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진현우는 아공간에 든 세 가지 아이템을 확인했다. 더없이 평범하게 생겼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힘을 가진 아이템들이었다.
"여길 또 오게 될 줄이야."
저 너머에 거대한 장벽이 보였다.
일찍이 한 세력이 도전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했던 플로어 보스가 저 장벽 너머에 있다.
데이비드가 종을 울렸다.
- 스으으으으....
그러자 장벽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역할을 다한 종도 사라졌다. 자그마한 종이지만, 저기에 엄청난 양의 특산품이 들어갔다.
"쿨럭! 보입니까?"
"예. 저건...."
장벽 너머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보였다.
그리고 그 크레이터의 중심에, 모든 이가 넋을 잃게 할 정도의 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말도 안 되는군. 저게...."
"거인."
그건, 거인이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거인. 지금까지 봐온 미노타우로스나 사이클롭스는 비교도 안 된다.
고층 빌딩에 버금갈 정도의 체구를, 그 거구를 신비로운 빛의 갑옷으로 가린 거인.
"저걸 상대로 싸워서 이기라고요?"
"아무 정보도 없이 들어갔던 세력도 대단한 놈들이군. 제정신이면 못 싸웠을 텐데."
"으으음...."
플레이어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 여기에는 메사이어와 골든 이글에 소속된 플레이어가 모두 모인 상태였다.
배후에는 수천은 족히 넘을 차원 병사가 대기하는 상황. 말 그대로 모든 걸 썼다.
"현우야, 이길 수 있을까?"
"언제 내가 실패하는 거 본 적 있어?"
진현우가 앞으로 나섰다.
거인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다가오자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번에도 성공할 거야. 걱정하지 마."
거인이 적들의 존재를 인지했다.
거대한 거인이 크게 숨을 삼켰다.
- 우오오오오오!
"거인이 공격해 옵니다! 갑시다!"
"첫 번째 패턴! 준비!"
거인이 지축을 울리는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놈의 근처에 있던 공간이 갈라지더니, 어디로 이어진지 모를 포털들이 나타났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포털이.
- 구우우우우....
"그래, 저거다. 저게...."
그 사이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가, 인간이 튀어나왔다. 모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들이 정확하게 플레이어들을 인지했다.
- 오오오오오!
"빌어먹을, 다시 봐도 미친 숫자구만!"
"처음 장벽을 뚫었던 세력이 저 군대를 상대하다가 전력의 대다수를 상실했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싸우는 건 자살행위야!"
헤아릴 수 없는, 해일과도 같은 병력이 플레이어들을 향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들과 싸워서 이길 방법은 없다.
하지만 막을 방법은 있다.
"차원 병사!"
"다 돌진시켜!"
전략도, 전술도 없다.
쏟아지는 해일에 이쪽도 똑같이 해일로 부딪치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방법.
그렇기에 효과적이었다.
- 우오오오오!
"사제! 버프 있는 대로 쏟아부어!"
두 연합이 가진 것을 모두 털어서 고용한 차원 병사들의 1선이 뛰쳐나갔다.
적들을 향해서 돌진하는 차원 병사.
거대한 두 무리가 충돌했다.
- 콰아아아앙!
고요하던 크레이터 내부가 전투의 소리로 가득찼다. 거인이 소환한 몬스터들과 차원 병사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기 시작했다.
- 우, 우우우우....
거인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손이 허공을 붙잡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으로 공간을 말 그대로 찢어 버렸다.
크게 벌려진 차원의 틈.
- 화아아아악!
"우, 우아아아아!"
"빠, 빨려 들어간다! 자, 잡아 줘!"
갈라진 차원이 주변의 모든 것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차원 병사들도, 플레이어들도.
지금이 아이템을 사용해야 할 때다.
진현우는 제조한 아이템을 꺼냈다.
- 아이템, 균형의 천칭을 사용합니다.
저 틈을 닫을 수 있는 아이템을.
171화
차원 파괴자 (1)
- 아이템, 균형의 천칭을 사용합니다.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진현우는 금빛의 천칭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천칭이 빛이 되어 사라지더니, 허공에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천칭이 나타났다.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치우진 천칭.
- 균형의 천칭이 움직입니다. 천칭이 차원의 무너진 균형을 바로잡습니다....
천칭의 기울기가 평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인이 제 손으로 찢어 버렸던 차원이 무언가에 봉합된 것처럼 빠르게 회복됐다.
- 으, 우오오오오!
거인이 다시금 공간을 찢어 버리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방해했다.
균형의 천칭이 가진 힘이었다.
[균형의 천칭 (전설)]
· 설명: 부서진 세상들의 힘이 모인 결과물. 뒤틀린 균형을 바로잡아 차원 파괴자가 가진 차원을 다루는 힘을 약화시킨다. 억지로 힘을 쓰려 할 경우 대상에게 대가가 돌아온다.
거인이 허공을 찢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크기가 몹시 아담했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정도의 크기.
차원을 다루는 힘이 약해진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큭, 우욱...?!
허공을 찢은 거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게 아니라, 멋대로.
천칭의 효과였다. 억지로 차원을 다루는 힘을 쓰려고 한 탓에 대가가 돌아온 탓이었다.
- 콰아아앙!
거인이 거대한 천칭을 강타했다.
하지만 그 주먹은 천칭을 뚫고 지나갈 뿐이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천칭은 물리적인 공격으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잔, 재주를....
"저거, 우리를 보는 거 같은데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차원 파괴자가 고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놈이 입고 있던 갑옷이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뿜어진 빛은 다시금 차원 파괴자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 몸이 더욱 크게 부풀었다.
- 차원 파괴자의 갑옷에 담긴 힘이 그에게 흡수됩니다. 신체 능력이 크게 강화됩니다.
갑옷의 효과로 강화된 것이었다.
거인의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가 진현우를 봤다. 균형의 천칭을 소환한 당사자를.
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절 노릴 겁니다! 다른 사람은 흩어져요!"
- 콰아아아앙!
거인의 주먹이 허공을 강타했다.
그러자 허공이 깨지더니, 사방에서 수많은 균열이 나타났다. 그 균열들에서 어둠의 파동이 오직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 화아아악!
반응할 시간도, 저항할 틈도 없었다.
반응하기에는 너무 빨랐고 저항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진현우에게도 그랬다.
- 옵션, 엘프의 수호자가 발동합니다.
대신 그가 가진 갑옷이 반응했다.
자그마한 방어막이 수없이 전개되면서 진현우를 향해 쏘아지던 어둠의 파동을 요격했다.
진현우는 방어막이 벌어 준 짧은 순간을 이용하여 재빠르게 궤적에서 몸을 피했다.
- 화아아악!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어둠의 파동의 궤적에 있던 차원 병사들은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흩뿌려졌다.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미, 미친...."
그 위력에 모두가 경악했다.
저 정도 속도에 저 정도 숫자인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순간 사기가 꺾일 정도였다.
하지만.
- 커헉! 크하아악!
그 순간, 거인이 피를 왈칵 토해 냈다.
놈이 조금 전에 쓴 것은 차원을 다루는 힘. 그걸 쓴 탓에 큰 대가가 돌아온 것이었다.
거인이 몸을 못 추스르고 휘청거렸다.
'이제 저놈도 대가가 얼마나 큰지 몸으로 체감했겠지. 그럼 이제부터....'
차원을 다루는 힘은 꼭 필요할 때에만 쓰고, 그 외의 힘으로 싸우려고 할 것이다.
거인은 그게 가능할 정도의 힘을 가졌다.
놈의 두 눈이 진현우를 응시했다.
- 쿠우웅!
거대한 발이 땅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렸고 바닥에 수많은 갈라짐이 생겼다.
그 틈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 화아아악!
"...!"
기운에 닿은 차원 병사들이 비명도 못 지른 채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플레이어들은 불길함을 눈치채고 몸을 피했다는 것.
하늘 높은 곳까지 솟구친 검은 기운이 흩어지더니 사방을 감싸는 장막으로 변했다.
- 밤하늘을 보는 것만 같구나.
장막의 형상이 그러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수많은 별이 떠 있는 것 같은 형상. 밤하늘과 비슷해 보였다.
이윽고.
"방어막!"
하늘에서 수많은 구체가 떨어졌다.
밤하늘을 닮은 형태의 구체들이 단번에 응축되었다. 진현우가 황급히 외쳤고, 그 말을 들은 마법사와 사제들이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구체가 폭발했다.
- 퍼어어엉!
"크으, 아아악!"
"끄으으윽...!"
엄청난 폭발이 지면을 뒤덮었다.
방어막으로 위력을 감소시킬 수는 있었지만 막는 건 불가능했다. 방어막이 파괴되었고, 강력한 폭발이 병사들과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널브러지는 아군.
"이건 또 뭐야!"
그리고 땅에서 수많은 봉오리가 맺혔다.
플레이어들이 봉오리를 보며 당황하고 있는 가운데, 거인이 무릎을 크게 구부렸다.
"돌진! 양옆으로 피해요!"
"우아아아악!"
- 투콰아앙!
포탄이 쏘아졌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포탄, 단숨에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병사들. 저걸 이대로 뒀다가는 적 몬스터를 상대할 병력이 다 죽게 생겼다.
화련이 다급하게 외쳤다.
"진현우! 저거 어쩔 거야! 다 죽겠어!"
"저놈이 노리는 건 나야! 방법이 있으니까 전부 다 나한테서 떨어지고 봉오리를 부숴!"
"봉오리? 일단 알았어!"
"신이시여!"
화련이 불길을 일으키며 봉오리를 불태웠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 행동에 동참했다.
저 봉오리가 만개하면 엄청난 규모의 폭발을 일으킨다. 어떻게든 파괴해야만 한다.
- 천, 칭. 너부터, 죽인다....
"화가 아주 많이 나셨어."
차원 파괴자가 노리는 건 진현우뿐.
오직 그에게만 돌진해 오고 있었다. 진현우에게서 떨어지면 돌진에 휘말리지는 않는다.
모두가 황급히 멀어졌다.
"어떻게 할 방법은 있는 거겠죠!"
"없으면 이러겠습니까? 샬럿! 치료 준비!"
"뭐? 치료? 어, 어어! 일단 알았어!"
진현우는 사슬을 꽉 움켜쥐었다.
아공간에서 나타난 구속의 사슬. 저 거인의 기동력을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거인이 또다시 자세를 취했다.
'온다.'
자세를 취했다고 인지한 순간, 차원 파괴자의 거구가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눈으로 보고는 반응할 수 없는 속도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뿐.
'지금...!'
순식간에 코앞까지 들이닥친 거인과 정면에서 충돌하기 전에, 진현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섬광을 쓴 그가 가까스로 옆으로 피했다.
- 콰드득!
"크, 으으윽!"
하지만 다소 늦었다.
그의 왼팔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거인과 충돌한 왼팔이 말 그대로 곤죽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럴 가치는 있었다.
- 절그럭!
- 우, 우우우....
거인과 교차하던 찰나의 순간, 진현우는 놈의 발목에 구속의 사슬을 던졌다.
말 그대로 찰나였기에 차원 파괴자도 반응하지 못했다. 사슬이 놈의 발목을 휘감았다.
- 우욱, 크으으윽?!
거인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휘청거렸다.
놈은 자신의 발목을 휘감은 사슬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사슬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끝없이 늘어나는 사슬은 이윽고 거인의 전신을 포박했고, 놈이 입은 갑옷에 파고들었다.
- 아이템, 구속의 사슬을 사용합니다.
- 구속의 사슬이 차원 파괴자의 갑옷으로 파고듭니다. 갑옷이 가진 힘을 잃었습니다. 차원 파괴자의 강화 상태가 해제됩니다....
신비로운 갑옷이 그 빛을 상실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끝에서부터 부서지더니, 완전히 고철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인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몸에 드러난 근육이 조금씩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구속의 사슬 (전설)]
· 설명: 부서진 세상들의 힘이 모인 결과물. 차원 파괴자의 갑옷을 무력화해 강화 상태를 해제하며, 신체 능력을 약화시킨다.
구속의 사슬이 가진 힘이었다.
차원 파괴자의 강화 상태를 해제하는 아이템. 거기에 놈을 약화시키기까지 한다.
거인이 당황한 듯 제 몸을 돌아봤다.
- 그으으윽...?!
거인 스스로도 느낀 것이다.
갑옷이 주던 힘이 사라졌다는 것을.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그 얼굴에 큰 당혹감이 어렸다.
- 이런 걸, 하나도 아닌, 둘을!
차원을 다루는 힘에 제약을 둔 걸로도 모자라서 신체 능력까지 약화시킨다니.
거인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 네, 노옴...!
거인이 허공을 붙잡았다.
그리고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공간을 찢더니, 강력한 몬스터들을 내보냈다.
바깥이었다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강한 놈들을.
- 크하악! 저놈들을, 막아라!
진현우는 몬스터들을 바라봤다.
사이클롭스, 해진 로브를 입은 리치, 온몸이 차갑에 얼어붙은 얼음 골렘, 수많은 팔을 가진 괴물까지. 온갖 보스 몬스터가 보였다.
혼자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여긴 차원 파괴자가 피해를 감수하며 소환한 것이었다.
"콜록! 진현우, 이제 우리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길드끼리, 나뉘어서 저 몬스터들을 막아 주십시오. 차원 파괴자는... 제가 상대하죠."
"혼자서 말입니까?"
데이비드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차원 파괴자를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무모한 짓은 아니었다.
"저놈 상태를, 보세요."
"흠, 쿨럭! 과연...."
차원 파괴자는 차원을 다루는 힘을 강하게 썼고 그 대가를 그대로 돌려받았다.
놈의 전신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근육은 작아졌고, 몸을 추스를 수 없어 휘청거렸다.
"큭! 큰 부상을 입었군요. 문제는 상처 재생력이 꽤 빨라서 금방 회복할 것 같다는 건데...."
"그 전에 처리해야죠."
거인이 자살하려고 보스 몬스터들을 소환한 것은 아니다. 놈은 강한 재생력을 가졌기에, 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한다.
보스 몬스터들을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놈이 회복하면 끔찍한 상황에 처할 터.
"좋습니다. 일단 상처부터 회복하시고."
"내가 치료할게. 팔이...."
샬럿이 진현우의 왼팔을 치료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다 부서진 상황. 하지만 아예 손실된 건 아니었기에 치료할 수 있다.
진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치료받았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선두를 맡는다! 쿨럭! 다른 길드도 집결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적을 상대해라!"
골든 이글의 일원이 데이비드를 뒤따랐다.
윤서희와 화련, 임호석, 하이드를 비롯한 이들도 각자 무리를 갖춰 그들의 뒤를 쫓았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데이비드.
그가 핏물로 가득한 전장에 우뚝 섰다.
- 오오... 구오오오오!
그를 인지한 사이클롭스가 돌진해 왔다.
차원 파괴자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놀라운 크기를 가진 거인, 그런 거인이 돌진해 오고 있음에도 데이비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자신의 스킬을 쓸 뿐이었다.
"저놈은 내가 막는다."
데이비드가 단언했다.
그가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흩뿌려진 수많은 피가 그에게로 흡수되었다.
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큭, 으윽, 크흐으으...!"
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가냘프던 몸이 거대해지고, 피부는 핏물처럼 새빨개졌다.
데이비드의 두 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뻗은 손에 핏물이 모이더니 그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만들어 냈다.
- 혈전사.
피를 이용해서 자신을 강화하는 클래스.
여러 단점이 있기에 평소에는 약해지지만, 조건이 갖추어지면 강한 힘을 발휘하는 전사.
새빨갛게 충혈된, 이성을 찾기 힘든 눈동자가 저 너머에 있는 사이클롭스를 응시했다.
"크아아아악!"
- 커헉!
사이클롭스에 버금가는 거인으로 변한 데이비드가 순식간에 놈을 향해 돌진했다.
충돌하는 두 거인.
그게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172화
차원 파괴자 (2)
전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부딪친 것은 데이비드와 사이클롭스였다. 피로 만들어진 거대한 대검이 다가오는 몽둥이와 그대로 충돌했다.
- 그으으으윽?!
맞부딪친 검과 몽둥이가 부르르 떨렸다.
어느 쪽도 밀리지 않았다. 하나 그것만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는 사이클롭스에 비견될 힘을 가졌다는 거니까.
데이비드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콰아아앙!
- 커억!
맞부딪친 대검이 폭발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핏물이 사이클롭스를 덮쳤고, 놈의 강철 같은 피부를 녹였다.
혈전사가 가진 특성의 힘이었다.
"저놈은 데이비드한테 맡겨!"
"우리는 다른 놈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막는다. 가! 오는 놈들은 다 죽여라!"
골든 이글이 데이비드를 지원했다.
그리고 그들을 뒤따르듯, 윤서희를 비롯한 네메시스 길드가 적 몬스터들과 싸웠다.
- 쿠우우웅!
윤서희가 창을 지상에 내리꽂았다.
사방으로 퍼지는 새하얀 기운. 곧 거대한 결계가 전개되면서 아군에게 힘을 실어 줬다.
동시에 적들을 약화시키면서, 윤서희를 섬기는 수많은 강철 갑옷이 나타났다.
"우리는 리치를 비롯한 언데드들과 싸웁니다. 최대한 제 강철 갑옷들을 이용하세요."
"예, 길드장님."
맞은편에 리치의 군세가 보였다.
리치도 평범한 리치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리치보다 더 거대하며 더 불길한 노괴.
엘더 리치라는 이름의 보스 몬스터였다.
- 크하아아아!
엘더 리치가 불길한 숨결을 토해 냈고, 그에 응하듯 언데드들이 네메시스에게로 돌진했다.
두 무리가 맞부딪쳤다.
격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윤서희는 머리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봤다.
- 구우우우...!
"골렘!"
냉기 골렘의 주먹이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아군을 덮치는 일은 없었다.
- 화르르륵!
- ...!
주먹이 지상에 닿기 전에 강렬한 화염이 녹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지상에서 불로 만들어진 거대한 뱀이 솟구쳤다.
뱀의 불길이 냉기 골렘을 덮쳤다.
"멍청한 년. 그냥 깔려 죽게 둘 걸 그랬나?"
"저 망할...."
화련이 윤서희를 비웃으며 날아갔다.
격렬한 화염이 냉기 골렘을 불태우는 걸 보고 있으니 허파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윤서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들보다는 빨리 끝내야 합니다. 가요!"
"다 불태워 버려!"
두 길드가 각자 적과 맞서 싸웠다.
차원 파괴자가 그 광경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봤다. 자신이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 소환한 몬스터들이 당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거인의 손이 움직였다.
- 투우웅!
하늘에서 다시금 여러 구체가 떨어졌다.
처음과 비교하면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밤하늘을 닮은 형태의 구체.
하지만 그게 지상에 닿는 일은 없었다.
- 감히....
하늘로 쏘아진, 폭풍 같은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 구체들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구체들을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궤적을 망가트리는 데는 충분했다. 목적지를 잃은 구체들이 오히려 몬스터가 있는 곳에 떨어졌다.
- 콰아아앙!
- 캬아아아악!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차원 파괴자는 진현우를 분노에 찬 눈동자로 노려보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빠르게 치료하고, 저 인간을 죽인다.
오직 그 일념에서였다.
"쓰읍, 후우우...."
진현우는 그 틈을 이용해서 왼팔을 회복하고 있었다. 살도, 뼈도 짓이겨졌던 팔이었지만 광휘와 샬럿의 치료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하지만 감각은 희미했다.
"현우야, 치료하긴 했지만 한동안 왼팔은 쓰기 힘들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안 괜찮아도 해야지."
"그건... 그렇네."
다른 플레이어들이 차원 파괴자가 소환한 보스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몬스터들은 많다. 차원 파괴자의 앞을 지키고 있는 놈들이 있었다.
"저놈들은 우리가 맡으면 되는 건가?"
"가능하면. 무리는 하지 말고."
하이드가 진현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파티원들과 수많은 차원 병사가 있었다. 있는 대로 모은 병사들이었다.
"내가 신호를 주면 움직여."
"알았다."
차원 파괴자는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들을 소환한 탓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몸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보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 공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거야.'
진현우는 실피르를 들었다.
청량한 바람이 느껴졌다. 오로지 바람으로 빚어 낸 화살을 쥐면서 하늘을 겨누었다.
차원 파괴자도 그 모습을 인지했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조금 전에 진현우가 쏜 화살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게, 피해를 주기에는... 부족하다.
충분히 무시해도 되는 일격.
거인은 상처의 회복에 전념했다. 그게 실책이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 쉬이이익!
화살이 어마어마한 빛을 머금었다.
진현우의 마력을 탐욕스러울 정도로 삼키면서, 화살에 어린 빛이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손아귀에 엄청난 크기의 빛을 쥐고 있는 모습이 흡사 유성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저건....
거인이 이상함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화살에 담긴 마력이 한계에 달했을 때, 진현우가 화살을 쏘아 냈다.
- 콰아아아앙!
제5식, 유성.
굉음과 함께 한 발의 화살이 쏘아졌다.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유성. 화살은 드높은 하늘까지 말 그대로 순식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성이 폭발했다.
- 퍼어어엉!
유성이 폭발하면서 수많은 빛의 조각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처음에는 조금 느리게, 하지만 이내 가속도를 받아서 빠르게.
그 모습을 본 플레이어가 넋을 잃었다.
"저건... 유성인가?"
"뭐? 생뚱맞게 뭔, 빨리 저 괴물이나 죽여!"
"어, 어어."
그건 쏟아지는 유성우를 보는 것만 같았다.
헤아릴 수 없는 유성의 파편이, 수많은 화살이 땅에 닿았고 이내 몬스터들을 덮쳤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 콰아아아앙!
- 키아아악!
거센 폭발이 지척을 울렸다.
적중한 화살들이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고, 그에 휘말린 몬스터의 몸이 단번에 붕괴했다.
설령 빗나간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땅에 닿은 화살도 폭발하는 건 똑같았으니.
"지금이다! 움직여!"
"돌진! 길을 만들어라!"
연신 이어지는 폭발이 적들을 휩쓸었다.
땅이 파이고 몬스터의 파편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겨우 폭발이 멈췄을 때, 그때를 기다리던 하이드와 병사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지금이 기회다!"
"다 죽여! 일어나기 전에 죽이라고!"
- 캬아아아아!
유성에 당한 몬스터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최대한 숫자를 줄여야 한다.
하이드와 병사들이 적들을 빠르게 죽였다.
그리고 그때, 진현우가 깃발을 들었다.
- 쿠웅!
거대한 깃발이 땅에 꽂혔다.
거인이 만들어 낸 장막 안에 넓은 영역이 전개되었다. 땅이 새까맣게 썩어 들어 갔고, 지하에서 한때 폭군을 섬기던 이들이 기어 나왔다.
하지만 그 면면은 이전과는 달랐다.
- 히이이잉!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기사단이었다.
유령마에 올라탄 불길한 사령 기사들. 놈들은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인지했고, 커다란 랜스를 앞세우면서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
"저, 저거 아군 맞죠?"
"그래. 저것도... 히익! 유, 유령이잖아!"
그다음은 악령들이었다.
악령들이 날아오르더니 몬스터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몬스터들의 눈이 뒤집히더니 곁에 있던 동료들을 공격했다.
악령에게 빙의된 것이다.
- 벌레, 같은 놈들이...!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차원 파괴자가 언데드와 차원 병사들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때, 암흑 마법들이 거인을 덮쳤다. 진현우가 소환한 언데드 마법사단의 마법이었다.
거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 크으으윽!
그리고 진현우가 움직였다.
샬럿에게서 온갖 버프를 받은 그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쏘아졌다.
섬광이 순식간에 거인에게 도달했다. 진현우는 마창을 쥐며 거인을 주시했다.
'약점이 한둘이 아니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수많은 약점이 진현우의 눈에 들어왔다.
놈이 부상을 입으면서 드러난 약점들.
그는 부서진 검을 손에서 놓았다.
- 촤르르륵!
- 크, 으윽!
순식간에 분열한 환검이 차원 파괴자의 약점을 사방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나타난 구체들이 검들을 막아 냈지만, 모든 검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 크하아아아!
거인이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그는 자신이 소환한 몬스터들을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모두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이런, 무력감을...!'
거인은 순간 무력감을 느꼈다.
가진 힘들이 봉인되거나 제약에 걸린 상황. 게다가 자신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저 인간, 진현우가 제때 대응하고 있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 우, 우우욱!
거인이 주먹을 내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진현우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냉기 서린 도끼가 거인의 팔에 꽂혔고, 주먹이 움직이는 속도를 늦췄다.
- 화아아악!
허공을 강타한 주먹이 어둠의 파동을 쏘아 냈지만, 움직임이 늦었기에 피할 수 있었다.
진현우는 오히려 그걸 기회로 삼았다.
마창이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 푸우욱!
마창이 거인의 발목을 꿰뚫었다.
오랫동안 진현우의 팔을 잠식하고 있었기에 대미지가 최대치까지 강화된 마창이었다.
꿰뚫린 발목이 부식되었다. 그는 추격타를 날리려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이가 있었다.
- 콰아아앙!
- 크하악!
화련이었다.
불길을 휘감은 거석이 거인의 발목을 강타했고, 버티지 못한 거인이 무릎을 꿇었다.
화련이 한쪽 눈을 깜빡이며 등을 돌렸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 으윽, 크아아아아!
그의 검이 남은 발목을 베어 냈다.
두 발목을 잃은 거인이 균형을 잃었다. 놈은 쓰러지면서도 진현우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멀리서 쏘아진 피로 된 데이비드의 대검이 거인의 등을 강타했다.
- 이, 놈들이...!
- 콰드드득!
진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수많은 검기를 쏘아 내 거인의 왼팔을 베어 냈다. 거인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놈의 오른팔을 윤서희의 강철 갑옷들이 붙잡았다. 검이 다시금 움직였다.
- 이, 이런, 이건...!
거인의 사지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차원 파괴자는 넋을 잃었다. 자신이 이렇게 무력하게 밀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황한 눈동자가 하늘을 바라봤다.
- ...!
하늘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보였다.
그건, 천사였다. 날개가 달린 천사가 거인을 빛으로 된 창으로 겨누고 있었다.
이윽고 창이 놈에게로 쏘아졌다.
- 으, 그윽, 끄으으윽!
차원 파괴자의 몸이 완전히 고정됐다.
더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무력화된 몸. 놈의 가슴께 바로 위에 진현우가 올라탔다.
그의 주먹이 새하얗게 빛났다.
"피곤하다. 이제...."
거인이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성멸권이 그의 가슴께를 강타했다.
"끝내자."
황금빛 광채가 사방을 밝혔다.
한계치까지 응축한 신성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차원 파괴자의 심장을 덮쳤다.
놈의 심장이 빛이 되어 사라져 갔다.
- 크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지척을 울렸다.
173화
귀환
차원 파괴자가 쓰러졌다.
성멸권이 놈의 심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심장이 완전히 파괴된 순간, 놈의 상처를 회복하던 재생력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거인이 움직임을 멈췄다.
- 어떻게, 이런....
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차원 파괴자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생기를 잃어 가는 눈동자가 진현우를 응시했다.
- 저 인간들을, 어떻게 규합한 거지? 내분으로 죽어 가던, 어리석은 놈들을....
진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눈의 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빠르게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켜보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 계, 계약.
그때, 차원 파괴자가 발악하기 시작했다.
- 으, 우욱! 계약, 계약을 준수해야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약을 언급하면서 격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치 계약이 깨지면 자신에게 큰 페널티가 주어지는 것처럼.
놈이 몸을 크게 웅크렸다.
그 몸에 검은 기운이 집결했다.
"그냥 깔끔하게 죽지, 좀."
주변을 에워싼 장막이 더욱 튼튼해졌다.
어떤 공격으로도 파괴할 수 없을 정도. 그러는 동안에도 거인에게 모인 기운은 강해지고 있었다. 진현우는 저게 뭔지 알고 있었다.
- 너희는, 죽는다. 여기서...!
마지막 패턴, 자폭.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차원 파괴자는 자신의 몸을 바쳐서 적들을 죽이려고 한다.
플레이어들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저, 저거 자폭하는 거 아닙니까?!"
"제길, 장막이... 안 부서지잖아!"
"내보내 줘!"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크게 당황했다. 장막은 파괴되지도 않고, 거인은 엄청난 힘을 모아서 자폭하려는 상황.
꼼짝없이 갇힌 채로 죽게 생겼다.
하지만 길드장들은 여유로웠다.
"진현우 씨, 마지막 아이템은...."
"여기 있습니다."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였다.
아직까지 쓰지 않은, 마지막 아이템.
[세상의 염원 (전설)]
· 설명: 멸망한 세상의 염원이 담긴 구체다. 구체에 담긴 염원을 해방할 경우, 차원 파괴자의 마지막 발악을 잠깐 차단할 수 있다.
세상의 염원.
진현우는 망설임 없이 구체를 깨부쉈다.
그 안에 담긴 새하얀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 나왔고, 어두운 장막 내부를 크게 회전했다.
그리고 그 기운이 거인을 인지했다.
- 큭, 으오오오오...!
새하얀 기운이 거인의 몸을 에워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검은 기운을 강하게 억누르면서 거인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차원 파괴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다.
- 또, 무슨, 짓으으을...!
"장막!"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막고 있던 장막이 순간 약해졌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다 바깥으로 나가! 어서!"
"최대한 빠르게 장막 밖으로 도망쳐라!"
"가! 움직여!"
가장 선두에 있던 임호석과 하이드가 장막을 찢었다. 그를 뒤따르던 플레이어들이 장막을 더욱 넓히면서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차원 병사들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어? 뭐야, 병사들이 사라지는데요?"
"나중에 신경 써! 더 멀리 벗어나!"
차원 병사들이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당황하면서 장막 밖으로 나갔고,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멀리 떨어졌다.
차원 파괴자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얼굴에는 절망감마저 어려 있었다.
- 하.
거인을 감싸던 새하얀 기운이 흐려졌다.
억눌려 있던 검은 기운이 한계치까지 모였다. 차원 파괴자의 전신이 흉측하게 부풀었다.
- 계약을, 지키지 못했다. 내, 동족....
유언처럼 남긴 한마디.
- 콰아아아아앙!
흉측하게 부푼 거인의 몸이 터지면서, 거대한 규모의 폭발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에 휘말린 지형이 붕괴하고,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검은 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 승리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7층의 플로어 보스, 차원 파괴자를 영면에 들게 했습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일부 스킬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숙련도가 5레벨이 되어 새로운 효과가 추가된 스킬이 있으니 확인하십시오.
- 특성, 각인된 심장이 승급했습니다.
- 새로운 직업 특성을 익혔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칭호....
눈앞을 가득 메우는 메시지들.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 * *
전투가 끝났다.
진현우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사방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폭발한 거인의 파편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크레이터 인근의 지형이 아예 붕괴됐다.
"후욱, 후우...!"
"약화시켰는데도 이 정도라니...."
플레이어들도 만신창이였다.
차원 파괴자가 소환한 보스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현우의 곁으로 윤서희가 다가왔다.
"진현우 씨, 괜찮습니까?"
"예. 그쪽은... 괜찮아 보이네요."
"최대한 차원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삼고 싸웠으니까요. 다 사라질 줄은 몰랐는데."
윤서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군요. 가진 걸 다 퍼부어서 고용한 병사들이었는데 그게 다 사라졌으니."
차원 파괴자를 죽인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7층에는 다른 점령지를 탐내고 있는 세력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자원과 병력을 다 써 버렸으니, 앞으로 점령지를 방어하기 힘들어질 터.
하지만.
"아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예? 그게 무슨...."
진현우는 알고 있었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 생각대로,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7층, 부서진 대륙의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상위 층으로 올라갈 권한을 얻었습니다.
- 부서진 대륙이 정복되었습니다. 7층은 새로운 형태로 도전자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4층에서 봤던 것과 같은 메시지였다.
기믹이 바뀐다는 뜻. 차원 파괴자는 다시 살아나지 않는 보스 몬스터였다. 놈이 죽은 이상 7층의 기믹은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새로운 기믹으로 바뀔 것이다.
'전생대로 간다면 점령지도 사라지겠지.'
길드들은 7층의 점령지에서 큰 이익을 얻었었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점령지들이 사라지게 될 테니까.
진현우는 저 너머의 점령지들을 봤다.
"이건...."
윤서희가 당황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갈라지고 부서졌던 차원이 서서히 붙어 가는 게 보였다.
그 과정에서 부서진 대륙의 곳곳에 있던 점령지가 빛이 되어 사라져 가는 것도 보였다.
"제우스 길드가 열 좀 받았겠는데?"
임호석이 슬쩍 다가와서 말했다.
"그 새끼들, 플로어 보스 공략하는 것 좀 도와 달라고 했더니 입 싹 닦고 안 움직였잖나. 다 끝나면 이득 좀 보려고 했을 건데."
"자업자득이죠, 뭐."
그리고 이미 챙길 만큼 챙겼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오랫동안 7층에 정체되어 있었고, 그동안 특산품으로 상점에서 온갖 이득을 얻었을 테니. 물론 화가 나기는 하겠지만.
진현우는 변해 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나쁘지 않아.'
7층은 탑의 공략을 오랫동안 막은 큰 벽이었다. 여기만 공략하고 나면 상위 층은 공략법을 안다는 전제하에 빠르게 밀 수가 있다.
'이 시점에 공략한 거면 베스트지.'
7층을 이 속도로 공략한 건 긍정적이다.
전생보다 아득하게 적은 피해로 공략했으니까. 이건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생과 많은 게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 7층 공략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 제일 높은 공헌도를 달성한 플레이어, 진현우에게 그에 맞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진현우의 바로 앞에 상자가 나타났다.
모두가 보는 가운데, 그는 상자를 챙겼다. 잔뜩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샬럿이 다가왔다.
"아흐, 이제 좀 쉴 수 있겠지?"
"나도 그랬으면 좋긴 하겠는데...."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네."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며칠 뒤.
7층에서 자잘한 일을 처리한 진현우는 탑을 떠났고, 한국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공사가 끝났나?"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풍경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공사가 드디어 끝난 덕분이었다.
겉으로 안 보이게끔 해 뒀지만, 곳곳에 경보 시스템과 방어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요새라도 만들고 싶은 것이냐?"
"너도 자다가 또 기습당하기는 싫잖아."
"으음, 그건 최악이긴 했느니라."
인간의 형태로 변한 미호가 투덜거렸다.
마당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녀석을 방치한 진현우는 인터넷으로 침식률을 확인했다.
- 침식률: 56%.
70%를 돌파했던 침식률이 50%대까지 감소한 것이 보였다. 침식률이 감소했다는 건 세상 사람들 모두 몸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 [속보] 탑 7층 공략에 성공.
- 침식률 50%대로 하락, 전 세계에 빈발하던 게이트의 출현 빈도가 크게 낮아져.
- 각국의 플레이어 협회는 협력하여 남은 게이트들을 처리하고, 상위 층을 빠르게 공략하여 침식도를 더 낮추겠다고 선언했습니다.
- 정부는 게이트 공략에 성공한 플레이어들에게 훈장을 내릴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수많은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인터넷과 TV, 온갖 매체에서 쏟아지던 플레이어에 대한 비난도 잠잠해지고 있었다.
'한동안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신없겠네.'
진현우는 여기로 오면서 본 광경을 봤다.
서울은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아서 안전했지만, 다른 지역은 게이트로 꽤 피해를 입은 상황. 복구하려면 많은 자원이 들어갈 것이다.
- 예, 이번에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플레이어들이 7층 공략에 성공했죠. 그런데 어떻게 공략한 겁니까? 원래 지지부진했잖아요?
스크롤을 내리다가 잘못 클릭했다.
그러자 기사에 있던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뉴스 앵커와 전문가들이 나온 동영상이었다.
- 맞습니다. 각국의 랭커들이 있었음에도 여러 사정으로 공략이 안 되고 있었는데요. 사람들 말로는 진현우라는 플레이어가 7층에 오르고 난 뒤부터 공략이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루키였던 플레이어가 7층 공략을 이끌었다는 말씀이십니까?
- 예. 네메시스와 아그니스, 사자심. 거기에 미국의 대형 길드들까지 규합해서....
뉴스는 진현우의 행적을 되짚으면서 노골적으로 그를 찬양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진현우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인간들이 널 칭찬하고 있구나. 기쁘지 않느냐?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어째 영...."
"야, 흙은 좀 털고 들어와라."
불쑥 나타난 미호가 그렇게 물었다.
진현우로서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전생에서 수없이 겪었던 일이니까.
또 하나, 자신이 실패하면 저들의 태도가 금방 바뀔 것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었다.
- 그럼 그동안 제우스 길드는 대체 뭘 한 겁니까? 명색이 한국 최고의 길드 아닙니까?
- 제우스 길드는 아무런 역할도 맡지 않았다고 합니다. 플로어 보스 공략에 참가한 사람들의 말로는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고.
- 거절했다고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 그래서 최근 제우스 길드와 그 길드장인 유신을 비토하는 여론이 커지고 있습니다.
진현우에 대해서 다루던 동영상은 어느새 화제를 바꿔 유신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동영상에 나온 유신을 바라봤다.
"좀 쉬고 싶은데."
조만간 이어질 확률이 높은 대침공을 생각한다면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거기에 유신이 얽혀 있겠지.
"또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174화
준비
한동안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보상부터 확인해야지.'
보상을 확인하는 것.
가장 먼저 새로이 얻은 특성이나 강화된 특성, 숙련도가 오른 스킬들부터 확인했다.
· 전투 감각 (A): 후천적으로 발현된 전투 감각. 적과 싸울 때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이 활성화되어 소유자의 전투를 돕는다.
· 각인된 심장 (A+): 보유할 수 있는 마력의 최대량이 3배 상승한다. 마법 스킬의 대미지가 50% 상승하며, 마력 소모량이 감소한다. 이 특성은 레벨에 맞춰서 성장한다.
전투 감각은 웨펀 마스터의 새로운 직업 특성이었다. 각인된 심장은 일정 레벨에 도달하면서 A+등급으로 성장한 거였고.
전투 감각은 설명이 모호한 편이었는데, 직접 겪어 봐야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대도둑의 은신 (A, Lv.5)
* Lv.5: 그림자가 더욱 짙어져 은신했을 때 적들이 감지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 선풍 (A, Lv.10)
* Lv.5: 스킬의 위력이 20% 증가한다. 도끼가 분열하는 숫자가 4개로 늘어난다.
* Lv.10: 스킬의 위력이 추가로 30% 증가한다. 도끼가 분열하는 대신, 거대한 도끼를 투척하는 형태로도 쓸 수 있게 되었다.
· 섬광 (A, Lv.10)
* Lv.5: 2.5배의 마력을 소모하여 섬광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다.
* Lv.10: 더 긴 거리를 질주할 수 있다.
숙련도가 일정 레벨에 도달한 스킬들이었다. 진현우는 곧바로 업적 보상을 확인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7층의 플로어 보스, 차원 파괴자를 처리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차원의 수호자 (효과: 모든 능력치 +30)]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위험 수준에 도달한 탑의 침식률을 크게 낮추는 데 공헌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위기 극복 (효과: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능력치 +20%)]을 획득했습니다.
에픽 퀘스트 같은 걸 공략한 게 아니라서 칭호 보상이 다소 심심한 감이 있었다.
그만큼 능력치 상승량은 확실했지만.
"음...."
진현우는 상자를 꺼냈다.
차원 파괴자를 공략한 보상으로 얻은 상자. 안에는 두 가지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미감정 아이템과 전설 등급 아이템이었다.
[차원의 힘이 담긴 부츠 (일반)]
- 설명: 차원 파괴자의 힘이 담긴 부츠지만, 아직은 힘을 각성하지 않은 상태다.
· 옵션: 알 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차원 파괴자의 정수 (전설)]
- 설명: 차원 파괴자의 힘이 깃든 정수. 사용할 경우 능력치가 큰 폭으로 상승한다. 또한 특정 계통의 스킬을 보유했을 경우, 해당 스킬을 A+등급의 특정 스킬로 강화한다.
진현우는 정수를 빤히 바라봤다.
특정 계통의 스킬을 보유했을 경우, 해당 스킬을 A+등급의 특정 스킬로 강화한다.
이런 아이템은 일단 잡아 보면 알 수 있다.
- 차원 파괴자의 정수가 당신이 가진 스킬, 진각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사용할 경우 진각을 A+등급의 특정 스킬로 강화합니다.
"역시나."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진현우는 바로 차원 파괴자의 정수를 썼다. 정수에 담긴 힘이 깃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스킬이 강화되었다.
· 파멸 (A+, Lv.1): 땅을 강하게 짓밟아 그 충격으로 사방의 대지를 갈라지게 만든다. 갈라진 대지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치며, 기운에 닿은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스킬의 설명을 읽자마자 차원 파괴자가 땅을 짓밟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과 비슷한 스킬인 모양이었다.
'뭐, 유용하게 쓸 수 있겠네.'
등급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현우는 미감정 아이템, 차원의 힘이 담긴 부츠를 감정했다. 기억 감정 스킬을 쓰자 눈앞의 시야가 남김없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좀 달랐다.
- 네게 기회를 주지.
목소리는 들리는데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다. 오직 백색으로 물든 세상만 보일 뿐.
정체 모를 목소리만이 계속 들렸다.
- 방주를 위해 봉사하고, 내 명령을 따르거라. 그러면 네 소원을 이루어 줄 테니.
기묘한 목소리였다.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그러면서 노인 같기도 하면서, 아이 같기도 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누군가를 비웃고 있었다.
- 이건 계약이다. 넌 이제부터 이름을 버리고 차원을 파괴하는 자가 될 것이다.
화아아악!
시야가 더욱 짙은 백색으로 물들었다.
너무도 밝은 나머지 더는 눈을 뜰 수가 없는 지경이 됐을 때, 재생되던 기억이 끊겼다.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이름을 잃은 자, '차원 파괴자'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차원의 힘이 담긴 부츠 (일반)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 스킬, '과부하 (S)'를 새로이 익혔습니다!
부츠가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진현우는 부츠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차원을 건너는 자 (전설)]
· 설명: 인간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는 부츠다. 원래는 더욱 강한 힘이 담겼으나, 당신이 아직 다룰 수 없는 힘이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 옵션: 가속, 각력 강화.
· 스킬: 공간 도약.
* 가속: 공간 도약을 사용한 후 짧은 시간 동안 이동 속도가 큰 폭으로 상승한다.
* 각력 강화: 발을 이용한 스킬의 위력이 50% 증가하며 마력 소모가 30% 감소한다.
* 공간 도약: 일정 거리의 공간을 도약한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치고는 옵션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아직 다룰 수 없는 힘이다.'
뭔가 더 힘이 잠재된 거 같은데, 지금의 진현우로는 다룰 수 없는 힘인 모양이다.
그래서 원래보다는 옵션이 약해진 상황.
"뭐, 어쩔 수 없지."
진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이 아이템이 가진 스킬, 공간 도약만으로도 제 역할은 충분히 해 줄 테니까.
그는 부츠를 착용했다.
때마침 거실에서 TV를 보면서 뒹굴거리고 있는 미호의 모습이 보였다.
'공간 도약.'
진현우는 아이템의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앞의 공간이 갈라지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
순식간에 없어진 그의 신형은 TV 앞에서 뒹굴던 미호의 앞에 유령처럼 튀어나왔다.
"우햐아아앗!"
미호가 먹던 과자를 던지며 뒤집어졌다.
"음, 괜찮네. 마음에 들어."
"뭐, 뭐, 뭐가! 뭐가 마음에 든다는 것이냐! 시, 심장. 끄으응... 심장이 아프구나...!"
"네가 엎은 건 네가 다 치워라."
"이, 이게 누구 때문인데...."
미호가 끙끙거렸다. 진현우는 기억 감정으로 배운 스킬을 확인했다.
· 과부하 (S): 신체를 과부하시켜 일정 시간 동안 한계를 초월한 힘을 낼 수 있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이 스킬에는 숙련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부하. 가만히 스킬 내용을 읽어 보던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버프 스킬이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디버프가 주어지는 형태의 버프 스킬.
'나쁘지 않은데?'
디버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차원 파괴자와 싸울 때 놈이 강화되는 패턴이 있었는데 이게 그 스킬인 모양이다.
'대침공 때 잘 써먹을 수 있겠어.'
진현우는 마지막으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진현우]
· 레벨: 13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차원의 수호자
· 근력: 413 (+40) · 민첩: 332 (+40)
· 체력: 334 (+45) · 마력: 233 (+32)
· 마기: 125
능력치가 어느 정도 올랐는지 확인한 후, 진현우는 곧바로 상태창을 껐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 사람들이 당신을 통해 희망을 느꼈습니다. 신성의 파편이 한 단계 승급합니다.
"응?"
전혀 예상치 못한 메시지였다.
진현우에게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이 사라졌을 때, 뭔가 변한 것을 느꼈다.
정확하게 뭐가 바뀌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현우는 확실한 변화를 느꼈다.
"인간, 왜 그리 빛나는 것이냐? 전등 같은 것이라도 삼킨 것이냐? 눈이 부시구나."
"내가 오히려 묻고 싶어."
미호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진현우는 C+등급으로 승급한 신성의 파편의 설명을 다시금 유심히 살폈다.
- 생명이 당신에게 가지는 믿음, 희망, 신념, 신의, 선망, 숭배.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며, 그걸 토대로 강해지는 힘.
딱 하나, 걸리는 문구가 있었다.
그걸 토대로 강해지는 힘.
'희망, 선망, 숭배....'
7층 공략의 중추 역할을 했던 게 진현우라는 게 알려지면서 많은 유명세를 얻었다.
원래 유명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그 유명세 때문에 승급한 것인가?
'이걸로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진현우는 상태창을 껐다.
'뭐가 됐든 강해지면 도움이 되겠지.'
투기장에서 이 파편이 가지는 힘의 일각을 맛본 적이 있다. 이 파편이 완전히 완성되었을 때 어떤 힘을 발휘할지 기대가 되었다.
"야, 미호. 일어나라."
"우웅, 움직이고 싶지 않느니라...."
"덩치만 더럽게 커 가지고는."
진현우는 미호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가야 할 데가 있다. 그는 품속에서 한 가지 아이템, 탄생의 꽃을 꺼냈다.
'이것도 슬슬 써먹어야지.'
가야 할 곳이 있다.
* * *
바 오렐리아.
평소에는 제법 손님이 있는 곳이지만, 오늘은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있는 것은 바의 주인인 이수경과 진현우.
그리고 초대받은 몇 명의 사람뿐.
"오랜만에 뵙는군요. 요즘에 무척 바쁘실 것 같은데, 여기 있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안 그래도 찾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이수경의 말에 진현우가 혀를 내둘렀다.
저 말대로 최근에 그를 찾는 곳이 정말 많았다. 플레이어 협회에, 정부에, 다른 나라에.
"자기 나라로 귀화해 달라는 요청이 제일 많아서 귀찮더군요. 귀화할 생각도 없는데."
"플레이어의 숫자는 곧 힘이니까요."
"짜증 날 정도로 집요하더라고요."
이수경이 화려한 색깔의 칵테일을 건넸다.
청량한 맛이 나는 칵테일이었다. 진현우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면서 물건을 꺼냈다.
"뭐, 그건 됐고. 여기로 온 건...."
탄생의 꽃이었다.
그 물건을 본 이수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것 때문입니다."
"진귀한 물건을 갖고 오셨군요. 이건,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이... 어디서 얻은 겁니까?"
"엘프 여왕한테서 받은 겁니다. 옛날부터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밀려서."
진현우는 이수경에게 꽃을 건넸다.
그리고 이 꽃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이 적힌 레시피와 필요한 재료들까지 모두 다.
"제가 만들어도 되는데, 가능하면 최대한의 효능을 내고 싶어서요. 맡겨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비용을 내서라도 맡겨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욕심을 낼 수밖에 없군요."
이수경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재료들로 아이템을 만들면 스킬의 숙련도가 얼마나 오를지 짐작도 안 갈 정도였다.
그녀는 조심히 재료들을 챙겼다.
"완성하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 그리고...."
진현우는 몸을 돌렸다.
바 오렐리아의 안쪽에 한 무리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바깥이라면 사람들이 곧장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
"아무도 못 들어오게 잘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침공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은밀하게, 적이 알지 못하게끔.
175화
손해 볼 건 없다
결계가 작동했다.
바 오렐리아를 감싸는 결계. 허락되지 않은 이는 내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결계다.
여기서 허락된 사람은 오직 여섯 명.
"바쁘실 텐데 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 아니, 네 말이면 모여야지."
"괜찮습니다. 저희만 부른 걸 보면 큰일인 거 같은데, 시간을 내서라도 모여야죠."
"음. 제법 괜찮은 술이군."
바 오렐리아에는 진현우가 7층 공략을 함께했던 길드장들이 모여 있었다.
윤서희와 화련, 임호석, 데이비드.
이것보다 더 많은 길드장이 있었지만, 그들은 당장은 신뢰하기 힘든 이들이었다.
'윤서희와 임호석이면 뭐.'
둘 다 믿을 수 있는 플레이어다.
윤서희는 말할 것도 없고, 임호석도 전생에서도 사람들에게 인망이 두터웠던 사람이다.
데이비드는....
'데이비드는 좀 애매하긴 한데.'
전생의 데이비드는 대전쟁 이전에는 싸울 때가 아니면 온화하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전쟁 이후로는 내내 피에 취해서 광기에 찌들 대로 찌든 사람이 됐었다.
'그래도 부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대형 길드를 이끄는 사람이니까, 좋든 싫든 이번 자리에 불러야만 했다.
화련은 말뚝의 노예니까 상관없고.
"그래도 피곤하긴 하네. 기껏 침식률도 떨어트렸는데 좀 쉬어도 괜찮지 않니?"
"당신이 뭘 열심히 일했어요? 길드원들한테 떠맡기고 파티나 주구장창 다녔으면서."
"정부하고 플레이어 협회에서 제발 와 달라고 하는데 가 줘야지, 그럼 안 가니?"
"둘 다 그만 좀 싸우면 안 되겠나?"
임호석이 이마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떻게 이리 앙숙일 수 있을까. 둘이 대화하는 걸 듣고 있으면 절로 머리가 아파졌다.
때마침 온 이수경이 자리에 앉았다.
"근데 샬럿은 어디 간 겁니까?"
"술 먹고 뻗었습니다. 요 며칠 동안 너무 힘들었다면서 술을 무식하게 마셨거든요."
"그래도 간이 멀쩡한 게 신기하네요."
"뭐, 일단은 성녀니까요."
신성력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되면 와 달라고 했더니 술을 먹고 뻗었을 줄이야.
하이드도 게이트를 공략하겠다며 안 왔다.
그래도 이 정도 인원이면 됐다.
"많이 모여 봤자 좋을 것도 없긴 하지."
"네? 뭐라고 했나요?"
윤서희의 물음에 진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한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그건 사슬이었다.
"우선 모두 이걸 써 줬으면 합니다."
"이건...."
이수경에게 비싼 돈을 주고 산 아이템.
[망각의 사슬 (영웅)]
· 설명: 사슬을 건 사람과 간이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 계약을 위반할 경우, 상대는 사슬을 착용한 동안 나눈 대화를 망각한다.
간단한 아이템이었다.
고등급의 플레이어들이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대화를 나눌 때 쓰고는 하는 아이템.
몹시 비싼 물건이지만, 쓸 가치가 있다.
"이걸 써야 할 정도의 대화라는 건가요?"
"망각의 사슬? 내키지 않는데...."
"쿨럭, 크흐음!"
길드장들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유일하게 반기는 것은 화련뿐이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슬을 착용했다.
"아니, 화련. 당신...."
"사슬을 착용한 동안 나눈 대화를 잊는 것 말고는 별다른 페널티도 없잖니? 우리를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착용해도 상관없잖아."
"그, 그건 그렇긴 한데요."
윤서희가 적잖게 당황했다.
화련의 저 태도가 매번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평소에 보이는 성격은 변한 게 없는데, 진현우와 엮이기만 하면 달라진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으음, 어쩔 수 없나."
화련이 먼저 저렇게 나오니 거절하기도 그렇다. 실제로 페널티는 대단치 않았으니.
윤서희와 임호석이 먼저 사슬을 찼다.
데이비드는 물끄러미 사슬을 바라보다가, 연신 기침을 터트리면서 사슬을 착용했다.
"쿨럭! 그래서, 계약 내용은요?"
"제가 어떤 제안을 할 겁니다.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사슬이 발동하는 걸로 하죠."
"그럼 그 제안이 뭔지 들어야겠군요."
윤서희가 잔을 홀짝였다.
모두의 시선이 진현우를 향했다. 진현우는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주 천천히.
"대침공이 있을 겁니다."
"대침공... 말입니까? 누가 침공하는 거죠?"
"대적자."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적자.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카오틱과 마인들이 신처럼 여기는 존재니까.
그런데 그 존재가 이 세상을 침공한다니.
"본인이 직접 나서는 건 아닙니다. 카오틱과 마인들을 이용해서 침공하려는 거죠."
"목적은...."
"콜록! 이 세상에 큰 타격을 입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놈들 목적이야 뻔하잖습니까."
대적자의 목적은 유일하다.
플레이어들의 탑 등반을 막는 것. 카오틱과 마인들도 그걸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 세상을 침공해서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탑 등반을 크게 방해할 수가 있다.
그게 대적자가 노리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얘기군."
아그작, 임호석이 얼음을 씹었다.
그 눈동자가 진현우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우리도 그걸 알아야 네 말을 믿든가 말든가 하지 않겠나."
"마인과 카오틱들을 처리하면서 얻어 낸 정보들입니다. 제게 특수한 스킬이 있어서."
"어떤 스킬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사념을 읽을 수 있는 스킬입니다."
완전히 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도 아니다. 사물에 남은 기억을 읽는 것은 사념을 읽는 것과 비슷한 셈이었으니까.
"그 사념들로 알아냈다는 건가요?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긴 해요. 아니긴 한데...."
"어렵군.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우리도 네 말을 믿고 따르겠다만, 그게 아니잖아."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 세상은 대적자에게 공격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대적자가 부하들을 이끌고 침공해 온다고 해도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다.
'내가 회귀했다고 밝힐 수도 없고.'
대침공은 게임에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유저라는 걸 밝혀서 설득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잖습니까."
"흠...."
임호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제안하고자 하는 건 간단합니다. 조만간 있을 대침공에 대비해서, 최대한 은밀하게 대침공을 막을 준비를 하자는 겁니다."
"대침공을 막는다...."
"만약 적이 침공해 온다면? 준비한 보람이 있겠죠. 침공해 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나중에 정말로 놈들이 침공해 올 때를 대비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이 세상에는 계속해서 게이트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게이트를 대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나쁠 건 없다.
"그나마 확실한 근거를 들자면, 침식률입니다. 침식률이 70%가 넘으면서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들 보셨을 겁니다."
"그랬죠. 그 피해가 어마어마했으니."
윤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열했던 7층의 플레이어들이 단합할 수 있었던 것도 침식률의 폐해 덕분이었다.
"침식률은 탑이 이 세상을 침식한 정도. 70%가 넘으면서 탑과 지구의 경계는 흐려졌습니다. 대적자는 그 기회를 노린 거고요."
"지금은 다시 낮아지지 않았습니까?"
"이미 준비는 다 끝냈으니 침식률이 낮아진 건 크게 의미가 없을 겁니다. 아마도요."
실제로 전생에서도 그랬다.
높아진 침식률을 가까스로 낮춰도 대적자들은 별 무리 없이 지구를 침공하고는 했었다.
아마도 모종의 수단이 있을 터.
"여기 계신 분들이면 큰 부담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7층에서 많이들 버셨잖아요?"
"...."
침묵이 감돌았다.
많이 번 건 사실이었으니까.
윤서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그냥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사람이 한 말이라면....'
무시할 수가 없다.
진현우라는 플레이어가 탑을 오르면서 보였던 행적이 그의 말에 신빙성을 불어넣고 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하죠."
"난 불만 없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윤서희와 화련은 흔쾌히 수락했다. 둘의 반응에 임호석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쓰읍, 후우우.... 그래, 좋아. 나도 끼지. 7층에서 너한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임호석도 한숨을 내쉬며 동참했다.
이수경은 이들과 만나기 전에 이미 대화를 나눴고, 참가하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미국의 플레이어, 데이비드 혼자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진현우를 봤다.
"콜록! 좋습니다."
그러더니 제안에 수락했다.
"저도 당신의 제안대로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역시나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서로 여기서 들은 걸 유출하지 않게끔 조치를 취한 다음에."
그는 여기 모인 이들의 얼굴을 돌아봤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얘기나 해 보죠."
* * *
길드장들과의 회담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오랫동안 이어진 회담이 끝난 다음 날, 진현우는 샬럿과 함께 부산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헥, 헤엑! 혀, 현우야. 나 토할 것 같...."
"인간, 저 계집은 체력이 참 약하구나."
진현우는 성큼성큼 산을 올랐고, 샬럿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숙취 때문이었다.
"빨라, 너, 너무, 빨... 우욱!"
"인간, 인간. 저 계집이 토하고 있느니라."
"하나하나 나한테 보고하지 마."
진현우는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주변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뭔가를 찾기 위해서.
'침식률이 오르면 나타나는 것들.'
침식률이 일정 수치를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탑이 지구를 침식하기 시작한다.
그 침식의 대표적인 증상이 하나 있다.
'던전 발생.'
게이트와는 별개로 탑 내부에 있는 이세계의 던전이 지구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차이가 있다면 탑에서와는 다르게 공략한다고 한들 별다른 경험치를 안 준다는 것.
하지만 물질적인 보상은 준다.
'침식률 70%가 넘으면 생기는 던전들....'
그중에 딱 하나.
대침공에 큰 도움이 될 던전이 있다. 정확히는 도움이 될 보상을 주는 던전이.
게다가 샬럿만 있으면 날로 먹는 게 가능한 던전이다. 공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협회 홈페이지에 없었으니 아직 누가 발견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들끼리 공략하려고 숨겼거나.'
진현우가 바로 이곳에, 이 시기에 던전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그가 찾는 던전에 남은 일지를 봤기 때문이었다. 먼저 던전을 발견했지만, 공략에 실패한 이들. 거기에 적힌 일자가 이쯤이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던전이 있을 텐데.
"휴우! 토하니까 좀 개운해진 거 같아."
"더러우니까 내 곁으로는 오지 마라."
"너무해...."
한창 토하던 샬럿이 다가왔다.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가까이 있기만 해도 짙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뭘 했길래 술을 이렇게 마셨어?"
"아니, 오랜만에 언니가 말아 주는 술을 마시니까... 이게 멈추지가 않아서...."
"신성력 써서 취기 몰아내든가 해."
"낭만 없는 소리 하기는."
샬럿이 혀를 차면서 앞서 걸어갔다.
숙취 때문에 몸을 가누기가 힘든지 이리저리 휘청거리는데,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저러다가 넘어져도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플레이어니까.
"어, 걸렸, 꺄아아악!"
위태롭게 산을 오르던 샬럿이 결국 발이 걸렸는지 요란스럽게 자빠졌다.
그러면서 뭐든 잡으려고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고, 가까스로 뭔가를 잡았다.
- 철컥!
"어머?"
"응?"
바로 그때,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작동하는 것 같은 소리가. 잠시 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크게 진동했다.
- 쿠르르르르!
샬럿이 나자빠진 지점의 바로 앞이 크게 열리면서, 그 안에 숨겨진 것이 드러났다.
던전.
'찾았다.'
진현우가 찾던 던전이었다.
176화
성왕의 성소
땅이 말 그대로 열렸다.
바닥의 흙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문이 드러났다.
던전의 입구였다.
[성왕의 성소]
· 권장 레벨: Lv.100.
· 최대 인원: 50명.
· 설명: 성왕의 유해가 잠든 성소다. 성왕은 먼 훗날, 세상에 큰 위기가 닥치거든 이 성소를 찾아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격이 없는 자가 들어오는 것을 엄금하고 있으며, 그를 막기 위한 수많은 장치가 준비되어 있다.
섣부르게 성왕의 성소에 진입하려는 자는 그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만 할 것이다.
성왕의 성소.
샬럿은 입구를 멍하니 바라봤다.
"야, 너 빛난다."
"응? 뭐가 빛난... 어? 이게 왜 이래?"
"눈이 부시구나, 인간 계집."
샬럿의 몸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신성력의 발현이었다. 그녀가 가진 신성력이 성왕의 성소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길 쉽게 찾은 것도 샬럿 덕분이었다.
'전생에서 여길 먼저 찾았던 공략대는 이 산의 땅을 다 헤집어서 겨우 찾았다고 했었지.'
그걸 샬럿은 나자빠지는 걸로 찾아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찾아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이 성왕의 성소가 샬럿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녀를 초대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어쨌든.
'얘만 있으면 날로 먹을 수 있다.'
성왕의 성소는 그런 던전이다.
진현우는 굳게 닫힌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자욱하게 쌓인 먼지가 얼굴을 뒤덮었다.
"푸우, 먼지 한번 더럽게 많네."
"그런 것치고 내부는 제법 깨끗하구나."
내부는 새하얀 신전이었다.
문에 들어서자 넓은 공동이 나왔는데,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통로가 여럿 있었다.
진현우는 일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 잘못된 통로를 선택했다. 끝에 도달하자 예상치 못한 함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략대원 5명이 허망하게 죽었다.
- 이번 통로도 잘못 선택했다. 신전을 지키는 가디언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공격했다. 이게 권장 레벨 100의 던전이 맞는 건가?
간단한 기믹이다.
저 통로들 중에서 옳은 통로를 선택해서 나아가는 것. 잘못된 통로를 선택하면 이 성소에 있는 방어 시스템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옳은 통로를 어떻게 찾느냐?
"야, 샬럿. 어디로 가고 싶냐?"
"뭐어? 그걸 나한테 왜 물어? 평소 같았으면 네가 알아서 척척 앞으로 갔을 거면서."
"이번에는 네 직감대로 가는 게 맞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샬럿은 진현우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통로들을 돌아봤다.
저 중에서 어디로 가고 싶은가.
"저기, 오른쪽 통로가 마음에 걸려."
"그럼 거기로 가자."
"진짜? 이거 맞아?"
진현우는 샬럿의 등을 떠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샬럿이 기겁했다.
"나, 날 왜 밀어? 설마 사제 보고 선두에 서라고? 여기 몬스터 뭐 언데드라도 나와?"
"사제가 아니라 성녀지."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 거니...?"
샬럿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진현우는 완고했고, 샬럿은 마지못해 선두에 서 걷기 시작했다.
진현우와 미호가 그 뒤를 따랐다.
"호호, 인간 계집. 다리가 떨리는구나."
"으, 으으. 함정이 있는 건 아니겠지...."
"있어. 근데 너하고는 상관없을 거야."
"어, 어떻게 그리 자신할 수 있는 거야?"
왜긴 왜야.
이미 겪어 본 던전이니까 그렇지.
일행은 어두운 통로를 말없이 걸어갔다. 겁에 질린 샬럿이 주변을 둘러보느라 속도는 느렸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 문이다."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주변을 계속 경계하던 샬럿은 십자가로 문을 두들겼다. 함정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자 닫힌 문이 멋대로 열렸다.
"하, 함정... 이 아니네? 뭐야?"
그 너머로 역시나 어두운 통로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샬럿이 발을 내디디자.
- 화아아악!
"오, 밝아졌구나."
통로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샬럿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미호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내 기분 탓인 것이냐? 이 신전이 저 계집을 반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기분 탓이 아닐걸."
그 뒤로도 기이한 일은 계속 일어났다.
신성한 빛을 두른 가디언들이 나타났지만 샬럿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고, 설치되어 있던 함정들은 샬럿이 지나가도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환영하는 것처럼.
"...여기가 끝인 거 같은데?"
"어, 그런 것 같네."
길게 이어지던 통로가 끝났다.
그 끝에 있는 것은 넓은 호수와 양피지가 붙은 거대한 관이었다. 신기한 것은 호수의 물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다는 것이었다.
샬럿이 물을 찰랑거렸다.
"신성력이야."
신성력이 어렸기에 빛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호수의 물에 어린 빛이 중심에 있는 관으로 빨려 들어갔다.
관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 이 신성한 기운은... 성녀인가....
"저 돌이 말도 하는구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샬럿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이곳은, 언젠가 찾아올 내 후예들을 위해 마련해 둔 곳. 자격이 없는 자는, 올 수 없다.
"자격? 아, 그래서!"
샬럿이 알겠다는 듯 박수를 쳤다.
온갖 함정에 가디언들까지 다 있는데 왜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건가 했더니.
성녀라는 클래스를 가진 그녀가 성왕의 후예로 인정받았기에 그런 것이었다.
- 성녀여, 세상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각오는... 되어 있느냐....
"네? 아, 되, 되어 있습니다."
진현우는 당황한 샬럿의 옆구리를 찔렀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지만, 관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몇 번 크게 점멸했다.
- 보이는구나. 네가 걸어 온, 여정이.... 숭고한 희생을 해 왔기에, 너는, 자격이 있다.
관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 네 세상이 위기에 처했다면, 여기 있는 것들이,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하는 거 한번 더럽게 답답하군.'
호수를 가득 메울 정도의 빛이었다.
그 빛은 곧 샬럿에게로 몰려들었고, 그녀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샬럿은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신성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 어라? 응?"
그리고 샬럿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특성: 성왕의 후예 (S)를 익혔습니다.
- 스킬: 신성 요새 (S, Lv.1)를 익혔습니다.
새로운 특성과 스킬을 익혔다는 메시지.
그리고 또 하나, 관에 붙었던 커다란 양피지가 다가오더니 샬럿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신성 요새 구축 (전설)]
· 설명: 암흑 시대, 수많은 괴물과 싸우며 사람들을 구하고 성왕국을 건국했던 성왕의 힘이 담긴 양피지다. 단 한 번, 신성 요새를 성왕이 썼던 수준으로 구현할 수 있다.
샬럿의 입이 헤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보상이었다. 그걸 바라보던 미호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파리가 들어가겠구나, 인간 계집."
비꼬는 말이었지만, 그 말은 샬럿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양피지를 보고 있었다.
'뭐, 전생하고 크게 달라진 건 없네.'
진현우는 전생을 떠올렸다.
여길 발견한 건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여러 가지 우연과 행운이 겹쳐서 일어난 일.
샬럿과 진현우는 운 좋게 이곳을 발견했고, 샬럿을 이용해서 말 그대로 날로 먹었다.
'그때는 탑을 공략하는 데 썼었는데.'
전생의 탑 공략은 절망적이었다.
인력 부족이 특히나 심했던 상황. 이 아이템이 주는 효과는 그때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탑을 공략하는 데 썼지만.
'나중에 후회했었지.'
대적자에 의한 대침공이 일어났을 때, 저 양피지가 없다는 걸 얼마나 후회했던가.
저게 있었더라면 피해가 크게 줄었을 텐데.
이번에는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진현우는 여전히 넋을 잃고 있는 샬럿의 어깨를 두들기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 인간이 품을 수 없는 신성을, 품은 자여.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남은 빛이 진현우에게 흘러들어 왔다.
- 이게,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스킬을 익혔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 성흔 (A+, Lv.1): 다음에 가하는 공격에 강력한 신성력을 담는다. 상대가 마족이거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적일 경우, 지울 수 없는 성흔을 남겨 각종 디버프를 부여한다.
"이건...."
진현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생에서 여기에 왔을 때는 샬럿만 뭔가를 얻어 갔지, 자신은 딱히 얻어 간 게 없었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신성.'
그것밖에 없다.
뭐가 어찌 됐든 나쁠 건 없다. 아니, 오히려 진현우에게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 파스스스....
모든 신성력을 사용한 관이 사라져 갔다.
관을 에워싸고 있던 호수도 마찬가지였다. 가뭄이라도 온 것처럼 물이 메마르고 있었다.
- 항상, 선을... 행하거라....
그 말을 남긴 관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적이 감돌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샬럿은 관이 있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돌아가자."
"어, 으응."
여기서 얻을 건 다 얻었다.
남은 건 대침공에 대비해서....
'적들의 눈을 좀 돌려야겠어.'
마인들의 눈을 속이는 것뿐.
* * *
침식률은 50%까지 떨어졌고, 세상 곳곳에 벌어졌던 이상 현상도 크게 줄어들었다.
아직 탑 공략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침식률이 크게 떨어졌다는 건 기뻐할 만한 일.
이를 두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미국에서 침식률을 떨어트린 것을 기념하여 추모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를 개최했죠.
- 미국 플레이어 협회와 미국의 대형 길드인 골든 이글이 협력해서 개최한 행사라고 하는데요. 이를 두고 여러모로 말이 많습니다.
- 그렇습니다. 탑 공략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많은 피해자도 발생한 상황인데 추모식을 제외한 다른 행사를 벌이는 게 맞느냐. 이런 말이 많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이 성대하게 행사를 벌인 것이다.
침식률이 올라가면서 발생한 사망자들을 추모하면서, 7층 공략 성공을 축하하는 행사.
여론은 엇갈렸다.
- 질질 끌리던 7층을 공략한 거니까 뭐, 사기 진작 차원에서 행사 좀 해도....
- 말이 되냐? 복구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행사야? 그 돈을 아껴서 차라리....
- 야, 골든 이글이 피해 복구하려고 낸 기부금이 얼만데 그런 소리를....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국도 그 뒤를 따랐다.
미국에서 개최한 행사 때문에 말이 많은데, 그걸 한국도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플레이어 협회가 주도하는 형태로.
- 네메시스와 사자심, 아그니스 길드는 피해 복구를 위한 지원금을 크게 기부하면서 미국에서 그랬듯 추모식을 열겠다고 했습니다.
- 동시에 플레이어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두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행사 준비 때문에 나라 전체가 시끄러워진 상황. 그걸 음지에서 비웃는 이들이 있었다.
"축제? 머저리 같은 놈들이군."
마인들이었다.
침식률이 크게 올라간 틈을 타서 대적자의 도움을 받아 한국과 미국에 침투한 마인들.
그들은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래, 지금은 승리를 만끽해라."
깊은 지하.
그곳에는 마인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준비해 왔던 '사슬'들이 심겨 있었다.
마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잠깐뿐인 승리일 테니."
177화
전조
행사는 착실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일어나는 행사. 그 특이성 때문에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
윤서희는 그 틈을 타서 움직였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으니 제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게... 좀 귀찮군요."
"그만 징징거리고 움직이기나 해."
"싸가지 없는...."
화련이 그녀와 동행했다.
둘은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각종 마법진과 방어용 아이템 따위를 설치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끔, 서울에 설치된 몬스터 방어 시설들을 최대한 은밀히 점검했다.
"아하, 이것들. 재밌는 짓을 했네."
그러던 도중에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방어 시설들을 무력화하는 장치가 설치된 게 보였다.
"뭐예요?"
"원격에서 이 시설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아이템. 누가 설치했는지는 뭐, 뻔하지."
"마인이나 카오틱이겠군요."
진현우가 경고했던 대침공이 실제로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윤서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제거할 수 있겠어요?"
"제거하면 들키잖니. 바보야? 이 아이템들을 남겨 둔 채 작동하지 않게끔 해 둬야지."
"바, 바보...."
윤서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화련은 설치된 아이템의 작동을 방해한 후, 여러 마법으로 방어 시설들을 강화했다.
대침공 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지역은요?"
"임호석, 그 늙다리가 돌아다니고 있어. 파라켈수스의 음침한 여자도 도와준다던데."
"공격은 서울에 집중될 거라고 했었죠?"
"그 남자 말로는."
화련은 진현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울은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 안전 지역. 플레이어와 관련된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여길 집중 타격 해서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 대적자가 첫째로 노리는 것일 거라고 했었다.
"그 남자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요?"
"몰라. 난 그냥 믿고 따를 뿐이야."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윤서희는 화련을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믿고 따른다는 말이 이렇게 안 어울리는 여자가 또 따로 있을까. 들을 때마다 놀라웠다.
"...끝났으면 빨리 가죠. 시간이 없어요."
"알아."
둘은 재빠르게 다음 장소로 향했다.
맡은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 * *
그로부터 며칠 뒤.
한국과 미국, 두 국가에서 예정된 대로 행사가 벌어졌다. 먼저 추모식이 열렸고, 다음으로 7층의 공략을 축하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흠...."
진현우는 광장을 내려다봤다.
플레이어 협회의 사람들과 행사를 보러 온 민간인이 모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길드의 수뇌부들도 보였다.
"진현우, 네 말대로 행사를 열기는 했다만, 자신이 있으니까 이렇게 한 거겠지?"
"없으면 안 했겠죠."
진현우의 곁에는 근육질의 중년 남자, 임호석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인과 카오틱들이 이 장소를 덮친다고 생각하면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군...."
"오히려 이게 더 안전할 겁니다."
"후우,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자칫 잘못하면 대참사다.
하지만 신성 요새가 있는 이상, 여기에 가능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게 오히려 낫다.
요새가 그들을 지켜 줄 테니까.
'이제 남은 건....'
진현우는 하늘을 바라봤다.
'협회든, 어디든 있을 내통자들이 우리 움직임을 눈치챘느냐, 눈치채지 못했느냐.'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적들의 시선을 돌리고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다.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자신하지만, 이쪽도 적들의 움직임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
"뭐가 그리 답답하지?"
"...!"
임호석의 중얼거림에 누군가 답했다.
그는 몸을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잘 정돈된 백색의 머리카락과 빼어난 외모를 가진 남자가 보였다. 제우스의 길드장, 유신이었다.
"오랜만이군, 임호석."
"음, 유신...."
유신을 만난 임호석이 침음성을 흘렸다.
진현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임호석과 인사를 나누던 유신이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 입가가 비뚜름해졌다.
"임호석, 저 남자는 누구지?"
"알고 있지 않나?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모르겠군. 별로 관심이 없어서."
미호가 진현우의 어깨에서 코웃음을 쳤다.
- 저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구나.
진현우도 똑같이 생각했다.
탑에서 카오틱들을 보내서 처리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7층에서 전언을 보냈던 걸 생각하면 유신이 그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걸 알면서 진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진현우입니다. 제우스의 길드장이신 유신 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
유신이 진현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것 같은 반응이었다. 진현우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유신은 손을 맞잡지 않았다.
"그래. 진현우라, 이름을 듣고 보니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군."
"들은 적이 있다고 하시니 다행이군요."
진현우는 웃었고, 유신은 무표정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신은 임호석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뭐가 그리 답답한 거지?"
"아니, 크흠."
임호석은 헛기침을 터트렸다.
머릿속으로 변명할 말들이 떠올랐다.
"저 행사 말이다. 이 상황에 사람들을 모아서 행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답답하군."
"7층을 공략한 게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너희가 이루어 낸 일이잖나."
"뭐, 그렇기는 한데. 저럴 시간에 8층을 공략할 준비나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7층을 공략한 플레이어 중 일부가 8층에 진입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7층의 공략에 지쳐서 지구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같군. 안 그래도 8층으로 선발대를 보내 뒀다. 유용한 정보를 얻으면 공유하지."
"허어...."
7층에서 플로어 보스 공략을 안 돕고 놀던 놈들이 8층 공략에 저리 적극적이라니.
임호석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선발대들 보내서 8층을 파악하고, 거기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선점하겠다는 건가.'
대형 길드를 이끌어 온 임호석에게는 유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플로어 보스는 불필요한 자원이 소모되니 피하고, 돈이 되는 8층 공략은 하겠다.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거참... 고맙군."
"고마워할 것까지야."
"음,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고. 협회 측에서 훈장을 준다고 해서 먼저 가 봐야겠어."
임호석은 등을 돌렸다.
진현우가 그를 뒤따르면서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를 응시하던 유신과 눈이 마주쳤다.
유신의 눈동자는 더없이 차가웠다.
"...."
"...."
점점 멀어져 가는 임호석.
유신은 입을 움직이지 않으며 속삭였다.
"신호를 보내라."
"예."
그의 등 뒤에 있는 그림자가 대답했다.
유신은 멀어지는 진현우를 노려봤다.
"윤서희, 화련, 임호석, 진현우. 7층의 공략을 주도한 놈들의 절반은 여기서 죽는다."
* * *
탑.
마인과 카오틱들을 위해 마련된 별개의 층.
짙은 어둠이 드리운 곳에, 수많은 마인과 카오틱이 도열한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약속된 때를.
"구트만 님, 모두 집결했습니다."
"...."
그 선두에 수많은 팔을 가진 마인, 구트만이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 지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행사가 펼쳐진 나라의 모습이.
"흥, 저딴 소국에 사는 놈들이...."
구트만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7층의 공략에 성공한 것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 구트만의 심기를 건드렸다.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 구트만.
"예, 주인님."
그가 섬기는 대적자의 목소리였다.
구트만을 비롯한 마인과 카오틱들은 목소리가 들리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인간을, 플레이어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 적들은 이 기습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을 것이다. 실패는, 생각하지 않고 기다리마.
"그리하겠습니다, 주인님."
구트만이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굳게 닫혀 있던 포털이 열렸다.
마인, 구트만은 몸을 일으켰다.
"한 시간 반 뒤에 진입한다."
* * *
행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협회와 협력해서 주변을 경계하던 윤서희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길드장님, 부산 쪽에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꽤 규모가 커서 저희한테 지원을 와 줬으면 한다고 협회 쪽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부산에서요?"
"예. 포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급한 일이라서, 나중에 반드시 보상하겠다고...."
윤서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이가 보기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인상을 찌푸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정말로 그 남자 말대로....'
윤서희는 속내를 숨기며 입을 열었다.
"다른 길드는요?"
"제우스나 아그니스, 사자심과 아웃로우, 그 밖에 다른 길드도 똑같은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산 외의 지역에도 나타나서...."
"길드장이 움직일 필요는 없겠죠."
"예. 각 길드의 길드장들은 가능한 행사 자리를 지켜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윤서희는 입술을 매만지면서 잠깐 생각하는 척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윤하연 부길드장을 보내세요. 믿을 수 있는 길드원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게끔 하세요."
"알겠습니다."
보고한 길드원이 빠르게 떠났다.
윤서희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른 길드들도 똑같이 길드원들을 파견했겠지. 그만큼 서울의 방비가 약해진다는 것.'
윤서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건... 너무 공교로워. 대적자는 몬스터를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윤서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행사장에 있던 길드원들이 일부 떠나는 것이 보였다.
다른 길드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마인들이 침공해 온다는 것인가.
모든 정황이 그게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서희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행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 에, 그럼, 훈장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익숙한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진현우였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7층 공략에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게 알려졌다.
그걸 기리기 위해서 훈장을 수여하겠다.
일단 대외적인 이유는 그러했다.
"후우우...."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예, 잠깐, 긴장돼서."
이렇게 평화로운데, 곧 있으면 마인들이 침공해 올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세상에 몬스터가 나타났던 때의 기억.
'이번에는....'
달라져야만 한다.
윤서희는 입술을 깨물며, 진현우가 무대 위에서 훈장을 수여받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어? 하늘이... 왜 저래?"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켰다.
오늘은 유독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공기도 좋고, 날도 따뜻해서 외출하기 좋은 날씨.
그랬던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 하늘 색깔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이 금방이라도 핏물이 떨어질 것처럼 붉어졌다.
지상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하늘에서 강력한 마력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 반응할 새도 없이.
- 카드드득!
붉게 물든 하늘이 크게 갈라졌다.
그 틈 사이로 익숙한 것이 보였다. 붉게 물든 포털. 이 세상에 처음 몬스터가 쏟아졌을 때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포털이었다.
"포, 포털!"
"저 붉은 포털은, 설마!"
포털을 인지한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포털이 열렸다.
- 드르르륵!
"끼아아아악! 어, 어어?"
"이건... 사슬?"
모두가 포털에서 몬스터가 쏟아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포털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사슬이었고, 그 사슬이 땅에 꽂혔다.
윤서희가 다급히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야! 사슬 곁에서 물러나세요! 얼른!"
사슬 곁에 전이 반응이 일어났다.
수많은 검붉은 마력이 모였고, 그 마력은 금방 형체를 갖추었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이들의 형체로.
"마, 마인."
마인이었다.
178화
대침공 (1)
붉게 물든 하늘이 갈라졌다.
- 촤르륵!
그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은 거대한 사슬.
거대한 사슬들이 지상을 꿰뚫었고, 그 순간 일어난 파동이 주변을 단번에 파괴했다.
행사가 진행되던 광장도 마찬가지였다.
- 콰아아아앙!
광장 한가운데에 꽂힌 거대한 사슬.
그 주변에 수많은 검붉은 마력이 모였고, 가장 먼저 거대한 마력이 형체를 갖추었다.
"저, 전이 반응! 뭐야, 대체 뭐냐고!"
"일단 포위부터 해!"
광장을 지키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황급히 전이 반응이 일어나는 곳을 포위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잠깐! 하늘이...!"
갈라진 하늘에 검은 기운이 모였다.
마기였다. 짙은 마기가 한데 모였고, 수많은 줄기로 나뉘어 광장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윤서희가 경악하며 결계를 펼쳤다.
- 콰아아아앙!
지상에 엄청난 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광장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윤서희의 갑옷들이 폭발 범위에 있던 이들을 구한 것.
폭발과 함께 일어난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크흐흐, 꽤나 재밌는 광경이로군."
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그 너머에 있던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인...!"
그건 마인이었다.
근육으로 가득 찬 체격에, 등 뒤로 돋아난 여러 팔과 전신을 뒤덮은 갑피를 가진 괴물.
마인, 구트만이 두 눈을 떴다.
"...!"
"컥, 수, 숨이...!"
"마, 마인! 마인을 포위해라!"
그 눈을 응시한 플레이어들은 목을 붙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누군가가 목을 꽉 조르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구트만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겁에 질려서 도망치는 꼴이라니."
구트만이 팔을 뻗었다.
공간이 갈라지면서 그 손에 불길한 형상을 한 대검이 쥐였다. 손잡이 부분에 박힌 거대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대검이었다.
"벌레를 보는 것 같구나."
놈은 자신을 포위한 플레이어들을 봤고.
- 후우욱!
대검이 허공을 베었다.
정적이 흘렀다. 뭔가가 베이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마력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 콰아아아앙!
"크아아악?!"
마인을 포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 주변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검은 폭발이 일어났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으니 반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명과 함께, 폭발에 휘말린 플레이어들의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인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자, 잠깐만. 저놈 뒤에...!"
아직 전이 반응은 끝나지 않았다.
구트만의 등 뒤에 모인 수많은 검붉은 마력이 형체를 갖추었다. 이 세계가 아닌, 탑에서 거주하고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서울에 오는 건 오랜만인데?"
"들뜨지 마라. 계획한 대로 움직이도록."
"그러지 말고 저놈들 얼굴이나 봐라."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마인들이었다.
족히 백은 넘는 숫자의 마인. 그걸 본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경악과 두려움이 어렸다.
마인 하나하나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는 플레이어들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잔뜩 쫄았잖아. 병신 같은 놈들."
"으, 으으...."
일당백은 능히 하고도 남는 마인이.
하나도 아니고 백이 넘는 숫자의 마인이 광장 한복판에 전이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 수백의 카오틱이 전이되었다.
"미, 미친."
"말도 안 돼. 저 정도 숫자가, 마인이 전이해 오는데 아무것도 감지 못 했다고?"
"저 숫자를 상대로... 싸우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울에는 불완전하지만 마인을 감지하는 시스템이 있다.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저 정도 숫자면 감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니.
"...."
윤서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현우가 말했던 마인과 카오틱들에 의한 대침공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저 숫자는....'
상대하기 쉽지 않다.
윤서희는 단상 위에 오른 진현우를 봤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마인들을 주시했다.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윤서희는 진현우의 움직임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는 그러지 못했다.
"저, 저 숫자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
숫자를 보는 것만으로 전의가 꺾일 정도.
탑에서 만났던 마인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플레이어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저 숫자를 상대로 싸우라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으, 으으... 으아아아아!"
"야, 야! 어딜...!"
겁에 질린 플레이어들이 도망쳤다.
구트만은 그 광경을 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그의 등 뒤에 나 있던 수많은 팔이 꿈틀거리더니,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쏘아졌다.
"쓰레기 같은 놈들."
"커, 헉...!"
쏘아진 팔들이 도망치던 플레이어들의 목을 단번에 움켜쥐었다.
그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싸울 생각도 않고 도망부터 치다니."
"끅, 끄으윽...!"
"공격! 저 새끼들부터 공격해!"
플레이어들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붙잡힌 이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온갖 스킬이 쏟아졌지만, 구트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뒤에 있던 마인이 움직였다.
"멈춰라."
마인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놈에게서 마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들이닥치던 수많은 공격이 허공에서 멈췄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이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끝나지 않았다.
"되돌아가라."
"허, 허억!"
그러자 멈춘 공격들이 되돌아갔다.
쏘아 낸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는 공격들.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공격이 닿기 전에 거대한 방패가 앞을 막았다.
- 카드드득!
"범위에서 빨리 벗어나!"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방패였다.
그것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지만, 범위에 있던 이들이 피할 시간은 벌 수 있었다.
콰앙! 되돌아온 공격이 텅 빈 땅을 덮쳤다.
"허, 어떤 놈이...."
구트만은 신성력이 발현된 곳을 감각으로 찾았다. 이 광장에 있는 커다란 단상.
그 위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네놈이로군. 그래, 네가 진현우인가."
진현우였다.
구트만의 눈동자가 진현우를 주시했다.
기이한 마력을 가진 눈동자였다. 눈을 마주친 순간,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를 엄습했다.
대상에게 큰 공포감을 주는 마안.
- 공포의 마안에 저항합니다.
"흠...."
구트만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땅을 짓밟았다. 그러자 바닥에서 검은 비석이 솟구쳤다.
하나가 아닌 수많은 비석이.
- 화아아악!
솟구친 비석들이 마기를 내뿜었다.
땅에 꽂힌 사슬이 마기에 공명했고, 엄청난 양의 마기가 붉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구트만의 두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동시에 그에게서 터져 나오는 파동이 주변을 덮쳤고, 인근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마인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너희가 범접할 수 없는 분을 목도하라."
모두가 마인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하늘이 갈라졌다. 하늘에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 있었고, 균열에서 거대한 사슬들이 튀어나와 땅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저, 저건...."
어떤 존재가 있었다.
흐릿한 어둠에 감싸인 존재.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기이할 정도로 붉은 눈동자뿐이었다.
제대로 된 형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엄청난 압박감은, 분명히 느껴졌다.
"큭, 으윽... 끄으윽!"
"뭐, 뭐야. 몸이...!"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짓눌렀다.
뒤늦게 도우려고 했던 플레이어들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저 존재가 내뿜는 압박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공간에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압박감.
- 이 세상을 보는 것은 3년 만이로군.
누군가가 숨을 삼켰다.
특이할 것 없는 목소리인데도, 듣는 순간 굴복해 버릴 것 같은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존재'가 입을 열었다.
- 폐허가 됐던 도시가 여기까지 복구된 것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드는구나.
3년.
이 세상이 게임처럼 바뀌고, 온 세상에 붉은 포털이 나타나 몬스터가 쏟아졌던 때다.
- 그럼 다시 폐허로 만들어야겠지.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몸을 떨었다.
폐허가 된 광장에 정적이 감도는 와중, 구트만이 광장 중심에 있는 단상으로 걸어갔다.
무너진 단상에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진현우, 널 찾고 있었다.
존재가 진현우를 주시했다.
아니. 대적자, 멸망의 목도자가 그를 봤다. 진현우는 몸이 짓눌리는 감각을 느꼈다.
구트만의 거대한 손이 그의 턱을 잡았다.
- 지금까지 이랬던 적이 없거늘, 요즘에는 내 예상을 벗어난 일이 계속 일어나는군.
강제로 들어 올려지는 턱.
진현우는 갈라진 하늘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형체, 멸망의 목도자와 눈을 마주쳤다.
- 그래서 생각해 봤지. 뭣 때문인지.
붉은 눈동자에 짜증이 섞인 게 보였다.
- 그게 다... 네놈 때문이더군.
갈라진 하늘에 마기가 모였다.
여태껏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마기. 거대한 에너지가 형체를 갖추고 있다.
- 널 죽이면 저 개미들이 탑을 오르는 속도도 느려질 것이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움직이지 마라."
강한 힘이 진현우를 옭아매다.
그조차도 버틸 수가 없는 힘이었다. 몸 전체가 사슬에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다.
멸망의 목도자가 비웃듯이 웃었다.
- 잘 가라.
하늘에서 굉음이 들렸다.
거대한 마기가 형체를 갖추었다. 마기가 일렁거리는 수많은 운석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 운석들이 회전했고, 이내 쏟아졌다.
- 화르르륵!
"으, 으으...!"
드높은 하늘에서 쏟아지던 운석이 점점 속도를 더하면서 지상을 향해 쇄도했다.
피해야 한다.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짓누르는 가운데, 플레이어들은 쏟아지는 운석을 보고만 있었다.
"...럿."
그때, 진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구트만이 그 입을 다물게 하려는 순간.
"샬럿! 지금 써!"
"뭐?"
구트만은 강력한 신성력을 느꼈다.
대적자가 선봉장의 역할을 맡길 정도의 힘을 가진 그조차도 몸이 떨릴 정도의 신성력.
모든 마인이 신성력이 느껴지는 곳을 봤다.
"성왕이시여!"
"...!"
그곳에 샬럿이 서 있었다.
손아귀에 쥔 것은 거대한 양피지. 오래된 종이가 눈부신 신성력을 내뿜었다.
구트만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저년을 막아!"
"여기,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마인이 일제히 샬럿을 노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의 공격이 채 닿기도 전에, 양피지가 모든 어둠을 몰아냈다.
마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이곳에 안식처를!"
신성한 빛이 광장을 뒤덮었다.
사방을 잠식했던 마기가 단번에 사라지고, 마인들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타들어 갔다.
부상을 입은 채 신음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무슨...."
이윽고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구트만은 광장에 나타난 거대한 건축물을 목도했다.
"요새?"
신성 요새.
오로지 신성력으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요새가 광장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었다.
179화
대침공 (2)
그건 말 그대로 요새였다.
광장에 나타난, 빛으로 만들어진 요새. 일찍이 성왕국을 만들었던 성왕이 가졌던 권능이 지금 샬럿의 손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큭, 으으윽!"
"이런 신성력을, 어떻게!"
요새는 찬란한 빛을 내뿜었고, 그 빛은 기둥이 만들어 낸 마기들을 모조리 몰아냈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운석도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마기로 이루어진 것. 운석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진 채로 요새를 덮쳤다.
- 콰아아앙!
운석이 격돌하면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지만, 요새에 제대로 된 피해는 입히지 못했다.
요새의 방벽이 막아 냈기 때문이었다.
- 화아아악!
요새가 더욱 강한 신성력을 내뿜었고, 그에 닿은 마인들의 갑피가 타들어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마인들의 신체 능력이 감소했다. 강한 신성력이 그들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샬럿이 양피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수호자여! 이 요새를 지켜 다오!"
그러자 요새 주변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공간 너머에 있던 존재들이 넘어왔다.
- 쿠우우웅!
"저, 저건...."
그건 골렘이었다.
거대한 체격을 가진 골렘. 그 등에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빛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런 골렘들이 지상에 강림했다.
"미친."
성왕의 성소를 지키던 가디언들이었다.
샬럿이 얻은 양피지의 효과로 단 한 번, 샬럿을 지키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 위용을 앞에서 본 카오틱이 말을 잃었다.
가디언이 팔을 높이 들었다.
"무슨, 덩치가...."
- 적을, 배제한다.
- 콰직!
거대한 주먹이 땅을 내리찍었다.
짓이겨지는 살점. 다른 골렘들은 무기를 휘두르면서 마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요새의 성벽에 강한 빛이 모였다.
- 콰아아앙!
"크아악?!"
그 빛이 포탄의 형태로 압축되더니, 마치 대포처럼 쏘아져 마인들을 덮쳤다.
신성력이 포탄처럼 폭발했다.
요새가 가진 방어 체계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마인들의 진형이 무너졌고, 가디언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적들을 덮쳤다.
"말도 안 돼! 혼자서 이걸 어떻게!"
"이게... 가능하다고?"
마인들이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요새와 가디언들은 일개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으, 으아아아아!"
"공격이 안 통해... 크아악!"
카오틱들이 가디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짓밟혔다. 마인들은 조금 전의 신성력의 여파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상황.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구트만은 진현우의 목에 대검을 겨눈 채, 당황한 눈으로 주변의 참상을 살폈다.
그때, 그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 구, 구트만 님! 커헉!
마인의 비명이었다.
곧 이어진 말에 구트만은 인상을 구겼다.
- 시내 장악에... 큭, 시, 실패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갔던 놈들이 돌아왔....
"...."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구트만은 강한 불길함을 느끼면서, 시내에 꽂힌 쇠사슬들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구트만이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 * *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도 광장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꽂힌 사슬이 여러 마인과 수많은 카오틱을 소환했고, 놈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들을 학살하려고 들었다.
"보이는 것은 모조리 파괴해라! 놈들이 피해를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서울을 파괴하는 것. 마인들의 주목적은 플레이어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피해를 복구하려면 시간과 자원을 써야 하고, 그러면 탑 공략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앞을 막는 놈은 모조리 죽여!"
"커헉...!"
일부나마 있던 플레이어들이 놈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였다.
버티려고 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제길, 사방이...."
"내가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말 그대로 사방이 적에게 포위된 상태.
서울 전역이 마인과 카오틱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 봤자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 일단 뭉쳐! 뭉치라고!"
"X발, 뭉치는 게 뭔 의미가...!"
"오, 온다!"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뭉쳐서 진형을 갖추었고, 도망치던 시민들이 그들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저 너머.
"흐, 벌레들이 한가득 모여 있군."
마인들이 다가왔다.
그 후방에서는 카오틱들이 온갖 스킬로 건물들을 파괴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데 뭉친 플레이어들을 보는 마인들의 눈동자에는 조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모인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제, 제길...."
마인들이 마기를 일으켰다.
플레이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마기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직감했다.
"그럼, 죽...!"
- 철컥! 쿠우웅!
바로 그때였다.
기계가 작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상이 크게 울렸다. 그리고 마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땅에서 무언가가 치솟았다.
그건 탑이었다.
"저건...!"
탑을 본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고, 마인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렸다.
- 방어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인근에 있는 시민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십시오.
방어 시스템.
서울에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지만, 몬스터가 침입하거나 카오틱이 공격해 올 때가 있다.
그때를 위해 준비해 둔 방어 시스템들.
"그럴 리가! 분명 무력화했을 텐데!"
마인들 역시 그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잠입한 마인, 내통자로 시스템을 무력화했다.
그런데 그게 작동하고 있다.
아무런 이상도 없이. 아니, 오히려.
"크아아아악?!"
더 강화된 채로.
방어 시스템이 수많은 마법을 쏘아 냈다.
그건 마인들이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이었고, 또 숫자였다.
"엎드려어어어!"
"방어 스킬을 써! 아무거나!"
플레이어들은 쏟아지는 마법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방어 스킬을 사용했다.
방어 시스템이 오직 마인과 카오틱만 노렸지만, 그 여파가 사방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끄으윽! 이깟, 방어 시스템으로...!"
마인들은 이를 악물며 힘을 일으켰다.
피해를 감수하면 방어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놈들은 마법을 몸으로 받아 내면서 시스템을 파괴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화아아아악!
"...!"
때마침 나타난 신성 요새 때문이었다.
사방으로 퍼진 신성력이 마인들이 일으키던 마기를 지웠고, 그들의 몸을 둔화시켰다.
그리고 저 너머에 마력 반응이 나타났다.
"커헉! 저, 저건!"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법진 위로 모이는 전이 반응. 수많은 형체가 나타나는 걸 본 마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나타난 것은 플레이어들이었다.
"무슨, 네놈들이, 여긴 어떻게...."
다른 지역에 나타난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위해 떠난 여러 길드의 플레이어들이었다.
마인이 경악했다.
'저 정도 규모의 전이 마법진은... 사전에 미리 준비하는 게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
서울에 적들이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전이 마법진을 준비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 전부터, 이미 적들이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위치까지 계산해서 준비해 놨다는 것.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마인은 경악하면서, 전이된 플레이어들의 선두에 있는 이들이 누군지 확인했다.
네메시스의 부길드장, 윤하연. 그 밖에도 여러 유명 길드의 핵심 간부들이 보였다.
윤하연이 경악한 마인을 비웃었다.
"속은 거야, 너희들."
"...!"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마력을 일으켰다.
마인은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상황이 반전됐다.
서울 전역에 나타났던 마인과 카오틱들은 예상치 못한 방어 시스템의 반격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이 마법진으로 복귀한 플레이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하기까지.
- 미, 밀리고 있습니다!
- 방어 시스템이 왜 작동하는 거야! 작동하지 않게끔 확실하게 처리해 뒀... 키아악!
- 아, 안 돼!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마인과 카오틱들의 비명이었다.
저 드높은 하늘에서 그 추태를 바라보고 있던 대적자의 눈동자가 분노로 물들었다.
- 한심한...!
대적자의 분노에 화답하듯 하늘이 울렸다.
- 구트만, 내게 더는 추태를 보이지 마라.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만 할 것이다.
"예. 지금 전부 바로잡겠습니다."
다른 마인들과는 달리 강대한 힘을 가진 구트만은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인은 눈앞에 있는 인간을 바라봤다.
진현우였다. 그는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요새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기 남은 상태였다.
- 그 인간을 죽여라. 얼른!
게다가 아직도 못 움직이는 상황.
대적자의 힘이 진현우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움직이려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구트만이 대검을 들었다.
"먼저 네놈부터 죽어 줘야겠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진현우를 죽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대적자는 그만큼 그를 위협적으로 여겼다.
대검이 순식간에 그의 목을 베었다.
-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이 들렸다.
하지만 대검을 휘두른 구트만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었다.
손아귀에 느껴진 감각이 이상하다.
"...!"
그때 진현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떨어진 머리가 땅에 닿으려는 순간, 그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한순간에 흩어졌다.
공간 이동. 그렇게 사라진 그의 신형은 구트만의 바로 뒤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
"크으윽!"
구트만은 바로 뒤에서 기척을 느꼈다. 그는 다급히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진현우의 도끼에 강한 신성력이 어렸다.
- 콰드득!
"커, 윽...!"
구트만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냈다.
도끼가 그의 등을 깊게 베어 냈고, 강한 신성력이 상처로 파고들어 큰 흉터를 남겼다.
신성한 빛을 발하는 흉터.
"크으, 크아아아악!"
성흔이었다.
구트만의 몸에 새겨진 성흔이 그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줬다. 진현우를 걷어차면서 물러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느꼈다.
- 성흔이 마인에게 지울 수 없는 성흔을 남겼습니다. 신체 능력이 저하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몸이 한층 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경악하는 구트만에게 거대한 도끼가 날아들었다. 그 공격을 대검으로 쳐 내자, 진현우가 한 줄기 섬광으로 변해 그에게로 쇄도했다.
"감히!"
구트만의 등 뒤에서 수많은 팔이 쏘아졌다.
제각각 진현우를 노리는 팔들. 그는 돌진하던 도중에 제동을 가하더니 땅을 힘껏 밟았다.
- 콰아아앙!
짓밟힌 지점을 중심으로 땅이 갈라지더니, 그 사이에서 검은 기운이 용솟음쳤다.
그 기운들이 날아들던 팔들을 막아 냈다.
진현우는 다시금 땅을 박찼다.
"...!"
구트만은 진현우가 검을 내지르는 것을 봤고, 검로가 어디로 향할지 빠르게 파악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날아들던 진현우의 검이 중간에 갑자기 궤적을 틀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었다.
- 서걱!
실수한 것인가? 아니었다.
침잠. 허공을 베자 구트만의 오른쪽 어깨 뒤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튀어나왔다.
검기가 그의 오른팔을 베어 냈다.
"우, 으으윽!"
검은 피가 흩뿌려졌다.
구트만은 연격을 이어 나가려는 진현우를 수많은 팔로 막아 내면서 다급히 물러났다.
진현우도 쏘아지는 팔들을 피해 물러났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이 상황은 상상도 못 했겠지."
진현우가 침묵을 깼다.
그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구트만이 불신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이 상황...."
구트만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네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굳은 입술이 가까스로 그 말을 내뱉었다. 내뱉은 본인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을.
진현우는 말없이 웃었다.
180화
대침공 (3)
구트만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검기에 깊게 베인 오른팔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웬만한 상처는 단번에 재생하는 마인의 재생력도 이 상처에는 통하지 않았다.
'신체 능력이 감소했다.'
구트만에게 새겨진 성흔은 격통을 안겨 주면서, 그가 가진 신체 능력을 약화시켰다.
그는 격통과 함께 위화감을 느꼈다.
'이 상황은... 대체 뭐지?'
탑의 침식률이 70%를 돌파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침식률이 그만큼 올랐기에 마인과 카오틱이 지구를 침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침공은 놈들에게도 처음일 텐데?'
하지만 조금 전, 자신들의 침공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대처는 어딘가 명백히 이상했다.
침공이 일어날 걸 예상했다는 듯한 대처.
겪어 보지 못한, 그리고 일어날 거라 예상도 못 한 침공을 어떻게 대비한단 말인가?
"이걸... 어떻게 안 것이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게끔 은밀히 준비한 일이었는데?"
실패할 리가 없는, 실패할 수가 없는 침공이었다. 여태껏 은밀하게 준비해 왔으니까.
그 침공의 첫 시작부터가 크게 꼬였다.
"글쎄. 너희 사이에 내통자가 있을지도."
"내통자? 하!"
구트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내통자가 있을 수는 없다. 어리석고도 멍청한 소리로군."
침공할 거라는 사실은 마인들만 알고 있었다. 카오틱들에게 알린 것은 침공 직전.
대적자의 힘으로 강제로 끌고 왔으니 어딘가로 정보가 샐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
구트만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주인인 대적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 신성 요새가 나타나면서, 강한 신성력 때문에 연결이 불안정해진 탓이었다.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구트만이 크게 숨을 삼켰다.
검은 마기가 넘실거렸다. 진현우는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을 감각으로 느꼈다.
지독한 냉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새까만 얼음 결정들이 떨어졌다.
구트만에게서 흘러나온 마기가 갑옷처럼 놈의 몸을 감쌌다. 놈의 등 뒤에서 돋아난 수많은 팔 역시 얼어붙으면서 위협적으로 변했다.
'냉기를 쓰는 놈인가.'
마인은 제각기 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마기를 이용한 속성 공격을 특기로 가진 놈들도 있다. 진현우가 일찍이 뇌전을 다루던 마인과 싸워서 이겼던 것처럼.
구트만은 냉기를 다루는 마인이었다.
"흐으... 크아아아아!"
냉기가 솟구쳤다.
구트만을 중심으로 땅이 얼어붙으면서, 바닥에서 수많은 얼음 가시가 솟구쳤다.
그 가시들이 진현우를 노렸다.
- 콰아앙!
도끼가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파가 들이닥치던 얼음 가시들을 파괴했다. 진현우는 곧바로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물러났다.
- 화아아악!
어느새 진현우의 주변으로 몰려든 구트만의 팔들이 사방에서 냉기를 내뿜었다.
그 냉기를 막는 사이, 멀리 떨어져 있던 구트만이 진현우를 향해서 돌진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인간 따위가!"
구트만의 수많은 팔이 움직였다.
팔들은 모두 제각기 자아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진현우를 공격해 왔다.
마치 수많은 적과 싸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크아아아!"
진현우가 그 팔들을 쳐 내는 사이, 거리를 바짝 좁힌 구트만이 진현우의 몸을 붙잡았다.
놈에게서 강한 마기가 일어났다.
"그 몸을 산산이 부숴 주마!"
거센 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다.
구트만을 중심으로 얼음 폭풍이 일어났다. 가까이 있던 것들을 모조리 흡입하면서, 얼음 파편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폭풍이었다.
- 쩌적! 파스스....
주변의 사물이 모조리 얼어붙었고, 동시에 마기에 잠식되어 부패해 가는 게 보였다.
빙결과 마기의 강점을 동시에 이용한 공격.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접촉한 순간 얼어붙을 것이고, 공격당하면 마기에 잠식당할 것이다.
그만큼 까다로운 공격이었지만.
"펜리스!"
진현우에게는 상관없었다.
그의 발밑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진에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더니 구트만이 일으킨 얼음 폭풍을 무력화했다.
얼음의 대정령이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대정령이라고?!"
- 콰아아앙!
거대한 발이 구트만의 몸을 강타했다.
그 충격에 진현우를 붙잡던 팔이 풀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서진 검을 내질렀다.
"잔재주를...!"
구트만은 금방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어붙은 주먹이 검을 쳐 냈다. 공격을 이어 나가려는 진현우에게 창날이 들이닥쳤다. 그걸 쳐 내자 머리 위에서 냉기가 쏟아졌다.
- 꽤 까다로운 놈과 싸우고 있군, 계약자.
머릿속에서 펜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 말대로였다. 놈은 수많은 팔을 가지고 있기에 일대일로 싸우기에는 최악의 상대였다.
모든 공격을 쳐 내거나 피할 수는 없다. 진현우의 몸에 조금씩 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내가 밀린다.'
진현우는 객관적으로 전력을 파악했다.
기습으로 성흔을 새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전력적으로는 자신이 열세였다.
저 구트만이라는 마인은 강하다.
'마인 중에서 직위가 높은 놈일 거고.'
간부, 아니 그 이상일 터.
이대로 싸우면 밀릴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진현우에게는 구트만에게로 기울어진 천칭을 되돌릴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스킬이 없었으면 골치 아플 뻔했어.'
진현우는 숨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의 심장을 중심으로 마력이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많은. 그리고 사나운 마력이 전신을 빠르게 순환하며 신체 능력을 강화했다.
- 파지지직!
과부하.
신체를 과부하시켜 일정 시간 동안 한계를 초월한 힘을 낼 수 있게 해 주는 스킬.
진현우는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과부하 스킬을 사용했다. 심장에서부터 더 강렬한 마력이 방출되면서 그의 전신을 자극했다.
"스으으으...."
진현우의 입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3층에서 만개를 썼을 때에는 못 미치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격통도.
"흐읍!"
"...!"
진현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구트만이 인지한 것은 그게 끝이었다. 그걸 인지했을 때, 검기가 옆구리를 베어 냈다.
"크하악?!"
구트만이 검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튼 순간, 그의 등을 칼날이 깊게 베어 냈다.
곧바로 정강이에 도끼가 내리꽂혔다.
"끄으으으! 이, 이게 무슨...!"
숨 쉴 틈도 없이 공격이 들이닥쳤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트만이 인지할 수 없는 속도였다. 마인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구트만조차도 쫓을 수 없는 속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이렇게 빠르지는 않았을 텐데.
구트만은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칼날에 정신없이 휘둘렸다. 그의 몸에 상처가 새겨졌고, 그중에는 신성력이 남긴 성흔도 있었다.
"크으... 으아아아아!"
구트만이 분노하며 마기를 방출했다.
마기를 동반한 냉기가 퍼지면서 일정 범위에 있는 이들을 둔화시키는 영역을 전개했다.
진현우의 움직임이 순간 느려졌다.
"잡았다!"
수많은 팔이 단번에 몰려들었다.
순간 느려진 진현우를 포위한 팔들이 사방에서 그를 공격했다. 진현우는 날아드는 공격들과 마주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느꼈다.
'보인다.'
전투 감각이었다.
진현우가 새로 익힌 특성, 전투 감각이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팔이 자아내는 공격들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면서 돌진했다.
"빌어먹을 놈이, 곡예라도...!"
구트만이 분노하며 외치는 것보다 먼저, 돌진해 오던 진현우의 검이 투명해졌다.
스사노오. 강하게 압축된 바람이 해방되면서 주변에 있던 팔들을 모조리 밀쳐 냈다.
진현우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 촤르르륵!
그러자 수많은 검으로 분열한 환검이 사방의 무기들을 쳐 내면서 공간을 만들었다.
그는 곧바로 실피르를 꺼내 쥐었다.
- 쉬이이이익!
화살이 어마어마한 빛을 머금었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구트만이 방어 태세를 취했고, 진현우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쐈다.
- 퍼어어엉!
"셰이드!"
하늘 끝까지 도달한 유성이 폭발했다.
수많은 유성의 파편이 쏟아지는 가운데, 구트만의 발밑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쳤다.
셰이드가 놈의 몸을 구속했다.
"하찮은 정령 따위가!"
구트만의 움직임을 아주 잠깐 묶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놈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유성을 초조한 듯이 바라보면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진현우가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놈!"
진현우의 주먹이 강한 신성을 머금었다.
그걸 본 구트만은 혼란에 빠졌다. 하늘에서는 위협적인 유성이, 정면에서는 마찬가지로 진현우가 위협적인 공격을 하려 하고 있다.
무엇을 먼저 막아야 하는가.
'지금 저놈이 하는 공격이 더 위험하다!'
구트만의 본능이 올바른 해답을 내놓았다.
냉기를 동반한 마기를 한계치까지 일으켰다. 전신을 감싼 얼음이 더욱 단단해졌고, 흩어져 있던 팔들이 방패처럼 그를 지켰다.
그의 대처는 모두 옳았다.
- 화아아악!
단 한 가지, 실수가 있다면.
"이건...."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진현우는 신성을 한계치까지 머금은 성멸권을 내질렀다. 그 앞을 가로막던 구트만의 팔들이 신성력에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이럴 리가...!"
성멸권이 허공을 강타했다.
구트만의 바로 앞을 강타한 주먹의 끝에 모인 성멸의 기운이 단번에 해방되었다.
"크...!"
찬란한 빛이 크게 확산하면서 구트만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강력한 신성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얼음을 모조리 녹여 냈다.
신성력이 마인을 덮쳤다.
"으아아아아악!"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면서 끔찍한 격통이 구트만을 덮쳤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현우는 곧바로 뒤로 물러났고, 교대하듯이 하늘에서 쏟아진 유성이 지상을 강타했다.
바로 구트만이 있는 곳을.
"...!"
하늘을 뒤덮는 거센 폭발.
구트만은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 냈다. 그렇게 연이은 공격이 마침내 그쳤을 때.
"크, 허억!"
만신창이가 된 구트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체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고, 남은 신체도 붕괴되기 직전까지 몰린 처참한 몰골로.
"구, 구트만 님!"
그 광경을 본 카오틱들이 경악했다.
놈들은 황급히 구트만을 지원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요새 쪽의 움직임이 빨랐다.
"어딜 가려고?"
"놈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진현우와 구트만의 주변을 거대한 화염 벽이 뒤덮었다. 그리고 결계가 펼쳐지면서, 수많은 갑옷이 마인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거기에 수많은 플레이어의 공격까지.
"아, 안 돼! 으으윽!"
"어떻게든, 구트만 님을...!"
진현우는 구트만에게 다가오려고 하는 마인들의 필사적인 외침을 들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전신에서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 어떻게."
구트만은 다가오는 진현우를 봤다.
한쪽만 남은 눈동자는 경악으로 가득했다.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이럴... 커헉!"
그 심장에 검이 꽂혔다.
진현우는 수많은 감정으로 얼룩진 구트만의 눈동자를 본 후, 놈의 목을 베어 냈다.
이놈과 한가하게 대화할 시간은 없다.
- 스으으으....
완전히 붕괴하기 시작한 구트만의 몸을 뒤로한 채, 진현우는 남은 마인들을 봤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너희도 이놈 뒤를 따라가게 될 거야."
진현우는 검을 움켜쥐었다.
181화
강림 (1)
폐허가 된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요새.
그 안에 수많은 시민과 플레이어가 머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넋을 놓고 있던 플레이어들도 적들의 공격을 목격하고는 반격에 나섰다.
"저 새끼들 다 죽여!"
"망할 놈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당신들은 나오지 말고 요새 안에 있어!"
적들이 밀려들고 있다.
선두에는 마인이, 그 뒤에는 카오틱이. 수많은 적이 사방에서 요새를 공격해 오고 있다.
이 요새를 파괴하지 않으면 대침공에 큰 지장이 생길 것이라는 걸 모두 알아서였다.
- 콰아아앙!
"흐으으, 이 빌어먹을...!"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성벽을 지키고 있는 가디언의 존재. 요새의 성벽에 설치된 여러 방어 시설의 위력.
그리고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이 문제였다.
"아하하하! 표적이 많아서 좋네!"
- 화르르륵!
마인들의 기습이 성공했더라면 플레이어들은 별다른 방비 없이 싸워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지킬 성벽이 있는 상태.
화련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쏘아 내는 마법은 마인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끔 막았다.
"크아악! 다른 지역에 있는 놈들은 어떻게 된 거냐! 놈들도 여기로 불러들이란 말이다!"
"아마 그놈들도 못 올 거다."
"못 온다고? 왜!"
마인이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다른 지역의 마인들도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아니, 오히려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제, 제길. 사방이...."
다른 지역에서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소환되었던 마인과 카오틱들은 포위된 상태였다.
서울의 플레이어들, 거기에 지방의 몬스터들을 처리하려고 떠났던 플레이어들이 귀환하면서 오히려 마인이 수적인 열세에 처했다.
거기에 각종 방어 시설까지.
"지금이다! 시민들을 피난시켜!"
경찰과 군대도 출동하여 사람들을 피난시켰다. 카오틱이라면 몰라도 마인과의 전투에서 경찰과 군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적었다.
게다가 아군과 적군이 어지럽게 뒤얽힌 상황. 병기를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적들과 싸우는 건 플레이어들한테 맡기고 시민들부터 대피시켜라! 그게 플레이어들을 돕는 거다!"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다행인 것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는 것.
지휘관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고, 플레이어들이 싸우는 동안 시민들을 대피시켰다.
"저 카오틱 놈들만 못 오게 막아!"
"마인은 플레이어들이 처리해 줄 거다!"
시민을 구출한 경찰과 군인들은 진형을 갖춘 후 카오틱들에게 화망을 펼쳤다.
빠르게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서 서울 전역으로 흩어진 것이 오히려 독이 된 셈이었다.
상황은 마인 측에게 안 좋게 흘러가고 있다.
"내가, 이럴... 커헉!"
구트만이 죽은 것도 그때였다.
심장에 검이 꽂히고, 목마저 완전히 베인 마인의 몸이 완전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카오틱들이 그 모습을 목격하고 경악했다.
"구, 구트만 님!"
"마, 말도 안 돼."
대적자, 멸망의 목도자가 만들어 낸 마인 중에서 손에 꼽힐 강함을 가진 마인.
그게 구트만이었다. 이번 침공의 선봉을 맡을 정도로 대적자의 신뢰가 두텁기도 했다.
그런 마인이 죽었다.
- 촤르르륵!
"으, 으아아악!"
"저, 저놈이...!"
그것도 고작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구트만을 죽인 진현우는 수많은 환검을 내보내면서 카오틱들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회전하는 환검이 피보라를 일으켰다.
"샬럿!"
"알고 있어!"
카오틱들 한복판으로 돌진한 진현우를 지원하듯, 가디언들이 거체를 이끌고 돌진했다.
그는 가디언들을 이용해서 적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가디언이 시선을 끌면 그 틈을 이용해서 적들의 급소를 공격했다.
마인과 카오틱, 누구든 가리지 않고.
- 마기가 15만큼 상승했습니다.
- 마기가....
눈앞에 계속 메시지가 나타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진현우는 가디언과 함께 싸우면서 적들의 시선을 끌었고, 그를 보던 윤서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
"...."
윤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지금부터 이 요새를 버리고 도망칩니다."
"네? 이 상황에요? 그게 무슨...."
"야, 미쳤어? 저놈들만 죽이면 끝이잖아!"
너무도 갑작스러운 지시였다.
화련과 플레이어들이 반발했다. 승기를 다 잡은 상황인데 요새를 버리고 도망치자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지시였다.
"이건 진현우, 저 남자가 부탁한 일이기도 합니다.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움직여요."
"지, 진현우가 말입니까?"
"그러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처음에는 반발하던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진현우가 한 말이라고 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이번 침공을 방어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플레이어가 부탁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뭔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어디로 갈 건데?"
"지하 대피소로 갑니다. 사자심 길드가 주변 사람들을 구출하면서 길을 터 놨을 거예요. 저 마인들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움직이죠."
"일단... 알겠어."
화련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눈치였으나 진현우의 지시였기에 거부하지 않았다.
윤서희와 네메시스는 가장 먼저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그다음으로는 플레이어들이, 마지막으로 소수의 랭커와 샬럿이 움직였다.
"이 요새는 그냥 둬도 유지되는 거야?"
"네. 제가 근처에 없어도 지속 시간 동안은 유지될 거예요. 가디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거 다행이네. 가자."
"...."
적들이 신성 요새에 남은 사람이 없다는 걸 눈치채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샬럿은 요새를 떠나면서, 가디언들과 함께 적들의 시선을 끄는 진현우를 봤다.
"야, 넌 알고 있지?"
"뭘 말인가요?"
"이 요새를 버리는 이유 말이야."
샬럿은 등을 돌렸다.
사방에 꽂힌 수많은 사슬이 보였다.
"이 다음에 일어날 사태를 대비하려면, 저희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가죠."
그녀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마인과 카오틱들이 지상을 침공하는 동안, 유신은 따로 맡은 일을 위해 움직였다.
그와 소수의 마인이 빠르게 움직였다.
"저 건물인가?"
"그래. 저 건물 지하를 통하면 플레이어 협회의 수뇌부들이 있는 대피소로 갈 수 있다."
"흠, 건물은 평범하게 생겼군."
그들의 목적은 하나.
플레이어 협회의 수뇌부들을 죽이는 것. 여기 있는 이들에겐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대피소로 가면 가드들이 있을 거다. 그런데 뭐, 이 정도 전력이면 문제는 없겠지."
"당연한 말을."
유신과 마인은 건물 지하로 향했다.
그 안에 숨겨진 인증 장치를 통과하자 긴 통로가 나타났다. 이 통로를 지나가면 협회의 수뇌부들이 있는 대피소로 향할 수 있다.
"협회 놈들이 알았을까? 랭커 1위였던 놈이 마인과 내통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생각도 못 했겠지."
이 인증 장치는 허가된 극소수의 이들만이 통과할 수 있는 것. 협회로서는 불행하게도, 거기에 유신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유신은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말이 많군."
"음. 우리에게 협력하는 놈들은 살려 두고, 걸림돌이 될 놈들은 모조리 죽인다."
"가지."
일행은 지하 통로를 나아갔다.
중간에 설치된 보안장치가 있었지만, 유신이 있었기에 전투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금방 목적지에 도달했다.
"도착했군. 저곳에 있을 거다."
"좋아, 그럼...."
마인은 함께 온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윽, 크으, 흡?!"
마인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온 다른 마인도 똑같이 고통스러워하며 무릎을 꿇었다.
유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뭘...?"
"주, 주인님. 왜, 저희를...!"
"뭐? 주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마인들이 경악과 원망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을 하늘을.
"그, 그런, 필요가, 없어졌다니, 저희는."
"주, 주인님! 기회를, 한 번만 더...!"
"큭, 으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통로를 울렸다.
마인들은 짙은 마기를 내뿜으면서 붕괴했고,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유신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유신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가 가진 통신기가 울렸다.
부하의 보고였다.
- 유, 유신 님. 보고가....
"빠르게 말해라. 무슨 내용이지?"
- 치, 침공이, 실패... 한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실패했다고?"
유신은 황급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마인들은 죽었다. 혼자서 플레이어 협회의 수뇌부를 공격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무엇보다 먼저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그는 순식간에 건물의 옥상에 도달했고.
"이건, 대체...."
지상의 상황을 보며 경악했다.
기습적으로 이 세상을 침공한 마인들이 플레이어들에게 포위당해 죽어 가고 있는 모습.
작동을 정시시켰을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
그리고.
"진현우...."
여러 적과 싸우고 있는 진현우의 모습까지.
유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대침공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실패했다고? 대체 어떻게?'
별다른 계획이 없는 공격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획을 짤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아예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무슨 계획이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이 대응, 예상한 게 아니면 불가능하다.'
상대가 기습을 예상하고 있었던 시점에서, 계획이 없는 기습의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유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크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마인들이 내뱉는 절규였다. 유신은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유신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대적자가 있을 하늘을.
* * *
진현우는 가디언들을 이용해 적들을 죽이면서, 붉게 물든 하늘을 흘깃 바라봤다.
대적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능성은 크게 둘.'
이 세상의 사람들은 대침공을 처음으로 겪지만, 진현우는 전생에서 여러 번 겪었다.
대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침공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대적자가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나거나.'
그게 아니라면.
-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군.
드높은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분노로 가득 물든 목소리가.
- 진현우, 네놈을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것.
그 목소리가 지상에 닿은 순간, 진현우를 치열하게 공격하던 마인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놈들은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윽, 컥...!"
"흐어, 으아아아아!"
그러더니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다.
한둘이 아니었다. 광장에 있던 마인들 그리고 서울 각 지역에 있던 마인들까지 모두.
같은 때에 심장을 붙잡고 괴로워했다.
"크아아아아악!"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고통스러워하는 정도가 심상치 않았다.
경계하며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당황할 정도. 카오틱들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마인들이 그러는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 콰득! 화아아악!
무언가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마인들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더니 놈들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플레이어들이 여태껏 봤던 마기들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가장 짙은 마기였다.
"마기다! 다가가지 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으, 으음...."
마기가 하늘 드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적자가 있는 곳으로.
하늘이 크게 진동했다.
'대적자가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나거나.'
진현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직접 강림해서 실패를 바로잡거나.'
대적자가 강림하려 하고 있다.
놈을 따르던 마인들을 모두 제물로 삼은 채.
182화
강림 (2)
대적자들은 기본적으로 탑 내부나 지구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대적자들에게는 알 수 없는 제약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제약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잠깐이지만 제약을 해제할 수 있다.'
탑의 침식률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을 때,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제약을 해제할 수 있다.
그 조건 중 하나가 '제물'이다.
- 너희에게 힘을 준 것도 나였으니, 이제 내가 나눠 준 힘을 돌려받을 때가 되었구나.
"그, 그런...!"
마인들은 대적자와 계약하고, 그 계약의 대가로 힘을 얻어서 마인이 된다.
지금 대적자는 나누어 준 힘들을 돌려받고 마인들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오직 자신이 강림하기 위해서.
- 파아아앗!
사슬이 요사스러운 빛을 내뿜더니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마법진에서 검은 기둥이 솟구쳤고 기둥은 이윽고 하늘에 닿았다.
그 순간,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서울 전역에 어둠의 장막이 깊게 드리웠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그 장막을 천천히 가르면서, 어두운 형체가 나타났다.
검은 무복이 바람에 흔들렸다.
- 너희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테니.
타악.
검은 형체가 땅에 발을 내디뎠다.
흩날리는 검은 장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흑색의 얼굴, 전신을 가리고 있는 검은 무복.
그 생김새는, 놀랍게도 인간에 가까웠다.
"저게... 대적자라고?"
"인간, 아냐? 크게 다를 게...."
지켜보던 카오틱들이 중얼거렸다.
대적자의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은 그들도 처음이었다. 실제로 목도한 대적자의 모습은 초월자라기보다는 인간을 보는 듯했다.
- 휘이이이....
검은 형체, 대적자의 손에 어둠이 모였다.
어둠은 기다란 장도의 형태로 바뀌었다. 대적자는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장도를 잡았다.
그 순간.
- 콰아아아앙!
"...!"
거대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졌다.
대적자를 중심으로 강력한 힘이 퍼지면서 땅이 짓뭉개졌고, 일대에 있던 건물이 굉음을 내면서 무너졌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 콰드득!
"크하, 아아악!"
"왜, 왜 우리들까지!"
파동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있던 카오틱들이 단번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죽었다.
진현우는 파동이 닥치기 직전, 가까스로 환검들을 만들어 내 방패처럼 나열했다.
- 카드드드득!
"카학!"
파동과 충돌한 환검이 굉음을 내면서 파괴됐다. 이걸로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 파동이 진현우를 덮쳤고, 그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엄청난 격통이 전신을 덮쳤다.
- 역시, 힘이 완전하지는 않군.
목소리가 들렸다.
지독하게도 무심한 목소리였다. 대적자는 검을 쥔 손을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진현우를 향했다.
-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대적자가 검을 휘둘렀다.
무성의한 손놀림이었다. 어린아이가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끔찍했다.
- 서걱!
진현우는 황급히 몸을 내던졌다.
조금 전까지 머리가 있던 위치로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걸 인지한 순간, 그의 뒤에 있던 건물들이 반 토막이 나며 무너졌다.
단 일격에 건물이 붕괴한 것이었다.
- 거리가 멀군. 내게 가까이 와라.
대적자가 땅을 가볍게 밟았다.
그러자 그와 진현우 사이에 있던 거리가 말 그대로 '접히더니'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도달한 진현우를 향해, 대적자가 무심하게 검을 내질렀다.
"끄으윽!"
진현우는 본능적으로 그 검을 맞받아쳤다.
충돌하는 두 검. 검을 맞부딪친 순간, 진현우의 팔이 엄청난 양의 피를 내뿜었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살점이 단번에 파괴된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헉, 허억!"
부러진 뼈가 기괴하게 튀어나왔다.
진현우는 광휘를 사용하면서 왼손으로 검을 옮겨 쥐었다. 검에 시퍼런 검기가 맺혔고, 검기는 곧 해일이 되어 대적자를 향해 쏘아졌다.
- 콰르르르!
- 시시하기 그지없는 검술이로다.
대적자는 들이닥치는 검기들을 시시하다는 듯이 보더니,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진현우가 했던 것과 똑같이.
"...!"
거대한 해일이 철썩였다.
대적자의 검 끝에서 일어난 검은 해일, 수많은 검기가 진현우의 것과 충돌했다.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 카드드득!
검은 해일이 접촉한 것들을 모조리 삼키면서 진현우를 덮쳤다. 그는 미리 예측하고 뒤로 물러났지만, 해일의 속도가 더욱 빨랐다.
"크아아아악!"
흑색의 검기가 그의 전신을 덮쳤다.
살점이 짓이겨지고, 근육이 파괴되었다.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뼈가 순식간에 토막 났다.
"흐읍...!"
엄청난 통증이 뇌리를 스쳤다.
지독한 마기가 피를 타고 스며드는 것도. 만약 마핵이 없었다면 이걸로 죽었을 것이다.
진현우는 광휘로 상처를 치료하고, 필사적으로 오른팔을 움직이면서 스킬을 썼다.
'이건 치료한다고 될 정도가 아니야.'
신성한 빛이 전신을 치료했지만, 상처가 극심했기에 치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억지로 움직이면서, 손아귀에 나타난 깃발을 내리찍었다.
- 쿠우웅!
거대한 깃발이 땅에 꽂혔다.
검은 기운이 지상을 잠식하면서 폭군의 영역이 펼쳐졌다. 지하에서 언데드 군단이 기어 나왔고, 죽은 이들이 언데드로 되살아났다.
수많은 언데드가 진현우의 곁에 섰다.
- 치료할 시간을 벌겠다는 건가?
대적자는 주변을 뒤덮은 폭군의 영역을 훑어보더니 가볍게 땅을 짓밟았다.
콰직! 뭔가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 초월자의 힘이 영역을 파괴합니다.
폭군의 영역이 파괴된 것이었다.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여태껏 파괴된 적이 없었던 폭군의 영역이 손쉽게 파괴되었다.
기어 나온 언데드 군단은 그나마 유지되었지만 그것도 대적자 앞에는 무의미했다.
- 캬아아아악!
- 크, 흐으....
대적자가 손을 내젓자 언데드들의 위, 높은 하늘에서 수많은 검이 나타났다.
그 검들이 빗물처럼 쏟아졌고, 진현우의 앞을 지키던 언데드들이 허망하게 파괴됐다.
- 촤르륵!
하지만 아주 약간의 시간은 벌었다.
자세를 다잡은 진현우는 환검을 펼쳤다. 순식간에 나타난 수많은 검이 대적자를 노렸다.
- 그 검, 내 우둔한 스승의 유산인가.
뛰어난 능력치를 가진 진현우조차도 대적자의 일격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쥔 부서진 검은 멀쩡했다.
그 검을 본 대적자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 그래. 탑이 준 기회를 걷어찼던 우둔한 자. 그 덕분에 내게 기회가 돌아왔다만....
대적자는 검으로 선을 그었다.
쏘아지던 환검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 공간이 갈라지더니 환검들이 반토막 났다.
목표에 닿지 못한 환검이 허망히 사라졌다.
- 불세출의 재능을 가진 자였다. 대적자가 된 나조차도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을 정도로.
진현우는 언젠가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완전히 부서진 세상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 둘이 나누었던 대화가 새삼 떠올랐다.
대적자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 푸우욱!
"끄으으윽...!"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들이 땅에서 솟구치더니, 진현우의 사지를 꿰뚫었다.
검들이 일어나면서 그의 몸이 세워졌다.
대적자가 여유롭게 그를 향해 걸어왔다.
- 네 재능은 그에 비할 바도 못 되는군.
진현우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전신의 근육이 갈라졌다. 뼈라고 다를 건 없었다. 특정 부위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과부하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 부작용으로 신체 능력이 저하됩니다.
게다가 과부하가 끝나기까지.
제대로 된 싸움도 아니었다. 진현우가 가진 모든 수단은 대적자에게 통하지 않았다.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인가?'
대적자, 멸망의 목도자.
진현우가 전생에서도 싸워 본 적이 있는 상대다. 지금처럼 놈이 불완전하게나마 강림했었고, 살기 위해서는 놈과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이겼는가?
'이겼을 리가 있나.'
간신히 목숨만 건진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때는 진현우가 지금보다 더 성장한 상태였다. 메사이어라는 길드원들도 있었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놔뒀어야 했나?'
놔뒀으면 도움은 됐을 것이다.
문제는 엄청난 피해가 생길 것이라는 것. 랭커조차도 대적자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여태껏 온갖 고생을 하면서 플레이어들의 피해를 억제했는데, 대적자와의 싸움 한 번으로 그걸 다 허사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이길 가능성이 없다.'
대적자는 신과 버금가는 힘을 가진 상대. 지금의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지구에 강림한 대적자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그걸 감안한다면....
'시간을 끄는 건 가능하다.'
진현우는 저 너머의 사슬들을 봤다.
사슬 일부가 파괴되는 것이 보였다. 대적자도 그 모습을 봤는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 무의미한 짓을 하는군.
저 사슬들은 대적자를 이 세상에 불완전하게나마 강림할 수 있게끔 하는 매개체.
저게 파괴되면 놈도 강제로 송환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네 목숨은 이미 끝났거늘.
대적자의 팔이 움직였다.
무형의 검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보다 먼저, 진현우는 입안의 약을 씹었다.
카드득!
- '탄생의 축복'을 복용합니다.
-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결손되지 않은 모든 상처를 회복합니다. 신체 능력이 짧은 시간 동안 크게 상승합니다....
탄생의 꽃을 이용해서 만든 영약.
파라켈수스의 이수경이 조제한 것이었다.
진현우의 전신에서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주변을 가득 메운 어둠을 몰아냈다.
- 이건, 세계수의 힘인가?
대적자의 검기가 진현우에게 쇄도했다.
그게 목을 베려는 순간, 땅에서 수많은 나무가 솟구치더니 검기를 잠깐이나마 막았다.
진현우는 그 틈을 이용해 자리를 벗어났다.
- 당신이 보유한 특성, '세계수의 축복'이 '탄생의 축복'에 반응합니다.
- 주변에 자욱한 숲이 생성됩니다.
- 특성, 세계수의 축복이 활성화됩니다.
세계수의 축복.
숲에 있을 때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하는 특성. 진현우는 차오르는 활기를 느꼈다.
전신에 입었던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었고, 주변에 나타난 숲이 대적자를 적대했다.
하지만.
- 고작 이까짓 것을 믿고 날뛴 것이냐?
대적자가 땅에 검을 내리꽂는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검이 꽂힌 지점을 중심으로 어둠이 퍼지더니 녹색의 빛을 집어삼켰다.
사방에 펼쳐진 숲도 마찬가지였다.
- 파스스....
생명으로 가득 차 있던 숲이, 닿으면 순식간에 부서질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는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숲은 진현우를 돕지 못할 것이다.
- 네가 죽을 시간을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저 새끼, 말은 더럽게 많군.'
진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만 벌면 된다. 하지만 벌 수 있을까? 제힘을 다 내지 못하는데도 저 정도다.
사슬이 파괴될 때까지 버틸 수 있나?
'되든 안 되든 해보는 수밖에.'
저 너머, 대적자가 걸어온다.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움켜쥐었다. 몸에서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활력이 느껴졌지만, 이걸로도 대적자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저 대적자와 싸웠던 기억이 있다고 한들 스펙이 압도적으로 뒤처지니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진현우는 각오를 다졌다.
바로 그 순간.
- 인지해라.
목소리가 들렸다.
3층에서 들었던 엘프와 비슷한 목소리였다.
- 네 안에 있는 신성을.
대적자가 다가온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도 느렸다. 대적자가 느리게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 내 축복이, 너를 도울 것이다....
두근!
진현우는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느꼈다.
그의 내면에 있던 파편이 태동하고 있었다.
183화
강림 (3)
진현우가 마인들, 그리고 대적자와 싸우는 동안 사자심 길드는 사람들을 피난시켰다.
가까스로 사람들을 지하 벙커로 피난시키는 데 성공한 임호석은 지상으로 나왔다.
"샬럿!"
저 너머,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온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임호석은 그 사이에 있던 샬럿을 불렀다.
"사람들은 다 대피시켰나요?"
"그래. 이제부터 뭘 하면 되지?"
"저희가 할 일은...."
샬럿은 말을 멈추며 고개를 확 돌렸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느낀 것이다. 초월적인 존재가 강림하는 것을.
"저, 저건...."
짙은 어둠이 광장을 집어삼켰다.
그 어둠은 순식간에 서울 전역을 뒤덮었다. 임호석은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둠이 그를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제! 아무나 빛을 밝혀라!"
"예, 예!"
화아악!
임호석의 곁에 있던 사제가 빛을 밝혔지만, 어둠이 너무도 짙어 그 효과는 미미했다.
"제가 할게요."
샬럿이 신성력을 일으켜야지 겨우 유의미한 빛이 일어날 정도. 이 정도면 근원지에서는 아예 빛을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임호석은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대적자가 만들어 낸 어둠인 건가?"
"아마도요. 빨리 움직이죠. 현우가 대적자를 상대로 시간을 벌어 줄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보여요? 저기 있는 거대한 사슬들."
"그래, 보인다."
샬럿은 사방에 있는 사슬들을 가리켰다.
윤서희와 화련 같은 플레이어들도 나뉘어서 사슬들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저걸 파괴해야 해요. 최대한 빠르게."
"좋아. 넋 놓고 있을 시간은 없군."
임호석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대피소를 지킬 인원만 남겨 둔 후, 남은 이들을 이끌고 사슬을 파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대적자가 있을 광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샬럿에게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샬럿. 진현우가 대적자를 상대로 시간을 벌어 줄 거라고 했었지. 도와주는 이는...."
"없어요.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야죠."
"버틸 수나 있으면 기적이겠군."
임호석은 한숨을 삼켰다.
"좋아, 가자! 사슬을 파괴한다! 성녀가 길을 밝혀 줄 것이다! 빠르게 움직여라!"
앞으로 나아가는 플레이어들.
샬럿은 그 뒤를 따라가다가 문뜩 자신의 어깨가 이상하게 가벼움을 느꼈다.
'미호는 어디로 간 걸까?'
광장에 마인이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샬럿은 의아함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 * *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진현우는 눈앞의 대적자를 바라봤다. 놈의 검이 더없이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아예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었던 일격이, 지금은 더없이 선명히 보였다.
'몸이....'
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더없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은 대적자에게도, 진현우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움직이지 않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움직이기는 하지만 속도가 느려서 움직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
- 두근!
세계수의 기운이 움직였다.
그 기운은 진현우를 고치처럼 감쌌다. 따사로운 기운이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 인간의 몸으로 신성의 파편을 얻게 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터.
그 기운은 진현우의 몸속으로 파고들더니, 깊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일깨웠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탑에게 굴복한 자들을 꺾으려면, 네 안의 신성을 끌어내는 방법을 익혀야만 할 것이다.
진현우는 내면에 깃든 파편을 인지했다.
세계수의 기운이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파편에 깃든 신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 느껴졌다.
이 감각을 익히라는 것처럼.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진현우는 적잖게 당황한 상태였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영약 같은 수단을 써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나쁘지 않다.
- 네 안에 잠든 신성은 불완전하지만.
이 감각은 분명 큰 자산이 될 테니까.
진현우는 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을 느끼면서, 신성을 이끌어 내는 감각을 익혔다.
- 필요한 순간,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이윽고 진현우가 완전히 감각을 익혔을 때.
- 화아아아악!
찬란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목을 노리고 다가오는 대적자의 칼날을 인지했고, 그 궤적에 검을 세웠다.
부서진 검이 강한 신성을 머금었다.
- 카아앙!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혔다.
충돌하는 순간 대적자의 검에서 짙은 어둠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어둠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한 신성이 진현우의 검에서 일어났다.
- 시간의 흐름이 뒤틀렸군. 뭘....
대적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뒤틀렸고, 자신이 휘말렸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파아아앗!
- 큭!
신성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졌고, 대적자는 저도 모르게 검을 되돌리면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사실에 처음으로 당혹감을 내보였다. 자신이 물러났다고? 인간을 상대로?
- 그건, 신성?
대적자는 진현우를 응시했다.
진현우의 검에서 피어오른 신성이 사방을 잠식한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등불처럼.
'처음으로 성멸권을 썼을 때 같군.'
진현우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에는 검을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진현우의 팔이 완전히 파괴됐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신성이 그의 팔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 어떻게 인간 따위가, 신격을 가지지도 않은 놈이 신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신에게 빌려서 쓰는 신성력이 아니다.
신성력의 근원이 되는 신성 그 자체. 오직 신격을 가진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힘.
대적자가 가진 마기의 정반대되는 힘.
'이건...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진현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직 가지고 있는 신성의 양이 너무 적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전에 대적자를 몰아붙여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부서진 검이 검기를 내뿜었다.
평소와 달리 신성력을 머금은 검기. 해일처럼 나아가는 수많은 검기가 어둠을 밝혔다.
- 콰드드득!
대적자 역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쏘아지는 검은 해일이 다가오는 검기와 맞부딪혔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검은 해일이 신성에 집어삼켜져 사라졌다.
- 크, 으으윽!
대적자는 다가오는 검기들을 쳐내면서, 이걸 쳐내야 한다는 사실에 굴욕감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적자가.
본연의 힘의 절반도 채 내지 못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인간을 상대로 이 꼴이라니.
- 촤르륵!
진현우는 손에서 검을 놓으면서 돌진했다.
검은 순식간에 환검이 되어 사방에서 대적자를 노렸다. 진현우는 놈이 환검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걸 이용해서 단번에 거리를 좁혔다.
그 주먹에 신성한 기운이 어렸다.
- 화아아악!
- ...!
성멸권이 허공을 강타했다.
공간이 짓이겨지면서, 주먹에 맺혀 있던 거대한 성멸의 기운이 대적자를 덮쳤다.
환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 쿠우웅!
대적자는 땅을 짓밟았다.
조금 전에 공간이 접혔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공간이 열리면서 거리가 벌려졌다.
진현우는 그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손아귀의 아공간에서 활을 꺼냈다.
-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유성이 쏘아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머금은 유성이 하늘에서 폭발했다.
쏟아지는 수많은 빛의 조각.
"펜리스!"
대적자의 발 아래에 마법진이 펼쳐지면서, 거대한 늑대의 머리가 불쑥 솟구쳤다.
그 입이 매서운 냉기를 내뿜었다.
- 하찮은 정령 따위가!
- 크르르르...!
냉기가 대적자를 휘감았다.
물론 큰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놈의 시선을 잠깐이라도 끌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펜리스가 다시금 사라지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의 조각이 대적자를 덮쳤다.
'이 신성이 날 약화시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적자는 저 너머를 바라봤다.
'사슬이....'
대적자가 이 세상에 강림할 수 있게끔 돕는 매개체, 쇠사슬들이 파괴되고 있었다.
아마도 플레이어들이 파괴하고 있을 터.
한 가지 의구심이 있다면.
-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의구심 가득한 눈동자가 진현우를 향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강림한 것은 처음. 저 쇠사슬을 파괴해야 한다는 걸 알 리가 없다.
그걸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의문이었다.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대적자가 완전한 상태였다면 이 정도의 신성은 가볍게 짓밟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완전하게 강림한 상태.
신성이 그가 가진 힘을 갉아먹고 있었고, 사슬이 파괴되면서 더더욱 약해지고 있었다.
- 굴욕적이기 그지없군.
분열하는 도끼가 대적자에게 날아들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보이지 않는 참격이 도끼를 쳐내면서 진현우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 참격이 닿는 일은 없었다.
- 이 상황이...!
그보다 먼저 한 줄기 섬광이 대적자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그걸 인지한 대적자가 검을 내질렀지만, 진현우의 검이 그를 쳐냈다.
대적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 카앙! 콰아앙!
숨 쉴 틈 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검을 내지르고, 쳐내고, 틈을 노리는 공격을 막아 내고, 다시 반격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두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굉음이 일어났다.
"후우...!"
진현우는 숨을 삼키며 땅을 짓밟았다.
사방의 대지가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하지만 대적자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애초에 그걸 노린 게 아니기도 했다.
'지금.'
대적자의 검이 다가온다.
진현우는 자신의 검을 뒤로 젖히면서 왼손에 성멸의 기운을 일으켰다. 그리고 목 바로 앞까지 치고 들어온 칼날을 주먹으로 쳐냈다.
- ...!
찬란한 빛이 터지면서 검을 밀쳐 냈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대적자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진현우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 푸우욱!
대적자의 심장을 검으로 찔렀다.
하지만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없었다. 살점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찌른 느낌.
- 내게 이런 검격은 아무 의미가....
대적자는 진현우를 비웃으면서 심장을 찌른 검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검을 쥔 순간.
- 욱, 커헉!
대적자의 입에서 검은 마기가 새어나왔다.
그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느껴질 리가 없는 격통이 존재하지 않는 심장에서 느껴졌다.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 무월.
3층에서 죽었던 마인.
대적자는 그 시체를 이용해서 강림했었고 진현우를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연결이 끊기는 바람에 실패했었다.
- 우둔한 자가, 검에, 무슨 짓을....
검에 특수한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대적자인 자신에게도 통할 줄이야.
부서진 검에 있는 옵션, 안배의 효과였다.
특정한 존재, 대적자에게 피해를 입히게끔 하는 옵션. 대적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죽을 시간을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대적자가 진현우에게 한 말이었다.
진현우는 대적자의 심장을 꿰뚫은 검을 빼내면서, 그와의 거리를 크게 벌렸다.
대적자의 눈이 그를 쫓았다.
"시간은 충분히 번 거 같은데?"
진현우의 너머, 파괴된 사슬들이 보였다.
플레이어들은 다른 지역에 있는 사슬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난 뒤였다. 단 하나의 사슬이 광장에 꽂혀 있었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검을 들었다.
- 콰드득!
검이 마지막으로 남은 사슬을 베어 냈다.
반으로 갈라진 사슬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자 서울 전역을 뒤덮고 있던 어둠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대적자도 마찬가지였다.
- 진현우....
대적자의 몸, 검은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몸뚱어리. 하지만 여전히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진현우를 노려봤다.
- 네 이름을 기억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눈동자.
- 이 굴욕은 반드시 갚겠다.
그 말을 끝으로 대적자는 사라졌다.
광장에 적막이 감돌았다. 진현우는 조금 전까지 대적자가 있던 곳을 보며 혀를 찼다.
"말 한번 더럽게 많은 놈이군."
그것도 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