 아니, 차라리 그놈이 걸리는 게 나으려나.'

시끄러운 건 싫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박정필이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기 전에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거주지에서 머물던 기간 동안, 놈은 놀랍도록 세운을 잘 피해 다녔으니까.

지금이라도 걸리면, 시간을 아껴서 교육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선인장이었지.'

세운이 오른편에 보이는 언덕 위의 선인장을 향해 걸었다.

원래 가장 쉬운 방법은 소리를 질러 동료를 찾는 것이었지만, 회귀 전의 기억을 통해 세운은 이미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설령 동료가 헤매고 있다 하여도, 선인장이 있는 언덕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기에 동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더운 곳은 딱 질색이라며 몸을 웅크립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곳에는 무슨 먹이가 있을지 기대된다며 침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전에 뭐라도 입에 물려줘야 하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거주지에서는 제법 긴 휴식 시간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그동안 베엘제붑에게는 그 어떤 먹이도 제공할 수 없었다. 폭식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세운이 직접 처치한 몬스터였으니까.

그래도 이전보다 투정을 덜 부렸던 걸 생각하면, 상을 내려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우웅!

세운의 마나 서클이 팽팽하게 회전하였다.

서칭 마법을 사용하여 주변에 마나를 넓게 퍼트린 후, 생명체의 흔적을 찾아낸다.

본래 사막은 식물은 물론 동물이 살기에도 열악한 환경이라 생명체를 찾기가 매우 힘들지만, 이곳은 평범한 사막이 아니다.

지금까지 겪어온 시련과 마찬가지로, 사막에 적응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렇게 잠깐 정신을 집중하던 세운이 아래에서 꿈틀거리던 기척을 느끼고 모래에 손을 짚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그라운드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쿠구구구!

세운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원형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흙으로 이루어진 대지에서 사용하는 것보다야 위력이 낮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라운드 웨이브를 사용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모래 속에 숨은 몬스터를 불러내는 것이었으니까.

퍼석!

"크아아-!"

세운의 마법으로 인해 주변의 모래가 꿈틀거리자 사막의 물결을 뚫고 물고기가 뛰어오르듯, 몬스터 한 마리가 나타났다.

데저트 샤크.

이름 그대로 사막에서 살아가는 상어 모습의 몬스터다.

모래 속을 마치 바다처럼 헤엄치며 움직이는 몬스터였기에 상대하기가 제법 까다로운 몬스터지만....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일 초식, 혈랑조(血狼爪)가 강화됩니다.

푹.

이미 모래 밖으로 튀어나온 시점에서, 세운에게 별 위협은 되지 못했다.

녀석은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던 아가리를 다물기도 전에, 세운의 검에 썰려 나갔다.

마몬 덕분에 한 단계 봉인이 풀렸기 때문인지, 검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전보다 훨씬 매끄러웠다.

-'데저트 샤크'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2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오랜만에 생겨난 먹이를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지느러미를 한입 베어 물더니, 자제력을 잃고 먹이를 한입에 집어삼킵니다.

만족해 하는 베엘제붑을 보며 세운이 검을 집어넣었다.

지금은 맛만 보여주는 거로 충분하다. 어차피 시련이 진행되는 동안 몬스터는 질리도록 나타날 테고, 자연스레 탐욕의 권능을 사용할 일도 늘어날 테니까.

부드러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내공을 운용하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모래 언덕을 오르고, 선인장에 도착하자.

"벌써 한탕 벌이고 있었네."

이번 시련을 함께할 동료의 모습이 세운의 눈에 들어왔다.

제 112화

112. 제112화

6층의 시련이 시작한 직후, 유서아는 가장 먼저 동료를 찾기 위해 발을 옮겼다.

'저 언덕이라면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거야.'

주변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언덕.

그녀에게는 오아시스를 찾는 것보다 동료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곧장 언덕을 향해 이동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스스슷!

모래 위로 드러난 수십 개의 지느러미.

그 모습이 흡사 바다 위의 사냥감을 노리는 한 무리의 상어와도 같았다.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두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서걱!

동시에 뛰어오른 두 마리의 데저트 샤크.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유서아는 특유의 날카로운 쌍검술을 이용해 공격을 피해냄은 물론 놈들에게 기다란 상처를 안겨주었다.

치명타는 입히지 못했지만, 그녀의 검에는 '바알'에게서 받은 독이 깃들어 있으니 죽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움직임이 너무 어설프다며 다리에 신경을 쓰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모래가...!'

사실, 유서아의 전투력은 동 층의 플레이어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그런 만큼 데저트 샤크 따위는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몬스터들과 대치를 하는 이유? 바로,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다.

쌍검술을 다루기 위해서는 특유의 현란한 보법이 필요한데, 이곳은 제대로 발을 디딜 단단한 대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로 움직여도 모래 사이로 발이 쑥쑥 빠져들었다. 그러니 보법을 펼치기가 어려웠고, 쌍검술의 위력 역시 크게 줄었다.

'그 힘을 써봐야겠어.'

유서아가 자신의 잠재력을 떠올렸다.

아직 잠재력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깨달은 건 아니지만, 이대로 시간이 끌릴수록 그녀의 체력만 빠질 뿐이었다.

데저트 샤크들 역시 그녀의 체력을 빼놓기 위해 지루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들이 대치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 그녀가 집중하며 빈틈이 드러나는 순간.

푸홧!

"크아아!"

데저트 샤크 한 마리가 그녀의 뒤를 노리고 뛰어올랐다.

당황할 틈도 없이 검을 빼 들었지만, 발아래에서도 또 한 마리의 데저트 샤크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깐의 방심이 불러온 절체절명의 상황.

다른 데저트 샤크들 역시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동시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자하신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에 열기가 더해집니다.

불꽃을 닮아 뜨겁게 이글거리는 늑대 한 마리가 그녀의 주위를 휩쓸었다.

승리를 확신하며 입을 벌리고 있던 데저트 샤크들이 한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뜨거운 모래 위로 떨어졌다.

너무나도 익숙한 공격.

유서아는 자신을 지켜 준 동료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세운 씨!"

* * *

"설마 세운 씨가 동료로 걸릴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뒤랑달을 돌려 검집에 넣은 세운이 유서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디아블로 클랜의 인원수만 해도 삼십 명에 다다른다.

그중에서 무작위로 동료가 설정되는데 그게 하필 유서아로 걸리다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유서아라면 내 도움이 없었어도 충분히 시련을 헤쳐나갔을 테니까.'

그녀의 힘은 세운이 나설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방금 도와준 것도 혹시 몰라 나선 것이지, 가만히 두었어도 큰 상처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다친 곳은?"

"괜찮아요. 딱 위험한 순간에 세운 씨가 와주셨거든요."

"어떻게 된 거야? 수가 많긴 했어도 그리 강한 놈들은 아니었는데."

"그게...."

유서아가 아래를 내려보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그녀의 발이 모래 아래로 반쯤 묻혀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세운은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법이 어려웠나 보네."

"네. 발이 계속 빠져서 당황하다 보니...."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한국인이 사막을 밟아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세운이야 회귀 전의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익숙하다지만, 유서아는 모래 위에서 제대로 걷는 방법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경험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던가?

사막에서의 이동은 유서아에게 좋은 수련이 되리라 생각한 세운이 사막에서 발을 내딛는 법을 알려주었다.

최대한 발의 면적을 넓게 하여 발이 빠지지 않도록 걷는 방법이었다.

세운은 거기에 새로운 주문을 추가하였다.

"지금부터 계속 다리에 내공을 싣도록 해."

"전투 상황이 아닌데도요?"

"내공을 실어서 모래에 안 빠지게 걷는 것만 해도 충분히 수련이 될 거야."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그럴싸한 수련법이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다 내공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전투는...."

"걱정 마. 전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어요."

내공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공을 다루는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익혀야 할 일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로 보법은 물론 내공을 다루는 데도 익숙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디아블로 클랜의 리더였으니까.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럼, 가 볼까?"

"네!"

* * *

그 시각, 6층의 시련에 도전하자마자 그 누구보다 빠르게 합류하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 중인 파티가 있었다.

바로.

"으아아아악!"

"아, 대체 왜 또 오빠가 걸리는 건데요!"

"그건 내가 할 소리라고!"

한아름과 박정필이었다.

시스템의 농간일까? 그 둘은 3, 4, 5층의 시련에 이어 이번에도 같은 팀이 되었다.

그리고 둘의 뒤로는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애초에 둘이 합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정필이 저 몬스터들을 달고 도망치다가 한아름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아름은 덩달아 박정필과 함께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아, 좀 뭐라도 해 봐요!"

"형님도 아니고 이것들을 어떻게 하라고! 으악, 적랑만 있었으면!"

아쉽게도 세운이 선물해 주었던 적랑은 박정필의 소유물로 인정되지 않았던 터라, 시련에 데려올 수 없었다.

이 정도 도망쳤으면 놓아줄 법도 하건만, 몬스터들은 지옥 끝까지 따라올 기세로 둘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 몰라! 혼자 도망쳐요!"

"으아아악, 버리기냐! 안 돼! 죽어도 같이 죽자아!"

"아, 진짜!"

이대로라면 둘 다 당하게 될 판이라 생각한 한아름이 박정필과 갈라지려 하였지만, 박정필은 끝까지 한아름에게 엉겨 붙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며 짜증이 솟구쳤지만, 지금은 짜증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

'무언가 방법이....'

박정필이야 저래 보여도 체력이 워낙 좋았다.

반면에 한아름은 지구력에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저 몬스터들을 상대할 방법을 떠올려야만 했다.

'여기서 공성 병기를 사용하는 건 무리인데.'

공성 병기를 꺼내 봤자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대로 적을 조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만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작은 탄환을 던져 크기를 부풀려 적을 쓸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능력에는 '운동성 상실'이라는 제한이 걸려 있었다.

제아무리 무언가를 집어 던지며 원상태로 크기를 돌린다고 해도, 운동성을 상실하고 제자리에 떨어질 뿐이다.

그래서야 적이 가만히 맞아줄 리가....

'아!'

고민에 고민을 반복하던 그녀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이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 빼낸 손에는 공성 병기용으로 만들어 둔 탄환이 들려 있었다.

운동성을 상실하여 적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이 달려와 알아서 부딪혀준다면?

쿠구구!

"크엉?"

그녀가 탄환을 던지자마자, 탄환이 본래의 거대한 크기로 되돌아갔다.

다섯 개의 탄환이 둘의 뒤를 어설프게 가로막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적이 이런 공격을 가만히 맞아줄 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째서인지 몬스터들은 박정필만 보면 눈이 돌아갔다.

5층에서 겪었던 오우거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

그녀의 계획대로 몬스터들은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했고....

쾅!

콰광!

바위로 이루어진 지름 2m의 탄환에 머리를 박으며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다.

속도가 빠른 놈들은 거대화하는 탄환 아래에 깔려 압사당하기도 하였다.

-성좌, '검은 새'가 훌륭한 사용법이라며 계약자를 칭찬합니다.

놀라운 활용력.

박정필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방법이었지만.

"아, 내가 왜 공격을 맡아야 하는 건데!"

"형니이이임!"

애초에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뿌듯함 대신 억울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괜찮아?"

"...아직은요.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요."

"뭐든지 시작이 어려운 법이야. 아마, 익숙해지면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질 거야."

유서아는 철저한 노력파였다.

세운의 수련을 수긍하는 순간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다리에 내공을 빼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는 별 차이가 보이지 않지만, 이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내공을 유지하며 걷는다는 게 말이 쉽지, 이제 기는 법을 깨달은 아기에게 걷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걷는 것도 걷는 건데, 덥네요."

"사막이니까."

"세운 씨는 별로 안 더워 보이는데요? 땀도 거의 안 흘리고."

그런가? 세운은 그제야 자신이 더위를 거의 안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비의 도움도 아니고,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의문을 느끼던 세운은 곧 뱃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기운을 느끼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양기 때문이었구나.'

시련에 도전하기 전, 거주지에서 내공을 쌓기 위해 수련하였던 '자하신공'. 그때 쌓인 양기로 인해 몸이 더운 기운에 익숙해진 듯했다.

오히려, 더운 만큼 내공이 평소보다 더욱 활발해진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혈랑검법을 사용할 때도 자연스럽게 자하신공이 사용됐었지.'

아무래도 양기의 특성상, 더운 지형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유서아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세운과 달리, 그녀는 수련법은 물론 더위까지 견뎌내야 했으니까.

이대로라면 오히려 더위로 인해 수련이 방해받을 수도 있었으니, 세운이 새로운 마법을 준비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템플리쳐(Temperature) ]

- 무색의 마탑에서 화탑과 수탑의 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해 낸 기온 조절 마법.

사아아-

마법이 발현되자 유서아의 주위로 스산한 냉기가 생겨났다.

템플리쳐.

기온을 조절할 뿐인 간단한 마법처럼 보이지만, 화탑과 수탑의 운용법이 섞인 고난이도 마법이었다.

5 서클 이상은 되어야 사용이 가능한 수준.

다행인 점이라면 범위만 잘 조절하면 사용되는 마나의 양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다.

그녀 한정으로 사용한다면 사막을 횡단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어떻게 한 거예요? 시원해요!"

"마법이야. 가는 동안은 계속 펼쳐줄 테니까 다리에만 집중해."

"설마 지금까지 혼자서 이걸 사용했던 거예요?"

"아냐, 나도 방금...."

"후후, 장난이에요. 장난."

더위가 사라져서 그런지 그녀의 말투가 한결 가벼워졌다.

괜히 진지하게 반응한 건가 싶었던 세운이 멋쩍은 듯이 뺨을 긁적였다.

"그보다, 길은 어떻게 알고 가는 거예요?"

"해는 서쪽에서 뜬다잖아? 그러니까 해가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되는 거지."

"아, 그렇네요. 당연한 건데도 생각 못 하고 있었어요."

"너는 수련에만 집중하면 돼. 시련에 집중했으면, 너도 바로 알아냈을 거야."

"음, 그런데 방향이 조금 다르지 않나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세운이 향하는 곳은 완벽한 서쪽이 아니라, 미묘하게 다른 방향이었다.

이대로라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늦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세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운의 목표는 층마다 히든 피스를 찾아내는 것.

지금 역시.

"오아시스에 도착하기 전에 둘러볼 곳이 있거든."

회귀 전, 우연히 발견했던 히든 피스. 아니, 히든 피스라기보다는 함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곳.

개미지옥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제 113화

113. 제113화

탑의 시련은 세운과 유서아가 가만히 사막을 횡단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시련에서 그래왔듯이 이번 시련 역시, 각종 몬스터가 모래를 뚫고 나와 둘을 위협하였다.

독침이 뚝뚝 흘러내리는 꼬리를 자랑하는 전갈이나 길이만 5m가 넘어가는 데저트 웜 등. 몬스터 하나하나가 아래층보다 강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자하신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에 열기가 더해집니다.

서걱!

세운의 검이 재빠르게 쏘아지던 전갈의 꼬리를 잘라냈다.

자하신공의 양기 때문에 뜨겁게 달아오른 뒤랑달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잘라낸 부위를 익혀 버렸다.

사막의 열기 때문인지, 의도하지 않아도 양기가 계속 뿜어져 나왔다.

지금은 내버려 두고 있지만, 이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지형적 특성 때문이라고는 하나 내공심법을 제대로 못 다루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도.

'이거, 생각보다 쓸모가 많겠는데.'

양기로 한껏 달아오른 검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 보였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적의 출혈을 막아내기에 그리 좋지 않았지만, 상대가 트롤처럼 재생력이 강한 적이라면?

아니면, 식물형 몬스터처럼 불에 약한 적이라면?

양기를 머금은 검은 놀랍도록 뛰어난 위력을 자랑할 게 분명하다.

세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양기를 최대한 조절하였다.

사막 위에서의 수련은 유서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도 도울게요!"

"괜찮겠어?"

"네, 많이 익숙해졌어요!"

유서아가 전투에 합류하였다.

내공을 실어 사막을 이동하기 시작한 지 이제 두 시간도 안 되는데, 그사이에 사막에서의 보법에 놀랍도록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전투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세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서거걱!

유서아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몬스터 사이를 내달렸다.

양손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적의 급소를 스쳐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몬스터의 체액이 뿜어져 나왔고, 금빛 모래알이 축축하게 젖어간다.

순식간에 열 마리가량의 몬스터를 쓰러트린 유서아가 검을 들어 올리며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어때?"

"대단해요! 전보다 훨씬 움직임이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이제야 자신의 계약자다운 모습이 나왔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유서아의 검술은 속도를 중시하기 때문에 검의 위력보다는 보법이 더욱 중요했다.

사막 위를 움직이며 다리에 내공을 운용하는 게 익숙해졌으니, 전투력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둘은 몬스터가 보이는 족족 검을 휘두르며 빠르게 사막 위를 이동했다.

푹푹 빠지는 모래알이나 푹푹 찌는 더위, 모래 속에서 기습해 오는 몬스터들. 그 어떤 것들도 둘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지금 세운이 찾고 있는 개미지옥은 여정의 지침표로 찾아낸 곳이 아니었다.

여정의 지침표는 세운이 원하는 대로 오아시스의 방향을 분명하게 알려주었으니까.

개미지옥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그때 함께했던 동료 덕분이었다.

그는 세운의 길 안내를 믿지 못하겠다며 혼자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는데, 하필 그 자리에 개미지옥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세운은 개미지옥을 빠져나올 힘이 없었기에 동료를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개미지옥을 빠져나올 힘은 물론, 개미지옥의 아래에 있는 몬스터를 사냥할 자신도 있었다.

'히든 피스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 개미지옥을 만들어 내는 몬스터라면 꽤 많은 공적치를 안겨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폭식의 권능을 통해 많은 능력치를 흡수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세운이 개미지옥을 찾으려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다른 사람들은 잘하고 있을까요?"

"불안하면 클랜챗으로 확인해 보면 되잖아?"

"...세운 씨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요. 꼭 해야 할 말이 아니라면 언급하지 않으려고요."

사람들의 판단력을 높여야 한다는 세운의 조언. 유서아는 그 조언을 확실히 새겨들은 모양이었다.

탑을 오르다 보면 다양한 시련만큼이나 많은 일이 벌어지는데 그때마다 공략법을 일일이 알려줄 수는 없었다.

각자의 판단으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지금 그 버릇을 들여놓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 가서 도태되게 마련이다.

"아, 그리고 저...."

쑤욱!

"어, 어?"

유서아의 신형이 돌연 아래로 쑥 꺼졌다.

아래를 보니 모래가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찾았다!'

개미지옥은 순식간에 몸집을 키워갔다.

처음에는 유서아의 몸이 반쯤 빠질 정도였는데, 모래가 빠지는 속도가 가속화되더니 순식간에 그 지름이 10m가 넘어갔다.

"유서아, 보법!"

"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그녀가 이내 침착을 되찾고 다리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모래에서 다리를 빼내고, 내공으로 가벼워진 발을 움직인다.

흘러내리는 모래를 거스르고 그녀의 신형이 위로 올라온다.

"카득, 까득!"

먹잇감이 탈출하자, 모래 지옥의 주인이 아쉬운 듯 반응하기 시작했다.

2m에 달하는 털 달린 집게가 모래 지옥의 중앙에서 불룩 튀어나와 애꿎은 선인장을 잔혹하게 잘라낸다. 아니, 잘라냈다기보다는 짓뭉갰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잡아!"

"고마워요!"

모래가 흘러내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유서아가 주춤거릴 때, 세운이 손을 내밀어 유서아를 끌어 올려 주었다.

그와 반대로.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

"세운 씨!"

유서아가 올라오는 순간, 세운은 모래 지옥의 안으로 뛰어내렸다.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대는 것처럼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세운으로서는 이미 계획하고 있던 행동이었다.

타다닷!

안 그래도 플레이어의 발을 붙잡아 움직임을 가로막는 모래알이 산사태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운은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위를 내달렸다.

이게 바로 보법의 힘.

유서아가 이제 막 익숙해지기 시작한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숙련도였다.

가가가각!

세운이 모래 지옥의 아래로 달리자, 그 주인이 아래에서 기분 좋게 집게를 딱딱거렸다.

놈의 입장에서는 먹잇감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오는 꼴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털 달린 집게를 딱딱거리며 모래를 집어삼키는 모습이 실로 위협적이었지만, 세운에게 놈은 그저 실험의 대상일 뿐이었다.

'뒤랑달의 힘을 확인해 볼 기회다.'

거주지에서 마몬의 도움을 통해 뒤랑달의 봉인이 한 단계 풀렸다.

그와 함께 생겨난 새로운 능력, 부서지지 않는 검. 그 어떤 공격으로도 내구도가 소모되지 않는다는 능력은 세운이 사용하는 탐욕의 권능과 놀랍도록 어울렸다.

과연 뒤랑달이 보구의 힘을 견뎌내고 다른 무기들처럼 부서지지 않을 수 있을지.

그것을 확인해 볼 절호의 기회가 바로 지금이었다.

타앗!

개미지옥을 중간쯤 내려온 세운이 높게 뛰어올랐다.

목표는 개미지옥의 중앙, 몸통을 숨긴 채 집게만 내밀고 있는 개미귀신이었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자하신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에 열기가 더해집니다.

세운이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갑자에 이르는 내공이 늑대의 형상을 이루더니, 그 주변이 불타오르듯이 이글거렸다.

불타는 늑대.

그 모습이 실로 위협적이었지만, 아래에서 딱딱거리는 집게에 비할 바는 못됐다. 크기부터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었으니까.

그리고 세운이 놈의 집게에 닿기 직전.

드디어, 뒤랑달의 검신에 보구의 힘이 깃들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거인의 검, 에케작스 ]

- 거인 에케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흠집 하나 없이 헤쳐나온 보검. 그 힘은 '손안에서 약동하는 것이 느껴질 만큼 좋은 검'이라 평가받고 있다.

거인의 검이라는 이명 때문일까?

보구의 힘이 깃들자, 세운을 둘러싸고 있던 늑대의 형상이 몸집을 크게 불려 나갔다.

불꽃처럼 순식간에 불어난 형체는 순식간에 개미지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다.

두근, 두근!

뒤랑달의 손잡이를 통해 심장 박동과도 같은 약동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는 느낌이다.

그제야 위협을 느낀 개미귀신이 딱딱거리던 집게를 멈추었다. 더 이상 자신이 포식자가 아닌, 피식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놈은 그 즉시 생존 본능에 따라 집게를 아래로 파묻었다. 몸을 돌리고, 공격을 피해 모래 속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다만, 공격을 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피하려고 하였다면, 세운이 뛰어오른 순간부터 몸을 내뺐어야 했었다.

인제 와서 깨닫고 도망친다 한들....

콰륵!

콰과과광!!

불타는 늑대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히든 퀘스트, '모래 지옥의 주인'을 완료하였습니다.

-시련 '사막 횡단'에 추가 점수가 부여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통해 놈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흐름이 멈춘 개미지옥 사이로 놈의 파편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개미귀신'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5, 지혜가 5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바싹하게 잘 익은 먹잇감의 갑각에 매우 만족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부숴준 당신의 배려에 감탄합니다.

역시, 히든 퀘스트였다.

탑은 플레이어에게 언제나 시련을 내려주지만, 그만큼의 보상을 잊지 않는다.

시련에 존재하는 그 어떤 고난도 의미가 없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두근, 두근....

'역시.'

점점 약해지는 약동에 뒤랑달을 내려보았다.

거인의 검, 에케작스의 힘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무기들처럼 소멸하기는커녕, 작은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뒤랑달이 보구의 힘을 완벽하게 견딜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게다가, 다른 무기보다 보구의 힘을 훨씬 강하게 구현해 주고 있었다.

앞으로 검 형태의 보구라면, 무기가 소멸할 걱정 없이 탐욕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약 몇 번으로 이제는 멈춰 버린 개미지옥을 올라오니, 유서아가 멍한 눈으로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라칸 때도 충분히 대단했는데. 그때보다 더 강해지셨네요."

"너희가 강해지는 만큼, 나도 강해져야 하지 않겠어?"

"세운 씨는 이미 그 선을 벗어나신 것 같은데요?"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게 장난이라는 것을 알아챈 세운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볼일도 끝냈으니, 이제 속도 좀 내볼까?"

"좋아요! 저도 속도로는 지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내기할까?"

"제가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 어때요?"

"좋아,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까."

"그럼, 바로 시작이에요!"

타앗!

어차피 6층 시련의 길목에서 히든 퀘스트로 짐작 가던 것은 개미지옥뿐이었다.

그렇기에 세운은 앞서가는 유서아를 따라잡으며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제 114화

114. 제114화

-6층의 시련 '사막 횡단'을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공적치 집계 중....

-남은 시간 : 22시간 01분

-사냥한 몬스터의 수 197 마리.

-히든 퀘스트 '모래 지옥의 주인' 완료.

-총 누적 공적치 175,750point

개미귀신을 사냥한 이후, 세운과 유서아는 뒤로 넘어가기 시작한 해를 확인하고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서쪽으로 직진하였다.

몬스터는 별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생각보다 일찍 오아시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걸린 시간은 고작 8시간.

유서아가 다리에 내공을 싣는 데 완전히 익숙해졌기에 가능한 기록이었다.

아마 다른 클랜원이 동료로 걸렸다면, 동료를 챙기느라 시간이 조금은 지체됐으리라.

'랭킹권은 실패인가.'

지금까지 줄곧 시련의 순위권을 유지해 오던 세운이었기에 조금은 실망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6층의 시련에는 모래 지옥 말고도 히든 퀘스트가 따로 존재하는 듯했다.

그게 아니면, 다른 플레이어가 모래 귀신을 처치하고도 이보다 빠른 속도로 도착했다거나.

어지간한 플레이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카샬락카스 같은 플레이어라면 충분히 가능한 수치니까.'

탑에는 인간의 힘을 아득히 벗어난 플레이어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들이라면 세운의 상식을 벗어나 시련을 공략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늦어져서...."

"너 때문이 아니야. 아마 나 혼자 도전했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거야."

세운이 지금까지 시련에서 높은 공적치를 획득할 수 있었던 건 다른 플레이어들이 찾아내지 못한 히든 피스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이번 개미지옥 같은 경우는 다른 플레이어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히든 피스. 아니, 애초에 플레이어에게 발견 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함정이었다.

그러니 여정의 지침표가 없는 지금, 괜히 아는 것도 없이 사막을 돌아다녀봤자 시간만 낭비했을 게 분명하다.

"정말이야. 나라고 항상 순위권을 차지할 수는 없으니까."

"네...."

"그러지 말고 얼른 쉬어. 슬슬 내공도 바닥났잖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회복할 테니까요."

유서아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세운에게 배운 내공심법을 이용하여 텅 비어 버린 단전에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세운은 짧은 명상만을 마친 채 눈을 떴다.

유서아를 위해 기온 조절 마법인 템플리쳐를 유지하고,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내공을 운용하긴 했지만.

무려 2 갑자의 내공과 5 서클의 마나를 품고 있는 세운에게는 전혀 무리가 가지 않았다.

[이하늘 : 서쪽이 헷갈리시면 태양을 보고 움직이시면 돼요. 지구는 아닌 것 같지만, 해의 위치는 같은 것 같거든요.]

[백현 : 혹시 해가 질 때까지 도착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남깁니다. 먼저 북극성을 찾은 후에 달의 위치와 대조하면....]

클랜챗을 확인해 보니 사람들이 각자의 공략법을 나누고 있었다.

솔직히 이런 공략법이 아니라 개인의 판단으로 시련을 마쳤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저런 배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사막을 걷는 게 조금 어렵긴 해도 방향만 잘 잡으면 30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운은 걱정을 접고 맑은 오아시스를 내려보았다.

해가 저물어가며 오아시스가 석양에 비춰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오아시스라....'

손을 담그니 뜨거운 모래알과는 다르게 차가운 수온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물을 떠 올려 얼굴의 모래 먼지를 닦아낸다.

반쯤 내비치던 태양이 완전히 저물며 날씨가 순식간에 쌀쌀해진다.

그래도 이 정도 추위라면, 클랜원들은 오히려 낮에 이동하는 것보다 더 편할 것이다.

그런데.

'음?'

오아시스에서 무언가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신경 쓰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갈증에 물을 한 모금 떠 마시니 기운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우웅!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캔 마법을 발현한 세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오아시스에 마나가 흐르고 있어?'

오아시스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자라면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아름다움이었다.

세운도 스캔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확인하지 못 할 뻔했다.

'시련은 이미 끝났을 텐데.'

회귀 전의 기억을 뒤져보아도 오아시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회귀 전의 세운은 오아시스에 도착하자마자 체력이 다 떨어져 기절하듯 쓰러졌으니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여정의 지침표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혹시 모르니까....'

첨벙!

세운이 망설임 없이 오아시스의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마자 흔적을 감추고 있던 인어의 아가미가 쩌억 벌어지고 손가락 사이에서 머맨의 지느러미가 생겨났다.

침착하게 숨을 들이켜자, 아가미 사이로 시원한 물결이 들어오며 몸에 힘이 들어왔다.

'생각보다 깊은데.'

오아시스의 크기가 크긴 했지만, 깊이는 얕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직접 들어와 본 오아시스는 놀라울 정도로 깊었다.

오아시스 자체가 땅속을 흐르는 지하수가 지층을 뚫고 나온 지점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세운이 보기에는 달랐다.

이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빛....'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에서 흘러들어 오던 빛이 사라져 갔지만, 그와 반대로 아래에서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세운은 빛을 따라 잠수를 이어갔다.

그럴수록 신비로운 불빛이 점점 더 밝아졌다.

대략 수십 미터를 잠수한 후에야,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실로 아름다운 보석이라며 관심을 드러냅니다.

'수정?'

호수의 가장 밑바닥에 사람 몸만 한 수정이 박혀 있었다.

수정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마나를 담고 있는 빛이었다.

세운이 느낀 마나 역시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혹시 이게 추가 보상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세운의 피부로 미약한 물의 흐름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수정 바로 옆의 벽면에 난 작은 틈에서 물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스캔 마법을 사용하자, 그 사이에서 수정보다 진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다.'

힘겹게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세운은 작은 틈 위에 손을 올린 채 새로운 마법을 발현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워터 스트라이크(Water strike) ]

- 청탑의 수류계 마법으로써 물의 기둥을 일으켜 상대를 강타한다.

콰콰콰콰!!

수류계 마법은 주변에 물이 많을수록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다.

하물며, 이곳은 물속. 사방이 물이었으니 워터 스트라이크의 위력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다.

거기에.

-흑탑의 묘리에 따라 '워터 스트라이크'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청탑의 묘리에 따라 '워터 스트라이크'의 안정성이 강화됩니다.

두 마탑의 묘리가 뒤섞이며 워터 스트라이크는 4 서클 마법이라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했다.

틈이 나 있는 것을 보아 얇은 벽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두께가 있는지 수압을 꽤 버텨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쩌적 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틈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틈이 커지자 세운의 마법은 더욱 강력하게 틈을 파고들었고.

쩌억!

수압에 밀려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며, 사람 한둘쯤 지날 수 있어 보이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마법을 멈추어 주위를 진정시킨 세운이 그 안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후우...."

유서아가 숨을 갈무리하며 내공심법을 멈췄다.

텅 비었던 단전이 가득 차오르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다리에 새로운 힘이 감돌았다.

이렇게나 내공을 오랫동안 유지해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생각보다 내공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많이 쌀쌀해졌네.'

눈을 뜨니 어두운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방에 아지랑이가 일렁일 정도로 더웠는데 해가 지자마자, 놀랍도록 추워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관절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많이 기다리셨.... 세운 씨?"

그러나, 세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나무 뒤에서 쉬고 있나 싶어 두꺼운 야자나무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설마 먼저 다음 시련에 넘어간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3층 시련에서의 경험대로라면, 이런 류의 시련은 한 명이 다음 시련에 도전하는 순간 동료 역시 함께 이동되니까.

잠시 당황한 유서아의 앞에 그녀를 지켜보던 성좌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그 인간이라면 오아시스의 안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줍니다.

"오아시스요?"

그녀가 다급하게 오아시스를 향해 달렸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고요한 오아시스를 멍하게 바라보던 중, 그 깊은 곳에서 미약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속에서 세운이 힘차게 떠올랐다.

목에는 아가미가 달려 있고, 손과 발에는 얇은 피막이, 팔뚝과 등에는 두꺼운 지느러미가 달린 기묘한 모습.

이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서아."

그사이, 세운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잡은 손에서 촉촉한 물기와 매끄러운 비늘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세운의 얼굴에서는 평소에 보기 힘든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기도 전에, 세운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일 분만 숨 참고 있어. 알겠지?"

"네? 그게...."

풍덩!

둘의 모습이 사라지고, 오아시스의 파문이 점점 옅어졌다.

* * *

"푸하!"

세운이 유서아의 손을 꽉 붙잡은 채로 물 위로 떠올랐다.

다만, 떠오른 곳은 오아시스의 위가 아니었다.

오아시스의 가장 깊은 곳에서 벽면을 뚫고 만들어 낸 통로. 그 통로와 이어진 공간이었다.

드드득-

수면 위로 오르자마자 자신의 역할을 끝냈다는 듯이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세운이 새로운 호흡에 적응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사이, 세운과 함께 떠오른 유서아가 콜록거리며 촉촉하게 젖어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

"세운 씨, 이게 무슨...."

"일단 봐봐."

"네?"

유서아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하나도 없음에도 주변이 은은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벽 곳곳에 수정이 박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빛의 정체인 듯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광경.

탑을 오르며 메말라가던 감정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어때?"

"아름다워요.... 여긴 대체 어디죠?"

"글쎄, 아마...."

세운이 대답하기 직전, 둘의 앞으로 환영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7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숨겨진 시련을 찾아내어 기존의 시련인 '신기루의 정체'가 '사하(沙下)의 수정동굴'로 변경됩니다.

-주제 : 사하의 수정동굴

-시간 제한 : 없음

-당신은 사막 아래에 숨겨진 수정동굴을 찾아냈습니다.

-수정동굴의 비밀을 알아내십시오.

시련의 변경.

여정의 지침표를 가지고 있던 회귀 전의 세운으로서도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시련이 어지간한 히든 퀘스트 하나보다 훨씬 얻을 게 많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제 115화

115. 제115화

"시련 변경이라니.... 그럼, 저희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련인 건가요?"

"그럴 거야."

"으음...."

"걱정 마. 이득이면 이득이지, 절대 손해는 아닐 테니까."

사하의 수정동굴.

세운도 처음 도착하는 만큼, 공략법 역시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천천히 시련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수정동굴의 비밀이라....'

솔직히 너무 애매한 목표였다.

무언가를 토벌하라거나, 찾아내라거나, 도착하라거나 하는 목표였다면 망설임 없이 움직였을 텐데.

비밀을 찾아내라고 한 이상, 수정동굴을 샅샅이 뒤지며 머리를 굴리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간 제한이 없다.'

탑에 들어온 후 최초로 받는 시간 제한이 없는 시련이었다.

이처럼 시간 제한이 없는 시련은 적어도 20층 이상은 되어야 나오는 대형 시련이 대부분인데....

아마, 그만큼 그 비밀이라는 걸 찾아내기 어렵다는 뜻인가 보다.

'입구는 막혔고.'

뒤를 돌아보니 세운이 건너왔던 통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시도는 해 보지 않았지만, 이미 시련이 시작된 이상 물리력으로 입구를 다시 뚫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세운은 가장 먼저 아공간 주머니에서 망치를 꺼내 들었다.

"세운 씨? 망치는 왜...."

"잠깐만 귀 좀 막고 있을래?"

"설마!"

콰아앙!!

세운이 수정 박힌 벽면에 망치를 휘둘렀다.

유서아가 다급하게 귀를 막으며 눈을 질끈 감자마자, 동굴 안으로 귀를 울리는 진동이 퍼져나갔다.

망치를 다시 들어보니, 벽면에는 조금의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 벽에 박힌 수정 역시 마찬가지.

망치를 꽉 붙잡았던 손바닥만 얼얼하게 떨려올 뿐이었다.

'파괴 불가 지형인가 보네.'

혹시나 파괴할 수 있으면 수정을 좀 캐가면 어떨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한 듯했다.

그리고 이번 공격으로 깨달은 건 단순히 채굴이 어렵다는 것 정도가 아니었다.

웅-

우웅-

동굴을 타고 퍼져나갔다가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진동음.

그것만으로도 이곳이 꽤나 복잡한 지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자."

"...네."

유서아가 양손으로 뺨을 쳐 정신을 차리고 세운의 뒤를 따랐다.

동굴을 걸을수록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욱 돋보였다.

중간중간 수정과 같은 빛을 흘리는 버섯 몇 무리가 동굴의 틈새로 자라나 있었는데, 세운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수확하였다.

'이 정도로 마나를 머금고 있으면, 뭐라도 효능이 있겠지.'

이하늘에게 가져다주면 좋은 약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리라.

이전에 사용한 식물도감의 지식 덕분에 최소한 식용이 가능할 것 같다는 건 예상할 수 있었으니.

만약 약으로 만들기 어렵다 해도 클랜에서 요리를 책임지고 있는 김소희에게 가져다주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바람도 안 느껴지는데 공기는 엄청 상쾌하네요."

"마나 덕분일 거야."

"마나요?"

"마법으로 불과 물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마나만 있으면 산소를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거든."

"신기하네요. 마법이라는 거."

사실, 세운의 대답에는 모순이 하나 있었다.

분명 마나로 산소가 만들어질 수는 있지만, 자연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은 마나를 산소로 바꿔주는 수식. 즉, 마법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 말은 이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소라는 것.

아마도, 그게 시련에서 말했던 수정동굴의 비밀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자 여유가 생겨났는지, 그녀가 클랜챗을 확인하였다.

사람들의 대화를 확인한 유서아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른 사람들도 슬슬 6층의 시련을 끝낸 것 같네요."

"길만 잘 찾으면 그리 어려운 시련은 아니었으니까."

"바로 다음 시련에 도전한 사람도 있는데, 역시 저희랑 달라요. 신기루의 정체를 밝혀내라는데, 뜻을 이해하기가 영 어렵나 봐요."

본래 7층의 시련이었던 '신기루의 정체'.

회귀 전의 세운이야 여정의 지침표를 통해 쉽게 공략해 낸 시련이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시련의 이름 그대로 사방에 신기루가 일렁이는 상황에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물론 길을 찾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신기루를 하나하나 뚫고 지나가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겨우 겪어야만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만 안 하면 통과 자체는 가능한 시련이니까.'

7층의 시련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단 한 가지다.

거듭된 실패로 인한 포기. 신기루에 몇 번 농락당한 후, 가망이 없다고 드러누워 버리는 경우다.

그것만 아니라면, 7층의 시련은 분명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운이 아는 디아블로 클랜의 사람들이라면 고작 그 정도 시련으로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걱정 마. 다들 잘 해 낼 테니까."

"그럼요! 그것보다는, 저희 시련에 집중해야죠."

"맞아."

그렇게 유서아가 기운을 내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순간, 세운이 자리에 우뚝 서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걸음을 막아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는 벽에서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는 곧바로 쌍검을 꺼내 들었다.

"역시 쉽게 넘어가진 않네요."

세운이 망치로 휘둘러도 끄떡하지 않았던 벽.

그 벽에서 굴러나온 돌덩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본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운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까앙!

다급하게 뒤랑달을 들어 올린 세운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놈의 중간을 내려찍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손잡이를 타고 익숙한 진동이 느껴졌다.

유서아 역시 쌍검을 날카롭게 치켜들고 세운의 뒤를 따랐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그리 경쾌하지 않았다.

"찌륵."

"찌르륵."

"더럽게 단단하네."

"틈이... 보이지 않아요."

둘의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사이 놈들은 완벽한 형체를 갖추었다.

중간의 수정을 토대로 이루어진 사족보행의 동물과 같은 모습.

생긴 게 영 어설펐기에 정확하게 무엇을 닮았는지 표현하기가 영 어려웠지만, 날카롭게 떠 오른 꼬리만은 확실히 전갈을 닮아 있었다.

"온다."

"찌륵!"

과연, 세운이 생각한 대로 꼬리에 자신이 있었던 걸까?

놈들은 날카로운 꼬리를 창처럼 앞세우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유서아가 말한 것처럼, 놈들의 신체 구조는 얼마나 절묘한지 관절 사이의 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정말 바위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캉, 캉!

꼬리를 빗겨내며 몇 번이고 반격을 해 보았지만, 그럴싸한 데미지는 입히지 못했다.

그나마 뒤랑달이었기에 검날이 상하지 않고 놈들에게 흠집이라도 낼 수 있었던 것이지, 평범한 무기였다면 진작 날이 나갔으리라.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스피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인페르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직!

화륵!

혹시나 싶어 마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전기는 놈의 몸에 닿자마자 잔류가 되어 사라졌고, 화염은 놈의 몸을 따뜻하게 달구는 것 정도에 그쳤다.

상황은 유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보법으로 놈들의 공격을 피해 냈지만, 빈틈이 없으니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무의미한 대치만 벌여봤자 체력만 낭비될 뿐이다.

"세운 씨! 일단 도망치는 게 어떨까요? 일단 멀리 떨어져서 전략을...."

"아니, 이제 대충 알 것 같아."

몬스터를 상대함에 있어 약점을 찾아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운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으로 놈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화염과 냉기의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는 것.

한 번에 큰 타격은 입히지 못했어도, 열에 달궈지는 것을 확인한 이상 화염과 냉기를 반복 사용하면 균열이 생길 게 분명하다.

다만, 이 경우는 효율이 너무 떨어졌다.

그 정도의 효과를 일으키려면 두 마법을 적어도 서너 차례 반복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팔괘장(八卦掌) ]

- 태극권, 형의권과 함께 내가권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삼대 무공 중 하나. 주로 일반적인 유파와 달리 손바닥을 많이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툭.

"...찌륵?"

퍼엉!

겉이 아닌 속을 공격하는 것이다.

세운이 가볍게 손바닥을 휘두르자, 바위보다 단단하던 놈들의 몸이 풍선껌처럼 터져 나갔다.

그리 많은 힘을 낸 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흘러가듯 가볍게. 힘보다는 몸의 탄력을 이용하여 손바닥을 뻗는다.

그럴 때마다 놈들의 몸이 하나하나 터져 나가더니,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적이 초라한 파편이 되어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간단해. 겉이 단단한 대신 속이 워낙 약한 놈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속을 어떻게.... 하아, 아니에요."

유서아가 포기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강한철이라면 몰라도, 유서아에게는 알려줄 수 없는 기술이니 뭐라 말을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그 대신, 세운은 전방에 퍼져 있는 놈들의 사체를 둘러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거, 보이지?"

"수정이요?"

"이게 이놈들의 핵이야. 작은 충격이라도 핵에 다다르기만 하면 이렇게 터져 버리는 거지."

"아...."

"아니, 터졌다기보다는 핵이 힘을 잃어서 흩어졌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지."

놈들이 터진 것처럼 보인 건 핵을 파괴하고도 남은 힘이 핵 주위로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운 역시 처음 사용해 본 힘이었기에 팔괘장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이놈들을 상대하기는 충분하다.

"그리고 여기."

"어? 꼬리랑 뭔가 연결되어 있네요."

"응. 아마 핵을 시작으로 꼬리를 통해 힘이 퍼져나가는 것 같아. 인간으로 치면 중추신경계. 척수라고 해야겠지."

"그럼 이 꼬리를 자르면...."

"응. 그것만 가능하면, 핵을 타격하지 않아도 무력화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겠네요! 몸통 쪽을 신경 쓰느라 자세히 못 봤지만, 꼬리 쪽에는 분명 몸통보다 큰 틈이 있었어요."

"잘 봤어. 다음에는 거기를 노리면 될 거야."

겉으로는 간단해 보여도, 팔괘장은 적의 내부까지 힘을 전달하는 만큼 많은 내공이 소모되는 무공이다.

물론 2 갑자의 내공을 가진 세운에게 부담이 가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만약 놈들이 수십 또는 수백 마리 이상 나타나면 꽤 곤란해진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유서아에게 공략법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고작 7층의 시련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시련이 아닌 숨겨진 시련이었으니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유서아가 꼬리 부위의 파편을 유심히 관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음 전투부터는 그녀도 놈들을 쉽게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준비됐지?"

"네. 다음부터는 당황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가자."

"네!"

그렇게 파편을 뒤로하고 발을 옮기려던 중, 한 줄의 메시지가 다급하게 세운에게 떠올랐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어째서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며 당신을 재촉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당장 입 안에 무언가를 넣지 않는다면 배고파 쓰러질 것 같다며 칭얼댑니다.

'...저걸 먹겠다고?'

세운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닥에 흩뿌려진 수정과 바위 파편을 바라보았다.

제 116화

116. 제116화

-'크리스탈 크리쳐'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체력이 2 상승합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폭식의 권능을 상용하는 게 가능했다.

까득, 까득 거리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수정과 바위의 파편을 씹고 있는 이빨들.

저러다 이빨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을 더욱 작게 조각내며 꿀꺽 집어삼켰다.

저런 강도라면 드래곤의 비늘이라도 씹어 삼킬 수 있으리라.

세운은 물론 유서아도 멍한 눈빛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냥 저 힘으로 몬스터들을 공격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쉽게도 저건 내가 쓰러트린 몬스터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거든."

-성좌, '배고픈 왕자'가 혀를 굴리며 달달한 수정 조각을 한껏 음미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 파편들은 씹는 재미가 있다며 입을 크게 오물거립니다.

베엘제붑이 놈들을 맛보던 중, 세운은 권능에 표시된 놈들의 이름에 주목했다.

'크리스탈 크리쳐라....'

회귀 전 수백 수천의 몬스터를 상대하고 조사했던 세운으로서도 처음 듣는 몬스터였다.

그러나 이름을 통해 그 이유 역시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크리쳐.

생물이나 생명체 등을 뜻하는 단어지만, 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몬스터에게 사용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즉, 예상했던 대로 이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였다.

몬스터들 역시 이 장소를 지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나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대략 열 마리.

점점 넓어지는 통로에 걸맞게, 크기 역시 처음 만났던 것들보다 커져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공략법이 밝혀진 적은 더 이상 위협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내공을 통해 팔괘장의 제삼 초식, 포월장(抱月掌)이 강화됩니다.

와르르-

세운의 손이 뻗어나갈 때마다 크리쳐의 몸체가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처음에는 내공의 분배에 익숙하지 않아 내공을 과도하게 사용하였다면, 지금은 딱 핵에 닿을 정도로 최소한의 내용만을 운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힘이 낭비되지 않아 놈들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세운이 세 마리의 크리쳐를 무너트릴 때쯤, 유서아 역시 처음의 전투와 달리 능숙하게 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세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카카강!

처음에는 거센 저항 소리가 들려왔지만 유서아의 검은 맹수처럼 집요하게 꼬리 사이의 빈틈을 노렸다.

그러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크리쳐의 꼬리가 잘려 나갔다.

즉사는 아니었지만, 예상대로 꼬리가 잘려 나가자 놈이 잠깐의 발작을 보이더니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핵과 신체의 연결부가 끊어졌으니 놈이 다시 일어날 일은 없었다.

"움직임이 많이 좋아졌는데?"

"6층에서 수련한 게 많이 도움 되는 것 같아요!"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지금이라면 네 번째 다리를 꺼낼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읊조립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유서아의 사냥에도 가속이 붙었다.

처음처럼 바위에 튕기는 듯한 저항음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쌍검이 한차례 들이닥칠 때마다 놈들의 꼬리가 단번에 잘려 나갔다.

빈틈을 공격하는 방법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이다.

덕분에 열 마리에 달하던 크리쳐가 순식간에 모두 쓰러졌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전투가 일 분이 넘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어느덧 유서아의 표정이 자신감이 차올라 있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수정 파편을 볼 한가득 집어넣고서 황홀한 표정을 짓습니다.

크리쳐를 백 마리쯤 해치웠을까? 드디어 길고 긴 외길이 끝나고, 처음으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음...."

4층의 시련인 '동굴 지나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감각에 집중해 보았지만 별다른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스캔 마법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흐름은 물론, 마나의 흔적까지. 그 모든 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동일했다.

"일단 움직여볼까요? 4층처럼 한쪽이 막혀 있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요."

"그러자."

가끔 이곳처럼 힌트가 없는 갈림길 역시 존재한다.

그럴 때는 유서아가 말한 것처럼 일단 움직여서 정보를 모으는 게 최선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어쩐지 수정의 보랏빛이 익숙해 보인다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대략 30분쯤 걸었을까?

이번에는 크리쳐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둘의 앞으로 새로운 갈림길이 나타났다.

아니, 이걸 새로운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마나의 흐름, 공기의 흐름 등. 모든 것이 처음 보았던 갈림길과 똑같았다.

"...어쩔까요. 조금 더 가 볼까요?"

"아니, 돌아가자."

"벌써요? 아직 알아낸 것도 없는데."

"의심되는 게 하나 있거든."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었다.

역시나 돌아갈 때도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았고, 이제는 익숙해진 몽환적인 빛 사이로 다시 30분쯤 걸었다.

그리고 세운과 유서아는 눈앞에 나타난 사실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둘의 앞에 나타난 갈림길. 통로의 각도로 보았을 때 절대 처음 지나온 갈림길이 아니었다.

첫 번째 갈림길이나 두 번째 갈림길과 똑같이 생긴 갈림길이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

이에 세운은 확신할 수 있었다.

"환상이야."

"환상이요?"

"일종의 결계 같은 거겠지. 침입자를 막는 결계."

"그럼 이제 어쩌죠?"

"갈림길이 결계라면, 결계를 구성하고 있는 핵이 있을 거야. 내가 전에 사용했던 마나석처럼."

"핵이라면.... 저걸 말하는 건가요?"

유서아가 갈림길 사이에 박혀 있는 수정을 가리켰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하던가? 사방에 수정이 가득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나에 집중하던 세운이 이 수정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수정에서 마나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더욱 이상했다.

'크기에 비해 다른 수정보다 느껴지는 마나가 더 미약해.'

마치, 고의로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한 듯한 모습이다.

이에 세운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수정이 환상의 정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확신하자마자 세운이 뒤랑달을 꺼내 들었다.

벽면이 파괴 불가 지형이라지만, 만약 이 수정이 결계의 핵이라면 분명 파괴가 가능할 것이다.

-내공을 통해 태산십팔반검의 제삼 초식, 태산삼격(泰山三格)이 강화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카가강!

동굴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들어간 힘과 내공만큼 소음도 컸기에, 유서아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심지어는 저 멀리까지 퍼져나간 후 돌아온 메아리조차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파극심공의 묘리까지 들어간 공격에도 수정에는 상처하나 나 있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흠집조차도.

다만, 뒤랑달이 수정에 닿는 순간에 세운은 느낄 수 있었다. 수정에 담긴 마나가 핵을 지키기 위해 꿈틀거리는 것을.

이로써 눈앞의 수정이 환상 결계의 핵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물리력이 아니라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그런 거라면 아무리 뒤랑달이라 하여도 부술 수 없었다.

크리쳐를 상대할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마법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수정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환상을 깨는 검, 이매진 브레이커 ]

- 일곱 마탑이 흑탑을 공격하기 위해 힘을 합쳐 만들어 낸 마법 검. 마나 그 자체를 베는 힘이 있어 그 어떤 마법이나 결계도 갈라낼 수 있다.

뒤랑달에 미지의 힘이 깃들었다.

개미귀신을 상대하며 뒤랑달을 이용하여 마몬의 창고에 들어 있는 검 형태의 보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굳이 탐욕의 권능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보구의 힘이 깃든 뒤랑달이 본래 이매진 브레이커의 형상을 닮아 붉게 물들었다.

환상을 깨는 검, 또는 마법을 베는 검.

그렇게 불렸던 검은 자신의 주인의 마나 마저 거부하고 있었다.

검을 잡은 손바닥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며 1초도 되지 않아 손이 벌벌 떨려왔다.

마법사가 만들어 냈지만, 마법을 거부하기 위한 검.

그 때문에 이 검을 사용했던 마법사는 그 일격으로 가진 마나를 모두 잃고 서클을 잃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세운은 달랐다. 서클에서부터 손을 향하는 마나를 철저하게 단절시켰다.

사대 마탑의 묘리를 활용한 극도의 마나 컨트롤.

집중에 집중을 거쳐 더 이상 마나가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덜덜 떨리던 손이 멈추는 순간, 이매진 브레이커가 제 형상을 드러내며 붉은 섬광을 내뱉었다.

서걱-

수정을 베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놀랍도록 깔끔한 절삭음.

수정을 지키고 있던 마법적인 힘은 이매진 브레이커의 앞에서 조금의 시간도 벌어주지 못했다.

대각선으로 새겨진 실선을 따라 수정이 비스듬하게 미끄러졌다.

그 안으로 수정의 매끄러운 절단면이 보였다.

"후우...."

뒤랑달에서 보구의 힘이 흩어졌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아니라 서클의 마나에 온정신을 집중하였던 세운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마나가 통하지 않아 창백해진 손으로 다시금 마나가 순환되었다.

"세운 씨, 괜찮아요?"

순간적으로 마나를 컨트롤하는 데 성공했기에 마련이지, 무턱대고 검을 휘둘렀다가는 마나가 전부 빠져나갈 뻔했다.

세운으로서는 이 검이 단순히 마법을 베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읽었을 뿐, 사용자의 마나까지 파괴한다는 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구를 사용함과 동시에 스며들어온 지식 덕분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빠르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이에 삼 서클에 해당하는 마나가 빠져나가 있었다.

스르르-

핵이 사라지니 힘을 잃은 환상이 점차 옅어졌다.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던 길이 하나로 합해지고, 오감에 관여하던 마나 역시 사라졌다.

단순히 시야를 속이는 환상이 아니라 감각과 공간 그 자체를 속이는 환상이었나보다.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환상 결계라니.

'설마, 신이 관여된 건가?'

이러한 결계를 플레이어나 거주민들이 설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중층. 아니, 상층의 플레이어도 이렇게 완벽한 환상 결계를 만들어 내는 건 어려웠다.

그러니 세운이 신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운 씨, 저건...."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중, 유서아가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어느덧 환상이 완전히 걷어지고, 한층 넓어진 통로를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었다.

거대한 수정 벽. 한 층이 아니라 겹겹의 수정이 쌓여서 만들어진 수정 벽이었다.

그곳에는 세운이 방금 부수었던 수정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 막혀 있었다.

분명하다.

저곳이 시련에서 언급했던 '비밀'이 숨겨진 곳.

수정동굴의 중심부다.

제 117화

117. 제117화

"산 넘어 산이라더니, 딱 그 꼴이네요."

"그러게."

세운이 수정 벽 위로 손을 올려보았다.

매끄러운 겉면에서 수정 특유의 시원한 냉기가 느껴졌다.

도대체 몇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이토록 투명한데도 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매진 브레이커라면 부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세운이 곧 고개를 내저었다.

수정 벽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작은 크기의 수정을 부수는 데만 해도 3 서클에 해당하는 마나가 소모되었다.

한 번 사용해 보았으니 다음부터는 사용이 더 익숙해져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수정 벽을 일격에 부술 수는 없어 보였다.

보구나 뒤랑달의 힘이 약한 게 아니다.

그 힘을 다루는 주체, 세운 자신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탑의 7층에서 2 갑자에 해당하는 내공과 5 서클의 마나를 지닌 세운이었지만 아직까지 보구의 힘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가 없었다.

다른 보물들 역시 마찬가지.

만약 지금의 몸으로 드래곤 하트라도 사용한다면, 당장 몸이 버티지 못하고 폭발해 버리리라.

분명 7층에서는 수많은 성좌가 관심을 가질 정도로 놀라운 무력이었지만, 탑의 전 플레이어로 놓고 보자면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새삼스레 한계를 깨달은 세운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와서 시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 문을 통과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숨겨진 7층의 시련 '사하의 수정동굴'을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총 누적 공적치 400,000point

-축하드립니다! 7층의 시련을 랭킹 1위로 통과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상상도 못 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유서아 역시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이게 시련이 말하던 비밀인 걸까요? 수상하긴 해도, 아직 비밀의 정체를 밝혀낸 것도 아닌데...."

세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시련을 통과했다고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중간했다. 게다가, 공적치도 조금 수상해 보였다.

이번 시련에서 해치워 온 크리쳐만 생각해 보아도 공적치가 저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숨겨진 시련이었기에 공적치 산출 방식이 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찜찜한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수정 벽 내부를 감추기 위해서 세운과 유서아를 다음 층으로 떠넘기려는 기분이었다.

'아니,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

탑에는 관리자가 존재한다.

세운이 튜토리얼의 마지막에 만났던 관리자인 튜닝처럼, 그들은 플레이어에게 친절한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저 안이 정말 성좌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시스템을 건드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수정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고민을 반복하던 마몬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마침내 수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수정이 '디오니소스의 잔'과 같은 재질이라고 외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그러고 보니 자신이 사용하던 잔과 같은 재질이라며 화들짝 놀랍니다.

'디오니소스의 잔?'

디오니소스라면 알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12신 중 하나인 술의 신. 그 외에도 광기나 축제, 풍요와 야성 등을 관리한다고 알려진 신이었다.

주신급에 해당하는 성좌답게 탑 내에서도 그를 따르는 플레이어가 꽤 여럿 있었다.

과거를 떠올리던 세운은 기억 속에서 보랏빛 잔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보랏빛 잔....'

회귀 전, 언젠가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길드에서 주최한 파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술의 신을 따르는 자들답게 플레이어에게 좋은 술과 노래를 베풀었다.

물론 파티가 끝나고 그 '대가'를 받아 갔지만 말이다.

그때, 세운은 보았었다. 파티가 시작되며 연설을 시작하던 길드장이 들고 있던 잔을.

분명, 수정과같이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잔이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디오니소스가 만들어 낸 잔은 성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며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럼 설마 이곳이....'

지금까지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숨겨진 통로. 탐욕의 권능이 아니었으면 파괴할 수 없었을 수정. 그리고 눈앞을 막아서고 있는 거대한 수정 벽.

마지막으로, 디오니소스의 잔까지.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어쩐지 신성을 견딜 만한 자수정을 어디서 그렇게 많이 구했나 싶었다며 부리를 까딱입니다.

이곳이 바로, 디오니소스가 잔의 재료를 조달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멈출 수 없지.'

디오니소스는 선신 중 하나로 평화를 사랑하는 신이었지만, 세운에게는 방해되는 신 중 하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디오니소스의 뜻을 따라 음주와 가무를 즐기며, 플레이어들에게 그것을 설파하고 다녔으니까.

시련에 지친 플레이어들에게 그것은 큰 축복이었지만, 디오니소스의 술은 플레이어들을 휴식에 그치지 않고 나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자연스레 성장이 정체되고 탑을 오르기 포기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탑의 전력을 끌어 올려 아우터를 상대할 생각이었던 세운으로서는 방해 거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디오니소스를 방해할 수 있다니,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세운 씨, 어쩌실 거예요? 조금 쉬고 나서 다음 시련에 도전할까요?"

"아니."

"그럼 설마 바로...."

"아니, 이 수정 벽을 넘어갈 거야."

"네?"

다만,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 수정 벽을 넘어가야 하냐는 것.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재미있겠다며 스산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문' 앞에서 무엇을 고민하냐며 당신의 품을 가리킵니다.

'문?'

그래, 이것은 문이었다.

수정 벽이라는 겉보기에 선입견이 생겨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곳은 엄연히 저 안을 지키는 문이었다.

그렇다면,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게 있지 않은가?

마몬의 메시지를 이해한 세운이 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스터키. 세상 그 어떤 자물쇠도 열 수 있는 만능열쇠였다.

물론 수정 벽에는 자물쇠도, 열쇠를 끼워 넣을 공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운은 정면을 향해 열쇠를 내밀었다.

기묘하게도, 뒤랑달로도 흠집을 내기 어려웠던 수정에 열쇠가 쑤욱 들어갔다.

열쇠 주위로 잔잔한 파문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철컥.

세운이 열쇠를 돌렸다.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열쇠를 중심으로 일던 파문이 더욱 넓게 퍼져나갔다.

파문은 파도가 되고, 파도는 해일이 되었다.

그 단단한 수정 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한 겹, 두 겹.

차차 퍼져나간 해일은 끝내 가장 안쪽의 수정 벽까지 무너트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수정 벽의 크기가 어찌나 두꺼웠는지, 5m에 가까운 통로에 수정의 잔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우와...."

유서아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만,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세운도 눈앞에 벌어진 일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고 있었다.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획득했던 열쇠.

탑의 수많은 문을 알고 있었기에 고른 것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쓸 수 있었다니.

열쇠의 활용처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할 것 같았다.

"가 보자."

"네!"

세운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 순간, 시스템 오류라도 난 것처럼 치지직 거리는 메시지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누군가 다급하게 세운의 침입을 막아서려는 듯한 모양이었다.

세운은 역시 이번 시련이 급작스럽게 완료된 이유가 관리자의 개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시스템 메시지가 정리되었다.

-플레이어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7층 관리자가 시련에 개입을 요청합니다.

-시스템이 관리자의 개입을 거부합니다.

-7층의 관리자가 플레이어의 특별 전담관을 호출합니다.

-특별 전담관의 권한을 통해 특수 개입이 시도됩니다.

'특별 전담관?'

튜토리얼에서 보았던 것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문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보다 7층의 관리자가 아니라 특별 전담관이라니. 그 말은, 성좌뿐만 아니라 탑의 관리자들도 세운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긴, 벌인 일도 있으니 어쩔 수 없으려나.'

튜토리얼에서의 일들은 물론 탑에 들어와서도 타뷸라의 늑대를 사냥하거나 스톤 라바를 사냥하는 등.

세운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눈에 띌 행동을 수도 없이 벌여왔다.

늘어진 시스템 메시지 사이에서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하아...."

가장 먼저 들려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한숨 소리. 곧이어 허름한 정장과 늘어진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튜닝.

튜토리얼에서 공적치 랭킹 1위 보상을 위해 세운의 앞에 나타났던 관리자였다.

어떻게 된 건지, 튜토리얼의 관리자였던 그가 세운의 특별 전담관이 되어 있었다.

"이걸... 열면 어떡합니까...."

튜토리얼에서는 가식이라도 영업용 미소를 활짝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세운과 눈을 마주치고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두 눈 아래로 내려온 다크서클은 이전과 비교해도 더 진하고 길게 내려와 있었다.

최소한 일주일은 잠을 자지 못한 듯한 몰골이었다.

특별 전담관이라는 직위를 보아하니 그 원인이 세운 자신이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세운... 플레이어."

"진급하셨나 보네요."

"진급? 하아, 진급이 맞긴 하지요. 일단은 탑에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튜닝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쩐 일이시죠? 관리자가 시련에 개입하는 건 금기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아.... 아니, 하...."

그가 당황한 듯 소리를 지르더니 곧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호출되다 보니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모양이다.

유서아가 옆에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물었지만, 세운은 답변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관리자가 나타난 이상, 우선은 그와의 대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머리를 쥐어뜯던 그의 손에서 머리카락이 한 움큼 떨어져 나올 때쯤,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눈을 낮게 뜨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이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걸 막을 권한은 없으실 건데요."

"...누가 보면 저희 직원인 줄 알겠습니다. 7층의 플레이어가 저희 매뉴얼을 이토록 잘 꿰뚫고 있다니 말입니다."

세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서 모르는 척을 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오히려 아는 척을 하며 압박을 하여 뭐라도 얻는 게 이득이었다.

튜닝이 세운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그런다고 무언가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보상이라면 두둑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네?"

"보상은 필요 없고, 저는 이 앞을 확인하러 갈 생각입니다."

"아니, 안 됩니다. 진짜 안 됩니다. 저 진짜 죽습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멈춰 주세요. 네?"

"안 됩니다."

"그러지 말고, 생각 좀 해 보십쇼. 보상은 진짜 두둑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분명 앞으로 층을 오를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세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7층의 관리자에게 어떻게든 세운을 막으라는 명령을 듣고 나타난 것이겠지.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특별 전담관이라 해도 세운이 알고 있는 관리자라면 플레이어에게 약간의 페널티를 주는 건 가능해도 강제로 움직임을 막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튜닝이 기어코 무릎을 꿇고, 옆에서 당황한 유서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 정리를 마친 세운이 튜닝에게 입을 열었다.

제 118화

118. 제118화

"이 시련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네? 아니,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7층의 시련 매뉴얼에도 이곳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반응을 보아하니 7층의 관리자가 꽤 급한 반응을 보인 것 같은데요?"

"시스템의 제약이 아니었으면 7층의 관리자께서 바로 내려왔을 겁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네?"

세운이 길게 미소 지었다.

이미 이곳이 디오니소스의 잔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자수정의 근원이라는 건 알아냈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성좌는 직접적으로 탑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사실.

5층의 시련에서처럼 장소를 대여해 주는 조건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지만, 지금은 달랐다.

본래 7층의 시련은 사막 위에서 벌어진다. 수정동굴과는 전혀 연관도 없다는 뜻이다.

그럼 디오니소스는 무슨 자격으로 7층의 자리를 빌려 자수정을 발굴하고 있었던 것일까?

간단하다. 성좌가 따로 관리자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세운의 말뜻을 깨달은 튜닝의 눈이 진지해졌다.

"...그렇군요. 확실히 이상합니다. 애초에 이런 장소가 있는 것도 이상하고, 매뉴얼에 적어 두지 않은 것도."

"제 성좌님들을 통해서 알아낸 게 있습니다. 이곳의 자수정들이 디오니소스의 잔을 만들기 위한 재료라더군요."

"정말입니까?"

"확실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이 직접 인증하겠다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얼마 전에 산 자신의 잔과 똑같지 않냐며 자신의 보랏빛 잔을 들이댑니다.

만약 7층의 관리자가 직접 내려왔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칫 수틀리면, 인과율을 어기더라도 세운의 입을 막으려 했을 테니까.

하지만, 튜닝은 다르다.

특별 전담팀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아마 세운을 지켜보기 위한 독립된 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탑의 부정을 신고하는 게 가능하다.

"성좌가 시련과 별개로 층을 사용해 사리사욕을 챙기고 있다는 건, 탑에 대한 기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규칙에도 어긋나고, 만약 관리자까지 연관되어 있다면 보통 일은 아니게 될 겁니다."

튜닝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세운은 간단하게 말했지만, 이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관리소가 아무리 성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지만, 탑을 관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관리소의 일이었으니까.

그 규칙을 어겼다면, 상대가 주신급 성좌라 하여도 간단하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이래도 제 앞길을 막으실 겁니까?"

"...."

"만약 7층의 관리자 자리가 빈다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튜닝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운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확실히 7층의 관리자는 징계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이에 그는 길고 긴 고민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 담당관으로서 허락하겠습니다. 정세운 플레이어의 행보는 플레이어로서 지극히 당연하니 제게 막을 권한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바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 안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되겠죠?"

"그럼요. 그게 플레이어의 권한 아니겠습니까."

우웅!

그의 뒤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또 한 번 길게 벌어지더니 문의 형상을 만들었다.

튜닝이 다급하게 등을 돌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단순히 관리자에게의 처벌로 그쳐질 일일까?

아니다. 어떻게든 사건의 원흉인 디오니소스에게도 타격이 돌아갈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걸로 끝낼 수는 없지.'

세운은 디오니소스의 주머니를 거덜 내기 위해 동굴의 안으로 발을 옮겼다.

* * *

"우와...."

통로에 흩어진 자수정 파편을 밟고 들어가니, 그 안에는 수백 개의 자수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밖에서 보았던 일반 수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일렁이는 보랏빛은 더욱 아름다웠고, 그 안에 품고 있는 마나 역시 놀랍도록 순도가 높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유서아가 절로 입을 벌리며 감탄하였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눈을 반짝입니다.

시련의 비밀은 모두 밝혀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하다면 눈앞에 보이는 자수정들을 모두 챙겨가고 싶었다.

만약 그게 안 되면, 마몬에게 자수정을 떠넘기더라도 이것들이 디오니소스의 품에 들어가게 두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러던 중....

드르르륵-

공동의 중앙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운 씨, 저건...."

"어지간히도 조심성이 많나 보네."

중앙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자수정이 조각조각 나뉘더니 무언가의 형상을 이루었다.

아무래도, 녀석이 바로 이곳의 파수꾼.

동굴의 몬스터에 환상 결계, 공동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정 벽에 이어 파수꾼까지 세워두다니.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어지간히도 힘쓰고 있었나 보다.

확실히 세운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다다르는 것부터가 불가능했을 테지.

"츠츳."

"츠츳-"

파수꾼이 제 형체를 찾아가던 중, 녀석의 주위로 통로에서 보았던 크리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 천장, 바닥.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의 수가 순식간에 수십을 넘어갔다.

세운이 처음에 걱정하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이놈들만 처리하면 끝이라는 거지.'

지금쯤이면 이미 튜닝이 7층의 관리자를 고발하고 있을 것이다.

그쯤이면 슬슬 디오니소스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겠지.

그것을 증명하듯, 눈앞에 처음 보는 성좌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침입자의 존재를 깨닫고 경악합니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당장 이곳을 나가라며 당신을 협박합니다.

광란의 축제.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이명이었다.

그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세운에게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왔지만.

"유서아, 준비됐지?"

"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마음에 드는 반응이라며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저 사탕을 입에 넣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 같다며 발을 동동 구릅니다.

세운은 그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뒤랑달을 꺼내 들었다.

그사이, 파수꾼이 완전한 형체를 만들어 냈다.

다른 크리쳐들과는 다르게 전신이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꼬리뿐만 아니라 몸통도 조각상처럼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꼬리 외에도, 머리 앞으로 거대한 두 개의 집게가 날카로운 자태를 드러냈다.

"전갈...이네요."

"조심해,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크리쳐들과는 급이 다를 테니까."

"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은 7층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적이다.

"넌 크리쳐들을 맡아줘. 저놈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얼른 정리하고 합류할게요!"

"좋아."

과연 유서아.

지시를 듣는 순간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쌍검을 빼 들고 크리쳐들을 향해 달렸다.

세운 역시 뒤랑달을 꽉 부여잡고 전갈을 향해 달렸다.

스톤 라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한 적이지만, 모든 몬스터에게는 약점이 존재한다. 일단은 그것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파수꾼에게 당장 저 파수꾼을 처치하라고 명합니다.

"츠츠- 츳!"

디오니소스의 명을 듣는 순간 전갈 역시 세운을 향해 기괴한 포효를 내질렀다.

수정으로 이루어진 여덟 개의 다리가 절도있게 움직인다.

카강!

세운이 눈앞을 향해 다가오는 집게발을 아슬아슬하게 받아치며 상체를 숙였다.

골렘처럼 광석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는 움직임이 느린 게 정석인데, 녀석은 세운 못지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관절.'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능력치로 보았을 때는 몰라도 기술 면에서는 세운이 한 수 위였다.

자세를 낮춘 세운이 몸을 용수철처럼 튕기며 녀석의 관절을 베어냈다.

붉은 늑대의 형상이 상대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관절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녀석이 방심한 덕에 제대로 된 첫 타를 먹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츠츠츳!"

카앙!

전갈이 몸을 한차례 꿈틀거리자마자 관절을 물고 있던 늑대의 형상이 갈가리 찢어졌다.

물어뜯긴 관절에는 작은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강도.

적어도 유효타 한 방 정도는 먹이고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운의 움직임이 멈칫한 사이, 사각에서 녀석의 꼬리가 쏘아졌다.

-내공을 통해 니추공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집니다.

공격을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강화된 청각으로 꼬리가 움직이는 미약한 소리를 감지하자마자, 세운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가까스로 꼬리의 범위를 벗어났지만, 꼬리에 스친 갑옷에 기다란 흉터가 나 있었다.

고창석이 만들어진 B급 갑옷.

공격에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드레이크의 소재로 만들어진 만큼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갑옷이다.

그런 갑옷이, 단지 꼬리가 스친 정도로 저런 자국이 생겨났다.

공격에 정통으로 당한다면, 아무리 등급이 높다고 하여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기껏 해 봐야 두세 번.

공격을 받아내는 건 그게 한계로 보였다.

콰직!

목표를 맞추지 못한 꼬리가 바람을 가르고 바닥에 박혔다.

날카로운 꼬리의 수정이 한차례 일렁이더니, 바닥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차갑게 얼어갔다.

아니, 얼음이 아니었다.

수정.

꼬리에 박힌 바닥이 수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녀석은 수정동굴의 파수꾼답게 적을 수정으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수정독(水晶毒)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세운의 생각이 바뀌었다.

저런 공격이라면, 고창석의 갑옷이라고 해도 절대 막아낼 수 없다.

방어력에 의존할 게 아니라, 꼬리의 공격은 무조건 피해 내야만 한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파수꾼에게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침입자를 처치하라고 다급하게 외칩니다!

서걱!

녀석은 꼬리를 빼내기도 전에 몸을 돌리며 세운에게 집게발을 드러냈다.

집게를 구성하는 극도로 예리한 수정 칼날이 공기를 갈라냈다.

세운은 놀라운 유연성으로 허리를 꺾어 피해 낸 후, 녀석과 거리를 벌리고 시각에 집중했다.

'약점부터 찾아야 한다.'

다른 크리쳐들처럼 몸속에 핵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하지만, 무턱대고 팔괘장을 휘둘러봤자 핵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소용이 없었다.

기왕이면 크리쳐들처럼 꼬리 사이에 틈이 있으면 했지만.

"츠츳, 츠츠츳!"

놈의 신체는 놀랍도록 견고했다.

꼬리의 외각 위로 두 겹의 외각이 덧씌워져 있어, 철저하게 틈을 가리고 있었다.

방어력만 따져본다면 스톤 라바 이상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시간이 걸리겠다고 판단한 세운이 질투의 권능을 사용하였지만....

-시기의 눈초리가 '크리스탈 가디언'을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성좌, '광란의 축제'의 개입으로 권능의 발현이 무산됩니다.

디오니소스가 관여하고 있는 이상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 방법을 써야 하나.'

마력의 소모가 너무 컸기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운이 들어 올린 손으로 마력이 집중되었다.

화륵!

까드득!

양손의 앞으로 이글거리는 화염과 차가운 얼음이 동시에 발현되었다.

제 119화

119. 제119화

-흑탑의 묘리에 따라 '인페르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세운의 손에서 무섭도록 뜨거운 화염이 쏘아졌다.

이에 전갈이 거슬린다는 듯이 집게발을 휙휙 흔들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몸으로 꼬리를 쏘아낸다.

창처럼 날카롭게 쏘아진 꼬리가 세운의 잔영을 꿰뚫는다.

속도로 따지자면 세운이 조금 더 느렸지만, 녀석의 꼬리 공격은 움직임이 너무 단순했다.

속임수 공격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공격만 잘 예측한다면 아슬아슬하게 피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꼬리 공격을 두어 차례 피해 낸 세운이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까드드득!

처음의 화염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몰아쳤다.

녀석의 다리가 지면과 함께 얼어갔지만, 처음 혈랑검법의 공격과 마찬가지로 녀석은 몸을 꿈틀거리는 것으로 얼음을 모조리 부숴냈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자신의 수정에 그따위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며 당신의 공격을 비웃습니다.

디오니소스의 비웃음이 들려왔지만, 세운은 멈추지 않았다.

전갈의 공격을 피해 내면서 화염과 냉기의 공격을 반복한다.

녀석의 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식기를 반복하며 치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증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섯 번째.'

화르륵!

치이익-

보이는 것처럼, 녀석의 마법 저항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온도를 높이고 식힐 만큼의 위력을 보이려면 꽤 많은 마나를 소모해야만 했다.

그 덕분에 벌써 1/3에 가까운 마나가 소모되었지만, 이렇다 할 만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화륵!

치이익-

의심을 멈추고, 스스로의 작전을 믿는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열다섯 번째.

세운의 마법이 반복적으로 발현되며 공동의 천장에 하얀 수증기가 구름처럼 일렁였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세운의 회피에 신경질이 났는지, 녀석이 새로운 공격을 선보였다.

"츠츠츳!"

푹!

녀석의 꼬리가 바닥을 꿰뚫었다.

세운이 피해서 빗나간 게 아니라, 수정독을 극도로 끌어 올리며 고의로 바닥을 노린 것이다.

그 직후, 바닥에서 날카로운 수정 가시가 연이어 튀어 올랐다.

놀라운 속도로 튀어나온 가시들이 주위를 가득 메웠고, 세운은 어쩔 수 없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그 가시들을 피해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전갈이 집게발을 세운에게 내밀었다.

녀석과의 거리가 5m쯤 벌어 있었기에 닿을 리가 없었지만, 세운은 오싹한 위기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에 본능적으로 뒤랑달을 꺼내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카가강!

"큭!"

뒤랑달을 통해 손목으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었지만, 녀석이 무언가 특별한 공격을 드러낸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근거리만 신경 쓰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피해 내고 있었는데, 이런 장거리 공격까지 반복된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어려웠다.

그렇게 판단한 세운이 남은 마력을 쥐어 짜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드드드득!

공동이 차가운 냉기가 휘몰아쳤다.

남은 마나를 쥐어짠 만큼, 그 위력은 유서아가 상대하던 크리쳐들의 움직임까지 굼뜨게 만들 정도였다.

세운을 상대하던 전갈 역시 이번에는 쉽게 얼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바닥에 얼어붙은 다리를 빼내려던 사이, 달아올랐던 몸이 식으며 세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쩌저적-

'통했다!'

균열이 생겨났다.

너무나도 미미하여 눈으로 찾기도 힘들 정도로 작았지만, 완벽하기만 하던 녀석의 몸에 드디어 균열이 생겨났다.

"츠츠츠츠츳!"

자신의 몸에 난 이상을 알아차린 것일까?

녀석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을 크게 움직이며 얼음을 한순간에 떨쳐냈다.

창, 차앙!

이어서 집게발을 휘두르며 조금 전에 선보였던 장거리 공격을 연신 날려댔다.

그것은 마치 공기를 갈라내어 날카로운 바람을 쏘아내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마나는 이미 전부 소진되었다.

그러니 세운은 다른 방법을 택하였다.

철컥.

이번에 꺼내 든 무기는 뒤랑달이 아니었다.

용아창(龍牙槍).

고창석이 세운을 위해 드레이크의 소재로 만들어진 수많은 무기 중 하나였다.

눈으로 찾기도 힘든 균열을 정확하게 공격하기 위해서는, 검보다 창이 더욱 효과적이다.

거기다, 세운은 지금까지의 변성 작용을 도와줄 뜨거울 열기를 덧입혔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화광대제의 창, 화첨창 ]

- 본래 화광대제가 사용하던 무기였으나 이후 호법신 중 하나인 나타가 보패로써 사용하던 불을 뿜는 창.

콰르륵!

화첨창의 힘이 깃들며, 세운이 들고 있던 창에서 거친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불꽃은 세운이 지닌 자하신공과 시너지를 이루어, 양기를 머금고 더욱 뜨거워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막무가내로 집게발을 휘두르던 전갈이 몸을 섬뜩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러나 녀석이 뒷걸음질 친 게 무색하게 세운이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츠, 츠츳!"

극도로 작은 균열이었지만, 자신의 몸에 난 균열은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일까?

녀석이 꼬리를 내려 자신의 옆구리에 생겨난 균열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반짝이는 두 눈은 세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번 공격만 끝내면, 집게발로 네놈을 꽉 쥐여 주겠다는 듯, 그러고는 꼬리로 심장을 꿰뚫어 주겠다는 듯.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세운은 녀석의 옆구리 앞에 다다른 순간.

터엉!

"츳...!"

창대를 회전시켜 녀석의 꼬리를 내려찍었다.

화첨창의 힘은 그저 창에 불꽃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전설의 보구답게, 창이 가진 힘을 몇 배 이상으로 끌어 올려준다.

지금까지는 다리를 휘청이게 하기도 힘들어하던 세운이었지만, 이번 공격은 녀석의 꼬리를 땅에 처박히게 하기 충분했다.

자연스레 꼬리에 가려져 있던 균열이 드러났고.

푹.

손톱보다 작은 균열의 틈새에 정확하게 창끝을 박아넣을 수 있었다.

이대로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몸이 깨져나갈 것을 깨달은 녀석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이건 말도 안 된다며 술잔을 집어 던집니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당신에게 천벌을 내리려 합니다.

-탑의 관리소가 '광란의 축제'의 개입을 막아섭니다.

-탑의 관리소가 '광란의 축제'에게 영장을 들이밉니다.

-탑의 관리소가 '광란의 축제'의 시스템 권한을 일시적으로 제한합니다.

-성좌, '광란의 축제'가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지릅니다.

씨익.

세운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신도 아니고 올림포스의 12신 중 하나인 디오니소스가 벌을 받는다고 하여도 격이 급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당분간 층에 간섭하는 건 어려울 거다.

메시지를 확인한 세운이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자하신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에 열기가 더해집니다.

콰르륵!

창끝에서부터 시작한 화염이 전갈의 전신을 뒤덮었다.

세운이 다리에 힘을 주고 창을 밀어 넣으며 창끝을 반 바퀴 회전하는 순간.

쩌저저적!!

균열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녀석이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세운을 향해 꼬리를 치켜세웠지만, 그 꼬리가 세운에게 닿기 직전.

째앵!

균열이 꼬리의 갑각까지 퍼져나가며, 보석처럼 아름다웠던 꼬리가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7층의 히든 보스 몬스터, '크리스탈 가디언'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200,000point 상승합니다.

파스스-

세운이 쥐고 있던 창이 화염과 함께 사라져 갔다.

아무리 고창석이 만들어 준 무기라고 하여도, 보구의 힘을 견디기는 어려웠다.

뒤랑달에 맞먹는 내구도를 가진 무기가 아닌 이상 보구의 힘을 견디지는 못하리라.

조금 아깝긴 했지만, 전갈 녀석을 죽인 건 용아창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세운은 전갈이 쓰러진 후부터 바쁘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베엘제붑을 위해 곧바로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였다.

콰득, 콰득!

하얀 어금니가 전보다 강하게 파편을 깨물었다.

뒤랑달로도 흠집조차 내지 못한 전갈의 표면이 서서히 부서져 갔다.

-'브라운 울프'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스톤 스킨'의 수준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스톤 스킨'이 '크리스탈 스킨'으로 진화하여 물리 방어력뿐만 아니라 마법 저항력 역시 대폭 상승합니다.

'오?'

스톤 라바를 쓰러트리고 얻었던 스톤 스킨은 물리 방어력을 올려주는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었다.

그 힘이, 이번 포식을 통해 진화하여 마법 저항력까지 높아졌다.

탑을 오르며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지면 마법을 사용하는 몬스터 역시 늘어난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지만, 탑을 오를수록 모든 공격을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획득한 크리스탈 스킨은 어지간한 능력치의 상승보다 뛰어난 이득이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커다란 수정을 입 안 가득 채우며 만족스러워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살살 녹이며 아껴 먹을 거라 다짐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의 입에서 '와득, 까득!'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한결같은 베엘제붑의 반응에 세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던 중, 어느새 크리쳐들을 모두 정리한 유서아가 세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어요."

"뭘. 네 덕분에 저놈한테만 집중할 수 있었던 덕이지."

"결국 합류하지도 못했는걸요."

크리쳐의 수는 대충 보아도 50마리가 넘어갈 정도였다.

그런 놈들을 상처 하나 없이 이 짧은 시간 안에 해치웠으니,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이번 전투는 균열을 만들기 위해 아슬아슬할 정도로 마나를 소모했었다.

그러니 만약 그녀가 크리쳐를 놓쳐 세운이 마나를 조금이라도 낭비했다면 전갈을 상대하기 꽤나 곤란했을 것이다.

-숨겨진 7층의 시련 '사하의 수정동굴'을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총 누적 공적치 600,000point

-축하드립니다! 7층의 시련을 랭킹 1위로 통과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아까 전에 관리자가 개입하며 생겨난 가짜 시스템 메시지가 아니었다.

진정한 시련의 통과.

보통 한 층에서 히든 퀘스트를 섭력하며 통과해도 20만 포인트 언저리의 공적치를 얻는 것을 생각했을 때, 이번에 얻은 공적치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하긴, 그 전갈은 애초에 7층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유서아 역시 세운만큼은 아니더라도 높은 공적치를 획득한 모양이었다.

아마 전갈을 사냥한 공적 때문에 차이가 나는 듯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랭킹 3위를 달성했다고 하였다.

처음으로 순위권에 들어서 그런지,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그러는 중, 세운은 가만히 주변의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것들을 어쩐다.'

이곳에 가만히 놔둬봤자 나중에 다시 돌아온 디오니소스의 손에 돌아갈 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마 관리소에서 디오니소스에게 벌을 내림과 함께 자수정까지 수거해 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마몬에게 상납하는 게 낫지 않을까?

혹시 모르니 이번에도 마몬의 창고에 대해 거래를 해 볼까 생각하던 중.

우우웅!

세운의 오른손에서 사티로스의 성흔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제 120화

120. 제120화

'뭐지?'

성흔이 빛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세운이 공포에 관한 힘을 사용할 때.

두 번째는 신의 힘. 즉, 신성에 반응하는 경우였다.

지금 세운은 전투를 끝낸 상황이니 첫 번째는 당연히 아닐 것이고. 남은 경우는 두 번째뿐이다.

즉, 이 주위에 무언가의 신성이 남아 있다는 뜻.

'디오니소스의 신성이 남은 건가?'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에게 자수정을 상납한다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읊조립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세운은 마몬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이전에 그가 보냈던 메시지 중 하나가 떠올랐다.

'어쩐지 신성을 견딜 만한 자수정을 어디서 그렇게 많이 구했나 싶었다며 부리를 까딱입니다.'

마몬은 자수정이 신성을 견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성흔이 반응한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성흔이 새겨진 오른팔을 수정을 향해 움직일수록 그 빛이 더욱 진해졌다.

이에 세운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수정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보라며 자비롭게 날개를 활짝 펼칩니다.

마몬의 메시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세운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성흔과 자수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힘이었다.

포식의 권능 덕분이긴 하지만, 사티로스의 권능은 어디까지나 판의 격을 집어삼켜 빼앗은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자수정에 깃들어 있는 디오니소스의 신성도 흡수할 수도 있다.

우웅!

자수정에 닿은 성흔이 더욱 강한 빛을 내뿜었다.

손바닥에 닿는 매끄러운 촉감 너머로, 무언가 강한 기운이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얼른 손을 떼라고 외칩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당신의 행보에 관심을 드러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다들 먹을 수도 없는 거에 왜 그리 관심을 가지냐며 의아해합니다.

레비아탄을 만나기 위해 닿았던 흑경의 심장이 떠올랐다.

심장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분명하다. 이게 바로 디오니소스의 신성.

다른 플레이어라면 접촉하는 것만으로 정신을 잃거나, 그게 아니라도 힘을 견디기 어려워했겠지만, 세운은 이미 사티로스의 성흔을 통해 작지만 엄연한 격을 지니고 있었다.

눈을 감고 차분하게 그 힘을 느끼던 세운이, 성흔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그 순간.

-사티로스의 성흔(봉인)이 신의 격(格)에 반응합니다.

-성흔에 봉인되어 있던 성좌의 격이 일부 깨어나 외부의 격을 흡수합니다.

성흔을 중심으로 감갈빛의 산양 형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세운의 옆에 서서 콧김을 크게 내뱉더니, 이내 바닥을 강하게 박차며 수정을 향해 돌진했다.

콰직!

산양의 두꺼운 뿔이 수정과 부딪혔다.

세운이 전갈의 외갑을 부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여도 손톱보다 작은 균열을 만드는 게 고작이었는데, 산양과 부딪히자 유리처럼 가볍게 깨져나갔다.

아니, 실제로 깨진 것은 아니었다.

물리적인 파괴가 아닌, 격의 파괴.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오니소스의 신성을 지키고 있는 일종의 보호막이 깨진 것이다.

수정의 안에 갇혀 있던 신성이 해방되어 성흔에 흡수되며 산양의 검갈색 털이 번들거렸다.

메에에에-

공동 안으로 산양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곧이어 세운의 뒤로 수십 마리의 산양이 나타났다.

그것은 처음 나타난 산양보다는 크기가 작았지만, 그 전부가 신성으로 이루어진 힘. 즉, 신의 힘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쨍, 째앵!

그것들은 공동의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자수정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뿔이 부러질지라도 멈추지 않고, 탐욕스럽게 수정 안에 갇혀 있는 신성을 흡수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깨져가는 자수정을 바라보며 경악을 내지릅니다.

공동의 자수정이 절반 넘게 부서졌을까?

실제로 부서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완전히 사라져 마나 하나 들어 있지 않은 평범한 수정과 다를 바 없이 변했다.

그 순간이었다. 세운의 성흔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진 것은.

치이익!

"큭...."

화상을 입은 것만 같은 고통. 아니, 단순히 피부가 뜨거운 느낌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가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세운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꽉 붙잡은 채로 이를 꽉 다물었다.

신성이 높아진다는 건 곧 영혼의 격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아우터를 막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성좌의 경지에 다다를 계획까지 가지고 있는 세운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자신을 무시하고 행동을 이어가라는 세운의 의지에, 기존의 산양들에 새로 생겨난 산양들까지 합세하여 공동의 자수정을 모조리 부수었다.

마몬이 그만 멈추라며 메시지를 날려왔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티로스의 성흔'이 디오니소스의 신성을 흡수합니다.

-혈랑전설의 설화에 새로운 잠재력인 '광란'이 새겨집니다.

-성흔의 두 번째 능력, '광란'이 깨어납니다.

디오니소스의 격이 단순히 성흔에 흡수되는 것을 넘어 세운의 영혼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혈랑전설에 새겨진 새로운 잠재력.

모든 플레이어가 단 하나의 잠재력만을 가질 수 있다는 규칙을 깨고, 광란의 잠재력이 추가되었다.

그 순간부터, 세운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공동의 자수정은 이미 전부 깨진 상태.

세운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성흔이 새겨진 오른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공동에 존재하는 수많은 산양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세우고 천장을 향해 울부짖었다.

우웅!

성흔이 불타오르듯이 빛을 크게 내뿜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갈빛의 성흔이 불타오르며, 그 자리에 사티로스의 성흔 대신 늑대의 형상을 가진 성흔이 생겨났다.

메에에에-

산양들의 모습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뿔이 쩍쩍 갈라지고, 탐스러운 검갈빛 가죽이 갈라지며 허물처럼 벗겨졌다.

그리고 그 안으로.

아우우우-!!

피처럼 붉은 가죽을 지닌 늑대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타나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 순간, 꽉 막힌 공동의 천장에 희미하게나마 붉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이 한바탕 하울링을 내지르던 늑대들은 곧 성흔을 향해 흡수되기 시작했고.

털썩-

"세, 세운 씨!"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세운이 결국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 * *

"이거 놔! 아니라고! 아니라고!"

"주신(酒神)은 이미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당신이 수정을 제공하는 대가로 영원의 유흥을 제공해 달라고 먼저 제안을 했다고 말입니다."

"뭐? 그분! 아니, 그 자식이! 이봐, 아니야! 먼저 내게 제안을 건 건 그놈이었단 말이다!"

"변명은 심판원에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 안 돼! 안 돼에에!"

7층의 총책임자가 두 명의 거인에게 팔목을 잡힌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탑과 시련을 위한 계약이 아닌,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성좌와의 계약. 이는 단순히 직위 박탈이 아니라 존재의 소멸로까지 이어지는 중죄였다.

심판원에 불려가고 증거까지 완벽한 이상,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그는 이미 사라질 운명이었다.

이에 7층의 관리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그를 외면하였다.

정을 내세워 그의 편을 드는 순간, 그 역시 심판원에 불려 나갈 수도 있으니까.

만약 무언가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가장 현명했다.

총책임자가 사라진 후, 이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감사팀장이 튜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하셨습니다. 총책임자를 신고하는 건 쉽지 않을 선택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아, 아닙니다. 전 단지 메뉴얼대로 진행했을 뿐입니다."

"권력 앞에서 매뉴얼을 지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일입니다."

"하하...."

칭찬을 들은 튜닝이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은 세운의 말이 모두 맞았다. 7층의 총책임자는 디오니소스와 계약을 맺어 암암리에 자수정을 제공하고 있었고, 이는 중대한 범죄 행위였다.

이번 일을 통해 다른 층에 관해서도 본격적인 감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7층의 총책임자 자리가 비었군요. 당장 자리에 앉힐 이를 구하기는 힘드니.... 괜찮으시다면 그 자리를 맡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말입니까?"

"하하, 물론입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를 신고할 수 있었던 분이라면, 총책임자 자리를 훌륭하게 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

"게다가, 이전에 튜토리얼의 총책임자 아니셨습니까? 실무경험도 있으실 테니, 조건은 충분합니다."

이 역시 세운이 말한 그대로였다.

7층의 총책임자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탑에 발도 들이지 못했었는데, 순식간에 7층의 총책임자라는 놀라운 직위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는 탑에서도 유례없이 빠른 진급이었기에 튜닝은 잠시 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믿기 힘들 정도였다.

"어떠십니까?"

"저는...."

당연히 수락해야 할 제안이다.

지금도 팀장에 해당하는 특별 전담관을 맡고 있다지만, 말이 팀장일 뿐이지 수하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그에 비해, 총책임자 자리는 지금 당장 주위만 둘러보아도 수많은 관리자가 존재한다.

특별 전담관과는 비교도 어려운 자리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잠시 고민하던 튜닝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자리는 명예직에 가깝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하하, 맞습니다. 수하에 직원 하나 없고, 일은 산더미죠. 탑에 들어오고 나서 제대로 잔적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절하시는 겁니까?"

감사원의 질문에, 튜닝이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수정동굴의 끝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자.

튜토리얼에서부터 수많은 히든 피스를 공략하고, 탑에 들어와서도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여 자신을 괴롭혔던 남자.

그리고 지금은, 고작 7층의 플레이어인 주제에 자신만의 격을 생성한 남자.

"조금 더 저 플레이어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를 지켜보다 보면, 7층의 총책임자 자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회가 생겨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 121화

121. 제121화

세운이 눈을 뜬 건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졸고 있는 유서아의 얼굴.

아무래도 세운이 기절한 동안 계속 곁에서 지켜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지?'

사티로스의 성흔을 이용하여 자수정을 깨부수며 신성을 흡수했다.

처음에는 견딜 만했지만, 이후로는 그야말로 지옥 불에 데는 듯한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도 없었고, 그저 고통을 참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늑대들에게 오른손을 내민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끝나 있었다.

여기까지 기억해 낸 세운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건?'

그곳에는 사티로스의 성흔이 존재하지 않았다. 익숙한 산양의 뿔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붉은 선으로 그어진 늑대의 포악한 송곳니가 그려 있었다.

성흔은 세운의 시선을 인식한 듯이 한순간 붉은 기운을 일렁였다.

그제야 세운은 모든 일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사티로스의 성흔'에 남은 판의 잔재가 소유자의 격에 완전히 흡수됩니다.

사라져 버린 판의 잔재.

그 말은 즉, 이제 더 이상 이 성흔이 판에게서 훔쳐 온 격의 일부가 아닌 세운의 격 그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산산이 부서진 자수정을 바라보며 좌절합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스스로의 격을 발현한 것을 축하합니다.

'나 자신의 격이라....'

회귀 전의 세운조차도 이루지 못한 업적.

그런 업적을, 고작 탑의 7층에서 발현하였다.

아무리 시작부터 두 마신의 권능이 뒤를 받쳐줬다고는 하나,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세운이 한참 오른손의 성흔을 바라보던 중, 졸고 있던 유서아가 눈을 뜨고 일어났다.

"세운 씨! 괜찮으세요?"

"보다시피, 멀쩡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잖아요."

"힘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다 잘 됐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고마워. 별일은 없었지?"

"네. 클랜챗을 확인해 봤는데, 슬슬 시련을 끝내고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분들이 생겨나고 있었어요."

"떨어진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었어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7층의 시련 도중에는 클랜챗을 켤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세운과 유서아는 숨겨진 시련에 들어왔다고는 하나, 본래의 시련은 '신기루의 정체'라 불리는 것이었다.

플레이어의 인내를 시험하는 시련이니 클랜챗을 사용하는 것을 막아둔 모양이다.

클랜에 가입하지 않았던 회귀 전의 세운으로서는 모르고 있던 정보였다.

'몸 상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클을 굴려 보았다.

마나가 가득 들어찬 서클이 힘차게 회전하였다. 단전 역시 마찬가지.

전갈과의 전투로 소모되었던 기운이 전부 회복되어 있었다.

"괜찮으면, 바로 다음 시련에 들어갈까 하는데."

"저는 괜찮은데. 세운 씨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쓰러져 계셨잖아요."

"보다시피 쌩쌩해. 오히려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야."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소리가 아니었다.

신성을 흡수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몸이 전에 비해 놀랍도록 가벼워져 있었다.

게다가, 새롭게 생겨난 늑대 송곳니 모양의 성흔. 얼른 이것의 힘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시련이 가장 적절했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가요."

시련이 시작되자마자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유서아가 미리 쌍검을 꺼내 들었다.

다음 시련을 선택하는 세운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층의 시련이 무엇인지 아는 터라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세운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새롭게 변한 성흔. 그리고 거기에 깃든 두 번째 능력이자, 세운의 이명이 가진 두 번째 잠재력. '광란'의 힘을 사용할 기대에 벌써부터 심장이 빠르게 두근대고 있었다.

* * *

-8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제 : 폭염 속 개미집

-시간 제한 : 10시간

-사막을 여행하다 거대한 개미집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의 개미들은 주변의 여행자들에게 큰 위험으로 알려져 당신과 동료는 개미들을 토벌하기로 결심합니다.

-제한 시간 이내에 100마리 이상의 개미를 퇴치하십시오.

뜨거운 햇볕이 머리를 쐬어 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원한 수정동굴 안에 있던 세운과 유서아였기에 영 적응이 안 되는 더위였다.

7층의 시련이 달라진 만큼, 혹시나 8층의 시련도 바뀌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8층의 시련은 세운이 회귀 전에 겪었던 그 시련 그대로였다.

"저게 그 개미집이겠죠?"

"그렇겠지."

"무슨 개미집이 아파트만 하네요."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번 시련의 주제인 개미집이 보였다.

사막보다 진한 갈색을 띠고 있는 개미집은 집이라기보다는 바위가 들쑥날쑥하게 솟아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중간이 숭숭 뚫려 있는 구멍이 아니었다면, 개미집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다만, 일반 개미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크기였다.

유서아가 말한 대로 개미집은 어지간한 아파트만 한 크기를 하고 있었는데, 간접적으로 개미의 수나 크기를 알려주는 듯했다.

시련의 내용이 개미집을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100마리만 사냥하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7층의 플레이어에게 저 개미집을 10시간 안에 부수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일단은 안으로 숨어 들어갈까요? 다행히 경비를 보는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안에 들어가면 오히려 움직이기 불편해져."

"그럴까요?"

"한두 마리 사냥할 거라면 괜찮겠지만, 그걸로는 너무 감질만 나잖아?"

-성좌, '배고픈 왕자'가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크게 끄덕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역시 먹을 줄 안다며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시련의 내용은 그저 100마리의 개미를 사냥하는 것이었지만, 세운은 이에 그칠 생각이 없었다.

플레이어를 위한 시스템의 최소한 배려겠지만, 세운의 목표는 저 개미집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이다.

통로에 들어가 아무리 열심히 사냥해 봤자 10시간 안에 개미들을 전부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럼 어떻게...."

"저놈들이 알아서 기어 나오게 해 줘야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파이어 캐논(Fire Cannon) ]

- 화탑의 화염계 마법으로써 극도로 압축된 고온의 불꽃을 발사한다.

세운의 손 앞으로 불꽃으로 이루어진 대포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파이어 캐논.

5 서클의 화염계 마법으로써, 5 서클 유저인 세운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준의 마법이었다.

목표는 개미집의 정중앙.

솔직히, 어디를 노리든지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 일격으로 개미집을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마나를 집중하자 대포의 앞으로 불꽃의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열기가 극도로 응축하며 생겨난 대포알이 대포의 안에 내장되는 순간.

콰앙!

대포가 시뻘건 화염을 토해내며 대포알을 날렸다.

안 그래도 폭염으로 인해 피부가 따가울 지경인데, 거기에 화염의 열기까지 더해지자 일대에 아지랑이가 크게 꿈틀거렸다.

유서아가 열기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들었고, 그 순간 대포알이 날아가 개미집에 충돌했다.

일반적인 대포알은 충격을 일으키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세운이 쏘아낸 파이어 캐논은 극도의 고온을 압축시켜 둔 대포알이었다.

충격을 받은 대포알이 내장된 열기를 내뱉었고.

콰르르륵!

콰아아아앙!!

뜨거운 화염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후폭풍이 열기를 머금은 채 세운과 유서아에게 닥쳐왔다.

세운이야 기본적인 마법 저항력과 함께 크리스탈 스킨 덕분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유서아는 달랐다.

이에 세운이 그녀를 위해 이전에 사용해 주었던 '템플리쳐' 마법으로 주위의 기온을 떨어트렸다.

폭발이 일어난 개미집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반응은 그 즉시 나타났다.

위이이잉!

폭발로 부서진 벽면 아래에서부터 날개 달린 개미들이 날아올랐다.

놈들은 순식간에 하늘을 검게 물들여 갔는데, 대충 보아도 그 수가 수백을 넘어갔다.

두두두두-

정면, 개미굴의 가장 낮은 곳에서는 일개미들이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특히 덩치가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병정개미 역시 여럿 존재했다.

개미집의 크기답게, 놈들은 개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 마리의 크기가 대략 1m 정도.

놈들은 감히 자신들의 집을 부순 적을 처단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며 이빨을 위협적으로 부딪혔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상다리가 부러지겠다며 환호의 함성을 내지릅니다.

"유서아, 괜찮지?"

"...최대한 따라가 볼게요."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네 번째 다리를 사용해 볼 좋은 기회라며 앞다리를 들어 올립니다.

두두두두!

위이이잉!

수백 마리의 개미가 시야를 가득 채우며 다가왔다.

당장 마법을 향해 쓸어 버리고 싶지만, 확인해 볼 힘이 있다.

오른손등의 성흔이 이전의 검갈빛과는 전혀 다르게 피같이 붉은빛을 내뿜었다.

이전에는 성흔의 힘을 발현하기가 영 까다로웠는데, 지금은 성흔을 인식하는 것 자체로 그 힘이 바로 발현되었다.

-성흔이 혈랑전설의 설화에 반응합니다.

-성흔의 두 번째 능력, '광란'이 깨어납니다.

성흔에서 뿜어지던 붉은 기운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세운의 전신을 둘러쌌다.

전신에 힘이 넘쳐나는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둘러 눈앞의 적들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일종의 버서커(Berserker) 상태. 아니, 버서커가 보통 판단력을 잃고 살의에 잠식당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이건 어딜 보나 그보다 상위호환의 능력이었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사 초식, 혈랑포효(血狼咆哮)가 강화됩니다.

아우우우!

단전을 통해서 흘러나온 내공이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이루더니, 태양을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었다. 그 울부짖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검기가 뒤섞여 있었다.

선두로 달려오며 포효에 움찔거리던 개미들이 검기를 막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베여나갔다.

다리가 절단되고, 복부가 터져 나간다.

검기를 막아낸다고 하여도, 놈들의 이빨로는 세운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전신이 붉게 물든 세운이 놈들의 사체를 뚫고 후열을 향해 달렸다.

뒤랑달이 움직일 때마다 놈들의 체액이 사막의 모래알을 적셔나갔다.

강해진 것은 단순히 신체 능력이나 내공뿐만이 아니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지직!

세운의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검자줏빛의 전류.

광범위 공격에 고 서클의 마법도 아닌 터라 본래 저런 상대에게는 잠깐의 경직이나 마비를 일으키는 수준이지만.

광란에 잠식되어 있는 세운의 손에서 발현된 마법은 주변의 개미들을 모조리 감전사시켰다.

개미들이 속에서부터 까맣게 타들어 가며 주위에 벌레 특유의 누린내가 진동했다.

공포에 이어 발현된 두 번째 힘, 광란.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격력을 높여주는 게 아닌, 주인의 힘 그 자체를 극도로 강하게 끌어 올리는 힘이었다.

-성흔이 혈랑전설의 설화에 반응합니다.

-성흔의 첫 번째 능력, '공포'가 깨어납니다.

개미들이 절대적인 포식자의 앞에서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제 122화

122. 제122화

쾅!

콰륵, 콰앙!!

세운의 전투는 그야말로 학살의 한 장면이었다.

양 떼 사이에 달려든 늑대처럼, 압도적으로 적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미 개미 중 대부분은 세운을 상대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날개를 펼쳐 하늘 위로 도망가거나, 동료의 사체를 밟은 채 개미집을 향해 돌아간다.

개중에는 공포에 이성이 마비되어 자리에 주저앉은 놈들도 여럿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서아 역시 쌍검을 꽉 쥐었다.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네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서거거걱!

유서아의 검이 개미들 사이를 휩쓸었다.

수정동굴의 끝에서 자신의 성좌인 왕관을 쓴 거미, 바알에게서 하사받은 새로운 기술.

이전의 공격이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면, 지금은 잔상은커녕 움직임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한 줄기의 바람.

그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개미들은 체액을 분수처럼 내뿜으며 차갑게 식어갔다.

'아직 부족해.'

그러나 유서아는 만족하지 않았다.

다리에 집중하며 더욱 현란하게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에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움직임에 검이 절로 따라오게 만들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크게 만족하며 독니를 번들거립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지금이라면 그 더러운 노인의 계약자를 가뿐히 짓밟을 수 있을 거라며 속삭입니다.

더러운 노인의 계약자. 악어를 탄 노인, 아가레스의 계약자인 강한철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유서아에게 경쟁심을 일으키기 위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철과 경쟁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세운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방해되지 않도록, 그 빠른 걸음에 뒤처지지 않도록. 세운의 등 뒤에 딱 붙어서 따라갈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쉬워 보이는 목표지만, 세운의 속도는 평범한 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피가 나고 뼈가 깎이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다짐할수록 유서아의 주위에 몰아닥치는 광풍이 크기를 더욱 크게 키워갔다.

광풍에 휘말린 개미들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도록 난도질당한 채 모래 위에 버려졌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거미가 목숨을 잃었다.

그때.

위이잉!

그녀의 위로 몇 마리의 날개미가 기습했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휘두른 검을 통해 익숙한 절삭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날개미들은 멈추지 않았다.

놀란 유서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놈들이 입에 죽은 개미를 물고 있었다.

그녀가 벤 것은 놈들이 물고 있던 개미의 사체였다.

'이런...!'

그녀의 공격이 놀랍도록 빠르지만, 그에 비해 공격의 깊이가 얕다는 것을 이용한 기습이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날개미들이 동료의 사체를 버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 순간, 유서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콰득!

단단한 무언가가 꺾이는 듯이 잔혹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대상은 유서아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개미 다섯 마리가 자신의 몸을 던져 날개미의 공격을 가로막고 반격을 날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이유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날개미를 물고 있는 개미들의 눈이 유서아와 같이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당신의 잠재력에 감탄합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힘을 키운다면 엄청난 활용성이 엿보이는 잠재력이라며 기대를 품습니다.

광풍의 이명을 얻으며 그녀가 가지게 된 잠재력, 지배.

유서아가 깨달은 그 사용법은 '베어낸 상대를 조종하는 것'이었다.

아직 사용해 본 적도 별로 없었고, 익숙하지도 않았기에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지금은 익숙하지 않다고 힘을 아끼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척.

척, 척.

전신이 난도질당해 목숨이 다 꺼져가는 개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들은 동공이 붉게 물든 채 유서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여왕과 기사들.

날개미들은 배신자를 바라보는 듯, 주춤거렸다.

* * *

콰아아앙!!

세운의 주위로 검과 마법이 요동친다.

개미들은 진작에 전투 의지를 잃은 채 도망치기 바빴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운은 더욱 집요하게 놈들을 쫓아 숨통을 끊어냈다.

벌써 수백 마리의 개미가 세운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주위에 널려 있는 개미들의 사체에서 악취에 가까운 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역시 오래 유지하는 건 무린가.'

세운의 이번 목적은 광란의 힘으로 개미들을 전멸시키는 것보다는, 광란의 힘 자체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광란의 힘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마나나 체력의 소모가 빨라지는 것과는 달랐다. 성흔에서부터 무언가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

아무래도, 세운이 가진 신성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신성만 늘리면 지속시간을 더 늘릴 수 있겠지만....'

문제는 신성을 키우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이건 마나 수련법 같은 것처럼 주변의 기운을 모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유일하게 떠오르는 방법은, 지금처럼 다른 신의 신성을 빼앗는 것뿐이었다.

위이이잉!

그러는 사이, 개미의 수가 또 한 번 늘어났다.

세운의 무력을 겪은 개미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치는 중이었지만, 새롭게 나타난 개미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아득히 먼 개미집의 끝에 특히나 거대한 덩치의 개미가 올라서 있는 게 보였다.

여왕개미.

놈이 개미집의 위협을 깨닫고 개미들을 지휘하기 위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슬슬 빼야 하나.'

첫 습격으로 개미집을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10시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존재했으니, 이대로 공격과 도망을 반복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고개를 돌려 유서아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잘 싸우고 있네.'

사막에서의 훈련 때문일까? 아니, 단순히 그것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까다로운 잠재력인 지배도 잘 적응하는 듯했고.

그녀가 시선을 느끼고서 주변의 몬스터를 한순간에 정리하고 세운에게로 다가왔다.

"어쩔 생각이신가요?"

"일단 물러나자."

"정말요?"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하는 식으로. 세네 번쯤 반복하면 끝낼 수 있을 거야."

평소라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운의 말에 따랐을 텐데, 어쩐 일인지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곧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저를 한 번 믿어주실 수 있을까요?"

"계획이라도 있어?"

"네."

유서아가 개미집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

여왕개미.

하지만 그녀의 계획을 눈치챈 세운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왕을 죽여 봤자 소용없어. 잠시 혼란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곧 새로운 지휘자가 생길 거야."

"그게 아니에요. 제 잠재력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유서아의 잠재력, 지배.

어떤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어지간하면 부탁이란 걸 하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세운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어?"

"네!"

"좋아."

"감사해요!"

그녀가 세운에게 계획을 알려주었다.

세운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그녀가 여왕개미에게 닿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저 높은 곳까지 어떻게 다가서려는 것인가 싶었지만, 동공이 붉게 물든 날개미 여러 마리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길은 내게 맡겨. 시원하게 뚫어줄 테니까."

"네!"

어차피 계획에 실패해도 거리를 벌리고 재공격을 준비하면 그만이다.

그녀의 부탁이기도 하니, 도박을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바로 출발할게요!"

위이잉!

그녀가 날개미를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그녀를 막기 위해 수많은 날개미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땅 위에서는 공격이 어려웠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날개미들의 영역이다.

놈들이 날개를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 있기 이빨을 까딱거린다.

그리고 그때, 세운이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발현하였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인페르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르르륵!

마나를 잔뜩 머금어 덩치를 키운 불꽃이 날개미들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햇빛에 익숙해진 놈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불길 안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극심한 열기로 인해 놈들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유서아는 개미집의 정상을 향해 빠르게 날아올랐다.

그녀가 타고 있는 날개미들은 뜨거운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페르노의 공격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녀가 높이 날아오를수록 열기가 약해졌다.

또한, 여왕개미에게 가까워질수록 호위 개미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 있었다.

놈들이 줄어든 열기에 안심하며 이빨을 드러낼 무렵, 세운의 손에서 두 번째 마법이 발현되었다.

서클의 남은 마나를 모조리 쥐어짜 내어 발현시킨, 그녀에게 '길'을 만들어 줄 마법이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토네이도'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녹탑의 묘리에 따라 '토네이도'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청탑의 묘리에 따라 '토네이도'의 안정성이 강화됩니다.

과도하게 멀어진 거리는 청탑의 묘리에 따른 안정성으로 극복했다.

흑탑의 묘리로 위력을 키우고, 녹탑의 묘리를 통해 그녀의 등 뒤를 밀어주었다.

토네이도가 그녀를 중심으로 요동치며 외길을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개미집의 정상을 향해 다가섰지만, 개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놈들에게 여왕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바람에 몸을 던지고, 날개가 찢겨나가더라도 유서아를 막아냈다.

그 때문에 균형이 흔들리며, 유서아가 타고 있던 날개미들이 바람에 휩쓸려 비행 능력을 잃게 되었다.

까마득한 상공에서 날개를 잃은 꼴이 된 셈.

하지만, 유서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날개미의 등을 밟으며 여왕개미를 향해 뛰어올랐다.

날개미들이 도망쳐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개미집에 다다른 유서아가 90도에 가까운 벽면을 밟고 수직으로 달렸다.

병정개미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전신이 난도질당하며 개미집 아래로 추락했다.

"그그그그극!"

유서아를 마주한 여왕개미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애초에 전투 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여왕개미의 공격이 그녀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검이 바람처럼 빠르게 휘날리며, 여왕개미의 정수리에 꽂혔다.

위이잉!

두두두두!

당황한 개미들이 몸을 버둥거렸다.

단신으로 뛰어들어 여왕개미를 무찌르는 업적을 보였지만, 그녀의 계획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유서아가 '여왕개미'를 지배합니다.

그녀의 동공이 붉게 일렁이는 순간, 그 기운이 검을 타고 흘러가 여왕개미에게까지 전해졌다.

숨이 끊어져 가던 여왕개미가 위엄한 자태를 유지하며 한쪽 팔을 들어 올린다.

"개미집을 부수어라."

여왕개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개미집을 부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여왕개미의 정수리에 침입자의 검이 꽂혀 있는 상황임에도.

개미들은 여왕개미의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하였다.

필드에 존재하는 모든 개미가 모여들어 개미집의 하단부를 갉아먹었다.

사각, 사각 하는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그 어떤 개미도 의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개미집의 하단부가 절반쯤 파먹히자.

쿠구구구구!!

사막 위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개미집이 거칠게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