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아래, 마력석인 붉은색 브로치가 달려있다는 것도 모르고.
* *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오전.
브라츠 영지에서 이어진 긴 행렬이 숲을 지나고 있었다. 이안, 베릭은 물론이고 로만드로와 그의 부하들 게다가 천려족 호위 전사들까지 함께인 행렬이었다.
로만드로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거리가 있군."
"숲만 빠져나가면 금방입니다."
"그쪽도 대사막과 접하고 있나?"
"메렐로프는…. 사막과 접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거의 영향이 없고, 동쪽으로 하완 왕국과 제일 가깝습니다."
"아아. 그렇지. 하완 왕국이 이쪽이군."
바리엘과 우호적인 데다 무역이 활발한지라, 메렐로프는 양국 교류의 교역지로서 이득을 많이 취하고 있었다. 메리가 동방에서 옷감을 떼는 것도 메렐로프 부인을 통해서였으니까.
"멈추시게. 어디서 왔는가?"
"전 브라츠 영지에서 자문관님이 오셨소."
외벽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마부의 통행증을 확인하고 길을 터 주었다. 안쪽은 브라츠와 닮은 듯하면서도 이국적인 흔적이 잔뜩 묻어있었다. 브라츠가 대사막과 천려족의 영향을 받았듯, 이들도 하완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계속 교류한 것은 아니라고?"
"데르가 생전에는 모르겠으나, 조사단이 내려온 이후로는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엮이면 곤란했겠지요."
하지만 에리카 단장이 물러난 이후, 이안이 영지를 본격적으로 담당하자 서신이 먼저 날아왔었다. 의례적인 상황 파악을 위한 것이었다. 데르가는 정말 죽었는지, 그렇다면 천려족이 영지를 점령한 것인지 등등. 이웃으로서 응당 알아야 할 내용이긴 하지만....
'아마 황궁에서 자문관이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이자들이 귀찮게 했을지도 모르겠군.'
변경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기본적인 방법 아니던가. 이웃을 잡아먹어 몸집을 키우는 것.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터인데, 황궁에서 자문관이 내려와 당황한 기색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끼익.
마차 행렬은 달리고 달려 저택에 도착했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자문관이 먼저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고즈넉한 브라츠와 달리 세련되고 화려한 느낌이 물씬 나는 조경이다.
"로만드로 자문관님 되십니까?"
"그렇소."
"안쪽으로 드시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늙수그레한 집사가 깍듯하게 그들을 안내했다. 뒤쪽에 따라붙은 천려족 전사들을 힐끗 쳐다봤지만, 그뿐이다.
"로만드로 자문관님?"
"안녕하십니까. 카를로 메렐로프 백작님."
"어서 오시지요."
응접실에는 굉장히 마른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나무 거죽처럼 핏기없고 딱딱해 보이는 인상. 그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더니 이안을 쳐다봤다.
"그대가 이안이군."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냉랭하다. 마치 네놈의 본체를 꿰뚫고 있다는 듯, 은근한 오만함이 느껴졌다.
"메렐로프 백작님을 뵙습니다."
"데르가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칭찬 감사합니다."
"…앉으시게나."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메렐로프와 로만드로 그리고 이안. 백작은 그들에게 차를 권하며 본론을 꺼냈다.
"식량을 구하고자 하신다고."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척박한 영지, 당장 다음 달 먹거리조차 불투명한 처지라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에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다른 것에는 문제가 없는가 보오."
"생각보다 회복력이 좋습니다. 당장 두어 달 치만 해결한다면 겨울 전후로 정상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메렐로프 백작은 까딱까딱, 손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사에게 명령했다.
"준비한 서류를 가져오라."
"네. 백작님."
"서신을 받고서 고민을 좀 했습니다. 이웃 영지민만큼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제 살 깎아서 남 살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분명 황궁 자문관이 없었더라면 이안에게는 거래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금이 없는 것도 빤할뿐더러, 그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제 영지였지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내줄 수 있는 목록과 값을 책정한 것입니다."
천천히 글자를 확인하는 로만드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필수품이라 여겼던 밀과 옥수수는 제외되었고, 그나마 부재료로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은 시세보다 다섯 배 이상 비싼 값이었다.
"…저기, 메렐로프 백작님."
"네. 자문관님."
기가 찬 로만드로가 백작을 불렀으나, 그는 태연했다. 황궁 자문관이 거래를 요구해서 응하기는 했다만 은근히 하기 싫다는 뜻을 팍팍 내보인 것이다.
서류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로만드로.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힘겹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저희끼리 의논을 해도 되겠습니까?"
"오! 하하하! 저자와요?"
로만드로가 칭한 '저희'에는 이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알아챈 메렐로프 백작이 처음으로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황궁에서 온 자문관이 천한 핏줄 서자와 회의라. 우습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오신 분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노골적인 무시였으나,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제시된 숫자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길 뿐.
메렐로프 또한 변경백이라지만, 달달한 교역으로 배가 부른 자다. 이 정도 배짱을 부릴 만한 입장이란 뜻이다. 이 또한 전부 예상했던 바.
"덕담 감사합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리 큰 웃음도 언젠간 멎는 법이니.
제58화. 소개합니다
"그럼 의논하는 동안 식사를 준비하라 하지요. 돌아가면 제대로 못 먹을 것 아닙니까? 여기서 충분히 채우길 바랍니다."
끼익, 쾅!
"저저, 저, 귀족이라는 자가...."
문이 닫히자마자, 로만드로는 목덜미를 잡으며 꿍얼거렸다. 이러다간 진짜 변경 백작들에게 선입견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안은 그가 보던 서류를 가져와 하나씩 확인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목록이 영 마음에 안 찹니다."
"그러니까. 구황작물은 거의 없다네."
만만찮은 겨울을 예상하는 지금, 그들이 필요한 건 수확 시기가 짧고 상대적으로 양이 많은 구황작물들이었다. 하지만 메렐로프가 내민 것에는 귀족들이 주로 소비하는 고급 식재료들 뿐이었다.
"어이가 없군. 혹 데르가와 사이가 안 좋았나?"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거래 자체가 달갑지 않기는 할 겁니다."
당장 저들 먹을 것도 없는데 황궁에서 자문관이 왔답시고 먹을 걸 내주게 생겼다. 게다가 브라츠 영지의 전투로 인해 그들도 알게 모르게 손해 입지 않았나.
"전투 중 일부가 메렐로프로 도망치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브라츠 저택의 집사도 여기서 목이 잘렸지요. 그 기간 문을 잠그고 밖으로 못 나왔으니...."
숲을 앞에 두고 땔감도 못 때, 사냥도 못 하고, 열매도 못 땄다. 교역에도 차질이 있었을 것이다. 고립되는 동안 안쪽에서 어떤 불편이 있었을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만, 짐작은 가능했다.
로만드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 쌌다.
"자문관님."
"응?"
이안은 톡톡, 테이블만 두드리다 천천히 로만드로를 불렀다. 사실 여기서 식량 수급을 하지 않아도, 이안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외람되지만, 지원금이 금화 3,000개 정도로 추측됩니다. 맞을까요?"
"그게,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말해줄 수는 없네."
"여기서 크림, 올리브 따위를 사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게 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로만드로 님이 저를 믿고 따라주신다면요."
바리엘의 대기근을 없앤,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굴라. 이안은 그런 굴라 씨앗을 네 포대나 갖고 있었다.
여타 구황작물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짧은 재배 기간과 풍부한 수확량 그리고 영양학적 기능.
모든 게 완벽한 식량을 두고서 어찌 이 돈 주고 이런 걸 산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인가?"
"황궁에서 보낸 소중한 지원금을 이리 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낭비이며, 더 나아가서는 사치입니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네만, 방도가 무엇 있나?"
이안은 볼 것도 없다는 듯 서류를 엎어놓고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로만드로의 부하들에게 엿듣는 귀가 없는지 확인해 달라 부탁했다. 그들이 복도로 나가자, 이안은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서 다른 걸 사가려고 합니다."
"다른 걸? 어떤?"
"사람이요."
뜻밖의 말에 로만드로가 눈을 크게 뜨며 끔뻑거렸다.
"…노예시장은 중앙에서만 열리게 되어있네만. 설마 메렐로프 백작이 주최하고 있나?"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노동력을 사겠다는 겁니다."
금화 3,000닢을 다 쓰지 않더라도, 충분할 것이라 이안은 속삭였다. 당최 영문을 모르는 로만드로는 이안과 거래 제안 서류만 번갈아 보며 고민했다.
"귀 좀 빌려주십시오."
이안은 싱긋 웃으며 로만드로의 귀에 굴라의 존재를 속닥거렸다. 로만드로의 안색이 점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변했으나, 잠시뿐이었다.
* * *
"그냥 간다고?"
"네. 백작님.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겠답니다."
메렐로프 백작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힐끗거렸다. 거나하게 차리겠노라 말했던 것과 달리 삶은 고기 스튜를 중심으로 차려져 있었다. 육즙 한 방울 버릴 수 없는, 서민들이 주로 해 먹는 요리.
이것으로 거래 제안 자체가 불쾌하다는 자신의 속내를 보이려 한 참이다. 백작은 수염을 매만지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배가 불렀군."
"배웅을 나가시겠습니까?"
"되었네. 적당히 둘러대."
대외적으로는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저들이 선택하지 않았을 뿐. 메렐로프 백작은 혹시 그 값에 거래를 하겠노라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곧 있으면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는 천려족도 돌아갈 것이고, 죄다 굶어 죽는 지경에서는 방도가 없겠지.'
변경에서 메렐로프가 왕처럼 군림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변경인지라 황궁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게 제일 컸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도 황궁에서는 모를, 그런 물리적, 심리적 거리 말이다.
하지만 브라츠 영주 자리에 황궁 사람이 들어앉는다면?
'젠장. 생각만 해도....'
바로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 역시 황궁 시야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메렐로프가 브라츠를 차지하는 게 나을 것이다. 지리상 야만족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지만, 황궁을 이웃으로 두는 것과 비교한다면 훨씬 낫다.
백작은 성큼성큼 걸어가 창문 아래를 확인했다. 정문 가까이, 마차 앞에 서 있는 이안과 자문관이 보였다. 둘은 정면을 본 채 무어라 떠드는 중이었다.
* * *
"아마 황궁의 사람이 브라츠에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걸 수도 있겠습니다."
"이웃으로 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이거군."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죽고 나면 도의고 나발이고 소용없지요."
너무 먼 탓에, 메렐로프 백작은 자신이 이안에게 정확히 간파당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로만드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처세에 맞는 얘기인지라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내가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
"그나저나, 집사가 좀 늦습니다?"
"백작이 용무를 마치느라 그런 것이겠지."
"글쎄요. 제가 봤을 때는 배웅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안이 회중시계를 딸깍거리며 중얼거렸다. 메렐로프의 입장을 확인했으니, 이제 영지로 돌아가 로만드로에게 굴라를 소개해 주는 일만 남았다.
"어머."
그때, 정원 뒷문을 통해 돌아 나오는 한 여인. 백금발 머리를 하나로 올려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한 귀족 부인이었다.
"…메렐로프 부인?"
"이안! 그대가 이안이군?"
"처음 뵙겠습니다."
이안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면서 그녀의 손등에 인사를 남겼다. 메렐로프 백작과 달리 그녀는 생기가 넘치는 여인이었다. 메리와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라 중년 또래일 것이라 짐작했건만, 생각보다 훨씬 어리다.
"리엔 메렐로프라 한다. 그래, 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벌써 돌아가나? 식사라도 하고 가지."
여인은 어렸지만 직위를 비롯한 모든 것이 이안과 로만드로보다 위에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하대였고, 이안도 그것을 알기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좀, 매너가 없구나, 싶은 정도.
"감사하게도 백작님께서 권해주셨지만, 일이 산더미인지라 함께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좋겠군요."
촤악.
부인은 화려한 부채를 살랑거리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안과 로만드로가 서로 힐끔거리며 모종의 시선을 나누었다. 저 백작 부인이 대체 왜 저러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계절감에 맞지 않는 드레스 하며, 뭔가 어긋나 있는 시선까지....'
흔히 골목에서 만나면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아리따운 백작 부인에게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상인데.
"자문관님?"
"아. 로만드로입니다."
"영광이네요. 이름도 못 듣는 줄 알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일행은 이게 전부인가요?"
그녀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부채를 돌리며 물었다. 함께 온 자들 중 절반은 먼저 중심가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이안이 제안한 '사람'을 사기 위해.
"늦어질 것 같아 미리 떠났습니다. 저희는 집사님을 기다리고 있고요."
"아아. 그렇구나. 브라츠 영지는 잘 수습되었고요? 남편이, 그쪽 얘기는 전혀 들려주질 않으니까."
"네. 덕분에."
"오호호.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부인."
백작 부인은 부채로 얼굴 아래를 가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귀와 눈을 닫고 있는 듯 보였다.
"혹시 메리 부인의 방은 누가 쓰고 있나?"
"메리 부인의 방이요?"
"내가, 빌려주고 받지 못했던 것이 있어서."
쉬이.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메렐로프 부인의 톤이 점점 낮아졌다. 이안은 메리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
메렐로프로 들고 가면 도움받을 만한 물건이 있노라 말했던 메리 부인. 뭔지 알려주지 않았으나, 저택을 나가는 순간까지 그리 말했던 걸 보면 섣불리 분실될 만한 물건은 아니었나 보다.
메렐로프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이안을 채근했다.
"응? 방은 멀쩡해?"
"…그럴 것입니다. 그쪽은 발걸음을 잘 하지 않아서요. 원하신다면 언제고 방문하십시오."
"그래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주인 잃은 방이니 그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이안의 말에 부인이 만족스럽게 눈매를 휘었다. 그때, 집사가 작은 상자를 들고서 나왔고 부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마님?"
"손님들이 가시는데 백작님은?"
"아. 갑작스러운 용무로 자리를 비우기 힘드시다 합니다.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며, 이것은 메렐로프에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혹 이웃 영지로서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라는 전언도 있었습니다."
집사가 깍듯하게 인사하자, 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비웃었다. 집사는 백작의 모난 말을 퍽이나 둥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안은 상자를 받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이만. 크흠."
로만드로 역시 짤막하게 인사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정문을 빠져나가는 동안, 백작 부인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그 성의라는 게 무엇인가?"
"냄새로 보아 말린 고기 같습니다."
"참나, 어찌 변방의 소문들은 근거가 있었군그래."
변경백들은 천박하고 야만적이라는 사교계의 선입견을 말하는 것이다. 말뜻을 알아들은 이안이 살포시 웃자, 로만드로가 저택이 멀어진 걸 확인했다.
"부인도 영 이상하고 말이야."
"저렇게 젊을 줄은 몰랐습니다. 메리 부인과 동년배일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백작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던데, 초혼인가?"
"그것까지는 잘...."
"됐고, 그래. 이제 자세히 좀 말해보게. 수확 시기가 한 달 남짓한 작물이 있다니?"
로만드로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이안의 옆에 바짝 붙었다.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작물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이래서 세상의 중심을 보려면 수도로 가고, 세상의 변화를 보려면 변경으로 가라는 말이 있나 보다.
"어디서 온 건가? 대사막? 그래, 사막에서 나는 거라 생명력이 좋은 거겠지? 이름은? 뭐라 부르나?"
"자문관님도 아실 겁니다."
"응? 뭐를?"
"굴라요."
"…굴라? 내가 아는 그 잡풀 굴라?"
살포시 웃는 이안과 달리 로만드로의 얼굴에는 낭패가 서렸다. 망했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게 분명하다.
제59화. 모집
"굴라라니, 자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 여실했다. 천민 출신 서자라도 그렇지, 굴라는 지나가던 개도 안 뜯어 먹는다는 독초였다.
이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정문을 박차고 나오다니. 차라리 메렐로프 백작에게 가격 협상을 제안해 보는 게 나을 뻔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굴라는 씨앗이 식용이에요. 구워 먹어도 좋고, 삶아 먹어도 좋으며 심지어는 생으로 먹어도 좋지요. 영양소, 포만감, 효율, 모든 것을 따졌을 때 감히 신의 은총이라 불릴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대단한 작물을 이제껏 아무도 몰랐다? 바리엘 대제국을 어떻게 보면 저런 말이 나오는지, 조금 괘씸할 정도였다. 지금도 황궁에서는 매일 같이 대기근 극복을 위한 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지천으로 널브러진 굴라 따위가 신의 은총?
"제가 요즘 먹고 있습니다."
"먹고 있다고?"
"네. 맛만 좋더군요. 분명 로만드로 님도 한번 맛보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겁니다. 재배 기간이 한 달 정도니, 겨울은 문제없지요."
끼익.
잘 달리던 마차가 도중에 멈춰 섰다. 마을 광장에서 한 번, 그리고 유흥가가 모여있는 골목 앞에서 한 번, 다시 주택가에서 한 번. 마차가 멈출 때마다 먼저 출발했던 부하들이 올라탔다.
그런데 베릭 놈, 얼굴이 좀 이상하다. 불콰하게 오른 것도 그렇지만 실실 웃을 때마다 포도주 냄새가 났다. 이안이 눈을 흘기며 가볍게 꾸중했다.
"베릭.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응? 아니아니. 조금. 주인장이 자꾸 권해서."
유흥가 앞에서 올라탄 베릭이 코를 훌쩍였다. 그 짧은 사이 술을 얼마나 얻어 마신 것인지 원. 이안이 인상을 찡그리려고 하자, 베릭은 재빨리 상황 보고를 하며 말문을 돌렸다.
"거기가 이 근방에서 제일 잘 나가는 주점인데, 내 얘기만 수십 명이 들었어. 공지도 붙여준대."
-굴라를 캐오면 값을 쳐주겠노라.
이안이 '사람'을 사자는 건 바로 이 의미였다. 브라츠와 가까운 숲에서는 영지민들이, 메렐로프와 가까운 곳에서는 메렐로프의 영지민들이 굴라를 캘 것이다.
"보수랑 기간도 정확히 했지?"
"물론. 큰 세 자루당 금화 한 닢. 앞으로 한 달 안으로만 받음."
금화 한 닢은 하층민 노동자가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굴라가 작으니 세 자루를 채우는 게 만만찮은 일이겠지만, 체력이 좋은 자라면 보름 내로 해낼 수 있을 터.
"근데 너무 후한 거 아닐까? 금화 한 닢이라니."
"그래야 눈에 불을 켜고 숲을 뒤질 것이다. 굴라 한 자루가 가져올 풍요로운 겨울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기간'.
한 달이라는 기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분명 재배해서 가져오는 자들이 생길 터. 미안하지만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안이 원하는 건 굴라 그 자체이면서도 인근의 모든 싹이 말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올해 메렐로프 농작 상황은 어떻다 하나?"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체 농사짓는 곳이 아니기도 했고, 중앙군 브라츠의 전투로 강물이 더러워지지 않았습니까. 저들끼리 흉작이라 점치는 듯합니다."
"보통 흉작이면 메렐로프에서는 어찌하는지 아는가?"
"겨울이면 하완 왕국에서 바리엘로 대상단들이 들어오는데요. 그때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돌아갑니다."
"…대상단이라."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상단들 아닙니까. 엄청나게 큰 곳은 말린 고기를 몇 년 치씩 들고 다닙니다. 메렐로프 영지민은 그들에게 숙박과 편의를 봐주는 대신 식량을 구매하지요."
"그래서 흉작이라 한들 크게 동요가 없는 거군."
"사실 메렐로프에서는 흉작 아닌 해를 찾는 게 더 쉬울 겁니다."
이안의 계속되는 물음에 로만드로의 부하가 훌륭한 답변을 내놓았다. 파견되어 내려오기 전에 정보 수집을 단단히 한 모양이다.
아무튼, 당장 가을에 수확이 어찌 될지 모른다 이거지. 굴라를 최대한으로 확보해 놓는다면....
혹시 아는가?
메렐로프 쪽에서 반대로 거래를 제안해 올 수도 있다. 이안이 속으로 겨울까지의 계획을 쭉 정리하는 동안, 로만드로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끙끙 앓기만 했다.
'굴라? 굴라아아아?'
당장이라도 영지로 돌아가 이안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니라면 마력운용자고 뭐고 시원하게 한마디 쏘아붙이리라.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메렐로프 백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보게. 좀 더 빨리 달릴 순 없나?"
"급한 일 있으십니까?"
"아, 말이 많군!"
"알겠습니다. 좀 많이 흔들릴 겁니다. 가자!"
짜악! 히이이잉!
이안은 그런 로만드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자 속 말린 고기를 노리는 베릭의 손만 매몰차게 쳐낼 뿐이었다.
"아, 거참 너무하시네그려. 주인 양반."
"술이나 깨고 말하거라. 말투가 시정잡배처럼 변했다."
"입안이 쓰단 말이야. 하나만? 응? 하나만."
결국,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빈 상자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로만드로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방을 비롯한 사용인들 전부가 뒤집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이걸로 음식을 만들라고?"
"이거 굴라잖아. 오늘따라 장난이 영 구리네."
"아니야. 진짜야. 이안 님이 굴라로 음식을 해오라 하셨어. 구황작물 요리법은 모두 이용이 가능하고, 대신 씨앗 겉의 과육이 있을지도 모르니 확실히 점검하라 하셨네."
주방 식구들은 모두 팔짱을 낀 채 굴라 상자만 내려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재료 낭비, 불 낭비, 인력 낭비였다. 세상 누가 길가의 잡초로 요리를 만든단 말인가.
주방장은 어쩔 수 없이 직접 이안의 방으로 올라가서 주문을 확인했다.
"이안 님. 오늘 저녁 식사 말입니다."
"아아. 그래. 얘기는 들었지? 참고로 나는 굴라를 삶아서 푹 익힌 다음에 응용하는 것을 좋아하네. 차가운 것도 좋지만 따뜻하게 먹으면 목 넘김이 예술이거든."
"...."
농담이 아니구나. 진짜구나.
주방장은 황당하게 모자를 벗으며, 꾸벅 인사를 남겼다. 주방 하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주방장을 닦달했다.
"뭐래요? 진짜 굴라로 요리하래요?"
"그래. 다들 불을 올려야겠어."
"이해가 안 가네, 진짜. 아아! 알겠다! 몰린 경이랑 그 일행을 주려나 보네."
"바보 같긴. 굴라 먹고 뒤진 사람 본 적 있어?"
"당연히 없지! 누가 그딴 걸 먹나?"
"아냐. 몸이 약하면 독 잘못 올라서 죽을 수도 있어. 왜, 일전에 구두닦이 할아범, 굴라 먹고 앓다 죽었잖아."
촤아악!
이토록 주방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나? 주방장은 차마 소란을 재울 생각도 못 한 채 팬을 돌려댔다. 이 위에 뿌려지는 온갖 소스와 향신료가 하수구에 버려지는 기분이 든다. 살다 살다, 요리하며 죄책감 갖는 건 처음이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로만드로는 긴장감 서린 표정으로 냅킨을 목에 걸었다. 그러자 식당 문이 열리고, 사용인들이 줄줄이 트롤리를 끌며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듯, 낯선 음식 냄새.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다는 건 침샘을 자극한다는 거다.
"이, 이게 다 굴라로 만든 거라고?"
"주방장. 소개 좀 해주게."
"…정확히는 굴라 씨앗입니다. 이건 굴라 씨앗을 볶은 다음 꿀에 절여서 만든 디저트. 그리고 이건 스튜로 끓여낸 것이지요. 불으면 그 크기가 더 커지더군요. 이름이랄 게 없어서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이안 역시 자세한 조리법은 알지 못했다. 황제였던 그는 받아먹는 처지였지, 주방에 출입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척하면 척. 한평생 불 앞에서 산 자들이라 대충 느낌대로 요리해도 시각적, 후각적 자극이 뛰어났다.
달그락.
"음."
이안은 음식을 맛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것저것 떠먹고, 찍어 먹으며 한껏 굴라를 음미했다. 로만드로는 눈썹을 찌푸리며 굴라를 슬쩍 뒤적였다.
"…의사는 밖에 대기하고 있겠지?"
"아니요. 밤중이라 집에 있겠지요?"
"대기하라니까!"
"하하하. 농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자셔보십시오."
이안이 호탕하게 웃자, 로만드로는 한숨을 푹 내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단숨에 굴라를 입에 넘겼다.
"흐익!"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는 로만드로. 이안은 그의 눈이 서서히 떠지는 걸 보며 역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말 대신 행동이라, 그의 스푼이 한 번 더 스튜를 떠먹었다.
"입맛에 좀 맞으십니까?"
"이거, 이거...."
왜 맛있는 건데? 로만드로는 난생처음 맛보는 진미에 정신이 쏙 빠져 보였다. 이안은 식당 뒤쪽에 서 있던 사용인들에게 손짓했다.
"그대들도 이리 오라."
"네? 저희 말씀이십니까?"
"거기서 있지 말고, 음식 좀 들어. 궁금하지 않나?"
사용인들은 머뭇거리며 로만드로만 힐끔거렸다. 그는 걸신들린 것처럼 수프 볼을 아예 들고서 마시는 중이었다. 주인 식탁에 손대는 것도 그러하지만, 잡풀 인식 때문에 쉬이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먹고 싶으냐?"
"저는 꿀에 절인 거요."
그런 그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선 것은 해나다. 해나는 넉살 좋게 음식을 가져와 먹었고, 이내 의외라는 듯 입을 가리며 당황했다.
"맛있습니다."
"그렇지?"
"해나. 정말 맛있어?"
"언니도 먹어보셔요."
"그러면 실례합니다, 이안 님...."
주인과 황궁 자문관이 저렇게 먹는데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해나의 권유에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몰려와 굴라 음식을 집어갔다.
"어?"
"음…. 이게 굴라라고?"
"말도 안 돼. 진짜 맛있다."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식구들을 지켜봤다. 사실 배곯은 것 같아 권한 것도 있지만, 이안과 영지민들을 잇는 자들이 바로 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이야말로, 굴라 보급에 있어 중요한 시발점이다. 한 명이 두 명으로, 두 명이 네 명으로. 무릇 모든 위업이 그러하듯, 시작은 미약한 법.
"하, 이거 진짜 기똥차다. 대체 어떻게 찾은 건가?"
로만드로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입가를 닦았다. 그의 앞에 놓여있던 그릇은 전부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우연이었습니다."
"데르가가 밥도 안 주었던가?"
"그건 아니고요. 아무튼, 이번 겨울은 굴라로 나면 됩니다. 당장 내일부터 정원에 온실을 만들도록 하지요. 마른 모래나 물속에서도 뿌리를 내리지만, 추위에는 약하거든요."
하우스를 치는 동안, 메렐로프와 브라츠의 영지민들을 동원해서 일대의 굴라를 모두 쓸어버리면 된다. 수요가 확실한 이상, 이 일대의 공급을 손에 쥐고 있어야 시장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으니.
"눈이 오면? 그래. 그러고 보니 확실히 겨울에는 보기 힘들지."
로만드로가 체면도 잊은 채 숟가락을 깔끔하게 핥아먹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이안에게 넌지시 물어왔다.
"며칠 두고 본 다음, 몸에 이상이 없다면 내 황궁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이 내용을 실어야겠네.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꼭 알리셔야지요. 발견 경위도 꼭 기재하시길 바랍니다."
이안의 이름을 빼놓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기야, 변경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로만드로가 독단적으로 굴라의 식용성을 발견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긴 했다. 로만드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보고서만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만을 적네. 그나저나, 이거 더 먹으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아직은 양이 적어요. 씨앗 하나당 나는 굴라가 열 개 이상인 걸 기억하십시오."
이안이 웃으며 거절하자, 로만드로는 입맛만 쩝쩝 다시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용인들이 굴라를 집어갈 때 막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다들, 굴라 씨앗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는 입단속을 철저히 하거라."
이안의 명령에 해나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한껏 엄숙하게 입 잠그는 시늉을 했다.
제60화. 황제인 아버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황제는 싱그러운 것을 갈구했다. 침실을 개조한 것도 그 맥락이었다. 한쪽 벽을 유리로 바꿔 사시사철 푸른 정원을 눈에 담곤 했다. 가끔은 그대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동이 없었는데, 마리브는 지금이 그렇게 느껴졌다.
"아버지?"
황제는 아들의 목소리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인자함이 잔뜩 묻어났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마리브.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더구나."
"언제나 그렇지요. 여름이다 보니."
마리브는 자연스럽게 황제 앞에 앉으며 대답했다. 사적인 공간이었고, 사적인 부름이었다. 마리브는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그저, 요즘 네 얼굴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새삼스럽습니다."
"마리브."
"네. 아버지."
"혹여 게일과 무슨 일이 있느냐?"
황제가 게일을 아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마리브도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황제는 철저하게 그 앞에서 게일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후계를 위한, 그리고 자식을 위한 나름의 처사였다.
"아니요.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어제 꿈을 꾸었다. 캐롤리나가 나왔더군."
왕비의 적통인 마리브와 달리 게일은 첫 번째 후궁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저 어딘가 근본 모를 귀족 출신이었는데, 미모 하나로 오를 수 있을 때까지 오른 여인이라 평가받는 중이었다.
"평소 꿈에 보이지도 않던 자가, 나와서는...."
물기를 머금은 황제의 목소리. 마리브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을 핑계로 오지 말 걸 그랬다. 그는 저 멀리 시선을 돌리며 애써 표정을 숨겼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홀연히 서 있었다.
"내게 복숭아를 건네주었어. 그리고 울먹이며 게일을 불러 달라 하더구나."
"아버지."
"문제가 없다면 그래. 되었다."
황제는 마리브의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인자한 미소를 지어도 황제의 오만한 소통은 여전했다. 마리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비의 침실을 나섰다.
끼익.
"마리브 저하?"
문을 나온 마리브가 꼼짝하지 않자, 보좌관이 의아하게 그를 불렀다. 황자는 일렬로 서 있는 하인들에게 다가갔다.
"폐하의 침실 관리에 문제가 없는가?"
"네? 네네, 그렇습니다. 마리브 황자 저하."
"한데 어찌하여 아버지의 꿈자리가 사나운 거지?"
"예?"
하인은 처음 듣는 말인 듯싶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반문하려는 순간, 마리브가 그의 뺨을 순식간에 내려쳤다.
짜악!
"한 번만 더 내게 이런 말이 들리면, 담당하는 모든 것들의 목을 치겠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부자(父子)는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둘은 판박이처럼 닮아있었다. 봄처럼 따뜻하다가도 문득 예고 없이 날아드는 한기. 하인들은 마리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오늘 일정은 다 끝났는가?"
"네. 황자 저하. 그런데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로 가셔야 할 듯합니다."
일정은 다 끝났다며?
마리브가 인상을 찡그리자, 보좌관이 재빨리 덧붙였다.
"로만드로에게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내일 확인하지. 오늘은 좀 피곤해."
"그런데 그것이 보고서가 좀 충격적인지라...."
황제에게 시달리고 나온 상관의 기분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같이 간 일행에는 몰린이 섞여 있었다. 마리브만 알게 될 게 아니라, 게일 역시 알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짧게."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대답이었다. 보좌관은 상관이 원하는 대로, 짧고 굵게 요약하여 보고서를 전달했다.
"데르가의 서자 이안이 천려족과 함께 브라츠를 재건하여 장악했다 합니다. 에리카 단장은 영지 밖으로 나갔고요."
"…뭐?"
"그런데 그자가 마법운용자라네요."
마리브가 걷던 것까지 멈추고 보좌관을 돌아봤다. 그러자 보좌관은 하나의 거짓도 없는 보고였다며,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난리 났군."
"그러게 말입니다."
"집무실로 간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마리브는 어금니를 물며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 * *
보름달이 뜬 다음 날.
메렐로프 영지 주점 뒷골목에서는 희한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뭐? 브라츠에 굴라를 가져가면 돈으로 바꿔준다고?"
"아, 조용히 좀 해! 누가 듣겠어."
"아니, 그걸 대체 왜? 잡풀을 어디에 쓰려고?"
"낸들 아나? 야만족 놈들이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지. 붉은 벽돌집 로건도 여섯 자루 가져다주고 금화 두 닢을 받았다네."
"기간이 있다더만. 근데 이미 가까운 숲은 다 털렸어. 굴라를 따려면 깊게 들어가야 할걸세."
"나 원 참. 살다 살다 개 잡풀을 돈 주고 산다는 얘기를 다 듣네. 미친 게지."
"알게 무언가? 우리는 좋은 일 아닌가? 안 그래도 요즘 마누라가 자꾸 고기 먹고 싶다 성화였거든."
누가 굴라를 채갈라, 다들 쉬쉬거렸으나 이미 메렐로프 하층민 중 그 얘기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브라츠 영지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뭐? 굴라를?"
"공고가 붙었어. 세 자루당 금화 한 닢이래."
"헛돈 쓰는 거 아니야?"
"당최 이유를 말 안 해주더만!"
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이안이 원하는 바를 확실히 충족했다. 산과 들로 쏘다니며 평소에는 발로 밟고 다녔던 굴라를 자루에 담아 저택으로 가져갔다. 하루가 멀다고, 창고에 쌓이는 굴라 씨앗은 천장에 닿을 듯이 높아졌다.
"오늘로 몇 자루지?"
"마흔아홉 자루입니다."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군."
이안은 그걸 흡족하게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뒤쪽, 출입이 제한된 정원에서는 굴라 재배 연구가 한창이었다. 추위를 제외한 모든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란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최선의 재배 방식이 있을 것 아닌가.
이안도 직접 길러본 적은 없는 터라,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을 많이 준 것과 아닌 것의 성장 속도 차이가 거의 없어요. 아무래도 토질을 달리 해봐야겠는데요."
"그러면 저쪽 강가 흙을 좀 퍼와야겠어."
"이안 님! 이것 좀 보세요. 벌써 싹이 나왔어요."
흙을 잔뜩 묻힌 해나와 로만드로의 부하들이 이안을 보고서 일어섰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아주 작은 크기. 이안은 방긋 웃으며 해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수고했다."
"참. 로만드로 님이 아까 또 굴라를 집어먹었습니다. 이안 님, 말씀 좀 해주셔요."
"또? 내 어제 잘 말씀드렸는데."
"아무도 못 볼 줄 알았나 봅니다."
로만드로는 그날 이후, 매 끼니를 따지지 않고 굴라를 집어먹었다. 보다 못해 이안이 자중해 달라고 말릴 지경까지 간 것이다. 씨앗 하나에서 열 개 이상의 또 다른 굴라가 생겨나니…. 차라리 고기를 먹으라 할 정도였다,
"알겠다. 내 다시 말씀드려보마."
이안은 그리 말하며 정원을 나섰다. 최대한 굴라를 불려서 겨울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아마 브라츠 영지민들 평생에 있어 제일 풍족한 연말이 되리라.
"무슨 생각해?"
뒤로 따라붙던 베릭이 앞서 걸으며 이안에게 물었다. 그가 무어라 답하기 전이다. 베릭이 손가락을 튕기며 자문자답을 해댔다.
"내가 맞춰볼까? 영감 생각하고 있었지? 별안간 쥐 죽은 듯 조용하잖아. 이상할 정도로."
"아아. 그래. 맞다."
이안은 영감이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인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몰린을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밖으로 안 나온다며?"
"부하 둘은 여기저기 쏘다니는데, 영감은 얼굴 본 지 꽤 됐어. 밥은 잘 처먹는다 하더라."
그들의 방 침대에 마력석 브로치를 붙여 놓았다. 청소를 틈타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방을 비우질 않으니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다. 이제 슬슬 직접 회수할 때가 되었다.
"로만드로 님께 언질하여 오늘은 다 같이 식사하자 전해."
"다 같이? 싫다 하면?"
"회의를 겸할 것이니 필수라 덧붙여라. 그 사이 마력석도 찾아오고."
베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굴라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지 모르겠다. 혹여 알고 있다 한들, 이안은 공식적으로 황궁 사자들에게, 정확히는 몰린 일행에게 계획을 전할 필요가 있었다. 보아하니, 로만드로는 로만드로대로 몰린은 몰린대로 보고서를 쓰는 것 같았다.
똑똑.
"이안 님 들어가십니다."
"어서 오게나. 이안."
마침 점심을 앞둔 시간이었는지라, 모이는 건 금방이었다. 앉아 있다 가볍게 일어서서 그를 맞이하는 로만드로와 달리, 몰린 일행은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오늘 해가 좋습니다."
"무슨 일이지?"
"일은요. 그저 손님들 얼굴 뵌 지 오래돼서 그렇지요. 불편함이 없는지 말씀도 듣고, 또 드릴 말씀도 있고."
이안은 몰린 일행을 '손님'이라 칭함으로써 서로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 이곳은 이안의 공간이라는 것.
맥이 비아냥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빠 보이던데. 퍽이나."
"아. 로만드로 님께 들으셨습니까?"
이안의 물음에 맥과 드고르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로만드로가 그들을 동등한 동료라 생각한다면, 당연히 굴라의 발견을 공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불청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이안이 함구령을 내린 건 저택 식구들이지, 로만드로는 아니었다.
"크흠. 아직일세."
"이런. 실례했습니다."
로만드로는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민망한 헛기침을 해댔다. 맥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식당 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들어왔다.
"몰린 경도 중앙에 보고서는 올려야 하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요. 겨울을 날 새로운 작물을 발견했습니다."
거창한 게 아니기는, 구석에서 듣던 베릭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바리엘의 대기근을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로만드로와 떠들어대던 게 눈에 훤했다. 그는 이안이 세 남자와 얘기하는 사이, 사용인들에게 눈짓했다.
"작물? 설마 그게 굴라라는 건 아니겠지?"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래. 모를 리가. 천하의 둘도 없는 개 잡풀을 저택에서 돈 주고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메렐로프에서도 사람이 올 정도이니, 브라츠에서는 귀머거리도 알 것이다."
맥은 조금 흥분한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몰린이 힐끔거리며 자중하라는 시선을 보내자, 입술을 꽉 깨문 채 말문을 닫았다.
"하면, 그대는 알고 있는가?"
맥 대신 끼어든 것은 드고르였다. 한껏 낮고 침착했지만, 적대감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무엇을요?"
"브라츠에서 왜 잡풀을 돈 주고 사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찌 떠드는가를."
"궁금하군요. 뭐라 하더랍니까?"
"이안이 지원금을 거덜 내 영지를 천려족에 팔아먹으려는 속셈이라 하더군."
"호오. 참신합니다."
이안이 가볍게 웃었다. 일리가 영 없는 건 아니었다. 자문관을 비롯해 황궁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브라츠가 주저앉는다면 제일 큰 반사 이익은 천려족이 얻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브라츠를 먹을 생각이었으면, 경들이 도착하자마자 속내를 보였을 것입니다. 무엇 하러 식량 축내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뭐라고? 축내?"
"맥. 언성을 낮추게."
"그리고 이리 열심히 재건하지도 않았겠지요. 누군지 모르겠으나, 허튼 소문을 내고 다닌다면 우방과 저에 대한 모욕으로 엄벌을 받게 될 거라 전해주십시오."
이안은 지그시 맥과 드고르를 쳐다봤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 영지민들이 의문을 품을 순 있어도 반발심을 갖고 있진 않을 터였다. 우선은 천려족과 이안의 인식이 상당히 좋았고, 무엇보다 영지가 망한다고 해서 그들이 망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르가가 죽었다고, 뭐가 바뀌었나?
맥과 드고르가 내고 다니는 소문임이 분명했다. 이안의 경고에, 침묵하던 몰린이 입을 열었다.
"…자네. 굴라에 대한 인식이 어떤 줄 모르는가?"
독성이 있는지라, 민가에서는 보이는 족족 뽑아버리는 식물이었다. 그 때문일까? 도심에서 굴라는 오물이 쌓여있거나, 하수구 등의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볼 수 있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만, 로만드로 님께서도 즐겨 드실 정도이니 다들 좋아라 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조금 아쉽다는 미소를 덧붙였다.
"한데, 몰린 경. 기억 안 나십니까? 우리, 이 문제에 대해 얘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요."
제61화. 소문
"…얘길 나눴었다고?"
"기억 안 나십니까? '소문을 이용할 것입니다.'라는 말이요."
이안의 의미심장한 말에, 몰린은 이안과 두 번째 오찬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기아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먹거리라도 고마운 일이라며, 인식 개선을 위한 보급 방식 따위도 서로 나누었다.
"...!"
혹, 그때부터 이 순간을 염두해 둔 걸까?
이안이 덤덤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굴라를 모으는 건 바로 황궁에서 내려온 로만드로 님이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로만드로를 향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궁에서, 황제를 받들며 일하는 자들이였다. 솔선수범하여 굴라를 먹거리로 인정한다면, 인식 개선은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조금 시나리오를 써 보지요. 황궁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대체 작물 연구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굴라는 독성이 강하지만 씨앗만큼은 영양가가 풍부하고 맛도 좋다는 걸 알아내지요. 로만드로 님께서는 이런 정보를 선점하여 굴라를 모은 것입니다."
"자네, 그래도 되겠나?"
"무엇을요?"
"아니...."
"뭐 어떻습니까. 말만 그런 건데. 브라츠의 소문은 황궁까지 닿지 않습니다. 두 분의 펜을 통해서만 전달되지요. 아시지 않나요?"
로만드로는 멋쩍게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그날 말한 대로, 보고서에는 이안의 공치사를 정확히 짚되, 영지민들에게 낼 소문만 그리하라는 뜻이다.
"그것만 소문만 내면 되겠나?"
"그럴 리가요. 연구 결과도 살짝 첨가해야 합니다. 무엇이 좋을까요? 피부와 머릿결이 좋아지고, 무병장수에 효과적이라 덧붙일까요?"
"하하하! 그거 너무 허무맹랑하네."
"뭐인들 어떻습니까. 원래 상대를 유혹하려면 몸집을 부풀리는 법입니다. 그리고 로만드로 님과 몰린 경은 시간을 내어 자주 바깥에서 식사하십시오. 보란 듯이, 굴라로 만든 요리를요. 그리하면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안의 말에 몰린이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쳤다. 자신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거절의 몸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소문에 황궁을 이용하는 것은 당치도 않아. 폐하의 존엄과 관련된 일일세."
하지도 않은 연구 운운하며 굴라를 보급했다가 후에 문제라도 생기면, 저들은 황궁을 원망할 것 아닌가? 나름 타당한 이유였으나, 이안은 공감하지 않았다.
"…분명 그때의 몰린 경은 기근 해결을 지도자의 숙명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리 자잘한 이유로 반대하실 분이 아니었거든요."
"자잘하다니, 자잘하다니! 황궁의 명예가 자잘하다 하였는가?"
"당장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사소합니다!"
거의 처음이었다. 이안이 이리 맞붙어 언성을 높인 것이. 항상 실실 웃으며 되받아칠 뿐이었는데 말이다. 몰린이 주춤하여 입을 벙긋거리는 동안, 이안은 냅킨을 내려놓았다.
"몰린 경.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지금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거절 따위는 거절한다는, 그런 일방적인 통보.
"반대하여 방해할 것이라면 당장 영지를 떠나십시오. 전사들에게 명하여 안내하라 이를 것입니다."
"…이 무슨 무례인가!"
"맥 경. 처지를 확실히 보세요. 지금 누가 무례를 저지르고 있습니까?"
영지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방안을 내놓은 이안과 그저 황궁 사자라는 이유로 주둔하면서 반대하는 몰린 일행.
처지를 확실히 보라는 모욕적인 말에 맥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공작, 백작에 비견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도 귀족 자제 출신이었다. 어디서도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만드로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슬쩍 끼어들었다.
"크흠. 진정하시지요들. 그, 몰린 경. 제가 먹어봤는데, 맛이 상당하덥니다. 생각보다 요리법이 다양해서 식탁이 다채로워질 것입니다."
그때, 식당으로 슬쩍 들어오는 베릭.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은근하게 신호를 보냈다. 마력석을 회수했다는 뜻이다.
"제 뜻은 전부 밝혔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훼방만큼은 용서치 않겠습니다."
"이안, 자네 어찌 그리 건방을!"
"그럼, 다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저는 이만."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로만드로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복도로 나온 베릭이 그의 손에 마력석을 쥐여주었다.
"근데 이안, 너 참 말 곱게 한다."
"무엇이?"
"사람들 앞에서 똥 씹는 것처럼 처먹으면 죽여버린다는 걸 '용서치 않겠다'로 표현했잖아. 고상하다. 고상해."
베릭이 감탄하며 혀를 끌끌 차자, 이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둘은 데르가가 썼던 집무실로 향했다. 조사단이 종이란 종이는 죄다 쓸어갔지만, 마력 용액은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데르가가 했던 것처럼 유리병에 용액을 가득 붓고 마력석을 떨어트렸다.
퐁!
붉은 보석이 빛을 발하며 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한 귀로 들으며 올라온 보고서를 읽어 넘겼고, 베릭은 소파에 벌러덩 누워서는 구룻잎을 씹어댔다.
조금은 평화로운 휴식 시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성격에 일이… 이렇게 넘어가면… 어찌 나올지는, 나는 감히… 예상할 수도 없네.]
사각사각.
웅웅 울리는 세 남자의 말 사이로 이안의 필기음만 조용히 들려왔다.
[앞을 막아선 자가… 비킬 생각이 없고, 돌아갈 수도 없으며, 다른… 길도 없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때였다. 상당히 거슬리는 내용인지라, 이안이 펜을 멈추었다.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베릭 역시 마찬가지. 씹던 것을 멈추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쉿."
[막아선 자를 치우고… 갈 수밖에.]
[…선생님.]
[언제나 방법은 있다네.]
이안이 재밌다는 듯 펜촉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가까이 온 베릭이 엄지를 뒤집어서는 목 긋는 시늉을 했다.
"이거 너 죽이겠다는 말 아님?"
"아아. 그래. 뭐. 나쁜 수는 아니지."
이안이 저들의 입장이었어도 고려했을 선택지였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브라츠 영지를 포기하는 것인데, 몇 달 동안 공들인 이곳을 놓는 것보다 이안의 숨통을 끊는 게 쉽고 편할 터다.
무엇보다 미래를 생각하면 그게 안전하고.
"어떡할까? 따?"
베릭은 담담하게 검집을 들었다. 마치 들꽃을 따겠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일하느라 혼자 있었던 적이 거의 없다. 언제나 베릭과 함께인 것은 둘째치고, 수면 시간 역시 들쭉날쭉하여 낮에 잠깐씩 눈 붙이는 게 다였으니까.
"따? 말아?"
"말아라. 기다려. 이것은 증거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면박을 좀 더 주는 건데."
이안은 웃음을 흘리며 마력석을 꺼냈다. 식당에서의 몰린 일행 얼굴이 더욱 뚜렷하게 떠올랐다. 수치와 굴욕으로 점철된 고귀하신 나으리들의 분노라.
아마 오늘 밤이라도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뭐가 그리 웃겨?"
"아아. 아니, 좀…. 옛 생각이 나서."
그 역시 짧은 시간이었지만, 황제는 황제였으니.
감히 말하건대, 밤중 처소가 얼마나 어두운지와 커튼을 타고 오르는 독전갈의 발소리, 단검을 빼 들고 뛰어드는 자의 눈빛 따위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베릭. 정신을 똑바로 차려줘야겠어."
"난 언제나 제정신인데?"
"조금 더. 말똥말똥하게."
이안은 베릭의 볼을 툭툭 두드리며 경호를 빈틈없이 해달라 부탁했다. 물론, 몰린 일행에게 붙일 눈과 귀 역시 빼놓지 않았다.
* * *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부지. 로만드로는 부하들과 함께 건축 상황을 확인하며 재건을 진행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지라, 부하가 넌지시 점심을 물었다.
"오전 일은 여기까지 하시죠."
"그럴까?"
"로만드로 님! 참나무 남은 것은 어찌합니까?"
"일렬로 모아 길샘마을 입구로 옮기거라. 거기 출렁다리가 끊어졌다 하지 않았나? 아예 고가 다리를 세울 것이니, 게다 쓸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로만드로 님!"
"잠깐 기다리게. 밥은 좀 먹고 하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좀 급해서요. 치우라 하셨던 거대 바위 말입니다. 수소문해 보니 이자 아비의 무덤이라 합니다."
"뭐? 미치겠군."
로만드로는 머리를 쥐어 싸며 부하에게 손짓했다. 어서 안내하라는 뜻이었다. 점심 식사를 놓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이내 뭔가를 한주먹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방금 봤어?"
그걸 흰자로 훔쳐보던 영지민들이 속닥거렸다.
"일할 때마다 자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드시네."
"그러게. 뭔지 물어도 안 알려주시고."
"쯧쯧. 자네들, 아직 못 들었나?"
숙덕숙덕, 한 남자가 아는 체를 하며 끼어들었다.
"굴라 씨앗 아닌가. 굴라 씨앗."
"으에엑? 개똥 같은 소리. 자문관님이 그런 걸 왜?"
"진짜 모르나 보네. 왜, 저번에 저택에서 굴라를 돈 주고 모으지 않았나."
"그랬지."
모집 기간이 끝나서 더 이상 받지 않았지만, 사실 받는다 하더라도 방도가 없었다. 주위에 굴라 씨가 말라버린 탓이다. 아무리 숲 깊이 들어가도 굴라 이파리 하나 볼 수가 없었다.
"그거, 사실은 로만드로 님이 먹으려고 그랬대!"
"미친, 거 말이라도 되는 소리여야 맞장구를 치지!"
"아니, 진짜야. 여기는 변방이라 소식이 늦어져서 그래. 중앙 사람들은 이미 굴라 씨앗을 저기, 땅콩처럼 까먹는다 하더라."
"저거, 굴라 처먹은 거 아녀? 독 때문에 머리가 회까닥한 것 같은데?"
"굴라가 겉에는 독인데, 씨앗은 맛이 아주 좋대. 그, 피부가 탱탱해지고 희어진다 하더만. 중앙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다카더라!"
그쯤 하자, 모여있던 사람들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못 믿겠으면 자문관님께 가서 물어봐. 주머니에 넣고 드시는 게 뭐냐고. 절대 안 알려주지. 저들 먹기 바쁜데, 알려주겠어?"
"그래서 그 돈 주고 굴라를 모으게 했다고?"
"아니면 이유가 뭐 따로 있나? 윗분들이 돈 허투루 쓰는 거 봤어?"
남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이라 하면 피 빨아 먹듯 쭉쭉, 아주 남김없이 잡수시는 분들 아닌가. 그럴 리가 없지. 모두 타당한 이유가 있을 터.
"이안이 천려족에게 팔아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란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 천려족은 곧 있으면 추워서 여기 있지도 못해. 지금도 죄다 빠져서 족장이랑 네르. 네르 그 뭐시기랑 몇몇만 남아있구먼. 거기 부족장이 오늘내일한다지?"
입에서 입을 타고 퍼지는 소문은 한번 옮겨질 때마다 크게 부풀어갔다. 곳곳에 눈과 귀를 은밀히 심어두었던 이안은 드디어 '그 소문'까지 돌자, 이제 됐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알아? '황제가 영생을 위해 먹는다' 하더라. 이게 말이야, 방구야."
"하하! 그래. 말이면 어떠하고 방구면 어떠하겠나? 됐다. 그만하면 됐어. 베릭. 슬슬 다음을 준비하자."
굴라에 대한 호기심이 정점을 찍었다 판단한 이안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제62화. 기회를 노리다
"오늘따라 저택이 분주하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나무를 팔러온 나무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자문관의 부하는 돈 계산을 하던 와중, 슬쩍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아니. 평소랑 똑같은데."
"그렇습니까? 하하...."
거짓말. 나무꾼은 어색하게 웃으며 코를 긁적거렸다. 전 백작이 죽고 나서는 사용인 수가 확 줄어들어 저택은 언제나 조용했다. 자문관과 그 일행이 합류한 이후에도 저택 불이 모두 켜진 날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뭐가 좀 달랐다.
"이건 좀 젖었는데?"
"새벽이슬에 젖은 것입니다. 이런 건 아침 해 뜨면 바로 마릅니다."
"다 해서 동화 세 닢."
"감사합니다."
부하는 영수증을 끊듯 뭔가를 적더니, 주머니에서 동화 세 닢을 꺼내주었다. 나무꾼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잠깐."
"네?"
"시간 좀 있나? 지금 정원 정비를 하고 있는데,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나무가 있어. 오래된 거면 내버려 두고, 아니면 베려고 하네만."
"아아. 그럼요. 맡겨만 주십쇼!"
"따라오게."
부하의 말에 나무꾼이 주머니를 매만졌다. 바로 내려가서 술 한잔하려고 했는데, 뭐. 상관없겠지. 오히려 수고비를 더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저택이 정신없었구나.'
어쩐지. 평소에는 있나 싶을 정도로 안 보이던 사용인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라.
나무꾼은 부하의 뒤를 따라 저택을 끼고 돌았다. 잡초에서 잔디로 바뀌는 바닥. 일평생 브라츠에서 살았지만, 이 경계를 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쪽이네."
'헉!'
나무꾼은 꺾어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정원에 숨을 들이켰다. 꽃과 수풀, 나무 따위가 아름답게 어우러졌을 거라 예상했던 것이 단박에 부서졌다.
농장을 차린 것처럼 일렬로 쭉 심겨 있는 풀떼기.
굴라 모집 때 한몫 톡톡히 챙긴 나무꾼은 그게 뭔지 바로 알아챘다.
'…굴라를 기르고 있잖아? 그것도 온실까지 세워서.'
진짜다. 시중에서 나도는 소문들이 진짜였다. 부하가 종이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뭣하나?"
"아. 죄, 죄송합니다. 어떤 나무죠?"
"이걸세."
나무꾼은 부하의 질문에 상세히 대답하면서도, 뒤쪽 굴라 밭에 정신이 뺏겨있었다. 한편, 복도에서 창문으로 그걸 내려다보던 이안이 물었다.
"몇 명이지?"
"식료품 떼오는 상인들 다섯에, 나무꾼은 두 명째고, 의상실이랑 저기… 어디더라? 아무튼, 뭐 열 명은 넉넉히 보고 갔지."
"식량 보급은?"
"말한 대로 줄였어. 절반으로."
"수고했다."
오찬에서 이안이 말했던 보급 방법은 두 가지였다.
소문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허술한 경비를 세워두는 것.
귀한 걸 탐내는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게 핵심이었다. 나눠 주던 보급까지 줄였으니, 굴라에 대한 갈망은 더욱 짙어지게 될 터.
"이제 대충 어중이떠중이 하나 세워두면 되나?"
"아니. 로만드로의 부하들에게 불침번을 서가며 지키라 해. 완벽하게 무장을 한 채로."
저번에 말했던 것과 조금 다른 지시였다. 정원을 내려다보던 베릭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으나, 이안은 그 시선을 느끼며 웃을 뿐이다.
"다른 영지나 중앙에서는 그런 방법을 써도 된다. 하지만 여기는 아직 공식 집권자가 없는 빈 영지지. 도둑과 약탈이 횡횡하게 되면 그건 곧 치안으로 직결되며 저들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린다. 그건 곧 영지의 질을 떨어트리는 것과 같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특히 저택이 털리면 그자들은 도둑질을 쉬이 생각하여 제 이웃의 집 역시 드나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떡하라고? 진짜 구경만 시키게?"
"베릭. 네 걱정이나 하거라. 당분간 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
"엥? 나? 나는 왜?"
베릭의 물음에 이안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톡톡, 창문을 두드리고 집무실로 올라갔다.
* * *
"이쪽이 맞나?"
"맞는다니까!"
"자네 목소리 좀 죽이게. 경비 오겠어!"
새벽의 어둠을 틈타 저택으로 접근하는 두 남자.
보급이 줄어 먹을 게 똑 떨어진 마당에 저택에는 굴라 천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어둠을 틈타 숨어들 수밖에.
"끄응."
"아이고, 더럽게 무거워라."
"빨리 좀 올려봐."
높다란 저택 담을 겨우겨우 넘은 도둑들. 듣기로는 건물 안쪽이 아니라 바깥 정원에 굴라 밭이 있다 하였다. 귀한 것이니 몇 개만 훔쳐 중앙으로 나르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
"여, 여기인가?"
도둑들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정원 쪽을 살폈다. 온통 어두컴컴하지만, 바닥에 뭔가가 잔뜩 심겨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들은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조심스럽게 서리를 시작했다.
"세상 참, 이게 금덩어리인 줄도 모르고 저택에 갖다 바쳤다니. 쯧쯧."
"입 좀 닥치고 담게나."
"한 자루 더 들고 올 걸 그랬어."
속닥속닥, 도둑들이 낄낄대며 굴라를 뽑아내는 동안, 로만드로의 부하들은 한숨을 내쉬며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한 놈 잡아서 지하 감옥에 처넣고 오는 길인데, 나오니까 또 잡것들이 있네?
"어이-!"
"히이익!"
"으아아악!"
부하가 담뱃불을 붙이며 소리치자, 도둑들은 기겁하며 뒤집혔다. 굴라를 공중으로 던지며 정원을 내달렸다.
"어딜 가? 사람들 다 깨겠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침입한 줄 알겠어?"
하지만 어쩌겠는가? 얼마 못 가 목덜미가 붙잡힌 도둑들은 무릎 꿇고서 미친 듯이 손을 빌어댔다. 부하 둘이 밧줄로 도둑 팔을 묶고 있을 때였다.
"다들 고생이 많군."
"아. 이안 님."
이안이 베릭과 함께 후드를 걸친 채로 나타났다. 도둑들은 딸꾹질해 대며 그를 올려다봤다. 어둠에도 가려지지 않는 저 금안은 무엇인가?
"도둑질하러 온 것인가?"
"아, 저기 그게...."
"잘못했습니다! 밥! 밥 빌어먹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것이...."
이안은 도둑들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조금 기다릴 것이지. 어찌 그러하였나."
"네?"
"이자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네. 이안 님. 오늘도 호위는 따로 안 가십니까?"
"그래. 베릭 하나면 충분하다."
이안과 저택의 부하들은 당최 알 수 없는 대화만 나누었다. 어리둥절한 도둑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는 동안, 이안은 베릭과 함께 저택 정문을 나섰다.
벌써 이틀째 이어지는 외출이었다.
"하아암."
"낮잠 좀 자두라니까."
베릭은 대답 대신 등에 진 굴라 자루를 두드렸다. 이안 만큼이나 저도 바빴다는 걸 티 내는 것이다.
잠시 후, 둘이 도착한 곳은 외곽의 민가였다.
"저쪽 집이 다둥이네라던데."
"그래? 그러면 저쪽 먼저 가지."
어둑한 시간인지라, 불을 꺼져있었다. 이안은 마당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두드렸다.
똑똑.
"있는가?"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똑똑.
"좀 나와 보시게나."
그러자 창문으로 희미한 불빛이 켜졌다. 이내 푹 잠긴 목소리의 남자가 물어왔다.
"뉘시오?"
"이안일세."
"…누구?"
"이안."
끼이익.
비몽사몽 한 터라,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보다. 문 열리는 속도가 한참이나 늦다. 끔뻑끔뻑, 이안을 보던 남자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움찔거렸다.
"이안 님?"
"쉬이. 자식들 깨겠네."
"어,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이안을 알고 있었으나, 이안이 그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그저 평범한 영지민이었으니까. 친분 없는 자가 자식들을 논하니 놀랄 수밖에.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러니 자연스럽게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남자의 얼굴이 두려움이 얼핏 지나자, 이안은 말없이 베릭의 포댓자루를 헤집었다.
스윽.
"무, 무엇입니까?"
"굴라일세."
"네?"
굴라 씨앗 한 자루였다.
"소문처럼 명약은 아니지만, 자문관님이 즐겨 드시는 것도 사실이고 맛과 영양이 좋은 것도 사실이네. 지금은 엄격하게 저택에서 통제하고 있지만 내 곧 이것을 영지에 자유로이 풀 것일세. 자문관님께 계속 건의하고 있어. 그때까지 잘 버티고, 혹여 이웃이 원한다면 넉넉히 베풀게나."
"이, 이안 님!"
"자식이 다둥이라 하여 먼저 내주는 것일세. 그대 말고 갈 집이 산더미이니 오래 못 있겠어. 씨앗만 먹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영지에서 이제 그것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요."
"맛만 조금 보고 나머지는 심게나. 씨앗 하나에서 열 개 이상의 굴라가 난다네."
이게 무슨 오밤중의 선물이란 말인가! 남자는 감격해서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안이 어깨를 툭툭 치며 마당을 나서자, 따라 나와 연신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옆집 다 깨겠어."
흡! 이안의 말에 남자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이안이 사라지자, 조심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렴풋했던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이안. 너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잘 알겠는데. 당장이라도 눕고 싶다는 표정이구나."
베릭은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매만졌다. 굴라 나눠주는 것 따위를 오밤중에, 그것도 직접 이리 돌아다니며 하다니. 이안은 베릭이 이해 못 하는 것을 이해했다.
"황궁 사자들이 굴라를 독식하고 재배하는 동안, 보급품은 줄어들지, 당장 겨울의 혹독함을 걱정하는 밤이었을 게다. 그런데 내가 이리 굴라를 나눠주면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이겠느냐?"
신이 보내준 은총이라 느껴지겠지. 그렇다면 이내 감사를 느낄 것이고, 그것은 곧 이안에 대한 지지를 가져오게 될 터다.
"아아아. 피곤하다구."
"어서 움직이거라. 다음은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원래 소문은 애들이 잘 내거든."
다둥이네 집처럼 홀로 사는 주택도 있지만, 이안의 어미 필리아가 살았던 사창가 밀집 구역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무슨 일이야? 밤에 잠도 안 자니?"
"엄마, 엄마. 이안 님이 왔다는데?"
"뭐? 이안이 왜?"
"굴라를 나눠주신대! 굴라!"
낮과 밤이 바뀌어 사는 사람이 많다 보니, 다른 곳보다 훨씬 시끌벅적했다. 이안은 가져온 굴라를 나눠주며 아이들에게 한껏 경고하듯 속삭였다.
"브라츠 사람들 먹기에도 모자란 것이니 외지인에게는 절대 주면 안 된다. 알겠지?"
"네! 저 지금 먹어도 돼요?"
"나도 먹을래!"
"그래. 줄을 서거라. 더 주마."
이안은 굴라를 타가는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이안과 베릭을 은밀히 따라붙던 한 남자.
스윽.
남자는 새벽달이 질 때, 그들이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간 차를 두고서 그 역시 저택으로 들어갔는데, 당도한 곳은 별채의 몰린 일행 방이었다.
끼익.
"왔는가?"
"그래."
남자는 드고르였다. 그는 후드를 침대에 벗어던지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기다린 맥이 채근했다.
"밤중에 나가서 무얼 하던가?"
"굴라를 나눠주더군. 그것도 아주 대놓고."
"뭐?"
드고르의 말에 맥이 와인을 홀짝거렸다. 창가에 앉아 있던 몰린 역시 웃음을 흘렸다.
"그놈 참…. 맹랑한 구석이 있다."
분명 로만드로는 굴라의 발견에 이안의 이름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황궁의 치하는 치하대로 다 챙기고, 영지 영지민들의 지지도 역시 빠짐없이 챙기는 행태라.
"보아하니 당분간 새벽에 베릭과 둘이서만 나설 것 같습니다."
드고르의 말에 몰린이 푹 꺼진 눈을 돌렸다. 어둠을 틈타 이안의 목을 노리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제63화. 골목에서
"에. 한번 봅시다."
로만드로는 코를 긁적거리며 서류를 확인했다. 그 맞은편에 앉아 함께 종이를 뒤적거리는 이안과 카칸티르. 저녁 식사 후, 하루 마무리 회의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이안에게 물었다.
"길샘마을 안쪽은 재건할 것이 없는가?"
"네. 전투 당시 다리가 먼저 끊어지는 바람에 고립되어 피해가 없었다 합니다. 다리 재건이 진행 중이니, 이것만 완료하면 거의 끝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제 채석장 주문을 좀 줄이지."
브라츠 영지에서 전투 흔적을 지우는 것, 큰 숙제 하나를 넘긴 것 같아 로만드로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계속 물었다.
"굴라 보급은?"
"슬슬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보급했던 영지민들을 통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합니다. 메렐로프 쪽으로 흘러가기 전에, 공표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군. 오늘도 나가나?"
"사흘 정도만 더 할 생각입니다."
"낮에도 일해, 밤에도 일해. 마법운용자는 남들보다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하더만, 자네는 그게 체력인가 보오."
뜻밖의 칭찬에 이안이 놀라며 웃었다. 초반, 브라츠에서 지낼 때는 외출 한번에도 골골대며 쓰러졌던 이안 아닌가? 이제는 대사막을 오가며 조금씩 단련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지. 음, 전 브라츠 영지 내의 굴라 재배와 유통 및 섭취는 자유롭되, 외부와의 매매는 무조건 저택을 통해서 할 것."
정확히는 황궁 자문관을, 그리고 더 정확히는 이안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굴라 특성상, 분명 브라츠에서 독식하는 기간은 이번 겨울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워낙에 번식이 빠르고 흔한 작물인지라, 인식만 개선된다면 곧장 바리엘 전역에서 소비될 터.
로만드로는 문장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메렐로프라는 조건을 붙여볼까...."
"좋지 않습니다. 그쪽에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니까요.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불리합니다."
"흠. 사실 먼저 시작한 것은 그자인데."
"원래 때린 자는 기억을 못 하는 법이지요."
"뭐. 그렇긴 하지. 하면 관련 벌금은...."
상세한 내용을 조율하다 보니, 어느덧 달이 하늘 중앙에 걸렸다. 이안은 시계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하면 되겠습니다.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 네르사른 님."
이안의 말에 카칸티르 뒤에 서 있던 네르사른이 손을 들었다. 회의 내내 비교적 조용히 있던 그였다.
"대사막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사막에서요?"
"부족장님의 건강이 다시 악화하였다고 합니다."
이안이 주었던 실라스크로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던 노인이었다. 회복세에 들어섰다 하여 다행이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죽음이 등 떠미는 것을 버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여, 남은 실라스크를 모두 쓰기로 했습니다."
"이런."
"심는다고 하여도 정보가 없으니 어떻게 재배할지, 그리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요."
"잠깐. 나도 좀 끼워주지 그러나? 부족장은 누구고 실라스크는 또 무슨 말인가?"
가만히 경청하던 로만드로가 손을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모르는 얘기였다. 특히 실라스크라는 것은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이안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서, 집시의 병을 고치려면 실라스크라는 붉은 꽃이 필요한데 마침 저한테 그게 있었지 뭡니까. 천려족은 그중 하나로 고비를 넘기고, 나머지 하나는 후대를 위해 심을 것인가 아니면 윈첸 부족장님께 쓸 것인가 고민하였습니다. 그 결정이 난 것이지요."
"실라스크? 처음 들어보는데."
"정말 모르십니까? 한번 피면 지지 않는 붉은 꽃입니다."
황궁에서 온 자문관이 모를 정도면 말 다했다. 사실 전생에 황제였던 이안 역시 생소한 것이었으니, 바리엘에서는 찾기 어렵다고 보는 게 맞겠지.
"우리가 그리 결정한 것에는 브라츠의 현재 상황에 제일 큽니다. 저희의 장례 풍습을 알고 계시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족장이나 부족장이 죽으면 일족 전체가 1년간 칩거에 들어선다. 가족이 죽으면 해당 가족만 그리하겠지만, 우두머리는 모두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윈첸처럼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킨 자라면....
"로만드로 님."
"응?"
이안은 테이블을 가만히 두드리다가 그를 불렀다. 그간 둘러 둘러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할 때가 된 것이다.
"황궁으로 올린 보고서에 답신이 왔습니까?"
"아니. 아직 한 건도 오지 않았네."
"저는 마리브 황자 저하의 답신을 여쭙는 겁니다."
매일매일 전서구를 날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1황자는 분명히 몰린 일행을 견제하는 중이었으며, 이는 게일 2황자를 견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브라츠의 재건 따위에만 관심 있을 리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딱 한 번 왔었지."
"실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것 아니었네. 그저 영지의 상황을 꼼꼼하게 전달하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로만드로는 이안을 힐끔거렸다.
"자네가 마력운용자라는 걸 보고하였기에, 잘 살피라는 말씀이었어. 크흠. 진짜 그것뿐이네. 별거 없지?"
이안이 추측하는 바에 한하면, 게일의 주축 중 하나가 마법부였다. 반란 실패로 안 그래도 귀했던 마법사들이 대거 숙청되는 사건을, 이안은 기억했다. 그러니 이안이 마법운용자라는 것은 마리브 입장에서 조금 곤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마리브도 이러한 세력 구도를 파악하고 있을 테니, 이안을 게일의 편이라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문관님. 보시다시피, 저는 몰린 일행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음. 그래. 안다네. 그래 보여. 허허."
로만드로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이안이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긴장되는 듯 보였다.
"마리브 황자 저하께서는 브라츠의 새로운 영주를 몰린 일행과 관계없는 자로 올리고 싶어 하실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윗분들끼리의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저 또한 그 뜻을 함께합니다. 자문관님."
"사실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네."
"짐작하셨다니 말씀하기 편합니다. 로만드로 님, 중앙으로 복귀하고 싶어 하시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서둘러 영주가 세워진다면, 자문관님 역시 좋은 일이겠지요."
"이안 자네...."
"저를 영주로 추천해 주십시오."
영주 임명권은 황제의 소관이지만, 계승 1순위이자 실세인 1황자의 추천 역시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제아무리 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하더라도, 이안이 마력운용자인 이상 부질없는 제한이었다. 바리엘의 발전을 위하여, 누군가는 그를 붙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대사막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새 영주가 이전 가문의 핏줄인 저를 가만 놔둘 리 없지 않습니까. 또한, 황궁에서는 노예라는 신분으로 제 능력을 독점하려 들 겁니다."
"그것도 그러하지만...."
"제 안전과 브라츠의 평화를 지킬 유일한 방법입니다. 황궁에서 신경 썼던 민심 역시 저보다 부합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다, 보고서에 빼곡하게 적혀 올라간 일 처리는 괄목할 만한 능력이었다. 굴라의 발견 역시 마찬가지다. 제국의 대기근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이런 변방의 영주 자리 따위야 솔직히 부족한 처사였다.
물론 아직 거기까지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로만드로는 결심했다는 듯 궐련을 꺼내물었다.
"좋아. 내 솔직하게 얘기하지."
"말씀하십시오."
"마리브 저하께서는 자네와 몰린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네."
제삼자의 시각으로, 이안은 몰린을 통해 제 아비를 밀고하였으며 그 여파로 현재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몰린 사람을 영주로 세우기 위해 발판을 만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력운용자. 황궁으로 들어온다면 필시 마법부에 소속될 터. 마법부 장관 웨슬리가 게일의 여인인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떻게 놓고 봐도, 이안은 게일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 이유라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어떻게?"
"내막은 마리브 저하를 뵙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상세하게 말한다고 한들, 글자로만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몰린 일행과 제가 진실로 반대되는 길에 서 있음은 당장이라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죽음으로써.
이안의 담담한 눈빛을 읽은 로만드로는 뒷골이 살짝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말도 없었거늘 어찌하여 아슬아슬한 기분이 드는 건지 원.
"그, 마리브 저하께는 내가 그리 전해보겠네."
"감사합니다."
사실 로만드로도 내심 이안이 적임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출신과 상황이 이러해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꺼내는 순간, 알 수 없는 정치의 소용돌이게 직접 몸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로만드로는 그저, 빨리 재건을 마치고 중앙의 본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리따운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는 그 집으로!
"그럼, 오늘은 그만."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지?"
"혹시 중앙에 실라스크를 취급하는 상단이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제국의 수도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분명 정보를 찾고자 한다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로만드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한번 확인해 보지."
"감사합니다."
"밤이 너무 깊었어. 자네도 적당히 하고 누움세."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지요."
끼익.
로만드로와 네르사른이 자리를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이안은 뻐근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바깥의 베릭을 불렀다.
"베릭. 오늘은 일찍 나갔다 들어오자."
"피곤하지?"
"그래. 눈이 자꾸 감겨서 안 되겠다."
이안은 웃으며 후드를 어깨에 둘렀고, 이내 회의실 등불을 모두 꺼버렸다. 이날 따라, 달조차 뜨지 않는 칠흑의 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