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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파르테논 신전

"이곳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자 신 아테네를 모시는 신전,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앞서가며 설명을 하는 연화를 바라봤다.

이연화.

현 국가 소속 3급 헌터이자 대사관의 가이드를 맡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2급이었지.

머리도 자른 거였구먼.

지금은 허리까지 와 찰랑거리는 흑발.

전에 만났을 땐 처음부터 목 정도까지 오는 단발머리였었다.

"백운 님…?"

"아, 네."

잠시 옛날 생각을 하느라 대답을 안 해서인지 이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아.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연화는 옛날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여전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깊고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한국인이세요.

깊다 못해 벽안에 가까운 눈동자에 혼혈 아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 눈동자 이쁘다는 말이죠?

농담 섞인 말을 건네며 환하게 웃었던 이연화.

그 미소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감사합니다, 카이안 님!!

앞에 카이안이 있었다면 바로 그랜절을 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완전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계속 가시죠."

싱긋 웃은 이연화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제가 다리가 좀 짧으니 천천히 가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170이란 큰 키를 가져서인지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이연화였다.

실제로 쫓아가는 게 힘들진 않았지만 옛날에 건넸던 농담이 떠올라 건네보았다.

"풉."

웃음을 터뜨린 이연화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약간 속도를 줄여주었다.

- 제 다리가 좀 길긴 하죠.

기분 좋은 얼굴을 하며 항상 이렇게 맞받아쳤었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온 상사의 지인이란 위치를 의식해서인지 거기까진 말하지 않는 이연화였다.

저벅.

파르테논 신전의 중앙 끝에 위치한 제단.

위로 올라간 이연화가 제단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테네 신을 모시는 이들이 여러 제물을 올린 신성한 곳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 올라오는 건 금지 되었었다는 설명.

흠 흔적은 없네.

# 시작은 파르테논 신전의 글귀. 이카로스 날개와 연관이 있어 보임.

"여기에 아테네 신이 남긴 글귀가 있다고 하던데, 어디에 있나요?"

"아 그 글귀요."

이연화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파르테논 신전의 구석진 공간.

어째서 이런 곳에 새겨져 있나 싶은, 아무렇게나 막 휘갈긴 듯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로 아테네 신이 쓴 거 맞나.

물론 100% 진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신전을 모시는 사람들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이 모시는 신과 신전을 더 드높이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이를 위해서는 누가 썼든 일단 아테네 신이 썼다고 하는 게 헌명하긴 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여신이 쓴 글씨가 학교 최고의 악필이었던 내가 쓴 글씨보다 못하다니.

이건 역으로 신성모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읽는 건가요?"

신이 갈겨놓은 글씨여서일까.

전에 먹어뒀던 알약으로 세계에서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앞에 있는 글귀는 읽을 수 없었다.

"욕망을 위해선 높이 날아야 한다. 하지만, 높이 오른 만큼 추락의 피해는 크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자여, 그럼에도 그대는 하늘 높이 오를 생각인가? 라고 해요. 고대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요."

"오… 뭔가 그럴싸한 글귀네요."

그럴싸하다기보단 대놓고 이카로스의 날개에 대한 이야기였다.

깃털에 밀랍을 발라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아버렸던 이카로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욕망의 달롬함을 맛보기 무섭게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해버린 것.

이거만 봐서는 전혀 모르겠는데.

새삼스레 날개를 찾아냈던 회귀 전의 대산이 몹시 대단해 보였다.

이런 글귀 가지고 시작을 했다니.

흔적이 있었으면 했는데 아쉽네.

소피아가 건넨 자료엔 파르테논 다음 단계까지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들린 건 혹시나 보랏빛의 흔적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보고 싶다, 보랏빛아.

더 보고 싶구나, 황금빛아.

빛들을 못 본지도 2년이 넘어버렸다.

사로카를 잡느라 어쩔 수 없었다곤 해도 2년이나 안 봐서인지 무기의 빛들이 몹시 그리웠다.

스윽.

…?

몸을 낮춰 글귀를 쓰다듬는 이연화.

묘한 얼굴로 글귀를 바라보던 이연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있어요. 저보다 더 자명한 고대학자 분들이 더 정확하겠지만요."

이연화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사삭.

앉아있는 이연화에게 다가가 함께 자리를 잡았다.

"들려주세요. 꼭 듣고 싶습니다."

내 친구 이연화라면 어떻게 해석했을지 궁금했다.

동시에 날개를 찾기 위해선 다방면으로 글귀에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감성적일 수 있는데요. 이 글귀는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다고 전 생각하거든요."

"걱정을 한다… 누구를 위해서요?"

이연화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글귀를 쓴 게 아테네든 누구든, 글을 쓴 사람은 누군가를 말리고 있는 것 같아요. 확정적인 죽음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소중한 사람을 말리는 듯한 느낌으로요."

"오호."

이연화의 말을 들으며 턱을 어루만졌다.

내용 자체는 크게 달리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이 한 해석과는 뉘앙스가 무척이나 달랐다.

학자들의 해석은 무뚝뚝하게 들리는 경고였다면.

연화의 해석은 소중히 여기는,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말리는 진심 어린 걱정이라 이 말이구만.

벌떡!

조금 전 말한 게 창피해서인지 이연화가 몸을 일으켰다.

"하하… 신전은 다 둘러본 거 같으니 다음 장소로 가볼까요?"

* * *

# 필로파포스의 언덕에서 보이는 곳은 다섯 군데. 이 중 한 곳에 날개가 있을 것으로 보임.

파르테논 신전에 이어 이연화와 함께 도착한 곳은 필로파포스의 언덕이었다.

그리스에 온다면 꼭 가봐야 하는 명소 중 한 군데로 알려진 장소였다.

"오늘도 관광객이 많네요."

어찌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데몬이 나타나며 해외여행은커녕 비행기 타는 것 자체를 꺼리는 이들이 많아졌는데.

그런 두려움을 뚫고 멀리서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이거… 다 커플들 뿐이구만.

필로파포스의 현재 색이 있다면 무조건 핑크였다.

죽이는 경치에 노을 지고 있는 하늘까지.

없던 사랑도 솟아오르는 장소여서인지 여기저기서 커플들의 알콩달콩한 애정행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삭.

조심스럽게 앞서가고 있는 이연화의 눈치를 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걸 보니 괜히 나만 주변 상황을 신경쓰고 있는 듯했다.

정신 차려, 백운! 그리스까지 와서 찐따 특성 못 버리고.

고개를 휙휙 저으며 이연화의 뒤를 따랐다.

"커플들 정말 많네요."

"!?"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던 이연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변의 커플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이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백운 님, 떨어지지 말고 바짝 붙어서 걸으세요."

!?

이연화가 밝게 웃으며 옆을 가리켰다.

"우리만 쓸쓸해 보일 순 없잖아요."

"네… 넵."

긴장을 해서인지 찐따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호다닥.

하지만 시킨다면 잘 수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곧장 이연화의 옆에 붙어 걷기 시작했다.

날개 찾아야 되는데.

온 신경은 이연화의 손과 스칠 듯 말 듯 한 오른손으로 향해 있었다.

쫘아아악!!

마음속으로 풀스윙 뺨따기를 걷어 올렸다.

정신 차려!!

날개 찾아야지.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필로파포스의 언덕을 올랐다.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오래된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엉?

건축물로 다가가자 출입금지라는 시뻘건 글씨가 보였다.

추락 위험이라는 글씨가 함께였다.

"올라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에요. 여기서 추락 사고가 꽤 많이 일어났거든요."

뒤따라 올라오던 커플이 표지판 앞에 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쉽다… 못 올라가나봐. 위에서 사진 찍고 싶었는데."

여자친구의 아쉬운 말을 들어서인지 고민하는 듯하던 남지친구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올라 가보자. 앞면으로만 떨어지면 능력 발동하니까 괜찮을 거야."

사고가 많이 나는 이유가 있었구먼.

저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아쉬워하는 연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올라가고 싶은 저 마음.

아 나는 모르는구나.

순간적으로 현실 자각을 한 후 옥신각신하는 커플을 바라봤다.

"뭘 올라가, 빨리 와.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계속 올라가겠다는 남자친구의 팔을 끌어당기는 여자친구.

다행히 오늘 사고가 일어날 일은 없어 보였다.

슥.

옆에 서 있는 이연화를 바라봤다.

이연화는 미소를 지은 채 건축물의 꼭대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연화 님, 올라가실래요?"

"네…?"

넌 또 왜 그러냐는 듯한 눈동자.

억울하네.

약간이지만 억울했다.

대산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난 어차피 올라가야 하는 상황.

가는 김에 같이 갈까 한 건데 말이다.

"전 올라가야 해서요."

"아…."

"무서우면 안 올라가셔도 돼요."

스리슬쩍 몸을 돌려 혼자 올라가려는 시늉을 했다.

"어머, 저 사람 올라가려나 봐."

"저러다 다치지. 여자친구 옆이라고 호기 부리면 안돼."

다 들려 이것들아!

나름 안 들리게 한다고 소곤소곤 말하는 듯했지만 워낙 조용해서인지 귀로 팍팍 꽂히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자친구라니.

흐무우….

짝!

나도 모르게 흐뭇해지려는 마음에 뺨을 갈긴 후.

건축물을 응시했다.

"같이 가요."

살짝 못 미더운 눈치로 이연화가 다가왔다.

"사실 저도 올라 가보고 싶었는데 제 능력을 썼다간 건축물이 무너질 거라 못 하고 있었거든요."

하긴.

이연화의 능력은 마도공학.

현대 기술로는 만드는 게 불가능한 장비를 다른 차원에서 소환해내는 능력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이 부피가 큰 만큼 광범위용 기술들이라는 점이었다.

"업… 히는 건 좀 그럴 거 같고."

모양새가 좀 빠질 것 같았다.

들고 가는 게 낫겠네.

"잠시 실례."

어떻게 데리고 가야 하나 고민하면 정적이 찾아올 것 같았기에.

호다닥 이연화를 공주님 안아 들어 건축물로 뛰어올랐다.

"!!"

이런 높이쯤이야.

2년 동안 가파른 돌산을 제 안방마냥 들락거렸다.

식은 죽 먹기보다 압도적으로 쉬운 난이도.

"우… 우와."

"와 몸 날랜 거봐. 신체 강화 능력자인가."

아래에서 부러움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그런 목소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좋았어.

자연스럽게 나온 목소리에 만족하며 이연화를 건축물의 정상에 올려다 놨다.

"와아… 고맙습니다."

단 두 번의 걸음 만에 올라와서인지 이연화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경치 죽이네.

"시간까지 잘 맞춰서 왔네요, 너무 예뻐요."

기뻐하는 이연화에 덩달아 만족감이 밀려왔다.

나도 기쁘네.

다시는 못 만날거라 생각했었던 친구.

그런 친구가 나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슥.

자… 그럼.

건축물의 꼭대기에서 정면을 응시했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위치에 솟아있는 엄청난 높이의 지형들.

다섯 개의 지형 중에서도 유독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더럽게 높네.

구름에 가려져 있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 건축물에도 보랏빛은 없었지만.

괜찮았다.

눈에 보이는 드높은 지형물.

나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곳에 날개의 흔적이 있다… 라고. 

100화. 암벽 등반

그리스에 위치한 한국 대사관.

"어? 연화 님, 오늘도 백운 님 가이드 가는 거 아니었나?"

김대혁의 물음에 이연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침에 가긴 갔었는데요. 이제 괜찮다고 하길래 돌아왔어요."

"그래? 여기저기 관광할 기세였는데 희한하네. 아침에 간 곳이 어디었는데?"

"항구 끝에 위치한 절벽이요. 그 끝도 안 보이는 지형이 있는."

이연화가 아침에 만났던 백운을 떠올렸다.

어제 약속한 대로 호텔 앞에서 만난 두 사람.

백운은 만나기 무섭게 아테네의 항구 끝에 있는 절벽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었다.

"거기서 오래 묵을 예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절벽에서 오래 묵는다…?"

처음에 들었을 땐 이연화도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아테네의 항구 끝.

걸어서 가볼 수 있는 곳이라곤 볼거리 하나 없는 상점가 마을뿐이었다.

"여기로 돌아오는 교통편도 없지 않아?"

"네, 갈 때도 제 차로 간 건데… 정 안되면 연락하겠다고 하길래 일단 돌아왔어요."

- 가이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체 절벽에서 뭘 하려는 건지 궁금했지만.

먼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백운에 이연화도 고개를 꾸벅인 뒤 대사관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사람이야.'

신기한 사람.

이 단어 말고는 백운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마치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친구 같은 느낌.

'내가 이상한 건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뭘 먹고 싶냐는 물음에 백운이 대답한 것들은 전부 이연화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거기다 말을 할 때마다 이연화의 개그 코드에 정확하게 적중하는 것까지.

'별일이 다 있어.'

피식.

그 순간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데 능력이 있는 백운이었다.

'가이드 하는 중인 것도 계속 까먹어서 혼났네.'

김대혁의 부탁으로 만나게 된 사이라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할 거라 생각 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와 잘 맞는 개그 코드 덕분인지, 이연화는 종종 자신이 가이드 중이란 걸 잊고 백운과 함께 웃으며 떠들고 말았다.

'같이 있으면 재밌는 사람.'

이연화가 하루 만에 내린 백운에 대한 정의였다.

'아.'

어제 하루를 생각하던 중 필로파포스의 건축물에 올라갔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높은 곳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무서워해 올라가지 못했었다.

필로파포스의 언덕 건축물 역시도 매일 올라가 보고 싶단 생각만 했을 뿐 시도해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는데.

- 올라가실래요?

언덕에 처음 왔으면서 망설이지도 않고 올라가자 말을 건네준 백운.

무서워서 조금 망설여졌지만, 왠지 모르게 백운과 함께 올라가면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 번쩍.

실례한다는 말과 동시에 안아 올렸을 땐 정말 놀랐었다.

건축물을 오르기 위해서라곤 해도 누군가에게 안긴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

안겼나 하는 찰나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건축물의 꼭대기였다.

조심스럽게 꼭대기의 언저리에 내려줬던 백운.

아래를 보면 정말 아찔해서 식은땀이 났어야 할 높이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백운이 있으면 괜찮을 거라는, 이연화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싱긋.

'엄청 예뻤는데.'

꼭대기에서 본 일몰은 정말 예술이었다.

"뭘 그렇게 실실 웃어?"

"!!"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어버린 이연화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런 이연화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김대혁.

"저… 전 업무 때문에 이만 가보겠습니다. 점심시간에 봬요, 팀장님."

호다닥 멀어져가는 이연화를 보며 김대혁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흠, 절벽이라."

국가직 10급 헌터 백운.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김희연과 김소연이 아니었다면 정체를 의심했을 정도로 말이다.

- 정말… 강해요.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성격의 김희연.

김희연이 그렇게까지 강조해 무언가를 말한 건 처음이었다.

"하아."

뭔가 알 거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백운을 떠올리며 김대혁이 항구 쪽을 응시했다.

'절벽에서는 또 뭘 하고 있으려나.'

* * *

"흐음!"

팔짱을 끼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제부터 하늘탑이라고 부르기로 한 지형을 바라봤다.

음! 이름 잘 지었어.

구름에 가려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아있는 탑.

이거야말로 하늘탑이지 무엇이겠는가.

연화가 있었으면 미쳤다고 무조건 말리려고 했을 테니.

절벽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연화를 돌려보낸 이유였다.

하늘탑까지 향하는 길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한 희망이었다.

- 저곳은 출입 금지에요.

출입 금지 구역 중에서도 최고 레벨로 위험한 곳이라고 이연화는 설명했다.

어제 필로파포스의 건축물은 그냥 안전사고가 자주 나다 보니 금지라는 말을 써놓은 것이지만.

하늘탑은 다르다고 말했다.

- 데몬이 등장하기 전부터도 그리스 사람들은 아무도 저곳에 다가가지 않았어요.

다가간 이들은 전부 돌아오지 못했다는 설명.

배로 가면 배가 침몰했고, 하늘을 이용해 가려고 해도 비행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추락한 비행기는 배들이 침몰했던 바다로 떨어져 잔해조차 건지지 못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 그런데 지금은 데몬까지 득실거리니. 저곳에 가려는 사람은 아마 미친 사람밖엔 없을 거예요.

순식간에 미친 사람이 되어버리다니.

애석하게 고개를 저으면서도 눈은 하늘탑에 고정되어 있었다.

데몬이 나타나기 전이든 후든 올라가 본 사람이 없는 지형.

구미가 확 당기는 곳이었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날개의 냄새가 난다!

회귀 전, 대산은 이카로스의 날개를 손에 넣었었다.

그렇다는 건 저곳에 뭐가 있든 뚫고 갔다는 소리였다.

물론 날개를 찾은 곳이 하늘탑이 아닐 수도 있지만.

풀썩.

절벽에 앉아 빵을 뜯으며 전략을 세워나갔다.

눈으로 보이는 건 구름 아래 정도였기에 탑이 얼마나 높은지는 알 수 없었다.

구름이 있는 것도 이상하네.

어제는 몰랐지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그럼에도 하늘탑이 있는 지형에만 짙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상태였다.

자연스러운 구름이 아닌,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구름이 저 정도로 끼어있다는 건 당연히 시야 확보가 안 된다는 얘기고.

시야 확보가 안 된다는 건 비전을 사용하지 못할 확률이 크단 건데.

비전 수리검의 약점이라면 약점인 부분이었다.

시야 안에 수리검이 없으면 비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

어제까지만 해도 구름이 걷히면 수리검을 이용해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불가능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암반 해야 되나.

하기 싫은데.

하기 싫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하늘탑은 더럽게 높았다.

쩝.

얼마나 높은지를 모르니 답답하네.

이래저래 생각을 하다 보니 이연화가 괜히 미친 짓이라 말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겠어.

개미친 짓이어도 가야 되는데.

슥.

옆에 놓인 두툼한 가방을 바라봤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어 옆에 있던 작은 마을에서 사온 식량이었다.

"으챠."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가볼까."

[비전 수리검]

* * *

몇 번을 이동해 왔을까.

애초에 거리가 꽤 됐는지 가까워질 거 같으면서도 은근 안 가까워지는 하늘탑.

꽤 머네.

비전으로 이동한 뒤 다시 수리검을 집어 앞으로 던졌다.

[비전]

다시 한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려는 순간.

쐐에에에엑!

머리 위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별 생각없이 고개를 든 순간.

햇빛을 가리는 거대한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시벌.

끼루우욱!

소리만 들으면 갈매기인데.

그냥 갈매기는 아니었다.

사람 몸통만 한 발톱을 가진 겁나 큰 갈매기였다.

후웅.

하늘탑 쪽으로 던지려던 수리검을 갈매기에게, 정식 명칭으론 알브론이라 불리는 데몬에게 집어던졌다.

쿠직!

꾸아아아… 악.

해안가에서 자주 출몰하며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을 통째로 집어가는 데몬이었다.

용기 있는 놈들은 사람도 집어가기에 알브론이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개인행동은 철저히 금지되고 있었다.

개인행동 하지 말라고 표지판이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유럽은 한국에 비해 안내나 서비스가 한참 부족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알브론 출몰 지역에 기본적인 표지판마저 없을 줄은 몰랐다.

끼루루루!

끼룩!!

알브론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

철새의 특징을 타고 난 건지 무리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럽게 많이.

으.

한 마리 한 마리를 수리검을 던져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저 엄청난 숫자였다.

수리검을 한 번 던진 후 리볼버로 조질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써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곳에 리볼버를 낭비하는 느낌.

다가오는 알브론에게 수리검을 던질까 말까 잠시 고민이 됐지만.

흠, 똥이 더러워서 피하나.

[해제]

결론은 이동 경로의 변경이었다.

하늘길이 저 지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공중이 아니면 바다로 가야지.

수영 드가자!

수리검을 던지려던 자세를 바꿔 입수 준비를 마쳤다.

풍덩!

한참 공중에서 햇볕을 쬐다 들어와서일까.

몸을 감싸는 바닷물이 무척이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돌산 강물 생각나네.

돌산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땀을 흘린 뒤 뛰어들었던 강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 느껴졌던 청량감은 지금도 몹시 그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엄청 평화로웠지.

다른 장소였지만 지금은 바다가 그때의 강가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깃털이 젖는 걸 싫어해 물에는 접근하지 않는 알브론.

위를 보니 알브론들이 바다 위를 빙빙 돌고 있는 게 보였다.

숨 쉬러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우매한 놈들.

수련을 하며 강해진 건 속도와 힘뿐만이 아니었다.

허구헌 날 물고기마냥 강물을 헤엄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늘어난 폐활량.

그 덕에 지금은 돌고래처럼 물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 수 있었다.

거기서 빙빙 돌아라

형은 평화롭게 물길로 갈 테…?

꿀렁.

희미하지만 저 아래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갑자기 PTSD 도지네.

2년 동안 돌산의 강물에서 너무 평화롭게 지낸 까닭일까.

그 전에 가지고 있던 물에 대한 악몽을 잠시 잊고 있었다.

유탈라스를 만나러 갈 때 조우했던 거북쉨.

거북이한테 죽기 직전까지 시달린 뒤 다짐했던 게 떠올랐다.

- 또 물에 들어오면 성을 간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흑운인가.

강물의 좋은 기억으로 희미해졌던 옹달샘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림자가 지나갔던 아래를 응시했다.

항상 느끼지만, 바다는 정말이지 존나 무서웠다.

부디 갈매기쉨이 나았다고 생각할만한 놈이 아니기를.

꿀렁!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 내 아래  쪽에 고정되는 그림자.

그리고,

쑤우우우욱!!

그림자가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온다.

그림자의 정체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흰수염고래만 한 상어가 이빨을 번뜩이며 빠르게 부상하고 있었다.

시발.

[비전 수리검]

빠르게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갈매기가 낫다!!!

101화. 아니기를

수리검을 꺼내 바다 위로 던지려는 찰나.

고민에 빠졌다.

밑에서 빠르게 올라오는 상어, 정확히는 상어처럼 생긴 데몬을 피해 물 위로 올라가려는 중이었다.

흠.

위로 향하던 시선을 내려 올라오고 있는 데몬, 샤킨을 바라봤다.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가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데몬이었다.

저 크기는 좀 에바지만.

크기는 제외하고 말이다.

저건 지금까지 동영상에서 본 샤킨 중에서도 손에 꼽는 크기였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물 안에서 지리게 만드는 어마무시한 크기.

나도 쫄아서 본능적인 판단에 따라 물 위로 탈주하려는 중이었다.

쑤우우우욱!

상어쉨.

생각해보니 괘씸했다.

저번 옹달샘에서야 거북이를 박살낼 힘이 부족했기에 도망쳤던 것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올라오고 있는 상어가 얼마나 크든 사방으로 두루쳐서 샥스핀만 똑 떼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건방진 자식.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니 결정 또한 달라졌다.

내가 다시 선택한 건 물 위로의 탈주가 아닌 참교육.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샤킨에게 샥스핀이 되는 경험을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꽈악.

수리검을 든 손에 힘을 줬다.

달려드는 용기는 가상하다만.

타이밍을 기다리며 차분히 샤킨을 응시했다.

저 무식한 크기를 보니 그냥 때려서는 좀 걸릴 터였다.

하지만, 알아서 저런 속도로 달려 와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게 바로.

쩌억!

바로 앞에서 더 크게 입을 벌리는 샤킨에게 수리검을 휘둘렀다.

카운터다, 이 상어 새끼야.

콰아아앙!

빠르게 부상하던 샤킨의 머리와 정면으로 부딪친 수리검.

옛날이었다면 샤킨의 힘과 속도를 못 이겨 내 팔이 튕겨 나갔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릿.

부딪힌 타격에 의한 반동이 오른손을 타고 어깨로 올라왔다.

느껴지는 반동만 봐도 샤킨이 얼마나 최대의 힘과 속도로 달려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상회하는 힘으로 찍어 누른 카운터에 샤킨이 큰 데미지를 입었으리란 것도 말이다.

푸화아아!

수리검이 타격된 지점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크기에 어울리는 출혈량으로 순식간에 푸르던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샤킨.

꾸루룩.

샤킨이 피를 뿌리며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안 죽었으면 가서 더 두들기려 했는데 카운터 한 방으로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듯했다.

흐읍.

조금씩 부족해지는 호흡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다시 한번 호흡하러 물 밖으로 나가야 할 때였다.

휘익.

여전히 물 위에서 왔다갔다거리는 알브론 무리들.

동족을 죽여서인지, 아니면 원래 끈기가 엄청난 건지 알브론 놈들은 다른 곳으로 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똥이 더러워서 잠시 피하긴 했지만.

수우욱.

계속 신경 쓸 바엔.

발장구를 치며 물 위로 방향을 틀었다.

치워버리자.

* * *

"하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다에 둥둥 떠 하늘을 보고 있자니 따가운 햇살이 눈을 괴롭혀댔다.

다 잡았나.

하늘에 아무것도 떠 있지 않은 걸 보니 정말 끝난 것 같았다.

슥.

고개를 돌려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날며 내가 물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알브론 무리들.

우루루 모여있을 땐 해마저 가리던 놈들이 지금은 모두 바다 위에 널브러져 종이 돛단배 마냥 힘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갈매기쉨.

한참 동안 수리검을 던지며 비전을 사용해서인지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바다 한가운데만 아니라면 어디로 떠내려가든 눈이나 좀 붙이고 싶었다.

완전 달달한 꿀잠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안되지.

스르르 감기려고 하는 눈에 힘을 주며 몸을 돌렸다.

일단 사방이 피로 범벅되어 있는 이곳부터 벗어날 생각이었다.

아주 그냥 피비린내가 몸에 배이겄네.

다시 상쾌한 바다를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팔을 저었다.

하늘탑을 오르기 전에 먼저 몸에 묻은 피부터 씻어 내야 했다.

첨벙!!

….

남김없이 씻어 내야지란 생각으로 열심히 팔을 저어서일까.

어느새 눈앞에 솟아있는 하늘탑이 눈에 들어왔다.

개높네.

멀리서 봤을 때도 높은 건 알았지만 막상 바로 아래까지 오니 더 어마어마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다 오르긴커녕 중간도 못 가고 쇼크가 올 것 같은 느낌.

잔뜩 끼어 있는 구름 때문에 안 보여서인지 더 웅장해 보이는 탑이었다.

뭐 없었으면 좋겠는데.

절벽에 매달려 암벽 등반을 해야 하는 상황.

사족보행으로 사사삭 올라가는 동안에 뭐가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수리검도 사용 못 한다.

가시거리가 얼마나 될지는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아무리 넓어 봐야 10미터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기껏 다 올라갔는데 무언가의 방해로 인해 손을 놓친다면 그대로 추락해야 하는 것.

진짜 방해하는 놈 있으면 무조건 죽인다!

오만상을 찡그린 채 센 척을 하며 하늘 위를 바라봤다.

그만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아야 멀쩡히 꼭대기에 도달할 듯한 높이였기에.

아무것도 없을 거란 긍정적인 마인드로 하늘탑으로의 첫 손을 내밀었다.

* * *

"네…? 식량을 사 갔다고요?"

"예에… 뭘 잔뜩 사가더라고요. 저기에 있는 가게에서 방수 가방도 사는 거 같던데요?"

처음 와보는 타국에 백운을 홀로 버려뒀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이연화.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백운에 이연화는 대사관의 일이 끝나자마자 절벽 근처에 있는 마을로 달려왔다.

"아까 그 젊은이 말이지? 어디 피난 가는 거 같던데. 이것저것 담는 거 보니까 말이야."

"피… 피난요?"

좁은 마을이라 그런지 백운을 본 사람은 여기저기에 많이 있었다.

그리고 목격자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이연화의 머릿속엔 불안감이 가득해졌다.

'대체 뭘 하려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사실, 딱 한 군데.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어제 필로파포스의 언덕에서 보였던 것, 오늘 아침 백운과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절벽에서 정면으로 보였던 장소.

구름을 뚫고 한참을 솟아있는 하늘탑이었다.

'아니겠지?'

아무리 무모해도 설마 사람이 그런 짓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경고했었다.

배나 비행기도 사라지고 난파되어 사람들은 하늘탑의 근처도 안 간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 가이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좀 부자연스러웠다.

오늘도 가이드를 해주기로 하고 만난 건데 절벽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보내버리다니.

마치 무언가 일을 벌이기 전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돌려 보내버린 느낌이었다.

"혹시 다른 말은 없었나요?"

이연화의 질문에 잠시 턱을 문지르며 기억을 떠올리는 상인들.

"뭐라더라, 바다에 상어 있냐고 물어봤던 거 같은데."

"어! 맞아요! 저한테도 물어봤었어요. 그러면서 사람 무는 거 또 있냐고 그랬었네."

꼴깍.

이연화의 이마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항상 무엇을 생각하던 그 이상을 해버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백운은 왠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듯했다.

'미… 미쳤어!'

상인들에게 인사를 마친 이연화가 전화기를 집어 들어 김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김대혁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대혁의 목소리.

이연화가 김대혁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팀장님! 제가 찍어드리는 절벽으로 구조대 파견 부탁드려요!"

* * *

아따 높다.

고개를 들어 아직도 까마득한 탑을 바라봤다.

높은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기어오르니 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어오르고 기어올라도 끝이 안 보이는 하늘탑.

어떻게 만든 거지?

아닌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건가.

탑을 열심히 기어오르면서도 끊임없이 떠오른 의문이었다.

옛날부터 있었다는 걸 보면 몇백 년은 되었을 텐데.

지금 같이 능력이나 중장비도 없을 때면 대체 어떻게 이런 게 바다 한가운데 처박혀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흠… 뭐 됐고.

간식 타임 좀 가져볼까.

그나마 널찍한 곳으로 발을 디뎠다.

조금만 삐끗해도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위치.

힘들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서라도 떨어지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와삭!

음!

일부러 더 기운 나라고 아몬드가 박혀 있는 초코바를 구매해왔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초코의 달달함과 아몬드의 고소함이 입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등산을 가든 어디 오지 탐험을 가든 이 초코바만 두둑하게 준비되어 있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 보면… 괜한 걱정이었나.

구름 위에 아무것도 없겠지란 긍정적인 마음이었지만.

솔직히 걱정하고 있었다.

다른 곳은 맑은데도 하늘탑이 솟아있는 장소에만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이상 기후.

아니라서 다행이야.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주변에 구름을 만들어내는 데몬이 있었다.

거대한 독수리과 데몬으로 천둥새라고도 불리는 세만트라였다.

처음엔 전설이 진짜였다며 다들 놀랐었지.

데몬의 출현 전에도 천둥새라는 이름은 종종 들리던 것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검은새로 사람까지 아무렇지 않게 집어 간다고 알려진 녀석이었다.

물론 한 번도 촬영되거나 공식적으로 발견된 기록이 없어 다들 전설이라고만 여겼지만 말이다.

- 천둥새… 아니, 세만트라는 구름을 몰고 다닙니다. 전설에서의 천둥새처럼 번개를 몰고 다니진 않지만요.

번개까지 몰고 다니면 사기지.

그게 어딜 봐서 새야, 제우스지.

입에 든 초코바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아니겠지…? 

세만트라 너 여기 없지…?

계속 아니겠지라 생각하면서도 인위적인 구름을 보고 있으니 불안감이 몰려왔다.

번개는 몰고 다니지 않지만, 세만트라가 널리 알려진 이유는 천둥새를 닮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친 듯한 비행 속도.

- 공중에서 세만트라를 만나면 재앙을 마주했다고 봐야 합니다.

과거 동영상에서 봤던 헌터가 한 말이었다.

공중전에 특화된 헌터들이 열댓 명 모여서야 간신히 잡아냈던 세만트라.

헌터들이 가장 많은 애를 먹었던 것이 바로 속도였다.

- 순간이동… 까지는 아니지만, 세만트라는 하늘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입니다. 저희는 그나마 층고가 제한된 장소로 끌어들여 간신히 잡을 수 있었죠.

꼴깍.

나도 모르게 삼켜지는 침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참, 겁이 많아졌나.

세만트라의 시옷도 안 보이는데 뭔 걱정이야.

불길한 생각을 잊고자 다시 벽으로 달라붙었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올라갈 생각이었다.

자 가볼….

살랑.

…?

올라가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위에서부터 살랑거리며 떨어진 몸통만 한 깃털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머… 머고.

청록색의 불길한 깃털 색깔.

동영상에서 봤던 세만트라의 색이었다.

아… 아니잖아.

펄럭!

내 부정을 듣기라도 한 걸까.

귓가로 무언가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 시발.

잠시 후 머리맡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풍압까지.

펄럭!!

그렇게 펄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쟈스.

그곳엔 청록색의 깃털로 온몸을 감싼, 비행기보다 빠른 비행속도를 가졌다는 거대 독수리 데몬.

세만트라가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102화. 몹시 큰 새

펄럭… 펄럭.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구름 속에서 거대한 게 나오는가 싶더니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세만트라.

마가 꼈나.

구름에서 튀어나온 게 세만트라인 걸 확인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구름을 보면서도 아니겠지라고 현실부정 하긴 했지만, 만에 하나 세만트라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염두해두고는 있었다.

어떡하지.

염두해뒀지만 아니길 애타게 바랐던 이유는 간단했다.

아주 작은 확률이 아니라 90%의 확률로 세만트라가 있다 한들 딱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카로스의 날개를 찾으러 그리스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 일단 가자.

그렇기에 세만트라의 가능성을 열심히 부정하며 바다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현실부정 하는 거 보면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쩔 수 없으니 나도 하게 되는구만.

눈앞에 있는 세만트라를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떡해! 방법이 없는데.

솟아있는 하늘탑과 그 탑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불과 오늘 아침이었다.

어제 필로파포스의 언덕에서만 해도 날씨가 우중충했었다.

그렇다 보니 그냥 구름이 낀 날씨라 그러려니 했을 뿐, 여기만 구름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었다.

연화도 아직 세만트라의 존재를 모르는 모양이네.

알았으면 어제 언덕에서 말해줬을 텐데.

세만트라가 잡혔다는 영상을 본 건 회귀 전이었다.

지금까지는 발견된 적이 없어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저 옛날부터 위험한 장소라고 여겼으니 다가갈 일도 없었을 터.

이연화도 설마 내가 헤엄쳐서 여기를 기어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만트라가 있는 줄 알았으면 쿄스케라도 부탁해서 데려왔을 텐데.

언력을 사용하는 쿄스케.

쿄스케의 떨어지라는 언력이 담긴 말 한마디면 세만트라 따위는 당장 바다로 다이빙했을 것이다.

하지만, 쿄스케는 지금 여기에 없다.

공중전 수단이라고는 수리검밖에 없는, 그마저도 잔뜩 끼어있는 구름 때문에 여의치 않은 뚜벅초 하나가 벽에 달라붙어 있는 게 현실이었다.

혹시 날 못 보진 않았을까.

작은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어째선지 그 자리를 지킨 채 가만히 있는 세만트라.

조심스럽게 세만트라의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빠안.

아니네.

말이 통한 건 아니지만, 날 발견하지 못했을 거란 불씨는 사그라들었다.

아주 정확히 날 내려다보고 있는 세만트라.

마치 집에서 누워있던 중 지나가는 돈벌레를 본 나의 눈빛 같았다.

건방진 새끼!

라는 생각에 냅다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수그려야 할 때였다.

발조차 제대로 딛기 힘든 암벽.

이곳에 매달려 세만트라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를 자극해선 안돼.

아주 미세한 움직임으로 손을 슬쩍 뻗었다.

만약 나란 존재가 세만트라에게 있어 돈벌레 같은 존재라면.

어쩌면 그냥 봐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천한 벌레를 굳이 움직여가며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지나가는 돈벌레를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귀찮으니까.

저 돈벌레 하나 잡자고 포근하게 뉘어져 있는 내 몸을 일으켜 휴지를 뜯고 쫓는 건 몹시 낭비라고 할 수 있었다.

난 벌레다.

난 딱정벌레야.

스스로 되뇌이며 슬금슬금 위를 향해 나아갔다.

"…."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는 세만트라.

좋아, 그렇게 가만히 있어.

생각이 적중한 것 같았다.

인간과 새라는 차이는 있지만 작디작은 존재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별 다를 바 없는 듯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투둑!

….

다음 손을 짚은 암벽이 무너지며 돌 부스러기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재빨리 다른 위치를 잡았기에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꼴깍.

펄러억…!!

문제는 미묘하지만 달라진 세만트라의 날갯짓이었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풍압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상황.

슬쩍.

긴장된 순간에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자.

시발.

"끼르르르르륵!!!"

세만트라가 엄청난 소리를 지르며 활강을 시작했다.

* * *

"끼륵!"

내 등을 스치고 지나간 세만트라가 다시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발톱과 부리를 들이대다 반응을 할라치면 구름 속으로 쏙 사라져버리고 있는 세만트라.

그 틈에 위로 올라가려 하면 귀신같이 놓치지 않고 세만트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존나 얄밉네.

세만트라의 행동에 대한 한 줄 평이었다.

일단 던지고 보잔 마음에 수리검을 날렸지만.

- 휘익!

영상에 나왔던 헌터의 말대로 하늘에서의 세만트라는 더럽게 빨랐다.

거기다 구름까지 있어 눈 깜짝하는 사이 모습이 사라져버리기까지.

구름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곤 세만트라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킹냥이의 눈도 발동 안 하고.

정혁과의 싸움에서 환각이 들어오자 자동으로 발동되었던 페샨의 눈.

예상은 했지만 환각이 아닌 찐구름까지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쐐에에엑!!

[잭 더 리퍼]

대각선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면도칼을 꺼내 들었다.

부리를 들이대는 순간 눈을 그어줄 생각이었다.

꿀렁!

온다.

구름에 비치는 그림자에 면도칼을 들어 올렸다.

….

면도칼을 들기 무섭게 사라져버린 그림자.

"끼룩!"

사라졌던 세만트라가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거대한 부리를 앞세워 돌진하는 세만트라.

오냐, 뒤졌다 넌.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오른손을 비늘로 덮으며 다가오는 세만트라를 응시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상승 속도였다.

저 속도로 부리가 닿는다면 엉덩이가 조금 뚫리는 걸 넘어 파열 확정이었다.

얍삽한 새끼니까 최대한 마지막까지 숨긴다.

비늘이 둘러싼 팔을 숨긴 채 세만트라를 기다렸다.

"끼루루루루!!"

반드시 내 엉덩이를 뚫겠다는 녀석의 울음이 들려왔다.

와라 새 새끼야.

거대한 부리 끝이 내 발끝 쯤에 도달한 순간.

내 엉덩이는 이 새끼야.

몸을 빙글 돌려 아래를 향해 의태된 오른손을 뻗었다.

아무나 뚫을 수 없단 말이다!

후우우우웅..!

이건 맞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면 이 정도 속도를 뒤집고 방향을 트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아아앙!!

하지만, 들려온 건 무언가에 부딪힌 타격음이 아닌 허공의 공기가 찢어지는 파열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회피를 시전하는 세만트라.

찰나의 차이로 유탈라스의 주먹이 세만트라를 비껴갔다.

와 시발! 이걸 피한다고?

빗맞았다는 아쉬움보단 놀라움이 더 컸다.

공중에서 빠르다 빠르다 하길래 얼마나 빠른지 궁금했었는데.

예상을 아득히 넘어가버리는 속도와 회피 능력이었다.

펄럭!!

그렇게 구름 속으로 사라지나 싶더니.

수십 개의 깃털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말이 깃털이지 하나하나가 내 몸과 비슷한 크기였다.

맞으면 꼬챙이다.

[유탈라스 - 2단계 의태]

용의 숨결.

팅팅팅!

몸 주변을 감싼 비늘에 의해 튕겨 나가버리는 세만트라의 깃털들.

호다닥.

유탈라스의 비늘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지금이라면 세만트라가 와서 치든 말든 다칠 일은 없었다.

바로 위가 하늘탑의 꼭대기이길 바라며 사족보행으로 빠르게 암벽을 기어올랐다.

꼭대기만 가면 된다.

공중에선 물 만난 물고기처럼 미쳐 날뛰는 세만트라였지만.

내게도 정상적으로 발 디딜 곳이 주어진다면 문제 될 건 없었다.

꼭대기 도착하기만 하면 스이카로 죽여버린다, 이 새 새끼!

세만트라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스이카의 발도 속도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발 디딜 곳만 충분하다면 몇 번이든지 발도를 뿌려낼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는 일.

쾅. 쾅. 쾅. 쾅.

올라가는데에 혈안이 되어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아무 반응도 않자 신나게 날아들어 날 공격하고 있는 세만트라.

유탈라스의 비늘이 모든 데미지를 받아주고 있었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진짜 조패버리고 싶네.

얍실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세만트라의 공격은 야비 그 자체였다.

등을 돌린 채 위를 바라보며 기어 올라가고 있음에도 한 번 공격 후엔 반드시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는 녀석.

"너 그러다 뺨 처맞어 이 새끼야!!"

오락실 격투 게임에서 동네 형을 상대로 얍삽이 약발만 갈겨대는 느낌이었다.

뺨을 처맞았어도 열 대는 처맞았을 행동.

스르르.

이런.

덕분에 꽤 올라온 듯했지만.

유탈라스의 사용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왜 끝이 안 보이는 거냐구!

최선을 다해 오르고 있는 상태.

바퀴벌레가 와도 울고 갈 정도의 사족보행 속도였다.

그럼에도 어찌나 높은 건지 하늘탑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쐐에에에에…!

다시 등을 후리기 위해 오른쪽에서 날아드는 세만트라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구름에 가려져 완벽하게 보이진 않지만 크기가 큰 만큼 그에 맞는 엄청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비늘이 사라지기 전에 한 방 더 먹여보자.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그냥 오른쪽으로 접근하는 순간 팔을 휘둘러 냅다 후려쳐버릴 생각이었다.

내가 계속 맞아주고 있으니 방심했겠지, 새대가리 쉨.

마음속으로 초를 세며 세만트라를 기다렸다.

하나… 둘.

쐐에… 서이!!

펄럭!!!

이번에도 반응을 해버리는 세만트라.

저런 개.

세만트라가 뛰어난 건 비행속도뿐만이 아니었다.

날개를 이용한 엄청난 반응속도까지.

내 팔이 움직이려는 찰나 세만트라가 먼저 강한 날갯짓을 하며 방향을 틀어버렸다.

이건 내가 날개라도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이다.

애초에 암벽에 매달려 저런 속도로 움직이는 새를 때린다는 건 불가능이었다.

얻어걸리길 바라며 계속 휘둘러봤는데도 마치 장난감 다루듯 가볍게 피해버리는 세만트라.

존나 약 오르네.

아직 공격당해 상처 입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기고 있었다.

겨우 새대가리 따위가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날 농락하다니.

근데 이 새끼는 어디 갔어.

마지막 공격 이후로 사라져버린 새 새끼.

어디로 간 건지 날갯짓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안 오니까 더 불안하네.

밉다가도 안 보이면 보고 싶다고 했던가.

불안한 마음에 한참을 모습을 안 보이는 세만트라가 보고 싶어졌다.

투둑.

응…?

투두둑. 투둑.

머리 위에서 돌부스러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이 시발놈이 설마…?

거울이 없어 내 눈을 보진 못하지만.

아마 동공 지진이 났을 터였다.

쿠르르릉…!!

잡고 있는 암벽으로 강한 진동이 전해졌다.

콰아아아아!!

진동이 점점 심해지는가 싶더니 위에서부터 암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게 휘두르는 공격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일까.

얍삽의 끝판왕 세만트라는 나에게 접근해 직접 공격하기보단 내가 잡을 수 있는 벽을 부수기로 한 것이었다.

이 시발!

여파가 점점 심해져서인지 손으로 잡고 있던 부분까지 무너져 내려버리는 암벽.

탓!

떨어지는 암벽을 딛고 위로 몸을 날렸다.

벽돌들을 발판 삼아 올라갈 생각이었다.

"끼루루루!"

쐐에에에에에!

승리를 확신한 건지 돌진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박살내려 면도칼을 준비했지만.

…!

날아온 건 세만트라가 아니었다.

무더기로 날아든 거대한 깃털들.

시… 시발.

발을 딛고 잡고 있던 균형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몸으로 날아오는 건 전부 쳐냈지만, 발을 딛고 있던 벽돌까지는 지켜내지 못했다.

돌을 부숴버리며 딛고 있던 발판을 없애버리는 세만트라의 깃털들.

실로 얍삽하고도 더러운 플레이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새 새끼가!!!"

발판이 무너지기 무섭게 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깃털을 날려 부숴버리는 새 쉨.

"맞서 싸워!! 새끼야! 맞서 싸우라고! 이 새년아!!"

약이 오를 대로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앤 보니&메리 리드]

두두두두두두두!!

기어 올라가느라 사용하지 못했던 리볼버를 꺼내 들어 위를 향해 난사해버렸다.

어차피 맞지 않을 건 알았지만, 얍삽한 세만트라에 너무 약이 올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 새끼야!! 금방 돌아온다아아아아아!!"

103화. 바다 밑에는 뭐가 있을까

부우우우웅!

여러 대의 보트가 바다 한가운데에 솟아있는 하늘탑으로 내달렸다.

맨 앞의 보트에 서 있는 김대혁이 이연화를 바라봤다.

"백운 님이 저곳으로 갔다고?"

"네….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맞는 거 같아요."

"이런."

김대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백운이 간 하늘탑은 아테네에서도 사고가 유독 많이 나는 장소였다.

- 다 겁주려는 거라고요!

아무리 말려도 모험심에 하늘탑으로 향했던 이들은 전부 돌아오지 못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던 헬기를 타고 가던 마찬가지였다.

전부 단숨에 추락했고 바다에 있는 데몬들에 의해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가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하늘탑 아래의 바다엔 유독 많은 데몬들이 살고 있었다.

구름 위에도 확인한 적은 없어도 분명 접근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굳이 안 가면 만날 일도 없으니 출입 금지를 시킨 건데.'

- 강하면서도… 특이한 사람이에요.

김희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좀 별나다는 건 김대혁 역시 잠깐 만나서 어느 정도 눈치챘지만.

이건 별난 걸 넘어서는 것 같았다.

'대체 뭐하러 저길 간 거지? 모험심인가?'

이해할 수 없는 백운의 행동에 김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티… 팀장님!"

이연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무언가를 발견하고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가는 구조대의 보트들.

"…!!"

보트에 타고 있던 모든 이들이 눈을 의심했다.

수십…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데몬들의 시체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뭐… 뭐야 저 샤킨은?"

흰수염고래만 한 샤킨의 크기에 보트에 타고 있던 헌터들이 혀를 내둘렀다.

바다 한가운데서 저런 걸 만난다면 웬만한 화력이 받쳐주지 않는 이상 죽었다 봐야 했다.

"허."

김대혁도 탄성을 내뱉었다.

"뭐야 저 상처는."

대게 대사관에서 일을 하면 평화로울 거라 생각하지만, 김대혁은 아니었다.

한국에 비해 데몬을 대비한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던 그리스.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김대혁이 한 일은 데몬 사냥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데몬을 잡았던 김대혁이기에 헌터 중에서도 꽤 많은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무슨…!'

그런 김대혁조차 입을 벌리게 만드는 상처였다.

'한… 방.'

거대한 샤킨을 죽인 건 단 한 방의 공격이었다.

"미사일이라도 터뜨린 건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대혁이 고개를 저었다.

미사일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거대한 샤킨의 가죽을 뚫을 만큼 엄청난 괴력에 의한 상처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데몬이 한 마리도 없었던 이유가 이거였군요."

이연화도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흩어져 있는 데몬들의 사체를 바라봤다.

이곳은 근처만 와도 하늘과 바다 아래서 데몬들이 달려드는 장소였다.

그런 장소로 달려오면서까지 데몬을 단 한 차례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

어째서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는데 눈앞의 사체들을 보니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팀장님 저 가장 높은 지형 좀 보세요!"

부하 헌터의 말에 김대혁이 고개를 들었다.

왠지 모르게 여기저기가 박살 나 있는 암벽.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분명 무슨 일이 나도 난 상태였다.

'백운 님.'

김대혁의 얼굴엔 조금 전과는 다른 빛이 어려 있었다.

순수한 걱정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걱정과 한데 뒤섞인 호기심의 빛이 말이다.

* * *

어떡하지.

꼬르륵.

점점 멀어지는 수면을 보며 턱을 문질렀다.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엄청난 강풍을 일으켜 날 날려 보낸 세만트라 놈.

그 덕에 엄청난 속도로 바다에 처박혀 이렇게 끝도 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생각 좀 해보자.

물론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완벽한 다이빙 폼을 취했기에 데미지는 전혀 없었다.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언제든 나갈 수 있는 상태.

하지만, 시원한 바닷물과 함께라면 무언가 더 좋은 생각이 날 것도 같았기에 일부러 가라앉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저 새끼를 조질 수 있을까.

덩치는 더럽게 크지만 공격이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유탈라스의 비늘이 없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수준.

문제는 하늘에서의 미친 듯한 기동력이었다.

이건 뭐 때릴 수가 있어야지.

빠르기만 하면 어떻게든 낚아볼 테지만, 조금 전 세만트라가 보여준 순간 회피 기동은 엄청났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말도 안 되는 탄력과 방향 전환.

바로 앞에서 리볼버를 갈겨도 금세 피해낼 녀석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암벽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게 문제야.

구름 때문에 수리검을 쓸 수 없으니 떨어지는 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올라가도 결과는 똑같을 거 같은데.

구름에서 벗어난 순간 수리검을 던져 다시 암벽에 달라붙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다시 올라가 봐야 결과가 똑같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날 수만 있으면.

아무리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봐도 묘책이 떠오르질 않았다.

암벽에 달라붙어야 하는 한계를 먼저 해결하지 않는 이상, 잔머리까지 굴리며 얍삽한 공격을 하는 세만트라를 잡는 건 힘들어 보였다.

희망은 날개다.

날개인데… 날개가 있을 걸로 추정되는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가 없으니.

흐으으음.

쉽게 풀리지 않는 고민에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통!

…?

그 상태로 얼마나 가라앉았을까.

바닥을 향하고 있던 뒤통수가 무언가에 닿으며 튕겨 나왔다.

뭐야.

퍽! 이었으면 차라리 이해가 갔을 것이다.

그렇게 얕을 리는 없지만 바다의 바닥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통이라니?

스윽.

몸을 돌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금 전 뒤통수가 부딪혔던 부근.

포잉.

포… 포잉!?

당황스러웠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마치 과일 푸딩을 만졌을 때와 똑같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탄력 좋은 푸딩 말이다.

뭐… 뭐야 시벌.

분명 눈으로 보이는 건 어두운 바다뿐이었다.

그럼에도 더 아래쪽으로의 진행을 막고 있는 무언가.

꾸욱.

손끝에 힘을 줘 푸딩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탄력이 강하긴 해도 꽉 막혀 있거나 한 느낌은 아니었다.

쏘오오옥.

!?

손을 시작으로 팔이 들어가나 싶더니 순식간에 몸이 빨려 들어갔다.

잘… 잘하는 짓인가!?

괜히 건드렸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기도 전.

쑤욱… 쿵!

억.

푸딩에서 빠져나와 어딘가로 떨어졌다.

꼬리뼈부터 제대로 떨어져서인지 엉덩이가 몹시 아렸다.

…?

슥슥 엉덩이를 문지른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있던 곳은 바닷속이었다.

어디로 떨어질 일도, 떨어졌다고 엉덩이가 아파서도 안 됐다.

"뭐… 뭐냐."

육성으로 뭐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분명 바다였지만.

지금 내가 떨어져 있는 곳은 딱딱한 지반 위였다.

"스으읍."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바닷속으로 한참 들어왔을 텐데도 코를 통해 들어오고 있는 건 분명 공기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몸을 일으켜 내가 떨어져 있는 장소를 살폈다.

벽면은 바닷물과 같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느낌을 주는 푸른색.

바다 밑에 있는 동굴이라니.

볼을 꼬집으며 걸음을 옮겼다.

개방 이후에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

슥.

손을 올려 액션 캠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 살폈다.

처음 절벽에서 바다로 다이빙했을 때부터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캠.

웬만한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고 오랜 시간을 촬영하는 캠은 비싼 돈을 주고 산 보람이 있었다.

겁나 이쁘네.

영롱한 바다색의 벽면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에 홀리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딱딱한 벽이 아닌 바닷물이라 그런지 아래가 그대로 다 비치고 있었다.

모험가 헌터들이 좋아하겠네.

능력과 데몬의 출몰 이후 하던 일을 때려치고 모험을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세간에서는 21세기의 모험가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모험가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간단했다.

데몬으로 인해 구성된 특이 장소를 발견해 소개하는 것이었다.

데몬마다 둥지나 던전을 꾸리는 특성이 있는 놈들이 있으니까.

동물과 다름없이 대충 아무렇게나 꾸리는 놈들도 있었지만.

눈으로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게끔 아름답고 체계적이게 던전을 만드는 녀석들도 있었다.

모험가들의 찾으려 하는 곳은 사람들이 봤을 때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장소였다.

그래야만 조회수가 폭발하며 많은 돈을 쓸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부자 되는 건가.

회귀 전에 자주 봤었다.

유물관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운명이 씁쓸해 그런 영상을 보면서라도 대리 만족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 예쁜 곳은 손에 꼽았던 거 같은데.

"후후후후."

스멀스멀 밀려드는 기대감에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울리는 걸 보니 꽤 깊이가 있는 동굴 비슷한 장소인 듯했다.

설마… 미론가.

조금 걷자 눈앞으로 갈라진 길이 나타났다.

흠.

갈림길에 서 턱을 문질렀다.

산소도 충분하니 급할 건 없고.

슥.

몸을 돌려 오른쪽 길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고민해봐야 모를 게 분명한 갈림길.

이쪽이 아니라면 다시 돌아와서 왼쪽으로 가볼 요량이었다.

일단 드가자.

* * *

다 부술까?

얼마나 걸었을까.

처음엔 여유롭게 마음을 먹었지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걸으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쯧.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장소였다.

그런 만큼 행동 역시 조심스러워질 수 없는 상황.

괜히 충격을 줬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말짱 꽝이었다.

왔던 곳인가 아닌가.

가만히 보고 있기엔 몹시 아름다운 바다색의 벽면이었지만.

조금 걷다 보니 참 개같은 벽이었다.

어디로 가든 다 비슷비슷해 길을 구분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터벅 터벅.

처음보단 잔뜩 힘이 빠진 걸음걸이.

한동안 잘 풀리나 싶더니.

굿이라도 한 번 해야…,

반짝.

해야…?

무심코 지나치려는 찰나.

시야의 구석 21시 방향에서 찰나지만 무언가 빛이 난 것 같았다.

저벅.

그 자세 그대로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제발!

잘못 본 게 아니길 빌며 몸을 쓱 기울였다.

홀리…!

슥슥.

빠르게 눈을 비벼봤지만.

헛것이 아니었다.

보라돌이도 아니고.

금돌이라니.

거의 2년하고도 5개월 만에 보는 황금빛에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선명한 황금빛을 뿌리고 있는 게 이카로스의 날개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신은 날 버리지 않았어!

믿는 종교는 없었지만 확신이 들었다.

하늘탑을 향하며 만났던 샤킨과 갈매기 쉨들.

거기다 올라가는 걸 필사적으로 방해하는, 방해도 아주 재수없게 약 올리며 해댄 세마트라까지.

모두 한 방 금돌이를 위한 시련이었구나!

저벅.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황금빛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일단 뭐가 됐든 무기고에 넣을 수 있으니 기뻤지만.

조금만 더 욕심을 내고 싶었다.

제발.

저벅.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속 바람은 커져갔다.

새 주제 날 농락했던 세마트라.

당장에라도 그 새 새끼를 바다 깊숙이 처박아 넣고 싶었다.

제발.

날개여라!!

104화. 동굴 속에는

빛을 따라 도달한 곳은 작은 공간이었다. 

넓은 동굴이 집이라 치면 이곳은 구석탱이에 위치한 아담한 방 같은 느낌.

그리고.

"…."

그 방은 비어있지 않았다.

바닷속에 위치한 동굴이었고 그 동굴 안에서도 복잡한 길을 따라 도달한 장소였다.

당연히 황금빛을 뿜고 있는 무기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을거라 생각했었다.

응…?

이런 내 예상과 달리,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던 방 안에는 여자 한 명이 홀로 앉아있었다.

아무리 많이 쳐도 나와 나이가 크게 차이 날 것 같지 않은 생김새였다.

한국인은… 아니고.

바닥까지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뜨린 긴 갈색 머리.

그리고 머리색에 어울리는 찐하디찐한 갈색 눈동자까지.

귀신은 아니겠지.

피부가 하얀 정도가 아니었다.

무서운 거라도 본 것처럼 허옇다 못해 창백한 색깔의 얼굴.

누구냐고 물어봐야 되나.

마찬가지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어떤 첫마디를 건네야 할지 고민되었다.

누군가는 굳이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거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말을 안 걸래야 안 걸 수가 없었다.

금돌이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말을 안 걸어.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누군가의 유골이었다.

그리고 그 유골은 여자의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여자와 사연이 있을 듯한 유골이었기에 함부로 다가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유골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황금빛과 공명 한다고 해서 다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무기의 일부나 그 자체가 아닌 이상 공명을 한 이후엔 빛만 사라질 뿐 여전히 실존했다.

잠시 유골을 좀 만져봐도 될까요?

간단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후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무기인지는 감도 안 오지만 만약 저 유골 자체가 무기라면?

난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유골을 훔쳐가 버린 안면수심 강도 새끼가 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네요."

"!!"

뭐… 뭐지?

가만히 있는 내가 답답해서일까.

먼저 입을 연 여자는 뜻밖의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라니?

잊힌 기억 속에서 날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 걸까?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외모인데 난 어째서 잊어버리고 만 걸까.

설마 카이안과 연관이 있는 인물!?

꼴깍.

"저… 절 아시나요?"

묘한 기대감을 안고 조심스럽게 되묻자 여자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람이 오랜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아.

머릿속에서 돌아가던 갖가지 시뮬레이션을 종료시켰다.

더 이상 돌리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거 참, 사람 헷갈리게 말을 하시네!

라고 속으로 약간의 불만을 표출한 후.

철푸덕.

난 당신을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표시로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 것이니 경계할 필요가 없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름이 뭔가요?"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 여자한테선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외딴 바다 밑 동굴에서 만나서가 아닌, 무언가 다른 차원의 사람인 듯한 느낌이었다.

"백운입니다."

"전 미네라고 해요."

뭔가 더 엄청난 이름이 튀어나올까 바짝 쫄아 있었는데. 

생각보다 사람 냄새나는 이름이라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여기에는 왜… 계시는 건가요?"

미네가 있는 곳에 멋대로 쳐들어온 건 나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나와 비슷한 또래인 미네가 이곳에서 누군가의 유골과 함께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왜… 라."

미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네요."

"죄… 죄송합니다."

초면부터 어려운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지내셨는지, 배는 안 고픈지, 배가 고프면 초코바가 있으니 드리겠다 등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 갔어야 하는데.

유물관에 박혀 있던 찐이 무얼 알겠는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건지,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제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도요."

"아… 그렇군요."

감도 안 잡히네.

무언가 알아들은 듯 답하긴 했지만, 사실 와닿지 않는 대답이었다.

달리 할 말이 없으니 일단 대답하고 본 것.

"어째서 여기에 온 건가요? 이곳은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독수리한테 공격당해서 추락한 후에 고민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왔습니다… 가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궁극적인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찾고 있는 게 있어서요."

"찾고 있는 게 이곳에 있나요?"

미네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을 뿜어내고 있는 저 유골이 무기로 날 인도해 주리라는 건 분명했다.

무슨 무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솔직히 날개는 아닐 거 같지만.

방에 들어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게 날개가 아닌 유골이란 걸 확인한 순간.

사실 마음속에선 이카로스의 날개에 대한 희망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대산이 발견해서 발표했던 건 분명 온전한 날개 형태였어.

좀 오래 되다 보니 날개의 형태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온전한 깃털들로 이루어진, 누가 봐도 날개라는 걸 인지할 수 있는 형태의 물건이었다.

방 안에는 날개 비슷한 것도 없으니.

좁은 방에 있는 건 미네와 유골뿐이었다.

더 찾아볼 것도 없을 정도로 깔끔 그 자체인 방.

그래도 뭐… 무기는 무기니까.

꼭 날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찾았어야 할 무기 중 하나인 건 분명했기에.

아무 수확도 없는 것보단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그렇군요."

슥.

대답 후 잠시 날 바라보던 미네가 고개를 내려 유골을 응시했다.

"당신이 찾고 있는 건… 이 유골이군요."

"…!"

도착한 순간 내 눈에 쓰여진 탐욕을 읽은 건가?

단번에 알아챈 미네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곳에 와서 무언가를 잘못하거나 몹쓸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미네가 가지고 있는 유골을 원하고 있다는 게 어째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씀하신대로… 유골이 뿜어내고 있는 빛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미네에게 내게 보이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유골이 목적이라기보단, 유골이 뿜어내고 있는 빛을 통해 찾고 있는 걸 손에 넣을 수 있거든요."

"신기한 능력이네요."

신기하다며 미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묘하게 맑네.

미네의 표정을 굳이 표현하자면 무표정이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해탈을 해버린 듯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

그럼에도 살짝살짝 짓는 미소에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맑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사락.

유골 위에서 손을 뗀 미네가 내 눈을 응시했다.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

마치 이리 와서 찾고 있는 걸 가져가라는 듯한 뉘앙스였다.

자신이 품고 있는 유골을 개인적인 목적과 욕심을 위해 가져간다고 말했음에도 화내긴커녕 오히려 다가오라고 말하는 미네.

너무 뜻밖의 반응이라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제가 손을 대면 유골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이건 저도 지금 당장은 알 수 없고요."

"괜찮습니다."

표정의 미동조차 없이 쿨한 대답을 하는 미네.

조금 마음이 찜찜하긴 하지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미네에게 걸어갔다.

안된다고 하면 미네가 허락할 때까지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 다방면으로 길을 찾으려 노력은 할 테지만 말이다.

"당신은 이 유골을 통해 무얼 얻고자 하는 건가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의 다가갔을 때.

묘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기를 찾고자 합니다. 물론 제가 처음에 이곳에서 찾으려 했던 건 누군가의 날개지만요."

"…!"

어떤 단어 때문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순간 미네의 눈이 커졌다.

"날개… 그 누군가의 이름은요?"

살짝 머리를 긁적였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했던 인물이었다.

실제로 존재했을지 안 했을지 알 수 없는 인물.

이곳이 바다 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 아니었다면 다른 이름을 둘러댔겠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그대로 말해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이카로스입니다."

"…."

이번엔 확실히 보였다.

미네의 눈동자는 대충 봐도 보일 정도로 확실히 흔들리고 있었다.

꿀꺽.

잠시 미네의 반응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제대로 찾아왔나요?"

대산이 발표했던 날개가 아니었기에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던 찰나였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네의 반응이 사라져 가던 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었다.

"빛에 손을 대면 고유 공간으로 들어간다고 하셨었죠."

조금 전에 했던 내 설명이 떠오른 건지 미네가 공명에 대해 물어왔다.

"네."

미네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간에는 누가 있나요?"

"보통 제가 공명한 것과 가장 연관이 깊은 사람, 즉 무기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외가 있을 수도 있지만요."

수리검의 경우엔 도윤의 영혼이 이미 사라져 만나지 못했었다.

이 밖에도 내가 무기고에 담은 무기는 극히 소수였기에 또 다른 케이스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싱긋.

내 대답을 들은 미네의 얼굴로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스륵.

…!

미네가 손을 뻗었다.

차렷 자세로 마지막 허락을 기다리던 내 손에 포개어진 미네의 손.

미네가 천천히 내 손을 이끌기 시작했다.

"혹시 그곳에서 그를 만나거든."

속삭이는 듯한 미네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마지막 미네의 목소리를 끝으로.

내 손이 빛에 도달했다.

* * *

찰나지만 사라졌던 오감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보통 공간엔 무기의 주인 한 명만이 있었는데.

어째서 이런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걸까.

화악.

빛이 번지며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날 둘러싸고 말을 주고받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굳어 있거나 찡그려져 있었다.

내가 그렇게 못생기진 않았는데.

길 가다 번호가 따이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혐오 어린 시선을 받은 적도 없었다.

눈 뜨자마자 저런 한결같은 얼굴들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저주받은 아이에요."

"어떻게 하죠?"

"당장 죽여야 합니다. 분명 재앙을 몰고 올 거예요."

뭐…뭐요?

이 양반들이 미쳤나.

혐오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까지는 오케이였다.

사람마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기준이 있으니 욕을 갈기는 것까지도 인정.

하지만 죽인다니?

이건 아무리 그래도 선을 넘는 언행이었다.

일단 일어나자.

일어나서 저 사람들을 두들길 생각은 없었지만.

계속 이 상태로 누워있을 순 없었다.

….

웅…?

분명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뭐 때문인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머리로만 지시를 내릴 뿐 명령을 이행해야 하는 몸이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슥.

!?

왜 안 움직이지 궁금하던 찰나.

몸이 저절로 일으켜지며 시야가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호… 홀리.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내 지시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

여… 여기가 어데고!!

내 몸이 아니었다.

105화. 저주받은 아이

이제 조금 적응이 되네.

새로운 형태의 공명이었다.

단순히 다른 이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 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 버리는 방식.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지금은 처음에 눈을 떴을 때보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설마 바둥거리는 아이 시절부터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건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어느 시점이 되면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다 시간이 후루룩 점프를 뛰었다.

저벅.

그 덕에 내가 들어와 있는 몸의 주인은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청소년이 되어있었다.

물론… 여전하지만.

초반에 봤던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매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것들은 여전했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해지지는 않았다.

옛날이라고 더 정겹고 그렇진 않았네.

- 차라카! 저기로 돌아가거라!

- 어딜 저주받은 게 길을 활보해!

내가 들어와 있는 몸은 차라카라 불리는 소년의 몸이었다.

모두가 저주받았다며 태어나자마자 죽이냐 살리냐 했던 차라카.

차라카는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했다.

그저 근근하게 마을에서 건네는 식량을 받아먹으며 목숨을 보존할 뿐이었다.

내가 듣는 것도 아닌데 참… 기분 더럽다.

몸에서 공명 중이어서일까.

차라카의 감정이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처음 사람들의 반응을 봤을 때 차라카는 의아했었다.

어째서 나한테?

라는 듯한 감정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차라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태어나 눈을 떴을 뿐인데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비난과 혐오가 시작됐다.

지금이었으면 그냥 문신이 화려하네 했을 텐데.

이 시대에는 아니었구만.

차라카가 저주받았다는 소리를 듣는 건 몸에 새겨진 문양들 때문이었다.

배꼽을 중심으로 몸 전체로 뻗어 나가 있는 검은색 줄기들.

마치 칠흑의 나무가 몸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감도 안 잡히네.

차라카가 이카로슨가?

몸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지금의 공명이 납득 되지 않았다.

공명을 시작하기 전 미네의 반응을 보며 유골이 이카로스와 연관되었을 거란 희망을 불태웠었다.

하지만 정작 들어온 건 차라카라는 소년의 몸.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자.

만약 차라카가 이카로스라면.

대산이 가져와 발표했던 날개는 이카로스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무기인 날개 본체가 존재했다면 유골에선 황금빛이 아니라 보랏빛이 뿜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카로스의 날개는 그 꼭대기보단 바다 아래에 있는 게 말이 돼.

대산에서 줬던 보고서의 정보 때문에 당연히 하늘탑의 꼭대기에 날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카로스가 태양 가까이 날다 바다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봤을 땐 하늘탑보단 바다 아래에 날개가 있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구전되며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결국 조금 더 지켜봐야 하나.

아직 확실한 건 없었다.

차라카가 이카로스인지, 이카로스이더라도 내가 얻을 수 있는 무기가 정말 날개인지, 아직까지는 모든 것들이 오리무중이었다.

저벅.

응?

한창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차라카가 지내는 장소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정확히는 아크로폴리스 양식의 도시에서는 조금 떨어진 절벽이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장소였다.

"…?"

발소리에 놀란 건 차라카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커져 가는 발소리에 차라카는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이들이 욕을 하거나 차라카를 해치려 했었기에.

누군가의 침투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슥.

!!!

가까워진 발소리와 함께 등장한 사람에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단 짧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갈색빛을 뿜어내고 있는 머리.

"안녕?"

바다 밑 동굴에서 만났던 미네가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이게 머선 일이고.

차라카가 사는 곳으로 찾아온 미네.

미네는 그 날 이후로 하루가 멀다하고 절벽으로 찾아와 차라카를 만났다.

"나 왔어."

오늘도 어김없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잔뜩 들고 미네가 찾아왔다.

"이카로스, 잘 잤어?"

그동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내가 들어와 있는 몸이 차라카이자 이카로스라는 것.

- 차라카라는 이름은 버려. 네 이름은 지금부터 이카로스야.

미네는 다짜고짜 찾아와 차라카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물론, 뜬금없는 작명에 나와 마찬가지로 차라카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그런 차라카를 바라보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던 미네.

- 차라카라는 이름은 저주를 받아들이는 자, 역병을 받아내는 자라는 의미야. 이름으로 할만한 게 아니거든.

미네가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준 이유였다.

이 쌍놈의 새끼들이 애 이름을 그딴 식으로 지어?

그동안 이유를 몰랐었는데 미네의 설명을 듣고 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혐오하고 매도하는 것만 해도 뺨따귀를 한 대씩 올려 쳐버리고 싶었는데, 이름까지 그딴 의미가 담긴 걸로 부르다니.

몹시 괘씸했다.

"응, 잘 잤어. 아테네는?"

그리고 또 다른 사실 하나.

이카로스를 찾아왔던 미네는 자신을 아테네라고 소개했다.

개놀랐지.

날아갈 몸이 없어서 망정이지.

소개를 듣는 순간 뒤로 튕겨나갈 뻔했다.

왜 몰랐지.

미네르바.

아테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네는 미네르바의 미네가 아닐까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아니지, 모르는 게 당연한 거지.

누가 미네라는 이름에서 아테네를 추측할 수 있겠어.

더군다나… 신화로만 듣던 아테네가 바다 밑 동굴에 있을 거라고 어떻게 생각했겠어!!

"당연히 잘 잤지."

아테네가 웃으며 이카로스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의 햇빛도 들지 않는 절벽 안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아테네의 갈색 눈동자만큼은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사실 이름을 듣기 전부터도 놀랐지.

아테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내 안의 놀람 지수는 꼭대기에 도달해버렸다.

유골 옆에 앉아 있던 미네와 완벽히 똑같은 모습.

쌍둥이를 넘어 분위기까지 완벽한 동일인이었다.

몇백 년 전일 텐데.

아니지, 몇천 년 전인가?

정확한 시기를 가늠할 순 없었지만.

어찌 됐든 엄청난 시간이 흘렀다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아테네는 내가 공명을 시작하기 전인 2021년까지도 유골과 함께 있었던 걸까.

"아테네, 오늘 의식은 끝났어?"

"응, 지금 막 끝내고 오는 길이야."

어느 정도 이카로스와 대화를 나눈 아테네는 스스로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줬었다.

- 난 이곳의 신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왔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테네의 이야기를 경청했었다.

당연히 그리스 로마 신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테네는 신이 아니라 평범한… 아니지, 능력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일반 아이와 다를 것 없었지만 신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아이.

"힘들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의식을 하잖아."

아테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처음엔 대체 왜 나인지, 어째서 매일 같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헷갈렸는데… 또 막상 의식을 하며 나에게 진심을 다해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이게 내 운명인가 싶기도 하거든."

"…."

이카로스가 옅게 웃고 있는 아테네를 응시했다.

막상 아테네가 마주 보고 있을 땐 눈을 돌렸지만.

다른 곳을 보고 있을라치면 이카로스는 아테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좋아하는구만.

이카로스의 안에 있기에 알 수 있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아테네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이카로스.

매일 지루해 죽을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아테네는 이카로스를 살게 하는 빛이었다.

어떻게 빛을 안 좋아할 수 있겠어.

킹정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아! 해 진 거 같은데? 나갈까?"

이카로스와 함께 아테네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드디어 나가겠구만.

이카로스의 몸은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태양 아래에 서면 타는 듯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던 것.

그렇기에 이카로스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건 해가 진 밤뿐이었다.

아테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카로스가 몸을 일으켜 절벽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그렇게 걸어 절벽의 공간에서 빠져나온 이카로스와 아테네.

선선한 밖의 밤공기가 두 사람을 반겼다.

상쾌하구만.

실제로 내가 갇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루종일 절벽에 처박혀 있다 나오는 지금은 나조차도 항상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조금 더 멀리 가볼까?"

"그러자, 오늘은 더 멀리, 더 높이 부탁합니다."

아테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카로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더 멀리, 더 높이.

아테네의 요청을 접수한 이카로스가 등 쪽으로 힘을 흘려보냈다.

스륵.

이카로스의 몸에 새겨져 있던 문양들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파악!!

등 뒤로 검은 연기로 된 날개가 펼쳐졌다.

이카로스의 날개.

처음 이카로스가 날개를 펼친 순간 확신이 들었었다.

이것이 내가 찾고 있던 이카로스의 날개라는 확신이.

꼬옥.

날개를 펼친 이카로스가 아테네를 들어 올렸다.

정확히는 안아 올렸다.

무슨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심쿵.

달달하네.

내 심장만 쿵쿵거리는 게 아니었다.

아테네를 안아 올린 이카로스의 심장 역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안겨 있는 아테네에게 들리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말이다.

화아악!

잠시 후, 두 사람의 밤 비행이 시작됐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시작으로 달이 떠 있는 하늘까지 높게 날아오르는 이카로스와 아테네.

그런 둘을 반기려는 건지 눈부신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시원하다.

얼굴로 밤하늘의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을 제외하곤 모든 게 멈춰버린 듯한 고요함.

지금 이 순간 하늘에 존재하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행복함.

하늘을 날고 있을 때 이카로스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테네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들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카로스.

그래서일까.

이카로스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아테네와 함께 하는 지금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기도하는 거겠지.

행복함을 느끼면서도, 이카로스는 쉼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아테네와 함께 고요한 하늘을 나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 * *

"여기다! 차라카 놈이 지내는 곳이다!"

이른 대낮.

밖이 소란스러웠다.

뭐야?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기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

그저 소란과 함께 밀려오고 있는 불안감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주받은 괴물을 끌어내라!"

뭐야, 이 병신들은.

마을 사람들이 우루루 절벽 내부 동굴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마다 하나씩 무기를 든 상태였다.

"네놈이 감히 신이 되어야 할 분과 만나!?"

"저주받은 존재 따위가 함께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잔뜩 상기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

"어젯밤 아테네 님과 하늘을 난 게 차라카, 네놈이 맞으렷다!"

누군가 어젯밤의 비행을 본 모양이었다.

"당장 이 자식을 끌어내!!"

그렇게 분노한 사람들이 이카로스에게 달려들었다.

퍽!

아니 이 새끼들이.

그냥 달려드는 게 아니었다.

들고 있는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두르는 사람들.

이카로스가 느끼고 있는 고통들이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이카로스의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 악마 새끼! 죽어!"

"처음부터 죽였어야 하는데!"

두근.

…!

이카로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몸으로 고통이 번질 때마다 빨라지고 있는 심장 박동.

잠시 후.

뚝.

참아 오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카로스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106화. 날개는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카로스의 몸에서 날개가 펼쳐지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튕겨 나갔고.

동시에 날개를 이루고 있는 검은 연기가 튕겨져 나간 사람들을 덮쳤다.

"끄으…!"

"쿨… 럭!"

묘한 감각이었다.

마치 날개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

날개는 이카로스의 감정에 반응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이 악마… 자식."

연기에 의해 어깨와 배가 꿰뚫린 주민들이 피를 흘려댔다.

이 광경을 본 몇몇 주민들은 겁에 질려 동굴을 뛰쳐나가 버린 상태.

날개에 덮쳐져 상처를 입은 사람들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공포에 벌벌 떨고 있었다.

"역시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는데…!"

죽어서도 주댕이만 떠오르겠네.

공포에 떨면서도 사람들은 입을 쉴새 없이 놀려댔다.

나 같았으면 그냥 주댕이 닫고 고개를 숙였을 거 같은데 용기 하나는 인정해줘야 할 것 같았다.

"…."

이카로스가 차가운 얼굴로 떠들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둘러봤다.

많이 참긴 했지.

갑자기 터진 게 아니었다.

그저 터질 때가 되어 터진 것이었다.

태어나서부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카로스를 몰아세웠던 마을 사람들.

이카로스의 마음은 의아함에서 슬픔, 슬픔에서 자기 혐오, 그리고 자기 혐오를 넘어 분노까지 이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아테네가 아니었으면 옛날에 터졌을 거고.

분노하던 이카로스를 멈춰 세운 것이 아테네의 등장이었다.

처음으로 외톨이었던 이카로스에게 따듯함을 알려줬던 아테네.

이런 아테네로 인해 끓어오르기 직전이던 이카로스의 분노는 잠시나마 사그라들 수 있었다.

"뻔뻔하구나, 너네 멋대로 아테네를 신으로 만들고 있으면서."

"…!!"

절벽의 공간으로 이카로스의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무리 비난받고 욕을 먹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카로스였다.

그런 이카로스에 마을 사람들도 놀란 모습이었다.

엔간히도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자신을 매도하는 것에 대한 분노는 줄어 들었지만.

이카로스는 아테네를 만나며 또 다른 분노에 눈을 뜨고 있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신으로 만들겠다며 아테네의 삶을 억압하고 희생시키려는 이기적인 인간들에 대한 분노.

오늘 터진 건 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는 분노였다.

"너 따위가 뭘 안다는 거냐! 이곳에는 신이 필요하다! 도시를 온갖 재앙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수호자가 말이다!"

아테네에게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아테네를 신으로 추앙하려는 이유.

그리스의 웬만한 도시에는 없지만, 유명한 곳에는 항상 수호신이 존재했다.

평소 내가 생각하는 그런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닌, 특수하고 맑은 힘을 가진 자를 도시 사람들이 신격화하여 신이라 모시고 있는 것이었다.

- 나도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도시에 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거 같아. 정작 신이라 추앙받는 나한테는 도시를 지키거나 할 만큼 강한 힘이 없는데 말이야.

아테네 스스로조차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단지, 태어나서부터 부모와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사명을 받았기에 그러려니 한다는 것뿐이었다.

- 어렸을 땐 섬에 홀로 갇혀 지냈어. 신의 힘이 형성될 때까지는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10년을 보내야 한다는 이유였어.

그렇게 외딴 섬에서 홀로 10년을 지내고 도시로 돌아왔다는 아테네.

이카로스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아테네의 얼굴엔 깊이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벅.

이카로스가 열심히 떠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섰다.

"!!"

날개를 이루고 있는 연기는 여전히 일렁이는 채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사람들의 목을 떨어뜨릴 것 같은 기세였다.

"너네들이 뭘 필요로 하든. 그게 진짜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카로스가 무서운 얼굴로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아테네를 계속해서 너네들의 입맛대로 부리겠다면."

사아아아!

날개를 이루고 있는 연기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만들어주마."

이게… 이카로스의 날개.

짙어진 건 날개의 연기뿐만이 아니었다.

늘어나는 연기와 비례하여 공간 전체에 퍼지는 싸늘함.

이카로스의 날개가 왜 무기인지 의아했었는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장면들이 그 의아함을 깨끗이 날려 보내고 있었다.

"으… 으…!"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아서일까.

직전까지 신나게 떠들던 이들이 입을 다문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항상 괴물이니 악마니 저주받은 인간이니 불렀었는데.

실제로 이카로스의 힘을 마주하니 공포에 집어 삼켜진 듯했다.

"…."

그런 인간들을 보던 이카로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죽…."

"이카로스! 안돼!!"

"…!"

이카로스가 날개를 휘두르기 직전.

절벽 안으로 아테네가 모습을 나타냈다.

다급하게 뛰어온 건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모습이었다.

"죽이면 안돼…. 이카로스."

* * *

아테네가 등장하며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분노했던 이카로스가 진정을 되찾으며 날개를 집어넣었고.

무작정 이카로스를 밖으로 끌어내려던 사람들 역시 물러났기 때문이다.

자박.

낮의 소란 이후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평소와 같이 모습을 드러낸 아테네.

"맞은 데는 괜찮아? 이카로스."

고개를 끄덕이는 이카로스에 아테네가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대화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끝날 순 없겠지.

지금은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상황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리가 없었다.

먼저 시작했다곤 하나 이카로스는 이빨을 드러냈고, 그 이빨에 사람들이 다쳤기 때문이다.

아테네가 아니었다면 더 큰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이카로스."

나지막한 아테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말을 시작하려는 듯한 부름.

이카로스는 아테네의 부름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내용은 듣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길 떠나."

"!!"

예상대로였다.

이카로스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말을 망설임 없이 꺼낸 아테네.

"나도 더 이상 여기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밤이 되면… 멀리 떠나."

이카로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이 끝날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펼쳐지다니.

"아테네…!"

"아무리 용을 쓰고 바꾸려 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지금이 그런 거야, 이카로스.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오늘 밤에 떠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아테네가 몸을 일으켰다.

"아…!"

그렇게 밖으로 향하기 시작한 아테네.

이카로스는 떠나는 아테네를 향해 손을 뻗었을 뿐 못 가도록 붙잡을 순 없었다.

자책하는군.

이카로스의 심정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됐는데.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자신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됐다며 이카로스는 자책하고 있었다.

저벅.

이곳을 나가기 직전.

걸음을 멈춘 아테네가 입을 열었다.

"이카로스… 안녕."

* * *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절벽 동굴의 밖.

아테네를 기다리던 도시의 책임자, 테샤가 물었다.

"이카로스는 오늘 밤 떠날 거예요. 그러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아테네 님이 신의 역할을 받아들이신다면 말이죠."

고개를 든 아테네가 차가운 눈으로 테샤를 응시했다.

어려서부터 세뇌하듯 신이 되라고 강요해온 늙은 구렁이 같은 인간.

- 차라카… 아니지. 이카로스라는 이름을 주셨다지요? 어쨌든 그 저주받은 놈은 사람을 해치려 했습니다. 그냥 둘 수 없죠.

오늘 낮의 소란이 있은 후.

테샤는 날이 밝는 대로 이카로스가 머물고 있는 절벽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대낮에 햇빛을 가리고 있는 지형을 부숴 이카로스를 태양 아래로 끌어낸 후 죽일 계획이었던 것.

-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카로스를 살려주세요.

그런 테샤와 사람들에게 건넨 아테네의 제안이었다.

"약속대로 신이 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대답을 한 아테네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솔직히 어제까지의 아테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이들이 강요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이카로스 덕에 생겼던 희망이니까, 괜찮아.'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을 날 때면 아테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온 억압은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하는 듯한 상쾌한 바람과 상승감.

이것들을 느끼며 아테네는 포기했었던 자유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다.

'….'

물론, 오늘 사건으로 테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타오르던 희망의 불씨 역시 사라졌지만 말이다.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저벅.

절벽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리며 아테네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운명이었어.'

질끈.

'괜찮아.'

* * *

아테네가 떠난 절벽 앞.

여전히 멈춰 서 있는 테샤가 소름 돋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됐다.'

저주받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려놓기로 한 아테네.

드디어 이 도시에도 수호신이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

슥.

테샤가 이카로스가 있는 동굴을 바라봤다.

'저딴 악마 놈 때문에 일을 그르칠 뻔하다니.'

테샤는 눈치채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보였던 아테네의 변화를 말이다.

예전부터 자포자기한 채 고분고분 따르던 아테네가 아니었다.

조금씩 주어진 운명에 반발하며 튕겨져 나갈 기미를 보였던 것.

- 아테네 님을 따라가라.

그렇게 밤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아테네를 쫓아갔고,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을 나는 아테네를 보며 테샤는 확신을 가졌다.

자신들의 신을 흔들고 있는 게 바로 저 저주받은 놈이라는 걸.

'다친 녀석들에겐 미안하지만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이카로스와 함께 있는 아테네를 본 테샤는 다음 날 동굴로 사람들을 보냈다.

이카로스를 자극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오늘, 계획은 성공했다.

이카로스를 죽이겠다는 테샤에 운명을 받아들이겠다 말한 아테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는구나.'

동굴을 바라보는 테샤의 눈이 번뜩였다.

'이놈만 사라지면 정말 끝난다.'

아테네와 약속했지만 테샤는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오늘 밤 떠날 거라곤 하나 테샤는 이카로스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의 오점.

어쩌다 저런 저주받은 존재가 태어났는지 아직도 미스터리 했다.

이것 역시 도시를 수호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테샤와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테네 님이 신이 되시는 것과 별개로 이카로스는 사라져야 한다.'

도시의 오점이 떠나는 걸론 만족할 수 없었다.

아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잠에 들 수 없을 것이다.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는 저주받은 아이.

저 날개라면 아테네가 신이 되며 평생 동안 머물게 될 장소에 아무렇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다.

'안되지.'

그 장소는 자신들 외에 그 누구도 출입해선 안 됐다.

자신들의 신이었기에,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신에게 도달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오점이여.'

저벅.

이카로스가 있는 절벽 안으로 테샤가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타버리거라….'

107화. 아테네를 위하여

절벽에서의 소란이 있은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밝아오는 날을 보며 아테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끝이구나.'

이카로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이후부터 아테네는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체념하고 말았다.

'이제는… 혼자구나.'

슥.

고개를 돌려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아테네의 바로 옆에 달라붙어 있는 테샤와 사람들.

모든 이들이 저 높은 지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신의 땅.

도시의 사람들은 높게 솟구친 암벽 지형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곳에 자신들의 신이 위치하면 수호신이 되어 마을을 지켜줄 거란 믿음과 함께 말이다.

저벅.

벌써 몇 시간이나 걸은 걸까.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도시를 출발한 아테네와 사람들은 3번 째 기둥 지형에 발을 딛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한 개의 기둥이었다.

가장 높은 지형을 중심으로 그곳을 지키기라도 하듯 둘러싸고 있는 나머지 네 개의 기둥 지형들.

도시 사람들은 이곳에 오랜 시간을 들여 서로를 잇는 길을 만들었다.

가장 높은 곳엔 아테네를, 그 주변 기둥엔 각각의 지킴이들이 머무를 생각이었기에 거주에 필요한 것들도 갖춰놓았다.

'….'

아테네가 고개를 들어 가장 하늘 가까이 뻗어 있는 지형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발을 디디면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아테네는 혼자 저곳에서 살아야 했다.

'아마 죽을 때도 혼자겠지.'

뒤늦게나마 사람들이 와 죽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테고.

아테네의 뒤를 이을 새로운 신 후보자를 들여놓을 것이다.

'이카로스는 잘 떠났겠지.'

그나마 아테네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사실이었다.

며칠 전에 떠났을 이카로스.

이카로스라도 이곳을 떠나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잘 지내야 돼, 이카로스.'

아테네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 * *

어느새 도착한 가장 높은 지형의 꼭대기.

테샤와 사람들이 아테네를 신으로 모시는 의식을 시작했다.

우우웅.

사람들의 손을 시작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노란색 빛.

빛들은 꼭대기의 주변으로 다양한 문자를 새겨 넣고 있었다.

'이게 날 가둘 결계구나.'

아테네가 새겨지는 문자를 보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신으로 모신다곤 하지만 혹여나 이곳에서 도망칠까 결계로 꽁꽁 싸매는 꼴이라니.

"하아…!"

거치적거리는 옷을 입은 아테네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해가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하늘이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카로스와 함께 자유롭게 날았던 곳이었다.

"딱 한 번만 더."

가늘게 떠진 아테네의 눈으로 묘한 그리움이 어렸다.

"날아봤으면."

그렇게 작은 소망을 읊조리고 있을 때.

"저… 저 밑을 봐!!"

정숙하기만 했던 의식에 소란이 찾아왔다.

"저… 저주받은 놈이다!!"

마을 사람의 외침에 아테네가 몸을 일으켜 절벽으로 달려갔다.

"…!!"

높은 지형의 저 아래.

꼭대기로 올라오고 있는 검은색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낯익어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존재.

"이… 이카로스!"

이카로스가 지형을 따라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 * *

바보네.

온몸으로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나야 그런 고통이 느껴진다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지, 정작 이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건 이카로스였다.

그러든 말든 이카로스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날개를 꺼내 날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오르려고 했던 하늘탑.

이카로스가 날아오르기 시작하며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테네가 갇혀야 하는 장소가 세만트라의 방해로 오르지 못했던 하늘탑이란 사실을 말이다.

- 네가 너의 운명을 이겨낸다면, 아테네 님 역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마.

이카로스가 아테네와 헤어진 날.

테샤라는 도시의 책임자가 찾아와 이카로스에게 한 제안이었다.

딱 봐도 능구렁이 같은 새낀데.

제안은 간단했다.

태양 아래서 날지 못하는 운명을 가진 이카로스가 한낮에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운명을 이겨내고 날아오른다면.

평생 갇혀서 자신들의 신으로 살게 될 아테네를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알면서도 가는 거겠지.

처음엔 이카로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함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이카로스의 감정을 느끼며 알게 되었다.

운명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함정이란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이카로스는 가려는 중이란 걸 말이다.

드드득.

으…!

불에 타는 고통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태양이 닿는 어깨를 시작으로 이카로스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졌던 날개 역시 희미하게 옅어진 상태.

태양 아래서 억지로 날개를 펼친 것에 대한 리바운드 같았다.

옆에 있었어도 못 말렸겠네.

실시간으로 이카로스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든 생각이었다.

아테네.

이카로스의 머릿속에 떠올라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햇빛에 의해 몸이 타 갈라지고 있었지만.

이카로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아테네라는 존재를 향해 최선을 다해 날아갈 뿐이었다.

그 테샤라는 능구렁이 새끼.

분명 아테네한테도 제안을 했겠지.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음에도.

이카로스에게는 어떠한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었다.

아테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카로스를 떠났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이카로스는 아테네를 위해, 아테네는 이카로스를 위해.

테샤와 사람들은 이런 둘을 이용한 것이었다.

쐐에에에엑!

올라가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카로스의 몸은 억지로 햇빛을 버티며 날개를 꺼낸 탓에 엉망진창이었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바스라져 흩날려질 것 같았다.

…!!

정상이다.

얼마나 날아온 걸까.

눈앞으로 꼭대기가 보였다.

화악!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이카로스가 꼭대기로 몸을 날렸다.

쿠당탕!

도착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힘겹게 버텨주던 날개가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사락.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는 상태.

이제부턴 굳이 날개를 꺼내거나 하지 않더라도 이카로스가 소멸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숨이… 희미해지고 있다.

이카로스 생명이 꺼져 가는 게 느껴졌다.

저벅.

죽어가고 있는 이카로스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햇빛을 등져 최대한 가려주면서 몸을 기울이는 누군가.

시력은 그 기능을 다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앞에 있는 게 누군지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테… 네."

"…."

얼굴로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이카로스, 안녕."

귓가로 아테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안녕."

아테네 역시 이카로스의 죽음을 직감해서일까.

만남과 동시에 아테네의 작별 인사가 건네졌다.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짧네.

짧은 만남이었다.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든 노력에 비한다면 정말 찰나의 만남.

그런 만남이었지만,

이카로스는 진심으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를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감정.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 감정이 퍼지며.

"안녕… 아테네."

이카로스도 아테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카로스는 숨을 멈췄다.

* * *

죽어버린 이카로스의 모습에 테샤가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잘못했다간 웃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됐다.'

아테네는 테샤가 이카로스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걸 모르는 상황.

유일한 증인이었던 이카로스 본인이 타 죽어버렸으니 완벽했다.

저벅.

이카로스를 안고 있는 아테네에게 테샤가 걸어갔다.

"결국… 이런 무모한 짓을 벌였군요."

테샤가 안타깝다는 듯 아테네에게 말을 건넸다.

"…."

그러든 말든 아무 대답 없이 죽은 이카로스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테네.

"욕망을 위해선 높이 날아야 한다."

"예…?"

아테네의 읊조림에 테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높이 오른 만큼 추락의 피해는 치명적이다."

"아테네 님, 지금 무슨…?"

"욕망을 실현하려는 자여."

아테네가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으로 테샤를 노려봤다.

이미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건지 아테네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뒤에 테샤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대는 하늘 높이 오를 생각인가?"

"…!"

순간이지만 아테네로부터 알 수 없는 소름을 느낀 테샤.

자기도 모르는 사이 테샤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테샤, 한때는 당신의 그 욕망을 이해해보려 했습니다. 겉으론 도시 사람들을 위해서인 척하지만, 결국엔 당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란 걸 알면서도요."

테샤는 항상 모두를 위해서라고 울부짖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테네를 신으로 만드는 순간 주변 일대에서 도시의 위상은 드높아질 터였다.

그 위상을 이용해 도시의 책임자인 테샤는 지금까지 없었던 권력을 손에 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멀리, 너무 높이 올라와 버렸네요."

우우우웅.

아테네의 몸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엔 주변에 만들어지고 있던 결계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아테네의 빛.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해요.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말았어야 합니다."

콰드득!

주변으로 퍼져나간 아테네의 빛이 하늘탑으로 이르는 모든 길을 비틀어 끊어버렸다.

"기… 길이!!"

"아… 안돼!!"

"아테네 님! 무슨 짓을!"

테샤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꼭대기에 와 있는 상태.

길이 끊어지며 고립된 이들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테네야 어차피 평생을 이곳에 살아야 할 처지였지만, 자신들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좌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또한… 이카로스와 하늘을 날며 가져선 안 되는 욕망을 가져버렸네요."

포기했던 자유에 대한 욕망.

그 욕망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카로스를 찾아갔고, 그 결과로 죄 없는 이카로스가 죽게 되었다.

"당신이나 저나, 저 사람들이나. 모두 마찬가지군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아테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 지경이었다.

"아… 아테네시여! 우리의 신이시여! 저희를 구해주세요!"

"다시 길을 만들어주세요!"

다급해진 사람들이 테샤 곁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눈물을 쏟으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

"…."

그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아테네가 이카로스를 끌어안았다.

"높이 오른 만큼 추락의 피해는 치명적이다."

"…!?"

이카로스를 안아 든 아테네가 절벽 끝에 섰다.

"아… 아테네 님…?"

"이만… 추락할 때네요."

후웅.

"아!!!"

추락할 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카로스를 안아 든 아테네가 꼭대기에서 몸을 던졌다.

* * *

아테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사라졌었다.

그리고,

"안녕."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 안에서 울렸던 목소리.

"난 태양을 향해 날다 추락한 자, 이카로스야."

108화. 날개는 불길함과 함께

이카로스의 공간이라서 그런지 주변은 캄캄했다.

서 있는 곳도 익숙한 장소였는데.

내가 세만트라에 의해 올라가는 걸 방해받았던, 이카로스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던 하늘탑이었다.

"안녕하세요, 백운이라고 합니다."

이카로스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정확히는 죽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태양에 의해 여기저기 갈라진 몸과 흐릿한 연기로 이루어진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재미없는 과거지?"

"아뇨, 절대 아닙니다."

진심이었다.

아테네와 이카로스에 대한 진실.

신화 속에서 듣던 존재들에 대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인데 어찌 재미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재미로 봤다기보단."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이카로스의 몸을 응시했다.

마지막에 아테네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카로스의 결말은 굳이 따지자면 새드엔딩이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엔딩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재미가 있다 없다로 대답하기가 몹시 곤란했다.

"동정할 필요 없어. 내가 원해서 뛰어든 죽음이니까."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이카로스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조금 전까지 이카로스의 안에서 모든 감정과 생각을 공유했었기에.

내가 함부로 그것들을 판단하고 공감하며 말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면서도 심플했지.

그래서 더 어려워.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이카로스가 앉아 있던 절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 아테네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어?"

이카로스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제 의식도 이카로스 님이랑 공유되고 있었으니까요. 이카로스 님의 마지막 기억이 제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에요."

"그렇군."

이카로스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카로스는 여전히 아테네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했다.

"아테네라도 행복하게 살길 바랐는데… 그러지 않았겠지. 그런데 넌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궁금해하는 이카로스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하늘탑에서 떨어져 바다로 추락했으며 그 안에서 특수한 공간을 만났다는 설명.

"특수한 공간…?"

"그 공간에 이카로스 님의 유골이 있었어요. 전 그 유골을 통해 이 공간으로 들어온 거고요."

이카로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화 속 인물인 이카로스도 바다 속에 그런 공간이 있다는 이야기는 낯선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카로스 님은 혼자가 아니었어요."

"…?"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카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뜻밖의 이야기에 무언가를 짐작한 건지 이카로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테네 님이 이카로스 님의 유골과 함께 있었습니다."

"…!!"

가장 원하지 않았던 이야기여서일까.

이카로스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아테네 님께 어떤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바닷속의 공간도 아테네 님에 의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고요."

눈을 감은 이카로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몰라도 아테네에겐 힘이 있었어…. 그래서 신 후보자로 지목된 거였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이카로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째서…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날…!"

아테네가 그 오랜 시간을 홀로 보냈다는 사실이 이카로스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아테네는… 어땠어?"

여러 의미가 담겨있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힘들어하는 건 아니었는지, 억지로 그곳에 갇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아테네 님이 원했다면 떠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드나드는 게 강제되거나 하진 않았거든요. 표정도 제가 봤을 땐 힘들어 보인다거나 그러진 않았고요."

이랬는데 못 나가는 거 아니겠지.

아직 나가보진 않았으니 불명확했지만.

들어갔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면 나오는 것 역시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이카로스 님을 만나면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

"저도 아테네 님과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제가 이카로스 님의 공간으로 들어오기 전에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잠시 놀랐던 이카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잊고 있었던 그리움을 떠올린 얼굴이었다.

"아테네는 여전하구나."

혼잣말을 하는 이카로스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아테네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과 조금 전 내게 전해 들은 말까지.

머리가 복잡할 것이었다.

슥.

조금 진정이 된 건지 고개를 돌린 이카로스가 입을 열었다.

"… 원하는 게 있어서 온 거겠지?"

"예."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

몸을 일으킨 이카로스가 내게 걸어왔다.

"날개가 어떤 힘을 낼 수 있는지는 나조차 잘 알지 못해. 내가 날개의 힘을 사용한 순간은 몇 번 되지 않거든. 너도 봐서 알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기억에서 봤었다.

쳐들어 왔던 도시 인간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던 검은 연기의 힘.

"…."

내 바로 앞까지 걸어와 멈춘 이카로스가 날 조용히 응시했다.

"내 날개지만, 왠지 네가 더 잘 사용할 거라는 확신이 드네."

이카로스의 말에 대답을 하진 않았다.

대신 조용히 웃어 보였다.

무조건 잘 사용할 겁니다.

슥.

그런 나를 향해 이카로스가 손을 뻗었다.

조용히 내 이마에 닿는 이카로스의 손끝.

"밤에만 사용할 수 있는 날개야. 알지?"

스으으…!

이마와 닿아 있는 이카로스의 손끝으로 검은 연기가 흘러들어왔다.

무언가를 넘겨받는 듯한 묘한 감각이었다.

"이제부터는 너의 날개야."

흘러들어오던 연기의 흐름이 끊기나 싶더니 이카로스가 이마에서 손을 뗐다.

"고맙습니다."

몸에서 느껴지는 검은 연기의 힘.

흔쾌히 날개를 건네준 이카로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다 머뭇거리는 이카로스.

"말씀하세요, 이제 파트너잖아요."

"…."

기… 기분 나쁘셨나.

파트너란 말에 이카로스의 눈이 커졌다.

다짜고짜 뱉은 뜻밖의 말에 좀 놀란 듯했다.

내 무기고로 들어오는 순간 영혼도 함께니까.

항상 말을 걸거나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소멸해버린 도윤을 제외하고 모든 무기에 깃든 영혼들은 나와 함께였다.

지금까지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을 알기에 나도 모르게 파트너란 단어를 사용한 것.

"파트너라… 낯설지만 듣기 좋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라서 말이야. 그럼…."

이카로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머뭇거리던 말을 건네왔다.

….

"알겠습니다, 걱정마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카로스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부탁할게, 파트너."

* * *

번쩍.

이카로스의 공간에서 빠져나와 눈을 떴다.

공명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아테네가 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끝났나 보군요."

"예…. 헉."

아테네는 미소를 지었지만 난 해맑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빛만 사라질 거란 예상과 달리 이카로스의 유골이 황금빛 입자로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호로 새끼야!

무기를 얻기 위해 아테네가 오랜 시간을 지켜온 유골을 홀라당 가져가 버리다니.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왠지 모르게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는 아테네.

고개를 저은 아테네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저도 떠날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떠날 시간…?"

묘한 말을 한 아테네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이카로스는 당신과 함께인 거죠?"

고개를 끄덕였다.

이카로스의 영혼을 불러내 대화를 시켜준다거나 할 순 없지만.

분명 이카로스는 나의 무기고에 존재했다.

"다행이에요."

…!

아테네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그려졌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한 번도 안 웃은 건 아니었지만, 아테네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거나 씁쓸해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보여 준 웃음은 아니었다.

아무런 걱정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다행이라는 안도감 하나만이 가득 느껴지는 밝은 미소였다.

슥.

자리에서 일어나 아테네에게 손을 뻗었다.

"여기서 나가요."

날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테네.

"이카로스의 부탁인가요?"

"그중 하나죠."

아테네가 웃으며 내밀어진 내 손을 붙잡았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달빛만이 유일한 빛인 밤하늘로 구름을 넘어선 지형, 하늘탑이 솟아있다.

하늘탑의 꼭대기에서 몸을 앉힌 채 유유히 여유를 즐기고 있는 거대한 독수리 데몬, 세만트라.

"끼루우우!!"

달을 바라보던 세만트라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자아냈다.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가졌던 둥지들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

꾸욱.

세만트라가 하늘탑을 거닐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낡고 허물어졌지만 누군가 지어 놓은 듯한 건축물들.

발에 차이며 거슬리긴 했지만 이 건축물들 덕에 자신의 둥지가 더 멋있어진 것 같아 굳이 없애버리진 않았다.

"끼루!"

무언가의 유산이 가득한 하늘에서 홀로 보내는 이 시간.

자신과 함께 하는 건 오로지 하늘을 비추고 있는 달 뿐이었다.

뽕이 안 차오를 래야 안 차오를 수 없는 환경.

"끼루우우…!?"

차오르는 뽕에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세만트라의 울음은 무언가에 저지당해 내질러 질 수 없었다.

"…."

물리적인 힘에 의한 저지는 아니었다.

단지.

사아아아…!

말도 안 되는 기운이 등 뒤에서 밀려들고 있었다.

이곳은 높은 하늘에 위치한 장소.

분명 자신의 영역이었음에도 세만트라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끼… 끼루…?"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자신만이 존재해야 하는 장소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당장 누군지 확인해 쫓아내야 했다.

다시는 이곳에 오르지 못하도록, 자신의 땅을 넘보는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날카로운 발톱으로 잔인하게 짓이겨 저 깊은 바닷속으로 추락시켜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세만트라는 쉽사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돌리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마주해야 할 존재.

그 존재의 크기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크기일 것 같아 망설여졌다.

도망쳐.

세만트라의 본능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둥지든 뭐든 일단 도망쳐야 한다고.

도망치지 않으면.

사아아…!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기운이 널 죽일 거라고 말이다.

"끼… 끼루… 끼."

세만트라가 애매한 신음을 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기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그 순간.

"내가 말했지."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기에는 너무 최근에 들었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금방 돌아온다고."

공포에 질려 떨려오는 몸을 이겨내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죽을 거란 공포를 이겨내며 세만트라가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

달빛을 등진 채 검은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게 만드는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날개.

너무나 불길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꺼려지는 그런 날개였다.

"…."

날개를 단 남자, 말도 안 되는 기운으로 이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는 차가운 눈으로 세만트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낮에 세만트라가 남자를 바라봤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는 하찮은 존재를 바라보는 그런 눈이었다.

"이번엔 네가."

남자의 날개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떨어질 시간이다."

109화. 날개를 달다

신기한 기분이네.

고개를 내려 굳어 있는 세만트라와 지형의 꼭대기를 바라봤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올라가려고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던 하늘탑이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낯설면서도 기분 좋네.

하늘은 난 게 처음은 아니었다.

수리검을 연속으로 던지며 공중에서 이동했었기 때문이다.

많이 다르지만.

수리검으로 이동하는 것과 얼마나 많이 다를까 의아했었는데.

날개를 얻고 하늘에 떠 있으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수리검을 던지며 이동하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만히 떠 있을 수 있는 것.

안정성은 물론이고 다음 행동을 준비하는데 있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날개라.

예상하던 날개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날개는 무수히 많은 깃털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게 훨씬 멋있네.

하지만, 지금 등 뒤에 달려 있는 이카로스의 날개는 깃털이 아닌 연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밤에 어울리는 칠흑에 가까운 연기.

그 연기가 두껍진 않지만 길다란 날개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나를 날게 하고 있었다.

제한 시간 없는 건 좋네.

발사하는 수에 상관없이 지속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리볼버.

이카로스의 날개는 리볼버와 달리 연기를 다 소모하기 전까진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사용할 수 있는 연기만 남아 있다면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낼 때 쿨타임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까지.

연기만 바닥까지 안 쓰면 언제든 꺼낼 수 있다니 최고네.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끼르르르르!!"

언제까지 굳어 있나 싶었던 세만트라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보다 몇 배는 큰 몸집을 가지고 있어선지 그냥 날아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웅장함을 자아내는 녀석이었다.

또 구름 속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세만트라가 빠른 속도로 구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낮에 그랬던 것처럼 구름을 오고 가며 날 공격하려는 것 같았다.

낮에도 얍삽한 새끼는.

스아아…!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날개로 힘을 흘려보냈다.

밤에도 얍삽하구만!

파악!

날개를 펄럭여 세만트라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날개에 의한 속도의 여파로 엄청난 바람의 저항이 얼굴로 느껴졌다.

"끼… 끼룩!?"

순식간에 세만트라의 뒤쪽까지 달라붙었다.

하늘에선 자신의 움직임을 못 따라올 거라 생각했던 건지 세만트라가 당황스러운 울음소리를 뱉어냈다.

진짜 속도 하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속도를 느끼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쩌억!

최고구만!

"끄르윽!"

내 힘에 날개의 속도까지 실린 주먹이 세만트라의 어깻죽지로 꽂히고.

쐐에에… 쿠웅!

예상치 못한 일격에 당한 세만트라가 하늘탑으로 처박혀버렸다.

애초에 주먹이 닿을 수만 있었으면 굳이 유탈라스의 비늘까지도 필요 없는 놈이었다.

사락.

몸을 채우고 있는 연기의 양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수치화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사용하는 동안엔 본능적으로 연기의 남은 양을 알 수 있었다.

날개를 이용해 빠르게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빠르게 소모되는 연기.

"끼라아아아아!"

쐐에에엑!

세만트라가 떨어졌던 곳에서 수십 개의 깃털이 날아들었다.

열심히 절벽을 기어오르는 동안 날 미친 듯이 괴롭혔던 공격이었다.

"…."

투두둑!

깃털이 도달하는가 싶더니 날개에서 뿜어진 연기가 장막을 펼쳤다.

연기의 장막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세만트라의 깃털들.

움직이는 거보다 이게 더 소모량이 낮으려나.

조금씩 줄어드는 연기를 느끼며 일렁이고 있는 날개를 바라봤다.

이카로스처럼 연기를 이용해 제대로 공격하려면 지금 양으론 빡셀 거 같네.

기억에서의 이카로스는 지금보다 훨씬 더 짙고 많은 양의 연기를 뿜어냈었다.

점점 늘어나겠지.

다른 무기를 더 모으거나 날개의 경험치가 쌓으면 연기의 총량도 함께 늘어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키르르라라라!!!"

응?

쿠우우!!

오… 개무섭네.

깃털을 뿜어내는 공격도, 그렇다고 이동 속도에서도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일까.

세만트라가 무섭게 포효하며 내게 날아들었다.

부리는 거구의 사람 두어 명은 합쳐놓은 크기였고, 발톱 역시 하나하나가 웬만한 사람의 상체와 맞먹는 크기였다.

근접전에도 자신이 있으시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세만트라에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근접전에 자신 있는 건 저 새뿐만이 아니었다.

돌산에서 미친 듯이 두들겨 맞아 가며 다양한 무술을 배운 상태.

스윽.

발을 치켜들어 부리를 들이민 세만트라를 맞이했다.

콰앙!!

"꾸룩!"

고개가 아래로 처박히며 휘청이는 세만트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쉴새 없이 세만트라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새 두루치기!!"

쾅! 쩌억! 콰아!

"끄… 끄륵…!"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세만트라 역시 가만히 맞고만 있진 않았다.

제대로 보고 공격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잔뜩 세운 발톱과 부리를 휘둘러대고 있는 세만트라.

하지만,

세만트라의 공격은 나에게 닿지 않았다.

닿기는커녕 스치지도 않았다.

- 상대가 뒤라고 생각할 때 위에서, 위라고 생각할 때 밑에서. 적의 예측을 벗어나는 공격을 하는 것.

비광이 날 두들기며 수없이 가르쳐줬던 것이었다.

- 그게 전투 센스다.

전투 센스.

비광의 가르침을 따라 난 쉴새 없이 움직이며 세만트라를 패고 있었다.

앞에서 공격을 한 뒤에는 뒤로, 뒤에서 공격한 후엔 옆으로, 세만트라가 다음 공격을 예측할 때쯤이면 그 장소를 유지해가면서 말이다.

훙! 훙! 훙!

엄청나네.

중거리 이동에서도 엄청난 속도였던 날개.

짧은 단거리에 있어선 거의 순간이동에 가까운 속도였다.

연기도 그만큼 빨리 사라지고 있지만.

쾅!!

다시 한번 찍어 내리자 세만트라가 아까와 같은 자리로 추락해 처박혀버렸다.

….

해치웠나?

한참이 지났는데도 움직임이 없는 세만트라.

밑으로 내려가 생사를 확인해보려는 순간.

푸화아아아아!

세만트라의 몸을 중심으로 엄청난 구름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탑을 오를 때 주변을 감싸고 있던 구름이었다.

구름을 뿜는 비둘기라.

데몬만 아니었다면 킹둘기가 될 수 있었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시야를 가린 구름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이 구름에 얼마나 애를 먹었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아니지만.

스륵.

두 눈을 감고 날개로 닿는 바람을 느꼈다.

아주 미세한 바람의 변화마저 감지하고 있는 날개.

세만트라가 그 자리에서 영원히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면, 작은 날갯짓이라도 한 번 한다면.

잡을 수 있었다.

… 화아아악!

고요하던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세만트라가 떨어져 있던 곳을 시작된 일렁임이 날개를 통해 느껴졌다.

이 새끼 봐라.

안 보이는 틈을 타 공격하나 싶었는데.

비둘기쉨은 열심히 전투에서 탈주하고 있었다.

아직 쓸데가 있으니 조금은 남겨두고.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세만트라 위치를 느끼며.

날개로 연기를 모아 응집시켜나갔다.

갖다 부딪히기만 해도 터뜨릴 수 있겠네.

날개로 모인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스윽.

감았던 눈을 뜨고 세만트라가 도망가고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폭발시키듯이.

드드드… 파아아앙!!

모였던 연기가 폭발하며 몸이 튕겨져나갔다.

초… 총알인가.

총알보다 빠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는 사이.

콰득!

"끼루루루욱!?"

"이리 와 이 새 새끼야!"

뻗은 오른손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세만트라의 머리채가 쥐어졌다.

[유탈라스 - 2단계 의태]

용의 숨결.

콰드드드득!!!

"끼루루루루루루!!!!"

손아귀로 빨려 들어오는 세만트라의 머릿가죽을 느끼며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른손으로 비늘을 집중시켰다.

착지 장소는 하늘탑.

- 부탁이 있어.

날개를 건네받고 공간을 떠나기 직전.

가까이 다가온 이카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었다.

-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탑을 무너뜨려 주지 않을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난 분명히 이카로스와 하나가 되어 과거를 경험했었다.

아테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들었으니 한 부탁이겠지.

이카로스가 한 건 본인을 위한 부탁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아테네를 위한 부탁이었다.

- 걱정마세요.

조심스럽게 부탁을 한 이카로스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었다.

- 아주 다시는 못 쌓게 개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유탈라스를 꺼내든 이유였다.

많은 인간의 탐욕과 헛된 신앙이 쌓여 희생자를 낳았던 하늘탑.

그 누구도 다시는 하늘탑을 향해 헛된 생각을 품지 않게끔 없애버릴 생각이다.

"끼르르르르루루!!!!"

아.

비둘기는 덤이었다.

세만트라를 잡은 채로 땅을 향해 나아갔다.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마운티거를 잡았던 때처럼.

오른손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지면과 부딪히는 게 내 주먹이 아닌 세만트라의 머리통이라는 것.

"끼… 끼루루욱!!?"

고통스러워하는 세만트라를 돌아보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말했지."

콰아아아아아!!

"떨어질 시간이라고."

* * *

쿠르르르릉!!

"…."

백운이 하늘탑으로 향하기 전 머물렀던 절벽.

절벽에 앉은 아테네가 무너져 내리는 하늘탑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 탑이 대체 뭐라고."

그저 하늘까지 솟아있는 특이한 지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탑을 신격화하며 그곳에 아테네를 가두려 했었다.

쿠우우우웅!

구름 위에서부터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하늘탑의 조각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은 건지 바다에 박혀 있는 하늘탑의 뿌리까지 균열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펄럭.

"…!"

후련한 기분을 느끼며 무너지는 탑을 보고 있을 때.

익숙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소리.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들었던 소리였다.

"이카로스."

달빛을 등진 검은 연기의 날개가 아테네를 향해 다가왔다.

* * *

펄럭.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을 향해 날아갔다.

조심조심.

고개를 내려 품에 안겨 있는 아테네를 바라봤다.

세만트라를 잡으면서도 날개의 연기를 남겨둔 이유였다.

추억 가득한 눈으로 달을 바라보고 있는 아테네.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가만히 있어야겠다.

지금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시원하네요."

방해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고개를 든 순간.

아테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밑 동굴에서 만났을 때 보다 훨씬 가볍고 밝아진 목소리였다.

"이카로스와 이렇게 하늘을 날 때면 자유로움이 느껴졌어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

아테네가 고개를 들어 달 주변의 하늘을 응시했다.

이카로스의 기억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눈과 얼굴이었다.

스르르….

그리고.

처음엔 잘못 봤다고 생각했었다.

바다 밑의 동굴에서 빠져나온 뒤.

아테네의 몸이 조금씩이지만 빛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 시간이 넘었으니까요.

라고 별거 아니라는 듯 아테네는 말했었다.

포옥.

…!

내 목을 감싸 안는 아테네.

따듯하지만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아티네의 체온을 느끼며, 달과 가장 가까운 곳에 멈춰 섰다.

"고마워요, 저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데려다줘서."

"… 별말씀을요."

싱긋.

아테네가 미소를 지은 게 느껴짐과 동시에.

스르르…!

품에 안겨 있던 아테네가 빛의 입자가 되어 달빛의 품으로 스며들었다.

110화. 밤바다 수영

"대혁 님!"

잠이 덜 깬 얼굴의 이연화가 절벽으로 달려왔다.

먼저 도착해 절벽에 서 있는 김대혁.

"조심해, 떨어질라."

허둥지둥 달려온 이연화와 달리 김대혁은 무척이나 침착했다.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그저 조용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김대혁.

"…."

옆에 있는 대사관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대혁과 다를 것 없이 아무 말도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이연화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허."

고개를 들자 이연화의 눈에 들어온 건 전망이 확 트여 있는 바다였다.

바다의 전망이 확 트였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 아테네에 오래 머무른 사람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기… 기둥들이."

아테네 앞바다엔 상징적인 다섯 개의 기둥이 솟아있었다.

우뚝 솟은 다섯 개의 기둥과 그중에서도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은 곳까지 솟아있던 중앙 기둥.

'어… 어디 갔어.'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하늘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가늠조차 안 됐던 중앙 기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나머지 중앙 기둥을 보좌하던 세 개의 기둥 역시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래도 하나는 남았…!?'

쾅! 쾅! 쾅! 쾅!… 쾅!!!

쿠르르릉!!

그나마 한 개는 남아 있네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마지막 기둥.

'무슨… 소리지?'

꼴깍.

저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꽤 먼 거리임에도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온 엄청난 타격음.

대체 뭐가 두들겼기에 수백, 어쩌면 수천 년을 존재했던 기둥이 저렇게 산산조각이나 무너지고 있는 걸까.

"티… 팀장님."

"처음엔 내가 잠이 덜 깬 줄 알았어.'

바다에서 기둥이 무너진다는 신고를 받고 달려 나온 김대혁과 대사관 헌터들.

처음엔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었다.

생긴 지 일이 년 된 것도 아니고 그 오랜 시간을 솟아있던 지형인데 무너진다니.

- 뭐… 뭐야 이게.

반신반의하며 절벽에 도착한 김대혁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장난 전화가 아니었다.

이미 사라진 중앙 기둥을 시작으로 하나씩 무너지고 있는 기둥들.

하도 현실감이 없어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있는 걸까."

긴장하고 있는 건 이연화뿐만이 아니었다.

김대혁을 포함해 그 자리에서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 걸 보고 있는 모든 이가 긴장한 상태였다.

"비상 대기조한테도 연락을 해둘까요?"

"아직 나오진 말고 준비만 하라고 연락해."

"알겠습니다."

기둥이 무너지는 건 비현실적이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사용하던 지형지물이 아니었기에 있든 없든 외관상의 차이를 제외하곤 아무런 영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기둥을 부수고 있는 무언가였다.

'사람일 확률은… 적다.'

부하들이 동요할까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어쩌면 노네임드급 데몬일 수도 있었다.

'충분하지.'

까다로운 능력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저 정도의 괴력이라면 노네임드라 불러도 과장이 아닌 수준.

"백운 님은 괜찮을까요…?"

이연화의 걱정에 김대혁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희연이 그토록 강하다 말했던 백운.

김대혁이 아는 한도에서 그리스 아테네에 생긴 변화라곤 백운이 왔다는 것 말곤 없었다.

"혹시 모르니 구급팀도 대기시켜. 그리고…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명령을 전달하는 김대혁의 목소리엔 평소에 볼 수 없는 긴장이 배어있었다.

* * *

우루루룽!

시원하게 무너지는구먼.

마지막 기둥이 무너짐과 동시에 오른손을 감싸고 있던 비늘이 사라졌다.

세만트라의 머리로 하늘탑을 박살 낸 후 연이어 나머지 기둥에도 주먹을 꽂았었다.

이거이거… 어디까지 강해진 거냐구.

마지막으로 다 무너진 기둥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유탈라스의 비늘을 감싸면 평소엔 사용할 수 없는 괴력을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하늘 높이까지 날아간 후 마운티거도 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훨씬 세졌어.

사로카를 쪼개버렸을 때도 느꼈지만.

돌산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유탈라스의 비늘을 사용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괴력의 한계치가 대폭 상승했다.

마운티거 때처럼 딱히 하늘로 올라가 가속력을 붙인 게 아님에도 가볍게 부서져 버리는 지형들이 그 증거였다.

나와 함께 강해지는 무기라.

몹시 흡족스러웠다.

노력을 해 두 배 강해지더라도 무기를 사용하면 뻥튀기가 되어 그 이상으로 강해지니 흡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돌아 가볼까.

다 무너져 내려 깨끗해진 정면을 확인한 후.

몸을 돌려 절벽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날개 있었으면 금방 갈 텐데.

아테네가 사라진 후 잠시 감상에 잠겨 있는 사이.

이카로스의 날개를 지탱해주던 연기는 모두 소모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 꾸어어!

오랜만에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는데 바다로 추락해버리다니.

평생 눈물 흘리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지 말도 안 되는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뭐.

수영도 나쁘지 않아.

독수리… 아니지.

구름 비둘기쉨과 한바탕 하고 기둥까지 박살 내서인지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바다 수영.

위험하니까 밤 수영은 하지 말란 거겠지만.

굳이 데몬이 아니더라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밤바다 수영은 몹시 위험했다.

슥.

고개를 들어 바닷물을 비추는 달빛을 바라봤다.

하지 말란 거일수록 참 좋단 말이야.

순간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청개구리형 인간들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듯한 고립감과 땀에 젖었던 몸을 감싸며 온도를 낮춰주는 시원한 바닷물까지.

밤바다 수영이 더 위험했다고 해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정취가 존재했다.

"어푸!"

깊게 호흡을 들이마시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

수영을 시작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물놀이로 인한 극심한 배고픔을 느끼려는 찰나, 눈앞으로 몸을 던졌던 절벽이 나타났다.

다 왔… 는데.

열심히 잠수하며 수영에 집중하느라 몰랐었는데.

절벽 위가 무척 밝았다.

사람도 많이 모인 거 같은데.

빛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안 몰릴 수가 없었다.

새벽이 다 되어 가는 시간대에 바다에 솟아있던 것들이 다 무너져 버렸으니.

옆동네에 불이 나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의 호기심을 봤을 때 참아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시… 신발이랑 옷 어떡하지.

바다로 뛰어내리기 전.

마을에서 급구한 트렁크형 수영복과 얇은 반팔 티 한 장을 제외하곤 모두 절벽 옆에 숨겨놓고 왔었다.

세만트라를 박살낸 후엔 반팔에 피까지 튀어 바다에 드랍하고 온 상태.

꼴깍.

이대로 올라가면 미친놈 행이다.

모두가 잠에 들었어야 정상인 시간대.

그 시간대에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모자라 바다에서 수영복 한 장만 입은 외국인이 튀어나온다면?

딱히 불합리한 일은 당하지 않더라도 평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미친놈으로 남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일단 토끼고 나중에 찾으러 오자.

연화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이연화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보여줄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거지 같은 꼬라지를.

첨벙!

방향을 틀어 절벽 옆 수풀 지대로 향했다.

당장 지갑도 절벽 위에 있기에 어딘가로 떠날 수도 없었다.

저 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숨어 있을 수밖에.

찰박.

"후우!"

바다에서 빠져나와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꼬로록.

배가 미친 듯이 고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디서 존버를 해볼까.

여기저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중.

끼릭.

응?

부자연스러운 쇳소리에 풀숲 안쪽을 바라봤다.

무언가 있었다.

뭐야.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수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리를 내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곤 몸이 굳기 시작했다.

여러 신기한 물체들이 합쳐져 있는 연분홍색의 안광을 뿜어내고 있는 것.

안돼.

회귀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광범위한 공격 기술 외에도 마도공학을 이용해 신박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던 이연화.

언제인가 이연화가 이것저것 물체를 조합해 마도공학으로 만든 정찰 기계를 보여줬었다.

그 기계가 지금 눈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백운 님!?"

아니나 다를까.

위쪽 절벽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이연화의 기계에 발견된 이상 도망치는 건 무의미했다.

오히려 도망치는 게 더 수상하고 이상해 보일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웃으며 절벽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오긴 왔는데.

빠안.

상당히 쪽팔리네.

절벽으로 올라가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지금 기둥을 부숴버린 존재가 밝혀지지 않아 한참 심각했던 거 같은데.

그러던 중 수영복 빤쓰 한 장 입은 새끼가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올라왔으니 안 쳐다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으… 음. 괜찮으… 세요? 백운 님."

이연화가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똑바로 바라보기엔 내 복장이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네… 네. 아주 멀쩡합니다."

"다… 다행이네요."

마음 같아선 숨겨놨던 옷가지와 물건들을 들고 탈주하고 싶었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앞으로 안 볼 게 아니라면 무의미한 짓이었다.

"…."

대혁 님,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마시고 말 좀 걸어주세요!

괜찮다는 대답을 들은 후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이연화와 애초에 날 모르니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들까지.

지금 이 몹시 쪽팔리고 불편한 정적을 깨줄 수 있는 건 김대혁이 유일했다.

"백운 님, 왜 이렇게 몸이 다 젖으셨나요…?"

나의 바람을 들은 건지 김대혁이 질문을 건네왔다.

한밤중에 폭싹 젖어 왔으니 나였어도 궁금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영 좀 하고 왔습니다."

"수… 수영요."

많이 당혹스러운지 말을 더듬는 김대혁.

잠시 마음을 추스른 김대혁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수영해서 오신 건가요?"

지형을 부순 게 나라는 걸 말해도 되는지 잠시 고민이 됐지만.

딱히 잘못하거나 한 건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스윽.

손을 들어 기둥이 있었던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서부터 왔어요."

* * *

"…."

홀로 남은 김대혁이 정면을 응시했다.

- 제가 부쉈어요.

수영을 어디서부터 하고 온지를 말한 후.

백운이 이어서 한 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이 기둥들을 다 부쉈다는 백운.

이야기를 듣기 전에 사람들을 물렸던 게 다행이었다.

분명 큰 파장이 있었을 것이었다.

'낮에 봤던 데몬들의 시체.'

누가 그렇게 데몬들을 박살냈나 궁금했었는데.

더 이상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내일 들어봐야겠지만.'

- 꼬로록.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는 순간.

백운의 배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었다.

당장 뭘 넣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우렁찬 소리.

무시하는 게 불가능한 소리였기에 김대혁은 더 질문을 하지 않고 이연화를 시켜 백운을 대사관 식당으로 안내했다. 

'강하다 하더니.'

김희연의 말을 떠올린 김대혁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규격 외였군.'

-1부 끝-

111화. 남은 건 한 개

"이거 이렇게 다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 이미 다 드셨는데요."

이연화의 즉각적인 대답에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다는데도 대사관에 가서 밥을 먹여주겠다며 날 데려온 이연화.

대사관은 당직 근무자들을 위해 야간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훌륭한 맛이야.

대사관에 도착해 방문한 식당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낮에야 북적이는 곳이지만 모두가 퇴근한 밤엔 당직자들을 제외하곤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메뉴판입니다.

졸린 눈으로 메뉴판을 가져다준 식당 요원.

아마 그때까지 요원은 몰랐을 것이다.

늦은 시간인 만큼 얘가 처먹어봐야 얼마나 처먹겠냐는 생각이었을 테니까.

- 수블라키 네 접시 더요!

- …!!

그리고 지금.

요원의 눈은 잠에서 깬 걸 넘어 경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처음엔 나도 인간답게 먹어야지 생각했었는데.

어째선지 음식을 집어넣으면 집어넣을수록 식욕이 더 살아나고 있었다.

"이제 배부르신가요? 더 드셔도 돼요."

"아니에요…. 충분히 많이 먹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이연화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제야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던 요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떠났다.

배에 거지가 들었나.

왜 이렇게 잘 들어가지.

한참 처먹은 놈이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 먹고 앞에 놓인 그릇 수를 보니 스스로도 의아함이 들었다.

이게 인간이 처먹을 수 있는 양이란 말인가.

연비가 안 좋아졌나.

빨리 달리고 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빨리 닳아버리는 휘발유처럼.

내 몸도 강해진 만큼 연비가 나빠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죄송해요."

옆에 놓여 있는 신발과 가방을 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낮에 날 찾으러 왔을 때 이미 숨겨놨던 신발과 옷가지들을 발견했던 이연화.

덩그러니 남아있는 옷가지들에 내가 안 좋은 선택이라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나였어도 놀랐겠네.

가이드 해주던 인간이 신발만 남기고 절벽에서 사라졌으니.

철심장의 할아버지가 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내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이연화는 같이 먹지 않고 날 빤히 바라만 봤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도야지처럼 배를 채우는 내 모습에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던 것.

- 이거 보세요.

그런 이연화에게 액션 캠을 건네줬었다.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순간부터 다시 절벽으로 기어 올라오기까지의 영상이 담겨 있었다.

- 허.

- 하!

건네준 액션 캠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계속 탄성을 질렀던 이연화.

얼마나 몰입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액션 캠에 들어가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이런 거 처음 봐요."

"저도 처음 해봤어요."

"…."

뻔뻔한 대답에 이연화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아마 그리스가 떠들썩해질 거예요. 내일이면 기자들도 올 테고요."

"그렇… 겠죠?"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내일 날이 밝으면 필요한 편집을 한 후 한튜브에 올릴 계획인 동영상.

그리스의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날 인터뷰하게 되면 이번 영상을 본 모든 이들이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알게 될 터였다.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 완벽한 비밀주의라고 하기엔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아는 이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꽤 있는 것과 모두가 아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지금은 누군가의 눈에 띌 걱정 없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니까.

"대사관에서 제가 탑을 부쉈다는 걸 비밀로 해줄 수는 없겠죠?"

절벽에서 많은 사람이 날 봤지만.

그저 한밤중에 수영을 한 괴기한 인간 정도로만 생각할 뿐 내가 세만트라를 잡고 지형을 박살 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알려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절대 안 된다는 아니지만, 안 알려졌으면 해서요. 그냥 한국의 헌터… 정도로만 소개가 가능할까요?"

질문을 들은 이연화가 생각에 잠겼다.

올리고 싶은데.

만약 불가능하다고 하면 액션 캠에 찍었던 영상은 한튜브에 올리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의 뉴스를 탈지언정 내가 무기왕이란 것까지 밝혀질 영상을 굳이 올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돈 많이 벌 수 있을 거 같은데!

바다에서 만났던 샤킨과 하늘탑을 오르다 만난 세만트라.

그리고 바다 밑에서 들어간 동굴까지.

비록 아테네가 동굴을 나오며 바다 밑의 공간도 사라지긴 했지만, 이미 영상에 담겨 있기에 문제는 없었다.

아테네가 나오는 부분은 지웠으니까.

버리기엔 몹시도 아까운 동영상이었다.

"김대혁 팀장님이 도와주신다면 가능할 거예요."

"오…!"

희망 가득한 대답에 눈을 반짝였다.

"제가 팀장님께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걱정말라며 미소를 짓는 이연화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며 웃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비밀인 동영상을 왜 저한테는 보여주신 거예요?"

의아한 얼굴로 물어오는 이연화를 응시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단어를 말하든 회귀를 한 나와 아무것도 겪지 않은 이연화가 받아들이는 의미엔 큰 차이가 있었다.

….

차이가 있겠지만.

상관 없었다.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유가 달리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싱긋.

빤히 날 바라보고 있는 이연화를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구니까요."

* * *

하이고 머선 문단속이 이렇게 철저해.

식당에서 이연화와 헤어진 뒤 대사관에서 제공해주는 게스트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푹신한 침대의 감촉을 만끽한 건 찰나의 순간에 가까운 10분이었다.

- 벌떡!

잠들려는 뺨을 후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사관 옥상으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굳이 옥상이 아니어도, 그냥 방 안이어도 아무런 상관없었지만.

돌산에서 항상 높고 사방이 트여 있는 곳에서 했던 게 버릇이 되어버린 듯했다.

"으챠."

간신히 도착한 옥상으로 발을 뻗었다.

사방이 잠겨 있는 대사관에서 간신히 찾아낸 길.

길을 통해 쭉 걷고 나서야 옥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시원하다.

고집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나 싶었지만.

막상 옥상에 도착하니 속이 뻥 뚫렸다.

이 맛이지.

옥상의 상쾌한 맛을 느끼며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스륵.

….

눈을 감고 집중하자 옥상에 있었던 몸이 무기고의 공간으로 옮겨졌다.

으음! 여기만 한 공간이 없어!

스이카를 얻은 뒤부터 출입이 가능해진 무기고.

내 능력의 본고장이라 그런지 오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볼을 간지럽히는 상쾌한 바람과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는 달빛도 이런 편안함에 한몫했으리라.

저벅.

걸음을 옮겨 늘어서 있는 무기들에게 다가갔다.

저마다의 고유한 모습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기들.

손을 뻗어 일렁이고 있는 날개 모양의 연기를 만졌다.

스륵.

무언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 통과해버리고 마는 손가락.

칼데아 윙.

쉬지 않고 날개를 사용하다 보니 이름도 제대로 못 불러줬었다.

칼데아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얼른 연기 양을 늘려야겠는데.

기억에서 봤던 이카로스의 화려한 공격을 떠올렸다.

마치 날개에 AI를 탑재한 것처럼 자유로운 형태로 공격을 구사했던 이카로스.

연기의 양을 늘려야 칼데아를 날아다니는 용도 외에도 공격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웅.

고개를 돌려 스이카를 바라봤다.

푸른 경계 안에서 눈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검기를 뿜어낼 수 있는, 말 그대로 귀신의 검.

스이카의 게이지가 어느새 가득 차 하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건 조건이 뭐 일려나.

지금까지 무기의 두 번째 능력을 개방한 건 잭 더 리퍼의 면도칼과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 그리고 유탈라스의 비늘이었다.

게이지가 가득 찼다고 개방된 게 아닌, 각각의 조건에 맞추고 나서야 게이지가 터지며 두 번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리볼버랑, 면도칼이랑… 비늘도 가득 찼네.

어느새 두 번째 능력을 개방했던 면도칼과 리볼버, 비늘도 다시 게이지가 가득 차 각각의 기운을 일렁거리고 있었다.

리볼버 쿨타임은 더 안 줄어드는 건가.

무기를 구할 때마다 사용 시간은 꾸준히 늘고 있었지만.

쿨타임 자체가 획기적으로 줄어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이전보다는 꽤 줄어 반나절에 두세 번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

거기다가.

고개를 들어 묘하게 일렁거리는 무기고의 달빛을 응시했다.

딱히 눈으로 분간할 순 없었지만 무기를 모을 때마다 변화하고 있는 무기고.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하나 남았네.

하나만 더 얻으면 무기고의 다음 능력이 개방될 거라는 것.

대체 뭐가 달라질지는 아직 감도 안 왔지만.

이전과는 많은 게 달라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젠 맨땅에 헤딩인가.

딱 하나만 더 모으면 무기고를 다음 레벨로 개방할 수 있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리 큰 도움은 안 됐더라도 대산의 정보가 어느 정도의 길잡이 역할을 해줬었기 때문이다.

악귀참도는 결국 못 찾았었지.

물론 이카로스의 날개도 엉뚱한 걸 구했던 대산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답게 대산이 가진 정보력과 탐색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것.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존재는 하는 건지 도통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스윽.

고개를 내려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바라봤다.

정신없이 도착한 이연화와 대사관으로 향하던 중에야 목에 무언가 걸려 있다는 걸 알아챘었다.

- 꼬옥.

사라지기 전 나의 목을 감싸 안았던 아테네.

분명 아테네가 주고 간 목걸이였다.

텅텅 비어 있는 듯한 반투명 흰색과 태극 문양을 반으로 쪼개 놓은 듯한 모양의 목걸이.

황금빛이나 보라빛이 없는 걸 봐선 무기고에 연관된 것도 아닌 듯했다.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건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목걸이의 용도가 짐작되진 않았다.

단지, 반투명한 원석이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담아야 함을 나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물건 잘 보는 능력자 없으려나.

무슨 물건을 보든 용도를 뚝딱뚝딱 알아맞히는 능력자가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다시 한번 놓여 있는 무기들과 무기고를 돌아본 후.

정신을 집중해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

뚜둑.

"끄어어…!"

공간에서 빠져나온 뒤 팔이 빠져라 기지개를 켰다.

할 일을 모두 마쳐서인지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튼튼해도 안 졸리면 사람이 아니지.

절벽에서 뛰어내린 후부터 쉴새 없이 지금까지 달렸으니.

신이 아닌 이상 잠이 안 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자러 가볼까.

조금 전 느꼈던 침대의 감촉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왔던 문으로 향했다.

푹 자야지.

해가 뜨고 눈이 저절로 뜨여질 때까지 죽어라 잘 생각이었다.

"후웁!"

상쾌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앞으로 한 개.

무기고의 다음 능력 개방까지 남은 무기의 수.

궁금하니까.

싱긋.

얼른 찾자!

112화. 하늘에 열린 문

음.

커튼 사이로 따듯한 햇빛이 스며들어왔다.

짹짹짹---!!

짹짹이쉨.

시끄럽게 울어대는 참새 소리까지.

환경만 갖추어진다면 앞으로 몇 시간은 더 오지게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햇빛은 이불을 뒤덮고 자더라도 저 짹짹거리는 소리 때문에 있던 잠도 달아나버렸다.

조패고 싶네.

알브론부터 세만트라에 이제는 참새까지.

그리스에서 조류는 내게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밖으로 나가 죄다 잡아버리고 싶었지만.

짹쨱이에 대한 분노보다도 몸을 일으키는 게 더 귀찮았기에 인내하기로 한다.

"하아… 아침은 참새구이로 해야 하나."

실행에 옮기지도 않을 말을 하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김대혁의 배려로 머무르게 된 대사관의 숙소.

밖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를 보니 출근 시간인 듯했다.

빙글.

몸을 뒤집어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집었다.

잠드는 데는 핸드폰이 쥐약이라고 했는데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른하고 노곤노곤 했음에도 핸드폰을 켜자 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오늘 새벽.

달아나 버린 잠을 그리워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핸드폰을 두들겼었다.

이왕 멀리 온 거 좀 더 뽕을 뽑아야지.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기엔 아쉬웠다.

열 몇 시간의 비행을 하고 왔는데 가능하다면 가까운 곳으로 가 무기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찾을 건 척준경의 악귀참도니까.

대산조차 찾는 걸 포기해버렸던 악귀참도.

무척이나 손에 넣고 싶지만 찾을 수 있는지 여부는 미지수였기에.

가까운 곳에 다른 무기가 있다면 먼저 찾아 무기고의 다음 능력을 개방하고 싶었다.

땅덩어리가 이렇게 넓은데 무기 하나 없을까.

막연한 듯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산의 정보를 통해 찾은 무기도 있지만, 반대로 그저 무언가에 이끌리듯 가다가 찾아낸 무기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우연에 일치인 듯하지만 어쨌든 손에 들어온 면도칼과 리볼버, 비늘이 그 반증이었다.

운명… 이랄까.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침대를 굴러다녔다.

난 카이안의 뒤를 이은 무기왕이었다.

애초에 무기들의 왕인 만큼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운명으로 무기들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운명도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

운명을 믿는다고 그것에 기대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운명이 알아서 해주겠거니 하며 기다리고 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던가.

띠링.

비행기 티켓 예매를 완료하며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지에 선명하게 적혀 있는 세 글자.

이집트.

최대한 빠른 비행기가 5일 뒤라니.

빨리 가고 싶은데 한참 기다려야겠구먼.

보다 빠른 시일 내에 운명을 끌어당기기 위해, 이집트에 가기로 했다.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서 약 두 시간의 비행만으로 도착할 수 있는 나라.

그리스만큼이나 많은 신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스에도 수많은 신화가 남아 있지만.

핸드폰으로 이곳저곳을 훑던 중 회귀 전 유물관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신화를 떠올렸다.

태양의 신, 라.

태양의 권능을 이용해 악한 이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는 신이다.

불꽃을 사용할 수 있다라.

씰룩.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라에 관련된 무기가 있을지 없을지 역시 미지수였지만.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 존재가 미지수인 악귀참도를 찾는 것과 별다를 것 없었기에.

재밌게 읽었던 신화의 도시도 구경할 겸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무기를 찾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라와 관련된 무기가 있으면 초대박이고.

없더라도 다른 무기가 있다면 대박.

없으면… 우울하겠지.

급시무룩해지려는 생각을 떨쳐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둘 다 미지수라면 가까운 곳부터 탐색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운명에 이끌리듯 찾아낸 무기들 덕분에 자신감도 넘치는 상태.

라의 무기든 다른 이의 무기든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걸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기 전에 연화 만나고 가야 하는데.

슥.

주머니에 들어 있는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어젯밤 헤어지기 전에 그리스에서 급할 때 쓰라며 이연화가 건네준 카드였다.

내가 아무리 날강도여도 카드를 먹고 쨀 순 없지.

다른 이의 카드였다면 신나게 한 번 긁을까 했겠지만.

아무리 굶주렸어도 친구의 카드를 시원하게 터뜨려버릴 정도로 바닥은 아니었다.

주섬주섬.

방에 흩어놨던 짐을 챙긴 후.

빼놨던 액션 캠을 다시 장착했다.

안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마이크로 렌즈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작디작은 액션 캠.

나중에 조회수 확인해야지.

흐뭇.

잠도 안 오는 김에 헌터청으로 영상을 보냈었다.

포상금 지급 후 한튜브에 올라갈 게 분명한 그리스 아테네에서의 영상.

반응이 어떤지는 좀 쌓인 다음에 한 번에 몰아 볼 생각이었다.

대박 터져라!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푹 잠들진 못했지만 편하게 묵었던 숙소의 문을 나섰다.

* * *

"연화 님은 오늘 외근이네요."

"외근요?"

방에서 호다닥 달려 내려온 대사관의 카운터 데스크.

카드를 주며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려 했는데 이연화는 대사관에 없는 모양이었다.

"어제 기둥 무너져서 난리 났었잖아요. 헌터 몇 분이랑 해서 무너진 곳으로 조사 가셨어요."

"조사… 요?"

뜨끔한 표정을 숨기며 되묻자 데스크의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김대혁 팀장님이 그리스 기자단에 발표하셨거든요. 한국에서 온 정체불명의 헌터가 기둥에 사는 데몬 토벌 중에 무너뜨린 거라고요."

김대혁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말했던 이연화.

아마도 김대혁이 이연화를 통해 들은 내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그걸 들은 기자단이 우려를 표했어요. 이제 기둥이 무너졌으니 사람들이 그곳을 항로로 이용할 텐데, 혹시 무너진 곳에 위험한 데몬들이 더 있는 거 아니냐고요. 그래서 연화 님이 헌터들이랑 함께 탐색을 간 거예요."

미안하구나, 연화야.

괜히 내가 기둥을 무너뜨려 버린 탓에 이연화에게 생각지 못한 업무가 주어져 버렸다.

밖으로 나가 환전을 한 다음 이연화한테 맛있는 거라도 대접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주변 지형 탐색까지 대사관에서 가는 건가요?"

질문을 들은 요원이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테네 소속 군이나 국가직 헌터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항상 전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저희한테 떠밀더라고요. 김대혁 팀장님이나 연화 님이나 일반적으로 배치되어있는 헌터들에 비해 우수한 전력인 건 사실이긴 하지만요."

우수해서 짬 맞았구만.

역시 눈에 띄면 힘들다니까.

저절로 고개가 흔들어졌다.

군대에 가서 배운 게 있다면 중간만 가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잘나지도, 그렇다고 욕먹을 정도로 못 나지도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

이것이 달달한 군생활을 위해 가장 필요시 되는 능력이었다.

"어?"

이제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돌아 나가려는 순간. 

카운터 요원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한국에서 온 헌터… 설마…?"

무심코 이야기를 하다가 이틀 전 한국에서 도착한 내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저 10급이에요."

"아… 맞다. 안녕히 가세요."

카운터 요원이 괜한 걸 물었다는 듯 머쓱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같은 헌터라면 10급이 그 높이에서 데몬을 잡거나 기둥을 무너뜨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좋은 가불기야.

항상 잘 먹히는 가불기에 만족하며 몸을 돌렸다.

이연화가 돌아오기 전까지 주변을 둘러봐야겠다.

* * *

전 날밤 백운과 세만트라의 전투가 있었던 지역.

무너진 잔해만 가득한 곳으로 두 척의 보트가 들어왔다.

열댓 명의 헌터들이 나누어 타고 있는 보트.

"조금 더 붙여주세요."

타고 있는 이들 중 가장 높은 급수를 가진 이연화가 볼록 튀어 나와 있는 기둥의 잔해로 보트를 이끌었다.

투투퉁.

잔해로 다가가자 엔진이 꺼지는 보트.

보트에서 내린 헌터들이 잔해로 조심스럽게 건너갔다.

"안정적인 곳이 없긴 한데 최대한 버텨줄 만한 곳에 설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헌터들이 가방에서 원형의 통을 꺼냈다.

통 안에 든 건 일정 범위의 생명체를 감지할 수 있는 탐지기였다.

기자들과 도시의 주민들을 위해 근처 지역이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데몬이 나올 수도 있으니 긴장 풀진 마세요."

"예!"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근방은 데몬이 많이 출몰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평소엔 주민들 모두가 높이 솟은 기둥들 때문에 지나갈 생각을 안 했기에 굳이 대사관에서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어제 백운이 기둥을 박살 내준 덕에 신경 쓰자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야겠어.'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직까지 자고 있을 백운을 떠올리며.

이연화가 재밌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백운은 같이 있으면 참 재밌는 사람이었다.

꽈악.

순간 딴생각을 해버린 이연화가 팔뚝을 꼬집었다.

다른 헌터들한테 긴장 풀지 말라 하고선 딴생각을 하다니.

'정신 차리자.'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임무 수행 중이었다.

위이잉!

그렇게 자신을 혼낸 이연화가 설치되는 탐지기를 바라봤다.

탐지기가 조용한 걸 봐선 주변엔 별다른 생명체가 없는 것 같았다.

"연화 님, 다 설치했습니다."

가져왔던 탐지기가 모두 설치되고.

이연화가 주변을 둘러보며 탐지기가 정상 작동하는 걸 확인했다.

"5분만 더 지켜보다가 철수하죠."

이곳에 설치된 탐지기는 반영구적으로 대사관과 연결되어 탐지 기록을 보내올 것이다.

사람이 상주하고 있지 않더라도 언제나 대사관에서 주변에 있을 생명체를 탐지할 수 있게 된 것.

'별일 없이 끝났네.'

팔짱을 낀 이연화가 동작 중인 탐지기들을 바라봤다.

그래도 나름 데몬이 자주 출몰하던 곳이라 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꽤 넓은 반경을 감지하는 탐지기들이 전부 조용한 걸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문제없는 거 같네요. 돌아가요."

"알겠습니다."

탐지기를 지켜보던 이연화가 몸을 돌려 보트로 향했다.

삑.

"…?"

편한 마음으로 보트로 향하던 이들이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탐지기.

삑…! 삑…! 삑!

"뭐… 뭐야, 왜 이래."

무언가를 탐지한 기계가 알림 소리를 키워갔다.

삐빅! 삐비빅! 삐빅! 삑!!

"모두 전투준비 해요!"

"예!"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울려대는 탐지기를 바라봤다.

'뭔가 이상해.'

탐지기가 저렇게 급작스럽게 울리는 건 불가능했다.

멀리서부터 무언가 다가오는 거라면 서서히 커졌어야 할 소리가 너무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투둑.

'…?'

이연화의 앞으로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와 함께.

삐이이이이이익!!

설치되어있는 모든 탐지기가 가장 강한 신호음을 뱉어냈다.

근처를 넘어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코앞까지 도달했단 신호였다.

"여… 연화 님, 위… 위에."

"…?!"

다른 헌터의 말을 따라 이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

커지기 시작한 이연화의 눈.

"저… 저게 대체…?"

화창하기만 했던 이른 낮의 맑은 하늘.

그 하늘에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113화. 꽃

콰앙!

하늘에서 문이 열리기 무섭게 나타난 몇 마리의 데몬.

자리에 있던 헌터들이 각자의 무기와 능력을 사용해 하늘을 조준했다.

'마도공학 3절.'

이연화의 손으로 연분홍의 빛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네 개의 총구를 가진 미니건이 만들어졌다.

현대에 존재하는 부품이나 데몬에게 얻은 재료를 이용해 무기 혹은 기타 기계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이연화의 마도공학이었다.

우우우⋯ 콰앙!

이연화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쿵!

곁에 있는 원거리 헌터들의 화력까지 더해져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한 데몬들.

화려한 등장에 비해선 상대하는 게 딱히 어렵지 않은 데몬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연화와 헌터들은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삐이이이이익----!!

탐지기가 여전히 미친 듯이 울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데몬들을 몇 마리 없앴음에도 조금도 작아지지 않은 알림음.

눈에는 안 보이지만 탐지기가 감지 하고 있는 무언가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뭐가 있는 거지.'

"연화 님⋯?"

얼마나 공격을 쏘아댔을까.

하늘의 균열에선 더 이상 데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음에도 탐지기는 여전히 미친 듯이 울려대고 있었다.

다른 헌터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연화의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대기해요."

이연화는 능력을 풀지 않았다.

하늘에 열린 저 균열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닫히지 않았기에 언제든 데몬이 나올 수 있었다.

"지원 요청은 해뒀습⋯!?"

말을 건네던 헌터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어갔다.

주변에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데몬이 잦아들어 약간이지만 마음을 놓으려던 중이었다.

드드드.

균열 속에서 무언가 나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나오던 데몬들을,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을 다 합친 것만한 거대한 손이었다.

길다란 검은색 손톱을 가지고 뼈만 앙상히 남은 소름 끼치는 손.

'⋯ 저거야.'

나오고 있는 손을 보며 이연화가 마른 침을 삼켰다.

탐지기가 감지해 미친 듯이 경고음을 내뱉고 있던 존재.

지금 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게 그 존재의 일부라는 확신이 들었다.

"공격!"

잠시 찾아왔던 정적을 깨며 이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다시 한 번 헌터들의 포격이 이어졌다.

두두두두두두!!

'마도공학 4절.'

다른 헌터들의 공격이 손을 둘러싸고 있는 동안.

이연화가 손에 있던 미니건을 거대한 활로 변형시켰다.

단 한 발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도달하는 곳에 큰 폭발을 일으키는 화살.

퉁!!

이연화의 손에서 쏘아진 화살이 문으로 나오던 거대한 손으로 날아갔다.

콰가아아아아---!

엄청난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화살.

지금까지 쏟아졌던 헌터들의 화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

공격을 멈춘 이연화와 헌터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 공격의 여파로 하늘 가득히 퍼진 화약 안개.

모두가 긴장한 순간이었다.

이연화의 화력에도 끄떡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로는 상대할 수 없는 데몬이었다.

"!!"

잠시 후 안개가 걷히며 균열에서 나오던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다섯 개의 손가락 중 약지와 중지가 사라져 있었다.

조금 전 이연화의 화살이 유효한 데미지를 입힌 것.

드드드⋯!

예상 밖의 데미지를 입어서일까.

잠시 멈춰 있던 손이 균열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삐⋯삐⋯삐⋯

동시에 서서히 약해져 가는 탐지기의 알림음.

"후!"

"대체 뭐였죠!"

그제야 손의 등장에 긴장하고 있던 헌터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들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부상자 없습니다!"

부상자가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연화.

'⋯.'

동료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표정과 함께.

이연화의 얼굴로 불안한 빛이 드리워져 갔다.

* * *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다 다시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일이 많나 보네.

이연화는 아직 대사관으로 복귀하지 않은 상태.

또 나가기가 애매해서 대사관 1층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아.

뭘 하며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생각난 한튜브.

새벽에 동영상을 보냈으니 지금쯤이면 올라왔을 것 같았다.

모아서 보려고 했는데 안되겠구만.

호다닥 달려 1층 쇼파에 자리를 잡았다.

머리를 휙휙 돌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한튜브로 들어가 검색 창에 무기왕이란 단어를 완성 시켰지만.

홀리 민.

검색 버튼을 누를 필요는 없었다.

글자를 치는 와중에 눈에 들어온 핫 동영상 탭.

탭의 가장 위에 새벽에 보냈던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 그리스 뉴스에 등장했던 한국 헌터가 무기왕!?

제목 어그로 끄는 데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야.

쏟아지는 동영상의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한튜브 친구들이었다.

나중에 만나면 감사의 표시로 밥이라도 한사바리 사줄 계획이었다.

보자보자.

댓글을 보자.

동영상 안으로 들어갔다.

올라온 지 몇 시간 안 됐음에도 쌓여 있는 몇천 개의 댓글.

굳이 쌓았다가 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개수였다.

두근대네.

내 동영상의 댓글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휴대폰을 산 이후엔 심심할 때마다 이전에 올렸던 동영상에 들어가 댓글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근거렸다.

사람들은 과연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 그리스 진출이라니⋯.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 국뽕에 취하는 거 같습니다.

@ 주모를 안 찾을 수가 없네요.

좀 볼 줄 아는 친구들이구먼.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 주작 아닌가요? 무슨 바다 밑에 저런 공간이 있지.

@ 잡으라는 데몬은 안 잡고 편집 기술만 배워온 듯.

어느 동영상에나 있는 주작무새도 존재했다.

동굴 들어가기 전에 데몬 잡았잖아, 새기들아.

앞에 있으면 당수를 한 대씩 갈겨주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댓글의 대부분이 동영상에 열광하고 있다는 것.

처음 바다에 들어갈 때는 저 미친놈이? 란 댓글이.

샤킨의 등장 때는 해저 공포증 때문에 숨을 참았다는 댓글이.

바다 동굴로 들어갔을 땐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라는 댓글이 가득 달려 있었다.

그리고.

@ 이제 하늘도 날아⋯?

칼데아를 꺼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에선 혀를 내두르는 댓글이 많았다.

# 떨어질 시간이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댓글이 달려 있는 부분은 세만트라의 머리채를 잡고 기둥으로 처박아버리는 곳이었다.

@ 어디까지 멋있어지려는 거냐.

@ 완전 어나더 레벨이네요.

@ 기둥 박살 난 거 실환가요⋯?

소설로 치면 날 괴롭히던 조류를 시원하게 아작내는 사이다 부분이니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 완전 멋있다구우우우웅!!

또 이 친구네.

송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구독자.

내가 올린 영상마다 엄청난 반응의 댓글을 달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부담스러울 정도의 반응.

날 욕하는 댓글이 있을라치면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무릎 꿇리는 투사 스타일의 구독자였다.

송이 무기왕의 부계정이란 주장에 더 무게가 실리겠구만.

하도 욕하는 댓글마다 등장해 죽일 듯이 싸우다 보니 사람들은 내 부캐가 아니냐며 의심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더 싸워!

물론 그런 의심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오히려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게 고마울 따름.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싸워주길 바랄 뿐이었다.

끼익.

음?

정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헌터가 우루루 대사관으로 들어왔다.

무리에 섞여 걸어오고 있는 이연화.

왠지 모르게 피곤한 얼굴이라 쉽사리 아는 척하기가 힘들었다.

괜히 피곤한데 부담 주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잠시 아는 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날 발견한 이연화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백운 님!"

* * *

"데몬이 나왔다고요!?"

1층에서 만난 이연화와 나온 도심지의 식당.

하마터면 먹고 있던 국수가 코로 튀어나올 뻔했다.

예상보다 내가 화들짝 놀라서인지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이연화.

"뭘 그렇게 놀라요, 데몬 나온 거 가지고. 전 완전 멀쩡해요. 다친 헌터들도 없고요."

데몬이 나왔다는 것 자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단지 나로 인해 가게 된 곳에서 정체불명의 데몬을 만났다는 게 날 놀라게 만들었다.

생각을 못 한 건 아니지만.

회귀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나란 존재가 개입했다는 것.

이로 인해 회귀 전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데몬 때문에 이연화에게 변수가 생겼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런 손은 처음 봤어요. 탐지기가 그렇게 미친 듯이 울리던 것도 처음이고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이연화를 보면서도 마음에선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다.

이미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회귀 전엔 없었던 것들이었다.

이로 인해 미래가 바뀌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

당장 지금만 봐도 쿄스케의 얼굴에 생겼어야 할 흉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신은 아니니까.

지금까진 해피였지만 그 일로 인해 더 끔찍한 미래가 닥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미래를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것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회귀 전에 겪어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면 바꾸지만 그 외의,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까지 바꾼다는 건 불가능한 일.

불가능한 것들까지 모두 내 탓과 책임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었기에 이연화가 데몬을 만난 것도 그렇게 치부하면 될 일이었다.

"백운 님? 듣고 있어요?"

"그럼요, 그럼요. 귀 쫑긋 세우고 듣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 만나도 될 걸 만났다는 게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무기를 찾느라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슥.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이연화를 바라봤다.

"연화 님, 정말 다친 데는 없는 거죠?"

"아휴."

걱정 좀 그만하라는 얼굴로 이연화가 팔 한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완전 괜찮다고요!"

* * *

그날 밤.

끼익.

집 화장실로 들어온 이연화가 샤워를 위해 옷가지를 벗었다.

스윽.

"⋯."

윗옷을 벗으며 이연화가 화장실 거울로 어깨를 비춰봤다.

작지만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정체불명의 검보라색 꽃문양.

- 드드드.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나온 거대한 손은 사라지기 직전 검지로 이연화를 가리켰었다.

가리켜짐과 동시에 찌릿하는 느낌이 어깨와 목 사이의 부위에서 느껴졌던 것.

"흐음."

작은 한숨을 내쉰 이연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겠지."

114화. 아테네의 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