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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강의 시작 30분 전.

천청색 머리카락과 자색 눈동자, 긴 귀를 가진 엘프의 혼혈.

프리다는 학교 교내를 걷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그녀는 건물 내부를 확인했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의 빼어난 외모도 있었지만, 엘프가 같은 신입생이라는 것에 상당히 놀란 것이다.

'분명 첫 강의실이…?'

프리다는 강의실을 찾았고 그 입구에 우뚝 섰다.

"저기 말이야."

프리다의 귀가 쫑긋거렸다.

"뭔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신입생 여자들이 모여 이야기 중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가슴이 막 쿵쾅쿵쾅 뛰었다니까? 그건 도대체…."

프리다는 시선을 돌렸다.

연분홍빛 머리를 단정히 닿은 여인이다. 연녹색 눈을 가진 여인이 같은 또래의 여자들과 이야기 중이었다.

어떤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에게 느낀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

프리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애 이야기인 걸까?

'청춘이네.'

"그거 사랑 아니야?"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뭐랄까.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는데 뭔가 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막, 절벽 위에 서 있는 느낌! 무서웠다고 해야 하나? 마치…. 그래! 오우거 로드 한 마리가 떡 하니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어!"

"그 사람 못생겼구나?"

"아니야!"

"그럼 네가 홀딱 빠졌다는 거네?"

"어? 그런 게 아닌데…. 아니라니까!"

재밌는 대화들이 이어진다.

프리다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저 아이들에게는 이 아카데미는 가벼운 여흥이겠지?'

개척지 확보를 위한 교육 시설? 아니다. 이 교육 시설은 그저 귀족들의 여흥이겠지.

졸업만 해도 엘리트 가문으로 명예가 드높아질 테니까.

대수림 정복을 꿈꾸는 이는 1%도 채 되지 않을 터였다.

프리다 역시 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언니, 샬럿 엘스포드. 그녀가 속해 있는 가문에 향한 복수다.

'어머니의 복수를 갚아 줄 테야.'

프리다가 강의실에 들어가려 할 때였다.

"안녕하신가? 엘프 레이디."

프리다는 옆을 쳐다봤다.

느끼한 표정의 귀족 도련님이 서 있다.

"내 이름은 셀롬 아스톤. 아스톤 자작가의 장남이야. 그쪽이 마음에 드는…."

프리다는 무시하고 들어갔다.

셀롬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나, 재수 없게. 그 평민도 나를 무시하더니, 이젠 엘프까지 나를 무시해?'

셀롬은 프리다의 뒤를 쫓아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는 그때, 누군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와! 엘프네요!"

프리다는 멈칫했다.

연분홍빛 머리의 여인이 자신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다.

"저 엘프는 처음 봐요!"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조금 전까지 연애 이야기를 하던 여자였다.

20살의 여인치고는 눈빛이 완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프리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두근… 두근…

엘프의 민감한 청력.

카를라의 심장 소리가 손을 타고 들려왔다.

표정과는 다른 심장 박동 소리. 이질감.

마치 '가면을 쓴 표정'.

프리다는 알고 있었다. 저 표정이 '가식적인 표정'이라는 것을.

하지만 도움이 되었다.

말을 걸어준 여자 덕분에 셀롬은 혀를 차며 강의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의도한 거겠지?'

프리다가 시선을 손을 잡은 여인에게로 향했다.

"저는 카를라라고 해요! 카를라 그리치."

"…프리다."

프리다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뿌리쳤다.

강의실에 앉는다. 옆에 카를라가 앉았다.

"프리다는 엘프니까, 4대 수호 왕국 중 엘리니아 소속이죠? 거기엔 나무 위에 집 짓고 산다는 데 정말이에요? 거기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는데 정말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그녀가 뭐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프리다는 무시했다.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환심을 사려는 인간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뚜벅-!

발자국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프리다, 카를라, 셀롬, 그리고 모든 생도가 어깨가 짓눌러지는 착각을 느꼈다.

아주 짧은 한순간이다.

거대한 무언가가 출입구로 들어온 듯했다.

압도적인 존재감.

모두의 시선이 출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느꼈던 것과는 다른 인물이 들어섰다.

깔끔한 복장의 장신의 사내였다.

굽이 높지 않은 구두임에도 훤칠한 키는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게 했다.

빼어난 외모는 보는 순간 몇 초간 시선을 얼굴에 고정하게 만들었다.

프리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서!'

아서 아난시아!

샬럿, 언니의 연주회 때 보았던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뭔가 무게감이 느껴진다.

오만함과 위엄이 있다. 하지만 허세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처음 짓눌리는 감각이 기억에 남아 있어, 그 오만함은 오히려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손에 들린 문서를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발걸음을 옮기며.

"셀롬 아스톤."

귓가에 울리는 정확한 발성을 내뱉는다.

낮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몰락한 귀족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위압감을 뿜어냈다.

처음 만났던 자상함이 마치 탈을 쓴 거짓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너, 퇴학이다."

선언했다.

프리다는 놀란 눈빛을 내비쳤다.

강의실 가운데, 자신을 꼬시려 했던 남자 생도.

셀롬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서의 섬뜩한 눈빛이 셀롬 아스톤을 노려봤다.

"학장님이 직접 너에게 전하라고 하셨어. 들고 가도록."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입학하자마자, 그것도 첫 강의도 시작하기도 전에 생도 하나가 퇴학당했다.

"뭐, 뭐?!"

셀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반사적으로 내뱉은 욕설. 하지만 그로 인해 셀롬은 더욱 짓눌러지는 압박감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사내, 아서가 노려보고 있다.

그의 황적색 눈이 마주치자, 몸이 굳어 떨려왔다.

"...!"

숨쉬기도 힘든 셀롬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그래, 알았어!'하고 나갈 수는 없었다.

"퇴, 퇴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 행실이 아카데미와는 맞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졌던 거 같다. 그러니…."

"서, 설마 네가 꼰지른 거냐? 건달을 동원한 걸 말했어?!"

생도들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살폈다.

건달?

의아함에 프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카를라도 아서와 셀롬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소리지?"

"시치미 뗄 생각이냐! 그, 그래, 그건 사과하마. 분명 내가 잘못했어. 철없는 생각이었어. 하지만 겨우 그걸로 퇴학 처분은 아니잖아? 응? 너 설마…. 부풀려서 없던 일까지 말한 건 아니지? 물론 내가 보복 삼아 그 건달들을 고용한 건 인정할게. 하지만 이건 아니지! 오히려 그놈들을 때려눕혔잖아! 아무런 피해도 없는데 이런 처벌은…."

"이건 내가 손을 써서 나온 결과가 아니야. 난 네가 한 일을 아카데미 측에 말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도 없어. 그리고 겨우 그걸로 네가 바로 퇴학 처분이 결정 날만큼 나에게는 권한이 없어."

"그럼 어떻게 된 건데…!"

"내용을 잘 봐. 열차역에서 노인을 학대했다는 증언이 있었어. 그걸로 어제 퇴학 처분이 결정된 모양이던데."

셀롬은 이를 악물었다.

"거봐! 그곳에 너도 있었잖아! 네가 꼰지른 게 맞잖아! 나는 이대로 퇴학당할 수는 없어! 아스톤 자작가의 장남으로서 이의를 제기하겠어! 지금 당장 네가 총장님과 만나 오해를…."

"셀롬 아스톤."

아서가 그를 노려봤다.

"이건 이미 결정된 상황이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셀롬이 이를 악물었다.

"보, 보복이 두렵지도 않아? 우리 아버지는 지금 이 리바이트 아카데미에 계셔. 또한 이 아카데미에 막대한 자금을 후원해 주고 계시지. 그런 내게 이런 짓을 하면…."

"이번에도 보복 이야기인가?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

"퇴학 증명서, 받지 않을 텐가? 이제 슬슬 팔이 아파지는데?"

셀롬은 입을 떼지 못했다.

결국 셀롬은 아서가 쥔 문서를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서는 나가는 셀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었다.

그야 당연히.

'쾅-!'하고 문이 닫혔다.

놈은 이제 볼 일이 없을 테니까.

***

"이번 강의는 자기소개로 끝내도록 하지. 모두 아카데미에 적응할 수 있도록 푹 쉬길 바란다."

아카데미 노교수가 나른한 목소리를 내뱉고는 자리를 떴다.

아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첫 강의가 끝나고, 조용했던 강의실이 떠들썩해졌다.

"미친, 방금 뭐냐?"

"입학한 생도 하나가 퇴학된 거야?"

"아까 말 들어보니까 건달을 고용했다고 하던데…. 혹시 아는 사람 있어?"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아까 그 퇴학당한 생도, 자작가의 장남 아니었어?"

"아스톤 자작가라면 은근히 영향력 있는 가문 아니야?"

"그러고 보니 나 본 적 있어. 그 생도, 시작의 거리, 열차역에서 노인을 못살게 굴다가 아까 그 퇴학서를 전해 준 생도와 시비가 붙었었어."

이야기를 듣던 프리다는 눈 근육이 꿈틀거렸다.

하프엘프인지라 청각에 집중하면 작은 속삭임은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시작의 거리, 열차역에서 시비를 걸어?'

보나 마나 뻔했다.

몰락 귀족으로 보이는 아서를 만만히 보고 시비를 걸다 처벌받은 거겠지.

"…아, 설마 그때의 보복으로?"

프리다는 바로 옆, 카를라를 쳐다봤다.

"보복?"

프리다가 관심을 보이자, 카를라는 멈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프리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

복도에서는 강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서는 이 음악을 들은 적이 있었다.

황태자 루시안의 약혼녀인 샬럿의 연주곡이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로 쓰이는 모양이로군.'

다행히 첫 강의를 자기소개로 간단히 끝났다.

따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했다.

'전생이라고 해야 하나?'

원래 세계에서 기껏해야 초등 학원 강사였지만.

이제는 학생이 되어 마법을 배운다라,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덕분에 긴장한 나머지 자기소개할 때도 딱딱하게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복도를 걷는 도중에 어떤 자가 아서의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검은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제복을 입고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깃털이 달린 사냥용 삼각모(三角帽) 사이로 하얀 설백색 머리카락과 흰 피부가 보였다.

무표정하면서도 냉정한 자색 눈동자. 매력적인 눈물점을 가지고 있었다.

목에 있는 파란 넥타이가 3학년 선배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아서는 선배에게 가볍게 미소 짓고 목례를 하려는 그때.

날카로운 자색 눈동자가 복도를 걷는 아서를 노려보고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아서."

아서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아차, 나를 아는 사람이었던가?

고민하던 아서는 떠올렸다.

연주회 때, 드레스를 입고 연주했던 아름다운 여인.

'아, 샬럿 엘스포드!'

자신의 형, 황태자 루시안의 약혼녀.

메인 퀘스트를 제안하는 전설급 영웅 NPC.

아서는 자신의 인물 관계도를 잘 모른다.

그렇기에 처음, 자신의 형인 황태자 루시안을 보고도 누군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아서가 다른 인물이라고 알고 있겠는가?

아몬이었을 적, 메인 퀘스트에서 샬럿은 면포로 얼굴을 가려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며, 이번 연주회에서도 스킬 습득에 집중했기에 샬럿의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서는 여인을 쳐다봤다.

여인은 로빈훗 모자의 챙 끝부분을 잡고 눌렀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아, 그래. 오랜만이야."

황자의 신분에 하대를 해도 되나? 아니, 선배니 존대를 해야 하는 게 맞겠지?

아카데미에서는 신분이 평등하다고 했으니까. 선배로서 존중해야 했다.

하지만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혼란도 잠시, 아서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몸뚱이의 원주인이 샬럿을 짝사랑했다지?'

미래의 형수님이 될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다라, 이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란 말인가?

여인, 샬럿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친년! 꼴도 보기 싫다. 나가!

예전에 아서가 했던 말을 떠올린 샬럿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지금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건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 터.

그렇기에 연주회 때도 자신에게 보란 듯 여자와 시시덕거리지 않았던가?

자신과의 연이 끝났다고 하듯이.

지금은 강하게 나가야 했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샬럿의 말에 아서는 미소 지었다. 뺨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뭘? 무슨 이야기야?

혹, 이 몸뚱이가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하녀들에게 듣자 하니 여자관계도 복잡했던 거 같고.'

아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였다.

"도대체 어떤 새끼야!"

갑자기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웬 사내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

콧수염을 기른 통통한 사내다.

덩치는 상당히 컸고 귀족인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그 뒤에는 퇴학당했던 셀롬 아스톤이 있다.

아서는 그런 셀롬을 쳐다봤고, 셀롬은 아서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짓고 손가락질했다.

"아버지, 저놈이에요!"

"...."

아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놈,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이야…?

아서는 어이가 없었다. 철이 없어도 저토록 없을 수가 있을까?

셀롬의 아버지로 보이는 귀족은 얼굴이 흉흉하게 변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귀족의 주먹에는 힘이 담겨 있다.

샬럿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귀족의 앞을 막았다.

"잠깐, 무슨 일입니까?"

"저리 비켜!"

귀족은 샬럿을 밀어냈다. 그리고 아서 앞에 섰다.

"그래, 네가 내 소중한 아들을 퇴학시켜? 네깟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봤는데, 기껏해야 남작 작위에 영지도 시골 촌구석의 몰락 귀족이더만! 근데 무슨 자신감으로 우리 아들을…!"

아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다는 듯 사내를 쳐다봤다.

이 상황, 아서는 알고 있다.

흔히 드라마에서 나오는 광경이 아닌가?

그걸 현실에서 체험하게 될 줄이야! 이다음은 어떻게 될까?

'아, 보통은…?'

셀롬의 아버지.

아스톤 자작이 아서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때리는 거겠지?'

"이 근본도 없는 것이 어디서…!"

"뭐 하시는 겁니까!"

샬럿이 말리려 끼어들려 했다.

아스톤 자작은 아서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퍽-!

머리가 틀어지며 돌아갔다.

핏물이 터졌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샬럿과 셀롬의 눈이 커졌다.

"...."

그리고….

눈이 뒤집힌 아스톤 자작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아스톤 자작은 입과 코에서 혈흔을 흘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

쿵-!

눈이 뒤집히고 움찔거린다.

아서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손.

아서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말아 올라갔다.

"아-!"

그것은.

"실수."

명백한 비웃음.

[악의] 특성이 발동된 상태였다.

제7화

총장 프롤론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얼굴이 붓고 이가 빠진 아스톤 자작. 그 옆에는 그 아들 셀롬이 자리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아서와 샬럿이 앉았다.

귀빈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프롤론은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만 그럴 뿐.

속으로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어 죽을 거 같았다.

'재밌어! 첫날부터 사고를 치다니!'

애초에 아스톤 자작에 대해 알아본 후 퇴학을 시킨 프롤론이다.

이 정도 마찰은 있을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건 아서가 망설임 없이 아스톤 자작을 후려친 것이다.

'뭐, 정당방위기는 했지.'

황자나 되는 신분이 얻어맞을 수야 없지 않은가? 사실상 아스톤 자작이 주먹을 후려치는 순간, 그는 슈하림 제국의 역적이 될 테지.

제국법상 가문은 몰락해 그 식솔들은 농노가 될 것이며.

아스톤 자작은 100년 이상의 노동 징역 끝에 사형에 처할 것이다.

아니, 가혹한 노동에 10년도 버티지 못해 죽어, 사령술을 이용, 언데드로 부활시킨 후, 다시 한번 목이 베이는 처형을 당하겠지.

그만큼 황자에게 손을 댄다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황제 폐하가 그걸 알았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난 아서다.

솔직히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는 했다.

재미와 호기심이라면 타 가문이 어찌 되든 상관없는 총장 프롤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스톤 자작."

"네, 총장님!"

"교내에서 소란을 피우면 곤란하네."

"그, 그것이…."

"아니면 지금."

프롤론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개기는 겐가?"

아스톤 자작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요!"

큰소리 펑펑 치던 아스톤 자작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았다.

퉁퉁 부은 상처 때문에 이따금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아닙니다. 총장님! 제가 소란을 피웠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저…. 아서라는 생도와 대화를 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근데…."

"그렇군! 대화하기도 전에 자네가 발이 미끄러져 쓰러진 게로군? 이거 미안하네. 시종들이 일을 너무 잘해 바닥이 반질반질하거든."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아서 생도가…."

"바닥에 미끄러진 게로군? 맞나?"

지그시 쳐다보는 프롤론 총장.

식은땀을 흘리는 아스톤 자작.

"…아, 네. 제가 넘어진 거 같습니다."

"아, 그렇군! 아서 생도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구만?"

"…네."

아서는 웃음을 터트렸다.

샬럿이 옆에서 자제하라는 듯 쿡쿡 팔꿈치로 친다.

프롤론은 기묘한 표정으로 아서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아스톤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자네가 이 아카데미를 위해 해 준 일들은 잘 알고 있네. 생도들의 편의를 위해 자금을 후원해 주거나, 연무장을 새로 신설하는 등, 아주 고맙게 생각하네."

아스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뇌물을 먹었다는 소리 아닌가?

"하지만 그런 선물은 개나 소나 주는 선물이고."

아스톤 자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프롤론 총장은 다리를 꼬았다. 미소를 지으며 깍지를 꼈다.

"아주 부족한 선물이지만 자네가 하도 사정사정 부탁하여, 내 부족한 자네 아들을 잘 보살펴 주려 했더니. 입학 초기부터 말썽을 부리지 않았나?"

"말썽이라니요!"

"열차역에서 노인을 두들겨 패려고 했다더군."

"그런 말도 안 되는 증언을 한 자가 누굽니까! 아, 저 아서라는 생도입니까?"

"아니라네."

"그럼 누굽니까! 제가 그놈을 직접 심문하겠습니다! 분명 천한 것이 돈이나 처먹으려고 거짓 증언을…!"

"나라네."

"...."

"미안하구먼. 천한 것이 돈이나 처먹으려고 자네 아들을 입학시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해서 말일세."

프롤론 총장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마에는 십자 형태의 핏대가 솟아나 있다.

아서는 프롤론이 마법사나 총장이라기보단 조폭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 심문할 텐가? 자네 아들처럼 이 노인네를 때릴 텐가? 어이쿠, 무서워 지릴 것 같구먼!"

프롤론은 과장된 겁먹은 표정으로 아스톤 자작을 쳐다봤다.

'놀리고 있군.'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장난기 많은 총장이다.

아스톤 자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얼마나 흘렸는지 땀에 옷이 흠뻑 젖을 정도다.

"아니, 총장님. 그런 말이 아니라…."

프롤론 총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재로 가 문서 하나를 꺼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세롬피아 자작가에서 아이 하나를 입학해 달라고 하더군. 점수가 미달이지만, 입학 예비 1번이라네. 마침 세룸피아 자작가에서 생도들을 위해 훈련용 무구들을 새로 맞춰 준다고 하더군."

"...!"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그토록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인다면, 나도 퇴학은 반려해 줄 수는 있다네. 어떤가?"

프롤론 총장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생각은?"

"마, 마침 제가 아는 상단에서 훈련용 병장기들이 새로 나왔다고 하더군요! 아, 그리고 요즘 생도들은 힘들지 않습니까? 영양가가 있는 음식 섭취를 해야 하니…. 그래, 그…! 식당의 배식 자재를 저희 가문에서 지원을…!"

"고맙네!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 제국은 빛날 수 있는 거라네!"

"가, 감사합니다!"

프롤론 총장이 눈웃음을 지었다.

아서는 프롤론 총장을 보며 감탄했다.

이제 보니 뇌물을 먹기보단 삥을 뜯는 거였다.

샬럿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짧은 한숨 소리가 나온 듯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프롤론은 그녀를 보며 방긋 웃고는 외면했다.

그러더니 셀롬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계속 아카데미에 나와 주게나. 퇴학은 보류하도록 하지. 아, 물론."

프롤론이 아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같은 신입생끼리도 잘 어울려야 할 게야."

셀롬은 식은땀을 흘렸다. 총장과 아서를 번갈아 보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차라리 퇴학당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

"괜찮으십니까?"

샬럿은 아서의 옷깃을 바로잡아주었다.

그리고 아서의 피 묻은 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수건을 꺼낸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끝까지 속을 썩인다니까."

정성스레 피 묻은 손을 닦아 주며 하는 혼잣말.

마치 철없는 동생을 대하는 누나의 말투다.

아서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

샬럿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샬럿은 고개를 획 돌려 총장 프롤론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미 나가 버린 두 부자, 아스톤 자작가의 일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뇌물도 적당히 받으셔야 합니다. 아니면 저도 그냥 넘어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총장 프롤론은 창밖을 쳐다봤다.

아스톤 자작이 아들의 구레나룻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자네도 나에 대해 잘 알지 않는가? 나도 적당한 녀석들에게만 골수를 빼먹는다네."

프롤론은 미소 짓고 샬럿을 쳐다봤다.

"나라가 너무 깨끗하면 오히려 망하기 마련이야. 어느 정도의 부패가 있어야 유지할 수 있지."

"...."

샬럿은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카데미 설립 이후, 대부분의 지원금을 부패 귀족에게서 뜯어낸 프롤론 총장이다.

그 자금으로 아카데미의 부족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아낌없이 쓰고 있다.

"하지만 아쉽군. 저 쓰레기는 퇴학시키고 싶었는데."

먹을 건 다 먹었으니 이제 버리기만 하면 되건만.

다른 건 몰라도 생도들만은 청정구역으로 만들고 싶은 총장 프롤론이었다.

그런 애제자들 사이에서 구더기-셀롬-가 끼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롤론은 고민하며 힐끗 아서를 쳐다봤다.

"자네는 저 생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악의적인 성향을 가진 녀석입니다. 그 성향이 고쳐지기는 힘들겠지요."

총장 프롤론은 눈을 빛냈다.

"그렇겠지? 그래서?"

"그래서…. 라니요?"

아서가 의아한 듯 묻자 프롤론이 말했다.

"저놈, 밤 몰래 담그지 않을 텐가?"

프롤론은 마치 칼을 잡고 쑤시는 시늉을 했다.

조폭 같은 게 아니라 조폭이었다.

"총장님!"

샬럿의 경고에 프롤론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서를 쳐다봤다.

"총장님께서 같은 신입생끼리 잘 지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서는 조용히 생도 생활을 할 생각이었다. 덤으로 힘까지 키우고.

지금 말썽을 부리면 황가에 그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군에 입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아스톤 자작을 후려쳤을 때 '아차'하는 느낌을 받았다.

황태자 루시안이 한 경고.

-일을 벌이면 군 입대를 하게 될 거다.

힘이 있으면 모를까, 힘이 없는 상태에서, 게다가 재입대라면 사양하고 싶은 아서였다.

샬럿은 의외란 표정을 지었고, 프롤론은 아쉬워했다.

"망나니라고 하더니. 배짱이 없구먼."

아서는 황자다. 자존심 강한 그가 아스톤 자작가를 가만히 둘리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아서는 너무 쉽게 물러섰다.

아스톤 자작가의 장남을 퇴학시키고 아서마저 자연스럽게 군에 보내 버릴 생각이었던 프롤론 총장은 못내 아쉬웠다.

'음, 역시 망나니라는 것은 소문뿐이라는 건가? 그럼 한 번 키워봐? 아니, 아니야. 실력 수준 미달인 생도를 두면 다른 아이들도 성장하지 못해.'

역시 황가의 압박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고 프롤론은 생각했다.

"뭐, 못 쫓아낼 것도 없지."

어차피 아스톤 가문의 장남은 성적 미달이었다.

뇌물을 주었기에 입학시켰던 만큼, 이제 쓸모가 없다. 그러니 아카데미에 나가도록 취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덤으로 실력이 낮다고 판명되는 아서까지.

프롤론 총장은 서재에 있는 강의 목록을 쳐다봤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동부 미개척지 - 9등급 불고양이의 숲.]

"아서."

"네, 총장님."

아서는 총장을 쳐다봤다.

총장 프롤론은 미소 짓고 말했다.

"자네, 미개척지 체험 좀 해 보지 않겠나?"

***

짝-!

셀롬의 뺨이 획 돌아갔다.

"아, 아버지-!"

셀롬이 붉어진 뺨을 부여잡았다.

"이 멍청한 녀석! 겨우 그놈 따위에게 당해?"

"아, 아니, 아버지. 당한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닥치거라! 덕분에 프롤론 공작까지 적으로 돌릴 뻔했어. 행동을 잘해야 할 거 아니더냐!"

퇴학당하는 건 중요치 않다.

문제가 되는 건 프롤론 공작의 눈 밖에 나는 것이다.

그가 가진 영향력은 어마무시하다.

그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만 돌아도 타 가문의 표적이 되어 공격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영지의 재산을 써 가면서까지 뇌물을 먹였건만.

오히려 프롤론 총장은 뻔뻔하게 더 과한 요구를 해 오고 있다.

"저기…. 아버지. 그…. 리바이트 아카데미에 계속 다녀야 해요?"

리바이트 아카데미 근처의 저택으로 돌아온 아스톤 자작은 흥분한 얼굴로 무릎 꿇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쳐다봤다.

셀롬이 울먹이고 있었다.

성인식이 지난 지 4년. 20살의 청년이 되었건만.

아스톤 자작에게 아직도 아들은 작은 꼬맹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진 아스톤 자작은 화가 난 표정을 풀었다.

"많이 아프냐?"

"…아, 아파요."

"그, 그래? 음…. 치료사를 불러 주마."

"꼭 아카데미를 다녀야 해요? 그 아서라는 생도. 미쳤다고요!"

"…제정신은 아닌 거 같기는 하더구나."

아스톤 자작은 아서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귀족인 자신을 후려치고도 그 젊은 생도는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 큰 배경이 있거나, 미친놈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아난시아 남작가라는 곳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아카데미 교수들과 생도들 조사해 봤고, 오늘 아침에 자료가 도착했다.

그래서 아들놈을 아카데미에 마중 보내고 마차 안에서 자료를 찾아봤건만.

[아서 아난시아]

이름 모를 작은 마을. 그것도 영지라고 할 수 없는 겨우 50여 명 남짓한 영지의 귀족 자제란다.

말이 영지지 그냥 촌락인 셈이다.

개척지 가장자리에 있는 만큼, 언제 마수의 습격으로 사라질지 모를 촌구석 귀족 따위가, 감히 자신을 때린 것이다.

'게다가 3서클 초급? 재능은 있어 보이지만, 그뿐인 녀석이다!'

황제의 명으로 시행된 아카데미라 기대했건만. 결국 수준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겠지.

"꼭 다녀야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리바이트 아카데미는 황제 폐하와 프롤론 공작이 내세운 프로젝트다. 그 졸업장만 있어도 계급과 대우가 달라지지."

같은 자작이라고 해도 훨씬 좋은 대우와 명성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황가에 바치는 세금 혜택 또한 상당했기에,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서라는 놈이…."

분명 이번 일로 셀롬을 아니꼽게 생각하겠지.

어쩌면 아카데미에서 건달처럼 셀롬을 괴롭히고 따돌릴지도 모른다. 가문의 명성 또한 더럽혀질 수도 있다.

사랑스러운 아들이, 그런 괴롭힘을 당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아스톤 자작이 말했다.

"어차피 뒷배경이 없는 놈이란다. 그러니."

아스톤 자작은 서재 서랍을 열었다.

"겁을 좀 주면 알아서 기겠지."

가문에서 종종 찾는 해결사들의 정보.

그중 하나.

[밤고양이 길드 - 마수 조련사 벨, 원소 마법사 카샤]

자칭 해결사라고 불리는 뒷세계의 암부들.

아스톤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

다음날.

강의실에 생도들이 모였다.

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제 그 아서라는 생도 말이야. 듣자 하니 촌락의 남작가라며?"

"그걸 귀족라고 할 수 있어? 그냥 영지가 아니라 마을 촌락이잖아."

"그래도 마법적 재능은 있는 모양이야. 3서클 초급이래."

"허, 나도 좀 있으면 3서클 초급으로 올라갈 거야…. 평범하구만."

"게다가 어제 아스톤 자작의 당주를 두들겨 팼다는데?"

"어머, 야만스러워."

생도들의 험담에 프리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이들.'

그가 보인 마나 컨트롤, 그리고 아공간 마법을 응용하는 걸 보면 결코 3서클 마법사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높은 경지리라.

카를라는 생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아스톤 자작가의 장남, 셀롬은 이를 악물며 이야기들을 무시 중이었다.

그때, 강의실에 아서가 들어왔다.

시끄러웠던 생도들은 아서를 쳐다보며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 고위 귀족의 자제들.

그들이 비아냥거리려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아서의 눈이 돌아가며 생도들을 쳐다봤다.

"...."

그 순간, 귀족 자제들은 입을 다물었다.

눈이 마주치자, 무언의 압박감을 받았다.

포식자 앞에 선 초식 동물처럼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서는 조용히 강의실을 둘러보며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교수가 들어왔다.

노교수는 생도들을 둘러보며 헛기침하며 말했다.

"에헴, 그…. 갑작스럽지만. 다음주 두 개의 강의가 예정되어 있다. 첫 강의는 마나학 개론. 두 번째 강의 내용은."

아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론 수업을 기대했거늘.

"미개척지 체험이다."

결국 실기마저 치르게 생겼다.

제8화

'그냥 평범한 학교생활로 생각했는데…. 미개척지 체험이 있는 거야?'

하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지구로 따지면 사관학교다. 그저 이론 수업만 할 리 없다.

미개척지 체험.

결국 아서는 실습일을 대비해 트레이닝을 하며 근력을 키웠다.

레벨이 낮았기에 근력을 올리고 자잘한 일로 생활 경험치를 쌓아 레벨을 올리는 데 집중했다.

"마나는 여러 속성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게 물, 불, 바람, 대지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생명과 죽음이 있지만, 이 속성을 빛과 어둠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기타 등등 생략된 속성만 해도 무수히 많다."

아서는 강의 중인 노교수를 쳐다봤다.

머리가 반짝이는 노교수는 대충대충 설명을 해 댄다.

생도들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하품하거나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노교수는 참견하지 않았다. 고위 자제도 있는 만큼, 그저 자신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만큼만 강의하는 것이리라.

맙소사,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아서는 호X와트를 생각했건만, 이건 그냥 학교 방학 보충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놀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모르겠어."

'카를라….'

아서는 안타까운 감정을 내뱉었다.

조금 떨어진 옆, 카를라가 앉아 있다.

카를라는 성실한 아이였다. 하지만 성실함과 노력이 공부에는 논 외인 모양이다.

눈이 핑핑 도는 듯해 보였다. 열심히 필기는 하고 있지만, 역시 공부에는 맞지 않는 듯했다.

머리 위로 열기가 흘러나왔다.

과장이 아니라 그녀의 속성인 화(火)인지라 감정에 따라 마나가 반응하는 것이다.

실제로 열기에 의해 공기가 일그러져 보인다.

'그리고 프리다는…?'

아서는 뒤를 쳐다봤다.

뒷자리에 있던 프리다가 아서를 뻔히 쳐다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방긋 미소 짓고 손을 흔들 뿐이다.

'애는 집중하는 건지 않는 건지 모르겠군.'

그리고 남은 녀석.

셀롬 아스톤.

그는 아서를 노려보고 있다. 눈빛에 악의가 담겨 있다.

아마도 예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이 녀석은.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복수를 할 생각인 모양이다.

손을 들며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한다.

노교수가 셀롬을 쳐다봤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셀롬과 노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보, 보복이 두렵지도 않아? 우리 아버지는 지금 이 리바이트 아카데미에 계셔. 또한 이 아카데미에 막대한 자금을 후원해 주고 계시지.

어?

아서는 셀롬의 말을 떠올렸다.

후원이라는 게 그런 뜻이었나?

설마 저 노교수도 한 패인 거냐? 뇌물을 주고받는 그런 사이?

황제의 명으로 만들어진 아카데미 치곤 부패했다.

이거…. 슈하림 황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데?!

"마나학의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교수님!"

딱 봐도 궁금한 게 있어서가 아닌, 무언가 골치 아픈 장난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아서도 예전에 이런 일을 많이 겪었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다니는 개구쟁이 아이들이 그러했고, 셀롬 아스톤은 딱 그 정도 수준밖에 미치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셀롬은 아서를 힐끗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초 마나학에서는 마나의 그릇을 만드는 것을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심장이나 단전에 마나가 담김으로써 혈관을 통해 마나를 전신으로 퍼지게 만드는 구조다. 이는 마법사, 기사, 두 가지가 공통된 특징이지."

또한 마법사나 기사, 둘 다 심장과 단전의 혈관 속 혈액을 공급하듯 마나가 깃들며 전신에 퍼진다.

노교수가 동의하자 셀롬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3서클이라고 했지? 그럼 지식 수준도 그 정도일 게 분명해. 얼마나 멍청한지 동급생들 앞에서 웃음거리나 돼라!'

마나 기초학에 기재된 내용이지만, 4서클 마법사들도 난해해했던 마법 이론에 대해 질문하면 된다.

그리고 그걸 아스톤 가문의 후원을 받는 노교수가 유도해 주면 되는 일.

"하지만 공통된 것치곤 차이점이 많습니다. 기사들이 행하는 마나는 '육체 강화'를 기본으로 합니다. 하지만 저 같은 마법사는 원소를 모아 형태를 구현하여 '마법'을 사용합니다. 기사나 마법사, 똑같은 마나를 가졌지만, 기사는 각성 단계를 '성'으로 칭하고 마법사는 '서클'로 칭합니다. 이는 단전과 심장에 생기는 마나의 차이 때문에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셀롬은 노교수를 찾아 뇌물을 주고 매수했다.

아서는 노교수와 셀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고리를 구현하는 방법이 다르고, 또한 속성을 구현해도 발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불 속성의 기사는 검에 불을 집어넣지만, 화염구를 만들지 못하며, 마법사는 화염구를 만들 수 있지만, 검에 화염 속성을 집어넣는 건 상당히 고난이도에 해당합니다. 이 또한 단순히 단전과 심장의 차이 때문인지요? 서로 같은 마나, 같은 고리를 가졌음에도 이처럼 서로 다른 특징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디서 들어 본 이야기인데?'

얼마 전 아서가 읽었던 '리프라이든의 기초 마나'에 서술된 이론을 말하는 듯하다.

아서는 머릿속에 담긴 지식들을 꺼냈다.

하지만 이는 4서클에 해당하는 이론 강의다. 다만, 마법사라는 것들이 대부분 '허세'를 부리기 좋아한다.

마나 기초학에서도 불필요하고 난해한 부분을 적기까지 한다.

분명 초급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마법사들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벽'을 만들어 놓고 견습 마법사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다.

마법사를 육성하는 기초 교육 과정이건만, 그런 기초 과정에서도 '천재'가 나올까 두려워 일부러 가로막는 마법사 꼰대들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렇군. 그게 궁금한가? 셀롬 아스톤 군. 그럼…. 그런 기초적인 문제에 대해, 아서 아난시아 생도."

"네?"

아서는 노교수를 쳐다봤다.

노교수가 빙그레 미소 짓고 말했다.

"자네가 말해 보겠나? 맞으면 학업 점수 3점. 틀리면 3점 감점하겠네."

"...."

눈앞에 있는 노교수도 그 꼰대 중 하나였다.

"기초적인 거라네. 물론 3서클이나 되면 아는 질문이기도 하지. 설마…. 3서클이나 되는데 모르는 건 아니겠지?"

노교수마저 은근한 도발을 걸어오고 있다.

어이, 이건 3서클 질문이 아니라 4서클 질문이잖아?

아서는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생도들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비웃었다.

키득키득거리는 소리가 강의실에 울렸다.

'이거 완전 왕따가 된 기분이로군.'

카를라는 어리둥절했고, 프리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서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셀롬이 질문한 그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있어.'

스킬북을 읽고 습득함으로써 기본적 지식들은 모두 충족된다.

4서클 마법서를 읽는다고 해도 스킬 습득과 지식은 얻을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수준이 못 미친다면 스킬 발현은 되지 않는다.

테스트용으로 '4서클 기초학'을 읽고 알게 된 아서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셀롬이 말한 건 마나 기초학 중 '마나 컨트롤'에 관한 것.

이미 아서가 읽은 교본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에 따른 '답변'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기본적인 답변을 하면 분명 무시당할 게 뻔하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지금은 기선 제압을 할 때다.

"모두 보는 앞에서 발표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노교수의 요청에 아서는 자리에서 나와 교탁 앞에 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서는 한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같은 고리라는 말은 틀립니다. 애초에 그릇의 위치가 다르고 그릇의 사용법과 응용법마저 다르니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서는 칠판에 앞에 서서 분필을 잡고 그리기 시작했다.

두 개의 고리를 그린다. 하나는 마법사, 하나는 검사들이 사용하는 마나의 고리다.

다만 두 개의 고리 형태는 다르다.

마법사의 고리는 둥근 원 형태를 심장에. 검사의 마나 고리는 나선형의 연결된 소용돌이 형태로 단전에 그렸다.

"마법사는 원형의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장과 연결된 마나를 일시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외부에 보낼 수 있도록 잡힌 형태입니다. 원형이어야 발산할 수 있는 마나의 면적이 넓기 때문이겠죠. 마나를 보냄으로써 마법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검사의 마나는 나선 모양. 이는 마나를 회전시켜, 보다 몸속에 빠르게 깃들도록 만들어진 형태입니다. 마나를 지속적으로 보냄으로써 검기 같은 형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다만 원리는 같으나 사용법은 다르다.

"마법사는 체내에 있는 마나를 이동시켜, 주변 마나와 공명시킵니다. 그리고 그 마나를 이용해 '형상화'를 시도할 수도 있지요."

마법사는 심장에 있는 마나를 혈관을 통해 전이시킨다.

"그리고 자연에 있는 마나를 모아 '형태'를 잡는 에너지로 씁니다. 마법은 형태를 갖추며 방대한 '파괴력'을 지니게 되고, 기사는 호흡을 통해 마나를 체내로 흡수해 전신으로 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호흡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전의 힘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나선 모양의 끝이 단전 쪽에 자리 잡고 있기에 산소와 함께 체내에 좀 더 효과적이고 빠르게 마나를 퍼트리고 흡수하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나 전달 속도를 계산하면…. 이런 식으로 계산되겠지요."

아서가 칠판에 마나 컨트롤 수식을 적어 나갔다.

설명이 계속되자 셀롬이 인상을 찌푸렸다.

노교수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뭔가 떠올렸는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군. 아서 아난시아 군. 하지만 말 말고 시범을 보여 주지 않겠나? 마나 컨트롤이 어떤 건지."

"네, 그야 어렵지 않지만. 그럼."

아서는 오른손을 들었다.

"마나 컨트롤."

잡답과 장난을 치던 이들이 멈칫 놀란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굳어졌다.

이를 본 카를라와 셀롬, 노교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서의 손에 마나가 모여든다.

'확실히…. 다시 봐도 대단하네.'

프리다는 속으로 감탄했다.

불순물이 없는 너무나도 맑고 투명한 마나의 결정체.

황금빛으로 된 마나의 액체가 아서의 손에 모여들었고, 그 주변은 은은한 금색 기체가 안개처럼 떠다녔다.

프리다는 쿡쿡 웃었다.

저 노교수의 표정을 봐라! 분명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저토록 당황해하다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가! 아마도 저 노교수조차 저토록 깨끗한 마나 컨트롤은 하지 못할 터였다.

"이는 바깥에서 마나를 모아 형성화한 마나입니다. 노란색은 번개의 소속이지요. 그러니."

아서는 모았던 마나의 일부를 소멸시킨다.

마나 컨트롤로 모은 마나를 손가락 끝에 모으고, 형태를 이룰 이미지를 상상한다.

아서는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뇌광."

순간, 번쩍임과 동시에 전류가 흐리며 바닥을 꿰뚫었다.

바닥이 그을리며, 딱딱한 대리석이 녹아내린다.

높은 고온에 시커먼 구멍이 뚫리고 전류가 바닥을 타고 퍼져 나갔다.

"이처럼 바깥 마나를 모아 속성에 따라 파괴적인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주문으로 이미지를 형성화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요. 그래야만 좀 더 강한 암시로 더욱 강도 높은 힘을 발휘하게 되니까요. 또한."

아서는 호흡을 했다.

프리다는 펜을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노교수와 셀롬은 숨이 멎었고.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카를라마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프리다는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호흡했다.

호흡을 통해 체내에 마나가 쌓였다.

왼손을 들어 힘을 주었다.

"마나 컨트롤."

아서의 근육에 핏줄이 돋아났다.

손에 황금빛 마나가 둘러싸이며 형태를 이룬다.

기사들이 쓸 수 있는 호흡을 통한 마나 컨트롤.

"보다시피. 단전의 호흡을 통해 마나를 체내에 넣어 육체를 강화하고."

아서는 손가락으로 교탁을 건드렸다.

"파괴적인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손가락이 교탁의 홈을 파이기 시작했다.

마치 과자부스러기를 뭉개 버릴 듯, 교탁의 가장자리가 부서져 나갔다.

"질긴 피부를 가질 수 있으며, 또한 뼈는 강철, 그 이상의 경도를 가질 수 있지요."

노교수와 셀롬은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의 체온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서는 지금 손가락 하나로 교탁을 뭉개고 있다.

셀롬은 경악했다.

'기사와 마법사, 두 가지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단순히 변방의 3서클 마법사가 아니었다고?

"이처럼, 기사와 마법사는 마나를 다루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답변이 되었나요? 교수님?"

아서가 노교수를 쳐다봤다.

마치, 맹수가 노려보는 듯한 그의 시선에 노교수는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롬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럼 자리에 돌아가겠습니다."

아서는 다시 자리에 가 앉았고 강의실은 고요했다.

생도들은 위압감에 침묵을 유지한 것이다.

그렇게, 강의는 끝이 났다.

이후, 아서를 비웃는 생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샬럿은 눈동자를 굴렸다.

아카데미에는 각 생도들의 개인 생활실이 있다.

자신의 생활실에 누군가 올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경계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했다.

슬쩍 문을 열고 생활실로부터 반경 10m 내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인지한 후.

문을 다시 닫았다. 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그녀가 향한 곳은 서재. 그중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겉표지에는 '미개척지 현 상황'이라는 보고서로 되어 있지만.

표지는 겉모습일 뿐이다.

샬럿은 의자에 앉았다. 무릎을 모아 쪼그려 앉아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책을 펼쳤을 때, 안에는 애틋한 소설 내용이 담겨 있었다.

-뭐야, 세린. 또 참견이야? 더는 나에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쓰니? 네가 이렇게 다쳤는데!

-어차피 너는 형의 약혼녀이지 나의 약혼녀가 아니잖아!

-그래도 신경 쓰이는걸…. 너는…. 너는…. 나의…. 소꿉친구니까!

샬럿은 눈을 부릅뜨며 소설 속 내용을 살폈다.

소설 제목은 [소꿉친구와의 짝사랑]이라는 로맨스 소설.

내용은 귀족 집안의 주인공이 소꿉친구인 히로인을 짝사랑하지만, 그 히로인이 주인공의 형과 약혼한 사이라는 내용.

어딘지 모르게 현실감에서 느껴지는 그 설정에 샬럿은 푹 빠져 있었다.

'원래라면 한 달에 한 번만 읽지만.'

분위기가 묘해 고백씬이 나올 거 같아 끊지를 못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긴다.

기다리던 장면이다.

주인공이 히로인을 벽에 밀어붙였다.

쿵-!

두근두근!

샬럿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벽쿵이라니!?

어머! 세상에…!

샬럿은 눈을 반짝거리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맥박이 올라갔다.

흥분한 그녀는 뚫어져라 책에 집중했다.

그다음 대사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사실, 나는…. 나는…! 너를….

남주인공이 말꼬리를 흐린다. 서서히 다가가는 얼굴.

여주인공이 질끈 눈을 감는다. 남주인공이 벽에 밀어붙인 그녀의 가녀린 턱을 잡고 올린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입술.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샬럿 엘스포드. 지금 시간 되나?"

생활실 문이 열렸다.

순간 문 옆으로 무언가가 꽂혔다.

"...."

손도끼다.

문 옆에 꽂힌 손도끼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마나에 의해 주변이 서리가 끼며 얼어붙는다.

문을 연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옆에 꽂힌 손도끼를 바라보다가 고장 난 기계처럼 삐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총장 프롤론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샬럿이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생활실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꼬고 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미개척지 현 상황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마치 골치 아픈 보고서인지 다른 한 손으로 이마마저 짚고 있다.

"…자네 손도끼를 던지는 버릇 좀 고치게나."

"맞지 않으셨잖습니까."

"심장이 내려앉을 거 같아서 그래."

"그럼 우선 노크 정도는 하십시오. 문까지 잠갔는데 들어온 건 뭡니까?"

"잠긴 문을 따고 들어오는 게 버릇인지라."

'그딴 버릇은 고치라고!'

샬럿은 속으로 외쳤다.

프롤론은 끙끙거리며 손도끼를 뽑고는 혀를 찼다.

"허허, 미안허이. 교수 중에 생도들에게 뇌물을 받는 놈들이 꼭 있어서, 그걸 목격할 때 좋거든…. 내가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미개척지 체험에 관해서라네. 2시간 후, 생도들이 동부의 9등급 미개척지에 도착할 거라네."

"...."

"미개척지 체험이니, 그걸 자네가 도와줬으면 하네. 부상자가 나오는 건 당연하지만, 사망자는 나오면 안 되는 거니까. 자네가 좀 몰래 살펴봐 주지 않겠나?"

"다른 교수분들은 없습니까?"

"없네. 일손이 부족해서 교수들을 좀 더 받아야 하네. 게다가 교수보단 자네가 더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프롤론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자네가 아서와 생도들을 감시해 주게나."

샬럿은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서 슈하림, 아니, 아서 아난시아가 미개척지 체험 수업을 한다고 했다.

걱정되니…. 잠깐 보는 것쯤은 괜찮겠지.

'아서도 있으니까.'

절대로 걱정돼서가 아니다. 그…. 후배들이 걱정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샬럿은 보고서를 덮고 서재에 끼워 넣었다.

벽에 걸린 손도끼를 잡아 뽑았다.

제복을 갈아입고 사냥용 삼각모를 쓰고 모자를 깊게 눌렀다.

허리에 샤벨-한쪽에만 날이 있는 긴 곡도-을 착용했다.

기사의 왕국, 룸의 왕실 근위대 중 '흑사자' 소속이자, 마수와 마족을 잡는 데 특화된 '야수 사냥꾼'.

"가 보도록 하죠."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에 있는 9급 미개척지로.

***

리바이트 아카데미의 동부.

작게는 10m. 크게는 90m도 넘는 높이의 거대한 군락지.

미개척 지역이었다.

리바이트 아카데미는 일부러 미개척 지역을 옆에 두고 설립했고, 이를 아카데미 생도들의 체험 학습실로 이용했다.

습기가 차 있고 안개가 무성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공격성이 낮은 짐승과 나약한 몬스터만이 자리 잡은 9급 미개척지였다.

그곳에서 복면을 쓴 사내 둘이 나무 위에 올라타 있다.

시선을 내려 미개척지로 다가오는 마차들을 바라봤다.

리바이트 아카데미의 생도들이다.

그리고 그 마차 중 하나에 타 있을 인물.

"…아서 아난시아라고 했나?"

아스톤 자작의 의뢰. 그를 겁을 주든, 아니면 반 불구를 만들든 설치지 못하게 만들어 달라는 의뢰였다.

-입단속은 꼭 해 주시오! 반드시!

그리고 거금의 의뢰금을 내걸었다.

'겨우 생도 한 명에 이런 의뢰를 한 이유를 모르겠다만.'

상관없다. 돈은 받았고. 이 임무는 완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은 덤일 뿐이었다.

실제로 들어온 의뢰 인물은 따로 있다.

'카를라 그리치.'

몰락한 그리치 후작 가문의 장녀.

밤고양이 길드의 마수 조련사 벨, 원소 마법사 카샤.

두 쌍둥이 형제는 마차가 멈춰서 내리는 생도들. 그리고 그들 중 하나인 연분홍빛 머리의 여인을 쳐다봤다.

쌍둥이의 목표로 한 건 생도 '카를라 그리치'.

옛 전장의 영웅이자 전사한 로한 그리치의 딸.

카를라 그리치를 납치하는 게 목적이었다.

제9화

'이곳이 미개척지…?'

카를라는 긴장한 얼굴로 미개척지를 쳐다봤다.

햇빛이 땅에 닿지 않는 울창한 숲이다.

그 덕분에 숲은 음지의 기운에 따라 짙은 마력이 모여들고, 그 마력을 흡수한 나무들은 더욱 거대해지고 단단해진다.

나뭇잎 또한 무성해져 지상의 햇빛을 가리게 되고 그렇게 발생한 음지의 기운은 나무가 다시 흡수하며 순환하는 생태계였다.

마력을 흡수하는 건 숲의 나무뿐만이 아니다. 열매, 꽃잎도 흡수하기도 하고, 짐승이 그런 열매나 꽃을 오랫동안 섭취해 마수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바위가 오래도록 마력을 흡수할 경우 마석이 되기도 하며, 각종 마도구를 만드는 데 쓰였다.

이처럼 미개척지는 숲이 없어지지 않는 한 생태계가 순환되는 것이다.

'저곳에 가는 거구나.'

카를라는 품에서 하얀 장갑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 로한 그리치가 스스로를 희생해, 수많은 사람을 살려 그 공을 인정받아 황실에서 내려진 '훈장'이다.

룬이 새겨진 그 장갑은 아버지의 유품이자, 그리치 가문의 상징과도 같았다.

'아버지를 따라 기사 작위를 따고 군에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에게 떳떳한 딸이라는 것을, 자신의 가문이 부흥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알리리라!

'미개척지인가?'

아서는 미개척지를 바라보며 분석에 들어갔다.

안개에 따라 마력의 농도가 달라진다.

옅은 안개에 시야가 잘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낮은 레벨의 개척지다.

어림잡아 초보자용. 레벨은 5에서 10레벨이 머물 수 있는 곳처럼 보였다.

'내 레벨로는 적당한 곳이로군.'

아니, 특성과 스탯으로 따지면 이 개척지는 야금야금 씹어 먹을 수도 있다.

아마 이 미개척지의 보스몹도 가볍게 이겨 내겠지.

숲을 관찰하던 아서는 시선을 돌렸다.

흰 장갑을 양손으로 꼭 쥔 채 가슴에 올리며 심호흡하는 카를라가 보인다.

'유니크 아이템이로군.'

아서는 카를라가 쥔 흰 장갑을 바라봤다.

그의 [관찰] 스킬이 활성화되며, 카를라가 쥐고 있는 아이템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슈하림의 훈장.

설명 : 슈하림 황가가 영웅에게 하사하는 훈장이다.

능력 : 근력 8% 증가.

민첩 5% 증가.

화 속성 부여 및 화 속성 사용자에게 5% 위력 증가.

화 속성 저항 3% 증가.

가문 및 명성 1000 증가]

'근데 저 아이템.'

아서는 턱을 짚었다.

'반군 퀘스트 때 나오는 아이템인데?'

바로 망나니 아서가 슈하림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아서의 소꿉친구인 샬럿이 '아서를 제지해 달라'는 퀘스트를 내걸게 되고, 그런 아서의 반란을 제압하며 수행하다 보면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아서를 지키는 '가디언' 역할을 하는 중간 보스다.

망나니 아서는 배경을 중점으로 선택지 보스였던 반면, 아서를 지키는 또 다른 보스는 '힘'과 '격투술'을 중점으로 둔 중간 보스였다.

'불꽃과 복수의 여인'이라는 이름의 NPC. 그 보스를 처리하게 되면 얻는 것이 저 [슈하림의 훈장]이다.

투구와 같은 서클릿을 끼고 있어 얼굴을 보지 못했건만.

'설마…?'

아서는 카를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얼마 전 카를라가 사용한 격투술을 떠올렸다.

'그렇군.'

어쩐지 낯이 익었다 싶었는데, 아서를 지키던 '가디언'이 바로 저 카를라 그리치였다니.

"...."

괜히 미안해진다. 게임 속에서 아서 황자를 제압하기 위해 그녀 또한 제압했었으니까.

'참으로 묘하게 돌아가네?'

아서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현재 아서는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그렇담 저 카를라 역시 자신을 지키는 가디언 NPC, 중간 보스가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계기로 또 다른 보스를 지키는 중간 보스가 되는 걸까?

여러 가지로 의문이다.

'복수인가….'

그나저나, 카를라는 무엇 때문에 복수의 여인이 되는 것일까?

아서가 고민을 할 때, 카를라는 무언가를 느끼며 멈칫거렸다.

고개를 돌려 아서를 쳐다봤다.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그를 향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 무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서는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미개척지는 오랜만이네."

묘령의 소리에 아서는 옆을 쳐다봤다.

프리다가 다가와 미소 지었다.

"엘프의 숲도 미개척지로 둘러싸인 거로 아는데?"

"응, 맞아. 우리 동네는 마수가 많지만, 대부분 길들인 것들이라 위험 요소는 없어. 혼자서 이렇게 미개척지에 오는 건 처음이야."

프리다는 긴장한 모습을 취했다. 그러면서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목에 감고 있던 붉은 머플러를 풀어 내밀었다.

"고마워, 잘 썼어."

"아, 조금만 더 써."

"응?"

"날씨가 춥잖아. 무엇보다 이 서식지. '불고양이'들이 자주 나와."

아서가 준 머플러는 불고양이 가죽으로 만든 거다.

즉, 불 속성에 대한 내성이 있다.

이 개척지에서는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어머, 그래도 돼? 그냥 주는 거야?"

"그건 아니야.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것도 있어야지?"

"헤~! 역시 노리는 속이 있었구나?"

아서의 표정을 관찰하던 프리다가 장난스레 웃었다.

"뭐, 좋아. 당분간 내가 쓰도록 할게. 나중에 나도 챙겨 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무리야."

프리다는 이곳 아카데미에서 착실한 생도이기는 싫었으나, 학교를 다니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자금을 해결해 줄 건 장학금밖에 없으리라.

'장학금을 받으려면 성적이 좋아야 하니, 다른 이를 챙겨 줄 여유는 없어. 조금이라도 나에게 유리한 이점을 취해야 해.'

아니면 근처 상가에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프리다는 최대한 학교 생활비를 줄이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선 좋은 성적을 내야 하리라.

"교수님."

그때, 한 병사가 노교수에게 다가갔다.

황적색 갑옷을 입고 등에 방패를, 허리에는 검을 착용한 보병. '에인헤르'였다.

제국의 정예병이며, 마나를 사용하는 엘리트 군 계급에 속해 있는 병사였다.

리바이트 아카데미에서 2학년이 될 때까지 기사 학과 성적을 받지 못한 이들은 '병사학과'로 진학하게 되고 '에인헤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검술, 방패술, 창술, 활, 화기, 그 밖에 기타 등등의 온갖 무기술과 전략 전술을 배우기에, 일반 병사와는 차원이 다른 황제의 정예 군대이기에 상당한 복지와 혜택이 주어진다.

"모두 도착한 모양입니다."

"아, 그런가?"

마부석에서 에인헤르들이 내려 생도들을 인도했다.

생도들이 도열하자, 아서 또한 그들 사이에 섰다.

노교수는 프롤론 총장이 내건 [체험지 교습서]를 바라봤다.

"음, 보다시피 미개척지 체험이다."

하지만 단순 체험이 아니다.

미개척지에 들어가서 단순히 헤매는 짓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너희가 해야 할 건 '구조'다."

에인헤르들이 짐마차에서 인형을 꺼내 들었다.

성인 남녀 크기의 마네킹들이다.

에인헤르들은 목각 인형처럼 되어 있는 그 마네킹을 든 채 미개척지로 들어갔다.

노교수는 말을 이어 갔다.

"바로 저 인형들을 지켜 내는 거지. 1박 2일. 하루 간. 너흰 이 미개척지에서 야영해야 할 것이다."

노교수는 에인헤르가 사라지는 숲속을 가리켰고, 생도들은 숲속을 쳐다봤다.

"각 마네킹마다 '구조 신호'를 발산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찾아내고, 마네킹에 부서진 부위에 대해 응급처치를 하도록."

아서는 그렇게 설명을 들으며 마네킹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튜토리얼 때 사용되는 인형이로군.'

온갖 직업군에서 체험용으로 쓰이는 마네킹이다.

안에 마석이 들어 있어 그 마력을 뿜어내며 위치를 알려 준다.

그것이 구조 신호이며, 마네킹의 손상된 부위에 응급처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력 방출도 줄어든다.

그에 따른 '점수'를 매길 수도 있는 유용한 제품이다.

"점수에 따라…."

노교수는 프롤론이 내건 교습서를 읽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적당할 수 있음을 알린다."

그 말에 생도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서도 '이거 심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만 있는 나름의 교육 방식이겠지.

이래야 생도들도 최선을 다할 테고.

하지만 제적은 좀 심했다.

'그럼 제적을 당하면 나도 무사하지 못하는 거 아니야? 아카데미 퇴출은 바로 군에 간다는 이야기잖아?'

그 점을 프롤론을 노렸다는 것을, 아서는 모르고 있었다.

"마력 감지가 서툰 자들은 표식을 따라가라. 구조 표식은 기본 교습으로 배웠을 거다. 물론, 내 강의에 낮잠 자던 놈들이니만큼 자신감이 있겠지."

노교수의 말에 생도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중에는 카를라 역시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퇴학 이야기가 나왔었다. 이번 '제적'이라는 말도 진심이리라.

"제적당하기 싫으면 최선을 다하도록. 제한 시간은 내일까지. 만약 문제가 발생할 시, 구조 신호를 보내도록. 그럼."

숲속에서 에인헤르들이 걸어 나왔다.

"이 에인헤르들이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 찾아갈 것이다. 알겠나?"

대답을 요구하는 것일까?

생도들은 목청껏 외쳤다.

"네!"

"행운을 빈다. 제적당하지 않길 빌지."

노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바위 근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서는 노교수를 보며 혀를 찼다.

저 노교수의 월급이 얼마나 될까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일단 가 볼까?'

초보용 미개척 지역이다. 별걱정은 없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아서는 긴장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

생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전투 배낭이 지급된다.

계급 높은 기사나 마법사들은 아공간 주머니를 소지하거나 종자를 이용해 아이템을 챙기지만.

생도들이기에 종자가 없을뿐더러 아공간 마법도 쓸 수 없었기에 지급되는 것이다.

전투 배낭은 기본 30kg.

식량, 물통, 모포, 제복, 야전삽과 침낭, 식기, 의료품, 단검 등이 들어 있다.

그밖에 훈련용 갑옷을 입고 주특기인 무기를 든 채 숲속을 행군해야 한다.

겨울의 서늘한 추위. 짙은 안개 덕분에 시야 확보가 어렵다.

프리다는 시선을 돌렸다.

생도들이 친한 사람끼리 조를 짜는 게 보였다.

개인으로 하든, 팀을 이루든 제한을 두지 않았으니 자유일 터.

하지만 프리다는 혼자가 편했다.

엘프의 습성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보적인 점수를 얻고 싶었다.

팀을 이루어 점수 나뉘기 따윈 하지 않으리라.

'점수가 높으면 아서가 놀라겠지?'

어쩌면 다음엔 같이 조를 짜 달라고 조를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에 머플러를 만지작거린 프리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용하기 쉬운 남자였어.'

아서라는 자에게 동질감이 가기는 했지만, 이곳 생도라는 점에서 이용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써먹기 좋은 도구였다.

'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용하겠어.'

엘스포드 가문에 대한 복수를 위해.

프리다는 이를 악물었다.

생도들이 모두 안개 속에 사라지는 걸 보며 프리다는 시선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나무 밑동 마다 검 자국이 나 있다.

구조 신호다.

마네킹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거겠지. 하지만 저걸로는 불확실하다.

그럼.

'후우….'

프리다는 두 눈을 감고 주변 마나를 탐지했다.

감응력을 발휘, 주변에 붉은 기류가 흘러나와 숲속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네킹에서 뿜어내는 마력을 감지한 것이다.

'누워서 떡 먹기네.'

너무 쉽다. 장학금 따위, 가볍게 딸 수 있으리라.

프리다가 걸음을 옮길 때,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뭐지?'

프리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나뭇잎 몇 개가 떨어졌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렸던 거 같던데…. 착각일까?

어쩌면 작은 동물일지도 모른다.

프리다는 별거 아니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저 엘프, 예쁘네~ 형. 내 장난감으로 할래!"

프리다가 사라지고, 나무 위에 있던 두 쌍둥이 형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 조련사 벨, 원소 마법사 카샤.

그 두 사람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지팡이를 쥔 채 하프 엘프 프리다가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아서 생도를 제압하고 카를라 그리치를 납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이다.

"아니, 시간이 없어. 본 임무에 충실하도록."

"참한 여자였는데, 게다가 엘프이고…. 아쉽네."

두 사람은 숲속을 빠르게 질주했다.

나무를 타고 뛰어오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뭇가지에 착지했다.

"빙고!"

마수 조련사 벨, 원소 마법사 카샤.

두 사람은 목표물을 찾았다.

카를라 그리치가 숲속을 헤매고 있는 게 보였다.

다만 훼방꾼이 있었다.

"누구야? 저건?"

마수 조련사 벨의 물음에, 원소 마법사 카샤가 말했다.

"셀롬 아스톤. 의뢰주의 아들이다."

"죽여도 돼?"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어쩔 수 없군."

쌍둥이 형제는 미소를 지었다.

"목격자는 없어야 하니 죽여도 되겠지."

두 사람은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

"카를라 그리치, 설마 그 영광스러운 그리치 가문의 장녀일 줄은 몰랐습니다!"

셀롬은 프리다 대신 목표를 바꾸었다.

프리다를 도와준 이 괘씸한 여자가 누구인지 조사해 봤다.

그리고 알아냈다. '대개척지 혁명' 시대 때 칭송받던 영웅 가문.

그리치 후작가!

10년 전, 슈하림 황제의 대대적인 미개척지 전쟁 선포. 수많은 몬스터와 마수, 마족과 마인과의 전쟁 속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늘리고 또한 수많은 국민을 구해 낸 영웅들.

그 대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인물 중 하나가 그리치 가문의 당주, 로한 그리치였다.

물론, 10년 전 로한 그리치가 전장에서 전사하여, 그리치 가문은 쇠퇴했지만, 그 명성이 낮아진 건 아니다.

셀롬은 이 여자를 배제하기보단 유혹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그 가문과 당주의 이름은 자신의 가문에 큰 힘을 실어 줄 것이다.

가문뿐만 아니라 외모도 출중하니, 셀롬으로서는 카를라 그리치가 달콤한 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기…. 저 구조 신호를 탐지해야 해서…."

"같이 팀을 짜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카를라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셀롬이 부담스러웠다.

저 눈빛, 저 행동과 말투.

뭔가 작위적이다.

카를라는 어렸을 때 봐왔던 '탐욕스러운 어른'의 그것과 똑같았다.

상대가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는 게 아닌, 가문 혹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그런 얼굴.

하지만 거절하지 못하는 카를라의 성격으로 인해,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카를라도 '가면 속 미소'를 지은 채 셀롬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그에 셀롬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뀨웅-!

그때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카를라와 셀롬이 고개를 돌렸다.

바위 위에 붉은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카를라와 셀롬을 바라봤다.

불의 속성을 가진 카를라를 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귀, 귀여워!"

카를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계했다.

불고양이.

이 미개척지의 마수일 것이다.

마력을 품은 열매를 오랫동안 먹은 고양이가 진화해 불을 뿜어낼 수 있는 불고양이가 된다.

무기만 있다면 평범한 농사꾼도 쫓아낼 수 있지만, 방심하는 순간 불을 뿜어내 불타 죽을 수 있는 위험 개체이기도 했다.

불고양이를 발견한 셀롬은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침 마수가 나왔으니 잘 됐다.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가 되리라!

"자, 보십시오! 카를라! 저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을…!"

…저번엔 마법사라 하지 않았나?

카를라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셀롬이 불고양이에게 다가갔다.

"목표물."

순간, 카를라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쿵, 하고 바닥이 울리며 카를라는 멈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장신의 몸집을 가진 두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포획."

두 사람이 손을 뻗는다.

커다란 손아귀가 카를라의 머리로 향했다.

"완료."

카를라는 움찔거리며 반사적으로 그 손아귀를 쳐냈다.

"...."

손이 튕겨 나간 마수 조련사 벨. 원소 마법사 카샤.

두 사람이 넋이 나가기를 잠시. 얼굴이 와그락 일그러졌다.

***

아서는 눈을 깜빡거렸다.

붉은 마나의 기류가 흔적을 남기며 주변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단순 마나를 사용한 흔적이 아니다.

이건….

'구조 신호?'

시작한 지 2시간 채 되지 않았건만…. 벌써 포기자가 나온 걸까?

'하지만 이 기운은….'

화 속성이다. 그리고 익숙한 마나의 기운.

'카를라인가?'

아서는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수풀을 나왔을 때, 보이는 특이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 에인헤르들이랑 같이 올 줄 알았더니…. 애송이 혼자 오셨군. 일이 편해지겠어!"

웬 장신의 사내 둘과 괴물 하나가 있다.

셀롬이 엉덩방아를 찍은 채 겁에 질려 있다. 그 옆에는 카를라가 쓰러져 있다.

카를라는 낯선 괴물에게 짓눌러져 있었다.

3m가 넘는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하얀 털, 그리고 튀어나온 송곳니. 원숭이 형태의 괴물.

괴력 원숭이.

레벨은 30에 이르는 마수형 몬스터다.

이 미개척지 지역의 보스몬스터였다.

'소환수로군.'

그런 괴력 원숭이가 카를라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도…망…쳐요. 아서 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괴력 원숭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정체불명의 두 괴한에게로 돌렸다.

아서가 입을 열기도 전, 그들이 말했다.

"마침 잘 됐어. 목표물도 왔으니."

쌍둥이인 듯, 얼굴이 똑같이 생긴 장신의 사내 둘은 번갈아 가며 말했다.

"우리 게임을 시작할까?"

제10화

아서는 두 괴한을 지그시 쳐다봤다.

어찌 된 일일까?

에인헤르?

아니다. 에인헤르 복장도 아니었고 느껴지는 기운도 다르다.

미개척지 지역에 들어온 모험가, 혹은 용병일지도 모른다.

레벨로 치면 저 두 사내는 몇 정도 될까?

30? 35?

아니. 더 높다.

40.

상당히 높은 레벨.

보아하니 허가받지 않은 이방인에, 카를라를 때려눕힌 것이 좋은 의도를 가진 자들은 아니었다.

아서도 미개척지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트레이닝을 하며 근력을 높이고 레벨을 올렸다.

낮은 레벨이었기에, 레벨 20까지는 도달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스탯 또한 모두 힘에 투자했다.

다만,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사내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우선 놈들의 수준과 특성을 알아야 했다.

"너희는 누구지?"

"나는 원소 마법사 카샤, 그리고 이쪽은 내 동생 마수 조련사 벨이다."

예상외로 가볍게 자기 정체를 말했다.

덕분에 그들의 특성과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특성이 나열되며, 적색 표시가 떴다.

'일반적인 초보 플레이어가 상대하기 힘든 레벨이다.'

적색 표시는 레벨이 아서보다 훨씬 높다는 뜻을 말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벨에 한해서의 이야기다.

워로드의 [특성]을 가진 아서는 평균 스탯이 다른 이들보다 남달랐다.

게다가….

"네가 아서 생도 맞지? 우리 의뢰 내용에 담긴 사내 맞는 거지? 죽여도 되는 거야? 응? 형!"

벨이라는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깔보고 있다.

이름마저 댄 걸 보면 상대는 완전히 방심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

의뢰라는 말에 셀롬이 멈칫 놀라며 반응했다.

"뭐, 뭐야? 너희가 우리 아버지가 고용한 이들이야?"

아서는 셀롬을 노려봤다.

셀롬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쌍둥이 괴한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도련님, 말이 많군. 자기 아비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던 게 의미가 없어."

"멍청해서 그래. 하하, 저놈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던 거겠지! 이래서 곱게 자란 놈들은 안 된다는 거야!"

"뭐 상관없지."

원소 마법사 카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우리의 얼굴을 봤고, 납치하는 상황까지 목격했으니…."

카샤는 지팡이로 셀롬을 가리켰다.

"어?"

"둘 다 죽여야겠지."

"히익!"

셀롬이 겁에 질려 도망치려 하자 주변에 룬이 새겨졌다.

식물 줄기가 뻗어 나와 셀롬의 다리를 휘감았다.

"이, 이거 놔!"

"잠깐! 형, 나 좀 재미 좀 보게 가만히 둬 봐."

"안 돼. 에인헤르가 올 거다. 쪽수로 밀리면…."

"아! 진짜! 잠깐이면 돼! 응?"

동생의 어리광에 카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괴력 원숭이를 조종하는 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서를 쳐다봤다.

묵묵히 서 있는 것이 아서가 겁에 질려 멍해 있는 거처럼 보였다.

"에헴! 아서 생도! 우리도 수업에 참관하고 싶거든. 그리고 우리는 미개척지 체험을 통해 미래의 인재인 아서 생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

벨이 셀롬과 카를라를 가리켰다.

"만약 이처럼 친구들이 인질로 잡힌 상태라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거지?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 딱 한 놈만 살려 줄게. 선택해. 아서. 넌 누굴 고를 거야?"

벨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신을 괴롭혀 겁주라고 한 아스톤 자작가의 도련님? 아니면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그리치 가문의 아가씨?"

"답할 가치가 없군."

아서는 가볍게 말했다.

"하하! 곤란한 질문이었나? 하긴, 나 같아도 곤란해할 거야. 친구라는 입장이 그렇잖아? 그럼 질문을 바꾸자. 아서."

벨은 아서를 지그시 쳐다봤다.

광기 어린 눈빛. 입꼬리가 올라가는 썩은 미소.

"너 자신과 이 친구들, 둘 중 누가 더 소중하지? 네 스스로를 목숨을 저버린다면 이 두 생도를 살려 줄게."

아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고민하듯 턱을 짚었다.

아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놈은 어지간히도 나를 얕보고 있군.'

나이도 어려 보이니 그런 거겠지.

본캐라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죽을 놈들이.

아서는 고민에 빠졌다.

카를라와 셀롬. 둘 중 한 사람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둘 다 상처 없이 구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애초에 카를라는 다쳤지만.'

시간도 더는 끌 수 없다.

놈들이 에인헤르를 언급한 걸 보면, 그들이 올 때가 되면 셀롬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나서겠지.

그때, 둘을 제압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럼 곤란해.'

사건이 커지면 그 책임을 아서가 맡게 될지도 모른다.

셀롬과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일부러 방관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아서는 벨을 쳐다봤다.

눈빛을 보면 제정신이 아니다.

형이라고 불린 자는 차분했지만, 동생은 정신이 나간 상태.

괜히 자극하다간 괴력 원숭이가 카를라의 목을 꺾을 수도 있다.

두 생도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럼….'

아서의 눈 근육이 실룩거렸다.

'군대 가야 한다.'

이 나이에 영장 받는 건 다시 경험하기 싫은 아서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아서는 멈칫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특성 같으니.'

특성도 있지만, 플레이어의 시점 때문인지 생명에 대한 가치가 너무나도 동떨어졌다.

'시간은 더는 끌 수 없어.'

"생도들을 풀어 줘."

고민할 것도 없다. 놈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면 그때 치면 되는 거다.

그때 카를라가 이를 악물며 손가락으로 오므라들었다.

저항하는 눈빛으로 아서를 쳐다봤다.

'안 돼, 이러다 황자님이 나 때문에…!'

슈하림의 위대한 혈족이 다치게 된다.

목적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 괴한들은 자신을 노리고 이렇게 인질로 살려 둔 채 아서마저 노리고 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면, 이는 그리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이었다.

두 괴한이 아서에게 시선이 쏠리자, 카를라는 발악하기로 했다.

차라리…!

'지금…!'

카를라가 힘을 주었다.

그때, 괴력 원숭이가 이상 징후를 감지했다. 괴력 원숭이가 카를라의 머리통을 잡은 채 들어 올려 다시 바닥에 내리꽂는다.

쿵, 소리가 울리자 카샤와 벨의 시선이 카를라에게 향했다.

마수 조련사 벨은 쭈그려 앉아 카를라에게 속삭였다.

"얌전히 있어야지. 위기에 빠진 공주님."

기분 나쁜 속삭임이다.

"나중에 놀아 줄 테니까."

카를라는 수치심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카샤는 그런 동생인 벨을 바라보며 회중시계를 들었다.

에인헤르가 올 시간을 체크하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군.'

맡은 임무는 카를라의 '납치'이지 '살인'이 아니다.

하지만 동생이 지금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나중에 미쳐 날뛸 것이다.

감당이 되지 않으면 말릴 틈도 없이 카를라를 죽일지도 모른다.

광기에 젖어 살육을 즐기는 동생 놈이었기에…. 이놈을 통제하는 건 매우 힘들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서, 미래의 인재가 될 너의 정보가 없어서 그러는데, 너는 무슨 마법을 주로 쓰지? 3서클 마법사라는 것밖에 몰라. 원소를 이용한 파괴 마법? 아니면 정령술? 소환술? 사령술? 그것도 아니면 환혹이나 현혹, 세뇌 등의 정신적 공격을 하나?"

벨의 질문에 아서는 말했다.

"물리."

"물리…?"

"나는 물리 마법사다."

'물리…. 마법사?'

냉정함을 유지하던 카샤가 의아해했다.

그런 건 들어 본 적이 없다.

'상관없지.'

카샤는 다리를 떨었다.

동생의 충동질에 휩쓸리는 것도 지긋지긋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그 화가 자신에게 덮칠지도 모르니.

아서는 상대를 관찰했다.

카샤는 의아해할 뿐이지만, 벨은 상당히 흥미로워하는 거처럼 보인다.

"그런 마법사가 있나?"

벨의 질문에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이 호기심에 물었다.

"물리 마법은 어떻게 쓰는 거지? 한 번 써봐!"

"예를 들면. 이렇게…."

아서가 다리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 모습에 카샤가 당황한 듯 외쳤다.

"잠깐, 벨! 놈을 저지-!"

"연막 마법으로 시야를 가리고."

다리를 들어 바닥을 내려찍었다.

바닥이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진다. 아서가 내리친 앞부분으로 2m나 되는 바위가 솟구쳤다.

뿌연 흙먼지가 주변을 감싸며, 시야를 가렸다.

"뭐?!"

"이런 식으로 마법을 날릴 수 있지."

아서가 주먹을 움켜쥔다. 앞에 가로막은 바위에 후려친다.

바위가 깨진다. 폭발과 함께 매서운 연기가 피어오른다. 또한 그 충격으로 돌파편들이 튀었다.

튕겨 나간 돌파편이 카샤에게로 날아간다. 총알 같던 파편은 카샤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

걸레 조각처럼 찢어지는 피부들.

"벨!"

카샤는 비명을 지르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벨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

쾅-!

폭발적 소리가 들려왔다.

카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굳어졌다.

뿌연 연기를 꿰뚫고 튀어나온 이.

아서 아난시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업에 참관한다고 했겠지?"

카샤가 눈을 부릅떴다.

"어리석긴-!"

마나를 쥐어짠다. 카샤의 지팡이에서 룬이 새겨지고 화염이 모여들었다.

화염구. 그것을 쏘아 냈다.

아서가 손을 휘둘렀다.

화염구가 손등에 맞아 두 동강이 나더니 카샤의 좌우로 떨어져 폭발했다.

작열하는 화염에 카샤는 뒷걸음질 쳤다.

화염이 로브에 달라붙었지만, 불을 끌 틈이 없다.

'뭐야?'

제정신이 아니다.

맨손으로 화염구를 쳐 내고 찢어내 튕겨 냈다.

'마법?'

아니, 마나의 기운이 있었지만, 마법의 종류가 아니다.

이것은 몸을 강화했을 때의 기운 중 하나.

압도적인 물리력.

그야말로 근력으로…!

맙소사, 피부가 바위처럼 단단하기라도 한 건가? 뼈가 강철처럼 견고한 건가?

어떻게 화염구를…!

카샤의 생각이 현 상황을 인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대응하는 데 반응이 늦어졌다.

"그럼 이런 기본적인 상식은 잘 알 거야."

아서가 바닥을 내디디고 몸을 회전하며 주먹을 움켜쥔다.

"주먹은 아프다."

아서는 카샤의 품에 파고들고 일격을 날렸다.

묵직한 주먹이 카샤의 빰을 후려쳤다.

일반 성인의 평균 힘은 스탯은 10이다.

아서의 힘 스탯이 90을 넘어선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일반 성인의 9배에 달하는 힘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 성인의 9배에 달하는 힘이 바위를 깨부술 수 있을 리가 없으며, 그러고도 아무런 뼈가 상하지 않을 리 없다.

오히려 9배 이상. 그 이상의 증폭적인 힘을 나타냈다.

특히 마나가 담긴 주먹이라면 그 위력은 배가 된다.

카샤의 얼굴이 틀어진다. 목이 꺾이는 소리가 들린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즉사할 위기.

하지만 이곳 [판타지 월드]의 인간들은 하나하나가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갖췄다.

그것이 육체 단련을 게을리한 원소 마법사 카샤라고 해도 다를 리가 없다.

목뼈가 꺾여도 살아는 있었다.

다만.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극악의 고통이 전해졌다.

목뼈가 꺾여 전신이 마비되었지만, 얼굴의 통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서의 손이 계속해서 카샤의 머리를 압박해 밀고 나갔다.

이윽고 카샤는 버티지 못해 눈이 돌아가며 정신을 잃어 죽음을 맞이했다.

콰직-!

카샤의 몸이 튕겨 나갔다.

몸이 바닥에 닿아 쓸리고, 이윽고 커다란 나무의 몸통에 부딪혀서야 멈췄다.

뒤늦게 뿌연 흙먼지가 나선 모양으로 펑 하고 흩어진다.

그 중심에 아서가 주먹을 쥔 채 하얀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혀, 형?"

벨은 자신의 형을 쳐다봤다. 그리고 아서를 쳐다볼 때.

"레벨업 하셨습니다. 스탯을 분배해 주십시오."

아서의 주변으로 황금빛 폭풍우가 불었다.

황금빛 마나가 모여들며 소용돌이친다.

그 광활한 모습에 벨을 얼어붙어 버렸다.

'뭐야?'

아서의 손바닥에 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레벨업을 통한 '완전 회복'과 '일시적 무적'.

하지만 마법 지식이 있는 벨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회복 속도였다.

당연했다.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는 시스템 특권을 NPC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서는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오만한 눈빛이 벨을 노려봤다.

'뭐냐고-!'

벨이 질겁하며 판단력을 상실했다. 뒷걸음질 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저 괴물을 막아-!"

괴력 원숭이가 카를라를 놓았다. 아서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고, 그에 대응하듯 아서는 손아귀를 뻗었다.

상대, 괴력 원숭이에 대한 정보 정도는 아서도 가지고 있었다.

괴력 원숭이의 평균 근력은 60에서 70.

조련사의 레벨에 따라 성장해도 최대 80에서 90.

마나를 사용하는 아서가 압도적인 우위다.

아서가 괴력 원숭이의 팔을 잡고 비틀자, 괴력 원숭이가 비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마수 조련사 벨은 움찔거렸다.

'무슨 괴력이…!'

아니,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벨이 멈칫 놀라며 지팡이를 땅에 내려찍었다.

주변에 룬 문자가 새겨졌다. 벨은 식은땀을 흘리며 상대를 노려보면서 주문을 외웠다.

콰직-! 콰직-! 콰직-!

아서는 고통에 무릎 꿇린 괴력 원숭이의 머리통을 잡았다. 그리고 앞면에다 주먹을 내리꽂고 있다.

그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 차갑고도 비정하다.

맙소사! 인간 형태의 몬스터를 저렇게 냉정하게 후려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제정신이 아니다. 생명의 기준을 하찮게 여기는 미친놈이다!

벨은 두려움에 떨며 지팡이로 룬을 그렸다.

'빨리…. 빨리…!'

그리고 소환에 성공했다.

룬에서 붉은 털을 가진 들개들. 소환된 마수들이 아서를 덮치며 그의 팔과 다리, 몸, 머리까지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서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치명상을 입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괴력 원숭이가 바닥에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을 때, 또다시 아서의 몸에서 황금빛 마나가 휘몰아쳤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스탯을 분배해 주십시오."

"[마초] 특성이 생성됩니다."

[마초 : 공격 받을 시 5분간 힘을 5% 증가. 피해를 입을 시 3초간 물리 피해력 8%감소. 체력 3%증가. 이동 제한 스킬의 면역 3%증가.]

탱커의 특성이 추가되고, 다친 상처들이 회복되었다.

마수들이 아서에게서 튕겨 나갔다.

마수들은 어리둥절하며 아서를 올려다볼 때, 아서가 손을 뻗고 있는 게 보였다.

마수들이 눈을 부릅뜰 때,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깨깽!

마수들의 비명이 울린다.

"…."

벨은 안색이 창백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서가 맨손으로 마수들을 사냥하고 있다.

뭐야…? 마법사라며? 3서클이라며?

그런데 저건 뭔데? 저게 마법사야? 아니 그전에 인간일 수가 있는 거야!?

저건…. 그냥…. 인간의 탈을 쓴 괴력을 가진 무언가이지 않은가!

아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벨과 눈이 마주쳤을 때, 벨의 몸이 경직되었다.

어느새 소환된 마수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는 않는 포식자.

그 눈빛에.

정신을 차린 순간, 벨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쳐!'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놈 괴물이야!'

포식자.

그는 터무니없는 괴물이라고.

제11화

'…어떻게 된 거지?'

카를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커다란 괴력 원숭이. 그 괴력은 권사인 자신을 압도했다.

마나를 응용한 근력으로도 이겨 내지 못한 그 괴력 원숭이를.

아서 황자가 너무나도 손쉽게 굴복시켰다.

그뿐인가?

다음으로 소환된 들개 사역마마저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했다.

피 묻은 아서가 고개를 치켜든다.

당당하다 못해 위엄이 넘치는 발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가 짓밟히며 그 족적을 남겼다.

하얀 입김을 뿜어냄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휘황찬란한 황금빛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나의 파동.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마나가 그의 몸 주변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피 묻은 그의 상처들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상식을 벗어났다.

저건 마법? 아니, 마법으로도 저러한 기적을 이룰 수 없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포션도, 그 어떤 마법도 저렇게 빠르게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하리라.

희미한 시야 속에서 카를라는 아서를 올려다봤다.

아서가 쭈그려 앉아 카를라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손길과 온기가 느껴졌다.

카를라는 안심이 되어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많이 다쳤구나."

다정함이 묻어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조금만 참으렴. 치료해 줄게."

그가 허공에 손짓한다. 그리고 포션 하나를 소환해 냈다.

뚜껑을 열고, 카를라의 입에 살며시 흘려보냈다.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희미해지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이제 괜찮아. 푹 쉬어."

그 한마디에 안도한 듯, 카를라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응?"

샬럿은 울창한 숲속에 우뚝 섰다.

안개가 자욱한 9급 미개척지.

낮은 레벨의 개척지다.

간혹 민간인들이 금은보화를 노리며 밀렵 행위를 위해 몰래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에 있는 마수 불고양이의 털가죽과 고기는 평민들에게 있어 꽤나 괜찮게 팔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뭐지?'

샬럿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이 있었다.

샬럿은 쭈그려 앉아 땅을 만져 보았다.

살짝 뭉그러진 발자국이 남아 있다.

'남자의 발자국이야. 그것도 두 개.'

일반적으로 에인헤르가 신고 다니는 군화와는 달랐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다.

기사나 마법사, 혹은 모험가나 용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흔적을 지우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지? 누가 침입을….'

흔적을 지웠다는 건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니리라.

'귀족 자제들을 노리는 건가?'

간혹 있다.

리바이트 아카데미의 특성상 경호가 없는 귀족 자제들의 생활이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그들을 노리는 세력이 있다면 지금처럼 무방비할 때가 가장 좋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슈하림 황제와 프롤론 리바이트 공작의 분노를 사겠지만 말이다.

그걸 생각지 못하는 모자란 놈들이 있거나 혹은 정말로 미친놈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샬럿이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마나의 흔적을 찾는다.

그리고 '구조 신호'로 된 붉은 신호를 탐지했다.

'...!'

이미 생도 중 하나가 당한 것일까?

그럼 큰일이다.

샬럿은 품에서 소환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스크롤 조각에서 빛이 뿜어지며 얼음조각이 퍼진다. 그리고 얼음으로 된 늑대들이 소환된다.

스크롤을 이용한 사역마 소환.

스크롤로 일시적 얼음 정령과 계약을 맺어 소환할 힘을 가질 수 있다.

얼음 늑대가 샬럿을 올려다본다.

"구조 신호를 찾아 따라가렴. 수상한 자가 있다면 막아."

얼음 늑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샬럿 또한 나무를 타며 질주했다.

그리고.

쾅-!

폭발음이 들렸다.

뿌연 안개가 더욱 자욱해진다.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저쪽인가?'

샬럿이 나무 위로 착지하자, 수상한 괴한을 볼 수 있었다.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채 허겁지겁 숲속으로 뛰어가고 있었고, 그 뒤로 얼음 늑대들이 뒤쫓고 있었다.

'침입자?'

샬럿은 '마수 조련사 벨'을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을 때 멈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공터에 마수들의 사체가 널려 있다.

3m에 이르는 괴력 원숭이가 양팔이 꺾인 채, 그리고 얼굴이 망가져 쓰러져 있다.

소환된 것으로 보이는 마수 들개들은 온몸이 찢어지거나 터져 죽은 상태였다.

마치 강력한 마법, 아니, 물리적 방법으로 제압한 흔적들이다.

그리고 쓰러진 마법사 하나에, 그 뒤에 기절한 남자 생도 하나.

샬럿은 저 남자 생도의 이름을 알고 있다.

분명…. 셀롬 아스톤이었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눈을 돌린 샬럿은 그대로 넋이 나가 버렸다.

'아…서?'

아서가 보였다. 그것도 피범벅인 모습으로.

그리고 그 상태로 바닥에 쓰러진 여자 생도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샬럿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설마 침입자로부터 아서가 목숨을 걸고 저 생도를 지켜 낸 것일까?

그래서 저런 몰골이 된 걸까?

샬럿의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희열이었다.

아서가 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켜 냈다는 것. 그 선한 심성이 다시 나타난 것에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도 잠시.

그녀의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분노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아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입고 있던 코트는 찢겨 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다.

분명 크나큰 상처를 입었겠지.

'감히…!'

샬럿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자신이 있는 이곳에서….

위대한 슈하림 황가의 혈족이…!

그것도 자신이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황자가 다쳤다?

'....'

샬럿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서리가 휘몰아친다. 그 감정에 반응하듯, 사역마인 얼음 늑대들이 붙잡은 마수 조련사를 덮쳐 쓰러뜨렸다.

날카로운 얼음 이빨이 물어뜯자, 벨이 비명을 지른다.

"그, 그만! 그만-! 으아아아악─!"

샬럿은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한다.

물어뜯기던 마수 조련사 벨은 고개를 들어 샬럿을 쳐다봤다.

"뭐, 뭐야? 네, 네놈이 이 사역마들의 소환사냐? 하, 항복이다! 당장 이놈들을 풀…."

샬럿이 도끼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냉혈한 초점 없는 눈빛에 벨은 입을 다물었다.

벨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 잠깐."

어렵게 내뱉은 용기 있는 말이었지만, 샬럿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벨을 노려볼 뿐.

커다란 도끼날이 번쩍이며 서리가 낀다.

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주, 죽이지 마!"

샬럿이 도끼를 들어 올린다.

"안-!"

그리고 내려쳤다.

***

'설마 이번 일의 발단으로 중간 보스몹이 된 건가?'

아서는 카를라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셀롬의 발을 잡았다.

카를라를 업고, 셀롬을 질질 끌며 숲속을 나가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아…빠…."

아서는 등에 업힌 카를라를 쳐다봤다.

잠꼬대인가?

자신의 목을 감싸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서는 생각했다.

이번 사건으로 카를라가 중간 보스가 되는 건 막은 것일까?

간혹 있다.

[판타지 월드]의 스토리에서 적에게 잡혀 회유를 당하거나 고문이나 협박에 버티지 못해 적의 세력에 가담하거나 혹은 세뇌되는 경우가.

이 아가씨 또한 그러했을지 아닐지는 아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주야장천 사냥만 했을 뿐이었고, 세부 스토리에는 무관심했으니까.

특히 '불꽃과 복수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커뮤니티에 많았지만, 그녀의 과거는 추측성 이야기만 있을 뿐, 진실을 아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결국은 지켜봐야 한다는 거겠지.

"무슨 일이야!"

그때 노교수와 에인헤르들이 다가왔다.

황적색 갑옷을 입고 커다란 방패, 검과 창, 머스킷 소총을 든 채 다가온 그들은 아서와 카를라, 셀롬을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침입자입니다."

"치, 침입자?"

"괴한 둘입니다. 한 명은 사망, 한 명은 도주했지만…."

숲속에서 얼음 늑대들이 스쳐 지나가고, 나무 위에서 은발의 여인이 뛰어가는 모습이 슬쩍 보였었다.

아서는 가볍게 말했다.

"아마 잡혔을 겁니다. 뒤처리를 부탁합니다."

"무슨…? 그래, 일단 조사에 들어가마. 그럼 이번 강의는 중지하는 것으로…?"

에인헤르들이 노교수를 쳐다보자, 노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라네! 총장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진행하라고 하셨어…!"

에인헤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아서는 따로 말리지 않았다.

'샬럿이 있다면 다른 생도들도 안전하겠지.'

강의를 속행하라는 말에 에인헤르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원 병력을 불러 경비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아서가 고갯짓으로 등에 업힌 카를라를 가리켰다.

"카를라 생도가 많이 다쳤었습니다. 일단 안정을 취하는 게."

"그래, 알았다. 너도 다친 거 같으니 치료를 받으렴."

"아, 제 몸에 묻은 피는 제 것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에인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를라를 조심히 들것에 올렸다. 그리고 셀롬 또한 조심스레 데려가려고 할 때.

"아, 그놈이 진범입니다."

"...?"

"침입자를 고용했던 모양입니다."

에인헤르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셀롬을 내려다봤다.

"그렇군. 일단 조사를…."

"괜찮습니다."

에인헤르들이 아서를 쳐다봤다.

아서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말했다.

"대신 통신용 전화 회선을 연결해 주시겠습니까?"

에인헤르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전화? 어디로…?"

아서는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슈하림 황실로 부탁드립니다."

***

아스톤 자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하늘이다.

골프 치기엔 딱 좋은 날씨다.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 셀롬 아스톤! 지금쯤 강의를 잘 듣고 있겠지?'

지금쯤 고용했던 암부들이 아서 생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아버지가 최고예요! 사랑합니다!

아스톤 자작은 오늘 집으로 돌아올 아들내미의 사랑스러운 어리광을 기대했다.

하나뿐인 아들이니 애지중지 키워 이 위대한 아스톤 가문을 그대로 상속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골프 연습을 하고 돌아온 아스톤 자작은 골프채가 담긴 가방을 든 채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아스톤 자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찝찝할까?'

아스톤 자작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서를 떠올렸다.

'그놈 어디서 봤었던 거 같지?'

처음 아들 퇴학 소식에 분노하여 알아채진 못했지만, 분명 안면이 있는 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이토록 찝찝한 느낌을 받는다는 건 분명. '고위 귀족'과 관련되었을 터였다.

'에이, 아니겠지. 분명 시골 변방 출신이라고….'

-황제 폐하의 성절을 축하드리옵니다!

저택으로 향하던 아스톤 자작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화, 황제 폐하, 성절을 추, 축하하옵니다.

아스톤 자작의 눈이 커졌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온몸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내렸다.

'…맙소사.'

아스톤 자작은 떠올렸다.

그것은 10년 전, 황궁에서 일어난 대제국 슈하림 황제의 성절.

그곳에 있던 꽃다발을 든 10살의 작은 아이.

밤갈색 머리카락과 황적색 눈동자를 가진 작은 소년.

자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시종장이 말한 이름.

-아서 슈하림 전하께서 황제 폐하의 성절을 위해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옵니다.

그래, 생각났다.

10년 전 그 꼬맹이!

'4황자! 아서 슈하림!'

아스톤 자작은 공포에 질렸다.

4황자, 아서 슈하림. 그가 지금, 리바이트 아카데미의 생도로 입학해 있었다.

아스톤 자작은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비명을 질렀으리라.

'맙소사! 안 돼. 아닐 거다. 아니, 일단 조사부터…!'

아스톤 자작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저택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젖혀 외쳤다.

"당장 황도로 가는 열차 티켓을 준비하라! 제국 수도로 간다. 그곳으로 가 황제 폐하를 배알…."

아스톤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저택은 조용했다.

일하던 하인과 하녀들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으며.

저택을 지키는 자작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우뚝 선 자들이 있다.

매의 머리를 조각한 듯한 투구.

전신을 감싼 묵직한 황금빛 갑주.

황금 태양이 그려진 붉은 망토를 두른 육중한 기사들이 서 있다.

제국 황실, 슈하림 황제가 직접 창설한 마법과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검사 집단.

'태양 기사단!'

개인 하나, 하나가 숙련된 기사 수십 명이 덤벼도 이기질 못할 그들이 저택에 도열해 있었다.

"...."

아스톤 자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이 서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의 기사 중 하나가 자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도 숙이지 않은 채, 오히려 그를 내리 깔보듯 고개를 치켜들며 그에게 말했다.

"서재로 가도록. 황태자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위엄있는 목소리에 거절하지도 못했다.

아스톤 자작은 골프 백을 든 채 조용히 황금 기사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별도의 신체검사를 하지 않은 것에서 황태자를 지키는 태양 기사단의 자신감이 돋보였다.

'망했다! 젠장!'

아스톤 자작은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처형대에 끌려가는 죄인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대체 왜 황자가 리바이트 아카데미에 있는 거냐…!'

분명 아서. 그자 때문에 이 저택에 황태자가 왔으리라!

서재의 문이 열리자, 서재 테이블 앞에 앉아서 문서들을 훑어보는 사내가 보였다.

아스톤 자작은 공포심이 밀려왔다. 그를 보자마자 바로 엎드렸다.

돌바닥에 쿵하고 머리를 내려찍었다. 그리고 목청껏 소리쳤다.

"위, 위대한 슈하림 제국 만세! 룬과 마법의 축복이 있나니…! 위대한 혈족, 루시안 황태자님을 뵙나이다!!"

그와 달리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게. 아스톤 자작."

슈하림 제국의 황위 계승권 서열 1위.

황태자 루시안 슈하림.

그가 아스톤 자작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역적이 된 기분은 어떠한가?"

제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