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zl존☆천마★(2)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혜성처럼 나타난 '깨달은 자.'
세간에 알려짐과 동시에 그동안 갖춰놨던 엄청난 인맥으로 아카데미의 정교수로 초빙된 인물.
총장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으며 차기 학장의 자리가 내정되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사람.
공신력 있는 공립 매거진, '시르베르트 -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 등등.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시르베르트 본인은 정작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 계획대로긴 한데···."
게임이었던 시절의 정보를 활용해 인맥을 만들고 빠르게 명성을 쌓아 그것을 기반으로 또다시 인맥을 쌓고.
그렇게 결국 아카데미의 중심부까지 들어오는 것에 성공했다.
다른 랭커 출신들에 비해 무력은 조금 달릴지언정 정치적인 힘과 영향력은 으뜸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까지 빙의자들은 기존의 최강자들 수준에 미치지 못하니 그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불안하단 말이야."
그래도 역시나 불안했다.
이제 곧 시작될 재앙이 얼마나 강력할지 아는 탓이었다.
"그 녀석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이 세계에 빙의 되고 난 후 최우선적으로 한 것이 랭커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접촉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판단하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해악이 될 놈들은 제외하고 우선적으로 혜택받았을 10위권 이내 랭커들.
그보다 우선적으로 5위 안쪽이었던 부동의 랭커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연락망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단 한 명, 지존 천마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원래 혼자 노는 놈이기는 했다만······."
그거랑은 별개로 게임 센스와 지식만큼은 엄청난 놈이었다.
본인도 게임 좀 한다 하는 사람이었지만, 녀석에게는 늘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초반 단계라고는 해도 어디서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알면 좋을 것을."
게임의 난이도가 얼마나 재앙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힘을 합치지 않아도 혼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오만인가.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에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똑똑-
"들어와."
방의 화려한 문이 열리고 조교수 호펜이 들어왔다.
손에는 웬 종이 하나가 들린 채였다.
"교수님 앞으로 편지 한 통이 와서요."
"편지?"
호펜이 건네준 종이를 받아들며 짧게 의문을 품는다.
워낙 인맥이 넓고 화려한 만큼 웬만한 편지는 그에게 닿기 전에 알아서 걸러지고 처리될 터인데.
심지어 그 어떤 화려한 인장이나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다.
"어디서 온 거지?"
"그··· 교수님께서 최근에 공들이고 계신 그곳이라고 하면 알 거라 해서···."
"······뭐?"
시르베르트가 최근 공들이고 있는 곳이라면 한 곳뿐이다.
제국의 음지를 장악한 단체.
대륙의 모든 정보가 모여드는 곳.
암살과 정보 길드의 장이자 그것들의 왕.
제이슨 클라록.
아무리 npc에 대한 열정이 진심이었던 곧휴가 갑니다라 할지라도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신비한 존재.
제이슨과 연을 만들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계획이 무척이나 편해질 것이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드디어 반응이 온 건가!"
환하게 펴진 시르베르트의 표정을 본 호펜 역시 밝게 웃으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축하드립니다 교수님!"
"음. 그래그래. 자네는 이만 나가보게나."
"옙!"
호펜이 나가자 시르베르트는 밝은 표정을 유지한 채 서둘러 편지를 뜯었고.
"······!"
그 표정이 경악으로 번지는 것은 아주 잠깐이면 되었다.
- 이틀 뒤. 델피르 마을로 와라.
편지에는 아주 짧지만, 너무도 강렬한 문장이 적혀있었기에.
- zl존☆천마★가 널 찾는다.
시르베르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 * *
시르베르트에게 이틀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까닭이었다.
당장에 '지존 천마'라는 이름에 흥분했지만,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이상한 점이 제법 있는 것이었다.
'2년 동안 잠잠하던 녀석이 이제 와서 날 찾는다고?'
다른 녀석도 아니라 자신을 찾는다는 게 미심쩍으면서도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자신이 신뢰가 가거나 쓸모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래도 조심해야지.'
지존천마의 이름을 아는 것은 시르베르트뿐만이 아니다.
워낙에 압도적인 1위였던 탓에 일만의 랭커 거의 대부분이 그 이름을 알고 있을 터.
시르베르트를 꾀어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악명으로 포인트를 버는 놈들에게는 최고의 미끼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시르베르트를 불러내 죽일 수만 있다면 악명이 급격하게 퍼질 터.
반대로 그런 악당을 시르베르트가 죽인다면 명성 포인트를 크게 벌 수 있는 것이다.
악명을 쌓아 강해지는 빙의자들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으니.
"교수님. 준비 끝났습니다."
생각을 마친 시르베르트가 뒤를 돌아본다.
"좌표설정 완료됐고 말씀하시면 바로 이동 가능합니다."
그에게 말을 건넨 이는 본래 쉽사리 볼 수 없는 자로서 결코 사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규모 이동 스킬 사용자 이오스.
황실 소속인 이오스를 개인적인 인맥을 활용해 이번 일에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아래에는 번쩍이는 갑주를 걸친 수십의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이들 역시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전원이 오러 유저로 구성된 상급 기사단.
이 모든 준비를 단 이틀 만에 해낸 것이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설사 자신이 가는 곳이 악인의 함정일지라도 억지로 뚫어낼 수 있는 전력.
'······다소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가치가 있지.'
고작 이틀이다.
제대로 된 설명과 설득, 절차를 밟을 시간은 없었기에 다소 억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지존천마의 호출이 아닌가.
별 볼 일 없는 일로 부르지는 않았을 테니 마땅한 성과가 있을 것이고 설사 함정이라 할지라도 그만한 악인을 잡는다면 그것 나름대로 성과라 할 수 있으니 충분히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일인 것이었다.
"가지."
그래도 어느 정도 긴장이 올라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인맥을 동원해 상급 기사단을 대동하고 국가 소속의 대규모 이동 스킬 사용자까지 불러온데다가 시르베르트 본인의 무력 또한 강력한 편이다.
그럼에도 지존 천마가 주는 이름의 무게는 커다란 것이기에 절로 긴장감이 밀려들어 온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오스가 하늘을 향해 양손을 쭉 뻗었다.
동시에 저 높은 곳에서부터 환하게 내려오는 빛의 무리.
그 다량의 빛이 시르베르트와 이오스. 그리고 기사단을 감싸고 곧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오스의 전용 스킬, 대규모 공간 이동이 발동한 것이다.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면 되었다.
물론 하루에 두 번이 한계지만, 그 두 번만큼은 대륙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
그런 이오스를 동원했다는 것은, 시르베르트도 이번 일에 사활을 건 것이었다.
'왜 이런 구석의 시골 마을에서 보자고 한 건지···.'
그런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서서히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한다.
제국의 중심에서 외곽까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 정도인 것이다.
"각자 위치로! 방어와 경계, 수색을 동시에 실시한다!"
시르베르트의 시야가 온전히 확보되기도 전에 기사단이 움직였다.
본인의 스킬은 깨닫지 못했으나 육체와 검을 극한으로 단련한 자들.
시르베르트의 눈이 완전히 뜨였을 때, 기사들은 넓게 퍼져 흉흉한 기세와 함께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채앵-
"누구냐!"
그 중, 경계를 담당한 기사들의 검이 뽑혀져 누군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중년 여인과 마찬가지로 붉은색 머리카락의 소녀.
시르베르트는 순간 흠칫했으나 곧 안정을 되찾았다.
'지존 천마가 여자······ 일리는 없고.'
워낙 터무니없는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털어 생각을 날려버리고는 천천히 두 여인에게 다가간다.
"너희는 누구고 왜 여기 있는 것이지."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소녀의 미모가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별달리 강한 힘이라든가, 어떤 특별함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니.
오히려 중년의 여인은 겁에 잔뜩 질려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었기에 시르베르트는 더욱 의심스러웠다.
지존천마가 부른 곳에 있는 이가 평범한 사람일 리 없지 않은가.
두 여인은 악명을 노린 희대의 암살자이거나 어떤 특별함을 지닌 지존천마의 하수인이리라.
"말해라. 지존······ 크흠. 녀석은 어디 가고 너희가 있는 것이냐."
기사의 검이 목에 더욱 가까워지고 두 여인의 안색 역시 더욱 파리해져 간다.
주변에 다른 인기척이나 특이점은 없다.
오직 이 두 여인만이 덩그러니 있는 것이다.
"저는······ 클레어예요!"
그리고 곧 예상외의 당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 저보고 여기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겁에질린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안색은 파리하게 질린 주제에 목소리에 제법 힘이 실려있지 않나.
시르베르트를 똑바로 쳐다보는 두 눈에는 두려움보다 더 강한 어떤 열망이 일렁이지 않나.
흥미를 느낀 시르베르트가 자신을 클레어라 소개한 소녀를 향해 묻는다.
"내가 찾는 사람이 네게 여기서 기다리라 했다는 말이냐?"
"네···! 기다리고 있으면 누군가 와서 저를 데려가 줄 거라고······ 서, 설마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지만요······."
"얘야. 나는 거짓말을 아주 싫어한단다."
시르베르트의 몸에서 무형의 기세가 일렁이며 뻗어나온다.
그가 가장 처음 받은 기초 스킬 '위협.'
그리고 그것을 강화하고 발전시킨 지금의 스킬 '살기.'
평범한 소녀라면 살기가 주는 엄청난 압박감을 결코 버텨내지 못하리라.
"다시 한번 물으마."
살기가 클레어의 주변을 비릿하게 맴돈다.
"내가 찾는 이가 누군지 알고 말을 하는 것이냐."
시르베르트의 눈앞에 선 클레어는 몸이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다.
맹수 앞에 놓인 생쥐의 심정이 이러할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시르베르트의 눈이 마치 뱀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인다.
살기가 맹렬히 쏘아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 주위를 맴도는 것뿐이었음에도 숨이 턱 막히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것이고 억울한 건 억울한 것이다.
자신은 정말로 히오의 말을 따랐을 뿐이었으니.
다만, 누군가 나타난다면 히오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말하라 불러줬기에 클레어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쥐, 쥐줜 춴마?"
클레어의 말과 동시에 낼름거리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하지만 시르베르트의 의심이 걷힌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존 천마의 이름이 적힌 편지였으니 저 수상쩍은 소녀가 그 이름을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시르베르트를 향해 클레어가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거··· 오시면 보여 드리라고······."
손에는 편지처럼 보이는 종이가 고이 접혀져 있었고 여전히 클레어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기사 중 한 명이 종이를 받아서 시르베르트에게 전달해주었다.
그 편지를 조심스레 펼쳐본 시르베르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 곧휴가 갑니다. 나 지존 천마다. 아카데미 교수로 들어갔다며?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대충 날려쓴 듯한 그 편지에는 다른 이들은 절대 모를, 아니 알아서도 안 될 둘만의 비밀이 적혀있었으니.
- 거듭 말하지만, 나는 네가 npc에 호감을 느낀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거나 그런 적 없다. 당시에는 뭐, 그래픽 쪼가리에 불과했어도······.
이걸······ 자신의 이 흑역사를 한국어도 아니고 대륙 공용어로 대놓고 적어놓다니!
이 세계에 빙의 되고 대륙 공용어가 모국어처럼 자연스레 느껴진다 해도 지존 천마가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적지는 않았을 테니 이는 경고인 것이다.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전하는 경고.
언제든지 네 흑역사를 밝힐 수 있다 말하고 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시르베르트의 머리가 흐트러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클레어라는 저 소녀가 만난 것은 정말 지존 천마가 맞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실은 벤타이얼 온라인 시절, 시르베르트 본인이 술 쳐먹고 지존 천마에게 하소연했던 내용이었으니까.
물론 벤타이얼의 npc는 모니터 너머의 그래픽일 뿐이었지만, 그 행동과 반응은 입력된 프로그램이 아닌 정말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기에 시르베르트는 npc에 빠져 들어갔고 결국 '레베카'라는 이름의 npc에게 사람과 같은 정도의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자괴감도 들고 한심한 마음이 계속해서 들었기에 거나하게 술 한잔하고 접속한 벤타이얼.
당시는 게임 중후반부였기에 혼자 플레이하는 지존 천마와도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술기운 탓일까.
아니면 같은 한국인이라서? 아니면 과묵하고 신중한 듯한 지존 천마의 성격 탓에?
어쩌면 압도적 랭킹 1위에게 위안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혼자 끙끙 앓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아 버렸고 그 바람대로 지존 천마에게 무어라 조언을 들을 수는 있었다.
술을 하도 마셨기에 뭐라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말이다.
- 레베카는 만나봤냐? 너라면 고백도 못하고 끙끙거렸을 것 같은데······. 뭐, 아무튼 걱정 마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클레어한테도 편지는 열어보지 말랬으니 안 봤을 거다. 음······ 아마도?
"······후우······."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고 편지를 고이 접어 품 안에 집어넣는다.
- 다른 건 아니고. 클레어 좀 데려가서 키워봐. 재능이 뛰어난 애니까.
여러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으로 클레어를 쳐다본다.
영문모를 그 눈빛에 가만히 굳은 채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는 클레어.
'저 애가······ 이 정도 일을 벌일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무려 2년 동안이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놈이 이런 소동을 벌일 만큼이나?
아니 그건 그거고.
"얘야. 거짓말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렴. 너 이 편지 읽어봤니?"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다.
물론 편지를 봤더라도 npc니 그래픽 쪼가리니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지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 사람이 읽지 말라 해서······ 안 읽었어요."
"후우··· 그래."
시르베르트가 기사에게 눈짓한다.
"검을 거둬주게. 신원은 내가 보증하지."
"예."
목끝까지 닿아 있던 검이 거둬지자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 클레어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 옆에 중년 여인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처럼 보였다.
"그래. 이름이 클레어라고. 그럼 옆은 누구니?"
"여기는 제 어머니인 셀리라고 해요."
"······내가 못할 짓을 했구나."
어쨌든 그 지존 천마가 직접 자신을 지명해 부탁한 일이다.
클레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지만, 그가 하려는 일에는 뜻이 있을 터.
옷매무새를 정리한 시르베르트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셀리에게 건넸다.
단단한 청록색의 테두리와 어우러지듯 새겨진 황금색 이름.
「이메니아 공립 아카데미 정교수 :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간신히 받아낸 셀리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평범한 아낙네로서는 짧지만,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던 탓이다.
갑작스레 하늘에서 쏟아진 빛의 무리와 함께 나타난 생전 처음 보는 흉흉한 기세의 기사단과 귀족.
그리고 목 바로 앞에 검이 겨누어지는 경험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시르베르트의 살기.
"이런··· 베른 경, 부인을 부축해주겠나."
기사의 부축을 받은 셀리가 간신히 일어서고 시르베르트의 시선은 다시 클레어를 향한다.
제 어미와는 다르게 조금의 두려움과 대부분의 호기심으로 뒤덮인 눈빛.
"저는 이제 아카데미로 가는 건가요?"
심지어 시르베르트에게 묻는 그 목소리에는 기대감마저 서려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이 잘릴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그 전에, 너를 이곳으로 보낸 그 녀석에 대해 아는 걸 모두 말하거라. 녀석은 지금 어디 있고, 어떻게 만났으며 무얼 하고 있는지."
다만, 시르베르트의 그 말에 곧바로 입을 꾹 다물어 버린 것을 보면 눈치가 없다기보다는 강단이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말하지 않으면. 어찌 될지 모르는데도?"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시르베르트의 살기.
그럼에도 클레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절대··· 절대 말 못해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그에 시르베르트는 살기를 거두고 피식 웃고야 만다.
"제법 강단은 있구나.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할 거야. 내가 오늘 손해 본 게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이대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달랑 클레어만 데려간다면 손해가 막심한 것이다.
이틀 만에 제대로 된 절차도 밟지 않고 막무가내로 빌려온 기사단과 황실소속 고급 인력 이오스.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오늘 일이 달라지겠지."
그럼에도 한 줄기 기대를 걸어보는 건, 이 소녀의 뒤에 있는 지존 천마라는 거대한 존재 때문.
어느 정도의 재능이길래 그가 그 이름을 스스로 드러낼 정도인 것인지.
"······네!"
그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인지 클레어가 굳게 다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녀석에 대한 것은 기억에서 지워라. 억지로 떠올리려 하지도 말고."
지존 천마의 이름은 빙의자들 사이에서 절대적이다.
비록 지금은 빙의자들이 대륙 최강자 반열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것 역시 머지않았으니.
이 세계의 주민들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강해지는 빙의자들은 이미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온갖 곳에 침투해 있었기에 조심해야만 한다.
클레어가 지존 천마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그것을 이용하려는 빙의자들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게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제아무리 시르베르트의 그늘 아래 숨어 있는다 해도 그 역시 한계가 있다.
상위 랭커들은 한명 한명이 그와 비슷한 강자이거나 커다란 단체에 속해있는 거물이었으니까.
"······네."
대충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 시르베르트가 몸을 낮추고 클레어와 눈높이를 같이하며 묻는다.
"다른 건 됐고 이거 하나만 답해주겠니?"
이것 만큼은 다른 계산 없이 정말이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녀석은······ 어땠느냐."
과연 그는 어디까지 올라간 것일까.
다소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 속뜻을 파악한 클레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강했어요."
눈을 감으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몰려오던 먹구름.
낮게 울던 천둥.
하늘을 가득 메운 뇌전과 그것에 둘러싸인 히오의 모습은 마치 벼락의 신.
"······저 하늘 위의 신처럼요."
그에 시르베르트가 피식 실소를 흘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이라니.
그는 그것이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11화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
"지금쯤 잘 갔겠지?"
슬슬 곧휴가 갑니다와 클레어가 만날 시간이 됐기에 잠시 떠올려본 히오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편지를 한국어로 적을 걸 그랬나?"
별 생각 없이 대륙어로 쓱쓱 써내려갔는데 지나고 보니 그 녀석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울 만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클레어가 그걸 열어보지는 않을 거라 확신하긴 했지만···.
"······알아서 하겠지. 내 앞가림이나 신경 쓰자."
산길을 터벅터벅 올라간다.
당연한 말이지만, 게임으로 플레이하는 것과 그것이 현실이 되어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이다.
즉,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의 대략적인 위치는 짐작해도 정확한 위치를 찾는 건 제법 힘든 일이라는 말이었다.
벌써 이틀째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이렇다 할 던전을 찾지 못한 것이다.
'···벌써 누가 털어간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자신이 게임 속에서 우연히 찾은 만큼, 다른 녀석들도 우연히 찾을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찾는 걸 포기할 수는 없다.
무려 스킬북 두 개를 얻을 수 있는 던전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그것도 힘도 거의 안 들이고 얻을 수 있었지.'
고작해야 코볼트 몇 마리가 나오는 게 전부인 허접한 던전에 스킬북이 두 개.
그러니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이다.
가뜩이나 '폭력은 안 돼!' 패널티로 뇌제를 제외한 모든 스킬이 사라진 상태가 아닌가.
뇌제는 최상위 등급의 스킬인 만큼,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
마력 소모가 적은 다른 스킬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인내력을 채웠을 때 내 스킬로 만들 수 있지.'
스킬이 없다면 인내력을 채우는 의미가 없지 않나.
그렇다고 명성 포인트로 스킬을 사기에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당장은 포인트를 버는 족족 스탯을 구매해야 하니 스킬북을 살 포인트를 모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짜 반드시 찾아야 하는 던전이네."
고로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은 반드시 찾아야 하는 던전.
그렇게 히오가 혼자 중얼거리며 산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으아아악!"
웬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 극악무도한 놈들! 내 오늘 너희와의 질긴 인연을 반드시 마무리 지을 것이다!"
히오의 시선이 그곳을 향한다.
듬성한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사람의 형체.
호기심이 인 히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여기에··· 사람?'
히오가 있는 곳은 사람의 왕래가 없다시피 한 산이다.
인근의 마을이래봐야 히오가 있었던 델피르 마을뿐이고 굳이 산을 넘어갈 이유도 없는 그런 곳.
그렇기에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설마 저기 저 목소리의 주인이 무언가 발견이라도 한 것인가.
"스승의 원수!"
히오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곧 목소리의 주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호호백발의 노인.
몸에 걸친 낡은 로브.
번쩍 들어 올린 팔은 앙상하기 그지없다.
다만, 히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진 것은.
"오늘 여기서 모든 악의 고리를 끊어낼 것인즉!"
그가 가진 특성이 '마력 감응의 천재'인 탓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미친 노인네로 비춰지겠지만, 히오의 눈에는 똑똑히 보인다.
"후오오오!"
취한 듯 양팔을 휘적거리는 노인의 주위에 모여드는 마력의 흐름.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보는 마력의 정돈된 움직임. 패턴화된 마력.
"피어나라 불이여. 저 악독한 것들에게 끝나지 않을 고통을!"
절도있게 움직이는 마력과 그것을 지휘하는 노인의 모습은 히오에게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그려지는 세 개의 기하학적인 문양.
히오는 단순 감응력만으로 그 문양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이 세계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
'마법진···?'
동시에 노인의 움직임이 뚝 멈추고 완성된 세 개의 마법진에서 마력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크오오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건가.
처음 보는 마법진과 마력을 다루는 노인의 모습은 히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고 긴장으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가운데 완성된 마법진에서 기어이 마법이 뿜어져 나왔다.
"모든 것을 불태우리라! 파이어!"
아주 조그마한 불덩이 세 개가 꼬물꼬물 귀엽게 등장했다.
'음?'
굳이 비유하자면 클레어의 주먹만 한 크기···?
아니, 그것보다도 좀 더 작은 것 같다.
한 5년 전 클레어의 주먹이라면 저 정도 크기였을 것 같기도 하고.
"쿠어어어! 가라!"
다만 노인의 힘찬 기합과 표정만큼은 진심이었고 히오도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 크르르···.
어린아이 만한 키에 개의 머리를 한 몬스터, 코볼트.
어비스 몬스터도 아니고 기본 몬스터 중에서도 상당히 약한 하급 몬스터.
'고작··· 코볼트?'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하던 상대는 고작해야 코볼트였다.
물론, 평범한 사람에게 코볼트는 마주친다면 반드시 도망쳐야 하는 몬스터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봐도 노인이 평범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런 허탈감이 드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노인이 만든 세 덩이의 귀염뽀짝한 화염이 코볼트를 향해 날아갔고 코볼트는 크릉- 울음을 토해내며 불길을 피해낸다.
"과연! 만만한 놈은 아니라는 것이구나!"
버럭 소리를 내지른 노인이 다시 한번 팔을 휘적인다.
그 움직임에 맞춰 마력이 문양을 이루고 문양이 진을 형성한다.
다시 봐도 황홀감이 드는 신비한 현상.
하지만 이번에는 코볼트도 마냥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 크르르르!
개를 닮은 울음과 함께 노인에게 달려가는 코볼트.
그 손에 들린 무기는 낡은 나무 몽둥이였지만, 비쩍 마른 노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 정도는 쉬울 것이었다.
"이런 비겁한 놈!"
달려드는 코볼트를 향해 노인이 양손을 내뻗는다.
하지만 저 마법진은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급하게 내지르느라 이전보다 완전하지 않은 마법진.
그곳에서 급하게 마법이 펼쳐진다.
"파이어!"
비록 미완성의 마법진이라도 마법은 발동되는 것인지 이전보다 조금 더 작은 화염이 생겨나 코볼트를 향해 쏘아졌다.
운이 좋았음인가.
무작정 달려오느라 화염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코볼트가 노인의 마법에 직격당하고 몸에 불이 화륵 옮겨 붙는다.
"으하하하! 어떠냐! 이것이 우리 파블렌코 가의 마법!"
낑낑대는 코볼트를 보고 호탕하게 웃어 재끼는 노인.
그리고···.
"꾸억!"
곧장 코볼트의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지는 노인.
그 조막만 한 화염은 코볼트를 죽일 만큼 뜨겁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쿨럭! 비겁한······."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노인의 입가에는 한 줄기 선혈이 흐른다.
"워, 원통하도다···. 스승의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거늘······."
코볼트의 주먹에 한 대 맞은 것뿐인데 그 자리에 뻗어 일어날 생각을 못하는 노인.
'정신이 좀··· 이상한가?'
아무리 하급 몬스터라도 일단은 몬스터다.
사람도 타죽지 않을 그런 불길에 죽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런데 노인은 녀석이 당연히 죽을 것이라 생각한 건지 바로 앞에 코볼트가 있는데도 대놓고 웃어 재끼다가 얻어맞고 쓰러져버렸다.
'이게 뭔······.'
뭔 상황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눈앞에 사람이 몬스터에게 죽는 꼴은 볼 수 없지 않은가.
코볼트가 바닥을 뒹굴며 불을 끄고 재차 노인에게 갈 것처럼 보였기에 히오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누워서 원통하다를 반복하는 노인과 그를 향해 다가가는 히오.
- 크르르르···.
코볼트가 그런 히오를 발견하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일단 나서기는 했는데··· 어떡하지?'
코볼트 한 마리 정도야 처리하는 것은 쉽다.
다른 사람 앞에서 '뇌제'를 사용하는 건 좀 꺼림칙하지만, 다 죽어가는 노인 한 명이 목격자라면 그 역시 크게 상관은 없으리라.
뇌제는 이미 패널티에서 벗어났기에 폭력을 사용해도 사라질 스킬 또한 없다.
다만···.
'코볼트는 영역 몬스터.'
눈앞에는 한 마리뿐이지만, 소란이 인다면 떼로 몰려올 것이다.
그리고 히오의 마력은 이제 겨우 11.
싸움이 조금만 길어져도, 1분 근처로만 가도 마력탈진과 함께 전투는 끝이 나리라.
···역시 그냥 도망이 답이다.
- 크르르르···.
다행히도 코볼트는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거리를 유지한 채 낮게 울음을 흘릴 뿐이다.
코볼트가 영역활동을 한다는 말은 영역만 벗어나면 괜찮다는 말.
게다가 상처 입은 몸.
히오가 코볼트를 바라보며 천천히 노인을 등에 업는다.
얼마나 비쩍 말랐는지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끄흑···. 원통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같은 말만 하는 노인을 등에 업은 채 히오가 중얼거렸다.
"영감님 집이 어디에요."
"스, 스승의 원수가 눈앞에······."
"집이 어디냐고요."
"저쪽으로 쭉 가다가······."
대충 방향을 들은 히오가 속으로 숫자를 세고.
"······지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노인이 말한 방향으로 달려나간다.
고작 코볼트 한 마리와 생사결을 펼치는 노인을 황당하게 쳐다봤지만, 정작 히오 본인은 싸울 수도 없는 처지였었으니.
"x같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8 / 1000)]
현장에는 히오가 남긴 욕설과 어리둥절해하는 코볼트 한 마리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 * *
"······진짜 설마 설마 했는데."
눈치가 웬만큼 없지 않은 이상에야 연관성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히오가 찾고 있는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은 분명 이 근처 어딘가.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웬 노인은 난생처음 보는 방식으로 스킬을 발현하는 이.
아무리 다른 단어를 생각해봐도 그저 마법사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노인.
그리고 그런 노인의 설명을 듣고 도착한 곳은.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
히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던전이었다.
쉽게 찾지 못하도록 입구가 절묘하게 가려진 동굴.
게임 속에서는 코볼트무리가 점령해 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나름 깨끗한, 사람 사는 곳처럼 되어 있는 것이었다.
들어오는 순간 마법처럼 실내가 아늑해지는 그런 공간.
노인을 침대에 눕혀놓고는 방을 둘러봤다.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은 꽤 넓은 던전이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분명 집 안처럼 보이지만, 이는 마법적 작용에 의한 것이고 실제로는 넓고 깊은 동굴.
'지하 3층까지 있었지.'
히오가 얻고자 하는 스킬북은 지하로 갈 것도 없이 지금 있는 1층에 대놓고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스킬북으로 보이는 게 없다.
그리고 활짝 열려있어야 할 지하로 가는 계단이 막혀있었다.
아무래도 설정대로라면 죽었어야 할 마법사를 본인이 살려버린 것 때문인가.
'스킬북을 얻으려면······ 좀 기다려야겠네.'
우선은 이 마법사 노인이 정신 차리고 난 뒤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일단 이 할아버지 좀 어떻게 하고."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건지. 집에 먹을 것도 딱히 없어 보인다.
이러니 코볼트 주먹 한 방에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주변에 몬스터는 없을 테고··· 먹을 거나 좀 찾아보자."
이렇게나 허약한 노인이 살고 있을 정도니 몬스터는 없을 테다.
일단 노인이 정신 차리면 이것저것 좀 먹이고 적당히 호감을 얻은 다음 스킬북 위치나 알아내야겠다 생각하며 히오가 마법사의 무덤을 나섰다.
그가 필요한 것은 오직 스킬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12화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2)
꼬박 하루가 지나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노인은 히오를 발견하고서 눈을 부릅떴다.
"넌 뭐야!"
아무래도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 나타난 히오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기에 히오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노인은 곧 겸연쩍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뉘신 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우이. 보다시피 별 볼 일 없는 늙은이라 딱히 보답해줄 건 없구려."
"예 뭐. 괜찮습니다."
보답은 어차피 스킬북으로 하게 되어 있으니.
히오는 우선 미리 만들어 두었던 야채스프를 노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노인은 무슨 신기한 물건 보듯이 스프를 노려보더니 다른 말 없이 한 입 떠먹는다.
"······음."
나름 입맛에 맞는 것인지 계속해서 숟가락을 움직이는 노인.
그런 노인을 잠시 바라보고는 히오 역시 그 옆에 앉아 조용히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 없이 달그락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오는 실내.
이윽고 그릇을 싹싹 비운 노인이 그것을 내려놓고는 히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베르가 파블렌코. 보다시피 곧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늙은이라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노인의 말에는 제법 힘이 실려 있다.
아직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에 히오 역시 텅 빈 그릇을 내려놓으며 입을 연다.
"히오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이 그저 떠돌아다니는 여행자이고요."
두 사람의 첫인사는 다소 담백한 맛이었다.
* * *
다시 세 번의 밤낮이 바뀌었다.
히오는 여전히 마법사의 집 안이었으며 자신을 베르가라 소개한 마법사 노인과 함께였다.
텅 빈 던전에 스킬북 두 개만 얻고 나가려던 기존의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버렸기에 일단은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첫날에는 이제 그만 가도 된다 말하던 베르가였지만, 히오가 더 머물고 싶다 말하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도 나름대로 사람이 그리웠던 것인지.
아니면 부모도 친구도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히오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꼈던 것인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삼 일이라는 시간을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이라는 던전이 아닌, 그냥 평범한 마법사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는 것이다.
베르가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늙은 몸은 회복이 더뎠다.
그래도 겉으로 드러난 부상의 정도가 크지 않았기에 삼 일 만에 기운을 차리고 침대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집은 지하 삼 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
베르가가 기운을 회복한 그날, 엄청난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히오에게 말하는 베르가.
당연히 히오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적당히 맞장구 쳐주었다.
"우와."
지하로 가는 길은 분명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길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뭐? 거짓말하지 말라고? 으허허허! 이거 엄청난 걸 네게 보여줘야겠구나."
본래의 기운을 차린 베르가는 히오가 처음 본 모습 그대로의 노인이었다.
쓸데없이 말 많고 쓸데없이 잘 웃는.
그리고 쓸데없는 마법을 무척이나 자랑스레 여기는.
그리고 그런 베르가의 성격은 히오에게 있어서 호재였다.
"자, 여기가 바로 지하로 향하는 길이다."
베르가가 히오를 데려간 곳은 아무것도 없는 빈 벽 앞.
물론 이 벽 너머에 지하로 향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히오는 알고 있다.
게임속 경험과 더불어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으로 인해 미세한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냥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아무래도 이런 걸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것도 없는데요?"
"으허허허! 당연히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허나!"
벽에 손을 가져다 대는 베르가.
"자! 이젠 어떠냐!"
그와 동시에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무슨 지문인식 장치도 아니고···.'
이러니 찾을 수가 없었지.
생각과는 다르게 히오는 손뼉을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와."
"으하하하하! 신기하지? 사실 나는 말이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마법사, 전설적인 파블렌코 가문의 마지막 후예란다!"
그렇게 스스로를 소개하는 베르가에게는 부담스러울 만큼이나 자부심이 철철 흘러넘쳤다.
"아, 예. 그렇군요."
"응? 놀라지 않는 게냐?"
물론 히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고작 사흘 만에 베르가의 신뢰를 얻은 것인지.
이제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고 아마 그곳에 있을 스킬북을 가지고 나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려간 지하.
"네게 이곳을 보여주기는 하겠지만, 연구 중인 자료가 많이 있으니 함부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
지하 2층을 지나 마지막 3층까지 내려와서야 히오는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이게 전부예요?"
"그래. 생각보다 복잡하지?"
지하 2층과 3층의 공간에는 스킬북 비스무리한 것조차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종이 쪼가리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그리고 그제서야 베르가가 왜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지하를 보여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신뢰를 얻은 게 아니라··· 그냥 지하에 아무것도 없어서잖아.'
그냥 지하를 보여줘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이지 않나.
귀중품이고 나발이고 알아먹지 못할 종이들만 널브러져 있는데 숨길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이거 아무래도······.'
베르가가 스킬북을 얻기 이전의 시간대에 와버린 것 같다.
"그나저나 내가 마법사라는 말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더구나."
베르가가 물었으나 머리가 복잡한 히오는 그냥 대충 대답했다.
"그거야 처음 만났을 때 봤으니까요."
게임이던 시절 이곳을 방문한 것은 확실히 지금보다는 이후의 시간대이다.
그렇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 여겼건만.
당연히 진작 죽었을 줄 알았던 마법사가 살아있고 정작 스킬북은 있지도 않았으니···.
'단순 시간문제인가··· 아니면 빙의자들이 대거 넘어오면서 나비효과가 발생한 건가.'
그걸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게 무슨 말이냐?"
히오의 머릿속이 그렇게 복잡한 것도 모른 채 베르가는 태연하게 그리 물었고.
"그때 막 신기한 마법진 만들면서 마법 쐈잖아요."
그 대답에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걸······ 봤다고?"
"예······?"
"다시 말해봐라. 그걸 진짜 봤다고?"
예상외의 격한 반응이 짐짓 당황스러웠다.
본디 스킬 사용자끼리는 서로의 스킬을 봐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예 보긴 봤는데··· 보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뭘 봤다고?"
"그 신기한 마법진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마법이······."
대충 대답했던 말을 되짚어 보다 문득 알아차린다.
그걸 본 것 자체가 문제 되는 게 아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저 스킬을 쓰는구나··· 하고 넘어갈 테니까.
다만 자신은 구체적으로 마법진을 언급했고.
"그거야! 그거!"
그에 베르가가 부담스럽게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있는 것이었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답지 않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이다.
"마법진은 마력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절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데 그게 정말로 보였다는 말이렸다!"
"······예? 무슨 말씀인지 저는 잘······."
불길한 직감이 든 히오가 뒤늦게 변명해보려 했지만.
"으허허허! 스스로의 재능을 감추려 해봐야 늦었다!"
이미 베르가의 눈은 돌아버린 후였으니.
"내 제자야!"
제자로 찍혀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마법사에게.
* * *
마법이란 것을 연구하던 플레이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제법 많은 편이었다.
마법이란 본디 rpg의 꽃이 아니던가.
게다가 포인트 상점에는 대놓고 마법서라는 것이 존재했다.
제법 비싼 가격이기는 했지만, 스킬북 보다는 훨씬 싼 가격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게임의 초중반에는 마법에 어떤 히든 피스가 있을 거라 여기며 그것만 파고들던 플레이어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척이나 참혹한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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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이라는 시간 넘게 포기하지 않은 유저들도 있었으나 그들이 내린 결과는 결국 똑같았다.
- 마법 없는 ㅈ망겜!
- 마법은 죽었다.
- 개쓰레기 개똥망 직업.
- 마법사라고 말하면 거지 npc도 측은하게 쳐다봄.
배우는 시간, 발동 시간, 들이는 마력량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한 위력.
그야말로 개똥 쓰레기인 것이다.
분명 그런데······.
"마법은 위대하다! 마법은 전지전능하다! 내게 마법을 배워라! 넌 행복해지고!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대마법사의 제자로서······."
눈앞에서 마법 만세!를 외치며 가스라이팅하는 이 늙은이는 뭐란 말인가.
그런 것보다 다른 대화를 통해서 스킬북을 입수한 경로를 유추해야 했기에 히오가 애써 말머리를 돌려보지만.
"그건 됐고요 영감님. 혹시 이전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었다거나······."
"어허! 영감이라니! 스승님이라 부르거라!"
"······후."
"응? 뭐라고?"
"아닙니다."
이 마법에 미친 늙은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일이 상당히 귀찮게 꼬여간다.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두 개의 스킬북을 얻고 하나는 자금 마련용.
하나는 진화용으로 익힌 다음, 인내력 1000을 채워서 그걸 진화하는 것이 가까운 목표였는데.
'스킬북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죽었을 줄 알았던 마법사는 눈앞에서 제자가 되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일이 꼬일 수가 있을까.
'마법. 마법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아니다.
이건 이미 게임에서 검증된 쓰레기가 아닌가.
"제자는 좀 아닌 것······."
"너도 위대한 마법의 편린을 보지 않았느냐!"
"뭐, 신기하긴 했지만, 그게 끝······."
"마법은 위대하다! 한번 배워보면 너도 알게 될 거다!"
"저희 그것 말고 좀 더 건실한 대화를······."
"제자! 마법! 제자! 마법!"
"······x발."
틀렸다.
이 노인네가 노망이 난 게 틀림없다.
'······그냥 스킬북을 포기해?'
이 던전 안에 스킬북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베르가가 어떤 경로를 통해 두 개의 스킬북을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일만 명의 빙의자가 2년 전에 투입됐으니 수많은 변수가 충분히 발생했을 터.
그 스킬북은 어쩌면 영영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좀 많이 아까운데.'
그렇다고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아깝다.
스킬북의 값어치를 생각한다면······ 베르가가 바라는 대로 제자가 되어 호감도를 쌓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스킬북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본래의 출처라든가 흘러간 방향이라도 파악할 수 있을 테니.
'······그래.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가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런 생각이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마법사의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은.
"그럼 가르쳐주세요."
그렇게나 가벼운 생각이었다.
"마법이 얼마나 대단······ 응? 정말이냐?"
"뭐, 신기하긴 했으니까요."
베르가의 손짓과 하나 되어 움직이던 마력.
빛나던 마력의 문양과 절제된 진의 아름다움.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신비로움이기는 했으니까.
"마법사는······ 무시받는다."
정작 제자가 되겠다고 하자, 베르가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고대에 융성했던 학문. 하지만 쇠퇴를 거듭해 이제는 기억하는 이가 없어진 직업. 과거에는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현재는 만인의 비웃음을 받는 것이 마법사다."
"······아깐 뭐 위대하고 대단하다면서요."
"물론! 그건 그치들이 마법의 깊이와 위대함을 모르기에 벌어지는 일이지. 마법은 위대해!"
"그럼 됐죠. 가르쳐주세요. 배워볼게요."
왠지 조금 우울해 보이는 베르가를 향해 손을 내민 것은, 일종의 습관 같은 거였다.
계약이 체결되고는 할 때 으레 건네는 악수 있지 않은가.
별 의미 없이 그저 맞잡는 손.
다만 그렇게 내민 손을 맞잡은 베르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환해졌으니.
"잘 부탁한다! 제자야!"
누군가 쿡쿡 찌르기라도 하는 듯,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13화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3)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역시 마력을 느끼고 그것을 제 수족처럼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히오에게 너무도 쉬운 것이었다.
마력과 관련해서 최고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탓이었다.
"잘 봐두거라. 제자가 된 기념으로 특별히 보여주는 것이니."
그렇기에 마법을 보여주려는 베르가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시작은 마력을 느끼고 그것을 다루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 역시 마력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그것을 다루는 데는 2년하고도 조금 더 걸렸지. 그럼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칭찬을 받았다."
베르가의 주위로 꿈틀대는 마력이 느껴진다.
단순 스킬 사용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정밀한 움직임.
"너는 나보다도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듯하지만, 마력을 직접 움직이는 것은 그것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 적어도 일 년은 수련해야 이런 움직임을 낼 수 있을 게야."
마력이 느긋하게 움직여 각각 문양을 만들어 간다.
히오가 충분히 보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다음은 문양이다. 마력으로 만든 문양에는 특별한 힘이 깃드니 이것을 조합하여 하나의 진에 가두어 두는 것. 그게 두 번째 단계이다."
각기 다른 수십 개의 문양이 하나의 진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하나를 만들면 하나가 풀리고. 하나에 집중하면 나머지를 이룰 수 없을 테니 모든 문양을 한 번에 만들고 유지해야 하며 동시에 진을 발동해야만 한다. 나는 첫 마법을 성공하는 데에만 5년의 시간이 들었지."
마법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십 개의 문양을 모두 파악하고.
마력을 움직여 문양을 하나하나 완성해가면서 그것을 유지해야 하며.
그렇게 완성한 문양을 한데 모아 발동까지 해야 한다.
첫 마법에 성공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음에도 베르가가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유였다.
5년도 무척이나 짧은 것이었으니.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마법을 쉬이 완성한다고 해서 그게 쉬울 거라는 생각은 버리고 정진하거라!"
마법의 완성이 코앞이었기에 베르가 역시 집중력을 끌어 올린다.
마지막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해주는 것은 입으로 내뱉는 주문.
"모든 것을 불태우리라! 파이어!"
모든 문양이 마력으로 완성되고 하나의 원에 갇힌 채 힘을 발휘하며 기적처럼 불덩이가 만들어진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틱 만들어지는 스킬 따위가 아닌, 수십 년의 노력이 들어간 결정체.
언제봐도 아름다운 광경이었기에 베르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으허허허! 어땠느냐. 마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 좀 감을······."
그리고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응?"
본인의 마법 완성에 집중하느라 차마 느끼지 못했었는데 주변에 다른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멀뚱멀뚱 서 있는 자신의 제자 근처에서.
그렇게 얼빵하게 서 있던 제자가 장난처럼 한 마디를 툭 내뱉는다.
"음······ 파이어?"
확신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멍청한 목소리와 그에 걸맞은 얼빵한 표정으로 내뱉는 주문에 베르가는 웃음을 터트리려고 했으나.
화륵-
생겨나는 불덩이 하나에 그 표정 그대로 굳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자의 근처에서 느껴지던 기이한 마법의 흐름.
자신이 만든 마법과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은 불덩이.
이 정신 나간 놈은 단 하루 만에 마법의 발현에 성공한 것이다.
자신은 무려 7년이나 걸린 것을.
게다가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엥?"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저 얄미운 표정.
죽을 때가 된 것도 아닌데 베르가의 머릿속에는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마력을 다루기 위해 2년간 아등바등 기를 쓰고 노력하던 자신.
문양을 만들어내기 위해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집중하던 자신.
그 과정 속에서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좌절감.
그런 기분을 제자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건만······.
"이런 천하의 나쁜 새끼···."
눈가가 촉촉해지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베르가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자타임에 빠져있는 사이, 히오 역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마법을 곧장 성공한 것 때문은 아니다.
마력을 다룰 수 있고 마력의 문양이 눈으로 보이는데 그걸 해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런 히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으니.
「화(火)속성 마법 - '파이어'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눈앞에 메세지가 떠오른 탓이었다.
「화(火)속성 마법 - '파이어'를 스킬에 등록하시겠습니까?」
"이게······ 스킬로 등록이 가능하다고?"
스킬북이 왜 그토록 높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겠는가.
스킬이란 것은 오로지 스킬북으로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마법을 똑같이 펼친 것만으로도 스킬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인 즉.
"특성의 효과도 받을 수 있겠는데?"
부 특성,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보조 특성, '모든 게 두 배!'의 효과를 모두 받을 수 있다는 말.
거기다 인내력을 모두 채우면 히든 특성으로 진화까지 가능할 테니······.
"대박이다."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火)속성 마법 - '파이어'가 스킬에 등록됩니다.」
「스킬 : 파이어」
「작은 불을 피워올립니다.」
「온전치 않은 마법식입니다. 위력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진지하게 마법을 배워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 * *
마법사의 제자가 된 것도 벌써 한 달.
그사이의 일과는 무척이나 단순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라고 해 봐야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풀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가끔씩은 베르가가 고기를 구해올 때도 있었다.
그렇게 밥을 때우고 난 뒤로는 단순하다.
공부.
또 공부.
공부 공부 공부 공부.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학습량이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진작 때려치는 건데."
처음에는 얼마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베르가의 마법을 보고 곧바로 익혀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베르가는 단호했다.
"너는! 무조건! 반드시! 기초부터 탄탄히 다져야 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다른 마법은 일절 배우지 못할 줄 알아라!"
재능이 너무도 뛰어나기에 오히려 기초를 완벽하게 다지고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저 마법만 쏙 빼 먹고 가려했던 히오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소리가 아닐 수가 없었으나.
"솔직히 말해봐요 영감님. 제가 너무 잘하니까 질투 나는 거죠?"
"떽!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죽고 나면 너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마법사이니 네게는 모든 지식을 배워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야!"
베르가가 원체 단호한 탓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대 마법서를 해석하기 위해 고대의 언어를 익히고 마력 문양 하나하나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익히는 수밖에.
"에휴··· 외울 건 진짜 더럽게 많네."
그나마 문양 같은 건 공부할 맛이 난다.
마법의 시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므로 이리저리 외우고 한번씩 문양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는 등, 나름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어는 진짜로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이걸 안 할 수도 없고."
마법은 이미 사장된 지 너무도 오래된 학문.
때문에 대부분의 책이 고대어로 이루어져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본 명예의 상점에서도 고대의 마법서라며 표지에 휘갈겨진 언어는 고대어였다.
분명 게임이던 시절에는 술술 읽혔었는데 말이지.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게 얼마나 힘든데······."
우선 이것부터 외우라며 베르가가 만들어준 종이 뭉치를 보며 히오가 한숨을 푹 내쉰다.
따지고 보자면 단어장 같은 것이다.
아니 그전에 알파벳부터 다시 익히는 느낌이랄까.
"에휴 내 팔자야."
한숨을 푹푹 내쉬는 히오와 그런 히오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베르가.
그리고 그쯤 되어서 베르가는 히오를 놔두고 지하로 내려간다.
"공부하고 있거라. 난 내려가 보마."
"······그거 굳이 계속 연구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베르가가 지하에서 연구하고 있던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스킬북의 제작에 관한 연구였다.
"너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거라."
그것을 알고 나니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마법사의 무덤에 아직 살아 있는 마법사.
실종된 두 권의 스킬북.
베르가는 기어이 연구를 완성하고 본인의 마법을 담은 두 권의 스킬북을 제작한 후에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오에게는 이제 스킬북이 크게 의미가 없었다.
마법을 익히면 어차피 스킬로 등록되지 않나.
"애초에 스킬이라고 하면 치를 떠는 양반이 스킬북은 왜 만들겠대?"
"그러니 더더욱 증명해야지 않겠느냐. 세간에서는 스킬북을 신의 도서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그까짓 거 결국 마법의 부산물일 뿐임을 말이다."
"예 뭐, 파이팅 하십쇼 영감님."
"쯧쯔··· 하늘 같은 스승한테 말하는 버릇 하고는."
혀를 끌끌 차며 내려가는 베르가의 뒤에 대고 히오가 외쳤다.
"아, 저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 영감님!"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베르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히오가 몸을 일으켰다.
"요즘에는 한 번 내려가면 거의 안 올라오는 것 같으니까···."
연구가 막바지에 달했는지 지하로 내려가면 잘 올라오지 않는다.
이제 확인해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스킬이 된 마법은 얼마나 휘황찬란할런지."
* * *
산 속의 해는 빨리 저문다.
히오가 집을 빠져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우선은 스킬이 아닌, 진짜 마법부터."
기억을 토대로 마력을 움직인다.
처음에는 그저 뜻 모를 문양으로만 보여졌던 것이, 이제는 나름 공부 좀 했다고 몇 개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이해가 된다.
"······파이어."
모든 문양이 완성되고 어둑해진 주위가 살짝 밝아진다.
주먹 보다도 자그마한 불꽃.
들인 노력과 마력과 정신력에 비해 살상능력이라고는 기대하기 힘든 마법.
그렇기에 더욱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은 진짜 마법사에게 문양의 힘에 대해 배웠다.
이것에 들어간 문양대로라면 결코 이리 쥐똥만 한 불꽃이 나올 것이 아닌데 나온 결과물은 이러하다.
마법에······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듯한 느낌.
"······모르겠고 스킬이나 써보자."
이번에는 스스로 마력을 움직이지 않고 단순 의지만을 일으킨다.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는 스킬을 사용하겠다는 의지.
하늘을 향해 쭉 내뻗는 양손.
그리고 곧 눈앞에 나타나는 메세지.
「스킬 - '파이어'가 발동됩니다.」
순간, 눈이 멀어 버릴 듯한 환한 빛이 내뿜어졌기에 히오는 두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슬그머니 눈을 뜨자 보이는 거대한 화염.
자신의 손이 뻗어진 방향으로 두둥실 떠오른 푸른 불꽃.
붉다 못해 시리게 타오르는 그 화염구.
아래서 올려다보는 것으로는 그 크기를 눈에 온전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
어둑해진 밤하늘에 떠오른 그 푸른불은 마치 태양의 축소판처럼 오롯이 떠 있었으니.
"워······."
그 장엄한 광경에 히오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랄 났네 진짜로."
14화 재앙의 시작
아카데미의 본관에서도 학장실 바로 아래 위치한 시르베르트의 호화로운 방.
커다란 창문.
그 앞에서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썩 괜찮은 기분이 든다.
평온하게 펼쳐진 야경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그것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의 성공을 증명한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시르베르트는 해가 진 이후에는 이곳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즐겼다.
'······이제 시작이지만 말이야.'
2년 만에 높은 명성과 함께 제국을 대표하는 기관, 아카데미의 정교수로 자리 잡았다.
허나 이 모든 것은 이제 곧 벌어질 재앙에 대한 준비일 뿐이었으니.
이제 머지않은 것이었다.
지이잉-
시르베르트의 안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그의 상념을 깨고 울린다.
고대 마도 시대의 유물.
소유자들 간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비한 아티팩트.
그것을 꺼내 든 시르베르트의 눈앞에 익숙한 문자들이 나열된다.
- 1번 사용자 : 오늘 밤인가.
- 3번 사용자 : 시르베르트, 준비는 완벽하겠지?
시르베르트가 그에 대답했다.
- 4번 사용자 : 준비는 됐다. 이게 최선이야.
- 3번 사용자 : 이제 곧 어비스가 열리는데도··· 그 녀석은 끝까지 안 나타나는군.
- 1번 사용자 : 이로써 확실해졌다. 지존 천마는 힘을 잃었어.
이는 지존 천마를 제외한 4명의 랭커가 모였을 때부터 꾸준히 제기되던 의문이었다.
지존 천마는 대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빙의자의 강함은 곧 명성과 비례한다.
시르베르트를 포함한 네 명의 랭커 또한 이름만 대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하지만 제국 어디에도 지존 천마일 거라 짐작되는 유명인은 없었다.
- 3번 사용자 : 그냥 게임 폐인이었던 것일 뿐이지. 막상 현실로 닥쳐오면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었던 거야.
- 4번 사용자 : 혹시 모르지···.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 3번 사용자 : 흥. 사정은 무슨 사정. 10위권 랭커에게 차등으로 부여된 혜택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시르베르트 너도 알 거 아니야.
- 4번 사용자 : 그건 확실히······ 말도 안 되긴 해.
전설급 아티팩트 혹은 전설급 무구.
상위 스킬을 시작부터 받은 이도 있고 특성 변경을 할 수 있는 혜택도 존재했다.
그 정도 혜택에 어느 정도 사전 지식만 있으면 강해지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
2위에서 5위 사이인 그들이 그 정도일진대 1위였던 지존 천마는 어느 정도의 혜택을 받았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꾹 참고 기다렸던 그들이었건만, 지존 천마와 비슷한 그 어떤 이름도 들려오지 않았다.
- 1번 사용자 : 근 2년간 이름을 떨친 놈들은 대부분 빙의자라는 게 확인됐다. 하지만 우리 네 명을 뛰어넘을 정도로 두각을 보인 놈은 없었어.
- 3번 사용자 : 뻔하지 뭐. 특성 말아먹고 겁나서 숨어버린 거야. 그런 놈한테 1위의 혜택이 가다니···.
5위 이내의 랭커들은 게임 극후반부까지 활약했던 랭커들이고 그렇기에 지존 천마의 강함과 결단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기대했고 희망을 품었으나 돌아온 것은 무소식.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2년 동안 아무런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임이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에 겁을 먹은 지존 천마가 숨어버렸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컸다.
- 3번 사용자 : 뭐, 그 얘기는 됐고. 시르베르트, 최근에 기사단까지 동원해서 고작 애 한 명 데리고 왔다며?
- 1번 사용자 : 나도 들었다. 이오스까지 무리해서 불러들였다지. 왜 갑자기 그런 짓을 한 거냐. 손해가 막심했을 텐데.
한 달 전 있었던 시르베르트의 기행은 권력자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한 일이었다.
한창 정치적 상승세를 이룩하고 있던 시르베르트가 돌연 황실과 귀족가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급하게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온 일.
심지어 그렇게 소란을 벌여놓고 데려온 것이 고작 예쁘장한 소녀 한 명이었으니.
썩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는 것이었다.
- 4번 사용자 :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야. 여태 왜 아무도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클레어를 본 것은 고작 한 달이지만, 그 사이 그녀가 보여준 것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명석함과 재능, 결단력까지 갖춘데다가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존 천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그것 만으로도 클레어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말할 수 없지.'
만약 시르베르트가 클레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역시 나머지 랭커들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지존 천마가 힘을 잃었다고.
- 강했어요. 신이라도 된 것처럼요.
처음에는 견문이 부족한 시골 소녀이니만큼 지존 천마의 작은 스킬이 과장되게 보인 것이라 생각했다.
신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했다니. 그야말로 시골 소녀나 할 법한 감성적인 말이 아니던가.
하지만 클레어가 아카데미로 오고 한 달.
명석한 클레어라면 세상의 넓음을 인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카데미에 별처럼 많은 강자들.
명예로운 교수진과 신문에서나 볼 수 있을 유명인. 그리고 재능 넘치는 학생들.
견문이 넓어진 만큼 지존 천마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을 거라 은근슬쩍 다시 물어봤지만, 클레어는 확고했다.
- 여기 있는 분들도 분명 엄청나긴 하지만, 그 사람과 비교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니.
어느 정도 콩깍지가 씌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상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시르베르트는 조심스러웠다.
- 4번 사용자 : 일단 지존 천마는 내가 따로 더 찾아보는 걸로 하고. 앞으로 계획을 좀 더 이야기하지.
- 3번 사용자 : 흥! 더 찾아봐야 소용없다니까. 2년 사이에 우리보다 더 유명세를 얻은 사람은 없잖아?
- 4번 사용자 : 숨어버린 게 아니라 혹시 우리가 파악한 사람 중에 있는데 우리가 놓친 것일 수도······.
- 1번 사용자 : 1위 혜택을 가지고도 고작 그 정도라면 오히려 더 실망스럽지. 그 정도인 놈이었던 거야. 좋은 능력을 쥐여줘도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이들이 이토록 날 선 말을 뱉어대는 것도 이해는 한다.
기대가 컸던 만큼 왠지 모를 배신감은 더 크게 돌아왔으니.
그렇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클레어에 관한 것을 설명해야 하고 조심한다고 해도 그에 관한 정보가 새어나갈 수가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지존 천마 본인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시르베르트는 억지로 대화의 방향을 돌리려 했지만.
- 4번 사용자 : 일단 그건 넘어가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어비스가 나타납니다.」
모든 빙의자의 눈앞에 어비스 출현의 메세지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기한 내에 어비스 -1층을 공략하세요.」
「실패시 악에 물든 몬스터가 풀려납니다.」
그리고 곧 활발히 올라가던 랭커들의 대화 역시 뚝 끊겨버렸으니.
「풀려나는 장소는 연결된 두 세계 모두입니다.」
마지막 메세지의 의미를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어비스 공략에 실패하면 두 세계 모두 어비스 몬스터가 출현한다는 메세지.
연결된 두 세계 중 하나는 분명 이곳, 벤타이얼 세상.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들의 고향이자 이미 많은 것을 이룩해 놓은 곳.
지구임이 분명했으니까.
- 2번 사용자 : 킼키키키키킼! 이거······ 대박이잖아!
본격적인 재앙의 시작이었다.
* * *
「어비스가 나타납니다.」
그런 메세지로부터 3주가량이 지났다.
어비스.
벤타이얼 세계관이 망하게 된 결정적인 원흉.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컨텐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어비스라는 새로운 공간과 그곳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더욱 강력해진 몬스터들.
기한 내에 정해진 층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풀려나는 시스템.
한 층 한 층 공략하는 재미도 있었고 실패 시 강해진 몬스터가 바깥세상에 등장하는 것도 신선했다.
하지만 그것이 본격적인 재앙의 시작이었으니.
어비스 몬스터가 풀려나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강자들이 즐비했고 명성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된 플레이어들이 널려 있는 덕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풀려나며 나오는 알 수 없는 괴이한 저주.
끔찍한 어비스 기운.
그 정체불명의 기운은 일반 npc들의 정신을 좀먹어 들어갔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운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대지에도 스며들어 침식하는 것이었으니, 끝까지 그 해결책을 알아내지 못한 세계가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은··· 신경 쓰지 말자.'
어비스의 최초 등장 알림이 떠오르고부터 벌써 3주가량.
히오는 여전히 마법사의 집에서 생활하는 중이었다.
초반 어비스의 난이도는 쉬운 편이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기는 하지만, 당장은 여유가 있는 것이다.
「어비스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런 메세지가 떠올랐음에도 덤덤하게 있을 수 있었다.
이 정도는 나머지 랭커들이 해결해 줄 것이기에.
'그러니 그 틈에 최대한 빨리 강해져야 한다.'
마법이란 것은 히오의 스킬 창고나 다름없다.
인내력을 채우더라도 스킬북을 어찌 계속 구해야 하나··· 솔직히 좀 막막한 느낌이 있었는데 마법을 계속 익힐 수 있다면 굳이 스킬북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내 예상대로라면 페널티로 인해 사라지지도 않는다.'
정확히는 사라지더라도 다시 스킬로 만들면 그만이다.
어느 날 폭력을 저질러 페널티로 스킬 '파이어'가 삭제되더라도 그 발동원리를 알고 있으니 다시 발동한다면 스킬로 등록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히오의 생각이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페널티로 인한 부담이 크게 덜어지는 것이다.
'끄응······ 그래도 쉽지 않단 말이야.'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마법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방대한 넓이와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문양 하나에 담긴 의미가 어떤 문양과 만나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어떤 속성을 만들어낼 것이냐에 따라 조합은 또다시 달라진다.
이것만으로도 이리 복잡한데 고대의 마법까지 파고들어 간다면 이보다 배는 어려워진다고 하니.
"그래도 이제 툴툴거리지 않고 곧잘 공부하는구나."
끙끙대며 공부하는 히오의 뒤로 베르가가 나타났다.
인자한 웃음을 띄운 채 말이다.
"웬일이에요 영감님? 스킬북이라도 완성했어요?"
한창 지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베르가의 등장에 히오가 묻자 베르가는 히죽 웃는다.
"비스무리한 걸 만들었지. 그보다 제자야 배가 고프구나."
"······아? 그냥 배가 고파서 올라오셨구나?"
"커흠!"
머쓱한 헛기침을 하는 베르가.
히오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가 계세요. 텃밭에 좀 다녀올 테니까."
"으허허! 그래그래."
"오늘 왜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실까? 진짜 스킬북이라도 완성한 거예요?"
"크흐흠! 이따 보여주마 제자야."
평소에도 호탕한 웃음을 자주 짓곤 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미소가 잦다.
'진짜 스킬북을 완성했다고?'
물론 게임으로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베르가가 결국 스킬북을 완성해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이제 마법사의 제자가 아니던가.
대체 베르가의 마법적 지식이 얼마나 깊기에 스킬북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이 약해빠진 노인이 새삼 대단해 보이기는 한다.
"커흠! 그리고 식사 후에는 두 번째 마법을 배워보자꾸나."
"······예?"
"첫 마법을 배우고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지 않더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익힐 수 있는 재능을 썩힐 수는 없으니."
"진짜죠?"
"허허허. 그래도 공부는 계속해야 한다. 너 같은 천재는 너무 달려나가다 기초가 부실해지니 말이다."
"이야! 당연하죠 영감님! 걱정 마세요!"
"허허허허. 스승님이라 부르라니까 이 썩을 제자 놈이. 허허허."
"아무튼 내려가 계세요! 빨리 준비할라니까!"
히오는 잽싸게 집을 빠져나와 근처의 텃밭으로 달려갔다.
제자가 된 지 하루 만에 하급 마법 파이어를 익히고 거의 두 달이 다되어 가도록 다른 마법은 구경조차 못했다.
그래도 나름 새로운 지식을 익힌다는 재미가 있고 마법적 기초가 다져지는 느낌이 들었기에 별 불만 없이 지냈거늘.
역시 새로운 마법을 배우는 재미에는 미치지 못하나 보다.
이토록 기분이 들뜨는 걸 보니 말이다.
'우리 기특한 영감님, 조만간 고기라도 해 먹여야겠네.'
작은 산토끼 한 마리라도 찾아서 사냥해야겠다.
어차피 인내력은 거의 0에 가깝고 마법이 계속 스킬로 등록되는지 실험도 할 겸해서 말이다.
'그냥 마을에 한번 들렀다 올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정들었던 마을이 아닌가.
고기나 소소한 먹거리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텃밭에 도착한 히오가 잘 자란 작은 열매와 채소 따위를 거침없이 뽑아대기 시작했다.
'곧 죽을 것처럼 비실대는 노친네. 언제까지 이런 걸 먹일 수도 없으니까.'
오랜 과제를 해결한 듯, 기분 좋아 보이던 베르가.
히오의 기분이 들떠가는 것은 그런 베르가의 미소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베르가는 염원했던 바를 이루었고 히오는 고대했던 새로운 마법을 배우는 날.
지금까지는 근 두 달 중에 가장 완벽한 하루였다.
「어비스 -1층 공략에 실패하였습니다.」
「두 개의 차원에 악에 물든 몬스터가 풀려납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메세지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로그아웃이 시작됩니다.」
불길함을 가득 담은 붉은색의 메세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히오의 정신은 아득해져 가고.
"······뭣···!"
짧은 당혹성만을 남긴 채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15화 윤슬아
대격변으로부터 2년 하고도 수개월.
갑작스레 나타난 게이트와 그곳에서 뛰쳐나오는 몬스터들.
세상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생각보다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초기 몬스터들은 군부대 만으로 충분히 진압이 가능했기에.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몬스터는 강해졌고 피해는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피해가 누적됐다가는 기존의 질서가 무너질 위험에 처했을 때 나타난 것이 바로 각성자.
각성자는 마치 게임처럼 자신의 레벨과 스탯을 볼 수 있고 스킬이라는 신비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데다가 몬스터를 사냥하며 힘을 키운다.
그리고 오직 각성자만이 게이트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그들은 게이트로 향했고 세상은 지금과 같이 안정되······ 지는 않았다.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던 탓이었다.
급격히 강해지는 몬스터와 겁을 먹고 게이트 진입을 거부하는 각성자들.
게이트 진입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도시와 일반 시민의 피해는 커져갔기에 문제가 심각해져만 갔는데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최초의 각성자'이다.
영웅, 구원자, 희망 등등 여러 이명이 있지만, 가장 많이 불리는 것은 역시 최초의 각성자.
최초의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그 비정상적인 강함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명성을 떨쳤으며 그 강함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윤슬아는 그런 상황 속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발 빠르게 움직여 최초의 각성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을 후원하며 관계를 쌓았고 그들이 뭉쳐 하나의 단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길드 '태룡.'
한국 최초의 각성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평가받는 남태민이 길드장으로 있는 곳이자 지금 현재 윤슬아가 소속된 길드이기도 했다.
"후우······."
최초의 각성자, 영웅, 구원자 남태민.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존재이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커다란 이.
하지만 윤슬아에게는 그저 짜증 나는 길드장일 뿐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각성 이후 사업가 윤슬아가 아닌, 각성자 윤슬아로 태룡 길드에 들어온 것은 본인이었으니.
"일해야지 일."
일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 보면 좀 낫다.
가슴이 답답해지다 못해 숨이 쉬어지지 않을 일도 없고 끔찍한 기억에 머리를 쥐어 싸맬 여유도 없다.
하지만 일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찰나 간 생겨난 생각의 빈틈.
굳은 목을 풀기 위해 시도한 약간의 스트레칭.
그러다 문득 책상 한구석에 놓인 사진에 시선이 간다면.
"······"
숨이 턱 막혀온다.
어깨동무를 한 채 다정히 웃고 있는 두 남매.
정신이 끝없이 침잠해 가는 것은 동생의 그런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는 탓이었고.
사진 속 활짝 웃는 모습과 제 앞에서 목을 맨 그 모습이 겹쳐 보이는 까닭이었다.
일반인의 몸으로 게이트에 휘말려버린 자신의 동생.
가까스로 생환해오기는 했으나 대체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버린 불쌍한 동생.
그 아득한 기억 속에서 끝을 모르고 가라앉던 윤슬아를 구원한 것은 똑똑- 울리는 노크 소리였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윤슬아의 상태를 파악하고 표정을 관리한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용건부터 말해."
"길드장님의 명령입니다. 새로운 게이트가 나타났으니 바로 출동하셔야 합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윤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예상등급은? 길드에서는 나와 또 누가 진입하지?"
"진입은 길드장님께서 직접 하십니다."
그 대답에 윤슬아의 행동이 잠시 뚝 멎었으나.
"윤슬아 팀장님께 내려온 명령은······ 게이트 주변 관리입니다."
"······하."
이내 곧 싸늘한 미소와 함께 다시 걸음을 옮긴다.
"······심정은 이해하나 길드장님께서는 생각이 있으셔서······."
"아무렴."
거칠게 닫히는 문 사이로 윤슬아의 가시 박힌 말이 흘러나왔다.
"한국을 구한 위대한 영웅님이 아니신가."
* * *
윤슬아가 도착한 곳은 새로운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곳이었다.
인근에는 이미 군 병력이 출동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그 바깥으로는 사건에 굶주린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
윤슬아를 곧장 알아본 군인이 경례와 함께 길을 비켜주고 역시나 그녀를 알아본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우르르 몰려온다.
"윤슬아다!"
"윤슬아님! 태룡 길드에 들어간 후로 이렇다 할 활약이 들려오지 않······."
"윤현수 회장의 배경을 이용해 억지로 들어갔다는 말에 대해서······."
"사실은 비각성자라는 의혹이 있는데 여기에 한 말씀만······."
그러한 것들을 익숙하게 지나치며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간다.
아파트 5층 높이는 될 법한 거대한 게이트.
그것을 올려다보는 윤슬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오셨습니까."
그녀를 알아보고 고개를 꾸벅 숙여오는 태룡 길드원들.
자신과 똑같이 게이트 밖에 남겨진 각성자들이었기에 윤슬아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태민 그 새······ 아니, 길드장이 진입하고 얼마나 지났죠?"
"한 시간 정도 됐습니다."
"나오려면 아직 멀었겠네요."
그리 판단하고 근처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걸터앉는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쉬어요."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 모를 사태는 개뿔."
윤슬아는 활짝 웃으며 재차 손짓했다.
"그 대단하신 영웅님인데 고작 이런 게이트에 실패하겠어요? 그러니 어서 와요."
그 미소에 잠시 넋을 놓은 각성자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쭈뼛쭈뼛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빛나던 윤슬아였었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굴지의 기업 재벌 3세.
아름다운 외모와 시원한 성격.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최초의 각성자들을 후원하며 태룡 길드를 만들었다 알려진 사람.
허나 모종의 사건 이후로 각성하여 직접 태룡 길드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윤슬아였다.
각성 당시에도 높은 레벨을 측정 받아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지만······ 현재의 처지는 보시다시피 이런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이 기회라 생각한 각성자 중 한 명이 윤슬아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으나.
"······저 사람은 뭐야. 누가 들여보낸 거지?"
윤슬아의 시선은 게이트 바로 앞에 가 있었으니.
그제서야 다른 각성자들도 윤슬아에게 시선을 떼고 그곳을 바라봤다.
"뭐지?"
"우리 길드원은 아닙니다."
"누가 들여보낸 거야."
"그보다 옷차림새가 왜 저래?"
푸른 게이트 앞에서 그것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사내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먼 옛날에나 입었을 법한 후줄근한 옷차림.
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을 이곳을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어차피 일반인은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하니 괜찮지만, 혹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라면 제법 큰일이었기에 윤슬아는 서둘러 그 사내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여기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그 목소리에 놀란 듯 사내는 고개를 홱 돌려 윤슬아를 쳐다본다.
큰 키에 운동이라도 했는지 단련된 몸. 그와 어울리지 않는 후줄근한 옷차림.
그리고 이 상황 자체가 놀랍다는 듯한 그 표정과 행동에 어떤 위화감이 든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윤슬아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저는 윤슬아라고 해요. 혹시 이곳에 어떻게 온 건지 말해줄 수 있나요?"
친절하고 나긋한 그 목소리에 대한 사내의 반응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것이었다.
"한국말이라······. 진짜··· 돌아왔나 본데."
아주 낮게 중얼거린 말이었으나 윤슬아의 귀에는 어렴풋이 들렸고 그렇기에 그녀는 표정을 굳혔다.
중얼거리던 말.
게이트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행동.
들어오지 못할 곳에 갑자기 나타나버린 사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설마······ 게이트 생환자?"
윤슬아의 뒤에서 따라오던 각성자 중 한 명이 무언가 알았다는 듯 말했고 그 말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게이트 생환자라고?"
"미친··· 그게 진짜 가능한 거였어?"
"저기요! 혹시 방금까지 어디 있었는지 기억나요?"
그런 각성자들을 돌아보며 윤슬아는 싸늘하게 말한다.
"조용히 해요. 제발 아무것도 모르면."
정황상 사내는 게이트 생환자가 확실해 보인다.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 우연히 게이트 생성장소에 있다가 그것에 휘말려 버린 것.
그리고 그런 이들 중 아주 극소수만이 간신히 살아 돌아오는데 그런 자들을 게이트 생환자라 불렀다.
백이면 백. 정신이 거의 나가버린 상태로 목숨만 건져 돌아온 그들.
처음에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점차 미쳐가다가 종내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가엾은 이들.
마치 제 동생처럼 말이다.
문득 생각난 그리운 얼굴을 간신히 억누르며 윤슬아는 더욱더 미소를 키운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름을 말해줄 수 있어요?"
그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정신이상 증세는 급격히 심해졌으니.
"아, 이현승이라고 합니다. 그보다 이걸 뭐라고 부릅니까?"
다만 본인을 이현승이라 소개한 이 사내는 조금 특이하게도 게이트가 무엇인지부터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건 게이트라고 해요. 각지에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게이트라······. 혹시 어비스 게······ 이것과 똑같은 모양에 아주 어두운 검은색이 넘실거리는 그런 게이트는 없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검은색의 게이트라니.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윤슬아는 사내를 더욱 측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다들 이렇게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인가.
"그것보다 다른 걸 좀 물어봐도 될까요?"
게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집은 어디에요? 서울이에요?"
"아, 집. 혹시 달력 좀 볼 수 있습니까?"
사내의 부탁에 윤슬아는 휴대폰의 화면을 보여주었고 날짜를 확인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집은 없어졌겠네요."
좋은 일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재빨리 다음 질문을 이어 가보지만.
"그럼··· 가족은 어디에······."
"없습니다."
"······아. 그··· 친척분들이라도."
"애초에 부모도 모르는 고아라서요."
"그, 그럼 친구나 가까운 지인이라도 제가 연락을······."
"다 죽었습니다."
"······."
덤덤하게 말하는 사내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에 빠진 장내.
뒤에 선 각성자 중 한 명이 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나섰다.
"우선은 저희 길드에서 도와드리겠습······."
하지만 그것을 윤슬아가 가로막아 버린다.
생환자에 대한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의 문제지 결국에는 미쳐버리는 것.
스스로를 상처입히고 자해하다가 끝끝내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
그것이 생환자라 할지라도···.
혹시 모르는 게 아니겠나.
최대한 평온한 일상을 유지시켜준다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나.
하나뿐인 동생은 생환과 동시에 쏟아지는 질문과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버렸지만, 이 자만큼은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아무런 배경도 없는 사내를 길드에 맡겼다가는 분명 감당 못할 질문을 쉴 새 없이 받을 것이 뻔했기에.
"그냥 저희 집으로 같이 가요."
윤슬아는 사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고.
"네!"
사내는 믿기지 않는 반응 속도를 발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6화 윤슬아(2)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안 됩니다. 길드장님께서 아시면······."
주변의 만류에도 윤슬아는 코웃음만 쳤다.
"남태민? 엿이나 먹으라고 전해줄래요?"
그렇게 차갑다가도 현승을 보며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는다.
"저희는 먼저 가요. 어차피 여기는 아주 대단하신 놈이 있어서 걱정 없거든요."
윤슬아의 손에 끌려가면서 현승은 상황파악을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풍경이 뒤바뀌기 직전에 보였던 단 세 줄의 메세지.
어비스 공략에 실패.
두 차원 모두에 어비스 몬스터가 출현할 것임.
그리고······.
「로그아웃이 시작됩니다.」
로그아웃이라니.
그래서야 마치 정말로 자신이 게임 속에라도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게임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자신의 움직임만 보더라도 바로 파악이 가능했다.
윤슬아에 손에 이끌려 움직이는 두 다리는 너무도 멀쩡하게 걷고 있었으니.
그것이 게임이었고 이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것이라면 자신은 다리를 병신처럼 절뚝여야 했다.
'그건 그거고··· 게이트라니.'
힐끗 뒤를 돌아보니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게이트가 아직도 보인다.
그리고 현승은 저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을 알고 있다.
'어비스 게이트.'
어비스 공략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게이트.
하지만 그것은 불길한 검은빛이지 저렇게 푸르게 넘실거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어비스 게이트를 찾고 그것을 막는다.
그리고 자신처럼 지구로 돌아왔을 그 썩을 놈들 역시 같이 찾는다.
'이 망할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비스의 기운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아는 놈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략을 실패한 것인가.
아무리 어비스가 위험하다고 해도 이제 막 시작된 1층일 뿐이다.
반면 다른 랭커들은 지난 2년간 엄청난 속도로 강해졌고.
그러니 그들 중 한두 명만 들어갔어도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가 없는 일이란 말이다.
무언가를 노리고 일부러 공략조차 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일이기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이 새끼들 만나기만 해봐라.'
사실 만나도 별수가 있는 건 아니다.
저들은 자신보다 아득하게 강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 * *
윤슬아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가면서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대격변.
각성자의 탄생.
게이트 내에서 발견한 마정석의 존재.
그리고 최초의 각성자라 불리는 영웅들.
그중에서도 현승이 유독 관심을 가진 것은 역시나 최초의 각성자라 일컬어지는 이들이었다.
"최초의 각성자들이 그렇게나 강합니까?"
"한 명 한 명이 일반 각성자랑은 비교조차 안 될 정도예요.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놈은 남태민이에요. 제가 있는 태룡의 길드장이죠."
"남태민이라······."
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래도 뭐, 어느 분야든 특출난 놈은 몇 명씩 있기 마련이니 별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들은 강하기도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거의 신격화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예요."
"다른 이유요?"
"네. 마정석과 관련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마정석은 기묘할 정도로 각성자의 능력과 관련된 연구와 잘 맞아떨어졌고 그렇게 가장 먼저 개발된 물건이 있었으니.
"각성자들의 강함을 측정해주는 이른바 레벨 측정기."
현승과 이곳의 각성자들의 차이점이 이것이다.
레벨.
레벨이란 개념이 없기에 레벨이 없는 자신과 달리 지구의 각성자들은 레벨이 존재한다.
"다른 각성자들에게는 정확하게 작동하는 레벨 측정기가 이상하게도 최초의 각성자라 불리는 이들에게는 하나같이 오류를 일으켰거든요."
"오류라고 하면······?"
"측정 불가라고 뜬 것이죠. 안 그래도 활약이 대단하던 놈들이었는데 그들 전부가 그렇게 뜨니 난리가 났죠 뭐. 선택받은 자들이라느니. 구원자라느니."
그렇게 말하는 윤슬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설명과는 달리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
아무튼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기는 했지만, 현승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검은색의 게이트는 정말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게 맞습니까?"
당장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난다면 기운이 퍼지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막아내야만 했으니까.
다만 그 말 직후 자신을 힐끗 쳐다보는 윤슬아의 표정에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났기에 현승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이트는··· 없어요. 아무래도 빨리 가야겠네요. 현승씨는 우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쉬세요.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 하죠."
"예? 아 뭐. 예 그러죠. 대신에 검은색의 게이트가 나타난다면 바로 제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네. 꼭 그럴게요."
그렇게 대답하는 윤슬아의 말투에서도 진한 안타까움이 느껴졌기에 현승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지?'
* * *
윤슬아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말로만 듣던 펜트하우스였다.
"······와우."
타고온 차량부터가 범상치 않았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다른 각성자들이 쩔쩔매더라니.
"여기 방 쓰시면 되고 저는 저기 반대편 방이니까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와서 말씀하세요."
그런데 이 여자, 지나칠 정도로 경계심이 없다.
집이 좀 많이 넓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 큰 성인 남녀가 아닌가.
심지어 오늘 처음 본 사이다.
급작스레 돌아온 현승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기는 했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휴대폰마저도 없다.
친구도 부모도 없으니 윤슬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꽤나 난감했었을 상황.
그래도 그건 그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 묻자.
"저 이래 봬도 각성자라구요. 제게 나쁜 짓 하려고 했다가는 현승씨가 위험할 걸요? 그리고 왜 도와주는 건지는······ 내일 말씀드릴게요."
또다시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피해버리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도 나쁜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에 현승은 윤슬아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녀가 왜 그토록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을 피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 * *
"현승씨. 놀라지 말고 제 말 잘 들어야 해요."
"예."
다음날.
오랜만에 현대의 식사로 배를 채운 현승의 앞에는 윤슬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직접 말하는 건 환자에게 좋지 않지만······ 견뎌야 해요! 그래야만 완전하게 나을 수 있을 테니까!"
"예? 환자?"
현승이 의문을 되물을 새도 없이 윤슬아의 말이 이어진다.
"현승씨는······ 게이트 생환자예요."
본래 각성을 하지 못한 일반인은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다.
허나 딱 한 가지 예외적인 상황이 있는데 바로 게이트가 생성되는 당시. 그곳에 있는다면 게이트에 휘말려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일반인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 게이트의 안쪽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정말이지 뜬금없게 극소수의 사람이 돌아오고는 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미쳐버려요."
처음에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웃고 떠들고.
마치 실종된 이후의 기억을 잃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문득 그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면···.
"정신이 붕괴하죠. 겁에 질려 대화가 통하지 않고 살려달라 부르짖어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열이 펄펄 끓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제 동생은 제 앞에서 목을 매고 죽었어요."
그날 이후로 한시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다.
자신이 조금만 더 섬세했다면.
조금만 더 의문을 품고 지켜봤다면.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동생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가 쌓이고 쌓여 가슴속에 아주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윤슬아는 이 사내만큼은 살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수없이 상상하고 떠올렸던 대로 노력하고 노력한 끝에 이 남자의 정신병이 완전히 치료된다면 자신의 이 무거운 후회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걱정 마세요. 현승씨는 정말 괜찮아질 수 있어요!"
"아니, 저는 그런 게 아닌데······?"
"아니면. 현승씨가 지난 2년 동안 어디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건······ 음······."
윤슬아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2년 동안 다른 세상에서 뭐 어쩌고저쩌고.
이게 통하겠는가. 오히려 정신병 환자로 더욱 확신하게 될 것이다.
현승의 말문이 막히자 윤슬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만. 억지로 떠올리지 말아요. 천천히 한 걸음씩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직후.
띵동- 울리는 벨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누군가 집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선생님."
아주 인자하게 미소 짓는 중년의 여인.
"오랜만이에요. 슬아씨. 잘 지냈어요?"
한 손에 서류가방을 든 여인은 윤슬아와 잘 아는 사이인 듯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 현승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럼 이쪽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슬아와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승의 맞은 편에 앉는 여인.
"반가워요. 저는 손수정이라고 해요."
"아, 이현승입니다."
손수정의 말투는 무척이나 나긋하며 차분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선생의 그것처럼 말이다.
"현승씨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굳건한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정신 방벽을 세우는 거랍니다?"
"······예?"
"정신 방벽은 다른 게 아니에요. 자존감이죠. 현승씨가 현승씨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
가방을 뒤적인 손수정이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 든다.
"우선 여기 아무거나 그리고 싶은 걸 그려볼래요? 다른 딱딱한 검사보다는 이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본인의 현재 마음에 다가가 보는 거예요."
미소 지으며 건네는 스케치북을 아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저들은 이미 자신을 생환자인가 뭔가로 확정 짓고 미래의 정신병 환자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 속 세상에 있다 왔다고 사실대로 말해도 돌아오는 것은 측은한 시선과 더욱 강화된 심리상담뿐일 테다.
일이 또 이상하게 꼬여간다.
'하······ 이럴 때가 아닌데 지금.'
어비스 게이트도 찾아야 하고 나머지 랭커들의 위치도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현승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나마 자신에게 호의적인 윤슬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속으로 투덜거릴지언정 손은 거침없이 움직이며 그림을 그려나간다.
현재의 심리 그딴 건 모르겠고 그냥 생각나는 장면.
어둑한 밤. 나지막한 풀벌레 소리. 조용한 산골.
밤하늘에 떠오른 것은 푸른 태양. 그리고 그 아래 있는 자신.
스킬 '파이어'를 처음 펼쳐보았던 그날의 기억이 그림을 통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림 실력은 최악이었기에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그려지고 있었지만.
"······다 그렸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색연필로 대충 쓱쓱 그린 그림을 상담사 선생에게 건네주었고 그림을 확인한 손수정은 큰 충격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상을··· 다 부숴버리고 싶은 건가요······."
그 중얼거림을 들은 윤슬아는 왈칵 쏟아지는 감정에 입을 틀어막으며 방을 뛰쳐나가고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손수정이 애써 웃으며 상황을 수습하려 한다.
"하하···. 그림이 참 예쁘네요. 이게 지금 현승씨의 심정인 거죠? 음··· 굉장히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이······."
마치 위로를 건네듯 차분하게 칭찬하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현승은 인상을 있는 대로 잔뜩 찌푸렸다.
'하아······ x발.'
* * *
뻘짓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심리 상담사 손수정이 돌아가고 난 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뭐 한국 최고의 최면술사 어쩌고.
이 분야 최고의 최면치료 어쩌고 하는데 다 모르겠고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현승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진짜 최면을 잘 걸기는 하는 건지 얼핏 빠져들 뻔 하긴 했으나.
「미약한 정신간섭이 감지되었습니다.」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잊고 있던 부 특성의 정신 공격 내성이 엄한 데서 발동하며 최면이고 나발이고 다 깨고 말았다.
그 뒤로는 뭐, 대충 최면에 빠진 척 대답해주고 2년 동안 뭐 했냐길래 괴로운 척 으으 거렸더니······.
"흐읍!"
윤슬아가 또다시 입을 틀어막으며 뛰쳐나갔고 그 헛짓거리도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동생과 같은 증상인 줄 알고 있다 했지.'
저렇게까지 격한 반응일 줄 알았으면······ 그냥 행복한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어쨌든 점심 직후 시작되었던 치료는 저녁이 다되어서야 마무리되었고 현승과 윤슬아는 다시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최면치료는··· 그만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손 선생님은 내일도 오기로 했으니까 그건 괜찮죠?"
아무래도 괴로운 연기를 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최면치료는 취소하기로 했다는 윤슬아.
내일도 치료를 계속하겠다는 말에 현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려는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슬아씨. 저는 정신병 같은 게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자신은 괜찮다고 정말 멀쩡하다고."
"그게 아니라 저는 정말 괜찮······."
"제 동생도 그랬었구요. 저는 그 말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었어요."
다시 말문이 막힌다.
윤슬아의 슬픈 눈빛이 자신을 향한 탓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진실을 밝혀도 결국 자신은 정신병 환자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윤슬아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다른 기관에 묶여 이것저것 조사를 받아야 했을 테니.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원하는 정보를 얻지도 못했으리라.
윤슬아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든 간에 여기 있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치료받을 테니 대신 검은 게이트에 관한 소식이 들리면 바로 제게 말씀해주셔야······."
현승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윤슬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휴대폰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는 윤슬아.
현승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무슨 일이에요. 남태민 그 자식이 어제 일로 뭐라 하던가요?"
- 아, 팀장님. 그건 아닙니다.
현승에게까지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
-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게이트가 발견되었는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목소리에.
- 웬 검은색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현승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17화 남태민
"······진짜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윤슬아는 차를 타고 새로이 나타났다는 검은색의 게이트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현승이 함께였다.
"정말 괜찮은 것 맞죠···?"
"그렇다니깐요. 다시 한 번 더 보여드려요?"
자신이 게이트 생환자인 것은 맞으나 정신병 같은 건 정말 없다고 계속 설명하고 결국 증명해냈기에 이렇게 함께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증명의 방법은···.
"게이트! 게이트! 게이트! 게이트! 게이트!"
게이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스스로 계속해서 하는 것.
그럼에도 정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증명하는 그 방식이 더 정신 나간 놈 같긴 했지만, 어쨌든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자 윤슬아도 인정한 것이다.
현승은 다른 게이트 생환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그 짓 좀 그만······ 하시고. 아무튼, 현승씨가 검은색 게이트를 잘 안다고 해서 데려가는 거예요. 혹여나 다른 짓 하시면 안 돼요?"
"걱정 마십쇼."
현승이 그것만큼은 걱정 말라는 듯 시원하게 대답한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다른 짓을 할래야 할 틈도 없을 테다.
어비스 게이트의 근처에는 자신처럼 소환된 랭커들이 있을 것이기에.
어비스 1층의 몬스터 따위는 현승이 다른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순식간에 정리될 것이다.
그 저주받은 기운이 퍼져나갈 새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시르베르트 그 새끼처럼 보이는 놈이 있으면 한 마디 해주고 말이야.'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그 역시 근처에 있을 것이다.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한걸음에 달려올 것이고.
'무슨 이유가 됐건 어비스 공략을 일부러 하지 않다니. 미친 짓이지.'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결정은 아니다.
저주받은 기운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량의 기운이라도 풀린다면 걷잡을 수 없을 터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딴 판단을 내리다니.
"근데 정말 검은색 게이트가 나타날 거라고 어떻게 안 거죠? 유례가 없는 일이었는데···."
"음······ 그냥 본능? 직감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윤슬아에게는 대충 둘러댔다.
역시나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있나.
벤타이얼과 관련된 세상.
어비스 게이트 등등. 그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에 너무 길었으며 굳이 설명해야 할 이유 또한 없었으니까.
"일단 가보시죠.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도 직감인가요?"
"뭐, 그런 셈이죠."
윤슬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착실히 검은색 게이트를 향해 차를 몰았다.
일단 현승의 말대로 검은색의 변이 게이트가 등장했으며 자신은 한국 최고 길드의 팀장으로서 그곳에 가야할 의무가 있었으니.
그렇게 조금 더 이동하자, 바리케이드를 친 채 통행을 막고 있는 군부대가 보였다.
돌아가는 다른 차들과는 달리 윤슬아는 바리케이드의 바로 앞까지 차를 움직인다.
"게이트의 등장으로 이 앞으로는 지나가실 수 없······ 엇? 윤슬아?"
기계적인 말을 읊던 군인이 윤슬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며 짧게 경례한다.
"등록증을······ 예. 확인됐습니다. 옆에 계신 분도 태룡 길드원이십니까?"
"관계자예요."
"옙.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서둘러 바리케이드를 치우는 군인들을 보며 윤슬아가 물었다.
"아직 게이트 발생지까지는 거리가 꽤 있는 걸로 아는데··· 왜 벌써 통제하는 거죠?"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 잘······. 아, 얼핏 듣기로는 태룡 길드장님의 명령이었다고 합니다."
"······남태민이?"
남태민 정도라면 통제 구역을 설정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다.
하지만 이유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그였기에 윤슬아가 놀란 것이다.
그 남태민도 이번 게이트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 그렇다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이제 지나가시면 됩니다. 고생하십쇼!"
통제 구역을 통과해 그 안쪽으로 들어가자 더욱 위화감이 들었다.
"사람이······ 없군요."
마치 유령도시라도 된 듯,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아무리 통제구역이라도 이렇게 사람이 없지는 않을 텐데."
일반적인 게이트라면 이토록 넓은 구역을 통제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게끔 최소한의 구역을 통제하고 공공기관의 관계자들이나 다른 각성자들도 수시로 드나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어떠한가.
이다지도 넓은 구역을 통제하면서도 한 명의 사람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비상 대피령이 내려진 수준이 아닌가.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 것이 다름 아닌 남태민이라고 하니···.
"원래는 이렇게까지 통제하지 않는다고 했죠?"
"네. 저희 길드장인 남태민이 내린 명령이라고는 하는데··· 이유를 모르겠네요."
변이 게이트라고는 하지만, 그저 색만 다를 뿐, 아직 다른 특이점이 발견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윤슬아의 의문은 그런 것이었고 현재의 상황에 의문을 품은 것은 현승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태민. 남태민이라······."
분명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최초의 각성자니 구원자니 뭐니 하며 그가 활약하고 있을 때, 자신은 벤타이얼의 세계에 있었으니까.
한데.
'묘하단 말이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든다.
분명 어비스 게이트는 처음 나타나는 것일 진데 남태민이라는 자가 내린 명령은 마치 어비스 게이트의 위험을 정확히 파악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어비스 기운에 면역이 없는 일반인을 완전히 물리고 기운이 번지지 않게 넓은 구역을 통제한다.
그리고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다가 어비스 몬스터가 나오는 즉시 모조리 사살.
이것이 조금의 기운도 새어나가지 않게 막는 방법이었고 남태민의 대처를 보자면 완벽한 것이었다.
'우연··· 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리 생각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남태민이라는 자가 어비스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각자 생각에 빠진 채 가다 보니 어비스 게이트의 근처까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의 곁으로 같은 마크를 가슴팍에 새긴 몇 명이 모여들었다.
"오셨습니까 팀장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이들은 모두 태룡의 길드원.
"진짜··· 검은색 게이트네요."
불길하게 넘실거리는 검은 게이트를 올려다보는 윤슬아에게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방금 오신 마당에 죄송한데···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길드장님의 명령입니다. 혹시 모르니 나머지 길드원도 전부 통제구역 밖으로 물러나라고."
다른 이들의 표정이 영 이상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리고 곧 윤슬아의 표정 역시 이들과 같아졌다.
"혹시 모르니······ 물러나라고요? 혹시 모르니 남으라는 게 아니라?"
"네. 저희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되물었는데 같은 말이었습니다."
"······남태민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게이트 바로 앞에 계십니다."
게이트 앞으로 곧장 걸음을 옮기는 윤슬아.
그 뒤로 길드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희도 계속 말해봤는데 소용이 없어서··· 일단 명령대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길로 각자 차를 타고 바깥으로 향하는 태룡의 길드원들.
마지막까지 그들의 표정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와 반대로 걸음을 옮기는 현승의 표정에는 어떤 확신이 점차 새겨진다.
'혹시 모르니 물러나 있으라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혹시 모르니 사람을 더 불러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비스의 기운 앞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건 오히려 독이었으니.
현승은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남태민. 녀석은 어비스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랭커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어.'
물론 통제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막혀 오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랭커가 괜히 랭커인가.
그런 일반인의 눈을 속이고 들어오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텐데 어찌 된 게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게이트로 향하자 윤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게이트 브레이크를 혼자 막겠다니!"
아파트 5층 높이는 될 법한 거대한 어비스 게이트.
그 아래에서 소리치고 있는 윤슬아.
그런 그녀와 마주 보고 있는 한 명의 사내.
'저자가 남태민.'
훤칠한 키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날카로운 눈매와 어우러져 냉철한 분위기를 풍긴다.
······역시나 본 적 없는 사내.
"하아······. 내가 이래서 윤슬아 너한테는 보고하지 말라고 한 건데."
"그게 무슨······ 아니 됐고.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빨리 길드원들 다시 불러! 당장이라도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다며!"
윤슬아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고 몬스터가 쏟아져 나올 테니 자신더러 나가 있으란다.
"너······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다.
남태민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 보고 손을 내민 것이 누구던가.
윤슬아 본인이 아니던가.
남태민에게 부족한 재정을 지원해주었고 최초의 각성자들과 뭉쳐 하나의 길드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으며 여러 권력자들과 연을 만들어준 것 역시 윤슬아였다.
윤슬아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남태민이 강하다고 한들 이렇게 쉽게 명성과 권력을 손에 넣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말.
한데 윤슬아가 각성하고 태룡 길드에 들어오자 남태민은 어찌했나.
명예뿐인 팀장직에 앉혀놓고 활약할 기회는 일절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윤슬아를 대하는 태도는 변함이 없었으니 윤슬아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나는 것이다.
······지금처럼.
"강하다 강하다 해주니까 진짜 미치기라도 한 거야? 너 혼자 게이트 브레이크 막다가 실패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다니까."
"너 그거 진짜 심각한 나르시즘이야. 정신차려."
"하아······ 슬아야."
무어라 말을 하려던 남태민의 시선이 윤슬아의 뒤쪽을 향한다.
멀뚱히 서 있는 현승을 발견한 것이었다.
"너··· 설마 일반인을······?"
그리고 그 순간.
싸아아-
바람이 부는 것과 비슷한 소리.
하지만 대격변을 겪은 남태민과 윤슬아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게이트가 깨져나가며 그 안에 있을 수백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재앙.
그것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 끼에에에!
- 키에엑!
검은빛이 넘실거리는 게이트 사이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몬스터.
여타 몬스터들과는 그 생김새부터가 다르다.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피부와 날카로운 발톱, 이빨.
종류도 다양해 비행형 몬스터와 무기를 든 이족 보행 몬스터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대형 몬스터까지.
숫자가 너무 많고 종 또한 다양하다.
절대······ 여기의 인원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리라.
윤슬아는 그리 생각했고 현재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 했다.
"일단 내가 반대편에서 시선을 끌 테니······!"
남태민이 게이트를 향해 손을 뻗기 전까지는 말이다.
"쯧···. 고작 1층 놈들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뻗는 손.
그리고.
퍼어억-
동시에 터져나가는 수십 마리의 몬스터.
"······."
윤슬아는 달려나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강한 위압감과 함께 나타난 수십의 몬스터가 무언가에 짓뭉개지기라도 한 것처럼 찌부러지며 순식간에 핏물로 화해버린 것이다.
물론, 게이트는 계속해서 몬스터를 뿜어내었다.
한 번에 수십 마리 이상씩.
하지만 머리를 들이밀고 나오는 그 순간이 곧 그들이 죽는 순간이었으니.
- 키엑···?
- 끼에에에엑!
등장과 동시에 모조리 터져나간다.
스스로가 폭죽이라도 된 것처럼 피의 축제를 벌이며 마구마구 터져나간다.
본디 재앙이었을 존재를 한낱 핏물로 만들어내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남태민.
"이게······ 무슨······."
윤슬아는 넋을 놓고 중얼거린다.
강하다 강하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직접 본 적 역시 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여태까지가··· 힘을 숨긴 거였다고······?'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광경이란 말인가.
힘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한국 최고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이 압도적인 모습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마치 몬스터들에게 경고라도 하는 것 같다.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니 감히 넘어올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남태민은 오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괜히 다른 각성자들이 남아 있어봐야 방해만 됐을 테니.
'차이가······ 이렇게나······.'
윤슬아가 각성할 때만 해도 온 매스컴이 그녀의 이름을 떠들어 댔다.
각성 능력도, 레벨도 훌륭했으니.
남태민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역시 견제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남태민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는지······.'
게이트의 절반을 잡아먹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비행 몬스터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게이트를 넘어온다.
하지만 그것이 비명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니.
몸이 절반도 채 넘어오기 전에 반으로 푹 꺾여버렸으니 나머지 몸뚱이가 게이트를 넘어왔을 때는 이미 시체가 되어 땅으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마치 허공에 절대적인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죽어나가는 몬스터들.
게이트를 넘어오는 즉시 반으로 찢기고, 작게 압축되고, 목이 꺾여 죽는다.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몬스터의 시체가 쌓여감에도 남태민은 고고하게 서 있을 뿐이었으며 그 단정한 옷은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그러니 윤슬아는 좌절한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압도되어버린 까닭이었다.
자신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이런 광경을 보일 수 없는 탓이었다.
학살의 숫자는 수백이었지만, 시간은 짧았고 게이트의 검은색도 빛이 바래지기 시작한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몬스터의 숫자는 줄고 그 질은 더욱 향상된 듯했으나 남태민에게는 하등 의미가 없었으니.
- 꾸에에에엑!
대형 몬스터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게이트는 완전히 빛을 잃었고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정말로 게이트 브레이크를 단신으로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여태 나온 몬스터들 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 것들을 아주 여유롭게.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말이다.
"하······."
그저 지켜보기만 했음에도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기에 윤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고 했으나.
"야 이 새끼야."
전혀 예상치 못한 욕설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살핀다.
* * *
처음엔 별생각 없었다.
'워우. 시원하게 잘 싸우네.'
어비스 게이트를 통해 넘어오는 어비스 몬스터들.
그 외관은 하나같이 살벌한 것이지만, 그래 봐야 1층의 하급 몬스터이지 않나.
나오는 족족 사냥당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몸이 근질거려 뇌제를 사용해 벼락 한 방만 떨어트려 볼까······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12 / 1000)]
'······오. 이렇게 참는 것도 인내력이 오르는구나.'
새로이 알아낸 사실에 감탄이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아까부터 느끼던 기시감이 커져만 갔으니.
'저 남태민이란 놈······ 분명 어디선가······.'
어비스 게이트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정체 모를 놈.
랭커 중에서도 상위권이라 해도 될 정도로 꽤나 강한 무력.
그리고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 있던 남태민의 스킬.
- 네 말대로 빙의자가 맞더라고.
번뜩 떠오르는 것은 제이슨이 정보를 전달해주던 날의 기억이었다.
- 아카데미의 그 교수 말이야.
머릿속은 과거를 훑으며 눈은 현재 남태민의 모습을 담는다.
- 황실에서 그 교수에게 칭호와 함께 훈장을 내렸다나 봐.
그 칭호는.
- 염동(念動)의 대가.
영역 내 모든 것을 자유로이 다루는 염동력의 권위자.
-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18화 마지막 마법사
- 염동(念動)의 대가.
영역내 모든 것을 자유로이 다루는 자.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현승의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 나갔다.
"야 이 새끼야."
어리둥절해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남태민.
그 뒤로 넓게 펼쳐진 끈적이는 피. 수백의 몬스터 시체.
이렇게나 어비스의 위험을 잘 아는 놈이 대체 왜 공략은 하지 않았단 말인가.
"너 이 새끼 나 좀 보자."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인가?"
"그래 이 자식아."
남태민의 표정이 황당함을 넘어서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내가 처음 보는 놈에게 그런 상스러운 말을 들을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남태민의 몸에서 살기가 일렁인다.
단순 인상을 쓰는 것이 아닌, 중위 등급의 스킬로 등록된 살기.
닿은 상대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며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정신계 스킬.
뜬금없이 나서는 무례한 놈을 교육하는 데는 아주 편리한 스킬이었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지만.
「특성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현승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걸음의 속도를 높였고.
"허, 남태민 아니, 시르베르트."
그제야 남태민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왜 공략하지 않았지.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어쩌려고?"
"너······ 누구···?"
기어이 남태민의 앞에 도달한 현승이 그 멱살을 틀어쥔다.
당황한 남태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서, 설마 너······."
틀어쥔 멱살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그래. 나."
그 귀에 대고 속삭이는 이름.
"지존 천마다."
그런 현승의 머리 위로 푸른 화염이 떠오르고 대낮처럼 환해진 그 불길 아래에서.
「스킬 - '파이어'가 발동됩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남태민이 휘청인다.
* * *
- 이걸로 확실하다. 지존 천마는 힘을 잃었어.
하하하···.
저리 지껄인 놈이 누구였더라.
그놈을 데리고 와서 옆에 앉혀 놓고 싶은 심정이다.
'힘을 잃어? 누가? 이놈이?'
눈이 멀어 버릴 듯 빛나는 화염.
지존 천마의 등 뒤로 떠오른 그 거대한 푸른 불길은 마치 태양처럼 텅 빈 도시를 비춘다.
지존 천마는 힘을 키우지 않은 것이 아니다.
키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 1위의 혜택이······ 기존 능력의 이전이었다던가···.'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인다.
지존 천마의 원래 능력은 '화염의 지배자.'
그리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시절 지존 천마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럼 명성을 키우지 않았던 것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나······.'
기존의 절대적인 무력을 그대로 계승했다면 명성 포인트 따위가 중요하겠는가.
이미 지고한 존재일진데.
저만한 화염구를 하늘 위에 띄었음에도 느껴지는 것은 미열뿐이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친다.
화염에 대한 지배력이 얼마나 높은 것인가.
"설명해라. 시르베르트."
그 후광에 모습조차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기에 남태민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존 천마는 자신 못지않게 벤타이얼 세계관을 아끼는 놈이다.
대답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2년을 준비했다. 실수는 없었다고 장담할게. 그러니 조금만 침착하게 내 말을······."
"너희를 믿었기에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나 칠 줄이야."
"아니, 아니야! 우리로서는 이게 최선이라 생각한 거라고! 진짜니까 제발 믿어줘."
"최선, 최선이라······."
훅 다가온 지존 천마의 얼굴이 남태민의 바로 앞에서 멈춘다.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한다.
그 배경을 차지하는 푸른 화염이 자신을 굽어다 본다.
"그게 최선이라 확신할 수 있나?"
그렇기에 남태민은 감히 확신하지 못한다.
분명 지존 천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것이 최선이라 확신했는데 더는 그럴 수가 없다.
이 푸른 화염의 아래에서라면 그 무엇이든 작고 초라해질 것이니.
"역시 대답하지 못하잖나."
하지만 어떻게든 대답해야 한다.
더이상 지존 천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다. 더이상 그에게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쯧."
그렇기에 어떻게든 입을 열어 변명이라도 내뱉어 보려 했으나.
"곧 찾아가지. 시르베르트."
그렇게 말하는 지존 천마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그땐 그럴싸한 계획을 들려줘야 할 거야."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해지는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시르베르트가 마지막 물음을 건넸으나.
"그, 그건 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겠다는 의미인······?"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지존 천마도. 하늘에서 압도하던 그 푸른 태양도.
"하, 하하하······."
힘이 풀린 남태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한순간에 다시 밤으로 돌아왔지만, 푸른 화염은 그의 뇌리에 박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만남은 짧았으나 그 충격은 폭풍과도 같다.
어비스 몬스터 따위를 상대하는 것보다 그와 마주하고 있던 일 분 가량이 수백 배는 더 긴장되었다.
한 점 흐트러짐 없던 옷은 구겨지고 엉망이었고 손은 땀으로 축축했으니.
최근에 이토록 흐트러진 적이 있었던가.
구겨진 옷을 펴고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올리기 위해 손을 뻗자 살짝 그을린 앞머리가 만져졌기에 다시금 소름이 돋는다.
'온도를······ 조금이라도 높였다면.'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타버린 것은 앞머리가 아니라 이 도시 전체가 됐을 터.
그리고 뒤늦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재차 떠오른다.
- 곧 찾아가지. 시르베르트.
남태민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한숨을 내쉰다.
"x됐네 진짜."
* * *
「모든 어비스 게이트가 소멸되었습니다.」
「귀환합니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둑한 산골짜기였다.
익숙한 텃밭.
마지막에 있던 장소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어봐야 할 게 많았는데.'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 투성이다.
이 세계에 갇혀 나가지 못하고 있어야 할 시르베르트가 어찌 남태민으로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는 말은······.
'설마 최초의 각성자라는 놈들이 전부······ 랭커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녀석들은 지구와 왕복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 역시도 로그아웃을 위해 오만 방법을 시도해봤지 않았던가.
혹, 명성 포인트로 살 수 있나 싶어 포인트 상점을 모조리 뒤져보기까지 했다.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딱 하나 생각만 하고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
그건 죽어보는 것이었다.
'······됐다. 그렇게까지 해서 돌아갈 이유가 없기도 하고.'
오랜만에 돌아간 지구였지만, 솔직히 크게 감흥은 없었다.
지켜야 할 이도 없고 보고 싶은 이도 없다.
"그러고 보니 영감님을 깜빡했네. 걱정하고 있으려나?"
본인에게는 차라리 이곳이 더 정감 가는 세계가 아닐까.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아는 마을 사람 만나서 갔다왔다 할까?"
뭐라 말하든 노친네는 제법 삐쳐있을 것이다.
뭐, 스승님이라고 한 마디 해주면 곧바로 좋아 죽겠지만 말이다.
"일단 들어가 볼까."
그렇게 텃밭을 나서려고 뒤돌아선 히오의 시야에 비친 것은.
"······."
저 멀리 솟아오르는 이질적인 불길이었다.
* * *
히오가 로그아웃 당해 지구로 가버린 그 시각.
베르가는 지하 연구실에서 자신이 만든 두 권의 책을 뿌듯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쓰다듬던 손이 멈칫한 것은 꼬르륵- 요란하게 울리는 배꼽시계 때문이었다.
"크흠. 히오야. 아직 멀었느냐."
베르가가 1층으로 올라오며 히오를 불렀지만, 히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작은 텃밭에서 뭐 그리 오래 걸리는지.
다시 지하로 내려갈까 고민하던 베르가는 그냥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지 않나.
두 번째 마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말에 신 난 얼굴로 뛰쳐나가던 제자의 얼굴이 선명하다.
"허허허. 그 녀석 그렇게나 좋을꼬."
그 정도의 재능이면 다른 마법을 배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텐데도 꾹 참고 공부하던 기특한 녀석.
마법에 미쳐 평생을 살았던 자신에게 갑작스레 생겨난 제자였기에 더욱 기특한 마음이 든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인 것은···.
- 마법사? 허허허허!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제정신이 아니구먼?
- 마법사요? 밥값도 못하면서 똑똑한 척만 한다는 그 양반들?
- 베르가. 미안하지만 자네는 너무 약해. 까놓고 말해서 쓸모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만······.
이미 팽배해져 버린 마법사의 인식.
그것은 자신이 젊었을 적 이미 최악이었고 지금에서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 취급당하는 것이 마법사이다.
그것을 개선하고자 평생을 노렸했음에도 바뀐 것은 전혀 없었다.
늘은 것이라고는 멸시와 조롱에 대한 인내심뿐.
'······여기도 오래됐구나. 나보다 더.'
전해 듣기로는 베르가의 스승의 스승.
혹은 그 이전부터 이 마법사의 집이 존재했으니 얼마나 오래된 공간인지 자신도 잘 모른다.
옛기억에 젖어들며 실내를 둘러보는 베르가.
고아로 구걸이나 해가며 연명하던 목숨을 구해준 것은 베르가의 스승이었다.
개럿 파블렌코.
스스로를 대마법사라 칭하며 마법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 흐르던 베르가의 스승.
그를 따라다니며 마법을 배우고 세상을 돌아다녔으며 덕분에 마법사가 얼마나 무시 받는지 알게 되었다.
제 앞에선 늘 당당하던 스승도 돈을 구하고자 다른 사람 앞에서는 비굴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베르가 역시 마찬가지.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도 히오 그 녀석 만큼은.'
자신의 제자만큼은 그렇게 살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분명 마법사의 인식을 뒤바꿀 정도의 천재이니 뭘 해내도 해낼 터.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안 와?"
지금쯤이면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텃밭에 간 제자 녀석이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에잉 쯧. 늙은이를 움직이게 하고 말이야."
결국 베르가가 늙은 몸뚱이를 일으켜 밖으로 나선다.
몸을 감싸는 포근한 가을 날씨.
발에 자박하게 밟히는 죽은 나뭇잎의 푹신함을 느끼며 도착한 텃밭.
"제자야! 뭐 하고 있느냐!"
그렇게 외치며 텃밭에 들어섰건만,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히오가 들고 나갔던 바구니.
안에 담긴 채소나 과일 따위를 와르르 쏟아낸 채 바닥을 뒹구는 바구니 하나.
"······히오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가만히 멈춰선 채 생각해본다.
근방에 위험이 될 만한 것은 없다.
코볼트 영역이 있긴 하지만, 녀석들은 영역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놈들이 아닌가.
바구니만 나뒹굴고 있을 뿐, 주변이 어지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짐승 따위가 습격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히오가 제 발로 도망쳤다?
왜?
마법 공부가 지겨워서?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신 나 하던 녀석이 도망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강제로 잡아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하나뿐이다.
"녀석······. 산토끼라도 발견하고 급하게 쫓아갔나 보구나. 허허···."
고기를 먹을 생각에 바구니도 급하게 내팽개치고 간 것이 틀림없다.
그래. 그것이 틀림없다.
모든 정황이 그리 말하고 있지 않나.
"허허······. 녀석 참."
베르가가 쏟아진 채소를 주섬주섬 주워담는다.
"허허······."
습관처럼 내뱉는 웃음에는, 어쩐지 불안감이 잔뜩 묻어나온다.
19화 마지막 마법사(2)
밤이 되었다.
히오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베르가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여 주변을 돌아봤지만,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콜록···."
찬공기에 괜히 감기만 얻은 것 같다.
"고얀 녀석아······. 늙은 스승 그만 걱정시키고 어서 오거라."
몇 분을 더 밖에서 서성였지만, 못난 제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베르가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근 이십여 년을 이곳에서 혼자 지냈음에도 오늘따라 왜 이리 허전한 것인지.
잠에 들기 위해 침대로 향한다.
침대에 누워 스스로를 다독였다.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 놈은 돌아올 것이다.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영감님 걱정했냐며 자신을 놀리려 들 테지.
그렇다면 크게 한 번 혼을 내주리라.
뭐, 녀석은 능글맞게 웃으며 넘어가겠지만 말이다.
······한데 만약 내일도 돌아오지 않으면?
애써 외면했던 불안감이 모여 작은 의문을 던진다.
혹, 이십여 년 전.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면?
던져진 의문은 파문이 되어 널리 퍼져나가고 베르가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본디 두 명이었던 이곳의 주인이 한 명이 되어 버린 그날, 베르가의 스승이 잔인하게 죽어버린 그날처럼 말이다.
여느 때처럼 음식을 구하러 밖에 나갔던 스승이 돌아오지 않은 과거의 그날.
별생각 없이 잠들었다 깨어나 스승을 찾으러 갔다 발견한 핏자국.
코볼트 영역으로 이어진 핏자국. 찢어진 로브 자락. 점점 흥건하게 보이는 핏물.
정신을 반쯤 놓고 쳐들어간 코볼트의 영역에서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왔던 그날.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결국 한참을 뒤척이던 베르가는 재차 밖을 향해 움직인다.
차가운 밤 공기가 몸 깊은 곳까지 찔러 들어와 기침은 점점 심해져 간다.
"콜록! 콜록···."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얼마나 후회했던가.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밤에 잠들지만 않았어도.
슬쩍 나가 보기만 했더라면 스승을 도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멍청한 베르가. 한심한 베르가. 게으른 베르가야.
어서 몸을 움직여라.
더이상 후회를 남기지 말아라.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히오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고.
텃밭에서 출발한 베르가가 기어이 다시 텃밭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핏발서린 눈으로 저 먼 곳을 쳐다본다.
웬만한 곳은 모두 둘러보았다. 허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가보지 않은 곳은 단 한 곳.
코볼트의 영역뿐이었으나.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텃밭에 있던 히오가 그 반대편인 코볼트의 영역까지 간다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기에 베르가는 고개를 절래 저으며 다시 집을 향해 힘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이 늙은이를 두고 어디 간 게냐. 못난 제자 놈아······."
홀로 산 지 이십여 년.
제자를 들인지 고작 두 달 남짓.
한데······ 무엇이 이리 허탈하고 서글픈 것인지.
* * *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날이 어둑해져 간다.
"히오야."
늙은 몸으로 찬 공기를 맞으며 밤새 돌아다닌 것은 너무한 무리였을까.
목이 갈라지고 열도 나는 것 같았지만, 제 몸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못난 제자 놈.
"히오야. 게 있느냐?"
몸을 간신히 일으켜 히오의 방문을 열어본다.
"······."
허나 베르가를 반기는 것은 텅 빈 방과 쓸쓸한 공기뿐.
베르가의 마음에 확신이 차오른다.
제자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침착하게 연유를 생각해본다.
첫 생각까지는 맞았을 것이다.
텃밭에 있던 히오가 갑작스레 뛰쳐나갈 이유는 작은 토끼라도 만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 이후.
토끼를 쫓는 것에 정신이 팔린 히오가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버리고 만다.
코볼트의 영역.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은······.
또 다시 그려지는 그날의 기억.
쳐들어간 코볼트의 영역에서 발견한 핏덩이.
여기저기 뜯어먹히고 짓뭉개진 핏덩이 사이에는 제 스승이 입던 로브 자락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꼴을 이번에는 자신의 제자가 당한 것이다.
"나쁜 놈들아."
비로소 베르가의 마음에 불이 붙는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아."
갈라진 음성 사이로 비통함이 새어나온다.
닳고 닳아 없어진 줄 알았던 마음에 슬픈 불이 번진다.
"내가···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더냐."
스승을 잃은 그날.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도망친 이후로 복수를 꿈꿨다.
마법을 대성하여 이 간악한 몬스터를 쓸어버릴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면 자연스레 스승이 원했던 위대한 마법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 이후로 이십여 년간 그가 이룬 것이라고는 홀로 떨어진 코볼트 몇 마리를 몰래 사냥하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원통하고 비통하다.
"히오야······."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으며 나가던 제자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남들에게는 고작 두 달일 뿐이지만, 이십 년을 마법과 복수에 미쳐 살던 이에게 두 달은 너무나도 따뜻한 것이었으니.
"제자야.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거라."
늙은 마법사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 * *
코볼트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영역 생물.
시각보다 후각과 청각에 예민하며 배가 극심하게 고프지 않은 이상, 영역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밤에는 활동하지 않지.'
깨어있을지언정 밖으로 나와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베르가의 이번 계획은 녀석들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볼트의 서식지인 동굴 입구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그 안쪽에도 불을 집어넣는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쉬운 계획.
하지만 이 계획을 지금껏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명확했다.
동굴 밖에는 당연하게도 코볼트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불을 붙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마법을 사용한다손 치더라도 원하는 만큼의 화력을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베르가의 힘으로는 두 마리 이상이 지키고 있는 동굴 입구를 뚫어내고 그런 불을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 방법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코볼트를 뚫고 입구에 불을 지를 수 있는 방법.
간단하다.
그들을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들이 제몸을 난도질 하든.
몽둥이로 후들기든 발로 짓밟든.
무엇을 하든 이미 불은 지펴진 이후일 테니.
그동안은 하지 못했다.
목표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마법을 알리겠다.
마법의 위상을 세우겠다.
스승의 꿈을 이뤄주겠다.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났다.
무엇을 이루었는가.
무엇이 변하였는가.
여전히 코볼트 한 마리 이기는 것도 버거우며 세상은 여전히 마법을 무시한다. 조롱한다.
이십 년간 공부하고 연구하였음에도 결국엔 제자리가 아니던가.
진한 무기력감이 온몸을 장악한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마법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스승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제자가 그리되었음에도 한다는 것이 고작 같이 목숨을 끊는 것.
그러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법은.
자신의 삶 그 자체였던 마법은.
평생의 염원이자 희망이었고 목표이자 원동력이었던 이 마법은!
사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것을.
이것을 조금 더 빨리 인정했더라면.
아집을 조금만 더 빨리 내려놓았더라면.
적어도 히오 만큼은 이런 멍청한 짓거리에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 아닌가.
적어도 이리 비참한 꼴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 아닌가.
"멍청한 베르가야. 한심한 베르가야."
터덜터덜 걸어가는 베르가의 모습에는 아무런 의지도, 의미도 없는 것이었으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이었나."
평생의 삶을 모조리 부정당한 자의 모습이었다.
* * *
태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달빛마저 희미한 밤.
베르가는 망설임 없이 코볼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들의 영역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싶은 건지 음습한 썩은 내와 함께 여기저기 뼛조각들이 보인다.
이곳.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 히오 또한 있을 터.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난 장소 역시 이 근처였다.
고작 코볼트 한 마리에 쩔쩔매고 있는 자신을 히오가 구해다 주었지 않나.
차라리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해하며 가버리지 그랬느냐.
돌이켜보면 두 달 동안은 많은 것을 잊었던 것 같다.
매일 밤 꿈에 나타나던 스승의 마지막 핏자국도 그에 대한 복수도.
마법을 증명해내겠다며 며칠 밤낮으로 지하에 틀어박히지도 않았고 끼니를 거르지도 않았다.
그제서야 문득 깨닫는 것이다.
'나는······ 그저 외로웠구나.'
핑계일 뿐이었다.
마법의 증명도 스승의 복수도.
외로움을 잊기 위한 핑계.
영감님 하며 부르던 그 목소리에.
마법을 바라보던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
평생의 목표와 평생의 복수가 희미해진 것을 보니 말이다.
- 크르르.
저 멀리 동굴의 입구가 보인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코볼트도 함께 보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맞바람이 불고 있기에 아직 냄새는 맡지 못했을 것이다.
딱히 상관은 없다.
비정상적으로 깡마른 몸 탓에 발소리 또한 아직 듣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상관없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
코볼트의 서식지에는 불이 날 것이고.
늙고 도망칠 힘도 없는데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쓰레기 같은 마법을 펼칠 뿐인 자신은···.
여기서 죽는다.
그뿐이다.
그러니 손에 든 기름통을 꼬옥 쥔다.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조금 더 접근한다.
평생을 함께한 마력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젠 정말 끝내자꾸나."
베르가의 중얼거림에 코볼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 크륵?
하지만 그 낮은 시력에 잡힌 것은 액체를 흩날리며 날아오는 통 하나.
그들을 지나쳐 동굴의 입구에 나뒹구는 통. 흥건해진 바닥. 조금씩 올라오는 기름 냄새.
그리고 곧 똑같은 통 하나가 더 날아오고 어쩐지 절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에게 부디 끝나지 않을 고통을."
훅- 밝아지는 주위.
"파이어."
코볼트를 향해 날아오는 세 덩이의 화염.
- 크르르륵!
두 마리의 코볼트는 황급히 그것을 피해냈으나 애초에 목표는 그곳이 아니었으니.
화르륵!
동굴의 입구에 불이 붙는다.
"파이어."
또 다시 날아온 화염구 하나는 동굴의 좀 더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다.
- 크르르륵!
- 크륵! 크르르르···.
급작스레 발생한 화염에 당황한 코볼트 두 마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곧 사건의 원흉을 찾아내었다.
늙은 인간 한 명.
- 크르륵!
녀석을 죽이자!
두 마리의 코볼트가 돌진해옴에도 베르가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의 시선은 동굴 입구에 못박혀 있었으니.
"파이어."
달려오는 코볼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동굴을 향해서만 불을 던져댄다.
그 멍한 눈빛에 담기는 것은 환하게 타오르는 불길.
그 위를 덮어가는 코볼트의 그림자.
가까워진 흉흉한 눈빛. 낡은 몽둥이.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베르가는 눈을 감고.
퍼석-!
마치 수박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20화 마지막 마법사(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