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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 수상쩍은 제안 (6) >

"각하, 이러면 좀 상황이 곤란해집니다만..."

기아다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비나쉬팀과 공화국이 서로 불가근불가원 하는 사이였지만, 저 이교도 제국과 맞설 때는 언제나 힘을 합했다. 동방인들은 둘 모두의 적이었던 것이다.

한창 저 멀리서 비나쉬팀과 치고받느라 정신이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 들어보니 바닷길을 통해 울카나 서쪽 해안가를 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비나쉬팀에 무력행사를 하기는커녕 저 이교도 놈들부터 걱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남쪽의 섬이 무사히 버티고 있지 않나?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비나쉬팀 놈들은 그리 잘 싸우지 못합니다."

기아다의 걱정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비나쉬팀 제국의 병사들은 그 숫자가 많이 줄고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최근에 있었던 몇 번의 졸전은 유명할 정도였다.

몇몇 부대를 제외하면 솔직히 전력으로 믿기 어려웠다.

"아시다시피 싸움이란 게 한 번 잘못 패배하면 밑도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릴 때가 있잖습니까. 그렇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알겠다. 주의하도록 하지."

요한은 기아다의 걱정을 받아들였다. 설마 그렇게 될까 싶긴 했지만, 기아다의 걱정에도 일리가 있었다.

여기서의 전투는 보통 소규모 접전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수십 명 정도가 기동하고 정찰하다가 부딪히면 싸우는 것이다. 서로가 크게 모여서 회전을 벌이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한 번 부딪혀서, 제대로 후퇴도 못할 정도로 패배한다면 그 주변 지역은 그냥 텅 빈 셈이 됐다. 순식간에 적들이 장악하는 것이다.

적들이 멀리 있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됐다.

'확실히 좀 캐묻기는 해야겠군.'

* * *

"통과!"

용병들은 해적들을 샅샅이 뒤졌다. 여기서 찾아내는 재산 하나하나가 용병들에게는 커다란 수입이었다.

해적들은 욕설과 함께 배 위로 올라탔다. 마음 같아서는 덤벼보고 싶었지만, 모인 병사들의 숫자와 무장한 상태를 보니 싸우지 않기를 잘 했다 싶었다.

"저게 예이츠 백작인가?"

"생각보다 젊은데? 그보다 전사답지 않게 생겼군. 상인처럼 생겼어."

"미친 놈 같으니. 조용히 해."

"어차피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기아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 해적 놈들이 살려줬더니 어디서 은혜도 모르고 지껄이는 거냐? 안 닥치면 혓바닥을 뽑아서 바다에 던져주마!"

"!!"

"그리고 백작 각하는 내가 아니라 저 분이시다!"

요한이 걸어 나오는 걸 본 해적들은 생각보다 훨씬 앳된 얼굴에 놀랐다. 스무 살 안팎 정도밖에 안 되는 애송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요한은 걸어오다가 시선을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 요한의 눈빛에서는 강렬한 영혼의 힘이 박동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해적들은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푹 숙였다. 마치 심장을 붙잡힌 기분이었다.

"문제는 없나?"

"예. 요새를 비우고 나오고 있습니다."

"귀족 놈 놓치지 않게 주의하도록."

요한과 용병들은 굳이 내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괜히 상대를 경계하게 했다가 밤에 몰래 도망이라도 친다면 일이 귀찮아졌다.

'사십 넘은 뱀파이어, 뺨에 흉터가 있고, 대머리라고 했나.'

인상착의를 알고 있었기에 상대를 찾는 건 쉬웠다.

"찾았습니다."

"체포해서 데리고 와라."

용병들이 와서 붙잡자 바쉬하르는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해적으로 위장한 호위들이 곧바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

요한의 노예병들이 활을 겨눴다. 노예병들은 쇠뇌뿐만 아니라 장궁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동부 부족들 덕분이었다. 수십 명이 넘는 궁수들이 활을 겨누자 호위들은 움찔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백작님?"

"귀족의 신분으로 그렇게까지 존대할 건 없소. 바쉬하르 공. 이쪽으로 오시오. 피를 보고 싶지는 않으니."

바쉬하르는 처음에는 경악했다가 그 다음에는 체념했다. 그는 순순히 나왔다.

"관습에 따라 권리를..."

"알겠소. 무기를 챙겨라."

"나의 주인께서 이 일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요."

"그쪽의 주인이 날 원래 좋게 생각했었나?"

요한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바쉬하르는 입을 다물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해적 몇 명이 물었다.

"바쉬하르 님. 그러면 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런 병신 같은 놈들이...!'

백작 앞에서 자기들을 고용하러 온 걸 대놓고 드러내는 멍청이들의 모습에, 바쉬하르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요한은 피식 웃었다.

"해적들을 고용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이겠군. 그렇지 않나? 북쪽으로 가라. 남쪽으로 가는 게 보이면 침몰시키겠다."

"..."

해적들은 수군거리더니 일단은 배를 출발시켰다. 저들 중에서 몇몇이나 명령을 따를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킬 이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몸값을 내면 풀어주시겠소?"

"물론."

요한의 약속에 바쉬하르는 일단 안심했다. 포로에 대한 관습은 동방에도, 대륙에도 다 똑같이 있었지만 종교가 다를 때는 예외였다.

신념은 가끔 황금도 무시하고 칼을 휘두르게 만드는 것이다.

"고맙소. 그러면 그 약속을 믿고..."

"각하! 전함이 나타났습니다!"

자리에 있던 이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바쉬하르와 호위들을 당장이라도 붙잡을 시선이었다. 바쉬하르는 당황했다.

이 근처를 노리고 있긴 했지만 함대의 준비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올라왔을 리가 없었다.

"아. 비나쉬팀의 깃발이군요."

"휴..."

바쉬하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자리에서 목이 매달리나 싶었던 것이다.

전함을 타고 온 비나쉬팀의 관리는 공손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 모습에 요한은 살짝 기꺼워졌다.

그러나 관리가 입을 열자 요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태도는 매우 공손했지만 전하는 말은 무례했던 것이다.

"여기서 꺼지라고?"

"각, 각하. 여기는 원래 비나쉬팀의 영토였습니다."

해적 같은 도적떼들이 근처의 섬을 점령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기껏해야 어부들이나 조그만 상선 정도만 습격하지 그 이상은 무리였으니까.

그러나 예이츠 백작이 공화국 함대와 함께 섬을 점령하는 건 그 이야기가 달랐다. 누가 봐도 본토로 올라오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함대가 왔다는 보고를 받은 가까운 항구의 총독은 깜짝 놀라서 관리를 보냈다.

-혼인 동맹을 맺기로 한 백작이 여기는 무슨 일로 왔단 말이냐? 당장 물러가게 해라!

총독도, 관리도 아직 요한에 대해 제대로 된 파악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게다가 소식도 늦었다. 혼인 동맹은 이미 파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짜란 게 들켰는데 어떻게 수습된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는 다르군. 브르뒤헤 공작이 용병을 고용해 점령한 다음부터는 브르뒤헤 가문의 영토였다. 호르마릭 공은 공작에게 상속 받았고, 그의 부탁을 받아 내가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지."

"아... 아니."

요한이 생각보다 훨씬 더 제대로 된 명분을 준비해 온 것에 관리는 당황했다. 애초에 신분만 따지면 그는 요한에게 비교할 수가 없었다. 하급 귀족 출신의 일개 관리와, 남부의 맹주인 영주 귀족 아닌가.

"그리고 혼인 동맹은 네놈들이 사기를 친 덕분에 끝장난 지가 언젠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예? 그게 무슨 말씀..."

"무슨 소리인지는 돌아가서 알아봐라. 내 비나쉬팀의 체면을 생각해서 벌하지는 않겠지만 한 번만 더 같잖은 소리를 했다가는 여기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꺼져라!"

요한이 호령하자 관리는 기겁해서 도망쳤다. 그리고 배에 올라탄 다음 서둘러 떠나...

...지 않았다.

관리는 수십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시 배에서 내렸다. 그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요한은 당황했다.

뭐지? 미친놈인가?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놀란 것 같았다. 저 수십 명 모두가 뛰어난 달인이 아니고서야...

자살하려는 걸까?

"각하! 알고 보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분노를 풀어주십시오!"

그러나 그 병사들을 이끌고 나온 건 습격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 나온 귀족의 호위와 하인들이었던 것이다.

아까 관리와는 다른,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나와서 넙죽 엎드렸다.

"공은 누구인가?"

"저는 세메누스라고 하는 미천한 자입니다. 각하! 도시의 재무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까 나온 관리가 대신 세메누스의 신분을 추가로 설명해줬다.

"세메누스 님은 총독 각하의 동생이십니다."

"아. 그러신가?"

"각하. 부디 저희가 각하를 대접해서 이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어드리게 해주십시오!"

"...?"

갑작스러운 초대에 요한은 당황했다.

'무슨 뜻이냐?'

쫓아내려 왔다가 안 통하자 도시로 초대하다니. 너무 노골적이어서 함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이렇게 함정을 파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 총독이 눈치가 빠릅니다."

"?"

"아마 각하께서 공격하실까봐 이러는 거겠지요. 잘 대접할 테니, 도시는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

기아다의 말에 요한은 상대가 뭘 원하는지 깨달았다.

비나쉬팀의 총독들은 황제에게 임명 받아 각 영지를 다스리는 관료였지만, 사실상 그 영지의 영주 비슷한 위치기도 했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공격받으면 누가 가장 손해를 많이 보는가? 바로 총독인 것이다.

그렇기에 총독은 사절을 보내면서 혹시 몰라 자신의 동생에게 명령을 내렸다.

-백작이 순순히 물러서면 다행이지만, 만약 물러서지 않는다면 네가 나서서 백작의 뜻을 캐내야 한다. 백작을 설득해서 도시를 공격하지 못하게 해야 해!

자기 도시만 건드리지 않으면 상륙해서 다른 곳으로 진격하든 뭘 하든 상관없다니.

요한은 비나쉬팀 총독들의 충성심에 감탄했다. 더 놀라운 건 기아다나 쟈니나도 저런 태도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총독이 협조해주면 더 편하겠습니다."

"저 자들이 함정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저치들이 말입니까? 하하하하하! 농담도... 아니. 진담이시군요?"

"함정은 누구나 팔 수 있지 않나?"

"절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지 않을 겁니다."

기아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실실 웃었다.

"만약 도시의 병사들이 습격이라도 하면, 각하께서는 한 팔로 병사들의 절반을 해치우시고, 저와 제 선원들이 남은 절반을 해치울 테니, 그 다음 유유히 배에 올라타서 빠져나가면 됩니다."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닌가, 기아다?"

"각하께서 보시면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알겠다. 어차피 내리기 전에는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으니..."

요한은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기아다는 두고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기아다의 말이 맞았다. 요한은 항구가 보이자마자 기아다가 왜 그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공화국 출신 상인들과 그들이 부리는 직원들. 또 하인들과 노예들. 미리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이 나와 요한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긴 백국의 도시와는 달랐다. 도시의 1/3이 넘는 이들이 비나쉬팀 사람이 아닌 외부인들이었다. 공화국에서 온 상인들부터 시작해서 흘러들어온 용병들과 여행자들까지 그 구성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도시의 큰 축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독이 멋대로 함정을 파려고 하면 당장에 배반자들이 수두룩하게 튀어나올 것이고 몇몇은 도시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군. 이래서 자신만만했나?"

"명예와 관습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 아무리 미친 짓을 저지르려고 해도 총독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의 총독은 영주와 비슷했지만 그 권한은 절대적으로 차이가 났다. 조금만 실수를 저지르면 시민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멀리서 초대 받고 온 백작을, 그것도 도시 일부의 강한 지지를 받는 백작을 불명예스럽게 습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 총독은 어떤 자인가?"

"저도 만나본 적은 없고 소문만 들어봤습니다만...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기가 아쉬운 입장이니 열심히 부탁을 하겠지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한 도시의 주인을 상대하는데 너무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지."

"정말 마음을 놓으셔도 될 것 같은데..."

* * *

"이게 다 어리고 철없는 황제 때문 아니겠습니까! 각하를 그렇게 모욕주다니.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뭐하느냐? 잔이 비었다. 따라드리지 않고!"

만나자마자 매우 친근하게 인사한 다음 자리에 앉히고 포도주 따른 뒤 황제를 욕하는 현란한 솜씨에 요한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 정도로 간도 쓸개도 빼놓은 채 덤벼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제 자식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제 자식이 조금만 더 쓸만했다면 각하께 보내드렸을 텐데."

"아니... 괜찮다."

농담으로라도 관심을 보여주면 정말 진지하게 혼담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아서 요한은 딱 잘라 거절했다. 총독의 외모는 자식이 기대되는 외모가 아니었다.

< 165 수상쩍은 제안 (6) > 끝

< 166 수상쩍은 제안 (7) >

총독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예이츠 백작과 개인적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든든했을 테지만, 보아하니 백작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당장 황실의 핏줄과 동맹을 맺을 뻔했는데 총독과 따로 맺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황제에 대해 불만이 많은 모양이군."

"불만이라니요? 이 정도는 불만 축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총독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한 말이 지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비나쉬팀에서 이 정도 표현은 일상적인 수준인 것이다.

'참 적응 안 되는군.'

봉건제인 신성 제국에서도 저 정도로 편하게 주군을 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요한은 신선함을 느끼며 총독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요한에게 포도주를 그렇게 따라줬음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먼저 취했다. 그는 살짝 혀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물... 물론, 물론. 황제 폐하에게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선대 폐하께는 신세를 많이, 졌기도 하고요."

"형님. 취하셨습니다."

"왜. 내버려두게. 재밌는데."

"..."

총독의 동생, 세메누스는 당황해하며 물러섰다. 보통 같이 마셨으면 한쪽만 취하는 일이 드물었다.

총독 본인도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고 심지어 요한의 잔이 빌 때마다 노예가 술을 가득히 따라주었는데...

"선대 황제한테 임명을 받았나?"

"예. 그랬지요. 그 때는 참으로...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두 분 다 미덥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비나쉬팀 고위 관리의 입에서 정황을 듣게 될 기회가 오자 요한은 흥미가 생겼다. 호르마릭이나 기아다의 말로만 파악하기에 비나쉬팀은 너무 크고 복잡한 곳이었던 것이다. 요한은 총독을 부추겼다.

"어디 한 번 시원하게 털어놔보게. 둘은 각각 어떤 사람인가?"

총독은 딸꾹질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이아로스 폐하는... 너무 쩨쩨하고 인색하신 분이십니다."

"쩨쩨하고 인색하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입고 계신 옷부터가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거친 녹색 옷을 입다니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옷을 염색시키는 염료는 귀한 물자였고, 구하기 힘든 색일수록 더욱 값이 뛰었다.

그리고 녹색은 구하기 쉬운 편에 속했다. 황제가 입을 만한 옷의 색은 아니었다.

"선대께서는 자리에 나오실 때면 언제나 자줏빛으로 몸을 감싸고 나오셨습니다. 그 뿔과 눈동자를 보면 영광과 후광이 느껴졌지요."

'거 검소해도 지랄이군.'

요한은 만나본 적도 없는 가이아로스한테 살짝 호감이 생겼다. 요한과 사고방식이 맞는 사람은 찾기 드물었던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세계의 사고방식은 요한과 달랐으니까.

귀족이 사치를 부리고 자신의 위엄을 뽐내는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돈이 없으면 당연히 빚을 내서 사치를 부려야 했다.

타고 난 핏줄과 권위가 있는데 그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는 자가 이상한 것!

검소한 귀족은 저런 식으로 쩨쩨한 구두쇠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요한처럼 교단을 업고 신실하단 소리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요한이야 신성 제국 쪽 사람이었으니 저게 가능했지 가이아로스 황제는 그런 것도 불가능했다. 황제의 자리를 받은 이상 그에 걸맞은 사치와 위엄은 무조건적으로 필요했다.

"가이아로스 폐하께서 등극하신 뒤부터는 연회도 줄어들었고, 심지어 그 줄어든 연회에도 잘 나오지 않으십니다. 검투사들의 대회도 줄어들었고, 전차 경기도 줄었고, 권투 경기도 줄었고, 연극도 줄었고, 또 뭐가 줄었더라..."

"그래. 즐길 거 줄어서 더럽게 슬프겠군. 자네의 슬픈 마음을 이해하네."

취한 총독은 요한의 비꼬는 말에도 감동을 받았다.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면 가이아로스 폐하는 뭘 하시나?"

"그냥 병영에만 계십니다. 황궁에서도 잘 안 머무르셔요! 아무리 군대에서 크고 자랐다지만 지금도 병사들과 같이 먹고 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예??"

"군인들과 노느라 정무를 안 보나?"

"아니, 정무도 거기서 보십니다."

'그러면 왜 지랄이야...?'

병사들 훈련시키고 제국 정무도 보면 '와, 저 황제 정말 열심히 일하는구나!'하고 감동해야지 불평만 해대는 총독의 모습에 요한은 어이가 없었다.

"여러모로 좀... 그냥 장군이셨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 선대 폐하와 비교하면 너무 볼품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키도 작고, 얼굴도 잘생기지 않았고, 대머리고..."

"...대머리는 왜?"

"품위가 없잖습니까."

총독은 매우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인기 많은 황제의 조건에는 화려함, 웅장함, 호감 가는 외모가 필수적이었다.

수많은 시민들 앞에 계속해서 나서면서 그들을 휘어잡고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가오알카나 폐하께서는 아직 너무 어리다는 것만 빼면 꽤나 믿음직스럽습니다. 훤칠하시고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계시죠. 품위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거 보니 혹시 이 분께서는 금화를 물 쓰듯 쓰시나?"

"잘 아시는군요. 폐하께서는 씀씀이가 크십니다."

"!?!"

농담 삼아 빈정거렸는데 총독이 냉큼 받자 요한은 당황했다.

"저번에 <성 율리니우스의 악령 토벌> 연극 때 뵈었는데, 호탕하게 금화를 뿌리시는 모습에 모두가 환호했었죠."

"그 금화로 병사들을 고용해야 하지 않나?"

"으하하하하! 각하. 농담도 잘 하십니다. 병사들은 따로 고용하면 되지요.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서 물을 안 마시지는 않잖습니까?"

요한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총독은 신이 나서 가오알카나의 행적들을 늘어놓았다.

동방에서 들여 온 가장 비싼 보석들로 만든 장신구들과 옷을 입고 연회를 주최했고, 공작새 배 안에 작은 공작새가 있는 창의로운 요리로 참가한 귀족들을 감탄시켰으며, 극단의 여자 무희들을 모두 애인으로 삼은 탓에 안에서 칼부림이 날 정도였다고...

요한이 듣기에는 폭군 그 자체였지만, 총독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로 수도의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성격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종장이 후견인을 맡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 레오아노스 공 말입니까. 예. 그렇지요. 아마 정무의 많은 부분을 레오아노스 공께서 맡고 계실 겁니다. 선대 때부터 일하셨던 분이고 또 워낙 많은 귀족들이 지지하고 계시니..."

"그러면 황실에서 거짓 제안을 한 것도 이 시종장이 엮여 있는 것 아닌가? 안 엮여 있을 수가 없는 것 같은데."

"어..."

총독은 갑자기 술이 깬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각하."

"시종장이 두려운 모양이군?"

"두, 두렵다기보다는 워낙 좀 성격이 불 같은 분이시다 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눈치부터 보는 걸 보니 두려운 게 맞는 모양이었다. 어린 황제들은 안 무서워도 성격 더러운 아랫사람은 무서운 법.

"저는 레오아노스 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각하.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레오아노스 공은 그게... 음... 정말 훌륭하신..."

주절대던 총독은 앞으로 고꾸라져서 이마를 탁자에 박았다. 술이 완전히 오른 모양이었다.

"총독 각하를 모시고 가라. 오늘 연회는 즐거웠다."

"감, 감사합니다. 각하."

* * *

날이 밝고 술에서 깨어난 총독은 허겁지겁 몸단장을 마친 후 다시 요한을 찾아왔다. 요한은 새 연회를 제안하는 총독을 말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접은 잘 받았으니 더 해줄 필요 없네. 병사들을 더 불러오고 싶은데, 총독의 의견이 궁금하군."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불러 오시지요."

요한에게 도시를 공격하거나 약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총독은 기꺼이 허락을 해줬다. 이제까지 요한이 쌓아 올린 명성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만약 참고 인내하지 않았다면 비나쉬팀의 황실이든 총독이든 요한을 협상 가능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위에서 질책 받지는 않겠나? 총독이 괜한 고초를 겪지 않았으면 하는데."

"각하...!"

요한의 말에 총독은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핑계를 대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니 말입니다. 금화를 써서 각하를 고용했다고 하면 됩니다."

'그게 통한다고?'

놀랍게도 충분히 말이 되는 변명이었다. 총독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총독이 허락했으니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함대가 섬과 본토를 오가며 병사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드워프들부터 시작해서 동부 부족들까지 비나쉬팀의 옥토를 밟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정예인데다가 중장병만 천이 넘었다. 켄타우로스들이나 동부 부족들까지 따지면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얼추 상륙이 끝나고 진영이 만들어지자 요한은 주변으로 정찰을 보냈다. 민첩하게 돌아다니던 척후병들은 놀라운 정보를 물어왔다.

* * *

"정신이 나갔소! 시종장!"

궁전의 홀에 모인 원로원의 귀족들은 삿대질을 하며 레오아노스를 공격했다.

"용의 핏줄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굴욕인데, 가짜를 준비했다니!"

고귀한 황가의 핏줄을 밖으로 내보내는 건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참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전례가 몇 번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오만한 귀족들도 시대가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짜를 용의 핏줄로 위장하려고 한 건 별개의 일이었다. 이게 알려진다면 도시의 가장 하찮은 자들까지 용의 핏줄을 비웃을 것이다.

"오해요."

"우리가 무슨 장님에 귀머거리인 줄 아시오!? 이미 환관들을 심문해서 이야기를 들었소! 당신이 후견인이라고 해도 이 일은 도를 넘었소! 물러나시오!"

"..."

레오아노스는 귀족들을 노려보았지만, 귀족들은 오히려 레오아노스를 겁박하듯이 마주 노려보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레오아노스였지만 이번 실책은 절대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도시의 시민들에게 알려진다면 모든 시민들이 레오아노스를 죽여야 한다고 들고 일어서리라.

'제길...'

요한이 쫓아낸 사절이 도착하기도 전에 소식을 전해 받은 공화국 상인들이 귀족들에게 먼저 말을 올리고, 그에 맞춰 젊은 황제도 호응하듯이 레오아노스의 책임을 물었다.

노회한 레오아노스도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한 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알겠소. 시종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칩거하겠..."

요한 때문에 궁지에 몰린 레오아노스였지만, 위기에 빠진 그를 구해준 것도 아이러니하게 요한이었다.

상륙 소식이 뒤늦게 따라 도착한 것이다.

"백작의 군대가 서쪽 해안가에 상륙했다고 합니다! 벌써 다케온을 점령했습니다!"

"!"

사실 점령이 아니라 협조였지만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야심찬 젊은 백작이 결국 상륙했다는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굳었다.

"예이츠 백작이 그리 야심가라고 하더니 결국에...!"

"지금 당장 지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산맥을 넘어오지 못하게 관문에 추가로 병사를..."

"관문은 이미 충분합니다! 백작이 산맥을 넘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위험한 건 연결된 해안가의 항구도시들입니다!"

비나쉬팀의 서쪽은 대부분이 산악지대라 통과가 여의치 않았지만, 해안가는 별개였다.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항구도시들은 그 자체가 통로이자 막대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내가 나서겠소. 감히 비나쉬팀의 땅을 밟은 백작을 몰아내고 대가를 치르게 하겠소."

"..."

레오아노스가 나서자 귀족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지른 죄가 있긴 했지만, 레오아노스가 나서준다는 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는 군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고, 개인적으로 영지에 고용한 병사들이 있을 뿐더러 뛰어난 장교들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아노스만한 인재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귀족들은 레오아노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산맥의 관문으로 향하는 걸 허락했다.

이렇게 레오아노스는 매달리거나 암살당할 뻔한 위기를 피해내고 수도를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레오아노스 공. 백작의 군대가 그 기세가 드높고 사납다고 합니다. 이 병사만으로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산맥의 관문만을 지키면 된다."

"...?"

"애초에 내 목적은 수도만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재수가 없어서 위험할 뻔했지만 밖으로 나온 이상 황제도 나를 함부로 대하진 못할 거다."

밖에 나가서 군대를 이끄는 장수는 황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 장수가 귀족들 사이에 깊게 뿌리를 내린 황족 출신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백작이 움직이면..."

"다른 도시들도 수비병들이 있다. 알아서 지킬 수 있을 거다."

항구도시들이 함락당하면 그건 그거대로 기회였다. 젊은 황제의 권위가 떨어지는 일이었으니까. 기회를 엿보는 그에게는 환영할 일이었다.

* * *

"황제가 밀사를 보냈다고?"

< 166 수상쩍은 제안 (7) > 끝

< 167 세 군대 (1) >

켄타우로스들은 밀사를 둘러싸고 고개를 끄덕였다. 붙잡혀 온 밀사는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켄타우로스들을 쳐다보았다.

반인반마의 난폭한 종족, 켄타우로스들은 신성 제국 동쪽으로만 흘러온 게 아니었다.

그들의 부족은 비나쉬팀의 북쪽으로도 흘러왔고 대다수가 소왕국들에 자리 잡아 냉혹한 약탈자로 변신했다.

비나쉬팀은 이들을 황금과 명예로 제어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켄타우로스들을 만나게 되다니.

밀사는 두려움에 차서 고대 제국어로 입을 열었다.

"저렇게 무시무시하고 난폭한 자들을 어찌하여 데리고 다니시는 겁니까?"

"뭐라고 지껄이고 있습니까?"

아클라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눈치로 그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이 무시무시하고 난폭하다는군."

"아니... 그런 칭찬을... 이 자, 사람 멋쩍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아클라다와 다른 켄타우로스들은 쑥스러워하며 좋아했다. 그들에게 난폭하고 무섭다는 것은 칭찬이지 모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태도에서, 밀사는 요한이 켄타우로스들의 충성을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국 출신 귀족치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어떻게?

"밀사로 왔으면 갖고 온 서신이나 내놓아라."

밀사가 꺼낸 서신은 황제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문양이 찍혀 있는 자줏빛 밀랍에서는 마법의 힘이 느껴졌다. 아마 황제가 갖고 있는 인장 반지의 힘이리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받으면 안의 내용이 불타버리는 건가?'

요한은 신기해하며 편지를 꺼냈다. 별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고 알아서 읽는 요한의 모습에서, 밀사는 요한이 고대 제국어를 능숙하게 말하고 읽을 줄 안다는 걸 깨달았다.

"...!"

소문과는 너무 다른 지적인 모습에 밀사는 당황했다. 솔직히 말해서 신성 제국 출신, 그것도 기사 출신의 귀족이 저 정도의 교양을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쿨리아와 이드라의 주인이자 지킬리드의 지배자, 일신교단의 기사이자 기수인, 뛰어난 전사인 예이츠 백작에게.

그대가 이런 편지를 받고 싶지 않을 것이란 걸 아오. 어쩌면 이 편지를 받자마자 시종의 목을 자를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백작에게 일말의 관대함과 자비가 남아 있다면 부디 그의 목을 내버려두시오.

이번 혼인은 짐이 원한 일이 아니었소. 짐이 무엇하러 용의 핏줄을 싸구려로 만들겠소. 시종장 레오아노스는 오만한 자요. 그의 전횡을 막을 수 없었던 걸 용서해주시오.

백작의 명예에 걸맞은 진실로 말하겠소. 황실에는 백작에게 보낼 명예로운 용의 핏줄이 없소.

"아니..."

어디서 누구라도 구해 와서 보내줘야 할 상황에 대놓고 없다고 배짱이라니?

여기까지 읽은 요한은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밀사는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요한이 어떤 부분에서 멈춘 건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게 누구라도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용의 핏줄은 단순히 용 수인족이나 황실과 연결된 피를 의미하지 않았다. 재위 중인 황제의 적자로 태어나 황궁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만큼 귀한 존재였고 숫자가 적었다. 그 중에서 또 대부분은 결혼했으니 보낼 만한 존재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달래러 밀사를 보내는데 '우리 그런 핏줄 없어서 못 보내겠다'라고 말하는 건 별로 좋은 선택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무리 진심을 담아도 상대가 믿지 못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 대신 약속한 지참금에 추가로 황금을 얹어 지불하겠소.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사절이 찾아갈 것이오.

"흠. 황금을 지불한다면야..."

"?!"

밀사는 당황했다. 요한이 너무 순순히 납득한 것이다.

상대가 납득해줘서 다행이었지만, 고귀한 비나쉬팀의 귀족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용의 핏줄이 그렇게 황금으로 납득될 정도로 싸구려란 말인가??

"왜 그러지? 거절해주길 원하는 표정인데?"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밀사는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자신의 표정 때문에 이 일이 그르쳐진다면 손수 목을 매달아도 모자랄 것이다.

"용의 핏줄에 그리 미련도 없고, 적당한 황금으로 보상한다면 나는 용서할 생각이 있다."

"...각하. 용의 핏줄은 고대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마법의 힘이 담긴..."

"그래그래. 그렇겠지."

"..."

'이래서 서쪽 놈들은!'

밀사는 속으로 신성 제국과 그 외 일신교도들을 욕했다. 하여간 전통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없는 야만인들다웠다.

요한은 마저 읽었다. 황금을 약속한 대신 뭐라도 부탁하나 싶었지만 그런 말은 없었다. 애초에 요한도 그런 부탁은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그 대신 시종장 레오아노스가 이끄는 부대의 정보가 상세히 들어 있었다. 염소 수인들은 특히 충성심이 부족하고, 시종장의 친위대는 어떤 자들이고...

"내가 그 레오아노스란 자를 이겨주길 원하는 건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각하."

"아무것도 모르기는 무슨. 어쨌든 알겠다. 돌아가서 네 주인에게 내가 긍정적으로 고민해보겠다고 전해라."

요한의 말에 밀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목이 잘리지 않고 저런 대답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무엇보다 예이츠 백작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컸다. 놀랍게도 예이츠 백작은 비나쉬팀의 옥토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용의 핏줄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게 그걸 증명했다.

그것만으로도 걱정을 몇 배는 덜어낸 기분이었다.

밀사가 돌아가고 나서 요한은 켄타우로스들에게 물었다.

"레오아노스란 자가 관문 요새에 도착했다고 하던데, 어때 보였나?"

"뚫기 힘들어 보였어요."

유클리아의 말에 다른 켄타우로스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를 뒤덮고 있는 광활한 산맥은 그것만으로도 천연 방벽의 역할을 해냈다.

산맥을 지나려면 그 사이로 나있는 고대 제국 가도를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비나쉬팀도 바보가 아니었다. 관문의 요새를 나름 철저히 준비해놓은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밖으로 나오지는 않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주변을 약탈해서 끌어내는 건 어떨까요?"

"여기 총독의 협조를 받고 있는 이상 그럴 수는 없고. 다른 도시를 약탈한다 하더라도 나올지가 의문이군. 들어보니 꽤나 노회한 자라고 하던데."

권력에 집착하는 늙은 귀족이 자기 것도 아닌 도시 몇 개 약탈당한다고 뛰쳐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꼭 공격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공격할 필요가 없다니! 놀러 왔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백인대장의 말에 동부 부족들이 성질을 냈다. 용병들과 달리 동부 부족들은 싸우지 못한지 너무 오래 되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저 절벽을 기어올라서 관문을 공격할 수는 없지 않소! 공성전이라도 하자는 거요?"

"..."

켄타우로스들도 차마 요새 벽에 들이박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황제가 서신을 보낸 이상 꼭 공격할 필요는 없긴 하지."

요한은 백인대장의 편을 들어주었다. 애초에 여기 온 목적은 달성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가짜 제안에 대한 보복과 배상을 받기 위해 이렇게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었는데, 상대가 먼저 굽혔다. 상대가 버티면 모를까 굳이 억지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쩌죠?"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겠지만, 그 때는 맞춰서 움직이면 그만이지."

산맥과 관문은 넘지 못해도 해안가를 따라 항구도시들은 얼마든지 약탈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 주둔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의미의 협박이었고.

"시간은 우리 편이니 기다리겠다. 병사들이 너무 나태해지지 않도록 주의해라. 혹시 모르니 꾸준히 관문 쪽을 정찰하고."

"예..."

"싸우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고."

"네..."

"관문 안에 있는 적들도 계속 안에만 있지는 않을 거다. 꾸준히 정찰을 나오지 않겠나? 너희들의 활약을 기대하겠다."

"예!"

요한이 달래자 켄타우로스들은 또 그 말에 솔깃해했다. 확실히 그랬다. 저들도 자기 땅인데 계속 전사를 보내지 않겠는가.

...요한의 예상은 틀렸다.

레오아노스는 관문 밖으로 정말 병사 하나 보내지 않았다. 총독이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오?'하며 투덜댈 정도로 얼굴 두꺼운 짓이었다.

최소한 도시에 사람을 보내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파악을 해야지...

* * *

"저 백작은 왜 가만히 있는 거냐?!"

바깥의 생각과 달리 레오아노스도 상당히 초조한 상태였다. 요한이 미친놈처럼 움직이며 약탈할 줄 알았는데 뭐라도 잘못 먹었는지 그냥 딱 자리를 잡고 움직이질 않았다.

비나쉬팀이 혼란스러워져야 레오아노스 본인도 움직이기 쉬워지는데 왜 저 백작은 한 달 넘게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사절이라도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으음. 어떻게 말이냐?"

"모욕을 하면..."

"!"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관문을 공격하면 그건 그거대로 좋았고, 분에 차서 다른 도시를 약탈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실로 좋은 생각이다. 놈을 조롱할 사람을 보내라!"

감히 백작의 군영으로 찾아가 백작을 조롱할 간 큰 자들이 선발되었다. 그들이 출발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 행상인들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군대의 깃발이 보였습니다! 이쪽으로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

"여기로 오고 있다고? 백작 놈이 겁이 없구나. 전투를 준비해라!"

레오아노스는 자신만만했다. 성벽 뒤에 숨으면 겁쟁이도 용감해지기 마련이었다. 요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레오아노스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저 이방인 백작을 패퇴시키고 꺾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이번 실책을 완전히 뒤덮고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 반란은 늦어져도...

"레오아노스 공!"

"무슨 일이냐?"

"백작 놈의 군대가 아닙니다!"

"백작 놈의 군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작은 왕국 놈들이 여기까지 내려오기라도 했다는 거냐?"

"아닙니다. 이교도 놈들의 군대가 여기 앞까지 와있습니다!"

"...?!??!"

* * *

"아니. 저 놈들은 어떻게 온 거지?"

요한은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교도 군대가 상륙해서 올라왔다는 보고를 듣고 황당해했다.

분명 남쪽에 요새화 된 여러 섬들이 있을 텐데 그걸 뚫고 올라왔단 말인가? 아직 멀쩡할 텐데.

"원해(遠海)로 빙 둘러서 우회를 한 모양입니다."

기아다도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저런 무식한 방법으로 북쪽으로 올라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만약 실패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돌아가려고? 아무리 비나쉬팀을 우습게 본다지만...

"각하! 각하!"

총독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는 요한이 떠나기라도 할까봐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위에 백작과 그의 병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는 핑계를 대려고 하긴 했지만, 정말로 용병으로 고용하게 될 줄이야!

"떠나시면 안 됩니다!"

"안 떠나네. 진정하고 말하도록."

"저들이 여기로 와서 모든 것을 불태우고 뺏어갈 겁니다. 제발 저와 저의 도시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총독은 황금을 쌓아 올려가며 넙죽 절을 올렸다. 요한은 총독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요한도 이 도시를 버릴 생각은 없었다. 공화국 상인들도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보급 장소였던 것이다.

"성벽에 병사들을 배치시키고 수비할 준비를 하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딱 삼일 후에 그 은혜를 잊었다. 이교도 군대가 도시는 내버려두고 산맥의 관문 쪽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총독은 속으로 후회했다.

'삼일만 기다렸다가 바쳐야 했는데...!'

물론 요한의 용병들이 도시에 와서 적들이 피한 걸 수도 있었지만, 막대한 황금을 잃은 입장에서는 그리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도시가 안전해져서 좋겠군. 총독?"

"정말 눈물 나게 기쁩니다... 각하..."

항구도시 살짝 남쪽에 상륙한 이교도들의 군대는, 몇몇 마을을 약탈하면서 바로 산맥의 관문으로 향했다.

뒤의 도시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진격하다니. 어마어마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무슨 배짱이지?"

"밖으로 나오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숫자가 많으니..."

상륙한 적들의 군세가 일만에 가깝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위압이 될 수밖에 없는 규모였다.

"관문만 뚫으면 가도를 타고 동쪽으로 쾌속하게 진격할 수 있습니다. 지휘관이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배짱이군요."

"황금 받으려고 왔는데 일이 복잡해지는군... 그런데 여기는 왜 공격하지 않은 거 같나?"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각하의 명성을 듣고 피한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도록."

< 167 세 군대 (1) > 끝

< 168 세 군대 (2) >

요한의 타박에 기아다는 민망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나름 진지하게 말했는데 요한이 너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여겼던 것이다.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요한이 백국과 반도 남부에서 보여준 활약을 생각해보면, 이교도들의 귀에 소문이 들어갔어도 놀랍지 않았다.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지는 법.

"으음. 그게 아니라면 도시보다는 관문이 중요해서 아니겠습니까?"

상대는 남쪽을 지키는 비나쉬팀의 요새를 뚫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바다의 섬들을 함락시키고 오지도 않았다. 이 모든 건 기습을 위해서였다.

기습의 생명은 속전속결.

관문만 뚫고 동쪽으로 진격해서 그쪽 영지를 점령할 수 있다면 해안가의 항구도시들은 필요 없다는 게 분명했다.

성공만 하면 어차피 나중에 점령할 수 있다!

"거 참... 과감하다고 해야 하나, 만용이라고 해야 하나..."

요한은 이런 자들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요한은 이리저리 따져보고 계산한 다음에도 조심스럽게 행동에 나서는데, 여기 사람들은 너무 겁이 없었다.

물론 요한도 수십 명의 적들 사이로 혼자 뛰어들 정도로 겁이 없어졌지만, 그건 나름의 판단과 계산이 선 뒤의 이야기였다. 다른 기사들은 그런 보장도 없이 뛰어드는 것 아닌가.

신이 가호해준다면 살아서 승리할 것이라고 그냥 믿는 것이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약 각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도시들이 공격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해안가의 도시들이 약탈당하거나 점령당했으면 공화국 입장에서도 재앙이었다. 무역로가 끊기는 건 물론이고 당장 이교도들이 올라오는 걸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비나쉬팀을 비웃고 견제하던 공화국이었지만 그들이 멸망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도시로 오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으로서는 움직일 필요가 없지 않나?"

"각하께서는 지금 움직일 필요가 없으시지요. 다른 자들이 애가 탈 겁니다."

일단 공화국은 지금 깜짝 놀라서 본국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저 밑의 섬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들은 뭘 하고 있길래 놓쳤냐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장 비나쉬팀 또한 정신이 없었다. 저런 기습을 당했으니 당연했다.

"총독. 보고가 도착하려면 얼마 정도 걸릴 거 같나?"

"이미 보고는 도착했습니다만?"

비나쉬팀의 수도는 동쪽 끝에, 총독의 도시는 서쪽 끝에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거리를 뚫고 전령이 도착하려면 아무리 가도를 따라 달린다 하더라도 일주일은 걸릴 텐데...

"그렇군. 마법을 쓴 건가? 어떤 마도구를 쓴 거지?"

"예? 아니요. 봉화를 썼습니다만."

"..."

비나쉬팀은 고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체계적이고 세련된 봉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저 먼 곳에서, 한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름 구체적인 보고 내용을 불꽃으로 전해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은 매우 민망해졌다.

'아니. 이건 좀 창피하군.'

봉화 생각도 못 하다니...

"공화국도, 비나쉬팀도 지원이 온다면 더더욱 먼저 움직일 필요가 없겠군. 병사들한테 곧 있을 싸움에 대비해 쉬도록 전해라."

동방 제국의 군대는 요한에게도 잠재적인 적이었다.

물론 요한이 '이교도 놈들 죽어라!'같은 식으로 그들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저들은 일단 요한을 '이교도 놈 죽어라!'하면서 싫어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요한의 상선을 보면 약탈할 것이고(이교도의 상선은 약탈해도 상관이 없었다), 저들이 점령한 곳에서는 무역도 힘들어질 터.

이 주변에서 활개 치는 걸 두고 봐서 좋을 게 없었다.

문제는...

'내가 내 군대를 이끌고 먼저 앞장서고 싶지는 않다는 거지.'

애초에 여기는 책임질 놈들이 여럿이었다. 당장 비나쉬팀도 있고 공화국도 있고 저 위쪽의 소왕국 놈들도 지원군 보내줄 수 있었고...

많고 많은 이들 중에서 가장 피해 덜 입는 요한이 자기 군대 이끌고 먼저 싸워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황 보다가 '이만큼 모였으면 한몫 거들어볼까'싶으면 그 때 끼어들어도 된다!

"각하. 관문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시종장이?"

요한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총독이 먼저 나섰다. 그는 요한의 손을 잡더니 말했다.

"각하. 시종장의 말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간교하고 교활한 자입니다!"

"..."

평소에는 레오아노스를 두려워하며 말을 조심하던 자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총독은 지금 혹시라도 요한이 군대를 이끌고 도시를 떠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물론 요한은 남들이 해야 할 일을 자기가 먼저 할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지만, 요한의 명성이 총독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교단의 기수이자 기사라면 이교도 군대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떠나시면 안 됩니다! 새로운 적의 함대가 언제 또 도착할지 모릅니다! 저 병사 자체가 양동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함대가 또 도착하면 그건 비나쉬팀이나 공화국의 함대가 병신이란 소리밖에 안 되는데..."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기아다가 옆에서 정색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화국 함대까지 병신 취급을 하다니?

"알겠다. 알겠어. 시종장이 아무리 부탁을 해도, 자네에게 말도 없이 도시를 떠나지는 않겠다. 설마 내가 미리 한 약속을 어기겠나?"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각하를 의심해서... 이교도 군대가 앞에 있으니 각하는 바로 말을 타고 쫓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날 뭘로 생각하는 거지 이 작자는?'

시종장이 보낸 사절은 곧 들어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다.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알고 있나봅니다."

"들어라, 촌놈에 야만인인 예이츠 가문의 덜 떨어진 저능아야!"

"...?"

"????"

자리에 있던 이들은 분노하기보다는 놀랐다. 정말 생각치도 못한 외교적 수사였던 것이다.

"비나쉬팀은 협조 요청을 저렇게 하나?"

"아... 아니. 각하. 저도 저건..."

"당장 이 땅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더 듣고 싶었지만 켄타우로스들이 먼저 달려와서 발굽으로 사절들을 짓밟았다. 안 그래도 손발이 근질근질한데 웬 같잖은 놈이 주인을 모욕하니 분노가 치솟은 것이다.

"죽이지 마라. 물러서라!"

켄타우로스들은 씩씩대며 물러섰다. 요한은 엉망진창이 된 사신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 주인한테 가서 전해라. 날 모욕하기 전에 이교도들한테서 자기 목숨이나 먼저 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사신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물러섰다. 두들겨 맞은데다가 죽을 뻔한 자리에서 살아 나온 덕분에 무슨 말인지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요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돌아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 * *

"도시를 공격하지 못한 게 영 아쉽구나."

"물크 가문의 조언은 들어서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예헤만은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헤만은 난폭하고 용맹한 전사였지만 멍청이는 아니었다.

상륙했을 때 가장 먼저 노리려고 했던 도시에 모르는 깃발의 군대가 있자, 예헤만은 사람을 풀어 상대를 확인했다. 들어보니 저 서쪽의 기사인 예이츠 백작의 깃발이라는 것이다.

-물크 가문의 귀족한테 들었습니다. 예이츠 백작은 젊지만 무시무시한 전사라고 합니다.

뛰어난 전사와 맞붙어 승패를 가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예헤만은 포기하고 군대의 방향을 틀었다.

어차피 식량은 아직 충분했고 근처 마을들을 약탈한 덕분에 사기도 높았다.

"관문을 함락시켜라! 이 요새를 함락시키면 아무도 해내지 못한 업적 위에 내 이름이 새겨지리라!"

동방 제국도 신성 제국처럼 봉건제로 굴러가는 국가였다. 황제의 자리에 앉은 술탄 밑에 수많은 귀족들이 얼기설기 엮여 있었다.

동방 제국은 난폭한 정복자였고 새로 점령한 땅들을 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보상은 귀족들을 다시 전장에 나서게 만들었다.

비나쉬팀은 가장 풍요로운 땅. 예헤만 밑으로 병사들을 끌고 온 귀족들은 비나쉬팀의 부(富)에 눈이 멀어 있었다.

"각하! 내가 앞장서겠소!"

"아니, 이 내게 선봉의 영광을 주시오!"

예헤만은 기세 좋게 나서는 기사들을 앞으로 세웠다. 귀족인 이상 선봉으로서 큰 공을 세우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양보하셔도 되겠습니까?"

부관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예헤만은 피와 영광에 집착하는 전사였다. 그런 걸 다른 이들에게 돌리다니.

"어차피 성벽을 넘지도 못할 거다."

예헤만은 앞장서는 기사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서쪽의 일신교도들은 보통 용병들을 고용해서 전투원으로 삼았지만, 동쪽의 이신교도들은 닥치는 대로 징집해서 전투원으로 삼곤 했다. 아무나 붙잡은 다음 몽둥이나 창을 들려주면 그냥 뚝딱 완성되는 것이다.

덕분에 그 질은 천차만별이었다. 지금 군대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지만 쓸만한 병사는 절반도 안 된다는 걸 예헤만도 잘 알고 있었다.

"저놈들은 성벽 안의 놈들을 지치게 만들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안의 놈들이 지치고 겁먹고 굶주리면 그 때 나와 내 부하들이 나설 거다."

앞장서는 기사들이 듣는다면 분노할 소리였지만, 예헤만은 여기 있는 기사들에게 아무런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저들도 예헤만에게 충성심 따위는 갖고 있지 않듯이 말이다.

여기 있는 이들은 서로 약탈하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모인 이들일 뿐.

"나팔을 불어라! 계속해서 앞으로 보내! 뒤로 도망치는 자들은 모두 베어버려라!"

* * *

"겁먹지 마라! 저 이교도 놈들에게 불과 벼락을 끼얹어줘라!"

레오아노스는 주변을 돌며 외쳤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만큼 상대가 격렬하게 몰아붙인 것이다.

질과 상관없이 숫자는 그 자체로 무기였다. 성벽 위의 화살이 떨어질 정도로 달려드는 공세에 수비병들은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레오아노스 공. 화살이 전부 떨어졌습니다. 동쪽 성벽이 무너졌는데 기술자들이 수리에 나서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지원은 언제 오는 겁니까?"

"..."

레오아노스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상황이 너무 곤란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제기랄, 백작 놈을 모욕하는 게 아니었는데!'

저 이교도 놈들은 목적부터가 달랐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오든 간에 무조건 요새를 함락시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요한을 만만하게 봤던 그였다. 하지만 상대가 이교도 군대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바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건 정치적 자살이었다. 안 그래도 한 번 실수한 상태에서 그랬다가는...

믿을 건 지원군밖에 없었지만 지원군이 언제 올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가 정말 나설지도 의문이었고.

차라리 공화국이나 소왕국들, 혹은 가장 가까이 있는 저 백작의 군대에 지원을 받는 게 가장 그럴듯해보였다. 그래도 저 이교도 놈들 앞에서는 한 편 아닌가.

...문제는 그가 하필이면 최근에 요한을 모욕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하고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백작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으리라.

"찾아갔던 사신의 목을 잘라서 보내라. 백작에게 오해가 있었다고 전해라!"

레오아노스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짜냈다. 야밤을 틈타 황금을 챙긴 밀사가 애꿎은 사신의 목을 잘라서 달려 나갔다.

요한은 황금은 받았지만 군대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뒤 돌려보냈다.

레오아노스는 다시 한 번 밀사를 보냈다. 요한이 세웠던 업적들을 칭송하고 명예를 다시 한 번 칭송한 다음, 군을 이끌고 참전해준다면 그 명성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문구가 밀서에 담겨 있었다.

요한은 또 한 번 황금만 챙기고 돌려보냈다.

레오아노스는 마지막으로 밀사를 보냈다. 자신의 자식과 혼인을 맺고 동맹을 맺자고.

언젠가 자신이 미는 귀족이 새 황제가 된다면 요한에게도 탐스러운 영지들이 떨어질 것이고, 동시에 비나쉬팀의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직위가 요한에게 주어지지 않겠냐고 시종장은 주장했다.

황금도 명예도 통하지 않는다면 야심을 자극해보려는 시도였다. 이것도 안 통하면 레오아노스는 몇몇을 데리고 관문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저 멀리서 지원군이 나타났다.

"살았다!!"

수비병들 사이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지치고 다친 이들은 엉엉 울며 신에게 감사를 올렸다. 레오아노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레오아노스 공. 백작에게 정말..."

"정말로 줄 것 같나? 그럴 자식도 없을 뿐더러 그럴 생각도 없네. 나중에 속았다는 걸 알게 되어봤자 백작이 어쩌겠나?"

레오아노스의 말에 시종이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인에게 그렇게 내준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어... 깃발이..."

"??"

레오아노스는 성벽 위에 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장 오른쪽에는 예이츠 백작의 깃발이 있었다. 성스러운 교단의 상징이 들어 있는 깃발이었다.

그리고 왼쪽에는 공화국의 깃발이 보였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공화국이 참전하는 건 말이 됐다.

마지막으로 가운데에는 용이 그려진 깃발이 있었다.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깃발이었다.

"..."

레오아노스는 돌아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 168 세 군대 (2) > 끝

< 169 세 군대 (3) >

쟈니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몇 백 명 정도의 병사들이 오고 가는 건 자주 봐왔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리에 모여 있는 건 처음 보았다.

지평선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병사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적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수백 개가 넘는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전장에서 개개인은 티끌 같은 존재였다. 신묘하고 정확한 전술로 전장을 휘어잡는 지휘관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것이었고, 실제로는 훨씬 더 난잡하고 엉망진창이었다.

싸우는 도중에는 누가 이기는지 알 수 없고, 가끔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누가 이겼는지 알기 힘든 것이 바로 회전(會戰)이었다.

기사들이야 기꺼이 티끌이 되어 흙먼지 사이를 달려 나가겠지만 쟈니나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이 없나 머리를 굴렸다.

"각, 각하.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그래 보이는군."

"도시에..."

"있을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따라 나오다니. 충성스러움이 날 감동시키는군."

요한은 쟈니나가 '도시에 돌아가 있으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려는 걸 원천차단했다. 쟈니나는 울상이 되어 물러섰다.

쟈니나가 수에틀그나 카에네르나만큼의 마법사는 아니어도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언제 필요한 일이 생길지 몰랐다.

'근처에서 몬스터를 끌어 올 수도 있고.'

사제들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요한은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아클라다. 후퇴 신호를 보내면 후퇴해야 한다. 알고 있겠지?"

"...기사님. 지금 그거 열 번째로 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열 한 번째로 말하지. 후퇴 신호를 보내면 후퇴해라."

"왜 저희한테만..."

"정말 몰라서 묻나?"

요한의 말에 아클라다와 유클리아는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 전장에는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자기 가문의 깃발을 걸고 모여 있었다. 적도,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통일되고 일사불란한 지휘는 당연히 불가능했고, 총지휘관이 뭘 전달하려고 해도 한참 걸리거나 실패할 때가 많았다.

결국 각자 알아서 구역을 나눈 다음, 각자가 알아서 잘 싸워야 했다.

요한이 맡은 부분은 우익.

드워프 용병들이나 노예병들은 제멋대로 굴 것 같지 않았지만 동부 부족들이나 이젤리아가 이끄는 기병들이 걱정이었다.

보병들과 달리 기병들은 한 번 튀어나가면 복귀 명령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동부 부족들은 호전적이기로 유명했고 이젤리아가 이끄는 기병들도 기사 못지않게 돌격을 좋아했으니...

이젤리아와 용병 기병들은 요한이 직접 거느리고서 통제를 할 생각이었다. 잘 갖춰 입고 중무장한 기병들은 한 번 돌격하면 그대로 전열을 찢어발기는 위력을 갖고 있었고, 그만큼 중요한 순간에 투입되어야 했다.

하지만 동부 부족들은 경쾌하게 돌아다니며 적들을 교란하고 추격하는 역할이 어울렸다. 상대적으로 가볍게 입은 대신 그들은 뛰어난 궁술과 승마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자. 나팔을 불면?"

"후퇴합니다! 아, 정말. 제 검과 활에 대고 맹세하겠습니다. 결코 눈 돌아가서 쫓아가지 않겠습니다!"

"저도 맹세하겠어요."

켄타우로스들의 맹세를 들은 요한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라면 믿을 만했다.

요한은 용병대장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여러 종족의 백인대장들이 흥분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잘 들어라. 이건 남의 전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쓸데없이 만용을 부려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놈은 없으리라 믿는다. 받은 값만큼만 하면 된다. 알겠나?"

요한의 말에 용병들은 씩 웃었다. 이런 식으로 말할 때면 저 대단한 백작이 정말 귀족 출신인지 아니면 그냥 용병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괜한 격려나 외침보다 저런 말이 훨씬 더 든든하다는 점이었다.

* * *

요한이 나선 건 레오아노스의 밀사 때문이 아니었다. 레오아노스가 한 제안들은 요한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각... 각하. 저건 솔직히 좀 탐이 나지 않으십니까?

-별로. 비나쉬팀에 별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저 자가 정말로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저 중에서 일부만 지키더라도 남는 장사입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지키지 않을 수도 있겠군.

-설마... 설마 그러겠습니까?

-뭐든 간에 선금을 받기 전에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네. 한 번 속았으면 됐지. 황금을 챙기고 사신은 돌려보내라.

기아다가 솔깃해했지만 요한은 칼 같이 자르고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그런 요한의 생각을 바꾼 건 다른 이들이었다.

-공화국 출신, 주스반이라고 합니다. 각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네도 공화국 출신, 용병대장 주스반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 것이다.

-주스반은 저희 공화국의 이름 높은 군인 가문 출신입니다. 아마 본국의 지원을 받고 온 게 분명합니다.

멀지 않은 북쪽에 공화국의 영지도 있었다. 이교도들의 습격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신속하게 군대를 고용해서 내려오다니.

-주스반은 비나쉬팀 내에서 부마관의 직위를 받을 정도로 신뢰 받고 있는 자인데, 그런 자가 여기 온 걸 보면 아마 비나쉬팀과 이야기가 오간 것 같습니다만...

기아다의 예측은 맞았다. 주스반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고 나서 하루 뒤에, 비나쉬팀의 황제가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북쪽 가도를 타고 달려왔다지만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황제는 관문으로 향하는 대신 우회해서 주스반과 합류했다.

그리고 주스반과 함께 요한을 찾아와 설득에 나섰다.

-적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소. 참전을 부탁드리겠소.

-각하.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이교도들과 같이 싸워주십시오.

둘의 군대를 합치면 4천에서 5천은 되었지만 적들의 규모와 비교하면 여전히 불안했다. 그들은 정예인 요한의 병사들을 반드시 참전시키고 싶어 했다.

-폐하께서 약속하신 황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황금의 세 배를 갖고 왔소.

-참전해서 싸우겠습니다. 같은 신앙의 형제이니 말입니다.

비나쉬팀은 정말로 황금이 많았다. 화끈한 제안에 요한은 화끈하게 응답했다.

요한이 바로 즉답하자 황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쉬운 입장이었으니 황제와 주스반은 감사의 말을 하고 물러섰다.

그리하여 공화국과 백작, 황제의 군대가 완성되었다. 그들은 위풍당당하게 관문으로 향했다.

* * *

"정말 믿을 수 있는 자인가?"

"저를 믿어주십시오. 폐하. 예이츠 백작은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주스반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일단 너무 젊었다. 황제는 요한의 소문만 듣고 사십을 넘은 백전노장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황제 못지않게 젊지 않은가.

주스반은 좌익을 이끌기 위해 돌아갔다.

황제가 총지휘관이긴 했지만 좌익이나 우익에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주스반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용병들은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다.

"주스반이 짐을 속이는 건 아니겠지?"

주스반은 친 비나쉬팀적인 귀족이었지만 그렇다고 공화국을 희생해서 비나쉬팀을 도와줄 사람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배신은 일어날 수 있었다.

황제를 모시는 늙은 환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문과 달리 너무 젊지 않나. 그런데 저런 평가라니. 공화국이 짐을 속이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어린 시절부터 군에서 생활한 사람답게 황제는 지휘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잘 알았다. 요한처럼 젊은 나이에 그만한 전공을 세우는 건 믿겨지지가 않았다.

"공화국은 폐하를 속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절대란 건 없지 않나."

"만약 수상쩍은 짓을 한다면 제가 나서서 직접 주스반 경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환관의 말에 그제야 황제는 표정을 풀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황제를 보필하는 건 환관과 부관들이었다. 그들의 노련한 경험은 황제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좌익과 우익은 자리를 채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 직접 키운 병사들을 믿으십시오. 그들이 해결할 것입니다."

"알겠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주스반이나 예이츠 백작에게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적의 중앙을 짓밟고 붕괴시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와 그가 이끄는 친위대가 되리라.

요한이 들었다면 서로 생각이 통했다며 기뻐했을 생각이었다.

* * *

양측은 갑작스럽게 회전에 돌입했다. 서로 인사도, 전투 전의 결투도, 탐색도 없었다.

적들이 뒤에서 다가오는 걸 발견한 동방 제국의 귀족들은 사납게 외치며 돌격에 나선 것이다. 좌익과 우익 쪽에서 여러 부대의 기병들과 보병들이 튀어나오며 교전이 벌어졌다.

"드워프들 앞으로! 각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물러서지 마라!"

"너희의 목숨을 가진 주인을 생각해라! 은혜를 갚을 때다!"

위에 걸친 복식은 달랐지만 무기나 갑옷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체인메일을 입고 롱소드를 든 적 기병들이 전열을 짓밟기 위해 돌격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버텨냈다. 쇠뇌와 화살이 집중적으로 기병들을 후려쳤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몇몇 이들이 쓰러졌다.

그러자 요한이 나섰다. 뒤에서 병사들이 갈라지더니 요한과 이젤리아가 이끄는 기병들이 사납게 뛰쳐나왔다.

"백작이다! 백작이다! 잡아라!"

요한의 깃발을 보고 신분 높은 자라는 걸 깨달았는지 이교도 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에게 닿기도 전에 이젤리아한테 목이 날아갔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

요한은 미쳐 날뛰는 이젤리아와 말머리를 맞추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젤리아. 진정해라."

"흥분하지 않았다만?"

"아. 그렇군..."

놀랍게도 피칠갑이 된 이젤리아의 얼굴은 매우 평온해보였다. 그저 엘프의 전투 함성일 뿐이었다.

다시 한 번 적들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요한이 먼저 나섰다. 거인살해자가 휘둘러지자 육편과 유혈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순식간에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악마■■■ ■■■■!"

사투리 섞인 동방어 때문에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잘 몰랐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짐작이 갔다.

요한은 워해머를 휘두르며 열심히 적들의 머리통을 수확해나갔다. 돌격하고 빠지고, 돌격하고 빠지고를 다섯 번 반복했을 때 주변의 적들은 와해되어 후퇴하고 있었다.

"적들이 후퇴한다!"

"전열 재정비! 전열 재정비!"

"다친 놈들은 뒤로 빠져!"

"각하. 놈들을 끌어내겠습니다!"

"아클라다. 약속한 걸 잊지 마라."

"예!"

동부 부족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섰다. 그들은 전장을 넓게 활용하며 내달렸다. 후퇴하는 이들의 등판에 화살이 박히고, 진영 안쪽에 있던 자들의 머리통에도 화살이 박혔다.

분노해서 뛰쳐나온 이들은 그대로 먹잇감이 되었다. 적들의 깃발 대여섯 개가 부러지고 무리들이 흩어졌다. 그러자 우익 쪽에서는 한동안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적들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거겠지."

요한은 몰랐지만, 적들은 겁을 먹고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전진 명령을 내릴까요?"

"아니. 보조를 맞추도록."

괜히 혼자 전진했다가 다른 아군이 지기라도 한다면 제아무리 요한이라도 후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답답하군. 다른 쪽에서는 이기고 있는 게 맞나?'

요한은 흙먼지 가득한 전장을 둘러보며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여기서 알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건 가까운 중앙 쪽의 싸움 정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보지 못했을 테지만 축복을 받은 요한의 시야는 흙먼지를 뚫고 상황을 파악했다. 적의 깃발들이 정신없이 가운데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위험 신호였다.

"중앙으로 지원을 가겠다! 따라와라!"

요한은 기병들 중 덜 지치고 날랜 자들만을 뽑아 내달렸다. 정신이 팔린 적들의 옆구리를 물어 뜯어줄 생각이었다.

* * *

"여기서 황제를 잡으면 세상의 모든 영광이 경들에게 들어갈 것이다!"

예헤만이 외치지 않아도 칼과 창을 든 모든 귀족들이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덤벼들고 있었다.

충성 높은 황제의 친위대는 살벌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버티고 있었지만 적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 전장에 모인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 전부 황제를 잡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돌격해서 무너뜨려라! 돌격해서 무너뜨려..."

시끄럽게 고함치던 귀족 한 명은 뜨거운 전장의 열기 속에서 한 줄기 서늘함을 느꼈다.

뭐지?

< 169 세 군대 (3) > 끝

< 170 세 군대 (4) >

그건 요한이었다.

"뭐냐? 누구냐?"

"■■■ ■■?"

한 무리의 서쪽 기사들이 벼락 같이 찔러 들어올 때만 해도 전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기습을 당했다고 무너지기에는 그들의 사기가 너무 높고 사나웠던 것이다.

그들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맞서 싸웠다. 호전적인 함성이 요한을 맞이했다.

요한은 그런 전사들을 쓰러뜨리며 전진했다.

이 자리에는 아버지 신과 어머니 신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전사들만 모여 있었다.

흙먼지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형형색색의 깃발들은 이 전사들이 얼마나 고귀한 가문 출신인지를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 깃발을 단 전사들이 창으로 요한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살기 섞인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요한은 그런 전사들을 짓뭉개며 전진했다.

오늘 비나쉬팀의 기사 세 명을 쓰러뜨리고 예헤만에게 비단과 목걸이를 받은 가르핫지가 날카롭게 빛나는 창을 들고 요한에게 덤벼들었다. 친위대의 백인대장을 쓰러뜨리고 작은 깃발을 노획한 모브라힘도 전투용 도끼를 들고 요한에게 덤벼들었다. 술탄의 호위노예 출신으로 그 검술

을 따라올 자가 없다는 이가르도 롱소드를 뽑아들고 덤벼들었다.

요한은 그런 전사들을 도륙하며 전진했다.

"■■■! ■■ ■■■ ■■■!"

"지원을! 미친 ■■ 놈이 나타■■!"

깃발 달린 창대란 창대는 모조리 꺾여나가고 이름 높은 전사들이 단칼에 유명을 달리하자 다른 쪽에 있던 전사들도 슬슬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좌측에서 기습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냐? 기껏해야 한 무리에 지나지 않는 놈들이다. 아무리 황제에 눈이 팔려 있어도 그런 기습에 당해? 병사들을 내줄 테니 가서 막아라!"

예헤만의 부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 나갔다. 예헤만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아무리 공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저런 기습에 당하다니.

여기 중앙은 정예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저런 기습에 당해 흔들렸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

전황을 기다리던 예헤만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이 믿겨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한 사람 앞에 전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기골이 크고 장대한 서쪽 기사 하나가 기형적일 정도로 거대한 워해머를 휘두르자 주변에 있는 전사들은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 나뒹굴었다.

갑주 위로 맞으면 몸이 제 꼴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박살이 났고 방패로 막으면 방패째로 박살이 났다.

처음에는 용맹하게 맞서 싸우던 동방의 기사와 전사들이 곧 의욕을 잃고 도망치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요한이 돌격한 곳을 중심으로, 구멍난 둑으로 물이 새어나오듯 진형이 허물어졌다.

"악마가 나타났다! 서쪽의 이교도 놈들이 악마를 데리고 왔다!"

"신들이시여! 저 악마를 치워주소서!"

서로 등을 돌리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자 전열은 더욱 더 빠르게 무너졌다. 요한은 피를 탐하는 바이콘을 재촉하며 맹렬히 적들을 쫓았다.

예헤만은 분해서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강하고 사납던 중앙의 정예들이 병 걸린 개새끼들마냥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황제의 진영까지 치고 들어갔을 전사들은 기습을 당해 자기 깃발 간수하는 데에도 벅차하고 있었다.

황제의 깃발이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황제의 친위대가 간신히 진형을 재정비하고 황제를 뒤로 빼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황제를 잡기는 글렀다고 봐야 했다.

"예... 예헤만 님."

"후퇴 명령을 내려라! 진영으로 후퇴해서 다시 집합한다!"

전장에서 오래 구른 기사답게 예헤만은 상황을 직감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상처만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저 무시무시한 서쪽의 기사 놈이 이끌고 있는 기병 무리는 악몽 같은 전투력으로 진형을 헤집어 놓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후퇴하려면 지금 해야 했다.

정신을 차린 황제의 친위대가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공격하면 차원이 다른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후퇴! 후퇴해라!"

거슬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중앙의 전사들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황제의 천막 앞까지 도착했으면 분하고 억울해서 미적거릴 법도 했지만, 그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주변을 휩쓰는 요한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도주했다.

마치 썰물 때처럼 이교도 전사들이 뒤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요한이 쫓아올까봐 겁을 먹은 채 힐끗거리며 말을 몰았다. 말을 타지 않은 자들은 갑옷과 무기를 벗어 던지고 내달렸다.

"뭐야, 끝났나?"

"적들이 후퇴하고 있다! 그대여. 추적할 건가?"

"이 인원으로? 농담하는 건가?"

방금까지 미친놈처럼 날뛰던 요한이 그런 말을 하자 이젤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이 인원으로 다시 돌격하는 건 좀 무리긴 했다.

요한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이들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젤리아의 군마도 피곤한 기색이 가득해보였다.

공이라면 방금 넘치게 세웠다. 정확히 얼마만큼의 적을 쓰러뜨린 건지는 이젤리아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느낌이 왔다. 이 주변을 제대로 타격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요한의 얼굴에 묻은 피와 땀을 닦아냈다.

"아. 고마워."

"이 정도 일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요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한의 군대가 있는 우익 쪽에서는 더 이상의 싸움이 없어 보였고, 좌익 쪽에서도 적들이 물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추격은 없나.'

후퇴하는 적의 등을 노리는 건 전술의 기본이지만 그것도 때에 따라 달랐다. 상대는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진형을 갖춘 채 물러서고 있었다.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쫓기 위험했다.

'오늘 싸움은 여기까지인가?'

요한은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 * *

"대승입니다, 각하! 대승!"

"대승까지는 아니지 않나?"

"이게 대승이 아니라면 모든 승리가 값어치 없게 느껴질 겁니다! 겸손은 미덕이지만 도를 지나치면 다른 사람들까지 부끄럽게 만들 겁니다. 각하."

공화국 출신 용병대장 주스반은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외쳤다. 꽤나 크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으로 가득 차 보였다.

전투의 승리 덕분이었다.

용병대장 본인도 다쳤을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중앙 쪽에서는 황제가 포로로 잡힐 뻔했고, 좌익 쪽은 상대의 돌격으로 그대로 무너질 뻔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적들이 훨씬 더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그들은 승리했다. 적들은 먼저 물러섰고, 요새 앞의 진영을 포기했으며, 다른 쪽으로 후퇴한 것이다.

요한이야 총사령관을 붙잡아야 대승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들까지 그러지는 않았다.

적들을 어떻게든 몰아내고 이겼으면 대승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각하의 용맹을 들었습니다. 혼자서, 단기필마로 중앙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과장이 심하군. 다른 기사들과 기병들과 같이 돌격했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십니다. 각하의 돌격이 아니었다면 중앙이 무너졌을 겁니다."

주스반은 흥분을 달래기 위해 독한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좌익을 지휘하느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중앙 쪽에 있던 친위대나 다른 병사들에게서 전투가 끝나고 말을 들은 그였다.

-이교도 놈들이 사방에서 덤벼들고 포위된 것 같길래 다 뒤졌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기사들이 달려와 놈들을 박살내지 뭡니까? 거짓이 아니라 저는 정말로 후광을 봤습니다. 뒤에 신이 내린 빛이 번쩍였다고요.

-그 사납던 놈들이 무기도 버리고 도망치는데 믿겨지지가 않아서 몇 번을 확인했습니다.

병사들의 증언뿐만이 아니었다. 부러진 적들의 깃대와 깃발들이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했다.

깃발은 귀족의 가문이 가진 명예를 상징했고 급한 후퇴를 할 때에도 절대 두고 가지 않았다. 깃발을 뺏길 바에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앙에 있었던 격전지에는 깃발들과 귀족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요한의 돌격에 도망칠 틈도 없이 박살난 것이다.

"각하와 같이 싸우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선장. 자네의 보고에 조금도 과장이 없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는군."

주스반은 기아다에게 감사를 표했다. 요한의 무력에 대해 보고를 몇 번 받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과장 좀 했었는데...'

기아다는 살짝 민망해졌다. 어차피 책임질 일 없었기에 요한에게 받은 것도 있겠다 좋은 말만 해서 올렸는데, 저렇게 감탄하니 좀 민망했던 것이다.

"적들이 후퇴했는데 추격할 생각인가?"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 아니겠습니까. 제 부하들 쪽에서도 만만치 않게 죽고 다친 놈들이 나와서..."

주스반은 상처 위를 긁적이며 주저했다.

중앙만큼은 아니었지만 주스반이 이끌던 좌익도 상당히 피해가 많이 나왔다. 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던 것이다.

패퇴시켰다지만 적들은 아직 전력이 남아 있는 상태. 놈들의 진영을 먼저 공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천막 안쪽이 들춰지고 환관들이 나왔다. 그 뒤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한과 주스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예의를 표했다.

"모두들 정말로 잘 싸워주웠소. 모두의 헌신이 없었다면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오. 특히 예이츠 백작에게는 다시 한 번 감사하오."

단순한 감사가 아닌, 이렇게 따로 말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한의 활약을 본다면 저 정도도 매우 겸손한 말이었다.

"계속해서 적들을 공격하시겠습니까?"

"병사들이 지치고 다쳤소. 무리해서 실수를 범하고 싶지는 않소. 그리고..."

요새 안에 시종장이 있는데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뒷말을 삼켰다. 남들 앞에서 벌써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적들에게서 사신이 왔소. 금을 바칠 테니 물러서게 해달라는군."

주스반의 얼굴이 밝아졌다. 공화국을 대표해서 온 그는 이교도들과 사생결단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공화국은 동방 제국의 상인들과도 무역을 하지 않았던가.

이 주변에서만 꺼져주면 얼마든지 눈감고 보내줄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두 분의 의견을 듣고 싶소."

"저는 찬성입니다. 폐하. 적들은 아직 많은 숫자가 남아 있습니다. 놈들이 자리 잡은 곳을 다시 공격하는 건 위험합니다. 게다가 놈들이 다른 쪽으로 이동해서 약탈이라도 하면 그 피해는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적들이 체면을 세워주니 그 제안을 받는 것도 자비와 위엄을 보여주는 일

일 겁니다."

주스반의 말이 끝나자 요한이 손을 들었다. 황제는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함정을 판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소만...?"

기본적인 명예에 대한 존중은 이교도에게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이교도여도 서로 주고받은 맹세나 약속은 신성한 것이었으니까. 그런 걸 어기는 자는 자신의 명예를 시궁창에 처박는 셈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명예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었다.

"혹시 모르니 놈들이 떠나기 전까지 경계를 하게 해주시지요."

"그러고 싶다면 그러도록 하시오."

황제는 의외로 순순히 요한의 부탁을 들어줬다. 단순히 요한의 군대뿐만 아니라 황제나 공화국의 용병들도 나서야 하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뭐야. 생각보다 친절하군.'

요한은 황제가 중앙을 도와주러 온 호의를 갚나 싶었다. 그 정도면 이런 보답은 받을 만했으니까.

그러나 황제는 단순히 호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요한이 생각하는 것보다 요한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전날의 전투 때문이었다.

'신이시여!!'

요한의 돌격을 멀리서나마 직접 본 가이아로스였다. 그 충격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방에 적들이 가득 차 있는 불리한 상황에서의 벼락 같은 돌격!

그 돌격이 끝나고 나서 황제는 용병대장의 말이 오히려 과소평가에 가까웠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 전투 다음이었으니 요한의 말에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권위가 실려 있었다. 만약 요한이 강하게 싸우자고 주장했다면 황제는 그 말을 진지하게 따랐을 것이다.

'저 백작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경계를 더 올리라고 해야겠다.'

"더 제안할 것은 없소?"

"딱히 없습니다만...?"

요한은 황제의 질문이 살짝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명목상 총지휘관도 황제였고, 저 옆에 공화국 용병대장도 있는데 왜 자꾸 그한테 묻는단 말인가.

'설마 병사들이 멀쩡하다고 앞장세우려는 건 아니겠지...'

< 170 세 군대 (4) > 끝

< 171 세 군대 (5) >

요한의 의심과 별개로, 저 말은 순전한 호의였다. 주스반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요한에게 선봉을 맡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전투로 인한 호의 때문만이 아니었다. 머리가 달려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언제든지 이탈할 수 있는 외부인에게 궂은일을 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게다가 전력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요한의 부하들이었다.

"알겠소.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보초를 서도록 하겠소."

"폐하의 병사들이 말입니까?"

"?"

황제는 의아해했다.

그러면 뭐 요한의 병사라도 시킬 줄 알았던 것인가?

황제가 저렇게 반응하는데 요한도 굳이 더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당황하긴 했지만 상대가 알아서 궂은일을 해주겠다지 않는가.

"그래도 제 병사들도 경계에 동참하도록 해주시지요."

"그러시겠소? 호의에 감사드리오."

"각하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주스반도 얼굴이 밝아졌다.

군을 이끌고 지휘하면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나 문제는 사람이었다.

매번 혼자서 군을 지휘하고 다니면 그만큼 편할 일이 없겠지만 용병대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때로는 고용주를 만나야 했고, 때로는 고용주 밑에서 같이 고용된 이들과 합을 맞춰야 했고, 때로는 한 때 적이었던 사람과 협상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뜻이 통하는 상대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요한 같은 경우가 그랬다.

저렇게 커다란 공을 세웠는데도 그걸로 오만하게 굴거나 탐욕스럽게 굴지 않았다. 말하는 모습이 싸우기 전이나 싸운 후나 똑같았다.

같은 능력을 가졌어도 이런 사람은 믿음이 가고 신뢰가 가는 법.

"저도 부하들을 시켜 경계를 서도록 하겠습니다."

"...?"

그냥 별 생각 없이 조심하려고 한 말에 황제부터 시작해서 주스반까지 동참하겠다고 하자 요한은 슬슬 의아해졌다.

이 작자들 왜 이러지?

'자기들도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 * *

-예이츠 백작 각하께서 직접 지시한 일이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예이츠 백작이...

위로부터 내려온 명령에 백인대장들이나 십인대장들은 잔뜩 긴장한 채 경계에 나섰다.

적들이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수원지(水原地) 쪽으로 후퇴해서 새로 진영을 차렸긴 했지만, 예이츠 백작이 그랬다는데 뭔가 있지 않겠는가.

자기네들 지휘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일단 믿고 봤다. 사람이 원래 기적을 보게 되면 처음 본 이방인이라도 뭔가 믿게 되기 마련. 게다가 전투 이후의 혼란 섞인 열기는 소문이 퍼지기 매우 좋았다.

"어... 그냥 가는데?"

"놈들이 뭐 숨겨 놓은 거 아니야?"

"척후들이 가서 주변 뒤져봤는데 없다던데?"

그러나 이교도 군대는 별다른 수작 없이 협상을 마치고 조용히 물러섰다.

물론 좋은 일로 떠나는 게 아니니 그 사기는 낮았고 태도 또한 조심스러웠지만, 거기에 숨겨진 수작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곧 이유를 깨달았다.

"아. 그렇군. 백작이 눈치 챈 탓에 놈들이 뭘 하지 못한 거군."

"그런 거였네."

한 번 자리 잡힌 인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괜한 짓을 시켰다고 불평이 나올 법도 했는데 말 한 마디 없었다.

* * *

"...맹세컨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예헤만은 이를 갈며 저 뒤를 돌아보았다. 반쯤 부서진 관문 요새가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주인님께서는 패배하신 게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게 패배가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요새를 손에 넣고 저 동쪽으로 진격할 꿈에 부풀어 있던 예헤만이었다. 그것들이 다 좌절되자 보통 분한 게 아니었다.

비나쉬팀은 아직 이빨이 살아 있었고 공화국 놈들도 제법이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였다. 설마 황제가 직접 올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더 좋은 기회였었고.

저 멀리서 예이츠 백작의 깃발이 펄럭이는 게 보였다. 근처에 있던 귀족들 중 몇몇이 앓는 소리를 냈다. 깃발만 보였는데도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예헤만은 그들을 질책하려다 말았다. 원정에 실패해서 돌아가는 이들이었다. 안 그래도 속이 만만찮게 쓰릴 텐데 타박해서 뭐하겠는가.

"바쉬하르 공."

"예. 예헤만 님."

요한에게 붙잡혔다가 협상 때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쉬하르는 몸을 떨었다.

자리가 좋은 분위기였으면 모를까, 패배로 인해 험악하고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책임이 조금이라도 흘러간다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다행히 예헤만은 그러지 않았다. 요한 옆에서 상황을 지켜본 귀중한 인재의 목을 자르는 건 얼간이나 하는 짓이었다.

"예이츠 백작은 어떤 자였나?"

"꽤... 꽤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자였습니다."

"...뭐?"

예헤만은 무심코 되물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뭔 같잖은 헛소리요?"

"이교도 놈에게 돈이라도 받았나?"

"모두 조용!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끼어드는 거냐?"

예헤만의 호령에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바쉬하르는 진땀을 흘렸다. 남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바쉬하르는 더듬거리며 경험했던 일들을 말했다. 고대 제국어는 물론이고 동방어도 할 줄 알고 꽤나 예의 바르게 대해줬다고. 가끔은 바둑돌을 잡고 바쉬하르를 상대해주었는데 그 실력이 무시무시했다.

"다른 사람 아닌가?"

"쌍둥이일지도..."

"바쉬하르가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니다. 모두 그만하도록."

예헤만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충격적이었기에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바쉬하르를 붙잡고 어떻게든 납득이 될 때까지 대답을 들으려고 했다.

"쉬는 시간에 제물을 고문하면서 악마에게 바치지 않던가? 그 힘을 생각해보면 악마와 계약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텐데?"

"교양 있고 박식한 태도도 당신이 속았을지 모르는 일이잖나. 원래 악마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법. 평범한 사람은 그 혓바닥을 당해낼 수가 없지!"

계속 물어오는 질문에 지친 바쉬하르는 결국 원하는 대답을 털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좀 악마 같기도 했습니다."

"역시...!"

"휘하에는 마법사를 데리고 있었는데 밤에는 그 마법사를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사악한 주술이로군."

"그리고 그 밑에는 복무하고 있던 엘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난폭했고 기마술과 창술, 검술에 능했는데..."

요한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신비스럽게 여기던 귀족 전사들이었지만, 엘프들에 대해서는 매우 현실적으로 반응했다.

"엘프 놈들은 원래 그렇지."

"지독한 귀쟁이 놈들 같으니."

주로 서쪽의 귀족들인 엘프 종족은 동방의 전사들에게도 악명 높았다.

한 번 나타나면 튼튼한 군마와 단단한 갑주, 날카로운 창을 갖춰 입고 고대 제국의 성벽도 뚫어버릴 돌격을 하는 기사들.

잘 갖춰 입은 동방의 기사들도 엘프 기사들에 비하면 밀릴 정도였다.

바쉬하르는 전사들이 시큰둥하자 당황했다. 솔직히 요한의 진영에서 가장 난폭하고 살벌하게 느껴졌던 게 엘프들이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다니.

"그, 그 엘프 놈들은 유난히 흉폭했습니다."

"엘프 놈들이 원래 그렇다니까? 핏줄이 그런 거야. 그보다 백작 밑의 마법사나 더 말해봐. 어떤 주술을 부렸지?"

* * *

수평선으로 함대들이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요한은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냥 정말로 떠나나?'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물론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사람은 원래 이성적으로만 행동하지 않았다.

저런 상황에 처했으면 본전이 생각나서 끝까지 물고 늘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나?"

"적들이 후퇴했다는군."

이젤리아는 눈을 비비며 간이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옆에는 그녀가 노획한 무구들이 쌓여 있었다. 원래는 수급도 있었는데 요한이 기겁해서 밖으로 갖다 치우게 했다.

"피곤할 텐데 조금 더 쉬지 그래?"

"괜찮다. 별로 피곤하지 않다."

그 말에 요한은 고개를 돌려 이젤리아를 쳐다보았다. 이젤리아는 요한의 눈빛을 오해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물, 물론 아침부터 할 정도는 아니다."

"...난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어쨌든 피곤하지 않다면 시종을 불러 나갈 준비를 하지. 주변을 둘러보고 싶으니."

적들은 사라졌고 요한은 노리던 황금을 받아냈다. 원래라면 바로 떠나면 됐지만 세상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당장 항구의 총독은 요한이 조금 더 머물러주기를 원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적들이 사라졌다고 바로 방심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 총독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몇 달 더 머무르고 안심시켜주는 거면 남는 장사였다.

'아. 그리고 시종장도 있었군.'

요새 안에 틀어박혀서 잊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시종장이란 자는 요한에게 사절까지 보내서 모욕을 던져 준 놈이었다.

급할 때는 내버려뒀지만 이제 황제도 있겠다, 정산을 받아야 했다.

"각하. 사냥을 나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사냥을?"

주스반의 말에 요한은 살짝 당황했다. 물론 귀족 놈들이야 전장에 나서도 전용 요리사와 시종들을 데리고 다니며 즐길 거 다 즐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주스반도 그런 놈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꽤나 실용적인 자라 굳이 그러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군.'

요한은 주스반의 눈빛에서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 * *

옆에 있던 이젤리아가 사냥감을 쫓기 위해 뛰쳐나가자 주스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각하. 레오아노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 생각도 없다만?"

받아낼 빚이 있긴 했지만 그게 무슨 살벌한 원한 같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모욕 갖고 흔들릴 요한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스반은 요한의 대답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렇다면 각하. 레오아노스를 죽여도 각하께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

주스반의 말에 요한은 놀랐다. 멋대로 움직여도 되냐고 물으려던 요한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그가 이런 일을 멋대로 할 리가 없지 않은가.

"폐하께서 부탁했나?"

"...!"

이번에는 주스반이 놀랄 차례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듣자마자 저렇게 바로 맞추는 모습이 놀라웠다. 거의 주스반의 자식뻘 나이였는데 하는 행동은 노회한 귀족 그 자체였다.

"맞,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멋대로 행동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흠... 레오아노스를 죽일 수가 있나?"

"이미 저지른 실책이 있는데다가 폐하께서는 이번 전투로 커다란 공을 세우셨습니다. 시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봐야지요."

젊은 황제는 군공이 필요했다. 다른 정적들을 짓누르고 자신의 자리를 바로잡으려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군. 그래서 친위대까지 끌고 직접 온 건가.'

그 도박에서 승리했으니, 과감한 행동에 나서려면 바로 지금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황제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죽여도 되냐, 고 물은 게 아니라 죽일 수 있냐고 물은 거다. 보아하니 꽤나 철저한 자 같던데."

"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예. 실은 폐하께서 레오아노스를 연회에 초대했습니다."

전투가 끝났으니 그에 대한 축하와 치하를 목적으로 도시 인근에서 커다란 연회를 열 작정이었다.

물론 이것만 들으면 상대는 여전히 의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주스반도 자리에 참석했고, 요한도 참석해주길 원했다.

다른 이들도 여럿 있는 자리에서 설마 피를 보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리 레오아노스라도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레오아노스도 설마 황제가 군대를 끌고 와서 이길 줄은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핑계를 대며 축연에 빠지는 건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래서 내 허락을?"

"예. 백작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멋대로 구는 건 엄청난 무례지 않습니까."

"고맙군. 주스반 경. 이렇게 내 명예를 생각해주다니."

"아. 폐하께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신 겁니다."

"...?"

요한은 살짝 당황했다. 보통 그냥 말없이 벤 다음 '어쩔 수 없었소 미안하게 됐소'라고 하지 않나?

물론 요한이야 꽤 불쾌하겠지만 원래 이런 일은 그런 걸 감당하고 하는 법이었다. 보안이 중요하지 않은가. 요한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불쾌함이야 나중에 황금으로 풀 수 있는 것이고...

'쓸데없이 친절하니 괜히 수상쩍군.'

잃을 게 없었을 때와 달리, 잃을 게 많아지자 상대의 호의도 괜히 의심하게 됐다. 어쨌든 이번 제안은 별 상관 없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고 전해주게."

"예! 감사합니다."

< 171 세 군대 (5) > 끝

< 172 신나는 연회 (1) >

한쪽에서 그런 흉흉한 제안이 오가는 동안, 레오아노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원래 비나쉬팀의 전통은 암살과 반란.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암살하고 인기가 떨어지면 반란을 일으키는 게 관습이었다.

노회한 황족인 레오아노스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황제와 공화국, 백작의 군대가 이교도들의 군대와 맞부딪혔을 때 레오아노스는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이교도 놈들이 이겨도 곤란하고, 황제가 이겨도 곤란하고...

차라리 둘 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공멸한다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황제의 군대가 이교도 군대의 맹공을 버텨내고 물리친 것이다. 협상이 이어지더니 이교도 군대는 초라하게 떠나갔다.

-저 들개 같은 놈들은 그리도 사납게 덤벼들더니 왜 그냥 떠나간단 말이냐? 불러와라! 어떻게든 불러오란 말이다!

레오아노스는 기가 막혔다. 이교도 놈들의 군대는 그가 경험한 적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사나운 놈들이었다. 동료가 쓰러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를 쌓아 성벽을 오르던 놈들.

그런 놈들이 전투 한 번 했다고 저렇게 포기하고 물러난다고?

-레... 레오아노스 공.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부하들의 말에 레오아노스는 정신을 차렸다. 불운에 불운이 겹친 탓에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하들의 말이 맞았다. 떠나가는 놈들을 다시 불러올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정말 불러온다면 요새의 병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레오아노스야 정 안 되면 도망칠 수 있다지만 병사들 입장에서는 미친 짓거리였으니까.

-폐하께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다케온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축연을 열 테니 참석하라고 하십니다.

-...가도를 따라 움직일 때 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

누가 친척 아니랄까봐 하는 생각이 비슷했다. 레오아노스는 바로 암살부터 걱정했다.

-설마... 레오아노스 님께서도 호위를 데리고 가실 것 아닙니까?

레오아노스는 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실력 있는 호위들을 데리고 이동할 것이다. 도적으로 위장한 수십 명 갖고 잡지는 못했다. 그 이상은 먼저 알아챌 수 있을 것이고...

-맞는 말이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그래. 황제가 그렇게 멋대로 굴지는 못하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 레오아노스가 누군데...

-맞는 말씀이십니다. 레오아노스 님께서 돌봐주시지 않았다면 제위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차라리 동생만 남기셨으면 훨씬 더 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

-제,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 아주 좋은 말을 했다. 입 무겁고 뛰어난 검사들을 불러와라.

* * *

총독은 매우 행복해보였다. 이교도들도 떠나고, 요한의 군대도 몇 달 정도 더 머물러 준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대신 관세는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대신 요한은 항구에 드나드는 상선들에 한해서 면세 약속을 받아내었다. 해로로 거래되는 물품들은 육로와는 차원이 달랐고 이에 따른 관세 또한 어마어마한 수입이었다.

그런 관세를 면세 받는 특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그래도 공화국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연하지.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요한은 총독과 깔끔하게 거래를 마쳤다. 서로 원하는 걸 얻은 좋은 거래였다.

"시체를 치우고 주변에 백분과 역청을 뿌려서 몬스터들이 오지 못하게 해라. 몬스터들이 꼬이면 골치 아파진다."

커다란 전투가 한 번 일어나면 주변에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생겨나곤 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억울함 섞인 원한이 몬스터들을 만들어낸다'라고 떠들었지만 요한이 보기에는 먹잇감이 많아서로 느껴졌다.

그렇게 먹을 게 많은데 성장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그르릉!

"옳지. 잘 찾았구나."

요한은 켄타우로스들과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며 가볍게 몬스터들을 소탕했다. 카라마프는 놀라운 감각으로 숨어 있는 몬스터들을 잡아냈다.

내버려두면 도시에 해가 될 수 있는 놈들이니 미리 잡아놓는 게 좋았다. 게다가 이런 놈들은 도시에 생색내기도 좋았다.

"그런데 기사님. 혹시 비나쉬팀에 가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비나쉬팀은 제국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그 수도의 이름이기도 했다. 아클라다의 질문에 요한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비나쉬팀에는 왜?"

"도시 중의 도시라고 들었으니까 그렇죠."

"가봤자 약탈할 수는 없을 텐데. 거기의 성벽은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다더군."

"아니. 제가 무조건 약탈하려고 물어보는 줄 아십니까? 제가 약탈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아십니까? 물론 약탈에만 관심이 있긴 한데..."

아클라다는 자기가 말하고서도 좀 민망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냥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소문을 들어보니 저기 황제가 기사님의 실력을 탐내고 있다던데요. 혹시 고용되어서 가시나 했죠. 비나쉬팀 놈들은 자주 그런다지 않습니까."

힘이 부족한 비나쉬팀은 외부 용병들을 자주 고용하곤 했다. 소왕국이나 공화국의 귀족들이나 용병대장은 물론이고 가끔은 이신교도 귀족까지.

충성심 높기로 유명한 황제의 친위대도 그런 외부에서 온 용병들의 후손이었다.

"그런 소문이 있었나? 딱히 그런 기색은 못 느꼈는데... 오히려 총독이 탐을 내면 냈지."

황제의 태도에서 그런 기색은 느끼지 못했었다. 요한은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병사들 중에 일부만 일 년만 고용해도 그 값이 얼마인데 또 고용하겠나. 황금이 썩어나는 게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지."

요한이 데리고 있는 용병들은 그 값이 비쌌다. 드워프들이나 훈련 받은 노예병, 동부의 궁기병들은 대체 불가능한 고급 인력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쇠뇌수들인 고르갈레 용병단, 말을 여럿 갖고 있는 아키텐의 사생아 등 잘 무장하고 경험 많은 용병들이 많았다.

지금처럼 성벽 앞에 적들의 대군이 몰려왔으면 모를까, 굳이 그런 비싼 이들을 따로 고용할 필요는 없었다. 요한이라면 그 돈으로 싼 용병들을 여럿 고용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어. 저거 그 놈 아닙니까?"

"그 놈이라고 하면 어떻게 아나?"

"각하를 모욕한 놈 말입니다. 각하를 모욕한 놈이 여럿 있지는 않잖습니까?"

아클라다가 가리킨 건 레오아노스의 행렬이었다. 레오아노스가 보냈던 사절이 들고 온 깃발의 문양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대를 받았다던데 왔나보군."

"저 말발굽에 차여 뒤질 놈이 어디서 뻔뻔하게 낯짝을..."

요한보다 아클라다 같은 다른 켄타우로스들이 더 흥분했다. 초대를 받아서 오는 놈이고 뭐고 간에 지금 당장 달려가서 활을 쏠 기세였다.

요한은 그들을 자제시켰다.

"초대 받아 오는 놈들인데 멋대로 위협하지 마라."

"저희는 그냥 여기서 사냥하고 있었을 뿐이죠. 저놈들이 멋대로 생각하면 모를까."

켄타우로스들은 사나운 눈빛으로 언덕 위에 서서 행렬들을 위협적으로 노려보았다. 다가오던 이들은 그걸 발견하고 움찔했다.

"왜 켄타우로스들이 여기 있나?"

"예이츠 백작의 부하들이라고 합니다."

"..."

성질 같아서는 썩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수행원들은 그러지 못했다. 켄타우로스들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게다가 요한의 명성은 쉬이 행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얌전히 고개 숙이고 지나갔다.

요한은 레오아노스에게 찾아가서 인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황제의 계획대로라면 곧 뒤질 놈이기도 했고, 굳이 인사할 정도로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호위들이 좀 많은 거 같은데?'

신분 높은 귀족이라면 시종이나 하인들 여럿 데리고 다니는 건 당연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전장 나가면서 하인에 광대에 음유시인에 첩까지 백여 명 데리고 다니는 귀족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요한의 눈은 수행원 사이에서 검객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을 잡아냈다.

다르게 발달한 근육, 가벼운 듯 하면서 묵직하게 균형 잡힌 걸음걸이 등 이런 것들은 검사들만이 가지는 특징이었지만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요한도 먼저 직감으로 느낀 다음에 생각에 들어간 것이지 처음부터 깨닫지는 못했다.

'비나쉬팀의 하급 귀족들인가? 비단 옷을 입은 거 보면 시종들 같기도 하고.'

* * *

"아. 비단 회랑 출신들 아닙니까?"

총독은 요한을 상석에 앉힌 다음 노예들을 시켜 부채질을 하도록 명령했다. 다소곳하게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부하와 주군 같았다.

요한은 과일을 입에 넣은 다음 손을 비단으로 닦아내고서 물었다.

"난 비나쉬팀 출신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면 모르는데."

"죄송합니다. 각하. 뛰어난 배우들입니다. 무희들이기도 하고요."

수도에는 거대한 극장이 여럿 있었다. 그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곳의 별칭이 비단의 회랑이었다. 회랑 벽에 걸려 있는 특유의 비단들 때문이었다.

이곳은 극장이었지만 신전과 수도원 같은 규칙으로 운영되었다. 입단할 때 맹세를 하고 안에 갇혀서 폐쇄적인 교육을 받는 것까지 그랬다. 소문에 따르면 일신교 이전의 토착신앙 풍습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규칙 때문인지 이들은 뛰어난 배우였고 무용수였다. 회랑 출신이라고 하면 비나쉬팀에서는 알아주는 배우인 것이다.

"연극은... 수도사들이나 사제들이 나와서 더듬거리는 게 아닌가?"

신성 제국에도 연극은 있었다. 보통 수도사들이나 사제들이 어설프게 분장하고 나와서 형편없는 연기력으로 교훈적인 이야기를 보여주곤 했다.

요한도 어렸을 때 사제를 도우면서 참여한 적 있었고.

"푸훗... 각하. 신성 제국의 촌뜨기들이 하는 그런 원시적인 연극 말고, 저희는 정말 세련된 세속극과 풍자극을 주로 즐깁니다."

신이 나서 떠드는 총독의 모습에 요한은 순수한 의문을 담아서 물었다.

"내가 신성 제국 출신인 건 잊었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순간 정신줄을 놓았던 총독은 다급히 사과했다. 하필 비나쉬팀 인의 자부심이 이럴 때 튀어나오다니.

"어쨌든 배우들이라고? 그런 것치고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던데."

"혜안이 있으십니다. 각하. 회랑 출신 배우들은 뛰어난 검사기도 하죠."

"배우라면서?"

"검술의 달인이기도 합니다."

수도사들이 수도원 안에서 검술을 훈련하듯 이들도 그랬다. 다른 직업이 검을 익히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나?'

총독의 설명을 들은 요한은 시종장도 꽤나 신경을 써서 호위를 데리고 왔다는 걸 느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시종들도 저렇게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을 뽑다니.

갑자기 연회가 황제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황제도 저렇게 호위를 데리고 온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으음. 나도 병사들을 좀 숨겨 놓을까."

축연은 도시 인근에서 천막을 치고 펼쳐졌고 그 안으로 가려면 무기를 놓고 들어가야 했다. 황제는 인근 천막에 칼 든 호위병들을 숨겨놨다가 레오아노스를 기습적으로 끝장낼 생각이었다.

계획대로만 굴러가면 레오아노스가 호위 몇을 데리고 왔든 '어, 어'하다가 죽겠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몇 번이나 겪지 않았던가.

"좋은 생각이다. 신호만 주면 검을 뽑고 들어가겠다."

"드워프...는 아니고. 켄타우로스...들도 아니고. 엘프들은... 내가 싫군."

"..."

이젤리아는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요한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엘프 용병들은 눈에 잘 띄는데다가 참을성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노예병들 중에서 뽑는 게 낫겠군."

노예병들은 나이가 대체로 젊어서 어디에 던져 놔도 그럴듯했다. 하인이나 노예 역할을 해도 충분히 어울렸다.

"알겠다. 그러면 신호만 주면..."

"이젤리아. 넌 내 옆에 있어야지. 네가 왜 그런 역할을 맡으려고 해?"

"내...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싸울 수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내가 뒤에 숨어 있어야겠군. 네가 없으면 어디 갔냐는 소리 나올 테니 옆에 있어줘야지."

"!"

요한은 수행원들 사이에 노예병들을 끼워 넣었다. 무기는 안에서 요령껏 챙겨 받으면 됐으니까.

'부를 일이 없으면 좋겠군.'

"그대여. 혹시 모르니 강하게 말해서 검을 하나 차고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검으로 대용할 수 있는 벨트를 차고 있으니."

"쓰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쓸, 쓸 일이 이제까지 딱히 없었잖아."

"아.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이젤리아는 알아서 납득했다.

요한은 이번에는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좀 체면을 지키면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 172 신나는 연회 (1) > 끝

< 173 신나는 연회 (2) >

약속한 날짜가 되자 도시와 그 인근의 귀족들이란 귀족들은 모두 찾아왔다. 눈도장을 찍고 아부를 할 기회였던 것이다.

이렇게 승전을 축하하는 기쁜 자리에 빠질 정도로 멍청한 이들은 없었다.

"용의 핏줄에 담긴 영광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폐하!"

"도시를 구해주신 영광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겠습니다. 백작 각하."

황제 못지않게 요한에게도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도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요한이 한 역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일을 눈감아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오. 백작."

"별 일 아닙니다."

젊은 황제는 요한보다 더 긴장한 모양이었다.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손은 땀에 젖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황제는 요한 못지않게 어린 나이였다. 늙은 얼굴 때문에 자꾸 착각하게 됐지만 긴장을 하는 게 당연했다.

'하긴 나이도 아직 많지 않으니 권위도 부족할 거고, 정적은 많을 테고, 황제 자리도 여러모로 힘들겠군.'

가장 고귀한 자리는 누구나 탐냈지만 때로는 시골 영주가 더 속이 편할 수도 있었다.

"더 조언해 줄 것이라도 있소?"

'부담되게 왜 이래?'

황제는 요한의 능력에 이상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높은 평가야 좋은 일이었지만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실패해서 도망이라도 치면 누구 책임을 물으려고...

요한은 안전한 조언이나 몇 개 해주기로 했다.

"안에 갑옷을 입으셨습니까?"

"입지 않았소."

"어차피 윗옷으로 인해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런 전투가 끝났는데 안에 갑주 하나 입었다고 흉을 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회 자리에는 전통적으로 무기와 갑주를 벗어 놓는 게 관습이었지만 이 정도는 들켜도 넘어갈 수 있는 짓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자기 병사들하고 어울리는 것으로 소문이 난 사람. 그 소문에 이거 하나 추가한다고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하긴 입어서 나쁠 게 없겠지..."

황제는 고분고분 갑주를 입었다. 별로 필요 없어 보이고 괜한 불평만 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요한의 조언을 신뢰했다.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

* * *

계획은 간단했다. 시종장이 자리에 앉고 술이 좀 돌면 황제가 그의 무례함과 불충을 꾸짖고 잔을 던져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레오아노스가 제법 호위를 데리고 왔습니다. 폐하.

-어차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말한 대로만 행동해라. 그러면 아무리 놈이라도 허튼 짓을 하지 못할 테니.

레오아노스가 앞에 도착했다.

최근에 있었던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시종장이 갖고 있는 정치적 권위는 상당했다. 주변의 귀족들이 일제히 몰리며 어떻게든 말 한 마디라도 붙여보려 애썼다.

그 반응에 레오아노스는 만족스러워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그가 가진 권력이 실감됐다. 권력은 마약 같아서 한 번 잡으면 절대 놓을 수가 없었다.

"무기를 두고 들어가십시오. 시종은 한 명만 데리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레오아노스는 순순히 호위들을 밖에 세워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급 귀족 출신 시종이 레오아노스의 옷자락을 들고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 모습에 은잔을 들고 목을 축이던 요한은 의아해했다.

'너무 멀지 않나?'

호위들이 검술의 달인이든 아니든 뭘 하려면 좀 더 가까이 접근해야 했다. 어떤 핑계를 대든 간에 바로 달려와서 끼어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저 거리는 너무 멀었다.

'내가 괜한 신경을 썼나...'

레오아노스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황제의 손에 입을 맞췄다. 복종과 충성의 뜻이었다.

"이렇게 와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해야 할 일이었다."

"자리에 계신 다른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사신을 보내 모욕하나?"

요한이 빈정거렸다. 이번에 세운 전공이나 이끌고 있는 병사들을 생각해 볼 때 요한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

대놓고 빈정거렸지만 시종장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참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사죄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오해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확인해봐야 알 수 있겠지. 사죄를 받을지는 그 때 결정하겠다."

더 괴롭힐 수 있었지만 요한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황제였지 그가 아니었으니까.

요한이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자 시종장은 속으로 안도 섞인 욕설을 뱉으며 물러섰다. 끊겼던 음악이 다시 시작되고 술이 돌기 시작했다.

"결투를 신청하지 그랬나?"

"신성 제국도 아닌데 무슨... 그리고 신청해봤자 대전사를 내보내겠지."

옆에 앉은 이젤리아와 떠들던 요한의 눈에 특이한 장면이 들어왔다.

레오아노스가 데리고 온 시종의 손가락 끝이 검게 변색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쳐다보던 요한과 시종의 눈빛이 마주쳤다. 시종은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요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같은 기술을 할 줄 아는 동업자를 만났을 때의 위화감!

'뭐야. 독?'

잘못 봤나 싶었는데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게다가 저 시종이 레오아노스가 데리고 온 암살자라면 아귀가 맞았다. 저 꿍꿍이 많은 작자가 아무 생각 없이 왔다면 그게 더 놀라웠을 것이다.

'한 명은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한 명은 암살자를 데리고 오고... 아름다운 문화군.'

비나쉬팀의 관습은 참 놀라웠다. 요한은 문득 카에갈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암살에서 가장 어려운 건 그 자리까지 들어가는 것과 무사히 빠져나오는 일이지, 사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나머지 일은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독 같은 암기는 언제든지 꺼낼 수 있어야 하겠지.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있긴 하지만 좀 더 조용

한 게 좋지 않겠느냐?

-왜 절 보시면서 그런 소리를?

-독을 조합하는 법, 숨기는 법, 뿌리는 법은 많이 하면서 익히는 수밖에 없다.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손이 움직일 테니까. 그리고 내가 가르쳐 주는 방법만이 정답은 아니다. 때와 장소가 달라지면 방법 또한 달라지니까. 내가 만났던 암살자는 혀 안쪽에 독을 보관하는 비전을 알고 있

었지. 지금 표정을 보니 '검술이 있는데 굳이 독까지 써야 할까?'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요한은 주스반을 불렀다. 주스반은 비나쉬팀의 무희에 홀딱 빠져서 박수를 치며 웃다가 요한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모르니 폐하에게 술과 음식을 더 이상 먹지 말라고 전해주게."

"...알, 알겠습니다."

주스반도 눈치가 있었다. 슬쩍 황제에게 말을 전했다. '무슨 소리냐?'라고 물을 법도 했는데 다시 묻지 않았다.

'편하긴 한데 이유도 안 묻나?'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요한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오해했는지 그 눈빛에는 감사의 뜻이 가득했다.

아직 상대가 독을 넣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는데 저러자 요한은 살짝 민망해졌다.

"저는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각하. 노예가 먼저 먹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조심해서 나쁠 게 없겠습니다."

사람이 한 번 명성을 쌓으면 어느 정도의 행동은 포장이 되었다. 과감한 행동은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포장이 되고, 소심한 행동은 신중함 있는 행동으로 포장이 되는 것이다.

주스반과 황제는 어떻게 오해를 했는지 자기들끼리 알아서 납득을 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황제가 잔은 입에다 가져다대지도 않자 초조해진 건 레오아노스였다. 기껏 술을 따라서 바쳤는데도 황제는 마시질 않는 것이다.

그가 데리고 온 암살자의 독은 실로 정교해서 여러 잔을 다 마시고 나야 뱃속에서 엉켜 독을 뿜어냈다. 하지만 한 잔도 마시지 않으면 독이고 뭐고 없었다.

레오아노스는 입술을 핥으며 기다렸지만 황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냐?"

"마시질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레오아노스도 눈치가 있었다. 황제의 굳은 표정과 긴장한 동작으로 봤을 때, 뭔가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연회가 끝나고 체포하거나 돌아가는 길에 기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독이 안 되면 단검이 있지 않느냐."

"제가 접근하는 순간 제지당할 겁니다."

"...좋다. 단검을 내놔봐라."

암살자가 숨긴 단검을 몰래 받은 레오아노스는 소매 속으로 단검을 넣었다. 가능하면 독으로 끝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쓰러지면 주변은 난리가 날 테니 그 틈을 타 호위들과 빠져나가는 수밖에.

애초에 호위들을 불러온 건 습격이 아닌 탈출과 호위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곡 하나가 끝나고 춤이 멈췄다. 레오아노스는 갖고 온 상자를 꺼내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저 노래에 걸맞은 보물을 폐하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노래에 대한 감사로 받아 주십시오."

레오아노스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보석이 눈부시게 빛났다. 수상한 게 없다는 걸 확인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레오아노스는 번개처럼 단검을 뽑아 황제의 가슴팍을 한 번 찔렀다. 딱딱한 소리와 함께 단검이 막혀서 들어가지 않았다. 레오아노스는 기겁했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이번에는 단검이 얼굴과 목을 향해 움직였다.

퍽!

단검이 목을 찌르는 소리 대신, 둔탁한 물건이 머리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레오아노스는 단검을 든 채로 절명해서 쓰러졌다. 그의 머리 옆으로 찌그러진 은잔이 떨어졌다.

"..."

"..."

너무 갑작스러운 일들이 겹쳐 일어난 탓에 사람들은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고함을 친 건 주스반이었다.

"암살이다! 폐하를 안쪽으로 모셔라!"

뒤늦게 뒤에 있던 친위대원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주변을 보며 외쳤다.

"움직이는 자들은 모두 베어버리겠다! 가만히 있어라!"

"폐하!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다. 어떻게 된 거지?"

"백작께서 폐하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잔을 던져서 말입니다."

주스반은 상황을 설명하다가 자기도 좀 어이가 없었는지 말을 더듬었다.

요한 옆에 있던 주스반은 똑똑히 보았다. 레오아노스가 단검을 한 번 찌르는 순간 요한이 들고 있던 은잔을 들어 머리통에 정확히 집어 던지는 모습을.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상대가 머리에 맞고 일어나질 못했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던진 게 은잔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무훈시에 나올 법한 일이었을 텐데...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종장님과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몇 년 전에 한 번 뵈었을 뿐 그리 관계는..."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허겁지겁 변명을 늘어놓았다. 혹시라도 시종장과 엮일까봐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정신을 차린 황제는 이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시종장의 수행원들을 전부 체포했다. 이 근처 귀족들에게서 피를 볼 생각은 없었지만 시종장의 부하들은 아니었다.

"무릎을 꿇어라!"

"저... 저희도 몰랐습니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

변명에 대한 대답으로 폭력이 쏟아져 내렸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요한의 노예병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요한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부를 필요도 없었군.'

그리고 벨트도.

* * *

황제와 황제의 부하들이 죄 있는 사람들과 죄 없는 사람들까지 괴롭히고 있는 동안 요한은 기다려주었다. 원래 저런 소란이 일어나면 한동안 정신이 없기 마련.

상황이 얼추 끝나고 나자 요한은 주스반과 함께 찾아갔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덕분에 살았소. 백작."

예의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레오아노스의 시종을 심문한 이들은 처음에는 독을 준비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요한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빨리 쓰러졌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독도 그렇고 갑옷까지. 혹시 미리 얻어 놓은 정보가 있었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그런 게 있었다면 제가 먼저 말씀드렸을 겁니다."

주스반은 공화국 사람다운 자부심으로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주스반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요한에게 물었다.

"백작. 총독에게 들었는데, 황금을 받고 올해 가을까지 도시에 머무른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괜찮다면 내가 그 계약을 사고 싶소."

"폐하. 제 병사들은 값이 비싼데다가 그 숫자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전부 고용할 생각은 없소. 여기 있는 병사들의 절반으로도 충분하오."

천명 안팎의 병사들로는 할 수 있는 일들이 한정되었다. 요한은 황제가 원하는 게 뭔지 바로 알아차렸다.

'호위를 원하나?'

자리가 불안정하면 믿을 만한 병사들이 필요하기 마련.

"총독이 말한 것보다 세 배 많은 값을 지불하겠소. 그리고 항구에서의 특권을 약속해주겠소. 이 정도면 백작과 용맹한 부하들에 대한 값으로 충분하지 않소?"

"...!"

순간 요한은 황제 뒤에 금화더미가 쌓여 있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 173 신나는 연회 (2) > 끝

< 174 가도 사냥 (1) >

요한이 재력에 취해 입을 다물고 있자 황제는 그 태도를 오해했는지 좀 더 길게 설명에 나섰다.

"음. 수상쩍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오. 백작의 능력에 대한 값을 치르려는 것뿐이니까."

가끔 너무 과한 값은 상대를 의심하게 만드는 법. 황제는 요한이 괜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설명을 늘어놓았다.

만약 요한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한동안 황제의 오른팔이 되어줘야 했다. 불신감을 남겨 놓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내게는 친위대가 있소. 친위대장은 충성스러운 자고.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좀 한정되어 있소. 검을 휘두르고 전장에서 싸울 줄은 알지만 지금 상황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오."

황제는 어렸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기가 너무 없었다.

수도를 돌아다니며 시민들과 상인들과 귀족들과 외국인들을 만나야 할 때 군영에만 박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동생이 대신 열심히 뛰어주고 있었지만 상황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세운 군공으로 인해 인기가 조금 올라가겠지만 근본적인 건 달라지지 않았다. 정적은 여전히 많았고 자리는 불안정했다. 반란 한 번에 날아갈 수 있었다.

이럴 때 옆에서 호위하는 친위대장은 좀 다방면에서 유능한 인물이어야 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지 않게 상대할 줄 알고, 견문과 학식이 풍부하고, 명성도 좀 있고, 암살 시도도 잡아낼 수 있고...

그리고 이런 사람은 흔치 않았다. 황제는 얼마든지 값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아니.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괜히 긴장되는군.'

요한은 남의 일인데도 긴장했다.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 암살이나 반란이 몇 번은 더 있을 낌새였다.

사실 수도에서 암살이나 반란이 터져도 요한에게는 그렇게 위험할 거 없었다. 외부인에 다른 영지의 백작 아닌가. 쓸데없이 벌집을 건드려 일을 키우는 멍청이들은 없었다.

만약에 일이 정말로 틀어져도 요한이 이끄는 정예들도 있으니 바로 공화국 구역이나 다른 쪽으로 빠져서 함선을 빌려 나오면 됐다.

하지만 받을 거 다 받아놓고 황제가 죽으면 그건 그거대로 좀 찔릴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금화는 선금으로 받아도 특권은 황제가 죽으면 날아갈 텐데.'

"항구에서의 특권은 구체적으로...?"

요한이 관심을 보이자 황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관세에 대한 특권은 물론이고, 외국인에게 허가되지 않는 항구 또한 백작에게는 허락해주겠소. 거주구역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모든 것은 황제의 금인(金印)이 찍힌 문서로 남을 거요."

"!"

황제의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한마디로 비나쉬팀의 바다에서 요한을 가장 최우선적으로 챙겨주겠다는 것 아닌가.

'너무 후해서 공화국이 분노할까 걱정이 될 정도군.'

"좋습니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한 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 * *

한 번 결정을 내리자 그 뒤의 행동은 빨랐다. 요한은 전리품과 황금을 정리해 병사들을 영지로 돌려보냈다. 이젤리아는 매우 아쉬워했다.

-이교도들이 다시 올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럴 거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이교도들이 다시 올...

-그러면 싫어도 다시 군대 이끌고 나와야 하니까 영지 가서 다스리고 있어. 약속한 기간이 끝나면 돌아올 테니.

-하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일은 품은 많이 들지만 명예도 없고 너무 지루한 일이다, 그대여...

-백작 대리는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이젤리아까지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수에틀그가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영지 안에서는 이방인이었다. 이젤리아까지 너무 오래 비워 놓아서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보여도 이젤리아는 에랑스 왕국 출신의 엘프 기사. 영지에서 생긴 일에 대응하기에는 충분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들을 보고 시민들이 두려움에 질릴까봐 걱정되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님? 이미 다 물어봤습니다. 켄타우로스 보고 놀라는 건 천 년 전에나 그랬답니다. 요즘은 놀라지도 않는다는군요."

요한을 호위할 정예들은 드워프들과 켄타우로스들이었다. 드워프들은 전투력도 물론이고 특유의 재주가 많았고, 켄타우로스들은 그냥 켄타우로스들이라서 뽑혔다.

"준비는 다 됐나?"

"그래. 명령만 내리면 된다."

기다리는 사이 요한은 황제와 꽤나 친해질 수 있었다. 황제는 자기 옆을 지킬 사람에게 인색하게 구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요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특권을 제공했다.

그리고 '인색하고 상대하기 어렵다'는 총독의 평과 달리 요한은 황제와 성격이 잘 맞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합리적이고 쓸데없는 허례허식 싫어하고...

배웅하는 총독을 보며 요한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총독이 네가 인색하다더군."

"..."

황제는 정색하고 총독을 쳐다보았다. 멀리 있던 총독은 멋모른 채 환한 미소로 배웅했다.

"다른 말은 안 했고?"

"다른 말도 있나?"

"옷을 허름하게 입는다거나..."

"흠..."

같은 재질의 옷이라도 누가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좀 더 유난히 볼품없어 보일 때가 있었다. 요한이 보기에는 황제가 바로 그랬다.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이런 것도 중요했다. 기사들이 배우는 덕목 중 하나가 이런 패션 아닌가.

방랑하는 가난한 기사라 하더라도 손재주와 눈썰미만 있다면 품위 있게 보일 수 있는 법.

"뭐 그런 이야기까지 한 것 같지는 않고, 신경 쓰이면 좀 비싼 옷을 사 입지 그러나."

"비싼 옷은 쉽게 약해지고 찢어진다."

"여러 벌 갖고 다니면 그만이지."

황제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보기에는 필요한 일이었다. 황제는 지금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요한 때문인지 유난히 더 초라해보였다.

요한은 말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주변의 시선을 잡아끄는 재주가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것은 물론이고 걸치고 있는 갑옷이나 서코트도 마법의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황제는 그냥 백인대장 같았다.

"황궁에 비단이 그렇게 많다는 게 진짜인가요?"

"그렇다."

잠시 쉬는 사이 쟈니나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다행히 황제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요한의 부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나쉬팀의 황궁에 대한 소문은 전설처럼 떠돌아다녔고 그 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지금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잡자 쟈니나는 놓치지 않았다.

"궁전의 외벽은 황금으로 덮여 있고 복도 바닥은 비단으로 덮여 있어 걸어도 소리가 나지 않고 조용하다는 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

요한은 쟈니나를 타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헛소리 아니다. 진짜다."

"!?"

"그런 궁전이 하나 있다. 아마 그게 소문이 퍼졌던 거겠지."

"...!"

요한은 이 이야기를 켄타우로스들에게는 해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듣는다면 그들 사이에는 전설이 하나 새로 생길지도 몰랐다.

"그리고 황금과 비단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벽돌이지."

"맞는 말을 하는군. 그래. 폐하의 말씀이 맞다. 쟈니나."

'아오 이 짜증나는 인간들.'

소문 한 번 물어봤다가 탐욕스럽다는 구박을 받은 쟈니나는 속으로 불평했다. 요한과 황제는 가도 옆에 앉아, 이 고대 제국 시절부터 있던 길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떠들어댔다.

"이걸 다시 만들 방법은 없나?"

"무리라고 생각한다. 황궁의 가장 뛰어난 마법사들도 비법을 알지 못하니."

잊혀진 고대 제국의 옛 비법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시대가 흘러도 부서지지 않고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과 혼란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나라의 곳곳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수에틀그 님이 들으면 재밌어 할 이야기들이 많군.'

아무래도 고대 제국 시절 전통이나 풍습이 많이 남아 있던 곳이라 그런지 이야기 하나 하나가 흥미로웠다.

황제도 이런 재미없는 주제를 귀담아듣는 상대가 귀했는지 제법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비나쉬팀에서 정예들은 가장 먼저 싸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축성하는 법을 배우지. 일단 앞에 간 이들이 땅을 확보하고 그 뒤에 도착한 자들이 땅을 파고 벽을 세우는데..."

"오. 확실히 삽질하는 능력은 중요한 능력이지."

* * *

가도를 따라 가는 길은 쾌적하고 빨랐지만 아무 위험도 없지는 않았다. 앞서 달리던 켄타우로스들은 길가에 쓰러진 병사들을 발견하고 신호를 보냈다.

"몬스터입니다, 각하! 그것도 상당히 덩치가 큰 놈입니다."

병사들은 토벌, 혹은 척후를 맡아 나온 모양이었다. 숨통은 이미 끊어져 있었고 근처에 난장판이 된 수레들이 보였다.

"가까운 성으로 이동하는 게 좋겠군. 폐하를 호위해라."

요한은 바로 판단을 내렸다. 몬스터를 쫓는 것보다는 일단 황제부터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친위대원들도 요한의 판단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성주가 누구지?"

"제르타오. 충성스러운 자다."

"그러면 기꺼운 마음으로 묵을 수 있겠군."

황제는 야영을 전혀 꺼려하지 않았고 이는 요한에게도 편했지만, 원래 인근 귀족의 성이나 영지에서 대접 받으며 머무르는 게 관습이었다.

저렇게 밖에서 자는 걸 선호하는 건 특이한 거였고...

켄타우로스들이 황제의 전갈을 갖고서 근처의 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민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문을 안 열어주는데요...?"

"..."

요한의 시선을 느꼈는지 황제가 다급히 말했다.

"켄타우로스들이라 그런 거다."

"하긴 그럴 수도..."

"아니, 저희가 뭘 잘못했다고?"

"너희가 무섭게 생겼잖나. 비켜라. 친위대원 중 멀쩡하게 생긴 자들을 뽑아서 보내도록 하지."

훤칠한 귀족답게 생긴 친위대원들이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도 똑같이 민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폐... 폐하.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감히 이 작자가!"

아무리 명예에 별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이건 모욕이었다. 하물며 외부인인 요한 앞에서 이런 모욕을 받자 황제는 극도로 분노했다.

"공성입니까??"

"쉿. 눈치 없게 떠들지 마라."

드워프들이 소곤거리며 묻자 요한도 소곤거리면서 대답했다. 황제의 표정을 보니 정말 공성을 시도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힘을 빼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저런 모욕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않나! 네 부하들까지 동원할 것도 없다. 내 친위대로만 공격하겠다."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통첩을 보내보지."

이번에는 요한이 직접 나섰다. 켄타우로스들과 함께 성 앞에 섰다. 성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성은 성이었다. 급하게 공격하기에는 힘들어보였다.

'성벽 넘거나 성문을 부술 수는 없나?'

"각하. 왜 그렇게 둘러보십니까?"

"아. 약한 부분을 찾고 있었다."

"...각하께서 직접 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모든 켄타우로스들이 아클라다만큼 겁이 없지는 않았다. 정신이 박혀 있는 켄타우로스라면 당연히 말려야 했다.

"아니. 그냥 둘러보는 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죄,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요. 하하. 하하하."

'이 자식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켄타우로스들의 입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아직 의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들어라, 성 안의 사람들아! 정당한 용의 핏줄을 이으신 가이아로스 폐하께서 앞에 오셨다. 만약 지금이라도 당장 문을 연다면 앞의 무례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용의 분노가 내려칠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못... 못 믿겠습니다."

"뭐? 지금 이 깃발이 가짜로 보인다는 거냐?"

"우,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성 안에서는 절박한 소리가 나왔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요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 주변에 인기척이 좀 있을 법한데도 사람 하나 없이 성이 꽁꽁 닫혀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좀 이상하긴 했다.

"사정을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성, 성 안의 사람으로 변장하는 괴물이 안으로 들어온단 말입니다!"

"...!"

< 174 가도 사냥 (1) > 끝

< 175 가도 사냥 (2) >

몬스터나 마법 같은 것에 대한 공포는 언제나 이성을 압도했다. 몬스터로 인해 겁에 질려 있다면 저렇게 성문을 닫아걸고 버티는 것도 이해가 갔다.

"병사들을 불러서 공성하겠다고 협박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관두도록. 별로 좋은 방법 같지는 않으니까."

근처의 가도를 따라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뒤에서 오고 있다고 말해봤자, 공포에 질린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성 가까이 도착한 수십 명의 병사들뿐이었으니까.

모일 때까지 기다리면 시간이 꽤나 걸릴 텐데, 그 때까지 기다리는 건 별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되고 나면 성 안의 사람들이 다른 의미로 겁에 질려 문을 안 열 수도 있었다.

'황제의 사절을 믿지 못하고 쫓아 보냈으니...'

"어떤 괴물인지 자세히 말해봐라. 그리고 성주는 어디 있나?"

"성주님께서는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

어쩐지 수비병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했더니...

요한의 재촉에 성 안의 병사들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기사가 말한 게 정말이라면 밖에 세워두는 것도 많이 위험했던 것이다. 미리 변명을 해둬야 했다.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성 밖에서 일어난 습격도 지금 말하는 몬스터의 짓인 모양이었다.

원래는 밖에서만 일어났던 습격이었는데 계속해서 토벌에 실패하자 일이 커진 것이다.

사실 군소영주들은 강한 몬스터가 영지에 나타났을 때 잘 처리하지 못했다.

요한처럼 직접 무기 들고 달려가서 잡을 수 있는 건 극소수의 기사뿐이었고 대부분은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용병들을 부르거나 방랑기사를 부르거나... 물론 이런 방법은 실패할 때가 더 많았다. 그쯤 되면 이제 다른 귀족들이나 주군에게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왜 지원을 안 불렀지?"

비나쉬팀은 신성 제국처럼 귀족들이 각자 노는 곳이 아닌 나름 탄탄한 제도로 묶여 있는 나라였다.

인근 군부대 사령관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됐고 아니면 다른 귀족에게 지원을 요청해도 됐다.

"보냈습니다! 보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겁니다."

나간 사람이 잡혔거나 아니면 저쪽에서도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렸거나. 성 안에는 별 차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보아하니 덩치가 큰 맹수 같은데 사람으로 변장한다는 건 무슨 소리냐?"

"놈은 성 안에도 자유롭게 들어와서 사람을 해칩니다. 성주님께서도 놈에게 당한 겁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군."

밖에서는 덩치 큰 맹수처럼 굴던 놈이 성 안에서는 사람으로 변장해서 습격까지 한다니.

요한도 나름 견문이 넓은 편이었지만 저런 몬스터는 처음이었다.

덩치 큰 몬스터도 많고, 사람으로 변장할 줄 아는 몬스터도 없는 건 아니긴 한데...

"?"

수비병들은 눈을 깜박였다.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요한이 은근슬쩍 성문 앞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성벽 앞에는 해자가 파여 있고 도개교도 올라가 있었긴 한데 왜 저렇게...?

그 답은 곧 나왔다.

쉭!

요한은 갖고 간 창 하나를 던졌다. 올라가 있던 도개교를 지탱하고 있던 사슬이 굉음을 내며 끊어졌다. 대응할 틈도 없이 곧바로 다음 창이 날아갔다. 사슬 하나가 또 끊어졌다.

쿵!

굵은 사슬의 연결부위를 정확하게 투창으로 던져 끊는 묘기에 병사들은 경악했다.

요한은 내려온 도개교를 건너 성문을 움켜잡았다. 다행히 성문은 비교적 작았고 붙잡기 쉬운 격자 형식이었다. 좀 더 커다랗거나 다른 형태였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물론 말이 열기 쉬운 것이지 무쇠로 되어 있어 그 무게는 사람 혼자서 들어 올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병사들이 여럿 붙어 도르래로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한 손으로 성문을 잡고 들어 올렸다. 성문 앞에 있던 병사들은 성문이 갑자기 올라가자 기절초풍해서 무기를 떨어뜨렸다.

"몬스터가 성 안에 들어 왔..."

"누가 몬스터라고?"

요한은 병사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병사는 숨이 막혀 컥컥댔다.

"내가 뭘로 보이나?"

"기, 기사님. 기사님으로 보입니다. 기사님으로 보입니다!"

"그래. 드디어 제대로 볼 줄 알게 되었군. 성문을 제대로 열고 안으로 병사들을 들여보내라. 폐하께 저지른 무례는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겠다."

소란을 듣고 달려 온 수비병들은 처음 보는 기사가 들어와서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내리는 모습에 당황했다.

"당신이 누군... 컥!"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살고 싶다면 실수하지 마라. 알겠나?"

요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권위와 기세는 병사들을 짓눌렀다. 분명 외부에서 성문을 열고 들어온 강도 같은 입장이었는데도 병사들은 쩔쩔매며 명령을 따랐다. 수비대장도 당황해서 따를 정도였다.

"그... 기, 기사님. 정말로 폐하께서 계신 겁니까?"

"그렇다. 자비를 원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성문이 닫혀 있을 때면 모를까, 성문이 열리자 황제에 대한 공포로 병사들은 벌벌 떨었다. 그들이 잡혀가서 모조리 처벌받는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한 마디 해 줄 성주는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성주가 쓰러져 있어도 딱히 변명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미쳤다고 저런 상황에서 편을 들어주겠는가.

병사들이 우물쭈물하자 요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상황을 잘 설명드릴 테니 움직여라. 상황이 상황이니 폐하께서도 관용을 베푸실 거다."

"정, 정말이십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기사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벼락같이 뛰쳐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켄타우로스들은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각하. 하하."

* * *

애초에 많은 인원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성이 그 정도로 크지도 않았고, 대번에 혼란이 일어날 테니까.

밖에서도 병력을 나눠서 움직이는데 하물며 성 안이라면야.

게다가 몬스터의 소문은 요한도 찜찜하게 만들었다. 요한은 믿을 수 있는 자들만 뽑았다. 황제의 시종이나 노예들도 유심히 확인했다.

'카라마프까지 확인했으면 괜찮겠지.'

요한은 스스로의 감각을, 그리고 카라마프의 후각을 믿었다.

황제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몰았다. 성 안의 놈들이 한 짓이 있었으니 기분이 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말 저들이 문을 열어준 거 맞나?"

"그러면? 설마 내가 가서 직접 문을 들어올렸겠나?"

"...하긴 그것도 그렇군. 내가 의심이 너무 과한 것 같다. 사과하지."

"..."

"..."

뒤를 따르던 켄타우로스들은 표정 관리를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클리아는 의아해했다.

왜 저러지?

황제의 깃발이 들어오자 성 안의 사람들은 '헉'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정말로 황제가 이런 누추한 성에 오다니.

사람들은 엎드려서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뺨에 자리 잡은 용 수인족 특유의 비늘과, 머리 위로 자리 잡은 두 개의 뿔은 누가 봐도 용의 핏줄을 이은 모습으로 보였다.

황제가 지나가고 나서 사람들은 고개를 들려다가 다시 엎드렸다. 쟈니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쟈니나를 멀리서 힐끗 본 탓에 용 수인족으로 오해했다.

"???"

* * *

성주의 부인은 기쁨과 곤란함이 섞인 얼굴로 황제를 맞이했다.

"표정이 좀 곤란한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 군대를 이끌고 와준 것은 기쁘지만, 귀족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하지 못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황제의 말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이슬만 피하려고 찾아온 성이니 괜한 연회를 열지 말도록. 병사들에게 술과 따뜻한 음식만 나눠주면 그 이상은 필요 없다."

"하오나 그럴 수는..."

"맞는 말이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가능한 정보를 얻어야 하니 도와줬으면 좋겠군."

부인은 요한을 당황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황제는 누군지 알았지만 요한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소문에 들었던 친위대장과는 종족부터가 달랐다.

"예이츠 백작이다. 신성 제국 출신으로, 호위를 위해 고용했지. 용맹하고 뛰어난 기사다."

"그, 그렇군요. 백작님. 알겠습니다."

외부의 귀족을 새로 고용했다는 말에도 부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비나쉬팀에서는 그렇게 파격적인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실력 좋은 기사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표정이었다.

"시종들과 하인들, 그리고 노예들을 불러주시오. 하나하나 다 들어봐야겠으니."

"그게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여기 있는 이 자는 마법사로서 몬스터에 대해 해박한 사람이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지혜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지."

"..."

쟈니나는 요한을 말리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실패하면 그녀만 병신이 되는 것 아닌가?

요한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쟈니나를 쳐다보았다. 얼핏 보니 용의 핏줄 같기도 하고...?

"각하. 각하! 너무 그러시면 큰일 나요!"

"왜?"

"지금 몬스터의 정체도 모르는데 그렇게 말했다가 못 찾으면..."

"설마 짐작가는 게 하나도 없는 건가?"

요한은 '마법사인데 그런 것도 못해?'라는 표정으로 쟈니나를 쳐다보았다. 진심이 담겨 있어서 더욱 모욕적이었다. 쟈니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세상 모든 몬스터를 제가 알 수는 없는 법 아니겠어요?"

"그래도 짐작 하나 못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알겠다. 부인이 돌아오면 사실대로 말해주지."

"...지금 당장 그러실 건 없고요! 좀 적당히 칭찬을 해주셨으면..."

요한은 매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한은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 눈빛은 '능력도 부족하면서 참 성가신 마법사군'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쟈니나는 일단 떠오르는 거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정말 무능한 자로 몰릴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습격할 수 있는 몬스터들은 여럿 있다지만, 사람으로 변장할 수 있는 몬스터는 적어요. 전설에 따르면 도플갱어 같은 몬스터가 있는데..."

"정말로 있나?"

"저도 직접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어요?"

요한이야 신도 안 믿는 성격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어지간한 미신이나 소문은 믿는 편이었다. '그런 것들이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덩치 큰 놈으로도 변장할 수 있나?"

"글쎄요."

"도플갱어는 어떻게 퇴치하지?"

"딱히 퇴치하는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그러면 할 줄 아는 게 뭐지?"

"..."

쟈니나가 좌절하는 동안 요한은 나름대로 대응을 시작했다.

'무엇으로 변장하든 간에 힘으로 찾으면 그만 아닌가?'

카라마프를 풀어 수상쩍은 놈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어떤 놈으로 변장해 있든 간에 안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사람으로 변장한 몬스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어... 누구였더라, 방앗간지기집 둘째 아들이 말했었나? 자기하고 똑같이 생긴 놈이 지나가는 걸 봤다고 합니다. 그 놈만 아니라 수비대에서 일하고 있는 병사도 그랬고..."

"일하고 있던 노예 놈도 그랬습죠."

증언들은 꽤 많았다. 요한은 검집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얼굴을 바꾸는 건 믿기 힘들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요한도 직접 본 적이 있지 않던가. 암살자가 쓰는 마법은 몬스터도 쓸 수 있었다.

'성문 닫고 하나씩 확인해야 하나?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골치 아파지겠는데.'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거면 요한이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냥 떠나야 하는데...

"?"

요한은 고개를 들었다. 안뜰에 요한과 꼭 닮게 생긴 자가 빤히 요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놈은 고개를 돌리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매우 재빨랐다.

"어딜!"

요한은 망설이지 않고 뛰쳐나갔다. 발밑에 엎드려 있던 카라마프가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

상대는 요한을 잘못 평가하고 있었다.

보통 도플갱어를 보면 그 수상쩍음과 두려운 마음에 먼저 몸이 얼어붙고 시선을 피해야 정상인데, 요한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검 뽑아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는 도플갱어의 피 색깔을 확인해보겠다는 강렬한 살기가 느껴졌다.

'미친 놈!'

< 175 가도 사냥 (2) > 끝

< 176 가도 사냥 (3) >

상대가 대체 왜 겁이 없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단 도망쳐야 했다.

다행히 상대 기사와 달리 그는 이 주변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날랜 것으로는 자신 있었으니 충분히 따돌릴 수 있으리라.

남자는 낮은 돌담을 붙잡고 뛰어 올랐다. 내성 앞쪽의 낮은 벽을 타고 넘어가면 저쪽의 입구로 나가는 것보다 더 빨리 나갈 수 있었다.

꽝!

"?!?!"

뒤에서 굉음이 들리자 남자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았다. 요한이 돌을 걷어차서 무너뜨린 다음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낮은 담벼락이라지만 발로 차서 무너뜨리다니?!

'미친 놈!!'

남자는 허둥지둥대다가 옆에 있는 말을 보고서는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말이 비명을 지르더니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길이 좁아서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콱!

요한은 달려오던 말을 힘으로 움켜잡은 다음 강하게 꿇어앉혔다. 사나운 기세에 말이 겁을 먹더니 벌벌 떨며 온순해졌다.

'저거 진짜 사람 새끼 맞냐???!'

황제 폐하께서 고용한 신성 제국 출신 귀족이라는 건 들었는데 하는 짓을 보니 아무리 봐도 인간의 핏줄이 아닌 다른 핏줄이 섞인 것 같았다.

남자는 오죽 급했는지 몸을 날려 성 밖의 해자로 뛰어들었다. 안에 뭐라도 있었으면 크게 다칠 수 있는 짓이었지만 상대는 과감했다.

"뭐하고 계세요?"

"유클리아!"

요한은 유클리아와 다른 켄타우로스들을 만나자 반색했다. 바로 지금 누군가를 쫓고 있다고 말했다. 유클리아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바로 요한을 등 뒤에 태웠다.

"그런데 어떤 놈을 쫓고 계셔요?"

"도플갱어 비스무리한 놈인데."

"...?"

유클리아는 발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매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에 타고 있던 요한은 유클리아의 근육을 타고 올라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도플갱어 같은 놈을 봤으면 도망치거나 용한 사제를 찾아가야지 왜 쫓아가고 있지...?

"그, 전설에 따르면 자기와 똑같은 놈을 만나면 죽는다고 하던데."

"둘 중 하나가 죽을 테니 상대가 죽겠지."

"..."

확실히 그건 그랬다. 유클리아는 반박하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 * *

쫓는 건 쉬웠다. 어려운 건 힘을 조절하는 일이었다. 잘못 쳤다가 죽이면 안 됐으니까.

유클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만약에 요한이 둘이 되서 서로 자기가 요한이라고 주장할까봐 겁을 먹은 것이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몬스터가 말을 잘 하는군."

"몬스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도플갱어가 아니었다. 제법 요한과 비슷하게 위장한 사람일 뿐이었다. 위장한 솜씨가 그럴듯해서 멀리서 보면 얼핏 착각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전부 다 말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벌써 고문하셨...?"

"안 했다."

남자가 손도 대지 않았는데 벌벌 떠는 모습에 유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고문하지도 않았는데...

"저 자. 성주 가문의 노예 같아요. 본 적 있어요."

"!"

남자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플갱어는 성주의 부인이 낸 헛소문이었다. 몸놀림이 재빠르고 손재주가 있는 노예를 시켜 소문을 만들어낸 것이다.

몇 번 헛것을 보면 알아서 소문은 부풀려지고 커지게 되어 있었다.

"뭔 미친 짓거리를... 밖의 몬스터도?"

"아, 아닙니다. 밖의 몬스터는 진짜 몬스터 맞습니다."

"성주를 봐야겠다. 안내해라."

"성... 성주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

성주가 죽은 것은 도플갱어 때문이 아닌 밖의 몬스터를 사냥하던 도중이었다. 호위하던 병사들도 전멸했는데 성주도 무사할 리 없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사망 소식을 발표하고 뒷일을 진행해야 했지만 성주 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가문이 꽤나 복잡하게 얽혔나보군.'

혼인은 두 개인이 하지만, 사실 두 가문 사이의 일이라고 봐야 했다.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그 재산은 원래 자식들이 물려받아야 하지만 세상 일이 그리 간단하게 굴러가진 않았다.

당장 이젤리아도 야심만만한 친척들에게 위협받지 않았던가. 들어보니 부인의 상황은 좀 더 안 좋은 모양이었다.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숨기기만 해도 문제는 훨씬 나아졌다. 도플갱어 소문은 영리한 소문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고 성주가 밖에 나오지 않아도 납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유클리아가 검을 뽑았다. 요한은 당황해서 물었다.

"왜 뽑나?"

"각하를 속였으니 죽여야 하지 않나요?"

"아니. 여긴 내 땅도 아니고, 내 땅이었어도 그렇게 단칼에 베지는 않지."

"그러면 혀와 귀만 자르는 걸로?"

유클리아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남자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위에 보고하고."

두 몬스터 중 하나만 잡으면 되는 일로 바뀌었으니 어찌 보면 더 간단해지긴 했는데, 생각치도 못한 일에 발을 디딘 상황이라 기분이 복잡해졌다.

* * *

말을 들은 황제는 조용히 부인을 불렀고, 노예가 붙잡힌 걸 보고 부인은 바로 실토하고 처분에 따르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르타오가 죽었을 줄이야..."

"그래도 도플갱어가 없다는 것에 감사하자고."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

"난 호위인데...?"

"참고만 하는 거니 편하게 말해봐."

"용서해주면 부인부터 자식까지 충성하겠지. 어차피 바꿔봤자 머리 굵고 약점 없는 야심가들만 자리에 앉지 않겠나?"

황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의 의견이 확실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젊고, 기사 출신이라는 것과 별개로 요한이 가진 정치적인 감각은 놀라울 때가 있었다. 비나쉬팀의 황궁에서 태어나고 자라 온 이가 아닌 외부인인데도 말이다.

"내버려둬도 들키지 않겠지만 성주를 만났다는 말 한 마디만 더 얹어준다면 몇 년 간은 확실히 들키지 않겠지. 자식이 성인이 되니 곧 자리를 이어받을 거고."

원래 평민이 영주의 얼굴을 보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었다. 영주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칩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귀족들이었는데, 다쳤거나 도플갱어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면 납득 가능하리라. 게다가 황제가 만났다는 말까지 얹어주면 누가 의심하겠는가.

"하지만 그 죄는 용서하더라도 영지 밖의 몬스터를 내버려둔 것은 큰 죄다. 지원을 보냈어야 했다."

"지원 요청은... 보냈습니다만...?"

"!?"

성주가 죽고, 도플갱어도 가짜였기에 당연히 지원 요청도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성주 부인은 그 정도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들킬 수 있더라도 일단 지원은 부르고 본 것이다.

"...그건 잘 했군. 하지만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걸 보니 도중에 습격당한 게 분명하다. 날이 밝는 대로 병사들을 풀어서 수색에 나서겠다."

도플갱어가 없다는 게 알려졌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황제는 바깥의 맹수를 사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주변을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훌륭한 군공이 하나 세워질 것 아닌가.

게다가 옆에는 든든한 백작까지 있었다.

"폐하. 보고가 들어왔는데 지원이 이제 도착했답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 * *

황제의 분통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지원은 어쩔 수 없었다. 성 군트살보 기사단에서 나온 이들은 깃발을 펄럭이며 성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수도원 출신인가?"

"수도원 출신이긴 한데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경건한 자들은 아니다."

확실히 황제의 말이 맞아 보였다. 수도원 기사단인데 복장은 화려하고 장신구들도 여럿 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귀족이었다.

비나쉬팀은 일신교단과 뿌리가 같았지만 좀 계파적으로 달라진 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청빈과 겸손을 주장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저렇게 수도사가 대놓고 입고 다니는 건...

무늬만 수도사란 뜻이었다.

'돈이 많아 보이는군.'

"폐하. 이 만남에 신의 영광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달려왔다가 황제의 깃발을 만나게 된 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달려와서 예의를 표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를 지나다가 성주의 부탁을 듣고 찾아왔다. 몬스터를 잡으러 온 건가?"

"예. 폐하. 저희 기사단의 능력을 잘 아시잖습니까?"

"성 군트살보 기사단의 능력을 어찌 모를까. 이렇게 신앙심으로 온 것을 치하하겠다."

서로 예의 갖춰서 덕담만 주고받고 있었지만 황제의 표정은 왠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요한은 그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폐하.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직접 나서실 게 아니니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짐은 군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고 전투를 치룬 경험도 많다. 짐을 무시하는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투와 몬스터 사냥은 전혀 다른 법 아니겠습니까. 부디 가납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요한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여기 있는 자들은 나름 다 황제가 말 한 마디로 갈아치울 수 있는 자들 아닌가.

그런데 건방지게 할 말 다 하는 게 신기했다. 누가 보면 여기가 신성 제국인 줄 알 것이다.

"저 기사단 놈들이 유난히 불충스러운 건가?"

"아니. 딱 평균인 놈들이지."

언제나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비나쉬팀은 황제의 명령으로 잘 굴러가는 관료 제도를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적들이 들이닥치는데 비나쉬팀의 군대만을 쓸 수는 없지 않는가.

용병을 고용하고, 지방 귀족들에게는 군을 모으는 대가로 실질적으로 세습 가능한 관직을 주고, 영주 자리도 주고...

이건 거의 관습적인 거라, 황제가 바꿀 수야 있다지만 멋대로 그랬다가는 즉각 반란이 터져 나올 것이다. 사실상 명목상의 권한이었다.

"그냥 신성 제국인데."

"딱히 할 말이 없군."

"그래서 저 성 군트살보 기사단은 뭐하는 놈들이지?"

"수도원이긴 한데 수도원의 특권과 귀족의 특권 모두 누리는 놈들이지."

수도원은 원래 몇몇 특혜를 받기 마련이었다. 그런 수도원이 커지고 세속적으로 변했지만 일단 이름은 수도원으로 달고 있는 게 바로 성 군트살보 기사단이었다.

인근 지방 귀족 자제들의 교육기관이자 사교장 같은 곳!

'아니. 저런 수법이?'

요한은 그 수법에 살짝 감탄했다. 요한이 영주만 아니었다면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서 저 수법을 써먹었을 텐데.

어찌되었든 간에 그 실력은 확실했다.

애초에 여유 시간에 훈련만 하는 귀족들의 실력은 농노들이 따라올 수가 없었다. 몇몇 이름 높은 몬스터들이 성 군트살보 기사단의 칼에 쓰러졌다.

"그냥 목에 칼을 들이대고 명령을 내리면 안 되나요?"

유클리아의 질문에 요한은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억지로 시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으니까. 아무래도 이 주변 귀족들의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겠지."

"그러면 다 죽이면 되지 않나요?"

"그 충언, 내가 폐하에게 꼭 올려주지."

요한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유클리아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클리아는 진심으로 그게 답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혼자 툴툴대고 있는 황제에게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불만이면 먼저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먼저 잡는다고?"

"그래."

"하지만... 내 병사들은 몬스터 사냥에 능하지 못한데."

"내가 트롤부터 시작해서 여러 몬스터를 잡았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나보군. 저 뒤의 켄타우로스들도 사냥의 달인이지."

요한의 말에 황제가 매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트롤을 잡았다고? 어떻게 잡았지?"

"어쨌든 허락만 한다면 신성 제국식 사냥을 보여줄까 싶은데."

"그래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그런데 트롤은 어떻게 잡았나?"

"자! 사냥이다. 저 비나쉬팀 놈들한테 지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켄타우로스들은 요한의 말에 매우 흥분해서 환호했다. 어디를 떠돌든 간에 그들에게 사냥은 가장 짜릿하고 뿌듯한 일이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밭을 갈듯이 켄타우로스는 사냥감을 사냥하는 것이다.

'한동안 비나쉬팀에서 지내게 될 텐데, 명성을 쌓아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요한은 이미 신성 제국과 반도에서 명성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느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하급 귀족이던 요한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다 명성의 힘 아니었던가.

이번 성주 부인의 가문에 은혜를 베풀어 준 것도 그렇고, 이 주변을 어지럽히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 또한 요한의 후광으로 돌아올 것이다.

요한과 켄타우로스들이 준비하던 사이,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주변을 지나가다 쟈니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기 저 여자, 용의 피를 이은 분이신가?"

"설마 폐하의 먼 친척...?"

< 176 가도 사냥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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