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짝퉁 (3)
로이스의 눈에 살짝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아쉽네.'
250년.
보통의 인간에게는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사라졌을 거라고.
그래도 그들의 후손 혹은 흔적 정도는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나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깊게 밀려든 공허함에 로이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분에 익숙해지는 것밖에 답이 없네.'
평생 외부와 단절한 채, 드래곤끼리만 교류하면 살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도 봐라.
켄드릭, 타니아, 라비나.
과거와는 새로운 인연이 생겨났다.
다른 생명체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드래곤인 만큼 언젠가는 이들도 자신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게 될 날이 올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로이스는 오래전부터 다짐해 왔다.
'현재를 즐기자.'
현재의 시간에 충실해 아낌없이 즐기자고.
나중에 시간이 흘러 모두가 사라졌을 때, 아쉬움보다는 당시를 회상하는 즐거움이 더 클 수 있기를.
그것이 드래곤으로서 로이스가 깨달은 시간을 흘려 보내는 방법이었다.
겨울 대륙 명소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세이렌의 쉼터.
캐리와 번트가.
과거의 인연은 추억으로 간직할 뿐.
로이스는 진한 아쉬움을 시원하게 털어 냈다.
"아무래도 여기도 글른 거 같다. 다른 숙소나 잡으러 가자."
다시금 밝게 웃은 로이스는 다시 꺼낼 일 없는 번트가의 반지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다시 일행을 이끌고 번화가로 향한 뒤, 비싼 숙소에서 루프트하겐의 첫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넌 정말 숙소에 있을 거야?"
"넵! 저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다른 일행이 모두 나간다고 했을 때 유일하게 숙소에 남겠다고 한 라비나.
로이스가 혀를 차며 라비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쯧. 그러게, 가출은 왜 한 거냐?"
"가, 가출이라뇨! 추, 출가라고 해 주세요!"
"집에 허락도 안 받고 나온 거면 가출이지."
"...."
로이스도 라비나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방구석에 틀어박히려는 이유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루프트하겐을 돌아다니다가 가문의 사람들을 만날까 싶었겠지.
"뭐, 알았으니까 나비나 잘 지키고 있어."
"…제가 지킬 게 있나요. 하루 종일 잠만 잘 건데...."
라비나의 시선이 침대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웅크린 나비에게 닿았다.
아마 저대로 건들지 않으면 이틀 뒤에나 일어나리라.
그렇게 라비나와 나비를 남겨 둔 일행은 숙소 밖으로 빠져나왔다.
거기서 일행은 또 둘로 나뉘었다.
"난 가을 대륙으로 가는 배편을 구하러 간다."
로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브로가 없으니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맡길 만한 이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애들에게 맡기기에는 영 불안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내가 하고 말지.'
단념한 로이스가 한쪽으로 빠졌다.
그러자 타니아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그럼 전 선생님 따라갈게요!"
자신에게 합류한 타니아를 흘낏거린 로이스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닿기 무섭게 쌍둥이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그럼 난 놀다 올게!"
"나도 만선기원제 구경하고 올란다!"
쌍둥이의 대답에 로이스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켄드릭에게 닿았다.
"흠흠, 그, 그럼 저도 쌍둥이님들과 함께...."
슬쩍 눈치를 보며 쌍둥이 쪽으로 붙은 켄드릭.
로이스의 한숨이 짙어졌다.
"핀."
"네!"
"네가 같이 따라가 봐. 얘들 또 허튼짓하면 바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쌍둥이 쪽 보호자로 핀이 따라붙고.
"이따 봐!"
"나중에 봐요!"
곧장 볼일을 보는 쪽과 놀러 가려는 쪽으로 일행이 둘로 나뉘어 갈라졌다.
물론, 볼일을 보러 가는 쪽에도 마음이 꽃밭에 가 있는 이가 있었으니.
"선생님, 선생님!"
"왜."
"그냥요."
"...."
"헤헤."
실로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로이스와 단둘이 있게 된 타니아는 그저 그와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로이스의 뒤를 쫓는 타니아.
그들의 기묘한 동행은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나오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타니아가 계속 어깨너머로 흘낏거리자 로이스가 피식 웃으며 표 하나를 건넸다.
타니아가 표를 받아 들고 신기하다는 듯 만지작거렸다.
"이틀 뒤가 가장 빠른 배편인가요?"
"그렇다고 하네."
"신기하다. 내가 배를 타는구나."
"앞으로 이것저것 많이 해 볼 건데 일일이 다 놀라지 말라고."
"하지만 신기한 걸 어떡해요."
그녀의 순진한 미소가 로이스마저 미소 짓게 만들었다.
로이스의 미소를 마주한 타니아가 살짝 볼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사이 로이스가 주위를 보았다.
"그만 움직이자."
"어디로요?"
"애들 찾아서 합류해야지."
그의 이야기에 타니아가 흠칫거렸다.
그녀의 눈에서 '벌써요?'라는 속내가 적나라하게 읽혔다.
"그, 그러지 말고 저희도 저희끼리 놀러 가요!"
"애들이랑 합류해서 놀면 되잖아?"
"여, 여럿이서 노는 것보다 둘이 돌아다니는 게 덜 복잡하잖아요!"
타니아는 허둥거리며 로이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로이스는 귀엽다는 듯 피식거렸다.
'잠깐은 같이 어울려 주지, 뭐.'
로이스는 못 이기는 척 타니아의 손에 끌려가 주었다.
이후 둘은 루프트하겐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비록 만선기원제의 진짜배기 행사는 저녁부터였지만, 그럼에도 제법 즐길거리가 많았다.
덕분에 타니아도 로이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을 넘어 오후를 향해 가니, 점점 거리에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많아지네, 슬슬 애들이랑 합류하자."
"네...."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타니아도 로이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더 사람이 많아지면 일행을 찾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퍽-.
누군가가 뒤돌아서는 타니아의 어깨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크억!"
튕겨 나간 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호리호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니아보다 큰 성인 남성이었다.
타니아가 깜짝 놀라 쓰러진 남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윽!"
어디가 불편한지 살짝 눈을 찡그리고 있는 사내.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따라 시선이 타니아의 얼굴에 향한 순간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아...."
무언가 넋이 빠져 버린 듯한 얼굴.
그와 함께 로이스는 알 수 있었다.
사내가 눈을 찡그린 게 아니고 단순히 눈이 엄청 가늘다는 것을 말이다.
'우와…엄청난 실눈.'
살면서 이 정도의 실눈을 가진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딱 봐도 놀란 거 같은데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의 실눈이라니!
로이스가 난생처음 보는 실눈에 경악하는 사이 타니아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사내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억?!"
연약해 보이는 여인이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자 쑥 딸려 올라가는 육신에 사내가 놀라 기겁했다.
가볍게 일어선 그는 놀란 표정을 빠르게 정돈했다.
"아하하, 고, 고맙습니다. 제, 제가 잠깐 방심을 해서."
"아뇨, 제가 죄송하죠."
"아닙니다! 이리 연약하신 분께 함부로 부딪힌 제 잘못이지요!"
"그래도 그쪽은 넘어지기까지 했는데...."
"너, 넘어진 건 그냥 제가 다리가 꼬여서 그런 겁니다! 예! 그, 그러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사내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연약? 누가?'
분명 외형적으로 보면 타니아는 연약해 보였다.
하지만 세상 어떤 연약한 여인이 단순히 어깨빵으로 성인 남성을 날려 버리겠는가.
더군다나 누가 뭐래도 타니아는 2티어 최상급에 오른 강자였다.
사람이 아니라 황소가 와서 들이받아도 오히려 튕겨 나가는 건 황소이리라.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내는 여인의 어깨에 부딪혀 나가떨어진 게 창피한지 볼을 붉혔다.
"괜찮으신 거죠?"
"다, 당연하죠! 그, 그럼 전 이만!"
사내는 또 타니아가 말을 걸까 싶어 후다닥 자리를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타니아.
"아!"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그녀가 다급히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뭐 하냐?"
로이스의 물음에 타니아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보통 소설에서 보면 이렇게 부딪히고 나면 소매치기를 당하잖아요?"
타니아는 혹시 자신이 도둑맞은 게 있나 싶어 꼼꼼히 주머니를 뒤지다 심각한 얼굴로 소리쳤다.
"내 배표!"
"…네 왼손에 있잖아?"
"아, 그렇네요."
손에 들고 까먹은 그녀가 푼수처럼 헤헤 웃어 보였다.
로이스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니 은근슬쩍 고개를 돌리는 그녀.
"따, 딱히 도둑맞은 거는 없네요."
"네가 퍽이나 소매치기를 당하겠다. 네 경지에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 마라."
"…그래도 소, 소설에서 보면 절대 고수도 막 소매치기당하고 그러던데...."
"그 소설 제목이 뭐냐? 고증이 잘못된 거 같은데?"
"...."
타니아가 다시금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러다가 그녀가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어? 이거… 아까 그 사람이 흘리고 간 거 같은데요."
"뭔데?"
로이스는 타니아가 건네준 물건을 받아 들었다.
사내가 떨어뜨리고 간 물건.
그것은 일종의 전단지였다.
얇은 종이에는 휘황찬란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 * *
겨울 대륙 무역로의 중심지 루프트하겐에서 펼쳐지는 최고의 경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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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느낌표가 대체 몇 개야?'
모든 문장마다 느낌표가 붙어 있었다.
심지어 밑으로 내려갈수록 느낌표가 많아졌다.
한편 경매회라는 명칭이 로이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경매회?'
거기에 마치 홈쇼핑에서나 자주 볼 법한 문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니 흥미가 가는 것도 당연했다.
'요즘은 경매를 이런 식으로도 홍보하는 건가?'
제법 재밌지 않은가?
피식 웃은 로이스가 전단지를 돌렸다.
그러자 뒷장에 적힌 빼곡한 글자들.
'많네.'
새로 등록된 물품의 개수가 생각보다 엄청 많았다.
혹여 괜찮은 게 있나 싶어 쭉 살피던 로이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어?"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어라?"
하지만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몇 번을 봐도 적혀 있는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어째서 이게 여기 적혀 있는 거지?
로이스가 혹시나 해 타니아에게 전단지를 넘겼다.
"선생님?"
"타니아, 이거 보여?"
로이스가 자신이 본 문구를 가리켰다.
"네? 네, 보여요."
"읽어 봐."
타니아는 로이스가 대체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로이스가 가리키는 문구를 읽었다.
"세이렌의 눈물?"
"…그렇지? 네가 보기에도 세이렌의 눈물이라고 적혀 있지?"
"네, 그렇게 적혀 있네요. 그런데 그게 왜요?"
"이, 미친!"
난데없이 욕설을 내뱉는 로이스를 보며 타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스의 시선은 경매회의 전단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 경매회에서 세이렌의 눈물이 나온다고?'
어째서?
왜?
세이렌의 눈물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로이스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내가 가진 세이렌의 눈물은 뭐지?'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원작에서 세이렌의 눈물이 발견된 시기는 지금보다 조금 더 이후다.'
로이스의 뇌리로 과거의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그게… 세이렌의 눈물이라고?'
'그래!'
'진짜? 진짜, 진짜?'
'어, 진짜다!'
'…가짜 아니고?'
'가짜라니! 국가 공인 검증사에게 직접 확인받은 물건을 뭘로 보고!'
그 당시 캐리가 당당히 세이렌의 눈물이라고 말했을 때, 자신도 놀라지 않았던가.
이게 여기서 왜 나오냐고.
아직 나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하지만 당시 캐리가 너무도 당당하게 진품이라고 주장하기에 그러려니 넘어갔었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세이렌의 눈물이 등장한다면 250년 전보다는 현재일 가능성이 더 높기는 했다.
만약 정말로 경매회에 등록된 저 세이렌의 눈물이 진품이라면?
"캐리, 이 새끼...."
로이스 눈에 어이없음이 깃들었다.
"…짝퉁을 사 온 거야?"
그것도 진품이라고 사기를 당해서 말이다.
205화. 짝퉁 (4)
'짝퉁이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만약 나한테 있는 세이렌의 눈물이 진짜가 아니라서 지금까지 내가 비밀을 밝혀내지 못한 거라면?'
솔직히 의심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세이렌의 눈물을 얻고 무려 250년이다.
그간 자신이 이 목걸이를 얼마나 연구했던가.
그런데 조금의 비밀도 밝혀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게 진짜 세이렌의 눈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를 때마다 애써 의심을 털어 냈었는데....
'그간 내가 비밀을 못 찾아낸 게 아니라 이게 짝퉁이라 찾을 비밀이 없었다는 거면… 말이 되네.'
로이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모든 가능성은 전부 열어 두자.'
자신의 손에 들린 세이렌의 눈물이 진짜일 가능성도.
혹은 경매장에 나온 세이렌의 눈물이 진짜일 가능성도.
지금으로서는 모두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로이스가 할 일은 하나였다.
바로 경매회에 참여해 진짜일지 모를 세이렌의 눈물을 손에 쥐는 것.
거기다 운이 좋게도 경매회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그것도 앞으로 1시간 뒤.
'운이 좋은건지, 아니면 운명인 건지....'
마치 세이렌의 눈물이 얼른 자기를 사 달라고 하는 거 같았다.
그가 타니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타니아,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어디요?"
"여기."
로이스의 손에 들린 경매회 전단지가 펄럭였다.
타니아가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둘이요?"
"응, 다른 애들 부르기에는 조금 시간이 애매하네."
그걸로 끝이었다.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타니아.
"가요! 당장 가요!"
그녀가 환히 웃으며 로이스의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힘껏 로이스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둘의 다음 목적지가 경매장으로 결정됐다.
* * *
경매장을 찾는 일을 쉬웠다.
전단지에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가요?"
"그런가 봐."
로이스는 단층 건물에 세워진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데모니아 지하 경매장]
알록달록한 간판.
심지어 무슨 장치를 한 것인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무언가 낯익은 간판의 형태에 로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뭐… 나이트냐?'
주변 인근 상가의 간판과는 확연히 다른 차별성.
전생에 본 나이트클럽의 간판을 연상케 했다.
심지어 건물 앞에 정차된 마차에 경매장 간판과 비슷한 것이 떡하니 박혀 있었고, 경매장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몇몇 사람이 전단지를 나눠 주고 있었다.
'호객 행위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이게 어딜 봐서 경매장이냐?
나이트지.
그리 피식거린 로이스는 타니아를 데리고 경매장의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자 입구에 서 있던 가드로 보이는 인물이 둘을 막아섰다.
"정지."
"...?"
가드는 로이스와 타니아의 전신을 훑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왜요?"
타니아의 물음에 가드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고 답했다.
"여긴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타니아와 로이스의 전신을 다시 한번 훑는 가드.
바로 그때, 그들의 곁으로 한 쌍의 커플이 쓱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본 타니아가 살짝 짜증 난 얼굴로 물었다.
"뭐에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면서 저 사람들은 왜 들어가는데요?"
"저분들은 아무나가 아니니까요."
가드의 이야기에 로이스는 기가 찬다는 눈빛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입구 컷 당한 거야?'
조금 전 들어간 사람들과 자신들의 차이.
그건 바로 복식이었다.
자신과 타니아는 가벼운 여행자 복장이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옷.
하지만 조금 전 입장한 이들의 복장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웠다.
'하긴, 경매장이란 게 돈을 쓰는 곳이니까.'
다시 말해 자신과 타니아는 돈이 없어 보여서 입구 컷을 당한 것이다.
로이스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호객 행위를 했대? 그냥 있는 놈들만 골라서 받을 것이지."
대놓고 들리는 투덜거림에도 가드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팔을 들어 그들을 막을 뿐이었다.
이에 로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이럴 때는 지랄이 답이었다.
바로 돈지랄 말이다.
"아저씨, 사람은 말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그리 말한 로이스가 아공간에서 각종 액세서리를 꺼내 장착하기 시작했다.
팔찌부터 시작해 목걸이, 반지.
한눈에 봐도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액세서리가 하나씩 튀어나올 때마다 가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양팔에 각각 팔찌를 대충 4개쯤 착용하고,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워 넣었을 때쯤.
철벽같던 가드의 팔이 내려갔다.
짤랑짤랑-.
"어때? 이거 비싸 보이지?"
로이스가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결정타.
잘그락-.
로이스의 품에서 나온 토끼 모양의 지갑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딱 들어도 금화가 맞부딪히는 소리.
토끼 지갑을 열어 안을 살짝 보여 준 로이스.
누렇고 반짝이는 내용물을 대놓고 보여 준 그가 골드 하나를 꺼내 가볍게 튕겼다.
척-.
가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골드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동시에 여태껏 굳었던 그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1골드에 사람의 표정이 이리도 달라진단 말인가.
춘풍에 녹은 얼음장처럼 흐물흐물 변한 사내의 얼굴.
말투와 행동거지도 달라졌다.
그는 굽신굽신 고개를 숙였다.
"제가 보는 눈이 없어 귀빈을 몰라뵈었습니다."
"알면 됐어."
"어서 들어가십쇼. 안쪽에 도착하시면 안내해 줄 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가드가 길을 터고 양손으로 안쪽을 공손히 가리켰다.
돌변한 태도에 로이스는 짜릿한 표정을 지었다.
'Flex!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참맛 아니겠어?'
짤랑짤랑-.
로이스가 과하게 팔찌를 짤랑거리며, 보무당당하게 카펫이 깔린 입구를 통과했다.
그 뒤로도 로이스는 한참이나 팔찌와 반지를 빼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내인이 과할 정도로 로이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말하지도 않았건만, 경매장에서 가장 좋은 장소로 데려가 주고.
거기다 상세히 경매에 참여하는 법도 알려 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로이스가 안내인에게 팁으로 1골드를 찔러 넣어 주니 안내인의 허리가 90도보다 더 아래로 숙여지는 것은 당연했다.
바로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타니아가 입을 헤 벌렸다.
"우와...."
"잘 봐 둬, 타니아. 이게 바로 돈의 위력이란 거야."
타니아가 목이 떨어져 나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린 제자에게 좋은 교육을 한 로이스는 뿌듯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둡네.'
지하 경매장이란 이름답게 주변은 매우 어두웠다.
경매에 참여한 이들이 누구인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역시 여기도 숫자로 부르는 건가?'
경매의 기본 규칙은 간단했다.
고객에게 전해진 숫자판만 들면 된다.
'우리는 245번이고.'
로이스가 실실 웃으며 숫자판을 매만졌다.
한편 타니아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미, 밀실이야!'
안내인이 데려온 곳은 앞이 훤히 뚫리기는 했지만, 뒤와 옆이 꽉 막혀 있었다.
오로지 고객만을 위한 사적인 공간.
그러한 사실이 타니아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서, 선생님과 단둘이… 둘이서!'
무얼 상상하는지 타니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녀가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손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
팟!
정면, 경매가 열리는 곳으로 추정된 단상에 빛이 들어왔다.
곧이어 말끔한 정장을 입은 사내가 올라와 고객들이 있는 방면으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저희 데모니아 지하 경매장을 찾아 주신 돈 있는 고객님들께 진심으로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인사에 따른 박수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행자는 개의치 않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오늘도 저희 경매장은 고객님들의 눈을 즐겁게 할 겨울 대륙과 가을 대륙의 진귀한 물건들을 한데 모아 왔습니다. 그럼 더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물건은 하미로우 지역에서 공수해 온...."
진행자의 긴 멘트 도중 하나의 물건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와 함께 한 줄기 빛이 단상의 물건을 비추며 진행자의 뒤쪽에 홀로그램처럼 영상이 떠올랐다.
멀리 있는 고객들을 위한 편의 시스템이었다.
'제대로인데?'
싸구려 홍보, 나이트클럽 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경매장의 시스템은 제대로였다.
최첨단 시스템에 로이스가 감탄하는 사이 첫 경매가 시작됐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가는 50골드, 이후 5골드씩 올라갑니다."
땅-.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들리고.
"134번 55골드, 23번 60골드...."
진행자가 빠르게 입찰되는 금액을 불렀다.
순식간에 골드는 100골드를 돌파했고.
"89번 150골드. 155골드 없으십니까?"
더 이상 입찰되는 금액이 없자 사회자가 망치를 내려쳤다.
"150골드, 150골드, 150골드… 낙찰! 89번 고객님 축하드립니다."
탕탕탕-.
세 번의 호가와 함께 낙찰된 물건이 단상에서 내려갔다.
이후로도 수많은 물건이 올라왔다.
하지만 로이스는 경매를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딱히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네.'
세이렌의 눈물을 얻으려고 왔지만, 괜찮은 물건이 있으면 자신도 입찰을 해 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을 충족하는 물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감에 따라 계속해서 팔려 나가는 물건들.
앞부분에는 가치가 낮은 물건들이 배치된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입찰 금액이 올랐다.
마지막으로 작은 보석이 수백 골드에 팔리자 타니아가 입을 떡 벌렸다.
"와...."
타니아로서는 신기할 뿐이었다.
세상에 수백 골드를 한 번에 턱턱 내놓는 부자들이 이리도 많았다니.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한 타니아에게는 경매장이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로이스와 타니아가 경매를 지켜보고 있을 때.
"자, 그럼 56번째 물품입니다."
사회자의 얼굴에 자신감이 잔뜩 묻어났다.
동시에 단상 위로 하나의 물건이 올라오고.
팟!
진행자의 뒤로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하나의 목걸이였다.
푸른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목걸이.
이를 본 로이스가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드디어 나왔네.'
로이스의 기대에 부응하듯 진행자가 멘트를 이어 나갔다.
"이는 얼마 전 저희 경매장에서 어렵게 입수한 물건입니다. 불리는 명칭은 바로… 세이렌의 눈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400년 전 당대 최고의 세공사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이며, 첫 소유자는 당시 최고의 미인이라 일컬어진 세르모노 왕비였습니다."
단상 위 세이렌의 눈물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자태를 뽐냈다.
"현재 밝혀진 마지막 소유주는 캐리 번트. 이 세이렌의 눈물 역시 번트가의 재산을 정리하는 도중 나온 물건으로, 250년 전 캐리 번트가 직접 의뢰한 진품 증명서도 함께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진품 증명서 또한 당대 최고 감정사의 검증인 만큼 이 물건이 진품이란 것은 확실합니다. 나아가 세이렌의 눈물을 구매하시는 고객님께는...."
딱-.
진행자가 손가락을 튕기니 한쪽에서 사내들이 몇 개의 액자를 들고 올라왔다.
"이 그림들이 같이 증정될 예정입니다."
진행자의 멘트에 따라 뒤의 영상이 진열된 액자를 비췄다.
"비록 망해 버린 번트가에서 나온 작품이나, 이 초상화 속 인물이 바로 당대 최고의 예술인이라 불린 여인입니다. 소장 가치로는 충분할 것입니다."
단상 위에 쭉 진열된 액자를 본 순간 로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에는 세이렌의 눈물이 그의 이목을 잡아끌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을 가로챈 것은 바로 액자 속 남녀.
"저거...."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루시아와 미남으로 성장한 캐리.
그들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모습이 액자 속에 담겨 있었다.
206화. 짝퉁 (5)
로이스가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이 진행자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루시아 번트, 당대 최고의 디바이자 모든 이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예술인. 당시 번트가의 가주였던 캐리 번트는 사랑하는 연인이자 아내인 루시아 번트를 위해 세이렌의 눈물을 구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두 여기를 봐 주시죠."
진행자의 손이 그림 속 루시아의 목을 가리켰다.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루시아의 목에는 푸른 보석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작은 그림이 진행자의 뒤쪽 영상에 크게 투영됐다.
"보시는 바와 같이 현재 경매장에 나온 목걸이와 루시아 번트가 착용한 것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금 영상이 경매로 나온 목걸이를 비췄다.
"원래 저희 주최 측은 목걸이와 그림을 따로 경매에 내놓으려 했으나, 물건을 등록하신 판매자께서 이 그림과 목걸이를 같은 구매자에게 넘겨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같은 이유로 이처럼 특별한 경매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진행자는 세이렌의 목걸이와 그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편 로이스는 그런 이야기를 무시한 채 그림 속 캐리와 루시아만을 바라보았다.
'캐리, 이 자식....'
그의 입은 미소 짓고 있었다.
'성공했구나....'
캐리의 끈질긴 구애.
그 결과가 바로 저것이었다.
서로를 향해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연인의 모습.
비록 오래전의 그림일지라도 그 속에서 서로를 향한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오랜 짝사랑의 결실을 2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라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조언해 준 당사자로서 어찌 기쁘지 않으랴.
'뭐, 그건 그거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로이스의 시선이 경매장에 나온 세이렌의 눈물에 닿았다.
'어쩌면… 저게 짝퉁일 수도 있겠는 걸?'
진행자의 설명에 의하면 저 목걸이가 세이렌의 눈물이라는 증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마지막 소유주인 캐리 번트가 루시아 번트에게 선물했다는 사실.
둘째, 캐리 번트가 감정받은 증명서가 같이 있었다는 점.
로이스는 당시 캐리가 했던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했다.
최고의 감정사에게 감정을 받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건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걸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경매장에 나온 저 목걸이는 뭘까?
로이스의 뇌리로 한 가지 가설이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캐리 녀석이 비슷한 목걸이를 구해 와서 루시아에게 거짓말을 한 거라면...?'
그로 인해 저 목걸이가 세이렌의 눈물이라고 오해가 생긴 거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
이로써 경매장에 나온 목걸이가 가짜일 가능성이 커졌다.
'그래도 일단은 손에 넣고 봐야겠네.'
비록 저 목걸이가 가짜일지라도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한다.
설령 가짜임이 확실하다 해도 로이스는 이번 경매에 참여하고자 했다.
목걸이보다도 손에 넣고 싶은 물건.
바로 루시아와 캐리의 초상화 때문이었다.
'이렇게라도 다시 보니 반갑네, 루시아, 캐리.'
로이스가 다시금 초상화를 응시하는 사이 경매가 시작됐다.
"시작가는 500골드입니다. 이후 50골드씩 올라갑니다."
경매가 시작되기 무섭게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550, 600, 650, 700… 지금부터 호가를 100골드로 올리겠습니다."
만만치 않은 금액임에도 돈 있는 이들이 끊임없이 가격을 높였다.
세이렌의 눈물이란 목걸이가 지닌 가치도 높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같이 나온 그림 역시 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었다.
그런 물건이 한꺼번에 손에 들어오는 일이니 돈 있는 이들은 아낌없이 주머니를 연 것이다.
때문에 두 물건의 가격은 순식간에 1,500골드를 돌파했다.
"와...."
고작 목걸이와 그림을 사고자 1,500골드나 쓴다는 사실에 타니아는 입을 벌렸다.
그렇게 막 가격이 1,700골드에 달하고 호가가 점차 사그라들 때쯤.
"245번 1,800 골드!"
로이스가 숫자판을 들어 올렸다.
타니아가 놀라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서, 선생님?"
지금까지 로이스와 함께하며 그가 얼마나 짠돌이인지 알고 있는 타니아였다.
그런 로이스가 1,800골드나 쓴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89번 1,900골드!"
"245번 2,000골드!"
"89번 2,100골드!"
"245번 2,200골드!"
"89번 2,300골드!"
"245번 2,400골드!"
89번과 로이스가 계속해서 숫자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막 로이스가 2,600골드를 불렀을 때.
"4천 골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경매장에 나직이 울렸다.
"파, 팔십구 번 고객님 4천 골드!"
난데없이 높아진 가격에 진행자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로이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 들려온 목소리에서 '어디 더 불러 볼 테면 불러 봐'라는 도발이 읽혔다.
'어쭈?'
이거 지금 나보고 해보자는 거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로이스가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이 누구던가.
아마 이 겨울 대륙에서 자신보다 돈 많은 개인은 없을 것이다.
'그래, 나도 돈지랄이라는 걸 한번 해 보자.'
쓸 땐 한번 써 보는 거지!
그리 결정한 로이스가 번호판을 들며 외쳤다.
"5천."
"...?!"
여기저기서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자신을 향한 진행자의 경악 어린 시선에 로이스는 짜릿함을 느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참맛!'
이래서 부자들이 돈을 쓰는 거구나!
더군다나 한참이나 아무런 반응이 없는 89번에 쾌감은 몇 배로 늘어났다.
"5천! 5천 골드 나왔습니다. 그 이상 없으십니까?"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로이스가 89번이 있는 방향으로 썩은 미소를 날려 주었다.
피식-.
완벽한 승리의 미소.
89번에게 이 미소를 못 보여 준다는 게 로이스로서는 너무 아쉬웠다.
"5천, 5천, 5천! 축하드립니다. 세이렌의 눈물과 번트가의 초상화는 245번 고객님께 낙찰되었습니다!"
당일 최고 낙찰가가 정해지자 진행자가 기쁜 얼굴로 열렬히 손뼉을 쳤다.
"우, 우와...."
타니아는 존경과 경외가 가득한 눈으로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이에 로이스가 짐짓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돈이란 이렇게 쓰는 거야. 아낄 때는 아끼더라도 쓸 때는 팍팍!"
"네!"
타니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로이스가 있는 방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선두에선 대머리 사내가 로이스를 보고 깊이 허리를 굽혔다.
"좋은 물건과 인연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로이스를 향해 연신 허리를 숙이는 경매장 관리인.
그사이, 흰 장갑을 낀 사람들이 물건들을 조심히 내려놓고 나가자 대머리 관리인이 조심히 물어 왔다.
"혹여 사시는 곳을 말씀해 주신다면 댁까지 안전하게 물건을 옮겨 드리겠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하하, 아주 약간의 수고료만 주신다면...."
"됐어."
그리 말한 로이스는 아공간에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액자가 사라지고 빈 공간에서 큼지막한 자루가 뚝 떨어졌다.
로이스가 관리인을 향해 턱짓했다.
"확인해 봐."
절그럭-.
무려 금화 5천 개가 들어간 자루였다.
갑자기 물건들이 사라지고 허공에서 돈 자루가 떨어지니 살짝 놀랐던 관리인.
그는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 주변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부하들이 낑낑거리며 돈 자루를 들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부하의 속삭임에 관리인이 웃으며 로이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확인 끝났습니다. 5천 골드 맞습니다."
"빠르네."
"하하, 신속! 정확! 고객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이 또한 저희 경매장의 우수한 장점 중 하나로...."
무언가 말이 길어질 거 같아 보이자 로이스가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아아, 됐고. 하나만 물어보자."
"예!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내가 산 물건들… 출처가 어디지?"
"...."
로이스의 질문에 관리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희 경매장의 영업 방침상 물건 등록인에 관한 정보는 발설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로이스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물건만 손에 넣었으면 그만.
출처가 어디인지 뭐가 중요할까.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금 끝났으니 이제 가 봐도 되는 거지?"
"버,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아직 좋은 물건들이 더 경매에 나올 예정인데...."
"필요 없어."
경매 관리인으로서는 5천 골드를 물 쓰듯 쓰는 로이스를 붙잡고 싶었지만, 이미 볼일 다 본 로이스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 그럼 살펴 가십쇼! 다음에도 저의 데모니아 경매장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리인은 경매장 입구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그렇게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온 그날 저녁.
"로이! 우리 왔어!"
"요 앞에서 맛있는 거 엄청 많이 팔더라!"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저 이런 거 처음 봅니다!"
밤늦게까지 축제를 즐긴 쌍둥이와 켄드릭의 품에 온갖 먹거리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딱 봐도 과소비가 분명했기에 이를 본 로이스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이것들이… 돈 아껴 써! 땅 파면 돈이 나오냐!"
그날 누구보다 많은 돈을 쓰고 온 로이스.
잠시 잠깐 자본주의의 참맛을 느꼈던 그는 다시 짠돌이 로이스로 되돌아와 있었다.
* * *
이틀 뒤.
남은 하루 동안 만선기원제를 즐긴 로이스 일행은 일정대로 가을 대륙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렇게 가을 대륙으로 향하는 여객선이 루프트하겐항을 빠져나온 지 3시간여.
짭짤한 바다 내음과 내리쬐는 햇살.
꿀렁이는 갑판 위에서 로이스는 며칠 전 사 온 목걸이를 꺼내 놓고 관찰 중이었다.
'흠… 이것도 별로 특별한 점은 없는데....'
새로 입수한 세이렌의 눈물도 기존의 것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점은 안 보였다.
'아무래도 내 가설이 맞는 거 같은데.'
구매한 세이렌의 눈물과 함께 딸려 온 250년 전의 감정서.
하도 오래되다 보니 감정서의 글자가 상당 부분 날아가 있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어쩌면 이 세이렌의 눈물이 짝퉁일 가능성이 더욱더 커졌다.
때문에 로이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캐리 이 새끼 때문에 돈을 얼마나 쓴 거야?"
비록 새로 산 세이렌의 눈물도 제법 괜찮은 목걸이였지만, 그렇다고 5천 골드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만약 같이 딸려 온 루시아와 캐리의 초상화가 아니었다면 돈 날렸다고 한동안 쌍욕을 날리고 다녔으리라.
그 뒤로도 한참 목걸이를 살피던 로이스가 이를 다시 아공간에 집어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둘 중 하나라도 진품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그가 그리 중얼거리고 있을 때.
구에에엑-.
우웩-.
으에에엑-.
귓가에 울리는 더러운 삼중주.
소리의 진원지로 시선을 돌린 로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거 어째…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아니, 정확히는 과거와 좀 다르긴 했다.
그때는 파브로 혼자였지만, 지금은 셋이었다.
"욱… 우웨에에엑!"
"야, 피, 피대가리… 저, 저리 가서 토하라고… 네가 토하는 소리 때문에 나도… 웁… 구에에엑."
"두, 둘 다 조용히… 우욱!"
처음 타 보는 배에 신나 날뛰던 불꽃 남매와 라비나가 저 상태가 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잔잔한 항만과는 달리 거센 파도를 뚫고 나아가는 선박의 출렁거림은 거의 롤러코스터급.
처음 배를 타 보는 세 사람의 속이 뒤집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 순간, 로이스의 옆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쉭- 하고 지나갔다.
"꺄하하하!"
"으하하하!"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쌍둥이.
그들은 과거의 추억을 되새긴다고 미친 사람처럼 배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 총체적 난국의 상황에서 로이스가 믿을 존재는 핀뿐이었다.
"핀… 어째 배만 타면 이 지경인 거 같지 않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이스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핀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로이스와 핀이 멀어지는 쌍둥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또다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꾸에에엑!"
"커어어억!"
"우웨에에엑!"
파도 소리에 섞여든 더러운 사중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로이스의 머리가 우뚝- 멈췄다.
'잠깐… 사중주? 왜 하나가 더 붙었냐?'
내 귀가 잘못됐나?
로이스의 시선이 더러운 사중주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뭐냐 저건?"
다행히도 로이스의 청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난간에 매달린 불꽃 남매와 라비나의 옆으로 어느새 한 명이 더 추가되어 있었으니.
"우욱! 우웨웩!"
누구보다 더 우렁차게 속을 게워 내던 그가 난간에 기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본 로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라...?"
난간을 타고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의 얼굴이 낯익었다.
그가 누군지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특이한 캐릭터를 어찌 잊을까?
로이스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실눈이잖아?"
난데없이 구토 연주회에 참여한 그는 다름 아닌, 며칠 전 타니아와 부딪혔던 역대급 실눈 캐릭터였다.
207화. 시바 (1)
로이스가 눈을 끔뻑였다.
'쟤가 왜 여기 있지?'
분명 그 녀석이 맞았다.
검은 머리에 볼펜으로 쓱 그어 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실눈.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녀석이 같은 여객선에.
그것도 하필, 하고많은 곳 중에서 왜 이 자리에 와서 오바이트를 하고 있냔 말이다.
로이스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거나 말거나 벽에 기대어 있던 실눈은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벌떡 일어나 고개를 바다 방향으로 뺐다.
"우웨에엑-."
촤르륵-.
상상을 자극하는 소리에 로이스는 인상을 썼다.
'아… 더러워.'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뭘 물어보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상태가 저런데 뭘 물어본다고 답해 줄 정신이나 있겠는가.
실눈남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로이스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여기서 저 지저분한 4중주를 계속 듣고 있으면 귀가 썩을 것 같았다.
"꾸에에엑!"
"우웩!"
"케에엑!"
"우욱!"
그렇게 로이스가 떠나간 자리.
"꺄하하하!"
"으하하하!"
미쳐 날뛰는 쌍둥이가 그곳을 휙 하니 지나쳤다.
* * *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노을이 내려앉을 시각.
핀, 나비와 함께 방에서 뒹굴뒹굴하던 로이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4인용 객실.
옆의 침대에는 언제 온 건지 모를 쌍둥이가 늘어져 있었다.
고롱고롱 잠이 든 그들을 본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다 뛰어다녔냐?"
그래도 나름 나이 좀 먹었다고 이제는 '적당히'란 걸 아나 보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도 정신 나간 것처럼 밖에서 뛰어다니고 있을 텐데.
그가 그렇게 침대에서 일어나자 나비를 껴안고 잠들었던 핀이 눈을 비볐다.
"어디 가시게요?"
"잠깐 밖에. 넌 더 쉬어."
"네...."
그리 답한 핀은 다시금 나비를 껴안았다.
언젠가부터 나비는 핀의 전용 베개가 되어 있었다.
폭신폭신 따끈따끈하다나 뭐라나.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온 로이스는 옆방 문을 열어 보았다.
"…얘들, 아직도 안 온 거냐?"
방의 주인은 불꽃 남매와 라비나.
한참이나 비어 있던 것인지 방 안의 공기는 서늘했다.
로이스는 아이들을 찾아 장소를 옮겼다.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아까 거기에 있겠지.'
뱃멀미 구토 3인방이 어디로 갔겠나.
골골거리던 것들이니 아마 그 자리에 아직도 난간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아이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왜 구토 3인방이 아니라 4인방이냐?"
그곳에 있는 사람이 셋이 아닌 넷이란 거다.
오전에 봤던 그 실눈이 여전히 일행의 옆에 붙어 있었다.
한데 웃긴 점은 4명이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거였다.
"와, 그런 일도 해 보셨어요?"
"그게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쪼르르 둘러앉아 즐겁게 이야기하는 4명.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꿀렁-.
배가 한 번 크게 출렁인다 싶으면.
"그간 고생이 심… 우웁!"
"우웁!"
네 명이 동시에 다시 난간을 부여잡았다.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동안 구역질을 하다가 잔잔해지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웅성웅성-.
배가 꿀렁-.
우웁-.
그들이 펼치는 기교한 사교의 장에 로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살다 살다 맞토 하면서 친해지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그렇게 로이스가 구토 4인방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을 때, 막 토악질을 멈춘 켄드릭이 로이스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어? 선생님?"
그제야 로이스를 발견한 이들이 시선이 모여들었다.
4쌍의 퀭한 눈이 자신을 향하자 로이스가 움찔했다.
'이건 뭐 좀비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파브로야 드워프니까 그렇다 쳐도… 이것들은 인간인데 왜 뱃멀미에 맥을 못 추냐?'
그것도 무려 2티어나 되는 것들이?
로이스가 제자들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 토를 하는데 아직도 뭐가 나오냐?"
"…안 나옵니다. 그런데 계속 뭔가 올라오는 거 같아요."
"선생님, 죽을 거 같아요...."
"살려주세요...."
불꽃 남매는 물론 라비나까지 로이스를 보고 우는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실눈이 로이스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보냈다.
"이분이… 그 선생님이시군요."
"왜, 쟤들이 내 욕 하대?"
"아, 아닙니다. 그냥 말보다 주먹이 빠르신 분이라고...."
"그게 욕이잖아?"
로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비나와 타니아의 손가락이 켄드릭을 가리켰다.
네놈이 범인이렷다?
"너, 너희들!"
당황한 켄드릭이 허둥거렸지만, 이미 진범은 밝혀진 뒤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응징.
"으아아악!"
켄드릭의 몸이 배 밖으로 던져졌다.
"사, 사람이 빠졌어?!"
난데없이 켄드릭이 날아가자 실눈은 경악했다.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날아갔던 켄드릭이 바닷물에 흠뻑 젖어서 다시 날아온 것이다.
"푸학!"
바닷물에 빠졌던 켄드릭의 입에는 큼지막한 물고기가 물려 있었다.
물고기를 뱉어 낸 켄드릭을 로이스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건 왜 물고 왔냐?"
"어… 그… 코앞으로 뭐가 지나가기에 반사적으로...."
"그래?"
그 와중에 물고기를 낚아챘다고?
'그거참 신기한 낚시법이네'라고 중얼거린 로이스는 다시금 켄드릭을 날려 보냈다.
"끄아아악!"
그렇게 두어 번 더 바닷속을 들락거린 켄드릭은 자신이 물고 온 물고기와 같이 바닥에 널브러져 파닥거렸다.
라비나가 이때다 싶어 켄드릭의 볼을 찰싹 두들겼다.
"야, 피대가리 죽으면 안 돼!"
평소였으면 난리 쳤을 켄드릭이지만, 지금은 빈사 상태였기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의 상황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자신의 말동무가 되어 준 이들이 선생이라 부르는 작자가 보통이 아님을.
그게 괴상한 능력이든, 혹은 성격이든.
그때 로이스가 긴장한 실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실눈."
"…네? 아, 넵!"
"저 녀석이 또 뭐라고 내 욕하든?"
"그, 그거 말고는 딱히 안 했습니다!"
"정말? 나중에 가서 뭐라도 밝혀지면 너도 저 꼴 난다?"
로이스가 라비나에게 귀싸대기를 맞고 있는 켄드릭을 가리키자 실눈은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정말 아닙니다!"
"그래? 정말?"
"정말입니다!"
"흐음...."
로이스의 눈이 게슴츠레해질 때, 타니아가 끼어들었다.
"시바 씨 말이 사실이에요. 저 멍청이가 그거 말고는 다른 건 얘기 안 했거든요."
로이스가 타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타니아, 그런 욕은 어디서 배웠어?"
"멍청이요?"
"아니, 그거 말고."
"네?"
"시바."
로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눈이 대답했다.
"예?"
"뭐?"
"...?"
"뭐가?"
"저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시바라고...."
"이 새끼가 왜 초면에 욕이야?"
"네? 제가 언제요?"
그제야 자신의 대화에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로이스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네 이름이 시바야?"
"그렇습니다만...."
"시바?"
"네?"
"시바, 시바?"
"...."
"너 혹시 네 이름 욕 같다는 소리 안 들어 봤냐?"
"태어나서 오늘 처음 들어 봅니다만...."
로이스가 재밌다는 듯 시바를 바라보았다.
'이야, 캐릭터 확실하네.'
외모부터 이름까지.
한번 보면 절대 안 잊어버릴 독특한 놈이었다.
그 뒤로도 로이스는 시바의 이름을 몇 번 더 불러 보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살짝 불쾌하게 변한 시바의 얼굴도 한몫했다.
시바에게서 시선을 뗀 로이스가 자신의 일행들에게 녹색의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설마… 멀미를 없애 주는?!"
라비나의 기대 어린 시선에 로이스가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수면제."
"수면제요?"
"마시면 바로 기절해서 하루는 푹 잘 수 있을 거다."
"멀미 없애 주는 약은 없나요...? 막 깔끔하게 없애 주는 그런 약!"
"없어."
단호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있었다.
하지만 줄 생각은 없었다.
'멀미란 게 겪다 보면 익숙해지는 거니까.'
파브로 같은 특이 체질만 아니라면 충분히 익숙해질 거다.
앞으로도 배를 탈 일이 많은데 그때마다 약에 의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 기회에 익숙해지는 게 나았다.
로이스는 실망한 눈빛을 한 라비나를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싫으면 말고."
"아, 아뇨!"
라비나는 잽싸게 로이스의 손에서 병을 낚아챘다.
더 나올 것도 없는데 계속 난간을 붙잡고 있느니 차라리 죽은 듯이 자는 게 나았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로이스의 손에서 나머지 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옆에서 갈망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에 로이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너도 줘?"
"부, 부탁드립니다."
이름을 가지고 놀린 것도 있고 딱히 비싼 건 아니기에 로이스는 그에게도 한 병을 건네줬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털썩- 털썩-.
여기저기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이스는 자신의 앞에 쪼르르 누운 셋을 보고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것들이… 여기서 그걸 처먹고 있네."
이건 자신을 믿는다는 건지, 아니면 지옥 같은 멀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그만큼 크다는 건지....
로이스의 설명처럼 엄청난 효용을 보인 수면제로 인해 불꽃 남매와 라비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은 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털썩-.
"얼씨구?"
덩달아 같이 쓰러진 시바를 보며 로이스는 혀를 찼다.
"저것도 머리에 나사 하나 빠진 거 아냐?"
크게 한숨을 내쉰 로이스는 기절하듯 잠든 구토 4인방을 들어 방으로 옮겼다.
이후 시간이 흘러.
가을 대륙행 여객선이 항해에 돌입한 지 닷새가 되었다.
불꽃 남매와 라비나는 무난하게 뱃멀미에 적응했다.
멀미에서 벗어나니 자연스럽게 항해를 즐기며 쪼르르 배를 구경 다니는 게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 셋이 아니란 점이었다.
오늘도 같이 몰려다니는 4명을 본 로이스가 그들을 불렀다.
"어이, 구토 4인방."
"구토 4인방, 어디 가?"
"여기야, 구토 4인방!"
로이스가 선창하고 쌍둥이가 따라 불렀다.
쌍둥이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
이에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이를 들은 구토 4인방이 얼굴을 붉히며 쪼르르 달려왔다.
"서, 선생님!"
"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저희 이제 멀미 안 합니다!"
"크흠!"
항의하듯 쫑알거리는 넷을 보며 로이스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살면서 너희처럼 뱃멀미하다 친해진 애들은 처음 보는구먼."
도원결의는 들어 봤어도 세상에 구토결의라니.
닷새 전 난간을 부여잡고 뱃멀미를 하던 넷은 수면제를 먹고 한방에서 깨어난 이후로 더 친해져 계속 몰려다녔다.
라비나야 친화력이 좋아서 그렇다 치지만, 불꽃 남매까지 이렇게 친해진 걸 보니 서로의 치부를 드러낸 구토결의가 대단하기는 했나 보다.
그 뒤로도 한참을 쫑알거리던 셋은 로이스의 눈썹이 심기 불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정확히는 타니아가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게 옳았다.
"아, 맞다 선생님! 여기 시바 씨가 예전에는 귀족이었대요!"
"누가? 쟤가?"
"네!"
로이스의 시선에 시바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그렇게 대단한 귀족은 아니었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쫄딱 망해서...."
"그런 거 같더라. 너한테 귀티란 게 하나도 안 느껴졌거든."
"…가문이 망한 뒤로 안 해 본 일 없이 세상을 살아왔다 보니...."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시바는 오히려 구김살 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때 다시 타니아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시바 씨의 가문이 그거더라고요!"
"그거?"
로이스의 되물음에 타니아가 신기하다는 듯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짝-.
"그 왜, 있잖아요. 선생님이 저번에 경매장에서 사신 물건요! 그거 원래 가지고 있던 곳."
"…뭐?"
로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번트였나? 그렇죠, 시바 씨?"
"맞습니다, 타니아 양."
시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확인에 타니아가 더욱 신나 말했다.
"엄청 신기하죠. 선생님? 와, 시바 씨가 번트가의 사람일 줄이야… 이런 것도 인연이라고 하는 건가 봐요."
타니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런 시선을 뒤로하고 로이스는 시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 검은 눈.
그리고 눈동자의 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실눈.
과거 자신이 알고 있는 캐리와 루시아의 외모와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때문에 조금도 번트가와 연관을 짓지 못했는데....
'그러니까 네놈이 캐리 새끼의 후손이렷다?'
괜히 헷갈리는 목걸이를 또 하나 준비해서 내 생돈 5,000 골드를 쓰게 만든 그 캐리 놈의?
이를 떠올린 로이스의 잇새로 나직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이런 씨바 번트...."
208화. 시바 (2)
"이런 씨바 번트...."
"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로이스의 뚱한 표정에도 시바는 되레 매우 기뻐했다.
"아무튼,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 물건들을 사 가신 분이 로이스 님이셨다니...."
"뭐?"
이건 또 뭔 소리래?
"지금 그 말은 경매장에 목걸이와 초상화를 내놓은 판매자가 너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눈을 빛낸 로이스가 시바에게 정신 속성 성법을 걸었다.
"뭐 좀 물어보자."
자신이 성법에 걸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시바가 환히 웃었다.
"뭐든지요!"
"너, 진짜 번트가의 후계자 맞냐?"
"맞기는 한데, 후계자라고 할 거까지야...."
"뭐, 그렇다 치고. 네가 경매장에 넘긴 세이렌의 눈물… 그거 진품 맞아?"
"네?"
"같이 동봉된 감정서가 워낙에 낡아서 말이지."
"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목걸이는 루시아 가모께서 착용하신 세이렌의 눈물이 확실합니다. 저희 가문이 망하기 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상자에 담겨 있었고, 제가 빚쟁이에게 쫓길 때 그 상자째로 들고 튀어서 내용물이 바뀐 적도 없습니다."
"중간에 누가 바꿔치기했다면?"
"그 목걸이와 초상화만이 제가 가문에서 유일하게 건져 나온 물건이었습니다. 정말 악착같이 지켜 낸 것들이니… 믿어 주세요."
"흠...."
로이스는 시바를 살폈다.
정확히는 시바에게 걸린 거짓말 탐지 성법을 말이다.
'거짓말은 아니란 건데....'
자신이 건 성법은 시바가 진실만을 고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세이렌의 눈물이 두 개라....'
로이스는 오래전에 입수한 세이렌의 눈물이 아무래도 진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혹시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중에 성모를 만나면 두 개 다 줘 보지 뭐.'
그럼 둘 중 하나는 걸려들겠지.
그리 생각을 정리한 로이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목걸이야 그렇다 쳐도, 선대의 초상화까지 파는 거는 좀 아니지 않나?"
로이스의 물음에 나머지 구토 3인방이 끼어들었다.
"선생님, 시바 씨가 참… 불쌍한 사람이더라고요."
"7살 때 가문이 쫄딱 망해서 안 해 본 일이 없더라고요."
"쟤, 어릴 때는 길바닥에서 동냥도 했다던데요?"
여기저기서 더해지는 추가 설명에 시바가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라고 그걸 팔고 싶었겠습니까… 망한 가문에서 나올 때 빚쟁이들로부터 유일하게 건진 게 그것들이었습니다. 길거리 동냥을 하면서도 가문을 재건하면 가져가기 위해 꼭꼭 숨겨 두었던 건데...."
"...."
"최근 들어 깨달았죠. 하루하루 빌어먹고 사는 제 처지에 가문의 재건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구나.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가문의 재건은 포기하고 그걸 팔아서 내 꿈을 위해 쓰자! 그래도 나중 일은 혹시 모르니까 제가 꼭 그것들을 한 분께 팔아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혹여 나중에 제가 다시 사 갈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한 분께 팔리는 게 나중에 되찾기도 수월하니까요."
"...."
"하여튼 그렇게 물건이 팔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이게 웬걸? 세상에 그걸 그렇게 비싼 가격에 사 주신 분이 계실 줄이야! 진짜 제가 그날 얼마나 기뻤으면 살면서 그렇게 울어 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이야기에 로이스는 할 말을 잃고 눈을 끔벅였다.
그는 시바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이 자식....'
루시아와 캐리의 후손이라는 이 시바 놈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심각한 투 머치 토커였다.
그런 로이스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나머지 구토 3인방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시바 쟤가 조금… 말이 많습니다."
"멍청한 수컷 피대가리, 저게 조금이냐?"
"조용히 해라. 땅딸보."
"땅딸보라고 하지 말랬지, 이 피대가리 멀대 새끼야!"
"그래도 시바 씨랑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잖아요? 뭔가 시장 온 기분도 나고."
"타니아… 사람 혼자서 떠드는데 그게 시장통처럼 시끄러운 거면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런가요?"
면전에서 대놓고 말 많다는 잔소리가 쏟아짐에도 시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너무도 익숙한 얼굴.
하루 이틀, 이런 잔소리를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시바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세상에 5천 골드라니! 로이스 님 덕분에 드디어 빚도 다 갚고, 제 꿈을 이루기 위해 가을 대륙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꿈이 뭔데."
대체 무슨 얼마나 대단한 꿈이기에 이렇게 사설이 길어?
로이스의 눈꼬리가 심하게 꿈틀거렸다.
재앙의 징조를 깨달은 원래의 일행은 로이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 로이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시바는 그저 할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제가 제 꿈이 뭔지 말씀을 안 드렸군요. 제 꿈은 바로바로...."
"...."
"초월기 제작자입니다! 끝내주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예술품을 제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이라니! 이 얼마나 멋지단 말입니까!"
짜증으로 물들어 가던 로이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가 돋았다.
"초월기 제작자? 근데 그거랑 가을 대륙으로 도망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가을 대륙에는 염원의 탑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초월기 관련 종사자들이 한 번쯤 가 보길 원하는 초월기의 성지!"
"오호?"
염원의 탑 이야기가 나오자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래? 그럼 넌 지금 염원의 탑에 들어가려고 가을 대륙에 가는 거야?"
"물론 최종 목적은 그렇습니다."
"최종 목적?"
"염원의 탑이 저 같은 어중이떠중이를 받아 줄 리 없지 않습니까. 전 세계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정비 법사, 제작 법사들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바로 염원의 탑입니다."
"그럼 가을 대륙은 왜 가는 건데?"
"초월학관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초월학관?"
로이스의 물음에 시바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처음 듣는 정보였기에 한 발짝 물러났던 다른 일행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혼자서 30분여를 떠든 시바.
길고 길었던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초월학관이란 염원의 탑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이다.
초월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여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는 염원의 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비록 염원의 탑의 선택을 못 받게 되더라도 초월학관을 졸업한 이들을 원하는 곳은 많기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수월하다.
로이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학교라는 거군. 그것도 대기업의 주력 제품 제작에 관해 가르치는?'
어찌 보면 대기업에서 원하는 전문 인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맞춤으로 키워 신입 사원으로 뽑아 가는 격이었다.
이른바 신입 같지 않은 중고 신입이랄까?
'대기업은 즉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즉시 전력을 얻고, 신입 사원들은 바늘구멍 통과하기 같은 대기업 입사를 다른 경쟁자들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물론 너무 한 가지만 편향적으로 배우게 된다는 경향이 있지만, 딱히 문제 될 거는 없었다.
'그 정도의 고급 인력을 원하는 곳을 많은 테니까.'
초월기에 관한 세상 모든 원천 기술은 염원의 탑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염원의 탑의 기술은 국제 표준 기술이란 소리였고, 이는 염원의 탑이 운영하는 초월학관에서 배우고 나온 인재들은 어느 곳을 가든 즉시 전력감이란 소리였다.
다만 문제는....
"그런 곳이면 아무나 쉽게 뽑을 거 같지는 않은데?"
로이스의 물음에 시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지요! 일단 입학 등록금이 엄청 비쌉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요. 로이스 님 덕분에 제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고! 로이스 님이 그걸 비싸게 사 주신 덕분에 입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 무슨 얘기를 하다가 이 말이 나왔더라...."
횡설수설하는 시바의 모습에 로이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무슨 말 하고 있는지도 까먹는 거냐?!'
로이스가 폭발하기 전 시바는 빠졌던 샛길에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 맞다! 그… 일단 입학 등록금부터가 일반인은 쉽게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비싸고, 설사 입학 등록금을 마련했다 하여도 초월학관 입시조차 뚫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곳에서 제법 실력을 쌓은 이들이 대거 몰려와 시험을 치르니까요."
"그 말은… 너는 실력에 자신이 있다?"
시바가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 이 일, 저 일 하며 굴러다니다가 초월기 정비 공방에서 10년 넘게 일을 했습니다. 제 꿈도 거기서 큰 거죠. 하여튼, 공방장님이 말씀하시길… 제 재능이 그리 나쁘지는 않답니다. 어디 가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최소 면박받을 실력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시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함께 지낸 자신들도 이리 잘 아는데 십 년을 같이 지낸 그 공방장이란 인간은 얼마나 시달렸겠는가.
어쩌면 시바가 가을 대륙으로 가는 게 공방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닐까?
시끄럽게 쫑알거리는 저 입 때문에?
"이런...."
한동안 주변에서 자신만 빤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
시바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또 너무 제 얘기만 떠든 모양이네요. 어…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은 무슨 이유로 가을 대륙에 가시는 겁니까? 다른 분들께 여쭤보니 이분들도 로이스 선생님이 가시기에 그냥 따라가는 거라고...."
한동안 시바와 같이 다닌 불꽃 남매나 라비나나.
그들로서는 로이스가 무슨 이유로 가을 대륙에 가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그가 가니까 따라갈 뿐.
목적지가 어째서 가을 대륙으로 잡혔는지는 다른 이들도 궁금했기에 로이스에게 이목이 쏠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 쌍의 시선에 로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구경도 하고 다른 볼일도 보고…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
"오오! 만약 여행하신다면 꼭 염원에 탑에 들러 보시길 권해 드리겠습니다! 저도 듣기만 했지만, 염원의 탑이 자리 잡은 사이론이 가을 대륙 최고의 도시라고 합니다!"
"그러지, 뭐."
두리뭉실하게 답하던 로이스가 시바를 향해 살짝 미소를 보냈다.
자신이 가을 대륙에 가는 이유는 염원의 탑 때문이었다.
만약 시바가 초월학관에 붙게 된다면 오다 가다 그를 볼 일도 생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서로의 위치가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이게 바로 대기업 회장님이 길 가다가 자기 회사 입사를 꿈꾸는 사회 초년생을 만난 기분인가?'
로이스는 자신에게 꼭 사이론에 들르라고 쫑알거리는 시바를 바라보았다.
과거 자신이 맺어 준 연인의 후손.
그리고 이제는 탑의 주인과 초월학관의 신입생.
툭툭 난데없이 튀어나와 새롭게 맺어지는 인연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런 감흥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 만약 사이론에 오실 거면 제가 조사해 둔 명소가 몇 개 있습니다. 우선 동쪽 구역부터 해서...."
가만히 놔두면 사이론의 모든 맛집과 명소를 하루종일 쫑알거릴 것 같았다.
질색한 로이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얘 데리고 저리 가라."
로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켄드릭이 시바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질질 끌고 갔다.
발버둥 치던 시바는 살고 싶으면 잠자코 따라오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가는 타니아와 라비나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쌍둥이와 핀이 입을 열었다.
"쟤, 정말 루시아 후손 맞나?"
"캐리라는 꼬맹이 핏줄도 아닌 거 같은데? 어쩜 저렇게 하나도 안 닮았냐."
"그래도 힘들게 살아온 거 같은데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거 보면 루시아를 닮지 않았나요?"
"아, 그런가? 하긴 그 캐리라는 애도 끈기 하나는 대단했잖아?"
"듣고 보니 그렇네."
쌍둥이와 핀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로이스도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외모적인 측면은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를 여의고도 꿋꿋하게 살아온 루시아, 오랫동안 이어 온 짝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캐리.
그들의 성향이 시바에게도 조금은 엿보였다.
'하여튼, 재밌는 녀석이네.'
겨울 대륙의 끝자락에서 만난 재밌는 인연에 로이스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후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바다 위에서의 시간이 흘러.
"육지다아아아!"
"육지!"
"땅이다!"
"땅이에요!"
우렁찬 구토 4인방의 외침이 가을 대륙 입성을 알렸다.
209화. 사이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