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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엘레나

* * *

프라우의 반응은 반사적이었다.

그는 불청객의 침입에 다짜고짜 땅을 박찼다.

"그 폭풍을 뚫고 오다니. 지독한 놈! 내 검을 막아봐라!"

데일은 곧장 마검을 들어 프라우의 일격을 막아냈다.

워낙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꽤나 버거웠다.

"무슨 짓이냐 프라우. 나다. 데일."

"...어?"

그제야 프라우는 데일의 얼굴을 살폈다.

투구에 가려져 있지만, 상당히 익숙했다.

"데일 경. 정말 데일 경인가?"

"그래."

"...."

입을 악문 프라우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이노오오오옴!! 용서 못 한다!!!"

"...왜 또 지랄이냐."

"데일 경은 명예롭게 죽었다! 감히 내 친우를 사칭하다니!! 전사의 죽음을 더럽히는 네 놈은 절대 용서 못 한다!!!"

"그러니까 안 죽었다고."

"듣기 싫다! 나를 현혹하려 하지 마라 이 악마야!"

프라우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분노의 일격이 연속해서 퍼부어지자, 참다못한 데일은 서둘러 투구를 벗었다.

"자. 이래도 못 알아보겠나?"

"...."

프라우가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분명 데일 경은 죽었는데... 설마 귀신?"

부끄러워서 내색은 안 하지만, 귀신을 몹시도 무서워하는 프라우다.

프라우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데일은 엘레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엘레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 머릿속이 완전히 하얘졌다.

꿈인가?

아니며 환각인가?

분명 얼마 전에 상대했던 악마 파르훈은 데일의 환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저게 환상이라면 마법으로 쓸어버려야 할까?

그래. 냉정히 생각하면 그게 맞다.

데일은 죽었다. 엘레나가 똑똑히 봤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되돌아왔다고?

하필 이런 장소. 이런 순간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쉬이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엘레나는 간절함을 담아 물었다.

"정말. 정말 데일 경인가요?"

"여러모로 걱정시킨 것 같군. 미안하다."

"...."

엘레나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데일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설령 저게 적이 보여주는 환각이라도, 지금만큼은 속아 넘어가고 싶다.

엘레나는 천천히 데일에게 다가갔고....

퍽!

프라우가 그런 엘레나를 옆으로 밀치고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데일! 내 친구여!!! 반갑네!! 으헝헝!"

양팔을 활짝 벌린 프라우가 맹렬히 달려들었다.

평소였으면 적당히 피했을 테지만, 지금은 몸 상태가 좋지 않다.

프라우가 데일을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다.

"정말이지! 신이시여! 나는 알았네! 그대가 절대로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까는 명예롭게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누가? 내가? 그럴 리가!! 아무래도 레티가 한 말을 들은 것 같군."

"레티가 누군데."

"내 롱소드의 이름이라네!"

"...."

엘레나는 프라우를 부러운 눈으로 보더니, 자기도 슬그머니 양팔을 벌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회를 엿봐도, 도무지 프라우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빈틈을 파고들려 해도 프라우가 워낙 거칠게 날뛰어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

결국. 심통이 난 엘레나는 손에 전류가 타닥이더니, 그대로 손을 프라우의 등에 갖다 대었다.

치직.

"아그극!"

"비켜요."

화들짝 놀란 프라우가 그제야 옆으로 조금 물러났다.

엘레나가 빈틈에 파고들어, 세 명이 함께 포옹했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엘레나."

데일은 말을 골랐다.

엘레나는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 충고를 해주는 게 맞을까?

아니면 꾸중하는 게 맞을까?

'아니.'

데일은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볼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똑똑하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다른 무엇보다 엘레나는 자신의 마법이 데일을 다치게 했다는 점에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데일은 차분히 말했다.

"고생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엘레나의 표정이 흐려지더니, 이내 더욱 세게 포옹했다.

"고맙네 경. 확실히 내가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

"너한테 한 말 아니다."

기쁨의 재회를 나누는 건 좋지만,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다.

데일이 엘레나에게 말했다.

"일단 이 폭풍부터 좀 멈춰줄 수 있겠나? 이대로 가다가는 요새가 다 엉망이 되어버릴 거다."

"아."

퍼뜩 정신을 차린 엘레나가 곧장 마법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법을 사용하려면 마력이 무지막지하게 들 텐데. 그걸 깜빡 잊을 수 있다면, 대체 마력이 얼마나 많은 거야.'

문득 데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이 대륙에 새로운 힘의 질서가 세워지면, 그 꼭대기에 있는 건 엘레나가 아닐까.

엘레나는 천천히 마법을 거둬들였다.

강력한 마법인 만큼, 가라앉히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폭풍이 잦아들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얼음 조각과 모레, 벽돌 따위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폭풍이 가라앉자 주위 상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

폐허가 그곳에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건물의 흔적만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엘레나는 본인이 만들어낸 참상에 말을 잃었다.

프라우가 중얼거렸다.

"마법이란 파괴적인 힘입니다. 바이만 왕가에서 왜 이 강력한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라고 그토록 강조하는지. 이제는 이해가 가시겠죠?"

"...."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사람들을 뒤로 물렸으니, 폭풍에 휘말려 죽은 사람은 없을 거다."

"...고마워요 경."

흐려졌던 엘레나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도시 반대편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거다. 황실 기사단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도와줘서 나쁠 게 없지. 싸울 여력은 좀 남았나?"

"당연하지!"

"저도 좀 더 싸울 수 있어요."

"그래. 여기서 활약하면, 네가 벌인 일에 대해 정상참작을 받을 수도 있겠지. 나도 최대한 변호해보겠다."

"굳이 저를 변호하려고 데일 경이 무리하실 필요는 없는데...."

"내가 걱정된다면 더욱 활약해라.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게."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빠르게 움직였다.

데일은 넝마가 된 몸으로 절뚝거리며 뛰었고, 프라우가 엘레나를 엎고 달렸다.

전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상황이 오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뚫고 들어온 황혼의 추종자들은 황실 기사단과 맞붙었다.

황실 기사들은 황혼의 추종자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겼고, 추종자들은 상대와의 실력 차이를 실감했다.

평지에서는 이기기 어렵다.

그렇게 판단한 황혼의 추종자들은 한 가지 꾀를 냈다.

자기들이 성벽으로 올라 농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벽에 올라 화살과 마법을 뿌려대고, 투석기 따위의 병기를 역으로 이용해버리니 황실 기사단도 꽤나 애를 먹게 되었다.

뚫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피해가 너무 커지리라.

그렇게 아일라와 에른스트가 곤란해하는 사이.

데일이 도착했다.

"어떤 상황이지?"

"아. 일찍 왔... 꼴이 엉망진창이잖아. 괜찮은 거야?"

"괜찮다. 생기만 조금 흡수해주면 금방 낫는다."

"으음."

미묘한 표정을 지은 에른스트의 시선이 뒤편의 프라우와 엘레나에게 향했다.

에른스트는 그 둘을 알아보았다.

"어? 저 사람들이 여긴 왜...."

"대화로 잘 설득했다."

"어? 대화로...?"

에른스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전에 데일이 물었다.

"상황이나 설명해라."

"보이는 대로야. 자기들이 성벽으로 올라가 버렸어. 아직 마탑의 마법사들이 못 내려와서, 견제할 수단이 미비해."

"저기로 올라가 버리면 퇴각도 불가능해질 텐데?"

"글쎄. 애초에 도망갈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지."

에른스트가 곤란하게 중얼거렸다.

아일라는 저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해결책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치가 않았다.

애초에 성벽이 역으로 점령당하는 상황은 대비하지 않았던데다가, 멜피스가 대체 어떻게 관리했는지 3군단 소속 마법사들의 수준도 형편없었다.

그사이에도 황혼의 추종자들은 아군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

여전히 요새 곳곳에서 불이 피어오르는 걸 생각하면, 되도록 빨리 해결하는 게 맞았다.

"대충 상황은 알겠다. 마침 우리 쪽에 그걸 해결해줄 인재가 있다."

"오오. 그게 대체 누구인데?"

데일은 엘레나의 등을 밀었다.

"여기 있잖아."

"음? 아아. 확실히...."

에른스트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조금 전까지 이쪽을 공격하던 마녀이니만큼 썩 신뢰하기 힘들겠지.

데일은 설득보다 결과로 보여주기로 했다.

"엘레나. 할 수 있겠나?"

"예! 제가 전부 죽여버릴게요!"

과격한 말에 데일은 순간 말을 잃었다.

여기서 힘내라고 응원해줘야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는 앞으로 나섰고, 주문을 외웠다.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 기사들이 흠칫했다.

아일라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발견했고, 외치려고 했다.

"지금 뭘 하려는...."

다음 순간 마법이 완성되었다.

꽈르르릉!

굉음과 함께 눈부신 벼락 줄기가 추종자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꽈릉! 꽈릉! 꽈릉!

푸른 빛 전류가 쉼 없이 내리꽂혔다. 계속. 계속. 계속. 끝없이.

'슬슬 끝이겠지.' '이 정도면 끝났겠지.'하는 생각이 들어도 벼락은 멈추지 않았고.

긴 시간이 지나 마침내 마법이 멈췄을 때, 사람들이 본 건 반쯤 무너져 내린 성벽과....

새까맣게 타버려 널브러진 시체들이었다.

몰살.

물러날 수 없는 공간에서 한데 뭉쳐 있던 게 오히려 패착이었다.

엘레나는 기쁜 듯이 외쳤다.

"데일 경! 다 죽였어요!"

어딘가 칭찬을 바라는 듯한 모습에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마법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예! 많이 노력했어요!"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데일은 생각했다.

'혹시 내가 애 교육을 조금 잘못한 거 아닐까?'

그 의문에 동의하듯.

옆에 선 기사들이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

괴물을 보는듯한 표정이었다.

* * *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살아남은 몇몇 추종자들은 기사들이 모두 베었다.

추종자들은 지독했다.

패색이 짙어도 누구 하나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격렬하게 싸웠다.

여의찮은 경우에는 서슴없이 자기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었다.

'애초에 이곳에 죽으러 온 거군. 최대한 피해를 주기 위해서.'

광신이라는 단어에 참으로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만큼 추종자들은 황혼의 말을 끔찍이 섬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

'이쪽을 견제하는 게 황혼의 목적이라면 성공했어.'

피해가 적지 않다.

성문과 성벽이 무너진 건 차치하고.

3군단의 기사들, 병사들의 희생이 크고, 중요한 물자도 많이 타버렸다.

황혼 입장에서는 실로 남는 장사이리라.

얼추 상황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3군단장 멜피스는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끄, 끝났나?'

그는 성문이 무너진 순간부터 가장 안전한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결되었다. 황실 기사단이 막아낸 건가?'

멜피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번 졸전에 대해서는 군단장의 책임이 크다.

군단장 자리를 빼앗기는 건 기정사실이고, 어쩌면 그보다 더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그는 아일라를 발견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일라 경!"

"...멜피스."

아일라는 흙 씹은 얼굴로 말했다.

평소의 멜피스였다면 아일라가 자신을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는 걸 알아차렸겠지만, 지금의 멜피스는 절박하다.

"참으로 처참한 상황일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걸 그대가 말하는 건가? 그보다 멜피스. 이 냄새... 설마 술 먹었나?"

아일라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찔끔한 멜피스가 외쳤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 일단 들어보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배신자가 있었다고!"

"배신자?"

"흑기사 데일! 경도 들어보았지? 그 언데드 놈이 우리를 배신해서 피해가 커졌다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

"그러니 당장 기사단을 움직여 그 녀석을 잡아야 해!"

"알았다."

아일라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순순한 태도에 멜피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만. 기사단을 움직이려면 단장이나 폐하의 지시가 필요하다."

"...무슨 소리인가 그게. 단장은 자네이지 않나?"

"아. 그새 바뀌었다. 한 번 얘기나 나눠보겠나? 마침 저기 오고 있군."

아일라가 검지로 멜피스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건 데일.

그 얼굴을 본 멜피스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응?"

황혼

* * *

멜피스는 참으로 변화무쌍한 감정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의문.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그다음은 부정.

"하하! 농담하지 말게. 명예로운 황실 기사단에 어찌 언데드 따위를...."

협상.

"이보게 아일라 경. 아무래도 내게 섭섭한 게 있나 본데, 우리 얘기 좀 나눠보자고."

분노.

"모두 짜고서 나를 엿먹이려고 하는 거지? 응? 평소에 나를 질투했으니까!"

그리고 애원.

"미안하네. 아일라 경. 섭섭한 게 있으면 내 다 사과하겠네. 이렇게! 이렇게 고개도 숙였네! 그러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게!"

멜피스는 연거푸 고개를 꾸벅였다.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냉정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아일라의 입꼬리도 씰룩였다.

"큼."

아일라는 헛기침으로 감정을 가다듬은 뒤, 사무적으로 말했다.

"데일 경은 우리 황실 기사단 전체와 결투를 벌여,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리를 꺾었다. 그의 행동에 명예가 있고, 정의가 있었으니, 우리는 그를 인정하기로 하였으며,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하셨다. 그러니 저분이 우리의 새 단장이 맞으시다."

"폐하?"

멜피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폐하가 허락했다고?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네 이놈들! 대체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설마 그분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제 와서 충신인 척하는 거냐?"

비웃음을 흘린 아일라가 길을 비켜주었다.

데일이 멜피스의 앞에 섰다.

데일을 알아보고 분노를 토하려던 멜피스는, 데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주, 죽는다.'

입을 열면 죽는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데일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황혼을 저지하기 위해 놈이 짓고 있다는 탑으로 향할 것이다. 당연히 3군단도 함께 가야겠지."

"무슨! 군단장은 나다! 3군단은 나의 것이란 말이다! 황혼에게로 간다고? 누구 맘대로!"

"이미 황제의 동의는 얻었다. 참고로 군단의 지휘권도 받았으니, 이제 너는 군단장이 아니다."

"뭐?"

얼빠진 소리를 낸 멜피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인정할 수 없다! 누가 뭐래도 군단장은 나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건 군단장 자리 따위가 아닐 텐데."

"...뭐?"

"꽤나 제멋대로 살아왔더군. 아주 소문이 자자해. 지금부터 전 군단장 멜피스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다. 네 죄를, 네가 알겠지."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멜피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군단장 자리를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기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기지 않았나!

멜피스는 시치미를 뗐다.

"죄라니. 흠흠. 비록 내가 조금 실수한 부분이 있었던 건 인정하오. 이번 황혼과의 싸움에서도, 살짝 미흡한 부분이 있긴 했지."

"조금도 아니고. 살짝도 아닌 것 같은데."

목숨이 걸리자 멜피스의 태도가 한층 정중해졌다.

"무능이 죄라면, 달게 받겠소. 군단장 직위는 얼마든지 내려놓겠소. 내가 모은 재산도 기꺼이 내놓겠소. 하지만 나는 신께 맹세할 수 있소. 나는 언제나 공정하고 정직하게 군단을 운영해왔소.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있다는 건 잘 알지만, 그건 전부 거짓말이오! 나를 질투한 작자들이 나를 모함하려 지어낸 소문이란 말이오!"

멜피스의 전략이 바뀌었다.

돈이든 직위든 전부 주겠다. 살려만다오!

순식간에 전략을 바꾸고, 입가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는 게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이 정도 되는 사내이니 군단장 자리도 따낸 건가. 다른 의미로 대단하군.'

속으로 감탄을 흘린 데일이 물었다.

"그래. 스스로 죄가 없다고?"

"그렇소!"

"그러면 물어보면 되겠군."

"뭐요?"

"이곳에 있는 전 군단장 멜피스의 죄에 대해 증언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데일이 쩌렁쩌렁 외치자, 멍하니 서 있던 3군단의 병사들이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는 너나 할 거 없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제가! 제가 증언할 게 있습니다!"

"접니다! 사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대들의 열의는 이해하나, 질서를 지켜라. 모두 기회를 줄 테니 한 명씩 나와 얘기하도록."

그러자 거짓말처럼 침착을 되찾은 병사들이 줄을 섰다.

그 줄이 한눈에 다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었으니, 그간 멜피스가 얼마나 막장으로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병사. 지휘관. 요새의 주민들이 증언을 시작했다.

"멜피스 전 군단장이 제 공적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는 입 닥치고 있지 않으면 목을 매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멜피스와 그 패거리는 저희 주민들에게서 세금 외에도 보호세를 따로 받았습니다! 그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은 요새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보급을 담당하는 상인들과 결탁해 병사들이 먹어야 할 군량을 빼돌렸습니다."

"자기 사람을 요직에 앉혀...."

"제 딸을 강제로...."

"근무 시간에 술을...."

"...."

"...."

끝도 없는 증언이 이어졌다.

에른스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반역 빼면 저지를 수 있는 죄는 전부 한 번씩 해보았군."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멜피스가 술에 취해, 자기 정도면 충분히 황제가 될 수도 있지 않냐는 질문을 했었습니다! 본인은 농담이라고 했지만, 그건 분명 진심이었습니다!"

"아 그래. 반역도 살짝 생각이 있으셨군."

참으로 긴 시간이 걸렸지만, 데일은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주었다.

그간 쌓인 게 많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라도 억울함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멜피스는 죽을 맛이었다.

그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몸이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고발이 끝나고.

데일은 멜피스에게 돌아섰다.

"아무래도 상황은 명명백백한 것 같군. 너에게 판결을 내리겠다."

"읍! 읍읍!"

데일이 재판관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네 죄를 설명하겠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온종일이라도 말하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세 가지로 줄이겠다. 첫째. 군단장으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하지 않은 죄."

데일은 문득, 이곳 3군단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는 데일이 이런 식으로 구속되었건만, 이제는 서로의 처지가 반대가 되지 않았는가?

"둘째. 군단장의 지위를 이용해 온갖 횡포와 비리를 일삼고, 자신의 권력으로 무마한 죄."

"읍! 읍읍!"

"마지막. 감히 불순한 사상을 품고 제국에 반역을 꿈꾼 죄."

마지막에는 데일도 실소를 터트렸다.

딱히 데일이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죄가 막중하여 이곳에서 판결을 내리니... 멜피스 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데일의 엄숙한 선언에 멜피스가 굳어버리고. 지켜보던 이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데일은 바둥거리는 멜피스의 입에서 재갈을 빼내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명확한 증거도 없이, 진짠지 가짜인지 모를 증언만으로 판결을 내리다니!! 이게 말이 되나!"

"너는 증거를 가지고 사람을 처벌했나? 적어도 내가 감옥에 처박힐 때 그런 건 못 봤는데."

"...어, 어쨌든! 반란이라니! 이건 모함이야! 나는 그런 적 없다고!"

"그래. 유언은 잘 들었다."

데일은 멜피스의 입에 다시 재갈을 쑤셔넣어주었다.

멜피스는 격렬히 저항했지만, 이빨 몇 개가 부러지자 데일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에른스트. 맡기겠다."

"아? 응!"

에른스트가 외쳤다.

"지금부터 전 군단장 멜피스의 교수형을 광장에서 집행하겠다!"

"와아아아!"

"흑기사 데일 만세! 황실 기사단 만세!"

사람들이 환호하며 광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아일라가 데일의 옆에 다가왔다.

"나쁘지 않았어. 일부러 이렇게 한 거지?"

"그래. 다들 사기가 바닥이니까."

멜피스의 횡포와 이번 졸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땅을 기었다.

그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라도 멜피스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다소 무시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일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멜피스와 붙어먹었던 지휘관들도 쳐낼 거야. 부대를 재편하고, 지금 3군단 꼬라지가 어떤지 다시 조사해야겠지."

"얼마나 걸리겠나?"

"글쎄. 솔직히 3군단이 어느 정도까지 망가져 있는지 짐작도 안 가서...."

어쨌건.

3군단이 온전히 회복하는 데에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건 자명하다.

"결국 급한 건, 시간인가"

시간만 넉넉하면 이대로 3군단을 재편하고.

곧장 4군단으로 날아가 협력까지 구할 수 있을 터.

데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주황빛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제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저 주황빛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올해 농사는 완전히 끝이겠지만,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근!

갑작스럽게 데일의 심장이 맥동했다.

데일은 당황했다.

오래도록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다니?

하지만 이건 착각이었다.

뛴 건 심장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밤의 힘이다.

'뭐지?'

싸한 느낌에 데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일라는 갑작스러운 데일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일라는 느끼지 못했다.'

느낀 건 데일뿐일까?

아니었다.

몰려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머리를 쥐어싸맸다.

"어억!"

"윽!"

"뭐, 뭐지?"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신을 섬기는 사제거나, 혹은 그녀들에게 힘을 내려받은 전사들이거나.

'신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하늘을 뒤덮은 주황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어어. 뭐지?"

"갑자기 조금 피곤한데...."

빛에 닿은 사람들은 따끔한 감각을 느꼈다.

묘하게 힘이 없고, 피로함을 느꼈다.

나무는 축 처졌고, 키 낮은 잡초는 그 색이 천천히 바래갔다.

데일은 몸속의 힘이 불안정하게 널뛰기하는 걸 느꼈고, 이내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질 알아차렸다.

'힘을 흡수하고 있다.'

마치 데일이 새벽 안개를 흩뿌려 사람들의 생기를 흡수하듯.

저 주황빛은 닿는 이의 힘을 강탈해가고 있었다.

지금은 그 양이 많지 않다.

조금 노곤한 정도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점점 더 이 빛이 강해질 거라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저 주황빛이 온 대륙을 뒤덮고 있다.

사람 숫자를 생각하면, 조금씩 힘을 뜯는다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 될 것이다.

그 힘으로 황혼은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키고, 기어코 신을 떨어트릴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멜피스의 목이 매달렸다.

사람들은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지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데일은 에른스트와 아일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당장 내일이라도 진군해야 한다."

"상태가 개판이지만... 어쩔 수 없군. 죽음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내가 이레네로 올라가서 얘기를 좀 해볼게. 이 정도까지 왔으니, 엉덩이 무거운 귀족들도 더는 뭉그적대지 못하겠지."

"부탁한다."

"경은 뭘 할 거야?"

잠시 고심하던 데일이 물었다.

"요새에는 밤의 신전이 있겠지?"

"어. 웬만한 군단에는 하나씩 있으니까."

"그곳으로 가보겠다."

밤의 여신이 어떤 상태인지.

당장 확인해야 한다.

황혼

* * *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탑에서 주황빛이 끝없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하늘로 솟아올라, 온 사방을 향해 퍼져나갔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황혼의 추종자들은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아아!"

"인간의 시대가 오리라!"

눈물을 쏟아내며, 기쁨을 울부짖는 광신도들.

그 광기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황혼은 차분히 서 있었다.

누군가는 황혼이 미쳤다고 말한다.

미치광이에, 머리가 돌아버린 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황혼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정하며, 뛰어난 머리를 가졌다.

가끔은 하찮은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황혼은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자였다.

그렇기에 숱한 위기를 넘어 이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한 걸음 남은 건가.'

황혼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하수인이 다가왔다.

어디서나 볼법한 평범한 노인의 생김새를 한 사내였다.

"경하드립니다. 이제 정말로 목표를 이루시는군요."

"경거망동하지 마. 아직 성공한 게 아니야."

"하지만 이미 계획은 완성 단계입니다. 누가 당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황혼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있어. 나를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한 사람이. 그가 반드시 올 거다."

"...."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노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해봐. 책망하지 않을 테니."

"그저 방금 황혼께서 짓고 있는 표정이 꼭... 그가 오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기를 바란다라. 당연한 말을. 그의 영혼은 이 의식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당연히 와 주어야지."

노인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황혼은 가슴에 틀어박힌 룬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너무 많은 위기가 있었다. 덕분에 대업이 너무나 늦어졌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돼. 눈앞의 성공에 홀린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법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명령을 내리겠다. 남아 있는 인간들이 이곳으로 병력을 보내겠지. 그들을 막아라. 내가 의식을 완성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

황혼이 탑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탑에서는 빛으로 된 줄기가 촉수처럼 뻗어나와 황혼의 몸을 관통했다.

황혼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강력한 힘과 전능감을 느꼈다.

한 꺼풀 더 인간이라는 탈에서 벗어났다.

황혼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할 수 있겠나?"

노인은 한 치의 주저 없이 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 * *

데일이 신전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처음 보게 된 건 머리를 부여잡고 덜덜 떠는 늙은 사내였다.

"아으. 아으으!"

복장을 보니 이곳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였다.

그는 끔찍한 광경이라도 목도한 사람처럼 몸을 벌벌 떨어댔다.

눈가에는 물기가 맺혔고, 다리는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데일이 그런 사제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시오."

벌벌 떨던 사제는 고개를 들었다.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데일을 알아본 것이다.

"데, 데일 경? 맞습니까?"

"맞소."

그러자 사제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와, 데일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크, 큰일입니다!"

"일단 진정하고.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시오."

붕붕 고개를 끄덕인 사제가 호흡을 골랐다.

여전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신께서. 여신께서 위기에 빠지셨습니다. 저희에게는 들립니다! 그분이 고통에 신음하는 목소리가! 황혼! 그 가증스러운 자가 기어코 이 세상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여신이랑 얘기하고 싶소."

"아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제는 기도실로 데일을 들여보내주었다.

데일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예를 표했다.

"왔습니다."

대답이 없다.

데일은 혹시나 해 목소리를 높여 여신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크게 불러도, 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하나.

[....]

데일은 여신의 존재를 느꼈다.

분명 데일의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하지만 여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전과 같이 단어의 형태조차 내려주지 못했다.

'여신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약해졌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안 그래도 바쁘니,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일은 잠시 고민하다 여신에게 말했다.

"예전에 당신이 말했었죠. 이 여정의 끝에서, 내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아무래도 그 끝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결전이 다가왔다.

이기든, 지든.

어떤 식으로든 결말은 나오리라.

"이전부터 얘기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만큼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데일은 여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밤의 여신은 언제나 데일에게 호의를 보였고, 진짜 아들처럼 대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데일은 그 호의 아래에 의도가 깔려 있다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치 않는다.

"당신이 저를 이용해서 원하는 걸 이루려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당신의 힘이 필요했으니, 당신을 믿지는 않아도 계속 당신을 이용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걸 주고받는 그런 계약 관계.

이 세계의 신앙이란 그런 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데일은 훌륭한 신도였을 수도 있으리라.

"애초에 당신을 믿는 건 제게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신이 없는 세계에서 왔고, 당신은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일이 없으며,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건 당신의 책임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악마가 대륙을 집어삼키는 걸 방치했다.

방치라는 말은 너무한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여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건 확실하다.

지상으로 개입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힘이 아까워서일 수도 있다.

지금의 혼란이 오히려 신앙에 더 도움이 되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황혼의 사상에 공감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데일은 이 여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때로는 의심했으며, 조금 한심하고 무책임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도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고 하여, 저에 대한 당신의 호의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설령 다시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지금 말해두겠습니다."

데일은 천천히. 그리고 힘을 주어 발음했다.

"감사합니다."

데일은 자리에 일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표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라 해도, 데일이 이곳까지 온 데에는 여신의 도움이 컸으니.

[....]

여전히 기도실 안은 고요하다.

하지만 데일은 왠지 여신이 자신의 모습을 전부 보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까?

아니면 주책맞게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밤의 여신이 차갑고 도도하다는 인상을 가진 사제들이 충격에 빠질 모습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감사는 전해졌다.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저한테 힘을 내려줄 여력이 있으십니까? 이번에 흡수한 생기가 제법 있어서."

대답은 없었다.

데일은 그걸 거절로 읽었다.

'힘든가 보군.'

데일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데일은 기도실을 떠났다.

기도실에는 죽음처럼 차갑고 서늘한 적막만이 맴돌았다.

* * *

밤의 여신은 더 이상 힘을 내려주기 힘들다.

'정확히는, 힘을 내려주려면 그만큼 희생해야 할 상태인 거겠지.'

신들이라고 전능한 존재는 아니며 제약에 묶여있다.

이제 데일에게 힘을 내려주려면 희생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렸고, 지금까지 여신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힘을 사용하는 데에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이제 여신의 힘으로 더 강한 힘을 얻는 건 어렵다고 봐야 한다.

'조금 아쉽긴 하군.'

데일은 본인의 성장이 결코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잠들어 있던 시간을 제외하면 약 1년 반.

그간, 데일은 단순히 '빠르다'라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보였다.

엘프들에게 쫓기고, 조금 강한 몬스터와 악마가 아닌 그 하수인에게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게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데일이 혼자서 황실 기사단을 전부 꺾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놀라울 정도의 변화.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냐? 묻는다면 대답은 확고했다.

'부족하겠지.'

황혼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게임에서 보았던 상위 서열 악마들보다는 강할 것이다.

그러니 악마를 휘하에 부리는 것일 테니.

하지만 지금 데일이 그 악마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힘들다. 현실적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게다가 꼭 여신의 힘을 받아야만 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장 황실 기사단과의 결투는 데일의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루드비히의 가르침도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었다.

숫자로 찍히는 능력치 외에도 데일에게는 많은 게 있는 셈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최대한 기량을 갈고닦아야겠군.'

데일은 거리를 걸었다.

이번 전투의 후처리로 병사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부상자를 수습했고, 건물에 붙은 불을 진화했다.

요새는 엉망이었다.

멜피스의 졸전 탓도 있지만 엘레나 탓도 무시할 수 없다.

병사들은 도시를 갈아버리던 토네이도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에게 책임을 지우자는 말은 거의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엘레나가 황혼의 병력을 일소해버린 전공을 세운 것.

둘째. 엘레나의 신분이 고귀한데다가 데일과 친하다는 것.

셋째. 이제 곧 황혼과의 싸움에서 엘레나의 힘이 중히 쓰일 거라는 것.

덕분에 엘레나는 황혼과의 결전에서 열을 다해 싸우는 걸 조건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병사들도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토네이도 자체에 죽은 사람은 없기도 하거니와, 적이었을 때는 두려운 '마녀'라도 같은 편이면 든든한 '마법사'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저 하늘의 빛이 사람들의 힘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사람이란 으레 변화에 금방 적응하기 마련이라, 온 하늘이 주황빛에 덮여도 금방 익숙하게 생활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제 그게 불가능하다.

저 빛은 모두의 생기를 거둬가고, 온 대륙에 죽음을 뿌릴 것이다.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속을 지배했다.

"정말로 세상이 끝나려나...."

"신들께서 우리를 구해주시겠지?"

그렇게 실의에 빠진 이들의 눈에 데일의 모습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데일 경!"

"제발 저희를 구해주세요!"

"황혼을 무찌를 수 있는 거 맞죠? 그렇죠?"

간절함.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곳에 여신의 기사가 있다.

수많은 위업을 쌓으며, 사람들을 구한 흑기사가.

그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싸움을 이겨왔다. 강적들을 꺾어왔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래 주기를 원했다.

"...."

기대가 무겁다.

이전부터 말했지만, 데일은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시선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호의적인 관심도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런 기대감은 더더욱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하지만 데일은 여기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확신을 주는 것.

데일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곧바로 황혼과 싸우러 갈 거다. 대륙의 모든 아군이 함께 싸울 거고, 너희들도 함께하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 미리 준비해두어라."

한 병사가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가. 이길 수, 있을까요?"

"...."

데일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데일은 확신에 찬 어조로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말을 해주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데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약속을 했으니 데일에게는 저 말을 지킬 의무가 생겼다.

그렇게 마지막은 빠르게 다가왔다.

황혼

* * *

아일라와 에른스트가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망가진 3군단을 재편했다.

병사들의 상태를 대강이나마 점검했고, 지휘관들의 역량을 빠르게 확인했으며, 멜피스에게 붙어먹던 지휘관들도 일단 쓸모가 있으면 가벼운 벌로 넘어갔다.

모든 건 시간 탓이다.

철저하게 일처리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그 둘이 쉼 없이 뛰어다닌 덕에 군단이 얼추 재편되었다.

임시 군단장은 아일라가 맡았다.

본디 데일이 군단장 지위를 맡을까도 싶었지만, 데일은 역시 지휘관보다는 전사로서 싸우는 걸 선호했다.

군단장의 서포트를 에른스트와 친위대가 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물론, 지금의 3군단이 절대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군단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병자나 다름없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병자.

아일라와 에른스트가 한 건 그 병자에게 극약처방을 해, 억지로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그 움직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목적은 달성되었다.

아일라가 말했다.

"바로 출발하겠어. 마침 하켄 사령관과 북쪽의 에스델 성하가 이레네를 탈환하고, 병력을 합쳤다는 소식이 들어왔어."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군."

"우리도 조금이라도 빨리 합세해야 해. 의식이 완성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어."

아일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길한 주황빛.

이미 파멸은 우리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당장 내일 아침 출발할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필요한 준비는 끝내둬."

"알았다."

데일에게 알려준 아일라는 그대로 어딘가로 급히 달려갔다.

과도한 업무에 그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 * *

데일은 성 밖에서 대기하던 유령선과 야가브를 찾았다.

데일이 상황을 설명하자 야가브와 자매들이 벌컥 화를 냈다.

"한참 기다렸는데! 지루했는데!"

"혼자만 황제를 보고 오다니!"

"치사하다!"

"됐고. 앞으로 올 싸움이나 준비해라. 이번 싸움에서 활약하면, 너희들의 꿈을 이룰 수 있을 테니."

"꿈?"

"사람들에게 무시 받지 않는 게 목표였잖아? 이런 싸움에서 활약한다면, 사람들도 이전처럼 너희들을 대할 수는 없을 거다."

대륙의 운명을 건 결전에서 활약하면 밴쉬들에 대한 시선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데일의 말에 자매들은 꺄르륵 거리며 기대에 부풀었다.

데일은 그런 자매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유령선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주황빛이 하늘을 뒤덮은 이후, 밤과 낮의 개념은 흐릿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전의 생활 그대로 시간이 되면 잠을 청했다.

천으로 짠 안대가 필수품이라 하던가?

데일도 똑같이 행동했다.

잠을 잘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이렇게 눈을 감으면 늘 그랬듯.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켄과 에스델과 함께 모험을 다니던 이야기.

이레네의 활기찬 모습.

언젠가 도적단에게서 구해냈던 소년과 그 어머니.

늪에서 라그나와 나눴던 대화.

프라우가 자기 무기에게 말을 걸던 모습.

이런저런 기억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기억을 즐겁게 되집던 데일은 문득.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어느새 이곳에서의 기억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군.'

보육원이나 조부. 지구에서의 기억보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시간의 파도 속에 흐려지며, 새로운 기억이 그 위를 덮기 마련이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오래도 있었어.'

금방이라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데일은 이곳에서 이미 몇 년을 보냈다.

시간 그 자체로 보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 밀도 있게 들어찬 사건들 탓에, 지구에서의 기억.

그리고 온전히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이 너무나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돌아가서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지금의 데일과 이전의 그는 전혀 다르다.

단순히 다른 이름을 쓰고, 다른 몸뚱이를 가진 것과는 다르다.

사고방식부터 삶을 대하는 자세까지.

과거의 데일과 비교하면 이미 그는 다른 사람이다.

과연 돌아가서도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면 다 끝인 것을.'

맞다.

이기지 못하면, 지금의 상상은 전부 김칫국을 마시는 것에 불과했다.

데일은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는 걸 이어 나갔다.

점점 지구에서의 기억도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평화롭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그 시절의 기억들.

그런 기억들에 집중하다 보니 주위 풍경이 변했다. 데일은 어느새 기억 속에 들어와 있다.

데일은 이걸 꿈이라 불렀다.

언제나처럼 조부가 앉아 진지한 얼굴로 훈계했다.

"■■아. 세상에는 개새끼들이 넘쳐나지만, 너만은 사람의 도리를 따라야 한단다. 알았지?"

몇 번이고 되뇌셨던 말.

그리고 데일이 그토록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 필사적이 되게 했던 조언.

그걸 말하는 조부의 태도는 어딘가 강경한 느낌이 있다.

평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결코 입에 담지 않을 욕설도 섞여 있다.

꿈속의 데일은 물었다.

"왜요?"

당연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당시 사춘기였던 데일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사람은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정작 그 도의라는 걸 저버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은데?

손자의 당돌한 질문에 조부가 답했다.

"사필귀정.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반드시 되돌려받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그걸 업보라 부르지. 지금 당장은 도덕을 어기고 이득 볼 수도 있을 거다. 정직하게 사는 게 바보 같고 우둔해 보일 수 있지. 하지만 먼 시선에서 보면 사람은 반드시 보답받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단다. 바보같이 사는 게 실은 제일 똑똑한 것이지."

그 말을 들었던 당시의 데일은 납득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도 그렇다.

늘 남을 위해 살았던 조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고, 사고를 냈던 이는 희희낙락하게 살아갔다.

'바보같이 사는 게 제일 똑똑한 거라.'

데일은 여전히 그게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

* * *

3군단은 반쯤 무너진 요새를 버리고 진격을 시작했다.

병사들이 어설프게 열을 맞춰 걸었고, 이레네가 그런 병사들의 머리 위에서 둥둥 따라다녔다.

"이번 싸움으로 대륙을 지켜내자! 가족과 친우를 지켜내자!"

"마지막이다! 이제 전쟁은 없어! 전부 끝이라고!"

"와아아아!"

"이기자!"

지휘관들이 곳곳에서 병사들에게 기운을 북돋웠고, 그에 호응한 병사들이 환호했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하지만 위태위태해.'

가뜩이나 오랜 시간 사기가 땅에 떨어졌던 3군단이다.

지금의 분위기가 한 번이라도 꺾인다면, 병사들은 절망에 빠져 전의를 잃으리라.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아야 해.'

패배하면 그걸로 끝.

3군단은 와해하여 버릴 것이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다.

아일라가 말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야. 저 빛이 병사들에게서 계속 힘을 빼 나가고 있어. 지금도 피로를 호소하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게다가 마탑에서 경고해왔어."

"마탑에서?"

"응. 아무래도 황혼이 강력한 의식을 펼치는 모양이야. 무슨 의식인지는 모른데. 아마 신을 떨어트린다느니 하는 거랑 연관이 있겠지. 확실한 건 하나야."

아일라가 할 말이 예상되었다.

"완성되면 끝이라는 것."

"그래.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이 싸움을 끝내야 하는 거야."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황혼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그걸로 끝.

싸우는 중에 황혼이 의식을 완성해버린다면 그것도 끝.

이쪽의 승리 전략은 단기간에 상대를 꺾어내고 의식을 저지하는 것뿐이다.

'쉽지 않겠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모두가 상황의 어려움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신, 데일이 물었다.

"적들의 움직임은?"

"일단 숫자가 적지 않아. 1군단과 2군단. 흡수된 악마 휘하 세력과 황혼을 추종자들. 거기다 황혼의 승리를 더 높게 친 기회주의자들도 달라붙었고. 숫자 자체로만 치면... 우리보다 훨씬 많아. 4군단이 합세해온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4군단 쪽은 소식이 제대로 전해졌는지조차 미지수다.

4군단으로 향하는 경로에 황혼의 영역이 있는 탓에 전령이 쉬이 가기도 힘들었다.

하켄이 이레네를 점령한 지금, 급하게 전령을 보냈겠지만 지금 보내서야 늦는다.

'내가 보냈던 전령이 무사히 도착했다면 또 모르지만.'

아일라가 이어서 설명했다.

"상대는 아무래도 완전히 수비 태세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아. 지금도 병력을 쪼개서 사방을 견제하고 있지만, 본대는 그 자리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시간만 끌어도 상관없다 이거겠지."

황혼이 탑을 짓고 있는 곳은 황무지다.

방벽으로 쓸 자연 지형물도 적고, 딱히 성벽이 지키고 서 있는 곳도 아니다.

그나마 수비의 이점은 좀 덜 하는 셈.

"뭐. 그것도 일단 무사히 도착했을 때의 얘기지만."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지금 3군단은 보급도 최소한으로 한 채 움직이고 있다.

어차피 단기 결전이 될 테니,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 다소 극단적인 생각이었다.

문제는 낙오자다.

하늘을 뒤덮은 빛에 피로를 느끼는 병사들이 많았고, 적지 않은 수가 행군 도중 낙오해버렸다.

군단은 그런 병사들을 최대한 달래고 힘을 북돋으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병사들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낙오병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걸려있는 싸움이니만큼 다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목적지에 도달하겠다는 집념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앞으로 행군을 거듭할수록 낙오병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 낙오병들이 사기에 절대 좋지 않다는 것도 명백하다.

'과연 몇 명이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데일은 이전에 기사단장과 함께 다닐 때 했던 것처럼 낙오병들을 등에 업었다.

해골마를 소환해 수레를 끌게 하고 그 수레에 낙오병들을 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벌써 힘이 빠져 낙오하는 이들을 억지로 데려가봤자 전투에서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었다.

'되도록 하켄이랑 에스델 쪽에서 병력을 온존하길 바라야겠군.'

그나마 그쪽은 사제 인력이 풍부하니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기에는 유리할 것이다.

반대로 이쪽에는 기사와 마법사가 많다.

두 군대가 합류할 수 있다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으니, 큰 힘을 낼 수 있을 터.

'문제는 무사히 도착하냐인가. 이놈의 전쟁은 항상 이동하는 게 문제군.'

데일은 옆에서 함께 이동하고 있는 엘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은 좀 괜찮나?"

"별문제 없어요. 이 해골마를 타는 데에도 제법 익숙해졌고요."

엘레나는 데일이 소환해준 해골마에 올라타 있었다.

일반 군마보다 1.5배는 더 큰 해골마는 생긴 건 무섭지만, 위기 시에는 자기 주인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조금 기대도 되네요. 하켄이랑 에스델이 엄청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면서요? 에스델은 이상할 게 없지만, 솔직히 하켄은 잘 상상이 안 가네요."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오랜만인지라 엘레나는 조금 들떠 보였다.

특히. 하켄의 소문은 쉬이 믿기 힘들었다.

프라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그는 제가 인정한 사내입니다. 조금 허술해 보여도 할 때는 하는 사내죠. 충분히 사령관쯤은 할 수 있지요."

"아무리 봐도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친위대를 지휘하던 에른스트도 이야기를 듣고 끼어들었다.

"아. 하켄 씨... 음. 뭔가 경험 많은 용병이긴 하지만, 좀 못 미더운 면이 있긴 하죠. 데일 경은 직접 봤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켄에 대한 소문은 워낙 믿기 어려워,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데일은 자신한테 쏠리는 시선에 간단히 일축했다.

"직접 가서 보도록."

데일이 그냥 알려주는 건 재미가 없지 않은가.

지금은 그런 소소한 기대감을 간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 싸움이라는 중압감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조금 의외군. 당연히 방해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3군단의 상황이 좋지 않은 건 황혼 측도 잘 알 것이다.

그러니 소수의 병력을 보내 견제를 했을 터.

지금 행군 중인 3군단은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다.

행군에 잔뜩 지친 데다, 규율도 잘 안 잡혀 있다.

조금의 타격을 입히고 공포심만 심어줘도 행군을 크게 늦출 수 있지 않겠는가?

'저쪽에서도 쓸데없는 데에 힘을 빼지 않고, 결전을 준비하는 걸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쯤.

마침내 군대가 황무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장 앞서가던 아일라는 탄식을 터트렸다.

"...이게 대체."

드넓은 황무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이 죽은 땅 곳곳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누구도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그런 꺼림칙한 광경이었다.

황혼

* * *

가뜩이나 황량한 황무지는 생기를 빨아들이는 주황빛에 검게 죽어 있었다.

생명이 없는 죽음의 대지.

그런 대지에 뜬금없이 뚫려있는 커다란 구멍들은 마치 이쪽에 경고하는 것 같았다.

감히 이 땅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아일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너무 쉽긴 했지. 어떻게 생각해?"

데일은 구멍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인 것 같다."

"악마?"

"땅에 굴을 파고 살며 지나다니는 인간들을 습격하는 악마가 있다. 아무래도 그 녀석인가 보군."

대지를 부수는 자 케톱.

데일은 기억을 뒤져 악마에 대한 지식을 찾아냈다.

"이곳은 케톱의 영역인 것 같다. 아무래도 저 구멍은 녀석이 파 놓은 굴이고, 그 굴은 땅 아래에 얽히고설켜 있을 거다."

"...상대법은 혹시 알고 있어?"

"녀석의 영역에서 싸워주는 건 하책. 가장 좋은 건 케톱을 밖으로 유인해 사냥하는 거지만... 지금은 힘들겠지."

일행은 황무지 너머로 가야만 한다.

돌아갈 시간은 없고, 악마를 유인해 사냥할 여유도 없다.

아니. 애초에 악마 케톱이 유인에 당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작정하고 시간을 벌려고 하겠지.'

에른스트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레네에서 연락이 왔어. 주위에 다른 적은 없는 모양이야."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이레네는 주위를 넓게 정찰할 수 있었다.

그들이 관측한 바로, 이 근처에 적은 없다.

적어도 지상에는 말이다.

아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결국 저 사이를 지나가는 수밖에."

"놈이 튀어나오면 최대한 빨리 처치해서 피해를 줄여야 한다."

대놓고 적의 함정에 발을 들이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일라가 말을 몰아 검게 죽은 황무지 위로 발을 디뎠다.

"지금부터 적의 영역이다! 모두 긴장하도록! 특히 구멍 근처를 이동할 때 조심해라!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즉각 소리치도록!"

"예!!!"

병사들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억지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데일이 에른스트에게 말했다.

"이레네에 있는 마탑에 연락해서, 적이 튀어나왔을 때 요격할 수 있게끔 준비하라고 해라. 하지만 화염 마법이나 전격 마법 같은 건 안 돼. 되도록 아군에게 피해가 적을만한 마법으로 준비하라고 해라."

"으, 으응. 알겠어."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준비하는 데일에게 고개를 붕붕 끄덕인 에른스트가 급히 말을 몰았다.

데일은 엘레나에게 말했다.

"엘레나 너도 프라우 옆에 딱 붙어 있어라. 여차하면 해골마가 도망칠 테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그리고 너도 마법을 준비해두면 좋을 것 같다. 저 하늘에 있는 마탑의 마법사들보다는 네가 훨씬 나을 것 같으니."

"...네! 맡겨주세요!"

칭찬받았다 생각했는지 엘레나가 의욕을 보였다.

그 다음으로는 황실 기사단에 지시를 내렸다.

"각자 흩어져서 병사들을 지키시오."

"옙."

악마를 상대로 일반 병사는 그리 의미가 없다.

마력을 다룰 줄 아는 기사나 마법사, 혹은 사제가 필요하다.

'기사들이 뭉쳐서 함께 싸우는 게 가장 좋지만....'

케톱은 영리하고 신중한 사냥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악마치고는 겁이 많기도 하다.

녀석은 이쪽의 가장 약한 부분만을 공격할 것이니, 기사들을 흩어놓는 게 좋았다.

진열을 가다듬은 3군단이 다시 전진했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하늘에 함께하는 이레네와 옆에서 걷는 황실 기사들, 그리고 데일을 보며 억지로 두려움을 억눌렀다.

"아, 아무 일도 없겠지?"

한 병사가 구멍 하나를 지나치며 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대체 얼마나 깊은지 모를 땅굴에는 깊은 어둠만이 서려 있었다.

왠지 기분 나쁜 냄새가 나고 섬뜩한 소리가 굴속에서 울려 나왔다.

식겁한 병사는 급히 구멍에서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한동안 위태로운 평화가 이어졌다.

기사들은 구멍을 날카롭게 감시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평온이 도리어 병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영리한 놈.'

데일은 마검을 꺼내 들었다.

악마는 반드시 이쪽을 습격할 것이다.

사람들의 불안함이 극에 달했을 때. 그때 바로 케톱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얼마 안 남았어.'

그리고 그런 데일의 생각을 증명하듯.

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각이 민감한 데일만이 감지해냈다.

하지만 이내 모든 병사들이 느낄 정도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뭐, 뭐야!"

"놈이 온다!"

"조심해!"

사방에 뚫린 구멍에서 일제히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었다.

어딜까.

어느 구멍에서 나타날까.

모두가 긴장하고 있던 그때.

데일이 소리쳤다.

"구멍이 아니다! 중앙이다!"

"뭐?"

다음 순간.

진형의 한 가운데가 들썩이더니, 이내 거대한 괴물이 솟구쳐올랐다.

파아아!

모습을 드러낸 건 길쭉한 몸체에 징그럽도록 많은 다리를 가진 괴물.

마치 샌드웜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그 크기가 압도적이다.

순식간에 땅을 뚫고 나와 병사들을 집어삼킨 케톱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대지를 부수는 자 케톱! 감히 나의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두 발 달린 것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케톱이 아가리를 닫았다. 순간적으로 케톱의 머리가 크게 부풀었다.

그리고 다시 아가리를 벌린 순간.

콰아아아!

흙과 돌이 섞여 끈적해진 액체가 병사들을 덮쳤다.

"크아악!"

"어억!"

액체에 휩쓸린 병사들이 그대로 파묻혀버렸다.

데일은 해골마를 이끌고 케톱에게로 달려들었다.

케톱은 데일을 알아보았다.

"왔구나 흑기사! 내 동지들을 죽인 원수! 오늘이 복수의 날이니라!"

하지만 케톱은 데일과는 싸울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데일이 외쳤다.

"원수라면서 도망치는 거냐?"

"나는 내 동지들만큼 멍청하지 않거든!"

그대로 케톱은 땅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데일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텅 빈 구멍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쫓을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저 아래는 굴과 굴이 얽혀 만들어진 미로다.

안 그래도 길치인 데일이 들어갔다가는 영원히 헤맬 수도 있으며, 케톱의 함정에 그대로 파묻혀 버릴 수도 있다.

데일은 쫓는 대신 피해 상황을 살폈다.

'방금 그 짧은 기습에 20명 정도가 당한 건가. 좋지 않은데.'

케톱은 영리했다.

구멍을 파 놔서 구멍에 모든 시선을 쏠리게 만든 뒤, 정작 기습은 멀쩡한 땅에서 튀어나오는 식으로 허를 찔렀다.

덕분에 마법사들도. 기사들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게임에서는 그냥 구멍으로만 공격했는데.'

꼭 구멍이 아니라도 공격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다.

이 황무지 전체가 위험지대라는 뜻 아닌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병사들이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미 공격은 시작되었다.

달랠 시간이 없다.

쿠구구구.

다시 한번 지면이 흔들린다.

데일은 바닥에 내려서, 땅의 울림을 느꼈다.

흔들림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케톱은 마치 이쪽을 비웃듯. 계속해서 땅을 흔들어 병사들의 두려움을 키웠다.

데일은 냉정했다.

겨우 이런 심리전에 흔들리기에는 헤쳐온 싸움이 너무 많다.

데일은 눈을 번쩍 떴다.

"3부대 쪽! 온다!"

말과 동시에 데일이 가르킨 구멍에서 케톱이 튀어나왔다.

아까와는 달리, 구멍을 이용하는 터라 튀어나오는 속도가 한층 빨랐다.

데일은 곧장 마검을 투척했다.

파악!

아가리를 벌려 흙을 토해내려던 케톱이 마검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녀석은 아가리를 다문 뒤, 머리를 흔들어 마검을 쳐냈다.

"쯧. 감이 좋은 놈이군. 동지들을 죽인 건 운이 아니었던 건가."

혀를 찬 케톱이 순식간에 다시 구멍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마법사들의 폭격이 집중되었지만, 이미 사라진 케톱에게는 닿지 않았다.

계속해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케톱이 구멍을 파고 튀어 오르면, 데일이 알아차리고 막아낸다.

마법으로 케톱을 공격하려 하면, 이미 케톱은 지하로 사라져버린다.

숨바꼭질. 아니, 두더지 잡기라 해야 할까?

문제는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게 악마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으아아악! 살려줘!"

갯지렁이같이 생긴 괴물이 튀어나와 그대로 병사 하나를 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어서 구멍에는 까드득. 거리는 뼈 씹는 소리가 울렸다.

케톱의 하수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하수인에 맞서 용전하지만, 주의가 분산되는 건 막을 수 없다.

병사들의 전열이 서서히 붕괴되고, 공포심은 극대화된다.

무력함을 느끼게 된 인간이 취할 행동은 하나.

'도망치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그걸로 끝이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3군단이라는 질서가 이대로 끝장이 날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듯.

케톱의 목소리가 모든 구멍에서 울려 퍼졌다.

"하하하! 도망쳐라! 먼저 도망치는 놈은 내 특별히 살려주도록 하마! 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바칠 이유가 있느냐!!"

"어어."

"사, 살려준다고?"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병사들이 흔들린다.

지휘관들이 당황하고 기사들이 악마의 교활함에 치를 떨던 그때.

데일은 다른 한 가지에 집중했다.

'모든 구멍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말은 곧 저 아래 굴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니. 이건 지금껏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데일의 뇌리에 박힌 건 '이어졌다'라는 단어다.

'그래. 애초에 내가 직접 저 아래로 잡으러 갈 필요가 없었어.'

데일은 급하게 마법사들을 불러 모았다.

계획을 설명하자, 마법사들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음. 저 땅 아래 공간이 얼마나 넓을지 모르고...."

"저희의 힘만으로 가능할지...."

하지만 엘레나만이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할 수 있어요."

"확실한가?"

"예."

데일은 지시를 내렸다.

"바로 준비해라. 어차피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냥 지금이라도 주요 병력만 이레네로 올라가 도망치는 게...."

병사들을 버리고 이레네로 올라가자는 의견에 데일이 살벌하게 말했다.

"닥치고 따라라.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데일의 서슬에 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사 수백이 일제히 주문을 외우자, 온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큰 게 준비되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케톱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전한 지하 굴에 들어간 탓에 도리어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문의 준비가 끝났을 때.

데일이 신호를 보냈다.

"지금!"

화아아아!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불꽃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폭탄처럼 펑펑 터져나가는 불꽃이 아닌, 파도처럼 흐르는 불꽃이다.

마법사들이 모여 만들어낸 막대한 불꽃이 빠르게 굴속을 타고 내려갔다.

"여력이 다할 때까지 마법을 쏟아부어라! 저 녀석이 못 참을 때까지!"

다음 순간.

대지에 나 있는 구멍에서 불기둥이 하나둘 솟구쳐 올랐다.

모든 굴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증거.

불기둥과 함께 악마의 하수인들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케톱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법사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윽.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아직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한계에요!"

"조금만 더."

"윽."

데일의 마음과 달리.

버티지 못한 마법사들이 픽픽 쓰러졌다.

마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부작용이다.

이대로 실패인가 싶던 그때.

엘레나가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냈다.

그저 붉기만 했던 불꽃이 새파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땅 그 자체가 녹아내릴 정도의 고열이 온 구멍에서 솟아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아아아!"

참다못한 악마가 튀어 올랐다.

저 단단한 피부로도 더는 불꽃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기회만 보던 데일이 곧장 달려들었다.

"감히!"

분노한 케톱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둥그런 입을 따라 징그러울 정도로 빼곡히 박혀 있는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케톱은 저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로 그대로 데일을 삼켜 부숴버리려 했다.

데일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키기 쉽게끔, 어깨를 움츠렸다.

데일의 몸이 악마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드득. 드드득 거리는 섬뜩한 소리.

"데, 데일 경!"

"데일!"

"하하! 별것도 아닌 놈이구나!"

비웃는듯한 악마의 태도.

충격적인 현실에 모두가 눈을 질끈 감던 그때.

케톱의 배 한편이 꿈틀거렸다.

찌르는듯한 고통에 악마가 바닥을 굴렀다.

"크아아악!"

케톱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통의 시간은 길게 가지 않았다.

부욱.

북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검의 칼날이 가죽을 뚫고 나왔다.

그 틈새로 케톱이 먹어 치워온 토사, 시체, 끈적한 위액과 내장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데일이 있었다.

케톱의 생기를 흡수해 곧장 몸을 원상복구 한 데일은 마검을 들고 케톱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케톱이 두려워하며 외쳤다.

"괴, 괴물이구나! 괴물이야!"

"악마가 괴물이라니. 우습구나."

데일은 마검을 들어 올렸다.

"황혼한테 전해. 이런 허튼수작은 이제 그만 부리라고."

후웅!

마검이 케톱의 머리통을 갈랐다.

워낙 두껍고 거대한 몸인지라 여러 번 내리쳐야 겨우겨우 잘라낼 수 있었다.

'아. 죽여버리면 황혼한테 말을 못 전하려나.'

하지만 상관없다.

이렇게 악마를 죽였으니, 더 견제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아군의 사기가 걱정이다.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굳어버린 병사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데일을 동경과 선망 어린 눈으로. 혹은, 마치 괴물을 바라보듯.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상관없다.

두려움이야말로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니.

"잠시 휴식을 갖겠다. 이후에 다시 출발하겠다."

감히 탈영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데일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데일의 말을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도망칠 생각은 못 할 테니.

데일은 널브러진 케톱의 시체로 다가가 투구를 벗었다.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데일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황혼

* * *

데일은 케톱의 피를 마셨다.

'케톱의 피를 마시면 내구가 올라가던가?'

바로 반응이 오는 것 같다.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몸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뼈가 조금 단단해지는 느낌이랄까.

데일은 케톱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마셨다.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조금 뜨악한 얼굴로. 혹은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피를 마시는 데에만 집중했다.

피를 다 마시자,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에 들어찬 케톱의 영혼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서 잠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데일에게 에른스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데일 경.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리저리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킨 데일이 말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것 같으니 다시 이동하지."

데일의 명에 따라 군단이 다시 이동했다.

습격은 없었다.

악마조차도 가볍게 격퇴했는데, 그 누가 덤벼들겠는가.

그렇게 3군단은 별 저항 없이 검게 죽어버린 황무지를 이동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이윽고 저 멀리 세워진 건축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탑이다...!"

대체 어떻게 저리 높이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불길한 탑.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흉물의 등장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라면 엄청나게 높다는 건가.'

하늘을 찌른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황혼이 지은 탑은 이미 저 하늘에 닿아 구름을 꿰뚫고 있었다.

데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가득 펼쳐진 주황빛이 저 탑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저 탑을 통해 힘을 모으고 있다. 즉, 저 탑만 무너트리면 황혼의 목적도 저지할 수 있다는 거겠지.'

이쪽의 목표는 간단하다.

저 끔찍한 탑의 붕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의식이 완성되는 것만큼은 막아내야 한다.

3군단은 계속해 전진했다.

적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다.

그때.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 깃발을 알아본 데일이 말했다.

"에스델 쪽 사람들이다. 전령인 것 같다."

군단은 행군을 멈추고 전령을 맞이했다.

전령으로서 온 젊은 사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데일 경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 교단의 사제가 초면부터 호의적이라서 조금 놀랐을 뿐이다."

사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와서 누가 그런 유치한 싸움을 하겠습니까. 애초에 두 여신께서는 서로 화해하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힘을 합쳐야지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부드럽게 말한 사제는 상황을 설명했다.

"하켄 사령관이 이끄는 서부군과 엘드리엄의 북부 군세가 합세해, 적의 서쪽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에스델 성하께서는 양측의 지휘관이 만나 함께 대화를 나누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급하더라도, 최소한의 조율은 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두 군대가 서쪽과 동쪽에서 황혼의 군세를 친다.

대전략은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은 일단 조절할 필요가 있긴 하다.

자칫 타이밍이 엇나갔다가는 두 군대가 함께 싸우는 게 아닌, 따로따로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으니.

"알겠다. 어디서 만나면 되지?"

"저희가 북쪽에도 이미 진지를 마련해놨습니다. 그곳에서 회담을 가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황혼의 군세가 도리어 이쪽을 공격해올 가능성은?"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럴 확률은 낮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몇 번 도발도 해봤지만, 완전히 수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알겠다. 지금 바로 출발하지."

같이 듣던 에른스트와 아일라. 그리고 마탑의 고위 마법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은 함께 갈 사람들과 최소한의 호위를 꾸려나갔다.

"경. 저희도 같이 갈게요."

"우리도 함께 가게 해주게."

엘레나와 프라우가 자원했다.

데일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다 같이 얼굴 한번 보면 좋겠지."

에른스트가 물었다.

"근데 그곳까지는 또 어떻게 갈 거야? 왔다 갔다 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릴 것 같은데."

"밴쉬 자매의 힘을 좀 이용해 보지."

데일은 야가브에게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을 태우고 이동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야가브는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살아있는 사람이라... 아슬아슬하게 될 것 같은데? 중간에 마력이 조금 부족할 수도 있긴 한데, 뭐. 잘못돼도 죽기밖에 더 하겠어?"

야가브의 말에 자매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반대로 프라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할 것 같네. 응. 그게 좋겠어."

"경. 제 호위기사가 저를 버리고 이곳에 남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 하, 하지만 저런 유령들의 배를 타야 한다니... 차라리 그냥 뛰어가면 안 되겠나? 응? 데일 내 친우여. 부탁일세!"

"얌전히 타기나 해라. 시간 아까우니까."

아일라와 에른스트를 비롯한 인사들이 유령선에 올라탔다.

그들 역시 언데드의 배에 타는 걸 탐탁지 않아 했지만, 데일이 괜찮다고 보증한 만큼 더 거절하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프라우가 반쯤 끌려와서 배에 오르자, 야가브가 웃음을 터트렸다.

"히히! 이런 귀한 인간들을 태워본 건 처음이군! 자! 자매들아! 준비해라!"

밴쉬들이 일행에 영체화 마법을 걸어주었다.

언데드가 보인 마법의 활용에 기사들은 껄끄러워했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흥미를 보였다.

"호오.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던가?"

"이런 방법도 있었군. 사람한테 써먹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지만 말이야."

"언데드도 얕볼 게 못 되겠어."

이윽고. 완전히 영체화 된 사람들은 현실과 분리되었다.

녹색 빛이 유령선을 두르자, 이내 배가 두둥실 날아올랐다.

데일은 조금 흐릿한 시야로 평야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유령선에 올라탄 건 직접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유령선이 충분히 날아오르자, 적의 상황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데일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숫자가 이렇게 많다고?'

드넓은 황무지에 적군이 새까맣게 몰려 있었다.

인간 병사들. 악마의 군세와 그 추종자. 누구의 하수인인지 모를 끔찍한 괴물들이 한데 얽혀 엄청난 대군을 이루었다.

그들은 명백히 이쪽보다 숫자가 많다.

적군이 빼곡히 모여, 마치 검은 파도가 꿈틀거리는 듯한 광경에 데일은 말을 잃었다.

'병사들이 이 모습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군.'

만약 일반 병사들이 저 압도적인 군세를 한눈에 담았다면, 모든 전의를 잃고 도망쳤으리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당황한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대체 몇만이나 되는 건지....'

데일은 야가브에게 손짓했다.

미리 얘기해둔 대로, 최대한 적 진영에 접근하라는 신호다.

고개를 끄덕인 야가브가 배를 움직였다.

늘 쾌활하고 유쾌한 야가브마저 조금 긴장한 기색이다.

적 쪽에서 자칫 요격이라도 날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 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서 적의 상황을 확인하고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승산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칫 요격당해 내가 증발해버린다면....'

꽤나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어쩌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해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밖의 동료들은 일부러 다른 배에 태웠으니, 설령 데일이 탄 배가 요격당해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으리라.

데일은 아래에 펼쳐진 적군의 상황을 꼼꼼히 확인했다.

'여러 집단이 섞여 있지만, 서로 따로 떨어져 있어.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하다는 거겠지.'

황혼의 군세. 악마와 그 추종자들. 어디에서 왔을지 모를 괴물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은 서로를 썩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당장 황혼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악마에게 긴 시간 고통받아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황혼이라는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같은 대의를 품고 있으니 잠시 함께할 뿐.

그 둘은 절대 사이가 좋을 수 없다.

심지어 같은 악마끼리도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으니, 하나의 군대라기보다는 여러 군대가 모인 연합군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 부분에서는 아군과 마찬가지다.

'찌를만한 틈을 하나 더 찾은 것 같군.'

영리하게 공격해 적들의 내분을 유도한다면, 생각보다 더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데일은 손짓했다.

'더 가까이 붙자.'

유령선이 다가가자 적들도 이쪽을 알아차렸다. 낌새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위험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야가브는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충실히 명령을 따랐다.

배가 적 진영에 더 가까워지자 좀 더 명확한 현황이 눈에 들어왔다.

데일은 적들의 숫자와 병졸. 진형과 상태를 최대한 머릿속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탑이 번뜩였다.

콰아아!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령선의 후미 절반이 깔끔하게 날아갔다.

균형을 잃은 유령선이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이, 이런!"

야가브가 급하게 힘을 써, 배의 균형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적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콰아!

이번엔 돛대가 깔끔히 날아갔다.

만약 조금만 더 아래를 겨냥했다면, 배가 통째로 소멸할만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데일은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차렸다.

'탑이 공격했다.'

탑이 번쩍인 순간. 광선이 뿜어져 나와 유령선을 타격했다.

말 그대로 빛의 속도에 준하는 공격이었기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 것.

야가브는 데일이 신호하기도 전에 배를 돌려 빠르게 탑에서 멀어졌다.

뒤이어 광선이 두어 번 쏘아졌지만, 다행히 사거리를 벗어난 탓에 배 일부분이 부서지는 선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타격이 너무 컸다.

부서진 배는 이내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야가브가 절규했다.

"으아아아! 내 배가!"

쿵!

마침내 지상에 부딪힌 유령선이 산산이 조각났다.

영체화가 풀린 데일이 배에서 내렸다.

'운이 좋았군.'

야가브의 조종 실력도 빛을 발했지만, 운도 좋았다.

저 섬광에 얻어맞은 데일이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탑에 공격하는 기능이 있다라....'

힘을 잔뜩 흡수한 황혼의 탑은 강력한 섬광을 뿜어댔다.

그 사거리가 짧지도 않으니, 아군입장에서는 끔찍한 무기라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다는 것.

만약 결전에 돌입하고 나서 탑의 포격을 받았다면,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내 배가! 내 배가!"

"그만 징징거리고 빨리 이동하자. 괜히 추격대가 붙을 수 있어."

데일은 땅을 치며 통곡하는 야가브가 말린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던 다른 유령선이 이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려 했다.

데일은 외쳤다.

"그냥 가라! 뒤따라가겠다!"

그럼에도 유령선 쪽에서는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야가브. 올라가서 다른 배를 지휘해라."

"그쪽은? 어떻게 하게?"

"나는 뛰어가는 게 더 빨라."

"뭐?"

데일은 더 설득하지 않고, 자세를 잡은 뒤 땅을 박찼다.

퉁!

땅이 패이면서 데일의 몸이 순식간에 저 앞으로 사라졌다.

그 속도는 이미 앞서가던 유령선을 따라잡고 있었다.

"...진짜네."

데일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린 야가브는 공중으로 둥둥 떠올라, 남은 유령선에 올랐다.

그녀가 아끼는 기함을 잃은 건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 보상을 톡톡히 받아낼 수 있으리라.

* * *

머지않아 일행은 북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다리로 빠르게 달려간 데일은 한발 앞서 도착할 수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프라우가 툴툴거렸다.

"우리는 유령선에 태우고, 자기 혼자만 뛰어가다니. 나도 뛰어가고 싶었는데...."

데일은 프라우를 무시하고 앞으로 시선을 주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 반가운 이들이었다.

"아, 데일 경. 그리고... 세상에. 엘레나?"

"허어. 공주님. 돌아왔구만."

에스델과 하켄이 놀라움을 얼굴에 드러냈다.

엘레나도 어딘가 쑥스러운 듯. 조금 민망한 듯.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죄송해요!"

엘레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왕족이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에 하켄과 에스델이 굳어버렸다.

"죄, 죄송이라니."

"마지막에 헤어질 때 너무 심한 말을 해버렸어요. 두 분도 많이 힘드셨을 텐데, 저만 생각하고... 용서해주세요."

하켄과 에스델은 서로를 쳐다보며 볼을 긁적였다.

악마 두르핀과 데일이 사라진 그날.

엘레나는 동료들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는 사라져버렸다.

그때의 기억은 엘레나에게 여전히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고개 숙인 엘레나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엘레나. 그럴 수 있지."

그 목소리에 엘레나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일라!"

여관 주인 카일라.

프라우를 제외하면 엘레나와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으며, 그녀가 언니처럼 따랐던 여인의 등장에 엘레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카일라는 그런 엘레나를 꼭 안아주었고, 엘레나도 카일라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하켄과 에스델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하티는 무심하게 다가와 데일의 허리에 주둥이를 비벼댔다.

데일은 그 탐스러운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다시 동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비록 힘든 싸움을 앞두고 있으나, 지금만큼은 모두 마음속에 따스함을 품을 수 있었다.

동료들은 함께 모여 앉아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떨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해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그런 따스함에서 빗겨난 이가 한 명 있었다.

"저, 저기. 왜 아무도 나는 아는 척도 안 해주는지...."

프라우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황혼

* * *

회포를 풀기에 앞서.

우선은 회의를 해야 한다.

결전을 앞둔 지금, 상의해야 할 부분은 적지 않았다.

하켄의 부관이 각을 잡고 설명했다.

"우선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저곳에 있는 적군의 숫자가 못해도 10만은 넘습니다."

"10만이라니...."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숫자가 모여 있을 수 있지? 보급은 어떻게 하고."

부관을 질문을 던진 아일라에게 설명했다.

"3군단도 최소한의 보급만을 챙기고 이곳까지 진군하지 않았습니까? 같은 이유입니다."

"아."

"어차피 이 결전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 이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이겠죠."

꽝! 하고 부딪히면 그걸로 끝.

무승부라는 뜨뜻미지근한 결과는 확실히 없을 것이기에, 이후의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부관은 힘을 주어 설명했다.

"우선 가장 위협적인 건 누가 뭐라 해도 악마들이겠죠. 황혼을 섬기는 악마들은 이전보다 힘이 줄었다는 평가를 듣지만, 그래도 악마는 악마입니다. 그들이 이끄는 군세는 여전히 아군에게 몹시 위협적입니다."

"악마... 확실히 까다롭긴 하지."

에른스트의 맞장구에 부관이 이어 말했다.

"그다음으로 위험한 건 바로 5,000에 달하는 황혼의 광신도 들입니다. 그들이 다루는 주황빛 힘. 편의상 황혼의 힘이라 부르겠습니다. 황혼의 힘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스스로의 몸을 강화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갑옷조차 베어 가를 정도로 파괴적이기도 합니다. 광신도들은 그런 황혼의 힘을 특히 강하게 사용하는 이들. 비유를 하자면, 기사이자 사제이자 마법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괴물이 5,000이나 있는 것이죠."

그 외에도 황혼에게 붙은 마법사나 기사들.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 역시 위협적이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는 따로 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저 탑에 요격당했다. 상당히 먼 거리까지 광선을 쏘아대더군. 봤나?"

이곳에 있는 모두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들도 똑똑히 봤다.

탑에서 연달아 쏘아지던 광선을.

기계처럼 딱딱하게 보고하던 부관도 침음을 흘린 뒤, 천천히 설명했다.

"...확인했습니다. 적이 사용하는 저 거대한 병기는 사거리도 길며 그 파괴력도 엄청났습니다. 심지어 연사까지 해대더군요. 지금으로선 약점이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무언가 대처법은 있나?"

"마법사들이 방어막을 치는 것밖에는... 하지만 그럴 경우 아군 마법사들은 공격 대신 방어에만 매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리면 저 탑은 광선을 쏘아대며 죽음을 흩뿌려 댈 것이다.

탑을 우선해 무너트리자니 그 주위에 포진한 병사들부터 뚫어야 한다.

방어막을 펼치자니 가뜩이나 수세인 아군의 화력이 더욱 줄어든다.

불합리하게까지 느껴지는 상황.

하지만 싸움이란 원래 불합리하다.

서로 동등한 조건에서 정당한 승부를 겨룬다는 건 현실에 없는 개념이다.

불리하고 승산이 낮더라도 어떻게든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생각이 복잡한지,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좋지 못하다.

쓸데없는 말이라도 일단 지껄여야 한다.

침묵 속에서는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저 탑이 우리 생각처럼 무적은 아닐 거야. 가령, 저런 파괴력이라면 막대한 힘이 들어가겠지. 그 정도의 힘이 들어가는 공격을 무한정으로 사용하지는 못하지 않을까?"

타당한 의견이다.

강한 일격에는 그만큼 많은 힘이 필요하다.

그런 막대한 힘을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황혼과의 싸움조차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최대한 많은 힘을 빼놓는 거야. 상대의 화살을 빼놓는 것처럼. 데일 경 덕분에 광선의 사거리는 얼추 파악되었잖아?"

"문제는 저희는 놈들이 몇 번이나 광선을 쏟아부을 수 있는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광선을 유도하려면 병사들을 미끼로 써야 하는데, 이는 아군의 사기에 몹시 안 좋을 겁니다. 게다가 적 병사들도 가만두고 보지 않을 것이고요."

"으음. 그건 그렇지.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

"아, 아닙니다. 저는 딱히 책망하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몇 마디 의견이 더 오고 갔지만 뾰족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어떤 수를 쓰든 막대한 피해는 불가피하다.

그때.

데일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방법이 하나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뭡니까?"

"부디 알려주십시오!"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데일을 쳐다보았다.

이 흑기사는 무식하게 보이는 인상과 달리, 가끔 번뜩이는 계책을 내놓았으니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데일은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한 빛을 띠었다.

특히. 제국에 충성심이 강한 이들은 난색을 보였다.

"으음. 어떤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다른 것보다 유용하냐 아니냐만 말해줬으면 좋겠군."

"확실히. 괜찮은 방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이 방법으로 가야겠군. 어차피 희생은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사람이 덜 죽는 방법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이 싸움은 우리가 명백히 불리하다. 이것저것 재면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몇몇 사람들은 무어라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데일의 의견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딱히 틀린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의견이 일치되었다.

일단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자,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공격할지.

부대를 어느 식으로 이동할지.

깃발과 뿔피리 신호를 맞추고, 서로의 전술적 식견을 공유했다.

사실. 이렇게 말을 맞춰도 막상 실전에 가면 다를 것이다.

수십만이 한 자리에 뒤엉키는 회전에서 상황이 예측대로 흘러갈 리도 없고, 명령이나 신호를 내려도 제대로 전달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말을 낮춰보는 게 승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군에게는 그 조금의 승산이 너무나 간절했다.

한참을 회의하던 중. 데일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4군단 쪽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나?"

"그게. 제시간에 전령이 도착했다면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기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

부관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제 올지 모를 4군단을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 하늘의 빛은 지금도 병사들의 힘을 빼앗아 가고 있다.

하루가 늦어질수록, 이쪽의 승산도 그만큼 낮아지는 것이다.

회의가 끝났다.

각자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해산했다.

데일과 동료들도 막사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카일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라? 기다리고 있었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죠. 어서 와요. 늦으면 음식이 다 식어버리고 말아요."

"음식?"

"그럼 이렇게 만났는데, 밥도 안 먹고 갈 생각이었어요? 자자. 빨리 오세요."

카일라가 데일의 등을 밀었다.

데일은 못이기는 척 순순히 카일라에게 따랐다.

카일라가 이끈 천막에는 원탁이 놓여 있었다.

취한 노새 여관에 있던 것과 비슷한 물건이었다.

원탁 위에는 음식을 담은 접시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구운 치즈를 곁들인 돼지고기.

새콤한 소스에 버무린 소 내장 요리.

채소와 감자 따위를 끓여 만든 수프.

노릇하게 잘 구워진 흑빵.

투박한 재료들로 보기 좋게 요리해내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카일라의 솜씨였다.

여관에서 먹던 바로 그런 요리들에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켄이 침을 다시며 말했다.

"쓰읍. 이거 침 고이네. 오랜만에 솜씨 좀 부렸네?"

"당연하죠. 모두 모이는 게 얼마 만인데요. 이 정도는 준비해야죠. 자! 어서 둘러앉으세요."

일행들이 얼떨떨하며 자리에 앉았다.

카일라가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자! 어서 먹으세요! 설마 그사이에 다들 성공했다고, 입맛이 높아진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카일라 님의 요리만한 건 아직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하하. 에스델 님도 참. 아. 이제 성하라 불러야 하나요?"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냥 에스델이라고 불러주세요."

에스델을 시작으로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데일도 돼지 통뼈를 하나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번, 두 번 씹고 삼킨다.

여전히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카일라의 정성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다른 동료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이내 본격적으로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어. 이거 진짜 맛있는데?"

"하하. 카일라! 그간 실력이 늘은 겐가? 내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키다니!"

"프라우 경은 아무거나 잘 먹잖아요. 저번에 하티 줄 먹이도 시험으로 삼아 줘봤는데, 잘만 먹더만요."

"...나한테 개밥을 줬다고? 농담이지?"

"하티한테 개라고 부르면 엄청 화낼걸요?"

아니나 다를까. 하티가 낮게 울며 프라우의 종아리를 깨물었다.

깜짝 놀란 프라우가 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일행은 웃는다.

그런 웃음의 한복판에 카일라가 두꺼운 통을 들고 들어왔다.

"자! 오늘 같은 날에 술이 빠질 수 없죠! 제가 직접 담은 맥주에요!"

일행의 웃음이 멎는다.

술이 한 순배 돌았다.

쓰고 맛없는 맥주에 동료들은 고개를 저었다.

하켄이 카일라에게 핀잔을 주었고, 그러면 카일라 조금 서운해하는 눈빛으로 그럼 먹지 말라고 소리친다.

데일은 그 모든 광경을 조용히 관찰했다.

'마치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군.'

데일과 동료들만이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가, 과거로 되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운 기분.

그리 생각하는 게 데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동료들은 몹시 아련하고도 즐거운 얼굴로 이 시간을 즐겼다.

술이 돌고.

이야기가 돌고.

분위기가 녹아내렸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불콰하게 취한 하켄이 입을 열었다

"저기 다들.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야?"

하켄답지 않게 차분하고 진지한 어조다.

조금 전까지의 왁자지껄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켄이 맥주를 쭉 들이켜고는 말했다.

"아니. 다들 앞으로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거 생각 안 해봤어? 설마 죽을 생각으로 온 건 아니지?"

"그러는 하켄은 뭘 하고 싶은데요?"

에스델의 질문에 하켄은 그윽하게 분위기를 잡고 말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그녀에게 고백할 거야...."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라."

데일의 핀잔에 하켄이 '진심인데...'라고 중얼거렸다.

엘레나가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그녀가 누군데요? 하켄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흐흐. 그건 나중에 알려주지. 전부 알려줘 버리면 재미없잖아?"

느끼한 태도에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재수 없어."

"...공주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다만, 데일은 하켄이 말한 '그녀'가 누구일지는 쉬이 짐작이 갔다.

고향 친구일 것이다. 아마도.

어쨌건.

하켄을 시작으로 각자 자기 꿈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다시 교단을 재건할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저밖에는 못 할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전의 교단은 너무 권위적인 느낌이 강했으니, 그런 부분을 조금 줄여볼 생각이에요."

에스델은 신념을 담아 말했다.

"나는 뭐. 다시 여관이나 차려야지."

카일라는 큰 고민 없이 말했다.

"저는 마법을 더 공부해보고 싶어요. 마법이라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잖아요."

엘레나는 순수한 학문적 열의를 빛내며 말했다.

"저는 그런 공주님의 호위 기사면 충분합니다! 평생 모시겠습니다!"

프라우는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티는 낮게 으르릉거렸다.

이 도도한 늑대는 딱히 미래 계획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시선이 데일에게 쏠렸다.

하켄이 장난스레 물었다.

"데일 경은 뭔가 계획이 있나요? 아. 사제 양반처럼 밤의 신전의 종교 지도자가 된다거나?"

"흠흠. 제 호위 기사가 되실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아니면 여관에서 같이 일하죠? 의외로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괜찮다면 교단에서 함께 일해도 좋죠. 빛과 밤을 한 신전에서 모신다면, 서로간에 반목도 많이 주지 않을까요?"

하켄의 모두의 의견을 대변하듯, 차분히 물었다.

"데일 경은 뭘 할 건가요?"

"나는...."

데일은 손에 들고 있던 맥주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탁한 수면에 데일의 얼굴이 비춰 보였다.

창백한 얼굴의 기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는 건 맥주잔을 잡은 데일의 손이며, 데일의 마음이다.

"나는."

데일은 대답하지 못한 채, 한동안 맥주잔만을 내려다보았다.

황혼

* * *

데일이 대답하지 않자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에스델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번 싸움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지."

데일은 자신이 이 세상에 떨어진 게 황혼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황혼과 맞붙어보면 아마 돌아갈 방법도 찾을 수 있으리라.

"아아. 데일 경이 가끔 말하던 곳 말이죠. 그러고 보니 경 고향은 어딨죠? 저 멀리 동쪽에 있으려나요?"

"내 생각에는 북쪽의 설산 너머 땅에서 왔을 것 같네. 말하는 것도 엘프다운 게, 분명 북쪽이 확실해."

"그럼 일이 끝나면 다 같이 데일 경의 고향에 가볼까요?"

"좋네. 여행하는 기분도 느껴보고."

동료들이 다시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하지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곳에 너희는 함께 갈 수 없다."

"...예?"

"내 고향은 아주 멀리. 저 하늘의 별보다는 더 먼 곳에 있으니까.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다."

데일의 말에 동료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데일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켄이 조심스레 물었다.

"경. 그 말은 혹시 죽음을 생각하고 계신다는 건가요? 저는 머리가 멍청하니까 조금 쉽게 설명해주세요."

당연한 오해다.

아주 멀리 있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

데일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들려도 이상하지 않다.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죽음 같은 곳이 아니야. 정말로 멀리 있는 고향이다. 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래.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이 세상을 떠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설마 데일이 떠날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듯.

동료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에스델은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노력해봤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켄은 곱슬머리만 벅벅 긁어댔다.

엘레나는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경은 저희를 버릴 생각인가요?"

"버리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게 아니면 뭐죠?"

엘레나의 맑고 푸른 눈과 마주치자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하다못해 이런 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하다."

화기애애하던 식사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속이 타는지. 연거푸 맥주만 들이마쉬던 하켄이 조금 취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면 뭘 할 겁니까?"

"뭐?"

"아니. 고향 가서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지 않겠습니까? 농사를 짓든, 머 검술 길드라도 차려서 스승 노릇도 해보든, 아니면 데일 경 실력이라면 거 뭐냐. 왕 노릇 같은 것도 해볼 수 있지 않겠어요?"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정작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무얼 할지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만도 벅찼던 것이다.

"사람은 꿈을 꾸는 존재라고들 하잖아요? 제가 용병 판에서 구르며 느낀 건데, 뭐든 하고 싶은 게 있는 놈들이 더 오래 살더라고요. 데일 경도 하나쯤 생각해두는 게 좋을걸요?"

"...그래. 고민해보겠다."

하켄에게 이런 조언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늘 뺀질거리기만 하던 용병이 오늘따라 조금 커 보였다.

그렇게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식사는 밝지만은 않은 분위기속에서 마무리되었다.

"모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에스델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동료들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야가브의 유령선에 올라탄 데일은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없었다.

하켄이 해주었던 조언과 자신들을 버리는 게 아니냐는 엘레나의 날 선 말.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데일은 고개를 들었다.

이럴 때 짙게 펼쳐진 밤하늘과 그 하늘을 수놓은 별이라도 보면 마음이 나아지련만.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은 요사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 * *

시간을 되돌려 데일이 아직 서부에서 엘드리엄으로 떠나기 직전의 무렵.

데일은 4군단으로 향할 전령을 모집했다.

10명의 자원자들은 다채로운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황혼에게 복수를 꿈꾸는 기사.

성공 보수를 원해 자원한 일반 병사.

역사서에 실리길 원하는 떠돌이 마법사.

자신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귀족.

그 밖에 성별도, 배경도, 출신도, 능력도 모두 다른 자원자들.

그중에 릴리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약초꾼 출신으로, 사실 그녀의 능력은 다른 자원자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 릴리가 기꺼이 이 위험한 임무에 참여하는 이유는 단 하나.

'데, 데일 경. 멋있다.'

그녀는 데일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계기는 단순했다.

데일이 래파킨이라는 이름의 도적들에게서 그녀와 마을 사람들을 해방해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래파킨은 언데드가 되어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했으니, 마을 사람들이 데일을 좋아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릴리가 전령으로 지원하겠다 선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걱정할지언정 모두 응원해주었다.

"열심히 해 릴리. 우리가 데일 경께 입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

"위험하긴 하지만, 너는 똑 부러진 아이니까 잘 해낼거야."

"자. 이 약초 챙겨가."

"음식도."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당당히 자원했건만. 다른 자원자들을 보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기사야? 저, 저건 마법사? 으으. 괜히 자원했나? 데일 경이 어딜 천한 년이 이런 일에 끼어드냐고 윽박지르면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과 달리, 데일은 그녀의 신분과 능력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이름이 릴리라고 했소?"

"기, 기억 해주시는군요! 릴리입니다! 패니의 첫째 딸 릴리!"

"당연한 것을. 어려운 일이 될 거고,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훨씬 높소. 그래도 임무를 맡아주시겠소?"

"물론! 물론입니다! 제가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저... 괜찮으면 악수 한 번만...."

릴리는 슬쩍 손을 내밀었고, 데일은 기꺼이 그 손을 잡아주었다.

릴리는 황송한 표정으로 데일의 손을 어루만졌다.

데일은 전령으로서 이곳에 온 자원자들에게 말했다.

"이번 일에 많은 게 걸려있소. 모두,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 카엘름성까지 가주시오. 단 한 사람이라도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가 승리할 확률도 늘어날 것이오. 그러니 부탁하겠소."

데일은 직접 고개 숙여 부탁했고, 이 자리에 모인 자원자들도 데일에게 예를 표했다.

릴리는 황홀한 기분에 멍하니 있었다.

머지않아 데일은 북쪽의 엘드리엄을 향해 여정을 떠났다.

세부적인 계획을 알려주는 역할은 하켄 사령관의 부관과 땅딸막하게 생긴 노움이었다.

'...음유시인?'

소마가 땅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휘! 위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자들이여! 가슴에 불꽃을 간직한 용사들이여! 이 음유시인 소마가 맹세한다! 그대들의 분투는 영원히 노래되어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불멸이 될 것이다!"

호들갑을 떤 소마는 이어서 카엘름까지 향하는 지리와 사용할만한 지름길.

주변 도시들의 상황이나 황혼의 세력 따위를 설명해주었다.

정보상이기도 한 소마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 노움 음유시인의 박식함은 분명 대단한 게 맞았다. 하지만.

'말이 너무 길어.'

릴리는 심드렁했다.

소마는 쓸데없는 말을 너무 빙빙 돌려서 했기 때문이다.

감미로운 노래도 계속 듣다 보니 슬슬 지겨웠다.

결국. 릴리는 꾸벅꾸벅 졸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마의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휘휘! 그대들의 앞길에 순풍이 불어주기를!"

그러자 놀랍게도. 부드러운 바람이 릴리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순풍이 불어오다니. 좋은 징조 아닌가?

그게 리마가 마법으로 만들어낸 바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뭐. 기분 좋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마침내 전령들은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같았지만 각자 향하는 길은 달랐다.

누군가는 들판으로. 누군가는 잘 닦인 가도로. 또 누군가는 평야로 향했다.

'모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릴리는 멀어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 중에서 한 명만 카엘름에 도착해도 성공이라지만, 그래도 용기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무사하기를 바라게 된다.

'아차. 내 주제에 누구를 걱정한다고. 저 사람들은 다들 나보다 훨씬 대단한 분들인데.'

릴리는 황급히 배낭을 챙겨 길을 떠났다.

그녀가 선택한 건 산길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산이 엄청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충분히 조심한다면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아.'

릴리는 약초꾼으로서의 경험이 풍부했다.

짐승이 다니는 길.

몬스터의 흔적.

어디가 위험하고 어디가 안전한지.

어느 위치에 야영하면 무사히 밤을 날 수 있는지를 잘 알았다.

그녀는 일주일간 산을 누비며 카엘름에 향했다.

가끔 방향을 잘못 잡는 경우도 있었다. 부득이하게 멀리 돌아가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길을 찾아 나아갔다.

그리하여, 릴리는 마침내 산에서 내려와 유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도시로, 일찌감치 황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곳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번 임무가 몹시도 어려운 이유 중 하나.

바로 카엘름으로 가려면 반드시 황혼의 세력권을 지나쳐야 된다는 점이다.

릴리는 주위를 살폈고, 이내 미친사람처럼 돌아다니는 황혼의 신도들을 발견했다.

"황혼을 따라라!"

"인간의 시대가 오리라!"

'정말. 빛의 여신님을 놔두고 웬 이상한 괴물을 따른데... 아! 저거다.'

릴리는 은근슬쩍 신도들 사이로 섞여, 미친 여자처럼 외쳤다.

"황혼을 따라라!! 황혼이 최고이시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황혼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도시로 내부로 들어갔다.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산속에서 일주일간 구르다 온 그녀는 몹시도 꾀죄죄했고, 외모 역시 평범해 어디서나 흔히 볼법한 그런 아낙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릴리는 자연스레 도시에 녹아들었다.

이제 여기서 식량을 구입하고 곧장 동쪽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헤헤. 생각보다 수월한데? 계속 이렇게 미친년인 척하면 카엘름까지도 금방이겠어.'

그렇게 마음을 놓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악!"

릴리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함께 카엘름 성으로 떠났던 동료 중 하나가 황혼의 추종자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여기 있는 이 자는 서쪽에서 보낸 전령이다. 아마 카엘름에 편지를 전해다 줄 생각이었겠지."

"아, 아니. 오해이올시다. 나느...."

촤아악!

추종자가 전령의 목을 단칼에 베어냈다.

충격적인 광경에 릴리는 굳어버렸다.

하지만 전령의 목을 벤 이는 무감정한 눈으로 말했다.

"분명 이런 쥐새끼가 이 도시에 여럿 숨어들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수색을 시작할 테니, 쥐새끼를 숨겨주는 자는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그 선언과 함께 추종자들이 흩어져 사람들을 검문하기 시작했다.

신분이 불분명한 자는 곧장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수색의 손길은 점점 릴리에게도 뻗어오고 있었다.

'이, 일단 도망가야 해. 하지만 어디로?'

대로의 양옆에서 추종자들이 다가오고 있다.

어쭙잖게 도망치려 했다가는, 곧바로 걸려서 동료처럼 목이 잘리리라!

'으으. 어떡하지?'

릴리가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에요. 이쪽."

"어?"

"빨리요!"

처음 보는 소년과 그 어미로 보이는 여인이 있었다.

그중에서 여인이 릴리를 향해 손짓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릴리는 홀린 듯이 따라나섰다.

여인이 물었다.

"밖에서 오신 분이죠? 혹시 저 사람이 말한 서쪽에서 온 전령?"

"그, 그걸 어떻게?"

"하하. 전령님께서는 좀 더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워야겠네요."

아뿔싸!

자신의 정체를 술술 말해버리다니!

릴리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 이 모자는 딱히 릴리를 팔아넘길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어서요."

소년이 앞장서고, 여인과 릴리가 그 뒤를 따랐다.

몇 개의 개구멍을 지나쳤다.

골목을 요리조리 움직였고, 이내 허름한 집에 도착했다.

"여기라면 안전할 거예요."

"후, 후우. 감사합니다. 설마 도시 내에서 도움을 받을지는 몰랐어요."

"이곳 사람들이 모두 황혼을 따르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저를 잘못 도왔다가는 여러분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데... 너무 고마워요."

여인이 빙그레 웃은 뒤, 소년에게 말했다.

"가서 누가 오는지 망 좀 봐줄래?"

"응!"

소년이 떠나자, 여인이 말했다.

"실은. 저희는 이전에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도적단에 잡혀서 끔찍한 시간을 보냈는데, 은인께서 저희를 구해주시고 이곳에 있는 수도원에 자리를 알아봐 주셨어요. 그때 받은 도움이 너무 커서, 저도 남들에게 도움을 나눠주자고 마음먹었답니다."

"오오. 엄청 좋은 분이시네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마 알지도 모르겠네요. 데일 경이라고. 좀 무섭지만, 마음이 따듯하신 분이랍니다."

"!!"

릴리는 번개에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여인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사, 사실 저도 그분께 은혜를 입었거든요. 이렇게 오게 된 것도 사실 그분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인데...!"

릴리는 횡설수설 상황을 설명했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여인도 크게 놀라워했다.

"허.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하하. 신께서 가호해주신 것 같아요."

"정말 그럴지도요."

여인은 이 만남에서 운명을 느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제가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몇 더 알고 있어요."

"어. 그렇게까지 도움을 주지 않으셔도."

"아뇨. 도움받으세요. 그냥 동쪽으로 갔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거예요. 곳곳에 돌아다니는 황혼의 추종자들도 많고, 일부러 침입자를 유인하려는 거짓 소문도 많아요.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카엘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없을 거예요."

여인의 박력에 릴리는 결국, 도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릴리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사실, 이 순간. 그녀와 함께 떠났던 전령 중 반이 사로잡혀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

나머지 절반도 머지않아 같은 꼴을 당할 운명이었다.

멀쩡한 건 오직 릴리 혼자뿐.

릴리가 이 대륙의 희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릴리는 운 좋게도 훌륭한 조력자를 얻게 되었다.

여러 우연과 운명이 겹쳐, 데일이 지금껏 해왔던 노력들이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었다.

결전

* * *

데일과 동료들은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유령선을 타고 내려다본 적군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이쪽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원을 가득 메운 군세와 점점 더 많은 힘을 빨아들이는 듯 발광하는 거대한 탑.

세상의 종말이 저곳에 있었다.

'다시 봐도 많긴 하군.'

10만이 넘는 병력.

아군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숫자다.

숫자는 그 자체로 힘이며 위협이다.

3배 차이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사들은 위축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쪽에 무슨 선택지가 있겠는가.

결국. 싸우는 수밖에 없다.

데일과 에른스트, 아일라는 3군단 쪽으로 돌아가 작전을 설명했다.

회의는 길었지만 의외로 설명해야 할 건 짧았다.

어차피 대규모의 병력이 부딪히는 대회전에서 세세한 전술은 큰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모든 작전을 설명한 데일이 엄숙하게 말했다.

"마지막 싸움이 될 거요. 설령 이기더라도 많은 사람이 죽겠지. 유언을 준비해라. 각자의 신께 기도드리고, 삶을 정리하시오. 후회가 남지 않도록."

데일의 말을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전달했다.

데일과 함께 온 교단의 사제들은 병사들에게 다가가 마지막 기도를 주관했다.

데일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밤의 신도들이었다.

"부디 데일 경께서 함께 기도해주세요."

에리얼이 없는 지금. 밤의 여신을 따르는 신도 중 가장 높은 사람은 데일이다.

데일은 신앙심이 없는 자신이 이런 역할을 맡아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뭐. 괜찮겠지.'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병사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늘을 포근하게 뒤덮은 어둠이시여. 누구에게나 평등한 죽음이시여. 당신의 신도들이 최후의 싸움을 앞두고 있으니, 강한 적에게 맞설 힘을...."

데일은 언젠가 에리얼이 하던 기도를 비슷하게 흉내를 냈다.

신도들도 눈을 감고 데일의 기도를 따라 읊었다.

그러자 묘한 일이 일어났다.

데일의 어깨 위에 무언가 사르륵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희미한 존재감이지만, 분명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데일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바, 방금 껀?"

"설마 여신님께서...?"

존재감은 금방 휘발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신이 이곳에 잠시 들렸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없는 힘이나마 쥐어짜내, 자신의 마지막 신도들을 굽어살피고 간 게 아닐까?

"...."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던 데일은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그 목소리가 하늘에 닿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마지막을 준비했다.

아껴놨던 모든 물자를 마음껏 풀었다.

술과 고기가 병사들에게 주어졌고, 병사들은 불콰하게 취하며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을 앞둔 특유의 비장함과, 이런 상황에서도 웃어 보이려는 사람들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가 흘렀다.

식사가 끝나자 병사들은 잠을 잤다.

몇몇 병사들은 되도록 이 단잠이 끝나지 않기를.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침내 때가 왔다.

하늘은 여전히 주황빛으로 빛나지만, 사람들의 생체 시계는 아침이 왔음을 알렸다.

데일은 사람들의 앞을 섰다.

이번 출진 연설에는 에른스트와 아일라, 마탑의 마스터를 비롯한 사람들이 차례대로 연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그 첫 번째 순서는 데일에게 돌아왔다.

황제는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게 우스운 부분이었다.

데일은 단상에 올라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투구를 벗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병사들과 눈을 마주쳤다.

침묵의 힘.

모두의 집중이 최고에 이르렀다고 느꼈을 때, 데일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간 너무 많은 걸 빼앗겨 왔소. 악마가 이 땅에 처음 강림한 지 수십 년이오. 사람들은 조국을 잃었고, 고향을 잃었고, 가족과 친우,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신앙이 위협받았으며, 낮과 밤을 잃어버렸소. 그리고 저 간악한 무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통째로 빼앗아 가기 위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하고 있소."

데일이 이어 말했다.

"나는 그간 많은 사람을 보아왔소. 부모를 잃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고아를 보았고, 친우의 죽음에 남몰래 눈물 흘리는 용병을, 제국에 죽는 그 순간까지 충성하던 위대한 기사와 신념의 차이 때문에 자신의 손자를 죽여야만 했던 노장을 보았소."

데일은 병사들과 눈을 맞췄다.

긴장한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 역시 각자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오. 다른 신앙, 다른 성별, 다른 신분, 다른 가치관, 다른 삶, 다른 꿈. 모든 게 다를 것이오. 하지만 우리는 같은 뜻을 품고 이 자리에 모였소. 바로 우리의 모든 걸 앗아가려는 저 괴물을 막아내는 것!"

데일이 오른 주먹을 하늘을 향해 내질렀다.

"내가 앞에 서겠소! 내 뒤를 따라오시오! 모두가 힘을 합쳐 끝까지 싸운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오!!"

연설을 마친 데일은 조용히 반응을 살폈다.

잠깐의 침묵.

이윽고 터져 나오는 우레와 같은 함성.

"우와아아아아!"

"반드시 이기자! 우리의 삶을 되찾자!"

"제국 만세! 데일 경 만세!"

"위대한 기사께 영원히 영광 있으라!"

용기와 두려움은 비슷한 성질을 지녔다.

용기는 전염된다.

모두가 함께 환호하자, 병사들은 마치 약에라도 취한 듯, 두려움을 모두 잊고 승리를 부르짖었다.

데일은 단상에서 내려와 다음 사람에게 양보했다.

아일라와 에른스트가 연달아 연설하고, 그때마다 뜨거운 반응이 일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뿌우우우!

두개골 속을 웅웅 울리는 섬뜩한 뿔피리가 온 황무지에 퍼져나 왔다.

하켄과 그 군대가 출진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쪽도 뿔피리로 화답했다.

덩치 큰 병사가 뿔피리를 불었고.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그 소리를 더욱 멀리 퍼져나가게 했다.

군대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언제나처럼 황실 기사단이 섰다.

데일 역시 해골마를 타고 그 옆에 함께 했다.

아일라가 투구를 머리에 쓰며 말했다.

"첫 돌격은 내가 할 거야."

"옆에서 보조하겠다."

"부탁할게."

다른 기사들도 투구를 깊이 눌러쓰고, 투구 끈을 꽉 조였다.

수많은 전장을 누벼온 이 기사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은 없다.

오직 전투를 기대하는 열망과 단단한 의지만이 빛날 뿐.

계속해서 전진하고 전진했다.

마침내 적의 군세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고, 병사들도 하나 둘 전장에 선 걸 실감하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저게 다 몇 명이야?"

솟아났던 용기는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두려움이 가득 찼다.

하지만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제자리에 버티고 서려 해도 뒷 열의 아군에 떠밀릴 뿐이니.

이제는 싸우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전진하던 군단은 저 탑의 쏘아내는 광선의 사정거리 밖에서 멈추어 섰다.

적들 역시 이쪽의 접근에 대비해 수비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망루도 보이고. 커다란 전쟁 병기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두 세력은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며 조용히 대치했다.

서로에 대한 비방이나 야유.

자신의 명분과 정당성을 선언하는 연설.

기사들 간의 결투조차 없다.

그저 조용히 응시할 뿐.

데일은 이 순간이 꽤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조용한 군대. 검게 죽은 대지. 주황빛으로 빛나는 하늘과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거대한 탑.

어느 것 하나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통각이 없는 몸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뭐랄까. 게임이나 영화 같은 비현실로 느껴진다 해야 할까.

현실에서 정신이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꿈을 꾸듯이.

"데일 경. 데일 경!"

"...음?"

"정신 차려. 이제 시작이니까."

아일라의 다그침에 데일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황무지의 반대편. 하켄과 에스델의 군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일라가 검을 빼 들었다.

"기사단."

그러고는 고함을 지르지도.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없이, 차분히 말했다.

"돌격."

아일라가 박차를 가했다. 그와 동시에 기사단원들도 말 엉덩이를 힘껏 때렸다.

그렇게 대륙의 모든 걸 건 결전이 시작되었다.

"이랴! 이랴!"

"마지막 싸움이다! 후회 없이 싸우자!"

흙먼지를 날리며 기사단이 돌격을 시작했다.

쐐기형의 대형으로 돌격하는 기사단의 역할은 적군의 방어진을 분쇄하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헤집어 놓는 것.

당연히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임무다.

하지만 위험은 곧 명예다.

가장 위험한 전장이 가장 명예로운 전장이다.

기사단은 명예로웠다.

"제국을 위하여!"

"미하일 경을 위하여!!"

황제 대신 전대 기사단장의 이름을 외치며 기사단이 달렸다.

그 사이에는 데일도 있었다.

적이 곧장 반응했다.

새까맣게 뭉쳐 있던 적 진영에서 형형색색 빛이 발발했다.

마력광이다.

에릭이라는 이름의 키가 유달리 큰 기사가 외쳤다.

"온다! 마법 폭격이다!"

그러자 기사들은 속도를 더 높였다.

머뭇거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말을 모는 게 생존 확률이 높다는 걸 잘 알았다.

이윽고 마법이 기사단을 덮쳤다.

콰아아!

불꽃. 냉기. 번개.

가장 먼저 위협을 알렸던 에릭 경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버렸다.

마법에 직격당해 불타고, 엉망이 된 땅에 낙마하고, 투석기로 쏘아진 돌덩이에 맞아 찌그러진다.

거대한 탑에서 쏘아보낸 광선은 기사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버린다.

하지만 기사단은 결코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묵묵히 돌진했고, 이윽고. 적의 최선봉과 맞닥뜨렸다.

가장 앞서 달려가던 아일라는 지금껏 움켜쥐고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아일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 데일조차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데일은 분명, 아일라가 그녀의 스승을 떠올렸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아일라가 검을 내려그었다.

쩌억!

방패를 들고 있던 적군이 방패째로 반으로 갈렸다.

쐐기가 적의 방어에 구멍을 뚫었다. 남은 건 그 구멍을 넓히는 것.

서로가 뒤엉켜 마법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 시점. 이 순간이야말로 기사들의 시간이었다.

투웅! 팍!

기사단이 말을 몰아 적진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갑을 입은 군마가 먼 거리를 질주해온 가속력 그대로 적병을 들이받자, 방패를 든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럼에도 힘을 잃지 않은 군마는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방패병 셋을 밀쳐내고 나서야 비로소 돌격이 멈췄다.

그 순간 기사는 능숙하게 말에서 내려 무기를 휘두른다.

순식간에 사방에 뻗어오는 검과 창.

기사 역시 검을 뽑아 휘두른다.

쇠와 쇠가 부딪히며 비명을 내지른다.

기사는 능숙하게 검을 되돌려, 상대의 목을 절묘하게 찔러넣었다.

뒤에서 휘둘러져 오는 날붙이는 갑옷으로 막아낸다.

피가 튄다.

기사의 피는 아니다.

아직은 말이다.

대륙 제일의 기사들 앞에 일반 병사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병사도.

어쭙잖은 악마의 하수인도.

이름 모를 괴물도, 기사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목이 달아났다.

이제 사태를 파악한 적군도 실력 있는 자를 내보냈다.

황혼의 광신도. 혹은, 악마의 오른팔격인 하수인들.

"싸워볼 만한 놈이 왔구나. 파르스토 님의 엄지손가락. 겐트."

"펜텐 가문의 파울로다!"

양측의 고급 병력이 전장 곳곳에서 맞부딪혔다.

때로는 아군이 졌고, 때로는 적군이 졌다.

또 때로는 둘 다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싸움은 실로 치열했다. 실로 처절했으며, 영웅적이었다.

하지만 그 치열하고 처절하며 영웅적인 싸움은 이 수십만이 격돌하는 드넓은 전장에서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개인이 전장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강력한 개인이라도 체력과 마력, 집중력이 고갈되면 끝이기 때문이다....

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

그러한 정설에서 벗어난 이가 있다.

'슬슬 시작하자.'

전장의 공포.

살육 기계.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가장 큰 위용을 보이는 언데드 기사.

마검을 든 데일이 적진으로 파고들었다.

결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