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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0

100화 아릴레이야 (8)

레가르다의 스킬 '해룡 소환'을 예로 들어 보자.

마치 뱀과도 같은 기다란 몸체에 거대한 크기.

이마에 솟은 두 개의 뿔은 각종 신묘한 힘을 다루는 장치이자 핵심이었으며 촘촘하게 돋아난 푸른 비늘은 단단하기 그지없다.

날씨를 조종하고 바다를 다스리는 신수.

충분히 용이라 불릴 만한 능력, 그런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신수(神獸).

신령스러운 짐승.

그것들은 육체적 능력이나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 것이지 그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 하지만 진정한 용이라 불리는 드래곤은 다르다네.

태어나기를 이미 최강의 존재로 태어난 종족.

세계의 수호자로 창조되었다는 반신(半神).

마법의 종주이며 무한한 마력을 지녔다는 지고의 생명체가 드래곤이라는 종족이었다.

-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어.

세계의 수호자가.

용이 있는 전쟁에서 어찌 패할 수가 있는지.

심연이란 것이 그토록 강력하단 말인지.

과거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언제나처럼 뒤따르던 의문이었다.

푸르넬은 심연의 침략 이전에 스펙터가 되어 간간이 들려오는 이야기로만 상황을 파악했었으니까.

"그런데 용언 마법이 책으로 정리되어 있다라...."

히오의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은 분명 '용언'이라는 단어가 똑똑히 적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히오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이시도르가 그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고대어를 읽을 줄 아시는군요."

히오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주억인다.

"마법사니까요."

물음에 대한 당연한 대답.

"히오 파블렌코 님."

그런 히오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시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아주 정중하게, 예의를 담아 숙여지는 머리.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의 돌발 행동에 술렁이던 내부의 소음이 뚝 멎는다.

정말로 마법사가 맞다는 생각에, 그 흥분에 잊고 있었지 않나.

마법사임을 의심하고 경계했으며 결국 증명까지 하게 만든 것을.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절차라고 한들 무례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시작이다. 그들은 히오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처지.

아릴레이야의 사명은 마법의 시작과 함께하는 것이었으니.

히오 파블렌코의 마법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가장 고귀한 엘프의 낮춰진 고개, 정중한 부탁.

그럼에도 비굴하기는커녕 오히려 품위가 느껴진다.

이런 상황임에도, 천 년 사명의 실마리가 생긴 상황임에도 흔들림 없는 태도.

고아한 어조.

다만 곱게 포개어진 손에 조금의 힘이 실린 것만큼은 그녀도 막을 수 없었으리라.

아주 긴 세월 동안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풀어 왔지 않은가.

사명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되었지 않았는가.

영원히 제자리일 것 같은 상황에서 비로소 한 걸음이나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조심스럽지만, 힘 있게 히오를 향해 말을 건넨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만요."

히오는 그런 이시도르를 본체만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가장 고귀한 엘프고 나발이고 그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지하 3층까지 내려오며 보아 온 것들은 모두 고대 마법서적.

그것도 대부분 용에 관한 것.

충분히 흥미로운 마법서이긴하나,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진짜배기는 언제나 가장 깊은 곳에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옷 속에 가려져 있던 녹빛의 목걸이를 꺼내든다.

이것은 언제나 길을 알려 주던 파블렌코 가의 상징.

이시도르는 그런 히오의 행동에 의문을 담아 물었다.

"혹, 무엇을 찾고 계시는 것인지."

"아래층으로 가려고요."

답을 들은 그녀는 퍽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아, 말씀 드리지 않았군요. 마법사의 집은 지하 3층이 끝입니다."

이 마법사의 집이 어느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지하 3층이 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기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3층까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고 마정석을 꼽는 장치 또한 지하 3층에는 없었으니까.

그 누구도 이 아래층이 있을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시도르의 말에도 히오는 찾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대충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동시에 목표 지점을 향해 움직이는 걸음.

"지하 4층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니."

그렇게 말하며 들어 올리는 지팡이.

모여드는 마력이 패턴을 이룬다.

정확한 패턴이 정확한 지점에 다다르면 또다시 들려오는 것은, 이젠 제법 익숙한 소리.

쏴아아- 나무의 뿌리가 스스로 활짝 벌어지며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하는 통로를 여는 것이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누구도 알지 못했던 공간이 너무나도 쉽게 열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언제나 평온한 엘프의 입에서도 기어이 당황의 소리가 튀어나오고야 만다.

"…예?"

오늘 하루만 대체 몇 번을 놀라는 것인가.

당연히 끝일 줄 알았던 지하 3층의 아래에 하나의 층이 더 있었다니?

아릴레이야의 천 년 역사를 기록한 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정보였다.

그런 정보를 히오 파블렌코는 어찌 저리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는 걸까.

"아니 분명 3층이 끝이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4층은 공개되어서는 안 될 장소였으니까요."

히오는 가장 고귀한 엘프의 상식을 가볍게 깨부수며 당연하다는 듯 그 아래로 내려간다.

지하 4층은 포털이 있는 공간.

그 말인즉, 마법을 다룰 수만 있다면 테트라디아든, 대륙 어디든 이것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엘프들의 앞에서 대놓고 4층을 연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이곳은 자신 외에는 열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고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장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는 것.

천 년 동안 비밀에 휩싸여 있던 신비의 섬 아릴레이야.

그곳에서도 비밀스러운 마법사의 집.

그중에서도 또 가장 은밀하게 숨겨진 지하 4층.

대체 무엇이 있을 것인가.

어떤 것이 있기에 이토록 꽁꽁 숨겨 놓은 것일까.

히오의 발걸음이 아래층을 향한다. 두 눈 가득 기대를 담아 4층을 둘러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익숙한 테트라디아의 포털.

아릴레이야에서 쓰이는 포털과는 사뭇 다른 모양의 포털.

그리고.

"그럼 그렇지."

포털의 앞에 놓여 있는 한 권의 책.

그것을 확인한 히오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가기 시작했다.

그 어떠한 것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한 권의 책.

마법의 시대에 풀렸다면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을 그런 마법서.

이것은.

〔크뢰츠발트 식 강령술의 서(敍)〕

흑마법과 네크로맨서의 시조.

크뢰츠발트가 직접 저술한 마법서였으니.

"대충 감이 잡히는군."

용언 마법.

그리고 크뢰츠발트의 강령술.

무엇을 해야 할지 대충은 짐작 가는 것이다.

* * *

자부심이 철철 넘치는 표정으로 허리춤에 손을 척 얹고 가슴을 쭉 내밀어 보이는 프레이야.

『제가 히오 아저씨는 분명 마법사가 맞다고 했죠? (๑'ᵕ'๑)⸝*』

머리 위에는 진작에 적어 놓은 문구가 화려하게 빛나며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릴레이야 섬, 마법사의 집.

천 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지하 4층.

그곳에 옹기종기 모인 엘프들과 프레이야. 그 옆의 레가르다까지.

"프레이야 님 말씀이 옳았네요. 믿어 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시도르의 말에 손을 내젓는 프레이야.

『아니에요! 마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저도 알아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들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하 4층의 포털 앞.

잠시 실험해 볼 게 있다며 그것을 타고 사라진 히오 파블렌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전송석은 아릴레이야에 있는 것과 유사한 듯하면서도 많은 부분이 다르군요."

"더 크면서도 정교해요. 게다가 마정석을 장착하는 공간도 없네요. 옛 마법사들이 이용했던 것일까요."

다른 엘프들은 하나같이 포털 앞에 모여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늘 하루가 신기한 것투성이었으니.

이시도르는 그런 이들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프레이야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히오 파블렌코가 돌아오면 제대로 부탁드려 볼 생각입니다."

『사명… 말인가요?』

"네."

아릴레이야의 사명.

멸망의 직전까지 갔다던 천 년 전의 전쟁으로부터, 그들의 선조로부터 이어진 숙명.

그것은 영혼 깊숙한 곳을 장악해 아릴레이야인이라면 마치 저주와도 같이 전해져 오는 것이었으니.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잘 했더라면....』

침울하게 고개 숙이는 프레이야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짓는 이시도르.

"아니에요. 프레이야 님은 놀라울 정도로 잘 해 주셨어요. 1서클의 형태를 구성한 것도 최초였으니까요."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는 본체를 깨울 수 없는 걸요.』

모든 아릴레이야인에게 주어진 숙명.

그것은 섬의 깊숙한 저 아래.

아득히 깊은 곳, 너무도 긴 시간 동안 잠들어 있는 마지막 용을 깨워 내는 것.

이 세상에 다시금 심연이 들이닥칠 것임을 그들의 선조는 예견했고 상처 입은 용을 잠재웠으며 섬 깊숙한 곳에 숨겼으니.

언젠가 닥칠 멸망 앞에서 대적할 수 있기를.

마법마저 상실한 시대에서 용은 곧 희망이 되어 심연을 물리칠 수 있기를.

그것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잠든 용을 숨기고 아릴레이야를 봉인한 것이었다.

『제가 잘 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프레이야는 그런 용의 조각이었다.

너무도 거대한 그 혼의 아주 작은 일부.

떨어져 나온 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어린 혼.

그렇기에 조금이나마 마법을 익히는 것이 가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프레이야 님. 혼자서 너무 많은 부담을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어린 혼을 돌보며 이시도르가 늘 강조했던 말이었다.

당신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고.

우리 모두가 해내야 하는 일이고 그렇기에 모두가 도울 것이라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마법 이론 연구를 위해 밤낮을 지새우고.

마법의 정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서클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끝없는 실험을 계속해 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만든 반쪽짜리 1서클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프레이야의 부담감은 커져만 갔다.

"이번에야말로 용을 깨워 낼 수 있을 겁니다."

외부인이 아릴레이야로 들어오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지만, 아릴레이야인들은 쉼 없이 대륙을 돌아다녔다.

마법에 대한 조금의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소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조건적인 실패.

마법을 구사한다는 자는 죄다 허풍쟁이 아니면 광대, 혹은 사기꾼일 뿐이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진짜 마법사가 왔지 않은가.

프레이야의 부담을 덜고 그 혼을 본체로 인도할 자.

아릴레이야의 천 년 숙명을 이뤄 줄 수 있는 자.

"제가 반드시 그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시도르는 굳게 다짐한다.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어서라도.

고개를 숙여서라도 반드시 히오 파블렌코의 협조를 얻어 내고야 말겠다고.

『저도...!』

그런 이시도르의 손을 힘껏 맞잡으며 프레이야 역시 함께 다짐한다.

『저도 도울게요! ヽ(•̀ω•́ )ゝ』

그에 재차 미소 짓는 이시도르.

"우선 제가 말해 보고 나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파아아-

4층의 공간에 번져 나가는 새하얀 빛.

몹시 환한 빛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포털.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가 돌아온 것이었다.

환한 빛과 함께 불쑥 나타난 마법사.

예의 그 고깔모자에 키보다 더 큰 지팡이를 쥐고 낮게 중얼거린다.

"이건 실패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히오를 향해 우다다 달려가는 프레이야.

꼬옥 잡고 있던 이시도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히오의 앞에 도착했고 조금 전에 했던 다짐을 곧바로 실현하는 것이다.

아주 간절하게 히오를 부르며.

『히오 아저씨!』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어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시도르의 손은 여전히 잡고 있는 채였기에.

"...."

가장 고귀한 엘프는 프레이야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무릎을 꿇어 버리고야 만다.

보기에는 작았고 실제로도 작았지만, 어쨌든 프레이야의 근본은 용이었기에 그 힘은 생각보다 강했으니.

이시도르는 매가리 없이 프레이야와 옆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버린 것이다.

그것도 히오 파블렌코의 바로 앞에서 말이다.

『저희 좀 살려 주세요! ̗̀(ꀬ⏖ꀬ∴)』

그에 히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응?"

101화 잠든 용을 깨워라 (1)

대륙 곳곳에 나타난 어비스 게이트에 다프네와 모험가 길드는 발 빠르게 대처했다.

파악된 어비스 게이트는 일반 시민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했으며 빙의자가 아닌, 평범한 길드원에게도 충분한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넓었고 게이트는 하나의 단체가 통제하기에는 너무도 많았다.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이번에 연이 트인 제국 황실과 협업하여 관리할 수 있었겠으나,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니.

당장에 중요한 것은 역시 51층의 공략.

그것을 위한 준비 역시 최선으로 준비되고 있었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더뎠다.

정보가 없는 까닭이었다.

선발대로 들어갔던 이들에게 연락이 오지를 않고 있지 않나.

그것이 로그아웃 불가 때문인지. 아니면 그조차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전멸해 버린 것인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으니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가 길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있는 현상. 바깥세상에서 영웅 취급받는 빙의자라 할지라도 불안감을 심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언제 목숨의 위협을 받아 보았겠는가.

바깥세상의 게이트는 쉽고 이곳 세상에서는 로그아웃이라는 무적의 수단이 있다.

그러니 랭커들은 커다란 위험 없이 순탄하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한데 그들이 지금 가야 하는 어비스는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오는 몬스터는 무엇일지. 갑작스레 바뀐 50층처럼 이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최후의 수단인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건 아닐지.

불안감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략의 제한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간다.

이제는 정말 들어가야 할 때.

두려움과 불안함이 밀려들어 오지만, 아직은 도망칠 수 없다.

여태 쌓아 올린 명성이 있지 않은가. 다프네를 비롯한 고위 각성자들이 대거 몰려 있지 않은가.

그런 이들을 옆에 두고도 겁에 질려 도망친다는 것은 비웃음당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으니.

최상위 각성자들만 무려 오십여 명.

그들 하나하나가 바깥세상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인사들.

"출발하지."

그렇게 꾸려진 초호화 원정대가 어비스의 공략을 위해 게이트 안으로 진입한다.

* * *

지하 4층에서의 작은 소동이 끝난 후 혼자 남은 곳은 마법사의 집.

이시도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금 막 돌아간 참이었다.

"갑자기 무릎 꿇고 살려 달래서 깜짝 놀랐네."

굳이 막 무릎 꿇고 고개 숙이지 않았더라도 부탁은 들어줄 생각이었다.

히오가 아릴레이야에 온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배워야 할 마법이 엄청 늘었네."

혼자 남을 지하4층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는 말에 푸르넬의 호응이 뒤따랐다.

- 마법사로서는 축복이지.

사방에 널린 것들이 전부 책이었다.

용언 마법에 관한 것부터 시작해서 드래곤에 관한 서적. 마법을 어떻게든 발현하기 위한 각종 연구 자료와 그 흔적.

그러한 것들에 둘러싸인 채 몇 권의 책을 꺼내 드는 히오.

〔크뢰츠발트 식 강령술의 서(敍)〕

이건 아직 제대로 읽어 보지는 않았다.

척 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였기에 시간 날 때 제대로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봉인된 섬의 가장 은밀한 곳에 놓여 있는 크뢰츠발트의 마법서.

아마 이게 핵심일 테다.

"그리고 이것들도 문제라면 문젠데."

강령술의 서 옆에 놓인 것들은 마법 이론에 관한 여러 논문과 마법서.

〔공간학〕

〔소환의 정의〕

....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

"이걸 익히라는 말이지."

다름 아닌 이시도르에게 직접 건네받은 것이었다.

- 정화 마법과 소환 마법. 아니, 일종의 공간 이동 마법이라 해야 할까.

잠든 용을 깨우고 그 강대한 힘을 다시 이 세상에 강림시키기 위한 마법.

하지만 이시도르로부터 계획을 전해들은 히오와 푸르넬의 반응은 조금 이상한 것이었다.

- 천 년 동안 잠든 용을 깨우는 데 필요하다니....

"어때. 이걸로 될 것 같아?"

- 솔직히 말해서 회의적이구먼.

의아한 것이다.

- 퓨리피케이션은 4서클의 정화 마법. 한데 천 년 동안 봉인된 용의 혼이 고작 이걸로 정화되겠는가?

당연하게도 회의적이었다.

이시도르에게 전해 듣기로 드래곤은 섬의 가장 깊은 곳.

손에 닿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은 깊은 해저에 봉인되어 있다고 한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 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심연에 깊게 물들은 용의 혼.

그것을 봉인하지 않았다면 필히 악룡이 되어 세계의 수호자가 아닌, 세계의 파괴자가 되어 버렸을 거라고.

"반신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혼을 정화하는 것이 고작 4서클 마법이라니."

히오와 푸르넬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한 것이 당연했다.

하나의 서클도 만들지 못하는 엘프들이야 뭐, 4서클만 해도 절대적인 미지의 영역이겠으나 히오와 푸르넬은 알고 있지 않은가.

상급 마법사 정도로는 아직 그만한 위상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 그래도 용을 소환한다는 마법은 진짜인 것 같다네. 공간 이동과 관련한 문양은 최소 5서클. 당장 사용하려면 마법진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게야.

용이 봉인된 장소는 일종의 아공간의 형태로 만들어져 바다를 탐험한다고 해서 그 장소에 닿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소환 마법으로만 불러낼 수 있다.

정화 마법의 수준이 낮다고 투덜거릴 시간이 없다는 말이었다.

공부해야 할 게 넘쳐흘렀으니.

"어차피 4서클에 올라야 하고 포털도 발견했으니 마탑과 왕복하며 익히면 되겠지."

퓨리피케이션을 무슨 기초 마법처럼 말하기는 했으나 그건 그 대상이 무려 드래곤이었으니 그런 것이고.

4서클의 마법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히오도 아직 3서클에 불과했으니, 우선 4서클에 오르고 봐야 하는 것이다.

- 먼저 공간과 소환의 개념에 대해서 완벽하게 익히고 가세나. 그렇지 않으면 계획은 시작도 못할 걸세.

"…그래. 가 보자고."

흐트러진 자료와 마법서를 한데 모아 집어 들고는 포털로 향하는 히오.

우선 테트라디아로 향해 4서클에 오르기.

그것이 잠든 용을 깨우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 * *

- 4서클, 상급 마법사의 문양은 대개 파괴와 확장에 치중되어 있네.

정식 마법사를 넘어 사회의 고위 계층으로 향하는 단계.

상급 마법사 이상부터는 전쟁에서도 우선 경계 대상이 될 정도로 고급 전력 취급을 받는다.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3서클이 마법 종류의 확장과 본인만의 길을 택하는 단계라면 4서클은 그 위력을 크게 늘리고 더욱 깊이 있게 정진하는 단계였으니.

- 이해가 안 되면 외우게! 고작 이 정도로 투덜거리고 있어!

그렇다고 새겨야 하는 문양의 개수가 적은 것도 아니었다.

서클 하나가 오를수록 마법은 무척이나 복잡해지고 문양이 늘어나는 만큼 서로 작용하는 효과가 전부 다른 것이다.

더욱 민감해지고 그에 따라 학습해야 하는 범위는 끝도 모르고 넓어져 가는 것이었다.

- 뭐 그리 무식하게 외우나! 이해를 하게 이해를! 이해를 하면 쉽게 외워질 게 아닌가!

"...."

신 나서 히오를 쥐 잡듯이 잡는 푸르넬.

마법을 배울 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겠나. 저리 못난 유령도 일단은 스승인 것을.

- 에잉! 쯧쯧.... 나 때는 말이야. 이 정도 문양의 상호 작용은 하루면 외웠다네. 요즘 마법사들은 끈기가....

매일같이 히오에게 무시받다가 오랜만의 활약에 신 난 것 같으니 대충 장단 맞춰 주면서 놀아 주면 될 뿐이다.

물론 푸르넬의 말처럼 하루아침에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마력은 충분했지만, 완벽한 4서클에 오르기 위해서는 확실한 이해와 연습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테트라디아에서 온전히 서클의 향상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루 정도를 마탑에서 보내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했다.

우선, 아릴레이야로 돌아와 마법을 가르치기.

마법에 목마른 아릴레이야인들 앞에서 마법을 보여 주고 불확실한 이론을 바로잡아 준다.

"오오오! 역시 마법사님!"

"과연… 고정계 7번 문양이라 표기됐던 것이 사실은 17번이었군요? 그래서 계속 꼬였던...."

물론 이론이 고쳐진다고 해서 그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서클을 만들지 못하는 육체였고 영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평생을 마법을 위해 살아온 자들이지 않은가.

용을 깨우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숙명이었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마법.

그러니 그들은 히오의 강의에 열광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막혀 있던 문제가 히오의 말 한 마디에 뻥뻥 뚫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히오가 가르쳐야 하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우으음....』

마법사의 집 지하 3층.

바닥에 다리를 펴고 주저앉아 용언 마법책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프레이야.

사실 그런 프레이야에게 히오가 해 줄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용언 마법이란, 말 그대로 용의 언어로 사용하는 마법.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마법이었다.

- 나도 상세히 아는 것은 아니네만, 드래곤은 마법 사용 방식이 인간과는 달라. 그들에게는 숨 쉬는 것과도 같다네.

태어나기를 마법과 함께 태어나는 종족. 몸에 간직한 무한의 마력.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숨 쉬듯 자연스레 사용하는 것이 용언 마법이라고.

『불이여...!』

허나 그런 사실을 어찌 프레이야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오염되지 않은 용의 영혼 중 일부가 떨어져 나오는 현상.

그렇게 탄생한 것이 프레이야였고 이러한 현상은 천 년 전부터 꾸준하게 있던 일이다.

용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며 그가 아직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멀쩡한 혼을 떼어 내 섬으로 올려 보낸다는 의미였으니.

상실된 마법을 되찾고 스스로 치유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실제로 봉인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탄생한 혼의 조각들은 프레이야보다 훨씬 강력했다.

알고 있는 지식도 많았으며 아릴레이야 주민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도 그들이었다.

허나 그렇게 탄생한 영혼을 세상은 새로운 혼으로 받아들였음인가.

마법만큼은 용의 혼을 담은 그들이라고 해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용의 육체가 아니기에, 무한한 마력이 없기에 용언 또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탄생하는 혼의 조각은 아릴레이야인들에게 그 의미가 각별했으니.

그것은 용이 실존한다는 의미였고 그들이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 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혼의 힘은 약해져만 간다.

새로이 탄생하는 용의 조각은 갈수록 어려졌고 지닌 힘은 점점 약해졌으며 지식 또한 줄어들어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탄생조차 않다가 몇 년 전.

기적처럼 다시 나타난 것이 바로 프레이야였다.

너무도 어린 모습이긴 했으나 그 탄생만으로도 아릴레이야는 다시 활기를 띄는 것이다.

희망을 품는 것이다.

모든 아릴레이야의 희망과 기대가 프레이야의 작은 어깨에 얹혀진 것이었다.

『우씨… 안 되잖아....』

지하에 홀로 남은 프레이야의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다른 엘프와 함께할 때의 천진한 미소도,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태도도 온데간데없이 그저 미간을 좁힌 채 책을 들여다볼 뿐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몇 시간이고 쉼 없이 연습을 반복하다가....

『내가 해야 하는데....』

결국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훌쩍이는 것이다.

인간의 마법을 익히고, 본체를 소환하고, 그것을 정화하는 것 역시 프레이야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자신이 못나서 결국 이뤄내지 못했고 그것은 히오가 해야 할 일이 되어 버렸지 않은가.

그러니 이것이라도 해내야만 한다.

용언 마법의 사용법이라도 익혀서 언젠가 본체로 돌아갔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수없이 많고 또 무거운 기대에 단 한 번도 부흥하지 못했기에 이번에야말로 해내 보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니, 될 턱이 없었다.

애초에 말을 하지 못하는 몸이 아니던가.

언어로서 내뱉어야 하는 것이 용언 마법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어찌 용언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건지.

이전의 조각들은 다들 멀쩡히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왜 자신만....

『....』

그런 생각들이 문득 들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그렇게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이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입을 괜시리 뻐끔거리며 몰래 훌쩍이는 것이었다.

마탑에서 돌아온 히오는 그런 프레이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그 옆으로 가서 앉는다.

딱히 무어라 말은 건네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고 집중할 뿐이다.

마력을 회전시키고 아직은 미완성인 네 번째 서클을 움직인다.

그러면 마력을 느낀 프레이야가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히오를 바라본다.

히오가 하려는 것은 지금 한창 배우고 있는 4서클의 마법, 퓨리피케이션.

그 의지에 반응한 미완성의 네 번째 서클이 맹렬하게 회전한다.

마치 은하의 띠처럼 떠 있는 무수히 많은 문양이 그에 반응하며 밝게 빛을 발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응하고, 어떤 문양은 다른 문양을 잡아끌기도 하며 각기 다른 힘을 발휘하는 문양.

그것이 점차 뭉치고 모여들어 이동하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느리지만, 히오의 몸에서 이동하며 완성되어 가는 마법.

잔뜩 집중한 히오의 이마에서도 한 방울 땀이 흘러내리고.

『…힘내요!』

어느새 프레이야는 소리 없는 응원을 메시지에 담아 띄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불완전한 마법.

네 번째 서클을 완벽하게 완성하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펼친 마법.

성공할 리 없는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모여들어 마법이 되어 가던 마력 덩어리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에 빛나던 무수히 많은 문양의 별들 또한 크게 흔들린다.

그러다 결국.

『아....』

픽-

모든 문양에게서 빛이 꺼져 버리고 완성되어 가던 마법은 뿔뿔이 흩어진다.

화려한 시작과 달리 너무도 허망한 결말.

그에 프레이야는 두 눈 가득 걱정을 담아 히오를 바라본다.

그 허탈함은 자신이 잘 알고 있었으니.

실패의 허무함은 누구보다도 많이 겪어 봤으니 그가 걱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 달리.

"씁… 아깝네."

눈을 뜬 히오의 표정은 밝았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될 테니까."

아쉬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그 일련의 모습에서 프레이야는 깨닫는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화려하고 강력한 마법사도 뒤에서는 무수한 실패를 겪었음을.

속에 담긴 별과도 같은 무수한 문양을 이루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도전과 좌절을 겪었음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이뤄낸 것임을 말이다.

"같이 해 보자. 프레이야."

그러니 눈가에 아슬히 맺혀 있던 것을 슥슥 닦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히오가 가르칠 수 있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

누구보다 좌절해 보았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참하게 살아 보았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분명 성공할 테니까."

프레이야는 다시 의욕에 가득 차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무수한 도전과 좌절 끝에 결국 마법을 성공해 낸 대단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았지 않나.

그가 단언했지 않나.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그러니 책을 파고들어 갈 기세로 읽어 내려간다.

있는 힘껏 집중하여 다시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프레이야는 보지 못했다.

"해낼 수 있을 거야."

옆에서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 있던 히오의 표정이 싸늘하게 내려앉아 있음을.

내뱉는 목소리에 조금의 불안이 담겨 있는 것은 문득 이런 의문이 든 까닭이다.

"…반드시."

용이 깨어난다면, 이 아이는 어찌 되는 것일까.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20 / 1000)]

102화 잠든 용을 깨워라 (2)

분명 예배당의 안이었다.

한낮이었기에 밝았고 주변은 신성함이 가득했으며 신실한 사제들이 잔뜩 모여 신성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울려 퍼지는 추기경 헤럴드 구겐베르거의 목소리 아래,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백여 명의 사제.

이리나는 그런 사제들의 가장 앞.

추기경 헤럴드 보다 더 앞쪽, 그리고 더욱 위쪽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소녀.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여인인 만큼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품안에 거두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깨끗한 심령에 기쁨을 주시옵고...."

헤럴드의 굳건한 신앙 낭독을 들으며 이리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맞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성녀의 옷. 경건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이런 복장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 않은가.

자신의 뒤에서 함께 기도 하는 수많은 사제들도, 그들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방법도, 가장 성스러운 여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마법사와 만났던 그날의 일 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눈으로 보았던 날.

이리나의 삶은 그날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으니.

'마법사님은 잘 계시겠지.'

소식은 전해 들었다.

제국의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

행보가 워낙 대단했던 탓에 신성 왕국에도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였으니까.

가장 최근에는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공포의 상징, 아타올프를 죽이고 흑아를 무너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까지 했으니.

그를 걱정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일 테다.

'집중하자. 집중....'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스스로를 다그치며 다시 눈을 꼭 감는 이리나.

교단의 본부에 오기 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다시피했지만, 이렇게 조금만 방심하면 이전의 이리나가 다시 튀어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주교급 이상의 리퓨에 사제가 모이는 날. 분기에 한 번 있는 중요한 행사 중인 까닭이다.

그러니 이리나는 눈을 감고 다시 기도에 집중하려 했으나....

어째선지 오늘따라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하게 잡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왠지 모르게 자꾸 드는 불안한 생각에 심장이 콩닥콩닥거리는 것이었다.

결국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고야 만다.

그리고 그 순간.

"...!"

눈에 들어온 주변의 풍경은 신성한 예배당의 모습이 아니다.

신실한 사제들이 신을 노래하고 맑은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던 그런 한낮의 리퓨에 교단이 아니었다.

보이는 것은 처절하게 무너진 건물의 잔해. 본디 고상하게 솟아 있었을 여신의 신상은 부서졌고 그 주변은 피로 물들어 있다.

신성함이라고는 사라진 공간. 새하얀 천장 대신 불길한 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재앙의 중심이었다.

분명 예배당의 안에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말이다.

"…무슨...."

마치 피로 물든 듯 붉은 하늘.

무너진 교단, 피어오르는 불길.

당황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발끝에 무언가 툭 걸린다.

"...."

추기경 헤럴드 구겐베르거의 잘려 나간 목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새로이 눈에 들어오는 풍경.

새하얀 사제복이 온통 피에 젖어 버린 무수히 많은 시체.

주변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와 죽음의 땅이 되어 버린 것이었으니.

흠칫 놀란 이리나가 뒷걸음질 쳤으나 사방에 빼곡히 들어찬 시체로 인해 발 디딜 곳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천지를 뒤흔드는 울림.

---!

포효였다.

하늘 아래 존재하는 피조물이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포효.

솜털이 곤두서고 몸이 굳어 버리는 거대한 울림.

시선을 간신히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자 곧 그것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포악한 한 쌍의 눈.

아득히 먼 옛날에 존재했었다는 지상 최강의 생명체.

용이었다.

"…허억!"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이고 그제서야 참았던 숨이 토해진다.

이곳은 다시 리퓨에 교단의 중심이었다.

천장은 새하얗고 주변에는 가득 느껴지는 것은 신성함.

허나 크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는 그대로였다.

천지를 뒤흔들던 포효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으니.

한낱 꿈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은 분명 언젠가 일어날 수도 있는 미래의 모습.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두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이리나 님...?"

기도는 어느샌가 중단된 채였다.

의아한 눈으로 이리나를 바라보고 있는 백여 쌍의 눈동자.

그리고.

"무슨 일이십니까."

바로 아래까지 다가와 조용히 묻는 헤럴드.

그에 이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다.

은은한 종소리는 여전했고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새의 지저귐도 들려온다.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져 오는 것 같았으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

천지를 뒤흔들던 용의 포효를.

마치 신과도 같이 지상을 굽어살피던 그 포악한 눈동자를.

그 앞에서 왕국이며, 인간이며 모든 것이 무기력한 것이었기에.

이리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뜬다.

무언가를 다짐한 성녀의 눈빛은 굳건하기 그지없었으나.

"…용이 나타날 겁니다."

그와 별개로 불안감은 끝없이 커져만 간다.

* * *

강령술(降靈術).

영혼을 사람의 몸에 내리는 일.

이는 네크로맨서라면 꽤 익숙한 것이다.

죽은 육을 다루고, 육체를 떠난 혼을 사용하는 것이 네크로맨서의 업이 아니던가.

죽음의 기운을 이용하여 사용하는 마법인 만큼 영혼을 다루는 것쯤이야 네크로맨서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크뢰츠발트 식 강령술은 달랐다.

살아 있는 육체이든, 이미 죽어 버린 육체이든 상관없이 혼을 불어넣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육체에 새겨진 능력과 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함께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크뢰츠발트의 강령술이었으니.

- 육체의 능력과 혼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강령이라니… 네크로맨서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얻고 싶어 할 마법서겠네.

푸르넬의 말처럼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마법서였다.

기본적으로 혼의 기억, 능력을 가지는 대신 육체의 강인함을 포기하든지.

육체의 강인함을 얻는 대신 생전의 지능이나 기억, 특별한 능력 등을 포기하든지 해야만 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니까.

- 그리고 여기 적힌 대로라면 서로 호환이 잘 된다는 가정하에 다른 육체에 다른 영혼을 씌워도 문제가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크뢰츠발트 식 강령술의 서(敍)'에 적힌 대로라면 그랬다.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

영혼이 가지고 있는 힘.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힘을 하나로 합쳐 사용할 수 있다고.

물론 그렇게 좋은 효과인 만큼 갖춰야 할 것들 역시 많았다.

우선 혼이 빠져나간 강인한 육체가 필요했고 그런 육체에 씌울 온전한 영혼이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 준비물은 강령술이 시행됐을 때 뛰어난 효과를 얻겠지만, 당연하게도 격이 높을수록 그것을 얻기는 매우 힘든 것이니 쉽지 않은 것이다.

서로 다른 혼과 육체이니 호환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성 마력이 필요했다.

그것도 무려 어둠 속성의 마력이.

- 나는 어둠 속성 마력이라는 개념을 처음 들어 봤다네.

푸르넬마저 모를 정도로 생소한 개념이었다.

흑아를 무너트리고 회색 성에서 이 아티팩트를 얻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혼 수확자의 랜턴 (에픽)」

「인외의 물건.」

「영혼 흡수 : 영혼을 흡수하여 능력치를 영구히 올릴 수 있습니다. 혼의 격에 따라 상승폭이 달라집니다.」

「영혼 보관 : 손상 없이 혼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랜턴에 오랜 시간 보관되어 있던 영혼은 사용자가 조종할 수 있습니다.」

「영혼 회복 : 보관된 영혼을 소모하여 영력을 회복하거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영혼 추출 : 혼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을 추출하여 어둠 속성 마력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흑마법의 근원인 기운입니다.」

혼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을 추출해 내어 어둠 속성 마력으로 전환한다니.

누구도 해 본 적 없을 발상이었고 어찌 가능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방법이었다.

"어쨌든 가능한 방법이라는 게 중요하지."

- 그 어둠 마력이라는 것만 사용할 수 있으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게 신기하구먼.

"내 말이."

요는 어둠 속성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강령술에 필요한 혼과 육체를 보유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혼과 육체의 호환성이 좋은가.

이 세 가지만 갖춘다면 크뢰츠발트 식 강령술은 보기보다 쉽게 펼칠 수 있는 것이었으니.

- 혼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을 추출한다는 건… 어쨌든 지금 하지 못하지 않나.

"그렇지?"

- 그럼 뭘 해야겠는가?

"음… 공부?"

- 알면 빨리 하게!

4서클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제법 남았고.

"응...."

그렇게 마탑과 아릴레이야를 번갈아 가며 생활한 것이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4서클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 * *

「무속성 마법 - '퓨리피케이션'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무속성 마법 - '퓨리피케이션'을 스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무속성 마법 - '퓨리피케이션'이 스킬에 등록됩니다.」

4서클에 올랐다고 해서 4서클의 마법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클을 만든 것과는 별개로 마법을 따로 익히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허나 문양을 새기며 동시에 계속 연습했기에 4서클에 오르고 하루 만에 퓨리피케이션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4서클의 정화 마법 퓨리피케이션.

"그래도 기껏 서클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이것만 익힐 수는 없지."

- 신중하게 고르게. 여러 분야의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대신, 많은 종류의 마법은 익히지 못하니 말이야.

"알겠어."

그렇지 않아도 4서클에서 익힐 마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로 파괴와 확장에 중점을 둔 단계가 4서클이었으니.

굳이 여러 종류의 파괴 마법을 익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마탑의 여러 층을 돌아다니며 신중하게 고른 결과.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

선택한 것은 총 세 권의 마법서.

강력한 폭발과 함께 땅을 뒤집어 버리는 대지 속성 마법 '어스 브레이크.'

풀과 나무를 엮어 대상을 묶는 자연 속성 마법 '인탱글.'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내다볼 수 있는 무속성 마법 '위저드 아이.'

공격 마법은 강한 파괴력에 대지를 뒤집는 변수 창출까지 가능한 어스 브레이크 하나로 충분할 터.

거기에 활용도가 좋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탱글과 위저드 아이까지 익히면 4서클은 얼추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네크로맨시는 제외한 것이었다.

다른 마법은 골고루 익히되, 네크로맨시 만큼은 푸르넬의 전문이기도 했으니 전부 배우기로 했지 않은가.

- 네크로맨서로서 4서클은 본인만의 군대를 만들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라네.

그러니 어스 브레이크, 인탱글, 위저드 아이의 마법서를 들고 푸르넬과 함께 네크로맨시 교육 실습의 방으로 향한다.

사실 히오에게 가장 중요한 마법은 네크로맨시라 할 수 있겠다.

어쩌다 보니 스승이 전 네크로맨서였고, 어쩌다 보니 크뢰츠발트의 삼신기를 전부 모았으며, 또 최상급 스킬 중 하나가 사신 소환이었으니 말이다.

네크로맨시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그 시너지 효과는 엄청날 게 분명할 터.

- 효율 좋은 두 가지 마법 정도만 익히자고. 할 일이 많으니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굳이 잡다한 네크로맨시까지 익힐 필요는 없었다.

히오에게는 무려 네 종류의 최상위 스킬이 있었으니.

웬만한 마법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용암 덩어리의 거대한 지렁이를 소환하는 '서먼 라바'

뼈의 창을 만들어 내는 '본 스피어'

그렇게 두 가지가 푸르넬이 정한 4서클의 네크로맨시였고 앞서 히오가 고른 세 가지의 마법과 더불어 총 다섯 개의 마법이 선정되었다.

"이걸 전부 익히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푸르넬이 있고,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이 있다지만, 그래도 4서클의 마법이지 않나.

아무리 빨리 잡아도 최소 일주일 이상은 잡아야 할 것이었다.

- 그리고 이것만 할 건 또 아니지.

게다가 마탑에 틀어박혀 마법에만 집중할 수도 없는 상황.

- 용을 소환하는 마법진도 준비해야 하니 말이야.

이시도르에게 받은 것은 퓨리피케이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봉인된 용을 일단 소환해야 정화를 할 게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5서클의 문양이 필요하다는 게 푸르넬의 설명이었으니.

그것까지도 공부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지난번에 다크니스 마법진을 사용한 것도 마법 실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 않은가.

"뭐… 그렇긴 하지."

확실히 지금 경지보다 한 단계 높은 마법진을 준비하는 것은 문양의 활용과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소환 마법진을 준비하면서 4서클 마법까지 전부 익히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 못해도 이 주일 이상은 잡아야겠지. 그것도 자네니까 가능한 속도지만.

"이 주라...."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게 생겼다.

그래도 이건 히오 입장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앞당겨 보자고."

2주라는 시간은 무슨 일이 터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103화 잠든 용을 깨워라 (3)

잠든 용을 소환하는 마법진.

그것은 이틀에 걸쳐서 완성되었다.

분명 5서클의 문양이 필요한, 지극히 어려운 난이도의 마법인 것은 분명했으나 정답이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대뜸 용을 소환해라 한다면 답도 없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시도르가 건네준 책에는 용의 위치와 그를 소환하기 위환 마법식까지 전부 나와 있었고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 자네 집중 안 하나! 마력이 질질 새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물론 따라 그리기만 한다고 해서 마법진이 턱하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새겨 넣는 문양에 마력을 잡아 두어야 하고 사이 통로 역시 마력이 원활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 쯧쯧... 느릿하구먼 느릿해.

평범한 4서클 마법사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방대한 크기의 마법진.

지극히 섬세하게 마력을 다루는 히오의 재능이 아니었다면 한 달이 넘게 걸렸을 수도 있는 그런 작업량이었다.

그것을 이틀만에 완성해 냈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릴레이야에서는 아니, 대륙 어디에서도 히오가 해낸 대단한 업적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 흠... 좀 더 집중했으면 하루만에 완성할 수도 있었겠는데... 자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게야?

그것을 인정해 줄 유일한 유령마저도 저딴 말이나 내뱉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푸르넬도 이제는 히오의 재능에 적응해 버린 것이었다.

"...."

물론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흠, 그 정돈가?' 따위를 중얼거리고 있는 푸르넬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의 발아래 완성된 마법진을 쳐다봤다.

아릴레이야의 신수(神樹) 아래 위치한 넓은 공터.

풀을 짧게 깎아 내어 만든 공터는 오로지 이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진 드넓은 공간이었다.

"준비가 다 된 것인가요."

평온한 어조로 묻는 이시도르.

그 맑은 눈에도 조금의 긴장은 서려 있었다.

그들 역시 시도해 본 마법진이었으니.

허나 무수히 많은 시도 끝에 도달한 것은 언제나 실패였다.

"무지한 제 눈에는 여느 때와 같아 보이는군요."

그런 자신들과 달리 히오 파블렌코가 그려 낸 마법진은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했으나, 눈에 보이는 마법진은 그들이 그린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 방대한 크기 하며, 놓인 마정석의 위치나 문양의 생김새.

거기에 혼자 그렸음에도 이틀만에 슥슥 그려 낸 것이 특히 그랬다.

"뭐, 잘되겠죠."

히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푸르넬이 분석해 본 바 마법진에 이상은 없었고 히오의 재능은 이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그려 내었으니.

정말로 용이 있다면 이 마법진의 위에, 이곳에 그 위용을 드러낼 것이었다.

무려 천 년 만에.

『분명 성공할 거예요...!』

언제나처럼 화려하게 떠오르는 프레이야의 메시지.

정작 프레이야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본체를 본 적이 없으니.

자신이 용이라는 것만 자각할 뿐 그 외의 것은 희미한, 무척 작은 영혼인 탓이었다.

"...."

그런 프레이야의 옆에 서 있는 레가르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의 실제 생각이나 느끼는 감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히오는 모인 이들의 면면을 한번씩 훑고는 자신이 그린 마법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

잠든 용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 누구도 실체를 본 적 없는 용.

그것을 정말로 소환 가능할 것인가.

모두의 기대와 의심, 희망과 긴장이 한데 뒤섞여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것이다.

"시작하지."

마법진의 시작.

그 촉매를 향해 다가가 손을 얹는다. 보이지 않는 몸 속에서는 네 개의 서클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손을 타고 마법진에 전달된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마법진에 그려진 통로를 타고 빠르게 번져 나가기 시작하는 빛.

곳곳에 그려진 문양에 하나둘씩 빛이 들어오고 각자 주어진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마력이 힘이 다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마정석이 놓여 있었고 그것에서 다시 힘을 받은 마력은 계속해서 퍼져 나가며 문양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마법진 전체가 환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정말로...."

드넓은 공터가 마법의 빛으로 가득 채워지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아릴레이야인들은 전율했다.

"마법, 마법진이 작동하고 있어."

수없이 시도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던 마법진이.

꿈쩍도 않고 무엇을 어찌 시도해야 하는 건지조차 몰랐던 그것이 정말로 빛을 발하고 있지 않나.

넓디넓은 공터를 가득 채우며 빛을 쏘아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빛이 모여 기어이 어떠한 형체를 만들어가고 있었으니.

"아아...."

조금씩 드러나는 거대한 형체.

하늘 높이 솟은 신성한 나무의 아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녹색의 꼬리. 녹빛의 날개.

태양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비늘과 웅크리고 있음에도 나무 둥치의 절반까지 닿는 크기.

"용이다."

그것은 에메랄드 빛의 용이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의 눈에 담기는 용의 모습.

높은 신수(神樹) 아래, 마치 그것을 지키듯 웅크린 채 잠든 용의 모습이 눈에 담기는 것이다.

모든 이가 그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장엄한 용의 자태를 기억에 새긴다.

단 한 명.

레가르다 오비에르를 제외하고 말이다.

"오늘에서야...."

모든 이들이 감격에 겨워 눈을 크게 뜰 때, 그는 외려 눈을 감아 버린다.

"나타났는가."

눈을 뜨고 있든, 감고 있든 레가르다에게는 상관없는 것이다.

항상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으니까.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지금의 모습이 아닌, 위대했던 과거의 모습을 그는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오래 기다렸어."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해 너무도 긴 세월이 지나 버렸지 않나.

그대에게 천 년의 세월은 어떠했는가.

지독히도 힘든, 인내의 세월이었나.

혹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 찰나의 시간이었나.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겐 무척 긴 시간이었다네."

레가르다에게는 무한이나 다름없는 세월이었으니.

다시 눈을 뜬 레가르드의 눈에 잠든 용의 모습이 가득 담긴다.

"용이여."

천 년 전,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가두던 그 모습 그대로.

* * *

*- 그린 드래곤이군.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마법진 위에 나타난 것은 영롱한 녹빛의 그린 드래곤.

"웅장하네."

크기부터가 가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또렷하게 느껴지는 막대한 기운.

용의 전신에, 비늘 하나하나에 전부 엄청난 마력이 깃들어 있었으니.

"...왜 반신이라 불렸는지 알겠어."

등장만으로도 막대한 마력에 숨이 막혀 온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숨을 조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용이 주는 압박감 때문이라고 생각할 터.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 으음...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왜?"

- 유령의 눈으로 보게.

"유령의 눈으로?"

넋이라도 놓은 듯 중얼거리는 푸르넬의 말대로 유령의 눈을 켰고.

「특성 - '유령의 눈'이 발동됩니다.」

볼 수 있었다.

"...미친."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용의 혼.

드높은 격.

- 이런 건... 나도 처음 보는군.

그것이 지독하리만큼이나 시커멓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사기(死氣)에 물든, 언데드의 영혼과도 같은 검정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훨씬 깊고 진한.

그래, 말하자면....

"...심연."

어비스에 물든 영혼.

"용은 심연에 잠식당한 것이었나."

- 자네 말대로라면 능력 없는 일반인이 그 기운에 잠식당한다고 했지 않은가?

"그래... 그랬었지."

게임 속에서는 그랬었다.

스킬을 각성한 NPC들은 어비스의 기운에 대항할 수 있었고 다른 평범한 시민들이 기운에 잠식당해 미쳐 버렸으니까.

"그건 공략에 실패했을 때 빠져나오는 어비스 기운이고... 용을 잠식한 것은 다른 종류인가 본데."

조금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그런 기운.

가령 심연에 끌려갔을 때 사방에 도사리고 있던, 다프네마저 정신을 놓아 버렸던 그런 것이지 않을까.

"용의 멸족에는 역시 어비스가 깊게 연관되어 있었네."

짐작이야 했지만, 그것을 눈앞에서 직접 본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저토록 거대하고 드높은 혼을 보는 것도 처음인데, 그것이 온통 오염되어 있는 모습이란... 제법 끔찍한 형상이었다.

- 이제 알겠네. 왜 용의 혼을 정화하는 데 신성 마법이 아닌, 4서클의 퓨리피케이션을 남겨 놨는지 말이야.

"동감이야. 저기에 아마 신성 마법을 펼친다면... 혼도 함께 소멸해 버리겠지."

생각하기를, 용을 소환하기만 한다면 정화는 손쉬울 것이었다.

아마 후대에 마법이 상실될 것임을 예견하고 정화 마법 중 가장 등급이 낮은 퓨리피케이션을 안배한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오에게는 최상위 방어 스킬, '천상'이 있지 않은가.

여신의 손길이 내려앉은 영역 내의 적대적인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스킬.

그것은 비단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되었고.

게다가 신성력 스탯을 요하기까지 했으니 신성 마법계열의 최상위 방어 스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였다.

- 이미 저것은 혼에 깊숙이 스며들었어. 혼의 일부와 다름이 없지.

막강한 신성력은 심연의 기운을 확실히 없앨 수 있을 테다.

허나 이미 혼과 융화되어 버렸지 않나. 혼 자체가 심연에 물들어 버렸지 않은가.

심연과 함께 용의 혼까지 소멸시켜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천 년 아릴레이야의 사명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음이었다.

- 그나마 용의 격이 워낙 높고 몸 전체에 걸린 봉인 마법으로 간신히 잠들어 있는 것 같군.

"만약 봉인이 깨지고 용이 눈을 뜬다면 어찌 될 것 같아?"

- 정화하기 전에 말인가?

"그래."

- 그렇다면 뭐, 볼 것도 없지 않겠나.

덤덤한 어조로 당연히 일어날 일을 전하는 푸르넬.

- 용은 미쳐 날뛰고 세상은 파괴되겠지. 제정신이 아닌 만큼, 시간을 들이면 어찌저찌 이길 수야 있겠지만,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게야.

세상은 어비스와 맞서기 전에 미친 용을 먼저 상대해야 할 테다.

무한한 마력에 강기로도 잘 베이지 않는 비늘.

거대한 덩치는 민첩하고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입으로는 막강한 브레스를 내뿜는다.

그야말로 재앙인 것이다.

당연히 피해는 누적될 것이었고 그만큼 어비스에 신경을 쏟지 못할 터였다.

"...끔찍하네."

- 그러니 열심히 정화해야겠지. 반대로 정화에 성공해 용이 정신만 차린다면 그만큼 든든한 일도 없을 테야.

"낑낑이를 불러서 저 시커먼 기운만 따로 빼낼 수 있는지 물어볼까?"

-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 인외의 사신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좋아."

생각과 동시에 발동하는 스킬.

「스킬 - '사신(死神)소환'이 발동됩니다.」

대낮의 햇빛으로 밝았던 공간에 어둠이 들어선다.

마치 명암을 조절해 낮추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한층 어두워지고 동시에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히오의 등 뒤에서 불쑥 생겨나는 검은 형체.

목 앞에 드리워지는 피처럼 붉은 낫.

그보다도 더욱 붉은 사신의 눈이 번뜩이며 히오를 내려다보지만.

"씁! 낑낑아, 무섭잖아."

낑낑!

히오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작고 꼬물해지는 낑낑이.

일명 낑낑이식 투정 부리기는 시작과 동시에 끝나 버렸다.

"낑낑아. 저번에 실비아에게 사기를 뽑아냈듯이 저거 뽑아낼 수 있겠어?"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의 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사신.

그 효과로 실비아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낸 경험도 있었기에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았으나.

끼잉....

도리도리 고개를 흔드는 낑낑이.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불안한지 눈망울에 불안함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애초에 이곳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기운이라고?"

낑!

"그래서 네가 다루지 못하는 거고?"

낑낑!

"그럼 당장에는 쓸모가 없네?"

...끼잉.

"돌아가 있을래?"

끼잉끼잉....

벌써부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더 놀렸다가는 진짜 울기라도 할 기세였기에.

"장난이야. 조금 더 있어도 돼."

손가락으로 낑낑이를 톡톡 두드려 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잠든 용을 바라봤다.

사신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천상의 신성으로도 정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정공법뿐.

"퓨리피케이션을 써야겠네."

걸음을 옮겨 에메랄드 빛을 발하는 용의 머리쪽으로 향했다.

손을 쭉 뻗어 그 머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래 봐야 턱 언저리의 비늘 하나에 닿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어쨌든 퓨리피케이션을 시전해야 했으니 마력을 움직이는 것이다.

네 개의 서클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고 문양에서 힘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힘이 한데 뭉쳐 마법으로 만들어지니.

"퓨리피케이션."

왼손은 용의 비늘에, 오른손은 지팡이를 쥔 채 발현되는 4서클의 정화 마법.

나름대로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상급 마법이 용의 비늘을 파고들어 그 혼에 닿는다.

부여된 법칙대로 오염된 혼을 정화하기 위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 퓨리피케이션은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었다.

깊은 심연에 오염된 용의 혼을 정화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렇게 심연에 물든 용의 혼은 정화되었다.

"정화가... 되긴 됐는데."

정화에 성공하긴 성공했다.

거대한 혼의 지극히 일부, 개미 눈곱만큼 말이다.

수치로 보자면 0.0002% 정도 될까.

딱 그 만큼의 정화에 성공하였으니.

히오의 입에서는 오랜만에 저급한 감탄사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x발."

이 짓을 못해도 만 번... 아니 그 이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냥 죽일까?"

-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네.

104화 낭패

"용 자식을 그냥 죽여?"

온종일 투덜대며 혼자 중얼거리는 히오 파블렌코.

레가르다는 그런 히오를 가만히 바라본다.

"크기는 또 왜이렇게 커? 이걸 어느 세월에 정화하냐고."

마법사가 부리는 저런 식의 짜증 비스름한 것도 이제 익숙해졌다.

용을 소환한 지도 어느덧 삼 일째.

레가르다는 그날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뭐하다가 이딴 저주받은 기운에나 감염되어 가지고는... 마스크나 잘 끼고 다니던가!"

저리 투덜거리면서도 매일 꾸준히 용의 머리에 손을 얹고 정화 작업을 한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일이 더 복잡하고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레가르다에게는 하등 의미가 없는 말이다.

그저 미약한 투정일 뿐이었다.

일이 복잡해졌다.

생각보다 오랠 걸릴 것 같다.

그 어떤 말도 레가르다의 앞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너무도 길었던 세월.

답이 보이지 않는, 어쩌면 답이 없을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버텨 온 사내의 앞에서는 그 어떤 커다란 문제라도 금새 초라해지는 것이었으니.

레가르다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한손에는 샛노란 창을 쥐고 굳건하게 선 채 묵묵히.

영롱한 녹빛의 용을, 감겨진 두 눈을.

그것이 다시 뜨여질 마법 같은 순간을 위해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시간은 간다.

기울었던 태양이 머리 위에 똑바로 서고 다시 반대로 조금 더 기울 때쯤이 되면 히오가 레가르다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다.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고 온몸으로 그것을 표하며 레가르다의 옆 잔디에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아, 힘들다."

그런 마법사를 향해 레가르다는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마법에 대해서는 무지할뿐더러 위로나 응원 같은 말을 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물론 히오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 말을 한 것은 아닐 터였다.

"너도 집에 좀 들어가서 쉬어."

- 의미 없다.

"그건 알지만... 자는 척이라도 좀 하고. 어? 그런 게 정신적으로 도움이 된단 말이야."

- 필요 없다.

"에휴. 맘대로 해라. 용을 깨우려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만 알아두고."

- 명심하지.

그리 무뚝뚝하게 답하는 것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홀로 지내다 보니, 오직 사명과 약속에만 얽매여 살다 보니 그리된 것이었다.

- 그대.

그럼에도 레가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걸어가는 히오를 불러 세운다.

이번만큼은 온 진심을 다해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 고맙다.

이젠 정말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으니.

히오는 아직 많이 남았다 말했으나 자신의 지난날에 비교해 보자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으니.

-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네.

그에 히오는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젓고는 그를 지나쳐 집으로 향한다.

"그건 나중에 용을 깨우고 나면 한 번 더 듣는 걸로 하자고."

- 얼마든지.

그렇게 히오가 사라지면 주위는 다시 적막에 휩싸인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면 곳곳에서 용을 구경하던 엘프들조차 집으로 들어간다.

은은하게 떠오른 달빛 아래 레가르다는 홀로 남아 용을 지킨다.

모두가 휴식을 취할 시간에도, 다 잊고 잠에 빠져들 때에도 레가르다만큼은 변함없이 용의 곁에 선다.

그것을 지키고 있는다.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천 년 전.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고 사명이었으니.

그를 제외한 일족의 모두가 하루아침에 소멸해 버렸음에도.

관련한 역사마저 지워져 아무도 그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자신의 곁에 남지 않았음에도.

그는 묵묵히 할 일을 해 나간다.

그렇게 선 채 먼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짚어 가는 것이다.

- 이제 정말 거의 다 왔어.

용의 녹색 눈이 다시 뜨이는 순간이.

그 현묘한 눈동자와 자신이 마주할 날이.

천 년의 시간을 인내해 온, 지켜 온 기사는 그렇게 오늘의 밤도 굳건하게 지켜 낸다.

약속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정해진 사명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레가르다 오비에르.

현 시대에 알려지기로 서쪽 바다의 지배자.

혹은 아릴레이야의 수호자.

허나 그것은 멋모른 이들이 내뱉는,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말.

어느 누구도 그의 진실된 이명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너무도 오래전 이미 사라지고 잊혀진 것이었으니.

- 그대를 다시 마주한다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레가르다 오비에르.

먼 과거의 인물들이 그를 경외하며 부르기를.

- 용이여.

용의 기사.

* * *

* * *

중국의 전설 속 동물 중에는 함께 움직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두 마리의 이리가 있다.

낭(狼)은 앞다리가 짧은 이리.

패(狽)는 뒷다리가 짧은 이리.

서로 돕지 않으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기에 둘은 서로를 도와 공생한다.

허나 어찌 매일같이 뜻이 맞을 수 있겠는가.

함께하다가도 뜻이 맞지 않으면 심각하게 틀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낭과 패, 모두는 걸을 수도 없고 사냥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잠시 떨어졌을 뿐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미리 기약하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나게 되는 것.

낭패였다.

* * *

*하루에 백 번씩 퓨리피케이션을 쉬지 않고 백 일을 반복하면 만 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냥 헛소리라 할 수 있겠다.

우선 하루에 백 번씩 사용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지 않나.

자신이 드래곤도 아니고 마력이 무한하기라도 한가?

마정석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백 번은 무리였고 또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마력뿐만이 아니다.

정신력 또한 문제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 대충 펼쳤다가는 효과가 약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다가는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 마법인 까닭이다.

히오의 특성, '간지 없이는 못 살아!'는 정신 공격에 강한 내성을 지니게 해 주는 것이지 정신력 자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냥 천천히 하자. 여유롭게."

처음 삼 일 정도는 퓨리피케이션을 무리해서 사용했지만, 방법이 틀렸다는 것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결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다른 일과 병행하면서 해결해 가야 하는 문제였다.

뭐, 당장 용을 깨우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마탑에서 다른 4서클 마법을 익히는 걸 우선 목표로 잡자고."

그렇게 정해진 히오의 하루 일과.

오전에는 마탑에서 다른 마법을 익히고 연습한다.

위자드 아이, 인탱글, 어스 브레이크는 결코 쉬운 마법이 아니기에 제법 심도 깊은 공부와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괜히 4서클의 마법사를 상급 마법사라 부르겠는가.

「네크로맨시 - '본 스피어'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네크로맨시 - '본 스피어'가 스킬에 등록됩니다.」

「스킬 : 본 스피어」

「마력으로 강화된 뼈의 창.」

「주변에 혼을 잃은 뼈가 많을수록 더 많은 양의 창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주입된 죽음의 기운의 양에 따라 위력이 결정됩니다.」

「네크로맨시 - '서먼 라바'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네크로맨시 - '서먼 라바'가 스킬에 등록됩니다.」

「스킬 : 서먼 라바」

「지옥에 존재하는 불의 벌레를 소환합니다.」

「뜨거운 곳을 좋아하는 라바는 용암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이용하여 일대를 용암 영역으로 만들 때까지 날뛸 것입니다.」

「불의 기운이 강할수록, 죽음의 기운이 짙게 퍼져 있을수록 더욱 강한 개체가 소환됩니다.」

「통제할 수 없다면 가능한 멀리 소환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나마 네크로맨시인 본 스피어와 서먼 라바를 빠르게 익힌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예의 그 시간이 찾아온다.

빌어먹을 퓨리피케이션.

마치 석상처럼 그 자리에 며칠째 꿈쩍 않고 있는 레가르다를 지나쳐 용의 비늘에 손을 얹고 지팡이를 들어 올린다.

이 짓을 하루에 몇 번이고 하다 보니 퓨리피케이션만큼은 3서클 마법 못지않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해진 것이다.

익숙해졌다는 말은 이제 단순 노동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지루해졌다는 말이었고 그럼에도 그것을 참고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인내력이 오른다는 뜻이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41 / 1000)]

물론 빠르게 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른다는 게 어딘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소소한 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나고서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법사의 집이 열리지도 않는 지하 4층에 꽁꽁 숨겨져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

「이메니아 마법 대학(1) - '마법사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포탈이 가동됩니다.」

그것은 일단 활성화만 시켜 놓으면 언제든 그 장소로 이동할 수 있기에, 마법사라면 누구든 이를 악용할 여지가 있기에 숨겨 놓은 것이지 않은가.

동시에 히오에게는 엄청난 장점이었으니 그것을 적극 활용해 이메니아로 눈 깜짝할 새 이동한 것이다.

"...뭐냐."

물론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시르베르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히오를 맞이했지만 말이다.

"뭘?"

"네가 서쪽 바다에서 레가르다랑 제대로 붙었다는 소문이 빙의자들 사이에서 파다한데... 왜 여기 있냐고."

그런 시르베르트를 지나쳐 손을 휘휘 내젓고는 소파에 털썩 걸터앉는다.

그 일련의 행동이 제집 안방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건 일단 넘어가고, 공략은 어떻게 되고 있어?"

"공략은 다프네가 잘 준비해서 들어간 지 꽤 됐는데... 아니 그것보다 아릴레이야는...."

"별 특이사항은 없고?"

"...초기에 로그아웃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일주일이 지나니까 정상적으로 로그아웃이 된다더라고. 그것 외에는 차근차근 공략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야. 이제 네 이야기를 좀...."

"좋아. 그거면 됐다. 바빠서 이만 가 볼게."

"...."

황당한 표정의 시르베르트를 내버려둔 채 다음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이동했다.

다음 목적지는 황궁.

"히오!"

칙칙한 시르베르트와 달리 황궁에서는 실비아가 히오를 화사하게 반겨 준다.

"어떻게 된 거야? 모험가 길드로 떠났는데 왜 서쪽 바다의 지배자랑 한바탕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화사함으로 무장한 잔소리였다.

"아니 기껏 히오를 위해서 따로 부대도 꾸려 놓았는데 신경도 쓰지 않고 어비스 게이트로 혼자 가 버리지 않나. 또 그렇게 갔는데 들려온 다음 소식이 '서쪽 바다의 지배자랑 수호 기사가 맞붙었다'라니...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미안."

왜 사과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분위기가 묘했기에 본능적으로 사과가 튀어나왔고 다행이 그것은 정답이었다.

본디 20분은 이어졌을 잔소리가 5분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다.

실비아도 원래 이러지는 않았는데 황제가 되어서 그런가.

잔소리가 많아졌다.

어쨌든 그렇게 실비아와 소파에 마주앉았고 곧 본론이 오고 가기 시작한다.

황궁에 온 목적이 이것이었다.

갑작스레 출몰한 어비스 게이트에 어찌 대처하고 있는가.

그에 실비아는 이제 몸에 밴 고아함과 함께 차를 홀짝이며 답한다.

"최대한 많은 게이트를 확보하고 군사를 보내 통제하고 있어. 몇몇 귀족이 자신의 영지에 나타난 게이트를 몰래 숨기려는 정황이 있긴 했지만, 어림없지."

그만한 욕심이 있는 귀족이라면 당연하게도 커넥션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의 끝은 항상 꼭대기를 향할 터였고 그 꼭대기에 있는 것이 바로 중앙 귀족.

즉, 수도에 기거하는 황궁의 귀족들이었으니.

어떤 정보든 그들을 통해 실비아에게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모든 중앙 귀족은 영혼을 바쳐 황제에게 충성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게이트로 진입하지는 않았지?"

"응. 당장은 나타난 게이트의 위치 확보와 통제에 주력하고 있어. 이상 현상에 대한 혼란과 변수에 대비해야 하니까."

현명한 판단이었다.

게이트가 무작위로 곳곳에 나타나고 그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야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

"이번 공략까지는 빙의자들이 해결할 거야. 우리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건 이 다음부터 해 보자고."

실비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 시간 안에 혼란을 잠재우고 규율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히오는 그사이 4서클을 완성하고 용을 정화하며 공략을 위한 원정대에 참가하는 것.

시간적으로 딱 들어맞는, 나름 괜찮은 계획인 것이다.

"그럼 다음 공략부터는 히오도 참여한다는 말이지?"

"그래. 이번 공략은 이미 상당히 진행됐을 거고...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응. 그럼 이번만 잘 넘긴다면 마음이 좀 놓이겠네."

그런 말을 하며 미소 짓던 실비아는 잠시 뒤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히오에게 묻는다.

"그... 빙의자들 말이야. 정말 믿을 만할까?"

조심스레 운을 띄운 질문은 불안함에서 기인한 것.

실비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불안함이었다.

"그들은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자들이잖아. 만일...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과연 우리 세상을 위해서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워 줄까?"

생각해 보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믿지 못하겠어."

가장 중요한 현장에 오직 빙의자들만이 투입되는 이 상황이 옳은 것인가.

물론 당장에 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불안함을 느끼는 건 황제로서, 이 세상의 주민 중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이번만... 이번만 믿어 보자.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까."

"...응. 다음 공략에는 제국군도 참여할 거야."

"그래. 나도 이 다음 원정부터는 참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 대화 이후에는 조금은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히오도, 실비아도 마음 놓고 웃고 떠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

그런 달콤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다.

실비아는 황제로.

히오는 다시 마탑으로, 아릴레이야로.

그렇게 일상이 다시 이어진다.

계획대로 차근차근 이어지고 있는 일상은 얼핏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제법 무거운 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약속을 위해 천 년을 인내한 레가르다의 기대.

오랜 사명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아릴레이야인들의 희망.

다음 계획을 위해 무던하게 수련하고 있는 히오의 노력.

그러한 것들이 잔뜩 담겨 있는,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은.

「어비스 - 51층 공략에 실패하였습니다.」

사실,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쉬이 파괴되어 버리는 것이다.

「두 개의 차원이 연결됩니다.」

「'심연'이 출현합니다.」

기약했던 일은 실패로 돌아갔고 희망은 곧 절망으로, 계획은 무산이 될 것이며 기대는 어긋나게 되었으니.

「로그아웃이 시작됩니다.」

낭패였다.

105화 극단적 코스프레 환자 (1)

「대지 속성 마법 - '어스 브레이크'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대지 속성 마법 - '어스 브레이크'가 스킬에 등록됩니다.」

「스킬 : 어스 브레이크」

「대지에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고 지형을 파괴합니다.」

「무속성 마법 - '위자드 아이'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무속성 마법 - '위자드 아이'가 스킬에 등록됩니다.」

「스킬 : 위자드 아이」

「시야를 공유하는 마법사의 눈을 생성합니다.」

「'위자드 아이'는 시야 범위 내에서만 생성이 가능합니다.」

「'위자드 아이'의 시야 내에서 다른 '위자드 아이'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자연 속성 마법 - '인탱글'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자연 속성 마법 - '인탱글'이 스킬에 등록됩니다.」

「스킬 : 인탱글」

「풀과 나무를 엮어 지정된 대상을 포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들어가는 마력량이 변화합니다.」

「들인 마력량에 따라서 강도가 결정됩니다.」

익히기로 결정한 모든 4서클 마법을 익힌 기분 좋은 날이었다.

스킬창에 등록함과 동시에 그 이펙트까지 모두 확인한 것 역시 당연한 일.

극적으로 화려해진 어스 브레이크는 대륙이 뒤집어지는 듯했고 인탱글은 주변을 순식간에 숲 한가운데로 만들어 버렸다.

마법의 경지가 높아지며 자연스레 스킬의 이펙트 또한 더 화려해진 느낌.

거기에 한 술 더 뜬 위자드 아이는 하늘 위에 고깔모자를 쓴 대마법사를 소환하며 허공을 눈동자로 전부 뒤덮었으니.

- 언제봐도 참 자네다운 특성이야.

"무슨 의미지?"

- ...그런 게 있다네.

푸르넬이 뭐라 말하든 기분 좋은 날이었다.

4서클의 마법을 전부 완성했으니.

정화 작업 역시 순조로웠으니 말이다.

무리가지 않는 선에서 매일 퓨리피케이션을 사용해 용의 영혼을 정화했고, 느리지만 조금씩 깨끗해져 가는 혼이 보인다.

게다가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매일 쉬지 않고 마법을 마력이 다할 때까지 펼치는 것.

이것은 의외로 수련의 효과가 커서 마력의 수발이 더 원활해지고 그에 따라 마법의 시선 속도가 더욱 빨라진 것은 물론, 마력의 총량 또한 미세하게나마 커진 것이다.

푸르넬의 말에 따르면 마법사로서 그릇이 커져 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마법적 효과 외에 따로 얻은 것이 있다면.

-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레가르다가 자연스레 먼저 말을 걸어온다는 것.

그와 상당히 친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히오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꽤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니 이전보다는 확실히 편해진 게 맞을 터였다.

"아직 뭐, 한참 남았지. 그래도 점차 속도가 붙고 있으니 너무 재촉하지 마."

- 재촉하려고 물은 것이 아니다.

"에이... 기대하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 ...아니다.

히오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용을 정화했고 레가르다는 한시도 용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자연스레 거리감이 꽤 줄어든 것이다.

"예상해보기로는 절반 이상 정화에 성공하면 속도가 훨씬 붙을 거야. 맑아진 혼이 스스로 정화하려는 게 느껴지거든."

- 그런가. 그게 느껴지는가.

"그래.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녀석도 엄청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이는 빈말이 아니었다.

몇 주 동안 용의 혼을 관찰하며 알아낸 사실이었다.

과연 드높은 격을 지닌 혼이라 그런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물론 정화된 부분은 지극히 일부였기에 아직은 미약한 움직임일 뿐이었지만.

"그러고보니 이런 마법에 정화될 정도라면 왜 용은 스스로에게 정화 마법을 걸지 않은 거지? 이보다 훨씬 고위계 정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반쯤은 중얼거리듯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

레가르다로부터 대답을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레가르다는 과거의 이야기만 물으면 입을 꾹 닫아 버렸으니.

하지만 역시 거리감이 꽤 가까워졌다는 히오의 느낌이 맞았음인가.

- 나는... 마법에 관한 것은 모른다. 용의 신전을 지키는 일. 그것이 나의 탄생과 동시에 주어진 사명이었으니.

레가르다의 무거운 입이 천천히 열린다.

-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다. 당시의 기운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모든 용이 대처할 새도 없이 오염되어 버렸고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럼... 그나마 약해진 기운이 저 정도라는 말이야?"

- 그렇다. 용이 스스로에게 건 봉인의 효과이자 그 노력의 결실이겠지.

덤덤하게 전해지는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매일 듣는 목소리였고 꽤 친해졌으니 말이다.

허나 감정의 변화를 알아챘을지언정 그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반대로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면서도 복잡한 것이었으니.

감정을 정의하는 적절한 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비슷한 단어를 하나 꼽아보라면.

"용이랑 꽤 친했나 봐."

우의(友誼).

깊은 우애 혹은 우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에리얼. 바람과 함께하는 용의 이름이다.

"그렇군. 에리얼이라...."

- 그리고 나는 신전을 지키는 용의 기사.

와중에도 퓨리피케이션은 꾸준히 발동하는 중이었고.

레가르다는 히오의 지팡이 끝, 영롱하게 빛나는 마력의 빛을 바라보며 옛이야기를 꺼내 보는 것이다.

- 용의 기사는 그 운명을 타고난 것이기에 탄생과 동시에 용과 함께한다.

"그럼 너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가르다.

- 그러니 나의 옛기억은 온통 녹빛뿐이지.

어렸던 레가르다에게 에리얼은 부모였다.

그가 조금 더 자랐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되었고.

그가 성인이 되고 성숙해진다면 에리얼은 이제 하나뿐인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녀는 레가르다의 부모이자 스승이었고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으니.

레가르다 오비에르.

용의 신전을 지키고 위대한 존재의 거룩한 뜻을 세상에 전하는 용의 기사.

천 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사명을 무던하게 지켜 나가는 자.

- 나를 위해 평소에는 엘프의 모습으로 함께 지냈었지.

허나 과거의 기억을 꺼내어 읊는 그 모습은 제법 평범한 것이었다.

언제나 살랑이던 녹색의 머리칼.

바람과도 같이 시원하던 목소리.

녹음의 숲속을 가르던 바람.

세상의 이치를 관통하던 현묘한 녹빛의 눈동자.

한번 나오기 시작한 기억은 뒤를 잇는 또다른 기억에 멈출 새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야 만다.

이제는 그때와 다른 육신이었지만.

이제는 잠을 자지도, 밥을 먹지도, 휴식조차 필요없는 몸이 되어 버렸음에도.

다른 감정마저 조금씩 희미해져 감에도 그 시절의 기억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기에.

잊어서 안 되는 것이기에 그는 여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세상 마지막 남은 용의 기사로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천 년을 버텨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완수할 수 없는 임무였음인가.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희망이었음인가.

아주 오래전 기억을 이야기하는 그 표정이 행복해 보인 것이 문제였을까.

레가르다의 회상에 끼얹어진 히오의 목소리는 다급하기 그지없었으니.

"레가르다."

어느샌가 사라진 퓨리피케이션의 밝은 빛.

"게이트를 막아."

영문 모를 그 말에 레가르다의 시선이 히오를 향했고 그는 곧 볼 수 있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 절대로."

깊게 가라앉은 히오의 눈.

처음보는 심각한 그 표정.

"용이 깨어나서는 안 돼."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꺼지기라도 한 듯이 순식간에 사라진 히오 파블렌코.

어디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라도 한 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직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레가르다의 기감에 잡히는 흑색의 기운.

너무도 익숙한 저주받은 그 기운.

그것은 아릴레이야의 해안가. 불길한 게이트가 있던 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으니.

이것의 정체를 레가르다는 분명 알고 있었다.

- ...다시 시작하려는 것인가.

레가르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을 향해 간다.

해룡을 부르고 자신의 창에 강기를 두른 채 솟구치려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달려간다.

그래서 그는 보지 못했다.

- 감히.

용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떨려 온 것을.

* * *

*- 인천 공항 B등급 게이트, 속칭 '개미굴' 클리어 성공의 주역 각성자 김철환, 가장 존경하는 각성자는 '구원자 남태민'.

- BBT 선정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최초의 각성자 1위, 구원자 남태민'.

- 최초의 각성자 이기한, 김기성, 한유라... 의문의 회동?

- 최초의 각성자들은 왜 특별할까.

- 태룡 길드장, 남태민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 프랑스 최초의 각성자 크리톤, 몇 달째 행방불명?

- 사라지는 최초의 각성자들. 원인은 무엇인가.

- 최초의 각성자 남태민....

- 최초의....

...

한가득 쌓여 있는 기사는 전부 최초의 각성자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조용한 방 안.

"하아...."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윤슬아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는다.

"대체 뭘까."

각성자이자 태룡 길드원인 윤슬아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태룡 길드를 박차고 나와 사업가 윤슬아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이라 한다면 역시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던 날.

난생 처음 보는 검은색의 게이트.

그곳에서 쏟아져 나온 것 역시 본 적 없는 괴물들.

이상한 점은 너무도 많았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분명 남태민은 그 검은색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최초의 각성자라 불리는 이들은 전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검은색 게이트가 등장함과 동시에 곧바로 막아 낸 것이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관련해서 남태민에게 물어봤으나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고 윤슬아는 그대로 태룡 길드를 나온 것이었다.

이는 결코 있어서 안 될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의 균형이 비정상적인 상황이지 않나.

불균형하게 몰린 명성과 권력, 무력까지.

그 모두를 전부 최초의 각성자라는 이들이 틀어쥐고 있지 않은가.

한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이들은 모르는 정보까지 그들이 통제하고 있다?

대체 최초의 각성자는 무엇이고 그들은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모든 의문이 시작된 그날 이후로 윤슬아는 오직 그것만을 조사하며 지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의문은 깊어져만 갔으니.

녀석들은, 최초의 각성자는 모두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우선 그들은 이따금씩 모습을 감춘다.

이는 태룡 길드에 있을 때부터 이상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남태민은 중요 게이트 공략이 있을 때가 아니면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당시에는 그저 바빠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모든 최초의 각성자의 특징이었다.

그뿐이랴.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서열이 존재했다.

레벨도 측정되지 않는 이들이 어찌 서열을 나누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끼리는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커낵트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사이에서도 남태민은 생각 이상으로 훨씬 높은 위치라는 것 또한 최근에서야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한계였다.

1. 최초의 각성자는 일반 각성자들 보다 월등히 강하다.

2. 그들끼리는 확실한 서열이 존재하고 남태민은 그 사이에서도 정점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정보가 여기까지 도달한다면 늘 막혀 버리는 것이다.

어찌저찌 가진 바 모든 것을 활용해 많은 것을 알아내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였으니.

3. 남태민은 이현승을 두려워했다.

"...이현승."

남태민이 두려워 하던 의문의 사내.

하늘을 푸른 태양으로 뒤덮었던,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무위를 지닌 자.

대체 그는 누구이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윤슬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에 대해 조사하려 했건만....

"나오는 게 하나도 없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

이상하게도 나오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관련 기록을 전부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사내.

그가 모습을 처음 보였던 곳과 마지막으로 사라진 장소에 사람을 풀어놓긴 했지만, 여태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여기서부터 막힌 것이다.

조사가 진행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정보를 쥐고 그것을 통제하고 있는 최초의 각성자들.

그리고 남태민마저 두려워하는 의문의 사내.

아무래도 핵심 열쇠는 이 사내에게 있는 듯한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띠링- 울리는 휴대폰의 알림음이 상념을 깨고 귓가에 울려퍼진다.

윤슬아의 시선이 휴대폰의 화면을 향하고 그곳에 떠 있는 것은 두 통의 문자 메시지.

- 그... 이런 것까지 보고해야 하나 싶긴 한데요.

발신자는 책임자 중 한 명.

이현승을 찾기 위해 풀어놓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몇 달째 특이사항 없다고만 보고하던 이였다.

한데 이번에 보내온 메시지에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

- 웬... 코스프레? 환자? 뭐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요?

그것을 확인한 윤슬아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진다.

106화 극단적 코스프레 환자 (2)

「로그아웃이 진행됩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메시지.

그 즉시 레가르다에게 말을 전했지만, 모든 것을 당부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찰나간의 어둠이 찾아오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하늘 높이 솟은 고층 건물과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

왼손에는 커피, 오른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

낯설었다.

이제는 이런 풍경이 낯설어진 것이다.

그 이유를 물으면 딱히 답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

살아온 세월은 이곳이 훨씬 길었으니....

그럼에도 어쩐지 허망하고 이다지도 불편한 것은 이미 다른 세상에 마음을 두어 버린 탓이 아닐까.

"후...."

그러니 히오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마침 옆에 있던 벤치에 앉는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카페 앞, 번화가.

이전과 같은 장소이지만, 그때와는 달리 게이트가 사라져 있었고 원래대로 북적이는 공간이 된 것이다.

"괜찮으려나."

공략에 실패했다는 말은 두 세계 모두 어비스 몬스터가 풀려나온다는 뜻.

그 저주받은 기운이 본격적으로 번져 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아릴레이야에 나타난 게이트는 하나뿐이고 레가르다가 있으니 대륙에 비해 사정이 훨씬 낫겠지만... 알 수 없는 이 불안감은 무엇일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돌아가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지난번에는 그랬지 않은가.

세상에 터진 어비스 게이트를 모두 끝내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와 달라진 것은 무척이나 많았다.

- 여기가 말로만 듣던 자네의 세상이로군?

일단 혼자가 아니었다.

푸르넬의 혼이 함께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괴리감이 제법 사그라들었다.

- 허허허 신기한 세상이야. 애초부터 마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이라니.

감탄사를 연발하며 신난 푸르넬의 목소리.

대충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그렇게 앉아 있는데.

- 그런데 저자들은 왜 자꾸 자네를 힐끗거리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주위로 사람들이 꽤 모여든 것이 아닌가.

그걸로도 모자라 몇몇은 카메라를 켜고 찍고 있기까지 했다.

그제서야 조금 실감이 난다.

정말 원래의 세상으로 왔다는 것을.

"복장이 신기해서 저러는 거야."

- 음. 그러고보니 내 자네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봤어. 저들의 시선에서는 우리의 복장이 특이해 보이겠구먼.

"우리가 아니라 내 복장이지."

- 그게 그거지. 새삼스레 따지지 말자고.

어쨌든 마음을 다잡고 움직여야 하리라.

이 세상에서 자신과 연이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아니 사실상 단 둘뿐이었다.

남태민과 윤슬아.

그 둘을 어떻게든 찾아서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저기... 혹시 괜찮으시면 사진 하나만 같이 찍어도 될까요?"

"예?"

생판 모르는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조심스레 부탁을 해오는 것이다.

"아, 뭐... 예."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니 그것만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들고 얼굴을 가까이 붙이더니 셀카를 찍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짧은 응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는 사내.

"코스프레 정말 잘하셨네요! 파이팅!"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내의 행동에 힐끗거리던 다른 이들도 용기를 얻었는지 사진을 요청했고 정신차려보니 사진을 찍기 위해 짧은 줄까지 생겨 버렸다.

"와! 지팡이 진짜 멋있어요!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아, 이건 테트라디아 정식 마법사용 지팡인데...."

"네?"

"...쿠팡에서 샀습니다."

"아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 대뜸 소환되어 버렸지 않은가.

그나마 마법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는 벤타이얼 세계에서도 특이한 사람, 괴짜 취급받는데 이곳은 오죽하겠나.

주변에 따로 코스프레 행사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큰 지팡이에 챙이 넓은 고깔모자에 장신구가 달린 로브까지 입고 나타난 히오는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코스프레예요? 각성자들은 전부 개량 수트 입고 다니니까 아닐 테고... 애니? 만화?"

"아, 사실은 코스프레가 아니라...."

"네?"

"...애니입니다. 애니. 마법사 뭐 그런 거."

"아하! 잘어울리세요!"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또다시 모이고.

어느새 히오의 주위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이다.

곤란했다.

얼굴이 알려지거나 뭐 그런 건 상관없지만, 한시라도 빨리 남태민이나 윤슬아를 만나고 어비스 게이트를 찾아 해결해야 했으니.

"옷감이 진짜 좋은데요? 정말 마법사 같아요!"

"아... 감사합니다."

"돈 많이 드셨겠어요."

"어마어마했죠."

그럼에도 사진을 찍어 주며 이딴 대화나 주고받는 것은 당장에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분명 이 세상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자신에게 그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가 않았으니.

자신은 이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은 짧은 대화에서도 알 수 있었다.

"뭔가 다른 코스프레하시는 분들과 다른 신기한 느낌이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 가려는 학생 한 명에게 물었다.

"혹시 남태민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어디 길드장이었는데."

"남태민이라면... 설마 태룡 길드장 남태민이요?"

"네. 그 사람 맞아요. 혹시 남태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순간 들려온 대답은.

"풉!"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비웃음이었다.

"아, 죄송해요. 진짜 예상 못한 질문이라서... 남태민을 저희 같은 일반인이 어떻게 만나요. 월클이잖아요. 월클."

그 대답을 듣고 느낀 감정은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이것마저도 낯선 것이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세상에 온 듯한 낯설음.

"그럼 윤슬... 아닙니다."

그러니 다음 질문은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번의 만남을 떠올려 본다면 윤슬아도 엄청난 유명인이었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는 비로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속칭 현자타임이 찾아온 것이다.

윤슬아와 만날 방법이야 뭐, 찾으면 되지 않겠는가.

어느샌가 낯설게 느껴진 이 세상에서 어비스 게이트를 찾고 그곳에 자유로이 진입하기 위해서는 남태민이나 윤슬아의 힘과 명성이 필요했으니.

휴대폰 하나 없고 돈 한 푼 없는 몸이지만, 마법이 있으니 어떻게든 방법이야 구할 수 있을 터였다.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걸음을 뗀다.

그저 복장이 조금 특이할 뿐인데 이다지도 많이 몰려든 사람들.

그만큼이나 평화롭다는 방증이었으니 마냥 나쁘게 생각할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자리를 벗어나려는 히오의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우뚝 멈춰서고야 말았으니.

그의 걸음을 막은 것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들이 웅성이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눈앞에 떠오른 다소 뜬금없는 메시지 알림이었다.

「'마법사 코스프레 장인'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명성 포인트가 +0.02 상승합니다.」

「명성 포인트가 +0.02 상승합니다.」

「명성 포인트가 +0.02 상승합니다.」

...

명성 포인트가 +1도 아니고 지극히 작은 0.02씩 오르기는 했으나 그것이 올라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으니.

'아니, 사진 찍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현대 문명의 위력이 실감나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고 그것을 커뮤니티 따위에 올리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번뜩이며 지나가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 하나.

'씁... 이거 잘하면....'

윤슬아나 남태민을 이쪽에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반대로 그들이 찾아오게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메시지를 한쪽으로 치워 버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깔모자를 살짝 들어올리며 인사를 건네자 돌아오는 것은 왜 저러나 싶은 반응.

"제가 마법을 좀 할 줄 아는데요."

하지만 이어진 히오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하나둘씩 휴대폰을 들어올린다.

"보여 드릴까요?"

지독한 마법사 코스프레 환자의 등장이었다.

* * *

- 웬... 코스프레? 환자? 뭐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요?

문자를 확인한 윤슬아의 미간이 좁혀진다.

- 그냥 공연하는 사람 같긴 한데. 저렇게 눈에 띄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놓쳐서요. 확인 한번 부탁드립니다.

문자로 전송된 몇 장의 사진.

사진 속에서는 웬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쇼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법사를 흉내 낸 듯한 복장과 소품.

그를 둘러싼 관중의 옷차림과 비교해보자면 확연히 눈에 띄는 모습이긴 했다.

다만....

"그 사람일 리가 없잖아."

저런 사람이 이현승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윤슬아가 알기로 이현승은 저렇게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성향을 떠나서 뭣하러 저기서 저런 짓거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

"얼굴은 안 보이는데...."

몰린 인파가 제법 많았기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주 높은 확률로 이현승은 아닐 터였다.

지팡에 끝에서 환한 빛 같은 게 뿜어져 나오는 게 사진에 찍힌 것을 보니 확실히 무슨 공연 같은 걸 하는 사람인가 본데....

"혹시 모르니 가 볼까?"

그 사람일 리가 없다는 건 너무도 당연해서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현승이 저기서 대체 왜 저런 공연이나 하고 있겠는가.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말이다.

그래도 요즘 답답한 마음이 많이 들었으니 기분 전환 겸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윤슬아는 각성자로서는 태룡 길드에서 나왔으나 그녀의 가치는 각성자가 아닐 때 더욱 빛나는 것이다.

각성자를 은퇴했다고 하지만, 그 안목이나 사업적 수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격변의 시대에 남태민을 알아보았던 안목. 그가 태룡 길드를 세울 수 있도록 과감하게 지원하던 결단력.

거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집안의 재력까지.

그런 것을 바탕으로 최초의 각성자를 조사함과 동시에 여러 길드를 창설하고 키워온 것이었다.

"그래.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사진이나 보내겠어."

보고를 올린 사내 역시 그런 길드의 책임자 중 한 명.

그에게 윤슬아는 은인이자 후원자였다.

그러니 윤슬아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나오는 성과는 없고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조사에 얼마나 진척이 없었으면, 얼마나 특이사항이 없으면 이런 쇼를 특이사항이라고 보고하겠는가.

"가 보자."

척 보기에도 아닐 건 알지만, 어차피 지금은 할일도 없겠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넣을 겸 가보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일어나려는 윤슬아의 휴대폰이 다시 한번 진동한다.

새로운 사진이라도 도착했나 싶어 확인해본 메시지의 발신자는 전혀 다른 이.

- 흑색 게이트 출현.

그것은 윤슬아가 목이 빠져라 기다려 왔던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

- 유례없는 엄청난 크기의 게이트. 초대형 게이트보다도 수십 배는 큰 것으로 파악됨. 태평양 상공에 출현.

윤슬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는다.

한 통의 메시지로 그녀의 목적지가 한순간에 바뀌게 된 것이었다.

* * *

'마법사 코스프레 장인'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명성 포인트가 +0.02 상승합니다.」

「명성 포인트가 +0.02 상승합니다.」

「명성 포인트가 +0.02 상승합니다.」

...

대체 인터넷에 어떤 식으로 올라갔는지.

0.02라는 작은 수치기는 했지만, 올라가는 속도가 빨랐기에 썩 나쁘지 않게 포인트가 모이고 있었다.

물론 목적은 명성 포인트를 모으는 게 아니라 윤슬아나 남태민이 영상을 보고 자신을 찾아오게 하는 게 목적.

그렇기에 1서클의 아쿠아나 파이어. 오랜만에 까마귀 소환 같은 마법도 사용하며 뭇 관중들의 감탄과 무수한 플래시를 받았지만....

"그러니까 댁이 어디시냐고요. 아저씨."

예상 외로 너무 많은 인파가 모였고 너무 시끄러웠던 탓인가.

민원을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히오는 성실히 조사받고 있는 중이었다.

"집이 없는데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멀쩡하게 생겨서는… 신분증 줘 보세요."

"그것도 잃어버려서...."

최상위 스킬을 무려 네 개나 보유한 이 세상 마지막 남은 마법사임에도 경찰 앞에서는 괜히 주눅이 든다.

"성함이랑 주민번호는요?"

"이현승이고 주민번호는...."

"예예. 잠시만요."

경찰 한 명이 신원 조회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괜스레 뻘쭘하게 서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경찰.

허나 그 표정은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하아… 아저씨 이러시면 안 돼요. 제대로 불러주셔야지."

"예?"

"신원 조회가 안 되잖아요. 어차피 큰일도 아니니 너무 겁먹지 마시고 그냥 제대로 불러 주세요."

"그럴 리가... 그거 맞는데요?"

아무리 다른 세상에 갔다왔다고 한들 주민번호까지 잊어버리겠는가.

그렇게 몇 번이고 다시 번호를 불러주고 확인을 했지만... 나오는 결과는 동일했다.

신원 없음.

이현승과 관련된 모든 기록이 사라진 것이다.

"이러면 정말 일 커져요. 아저씨."

경찰들의 표정이 갈수록 험악해졌으나.

"...이건."

히오가 느낀 당혹성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107화 극단적 코스프레 환자 (3)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바깥 세상, 즉 지구에서는 한 명 한 명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각성자들이다.

유명하다는 것은, 명성이 높다는 말이다.

명성이 높다는 것은 곧 강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다프네를 필두로 한 51층의 공략 원정대는 지구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호화스러운 멤버였다.

처음에는 다들 여유가 넘쳤다.

물론, 여유를 가장한 허세였음을 다프네는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TV 너머로, 각종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으니... 그 가운데서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한 허세였고.

두려울수록 덩치를 부풀리는 본능이었다.

그만한 빙의자들이 모였음에도 불안해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역시 로그아웃의 문제였다.

로그아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니 자연스레 불안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큰 위기 없이 승승장구했던 이들인 만큼, 진정한 위기 앞에서는 침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공략을 위해 어비스 게이트로 진입하고 그런 불안은 사라졌다.

진입 후 10일 동안 로그아웃이 불가능하다는 제약이 알림 메시지로 떠오른 탓이었다.

10일 정도야 뭐 버티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니 로그아웃이라는 최후의 수단이 다시 생겼음을 깨닫고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이미 시작부터 변수로 가득한 원정이었다.

10일간 로그아웃이 제한된다니…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일이었다.

한데 왜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은 상식 내의 존재일 것이라 생각하였나.

징조는 충분했고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음에 대비했어야 했는데....

"…아니. 아니다."

이런 자책은 의미가 없다.

사실 대비는 충분했다.

자신이 불러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이었지 않은가.

이것 이상으로 대비하는 것은 시간상으로나 방법적으로나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재해와도 같은 것이었을 뿐.

그것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빙의자들이 와해되어 버렸을 뿐.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공략에 실패했다.

세상엔 그것이 풀려나올 터였다. 재앙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런 불행 가운데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면 그 괴물의 능력을 보았다는 점.

그러니 이제는 정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곳은 로그아웃 같은 편리한 기능 따위가 없는 현실이었니 말이다.

하지만 어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그 재해와도 같은 능력에 누가 앞장서서 맞설 수 있겠는가… 라는 자문에 떠오르는 것은 단연코 한 사람.

"지존 천마."

그뿐이다.

오직 그뿐이었다.

자신마저 미쳐 버렸던 그 공간에서도 무던했던 지존 천마만이 그것을 상대로 물러나지 않으리라.

그러니 다프네는 즉시 몸을 일으킨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을 터였다.

새하얗고 넓은 방.

각종 보안장치로 인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방의 문이 열리고 다프네가 걸어나간다.

동시에 그녀의 뒤에 따라붙는 것은 십여 명의 각성자.

다프네는 익숙하게 그들을 돌아보며 입을 연다.

"지존 천마를 찾아라."

그를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 * *

다프네 키린.

스페인 출신 최초의 각성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

위험하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 그것을 지킬 힘이 있는 자가 명성과 권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니.

거기에 출중한 외모와 특유의 냉철함.

유별나게 강하다는 최초의 각성자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강함.

어찌 유명해지지 않을 수 있겠나.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은 하나의 거대한 집단이 되었고 그 정점에 있는 다프네 키린의 힘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것이다.

그런 다프네가 명했다.

"지존 천마를 찾아라."

이는 그녀를 따르는 랭커를 거쳐 일반 각성자들에게까지 빠르게 전파되었다.

물론 그쯤에서 지존 천마라는 이름 대신 그의 복장이나 특색 따위가 전해지고 그것을 찾는 것으로 명령이 수정된 채였다.

그러면서 다프네 본인은 직접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존 천마와 시르베르트가 한국 출신인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

다만 시르베르트는 다른 세상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그것이 시르베르트가 공략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맡기로 한 역할이었으니까.

그쪽에서도 한창 정신없을 테니 그의 협조를 받기란 요원한 일일 터.

그렇다고 다른 랭커들이 지존 천마의 위치를 알고 있느냐 하면.

"그럴 리가."

무려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모두의 눈을 피해 있던 이가 지존 천마라는 인물이다.

온갖 신비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미래를 내다보고 움직이는 자.

그나마 저쪽 세상에서는 제국의 수호 기사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조금도 그 정체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이.

그런 사람을 일반 랭커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다프네는 직접 한국으로 향한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일인 만큼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고....

세상은 다프네 키린이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너무도 많았다.

- 다프네 키린. 갑작스러운 한국 방문.

-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여인, 다프네 키린. 한국에 첫 방문하다!

- 다프네 키린. 김치를 아냐는 기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지나쳐....

- 다프네의 내한은 사실 연인이 한국인이기 때문?

...

그저 공항에 모습을 살짝 비춘 것이 전부였음에도 삽시간에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백 수천 개의 기사가 우후죽순 생겨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 후보의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인기와 팬심으로 먹고사는 연예인도 아니었으니 무수한 인터뷰와 사진 요청 따위를 전부 무시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한다.

냉혹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라거나 뭐 그렇게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정작 다프네는 그런 말들조차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다.

그녀에게 당장 신경 쓰는 것은 시간 내에 지존 천마와 만날 수 있을지에 관한 것뿐.

그렇게 한국에 막 도착한 다프네가 가장 먼저 접한 소식은.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태평양 상공에 나타난 어비스 게이트에 관한 소식.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며칠 내로 대규모 원정으로도 실패했던 존재가 세상에 튀어나올 것이다.

"지존 천마는?"

그러니 더욱 빨리 지존 천마를 찾아야 하리라.

"그렇지 않아도 단서를 찾았습니다."

그런 말과 함께 다프네에게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영상이었다.

사람이 잔뜩 몰린 중앙에서 공연하듯 지팡이를 휘적이고 있는 한 사내에 관한 영상.

"이건...."

머리에 쓴 커다란 모자하며 손에 든 지팡이에서는 빛이 번쩍인다.

그 끝에서 작은 불꽃이나 물방울 따위가 생기는 게 꼭 신기한 마술쇼라도 하는 듯한 모양인데....

그 차림이나 행색이 너무도 익숙하지 않나.

저건 분명.

"…지존 천마. 뭐 하고 있는 거지?"

미궁에서 만났던 것과 같은 옷에 같은 지팡이.

분명 그가 맞았다.

한데 왜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저런 쇼를 하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조차도 어떤 생각이 있는 것이겠지."

그가 하는 일에 의미 없는 일이 있겠는가.

이미 마음 깊숙하게 그를 신봉하고 있는 다프네였다.

"바로 여기로 이동한다."

다프네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동한 곳은 서울의 유명 번화가.

이것이 꽤 큰 이슈와 각종 루머를 만들어 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 * *

태평양 상공에 나타난 흑색의 게이트.

급하게 찍은 듯 흐릿한 사진으로 확인한 그것은 분명 그때와 같은 불길한 게이트였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상이 아닌 하늘에 나타났다는 점.

그리고 크기가 그때와는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거대하는 점.

게이트의 크기로 그 위험도를 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저 정도로 거대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나.

그렇기에 윤슬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공항으로 향했다.

최초의 각성자를 제외하고는 그 검은색의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자신뿐이라 여겼으니.

대체 그들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저것의 비밀은 무엇인지 알아야 했으니 말이다.

동시에 모든 연락망을 활성화했다.

최초의 각성자들에게 눈을 붙이고 있는 감시자들.

그때와 같은 흑색의 게이트가 나타났다.

이 상황에서 과연 최초의 각성자들은 어찌 움직일 것인가.

예상컨데 분주하지 않을까.

그 압도적인 크기에 그들도 나름 당황하며 움직일 테고 그 사이에 틈이 보이지 않을까.

어떤 정보라도 흘리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예상은 빗나갔다.

- 움직임 없음.

- 특이사항 없음.

-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음.

그들의 움직임을 종합해 보자면, 결론은 이상 없음.

…이해할 수 없다.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최초의 각성자들이 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인가.

꼭 겁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게다가 개중 몇몇은 몇 달이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대체 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띠링-

그렇게 의문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 받은 하나의 연락.

- 다프네 움직임 포착.

최중요 인물로 지정해 놓은 다프네 키린.

그녀에게 달아 놓았던 수많은 '눈'의 총책임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 사람 한 명을 찾으라 지시 내린 것으로 확인.

- 평소의 움직임과는 다름. 철저하지 않고 급함.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

- 찾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파악되지 않으나 화려한 복장에 챙이 넓은 고깔모자, 지팡이를 지닌 이라는 설명. 아마 은어일 것이라 사료됨.

거기까지 확인했을 때 윤슬아의 움직임은 이미 멈춘 채였다.

화려한 복장에 챙이 넓은 모자.

지팡이를 지닌 이.

이 설명에 나와 있는 사람을 자신은 분명 알고 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고 받았던 사진 속의 사내가 아닌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동시에 든 생각은 부정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서울 한복판에서 마술쇼를 벌이는 사람을 세계 최강의 각성자가 대체 왜 찾는단 말인가.

그러니 이것은 지극히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생긴 오해일 것이었다.

그것이 분명했다.

허나....

- 다프네 키린.

그렇다면 이 다음에 이어지는 메시지는 대체 무엇인지.

- 한국으로 이동.

윤슬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서초 경찰서의 반포 지구대.

한창 정신없을 시간대이건만, 이례적으로 경찰들이 모여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문 인식도 안 먹히고… 진짜 뭐지?"

"생긴 건 멀쩡한데요."

"외국인도 아니고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이 맞는데 말이야.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아예 출생 신고도 되지 않은 것 같죠?"

"그래. 지문 감식에도 나오지 않으니까 아마 맞겠지."

히오는 그런 수군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는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지만, 이 정도 거리쯤이야. 각성자들에게는 별것도 아닌 거리였으니.

"근데 진짜 억울하다는 듯이 주민번호 부르는 거 봤어요? 와, 전 거기서 소름 좀 돋았잖아요."

"너무 그러지 말어."

"복장도 그렇고… 알고 봤더니 공연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도 아니었고… 정신에 좀 문제 있어 보이죠?"

"아까는 자기가 마법사라 하고 뭐, 남태민이랑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던데."

"남태민? 그 태룡 길드장 남태민이요? 와… 리플리 증후군? 뭐 그런 건가?"

"비슷한 거겠지. 쯧쯧… 아직 젊어 보이는데 거 참 어쩌다가...."

가볍게 출동한 현장에서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을 만났으니 처음 겪는 일에 한데 모여 수군거리는 것이다.

이해는 한다.

다만 그런 심정을 이해한다고 공감하며 고개나 끄덕이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을 뿐.

- 그러니까… 자네가 이 세상 사람이란 걸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다?

푸르넬의 말에 속으로 긍정을 전하는 히오.

'그래.'

-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인데?

'맞아.'

차라리 사망처리된 것이라면 이해라도 하지.

그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히오가, 이현승이 이 세상에서 살았었다는 흔적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 으음… 나도 잘모르겠네만, 굳이 추측해 보자면… 이곳의 신이 자네를 지워 버린 건가?

'그러니까 왜?'

- 내가 어찌 아나? 아니면 혼이 그대로 넘어가 버린 탓일 수도 있고....

'혼이 넘어갔다라.'

확실히 영혼이 텅 빈 다른 빙의자들과 달리 히오는 혼과 함께 벤타이얼 세상 속으로 이동했다.

그렇기에 로그아웃할 수단 또한 없었고 그것을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 그리고 자네와 같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지 않나.

히오와 마찬가지로 혼이 비어 있지 않았으면서 로그아웃이 불가능했던 자.

'아이라이츠.'

- 그렇지. 그 혼을 크뢰츠발트의 랜턴 속에 모셔 놨으니 언젠가 물어보게나. 그녀 역시 자네처럼 이 세상에서 흔적이 지워졌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이라이츠의 과거는 히오와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아니, 과거로 인한 결과가 비슷했다.

벤타이얼에 빠져든 계기와 상황이 비슷한 것이었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현실에서는 더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한 자.

동시에 벤타이얼에서 높은 랭킹을 기록한 자.

그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인가. 아니면 히오에게만 일어난 특수한 일인가.

- 저기 이야기가 대충 끝난 모양이구먼.

깊어지려는 상념을 푸르넬의 목소리가 끊어 주었고 그 말대로 경찰관 중 한 명이 히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승 씨. 어떻게 생각은 좀 나셨어요?"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

배려가 가득 담긴 사근사근한 어조였다.

"음… 글쎄요… 기억이 잘...."

"저런… 괜찮아요. 저희가 도와줄 테니 우선 살던 곳이랑 가까웠던 지인부터 차근차근 떠올려 보죠."

경험 많은 경찰들이었지만, 멀쩡하게 생긴 젊은 남성이 출생 신고도 되어 있지 않고 살던 집도, 부모나 지인도 기억 못 한다고 하니.

그들로서도 처음 겪는 것이다.

애초에 이현승이라 주장하는 이름도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저랑 같이 차분하게 생각해 봐요. 정말 연락할 사람이 없어요?"

"연락은… 할만한 사람이 있긴 한데."

"그 사람의 연락처는 모르고요?"

"연락처는 모르는데 그쪽 회사 쪽으로 연락해 보면 가능할 것 같긴 해요."

"회사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윤슬아라고 나름 유명하긴 한 것 같던데...."

히오의 말에 마주 이야기를 나누던 경찰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윤슬아라면 그 재벌 3세?"

"글쎄요… 집이 엄청 좋긴 하더라고요."

"각성자 포기하고 사업가로 돌아와서 벌써 중견 길드만 셋 이상 키워 낸 그 윤슬아 말씀하시는 거죠?"

"뭐… 맞는 것 같네요. 이현승이라는 이름만 전달해 주면 그쪽에서 만나러 올 건데… 방법이 있을까요?"

그리 말하면서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들이 하는 속닥거림을 엿들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윤슬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전할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말해 봤건만....

"…예에. 그럼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그런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킨 경찰의 표정에는 안쓰러움이 묻어나 있었으니.

"이현승 씨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는 등을 돌리며 이곳을 보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재빨리 신호하는 것이다.

정신 나간 놈이 확실하니, 빨리 정신 병원에 연락하라는 약속된 신호였다.

불현듯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108화 천상(天上)

지구대 바깥이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안쪽에서도 그 번잡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 무슨 일인지 파악하러 몇 명의 순경이 뛰쳐나갔지만.

"…억!"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뛰쳐들어오고야 만다.

손은 바깥을 가리키며 휘적였고 당황한 입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면서 말이다.

"뭔데, 왜 무슨 일이야."

흔치 않은 그 반응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고 곧 볼 수 있었다.

지구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외모의 여인.

그 뒤를 경호하듯 따라오는 각성자들과 바깥쪽에 얼핏 보이는 수많은 기자까지.

"어… 어디서 많이 봤는데?"

워낙에 갑작스러웠던 탓에 잠시 사고 회로가 정지했지만, 그 정체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윤슬아?"

티비에, 뉴스나 신문 따위에 심심하면 등장하기에 낯익은 얼굴.

등장만으로도 칙칙한 지구대가 환해지는 듯한 외모.

태룡 길드의 전(前) 각성자이자 스스로 능력을 증명한 사업가이면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플루언서.

윤슬아였다.

"미, 미친. 아니 윤슬아가 여긴 왜...."

"그럴 게 아니라 우선 이쪽으로...."

"소장님께 빨리 연락드려!"

바깥이 왜 소란스러웠는지 금방 이해한 덕에 내부 역시 외부 못지않게 소란스러워지려는 순간.

"…엥?"

누군가의 얼빠진 소리와 함게 모두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잠시나마 움직임이 멈추고 정적이 일은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목격해 버린 까닭이었다.

윤슬아의 뒤로 들어온 다른 한 명의 얼굴 역시 무척이나 낯이 익은 것이 이유였다.

"그… 다프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짙은 청색의 머리칼.

다프네의 경호원처럼 보이는 이들 역시 TV만 틀면 나오는 유명 각성자들이었으니.

윤슬아의 등장도 이해 안 가기는 했지만, 다프네의 등장은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것이었다.

윤슬아야 어찌됐건 한국 사람이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업가이지 않은가. 어쩌다 운 좋으면 볼 수 있는 셀럽이라는 말이다.

한데 갑자기 다프네?

그녀의 등장에는 괴리감마저 드는 것이다.

그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 아닌가.

가장 강한 각성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다프네가 급작스레 내한했다는 뉴스를 불과 몇 시간 전에 본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런 작은 지구대에 온단 말인가.

그런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오, 이게 누구야."

마법사 코스프레하는 정신병자가 그들을 아는 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문이 해소된 자리에는 새로운 의문이 다시 생겨난다.

"마침 잘 왔어. 나 좀 꺼내 줘."

정신이 아픈 친구는 왜 저 두 거물에게 친한 척 말을 거는 걸까.

기껏 한국에 방문한 다프네 앞에서 망신살을 끼칠 작정인가.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지면 어떡하나.

따위의 하잘것없는 생각은.

"여기 있었군. 히오 파블렌코."

"오랜만이네요. 현승 씨."

두 사람의 대답에 곧바로 묻혀 버렸다.

* * *

"둘이 같이 올 줄이야. 내 메시지를 눈치챘구나?"

반색하며 윤슬아와 다프네에게 건네는 히오의 말.

사람들이 찍어 대는 동영상 속에는 히오가 몰래 감춰 둔 메시지가 존재했다.

마술 공연을 가장한 마법을 펼치며 하늘 높은 곳에는 청염을 어렴풋이 펼쳐 놓았으니.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다프네와 윤슬아가 자신을 찾아올 수 있었다 생각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 다 그런 히오의 노력 따위는 알지 못했다.

윤슬아는 히오가 처음 나타났던 곳 위주로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기에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고.

다프네는 히오의 특징을 상세히 알고 있었기에 넘쳐 나는 인력으로 무식하게 찾아낸 것뿐이었다.

상식적으로 하루에 올라오는 영상이나 게시글이 몇 개인데 고작 마술쇼 정도로 두 거물에게 닿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히오만 뿌듯해하고 있는 상황.

다프네와 윤슬아는 굳이 히오에게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할 말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

그렇게 자연스레 세 사람은 함께 이동했다.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닌 히오를 빼내는 것쯤이야, 다프네와 윤슬아에게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으니까.

"이래서 다들 권력, 권력 노래를 부르는구나."

새삼 제국 수호 기사로 대접 받을 때가 좋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히오가 그러거나 말거나 윤슬아와 다프네. 두 사람은 히오를 사이에 두고 묘한 신경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저 여자는 자꾸 왜 따라오는 거지?"

통역 아티팩트를 통해 전해지는 다프네의 말에 여유롭게 받아치는 윤슬아.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다프네, 이 시기에 당신이 대체 여기 왜 있는 거죠? 한창 바빠야 하지 않나요? 최초의 각성자로서."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을 위해 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다른 무엇보다 현승 씨가 중요하다?"

윤슬아의 말에 꿈틀거리는 다프네의 눈썹.

잘못 대답했다가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다프네 키린이 누구던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

상대가 그렇게 나오자 이번에는 윤슬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는 당신은 히오와 무슨 관계지? 여자친구라도 되나?"

"무, 무슨 소리를… 그냥 아는 지인 정도예요."

다프네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저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 눈빛에 히오가 고개를 끄덕였고.

"잘됐군."

다프네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제 돌아가. 일반 각성자가 따라가기에는 무리인 곳이니까."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지런히 공항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허나 다프네가 돌아가란다고 순순히 돌아갈 윤슬아가 아니었다.

최초의 각성자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 핵심 열쇠라 할 수 있는 이현승을 간신히 찾아내지 않았나.

그녀의 입장에서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 아무리 당신이 다프네 키린이라고 해도 내게 돌아가라 마라 할 자격은 없죠."

윤슬아의 시선이 다시 히오를 향한다.

아무튼 아까 히오의 입으로 윤슬아를 찾고 있다고 말했지 않나.

그 말대로 윤슬아는 히오를 찾아왔고 그녀를 돌려보낼지 말지는 히오가 정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속뜻을 파악한 다프네 역시 히오를 바라본다.

두 여인의 시선을 받으며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히오.

"빨리 가기나 하자. 시간 없어."

윤슬아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다프네가 왜 윤슬아를 떼어 놓고 가려는지 정도는 짐작이야 하고 있다.

다만 그에게는 하등 상관없을 뿐이었다.

최초의 각성자니 영웅이니.

그 위상이 어쩌고 그들의 비밀이 어쩌고....

그딴 것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어비스 게이트를 해결하고 다시 아릴레이야로 돌아갈 생각뿐이다.

그쪽이 훨씬 걱정되었으니 말이다.

자칫하다가 정화도 되지 않은 용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해라, 다프네. 그 기운이 풀려나면 끝이야."

사실 다프네가 올 것은 예상 못 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다프네가 오지 않았다면 윤슬아에게 어비스 게이트에 대한 정보와 비행을 부탁했을 텐데 이제와서 나몰라라 하고 간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히오는 그렇게 염치없지 않았다.

"봤죠?"

"...."

왜 윤슬아가 의기양양해 하는지 모르겠다만, 어찌됐건 그렇게 동행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여인을 경호하는 각각의 각성자가 다가와 귀에 대고 조심스레 전하는 소식.

그것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진중하게 가라앉는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났답니다."

어비스가 기어이 터져 버리고야 만 것이었다.

* * *

"문제는 정신력의 부재였어."

"정신력?"

"그래. 가령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 내겠다는 그런 의지 말이야. 빙의자들에게는 그게 부족했지."

어비스 게이트로 향하는 다프네의 전용기 안.

히오에게 설명하는 다프네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작부터 변수투성이었던 51층.

공략 조건은 층내의 모든 몬스터의 말살.

문제는 51층의 보스 몬스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내가 몰랐다는 건 다른 랭커 누구도 본 적 없는 종류의 보스 몬스터라는 거야."

다프네의 말에 미미하게 끄덕여지는 히오의 고개.

"다프네, 네가 본적도 없는 종류의 보스 몬스터가 51층에서 나왔다라...."

그건 확실히 변수가 될 만했다.

벤타이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히오 못지않은 게 다프네였으니.

"호기롭게 나선 각성자 몇 명이 예상 밖의 강한 힘에 바로 죽어 버린 게 시작이었어."

상위권의 랭커이자 각성자들.

녀석들은 죽음의 위기를 겪지 못했다.

위기라고 해봐야 전부 자신의 힘 안에서 통제 가능했던 것뿐.

진정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상황은 겪은 적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51층은 로그아웃이 10일 동안 불가능했었으니까. 강한 위기감을 느끼자마자 그게 먼저 떠올랐겠지."

자칫하다가 로그아웃마저 또 불가능해진다면?

진짜로 여기서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닐까.

게임처럼 명성을 얻으며 막힘없이 강해지기만 했지.

실상을 파헤쳐 보면 정말로 위기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울 자는 많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 명이 도망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도 로그아웃해 버리더라고. 남들 다 도망가는데 혼자 남아 있어 봐야 죽겠구나 싶었던 거겠지."

중반부 이후부터는 어비스 몬스터의 단위 자체가 달라진다.

괜히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서 조심스레 가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직도 많이 남은 어비스 몬스터, 거기에 처음 보는 유형의 강력한 보스 몬스터까지.

다프네와 몇몇이 남아 분전했지만, 어림도 없었으리라.

"결코 공략에 실패할 만한 멤버가 아니었어. 분명 계속 싸웠다면 성공했을 거야. 그 과정에서… 몇 명 정도는 더 죽었을 수도 있지만."

도망갈 구석이 있다는 게 문제다.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없다는 것 또한 문제였다.

보스 몬스터는 분명 재해와도 같은 힘을 지녔다.

허나 그곳에 모인 이들은 세계의 정상급 각성자들. 재해를 버텨 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중반부이기는 하나, 51층에서 실패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겉으로만 강해졌지 내면은 아직도 평범했던 과거에 머물러 있었으니.

공략은 그렇게 실패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 녀석들을 믿지 않아. 과한 명성을 얻고 으스대기만 할 줄 아는 머저리들."

다프네의 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침잠한다.

생각만으로도 부아가 치민 까닭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실력에 비해 너무 과분한 명성을 얻은 놈들이지 않나.

자신들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면서도 도망가기 급급했던 놈들.

책임감은 없고 그저 떠받들어지기만을 원하는 한심한 작자들.

"그래서 널 찾아온 거야. 히오 파블렌코. 아니, 이곳에서는 이현승이라 불러야 하나."

다프네의 시선이 맞은편의 히오를 향한다.

그 머저리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인 사내.

명성을 탐하지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도 않는 자.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

외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력 또한 다프네로서는 끝을 알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 머저리들을 한 번 더 믿었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믿을 만한 사람들로 다시 한번 원정대를 꾸리자. 나와 함께."

그것이 다프네가 곧장 히오를 찾아온 이유였다.

자신이 아는 한 가장 강한 사람이었으니.

그리고 그는 결코 도망 따위 가지 않을 사람이었으니.

그에 히오는 모자를 고쳐 쓰고 기대 놓은 지팡이를 손에 쥔다.

너무도 진한 어비스의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정정해야 할 게 두 가지 있어. 우선 이현승이라는 이름은 이제 없는 듯하니까 그냥 히오라고 불러."

그러면서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는 히오 파블렌코.

도착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어비스 게이트를 막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얼핏 보이는 창밖의 풍경은 해가 사라진 바다의 한가운데.

어둠에 잠긴 망망대해의 하늘 위.

"나서지 마."

그말과 동시에 비행기가 착륙하기 시작했다.

* * *

"…쳇."

히오와 다프네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비행기의 반대쪽.

그곳에는 윤슬아가 혀를 차고 있었다.

이현승과 다프네가 윤슬아만 빼놓고 따로 대화를 하기 위해 반대편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래봐야 어차피 같은 비행기의 안이었으니 충분히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대화는 들리지도 않고."

접근도 하지 못하게 다프네 휘하 각성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막고 있지 않나.

이런 취급을 받아 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그럼에도 윤슬아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성격이었으니.

다프네는 최초의 각성자 중에서도 정점으로 꼽히는 인물.

그리고 이현승은… 정체는 모르겠다만, 이전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남태민보다는 확실히 위.

그리고 다프네의 언행과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믿기지는 않지만, 다프네보다도 더 윗줄.

그말인즉.

"최초의 각성자들의… 리더? 우두머리?"

뭐, 그런 존재인가?

일단 마구잡이로 추측만 해볼 뿐이다.

그래도 함께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겠나.

저번에는 놓쳤지만, 이번에는 곁에서 지켜보며 많은 것을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최초의 각성자에 대해서도, 그들이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현승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해서도.

그렇게 윤슬아가 다짐했을 무렵.

"나서지 마."

이현승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시에 비행기가 착륙하기 시작한다.

'…응? 나서지 말라고? 무슨 뜻이지?'

해결할 수 없는 윤슬아의 의문을 가득 담은 채 착륙하는 비행기.

바깥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어둠뿐이었다.

* * *

게이트 브레이크란, 공략에 실패한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비스 게이트 또한 마찬가지여서 지난번 1층의 공략 실패 때 그랬듯 브레이크 시작과 동시에 몬스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섬의 형태라. 확실히 처음 보는 유형이야."

바다 위, 가로로 길게 드리워져 있던 초거대 게이트.

그것이 부숴지며 나타난 것은 게이트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섬이었다.

그것도 지상에 붙은 게 아닌, 하늘 위에 떠 있는 섬.

섬 안쪽으로는 달빛도 들어가지 못하는지 어둠이 깊게 내려앉아 있다.

"운치 있네."

히오는 팬텀 스티드 위에 올라탄 채 홀로 그 섬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물론 운치는 개뿔.

느껴지는 건 끔찍한 어비스 기운뿐.

토벌이 늦어졌다가는 이 저주받은 기운이 세계 곳곳으로 퍼질 터였다.

다행이라 한다면 섬의 형태로 함께 움직이는 듯, 섬 내부의 몬스터가 따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

오히려 이쪽이 히오 입장에서는 한 번에 소탕할 수 있고 좋았다.

"그러니까 요는, 신성력이라 이거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속도로 오르는 명성 포인트.

그것을 즉시 활용해, 가능한 족족 신성력에 투자하는 중이었다.

요는, 신성력이었으니까.

「스탯 '신성력'을 11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신성력'이 +11 상승합니다.」

명성 포인트가 이토록 빠르게 올라가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주위를 살짝만 둘러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헬기는 다프네의 명으로 재빠르게 통제했지만, 바다가 워낙 넓은 탓에 모든 이를 빠르게 제지하는 것은 힘들었으니.

가까운 육지에는 빼곡히 들어서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드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섬인지라 완전한 통제는 힘든 것이다.

유튜버, 기자, 관광객, 근처 주민 등.

온갖 사람들이 하늘에 떠 있는 섬을 구경하고 있었다.

본래 대로라면 곧 어비스의 위험성이 알려지고 너도나도 도망가기 바쁘겠지만....

"생각처럼만 된다면 순식간에 정리할 수도 있을 거야."

사람들 틈바구니에는 윤슬아와 다프네 또한 함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들과 함께 굳이 위험천만할 것이 뻔한 저 섬의 안쪽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지상의 사람들을 쭉 훑어본 히오의 시선이 다시 어둠에 잠긴 섬을 향한다.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전부 어비스의 저주받은 기운.

어두운 공간. 공중에 뜬 거대한 섬 앞에서 새하얀 날개의 팬텀 스티드는 작지만, 신성하게 느껴진다.

"저주받은 어비스의 존재들. 너희의 약점이 무엇일까."

그 위에 올라탄 히오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의지를 불어넣는 것이다.

어비스에 물든 영혼.

그러한 영혼을 소멸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힘.

"답은."

하늘 높이 뻗어 올리는 지팡이.

피어나는 눈부신 금빛 광휘.

"천상이라."

「스킬 - '천상(天上)'이 발동됩니다.」

어둑한 하늘을 가르고 여신의 손길이 섬을 뒤덮어 간다.

109화 천상(天上) (2)

"모든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됐지."

심연과 하나 되어 버린 용의 혼.

그런 상태로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라는 건, 이미 기적이었다.

용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였다면 혼 자체가 이미 어비스에 잠식당해 본래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혼이 되어 버렸을 터.

용은 단지 미리 걸어 놓았던 봉인 마법과 아주 자그마하게 남아 있는 본래의 영혼.

그리고 드높은 격으로 간신히 잠들어 있을뿐이지, 실상은 어비스에서 나오는 몬스터와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 그 어비스 몬스터 말이다.

어비스 공략을 위해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악에 물든 몬스터들.

이 세계의 수호자, 반신(半神)이라 불리던 용과 하찮은 어비스 몬스터가 비슷하게 느껴진다니.

성립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어비스 몬스터는 어디서 왔는가.

그들에게 혼은 존재하는 것인가.

혹, 어비스 몬스터의 정체는....

과거 그것에 잠식당한 인간이나 몬스터, 다른 세상의 생명체들인 것은 아닐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그걸 안다고해서 달라질 건 물론 없지만."

그래도 알아야 했으니 차근차근 알아보면 될 뿐이다.

"우선,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모습 좀 볼까."

짙은 어둠에 둘러싸인 섬.

척보기에도 온갖 불길함으로 뒤덮인 채 허공을 부유하는 거대한 섬.

각성자의 눈으로도, 현대의 기술로도 그 내부가 보이지 않는 심연에 잠겨 버린 섬.

그러니 히오는 마법사의 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가볍게 들어올린 지팡이.

동시에 발현되는 것은 4서클에 근간을 둔 스킬.

「스킬 - '위자드 아이'가 발동됩니다.」

공중을 부유하는 섬과 그보다 더 위에 자리한 거대한 형체.

섬과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형체는, 히오와 같은 고깔모자에 그보다 더 화려한 지팡이를 쥔 노인이었다.

그 형체가 거대한 지팡이로 허공의 한 점을 톡 건드리자 우수수 생겨난 눈동자가 섬의 상공을 온통 뒤덮어 버린다.

"허허...."

자신이 시전했지만, 볼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에 헛웃음을 흘리는 히오.

"무슨 이런 단순무식한 이펙트가 있나."

위자드 아이.

즉, 마법사의 눈.

그러니까 마법사를 하나 만들고 눈동자는 수천 개를 만들어 내는 이펙트.

무식하게 크고, 무식하게 숫자를 늘린 것 뿐이지만, 그만큼 화려했다.

'간지 없이는 못살아!' 특성에 환영 마법과 정신 방어 마법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었다.

마법사의 관점에서 그리 생각하니 상당히 좋은 특성이 아닌가.

"어쨌든... 이것도 보이지는 않네."

상공을 장악한 수천 개의 눈동자.

그중에서 실체는 몇 개뿐이었고 그것으로 섬의 내부를 들여다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다.

뭐, 그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진짜 실망한 점은.

「특성 - '유령의 눈'이 해제됩니다.」

'위자드 아이'와 '유령의 눈'이 연동되는지 확인해 보려 한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한 모양.

녀석들의 혼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비스에 잠식당한 용의 혼과 정말 비슷한 느낌이 맞는지 보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에 알아 보면 되지."

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 하기위해 굳이 섬의 내부로 진입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다.

「스킬 - '위자드 아이'가 해제됩니다.」

정말 급한 것은 허공을 부유하는 이 저주받은 섬이 사람들이 모인 내륙 근처로 가기 전에 없애 버리는 것.

어비스 기운이 지구에 퍼지지 않게 소멸시키는 것.

그것이 정녕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저주받은 어비스의 존재들. 너희의 약점이 무엇일까."

어비스에 물든 것들을 상대할 힘.

그것은 정말로 치명적인 힘일 것인가.

"답은."

결과에 따라 많은 것이 뒤바뀔 터였으니.

히오는 하늘 높이 지팡이를 치켜든다.

그에 맞추어 드러나는 여신의 자애로은 빛.

금빛의 따스한 손길.

이는 그야말로.

"천상이라."

하늘 위의 힘.

악을 멸하는 신성.

「스킬 - '천상(天上)'이 발동됩니다.」

천상의 광휘는 어둠을 가른다.

밤을 넓게 물리고 그 자리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은 성력.

그것이 심연에 잠긴 섬을 크게 감싸 들어가기 시작했으니.

그곳은 더이상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제는 여신의 손길이 닿는 신의 영역.

히오 파블렌코가 악하다 느끼는 그 어떠한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

대단치 않은 사악한 혼 따위는 변변찮은 저항도 못하고 소멸해 버릴, 그런 영역인 것이다.

그만한 스킬을 시전한 자로서 느껴지는 게 있다.

섬의 어둠이 사라져 가는 것을.

그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가 고통에 겨워하다 깨끗하게 지워지는 것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초를 헤아린 사람은 없었겠지만, 대략 1분이 조금 넘는 시간, 2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천상의 영역은 지속되었고.

보는 모든 이로 하여금 황홀경을 느끼게 한 신성의 빛은 점차 사그라든다.

"신성력이랑 마력의 소모가 상상 이상이야."

텅 비어 버린 신성력과 빠르게 줄어든 마력을 확인한 히오가 고개를 작게 가로젓는다.

신성력 스탯이 낮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속시간이 짧은 편이었다.

마력 역시 '뇌제'와 비슷할 정도로 잡아먹는데, 신성력까지 엄청난 속도로 줄어드는 것.

최상위 스킬 중에서도 가장 소모값이 큰 스킬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가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힘이었다.

2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고작 그 정도의 시간은 섬에 존재하는 모든 어비스 기운이 천상에 의해 깨끗하게 지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쿠구구궁-

하늘을 떠다니던 섬이 힘을 잃고 부서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천상의 금빛 광휘가 사라진 자리.

육중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섬은 바다를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섬을 감싸던 어둠은 씻은 듯 사라졌고 섬과 함께 추락하는 어비스 몬스터의 모습 또한 함께 보인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떨어지는 몬스터의 모습.

최고위 신성 마법은 그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비스 기운 자체를 모조리 소멸시켜 버렸으니.

어비스에 물든 것들 한정으로는 가히 재앙과도 같은 힘.

"요는 신성력이라니까."

이제는 신성력 스탯을 부지런히 올려야 할 테다.

* * *

현대의 과학 기술은 확실히 경이롭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을 세계 어느곳에서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프네가 급하게 인원을 통제했다고는 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어디엔가 숨어 있던, 섬의 반대편이나 그늘진 곳 정도에 몰래 숨어서 촬영하던 드론이나 헬기 따위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에 현장의 상황이 생생하게 담겼다는 의미였다.

뭐, 어차피 육지에서 수백 수천 대의 카메라가 이곳을 찍고 있긴 했지만, 현장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한 메리트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가령, 이 기적 같은 일을 벌인 당사자와 인터뷰를 한다든가.

유례없을 정도로 커다랬던 검은색의 게이트.

그것이 깨짐과 동시에 나타난 허공을 부유하는 섬.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대체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가늠조차 가지 않는 것이다.

단지 몇몇 최초의 각성자가 절대 다가가지 말라고, 인류는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 이야기했을 뿐.

그럼에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자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미친듯이 히오를 향해 날아오는 저 헬기처럼 말이다.

팬텀 스티드 위에 올라 가라앉는 섬을 바라보던 히오가 헛웃음을 흘릴 정도로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위기감이란 게 없는 건지.

당장에 떨어지는 거대한 섬에, 그 땅덩어리게 바다가 출렁이고 그로인해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며 파편 따위가 어떻게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이곳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꼴이라니.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게 다가오는 헬기에게서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오는 것이었다.

당장에 섬의 파편이 그 위로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으니.

"거참."

히오가 지팡이를 뻗어 실드를 펼쳐서 막아 주지 않았다면 필히 추락해 버렸으리라.

어찌저찌 역경을 헤치고 기어이 히오 앞에 도달한 헬기 안에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상황을 담아내겠다는 표정의 카메라맨이 보인다.

한손으로 벽을 꼭 잡고 반대손으로는 마이크를 쥐고 있는 기자가 보인다.

저들의 직업 정신은 박수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lsakjlakjr!"

그들이 마이크를 쭉 뻗으며 뭐라뭐라 말을 건네는데 당연하게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다른 언어이기도 했고 바람 소리와 헬기의 소음, 철썩이는 파도 따위로 시끄러웠으니까.

하지만 대충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있다.

뭐, 너는 누구냐.

저건 뭐냐.

어떻게 한 거냐 등.

질문이야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히오는 입을 열었다.

시끄러운 온갖 소리를 물리칠 수 있도록 마력까지 실어 전하는 말.

물론 저들의 직업 정신에 감명을 받아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는 경고.

그래.

다프네의 말을 빌리자면.

"실력에 비해 과한 명성을 얻은 머저리들."

이것은 그 한심한 작자들에게 전하는 경고였다.

"부끄러움을 알아라."

그쯤에서 섬은 완전히 가라앉는다.

본디 신비로웠을 섬은 어비스에 잠식당한 채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것은 메시지.

「모든 어비스 게이트가 소멸되었습니다.」

"지켜보마."

「귀환합니다.」

* * *

인구의 대부분이 엘프로 이루어진 아릴레이야.

본디 엘프란 자연을 벗삼으며 정령과 노래하고 마법 또한 수준급으로 펼치는 종족이었지만....

정령과 마법을 잃어버린 시대의 엘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엘프는 약해졌다.

그렇다면 아릴레이야는 약한가?

아니, 아릴레이야는 강하다.

아릴레이야 대부분이 엘프로 이루어져있음에도 그들은 강했다.

지키는 것이 사명이었기에.

그것을 위해, 자신들의 섬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탓이었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게이트에서 심연의 기운을 감지한 레가르다가 가장 먼저 뛰쳐나갔고.

가장 고귀한 엘프, 이시도르가 모든 엘프를 불러 모았다.

결국 입구는 하나였으니.

한 번에 튀어나오는 몬스터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고 다른 엘프에게 갈 것도 없이 레가르다 선에서 정리되는 것이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결국 레가르다가 흘리는 몬스터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다른 엘프들이 나섰다.

한번 구멍이 발생하니 그것은 점차 커져 갔고 레가르다는 결정을 내렸다.

- 이시도르.

가장 고귀한 엘프의 힘을 사용하기로.

어비스 기운의 저주 받은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레가르다가 아니던가.

혹시라도 그것에 오염되는 엘프가 나오기 전에 확실히 하려는 것이었다.

병력을 뒤로 물리고 게이트를 넓게 포위한다.

이시도르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가장 고귀한 엘프는 어찌하여 가장 고귀한 엘프인가.

그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

묻는다면 아릴레이야의 엘프들은 입을 모아 이리 답할 터이다.

'가장 고귀한 엘프는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가장 고귀한 엘프이다.'

말장난 같았으나 이는 사실이었다.

아릴레이야 정중앙에 깊게 뿌리내린 거목.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은 그 나무의 안에서 이시도르는 눈을 감는다. 손을 앞으로 뻗는다.

그에 신수(神樹)라고도 불리는 거목이 조금씩 흔들려 오는 것이다.

가장 고귀한 엘프, 이시도르.

그녀의 의지는 곧 나무의 의지.

신수와 하나 되어 그것을 다루고 조종하는 힘.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고귀한 능력의 혈통이었으니.

모두가 그녀를 향해 '가장 고귀한 엘프'라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었다.

거대한 나뭇가지가 게이트에서 갓 튀어나온 몬스터 무리를 뒤덮는다.

그 압도적인 크기와 힘 앞에서는 아무리 중반부 어비스 몬스터라 할지라도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심지어 그런 나뭇가지는 하나가 아니었으니 휘몰아치듯 계속해서 게이트 일대를 휩쓸어 버린다.

"...허억!"

물론 그만한 힘을 무한정 쓸 수는 없었으니, 이시도르와 신수가 잠시 움직임을 멈출 때면 레가르다와 엘프들이 나선다.

그러니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릴레이야는 강하다.

어비스 중반부 몬스터는 강력하지만, 고작 하나의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것쯤이야.

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았으니.

이시도르와 레가르다,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있고 그 두 존재를 존중하고 따르는 수많은 엘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한낮의 높다란 태양이 아래로 기울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일방적인 학살이라 할 만했다.

허나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소름이 돋는 것이다.

하나의 게이트에 이만한 몬스터가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니.

레가르다와 이시도르가 있었기에 손쉽게 막고 있는 것이지, 대륙의 다른 곳은 어떤 지경이고 얼마나 처참할 것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을 정도로 상황이 퍽 여유롭다.

레가르다야 원래 체력이란 게 무의미한 존재이니 괜찮았고 다른 엘프들의 활약으로 이시도르 또한 휴식을 간간이 취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쏟아지는 몬스터의 숫자 또한 조금씩 줄어가는 듯했으니... 다시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전투는 끝날 터였다.

여기서 레가르다가 간과한 변수는, 그럼에도 이미 넘칠 정도로 길게 지속된 전투라는 것.

그말인즉, 어비스 기운이 퍼지고 있다는 것.

그 양이 미약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

그 작은 기운에 반응한 용이 눈을 떠 버렸다는 것이었다.

무려 천 년의 세월을 지나 비로소 다시 뜨여진 녹빛의 바람을 품은 눈동자.

동시에 일으켜지는 거대한 몸체.

아릴레이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용의 육체가 날아오르기 시작하고 그 날갯짓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레가르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로 솟구치던 용 역시 정확히 레가르다를 내려다본다.

천 년만에 비로소 마주하게 된 눈동자.

기억 속에서 한순간도 잊은 적 없던 용의 눈. 친구의 눈.

- ...에리얼.

그 녹색의 눈에는 더이상 현묘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때때로 속을 꿰뚫어보던 날카로움도.

그러면서 부드럽게 감싸던 따스함도 없었다.

그것을 대신해 담겨 있는 것은 오로지 파괴. 살의.

포악하게 번들거리는 포식자의 눈.

'내가 올 때까지 절대로 용이 깨어나서는 안 돼.'

굳이 히오 파블렌코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아니더라도 몹시도 위험한 상태임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 크르르르....

용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110화 개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