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용을 죽여라, 용을 지켜라
히오의 가설이 들어맞았다.
벤타이얼 속, 가장 먼저 멸망한 왕국이 신성 왕국 히베루니아였던 이유.
어비스 몬스터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느끼고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이다.
여기, 눈앞에 생생한 증거가 있지 않나.
저 먼 서쪽 섬나라 아릴레이야에서 이곳 히베루니아의 수도까지 올 이유가 그것 외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노골적으로 파괴 행각을 벌이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떤 신성의 흔적을 느끼고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내포되어 있는 잔인한 진실은.
"어비스 몬스터야."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
모든 혼이 완전하게 심연에 물들었다는 것.
한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잔혹할 이야기.
허나 정작 그 당사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 에리얼을 무력화한 후 다시 봉인한다.
"지금의 마법 지식으로는 재봉인은 불가능해."
- 방법은 내가 찾지.
"그동안 입을 피해는."
- 나의 목숨으로 막지.
잠시간 이어진 침묵.
그 끝에 다시금 무겁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
"용을 죽인다."
- 불가하다.
레가르다는 그의 신념처럼 곧게 쥔 창으로 하늘에 우뚝 선다.
- 그건.
레가르다 오비에르.
그의 정체는 천 년을 버텨온 용의 기사.
용의 기사란, 용을 지키는 자.
- 나의 앞에서 허용하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그는 언제나처럼 용을 지킨다.
그가 해 왔던 사명이자 해 나가야 할 일이었다.
"미안하다. 나는 또다시 이 세상이 멸망하는 꼴은 보기 싫어서 말이야."
히오 또한 지팡이를 고쳐 잡는다.
그에게 그의 사정이 있듯, 그만의 사명이 있듯이 히오에게도 존재하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에게 마법을 알려 주었던 한 늙은 마법사와의 약속을 시작으로, 지켜야 할 것은 그에게도 버거울 정도로 많았으니.
각자 지켜야 할 것이 달랐다.
서로 자라온 환경이 달랐다.
신념이 다르고 가치가 달랐다.
용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달랐다.
레가르다에게는 탄생과 동시에 함께했던 부모이자 스승이며 친구였고.
히오에게는 점점 더 강해져가는 심연, 미래의 거대한 변수. 어쩌면 멸망의 신호탄.
그러니 이건.
- 그대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악당인 이야기.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오고 멀리서부터 육중한 우레가 불행한 시작을 알린다.
고개를 든 히오의 잿빛 눈동자 위로 백색의 광휘가 뒤덮어 가고.
의념을 가득 실은 레가르다의 강기는 노란 용이 되어 벼락과도 같은 빛을 뿜어냈으니.
- 크르르르르.
그런 둘의 사이로 심연에 물든 용이 달려든다.
* * *
콰아앙!
용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벼락.
- 크르르....
타격은 있었다.
단단한 비늘은 웬만한 마법을 모두 무위로 돌린다고 하지만, 뇌제는 엄연한 최상위 스킬.
강한 전격이 용체를 타고 흐르고, 그에 찰나간 움찔 멈추는 용.
콰아아앙-!
그 거대한 몸과 부딪치는 것은 레가르다의 창이었다.
의념을 뺀 채 전력으로 휘두르는 힘에 크게 밀려나는 심연에 물든 용, 에리얼.
그렇게 용을 밀어낸다면, 이제 시작이었다.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뇌제와 청염.
늘어난 마력으로 둘을 동시에 다루며 레가르다를 압박해 들어가지만.
- 소용없음을 이미 알지 않나.
몇 번의 휘두름으로 가볍게 파훼한다.
- 그대는 잠시 빠져 있게.
그러고는 서쪽 해안을 지키고 있을 해룡까지 소환하는 레가르다.
바다가 아니었기에 이전과 같은 위용은 부릴 수 없겠으나 그럼에도 히오를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벼락과 벼락이 맞부딪치고.
다시 달려드는 에리얼을 레가르다가 막아선다.
쿠릉- 울리는 우레와 쉼없이 번쩍이는 번개.
그 바로 아래에서 맞부딪치는 용과 용의 기사.
히오는 해룡을 피해다니며 에리얼을 향해 청염과 벼락을 쏟아 낸다.
콰앙!
몇 번은 레가르다에게 막히고.
몇 번은 온전히 에리얼에게 적중함에도 여전히 건재한 몸짓.
아니, 오히려 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것 같지 않나.
갈수록 뇌제의 벼락에 움찔거리는 시간도 짧아지는 것 같고.
"착각이… 아니군."
왠지 더 버거워졌다는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에리얼의 주위로 짙게 퍼져 나가는 심연의 기운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염된 용의 혼이 어비스 기운까지 다루려 하고 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끔찍한 일이었다.
날 때부터 이미 지상 최강의 생명체.
반신이라 불리울 정도로 높은 격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오염이 당했음에도 여전하여 새로운 혼과 새로운 능력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빠르고 단단할 뿐인 거대한 생명체지만, 이대로 놔둔다면 점점 적응해 간 저것이 어떤 재앙이 될런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에.
"반드시 여기서 처리한다."
콰아앙-!
재차 뇌제의 힘으로 천둥을 터트리며 짓쳐들어 간다.
뱀의 몸, 머리에는 뿔이 달린 해룡의 공격을 피해 내고 에리얼의 몸 위에 벼락과 함께 내리꽂힌다.
동시에 두 손 가득 청염을 모아 직접 박아 넣을 계획이었지만.
- 불가.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레가르다가 창을 찔러 들어왔기에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사이 에리얼은 히오와 레가르다를 무시하고 교단을 향해 날아간다.
"어딜!"
- 에리얼.
물론 수백 번이 중첩된 벼락과 재차 막아서는 레가르다 때문에 경로를 크게 벗어나야 했지만 말이다.
- 크르르르르....
전투는 계속 이런 양상이었다.
에리얼이 교단을 향해 달려들 때는 동시에 막아서고 잠깐의 틈이 있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한다.
히오는 레가르다의 틈을 노려 에리얼에게 타격을.
레가르다는 에리얼을 막아서면서 동시에 히오의 무력화를.
해룡은 계속해서 히오의 뒤를 쫓고 히오는 그런 해룡을 피해 에리얼에게 공격을 쏟아붓는다.
레가르다는 그런 히오를 막아서면서도 동시에 에리얼에게 창을 휘두른다.
그것을 대략 한 시간쯤 반복하면은 제아무리 히오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상대는 명백히 자신보다 앞서 있는 강자.
히오를 상대하면서도 에리얼을 끝없이 막아서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의념을 다룰 수 없는 히오로서는 그런 레가르다를 피해 단박에 치명상을 입힐만한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고 레가르다의 계획에 동참한다?
그거야말로 어불성설.
용 하나 살리겠다고 다같이 죽자는 말이다.
에리얼은 분명 지금의 육체와 심연이라는 새로운 기운에 적응해 가고 있다.
끝모를 마력을 다루지 못함에도 이만한 강함인데 마력을 대신해 다른 기운을 다룬다?
혹, 그것을 마력처럼 사용하고, 종내에는 마법까지 사용해 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비약일 수 있겠으나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땐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터.
다시 에리얼을 봉인할 방법도, 방법을 찾을 시간도, 방법을 찾는다고 한들 완전히 심연에 물들어 아예 바뀌어 버린 혼을 되돌릴 방법도 없다는 말이다.
레가르다의 생각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히오의 상식으로는 그러했다.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한데...."
둘의 체력과 마력은 척보기에도 히오를 아득히 앞서 나간다.
하나는 지고한 생명체인 용.
하나는 무려 천 년을 살아온… 아니, 천 년을 버텨 온 존재.
당연한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가장 먼저 나가떨어지는 것이 히오임은 자명한 사실.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히오의 머릿속으로 조금은 진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여태 조용히 전투를 관망하고 있던 푸르넬이 말을 걸어온 것인데.
- 자네… 알고 있으면서 왜 사용하지 않는가.
그 말이 제법 가슴을 아프게 울린다.
- 그걸 사용하게. 전황은 삽시간에 뒤집힐 게야.
히오라고 그것을 모를까.
- 망설이지 말어. 결심한 것이 아니었나. 수천만의 사람을 위해 단 한 명에게 지독한 악당이 되겠다고.
"...."
시선을 들어보면 여전히 에리얼을 막아서고 있는 레가르다가 보인다.
멀찍이 물러난 히오를 굳이 건드리지 않는 레가르다 오비에르.
용의 기사.
그는 정말 용을 되돌릴 수 있다 믿는 것일까.
그저 그리 믿고 싶은 것일 뿐일까.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것은 절박하기 그지없는 그의 심정.
"나는… 몰라."
레가르다가 에리얼과 어떤 유대를 쌓았는지.
용이 잠에 빠져들 때는 어떤 심정이었고 무슨 마음으로 천 년을 버텨 왔는지.
어떤 약속을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뎌 왔는지.
또 지금은 얼마나 절박하게 막아서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다.
"나를 지독히도 원망하고 미워하겠지."
- 선택이란 게야. 그리고 내가 보기에 자네는 늘 옳은 선택을 해 왔어.
푸르넬의 말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확실한 힘이 있음에도 사용을 계속 망설인 것은 너무도 잔혹할 것이 뻔하기에.
다른 이들에게는 영웅의 빛, 구원의 힘.
허나 저 둘에게만큼은 그 사명을, 신념을, 천 년의 약속을 부수는 것이었으니.
- 사실 첫만남 때부터 자네는 알고 있었지.
용의 기사, 레가르다 오비에르.
창을 다루고 의념을 품으며 해룡을 부림과 동시에 더치맨이라는 비밀 병기까지 보유한 역대 최강의 괴물.
그런 이의 약점이라.
사실 뻔한 것이다.
- 인간이 그리 긴 세월을 살아올 수는 없으니.
자연과 함께하여 장수한다는 엘프족도 평균 수명이 고작 150세 정도이다.
천 년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란, 눈앞의 용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가르다는 어찌 버텨 온 것인가.
그 강인한 육체는 어찌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것인가.
그리고 크뢰츠발트는 어찌하여 레가르다를 찾아가라 하였나.
생각해 본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였다.
그의 주위는 늘 싸늘했고 그의 피는 차가울 것이며 그의 육과 혼은 서로 다른 것이었으니.
레가르다 오비에르.
그의 정체는.
- 크뢰츠발트의 강령술.
천 년 전에 이미 죽어 버린 용의 기사.
그러니.
- 언데드지.
히오의 손이 씁쓸하게 움직인다.
「스탯 '신성력'을 34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신성력'이 +34 상승합니다.」
* * *
"서, 성녀님… 이거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까...?"
더듬거리며 이리나를 부르는 호위 대장.
평소 언행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나 지금 상황에서는 당연한 행동과 말투였다.
하늘에서는 벼락이 수십, 수백 번씩 번뜩이고.
용과 기사, 사람이 날아다니며 천둥보다 더한 굉음을 토해 내는데.
충돌로 귀가 먹먹하고 땅이 울려오는데 그 바로 아래에서 멀쩡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왠지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는 듯한...."
허나 이리나는 침착했다.
생각해 보면 이전부터 그랬다.
성녀로서 낯선 히베루니아에 툭 던져졌음에도 짧은 시간에 본인이 할 일을 인지하고 빠르게 자리 잡았지 않나.
이전에는 검성과 마법사,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도 친구들을 살려 달라 간청하며 신성을 각성하였지 않았나.
그러니 이리나는 이번에도 침착하게 할 일을 해 나간다.
단순 충돌음에 본단 건물이 흔들리고 땅이 울리는 상황에서도 자리에 앉아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것이다.
가장 신성의 회복이 잘되는 곳이다.
교단 본단의 중심.
성역이라 불리우는 이곳.
그러니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격을 벗어난 전투 속에서도 차분하게 앉아 신성을 느끼려 애쓴다.
콰아아앙-!
콰아앙-!
꽈아아아앙-!
그것이 대략 한 시간 정도를 지나갈 때.
"히이익! 서, 성녀님! 아직이십니까? 왠지 용의 기사가 점점 밀리는 것 같은데...."
비로소 이리나는 눈을 떴다.
"경, 중앙의 성목 방향을 모두 제쪽으로 돌려 주시겠어요?"
"예, 예? 이 막대기 말입니까?"
"네. 그걸 전부 저를 향하게 놔둬 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한 시간의 집중 끝에 신성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본래 지닌 양에 비한다면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분명 교단을 지킬 정도는 충분할 터.
그러니 본디 사방으로 뻗쳐 있었을 성목을 모두 자신을 향하게 한다.
이는 신성 가호의 통제를 혼자 해내겠다는 의미.
못해도 열 명 이상이서 행했던 가호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였으니.
"...하겠습니다."
곧게 뻗은 이리나의 두 손 사이로 새하얀 빛이 뿜어지기 시작한다.
121화 용의 기사 (1)
「스킬 - '천상(天上)'이 발동됩니다.」
어둠이 물러난다.
밤이든, 먹구름이 끼었든, 마음이 어둠에 물들었든 상관없이 공평하게 내리쬐는 여신의 손길.
천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의.
따스하면서 동시에 황홀한 기적이 히베루니아의 상공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아아... 여신이시여."
교단의 중심에 있던 호위 대장은 무릎을 꿇는다.
현현한 신의 손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경배한다.
"이건...."
이리나 또한 손길에 가득 담긴 신성을 느꼈다.
다만 그녀는 누구보다 막대한 신성을 품고 지내 왔기에 금빛 안에 오로지 순수한 신성만 있는 게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분명한 기적이었으니 이리나 또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며 가진 바 신성을 더욱이 끌어올린다.
이러한 신성은 모두의 마음을 편안하게 녹여 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걱정이 씻겨 가는 평온의 금빛.
허나 그것은 모두를 부드럽게 감싸면서도 허락되지 않은 존재에게는 단호한 것이기도 했으니.
모든 이가 편안한 미소를 짓고 경배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신성에 반하는 존재는 둘뿐이다.
- 그대, 단단히 마음먹었나보군.
이 성스러운 영역 내에서 고통에 겨워하는 것은 단 둘.
용과 용의 기사.
심연에 물든 용, 에리얼과 용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언데드가 된 레가르다.
분명 온몸이 타들어 갈 고통 속에서도 히오를 직시하는 두 눈은 흔들림이 없다.
"...미안하다."
그의 뒤로 몸부림치는 에리얼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 이제는 그저 어비스 몬스터의 하나가 되어 버린 검은 용.
레가르다는 그런 에리얼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다.
- 마법사. 나는 더이상 후회할 짓을 하지 않아.
몸의 바깥쪽부터 조금씩 가루가 되어 흩날림에도,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함에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으니.
- 그러니 그대도 선택을 내렸으면 사력을 다해.
- 그 과정에서 내 몸이 타들어 간다 하여도.
레가르다의 전신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강기.
- 설령 내가 죽는다 하여도 망설이지 말고 해야 할 것을 해 나아가라.
노란 창에서 피어나는 샛노란 강기는 의념을 싣고 용이 되어 포효한다.
이윽고 그것이 횡으로 크게 휘둘러지니.
- 나 역시 그리할 테니.
천상의 빛이 동강 나며 갈라진다.
* * *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아니, 이미 죽어 버린 혼이기에 모든 것이 또렷하게 생각난다.
혼의 시작부터 되짚어가다 보면 그 속에서 항상 곁에 있던 존재.
푸른 녹음의 지배자. 바람 용 에리얼.
그런 기억의 줄기에서 에리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고작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긴 시간을 함께하였으나 그것이 지워지는 데는 그토록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 그대. 마을에 가려고?
그래, 그날은 용의 둥지에서 벗어나 마을에 내려갔었다.
식료품은 충분했는데도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가 거의 떨어졌기에.
그래서 에리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었다.
- 그대는 참 그것을 좋아하는군. 나의 입맛에는 영 맞지 않던데 말이야.
그런 물음에 무어라 답했더라.
그저 싱겁게 웃으며 다녀오겠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평온한 일상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임을 알았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꿈과도 같은 일상임을 알았더라면 그대로 마주앉아 도란도란 한없이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 잘 다녀오게.
용의 둥지에 앉아 이미 몇 번이고 읽었을 책을 읽고 있던 에리얼.
생긋 웃어 주던 그 미소가 마지막임을 몰랐기에 그대로 둥지를 벗어나 마을로 향했다.
마을로 향해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를 얻고.
병신처럼 웃으며 마을을 벗어났을 때는, 이미 이변이 일어난 후.
용의 둥지가 있는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짙은 검은색이었고, 그것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끔찍하고도 불길한 기운.
기껏 얻은 식재료마저 집어던지고 뛰쳐나가며 본 풍경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그나마 가까이 있던 붉은 용의 둥지와 하늘 용의 둥지가 있는 방향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고.
용의 둥지에 가까워질수록 마치 심연과도 같은, 오한이 느껴지는 기운은 진해져만 간다.
그렇게 도착한 용의 둥지.
에리얼의 상태는 끔찍했다.
본래의 용체로 돌아와 있음에도,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의 시커먼 기운이 짙게 배어 있고 그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으니.
그럼에도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일방적으로, 에리얼이 대응조차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당한 것이다.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물론 그런 것을 물을 시간은 없었다.
- 그대... 봉인식을 준비해 주겠는가.
고통을 참으면서 천천히 내뱉는 말.
그럼에도 여전히 현묘하게 빛나는 눈동자.
대화를 나눌 틈도 무언가를 물을 시간도 없었다.
상황이 초단위를 다툰다는 것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기에.
그저 주먹이 으스러져라 꽉 쥐며 봉인식을 서둘러 준비하는 수밖에.
상식으로만 배워 놨던, 쓸 일이라고는 평생에 없을 줄 알았던 봉인식.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봉인식이 시작되면 기약 없는 잠에 빠져들고,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어쩌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허나 눈을 감은 채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는 에리얼의 모습에 결국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저.
"다시 깨어나도 나는 네 앞에 있을 거야."
그리 약속할 뿐.
- 그대.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잠들어가는 에리얼의 눈빛에서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간 것은, 무척이나 고될 나의 미래를 예견했기 때문이었나.
그날 이후로 나는 용의 둥지 앞을 지켰다.
병신, 머저리.
사명을 다하지 않고 희희낙락하던 스스로를 끝없이 채찍질하며 잠든 용의 둥지 앞을 홀로 지켜 나가는 것이다.
겨울이 오고, 추적이는 비마저 싸늘한 질책이 되어 쏟아지는 날에도.
배가 고프면 벌레를 잡아먹고 그것이 없는 날에는 생풀을 뜯으며.
그마저도 없다면 없는대로 그저 둥지를 지킬 뿐이었다.
괴이와의 전쟁이라 불리는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발발했다.
온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용의 둥지에 나타난 것과 같은 기운이었지만, 훨씬 옅은 것.
그 정도에도 세상은 멸망 직전까지 치달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훗날 알게된 사실이고 당시의 나는 여전이 용의 둥지를 지킬 뿐이었다.
에리얼이 선물해 주었던 샛노란 창을 쥔 채.
옷은 해어지고 산발이 된 머리에 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감에도... 못다한 사명을 지금이라도 다하기 위해.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결국 늦었기에 후회라고 하지만, 이것에서 더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듯 그렇게 지켜 나간 것이다.
마냥 헛된 일은 아니었다.
전황이 악화되었는지 괴이라 불리는 것들이 근처에도 심심찮게 나오곤 했으니까.
부서져 가는 몸으로 창을 휘두르고 그것들로부터 용을 지켜 냈음에도 가슴은 답답했다.
끝이 보이는 까닭이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몸이 점차 말을 들어 가지 않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죽음이 목전에 닥친 것이다.
결국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한 채였다.
스스로 다짐처럼 내뱉은 약속도, 그의 사명도, 가장 소중한 존재도 결국 지키지 못한 채 죽음만 가까워진다.
체력은 진작 한계를 아득하게 넘긴 후였고, 팔과 다리는 멀쩡한 곳이 없었으며 몸 곳곳에는 피딱지가 눌어붙어 있었지만.
가장 엉망인 것은 마음이었다.
점차 감기는 눈꺼풀보다, 움직이지도 않는 육체보다, 마음이 더욱 무거워... 죽어 가면서도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무너지고 완벽한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 들려온 것은.
- 조각이 여기 있었구나.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
- 아이야. 기회를 주마.
그의 이름은 크뢰츠발트였다.
- 네 사명을 이어 가거라.
* * *
의념을 실은 창이란, 형체가 없는 것까지 베어 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늘을 뒤덮은 천상의 빛.
그것을 양분하는 샛노란 강기.
"...이 무슨."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어찌저찌 방어해 내거나, 시전자인 히오 자신을 공격해 들어올 줄 알고 대비 중이었는데....
설마 천상의 빛을 잘라 버릴 줄이야.
힘이 탁 풀린다.
- 그래도 스킬 자체를 파훼한 건 아닌듯하네만.
푸르넬의 말대로 잘려 나간 천상의 빛이 서서히 채워지고 있었다.
저 높은 하늘 꼭대기에는 여전히 금빛의 손길이 내려오고 있었으니, 그 근원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히오의 마력과 신성력이 다하지 않는 이상, 이것은 계속해서 레가르다와 에리얼을 괴롭힐 것이다.
- 크아아아!
혼이 소멸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에리얼.
그에 또다시 창을 휘두르는 레가르다.
채워지던 천상의 빛이 다시금 잘려 나가고, 잠시지만 고통 또한 옅어질 터였다.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잠시일 뿐.
빛은 결국 내리쬐기 마련이고, 고통스러워하는 에리얼이 있는 한, 레가르다는 그 곁에서 계속 창을 휘두른다.
스킬을 최대한 에리얼을 집중해 쏟아 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고위격인 용의 혼.
거기다 조금씩이지만, 그것을 막아 주는 레가르다의 존재.
여태 천상을 펼치기만 하면 하릴없이 소멸했던 다른 어비스 몬스터와는 버티는 시간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몇 번 정도 더 반복되었을 때.
"...이건."
에리얼의 몸부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힘이 다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느껴지는 기운이 한층 더 강해졌을 뿐.
혼이 소멸할 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이었다.
어비스의 기운도, 그것을 다스리는 용의 능력도.
"이래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것도 해결 못 하고 상황만 외려 악화한 꼴이 아닌가.
용의 기운은 더욱 강해졌고 그를 무력화하겠다는 레가르다의 계획 또한 더 버거워질 터.
천상이 통하지 않게 된다면 여러모로 일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히오가 고심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파아아- 새하얀 빛이 아래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것은.
정확히 교단의 중심에서부터 시작된 빛.
잊고 있던 이리나의 존재.
그녀의 독단적인 판단하에 신성 가호를 방어가 아닌 보조와 합류에 사용한 것이었으니.
천상의 금빛과 새하얀 신성이 합쳐져 더욱 강한 빛을 내리쬔다.
신성력 스탯을 올린다고 '천상'이 강화되지는 않는다.
그 지속 시간만 길게 가져갈 수 있을 뿐.
한데 그런 천상에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신성이 합류해 질이 크게 상승한 것이다.
그말인즉.
- 크아아아아!
용이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 ...에리얼.
레가르다의 육체 붕괴가 더욱 가속된다는 말이었다.
천상의 영역 내에서 강기를 둘러 최대한 자신을 보호했지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있겠는가.
언데드와 상극인 영역 한가운데서 그만한 무위를 보이며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으니.
레가르다는 창마저도 내려놓은 채 에리얼에게 다가간다.
- 조금만... 조금만 참아라. 에리얼.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두 눈 가득 담는다.
제 몸 또한 함께 타들어 가고 있음에도 그 따위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레가르다."
히오는 그런 레가르다를 향해 입을 연다.
차마 감추지 못한 착잡함이 함께 새어 나왔다.
"어서 거기서 빠져나와."
제아무리 천 년을 버텨온 레가르다라고 한들.
서쪽 바다의 지배자이자 용의 기사라고 한들... 이토록 많은 신성의 향연에는 버텨 낼 재간이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또한 용과 함께 소멸해 버릴 테니.
하지만 레가르다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답할 뿐이다.
- 어쩌면 이것이 순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전에는 심연의 빛에 고통스러워했다면, 이제는 천상의 빛에 고통스러워하는 에리얼.
그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며 내뱉는 말에는 몹시도 짙은 감정이 배어 있었다.
- 그저 내 욕심일 뿐이었던 것이야.
사명이니 뭐니.
결국 자신의 후회로 인해, 무거운 마음을 덜고자 그런 것은 아니었나.
현묘함도 잃고 품위도 잃은 채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에리얼의 모습.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으로 비롯된 일이 아니었냐는 말이다.
기어이 몸을 돌려 히오를 바라보는 레가르다.
뜨거웠다.
타들어 가는 육신보다 더 마음이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시리게 아려 오는 것이다.
천 년의 세월, 그 마지막에서 깨달은 것이라고는 결국 더욱 짙은 후회.
"네가 할 일은 분명 남아 있을 거다. 그러니 어서 나와."
- 아니, 이건 천 년 전에 이미 이리되었어야 할 운명이었던 게야.
천 년 전.
자신이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에 길게 늘어진 결말.
더욱 악화되어 버린, 잔인한 이야기.
-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고 무엇도 지켜 내지 못했구나.
몸이 하염없이 타들어 간다.
- 참으로 하찮은 생이었다.
점차 빠져 나가는 힘.
레가르다의 육체는 무너져가고.
에리얼의 검은 혼은 소멸되어 간다.
히오는 그 모든 과정을 놓치지 않고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모든 걸 놓아 버린 듯 허망한 레가르다의 눈빛.
빛으로 화해 가는 그의 육체.
소멸하기 직전인 에리얼의 혼.
미약해져 가는 몸부림.
그 모든 것을 한눈에 담고 있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리얼의 혼은 오래 버텼지만, 결국 소멸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니 고통에 겨운 몸부림 또한 미미해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허면 왜.
콰아앙-!
어찌하여 마지막에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것인가.
그 마지막 몸부림은 왜 하필, 레가르다를 강하게 밀쳐 낸 것이고.
왜 하필, 그렇게 날아간 레가르다는 천상의 영역 바깥에 떨어진 것인가.
그리고 완전히 눈을 감기 직전, 용의 시선은 왜.
"...."
레가르다를 향해 있었나.
알 수 없었다.
122화 용의 기사 (2)
웬 묘령의 여인이 작은 꼬마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달려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 테다.
하물며 그 속도가 일반인의 눈에는 제대로 포착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다면, 더더욱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귀가 뾰족한 묘령의 여인과 그 등에 업힌 작은 아이.
두말할 것도 없이 아이라이츠와 프레이야였다.
"꼬마야 이 방향이 맞니?"
『아뇨! 조금 더 왼쪽 방향이에요!』
"등에 업혀 있어서 글자가 안 보인단다."
그에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어 아이라이츠의 얼굴 바로 옆에 가져다 대는 프레이야.
『조금 더 왼쪽!!!』
"...그렇게 들이밀면 앞이 안 보이잖니. 당돌한 꼬맹아."
『꼬맹이가 아니라 프레이야!』
"알겠으니 얼굴 치우렴."
일반인의 눈에는 제대로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재빠른 몸놀림.
그녀의 본래 육체도 기본 스탯을 한계까지 찍은 뛰어난 몸이었지만, 이번에 얻은 엘프의 육체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단순 기본 스탯으로는 얻을 수 없는 탄성과 유연성.
거기에 민첩함은 한계 스탯이었던 본래 육체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으니.
프레이야를 업은 채로도 빠르게 용의 흔적을 따라 이동한다.
"제대로 업혀 있는 거 맞니?"
달리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프레이야의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등에 확실히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겠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다.
『그럼요!』
그에 다시 한번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화려한 전광판과도 같은 문자를 보여 주는 프레이야.
『얼른 가요!』
"가고 있잖니."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나도 그 정도는 안단다."
『아무래도 전투 중인가 봐요!』
"자꾸 뻔한 소리 할 거면 고개 다시 집어넣으렴."
『뭔가... 심상치 않아요!』
"그러니까 나도 보인대두?"
이제는 아이라이츠 역시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프레이야의 말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기운이 또렷하게 느껴졌으니.
저 멀리 먹구름 낀 하늘에 내리치는 벼락.
떨려 오는 공기 속에 섞인 우레.
그런 번뜩임 사이에서 조금씩 보이는 거대한 형체.
마치 성과도 같은 크기의 용.
『저기 보이는 게 에리얼이에요! 엄청 크죠?』
"그럴싸하구나."
『가까이서 보면 더 대단해요! 강하기도 엄청 강하고 가슴이 떨릴 정도로 엄청 웅장하고 완전히 깨어나면 엄청 현명하고 또 마법도 계속 쓸 수 있대요!』
"흥. 그래봤자 히오 스킬 한 번이면 죽을걸?"
『헉! (꒪ȏ꒪)』
말은 그리했으나 아이라이츠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본디 자연의 축복을 받은, 가장 고귀했던 엘프의 육체이지 않은가.
하늘 위의 전장.
그곳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의 덩어리들.
존재하는 한 명 한 명의 위상이 일대를 압도하다 못해 이곳까지 잔여 기운이 퍼져 나온다.
그것이 각자의 신념을 품고 서로 뒤엉켜드는 것이 느껴졌으니.
그런 존재들이 모인 곳에서도 가장 거대한 것은 역시 용이 가진 혼의 격과 압도적인 마력.
더불어 그 외의 다른 새로운 기운, 심연의 기운까지 마치 마력처럼 덩치를 불려 가고.
그것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존재감은 나머지 두 존재보다 확연히 뛰어난 것이다.
『마법사님이 분명 에리얼을 다시 돌려놓아 주실 거예요.』
"다시 돌려놓으면. 저 용이 우리 편이 된다는 말이니?"
『그럼요! 그럼 레가르다 아저씨도 행복해지고 이시도르랑 뮤틴스 아저씨도 행복해질걸요?』
"저게 정신만 차리면 모두가 다 행복해질 거라 믿는구나."
『에리얼은 강하고 현명하고 못하는 게 없다고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강하고, 외형은 아름다우며 현명하니 못하는 것 또한 없다."
『네!! 예전에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요 에리얼은....』
대화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아이라이츠로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흥분하며 와다다 쏟아내는 에리얼 찬양을 가로막는 것이다.
"너는 용의 조각일진데."
프레이야의 말을 들어보면 꼭.
"용을 동경하는 듯이 말하는구나."
자신과 용을 별개로 두고 동경하고 있지 않나.
아이라이츠가 이해하기로 프레이야 역시 용의 일부라 알고 있다.
한데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듯 별개로 두는 프레이야의 말에는 강한 동경이 존재했으니.
그에 이어진 것은 대답 대신 적막이었다.
프레이야의 말문이 흔치 않게 막힌 것이다.
아이라이츠 또한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그야... 에리얼과 저는 분명 같지만, 다른 존재인걸요.』
"뭐라는지 안 보인단다."
『우씨....』
얼굴을 다시 아이라이츠의 얼굴 옆에 바짝 붙이는 프레이야.
『저랑 에리얼은 같지만, 다른 존재라구요!』
분명 같은 혼이었으나 원체 격이 높은 용이 아닌가.
그 일부를 분리하여 별개의 생명체로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프레이야였다.
그럼에도 이전의 다른 조각들은 용의 조각답게 여러 방면으로 뛰어났으나....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역사상 가장 쓸모없는 조각인걸요.』
솔직히 말해서 왜 탄생했는지조차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시도르나 다른 엘프들이 늘 에리얼의 뜻이 있을 거라고.
프레이야 자신은 언젠가 분명 저 높은 곳에서 아릴레이야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그리 말해 주었기에.
자신을 보며 희망을 품었기에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되는 건 없었다.
마법도, 용언도.
심지어 말조차도 하지 못해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는 벙어리.
『그런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상상하는 거였어요.』
깨어난 에리얼의 모습을.
자신은 기억하지 못해 그림으로만 봐야했던 그 모습을 상상하고 동경하는 것.
하루 종일 도전해도 발현되지 않는 마법에.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 서클에 낙담하고 좌절할 때면, 그런 에리얼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못하는 반푼이 그 이하이지만, 본체는 아름답고 강하며 현명할 것이니.
『어쨌든, 에리얼이 돌아오면 전부 해결될 일이니까요! 이제 괜찮아요! ٩( °ꇴ °)۶』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소멸과 맞바꾸어서라도 에리얼을 깨워 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차피 이토록 작은 조각 정도야 없어져도 티나지 않을 텐데.
생각과는 달리 씩씩한 표정으로 문자를 띄워 올리는 프레이야.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이라이츠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무덤덤하게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과한 동경은 품지 마."
프레이야에 대해 아직 잘 모름에도 자신의 경험으로 아는 것은 있기에.
"저 용처럼 되고 싶은 거잖아."
프레이야는 분명 그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저토록 강하게 열망하는데.
그런 열기를 바로 앞에서 느끼며 어찌 눈치채지 못할까.
본인이 말하기를 엄청 강하고 엄청 아름다우며 또 엄청 현명하다는 용.
"그렇게 되고 싶다면 동경으로는 안 돼."
아이라이츠가 보기에 프레이야는 마음을 좀 더 굳게 먹을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은 그걸 이해 못 하겠지만.
"네가 용의 조각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으니 말이야."
『그럼 언니도 마법사님을 동경하지 않는 거예요?』
"동경과 사랑은 전혀 다른 말이란다."
『(。・ω・。)?』
역시 이해하기 어렵지만, 대답만큼은 힘차게 한다.
『네! 언니!』
"언니라고 하지 마."
『네! 언니!』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도착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을 터였다.
하늘 위, 용의 모습은 점점 거대하게 보이고 있고 혼란한 전투의 모습마저도 슬슬 보이고 있었으니.
그즈음이었다.
아이라이츠와 프레이야 두 사람의 말 수도 점점 줄어들고 조용히 차오르는 긴장과 함께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그 즈음.
나아가는 방향, 먼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성스러운 빛.
먹구름 위에 드러나는 여신의 형상.
어느새 벼락과 우레는 그친 채 내리 쏟아지는 것은 금빛의 광휘.
황홀하며 성스러운 기적.
그 속에서.
"...."
용은, 추락하고 있었다.
* * *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한 삶.
정말이지 하찮았던 생.
회고하기를, 분명 의미가 있는 삶이었다.
목표가 있었고 희망이 존재했던 삶이었다.
허나 죽음 직전에 돌이켜 본 삶에는 무엇이 남았던가.
지킴으로서 완성되는 삶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으니 무엇이 남았겠는가.
나는 분명 에리얼의 앞에 서 있었다.
고통에 겨워 하는 그 모습을 등지고 선 채 한탄했었다.
당시 마법사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뒤편을 향해 있던 마법사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었고.
지금 나의 눈에도 역시 의문이 가득 담겨 있다.
분명 나는 에리얼의 앞이었다.
썩지 않는 언데드의 몸은 타들어 가고 머지않아 완전히 바스라질 터였다.
그게 분명했다.
허면 나는 어찌하여 아직도 살아 있는가.
먹구름 낀 하늘을 보며 나자빠져 있는가.
재로 화해 가던 육신은 왜 다시 멀쩡해졌는가.
지킬 수 없다면, 지킬 것이 없다면 적어도 함께 죽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과분한 바람이었나.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다.
그대로 뒤를 돌아보면, 거대한 용이 눈에 들어온다.
지상에 놓여진 채 잠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진 용.
혹시 마법사가 무언가를 해낸 것은 아닐까.
에리얼을 다시 잠에 들게 하고 혼을 정화할 방법을 찾자고.
그리 내게 말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건, 채 한 걸음도 옮기기 전에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혼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언제나 존재하고 있던 용의 혼이 이젠 정말이지 완전히 소멸했기에.
전혀 느껴지는 것이 없었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에리얼.
불러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비틀거리며 도착한 에리얼의 앞.
여전한 용체.
다시 돌아온 녹빛의 비늘.
끝없는 마력.
흠집조차 나지 않은 강인한 육체.
조용히 엎드려 있는 그 모습은 천 년 전처럼.
며칠 전과도 다를 게 없다.
조금 있으면 마법사가 와서 투덜거리겠지.
그러면서도 언제나처럼 정화 마법을 시작할 테고.
나는 그 옆에 우두커니 선 채 조금씩 돌아오는 에리얼의 영혼을 느끼며.
조금씩 돌아오는 희망을 느끼며 언제나처럼 그 곁을 지키면 될 것만 같지 않은가.
물론 이는 몹시도 헛된 망상.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 혼.
다시는 떠지지 않을 눈꺼풀.
더이상 들을 수 없을 목소리.
어찌했어야 할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시기가 잘못되었나.
불길한 게이트를 해결하고 나서 시작했어야 됐을까.
아니, 게이트를 기운이 새어나올 틈도 없게 완벽하게 막아 냈더라면.
천 년 전, 헛된 희망을 품지 말고 그저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더라면.
애초에 그날에 내가 에리얼의 곁에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적어도 네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며 소멸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과거의 무엇부터 어긋났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하나뿐.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는 것.
천 년의 버팀도.
그간 품어 왔던 희망도, 사명도.
웃으며 보자는 약속도, 반드시 지켜 내겠다는 다짐도.
지켜 내기 위해 살아온 자가 그 어떤 것도 지켜 낸 것이 없었으니.
나는 무얼 한 것인가.
나의 천 년은 대체 어떤 가치가 있었는가.
그에 대한 답이 나온 것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고.
이제는 지킬 것도, 지켜야 할 이유도 남지 않았기에.
헛된 희망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평온히 잠든 에리얼.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영원한 안식에 들어선 용.
시선은 여전히 죽은 용을 향한 채 천천히 입을 연다.
- 이제 그만 죽여다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 * *
- 이제 그만 죽여다오.
죽은 용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리 말하는 레가르다.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바람대로 죽일 수도, 그렇다고 힘내서 살아 보자고 말할 수도 없다.
이유나 과정이야 어찌됐든, 용을 죽인 것은 히오였으니.
무어라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기만이 아닐까.
그에게 건네고 싶은 수많은 문장이 스쳐 지나간다.
미안하다.
나의 불찰이다.
직접 게이트를 공략했더라면.
그 기운에 노출된 용이 깨어날 수 있다고 예측했더라면.
그래도 에리얼은 네가 살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 말이 되어 입밖으로 꺼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미 보아 버린 까닭이다.
천 년을 굳세게 버텨 온 레가르다의 눈빛이.
신념으로 번들거리던 그 눈동자가 텅 비어 버린 것을.
모든 희망, 목표, 사명, 삶의 이유를 잃은 자의 눈빛을.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이 레가르다의 목표를, 삶의 이유를 되찾게 하지는 못할 테다.
텅 빈 마음을 채울 수도 없을 터였다.
-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용의 기사였지만.
레가르다는 다시 한번 입을 연다.
텅 비어버린 눈동자에는 오직 죽은 용의 모습만이 담긴 채였다.
- 그래도 죽는 것 정도는 함께하게 해다오.
천 년의 기다림 끝에 마주한 만남은 너무도 짧고 가슴 아픈 것이었으니.
적어도 죽는 것만큼이라도 함께할 수 있기를.
다음 생이 있다면 그곳에서라도 길게 마주하고 싶었으니.
- 부탁하네. 죽여 주게.
짙게 끼인 먹구름에서 참다 못한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히오의 머리를 적시고.
죽은 용의 위에도 내려앉았으며.
텅빈 레가르다의 눈망울 아래에도 흘러내린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뇌제가 들렀다 간 장소에는 언제나 짙은 먹구름이 끼어 있다.
벼락은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거운 울음이 항시 뒤따르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뇌제를 처음 각성했던 델피르 마을.
와일들리 평야의 전쟁.
이메니아 아카데미의 참사.
회색 성 꼭대기의 악당.
불행을 막고자 벼락의 힘을 불렀으나, 벼락은 결국 먹구름을 동반할 뿐이다.
어두운 먹구름은 결국 비를 쏟아 내고야 만다.
쏴아아- 쏟아지는 비를 구태여 막는 이는 없었다.
이미 죽은 용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와중에 히오만이 비를 잔뜩 쏟아 내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는 알고 있었기에.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델피르 마을에서도.
와일들리에서도.
이메니아 아카데미와 회색 성의 꼭대기에서도.
언제나 그랬기에 히오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벼락이 그치면 비가 내리리라는 것을.
그리고 비가 그치면.
『...레가르다 아저씨!』
분명 해가 다시 뜨리라는 것을.
123화 용의 기사 (3)
격전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볼 수 있었던 여신의 손길.
그리고 추락하는 용.
프레이야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차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어, 어?』
선명하게 느껴지던 혼의 존재감마저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으니.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그 예상대로 현장의 분위기는 참담했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죽은듯 누워 있는 용의 모습.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레가르다와 그 뒤에 있는 히오까지.
굵은 빗방울이 그들을 거세게 두드리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빗소리가 가득함이 분명함에도 적막에 휩싸인 것이다.
『레가르다 아저씨!』
그에 땅을 딛고 선 프레이야가 있는 힘껏 레가르다를 불러 보지만, 적막은 여전할 뿐이다.
프레이야는 탄생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몸이었으니.
제아무리 화려한 문자로 번쩍이며 불러도 상대가 등을 돌려 버린 이상에야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서로가 마주 보아야지만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레가르다 아저씨....』
그럼에도 프레이야는 조금씩 레가르다를 향해 다가간다.
자신의 말 따위, 그에게 닿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건다.
세상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접한 이야기는, 자신의 본체 에리얼과 그녀를 지키는 기사 레가르다 오비에르에 관한 것이었다.
멋있다고 생각했다.
오직 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수명을 아득히 넘어서 천 년을 버텨 온 기사라니.
위대한 마법사와 함께 섬 깊은 곳에 용을 봉인하고 그날부터 쭉 아릴레이야 전체를 수호하기 시작한 기사라니.
부러웠던 만큼이나 막중해지는 것은 책임감이었다.
자신이 해내지 못하면 결국 레가르다의 사명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프레이야도 자신의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에리얼을 깨우고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사명일 것이라 모두가 말했으니 그것은 자신의 사명이 분명할 터였다.
비록 말도 못하는 반푼이지만.
서클 하나도 온전히 완성시키지 못하는 멍청한 용의 조각이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렸기에.
아릴레이야의 기대도, 레가르다의 긴 사명과 희망 또한 부족하디 부족한 자신의 손에 달렸기에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보았기에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 어찌나 허망한지.
결국 마법사가 용을 소환해 내고 그것을 정화하기 시작했을 때 기쁜 마음 한구석에는 허탈함 역시 존재했었으니.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무슨 쓸모가 있는가.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던 것도 다른 이가 해결해 버린 마당에 왜 존재하고 있는가.
대체 무엇을 위해 탄생해야 했던 것인가.
그 의도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고 스스로가 내린 결론은 제법 비참한 것이다.
'실패작' 혹은 '에리얼의 실수'.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나 쓸모 없는 자신을 구태여 왜 만들었겠나.
그렇게까지 결론을 내렸지만, 마음이 깊은 심해까지 침잠하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될 테니까.
- 같이해 보자. 프레이야.
마법사 히오의 격려.
- 당신이 있음으로서 모든 아릴레이야인들이 희망을 품고, 활기를 띄고 살아가고 있어요. 감사해요 프레이야.
이시도르의 감사.
- 프레이야 님께서는 위대한 용이시지 않습니까.
수많은 이의 그런 말들이 쌓이고 쌓여 침잠하는 마음을 지탱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힘이 되는지 알기에 프레이야는 레가르다를 향해 다가간다.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죽은 용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 허망한 뒷모습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건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레가르다 아저씨.』
짧은 생을 살아온 자신조차 그 정도의 허탈함일진대 레가르다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어쩌면 자신의 작은 경험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천 년을 오직 한 존재를 위해 버텨 온 자.
그것이 한순간에 끝나 버린 그 심정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프레이야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곧은 신념으로 굳건하던 뒷모습이,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으니.
『다 괜찮을 거예요.』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전해지지도 않을 말이다.
감정을 실을 수 없는 문자 따위로 어찌 그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레가르다의 시선이 이곳을 향할 리가 없는데도 프레이야는 그를 향해 계속 다가간다.
닿을 리 없는 말을 건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며.
* * *
- 솔직히 말해 보게.
마치 악마처럼 은밀하게 속삭이는 푸르넬의 목소리.
- 저 아이가 막 도착했을 때, 자네 무슨 생각을 했나?
그런 푸르넬의 물음에 히오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쓱거린다.
"응?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 쯧쯧... 차라리 귀신을 속이게나. 솔직히 말하게. 썩 괜찮은 생각을 떠올렸지 않은가. 참고로 나는 찬성했다네.
"무슨 말인지... 설마 내가 뭐, 멀쩡한 프레이야를 죽여서 영혼을 빼낸 다음에 에리얼의 육체에 크뢰츠발트식 강령술을 하는 생각을 했다는 그런 말인가? 전혀? 아닌데?"
- ...그렇게까지 생각했었나, 자네?
"...."
히오의 말문이 막힌다.
당연히 실행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본디 거대한 혼의 일부였을 프레이야.
그만큼 크뢰츠발트식 강령술의 조건에 부합하는 혼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몹시도 커다란 문제가 있었으니, 멀쩡한 프레이야의 혼을 죽은 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생각은 했지만, 실행할 마음은 없었다.
- 역시 자네는 훌륭한 네크로맨서가 될 게야.
"...아무튼,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으니 다행이지."
- 동의하네. 예로부터 용과 그에 관련한 것들은 베일에 싸여 있고 신기한 것이 많았다지만... 이건 정말이지 신비롭군.
뒤로 물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풍경.
별건 아니었다.
현장에 도착한 프레이야가 레가르다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뿐.
그러면서 자연스레 죽은 용, 에리얼에게 가까워지고 있을 뿐.
다만 그 과정 속에서 프레이야의 몸이 마치 별처럼 빛난다면 어떤가.
아스라이 흩어지고 있는 것과도 같으면 어떠한가.
- 이건 용이 직접 새겨 놓은, 숨겨진 마법이구먼.
프레이야는 그 자체로도 이미 마법이었다.
- 발동 조건을 유추해 보건대 용의 죽음. 혹은 그 혼의 완전한 소멸 이후에 저 아이가 접근할 것.
그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꽤나 냉혹한 것이었으니.
- 용은,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예견했나보군.
그리하여 가장 깨끗한 영혼을 떼어내 올려 보낸 것이다.
언젠가 껍데기만 남을 육신을 프레이야가 대신할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 놓은 채로.
"여러 부작용이 심하겠는데."
- 당연하지. 격의 차이도 극심하고 저 아이가 지고한 생명체의 육신을 다룰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용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육체가 가진 값어치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용의 육신.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대륙 단위의 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막중한 짐, 막연한 계획을 작고 어린 혼, 순수하기만 할 혼의 어떤 것을 믿고 행했겠는가.
- 수많은 탐욕을 부르기에 용에게는 스스로 육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 허나 그러지 않고 저 아이를 보냈다는 것은....
답은 간단한 것이다.
"...아직 레가르다가 남아 있음을 알았던 거겠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자가 여지껏 사명을 이어 가고 있음을.
그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레가르다 오비에르.
용의 기사가 약속했었으니까.
그라면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약속을 지키고, 사명을 지킬 것임을 알기에.
자신의 소멸을 예감했음에도 그것을 믿고 프레이야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레가르다가 계속 삶을 이어 나가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참 경이로운 광경이야."
프레이야가 옮기는 한 걸음에 점차 바스라지는 몸이 별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유독 짙은 어둠에 빛나는 별가루는 하나둘씩 모여 에리얼의 몸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당사자인 프레이야와 넋이 나가 버린 레가르다 둘뿐이었다.
허나 눈치를 채지 못함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프레이야는 이내 곧 레가르다의 바로 뒤에 도달했고, 그 별과도 같은 반짝임은 정도를 넘어 섰으니.
그제서야 레가르다는 뒤를 돌아봤지만.
『레가르다.』
그 눈앞에 보인 것이라고는 별가루가 되어 밤을 수놓으며 날아가는 조각뿐.
그렇게 고개를 돌린 레가르다의 등 뒤에서 용의 무거운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인다.
- 경이로운 마법이야.
비는 어느새 그친 채였다.
* * *
환청인가.
"레가르다."
분명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너무도 익숙해서 외려 낯설은 그것은 분명 에리얼의 목소리였다.
"에리얼...?"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았고, 그때 눈에 비친 것은 몹시도 작지만... 그만큼 환한 별의 가루.
이건 또 무엇인가.
낯선 존재 하나와 낯익은 존재 하나가 나타났음은 알고 있었다.
그중 낯익은 존재가 프레이야라는 것도.
그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레가르다는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신경 써야 할 이유도, 의미도 없었을 뿐.
아니, 그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상실했을 뿐.
에리얼의 영혼 조각 중 하나인 프레이야.
그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기에 둘은 다른 존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에리얼은 어리숙하지도, 기초 마법에 끙끙대지도,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지도 않을뿐더러 밤이 되면 감기에 걸릴까 걱정할 필요도 없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둘은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뒤에 있는 것은 분명 프레이야였다.
에리얼이 아닌, 명확한 프레이야의 기척.
분명 그랬다.
허면.
"...."
이 눈부신 별가루는 무어란 말인가.
이것은 틀림없는 에리얼의 마법이지 않은가.
자신이 이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않은가.
마치... 그때처럼.
에리얼이 아직 어렸던 자신에게 처음 보여 준 마법과 너무도 똑같았으니 말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에리얼."
프레이야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화려한 별가루까지 불러오며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은.
- 어... 어?
등 뒤에서 들려왔다.
- 왜 이렇게 다들 작아졌... 응? 모, 목소리가!
착각이 아니었다.
에리얼의 목소리.
그것으로 떠드는 것은 분명 프레이야의 어린 혼.
본래에 비한다면 너무도 작은 조각.
육체를 다스리기는커녕 이대로 둔다면 외려 육체에 잡아먹힐 미약한 영혼.
몸을 돌린 레가르다의 시선에 그런 용의 모습이 가득 담긴다.
- 뭐가 어떻게... 아, 레가르다 아저씨! 괜찮아요?
레가르다이기에. 누구보다 에리얼을 잘 아는 레가르다였기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에리얼.
- 이것이 너의 선택이었구나.
자신이 아는 한, 세상 그 무엇보다 현명했던 용.
그런 에리얼이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상태 하나 예견하지 못했을까.
그러니 레가르다는 가만히 용을 올려다본다.
에리얼이 아닌, 프레이야가 된 녹빛의 용.
바람을 관장하기는커녕 바람에 휩쓸릴 것만 같은 연약한 영혼.
- 이거 몸이 좀 이상한데요... 우악! 이게 뭐야!
언제나 평온하고 현묘하던 눈빛 대신 온갖 불안과 걱정,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이는 녹색 눈.
- 요, 용! 제가 용이 됐어요 레가르다 아저씨!
이런 현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레가르다는 안다.
지고한 육체에는 그에 걸맞은 혼이 필요한 법.
그렇지 못해서야 머지않아 제풀에 지쳐 잡아먹혀 버릴 터.
용의 육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혼의 격을 빠르게 키워야 할 것이다.
- 용이다아아! 그리고 목소리도 나온다아아! 우와아아아!
그리고 그 방법은 이 세상에서 오직 레가르다만이 알고 있는 것일 테고.
크게 어렵지는 않으리라.
그저 알려 주면 될 뿐이다.
해본 적은 없으나 곁에서 지켜본 세월은, 떠올리며 추억한 세월은 아득하기에.
용의 격식, 품위, 걷는 법, 나는 법, 본체를 변형하는 법.
알려 주면 될 뿐이다.
- 근데... 제가 왜 용이...?
언젠가 에리얼이 그에게 알려 주었듯이.
이제는 자신이 프레이야에게 알려 주면 될 뿐이었다.
- 프레이야.
용의 기사란 언제나 용과 함께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 마지막 용으로서 품위를 갖추어라.
그리 말하는 레가르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옛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회한의 미소인지, 그녀의 선택에 대한 미소인지.
아니면 어설픈 프레이야의 모습에 나온 웃음인지, 그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마 그조차도 모르리라.
다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 나 역시 마지막 용의 기사로서 사명을 다할 테니.
다시 눈을 떴을 때 미소 짓고 있겠다는 약속은 지킨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 가르칠 게 많겠어.
살아가면서 천천히 고민해 봐야 할 터였다.
124화 용의 기사 (4)
"끝... 난 건가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교단의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 이리나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다.
세상에 종말이 닥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천지를 울려대던 충돌음과 천둥.
벼락과 번쩍이는 빛.
그 바로 아래에서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 집중했지만, 사실 심장은 전장 못지않게 쿵쿵대고 있었다.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성채만 한 용이 하늘을 날고 신수가 포효하며 벼락과 천둥을 다스리는 자들이 충돌하는데.
그 바로 아래에서 어찌 심장마저 태연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리나는 결국 해내 보인 것이다.
"저... 잘한 거겠죠?"
본래의 목적은 본단의 보호.
무구한 역사를 지닌, 성역이라 불리웠던 교단의 중심만큼은 보호하기 위함이 최초의 목적이었으나.
어둠을 가르고 여신의 손길이 느껴졌을 때.
그 속에서 신성을 느꼈을 때.
또 그것을 발휘한 자가 히오임을 알고 그것이 비장의 한 수임을 문득 느꼈을 때.
회복한 모든 신성을 쏟아 내어 금빛 손길에 합류시킨 것이었다.
"그 이후로 저 악룡이 추락했고 나머지도 잠잠한 것 보니 잘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뭐, 제가 뭘 알겠느냐만은...."
드러누운 이리나의 곁에는 호위 대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경."
"예. 성녀님."
"제가 이렇게 누워 있는 거 헤럴드 할아버지께는 비밀이에요."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시면 또 성녀의 존엄이니 체통이니 엄청 잔소리하실 테니까요."
"하하하. 대사제님께서 성녀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성국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 겁니다."
언제 그토록 격하게 싸워 댔냐는 듯 주위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결과는 어찌된 것일까.
서로 아는 사이인 듯 보였던 용의 기사와 마법사 히오는 왜 서로 싸운 것일까.
의아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신성을 이렇게까지 쥐어짜 내며 쓴 것은 처음이었으니.
흔히 말하는 마력 탈진이라는 증상이 이와 비슷할는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비가 내리네요. 성녀님."
활짝 열린 지붕 사이로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에 이리나의 눈이 기분 좋게 감겼다.
"비를 막을 것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이대로 있고 싶은걸요."
"감기 걸리십니다."
"저는 한 번도 감기에 걸려 본 적이 없어요. 성녀잖아요. 헤헤."
"그건... 부럽군요."
그에 호위 대장 또한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바라보는 하늘.
천둥과 번개가 사라진, 그저 먹구름이 짙을 뿐인 하늘.
"저는 이제 신화 속 이야기를 모두 믿기로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저 하늘에 용이 날아다니고.
창을 든 기사와 지팡이를 쥔 마법사가 뒤엉켜 들며 싸우고 있었다.
"신화니 전설이니, 참으로 허무맹랑한 소리뿐이다 싶었는데 오히려 축소되어 전해진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성녀를 지켜야 한다는 임무로 현장에 있었기에 모두 보았지 않은가.
이리나가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목을 꺾어 하늘을 보고 있었기에 아는 것이다.
마법사는 벼락과 천둥, 화염을 다스리고.
기사는 창으로 용을 부렸으며.
그 사이에서 포효하는 악룡은 그런 둘을 압도했다.
어쩌면 자신은, 알려지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던 신화를 목격한 것은 아닐까.
그 현장에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인간이 맞긴 한 건지 의구심이 듭니다. 고작 5위계에 올랐다고 기세 등등했던 제가 어찌나 부끄러워지던지."
그런 호위 대장의 말에 이리나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 어쩐지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즐기면서 말이다.
"제가 그랬죠? 마법사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고."
"...예. 베르덴의 새로운 수호 기사가 탄생했다고 들었을 때는 그자도 참 운이 없다 생각했습니다. 하필이면 그 검성의 바로 다음 수호 기사가 되었으니까요."
무엇을 하든 비교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검성이 직접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그린 듯한 영웅이었던 검성 비탈리아누스가 아니던가.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니, 죽음을 거부한 기사를 부린다느니 하는 소문이야 들었지만, 이건... 소문이 모자란 것 같지 않습니까."
왜 검성의 뒤를 잇는 새로운 영웅으로 불리는지.
어찌하여 공포로서 군림하던 흑아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리나는 누운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러게요. 대단하신 마법사님께는 언제나 도움만 받네요."
돌이켜 보면 첫만남은 무척이나 사소한 계기였다.
운이었는지, 여신께시 인도하신 것인지는 모르겠다.
당시에는 그가 이토록 대단한 존재일 줄 전혀 모른 채 만났었다.
아주 작은 도움을 준 것뿐이었다.
한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것은 너무도 크지 않은가.
자신이 능력을 각성하게 된 것도.
자신을 위해 검성과 맞서고 친구들의 누명을 씻어 준 것도.
그렇게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어찌 보답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도움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더... 더 노력해야겠어요. 아직 신성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요."
그가 맞서고 있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마음이라도 한결 편안하게 해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니 얼른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생겨나는 것이다.
가진 신성은 추기경 헤럴드조차 아득하게 능가할 정도로 대단하나,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아직 미숙하고 모르는 것이 많았으니 말이다.
"저도 왠지 어서 검을 휘두르고 싶어집니다."
"그럼 같이 힘내 봐요."
"하하하. 영광입니다 성녀님."
기분 좋게 내리던 비도 점차 그쳐 가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잠시 멈춰 있던 이들도 다시 움직일 테지.
이전보다 더 활기차게. 힘을 내서 말이다.
그러니 이 비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비.
시원하게 쏟아 버리고 난 후, 다시 시작하자는 메시지.
그렇게 한동안 기분 좋게 내리던 비는.
"와... 아름답네요."
반짝이는 별가루와 함께 끝이 났다.
* * *
짧은 휴식을 마치고 아주 조금이지만, 기력을 회복한 이리나는 곧장 움직였다.
"아, 고마워요. 경."
호위 대장의 망토로 비에 젖은 몸을 가린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이리나.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용이 추락해 버린 곳이었다.
"용은 정말 죽었을까요?"
"그렇게나 포효하며 날뛰었는데 지금은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죽었을 겁니다."
"그렇겠죠...."
어쩐지 슬퍼하는 것 같던 정체 모를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용과 이름 모를 기사. 그리고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외에 정확한 사정을 아는 이는 없었으니.
거리는 고요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끝까지 남아 있으려하던 병사와 기사들, 신성 가호로 용의 공격을 몇 차례나 막아 낸 고위 사제들까지 몸을 피했으니 근처는 유령도시처럼 적막에 잠긴 것이다.
도시의 피해는 제법 컸지만, 용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
전투의 규모를 떠올려 본다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라파엘라 광장 부근일 겁니다."
무너진 건물 하나를 지나치고 또다시 몇 개의 건물 사이로 걸어간다면 리퓨에의 천사, 라파엘라 석상이 중앙에 놓여진 광장이 나온다.
평화에 행복해하고 석상 아래에서 신을 노래하는 찬송이 늘 울려 퍼지던 광장.
그곳에 용이 있었다.
아직 골목이었기에 광장의 일부만 보였으나 그럼에도 거대한 꼬리는 확실하게 보였다.
거침없이 하늘을 휘젓던 용의 일부.
이리나와 호위 대장은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걸음을 옮긴다.
정면에 놓인, 위로 높게 솟은 시계탑.
그것에 가까워질수록 광장은 가까워지고 보이는 범위 또한 넓어진다.
용의 꼬리를 지나 다리,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몸통.
그리고.
"...성녀님 방금 분명...."
움직이는 꼬리.
순간이었지만, 분명 움직였다.
죽었을 거라 생각했기에 눈을 의심했을 뿐, 그 거대한 꼬리가 움직이는데 잘못봤을 리도 없다.
분명 용은 움직였다.
"이게 무슨...?"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저것이 만약 살아 있다면 다시금 재앙이 펼쳐질 테니.
자신들처럼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 기사들을 다시 물려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의문과 당혹감에 휩싸인 이리나와 호위 대장이 광장을 향해 더욱 빠르게 접근하려는 순간.
"이리나."
그들을 멈춰 세우는 익숙한 목소리.
"마법사님...?"
히오 파블렌코였다.
어쩐지 조금 피곤한 듯한 얼굴로 모자를 고쳐 쓰고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는 히오.
"못 본 걸로 해 줄 수 있을까. 이리나 그리고...."
히오의 시선이 닿자 호위 대장은 짧게 고개를 숙인다.
"에버첸 바아네스입니다."
"그래. 바아네스 경. 내 이리 부탁하지. 방금은 보지 못한 것으로 해주게."
히오의 피곤한 얼굴이 두 사람을 지나쳐 먼 뒷편을 향한다.
많은 사람이 몰려 오고 있었다.
그친 벼락과 천둥, 내리지 않는 비.
전투가 끝났음을 직감하고 기사를 필두로 조심스레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알려지겠지만, 그게 지금이어서는 안 돼."
가뜩이나 혼란한 시국이다.
전대륙이 힘을 합쳐 어비스라는 명확한 적을 상대한다는 개념이 잡히지도 않았으니 이런 시국에 등장하는 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 큰 혼란과 전쟁을 불러 올 수 있을 터.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용에게도.
"잠시만 못 본 척 등을 돌리고 사람들을 막아 줄 수 있겠나."
당장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조금의 시간.
용이 사람들에게서 모습을 숨길 수 있는 그 정도의 시간만 저들에게 주면 될 테니까.
그에 이리나는 별다른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언젠가... 모두 이야기해 주실 거죠?"
"물론이지, 이리나."
"알겠어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제가 설득할게요."
이리나는 당차게 말했으나 사실 저 많은 인원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광장은 넓었고 용은 거대했으며 다가오는 사람은 많았으니까.
그런 문제를 히오에게 말했으나.
"하지만 모두를 막지는 못할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말렴."
지팡이를 가볍게 들어올리며 슬쩍 미소 지을 뿐인 히오.
피곤이 가득함에도 여유로운 미소였다.
"광장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만 전해 주면 된단다."
"...알겠어요. 꼭 그렇게 할게요 마법사님."
막대한 임무라도 부여받은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나.
이리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지팡이를 조금 더 위로 들어올리는 히오.
호위 대장 에버첸은 그런 히오를 향해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으니.
"악룡은... 정말 죽은 것이 맞습니까?"
교단을, 히베루니아 자체를 파괴하고 싶은 것처럼 날뛰던 악룡.
그것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들에게는 언젠가 또다시 발발할 재앙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물은 질문이었고, 히오는 단호하게 답했다.
"죽었네. 그 영혼까지 완벽하게 소멸되었어."
그리고는 들어올린 지팡이의 끝이 허공에 원을 그렸고.
그 끝에서 뻗어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푸른 녹빛.
「스킬 - '인탱글'이 발동됩니다.」
마법으로부터 비롯되어 발현된 스킬은, 광장을 중심으로 숲을 이뤄 나가기 시작한다.
거대한 풀이 자라나고 덩쿨이 건물 위로 자라나며 광장을 둘러싸는 것이다.
흙바닥 사이로, 돌을 뚫고서도 자라나는 식목.
그것이 용의 모습을, 그 앞에 서 있을 용의 기사를 가리고 나아가 광장 전체를 가려 버린다.
눈앞에서 펼쳐진, 그야말로 마법 같은 광경에 넋을 놓은 채 중얼거리며 묻는 에버첸.
"알겠습니다... 용의 기사와 베르덴의 수호 기사께서 악룡을 처단했다. 그리 이야기하면 되겠습니까?"
몸을 돌려 커져 가는 숲을 바라보던 히오가 그 말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표정은 제법 씁쓸한 미소를 띈 채로,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
"아니. 그게 아니야."
천 년을 기다린 용의 기사가 용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그건 너무 잔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니.
"사악한 악룡은 내가 죽였다네."
그게 맞을 것이다.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영혼 채로 지워 버렸으니."
세상 모든 이에게는 그리 기억되어야 할 것이었다.
사실, 용은 사악하지 않았고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이며.
그에 맞선 기사는 그런 용을 지키고 싶어 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용은, 기사가 계속 살아가기를 바랐다는 것.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고작 그것을 위해 천 년을 이어진 이야기.
"이제 끝났으니 말이야."
뭐,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터였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664 / 1000)]
125화 신성 마법사의 집? (1)
- 괴이와의 전쟁,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용의 둥지 앞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니.
레가르다의 말이었다.
- 용과 엘프의 기록? 그건 전부 내가 지웠다. 내가 지우지 못한 것은 수백 년에 걸쳐 아릴레이야가 지워 왔지. 상상 속 종족이라 여겨지며 모두의 기억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기를 원했고 결국 그리되었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레가르다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 인간의 탐욕을 잘 알기에 그리하였다. 엘프는 멸족 직전까지 치달았고 용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나 인간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니 대마도사의 힘으로 아릴레이야 해역을 폭풍우 치는 바다로 만들었고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천 년은커녕 그 반절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그 대마도사란 히오 자신도 알고 있는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네크로맨시와 흑마법의 종주.
크뢰츠발트.
레가르다와 연이 있으면서도 세상의 비밀에 가장 근접한 대마도사는 그밖에 생각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리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 아니다.
부정.
아릴레이야 전체를 감싸는 그 막대한 대마법의 시전자가.
자연과 환경을 뒤바꾼 그 마법의 주인이 크뢰츠발트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 나도 모른다. 마법사에 대한 견문이 짧기도 했거니와, 당시에는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 정신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겠군. 돌이켜 보니 이름 정도는 들어 놓을 것을... 싶은 후회가 들기도 한다.
모른다는 아주 실망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아직 물어야 할 것은 많았다.
이종족에 관한 기록을 지운 것은 이해하겠다만, 전쟁의 기록은 왜 지운 것이냐 라는 물음에는.
- 나 역시 궁금하여 찾아봤으나 알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 괴이와의 전쟁. 그것에 관한 기록은 내가 관여한 것이 아니다.
천 년을 살아온 레가르다 역시 모르는 어떤 존재가 벌인 일이라고 한다.
그것도 레가르다도 모르게.
누구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말이다.
누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런 대화가 한창 오가고 있을 때.
똑똑- 노크가 울리고 잠시 뒤 열리는 문.
"대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히오 파블렌코 님."
두 사람이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곳은 신성 왕국 히베루니아의 왕성 내부.
왕국의 수뇌부와 약속된 만남의 시간이 된 것이다.
- 못 다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도록 하지.
그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가르다.
- 그대와는 꽤 많은 일을 하게 될 것 같으니.
* * *
"커흠...."
"크흠."
어색한 헛기침만이 감도는 이곳은 히베루니아 왕성의 대회의실.
교단의 고위 사제는 물론 왕성의 고위 귀족까지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물론 신성 왕국이라는 이름답게 고위 사제가 곧 수뇌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새하얀 절제의 미백이 존재하는 대회의장.
그리고 그런 회의장과 어울리는 순백의 사제들.
이런 대회의실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곳과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무척이나 눈에 띄는 차림의 네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깨끗함을 넘어서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회의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련의 사람들.
두말할 것도 없이 히오와 레가르다.
그리고 아이라이츠와 프레이야였다.
프레이야가 어찌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제 몸통만 한 큰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있느냐.
그것에 관한 건 잠시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러니까... 여기 계신 이분이 서쪽 바다의 지배자로 알려진 레가르다 경이시라고요."
이들이 일차적으로 놀란 것은 용과 맞서 싸운 기사의 정체가 서쪽 바다에서 악명 높은 레가르다라는 것.
레가르다에 관한 소문은 원체 거짓되고 믿기 힘든 것이 많아서 이렇게나 놀라는 것이다.
저주 받은 바다의 주인.
그곳을 건너오는 뱃사람들을 잡아먹고 생을 연장하는 괴물.
심해의 뱀을 부리는 악당.
수백 년을 살아온 바다 괴물 등.
어디 그뿐인가.
단지 소문뿐만이 아니라 뱃사람들은 레가르다를 일종의 바다 전설로 여기기도 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레가르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는 자신의 아이에게 레가르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아이가 다시 자라나 자신의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도 레가르다라는 이름은 여전히 뱃사람들에게 들려오곤 했었으니.
그런 말을 들은 육지 사람들은 아예 레가르다 자체를 허구의 인물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레가르다가... 실존하는 인물...?"
믿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미신을 곧잘 믿는 뱃사람의 상상 속 인물이라고만 여겼던 존재가 대뜸 나타난 것치고는 나름 준수한 반응이라 할 수 있겠다.
뭐,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그 엄청난 무위를 모두가 보았지 않은가.
신화 속 용의 존재도 보았고 그에 맞서는 모습도 보았는데 레가르다 정도야 얼마든지 실존할 수 있지 않겠나.
"더이상의 무례를 범하지 말게. 왕국의 은인이시다."
그렇다고 해도 히베루니아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은인 앞에서 보일 만한 말과 행동은 분명 아니었다.
추기경 헤럴드의 온화한 질책에 무례를 깨닫고 표정과 행동을 바로 하는 이들.
그것을 확인한 헤럴드의 시선이 이번에는 레가르다의 옆을 향한다.
"여기 계신 작은 마법사님은 아릴레이야의 귀족 아가씨로군요."
히오가 썼던 입문 마법사용 고깔모자를 쓰고 히오를 흉내 내며 근엄하게 앉아 있는 프레이야.
가뜩이나 작은 머리에 챙까지 넓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텐데 꿋꿋하게도 앉아 있다.
게다가 왼손에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길고 얇은 나무 막대기마저 쥐고 있었으니.
히오의 지팡이가 내심 멋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히오를 작게 축소해서 복사해 놓은 듯한 모습.
마치 마법사를 흉내 내고 싶어하는 꼬마 아이의 모습에 헤럴드를 비롯한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전에 즉위식 행사에서 뵌 적이 있지요."
프레이야는 헤럴드를 비롯한 몇몇 사제들과 만난 적이 있다.
실비아의 즉위식에서 짧게나마 본 적이 있었기에 레가르다를 소개할 때처럼 소란이 이는 일 없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프레이야의 옆에 앉아 있는 여인.
히오 파블렌코야 그 화려한 차림새와 독특한 개성이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헤럴드와 친분 또한 있었기에 괜찮았다.
그 옆의 레가르다라는 존재는 상당히 믿기 힘들고 아직도 긴가민가 싶지만서도 그 엄청난 무력을 직접 보았지 않나.
그것을 보았으니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었다.
프레이야 또한 아릴레이야의 귀족이 아닌가.
그런 프레이야가 왜 이곳에 있는지... 에 대한 것도 레가르다에 관한 소문의 근원이 아릴레리야 해역인 것을 감안하면 억지로 억지로 이해하고 넘길 만했다.
하지만 그 옆의 인물은 아무리 이해해 보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우선 화려한 겉모습은 개성이 뚜렷한 앞의 세 사람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순전히 외모 하나로만 그 정도였다.
늙은 헤럴드의 눈마저도 번쩍 뜨이게 하는, 아름다움의 정석.
"뭘 봐? 늙은이."
"...."
다만, 저 삐딱한 자세와 말투 하며.
무엇보다 척 보기에도 기이하게 큰 저 귀는 꼭... 아이들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엘프의 모습이지 않은가.
"아이라이츠."
"응! 미안! 나도 모르게 또 그랬네? 죄송해요. 추기경님.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외모는 완벽한 엘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하는 행동은 동화 속 엘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히오 파블렌코의 말 한마디에 싹 바뀌는 저 태도와 말투는 그냥 미친년 같....
"크흠! 괜찮습니다."
헛기침 한 번으로 마음을 다잡은 헤럴드가 아이라이츠의 눈을 피해 다시 히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갔다가는 마음속에 심마가 찾아올 것 같았으니까.
"예, 아무튼 네 분께 거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엘프.
뱃사람들의 전설이라 여겼던 서쪽 바다의 지배자.
이제는 사라진 마법사.
그리고 그냥 귀여운 프레이야.
용을 막아 낸 것은 이 네 사람이었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히오 파블렌코의 이름 정도만 올라가겠으나 그의 일행에게도 감사를 전하기 위한 자리.
그런 자리에서 레가르다와 아이라이츠의 정체가 처음 공개된 것이었다.
"감사를 위한 성제를 열지 않아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도시 복구하기도 빠듯하지 않습니까."
명성 포인트를 꽤 쏠쏠하게 벌 수 있을 축제 또한 히오는 거절했다.
무엇이 그리 즐겁다고 축제까지 벌이겠는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당시 심연에 침잠했던 에리얼의 모습은 어비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것이라 둘러댔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와 히베루니아로 향하는 모습을 마침 프레이야와 함께 있던 레가르다가 목격했고 그런 모습을 또 마침 히오와 아이라이츠가 목격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히오가 나서서 용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다는 것이 헤럴드와 나머지 사제들이 알고 있는 대략적인 사건의 전말.
물론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건, 허점투성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진실은 조금 다를 것이라는 것. 무언가 이야기하지 않은 게 많다는 걸 알지만, 관련해서 캐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히오 파블렌코의 입을 어떤 방식으로 열게 한단 말인가.
무력? 어림도 없다.
정치적인 압박? 가능할 리가.
무려 황제를, 베르덴 제국을 지키는 수호 기사이다.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존재는 오직 한 사람. 제국의 황제뿐이라는 의미.
그가 곧 제국 무력의 상징이자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무엇으로도 그를 압박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압박할 수 없다면 품어야 했다.
아니, 품을 수도 없으니 친하게라도 지내야 한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보답하라. 리퓨에께서 내리신 가르침이죠. 힘이 닿는 데까지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사실 히베루니아의 정치적 입장에서는 성제를 여는 것이 마냥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히오에게 감사를 전하고 나아가 리퓨에 여신께 감사하는 축제.
그만큼 히베루니아와 히오 파블렌코가 긴밀하게 엮여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었고.
또 그런 히오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성국을 방문할 테니 리퓨에의 이름 또한 더욱 널리 알려질 터였다.
하지만 히오가 한사코 거절하니 차선책으로 보답이라도 내려야 한다는 게 히베루니아의 입장.
"으음...."
그에 히오는 고민에 잠긴다.
얻어 낼 게 너무 많아서와 같은 그런 행복한 고민은 아니었다.
정확히 반대였다.
'받을 게 없는데?'
히베루니아에서 히오가 원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생각나는 게 없었다.
마법 무구나 마법서. 관련된 아티팩트 등.
뭐, 이런 건 테트라디아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필요할 때 도움을 달라던가 하는 부탁 또한 크게 의미가 없다.
그건 굳이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에.
"혹시 신성력과 관련된 아티팩트가 있을까요?"
그러니 신성력과 관련된 아티팩트 정도가 간신히 생각 났는데.
"...아, 서, 성물 말씀이시군요...."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교단이라고는 리퓨에뿐이고 그마저도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이 약해지고 있는 시대지 않은가.
신성력과 관련된 아티팩트는 모두 성물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교단의 성물을 턱 내어줄 수 있겠는가.
"농담입니다."
그러니 히오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당장 떠오르는 게 없지만, 일행은 원하는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바라본 것이었고.
하필이면 바로 옆에 앉은 것이 레가르다.
이 지독한 용 덕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그저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을뿐이다.
분명 머릿속에 용용용, 용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다.
그러니 패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프레이야는....
『( ´•౪•`)』
그냥 넘어가고.
다음으로 그 옆을 바라본다면 진작부터 히오를 바라보고 있던 예쁜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다.
한쪽 눈은 찡긋 윙크하고 손으로는 하트를 그리고 있는 엘프의 모습.
"에휴...."
저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째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 하나씩 빠진 놈들뿐인지.
아무튼, 나머지 일행도 아무 생각 없어 보였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 물건으로 받을 게 없다면, 장소를 택하는 건 어떤가.
푸르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곳에도 잘 찾아보면 분명 마법사의 집이 있을 텐데 말이야.
일리 있는 말이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히베루니아의 포탈도 활성화하면 좋고 또.
- 그리고 높은 확률로 신성 마법사의 집이지 않겠나.
신성 마법사의 집이라면 신성 마법서를 구할 수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마력 스탯을 전부 찍고 아티팩트와 마나 호흡법의 영향으로 마력 스탯이 600 근처에 도달했으니.
5서클에 오를 준비 또한 벌써 갖춰졌다는 말이었다.
'역시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다더니.'
- ...?
평소에는 옆에 앉은 세 사람만큼이나 쓸모 없는 푸르넬이지만, 이렇게 간혹 좋은 의견을 내고는 한다.
"사실 제가 찾고 있는 곳이 하나 있긴합니다."
생각을 마친 히오가 운을 띄웠다.
"장소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예. 히베루니아에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 누가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곳이 있을까요."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면서도 누가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말씀입니까?"
"네. 왠지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가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지하 공간. 아마 꽤나 중요한 장소에 숨겨져 있는 공간일 겁니다."
자신이 설명하고도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이렇게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마법사의 집'이다.
그런 엉망진창인 설명을 들은 헤럴드의 표정은 의외로 진중했다.
진중함을 넘어서 조금 심각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아셨는지... 그런 곳이 하나 있긴 합니다."
역시 마법사의 집은 존재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곳이 마법사의 집인지 모르는 듯했고.
"그곳에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본래 사제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는 합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헤럴드는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저희와 연이 깊기도 하고 많은 도움을 주신 히오 파블렌코 님이시니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는 곳임에도 막상 가면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말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안 될 가능성이 크니 다음에 다른 말을 하셔도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런 헤럴드의 걱정에 히오는 아주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법사의 집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전형적인 집린이의 반응이 아닌가.
"하하하. 걱정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확신에 찬,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오.
"제가 또 마법사 아닙니까. 하하하하!"
신성 마법과 5서클.
잘하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126화 신성 마법사의 집? (2)
달리 지체할 이유도 없었기에 히오는 바로 움직였다.
"그곳에 가는 건 히오 파블렌코 님 한 분이십니까?"
히오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물론 아이라이츠의 사소한 반발이야 있었다.
"나는?"
"너는 레가르다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
"쳇."
저렇게 아쉬운 티를 내도 어쩔 수 없다.
신성 마법사의 집이라 예상되는 곳이 아닌가.
레가르다도, 아이라이츠도 신성과 관련된 장소는 조심해야 한다.
크뢰츠발트의 강령술은 기존의 네크로맨시와 완전히 다른 구조.
사기(死氣)를 사용하지 않고 어둠 마력이라는 새로운 힘을 사용했기에 겉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히오처럼 관련 지식이 있거나 신성력에 노출되지 않는 이상, 이들을 언데드라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교단의 중심.
게다가 가려는 곳에는 높은 확률로 신성력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 동행은 불가능했다.
- 그나마 지금 시대이니 이곳에 올 수라도 있는 것이지. 과거 신성이 충만하던 시대라면 중심은커녕 수도에 접근조차 못했을 걸세.
푸르넬의 말대로 신성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기에 망정이지.
언데드가 성국의 수도를 활보하고 있는 이 상황이 몰락해 가는 신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가르다와 프레이야, 아이라이츠는 본래의 거처로 돌아가고 히오는 헤럴드를 따라 이동한다.
그의 뒤로는 열 명이 넘는 사제가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채 뒤따르고 있었다.
왜 이리 다같이 움직이는 거냐고 헤럴드에게 넌지시 물으니.
"저희가 갈 곳의 특수성 때문이죠."
뭐, 그렇다고 한다.
그래 봤자 마법사의 집일 텐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우르르 몰려가는 건지.
'아무튼 신성 마법이라....'
히오의 신성력은 2서클 마법 '실드'를 히든 특성으로 진화하면서 얻은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근본이 신성 마법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신성 마법을 직접 구사할 수 있게 되고, 또 나아가 그것을 진화까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못해도 신성과 관련해서는 '천상'을 뛰어넘는 위력을 가지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드는 의문.
'그러고보니 신성 마법은 테트라디아 마탑에 없었지 않아? 그래도 마법이라는 말이 붙었는데 말이야.'
신성 '마법'이지 않은가.
마법에 관련해서 없는 것이 없다는 마탑에서, 신성 마법과 관련된 단어는 보지 못했다.
그것이 히오의 경지가 낮아서인지 아니면 원래 없는 것인지 푸르넬에게 물었고, 옛날이야기에 환장하는 푸르넬 답게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 신성 마법사는 나의 시대에도 귀했다네. 때문에 마법사의 집에 관련해서도 알려진 바가 적어.
'왜 하필 신성 마법만?'
- 신성 마법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으나 사실은 순수 신성에서 조금 더 마법에 가깝게 변형한 것이지. 순수 마법이라 할 수는 없고 순수 신성이라 하기에는 애매해. 따지자면 신성에 더 가까운 거지.
'그럼... 신성 마법에는 마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 그렇다네. 신성력을 마력처럼 활용한 것이 신성 마법. 그렇기에 신성 마법이라는 단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마법사도 많았어. 신성 마법이 아니라 신성술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이야.
'...내가 봐도 그게 맞는 것 같은데?'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을 마법이라 불러도 되는가?
신성을 다루는 사제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나.
마법이란 무릇, 마력으로 문양을 한땀한땀 새기고 퍼즐을 완성해 가듯 하나씩 그 힘을 일깨워 내는 것일진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푸르넬이 혀차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온다.
혀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 쯧쯧... 자네 같은 사람을 나 때는 뭐라 불렀는지 아는가? 마법 꼰대라네, 마법 꼰대. 아직 젊은 게 사고 방식이 저리 꽉 막혀서야... 쯧.
'....'
- 신성력만을 활용해서 마법을 흉내 내던 것은 신성 마법의 초기 형태이고 당연히 더 발전했지. 마력과 신성력을 접목해 함께 사용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일어났고, 성과 또한 있었어. 그런 자들이 비로소 신성 마법사라 인정받았던 거라네.
'...그걸 먼저 말해 주던가.'
- 역사란 과거부터 천천히 거슬러 올라와야 하는 것이야. 쯧쯧... 이래서 요즘 젊은것들은....
요즘 애들은 의지가 없다, 나 때는... 으로 시작하려는 푸르넬의 말을 빠르게 끊고 묻는다.
'신성력과 마력을 합쳐서 하나의 마법으로 만든다는 게 가능한 일이야?'
- 가능했지. 본디 정통 마법사란 신을 섬기지 않는 존재. 한데 신을 섬기면서 마법을 발휘한다? 별종이었어. 자네 세상의 말을 빌리자면 MZ세대 마법사라는 말이야. 그러니 신성 마법사가 귀했고 마탑에도 관련된 층을 만들지 못한 채 전쟁이 시작되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라네.
'신기하네... 그럼 신성 마법은 어떤 식으로 마법이 발현되는데?"
- 그건 나도 모른다네. 내가 살아생전 가장 싫어했던 게 사제랑 신성력이야. 녀석들이 대충 몇 마디 띡 하면 몇 달을 공들이고 공들인 귀여운 내 언데드 부대가 봄날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데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웬일로 제법 흥미로웠던 푸르넬의 이야기.
대충 알짜배기 이야기는 들었으니 뒤에 이어지는 언데드들과 푸르넬의 눈물겨운 감동 실화에는 귀를 닫아 버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베르덴의 여황제 폐하께서는 강녕하신지요."
마침 헤럴드가 말을 걸어왔기에 푸르넬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근래에 하도 사건사고가 많아서 걱정이긴 한데 뭐, 괜찮을 겁니다."
"허허. 두 분께서 정말 각별하신가 봅니다.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 나오는군요."
"예 뭐... 이런저런 모습을 많이 봐서 걱정이 되긴 하네요."
지금의 실비아는 그린 듯한 여제의 모습이지만, 가면 속의 모습을 아는 히오로서는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이 혼란한 시국에 마음 고생이 상당히 심할 테니 말이다.
그런 히오의 모습에 미소를 은은하게 피우는 헤럴드.
"이거 어쩌면 제국에 큰 경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예? 경사라면 어떤...?"
"글쎄요. 허허허허허."
"...."
왜 저리 허허허허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좋아 보였으니 더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웃던 헤럴드는 이내 표정을 바로하고 조금은 걱정된다는 어투로 다시 히오에게 말한다.
"그런데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도시를 지켜 준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정말 텅 빈 공간이어서요. 상상하시던 거랑 다를 겁니다."
"괜찮습니다. 텅 빈 지하 공간. 그게 바로 제가 찾던 곳이니까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시더라도 다른 원하는 바를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하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 마법삽니다. 마법사. 하하하하!"
헤럴드의 저런 걱정도 이해는 하지만, 히오의 입장에서는 뭐랄까... 귀여웠다.
여유 넘치는 고인물의 입장에서, 걱정 가득한 뉴비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 그런 귀여움.
여태 이런 반응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않나.
아릴레이야에서처럼 입을 떡 벌리고 놀랄 헤럴드의 모습을 상상하며 히오는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는 것이다.
"...예. 원하시는 바를 꼭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히베루니아 성을 빠져나와 옆의 건물로 향한다.
가로로 넓고 길게 뻗은 새하얀 건축물.
다름아닌 리퓨에 교단의 본단이었다.
그런 본단의 내부로 들어가면 새하얀 타일과 새하얀 기둥.
그리고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헤럴드 일행을 보고 그들만의 인사법으로 고개를 숙여 온다.
"가시죠."
헤럴드의 안내를 받아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석벽을 만날 수 있다.
높은 천장까지 쭉 뻗어 일행의 앞을 가로막은 연회색의 벽.
그것을 지키고 있던 교단의 병사가 헤럴드를 확인하고는 커다란 문을 양쪽으로 열기 시작했으니.
"이곳입니다."
그 안쪽이 바로 리퓨에 교단의 중심.
히오가 며칠 전에 이리나와 만난 그 장소였다.
마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커다란 기둥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텅 빈 채인 가운데에는 열두 개의 막대기가 놓여 있는 장소.
다만, 용과 전투가 한창 때였던 그때와는 달리 천장이 막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날은 신성 가호를 위해 천장을 열어 놓은 상태였죠. 저희는 그것을 성스러운 하늘이라 부릅니다."
헤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을 중심으로 리퓨에 교단이 세워졌으며 그 역사가 무척이나 깊다는 점.
긴 역사 속에서도 단 한 번의 외세 침략을 허용치 않았다는 것.
그리하여 이곳은 성역이라 불린다는 점.
"대부분은 교단의 중심이고, 오랜 역사적 가치가 있기에 성역으로 불리는 줄 알고 있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진정한 성역은 따로 존재합니다."
중앙의 빈 공간이 아닌, 기둥 옆에 세워진 조각상을 향해 움직이는 헤럴드.
그것은 성역의 여러 기능을 발동할 수 있는 장치였으니.
조각상의 앞에 도착한 헤럴드가 조각상의 손을 문 손잡이처럼 돌리자.
쿠구궁-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바닥.
기둥이 둘러싸고 있는 텅 빈 중앙의 바닥이 갈라지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히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MZ세대 마법사의 집다운 설계와 장치이지 않은가.
"저 아래가 바로 진짜 성역이라 불렸던 곳입니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계단.
"내려가시죠."
헤럴드가 앞장서 내려가고 그 뒤를 히오가, 히오의 뒤를 다른 사제들이 따른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 완전히 지하 1층에 도착했을 때.
"여기가... 성역?"
드러난 풍경은 정말이지 성역이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마법사의 집과 다를 게 없는 모습.
한마디로 정말 텅 비어 있다는 말이었다.
"이래 보여도 정통성이 있는 곳이고 예로부터 신성하게 여겨진 공간입니다. 정식 리퓨에 사제로 임명되면 삼 일을 이곳에서 머무르며 기도를 올리죠."
"...그렇군요."
그런 설명을 듣는다 해도 히오가 보기에는 그냥 넓은 지하 공간이었다.
마법사의 집치고도 좀 과할 정도로 넓은 공간.
성역이라면서 그 흔한 여신상 하나 없는 것이, 그냥 전형적인 마법사의 집이었다.
"어찌, 원하시던 곳이 맞습니까?"
그러니 히오는 확신하는 것이다.
"예. 확실하군요."
이곳이 마법사의 집이라고.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제가 놀라운 걸 보여 드릴 테니."
"놀라운 거... 말씀이시군요."
여전히 불신이 섞여 있는 헤럴드의 목소리.
이곳은 수백 년 동안 검증된 장소이다.
아주 오래 전, 신성이 가득하던 시대에는 무언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그저 상징성만 있을 뿐인 장소.
그런 곳에서 뭘 하겠다는 말인가 이 마법사는.
"보자... 어디 숨어 있으려나."
눈을 감고 집중하는 히오.
마법사의 집 아래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쯤이야 이제는 쉬웠으니.
우선 마력이 지나다녔던 통로를 찾는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대략적으로 어떤 마법진이 숨어 있는지.
어떤 원리로 지하 공간이 보호되고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5분이 지났다.
"음... 녀석, 꼼꼼하게도 숨겨놨군."
마력의 흔적이 어찌나 희미한지 마력 감응의 천재인 히오였음에도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아니, 흔적이 있긴 한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
"괜찮으십니까?"
그에 헤럴드가 다시 물었지만.
"하하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죠. 얼마 안 걸릴 겁니다. 하하하하!"
히오는 당황을 큰 웃음에 숨기며 그리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5분은 10분이 되고.
10분은 15분이 되다 못해 20분에 가까워졌으니.
그때는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X됐다.'
여긴 마법사의 집이 아니었다.
마력의 흔적은커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로 이 텅 빈 넓은 지하 공간이 전부라는 말이었다.
'이 녀석들은 왜 여기를 성역이라 부르는 거야? 그냥 텅 빈 방인데!'
- 그게 문제가 아니네. 사제들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
20분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헤럴드의 눈빛은 언제부턴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한심한 눈초리.
뒤의 사제들 또한 다를 건 없었다.
짝다리를 짚고 상당히 불손한 눈빛으로 히오의 위아래를 훑는 시선.
사제가 저래도 되나 싶지만, 생각해 보면 안 될 건 또 뭔가.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쳐 놨는데 어떡하냐고.'
- 쯧, 누가 그러게 섣부르게 판단하라 했나?
'너도 처음에는 여기가 무조건 맞다며!'
- 크흠! 아무튼 헛다리 짚었으니 어서 저 사제들에게 번복하고 사과하게. 미안하다고.
'...썩을.'
상당히 민망하지만, 어쩔 수 있나.
결국 헤럴드의 생각이 맞았음을 인정하고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터였다.
"...여러분."
히오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며, 머쓱한 첫마디를 뗀 순간이었다.
- 개척자가 왔구나.
성역이라 불리는 이곳 지하 공간에 문득 새하얀 빛이 들어차기 시작한 것은.
사제들이 들고 있는 등불의 빛이 희미해질 정도로 밝고 하얀 빛.
그것이 지하를 가득 메웠으니.
아득히 울리는 목소리는 청아하고 성스러웠다.
- 희망이 왔구나.
희미하게 떠오른 윤곽은 드러남으로서 아름다웠다.
- 아이야.
그렇게 퍼져 나가는 눈부신 빛과 여신의 형상이 히오를 잡아 이끌었고.
- 잠시 이곳으로 넘어오려무나.
그런 울림을 마지막으로 깜빡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새하얀 빛도.
황홀한 여신의 자태도.
아름다운 울림도.
그리고 히오의 모습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후였으니.
이곳은 예로부터 신과 가장 가까이서 소통하던, 그것을 위한 공간.
성스러운 영역.
그리하여 부르기를, 성역이었다.
"여신, 여신이 강림하셨다!"
"으아아아! 여신이시여!"
"으아아아아앙!"
그런 광경을 바로 앞에서 목도한 헤럴드와 사제들이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졸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27화 희망
짙은 위화감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파란 크레파스로 칠한 하늘.
새하얀 분필로 문지른 구름.
중간중간 색이 덜 입혀진 나무와 날아가던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새는 평면이었으며 조잡스러웠다.
한마디로 이상한 공간이었다.
꺾었던 고개를 내려보면 녹색으로 진한 잔디가 지평선 너머까지 깔려 있었다.
물론 초록의 색연필로 대충 칠한 듯한 모양이었기에 마찬가지로 위화감이 들었지만 말이다.
미술을 막 시작한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그림.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멈춰 버린 평면 속 세상.
그런 세상 속으로 들어온 느낌.
"...음."
그럼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유아틱한 그림체 사이에서 단 한 존재만이 극사실주의 작품처럼 있었으니까.
삐뚤빼뚤 괴상한 티 테이블.
마찬가지로 엉성한 선이 이어진 의자.
그곳에 앉아 있는 존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여인이었다.
머리카락과 눈썹.
눈은 나른하게 감은 채였고 길게 뻗어나온 속눈썹마저도 몹시 새하얬으니.
히오는 터벅터벅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 괴상한 티 테이블 앞에 털썩 앉는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인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직전에 보았던 기현상과 들려왔던 목소리.
마법사의 집인 줄로만 알았던 곳은 정말로 성스러운 영역.
그러니 눈앞의 여인이 바로.
"리퓨에 여신."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신.
희망의 여신 리퓨에.
히오의 말이 맞다는 듯, 리퓨에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여전히 감긴 눈은 뜨지 않은 채 이 순간이 정말로 즐겁다는 듯 짓는 미소.
"아이야."
조용히 열리는 입.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성역에서처럼 울리지도, 신비롭지도 않았으나 청아하고 단정했다.
"들겠느냐.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거란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림처럼 생긴 티 테이블 위에 마찬가지로 그린 듯 만들어진 찻잔이 나타났으니까.
삐뚤한 찻잔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히오는 그것을 들고 입가에 가져다 댄다.
의심은 없었다.
마치 리퓨에의 목소리 자체에 의심을 배제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는 빈 찻잔을 기울였고, 곧 거짓말처럼 입안을 채우는 액체.
느껴지기 시작하는 달콤쌉싸름한 맛.
그것이 목구멍을 넘어감과 동시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긴장이 풀려 간다.
분명 크게 긴장하지 않고 있다 생각했는데 생각과 달리 몸은 낯선 공간과 이질적인 위화감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맛이 괜찮지?"
리퓨에는 감은 눈으로 히오를 바라보았고.
히오는 대답 대신 찻잔을 내려놓고 그려진 구름과 하늘, 잔디와 테이블을 둘러봤다.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으십니다."
리퓨에의 그림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
신의 눈을 가리고자 했던 욘 토르노 성의 몬스터 웨이브.
그 보상으로 받았던 인내의 카탈로그 표지에 있던 허접한 그림과 지금의 풍경이 똑 닮았으니까.
"완성된 그림은 희망이 적지 않으냐. 그래서 나는 이런 그림이 좋더구나."
"그렇군요... 아무튼, 이런 대화가 가능했으면 진작 좀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진 탓일까.
분명 낯선 공간이고 처음 보는 리퓨에일진대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투정이라는 것을 조금 부려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리퓨에는 그런 히오를 향해 자애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네가 성역으로 와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야. 녀석들의 눈은 모든 곳에 있으나 나의 영역만큼은 어찌할 수 없으니, 늘 파괴하고 싶어하지."
"그럼 역시 어비스 몬스터는 신성 때문에 히베루니아를 목표로 삼은 거였네요."
"그렇단다."
리퓨에는 등받이에 등을 나른하게 기대며 하늘 위 태양을 향해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다.
물론 태양은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그려진 가짜 태양이었고 리퓨에의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으나 정말로 따스한 햇볕을 맞이하는 것처럼 기분 좋게 미소 짓는다.
그 상태로 나지막이 전하는 말.
"많이 힘들었지."
그 작은 한마디에 마음이 크게 요동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혹 다른 때에, 아니면 다른 이에게 들었다면 그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을 말.
허나 이번 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 대신에 정말로 투정이라도 부리듯, 말이 나오는 것이다.
"...녀석들은 대체 뭡니까. 저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 중이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분명 그 요상한 음료 때문일 터다.
몇 년 간 이렇게 긴장을 놓고 편히 있어 본 적이 있었던가.
힘이 없을 때는 마음이 불편했고.
힘이 생긴 후에는 몸과 마음 모두가 편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쌓인 책임감이 너무도 막중했으며, 믿고 의지할 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러니 늘 쫓기듯 불편하던 마음이,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처음으로 녹아 없어진 탓이 분명했다.
자꾸만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가 말이다.
"놓친 것이 너무 많아요. 아쉬운 일은 셀 수도 없지요. 살리고 싶었는데, 함께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살리고 싶었다.
마법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자신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 준 스승 베르가 파블렌코.
할 수만 있었으면 살리고 싶었다.
구하고 싶었다.
천 년을 버텨 온 에리얼. 그 곁을 지켜 온 레가르다. 두 존재를 고통 속에서 구해 내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아무리 변명해 봤자 결국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돌려놓을 수 있다면, 돌려놓고 싶었다.
수없이 많은 이를 죽인 최악의 악당 아타올프도 사실은 살았으면 했다.
검성이 어떻게든 설득에 성공해 함께 살았으면 했다.
같잖은 동정심은 아니었다.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최강자 중 한 명이 도와준다면 크게 도움이 될 테니.
자신의 무거운 짐 또한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테니 말이다.
"뭘 어떻게 했어야 됐을까요."
정말 이게 최선이었나.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늘 무던하게 있었지만, 사실 속에선 수없이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정해진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으나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
인간이지 않은가.
아무리 게임으로 경험했다지만,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지 않은가.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예방하며 원하는 모든 것을 취하기에 자신은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모두가 동경하고 바라는 게임 속 지존 천마였다면 달랐을지."
애써 모른 척한다고 하지만, 자신에게 걸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안다.
지존 천마라면 다를 거야.
지존 천마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야.
역시 지존 천마.
아무리 모른 척 무던하게 있는다 해도 그런 시선과 기대가 없어지겠는가.
천천히 쌓여 조금씩 무거워지는 기대와 의지에, 자신도 모르는 새 짓눌리고 있던 것이다.
"...아이야."
그런 히오를 바라보는 리퓨에의 표정에는 짙은 안타까움이 배여 있다.
"희망이란 그런 것이란다."
감겨진 눈은 여전히 뜨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함께 슬퍼한다.
"모두가 바라보고 기대하지만, 누구도 희망이 지닐 무게와 아픔은 신경 쓰지 않아."
허나 또 말한다.
"그렇기에 희망이지."
그럼에도 희망이다.
언제나 가장 앞에서, 모두가 바라보고 바랄 정도로 앞에 있기에, 흔들리지 않기에 희망이다.
리퓨에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니."
눈을 감은 채 곧은 자세로 천천히 들어올리는 손.
새하얗고 고운 손에는 어느새 붓이 쥐어진 채였다.
"기록이 시작되기도 전, 인류의 탄생보다도 먼저 우리는 다투고 있었지."
우아한 붓의 움직임.
그에 맞춰서 하늘 위로 그림이 나타난다.
최초에 칠해지는 것은 빛과 어둠.
가장 새하얀 빛과 가장 깊은 어둠.
"긴 싸움 끝에 우리는 승리했단다. 가장 깊은 어둠은 가장 깊은 아래로 가라앉았지."
어둠은 미약해지고 빛은 기뻐한다.
어둠이 있던 자리에 빛이 내려오니 많은 것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식물과 동물, 인간과 요정, 포악하지만,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몬스터.
그 모든 것을 수호하는 용까지.
세상은 구성되었고 안정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조화롭게 돌아간다.
어둠이 있었던 자리는 그렇게 채워진 것이다.
그렇게 평화와 발전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가장 깊은 어둠이 있었다는 것조차 희미해질 무렵에서야.
"다시 나타난 거지. 가장 깊은 어둠은 어느새 심연이 되어 돌아온 것이야."
허공에서 밝게 미소 짓고 있던 수많은 생명체들 위로, 짙은 어둠이 덧칠해진다.
'괴이'라 기록된 전쟁의 시작.
재앙의 시작이었다.
용이 추락하고 요정과 정령은 숨거나 소멸한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되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신은 개입하지 않았죠?"
크뢰츠발트조차도 내다보았던 미래가 아닌가.
한데 신이라는 작자들이 그것을 몰랐을까.
알았다면 왜 끔찍한 전쟁을 내버려두었는가.
그에 리퓨에는 답한다.
"어둠은 더욱 탐욕스러워져서 본래의 자리는 물론 다른 세상까지 그들의 그림자로 뒤덮으려 했지.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단다."
붓을 쥔 손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허공에 그려지는 수많은 생명체. 그 머리 위로 덧칠해지는 빛과 어둠.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했으니."
직접 개입했다면, 심연을 막아 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래서야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여파로 세상은 지워질 텐데.
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했고 그렇기에 직접 나서지 못했다.
직접 심연과 충돌했다면 세상은 소멸했을 테니.
"마음이란 너무도 소중한 것이어서, 우리라고 해서 버릴 수 없었단다. 그걸 버리는 순간 심연과 다를 게 없었으니."
그리 결론 내린 순간, 그것은 거대한 운명의 흐름이 되어 결국 정해진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치... 벤타이얼 세상 속 결말처럼.
"우리는 구태여 정해진 멸망을 미루는 대신, 변수를 주고자 한 것이란다."
신의 여러 권능을 사용한다면 예정된 멸망을 길게 미룰 수도 있었을 테다.
허나 그리하지 않은 이유라면, 어둠은 끝없이 밀려올 테고 결국 멸망은 이 세상에서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
그러니 그들은 그 막대한 권능을 이용해 작은 변수를 주고자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설령 그들이 힘을 잃는다 하여도.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긴 잠에 빠져들 수 있다 하여도 자신들이 만든 이 세상을 그만큼이나 사랑했으니까.
"아이야."
그러므로 그들이 마지막까지 남긴 것은 희망.
마지막으로 남은 신은 여신 리퓨에.
희망의 여신.
그런 여신이 히오에게 말한다.
"너는, 너희들은 정해진 운명을 뒤트는 자."
붓과 함께 허공을 휘젓던 두 손은 어느새 가지런히 모아 무릎 위에 얹었으나.
"이미 크게 뒤흔들린 운명이 앞으로 어찌 변화할지 볼 수 없음이 통탄스러우나."
리퓨에의 감은 눈만큼은 그대로였다.
허나 안타깝다는 말과 달리 리퓨에의 입가에는 평온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럼에도 다행이야. 더 늦기 전에 나를 찾아와 주었으니."
무엇이 다행이라는 의미일까.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없음이 미안하구나."
지평선 너머까지 넓게 펼쳐졌던 그림의 세상이 좁아지는 것이다.
끝없이 넓던 공간이 분명 좁아지고 있었고 그 바깥으로는 칠흑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으니.
"결사대에 합류하게 될까. 아니면 새로운 결사대를 직접 꾸리게 될까. 전혀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마치 더이상은 볼 수 없다는 듯 말하는 리퓨에의 말.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서서히 숙이는 몸.
좁아지는 공간.
나른한 목소리.
"네 이야기의 끝이 궁금하지만... 너무도 피곤하구나."
정말로 피곤하다는 듯 두 팔을 베개 삼아 엎드리는 리퓨에.
"시스템은 완벽히 구축되었다. 네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도 돌아가면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란다. 그러니 아이야 잊지 말아라."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여신 리퓨에.
희망의 여신.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리 말했다.
"너는 나의 희망이란다."
나른하게 잠에 빠져드는 리퓨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는 아득하게 멀어져만 간다.
「아이템 - '인내의 카탈로그'가 소멸합니다.」
「아이템 - '인내의 카탈로그'의 효과가 영구히 귀속됩니다.」
「고대 마법서 - '용(龍) 소환술의 서'를 획득하였습니다.」
「권능 - '???'를 획득하였습니다.」
128화 잔해
히오는 분명 아이라이츠에게 레가르다, 프레이야와 함께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언제 어디서 신성력이 발휘될지 모르고, 그것에 노출된다면 아무리 크뢰츠발트의 강령술이라 해도 언데드임을 들킬 염려가 있는 까닭이었다.
물론, 우리의 아이라이츠는 그딴 것쯤이야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심심해."
언데드고 성국이고, 신성력이고 나발이고 내키는 대로 수도를 마음껏 활보하는 중인 아이라이츠.
"히오는 어디서 뭐 하고 있으려나."
사실 몰래 히오를 따라갈 생각까지 했으나 통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금방 포기하고 방향을 튼 아이라이츠였다.
워낙 눈에 띄는 외모 탓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활보한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히베루니아의 왕성 근처는 번잡하기 그지없었다.
용의 습격으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으니.
무너진 건물.
그것을 복구하기 위한 움직임.
인명 피해는 없다고 해도 도시 내에 파괴된 부분이 상당했다.
그만한 전투가 벌어진 도시이지 않은가.
복구하는 비용과 시간만 해도 꽤나 골치아픈 것이다.
"용이라... 벤타이얼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했는데 용이 있을 줄이야."
용의 조각이니 뭐니.
게임이던 시절에는 비슷한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데 용은 실존했고 어비스에 물들어 날뛰는 모습까지 보았지 않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혼을 히오 파블렌코가 소멸시키고.
프레이야라는 조각이, 영혼이 사라진 용을 대신한다니.
애초부터 그것을 위해 탄생한 조각이었다니.
정말로 보고 들었음에도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이라이츠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히오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히오니까."
아이라이츠니까 가능한 것이다.
벤타이얼 세상 속 당시의 히오 파블렌코를, 극도로 몰입하던 지존 천마를 따라다니며 관찰했었지 않은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 그러한 것들을 수없이 보아 왔기에.
그에 대한 결과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몇 차례나 확인했었으니 말이다.
게임 속에서도 그 정도였는데 현실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범인은 감히 시도도 하지 못할 여러 기적을 일으켰을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본래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성녀가 탄생했고.
제국에는 고위 귀족들의 완전한 충성을 받아 낸 새로운 여제가 등극했으며.
가장 커다란 변수였던 흑아까지 무너졌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히오 파블렌코는 또 무엇을 바꿀 것이고 또 어떤 행보를 보여 줄 것인가.
이제 그의 곁에서 함께할 수 있기에.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기에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라이츠의 표정에는 행복한 미소가 절로 피어오른다.
"지금쯤 히오가 돌아왔으려나?"
아직 히오 파블렌코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다.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은 왜 찾는 것인지.
거기에 무엇이 있는 건지.
지난번 이메니아 실습동의 지하처럼 히오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공간을 또 찾고 있는 것인지.
뭐, 차차 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이제부터 매일을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으흠흠."
생각하니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거처로 향하는 아이라이츠.
주변은 여전히 분주했다.
움푹 파인 도로를 정비하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운다.
그런 모습을 눈에 담으며 지나가던 아이라이츠의 감각에 문득 걸리는 아주 불쾌한 느낌.
"...."
고개를 돌리자 완전히 무너져내린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저곳이었다.
불쾌한 느낌의 근원지.
몹시도 희미해서 바로 옆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작은 기운.
되살아나기 이전이었다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었으나 지금은 본능이 경고를 보내오는 그 기운은 분명.
"...신성."
성스러운 힘. 신성력이었다.
영혼과 육체를 이어 주고 있는 어둠 마력.
단단하게 엮인 그 실타래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그런 신성력이 느껴질 이유가 무엇에 있단 말인가.
호기심을 느낀 아이라이츠가 건물의 잔해 위에 올라섰고.
곧 볼 수 있었다.
잔해 사이로 얼핏 보이는 공간.
무너진 건물 안쪽에서 또다시 무너져 버린 색다른 공간을.
희미한 신성력은 그곳에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건...."
그것을 내려다보는 후드 속, 아이라이츠의 선홍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 * *
『우아으... 너무 어려워요!』
프레이야가 머리를 감싸쥐며 침대에서 바둥거려 보지만, 레가르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리 발버둥치면 변신이 풀릴 가능성만 더 높아질 뿐이다."
『하지만... 벌써 삼 일째 변신을 유지하고 있는걸요. 머리도 아프고 몸도 여기저기 막 욱신거리는데....』
"시간을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버릇도 바꿔야 한다. 분명 똑같은 시간이긴 해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어."
『네에....』
프레이야를 향해 그리 말하기는 했으나 레가르다 역시 흔치 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가르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에리얼에게 들었던 이야기.
함께해 오며 겪었던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고는 있으나 그 역시도 에리얼이 처음 변신했던 순간은 알지 못했다.
전혀 다른 존재의 외형으로 모습을 바꾸는 마법.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마법이라 칭할 만한 것이나, 용에게 있어서는 숨쉬듯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는 본능과도 같은 것.
그것을 알고 있기에 용이 된 프레이야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이 변신이었고.
본래 모습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덕분에 프레이야는 빠르게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삼 일째 변신을 유지한다고 머리가 아프다니? 몸이 욱신거린다니?
그런 현상은 레가르다라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가르다가 아는 에리얼은 이미 완성된 용이었으니까.
『으아아....』
그러니 힘겨워하는 프레이야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한없이 냉혹해 보였지만 말이다.
"...마법사가 돌아오는 즉시 아릴레이야로 돌아가지."
『그럼 변신 풀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
『와아아아!』
그게 그리도 좋을까.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폴짝폴짝 뛰는 프레이야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
아니, 정말로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맞았다.
에리얼의 혼에서 갈라져 나왔으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아이.
미숙하고 어리기에 가르칠 것은 산더미 같을 것이다.
"와아! 빨리 돌아가서 이시도르도... 헙!"
말을 하다 말고 제 입을 틀어막는 프레이야.
"용언을 완벽하게 다룰 때까지 언어로서 내뱉는 건 조심하도록 해라."
『네에에....』
정말로 가르칠 게 많을 것이다.
자신 외에는 저 마법사조차도 용언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못하겠지.
그러니 자신은 앞으로 이 작은 용을 위해 살게 되리라.
레가르다의 시선이 프레이야를 지나쳐 방문으로 향한다.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인기척.
화려하고 당당하며 언제나 사건을 몰고다니는 자의 존재감.
"마법사가 돌아온 모양이야."
『오오! 히오 아저씨가 벌써 왔어요?』
그렇다는 말은, 아릴레이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용이라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프레이야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빨리 돌아가야할 터.
프레이야 스스로도 강한 의지가 엿보이니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용의 육체는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아릴레이야의 상공에서부터 날개를 활짝 핀 녹빛 용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아릴레이야의 천 년 사명이 끝난다는 말이다.
신비로운 섬의 봉쇄가 풀리고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말이었다.
그들을 수호하는 바람의 용이 언제나 그 머리 위에 존재할 테고.
"프레이야."
그때가 되면 다를 것이다.
이전과 같은 실수는 결코 반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모든 일의 원흉.
그 저주 받은 기운. 그것을 퍼트린 놈들.
망설이지 않고 직접 나서 그 모든 것들을 부숴 버리리라.
방문 너머,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응시하는 레가르다의 눈에 샛노란 분노가 일렁인다.
"돌아갈 준비하지."
천 년을 인내하던 분노였다.
* * *
나른하게 잠에 빠져드는 리퓨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꺼진다.
바깥에서부터 몰려오던 칠흑은 마치 수마처럼 밀려들어와 그림의 세상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
그리하여 히오는 다시금 성역이었다.
포탈을 이용할 때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도, 돌연 시야가 확 밝아지는 그런 느낌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저 이곳에 있던 것만 같은 느낌.
짧은 꿈을 꾸다 문득 깨어 버린 느낌.
꿈이 아니라는 듯 히오의 정신을 일깨워 준 것은 친숙한 알림음과 낯선 메시지의 내용이었다.
「아이템 - '인내의 카탈로그'가 소멸합니다.」
「아이템 - '인내의 카탈로그'의 효과가 영구히 귀속됩니다.」
「고대 마법서 - '용(龍) 소환술의 서'를 획득하였습니다.」
「권능 - '???'를 획득하였습니다.」
리퓨에와 나눈 모든 대화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스템은 완전히 구축되었고 주려던 것은 돌아가면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처럼 대하던 말과 행동.
만남은 너무도 짧았다.
묻고 싶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고 마음 같아서는 며칠 밤을 새서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공간 자체가 사라져 버린 탓이다.
어쩌면 그녀의 모든 힘이 다해 버리고 길고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건 그렇고... 이건 또 뭐야."
리퓨에와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새로 나타난 메시지의 의미를 좀 깊게 생각해 보고 싶었으나 드러난 상황이 히오의 상념을 방해한다.
헤럴드를 비롯한 열 명의 고위 사제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교단에 막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용과 레가르다가 다투고 있는 전장의 아래에서 이리나만 깨어 있고 나머지는 이렇게 쓰러져 있는 상태가 아니었나.
"이건 뭐 개복치도 아니고 툭하면 쓰러지네."
몸이 약한 건지 심장이 약한 건지.
호흡과 맥박은 모두 정상이었다.
그냥 정말 놀라서 기절한 것이라는 의미.
아니면 돌연 들이닥친 리퓨에의 막대한 신성이 그들의 몸에 무리를 안긴 것이라든지.
뭐가 됐든 지금은 조용히 혼자 곱씹어 볼 만한 장소가 필요했지, 이렇게 사제들이 쓰러져 있는 방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까지 남아 있지 않나.
으으. 괜히 봤다.
"그래도 이대로 놔두고 나갔다가는 어떤 오해를 살지 알 수 없으니까...."
추기경과 고위 사제 열 명이 쓰러져 있는데 혼자 멀쩡히 걸어 나오면 무슨 오해를 하겠는가.
그러니 그냥 텅빈 성역 바닥에 주저앉는다.
아마... 예상컨대 이제는 정말이지 성역도 뭣도 아닌 그저 지하에 존재할 뿐인 공간.
마지막 남은 희망의 여신마저 잠든 세계.
희망의 신마저도 희망을 찾는 시대
이런 세계에서 자신은 이제 뭘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
- 뭘 어떡하기는. 하던대로 하면 되지 않겠나.
"...그렇지."
- 답지 않게 약한 소리하지 말게. 할 일이 많아. 신성 마법사의 집도 다시 찾아봐야 하고 5서클에도 오르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할 게야.
"그래. 정신이 번쩍 드네. 고맙다."
푸르넬의 말이 맞았다.
자신답지 않게 나약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푸념은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다시 힘내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의 말처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우선 인내의 카탈로그 효과가 영구히 귀속되었다고 했지."
메시지는 분명 그런 의미였다.
같은 상황을 겪더라도 인내력의 상승폭을 더욱 크게 해 주는 아이템, 인내의 카탈로그.
인내의 카탈로그란 분명 히오에게 중요한 아이템이었으나 사실 사용한 적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작정하고 인내력 작업을 할 때가 아니라면 언제나 손에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한데 그런 아이템의 능력이 영구히 귀속되었다는 말은 즉.
"인내력을 채우는 난이도가 확 낮아졌겠는데."
히든 특성의 조건을 발동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는 의미.
"시스템도... 건재하고."
- 시스템이란 것도 결국 신들이 자네같은 빙의자들을 위해 만든 것이었어.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다.
바깥 세상의 각성자들과 시스템적으로 너무도 달랐으니.
강해지는 속도부터 비교가 안 됐으니 말이다.
이 세상의 신들이 그들의 막대한 힘을 소모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마지막 신이 잠들었음에도 여전히 시스템은 작동 중이었으니.
시스템은 완전히 구축되었다고 나른하게 말하던 리퓨에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신의 눈을 가린다라...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이었던지."
신의 눈을 가렸다고 좋아했던 지난날이 흑역사가 되어 돌아온다.
신의 눈이 아니라 시스템의 눈을 가린 것뿐이었고 여신은 그 모든 광경을 버젓이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아무튼, 다음은 이건데."
히오의 손에 들려진 낡은 책 한 권.
고대어가 간결하게 적혀 있는 이것이 바로 고대 마법서.
〔용(龍) 소환술의 서〕
해석은 잠시 미뤄 두고 문양만 살피며 빠르게 넘겨 보는데 낯선 문양이 꽤 많다.
아무래도 4서클의 경지로서 바로 익힐 수는 없을 듯했기에.
- 일단 나중에 보고 어서 권능이란 것 좀 살펴보세나. 세상에 권능이라니.
인내의 카탈로그 효과와 고대의 마법서란 그래도 이해 가능한 범주 내의 선물이다.
한데 권능이라니.
무릇 권능이라 함은 신의 힘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던가.
상태창을 펼치자 스킬창 아래에 권능이라는 새로운 창이 생겨난 것이 보였다.
의구심과 기대감을 반씩 가지고 그 창을 열자.
「권능 - ???」
「신의 정수가 깃들었으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의 성장 방향에 따라 권능은 변화할 것입니다.」
의외로 간단한 설명.
요약하자면.
- ...이것도 당장은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군.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냐에 따라 깨어나는 권능이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성장이란 것이 스킬이나 스탯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마법의 종류를 말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면의 정신적 성장을 일컫는 의미인지는 모르겠다만.
"지금도 충분히 신중하지만, 더 신중해야겠네."
마법이든, 스킬이든 정하는 것에 있어서 더 신중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어서 5서클에 올라야 한다.
신성 마법사의 집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만약 찾지 못할 경우에는 하는 수 없이 좀 먼거리를 이동해 다른 마법사의 집을 통하는 수밖에.
"가능하면 이곳 마법사의 집을 찾으면 좋겠는데."
- 그게 아무래도 편하지. 꼭 신성 마법사의 집이 아니더라도 포탈을 활성화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걸 찾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단 말이야."
마법사의 집이란 중요한 건물의 지하에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 찾기 쉽지 않은가.
이메니아에서도 그렇고 베르가와 함께 지냈던 마법사의 집도 그렇고.
정말이지 평범한 장소의 지하에 툭 지어져 있는 것이다.
- 일단은 그 고대 마법서나 탐독하고 있지. 무슨 내용이고 어떤 효과일지 해석해야 하지 않겠나.
"...그럴까."
우선은 사제들이 깨어나길 기다려야 하니 용 소환술의 서를 펼치고 내용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 이건... 정말로 오래된 마법서인가 보군. 하긴 테트라디아에도 없는 마법서라고 했으니 말 다했지.
얼마나 오래된 마법서인지 고대어조차 푸르넬이 아는 것과 조금 다를 정도.
아무래도 해석하는 것에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렇게 앉아서 마법서를 들여다본 지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집중하고 있는 히오의 주위로 하나둘씩 느껴지는 인기척.
"으음...."
"여기는...."
기절했던 고위 사제들이 깨어난 것이다.
잠깐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은 곧 상황을 깨닫고 자신들의 앞에 앉아서 고대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히오를 발견한다.
그 순박한 눈망울은 화등잔만 해지고 기절 직전의 상황을 모두 떠올렸으니.
"사도, 사도시여!"
일어나자마자 다시 바닥에 넙죽 업드리며 히오를 향해 절을 올리는 것이다.
"여신의 사도가 다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성자 탄생의 순간일지니! 영광스러운 날이렸다!"
"아아! 리퓨에시여! 감사합니다!"
그에 히오는 읽던 고대 마법서를 덮고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에휴... 또시작이네."
개복치 사제들이 단체로 미쳐 버린 것 같다.
129화 신성 마법사의 집! (1)
"사도님의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사도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지 마라!"
다 늙은 몸에서 어찌 저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저런 기백을 이딴 곳에 쓰고 있음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여신께서 현현하시고 성자께서 탄생한 영광스러운 날이다! 오늘을 국경일로 삼아...!"
"저... 헤럴드 사제님?"
"예. 사도시여. 하명하십시오."
"좀 닥... 조용히 가면 안 될까요?"
절도 있게 허리를 굽힌 채로 절도 있게 답하는 헤럴드.
"그것 만큼은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사도시여!"
그러자 그를 따르는 열 명의 고위 사제 모두가 고개를 똑같이 숙인다.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오!"
히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성국의 모두가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리퓨에께서 저희에게 직접 모습을 보인 기적과도 같은 날입니다! 부디 나누는 기쁨을 허락해 주십시오. 사도시여!"
"사도시여!"
"사도시여어어!"
"하아...."
그래.
저들의 입장에서는 어찌나 기다리던 순간이겠나.
그저 상징성이 있었을 뿐인 성역에 정말로 리퓨에가 모습을 드러낸 기적과도 같은 날이었으니.
상당히 수치스러웠지만, 히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길을 비켜라니 뭐니 그런 말은 하지 말죠."
그게 가장 수치스러웠다.
비키긴 뭘 비켜.
가로막기는커녕 지나가라고 양옆으로 갈라선 채 길을 넓게도 내주고 있는데.
어찌나 우렁찬 외침인지 사람이 바글바글함에도 질서 있게 길을 터놓는 것이 과연 성국의 신민이라 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건 아니되옵니다! 사도시여!"
"사도시여어어!"
한데 이 개복치들은 그것도 안 된다며 다시 고개를 숙이며 통곡한다.
"이는 여신의 사도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의 표명이자 숭고한 관례로서...."
"이토록 영광스러운 날에 혹시 모를 조금의 가능성조차 제거하고자 하는...."
"하아... x발."
"예?"
"...아닙니다. 그럼 그냥 갑시다."
"예! 사도시여! 사도께서 행차하신다! 기르으으으을! 비켜라아아!"
"길을 비켜라아아아악!"
"길을! 열어라아악! 콜록!"
넓은 대로.
고작해봐야 본단에서 왕성으로 가는 짧은 길.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그 길을 지나쳐 왔다.
「'여신의 사도?'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간신히 도착한 왕성.
레가르다와 프레이야가 히오를 맞이했다.
"우린 아릴레이야로 돌아가겠다."
다름 아닌 작별 인사와 함께 말이다.
"그래. 너희도 할 일이 많겠네. 바빠지겠어."
다만 그리 긴 작별은 아닐 터였다.
아릴레이야의 포탈을 활성화해 놓았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쉽게 드나들 수 있을 것이었다.
『다음에 볼 때는 많이 달라져 있을게요! 히오 아저씨!』
당찬 프레이야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둘은 지체 없이 떠났다.
새로이 탄생한 용과 그녀를 지키는 용의 기사.
두 존재는 분명 커다란 힘이 되어 다시 히오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둘이 떠난 직후 히오를 찾아온 것은 이리나였다.
성녀란, 가장 성스럽고 고귀하기에 아무나 만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이번 만큼은 사정이 달랐으니.
"마법사님! 아니... 성자님? 사도님?"
불쑥 찾아와 놓고는 진지하게 호칭을 고민하는 이리나의 모습에 히오는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쉰다.
"하던대로 해. 성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니까."
"에? 정말요? 하지만 지금 헤럴드 대사제님부터 시작해서 난리도 아닌걸요?"
"그냥 대충 흘려들어. 나는 사도도 뭣도 아니야."
리퓨에에게 직접 희망이라느니, 개척자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사도나 성자는 아니지 않은가.
"리퓨에 여신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건 너야. 이리나."
확언을 들은 것은 아니다. 허나 그런 생각이었다.
이리나가 품은 비정상적인 신성력.
고위 사제 수십 명 분을 혼자 해낼 수 있는 막대한 힘.
이마저도 리퓨에가 심어 놓은 희망의 일부이지는 않을까.
계획한 퍼즐의 조각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에헤헤...."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니.
설마 그런 칭찬을 히오에게 들을 줄은 몰랐던 이리나가 쑥스러워하며 배시시 웃는다.
그러다 문득.
"그런데... 마지막이라구요?"
히오의 말 속에 담긴 작은 위화감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라니.
말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여신의 선택은 더이상 없을 것이라 단언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은가.
그에 히오는 찰나의 고민에 빠진다.
과연 기나긴 잠에 빠졌을 리퓨에의 마지막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옳은가.
그녀가 직접 선택한 이 소녀에게는 그것을 전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것에 대한 고민은 말그대로 찰나였고.
내린 결론은 명료했다.
"아니, 잘못 말한 거야."
희망의 여신은 아직 존재해야만 한다.
"잊어버려."
자신은 아직 희망이될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 * *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고작 하루였음에도 정신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 않은가.
레가르다와 프레이야를 보내 주고 이리나와 이야기까지 끝난 후에는 어느새 해가 뉘엿해지는 시간이 된 것이었다.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조용해진 방 안.
창문밖으로 지는 석양과 함께 밤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도시의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무너지고 부서졌지만, 다시 일어나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풍경, 익숙해진 세계.
오만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보람을 느껴도 되지 않을까.
이러한 것들을 지키고자 계속해서 노력한 것이었지 않나.
그러니 앞으로도....
"히오!"
조용히 감상에 젖어 들어가는 마음을 와장창 깨부수며 요란하게 들어오는 여인.
"미안해! 나 찾았지?"
진한 흑발과 청초한 외모, 기다란 귀.
방 안으로 들어온 여인은 아이라이츠였다.
그녀를 확인한 히오의 표정에 일순간 당황이 스쳐 간다.
"응? 아이라이츠? 어디 갔었어?"
"뭐야 그 반응은? 설마 나 잊고 있던 건 아니지?"
"...내가? 아니 전혀?"
정신 없었던 하루가 아닌가.
솔직히 아이라이츠도 잠시 잊었고 평화로운 풍경과 함께 사색에 잠기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조용히 상념에 잠기기는 그른 것 같다.
"응. 역시 히오가 그럴 리가 없지. 아무튼 내가 오면서 엄청 이상한 장소를 발견했는데...."
"이상한 장소?"
"무너진 건물이었어. 어둡고 좁고 사람들은 밖에 막 돌아다니지. 하지만 그곳에는 우리 둘밖에 없는 그런...."
"지하야?"
"...응. 그리고 신성력도 느껴졌어. 여기 히오 네가 찾는 곳 아니야?"
무너진 건물의 지하에 존재하는 어두운 공간.
게다가 신성력까지 느껴졌다?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히오.
역시 조용히 상념에 잠기기는 무슨, 어울리는 짓이 아니었다.
"잘했어. 아이라이츠."
이번에는 진짜다. 진짜 신성 마법사의 집이 나타난 게 분명했다.
"정말? 나 잘했어?"
"그래. 진짜 잘했으니까 빨리 거기로 가자."
"그럼 이제 나 없으면 안 되겠지?"
"그래그래."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면 아이라이츠가 밝게 웃으며 히오의 손을 잡아 이끈다.
"가자!"
왕성을 나와 수도의 거리로 향하는 걸음.
아이라이츠의 발걸음은 무슨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기 그지없다.
해는 거의 저물어 갔고 길목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히오와 아이라이츠를 힐끗 쳐다본다.
아이라이츠는 그 화려한 외모를 후드로 가렸다고 하지만, 히오는 복장 자체가 이미 화려했기에.
"저기 그 성자님 아니셔?"
"맞는 것 같은데? 저런 복장으로 다니실 분은 성자님밖에...."
"예끼 이 사람아. 성자님이 저렇게 대놓고 다니시겠나?"
"그렇지?"
대개 긴가민가하며 힐끗거리기만 할뿐 다가오지는 않았다.
물론 히오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응? 성자라니? 그 잠깐 사이에 새로운 별명 생긴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흘려들어."
"흐음. 언데드를 부리는 성자라니... 뭐, 난 좋아! 아무튼, 이쪽이야."
아이라이츠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그냥 건물이 폭삭 내려앉은 곳이었다.
다른 건물에 비해 유독 붕괴의 정도가 심한 곳.
전투가 있었던 그날 운이 나쁘게도 히오의 벼락이나 강기 다발에 직격이라도 당한 것인지.
어찌 됐건 히오의 입장에서는 운이 좋은 것이었다.
"...맞네. 신성력이 새어 나오고 있어."
분명하게 저 밑에서 희미한 신성이 느껴졌으니.
게다가 복구 작업에서 후순위로 밀린 것인지 건물의 잔해가 정리조차 되지 않았으니 더욱 운이 좋은 것이 아닌가.
히오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아이라이츠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으며 함께 좋아한다.
"여기 맞지? 그래 내가 딱 느낌이 왔다니까? 역시 우린 천생연분이야."
이야기가 왜 그리 흘러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라이츠가 큰일을 해낸 것은 사실이었다.
이곳이 정말 신성 마법사의 집이 맞다면 말이다.
"내려가 보자."
무너진 돌무더기를 대충 치우고 나니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하 계단의 입구.
아마 다른 이가 봤더라도 크게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을 그런 입구였다.
지하실의 계단이 한두 개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흙먼지와 함께 좁은 계단을 통해 직접 지하로 내려가 본다면 어떤가.
그렇다고 해도 다른 이들은 별달리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터였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곳이었으니.
허나 히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확신하는 것이다.
"찾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흔적.
마력이 지나다니던 통로와 더불어 은은하게 흐르는 신성력까지.
"마법사의 집."
기나긴 세월 동안 감춰져 있었던 새로운 마법사의 집을 찾은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 지하 1층인지라 눈에 띄게 특별한 건 없었다.
"확실히 이메니아의 지하 공간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네."
주위를 둘러본 아이라이츠의 말이었다.
아이라이츠 역시 이메니아에서 히오의 뒤를 쫓아 지하로 내려온 적이 있기에 그때를 회상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지하 1층이 끝이었고 매혹 걸린 조교수 호펜의 몸으로 클레어 일행에게 둘러싸여 처맞고 있었지만.
"...독한 계집애들."
당시의 무차별 폭행이 떠오른 아이라이츠가 자신의 두 팔을 감싸는 사이, 히오는 지하 계단 입구로 향하는 마법의 흔적을 찾아냈다.
이렇게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을 성역에서 찾으려고 억지를 부렸으니 그게 찾아지겠는가.
마력의 흐름을 따라 숨겨진 마법진의 앞에서 불어넣는 마력.
흔적 그대로 완벽하게 움직이는 마력에 아무것도 없었을 회색 벽에서 마법진의 모양 그대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쿠구궁- 바닥이 흔들리며 갈라진다.
지하 2층으로 향하는 입구가 열린 것이다.
"이게... 마법?"
지하가 열렸다는 사실보다 벽에서 새어나온 마법진의 빛을 더욱 흥미롭게 지켜보는 아이라이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은 히오가 그러겠다 했으니 당연히 그리 되겠지라 생각했다.
한데 이런 기하학적인 문양의 빛이 불쑥 나타날 줄이야.
히오 파블렌코가 본인을 마법사라 칭하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된 기분이다.
"내려가자."
내려간 지하 2층역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완전히 텅 빈 지하 1층과는 달리 몇 개의 책상과 그 위에 연구 자료와 흔적이 남아 있긴 했으나.
"보존 마법은 없네."
전부 낡아서 바스라지는 것들뿐이었다.
보존 마법이 걸리지 않았다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라 푸르넬에게 배웠었지 않나.
그리고 지하 2층은 확실히 위층보다 신성력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진다.
돌아본 아이라이츠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을 정도.
"안 되겠다. 아이라이츠 너는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라이츠를 향해 직접적인 신성을 쏟아붓는 건 아니었지만, 지속적으로 오래 노출되면 어떤 이상이 생길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라이츠는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 밝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 멀쩡한데?"
"멀쩡하기는. 나도 이 아래층에 뭐가 있을지 몰라. 나중에 괜찮아지면 부를 테니까 일단 돌아가 있어."
"아니. 그건 싫어."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히오의 팔에 딱 달라붙는 아이라이츠.
"이제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자신은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에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도 못했었다.
허나 죽은 후에야 알게된 것들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지....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본인보다 더 자신을 사랑해 준 존재가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을.
그것을 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는 건 어찌나 한이 되던지.
결국 떠나지 못하고 랜턴 속에 남아 지난날을 끝없이 되돌아 보았다.
영혼의 시작점.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서 천천히 돌이켜 본 스스로는 얼마나 외로워하고 있었던가.
기어이 혼자 남겨진 후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생각들로 정신을 둘렀으나 그 내면은 불현듯 떠나가 버린 온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죽기 전, 며칠 동안 느낀 히오의 온기는 그런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때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아픈 마음이 두려워 외면했던, 스스로를 혐오하던 당시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해 준 존재가 있었음을 알았기에 다시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지독한 외로움을 알기에 더는 차가운 방에 혼자 남기 싫은 것이었다.
버려질까 두려워 눈을 꼭 감은 채 히오의 팔을 감싸안은 아이라이츠.
전혀 그녀답지 않았고 처음보는 모습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너무도 여렸기에 단단한 껍질을 두를 수밖에 없었던 아이라이츠의 과거를 알고 있으니.
히오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대신 생각 이상으로 신성력이 강하거나 하면 바로 올라가야 해."
"알겠어... 그럼 같이 가도 되는 거지?"
지하 3층으로 향하는 마법진을 향해 다시 마력을 불어넣는다.
지상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던 희미한 신성.
그것은 아마 이 아래있는 무언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일 터.
"...그래. 가 보자."
쿠구궁- 같은 소리를 내며 지하 바닥이 열린다.
드러나는 입구.
확연히 강해진 신성력.
"괜찮아?"
"...응. 아직 괜찮아."
좁은 계단을 함께 내려갔고 곧 완전한 지하 3층에 내려섰을 때.
히오는 물론이고 아이라이츠까지 입을 작게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린다.
그만큼 지하 3층의 공간이 대단했던 까닭이었다.
"아이라이츠."
"...응?"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지금 바로 헤럴드한테 가서 말 하나만 전해 줄래?"
확 넓어진 지하 3층의 공간.
이건.
"이곳 지상에 빨리 집 하나만 지어 달라고. 그리고 그동안 출입을 제한해 달라고 말이야."
"...알겠어."
당분간 이곳을 거점으로 움직여야 할 이유였다.
* * *
히오의 전언을 들은 헤럴드는 곧장 움직였다.
물론 직접 움직여 집을 지었다는 말은 아니었고 최우선으로 히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말이었다.
"사도님의 명령이다! 두 번째 성역을 건설하라!"
"오오오!"
빠른 속도로 무너진 건물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축물을 올린다.
기존의 건물이 무척이나 낡았고, 창고의 용도로 사용하던 것이기에 일이 수월했다.
"무엇보다 새하얗고 높게! 가장 꼭대기층에는 리퓨에 여신의 조각을, 그 아래층에는 사도님의 얼굴을 조각해서 새겨 넣어라!"
그런 헤럴드의 야심찬 계획은 히오에 의해 가로막혔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으나 대충 히오의 요구사항을 요약하자면 제발 주접 좀 그만 떨고 평범하게 지어 달라는 것.
헤럴드는 결국 울먹이며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겉보기에는 무척 평범한 2층짜리 집이 완성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새로운 마법사의 집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집의 입구.
1층의 문을 빼꼼 열고 나오는 아이라이츠의 표정에는 즐거움이 가득했고 손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표찰이 들린 채였다.
"헤헤헤."
그것을 지나다니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바깥문에 걸며 헤실헤실 웃는 아이라이츠.
그 표찰에 적힌 문구는 제법 상큼한 것이었다.
〔아이라이츠♥히오 신혼집♥〕
물론 그로부터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히오에게 발각당했고.
"아, 안 돼에!"
눈앞에서 무참히 부서져 버렸지만 말이다.
130화 신성 마법사의 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