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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큰거 온다

스타더스. 신하루.

새로운 하루라는 의미로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

그러나 요즘 그녀는, 새로운 하루를 맞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아..."

스마트폰을 보던 그녀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내렸다.

[스타더스 솔직히 하는 게 뭐가 있냐?]

그런 말이,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펼쳐진 여론.

A급 히어로 스타더스에 대한 자질 의심.

솔직히 그녀는 매우 억울했다.

자신이 잘못한 게 뭐가 있는가?

그녀의 죄라고는 대학 생활하면서도 틈틈이 사람들을 구하러 다닌 죄밖에 없다.

그러나 여론은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싸늘해졌다.

다 에고스틱, 그놈이 등장한 이후로.

여느 때와 같이 있다가 에고스틱이 시내에 등장했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갔을 뿐인데 왜 그녀가 욕을 먹어야 하는가?

심지어 시민들이 위험할까 봐 놈을 잡으려는 시도도 제대로 못 해준 체 그냥 보내줬는데.

그녀는 잘 몰랐었다.

시민들이 다른 빌런들을 시원시원하게 제거하는 에고스틱의 모습에 얼마나 큰 호감을 느끼는지를.

매번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히어로들이 잡아봤자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끝나는 모습을 보며, 시민들의 불만이 쌓여 왔던 거다.

판사들로 향했던 그 분노는 어느새 히어로들한테까지 옮겨붙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즉시사살하면 될껄, 왜 굳이 생포하는 데 목적을 두나.

너희가 그냥 생포하는 바람에 저놈들이 저렇게 감옥에서 안락하게 사는 거 아니냐 등...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이미 시민들 사이에서 불만은 조용히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모두가 기다리던.

빌런을 속 시원하게 사냥하는 사람이 등장한 거다.

그게 바로 에고스틱.

대한민국 국민들 가슴속 깊숙이 꿈꾸고 있던 인물이었다.

....물론 유람선 테러 사건이 있기는 하다. 아니지, 정확히는 테러 '미수'사건이라고 봐야 하는 그 사건.

그는 결국 테러를 일으키지 않았다. 시민들이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않자, 빠르게 납득하고 시원하게 물러났다.

그리고 그 사건을 묻혀 버릴 정도로 컸던, 대현타워 테러 인질극을 홀로 격파한 사건.

다른 히어로들이 인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 홀로 적진에 당당히 진입, 사살자 한 명 없이 모두를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돈도 줬다.

그리고 도주의 위험성 때문에 A급을 받은 텔레포터 또한 어떻게 알았는지 홀로 없애버린 모습까지.

그야말로 대중들이 열광할 모습을 여러모로 보여줬다. 거의 모든 커뮤니티가 그를 좋아하고 팬카페까지 개설된 건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거지.

그리고 그런 그와 맞서는 자는 당연하게도 욕을 먹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게 하필 자신일뿐.

"하아..."

신하루는 다시 한번 자기 손에 있던 망고프라페를 빨아 마셨다.

이러려고 히어로 됐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심지어 자기 친한 선배마저 에고스틱이 요즘 좋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충격에 빠졌다.

카페에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는 밖을 내다보았다.

봄이 오며 길에는 벚꽃이 저렇게 이쁘게 폈는데.

자기는 대학 생활에 히어로까지 하느라 보러 갈 시간도 없다.

근데 그러면서도 욕은 욕대로 먹고 있고.

심지어는 저번에 열린 히어로 협회 정기 회의.

거기에서 국장마저 '요즘 에고스틱 덕분에 좀 편해진 거 같다.'라고 허허 웃으며 말했을 때 그녀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이건 정상적이지 않다. 사람들이 다 나 빼고 미쳤다.

"하아... 아니지. 정신 차리자."

그녀는 고개를 털고 과제나 마저 하기로 결심했다.

계속 이렇게 땅만 파고 있는 건 생산적이지 못하다.

과제나 해야지.

그렇게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과제를 마저 하려고 했다.

딱 이 타이밍에 연락이 오기 전까진.

[스타더스, 당장 티비 틀어보게! 에고스틱이 다시 나타났어! 또 자네를 지목했네!]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또 일해야 할 시간인가 보다.

신하루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그녀는 히어로이기에.

그녀는, 해야 할 일 하러 나갔다.

***

"오랜만입니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호감 빌런, 에고스틱입니다!"

철도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 위.

그곳에서 나는 카메라에 인사를 던졌다.

또다시 모든 티비에 생중계되고 있을 내 모습.

사실 이제는 그냥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만 해도, 지상파에서 알아서 중계해 줄거 같기는 한데.

그냥 이번에도 전파납치 했다.

왜냐고? 그게 내 저력을 보여 줄 수 있으니까.

저번에 전파납치 사건이 후로 방송사들이 보안에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인데, 그런 건 나한테 아무 의미 없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사실 내가 한 건 아니고 서은이가 다 한 거긴 하지만... 그걸 누가 알겠어?

고개를 꾸벅 숙인 나는 오른쪽 가면에 숨겨진 눈으로 홀로그램을 봤다.

서은이가 만들어 준 최첨단 기술로, 마치 원래 세계의 아이X맨 슈트처럼 홀로그램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능이다. 근데 중요한 건 이 기능에 넣을 소프트웨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유튜브 생중계 채팅창을 띄어 놨다. 띄어 놨는데...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큰거왔다]

[에고스틱 라이브 ONㅋㅋㅋㅋㅋㅋ]

[심심하던 찰나 개꿀잼 이벤트 왔다ㅋㅋㅋㅋ]

[오늘은 또 얼마나 미친 짓을 하려고ㅋㅋㅋㅋ]

[에-하(에고스틱 하이라는 뜻)]

[자 드가자~ 자 드가자~ ]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벌써 후회가 되고 있다. 아니, 얘들은 이게 무슨 깜짝 이벤트인 줄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카메라에 비치는 내 모습을 점검했다. 늘 그랬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통일된 로브를 입은 내 모습. 얼굴에도 내 상징적인 모습인 회색의 반쪽 마스크를 쓰고 있다. 사실 여기에 검은색 마법사 모자까지 쓰고 싶었는데, 제발 그것만은 자제해 달라는 서은이의 부탁에 못썼다. 다음에는 꼭 몰래 써봐야지...

어쨌든, 계속 말을 이어가 볼까.

"요즘 저한테 이런저런 소식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 참 많이 들어오고 있죠. 저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참 많더라구요? 제 팬카페도 봤습니다! 아이고, 신기하더라구요. 하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머리를 긁으며 허술하게 웃다가,

갑자기 여기서 정색.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좀 오해하는거 같은데."

나는 목소리를 깔고 말하며 절벽의 끝으로 걸어갔다. 카메라도 그런 나를 따라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 내가 염동력으로 조종하는 거다. 휴, 정말 염동력이 있으니까 망정이지. 아니면 카메라맨을 따로 고용할 뻔했다. 이 절벽 위에 카메라맨을 보면서 떠벌떠벌 말하면 얼마나 어색하겠어?

아직도 목소리를 깐 채로, 나는 절벽 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악당입니다 여러분. 요즘 말로는 빌런이라고 하나요? 하여간, 그게 접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빌런인 걸 잊으신 분들이 좀 많은 거 같더라고요? 제가 다른 빌런들을 제거한 건 제 저열한 만족감을 위해서지, 딱히 여러분을 위한 건 아닌데 말이죠!"

[이 녀석, 완전 츤데레인wwwwwww]

채팅창을 보고 순간 절벽에서 넘어질뻔했다. 이거 중간에 못 끄나? 이 일이 끝나면 서은이에게 꼭 OFF기능 만들어달라고 얘기해야겠다.

순간 정신을 놓을뻔했으나 나는 프로.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로, 또 다른 멋진 기획 하나를 준비해 봤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무서움을 여러분이 아직 못 깨달은 것 같더군요. 자! 여러분, 저 멀리 철도가 보이십니까?"

나는 염동력으로 카메라가 열차의 선로쪽을 보도록 고정했다.

선로는 쭉 일직선이었으나, 중간에 다른 쪽으로 뻗어나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카메라가 보여주는 선로의 끝에는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여러분, 보이십니까?"

순식간에 들썩이는 채팅창.

그래, 이거지. 이거야! 좀 더 두려워하라고!

"제가 묶어 놨습니다. 선로에 사람들을 말이죠. 열차가 직진으로 달리는 이곳! 이곳에 5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열차가 빠지는 저곳! 저 갈림길 쪽에는 한 명만 묶어 놨습니다. 이 열차가 이대로 달린다면 5명을 치어버릴 겁니다. 그런데 저기 레버 보이시나요? 저 레버를 당기면 선로가 바뀝니다. 그래서 그쪽에 묶여 있는 한 명만 치게 됩니다."

[나 이거 어디서 본거 같은데?]

[이거 트롤리 딜레마 아님?]

[트롤리 딜레마 실사화ㄷㄷㄷ]

나는 채팅창을 보고서야 아차 했다.

아, 다크나X트와 다르게 트롤리 딜레마는 이 세계에도 알려져 있구나?

그래도 아직 이짓거리를 한 빌런은 한 명도 없나 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레버를 돌릴 건가요? 안 돌릴 건가요. 참고로 열차를 멈추는 선택지는 없답니다."

나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화면을 전환시켰다.

그곳에는 지금 열심히 달려오는 열차의 기관실이 보였다. 그곳에 원래 있던 기관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가면을 쓴 여자가 기차를 몰고 있었다. 그래, 저건 수빈씨다. 고마워요 수빈씨!

"허튼짓하면 열차를 확 전복시킬 수도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레버를 돌리는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자, 여기서 말하겠습니다. 스타더스씨, 와주시죠. 당신의 도덕적 판단을 제가 지켜봐 드리겠습니다."

자, 판은 다 깔아놨다.

이제 신하루. 너만 오면 된다.

[또 스타더스ㄷㄷ 이 정도면 찐사랑인듯?]

채팅창은 말끔히 무시했다.

EP.17 선택의 시간

테러.

말만 들으면 그냥 폭탄 하나 던지면 끝날, 아주 쉬운 일인 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매우 복잡하고 많은 설계와 계획을 거쳐야 한다. 대규모 테러만 2번 일으킨 내가 하는 말이니 맞는 말일 거다. 아마.

기차가 지나갈 선로에 사람을 묶어 놓는다.

말만 들으면 참 쉬어 보인다. 아닌가?

그냥 사람 한 명 쓱 납치해서 묶어 놓으면 될 것 같으니.

근데 이게 실제로 하면, 진짜로 좀 쉽지가 않다.

일단 난 묶어 놓을 놈들 찾는 거부터 힘들었다. 진짜 평범한 민간인을 묶어 놓았다가 실수로 죽어 버리면 얼마나 찝찝하겠는가?

비록 내가 벌써 손에 피를 묻힌 적이 많은 진짜배기 빌런이지만 그런 짓 했다가는 밤에 잠이 안오고 말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한민국의 준법시민이었다고.

그래서 좀 하자 있는 애들을 선별해서 구해 왔다. 중죄를 지었음에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난 애들로. 아직도 개차반처럼 살고 있어서 납치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납치는 어찌저찌 했다 쳐도, 얘들을 선로에 묶어놓는 것도 큰 문제다. 사실 납치랑도 비슷한 부분인데. 대한민국은 CCTV가 너무 많다. 뭐 사생활 침해 그런 거 때문에 도처에 깔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절묘하게 있을 때는 다 있다.

물론 CCTV도 내 순간이동 능력과 서은이의 해킹실력으로 어찌어찌 뚫을 수는 있는데, 선로에 사람 묶는 건...

대한민국은 밤에 한정해서는 무적인 섀도우워커라는 히어로 때문에 밤에 뭔 짓하다 걸리면 큰일 난다. 차라리 밤에 아싸리 너도나도 테러하면 섀도우워커 혼자 다 해결을 못 하니 좀 낫겠지만, 빌런들이 다 쫄보라 밤에 사려서 혼자 나대다가는 큰일 난다. 쩝.

그러니까 나는 대낮에 순간이동 해가며 사람을 묶고 다녔단 말이다. 이게 참 쪽팔리고 기분이 묘하고 좀 그렇다. CCTV가 없다고 해도 날이 밝은데 이러니 기분이 뭔가 뭔가야...

그리고 기차. 사실 이거는 내 죄가 큰데, 저번에 유람선 폭탄테러와 추종자들의 건물 폭탄테러 이후로 어느 곳이든 폭발물 검사가 강화돼서 기차에 폭탄 설치하는 짓거리를 못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빈씨가 수고해줬다. 기차 운전하는 사람을 마취시켜 쓰러트리고 자기가 대신 앉았다.

수빈씨. 분명 자기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도 없고 집에만 있었다고 했던 거 같은데, 헬리콥터에 기차에 포크레인에 비행기에 운전 못하는 게 없다고 한다. 대체 그걸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컴퓨터 시뮬레이터로 배웠다는 대답에 기절할 뻔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 같았는데, 수능 공부를 수능 1주 전에 시작하고 서울대 들어갔다는 말에 납득하기로 했다. 그래, 천재는 나랑 다른 뭔가가 있겠지.

워낙 소심하길래 나랑 비슷한 타입인 줄 알았지만, 사실 서은이와 기술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천재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여기서 나만 또 일반인이야? 서러워서 정말...

어쨌든 기차는 수빈씨가 몰기로 했다. 기관사가 갑자기 사람 안 치겠다고 정지하거나 드리프트 하면 좀 곤란하거든. 그리고 여차하면 기차를 탈선시켜 너죽고 나죽자는 위협도 되고.

테러를 일으킨 데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보험이 필요하다. 늘 말하지만 나는 스타더스의 주먹 한 방에 즉사할 수 있는 연약한 몸이다. 레버를 당기라고 했더니 내 척추를 당겨서 이승과 하직시키려 할 수도 있다고. 보험을 깔아놔야 한다. 기차를 탈선시킬 수 있는 수빈씨가 첫 번째 보험. 그리고 혹시라도 스타더스가 기차를 습격하는 걸 대비해 사람들 철도에 묶인 곳에도 폭탄을 논게 두 번째 보험. 쉬운 게 없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서.

시민들에게 내가 얼마나 위험한 악당인지 알릴 수만 있다면!

스타더스의 호감도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면!

나 다인, 내 최애캐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저기서 날라오고 있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르겠는 빨간 라텍스 옷에 금발을 휘날리며 날라오고 있는 스타더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예쁘다.

내가 평생 스타더스만한 미모를 가진 여자랑 사귈 수 있을까? 안될 거야, 아마.

물론 수빈씨도 단순히 미모만 놓고 보면 스타더스랑 맞먹을 수도 있기는 한데... 그래도.

어쨌든, 이제는 다시 컨셉을 잡을 시간이다.

비록 하면 할수록 적응되기는커녕 손발이 떨리는 거 같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컨셉! 악으로 깡으로 지킨다.

"아, 여기 오늘의 주인공. 스타더스씨가 오셨군요!"

나는 혼자 박수를 치며 스타더스를 맞이했다.

나랑 조금 떨어진 곳으로 착지한 그녀.

"네 이놈! 또 뭔 짓을 하는 거냐!"

음.

사실 내 컨셉만 이상한 건 또 아니다.

만화로 읽을 때는 몰랐는데, 스타더스도 직접 실제로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어...

너도, 나도. 컨셉을 좀 잘못 잡은 거 같다. 그치?

현대에서 신하루같은 평범한 여대생이 사극조로 말하는 걸 들으니 굉장히 어색하고 그렇다.

물론 나도 만만찮지만.

"하하하하하! 뭔짓을 하다니요. 저는 그저 당신의 어떤 '도덕적' 선택을 내리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네 이놈. 너가 그렇게 민간인을 학살하려고 해도 괜찮을 거 같냐?"

[민간인(아니다)]

[학살(한적없다)]

[스타더스 저거저거 왜 우리 망고스틱 음해함?]

[ㄹㅇ 망고가 ㅈ으로 보이나?]

[호감가네....]

[누가 호감간다는겨?]

[스타더스가 호감간다고. 반어법임. 비호감이라는겨]

[??? 언제는 또 에고스틱이 호감이라며?]

[그건 진짜 호감간다는 소리임]

[아니 ㅅㅂ왜 호감에 2가지 뜻이 있어]

[문맥보고 판단해라]

[이 녀석 커뮤용어 처음 맛보더니 정신을 못 차리는wwww]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도배 멈춰!]

[스타더스 꼴 보기 싫음]

...말하면서 채팅창을 한 번 더 확인했는데,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스타더스를 더 욕하는 분위기이다. 안 돼, 빨리 반전을 시키지 않으면!

나는 과장되게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열차가 오고 있고, 이대로라면 5명의 사람들을 그대로 치게 생겼다는 게 문제죠! 빨리 저기 가서 레버나 당길지 말지 결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빈정대며 말을 하자 스타더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게 느꼈다.

"....내가 그냥 이 자리에서 너를 족치면 안 될 이유가 있나?"

"네? 당연히 이유가 있죠! 자, 이게 뭔 줄 아시죠?"

나는 재빨리 로브에서 기폭장치를 꺼내 들었다. 아니, 내가 이건 설명을 안 했나? 생각해 보니 안 했네.

"자, 이거 보이십니까? 누르면 저기 6명 전부 몰살이에요 몰살. 그리고 제가 죽으면 지금 기차를 운전하고 있는 제 부하도 가만히 있지 않겠죠?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타더스는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납득한 거로 보였다. 휴, 큰일 날뻔.

근데, 지금 시간이 없다. 기차가 거의 다 온 거 같거든?

"자! 기차가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속보입니다!"

나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절벽 아래 레버가 있는 쪽으로 순간 이동했다. 아래에서 절벽을 올려다 보니, 내가 어디 갔나 두리번거리던 스타더스도 뒤늦게 레버 쪽으로 날아왔다.

"자, 자! 이제 선택의 순간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버를 안 돌리면 저기 묶여 있는 다섯 명이 그대로 죽습니다. 어어, 거기로 가지 마세요! 기차 그냥 탈선시켜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네, 레버. 레버를 돌리면 한 명만 죽습니다.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할지, 빨리 결정이나 해주시죠."

거기까지 빠르게 말한 나는 절벽 위로 다시 올라갔다.

절벽 위에서 카메라로 레버 앞에서 고민하는 스타더스를 찍었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

"자, 자! 펜타킬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스타더스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무조건 레버 돌려야지]

[레버 돌리면 스타더스가 그 한 명 죽인 거 되는 거 아니냐? 가만히 있으면 무죄인데 레버 돌리면 한 명 자기 손으로 죽이는 거지]

[돌리면 공리주의적으로 4명 살리는 거니 돌리는 게 맞다ㅇㅇ...]

채팅창에서도 엇갈리는 의견.

그래도 다들 아마 스타더스가 레버를 돌릴 거라고 예상하는 모습이다.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았지.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아는 스타더스는,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걸!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열차.

레버의 앞에서 고민하던 스타더스는, 결국 레버를 당기지 않았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더니,

기차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악! 다인씨! 쟤 제 쪽으로 달려오는데 어떡하나요오오!!!]

귓에 꽂은 인이어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수빈씨의 비명소리. 기관실에서 정면으로 스타더스가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나 보다.

나는 급히 촬영 중인 카메라를 음소거 시키고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빈씨를 해치려고 오는 게 아닐 겁니다."

아마 몸으로 기차를 막으려고 하는 거겠지.

그래.

내가 아는 스타더스, 누구보다 정의로운 신하루라면.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길을 선택할 줄 알았다.

이제 나는, 그런 그녀를 돋보이도록 해야겠지.

카메라에 음소거를 해체한 뒤, 나는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질렀다.

"이럴 수가!!!! 대체 스타더스는 뭘하는 거죠!!!! 끼에에에에엑!"

익룡 같은 소리를 냈더니 목이 급격히 아프다.

스타더스, 보고 있니?

내가 너를 위해 이 정도로 망가지고 있단다...

EP.18 영웅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기차.

그 기차에 사람이 정통으로 맞으면 어떻게 될까?

뭐,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하겠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거다.

이런 생각이 '상식'이고.

그런 의미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뛰어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가?

'요즘은 자살도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구나!'라는 생각 말고는 별다른 생각이 안 들 것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도 똑같다.

가녀린 여성이,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

그러나 나한테는 믿음이 있다.

그녀가 산산조각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말할 때가 아니다.

여기서는 좀 오바를 해야 할 때.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저래도 되는 겁니까? 저러다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껍니다!!!!"

[스타더스 드디어 미친 거임???]

[아니 스타더스가 아무리 A급 히어로여도 저거 버틸 수 있냐?]

[ㄴㄴ스타더스정도 근력으로 저거 못 버틸듯. 히어로협회에 올려진 자료 봤는데 견딜수 있는 최대 물리량이 저 기차 충돌보다 적음]

[그럼 어떻게 되는 거임?]

[1명과 5명 사망중에 고르라 했는데 6명 사망이 된 거지 뭐]

"아니! 스타더스씨! 왜 자살하러 가는 겁니까!! 멈추세요!!!"

내가 절벽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나, 스타더스에게 들릴리는 만무.

그저 나는 허망하게 기차로 달려드는 스타더스를 지켜볼 뿐이었다.

이에 불타기 시작하는 채팅창.

[코이츠 진짜 광기를 만나자 당황하는 거 뭐냐고wwwww]

[분명히 딜레마를 연출했는데 자살을 해 버리는ㅋㅋㅋㅋㅋ]

[망고스틱 이쉨 왜 갑자기 얼어붙었냐]

[아이스망고가 되어 버린wwwwwww]

[에고스틱 S급 빌런으로 상향시켜야할듯]

[ㄹㅇ아무것도 안 하고 A급 히어로 제거시켜 버리는데?ㅋㅋㅋㅋㅋㅋ]

[미친놈들아 스타더스 죽으면 우리도 ㅈ돼 쳐웃을 때가 아니야!!]

[스타더스 서울 담당 아님? 난 서울 안살아서 상관없음ㅋㅋㅋㅋㅋㅋ]

[ㄹㅇ나만 아니면 돼에에에에ㅋㅋㅋㅋㅋㅋ]

"이건... 제가 의도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나.

정확히는 '씁쓸한 척' 중얼거리는 나다.

의도 안하기는 개뿔. 당연히 의도한 거다.

정의로운 스타더스의 성격에, 누군가를 희생하는 걸 용납할 리가 없다.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면 희생했지.

스타더스. 신하루.

신하루는 원작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는다.

온갖 기상천외한 빌런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스타더스를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신하루의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누구보다 정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통받는 그녀.

내가 이 이상한 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은 첫날, 내가 다짐한 게 그거다.

스타더스, 신하루의 고통을, 조금은 덜어 주자고.

근데 그러면 살짝 문제가 있다.

히어로물의 주인공 답게, 신하루도 고난을 겪을수록 점점 강해진다.

정신이 피폐해 질 수록 능력이 세지고, 몸이 고생할 수록 능력이 세진다.

역경을 딛고 강해지는, 잡초같은 캐릭터.

근데 중요한 건, 내가 그녀대신 빌런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역경이 점점 사라진다는 문제가 있다.

아니 고생해야 하는데, 나 때문에 고생을 안 하네?

그녀가 고난을 받지 않으면 강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가 강해지지 않으면 문제가 좀 많아진다.

예전에 말한 적이 있듯이, 이 세계를 이루던 원작 만화는 갈수록 파워 인플레이션이 심해진다.

분명 적당적당한 히어로와 적당적당한 빌런들이 모여 있던 대한민국은,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식하게 강해지는 빌런과 그에 맞추어 똑같이 무식하게 세지는 스타더스의 이야기가 돼 버린다.

그리고 미국. 이 세계관에서 미국은 그냥 개판 5분전이다. 대한민국에는 한 명도 없는 S급 히어로 보유 세계 1위이자 S급 빌런들도 제일 많은 나라. 하루에도 온갖 사건사고가 터지는 나라.

스토리 후반부에는 그냥 막 신적존재 나오고 지구멸망 나오고 난리가 나는데, 그 미국에 널린 S급들도 못막는 지구멸망을 다름이 아닌 우리 스타더스가 막는다.

뭔가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스타더스는 지구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도 고난을 받고 파워업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고난을 줘야 하는 게 나다.

온갖 민간인 피해와 기물파손에 예측불가능한 기타빌런들에게 고난을 받는 것보다는, 체계적이게 잘 짜인 고난 커리큘럼으로 밀착 담당해주는 나한테 고난을 받는 게 스타더스한테도 낫지 않을까? 아무튼 더 나을 거다.

그리고 내 고난 선물 세트의 첫 번째, 바로 달려오는 기차 막기다.

그래, 힘들 수 있다. 힘들 수 있지만, 우리 하루는 버틸꺼다. 스타더스 파이팅!!

그리고 그 순간, 스타더스가 기차랑 충돌했다.

콰아앙- 이곳까지 들리는 엄청난 굉음.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들리는 수빈씨의 비명.

미안해요 수빈씨.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나는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뭉개뭉개 풍겨 오르는 흙먼지들. 그 흙먼지를 뚫고,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라나, 확실히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있는 기차.

누군가가 그 앞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겠지.

끼이이이이익-소리를 내며 속도가 줄어들던 기차는, 결국 묶여 있는 사람 5명 바로 코앞에서, 간신히 멈춰 섰다. 됐다! 멈췄다! 휴우.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근데 잠깐, 스타더스는 괜찮겠지? 나는 주먹을 쥐고 그곳을 바라봤다. 버텼겠지? 버텼을 거야. 내 스타더스가 이런 걸로 쓰러질리가 없잖아. 그래, 당연히 버텼겠지.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초유의 상황. 슬슬 먼지가 걷히기 시작했다.

뭔가 다시 불안 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죽었으면 어떡하지? 어, 그럼 안 되는데.

공포의 순간.

어느덧, 먼지구름이 전부 걷히고.

그 속에서 등장한 건, 굳건하게 서 있는 스타더스의 모습이다.

나는 쥐었던 주먹을 펴며 나도 모르게 외쳤다.

"예쓰!!!...가 아니라! 오! 오... 오! 버텼군요. 버텼어요. 와 이걸 버티네. 네. 제가 기획한 건 이게 아니긴 한데... 네. 뭐, 그녀 스스로만의 방법으로 이 딜레마를 풀어 냈군요. 흠. 네."

[예쓰라고 외치는 거 뭔데?ㅋㅋㅋㅋㅋㅋ]

[아니 스타더스가 멀쩡히 있는 걸 보니까 누구보다 기뻐한 거 같은데?]

[망고스틱 이 녀석 빌런 죽이고 스타더스 이름 써놓을 때부터 알아 봤는데, 알고 보니 누구보다 스타더스를 좋아하는wwwwww]

['예쓰!가 아니라' ㅇㅈㄹㅋㅋㅋㅋ]

[에고스틱 아주 커엽다예요]

[와 근데 스타더스 저걸 버티네? 어케 버텼노ㄷㄷ]

[ㄹㅇ저거 속도 한 140아니냐? 사람이 저걸 어케 버팀?]

[사람이 아니라 '영웅']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엄마 난 커서 스타더스가 될레요! 엄마 난 커서 스타더스가 될레요! 엄마 난 커서 스타더스가 될레요!]

[이 자식들 스타더스 그렇게 까다가 갑자기 태세 전환 하는 거 보소ㅋㅋㅋㅋㅋㅋ]

[ㄹㅇㅋㅋㅋ사실 레버를 스타더스가 돌리든 안돌리든 욕처먹었을 거 같은데 이걸 이렇게 뚫네ㅋㅋㅋㅋㅋㅋ]

[스타더스 욕한놈들 당장 튀어나와!]

[이 와중에 에고스틱 이번에도 사상자 0명 갱신한 거 실화냐? 진짜 에고스틱은 전설이다....]

[에고스틱 당장 A급 히어로로 임명하라고 협회에 청원넣고 온다 ㅅㅂ]

채팅창 반응도 매우 좋다.

그래, 이거야! 스타더스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나는 막혀 있던 속이 뚫리는걸 느꼈다. 좋아, 좋아. 비록 이번에도 사상자 0명이라 나를 빠는 사람들이 좀 더 늘어날 거 같기는 한데... 그래, 우리 스타더스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희생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그렇게 나 혼자 감격에 빠져 있던 순간, 저 멀리서 스타더스가 자리에 쓰러지는 게 보였다. 어라.

나는 곧바로 스타더스의 쪽으로 이동했다.

자리에 쓰러져 누운 스타더스.

먼지가 잔뜩 묻은 그녀는, 숨을 쌕쌕거리며 겨우 눈을 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모습.

"네... 이, 놈..."

다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스타더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좀 큰 미안 함을 느꼈다. 고생해야 하니까 고생시킨 거긴 한데,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으니 좀 미안 하네.

기절하기 전에, 이 정도 말은 해 줘야지.

나는 그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입을 열었다.

"그래요 스타더스. 잘하셨습니다. 제가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요. 그런 방식으로 모두를 살릴 줄이야, 진짜 예상도 못했네요. 당신의 승리입니다. 저는 이만 가볼 테니, 이제 푹 쉬세요. 곧 다른 히어로들이 올 테니."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을 해준 나는, 한쪽 손을 뻗어 눈을 감겨 줬다.

잠시 저항하려고 했던 그녀는, 눈이 감기자 이윽고 힘이 완전히 빠졌는지 결국 숨을 쌔액쌔액 쉬며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 힘들었겠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릎을 턴 나는, 카메라를 향해 작별 인사를 고했다.

"네. 제 테러는 여기까지입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제 조용한거 보니 기절한 것 같은 수빈씨 기관실에서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야지.

엔딩멘트까지 한 이후, 카메라를 껐다.

방송이 꺼짐과 동시에 채팅도 종료됐다.

[둘이 분위기 모야모야]

그게 마지막 채팅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에고스틱-스타더스 열애설이 터졌다.

이게... 한국?

EP.19 세상 말세

기차에 사람을 묶어놓고 이대로 가면 5명이 치이게 생겼는데 레버를 돌리면 다른 선로에 묶인 한 명만 죽는다. 레버를 돌리겠는가?

에고스틱이 던진 난제.

사실 이미 철학적으로 꽤 알려진, 유명한 난제다.

일명 트롤리 딜레마.

기차가 이대로 가면 5명을 친다. 근데 레버를 돌리면 한 명만 친다. 공리주의적으로는 레버를 돌리는 게 맞다. 4명을 살릴 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과연 당신은 돌릴 수 있겠는가.

기차가 5명을 친거는 참 안타까운 사고다. 여기서는 안타까운 테러겠지만. 그러나 레버를 돌리면 거기서부터는 사고가 아니다. 5명은 사고로 죽은 거지만, 당신이 레버를 돌리면 그 1명은 '당신이' 죽인 거다. 안죽을 수 있던 사람이 당신이 레버를 돌렸기에 죽는 거다.

...뭐, 이런 딜레마다.

그리고 나는 이 딜레마를 실제세계에 구현했고.

스타더스는, 말뿐인 딜레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행동으로 옮겨서 멋지게 돌파했다.

레버를 돌려서 기차를 어디로 향하게 할까 고민하지 않고.

스스로가 나서서, 기차를 멈춰 세웠다.

스타더스는 초상 능력자다.

나와 같은 이중능력자. 힘이 아주 강함과 동시에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정확한 명칭으로는 괴력과 비행 능력.

그리고 그녀도 이중능력자이기에, 나처럼 능력이 좀 하자가 있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은.

괴력도 보면 괴력 단일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혼자 건물도 무너트릴수 있다. 비행 능력도, 단일로 그 능력을 갖춘 사람 중에서는 하늘을 마하의 속도로 비행한다. 물론 둘 다 미국에 있는 히어로들이기는 하지만.

스타더스는, 결코 그 정도는 아니다. 괴력도 강하기는 하지만 건물을 한 방에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고, 비행 능력도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막 초음속으로 날고 그런 건 아니다.

...물론 분명 똑같은 이중능력자임에도 둘 다 심각한 하자가 있는 나보다는 훨씬 낫기는 한데... 그래도. 좀 부족하다는 건 여지없는 사실이다.

물론 이중능력자 자체가 매우 희귀하고, 괴력과 비행 능력이 서로 상호작용도 좋아서 A급이지만, 약간 2프로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만화의 주인공.

다른 능력자들과 다른 그녀만의 특징은, 그녀의 능력은 진화한다는 거다.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더더욱 강해지는 능력.

그래서 이번에 내가 근력 강화 이벤트를 준비해본 거지.

Make Stardus Great Again.

실제로 그녀가 원래 그녀의 힘은 달려오는 기차를 못막으나, 막상 실제상황이 닥치자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에 폭발적으로 강해진 거다.

그리고 그녀의 호감도도 좋아졌다.

어째 나랑 대립각을 세우면서 낮아진 그녀의 인기는, 이번 기회에 다시 상승했다. 자신의 몸을 초개 같이 던져 기차를 막는 그녀의 모습은, 전국의 티비에서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스타더스가 다시 호감이 된 거는 좋았다.

근데 왜 열애설이 터지냐고.

***

나는 허망한 마음으로 티비를 시청하고 있다.

겨우겨우 거사 후에 순간이동으로 집에 돌아와 피로회복장치에서 푹 잔뒤에 일어나보니.

서은이가 티비보라며 내 손을 잡고 질질 끌고 가 나를 소파에 앉혔다.

티비에서 보이는 커다란 오늘의 방송 제목.

[에고스틱-스타더스 열애설]

"이게 뭐야 시발."

티비를 보자마자 외친 나.

그러나 내가 뭐라고 하던 말던, 티비의 사람들은 자기가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 연예가 중계입니다! 요즘 이 둘이 아주 핫하죠.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빌런 에고스틱과! 떠오르는 초신성 히어로 스타더스! 이 둘의 열애설이 요즘 대한민국 연예계를 휩쓸고 있는데요. 박기자님, 둘의 열애설이 터진 이유가 뭔가요?"

지상파의 연예계 중계 프로그램.

여자 앵커가, 뭔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남자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일단 이는 에고스틱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아래에서 판넬을 들고 온 남자는, 이를 자기 앞에 놨다.

하얀 배경의 스티커가 붙어있는 판넬.

맨 위에 핑크색으로 적힌 에고스틱♡스타더스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에고스틱의 공개적인 구애들입니다."

판넬에는 하얀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그걸 쓱 떼니 안에 접힌 글자와 사진이 보였다.

[1. 에고스틱의 러브레터.]

남자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양복을 갖춰 입고 올백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체 그런 표정으로 말을 하니, 누가 보몃 마치 CEO가 주주총회에서 실적보고를 하고 있다고 느낄만한 그림이었다.

물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그런 게 아닌 황당한 찌라시였지만.

"에고스틱의 첫 행보는 S급 빌런 엔조디악과 A급 빌런 라이노 살해였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바로 이겁니다."

그는 자신이 든 판넬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르켰다.

사진에 보이는 건 마치 누군가가 피로 적은 듯한 글자들. 그 글자들은 이리 적혀 있었다.

나보다 악한 이에게 죽음을.

나보다 약한 이에게 죽음을.

To you, Stardus.

이 오늘거리는 문구는, 사실 말하는 리포터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컨셉을 잡고 범행을 저지른 내가 내 컨셉을 어디까지 해야 할 지 모른 체 폭주해 버린 결과다.

처음이라 그런지 의욕도 넘쳤고, 첫 살해라고 전에 약좀 빨고 가서 그런지 너무 내 감성에 취해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구, 내가 보기에 멋진 문구를 피로 휘적휘적 적고 왔다.

근데 그게 맨정신으로 봤을 때 저렇게 오글거릴 줄은 몰랐지.

지금은 그래도 적당히 오글거리게 컨셉을 좀 조절하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대충 멋져 보이는 말 적는다고 폭주하다가 저렇게 된 거다. 아...

사실 처음에는 저거 적고 운율이 완벽하다며 나 혼자 뿌듯해했다. 물론 나중에 저걸 본 서은이가 폭소하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고... 지금은 언급만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흑역사가 됐다. 서은이가 그때 하도 앞에서 '나보돠 왁한 이들에게 쥬금을~' 이러면서 놀리다 보니 약간 트라우마가 된 거 같기도...

하여튼, 내가 지워 버리고 싶어 하는 흑역사를 저 기자가 또 공개했다. 옆을 보니 서은이가 또 폭소를 터트리고 있다. 그나마 수빈씨라도 옆에 없어서 다행이디...

근데 정작 저 흑역사를 분석하는 기자 본인은 굉장히 진지해 보였지만.

"자, 여기 문구 보이시나요? 에고스틱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뒤 현장에 남긴 메시지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역시 마지막 줄의 '스타더스에게' 인데요. 사실 처음부터 에고스틱은 일관적이게 스타더스에게 구애를 했습니다. 빌런들을 제거한 뒤 스타더스에게 선물로 줬다는 거죠. 사실상 공개적인 구혼입니다."

어... 선물로 준 게 아니라 그냥 어그로 끌려고 한 건데...

내가 막 악행 저질렀는데 내 담당으로 스타더스가 아닌 이상한 히어로가 붙으면 어떡해? 그래서 딱 스타더스를 지칭해서 어그로를 끈거다. 스타더스가 사적제제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이 무슨...

그러나 내 말이 저곳까지 들릴리는 없었고, 기자는 여전히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테러입니다. 사실 에고스틱의 테러는 테러라고 부르기도 어려웠죠. 결과적으로 사상자가 0명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벌인 테러 두 개에서 모두 스타더스를 불렀고, 이 두 개를 모두 스타더스가 멋지게 해결했었죠."

그러면서 나오는 나의 테러현장. 스타더스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모습과, 기차를 혼자 힘으로 막아 세우는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틀어졌다. 음, 멋지긴 하네.

"그리고 에고스틱이 이후에 한 말들 또한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한번 들어 보시죠."

그리고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

배에서의 테러가 무산되고 나서, 내가 의아해 하다가 그녀한테 한 말이다.

[당신 때문이었군요]

[당신의 연설을 듣고 나서, 모두가 갑자기 연합되었었죠]

[그래요. 그래. 제가 아무래도 당신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 당신이라면, 말 한마디로 대중을 계몽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죠.]

아. 내가 저런 말을 했다고?

내 혼란스러움이 채 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바로 저번의 기차 테러에서 한 말.

[그래요 스타더스씨. 잘하셨습니다. 제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요. 그런 방식으로 모두를 살릴 줄이야, 진짜 예상도 못했네요. 당신의 승리입니다.]

잠잠히 자신이 틀어놓은 음성을 듣고 있던 기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앵커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걸 보십쇼!!!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냔 말입니다!!! 망고스틱이 저 마지막 말하고 스타더스의 눈을 감겨 주자, 스타더스도 그제야 조용히 잠든 거 보세요!!! 이게 둘이 사귀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뭐가 사귀는 거란 말입니까!!!"

그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 대체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녕 공중파 방송이 맞다는 말인가!!!

"이게 대체 뭐야!!!!"

나는 소리를 지르며 리모컨을 티비쪽으로 던졌다.

이미 옆자리에서 같이 보던 서은이는 숨 뒤집어질 정도로 웃고 있는지 오래.

방송은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보는 앵커를 화면에 잡는걸 끝으로 갑자기 화면이 광고로 바뀌었다.

자막으로 [방송점검중]이라고 뜨는걸 보니 방송사고였나보다.

그래 시발 대체 누가 방송에서 나보고 망고스틱이라고 해.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좌절할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한민국은 미쳤어.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기자는 내 열렬한 팬클럽 회원으로써, 통칭 망고단이라고 한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일으켜 강등 위기를 맞았으나, 그날 방송이 역대급 시청률은 찍은 덕분에 징계는커녕 오히려 성과급을 받았데나.

세상 말세다 정말로...

EP.20 우연

"아아아아아악!!"

신하루는 리모컨을 티비쪽으로 던져 버렸다.

물론 너무 세게 던지면 새로 산 UHD 티비가 박살이 나버릴 수 있으므로, 의식적으로 최대한 살살 던지기는 했다.

물론 그것도 벽에 굉음을 내며 부딪쳤지만.

"하아.. 하아..."

그녀는 숨을 쌕쌕댔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소파에 앉은 뒤, 천천히 생각이나 해봤다.

자신이 스타더스란 이름으로 히어로 활동을 한지 어언 몇 년.

처음으로 각성한 게 중고등학생 때니까, 그때부터 했으니 꽤 오래 했다고 볼 수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복수하기위해 빌런들을 감방에 처넣는 히어로 생활을 하기로 다짐했었지.

그런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빌런이랑 열애설이 나다니?

"하아..."

신하루는 한숨을 쉬며 냉장고로 향했다.

너무 골때려서 단게 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시원한 주스팩을 꺼내 마시던 그녀는, 자기 마시는 주스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미닛 메이드 망고]

망고. 이제는 망고만 보면 에고스틱 그놈이 떠오르게 생겼다.

에고스틱 그놈을 추종하는 놈들이 에고스틱을 망고스틱이라고 부른대지?

아. 그녀는 자기 뇌가 오염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게 망고다.

사실 망고 그자체는 싫어하는데, 망고주스 망고 프라페 망고빙수등 망고-라이크를 좋아하는 편이다.

근데 이제는 다시는 망고를 볼 때 예전과도 같이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망고를 볼 때마다 망고스틱이 떠오를 것임으로.

"내 뇌... 내 뇌가 오염당했어..."

그녀는 살짝 침울해졌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인식이라는 게 때때로 변하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변할지는 상상도 못 했다.

"휴..."

그녀는 창밖으로 나가 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빼냈다.

시원한 봄바람이 그녀에게 불어닥친다.

옅은 햇볕이 그녀의 금발에 반사돼, 마치 반짝반짝 거리는 것처럼 몽환적인 연출을 주었다.

그 결과 길거리를 걷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본 남자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중심에는 당연히 에고스틱 그놈이 있었다.

에고스틱. 그녀는 참 그게 웃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에고-스틱이라니. 약한 할아버지가 에고-에고- 거리면서 스틱을 쥐고 걷는 게 연상되지 않는가? 물론 그 이야기를 자기 친한 언니에게 슬쩍 했다가 언니의 측은한 시선을 보고 앞으로는 혼자서만 생각하기로 했지만.

차라리 에고스틱보다는 에고이스틱이 더 멋지지 않을까-라는 생각한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왜 저 빌런놈의 이름을 생각해주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털며 그 생각을 덜어냈다.

그래도, 그녀는 에고스틱을 생각할 때면 심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뭔가는 말로는 잘 설명이 안 된다.

복합적인 감정이 그녀를 체워, 채 토해내지 못할 생각뭉치가 되어 그녀의 뇌에서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이상했다.

분명 사악한 빌런놈을 떠올리면 증오, 혐오가 떠올라야 하는데.

어째서 복합적인 감정이 떠오르는가?

그 수많은 감정중에서는 분명 증오나 혐오가 아닌 다른 것들도 있는 것이었다.

에고스틱. 그놈은 지금 인터넷상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아니, 비단 인터넷뿐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인기가 엄청나다.

그녀의 친한 언니 채현만 하더라도 저번에 자신이 망고단에 가입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학과 톡방에서도 가끔 망고스틱 하면서 언급되는데 다 좋은 이야기뿐이었다.

기차테러를 저지르는걸 모두가 실시간으로 보고도 어떻게 저러나... 했는데.

처음에는 이번에도 사상자 0명이라면서 에고스틱을 커버쳐주다가.

나중에는 그 기차에 묶인 사람들이 전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난 놈들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또 무지성 에고스틱 찬양이 시작됐다.

아싸리 스타더스가 기차를 안 막았어도 좋았다는 우스개소리가 들릴 정도니.

사실, 이미 에고스틱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열광은 거의 광신 수준에 도달했다.

지금까지 고구마만 퍼먹던 국민들에게, 사이다를 넘어선 염산을 들이부어 주는 에고스틱은 '제발 한국인이라면 에고스틱 지지합시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유행할 정도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아까 본 그 열애설.

"윽."

그녀는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그 피로쓴 글자, 그의 테러등 지금까지의 행보들이

그게 다 자신을 좋,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대체 그가 왜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인가.

자기의 얼굴때문에? 그래, 그거겠지. 그거 말고는 좋아할 이유가 없으니!

역시 에고스틱 그놈또한 자기의 얼굴만 보고 껄떡이는 그런 놈일게 틀림없다....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거는 있다.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전보다 확실히 늘어난 근력.

저번에 기차를 막은 이후, 그녀는 확실히 강해졌다.

강해진 거는 좋은 일이지, 그녀가 늘 추구해 온것이기도 하고.

"모르겠다..."

그녀 자신도 왜 혼란스러운지 모르겠는 만큼, 한숨만 늘어갔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일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기 안티팬들이 좀 사라졌다는 말.

사실 여론의 반응 그런 거 신경 안쓰는척하면서 누구보다 신경을 쓰는 그녀였기에, 자신에 대해 호의적으로 변한 여론에 상당히 안심했다.

사실 호감도가 내려간 것도 에고스틱 때문이고, 다시 올라간 것도 에고스틱 때문이라는걸 생각하면 참 묘한 기분이 되었다.

마치 자기 인생을 에고스틱이 쥐고 흔드는 기분.

실제로 상부에서 자신을 에고스틱 담당으로 공식 임명했으니, 틀린 말도 아닐꺼다.

"에휴..."

심란하던 그때 때마침, 걸려 오는 전화소리.

발신자는 김채현.

그녀의 제일 친한 대학 선배였다.

"여보세요?"

[어 하루야! 우리 날도 좋은데 놀러 갈래?]

"놀러요?"

놀러간다라.

생각해 보면, 그녀가 놀러가 본적은 몇 번 없다.

공부하랴, 히어로 활동하랴. 이 2개만해도 계속 부족한 게 시간이었으니.

근데 놀러라.

흠.

원래라면 거절했을 제안이다.

학업과 영웅일을 병행하기도 벅찬만큼, 한가롭게 놀러 다닐 만한 시간이 없었으니.

애초에 요즘 너무 바빠서 자기 협회 사무실에도 오래 못 앉아 있었다. 거기 볕이 잘 들어서 좋은데.

근데, 안 그래도 에고스틱때문에 심란한 요즘.

놀러 가자는 제안은 꽤 솔깃한 것이었다.

"어... 좋아요! 언제갈까요?"

[바로 오늘! 어때? 축제가 열린데! 나 예전부터 늘 가고 싶었거든!]

"오 축제 좋죠. 오늘 시간이... 될 거 같네요. 그럼 좀 있다가 만나요. 근데 무슨 축제예요?"

[아이스크림 축제! 재밌겠지?]

"어, 네."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아이스크림 축제라는 것도 있었나?

***

건물이 빼곡히 깔리고, 차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서울.

의 지하 깊은 곳 저어멀리에, 우리의 지하 기지가 있었다.

대한민국 모두를 공포에 빠트리게 하는 빌런, 에고스틱.

손가락 하나만으로 대한민국의 전산망을 무너트릴수 있는 천재 해커, 한서은.

해킹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는 만능조수, 이수빈.

이 셋이 모두 모인 이곳, 일명 에고-베이스.

비록 지하 깊은 곳에 있어 볕은 잘 안 들지만, 햇볕을 대체할 수 있는 LED빛이 있는 아늑한 곳이다.

가끔은 집에서 쉬는 것도 좋은 거다.

요즘 너무 바쁘게 살지 않았나?

평범한 소시민이던 내가 악당 연기를 하는 게 쉬운 게 아니다.

저번 방송때 수만 명이 나를 보고 있다고 하니까 좀 쫄리더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로 박제될 걸 아니... 이미 저번에 내가 스타더스가 기차 멈춰 세운거 보고 '예쓰!'라고 말한 건 박제돼서 이리저리 쓰이고 있다. 주로 열애설의 근거로...

기레기놈들.

눈치만 빨라가지군...

하여튼, 또 너무 자주 어그로를 끌어도 좋을 게 없으니.

요즘은 집에서 빈둥빈둥 쉬고 있다.

주로 하는 일은 서은이랑 놀아주기.

얘도 중3인데 친구 한 명 없으니 얼마나 심심하겠어...

수빈씨까지 껴서 같이 보드게임 하거나 스위치하면서 놀며 지냈다.

말로는 이건 애기들이나 하는 거라며 툴툴거리면서도 거실에 펼쳐 놓으면 재밌게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 애들은 애들답게 놀아야지! 맨날 컴퓨터만 보고 그러면 좋지 않을 거다.

어쨌든 여전히 빈둥빈둥 놀며 지내는 하루.

티비나 보면서 수빈씨가 깎아 놓은 사과를 먹는데, 자기 방에서 뭔가하고있던 서은이가 나한테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더니 여기 가자면서 뭔가를 보여줬는데.

"아이스크림 축제?"

"그래, 저번에 말했잖아요. 그게 오늘이래! 이건 꼭 가야돼요!"

눈을 반짝반짝거리며 말을 하는 서은이.

옆에 있는 수빈씨도 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래, 생각해 보니 들어 본거 같기도 하다.

국제 제 13회 아이스크림 축제라... 원작에서도 이런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옆에서 서은이가 뭐 이게 한국에는 처음 온 거고 볼 것도 엄청 많고 설명을 하고있다.

태어나서 아이스크림 축제라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좀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서은이도 나처럼 집순이라 집에만 있는걸 제일 좋아하는데, 먼저 나가자고 하는 거 보면 그리 보고 싶은 건지... 아이스크림이 그리 좋더냐?

"그래, 가자! 옷 갈아입어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외쳤다.

뭐, 별일 있지는 않겠지?

EP.21 축제에서

"날씨 좋구나."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이곳.

마지막으로 테러하러 나온 게 벌써 저번주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안 나오고 집에만 콕 박혀 있었으니, 실로 오랜만에 나왔네.

축제로 향하는 길.

나와 서은이, 수빈씨는 오랜만에 길을 걷고 있었다.

아, 수빈씨는 오랜만이 아니겠구나. 늘 장을 보러 왔다 갔다 하셨으니.

하여튼, 오랜만에 태양볕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사람은 가끔 이렇게 일광욕도 하고 살아야돼. 햇볕에 그 뭐냐... 비타민 D가 들어 있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너무 안에만 있으면 안 돼.

"오빠, 또 검은색 옷 입었어요?"

나한테 핀잔을 주는 서은이.

꽤 오래 같이 살면서 알게 된건데, 서은이가 형 - 오빠를 나누는 기준이 있다.

평상시에는 형인데, 뭔가를 부탁해야 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면 나한테 오빠라 부른다.

...그냥 오빠라고 통일하면 안 되겠니?

솔직히 날 잡고 따끔하게 혼내면 쭉 오빠라 부를 거 같기는 한데.

솔직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괜히 사이 어색해지고 거리감 생기고 그러자너. 언젠가 마음의 문이 열리길 기다려야지. 언젠가는 쭉 오빠라고 부를 날이 오겠지? 분명 올 거야...

어쨌든 지금은 기분이 좋은지 오빠라고 불러 주고 있으니 좋다. 근데 왜 또 검은색 옷을 입었냐고?

나는 내가 입은 옷을 점검해봤다. 검은 코트를 입은 모습. 안에는 평범히 입었다. 어차피 코트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기는 한데.

결과적으로 에고스틱때처럼 검은색으로 통일된 모습이다. 아니, 코트는 검은색이 제일 어올린다니까?

나는 서은이에게 그녀는 모를 진실을 얘기해 주기로 했다.

"서은아, 남자는 블랙이란다."

"뭐래요."

픽 웃으며 말한 서은이. 어라, 원래 이렇게 밝게 답해주는 애가 아닌데? 경멸 어린 얼굴로 던질 매도를 기다리던 나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게,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

서은아, 너 굉장히 아이스크림에 진심이었구나?

아니면 오랜만에 나들이라 기분이 좋은 건가?

수빈씨도 그런 서은이의 모습이 귀여줬는지 입을 가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서은이도 흔치 않은 은발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힐끔거리고, 수빈씨도 원체 미인이라 그런지 그저 길을 걸을 뿐인데 사람들이 단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왜 이래?

참고로 수빈씨는 처음에 방송타는 바람에 인식저하 필터가 적용되어 있다. 물론 인식저하 필터 자체가 그 얼굴 한정으로 보는 사람을 안면인식장애로 만드는 기능이라 이미 수빈씨가 수빈씨라는걸 아는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하네. 온갖 방송에 나온 나는 가면쓰고 필터끼고 다녀서 이렇게 당당히 맨얼굴로 다닐 수 있는데, 수빈씨는 인식저하 필터가 외출할 때마다 필수니.

참고로 이 인식저하필터라는 것도 최신기술의 결정체다. 미국의 한 천재 연구자가 '언제까지 히어로들이 괴상한 쫄쫄이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하냐'면서 발명해낸 것으로, 장치에 들어갔다 나오면 일정 시간 동안 인식저하가 안면에 작용되는 건데...

히어로 협회 사무실마다 하나씩 있는걸 서은이가 어떻게 설계도 보고 만들어서 우리 지하 기지에도 하나 있다. 고마워요 서은에몽!

인식저하 없으면 망해... 수빈씨가 장을 못봐오자너.

수빈씨가 밖에 못 나가면 삼시세끼 배달 음식을 시킬 수 밖에 없다. 그게 '집순이'라는 것이니...

"아, 저기 보인다!"

서은이가 잔뜩 흥분해서는 외쳤다.

그래, 나도 보이네.

[제 13회 국제 아이스크림 축제]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는 이곳.

살다 살다 올 줄은 모른, 아이스크림 축제의 현장이다.

거리마다 냉장고가 있는 부스가 가득. 대체 이 축제로 쓰는 전기세가 다 합쳐서 얼마일지에 대한 궁금증만 생길 뿐이었다.

서은이는 벌써 신나서 고개를 사방팔방 돌려가며 보고 있고, 수빈씨도 신기한지 두리번 두리번 하고 있다.

"오, 쌀 아이스크림이다!"

어딘가로 오도도도 달려가는 서은이. 야, 같이 가야지!

나랑 수빈씨도 천천히 뒤따라 가 보니, 서은이는 이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들고 있었다.

콘에 담겨 있는 하얀 아이스크림.

"맛있다! 오빠랑 언니도 먹을래요?"

서은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쌀 아이스크림이라. 들어만 봤지 한 번도 먹은 적은 없는데 말이지.

"그래, 줘 봐."

나는 서은이가 건넨 콘을 받아 한입 물어 봤다.

음. 맛있네.

햇반 맛이 날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바닐라에 가까운 맛이었다.

"오, 먹을 만한데? 자 수빈씨도 한입 드셔보세요."

"네? 저, 저는."

갑자기 당황하더니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하는 수빈씨. 왜 이러시는 거지?

"이거 맛있는데 안 드셔보실꺼예요?"

"그래 언니, 먹어봐요!"

나와 서은이의 거듭되는 공세에 수빈씨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네. 주, 주세요."

말을 더듬으며 손을 뻗는 그녀.

아니, 왜 다시 초창기의 왕소심 수빈씨가 된 거지?

내가 너무 강압적으로 먹으라고 해서 그런가?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건가?

"...으으...이거...간접...나만...이상한 건가?"

그녀가 뭐라 뭐라 중얼거렸으나 너무 작게 중얼거리는 바람에 딱히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더니 아이스크림을 눈감고 한입 꼬옥 먹는 그녀. 아니, 무슨 아이스크림을 저렇게 비장하게 먹는데.

"으음...맛있네요!"

한입 먹더니 그제야 눈을 빛내며 맛있다고 하는 그녀. 그치? 생각보다 약간 고소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이라 먹을 만 하다.

한입 먹은 뒤 남은 콘은 다시 서은이의 손으로 돌아갔고, 남은 건 서은이가 깔끔하게 마저 먹었다. 잘 먹네.

***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축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을 시식했다. 하도 많이 이것저것 먹어서 그런지 돈을 물 쓰듯 쓰는 느낌이었지만, 남는 게 돈이라 별문제는 없었다.

무슨 전 세계 단위로 나라마다 돌아다니며 열리는 세계적 축제라 그런지, 정말 별별 아이스크림을 볼 수 있었다. 초코, 바닐라, 딸기, 민트 초코등 익숙한 기본 아이스크림과 아빠는 외계인, 슈팅스타같은 브랜드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널렸다. 그리고 저것들 외에도 평생 여기서만 볼 수 있을 거 같은 아이스크림이 널렸다.

와사비맛, 냉면맛, 스테이크맛, 라면맛등 무언가의 끔찍한 혼종 아이스크림들. 근데 스테이크맛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약간 직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이런 느낌일려나? 나도 내가 뭔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책상맛, 코딱지맛, 귀지맛등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들 또한 있었다. 저걸 왜 돈 받고 파는 거야...

...물론 가위바위보 해서 진사람이 먹는 걸로 내기해서 코딱지맛은 사봤다. 혼자 가위를 내서 진 수빈씨가 눈을 글썽이며 먹었는데, 한입 먹더니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길레 나머지는 그냥 버렸다. 먹지 마세요, 쓰레기통에 양보하세요.

지금은 망고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왜 망고맛을 먹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러치 않니 서은아?

내가 책망하듯 묻자 그녀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속삭였다. 나한테 까치발을 들고 귀에 입을 붙인뒤 한 말은.

"....오빠가 망고단의 수장이니 망고맛 아이스크림을 먹어야죠!"

"서은아... 솔직히 망고 어쩌구는 이제 좀 뇌절이라 생각하지 않니? 너무 우려 먹으면 재미없어."

"아니요? 할 때마다 재밌는데요? 그리고 오빠가 아무리 부정해도 이미 오빠 팬클럽 이름은 망고단이예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서은이. 이제는 아주 나 놀리는 재미로 사는구나...

그래, 너라도 행복하면 됐다.

이것저것 보다 보니 어느덧 이벤트코너로 왔다.

프랑켄슈타인맛 아이스크림, 미키마X스맛 아이스크림등 콜라보 아이스크림을 파는 이곳.

저쪽에는 에고스틱맛 아이스크림도 있고...

응?

잠깐, 무슨맛 아이스크림?

"자,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에고스틱맛 아이스크림!"

부스안에 여자가 큰 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이거 초상권 침해야!

"오빠, 풉, 아이스크림도 있네요. 푸하하하!"

아주 그냥 웃음꽃이 핀 서은이. 웃기냐?

잠깐, 지금 수빈씨도 고개 돌리고 웃고 있는데?

더 웃긴 건 저 코스만 유일하게 줄을 서고 있다는 거다. 앞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인증샷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 인스타용인가? 정말 어질어질하다...

서은이와 수빈씨의 강력한 요청으로 나도 결국 줄 서서 내맛 아이스크림을 샀다. 과연 에고스틱맛은 무슨 맛일까...?

아이스크림 자체는 흔한 바닐라에 초코로 만든 내 트레이마크인 반쪽가면이 올려진 모습이다. 초코로 눈이랑 입도 구현해 놨는데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안에는 망고가 들어가 있다는 점?

다행히 먹을 만은 했다. 저기 팔고 있는 사람은 알까? 에고스틱맛 아이스크림을 에고스틱이 와서 먹었다는 걸...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무슨 게임하는데가 있었다. 다트를 던져서 풍선맞추기. 많이 맞추면 상품을 준덴다. 근데 아이스크림 축제라 그런지 상품도 아이스크림이다. 10단 아이스크림? 이건 또 뭐래.

"서은아, 오빠가 보여 줄게. 내가 왕년에 다트던지기 장인이었거든? 10단 아이스크림인가 뭔가 먹여 준다!"

"오빠, 염동력으로 사기칠려는 거 아니야?"

서은이의 말에 뜨끔한 나는 그냥 얼른 게임이나 하기로 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총 두 명이 할 수 있는 부스인데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바로 할 수 있었다.

"휴우.. 이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

다트를 쥐고 서은이에게 헛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옆에도 누군가도 게임을 하러 왔다.

아무 생각 없이 누가왔나 옆을 쓱 본 나는,

뇌 정지가 오고 말았다.

찬란한 금발.

세상 누구보다도 예뻐 보이는 외모.

게임을 하러 온 사람은 스타더스, 신하루였다.

어.... 너가 왜 거기서 나와?

EP.22 만남

"하루야, 여기야 여기!"

아이스크림 축제 행사장 앞.

버스를 타고 내린 신하루는 선배와 만났다.

"어, 언니. 먼저왔네요?"

"나도 방금 막 온 거야! 슬슬 봐보자!"

"그래요."

둘은 함께 축제를 둘러보기로 했다.

밝게 웃으며 재잘재잘 떠드는 선배를 하루는 귀엽게 바라보았다.

채현 언니는 비록 나이는 자신보다 한 살 많지만, 키도 작고 밝아서 그런지 왠지 동생 같은 느낌이 든다.

"선배, 이거 한번 먹어볼래요? 쌀맛 아이스크림이라는데."

"그래!"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선배를 보니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

사실 아이스크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여유롭게 친한 언니와 나들이를 하니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사실 신하루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와 히어로생활에 치여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았으니. 대학와서도 채현선배가 적극적으로 앵기지 않았으면 친한 사람 아무도 없이 살뻔했다.

물론 히어로 신분으로 사귄 친구들이 있기는 하다. 같은 A급 히어로인 섀도우워커랑 북해빙녀가 대표적. 그러나 이 둘이랑은 연락이 뜸한 상황이다.

사실 섀도우워커는 밤에만 활동하는 바람에 낮에는 자고 밤에 깨어 있는 생활을 유지해 만나기 힘들고, 북해빙녀는 혼자 한반도 아래를 커버하느라 늘 바쁘다. 그 결과 셋이 모인 채팅방은 늘 아무 말 없기가 부지기수. 사실 스타더스 본인도 에고스틱 때문에 바쁘긴 한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선배와 함께 길을 걸었다.

물론 걷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참 많이 받게 되었다. 선배 김채현도 귀염상의 외모로 한 미모 했으나, 여자치고 큰 키에 금발을 흩날리며 다니는 신하루의 모습이 굉장히 눈에 띄는 것이었으니. 그것도 남들이 보기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그녀였으나, 선배와 가끔 대화를 나누며 웃는 모습은 많은 남자들의 심장을 콩닥이게 했다.

물론 그런 남자들 중에는 여자 친구랑 걷다가 바라보던 놈들도 있어서, 의도치 않게 그녀들은 여러 커플의 분란을 조장하고 있었다. 본인들은 그걸 잘 모르는 눈치긴 하지만.

그렇게 이곳저곳 덜아다니던 신하루와 김채현은, 슬슬 먹을 거 다 먹고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와! 저기 에고스틱맛 아이스크림도 있어!"

밝게 웃으며 저기로 가 보자는 선배.

에고스틱을 잊으러 나온 건데도 또 에고스틱을 마주한 하루의 얼굴이 굳었지만, 이미 망고단에 빠진 선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게 된 둘.

하루는 그저 한숨을 쉬며 행복하게 웃으며 먹는 선배를 카메라로 찍어 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배를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자신한테 스타더스를 욕하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악질 망고단들 중에는 스타더스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구글에 스타더스를 검색해 보고 직접 읽은 거라 충격이 컸다.

그렇게 사진도 찍고 남은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나게 됐다.

오랜만에 채현언니랑도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었지.

에고스틱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심란함은 여전했지만...

"마지막으로 저것만 하고 가자!"

채현언니가 가리킨 곳에는 다트를 던져 풍선을 맞추는 게임을 하는 곳이 있었다.

일정개수 이상 맞추면 선물로 10단 아이스크림을 준다고 적혀 있었다. 10단 아이스크림은 대체 뭐지..?

"좋아요."

그렇게 그들은 그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동시에 2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된 부스.

이미 다른 손님이 한쪽은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일가족이 놀러 나온 건줄 알았다.

엄마, 아빠, 딸이 놀러 나온건가.

근데 엄마 아빠는 머리카락이 검은색인데 딸은 하얀색이네? 염색인가?

은발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녀였기에 호기심이 앞섰다. 가까이 가서 좀 자세히 보니 딸은 중학생인 거 같은데 엄마 아빠가 너무 젊었다. 일가족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사이일까?

그런 생각하던 도중, 그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언제부터 저렇게 남을 살피는 타입이었지?

은발이 신기해서 그런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녀는 옆에서 초록 아폴로 머리를 한 흑인 남성이 있어도 그냥 한번 슥 보고 지나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 유사 일가족은 관심이 간다.

특히 저 검은 머리 남자.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뭐, 그냥 괜한 생각이겠지.

잡념을 털어낸 그녀는 채현언니가 다트 던지는 거나 구경하기로 했다.

어느새 부스 코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직원을 불렀다.

"여기요."

***

이런 시발.

"여기요."

"네 손님!"

"다트 10발만 주세요."

"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왜 그냥 평범하게 축제를 즐기러 왔을 뿐인데,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나는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걸 느꼈다.

등에서 벌써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하염없이 흔들리는 나의 눈동자.

옆을 보니 서은이와 수빈씨도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다들 스타더스의 맨얼굴 정도는 안다.

즉, 그만큼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나는 침을 삼켰다.

대체 왜 스타더스가 하필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도망쳐야 한다.

스타더스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괴력과 비행 능력.

그런데 이 괴력이, 단순 괴력이 아니다.

정확히는 신체의 힘이 엄청나다고 해야 하나.

아직은 뭐 단순히 원할 때 힘이 무식하게 강해지는 게 다지만, 나중에 가면 점점 인간의 몸을 넘어선 초인이 된다.

남들보다 멀리보고, 남들보다 잘 듣는 등 오감이 발달하는 것.

즉, 아직 잘 모르는 협회는 이 능력을 괴력으로 명명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냥 스타더스를 초인으로 보는 게 옳다.

오감뿐만이 아니라, 육감까지 발달하거든.

즉, 무언가 쎄한걸 본능적으로 눈치챈다는 말이다. 사실상 초감각?

물론 아직은 원작 시간대로 따지면 초기. 벌써 날 보자마자 '저거 저놈 에고스틱이다!' 할 정도는 아니다. 근데 물론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라고 느낄 정도는 된다.

결론은, 큰일 났다는 소리.

도망쳐야돼.

근데 이미 다트를 받았다.

갑자기 여기서 다트를 받았는데도 안 하고 도망치면 더욱 수상해 보이지 않을까?

"얍!"

"오, 언니 잘하네요?"

"그럼! 내가 원래 좀 잘해!"

옆에서 웃으며 다트를 던지는 여자.

김채현, 하루의 친한 언니다.

원작에서 그녀가 히어로가 아닌 일상모드라 해야 하나? 하여튼 일반인으로 살 때 가장 친하게 지내는 선배다. 굉장히 밝고 귀여운 성격으로 나름 인기가 많았던 캐릭터다. 물론 후반부에 그렇게 되기는 했으나...

"다트를 던지고 던지고~"

옆에서 미친 듯이 다트를 던져가며 풍선을 터트리는 모습. 아니, 너무 잘 던져서 순간 신하루가 던지고 있는 줄 알았다.

"손님, 안던지세요?"

멍하니 있는 나를 보고 점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차, 그래. 빨리 던져야지.

아직는 하루가 채현의 다트던지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도 후딱 던지고 가야겠다.

"아이고, 옆에 분이 너무 잘하셔서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네요. 지금 던지겠습니다."

점원에게 조용히 빠르게 말한 나는, 얼른 다트를 들어 던지기 시작했다.

"하하, 서, 서은아. 자 봐라. 오빠의 다트 던지기 실력을...!"

"으, 응. 빠, 빨리 던져 봐아."

파르르 떨며 내 말에 대답한 서은이. 야! 연기좀 잘해 봐! 말을 떨면 어떻게... 근데 나도 떨었으니 피차일반인가.

나도 일단 막 던지기 시작했다. 뭐 막던지니 당연히 명중률은 별로. 이 와중에 옆에 신하루네는 벌써 끝난 거 같다. 우리보다 늦게 왔는데...

"와! 다 맞췄다!"

"오 언니, 어떻게 한거예요?"

"상품주세요 상품!"

아니, 이 와중에 10발을 다맞췄어?

점원이 10발 다 맞춘 사람은 오늘 처음라고 웃으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뒤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 가져오는 점원.. 가져고오 나서는 냉장고에 있는 통에서 아이스크림을 퍼내서 콘에 올리기 시작했다.

저게 그 상품인 10단 아이스크림 콘인가.

한 스푼 떠서 콘에 올리고, 두스푼 떠서 콘에 올리고, 세스푼 떠서 콘에 올리고, 네스푼떠서 콘에 올리고, 다섯스푼 떠서 콘에 올리고, 여섯스푼떠서 콘에 올리고...

어어 뭐야 어디까지 푸는 거냐?

그러더니 결국 열 번을 퍼서 담았다.

나중 가면 아이스크림이 점원의 키를 넘는 바람에, 손을 위로 뻗어서 올려 쌓더라.

결국 완성된 10단 아이스크림콘.

이게... 이게 대체 뭐지?

콘을 허리에 들었을 때, 아이스크림의 끝은 머리를 훌쩍 넘는다. 아니 진짜 저거 1m 되는 거 같은데?

나는 다트를 던지면서도 옆을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저게 뭐야.

너무 긴 바람에 이게 넘어질 듯 위태위태하다.

점원도 무슨 밸런스게임하듯 계속 손을 돌려가며 서 있다. 뭐하는 거지...

"아이고, 이게 생각보다 중심집기가 힘드네요 손님. 조심해서 드세요."

"네, 넷!"

"언니... 그냥 내가 들까?"

"아니! 내가 딴 건데 내가 들어야지, 할 수 있어."

그렇게 주장하던 김채원은 겨우겨우 점원으로부터 콘을 받아들였다.

"어어..."

벌써 그녀의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아이스크림탑.

이거, 조금만 더 있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마침 나도 다트를 다 던졌다. 풍선 한 4개 맞췄나? 당연히 상품은 없다.

"아이고, 아쉬워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몸을 돌려 빠르게 빠져나올려 했다. 빨리 도망가야돼.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김채현의 새된 비명.

"어어어... 안 돼!!"

뭐지 하고 옆을 돌아보니 무게중심이 안 잡혀진 10층 아이스크림이 기울어지다 결국 옆쪽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나치기 위해 가까운 옆으로 그녀를 지나치던 내 쪽으로.

뭐야 시발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EP.23 잠시 소란이 있었어요

나에게로 무너져 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주는 거지?

...물론 많은 잘못을 하기는 했다. 잘못을 하기는 했는데.

이거는 거의 세계가 나를 억까 하는 수준이 아닌가?

축제에 갔는데 나를 잡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과 우연히 만날 확률은?

그리고 그 사람의 일행이 나와 엮이게 될 확률은?

이건 말도 안 된다. 무언가 음해세력이 있는 게 틀림없다.

아주 짧은 시간.

위태로운 아이스크림 탑이 나에게로 무너지는 이 짧은 시간, 나는 이미 미래를 완벽하게 그렸다.

저 아이스크림들이 내 몸에 덕지덕지 묻는다.

그럼 당연히 저 채현이라는 여자는 성격상 나한테 배상을 하기 위해 전화번호나 계좌를 달라고 할 거다.

둘 다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이다. 이렇게 넘긴 정보는 언젠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스타더스에게 흘러갈 확률이 큰다.

그럼 꼼짝할 수도 없이, 체크메이트.

그리고 여기서 그런 것들을 하나도 안 주고 튀어도 문제다.

굉장히 수상하지 않나? 온몸이 남에 의해 아이스크림 범벅이 됐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망가면?

결국 문제는 스타더스가 나에 대해 뭔가를 느꼈냐는 거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 짧은 사이에 뭐 나를 얼마나 봤겠는가, 또는 뜬금없이 의심하겠느냐 할 수도 있지만.

원작을 읽은 처지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신하루의 육감, 초감각이 지금은 어느 정도 발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느 정도는 발달했을 것. 원작을 몇십회독한 내가 확신하건대 분명 날 보고 뭔가 갸우뚱했을 거다. 확신해.

생각은 끝났다.

이제 막 내 몸에 닿기 직전인 아이스크림 타워.

저걸 닿는 순간, 내 인생이 끔찍한 방향으로 뒤틀릴 수 있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젖먹던 힘까지 나는걸 아는가?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움직여야 해.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흐아앗!"

"어어!!"

나는 굴렀다.

에고스틱 필살 오의(奧義) 앞-구르기.

데굴데굴.

코트와 얼굴에 먼지가 묻는다.

하지만 남자는, 가끔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때도 있는 법.

내 미래를 위해, 이세계의 행복을 위해.

나는 구른 것이다.

나는 부끄럽지 않다.

진짜 안부끄럽다고!

"오빠!"

"다인씨!"

내가 갑자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자 화들짝 놀란 서은이와 수빈씨가 달려왔다.

"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옷을 탁탁 털면서 일어났다.

...사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먼지 투성이라 터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형식상 털었다. 난 도망가고 싶어.

"아이고... 괜찮으세요? 너무 죄송해요. 제가, 제가. 덜렁여서...흑."

김채현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다가왔다.

10층 아이스크림은 내 슈퍼-닷지(Dodge [dɑːdʒ]/회피하다)로 피한 덕분에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일자로 땅에 눌러붙은 모습이 마치 커다란 무지개 지렁이 같은 느낌. 볼 수록 나에게 안달라붙어서 다행이란 느낌 뿐이었다.

일단 다 필요 없고 눈물을 흘리는 이 김채현부터 때내야 했다. 아니 왜 갑자기 선즙필승을 시행하고 난리야. 울고 싶은 건 나야.

뒤에서 신하루가 당황한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 돼! 다가오지 마! 내 얼굴 기억하지 마!

원래는 선즙필승을 하는 자들에게는 세상에 운다고 해결되는 게 없다는 걸 알려주는 나였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 여기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자명. 지금은 크레이지 싸이코 에고스틱이 아닌 스윗 다인이 나설 차례다.

"괜찮습니다. 사람이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죠. 제가 좀 유난을 떨었네요. 하하, 살짝만 피할걸."

"흑, 그, 그래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이제는 하다 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그녀. 진정해 제발. 너가 이렇게 시간 끌수록 나만 망한다고. 벌써 뒤에 신하루가 나를 보고 있잖아!

"자, 서은아. 이만 갈까...?"

라고 말하며 황급히 자리를 이탈하려는 나.

근데, 서은이는 울고 있는 김채현을 째려보고 있었다. 뭔가 몹시 마음에 안 들어하는 얼굴. 수빈씨도 별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애들아 왜 이래...

이럴 때가 아니야, 우리 이러다가 다 죽어!

그렇게 다시 한번 가자라고 말하려는 그때.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쾅-. 쾅-.

천지를 휘두르는 소리.

갑자기 평화롭던 축제가 전쟁통이 된 듯 비명이 나기 시작했다.

뭐야 또 뭐야 시발.

"크-하하하하하하하!!!!!!"

무슨 아이돌 콘서트에서나 들을수 있는 엄청난 굉음.

마치 실수로 블루투스 이어폰 음량을 풀파워로 올리고 틀었을 때에나 느낄 수 있는 두 개골안의 뇌부터 흔드는 보이스.

"스타더스!!!!! 스타더스 나와라!!!!!!!!"

쾅-. 또다시 들리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이 다들 꺄아악 거리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도 일단 바로 서은이와 수빈씨부터 챙겼다. 둘 다 깜짝 놀란 모습. 둘은 무력이 일천해서 무조건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한다.

"일로 붙어!"

나는 일단 둘을 한 손에 꼭쥐고 말했다. 여차하면 순간 이동을 할 수 있기에, 일단 서로 신체적 접촉만 있으면 어느 정도 안심이다.

서은이와 수빈씨 모두 다 한 쪽씩 내 손을 꼬옥 잡았다. 특히 서은이는 벌벌 떨고 있다. 늘 집에만 있었으니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놀랐겠지 애가. 아니면 어릴 적 트라우마가 떠올르는 걸 수도 있고. 뭐든 좋지 않다.

그나마 수빈씨는 조금 더 침착해 보였다. 아무래도 직접 테러까지 일으켜본 사람이니 훨씬 더 이런 경험이 많겠지. 늘 헤헤 거리던 착한 모습은 어디 가고, 표정이 굳고 냉철해 보이는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역시 이런 거보면 평소에 소심해 보이는 척은 연기가 아니었나 합리적 의심이 든다.

신하루를 보니 얼른 선배 김채현을 끌고 소리가 난 곳의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단 선배를 안전한 곳에 먼저 놓는다는 생각이겠지. 사람을 제일 중요시하는 스타더스다운 생각이다.

"오, 오빠. 우리도 빨리 도망쳐요. 그, 워프. 빨리."

"그래, 할게. 근데 잠깐만 누군지만 보고."

내 손을 꼭 쥐는 서은이.

미안 해,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원작을 몆번이나 정주행 했더라.

확실한 건 세세한 타임라인마저 거의 정확히 알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분명, 이 시기에 대규모 테러를 저지르는 빌런은 없었다.

원래 지금, 이시기에 나올 빌런이 엔조딕악이랑 라이노인데, 얘네 둘은 이미 옛적에 제거했다고.

나는 살금살금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으악-!'이러면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가니 마치 연어가 된 듯한 기분.

서은이가 너무 심하게 떨길레 안심하라고 거의 안듯이 하고 갔다. 사실 순간 이동으로 내려다 주고 가면 좋기는 한데, 그러면 너무 힘이 든다. 지금 어떤 걸 해야 할 지도 모르는데 힘을 빼놔서 좋을 게 없다. 서은아 미안 해, 좀만 참아라.

그렇게 코너를 돌아 얼굴만 빼꼼 내밀어 뭔 일인가 봐보니.

초록색 괴수가 온 부스를 부서트리고 있었다.

집 한 채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괴수.

무지막지한 덩치의 사람처럼 보이나, 몸이 초록색이고 얼굴이 악어처럼 생긴 데다가 꼬리까지 붕붕 휘둘르고 있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놈이다.

A급 빌런, 크로코다일맨.

근데 저놈 저거 지금 등장할 타이밍이 아닌데.

어째서 지금 갑자기 활동을 시작한 거지?

"스타더스!!!!!! 나와라!!!!!!"

여전히 고막파열을 일으키는 소음충격파를 발생 시키고 있는 놈.

서은이와 수빈씨는 이미 손으로 귀를 가린 지 오래다. 나도 귀에서 피가날꺼 같은데 이 둘이 귀막는다고 내 손을 떼는 바람에 내 손은 둘의 허리를 감싸느라 귀를 막을 수가 없다. 아악.

"....."

어쨌든, 저놈을 처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모자란 머리를 폭발적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내 혈액형은 A형이다.

그리고 A형은 어디서 봤는데 위기 상황에서 두뇌 회전이 빠르다고 들었다. 아닌가? 아님말고.

어쨌든 중요한 거는 예상 시나리오다.

저놈은 스타더스를 부르고 있다.

스타더스에게 평소 원한이 있던 놈인 만큼, 스타더스를 부르는 거는 어색하지 않다.

근데 중요한 거는 지금 스타더스가 올 만한 상태가 아닐 거 같다는 것.

히어로로 활동하는 게 쉬운 게 아니다.

일단 얼굴이 팔리면 사돈에 팔촌까지 빌런들의 표적이 될 수 있기에, 인식저하 장치를 얼굴에 바르고 나와야 하는건 당연.

그리고 특히 스타더스같은 경우 그냥 옷 입고 공중에서 날면 마찰력때문에 몸이 다쳐서, 특수 제작된 라텍스옷을 입어야 한다.

근데 중요한 건 지금 스타더스는 아무것도 없이 여기 있다는 것.

다시 협회로 돌아가서 장비 챙기고 와야 하는데, 여기서 협회와 거리가 또 하필 멀다.

그리고 저놈이 깽판을 치고 다녀서 인명피해는 계속되는 상황.

그래.

내가 아는 스타더스, 신하루의 성격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냥 자기 얼굴이 팔리는걸 각오하고 뛰어든다.

"안 돼."

"오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최 후반부 이슈에서 지금과 비슷한 상황으로 인해 결국 얼굴을 깐 그녀가 얼마나 불행해졌는가.

지금까지 내가 한 게 우리 신하루좀 행복하게 해 줄려고 했던 건데 이게 이렇게 꼬인다고?

내 눈에 흙들어가도 그런 일은 없다!!!

"으아아아아!!"

"으악, 오빠!"

픽.

나는 모두를 데리고 지하 기지까지 워프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2명을 더 데리고 오니 힘들구나.

"헉, 헉."

"아, 왔네. 휴우... 어? 오빠 뭐 해?"

"뭐 하냐고?"

나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코트를 벗고 로브를 입었다.

그리고 에고스틱의 상징,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챙겼다.

"서은아, 오빠 일 좀 하고 온다."

무기류가 가득히 담긴 검은색의 특제 에고-보따리까지 챙기고 다시, 중장거리 워프를 했다.

자, 한 주 푹 쉬었으니 한 번 더 놀아볼까.

***

[속보)아이스크림 축제 한복판에서 괴한 난동중ㄷㄷ]

[스타더스 아직 안 가네 어디 갔냐?]

[ㄹㅇ오랜만에 대규모 테러네 무섭다]

[와 ㅅㅂ무슨 사람이 저렇게 크냐]

[속보)))))에고스틱 방송킴]

[야 지금 유튜브에 에고스틱 방송뜸ㄱㄱ]

[망고스틱 LIVE ONㅋㅋㅋㅋㅋ]

[자 드가자~ 자 드가자~ 자 드가자~ 자 드가자~]

[아니 쟤는 갑자기 방송 왜 키는 건데ㅋㅋㅋㅋㅋㅋ]

EP.24 악어사냥

"스타더스!!!!! 나오지 않으면!!!!! 다 부순다!!!!"

축제가 열리고 있던 도심의 한복판.

그곳에서는 더 이상 축제가 아닌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이미 불의의 습격을 당한 시민들이 도처에 쓰러져 있었다.

쾅-. 쾅-.

건물, 부스, 가로등.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때려 부스며 다가오고 있는 한 괴수.

전신이 녹색 비늘로 덮여 있는 이놈의 이름은 크로코다일맨이다.

원작에서 이슈 중반쯤부터 등장했던 놈.

이 과학자녀석이 악어가지고 실험하다가 무슨 사고가 일어나서 이렇게 합체된 뭐 그런 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중요한 거는 그게 아니라 저놈이 여기서 등장하면 안 되는 놈이라는 거다.

아직 등장할 타이밍이 아니라, 처리 우선 대상에 놓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냐?

"스타더스!!!!! 왜 안 나오는 건가!!!!! 에고스틱이랑 물고 빠느라 안 나오는 거냐!!!!!!"

....어, 저게 튀어나온 이유인 건가?

갑자기 자기가 말하다가 빡쳐서 온 주위를 때려 부수는 모습은 가관.

"흐, 흐으윽."

쓰러져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대부분 사람은 진작에 빠르게 도망쳤지만, 사고에 휘말려서 쓰러진 채 신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놈이 평소에는 평범한 남자로 살지만, 자기가 원할 때 악어괴수가 될 수 있는 거라 좀 더 악랄한 놈이다

아, 쟤 변신만 안 하면 진짜 순간 이동-기습-총한 방 컷인데. 농땡이 피우지 말고 그냥 족칠 걸.

하여튼, 이미 일은 벌어졌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스타더스 나오라고 깽판을 치고 있으니 원...

크로커다일맨. 아마 사람들에게는 지금 처음으로 모습을 본 빌런일 거다. 그전까지는 저놈도 숨어 살았을테니.

후에 협회가 부여하기를 A급 빌런인 놈. 사실 내가 보기에는 S급을 줘도 상관이 없다고 본다. 애초에 협회가 빌런들에게 히어로들보다 훨씬 후하게 등급을 주는데, 왜 얘는 A급을 줬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놈, 원작에서 참 곤란한 놈이었다.

기본적으로 피부가 두꺼운 비늘로 둘려싸여서, 어지간한 물리 공격이 거의 다 안 통한다.

총, 폭탄 등등을 몸빵으로 버텨 낼 수 있는 괴물.

사실상 무력은 괴력밖에 없는 스타더스가 참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다. 아무리 스타더스가 떄려도 거진 다 버티니까.

특히 저놈은 스타더스에게 집착한다는 게 큰 문제다. 시리즈 최초로 무작정 깽판을 치는 놈이 아닌, 스타더스를 콕 짚어 지목해서 부르는 놈이니. 사실 내가 스타더스 부를 때 원작의 이놈을 많이 참고했다. 아니 부르니까 우리 정의감 넘치는 스타더스는 웬만해서는 달려 오더라고.

어쨌든, 지금은 위기 상황이다.

왠 3대 500은 치게 생긴 녹발 태닝 양아치가 내게로 향한 스타더스의 관심을 빼앗으려는 상황.

안 돼! 내가 녹태양한테 내 스타더스를 빼앗길거 같으냐?

그리고 타이밍적으로도, 스타더스가 굉장히 나서기 곤란한 상황에 저놈이 테러를 개시했다. 지금 하필 여기 있던 바람에 협회에 들려 인식저하를 받고 오면 시간이 지체된다. 그전에 사람들 다 죽는다고. 저기 골골대며 쓰러져서 피흘리는 사람들 어쩔 거야.

그래, 백프로다. 스타더스가 인식저하 안 받고 생짜로 얼굴까고 나설 확률이 백프로라고.

절대 안된다.

원작 최 후반부 에피소드 'Revealed'를 보면 알겠지만, 얼굴이 까진 이후의 세계는 신하루에게 지옥이다. 온갖 악플, 테러, 저격등이 신하루에게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비난이 복사가 된다고.

그래, 내가 스타더스 행복하게 해주자고 이지랄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폭삭 망하는 건 두 눈뜨고 볼 수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거다.

근데 또 이랬다가 막 안티히어로라는 소리 또 들으면 어떻게.

그러니까 변명, 이 아니라 해명을 해야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송켜고 가야지.

에휴, 이 정도면 솔직히 내가 빌런인지 유튜버인지 모르겠어.

***

"스타더스!!!! 아직도 안 나오는 거냐!!!!"

주위에 모든 걸 쓰러트린 크로커다일맨에 외침.

그놈은 화가 난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거의 사람 머리통만한 그의 주먹.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다. 여기 있는 놈들 모두 죽여주마!!!!!"

주먹을 쥔 체로 무너진 잔해에 사람들이 깔려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크로커다일맨이 자기들쪽으로 걸어오자, 어떻게든 도망쳐볼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돼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어코 주먹을 말아쥔 크로커다일맨의 그림자가 자신들을 가리자, 공포에 질린 사람들.

"사, 살려..."

"나를 원망하지 말고 스타더스를 원망해라!!!!"

그렇게 그가 주먹을 내려치기 위해 허공으로 손을 올리고, 사람들이 죽음을 직감한 체 눈을 꼭 감던 그때.

고요하던 이곳에, 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음?"

고개를 갸웃하는 크로커다일맨.

갑자기 이곳 분위기와 하나도 어올리지 않는, 경쾌한 락 음악이 울려 퍼졌다.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일렉기타의 독주가 어디선가 들리자, 크로코다일맨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근처 건물 옥상에 서 있던 나였다.

옥상의 난간에 서서 크로커다일맨을 내려다보는 나.

그런 내 오른쪽에선, 소리를 최대치로 맞춰둔 블루투스 스피커가 시끄러운 음악을 토해나고 있었다.

옥상에 서서, 음악의 비트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나. 격하게는 아니고, 그냥 비트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있을 뿐이다. 가끔 박자에 맞추어 박수도 쳐주고 말이야. 원래 첫등장은 요란해야 하는 거거든.

그리고 그런 내 왼쪽에서는, 염동력으로 들려 있는 카메라가 유튜브로 내 모습을 송출하고 있었다.

인사나 해 줄까?

자, 다시 한번 컨셉 잡고.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번에 뵙고 다시 또 보는군요. 이 시대의 진짜 악당, 대한민국 공공의 적 에고스틱입니다. 반갑습니다!"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왔다 내 야동]

[신 그는 망고스틱인가? 신 그는 망고스틱인가? 신 그는 망고스틱인가?]

[자기 입으로 진짜 악당 공공의 적 ㅇㅈㄹㅋㅋㅋㅋ]

[야코의 적ㅋㅋㅋㅋㅋㅋㅋ]

[이 시대의 진짜 히어로를 잘못 말한 건가요?]

[공공의 히어로 아니었음? 진짜 몰?루]

[ㅋㅋㅋㅋㅋㅋㅋ오프닝부터 개웃기네 춤은 왜추고 있냐고ㅋㅋㅋㅋ]

[아니 그래서 여기 지금 어디임???]

[어 여기 그 초록괴수가 테러하고 있다던 거기 아님?]

[맞는거 같은데?]

[아니 얘는 여기 또 왜온 거야ㅋㅋㅋㅋㅋㅋ]

여전히 등에는 지하 기지부터 챙겨 온 보따리가 매여 있는 상태.

그곳에서 나는 좀 뒤적이다가 무선 마이크를 꺼냈다. 자 보자... 페어링을 저 스피커에 하면? 됐다.

어느덧 스피커에서 노래는 멈추고, 마이크에 연결되었다.

나는 마이크를 한번 톡 건드려봤다

톡-.

쿵-.

마이크를 치자 스피커에서 나는 묵직한 소리.

그래, 제대로 연결된 거 같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에 대고 말하자, 옆에 스피커에서 엄청난 음량으로 소리가 나갔다. 아 시바 귀 멀겠네.

예전에 서은이가 특제 개조한 스피커라 그런지, 작은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콘서트장의 뚱땡이 스피커정도의 출력이 나간다. 그래, 이 정도면 저 건물 아래에도 잘 들리겠지?

나는 마이크에 입을 대고 저 밑에 있는 악어새끼 한테 말을 건넸다. 평소대로 존댓말로 할까? 아니야, 얘는 괘씸하니 그냥 반말가자.

"악어 새끼는 들어라. 너는 포위됐다. 지금 당장 항복해라."

저 밑에서 민간인 학살을 시작하려던 크로코다일맨은, 위에 있는 나를 보더니 방향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아니, 저 새끼는 왜 나처럼 스피커 쓰는 것도 아닌데 소리가 이렇게 커.

"네놈은 누구냐!!!!"

"네가 몇분 전에 음해한 에고스틱이다 이 새끼야."

"뭐라고!!!!"

눈이 안 좋은지 눈을 찡그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악어 주둥이. 그렇게 한참을 보다 드디어 내 얼굴을 확인한 뒤, 열을 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네놈!!!!!! 에고스틱이 아니냐!!!!!!"

"그래, 내가 에고스틱이라고."

"네 이놈!!!! 내가 죽여주겠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한테 달려오기 시작하는 놈. 급발진에 굉장히 당황스럽다. 내가 뭘 했다고 이래.

근데 그건 그렇고 나 건물 위에 있는데 어느세월에 올려고? 엘리베이터타고 오려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놈은 건물 외벽에 손을 박더니 건물을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으아아아아아!!!!"

"너 뭐 하냐?"

괴성을 지르며 건물을 기어오르는 놈.

나는 그냥 가만히 서서 구경해줬다. 엘리베이터보다는 빠르게 올라오기는 하네. 애초에 건물 층수가 그리 높지 않아서 금방 올라온다.

"으아아!!!"

기어코 기어서 올라온 놈.

옥상에 착지하자, 쿵- 하며 건물을 뒤흔드는 소리가 났다.

"네 이놈!!!! 내가 죽여주겠다!!!!!!"

"아니, 말로 하자니까?"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나한테 돌진하는 녀석을 순간 이동으로 가뿐히 피해줬다. 그냥 바로 등 뒤로 이동하면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 스피커는 그냥 땅바닥에 내려 놓았고, 마이크와 보따리만 챙긴 채 이동했다.

돌진 후에 내가 맞지 않은 채 사라지자 당황하는 녀석. 아니, 뉴스만 봐도 내가 순간 이동 능력 있다는 건 알 텐데 뭐하는 거지?

고개를 돌리며 나를 찾길래 계속 등 뒤로 순간 이동 해서 놈의 시야에 절대 안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몹시 당황하는 놈. 아니, 얘가 원래 이렇게 바보였나?

결국, 나는 못 참고 이놈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말았다. 손으로 찰싹.

"뭐 하냐 이놈아?"

얘 좀 모자란 친구같아...

EP.25 바베큐 파티

찰싹.

내가 뒤통수를 치자 '으윽?' 거리는 악어놈.

"으아아아!!!!"

손을 뒤로 뻗어 나를 향해 시원하게 휘두르지만.

당연히 나는 이미 순간이동해 멀리 떨어진 이후다.

"이놈!!!!! 모기처럼 도망가지 말고!!!!! 사나이답게 싸워라!!!!!!"

"야, 너 같은 덩치랑 나랑 맨몸으로 싸우면 좀 불공정하지 않겠어? 그게 더 사나이답지 않은 거 아닌가?"

"그아아아아아아!!!!"

음, 애초에 들어 주질 않네.

아니 내가 뭘 밉보였다고 이렇게 적대적이게 구는 거야?

원래 빌런들끼리는 막 서로 내적 친밀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막 서로 한 번도 만난적은 없지만 히어로라는 공통의 적을 위해 서로 의기투합해서 힘을 합치고... 그런 그림을 원했다고. 왜 갑자기 무식하게 달려드는 거야?

사실, 저놈이 나한테 유하게 나오면 바로 통수칠려고 하긴 했으니, 혹시라도 그걸 깨달은 거면 무식한 게 아닌가?

그러나 다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황소처럼 뛰어오는 놈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식한 게 맞는 걸로 결정내려졌다. 아니, 진짜로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나는 다시 이놈이 나를 덮치기 직전에 순간이동으로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사실 나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집까지 순간이동으로 왔다 갔다 했는데, 그게 얼마나 힘든데. 안 그래도 체력 딸리는데 여기서 슉 슉 이동하니 조금씩 피로가 쌓이고 있다. 심지어 한 손에는 마이크, 다른 손에는 산타클로스처럼 보따리를 뒤로 매고 있다고.

그러나 일류는 여기서 힘든 내색하지 않는 법. 나는 마치 아무 문제없다는 듯, 씨익 웃으며 놈에게 말을 건넸다.

"친구야, 하루 종일 이럴 거니?"

"그아아아아아!!!! 이런 야비한!!!!!!!"

[ㅋㅋㅋㅋㅋㅋㅋㅋ야비하데ㅋㅋㅋ]

[악어 점마 개빡친 듯ㅋㅋㅋㅋ]

[ㄹㅇ모기처럼 쏙 쏙 빠져나가는데 개빡치겠지ㅋㅋㅋㅋㅋ]

[망고스틱 그는 모긴가? 망고스틱 그는 모긴가? 망고스틱 그는 모긴가? 망고스틱 그는 모긴가?]

[모기스틱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쟤 진짜 힘 하나는 존나 쎈듯 무슨 돌진할 때 시멘트바닥이 움푹 파이네ㄷㄷ]

[힘은 쌘데 좀 모자란거 같은wwwww]

[악어남 이렇게 자꾸보니... 귀여울지도?]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지금 쟤가 테러 일으켜서 몇 명이 죽었는데]

[ㄹㅇ빌런 커버쳐주는 건 선 넘네]

[애들 돌음? 하다 하다 빌런 귀엽다고 커버쳐주네]

[이렇게 빌런 적대적인 놈들이 에고스틱은 빨아주는wwwwww]

[아 에고스틱은 사상자 0명이라고ㅋㅋㅋㅋㅋ]

[에고스틱이 빌?런]

[망고스틱은 협회 공인 A급 히어로이며 이거는 수박도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코이츠 수박도가 아니라 망고도인wwwww]

[근데 에고스틱은 ㄹㅇ저기 왜 간 거냐?]

여전히 정신없는 채팅창.

그중에 한 채팅이 내 눈에 딱 들어왔다.

에고스틱은 여기 왜 온 거냐.

그래, 이거를 잘 설명해야된다.

여기서 잘못 설명했다가는 사람들이 또 나를 이 정도면 히어로네 뭐네 하고 또 음해를 할 것 아닌가?

나는 또 달려올 준비하고있는 크로코다일맨한테 소리쳤다.

"잠깐!!!!!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내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최대성량으로 소리를 치자, 그제야 무지성 공격을 멈춘 악어인간.

그는 코를 큼하고 내뿜더니 나를 향해 외쳤다.

"좋다!!!! 말해 봐라!!!!!"

"그래!!! 이거부터 묻겠다!!!!! 왜 갑자기 나를 공격했냐!!!!!!"

나의 질문에, 그놈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스타더스를 내 타겟으로 찍었다!!!!!! 그런데 너도 스타더스에게 관심이 많은 거 같으니!!!!! 넌 내 적이다!!!!!"

"..."

뭐야 이 이상한 논리는.

채팅창의 반응도 뜨거웠다.

[코이츠wwwww 저 멍청한 빌런도 망고가 스타더스 좋아하는 건 알고 있는wwwwww]

[아니 왜 에고스틱 순간이동 능력 있는건 모르면서 스타더스 좋아하는 건 알고 있냐고ㅋㅋㅋㅋㅋ]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두 남자 ㅗㅜㅑ]

[ㄹㅇ사실 에고스틱 지금 달려온 것도 스타더스 대신 달려온 거 아님?]

[스타더스 부르니까 에고스틱이 나오는... 부부는 한 몸이라던데 혹시?]

[모야모야 둘이 모야]

[악질우결충들 또 엮기 시작하네ㅋㅋㅋㅋ]

[ㄹㅇㅋㅋ우결이 아니라 진결인데ㅋㅋㅋㅋㅋ]

[그래서 ㄹㅇ왜온 거지??]

"...네놈!!!!!"

나는 다시 마이크에 대고 빽 소리쳤다.

어째 스피커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가 내 귀를 망가트리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공격했다는 거냐!!!!"

"아니!!!! 애초에 너가 먼저!!!!! 나보고 항복하라고 하지 않았냐!!!!!!"

내가 그랬나?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일단 발뺌이다.

"내가 언제 그랬냐!!!!"

내가 그렇게 외치자 눈을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 내는 악어놈.

"뭐라고!!!! 너가 분명 나한테 [악어 새끼는 들어라. 너는 포위됐다. 지금 당장 항복해라.]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아니 시발 저 새끼 왜 이럴 때는 머리가 잘 돌아가.

내가 급작스러운 공격에 입을 끔벅이자, 채팅창은 또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정곡을 찔리니까 아무 말도 못하네ㅋㅋㅋㅋㅋ]

[악어쉨 왜 갑자기 말 잘하누ㅋㅋㅋㅋㅋ]

[아니 지가 선시턴거 라이브로 다 송출됐는데 뻔뻔하게 우기는 거 뭔데ㅋㅋㅋㅋㅋ]

[뻔뻔한 망고스틱도 귀여워!!!! 악!!!!!!!]

음, 이럴 때 페이스가 흔들리면 안 된다.

오히려 뻔뻔하게 나와야 성공할 수 있는 법.

어렸을 적에 읽은 자기계발서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인생은 마치 철판볶음밥과도 같다고.

철판에 볶은 볶음밥은 맛있다.

사실, 철판 깔고 볶으면 뭐든 어지간하면 괜찮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철판 깔고 살면, 어지간하면 잘풀린다.

그 격언을 떠올리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을 연다.

"어쩌라고!!!! 안 물어 봤다!!!!!"

"...? 분명 너가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묻지 않았냐!!!!"

"됐고!!!! 너가 먼저 건물 부술때 스타더스보고 에고스틱과 물고 빨느라 안 오냐고 말하지 않았냐!!!! 이 무슨 음해!!!! 사과해라!!!! 내가 느낀 모욕감에 사과해라!!!! 사과하면 용서해 주겠다!!!"

내 말에 결국 야마가 돌아버린 놈.

"미친놈!!!! 너 말을 들어 준 내가 바보다!!!! 죽어라!!!!!"

거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입에 뭔가를 머금기 시작하는 악어 자식.

어어 저거 그 공격 아닌가?

무언가 그놈의 입에서 쏘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동시에, 나는 바로 옆으로 순간이동했다. 미친놈!

급하게 이동하다 보니 실수로 손에서 마이크를 놓친체 순간이동 하고 말았다. 아, 저거 집에서 노래 몇 번 부른 거 말고는 거의 쓴적도 없는데. 개박살 나겠네.

겨우 간발의 차로 순간이동 하고 보니, 내가 서 있던 쪽으로 물줄기가 쏴지고 있었다.

저게 바로 크로커다일맨의 비기, 익스트림워터스파우팅.

근데 저건 걍 원작에서 자기가 이름 붙인 거고, 실상은 그냥 물대포다. 대신 맞으면 즉사인.

대체 악어인 거랑 물대포 쏘는 거랑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건줄 모르겠지만, 어쨌든 원작에서 스타더스가 불시에 저거 맞고 사경을 해맸었다. 이미 알고 있던 나는 겨우 피했지만.

"쥐 새끼같은 놈!!!! 이걸 피하다니!!!!"

입가에 묻은 물을 닦으며 입을 놀리는 녀석.

저놈이 즉사공격을 나한테 써?

방금 그건 진짜로 기습이라 못피했으면 그대로 죽는 거였다.

생각해 보니 피어오르는 분노.

저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짓을?

안 되겠다.

원래는 대충 겁만주고 돌려보내서 나중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그냥 오늘 잡자.

오늘 저녁은 악어고기다.

나는 아까부터 들쳐메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슬슬 염동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염동력 차징했으니,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염동력으로 인해 떠오르는 내 몸.

그리고 동시에, 내가 보따리에 넣어 놨던 물건들도 하나둘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수많은 총들.

허공에 떠 있는 내 주위로, 내가 챙겨 놓은 수많은 총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야, 이 악어 자식아."

나는 염동력으로 총들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오케이, 준비완료.

허공에 떠서 자기를 겨냥하는 무수히 많은 총들을 보고 악어놈은 눈을 꿈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수많은 총들을 동시에 발포하기 직전, 나는 놈한테 한마디 해줬다.

"지옥에서 보자, 개자식아."

그리고 동시에 쏘아지는 총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수십 개의 총들의 동시에 발포하기 시작하니, 엄청난 굉음이 옥상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으으으으으윽!!!"

고개를 숙이고 팔을 교차해서 몸을 가린 체, 총알을 다 맞기 시작한 크로커다일맨.

어느덧 너무 많은 총들을 가격해서일까, 그놈이 서 있던 자리에는 먼지가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가득끼기 시작했다.

다시 땅바닥으로 돌아온 나는, 무심하게 한마디 던져 줬다.

"해치웠나?"

[아앗... 그 말하면...]

[ㅈ됐다 100퍼 안 죽었을듯]

[근데 총을 저만큼 맞고도 살아 있다고? 설마]

[에이 설마 살았겠어?]

[설마 특) 사람 잡음]

어느덧 자욱하던 먼지가 걷히고.

먼지가 걷힌 그곳에는,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굳건하게 서 있는 크로코다일맨이 있을 뿐이다.

"하하하하하!!!! 그런 빈약한 물리 공격 가지고 나한테 상처를 줄 수 있을거로 생각했느냐!!!!!"

큰 소리로 웃은 놈이 다시 앞을 보자 있던 건

텅 빈 옥상.

그리고 갑자기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

"내가 지옥에서 보자고 했잖니, 아기악어야."

그놈의 머리 위로 순간이동한 나는, 추락하면서 그대로 수직으로 놈의 머리통에 유리병을 던졌다.

쨍그랑- 놈의 머리에 맞으며 산산조각이 나는 유리병.

"음?"

그리고 그 유리병에서 나오는 정체불명의 초록 안개.

이게 뭐냐는 듯 코를 킁킁 거린 놈은, 갑자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물리 공격에 내성이라고?

그러면 특수 공격하면 되는 거 아니야?

독가스 맛 좀 봐라 이 녀석아.

EP.26 K-빌런

"그아아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악어놈.

독가스를 마시고, 취한 듯 비틀거리더니.

결국 쿵-.

쓰러지고 말았다.

"...."

그러고 나서 안 움직이는걸 보니.

음, 죽었나?

등장과는 다른 허무한 퇴장이었다.

너무 상성이 좋은 공격이기는 했지.

"...네! 여러분, 이렇게 또 한명이 지옥으로 갔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요즘 빌런 특) 다른 빌런들이 와서 테러하면 대신 해치워줌]

[히어로협회는 망고스틱을 당장 히어로로 지정해라. 3216번 말했다.]

[아ㅋㅋ 벌써 오늘 9시 뉴스 헤드라인이 보이네ㅋㅋㅋ]

[이제 유튜브에 국뽕티비들 영상 ㅈㄴ올라올듯ㅋㅋㅋ]

또 나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채팅창.

나야 스타더스가 이 사건으로 얼굴 팔리고 피폐물을 찍기 시작할까 봐 대신 나선 거지만, 그걸 모르는 시청자들은 나를 찬양하기 바빴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스타더스를 위해 나선겁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말했다가는 바로 오늘 밤에 연예가중계에 열애설 시즌2로 얼굴을 비추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정해진 건 바로 하나, 우기기다.

아무튼, 저놈이 먼저 나한테 시비 건 바람에 꼴 받아서 죽인 거라고.

"어허... 여러분. 제가 뭐 이놈을 딱히 공익을 위해 해치운 거는 아닙니다. 다만 이놈이 저를 공개적으로 모욕했기에 처리했을 뿐이죠. 제가 여러분을 위해 나선거겠습니까? 저번의 제 추종자들이 모였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둘 다 제가 정한 선을 넘겼기에 족친거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나는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예예 그러시겠죠ㅋㅋㅋ]

[지금까지 빌런 에고스틱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히어로 망고스틱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츤데레인wwwww]

물론 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시청자들이 아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그런 채팅창을 보며 그저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너희, 과연 다음 달에도 그럴 수 있을까?

"흠... 일단, 빨리 누구든지 와서 저 독가스 좀 치우는 게 좋겠네요. 어떻게 치울진 저도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뭉개뭉개 피어오른 독가스들 사이에서 크로커다일맨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죽었을려나? 뭐, 웬만하면 죽었겠지 뭐.

나는 보따리를 뒤적여 방독면을 찾은 뒤 썼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준비성이 좋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약해서 저 독가스 마시면 죽는다고.

대충 매고온 보따리에 가져온 총기를 바리바리 다시 집어넣었다. 사실 염동력으로 넣는 게 보기에 멋지기는 한데, 이제 몸이 한계다. 더 이상 염동력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

오늘 내가 고생을 얼마나 했는가? 서은이랑 수빈씨 내려놓고 집에서 여기까지 왕복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이게 진짜 쉬운 게 아니다. 체력이 방전되기 직전이라고. 거기에 저 악어놈과 싸운다고 또 순간이동 계속했다.

그 결과 내 몸이 입장보고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한 번만 더 능력을 사용할 경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꺼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염동력 좀만 쓰다 보면 그대로 픽 쓰러진 후 눈떠보니 동부 초상 능력자 구치소, 일명 이스트 카르케리스(East Carcer)에서 눈을 뜰수도 있다. 사실 거기 들어가도 서은이가 우당탕탕 구출시켜 주면 되기는 한데... 아직은 들어갈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삭줍는 여인들처럼 내 손으로 총을 하나하나 들어 보따리에 넣는 중이라는 거다. 아, 힘들어.

[ㅋㅋㅋㅋㅋ아니 아까는 거의 날아다니더니 저거는 왜 손으로 하나하나 집고있는 거냐]

[ㄹㅇㅋㅋ 뭐 하는건지 잘 모르겠네]

조용히 해라 이것들아.

너희들은 모르는 깊은 속사정이 있으니까...

그렇게 거의 모든 총을 집어넣을 때쯤.

저 멀리 하늘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금발 머리를 흩날리며 날아온 그녀는 스타더스.

굉장히 급하게 날아왔는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헉... 헉..."

날아오자마자 고개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옥상에서 쓰러져 있는 크로코다일맨을 먼저 보고, 그 다음으로 방독면을 쓰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날아오고 나서야 상황이 끝났다는 걸 안 걸까. 다시금 악어놈이 쓰러져 있는 곳을 바라본 그녀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너가 쓰러트린 거냐?"

"네, 맞습니다. 제가 쓰러트렸죠."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딱히 부정할 이유가 없거든.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치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한, 그런 모습.

"....왜지?"

"뭐, 저는 그저 편하게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송에서 어떤 괴한이 깽판 치는걸 보여주더라고요? 막 스타더스도 부르고 하길래 요즘 우리 스타씨 인기 많아졌구나~ 이러면서 팝콘을 뜯고 있었는데, 글쎄 저를 언급하지 뭡니까? 제가 뭐 당신이랑 물고 빤다나 뭐라나. 기분이 좀 나빠지더라고요? 제가 뭘 했다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사전에 따르면, 저를 언급하며 장난질 한 놈은 좀 교육을 해 줘야 합니다. 본보기도 보일겸, 좀 갖고 놀아줬죠."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런 이유였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나같은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한 모양.

그래. 이거면 됐다. 여기까지 했으면 이제 그만 난 집으로 가도 된다. 가도 되는데.

쓰읍.

이걸 말할까 말까.

나는 살짝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은 빨랐다.

그래, 말하자.

언젠가는 내가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나는 잠시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음소거했다.

이제 내가 하는 말을, 그녀를 뺀 누구도 들을 수 없겠지.

카메라를 등지고 선 나는, 그녀에게만 들리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음소거 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앞으로 다시는 오늘처럼 그냥 얼굴 까고 나설까- 라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하는 순간 인생이 굉장히 고달파 질겁니다."

내가 던진 말에 그녀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그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카메라의 음소거를 해제할 뿐이었다.

"자! 그럼 제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갑작스럽게 계획도 없이 나서느라, 굉장히 피곤하네요. 다음달에 큰거 오니까, 그거나 기대해 주시고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안녕~."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인사도 하고 손도 흔들어 주었다. 이 정도면 거의 프로 방송인 아닐까?

"잠깐!....."

등 뒤로 들리는 그녀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나는 집까지 순간이동했다. 물론 그전에 방송은 종료하고.

[에바(에고스틱 바이라는 뜻~)]

[에바? 에반데...]

[오방알]

[오늘 방송 알찼다]

[아니 방금 음소거 된 거 같은데 뭐지??]

[헉...둘의 비밀의 커뮤니케이션...]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탁.

저 서울 어딘가 지하 깊은 곳에 온 나.

순간이동으로 집에 오자마자 내가 한 것은.

"쿨럭."

피를 토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진 나. 아, 시발. 죽겠네.

"쿨럭, 쿨럭."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붙잡고, 나는 계속 피를 토했다.

아, 이대로 설마 죽는 건가?

너무 무리했나...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쓰러지기 전, 저 멀리서 '오빠!...' 라며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공식]한국 초상 능력자 협회, 아이스크림 축제 테러 범인 이름 '크로커다일맨'으로 확정. 현재 범인의 생명에는 지장없어... 구금 중]

[이번 테러로 부상자 수백명... 기물 파손 피해액도 천문학적.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히어로 협회 부실대응 논란 일파만파... 숨 막히는 현장, 그들을 도우러 온 히어로는 한 명도 없었다]

[[이재범의 사설]빌런이 히어로보다 나은 사회, 과연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을까]

[도심 한복판에 퍼트려진 독가스... 협회 '처리완료', 그렇게 강한 독은 아니야]

[[김경진의 이슈 플러스]에고스틱 그는 누구인가? 유추해 보는 그의 정체]

[빌런 에고스틱 '다음달에 큰거온다' 예고... 또다른 테러 암시?]

[에고스틱 팬카페 회원수 가파른 상승... '역대 최고']

[에고스틱에 대하여 당신이 모르는 15가지 TMI]

[K-빌런 에고스틱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A급 빌런을 단신으로 해치우는 모습을 보며 일본 협회장이 입을 다물지 못한 이유는? 현재 일본 실시간 트렌드 1위! '에고스틱 같은 빌런이 있는 한국은 그 자체로 세계 최강대국이다.' 일본 현지 네티즌들 반응 집중분석!]

[안녕하십니까. 9시 뉴스입니다. 오늘, 서울시의 축제현장에서 A급 빌런이 나타나 테러를 일으켰는데요, 이를 다른 빌런이 등장해 막았다고 합니다. 최다혜 기자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또다시 대한민국을 뒤흔든 에고스틱 열풍.

히어로들도 즉시 막는데 실패한 테러를, 빌런이 갑자기 나서서 막았다는 얘기는 반도의 화제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사람이 에고스틱에 대해 떠드는 지금.

신하루 또한, 에고스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소거 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앞으로 다시는 오늘처럼 그냥 얼굴 까고 나설까- 라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하는 순간 인생이 굉장히 고달파 질겁니다'

계속,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며.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걸 어떻게 안거지?

내가 얼굴을 까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조언해준 거지?

신하루의 생각은 깊어져만 갔다.

그래, 그날. 그날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EP.27 그녀의 결심

"언니... 그냥 내가 들까?"

"아니! 내가 딴 건데 내가 들어야지, 할 수 있어."

신하루는 선배가 10단 아이스크림콘을 위태롭게 들고 있는 걸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저거 저러다 흘릴 거 같은데.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기어코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아이스크림콘.

"어어어... 안 돼!"

채현언니의 비명과 함께,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쓰러지는 아이스크림.

그렇게 꼼짝없이 옆에 있던 남자에게 아이스크림이 묻나 했으나.

이변이 일어났다.

"흐아앗!"

아이스크림이 떨어짐과 동시에 남자가 그걸 굴러서 피한 것.

실로 엄청난 반사신경이었다. 대체 왜 굴러야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

"다인씨!"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두 여자가 그에게 황급히 다가왔다.

남자의 이름이 다인이었구나.

남자는 비록 먼지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옷을 탈탈털며 일어났다.

"아, 괜찮아. 괜찮아."

물론 표정만 평온하지, 옷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먼지투성이가 된 그의 몸.

"아이고... 괜찮으세요? 너무 죄송해요. 제가, 제가 덜령여서... 흑."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다가가는 채현언니. 자신도 그녀와 같은 일행이었기에, 신하루도 당황했지만, 그에게 다가 갔다.

자신들이 다가오자, 너스레를 떨며 웃는 그 남자.

"괜찮습니다. 사람이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죠. 제가 좀 유난을 떨었네요. 하하, 살짝만 피할걸."

"흑, 그, 그래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남자가 울기 시작하는 그녀를 달래주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신하루도 괜히 미안해졌다. 자신이 나서서 잡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고 정말 착한 남자에게 걸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평범한 사람이었어도 불같이 화냈을 상황일 텐데, 저렇게 태연히 넘어가 주는 사람이 있다니.

....뭐, 저 남자만 태연하고. 옆에 있는 여자 둘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사실 저게 정상이기는 하다. 저렇게 유들유들하게 넘어가 주는 남자가 특이한 거지.

"자, 서은아. 이만 갈까...?"

남자는 어떠한 배상도 필요 없다는 듯, 일행을 챙겨 자리를 뜨려고 했다. 어찌 보면 서두르는 듯 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렇게 넘어갈 채현언니가 아니다. 어떻게든 보상이라도 해주기 위해 언니가 손을 뻗는 그 순간.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평범한 대학생 신하루이지만, 동시에 히어로 스타더스였기 때문에.

그녀의 상황판단은 빨랐다.

테러다.

높은 확률로, 빌런의 테러.

쾅-. 쾅-.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판단은 빨랐고, 행동도 빨랐다.

일단, 채현 언니를 대피시키는 게 우선이다.

"언니, 따라와요!"

"어? 어..?"

연속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언니의 손을 잡고, 그녀는 소리가 난 곳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현재는 스타더스로의 힘을 어느 정도 개방한 상태이기에, 남들과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현장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물론 손이 잡힌채 끌려오는 채현은 죽을 맛이었지만.

"꺄아아아아악!"

다 같이 반대편으로 뛰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녀들도 껴서 함께 달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들리는 소리.

거리가 꽤 됨에도, 여기까지 들리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스타더스!!!!! 스타더스 나와라!!!!!!!"

순간, 달리던 그녀의 몸이 살짝 굳었다.

손을 붙잡힌채 따라가는 것맛으로도 눈이 반쯤 풀린 김채현은 전혀 못 느낄 정도의, 짧은 순간 굳은 신하루의 몸.

물론 잠깐 멈칫한 다음에 곧바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내면은 혼란 그 자체였다.

뭐지? 왜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거지?

그러나 일단, 그녀는 다른 건 다 젖혀두고 채현 언니부터 안전한 곳으로 내려다 놓기로 결정했다.

"헉... 헉..."

그렇게 둘은, 어느덧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착했다.

주위에는 자신들처럼 같이 대피한 사람들이 모여, 숨을 고르고 있었다.

축제 현장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거리.

"아이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눈도 풀리고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던 김채현은, 가만히 서서 진정한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하루야, 너 진짜 빠르네. 하루... 하루야?"

그러나 채현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하루의 표정이, 놀랍도록 굳어 있었기에.

"....."

입을 다문채, 자신들이 도망쳐 온 곳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터질 듯이 복잡했다.

히어로에게는 불문율이 있었다.

'절대로 인식저해를 받지 않고 현장에 나서지 말아라.'

이는 인식저해 기술이 없었던 과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였다.

절대로, 마스크를 벗지 말라.

지금처럼 히어로들이 얼굴을 내놓고 다니기 전, 과거의 히어로. 그러니까 '영웅'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다녔었다.

정체를 들킨 순간, 끔찍한 삶이 시작된다.

전 세계 모든 히어로 협회가 공통적으로 채택한 하나의 원칙.

어떤 끔찍한 테러가 일어나도, 얼굴이 노출된 상태라면 나서지 말아라.

히어로는 굉장히 귀하다.

특히 강력한 히어로는.

수십년 전 몇몆 사람들에게 갑자기 생긴 능력.

일명 초능력, 다른 의미로 초상 능력.

어째서 갑자기 이러한 능력이 인류에게 나타났는 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었지만,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원래 유전자에 있던 건데 특정 인물들에게만 형질이 발현될 뿐이라는 가설, 우주 자기장 같은 거 때문에 나타났다는 가설, 아니면 아예 신이 부여한 것이라는 가설...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커서 능력이 생긴 사람들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뉜다.

첫 번째, 그냥 그런대로 평범히 살아가는 타입.

사실 대다수의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소시민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도하고, 애초에 초상 능력자들 중 대다수가 별로 쓸모가 없는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물의 생장을 반대로 할 수 있는 능력. 식목원을 폐업하게 할 수 있는 거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튼튼한 위장. 뭐든지 소화시킬 수 있으나, 그래서 뭐 어찌하는가? 이 능력을 갖춘 사람도 돌을 먹는 것보다는 치킨을 더 좋아한다.

즉, 사실 대다수는 사회에 섞여 그냥 살아간다.

그들에게 초능력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야 나 이런 능력 있다?' 하고 이벤트로 보여주는 거 말고는 딱히 쓸데가 없다.

그리고 사실 강한 능력을 갖춘 자들도, 그냥 평범하게 살아간다. 괴력 능력이 있다. 힘이 세다고 꼭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가? 나라가 이를 딱히 강제하지는 않는다. 괴력 능력이 있어도 미술가가, 사진사가, 회사원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을 수도 있다. 이들도 그냥 평범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능력이 좀 강하고 정의감도 있는 사람은 히어로를 선택한다. 히어로 협회에 가서, 능력 테스트 받고 등록 하면 된다.

그러나 히어로는 굉장히 적다. 큰 꿈을 갖고 능력을 테스트 받는 이들은 자신들이 고작 B, C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갖춘 빌런은 A급인데 자신은 B급이냐고 따져도, 히어로 등급 방식이 빌런에 등급을 매기는 방식보다 깐깐하다는 원론적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

기준 자체가 A급은 제일 희귀한 이중능력을 가진 자들이나 막강한 능력을 가진 이들만 받을 수 있게 설계되어있다. S급은 시간을 멈추는 정도는 되야 하고. 어중간하게 강해봤자 B급이 최대라는 것.

거기에 말이 히어로지 매번 사지를 오가는 전투를 하는 사실상 군인과도 다름없는 혹독한 일 때문에, 대다수는 중간에 포기한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더라도.

거기에 대중들이 히어로의 도덕적 완결함에 굉장히 깐깐하고,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으면 악플이 달리는 대한민국의 히어로 비율은 타 국가 대비 훨씬 낮기도하고.

그런데 히어로는 적음에도 불구하고 빌런은 무수히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강한 능력을 갖춘 자들은 웬만해서는 빌런의 길로 가기 때문.

사실, 대중을 상대로 테러를 일으키는 빌런의 비율은 굉장히 적은 편이다. 그렇기에 에고스틱이 화제가 되는 면도 있고.

많은 빌런은, 조용히 그림자에 숨어 자신만의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 그들은, 평상시에는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뒤에서 암약하며, 자신들의 정체를 숨긴 채 살기에.

그러나 히어로의 신상이 노출된다?

그들은 바로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전면에 나선다. 히어로는 잠재적 위협이기에, 빠르게 해치우고 싶어 하기에.

그러니까, 히어로는 절대로 자기의 얼굴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상식이다.

상식이지만.

그래서, 지금 이 고통받는 시민들을 내버려 둬야 한다는 말인가?

"스타더스!!!!!!!"

쾅-. 쾅-.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

이 모든 걸 버려야 한다는 건가?

지금 히어로 협회에 가서 인식저해 처리를 받고 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아마 자신이 돌아올 때쯤이면 상황이 이미 종료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갈려고 그녀 자신이 히어로가 되기를 선택했는가?

"하루야...?"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발을 디뎠다. 그래, 어쩔 수 없다.

자기의 안위보다는, 시민들을 위해서.

그렇게 그녀가 자리를 박차려던 순간, 옆에서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에고스틱이다!! 에고스틱이 왔드아!!!"

순간 그녀의 발이 미끄러질 뻔했다.

아니, 그놈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EP.28 의심의 씨앗

[..그래서 지금 에고스틱이 시간을 끌고 있을 때, 출동하게, 알겠나?]

협회장과의 전화 통화 이후, 그녀는 날아가고 있었다.

인식저해를 받고,

최대한 빨리 왔다가 가는 거기에, 시간이 그렇게 지체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에고스틱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사상자가 몇백명 더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건이었다.

"하아, 하아..."

하늘을 가로질러 장장 몇십, 몇백 키로미터를 날아간 그녀.

너무 늦지는 않았을까, 이미 모든 게 끝나있는 게 아닐까 싶은 그녀였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날았다.

협회의 직원과 연결된 인이어 이어폰은 너무 고속으로 나는 바람에 더 이상 들리지도 않을 지경. 그러나 그녀는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그녀가 잠깐 꾸물거리는 그 짧은 사이에 몇 명이나 더 피해를 볼지 몰랐기에.

그렇게 그녀가 빌런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 빌런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덤덤히 땅에 떨어져 있는 총기를 주워 보따리에 넣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요즘 그녀의 대뇌 생각 지분 1순위, 에고스틱이었다.

"헉... 헉..."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해 보니.

악어같은 얼굴을 가진, 엄청난 크기의 덩치가 쓰러져 있었다.

악어 괴수의 주위에 무슨 초록색 연기 같은게 떠돌고 있고, 에고스틱 이놈이 방독면을 쓰고 있는 걸로 보아 무언가 생화학 무기를 써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대체 저놈은 어디서 저런 걸 구했으며,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처리할 생각을 한걸까.

차오르는 의문을 삼킨 채, 그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다.

"...너가 쓰러트린 거냐?"

"네, 맞습니다. 제가 쓰러트렸죠."

태연스러운 그의 대답에 그녀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해할 수가 없다. 갑자기 왜 나타나 저 악어괴수를 해치운 거지? 그렇게 행동하는 게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 모든 의문을 합쳐, 그녀는 그저 이렇게밖에 물을 수 없었다.

"....왜지?"

그녀가 그렇게 묻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는 듯 입을 열고 술술 말하기 시작하는 에고스틱.

"뭐, 저는 그저 편하게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송에서 어떤 괴한이 깽판 치는걸 보여주더라고요? 막 스타더스도 부르고 하길레 요즘 우리 스타씨 인기 많아졌구나~ 이러면서 팝콘을 뜯고 있었는데, 글쎄 저를 언급하지 뭡니까?"

그 괴한이 에고스틱을 불렀다고?

자신은 즉시 현장에서 채현 선배를 데리고 이탈해서 못들은 건가- 라고 신하루가 생각하고 있을 때, 에고스틱은 말을 이었다.

"제가 뭐 당신이랑 물고 빤다나 뭐라나. 기분이 좀 나빠지더라고요? 제가 뭘 했다고."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뭐? 내가 쟤랑 물고빨아? 말도 안 되는 음해이다. 애초에 서로 적인 것을.

...그런데 에고스틱이 자신도 기분 나빴다고 말하자 약간 기분이 안 좋아졌다. 뭔가 불쾌한걸.

"그리고 제 사전에 따르면, 저를 언급하며 장난질 한 놈은 좀 교육을 해 줘야 합니다. 본보기도 보일겸, 좀 갖고 놀아줬죠."

역시 그게 핵심이었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 저 미친놈이라면은 그럴 수 있지.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만 해도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이었으니.

에고스틱 자신보다 더 약한 놈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자, 기분이 확 나빠져 죽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그녀가 모든 의문을 해소한 그때.

갑자기 그가 염동력으로 자신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조작하더니, 그것을 등지고 자신을 향해 섰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하는 말.

"...그리고 음소거 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앞으로 다시는 오늘처럼 그냥 얼굴 까고 나설까- 라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하는 순간 인생이 굉장히 고달파 질겁니다."

뭐라고?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너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알지?

그녀가 순간 뇌 정지가 왔을 때, 에고스틱은 이미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 그럼 제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갑작스럽게 계획도 없이 나서느라, 굉장히 피곤하네요. 다음달에 큰거 오니까, 그거나 기대해 주시고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안녕~."

잠깐, 다음달에 큰거?

아니 그전에 대체 자신이 아까 생각한 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잠깐!"

그녀가 황급히 그에게 묻기도 전에,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옆에서 쓰러진 채 뻗어 있는 악어 괴수를 제외하고는, 옥상은 텅 비게 되었다.

"...뭐냐고, 대체."

***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사건은 빠르게 국민들에게 잊혀졌다.

당시 현장에 출동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았던 B-C랭크 히어로들에게 징계가 이루어지는걸 끝으로, 협회 내에서도 사건이 종결되었다.

"하아. 정말 그때 에고스틱 이놈이 안 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이놈이 말이다, 미친개야. 미친개가 우리를 물면 큰일이지만, 그놈이 적을 향해 달려들면 그보다 든든한 게 없다니까! 하하."

태평한 협회장의 넉살어린 웃음을 뒤로한 채, 그녀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휴우...."

모든 보고를 완료하고 건물 밖으로 나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인데.

머리가 왜 이리 복잡하다는 말인가.

길거리를 걸으며, 그녀는 휴대폰으로 학교 커뮤니티를 들어가 봤다.

커뮤니티 내 검색창에, 한글자 한글자 입력을 해 검색해봤다.

[에고스틱]

별로 뜨지 않는 게시물들.

의아하게 생각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르게 검색해 보았다.

[망고스틱]

그러자 우후죽순 검색되는 게시물들.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오늘따라 망고스틱이 땡기네]

[애기 망붕이 망고단 가입했다... 핫게 가능하냐?]

[요즘보면 어지간한 히어로보다 망고스틱이 훨씬 나은 듯ㄹㅇㅋㅋ]

[망고스틱 우리 대학 출신인 듯 (증거있음)]

[예전에 망고스틱 찬양했더니 빌런 옹호했다 1달 정지 줘놓고 이제는 왜 다 안하는 거냐 ㅅㅂㅋㅋㅋㅋ]

[망고스틱 다음달 테러 예측...real fact]

수많은 게시물들은 전부 에고스틱을 찬양하는 내용뿐이었다.

착작한 마음으로 게시글을 계속하여 넘기던 그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게시물이 있었다.

[요즘 망고스틱 거리면서 빌런을 무지성으로 빨아주던데, 대한민국 계속 이렇게 가면...]

그래, 여기에도 자신처럼 현재 사회현상에 문제점을 파악한 사람이 있구나.

그녀는 기대하며 그 게시글을 클릭했다.

그러자 뜨는 본문 내용.

***

[글쓴이]익명

[제목]요즘 망고스틱 거리면서 빌런을 무지성으로 빨아주던데, 대한민국 계속 이렇게 가면...

라이더

(가면 라이더가 손을 뻗고 있는 짤)

[익명1]예측성공했으면 좋아요

ㄴ[익명2]좋아요 구걸 싫으면 여기에 좋아요ㄱㄱ

***

"에이 씨."

그녀는 그냥 뒤로 가기를 눌렀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휴대폰을 끈 그녀는, 턱을 괴고 달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뺀 모두가, 에고스틱을 좋아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놈이 적어도 사상자는 한 명도 안내지 않았나? 거기에 에고스틱 그놈이 요즘 다른 빌런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바람에 범죄율도 줄어들었고 말이야. 일단은 가만히 놔두세. 어차피 순간 이동 능력자라 잡기도 힘드니...'

'뭐? 그놈이 또 다른 테러를 일으키면 어떡하냐고? 하하, 그럼 그때 가서는 자네가 또 막으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난 자네만 믿네. 우리 협회가 자네를 믿지."

....그녀의 머릿속에서 협회장의 말이 자꾸만 떠돌았다.

한국 초상 능력자 협회의 수장이 저렇게 말할 정도니, 에고스틱이 어쩌면 정말로 무해한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만 보더라도 예측불가능한 사고의 화신.

사실 자신이 막지 않았더라면 그 배의 사람들도, 그 선로에 묶인 사람들도 다들 죽었을 것이다.

만약 에고스틱에 의해 누군가 죽었더라면, 그때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그를 찬양했을까?

"...."

그래, 그랬을리가 없지.

그녀는 창가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에고스틱, 이놈은 대체 자신이 얼굴을 까고 나설 생각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는것인가? 독심술사처럼?

아니, 그럴리가 없다. 그런 능력이 있지는 않겠지.

그럼 대체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 혹시 자신이 그때 그 축제 현장에 있었다는걸 안건가?

어떻게 안거지? 그러면 내 신상도 안다는 말인가? 내가 신하루라는 것을?

"..."

그래,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건 에고스틱은 확고한 빌런이고. 그녀는 그를 잡을 것이다. 다른 빌런들과 똑같이.

그녀는 재차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도 모른 사이에, 그녀의 가슴에는 씨앗이 하나 심어졌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옳고,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심의 씨앗이.

***

"...수빈언니, 오빠 아직도 안 깨어났어요?"

"응. 그래도 이제는 바이탈 수치가 많이 괜찮아졌어. 아마 곧 깨어나실거 같은데."

"하아... 진짜 이 바보 오빠는 대체 뭘 믿고. 몸을 이렇게 함부로 굴리는 거야...."

에고스틱. 다인이 누워 있는 침대에 기댄채, 한서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대첵도 안세우고 마구잡이로 달려든다는 말인가.

....역시 스타더스, 그년 때문이겠지.

"....."

한서은은 스타더스를 떠올리자 무언가 불편한 마음이 샘솟는 게 느껴졌다.

다인이 지금까지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추리했다.

이때까지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다인은, 스타더스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고.

대체 스타더스의 어디가 좋다고 그러지?

그보다는.

"쿨럭, 쿨럭."

"오빠!"

그녀가 생각을 채 다하기도 전, 다인이 깨어났다.

그가 쓰러진 지 3일만이었다.

EP.29 징검다리

3일간 기절해있다 깨어난 후.

깨어나자 마자 나를 반긴 건 눈물을 펑펑 흘리는 서은이었다.

'오빠 진짜 미쳤어요!' 이러면서 나를 퍽퍽 때리는 서은이. 아니, 서은아. 진짜 아파! 그만해!

대충 일어나서 좀 달래면서 느낀건데, 애가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갑자기 3일동안 시체처럼 쓰러져 있으니까 많이 걱정이 되었나보지.

그래도 나 쓰러져 있다가 깨어났다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서은이의 모습에 조금 감동받았다. 그래도 같이 산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나를 위해 눈물도 흘려주고. 같이 게임하고 논게 효과가 있구나!

그래서 눈물 흘리며 앞으로는 몸관리 하라고 말하는 서은이한테 쓰게 웃으며, 앞으로는 주의하겠다고 다짐했다. 뭐, 다짐했다고 해서 앞으로는 안 이럴꺼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야.

깨어나서 서은이를 달래주고, 간병을 해준 수빈씨한테 감사인사를 건넨 뒤 내가 바로 한 것은 여론조사였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했지?

그리고 스타더스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을려나.

음, 그리고 나온 결과로는 나의 인기가 현재 절정이라는 분석이었다. 국민들이 빌런인 나를 오히려 히어로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기사가 많이 보였다.

흠... 역시, 이렇게 되나.

내가 꼴받아서 그냥 죽였다는게, 오히려 호감 요소가 되었다. 시원하다나.

그리고 충격적인 것은 크로코다일맨 이놈이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독가스 맞고도 안죽었다고? 물론 혹시나 해서 좀 약한걸 쓰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걸 버틸줄은 몰랐다. 하기는, 원작에서도 처리하는데 애 좀 먹은 놈이니까.

현재 악어화 상태에서 다시 평범한 남자로 돌아왔다는 그는, 치료후 동부 초상 능력자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음, 이거는 어째 원작대로 흘러갔네.

동부 초상 능력자 구치소. 이스트 카르케리스라고 한다. 말 그대로 초능력을 가진 빌런들을 모아서 수감하는 곳.

히어로 협회와 마찬가지로, 각 국가마다 일명 '카르케리스'라고 불리는 곳들이 있다. 카르케리스, 라틴어로 감옥이라는 뜻이다. 최초의 초상능력자 전용 구금소 '아메리카 카르케리스'가 미국에서 세워진 직후, 그 이후로 다른 국가에서 세워지는 모든 초상능력자용 감옥은 카르케리스라고 쓴다.

각 국가별 최고 보안 등급의 시설로, 수감자별로 각자의 특성에 맞게 능력을 제한하는 온갖 도구들이 깔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해바다 무인도에 세워져 있는데,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철저한 보안으로 지켜져있는 곳이다. 물론, 원작에서는 서은이가 그냥 해킹해서 털어버렸지만.

어쨌든 놈이 거기 살아서 갇혔다고 하니, 나중에 써먹을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가 좀 멍청하니 써먹기 쉬울거 같기도 하니. 근데 그게 악어화 상태에만 그런건지 인간일때도 그런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긴 하다만.

하여튼, 나는 며칠 또 놀고 쉬었다.

애초에 나는 소시민이라고.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나면 번아웃이 와서 조금 쉬어줘야 한다.

...어째 노는동안 서은이가 내 옆에 붙어있을 때가 전보다 조금 더 많아진거 같기는 하다만. 애가 왜이래?

물론, 매일 누워서 뒹굴거리며 논거는 아니다. 가끔씩은 서은이와 수빈씨에게 대한민국 히어로 사회에 대해 알려주기도 한다. 둘다 방안에 틀어박혀 컴퓨터 기술만 연구했는지, 시사 이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게 많아서.

"자, 오늘은 대한민국의 히어로 현실에 대해 알아봅시다. 수빈씨, 대중이 히어로에 대한 인식이 어떨거 같나요?"

"음... 좋겠죠? 아무래도 자기를 구해주는 사람이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좀 틀려요. 자, 예를 들어 봅시다. 가족이 빌런한테 습격당했어요. 그래서 바로 히어로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히어로가 오기도 전에 빌런이 이미 죽이고 도망간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를 원망하는줄 아십니까?"

"당연히 빌런을 원망하는거 아니에요?"

"아, 물론 빌런도 원망하죠. 빌런도 원망하지만, 히어로도 빌런만큼 원망합니다. 너가 늦게 온 바람에 우리 가족이 죽었다고요."

" ...근데 그게 히어로 잘못은 아니지 않나요? 자기가 늦게 오고 싶어서 늦게 온것도 아닐텐데."

"그렇죠. 그런데 시민들은 그거 신경 안씁니다. 그냥 너가 빨리 올 수 있었는데 너가 밍기적대는 바람에 죽었다. 이러면서 원망한다는 거죠. 뭐 이게 다가 아니기는 한데, 어쨌든 이런 비슷한 것들이 모여서 히어로에 대한 불신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히어로를 그리 신뢰하지 않죠."

말을 너무 길게 했더니 목이 아파.

나는 옆에 뜯어논 패트병을 들어 한입 마셨다.

"입 대고 마시지 마요."

...서은이에 타박을 들으며 말이다. 아니, 서은아. 휴대폰 보고 있는줄 알았는데 내쪽에는 언제 또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니?

서은이가 바라보길레 결국 입을 떼고 마셨다. 아니, 너는 너 물 마시면 되잖아...

목을 축인 나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히어로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거죠. 아니, 목숨걸고 일하는 것도 서러운데 욕까지 얻어먹으니 말입니다. 사실 대한민국에는 히어로가 몇명 없어서, 유사시에 바로 현장에 누가 가기에 어려운 구조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딜레이가 생길수 밖에 없죠. 그런데 욕을 먹는다, 이말입니다."

"아하..."

수빈씨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마트폰을 보고있던 서은이도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하고 있는걸 보니, 내가 역시 설명을 잘하나?

사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만 해도 내 꿈은 선생님이었다. 물론 지금은 다른 할게 너무 많고, 애초에 신분증도 없어서 뭘 할 수가 없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신분세탁하고 선생님이라도 해볼까.

어쨌든 이게 중요한게 아니지.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게 도미노처럼 연쇄 반응이 된다 이말입니다. 히어로의 불신에 지친 히어로들이 히어로를 때려친다. 히어로 수가 감소한다. 히어로 수가 적어져 범죄 현장에 대처하는 속도가 더욱 늦어진다. 그러면 히어로들에 대한 불신이 더욱 쌓인다... 악순환입니다. 사실상 B, C급 히어로들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가 있죠. 나라 치안이 A급 3명에 달린 상황인겁니다 지금."

"경찰이라도 도우면 좋았을텐데, 법으로 경찰은 초상능력을 사용하는 범죄가 발생했을 때에는 출동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사실상 빌런 혼자 총든 경찰들 따위는 싹 쓸어버릴 수 있어서, 가봤자 도움이 안된다 이거죠."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다.

개판.

히어로는 천시받고, 빌런들은 갈수록 많아지는 사회.

히어로 숫자 대비 빌런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스타더스가 왜 그렇게 혼자 구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그래서, 오빠가 빌런들을 제거한다는 거에요? 아주 다크 히어로 납셨네?"

가만히 듣고 있던 서은이가 빈정거렸다. 크흑, 서은아. 요 몇일간은 좀 잘 대해주더니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구나.

"....다크 히어로 까지는 아니고. 그냥 대한민국의 명운에 관심이 좀 많다고 할 수 있지."

"그냥 오빠가 스타더스 좋아해서 그 여자 일 대신해 주는게 아니라요?"

"어허, 서은아. 그 여자라니. 말을 이쁘게 해야지."

근데 맞긴 해.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았니?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걸 바로 인정하는건 하수.

나는 태연하게, 상황을 넘겼다.

"그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에 안들어서..."

"제가 보기에도 다인씨는 스타더스에게 관심이 매우 많은거 같던데요?"

수빈씨가 내 말을 끊고 반론을 제시했다.

수빈씨가 내 말을 끊었어. 그 착하던 수빈씨가.

내가 말 한마디 하면 겁에 질려 눈물을 글썽이던 순박하던 수빈씨는 어디가고...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갑작스러운 두 여자의 시선.

갑자기 나를 추궁하는 듯한 그 눈길에,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자, 자. 제가 뭐, 관심이 많다? 네,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근데 그게 뭐 별다른 의미가 아니라, 이제 그 히어로랄게 사실상 스타더스밖에 없으니. 이게 또 빌런이란게 히어로가 있어야 성립되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뭐야. 그래, 대비구조. 이제 아치에너미로 스타더스를 설정을 한거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명을 하고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아니, 내가 이걸 왜 변명하고 있지?

여전히 서은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서은아, 대체 왜 그러니. 나는 억울하단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이제 또 슬슬 테러나 기획해 봅시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서은이의 관심이 스타더스가 아닌 딴 곳으로 옮겨졌다.

"테러? 또?"

"그래. 지금 뭐랄까. 내 호감도가 너무 올라갔어. 정확히는 호감도가 아니라 기대감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그걸 다시 낮출려면 대규모 테러뿐이다."

"하아... 그걸 또 언제 준비해."

"걱정하지 마렴. 이번 테러 하고 나면 한동안 쉴꺼니까."

서은이의 투정거림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쉰다고? 진짜? 그럼 우리 여행도 가나?"

"여행?"

서은이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자, 나도 모르게 긍정하고 말았다.

"그래, 여행, 좋지. 끝나고 가자."

"아싸! 약속한거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슝 달려가는 서은이.

아니, 테러 준비하자니까... 지금 설마 여행 준비하러 가는 거는 아니지?

수빈씨는 그런 우리를 보며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EP.30 더 테러 라이브

서울에는 참 집이 많다.

길거리를 보다보면 나오는게 아파트, 아파트...

물론 단독주택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지상을 빼곡히 채운 집들중 하나.

평범해 보이는 단독주택이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주택.

만약 당신이 그 집 앞에서 문에서 누가 나오는지를 보면.

주로 여자 한명이 왔다갔다 하고, 가끔씩 남자랑 여자아이도 나오는 걸 볼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가정집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만약 안으로 들어간다면.

뭔가 이상한걸 느낄 수 있을거다.

왜 안에 있는 문도 비밀번호로 잠겨있지?

그리고 그 문도 열어서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무언가 이상한 걸 느낄 수 있을거다.

그 집의 안에는 텅 비어있으니까.

가구가 몇개 있기는 하지만, 한번도 사용 안한 듯 소복히 먼지가 쌓여있다.

마치, 사람이 한번도 살지 않았던 것 처럼.

근데 그러면, 왔다갔다 하던 그 남자와 여자 둘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당신은, 등 뒤로 뭔가 소름이 돋는걸 느끼고나서.

귀신의 집이야 이렇게 소리지르며 도망칠지도 모른다.

근데 사실 여기가 뭐 귀신이 사는건 아니고.

집이 지하에 있을 뿐이다.

저 깊은 지하에.

지상에서 출발해 수백미터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아주아주 넓은 공간이 나온다.

수십개의 방에, 온갖 첨단기기들과 편의시설로 무장한 이곳.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빌런 1위.

10대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인물 1위.

포부스 선정 이 남자가 대단하다 1위.

수십만의 팬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무후무한 악당 에고스틱이 살고 있는 비밀의 지하기지.

일명 에고-베이스다.

그리고 이곳의 수장인 나는.

현재 계획을 짜고 있었다.

"자,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봐라!"

집 어딘가에 있는 수많은 방 중 하나.

그곳 벽면에 붙여진 커다란 칠판에는.

[제 3차 대규모 테러 관련 회의]라고 써져 있었다.

내가 썼다.

"이번 테러의 목적이 뭐에요. 인지도는 이미 충분하니까, 위압감을 높이겠다고?"

"그래. 지금 내가 착하다고 믿는, 마치 나를 히어로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거 같은데, 그 생각을 고쳐줄려는거지. 어디까지나 나를, 충동적이고 나 꼴리는데로 하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어... 사실 어느정도는 이미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거 같긴 한데... 알았어요. 근데 그러면 그냥 아무나 붙잡고 학살하면 되는거 아닌가?"

"서은아!"

나는 화들짝 놀라서 서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내가 애를 잘못키웠어!

...생각해보면, 서은이는 원래 빌런이기는 했다. 나랑 살면서 성격이 많이 유들해진거지. 원작에서는 그냥 대한민국을 멸망시킬까 말까 했던 애니까.

어쨌든, 이런건 미리미리 교육시켜야 한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민간인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막 함부로 죽일려고 하고 그러면 안돼."

"아니, 무슨 조건이 이렇게 까다로워요? 빌런이라면서 사망자 0명인게 더 웃긴데."

"어허, 다른 빌런들은 몇명 내가 죽였다. 당장 수빈씨 친구들만 해도 내 손으로 처리했는데?"

그렇게 말하자 순간 수빈씨가 흠짓하는게 보였다.

미안해요 수빈씨, 머그컵든 손은 떨지 말고.

"흠... 일단 알겠어요. 그러면 감옥에서 범죄자를 학살하는건 어때요? 민간인도 아닌데."

"어... 음..."

반박할 말이 없네?

아니다, 있네.

"서은아, 근데 요즘 사람들 반응을 보면 그랬다가는 오히려 인기가 더 오를수도 있어. 사이다라고."

"그런가..."

"그리고 뭔가 좀, 그냥 무작정 벌이는 테러가 아니라. 막 잘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구멍이 있을거 같으면서도? 결국 못 빠져나가서 모두가 죽게 생기는. 그런 상황이 있어야돼. 지금까지 내가 벌인 것들을 봐봐. 죄수의 딜레마. 트롤리 딜레마. 물론 이렇게 딜레마 까지는 아니여도, 좀 머리써야 하는 그런 테러여야 한다는거지."

"흐음.. 어렵네요."

그치? 어렵지?

이게 쉬운게 아니다. 대체 무슨 테러를 계획해야돼?

나는 원래 평범한 소시민이었다고.

막 혼자 집에서 무슨 테러를 일으킬까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한적이 없다는 말이다.

서은이는 머리를 끙끙거리며 열심히 다음 테러를 구상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수빈씨도 조용히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원래 앞에 테러 2개는 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했어서, 둘은 그냥 실행만 하면 됐었는데. 이제는 내가 아이디어가 다 떨어져가지고 집단 지성의 힘이라도 써봐야 한다. 도와줘!

아, 근데 이걸 말 안했네.

"아,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히어로가 딱 나타나서 구해줄 수 있는 상황이어야해. 모두가 죽기 일보 직전에, 히어로가 갑자기 탁 나와서 구해주는거지."

"아 진짜! 뭐 이렇게 조건이 많아요!"

서은이는 그 말까지 듣자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짜증을 왈칵 냈고, 조용히 듣던 수빈씨는 처음으로 한마디를 했다.

"...그리고 그 히어로는, 또 스타더스인가요?"

"네? 뭐, 그렇죠."

"흐음..."

그녀는 거기까지 듣더니 들고있던 머그잔에 물을 한모금 마셨다.

호룩-.

"그놈의 스타더스, 스타더스. 아주 우리랑 살지 말고 스타더스랑 살림 차리지 그래요? 누가 보면 이미 결혼했겠어."

서은이가 얼굴에 턱을 괴고 빈정거렸다.

뭔가 부루퉁해 보이는 얼굴.

어, 나 이거 육아서적에서 본적 있어.

내가 나름 한때 선생님을 꿈꾸었던 몸.

교사지망생의 필독서, 에밀에서 뭐 비슷한걸 본 적 있는거 같다.

애는 부모가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면 질투한다고 했었나?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하라고 했던 것 같았다.

"아유, 서은아. 걔는 그냥 내 반대포지션으로 나 자신을 띄울려고 부르는거지, 내가 걔를 위해 뭔가를 하는거겠니? 당연히 나는 우리 식구랑 서은이가 먼저지."

"흥."

삐졌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는 서은이었지만, 입꼬리 올라가는거 다 보이거든?

애 키우는게 쉬운게 아니다...

아니, 중3이면 애도 아니지 않나?

근데 사실 서은아.

다 스타더스를 위해서 하는게 맞긴 해...

알려지면 피바람이 불 진실은 저 밑 깊숙한 곳에 꾹꾹 숨기고, 우리는 계속 회의나 이어갔다.

그렇게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놓던 중에, 수빈씨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지금까지 하신 테러가. 배, 기차. 2개 맞으시죠?"

"그렇죠?"

"그럼 간단하네요. 다음에는 비행기에 테러해요."

"비행기요?"

비행기라.

음. 배, 기차, 비행기까지 하면.

이동수단 3부작인가?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 않네요. 근데 비행기를 어떻게 떨어트리죠? 그러니까, 떨어트리는 건 쉬운데. 그 전에 약간 딜레마나 아니면 똘끼있는 쇼를 보여주고 떨어트려야 한다는 거죠. 또 막 모두가 살 수 있을거라는 희망도 줘야 하고."

"아,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그렇게 수빈씨가 설명을 이어갔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수빈씨, 천재에요?"

"하하..."

그렇게 우리의 다음 테러가 결정됐다.

내가 스타더스한테 테러를 다음달에 하겠다고 예고했으니.

그 전까지, 한번 완벽히 준비해볼까.

***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

국내선이라 작은 비행기이지만, 그래도 저마다의 사정으로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였다.

짧은 비행시간동안 사람들은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쪽잠을 잔다던지, 책을 읽는다던지, 아니면 좌석 앞에 달려있는 디스플레이로 영화를 본다던지...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그랬었다.

갑자기 비행기의 불이 모두 꺼지기 전까지는.

"...?"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좌석 앞의 디스플레이가 모두 켜지고, 모두에게 같은 영상이 송출되자.

그때서야,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THE EGO SHOW]

[Now Live]

"이거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청하고 있던 영화가 끊긴 시청자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의 앞에 있던 디스플레이가 켜지자 뭔일인가 하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원래는 안내방송 용도로 쓰이는 스피커에서,

기장이 아닌. 다른 누구가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고도 25000피트에서 일어나는 지상 최대의 퀴즈쇼. 아니! 상공 최대의 퀴즈쇼, 더 에고쇼 라이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갑작스럽게 스피커에서 들리는 한 남성의 목소리.

그의 말이 끝나자, 마치 개그프로처럼 스피커에서 박수소리도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와-. 짝짝짝짝짝.]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 밝은 소리가, 싸늘해진 비행기 소리와 대비됐다.

"아니, 이게 지금 뭐하자는거야? 승무원! 승무원 어딨어!"

그러나 어떤 승무원도 오지 않았다.

드디어 승객들이, 무언가 잘못됐다는걸 느꼈을때.

안내방송에서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자, 자! 뭐 일단, 쇼의 극적긴장감을 위해 비행기에는 폭탄이 부착되어 있답니다! 여러분이 허튼 짓을 하면... 펑! 아이고, 조심하는게 좋겠죠?]

이미 그의 말이 끝나기 전부터 사방에서는 비명이 가득했다. 에고스틱을 한번이라도 들은 자라면, 그가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는걸 알기에.

수많은 비명 속에서도, 스피커에서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자, 게임을 시작해 보죠!]

***

[스타더스, 에고스틱이 킨 방송 보고있나? 놈이 또 테러를...]

"네, 지금 보고 있습니다."

저놈이 또 무슨 짓을 하는건지.

EP.31 퀴즈쇼

"나는 살짝 그런게 좋더라."

아이스티를 마시며, 나는 말을 이었다. 음. 달달하네.

"살짝... 분위기와 상황의 대비가 주는 언밸런스함? 예를 들어, 이런거지. 막 동화 속 세상이야. 왕자와 공주가 하하 호호 웃으며 살고 있어. 둘이 숲속 동물 친구들을 모아서 연회를 열기로 했어."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잖아? 근데 여기서 변주를 주는거지. 멋진 왕자랑, 아름다운 공주랑, 용맹한 사자와, 귀여운 토끼랑, 느긋한 거북이가 모여서. 함께... 음. 뭐, 맞담배를 피는거지."

"아니 오빠, 그게 무슨 엽기적인 소리에요?"

서은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기겁하며 볼 거는 없잖아...

"저는 무슨 얘기인 줄 알거같아요."

"수빈언니?"

서은이가 마치 배신당했다는 듯 수빈씨를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수빈씨는 당황하며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다인씨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얘기인 줄 알것 같다는 거야. 살짝 잔혹동화? 그런 느낌 얘기하시는거죠?"

"음, 맞아요. 비슷한 느낌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정확히는, 그것보다는 뭐랄까... 오징어 게임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에 가까운 거랄까.

오징어게임,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등.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고, 듣기만 해도 동심을 일으키는 그런 것.

그런 것들이 즐거운 게임을 위해 사용되는게 아닌, 생존과 죽음을 위해 사용될때의 그 괴리감.

달고나를 제대로 뽑으면 선물로 달고나를 주는게 아닌, 달고나를 제대로 뽑지 못하면 끔찍하게 죽는. 그런 룰. 그런 룰이 있는 게임은 얼마나 잔혹하면서, 동시에 웃기고 친숙하기에. 큰 괴리감을 준다.

...이 얘기를 둘에게 해봤자 횡설수설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는 타박을 듣고 말거다. 서은이는 직접적으로, 수빈씨는 눈빛으로.

그리고 사실, 이해시키기도 애매한게 이 세계에서는 그 오징어 게임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가 없다. 국뽕요소가 하나 줄어들다니, 애국자인 나로써는 참 슬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테러가 그런거라고요?"

"맞습니다. 뭐든지 테러가 컨셉이 확실해야죠. 딜레마는 2번이나 썼으니, 이번에는 잔혹동화 컨셉으로 갈겁니다."

***

[THE EGO SHOW]

[Now Live]

고도 25000피트.

외부와는 전화, 인터넷 등 모든 통신이 단절된.

하늘 위의 밀폐된 공간.

대략 80명 정도의 사람이 타 있는 이곳은.

숨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들의 말소리만 없어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없이, 조용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

[상공 최대의 퀴즈쇼, 더 에고쇼 라이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해 보죠!]

그들은 몰랐다.

자신들이 뉴스에서 저녁을 먹으며 흘려들었던 목소리가.

자신들이 유튜브로 낄낄대면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이렇게도, 공포스러운 것일지는.

분명 방송에서 한번이라도 들었던 목소리였다.

약간 경박하면서도, 동시에 유쾌하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저절로 집중하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

그런데 어째서, 지금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이다지도 사람에게 원초적 공포를 주는가.

그들은 이제서야 지금까지 에고스틱이 해온 일들을 새삼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대규모 테러만 2회.

직접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사람들만 해도 10명 이상.

협회 선정, '대단히 잔혹하며 도주 가능성이 높은' A급 빌런.

다들 웃으며 망고스틱 망고스틱 그랬지만.

현실로 닥치고 나서야,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에고스틱이 빌런이라고 불리는지를.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그의 말은,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게임을 진행하는듯 하였지만.

그 안의 내용은,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자, 게임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1번. 절대 소리를 내지 말것! 누구라도 소리를 내는 순간, 폭탄에 부착된 3개의 전선중 하나가 저절로 잘립니다! 다 잘리게 되면... 아시죠?]

[2번.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말 것! 컨닝은 범죄입니다 범죄. 어떠한 방식으로도 서로의 소통이 들키면... 이건 뭐, 그냥 바로 폭파시킬게요. 퀴즈쇼는 다음에 언제든 하면 되니까.]

계속해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발언들에, 비행기에 탄 사람들의 표정이 창백히 질렸다.

어떤 이들은 침을 삼키고, 누구는 눈물을 보였으며, 신을 향해 눈을 감고 기도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피커에서는 계속해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그러면 이제 핵심내용인 3번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화면이 바뀐 좌석 앞 디스플레이 장치.

80년대 미국 카툰풍의 흑백 애니메이션이 흘러나오며, 영어로 글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EGO's Funny Non-Sense Quiz]

'넌센스 퀴즈...?'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에 답하듯, 스피커에서 나오는 에고스틱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룰은 간단합니다! 총 10문제에 넌센스 퀴즈가 나갈텐데, 그거를 맞추시면 됩니다! 단 한명만이라도 모두 맞추시면, 얌전히. 그리고 안전히! 비행기를 놓아드리죠. 그런데 만약 모두가 틀린다면? 펑. 폭탄이 터진답니다!]

듣기에는 너무나도 간단해보이는 얘기였다.

넌센스 퀴즈 10문제를 맞춰라?

마치 초등학생들끼리 서로 놀게 없을때 할 만한 놀이.

어른들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유치한 놀이.

그러나 판돈으로 목숨이 걸려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넌센스 퀴즈는 1번부터 제가 직접! 읽어드릴거고 여러분 앞에 있는 디스플레이에서도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정답은 어디로 보내면 되냐고요? 여러분 휴대폰에 문자 앱을 보시면 됩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와있죠?]

그의 말을 끝으로 사람들이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보자, 실제로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THE EGO SHOW 정답은 여기로!]

처음번호로 온, 문자 하나.

대체 전파도 안터지는 비행기에서 어떻게 문자를 보냈는지 모르겠지만은, 어쨌든 그것은 분명히 와있었다.

다시 안내방송이 들려오는 스피커.

[문제가 나가고, 3분안에 답을 써서 문자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와, 3분! 무려 컵라면 하나가 다 익을 시간. 참 길다, 그죠? 왜, 컵라면에 물 부어놓고 3분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때까지 체감상 한참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여러분들을 위해 좀 넉넉히 줬습니다. 하하.]

'뭐가 넉넉하냐 이 미친놈아!'

사람들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소리를 내는 순간, 폭탄의 전선을 터트리겠다는 에고스틱의 약속이 있었기에.

[한문제라도 틀리면 바로 아웃! 재도전 기회는 없습니다. 첫번째 문제에서 틀리면, 남은 아홉 문제의 답을 알아도 아무 의미가 없겠죠? 그래도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한명은 다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있겠죠. 전 믿습니다!]

듣기에도 굉장히 불합리해 보이는 규칙.

그러나, 그들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사람들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스피커에서 경쾌한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나는 음악을 배경으로, 경쾌하게 들리는 에고스틱의 외침.

[자!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제 1회 에고쇼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문제! 타이타닉의 구명보트에는 몇명이 탈 수 있을까요?]

그와 동시에, 그 질문이 그대로 승객들의 좌석 앞 디스플레이에 떠올랐다.

[첫번째 문제. 타이타닉의 구명보트에는 몇명이 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래, 굵은 빨간색 글자로 카운트다운되기 시작한 숫자.

[3 : 00]

[2 : 59]

[2 : 58]

사람들은 서둘러, 휴대폰으로 답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이 다 지나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에고스틱의 말이 다시 방송되기 시작했다.

[네! 첫번째 문제의 제한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정답은.... 구명 보트기에 9명! 이었습니다. 야, 좀 쉬운걸로 했더니 거의 다 맞추셨네요. 역시 해학의 민족 한국인! 멋집니다.]

[9명]이라고 문자를 보낸 이들에게는 [정답!]이라는 문자가 수신되었다.

몇몇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몇몇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고스틱의 방송은 계속되었다.

[자! 그럼 바로 두번째 질문으로 가보겠습니다! 세상에서 뜨거운 과일은 무엇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