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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다행히 폭발은 금방 가라앉았다.

정확히는 끊임없이 불어오는 상승기류와, 그 기류가 머금은 축축한 습기에 폭발의 여파가 위쪽으로 날아가버린 것.

물론 통로 반대쪽에서 터진 폭발이었기에 망정이지, 폭약의 매설 지점이 근처이기라도 했으면 일행 모두가 꼼짝없이 바람에 휘말렸을 테였다.

중간중간 회오리 같은 기류에 걸려들어,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몸이 으깨져나가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는 상황.

"크, 큰일 날 뻔했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챈 비요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 곁에서 댈런은 여유롭게 한 손만으로 돌부리를 붙잡은 채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오."

"그런가? 하지만 폭발은 방금···."

"폭발이 문제가 아니오. 그 폭발로 통로 전체를 울린 진동이 문제지."

댈런은 순식간에 통로 전체를 향해 감각을 확장했다.

기감이 뒤틀린 마력풍을 살피고, 나머지 감각들은 벽과 바위틈을 샅샅이 훑는다.

바위틈 사이. 먹잇감을 향해 번뜩이는 살기를 느끼는 건 금방이었다.

방금 전 폭발의 여파로, 이 통로에 서식하는 유일하다시피 한 마물이 잠에서 깨어난 것.

문제라면 그 살기의 숫자가 한둘이 아닌, 수십 수백이라는 점이었다.

"오는군."

"댈런? 대체 뭐가···우웃!"

까아앙!

본능적으로 뽑아 휘두른 양날도끼에, 반투명한 촉수가 부딪혀 튕겨나간다.

흐느적대는 촉수는 도끼날에도 잘리지 않았다. 오히려 금속음을 내며 불꽃을 튀기는 촉수.

'촉수아귀.'

오랜만에 떠올리는 마물의 이름을 되뇌인다. 댈런은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걸 기점으로,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커헉···!"

"끄아아악! 초, 촉수가!"

"등 뒤를 조심해!"

습기를 가득 먹다못해 안개나 다름없는 통로의 공기.

뿌옇게 물든 시야 너머에서, 십수 가닥의 촉수가 날아들어 요원들을 공격해왔다.

"마물의 습격이다! 무기를 들어라!"

"하, 하지만 손을 놓았다간 그대로 날아갑니다! 어떻게···!"

"밧줄에 몸을 맡기고 싸워라! 그러려고 박아둔 쐐기 아니냐!"

"저희 모두의 체중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비명 사이로 고성이 오간다. 진퇴양난이었다.

이대로 나아가자니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대응하자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미 한계까지 내몰린 팔다리는, 벽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한 상황.

곳곳에 박아둔 쐐기가 잠시간 몸을 붙잡아줄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테였다.

그리고 일행의 가장 후미.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댈런은 도끼자루를 슬슬 매만졌다. 그가 말했다.

"시에나."

"응?"

"요원들에게 보호막을 씌워주시오. 무리하지는 말고, 손이 닿는 대로. 그리고 비요른."

"폭발로 쫓아내라 이거지? 시도는 해보겠네. 습도가 높아서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모르겠어."

"시간 끄는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오."

비요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시에나가 끼어들었다.

"당신은 어쩌려고? 설마 여기서 혼자 싸우겠다는···."

시에나는 말을 멈췄다. 댈런의 웃음 때문이었다.

그가 씩 끌어올린 입꼬리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웃음이었다.

꿈틀거리는 입술은 가볍지도, 부드럽지도 않았으며.

그 사이로 드러나는 송곳니는, 포식자의 탐욕스런 빛깔로 번들거린다.

지옥의 시체거인과 미궁의 놀, 사람 잡아먹는 흑마법사를 앞에 두고 지었던 미소.

지옥을 강림시킨 부단장 앞에서도, 푸른 비늘 아룡과 거대한 샌드웜을 눈앞에 두고도 변하지 않았던 웃음이었다.

강철도 가볍게 구부리는 이 몸뚱이를 입게 된 이후, 숱한 싸움을 통과하며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자리잡게 된 표정.

싸움 뒤의 보상을 향한 탐욕인지, 혹은 싸움 그 자체를 즐기게 되어버린 것인지는 이제 그 자신마저도 알 수 없었다.

허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저것들을 잡아 죽여 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끝에, 이 마지막 회차의 끝에서는 종말을 이겨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으니까.

언제부터인가는 종말과의 싸움마저도, 더이상 어깨를 짓누르는 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어렴풋이 느껴온 승리에 대한 희망이, 그 무게를 가볍게 해준 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 희망 쪽으로 좀 더 기울 수 있도록, 가능성의 저울 위에 무게추를 올릴 뿐이다.

휘릭―

댈런은 가볍게 도끼를 휘둘렀다. 툭 하고 끊어지는 밧줄.

박아두었던 쐐기에 연결된 밧줄들 역시 가벼운 손짓에 끊어진다.

"경험치 챙겨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절벽을 가볍게 밀어찼다. 거구의 육신이 둥실 떠올라 순식간에 기류에 휩쓸린다.

스으으···.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에, 신성력이 아지랑이처럼 맺히며 도끼날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댈런의 눈이 마력광으로 번뜩였다.

환상과 주문마저 꿰뚫어볼 수 있는 시야에, 안개 너머 이를 악물고 촉수를 쳐내는 집행관의 모습이 잡혔다.

집중은 잠깐이면 충분했다.

파지짓!

깨어진 불협화음과 함께, 도끼날 위에 맺히는 또렷한 형상.

흐릿해진 오른손 너머. 이미 손도끼는 사라지고 없었다.

쉬이― 파바바박!

공간을 뛰어넘는다.

한 번이 아닌, 다섯 번에 걸쳐서.

쩌저저적―!

그 경유지마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늑대 크기의 반투명한 아귀 같은 물고기가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거센 기류를 무시하고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반투명한 피. 형광색을 머금고 펄떡이는 심장과 꿈틀거리는 내장들.

도끼가 사샤를 덮치던 촉수아귀를 쪼개고 벽에 박히는 걸 확인한 댈런은, 등 뒤의 창을 뽑아들었다.

투웅―

가볍게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며, 기류를 역행해 내려간다.

세찬 바람에도 찡그림 없이 부릅뜬 눈에는, 붉은 마력광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바라보는 건, 심상 너머 영역에서 이글거리는 불뱀의 꼬리.

반 년도 더 전에 영역의 오두막 근처에서 피어났던 작은 불꽃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역풍(2)

휘이이이···!

얼굴을 두들기는 바람. 희뿌연 안개 속.

시야 한켠에 띄운 상태창을 곁눈질하며, 댈런은 창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이름 : 댈런

레벨 : 21

[근력 : 34] [기량 : 30] [체력 : 31]

[감각 : 25] [지능 : 28] [마력 : 29]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

상태창은 최근 회수한 시체와 레벨업을 반영하고 있었다.

작열사막에서 한 샌드웜을 처치하자 나타난, 반쯤 녹아버린 흑마법사의 시체.

연조직이 대부분 용해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의 잿빛 시신은, 그에게 능력치와 아이템을 더해주었다.

[샌드웜의 위장 속에서 녹아버린 흑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마력 +2, 감각 +1, 핏빛 제례용 단검]

아공간 한쪽에 악마가 곱게 정리해둔 단검은, 언젠가 요긴하게 쓸 곳이 있겠지.

허나 지금 주목해야 할 건 다른 쪽이었다.

스으으···.

창을 쥔 손아귀에 미묘한 간질거림이 감돌고, 무형의 기운이 희끗하게 그 위를 덮어간다.

레벨업을 통해 30에 도달한 기량 능력치.

댈런이 그로 인해 얻은 능력은, 공간을 빗겨 뛰어넘는 도끼 투척만이 아니었다.

'힘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이 대륙에 떨어진 첫날.

지금의 육신을 입게 되었던 그 시점부터, 전신에 끓어넘치는 힘은 멈출 줄 모르고 성장해왔다.

허나 지금까지 그걸 사용하는 방식은 한정되어 있었다.

무식하게 힘의 총량으로 밀어붙이거나, 능력의 격차 그 자체로 압도하는 방식.

오래 전 여관에서 깡패들을 두들겨 팼을 적에나, 부상당한 진룡 청린을 하늘에서 떨어뜨렸을 때나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스으으으···.

창을 쥔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림은, 이때까지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자극.

이 감각이라면 이미 오래 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그 총량이 아닌 기예의 측면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그넬 로트."

숙련도 100퍼센트를 찍은 불꽃 화살 스킬은, 그 가능성의 첫 현실화였다.

화륵!

창날에서 불꽃이 일렁인다. 자연스럽게 손을 떠난 창 위로, 불꽃이 점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역풍에 맞서 헤쳐나가는 르베론의 걸작.

B등급 스킬, 레레도나라의 비검은 댈런의 심상을 창으로 여과 없이 전달했다.

파바바밧!

점점이 찍힌 불꽃들이 서로 첨단을 뻗으며, 밧줄처럼 매듭으로 이어지고.

기기기긱―

불꽃의 매듭이 창을 완전히 둘러싼 채, 기이한 마찰음을 토해낸다.

화르르륵!

매듭마다 폭발하는 주홍빛 화염.

점이 선으로, 선이 면으로 이어지며, 창을 둘러싼 불꽃은 이내 뚜렷한 형체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 끝에 남은 건, 한 자루의 창이 아닌 거대한 불꽃의 뱀.

여덟 갈래로 쪼개진 주둥이가 날카로운 수백 개의 이빨을 드러내고.

주둥이를 둘러싼 수십 개의 눈이 새빨간 안광을 뿜어낸다.

[캬아아아!]

불꽃 화살이 최대의 숙련도에 닿았을 시점과, 미궁 2층의 샌드웜을 때려눕힌 시기가 엇비슷해서일까.

타오르는 불뱀의 형상은 일견 작열사막의 샌드웜과도 닮아있었다.

결국 댈런의 손에 때려눕혀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샌드웜이 미궁 2층의 가장 강력한 포식자 중 하나임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현실의 두 눈으로 목도한 포식자의 위용이,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그래픽 덩어리와 차원이 달랐음은 이루 말할 것도 없는 일.

작은 인상. 그 정도면 심상 속 새로운 가능성의 발아에 충분한 양분이다.

댈런의 영역 속 불꽃 화살이, 그 크기를 불려가며 거대한 불뱀의 형상으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가라."

콰아아아아―!

주인의 명령을 받은 화살이 쏘아진다.

부딪히는 역풍에도 굴하지 않고, 수중을 유영하는 물뱀처럼 통로 아래로 헤엄쳐가는 염사(炎蛇).

불꽃이 넘실거리는 주둥이를 벌리고, 상승기류 사이를 유영하던 촉수아귀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꾸르륵! 그르륵!

난데없이 등장한 포식자에 당황한 마물들. 기류 사이를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제 살길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불뱀의 이빨을 피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치이이이···!

넘실거리는 주홍빛 비늘은, 그 열기만으로 일대에 깔린 안개를 순식간에 기화시켜버린다.

짧은 순간, 완전하게 확보된 일대의 시계.

물론 통로의 상승기류가 더 많은 안개를 몰아왔기에, 일대의 시야가 확보된 건 찰나였으나.

숙련된 사수들이 목표물을 조준하기에는, 그 찰나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준―"

걷힌 안개 사이로, 특무대 요원들이 장총을 겨누고.

"발사!"

타다다다당!

집행관의 명령에 따라, 수십 발의 총알이 기류를 타고 솟구친다.

퍼버버벅···!

상승기류마저 계산해 발사한 총알이, 촉수아귀의 동체를 사정없이 꿰뚫는다.

터져나가는 회백색 피부. 단단한 촉수와는 다르게, 반투명한 근육과 살은 저항조차 하지 않고 관통당했다.

그러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몸뚱어리 정중앙에 위치한 심장을 맞은 놈들을 제외하면, 마치 슬라임처럼 금방 피해를 수복하고 다시 달려들었기 때문.

"······!"

"탄종 교환! 순은탄으로!"

집행관 사샤가 빠르게 명령을 내린다. 일순 당황했던 대원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총알을 빼내고 새로 집어넣었다.

스륵! 척척척!

밧줄에 몸을 의지해, 까마득한 절벽에서 탄종을 바꿔낸다.

한편 요원들의 발 아래에서는 시에나가 펼친 보호막이, 불어닥치는 바람을 적절한 궤도로 흘려보내며 무마시키고 있었다.

휘이이이···!

몸을 아래로 잡아끄는 중력과, 아래에서 위로 불어닥치는 바람 사이의 미묘한 균형.

숙련된 마법사의 곡예에 가까운 마력 운용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사격은 아무리 뛰어난 특무대 요원들이라도 엄두조차 낼 수 없었으리라.

꾸르르르! 꾸르륵!

물론 마물들은 잠자코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안개가 걷히며 잠시 당황했던 촉수아귀들이, 다시금 특무대를 덮쳐들며 촉수를 뻗어낸다.

타다당!

강철 같은 촉수는 다급한 권총의 대응사격에도 쉽게 저지되지 않았고.

쉬이익!

촉수 끝에서 돋아난 마비 독침이, 먹잇감을 노리고 독액을 뭉클거리며 뿜어낸 순간.

콰과광! 꽈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마물 떼와 특무대 요원들 사이를 가로막으며, 다가오던 촉수들을 싸그리 날려버렸다.

"으하하하! 강풍에 안개라니!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날씨라니까!"

폭발의 주인공은 외눈의 명공, 비요른이었다.

배낭에서 주섬주섬 꺼내 불 붙인 폭탄이, 장인의 손을 떠난 뒤 절묘한 순간에 터져나간다.

폭발로부터 말미암은 화염과 폭풍은 촉수아귀의 접근을 저지하기에 충분했다.

이쪽으로 불어닥치는 폭압은 시에나가 적재적소에 보호막 마법을 펼쳐내어 상쇄시켰고.

시에나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다더니, 확실히 한두 번 합을 맞춰본 건 아닌 모양.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댈런은 피식 웃으며 창을 불러들였다.

콰아아아아―

저 아래쪽까지 내려갔던 화염의 뱀이, 통로 전체를 붉게 물들이며 솟구친다.

치이이이···!

그 몸으로 인해 데워진 공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와, 일대의 안개를 다시 한 번 싸그리 날려버렸다.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사수들의 조준선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정렬된 순간.

"발사!"

타다다다당!

사샤가 다시 한 번 외치고, 빗발치는 탄환에 촉수아귀의 몸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뻐버버벅―!

순은탄이 명중하자 착탄음부터가 달라진다.

촉수아귀는 반쯤 영체에 가까운 존재들.

심장을 제외한 부위는 물리적인 피해에 어느 정도 면역이지만, 그만큼 마법이나 주술, 혹은 순은 재질의 무기에는 취약했다.

콰아아아―!

불뱀이 끊임없이 통로를 배회하며, 안개를 날려버리고 촉수아귀를 씹어삼키는 동안.

거듭된 사격으로 안정적인 화망이 구축되고, 그 사이사이로 시에나의 주문과 비요른의 유탄 역시 날아들었다.

패래래랙―

상황을 안정시킨 댈런은 도끼를 불러들였다. 새 힘을 시험해봤다지만, 그렇다고 손발 놀리는 것도 좀 쑤시는 짓이다.

쉬이―퍼버벅!

그의 도끼가 번쩍이고, 폭발이나 주문의 전조조차 없이 토막 나는 촉수아귀가 점차 늘어간다.

꾸르르륵···!

몰살 직전까지 몰린 촉수아귀 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놈들이 도망치고자 파고든 바위틈 깊은 곳은, 염사의 열기로 인해 산 채로 익어가는 무덤이 되었을 뿐이었다.

생선 익어가는 냄새가 한동안 통로에 맴돌았다.

***

찰박!

가죽 부츠가 진창을 밟았다. 역한 냄새가 훅 올라와 코를 찔렀다.

댈런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축축한 지면. 느릿하게 흘러가는 끈적한 늪지.

이곳은 상승기류가 부는 통로를 기어내려가, 벽 바위틈의 커다란 동굴을 통과한 끝에 다다른 장소였다.

'미궁 3층. 바닥 없는 늪.'

둥실둥실 떠다니는 부유물은 이미 늪 위를 완전히 뒤덮은 채였다.

어두운 빛깔의 이끼와 얇은 덩굴들, 썩은 나무껍질, 이름 모를 마물의 뼛조각 같은 것들.

초입 부근이라 늪지의 깊이 역시 비교적 얕았다. 하지만 마냥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이런 얕은 늪지라도, 곳곳에는 수심 십 미터가 넘어가는 깊은 구덩이가 곳곳에 존재한다.

저런 부유물들 사이로 자칫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늪지 아래로 빨려들어갈 터.

그럼 끝이었다. 구덩이 깊은 곳에 도사리는 존재는 베테랑 탐험가라 해도 몸서리치게 만드는 놈들이었으니까.

"2층이 사막인데, 3층은 늪지대라니······. 한 층 한 층이 완전히 다른 세계군요."

엄지손가락만 한 파리를 휘휘 쫓고 있자니, 집행관 사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그녀 역시 악취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였다. 댈런은 대충 답했다.

"내려갈수록 더 심해질 거요."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보신 겁니까?"

댈런은 어깨만 으쓱했다. 마우스랑 키보드 딸깍여서는 내려가봤지.

그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사샤의 표정에 약간의 두려움과 존경이 동시에 깃들었다.

"다들 지쳤을 테니 우선 쉴 곳을 찾도록 하지. 고지대가 좋을 거요. 3층의 마물은 대부분 늪 깊은 곳에 살고 있으니까. 고지대가 그나마 마른 땅이기도 하고."

"···예. 알겠습니다."

일행은 빠르게 주변을 수색했다. 머지않아 근방의 고지대에 작은 야영지가 꾸려졌다.

치열한 전투로 체력이 한계에 몰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움직이는 요원들. 확실히 정예는 정예였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난 뒤, 사샤는 모닥불 앞의 댈런을 다시 찾아왔다. 감사의 인사와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그런 함정을 설치한 걸까요? 작열사막의 통로에 서식하는 물고기 형태의 마물이라니. 저희 특무대도 입수하지 못한 정보였습니다."

"악마의 도움을 받았을 거예요."

시에나가 대신 대답했다. 댈런은 말없이 구운 샌드웜 고기를 계속 우물거렸다.

이제와서 안 사실이지만, 시에나도 요리 실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 재료만 충분하다면 어쩌면 루시아와도 비벼볼 수 있을 정도로.

"악마 말입니까?"

"촉수아귀는 앞을 못 보는 대신 진동에 예민하고, 심장을 제외한 모든 부위가 영체에 가까운 마물이죠. 원래 지옥에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런 녀석들이 미궁 저층부에 거주한다니. 극소수의 탐험가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모르는 정보일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노릇하게 익은 계란을 팬에서 접시에 덜어내며 시에나가 덧붙였다.

"하지만 악마라면 알고 있었겠죠. 마침 반란군이 소환하려는 악마, 칼카스가 기거하는 지옥도 촉수아귀의 서식지 중 하나라고 하니까요. 놈이 촉수아귀의 습성과 특징을 자세히 알려주고 함정을 깔도록 유도했을 게 분명해요."

"···악마에 대해 굉장히 잘 아시는군요."

"정보상 일을 하다 보면 알기 싫은 이야기도 듣게 되는 법이죠."

시에나가 싱긋 웃었다. 그때 팬에서 기름이 팍 튀었다.

댈런은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로 튀는 기름을 막아주었다. 그의 피부에 끓는 기름은 뜨뜻한 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댈런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 방금 익혀낸 계란을 접시에 덜어왔다.

큼직하게 잘라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또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기름이 아니었다.

꽈과광!

"으하하! 이거지!"

"허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물에 젖은 화약을 되살리시다니!"

"흐흐, 다 비법이 있다네. 자네들도 어서 줘 보게나. 버릴 바에야 수류탄이라도 하나 더 만드는 게 좋지 않겠나?"

물에 젖어 폐기하려던 특무대의 화약을, 비요른이 수류탄으로 재활용해주고 있는 듯했다.

룬 마법과 특수한 비법의 보유자인 외눈의 명공이라면, 저런 기예에 가까운 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

나중에는 악마의 주둥이에 폭탄을 물리고 터뜨리기까지 하는 양반이다.

폭발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난쟁이답게, 화약 무기를 주제로 요원들과 빠르게 친해지는 모양새였다.

"···혹시나 사고가 발생하면 안 되니, 이만 저는 저쪽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러시오. 내일 봅시다."

사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비요른과 요원들이 있는 모닥불에 쪽으로 합류했다.

셋이서 쬐던 모닥불 앞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 팬에서 고기와 계란을 굽고, 약간의 쌀을 볶는 시에나. 그리고 열심히 우물거리는 댈런.

풀벌레 소리와 타닥이는 모닥불, 기름의 지글거림이 인상 깊은 밤이었다.

문득 어느 성기사가 떠오르는 정경이었다. 축축한 공기만 아니었다면, 몇 달간 함께했던 밤이 딱 이랬더랬지.

푸르고 청명한 눈망울. 피와 땀으로 살짝 떡진 금발. 미성의 목소리로 걸걸한 욕을 뱉어내던 입술. 부드러운 입술.

"······."

이번 여정이 무사히 끝난 후에, 어쩌면 보러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에나가 마녀의 힘을 되찾는 걸 도와주고, 무사히 둥지까지 돌려보내는 게 거래의 조건.

버번이 용의 이름을 걸고 한 계약은, 그 대가로 진룡의 힘을 감당할 만한 육신을 약속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반이 술 하나는 기막히게 섞어줬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던 생각이, 바텐더의 조주 솜씨에까지 미친다. 이번에는 일정이 급해서 못 마셨다지만, 다음에는 꼭 게임에서만 보던 칵테일을······.

"우리 가문을 지키는 수호룡이 있다고 해."

"푸흡, 컥!"

"···괜찮아?"

"괜찮소. 쿨럭! 그냥 사레들린 거요."

이 여자, 마녀가 맞긴 하군.

늪지의 소녀들(1)

"수호룡이라고 했소?"

댈런은 모르는 척 되물었다.

이 시점의 시에나는 버번이 용인 걸 알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용신의 첫 포효,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은 단 한 번도 시에나에게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시에나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 때문이지.'

금강궁에서 쫓겨나, 가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깃털의 마녀.

그녀는 자신의 딸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멀리서 지켜보며 도와달라고 버번에게 부탁했다.

수천 년 묵은 고룡이 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는지는 모른다.

어찌 됐건 버번은 그 청에 따라, 시에나가 어릴 적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그녀를 도와주었다.

스스로의 존재는 철저히 숨긴 채.

"그래. 수호룡. 초대 깃털의 마녀는 한 진룡과 사랑에 빠졌었다고 해. 그 진룡은 말 한 마디로 사막을 숲으로 만들 수도, 산을 깎아 호수를 메울 수도 있었다고 하지."

시에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녀는 다 익은 계란과 베이컨, 그리고 빵조각을 댈런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마녀와 용의 사랑이라. 옛이야기답군."

"그렇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용의 수명은 마녀보다 훨씬 길었어. 오랜 세월이 흐르고 깃털의 마녀가 침상에서 숨을 거둘 때, 용은 그녀와 계약을 맺었다고 해. 그녀의 후손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면, 단 한 번 위기에서 구해주겠다고."

시에나는 기름을 닦고 집기를 정리한 뒤, 미리 내려놓은 찻잔을 무릎 위로 가져갔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가 들려주신 거야.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이걸 그저 잠자리 동화 정도라고 결론 내렸지."

"···그렇군."

"하지만 요즘 든 생각인데,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어."

댈런은 빵을 우물거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시에나는 이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쌍의 검은 눈이 서로를 마주 본다. 한쪽은 빛나는 마녀의 눈, 다른 한쪽은 뚱한 전사의 눈이었다.

'버번의 정체를 눈치챈 건가?'

수백 회차에 걸친 플레이에서, 그녀 스스로 버번의 존재를 맞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그 명제가 빗겨나간다면, 이건 어떤 변수 때문일까.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변수는, 또 어떤 결과물들을 낳게 될···.

"···만약 수호룡이 정말 있다면, 그건 분명히 당신일 거야."

···변수는 개뿔.

"피곤한가 보군. 좀 쉬시오."

"아하하, 농담이야. 설마 당신이 진짜 용이겠어? 그랬으면 비요른 저 영감이 당신이랑 같이 못 다녔지."

"······."

그러고 보면 비요른이 보는 앞에서 용의 힘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긴 했다.

첫 만남 때는 성검으로 용의 힘을 억눌렀었고, 버번을 만난 뒤로부터는 청린용의 능력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었으니까.

간혹 언뜻언뜻 그 존재감이 새어 나올 때가 있긴 했지만.

"수호룡이라니. 다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지."

시에나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남은 찻물을 모닥불 옆에 쏟았다.

"좀 피곤하네. 당신 말대로 쉬어야겠어. 언제 잘 거야?"

"다 먹고 자겠소. 먼저 주무시오."

댈런은 계란과 고기, 빵이며 볶은 쌀이 고봉으로 쌓여있는 그릇을 들어 보였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모닥불 앞에는 이제 혼자였다.

달그락.

댈런은 그릇의 음식을 대충 섞어 입에 밀어 넣으며, 한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금발머리 성기사에 대한 생각도 중간중간 섞어가면서.

***

1층에는 갑각늑대 택시. 2층에는 샌드웜 버스.

다른 두 층과 달리 미궁 3층에서는, 딱히 이동수단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끈적한 늪지는 기어가는 수준으로 유속이 느렸고, 그건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생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며, 먹잇감이 그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포식자들.

간혹 활동성이 높은 마물도 있긴 했지만, 죄다 탑승물과는 거리가 먼 놈들이었다.

따라서 일행은 두 다리로 늪지를 걸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마물들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아루룩! 우그르르!

"프로그맨이다!"

눈 네 개짜리 프로그맨이 발톱을 들이민다.

얕은 늪지에서 느닷없이 솟구쳐올라, 먹잇감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개구리 머리통의 마물들.

물론 이끼 사이에서 끔뻑이는 눈을 본 댈런이 미리 주의를 줬기에, 특무대가 급습당하는 일은 없었다.

"사격!"

타다다다당!

우그르륵! 오르륵!

오히려 조준을 끝마친 총구가 납탄 세례를 쏟아내며, 물컹한 놈들의 살거죽을 걸레짝으로 만들었을 뿐.

끄우아악! 우르락!

그때 늪지 저 안쪽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보통의 프로그맨과는 좀 다른, 더 높고 날카로운 울음소리.

"주술사다!"

지이이이잉―!

원시적인 주문의 힘이 지팡이 끝에 모여들고, 세 줄기 굵은 광선으로 현현해 특무대를 덮쳐든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일행에는 저런 주술사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가 함께했으니까.

"녹스, 펠리렘!"

파지지지직!

주문을 외자마자 떠오른 세 개의 보호막이, 광선의 궤도를 정확하게 예측해 가로막고 굴절시켜낸다.

튕겨난 광선은 늪지의 끈적한 오물을 갈아엎으며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댈런은 도끼를 가볍게 던졌다.

패래랙― 퍽!

영역의 힘을 쓸 필요도 없었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손도끼는, 프로그맨 주술사가 다음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놈의 미간에 꽂혔다.

놈의 세 쌍 눈이 정확히 세 개씩 반반으로 나뉘었다. 댈런은 손을 뻗어 도끼를 불러들였다.

"사격!"

그 사이 다시금 조준을 마친 특무대가 총알을 쏟아내고.

"흐하하하! 폭탄 받아라!"

꽈광! 콰과과광!

난쟁이가 던지는 유탄이 그 화력의 공백을 넘치도록 메워준다.

전투는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일행은 이런 식으로 미궁 3층을 어렵지 않게 누빌 수 있었다.

60명이나 되는 특무대 요원들과 외눈의 명공이 만들어내는 화력은, 일반적인 차르국 총병 중대급을 아득히 웃돌았다.

여러 발을 동시에 장전할 수 있는 시제품 격의 장총과, 비요른의 특제 폭약이 환상의 조합을 이룬 덕분.

물론 근본적으로는 미궁의 지리를 꿰뚫고 있는 댈런이 적절한 경로로 그들을 이끌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에나의 주문 역시 적재적소에서 일행을 보조하며 활약했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

'대략 이틀길 남았군.'

개인 천막 안.

저녁 회의를 마친 댈런은 갑옷 끈을 넉넉하게 풀어두고 모포에 몸을 뉘였다.

선발대가 미궁 1층에서 반란군 포로를 심문해 알아낸 바가 맞다면, 악마가 지시한 성소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저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요? 앞서갔을 반란군들의 시체는커녕, 뼛조각이나 찢어진 갑옷조차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악마의 조언을 받는다지만···사망자가 한 명도 없는 건 불가능할 터인데.'

회의 때 집행관 사샤가 남몰래 풀어놓았던 고민. 댈런은 문득 떠오른 그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미궁에서 죽은 사람 시체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소.'

불안한 얼굴의 그녀에게, 댈런은 이렇게 답했었다.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인 미궁. 이 마경에서 버려진 시체는 어느 마물에게나 좋은 먹잇감이다.

따라서 내버려진 탐험가의 시체는 보통 하루이틀이면 사라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3층에서는 그 속도가 더 빨랐다.

제 영역을 지키는 늪지의 마물들은, 다 먹어치우지 못한 사체를 늪 깊은 곳으로 끌어가 묻어두었기 때문.

공짜 먹이를 노리는 시체 청소부들을 사전에 막고, 산소를 차단해 부패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제든지 먹어치울 수 있도록 보존하는 습성이었다.

회의 내용을 뇌리에서 털어낸 댈런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속으로 악마를 불러냈다.

'야.'

[옙, 주인님.]

'그거 꺼내 봐라.'

[예, 여기 있습니다.]

이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악마다. 스르르 열리는 아공간 입구.

댈런은 그 안에서 조심스레 내밀어진 단검 손잡이를 잡아들었다.

얼마 전, 흑마법사의 시체에서 얻어낸 아이템이었다.

스아아···.

칼집에서 뽑아드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소리가 천막 안을 아스라이 메워간다.

어렴풋하게 들리는 비명과 신음들.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한 원혼의 형상.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댈런의 감각마저, 단검을 뽑은 순간 그 범위가 야영지 안쪽으로 제약될 정도였다.

'이런 느낌인가.'

저주와는 다르다. 어깨의 인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아이템 자체에 붙은 디버프 옵션 중 하나.

텍스트 상으로만 보던 환각과 환청의 효과를 직접 체감하는 한편, 댈런은 단검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손잡이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표면이 우둘투둘하고, 옅은 핏빛의 검신은 유려하게 휘어져 있었다.

매끄러운 앞날과 톱 같은 뒷날. 검면 위에 점점이 찍힌 짙은 붉은색의 자국은, 마치 핏방울이라도 튄 것 같은 모양새.

'핏빛 제례용 단검.'

이건 흑마법사 캐릭터를 키운다면, 중반부가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얻어내야만 하는 필수 아이템 중 하나이자.

동시에 적대 흑마법사가 이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물건이기도 했다.

'영혼제사의 모든 과정을 생략시켜주는 아이템이지.'

흑마법사로 전투의 일선에 나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열 중 아홉은 되는 어중이떠중이를 제외한, 제대로 된 흑마법사라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흑마법사는 누군가의 육신과 영혼을 제물로 바치고, 악마나 악신에게서 특별한 힘과 능력을 얻어낸다.

문제는 이 제사의 과정이 굉장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악마들마다 취향과 입맛이 까다로운 경우도 많다는 것.

자칭 흑마법사들 중에 어중이떠중이가 괜히 많은 게 아니다. 그중 태반은 몇 번의 제사 끝에 실패한 놈들.

납치와 고문, 살인이라는 피웅덩이에 발을 담갔음에도, 악마의 선택을 받지 못한 실패자들이 뒷골목 흑마법사의 대다수였다.

'어찌저찌 제사와 계약에 성공했다고 해도, 필요할 때마다 영혼을 바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영혼은 마력처럼 어디 담았다 뺐다 할 수 있는 에너지의 개념이 아니다. 더군다나 악마가 원하는 건 신선한 영혼.

따라서 대부분의 흑마법사는 스스로의 영혼을 그릇으로 삼아, 죽은 이의 사념과 영혼을 붙들어두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영혼을 신선하게 담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릇은, 바로 다른 영혼이었으니까.

[이 단검이라면 그 모든 제약에서 자유롭죠.]

악마가 중얼거렸다.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묻어나는 목소리.

[흐흐, 만약 내 손에 이 물건이 있었다면, 지금쯤 그 동굴에 나만의 지옥을 만들고 인간 세계를 점령할 수 있었을···우으읍! 크읍!]

이 새끼 안 맞은 지 좀 되긴 했지. 댈런은 피식 웃으며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몇 번 만져주자 아공간에서 탐욕스런 중얼거림 대신 비명이 메아리쳤다.

[훌쩍···무슨 말도 못 하고······.]

"처맞을 말을 하니까 그렇지."

[아아, 인권, 아니 악마권이여······.]

"또 처맞을 말을 하는군."

[···.]

악마가 입을 다물었다. 댈런은 놈의 뾰로통한 표정을 무시하고, 핏빛 검면을 몇 번 두드려봤다.

히야아아···.

으흑, 으흐흑.

손이 닿을 때마다 함께 커지는 환청. 이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그도 알지 못한다.

지옥 깊은 곳에서 담금질 된 금속이 주재료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아이템 설명란에도 별다른 내용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출처와는 달리, 그 능력만큼은 아주 명확했다.

까다롭고 복잡한 제사의 모든 과정을, 그저 찌르고 베는 것 하나로 축약해버리는 것.

더불어 그렇게 취한 영혼과 사념을, 마치 시간을 동결시킨 듯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게 단검의 능력이었다.

사실상 제물과 제단, 그리고 제사의 모든 과정을 손 안에 가지고 다니는 셈.

그렇기에 이 단검 한 자루만으로도, 흑마법사의 전투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스각.

댈런은 단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당장은 사용할 일이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일이 흘러갈지는 모르는 법.

때마침 얼마 전 시체에서 회수한 스킬, '지옥문의 열쇠'와도 궁합이 잘 맞는 아이템이었다.

단검을 아공간에 돌려놓자 스산한 바람이 잦아들며, 감각을 어지럽히던 환각과 환청도 가라앉았다.

댈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감각권에 뭔가 수상한 기척이 걸려들고 있었다.

"시발."

펄럭!

갑옷 끈을 조일 새도 없이 천막을 나섰다. 야영지는 아직까지 조용했다.

타오르는 모닥불 앞, 불침번들이 무슨 일인가 싶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적습."

스릉―

짧은 대답 뒤에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요원들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물론 몸은 알아서 총을 집어들고 어깨에 견착하는 중이었다. 요원들의 분대장이 다시 물었다.

"적이라니, 어디에···."

"저기 오는군."

댈런이 고개를 까딱였다.

불침번들의 시선이 숲 안쪽으로 향했다.

3미터가 채 안 되는 낮은 관목들 사이, 어둑한 그림자를 뚫고 한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루터?"

요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같이 불침번 서던 동료였다.

아까 전 볼일을 보고 오겠다며 숲으로 들어갔던 요원.

"어이, 루터! 놀랐잖냐! 오줌보 터질 것 같다더니!"

"조용."

눈치 없는 요원의 외침을, 분대장이 나직하게 가로막는다.

아직 거리가 좀 있었지만, 분대장은 볼 수 있었다.

루터라 불린 요원이 정상이 아님을.

"아, 으아······."

비척이는 발걸음.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손끝.

축 처진 어깨와 목덜미에 돋아난 힘줄은, 어떤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지게라도 짊어진 것만 같았다.

분대장은 천천히 총구를 들어올렸다. 그가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는 루터가 맞다면, 그 자리에 멈춰 서라."

저벅. 멈춰선 발걸음.

"도, 도···망쳐······."

입술을 타고 선혈이 주륵 흘러내린다. 요원의 눈이 순간 정상으로 돌아왔다.

"···도망치십시오."

저도 모르게 부하를 구하러 달려나가려던 분대장을, 댈런이 검을 들어 가로막았다.

"이미 늦었다."

그게 기점이었다.

콰직!

"커허어억!"

목덜미 언저리가 움푹 떨어져나간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

우드득!

직후 어깨와 허리가 기괴하게 비틀리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든 요원이 쓰러졌다.

"루터!"

대답은 없었다.

등에 난 네 개의 구멍에서는 핏줄기가 왈칵거리고, 그 위에서 누군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린다.

"무슨···?"

분대장이 침음을 흘린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이는 건 허공에 둥실 떠오른 붉은 흔적들뿐.

아무것도 없는 투명한 공간에, 진한 핏자국만이 눈두덩과 속눈썹, 콧잔등, 얇은 입술을 그려낸다.

"···투명한 마물인가?"

그러자.

피로 물든 입술이 벌어지고.

히죽.

붉은 이빨이 웃었다.

늪지의 소녀들(2)

쉬익―

전조는 없었다.

쩍!

댈런의 팔이 흐릿해진 순간, 공간을 빗겨낸 도끼는 핏자국 얼굴 위에 즉시 돋아났다.

"칵―!"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가는 핏자국 얼굴.

비검의 힘으로 도끼날에 신성력을 덧씌우자, 붉은 입술이 웃음기 섞인 비명을 질러댔다.

"끼히, 히히······."

끝까지 히죽대는 입모양으로 최후를 맞이한 핏자국 얼굴.

마침내 숨이 끊어지자, 놈의 투명한 몸뚱이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대체···."

요원 하나가 중얼거렸다. 곁에 선 분대장도 깊은 침음을 흘렸다.

나타난 건 사람의 형상과 닮아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하다시피 한 피부에, 기껏해야 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신장.

피골이 상접한 팔다리와 조그마한 머리, 골반 너머까지 풀어헤친 머리칼.

얼핏 보면 그저 예쁘장하게 생긴, 허나 잘 먹지 못해 빼빼 마른 소녀로 착각할 수도 있는 외견이었다.

"귀, 귀신···?"

머리에 도끼를 꽂고도 활짝 웃는 입술과, 그 입 안쪽에 한가득 들어찬 살덩이.

그리고 검붉은 피가 끈적하게 묻은 길쭉한 손발톱만 아니었다면.

"겁먹지 마라. 늪지 원혼이라 불리는 마물이다."

어느새 천막에서 뛰쳐나온 사샤가 요원을 진정시켰다.

불침번이 깨운 나머지 일행들 역시,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신속하게 합류하는 중이었다.

"하나가 아니오."

숲 안쪽을 내다보던 댈런이 말했다. 그 말에 사샤는 곧장 요원들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원형진을 구축해라!"

"예!"

순식간에 모닥불을 둘러싼 원형진이 만들어진다.

잠에서 덜 깬 이들이나,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지켜본 불침번이나 움직임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뼛속까지 새겨진 훈련으로 인해, 몸의 상태 따위와는 상관없이 수행해내는 동작들.

진형이 갖춰지자마자 곧장 다음 명령이 떨어진다.

"상대는 영체 속성을 가지고 있다. 탄종 교환! 순은탄으로!"

슥― 척척척!

역시나 재빠른 손놀림으로 교체되는 납탄과 은탄.

촉수아귀 때도 그랬듯, 지금 상대해야 할 적 역시 순은탄이 훨씬 효과적인 공격수단이었다.

초행길임에도 이런 기민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건, 집행관인 그녀가 미궁 각 층의 환경과 서식하는 마물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숙지해두었기 때문.

거기에 더해 수많은 상황들을 상정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까지 세워놓았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집행관의 위치를 거저 얻은 건 절대 아니군.'

댈런은 질서정연한 대처를 보며 생각했다.

왕실 직속 부대의 훈련도는, 왕실의 힘 그 자체와도 무관하다 할 수 없는 바.

그런 의미에서 집행관 사샤와 특무대는, 이번 여정 속에서 차르국의 역량을 몇 번이고 증명해내고 있었다.

현 차리나의 통치 아래, 백 년 만에 전성기를 맞이한 차르국답달까.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전력이 되어줄 수도 있겠어.'

종말에 맞서는 미래를 그려내는 한편, 댈런은 원형진의 안쪽에 선 채 요원들의 머리 너머를 가만히 응시했다.

스륵···.

숲 안쪽. 움직임이 느껴진다.

투명한 몸뚱이의 마물이지만, 신비를 꿰뚫어 보는 댈런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인 육신과 영체에 가까운 육신. 두 가지 상태를 원하는 대로 취해가며 공간을 건너뛰는 소녀들.

입가에 히죽거리는 웃음과, 광기로 번들거리는 흰 눈동자.

"으히! 이히히히!"

"끼햐아!"

기괴한 웃음이 관목들 사이를 메아리친다. 댈런은 손을 들어 도끼를 회수했다.

촉수아귀 때와는 달리, 이 마물들은 무작정 공격해봐야 소용없는 종류였다.

'늪지 원혼.'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늪지의 소녀'라고도 불리는 언데드형 마물.

신체능력 자체는 다른 마물들을 크게 압도한다 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놈들은 명실공히 미궁 3층의 최대 난적 중 하나였다.

태생적인 주술로 투명한 놈들의 육신은, 원할 때마다 영체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는 게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라면 공간의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어 다닐 수도 있었고.

'정확히는 정령계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이지.'

정령계는 현실 세계에 그림자처럼 덮여 있는 차원.

일종의 이면 세계라고도 볼 수 있는 장소다.

늪지 원혼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가장 큰 이유는, 그 정령계에 몸을 숨긴 채로 접근해 기습하는 패턴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이히히! 히힛!"

"꺄하하하!"

댈런이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정령계로 넘어간 상태의 원혼은 아무리 댈런이라 해도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사냥감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놈들 역시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법.

그리고 그 찰나야말로, 원혼을 처치하기에 최적의 순간이었다.

스으···.

소리 없이 열린 공간의 틈.

"끼히히히!"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전조다.

허공에서 솟아난 희미한 일렁임은, 원혼이 일시적으로 물리적인 형태를 취했다는 의미.

더불어 마력광으로 번뜩이는 댈런의 눈은, 일렁임만이 아닌 원혼의 형체까지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손을 내뻗고, 성화가 일렁이는 도끼를 공간 사이로 밀어보낸다.

쉭― 쩍!

요원 하나의 목덜미를 노리던 소녀가, 머리에 도끼자루가 돋아나며 움직임을 멈췄다.

댈런은 곧장 도끼를 회수했다. 회수하자마자 다시 던져지는 도끼. 그 사이 시에나도 주문을 외워냈다.

"녹스, 펠리렘! 오벡스!"

콰지직!

또 다른 요원에게 달려들던 원혼이, 보호막과 충격 주문 사이에 끼어 전신이 으깨진다.

댈런이 신비를 꿰뚫는 시야로 놈들을 확인했듯이, 시에나는 마법사 특유의 예민한 마력 감응력을 이용해 그 위치를 대강 특정한 것.

하지만 두 사람만으로 모든 기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캬아아!"

"끄아아악!"

도끼가 채 돌아오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튀어나온 원혼이 요원 하나의 목덜미를 낚아채 사라진다.

타다당!

특무대의 일제사격이 그 뒤를 쫓았지만, 이미 원혼은 요원과 함께 정령계로 자취를 감춘 뒤.

댈런이나 시에나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원혼의 투명한 육신을 간파할 수 없었다.

공격을 당한 이후에나 그 위치를 추측할 수 있을 뿐.

"이히히! 아하하하!"

"깔깔깔!"

이제 시작이라는 듯, 관목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이대로라면 놈들에게 농락당하며 요원을 하나씩 잃어갈 뿐이다.

지금의 싸움은 단지 적을 처죽이는 게 끝이 아니라, 아군을 지켜내면서 적을 쫓아내야 하는 싸움.

'썩을.'

댈런의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늪지 원혼을 상대하는 법은 보통 세 가지다.

정령계에 직접 간섭하는 건 지금 가진 스킬들로는 불가능하고, 아예 근방 일대를 힘으로 찍어누르자니 요원들도 함께 휘말리게 되는 상황.

그렇다면 남은 건, 지금처럼 원혼이 공격하는 타이밍에 선수를 치는 방법뿐.

'문제는 손이 모자라다는 건데······.'

해결할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요원들의 눈에도 원혼이 보이게 만드는 것.

"비요른. 공터 주위로 연막탄을 까시오."

"연막? 지금 말인가?"

"지금 당장."

"알겠네!"

딸깍! 치이이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 연막탄이, 순식간에 원형진 주변을 두르고 잿빛 연기의 벽을 구축해낸다.

그 짧은 사이에도 요원 두 명이 더 납치되어 사라졌다.

댈런의 도끼와 시에나의 주문이 세 마리를 죽였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요원들을 둘만으로 지켜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연막의 벽이 구축되고 나자,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스륵···.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원혼.

물리적인 형체를 취했음에도, 투명한 육신은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육신으로 인해 밀려나는 연막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에릭! 네 앞에!"

타다다다당!

연막탄의 한쪽이 확 일그러지고, 그 즉시 빗발치는 총알 세례.

퍼버버벅!

순은탄이 닿는 곳마다 영체의 속성을 지닌 뼈와 살이 퍽퍽 터져나간다.

"끄히히힛!"

"꺄하악!"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소녀들.

투명했던 원혼이 죽어 모습을 드러내며, 공터 주변으로 가냘픈 소녀들의 시체가 쌓여간다.

"흐으···히이···."

죽어가면서도 히죽대는 소녀들의 얼굴은,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으나.

장총에 순은탄을 욱여넣는 요원들의 눈빛은, 더이상 공포심에 물들어있지 않았다.

전환점이었다.

***

전황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적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치명적인 불리함이 해소되자, 특무대 요원들은 빠른 반응사격으로 원혼을 처치해나가기 시작했다.

투명한 몸뚱이를 믿고 달려들었다가, 순은탄의 탄막에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늪지 원혼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눈치챘는지, 미친 듯이 몰아치던 원혼들의 공세도 점차 공백이 많아졌다.

"히히, 히······."

어느 순간 웃음소리들이 점차 멀어져가기 시작한다.

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원혼들은 예고 없이 자리를 떠났다.

싸움이 끝난 것이었다.

"···맙소사, 차르시여."

부족한 수면과 전투의 피로, 과한 긴장감으로 여기저기서 신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다.

지극히 짧은 전투였음에도, 요원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원래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골치 아픈 법이다.

거기다 그 적이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스산한 웃음소리까지 흘려내기까지 하니 등골이 오싹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댈런은 원혼들의 소리가 멀어진 방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비요른이 다가왔다.

"뭔가 이상하군."

"예. 저도 느꼈습니다."

대답한 건 댈런이 아닌 사샤였다.

분대장들에게 야영지 수습을 맡긴 그녀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자신의 총기에 순은탄을 한가득 욱여넣고 있었다.

난쟁이는 수염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늪지 원혼들은 미궁 3층의 마물들 중에서도 가장 영역 중심적인 놈들이네. 내가 아는 게 맞다면, 여긴 가장 가까운 놈들의 영역에서도 몇 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야."

"제가 공부한 자료에서도 그렇더군요. 왠지 반란군 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직감이 듭니다."

사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다 정확히 봤군.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오."

"그렇지? 그럼 어서 여길 떠나···."

"그래서 확인하러 가봐야겠소."

"뭐, 뭐라고?"

난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말했다.

"늪지 원혼이 활동 반경을 넓혔다는 건, 그만큼 사냥감이 많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요."

늪지 원혼은 미궁 3층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다.

그럼에도 댈런과 일행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놈들은 본디 '모태'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 이상 벗어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

더불어 프로그맨이나 놀 같은 마물들과 다르게, 원혼들에게는 세력을 넓히고 동족의 수를 불려야 한다는 동기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 늪지 원혼이 제 영역을 넓혀내고, 더 많은 사냥감을 확보하려 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

"놈들의 모태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게 분명하오. 집행관의 말대로, 앞서간 반란군이 뭔가 술수를 부렸을 확률이 높소. 금방 확인하고 오도록 하지."

어떤 방법으로,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달아나기에 급급하던 놈들이 어디서 그런 여유를 얻었는지 역시 의문이었고.

허나 댈런의 초점은 반란군이 아니라, 놈들이 섬기는 악마에게 맞춰져 있었다.

'악마 칼카스.'

에낙사구스 휘하, 아홉 옥좌 중 하나의 주인.

미궁 3층으로 넘어오는 통로에서부터, 놈은 이미 반란군의 행동에 깊숙이 간섭하고 있었다.

악마 칼카스와 놈의 수족이 될 반란군 병력들, 그리고 뭔가 이상이 생긴 늪지 원혼들의 모태.

'설마 그 미친 시나리오가 이 시점에 나오지는 않겠지만.'

머릿속에 맞춰져가는 퍼즐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고를 들여서라도 확인해봐야겠지.'

댈런은 갑옷 끈을 조였다.

"서, 설령 그렇다 해도 자네 혼자 그 위험한 곳을 가겠다는 건···."

"혼자가 더 편하오."

비요른이 걱정을 표했으나, 댈런은 단칼에 잘랐다.

외눈의 명공이나 차르국 특무대 모두 도움이 되는 전력임은 분명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늪지 원혼을 상대로는 마법사인 시에나를 제외하면 전부 짐덩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녀라 해도 마녀의 힘을 깨워내지 못했다면, 놈들의 영역 깊숙이 쳐들어가는 상황에서 큰 도움은 못 되겠지.

이곳에서 맡길 역할이 따로 있기도 했고 말이다.

"시에나, 결계 주문에 조예가 있으시오? 혼령을 막거나 그 시선을 피해내는 종류로."

"마법보다는 주술에 가깝기는 한데···어깨 너머로 배운 거지만, 가부를 묻는다면 가능하다고 답할게. 다만 결계를 유지하는 동안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어."

"그거면 됐소. 늪지 원혼의 세력권에 들어온 이상, 이 근방에 다른 마물은 없을 테니."

시에나를 통해 혹시나 모를 추가 습격을 대비한 뒤, 댈런은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했다.

그는 관목 숲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납치당한 요원들도 데리고 오겠소. 만약 살아있다면."

늪지의 소녀들(3)

찰박!

끈적한 늪지 위. 진흙이 튀며 파문이 일어난다.

가라앉아야 할 부츠는 마치 늪지를 단단한 땅처럼 내달렸다.

몇 걸음 만에 작은 늪을 건너버린 댈런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 뛰어갔다.

마른 땅과 질척한 늪을 가리지 않고 디뎌내는 발걸음.

달리는 말보다도 배 가까이 빠른 속도에, 호흡은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안정적이다.

'자기 영역을 지키고 있어야 할 마물이 죄다 사라졌군.'

달리는 동시에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신비를 꿰뚫는 시야가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을 간파하고, 20대 중반에 접어든 감각 수치는 어떠한 흔적이든 잡아낸다.

드문드문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웃음소리. 자취를 감춘 다른 마물들의 존재감.

곳곳에 꺾인 나무들과 뒤엎어진 땅, 이빨과 발톱 자국들.

결론은 금방 도출됐다.

'이미 한 차례 바닥까지 긁어먹은 뒤였어.'

이렇게 대놓고 마물들의 영역을 관통하며 질주하는데, 단 한 차례의 방해나 반응조차 없다.

간혹 들리는 원혼의 웃음소리만 제외하면, 사위는 말 그대로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미 늪지 원혼들이 주변 일대를 죄다 쓸어버린 것.

마물이건 탐험가건 간에, 살아서 움직이기만 하면 전부 먹잇감으로 여기는 놈들다웠다.

'사실상 3층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지.'

미궁 2층의 샌드웜과는 달리, 늪지 원혼들에게 거대한 몸뚱이나 압도적인 힘은 없다.

그러나 불가시의 육신과 영체 속성, 정령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은 그 이상으로 까다로웠다.

하나만 있어도 골치 아픈 상대일진대, 셋 모두를 지니고 있는 늪지의 소녀들.

거기다 홀로 움직이는 샌드웜과 달리, 늪지 원혼들은 모태를 중심으로 수백 단위의 무리를 이루곤 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선가 튀어나와 살점을 뜯어내고 사라져버리는 영체형 마물이 수백이라.'

어지간히 강력한 포식자가 아닌 이상, 그런 차륜전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찰박!

댈런은 조금 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늪지 위로 일어나는 파문이 커져가더니, 순간 퍽 소리를 내면서 그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터터덩―

허공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쑥 내려가는 관목들과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

"키히히히!"

"크히힛!"

한 박자 늦게 방금까지 달려가던 땅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먹잇감을 노리고 모습을 드러낸 원혼들이, 닭 쫓던 개가 되어 하늘 위의 댈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딴에 이제는 자기들 구역이 됐다 이건가.'

다행히 놈들에게 비행 능력은 없었다. 지상에서 계속 쫓아오기야 하겠다만.

휘이이―

좀 더 올라가자 퀴퀴한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른 땅 사이로 느릿하게 흘러가는 끈적한 흙빛 지류. 중간중간 보이는 부서진 나무들과 헤집어진 땅들.

전투의 흔적 주변으로, 아직 신선한 마물의 피가 지척에 널려있었다.

늪지 원혼들이 대대적인 사냥을 벌인 지 얼마 안 됐다는 소리다.

'흔적을 보면···대충 이틀에서 사흘 정도.'

그 시간 동안 일어날 만한 변수는 사실상 하나뿐. 심증이 점차 확신이 되어간다.

'반란군이 모태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게 확실하군.'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답은 이미 머릿속 한 켠에 자리 잡아 있었다.

이곳에서 반란군은 엄연히 쫓기는 입장이다.

굳이 마물의 영역 심부까지 파고들며 시간을 지체했다는 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필요성이 있었다는 이야기.

놈들의 목적이 악마의 소환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게 무엇인지 맞추기는 어렵지 않다.

"···원혼의 핵."

[에엑?]

아공간에 가만히 있던 악마가, 댈런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래도 명색이 악마라고, 마물의 생태를 대충은 알고 있는 모양.

[모태를 죽이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핵만 빼낸다니. 그러면 모태에 구속된 원혼들은 한참을 미쳐 날뛸 텐데······.]

그래서 미쳐 날뛰고 있는 거 아니냐.

늪지 원혼이 개미라면, 모태는 놈들의 여왕개미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하는 일도 비슷했다. 지옥에서 방출된 영혼 찌꺼기들을 흡수해, 마물이라는 실체로 빚어내는 게 모태의 역할.

특징이라면 영혼을 마물화시키며 남는 끈덕한 사념을, 물리적인 핵의 형태로 빚어내 자기 안에 보관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만들어진 원혼의 핵은, 모태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걸 빼갔으니 모태가 발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놈에게 예속된 늪지 원혼들도 함께 미쳐 날뛰고 말이다.

'그러니 특무대를 습격했을 때도, 대부분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납치해간 거야.'

사념으로 만들어진 핵은, 복구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양분이 필요하다.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양분이 아니라, 사념으로 가득한 영혼이라는 양분이.

"끼히히힛!"

"흐히, 꺄하하하!"

발밑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몇 배는 불어나 있다. 댈런은 슬며시 시선을 내려보았다.

공간을 넘나들며 그를 쫓는 소녀들의 형상이 대략 백 남짓.

이 정도면 특무대가 있는 방향의 원혼들은 죄다 끌어왔다고 봐도 되겠지.

'어그로는 잘 끌렸고.'

지켜야 할 파티원들에게서 소환수를 떼어낸 걸로, 일단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

이제 놈들을 처리할 적당한 장소로 유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기왕 사냥할 거, 보스몹과 잡몹을 함께 잡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을 터.

'슬슬 보스전으로 들어가볼까.'

어쩌면 오늘, 레벨업을 한 번쯤은 할 수 있을 듯했다.

***

미궁 3층, 바닥 없는 늪의 지형은 단순했다.

북쪽의 거대한 수원지에서 시작되는 끈적한 강물.

그 강물은 남쪽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며, 점점 더 유속이 느려지고 깊이가 깊어진다.

다만 비교적 수심이 얕은 북쪽 지역이라 해도, 수심 십여 미터가 넘어가는 깊은 늪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긴 했다.

강의 상류 부근에 위치한 호수 같은 지형이랄까.

철벅!

늪지 원혼의 모태가 자리 잡은 곳은, 바로 그런 호수들 중 하나였다.

"시발."

가볍게 착지했을 뿐인데, 쑥 하고 발이 빠져들며 부츠 안쪽으로 물컹한 질감이 스며든다.

도약 스킬로 물은 물론 허공까지도 딛고 뛰어오를 수 있지만, 이런 끈적한 늪에서조차 가만히 서 있으면 별수 없이 가라앉는다.

단숨에 정강이까지 잠겨버린 다리. 불쾌한 감각에 혀를 쯧쯧 차고 있자니, 등 뒤에서 아스라이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히히!"

"흐헤, 끼히히히!"

좀 뒤쳐져서 따라오던 늪지 원혼들이었다. 슬쩍 돌아보니 그 숫자는 어느새 이백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 정도면 몸을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놈들은 정령계로 숨어들기는커녕, 대놓고 히죽거리며 우르르 몰려와 그를 반원형으로 포위했다.

[워메···. 등골에 소름이 쫙 돋네.]

요즘 들어 왠지 말이 많아진 악마의 헛소리를 흘려들으며, 댈런은 어깨를 자연스레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원혼들의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숫자가 엇비슷할 때 이야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숫자로 주는 위압감이 오히려 더 크기 마련이다.

상대가 경험치에 미친 고인물 플레이어만 아니었더라면.

'퇴로를 가로막은 놈들이 이백. 모태 주변을 지키는 놈들이 삼백 언저리.'

합쳐서 오백 마리가 좀 넘는 늪지 원혼.

아니, 오백이 넘는 경험치 덩어리들.

사냥 나갔던 원혼들까지도 침입자를 눈치채고 속속 복귀하고 있었으니, 수는 계속해서 불어날 테였다.

스륵―

댈런은 성검을 뽑아들었다. 왼손에는 도끼를 가볍게 쥐었다.

저 멀리, 드넓은 호수 중앙에는 거대한 무화과 형태의 살덩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직경 오십 미터, 높이는 십 미터에 가까운 압도적인 덩치의 마물.

[늪지 원혼이 된 길잡이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회복을 위해 평소보다도 몇 배는 비대하게 몸을 불린 모태 위에, 한 회차의 결말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주르르 나열되고.

그걸 바라보던 댈런은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가, 내리그었다.

패래래랙―!

공간을 빗겨내지 않았다. 실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일부러 조금 느리게 던진 도끼의 궤적은, 원혼들의 눈으로도 아슬아슬하게 쫓을 수 있을 정도.

"꺄하!"

"이히히!"

모태를 향해 날아가는 빛의 원반을, 늪지 원혼들이 앞다투어 가로막는다.

퍼버버버벅!

고기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성화를 덧씌운 도끼날에 늪지 원혼들의 몸뚱이는 손쉽게 썰려나갔다.

첨벙!

열 마리가 넘는 원혼이 목숨을 잃고서야, 위력을 잃고 늪지에 떨어진 손도끼.

그때까지도 모태는 천천히 숨을 쉬듯 몸을 부풀렸다 줄였다 할 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변이종은 아니군.'

원혼의 모태 중에는 가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개체도 존재한다.

원래는 지옥에서만 볼 수 있는 강력한 마물이지만, 워낙에 변수가 많은 회차이니 한 번쯤 확인해본 것.

허나 지금 반응을 보아하니, 눈앞의 모태는 그저 평범한 개체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건 없었다. 댈런은 다리에 힘을 더했다.

푸확!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가 폭발한다. 진흙과 오물, 부유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댈런의 신형은 이미 제자리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을 내달리고 있었다.

촤자자작―

늪지 호수 위를 내달리는 발걸음. 양손으로 거머쥔 성검에 회오리가 맺힌다.

"꺄르르르!"

"끄힛힛!"

방금의 도끼질로 한껏 경계심이 끌어올려진 원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스스슥···!

공간을 넘나들며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얇은 형체. 정령계로 숨어버리면 댈런의 검도 닿을 수 없다.

하지만 초조해할 일은 아니었다.

모태를 향해 짓쳐드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는, 놈들도 언젠가는 현실 세계로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법.

스으···.

코앞에서 튀어나와 이빨을 들이미는 원혼에게, 댈런은 그대로 이마를 들이받았다.

콰직!

"끄아···!"

날카로운 이빨이 우수수 비산하고, 투명한 핏줄기가 그 뒤를 따른다.

안면이 함몰된 채 넘어가는 소녀의 몸뚱이. 그 위로 망설임 없이 성검을 내리긋는다.

스각!

단조롭게 양단되는 육신.

콰과과과···!

그 너머로 뻗어간 분쇄검의 기운이 두 놈을 더 으깨버린다.

첨벙!

댈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늪지에 거친 파도를 일으키며 달려나갔다.

레이더처럼 주변을 뒤덮은 감각권 안,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기회를 노리는 원혼이 수백.

구태여 정령계에 숨어든 놈들을 쫓는 건 하책이다. 괜히 체력만 낭비하는 짓일 뿐.

'개미집에 쳐들어갈 때는, 여왕개미만 노리면 되는 법.'

모태에 가까워지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테다.

최근에 침입자에게 한 번 당한 사례가 있으니,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겠지.

아니나다를까, 댈런이 호수 중앙까지 반쯤 도달했을 무렵.

"이히히히!"

"꺄하하! 꺄아!"

입가에 광소를 머금은 소녀들이,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싸고 촘촘한 포위망을 구축해냈다.

샤아아아―!

전후좌우, 심지어는 머리 위에서도 짓쳐드는 이빨과 손발톱.

하나하나가 강철 판금도 손쉽게 찢어발길 완력의 공격이다.

어지간한 탐험가라면 단번에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찢겨나가겠지.

아무리 댈런이라도 이 많은 숫자를 일일이 쳐낼 수는 없었다.

물론, 애당초 그럴 생각조차 없었지만.

키이잉···.

마력이 일렁이는 발끝.

늪지의 파문이 커다란 동심원으로 퍼져나간다.

도약 스킬이 발현되는 찰나의 순간. 이 순간만큼은 발밑에 굳건한 대지를 디딘 거나 다름없었다.

'부족해.'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경지를 넘어선 댈런의 기량 능력치는, 능력 전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내고 있었다.

단순히 그 자체로 하나의 기술이 된다기보다, 이미 영역 속에서 현실화된 가능성을 다시 재단해내는 역량.

[도약(E)]

- 한 번의 발디딤으로 몸을 높게 띄워올리는 기술.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에 힘과 기교의 총체적인 응용이 담겨있다.

- 숙련도 100%

스킬의 본 의미.

그 뿌리부터 재해석한다.

손을 뻗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스킬의 이름 모를 창시자보다도 높은 경지.

디뎌 밀어내는 것이 도약의 원리라면, 아예 딛고 서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힘을 주어 밀어내지 않는다. 부드럽게 마력을 퍼뜨리며, 체중을 온전히 발밑에 실어낸 순간.

[고유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보상 : 답보(D)]

원래라면 게임 후반부가 시작할 즈음에야 볼 수 있을 알림창이 눈앞에 떠오르고.

쿠우웅―

발밑에서 다시 한 번 거대한 동심원이 일어나며, 댈런의 검이 불꽃에 휩싸였다.

[답보(D)]

- 용을 떨어뜨린 전사가 창안해낸 기술. 마력으로 디딜 수 없는 곳을 딛고 서는 기예다. 첫 발디딤의 순간에 방출되는 마력의 일부분을 완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뿌드드득!

발밑에서부터 터져나오는 힘이, 발목을 거쳐 무릎, 골반, 허리, 어깨에 이르며 회전력으로 치환된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관절이 작게 비명을 지르고, 오랜만에 근육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성화가 더해진 분쇄의 기운.

밝디밝은 붉음이 검신을 뒤덮은 채 단단하게 응축되고.

발밑에서 시작된 힘의 파도가, 마침내 팔을 거쳐 손끝까지 이르렀다.

베어낸다.

쩌━━━

몸의 회전력을 실은, 단순한 횡베기.

그 앞에서 질긴 마물의 육신은 의미가 없었다.

한 획으로 그어진 검끝이 그려낸 건, 선이 아니라 면.

가장 앞에서 달려들던 원혼들만이 아니라, 그 뒤의 뒤쪽까지 공간째로 갈려나간다.

후두두두둑.

투명한 육편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떨어지면서 불가시의 주술이 풀려, 마치 허공이 끊임없이 피와 살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그 붉은 비의 한가운데.

바윗덩이 같은 근육질의 전사는, 양손으로 쥔 검을 천천히 내렸다.

착.

붉게 물들어가는 늪지에, 발은 더이상 빠져들지 않았다.

순식간에 백에 달하는 동족을 잃은 늪지 원혼들이, 처음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히···?"

히죽 올라간 입꼬리가 의문 가득한 웃음기를 흘려내고.

"쫄기는."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댈런은, 거대한 모태를 향해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119

소환 의식(1)

"끼히히!"

내뻗은 손끝. 손목째로 잘라버린다.

"캬아···!"

목덜미를 노리고 들이미는 이빨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긴 검의 폼멜로 찍어 부쉈다.

끈적한 늪의 호수. 처절한 난투전은 그 수면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굉장하군.'

댈런은 짧게 검을 휘둘러 원혼 하나의 목을 날려버리며 생각했다.

이곳은 발을 조금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십여 미터 깊이의 끈적한 침전물들 사이로 영원히 가라앉는 장소다.

그런 호수 위를 마른 땅처럼 활보할 수 있다는 건, 냉병기를 휘두르는 전사에게 굉장한 이점이 아닐 수 없었다.

찰박!

늪지 위에 얕은 발자국만 남기고 뛰어다니는 소녀들.

착―

그 앞에서 발 아래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늪지를 마치 단단한 땅처럼 디뎌낸다.

고유 스킬은 일반적인 스킬과 달리, 영역을 통해 재창조해낸 능력이다.

숙련도의 개념이 없으며, 따라서 처음 얻었을 때부터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거기다 기량 능력치를 조금 더 끌어올리면, 수면만이 아니라 허공에서도 비슷한 기예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직감마저 느껴진다.

원래라면 일반적으로 게임 후반부에 접어들 즈음에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인 만큼, 파고들 구석은 무궁무진했다.

스가각!

검신 중간쯤에서 세 놈이 한 번에 걸려든다. 준비동작조차 허용되지 않은 간격이었다.

댈런은 힘을 조금 더 줬다. 그러자 조금 멈칫하던 검이 제 속도를 되찾았다.

"끼히힛!"

"히야, 흐히히!"

세 놈을 토막 내자 이번엔 다섯 놈이 지척이었다. 아예 검을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될 건 없었다. 검을 쓰지 못할 간격이면, 쓰지 않으면 될 뿐이니까.

화륵!

찰나의 순간, 양손의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화염의 갑주가 덧씌워지고.

쩌저저저적!

두 팔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달려들던 다섯 원혼이 줄에 매달린 것처럼 뒤로 휙 날아간다.

함몰된 두개골. 꺾인 목줄기.

박살난 갈비뼈가 등가죽을 뚫고 튀어나오며, 내장과 피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첨벙! 첨벙!

한 차례의 공세가 지나갔지만, 잠깐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방금 놓았던 검을 발끝으로 다시 띄워올린 뒤, 낚아채자마자 발끝을 밀어 찼다.

쉬이익―!

허공에 높이 뜬 채 아래쪽을 향해 고개를 꺾는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로 십수 마리의 늪지 원혼들이 밀려드는 게 보였다.

콰직!

"캬학!"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며 살점을 찢어감에도 불구하고, 공격성을 자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이는 마물들.

첫 일격으로 백 마리가 증발한 이후, 원혼들이 두려움에 주춤거린 건 잠시뿐이었다.

댈런이 모태를 향해 발걸음을 뗀 순간, 놈들은 다시금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으니까.

"키힛, 크흐흐!"

"흐히히히!"

정령계로 숨는 것마저 포기하고, 아예 숫자 그 자체를 폭력으로 앞세워 몰아치는 원혼들.

둘을 처치하면 넷이, 넷을 처치하면 여섯이 동족의 시체를 넘어온다.

'당연한 일이지.'

원혼에게 있어 모태의 안위는 절대적인 1순위였으니까.

그리고 댈런에게 있어서, 그 앞뒤 없는 공세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착―

상념의 끝에,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수면에 다시 착지한다.

발밑에서 퍼져나가는 거대한 동심원.

고유 스킬, '답보'의 첫 걸음이 방출된 마력의 상당 부분을 물리적인 힘으로 치환시킨다.

스으으···.

검신에 맺히는 분쇄의 기운.

동시에 넓게 퍼져나간 감각권으로 호수 전체의 상황을 내려다본다.

사방으로 퍼져나가 사냥 중이던 원혼들은, 이제 대부분이 모태가 있는 호수로 복귀한 상태였다.

둘을 베어내고 넷을 으깨버렸음에도, 쓰러뜨린 것 이상의 숫자가 끝없이 몰려들었던 이유였다.

허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댈런 하나를 잡기 위해 몰려들면서, 원혼들은 스스로의 안위마저 도외시한 채 밀집된 포위망을 구축해낸 상황.

물샐 틈 없이 단단한 포위망은, 댈런마저도 육탄전 하나만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빠져나가기보다 부수는 걸 택한다면, 그야말로 단번에 모든 적을 진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화르르르―

회오리 같은 분쇄의 기운에 밝게 빛나는 성화가 더해지고.

우르르릉···!

심상 속 우렛소리가 검신 전체를 집어삼키며, 어느새 하늘을 채운 먹구름에서부터 동일한 뇌성을 지상을 향해 토해낸다.

용의 피가 혈관에 흐르게 된 이후, 무리 없이 중첩이 가능해진 성화와 라판텔라의 분쇄검.

그 위에 더해진 첫 영역의 힘, 「뇌격」.

발밑에서부터 전신에 가득 휘몰아치는 고유 스킬, 답보의 첫 걸음을 기반으로 삼아.

모든 힘을 단 한 번의 검격에 실어낸다.

뿌드드득!

용의 피로 강화된 육신마저 불길한 신음을 흘려댄다.

원래라면 육체의 한계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이적.

아직 버번에게서 신비의 육신을 얻지 못한 채이기에, 사실 이 정도 힘의 응축은 지금으로서도 꽤 무리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칼카스 정도 되는 악마를 상대하려면, 이 정도 비기는 가지고 있어야 해.'

악신 휘하에서도 두 손 안에 꼽히는 악마다.

그런 악마와의 전투 중간에, 새로운 힘을 탐구해낼 여력은 아마 없을 터.

미리 비장의 수를 한 번쯤 연습해두는 게, 승리를 위한 발판을 다지는 길이었다.

"끼히···?"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내리그어지는 검 끝에서 섬광이 가장 먼저 뻗어나가고.

꽈르르르릉―!

호수의 끈적한 수면이 좌우로 쩍 갈라지면서, 성화의 폭풍이 밀집된 원혼들의 무리를 덮쳐들었다.

피보라는 일지 않았다.

산산이 부서진 원혼들의 육신을, 신성한 불꽃이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불태워 버렸기에.

"키이···?"

호수 일부분이 통째로 증발하며 피어오른 자욱한 안개 사이.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혼 몇 마리가 허둥지둥 모태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

남은 원혼들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댈런의 마지막 일격 이후, 놈들은 더이상 정령계에 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화에 이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호수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휩쓴 성화의 폭풍은, 넓은 일대에 걸쳐 신성력의 잔향을 남겼다.

그 결과 정령계를 오갈 수 있는 원혼의 능력은 일시적으로 완전히 봉인되었다.

신성력이 원혼의 이능에 어떻게 간섭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

가능한 한 다방면의 가능성을 손에 넣을 생각인 이상, 신성력과 기적에 대한 연구도 이어가는 게 좋겠지.

'나중에 꼭 필요해지기도 할 테고.'

닥쳐오는 종말의 어느 시점일까.

그 정확한 시간대까지 파악할 수는 없으나, 댈런은 분명 한 번쯤은 그곳에 발을 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지옥에서 신성력만큼 효과적인 공략 수단도 없지.'

지옥.

다섯 악신과 수백 악마들의 본거지.

환상세계의 한쪽 구석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는, 모든 부정적인 가능성이 현실화된 세상.

모니터 너머에서도 발을 들여본 적은 많지 않은 장소였다. 그만큼 위험하고, 또 방문하기 까다로운 곳이라는 의미였다.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댈런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는 가슴팍에 구멍 뚫린 원혼의 사체를 대충 던져두었다.

푸확! 패래래랙―

손끝을 까딱이니 늪지 어딘가에서 도끼가 솟아올라 날아왔다.

흐낏한 원반이 되어 날아오는 바람에, 표면에 묻어있던 늪지 깊은 곳의 오물들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얼굴에 튄 오물을 대충 닦아낸다.

댈런은 호수 정중앙의 거대한 살덩이에게 다가섰다.

쿵. 쿵.

가까이 다가갈수록 규칙적인 울림이 또렷해진다.

직경 오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무화과 모양 살덩이. 얇은 가죽 아래에서는 파이프 같은 혈관들이 천천히 맥동하고 있었다.

저 높은 곳에 달린 수십 개의 주둥이는, 제각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저건 지옥에서 배출되어 미궁 속을 떠도는 찌꺼기를 흡수하는 과정.

원혼이라는 마물로 다시 빚어내는 생태의 일부분을 바라보며, 댈런은 도끼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스각!

가볍게 내리긋는다. 질기고 두꺼운 모태의 가죽은 껍데기만 베일 뿐이었다.

댈런은 조금 더 힘을 주어 다시 내리그었다. 안쪽에 가득할 내용물을 생각해서라도 힘 조절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투두두둑···.

어지간한 마물의 가죽보다 몇 배는 질긴 살갗이 뜯겨나가고.

푸화아악!

그 깊은 안쪽에서 묽은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콸콸콸···.

미리 예상한 댈런은 몇 걸음 옆으로 물러서서 피해냈다.

반쯤 녹은 뼈와 흐물텅한 살점, 마물의 신체 부위 이곳저곳이 액체와 함께 한참을 쏟아져 나왔다.

어느덧 쏟아지는 액체가 개울물 정도의 유량으로 바뀌었을 무렵, 댈런은 찢어놓은 살덩이의 구멍 안쪽으로 들어섰다.

[···와우.]

악마가 탄성을 지른다. 그 정도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거대하게 부푼 살덩이. 그 안쪽은 모태의 뱃속이었다.

질긴 살덩이와 촉수에 꽁꽁 묶인 채로, 마물들이 반쯤 녹은 입을 뻐끔거리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프로그맨부터 시작해 미궁 3층에 서식하는 가지각색의 괴물들은, 이곳에서 산 채로 잡혀와 천천히 소화되는 중이었다.

악취가 폐부를 찌른다. 단순히 독한 냄새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닿는 것만으로 피부에 고름이 찰 정도의 독성 기체였다.

댈런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위장의 꼭대기, 살덩이의 천장에는 뭔가 들어있었을 법한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원혼의 핵을 빼간 게 맞았군.'

원래라면 저 구멍은 원혼의 핵이 들어있어야 할 부분.

화약의 그을음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텅 빈 구멍은, 반란군이 모종의 방법으로 핵을 빼내갔다는 걸 의미했다.

'수백 마리의 마물이 산 채로 소화되고 있는 것 역시, 저 구멍을 다시 메꾸기 위한 노력이겠지.'

원혼의 핵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영양분이 필요했다.

원래라면 지옥의 찌꺼기들에 담긴 사념을 뽑아내고, 오랜 시간 따로 정제한 끝에 만들어지는 게 원혼의 핵.

수많은 생명들이 산 채로 썩어 문드러지며 내뱉는 고통 어린 사념이라면, 그 핵의 일부분이나마 재생하는 게 가능하겠지.

원혼들이 사냥감을 죽이기보다 납치했던 건, 이렇게 모태의 위장 안에서 죽어가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착. 착.

댈런은 십수 개의 위장을 넘나들며, 창끝으로 걸쭉한 위액 안쪽을 헤집었다.

걸려드는 건 대부분 마물이었다. 프로그맨 같이 무리 지어 사는 놈들. 혹은 눈알거북이나 필레룬의 장어처럼 독립된 개체로 영역을 지키는 포식자급 마물들.

한참을 찾다 보니 그 사이사이에 사람의 형상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요원 다섯 명과 반란군 네 명이었다.

'숨은 붙어있군.'

요원 다섯은 멀쩡했다. 마취되어 위장에 던져 넣어진 지 얼마 안 됐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며칠간 위장 속에서 썩어갔을 반란군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상태였다.

부식된 갈비뼈 사이로 반쯤 녹은 폐부가 애처롭게 공기를 갈구하고, 흐물거리는 피부는 두개골에서 완전히 벗겨져버린 몰골.

다행히 그중 한 명은 숨이 붙어있었다. 부패해가는 골격과 근육을 보아하니, 그래도 한때 강인한 전사였던 듯했다.

댈런은 놈과 요원 다섯을 모태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반란군을 깨웠다.

파지지직!

"어어억, 커헉···."

가벼운 정전기로 깨어난 반란군이 신음을 흘려댄다. 댈런은 놈의 너덜거리는 얼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배, 배신. 원로 놈들이 배신했···."

"그래. 꼴을 보니 통수 맞은 건 말 안 해도 알겠군."

그는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놈에게 남은 수명이 많이 없어 보이니, 심문은 짧고 굵게 가야 했다.

댈런은 몇 개밖에 안 남은 손가락 중 하나에 도끼를 올려두고 물었다.

"반란군 원로들. 놈들이 원혼의 핵으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120

소환 의식(2)

반란군 간부의 상태는 심각했다.

한 차례 부상당한 상처 입은 내장은, 모태의 위액에 담겨지며 지독하게도 부패했다.

걸쭉한 위액에 함유된 마취 성분은 어지간한 초인마저도 마비시키는 강력한 독.

물론 눈앞의 반란군 간부 정도라면 자력으로 탈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상 없이 원래의 컨디션이었다는 가정하에.

'상당한 실력자군. 어쩌면 소영역을 이뤘을지도.'

댈런은 감각을 곤두세우고 놈의 심상을 느꼈다.

시체를 회수하며 한 걸음 더 답보한 그의 육감은, 초인이 죽어가며 흘러나오는 심상의 그림자를 흐릿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늪지 원혼이 된 길잡이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2, 암월의 환상살해자]

"복수···해야······."

툭.

간부의 고개가 떨어졌다. 한이 가득 서린 눈꺼풀은 끝내 덮이지 못했다.

댈런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죽은 반란군 간부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죽기 전, 놈은 반란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줄줄이 이야기해줬다. 고문도 필요 없었다.

동지들에게 배신당해 죽어가는 이는, 누군가에게 넋두리로나마 자신의 한을 풀고 싶어 했으니까.

'한 마디로 반란군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거지.'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내분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란군은 스스로를 '일곱 왕관의 수호단'이라 부르는 조직.

실제로 놈들이 내세우는 왕위 계승 후보는 모두 일곱 명이었고, 반란군은 각 후보를 중심으로 한 일곱 파벌의 연합체였다.

그리고 댈런이 오래전 미궁에서 처치한 금패 용병을 제외하고, 남은 왕위 계승 후보는 총 여섯.

실질적인 권력을 잡은 여섯 파벌은 세 파벌씩 두 진영으로 쪼개져, 서로를 몇 년 동안 견제하던 중이었다.

'이번에 그중 하나가 다른 쪽을 쳤다는 이야기고.'

반란군 간부가 남긴 전말은 이러했다.

악마 소환을 목적으로 보낸 파티 중에, 경쟁 파벌의 원로가 둘이나 있었다는 것.

'일곱 왕관의 수호단, 그놈들에게 원로라는 직책은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를 의미하지.'

상징성을 가진 왕위 계승자들과 달리, 실질적인 권력과 무력을 모두 거머쥔 노괴들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 평범한 전사로 위장해 들어온 원로들은, 미궁 3층에 도달해 정체를 드러내고 반대 진영을 급습했다.

그렇게 죽은 이가 여섯. 이제 남은 반란군은 열 명도 채 안 되었으니, 사실 호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미친 새끼들이 그런 계획을 세우지만 않았다면.'

무려 원로 두 명이 미궁으로 내려오는 위험을 무릅썼다. 놈들이 노리는 바가 보통 일은 아니라는 뜻.

실제로 반란군 간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댈런이 상상하던 최악의 경우에 속했다.

수백 회차 동안에도 열 번이 채 일어나지 않은 사건.

그리고 일어났다 하면 북부의 차르국을 세 달 안에 멸망시킨 희대의 재앙.

'악마 칼카스의 본체 소환.'

에낙사구스 직속 휘하의 아홉 옥좌.

칼카스는 그 옥좌 중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악마다.

무한의 사슬과 냉기의 주인. 하나하나가 상급 마물에 필적하는 사냥개 수천 마리를 발밑에 둔 덫사냥꾼.

화신체만으로도 차르국의 국운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직접 본체로 현현한다니.

'차르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시연합도 타격을 받을 게 분명해.'

그리고 도시연합이 받는 타격은, 직간접적으로 그 수도인 미궁도시 팔시온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후의 최후까지 지켜내야 할 인류의 보루가, 튜토리얼이 끝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는 불사의 악마를 불러내 호숫가의 요원 다섯 명을 지키게 했다.

"으에? 저는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았···."

"고기방패로 시간은 끌 수 있잖냐. 그리고 이 근처에 마물은 씨가 말랐을 거다."

궁시렁거리는 악마를 할만의 사슬로 닥치게 한 뒤, 댈런은 호수로 다시 걸어갔다.

'악마의 본체를 소환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옥문을 제대로 여는 것만 해도 수십의 제물이 필요하고, 제대로 된 악마를 소환하려면 그 숫자는 열 배로 불어난다.

칼카스 정도 되는 강력한 악마라면, 수천 단위의 인명이 고통 속에서 죽어나가야만 소환할 수 있는 바.

아무리 반란군의 원로쯤 되는 인물이라도, 그런 일에 만반의 준비를 거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의식은 이미 완성에 가까워졌을 거야.'

최상의 시나리오는 소환 의식 자체를 막는 것.

허나 원혼의 핵이라는 마지막 준비물을 가져간 이상, 의식 자체를 막을 방도는 없을 테였다.

그렇다면 그 중간 과정에 개입해, 그 결과물을 비틀어놓는 차선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모든 주문이 그렇듯, 주문의 결과를 비틀기 위해서는 같은 계열의 주문이 제격인 법.

스아아아···.

악마에게서 받아낸 단검을 검집에서 뽑아내며, 댈런은 모태의 위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훅 올라오는 독성 기체. 산 채로 썩어가는 마물들에게서 피어나는 지독한 악취.

모태는 이미 그의 손에 죽었으나, 놈의 위장 속에는 여전히 고통스레 부패해가는 생명체들이 한가득이다.

그리고 고통스런 죽음은 흑마법에서 최상의 연료.

스아아···!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단검의 핏빛 날이 스산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

일행은 즉시 행군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 한시가 급해졌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칼카스의 소환은 그 자체로만 일주일은 족히 걸리는 대규모 의식.

그러나 반란군 간부의 증언을 들은 사샤는, 그 기간이 대폭 줄었을 거라고 확언했다.

"악마의 본체를 소환한다니. 반란군 중에도 강경파가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강경파의 원로들은 모두 수준급의 흑마법사죠."

어중이떠중이 흑마법사 열 명보다, 한 명의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진행하는 의식이 몇 배는 빠르고 정교하다.

반란군 파티에는 그런 흑마법사가 무려 둘이나 있는 상황.

거기다 의식 장소마저도 악마가 직접 골라준 성소인 만큼, 의식은 일주일은커녕 사흘도 안 걸릴 게 분명했다.

일행은 부상자와 병력 일부를 임시 막사에 대기시켜두고, 요원들 중에서도 컨디션이 최상인 이들만 데려가기로 했다.

근방의 생태계는 늪지 원혼들에 의해 초토화되다시피 했으니, 한동안 마물의 습격은 없을 테였다.

댈런과 시에나, 비요른, 그리고 특무대 요원 스무 명은 그렇게 낮밤을 가리지 않고 달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동굴에 도착했다.

악마 소환 의식을 위한 성소가 있다는, 바로 그 동굴에.

***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늪지의 썩은 물이 바위틈 사이로 개울처럼 흐르고, 천장의 종유석은 검붉은 색의 이끼로 빈틈없이 감싸져 있었다.

"미궁에서만 자생하는 스테리아 이끼야. 강력한 해독제의 원료로 쓰이지."

"그렇소?"

"잘 말리면 작은 상자 하나에 금화 한 개 값으로 거래되곤 해. 곱게 빻은 가루는 귀족들 사이에서 선물용 고급 차로 취급되지."

"나갈 때 좀 챙겨가야겠군."

댈런은 낮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땅에 굴러다니는 금화를 줍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특무대 요원들은 죄다 표정이 굳어있었다. 일렁이는 횃불 사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

"크흠, 탐험가들이 부자인 이유가 있구만. 나도 이 기회에 한몫 잡아야지, 하하하!"

그래도 베테랑이라고 불필요한 긴장을 없애려는지, 하나둘씩 지나가듯 잡담을 늘어놓는 모습이었다.

"나, 나도 한 상자 챙겨가야겠군. 약혼자가 좋아하겠어."

"그래. 우리 집 어머니께서도 요즘 몸이 안 좋으시니, 직접 우려드려야겠네."

···플래그를 그렇게 세울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댈런은 고개를 작게 흔들고 앞을 바라봤다. 동굴의 어둠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횃불이 비추는 반경을 조금씩 좀먹어가며, 살아있는 듯 다가오는 암흑.

이건 평범한 어둠이 아닌, 흑마법에서 비롯된 잔여물이었다.

"불길한 바람이 부는군. 쇠 냄새가 나."

"찬 기운도 느껴집니다. 추위를 안 타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교적 강자인 비요른과 사샤도 이상을 느낀 듯했다. 댈런과 함께 앞서가던 시에나가 그 말을 받았다.

"칼카스의 지옥, 사슬옥좌의 영향이야. 소환 의식 준비가 거의 끝난 게 분명해."

"그런 것 같군."

댈런이 멈췄다. 그는 자연스럽게 도끼를 뽑아들었다.

가볍게 휘저어진 손끝.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도끼.

패래래랙― 콰직!

곧이어 단단한 무언가에 도끼가 적중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저편에서 푸른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흐흐흐, 칼카스님께서 멜린다의 깃방패를 준비하라 하신 이유가 있었군."

눈앞에 나타난 건 거대한 폭포였다. 정확히는 소리없이 폭포처럼 떨어지는, 강력한 마력의 장벽.

거대한 공동의 출입구를 가로막은 그 장벽이,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결계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결계 너머에서 음험하게 웃고 있는 노인의 정체 역시 그 무엇보다 분명했고.

철컥!

곧장 견착과 조준을 마친 사샤가, 미리 장전해뒀던 장총의 방아쇠를 당겨내고.

탕― 타다다당!

그녀의 뒤를 이어 스물에 달하는 총구 역시, 동시에 불을 뿜으며 화망을 만들어낸다.

파지짓!

그러나 총알은 모두 결계를 넘자마자 힘을 잃고 떨어졌다.

어린아이의 손에서 던져진 쇠구슬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흐하하하! 그 따위 장난감으로 내 영역, 진록의 장막을 파훼할 생각을 하다니!"

노인은 웃어젖혔다. 사샤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진록의 장막? 그렇다면 네놈은 원로 바스텐···!"

"그런 의미에서 전사, 자네의 일격은 정말로 인상 깊었네. 미리 준비해둔 유물이 아니었으면 이걸로 내 목숨은 사라졌겠지."

집행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노인은 지팡이로 보호막에 박힌 도끼를 툭툭 건드렸다.

댈런은 무심한 표정으로 허리띠에 손을 얹었다. 그가 바라보는 건 노인의 어깨 너머였다.

장막의 영향인지 육안으로는 넘어다볼 수 없는 어둠. 그곳을 댈런의 눈이 마력광으로 번뜩였다.

장막 역시 노인의 영역에서 비롯된 힘이기 때문일까.

신비를 꿰뚫어보는 그의 시야마저도 선명한 상을 잡아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흐릿하게 보이는 여덟 명의 인영과, 그들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마법진은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반란군의 원로라는 노인의 등 뒤에서,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은 한창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으며.

놈은 그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떤가? 자네의 가장 중요한 한 수가 사라졌네. 다음 수는 무엇으로 내게 맞설 텐가? 번개 뿜는 성검? 몸에 두르는 화염의 갑주? 아니면···."

"말 존나 많네."

패랙―!

보호막에서 뽑혀 나온 도끼가 공동을 가로지른다. 결계의 강력한 저지력에 비틀거리면서도, 손도끼는 댈런의 손에 무사히 돌아와 안착했다.

"또 투척인가? 흐허허, 통하지 않는 걸 눈앞에서 봤음에도 다시 시도한다라. 야만인 전사다운 무식함이군. 하지만 우리 가문의 보물, 멜린다의 깃방패는···."

쉭―

도끼가 다시 날았다. 이번에는 파공음이 없었다.

공간을 빗겨내며 장막을 뛰어넘은 손도끼.

위협을 감지한 보호막이 펼쳐졌지만, 장막의 힘을 받지 않은 도끼에 버터처럼 갈라질 뿐이었다.

"어억···."

머리에 도끼 꽂은 흑마법사가 뒤로 넘어간다. 흩어져가는 장막 너머로 댈런은 발을 내디뎠다.

장막의 어둠이 사라지자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부터 벽, 바닥까지 빼곡하게 검푸른 도형과 기호들로 메워진 공동.

더이상 숨겨지지 않는 마력의 울림이 공동 전체를 가득 채운다. 비릿한 철향과 살을 에는 냉기가 살기의 형태로 피부를 콕콕 찔렀다.

"흠.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 한가운데, 마법진의 중심에 선 노파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늦었다 전사야. 의식은 이미 완성되었고, 나와 내 동료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소환이 저지될 일은 없어."

살며시 짓는 미소. 마치 모든 걸 초연한 듯한 표정.

"원혼의 핵은 소환진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제 차르국의 백성 팔천 명이 원혼에 의해 목숨을 잃고, 그 대가로 칼카스께서 본신을 이끌고 지상에 강림하실 게야."

어떠한 자신감도 아닌, 그저 정해진 결과라는 듯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댈런은 팔짱 낀 손끝을 자연스레 품에 넣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환은 피할 수 없겠군."

"그래. 이미 벌어진 일. 피할 수 없단다."

"어쩔 수 없지."

그는 고개를 털고는, 품속 아공간에서 뽑아낸 단검을 내던졌다.

쉭―!

공간을 뛰어넘는다. 이미 손도끼로 수없이 해낸 이적이, 다시 한 번 손끝에서 펼쳐졌다.

스아아···.

그 끝에 어른거리는 붉은 기운은, 수백 마물의 고통스런 죽음을 제물로 축적한 결과물.

"저, 저건!"

"···핏빛 제례용 단검!"

"에낙사― 젤츠!"

그 잔영을 본 흑마법사들이 황급하게 주문을 늘어놓고, 노파의 표정에서도 평정심이 산산이 깨져나간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콰직!

모든 주문을 무시한 채, 공간을 뛰어넘은 새빨간 단검의 날이 마법진 한가운데 정확하게 꽂힌 순간.

파지지지직!

단검에 충만하게 채워진 제물의 힘이 소환 주문에 더해지며, 동굴 벽면을 가득 메우던 마법진이 뒤틀리기 시작하고.

"쎄 글램."

흑마법사의 가장 기초가 되는 주문이나, 동시에 어떤 악마의 이름도 부르지 않은 영창이 댈런의 입에서 흘러나오며.

쩌저저적!

공동 정중앙에, 거대한 지옥의 문이 공간을 찢고 드리워졌다.

121

소환 의식(3)

'많은 희생을 치뤘으나, 그 대가로 오랜 대계는 완성되었다.'

일곱 왕관의 수호단. 그중에서도 셋째 왕자를 따르는 파벌.

파벌의 원로이자 소영역을 이룬 흑마법사, 카프렌나 지드코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5분 전, 방해꾼 놈들이 공동 안쪽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성공적이었다.'

대역을 앞세워 온건파의 눈을 속이고, 평범한 대원으로 파티에 위장 잠입했다.

팔시온으로 진입해 미궁으로 내려올 때까지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점은, 차르국 특무대가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길잡이를 고용했다는 것.

그 때문에 열 개의 파티 중 무려 세 개가 초반에 섬멸당했으나, 이 정도 희생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저놈, 성검 든 야만인 전사가 끼어들면서부터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빠드득.

카프렌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실 놈이 특무대를 이끌고 미궁에 진입했다는 걸 알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미궁 1층이야 공간 전이 위치가 무작위였기에, 운 좋게 금방 내려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층의 작열사막에서 벌어진 거리를 좁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

헌데 무슨 수를 썼는지 놈은 순식간에 사막을 횡단했고, 그 때문에 선발대에 역습을 가하던 병력들마저 전멸하고 말았다.

'칼카스 님의 계시와 조언 덕분에, 이어지는 추격을 조금이나마 지연시킬 수 있었거늘.'

그렇게 번 여유로 아슬아슬하게 원혼의 핵을 손에 넣고, 온건파의 끄나풀을 제거한 뒤 늦지 않게 의식을 치뤄냈다.

상급 악마를 소환하는 복잡한 의식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이제 돌이킬 수 없을 터인데, 이로써 대계는 성공인 것인데···."

온건파 측에서 제물이라고 알고 있었을, 아공간 배낭에 담아온 삼백 예순 아홉 개의 심장이 의식의 마중물이었고.

원혼의 핵에 서린 지독하고도 강력한 사념은,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을 마중물 삼아 지상의 존재들을 직접 사냥하는 도구였다.

차르국 백성 수천 명이 원혼들의 저주에 사로잡혀 죽기까지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고통 속에 죽어간 영혼들을, 다시 한 번 악마 소환의 대가로서 지옥에 바치는 건 두 시간이면 족했고.

그렇게 막바지에 접어든 의식.

이미 완전하게 발동한 악마 소환의 의식을 취소하는 건 불가능했다.

소환 의식의 결과를 다소 비틀 방법이 있긴 했으나, 뛰어난 흑마법사만이 가능한 일이었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소문의 전사가 동굴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서도, 대계가 완성되었다는 확신을 가진 이유였다.

분명 그랬는데.

"···어떻게 성검의 주인이라는 놈이, 사특한 흑마법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말이냐!"

"뭐야, 지 얼굴에 침 뱉기냐?"

피식 웃으며 성검을 뽑아드는 눈앞의 전사는, 성검의 주인인 동시에 흑마법사였다.

그것도 지옥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는 제대로 된 흑마법사.

거기다 놈은 흑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얻고자 하는 보물, '핏빛 제례용 단검'까지 가지고 있었다.

스아아아···!

단검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양의 원념과 영혼이, 마법진 위에 지옥문 소환의 주문을 덧씌우고.

기이이잉―

찢겨나간 공간의 틈으로, 지옥의 불길한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우우웅···.

공명한다.

마법진과 지옥의 문이, 점차 울림의 결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공동에 설치된 거대한 마법진.

그 역할은 소환의 대가를 지불하고, 소환된 존재를 지옥의 문으로 전이시키는 교두보였다.

지금쯤이면 차르국 변방에서 흑마법사들이 지옥의 문을 열어놓고 대기 중일 터.

계획대로라면 칼카스는 그 문을 통해 지상으로 소환되어야 했다.

마법진 바로 위에 열린 채, 소환 의식과 공명 중인 지옥의 문만 아니었다면.

차르르르···.

공동 전체에 사슬 소리가 울려퍼진다. 살을 에는 한기가 순식간에 벽과 천장에 고드름을 맺었다.

머지않아 직경 오 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공간의 틈에서, 수천 가닥의 사슬이 파도처럼 쏟아져나왔다.

"피, 피해! 커어억!"

"우욱, 살려줘!"

피할 틈도 없이 범람한 사슬의 파도에, 마법진 위에 서 있던 흑마법사들이 휩쓸리고.

가까스로 보호막을 만들어 목숨을 부지한 원로는, 턱을 달달 떨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

거대한 사슬의 언덕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한기가 새어나오는 수만 가닥의 사슬. 그 사이에서 번쩍이는 두 개의 푸른 안광.

압도적인 존재감이 목과 어깨를 짓누른다. 기도를 파고드는 냉기에 목이 따끔거렸다.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기운에서, 악마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묻지.]

"예, 예예."

[내가 왜 미궁에 있는 건가?]

"그, 그것이···."

계획에 없던 지옥문 탓이다. 정확히는 지옥문을 연 단검, 아니 그 단검을 던진 전사 때문이었다.

원로는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목을 감아쥔 사슬이 그보다 빨랐다.

[말 안 해도 알겠군. 이런 얕은 수작에조차 대비하지 않은 건가. 불충한 종속이로다.]

"커허···아, 아닙니···!"

[그렇다면 대비하지 못한 것이겠군, 무능한 종자여.]

사슬이 목 아래를 휘감는다. 몸통과 팔, 다리까지 두꺼운 사슬에 속박됐다.

마치 거대한 뱀이 먹잇감을 조이듯, 사슬은 흑마법사의 숨통을 천천히 조여갔다.

얼어붙은 피부가 조각조각 떨어지기 시작한다. 유물 로브의 높은 저항력은 지옥의 냉기 앞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답이 없구나. 어느 쪽이든 벌을 받는다는 걸 안 모양이지.]

파랗게 질린 하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정답이었다.]

악마가 잔혹하게 웃었다. 흑마법사가 잠깐 발버둥 쳤지만 그뿐이었다.

촤르륵―

머리통을 휘감은 사슬이, 순식간에 온몸을 두세 겹으로 둘러싸고.

콰직!

다음 순간, 흑마법사의 육신은 한 줌 핏물로 변했다.

***

"···도망쳐야 합니다."

흑마법사가 썩은 햄처럼 으깨진 걸 본 사샤가 말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로?"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다가는 전부 죽을 겁니다."

"도망치면 살 수는 있고?"

사샤는 입을 다물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는 죽은 원로의 머리통에서 도끼를 회수해 왼손에 들었다.

촤르르르···.

지옥문은 끊임없이 왈칵이며 사슬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이미 거대한 공동의 한쪽 구석을 가득 채울 규모였지만, 칼카스의 본체를 생각하면 두 배는 더 쏟아져야 하겠지.

댈런은 산처럼 쌓인 사슬 더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사샤가 물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글쎄.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이 세상은 그래픽 덩어리의 게임이 아니다.

흩뿌려진 피는 모니터 너머의 물리엔진으로 구현할 수 없는 생생함을 지녔으며.

죽음과 함께 내뱉는 숨결에는, 현대인이었던 그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허망함과 섬뜩함이 묻어났다.

영역을 이룬 뒤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가끔씩은 악몽을 꾸곤 했다.

무력하게 고블린의 단검에 찔려 죽는 꿈. 악마의 손아귀에서 으깨지는 꿈.

전장의 화마 속에서 스러지는 꿈. 미궁의 끝을 눈앞에 두고 허망하게 악신에게 짓밟히는 꿈까지.

'비명이지.'

그건 마음속 한 켠, 삼십 대 아저씨가 질러대는 비명이었다.

피와 살육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두려움에 물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의 무기력한 절규.

사회에 나가 경제적으로 독립했음에도, 서른 넘게 먹은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모니터 너머에서만 보던 세계에 떨어져, 초인적인 육신을 손에 넣은 순간에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이제는,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지구의 평범한 배불뚝이 회사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때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싸움들이라면.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은 이유들이 더해졌다.

싸움으로 강해지고, 강해진 끝에 승리한다. 싸움 자체를 즐길 때도 있었으며, 언젠가 돌아갈지 모르는 끝날을 내다본다.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던 인생에서, 미래를 스스로 그려내는 이 태도는 어디서 온 것일까.

변한 육신과 힘에 적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도 모르게 찾아온 정체성의 변화일까?

'쓸데없는 생각이다.'

알 수 없었다. 캐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중요한 건 그 심경의 변화는, 그의 모든 결정에 적용된다는 사실.

이번에도 그랬다.

칼카스의 소환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차선책을 찾을 뿐이다.

지상에 소환된 악마는 수만의 인명을 집어삼키고, 더 많은 군세를 자신의 옥좌 곁에서 불러냈겠지.

그렇게 만전이 된 놈을 상대하는 건 최악의 수였다. 차라리 이 좁아터진 동굴에서 1대 1로 한 판 뜨는 게 승산이 높았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 설계를 거듭한다. 그게 안 된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높은 길을 택한다.

수백 회차의 간접적인 경험과,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지 모르는 대담함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옛 자아의 두려움 따위는 그 다음에야 생각할 일이었다.

[호오?]

댈런이 성검을 뽑고 걸어오자, 거대한 사슬 언덕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 가닥의 사슬 깊은 곳. 기묘하게 번뜩이는 두 개의 푸른 안광.

진룡을 앞에 두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뻣뻣하게 저려오는 감각이 전신을 강타했다.

'속박하는 사슬의 저주.'

순간적으로 팔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짓누르는 탈력감.

[으븝! 우우웁!]

악마가 아공간에서 강제로 만찬을 즐기기 시작하며, 그 무게감은 단번에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허, 에낙사구스 님의 실험체를 종속으로 삼았다는 게 사실이었군. 어찌 이런 일이······.]

사슬 더미가 중얼거린다. 댈런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상 저주에 면역인 그와는 달리, 다른 일행에게 놈의 저주는 치명적일 테니까.

'사슬 옥좌의 주인, 악마 칼카스의 페이즈는 총 세 개.'

게임에서도 그 공략의 핵심은, 저주와 주문 위주의 첫 페이즈를 얼마나 빠르게 넘어가느냐였다.

촤르륵― 캉!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얇은 사슬을, 의지를 가진 듯 쏘아진 도끼가 가볍게 걷어낸다.

까가가가각!

구 형태로 그를 둘러싸려는 사슬의 파도는, 성화를 깃들인 성검으로 전부 쳐냈다.

전후좌우, 위아래 할 것 없이 수백 가닥의 사슬이 날아든다.

그 광경은 마치 오래 전, 악마의 분신을 덧씌운 대사도를 상대할 때와 비슷했다.

물론 차이는 명백했다.

칼카스의 사슬은 살덩이 촉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고, 흘러나오는 냉기는 댈런의 피부마저 상하게 하기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강해진 건 댈런도 마찬가지였다.

스친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치유되었고, 한 번도 쓰기 힘들어했던 뇌격이 성검으로부터 수도 없이 뻗어나온다.

꽈르릉― 꽈릉!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사슬 파편들. 그 사이로 거침없이 파고든다.

노리는 건 사슬 더미 한가운데, 번뜩이는 푸른 안광 사이.

1페이즈를 넘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칼카스의 몸을 덮은 수만 가닥의 사슬이, 전부 사용되고 부서질 때까지 버티거나.

혹은 그 수만 가닥의 사슬 안쪽, 옥좌에서 떨어지고도 이 많은 사슬을 제어하게 해주는 칼카스의 지팡이를 부수거나.

댈런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촤라라라락!

파도처럼 몰아치는 사슬의 틈, 번쩍이는 지팡이의 수정구를 눈에 담아낸다.

두 손으로 쥔 성검에, 섬광과 회오리가 함께 얽혀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꽈르르릉―!

휘두른 검끝 너머, 섬광이 선두에서 길을 뚫고.

화르르륵!

성화와 분쇄의 기운이 함께 뒤섞인 채, 뇌격의 배후를 밟아가며 공간을 넓혀낸다.

[무슨···!]

그 찰나의 순간에 훤히 드러난 지팡이의 모습. 댈런은 손가락을 까딱여 도끼를 불러들였다.

쉭―

닫혀가는 사슬의 장막을 향해 도끼를 내리긋는다.

공간을 빗겨간 도끼는 지팡이 끝의 수정구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쩌적! 쩌저적―!

생생하게 들리는 파열음. 산산조각난 채 비산하는 수정구의 파편들.

[내 지팡이가···!]

화아아악!

그 조각들 사이에서, 마치 지옥문을 열었을 때처럼 불길한 빛이 뿜어져나오고.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이 잦아들었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공동이 아니라 금속의 정글이었다.

2 페이즈였다.

122

사슬옥좌(1)

차르르르···.

불길한 금속의 마찰음. 공기를 가득 채운 비릿한 쇠 냄새.

지면을 뒤덮고 나무를 휘감은 사슬들은, 광택 없이 음울한 빛깔로 젖어들었다.

시에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하얗게 맺혔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

칼카스의 지옥, 사슬옥좌의 정경.

얼마 만에 보는 지옥의 그림자이던가.

'열 살이 되었던 겨울 이후 처음이지.'

시에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되짚어봤다.

홀로 선 지 삼 년이 지날 무렵, 그녀는 마녀의 힘을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졌다.

마녀의 힘은 가벼운 주문에도 어김없이 발현되었다. 때로는 조금만 감정이 격해져도 폭발할 정도였다.

이러다가는 금강궁의 정적들에게 발각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판단한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악마의 힘이 유일한 답이었어.'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마녀의 힘은, 어설픈 주문 따위로는 억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전을 찾아가자니 금강궁의 손 안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미는 꼴.

낮은 거리의 흑마법사를 찾아간 건, 당시의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커헉! 꼬, 꼬마야, 이게 무슨 짓이냐!'

'닥치고 악마를 불러내. 소환은 힘들더라도, 계약 의사 정도는 전달할 수 있잖아?'

마녀의 힘으로 흑마법사를 제압하고, 악마와의 계약을 중재하도록 협박했다.

마침 사슬옥좌의 칼카스가 모자란 제물에도 불구하고 응답해주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칼카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녀들의 힘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

그렇게 사슬옥좌의 권능으로 마녀의 힘을 봉인한 뒤, 이제 걱정할 거리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바로 저번 겨울까지만 해도.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어.'

일 년쯤 전부터였을까.

대륙의 정세는 시시각각 불안해지고 있었다.

마물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서, 잠잠했던 전운이 대륙 곳곳에 감돌았다.

북쪽에서는 악신에게 홀린 야만족이 차르국을 압박했다.

남쪽의 제국은 혼란을 틈타 주변 소국들의 땅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중이었다.

성기사단의 내전 소식에는 균열의 진룡이 사냥당했다는 이야기가 섞여 들리고, 동쪽에서는 이백 년 만에 엘프가 상선이 아닌 전함을 끌고 왔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일 년 사이에 대륙의 앞날은 한 치도 알 수 없게 됐다.

아직까지는 위태로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길어야 5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모자랄지도.'

뒷골목 정보상의 안온한 생활은 끝났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신의 무력을 키워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차르국의 의뢰를 받아 미궁으로 내려왔다.

오랜 시간 봉인해뒀던 혈통의 힘을, 악마와의 담판을 벌여서라도 되찾기 위해서.

푸드드득!

뻗어내는 마력. 그 사이에서 날갯짓 소리가 흘러나온다.

육신과 영혼을 짓누르던 칼카스의 권능, 속박하는 사슬의 저주가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어져나가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 안쪽에서는 흐릿하게 휘날리는 수천 개의 깃털과, 그걸 호시탐탐 노리는 차가운 사슬들의 형상이 드리웠다.

가볍게 들어올린 손날을 내리그으며, 시에나는 외쳤다.

"모습을 드러내라, 칼카스!"

스아아아―!

가벼운 손짓에, 밀림이 갈라진다.

콰자자자작!

두부처럼 으깨지는 지면. 다 타버린 삭정이처럼 부스러지는 지옥의 나무들.

그 위를 뒤덮었던 수백 가닥의 사슬 역시, 수많은 고철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휘날렸다.

십수 년 만에 깨워낸 마녀의 힘.

악마가 도전자를 시험하기 위해 강림시키는 지옥의 그림자는, 그 힘 앞에 걸레짝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츠아아아아···.

지옥의 정경이 걷혀나간다. 마법진이 빛을 잃은 거대한 공동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지옥의 그림자 안에서 해메고 있겠지. 댈런은···잘 이겨낼 수 있을까.'

문득 한 전사의 안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시에나는 곧바로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자신의 싸움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마법진을 통한 담판이나, 기껏해야 화신체 정도를 상대하려 했던 원래의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예상치 못하게 악마의 본체와 맞서야 하는 상황.

한순간의 방심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 중, 지옥의 그림자가 모두 지워지고.

차르르르···.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내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나. 거기다 모든 이들 중에 가장 빨랐군. 에낙사구스께서 주시하고 계신 그 전사가 첫 번째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절그럭.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슬 소리가 울려퍼진다.

차르르르···.

다시 한 걸음. 지면을 즈려밟는 발밑에서부터 사슬 가닥이 덩굴처럼 무더기로 자라났다.

사슬 장막이 벗겨져나간 칼카스는, 로브를 뒤집어쓴 거대한 주술사의 형상이었다.

못해도 십 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신장과 덩치.

얇고 굵은 사슬로 짜인 로브 밑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서리의 기운.

[그나저나 그 힘을 사용한 건 꽤 대담한 행동이었다. 아니, 다시 말하지. 대담한 만큼이나 멍청한 선택이겠군.]

얇고 굵은 사슬로 짜인 두건 안쪽에서, 악마의 푸른 눈이 번들거렸다.

[십오 년 전 계약의 내용을 잊었느냐? 네 의지에 따라 단 한 번은 봉인의 서약을 깨고 마녀의 힘을 사용할 수 있으나, 그 대가로 너의 존재 자체를 내게 바쳐야 한다는 맹세를?]

악마는 입맛을 다셨다. 쩍쩍 갈라진 입술 안쪽으로 창백한 혓바닥이 낼름거렸다.

시에나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품에서 작은 나무 인형을 꺼내들었다.

까마귀의 깃털을 덧댄 채, 얇은 쇠사슬로 꽁꽁 묶어놓은 인형.

그건 십오 년 동안 그녀를 구속해왔던 계약의 증표였다.

"우리의 계약에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지. 네가 직접 내게 해를 끼칠 경우에, 계약은 파기되며 내 힘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고."

검은 눈에서 마력광이 이글거린다. 그녀는 인형을 잡은 손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네 저주가 나에게 닿은 순간 우리의 계약은 파기되었다, 칼카스. 내 힘은 이제 내 것이야."

콰직!

선언과 동시에 부서지는 인형.

초월적인 존재들의 계약에서, 정당한 선언과 증표의 상실은 곧 계약 종료를 의미하는 바.

촤르르르륵!

시에나의 무형의 사슬 수십 가닥이 뻗어져, 구속력을 잃은 채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거구의 주술사는 손을 펴 계약의 잔재를 회수했다. 놈은 히죽이던 입술을 슬그머니 끌어내렸다.

[···머리를 잘 썼구나, 마녀. 하긴 어릴 적에도 너는 영특했었지. 너무나 영특하고 출중해서, 상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내 종속을 삼고 싶을 정도였어.]

"꿈 깨시지. 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면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네 얕은 수작에 놀아날 정도로···."

[허나.]

쿠웅.

수정구 부서진 지팡이가 땅을 내리찍었다. 수천 가닥의 사슬이 새로이 뻗어나왔다.

공동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내달리는 사슬의 파도.

마치 거대한 거미가 먹잇감을 포획하기 위해 지은 함정처럼, 사슬 그물은 공동을 빈틈 하나 없이 촘촘하게 뒤덮었다.

[세계의 종점이 머지않은 지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영혼이 소멸하지만 않으면 에낙사구스께서 어떻게든 솥구덩이에 데려가 살려주시겠지.]

악마는 끌어내렸던 입꼬리를 다시 올렸다. 놈이 말했다.

[어디 갓 되찾은 힘으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거라, 깃털의 마녀야.]

***

'잠깐은 버틸 수 있겠지.'

쇠 냄새 가득한 밀림을 천천히 걸으며, 댈런은 생각했다.

칼카스의 두 번째 페이즈는, 놈이 기거하는 지옥의 그림자가 강림한 가운데 펼쳐진다.

광대한 지옥의 그림자 속.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에게 주어진 지옥의 시험을 통과하는 게 2 페이즈의 정석 공략법.

그리고 놈의 보스전에서 시에나를 동료 삼은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중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칼카스와의 계약으로 인해 봉인된 마녀의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파티에 시에나가 있을 경우, 2 페이즈에서 칼카스는 오직 그녀만을 노리는 바.

오랜 시간 마녀의 힘을 탐해온 놈이라면 그럴 이유가 충분했다.

'그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상급 악마.

오래 전, 성검을 강탈했던 악마 골라캅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강대한 적.

태초의 마녀로부터 이어져온 혈통의 힘은, 그런 악마와도 승산을 점쳐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물론 이제야 힘을 막 되찾은 시에나가 그 혈통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의 승산이라도 있는 이유는, 칼카스가 상급 악마 중에서 약체에 속하기 때문이겠지.

'옥좌에서 멀어진 만큼 원래 힘의 절반도 못 내는 이유도 있고.'

원래 싸움은 홈그라운드가 제일 유리한 법.

옥좌를 떠나 지상에 가까운 미궁 저층부까지 소환되었으니, 놈의 힘이 제약되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죽일 수도 없다는 거지만.'

골라캅 같은 떠돌이와 다르게, 자신만의 지옥이 있는 악마는 결국 그 지옥에 쳐들어가야만 완전히 죽이는 게 가능하다.

물론 이건 아직까지 머나먼 미래의 일.

당장 악마의 본체를 상대한다는 것도, 원래 게임에서라면 이 시점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잘그락.

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린 사슬을 밟아가며 이동하던 중, 댈런은 눈앞의 나무 한 그루를 보고 멈춰섰다.

불에 탄 숯처럼 새까맣고, 빼곡한 가시가 껍질을 덮은 지옥나무.

그 나무껍질에는 작은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오직 그만이 새길 수 있고,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

[왔던 곳]

한국어로 적힌 세 글자를 보고, 댈런은 오랜만에 턱이 아닌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말했다.

"길을 잃었군."

***

길을 잃었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사슬옥좌의 칼카스.

놈의 소환된 본신을 상대하는 보스전에서, 두 번째 페이즈는 총 세 부류로 나뉘었으니까.

'파괴의 시험과 인내의 시험, 그리고 주문의 시험'

세 부류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았다.

모든 시험의 장소는 차디찬 사슬로 뒤덮인 지옥나무 밀림. 바로 칼카스가 기거하는 지옥을 본딴 그림자였으니까.

'하지만 비슷한 지옥의 그림자라도 파훼법은 다 다르지.'

파괴의 시험은 단 일격으로 주변 일대를 뒤엎어야 하고.

인내의 시험은 칼카스의 사냥개 수백 마리를 상대로 일정 시간 이상을 버텨야 했다.

그리고 미로 그 자체가 된 밀림 속에서, 뛰어난 마력 감응력으로 출구를 찾아내야 하는 게 바로 주문의 시험.

댈런은 확신했고, 미소 지었다.

'이곳은 주문의 시험이다.'

그의 예민한 감각마저 속절없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환상이나 환각이 아닌, 세계의 법칙 그 자체가 비틀리면서 벌어진 일.

결정적인 단서는 하나 더 있었다.

가장 간교하기로 소문난 악신, 에낙사구스의 수하 아니랄까.

칼카스의 지옥이 제시하는 각 시험은, 도전자의 가장 뒤떨어지는 능력을 기반으로 정해진다는 점이었다.

'근력과 민첩이 낮으면 파괴의 시험, 체력과 감각이 낮으면 인내의 시험, 이런 식이었지.'

댈런은 상태창을 띄웠다.

――――――――

이름 : 댈런

레벨 : 22

[근력 : 34] [기량 : 30] [체력 : 31]

[감각 : 27] [지능 : 28] [마력 : 29]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

체력과 감각의 합산은 58.

지능과 마력은 도합 57이다.

단 1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낮은 수치. 당연하겠지만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지능과 마력 수치가 조금이라도 더 낮으면, 두 번째 페이즈에서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1 차이는 경험해본 적 없어서 혹시나 싶었는데. 다행이군.'

칼카스의 본체를 상대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댈런은 늪지 원혼들과 모태를 잡고 레벨업해 얻은 능력치를 투자하지 않고 아껴두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게임 중반부에 가장 필요한 아이템 중 두 개를, 이곳 어딘가의 시체들에서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비축했던 잔여 능력치를 마력에 투자했다.

이로써 그의 마력 수치는 30.

머지않아 검은 눈에서 마력광이 번뜩이며.

············.

이전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것들이 눈과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23

사슬옥좌(2)

·········.

그동안은 기감으로만 느껴지던 마력의 바람.

공기중에 수없이 얽히고설키는 주문의 원천이, 오감을 통해 전달되는 건 상당히 기묘한 감각이었다.

물감을 퍼뜨린 듯 일그러진 색조의 흐름. 아이들의 재잘거림 같이 순환하는 소음들.

피부 위에 느껴지는 신비한 감촉과, 혀끝에서 톡톡 터지는 복잡미묘한 향취.

자극이 좀 과한 듯한 이유는, 감각 능력치 역시 인외의 경계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겠지.

다만 평소의 몇 배는 되는 자극이 뇌리에 때려박힘에도, 마찬가지로 30을 앞둔 지능 능력치는 이를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었다.

"후우."

불필요한 자극들을 빠르게 넘겨내고, 수천 가지 마력의 흐름을 종류와 성질에 따라 분류해낸다.

몇 번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감각권은 이전과 같이 맑아져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까지의 오감과 육감 위에, 필터 하나를 덧씌우듯 마력풍에 대한 지각이 또렷하게 덮였다는 것.

다만 그게 다른 감각들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잘 연구하면 도움이 될 게 분명한 일.

기량 수치가 경계를 넘어섰을 때 그랬듯, 상승한 마력 역시 응용법이 꽤나 다양할 듯했다.

'가볼까.'

댈런은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왔던 곳'의 표식을 지나쳐, 나아가는 방향은 이전과는 달랐다.

길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은 수많은 마력풍의 흐름 속.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지옥의 마력 사이에, 비교적 익숙한 마력의 바람이 단 한 갈래 있었으니까.

'미궁에서만 볼 수 있는 성질의 마력풍이군. 저걸 따라가면 되겠어.'

깊은 동굴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가면 출구가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곳은 칼카스의 권능으로 빚어진 지옥의 그림자.

원래 있던 미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미궁의 마력풍을 따라가면 된다.

물론 수없이 얽힌 복잡한 마력풍의 흐름 속에서, 단 한 성질의 마력풍만을 식별해 따라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주문을 깊게 연구한 마법사만이, 섬세한 관찰 끝에야 저 흐름을 파악해낼 수 있겠지.

아니면 댈런처럼 마력 감응력 자체에서 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방법이었고.

절그럭. 절그럭.

어쨌든 댈런은 갈라진 뿌리의 근원을 쫓아가듯 마력풍의 흐름을 역추적해갔다.

이로써 길을 두 번이나 잃을 일은 없어졌다.

다만 이 지옥을 빠져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아이템을 얻으러 가야지.'

계승자 DLC.

이 야만적이고 위험한 세계에서, 그에게 주어진 두 가지 선물 중 하나.

아무리 수백 회차의 경험이 머릿속에 있더라도, 그걸 활용할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뻥튀기된 초반 능력치가, 그의 단기적인 생존을 철저하게 보장해주었다면.

계승자 DLC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그 이상의 것들을 거머쥘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시스템이기도 했지.'

수백 회차의 실패 끝에, 그야말로 홧김에 지른 DLC.

현질만은 자제하겠다는 신념마저 버릴 정도로 흥분했던 과거의 그였다. 그 와중에 설명을 제대로 읽어봤을 리가 없지.

물론 기본적인 건 쉽게 파악이 가능했다.

근력캐의 시체를 회수하면 근력 수치가 주어지고, 마법사의 시체에서는 주문 스킬이나 관련 능력치가 나온다는 사실 정도.

하지만 수많은 아이템과 스킬들 사이에서, 대체 어떤 기준으로 보상이 산정되는 것일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야 어렴풋이 감을 잡은 것 같군.'

댈런이 지금까지 회수한 시체는 두 자리수에 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쌓인 데이터를 통해, 그는 꽤 그럴듯한 가설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건 각 능력치와 스킬, 아이템의 값어치와 잠재력을 종합하는 복잡한 공식이었다.

좀 더 명확하게는 각 항목의 세부 등급과 능력, 입수 난이도, 사용 제한치, 금전적인 가치와 이름값 등을 죄다 뒤섞어 우열을 가리는 공식.

그렇게 캐릭터의 보유 항목들을 전부 동일하게 환산한 뒤, 최소한의 능력치를 포함해 가장 값어치 있는 항목들부터 차례로 지급하는 게 보상 선정의 방식이었다.

아마 이 육신에 깃든 초인적인 지능 수치가 아니었다면 이를 역산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댈런은 도끼자루로 머리를 긁적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쨌든 오랜 시간에 걸쳐 가설을 세웠으니, 이제 실증의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이 지옥의 그림자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두 구의 시체를 통해서.

***

시체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기중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마력의 바람 사이에서, 문득 그의 발걸음을 잡아끄는 한 가닥 흐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 ······.

그건 흐리멍텅한 잿빛의 흐름이었다.

폐부를 간질거리는 퀴퀴한 자취방의 냄새이기도 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였으며, 동시에 짭짜름한 후라이드 치킨의 기름맛이었다.

"···썩을."

댈런은 고개를 털어 감상을 끊어냈다. 그리고 미약한 마력풍을 따라간 끝에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악마를 처단하고자 한 성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진짜 있었군."

댈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사실 따라오면서도 확신은 없었다.

그저 이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인 만큼, 반반 정도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뿐.

'이건 생각해본 적 없는 다른 문제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단순히 허상일 뿐이라 여겼던 잿빛 시체.

모니터 너머에서 겪어온 옛 플레이의 흔적이, 미약하나마 새로운 마력의 흐름이 뻗어져나올 줄이야.

'다른 마법사들은 저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마법사는 귀한 직종이다. 제대로 된 마력 재능을 가진 이는 백 명 중 두셋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하지만 대륙은 드넓었다. 그렇기에 머릿수만 따지면 수도 없이 널린 게 마법사였다.

개중에는 펠버와 같이 대영역을 이룬 대마법사들도 꽤 많이 존재했고.

속세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배후에서 정세를 조종하는 노괴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만약 그런 초월자들이 이토록 이질적인 마력풍을 감지할 수 있다면, 시체를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뭔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겠지.

최대한 많은 시체를 회수해야 하는 댈런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여기 뭐가 있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마력의 바람에서 뭔가 이질적인 느낌은 없나?'

[지옥의 마력풍 사이에···아주 약간, 미궁의 냄새가 섞여있기는 하군요. 추적은 힘들 것 같습니다. 힘이 그 정도까지 회복되지는 않아서.]

일단 악마는 느끼지 못하는 게 확실하고.

어쩌면 다른 이들이 시체를 볼 수 없듯, 이 희미한 마력풍 역시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종류일 지도 몰랐다.

물론 대악마나 악신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다만 거기까지는 당장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지.

댈런은 이 주제를 머릿속 한 켠에 곱게 접어 넣어두었다. 그리고 시체에 손을 뻗었다.

파스스.

빛의 가루로 변해, 자석에 철가루가 끌리듯 손끝으로 빨려들어오는 잿빛 음영.

[악마를 처단하고자 한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2, 십이성창의 네 번째 조각]

뿌드득―

오랜만에 증가한 근력 수치에 바윗덩이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허공에서 아지랑이처럼 나타난 물건이 천천히 내려와 손에 쥐여진다.

스륵.

순백의 면포에 싸인 길쭉한 막대 형태의 물건, 성창의 조각.

이건 게임 중후반부, 마물의 대대적인 침공 때 유용하게 쓰일 아이템 중 하나였다.

'어쨌든 이걸로 공식이 대충 들어맞는다는 건 확인했군.'

[악마를 처단하고자 한 성기사의 시체]

- 압도적인 완력으로 기사단 내에서 유명하던 성기사의 시체다. 타고난 힘 때문에 갑옷과 무기를 달에 두 번씩 바꾸는 걸로도 유명했다. 악마 칼카스의 차르국 침공 당시 놈을 처치하기 위한 원정군으로 발탁되어 최선봉을 맡았으나, 지상에 강림한 지옥의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성물을 지켜내다 사망했다.

방금 회수한 시체는 근력 올인으로 키운 성기사 캐릭터였다.

성기사답게 가지고 있는 스킬도 여럿이었고, 상급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원정을 보낸 만큼 귀한 아이템들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다만 가설로 정립한 공식에 따르면, 이 시체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보상은 둘뿐이었다.

20대 후반에 달하는 근력 수치.

그리고 수만의 마물을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성물.

'다음 시체를 회수하면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겠지.'

댈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운한 곡검의 달인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불운한 곡검의 달인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낙성의 비약]

이로써 가설로 세운 공식은 두 번이나 검증된 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을 때, 계승 보상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다른 무엇보다 값어치 있는 수확.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군. 지금 상태의 시에나라면 슬슬 한계가 올 시점이니.'

댈런이 아공간에 조심스레 비약을 정리해 넣고서, 출구를 향해 떠나려는 찰나였다.

"댈런?"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낮고 허스키한, 반쯤은 쉰 듯한 음색이었다.

반사적으로 도끼를 던질 뻔한 댈런은, 가까스로 그 지친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고는 멈출 수 있었다.

"댈런! 자네가 맞구만! 이럴 수가, 정말 다행이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나!"

스륵―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온몸에 폭약과 여분 총탄을 둘둘 두른 난쟁이.

그것도 겁에 질리다 못해, 하나뿐인 눈이 시뻘겋게 부은 외눈의 명공이었다.

***

5분.

외눈의 명공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장인 중 하나, 비요른 칼라드라쿰이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은 시간이었다.

"으흐흑, 고맙네. 자네가 있으니 마음이 좀 놓이는구만. 자네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숲과 관련된 끔찍한 기억이 있다네. 차라리 악마의 입에 폭탄을 쑤셔넣었으면 넣었지!"

눈가를 훔치며 수염에 묻은 눈물을 탈탈 털어내는 난쟁이.

들어보니 어릴 적에 숲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 지옥의 숲처럼 기괴하게 생긴 나무들로 둘러싸이면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다고.

'게임에서도 원체 개인적인 정보를 알아내기 힘든 인물이었지. 그런 과거가 있는 줄은 몰랐군.'

평범한 숲은 괜찮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참을 만하다고도 했고.

'그나저나 무슨 겁에 질렸다는 양반이 폭탄 테러라도 불사할 정도로 폭약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녀?'

이미 룬 마법에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까지 동원해, 댈런의 감각에조차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은신을 유지한 상태였다.

거기에 저렇게 폭탄까지 달고 다니니, 그야말로 어디 주요 시설을 붕괴시키려는 테러범으로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

넌지시 돌려서 물어보자, 비요른은 헛기침을 큼큼 하며 대답했다.

"그야 두려울수록 더 화려한 폭발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겠나? 갈 때 가더라도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

"화약과 폭발로 끝맺는 생이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거 어디 중동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테러범들이랑 사고방식까지 비슷한 것 같은데.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걸 살살 문지르며, 댈런은 슬슬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이곳은 어떻게 찾아온 거요?"

사실 비요른 역시 지혜의 시험에 떨어졌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의 손재주와 감각에 더불어, 난쟁이의 힘과 체력까지 겸비한 영웅이었으니까.

룬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보조하는 역할에 가까운 만큼 마력 수치는 그리 높지 않겠지.

다만 예상하지 못한 건, 어떻게 이곳까지 길을 찾아왔냐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출구까지는 대략 걸어서 5분 거리다. 사실 코앞이라 해도 무방해.'

댈런은 방금 회수한 시체, 불운한 곡검의 달인이라는 캐릭터의 결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사의 악마에게서 온갖 저주를 둘둘 감은 채, 어쩔 수 없이 돌입한 칼카스와의 보스전.

이미 파훼법을 알고 있기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축적되어온 저주로 인해 출구를 얼마 안 남기고 캐릭터는 사망했다.

사실상 이곳은 출구에서부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이야기.

주문에 대한 지식도 깊지 않을 테고, 거기다 마력 수치도 비교적 낮은 비요른이 이 시간에 닿을 수 없는 위치였다.

"무서운 마음에 잘은 모르겠고, 그냥 감을 따라 움직였네."

"···그렇군."

그냥 감이 좋은 건가. 자세한 건 나중에 더 알아봐야 할 듯했다.

어쨌든 시간이 많이 없었다. 댈런은 진정한 비요른을 데리고 바로 움직였다.

5분쯤 걷자 예상대로 출구가 등장했다.

정확히는 출구라기보다, 마지막 시험이라고 봐야 맞겠지만.

츠즈즈즈즈···.

잘게 부서진 공간의 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깨진 거울처럼, 공간 자체가 일그러진 현상.

장벽의 표면은 끊임없이 부서졌다가 다시 결합되고, 그럴 때마다 각기 다른 수많은 장소들의 상을 맺어내며 변화해나갔다.

"예전에 마탑과의 합동 연구에서 이런 비슷한 주문을 본 적 있네. 물론 십수 명의 마법사들이 붙어서 완성해냈고, 이 정도로 거대하지도 않았네만···. 요지는 이 벽은 주문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걸세."

평소처럼 이성을 되찾은 어조로 비요른이 말했다. 그가 아쉽다는 듯이 덧붙였다.

"어쩔 수 없군.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네."

"무슨 소리요?"

"자네에게 굉장한 마법 무구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네만, 저 벽은 도구에 의존한 주문에는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잘 생각해보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주문과 내는 시너지가 워낙 좋다보니, 어지간해서는 주문의 힘을 무기에 덧씌워 사용하곤 했으니까.

"어쩌면 다른 길도 있을지 모르네. 일단 왔던 길을 돌아가보는 게···."

"필요 없소."

댈런은 난쟁이의 말을 끊고서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스윽.

손을 들어올리고, 장벽에 시선을 집중한다.

우우웅···.

그 간단한 동작에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스킬에 영향을 주는 기량.

주문의 근간 그 자체인 마력.

두 능력치가 모두 인외의 영역에 다다랐으니, 안 그래도 한 번 시험해봐야 할 참이었다.

지금까지 익혀온 주문이, 영역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어디까지 응용될 수 있는지를.

124

사슬옥좌(3)

얼마 전, 기량 수치가 임계를 넘어섰을 때.

이전까지 볼 수 없던 것들이 댈런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물리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념적인 힘의 방향과 흐름.

그건 육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었으나, 육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수많은 선들의 뒤섞임이었다.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다루는 기예는 진일보했으며, 조금 비틀어내자 이전에는 할 수 없던 일들마저 가능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염사와 답보.

영역을 통해 새롭게 빚어진 스킬들에, 한 차례 더 손을 댐으로써 만들어진 이적.

그리고 마력 수치마저 임계를 넘어서자, 변화는 다시 한 번 찾아왔다.

스으으···.

먹구름이 몰려든다. 그 위치는 하늘 위가 아니었다.

검붉은 구름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사슬 가득한 지면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 댈런! 자네 설마···."

난쟁이가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그 의문에 대답은 필요 없었다.

손끝이 복잡하게 수인을 맺어갈수록, 시시각각 형태와 규모를 바꿔나가는 먹구름이 그 대답을 대신했으니까.

우르릉.

사슬로 뒤덮인 숲 한가운데.

땅에서 솟아난 먹구름이 천천히 얽혀들며 회전하기 시작한다.

사용하고자 하는 주문은 하나였다.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

염열 계열 마법의 오랜 선구자, 이그넬라 마탑의 전대 마탑주가 만들어낸 주문.

마탑의 교육 및 연구과정에서도 최상급 레벨에 올라가야만 배울 수 있는 주문은, C등급 스킬답게 광범위한 기상 조작과 화려한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그 화려함 덕에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마탑의 상징격 주문들 중 하나.

그런 주문이, 지금 댈런의 손끝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되고 있었다.

쿠르르르···!

나선형으로 겹겹이 얽혀들던 먹구름은, 이내 높이 십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차디찬 지옥의 그림자 한가운데서 열기를 내뿜으며, 냉기를 몰아내고 도처에 깔린 사슬마저 녹여내는 검은 기둥.

"이그넬― 셀티데오 라그레타."

그리고 기나긴 수인의 마지막을 짧은 영창이 장식한 순간.

콰아아아아―!

검붉은 구름기둥의 색깔이 반전되어, 선홍빛의 불기둥이 주변을 밝게 비추며 타올랐다.

「홍염주(紅炎柱)」

주문과 초능력이 실존하고, 무협지에나 나올 무술들이 전수되는 이 세계.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영역의 힘은, 마력이라는 매개를 원동력 삼아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

임계를 넘어선 기량이, 힘의 흐름을 인지하고 비틀어낼 수 있게 했다면.

임계를 넘은 마력 수치는, 그 흐름을 직접적으로 주무를 수 있는 권능.

까딱.

댈런은 가볍게 손끝을 움직였다. 그러자 화염 기둥에서 수십 갈래의 불꽃이 쏘아져 일그러진 공간을 향해 뻗어갔다.

쩌저저저정!

쏟아지는 화염의 폭격에 비틀리던 상이 하나씩 고정되기 시작하고.

쿠구구구···!

반대로 시험의 배경인 지옥의 그림자는 지평선에서부터 서서히 소멸하기 시작한다.

"주문을 마음대로 조작하다니, 이건 고등 마법사나 할 수 있는 일일 텐데······."

곁에서 지켜보던 비요른이 입을 떡 벌린 채 그런 말을 중얼거린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모니터 너머.

수백 번이나 되풀이한 도전의 절반 이상을, 정석과는 거리가 먼 잡캐로 키워온 그다.

치트성 현질 없이 게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결국 잡캐가 답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

아마 지금 자신의 모습은, 그 당시에 모니터 너머에서 꿈꾸던 캐릭터의 이상향에 꽤나 가까워졌겠지.

물론 당시 가졌던 의지와는 달리 거금을 현질해서 얻어낸 육신과 재능이지만 뭐 어떠랴.

이 세상은 더이상 게임이 아니었고,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다가오는 종말을 쳐부수고, 살아남아 돌아갈 기회를 얻는 것.

쩌저적···!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던 공간의 균열이 복구되어간다. 마치 방탄유리를 총으로 쏜 다음, 그 장면을 슬로우 카메라로 되돌려 재생하는 듯한 광경.

결합되며 하나로 온전해져가는 상은, 거대한 공동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비추고 있었다.

촤르르르···!

한 지점을 향해 뻗어가는 수백 갈래의 굵은 사슬들과.

까가가가강!

흐릿한 깃털의 잔상과 함께, 그 공세를 힘겹게 받아치는 마녀의 힘.

시에나는 예상 이상으로 분전했지만,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본거지인 지옥을 떠나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상대는 엄연한 상급 악마.

이는 결단코 그녀가 되찾은 마녀의 힘이 약한 게 아니다.

오히려 갓 되찾은 힘으로 여태까지 버텨낸 게 대단한 일이겠지.

쩌적···!

어느새 장벽은 실금 몇 가닥을 제외하고 온전해졌고, 반대로 지옥의 정경은 9할 이상이 증발해버렸다.

그건 곧, 두 번째 페이즈의 끝이 코앞이라는 이야기.

이쯤 되자 마녀를 손에 넣기 위해 몰두하던 칼카스 역시 이상을 눈치챘는지, 흠칫하며 댈런과 비요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고.

쩡―!

온전히 상이 맺힘과 동시에 지옥의 그림자가 사라지며, 두 사람의 신형이 공중에서 동굴의 바닥을 향해 낙하했다.

[성검의 전사···!]

악마가 안광을 번뜩이며 소리친다. 놈에게는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마침내 마녀를 무너뜨리고, 그토록 원하던 힘을 손에 넣기 일보직전의 상황.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분노로 일그러진 눈빛 앞에서, 댈런은 사납게 웃으며 성검을 뽑아들었다.

우르릉···!

익숙하게 성검을 울리는 우렛소리가, 섬광과 함께 검끝에서 터져나오고.

동시에 동굴의 두터운 천장을 뚫고, 거대한 빛의 기둥이 악마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힌다.

어둑한 공동을 가르는 두 줄기 섬전.

「뇌격(雷擊)」.

꽈르르릉―!

뇌격에 정통으로 맞은 악마가 비틀거리며 물러난다. 그 사이 댈런은 시에나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괜찮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선혈을 흘리면서도 내려갈 줄 모르는 입꼬리.

십수 년 만에 되찾은 힘의 쾌감이란 그런 의미겠지.

댈런이 지금껏 겪어온 그 어떤 레벨업이나 시체 회수보다도 더한 충만감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을 테였다.

"계속 싸울 수는 있겠소? 그토록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힘이면, 다시 되찾았을 때 돌아올 몸의 반동도 상당할 텐데."

"당연하지. 저 개새끼 면상에 주문을 꽂아넣을 수 있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렇다면야."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뻗어 도끼를 회수했다.

그때 두 사람의 곁으로 난쟁이가 다가왔다.

"저거 저놈, 방금 한 방으로도 죽지 않은 것 같네만."

"그럼 명색이 악만데 번개 한 줄기 맞았다고 골로 갈 거라 생각했어?"

시에나가 웃었다. 그녀는 입에 모인 피를 땅에다 뱉었다.

"이제 시작이지."

후드드득···!

검은 두 눈이 마력광으로 일렁이는 순간, 그녀의 주변 공간에서 수많은 날갯짓이 환청처럼 울려퍼졌다.

깃털의 마녀가 가진 힘.

그 힘은 기본적으로는 환각 계열이지만, 동시에 파괴력으로도 모든 마녀의 혈통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크하하, 음습한 동굴에 악마라니. 이거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환경이구만."

비요른 역시 숲에서 받은 정신적인 피해를 극복해냈는지, 활짝 편 얼굴로 산탄총에 수제 탄약을 욱여넣었다.

[성검에서 발현되는 영역의 힘이라···인상 깊군.]

그즈음 뇌격에서 발생한 스파크를 완전히 떨쳐낸 칼카스가, 지팡이를 들어 반쯤 부스러진 사슬 로브를 털어내고.

꽈광―!

즉시 댈런의 신형이 사라지며, 방금까지 서 있던 돌바닥이 쩍 하고 갈라졌다.

3 페이즈의 시작이었다.

***

촤르르륵!

수십 갈래의 사슬들이 쏘아진다.

그 첨단마다 둘러진 냉기의 마력은, 아무리 못해도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 이상의 위협.

꽈과과과광!

닿는 곳마다 돌벽과 바닥이 으스러져나가고, 그 파편이 채 비산하기도 전에 얼어붙어 고정된다.

그리고 퍼붓는 사슬 폭격 사이로 댈런은 달렸다. 그의 발은 지면이 아닌, 허공을 거듭해서 디뎌내는 중이었다.

터텅― 터터텅!

중력을 무시한 듯 퉁퉁 튀어오르며 내달리는 건, 고유 스킬 답보의 능력.

보이지 않는 바닥과 벽, 천장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기동은, 악마의 사슬이라도 피해내기에 충분한 움직임이었다.

물론 칼카스의 권능이 사슬 폭격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크르르릉!

놈이 마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곳곳에서 열린 지옥문의 파편.

그 안에서 뛰어나온 수십 마리의 사냥개가 일행을 노리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이놈들은 내가 맡겠네!"

퍼버벙! 꽈릉―!

능숙한 손놀림으로 날린 폭약이, 적재적소에서 터지며 원하는 방향으로 수백 조각의 철편을 흩뿌린다.

평범한 파편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난쟁이의 룬 마법이 새겨진 철편들.

사냥개를 두른 사슬에 닿는 순간, 룬이 내뿜는 강력한 빛이 사슬에 깃든 냉기를 날려버리고.

파지지지직!

깨갱! 깨개갱!

사슬을 타고 흐르는 강력한 마법적인 전류에, 집채만 한 사냥개들이 산 채로 통구이가 되어간다.

[인간 놈들의 알량한 화약 무기 따위로···!]

분노에 찬 노성을 토해내는 악마. 허나 시선을 돌릴 틈은 주어지지 않는다.

악마가 비요른을 향해 지팡이를 내뻗음과 동시에, 수십 갈래의 마력 줄기가 놈의 본체를 노리고 쏘아졌다.

휘리리릭!

바람 찢는 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흐릿한 깃털의 형상들.

촤르르― 까가가강!

황급히 지팡이를 회수해 수백 가닥의 사슬을 한 차례 더 둘러내지만, 전방위에서 날아드는 깃털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마녀!]

"언제까지나 처맞고만 있을 줄 알았어?"

[냄새나는 인간의 편에 붙은 배신자의 혈통 주제에···!]

꽈르르릉!

놈의 말을 끊고 백색의 벼락이 천장을 다시 한 번 부수며 날아든다.

한 번 당한 게 있어서인지 재빠르게 놈의 머리 위를 가리고 형성되는 사슬의 방벽.

쩌저저적!

사슬에 담긴 냉기가 폭발하며 벼락을 막아냈다.

그러나 어느새 발밑까지 다가온 댈런이 쏘아낸 섬광은, 보란 듯이 악마의 어깨를 관통했다.

[커헉···! 성검의 주인, 어디 그 검을 잃고도 싸울 수 있을···.]

"말이 길다, 새꺄."

가볍게 자리를 박차며 비웃는다. 뒤늦게 날아든 사슬의 폭격은 애꿎은 돌바닥만 박살낼 뿐이었다.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봐도 무방했다.

인외의 경지에 접어들어가는 전사와 혈통의 힘을 타고난 마녀, 그리고 마개조한 화약에 특유의 전투 센스를 겸비한 장인까지.

고작 세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파티였지만, 방금 막 소환된 악마는 정신을 못 차리고 두들겨맞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으니까.

이유는 다양했다.

'시에나가 생각 이상으로 마녀의 힘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어. 비요른의 화약과 룬 마법이 칼카스의 권속들을 상대로 상성이 좋기도 하고.'

그것뿐만이 아니다. 댈런의 능력치는 보통의 플레이라면 이미 중반부의 끝자락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

지금까지 쌓아온 재능과 힘에, 영웅들의 능력과 약간의 행운까지 더해진 싸움이다.

이 정도까지 유리해진 조건에서 패배해서야, 수백 회차를 플레이한 고인물의 체면이 서지 않겠지.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점점 더 기울어져간다.

칼카스는 위풍당당한 등장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상처가 늘어가며 구석으로 몰려났다.

푸른 피를 흘리며 잔뜩 일그러진 입술. 오만한 분노보다는 독기에 가까워진 두 안광.

'답답하겠지.'

댈런은 피식 웃었다.

제 정수를 사슬옥좌에 박아넣은 탓에, 지금 놈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은 지옥에서와 비하면 3할 정도다.

원래의 힘이라면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으니, 당할 때의 억울함 역시 배는 더 크겠지.

물론 한편으로 그건 놈을 여기서 죽여봐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슬옥좌에 담긴 정수가 건재하는 한, 놈은 언제든지 자신의 지옥에서 다시 부활할 테니까.

'상관없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다만 이 작전의 핵심은 놈이 지상에 소환되는 걸 막는 것.

처음부터 악마를 소멸시키는 게 목표가 아니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경험치도 문제없이 들어오고 말이지.'

꽈르르릉―!

뚫리다 못해 무너져 하늘이 내다보이는 동굴 천장에서, 다시 한 번 벼락이 내리친다.

만신창이가 된 악마가 가까스로 세운 사슬 방벽을 부수고, 넝마에 가까운 놈의 몸을 다시 한 번 찢어놓는 섬광.

[크아아악!]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이 공동을 쩌렁쩌렁 울린다. 쿵. 10미터 넘는 거체가 주저앉듯이 무릎을 꿇었다.

칼카스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마녀의 권능과 영역의 힘이 악마의 초월적인 재생력마저 끈질기게 방해했기 때문.

"끝난 것 같군."

"······."

갑자기 플래그를 세워버리는 난쟁이의 말에 순간 흠칫했지만, 댈런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이걸로 보스전은 끝이었다. 댈런은 바닥에 가볍게 착지해 놈에게 다가갔다.

[크으, 흐흐흐···.]

"뭘 처웃냐."

[확실히, 강하구나. 용의 피에 힘입어 청린을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어. 아직 그 힘을 제 것처럼 사용할 수는 없는 모양이지만···육신의 내구성이 상승하는 것만으로도, 필멸을 넘어선 힘을 가진 영웅에게는 강력한 이점인 법이지.]

거참 혀 한 번 기네. 누가 보스몹 아니랄까.

댈런은 무심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현실에서까지 엔딩 컷신 분량을 채워줄 이유는 없었다.

그 순간, 칼카스의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에낙사구스께서는 경고를 남기셨지. 전사, 너를 조심하라고.]

후웅―

검이 내리그어진다.

악마의 목도 자를 수 있는, 심상 너머의 벼락과 함께.

[그리고 한 가지 선물도 남겨주셨다.]

'선물?'

[손님맞이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말씀하시며.]

꽈릉―!

섬광이 거인의 두터운 목을 자른다. 잘린 머리통의 두 안광이 길게 휘어진 채 흐릿해졌다.

동시에 놈의 손에서 반의 반 토막 난 지팡이가 툭 떨어지고.

꿀렁―

그 나무토막에서부터 뻗어나온 끈덕한 액체 같은 마력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칼카스의 시체를 집어삼켰다.

"댈런! 위험···!"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던 시에나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임계를 넘어선 마력 수치가 미친 듯이 경고를 보내왔다.

'이게 무슨.'

주어진 시간은 찰나.

뇌가 팽팽 돌아가며 상황을 분석한다.

칼카스의 본체는 죽었다. 경험치 역시 제대로 들어왔다.

하지만 놈의 시체는 끈적한 마력에 먹혀 말 그대로 증발. 그리고 그 마력은 댈런 역시 몇 번이고 보아온 종류였다.

문제라면 그 경험이 모니터 너머, 게임의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나 있는 일이라는 거지.

'이런 시발 에낙···!'

촤아아아―!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마력이 폭발한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반전됐다.

핑 도는 어지러움을 빠르게 털어낸 후, 댈런은 검을 앞세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휘이이이···.

숲이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가 있었던 바로 그 숲.

얇고 굵은 사슬들이 죽은 지옥나무와 바싹 마른 지면을 뒤덮은,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옥의 풍경.

'칼카스의 지옥, 사슬옥좌.'

다만 몇 시간 전까지 마주하던 지옥의 그림자와 다른 점은, 바로 그 숲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옥좌가 자리했다는 것과.

[흐흐흐. 네 표정을 보니 손님맞이에 신경을 쓴 보람이 있구나, 전사야.]

그 위에 상급 악마 칼카스가, 상처 하나 없는 완전한 몸으로 앉아있다는 점이었다.

[어디 한번 아까처럼 입을 놀려보거라.]

썩을, 게임에서도 4 페이즈는 없었는데.

125

사슬옥좌(4)

'쯧. 악신의 개입이라니.'

뭣 같은 에낙사구스.

휘릭! 차르르륵―

댈런은 몸을 뒤틀어 날아오는 사슬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칼카스의 본체를 처치했을 때 벌어진 일들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맥락을 잡기에 충분한 증거였으니까.

악신의 마력을 쏟아내던 지팡이의 파편. 그건 분명 은밀하게 내장된 에낙사구스의 비술이었다.

발동 조건과 효과 역시 유추하기 쉬웠다. 주문이 효과를 발하는 시점은 칼카스가 죽음을 맞는 순간.

그리고 그 효과는 갓 죽은 악마의 육신을 제물 삼아, 살해자를 지옥으로 소환해버리는 게 분명했으니까.

'여러 번 꼬아낸 차원 전이 마법이군.'

[으하하하!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콰광! 콰과광!

악마의 광소와 등 뒤를 쫓아오는 굉음을 무시한 채, 다시 한 번 지면을 박차며 숲속을 주파한다.

콰지직! 우직!

이쑤시개처럼 꺾여나가는 굵직한 지옥나무들. 유연한 육신이 그 사이로 빗발치는 사슬의 폭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다.

그 순간 섬찟하게 들어오는 육감의 경종.

"쯧."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튕기듯이 허공으로 띄워올렸다.

촤르륵···!

시야의 사각으로 날아드는 가시 돋친 사슬을 인지하고,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내기까지 반의 반 호흡.

쩌어어엉!

손아귀에 전해지는 충격은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공동에서 상대하던 사슬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칼카스의 본거지인 사슬옥좌.

악마의 권능으로 빚어진 지옥이니만큼, 모든 환경과 조건이 놈에게 최적화된 싸움터였다.

쩌저저적!

지면에 발이 닿는 아주 잠깐 사이에 냉기가 파고든다. 부츠는 이미 걸레짝이 된 상태였다.

퍼버벅! 촤르르르···.

거기다 느닷없이 땅을 뚫고 용솟음치는가 하면, 허공을 찢고 뱀처럼 달려들기까지 하는 사슬의 파도.

작게는 성인 남성 허벅지 굵기의 사슬부터, 아예 아름드리나무 수준의 거대한 사슬까지 댈런 하나를 잡기 위해 날아들었다.

"······."

그 모든 걸 신중하게 눈에 새기던 댈런은, 어느 순간 달아나는 걸 멈추고 지면에 내려앉았다.

계산이 끝난 것이다.

'쉽지 않겠어.'

방금까지 인간과 마녀, 드워프로 구성된 파티한테 처맞느라 응어리가 맺힌 걸까.

악마는 그야말로 뼛조각 하나 안 남길 기세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앞뒤 없는 악마의 공세를 맞이하며, 댈런은 놈에게 남은 힘의 크기를 하나하나 역산해갔다.

쏟아지는 사슬의 숫자와 파괴력. 각각의 사슬이 품고 있는 냉기. 놈이 공간을 여닫는 마력의 흐름. 이 와중에도 끝까지 숨기고 있을 변수들까지.

게임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4 페이즈.

그것도 칼카스의 본진인 사슬지옥에서의 싸움인 만큼, 충분히 놈의 상태와 능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승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댈런을 함정에 빠뜨리는 건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악마 역시 만전의 상태는 포기해야만 했다.

3할의 힘을 가지고 소환된 본체가 제물로 바쳐진 탓에, 놈에게 남은 힘은 6할에서 7할 정도.

그 정도라면 지금 본신의 힘으로 부딪혔을 시, 이길 확률은 대충 10 퍼센트 미만이었다.

게임이었다면 승산이 0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싸움에 뛰어들었을 터.

허나 댈런은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이 세계는 더이상 모니터 너머의 허구가 아니었고,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으니까.

'도박수이긴 하지만, 통하기만 한다면 승률은 100 퍼센트.'

습―

짧은 생각을 마치고 한껏 숨을 들이쉰다. 두 발은 지면을 굳게 디뎌 몸을 지탱했다.

양손으로 성검을 잡고 들어올리는 간단한 동작 속에서, 어깨로부터 시작된 회오리가 순식간에 검신까지 내달리고.

꽈광! 쿠르르륵!

온 지면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짓쳐오는 사슬의 파도를 향해, 댈런은 성화가 맺힌 성검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화륵!

시작은 허공에 날린 불티처럼, 백색 불꽃으로 그려진 얇은 호선.

콰아아아―

곧이어 백색의 성화를 머금은 폭풍이, 그 궤적을 기점으로 전방을 향해 부채꼴로 쏟아졌다.

쿠지지직―!

사슬의 파도와 불꽃의 폭풍이 부딪친다.

힘과 힘의 충돌은 일대의 공간을 말 그대로 으깨버렸다.

한 발 늦게 댈런을 쫓아오던 사냥개들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지옥나무의 깊은 뿌리마저 뽑히다 못해 뜯겨서 날아가버렸다.

격돌의 심부에서 떨어져 있었음에도, 댈런의 두 다리가 땅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밀려날 정도.

그 파괴의 충돌이 가라앉은 직후.

[크흐흐, 포기한 거냐?]

어느새 다가온 칼카스가 옥좌 위에서 조소를 머금고 안광을 번쩍였다.

[기사왕 라판텔라의 분쇄검, 그리고 성화라. 전사여, 네 영역에서 만들어진 가능성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구나. 그래서 그게 네 최선인 건가?]

악마가 물었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놈이 아는 성검의 전사라면 이게 최선이 맞겠지.

영역의 힘에 성검의 능력이 결합되어 탄생한 '뇌격'.

그리고 라판텔라의 분쇄검에 균열에서 얻어낸 성화를 접목시킨 백색 화염의 폭풍.

지금까지 대부분의 싸움에서, 댈런은 이 두 가지 능력을 사실상의 주력기로 사용해왔으니까.

실제로 이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감당해내는 적은 흔치 않았다. 사실 여기까지도 필요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현재 댈런의 몸뚱이는 치트키를 몇 번이고 친 것 같은 상태.

보통의 싸움은 검 좀 휘두르거나 도끼질 한두 번이면 해결되곤 했다.

물론 상급 악마인 칼카스에게는 좀 더 강한 처방이 필요한 법이다.

[크하하하! 아까의 자신감은 다 어디 간 거냐, 전사!]

숲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비웃는 놈을 무시하고, 시린 냉기로 가득한 공기를 천천히 들이쉰다.

시선을 내려 왼팔을 쳐다봤다. 익숙한 푸른 문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팡이 파편에 내장되었던 술식은, 살해자 단 한 명만을 전이시키는 주문이었기 때문.

댈런은 성검의 검면을 퉁퉁 두드렸다. 그러자 지금껏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던 성검이 떨림을 멈췄다.

[그래. 벌레 같은 필멸자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어야 하거늘, 어딜 감···히······.]

그리고 그 대신 떨리기 시작한 건, 이변을 눈치챈 악마의 목소리.

댈런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날숨에 실려나온 깊은 열기가 몸을 둘러싸고 있던 냉기를 확 몰아내고.

화륵!

차디찬 사슬로 뒤덮인 지면과 나무들이, 난데없이 달라붙는 검붉은 화염에 서서히 타들어간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칼카스의 푸른 안광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세로로 죽 찢어진 검붉은 동공.

그 눈을 본 악마가 기함했다.

[어, 어찌···용의 힘을 단순히 담아내는 건 몰라도, 필멸자의 육신으로 그 불꽃을 휘두르는 건 불가능할 터인데!]

"지랄."

쿠웅.

내딛는 걸음에 공기가 훅 밀려난다.

반경 수 미터의 사슬이 죄다 끊어져 떠오르고, 부스러져 날아가는 광경.

경악으로 물든 악마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댈런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나도 2 페이즈 있다, 새꺄.

***

촤르르르···!

사슬의 비가 내린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냉기만으로도 피부가 얼어붙고, 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온몸이 산산조각날 지옥의 사슬들이었다.

수백 단위의 군대라도 단숨에 쓸어버릴 그 폭우에 맞서, 단 한 번 검이 휘둘러졌다.

검끝이 그려내는 검붉은 곡선.

그리고.

쩌━━━

산산조각나 파편으로 변해버린, 지옥의 사슬이었던 것들.

후두둑 떨어지는 쇠쪼가리들 사이에서 댈런은 말없이 검을 늘어뜨렸다.

직후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는, 가볍게 땅을 밀어찼다.

투웅―

단숨에 수십 미터 상공으로 치솟는 신형. 옥좌 위에 앉은 거인과 동일한 눈높이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만만하던 악마가, 다급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옥좌의 등받이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 길이만 수 미터. 사람이 아니라 건물이라도 썰어야 할 것 같은 크기의 장검.

검신 위에 얼기설기 얽힌 사슬에서 사특한 문자가 빛을 내뿜으며, 일대의 마력을 죄다 끌어모은다.

구우우웅···.

휘둘러지는 것만으로 일대의 대기를 떨게 만드는 검로.

그에 맞서 댈런도 마주 검을 내뻗었다.

짙게 맺힌 흑염으로 인해, 한 자루의 검이라기보다 용의 발톱에 가까워진 성검을.

쩌━

격돌의 순간은 짧았고.

━━━!

찰나의 번쩍임 이후, 밀려난 건 댈런 쪽이었다.

콰르르르르!

강력한 폭탄이라도 터진 듯, 충격파로 일대의 지면이 죄다 쓸려나간다.

댈런은 화염의 날개를 펴 충격파에 휘말려가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크으."

한 번의 격검으로 백 미터 가깝게 튕겨나갔다. 일대를 휩쓴 힘의 폭발은 댈런의 육신에도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채였다.

반면 칼카스는 여전히 옥좌 위에 서 있었다.

작은 생채기 몇 개는 났으나, 그쯤이야 악마의 재생력으로 금방 회복해내면서.

[크하하하! 역시, 필멸자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악마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놈도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검신을 휘감은 사슬은 삼분의 일이 뜯겨나갔으며, 놈의 권능을 상징하는 사슬옥좌 역시 군데군데 실금이 갔으니까.

[제어조차 수 없는 권능을 그저 마구잡이로 휘두른다니, 어린아이가 진검을 손에 쥔 것과 다를 게 뭐란 말이냐!]

그러나 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검붉은 용의 피.

댈런이 소유한 십수 개의 스킬 중, 가장 높은 A등급의 권능.

용혈은 다른 스킬들과 달리 그가 온전히 통제할 수 없었고, 스스로 의지를 가진 채 그의 영역을 불태우려던 전적까지 있었으니까.

때문에 성검의 힘으로 한참 동안 그 자의식을 억눌렀었고, 버번을 만난 이후에는 새끼 청린용을 통해 그 힘을 봉인해왔다.

따지고 보면 지금 악마와 싸우게 된 것도, 신비의 육신을 얻어내고자 버번과 맺은 거래 때문 아니던가.

언젠가 초월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몸뚱이와 재능만으로 이 힘을 다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댈런은 스스로의 재능만으로 이 힘을 다룰 생각이 없었다.

'진룡.'

내면을 향해 말을 건다.

심상 너머, 설산 위에 웅크린 거대한 고룡을 떠올리며.

'용신의 적창, 이름이 지워진 용.'

듣지 못했다는 듯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더 의지를 표했다.

'내가 죽으면 네 마지막 기회도 사라질 텐데. 정말 그걸 원하나?'

[···모든 걸 다 아는 척 기만하지 마라, 인간. 나는 너의 영역 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자 낮고 굵은 목소리가 심상 속에서 울려퍼졌다.

[네 알량한 속임이 카일버르쿠스에겐 통했을지라도, 네 심상의 근원을 아는 나는 다르다.]

심중의 전성에 노기가 담긴다. 그리고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휘청 흔들렸다.

"크윽."

용암 같은 압박감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살갗이 쩍쩍 갈라지며 검은 불길을 토해낸다.

마치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육신을 찢어발길 수 있다는 듯한 날카로운 의지의 표명.

우웅···.

성검이 다급하게 그 힘을 억누르려 했지만, 댈런은 검신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 심상 속에 둥지를 틀었으니 더 잘 알 텐데.'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신중하게 다음 단어들을 골라낸다.

'나야말로 네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핑핑 돌던 시야는 한결 차분해졌다.

댈런은 씩 웃었다. 오케이. 일단 미끼를 물었다는 거지.

남은 건 이 연식조차 가늠할 수 없는 초월자를, 적당하게 구워삶아 이쪽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해왔던 것처럼.

126

사슬옥좌(5)

이 대륙에 떨어진 이후, 댈런이 비단 폭력적인 방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쪽이 편하긴 헀다. 그가 입은 육신은 처음부터 부수고 썰어제끼는 일에 완벽하게 특화됐으니까.

다만 가끔은 그의 검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는 법이고, 나아가 그런 상대에게 도움을 얻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버론 라크탈라.'

금강궁의 스물여섯 초월자 중 하나에게, 악마의 정수를 넘기고 호의를 얻어냈을 때가 그랬고.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누구도 알지 못했던 바텐더의 정체를 까발리면서까지, 육신의 강화를 위한 거래를 성사시킨 일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지금.

[입을 신중하게 놀리는 게 좋을 거다, 인간.]

영역에 자리 잡은 진룡을 상대로 해야 하는 일도 그것들과 같았다.

[지금까지 네 영역 안에 잠잠히 있었던 게, 결코 네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님을 알아두어라.]

난데없는 필멸자의 영역에 자리 잡게 되어, 팔자에도 없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된 고룡.

첫 대면 때부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던 이를 상대로, 어떤 설득이 유효할 것인가.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댈런은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올렸다.

'용신에게 버림받아 갈 곳 없는 신세에, 몸 뉘일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 아닌가?'

도발한다.

한낱 필멸자가 불멸의 존재에게 내뱉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단어들.

심지어 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내용과 어조였다.

[······쯧.]

다만 그 폭언을 들은 고룡 본인은, 그저 짧게 혀를 찰 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찔린 탓이겠지. 댈런은 빠르게 다음 말들을 골라냈다.

콰과과과···!

그러는 동안에도 악마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댈런이 진룡의 힘을 깨워낸 이상, 자신의 승산도 100 퍼센트는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수 미터짜리 검신의 고대 문자가 빛을 뿜으며 저주가 빗발치고, 머리 위의 하늘이 열리면서 사슬의 벼락을 끝도 없이 쏟아낸다.

화륵―!

댈런도 그에 맞서 화염으로 뒤덮인 검을 휘둘렀다. 검붉은 불꽃이 훑고 지나가는 경로마다, 냉기가 소멸하고 사슬이 바스라져 흩날렸다.

허나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모든 공격을 받아치는 건 불가능한 법.

흩뿌려진 화염을 피해 날아든 사슬들은, 착실하게 그의 육신과 체력을 갉아먹어가는 중이었다.

'썩을.'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침묵하는 용을 향해, 댈런이 다시 한 번 의념을 발하려 할 때였다.

'잘 생각해봐라. 난 네게 재기할 기회를···.'

[너는 초월자가 아니다, 인간.]

심상 너머 용의 전성이, 의념을 자르고 낮게 울려퍼진다.

[네가 권속 삼은 늙은 마법사는 널 회귀자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조차 아니지.]

'맞아.'

댈런은 곧장 수긍했다. 다른 초월자에게라면 몰라도, 영역 속에 둥지를 튼 진룡에게까지 숨길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명해보거라. 어떻게 그토록 확신에 차서 나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나의 존재는 인간들의 역사에서 잊힌 지 오래일 터인데.]

한결 차분해진 용의 목소리. 그 안에 담긴 심리는 이제 분노보다는 의문에 가까웠다.

이로써 목표까지 절반은 온 셈이다. 댈런은 급하지 않게 대답을 빚어갔다.

'역사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네 위명 자체는 들어본 적 있다.'

용신의 적창, 이름 없는 용.

게임의 최후반부에 이르러서조차 단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은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완벽하게 베일에 가려진 건 아니었다.

'용신의 손에서 한 번 휘둘러진 창끝이 바다를 증발시키고, 드높은 산맥을 날려버렸다던가.'

당연한 일이다.

진룡 중에서도 용신과 직접적으로 엮인 권속은 단 열셋뿐.

심지어 전설에 따르면, 적창의 권능은 그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강대했다고 한다.

그런 존재를 어떻게 세상에서 완벽하게 지워내는 게 가능할까.

'눈여겨봐야 할 점은, 네가 그토록 강대한 용신의 권속이었음에도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지.'

아니, 정확히는 빼앗겼다는 표현이 옳을 터였다.

용에게 진명이란 곧 용의 존재 그 자체. 이름을 잃었다는 건 곧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니까.

'난 네게서 이름을 앗아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용신.

모든 용들의 지배자.

역사의 뒤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적창과 용신이 어떤 갈등을 빚었고, 어쩌다가 그 결과가 한 존재를 소멸에 가깝게 몰아갔는지도.

허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결과만이 남아있을 뿐.

용신에게 이름을 빼앗겼다는 건, 곧 용족의 명부에서 지워졌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군주에게 버림받은 신하가 품을 생각이야 뻔한 법.

'용신을 대면하고 싶나?'

[······.]

'나라면 널 용신 앞에 데려가줄 수 있다.'

침묵하는 진룡의 전성. 댈런은 송곳니를 슬쩍 드러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내 영역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직접 봤을 테니까. 그렇기에 지금껏 내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거 아닌가? 원했다면 힘을 폭주시켜 날 죽일 기회는 이미 몇 번이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

마지막 의념 이후 용은 한동안 침묵했다. 댈런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크하하! 미지근하다, 전사! 좀 더 불을 뿜어봐라!]

악마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주문과 권능에 맞서면서도, 심상 속은 최대한 평정을 지켜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필멸자 주제에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오만하다는 말은 부족할 정도로.]

슬슬 악마의 공세가 힘겹게 느껴질 즈음, 용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 네게 판돈을 걸어보도록 하지. 과연 운명의 저울은 너를 향해 기울 것인가, 아니면 심연의 다섯 신들을 향할 것인가.]

그 의념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건, 숨기지 않은 흥미와 기대감.

깎아지른 설산의 봉우리에서, 용이 자신의 거체를 천천히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저 애송이를 처리해주는 건, 그걸 지켜보기 위한 관람료로 생각하도록.]

화륵!

허공에 불이 일었다.

검고 녹진한 작은 불꽃이었다.

주먹보다 작은 크기로 피어난 화염의 꽃을, 댈런은 손을 뻗어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무슨···.'

그리고 댈런은 당황했다. 방금 전의 그건 자신이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팔다리. 허나 이에 당황할 틈은 없었다.

[크하하! 포기했구나, 그럼 죽어라!]

잠깐 내보인 빈틈을 비집고, 칼카스가 전력을 다해 권능을 떨쳐냈고.

촤르르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사슬의 파도가 눈앞을 가득 메운 순간.

[쯧.]

가소롭다는 듯 짧게 혀를 차는 전성이, 댈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불꽃 쥔 손이 앞으로 천천히 뻗어졌다.

피싯━

[···뭐?]

공백이었다.

다가오던 사슬의 파도와 거기 덧씌워진 지옥의 한기, 그 사이사이를 파고들던 악마의 저주까지.

모든 게 한순간에 증발해 사라지고, 촛불 꺼지는 듯한 소리 이후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 공백뿐.

[무, 무슨, 아니, 어떻게···.]

옥좌 위의 악마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건 방금 손을 내민 당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뭔···?'

막아낸 게 아니다. 그렇다고 상쇄하거나 흘려낸 것도 아니었다.

인외의 경지에 오른 기량과 마력 수치도 방금 전의 현상을 해석할 수는 없었다.

아니, 해석은커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파악이 불가능한 상황.

'···진룡의 힘인가.'

허나 직감적으로 느낀다.

쿵. 쿵. 쿵. 쿵.

뻐근하게 요동치는 심장. 혈관을 타고 도는 용혈. 코에서 한 줄기 선혈이 주륵 흐르고, 핏방울은 지면에 닿자마자 땅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라. 몸의 주인인 네가 졸도하면 나도 힘을 쓸 수 없으니까.]

용이 말했다. 댈런은 살짝 흐릿해지려 하는 시야를 부여잡았다.

[용신 앞에 데려다주겠다더니, 이딴 걸 몸뚱이라고 잘도 가지고 다녔군. 돌아가면 수천 년 전 사랑놀음의 굴레를 못 벗어 술이나 따르고 있는 녀석에게 심장부터 만들어 받도록 해라.]

저벅.

가벼운 잔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조금 흐릿한 형체의 허상. 동양풍의 검은 도복 같은 옷을 입은 인영이었다.

키는 작았다. 댈런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느낌이었다. 짧게 쳐올린 머리칼은 검은 바탕에 붉은 기가 드문드문 섞인 이채로운 빛깔이었고, 눈동자는 세로로 찢어져 두 가지 색으로 번뜩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누군지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댈런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적창."

[그래.]

"거래를 받아들인 건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고 지옥에마저 떨어져 본 그에게도, 방금 본 광경은 지독하리만치 현실감이 결여되었기 때문.

인간의 형상을 입은 용은 피식 웃었다. 어째선지 익숙한 웃음이었다.

[당연하지. 대가 없이 귀찮은 일을 도맡을 이유가 있겠느냐?]

그가 농담처럼 말했고.

[그럼 잠시만 몸을 빌리도록 하겠다.]

이어진 전성이 끝맺음과 동시에, 댈런의 신형이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다시 나타났을 때, 악마는 한쪽 팔을 잃은 채였다.

쿵.

거대한 팔이 땅에 떨어진다. 댈런의 몸을 빌린 용은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이거 주먹질 몇 번 했다가는 몸뚱이가 못 버티겠군.]

잠시 생각하던 그는 등에 메어져 있던 창을 뽑아들었다.

[기왕이면 익숙한 형태가 좋겠지.]

화르르륵!

르베론 아하킴의 창이 불꽃에 휩싸인다. 잘려나간 어깨를 감싸쥔 악마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소리 질렀다.

[···저, 적창! 어찌 그대가 필멸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아무리 형편이 궁지에 몰렸다고 한들, 이런 벌레 같은 존재에게···!]

[시끄럽다.]

전사의 몸을 입은 용이 창을 내리그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땅이 쩍 갈라졌다.

갈라진 건 그 땅 위에 부유하던 옥좌 역시 마찬가지. 수만 갈래의 사슬이 죄다 끊기고, 반토막난 옥좌가 볼품없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쿠웅―

건물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이 일대를 휩쓸었다. 적창은 여유롭게 걸어 그 앞에 섰다.

옥좌와 함께 반토막이 되는 걸 가까스로 피해낸 칼카스는, 대신 나머지 손목과 다리 한쪽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끄으으···이렇···게는······.]

반쯤 남은 팔과 한쪽 다리로 꿈틀거리며, 떨어진 검을 향해 기어가는 사슬옥좌의 주인.

악마 특유의 재생력이 놈의 잘려나간 신체마저도 빠르게 복구시키고 있었으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이유는 없었다.

푹―

[끄아아아악!]

멀쩡한 다리에 창을 꽂아 넣자, 거대한 화염 기둥이 솟아오르며 놈의 다리를 말뚝처럼 지면에 박아버렸다.

적창은 천천히 걸어 악마의 머리맡에서 멈춰 섰다. 그는 뒷짐을 진 채 허리를 숙여 놈과 눈을 마주쳤다.

[참으로 벌레 같은 꼴이 됐구나. 사슬옥좌의 주인아.]

[이, 이런다고 예정된 종말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대가 아무리 애써봐야···!]

[기어오르는구나. 기껏해야 천 년 정도 에낙사구스의 옥좌를 차지했다고 목이 꽤 뻣뻣해진 모양이다.]

적창이 웃었다. 악마는 순간 뒷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놈은 가진 마력을 죄다 끌어모으며 외쳤다.

[모, 모두 이놈을 죽여라! 내용물이 무엇이든 간에 겉은 기껏해야 피륙 입은 인간···!]

[굽힐 줄 모르게 되었다면 꺾일 뿐이지.]

슥―

전사의 두 손이 움직였다.

가볍게 털어낸 왼손은, 악마의 마력으로 공간을 뛰어넘으며 끝없이 달려드는 사냥개의 파도를 지워버렸고.

부드럽게 그어진 오른손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내는 악마의 목을 툭 잘라냈다.

쿵.

악마의 머리가 떨어졌다. 놈의 육신도 축 늘어졌다.

물론 상식을 벗어난 재생력은, 목구멍에서 냉기를 꿀렁이며 떨어진 머리까지도 다시 이어붙이려 했다.

[쯧. 더러워서.]

적창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다리를 꿰뚫었던 화염 기둥이 몸을 불려 악마의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화륵!

화염 기둥이 사라지고 남은 건, 둥글게 불타버린 지면과 르베론이 만든 창 하나뿐.

파스슥···.

적창이 손을 대자 창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바스라졌다. 전사의 몸을 입은 용은 턱을 긁적였다.

[···창 값은 얼마더냐?]

"나도 모른다."

[놈의 사냥개도 처리해줬으니, 대충 퉁치도록 하지.]

미안하지만 수중에 금화가 없느니라. 가난한 용이 덧붙였다.

***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라. 네 육신은 더이상 내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

칼카스의 본체를 증발시키고, 사냥개들마저 수천 단위로 지워버린 용이 영역 속으로 돌아가며 남긴 말이었다.

댈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향취가 올라왔다.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댈런의 속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심장 부근이 저릿하게 아려오는 걸 볼 때, 적창이 몇 분만 더 힘을 썼어도 목숨이 위태로웠을지 모르는 상황.

'이거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예전 균열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영역 속에서 끝을 모르고 불어나던 힘을, 필멸의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붕괴할 뻔했었지.

신비의 산물인 용혈을 각성하며 그 문제는 완전히 해소됐으나, 이제 그 용혈의 신비가 다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 셈이었다.

'버번에게 대가를 받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 테니까.'

댈런은 고개를 슬슬 털고 발걸음을 옮겼다. 악마의 본신을 처치했지만, 아직 이 지옥에서 할 일이 몇 가지 남아있었다.

'일단 시체 먼저.'

그리고 그 첫 순서는 당연하게도 시체를 회수하는 것.

이 차디찬 지옥까지 내려와 사투를 벌였던 용사들의 최후를 마주할 시간이었다.

127

변화(1)

댈런은 걸음을 서둘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곳은 칼카스의 지옥. 놈의 정수에 담긴 권능으로 만들어진 세계였다.

본신이 소멸한 악마는 몇 시간만 지나도 다시 힘을 회복하기 시작할 터.

그 전까지 시체를 모두 회수하고, 놈을 완전하게 소멸시켜야 했다.

투웅―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숲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높이.

넓어진 시야에 저 멀리 하늘로 솟은 네 개의 기둥이 보였다.

'사슬탑.'

이 지옥의 동서남북 끝자락에 각각 하나씩 세워진 탑. 그건 이 사슬지옥의 힘을 품은 오벨리스크였다.

'칼카스의 권속들이 만들어지는 장소지.'

칼카스의 사냥개. 사슬기사. 구속된 원혼. 그밖에도 수많은 종류의 마물들이 저 탑에서 칼카스의 힘에 절여져 권속으로 재탄생했다.

게임에서는 보스전 때 수많은 잡몹들이 쏟아져나오는 게이트 같은 시설이었고, 때문에 원래 칼카스의 정석적인 공략법은 첫 단계가 저 사슬탑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이번 경우는 좀 다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칼카스를 상대하는 것도 벅찼기에, 사슬탑까지 틀어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적창이 직접 나선 다음에는, 잡몹이 수천이든 수만이든 손짓 한 방이면 지워져버렸고.

투웅―

도약 스킬을 아낌없이 사용한 끝에, 오래지 않아 남쪽 사슬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시체는 사슬탑 바로 밑에 있었다. 댈런은 손을 뻗어 시체를 회수했다.

[침울한 곡검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1, 감각 +1, 귀환석]

'일단 가장 급한 건 얻었고.'

여섯 가지 빛깔이 뒤섞이며 빛나는 돌.

이건 인류가 종말에 휩쓸려갈 무렵, 대륙의 여섯 대마탑이 힘을 모아 제작한 귀환석이었다.

댈런이 경험한 수백 회차의 끝은 전부 멸망이었지만, 그렇다고 궁지에 몰린 인류가 아무 발악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륙의 땅덩어리를 한 뼘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 분투했고, 때로는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 반격의 일환이 바로 지옥을 향한 원정대.

대륙을 침공하는 악마의 본진을, 수십에서 수백 단위의 초인들을 보내 털어버리는 시도였다.

'게임에서는 지옥 레이드 느낌의 후반부 컨텐츠였지.'

그렇게 악마의 뒤통수를 친 영웅들이, 무사히 대륙으로 귀환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이 귀환석이었다.

악마와의 전투로 탈진해, 본신의 마력이 고갈되었더라도 생환할 수 있게 해주는 마도구.

귀환석 하나당 열 명이 원래 장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차원 전이 마법의 어마무시한 난이도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악마도 학을 뗄 수준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비슷한 물건을 구하는 것 자체는 지금도 가능했으나, 미친 듯이 비싼 가격에 비해 안정성은 하나도 보장되지 않으니까.

'곧 쓸 거니 잘 놔둬라.'

[끄윽, 으으, 옙. 주인님.]

조금 전의 전투에서 한계까지 저주를 먹어치운 악마가, 아공간에서 거북한 배를 쓸며 귀환석을 받았다.

놈은 귀환석을 흥미로운 눈길로 살펴보더니 말했다.

[으흠, 신기한 물건이군요. 기본적인 차원 전이 술식을 바탕으로 하되, 사용자의 과거에 실존했던 시공간 좌표계를 기반으로 삼아 필요한 마력량을 대폭 줄이는 방법이라. 마력풍의 임의값을 계산한 것도 혁신적입니다. 마치 이 시대의 물건이 아닌 것 같군요.]

'···주문에도 조예가 있었나?'

[어···일단 저도 악마입니다만. 차원에 관한 마법은 본능에 가깝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뿌듯한 목소리였다. 마치 자기가 이 정도 능력이 되니, 앞으로 잘 좀 봐달라는 듯한 느낌.

댈런은 낮게 웃으며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흠칫 물러나는 악마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지금처럼 가방 역할을 잘 한다면, 나중에는 좀 다른 역할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

악마가 기합이 빡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댈런은 실소했다. 이래서 세뇌 교육이 무서운 거라니까.

남쪽 사슬탑을 떠난 댈런은 머지않아 서쪽에 도착했다. 지옥답게 땅이며 하늘을 가리지 않고 마물이 넘쳐났지만, 다들 그에게서 도망치기 바빠 보였다.

적창의 힘으로 악마를 두들겨 팼기 때문이겠지. 자기들의 주인도 당해내지 못했는데, 덤벼봐야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여기는 게 당연했다.

[스타티아 마탑 고위 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지능 +3, 마력 +1, 고유 스킬 : 빙정(고유)]

그렇게 회수한 두 번째 시체.

보상은 무려 고유 스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