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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공허한 언덕 (2)

공허한 언덕.

그 이름대로 언덕은 공허했다. 단지 넓은 것을 떠나서, '원래 있어야 할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진 것 같은 공허함을 느끼게끔 했다.

"아윽, 으으으...."

"이, 저주받을, 쓰레기들이...."

그 언덕에 쓰러진 이들이 있었다.

엘프들이었다. 그 숫자만 해도 수십. 이곳을 지키며 몬스터를 처리하던 엘프 수색대였다.

그들은 부상을 입은 채 구속된 상태였다.

"하여튼, 저 엘프 놈들은 하나같이 말하는 게 다 똑같다니까. 안 그렇냐?"

"좀 있으면 차라리 죽이라고 하겠지."

"그냥, 죽여라...."

"저거 봐!"

엘프들의 앞에는 카오틱들이 서 있었다.

그 숫자는 20명 남짓. 요즘 이름을 떨치는 카오틱 길드와 일반 카오틱들이 모여 있었다.

엘프들은 놈들의 비웃음에 이를 악물었지만, 그런다고 따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비겁한 놈들. 기습을 하다니!"

"부끄러움도 없느냐...!"

"뭐 부끄러울 일이 있나? 오히려 고맙지."

원한에 찬 엘프들의 말에, 저 너머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대답했다. 도복처럼 생긴 갑옷을 입은 중국계의 카오틱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카오틱을 이끄는 자였다.

"청연, 보스 몬스터는?"

"저 엘프들이 잘 처리해 놨던데. 일단 확실하게 구속해 뒀다. 마기에 절여야지."

"흐, 죽이면 나올 아이템 생각하면 아쉽네."

"그만큼 마족들이 챙겨 줄 거다."

청연이라 불린 카오틱은 동료들과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면서 엘프들 앞에 섰다.

만신창이가 된 엘프들과는 달리 카오틱들은 대다수가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엘프 수색대. 꽤 까다로운 놈들이다만."

엘프들이 공허한 언덕에 나타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 기습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힘이 빠졌을 때를 노려서.

엘프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 했다.

"이렇게 보니 별것도 아니군."

"쓰레기 자식! 세계수가 널 벌할 것이다!"

"어, 저 나무가 말이지. 글쎄다, 벌할 거였으면 진작에 벌하지 않았을까? 안 그래?"

"감히!"

청연은 엘프들을 비웃으며 등을 돌렸다.

넓은 언덕 중심부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불길한, 검은 진흙을 쉼 없이 흘리는 결정체가 담겨 있었다.

마기의 근원이다.

"완전히 오염되려면 얼마나 걸리지?"

"이틀 정도. 어차피 계속 지원이 올 거다. 우리는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한동안 귀찮아지겠군."

"정 심심하면...."

카오틱이 쓰러진 엘프들을 흘깃 봤다.

그들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챈 엘프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서라. 접경 지역이야. 양동작전이라서 엘프 놈들이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긴 할 건데, 그래도 계집질은 나중에 해라."

"흐, 아쉽군."

"그리고 어차피...."

청연은 분노하는 엘프들을 재밌다는 듯 보더니, 그들의 대장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고 구덩이까지 끌고 갔다.

"아악!"

"다크 엘프가 되면 잘 놀아 주잖아?"

청연은 엘프 대장의 머리를 들어 구덩이 안에 든 마기의 근원을 보게끔 했다.

그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보이나? 마기의 근원이다. 지금부터 너희들을 저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을 거다."

"우리를, 다크 엘프로 만들 셈이냐...!"

"그래. 많이 봤잖아? 뭐, 걱정 마. 지금은 죽도록 싫겠지만 다크 엘프가 되면 그런 감정도 다 잊게 될 테니까. 나름대로 잘 지내더라고."

이미 마족 측에는 다크 엘프들이 있다.

당연하지만 원해서 다크 엘프가 된 이들은 아니다. 강제로 그렇게 만든 이들이었다.

다크 엘프가 되면 육체와 정신이 마기에 물들게 된다. 엘프일 때와는 다르게 잔혹하고 피를 즐기는, 마족 같은 심성을 지니게 된다.

"차라리 죽...!"

"그래, 일단 너부터 들어가라."

"끄으윽!"

청연은 엘프 대장을 구덩이 속으로 던졌다.

구덩이에 가득 모여 있던 마기가 엘프 대장을 에워쌌다. 저렇게 놔두면 마기가 스며들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다크 엘프가 될 것이다.

"다른 놈들도 다 집어넣어."

"어. 이리 와, 이 새끼들아!"

"꺄아아악!"

엘프들이 하나둘씩 구덩이로 던져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연은 기분 좋은 듯 웃다가, 어떤 사실을 떠올리고 얼굴을 구겼다.

"루이스하고 다른 둘은 아직 안 왔나?"

"응. 도망친 엘프를 추적하러 갔는데...."

"엘프 하나한테 당하지는 않았겠지."

청연은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치고 다친 엘프한테 당할 정도의 머저리들이 아니다. 뭔가 변수가 생겼다는 것.

'플레이어들이 왔나? 루이스 녀석들을 처리하려면 전투가 격해져서 시끄러웠을 텐데.'

따로 인원을 보내서 수색해야 하나.

청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때, 주변을 경계하던 카오틱이 목소리를 높였다.

"응? 잠깐, 저거! 청연! 저길 봐!"

"뭘 보라고? 어?"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숲 저 너머에서 걸어오는 이들이 보였다. 청연과 카오틱들에게 익숙한 이들이었다.

루이스와 두 카오틱들.

"루이스잖아! 어딜 갔다 온 거야!"

"다른 놈들도 있다! 하, 죽은 줄 알았는데."

"병신들, 귀쟁이 하나 못 잡아서 저 꼴이 된 거냐? 잘하는 짓이다, 이 머저리들아."

루이스와 다른 일행은 부상을 입었는지 휘청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청연은 혀를 찼다.

"다쳤나 보군. 포션!"

"어! 알았어!"

일단 치료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카오틱들은 뛰어가서 그들을 부축했다.

루이스를 중심으로 카오틱들이 모였다.

"이 새끼 왜 이리 조용해? 야, 아프냐?"

"...."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카오틱은 의아해하면서 루이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 봤다.

초점을 잃은 루이스의 눈동자를.

- 쉬익!

"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카오틱이 인지한 것은 그게 끝이었다.

그는 불현듯 가슴에서 통증을 느꼈고,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뭐, 무, 크어...!"

보이는 것은 심장을 꿰뚫은 칼날.

그 단검을 쥔 것은, 루이스였다. 카오틱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동료를 봤다.

루이스와 함께 온 두 카오틱도 같은 타이밍에 근처에 있던 동료들을 기습했다.

"이, 이 새끼들, 미친 거냐!"

"미친, 제압해! 뭐 하는 짓이야!"

카오틱들은 황급히 루이스를 제압했다.

하지만 저항이 워낙 거셌기에 제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부상을 입어 가면서 어떻게든 제압한 순간, 청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저놈, 몸에 뭔가 붙어 있는데?'

커다란 로브로 가려져 있던 루이스의 몸에 뭔가가 붙어서 툭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불안하다. 청연이 황급히 외쳤다.

"그놈들한테서 물러...!"

- 퍼어어엉!

루이스와 두 카오틱의 몸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사방으로 살얼음을 흩뿌렸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살얼음을.

"크아아아악!"

"커, 으윽! 내 눈!"

빙결 덫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덫이 아니다. 빙정의 효과로 그 위력이 훨씬 강화된 빙결 덫이었다.

원격으로 작동된 빙결 덫이 폭발하면서 광범위한 냉기와 살얼음을 흩뿌렸다.

- 피슈우욱! 푸욱!

그뿐만이 아니었다.

빙결에 휘말린 카오틱들이 몸을 못 추스르는 사이, 저 멀리서 화살이 쏘아졌다.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 중간에 분열하더니 카오틱들의 급소를 정확히 관통했다.

"시발! 기습이다!"

"정신 차려! 서쪽! 방어... 커헉!"

"바인!"

연이어서 쏘아지는 화살.

카오틱들이 필사적으로 태세를 가다듬은 그때, 저 멀리서 섬광이 번뜩였다. 섬광은 순식간에 그들 앞에 도달했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 파아아앗!

"큭, 눈이!"

광휘가 터졌다.

빛이 순간 시야를 차단했다. 시야는 금방 돌아왔지만, 그 짧은 순간이 치명적이었다.

- 콰직!

"커억...!"

어둠 속에서 벼락처럼 날아든 도끼가 카오틱의 목을 찍었다. 연이어서 허공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카오틱들을 휩쓸었다.

그에 휘말린 카오틱들이 휘청거렸다.

- 커허엉!

"이 늑대 새끼들은 또 뭐야!"

"아아악!"

휘청거리는 카오틱들을 늑대가 덮쳤다.

늑대의 기세는 흉포했고, 망설임 없이 카오틱의 목을 노렸다.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렇다고 늑대들을 상대하자니.

- 쉬이이익!

"아아아악!"

"크으윽!"

카오틱들을 노리고 도끼가 쏘아졌다.

살얼음과 돌풍을 휘감은 도끼들이 카오틱들을 덮쳤다. 일부는 피하지 못했고, 일부는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도끼를 쳐 냈다.

- 크르르! 콰드득!

"억, 크헉! 도, 도와... 끄르륵!"

도끼를 쳐 낸 카오틱을 늑대들이 노렸다.

순식간에 목을 물어뜯긴 카오틱들은 입에서 피거품을 내뿜으면서 땅을 나뒹굴었다.

그들과 같은 꼴이 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절반 가까이 되는 카오틱이 그렇게 됐다.

"이, 개새끼가!"

청연은 노성을 터트리며 진현우를 덮쳤다.

배후에서 이루어진 기습. 청연은 두 단검을 교차하며 휘둘렀다. 그러자 칼끝에서 검풍이 일어나더니 진현우의 등으로 쏘아졌다.

검풍이 갑옷을 강타했다.

'자세가 무너졌다. 지금!'

청연은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두 자루의 단검이 뱀처럼 움직이면서 진현우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단검이 목에 닿는 일은 없었다.

- 카드드득!

"큭!"

방패가 단검을 쳐 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청연은 목을 노린 공격이 막힌 것을 깨닫자마자 진현우의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갑옷을 노린 공격은 명중했다.

'타격을 받았을 거다. 이대로....'

피해를 누적하면 된다.

그리 생각한 청연은 진현우의 갑옷을 봤다.

'이대로....'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 스으으으!

"무, 무슨...!"

진현우가 입은 불길한 갑옷에 균열이 생겼다. 청연의 검풍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균열로 검은 기운이 집결했다.

'미친. 갑옷이, 복구되고 있어...?'

그리고 갑옷의 흠집을 수복했다.

전투 중에 자가 수복 하는 갑옷이라니. 평범한 갑옷이 아니다. 분명 고등급의 갑옷일 터.

저런 갑옷을 가진 플레이어라면.

'제길, 어디서 이런 새끼가!'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그리 판단한 청연은 카오틱들을 모아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흐아, 흐아악! 오지 마! 이 괴물아!"

"뭐, 미친! 난 동료... 커헉!"

"어? 괴, 괴물이 왜... 내가, 뭘...?"

환각이라도 보는지, 다친 카오틱들이 눈을 뒤집은 채 동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조금 전의 루이스처럼.

그 모습을 본 청연이 넋을 잃었다.

"대체, 이게 무슨."

"쿠후후훗! 네 동료들은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니라. 내 마안에 사로잡힌 것이지."

"뭐? 크아악!"

뒤에서 들린 목소리.

강한 충격파가 청연의 등을 강타했다. 버틸 수 없는 충격에 그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위를 늑대들이 올라탔다.

"악! 으아아악! 개새끼들이!"

그 몸을 무자비하게 물어뜯는 늑대들.

청연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진현우가 천천히 걸어갔다.

"헉, 허억!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겁에 질린 청연이 땅을 기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 진현우는 놈의 복부를 짓밟았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카오틱이 입은 강철 갑옷이 단번에 우그러졌다.

'무, 무슨 힘이...!'

믿을 수 없는 힘에 청연이 경악했다.

진현우는 도끼를 들었다.

"안 돼, 안...!"

- 콰득!

살을 짓이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

그걸로 끝이었다. 진현우는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도 더럽게 많네."

"쿠후후, 어차피 전의를 상실한 놈들이다. 어떻게 할 것이냐, 인간? 살려 줄 것이냐?"

아직 남은 카오틱들이 있다.

진현우는 도끼를 세게 움켜쥐었다.

"미쳤냐? 다 죽여야지."

카오틱은 살려 둘 가치가 없다.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가치관이었다.

97화

공허한 언덕 (3)

진현우가 카오틱들을 상대하는 동안 이리샤도 마냥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족들을 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이리샤. 네가 어떻게 여길...."

"은인을 만났어요. 일어나요. 저 가증스러운 괴물들이 우리를 인질로 잡을 수도 있어요."

"그래, 그래야지. 큭!"

카오틱들이 엘프를 인질로 잡을 수 있다.

진현우와 이리샤 둘 다 그리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카오틱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이리샤는 재빠르게 동족들을 구했다.

"이 망할 년이! 뭘 하는 거냐!"

"실프! 윈드 커터!"

"크하악!"

이리샤를 눈치채고 막으려는 카오틱들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녀는 재빠르게 동족들을 구했다.

"다른 분들은 어딨죠? 이게 다인가요?"

"나머지는...."

보이는 엘프들은 모두 구했다.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한 엘프들이 있었다. 엘프는 분노에 찬 얼굴로 구덩이를 가리켰다.

그 안에 내던져진 엘프들과 넘실거리는 마기를 본 이리샤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괜찮아요. 아직 시간은 있어요. 일단 나중에 구하고, 저 여행자부터 도와야 해요."

"돕는다라.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구나."

"네?"

그 말대로였다.

진현우의 전투는 이미 끝나 가고 있었다.

저 카오틱들의 대장 격인 청연을 죽이고, 내분이 일어난 카오틱들까지 죽이는 중이었다.

'강하다.'

말도 안 되는 강함이다.

일련의 전투를 지켜본 엘프는 그리 생각했다. 이 정도 숫자의 카오틱을,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한 플레이어가 있다니.

'단순히 가진 힘이 강한 걸 떠나서....'

주목할 것은 무력만이 아니다.

움직임. 저 남자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직 어린 나이일 텐데도 수많은 실전을 겪은 전사 특유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우리는 기절한 자들을 제압하자꾸나."

"아, 네. 그렇게 해요."

전투를 돕는 건 의미가 없다.

그리 판단한 엘프들은 죽지 않은 카오틱들이 도망치지 못하게끔 제압하기로 했다.

"크아아악!"

그리고 잠시 후, 전투가 끝났다.

온몸을 피로 칠갑한 진현우는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아이템들을 챙겼다.

챙겨 두면 돈이 될 것이다.

"이놈도... 흠, 죽여야겠지?"

- 크르르르....

공허한 언덕에는 카오틱들이 포획해 둔 보스 몬스터가 있었다. 새까만 털을 가진 거대한 사자였는데, 사지가 묶인 상태였다.

아마 마기로 물들여서 전쟁에 쓸 생각이었겠지. 진현우는 도끼를 들고 내리쳤다.

- 콰득!

- '공허한 언덕의 괴물' 퀘스트의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수색대로 가서 보고하십시오.

이미 많이 약해진 사자는 얼마 못 버티고 죽었다. 진현우는 놈이 드롭한 아이템을 챙겼다.

드롭되는 아이템들 그리고 소환석.

하지만 드롭되지 않은 아이템이 있었다.

"역시, 영혼 중재는 발동 안 되나."

정수였다.

영혼 중재 특성 때문에 짐승형 몬스터를 잡으면 정수가 드롭되어야 하는데, 없다.

다만 짚이는 것은 있었다.

'소환석 때문이겠지.'

소환석 안에 몬스터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혼 중재가 발동되지 않는 원인이라면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

진현우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3층에서 영혼 중재는 못 쓰겠군.'

다음 층에서 쓸 수밖에.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뇸뇸, 정기는 참으로 맛있구나!"

"...."

"쿠후! 인간, 이대로만 해 주면 좋겠구나. 내 성장이 멀지 않았음이 몸으로 느껴지니라!"

그 곁에서 미호가 정기를 흡수했다.

청연을 비롯한 카오틱들은 나름 레벨이 높은 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서 나오는 정기니까 미호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아쉽구나, 아쉬워. 내 힘이 옛날 같았다면 더 섬세하게 조종할 수 있었을 텐데."

미호는 시체들을 보며 혀를 찼다.

루이스와 두 카오틱 그리고 전투 중에 갑자기 동료들을 공격했던 카오틱들.

그들이 이상 행동을 벌인 이유는 미호가 가진 마안에 당했기 때문이었다.

"숲에서 대단하긴 했지."

"그러니까 말이다! 인간, 네가 죽여서...."

"뭐?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아, 아니, 아니니라. 아무것도 아니니라."

진현우가 슬쩍 도끼를 들어 보이자 미호가 두 귀를 감싸면서 파르르 떨었다.

꼬리가 두 개로 줄어들면서 가진 힘이 많이 약해졌다. 그녀의 자랑이던 마안도 그랬다.

'확실히 키울 가치가 있는 놈이야.'

지금 미호의 마안은 조건을 많이 탄다.

상대가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여야 하고, 그마저도 간단한 명령밖에 내리지 못한다.

지속 시간도 짧았다.

"오늘 안에 꼬리 한 개는 늘려 줄게."

"정말인 것이냐? 그러면 기쁘... 으응? 근데 그 정도의 정기를 어떻게 구하려는 것이냐?"

"다 방법이 있지."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보스 몬스터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른 구덩이가 있었다. 엘프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뭐 하고 있습니까?"

"아, 은인이시여. 저 안에... 저희를 도와줬던 여행자들이 있습니다. 저 가증스러운 괴물들이 쓸모가 없다면서 모두...."

엘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현우는 구덩이 속을 봤다. 그 말대로, 구덩이 안에는 플레이어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는 혀를 차며 곰을 소환했다.

"저 시체들을 밖으로 꺼내 줘."

- 커어엉!

고개를 끄덕인 곰이 구덩이 안의 시체들을 하나둘씩 꺼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엘프들은 놀란 나머지 입을 헤 벌렸다.

"소, 소환사? 저런 거대한 동물을...."

"시체 좀 수습해 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진현우도 돕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언덕의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구덩이로 향했다. 그 앞에서 엘프들이 구덩이 속에 던져진 동족들을 구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드네아! 정신 차려! 이걸 붙잡아!"

"안 돼요. 기절한 것 같아요. 이렇게 된 이상 제가 직접 내려가서 다른 분들을...."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위험해질 거다!"

"저 결정체를 파괴하는 게 안 낫겠습니까?"

"그럼 결정체에서 나오는 마기 때문에 구덩이 안에 있는 엘프들이 큰 타격을 입을 거야."

엘프들은 구덩이 안에 갇힌 엘프들을 어떻게 구할 건지를 놓고 토론 중이었다.

그 결과가 나오기 전에 진현우가 나섰다.

"여행자?"

"은인이시여, 무엇을...."

진현우는 말없이 방패를 들더니 '빛의 수호' 스킬을 사용했다. 파아앗! 화사한 빛이 퍼지면서 주변 엘프들에게 버프가 주어졌다.

흑마법과 사기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갖게 하는 가호. 마기에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자, 잠깐!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여행자! 위험해!"

진현우는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진흙을 연신 내뿜는 결정체. 그 주변에 진흙에 잠긴 엘프들이 보였다. 그는 그들을 들고, 하나둘씩 구덩이 밖으로 내던졌다.

- 사아아아아....

진현우의 몸 절반이 진흙에 잠겼다.

진흙은 그를 잡아먹으려는 듯 달라붙었다. 저 진흙은 강력한 마기. 닿으면 강력한 디버프와 함께 빠른 속도로 생명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진현우와는 무관한 얘기였다.

"저 마기를... 버티고 있어?"

"아니, 대체 어떻게...."

"약! 일단 빨리 약부터 만들어야 한다! 마기에 잠식된 동족들에게서 마기를 빼내야 해!"

그 광경을 보던 엘프들은 경악했고, 곧 구조된 엘프들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진현우는 마지막 엘프를 빼냈다.

이제 남은 것은 마기의 근원뿐.

[마기의 근원 (?)]

· 설명: 살아 있는 것들을 모조리 오염시키는 마기의 결정체다. 평범한 인간은 특수한 조치 없이는 소지할 수도 없는 아이템이다.

가질 수도 없는 아이템.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진현우는 도끼를 높이 들어 결정체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카드득! 결정체가 유리처럼 부서졌다.

- 스으으으으....

마기의 근원이 부서지자 넘실거리던 진흙이 기화하더니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구덩이를 올랐다.

"여, 여행자!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지금 마기를 몰아내는 약을 만들 테니까 기다려!"

"됐어. 난 멀쩡해."

"멀쩡하다고? 그럴 리가...."

이리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 멀쩡했다. 폭군의 진노나 빛의 수호 덕분에 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있었으니까.

진현우는 갑옷에 남은 진흙을 털어 냈다.

"다친 엘프들 다 모아 봐."

"아, 응! 알았어!"

이리샤는 진현우가 빛으로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을 떠올리며 엘프들을 한데 모았다.

진현우는 광휘를 사용했다.

- 파아앗!

"이 정도의 신성력을...."

"세계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거야."

엘프들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광휘의 범위와 회복력을 눈으로 확인한 엘프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의 신성력이라면 분명히 뛰어난 성기사일 거라 생각하면서.

"으, 으윽...."

"언니! 정신이 좀 들어?"

"이, 이리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덩이 속에 잠긴 채 기절해 있던 엘프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리샤의 언니인 엘프 대장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아, 아아! 이리샤! 무사했구나...!"

"언니! 괜찮아? 다친 곳은... 흐윽!"

이리샤는 엘프 대장을 껴안고 엉엉 울었다.

다른 엘프들도 깨어난 엘프들을 보살피면서 눈물을 삼켰다. 참으로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시간 아까운데. 언제까지 울 생각이지?'

- 인간, 넌... 참, 감성이 메말랐구나.

'너도 저거 보면서 감동하진 않았잖아.'

- 아니, 나야 그렇다만... 크응.

미호는 진현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엘프들의 감동적인 재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엘프 대장은 이리샤의 도움으로 일어나더니 진현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은인이시여. 이름이...."

"진현우라고 합니다."

"진현우 님. 기억했습니다. 제 이름은 아드네아라고 합니다. 이 공허한 언덕을 지키는 엘프 수색대의 대장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아드네아가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은인에게 행하는 감사 인사였다.

"진현우 님, 당신의 도움 덕분에 저주받은 엘프가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반드시."

"이왕이면 지금 바로 갚아 주시죠."

"예?"

진현우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은혜를 갚는다. 굳이 나중에 갚을 필요가 있는가. 지금 바로 갚으면 될 일인데.

아드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공허한 언덕에 계속 나타나는 몬스터들 말입니다. 그거, 해결하고 싶지 않습니까?"

"몬스터들... 예, 해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제가 해결할 방법을 압니다."

"네?"

너무도 갑작스럽고 믿을 수 없는 말.

아드네아와 다른 엘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의 몬스터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근데 위험할 겁니다. 안에 몬스터가... 좀 많을 거거든요. 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숫자라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아드네아는 이곳을 오랫동안 지켰다.

그렇기에 어떤 몬스터들이 있을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래서, 저 제안을 거절할 것인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천만에.

이 지긋지긋한 몬스터들을 더 이상 안 나오게끔 할 수 있다면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

다른 엘프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은인이시여, 그건 저희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은혜는 따로 꼭 갚겠습니다."

"흠, 그래요?"

"예. 그렇습니다."

꼭 갚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야 좋죠. 일단 상처나 회복합시다. 가져온 약들이 있는데 편하게 쓰세요."

"감사합니다."

진현우는 엘프들의 회복을 도왔다.

98화

고독한 사념

공허한 언덕은 이상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화감'이 느껴진다.

원래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듯한 느낌. 누군가가 이곳에 있을 것을 떼어 낸 듯한 느낌.

그리고 그건 기분 탓이 아니다.

"여행자, 네 말이 맞아. 이 공허한 언덕은... 처음부터 이렇게 텅 비어 있던 곳은 아니야. 원래는 이곳에 보관고가 있었어. 선조들이 쓰던 장비들을 모시는 보관고였지."

진현우와 엘프들은 사망한 플레이어들의 넋을 기린 후, 그들의 시체를 보존해 뒀다.

여기서 할 일이 끝나면 죽은 이들을 베카샤로 데리고 가서 바깥으로 내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다가, 응. 도둑이 들었어."

이리샤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지는 잘 몰라. 자기를 '대도'라고 칭하던 얼간이였다는 것만 알아. 아, 그리고 다른 대륙에서 꽤 악명을 떨쳤다는 것도."

"그 도둑이 보관고를 침입했겠지."

"맞아. 그리고... 성공했어."

여러 대륙에서 대도로 악명을 떨치던 도둑은 엘프들의 보관고에 잠입했고.

그곳에 있던 것들을 훔치는 데 성공했다.

"보관고 내부에는 여러 가디언과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어. 대도는 가디언들과 함정을 돌파하고 보관고에 있던 물건을 훔쳤어. 근데."

대도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 때마침 보관고에 들를 일이 있었던 여왕님이 계셨던 거야. 여왕님은 대도를 기습했고, 대도는 치명상을 입었어. 그리고 뒤늦게 엘프 수색대가 보관고에 도착했지."

대도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황.

엘프 여왕의 공격을 받은 대도는 치명상을 입었고, 수색대는 그를 포획하려 다가갔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라서 모르지만, 그때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했어. 공간이 뒤틀리는 것 같은 현상... 그 현상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그 현상이 끝났을 때는."

이리샤는 텅 빈 언덕을 가리켰다.

한때는 보관고가 있었던 언덕.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공허하기만 한 곳.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보관고가 사라져 버렸어. 그 대도도 함께. 다행히도 여왕님과 수색대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보관고 안에 있던 장비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관고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치명상을 입은 대도도 마찬가지였다.

- 헤에, 그게 위화감의 정체라는 것이구나.

'맞아.'

원래 있었어야 할 보관고가 사라져 버렸으니 공허한 언덕에 위화감이 느껴질 수밖에.

이리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부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지역에서 가끔씩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기 시작했어. 그것도 이 근방에서는 볼 수 없는 몬스터들이... 최근에는 유독 더 심해졌어."

카오틱들이 이곳을 노린 이유다.

그게 공허한 언덕과 관련된 이야기다.

보관고를 노린 대도, 갑자기 사라진 보관고, 그 뒤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강력한 몬스터들.

이 현상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하나다.

'대도는 자신만의 보관고를 가지고 있었다.'

함께 움직일 수 있고, 원할 때마다 언제나 진입할 수 있으며, 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곳.

바로 '아공간' 보관고를.

세계를 떠돌며 온갖 진귀한 물건을 훔치고 다니던 대도가 얻은 기연의 결과물이었다.

'죽기 직전, 대도는 살기 위해서 아공간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부상은 치명적이었지.'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보관고에 있던 진귀한 물건도 생존 시간을 잠깐 늘려 줄 뿐, 상처를 회복하진 못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대도는, 그 악명이 무색하게도 보관고 안에서 죽었다.

아무도 모르게, 홀로.

- 그것참, 재밌는 얘기기는 하다만, 아니 근데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네가 알아서 뭐 하게?'

- 흥! 쌀쌀맞기는. 그래서, 그 아공간을 열 방법은 있나? 주인이 아닌 이상은 들어갈 수 없는 아공간일 것 같다만....

미호의 말대로 아공간을 열 방법은 없다.

오직 대도 본인의 의지로만 열고 닫을 수 있는 곳. 아공간이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파괴되면 모를까, 그 전에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찾을 방법이 없나?

"방법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응? 여행자,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건 아니었다.

찾을 방법은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진현우이기에 가능한 방법이 있다.

오직 그만이 가진 스킬이 있기 때문이다.

· 기억 감정 (Master): 아이템의 잔류 사념을 확인하여 기억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사념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사념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고, 잔류 사념을 확인하여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스킬.

그리고 사념과 대화할 수 있게끔 하는 스킬.

진현우의 오른쪽 눈이 뻐근해졌다.

'이 근방에 사념이 있다.'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이리샤나 다른 엘프가 보기에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휘청거리는 것으로 보였지만.

한참 헤매던 그는 한 곳에 발걸음을 멈췄다.

"여행자, 괜찮아? 피곤하면...."

진현우가 멈춘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하지만 진현우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이 아공간의 문이 있었던 자리라고.

또한 이 세계와 아공간의 경계가 가장 흐릿한 곳이라서 목소리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 나를....

'반응하고 있다.'

아공간 너머에 있을 대도의 사념이.

오랜 세월 아공간에 갇혀 있던 사념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진현우는 오른쪽 눈이 저릿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 이곳에서... 나를, 구해 다오....

지칠 대로 지친 목소리.

진현우는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 파지지직!

"어, 어어?! 여행자! 위험해!"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진현우의 바로 앞에 마력이 집결하더니, 공간을 찢어 갈라 차원의 경계를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자.

- 히든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 처음으로 발견한 보상으로 몬스터의 경험치와 드롭율이 상승합니다. 보스 몬스터가 무조건 희귀 아이템을 드롭합니다.

거대한 균열이 생긴 것이 보였다.

대도의 아공간으로 진입하는 균열이자, 공허한 언덕에 숨겨진 '히든 던전'이었다.

[대도의 보관고]

· 권장 레벨: Lv.65.

· 최대 인원: 40명.

· 설명: 한때 엄청난 악명을 떨쳤던 대도둑이 자신의 보물들을 보관하던 아공간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아공간이 불안해졌고, 상당수의 보물이 유실되었다.

불안정해진 아공간 내부로 여러 몬스터가 흘러들어 왔다. 원래라면 사람은 입장할 수 없는 곳이지만, 고독한 사념이 당신을 허락했다.

던전, 대도의 보관고.

권장 레벨 65. 지금 진현우가 들어가기에는 벅찬 던전이다. 그걸 다르게 말하자면, 지금의 진현우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던전이다.

"여행자, 이게... 뭐야?"

"던전. 아드네아, 잠깐 여기로 와 주세요."

"곁에 있습니다, 은인이시여."

아드네아가 진현우의 옆에 섰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길로 균열을 응시했다.

"보관고가 사라졌다고 했었죠. 정확하게 말하면 사라진 게 아니라 갇힌 겁니다. 저 균열에 휘말려서 아공간 안에 보관된 거죠."

"...그게 가능한 겁니까?"

이 언덕에서 보관고가 사라진 후, 엘프들은 보관고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가장 처음 의심했던 것은 마법.

그래서 이곳에 있을 마법적인 흔적들을 찾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었다.

'엘프 수색대와 마법사가 오랫동안 찾아도 못 찾았던 걸, 이렇게 쉽게 찾는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그걸 한 진현우가 크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 역시.

"대도는 아공간을 다루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불가능하지만, 아마 그때는... 큰 부상을 입어서 폭주한 게 아닐까요."

"폭주에 휘말렸다. 납득이 갑니다."

아드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은인께서 저희에게 바라시는 것은."

"저 던전을 공략하면 보관고가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계속 나타나던 몬스터도 사라질 거고요. 문제는 저 혼자서는 공략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가진 실력에는 자신 있다.

하지만 대도의 보관고는 굉장히 위험한 던전이다. 내부의 차원이 불안정해지면서 여러 몬스터가 흘러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들어가면 다수의 보스 몬스터와 싸워야 할 터. 실력에 자신 있는 진현우에게도 힘든 일이다.

"여러분이 도와주시면 공략할 가능성이 생길 겁니다. 위험한 건 매한가지겠지만요."

"그렇군요. 예, 돕겠습니다."

"...생각하고 대답하는 건 맞죠?"

"물론입니다, 은인이시여."

진현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드네아를 봤다. 그녀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는 오랫동안 저희 엘프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시도해 봐야죠."

"흠, 그래요."

해결 못 할 가능성도 있긴 한데.

아드네아는 그런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진현우를 믿는다고 은연중에 암시했다.

저러는데 딱히 더 할 말도 없다.

"좋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다 회복할 때까지만 기다리고 바로 균열로 진입하죠."

"예, 알겠습니다."

* * *

엘프들이 회복하는 동안, 진현우는 높은 나무에 올라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 너머에 보이는 것은 세계수의 장막.

연녹색빛의 거대한 장막이 숲을 에워싸고 있었고, 벽처럼 마족들의 침입을 막았다.

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처참했다.

- 과연, 오염됐다고 말할 만하구나.

미호가 중얼거렸다.

장막 내부는 녹림이 우거졌다. 아름다운 자연이 자신의 색을 온전히 뽐내고 있었다.

장막 너머는 그렇지 않았다. 탁한 진흙으로 물들인 것처럼 만물의 색이 탁해졌다.

'폐수가 흐르는 것 같군.'

장막 너머에는 맑은 물 대신에 검은 진흙이 흘렀고, 땅이나 바위는 시커멓게 변색되었다.

마족이 점령한 땅은 저렇게 되는 것이다.

"여행자! 전부 회복했어!"

"어, 그래."

엘프들의 회복이 끝났다.

물론 아직도 최고의 컨디션이라고 하긴 힘들었지만, 더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현우는 균열 앞에 섰다.

"들어갑시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균열로 진입했다.

- 던전: 대도의 보관고에 진입합니다.

- 권장 레벨: Lv.65.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하얗게 물드는 시야.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 파아아앗!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아득히 넓은 공간이었다. 여러 방이 있는 화려한 창고 같은 곳이었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서 그런지 곳곳이 파괴되었다.

대도의 보관고다.

"저, 저건!"

보관고는 건물 여러 채가 들어가도 거뜬할 정도로 넓었다. 그래서일까, 보관고 한구석에 어디선가 똑 떼어 낸 듯한 건물이 있었다.

"보관고입니다. 정말로 여기 있을 줄이야."

"아아, 선조시여...."

"저 건물을 다시 보게 될 줄은...."

엘프들이 선조의 장비를 모신 보관고.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보관고를 본 엘프들은 감격한 나머지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에 있는 건 저게 다가 아니었다.

"각각의 방에 대도가 모았던 아이템들이 있을... 아니, 있었을 거야. 지금은 없겠지만."

"없다고? 없어진 거야?"

"어. 저 균열 같은 거 보이냐?"

"으응. 뭔가, 유리가 깨진 것처럼 보이네."

진현우는 허공을 가리켰다.

허공에 수많은 균열이 나 있었다. 진현우가 들어왔을 때 썼던 균열과 비슷한 것이었다.

균열은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

"이 아공간은 주인이 죽으면서 불안정해졌어. 그러면서 여러 공간하고 멋대로 연결됐고, 저 틈이 생긴 거야. 아이템은 뭐, 저 틈이 생기던 순간에 휘말려서 어딘가로 사라졌겠지."

"출구가 어디로 이어진 건지는 모르지? 아이템들도 어디로 간 건지 모르는 거고...."

"어,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라."

저 균열에 빨려 들어가면 어디서 나타나게 될지 모른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뜻.

얘기를 들은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 쿠오오오오오오!

- 샤아아아악!

소리가 들렸다.

보관고에 있는 여러 방에서 몬스터들의 괴성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를 들은 이리샤가 몸을 떨었다.

"이 소리는...."

"보관고에 갇힌 몬스터들이다."

"갇혔다고? 설마."

진현우는 주변의 방을 훔쳐봤다.

안에서는 강력해 보이는 몬스터들이 서로 이를 드러내며 싸우는 중이었다. 아마 다른 방도 상황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까 말했잖아. 여러 공간하고 연결됐다고. 다른 곳에 있던 몬스터가 흘러들어 온 거야."

"...이 내부가 던전이나 다름없다는 거네."

"맞아. 위험한 곳이지."

말과는 달리 진현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들은 서로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런 낯선 공간에서 갑자기 마주친 몬스터들이라면 싸워서 서로 죽이려고 들 터.

'싸우다가 약해진 놈들을 죽이면 된다.'

그러면 어부지리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아마도 소환석 역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생에서는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으니 아드네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드네아,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 공간에서도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집니까?"

"예. 강하지는 않지만 느껴집니다."

"좋네요. 소환석이 생길 수도 있겠어."

진현우는 무기를 쥐었다.

"보관고 어딘가에 아공간을 제어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습니다. 일단 그것부터 찾죠."

"저 몬스터들은...."

"처리합시다. 여기서 잡는 게 나을 겁니다. 잘못하면 아공간을 닫을 때 저 몬스터들이 죄다 바깥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거든요."

아드네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 진현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게 맞다.

엘프들은 모두 무기를 쥐었다.

"갑시다."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99화

대도의 보관고

대도의 보관고는 처음 오는 곳이 아니다.

이미 전생에서 진현우가 들러서 공략했던 적이 있는 곳이다. 그때도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파티를 구해서 공략했었다.

'그때하고 비교하면 지금이 더 낫긴 해.'

엘프 숫자만 서른이 넘는다.

그것도 엘프 내부에서 전투를 맡는 수색대. 궁술에 능하고, 정령 마법도 다룰 줄 안다.

몬스터를 처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또 하나, 비장의 수단도 있고.

'이왕 구해 줬으니 뿌리까지 뽑아 먹어야지.'

- 인간, 너는 정말....

머릿속에서 미호가 한탄했다.

애초에 진현우가 저 엘프들을 최대한 피해 없이 구하려 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공헌도도 있지만, 부려 먹기 위해서.

엘프들은 헌신적으로 도울 것이다.

- 쿠후, 그렇겠지. 저 엘프들도 자기네들 선조의 보관고를 되찾아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래. 서로 이득이잖아.'

- 으으응... 뭐어, 그런... 가?

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현우는 녀석을 가볍게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보관고 내부에는 여러 방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문이 파괴된 상태였다.

"몬스터가 너무 많습니다. 근데 은인이시여, 저 몬스터들, 어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언니,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저 몬스터들의 눈빛이...."

아드네아는 싸우는 몬스터들을 가리켰다. 눈이 반쯤 돌아간 채 미친 듯이 싸우고 있다.

누가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공간에 갇혀서 정신이 반쯤 맛이 갔을 겁니다. 굶주려서 이성도 날아갔을 거고요."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는 이유 중에 굶주림이 아마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할 것이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쁠 겁니다. 이쪽을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에 빠르게 움직이죠."

"길은 알고 계십니까? 여긴...."

아드네아는 주변을 돌아봤다.

넓은 공간에는 여러 방이 있었고, 그 사이로 기다란 통로가 뻗어져 있었다. 그런 통로에서도 여러 몬스터가 싸우는 것이 보였다.

"미로 같습니다. 길을 잃을 것 같군요."

"대충은 압니다. 갑시다."

진현우는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대도의 보관고는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사방에서 몬스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아이템이 있었을 진열장은 완전히 파괴됐다.

"조, 조금, 으스스하네. 여행자."

"뭐, 오랫동안 사람이 오지 않은 곳이니까."

"유령 같은 게 나오지는 않겠지?"

"그런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겠지."

이리샤를 비롯한 엘프들은 다소 겁을 먹은 눈치였지만, 진현우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사념이 담긴 아이템이 아마 중앙에 있었지. 거기까지 가려면... 이 근처가 낫겠군.'

빠르게 움직이던 진현우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왜 그래?"

"냄새 안 나냐? 좀 알싸한 냄새."

"냄새? 킁, 크응."

냄새를 맡던 이리샤가 방을 가리켰다.

"맞아. 저기서 냄새가 나. 근데 이거...."

"가자."

이리샤가 이 냄새가 무엇인가 고민하기도 전에 진현우가 방 앞으로 향했다.

이미 반쯤 파괴된 방.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몬스터가 이쪽으로는 오지 않는다.'

엘프들은 불현듯 눈치챘다.

사방에서 격하게 싸우고 있는 몬스터들이 이상할 정도로 이 방에는 접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건...."

격한 전투가 있었는지 파괴된 흔적이 가득한 방. 그 중심부에 거대한 몬스터가 있었다.

"저건... 전갈인가요?"

"저, 전갈은 전갈인데, 너무 큰 거 아냐?"

"스퀴토스라는 이름의 몬스터야."

거대한 크기의 전갈.

강철보다도 단단한 갑각을 가졌으며, 집게발은 잡은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저 꼬리에는 강한 독이 묻어 있다.

"그렇군요. 이 냄새는 독의 냄새였군요."

"사방이 독이야. 접근도 못 하겠는데?"

스퀴토스가 꼬리로 내뿜은 독이 마치 늪처럼 바닥에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늪에 여러 몬스터가 잠긴 게 보였다.

독에 중독되어 이미 목숨을 잃은 몬스터는 치이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부식. 죽은 몬스터를 보니 제대로 반항도 못 한 거 같습니다. 아마 마비도...."

"여행자... 엄청 위험한 몬스터 아냐?"

"위험하지. 근데 지금은 할 만해. 잘 봐."

진현우는 스퀴토스의 몸통을 가리켰다.

원래는 아무런 흠집도 없었을 새까만 갑각에는 균열이 잔뜩 나 있었다. 그 사이로 스퀴토스의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아! 저 스퀴토스, 다쳤어."

"다른 몬스터하고 싸우다가 다쳤겠지. 균열을 잘 노리면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원거리에서 죽이겠다는 거지?"

"아니, 원거리에서 피해를 입히고 근접해서 마무리할 거다. 걱정 마. 내가 갈 테니까."

진현우는 스퀴토스의 약점을 파악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서 마셨다. 잠깐 동안 독에 저항력을 갖게 해 주는 약이다.

엘프들은 그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봤지만, 뭔가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먼저 화살을 쏠 거다. 여러분은 화살에 맞은 부위를 공격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뛰쳐나갈 때 저놈 집게발을 묶어 주면 됩니다."

"같은 부위를 말입니까?"

"예, 정확하게요."

몬스터들은 서로 싸우면서 약해졌고, 덕분에 평소에는 안 보였을 약점이 노출되었다.

진현우는 그 약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는 실피르를 꺼냈다.

"시, 실피르?!"

"으, 은인이시여. 그 무기를 어떻게!"

"여행자, 당신이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는 거야? 옛날에 여왕님이 보관고에 이상 현상이 벌어질 때 도망치다가 분실하신 건데...."

"이 활?"

왜 이렇게 놀라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진현우는 실피르가 '엘프 여왕'이 쓰던 활이었음을 떠올렸다.

이리샤가 진현우를 놀란 눈으로 봤다.

"오해할까 싶어서 말하는 건데 훔치고 그런 건 아니야. 보상으로 내가 얻은 거지."

"보상으로 얻었... 아아, 뭔지 알겠군요."

엘프들의 보관고는 아공간 내부에 있다.

이 공간이 불안정해지면서 생긴 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보관고 내부에도 틈이 나타나서 아이템을 빨아들였을 것이다.

실피르도 그렇게 여러 공간을 헤매다가 보상이라는 형태로 진현우에게 주어진 것이고.

"끄으응, 여왕님이 아끼시던 활인데.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준비나 해."

진현우는 실피르에 마력을 실었다.

스퀴토스는 아직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숨을 삼키면서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최적의 기회가 왔을 때.

- 투우우웅!

여풍의 화살이 쏘아졌다.

노리는 것은 스퀴토스의 갑각.

원래는 아무런 흠집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부서질 것처럼 균열로 가득한 갑각을 노렸다.

- 쉬이이익!

바람과 얼음을 동시에 휘감은 화살이 스퀴토스의 갑각을, 균열의 핵심부를 강타했다.

파스스! 바람과 얼음이 갑각을 덮쳤다.

- 키아아아아악!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 먹이를 찾아헤매던 스퀴토스가 화살에 맞아 비명을 토했다.

원래라면 그냥 튕겨 낼 수 있었을 공격.

하지만 지금은 갑각에 균열이 생긴 데다가, 그 균열의 핵심부를 정확히 맞은 상황이었다.

- 쩌적, 쩌저적!

"같은 부위를 노리고 쏴라!"

갑각의 균열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엘프들의 화살이 진현우가 노린 부위를 정확하게 맞혔다. 갑각이 크게 부서지면서 스퀴토스가 몸을 크게 펄떡거렸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지금!"

"실프, 내 동행자에게 바람의 축복을!"

"속박의 화살!"

바람이 진현우의 몸을 가볍게 했다.

그의 몸이 섬광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고통스러워하던 스퀴토스는 누군가가 접근해 오는 것을 본능으로 눈치채고 집게 발을 휘둘렀다.

하나 집게발은 진현우에게 닿지 못했다.

- 크이이이익!

화살과 바람이 놈의 집게발을 막았다.

진현우는 그 틈을 타서 스퀴토스의 등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고, 진각을 밟으면서 약점을 향해 파쇄권을 내질렀다.

- 쾅! 콰앙! 콰드득!

- 키아악! 캬아아아악!

갑각은 일격으로 부서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서질 때까지 내리치면 된다. 진현우는 계속해서 갑각에 파쇄권을 내질렀다.

스퀴토스라고 그냥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 쉬이이익!

스퀴토스의 꼬리가 움직였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꼬리의 끝에는 극독이 묻어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의 독이었다.

진현우는 마력을 일으켰다.

- 쿠어어어엉!

- 혼령 불!

어느새 나타난 거대한 곰이 날아드는 꼬리를 붙잡았다. 꼬리의 독이 곰을 중독시켰지만, 어차피 영혼 동물에게 목숨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미호가 스퀴토스의 눈앞에 혼령 불을 터트려 놈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 콰직!

진현우는 도끼를 쥐었다.

마력을 머금고 붉게 물드는 도끼. 대분쇄가 스퀴토스의 갑각을, 약점을 정확히 타격했다.

- 키, 이이익!

- 콰득, 콰지지직!

그리고 갑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에 달했던 스퀴토스의 갑각이 핵심부부터 갈라지더니 이내 완전히 파괴됐다.

그 사이로 놈의 속살이 드러났다.

갑각에 보호받던 목 역시.

- 서걱!

도끼가 스퀴토스의 목을 갈랐다.

갑각을 잃은 고통에 버둥거리던 거대한 몸뚱어리가 이내 힘을 잃고 땅에 처박혔다.

그걸로 끝이었다.

"끝난 겁니까?"

"아니, 오지 마. 아직 남았어."

진현우는 스퀴토스의 꼬리를 향해 도끼를 투척했다. 놈의 꼬리는 다가오는 적을 길동무로 삼기 위해서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그 꼬리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스퀴토스는 죽어도 꼬리가 움직이거든."

"이런 불길한 생물이...."

스퀴토스는 사막에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엘프도 상대해 본 경험이 없었다.

저런 특징을 모를 수밖에 없다.

"후욱!"

"여행자! 괘, 괜찮아?"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키며 물러났다.

스퀴토스의 근처에는 독무가 자욱했다. 숨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몸이 중독되는 상황.

포션의 효과가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포션으로도 중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괜찮아. 모두 제 곁으로 오세요."

진현우는 피뢰침처럼 생긴 마법 아이템을 꺼내더니 땅에 꽂았다. 그러자 자그마한 결계가 펼쳐지면서 주변을 감쌌다.

"이 안에 있으면 독이 닿지 않습니다.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데... 괜찮을 겁니다."

"굉장히 불안한 말씀이십니다."

"일단 이 안에서 대기해 주세요."

"여행자, 넌 어쩌려고?"

"난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진현우는 마법 아이템을 꺼냈다.

묘한 향기를 내뿜는 향로, 피가 가득 담긴 주머니, 마법 스크롤과 구슬들이었다.

"그 향로는 뭐야?"

"몬스터들을 유혹하는 냄새를 풍기는 향로. 내가 이걸 가지고 몬스터들을 유인할 거다."

"유, 유인한다고? 안 위험하겠어?"

"위험하겠지."

그래도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아공간에 있는 몬스터들은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먹이로 봤으면 봤지.

놈들을 한공간에 몰아넣을 수 있다면 자기들끼리 싸우다 지치게끔 만들 수 있다.

"우린 지친 놈들을 처리하면 돼."

"몬스터들을 유인하신 다음에 여기로 돌아오시려는 거군요. 그동안에 몬스터와 싸울 일이 없게끔 이 방을 선택하신 거고요."

"예, 맞습니다."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이 방에 스퀴토스가 살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독에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접근하지 않을 터. 여기 있으면 싸울 일은 없다.

"솔직히 저로서는 왜 그렇게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일단 은인을 믿겠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대기하면 되는 겁니까?"

"네. 아마 저는 못 움직일 것 같으니까 대신에 이 녀석을 보내겠습니다. 보이죠?"

"귀찮은 일을 시키는구나...."

미호가 엘프들을 불러오는 역할을 맡을 것이다. 바닥에 핏자국을 남겨 두면 찾아올 때 헤맬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만약에 못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리샤가 순진하게 물었다.

만약에 도중에 무슨 일이 생겨서 미호가 엘프들에게 올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쩌느냐.

그 말에 진현우가 무심하게 답했다.

"아공간을 못 나가서 굶어죽든가, 아니면 몬스터들한테 죽거나. 둘 중 하나겠지."

"...."

"...."

엘프들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리샤의 눈빛이 떨렸다.

"여, 여행자. 꼭 무사히 돌아와. 나, 나 세계수님한테 네가 무사하길 기도할게...."

"저, 저희도 기도하겠습니다."

"그래라."

엘프들의 기이하게 뜨거운 눈빛을 받으면서, 진현우는 방을 나섰다.

100화

몬스터를 몰이하는 방법

여기로 오기 전, 진현우는 골드 거래소를 통해서 필요한 아이템들을 구매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은 셋.

[미혹의 향로 (영웅)]

· 설명: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향로다. 몬스터를 유혹해서 따라오게끔 만든다. 범위가 넓고 지속력이 강하므로 조심해서 써야 한다.

[분노 폭탄 (고급)]

· 설명: 짧은 시간 동안 몬스터를 분노하게 하는 폭탄이다. 분노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어지지만 그만큼 힘이 강해진다.

[광란의 스크롤 (영웅)]

· 설명: 적들을 광란에 빠지게끔 하는 마법이 깃든 스크롤이다. 광란에 빠진 적들은 이성을 잃지만, 그만큼 힘이 강해진다.

향로와 폭탄, 스크롤이었다. 피 주머니도 있지만, 이건 말 그대로 피를 담은 주머니다.

이 아이템들의 용도는 굉장히 간단했다.

"몬스터를 유인하는 용도로 써야지."

"인간...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위험하지. 그래도 이게 제일 빨라."

대도의 보관고에는 많은 몬스터가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강력한 보스 몬스터 혹은 그에 준하는 몬스터들. 엘프들의 도움이 있더라도 놈들을 다 처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놈들끼리 싸우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건, 맞는 생각이긴 하다만."

"왜? 내가 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냐?"

"쿠후훗, 지금은 네가 죽으면 곤란하다. 약속을 지킨 다음에는 죽든 말든... 히이익!"

"말을 해도 꼭 기분 나쁘게 말을 해요, 응?"

"우, 우리 도끼는 내려 놓고 얘기하자...."

미호의 귀가 축 늘어졌다.

저렇게 말만 하고 영혼석을 어떻게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물씬 당한 기억이 있다 보니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음, 일단...."

진현우는 아공간의 중심부로 향했다.

정중앙에 유독 커다란 방이 보였다. 방 안에는 먹다 남은 뼈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 드르렁, 푸우우우, 커억!

집채만 한 크기의 외눈의 거인.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돋아 있고, 푸른 피부의 몸뚱어리는 근육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한 손에 쥔 거대한 몽둥이까지.

'사이클롭스.'

레벨 80대의 괴물이다.

지금의 진현우가 죽었다 깨어나도 혼자서 공략하는 건 불가능한 몬스터이기도 했다.

'저놈을 잡으려면 힘을 최대한 빼야 한다.'

그게 엘프들을 아공간으로 데려오고, 몬스터들을 이곳으로 유인하려는 이유였다.

다행히도 놈은 아직 잠든 상태였다.

진현우는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방 곳곳에 미혹의 향로를 다수 설치했다.

"스읍, 후우우."

"괴, 굉장히 긴장되는구나...."

그리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그림자 걷기' 옵션을 가진 전쟁 영웅의 부츠 덕분에 사이클롭스를 안 깨울 수 있었다.

방을 나선 진현우는 피 주머니를 꺼냈다.

"피는 왜 뿌리는 것이냐?"

"피 냄새 맡고 눈 돌아가라고."

그리고 중앙부의 방으로 가는 길에 인공 혈액을 피로 떡칠하는 수준으로 뿌렸다.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좋아. 이 정도면 준비는 다 됐어."

"으으...."

미호가 근심 가득한 신음을 흘렸다.

진현우는 정중앙의 방을 떠나 다른 방으로 향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아! 이, 인간. 저 방에 뭐가 있느니라!"

"말 돌리기는."

진현우와 미호는 방 앞에 섰다.

안에서는 두 몬스터가 싸우고 있었다.

- 구오오오오! 배고프다, 난... 배가 너무 고프다! 하찮은 뱀! 먹어 치워 주마!

- 샤아아악!

전투를 벌이는 두 몬스터의 형체였다.

하나는 거대한 반인반소의 미노타우로스. 또 하나는 상반신은 사마귀, 하반신은 뱀 같은 형태를 가진 라가라는 이름의 몬스터였다.

- 카아앙!

- 뱀! 네 앞발은 무디다! 크아아아아!

- 시, 시이이익...!

전투의 행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거대한 도끼로 라가의 앞발을 쳐 내면서 놈에게 차곡차곡 상처를 입혔다.

라가는 패배할 것이다.

'여기서 지면 안 되지.'

조금 더 살아 줘야 한다.

진현우는 미혹의 향로에 불을 피웠다. 향로에서부터 묘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 향기를 맡은 미호가 움찔거렸다.

"으, 으음! 인간! 그 향! 그 향이 좋구나. 쿠후훙, 조금만 더 가까이서 맡게 해 다오."

"뭐라는 거야? 야, 영체로 돌아가."

"쿠우우웃...."

미호가 개다래나무에 취한 고양이처럼 헤롱거렸다. 향로의 효과가 확실하다는 증거다.

진현우는 향을 흩뿌린 후,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몬스터들을 향해 투척했다.

- 퍼어억!

- 쿠오오... 크아악?!

- 키이이이익!

미노타우로스와 라가의 머리를 정확히 타격하는 도끼. 격한 전투를 벌이던 두 놈이 그제서야 진현우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리고 냄새가 놈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 크우우... 우, 우오오오오!

- 시아아아악!

"오, 온다! 오고 있느니라, 인간!"

"나도 알아."

진현우는 타이밍을 쟀다.

너무 빠르게 도망치면 안 된다. 그러면 놈들이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느리게 도망치면 놈들에게 붙잡히게 될 터.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야 한다.

'지금.'

미노타우로스와 라가가 절묘한 거리에 있을 때, 진현우가 섬광을 쓰며 뛰쳐나갔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거대한 도끼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앞발이 강타했다.

- 향기, 맛있는 향기가 난다! 배가 고프다!

- 시이이익!

진현우는 놈들과의 거리를 적당히 벌렸다.

그리고 그를 노려보는 두 몬스터에게 분노 폭탄을 던졌다. 파앙! 폭탄이 맥없는 소리를 내며 터졌고, 붉은 가루가 몬스터를 덮쳤다.

- 크흐으?! 그, 그으...!

- 키, 키이이익?

두 몬스터의 눈이 돌아갔다.

이성이 살짝 날아간 것이다. 거기에 미혹의 향로 때문에 진현우에게 시선이 쏠린 상황.

- 구오오오오오!

- 캬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미노타우로스와 라가는 눈이 돌아간 채 진현우를 쫓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놈들의 기세에 화들짝 놀란 미호가 진현우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세게 흔들었다.

"인간! 저것들 화가 엄청 났지 않느냐!"

"내 생각대로... 야! 머리 좀 잡지 마!"

"도, 도망치는 것이다! 얼른!"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야!"

몬스터를 유인할 조건이 충족됐다.

진현우는 두 놈과의 거리를 계산하면서 땅을 박차고,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아직 유인해야 할 몬스터가 많다.

"이, 이 짓거리를 또 하겠다는 것이냐!"

그 생각을 읽은 미호가 비명을 질렀다.

* * *

사이클롭스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주변에 몬스터가 가득한 곳이라서 잠들기 위험한 곳이지만, 놈에게는 무관한 일이었다.

감히 누가 사이클롭스를 공격하겠는가?

- 커어억, 드르렁, 퓌휴우우....

이 공간에 흘러들어 온 지 꽤 오래됐지만, 사이클롭스는 나름 이곳에 적응한 상태였다.

배가 고프면 몬스터를 사냥해서 먹고, 피곤하면 거처로 삼은 방으로 와서 잔다.

사이클롭스의 일과는 그렇게 흘러갔다.

'먹이, 많다. 다른 놈들, 다 약하다. 편하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이클롭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평화는.

- 배가 고프다, 배가... 크아아아아!

- 냄새! 이곳에서 냄새가 난다!

갑작스러운 몬스터들의 포효에 깨졌다.

사이클롭스는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감히 어떤 놈이 겁도 없이 자신의 거처로 온 것인가? 당장 몽둥이로 짓이겨 버릴 테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무엇, 이냐? 네놈들, 미친, 것이냐?

- 먹이, 먹이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 냄새가 난다! 내 코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다!

- 피 냄새! 피 냄새도 난다!

사이클롭스가 순간 당황했다.

침입한 몬스터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놈들이 사이클롭스는 신경도 안 쓰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놈들은 눈이 반쯤 돌아간 상태였다.

- 인간, 고기, 고기, 나, 배가 고프다.

- 이, 미친, 먹잇감이!

콰아아앙!

방을 수색하려는 트윈헤드 트롤의 머리를 거대한 방망이가 내리쳤다.

단번에 트롤의 머리가 짓이겨지고, 사이클롭스는 그 몸을 휘두르며 분노했다.

- 감히, 내 집에, 침입하다니!

- 어, 으으, 으어어어....

단번에 곤죽이 된 몬스터의 모습을 본 다른 몬스터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사이클롭스의 분노를 목도한 놈들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 키이아아아!

- 부오오오! 인간, 먹잇감은 어디냐!

- 또, 또, 내 집을, 침입하다니!

놈들이 들어온 방문으로 또 다른 몬스터가, 미노타우로스와 라가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다. 사이클롭스의 방에는 문이 두 군데 있다. 거기로 도망치면....

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 키히이익! 여기다! 여기서 냄새가....

- 히히히, 땅을 기어다니는 벌레 따위가 내 날개로부터 피할 수 있을 거라....

- 우오오오오!

고블린 킹, 레드 와이번, 스노우 빅풋, 오크 로드 등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몰려들었다.

사이클롭스의 방이 몬스터로 가득 찼다.

침입자들을 다 때려죽이려던 사이클롭스도 적들이 너무 많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네놈들, 미친, 것이냐?

- ....

- ....

사이클롭스가 으르렁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몬스터들이 사이클롭스를 보더니, 서로를 어색한 눈으로 봤다.

- 다, 다 죽여 버리기, 전에, 꺼...!

다 꺼져라.

그렇게 외치려는 순간, 방 안으로 자그마한 구슬들이 한가득 굴러 들어오더니 터졌다.

- 퍼어어엉!

아무런 살상력도 없는 폭발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살상력을 가진 폭발이었다. 구슬에서 터진 폭발 그리고 연기가 방 안에 있던 몬스터들에게 스며들었다.

- 그르르르....

- 크아아아악!

그러자 몬스터들의 눈이 시뻘겋게 물들더니 서로를 미친 듯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분노 폭탄의 효과였다.

그 광경을 본 사이클롭스가 크게 당황했다.

- 내 집에서! 꺼지란, 말이다!

쿠우웅!

사이클롭스가 연신 무기를 내리쳤지만, 어떤 몬스터도 놈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르릉, 사이클롭스가 이를 드러냈다.

- 감히, 날, 무시하다니!

- 캬아아아악!

사이클롭스가 몬스터들의 전투에 끼었다.

그렇게 넓은 방에서 몬스터 간의 격한 전투가 벌어졌다. 서로 죽이고, 피가 튀는 전투.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여기에 마법 스크롤까지 써 주면.'

진현우는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

광란 마법이 담긴 스크롤. 천장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빗물처럼 사방에 흩날렸다.

그 기운을 몸으로 받은 몬스터들의 눈이 돌아가더니 더욱 격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좋아, 이걸로 준비 과정은 끝났다.'

대부분의 몬스터를 이 방에 유인했다.

이 아공간에서 가장 까다로운 적인 사이클롭스를 몬스터들 사이에서 싸우게끔 했다.

미호는 한참 전에 보내 놨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프들이 지원하러 올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진현우는 손을 뻗었다.

그 손아귀에 검보랏빛의 불길한 기운이 모이더니 거대한 깃발의 형태를 갖추었다.

피로 칠갑한 검은 깃발.

그는 깃발을 힘껏 땅에 내리꽂았다.

- 화아아악!

미친 듯이 서로 싸우고 있는 몬스터들의 발아래로 검보랏빛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일부 몬스터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늦었다.

한때 폭군을 섬겼던 언데드 부대가 마법진에서 기어나와 진현우의 곁을 지켰다.

- 크우우우....

"아니, 공격할 필요는 없어."

언데드들은 당장에라도 공격 명령을 내려 달라는 듯이 그르릉거렸다.

하지만 당장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저놈들끼리 싸우다가 죽게끔 놔둬."

'영역 선포' 스킬에 있는 또 하나의 효과.

영역 안에서 죽은 적을 언데드로 부활시킨다는 효과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진현우가 불길하게 웃었다.

101화

영역 선포

사이클롭스의 방.

놈이 머무는 중앙의 방은 몬스터들도 감히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사이클롭스가 얼마나 강하고 흉폭한지 놈들도 잘 알아서였다.

그리고 지금.

- 크아아아악!

- 키히익! 살점! 고기!

그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절대 접근하지 않던 사이클롭스의 방에서, 화가 잔뜩 난 몬스터들이 싸우고 있었다.

분노와 광란에 당한 탓이었다.

- 그만! 뭔가 이상... 캬하악!

- 이히히히!

일부 몬스터들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분노와 광란은 지속 시간이 길지 않다. 효과가 풀린 몬스터들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이곳에 모인 몬스터 중에는 이성은 거의 없고 본능에만 의존하는 놈들도 많았다.

전투의 흥분과 피 냄새가 놈들이 싸움을 멈출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성이 있는 놈들도 그에 휘말려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렇게 점점 전투가 격해져 갔다.

- 큭, 끄허억!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진현우가 기다려 왔던 첫 번째 희생자가 나타났다.

- 이, 이럴... 그아아아악!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오크 로드였다.

평범한 오크가 아닌 블러디 오크의 로드. 바깥에서는 쩡쩡거리면서 살았던 괴물이었지만, 이 아공간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그, 우, 우우우우....

- 좋다, 먹... 크허억?!

다음으로 죽은 건 엘더 리저드맨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리저드맨은 오크 로드를 죽이고 그 육신을 먹이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죽었던 오크 로드가 기습적으로 도끼를 휘둘러 놈의 목을 쳤다.

- 끄륵, 끅? 끄흐으윽...!

- 그어어어어어!

엘더 리저드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지더니 이내 쓰러졌다.

그 몸뚱어리에 닥치는 거센 공격들.

놈은 얼마 가지 못해 죽었다.

- 스으으으으....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바닥에 넓게 펼쳐진 검은 마법진이 불길하게 빛나더니 검은 기운을 내뿜은 것이었다.

기운은 엘더 리저드맨의 사체에 깃들었고.

- 크흐으, 키히이이!

- 그어어어어!

놈을 언데드로 되살렸다.

목이 덜렁거리는 엘더 리저드맨이, 심장이 꿰뚫린 오크 로드가 다른 몬스터를 덮쳤다.

그건 일종의 역병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으로써 퍼져 나가는 역병.

- 영역 선포.

폭군을 섬기는 언데드 부대를 소환하는 스킬. 이 스킬에 있는 영역 안에서 죽은 적을 '언데드로 부활'시키는 효과의 힘이었다.

- 캬햐아악!

- 어으, 끄어어....

전투가 점점 격해지고, 죽어 가는 몬스터의 숫자가 점점 늘어 가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자잘한 몬스터들은 거의 죽었다.'

이곳에 있는 놈들은 대부분 보스 몬스터이기에 자잘하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사이클롭스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괴물을 생각하면 자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진현우는 사이클롭스를 주시했다.

- 내, 집에서, 꺼지란, 말이다!

- 콰아아앙!

사이클롭스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언데드를 늘려 주는 1등 공신이다.

'저놈한테 몬스터들을 몰아줘야겠군.'

영역 선포로 되살아난 언데드는 명령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진현우는 언데드들을 이용해서 살아 있는 몬스터들을 밀쳤다.

- 캬학! 그허어억!

- 크아아아아아!

바로 사이클롭스를 향해서.

괴물의 곁으로 떠밀린 몬스터의 머리 위로 거대한 몽둥이가 떨어졌다. 몽둥이는 몬스터의 머리를 으깨고 몸통을 단번에 박살 냈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해라.'

진현우는 교활하게 움직였다.

언데드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몸을 감추고, 그 사이에서 화살로 사이클롭스를 자극했다.

검은 화살이나 실피르를 이용해서, 특히 사이클롭스의 무릎 부분을 노려서 공격했다.

- 어떤, 놈이! 우오오오!

- 그, 그만! 꺼억!

더욱 분노한 사이클롭스가 미쳐 날뛰었다. 다른 몬스터들은 놈을 막을 수가 없었다.

놈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기에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고 휴식을 취했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으니.

상대가 못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지.'

몬스터가 다 멍청한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지성을 가진 놈도 있었다. 진현우가 이곳으로 유인했던 미노타우로스처럼.

- 부오오오오!

- 키하악!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을 귀찮게 하던 라가의 목을 뽑고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사이클롭스에는 못 미치지만, 미노타우로스 역시 이곳의 몬스터 중에서는 강자에 속한다.

놈을 막을 수 있는 적은 몇 없었다.

- 죽어라! 죽어! 우오오오!

미노타우로스는 주변의 몬스터들을 죽이면서 놈들의 살점을 먹이로 삼았다.

놈의 털이 피로 흠뻑 젖었다.

그렇게 한동안 살육에 젖어 있던 미노타우로스는 어느 순간 번쩍 정신을 차렸다.

- 뭐지? 이건....

배를 채우면서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왔고, 광란과 분노의 효과가 사라진 덕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주변을 돌아봤다.

- 이놈들은 왜 싸우고 있는 거냐?

저 너머에 사이클롭스라는 괴물이 있는데도 몬스터들은 도망치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모닥불에 몸을 내던지는 불나방처럼.

그뿐만이 아니었다.

- 왜 죽은 놈이 움직이고 있는 거냐?

죽은 몬스터가 살아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있을 수 없는 일. 이런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미노타우로스는 원흉을 찾았다.

- 너! 인간! 네놈이었구나!

그리고 얼마 안 가 원흉을 찾았다.

놈을 보며 비웃고 있는 진현우. 언데드가 그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었다.

검은 화살이 놈의 안면을 강타했다.

- 부오오오! 이 빌어먹...!

미노타우로스는 돌진하려다가 멈췄다.

제법 많은 숫자의 언데드가 진현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상대한다면 상대 못 할 것도 없다. 이길 자신은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저깟 인간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문제는 흉포한 사이클롭스다.

눈이 반쯤 돌아간 채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있는 괴물. 저놈은 강대한 미노타우로스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저놈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 지금은!

미노타우로스가 으르렁거렸다.

- 지금은 살려 주마, 인간!

놈은 그렇게 외치면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발걸음도 뗄 수 없었다. 주변을 어느샌가 언데드들이 포위하고 있어서였다.

- 이깟 것들로! 부오오오!

미노타우로스는 거대한 할버드를 휘두르면서 언데드들을 단번에 쳐내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키아아아아아!

- 크으윽!?

놈의 등 뒤로 거대한 형체가 돌진했다.

매의 머리와 사자의 몸통, 거대한 날개를 가진 괴물. 그리폰이 할버드를 휘두르느라 균형이 무너진 미노타우로스의 등을 들이박았다.

그리고 진현우가 움직였다.

- 쿠웅!

진각을 밟는 발.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면서, 파쇄권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있는 힘껏 강타했다.

충격파가 놈의 몸을 덮쳤다.

- 크아아악!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닥친 두 번의 공격에 미노타우로스가 균형을 완전히 잃었다.

놈의 몸이 크게 밀려났다.

바로 사이클롭스가 있는 곳까지.

- 크흐으....

사이클롭스는 아직 흥분한 상태였다.

주변의 몬스터를 학살하던 놈의 무릎을 검은 화살이 강타했고, 놈이 고개를 돌렸다.

그 시야에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 아, 아니! 아니다! 내가 한 게...!

미노타우로스가 황급히 부정했다.

하지만 수많은 피를 보면서 흥분한 사이클롭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

- 부, 부오오오! 내가 아니란 말이다!

- 카아아아아! 죽, 어라!

미노타우로스는 황급히 물러나려고 했지만, 놈의 발목을 나무 줄기와 뿌리가 묶었다.

누가 한 짓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 인간, 네놈, 네놈... 크아아악!

그 분노의 대상인 진현우는 이미 언데드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난 뒤였다.

사이클롭스의 거센 공격이 이어졌다.

미노타우로스 역시 강한 몬스터였기에 사이클롭스를 상대로 나름 분투하기는 했지만.

- 커헉! 아, 안 돼, 그만...!

그게 다였다.

사이클롭스는 미노타우로스가 할버드를 쥔 손을 몽둥이로 으깨더니 놈의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의 거구를 들어 올리고는 머리를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했다.

- 푸아아앗!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온몸을 피로 적신 사이클롭스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다음 몬스터를 찾아서 죽이려던 놈은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 후욱! 크아아아아!

방에 있던 몬스터가 다 죽은 것이다.

새빨갛게 물들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이클롭스는 거센 포효를 내질렀다.

다 죽였다. 내 방에 침입한 놈들 다 죽였다.

- 훅, 후욱! 벌레, 같은, 놈들이!

뿌듯함과 함께 피로가 몰려들었다.

아무리 강대한 사이클롭스라도 이 정도 숫자의 몬스터를 상대하면 지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은 방이 마침내 조용해졌음을 느꼈다.

- 그래도, 잘됐군.

"뭐가 잘됐다는 거냐?"

- 한동안, 먹을 것이....

먹을 것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사이클롭스는 주변을 돌아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이건, 무슨....

사방이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사이클롭스가 죽였던 몬스터들. 어딘가 으깨지고, 짓이겨진 몬스터들이 서 있었다.

그놈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 부우우우우....

머리를 잃은 미노타우로스도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사이클롭스는 외눈을 부르르 떨면서 언데드 너머의 인간을 봤다.

진현우, 그가 사이클롭스를 비웃고 있었다.

"역시 사이클롭스야. 잘 싸우던데. 어디, 이만한 숫자를 상대로 또 싸울 수 있을까?"

- 이, 쓰레기, 놈이!

사이클롭스가 이를 갈며 분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대한 몽둥이로 땅을 힘껏 내리치면서 거센 포효를 내질렀다.

놈이 땅을 내리치자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지면서 포위했던 언데드들이 튕겨져 나갔다.

- 내가, 죽였던, 버러지들! 이놈들을, 되살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여행자!"

바로 그때였다.

진현우의 뒤에서 엘프들이 들어왔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은인이시여, 괜찮으십니까!"

"예. 왜 이리 늦었어요?"

"오다가 몬스터들을 만났어. 그놈들하고 싸우느라고. 그, 근데 언데드가 왜 이리 많아?"

언데드를 경계하면서 진현우의 곁에 선 엘프들은 사이클롭스를 보며 경악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들 정도의 덩치. 그리고 온몸에 칠갑한 피까지.

"저런 괴물이...."

"아드네아, 저 괴물과 싸운단 말이에요?"

"아니, 잠깐. 저놈의 상태를 잘 봐라."

엘프들도 본 적이 없는 괴물이다.

원래라면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난적.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 훅, 후욱! 귀쟁이, 죽인다!

"지치고... 다쳤어."

사이클롭스의 현 상태였다.

놈에게는 못 미치지만, 이곳에 있던 몬스터들도 바깥에서는 보스 몬스터라 불린 놈들.

죽기 전에 사이클롭스의 몸에 상처를 남겼고, 그것들이 쌓이면서 큰 부상을 입혔다.

- 크아아아악!

하지만 놈의 힘은 여전했다.

사이클롭스는 바로 옆에 있는 기둥을 힘으로 뽑아내더니 투창처럼 투척했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기둥.

- 콰아아앙!

앞으로 나선 진현우가 방패를 전개했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신성력으로 된 거대한 방패가 기둥을 막았다. 우득!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 정도의 힘이었다.

- 다 죽여, 주마!

"할 수 있으면 해 봐."

금방이라도 돌진하려던 사이클롭스의 앞을 수많은 언데드가 가로막았다.

상황이 좋지 않다. 까드득! 여태껏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위기감에 놈이 이를 갈았다.

102화

몇 초의 시간

사이클롭스는 괴물이다.

- 쿠오오오오오!

- 퍼억! 콰아아앙!

놈이 언데드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몽둥이가 휘둘릴 때마다 언데드들이 낙엽처럼 날아갔고 진형이 무너졌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인데도 저 위력이라니.

"여행자, 어떻게 싸울 거야?"

"접근해서 싸우는 건 위험할 겁니다."

"예. 지금은요."

사이클롭스는 보스 몬스터들도 단번에 짓이겨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괴물이다.

놈과 접근전으로 싸우다가 눈먼 공격에 스치기라도 했다가는 치명상을 입을 터.

먼저 힘을 최대한 빼 둬야 한다.

"언데드가 방패가 될 겁니다.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고 원거리에서만 공격하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 언데드가 다 파괴되기 전에 사이클롭스를 죽여야 한다는 건데, 솔직히 자신 없어."

사이클롭스는 맷집이 어마어마한 놈이다.

웬만한 공격은 튕겨 낼 정도의 강도를 가진 가죽. 엘프들의 공격도 위력이 반감될 것이다.

놈의 상태가 멀쩡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방법이 있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진현우의 눈에는 사이클롭스의 몸 곳곳에 있는 약점이 보였다. 원래는 없었지만, 놈이 부상을 입으면서 생긴 약점이었다.

"제가 먼저 화살을 쏠 겁니다. 그 화살이 맞는 부위를 똑같이 공격하면 됩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따라와요."

엘프들은 전적으로 진현우를 따랐다.

진현우와 엘프는 사이클롭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놈의 패턴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제가 소리치면 바로 양쪽으로 흩어지세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죽는 겁니다. 알겠죠?"

"예."

언데드를 상대하던 사이클롭스가 점점 멀어져 가는 진현우와 엘프를 눈치챘다.

놈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 어딜, 도망치려, 는 거냐!

"옵니다."

사이클롭스가 몸을 낮게 숙였다.

한껏 웅크린 두 다리에 힘이 가득 실렸다. 그리고 그 힘이 한계치까지 응축됐을 때.

- 우오오오오오!

"아까 말했던 대로!"

거인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그 체구로 낸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사이클롭스가 진현우와 엘프들을 향해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와 압도적인 무게. 약간이라도 스친다면 뼈가 완전히 부서질 것이다.

- 콰아아아앙!

- 콰지지직!

돌진하는 사이클롭스의 궤도에 있던 언데드들이 곤죽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공격한 것도 아니다.

단순히 돌진했을 뿐인데도 저 정도 위력.

"멀리 떨어져! 빨리!"

순간 넋을 잃은 엘프들에게 진현우가 황급히 외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엘프들이 정령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물러났다.

그리고 사이클롭스가 포효했다.

- 크아아아아아!

듣는 이를 압도할 정도로 강렬한 포효.

당연하지만 단순한 포효가 아니었다. 일정 범위 안에 있는 적들의 청각을 마비시키고 능력치를 약화시키는 디버프 스킬이다.

엘프들이 귀를 막으며 휘청거렸다.

- 인, 간... 너부터, 죽여 주마!

'아직 안 끝났어.'

돌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이클롭스가 숨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 시선이 향하는 것은 진현우가 있는 곳.

놈이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 콰아아앙!

"크윽!"

진현우는 섬광으로 황급히 회피했다.

사이클롭스는 그가 피할 것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돌진하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탓에 놈의 돌진 범위가 넓어졌다.

- 퍼어억! 콰드드득!

"쓰으읍...!"

몽둥이의 끝부분이 가슴께를 스쳤다.

말 그대로 스친 정도. 하지만 그 정도로도 갑옷의 가슴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갑옷이 보호하던 몸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진현우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커헉!"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일격. 단 일격에 내장이 상한 것이다.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죽는다.'

레벨 80대의 보스 몬스터다.

터놓고 말해서 지금의 진현우가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다. 정면에서 싸운다면 몇 번을 싸우더라도 질 것이다.

'언데드와 엘프들을 최대한 이용해서 틈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열어서 흉터로 만들어야 한다. 진현우는 광휘로 상처를 회복하며 숨을 삼켰다.

"헉, 허억!"

"아, 아무도 안 다쳤지?! 여행자!"

"난 괜찮아. 아까 내가 말한 대로 해."

엘프들은 진현우가 미리 경고했기에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다시 진형을 갖출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한동안 돌진은 못 쓸 거야.'

저 정도 위력을 가진 돌진이다.

사이클롭스라도 연속으로 쓸 수 있는 스킬이 아니다. 쿨타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전에 놈의 기동력을 뺏어야 한다.

'뛰어다니게 놔뒀다가는 답도 없어.'

진현우가 땅을 박찼다.

그의 곁에 있던 언데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듀라한과 해골 기사들이 선두를 지켰다.

사이클롭스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 죽으러, 오는, 군!

사이클롭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어떤 놈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숫자가 많아서 저 인간, 진현우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 이렇게, 제 발로, 와 줄 줄이야!

몽둥이를 높게 들었다.

나무를 통째로 뽑아서 휘두르는 듯한 크기의 몽둥이는 스쳐도 치명상을 입힐 정도.

그러면 스칠 일이 없게끔 하면 된다.

'가장 먼저 기동성부터 빼앗는다.'

덩치도 거대한 놈이 움직임도 꽤 빠르다.

저 기동성부터 제거해야 한다. 진현우는 사이클롭스의 무릎에 있는 약점을 주시했다.

놈이 몽둥이를 내리쳤다.

- 콰아아앙!

- 구어어어어...!

거대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터졌다.

그 범위 안에 있던 언데드들이 폭죽처럼 터지면서 곤죽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이클롭스의 몽둥이가 순간 땅에 꽂혔다.

"지금!"

- 그우어어어어어!

그게 진현우가 노리던 순간이었다.

진현우는 덩치가 큰 언데드들을 시켜서 사이클롭스의 오른팔을 붙잡고 늘어지게 했다.

- 하찮, 은, 이깟, 것들로...!

붙잡고 늘어져 봤자 사이클롭스가 팔을 크게 터는 것만으로도 죄다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이 중요했다.

사이클롭스의 신경이 언데드에게 쏠리고, 놈이 오른팔을 잠깐이나마 못 움직이는 순간.

- 쉬이이익!

검은 화살이 쏘아졌다.

진현우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검은 화살이 사이클롭스의 오른쪽 무릎에 적중했다.

"같은 부위를 노리고 쏴라!"

- 죽여... 이, 벌레들이?!

사이클롭스가 진현우를 비웃으며 몽둥이를 휘두르려는 순간, 후속타가 이어졌다.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이 검은 화살이 적중한 부위를 노리고 화살을 퍼부었다.

- 크아아아악!

하나하나가 마력이 담긴 화살들. 적중한 순간 폭발하면서 놈의 무릎에 큰 타격을 줬다.

사이클롭스의 거구가 휘청거렸다.

'저 정도의 거구인데 무릎이 성할 리가.'

조금 전, 진현우가 사이클롭스를 자극할 때마다 집요하게 공격했던 부위가 있다.

바로 무릎이었다.

사이클롭스의 몸 곳곳에 약점이 생겼지만, 그중에서 가장 선명한 곳이 무릎이었다.

'한 번에 부순다.'

진현우가 섬광처럼 쏘아졌다.

휘청거리는 사이클롭스. 연이은 공격으로 가죽이 찢어지고 뼈가 훤히 드러난 무릎.

하지만 놈은 보통 괴물이 아니었다.

- 아무리, 빨, 라도... 보인다...!

사이클롭스는 진현우의 궤적을 정확하게 읽고 그가 도달할 지점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저 주먹에 닿으면 온몸이 부서질 것이다.

그렇기에.

- 파아앗!

- ...!

한 번 더 섬광을 사용했다.

섬광의 5레벨 숙련도 효과.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직전, 또 한 번 섬광을 사용해 궤적을 크게 틀면서 사이클롭스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는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한 번에.'

도끼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진현우는 한계까지 힘을 응축했고, 사이클롭스의 무릎을, 약점을 힘껏 후려쳤다.

콰아앙! 호쾌한 타격음이 터졌다.

- 우드득!

- 끄...!

대분쇄가 사이클롭스의 무릎을 강타했다.

연이어 들리는 뼈가 부서지는 소리. 사이클롭스는 예상치 못한 고통에 숨을 삼켰다.

- 끄아아아아!

사이클롭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런 거구를 지탱하려면 필연적으로 무릎에 많은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가 진현우 때문에 집중적으로 타격까지 받은 상황.

무릎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바로 쏴!"

"네!"

사이클롭스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진현우와 엘프는 놈의 왼쪽 무릎을 똑같이 약점을 노리는 방식으로 파괴했다.

두 무릎이 파괴된 사이클롭스가 무너졌다.

- 허억, 허어억! 끄르르...!

"밀어붙여! 정면에서 공격해라!"

사이클롭스는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언데드들이 돌진했다. 어차피 언데드들로는 놈에게 제대로 된 피해는 못 입힌다.

기동력은 잃었지만 힘은 아직 여전하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언데드들은 패턴 유도용이니까.

무릎은 꿇은 사이클롭스는 언데드들이 자신을 포위한 채 다가오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진현우와 엘프들이 공격하려는 것도.

- 죽, 인다. 전부, 다...!

사이클롭스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광화. 이성을 잃은 사이클롭스는 몽둥이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면서 사방을 내리쳤다.

그 몽둥이에 붉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 콰앙! 쾅! 퍼어엉!

몽둥이가 땅을 후려칠 때마다 강력한 충격파가 터지면서 언데드들을 휩쓸었다.

엄청난 위력에 믿을 수 없는 속도.

접근하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른쪽 어깨를 노려!"

"네!"

진현우는 그 상황에서 틈을 엿보며 사이클롭스의 오른쪽 어깨를 집요하게 노렸다.

하지만 이걸로는 의미가 없다.

저 거인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부족하다.

'이대로 시간을 끌까?'

그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언데드들은 무한하지 않다. 고기 방패 역할을 하는 언데드들이 다 죽으면 틈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엘프들의 희생이 뒤따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이클롭스는 재생력을 가졌다.'

그리 강한 재생력은 아니지만, 시간이 끌리면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언데드가 남아 있을 때 싸워야 한다.

'그럼 정면에서 받아치는 수밖에.'

매 공격마다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키는 저 몽둥이를 정면에서 받아 내는 수밖에 없다.

더없이 위험하지만, 해야만 한다.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켰다.

- 구으우우우우!

- 주인의, 명령을 따라서...!

언데드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두려움이 제거된 언데드이기에 가능한 제 몸을 돌보지 않는 돌격이었다. 하지만 사이클롭스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 그아아아! 이 쓰레, 기들이!

몽둥이가 허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언데드들이 곤죽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렇다. 언데드는 놈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놈의 시선은 끌 수 있었다.

- 다, 죽여, 버리겠...!

노성을 터트리며 몽둥이를 내리치던 사이클롭스의 외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언데드들의 파편.

그 사이에 서 있는 진현우의 모습이.

'지금.'

진현우가 섬광처럼 쏘아졌다.

그는 사이클롭스의 몽둥이가 닿을 궤도에 정확하게 멈추면서 부서진 검을 쥐었다.

한껏 마력을 흡수한 검이 검기를 세웠다.

- 멍청, 한, 놈!

사이클롭스가 진현우를 비웃었다.

저 자그마한 인간이, 하찮은 인간이 자신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을 생각을 했다고?

자살행위다. 그리고 동시에 기회였다.

- 제 발로, 죽으러, 왔구나!

사이클롭스는 광소를 터트리며 몽둥이를 내리치는 손에 힘을 가득 실었다.

거대한 둔기가 진현우를 내리친다.

"후욱!"

그 앞에서 진현우는 숨을 삼키면서, 한계치까지 검기를 응축한 검을 내질렀다.

검이 허공을 베었다.

그리고 해일이 철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 콰르르르르르!

해일이 자아내는 수많은 검기가 거대한 둔기와 맞부딪쳤다. 해일은 앞을 가로막는 붉은 기운을 베어 내면서 둔기를 덮쳤다.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카드드득!

- 큭! 우, 우으오오?!

사이클롭스는 팔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수많은 언데드를 단 일격에 곤죽으로 만들었던 몽둥이가, 사이클롭스의 팔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놈의 오른팔이 부르르 떨렸다.

- 무슨, 말, 도, 안 되는...!

인간이 쏘아 낸 검기가 자신의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가졌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이클롭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리고 진현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왼손을 휘둘렀다. 손아귀에서 쏘아진 도끼들이 사이클롭스의 오른팔에 적중했다.

강력한 투척이었지만, 이 정도 공격으로는 놈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 화아아악!

- 크윽!?

애초에 목표는 피해를 주는 게 아니었으니.

도끼를 휘감은 바람이, 그에 동반된 강렬한 한기가 사이클롭스의 사지를 덮쳤다. '빙정' 특성의 효과로 부여된 빙결 속성의 힘이었다.

그게 사이클롭스의 팔을 둔하게 만들었다.

- 그아아아! 내, 팔이!

"실프! 저 괴물의 팔을 묶어 줘!"

"속박의 화살을 쏴라!"

그 뒤를 이어서 엘프들의 마법과 화살이 일제히 사이클롭스의 오른팔을 덮쳤다.

놈의 팔이 허공에 완전히 고정되었다.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몇 초밖에 안 되는 시간.

'그거면 충분해.'

진현우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돌아갈 시간은 없다. 일직선으로, 사이클롭스의 품속으로 한 줄기 섬광처럼 돌진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 크아아아악!

사이클롭스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왼 주먹으로 진현우를 내리찍으려 했다.

그 팔을 날카로운 발톱이 낚아챘다.

- 뭐...!

그리폰이었다. 녀석은 사이클롭스의 왼 주먹을 발톱으로 잡으며 궤적을 비틀었다.

두 발이 단번에 으깨지고 몸이 주먹에 꿰뚫렸지만, 궤적을 약간 비트는 것에 성공했다.

- 콰아아앙!

진현우는 작은 움직임으로 사이클롭스의 주먹을 피하면서 부서진 검을 꽉 움켜쥐었다.

검에 어린 검기가 찬란하게 빛났다.

눈에 보이는 것은 번쩍이는 일점.

- 서걱!

그리고 일섬.

섬광이 번뜩였다. 진현우의 손아귀에서 쏘아진 섬광은 사이클롭스의 오른팔에 닿았다.

어깻죽지. 연이은 공격과 과도한 혹사로 너덜너덜해진, 그래서 약점이 된 부위를.

- 크....

사이클롭스의 어깨에 실선이 새겨졌다.

놈이 팔을 움직이려는 순간, 실선이 크게 갈라지면서 오른팔이 몸에서 완전히 분리됐다.

쿠웅! 땅에 처박히는 오른팔과 몽둥이.

- 아아아아아악!

사이클롭스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진현우는 숨을 삼키며 땅을 박찼다. 그리고 사이클롭스의 어깨에 올라타면서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 키아아아아아!

검기가 사이클롭스의 외눈을 갈랐다.

순식간에 시야를 잃은 놈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남은 왼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은 발악이었다.

"쏴라!"

"가진 마력을 다 퍼부어서 공격해요!"

진현우는 왼팔을 피해서 사이클롭스의 등 뒤로 돌아갔고, 이어서 공격이 쏟아졌다.

정면에서부터 쏟아지는 엘프들의 화살과 마법이 사이클롭스의 전신을 덮쳤다.

거인이 고통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걸로 끝낸다.'

사이클롭스의 등 뒤에서, 진현우는 검을 쥔 손을 크게 뒤로 뻗었다.

그리고 남은 마력을 모조리 일으키면서.

- 푸욱!

사이클롭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혼신의 힘을 담은 찌르기가 등가죽을 꿰뚫고 거인의 심장을 단번에 관통했다.

발악하던 사이클롭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 카, 학!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었던 사이클롭스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검을 한껏 회전시켜서 심장을 완전히 파괴한 진현우는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 쿠우우웅...!

거인이 쓰러졌다.

두 무릎이 부서지고, 한쪽 팔을 잃고, 외눈이 갈라진 사이클롭스가 무너졌다.

진현우는 쓰러진 놈의 머리 앞에 섰다.

- 인, 가아아안...!

아직까지 살아 있던 사이클롭스가 진현우를 향해 원한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검을 높이 들었고, 그대로 내리쳤다.

- 촤아악!

그걸로 끝이었다.

진현우는 사이클롭스의 목에서부터 쏟아지는 피를 받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멍청한 놈아."

- 인가안... 그걸 이제야 안 것이냐?

그리고 이 보관고에 들어오겠다는 판단을 한 자신을 자책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103화

대도의 기억 (1)

사이클롭스가 죽었다.

거인은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던 모습이 무색하게,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엘프들은 떨리는 눈으로 그 모습을 봤다.

"아드네아 님, 저희가 뭘 보고 있는 거죠?"

"...사이클롭스가 죽는 걸 봤지."

물어보는 엘프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들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저 강대한 괴물, 혼자서 엘프 마을 하나를 파괴할 수 있을 사이클롭스가 죽었다니.

그것도 한 인간의 손에.

'우리가 돕기는 했지만....'

엘프들이 지원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원일 뿐. 사이클롭스와 직접 싸운 것은 진현우였다.

정면에서 저 거인과 맞섰고,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을 쓰러트린 것이다.

"대단하군."

그건 믿을 수 없는 위업이었다.

실제로 지금 진현우의 눈앞에는 그 위업을 칭송하듯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 레벨이 8단계 상승했습니다!

- 각인된 심장이 한 단계 성장했습니다.

-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 광휘와 진각의 숙련도가 5레벨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효과가 추가됩니다.

레벨이 8단계나 올랐다.

대부분의 몬스터를 사이클롭스를 이용해서 처리한 탓에 경험치가 다소 적게 들어왔다.

그래도 엄청난 성과였지만.

· 진각 (B, Lv.5): 바닥을 짓밟으면서 체중을 이동한다. 진각이 땅을 울리게 만들어 적의 자세가 흐트러지게 만든다. 이 스킬 다음에 사용하는 스킬의 위력이 증가한다.

* Lv.5: 진각을 사용한 다음에 사용하는 스킬의 위력이 한층 더 증가한다.

· 광휘 (A, Lv.5): 신성한 빛을 터트려 일정 범위 안의 언데드들을 불태우고, 죽지 않은 언데드들을 약화한다. 또한 아군을 치유한다.

* Lv.5: 언데드뿐만이 아니라 사악한 존재에게도 스킬의 효과가 적용된다.

· 각인된 심장 (A): 보유할 수 있는 마력의 최대량이 2배 상승한다. 마법 스킬의 대미지가 30% 상승하며, 마력 소모량이 감소한다. 이 특성은 레벨에 맞춰서 성장한다.

광휘의 숙련도 효과를 본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효과였다.

사악한 존재. 마기에 잠식된 몬스터나 마족들에게도 광휘가 통하게 됐다는 거니까.

각인된 심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사이클롭스를 죽이고, 그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거인 살해자 (효과: 근력 +10, 거인형의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가 15% 상승)]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다수의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몬스터 헌터 (효과: 보스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 +15% 상승)]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압도적으로 높은 적을 상대로 승리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강강약강 (효과: 체력 +10,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에게 주는 대미지 +15% 상승)]을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수많은 언데드를 지휘하여 전투에서 승리할 것.

- 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군단의 지배자 (효과: 휘하에 있는 언데드의 능력치 5% 상승)]를 획득했습니다.

그다음으로 나온 게 업적 메시지였다.

총 4개의 업적. 그만한 일을 하기는 했다. 진현우는 지친 듯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58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거인 살해자

· 근력: 196 (+48) · 민첩: 171 (+48)

· 체력: 176 (+53) · 마력: 120 (+40)

언제나 그렇듯 58레벨이라고는 믿기 힘든 상태창이었다. 이 정도였으니 사이클롭스와 비벼 볼 수라도 있었지, 아니면 죽었을 것이다.

진현우는 몸을 일으키려다 축 늘어졌다.

"여행자! 괜찮아?"

"괜찮아 보이냐? 안 괜찮아."

"아, 앗! 잠깐만, 회복약이...."

"가능하면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걸로 줘."

이리샤가 허둥거렸다.

어딜 다쳐서 못 움직이는 게 아니다. 체력과 마력이 완전히 고갈돼서 그런 것이지.

그녀는 진현우에게 몇 가지 약을 먹였다.

"조금만 쉬면 기력이 회복될 거야. 여길 나가면 한동안 쉬면서 요양이라도 해."

"그럴 여유가 있으면 말이야."

"여유가 없는 세상이긴 하지."

이리샤는 쓰게 웃었다.

아드네아와 다른 엘프들은 방을 돌아다니면서 혹시나 살아남은 몬스터가 있나 확인했다.

그리고 미호는.

"저, 정기! 정기이이... 넘치는구나. 정기가 넘쳐! 이 정도로 강한 정기라면...!"

활짝 웃으며 정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보스 몬스터인 괴물들에게서 나온 정기였으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정기를 흡수하던 미호가 몸을 떨었다.

- 미호가 충분한 정기를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크게 상승하며 변화가 일어납니다....

- 미호의 꼬리가 하나 늘어났습니다!

미호가 한 단계 성장했다는 메시지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 잡은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보스 몬스터에, 괴물이었으니까.

성장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 포옹!

"쿠후후훙!"

미호의 꼬리에서 작은 연기가 터지더니 꼬리가 하나 툭 튀어나왔다.

그걸 보던 이리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행자, 네가 데리고 다니는 애완동물의 꼬리가 늘어났어. 꼬리가 늘어나는 거였나?"

"늘어나는 건 아닌데, 그런 사정이 있어."

"그래?"

저 멀리서 미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진현우는 미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미호]

· 레벨: 30

· 종족: 요호

· 등급: 전설

[특성]

· 요호 (S), 정기 흡수 (S)

· 삼미 (C+), 요호의 인정 (C+)

[스킬]

· 마안 (B+), 매혹 (B+)

· 둔갑 (B), 혼령 불 (B), 분신 (B)

· 삼미 (C+): 세 개의 꼬리를 가졌다. 꼬리가 늘어날수록 강해지며 매혹의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특성과 스킬에 변화가 생긴다.

· 분신 (B): 분신을 소환한다. 분신은 혼령 불을 사용할 수 있으며, 소멸할 경우 주변 적들의 정신 계열 공격 저항력을 감소한다.

미호가 숲에서 썼던 그 분신 스킬이었다.

당장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저항력을 감소한다는 효과는 마음에 들었다.

"쿠후훙! 인간, 보거라! 내 꼬리를! 내 꼬리가 세 개로 늘어난 모습을! 어떻느냐!"

진현우의 앞에 선 미호가 꼬리를 흔들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세 개의 꼬리. 저 꼬리를 다 잡아서 뽑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 우우... 아니다, 쳐다보지 마라. 네가 쳐다보니까 불길한 느낌이 드는구나...."

"감이 좋은 녀석이군."

"정말로 불길한 생각을 한 것이냐?!"

진현우는 미호를 빤히 쳐다봤다.

살짝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시선을 받은 미호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여행자, 동물은 괴롭히지 마. 널 따르는 동물이니까 아끼는 마음으로 대해 줘야 해."

"그, 그런 것이니라! 귀쟁이! 말이 통하는구나. 저 인간은 날 너무 험하게 대하느니라!"

"귀쟁... 아냐, 내가 생각을 잘못한 거 같아. 조금 더 험하게 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왜, 왜애?!"

미호를 보는 이리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안 그래도 험하게 대하고 있어."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어째서어...."

진현우는 손을 내저으며 일어났다.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됐다. 이제 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리품들을 확인해야 한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사이클롭스였다.

"진짜 더럽게 크네."

"응. 다시 봐도 어떻게 잡은 건가 싶어. 뭐어, 여행자. 네가 다 한 거기는 하지만."

"나 혼자서는 못 잡았어."

진현우는 이리샤와 뻔한 공치사를 나누면서 사이클롭스의 사체를 확인했다.

자잘한, 아니 값어치로 따지자면 큰 가치를 가진 재료 아이템들. 그리고 하나.

[거인의 핵 (전설)]

· 설명: 사이클롭스가 가진 힘의 핵심. 거인이 생전에 가졌던 힘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 옵션: 두 가지 선택, 귀속.

* 두 가지 선택: 아이템 제작 용도로 쓰거나 기존의 아이템을 강화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아이템에 특수한 효과가 깃든다.

* 귀속: 획득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특이한 아이템이 있었다.

진현우의 머리만 한 크기의 코어. 안에 어마어마한 힘이 담긴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이템 제작 용도로 쓸 수 있는 재료. 동시에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는 아이템....'

두 가지 선택이다.

어느 용도로 쓸 것인가. 이미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쓸지 방향성이 정해진 상태였다.

'아이템을 강화하는 용도로 써야지.'

어떤 아이템을 강화할지도 이미 정했다. 진현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코어를 챙겼다.

그리고 소환석도 같이 챙겼다.

[소환석: 사이클롭스 (전설)]

· 설명: 사이클롭스가 깃든 소환석이다. 하이아칸 대륙에서만 쓸 수 있으며, 전쟁이 벌어졌을 때 특수한 장소에서 사이클롭스를 소환할 수 있다.

사이클롭스를 소환할 수 있는 소환석이라니. 사치스러워도 너무도 사치스러웠다.

"이리샤, 전리품 챙기는 것 좀 도와줘."

"응."

진현우는 방을 돌아다니면서 보스 몬스터들이 드롭한 아이템들을 모조리 챙겼다.

장비류의 아이템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재료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소환석.

'소환석이 이게 몇 개냐.'

오크 로드, 엘더 리저드맨, 라가, 미노타우로스와 거기에 사이클롭스까지.

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몬스터의 소환석이 이번 기회로 손에 들어오게 됐다.

이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 큰 도움이 되겠지.'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아이템을 모두 챙긴 진현우는 사념이 담긴 아이템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나섰다.

감각이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 크어어엉!

"시끄럽고 이거나 좀 들어."

- 끄어엉....

감각이 가리키는 곳은 방 구석에 있는 돌무더기였다. 기둥이나 천장 따위가 무너지면서 파묻힌 곳인데, 여기에 뭔가가 있다.

곰이 시무룩한 얼굴로 그곳을 파헤쳤다.

- 꾸어엉?

"...음."

돌무더기를 파헤치자 시체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체였던 흔적.

사이클롭스가 그랬는지 다른 몬스터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살점 없이 뼈만 남아 있었다.

- 우우웅!

대도의 시체다.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스킬이 이 근방에 사념 아이템이 있다고 알려 주고 있다.

'전생하고 비슷한 위치에 있을 거 같은데.'

진현우는 대도의 시체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그 아래에 완전히 조각난 물건이 보였다. 아마도 장갑이 아닐까 싶은 아이템.

[파괴된 장갑 (일반)]

· 설명: 한때는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파괴된 장갑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 쓰레기통에 버리자.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처참하게 파괴된 장갑이었다.

설명대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쓰레기라면서 갖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보물로 보였다. 실제로 보물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좋아. 이건 바로 써야겠지."

진현우는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기억 감정.'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104화

대도의 기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