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신성 마법사의 집! (2)
나는 리퓨에 여신을 섬기는 네 번째 종이자 테트라디아의 마도사, 생디슈 브란체프.
여신의 종과 테트라디아의 마도사가 어찌 한 몸에 존재할 수 있느냐.
그리 물으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 생디슈 브란체프는 흔한 시골 영지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 * *
...고찰해야 할 것은, '신성력과 마력은 어찌하여 함께 다룰 수 없는가'에 관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재능이라 할 수 있겠다.
마력을 다루고 마법을 깨우치는 것은 순수한 재능의 영역.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노력을 기울여도 보통 재능으로는 4서클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마법이다.
그렇다면 신성은 어떤가.
사실 신성이야말로 재능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신실함이 깔려 있다는 전재 하에 신의 선택을 받은 자.
그렇다. 나, 생디슈 브란체프는 이 두 가지 재능을 모두 타고난 천재 중의 천재.
어찌나 재능이 넘쳤는지 돌이켜 보자면....
* * *
...우리 젊은 마법사들은 이를 계기로 의기투합했다.
마법 꼰대들은 우리를 X세대라 부르며 마법의 근간을 뒤흔들 최악의 세대라 평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정통은 존중받고 기억해야 하지만,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고 멍청한 짓이다.
신에게 맞선다느니, 법칙을 뒤바꿀 궁극의 마법을 만들겠다느니.
얼마나 고리타분한 옛날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요즘 시대는 바야흐로 대화합의 시대. 신과 마법 또한 공존할 수 있는 시대.
우리는 그리 생각했고 결국 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대의 천재 마법사이자 리퓨에의 선택을 받은 나, 생디슈 브란체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 * *
...요는 주도권이었다. 어느 것에 힘을 실을 것이냐.
마력을 주로 삼고 신성을 보조로 삼자니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쓸데없이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지기만 할 뿐, 다른 마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성에 주를 두고 마력은 그것을 보조한다.
정답이었다.
허나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기존의 신성술보다 조금 낫긴 했으나 들인 노력과 시간, 필요한 재능에 비한다면 상승폭이 작은 것이다.
우리는 더 연구해야 했다. 남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결국 같은 것만 보일 터.
그러니 시선을 더욱 낮췄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다.
마력이 아닌, 신성을.
마력은 테트라디아라는 초거대 집단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졌지만, 신성은 그렇지 않았다.
나 역시 리퓨에의 종이었기에 교단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으니.
오직 믿음과 기도만이 강조될 뿐, 뭐든 분석하는 마법사들처럼 신의 힘을 분석하고 파고들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불경하다 여기는 사제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사제임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테트라디아의 인정을 받은 마도사.
나와 함께하는 이들 역시 나보다 많이... 아니 조금 아래긴 하지만, 어쨌든 꽤 괜찮은 녀석들.
그러니 우린 신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알아낸 것이다.
신성에도 종류가 있음을.
어떤 신을 모시느냐. 어느 교단이냐에 따라서 그 성질이 확연히 다름을 말이다.
리퓨에의 신성은 희망이었다.
가장 밝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빛난다.
가장 높지도 않았지만,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
뒤에 있지는 않다. 언제나 앞에서 빛나고 미래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한 성질을 고스란히 담았다.
나는 신이 아니었기에 그 모든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마력의 보조가 필수적이었다.
나의 신성 마법은 그렇게 완성된 것이었다.
이 감동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만들어진 마법을 부여잡고 하루 내리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희망이다.
희망과 가장 가까운 마법이라 단언할 수 있다.
사랑의 신성처럼 화려하지도, 지배의 신성처럼 가장 높지도 않지만, 이는 희망이었다.
언젠가 분명 온 세상이 이를 바라보고 희망을 떠올릴 날을 소망하며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조금만 더 다듬은 후에 정식 마법 중 하나로 등록할 것이고.
테트라디아와 리퓨에 교단 양쪽의 인정을 받은 최초의 신성 마법이 될 것이라 나는 자신한다.
* * *
유례없는 전쟁이다.
절망적인 재앙 앞에서 우리는 나서기로 했다.
나를 필두로 신성 마법을 완성한 젊은 마법사들이 함께한다.
죽음 신을 모시는 사제이자 마도사, 베린 바딤.
사랑 신을 모시는 사제이자 상급 마도사, 로이시아.
희망 신을 모시는 사제이자 마도사, 본인 생디슈 브란체프 등.
나는 재앙 앞에서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나의 마법은 곧 희망이니 살아남아야만 한다.
리퓨에를 위하여.
이 아름다운 대륙을 위하여 나는 기꺼이 희망이 되리라.
그것이 내가 신성 마법을 완성한 이유이자 여신께서 내게 신성을 내린 이유일 것이다.
희망이란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다시 돌아와 기록을 이어가리.
...반드시.
* * *
책을 덮은 히오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것을 끝으로 기록이 더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직 뒤에 남은 페이지가 많았음에도 말이다.
"생디슈 브란체프. 신성 마법을 개척한 마도사라...."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신성 마법사의 집, 지하 3층.
너른 공간.
벽을 포함한 모든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것은 전부 책이었다.
신성과 마법을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의 흔적.
그것에 대한 분석과 방법에 대한 연구.
그리고 방금 읽은 생디슈의 기록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상태였었다.
잉크는 마르고 깃펜은 바스라졌지만, 책 만큼은 조금의 손상도 없이 그대로.
- 생디슈 브란체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야. 당시에는 젊은 마법사끼리 뭉쳐 다니기에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이 많았었는데... 결국 자신만의 정의를 세우고 그만의 신성 마법을 완성해 낸 모양이로군.
푸르넬과 동시대를 살았던 마법사.
다만 푸르넬은 네크로맨서의 학파였고 전쟁 직전에 그 재능을 시기한 스승으로 인해 스팩터가 되어 버렸지만, 그 사이에 생디슈는 신성 마법을 완성하고 전쟁까지 참여한 것으로 보였다.
"...혹시 네가 여기 나온 꼰대 마법사 중 한 명은 아니지?"
- 그, 글쎄? 나, 나는 모르는 일이라네?
"에휴, 그럼 그렇지."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역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푸르넬은 말이 많고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며 시체를 바라보며 음침하게 웃는 그런 마법사였던 것이다.
- 아니 그 정도는....
지하 3층은 가히 작은 도서관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은 서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도착과 동시에 꽤 오래 머물러야 할 것임을 직감했고 거점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 사소한 헤프닝이 몇 개 있었지만... 뭐, 무사히 잘 넘어갔고.
신성 마법사의 집은, 적어도 겉모습은 깔끔하고 평범한 2층짜리 주택으로 재탄생 중이었다.
"그나저나 교단마다 가진 신성의 종류가 다르다니. 생각도 못했어."
- 같은 마음이라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신성력은 리퓨에의 신성인가?"
- 글쎄... 변수를 안배하고 시스템을 설계한 것은 다른 모든 신이 참여하지 않았겠나. 어떤 신의 힘인지는 그걸 통해서 비교해 보면 되겠지.
방법은 이곳에 널린 서적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이 제법 골치 아프긴 했으나 직접 맨땅부터 시작한 생디슈란 마법사에 비할 바는 아닐 터.
뭐, 푸르넬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게... 성물이란 말이지."
이곳 신성 마법사의 집 지하 3층에는 성물에 준하는 물건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금의 기준이 아닌, 당시의 기준으로 성물급이라는 말이다.
주변에 아이라이츠가 없는 것을 확인한 히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돌을 꺼내 들었다.
손톱만큼 작지만, 은은하고 성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돌.
「리퓨에의 작은 돌 (신성)」
「희망의 여신, 리퓨에의 신성이 담긴 돌.」
「신성의 근간이 담겨 있기에 파괴되지 않는 한, 무한한 신성이 흐른다.」
「'신성'이 존재하는 범위 내의 모든 존재에게 안정을 가져다줍니다.」
「보유 시 스탯 '신성' +65」
「신성력 회복 속도 +150%」
「신성 관련 모든 효과 +150%」
이것이 지하 3층에서 느껴지던 강한 신성력의 주인이었다.
리퓨에의 작은 돌.
당시에도 성물 취급을 받을 정도의 물건.
이게 여기 있다는 의미는....
- 훔쳤겠지.
생디슈가 추기경 급의 인물도 아니고 어찌 이만한 물건이 여기 있겠는가.
뻔한 것이다.
- 생디슈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어.
그 역시 사제임과 동시에 뼛속까지 마법사였으니.
마법을 위해서라면 성물을 훔쳐서라도 연구를 이어 가는 미친놈들의 집단.
그게 바로 마법사였다.
"어쨌든 이 성물에 담긴 것은 확실히 리퓨에의 신성이니까. 이거랑 비교해서 분석해 보면 된다는 말이네."
할 일이 급격하게 늘어난 셈이었다.
리퓨에 여신에게 받은 〔용(龍) 소환술의 서〕도 연구해야 하고.
마탑에 가서 5서클에도 올라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전혀 다른 방식의 신성 마법이라는 것을 공부해야 하니....
오죽했으면 지하 4층까지 있는 걸 확인했음에도 아직 테트라디아로 넘어가지 않았겠는가.
- 게다가 기록을 살펴보면 이것 외에도 다른 교단의 신성 마법 또한 찾아볼 가치가 있지 않겠나?
"그렇지. 신성 마법이란 게 정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면 다른 신성도 찾아봐야겠지."
- 여기 있는 모든 서적을 뒤져 보면 다른 신성 마법사의 집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게야. 그래도... 그건 조금 천천히 하세나. 즐거운 연구거리가 이미 차고 넘치니 말이야.
"즐거운 건 모르겠고... 당분간 죽었다 생각하고 박혀 있어야겠네."
시간이 썩 널널한 것은 아니다.
51층의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며 세상에 게이트가 터져 나가고.
그것이 이제 수습되어 가는 단계.
그러니 52층의 공략 게이트가 활성화되기 전까지 부지런히 경지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 이럴 때일수록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네. 괜히 욕심 내서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하는 순간 더 꼬이고 복잡해질 게야.
"맞는 말이긴 하지. 5서클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고대 마법인 용 소환술의 해석, 처음 보는 방식의 신성 마법의 연구와 연습까지 뭐 하나 만만한 게 없네."
하나를 확실하게 정한 다음, 해결하고 난 후에 그 다음 것을 익혀야 할 터.
- 그럼 정하게. 5서클, 리퓨에 여신이 남긴 고대 마법 용 소환술, 신성 마법. 뭐부터 할 텐가?
"무엇을 먼저 익힐 것이냐라...."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셋 전부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되고 52층의 어비스부터는 직접 참여하겠다 마음먹었으니, 무엇을 먼저 익히느냐에 따라 전투의 향방이 갈리지 않겠는가.
제법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속으로는 어느 정도 결정을 내렸음에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본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그래도 역시...."
답은 나와 있었으니.
"신성 마법 먼저 익혀 보자."
손에 들린 작고 새하얀 돌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히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얗고 은은한 빛은 마치 그 신성의 주인을 꼭 닮은 듯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그런 모습.
이제는 깊은 잠에 빠졌을 온통 새하얗던 여신의 모습.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희망.
"희망이라...."
히오의 머릿속에 각인된 마지막 희망의 모습이었다.
* * *
신성 마법을 가장 먼저 익히기로 결정한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정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으니 곧장 주변에 가득한 서적을 탐독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신성의 종류를 분석했다.
우선 리퓨에의 돌과 히오가 가진 신성력을 비교해 봤는데.
"...아니네."
둘은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리퓨에의 신성은 확실한 특색이 있는 반면, 히오의 신성은 뭐랄까.
마치 모두를 위해 만들어진 신성력이라고나 할까.
큰 특색이 없는, 신성을 위한 신성.
그런 느낌이었다.
- 그래도 생디슈가 남긴 성물이 있으니 리퓨에의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겠구먼.
다행인 점은 히오가 웬만한 고위 사제 못지않은 신성력을 보유하고 다룰 수 있다는 점.
게다가 아직 신성력 스탯을 더욱 올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 신성이 모자라지는 않으니 계속 실험해 보세나.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난다.
최우선 과제는 성물에서 느껴지는 신성처럼 히오의 신성력을 변화시키는 것.
생디슈의 신성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것을 위한 준비물은 이곳 마법사의 집에 모두 갖춰져 있었기에 불필요한 시간의 낭비는 없었다.
생디슈가 남긴 연구 자료를 몇 번씩 반복해서 읽고.
신성력을 뽑아내어 담을 수 있는 특수한 용기에 담아 서로 비교하며 다른 것을 구분해 낸다.
그런 과정에서 알아낸 것인데, 히오가 보유한 신성력.
그러니까 시스템을 통해 얻어 낸 신성력에는 분명 리퓨에 신성의 특징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리퓨에뿐만 아니라 다른 신의 수많은 신성도 함께 있는 것인지 그 내용이 무척이나 방대했다.
다만 너무 많은 정보와 내용이 들어 있는 탓에 이 상태 그대로는 생디슈의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정확히 리퓨에의 신성만 남기고 나머지는 덜어 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법을 사용하는 그 순간에 말이다.
그뿐인가.
동시에 마력 또한 보조로서 움직여야 한다.
서클에 새긴 문양의 힘 또한 함께 발휘되어야 신성의 특징을 완전히 끌어낼 수 있다.
한마디로 더럽게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마력 감응의 천재이지 않은가.
게다가 4서클까지 오르며 쌓은 경험도 있지 않나.
신성력을 다루는 것 또한 큰 틀은 비슷했기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고.
며칠 사이에 신성력을 다루는 감각과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성과가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넓고 서적이랑 이상한 기구가 많은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
신성에 담긴 다른 수많은 것들을 덜어 내고 오직 리퓨에의 신성과 똑같이 만든다.
이는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비유해 보자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작은 물체 속에 든 수천 가지 물질 중,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깎아 내는 느낌.
생디슈의 연구 자료와 연구를 위한 수많은 마법 기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음은 당연하고 그 과정에서 신성력을 다루는 실력이 큰 발전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찌저찌 거기까지는 성공한 것이다.
허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렇게 다듬어진 신성을 활용하고 마력의 힘과 접목해 원하는 힘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순간에 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성 마법의 완성이었으니.
- 여기까지 오니 슬슬 윤곽이 드러나는구먼.
윤곽이 드러난다.
기록에 적혀 있던 신성 마법. 그 효과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게... 신성 마법."
- 과연 혁명이야. 이것이 전쟁 이전, 조금만 일찍 세상에 드러났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어.
그 내용은 히오와 푸르넬의 말문이 순간 막힐 정도로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다.
생디슈가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 낸 것은 총 세 가지의 신성 마법.
「희망 신성 마법 - 마음」
- 희망의 특징 중 하나는 품은 순간, 마음이 활기를 띠고 충족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만든 첫 번째 마법이다.
「희망 신성 마법 - 불을 밝혀라」
- 희망은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더욱 탐스러워진다. 많은 이가 품으면 품을수록 밝게 빛나는 것이다. 그러니 상황이 어려울수록, 많은 이가 지켜볼수록 희망은 결코 쓰러질 수 없다. 두 번째 마법은 이러한 특징을 발현한다.
「희망 신성 마법 - 소망」
- 희망이란 결국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는 기도. 그러니 세 번째 마법은 희망 그 자체이자 희망이 품은 소망. 이것으로 표할 수 있는 궁극적 마법.
...
수많은 시도 끝에 첫 번째 신성 마법을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이 주의 시간을 온전히 쏟아부은 후였다.
131화 신성 마법사의 집! (3)
채앵-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언제나 엇비슷하게 들려오지만, 실은 전혀 다르다.
자신은 어떤 힘으로, 상대는 어떤 의도로.
어느 각도로 어디를 노린 것인지.
진심을 다한 것인지 함정을 위한 허수인지.
그 모든 것들이 맞물려 언제나 다른 소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상대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마주하며 발생하는 황홀한 음율.
세상 그 어떤 음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환상적인 음악.
데이먼이 생각하는 검술이란, 대련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름다우며 짜릿하고 상대와 한결 가까워지는 느낌.
상대는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자신은 상대의 생각을 읽으며 그것이 검을 통해서 분출되고 또 전달되는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한 행위이다.
위대한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이 이끄는 황제의 친위대 로열 나이츠.
데이먼 리에프테는 그런 로열 나이츠의 일원이며 비탈리아누스를 존경하는 한 명의 검사임과 동시에 훌륭한 스킬을 각성한 스킬 사용자였다.
채앵-!
강자라는 의미였다.
로열 나이트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드넓은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강자였으니.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과 그에 어울리는 극한의 쾌검.
상대의 뒤를 한순간에 점하는 공간 계열의 스킬은 그를 대인전 무패의 기사로 만들어 준 이론상 완벽한 조합이었다.
평생을 단련한 기사라 할지라도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목에 검이 드리워지는 공포의 쾌검.
물론 이론과 실전은 다른 것이어서 데이먼의 검이 가로막힌 적은 있었지만, 절망적일 정도로 무기력함을 느껴본 것은 단언컨대 한 번뿐이리라.
대륙 최강자 중 일인이자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
이메니아에 침입한 그를 향해 호기롭게 달려들었다가 순식간에 내팽개쳐진 경험이 그것이었다.
닿는 순간 느낀 강렬한 촉.
절대 이 안개를 뚫어 낼 수 없겠다는 확실한 직감과 더불어 마음속에는 실존하지 않는 벽이 생겼었다.
마치 결코 이길 수 없는, 벽 너머의 존재를 상대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을 겪었기에 단련은 쉬지 않았다.
당시와 비교해서 그의 검은 더욱 쾌속해졌고 스킬은 극도로 은밀해졌으며 커다란 동작없이 검을 뽑는 발검술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한데 눈앞의 이 사내는 무어란 말인가.
넘을 수 없는 벽.
그런 벽을 또다시 만난 느낌이다.
채애앵-!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울림은 맑지 않다.
벽을 만난 검이란 그런 것이다.
데이먼의 시선은 상대에게 향했으나 상대의 시선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
분명 눈은 자신을 보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였다.
자신이 아닌 아득한 뒤쪽을 바라보는 눈.
마치 데이먼 자신 정도는 눈에 밟히지도 않는 듯한 무심한 시선.
그것이 못내 분하였기에 데이먼은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 예비 동작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검의 속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으며 동시에 어떤 전조도 없이 상대의 뒤에 나타났으니.
등장과 동시에 상대의 목에 검이 틀어박히는 것이 당연한 수순.
허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채앵!
막혔다.
극한의 쾌검과 공간 이동 스킬이 합쳐진, 필살의 기술과 다름이 없었음에도 막혔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크윽!"
막음과 동시에 내질러진 군홧발에 복부를 얻어맞은 데이먼이 바닥을 뒹군다.
한순간에 승패가 결정난 것이다.
아니, 사실 승패야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데이먼 리에프테."
눈앞의 상대는 상상 이상의 괴물이었으니까.
"로열 나이트 중에서 대인전이 가장 강하다는 이도 겨우 이 정도인가."
무심하게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에 데이먼의 시선이 상대에게 향한다.
사내치고는 길게 묶은 금발에 단단한 상체.
저자가 바로 한때는 검성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던 신성.
"안티푸스 프라만."
혜성처럼 나타나 황실 제2기사단의 장까지 빠르게 올라온 자.
안티푸스 프라만.
그가 강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격차라니.
이건 뭔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지."
"그 말은 이제 이유가 생겼다는 말로 들리는데."
"반대야.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
애초에 수도 안정화 임무에 투입되었을 2기사단의 단장이 이곳에 와서 데이먼에게 대련을 요구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더불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는 저 말.
마치 황실 기사단장이라는 거대한 직위를 내려놓고 떠나겠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런 데이먼의 생각에 확신이라도 심어주려는 듯 안티푸스의 무심한 입이 재차 열린다.
"떠나기 전에 검성과 한번 붙어 보고 싶었지만... 너를 보니 그 위대하다는 검성의 실력도 대충은 알겠군."
"...뭐?"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단장, 안티푸스... 프라만."
몸을 일으키는 데이먼의 눈에 흔치 않게 분노가 일렁인다.
허나 안티푸스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수호 기사의 패를 그녀석이 가져가면서 많이 꼬이긴 했어도 썩 나쁘지는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만, 그 입을 닫아라. 네 말에는 존중이 담겨 있지 않다."
"약한 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안티푸스!"
분노한 데이먼이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린다.
"제국의 명예로운 단장 중 한 명이었던 네가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오해하나 본데 그냥 은퇴하려는 것뿐이다. 얻을 수 있는 것,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거든."
"그렇다면 정정할 기회를 주지. 로열 나이츠를, 나아가 위대한 검성을 모욕한 것을 사죄하고 경의을 담아라. 황실에 감사를 표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행동해라, 안티푸스 프라만."
제국 황실의 기사단장이 자신이 원한다고 대뜸 은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물며 친위대인 로열 나이츠를, 그 정점에 있는 검성 비탈리아누스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까지 내뱉다니.
데이먼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힘이 필요한 시대지."
하지만 안티푸스는 데이먼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 시대에 나는 완성되었으니."
데이먼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로열 나이트 정도가 아니었다.
이는 세상에 나서기 전, 치르는 일종의 확인 절차.
그는 언제나 완벽했고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사내였으니.
"결국 모든 건 나의 아래에 놓이는 것이다."
랭킹 2위. 안티푸스 프라만.
바깥에서 부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
물론 이를 알 리 없는 데이먼은 안티푸스의 광오한 말에 실소를 터트린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였군."
그가 강한 것은 맞지만, 하늘 위에는 또다른 하늘이 있는 법.
가령 이메니아의 하늘처럼.
바알 숲 안개의 중심처럼.
범인은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 그들만의 세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그런가. 너는 두 사람을 모두 만나 봤으니 그리 말하는 것이겠어. 하늘 위의 하늘이라."
그제서야 안티푸스의 시선이 저 높은 곳이 아닌, 데이먼을 향한다.
"그럼 묻지."
동시에 천천히 들어올리는 검.
무심한 눈에 담긴 것은 끝없는 대지.
데이먼은 극도로 긴장하며 온힘을 다해 오러를 끌어올렸으나.
"나의 검은 하늘을 뒤집을 수 있는가."
그의 세상이 뒤집히는 데에는 단 한 합이면 충분했다.
* * *
정신을 공격하는 계열의 스킬은 희귀하다.
따라서 정신을 방어하는 계열의 스킬은 더욱 희귀하다.
그런 연유로 2주의 시간에 걸쳐 배운 첫 번째 신성 마법 '마음'은 매우 훌륭한 마법이라 할 수 있겠다.
「신성 마법 - '마음'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신성 마법 - '마음'을 스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신성 마법 - '마음'이 스킬로 등록됩니다.」
「스킬 : 마음」
「희망의 특성을 담은 신성 마법.」
「범위 내 모든 아군에게 높은 수준의 정신 방벽을 생성합니다.」
「시전자는 '희망'으로 지정됩니다.」
「'희망'이 쓰러지지 않는한 아군의 높은 정신 방벽은 계속 유지됩니다.」
「단, '희망'이 위태롭거나 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방벽은 허물어지고 급격한 불안 증세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아군으로 지정된 모든 이의 정신 방벽을 높여 주는 효과.
히오 본인의 정신 방벽은 특성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덕분에 매우 높은 편이나 다른 이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지난번 심연에 다프네와 함께 그녀의 정신을 보호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때마침 '천상'을 진화하지 못했다면 다프네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됐으리라.
허나 다음에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천상'은 마력과 신성력의 소모가 막대하기에 오래 유지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번에 익힌 신성 마법 '마음'이 훌륭한 것이다.
혹, 이전처럼 심연의 변수가 나타난다 해도 다른 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첫 신성 마법을 완성하자 두 번째는 한결 나았다.
물론 '한결 나아졌다'지 여전히 쉬운 것은 아니었고 일주일을 밤낮으로 연구하고 연습하였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두 번째 신성 마법.
불을 밝혀라.
「신성 마법 - '불을 밝혀라'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신성 마법 - '불을 밝혀라'를 스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신성 마법 - '불을 밝혀라'가 스킬로 등록됩니다.」
「스킬 : 불을 밝혀라」
「희망의 특성을 담은 신성 마법.」
「'희망'으로 지정된 대상에게 기본 스탯 '체력', '민첩', '근력', '마력'과 희귀 스탯 '신성력'을 부여합니다.」
「'희망'으로 지정된 대상은 일정 시간 동안 특성 '고통 면역'을 획득합니다.」
「'고통 면역'의 지속 시간과 스탯의 상승 수치는 '희망'을 인지하고 있는 아군의 숫자, 의지하는 마음의 크기에 비례하여 상승합니다.」
두 번째 신성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신성 마법, 마음.
먼저 '마음'을 발동해 아군에게 희망으로 인식된 다음, 두 번째 신성 마법 '불을 밝혀라'를 발동하는 것이다.
스탯 체력, 민첩, 근력, 마력, 신성력을 모두 상승시켜 주는 데다가 잠시나마 새로운 특성 '고통 면역'까지 얻게 해주는, 상당히 독특한 효과.
생디슈가 마법서에 첨언해 놓았던 대로 희망이란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더욱 빛나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
그러니 스탯의 상승폭 또한 희망을 많이 품고 그것을 더 간절히 바랄수록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큰 힘을 주는 희망의 신성 마법이라니.
결국 희망에 기대야만 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사용하는 마법이라는 뜻이 아닌가.
가능만 하다면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 해결하는 것이 최선임은 당연했다.
"아무튼, 이 정도인가."
3주 간 노력의 결과 생디슈가 남긴 세 개의 신성 마법 중 두 개를 익혔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복잡하고 전례없는 유형의 마법임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푸르넬이 함께 연구해 주었고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을 보유했으며 신성력 또한 잘 다를 수 있었기에.
4서클에 오른 마법사이자 5서클의 자격을 갖추었고 시스템의 보조까지 있었으니 가능한 속도였지.
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렸으리라.
- 세 번째 신성 마법은 아쉽게도 안 되겠구먼.
"그러게... 이건 생디슈도 완성하지 못했어."
그는 분명 세 가지 마법을 모두 완성하고 세상에 희망의 신성 마법을 알릴 생각이었을 테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마법은 완성되지 못했다.
신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순전히 마법적인 문제.
생디슈가 이루었던 5서클의 경지로도 발현이 불가능한 마법이었으니, 그야말로 희망 신성의 궁극이라 할 만한 마법인 것이다.
- 그래도 이론은 어느정도 있으니 자네 경지만 올린다면 연구를 이어 갈 수 있지 않겠나.
"그렇지. 못해도 6서클은 이루어야 실험이라도 해볼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마법이니... 지금은 두 번째 마법으로 만족해야겠지."
정신없이 지나온 3주의 시간이었다.
지상의 2층짜리 주택은 완성되었고 히오가 지하에 틀어박혀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아이라이츠가 손을 써 히오와 집의 공동 주인이 되어 버렸다.
뭐,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오히려 편했다.
"히오, 밥 먹자!"
앞치마를 두르고 왼손에는 나무 국자를 쥔 채로 내려오는 아이라이츠.
밥도 꼬박꼬박 챙겨 주고 그 외에 자잘한 문제들을 전부 나서서 처리해 주었으니 온전히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함께 있는 시간이 제법 많았다는 의미.
서로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밥 먹자고 내려오는 아이라이츠의 표정이 평소보다 밝은 것.
미소는 더욱 화사해지고 눈웃음은 더욱 생글해졌으며 괜스레 더욱 가까이 붙어 말을 걸어오는 점.
무언가 감추고 싶을 때 하는 아이라이츠의 행동이었다.
과연 히오에게 무엇을 감추고 싶어 하기에 이리 행동하는가.
그것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히오는 커다란 모자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히오와 함께하는 이다지도 평화로운 일상.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 역시 시간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하나뿐이었으니.
"게이트가 다시 나타났구나."
52층의 게이트가 시작된 것.
그에 아이라이츠는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응."
언제나 그랬듯,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132화 회의
최초의 각성자.
즉, 벤타이얼의 세상에 빙의된 빙의자들에게는 커다란 특징이 있다.
창이나 검과 같이 근접에서 직접 몸을 움직여 사용하는 무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위험하니까.
또 재능이 받쳐 주지를 않으니까.
제아무리 스킬과 특성이 받쳐 준다고 해도 평생토록 검이나 창 따위를 휘둘러볼 일이 있었겠는가.
스킬과 특성은 만능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마저도 랜덤으로 시작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명성이 필요했으니.
최초의 각성자 대부분이 자신의 스킬을 극한으로 활용하는 이능력자로 구성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사용하는 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기사의 낭만에 취해, 혹은 랜덤으로 부여받은 특성과 스킬이 근접 무기와 잘맞았기에 검이나 창을 든 빙의자들 또한 있었고....
현재는 대부분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불가능을 깨닫고 눈물을 머금으며 다른 방향으로 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깥 세상의 각성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
이곳은 바깥처럼 단계별로 게이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강해지는 방법 또한 너무도 달랐으니까.
몬스터의 강함 또한 훨씬 대단한 것이어서, 아무리 스킬을 얻었다고 한들 스킬을 사용한 이후에는?
순전히 자신의 역량으로 검을 휘두르고 적을 직접 찔러 죽여야 한다.
그렇기에 빙의자들 사이에서 근접 무기의 쇠퇴는 자연스레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러니 더욱이 돋보이는 것이다.
랭킹 2위, 안티푸스 프라만.
최초의 각성자 중 유일하게 검을 사용하는 마지막 검사.
2위 특전의 영향이 크긴 했으나 황실 제2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은 순전히 그의 노력과 뛰어난 역량 덕분이었다.
"...그런 안티푸스가 돌연 단장직을 내려놓고 황실을 떠났다라."
안티푸스가 기사단을 떠났다.
뭐, 전혀 예상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빙의자인 그가 제국에 충성하고 황실에 묶여 있을 이유가 무엇에 있단 말인가.
목적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고 그것이 끝나면 미련없이 떠날 것이라 추측했다.
그렇기에 실비아에게도 가만히 지켜만 보라고 조언했었고.
로열 나이트 데이먼에게 필요 이상의 힘을 과시하며 떠나긴 했지만, 안티푸스는 나름 조용히 떠난 셈이었다.
그 역시 제국의 범죄자가 되어 추격을 받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안티푸스도 본격적인 공략에 나서려는 모양이네."
그가 황실에 묶여 있었기에 그간 다프네의 주도로 공략이 이루어졌었다.
그들 간에 정확한 질서나 규칙은 모르지만, 안티푸스의 합류로 꽤 많은 것이 바뀔 터.
"우리도 이제 준비해야지."
"응. 그래야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보면 다소곳이 앉은 실비아가 보인다.
"그런데 히오, 오늘 좀 피곤해 보이네?"
"좀...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그럴 만한 일이란, 떼쓰는 아이라이츠를 떼어 놓고 오는 일이었다.
히오야 마탑의 포탈을 이용해 바로 이메니아로 갈 수 있지만, 아이라이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니 집에서 기다리라 했건만 어찌나 말을 듣지 않는지....
뭐, 어찌저찌 결국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준비는 어떻게 잘되어 가고 있어?"
"아무래도 우리쪽에서 들어가는 건 처음이다 보니까 더 철저하게 준비하려고. 히오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그래도 아직 불안해."
"빙의자들과는 협력하지 않을 생각인 거지?"
"우선은 그래. 결국에는 그들과 힘을 합쳐야겠지만, 당장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싶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해해."
빙의자의 존재를 처음 히오에게 들었을 때부터 실비아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저들 세계에서 넘어온 강자들이 어찌 그들의 세계도 아닌 곳을 목숨 걸고 지켜 주겠는가.
그리고 그 예상대로 이전의 51층에서 단체 로그아웃 사태가 벌어졌으니 실비아의 생각이 들어맞은 셈이었다.
"저들 역시 제국이 움직일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도 별다른 행동이 없다는 건 비슷한 생각이란 것이겠지."
우선 이번 52층에서 따로 움직이며 서로의 필요성을 확인한다.
제국 역시 강한 이능력자 집단인 빙의자들이 필요할 테고.
빙의자들 역시 제국의 방대하고도 막대한 무력 협조가 결국 필요해질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번 52층은 서로를 탐색하고 신뢰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
실비아 베르덴이라는 새로운 여제가 영혼을 보는 눈을 지닌 이상, 이전처럼 빙의자임을 속일 수는 없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서로 협조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니.
이번 층에서 서로가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미래의 공략 난이도가 달라질 것임은 분명했다.
"일주일 후에 층이 열릴 거야. 우선 선발대를 통해서 유형을 파악하고...."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사이에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 *
다프네가 이끄는 모험가 길드의 본부.
어비스 공략의 중심이었던 이곳 역시 회의가 한창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회의 참여 인원히 급감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신이라고 할까.
참여자의 질이 급격히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얼굴 보고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군. 2년 정도 됐나?"
5위 안쪽, 최상위 랭커들 중 히오와 아이라이츠를 제외한 모두가 참석했으니 말이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모였어. 계획대로라면 초반 저층 구간은 다프네 네가 도맡아 처리하고 나는 정치적 입지를, 안티푸스는 힘을 키운다는 게 큰틀이었잖나."
오랜만에 아카데미 밖으로 나온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한국에서는 구원자 남태민으로 통하는 랭킹 5위의 하이랭커.
그의 말에 다프네의 고개가 미미하게 까딱인다.
"공략 난이도가 이렇게 급상승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이전 51층이 결정적이었어. 50층의 이변을 직접 겪지 못했으니 51층에서 완전 멘탈이 나가 버린 거야."
회의장이 텅 비어 버린 이유였다.
진정한 어비스의 공포를 직접 마주한 빙의자들이 대거 이탈한 것이다.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보다 죽기 싫다는 본능이 압도적이었으니.
"언젠가는 걸러졌어야 할 놈들이지. 덕분에 인원은 줄었지만, 더 단단해진 셈이야."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도망치는 겁쟁이를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들이 도망친다면 남은 이들이 더욱 힘겨워지는데.
그런 면에서 여기 모인 이들은 51층에서 끝까지 발악하던 자들이었다.
공략에 참여하지 않고 비상시를 대비하던 시르베르트와 안티푸스를 제하더라도 충분히 강한 전력.
끝까지 공략에 참여하겠다 판단 내린 100위 내의 랭커들.
이들만큼은 마냥 운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 아님을 증명한 자들인 것이다.
그런 이들의 숫자가 대략 삼십여 명.
그들을 쭉 둘러본 안티푸스의 무거운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래서."
두터운 팔로 팔짱을 낀 채.
"지존 천마는 어디있지."
등에는 제 몸보다 큰 대검을 맨 채 찾는 이름은 지존 천마.
무심하게, 또 나지막이 내뱉어진 중저음에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일순간 모든 소음이 멎은 채 적막이 찾아온 것이다.
아주 미세한 소음도 없다는 것은 모두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긴장한다는 뜻.
이유야 단순한 것이다.
지존 천마를 향한 안티푸스의 광기 어린 집착은 게임이던 시절부터 유명한 것이었으니까.
아이라이츠의 집착과는 그 내용이, 결이 다른 종류.
조용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광기.
그 찰나간의 긴장과 무거운 적막을 깬 것은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남태민이었다.
"그 녀석이야 뭐, 이번 회의에 나타나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잖아. 보아하니 제국 측이랑 움직일 모양이더라."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시르베르트 역시 은연중에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르다.
안티푸스 프라만, 이전의 만남과는 달랐다.
마치 진정한 고위계 기사를 만났을 때의 느낌. 단단하게 전해져 오는 압박감.
2년 사이에 안티푸스는 진짜 기사와 다를 바가 없어졌으니.
거기에 그의 특전과 스킬까지 생각한다면...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제국은 완전히 우리의 손을 떠났어. 황녀... 아니, 황제의 능력으로 제국은 거의 한몸처럼 움직이고 있으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쪽은 지존 천마에게 맡기는 수밖에."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시르베르트는 말을 잇는다.
더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제국의 정치권.
어찌 보면 잘된 일일 수도 있고 또 어찌 보면 불안한 일일 수도 있다.
멸망에 앞서 제국이라는 초거대 집단이 하나로 뭉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의 통제 하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어떤 변수가 될지 알 수 없기에.
도대체가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더이상 제국 정치권에 간섭할 수가 없었기에 안티푸스와 시르베르트가 공략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지존 천마가 제국과 함께 움직인다면 우리는 우리끼리 움직여야 할 가능성이 높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하던대로 할 뿐이고 거기에 제국이라는 큰 조력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편하지."
다프네의 말이었고 그것이 핵심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신뢰를 잃었을 테니."
51층 공략의 실패.
고작 51층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층이 몇 개나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이제 중반부의 시작에서 벌써 실패하고 하찮은 단합력을 보여 주었지 않나.
그에 분노한 지존 천마가 직접 카메라에 대고 말했었지 않은가.
실력에 비해 과한 명성을 얻은 머저리들. 자신이 직접 지켜보겠다고 말이다.
결코 허언을 할 사내는 아니었으니 이번 공략에 분명 참여할 테다.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은 어찌보면 증명의 층.
진정한 최상위 랭커의 힘을.
그 능력과 단합을 보여 주어야만 하는 층.
물론.
"증명이라."
단 한 사람만큼은 그 말을 달리 받아들인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남은 시간은 일주일.
안티푸스의 눈에 짙은 흙빛이 일렁인다.
* * *
일주일.
히오가 4서클에 오를 준비를 마치고 다른 일과 병행하며 4서클에 오르는데 걸린 시간이다.
허면 5서클에 오를 준비가 된 지금,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오로지 5서클에만 집중하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인가.
- 글쎄... 워낙 특이한 경우라 예상할 수가 없군. 내가 살다살다 다섯 번째 서클을 일주일 안에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로 고민하는 날이 올 줄이야.
실비아와 긴 이야기를 마치고 바로 다시 돌아온 테트라디아 마탑.
두 가지 신성 마법을 익혔으니 이제 5서클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가능하면 52층의 공략에 들어가기 전에 5서클에 오를 수 있으면 좋겠지만...."
-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혹, 오를 수 있다고 해도 마법을 익힐 시간까지는 없을 게야.
다섯 번째 서클이야 어찌저찌 만들 수 있겠지만, 5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익히기에 일주일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물론 서클 하나를 더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마법의 안정감과 시전 속도, 위력이 상승한다는 말이었으니 큰 의미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쉽네. 배우고 싶은 게 무지막지하게 많은데 말이야."
4서클까지 필요한 마법만 정해 놓고 최소한으로 익혔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부터 가능한 많은 마법을 익히기 위함이었다.
5서클의 경지는 마법사를 넘어 마도사라 불리는 경지.
여태 배우지 못했던, 시간을 다루는 크로노맨시나 혈마법, 그림자 마법.
그리고 원소 마법의 위력도 전장의 흐름을 바꿀 정도로 위대해지는 것이었으니.
"우선 최대한 빠르게 익혀 보자."
일주일 안에 5서클에 오르기.
그리고 가능하다면 5서클 마법 하나 정도는 익히고 52층에 진입하기.
그것을 목표로 일주일 동안의 폐관 수련이 시작되었다.
133화 정복의 층 (1)
마력을 품은 핵, 마나 코어.
그것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는 문양의 모습은 마치 별과도 같다.
은은하게 빛나며 회전하는 수백 종류의 마법 문양.
마나 코어의 바로 앞에 있는, 가장 기초적인 문양으로 구성된 첫 번째 고리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세 번째로 갈수록 문양의 숫자는 늘어나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 또한 복잡해진다.
그만큼 조합할 수 있는 문양의 갯수가 급격히 많아지고 서클에 실린 마력의 힘은 더욱 묵직해지며 안정감이 커져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어이 다섯 번째 고리까지 완성되면.
그것은 진정 은하와도 같아지는 것이다.
넓은 우주를 채우는 별의 무리.
일정한 규칙으로 천천히 회전하며 빛나는 수백 개의 문양.
온몸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
막대한 마력이 힘을 감춘 채 도사리고 있고 그것을 언제든 뿜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전능한 기분.
상급 마법사를 넘어, 마도사의 경지에 이른 히오의 눈이 서서히 떠진다.
일순간 번뜩이는 안광은, 무수히 많은 별을 담은 마도사 특유의 현묘함.
몸에 은은하게 흐르는 기운은 화염 수호자의 팔찌에서 전해지는 불의 힘과 더불어 5서클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안정적으로 몸에 흐른다는 증거였으니.
- 역사상 가장 빠른 시일 내에 5서클에 오른 괴물로 기록해 놓아야겠구먼.
비로소 초인을 목전에 둔, 마도사의 품위가 몸에 흐른다 할 수 있겠다.
- 어떤가. 마도사가 된 기분은?
푸르넬의 본체가 예의 그 커다란 눈을 기괴하게 키우며 히죽 웃으며 물었고 히오는 자신의 몸을 쭉 둘러보며 마찬가지로 미소 짓는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야."
- 클클클. 자네가 워낙 빠르게 경지를 올려서 그렇지. 마도사란 그런 것이라네. 초인을 목전에 둔 인간. 천재가 별처럼 많은 테트라디아에서도 보기 드문,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주어지는 자.
과연 푸르넬이 그리 말할 만한 경지였다.
배로 늘어난 문양의 갯수와 그보다 더 복잡해진 활용 방식.
이전에 푸르넬이 모든 문양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숙달한 다음 서클에 새길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다면, 아마 여기서부터 가로막혀 꽤 긴 시간을 잡아먹혔을 터였다.
물론 이제 겨우 겉모습만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셈.
진짜라 할 수 있는 5서클의 마법서는 일부러 읽어 보지도 않았으니.
"며칠 정도 남았지?"
- 공략이 시작되기까지 36시간 정도 남았군. 대략 5일 만에 5서클의 벽을 뚫어 낸 셈이야.
"조금 더 줄일 수도 있었을 것 같았는데... 아쉽네."
- 허어... 남들은 하나의 서클이 오르는 데 못해도 수년. 완숙한 4서클의 경지에 오르고 5서클에 발을 걸치기까지가 최소 몇 달에서 최대 몇 년까지. 아니, 아예 5서클을 꿈의 경지라 여기고 좌절하는 이도 있지. 그러니 자네는 그 경지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마법의 위대함을 겪을 필요가 있어.
히오의 어깨에 내려앉아 진지하게 충고하는 푸르넬.
그 말대로 5서클까지 히오의 마법 경지는 순식간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6서클부터야 단순 마력으로는 불가능한 경지라 막히겠지만, 5서클이 어느 경지인가.
많은 마법사의 존경을 받는 마도사의 경지가 아닌가.
"하긴... 나는 처음부터 청염이나 뇌제 같은 스킬로 시작했으니."
그럼에도 언제나 전투의 주가 되는 것은 결국 스킬이었다.
뇌제나 청염의 막대한 공격력을 따라올 만한 마법이 없었으니 효율이 나지 않는 것이다.
- 이젠 다를 게야. 마도사의 위대함을 보여 주지.
푸르넬은 그런 히오의 인식이 바뀔 것이라 확신하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 몇몇 특수한 학파의 마법은 자네가 선택하고, 우선 내가 생각하기에 필수로 익혀야 할 5서클의 마법서라네.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책 전부가 5서클의 마법서였다.
이전 4서클까지는 히오가 원하는대로 마법서를 고른 것과 조금 다른 모습.
- 내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는 익혀야 해. 그래야 마도사라 할 수 있을 게야.
푸르넬의 단호한 말에 책상으로 다가가 마법서의 제목을 하나씩 살펴본다.
〔배리어〕
〔익스플로전〕
〔파이어 필라〕
〔플레어〕
〔파이어 월〕
〔레이 오브 프로스트〕
〔아이스 캐논〕
〔거스트 오브 윈드〕
〔윈드 블레이드〕
〔안티 매직 필드〕
...
무려 10개가 넘는 마법서.
하나씩 읽어 보던 히오가 문득 의문스럽다는 듯이 푸르넬을 보며 물었다.
"원소 마법이 많네. 특히 화염 속성이?"
여태까지는 일부러 원소 마법을 피했었다.
앞서 말했듯 마법을 쓸 바에는 뇌제와 청염을 사용하면 됐었으니까.
하지만 푸르넬이 준비한 마법서에는 원소 마법서만 절반 이상이지 않은가.
그런 히오의 의문에 푸르넬은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 그 두 가지 스킬이 강력한 것은 맞지만, 단점도 많아. 우선 마력 소모가 너무 크지 않나.
5서클에 이르러 마력 총량이 충분해졌다고 해도 언제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마력은 아끼면 아낄수록 좋았다.
- 5서클의 마법은 살상력이 뛰어나고 범위도 넓지. 상황에 맞는 마법을 사용해야지 매일 같이 청염과 뇌제로 때울 생각인가?
"공격과 회피를 전부 그 두 가지 스킬에 의존해서 하고 있으니까... 보완하긴 해야 했지."
- 그렇지! 그래서 무엇보다 뛰어난 사신 소환이라는 최상위 스킬이 봉인되다시피 한 게 아닌가. 사신을 소환하면 청염과 뇌제, 천상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들을 전부 익힌다면 그 끈끈인가 낑낑인가 하는 사신도 마음 놓고 소환할 수 있을 게야. 그 정도로 뛰어난 마법들이니까.
"낑낑이라... 확실히 어비스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낑낑이만 한 게 없긴 할 텐데."
어비스는 52층,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중반부 이후부터는 무조건 대량의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단일 개체, 즉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해야 하는 유형에도 기본적으로 수많은 어비스 몬스터를 뚫고 가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말인즉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이 활개치기 가장 좋은 장소라는 뜻.
사신으로부터 마력과 생명력, 죽음의 기운을 무한히 공급받으며 난사하듯이 펼치는 5서클의 마법이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푸르넬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원소 마법이 히오의 기대에 미칠 만큼의 위력이 되냐는 것인데.
- 위력은 내 보증하지. 괜히 마법사들 중에서 원소 마법사가 가장 많았던 게 아니야. 널리 알려졌다는 건, 그만큼 장점이 많다는 의미야. 게다가 자네는 화염 수호자의 팔찌까지 있지 않나. 불 속성 마법의 위력과 시전 속도를 높여 주는 보물 말일세.
히오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을 향한다.
은은한 붉은 빛을 내는 팔찌.
화염 수호자의 팔찌란 회색 성에서 크뢰츠발트의 삼신기와 함께 얻은 유니크 아티팩트.
위험시에 착용자를 스스로 보호해 주는 기능과 화염 속성 마법의 강화가 있어 늘 착용하고 다녔지만, 한 번도 유용하게 사용한 적은 없는 아티팩트였다.
어쨌든 푸르넬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한 히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네 조언대로 전부 익혀 볼게."
- 흐흐흐. 잘 생각했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야. 네크로맨시는 필수로 배워야 하고 특수 학파의 마법은 자네가 판단해서 고르게나.
"배울 게 너무 많은데...?"
- 마법사로서 축복이지 축복이야.
열 개가 넘는 원소 마법, 기본 마법에 네크로맨시와 특수 학파의 마법까지.
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감도 잡히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그렇다고 불만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히오의 입가에도 즐거움의 미소가 번져 있었으니.
공략까지 36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마법 하나를 제대로 배우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럼 보자... 뭘 먼저 익혀 볼까."
불기둥을 만들어내는 파이어 필라를 시작으로 실드의 상위 버전인 배리어 등.
책을 하나씩 훑어 내려가던 히오의 시선이 마지막 책에 고정된다.
"이건...."
〔블링크〕
역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쉽기 그지없었다.
* * *
때가 되었다.
52층의 공략을 위해 게이트가 열리는 날.
51층의 실패 이후 모든 게이트를 막아 내긴 했으나 한 달이라는 시간은 피해를 복구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이번 공략은 성공해야만 한다.
이렇게 피해가 누적되고 저주받은 기운이 쌓여 세상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선발대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52층은 정복의 층이라 예상됩니다."
대부분의 게이트는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물론 모든 게이트를 완벽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이전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온 어비스 몬스터를 경험했지 않은가.
목숨이 열 개라도 굳이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이는 없었다.
"정복의 층이라... 꽤 재미난 게 튀어나왔군."
그리하여 52층을 공략하는 원정대는 크게 두 부류.
제국에서 출정한, 심연으로부터 세상을 지켜내겠다는 멸사봉공의 원정대.
그리고 빙의자들로 구성된 모험가 길드의 원정대.
두 거대 세력은 각기 다른 게이트에서 서로 선발대를 보내 유형을 파악해 낸 것이다.
정보의 우위는 다프네와 시르베르트, 안티푸스를 위시한 원정대에 있었다.
안티푸스가 단장직을 내려놓고 황궁에서 나옴으로서 그를 따르는 모든 빙의자가 함께 빠져나왔고.
제국은 그런 그들을 알면서도 모두 내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들이 공략을 위해 움직일 것을 알고, 그 정체 또한 알고 있으니 굳이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로 인해 모험가 길드의 원정대는 전원이 빙의자로 구성된 집단이 되었고.
제국 원정대는 이곳 세상의 인물로만 구성된 집단이 완성된 것이다.
빙의자가 없는 제국의 원정대는 자연스레 어비스 공략에 관한 정보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으나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히오에게 들은 정보가 적지 않았고 부족한 것은 그가 돌아오면 해결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제국 내에도 능력이 출중한 자는 넘쳐 났으니.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성입니다. 하늘까지 닿은 듯한 성벽 때문에 내부로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공략하는 것이 주된 목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복의 층이라 명확하게 결론 내린 빙의자 집단과 달리 정보에서 조금 뒤쳐지긴 했으나.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성의 벽이라...."
무력은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흥미롭군."
검성 비탈리아누스.
그가 이끄는 열 명의 로열 나이츠.
황궁을 지키는 1기사단을 제외한 세 개의 주력 기사단.
스킬 사용자로 구성된 1개 대대급 부대.
그리고.
"여신의 사도께서 저희를 인도하셨나이다."
"아아, 성자시여."
신성력 사용이 가능한 리퓨에 교단의 고위 사제들의 지원까지.
과한 물자가 필요하지 않는 선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무력 집단이 모두 집결한 것이었다.
그만큼 실비아 베르덴, 제국의 여황제이자 대륙 권력의 정점인 여인이 제국 차원에서 진행하는 첫 공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
그러니 원정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 위대한 검성이 임명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우리의 수호 기사께서는 어디 계신가."
비탈리아누스의 말에 답한 것은 리퓨에의 고위 사제였다.
성국의 자발적인 협조로 원정대에 기꺼이 합류한 고위 사제 십여 명 중 일인.
"사도께서는 늦어도 오늘 안으로 합류하시겠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사도가 아니라 제국의 수호 기사라네. 아무튼, 그럼 먼저 진입해서 진영을 구축해 놓아도 되겠어."
"...예. 성자께서도 그것을 바라고 계실 겁니다."
"성자가 아니라... 제국의 수호 기사... 됐네 그냥."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레 저들로부터 사도니, 성자니 그런 호칭을 듣고 있는 건지.
고개를 작게 내저은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사제 사이에 끼여 있는 한 사람을 향한다.
후드를 푹 눌러쓴 존재.
명확히 단언할 수는 없으나 무언가 오묘한 기운을 가진 존재.
전해 듣기로는 마법사측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지지 않은 자.
그로부터 느껴지는 히오 파블렌코 특유의 흔적을 잡아낸 비탈리아누스가 그 존재를 향해 묻는다.
"자네는 마법사의 소환수인가?"
이미 언데드로 되살아난 테오르도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인 듯 아닌 듯 오묘한 존재와 거기서 느껴지는 마법사의 흔적.
그러니 비탈리아누스로서는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성.
"소환수라니. 나는 그런 미개한 존재가 아니란다?"
그리고 무척이나 당돌한 대답.
"이 몸은 히오와 결혼할 몸이지."
대답을 들은 검성은 재빨리 기감을 펼쳐 주위를 살핀다.
다행히도 주변에 실비아는 없었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래. 예상치 못한 관계였군. 뭐, 마법사가 알아서 할 일이지. 여하튼, 이제 진입하겠다."
이미 출정의 준비는 모두 끝난 상태였다.
남은 것은 히오 파블렌코 단 한 명.
허나 조금 늦어지는 것 같았기에 우선 게이트에 진입해 그 어비스라는 공간에 적응하려는 것이다.
적응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으니까.
"진입한다!"
일반 병사라고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최정예부대.
제국의 영웅, 검성 비탈리아누스가 직접 이끄는 최초의 원정대가 그렇게 게이트를 통해 어비스 52층으로 진입하고.
"심연으로!"
그들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그런 하늘 끝까지 닿은 위압적인 성벽의 모습이었다.
같은 시각, 최상위 랭커 3인이 이끄는 빙의자 원정대 또한 다른 게이트로 진입하였고 같은 하늘 아래 비슷한 광경을 보고 있었으니.
"...빠르게 정복해야 한다."
본격적인 52층 공략의 시작이었다.
134화 정복의 층 (2)
정복의 층.
높다란 탑, 웅장한 성 등 대개 영역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런 영역을 다스리는 어비스 몬스터를 퇴치하면 공략이 끝나는 층을 정복의 층이라 일컫는다.
단일 보스 몬스터 유형 중 하나인 셈이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성이나 탑과 같은 구조물이 있고 그런 특징에 맞는 어비스 몬스터가 튀어나온다는 점.
함정 따위가 있을 수도 있고 그 꼭대기에 군림하는 보스 몬스터는 특히나 강력하다는 점.
그런 점들 때문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 층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전 51층의 거대 섬이나 50층의 미궁 등.
51층에서는 로그아웃이 되지 않는 점이 빙의자들의 나약함을 불러일으켰고 50층의 미궁은 전혀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프네와 히오를 심연으로 끌고 갔지 않나.
그런 변수덩어리들에 비한다면 성을 정복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몬스터를 죽이기만 하면 끝이었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인 것이다.
"...크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코 쉬운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르베르트조차도 질릴 정도로 엄청난 높이의 성벽. 사람이라면 당연히 눌릴 수밖에 없는 장엄한 광경.
하늘 끝까지 자리한 성벽을 언제 볼 수 있겠는가.
게임 속 모니터로 봤기에, 높은 탑 혹은 높다란 성 따위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그 웅장함에 압도당한다는 말이었다.
그런 성벽 아래임에도 안티푸스는 표정 한 번 바뀌지 않은 채 명령을 내린다.
"입구를 찾아 움직여라."
그에 성벽을 따라 두 갈래로 나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각성자들.
성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만큼, 두텁고 넓게 펼쳐져 있다.
그런 성벽을 부순다는 건 불가능, 시르베르트의 염동을 활용해 단체로 넘어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우선 입구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들어온 위치에 따라서 입구 찾는 데에만 하루가 넘게 걸릴 수도 있는, 그정도로 넓은 공간이었으니까.
입구를 찾으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성벽이 이 정도로 높다는 것은 그 안쪽의 성 역시 드넓고 높을 터.
어떤 종류의 어비스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서둘러라. 결코 제국에게 뒤쳐져서는 안 된다."
허나 안티푸스는 그런 몬스터 따위에게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압도적인 경험을, 격차를 보여 주는 것.
안티푸스 프라만이라는 사람은 그래야만 한다.
평생을 그리 살아온 사내였으니.
남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며 지내 왔었으니까.
언제나 앞서나가야 하는 건 그에게 의무를 넘어서 몹시도 당연한 일상인 것이다.
물론 예외는 언제나 존재했고 그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단 하나뿐.
"지존 천마."
언제나, 무엇을 하든 이겨야만 하고 앞서 나가기만 했던 자신의 머리 위에 늘 군림하던 사내.
흥미로 가볍게 시작한 게임에 이렇게까지 몰두하게 만든 사내.
닿을 듯 말 듯, 결국 이기지 못한 유일한 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보다는 먼저 층을 정복한다."
그리 중얼거리는 안티푸스의 눈에 갈색 광기가 일렁인다.
* * *
운이 좋게도 성의 입구는 가까웠다.
"입구를 찾았습니다!"
길면 하루가 꼬박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몇 시간만에 입구를 발견한 것이다.
"좋다. 바로 가지."
흩어진 각성자를 모으고 발견된 입구를 향해 즉시 출발한다.
제국 측에 비한다면 50명 정도 되는 소규모 인원이기에 이동은 더욱 빨랐다.
그렇게 도착한 성의 입구.
까마득히 높은 성문은 살짝 열려 있었음에도 모두가 일렬로 지나갈 수 있을만큼 그 틈이 넓었다.
그정도로 거대한 성문의 안쪽.
그곳은.
"...지옥인가."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었으니.
성벽의 안쪽으로 안개같이 흐르는 것은 칠흑의 기운.
그런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안광은 못해도 수백이 넘어간다.
"입구부터 이렇게 맞이한다라...."
아직 본성에 입성한 것도 아니고 고작 성벽의 성문임에도 이 정도의 숫자, 이 정도의 기운.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역시나 안티푸스.
커다란 대검을 한 손에 가볍게 쥐고 나아가는 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고작 이 정도의 층에서 자신이 쓰러질 리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의 걸음.
그런 안티푸스의 뒷모습을 보며 나머지 각성자들 또한 걸음을 옮긴다.
그들 역시 끝까지 남아 공략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 자들이었으니.
거대한 성문 안쪽.
진득한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 * *
검성 비탈리아누스가 이끄는 제국 측 진영.
이곳의 분위기는 빙의자 진영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도착과 동시에 바쁘게 움직인 빙의자들과 달리, 먼저 막사를 세우고 진영을 갖추며 천천히 적응하고 준비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전쟁에 들어가기 전에 기지를 구축하고 지휘부를 세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니던가.
게다가 인원수도 빙의자쪽에 비해 월등히 많으니 보급품도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휘부의 막사 안은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후드를 시원하게 벗어 엘프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미모를 드러낸 아이라이츠.
"우선 성의 입구를 찾아야 해."
태연하게 내뱉는 아름다운 미성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 술렁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음침하게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 속에 저런 미모를 감추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한 것인데 세상에 엘프라니.
전설 속에나,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신비로운 이종족이 실존했었단 말인가.
그리고 응당 엘프라면 온화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예의가 바른 종족으로 묘사되곤 했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수군대기만 하게? 너희가 무능하니까 내가 히오 얼굴도 며칠째 못 보고 이러고 있잖니?"
청초하고 단아한 미모와 달리 표정은 마치 똥이라도 씹은 것 같았고 초면부터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게 머릿속 엘프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거기다 신성국의 사제들은 그런 모습이 익숙하기라도 한 것인지 능숙하게 엘프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죄, 죄송합니다...?"
수뇌부 중 몇몇은 그런 아이라이츠의 기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해 버리고 만다.
저렇게 버릇없는 말투에도 이상하리만큼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쁘기 때문이다.
상식을 초월한 아름다움, 엘프라는 이름이 주는 신비감과 낯섦.
그리고 알게 모르게 아이라이츠의 주위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선홍빛 기운 등이 합쳐져 어느새 막사 안은 아이라이츠가 중심이 되어 버린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표정과 사소한 몸짓 한 번에 움찔하며 신경 쓰는 것.
아이라이츠의 매혹이 저도 모르게 번져 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물론.
"그래, 과연 마법사의 동료다운 자로군."
낮고 웅혼하게 울리는 비탈리아누스의 한마디에 모두의 정신이 강제로 깨어났지만 말이다.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장내의 수뇌부를 한번 훑는다.
제국 황실에서 제1기사단을 제외한 주력 기사단의 단장들.
스킬사용자 부대의 장, 성국의 고위 사제들과 기타 여러 부대를 이끄는 자들이 모인 곳.
한 바퀴 돌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이라이츠에게 닿는다.
그런 자들을 짧은 시간에 휘어잡은 이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풍기는 달콤한 체취와 은은한 선홍빛 기운.
어쩐지 익숙한 느낌임은 알았지만, 누군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아이라이츠라고 했던가?"
"응."
"그래, 성의 입구를 찾고난 다음에는?"
"다음에는 쉽지. 성을 오르고 정복자를 물리치기만 하면 공략이야."
"간단하군."
"아무리 네가 검성이라고 해도 쉽지는 않을 거야."
"그건 충분히 느끼고 있다네. 괴물들의 숫자가 생각 이상으로 많아."
"그래도 정복자만 죽이면 자연스레 공략은 완료되고 층이 무너질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물론 성을 오르는 과정에서 전투가 끝없이 일어나겠지만."
예쁜 얼굴로 쌀쌀맞게 말하는 아이라이츠.
그런 모습과 그런 대답에 의아함은 늘어난다.
비탈리아누스는 실비아와 함께 빙의자의 존재를 아는 인물이었으니 더욱 의아한 것이다.
저쪽 세상의 강자들.
즉 빙의자라 일컫는 자들의 특징은 영혼이 없는 것인데 출정 전에 실비아가 직접 확인하기로 그런 자는 없었으니까.
그말인즉 아이라이츠라는 여인이 저쪽 세계의 인물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럼 어찌 이토록 상세히 알고 있단 말인가.
마치 직접 겪어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런가.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군."
"흥. 나중에 히오 귀찮게 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 주는 거야."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뭐 사실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다.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의 동료라지 않은가.
꽤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만큼 그가 알려 주었을 수도 있는 것이겠지.
"그럼 자네의 말대로 입구를 찾기 위한 병력을 차출하지. 나머지 병력은 진영을 갖추고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결정을 내린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정면, 막사 입구 너머를 향한다.
성벽이 보이는 곳. 그 너머에 느껴지는 음습하고도 거대한 기운.
"큰 싸움이 벌어질 듯하니 충분한 휴식을 갖도록."
입구를 찾은 순간부터는 조금의 쉴틈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 * *
"...이젠 진짜로 가야겠다."
아직 다 읽지 못한 마법서를 전부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오.
-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하나 정도는 익힐 수 있었겠네만.
"그러게 하필 왜 블링크를 골랐을까...."
이름에 혹해 버렸다.
마법사하면 블링크.
블링크하면 역시 마법사가 아닌가.
짧은 공간을 도약하며 이동하는 공간계 마법.
간과한 것이 있다면 공간계 마법 특성상 익히는 것이 무지막지하게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아릴레이야에서 에리얼을 소환하는 마법진을 공부한 적이 있기에 눈에 익은 문양이 있었고.
그덕에 한결 수월했음에도 여태 완벽하게 펼쳐 내지 못한 것이다.
- 그 마법서들은 가지고 나가려고?
"아쉽잖아. 조금만 더 해보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 아무리 그래도 연구할 시간이나 있겠나. 어비스와 싸우러 가는 것인데.
"혹시 모르니까... 일단 가져가 보는 거지."
확실히 5서클의 마법은 매력적이었다.
난이도도 그렇고 그 효과도 그렇고.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익히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이다.
- ...뭐, 마음대로 하게나.
그대로 포탈을 활용해 이메니아로 향한다.
어느 게이트에서 원정을 시작할 것인지는 이미 들어놓았기에 팬텀 스티드를 타고 곧바로 이동했고, 곧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검은색 게이트.
히오를 알아본 제국의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경례를 해 오고 그런 그들을 지나쳐 바로 게이트 속으로 진입한다.
처음 참여하는 공략.
게이트 속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처음이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저주받은 어비스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짜증이 조금 솟구쳤을 뿐.
그렇게 52층에 들어섬과 동시에 보이는 것은 검붉은 하늘, 거대한 성벽.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제국 기사단의 진영이었다.
마치 거인족이 사는 성처럼 하늘 끝까지 솟은 성벽과 그 아래로 휘날리는 제국의 깃발.
그것은 꽤나 장관이어서 눈길을 사로잡을 법도 했건만, 히오의 시선은 그것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어비스에 직접 들어왔다는 감상을 할 새도 없이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 성벽 안쪽에서부터 진하게 전해져 온 까닭이었다.
그것은.
"...사기?"
진하디진한 죽음의 기운.
이미 죽은 존재가 산 자를 흉내 내며 돌아다니는 언데드의 힘.
그러한 언데드가 수천, 수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뭉쳐 자아내는 힘이 거대한 성벽 안쪽에서부터 전해져 왔으니.
히오와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것을 보는 푸르넬 역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온다.
- 설마....
넘치다 못해 진득한 액체처럼 흐르는 사기(死氣).
저 안쪽부터 느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데드의 기척.
거대한 성, 그 통째로 심연에 물들어 버린 것.
그게 바로 이곳, 어비스 52층의 정체.
- 네크로폴리스....
죽은 자들의 도시였다.
135화 정복의 층 (3)
죽은 자들의 도시, 네크로폴리스.
- 예를 들자면 자네의 팬텀 스티드가 나온 유계(幽界)와도 비슷한 공간이라 생각하면 된다네.
분명 이곳 세상과 같은 차원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
유계나 정령계, 신수가 머문다는 공간처럼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나 독립되어 있기도 한 것이 네크로폴리스였다.
- 네크로폴리스에도 종류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네.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그 도시의 위력과 힘이 결정되는, 신비로운 죽음의 도시이지.
"네크로폴리스가 하나가 아니란 말이야?"
- 무수히 많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도 훨씬 거대할 수도 있다네.
"그런 네크로폴리스 중 하나가 어비스에 물들어서 이렇게 됐다는 말이지...."
예상치 못한 대량의 죽음의 기운에 놀라서 그렇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순수한 죽음의 기운이 아니라 어비스 기운과 한데 뒤섞여 있다.
하늘 끝까지 솟아 있는 성벽.
지금은 비록 심연에 가라앉아 어비스의 수많은 층 중 하나가 되어 버렸지만, 이러한 성 역시 언젠가는 세상 어딘가에 존재했었던 그런 곳이라는 말이다.
"정복의 층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이야."
하늘에 닿은 것처럼 높게 솟아 있지만, 그 내면은 이제 가라앉고 썩어 버린.
네크로폴리스였을 성벽의 모습을 가득 담으며 제국의 깃발이 나부끼는 막사를 향해 걸어간다.
* * *
히오가 도착한 때는 꽤 적절한 순간이었다.
히오의 도착과 동시에 드디어 입구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이었으니.
넓디넓은 성벽 외곽.
입구를 찾는 데 꽤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어차피 정복의 층은 시간에 쫓기는 미궁 같은 층이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대신 한번 성의 입구로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돌아나올 수 없으리라.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고 전투를 이어 가야 할 테다.
한없이 커다란 성의 꼭대기에 올라 층의 정복자, 네크로폴리스의 주인을 소멸시키기 전까지 말이다.
"이동을 준비하라!"
휴식을 취하며 어비스의 공간을 구경하고, 그 불쾌한 기운에 적응하고 있던 기사들은 입구를 발견했다는 소식과 동시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말을 데리고 올 수 없는 공간이었기에 직접 걸어 이동해야 했으나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제국의 정예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
군마 없이도 이동 간에 속도를 낼 수 있을 터였다.
"사도께서 도착하셨다!"
"성스러운 여신의 사도시여. 이쪽으로...."
고위 사제들의 성대한 주접을 받으며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듣고 난 이후.
입구의 위치까지 확인하고 나서는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기다릴 필요 없이 입구를 향해 곧장 이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가 발동됩니다.」
「특성 - '영체화'가 발동됩니다.」
유계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환한 빛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팬텀 스티드.
리퓨에 사제들의 환호성이 뒤따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키햐!"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수시여!"
"여신의 사도의 애마!"
"오오! 과연 신령스럽고 성스롭도다!"
그런 환호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선 유령마의 등 위로 바로 올라타는 히오.
비탈리아누스와 아이라이츠가 그런 히오에게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네지만.
"또 먼저 가? 같이 가자, 히오."
"그래, 이야기나 좀 나누며 함께 이동하지. 황궁에 들렀다는 소식은 몇 번 들었네만, 자네가 워낙 바쁘니 오랜만의 만남이 아닌가."
히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확인해 볼게 있어서. 먼저 가 있을게."
히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이녀석들이랑 함께 이동하다가는 분명 가랑이가 찢어지고 말 테니까.
그래서 팬텀 스티드를 타고 이동하려는 것이다.
체력과 민첩, 근력 스탯은 아직 100을 넘지도 못했지 않나.
괜히 히오가 팬텀 스티드를 애용하는 게 아니었다.
녀석들이야 허허 웃으며 여유롭게 담소나 나누며 이동하겠지만, 육체 스탯이 낮은 히오는 전력 질주를 해도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터.
나머지 기사들 역시 황실의 정예들이었으니 망신당하기 싫으면 뭔가 있어 보이는 척, 그냥 먼저 가 있는 게 나았다.
"그래, 자네의 뜻이 그러하다면야."
"...금방 따라갈 테니까. 혼자 해결하려 하면 안 돼?"
비탈리아누스, 아이라이츠.
두 사람의 아쉬움과.
"성자께서 이동하신다! 길을 비켜라!"
"사도의 행차시다!"
"길을! 열어라아아악!"
고위 사제들의 격한 배웅을 받으며 성벽의 입구를 향해 빠르게 날아간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모습이 손바닥만큼이나 작게 보이기 시작함에도 여전히 까마득하게 높은 성벽.
팬텀 스티드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지나치는 바람이 거세어졌기에 눈앞에 실드 마법을 전개하며 정면을 바라본다.
사실 먼저 이동하는 이유에는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함도 있지만, 정말로 확인할 것이 있어서 가는 것이기도 했다.
마도사의 경지에 올랐지 않은가.
5서클의 마법은 아직 익히지 못했지만, 바뀐 것은 제법 많았다.
더욱 웅혼해진 마력과 예민해진 기감.
본디 가지고 있던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에 '모든 게 두 배' 특성까지 합쳐져 천재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거기에 마도사로서의 경험과 능력이 더해졌으니.
마력뿐만 아니라 어떤 기운을 감지하고 감응하는 것에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지에 오른 자로서 느낀 직감인데.
"이거... 생각보다 쉽겠는데."
이번 52층, 정복의 층은 쉽고 빠르게 공략 가능할 것 같지 않나.
최상위 스킬 '천상'을 활용하는 건 아니었다.
성벽의 높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네크로폴리스는 넓고 거대하다.
이렇게나 넓고 상대해야 할 적은 끝없을 텐데 천상을 이용해 한 걸음씩 전진한다는 것은 시간도, 힘도 아까운 낭비.
그러니 히오는 기존의 지팡이를 집어넣고 새로운 지팡이를 꺼내든다.
피처럼 붉은, 불길함이 가득 담긴 지팡이.
크뢰츠발트를 상징하던 삼신기 중 하나.
「암흑 권위자의 지팡이 (???)」
「흑마법의 개척자이자 시조, 위대한 흑마법사 크뢰츠발트를 위해 제작된 지팡이.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자랑한다.」
「스탯 '마력' +15」
「마법 시전 속도 +15%」
「사용자의 마력 서클에 따라 순차적으로 능력이 개방됩니다.」
지팡이에 담긴 옵션 중에는 사용자의 경지에 따라 능력이 개방된다는 특수 옵션이 존재했지 않은가.
그리고 히오는 지금 마법을 익히지 못했다 뿐이지, 명백히 다섯 개의 고리가 존재하는 5서클의 마도사.
미궁에서 요긴하게 사용했던 '어둠의 통찰' 외에 다른 능력을 개방했다는 말이었다.
「3서클 : 스킬 - '어둠의 통찰' 사용 가능」
「5서클 : 스킬 - '지배' 사용 가능」
「7서클 : 잠김」
새로이 개방된 지팡이 스킬의 이름은 지배.
「지배」
「네크로맨시와 흑마법의 권위자였던 마법사의 마법이 지팡이에 그대로 새겨졌다.」
「범위 내 모든 언데드의 지배력 강화.」
「죽음의 기운. 그 자체를 지배합니다.」
「따라서 죽음의 기운의 영향을 받는 모든 언데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합니다.」
「사용자의 마력, 정신력에 따라 지배력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요컨대 언데드가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지배하에 놓을 수 있게 해 주는 스킬이었다.
누가 만들어 낸 언데드이건, 자연스레 탄생한 언데드이건. 일단 언데드라면 죽음의 기운을 근간으로 탄생하는 존재이지 않나.
그런 기운 자체를 일정 범위 내에서 지배한다는 말이었으니.
지배의 영역 안에 있는 언데드라면 그런 지배자의 명령에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숫자 제한이 있는 게 아니라 범위로 작동하는 스킬이니 히오의 마력과 정신력이 받쳐 주는 한, 계속해서 발동할 수 있는 스킬.
- 범위 내의 사기. 즉 죽음의 기운 자체에 지배력을 부여해 통제하는 방식인 것 같은데...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군.
"확실히 그래."
네크로맨서로서의 생리를 잘 모르는 히오가 봐도 사기적인 스킬이다.
이런 마법을 보유하고 있다면 적어도 같은 네크로맨서에 한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기껏 열심히 언데드를 제작했는데 낼름 통제권이 뺏겨 버리면 얼마나 허망하겠나.
그게 아무리 일시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괜히 흑마법과 네크로맨시의 종주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거겠지."
그러니 이제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은 5서클에 이르러서야 개방된 지팡이의 능력, 지배.
이것이 저 성벽 안쪽에 있을 무수히 많은 언데드에게도 통할 것인가.
- 언데드란 강령술과는 달라. 데스 나이트를 직접 만들어 봤으니 알겠지만, 육신 자체가 죽음의 기운으로 구성되어 있단 말이야. 뭐, 최하급이나 하급 언데드에게는 혼이 없고 육신도 실제 썩어빠진 시체로 이뤄지지만, 네크로폴리스에 그런 저급 언데드는 없을 테니 제외하자고.
"그래도 그 혼은 심연 물들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됐잖아. 그럼에도 언데드라 할 수 있을까?"
- 글쎄... 혼은 그렇게 타락했다 하더라도 형태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힘이 사기(死氣)라는 점은 변함 없을 듯하니. 내 생각에는 충분히 통할 거라 보네.
통한다면 히오의 생각대로 쉽게 이 거대한 성을 정복할 수 있을지.
범위는 얼만큼이고 시간은 얼마나 지속될는지.
"뭐, 해보면 알겠지."
이제 육중한 성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 * *
"막아라! 뒤!"
안티푸스가 이끄는 랭커들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진작에 성벽 안으로 진입한 후였다.
진입한 이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은 채 오직 정면만을 향해 직진하는 원정대.
그럼에도 아직 본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유라고 한다면 역시 이 끈덕진 몬스터들.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검은 파도가 출렁이며 몰려드는 것 같다.
웬만큼 담대한 자도 죽음의 공포를 느낄 법한 광경.
거기에 태양이 없어 어두컴컴한 시야는 그런 공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걸음을 멈추지 마라! 어차피 돌아갈 길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최상위 각성자 세 명의 힘 덕분이었다.
각기 2위, 4위, 5위를 기록했던 랭커들의 랭커.
시르베르트는 염동의 막을 둘러 대열의 후미를 방어하고.
다프네를 상징하는 전설 무구, 라플리시아가 빛을 뿜어낼 때마다 일직선으로 긴 얼음의 길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안티푸스의 무위는... 그것을 뒤에서 바라보는 자로 하여금 가히 무적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으니.
"걸음이 멈추는 순간 고립된다! 절대 멈추지 마라!"
그런 세 사람을 포함한 50명의 랭커가 한데 뭉쳤는데도 이토록 애를 먹고 있다는 건, 그들이 상대하는 적이 그 정도로 까다롭다는 의미였다.
잘 확보되지 않는 어둑한 시야.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몬스터는 팔이 잘려도, 발목이 잘려도, 심지어 목이 잘려도 움직인다.
죽이고 싶어도 잘 죽지 않고 무시하자니 목숨이 위험한 소굴.
그런 놈들로 빽빽한 성벽 안쪽을 향해 제발로 걸어들어온 셈.
허나 공략에는 이 방법뿐이다.
다른 요행 따위는 통할 리가 없었다.
"마력을 아껴!"
"가능한 밀어내는 식으로 움직여! 이놈들 전부 절대 못 죽인다!"
그러니 그저 나아가야만 한다.
들어온 이상 오직 전진, 그것만이 방법이었다.
가장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안티푸스의 든든한 뒷모습에 조금의 안정을 얻으며.
죽음으로 요동치는 망망대해를 뚫고 언젠가는 보일 거대한 성을 향해.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 악을 쓰고 스킬을 두르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다.
* * *
히오는 머지않아 성벽의 문 앞에 도착했다.
"외성벽이 이렇게 크니까 성문도 무지막지하게 크네."
팬텀 스티드를 돌려보내고 땅으로 내려와 성문 안쪽을 바라본다.
활짝 열린 거대한 문 너머에는 죽음의 기운이 넘쳐 흐르다 못해 어둠으로 형상화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둠 속에서, 문 안쪽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수백, 수천 마리의 언데드.
성문 바깥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듯, 가만히 선 채 히오를 보며 진득한 살기를 피워 올리는 모습은 들어오는 즉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으니.
외형은 기존 언데드에서 변형된 듯 더욱 흉측해지고 위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외형뿐만 아니라 그 힘 또한 본래에 비해 몇 배는 더욱 강해졌을 터.
그게 저주 받은 어비스 기운의 힘이었으니 말이다.
"아이고 무섭게도 생겼다."
그렇게 다가오는 히오를 향해 진득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 크르르르르....
성문과 바깥의 경계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으르렁거리는 놈이었는데, 이 근방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는 놈인지 위압감이 제법이었다.
헬 하운드와 비슷한 외형.
크기가 히오의 몇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하고 어금니가 머리 끝까지 돋아나 있다는 게 일반적인 헬 하운드랑 다른 모습.
이 역시 어비스에 물들어 버린 영향일 것이다.
그런 헬 하운드를 향해 피처럼 붉은 지팡이를 쭉 뻗는다.
그리고 곧장 발동하는 스킬.
「암흑 권위자의 지팡이 스킬 - '지배'가 발동됩니다.」
지팡이의 끝에서부터 널리 퍼져나가는 무형의 영역.
이것이 지배의 영역이다.
사기(死氣)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존재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을 암흑 권위자의 영역이었으니.
영역 내의 모든 죽음의 기운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런 전능함을 느끼며 히오는 거대하고도 사나운 헬 하운드를 향해 손을 들이민다.
"손!"
몇 배나 큰 헬 하운드에 비한다면 무척이나 작은 손.
그리고 곧.
- 키잉....
그 위에 수줍게 포개지는 헬 하운드의 커다랗고도 울퉁불퉁한 발바닥.
"잘했어!"
히오의 칭찬에 몸을 바짝 낮추고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드는데, 그 꼬리질에 언데드 수십 마리가 우수수 쓰러진다.
"녀석, 귀엽기는."
지배는 성공적이었다.
136화 정복의 층 (4)
안티푸스가 이끄는 원정대.
그들의 눈에 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둑한 시야와 사방에 징그러울 정도로 넘쳐 나는 몬스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성이었다.
어찌나 넓은지 그 밑동만으로 시야가 꽉 들어찰 정도.
"성이 보인다!
성의 입구로 향하는 계단은 거인이 올라서도 될 정도로 넓었으나 부실했다.
무척이나 낡았고 여기저기가 파손되어 있었는데 그 위로 해골 같은 시커먼 몬스터 수백 마리가 원정대만을 바라보며 달려들고 있었으니, 언제 어느 곳이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허나 어쩌겠는가.
공략을 위해서는 설사 계단이 무너지더라도 뛰어 올라가야만 한다.
"알아서 따라와라."
작전은 그게 전부였다.
낡은 계단이 무너지고 몬스터에 둘러싸일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상황.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런 것 하나하나 신경 써 줄 수 없는 전장이다.
제 목숨은 스스로가 챙겨야 하고 적어도 여기 있는 50인의 빙의자들은 그 정도 역량은 충분한 이들이었으니.
안티푸스는 뒤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넓고 높은 계단으로 향한다.
손에는 대검 한 자루만을 쥔 채 적의로 가득한 새카만 해일을 가르며 길을 뚫는 것이다.
하루하고도 한나절,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대략 그쯤 되었을 테다.
그동안 밤이고 낮이고 구분조차 할 수 없이 오직 전투만 일삼으며 전진해 온 것이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기본 스탯을 한계까지 찍어 놓은 상위 랭커였기에 가능한 일.
물론 원정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상위 랭커였기에 간신히 가능했다 뿐이지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몸을 보호하는 값비싼 장비는 진작에 너덜해졌고 내재된 스킬 또한 거의 사용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몬스터들로 인해 작은 생채기는 셀 수 없고 온몸이 땀과 피로로 범벅된 처절한 꼴.
"정면은 안티푸스에게 맡기고 측면만 막는다! 시르베르트! 뒤쪽!"
그럼에도 해냈다.
고작 50명으로 결국 성을 향해 오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성벽에 도달했을 때만 해도, 그 입구에서 안쪽을 들여다볼 때만 하더라도 망설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고작 50명이었으니까.
당장 이전 층만 하더라도 그 몇 배가 넘는 숫자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나아갔고 전진했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었다.
"허억... 허억... 옆, 옆을 조심해!"
인간의 한계를 넘은 스탯과 강한 스킬로 위기라고는 겪을 일이 없던 각성자들.
단 한 번도 이렇게 마력을 최대한 아껴 가며.
체력과 근력을 쥐어짜 내며 싸워 본 적 없는 이들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원정대의 모두는 알 수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길을 열고 있는 안티푸스는 그들보다도 이미 몇 단계의 위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렇게 용을 쓰고 어떻게든 마력과 체력을 안배하며 싸우는 자신들과 달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안티푸스야 말로 괴물 중의 괴물임을.
결코 자신이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자의 움직임.
두려움을 상실한 대검술.
안티푸스 프라만은 홀로 해일을 뚫는 괴물이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의문이 든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조급하게 하는가.
그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빠르게 성을 정복하고자 하는 것일까.
'확실히 제국보다 먼저 성을 정복한다면 좋긴 하겠지만....'
다프네의 시선이 안티푸스의 뒷모습을 향한다.
지금처럼 50인의 랭커로 계속 층을 공략해 나가기에는 무리다.
어비스는 계속 나타날 테고 그만큼 강해질 테니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멈춰진다는 건 곧 뒤쳐진다는 것.
그리고 이는 자신의 고향과도 연결된 위험.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위험이었으니 반드시 공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후 제국과 힘을 합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지금은 그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압도적인 속도로 정복자를 물리치고 층을 공략한다면, 향후 제국과 함께할 때 입깁이 그만큼 더 강해지지 않겠는가.
제국에서도 빙의자들의 중요성을 더 확실하게 인지하지 않겠는가.
'...물론 안티푸스가 그걸 노리고 저리 나서는 건 아니겠지.'
그는 언제나 정상에 있었고 그것이 당연했던 사내.
바깥에서 그의 정체를 알고난 이후에 다프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푸스 프라만은 이 세상이 바라는 최강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을.
이 최강의 사내는 결코 남에게 잘보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초거대 국가인 제국 전체보다도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단지 한 사람.
언제나 정점에 있어야만 했던 사내를 만년 2인자로 만들어 버린 이름.
랭킹 1위 지존 천마.
그를 이기고자, 그보다 무조건 앞서 정복하고자 이토록 빠르게 결단하고 움직이는 것일 터였다.
"...히오 파블렌코."
다프네는 조금의 휴식도 없이 성을 향하는 단단한 뒷모습을 보며, 웅혼하게 휘둘러지는 대검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아무리 너라도 이번엔 두 번째가 되겠네."
히오 파블렌코의 엄청난 힘과 능력은 알지만, 이번 만큼은 안티푸스가 먼저 층을 정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제아무리 히오 파블렌코라 하더라도 무한한 몬스터의 물결 속에서 이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
게다가 제국측은 지킬 사람이 배는 더 많을 테고 그만큼 신중하게 움직일 테니까 안티푸스의 진행도가 압도적으로 빠를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리된다면....
"일이 꽤 복잡해지겠어."
지존 천마를 향한 안티푸스의 강한 집념을 알기에.
안티푸스와 지존 천마. 빙의자들 사이에서 두 인물이 가지는 거대한 상징성을 알고 있기에.
안티푸스는 지존 천마보다 먼저 층을 정복함으로서 부동의 1위라는 굳건한 명성에 조금씩 흠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 하늘을 깨부수고 자신이 하늘에 오르고자 하는 것일 테다.
"모든 랭커들을 이끄는 리더의 자리."
안티푸스가 지존 천마를 꺾고자 하는 이상, 둘은 그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관계.
바깥에서 최초의 각성자라 불리며 무수히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 랭커들. 그런 이들의 확고부동한 정점이 되기 위한 두 괴물의 경쟁.
승자는 누가 될 것이고 그 끝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우선은 공략에 집중하자.'
다프네는 그리 생각하며 재차 활시위를 당긴다.
이제 간신히 본성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들의 사방으로 재차 몰려드는 검은 해일.
성의 정복자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을 전투.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런지.
"진짜 지옥 같네."
결과가 어찌되든, 그 과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과도 같았다.
* * *
리퓨에 교단의 고위 사제, 프레드릭.
그는 히베루니아에서 태어나 평생 리퓨에 여신을 모시며 진심으로 기도하는 아주 신실한 사제였다.
그리고 여신께서 현현하시고 성자께서 탄생한, 성역의 기적을 목격한 고위 사제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렇게 직접 목격한 만큼 여신의 사도 히오 파블렌코에 대한 믿음이 각별한 자가 바로 프레드릭인 것이다.
그런 프레드릭이 히오를 향해 아주 조심스레 묻는다.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채였다.
"저... 사도시여...?"
히오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태연하게 답한다.
"예. 프레드릭 사제님"
"제가 감히 사도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무슨 문제라도?"
여전히 태평한 히오의 태도에 프레드릭은 볼을 긁적이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있냐니?
문제가 너무 많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 컹컹!
우선, 히오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열심이 짖는 이녀석.
검고 커다란 개.
그것이 무려 네 마리나 있었는데 그 등에는 검성과 히오, 체력이 약한 사제들이 고루 나누어 탑승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방에 언데드 몬스터로 빼곡한 전장 한가운데서.
"어찌 이 사특한 것들이... 사도님의 말을 따르고 있는 건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성벽 안쪽의 공간.
당황스럽다는 듯 말을 전하는 프레드릭은 혼란스런 눈으로 히오와 자신의 밑에 있는 이 검고 거대한 개를 번갈아 바라봤다.
척 보기에도 성스러움의 정반대에 있는 생명체가 아닌가.
한데 어찌 이런 저주받은 몬스터 따위가 성자의 말을 듣고 헥헥대며 자신들을 실어 나르고 있는 건지....
불경스럽게도 여신의 사도에게 할 말을 아니었으나, 이 저주 가득한 공간에 의해 사도께서 오염됐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말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프레드릭은 신실한 두 눈에 의심을 살짝 담아 히오를 바라봤고.
"혹, 사도께서는 어둠의 저주에...."
히오는 여전히 시선을 한곳에 고정한 채 희미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는 것이다.
"제법 귀엽지 않습니까?"
...귀엽지 않냐고.
몸 곳곳이 썩어 있고 흉흉한 붉은 안광에 시커먼 기운을 줄기줄기 뽑아 대고 있는 저것들이 말인가?
정녕 귀엽지 않냐고 들은 게 맞는 건가.
프레드릭은 제 귀를 의심했기에 귓구멍을 한 번 후비고는 재차 물었다.
"...주변의 이것들이 귀엽다는 말씀이십니까?"
자신을 태운 이 검은 개도 이상한데 주변의 풍경은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더 이상했다.
검은 개 네 마리를 중심으로 바깥 쪽에는 기사들이, 그보다 더 바깥쪽에는 흉흉한 외형의 언데드 몬스터가 함께 이동 중이었다.
'함께' 말이다.
제국의 기사단과 몬스터, 그것도 언데드 몬스터가 함께라니.
처음부터 이 지경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여신의 사도 히오 파블렌코가 언데드에게 둘러싸여서 헹가래를 받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언데드에게 헹가래를 받는 여신의 사도. 이 무슨 세상 멸망 직전에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인가.
허나 그런 모습에 검성은 허허 웃으며 재밌어 했고 성격 나쁜 엘프 여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자연스레 성자님의 옆에 가서 착 달라붙었으니.
비정상의 세상에 가면 정상인이 비정상이 된다더니, 딱 그 모양이었다.
"귀엽지 않을 이유가 없죠. 말도 잘듣고 길도 충실하게 잘 알려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몬스터들이 대체 왜 성자님의 말을 따르는 건지 저는 그것이 의문이라...."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제서야 히오는 손에 들고 있던 고대어로 적힌 책을 덮고서는 프레드릭을 바라본다.
입가에는 다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이다.
"종종 이런 오해를 받고는 하죠."
"오해... 말씀이십니까?"
"예. 그러니까 그날, 제가 여신과 만났던 그날은 사제님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히오의 눈망울이 아련하게 하늘을 향한다.
그래 봤자 시커매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때 희망의 리퓨에 여신께서는 말씀하셨죠. 아이야, 언데드는 불쌍한 영혼이니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거두어 주거라! 라고 말입니다."
"저, 정말 여신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게 이런 능력을 내려주신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악의 존재를 멸하는 것이 신성의 의무라고...."
"아, 그리고 덧붙여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 프레드릭의 태도에 히오는 재빨리 뒷말을 덧붙인다.
"프레드릭 사제님의 기도가 가장 진실되고 신앙이 충만하더더군요."
"제, 제, 제 이야기를 여신께서 하셨다는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시다는 마, 말씀을 전하는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여신께서는 신실한 사제님들 한 명 한 명에게 전부 사랑한다 그리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아, 아아아... 리퓨에시여...!"
"여신께서 사제님을 얼마나 눈여겨보고 계시는데... 설마 프레드릭 사제님은 그런 여신의 말씀을 의심하시지는 않겠죠?"
"저, 절대 제가 감히익!"
히오의 말에 프레드릭은 어찌나 놀라는지 손사래를 치다가 헬 하운드의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다시 말을 이어 가는 프레드릭.
"저, 저는 결코 여신님과 성자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쯤에서는 프레드릭뿐만 아니라 그 뒤에 함께 타고 있던 다른 고위 사제들까지도 합창하는 것이다.
"정말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역시 여신께서는 이번 시련까지 예상하시고 사도님을 부른 거였다.
과연 여신께서 직접 임명한 사도님은 이런 사이한 것들까지 가엽게 여기시고 거두어 주신 것이었다니.
자신은 멀어도 아직 한참 멀었다.
더욱 정진하고 신실하게 기도해야겠다 마음 먹으며 프레드릭을 포함한 모든 고위 사제들은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린다.
헬 하운드의 등 위에서 흔들흔들 이동하며 말이다.
* * *
- ...이건 사기 아닌가?
기도하기 시작한 사제들을 보며 푸르넬이 말했지만, 히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마법서를 펼칠 뿐이었다.
'억울하면 뭐, 자다가 일어나겠지.'
- 지독하군. 지독해.
지독이고 뭐고 모르겠고 어둠 권위자의 지팡에 내재되어 있던 스킬, '지배'는 생각 이상으로 요긴했다.
요긴하다로 끝날 정도가 아닌 것이다.
이 수많은 네크로폴리스 출신 어비스 몬스터를 전부 아군으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 아무튼, 아쉽게 됐네. 이 언데드들을 전부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지배가 풀리면 어비스 몬스터와 다를 게 없으니까.'
언데드의 육체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것이 사기였고 '지배'는 사기 자체를 통제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지.
어비스 몬스터가 일반 언데드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스킬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영구히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데리고 나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지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의 틈바구니 속에서 여유롭게 블링크 마법사나 탐독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히오의 마력은 충분히 많았고 히오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지배의 영역은 넓었다.
제국의 기사들을 모두 넣고 그 바깥까지도 영역이 남아서 들어온 어비스 언데드를 모두 지배하에 두었으니.
영역 바깥에서는 여전히 무한하게 많은 몬스터가 포악한 울음을 터트리며 공격해 들어오고 있지만, 지배 당한 다른 언데드가 그것을 막아 주고 있었고.
그마저도 뚫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오는 즉시 바로 지배당해 금방 온순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렇게 편할 수가.'
언데드들의 호위를 받으며 편안하게 블링크 연구나 하면 된다는 말이다.
주변의 몇몇 기사는 찝찝하고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이러한 현상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괜스레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언데드의 뒷통수를 후려갈겨 보기도 하고 툭툭 건드려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어비스 언데드.
지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자, 안전은 제가 보장할 테니까 다들 긴장 풀고 주변 경치도 좀 구경하면서 가자고요."
안전만 보장된다면야 이보다 더 좋은 여행지가 어디있겠나.
시야가 조금 어둡긴 해도 웅장한 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어비스 언데드의 해괴망측한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며 이동할 수 있으니 심심할 틈은 없을 테다.
게다가 신경 쓰지 못했던 바닥도 자세히 보니 평범한 돌이 아니라 거대한 뼈로 이루어진 것 같지 않나.
위기감이 서서히 가시자 기사들은 마치 동물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 여기저기를 관광하듯 둘러보며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쭉 훑어본 히오는 다시 블링크 마법서로 시선을 옮기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좋군."
사방에 가득한 언데드 덕분에 싸늘한 냉기가 기분좋게 불어오는 이곳은 네크로폴리스.
헬 하운드의 등에 올라타 시원한 공기를 쐬며 마법서를 탐독하는 기분은 마치.
"여기가 바로 천국이야."
천국과도 같았다.
137화 정복의 층 (5)
어렵다.
새삼 느끼는 건데 마법은 정말 어려웠다.
4서클도 충분히 어려웠고 여러번의 실패를 거친 끝에 완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5서클은 두 배는 어려운 듯했다.
- 원래 이게 당연하지. 자네는 그 천재 특성의 힘으로 마법을 쉽게 익히는 것이야. 어느 누구도 자네처럼 빠르고 쉽게 익히지를 못해.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에 '모든 게 두 배'가 더해진 효과.
천재가 괜히 천재인가. 남들보다 월등한 재능을 가진 이를 천재라 일컫는데 거기에 두 배의 효과가 더해진다?
이건 '와 재능이 두 배!'와 같은 단순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효과.
- 한마디로 자네는 그 압도적인 재능으로 많은 공부 없이, 억지에 가깝게 마법을 익혀 낸 것이라네. 그러니 이전까지 쉽게 익힐 수 있었던 마법도 내 일일이 설명해 가며 완벽하게 이해시키고 넘어갔지 않은가. 그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자네는 여기서 완전 막혔을 게야.
특히나 블링크 마법은 짧은 공간을 점멸하듯 이동하는 마법.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공부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언데드의 싸늘한 냉기가 기분 좋게 불어오는 지하 낙원, 네크로폴리스.
이미 죽은 이들이 어비스에 물들어 영혼마저 다시 죽어 버린 가여운 곳.
그런 어비스 언데드의 철통 호위를 받으며 정복자가 있을 본성으로 이동하는 데만 하루가 온전히 걸렸다.
그 하루 동안 마법서를 들여다보며 끙끙대고 푸르넬의 조언을 받아 이리저리 연습해 보았음에도 아직 블링크 마법을 실현해 내지 못했다.
'그래도 거의 감을 잡았어. 공간 이동이라기보다는 왜곡과 재소환에 가깝네.'
많은 실패 끝에 개념이 정립되었다.
헬 하운드의 등 위에서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로 마법서를 들여다보고 마법을 시도해 본 결과였다.
다만, 아무리 마법에 진심인 히오라 할지라도 이제는 마법서를 집어넣어야 했다.
정복자가 있을 본성의 입구까지 도착했으니 말이다.
'진짜 몇 번만 더 해보면 될 것 같은데... 씁, 아쉽네.'
- 그 마음 잘 알지. 마법의 완성이 눈앞인데 다른 일을 해야 한다니. 이걸 어떻게 참나.
실제로 인내력 수치까지 소폭 상승할 정도였으니 그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허나 아쉽긴 해도 성에 도달한 이상 어쩔 수 있나. 어떤 변수가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집중해야만 한다.
근처에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안티푸스를 위시한 각성자들이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거나, 반대편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
근방에 느껴지는 기척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었다.
"진짜... 엄청 크네."
"성이 아니라 섬이라고 해도 믿겠어."
"...내 살아생전에 이토록 거대한 성을 보게 될 줄이야."
언데드와 함께하는 것이 제법 익숙해진 기사들은 성을 올려다보며 짧막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하루 전과 비교해 보자면 확연히 달라진 태도.
이전이 긴장감을 끌어올린 전쟁 직전 군인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외국에 관광 나온 평범한 아저씨 같은 모습이지 않나.
그런 기사들의 머리 위로 비탈리아누스의 근엄한 명령이 떨어진다.
"긴장해라. 성에 진입하면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심연에 가라앉아 개판이 되어 버린 네크로폴리스.
성 안에 있어야 할 언데드와 바깥의 언데드가 이미 뒤죽박죽 섞여 있지만, 그래도 본성에는 좀 더 강한 몬스터가 있을 터였다.
"여기까지 편안히 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마법사의 능력 덕분이다. 우쭐대지 말고 긴장을 유지하도록."
헬 하운드의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말하는 검성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지배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경계에서는 아직도 언데드끼리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으니.
본성의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면 확연하게 보이는 것이다.
눈에 닿는 사방이 전부 검은 물결.
그 붉고 흉흉한 안광 수천 수만 개가 모두 이곳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히오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저 모든 것을 뚫고 예까지 왔어야 했으리라.
그제서야 기사들의 눈에도 재차 긴장의 빛이 어리고.
"진입하지."
어비스 언데드의 호위를 받으며 제국의 최정예 원정대는 정복자가 있을 성으로 진입했다.
* * *
성의 내부는 겉에서 보고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어떤 생물의 뼈로 만들어진 기둥.
음습하다 못해 침울한 기운이 가득한 내부 공기.
강인한 기사들은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고 사제들은 기도를 올리며 그런 기운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끝없이 높게 뚫린 중앙 천장을 기점으로 네 방향의 계단이 있었는데 빠르게 회의한 결과 병력을 나누지 않고 다같이 움직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비탈리아누스와 히오를 중심으로 병력을 나눌 수도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몬스터들에게 히오의 지배가 잘 통하고 있었기에 굳이 피해를 입지 말자는 취지였고, 정답이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각 층마다 강한 기운을 가진 어비스 언데드가 줄줄이 나왔으니, 병력을 나누었다면 이동 속도에서 차이가 벌어졌을 것이다.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거대한 새의 형태를 한 언데드.
목 없는 기사, 듀라한 등이 어비스 기운을 줄기차게 뿜으며 등장하기도 했다.
듀라한의 외형은 전해지는 모습과 달리 어비스 기운에 뒤틀려 말과 몸이 합쳐졌고 말의 다리 사이에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린 기괴한 형태였지만, 어찌됐건 소문난 그 강함만큼은 틀림이 없었으리라.
다만 그 강력함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그런 중간 보스 개념의 어비스 언데드조차도 제국의 원정대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들 역시 근원은 사기(死氣)로 이루어진 언데드이지 않은가.
그것에 저항할 지성은 진작에 어비스에 침잠하여 소멸당했으니 히오의 지배 아래, 사기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층을 오를수록 원정대와 함께하는 언데드들은 더욱 질이 높고 강한 몬스터들로 채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순탄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평지를 걷는 것에서 계단을 계속 오른다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그마저도 헬 하운드가 오르는 것이라 사실 힘들 것도 없다.
성 바깥쪽이든 안쪽이든 지배가 제대로 작동하니 점차 여유로워진다.
여유롭다는 말은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뜻이다.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말은 완성 직전의 블링크 마법이 자꾸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는 말이었다.
'너무 아쉬운데… 지금 슬쩍 시도해 볼까?'
- 좀 참게. 마음은 이해하네만, 공략 끝나고 완성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만....'
마도사라 불리우는 5서클의 첫 마법이 아닌가.
거의 감을 잡은 까닭에 당장이라도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으나,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사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조금 만만하게 생겼던 언데드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는 중간 보스급 어비스 언데드.
듀라한과도 같은 그 살벌한 외형의 그것들이 언제 갑자기 덤벼들지 알 수 없으니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히오의 지배에 저항할 만한 지성이 없다는 걸 모르기에 하고 있는 긴장이었다.
그런 상태로 성의 꼭대기를 향해 계단을 오른 시간이 대략 두 시간가량.
단 한 번의 전투 없이 묵묵하게 오르기만 했음에도 그만한 시간이 걸렸으니, 성이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이 될 것이다.
"끝이 보인다."
조용히 꼭대기를 향해 오르기만 하던 비탈리아누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성의 천장이 보인다.
계단의 끝이 드러난다. 성의 마지막 층에 도달한 것이다.
그말은 곧 정복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곳 네크로폴리스의 주인이자 강대한 힘으로 정복의 층, 정복자로 선택을 받아야만했던 불운한 존재.
"...강하군."
마지막 층에 도달함과 동시에 복도의 끝에 거대한 문 하나가 보이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존재감.
저 안에 정복자로 지정된 성의 주인이 있다.
그런 존재인 만큼 강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으나.
"문 너머의 저 존재만 쓰러트리면 된다는 말이지."
층의 정복자가 상대해야 할 것은 바로 위대한 검성.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인 비탈리아누스 마헬이었으니.
"더욱이 긴장해라. 마지막까지 방심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당부와 함게 움직이는 비탈리아누스.
허나 정작 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타올프의 죽음, 어비스의 준동 등으로 최근 잠잠했지만, 비탈리아누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지독하디 지독한 호승심이지 않은가.
즐거운 것이다.
셀 수도 없이 무수히 많은 적에게 둘러싸여 편안히 온 것은 조금 따분하긴 했으나 피해가 없어서 좋았다.
숫자가 많긴 했어도 그래 봤자 약한 몬스터 따위가 뭉쳐 있는 것일 뿐. 호승심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저 문 너머의 존재는 다르다.
그러니 비탈리아누스는 거대한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히오에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 바라건대 마법사, 기왕이면 나서지 않아 줄 수 있겠는가."
나서지 말아 달라고.
"자네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서야 내 너무 미안하니 이렇게라도 밥값을 해야겠네."
"혼자 겨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물론 그런 이유도 없진 않지."
능청스레 말하는 비탈리아누스의 모습에 히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히오의 입장에서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오히려 고마울 정도다.
비탈리아누스라면 정복자를 상대함에 있어서 능력이 차고 넘침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그야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완벽한 자동사냥.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구석에 얌전히 있을 테니 알아서 해봐."
"고맙네. 이 은혜는 황궁에 돌아가 대련으로 보답하지."
"...아니, 그건 괜찮아."
비탈리아누스는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간다.
* * *
콰아앙-!
넓은 방을 크게 울리는 격돌음.
성의 주인이자 네크로폴리스를 다스리던 지배자.
어비스 52층의 공략 대상인 그 존재의 정체는 죽음에서 돌아온 기사.
데스 나이트였다.
넘실거리는 데스 오러.
순수한 죽음의 기운과 어비스의 저주 받은 기운이 뒤섞여 뿜어져 나오는 불쾌한 힘은 어찌나 강한지 그것이 가시화되어 눈에 드러날 정도.
콰앙-!
거기에다 어비스의 저주까지 더해져 그 힘이 더욱 기괴해지고 강해진 것이다.
일반적인 데스 나이트, 테오르도와 비교했을 때 수 미터는 더 큰 키와 짐승처럼 몸 곳곳에 돋아난 검은색 가시.
위압적인 존재감은 테오르도에 비해 적어도 몇 줄은 위에 있는 것이었다.
콰아앙-!
죽음과 심연이 뒤섞인 결정체.
그런 존재에 맞서는 것은 찬란한 금빛 오러.
수십 년 동안 영웅의 상징으로서 흔들리지 않았던 비탈리아누스의 강기가 데스 나이트를 사방에서 압도하며 밀어내는 중이었다.
"와...."
"허어 어찌 저기서 저런 움직임을."
"과연 비탈리아누스 님!"
미리 약속된 대로 다른 기사들은 일절 나서지 않았으며 거리를 둔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탈리아누스가 저토록 진심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 광경은 무척이나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경지가 높은 기사들인 만큼 얻어 가는 것도 많으리라.
그런 기사들보다도 조금 더 떨어진 한쪽 구석.
히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흠. 그 정돈가?"
검성과 층의 주인 간의 전투 속에서 히오 역시 얻어 가는 게 많았다.
물론 검에 관한 건 아니었다.
- 그 정도? 당연한 거 아닌가! 왜곡과 소환의 문양에 대체 왜 같은 힘을 실으려고 하나?
전투야 뭐, 비탈리아누스가 알아서 잘할 테니 한쪽 벽에 웅크리고 앉아서 블링크 마법의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틀은 확실하게 잡혔다.
마법의 실현만 남은 상황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차 정답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왜곡과 소환. 둘 모두 주가 되지만, 왜곡에 힘을 더 실으라는 거네?"
- 그렇지.
이제 마법서는 필요 없었다.
반복 실험만이 남아 있었으니 정답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시도해 봐야 한다.
완성이 코앞이었으나 핵심을 조금만 잘못 잡으면 며칠 동안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마지막 단계.
"좋아."
지팡이를 쥐고 정면을 주시한다.
별처럼 퍼진 수백 개의 문양에 마력을 전하고 그것에서부터 힘을 빌려 온다.
블링크 마법 하나에 들어가는 문양의 큰 갈래만 십여 가지.
그만한 문양에 각자 알맞은 크기의 마력을 불어 넣고, 그에 문양은 그만큼의 힘을 전해 주어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 가기 시작했으니.
극한으로 집중하던 히오의 눈이 번쩍 뜨이고.
"블링크!"
지팡이의 끝에서 환한 빛이 짧게 번쩍인다. 커다란 마력 반응과 함께 시야의 풍경이 확 가까워진다.
그렇다는 의미는 곧.
「공통 마법 - '블링크'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공통 마법 - '블링크'를 스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5서클 마도사로서의 첫 마법이 성공했다는 의미.
「공통 마법 - '블링크'가 스킬로 등록됩니다.」
「스킬 : 블링크」
「시야 인지 범위 내의 짧은 거리로 순간이동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시전 중 마력 방해를 받으면 큰 내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히오가 블링크의 시전에 성공한 순간은 아주 시기 적절한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검성 비탈리아누스의 황금빛 검이 데스 나이트를 정수리부터 바닥까지 관통해 버린 순간. 수 미터에 달하는 죽음의 기사가 무릎을 꿇고 그 가여운 생을 마감한 순간이라는 말이다.
붉은 안광은 점차 빛을 잃어 가고 그 시선은 황망하게도 하늘을 향한 채.
그렇게 막을 내린 전투.
성의 정복자가 검성의 검에 스러졌다.
층의 공략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어비스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활짝 열려 있는 문의 방향, 정복자의 방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도착한 것이다.
"이게 무슨...?"
빙의자로 이루어진 원정대.
황당한 표정의 시르베르트와 다프네.
그리고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던 안티푸스까지.
"...지존 천마!"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노한 듯 싸늘하게 굳어 있는 안티푸스의 표정.
어찌됐건 반가운 마음이 앞섰기에 히오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의 곁으로 이동하려 했다.
「-52층이 더없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층이 붕괴됩니다.」
하지만 공략은 끝이난 상황이었고 곧 어비스가 닫힌다는 메시지가 울렸으니.
층이 붕괴되기 전, 짧게라도 이야기를 해 보고자 히오는 스킬을 바로 발동했고.
「스킬 - '블링크'가 발동됩니다.」
그 이펙트에 현장의 모든 사람은 압도당한다.
「본래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138화 경고
52층, 정복자가 지배하는 정복의 층.
안티푸스가 이끄는, 오직 랭커로만 구성된 50인의 원정대.
분명 이보다 더 빨리 오를 수 없을 것이라 자신했다.
성벽 안으로 향하는 입구도 빨리 찾은 편이었고 본성까지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갔지 않은가.
나머지는 다른 각성자들에게 맡긴 채 오로지 정면만을 뚫으며 달려 나갔다.
고작 50명의 인원으로 이뤄 낸 쾌거.
안티푸스 프라만,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라 확신했다.
지존 천마.
히오 파블렌코의 성정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제국과 함께 하는 이상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성에 도달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임을 모른 채,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렇게 그가 별 필요도 없는 이들을 챙기는 사이에 자신은 나아간다.
히오 파블렌코라는 이름 앞에 안티푸스 프라만이라는 이름이 먼저 놓일 때까지.
이번 층을 시작으로 조금씩 조금씩.
물에 씻겨 내려가듯 지존 천마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그 대신에 각인되는 것은 자신의 이름.
그제서야 바깥 세상의 멍청한 놈들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다.
결국 정점에 오르는 것은, 자신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안티푸스뿐이라고.
지존 천마마저도 안티푸스에게 밀려났다고 말이다.
한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이변은 본성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복의 층에 존재하는 본성이라 함은, 본디 그 바깥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정작 들어온 본성 내부는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였다.
중간 보스급 어비스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층을 오를수록 좁아지는 구조.
필히 나와야 할 강한 몬스터가 나오지를 않는다.
그것을 대신해 보이는 것은 부서진 뼛조각, 죽은 몬스터의 시체 따위.
날카로운 검이나 오러 같은 힘에 의해 절단된 모습이 아니었다. 체계가 잡힌 검술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하거나 강한 힘에 파괴되어 버린 것 같은 모습.
마치 저들끼리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상했다.
갑자기 왜 어비스 몬스터끼리 싸운단 말인가.
그덕에 중간 보스급 몬스터가 나오기는커녕 외려 바깥보다 더 난이도가 쉬워졌지 않나. 정말로 그냥 계단을 오르기만 하면 됐으니까.
편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기에 문득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점점 꼭대기에 가까워져 갈수록.
파괴된 언데드 몬스터의 시체가 계단을 따라 쭉 이어진 것을 보고 있을수록 불안한 마음은 커져 갔고.
그렇게 결국 성의 최상층, 정복자의 방에 도달하였을 때 그러한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보스룸의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거기서 느껴지는 수많은 인기척.
그리고 전혀 볼 수 없었던 중간 보스급의 모든 몬스터가 한자리에 모여 기사들과 나란히 서 있는 진풍경을 목격해 버리고야 말았으니.
이러한 사태의 원인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방의 정중앙.
무릎 꿇은 데스 나이트의 앞에 있는 익숙한 얼굴.
지존 천마, 히오 파블렌코.
그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들어올리고 있지 않은가.
여유 가득한 그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지존 천마...!"
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신보다 한참이나 앞서 도착할 수 있었는가.
물론 자신도 아직 체력이나 마력 따위는 남아돌았으니 여유롭다면 여유롭게 도착한 셈이다.
하지만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엉망이었다.
거의 이틀에 가까운 시간을 전투와 함께하며 무작정 달려왔으니.
안티푸스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나머지 빙의자들의 꼴은 말이 아닌 수준인 것이다.
그에 반해 다른 기사들과 히오 파블렌코는 마치 전투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처럼 깨끗한 상태 그대로이지 않나.
미친 듯이 성을 향해 달려온 자신들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
한참이나 앞서 도착한 것으로도 모자라 층의 주인마저도 이미 쓰러트린 이후가 아닌가.
이내 곧 지존 천마,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어비스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의 미소는 짙어졌다.
강하기에, 이겼기에 지을 수 있는 승자의 미소.
이가 뿌득 갈린다.
「-52층이 더없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층이 붕괴됩니다.」
그래.
그렇게 실컷 웃어라.
반드시 너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썩어 들어가게 만들어 주겠다.
이번에야 운이 좋았다지만, 아직 시간과 기회는 많이 남아 있을 테고 분명 무력은 자신이 더 강할 테다.
그러니 기고만장해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뭐, 그런 말이라도 전하려 했다.
곧 층이 붕괴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 그 정도 말이라도 전해야 이 원인 모를 분노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은 것은, 잠깐의 마주침 속에서 지존 천마의 미소가 즐거운 미소가 절정에 달했을 때.
자신의 말보다 그의 지팡이가 먼저 움직인 까닭이었다.
마력이 요동친다.
마력으로 인한 옅은 미풍이 그를 중심으로 불어오니, 모두의 시선이 오직 한 사람에게 향한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 이유 모를 정적이 감돌고.
그런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
넓은 방 안 가득 펼쳐지는 검은색의 날개.
그의 등 뒤로 활짝 피어나는 것은 거대한 한 쌍의 날개.
그것이 넓게 펄럭임과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지존 천마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찌그러지듯, 구겨지듯이 부서지는 것이다.
"무슨...!"
경악성을 토해 낼 틈도 없었다.
그 검은색의 날개에서 흩날리는 깃털로 시야가 장악당했으니.
그토록 화려한 현장 속에서.
"시르베르트."
어느샌가 바로 옆, 왼쪽 귓가에 들려오는 지존 천마의 목소리.
"다프네."
반응하지 못했다.
반응했어야 마땅했으나 눈앞을 장식하는 화려함에, 이그러지는 공간에 압도당해 움직이지 못했다.
검은 날개가 옆에서 펄럭이고 그로 인한 깃털이 휘몰아친다.
자신의 어깨 바로 옆에서 지존 천마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무슨 이유였을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였는가.
정말로 인정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리고 안티푸스 프라만."
두려움은 아니었을까.
그 화려한 날갯짓에, 공간의 이그러짐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가 자신의 목숨을 취하고자 했으면 어찌할 뻔했는가.
그의 기척이 느껴지는 왼쪽 목덜미로 순간, 소름이 돋아난다.
이것이 정녕 두려움이란 말인가.
"...지존 천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은 두려움 따위 느껴 본 적도 없고 느껴서도 안 되는 몸.
그러니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나타난 지존 천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 역시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의 거대한 날개는 등에 가지런히 접힌 상태였고 공간의 이그러짐 또한 점차 본래의 상태로 복구되는 와중.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여유로움을 과시하며 그에게 말을 건네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지존 천마의 입이 먼저 열린다.
그것조차도 지존 천마가 한발 빨랐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과시하지 않는 여유로움과 함께 전하는 그 말은 분명.
"조심하지."
경고.
「본래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감히 하늘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
* * *
「본래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조심하지. 데이먼이 널 꺾을 거라고 매일같이 수련을... 젠장."
오랜만의 만남은 짧았다.
사실 히오와 안티푸스는 게임 속에서만 자주 만났고 실제로는 본 적 없으니 첫 만남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그래서 약간의 어색함도 풀 겸, 안티푸스에게 철저하게 깨진 로열 나이트, 데이먼과의 대련을 주제로 안티푸스도 좀 추켜세워 주고 이야기의 물꼬를 트려는 계획이었는데 그전에 층이 닫혀 버린 게 아닌가.
데이먼이 안티푸스를 꺾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수련 중이니 조심하라고 농담 식으로 자연스레 말을 건넨 것인데 뒤에 말이 싹둑 잘려 버렸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뭐, 다음에 또 볼일이 있겠지."
이번 52층은 진입 후 거의 이틀 만에 공략에 성공했기에 남은 시간이 꽤 많다지만, 결국 언젠가 53층이 열릴 것이다.
그때 만나서 친해지든가 하면 될 터.
- 내 이전부터 조금씩 느끼던 거였는데....
그렇게 머릿속에서 안티푸스의 존재가 밀려나고 푸르넬의 말에 정신이 집중된다.
- 마법의 경지가 오를수록 스킬 이펙트에 변화가 있어.
"이펙트에 변화라."
- 화려함이야 뭐 1서클 마법부터 말도 안 될 정도였지만, 뭐랄까...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건 히오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거였다.
마법의 경지가 오를수록, 고난도의 마법이 스킬화될수록 펼쳐지는 이펙트가 더욱 생동감 있게 느껴졌으니.
"이것까지가 특성의 숨겨진 효과일지도...."
히든 특성 '폭력은 안 돼!'가 아니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을 효과.
한데 그것이 히오의 마법과 만났고 그 숨겨진 효능이 드러난 게 아니겠는가.
마치 일루전 마법이 패시브 효과처럼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푸르넬과 주고받는 사이, 암전됐던 시야가 점차 돌아오며 밝은 빛이 눈에 들어온다.
어비스의 기운이 안개처럼 깔린 52층이 아닌, 죽음의 기운이 넘쳐흐르던 타락한 네크로폴리스가 아닌, 본래의 세상.
공략을 이틀 만에 끝내고 다시 돌아온 것이다.
주변에는 함께했던 비탈리아누스와 제국의 기사들이 함께였다.
"자네는 참 종잡을 수가 없군."
마찬가지로 히오를 발견한 비탈리아누스의 말이었다.
"주목받는 걸 싫어하면서도 화려함을 즐기니 말이야."
그 자리의 수많은 사람 중 오직 비탈리아누스만이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펼쳐지는 거대한 날개.
그것이 펄럭임과 동시에 이그러지는 공간.
흩날리는 검은 깃털까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으나 이는 모두 아름다운 허상.
눈을 어지럽히는 신기루임을 비탈리아누스는 알고 있었지만.
"눈부신 화려함에 본질을 숨기고 있군. 그 이유가 궁금하긴 하나... 자네가 이유 없는 일을 하지는 않겠지."
비탈리아누스는 히오에게 무슨 뜻이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사실 첫 만남부터 그랬지 않은가.
푸른 불꽃을 허세처럼 띄우고서는 그에 비웃음을 흘리자 곧 보란듯이 실체가 되었지 않았던가.
마치 당시에 겉모습만 보고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비탈리아누스 자신을 질책하듯이 말이다.
"그렇군. 이번에도 저들에게 경고를 내린 건가. 눈부신 화려함에 정의를 담아서."
그에 히오는 대충 미소 지으며 가벼운 웃음을 흘린다.
"훗."
뭔 개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으면 비탈리아누스는 혼자 말하고 혼자 결론까지 내려 버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비탈리아누스의 곁으로 프레드릭을 비롯한 신성왕국의 고위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과연 리퓨에 여신에 미친 사제들답게 검성이 있든 말든 거리낌 없이 히오에게 다가온다.
그들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다가온 이유는 하나.
"사도께서 날개를!"
"하지만 검은색의 날개는 좀...."
"의심하지 말지어다! 날개는 곧 여신의 은총!"
"저 사특한 존재를 거두어라 명하시며 검은 날개를 내려주신 게 분명합니다!"
블링크 스킬의 이펙트를 실제라 믿어 버린 까닭이다.
"성자님의 훌륭한 모습과 리퓨에 여신의 은총을 모든 사람들에게 어서 알려야 합니다!"
"어디 모습뿐인가요. 하찮은 몬스터마저도 가엾게 여기는 그 성품까지도 빼먹지 말고 알려야 해요!"
히오의 자그마한 한숨은 그렇게 호들갑 떠는 사제들의 목소리에 조용히 파묻힌다.
"에휴...."
어째 공략하는 것보다 그 이후가 더 피곤한 것 같다.
「'검은 날개의 성자'에 관한 이야기가 퍼집니다.」
* * *
새로운 공략의 층이 열리는 것은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으나 대략적인 주기는 정해져 있다.
공략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제한 시간이 모두 소모된 이후로 대략 한 달 정도 후에 새로운 공략의 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대략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의 시간을 두고 새로운 층이 열리는 셈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52층을 무척이나 빨리 공략해 냈으니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다는 말이다.
한 달하고도 절반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의 시간은 많은 것을 이뤄 낼 수 있는 시간이다.
가령 5서클의 마법을 더 익힌다든가.
아니면 제국과 빙의자들이 공식적으로 접촉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합 회의 일정을 잡는다든가.
혹은 사제들이 나서서 이전 층의 공략 실패로 피해 입은 지역에 정화 작업을 실시한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중 히오가 선택한 것은 두 가지였다.
5서클의 마법을 추가로 익히는 것과 피해 지역의 정화.
제국측과 빙의자들이 만나 향후 미래 대책을 세우는 것에는 굳이 히오가 가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그쪽으로는 시르베르트와 다프네가 더 많은 준비를 했을 테고 실비아와 그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고위 귀족들 또한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괜히 그쪽으로 심력을 쏟을 시간에 5서클 마법 하나 더 익히는 게 나았다.
배워야 할 마법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그 난이도는 4서클 때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것에만 온전히 집중한 것 또한 아니었다.
피해 지역의 정화.
이게 어찌보면 그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비스의 저주 받은 기운은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쌓일 틈도 없이 계속해서 정화 작업을 벌여야 했다. 게임이던 시절에는 히베루니아가 망해 버려서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으니.
5서클의 마법을 익힌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피해 지역으로 직접 이동해 '천상'으로 잔여 기운을 정화한다.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함이었다.
미래를 대비하고 과거는 잊지 않는다.
미래의 계획, 대비, 걱정, 희망, 불안.
과거의 후회, 반성, 인혐, 통회, 고뇌.
평범한 하루 속에는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그러한 것들이 퇴적되어 현재가 나아가고 하루가 완성되는 것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훌쩍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139화 가을날 정한 길
이메니아의 여름이 지나갔다.
유독 더웠던 탓일까.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여름이었다.
많은 이를 떠나보내야 했고 많이 울기도 했던 여름.
결국에 가을이 찾아왔음에도 유별나게 뜨거웠던 그 기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마음의 열상이 흉터가 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가을이었다.
치열했던 여름은 끝이 나고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는 말이다.
이메니아 아카데미의 조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나 봄과 가을이 그러했으니 지금은 가히 절경이라 할 만한 것이다.
형형색색 물든 나뭇잎은 각 동과 학부별로 나누어져, 마치 그림처럼 칠해져 있고.
가을꽃은 낙옆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거리 양옆으로 활짝 피어나 걷는 이들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준다.
클레어는 이메니아 특유의 하늘한 교복 위에 낡은 가죽 코트를 걸치고 기숙사를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가을의 시원한 공기를 맡으러, 그것을 즐기려는 수많은 학생으로 북적였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클레어와 비슷한 차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각 나라의 귀족 혹은 돈많은 집안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간혹 클레어처럼 누군가의 추천으로 들어온 평민도 있긴 했으나 아카데미 자체에서 지원해 주는 것도 있고 대부분은 후원하는 귀족이 있기 때문에 옷차림에도 많은 지원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학생들도 잘 입지 않는 교복 위에 낡은 코트 한 장만을 걸친 클레어는 다른 의미로 제법 눈에 띄는 것이지만, 누구 하나 그런 차림을 지적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이가 없었다.
클레어가 이메니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까닭이었다.
화려한 적발과 나날이 개화하는 미모.
모든 교수가 주목하는 압도적인 재능.
1년 만에 졸업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 능력에 도움을 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흑아의 습격과 어비스 몬스터의 습격에서 빛나는 클레어의 불꽃은 많은 학생에게 영감을 심어 준 것이었다.
그러니 클레어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종류가 많다.
연모 혹은 어린 짝사랑.
동경과 부러움.
조금의 시기와 질투.
그런 클레어인 만큼 하루가 멀다하고 수많은 스캔들과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지만, 클레어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그녀와 함께하는 이들은 언제나 동일했다.
"라베나."
멍하니 추모비를 올려다보고 있던 라베나가 클레어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클레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노란 머리칼 아래로 환한 미소를 짓는 라베나.
그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롤랑이 함께였다.
"흥, 참 빨리도 나오네. 게으름뱅이 클레어."
"내가 늦은 게 아니라 네가 빨리 나온 거야."
"자자, 싸우지 말고 어서 가자!"
양팔로 각각 롤랑과 클레어의 팔짱을 낀 라베나의 주도로 세 사람은 꽃다발이 가득 놓인 추모비 옆을 지나쳐 교수동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시르베르트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이트 브레이크라 명명된 두 달 전의 사건 이후로 모든 강의를 휴강하고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시르베르트의 호출.
그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역시나 롤랑이었다.
"나 혼자 상담하게 너희는 아픈 척하고 좀 빠져 있으라니깐."
"...어떻게 그래. 교수님이 우리 셋 전부 불렀는데."
"흥, 하여튼 도움이 안 돼."
근래에 알려지기 시작한 대륙의 위기.
검은색 게이트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끔찍한 몬스터들.
아직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고 무수한 추측만 나돌고 있는 가운데, 시르베르트가 원정대의 일원으로서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를 향한 롤랑의 동경과 연모는 더욱 짙어졌다.
그러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몇 시간의 치장을 거친 것으로도 모자라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롤랑의 시선이 클레어를 위아래로 훑는다.
"너는 교수님 만나러 가는데 옷이 그게 뭐니? 진짜 못참겠구나. 어쩔 수 없이 내일 안으로 내가 몇 벌 보내 줄 테니...."
"됐어."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미련한 클레어."
"내가 필요해서 그런 거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고, 고, 고, 고맙긴 무슨, 네 그 거지 같은 꼴이 한심해서 내가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당황한 듯 허우적대며 얼굴을 붉히는 롤랑을 내버려두고 클레어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다.
항시 고집하는 교복과 낡은 옷은 정신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나태해지지 말고, 쉼 없이 정진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다짐.
삶의 목표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자신도 수많은 학생처럼 예쁘게 꾸미고 가을꽃 향기를 맡으며 조금의 여유를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악한 이에게 당하지 않을 만큼, 외려 그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높이 올라가고자 한 것이 본래의 목표가 아니었던가.
이메니아에 입학했다는 것은 졸업만 한다면 그 정도 지위는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목표는 바뀌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무엇이 기점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마음 속에 한 사람으로 가득 차 버려 그 외에는 다른 목표를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높고 아득한 목표여서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남들과 같이 움직여서는 결코 그의 곁에 서지 못할 테니까.
"아무튼, 교수님이 왜 우릴 부른 거지? 요즘 엄청 바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 그 검은 게이트 때문에 제국과 협력해서 무슨 연합? 같은 걸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
소문은 빨랐다.
특히 제국과 관련된 큰 이슈는 수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고 아카데미 역시 그런 영향을 받아 소문이 빠르게 퍼진다.
"검은색 게이트가 계속 나타나는 게 유례없는 대륙의 위기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무서워."
"겁쟁이 라베나. 어차피 이번처럼 시르베르트 교수님이 막아 주실 텐데 뭐가 걱정이니?"
그리고 그런 소문 속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 사람.
"교수님도 물론 대단하시지만, 역시 검은 날개의 성자님을 따라올 수는 없지? 안 그래 클레어?"
검은 날개의 성자.
혹은 여신의 사도.
그 사람이 누굴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는 라베나가 클레어를 콕콕 찌르며 장난스레 물었고.
"...몰라."
클레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모르는 채 고개를 살짝 돌렸다.
"피해 지역을 직접 순회하며 여신의 기적을 행하고 있다나 봐. 그런 사람이 세상에! 나랑도 안면 있고 클레어랑은 친한 사이라니!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검은 날개의 성자니, 여신의 사도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문인 것 같으나 그가 행한 기적을, 그 힘을 몇 번이나 보았기에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너무도 유명해서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존재.
황제의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
그와 관련해서 들려오는 소문 하나하나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뿐이었다.
신성 왕국 히베루니아에서는 재앙처럼 나타난 악룡을 물리쳤단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그 전설의 용을 말이다.
단순 헛소문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성처럼 거대한 용이 날아가는 모습을 본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여신이 직접 현현해 그를 사도로 임명했다.
또 이번에 사라진 검은색 게이트도 히오 파블렌코 혼자 힘으로 한 것이라는 소문도 은근히 나돌았다.
검은 날개를 펼쳐 사악한 몬스터를 모두 거두었다고.
물론 전부 사실은 아닐 터였다.
소문인 만큼 과장도 많이 섞여 있겠지만, 도대체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대체 얼만큼 더 알고 얼마나 더 노력해야 그와 같은 것을 보고 함께할 수 있을는지.
몹시도 까마득한 목표였기에 클레어는 오히려 더욱 마음에 불을 지핀다.
그것을 원동력으로 더욱 높게, 그에게 닿을 수 있을 때까지 반드시 올라갈 것이라고.
그리 다짐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 * *
교수동이 있는 본관 건물에 도착한 세 사람은 곧장 시르베르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짧막한 노크와 함께 도착을 알렸고 허락이 떨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언제나와 같은 시르베르트의 모습이 보인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근래에 바쁘다는 소문이 사실이긴 한 것인지 안경을 접어 내려놓는 동작에서도 피곤함이 물씬 새어 나왔다.
"그래, 거기 앉아라."
앞의 소파를 가리키며 자리를 옮기는 시르베르트.
그의 모습에 롤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교수님, 많이 피곤하시면 라베나와 클레어는 돌려보내고 저와 따로 이야기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란다. 괜찮다, 롤랑."
"네. 교수님."
당당한 헛소리와 달리 쑥스러운 몸짓의 롤랑까지 소파에 앉고 나자 시르베르트의 입에서 곧장 본론이 튀어나왔다.
"좋은 기회가 생겨서 너희 셋을 불렀단다."
"좋은 기회라고 하심은...."
"말하자면 일종의 실습 개념인데 그 장소가 황궁이라는 게 좋은 기회이지."
"...황궁이라구요? 진짜 저희가 황궁을 갈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어찌나 놀랐는지 엉덩이를 달싹이는 라베나.
물론 그녀 못지않게 클레어도 놀란 상태였다.
제국 황궁이란 대륙의 패자가 군림하는 곳.
모든 권력의 중추이자 위대한 별들이 머무는 장소가 바로 황궁이 아니던가.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이 선망하고 최우선으로 가길 원하는 곳이 바로 제국의 황궁이었으니.
"그래. 아카데미의 우수 인재들에게 주어지는 기회지. 예전부터 있던 혜택이었어."
"원래 있던 거라구요? 저는 처음 들어봐요."
"그 의미가 많이 변질되서 그래. 바로 작년까지는 명문가의 자제들이 가는 게 당연했고 관례처럼 굳어졌으니 말이야. 한데 새 황제가 집권하고 다들 정신을 차렸는지 일 처리를 똑바로... 아무튼, 뭐 그런 이유로 내가 너희를 추천했고 당장 다음 주부터 투입될 거다."
"헉! 클레어랑 롤랑은 그렇다치는데... 저도 정말 가는 거예요?"
클레어의 능력이야 당장 졸업반이랑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롤랑 또한 클레어에 비해 조금 뒤떨어지지만, 충분히 뛰어난 재능이었다.
하지만 라베나는 평범보다 조금 나은 정도.
물론 그 정도만 해도 대륙 전체로 봤을 때는 손꼽히는 재능이지만, 아카데미 내에서는 그리 특출나지 않은 것이다.
그에 시르베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래. 너희 셋 전부."
사실 황궁에서 종합하여 원한 인재 목록에 라베나와 롤랑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시르베르트의 재량으로 그 두 사람까지 포함시켜 준 것이다.
클레어를 위한 행동이었다.
"걱정 말고 다녀와. 가서 사고 치지 말고 너희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일하게 될지, 너희의 선배들은 어떻게 지내고, 일은 얼마나 힘든지 가슴에 잘 새기고 돌아와라."
"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해요. 교수님."
"사랑해요!"
"...그래. 이제 그만 나가 봐."
시르베르트는 피곤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고 클레어를 비롯한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여왔다.
이는 정말이지 큰 기회가 분명했으니까.
인재가 별처럼 많은 이메니아에서도 황궁에 들어가는 이는 극히 소수였으니까.
"가 보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님!"
씩씩한 라베나의 인사를 끝으로 세 사람이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아, 클레어. 너는 올 겨울이 지나기 전에 진로를 정해 놓는 게 좋을 거다."
들려온 시르베르트의 말에 클레어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올해가 가기 전에 진로를 정해 놓으라니.
그것이 뜻하는 바가 명확했기에 다시 등을 돌려 시르베르트를 바라본다.
"그 말씀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시르베르트.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지만, 좋지 않은 상황이다. 제국은 더 많은 인재를 원하고 있지. 너는 겨울이 지남과 동시에 황궁의 예비 병단에 소속될 거다."
"예비 병단...."
"재능은 뛰어나나 아직 경험이 미숙한, 너처럼 어린 인재들을 위해 새로이 기관을 창설한다더군."
뛰어난 이를 더욱 빨리 성장시켜 비상 시를 대비해 귀중한 인력으로 투입하겠다는 제국의 뜻이었다.
"클레어, 너라면 거기서도 단연 압도적일 거다.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갈 테니 장래를 확실하게 생각해 놓아라."
클레어의 능력은 실전을 거치며 무척이나 가파르게 성장한다.
고작 일 년만에 졸업반과 비등한 실력을 가졌지만, 몇 달이면 그들마저도 가뿐히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히오의 부탁으로 직접 클레어를 데려왔고 일 년 동안 가장 집중해서 지켜본 시르베르트였으니 단언하는 것이다.
클레어의 재능은 동일 세대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아니, 역사적으로도 손꼽힐 정도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클레어의 표정은 오히려 굳어 버렸다.
"예비 병단이면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거죠?"
"글쎄... 아무리 못해도 기본적으로 삼 년은 있어야겠지. 거기서 능력을 인정 받고 다른 기관 혹은 부대에 편입되어 기사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삼 년."
길다.
그마저도 클레어의 재능을 생각해 줄인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길었다.
고작 몇 달 사이에 어떤 사건이 얼마나 많이 터졌었나.
어찌나 많은 소문을 들었던가.
그런 소문을 들으며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밤잠을 설친 경우도 허다했다.
자신이 그러한 소문의 현장에 히오와 함께 있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옆에 서겠다는 소박한 목표가 어찌나 높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앞서 다짐했듯, 남들과 같이 생각하고 움직여서는 결코 목표에 닿을 수 없다.
평생 그를 올려다보며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야 클레어답지 않았다.
"저는 예비 병단에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클레어는 시르베르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무리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고서야 평생토록 닿을 수 없음을 직감했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게 시작하느니.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게 시작하리라.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면 단 하나.
그렇기에 클레어가 바라는 것 또한 단 한 곳.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
별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별들이 모인 장소.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로열 나이츠에 입단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영웅, 비탈리아누스 마헬이 이끄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
이 세상에 군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집단의 일원.
그곳에 들어가겠다는 말은 제국의 최심부에 들어가겠다는 말이었으며 그러한 명예와 영광을 제 손으로 거머쥐겠다는 말이었으니.
클레어는 가슴을 쭉 펴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하게 시르베르트를 바라본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의 입단.
허나 그래 봤자 시작이었다.
그것마저도 시작인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목표가 간신히 보일 정도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클레어의 태도에 깊게 감명 받은 시르베르트는.
"...그게 되겠냐?"
한숨을 푸욱 내쉴 뿐이었다.
140화 가을날 정한 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