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대도의 기억 (2)
누군가의 인생이 보였다.
대도라고 불리는 이의 인생이었다.
무엇 하나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무언가를 훔치는 재능 하나는 타고났던 남자.
- 세상의 값진 것은 모조리 가지고 싶다. 그래, 하나도 남김없이... 이 손에 쥐고 싶다.
대도는 그 욕망을 꽉 움켜쥔 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나라의 보물을 훔치고, 마탑의 연구물을 훔치고, 신전의 성유물을 훔쳤다.
그러던 와중에 특수한 능력을 얻었다.
- 아공간을 다루는 힘... 수백 년 동안 연구해 온 결과물이 이것인가. 나쁘지 않군. 이 아공간에 내 보물들을 컬렉션처럼 장식해야지.
사람들이 진귀하게 여기는 물건일수록 그의 욕망을 자극했다. 아공간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얻으면서 욕망은 더욱 커졌다.
수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물건을 훔치고, 자신의 아공간에 보관했다.
- 쿨럭! 제길, 어느새 이렇게 늙었지?
그런 대도도 세월은 피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노쇠한 대도는 조급해졌다. 죽고 싶지 않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는 정해진 수명을 늘리고 싶었다.
- 엘프의 보관고. 그곳이라면....
그 당시에 돌던 소문이 있었다.
장생종인 엘프의 보관고에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비약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
대도는 그 소문을 믿었다.
- 어쩌면 헛소문일 수도 있다. 흐, 그래도 가만히 늙어 죽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지.
대도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준비했고, 기회를 틈타 보관고에 침입했다.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쌓으면서 신기의 영역에 달한 은신이 그걸 가능케 했다.
그리고.
- 침입자다!
- 더러운 도둑 놈이!
- 큭, 어째서 여왕이 이곳에...!
결과는, 참혹한 실패.
대도는 노쇠했고 마음이 급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지만, 그 계획은 전성기 때에 비하면 부족했고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실패는 대도에게 치명적이었다.
- 선조님들의 무구를 모셔 놓은 신성한 장소에 비열한 도둑 따위가! 감히!
진노한 엘프 여왕이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보관고 내부의 함정과 가디언을 상대하느라 지쳤던 대도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치명상을 입은 대도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보관고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시간, 시간을, 조금만....
이대로면 죽는다.
아공간에 있는 아이템들을 뒤지면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대도는 그 일념으로 아공간을 열었다.
그게 실책이었다.
- 화아아악!
아공간을 다루는 힘은 원래 대도의 것이 아니었다. 마탑의 연구물을 훔쳐서 얻었을 뿐.
연구물에는 아직 불완전한 부분이 있었고, 대도는 힘을 완전하게 다룰 수가 없었다.
- 크아아아아악!
그 결과가 아공간의 폭주였다.
폭주는 대도의 몸 내부를 갈기갈기 찢었다.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회복할 수 없을 정도.
대도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 나답지 않게, 급했군.
침착했더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들.
수명이라는 위협 앞에서 대도는 침착함을 잃었고, 그건 그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 아쉽구나. 조금 더, 많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태껏 모아 온 아이템들 사이에서 대도는 숨을 거두었다. 온갖 악명을 떨친 남자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도 시시한 최후였다.
그렇기에 대도는 짙은 미련을 갖게 됐다.
- 보물. 더 많은 보물을 보고 싶다. 이 세상의 진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갖고 싶다.
지독한 욕망.
절대로 꺼지지 않을 탐욕의 불길.
대도라는 남자의 인생을 이끌어 온 탐욕은, 그가 영혼이 되어서도 채 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격하게 불타고 있었다.
- 진귀한 보물을 보여 다오. 훔치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만 한다면 내 힘을 빌려주마.
그게 대도가 남긴 미련이었다.
더 많은 보물을 보지 못했다는 미련.
대도는 폭군처럼 명백한 악인이지만, 그 미련은 들어주기 힘든 종류의 미련은 아니었다.
"좋아. 그렇게 해 주지."
그렇기에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 때문에 성불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아공간에 갇혀 있었던 사념이 그에게 화답했다.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악명 높은 대도둑, '무명'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파괴된 장갑 (일반)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 특성 '아공간의 주인 (B)'과 스킬 '대도둑의 은신 (A, Lv.1)'을 새로이 익혔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났기에 이름도 없었던 남자, 무명. 그 남자가 생전에 가졌던 힘이 진현우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 아공간의 주인 (B): 자그마한 아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아직 실력이 미천하기에 특수한 아이템이 있어야지만 다룰 수 있다.
· 대도둑의 은신 (A, Lv.1): 어두운 곳에 있을 때 그림자로 몸을 휘감는다. 은신 시 이동 속도가 30% 빨라지며 함정을 밟아도 발동하지 않는다. 움직일 때의 소음이 감소한다.
전생에도 가진 적이 있던 스킬이다.
이 스킬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진현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갑.'
장갑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보였다.
다만 일반적인 장갑과는 형태가 좀 달랐다.
일반적인 장갑이라기보다는 장갑에 추가로 덧붙이는 부속품처럼 생긴 장갑이었다.
[아공간 제어 장갑 (영웅)]
- 설명: 대도가 훔쳤던 아공간 제어 장갑 프로토타입이다. 그가 연구 성과를 모조리 훔쳤기 때문에 후속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 효과: 아공간 제어, 부착.
* 아공간 제어: 손바닥에 자그마한 아공간을 만들어 내서 원하는 아이템을 보관한다. 또한 보관한 아이템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
* 부착: 다른 장갑을 착용한 상태에서 착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장갑에 부착된다.
손아귀에 작은 아공간을 구현하는 아이템.
전생에서도 애용했던 물건이다. 쓰는 방법도 굉장히 간단하다. 장갑에 무기 따위를 보관해 두고 전투 중에 필요할 때 꺼내면 된다.
꺼내는 것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된다.
'전생에서보다는 편하게 얻었네.'
진현우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전생에서도 혼자서 공략하기는 힘들 것 같다 싶어 파티를 구해서 이 던전에 왔었다.
아니, 사실상 공략대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 정도 규모였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지. 겨우 다 처리했을 때는... 내분이 일어났었고.'
이번에는 굉장히 쉽게 공략한 셈이었다.
진현우는 건틀릿, 분쇄자에 아공간 제어 장갑을 부착했다. 그러자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아공간 제어 장갑이 건틀릿에 붙었다.
"오랜만에 한번 시험해 볼까."
진현우는 실피르를 꺼내고 손을 펼쳤다.
그러자 분쇄자의 손바닥 부분에 자그마한 아공간이 펼쳐지더니 실피르를 흡입했다.
쑤욱! 아공간이 실피르를 삼켰다.
"시, 실피르가! 여왕님의 활이!"
"진정해."
진현우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더니 다시금 활짝 펼쳤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실피르가 튀어나왔다.
'아공간 제어 옵션'의 효과였다.
"호오, 꽤 신기한 재주로구나. 근데 인간,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다. 그 장갑과 연결된 아공간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이곳이냐?"
"아니, 아마 다른 아공간일걸."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이 넓은 아공간은 대도의 것이다. 그는 죽었고, 이 공간을 유지하던 사념도 떠났다.
곧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여, 여행자. 그럼 위험한 거 아냐?"
"나갈 방법은 생겼어. 일단 전부 다 모여 봐. 나가기 전에 챙길 것들은 다 챙기자고."
"으, 으응."
진현우는 흩어졌던 엘프들을 모았다.
그리고 엘프들과 함께 대도둑의 보관고를 돌아다니면서 무사한 아이템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성과는 생각보다 아쉬웠다.
"상당수가 유실되었군요."
"여기도 없어, 여행자. 몬스터가 부쉈어."
"뭐, 이렇게 될 줄은 알았는데...."
다른 공간과 연결된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간 아이템이 많았다. 거기에 아공간에 흘러들어 온 몬스터들에게 파괴된 아이템들까지.
'대도의 보관고'라는 던전의 이름에 비하면 성과가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전생 때보다는 많이 남았네.'
그때는 더 시간이 흐른 때라서 아이템이 많이 남지 않았었다. 던전 공략을 끝낸 공략대가 서로에게 칼을 겨눈 이유였다.
진현우는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신전의 성유물, 나라의 보물... 이것들은 일단 챙기고. 이 반지도 따로 챙겨 둬야지.'
생각보다 챙길 게 많다.
진현우는 쓸 만한 아이템들을 주머니에 챙긴 후, 남은 아이템들을 놔 두고 잠깐 고민했다.
굉장히 좋은 아이템들이기는 한데.
'경갑옷 종류에 활, 단검 다수. 나머지도 나한테는 크게 필요가 없는 아이템들이군.'
진현우가 쓰기에는 다소 애매한 감이 있다.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내가 다 먹어도 상관없긴 해.'
저 엘프들이면 반감도 안 가질 것이다.
그들의 염원이었던 선조의 보관고를 되찾은 데다가 골치 아픈 아공간까지 처리했으니.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엘프들의 도움을 조금 더 받아야지.'
아직 드라이어드의 숲이 남았다.
마기에 의해 잠식된 숲. 그곳에 있는 마기의 근원을 제거하고 드라이어드를 구해야 한다.
엘프들의 도움이 있으면 한결 편할 터.
'특히 이것들로 무장한 엘프들이라면.'
일이 한층 쉬워질 수도 있다.
진현우는 빠르게 판단을 끝냈다.
이리샤와 아드네아를 비롯한 엘프들은 바닥에 놓인 아이템들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필요한 아이템이 있으면 쓰세요."
"어? 아, 아냐. 여행자. 염치가 있지...."
"맞습니다, 은인이시여. 저희는 선조들의 보관고를 되찾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전부 은인이 가져가시는 게 맞습니다."
엘프들이 극구 사양했다.
빈말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진현우가 다 가져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예 가지라는 건 아니고요. 여러분의 도움을 조금 더 빌려야 할 거 같아서 그럽니다."
"저희의 도움을, 말인가요?"
"예. 알고 계시잖아요. 드라이어드의 숲."
"거긴... 마족들에게 빼앗겼지요."
아드네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저는 그 숲을 되찾고자 합니다. 라시드한테 그렇게 해 달라는 의뢰도 받았었고요. 여러분이 도와주시면 수월해질 것 같아서요."
"드라이어드의 숲을, 말이군요."
"지금이 기회입니다. 마족들은 공허한 언덕에서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할 겁니다."
"맞아. 실제로 성공했었잖아."
진현우가 오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있는 엘프들은 모두 카오틱에게 잡혔을 것이다.
그리고 다크 엘프가 됐겠지.
마족들은 엘프들을 속이기 위해서 다른 접경 지역으로 카오틱들을 쏟아붓기까지 했다.
"우리가 드라이어드의 숲을 탈환할 거라는 건 아예 상상도 못 할 거고요. 놈들의 방심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겁니다. 최대한 빠르게."
"...아마 접경 지역에서 카오틱과 저희 동족이 대치 중일 겁니다. 마족들이 알아챈다고 하더라도 바로 지원을 보내기는 힘들 거예요."
아드네아의 눈동자가 빛났다.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다. 아니, 오히려 높다. 지금이기에 성공할 수 있는 기습이었다.
"드라이어드는 엘프의 든든한 동맹이라고 들었습니다. 전 그런 드라이어드를 돕고 싶고요. 이 아이템들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엘프들은 진현우가 내민 아이템들을 봤다.
하나같이 훌륭한 아이템들이다. 이곳에 있는 엘프들의 전력을 크게 향상해 줄 터.
"드라이어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염치없지만, 은인의 호의를 받겠습니다."
"응... 여행자."
이리샤가 진현우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우리가 여행자한테 받은 은혜는 꼭 여왕님한테 말씀드릴게. 아니, 모든 동족한테도, 네가 우리를 위해 헌신했다는 걸 알릴 거야."
"저희도 그리하겠습니다. 어떻게든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은인이시여."
진현우의 헌신을 칭송하며 고개를 숙이는 엘프들. 그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헌도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구만.'
-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105화
드라이어드의 숲 (1)
대도의 아공간은 사라질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힘을 이어받은 진현우는 아공간의 출입구를 열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는 아공간의 출구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갑시다."
"네, 은인이시여. 뒤따르겠습니다."
"왠지 여기 오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야."
일행은 출구를 나섰다.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새하얀 빛으로 물드는 시야.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이 언덕이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주변에 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그래도 일단 모르니까 실프, 주변을 탐색해 줘."
시야에 물드는 빛이 사라지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공허한 언덕의 광경이 보였다.
아공간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딱히 바뀐 것은 없었다.
"은인이시여, 보관고는...."
"저 출구가 닫히면 나타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대로였다.
잠시 후, 아공간의 출구가 닫혔다.
- 쿠우웅!
사라져 가는 출구가 부풀어 오르더니 거대한 건물을 내뱉었다. 엘프들의 보관고였다.
인위적인 위화감이 들던 언덕이었는데, 보관고가 나타나자 위화감이 사라졌다.
원래 이랬어야 할 풍경이었다는 것처럼.
"아아, 저 건물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여왕님이 아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보관고를 못 지킨 것을 슬퍼하셨으니...."
"우리한테 큰 도움이 된 거야, 여행자."
엘프들은 보관고를 보면서 감격하더니 다시 진현우에게 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는 엘프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 '공허한 언덕'의 지명이 '엘프들의 보관고'로 변경됩니다. 보관고에 잠들어 있던 무구는 아군의 장비를 크게 개선할 것입니다.
- 해당 지역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군에게 특수한 버프를 제공하는 지역입니다.
- 버프: 공격력과 방어력 +15%.
하이아칸 대륙의 특징 중 하나인 버프다.
특수한 지역을 점령할 경우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큰 도움을 주는 버프를 얻을 수 있다.
드라이어드의 숲도 마찬가지다.
'버프는 최대한 많을수록 좋지.'
그래야 일이 편해진다.
진현우는 메시지를 없앴다.
"내부를 확인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겠지요. 일단 동족에게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여기서 일부는 따로 움직입시다. 수색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상황을 알려 주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렇다면...."
엘프 중에 부상자들이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전투를 할 정도로 치료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부상을 입은 엘프들.
아드네아는 그들을 따로 빼냈다.
"보관고가 다시 나타났으니 최대한 많은 병력을 보내 달라고 알려. 가능한 빠르게."
"네, 대장님."
부상을 입은 엘프들이 떠났다.
남은 엘프들이 진현우를 돌아봤다.
"빠르게 움직입시다. 시간이 없으니."
여길 떠날 때가 됐다.
* * *
다행히도 드라이어드의 숲은 공허한 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몇 시간은 걸어야 했지만.
"장막이군."
"응. 접경 지역이야."
저 너머에 세계수의 장막이 보였다.
마족들의 접근을 막는 장막. 저 장막을 넘어가면 마족들의 영토로 진입하게 된다.
"드라이어드 숲의 상황부터 알고 싶은데. 정령으로 정찰 같은 건 못 하나?"
"실프면 할 수 있어. 그치만 마기가 강해서 오래 있지는 못할 건데, 그래도 괜찮아?"
"어. 드라이어드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만 알 수 있으면 충분해."
"알았어."
이리샤는 다른 엘프들과 협력해서 정령들을 소환했고, 숲 저 너머로 정찰을 보냈다.
바람의 정령은 눈으로 포착하기 힘든 존재라서 정찰용으로 쓰기에 적합했다.
진현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정령들이 돌아올 때까지만 쉽시다. 장막을 넘어가면 쉬지도 못하고 움직여야 할 텐데."
"좋은 생각이야."
"전원, 모습을 감춘 채 휴식하도록."
엘프들도 내색은 안 했지만 지쳤었는지, 아드네아가 말하자마자 휴식을 취했다.
진현우가 지쳤듯이 엘프들 역시 연이은 강행군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카오틱들에게 기습당해서 포로가 됐다가 아공간에서 보스 몬스터들과 싸웠다.
그리고 바로 드라이어드의 숲까지.
"안 지치려야 안 지칠 수가 없지."
"크흥, 크후우웅...."
재잘재잘 떠들던 미호도 진현우의 어깨 위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짧더라도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한다.
'일단 그 전에 이것부터 해야지.'
진현우는 두 아이템을 꺼냈다.
하나는 건틀릿, '분쇄자'. 그리고 또 하나는 이번에 사이클롭스한테 얻은 '거인의 핵'.
'장비를 강화해 주는 아이템.'
사이클롭스의 힘을 부여할 수 있다.
이걸 어디에 쓸 것이냐? 사실 처음 얻을 때부터 분쇄자에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등급이 낮아서 그렇지 유용하단 말이야.'
적의 방어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강한 대미지를 입힐 수 있는 '분쇄' 옵션.
그걸 가진 분쇄자는 귀한 아이템이었다.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울 정도.
"좋아."
그렇기에 강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진현우는 분쇄자를 내려놓은 후, 그 위에 거인의 핵을 올려 뒀다. 그리고 거인의 핵에 마력을 불어넣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스르르륵....
거인의 핵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렇게 녹아내린 거인의 핵은 그 아래에 있는 분쇄자로 남김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잠시 후, 빛이 일어났다.
- 거인의 핵 (전설)을 사용했습니다. 핵에 담긴 힘이 분쇄자로 흘러 들어갑니다....
- 분쇄자 (고급)가 변화합니다.
빛 사이로 그런 메시지가 보였다.
그리고 완전히 메시지가 사라졌을 때.
[분쇄자 (영웅)]
- 설명: 무엇이든 분쇄하는 힘이 담긴 건틀릿이다. 놀라울 정도로 튼튼하다. 특수한 아이템을 사용해 거인의 힘을 담았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 효과: 완전한 분쇄, 강화 금속, 무투가의 혼, 거인의 괴력.
* 완전한 분쇄: 적의 방어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강한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 또한 타격한 부위의 방어력을 30% 무시한다.
* 강화 금속: 거인의 힘을 담은 금속이 웬만한 공격은 튕겨 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졌다. 또한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착용감이 좋다.
* 무투가의 혼: 격투 스킬의 대미지가 30% 증가한다. 근력, 민첩, 체력이 +10 상승한다.
* 거인의 괴력: 괴력을 발휘해 격투 계통 스킬의 위력을 크게 강화한다. 한번 발동하면 일정 시간 동안 쿨타임이 적용된다.
변화한 분쇄자가 진현우를 반겼다.
두꺼운 건틀릿이었던 외형이 다소 바뀌었다. 좀 더 커지고 투박해졌다고 해야 할까.
끝에 붙은 징이 특히나 그러했다.
'이 정도면... 굉장히 좋은데.'
등급은 영웅 등급이지만, 사념 아이템은 등급 대비 강력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걸 감안한다면 전설 등급이나 다름없다.
진현우는 만족하며 건틀릿을 착용했다.
"이 활은 이렇게 쓰는 건가?"
"하나같이 굉장히 좋은 장비들이에요. 이런 활을 다룰 기회가 생길 줄이야...."
"빠르게 손에 익혀 둬. 조만간 써야 하니까."
다른 엘프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진현우가 나누어 준 장비들을 써 보고 있었다.
전부 영웅 등급의 아이템들이다.
손에만 익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후우."
진현우는 눈을 감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잠깐이라도 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행자, 일어나. 정령들이 돌아왔어."
"...음. 빨리 돌아왔네."
"아냐, 30분이나 지났어. 정신 차려."
아무래도 눈을 감자마자 졸았던 모양이다.
진현우는 고개를 털며 일어났다. 이리샤와 아드네아를 비롯한 엘프들이 그를 기다렸다.
"은인이시여, 정령들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조금, 곤란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뭐가 곤란하다는 겁니까?"
"붙잡힌 사람들이 있대. 아마 너하고 같은 여행자들인 것 같아. 마족들이 붙잡은 걸 보니까 꽤 실력이 있는 사람들인 거 같은데...."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
"그림으로 그려 줄게. 기다려 봐."
이리샤는 돌멩이로 흙에 그림을 그렸다.
드라이어드 숲의 중심부. 그곳에 마기의 근원이 있고, 마족과 카오틱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 포로들이 보였다.
"인간들 그리고 드라이어드들이야. 드라이어드들은 진흙... 그러니까 마기에 잠식당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시간이 많지 않아."
"시간이 끌리면 마기에 잠식당하겠군."
"응. 그 전에 구해야 해."
적절한 타이밍에 온 셈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완전히 타락한 드라이어드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을 테니까.
"그리고 여기에 유독 큰 드라이어드가 있었대. 아마 드라이어드들을 이끄는 공주일 거야. 똑같이 마기에 잠식당하고 있는 중이고."
"공주가 잠식당하면 큰일 나겠는데."
"큰일 정도가 아니라 끝이야. 드라이어들의 탄생에 관여하는 게 공주거든. 공주를 잃으면 드라이어드라는 동맹을 잃게 되는 거야."
한마디로 꼭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붙잡힌 여행자들이 있어. 아직까지 살려 둔 걸 보면, 아마도...."
"꽤 실력이 있는 놈들이겠지."
마기로 잠식시킬 정도의 가치가 있는 자들. 어느 쪽이든 반드시 구해야 한다.
"아, 그리고 마법사들이 있었어."
"마법사라. 기습할 때 좀 귀찮은 놈들인데."
여긴 3층이다.
플레이어들 수준이 꽤 올라왔다는 뜻이다.
여기서 활동하는 마법사 정도면 위기 상황에 쓸 수 있는 비장의 수단이 있을 것이다.
'아마 방어막 같은 것들.'
공격을 막아 내고 반격할 기회를 엿보게끔 해 주는 수단이 아마도 있을 것이다.
진현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처리할 방법이 없지는 않다.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 움직입시다."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일행은 장막 앞에 섰다.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킨 후, 장막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풍경이 일변했다.
- '드라이어드의 숲'으로 진입합니다.
- 해당 지역은 마족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반대 진영에게 디버프가 주어집니다.
- 권장 레벨: 68.
청록을 자랑하던 숲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까맣게 썩어 가는 숲이 반겼다.
땅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 그랬다.
마기에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족들의 영역입니다. 마족이 아닌 자들을 거부하는 곳이지요. 오래 있으면 마기에 잠식됩니다. 여기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틀 정도일 겁니다."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예. 신성력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마기의 상극은 신성력이다.
신성력을 일으킨다면 마기에 저항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대신에 신성력 소모가 엄청나지. 사제나 성기사가 혼자 버티는 건 의미가 없잖아. 주변 사람들도 같이 버틸 수 있게 해 줘야 하는데."
"써 봤자 오래 못 버틴다, 이거군."
"응, 맞아."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이긴 했다.
전생에서 진현우가 3층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았다. 엘프가 사실상 멸망하고, 마족이 대륙을 지배한 상황.
대륙 전역이 마기에 찌들어 있었다.
'나중에 어찌저찌 되찾기는 했다만.'
그동안 수많은 피가 흘렀다.
당시에 3층에서 활동했었으니 마족들의 영토가 얼마나 까다로운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생할 거라 생각했는데.
[성배의 잔해 (전설)]
- 설명: 오래전에 역할을 마치고 파괴된 성배의 잔해다. 잔해라고는 하지만 워낙 강대한 성유물이었기에 아직 큰 힘이 남아 있다.
- 효과: 성역 전개, 재림, 잔해.
* 성역 전개: 악을 몰아내는 성역을 전개한다. 사용할 때마다 1번의 횟수를 소모한다.
* 재림: 악을 벌하고 아군에게 축복을 내리는 광범위한 성역을 전개한다. 사용할 때마다 5번의 횟수를 소모한다.
* 잔해: 10번의 횟수 제한이 있다. 횟수를 초과하여 사용할 경우 완전히 파괴된다.
"...아이템이 생겼네?"
전생에는 얻지 못했던 아이템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늦은 시기에 보관고에 들렀고, 더 많은 아이템이 유실되었으니까.
이 성유물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진현우의 손에 들어왔지만.
"일이 쉬워지겠군."
무려 성배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템이다.
옵션도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신성력이 가득한 영역을 전개하는 '성역'이라는 옵션이 특히 그렇다. 이름만 들어도 신성하지 않은가.
횟수 제한이 있는 게 문제였지만.
'아껴서 잘 쓰면 되겠지.'
성배를 이용하면 일이 편해진다.
당장 이 성배를 이용해서 드라이어드 숲을 공략할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리샤, 내가 준 활 쓰는 법 익혔지?"
"응! 마력을 엄청 먹기는 하는데, 익혔어."
"좋아."
진현우가 이리샤에게 준 활에는 특수한 스킬이 하나 부여되어 있다.
그 스킬과 이 성배가 있다면.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쉽게 끝낼 방법이 있다.
106화
드라이어드의 숲 (2)
드라이어드의 숲.
한때는 청록을 뽐내는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던 숲은 그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땅에는 시커먼 진흙이 흘렀고, 그 진흙들이 꽃과 나무를 천천히 오염시키고 있었다.
"아, 으으...."
"그만, 그만해. 이건, 아아악!"
"죽여! 차라리 우리를 죽이란 말이야!"
숲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이 들리는 곳은 숲의 중심부. 그곳에 수많은 드라이어드가 처참한 꼴로 묶여 있었다.
진흙이 그들을 휘감았다.
"카하핫! 멍청한 사슴 놈들! 네놈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니 기분이 아주 좋구나!"
그 앞에 거대한 괴물이 서 있었다.
핏물처럼 새빨간 피부에 근육질의 커다란 덩치. 머리에는 산양과 비슷한 뿔이 두 개 솟아나 있고, 등에는 거대한 날개가 나 있었다.
데몬이라는 종족의 마족, 드라쿠스였다.
"기분이 어떻나? 응? 그렇게 증오하던 마족에게 제압당한 기분이 어떻느냔 말이다!"
"아아악!"
드라쿠스는 가시가 잔뜩 돋은 채찍으로 가까이 있던 드라이어드를 후려쳤다.
찰싹! 찢어진 살점이 채찍에 묻어났다.
물론, 드라쿠스가 단순히 변태적인 취향을 가졌기에 채찍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더 고통스러워해라! 더 울부짖어라! 너희가 고통스러워할수록, 좌절할수록! 마기가 네놈들의 근원까지 파고들 테니까!"
"크흑, 으, 으아아... 그만, 그만...!"
모든 것은 마기로 잠식시키기 위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드라이어드를 덮쳤다. 그러자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몸을 단단히 구속하던 마기가 빠르게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 카학! 끄, 으으아아아아!"
"안 돼! 알리우스, 정신 차려! 마음을... 꺅!"
"방해하지 말고 동족의 탄생을 지켜봐라!"
드라이어드의 모습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슴 같던 하반신이 새까맣게 물들면서 파충류의 그것과 비슷한 갑피가 돋아났다.
상반신은 피가 묻은 것처럼 새빨갛게 변했으며, 머리에는 기괴한 형태의 뿔이 생겼다.
"크아아아악!"
"그래, 이제야 좀 볼만하군!"
"아, 안 돼...!"
아름답던 얼굴도 흉측하게 변했다.
마기에 더는 저항하지 못하고 완전히 잠식당하면서 마족과 비슷하게 변한 결과였다.
곁에 있던 드라이어드가 비명을 내질렀고, 드라쿠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었다.
"알리우스, 왜, 왜...."
"카하하하하! 슬퍼하지 마라! 어차피 네놈들도 저놈과 똑같은 꼴이 될 테니까."
드라쿠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저 드라이어드들의 모습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인가.
숲과 마법을 이용해서 자신들을 괴롭히던 드라이어드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역, 겨운, 놈...."
그때,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드라쿠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이 숲의 중심부에 있는 큰 나무에 유독 큰 드라이어드가 구속되어 있었다.
"아, 드라이어드의 공주님이 이게 무슨 꼴이신가? 자기를 낳은 나무에 묶인 꼴이라니!"
"네가, 이렇게 만들었, 으면서...."
"카하핫! 당연히 알고 한 소리 아니겠나."
드라이어드의 공주, 하엘.
한 종족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지금은 언제 마족으로 타락할지 모르는 신세였지만.
그녀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자연이, 널, 벌할 것이다...."
"자연! 그 잘난 세계수가 말인가? 그런데 이를 어떡하나, 아직 아무런 일도 없는데! 네 동맹인 엘프들도 도우러 오지 않고 있잖나!"
"큭...!"
정확하게 말하자면 엘프들은 드라이어드의 숲을 탈환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족들의 작전 때문에 탈환이 아니라 방어로 잠깐 태세를 전환한 상태.
드라쿠스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피 묻은 채찍이 하엘의 뺨에 닿았다.
"드라이어드 공주는 새로운 드라이어드를 만드는 힘이 있다더군. 아주 기대돼. 네가 우리를 위해 노예들을 만드는 모습이...."
"그럴 일은, 크으으윽!"
"카하하!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마기가 하엘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조만간 하엘도,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결국에는 마기에 잠식당하고 말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드라쿠스."
"음, 노조무. 돌아왔나."
"물론. 정찰을 마치고 왔다."
드라쿠스에게 카오틱들이 다가왔다.
그 선두에 있는 노조무라는 이름의 남자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3층의 카오틱들 중에서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유명한 남자였다.
곁에 있는 건 그의 동료들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드라이어드들도 조만간 다 마기에 잠식될 거다. 적들의 침입에 대비할 준비는 확실히 해 뒀겠지?"
"경계 마법을 빼곡하게 설치해 뒀다. 하늘을 날아서 오는 게 아닌 이상은 먼저 우리한테 신호가 올 거다. 하늘을 날아서 온다고 하더라도 대처할 방법은 강구해 뒀다."
"좋군. 그리고 이 정도 숫자면...."
드라쿠스는 주변을 돌아봤다.
이 드라이어드 숲에는 도합 수백에 달하는 마족과 카오틱들이 있었다. 엘프가 공격해 오더라도 충분히 반격할 수 있는 숫자다.
그는 노조무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이번 일만 끝내면 너희한테도 큰 공헌도가 돌아가겠지. 그분께 더 큰 힘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기대하고 있지."
플레이어들에게 공헌도가 있듯이 카오틱들에게도 공헌도 시스템이 존재한다.
카오틱들은 공헌도에 따라서 여러 아이템, 심지어는 특성과 스킬까지 얻을 수 있었다.
놈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였다.
"공허한 언덕의 상황은 어떻지?"
"마지막으로 연락을 받았을 때는 언덕 제압이 끝났다고 했다. 엘프들을 다 제압하고 마기의 근원을 심은 상황이라고 하더군."
"거의 다 끝난 상황이군."
공허한 언덕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보스 몬스터는 굉장히 매력적인 먹이였다.
거길 차지하기 위해서 다른 접경 지역에서 시선을 끌었는데, 엘프들이 쉽게 속았다.
이제 결실만 거두면 되는 상황.
"저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할 거지?"
"뭐? 아아, 저놈들 말인가."
노조무가 철창에 갇힌 플레이어들을 가리켰다. 여섯 명이 마기에 묶여 신음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숲을 지키던 플레이어들.
"흐윽, 윽! 이 X새끼야!"
"씹어 먹을 카오틱 놈들이...!"
"귀가 아프군. 으음, 마음도 아파."
그들이 저주를 내뱉었다.
당연하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드라쿠스, 저놈들을 꼭 살려 둬야 하나? 내가 마음이 아파서 빨리 죽여 주고 싶은데."
"놔둬라. 크흐흐, 대적자라고 했던가. 그 존재가 쓸 만한 놈이 있으면 데려오라고 했다."
"그래? 흠, 쓸 만한 놈들이긴 하지."
노조무는 철창 안의 남자를 봤다.
흉터가 가득한 근육질의 몸을 지닌 남자. 격투로 싸우던 자였는데, 실력이 출중했다.
저놈을 잡느라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들... 나가면 다 죽여 버릴 거다. 저놈들도, 배신했던 놈들도!"
"화가 많이도 났군."
노조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마족은 별다른 피해 없이 드라이어드의 숲을 장악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배신자들이 있었으니까.
전투가 벌어졌을 때 플레이어들의 일부가 배신했고, 아군을 마족들에게 바쳤다.
"카하핫! 무의미한 다짐이군. 얼마 안 남았다. 그 신성력만 사라지면 네놈들도...."
플레이어들을 미약한 신성력이 감싸고 있었다. 그들이 마족들의 영역에 오래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잠식되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대되는군. 저놈이 바뀌는 모습이."
"크흐흐,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도록."
무난한 상황이다.
엘프들과의 전쟁 대부분이 이러했다. 마족이 일방적으로 엘프들을 몰아붙이는 형태.
이번에도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그렇게 판단했다.
- 카루루루루루루!
"뭐야?!"
그 순간 하늘에서 고성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하늘을 비행하는 거대한 괴물.
그리폰이었다.
- 후두두둑!
"크윽!"
그리폰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칼날 같은 깃털이 지상을 향해서 쏟아졌다.
하지만 마족과 카오틱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폰? 저런 몬스터가 이곳에 있었나?"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어이! 경보 장치가 울린 건 있나? 아무나 빨리 확인해!"
그리폰에 긴장할 이유가 없다.
강한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혼자. 이 숫자면 그리폰은 능히 사냥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저놈 말고 다른 적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노조무 님! 다른 경보 장치는 울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요!"
"혼자라는 건가? 이해가 안 되는군."
"카하핫! 이해할 필요가 있나?"
드라쿠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펼쳤다. 그 손아귀에 작열하는 불길이 어렸다.
"어차피 죽이면 끝날 일인데!"
- 화르르륵!
거대한 불길이 하늘로 쏘아졌다.
하늘을 활공하는 그리폰이 몸을 크게 틀면서 불길을 피했다. 그러자 스쳐 지나간 불길이 방향을 틀면서 다시금 그리폰을 노렸다.
유도 성능을 가진 화염탄이었다.
- 퍼어어엉!
- 캬르르...!
그리폰의 등에 적중하는 화염탄.
놈이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큼 드라쿠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크흐, 저놈은 포획한다."
"새로운 노예가 또 생기겠군."
매 사냥이라도 하는 것처럼 평온하다.
드라쿠스는 하늘을 활공하는 그리폰을 우습다는 듯이 보면서 놈을 떨어트리려고 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놈에게 끌린 순간.
- 파아아앗!
"...!"
섬광이 번쩍였다.
저 너머, 수풀 사이에서 쏘아진 섬광이 순식간에 마족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잡기에는 너무도 빨랐다.
"뭣...!"
노조무가 경악했다.
언제? 어떻게? 함정과 경계 장치는 그 무엇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섬광이 숲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무, 엇이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섬광이 도달한 곳은 드라이어드의 공주, 하엘의 앞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선 인간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자는 누구인가.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진현우는 두 손을 높이 들었다.
"그건!"
"저놈을 막아!"
그 손에는 성배가 쥐여 있었다.
드라쿠스는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다. 저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족인 자신에게 치명적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 파아아아앗!
"크아아아아악!"
그 예감은 적중했다.
성배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신성. 강렬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캬아아아아악!"
"허억, 흐으아아아...!"
드라쿠스의 명령을 받고 뒤늦게 진현우에게 달려든 마족들이 첫 번째 희생양이었다.
빛이 놈들을 덮쳤고, 그 몸이 불길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새하얀 불길이 놈들을 삼켰다.
- 화르르르륵!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성에 닿은 마기가, 진흙이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드라이어드와 하엘을 잠식해 가던 진흙 역시 성배의 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허억, 헉! 이 빛은!"
"몸을 잠식하던 마기가... 사라졌어."
마기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난 드라이어드들은 멍하니 주변을 에워싼 빛을 바라봤다.
사방을 뒤덮는 거대한 영역이 전개됐다.
성배가 자아내는 '성역'. 사악한 것을 부정하고, 마기를 몰아내는 신성의 극치였다.
'횟수 제한이 있는 아이템이라서 그런가.'
진현우는 손아귀의 성배를 바라봤다.
'위력이 장난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가까이에 있던 마족들을 단번에 불태우고 다른 마족들도 쓰러지게 할 정도의 위력.
거기에 마기까지 지워 낼 줄이야.
"이, 이 정도의 신성력을...."
드라쿠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다른 마족들과 다르게 강대한 마족이었기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성력이 자신을 약화하고 있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인간이, 어떻게?"
드라쿠스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하늘을 뒤덮은 신성한 장막을 올려다봤다.
장막에서부터 떨어지는 빛의 가루.
누군가에는 성스럽게 느껴질 광경이었지만, 드라쿠스는 악몽을 보는 것만 같았다.
"드라쿠스! 괜찮나!"
"난 괜찮다. 일단 마기의...."
마기의 근원을 지켜라.
그렇게 말하려던 드라쿠스는 말을 멈췄다. 하늘에서 뭔가가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건 화살이었다.
"크으윽!"
위기를 직감한 노조무가 발악하듯 무언가를 작동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 푸우욱!
"크으아아악!"
"이, 망할...!"
빗물처럼 쏟아지는 화살.
수많은 화살이 지상을 뒤덮었고, 그에 꿰뚫린 카오틱과 마족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광경을 본 드라쿠스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인간 놈이...!"
드라쿠스는 자신의 맞은편에 선 인간, 진현우를 보면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원흉.
"뭘 그리 노려봐?"
진현우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107화
드라이어드의 숲 (3)
적들이 기습해 온다.
노조무가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은 저 너머에서 화살을 겨누는 엘프들이 보였을 때였다.
진현우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은밀하게 여기까지 와서 기습을 준비한 것이었다.
'어떻게? 경계 장치가 있을 텐데!'
경계 마법은 울리지 않았다.
그걸 돌파하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경계 마법을 파괴하지 않는 한은.
"크으윽!"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각종 화살들과 정령 마법들이 카오틱들과 쓰러진 마족들을 노리고 쏘아지는 게 보였다.
노조무는 황급히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괜찮아. 엘프들이 쏘는 화살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버텨서 태세를 가다듬고....'
엘프와 한두 번 싸운 것이 아니다.
그들의 화살과 마법이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버틴다.
목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자 찬란한 빛을 내뿜으면서 거대한 규모의 방어막을 전개했다.
'영웅 등급 아이템이다. 이거면 저 엘프들의 공격을 한 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노조무는 마법사다.
원거리에서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지만, 근거리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클래스.
그렇기에 근접전에 대비한 아이템들을 준비해 뒀고, 그중 하나가 이 방어막이었다.
'버티고, 곧바로 반격한다.'
노조무는 마법을 영창하며 그리 판단했다.
그리고.
- 푸우욱!
"크으아아악?!"
"이, 망할...!"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
가장 처음, 푸른 마력을 머금은 화살이 방어막을 강타했다. 그러자 화살이 신묘한 빛을 내뿜더니 방어막이 그대로 해제되었다.
"무, 무슨! 방어막을 어떻... 크아악!"
"아아아악!"
방어막이 순식간에 파괴되었고, 연이어 쏟아지는 화살과 정령 마법이 적을 덮쳤다.
사방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빗물처럼 쏟아지던 마법과 화살에 당한 마족과 카오틱들이 토하는 비명이었다.
"으, 으윽...."
"흐어어어...."
엘프들의 화살은 정확히 급소를 노렸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예상치 못한 위력. 상당수의 카오틱과 마족이 무력하게 당했다.
절반 가까이 되는 숫자가 땅을 굴렀다.
"크으윽! 말도 안 돼...!"
노조무는 화살에 꿰뚫린 팔을 붙잡으며 신음했다. 영웅급 아이템으로 만들어 낸 방어막이 화살 한 방에 파괴되다니, 이게 무슨.
게다가 뒤이은 마법과 화살들의 위력들.
'엘프 화살이 이렇게 빨랐나?'
엘프와 한두 번 싸운 게 아니다.
수없이 싸웠고, 놈들의 장비 수준이나 전투 스타일 같은 것들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뭔가 달랐다.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르다.'
마법도, 화살의 위력도.
그 모든 것이.
"저, 적들이 또 공격해 온다!"
"시발, 정신 차려! 엘프 새끼들이잖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죽이면 된다고!"
"크아아아아아!"
노조무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저 너머에서 엘프들이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엄호하는 다른 엘프들의 모습도.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너희는 포로들을 구해라. 이리샤!"
"응, 언니!"
"크으윽...!"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던 노조무의 목을 노리고 마력을 머금은 화살이 쏘아졌다.
그 방해에 준비했던 마법이 흐트러졌다.
일부 엘프는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고, 나머지는 마족과 카오틱들을 막아섰다.
"저 새끼들, 장비가...."
"귀쟁이가 어디서 저런 장비를 얻은 거야?"
근데 엘프들의 장비가 심상치 않았다.
척 봐도 진귀해 보이는, 여기 있는 카오틱들도 한둘 있을까 말까 한 아이템들이었다.
그런 장비를 온몸에 둘둘 말고 있었다.
"동족들이여, 숲을 수호하라!"
"더러운 마족 놈들을 모조리 섬멸하라!"
"이, X발!"
좋지 않다.
상황이 너무도 안 좋다.
마족과 카오틱들은 그 사실을 절감하면서, 들이닥치는 엘프들의 공격을 방어했다.
"인간...."
그리고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마기의 근원이 있는 구덩이 앞에서, 드라쿠스와 진현우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조금 전의 그 가증스러운 빛은, 저 엘프들은 뭐냐!"
"내가 좀 좋은 아이템을 얻었거든."
"아이템, 이라고?"
드라쿠스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질문이 맴돌았다.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여기로 온 것이냐.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하! 다 필요없다. 궁금한 것들은 네 시체에 대고 물어보마, 하찮은 필멸자 놈아!"
"자기는 안 죽을 것처럼 말하는군."
드라쿠스는 이 모든 걸 일으킨 원흉, 진현우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 불길이 일었다.
놈의 몸도 그러했다.
- 화르르륵!
데몬, 드라쿠스의 전신을 휘감은 검은 마기가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놈의 손에 마기로 된 대검이 쥐였다.
"큭...!"
드라쿠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몸을 휘감은 마기도, 손에 쥔 대검도 평소보다 기세가 한층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 주변을 에워싼 성역 때문이었다.
놈이 이를 까드득 갈았다.
"죽여 주마, 반드시!"
"생각보다 말이 많은 놈이야."
드라쿠스가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커다란 덩치로 낸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였다.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
- 부우웅!
아무런 기교도 없는 움직임.
대검을 휘둘렀다기보다는 몽둥이를 휘두른 것만 같은 무성의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더없이 위력적이었다.
- 화아아악!
무성의하게 허공을 가른 대검.
그 칼날에서 마기가 형태를 갖추더니, 마치 검기처럼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카드득! 방패와 마기가 충돌했다.
- 파스스...!
가로막힌 마기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마기가 진현우의 피부로 접근했다. 그를 잠식하기 위해서였다.
'하여튼, 마족 새끼들.'
마기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는 상극이다.
설령 저 검기 같은 마기를 막아 낸다고 한들, 남은 마기가 진현우의 몸에 조금씩 쌓일 터.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후욱!"
진현우는 검기를 쳐 내자마자 도끼를 투척했다. 바람을 휘감은 도끼가 드라쿠스를 노렸다.
다양한 각도에서 날아드는 도끼.
드라쿠스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찮다!"
- 파지지직!
드라쿠스의 왼손에 흑마법이 어렸다.
순식간에 검은 번개로 화한 마기가 날아드는 네 자루의 도끼를 허공에서 요격했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추진력을 잃은 도끼를 회수하면서 드라쿠스를 향해 돌진했다.
'인간 주제에!'
그 속도는 섬광과도 같다.
드라쿠스는 순식간에 코앞까지 들이닥친 적을 노려봤다. 진현우는 땅에 발을 고정하면서 오른 주먹으로 허공을 타격했다.
- 퍼어엉!
"흥...!"
파쇄권.
그 충격파가 드라쿠스의 팔을 강타했다.
꽤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티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이다.
"솟구쳐라!"
드라쿠스의 왼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바닥에서 검은 송곳들이 연신 솟구쳤다. 그 순간, 진현우는 왼손의 아공간을 개방했다.
그 손아귀에서 빛나는 검이 튀어나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마르실의 성검이.
- 서걱!
"...!"
진현우는 솟구친 송곳들을 성검으로 베어 내면서 드라쿠스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 검을 본 드라쿠스는 불길함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방어 태세를 취할 정도였다.
- 카드드득!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불길함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성검과 대검이 맞부딪쳤다. 그러자 마기로 된 대검이 너무도 쉽게 반으로 갈라졌다.
마치 나무토막이라도 베는 것처럼.
"허억!"
드라쿠스는 경악하며 마기를 흩뿌렸다.
화약처럼 흩뿌려진 마기가 일제히 폭발했고, 놈은 물러나서 태세를 가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진현우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 화아아악!
"이 미친놈이!"
빛의 수호를 앞세우며 폭발을 헤쳐 나온 진현우가 드라쿠스를 향해서 돌진했다.
그 몸에 폭발로 입은 상처가 생겼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 꽈아앙!
"크아아아아!"
진현우는 파쇄권으로 충격파를 쏘아 내 드라쿠스를 도망치지 못하게끔 막았다.
놈은 이를 까드득 악물며 대검을 만들었다.
'저 검을 막으려면 마기를 집중해야 한다.'
조금 전에 만들어 낸 것보다 더 많은 마기를 불어넣은 검이었다. 이 정도라면 조금 전처럼 단번에 부러지는 불상사는 없을 터.
드라쿠스는 크게 숨을 삼켰다.
"크... 건방진, 인간 따위가!"
격렬하게 분노한 드라쿠스는 땅에 두 발을 고정하면서 미친 듯이 대검을 휘둘렀다.
수많은 검기가 진현우를 덮쳤다.
'침착하게.'
진현우는 검기들의 궤적을 읽었다.
막을 수 있는 건 막는다. 막을 수 없는 건 피한다. 피할 수 없는 것은 검으로 베어 낸다.
그건 일종의 곡예나 다름없었다.
'뭐, 뭔 미친 짓을 하는 거야?'
'저런 짓이 가능하다고?'
엘프들과 격전을 벌이던 카오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기겁할 정도였다.
노조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얼굴,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저 검, 저 도끼, 저 전투 방식.
모두 어디서 본 적이 있다. 그래, 최근에 유명한 놈이니까 주의하라고 들었던....
"지, 진현우! 이런, 시발!"
"뭐? 갑자기 왜 그래?"
루윈 대륙의 영웅.
카오틱들에게 크게 물을 먹였던 X새끼.
그 사실을 깨달은 노조무가 입술을 씹었다.
'위험하다. 이건....'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엄습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크으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면 힘이라도 생기나?"
"씹어 먹어도 모자랄 인간 놈이!"
진현우와 검격을 나누는 드라쿠스도 노조무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두 발을 땅에 고정한 채 대검을 미친 듯이 내지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맹공을 펼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빌어먹을, 이, 망할!'
대검을 휘두른다.
때로는 머리 위에서, 어떨 때는 허리를 노리고, 또 어떨 때는 목을 노리면서 내질렀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진현우는 모든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 내고 있었다.
"죽으란 말이다!"
드라쿠스의 대검이 진현우의 머리를 노렸다. 머리를 내리쳐 한번에 쪼개려는 것이다.
진현우는 오른발을 축으로 삼으면서 몸을 회전시켰고, 미세한 차이로 대검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금 주먹을 내질렀다.
- 꽈아앙!
"크흐윽!"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검으로 공격을 막아 내면서 파쇄권으로 계속해서 충격파를 쏘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성검을 쏘아 내서 드라쿠스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기회.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 의미도 없는 공방을 이어 나가던 드라쿠스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저놈의 충격파.'
진현우의 파쇄권은 성가시지만 위협적이진 않다. 충분히 버틸 만한 위력이었다.
그 뒤를 잇는 검격이 위협적이면 모를까.
그리고 충격파를 쏘아 낼 때마다 약간이지만 진현우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정확한 타이밍에 그 틈을 노린다면.'
상황을 역전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드라쿠스는 검격을 나누면서 입속으로 영창을 이어 나갔다.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안 된다.
흑마법. 지금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흑마법으로 저놈을 한 번에 죽여야 한다.
- 카앙! 카드드득!
다시금 무의미한 검합이 이어졌다.
몇 번이고 이어졌던 검합. 드라쿠스는 진현우가 충격파를 쏘아 낼 타이밍을 짐작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읽어 냈다.
'지금이다!'
진현우가 다시금 주먹에 힘을 집중했다.
드라쿠스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보나 마나 조금 전과 같은 충격파를 쏘아 낼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했던 공격.
'저 충격파는 막을 필요도 없다.'
제법 위력은 있으나 버틸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역으로 기회로 삼는다.'
지금 준비를 끝마친 흑마법으로.
충격파를 쏘아 낸 진현우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 놈의 몸에 흑마법을 꽂아 넣는다.
드라쿠스는 그렇게 판단했고.
- 스으으으!
진현우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사실에 드라쿠스가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주먹이 허공을 타격했다.
'온다. 지금 흑마법을...!'
충격파가 쏘아지는 것이 보였다. 드라쿠스는 그걸 무시하면서 두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충격파가 복부에 닿을 때.
- 뻐어어엉!
"...?!"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의 충격파와는 명백히 다른 굉음. 충격파가 몸에 닿았을 때 동시에 흑마법을 쏘아 내려던 드라쿠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윽, 흐으으으...!"
어마어마한 고통이 뇌리를 엄습했으니까.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 정도의 고통이었고, 느낄 리가 없는 고통이었다.
"커, 헉!"
드라쿠스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놈은 떨리는 눈으로 복부를 내려다봤다. 정확하게 진현우의 충격파가 타격한 부위.
그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야, 너 배에 구멍 났다. 괜찮냐?"
"꺼흑, 끅, 크하아아아...."
거인의 괴력.
괴력을 발휘해 격투 계통 스킬의 위력을 크게 강화하는 분쇄자의 새로운 옵션.
진현우는 위력을 약하게 한 파쇄권을 계속 쓰면서 드라쿠스의 방심을 유도했다.
'버틸 수 있는 공격이라고 생각했겠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방심.
그리고 드라쿠스의 움직임이 달라졌을 때, 거인의 괴력을 더한 파쇄권을 쏘아 냈다.
그 위력은 치명적이었다.
- 쿠우웅!
"헉, 카학! 씹어 먹을, 인간, 따위가아아!"
무릎을 꿇은 드라쿠스가 저주를 내뱉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드라쿠스를 돕는다! 서둘러!"
드라쿠스에게 동아줄이 떨어졌다.
노조무를 비롯한 카오틱들이 모든 스킬을 집중해서 진현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절체절명의 위기.
"멍청한 놈들."
- 스으으으...!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부서진 검이, 검기를 내뿜었다.
108화
탈환
"빌어먹을 귀쟁이 놈들이!"
"숲의 분노를 맛봐라, 더러운 마족들아!"
숲에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같이 엄청난 장비로 무장한 엘프들은 카오틱과 마족들을 매섭게 압박했다.
노조무는 마법을 영창하며 이를 갈았다.
"X발! 이 X새끼가!"
여기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는 노조무다.
그걸 어떻게 파악했는지, 그가 큰 마법을 영창하려고 할 때마다 끈질기게 방해했다.
영웅급 활을 받은 이리샤가 활에 담긴 스킬로 노조무를 계속 저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드라이어드들이 하나둘씩 풀려나고 있다.
이대로면 죽는다. 반격할 기회를 찾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이 장소에서 도망쳐야 한다.
'엘프를 상대로?'
노조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기는 숲이다. 엘프들은 긴 세월을 살아온 숲의 종족이었고. 그런 자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저놈들은 추적의 달인이다.
'드라쿠스. 일단 저놈이 살아야....'
어떻게든 활로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크윽, 흐으으으...!"
그 드라쿠스가 위험하다.
배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본 노조무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대로 가면 드라쿠스는 무난하게 저 괴물의 손에 쓰러지게 될 거라고.
'안 돼. 드라쿠스가 죽으면 끝이다.'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전력이 드라쿠스다. 놈이 죽으면 승산이 없어진다.
어떻게든 드라쿠스를 살리고, 놈과 협력해서 이 난관을 타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드라쿠스를 돕는다! 마족! 너희가 방패가 되어서 우리를 지켜라! 어서, 이 머저리들아!"
"개소리를... 크으윽! 젠장!"
마족들은 고기 방패가 되라는 말에 분노했지만 마땅히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사방에서 엘프들이 공격하고, 다른 엘프들은 붙잡힌 포로들을 구하고 있는 상황.
여기서 드라쿠스가 죽으면 끝이다.
"크아아아악!"
"인가아안! 실패하면 죽여 버리겠다!"
카오틱들이 뭔가를 준비하는 걸 눈치챈 엘프들이 거센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마족들이 흑마법으로, 그리고 제 몸을 방패로 삼아 공격을 막아 냈다.
그리고 노조무의 영창이 끝났다.
"불꽃이여!"
"내 뜻에 응답하라!"
허공을 수놓는 수많은 마법.
드라쿠스가 죽으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를 구하려는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은.
'검? 뭐야, 저 부서진 검은....'
최악이었다.
진현우의 손아귀에서 부서진 검이 튀어나왔고, 그는 그걸 쥐자마자 검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 콰르르르르르!
수많은 마법이 해일처럼 쏟아졌다.
거센 불길이, 지독한 냉기가, 번쩍이는 뇌전이, 땅을 기는 토룡이 진현우를 노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에게 닿지는 못했다.
"미, 친...!"
노조무와 그 부하들이 쏘아 낸 수많은 마법은 위력적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 모든 마법이 진현우를 스쳐 지나갔다.
부드러운 강물에 흘러가는 것처럼 지나간 수많은 마법은 진현우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 콰아아앙!
되돌릴 수 없는 마법은 흘린다.
그리고 되돌릴 수 있는 마법은 강물에 휩쓸린 것처럼, 그 궤적을 틀어 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악!"
바로 드라쿠스를 향해서.
드라쿠스를 지키기 위해서 쏘아 낸 마법이 오히려 드라쿠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불길이 놈을 불태웠고, 얼음이 불타는 몸을 얼어붙게 했고, 뇌전이 피부를 내달렸다.
"아, 아아, 흐아아아아...."
드라쿠스를 덮친 수많은 마법이 사그라들었을 때, 놈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온몸이 불타고 녹아내린 흉측한 모습으로.
믿을 수 없는 광경. 노조무가 아연실색했다.
"무슨, 미친 짓을...."
미친 짓을 한 것이냐.
검 한 자루로 저 수많은 마법을 막아 냈다고? 그뿐만이 아니라 역으로 이용했다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레벨대의 플레이어가.
'아니, 설령 상위권 랭커라고 할 지라도.'
저런 기적을 선보일 수 있단 말인가?
노조무의 손이 떨렸다. 그의 곁에 있던 카오틱들도 몸이 떨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진현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 파아아아앗!
"크하아아악!"
"으윽!"
찬란한 광휘가 사방을 뒤덮었다.
숙련도의 효과로 이제는 마족들도 불태우고, 약화하는 힘을 가지게 된 광휘.
안 그래도 카오틱들을 지키느라 부상을 입은 마족들이 빛을 못 버티고 쓰러졌다.
"여행자! 포로들은 다 구했어! 공주님도!"
그게 다가 아니었다.
진현우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리샤를 비롯한 엘프들은 포로를 구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증오로 치를 떠는 이도 있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풀려난 드라이어드가 몸을 떨었다.
지독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드라이어드의 공주, 하엘은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이 숲을 더럽힌 너희들은 절대로!"
분노한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을 모조리 일으켰다. 그러자 숲이 그녀에게 반응했다.
쿠르르르! 바닥이 일어나면서 그 사이로 수많은 뿌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뿌리들은 땅에 선 카오틱과 마족들을 일제히 덮쳤다.
"우아아아악!"
"제길, 드라이어드 공주가...!"
"크, 커허억!"
몸을 꿰뚫고 구속하는 뿌리들.
그 모습은 자연이 분노한 것처럼만 보였다. 그리고 분노한 것은 엘프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은인님에게!"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어느새 마족들은 모두 쓰러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넋을 잃은 카오틱뿐. 격노한 엘프들이 바람을 휘감은 화살로 놈들을 겨누었다.
노조무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하, 항복하겠다. 그러니까...."
"일부만 살려 두고 나머지는 다 죽인다. 쏴!"
"아, 안... 크아아아악!"
카오틱들은 목숨을 구걸했지만, 숲을 빼앗기는 치욕을 겪은 엘프들에게 자비란 없었다.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 카오틱들을 덮쳤다.
"으아아아아!"
"X발, X발...!"
애초에 방어를 포기해 가면서 쏘아 낸 마법이었다. 카오틱들은 엘프들의 공격을 막지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화살에 꿰뚫렸다.
"흐어, 흐으으으...."
"살아남은 놈들은 모두 포획해 두도록."
"예, 대장님!"
엘프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카오틱들을 포획했다. 그중에는 노조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을 보는 엘프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가증스러운 카오틱 놈들."
아드네아는 죽은 카오틱을 걷어찼다.
마족도 증오스럽지만 이 카오틱들도 그 못지않게 증오스러웠다. 엘프의 땅을 침공하고 다크 엘프로 만드는 놈들이었으니까.
"은인은...."
"다 끝나 갑니다."
모두의 시선이 진현우에게로 향했다.
그의 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드라쿠스가 쓰러져 있었다. 놈은 거의 다 죽어 가는 상황이었지만, 진현우를 보는 눈빛은 살아 있었다.
"빌어, 먹을... 인간, 놈이...."
"너희 같은 놈들은 하는 말이 비슷하더라."
"큭, 허억!"
드라쿠스는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바로 목을 칠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놈의 목숨을 뺏는 것은 진현우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
"그쪽에서 처리하시죠."
"...고맙다, 친우여."
하엘과 그녀를 따르는 드라이어드들.
드라쿠스를 죽이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드라쿠스...."
만신창이가 된 드라쿠스를 보는 하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그녀의 뜻을 따르듯이 드라쿠스를 에워쌌다.
"편하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크으, 으으아아아아아!"
숲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하엘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녀와 드라이어드들은 드라쿠스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은 모조리 겪게 하고 죽였다.
잔혹함에 진현우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드라이어드가 저런 종족이 아닌데.'
자연을 사랑하고 자애로운 종족이다.
그런 드라이어드가 저렇게 된 것을 보니, 이 대륙에 벌어진 전쟁이 꽤 참혹한 모양이다.
실제로도 그렇긴 했다.
"음... 일단."
진현우는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들을 봤다.
- '드라이어드의 숲'을 탈환했습니다. 청량한 숲의 기운이 아군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해당 지역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군에게 특수한 버프를 제공하는 지역입니다.
- 버프: 스킬 대미지 +15%, 마력 재생 속도 +40%. 비전투 시 상처가 미약하게 회복함.
드라이어드 숲의 버프 효과는 훌륭했다.
마족들이 괜히 노린 게 아니다. 이 정도 버프면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 퀘스트 '드라이어드 숲의 구원'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와 골드, 공헌도와 칭호가 주어집니다.
- 레벨이 3단계 상승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처음으로 마족 계열의 보스 몬스터를 죽일 것.
- 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마족을 죽이다 (효과: 마족형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가 5% 상승합니다.)]를 획득했습니다.
A+등급 퀘스트답게 경험치가 후했다.
한 번에 3단계가 상승할 정도. 진현우의 레벨이 마침내 60레벨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게 의미하는 것은.
- 적정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계승자' 칭호의 효과로 직업 퀘스트를 강제로 받습니다.
직업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진현우가 기다리던 메시지였다.
[하이아칸 대륙의 조각-1.]
· 난이도: S.
· 설명: 하이아칸 대륙 어딘가에 웨펀 마스터가 남긴 조각이 숨겨져 있다. 조각이 숨겨진 위치는 엘프 여왕이 알고 있을 것이다.
· 보상: 다음 퀘스트로 연계.
"이건 또 뭐야?"
진현우는 인상을 확 구겼다.
난이도가 이상하다. 잘못 본 건가? 하지만 아니었다. 분명히 S등급 퀘스트였다.
A등급도 아니고 S등급.
'에픽 퀘스트급 난이도잖아. 미치겠네.'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폭군 퀘스트를 깨느라고 온갖 귀찮은 짓을 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게 생겼다.
'그리고 엘프 여왕을 만나라....'
엘프 여왕이라면 만나기 까다로운 존재다.
하지만 이번에 진현우가 성공한 것들이 있으니 아마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3층에 오자마자 순식간에 큰일을 두 개나 처리했는데.
'안 만나 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방법이 있겠지.
진현우는 메시지를 지운 후, 엘프들이 구출했다는 포로들을 확인했다.
드라이어드들은 볼 필요가 없다. 그가 궁금한 것은 플레이어들이었다.
"이 사람들이지?"
"응, 여행자. 꽤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특수한 아이템 덕분에 마기를 버틴 모양이야."
"그런 것 같네. 저 신성력을 보니까."
한 무리의 플레이어가 쓰러져 있었다.
구속에서 풀려났지만 오랫동안 굶은 탓에 몸을 못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피부를 아주 옅은 신성력이 감싸고 있었다.
"으, 꺼으윽...."
"이리샤, 얘 숨 넘어가는데?"
"으응, 일단 치료는 해 뒀어. 죽지는 않을 거야. 돌아가면 한동안 집중 치료를 해야겠지."
진현우는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봤다.
굳이 살려서 마기로 잠식시키려고 했던 걸 보면 꽤 실력이 있는 플레이어일 것이다.
그래서 얼굴을 관찰했는데.
"응?"
한 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가장 선두에서 신음하고 있는 남자.
'이놈이 여기엔 왜 있어?'
짧은 머리카락에 흉터가 가득한 근육질의 몸을 가진 남자. 두 팔은 근육이 가득 올라온 것이 무슨 흉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 한 대 맞으면 죽을 것 같구나.
미호의 말이 정확했다.
아무튼.
'도살자. 이 새끼가 여긴 왜....'
진현우는 이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전생에서 도살자라 불리며 엄청난 악명을 자랑하던 마인이니까.
109화
도살자 (1)
도살자.
전생에 악명을 떨쳤던 플레이어다.
하이아칸 대륙이 마족의 손에 넘어갔을 때, 그 선봉에 서서 큰 활약을 한 걸로 유명하다.
'플레이어들을 엄청 증오하는 놈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플레이어들을 쓰레기라고 욕하면서 몹시 증오하고는 했었다.
손속도 굉장히 잔인했다. 플레이어들을 가축처럼 죽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도살자다.
그 도살자가 눈앞에 있다.
'죽여야 하나?'
순간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미래에 도살자가 될 놈이다. 수많은 플레이어를 죽이면서 탑 공략에 큰 타격을 줄 놈이기도 했다.
죽일 거면 지금 죽여야 한다.
'아니, 아직은 너무 일러.'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
일단 이놈이 왜 카오틱이, 그것도 마인이 되었는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뒤에 결정하면 될 일이다.
"인간, 왜 내 영혼석을 보는 눈으로 저 남자를 보는 것이냐? 정말 불길하구나...."
"아무것도 아냐. 당장 대화는 힘든가?"
"응, 여행자. 지금은 힘들 거 같아."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힘들다니 어쩔 수 없다. 일단 한동안은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게 하는 수밖에.
"친우여."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드라이어드가 보였다. 아름다운 인간의 상반신과 사슴의 하체를 가진 종족, 드라이어드 공주인 하엘이었다.
"난 드라이어드를 이끄는 하엘이라고 한다. 친우의 이름을 내게 알려 줄 수 있겠나?"
"진현우입니다."
"그렇군."
하엘은 그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려는 것처럼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그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를 뒤따르는 드라이어드들도 그러했다.
"진심으로 고맙다, 친우여."
"처음 보는 사이 같은데 친우입니까?"
"우리를 구해 주지 않았나. 이 대륙의 모든 드라이어드는 너를 친우로 여길 것이다."
하엘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 더러운 마족 놈들에게 말로는 저항했었지만, 속으로는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하이아칸 대륙의 상황은 좋지 않다.
엘프 측이 마족들에게 밀리는 형세. 거기에다가 마족에게는 많은 카오틱이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배신이 심한 탓에 엘프들은 그들을 믿고 쓸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마족은 카오틱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가 있었다.
'이 차이는... 좀 크지.'
엘프 측은 카오틱들이 계속 침투하는 것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드라이어드도 그걸 잘 알았다.
"엘프 측에서도 우리를 도우려고 노력했었다. 많은 엘프가... 이곳에서 죽었었지. 그런 희생을 겪었음에도 우리를 도와줘서 고맙다. 엘프, 우리의 오랜 맹우여."
"천만에요."
하엘은 엘프들을 돌아봤다.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맹우여, 너에게도. 지금은 어렵겠지만,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겠다."
"거부하지는 않겠습니다."
"기대해도 좋다."
보상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나중에 받게 되겠지만.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바로 베카샤로 돌아갈 예정인가? 아니면...."
"쉬고 싶기는 한데, 그러기에는 좀 불안하긴 하네요. 한동안은 여기 머물겠습니다. 언제 카오틱들이 또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고맙다, 친우여. 은혜를 잊지 않겠다."
하엘도 내심 진현우와 엘프가 한동안 이 숲에 머무르면서 지켜 주기를 바랐다.
염치가 없어서 말은 못 했지만.
"그럼 야영지를 만들어야 하나?"
"아니, 은인들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지."
하엘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바닥이 들썩거리면서 주변의 나무가 움직이더니 커다란 나무 집을 만들어 냈다.
"다치거나 지친 이는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 이 숲이 은인들을 회복시켜 줄 테니까."
"여행자, 드라이어드의 숲에는 상처를 회복해 주는 효과가 있어. 여기서 좀 쉬다가 가자."
"그거 좋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진현우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플레이어들을 하엘이 만들어 준 집으로 옮겼다.
"지금쯤이면 수색대 본부로 보낸 동족이 도착했을 겁니다. 그쪽에서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만 고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경계는 우리가 설게. 여행자는...."
이리샤는 카오틱들을 흘깃 봤다.
대부분 죽었지만 일부는 살려 뒀다. 미호를 이용해서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다.
"알지?"
"어. 저쪽은 내가 맡지."
"잘 부탁해."
엘프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경계를 설지 정하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미호를 불렀다. 녀석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정기를 흡수하는 중이었다.
"야, 일 좀 해라."
"움냠냠... 크흐흥!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냐? 어쩔 수 없구나, 인간! 도와주지!"
"왜 이렇게 건방지지?"
미호가 의기양양하게 다가왔다.
"쿠후훗, 인간! 너한테 복종한 걸 매번 후회했었다만, 이번에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 정도의 정기를 매번 바친다면 기쁘게...!"
"진짜 미친 건가?"
정기를 많이 먹어서 취했나?
미호의 배는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진현우는 부푼 배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께흑, 하, 하지 말거라! 속이이...!"
"시끄럽고 일이나 해. 따라와."
"크흐응... 너무해...."
시무룩해진 미호가 질질 끌려왔다.
카오틱들은 드라이어드들의 감시 속에서 기절해 있었다. 그중에 마족의 모습도 보였다.
"마족들은 왜 놔둔 겁니까?"
"심문용으로 필요할까 싶어서 남겼어요."
"그래요? 필요 없는데."
진현우는 도끼를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촤악! 피가 요란스레 솟구쳤다. 그는 얼굴에 묻은 피는 신경도 쓰지 않고, 부상을 입은 마족들을 가축을 도축하는 것처럼 죽여 나갔다.
"마족은 심문하기 힘듭니다. 이놈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기 때문에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고요. 그냥 죽이고 처리합시다."
"어... 아, 네. 알겠습니다, 친우여."
"사체는 우리가 처리하겠다."
진현우의 도끼질에 드라이어드들이 순간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사체를 치웠다.
어차피 그들에게 마족은 원수였으니까.
"오, 뭐야. 얘가 살았네?"
"이걸 살아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냐?"
카오틱 중에 익숙한 남자가 있었다.
노조무. 카오틱 소속의 마법사. 실력이 있는 편이라서 마족에게 중용받던 남자다.
이 정도면 아는 게 많을 것이다.
"산 송장이나 다름없긴 한데, 뭐."
노조무는 큰 부상을 입었다.
터놓고 말해서 치료해 주지 않으면 몇 시간 안에 죽을 정도로 위급한 부상이었다.
아마 정신도 혼미할 것이다.
"미호, 너한테는 이 상태가 낫지 않나?"
"흐흠, 맞다. 이 정도로 만신창이면 정신도 무너진다. 마안에 걸리기 쉬운 상태가 되지."
미호가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기뻐하도록, 인간! 요호의 역사에 남을 천재인 내가 널 위해서 직접...."
"그러다가 얘 죽으면 너도 죽는다."
"바, 바로 하겠느니라!"
미호가 잘난 척을 하는 걸 들어 줬다가는 노조무가 죽게 생겼다. 녀석은 진현우의 협박에 화들짝 놀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 두 눈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뿜었다.
- 스으으으!
요호의 마안.
눈을 마주친 자의 정신을 뒤흔들어서 각종 환각을 보게끔 하는 특수한 눈.
미호는 곧바로 매혹을 사용했다.
"후훗, 너는 이제부터 내 종이란다. 자아, 충성스러운 내 종아. 네게 있어 나는 무엇이지?"
"...."
기절해 있던 노조무가 눈을 떴다. 초점 하나 없는 흐리멍텅한 눈빛이 미호를 바라봤다.
"내, 주인...."
"쿠후후! 자기 주제를 잘 아는 종이로구나! 좋아, 지금부터 네게 질문을 할 것이니라!"
미호가 진현우를 흘깃 봤다.
뭘 물어봐야 하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다.
"질문은 몇 개까지 가능하지?"
"으음, 이놈의 상태가 생각보다 많이 안 좋구나. 두세 개면 아마 기절할 것이니라."
"음, 일단 이 녀석이 마족 진영에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가지고 있는지부터 물어봐."
"알겠느니라!"
미호는 진현우의 질문을 노조무에게 전달했다. 놈이 떠듬떠듬 대답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에게, 나름, 중용받고 있다."
"드라이어드 숲 공략에 참석한 걸 보면 아마 사실일 거야. 그럼... 이다음에 뭘 할 건지 드라쿠스에게 들은 얘기가 따로 있나?"
"질문이 길구나. 크흠, 잘 듣거라!"
미호가 전달해 준 질문을 들은 노조무가 잠깐 침묵했다. 기억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있다. 나무 정령, 거래, 힘...."
"뭐지? 나하고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건가?"
"으으음... 이잇, 나쁜 종아! 똑바로 대답하지 못할까! 네가 이상하게 대답하면 내가 저 인간한테 크게 혼난단 말이다...!"
미호가 노조무를 윽박질렀다.
그러자 놈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야, 얼마나 혼냈길래 애가 피를 흘려?"
"아, 아니! 아니다! 나 때문이 아니다! 아까 말했잖느냐.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오!"
"더 질문하는 건 힘든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느니라."
진현우는 노조무의 얼굴을 빤히 봤다.
안색이 새파랗다. 치명상을 입은 데다가 마지막 발악을 한다고 마력도 쥐어짜 냈다.
상태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
"나무 정령, 거래, 힘이라."
진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 키워드로 떠올릴 수 있는 게 뭐가 있는가.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래도 이건 기절한 플레이어들이 깨고 난 다음에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 콰드득!
"좋아, 다음."
"으히익! 이, 인가안! 제발! 제바알! 도끼를 휘두를 때는 내게 말하고 해 다오!"
도끼가 노조무의 목을 베었다.
쏟아진 피를 얼굴에 받은 미호가 기겁했다.
"따라와. 다른 놈들도 다 써먹어야지."
"크흥, 알겠느니라...."
진현우는 미호와 함께 심문에 나섰다.
다른 카오틱이라고 크게 대단한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았는데, 유용한 정보는 있었다.
"대적자가 우리를, 돕고 있다."
"음, 듣기 싫은 이름인데. 어떤 대적자?"
"멸망의 목도자...."
"걔네는 이름이 참 거창하단 말이야."
대적자.
플레이어들이 탑을 오르는 걸 방해하는 자들. 플레이어들에게 힘을 주겠다면서 유혹하고, 카오틱으로 만드는 망할 놈들.
그리고 마인까지 만들기도 한다.
'세계의 탑에게 선택받은 놈들이지.'
진현우가 알기로는 그렇다.
대적자는 탑과 특수한 계약을 맺어서 플레이어들을 방해하는 임무를 맡은 놈들이다.
그 대가로 여러 특수한 힘을 얻었다.
'멸망의 목도자.'
당연하지만 저게 이름은 아니다.
일종의 이명. 그중에서 멸망의 목도자라는 이명은, 진현우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전생에서 몇 번 부딪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놈이 여기를 지원하고 있다....'
대적자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탑 내부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특수한 조건이 갖춰져야지만 가능하다.
아니면 고층이든가.
"마인도 있겠군. 맞나?"
"그렇... 카학! 크륵, 끄르륵...!"
"으음, 아쉽구나. 죽었느니라."
"됐어. 이 정도면 필요한 건 다 들었어."
진현우는 정보를 정리했다.
지금 3층은 대적자, '멸망의 목도자'가 개입하고 있다. 아마 마인도 있을 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그놈이 여길 왜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지금 플레이어들이 한창 공략하고 있는 7층이면 모를까, 왜 하필이면 3층을.
그리고 또 하나.
'2층에서 마인을 만났었단 말이지.'
정확하게 진현우가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찾으려고 했을 때 마인을 만났었다.
진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만약 2층의 마인에게 힘을 준 대적자가 멸망의 목도자, 그놈이었다면....'
웨펀 마스터와 분명 관련이 있다.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졌다.
"당장은 결론을 내기가 힘들군."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보는 3층에서 활동하면 싫어도 얻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예감이지만.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찾다 보면 또 마인하고 부딪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그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기대되네."
110화
도살자 (2)
필요한 정보는 모두 캐냈다.
진현우는 남은 마족들과 카오틱들을 모조리 다 죽였다. 살려 둬도 쓸데가 없는 놈들이다.
작업을 끝낸 그는 길게 숨을 토해 냈다.
"더럽게 힘드네."
오늘 하루가 유독 긴 느낌이다.
체력적인 한계를 느낀 진현우는 드라이어드들이 만들어 준 나무 집으로 향했다.
안에는 여러 플레이어가 기절해 있었다.
아마 내일이면 깨어날 것이다.
'잘까. 아니, 일단 그 전에....'
확인해 둘 것이 있다.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61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거인 살해자
· 근력: 198 (+48) · 민첩: 174 (+48)
· 체력: 179 (+53) · 마력: 120 (+40)
레벨이 61에 도달했다.
직업 퀘스트를 받은 것 말고도 진현우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직업 특성의 강화였다.
그는 꺼 뒀던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 적정 레벨에 도달하여 무기의 달인과 격투의 달인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적정 레벨에 도달하여 새로운 직업 특성, '달인의 손놀림 (A)'을 익혔습니다.
특성이 강화되고, 특성을 익혔다는 메시지.
진현우는 바로 특성들을 확인했다.
· 무기의 달인 (A): 선대의 깨달음을 계승해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무기를 활용한 공격의 대미지가 70% 증가한다. 또한 신체 속도가 20% 빨라진다.
· 격투의 달인 (A): 이 몸 또한 무기일지니, 육체를 이용한 전투법을 깨달았다. 격투기로 싸울 때 대미지가 70% 상승하며, 적의 방어력을 항시 30% 무시한다.
"한 번에 20%가 올라가냐."
진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보통의 A등급 특성은 20~30% 정도의 대미지를 올려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웨펀 마스터의 특성은 그 두 배를 넘었다.
그리고 새로운 특성.
· 달인의 손놀림 (A): 무기를 교체했을 때, 해당 무기와 관련된 스킬을 빠르게 시전한다.
간단하지만 유용한 특성이었다.
예를 들어서 용맹한 자를 쓰다가 부서진 검으로 무기를 교체하면, 검 계통의 스킬인 유수나 해일을 빠르게 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네.'
괜찮은 특성이다.
진현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시스템창들을 끄고는 나무로 된 침대에 누웠다.
나뭇잎이 깔려 있어서 꽤 푹신하다.
"인간, 자는 것이냐?"
"어. 오늘은 더럽게 피곤하네."
두둥실 떠다니는 미호가 진현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정말로 잠든 것이냐? 흠, 빠르구나."
미호는 누군가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더니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풍성한 꼬리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으으음...."
"쿠우웅...."
잠시 후, 두 개의 잠꼬대 소리가 울렸다.
* * *
다음 날.
기절한 플레이어들이 깨어났다.
제법 길었던 포로 생활 때문에 아직 상태는 안 좋았지만, 몸은 추스를 수 있을 정도였다.
"배신자들이 있었다."
진현우는 플레이어들이 회복할 수 있게끔 도운 후, 곧바로 정보를 수집했다.
그의 앞에 도살자가 앉아 있었다.
"배신자라면?"
"말 그대로 배신자다. 이곳 드라이어드 숲에는 적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는 장치들이 있었다. 그리고 카오틱들이 공격해 왔을 때."
도살자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그 장치들은 모조리 파괴되어 있더군. 배신자들의 짓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카오틱 놈들과 함께 우리를 앞뒤로 공격했다."
"왜 함락당했나 했더니 그래서였군."
"맞다. 배신만 아니었다면...!"
도살자가 이를 까득 갈았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나와 내 동료들은 살아남았다. 네가 아니었으면 강제로 카오틱이 됐겠지. 만약, 누구든 하나라도 적들 손에 죽었다면...."
도살자의 눈빛이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를 배신했던 놈들을 찾아서 죽였을 거다. 어떻게 해서든."
"누가 배신했는지는 알고 있나?"
"모른다. 여기에는 우리 말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많았거든. 지금은 대부분 죽었지만."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니 배신자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살자가 인상을 찡그린 걸 보던 진현우는 그가 일어나면 물어보려 했던 걸 말했다.
"조금 갑작스러운 질문이긴 한데. 지금 엘프 진영에서 가장 유명한 길드가 어디인지 알고 있나? 엘프가 신뢰하는 길드 말이야."
"워든이라는 길드다. 영국 출신의 유명 길드지. 3층에서 오래 활동한 데다가 이룬 게 많아서 엘프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도살자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여러 지역을 맡아서 지키고 있다. 원래는 이곳, 드라이어드의 숲도 워든이 지켰었지. 워낙 맡은 지역이 많아서 여기는 다른 플레이어들한테 넘겼었지만."
"워든. 워든이란 말이지...."
기억이 떠올랐다.
나무 정령, 거래, 힘, 워든.
'그 새끼들이잖아.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엘프를 배신해서 치명상을 입혔던 놈들.'
그뿐만이 아니다.
전쟁 이전부터 마족 측에 정보를 제공했고, 몇 가지 중요 거점을 빼앗긴 척 넘겨줬었다.
'그러고 나중에 죄다 마인이 됐지.'
굉장히 치밀한 놈들이었다.
오랜 세월을 들여서 엘프 진영에서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고, 엘프의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그 신뢰를 이용해서 차곡차곡 손해를 쌓다가 중요한 타이밍에 터트렸다.
'엘프들은 플레이어를 믿지 못한다.'
이런 전선에서 활동하려면 공헌도가 높아야 한다. 공헌도가 높다는 것은 엘프들의 부탁을 많이 들어주면서 신뢰를 쌓았다는 거니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보증을 받았든가.'
실력은 있지만 공헌도는 낮은 플레이어들.
그런 플레이어는 누군가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면 높은 수준의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
'그래, 워든 같은....'
그 정도 길드에게 보증을 받았다면.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하엘을 만나야겠군.'
이 뒤부터는 믿을 수 있는 자들과 얘기해야 한다. 나중에 마인이 되는 도살자나 그의 동료들은 아직까지는 신뢰하기가 힘들다.
"워든은 왜 물어보는 거지?"
"궁금한 게 있어서. 한동안은 여기서 머물 생각이야, 아니면 베카샤로 돌아갈 거야?"
"여기 머물 생각이다. 조금 불안해서."
"그래. 뭐, 배신자를 찾으면 연락할게."
"꼭 그랬으면 좋겠군."
도살자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진현우는 바로 떠나려다가, 자신이 도살자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몰랐네. 이름이?"
"친구들은 날 하이드라고 부른다. 원래 이름이 좀 길어서. 너도 그렇게 불러도 좋다."
"친구라는 건가? 나는 진현우야."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아마 조만간 또 만나게 될 거야."
"그때를 기다리지."
하이드.
전생에는 플레이어들을 가축처럼 도축해서 도살자라는 악명을 가졌던 남자.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지켜봐야겠어.'
아무래도 여기서 배신당하고 강제로 마인이 되면서 맛이 간 게 아닐까 싶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지켜봐야 한다.
진현우는 하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엘."
"친우여, 잘 잤나? 푹 쉬었길 바라지."
"괜찮았습니다. 지금 하시는 건...."
하엘은 드라이어드 숲을 돌아다니면서 마기에 오염된 나무를 돌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 시들었던 나무가 생기를 되찾으면서 잠식한 마기를 몰아냈다.
"나무들을 정화하고 있다. 드라이어드는 나무에서 비롯된 정령 같은 것이거든. 오염된 나무를 되돌리면 동족들을 되살릴 수 있다."
"완전히 되살리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음... 우리에 대해서 잘 아는군."
하엘이 쓰게 웃었다.
"맞다. 기억 같은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같은 나무에서 비롯된 다른 존재로 되살아난다. 사실상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렇군요."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나무를 잠식한 마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나무가 초록색의 빛을 내뿜더니 자그마한 구체를 만들어 냈다. 그 구체 안에는 아직 어린 드라이어드가 잠든 채 들어 있었다.
'어제 마족이 됐던 드라이어드 같은데.'
이름이 알리우스였던가.
하엘은 잠든 드라이어드를 두 팔에 받았다.
"우리 드라이어드는 인간과는 다른 시간을 산다. 이 어린 드라이어드도 금방 자라지."
"다행이라고 해야 합니까?"
"금방 전력이 된다는 의미에서는...."
마족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
어린 드라이어드가 빠르게 성장해서 전력이 되어 주는 건 하엘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서, 친우여. 이게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내게 물어볼 게 있는 게 아닌가?"
"예.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보증을 받은 플레이어가 있었습니까?"
"보증, 말인가?"
하엘도 보증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흠, 그래. 잘 생각해 보니 있었던 것 같다. 3인 구성의 여행자들이 있었는데, 공헌도가 부족해서 보증을 받았었지."
"누구의 보증을 받았는지는 기억합니까?"
"그게, 그러니까...."
진현우가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워든 아니었나요?"
"...."
기억을 더듬던 하엘은 그 말을 듣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그 길드였다. 엘프 측에서 꽤 신뢰하는 길드라고 하더군. 여러 일을 처리했다던가. 우리도 큰 도움을 받았었다."
"그렇군요. 워든이 보증한 3인조를 전투 도중에 본 적은 있습니까?"
"...."
하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없다. 이건 확신할 수 있겠군."
그녀는 침음성을 흘렸다.
"카오틱들이 몰려들었을 때 겁먹고 도망친 놈들이 있었지. 그래서 같이 싸웠던 여행자는 기억한다. 그 3인조는, 분명히 없었어."
"참 공교롭군요. 보증을 받고 왔는데 정작 싸울 때는 도망치고 없었다. 다른 길드도 아니고 워든이 보증한 사람들인데."
"친우여, 설마...."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진현우는 드라이어드의 숲을 돌아봤다.
"이 숲에는 방어 장치가 다수 설치되어 있다더군요. 마법에, 마도 물품에...."
"그렇다. 도움이 되는 물건들이었지. 정작 중요한 때에는 도움이 못 됐다만."
"그걸 준 건 누구였습니까?"
"준 것은...."
기억을 더듬던 하엘은 크게 숨을 삼켰다.
"워든이었다. 그들이 큰돈을 써서 설치해 줬었지. 우리도 그에 크게 감사했었다."
"많은 방어 장치를 3명이서 제때 해제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르게 생각해 보자고요. 그걸 한 번에 해제할 방법이 있었다면?"
"...설치한 자라면 그 방법을 알 수도 있지."
합당한 의심이다.
하지만 하엘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진현우가 하는 말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 3인조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곳으로 왔고, 전투 중에 사주받은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게 맞지 않나요? 그리고."
"...그걸 사주한 게 워든이다?"
하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아직은 추측이죠. 근데 내가 어제 카오틱들을 심문하면서 들은 단어들이 있거든요. 나무 정령, 거래, 힘. 이 세 단어를 말하더군요."
"나무 정령, 거래, 힘? 무슨 뜻이지?"
"들은 얘기인데, 워든은 여러 지역을 맡아서 지키고 있다던데요. 그 지역 중에 나무 정령과 관련된 지역도 포함되어 있나요?"
"...."
하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워든. 그 길드가 수상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전 그놈들이 배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수상한 정황이 많기는 하군."
진현우가 단언하자, 하엘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손으로 매만졌다.
믿기 힘들지만 부정하기는 힘든 의심.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증거를 찾아야죠."
드라이어드의 숲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엘프 여왕은 진현우보다는 워든을 신뢰할 터.
워든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쌓아 온 신뢰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찾아서... 다 죽일 겁니다."
진현우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111화
그 말을 믿으라고
진현우는 전생을 떠올렸다.
그가 제대로 탑을 등반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마스터 스킬을 익히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때는, 플레이어의 암흑기였다.
'카오틱이 안 되면 바보인 세상이었지.'
2층은 폭군의 수중에 떨어졌었고, 3층도 소수의 엘프 반란군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에 조력했던 것이 카오틱들이었다.
카오틱들은 그런 조력의 보상으로 2, 3층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카오틱이 아니면 성장할 수 없었던 시기.'
대형 길드들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권 다툼을 벌이느라 바빴고, 어느 시점에서는 대전쟁으로 공멸했다.
끔찍한 암흑기.
그게 끝났던 것은 영웅이 나타난 뒤였다.
'하지만... 그러고도 실패했다.'
영웅은, 그리고 메사이어는 실패했다.
상황을 바로잡기 전까지 입었던 피해가 너무도 컸으니까. 뭘 하기에는 너무 늦었었다.
이번에는 달라져야만 한다.
'우선 배신자 놈들부터 다 죽여야겠지.'
워든 길드 같은 놈들.
놈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처리해야 한다.
"눈빛이 무섭구나, 친우여."
"그런가요? 잠깐 옛 생각이 좀 나서."
"아니, 괜찮다. 지금처럼 가혹한 상황에서는 독기 가득한 눈빛이 도움이 되는 법이지."
하엘은 쓰게 웃었다.
그녀는 진현우가 자신에게 한 얘기들을 되새기면서, 머리에 남은 의문을 말했다.
"워든 길드가 배신했을 것 같다고 했지.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만."
"엘프를 돕는 동맹의 지도자에게는 엘프 여왕이나 다른 지도자와 통신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더군요. 그걸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흠."
세계수가 만들어 준 아이템이 있다.
엘프를 돕는 종족의 지도자만 가질 수 있는 아이템. 진현우는 그걸 달라고 한 것이다.
하엘은 진현우를 재밌다는 듯 봤다.
"대충 알겠군. 워든이 배신했다는 정황을 파악하면 바로 여왕에게 보고할 생각인가?"
"네. 좀 생각해 둔 게 있어서요."
"그렇다면야."
하엘이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그 팔에 나뭇가지로 엮은 팔찌가 있었다.
[세계수의 선물 (영웅)]
- 설명: 세계수가 동맹과의 빠른 정보 교환을 위해서 만든 특수한 통신 아이템. 엘프 여왕이나 동맹의 지도자와 연락할 수 있다.
진현우는 팔찌를 받아 자신의 팔에 찼다.
"내일 엘프 수색대가 지원을 온다고 들었다. 너는 함께 온 엘프들과 같이 떠나라."
"괜찮겠습니까?"
"네 말대로라면 나무 정령들이 위험하다는 것 아닌가? 어떻게든 이 숲을 지키고 있을 테니, 그동안 네가 나무 정령들을 구해 다오."
하엘은 내심 진현우가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숲의 방어를 도와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큰 그림을 생각하면 그를 지금 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걱정하기보다는 너 자신을 걱정해라.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좋지 않군. 많은 짐을 떠넘기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
하엘이 진현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우리 드라이어드는 네게 큰 빚을 졌다.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불러라, 친우여."
진현우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베카샤로 돌아갔다.
* * *
엘프와 마족의 영토가 맞닿는 접경 지역.
마족들은 접경 지역의 엘프들의 영토를 빼앗으려고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접경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평화로운 지역이 한 군데 있었다.
- 나무 정령의 샘.
지역 중심부에 아름다운 샘이 있는 곳.
그 샘을 중심으로, 지역의 외곽에 얽히고설킨 나무가 거대한 장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나뭇가지나 줄기, 뿌리가 엮여서 만들어진 장벽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약해 보였다.
"그래 봤자 나무 아냐? 그냥 태워 버리라고!"
"화염 마법! 있는 대로 퍼부어라!"
"멍청아, 그래 봤자...!"
이제 막 3층으로 올라온 카오틱들이 나무 장벽을 향해 화염 마법을 쏟아부었다.
불길이 장벽에 뱀처럼 달라붙었다. 매서운 불길은 장벽을 모두 불태우고 남을 기세였다.
하지만.
- 치이이이익!
"뭐, 뭐야?"
"무슨, 나무가 X발...."
불길은 장벽을 삼키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타는 속도가 장벽이 '재생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무 장벽은 불타는 순간 푸른 기운을 내뿜으면서 바로 재생했고 되레 불길을 삼켰다.
"아, 미치겠네! 피해!"
"뭐? 우아아악!"
- 퍼어어엉!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길을 삼킨 장벽이 크게 부풀더니 카오틱들을 향해 더 강해진 불길을 내뿜었다.
그에 휘말린 카오틱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 장벽 위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멍청한 카오틱 놈들, 똑같은 짓을 몇 번이고 하는군. 학습 능력이라고는 없는 거냐!"
"저, 저 망할 년이...!"
거대한 근육, 전신을 뒤덮은 백색의 갑옷, 짧게 자른 금발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를 본 카오틱이 이를 갈았다.
"저 새끼 누구야?"
"워든의 길드장, 아바. 아주 유명한 년이지. 전차처럼 날뛰는 인간 병기 같은 새끼야."
아바.
3층의 카오틱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플레이어였다. 전장의 최전선에서 전차처럼 밀고 들어와서는 아군을 죽이고 돌아가기로 유명한.
그 여자가 카오틱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꺼져라! 죄다 뒈지기 싫으면!"
"망할... X신아!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엉? 저기에 불 질러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아, 아니. 그래도 나무잖아. 저게...."
"저 지역에 있는 샘 때문에 의미 없어. 힘 빼지 말고, 좀! 하, 자존심 더럽게 구기네."
"아, 알았어. 화 좀 내지 마!"
나무 장벽을 태우려고 했던 카오틱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났다.
그 모습을 아바가 싸늘하게 지켜봤다. 그녀의 곁에 있는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 멍청한 짓을....
그 모습을 장막 밖에서 지켜보던 마족들은 애초에 공략할 시도도 안 했다.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 저 요새를 밖에서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 몇 번이나 겪고도 학습하지 못했나.
나무 정령의 샘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받은 마족 지휘관, 베라칸은 혀를 찼다.
저곳을 공략하려고 수많은 시도를 해 봤다.
그렇기에 잘 안다. 저걸 바깥에서 공략하는 것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어렵다고.
'저 빌어먹을 샘이 있는 한.'
나무 정령의 샘이 가진 효과 때문이었다.
강한 생명력이 녹아 있는 샘은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를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다친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천연의 요새.'
나무 정령의 샘은 절대로 뚫을 수 없는 요새로서 엘프 진영을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고 싶다.
하지만 피난처 베카샤를 공략하려면 꼭 점령해야 할 거점이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베라칸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저 강한 생명력도 마기가 있다면 억누를 수 있다. 그래, 군단장 정도의 마기라면....
문제는 세계수의 장막이다.
저 장막 때문에 마족이 요새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니 바깥에서는 공략할 수 없다.
- 그래, 바깥이라면 말이다....
바깥에서는 공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공략한다. 그걸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들이 있었다.
그게 결실을 맺을 때가 왔다.
- 얼마 안 남았다. 그놈들을 기다리지.
- 지휘관의 말이 그렇다면....
마족들은 때를 기다리며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나던 도중, 베라칸은 장벽 위에 서 있던 아바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베라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카오틱들이 물러났습니다."
"그래, 나도 봤다. 너희는 여기서 나무 정령들과 협력해서 경계하도록. 물러난 척하면서 나중에 다시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까."
"예, 길드장님."
적들이 물러난 걸 확인한 아바는 길드원들에게 명령을 내린 후 장벽에서 내려갔다.
그런 그녀에게 정령들이 달려들었다.
- 아바! 고생했어!
- 아바, 아바. 나쁜 인간들은 물러난 거야?
자그마한 요정처럼 생긴 정령들이었다.
녹색의 피부를 가졌고, 피부에 자그마한 나뭇가지나 나뭇잎 따위가 자라고 있는 정령들.
나무 정령의 일종이었다.
"그래. 오늘은 물러났다.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계속 경계해야겠지만."
- 괜찮아! 아바가 있으면 괜찮을 거야!
- 아바! 오늘 떨어진 열매야. 선물!
장벽 안은 요새처럼 꾸며져 있었다.
아바가 장벽을 내려오자, 곳곳에 있던 나무 정령들이 다가와서 각자 선물을 건넸다.
그들이 아바를 아낀다는 것이 느껴졌다.
- 이번에도 동쪽이었지, 아바?
"어. 요즘 들어서 마족들이 계속 동쪽으로 공격해 오는데,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 그럼 어떻게 할까?
"한동안 동쪽을 주시해 줘. 엘더 그로브한테도 동쪽을 경계하라고 건의할 생각이야."
- 알았어, 아바!
아바는 자신을 반기는 나무 정령들을 익숙하다는 듯 지나며 어딘가로 향했다.
이 지역의 중심부, 샘이 있는 곳으로.
높다란 언덕을 빠르게 올라갔다.
"...."
그렇게 언덕을 다 오르자,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그녀를 반겼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은 나무였다.
아바가 나무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나무의 몸통이 살짝 갈라지더니 눈이 나타났다.
- 아바, 돌아왔구나.
"예, 엘더 그로브.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왔습니다. 적들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 그건, 참으로 다행이구나.
저 거대한 나무의 이름은 엘더 그로브.
아득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거목으로, 이 지역이 요새처럼 바뀐 것은 그의 힘 덕분이었다.
- 마족들의 손에 들어간 숲의 종족들이 많다. 최근에는 드라이어드들까지.... 이대로면 이 대륙까지 마족들의 것이 될 게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막겠습니다."
- 그래. 아바, 그리고 워든... 숲의 오랜 친우들이여. 우리는 그대들을 믿고 있노라. 나는 이곳에서 더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
엘더 그로브는 나무 장벽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힘을 쓰고 있다. 그렇기에 나무 정령의 샘에 뿌리를 내린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랜 친우였던 아바.
"그 믿음,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 그래. 믿고 있다, 아바.
지금까지 워든 길드와 그들을 이끄는 아바는 엘프 진영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 으음, 미안하군. 또 잠이....
엘더 그로브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요새를 유지하는 그는 최근 잠이 유독 많아졌다.
그렇기에 그는 보지 못했다.
"절대로."
입가에 비웃음을 띤 아바의 얼굴을.
그녀는 그 신뢰를 비웃으며 생각했다.
'이 광대 놀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
전황이 뒤바뀌고, 이 요새를 믿는 나무 정령은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약속했던 것을 받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아바의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렸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 앞에 있던 엘더 그로브조차도.
* * *
드라이어드의 숲을 떠난 진현우는 목적지로 가기 전, 피난처 베카샤를 들렀다.
목적지인 나무 정령의 숲으로 가려면 베카샤를 반드시 경유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따로 할 일도 있었고.
"...그러니까 공허한 언덕에서 우리 동족을 납치하려는 카오틱들을 만났다, 이건가?"
엘프 수색대의 본부.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한 라시드는 이마를 감쌌다.
"거기에 공허한 언덕에 몬스터가 나타나는 이유를 알아내서 해결하기까지 했고."
"그렇죠."
"마지막으로 과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선조들의 보관고까지 찾아냈다...."
"운이 좀 좋았습니다."
"또, 마족들에게 빼앗겼던 드라이어드의 숲을, 그러니까, 네가 되찾았다는 건가?"
"그렇게 됐습니다."
"...."
라시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는 진현우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112화
꽃잎
처음 진현우의 말을 들은 라시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으, 으음. 진현우, 네가 여기에 온 지 겨우 일주일 정도 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그렇게 오래됐나요?"
"오래된 게 아니지. 그것밖에 안 된 거다."
라시드가 침음성을 흘렸다.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일을 했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귀를 의심하게 되는군."
"믿으셔도 돼요, 대장님."
"네, 저희가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아드네아와 이리샤가 거들었다.
저 둘이 거짓말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에, 라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안하다, 진현우. 너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공허한 언덕의 얘기는 듣지 않았습니까?"
"미리 듣기는 했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들었다. 허어, 이거 참. 믿을 수가 없군."
라시드가 진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괜히 루윈 대륙의 영웅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어. 엄청난 추진력을 가지고 있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일을 해낼 줄이야."
"휘장을 받은 값어치는 한 것 같군요."
"값어치? 하! 그 이상을 해 줬지!"
라시드가 씨익 웃었다.
그는 진현우의 어깨를 거칠게 두들겼다.
"제길, 모든 여행자가 너 같았으면 좋겠어. 실력도 있으면서 믿을 수 있는... 하아."
그런 플레이어가 많을 리가 없다.
라시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진현우, 넌 엘프에게 큰 공헌을 했다. 공헌에는 마땅한 보상을 해야겠지, 다만...."
"혼자서 결정하기는 힘듭니까?"
"정확하다. 이 정도 공헌에 걸맞은 보상을 주려면 여왕님에게 여쭤봐야 할 것 같다."
라시드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진현우가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여왕님에게 보고하고 보상을 논해야겠어."
"그전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부탁이라고?"
진현우와 라시드의 눈빛이 교차했다.
"엘프 여왕님과 만나거든 제가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해 주세요. 그래서 한동안은 엘프 수색대에 머무르면서 휴식을 취할 거라고."
"흠...."
라시드는 진현우의 몸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다. 엄청난 일들을 해냈는데도 몸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해 달라니.
"이유가 있을 것 같군. 말해 줄 수 있나?"
"...."
진현우는 라시드의 인격을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엘프인가? 맞다. 전생에서도 끝까지 엘프들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남자다.
어느 정도 사정은 말해 둬도 될 것이다.
"의심스러운 배신자가 있습니다. 이번에 그 배신자를 낚을 생각이라서요. 그러려면 제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거짓말이 필요합니다."
"배신자라. 고질적인 문제점이지."
라시드가 쓰게 웃었다.
"나쁜 의도로 하는 거짓말이라면 거부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겠군. 일단 네 말대로 여왕님에게 보고하지."
"감사합니다."
"음, 그래. 몸조리 잘하도록."
라시드가 피식 웃으며 떠나려다가 아직 방에 남아 있던 아드네아와 이리샤를 봤다.
"너희는 안 갈 건가?"
"가야죠. 근데 그 전에...."
둘은 자신이 쓰던 장비들을 건넸다. 진현우가 대도의 보관고에서 얻은 아이템들이었다.
"여행자, 우리가 쓴 아이템들 말이야."
"이제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다른 엘프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모두 회수해서 돌려...."
"아니, 됐어."
이리샤를 비롯한 엘프들은 진현우에게 아이템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가 거절했다.
굳이 받을 이유가 없다.
"저한테는 필요가 없는 아이템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 중이잖습니까. 이 아이템들로 엘프의 전력이 강화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아, 아닙니다. 은인이시여, 그건...."
"그럼 교환하는 건 어떻습니까?"
"교환, 말입니까?"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숲의 종족인 엘프는 다양한 약재를 가지고 있다. 당연하지만, 그중에는 영약도 있다.
"숲의 일족인 엘프는 특이한 약재를 많이 가지고 있다더군요. 그런 약재들과 이 아이템들을 교환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약재를...."
"그래도 은인께서 손해를 보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아드네아는 고민에 빠졌다.
내키는 제안은 아니었다. 약재가 아까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교환하면 진현우가 손해를 볼 것이기에 꺼려졌다.
'그래도... 굉장히 좋은 장비들이야.'
게다가 숫자도 많다.
저 아이템들이 있다면 엘프들의 전력이 크게 오를 터. 꽤 탐이 나기는 했다.
고민하던 이리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라시드 님, 그 꽃잎은... 어떨까요?"
"꽃잎? 몇백 년에 한 번 피는 그 꽃을 말하는 건가? 흠, 꽃잎 하나라면 괜찮긴 하다만."
"여왕님이 허락하실까요?"
"선조의 보관고를 찾아 줬지 않나. 게다가 저 장비들까지 준다고 하면, 가능성은 있지."
엘프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은인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아드네아의 표정에 결의가 가득 찼다.
"저희가 보관하는 특이한 꽃이 있습니다. 꽃을 아예 드리는 건 힘들지만, 그 꽃잎을 드리는 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꽃잎이라고요?"
"몇백 년에 한 번 피는 꽃입니다. 꽃잎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죠. 일단 여왕님께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은인께서 이룬 것들을 생각하면 아마 주실 것 같습니다."
뭔지 알 것 같다.
진현우도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힘들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던 영약.
'선조의 정원에 있는 꽃을 말하는 거겠지.'
당연하지만 엘프가 굉장히 아끼는 꽃이다.
꽃잎 하나로도 큰 효과를 가져서 여왕이 복용하거나,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주곤 했다.
받을 수만 있다면야 최고의 보상이다.
"가능하면 그렇게 해 주세요. 안 되면 뭐, 다른 약재를 줘도 상관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왕님께 아프다고 보고하면 꽃잎 한 장은 쉽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군."
"우리만 믿어 줘, 여행자. 아! 그리고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 집에 가서 쉬면 돼!"
라시드와 다른 엘프들이 떠났다.
홀로 남은 진현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어깨 위로 미호가 나타나더니 앉았다.
"여왕의 귀에 내 얘기가 들어가면 워든에게도 전해질 게 틀림없단 말이지...."
"흠, 그래서 다친 척을 하겠다는 것이냐?"
"어. 날 경계할 거거든. 다친 척을 하면서 안심시켜 줘야지. 그러다 보면 내가 다친 게 사실인지 누군가 확인하려고 올 거야."
미호가 진현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때가 내가 나설 때로구나."
"잘 아네. 일 좀 해라, 식충아."
"난 식충이가 아니니라!"
지금은 밑밥을 뿌릴 때다.
진현우는 앞발을 마구 휘두르는 미호를 한 손으로 억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샤의 집으로 가야겠다.
* * *
피난처 베카샤의 왕궁.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왕궁은 아니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곳이었다.
마을 회관을 개조해서 왕궁의 역할을 하게끔 만든 곳에서, 라시드는 여왕을 알현했다.
"여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시드... 오랜만이군요."
저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미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엘프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의 여인.
엘프 여왕이었다.
"후후, 라시드가 올 때면 매번 나쁜 소식만 듣게 되는지라 마음이 조금 떨리는군요."
"죄송합니다, 여왕님. 그러려고 한 것은."
"농담이에요. 신경 쓰지 마요."
여왕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수색대장인 라시드는 접경 지역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왕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문제는 전황이 엘프에게 좋지 않다는 것. 자연히 보고하는 내용도 매번 어두워졌다.
"다행스럽게도, 여왕님. 이번에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기쁜 소식이라면, 무엇인가요?"
"드라이어드의 숲을 탈환했습니다. 드라이어드 공주, 하엘도 무사합니다."
"아, 하엘이...."
여왕의 안색이 밝아졌다.
마족이 드라이어드의 숲을 장악했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부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어떻게든 탈환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했었는데.
"동족이 한 것인가요? 여행자들은 드라이어드의 숲에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나요?"
"예, 그랬지요."
엘프 진영은 공격을 막는 걸로도 벅차다.
안 그래도 전력적으로 열세인 상황. 플레이어들은 마족이 강탈한 지역을 탈환한다는, 죽을 확률이 너무도 높은 일은 하기 꺼렸다.
꺼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무도 안 할 정도로.
"저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여행자가 했습니다. 단체가 아니라, 개인으로 말입니다."
"개인으로... 대체 누구죠?"
"진현우라는 이름의 여행자입니다."
"진현우.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그럴 겁니다. 얼마 전에 온 여행자라서."
라시드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공허한 언덕에서 카오틱들에게 붙잡혔던 엘프들을 구출하고, 그들을 재무장시킨 후에 드라이어드의 숲을 탈환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정말인가요?"
"예.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허한 언덕에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요. 선조님들의 무구를 모신 보관고가 있던 곳.... 그 가증스러운 도둑을 제 손으로 못 죽였던 게 아쉬울 뿐입니다."
"그 보관고가 돌아왔습니다."
여왕이 기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다만 내부에서 사라진 장비들이 많습니다.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누,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진현우입니다. 수색대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여왕님이 직접 살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아니, 아니. 잠깐만요."
여왕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너무 당황했다.
"그 진현우라는 남자는 어디에 있나요? 제가 지금 바로 찾아가서 상을 내려야겠어요."
"지금은 큰 부상을 입고 요양 중입니다. 한동안은 누구를 만나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큰일이군요. 워든 길드처럼 믿을 수 있는 여행자는 정말로 중요한 존재인데...."
바로 그때, 라시드의 뒤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아드네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왕님, 거기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선조의 정원에 있는 '꽃'을, 은인을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 허가를 구하고 싶습니다."
"꽃을...."
몇백 년에 한 번 피는 꽃.
엄청난 생명력이 담긴 꽃으로, 꽃잎을 먹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가 있다.
여왕이 생각에 잠겼다.
"믿을 수 있는 여행자입니다. 동시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고요. 꽃잎을 하사한다면 그를 치하하면서 회복하는 걸 도울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고민하던 여왕은 금방 결론을 내렸다.
"좋아요. 여러분의 말대로 하죠. 선조의 정원을 여러분에게 개방할 테니, 그 사람의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여왕님."
"꽃잎이 있다면 금방 회복할 수 있겠죠?"
"확실히 빨라질 겁니다. 그래도 한동안은 쉬면서 약 기운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여왕과 다른 엘프들은 진현우에게 줄 꽃잎 이야기로 서로 바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구석에 있던 시종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113화
불청객
깊은 밤.
마족들의 공격이 없는 시간대, 어두운 지하에서 플레이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어두운 영상이 떠 있었다.
- 드라이어드의 숲을 빼앗겼다, 아바.
"뭐라고? 거기가 왜... 뭐? 빼앗겼다고?"
워든의 길드장, 아바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어두운 영상에는 흐릿한 형체를 가진 마족이 서 있었다.
"마족들이 점령한 상황 아니었나? 그걸 어떻게 다시 빼앗길 수 있지? 대체 무슨...."
- 이미 빼앗긴 걸 어쩌겠나.
"뭐? 시발, 미쳤어?!"
콰앙! 아바가 책상을 내리쳤다. 단번에 부러지는 책상을 보며 아바가 이를 갈았다.
마족이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봤다.
"우리가 거길 어떻게 작업했는데! 그 병신 같은 놈들이, 그걸 그렇게 쉽게 빼앗겼다고! 거길 맡고 있던 새끼는 누구야! 말해!"
- 노조무다. 최근 유명한 카오틱이지.
"그놈이 지키고 있었는데 빼앗겼다고?"
- 드라쿠스도 그 숲을 지켰었다. 죽었다만.
노조무와 드라쿠스.
최근 엘프와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이고 있는 카오틱과 마족 조합이었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데 빼앗겼다니.
"...누가 한 거지? 지금 3층에 있는 플레이어 중에 그게 가능한 놈이 있었나?"
- 흠, 짐작이 가는 놈이 없는 건 아니지.
"누군지 말해."
아바가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저 거대한 덩치와 거친 근육처럼 그녀는 맹수처럼 사나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본 마족의 형상이 일렁거렸다.
-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주제를 모르는군. 아바, 내가 우습나? 네깟 년이 감히 나에게, 군단장 베라칸에게 그딴 언동을 해?
"...."
군단장.
이 대륙을 침공한 마족 측에서 한 군단을 이끌 정도의 권력과 힘을 가진 이들이다.
물론 마계에서 그랬다는 거고, 하이아칸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다소 약화되기는 했지만.
"...미안하다, 내가 실언을 했군."
- 주제를 알아라, 아바. 하찮은 인간이여.
"큭...."
그럼에도 군단장 베라칸은 강했다.
하이아칸 대륙에서 손꼽히는 힘을 가진 아바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힘을 가진 마족.
그렇기에 아바는 고개를 숙였다.
- 엘프 측에 심어 둔 첩자가 보고했다. 진현우라는 놈이 엘프 측에 합류했다고 하더군.
"진현우라면, 그 에픽 퀘스트를 깬 놈?"
- 그래. 흠, 그놈이 누구인지는 마족인 나보다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최근에 인간들의 사회에서 꽤 유명세를 떨친다고 하던데.
아바가 인상을 구겼다.
진현우. 그녀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요즘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이제 막 3층에 올라온 놈이 그 정도 사건을 해결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말이 안 되긴 하지. 크흐흐, 근데 그놈이 지금까지 한 일들을 봐라. 그건 말이 되나?
"...."
쯧, 아바는 혀를 찼다.
베라칸의 말에 공감이 됐기 때문이었다.
"정보는 확인해 봤나? 엘프 왕궁 쪽에 첩자를 몇 명 박아 놨잖아. 보고 온 거 없어?"
- 말했잖나, 첩자가 보고했다고. 그 진현우가 드라이어드 숲을 탈환했다더군.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요양 중이다.
"부상이라...."
- 여왕한테 '꽃잎'을 달라고 할 정도의 부상이다. 노조무와 드라쿠스가 상대였다면 그 정도 부상을 입는 게 그리 이상하지도 않지.
아바는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꽃잎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부상에서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안 그런가?"
- 그래. 아마 한동안은 베카샤에서 요양하지 않겠나? 만약을 대비해서 첩자에게 진현우라는 인간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 말에 베라칸이 코웃음을 쳤다.
- 드라이어드의 숲을 빼앗길 거라고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나? 언제나 만약이라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일이지.
"그건... 공감할 수밖에 없군."
- 그래서, '마법진'의 상황은 어떻지?
베라칸이 목소리를 깔았다.
마법진. 오래 전에 이 요새에 도착한 아바가 비밀리에 추진해 왔던, 가장 중요한 작업.
아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완성했다. 직접 보는 게 어때?"
- 내게 보여라.
둘이 있는 곳은 샘의 지하였다.
완전히 요새로 바뀐 지상은 사람이 머물기에 좋지 않아서 엘더 그로브가 베푼 호의.
그 지하에 비밀 공간이 있었다.
- 스르륵.
아바가 손을 내젓자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각이 사라지면서 기다란 통로가 나타났다.
원형으로 길게 이어진 통로. 바닥에는 푸르게 빛나는 마법 각인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샘이 가진 생명력을 이용해서 만든 대규모 전이 마법진이다. 이 정도면 '풍요로운 초원'의 카오틱과 마족을 대거 소환할 수 있다."
- 마기의 근원은 제대로 활용했나?
"물론.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마족들도 장막의 영향력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있을 거다. 마기가 수맥을 오염시킬 테니, 이 요새를 구축한 엘더 그로브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거고."
엘더 그로브도 마기에 대응하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해서 놈을 죽이면 된다.
- 훌륭하군. 들키진 않았겠지?
"하, 알면서 묻는 거야? 엘더 그로브가 지하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거 알잖아."
- 흠, 그 노괴도 맛이 갔다던데.
엘더 그로브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오랜 세월을 산 나무 정령은 자신의 몸을 자연에 환원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한다.
놈은 그 주기를 놓쳤다.
"하루의 대부분을 잠만 자고 있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요새를 구축하고 유지하고 있으니까. 이곳은 아예 눈치도 못 챘을 거다."
- 그게 전부인가? 따로 대처는 안 했나?
"해 뒀어. 아이템을 사용해서 지하의 마법진은 아예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게끔 했다."
- 훌륭하군.
베라칸이 만족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일이 성공한다면 넌 대적자가 약속했던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우리, 마족이 약속한 보상도.
"...걱정 마라. 실패하지는 않을 테니까."
- 그래야만 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화면이 꺼졌다.
화면이 사라진 곳을 성난 눈으로 노려보던 아바는 주먹으로 벽을 있는 힘껏 쳤다.
콰앙! 벽이 크게 흔들렸다.
"개같은 놈들."
"누님, 동굴 무너지겠어. 살살 좀 쳐."
"후우...."
그녀의 뒤로 남자가 다가왔다.
루이스. 워든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아바와 함께 워든 길드를 설립한 초기 멤버였다.
그녀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이기도 했다.
"얼마 안 남았어. 알잖아? 우리가 마인이 되면 저 새끼도 지금처럼 까불진 못할 거야."
"안다. 그때까지는 참아야지."
"그래, 배신한 대가는 받아야지. 응?"
아바가 처음부터 카오틱이었던 건 아니다.
그녀와 워든 길드는 힘들었던 2층을 플레이어로서 돌파했고, 마침내 3층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플레이어라는 집단은, 희망이 없다.'
카오틱이 점령하다시피 했던 2층.
거길 지나서 3층에 도달하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엘프는 미약했고, 마족은 강대했다. 그를 상대해야 하는 플레이어 집단도 나약했다.
이 집단에 속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배신해야만 한다, 살아남으려면.'
그때 접근한 것이 대적자였다.
인류의 적이며, 플레이어가 탑을 등반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들. 그런 대적자의 대리인은 그녀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 엘프를 배신해라. 그럼 너희에게 이 탑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힘을 주지.
- 너희를 마인으로 삼겠다.
엘프를 배신하고 마인이 되라는 제안.
그 당시의 아바는 전장에서 마인이라는 존재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었다. 그렇기에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마인이 될 수 있다.
"배신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
그렇게 아바는 인류를 배신했다.
그녀를 따르는 루이스도, 오랫동안 함께했던 길드원들도 그녀의 뜻에 동참했다.
동참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죽였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2층에서 마인이 하나 죽었다나 봐. 공석이 생겼으니 우리 길드원 중에서 마인이 한 명 더 생길 수도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군."
아바는 등을 돌렸다.
"저 마법진으로 카오틱과 마족들을 소환하고, 이 샘을 마족들의 손에 바친다. 그거면 우리가 할 일은 끝나는 거다, 루이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카오틱으로 전향하고 마인이 된다.
그리고 하이아칸 대륙을, 이곳의 원래 지배자였던 엘프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다.
"반드시."
아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진현우는 한동안 이리샤와 아드네아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둘의 집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지내기에는 괜찮았다.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데."
"인간, 난 네가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느니라. 너무 바쁘게 사는 것 아니냐?"
"누가 쉬기 싫어서 안 쉬냐? 엉?"
진현우가 영혼석을 쥐며 으르렁거렸다.
전생에서 막 은퇴했을 때 집에서 칩거하며 온갖 대중 매체를 접했을 무렵이 떠올랐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우, 우우... 몇 번이고 말하지만, 영혼석은 아껴 줘야 하는 물건이니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네가 아끼지 못하게끔 만들고 있잖아. 일부러 시비라도 거는 거냐?"
"추, 충고를 한 것이니라!"
"그거 참 고마운 충고네."
진현우는 세 개의 꼬리를 움켜쥔 채 벌벌 떠는 미호를 무시하고 영혼 매를 소환했다.
두 마리의 매가 창밖으로 날아갔다.
"쟤들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정찰. 누구 오는 사람 있으면 알려 달라고."
"흐으음."
라시드가 엘프 여왕에게 진현우가 했던 일들을 보고한 지 3일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진현우는 큰 부상을 입은 척, 이리샤의 집에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워든 길드는 진현우를 경계할 것이다.
그들이 계획해서 마족에게 바쳤던 드라이어드의 숲을 탈환한 것이 바로 진현우였으니까.
또 자신들의 일을 방해할까 싶어서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확인하려고 들 것이 분명하다.
'워든의 부탁을 들어주는 놈이 있겠지.'
그놈을 속여야 한다.
침대에 누운 채로 빈둥거리던 진현우는 서랍장 위에 놓인 꽃잎을 바라봤다.
미호가 앞발로 꽃잎을 건드리고 있었다.
"인간, 이건 언제 쓸 것이냐? 쓸 생각이 없다면 날 다오. 강한 정기가 느껴지는구나."
"내가 쓸 거야."
어제 라시드가 가지고 온 선물이다.
엘프 여왕에게 부탁해서 받아온 꽃잎.
[세계수의 꽃잎 (영웅)]
· 설명: 세계수가 피워 낸 꽃의 꽃잎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복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먹으면 능력치를 올려 주는 꽃잎이다. 거기에 부상의 회복을 빠르게 해 주는 효과까지.
하나 이걸 그냥 쓰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나.
'굉장히 좋은 재료란 말이지.'
다른 약재와 조합하면 더 큰 효과를 낼 수가 있다. 그래서 이리샤한테 뭘 부탁했었는데.
- 콰앙!
"여행자! 나 왔어! 부탁한 거 가져왔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리샤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녀는 바구니를 한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 여러 가지 약재가 들어 있었다.
진현우가 요구한 약재들이었다.
"후후, 선조의 정원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야. 엘프 여왕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셨어."
"음, 품질 좋네. 역시 엘프야."
"그렇지? 여왕님이 각별히 신경 써서 관리하시는 정원이거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리샤가 가슴을 펴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녀에게 바구니를 받은 진현우는 필요한 약재들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으음, 근데... 여행자. 있잖아."
"왜."
"이 약재들도 쓰려고 가져오라 한 거야?"
이리샤가 몇몇 약재를 가리켰다.
이상할 정도로 이쁘게 생긴 버섯이나 기이하게 생긴 약초, 뿔처럼 생긴 약재까지.
이것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독초잖아! 여왕님이 주시면서 엄청 주의를 주셨어. 여행자가 잘못 쓰지 않게끔 꼭 지켜보라시면서. 진짜로 쓰려고 가져오라 한 거야?"
"그럼 쓰라고 가져오라 하지. 이걸 팔까?"
"자, 잘못 쓰면 죽어. 여행자...."
하나같이 극독을 가진 약재들이었다.
당연하지만 이걸 그냥 복용하려고 가져오라 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조합용 재료다.
"꽃잎하고 같이 조합할 거야."
"세계수의 꽃잎하고?"
"어. 조금 위험한 약이기는 한데."
능력치를 크게 버프해 주지만 동시에 생명력을 많이 깎아 먹는, 일종의 독약 같은 것이다.
원래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약이지만.
'지금은 쓸 이유가 있지.'
잘 쓰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진현우는 나중에 약을 만들기로 하고, 세계수의 꽃잎과 약재들을 아공간에 보관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매가 돌아왔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
매가 주변에 누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손님? 누구?"
"엘프 여왕에게 내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놈. 아마 확인하러 왔겠지."
"여행자, 나도 여기 있을까?"
"연기는 좀 잘하나?"
"잘하지는 않는데... 그래도 괜찮을 거야."
그 정도면 됐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 맞이할 준비나 하자."
"쿠후훗, 내가 나설 차례로구나."
미호가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114화
나무 정령의 샘
그리고 잠시 후.
이리샤의 집에 엘프가 찾아왔다.
"그렇군요, 이 정도의 부상을...."
엘프, 세드루스. 왕궁에서 일하는 시종은 진현우의 상태를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을 붕대로 휘감고 있었는데, 전신이 마기로 절여져서 썩어 가는 것이 보였다.
끔찍한 부상이었다.
"드라쿠스라는 마족과 싸우다가 이렇게... 알겠습니다. 여왕님이 잠깐 상태를 보고 오라고 하셔서 온 건데, 확인했으니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오래 있는 것도 민폐일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세드루스는 집을 떠났다.
그는 빠르게 거리를 걸었고, 이리샤는 저택 내부에서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 갔냐?"
"갔어. 그 붕대 좀 풀지 그래?"
"안 그래도 그럴 거야. 더럽게 답답하네."
진현우는 온몸을 덮은 붕대를 풀었다.
당연하지만, 그 안에 상처는 없었다. 마기에 잠식되어서 썩어 가던 살점도 보이지 않았다.
"고생했다, 미호."
"쿠후후, 날 좀 더 칭찬하거라!"
"그러니까, 음. 나한테는 멀쩡하게 보이는데 저 시종한테는 네가 다친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 저 아이가 쓰는... 그 환각 때문에."
"그 말이 맞느니라, 귀쟁아."
"귀쟁...."
진현우가 덮은 이불이 꿈틀거리더니 그 속에 숨어 있던 미호가 불쑥 튀어나왔다.
미호의 말을 들은 이리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진현우는 엘프가 떠난 쪽을 흘깃 봤다.
"저놈 누구야? 아까 여기 온 엘프."
"엘프 왕궁에서 일하는 시종이야. 원래부터 일하던 시종은 아니고, 베카샤로 피난 온 뒤에 새로 모집한 시종이라고 알고 있어."
"그리고 워든한테 빚이 있을 테고."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입었다. 그 말에 이리샤의 표정이 묘해졌다.
"워든 길드한테 은혜를 입은 엘프들이 많아. 특히 아바한테. 많이 도와줬거든. 그렇게 은혜를 입었으니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내 상태가 어떤지 보고 오라는 정도의 부탁이면 크게 어려운 부탁도 아닐 테니까."
"그렇지."
이리샤가 흘깃 진현우를 봤다. 그는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쩌려고?"
"나무 정령의 샘으로 가야지. 따로 움직일 테니까 이리샤, 너는 여기 남아 있어. 누가 찾아오거든 핑계 잘 대고 못 들어오게 하고."
"응, 알았어. 계속 여기 있으면 돼?"
"내가 나중에 연락을 보낼 거야."
진현우는 이리샤에게 수정구를 건넸다.
통신용 수정구였다.
"연락이 오면 나무 정령의 샘으로 와. 같이 보관고 공략했던 엘프들도 데리고."
"조용히 움직일까? 아니면 빠르게?"
"최대한 빠르게. 다소 소란스럽게 움직여도 너희한테 신경 쓸 여력은 없을 거야."
"그렇게 할게."
이리샤는 진현우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와 만나고 이룬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놀랄 정도였으니.
'도와주면 뭔가 또 대단한 걸 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들었다.
아니,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샤는 진현우의 활약을 곁에서 봤으니까.
그러니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잘 갔다 와, 여행자."
"어."
진현우는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이제 빠르게 움직여야겠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진현우는 저택을 나섰다.
* * *
나무 정령의 샘.
엘프와 마족의 영토가 닿는 접경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점으로, 원래는 나무 정령들과 동식물들이 어우러져서 살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요새가 다 됐군."
"인가안... 정말로 저 요새를 몰래 침입하겠다는 것이냐?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이냐?"
"불가능하면 말을 꺼냈겠냐?"
눈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요새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요새. 엄청난 생명력을 머금은 나무라서 쉽게 파괴되지도 않는다.
거기에 나무 정령과 플레이어들이 성벽 위를 순찰하면서 적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도 통과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
대도둑의 은신을 쓴다면 가능하다.
나무 정령은 진현우가 잠입하는 걸 눈치채지도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 녀석들이 아니라 엘더 그로브다. 저 요새를 구축한 거목.
'엘더 그로브는 날 눈치챌 거다.'
나무로 만들어진 저 요새는 엘더 그로브가 만들어 냈다.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의 몸으로.
한마디로, 저 요새 자체가 엘더 그로브의 몸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진현우가 잠입한다면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럼 위험한 것 아닌가?"
"아니, 아마 괜찮을 거야. 이걸 써야지."
"그건... 보관고에서 얻었던 반지구나."
진현우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대정령사의 반지 (영웅)]
· 설명: 오래 전 역사에 이름이 남을 정도의 활약을 했던 대정령사가 쓰던 반지다.
· 착용 제한: 레벨 60.
· 옵션: 정령 친화, 대정령사, 각인.
* 정령 친화: 정령과의 친화력이 상승한다. 처음 보는 정령의 호감을 살 수 있다.
* 대정령사: 정령을 이용한 공격의 대미지가 25% 증가하며, 정령을 소환했을 때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는 마력의 양이 감소한다.
* 각인: 소환할 수 있는 정령 하나에게 특수한 각인을 새겨서 해당 정령을 크게 강화한다. 이 옵션은 한 번 사용하면 제거된다.
보관고에서 얻은 정령의 반지였다.
정령과의 친밀도를 올려 주는 옵션이 붙어 있는데, 이게 아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꽃잎'도 있다.
"쿠우웅... 불안하기 그지없구나. 꼭 숨어서 가야 하는 것이냐? 따로 이유가 있는 건가?"
"워든 길드한테 내 존재가 들키면 안 돼."
"그건, 으음, 그렇구나. 맞는 말이야."
워든 길드는, 특히 아바는 진현우가 아직 베카샤에 남아 있다고 알고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부상을 입은 연기를 한 거니까.
진현우는 그림자 속에 몸을 감췄다.
"움직이자. 잘 따라와."
"알겠느니라."
둘은 재빠르게 요새에 잠입했다.
* * *
엘더 그로브는 잠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몸을 활용하여 샘을 요새로 만든 후, 오랜 거목은 부쩍 잠이 는 상태였다.
잠이 든 거목은 꿈을 꿨다. 마족이 침공하기 전의, 행복한 하이아칸 대륙의 모습을.
-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옛날이로구나.
꿈이라는 걸 알지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거목은 쓰게 웃으며 꿈을 탐닉했다. 언제나 그렇듯, 거목이 움직여야 할 때가 올 때까지.
그리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 음, 침입자가 있군.
요새를 누군가가 침입했다.
재빠르고 은밀한 자였다. 성벽을 지키던 나무 정령도, 인간들도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엘더 그로브는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려 했다.
- 아니, 잠깐. 이 기척은....
그런데 침입자에게서 꽃잎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까닭을 알 수 없는 친밀감도.
거목은 침입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내부로 잠입했지만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고 있다. 향하는 곳은, 아마도 자신이 있는 곳.
- 내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냐?
엘더 그로브는 흥미를 느꼈다.
꽃잎을 가졌다는 것은 엘프 여왕의 신뢰를 샀다는 것. 거목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침입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엘더 그로브."
침입자가 거목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현우. 그는 몸을 휘감은 그림자를 지워 내면서, 거대한 엘더 그로브 앞에 섰다.
"얘기 좀 합시다."
그 모습을 본 거목의 눈매가 휘어졌다.
* * *
엘더 그로브는 눈앞의 인간을 봤다.
불길한 갑옷을 입은 남자. 평소 같았다면 여기로 오기 전에 진작에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 신기한 기척을 가진 인간이로구나. 까닭은 모르겠지만, 너에게 큰 친밀감을 느낀다.
"이 반지 때문일 겁니다."
- 호오, 그 반지는....
진현우의 반지를 본 거목이 감탄했다.
놀라운 힘이 담긴 반지. 왜 친밀감이 느껴지는가 했더니 저 반지 때문인 모양이었다.
엘더 그로브가 긴 숨을 내뱉었다.
- 인간... 너는 저 마족들의 편인가?
"그랬으면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오자마자 당신을 어떻게 하려고 했겠지."
- 그건 맞는 말이로다. 그렇다면, 묻지. 왜 이곳으로 온 것이냐? 그것도 몰래 숨어서.
잠입해서 왔다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내보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
거목의 눈이 진현우를 주시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더 그로브, 당신이 가장 믿던 인간들이 배신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 내가 가장 믿던 인간, 말이냐?
"예. 누군지는 스스로 잘 아실 테고요."
엘더 그로브는 몽롱한 머릿속을 되새겼다.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인간.
- 아바와 그 동료들을 말하는 것이겠군.
"맞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엘더 그로브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이 배신했다니, 증거 없이는 믿을 수 없는 말이다.
- 증거는?
"당장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파헤쳐야죠. 그래서 당신의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요."
- 무엇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냐?
"이 샘의 지하를 뒤져야 합니다."
샘의 지하에는 거주지가 있다.
이 요새를 지원하는 플레이어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큰 공간을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워든 길드였다.
- 지하는... 내가 이곳에 온 인간들에게 거점으로 쓰라고 허락했던 곳이었지. 그 지하에 무엇이 있단 말이냐? 하지만....
엘더 그로브는 눈을 감았다.
요새로 바뀐 샘은 그의 몸이나 다름없다.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짚이는 것이 없었다.
-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곳에서 지내는 인간들 말고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아.
"그럼 지하에 뭘 숨겨 놨는데 그걸 금방 알아챌 수 있게끔 놔뒀겠습니까? 숨겨 두지."
진현우가 코웃음을 쳤다.
"지하에 어떤 공간이 있을 겁니다. 그 공간을 워든 길드가 지키고 있을 건데, 놈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방법이 필요합니다."
- ....
엘더 그로브는 생각에 잠겼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지하를 지키는 워든 길드를 빼낼 방법은 다양하게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문제가 하나 있었다.
- 인간,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저는 못 믿죠. 터놓고 말해서 이제 처음으로 만난 사이인데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니까 저 대신에 제가 가진 것들을 믿으십시오."
진현우는 꽃잎을 꺼냈다.
선조의 정원에서 자라는, 수백 년에 한 번 피는 꽃. 그 꽃잎은 엘프 여왕이 신뢰하거나 큰 공헌을 한 이에게 포상으로 주어진다.
엘더 그로브도 기척으로 파악한 물건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진현우는 팔찌를 보였다.
세계수의 선물. 엘프 여왕이나 동맹의 지도자와 연락할 수 있는 특수한 통신 아이템.
"제 신분을 보증해 줄 분이 있습니다."
- 그건... 누구에게 받은 것이냐?
"드라이어드 공주, 하엘에게 받은 겁니다. 보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건 하엘의 것이군.
엘더 그로브는 상념에 잠겼다.
죽이고 빼앗은 것인가?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걸로는 꽃잎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저 남자가 마족에게 점령당한 드라이어드의 숲을 되찾았고, 팔찌를 빌렸다.'
이게 가장 가능성이 큰 전개였다.
엘더 그로브는 길게 숨을 토해 냈다.
- 믿기 힘든 얘기로다.
상념을 끝낸 거목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 지친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 아바와 그 동료들이 배신자라는 건, 솔직하게 말하마. 나로서는 믿기가 힘들구나. 우린 그들에게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겠죠. 엘프도 안 그렇습니까?"
- 그렇다. 곤경에 처한 엘프들에게 큰 도움을 줬었지. 여왕도 그들을 믿지 않던가?
"믿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런 길드가 엘프를 배신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엘프를 배신하기 위해서 신뢰를 쌓으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시간이 아깝군요. 길게 얘기하지 맙시다. 저한테 기회를 주면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볼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안 되겠지.
"그럼 너무 요란해질 겁니다."
엘더 그로브가 지하를 확인할 방법은 나무 정령을 보내거나 뿌리를 움직이는 것뿐.
그러면 워든 길드도 눈치챌 것이다.
- 좋다, 인간. 아직 너는 믿을 수 없다만, 네게 그 물건들을 맡긴 이들을 믿겠다. 시간을 다오. 네가 움직일 기회를 만들어 주마.
"좋군요. 그렇게 하죠."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마법진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 넌 참 바쁘게 움직이는구나, 인간.
"그러게나 말이다."
진현우는 미호의 말에 한숨을 내뱉었다.
115화
배신 (1)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엘더 그로브가 워든 길드를 소집했다. 한 명도 아니고, 요새에 있는 이들은 모두 다.
"X발, 이 새벽에 뭔 짓거리야?"
"길드장님, 몇 명이나 오라고 한 겁니까?"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전부 다."
아바는 인상을 굳혔다.
악질 상사도 아니고, 이런 새벽에 갑자기 모이라고 하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최대한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
엘더 그로브가 지하의 마법진을 눈채채지 못하게끔 해야 한다. 온갖 대처를 해 뒀으니 직접 오는 게 아닌 이상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하를 경계할 인원은 놔뒀겠지?"
"예. 인원이 적긴 하지만 놔뒀습니다. 평소보다 경계가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빠르게 돌아가야겠군."
아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너머에 엘더 그로브가 보였다.
"다 왔군. 모두, 표정 관리 잘해라."
"예, 예. 알고 있습니다."
엘더 그로브가 있는 곳까지 도달한 워든 길드는 안색을 굳히며 걸음을 옮겼다.
거목이 그들을 반겼다.
- 왔는가, 정령의 친구들이여.
"예, 엘더 그로브. 저희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 그렇다. 꺼림칙한 소식을 접해서 말이다.
"꺼림칙한 소식이라면...."
아바가 말을 흐렸다.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저 거목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저절로 마음이 긴장됐다.
엘더 그로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그것이....
"...."
- 음, 으으음....
아바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것은 없었다. 대신 숨소리만 들릴 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뭐야, 자는 건가?"
"미치겠군. 불러 놓고 잔다고?"
"...길드장님, 그냥 가도 됩니까?"
"잠깐만 기다려. 흔히 있는 일이야."
엘더 그로브가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흔한 일이었다. 이 요새를 만든 뒤부터 거목은 상태가 안 좋아졌다.
엄청난 규모의 요새니 그럴 수밖에.
"기다리면 아마...."
- 음! 어어, 미안하군. 내가 잠깐... 졸았었나? 요즘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이해합니다. 힘드실 테니까요."
- 고맙다, 아바. 역시 그대는 우리 나무 정령의 소중한 친우야. 그러니까, 흐으음.
이제 워든 길드를 소집한 이유를 말하겠지.
아바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던 엘더 그로브가 다시 졸았다.
아바는 혀를 차며 부하에게 손짓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너희는...."
- 아아, 미안하군, 그래. 아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듣게. 이건 중요한 얘기니까 말이다.
"이런 X발."
아바는 욕을 내뱉으며 손짓을 거두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왜 새벽에 이런 짓을 해야 하나, 한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할 얘기는.
"...참아라, 금방 끝날 거다."
"정말로 금방 끝나는 거 맞습니까?"
저 노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최대한 엘더 그로브의 의심을 피하고 호감을 사야 하는 아바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좋아, 움직이자."
진현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지하의 입구에 도달한 상태였다. 지하 내부에는 다양한 천막이 펼쳐져 있었다.
- 인간들이 여기서 머물고 있구나. 워든 길드가 빠졌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지 않느냐?
'어쩔 수 없어. 플레이어는 여기서 자니까.'
- 지상에서는 잘 수 없는 것이냐?
'잘 수는 있는데 불편하겠지.'
지상에서는 사람이 생활하기가 어렵다.
애초에 나무 정령들이 살던 샘이었기에 사람들이 지낼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엘더 그로브는 이곳을 찾아온 인간들을 위해서 지하 공간을 나눠 줬다.
"일단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진현우는 재빠르게 안쪽으로 향했다.
지하 동굴은 불을 밝혔음에도 어둡다. 그림자로 몸을 감추기에 최적인 환경이었다.
그림자를 휘감은 그가 빠르게 나아갔다.
- 저쪽에 경계를 서는 인간이 있구나.
'나도 봤어.'
안쪽에 워든 길드에게 배정된 공간이 있었다. 그 입구를 길드원들이 지키는 중이었다.
최소한의 경계 인원을 두고 간 모양이다.
"야, 미호. 일 좀 해라."
- 흥, 분신을 소환하면 되는 것이냐?
"그래. 잠깐이면 되니까 시선 좀 돌려 봐."
미호는 코웃음을 치면서 분신을 소환했다.
자그마한 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입구를 지키는 길드원들 앞을 천천히 걸어갔다.
길드원들의 시선이 순간 여우를 향했다.
"여우? 뭐야, 저건."
"숲에 사는 동물 아냐? 특이하게 생겼네."
"여기 동물들이 좀 특이하긴 하더라."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진현우는 섬광을 사용했다. 그림자를 두른 신형이 순식간에 입구 너머로 나아갔다.
동시에 여우도 다른 통로로 들어가면서 모습을 감췄고, 길드원들은 시선을 되돌렸다.
'내부는 텅텅 비었군.'
엘더 그로브의 말에 잘 따른 모양이다.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이곳 어딘가에 마법진이 숨겨진 곳으로 가는 출구가 있을 터.
그것만 찾으면 된다.
'발자국.'
진현우는 사냥꾼의 감각을 활성화했다.
검게 물든 시야로 발자국들이 보였다. 그는 발자국을 쫓으며 위화감이 있는 곳을 찾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자국이 멈춘 곳.'
가장 안쪽에 있는 넓은 천막.
다양한 짐이 놓인 곳의 바닥에 그런 곳이 있었다. 여러 발자국이 멈췄고, 발자국이 인위적으로 사라진 곳.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진현우는 주변을 헤집었다.
"역시."
짐들 사이에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그걸 당기자 바닥이 열리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나타났다. 진현우는 섣불리 들어가지 않고 통로 내부를 유심히 지켜봤다.
- 뭘 보는 것이냐?
"함정. 한두 개가 아니야."
침입자를 경계했는지 함정이 가득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경보를 울리는 함정처럼 침입자를 알리는 함정들이 대다수였다.
진현우는 곡예를 벌이듯 함정들 사이를 나아갔고, 마침내 통로의 끝에 도달했다.
"그럼 그렇지, 이 새끼들."
그리고 진현우는 목도했다.
굳게 닫힌 문 너머, 길게 이어지는 통로. 그 바닥을 빼곡하게 채운 마법진의 각인을.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진현우는 팔찌를 들었다.
일단 엘더 그로브에게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