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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에픽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2층 전역에 에픽 퀘스트의 존재가 알려집니다.

- 퀘스트를 발견한 당신의 명성이 널리 알려집니다. 명성이 1,000 상승했습니다!

진현우는 에픽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러자 낡은 방패에 남은 사념이 반응했다.

에픽 퀘스트는 마르실이 생전에 남긴 후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퀘스트였다.

그걸 수락했으니 사념이 반응할 수밖에.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고결한 성기사, '마르실'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낡은 방패 (일반)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 특성 '신성한 마력 (A)'과 스킬 '광휘 (A)'를 새로이 익혔습니다!

방패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새로운 특성과 스킬을 익힌 것도.

· 신성한 마력 (A): 마력에 신의 축복이 깃들었다. 신성력이 필요한 스킬에 마력을 대신 사용하며, 마력 재생력이 20% 빨라진다.

· 광휘 (A, Lv.1): 신성한 빛을 터트려 일정 범위 안의 언데드들을 불태우고 아군을 치유한다. 또한 짙은 어둠을 빛으로 밝힌다.

성기사나 사제로 전직한 플레이어들에게는 '신성력'이라는 능력치가 추가된다.

마력 대신 신성력으로 스킬을 쓰는 것이다.

'문제는 난 신성력이 없다는 거지.'

웨펀 마스터에게 신성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신성한 마력이라는 특성이 중요하다. 신성력 대신 마력을 써서 성기사나 사제의 스킬을 쓸 수 있게끔 해 주는 특성이니까.

'광휘 스킬은 말할 것도 없지.'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진현우는 변화한 방패를 확인했다.

[빛의 수호 (영웅)]

· 착용 제한: 마르실의 인정을 받은 자.

· 옵션: 불침의 신앙, 빛의 수호, 정신 면역.

· 스킬: 신성한 방패.

* 불침의 신앙: 흑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40% 강해지며 흑마법을 흡수할 수 있다. 충분히 흡수했을 때 신성한 파동을 일으킨다.

* 빛의 수호: 자신과 주변 아군의 능력치를 향상하며, 흑마법과 사기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갖게 하는 가호를 부여한다. 사용한 후 일주일의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

* 정신 면역: 신앙에 대한 믿음으로 정신에 간섭하는 공격 일체에 강한 면역력을 지닌다.

* 신성한 방패: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패를 전개하여 적의 공격을 막는다. 이 스킬에는 '불침의 신앙' 효과가 적용된다.

진현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마르실의 검 그리고 빛의 수호. 이것들이 있으면 언데드를 상대하는 건 쉬울 것이다.

- 그대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군. 선대가 그런 능력을 다루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아뇨, 저만 쓸 줄 아는 겁니다."

진현우를 지켜보던 석상이 놀랐다.

특수한 과정을 거쳐서 복구해야 하는 낡은 방패가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니 놀랄 수밖에.

진현우는 품속에서 비급을 꺼냈다.

"이 비급의 주인에 대해서 잘 압니까?"

- 모른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만, 그자가 이 성소를 찾아왔더군. 그리고 내 시험을 받은 후에 자리를 좀 빌리겠다고 했었다.

그 자리가 석상 뒤에 있던 공간이다.

마르실을 수호자 역할로 쓴 것이다. 그리고 마르실은 그 역할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 그자가 그러더군. 어쩌면 이게 내가 걱정한 미래를 구할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허락하셨군요."

- 어차피 공간은 많지 않나.

석상이 씨익 웃었다.

물론 돌로 된 얼굴이니 실제로 웃은 건 아니지만, 진현우는 그렇게 느꼈다.

- 미안하군, 쓸 만한 정보를 못 줘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 그래, 그럼....

쿠웅! 석상이 힘겹게 앉았다.

- 이제 가라. 이 땅을...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석상의 움직임이 멈췄다.

영혼의 일부만 남아서 움직이던 존재. 석상도 크게 파괴됐으니 오래 남을 수 있을 리가.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폭군의 부활은 거의 끝났겠지.'

성소를 떠나면서 진현우는 생각했다.

원래라면 시간적인 여유가 좀 더 있다. 하지만 그가 퀘스트를 받으면서 여유가 사라졌다.

- 관련 이벤트의 시간이 단축됩니다.

에픽 퀘스트를 받았을 때 나온 메시지다.

전생에서는 연 단위의 시간적 여유가 있던 것이 단축된 탓에 바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지금 놈의 부활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부활한 폭군을 처리하는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

'폭군은 죽지 않는다.'

말 그대로다.

언데드가 된 폭군은 불사다. 전생에서 에픽 퀘스트가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아빌론을 공격해 온 폭군은 아무리 공격해도 죽지 않고 계속해서 부활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막으려면 지하 무덤을 찾아야 한다.'

폭군의 부활 의식이 치러졌던 지하 무덤.

거기에 놈의 불사성을 깨트릴 방법이 있다.

'가는 길에 까다로운 함정도 많단 말이지.'

폭군의 부활 의식이 치러졌던 지하 무덤은 구조가 복잡하고, 함정도 많다.

거기로 가는 길도 미로다.

'대충 기믹은 다 파악하고 있긴 한데.'

문제는 수도 아빌론이다.

진현우가 폭군의 불사성을 깨트리는 동안 수도 아빌론이 공세를 버틸 수 있는가.

현재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도와줄 이들을 찾아야 한다.

'일단 프레아 왕국한테 알려야겠지.'

지금 진현우의 명성치는 꽤 높은 편이다.

거기에 에픽 퀘스트까지 받았으니, 프레아 왕국과 협조해서 퀘스트를 대비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또 하나.

'플레이어 협회한테도 말해 봐야겠고.'

프레아 왕국의 병력은 한정적이다.

반면에 몰려들 언데드와 몬스터의 숫자는 어마어마할 터. 지원군이 있어야만 한다.

플레이어들이 지원군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음...."

드물게도 진현우가 잠깐 망설였다.

지원군이 되어야 할 플레이어 중에 무조건 있어야 할 사람이 한 명 있기 때문이었다.

미래에 메사이어의 길드원이 되지만, 지금은 반쯤 플레이어 활동을 그만둔 사람.

'성녀.'

수도 아빌론 그리고 벤데일 신전에서 귀가 떨어지도록 들었던 이름이다.

카단이 그녀가 떠난 걸 한탄할 정도.

"쓰으읍, 그 녀석을 찾아야 하나."

언데드 그리고 이런 종류의 방어전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플레이어다.

또 성녀와 각별한 인연을 가진 플레이어가 있는데, 그녀가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잠깐 고민하던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찾아야지."

전생에서 2층은 카오틱들의 것이 되었다.

프레아 왕국의 방어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67화

오렐리아의 성녀

"예, 예?"

세계의 탑 2층.

수도 아빌론의 플레이어 협회 지부. 그곳을 맡고 있는 우석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그러니까...."

"제가 받았습니다. 에픽 퀘스트."

"에픽 퀘스트를, 어, 말이죠?"

우석형은 멍하니 진현우를 봤다.

에픽 퀘스트를 받았다는 것도 놀라운데, 퀘스트의 내용은 놀라서 까무라칠 정도였다.

"이 도시에, 그러니까, 언데드하고 몬스터들이 쳐들어온다는 겁니까? 그것도 엄청 많이."

"예. 플로어 마스터...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한 보스 몬스터도 같이 공격해 올 겁니다."

"...지구 멸망의 날인가요?"

우석형이 실없이 웃었다.

"저희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플레이어들을 모아야 합니다. 길드들의 도움도 필요하겠고요. 협회 차원에서 포상금을 푸는 방식으로 모으든가 해야겠죠."

"예, 뭐."

플레이어는 공짜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진현우 혼자서는 움직이게 만들기 어렵다.

"그리고 소재를 알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요. 플레이어 협회에서 알고 있나 싶어서요."

"소재요? 누구를 찾으시는 건가요?"

"성녀입니다."

"성녀... 아아. 그분이요?"

우석형도 누군지 아는 플레이어였다.

작년까지는 랭커였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플레이어. 하지만 2층을 기점으로 갑자기 의욕을 상실하고 탑에 들어가지 않는 상태.

그 이유는 누구도 모른다.

"제가 알기로는 자택하고 바를 왔다 갔다 하는 걸로 아는데요. 어딘지 찍어 드릴게요."

"바 말이죠."

진현우는 쓰게 웃었다.

성녀는 미래의 메사이어 길드원이었다. 당연하지만 그와도 적잖은 친분이 있었다.

그녀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저한테도 향락에 찌들어서 살던 때가 있었답니다! 술, 도박! 네? 담배요? 안 했어요! 남자요? 남자도 만난 적 없거든요?!

그게 바로 이 시기다.

성녀가 좌절하고 플레이어 활동을 놓았을 때. 나중에 어찌저찌 해결되기는 했다만.

'귀찮지만 설득하러 가는 수밖에.'

그녀가 플레이어 활동에 좌절하게 된 이유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그걸 이용해서 설득하는 수밖에.

"감사합니다."

"아이, 뭘요. 말씀하신 대로 바로 상부에 보고해서 지원을 받을 수 있게끔 하겠습니다."

"예."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이제 탑을 나갈 때다.

* * *

'성녀'.

이름만 들으면 엄청 대단한 성인(聖人)일 것 같지만, 진현우가 찾는 건 그게 아니다.

저건 히든 클래스의 이름이다.

'사제 계통의 히든 클래스, 성녀.'

그게 진현우가 찾는 사람이다.

탑을 나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간 후, 플레이어 협회에서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 말씀하신 분이 주로 가는 바입니다. 회의는 내일 오후 5시에 열릴 예정입니다.

- 첨부 사진: 위치.jpg.

주소를 확인한 진현우는 택시를 탔다.

차를 끌고 가도 되지만 술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어디 보자.'

도로를 달리는 택시.

진현우는 플레이어 커뮤니티를 켰다. 그리고 커뮤니티에 올라온 동영상들을 확인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는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던전을 공략한 동영상들이 올라오곤 했다.

'성녀 동영상 모음... 이라고 치면 나오나?'

지금은 활동을 중지한 상황이지만, 한창 활동할 때의 성녀는 인기가 많은 플레이어였다.

애초에 랭커였고, 히든 클래스니까.

- 구우우우....

- 저주한다, 살아 있는 인간!

진현우는 동영상을 틀었다.

어둠이 자욱한 밤, 게이트에서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게이트를 막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이 와 있었지만, 그 숫자를 보고 겁에 질려 버렸다.

- 너, 너무 많잖아. 저걸 어떻게 잡아?

- 이거 막을 수 있는 거 맞아?

점점 언데드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채 물러나는 플레이어들. 그들과 교차하듯이, 한 여성이 가장 선두로 나섰다.

- 잠깐만요, 위험...!

- 아냐, 놔둬! 저분이면 괜찮아!

막으려던 플레이어를 다른 이가 막았다.

앞으로 나서는 여성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여성에게로 쏠렸다.

- 신이시여, 여기 가엾은 자들이 있습니다.

순백색의 사제복, 화사한 백금색의 장발, 눈부신 미모를 가진 여성이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눈을 감으며 기도했다.

- 그아아아아!

- 찢어 죽여 주마...!

그녀에게 언데드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성녀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언데드들이 그녀를 덮치려는 순간.

- 저들을 당신의 품에 거두어 주십시오.

신성한 파동이 일어났다.

여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파동이 언데드들을 단번에 떨쳐 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이 모여들더니, 어떤 형상을 취했다.

- 와, 저건....

- 아름답다는 말밖에....

아름다운 천사의 형상을.

천사는 손에 쥔 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빛으로 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리고.

- 화아아악!

- 키아아아아악!

찬란한 빛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언데드들의 비명뿐. 몇 초가 지나서 빛이 간신히 사그라들었을 때.

- 미, 미친.

언데드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들이, 여성의 기도 한 번에 일소된 것이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넋을 잃었다.

- 저게 성녀....

여성, 아니 성녀가 등을 돌렸다.

새하얀 빛을 두른 그녀의 신성한 모습을 비추는 것을 마지막으로, 동영상은 끝났다.

새까매진 화면.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아니, 미래라고 해야 할까.

성녀는 뛰어난 치유 능력과 버프 능력을 가진 강력한 클래스다. 그러면서 언데드를 상대로는 막강한 전투력까지 구사할 수 있다.

'괜히 직업 퀘스트가 까다로운 게 아니지.'

브로큰 월드의 규칙 중 하나다.

강력한 히든 클래스는 무조건 까다로운 직업 퀘스트를 받는 것. 실제로 진현우의 클래스인 웨펀 마스터도 직업 퀘스트가 까다롭다.

성녀도 그 못지않게 까다롭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진현우는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시간대는 저녁. 도착한 곳은 서울에서 유명한 부촌이었다. 이곳에 바가 하나 있다.

- Bar 'Aurelia'.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형의 건물.

그 건물을 보며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다, 귀찮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진현우는 오렐리아에 발을 디뎠다.

* * *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바.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흐르고 있는 바 안에는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적었다.

극소수의 사람만 있을 뿐.

"하아아...."

피아노 소리 사이에서 짙은 한숨이 들렸다.

바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은, 눈에 띄는 백금발을 가진 여성이 내뱉는 한숨 소리였다.

바텐더가 인상을 구겼다.

"야, 한숨 쉴 거면 집에 가. 장사 안 돼."

"하아아아...."

"귀가 먹었니? 이년아, 제발 집에 가라고."

"어차피 술로 돈 버는 것도 아니면서."

여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술잔을 닦던 바텐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샬럿,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나도 몰라아...."

"너 탑에 안 들어간 지 몇 달째야? 내 바 죽순이 된 지 한 3개월 된 거 같은데 맞아?"

"그렇게 오래됐나?"

옛날에는 성녀라고 불리던 년이.

바텐더는 튀어나올 뻔한 말을 삼켰다. 대신 몇 번을 내뱉었는지 모를 한숨을 토할 뿐.

"야, 너 같은 애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인력 낭비야. 탑에 가서 일 좀 해라."

"2층에서 더 올라가지도 못하는데 가서 뭐 해? 난 3층 못 가. 2층에서 막혔다고오...."

"그 망할 놈의 직업 퀘스트."

성녀라고 불리면서 만인의 찬사를 받던 샬럿이 왜 이런 꼴이 되었는가.

모든 것은 직업 퀘스트 때문이었다.

"지랄맞은 직업 퀘스트.... 루윈 대륙의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퍼센트를 채우라고? 뭘 어떻게 구원해? 나더러 뭘 하라는 거야?"

샬럿이 울분을 토했다.

30레벨이 된 그녀는 직업 퀘스트를 받았다.

루윈 대륙을 덮친 어둠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퀘스트. 퍼센트로 진척도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더 열받는다.

"씨잉, 처음에는 나도 열심히 했다고오! 몬스터 웨이브 올 때마다 싸우고, 위험한 곳 가서 사람들 도와주고! 근데 안 깨져어!"

샬럿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그녀도 직업 퀘스트를 깨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적이 있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직업 퀘스트의 진척이 조금도 없었다는 것.

그녀는 지쳤다.

"그래서 포기하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했는데에! 안 깨면 3층으로 못 올라간대!"

"알아. 너 술 취할 때마다 하는 말이잖아."

이미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

1년 동안 직업 퀘스트를 깨려고 노력했던 샬럿은 꺾이고 말았다. 플레이어 생활을 포기하고 알코올 의존자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바텐더는 샬럿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옛날에는 그리 의욕적이던 애가.'

성녀라는 클래스에 만족했고, 그 덕분에 들어오는 막대한 수입에도 행복해했었다.

나름의 사명감도 있었다.

히든 클래스라는 운명을 받은 사람이니까 앞장서서 탑을 공략해야 한다는 사명감.

'지금은 백수도 이런 백수가 없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바텐더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바로 그때, 샬럿의 옆자리에 남자가 다가와서 앉았다.

"안녕하세요,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시간 없어요... 저리 가세요...."

"잠시면 됩니다. 저희는 이런 길드입니다. 샬럿 님에게 제안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아안? 길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이요오?"

"맞습니다. 영입 제안입니다."

헌팅인가 했더니 스카우터였다.

남성은 공손한 자세로 명함을 내밀었지만, 성녀, 아니 샬럿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금 2층에 머무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길드에 들어오신다면 길드 차원의 지원으로 상위 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끔...."

"헤, 도와준다고요? 당신들이? 도와줘?"

"예?"

그때까지 스카우터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샬럿이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스카우터는 그제서야 그녀의 눈빛을 봤다.

핏발이 선, 울분에 찬 눈빛.

"당신네들이 나 도와줄 수 있어?! 내 직업 퀘스트 당신들이 도와줄 수 있냐고오오오오!"

"아, 아니. 진정하십시오."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어어!"

샬럿이 스카우터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남자의 힘으로도 떨쳐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스카우터가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자, 잠깐, 죄송... 그, 그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당신 말고 다른 길드도 왔었어어! 도와준다고 거짓말만 하고오!"

"죄, 죄송합...."

"나가! 언니, 이 인간 좀 내보내 줘요!"

잔을 닦던 바텐더가 그제야 나섰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둘 사이를 갈랐다.

"볼일 다 보셨으면 나가 주실래요?"

"예? 아니, 아직...."

"샬럿한테 영입 제안하러 온 길드가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다 거절했고요. 그쪽 길드라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네요."

스카우터는 나가기 싫은 눈치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바텐더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나가지 않으면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스카우터는 바텐더의 본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로 물러나는 걸 택했다.

저 여자에게 대드는 건 너무 위험하다.

"고마어어, 언니이이...."

"고마우면 너도 여기서 나가. 꺼져."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는거얼...."

쿠웅! 샬럿이 다시금 바에 머리를 박았다.

바텐더는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봤다.

"그래, 마음대로 해."

바텐더는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찬 바람이 불 것처럼 매몰차다. 고개를 박고 있던 샬럿은 입을 우물거리면서 구시렁댔다.

"눼에, 눼에... 이제 언니도 나 버리는 거야? 맞아요, 저느은 낙오자입니다...."

샬럿, 불리는 호칭은 성녀.

작년까지만 해도 랭커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 상태는 이렇다.

술에 찌들 대로 찌든 취객.

"낙오자라고오... 시이바알...."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샬럿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에 또 다른 남자가 앉는 것이 보였다.

"그쪽은 또 누구신데...."

"저하고 일 하나 같이 합시다."

"네에?"

진현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쪽 직업 퀘스트 해결해 줄 테니까, 나하고 일 하나만 같이 하자고요."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샬럿이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68화

도망치지 말았어야

피아노 음악이 흐르는 모던 바.

진현우와 샬럿은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샬럿이었다.

"씨잉, 언니이! 또 왔어!"

샬럿이 고개를 박으며 바텐더를 불렀다.

바텐더가 진현우를 싸늘하게 봤다. 너도 스카우터냐? 쫓겨나고 싶어? 이런 눈빛이었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입하려고 온 거 아닙니다."

"그럼 헌팅이에요? 남자 안 만나요오!"

"헌팅은 더더욱 아니고요."

샬럿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진현우는 바텐더의 시선을 느꼈다. 그가 허튼짓을 하면 바로 내쫓을 것 같은 눈빛이다.

"2층에 묶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업 퀘스트를 못 깨서 올라갈 수가 없다고요."

"눼에, 말 안 해도 잘...."

"그 직업 퀘스트를 깰 방법이 있습니다."

"...."

샬럿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술기운 때문에 살짝 달아오른 것도.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직업 퀘스트가 뭔지는 알고요?"

"잘 압니다. 그대, 성녀로서의 의무를 다하라. 루윈 대륙의 어둠을 몰아내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원하라. 아닙니까?"

"...어? 어떻게 알지?"

샬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켜보던 바텐더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길드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겠지."

"아니, 아니야. 어떤 퀘스트인지 말해 준 적은 있는데에, 설명까지 말해 준 적은...."

진현우가 말한 것은 샬럿이 받은 직업 퀘스트의 설명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어떤 퀘스트인지 여러 길드에 알려 준 적은 있지만, 설명까지 다 말해 준 적은 없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신기하네에. 그래서, 어떻게 깰 건데요? 루윈 대륙을 구원할 방법이 있나요?"

있을 리가.

샬럿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구원하는 건지 알 방법이 없는데.'

지금까지 별짓을 다 해 왔다.

그래도 퀘스트는 깨지지 않았다. 심지어 퍼센트도 거의 오르지 않았다. 허송세월만 보내던 샬럿의 마음은 결국 꺾였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그녀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방법이.

"예.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진현우는 샬럿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 상대가 퀘스트 내용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브로큰 월드에 있는 기능이다. 상대방에게 자기가 받은 퀘스트를 보여 주는 기능.

샬럿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메시지 창이 사라진다.

대신에 커다란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그 내용을 본 샬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폭군의 복수? 에픽... 퀘스트네?"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 창의 내용이었다.

에픽 퀘스트, 폭군의 복수. 폭군이 수도 아빌론을 공격할 테니, 그걸 막으라는 내용.

샬럿도 에픽 퀘스트는 처음으로 봤다.

"어, 으음. 대단하네요. 에픽 퀘스트라니. 근데 이게 제 직업 퀘스트하고 연관이...."

"루윈 대륙의 어둠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어둠이요? 그거야, 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몬스터 웨이브겠죠? 언데드들도 그렇고. 그것 때문에 프레아 왕국이 힘들어졌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2층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빌론에서도 활약하고, 벤데일 신전에서도 활약했다더군요."

"네에, 근데, 의미 없었어요."

직업 퀘스트를 받은 샬럿은 수도 아빌론과 벤데일 신전을 오가면서 온갖 고생을 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언데드를 막고.

그래도 퍼센트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안 오른다고요오.... 그래서, 그분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너무 지쳐서...."

샬럿이 울먹거렸다.

그녀는 아빌론과 벤데일의 방어전에 수없이 참가했다. 그곳의 사람들을 도우면서 정도 들었고, 그런 만큼 죄책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

'그래도 더는 못 해. 난, 못 하겠어.'

지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방어전에 참가하면서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린 것도 컸다.

샬럿은 지친 상태였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만 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급한 불을 끄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죠."

진현우는 마르실과 나눴던 대화를 샬럿에게 말해 줬다. 루윈 대륙에 나타나는 이변의 원인이 폭군이 부활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폭군을 제거하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샬럿의 눈빛이 멍해졌다.

"이제 할 생각이 좀 듭니까?"

진현우에게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자신이 받은 에픽 퀘스트를 깨면 샬럿의 직업 퀘스트도 완료될 거란 확신이 느껴졌다.

반면 샬럿은 혼란스러웠다.

'아니면? 만약에 아니면.'

지울 수 없는 불안감.

지금까지 희망 고문을 너무 많이 당했다. 이번에도 성과가 없다면 정말 꺾일 것이다.

"지금 안 움직이면 후회할 겁니다."

그런 그녀를 재촉하듯 진현우가 단언했다.

확신에 찬 어조로.

"나중에 아무것도 안 한 걸 후회할 겁니다."

전생의 일이었다.

샬럿은 프레아 왕국이 부활한 폭군의 손에 멸망당할 때까지 술에 찌든 채로 살았다.

그녀가 언젠가 진현우에게 말했었다.

- 후회했어요. 루윈 대륙이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한 걸요. 뭐든 했어야 했어.

샬럿은 오랜 기간 2층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NPC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왕국의 모습뿐.

-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샬럿은 그때의 행동을 크게 후회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메사이어에 합류하여 2층 탈환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오랫동안 그녀를 2층에 묶어 뒀던 직업 퀘스트가 끝난 것도 2층을 탈환하고 난 뒤였다.

폭군을 죽이고, 어둠을 몰아내고 난 뒤.

"...."

"...."

샬럿은 진현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확신에 찬 눈동자.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자신이 틀렸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눈치다. 그 눈동자가 믿음이 갔다.

"...좋아요."

샬럿이 손을 뻗었다.

그녀가 진현우의 손을 맞잡았다.

"당신 말대로 하... 욱, 우욱...."

"아, 제발."

샬럿은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라온 탓이었다.

그녀는 진현우에게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안심해서 그런 거니까 양해해 주세요."

"...예."

바텐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은밀한 눈빛으로 진현우를 봤다.

"최근에 가장 유명한 유망주를 제 바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현우 씨."

"절 아시나 보군요."

"모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바텐더가 피식 웃었다.

최근에 진현우가 한 일들이 너무 많다. 귀가 달렸으면 그의 이름을 들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음. 통성명부터 먼저 해야겠군요. 전 이수경이라고 합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연금술사 길드를 이끌고 있습니다."

바텐더, 이수경이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그녀의 이름과 그녀가 이끄는 길드의 이름이 아름다운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 파라켈수스 길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연금술사 길드를 이끌고 있다. 저 말은 순전히 겸손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길드면서 무슨.'

네메시스가 다양한 부문의 아이템을 만드는 장인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것처럼.

이수경이 이끄는 길드 역시 뛰어난 연금술사들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길드였다.

길드장인 그녀 역시 엄청난 실력자였다.

"샬럿한테 기회를 줘서 감사합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돕겠습니다."

이수경이 왜 저런 태도를 보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샬럿의 튜토리얼 동기니까.'

튜토리얼을 함께 헤쳐 나갔고, 그 뒤로도 서로 협력하면서 탑에서 성장했던 사이.

친밀한 관계였기에 진현우가 샬럿을 도와준 것을 특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 도움, 지금 필요한데 말해도 됩니까?"

"네? 예, 물론이죠. 말씀하십시오."

그렇기에 이수경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조만간 플레이어 협회에서 제 에픽 퀘스트를 두고 회의가 열릴 겁니다. 협회는 지원을 요청할 거고, 길드들은 아마 꺼릴 테죠."

"흠... 확률이 낮진 않습니다."

이수경은 진현우의 말에 동의했다.

프레아 왕국은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린 탓에 금전적인 여유가 없다. 인력도 부족했다.

그런 왕국이 수도를 지킬 수 있게끔 도우려면 길드들이 큰 금액의 지원을 해야 할 터.

"최근 들어서 길드들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탑의 공략보다는 서로를 견제하고, 더 많은 점령지를 차지하기를 원하죠."

큰 이득이 되지 않는 2층의 방어전을 도우면서 출혈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이수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파라켈수스 길드가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잘 조성해 주셨으면 합니다. 길드들이 쉽게 거절할 수 없게끔, 도울 수밖에 없게끔요."

"그건, 어렵지는 않습니다. 샬럿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고요."

이수경은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저 혼자서는 분위기를 조성하기가 힘들 겁니다. 저 말고 다른 길드, 플레이어들이 무시할 수 없는 대형 길드가 필요할 텐데...."

"그건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는 건?"

"네메시스 길드가 도와줄 겁니다."

진현우가 확언했다.

너무도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라서 듣고 있던 이수경도 저절로 설득될 정도였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 우욱, 욱... 에에에엑....

"...죄송합니다. 술이 약한 애라서요."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하죠...."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샬럿 씨한테는 내일 오후 5시까지 탑의 입구에서 보자고 전해 주세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예."

의아해하며 배웅하는 이수경을 뒤로하고, 진현우는 바 오렐리아를 벗어났다.

바깥은 깊은 밤이었다.

'할 일도 더럽게 많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은퇴하고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아무 걱정 없이 살 생각이었는데, 꼴이 우습게 됐다.

지금은 세상이 멸망하게 되는 트리거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으니.

'샬럿.'

진현우는 바 오렐리아를 봤다.

함께 메사이어에서 활동했던 동료. 그녀를 다시 만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는 죽었었으니까.'

메사이어가 세계의 탑 공략에 크게 실패하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샬럿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었다.

- 또 후회하고 싶지는 않아요.

2층, 루윈 대륙이 멸망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후회했던 샬럿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서 동료들이 탈출할 수 있게 도왔다. 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는....'

진현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전생에서 겪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진현우는 어두운 밤거리를 걸었다.

69화

선택지는 하나

2층 플레이어 협회 지부의 대회의실.

여러 길드장들이 길게 이어진 원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잔뜩 긴장한 얼굴의 우석형이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우석형이라고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회의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길드장 여러분들."

우석형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주 약간의 박수만 돌아올 뿐, 별다른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익숙한 반응이다.

'참석하지 않은 길드가... 너무 많다.'

우석형은 속으로 혀를 찼다.

5대 길드라고 불리는 길드 중에서는 네메시스와 사자심만이 참석했다. 나머지는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듣는 척도 안 했다.

'이게 지금 협회의 현실.'

대형 길드들에게 끌려다니는, 제대로 된 힘도 갖추지 못한 협회의 현실이었다.

우석형은 크게 숨을 삼켰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2층에 있을 에픽 퀘스트 때문입니다. 화면을 봐 주십시오."

대회의실의 스크린에 자료가 비쳤다.

이번에 진현우가 에픽 퀘스트를 얻었으며, 그 에픽 퀘스트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자료.

길드장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자료를 봤다.

"진현우? 요즘 자주 들리는 이름이네."

"최근 유망주 중에서 꽤 유명하다더군."

"그러니까, 일개 플레이어의 에픽 퀘스트를 돕기 위해서 우리가 나서야 한다. 이겁니까?"

길드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길드원도 아닌 생판 타인의 에픽 퀘스트를 도와 달라고 자신들을 회의에 부른 것인가.

우석형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에픽 퀘스트를 성공하지 못하면 몬스터들이 수도 아빌론을 점령하게 됩니다. 진현우라는 플레이어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우석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2층을 몬스터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흠, 그건...."

"몬스터들의 손에...."

길드장들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우석형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남성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어떻게 나서라는 거지?"

"이런 건 플레이어 협회가 알아서...."

"파라켈수스는 동의합니다."

"그래, 파라켈수스는... 뭐라고?"

남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두의 시선이 파라켈수스의 길드장, 이수경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 길드는 협회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길드 차원에서 방어전을 지원하겠습니다."

"어, 어어. 그러니까, 이수경 길드장님이."

우석형도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그 말을 꺼낸 것이 파라켈수스의 길드장.

평소에는 어떤 일이든 관심 없다는 듯이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수경이어서였다.

"저희 길드에서 생산하는 포션, 영약, 비약, 모든 것들을 루윈 대륙으로 이송하겠습니다."

"아, 아아! 네! 감사합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확신한 우석형의 얼굴이 밝아졌다. 파라켈수스가 도와준다면 다양한 포션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방어전에 큰 도움이 되겠지.

"진심입니까? 이걸 돕겠다고요?"

"아니, 이걸 왜...."

다른 길드장들이 황당해했다.

굳이 나설 필요도 없다. 길드들이 돕지 않는다고 해서 협회까지 손을 놓지는 않으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플레이어 협회가 자기들 선에서 2층을 지원하려고 할 것이다.

"좋네요. 네메시스 길드도 동참하죠. 저희 길드원 그리고 장비들을 지원하겠습니다."

"유, 윤서희 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메시스의 윤서희까지.

사실 그녀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긴 했다. 이런 일에 제일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파라켈수스는 예상 밖이었다.

'아니, 쟤네 왜 저래?'

'이런 일에 관심 없던 사람 아냐?'

파라켈수스는 대형 길드라고 부를 만큼 덩치가 큰 건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은 크다.

뛰어난 연금술사 태반이 속한 길드이고, 뛰어난 포션들을 만들어서 유통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길드는 중요한 사냥을 앞두고 파라켈수스 길드에게서 포션들을 사곤 했다.

그래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

"...."

이수경과 윤서희가 눈을 마주쳤다.

'이수경, 저 사람이 웬일이지?'

윤서희는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런 일에 크게 관여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자기 일인 것처럼 의견을 내고 있다.

그 모습이 의외였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이 흐름은 자신이 원하던 흐름이다.

윤서희의 입술이 부드럽게 반달로 휘었다.

"사자심, 그쪽은 어떤가요?"

"흠, 우리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원탁의 상석에 앉은 남성. 곰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체구가 인상적인 중년의 남성이었다.

사자심의 길드장, 임호석이다.

"너무 조용해서요. 사자심의 길드장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음, 그렇지. 기껏 회의에 참석했는데 입을 닫고만 있는 것도 좀 그러니까 말이야."

임호석이 우석형을 응시했다.

덜컥, 우석형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임호석의 눈빛을 받으니까 저절로 그리됐다.

상대방을 집어삼킬 것 같은 눈빛이다.

"우리가 어떻게 나서 주기를 원하나?"

"금전적인 부분은 협회가 감당하겠습니다. 나머지, 아이템이나 소모품, 가능하다면 2층에서 활동 가능한 플레이어가 필요합니다."

"그렇군."

임호석은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이 이수경과 마주쳤다.

"좋아, 사자심 길드도 돕도록 하지. 안 그래도 육성 중인 신입들이 있다. 선배 플레이어들과 함께 실전을 경험하게 하면 좋을 거 같군."

"가, 감사합니다!"

"뭐라고요?!"

임호석의 선언을 반기는 우석형과 달리, 다른 길드장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여기서 사자심 길드까지 동참한다니.

'이, 이거....'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잖아.'

대형 길드들이 돕겠다고 선언했다.

그에는 못 미치지만, 포션업계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파라켈수스 길드까지.

"다른 길드들은 어떤가?"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돕겠죠."

"예? 아, 어어...."

그들이 주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은 못 돕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길드는 없었다.

길드장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 예. 저희도 돕겠습니다."

"칼리스타 길드도 차, 참가하겠습니다!"

"저도...."

길드장들의 참전 선언이 잇달았다.

당연하지만 그들이 원해서 한 선언은 아니었다. 분위기 때문에 강제로 한 것이었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어찌 됐든 협회로서는 기쁜 상황. 우석형의 입가에는 함박 미소가 어렸다.

우석형은 길드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설명했고, 잠시 후 회의가 끝났다.

"...."

"...."

"...."

회의가 끝나고 길드장들은 짜증 섞인 얼굴로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떠난 회의실에는 이수경과 임호석, 윤서희. 세 명의 길드장이 남아 있었다.

"이수경, 이거면 됐나?"

"네. 감사합니다, 임호석 길드장님."

"흠, 됐다. 파라켈수스한테는 빚진 게 많아. 다음에 좋은 포션들을 줄 거라 기대하지."

임호석이 씨익 웃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윤서희가 입을 열었다.

"사자심이 웬일로 제 의견에 힘을 실어 주나 했더니, 파라켈수스 길드 덕분이었군요."

"뭐, 그렇지. 원래라면 참가도 안 했을 거다. 그런데 이수경이 도와 달라고 해서 말이야."

"...."

이수경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궁금해졌다. 이런 일에 관심이 없는 그녀가 왜 나서게 된 건지.

"진현우라고 했던가? 그 유망주한테 말한 게 있다더군. 그걸 지켜야 한다면서 말이야."

"진현, 우...."

끄으응.

윤서희는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파라켈수스 길드에서도...."

"아닙니다. 영입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한테 약속한 게 있습니다."

"파라켈수스의 길드장이 빚을요?"

"예. 자세하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수경이 잠깐 입을 닫았다.

"무엇보다, 샬럿이 방어전에 참가할 겁니다. 그래서 위험 요소는 최대한 없애고 싶네요."

"아아, 그래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이수경은 겉으로는 틱틱거리지만, 속으로는 샬럿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있었다.

"흠, 진현우라. 요즘 자주 들리는 이름이군. 나도 절로 호기심이 생긴단 말이야."

"진현... 제가 입찰한 매물에 상회 입찰 할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임호석 길드장님."

"하하하! 그게 경쟁 아니겠나!"

호탕하게 웃으면서 떠나는 임호석.

윤서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됐겠죠.'

어젯밤, 진현우가 그녀에게 전화해서 부탁했다. 회의에서 여론을 주도해 달라고.

그 목적은 하나.

'2층, 루윈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윤서희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녀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확실히 그 남자는....'

윤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달라.'

그 사실이, 썩 마음에 들었다.

* * *

그날 오후.

진현우는 탑의 입구에서 샬럿을 만났다.

그녀는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은 채, 입구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

"오랜만이다 싶어서요."

꽤 오랫동안 탑에서 떠난 상태였다.

탑을 보는 것도, 탑으로 들어가는 플레이어들을 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샬럿은 묘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숙취 때문에 못 일어나는 게 아니고요?"

"어, 크흥! 큼! 아, 아니에요. 맞긴 한데!"

샬럿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사실 숙취 때문에 서 있기 힘든 탓도 있었다.

"볼 거 다 봤으면 들어갑시다."

"아이, 사람이 감회에 젖어 있는데."

"감회고 뭐고 오늘 바쁩니다. 들어가죠."

그 감회를 진현우가 산산조각 냈다.

샬럿이 입을 비쭉 내밀면서 구시렁댔다.

"차가워. 어제는 열정적이었는데."

"열정적으로 토하시기는 하더군요."

"아니! 아니이! 아니거든요! 토한 거 아니거든요! 그냥, 화장실에 볼일이 있어서!"

"그러시겠죠."

진현우는 그녀를 지나쳤다.

그런 그의 뒤를 샬럿이 쪼르르 뒤따랐다.

"들어가기 전에 통성명부터 해요. 서로 이름은, 음, 이름은 알지만 나이는 모르잖아요."

"진현우입니다. 23살이고요."

"어! 저하고 동갑이네요. 전 샬럿 로즈우드라고 해요. 생긴 거하고 이름은 이런데,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살아서 외국어는 못해요."

"그렇군요. 궁금하진 않았는데요."

"아, 저희 말도 놓을...."

"들어갑시다."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샬럿을 옆에 단 채, 진현우는 세계의 탑 2층에 진입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간 곳은 왕궁이었다.

"그러니까, 허어. 머리가 아프군."

황금 기사단의 기사단장, 알렉산더는 일찍이 만난 적이 있던 진현우를 환대했다.

하지만 그가 전한 소식은 반갑지 않았다.

"이 왕국을, 언데드들이 공격한다는 건가?"

그들이 있는 곳은 왕궁의 회의실.

회의실의 의자에는 화려하지는 않으나 명백히 고급스러운 의상을 입은 노인이 있었다.

"맞습니다, 전하. 언데드만이 아닙니다. 온갖 몬스터들이, 카오틱들이 공격해 올 겁니다. 당장 방어전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로군."

프레아 왕국의 국왕, 윌리엄 2세였다.

진현우의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가 이 일은 국왕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며 모시고 왔다.

"폭군이라니. 그 이름이... 후우."

알렉산더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옥좌에 앉은 윌리엄 2세는 먼 옛날, 역사책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폭군 마그누스. 짐은 마르실이라는 성기사가 목숨을 바쳐서 물리쳤다고 들었다만."

"물리친 건 맞지만 해치우지는 못했습니다. 겨우 봉인을 연장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부활을 뒤로 미룬 것이군."

윌리엄 2세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자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이 대륙의 운명이 바뀔 것이라고 하더군.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진현우는 에픽 퀘스트가 이 대륙에 미칠 영향을 윌리엄 2세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뿐이었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하."

윌리엄 2세와 알렉산더가 눈을 마주쳤다.

둘은 진현우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대로 하지.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왕국의 모든 전력을 쏟아붓겠다."

"감사합니다."

"음. 그나저나 뒤에 있는 사람은...."

진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샬럿. 일찍이 아빌론의 방어전을 수없이 도와줬던 성녀다.

그녀를 본 윌리엄 2세가 반갑게 웃었다.

"역시 성녀였군."

"예. 성녀가 방어전을 도울 겁니다. 최대한 부려 먹, 아니 협력해서 아빌론을 지키죠."

"으음, 그리해야지. 성녀가 있으니 이번 웨이브도 막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기는군."

"아, 아하하. 아하하하...."

샬럿이 어색하게 웃었다.

진현우가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샬럿은 히약, 하고 깜짝 놀란 소리를 내더니.

"네, 네! 저만 믿으세요!"

국왕과 기사단장 앞에서 그리 단언했다.

70화

무운을 빕니다

진현우와 샬럿은 왕궁을 떠났다.

샬럿은 그의 뒤를 쪼르르 따라다녔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전 따로 움직일 겁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수도 아빌론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제, 제가 말이죠."

진현우가 샬럿에게 바란 역할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었다.

그녀라면 가능할 것이다.

언데드 상대로는 핵폭탄인 여자니까.

"예. 언데드 대군이 몰려올 겁니다. 물리칠 필요는 없어요. 시간만 끌어 주면 됩니다."

폭군은 자신의 부활 의식이 치러진 지하 무덤에 있다. 놈의 부하들과 함께 말이다.

지금 거기로 가는 건 자살행위다.

'폭군이 수도 아빌론을 공격할 때.'

놈은 지하 무덤에 있던 부하들의 상당수를 이끌고 수도 공략에 나설 것이다.

지하 무덤의 방어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지하 무덤에 침입하여 폭군의 불사성을 깨트린다. 그게 진현우의 계획이었다.

당연하지만, 그게 성립하려면 수도 아빌론이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거기서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아빌론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군요. 그럼 진현우 님은 혼자서 움직이시는 건가요?"

"기본적으로는요. 근데...."

시선을 끌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진현우가 지하 무덤 안으로 잠입하는 동안, 무덤에 있을 적들의 시선을 돌려 줄 이들.

짚이는 이들이 있었다.

"전 벤데일 신전으로 갈 겁니다. 샬럿 씨는 여기 남아서 방어전을 준비해 주세요."

"아, 네. 그렇게 할게요."

성기사장, 카단의 도움이 필요하다.

* * *

- 퀘스트 '성소의 불신자'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와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벤데일 신전에 도착한 진현우는 이전에 받았던 퀘스트의 보상을 받았다.

카단이 준 아이템은 소모품이었다.

"뛰어난 사제가 만든 성수니 잘 써 주시오. 언데드와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예, 잘 쓰겠습니다."

여러 병의 성수. 나쁘지 않다.

진현우는 성수들을 챙긴 다음, 카단에게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이유를 밝혔다.

- 언데드들의 대침공이 있을 것이다. 여긴 너무 위험하니 잠깐 아빌론으로 피난해라. 플레이어들이 피난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벤데일 신전을 버리라는 건 아니다.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만 비우고, 모든 게 끝나거든 돌아와서 신전을 복구하면 된다.

카단은 그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 여태까지 여기에 남았던 이유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었소. 이 몬스터 사태가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수도 아빌론으로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희망이 있다.

폭군을 막는다면 모든 일이 끝날 거라는 희망이. 그렇기에 카단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하겠소. 피난을 준비하겠소."

"예.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할 게 있습니다."

이게 본론이었다.

진현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몰락한 고원의 서쪽을 아십니까?"

"서쪽 말이오? 알고 있소. 어마어마한 사기가 일어나서 접근할 수 없게 된 지역이오."

사기가 일어난 뒤부터 온갖 이변이 터졌다.

자연이 썩기 시작했고, 언데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몬스터들이 흉포해지기까지.

치안이 엉망이 되면서 카오틱들이 활개를 쳤다. 마치 자기들 영역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

"전 거기로 갈 생각입니다."

"음...!"

카단의 두 눈이 커졌다.

진현우를 바라보는 시선에 걱정이 섞였다.

"가면 죽을 것이오. 이유가 있는 건가?"

"예. 폭군을 죽이려면 그 사기 안에 있는 지하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현우와 카단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단 님, 그리고 여기 계신 성기사단이 저와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

그건 사지로 함께 가자는 제안이었다.

몰락한 고원 자체가 몹시 위험한 곳이지만, 서쪽은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는 마경이다.

지금까지 서쪽으로 갔던 사람이 여럿 있었으나,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말을 꺼내는 걸 망설였는지 알겠군."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거절할 제안.

하지만 카단은 씨익 웃었다.

"당신 말대로 하면 폭군 마그누스를 없애고 모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오?"

"예, 확실합니다."

"좋소. 그럼 우리 목숨을 당신에게 맡기지."

조금 전과 똑같이, 카단은 흔쾌히 수락했다.

아니, 애초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썩어만 가고 있었소. 이 땅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목숨은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지. 함께하겠소."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오."

카단이 진현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군.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망이 보이는 느낌이야."

그런 말을 하면서.

카단은 호탕하게 웃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진현우는 플레이어들의 힘을 빌려서 벤데일 신전의 사람들을 아빌론으로 이송했다.

성기사단은 벤데일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폭군이 아빌론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언데드도 벤데일 신전을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알겠소. 우리는 여기서 대기하지."

벤데일 신전과 지하 무덤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거기서 합류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빌론에도 여러 변화가 생겼다.

"아, 포상금 많이 주는 게 불안한데...."

"엄청 위험한 일 아냐? 빠져야 하나?"

"근데 사자심하고 네메시스 같은 대형 길드가 나서는 거 보면 안전할 것 같기도 하고?"

플레이어 협회는 엄청난 금액의 포상금을 제시하면서 플레이어들을 섭외했다.

포상금이 많다는 것은 일이 힘들다는 뜻.

플레이어들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네메시스와 사자심의 존재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어, 병사들하고 협력해서 진형을...."

"물자는 이쪽으로 옮겨 주세요!"

이전에 회의에 참가했던 길드도 마찬가지로 아빌론 방어전을 도울 물자를 지원했다.

그중 가장 으뜸은 파라켈수스 길드였다.

"이건 신성력이 깃든 기름이거든요? 언데드들이 올라오거든 냅다 붓고 불붙이세요."

"적들하고 싸울 때 이것부터 마시고요."

"그리고 이건...."

아끼는 친구인 샬럿이 참가하는 방어전인 만큼, 이수경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파라켈수스 길드가 지원하는 연금 아이템들의 양을 본 다른 길드들이 혀를 내둘렀다.

"아니, 뭔데 저렇게 지원을 많이 해?"

"파산하려고 작정했나."

"파라켈수스가 저런다고 파산하겠냐?"

"하, 씨. 우리도 괜히 눈치 보이잖아."

드높은 성벽 위.

진현우는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도 아빌론이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 같은데.'

그래도 불안한 감은 있었다.

전생에서 프레아 왕국과 플레이어들은 폭군 마그누스의 침공을 막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털렸다.

'마그누스의 불사를 깨트리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 폭군의 침공은 지금보다 더 나중에 일어났다. 그때는 지금보다 길드 간의 대립이 심해져서 협력하기가 힘든 때였다.

'시기를 앞당겨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진현우가 에픽 퀘스트를 받으면서 폭군 마그누스의 부활이 훨씬 앞당겨졌다.

단점도 있지만, 길드들의 협력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남은 건 불사를 깨트리는 것.'

전생에서는 에픽 퀘스트를 받았다는 메시지가 나오고 10일 후에 폭군이 공격해 왔다.

남은 시간은 이틀.

진현우는 지하 무덤을 공략해야 한다.

그것도 혼자서.

"어려울 것 없지."

익숙한 일이다.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진현우는 여유롭게 성벽에 앉았다.

'여기서 활약을 하면 할수록 좋다.'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면 왕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주려고 할 것이다.

진현우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명성을 쓰려면 제대로 써야지.'

왕국에는 명성을 화폐로 쓰는 상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더 특별한 상점이 왕궁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이번에 큰 활약을 한다면 그 상점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현우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술... 아무나, 나한테 술을 줘...."

"나가면 알코올 의존증 치료부터 받죠?"

"아냐, 전 알코올 의존증이 아니에요...."

그의 옆에는 샬럿이 쓰러져 있었다.

최근 진현우는 바쁘게 움직였고, 샬럿은 그런 그를 따라다녔다. 오랫동안 플레이어 활동을 쉰 샬럿이 버티기 힘든 노동 강도였다.

"일이 끝나면 원 없이 마시세요. 알아서."

"으응...."

샬럿이 엎드린 채 웅얼거렸다.

더없이 하찮은 모습이지만, 이래도 방어전에서는 큰 활약을 할 것이다. 아마도.

"좋아, 그럼."

진현우는 성벽 저 너머를 봤다.

언데드들의 군세가 쳐들어올 지평선을.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인가."

진현우는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 * *

당연하지만, 수도 아빌론의 그런 움직임은 폭군 마그누스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 그래서.

지하 무덤의 심층부.

마그누스는 카오틱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카오틱은 2층을 완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마그누스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 인간 놈들이 눈치챈 것 같다고?

"예. 에픽 퀘스트... 아, 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여튼 눈치챈 거 같네요. 수도 아빌론의 방어를 강화하고 있던데요."

- 흠, 그렇단 말이지.

"여러 길드가 모이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들도 그렇고요. 이거, 조금 더 신중하게...."

-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마그누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괬다.

- 놈들이 뭘 하든 의미가 있느냐?

"어, 음, 그건...."

- 도시 하나에 처박혀서 방어전을 준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놈들이다. 네놈은 그런 버러지들이 무섭나? 두려운 건가?

카오틱이 고개를 숙였다.

마그누스는 시시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 나는 불멸이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나를 죽일 수는 없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

폭군은 오만하게 단언했다.

- 놈들은 멸망하게 될 테니.

단언한 폭군이 손가락을 튕겼다.

대기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산 제물들을 데리고 오더니 마법진 위에 고정했다.

그리고 흑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웠다.

"아아아아아악!"

- 후, 흐흐... 흐흐하하하!

마법진이 불길한 빛을 내뿜으면서 산 제물들의 생명력을 모조리 흡수했다.

그 생명력이 그대로 폭군에 전해졌다.

- 마지막이다. 드디어....

콰지직!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거의 사라져 가던,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던 폭군의 봉인이 완전히 사라지는 소리였다.

폭군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 나는, 이제 자유롭다.

폭군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스으윽, 폭군의 뒤를 유령처럼 지키고 있던 흑마법사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폭군의 심복.

- 베논, 병력 준비는 끝났나?

"예. 언데드와 몬스터 그리고 카오틱들까지 모두 준비를 갖췄습니다. 언제든지...."

- 좋군. 베논, 짐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이 무덤을 관리해라. 중요성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폐하."

흑마법사, 베논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폭군이 부활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심복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 어차피 살아 있는 자들은 이곳에 도달하지도 못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폐하."

- 흠, 그럼.

폭군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지하 무덤에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자유로워졌다.

자유로워진 폭군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 이제, 내 왕국을 되찾으리라.

망집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 폭군이 다스린 왕국을 되찾기 위해.

* * *

그로부터 이틀 뒤.

벤데일 신전에서 성기사단과 함께 대기하던 진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에픽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 과거의 폭군이 망집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 아빌론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 수도 아빌론을 지키십시오.

- 만약 지키지 못할 경우.

잠깐의 침묵 후, 메시지가 이어졌다.

- 해당 층은 언데드와 몬스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무운을 빕니다.

메시지가 끝났다.

진현우는 숨을 삼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단과 성기사단이 그를 응시했다.

"갑시다."

움직일 때가 왔다.

71화

고원의 서쪽

군대가 진군하고 있다.

죽은 자들로만 이루어진 군대. 망령된 고집을 버리지 못한 자가 이끄는 망집의 군대.

그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 우아아아악!"

"가, 갑자기 언데드가 왜!"

"적들이, 너무 많아...!"

망집의 군대는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파괴하면서, 막힘없이 나아갔다.

그 무엇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요새의 드높은 성벽도, 그곳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던 도적들도, 겁에 질린 몬스터도.

- 구어어어어어....

- 우으우우우....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불사자의 해일에 휩쓸렸고, 곧 그들의 일부가 되어 일어났다.

망집의 군대는 그렇게, 더더욱 숫자를 불려 나가면서 적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바로.

- 아, 그리운 광경이로구나.

수도 아빌론을 향해서.

망집의 군대가 아빌론에 도달했다. 그 숫자는 수천, 아니 어쩌면 만에 달할지도 모른다.

그 광경을 본 알렉산더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허... 말도 안 되는, 숫자로군."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언데드의 군세에는 지켜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있었다.

오랫동안 수도를 지켜 온 알렉산더가 그럴 정도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 미친. 뭐가 저렇게 많아?"

"저걸... 우리끼리 막으라는 거야?"

"어떻게 막아! 죽으라고?!"

아빌론에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플레이어 협회에서는 에픽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서 다른 국가 협회의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다양한 국가의 플레이어들이 아빌론을 지키기 위해서 모인 상황이었다. 하나.

- 우우우어어어....

"적이... 너무 많아."

너무 많다.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도 많았다.

그 종류도 다양했다.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하급 언데드에, 듀라한이나 누더기 골렘 같은 중상위급 언데드에, 리치까지 보였다.

방점을 찍는 것은 폭군 마그누스였다.

- 많이 바뀌었군. 아아, 너무 많이 바뀌었어. 짐의 왕국의 풍경이 남지 않았잖느냐.

거인을 방불케 하는 아득한 덩치.

절반은 부패해 가는 인간의 형상을, 절반은 뼈만 남은 괴물, 마그누스가 성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 짐은 왕국을 평생 다스리겠다고 백성들 앞에서 다짐했느니라. 너무 늦었지만, 짐이 했던 다짐을 이제야 이룰 수 있게 됐구나.

마그누스가 두 손을 펼쳤다.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은 먹으로 칠한 것 같은 불길한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이 검은빛을 내뿜었다.

- 들어라, 인간들이여. 이곳은 내가 다스리던 땅이다. 이제 진정한 주인이 돌아왔으니.

마법진이 무언가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그건 언데드였다. 부활한 망자들은 서로 뭉치고 또 뭉치더니, 이윽고 거대한 포탄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런 포탄이 수십 개였다.

마그누스가 손을 튕겼다.

- 문을 열어 왕을 받들어라!

하늘을 가득 메운 썩은 살덩어리의 포탄이 수도 아빌론의 성벽으로 쏘아졌다.

그 속도는 빠르고, 질량은 어마어마하다.

명중한다면 성벽도 무사할 수 없다.

- 구어어어어어!

- 오오오오오!

"오, 온다...! 시발, 온다고!"

그게 신호탄이라도 됐는지.

망집의 군세가 돌진했다. 어마어마한 군세가 자아내는 발소리는 지진을 방불케 했다. 그 광경에 병사들이 겁에 질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떻게 막아...?'

들이닥치는 살덩어리의 포탄들.

지상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불사의 군대가.

'막을 수 없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협회에게 포상금을 약속받고 온 플레이어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결의에 찬 병사도.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으...!"

공포가 한계에 달해 터져 나오려는 순간.

한 여성이 성벽의 난간에 섰다.

"신이시여."

바람에 흩날리는 백금색의 머리카락.

한 치의 티끌조차 없는 순백색의 사제복. 샬럿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여기 가엾은 자들이 있습니다."

살덩어리의 포탄이 성벽에 닿는다.

진군하던 불사의 군대가 성문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보다 성녀의 기도가 더 빨랐다.

"저들을 당신의 품에 거두어 주십시오."

찬란한 빛이 일어났다.

샬럿을 중심으로 모인 빛이 터지면서, 신성한 파동이 되어 언데드들을 덮쳤다.

- 키아아아아아아!

- 갸아, 그어어....

성벽에 닿을 뻔한 살덩어리의 포탄이 강력한 신성력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성문의 지척까지 접근했던 불사의 군대가 해일에 휩쓸린 것처럼 단번에 쓰러졌다.

"저, 저건...."

"그래, 저 사람이 있었어."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샬럿의 바로 위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숭고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천사가 있었다.

천사는 검을 높이 들면서 마법진을 전개했다. 그리고 찬란한 빛이 다시금 일어났다.

- 화아아악!

- 캬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주변을 일소했다.

성문을 파괴하려던 살덩어리의 포탄도, 지척까지 다가왔던 언데드들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언데드가 아닌 몬스터들뿐.

"나, 나 이거 본 적 있어."

"맞아. 저번에 동영상에서...."

진현우가 동영상에서 봤던 그 광경이, 수도 아빌론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샬럿은 두 손을 모았다.

"용기 있는 자들에게 축복을."

그녀의 위에 머무르고 있는 천사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다시금 빛이 일어났고, 그 빛은 아군들에게 흡수되었다.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성녀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마력 재생 속도가 빨라집니다. 스킬의 대미지가....

- 공포를 극복합니다.

성녀의 가호.

한 달에 쓸 수 있는 횟수가 정해진 스킬.

그만큼 그 위력은 확실하다. 플레이어와 병사들은 신체에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 그래! 막을 수 있어!"

"시발, 언데드 새끼들이 뭐라고...!"

"성녀님만 있으면 이길 수 있어! 쫄지 마!"

함성이 사방을 울렸다.

언데드의 압도적인 군세에 꺾였던 사기가 완전히 되살아난 것이다.

마그누스도 그걸 느꼈다.

- 뭘 믿는가 했더니, 저것이었나.

마그누스가 불만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적들의 사기는 언데드 군세를 본 순간 꺾여 있었다. 그런데 저 여자, 가증스러운 빛의 힘을 다루는 여자가 나타나면서 뒤바뀌었다.

- 그래 봤자 발버둥일 뿐이다.

마법진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마그누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깊은 지하에 잠들어 있던 망자들이 다시금 깨어났다.

샬럿이 죽였던 만큼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언데드가 다시금 전장에 나타났다.

- 가라, 병사들이여. 짐의 성을 되찾아라. 그리고 저 계집을 짐에게 데리고 와라.

샬럿과 마그누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 넌 짐이 직접 되살려 주마.

샬럿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한 것이 아니다. 뒤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빌론을 보기 위함이었다.

원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2층에 머무르면서 많은 사람과 친분을 쌓았다.

- 지금 안 움직이면 후회할 겁니다.

머릿속에서 말이 맴돌았다.

진현우가 처음 만난 그녀에게 한 말.

- 나중에 아무것도 안 한 걸 후회할 겁니다.

술에 취했지만, 그 말은 선명히 기억났다.

기억날 수밖에 없었다. 진현우의 말에는,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확신이 넘쳤으니까.

샬럿은 그 말에 설득된 것이다.

'당신 말이 맞아요.'

샬럿은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바라봤다.

프레아 왕국은 저 언데드들을 막을 수 없다. 샬럿과 진현우가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성벽이 뚫렸을 것이고, 수도에 침입했겠지.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샬럿이 알고 지내는 이들이.

'그랬으면 난 후회했을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 너머에서 적들이 몰려들고 있다.

- 캬아아아아!

샬럿은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그녀와 마그누스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진현우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이긴다.

샬럿은 그를 믿기로 했다.

* * *

수도 아빌론에서 방어전이 펼쳐질 무렵.

벤데일 신전에서 머물던 진현우는 성기사단과 함께 몰락한 고원의 서쪽으로 향했다.

"끔찍하군. 이건...."

"앞을 가로막는 건 다 죽이고 갔군요."

서쪽으로 가는 길은 참혹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언데드 군대가 진군하면서 지형은 붕괴했고, 앞을 가로막던 건축물과 생명체들은 언데드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흔적이 처참하게 남아 있었다.

"풀 한 포기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건가."

"카, 카단 단장님. 아빌론은 무사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언데드 군단에 몬스터들까지 섞였다는데, 쉽지 않겠지."

카단은 앞서 걸어가는 진현우를 봤다.

시선을 눈치챘는지, 진현우가 입을 열었다.

"한동안은 멀쩡할 겁니다. 샬럿... 아니, 성녀가 있으니까요. 거기에 준비한 것도 많으니까,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리 길지는 않겠군."

"예.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진현우는 투구를 꾹 눌러썼다.

지금 그는 성기사들과 똑같은 갑옷을 입고 얼굴을 완전히 가린 상태였다.

주변 성기사와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그리폰을 써서 빨리 가고 싶기는 한데.'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어쩔 수 없다. 진현우와 성기사단은 빠르게 서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보이는군."

진현우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몰락한 고원의 서쪽. 황무지를 검보라색의 기체가 거대한 돔 형태로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근방에는 수분이란 수분을 모조리 빨려서 미라처럼 메마른 사체들이 가득했다.

"보이시오? 저 사기로 이루어진 장막에 생명력이 빨려서 죽은 것들이오."

"인간, 동물, 식물들까지 다 죽었군요."

"그렇소. 이 일대가 황무지가 된 이유지. 더 나아가서 여기가 몰락하게 된 이유고."

카단이 씁쓸해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서쪽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사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기는 몰락한 고원의 서부를 집어삼켰고, 그때부터 이 일대에 온갖 이변이 발생했다.

"죽었던 자들이 부활하기 시작했소. 식물들이 메마르면서 땅이 황무지로 변했지. 동물들은 괴물이 되었고, 몬스터들은 흉폭해졌소."

모든 것의 이변이 저곳에서부터 시작됐다.

어쩌면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도 저곳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저 사기를 돌파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몇 번 왕국에서 수색대를 보냈던 적이 있소. 결과는 참혹했지. 모두 돌아오지 못했소.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자는 미쳐 버렸었소."

카단도 본 적이 있다.

완전히 미쳐 버려서 헛소리를 내뱉던 병사의 모습. 그걸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사기는 살아 있는 자에게는 독이나 다름없소. 접근하는 것만으로 살이 썩고, 들이켜는 것만으로 질병에 걸리지. 위험한 기운이오."

말하자면, 죽은 자의 영역이라는 셈이다.

산 자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역.

카단이 진현우를 은근하게 바라봤다.

"뭔가 방법이 있어서 오자고 한 거겠지. 그 방법을 이제 보여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죽은 자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기꺼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개죽음은 원치 않는다. 저 사기를 어떻게든 막아 낼 방법이 있어야만 한다.

카단은 질문했고.

"방법이야 당연히 있죠."

진현우는 방패를 들었다.

티끌 하나 없는 백색의 방패. 그가 힘을 집중하자 방패에 깃든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에게서부터 신성한 기운이 분출되었고, 그 기운들이 카단과 성기사단에게 깃들었다.

- '빛의 수호' 옵션을 발동합니다.

- 일정 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흑마법과 사기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갖습니다.

능력치를 향상시키며, 흑마법과 사기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갖게 하는 가호.

"이건...."

변화를 느낀 카단의 두 눈이 커졌다.

72화

오른쪽, 왼쪽, 오른쪽

빛의 수호.

마르실의 기억이 담긴 방패에 담긴 옵션.

그 효과를 받은 진현우와 성기사단의 몸은 신성한 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그 방패의 힘이오?"

"예. 이거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요."

강한 저항력을 가진다는 것이지, 사기를 아예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

다행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성기사단. 그 정도 피해는 회복할 수 있는 이들이다.

"왜 자신만만했는지 알 것 같군."

"오래는 못 버틸 겁니다. 한 20분 정도."

"20분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지는 건가?"

"예. 그렇게 되면 사이좋게 죽겠죠."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이로군."

카단도, 그의 곁에 있던 성기사들도 불길한 미래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현우는 태연스레 앞으로 나섰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전에 끝낼 거니까."

"자신만만해서 좋소. 또 주의할 게 있나?"

"저 내부는 복잡한 미로입니다. 게다가 언데드들까지 있죠. 언제 나올지는 제가 알고 있으니 제 지시대로 움직여 주세요. 그러면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카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던 벤데일 신전 방어전에서의 모습 그리고 그 후로 보여 줬던 신비로운 모습.

진현우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겠소. 모두 들었나? 안으로 들어가거든 내가 아니라 이분의 말에 따르도록!"

"예!"

"그럼 들어갑시다."

진현우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거대한 사기의 장막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푸욱! 바다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것도 아주 끈적끈적한 바다에.

"크윽... 이건, 기분이 별로군!"

내부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카단은 불길한 기운이 자신의 몸을 침범하는 것을 느꼈다.

빛의 수호와 신성력이 사기를 몰아내고 있었지만,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카단 님, 성기사단 전원 진입했습니다."

"음.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진현우."

"일단 절 에워싸는 형태로 진형을 갖추죠."

다소 의아할 수도 있는 지시였지만, 카단과 성기사단은 의구심 없이 그를 에워쌌다.

진현우는 자세를 낮췄다.

"최대한 제가 안 보이게끔 해 주세요.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저는 빠져 있겠습니다."

"이유가 있소?"

"여기를 지켜보고 있는 적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제 존재를 숨겨 두고 싶어서요."

"납득 가능한 이유군. 알겠소."

주변을 에워싼 성기사들은 마치 벽 같다.

어쨌든 주변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이대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진현우는 신성력을 일으켰다.

- 파아아앗!

"오, 오오... 신성력이...."

찬란한 광휘가 어둠을 몰아냈다.

신성한 빛을 견디지 못한 사기가 희미해졌고, 전방의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길은 제가 압니다. 움직이죠."

"으음! 모두, 뒤처지지 마라!"

"예!"

진현우와 성기사단은 길을 나아갔다.

하지만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다. 카단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내심 의아해했다.

'길을 어떻게 안다는 거지?'

주변 풍경은 다 똑같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없다. 마치 광활한 사막에 아무것도 없이 조난당한 것만 같다.

그래서 길을 안다는 게 의아했지만.

"여기서 오른쪽으로."

"음, 오른쪽으로."

카단은 아무 불만 없이 지시를 따랐다.

여기까지 온 이상 따로 방법도 없다. 진현우를 믿고 따르지 않으면 여기서 죽게 될 터.

그는 진현우를 믿기로 했다.

"저기 발을 디디면 언데드가 나올 겁니다. 준비하세요. 나오자마자 퇴치해야 합니다."

"알겠소. 신성 마법을 준비하라!"

"예, 예!"

성기사들은 내심 의아해하면서도 진현우의 말대로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현우가 가리킨 지점에 카단의 발이 닿는 순간.

- 캬아아... 크아아악!

"저, 전원 퇴치했습니다!"

땅에 몸을 감추고 있던 언데드들이 튀어나오더니 성기사단을 기습적으로 덮쳤다.

하지만 이미 준비하고 있던 상황.

신성 마법이 언데드들을 단번에 퇴치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뭐가 보인 건가? 아무것도 없지 않나?'

카단과 성기사단이 경악했다.

경악의 대상인 진현우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보면서 일행에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이번엔 왼쪽으로 가면 됩니다."

"으, 으음!"

카단은 홀린 것처럼 지시에 따랐다.

그 뒤로도 진현우의 안내는 계속되었고, 그 안내에 틀렸거나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길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또 언데드가...."

진현우가 계속 길을 안내하고 있다.

그 안내에 따르던 카단은 주변을 돌아봤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흐릿해진 사기만이 보일 뿐.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다. 길을 안내할 수 있을 만한 흔적 같은 것은 없다.

그러면.

'도대체 뭘 보고 안내하고 있는 거지?'

저 남자, 진현우는 도대체 어떻게 이 황무지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언제, 어느 때에 언데드가 나타날지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마치 알고 있다는 것처럼.

'흔적이 있으니까 알 수밖에 없지.'

진현우는 땅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아무리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라고 할지라도 돌멩이들은 있다.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 돌멩이들은 특수한 규칙으로 배열되어 있다.

'흑마법사들만이 알 수 있는 규칙.'

여기를 오가는 흑마법사들이 길을 잃지 않으려 설치해 둔, 일종의 이정표 같은 것이다.

읽는 법만 알면 길을 찾는 건 쉽다.

전생에서 이미 방법은 익혀 뒀었다.

- 스으으으....

언데드의 위치를 아는 건 광휘 덕분이었다.

광휘 스킬에 붙은 효과가 있다.

· 광휘 (A, Lv.1): 신성한 빛을 터트려 일정 범위 안의 언데드들을 불태우고, 죽지 않은 언데드들을 약화한다. 또한 아군을 치유한다.

언데드들을 불태우고 약화한다.

일종의 디버프인 셈이다. 디버프를 받는 몬스터에게서는 흐릿한 이펙트가 나타난다.

그 이펙트로 파악한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주변에 자욱하게 껴 있던 사기가 옅어졌다.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전투 준비하세요. 밖으로 나가면 언데드와 카오틱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음, 알겠소. 모두 들었겠지?"

"예."

성기사단이 전투를 준비했다.

이윽고 사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탁 트인 시야에 보이는 것은 황무지와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고대 무덤으로 가는 문이었다.

그리고.

"뭐, 뭐야! 성기사? 저놈들이 왜...!"

"적이다! 적습!"

- 그르으! 그아아아아!

카오틱들과 언데드들도.

놈들은 불쑥 튀어나온 성기사단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살아 있는 자는 돌파할 수 없는 장막을 뚫고 왔으니 당황할 수밖에.

"1열! 성스러운 불꽃을 펼쳐라! 2열! 신성한 화살을 준비해라! 내 명령을 기다리도록!"

"크아아아악!"

성기사단이 앞으로 나섰다.

가장 선두에 있던 이들이 신성 마법을 펼쳤고 새하얀 불꽃이 적들을 덮쳤다.

카단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쏴라!"

- 피슈우욱!

성기사들이 신성력이 담긴 화살을 쐈다.

달려들던 언데드들을 관통하고, 불태우면서 나아간 화살들이 카오틱들까지 공격했다.

"저, 저 개새끼들이! 죽여!"

"3열! 방패를 전개하라! 4열, 준비!"

선두에 있던 자들이 뒤로 물러나고, 대신 앞으로 나선 성기사들이 방패를 내세웠다.

적들의 공격이 방패를 덮쳤다.

하지만 방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시오, 얼른. 여기는 우리가 맡겠소."

성기사들이 세운 방패의 벽 뒤에서, 카단은 진현우를 돌아보지 않고 그리 말했다.

진현우는 자세를 낮췄다.

"위험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하하, 이게 우리 역할 아니오? 모두 감수하고 온 것이오. 우리는 신경 쓰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진현우는 더 말하지 않았다.

자세를 낮춘 그의 모습이 황무지에 녹아들었다. 보호색 옵션이 발동하고 있었다.

카단은 성기사단에게 명령했다.

"4열! 빛을 터트려라!"

- 파아아앗!

성기사단이 일제히 빛을 터트렸다.

폭발하는 신성력이 언데드들을 휩쓸었고, 동시에 사방의 시야를 일순간 가렸다.

진현우가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지금이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음, 최대한 버텨 보겠소."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주변 풍경에 완전히 물든 진현우가 누구도 모르게 지하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교차하듯이 지하 무덤에서 카오틱들과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기사단, 마음의 빛을 밝혀라!"

카단은 검을 빼 들었다.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다."

몰려드는 적들.

성기사들은 빛을 밝혔다.

* * *

폭군의 무덤 심층부에서는 언제나 피 냄새가 난다. 수많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서, 그들이 흘린 피가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피가 새겨진다.

"제물은 저게 다인가?"

폭군 마그누스의 심복, 베논은 지하 무덤의 심층부에서 제물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수많은 제물이 마법진 위에 섰다.

"으흑, 흐으윽...."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저는 괜찮으니까, 제 아이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몰락한 고원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언데드들은 이 지역의 문명을 파괴하면서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모조리 납치했다.

폭군의 부활을 위해서였다.

"예, 베논 님. 마지막 제물들입니다."

"흠. 수도 아빌론을 함락하고 나면 또 많은 제물이 생기겠지. 아끼지 말고 다 바쳐라."

"알겠습니다."

흑마법사들이 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물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게 오늘따라 유독 거슬려서, 베논이 마력을 일으켰다.

검은 마력이 제물들을 짓눌렀다.

"사, 살려... 아아악!"

"아무 쓸모도 없는 네놈들의 목숨이 왕을 위해서 쓰이는 거다.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

"무, 무슨, 그게 무슨...!"

베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아까부터 비명을 지르던 여성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력이 그녀를 베논 앞으로 이끌었다.

"네 자식은 살려 달라고 했던가? 그럴 수는 없지. 대신에 내가 선물을 하나 주마."

"서, 선물?"

여성과 아이의 몸이 떠올랐다.

베논은 다른 제물들을 치우고, 여성과 아이를 마법진의 중심부에 내려놓았다.

"이 둘을 가장 먼저 제물로 바쳐라. 흐흐, 자식과 같이 제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아, 아아...."

"으아아앙!"

마법진이 불길한 빛을 내뿜는다.

여성이 겁에 질린 아이를 끌어안았다. 베논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베논 님, 이것부터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쯧, 한창 재밌을 때... 무슨 일이냐?"

"이 수정구를 봐 주십시오."

마법진이 작동을 멈췄다.

저들이 죽는 건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에 수정구를 보고 난 뒤에 처리하려는 것이다.

베논은 부하가 건넨 수정구를 봤다.

거기에 비치는 것은 지상의 풍경. 이 지하 무덤을 감싸고 있는 사기의 장막이 보였다.

'어떤 얼간이가 다가오겠는가.'

다가오는 자들의 생명력을 모조리 빼앗는 사기가 방어막처럼 전개된 곳이다.

이미 수많은 생명이 접근했다가 목숨을 잃은 곳이니 누구도 오지 않을 터.

- 어차피 살아 있는 자들은 이곳에 도달하지도 못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마그누스가 한 말은 지극히도 옳다.

산 자는 이곳에 도달할 수 없다. 카오틱들도 흑마법사와 함께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사기로 이루어진 장막 자체가 미로이며, 적들의 침입을 막는 불굴의 요새인 셈이다.

'저놈들은... 성기사단이로군.'

그런 장막에 접근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루하다 못해 고루하다 느낄 정도로 똑같은 복식을 갖춰 입은 한 무리의 성기사단.

그 선두에 있는 자도 익숙한 자였다.

"카단. 흥, 아직도 살아 있었는가."

사기로 이루어진 장막을 돌파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사제와 성기사들이다.

마그누스와 베논은 그걸 잘 알고 있었고, 몰락한 고원의 사제와 성기사들을 박멸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벤데일 신전이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성기사단이 장막에 진입했다.

그걸 본 베논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저 정도 숫자로는 돌파할 수 없다. 만전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돌파할 수 있을 정도.

'신경 쓸 필요도 없겠군.'

저들은 장막 안에서 죽을 것이다.

베논은 그리 판단하고 마그누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해야 할 일들을 하려고 했다.

장막을 돌파할 수 없다. 그렇게 믿었기에.

- 콰아아아앙!

"...!"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깨졌다.

갑작스러운 굉음이 들렸다. 베논은 황급히 수정구를 바라봤다. 거기에 비치는 것은, 장막을 돌파한 성기사단의 모습이었다.

"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베논이 기함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장막을... 돌파했다고?'

살아 있는 자는 지나갈 수 없는 장막을 대체 어떻게. 베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73화

한 번에 처리한다

카단이 이끄는 성기사단이 사기의 장막을 돌파했다. 살아 있는 자는 절대로 지나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는 장막을.

베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장막을... 돌파했다고?'

200명 남짓한 저 정도 숫자로?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하다. 흑마법사의 수장, 베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침착해라. 저 정도 숫자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기사단의 숫자는 많지 않다.

지하 무덤에 남은 언데드들과 카오틱들로 충분히 대처하고도 남을 정도의 숫자다.

'무덤에는 진입하지도 못할 것이다."

설령 돌파당한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이 지하 무덤은 지상과 마찬가지로 미로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절대 돌파할 수 없는 마경인 것이다.

"불나방들이 죽는 꼴이나 봐야겠군."

어떻게 돌파한 것인지는 모든 일이 끝난 후, 살아남은 놈을 잡아서 심문하면 된다.

베논의 마음이 다시금 평온해졌다.

"베, 베논 님! 누군가 무덤에 침입했습니다! 함정을 엄청난 속도로 돌파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지상의 성기사단은 죽을 것이다.

마음이 평온해졌던 베논이 다시금 경악하면서 수정구를 바라봤다.

지하 무덤 내부의 모습을 비추는 수정구.

- 콰앙! 푸슈우욱! 스으으윽!

함정들이 계속해서 발동하고 있다.

하지만 목표는 보이지 않는다. 베논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작동한 것처럼 보였다.

고장 난 것인가?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아,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다.

함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그 목적대로 침입자를 못 지나가게 막으려 하고 있다.

문제는 침입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움직임이 너무도 빠르다는 것.

"함정을... 다 파악하고 있는 건가?"

"그,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마치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모든 함정을 파훼하고 있었다.

게다가 길조차 알고 있다.

이 지하 무덤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미로였고, 그 뒤에도 증축으로 복잡해졌거늘.

'위험하다.'

베논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바깥에 있는 성기사단이 문제가 아니다. 무덤을 돌파하고 있는 침입자가 문제다.

그는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카오틱과 언데드들을 불러 모아라! 바깥의 성기사단 따위를 상대할 때가 아니다! 지금 이 무덤을 돌파하는 침입자를 막아야 한다!"

"예, 베논 님!"

폭군이 대군을 이끌고 갔지만, 이 무덤에는 여전히 많은 방어 병력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숨겨진 물건이 워낙 중요한지라 떠나면서도 각별히 방어에 신경 쓴 것이다.

베논은 방어 병력을 모조리 집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다.'

흑마법사 베논은 마력을 일으켰다.

검은 마력이 피어난다. 방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마력. 폭군의 부활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흑마법사인 만큼 그 실력도 대단했다.

"나도 움직여야겠군. 적을...!"

베논은 수정구를 봤다.

그의 명령을 받은 언데드와 카오틱들이 미로에서 침입자를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펼쳐진 광경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베논을 경악하게 하기 충분한 광경이었다.

* * *

폭군의 무덤.

그 자체가 복잡한 미로이며 가는 길마다 복잡한 함정과 기믹이 적용된 던전.

전생에서도 악명이 높았으며,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여길 다 깬 유저가 없을 정도.

'여기서는 오른쪽. 바닥에 빙결 함정.'

그리고 진현우는 전생에서도, 게임에서도 이 던전을 공략했던 플레이어였다.

아무리 복잡한 미로든, 파악하기 힘든 함정이 있든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이미 모두 알고 있으니까.

'압살하는 벽 함정. 천장에서 독액....'

전생에서의 일이다.

이 세상이 막 게임으로 바뀌었을 때, 진현우가 막 '감정사'라는 클래스로 전직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브로큰 월드의 정보를 모두 기록하고 외우는 것이었다.

'게임 지식은 그 자체로 힘이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판단해서 기록했고,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때까지 반복해서 외웠다.

진현우의 그 판단은 옳았다.

그때 외웠던 정보들은 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으니까.

'베논, 그놈부터 찾아야겠지.'

흑마법사 베논.

이 지하 무덤의 네임드 몬스터다. 오랫동안 살아온 노괴로, 흑마법 실력 역시 뛰어나다.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결국은 흑마법사. 뛰어난 마법 실력도 불의의 기습을 당하면 발휘할 수가 없다.

"저기다! 저놈이다!"

- 그아아아아!

진현우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언데드와 카오틱들의 모습이 보였다.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다소 귀찮을 정도의 숫자.

그는 더욱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놈이 도망친다! 쫓아라!"

"어딜 도망치려고!"

그 뒤를 쫓는 언데드와 카오틱들.

달리던 진현우는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속도를 낮췄다.

점점 거리가 좁혀진다.

"좋아, 잡...!"

- 덜컥!

이 정도 거리면 잡을 수 있다.

그리 판단하고 카오틱들이 더욱 속도를 높이며 발을 내디딘 순간, 소리가 들렸다.

덜컥, 무언가 작동하는 소리가.

"아, 안 돼! 끄아아악!"

- 화르르륵!

천장이 열린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정교한 마법진.

카오틱들이 그 존재를 눈치채고 피하기 전에, 마법진들이 검붉은 화염을 내뿜었다.

"허억! 흐아아악!"

"시, 시발! 이게 무슨...!"

불이 붙은 카오틱들이 쓰러졌다.

저들을 치료해야 한다. 하나 그럴 시간이 없다. 화염 함정에 당하지 않은 이들은 동료를 무시하고 침입자를 뒤쫓기로 결심했다.

'그래, 그렇게 쫓아와야지.'

바로 그게 진현우가 원하던 바였다.

그는 골목을 돌더니 도끼를 빼 들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있는 벽을 노리고 투척했다.

벽을 강타하는 도끼.

- 퓨수우욱!

"아아악! 이, 시발!"

"커륵, 큭...!"

진현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도끼가 날아간 방향에 있던 벽이 열리더니 거기서부터 수많은 화살이 쏘아졌다.

막 골목을 돌아서 진현우를 쫓아오던 카오틱과 언데드들이 화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으, 으아아아아!"

"내가 저 새끼는 죽이고 만다!"

악에 받친 카오틱들이 필사적으로 진현우를 쫓았지만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누구도 진현우를 잡을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왜, 우리가 함정에 당하고 있는 거지?'

카오틱들도 미로에 함정이 있다는 것만 알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이 미궁을 만든 사람도 모를 것이다.

'마치 자기가 설치한 함정인 것처럼....'

그런 함정을, 진현우는 마치 자기가 설계한 것처럼 적들을 처리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

카오틱들과 언데드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남은 이들도 더는 쫓을 엄두를 못 냈다.

'쫓아 봤자 우리만 죽는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지배해서였다.

진현우는 전의를 잃은 적들을 미궁 속에 방치한 채 베논이 있을 심층부로 향했다.

심층부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

문 너머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진현우는 방패, 빛의 수호를 쥐었다.

'새 옵션을 시험해 볼 때가 왔군.'

* * *

엄청난 양의 마력이 순환하고 있다.

베논과 흑마법사들은 흑마법을 준비한 채, 저 너머에 있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전력을 알 수 없는 놈이다.'

베논은 지팡이와 고서를 쥐며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몸놀림으로 미궁을 돌파하고, 방어 병력을 역으로 함정으로 농락한 적.

진현우의 전력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한 번에 처리한다.'

모든 공격을 퍼부어서.

놈이 저 문을 연 순간, 수많은 흑마법을 퍼부어서 흔적도 남기지 못하게끔 만들 것이다.

베논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드르륵!

이윽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낡은 돌문이 굉음을 내면서 열린다. 베논은 흑마법사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얼마 안 지나서 문이 완전히 열리고, 그 너머에서 침입자의 모습이 얼핏 보였을 때.

"지금이다!"

- 콰르르르!

흑마법사들의 마법이 쏟아졌다.

공간을 가득 메운 흑자색의 화살과 칼날, 구체, 화염이 일제히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애초에 피할 수도 없다.

"죽어라, 침입자!"

그리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진현우는 빛의 수호를 앞으로 내밀면서 방패에 깃들어있는 옵션을 발동했다.

신성한 방패.

- 카드드득!

"...!"

진현우의 전방에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패가 나타났다. 방패는 쏟아지는 흑마법들을 막아 냈고, 이내 흡수하기 시작했다.

방패의 빛이 더더욱 거세졌다.

"마법을 더 퍼부어라! 방패를 부숴 버려!"

"잠깐, 뭔가...."

뭔가가 이상하다.

흑마법사가 그리 말하려는 순간.

-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충분한 흑마법을 흡수한 신성한 방패가 전방으로 빛으로 된 파동을 내뿜었다.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진현우에게 달려들던 언데드들이 일소했다. 놈들의 뒤에 있던 흑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허, 허억! 으으윽...."

"마, 마력이... 움직이지 않아."

강력한 파동에 휘말린 흑마법사들이 벽에 처박혔다. 다급히 흑마법을 펼치려고 했지만, 고통 때문에 영창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베논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 빌어먹을, 충격 때문에 마력이!'

베논은 지팡이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는 마력을 어떻게든 쥐어짜 내려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 콰아앙!

그 사이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말 그대로 신속. 베논이 반응할 새도 없이, 섬광이 순식간에 그의 앞에 도달했다.

후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컥, 끄르륵...!"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베논의 목을 서늘한 도끼가 짓누르고 있었다.

경악한 눈동자가 진현우를 바라봤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느냐.

- 퍼어억!

"끄으, 끄으아아악!"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도끼가 베논의 목을 그었다. 그리고 가슴께, 심장이 있는 곳을 파쇄권으로 강타했다.

강력한 힘이 심장을 강타했고, 그 충격으로 베논의 신체 내부의 마력이 엉망이 됐다.

"이러면 마법은 못 쓰겠지."

"헉, 허어억!"

마법 영창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즉사할 상처지만, 이놈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기에 죽지 않는다.

- 스으으으....

베논에게서 피어오르던 마력이 사라졌다.

준비하던 흑마법이 사라진 것이다. 진현우는 지상을 비추는 수정구를 흘깃 봤다.

격전을 벌이는 성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많지 않군.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베논이 그랬던 것처럼,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흑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는 마력을 일으켰다.

"선착순 한 명."

진현우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일어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것 같은 거대한 그림자. 영혼으로 이루어진 그리즐리 베어였다.

- 쿠어어어엉!

"제물들 갇힌 위치 부는 놈은 살려 준다."

포효하며 돌진하는 그리즐리 베어.

잠시 후, 처절한 비명이 대공동을 울렸다.

74화

생명의 구슬

곰은 사람을 찢는다.

스킬과 각종 아이템의 효과로 강화된 그리즐리 베어가 마법사에게는 재앙이었다.

특히 마력을 못 쓰는 마법사에게는 더욱.

"그러니까 저쪽에 있다, 이거지?"

"그, 그래. 침입자를 먼저 제거해야 할 거 같아서 제물로 바치는 건 나중으로 미뤘다!"

"좋아.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진현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온몸을 피로 칠갑한 그리즐리 베어가 피 묻은 이를 드러냈다.

끔찍한 광경에 흑마법사가 기겁했다.

"자, 잠깐! 살려 준다고...!"

"거짓말이야."

- 쿠어어엉!

콰드득!

살이 짓이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대공동을 돌아봤다.

"다 처리했나?"

- 쿠워엉!

완전히 무력화된 흑마법사들.

진현우에게는 너무 손쉬운 상대인 언데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카오틱들까지.

모두 그의 손에 쓰러졌다. 진현우가 중얼거린 말에, 곁에 있던 곰이 우렁차게 답했다.

- 레벨이 4단계 상승했습니다!

- 파쇄권과 섬광의 숙련도가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파쇄권의 숙련도가 5레벨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효과가 추가됩니다.

· 파쇄권 (B, Lv.5): 순간적으로 주먹에 힘을 집중하여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 Lv.5: 충격파를 일으킬 수 있다.

전투가 끝나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붉은 번견 소속의 카오틱들은 레벨이 높았기 때문에 경험치를 후하게 주는 편이었다.

한 번에 레벨이 4단계나 오를 정도로.

'흠, 이제 40레벨인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다.

파쇄권의 숙련도가 5레벨에 도달했다.

진현우는 자신의 주먹을 한 번 바라보더니 파쇄권으로 허공을 있는 힘껏 강타했다.

그러자.

- 투콰아앙!

파쇄권이 허공을 강타하더니, 마치 대포를 쏘는 것처럼 충격파를 앞으로 쏘아 냈다.

숙련도 5레벨의 효과였다.

'원거리 공격처럼 써먹을 수 있으니 좋지.'

기습적으로 쓸 수 있어서 유용하다.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도망치려고 하는 베논을 발견했다.

그는 베논의 허리를 짓밟았다.

"끄르르륵...!"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진현우는 베논을 어깨에 둘러멘 후, 놈이 가지고 있던 고서를 빼앗았다.

안타깝지만 놈이 쓰던 지팡이는 부러졌다.

[베논의 마도서 (영웅)]

· 설명: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흑마법사, 베논이 자신의 지식을 담은 마도서다.

· 착용 제한: 레벨 50, 마력 120

· 옵션: 마도서, 어두운 지식, 정신 지배

* 마도서: 마력의 최대양이 50% 증가하며 회복 속도가 25% 빨라진다.

* 어두운 지식: 흑마법과 사령술의 데미지가 25% 증가하고 효율이 50% 증가한다. 지배할 수 있는 언데드의 숫자가 늘어난다.

* 정신 지배: 마도서의 힘으로 적들이 소환한 언데드의 지배권을 뺏을 수 있다. 또한 정신에 간섭하는 공격에 강한 면역력을 지닌다.

영웅 등급의 고서.

흑마법사라는 직업답게 고서에는 마법 관련 옵션이 많이 붙어 있었다.

진현우는 고서를 주머니에 넣었다.

'지팡이하고 같이 쓸 수 있는 아이템이니까, 흠....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기겠지.'

고서를 챙긴 진현우는 옥좌로 향했다.

넓은 대공동의 중심부에 피로 물든 옥좌가 있었다. 폭군이 앉아 있었던 옥좌일 것이다.

여기 앉아서, 흑마법사와 카오틱들이 데리고 온 제물들의 생명력과 영혼을 흡수했겠지.

- 콰아앙!

진현우는 옥좌를 향해 파쇄권을 썼다.

후드득! 단번에 제단을 파괴하는 주먹. 그러자 아래에 감춰져 있던 문이 드러났다.

"어, 어떻, 게, 이곳, 을...."

"뭐? 어떻게 이곳을 알고 있냐고?"

"크륵...."

어깨에 멘 베논이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온갖 미로를 답파한 침입자가 미로를 만들게 된 '이유'가 있는 위치도 알고 있었으니.

당황한 눈동자가 진현우를 응시했다.

"궁금하냐? 일단 문이나 열어."

"크으윽!"

숨겨진 문에는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침입자는 들이지 않는 마법. 무시하고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는 있는데, 그랬다가는 문 너머의 기믹이 더욱 복잡해진다.

진현우는 베논의 얼굴을 문에 처박았다.

"커헉!"

- 쿠우웅!

묵직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짙은 어둠이 자욱했다. 진현우는 광휘로 길을 밝히면서 문 너머로 들어섰다.

내부는 역시나 복잡한 미궁이었다.

'이, 이놈은 대체....'

하지만 의미는 없다.

진현우는 익숙한 듯 미궁을 돌파했고, 순식간에 미궁의 심층부에 도달했다.

지켜보던 베논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도 마지막 문은, 누구도 못 연다.'

심층부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베논도 지나갈 수 없는 문이다. 이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오직 마그누스뿐이다.

진현우는 문을 올려다봤다.

"크, 흐흐, 여긴... 누구도, 못 지나간다. 저 결계, 크륵, 도, 네놈은 부술 수, 없다."

"말 좀 똑바로 해라. 듣기 싫으니까."

"끄어억!"

베논의 얼굴이 땅에 처박혔다.

문에는 검붉은 결계가 쳐져 있었다. 강력한 마법이라서 물리적으로 파괴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파훼법이 없는 건 아니다.

'미궁 곳곳에 있는 동력원을 찾아내서 제거하면 돼. 문제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지.'

진현우는 동력원을 찾지 않고 바로 왔다.

그 이유는, 시험해 볼 게 있어서였다.

"...."

"흐흐, 흐흐하하! 네가 이러는 동안...."

진현우는 베논의 머리를 걷어차면서 주머니 속에 있던 부서진 검을 꺼냈다.

이 아이템이 가진 옵션, 흡마검.

마력을 베고 흡수할 수 있는 검기.

'한번 시험해 볼까.'

진현우는 검을 쥔 채 문 앞에 섰다. 부서진 검이 빛을 발하면서 강렬한 검기를 일으켰다.

그걸 본 베논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한, 그 결계는, 절대 파괴되지...."

- 서걱!

"...않는, 어, 어어?"

파괴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베논의 귓가에 날카로운 절삭음이 들렸다. 그는 멍하니 문을 올려다봤다.

굳건히 서 있는 문. 그 문을 보호하고 있는 검붉은 결계에 자그마한 실선이 생겼다.

그리고.

- 카아아앙!

"...!"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을 보호하던 검붉은 결계가 파괴됐다.

산산이 조각나는 결계에 담긴 마력을, 부서진 검이 탐욕스럽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파괴되지 않는다며?"

"어, 으어...."

결계가 파괴됐다.

베논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절대로 파괴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결계가 부서지다니.

진현우는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 넓지는 않은 공간. 그 중심부에 붉은 기체가 가득 담긴 커다란 구체가 보였다.

[생명의 구슬 (전설)]

- 설명: 폭군 마그누스가 오랜 세월을 들여서 만든, 엄청난 양의 생명력이 깃든 구슬이다. 파괴할 경우 폭군 마그누스의 불사성을 파괴할 수 있으며, 그를 약화할 수 있다.

생명의 구슬이다.

폭군 마그누스가 여태껏 부활하기 위해서 희생했던 제물들의 생명이 깃든 구체.

몇천, 어쩌면 몇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생명력이 이 구체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것이다.

'이게 있는 한 폭군은 죽지 않는다.'

이 생명의 구슬에 생명력이 남아 있는 한, 폭군 마그누스는 계속해서 부활한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이 이 구슬을 깨는 것이다.

'가장 간단하면서 어려운 방법이지.'

폭군 마그누스도 바보는 아니다.

이 지하 무덤은 몇 겹의 방비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일차적으로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사기의 장막이, 이차적으로는 내부의 미로가.

거기에 생명의 구슬이 있는 곳까지도 함정이 가득한 복잡한 미로로 만들어 놓았다.

'전생에서도 이 생명의 구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었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다.'

너무도 위험하니까.

하지만 마그누스가 알았겠는가.

그런 기믹들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진현우는 생명의 구슬을 주머니에 챙겼다.

'이건 결정적인 타이밍에 부숴야지.'

최대한 효과적으로 쓰기 위함이다.

그렇게 진현우가 생명의 구슬을 챙긴 순간.

- 쿠르르르르!

갑자기 사방이 흔들렸다.

천장과 벽이 뒤흔들리면서 갈라지고, 돌가루와 먼지가 마구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하 무덤이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바깥의 장막도 무너지고 있을 것이다.

"아, 안 돼...!"

베논이 위를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천장이 크게 갈라지더니, 거대한 낙석이 되어서 베논에게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놈은 도와 달라는 듯 진현우를 봤지만.

"내가 미쳤다고 널 도와주겠냐?"

- 콰아앙!

"꺽...!"

진현우는 가볍게 무시했다.

콰득! 살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폭군을 부활시킨 흑마법사치고는 시시한 최후였다.

'빠르게 탈출해야겠군.'

진현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갇힌 사람들부터 빨리 구해야 한다.

* * *

카단은 흐르는 피를 닦았다.

지상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적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카단과 성기사단은 언데드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적들은 언데드만이 아니었다.

'이건... 버틸 수 없겠군.'

주변을 돌아보자 사방을 포위한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흑마법사와 언데드, 카오틱.

성기사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숫자다.

- 콰아앙!

"크흐으윽...!"

"벨! 제길, 벨을 뒤로 끌고 가!"

진현우가 쓰고 간 빛의 수호의 효과 덕분에 처음에는 비등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무덤에서 지원 병력이 올라왔고, 성기사단은 수적인 열세에 몰렸다.

- 캬아아아아!

"부정한 놈! 네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라!"

"카단 님! 위험합니다! 뒤로...!"

카단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선두에서 몰려드는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얼마 안 남은 신성력을 쥐어짜 낸다.

그의 주변에 나타나는 빛으로 된 검들.

"나는 괜찮다! 다친 기사들부터 치료해라!"

빛의 검이 언데드들을 꿰뚫었다.

카단은 이를 악물며 적들을 베어 넘겼다. 신체는 이미 한계에 달했지만, 물러날 순 없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

몰락한 고원.

언데드와 몬스터들에 의해 멸망한 지역.

카단은 기억하고 있다. 이곳이 눈부시게 빛나던 시절을, 수많은 사람이 살던 시기를.

'모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폭군 마그누스만 없앤다면 가능하다.

무덤에 놈을 없앨 방법이 있다. 자신들의 역할은 진현우가 그걸 얻을 시간을 버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 쿠오오오오!

"카단 님! 위험합니다!"

카단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살덩어리를 엮어서 만든 거대한 골렘.

검을 움켜쥐었다.

- 아무런 희망도 없이 썩어만 가고 있었소.

카단은 땅을 박찼다.

거대한 골렘이 두 팔을 높이 들었다. 그는 쥐어짜 낸 신성력으로 빛의 검을 만들어 냈다.

쏘아진 빛의 검이 놈의 무릎에 적중했다.

- 그아아아아!

터지는 빛.

골렘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돌진한 카단이 놈의 정면에 도달했다. 목표를 포착한 골렘이 들어 올린 두 팔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단순하지만 엄청난 힘이 담긴 일격.

거대한 바위가 다가오는 압박감이 들었다.

- 이 땅을 구원할 수 있다면.

카단은 방패를 높이 들었다.

막을 수 있나? 아니, 막을 수 없다. 하지만.

- 콰아앙!

"큭, 으으윽!"

공격의 방향을 틀게 하는 건 가능하다.

카단은 방패를 있는 힘껏 휘둘러 골렘의 두 주먹의 궤적을 틀었다.

우득, 콰드득! 방패를 쥔 왼팔이 부러지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흐읍...!"

카단은 땅에 꽂힌 골렘의 두 팔을 디딤대로 삼으면서 도약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놈의 등에 올라탄 채, 검에 신성력을 집중했다.

검이 신성한 빛을 머금었다.

- 그아아아아아!

등에 올라탄 카단을 붙잡으려는 골렘. 그 손길이 닿기 전에 카단이 검을 내질렀다.

푸욱! 칼날이 골렘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검에 모여 있던 빛이 폭발했다.

- 키아아아악!

신성력은 언데드의 상극.

누더기 골렘의 머리가 녹아내렸고,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천천히 쓰러졌다.

그와 함께 카단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헉, 컥!"

"단장님! 크윽!"

"오지 마라! 방진을 계속 유지해!"

"하지만...!"

카단은 도우려는 성기사들을 막았다.

적들이 그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지금이다! 적들의 대장이 쓰러졌다!"

누더기 골렘은 위험한 언데드다. 놈이 아군의 진형에 다가오기 전에 처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선 거지만 그 대가는 컸다.

쓰러진 카단은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 진현우가 들어간 무덤의 입구를 보기 위해서.

- 이 땅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목숨은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지.

"흠."

언데드들이 몰려든다.

카오틱과 흑마법사들이 카단을 노렸다. 수많은 마법과 스킬이 그를 겨누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시간은 충분히 벌었겠지.'

자신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진현우. 바닥을 알 수 없는 남자가 폭군을 처리하기를 바라면서, 카단은 눈을 감았다.

그런 그에게 적들의 공격이 쏟아진다....

"...."

아니, 쏟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공격은 쏟아지지 않았다.

카단은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찬란한 광휘.

빛에 고통스러워하는 적들의 모습. 그리고 그 너머에 서 있는, 진현우의 모습이었다.

카단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보람이 있군."

그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75화

아빌론 공방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