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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히메지 성

햇빛이 들지 않는 회의실.

어두운 회의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에 도착할 일은 없다더니 어떻게 된 거죠?"

# 크흠!

듣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목소리.

목소리에 어울리는 예리한 질문이었는지 연결되어 있는 화상 회의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추락할 거라던 비행기는 멀쩡히 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에는 내렸어도 성까진 못 올 거라 하더니… 하!"

# 진정하시죠, 연 이사님."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연 이사라 불리는 여자, 연수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히메지 성에 도착했다는 건 곧 일본의 장군을 만난다는 거예요. 그럼 대산과 일본의 대화가 시작된다는 거고요!"

# 대화만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되고 안되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상징이 중요한 거죠. 첫 물꼬를 트는 게 어려운 거지 그 이후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잖아요."

연수정이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녀는 대산의 최리아가 히메지 성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서 대산에서 미리미리 일을 하셨으면 이런 수고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 허허허!

중후한 남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 대산은 애들 소꿉장난으로 세워져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쉽게 차지할 수 있다면 전부 회장하고 있게요.

"그러니까 미리미리…!"

#진정하세요, 연 이사님. 멀지 않은 시기에 제 손에 떨어질 테니까요.

"후우…!"

한숨을 내쉰 연수정이 몸을 파묻었다.

나이가 든 늙은이들 뿐이라 그런지 행동이 굼뜨고 느릿느릿 한 게 정말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대체 왜 실패한 거죠? 배리어도 없는 일반 항공기에 항로를 지키던 팀도 철수시켰고, 비행기 안엔 공중전이 불가능한 헌터만 배치했는데요."

# 승객이라고 하더군요. 우연히 공중전에 능한 자가 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히메지 성을 가는 길에서는요?"

# 기존 대산 인원들 외의 헌터가 한 명 더 있었다고 합니다. 살아 나온 자들 말로는 귀신처럼 강했다고 하고요.

"풉!"

설명을 들은 연수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별명도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상에 귀신이라니.

# 조금 지연되긴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네.

"…!"

일본어와 함께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듣기만 해도 눅눅하고 끈적한, 몹시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 이틀 후, 히메지 성의 장군과 대산 측 인원들은… 모두 죽을 걸세.

* * *

와 겁나 크네.

굴곡은 있었지만 어찌어찌 도착한 히메지 성.

처음 도착한 소감은 성이 몹시 넓다는 것이었다.

성이란 게 제한된 공간이다 보니 그렇게 클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꼬로록.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서일까.

당장 밥을 집어넣으라는 배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기다려!

그런 배를 잠시 다독였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을 순 없었다.

반짝.

손에 들려있는 검은색 카드를 바라봤다.

흐뭇.

조금 전 전수희가 주고 떠난 대산의 법인 카드.

- 백운 님, 정말 감사합니다. 카드는 한국에 돌아가서 반납해주시면 돼요.

역시 된 사람이란 말이야.

감사해하는 자세가 아주 제대로 되어 있어.

- ….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던 최리아.

오는 길에 입었던 상처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보다 훨씬 말수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흠.

전수희를 감싸는 모습을 봐서일까.

약 2% 정도 최리아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된 느낌이었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몹시 불편해.

플러스 괘씸하기도 하고.

이미지가 좀 개선됐다고 해서 이전에 했던 일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괘씸한 인물 넘버 투에 등록되어 있는 건 변함이 없다.

어차피 볼 일도 없으니까.

전수희와 동행하기로 했던 건 히메지 성까지였다.

성 안이니까 괜찮겠지.

오는 길에 공격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성 안이었다.

눈에 보이는 곳만 해도 빽빽하게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

이렇게 철저하니 오기 전에 제거하려고 했던 건가.

대체 무슨 회담이길래 이 정도 공격을 당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으쓱.

이제 내 알 바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은 스이카를 찾기 위함이었고 대산의 보증 덕에 성까지 무사히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룰루."

뭐처럼 받은 카드이니 먹고 싶은 것들을 먹으며 식도락 스이카 찾기 여행을 즐기면 됐다.

"첫 끼로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나."

여유롭게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대체로 일본 음식은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다고 들었는데.

해외여행에서의 첫 끼가 몹시 기대되는 순간이다.

모락모락.

!?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대각선 약 100m 거리에서 겁나 맛있어 보이는 게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5252…. 뭐냐구 저건.

호다닥!

왠지 모르겠지만 저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걸 입안에 넣을 수만 있다면 이번 식도락 여행의 시작은 몹시 훌륭할 거라는 강한 확신.

왕만두!

일본의 특화된 음식이라 볼 순 없었지만 비주얼이 미쳐버렸다.

몹시 쫄깃해 보이는 피에 가득 차 있는 속까지.

저걸 그냥 지나치면 범죄야.

이미 다국어 지원 알약은 먹어둔 상태.

"만두 하나 부탁드려요!"

"만두 하나 주실래요?"

!?

달려가자마자 손을 뻗은 왕만두.

그 옆엔 내 손을 제외한 다른 이의 손이 하나 더 뻗어져 있었다.

누구냐, 내 첫 여행의 만두를 노리는 녀석이.

불타는 의지를 표현하고자 뻗어져 있는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죄송한데 제가 먼저…!!"

내가 먼저 말했음을 강하게 어필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은 만두를 노리는 작은 키의 남자.

단정한 검은색 바가지 머리와 선한 눈매, 평화로운 인상까지.

"쿄… 쿄스케!" 

* * *

회귀하기 전이었다.

개방의 조건을 찾다 찾다 지쳐 포기 직전까지 갔던 나이, 서른.

딸깍.

퀘퀘하고 어두운 반지하 방에 불이 켜졌다.

"뭐야… 얼른 꺼."

"뭘 꺼예요, 얼른 일어나시죠.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반지하에 사는 사람에게 해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친구네."

잠이 덜 깬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를 봉지에 바리바리 싸온 몇 없는 나의 친구 중 한 명, 모리타 쿄스케.

일본에서 태어난 쿄스케가 왜 이런 후진 동네에 살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이었다.

"일어나서 도시락이나 먹어요. 내가 안 오면 아주 굶어 죽으시겠네."

이대로 더 누워있으면 곧 굶어 죽겠구나 할 때쯤 귀신같이 방에 찾아오는 녀석.

사람 쉽게 죽지 않는구나.

반지하 방에 처박혀 매일 누워만 있는 놈을 찾아오는 이가 있다니.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밤에 또 신세 한탄하다가 잤나 보네. 눈 팅팅 불어 있는 거 보니까."

"내 하루 루틴이야. 존중해주길 바라."

킁킁.

어디선가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사가 귀찮고 그냥 이렇게 누워서 굶어 죽어야지 싶었는데.

막상 또 음식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돌며 배가 꼬로록 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참 간사해.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으며 쿄스케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오늘은 무슨 도시락이야?"

"…."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는지 쿄스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패하지 않는 메뉴, 제육볶음에 계란말이에요."

"크으… 한국인보다 더 한국의 맛을 아는 친구구만. 잘 먹을게!"

호다닥 도시락 뚜껑을 열며 웃고 있는 쿄스케를 바라봤다.

한쪽 눈을 덮고 있는 머리와 코 바로 밑까지 잠겨져 있는 지퍼가 눈에 들어왔다.

"쿄스케, 나랑 있을 땐 편하게 있어. 친구끼리."

"아, 그렇네요. 이러고 다니는 게 적응이 돼서요."

쿄스케가 천천히 머리를 뒤로 넘기며 입을 덮고 있던 지퍼를 내렸다.

오른쪽 눈을 가로지르며 길게 그어져 있는 흉터와 양옆으로 깊게 찢어져 있는 입.

"문신이라도 하러 가자. 내가 싸게 하는 곳 알고 있어."

매일 흉터를 신경 쓰는 쿄스케에 문신을 하러 가자고 꼬시던 중이었다.

흉터 치료 같은 비싼 시술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문신을 하면 흉터가 어느 정도 가려졌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제가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절 보는 다른 이들이 불편해하니까 가리고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고개를 내젓는 쿄스케.

"또 이건 속죄입니다, 라고 말하려는 거지?"

정확한지 쿄스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이 죽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있으니까요."

"어허! 또 또! 이거 가만히 보면 나보다 더 우울하단 말이야."

"그건 아닐걸요. 맨날 밤마다 울면서 잠드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이거나 더 먹어."

쿄스케에게 제육 한 덩이를 옮겨줬다.

"내가 원래 제육 아무나 안 주는데 너니까 준다."

"제가 사온 거잖아요."

"이런 물질적인 인간이…? 중요한 건 마음이야!"

투닥거리는 사이 미소를 짓는 쿄스케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을 하다 한국까지 온 건지는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다.

단지 일본에서 누군가를 지키는 일을 했었고, 결국엔 지키지 못해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는 정도만 말해줬을 뿐이었다.

아르바이트라도 구하러 가야지.

앞에 앉아있는 쿄스케를 보며 마음을 먹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시락을 얻어 먹기만 할 순 없는 일.

소고기 사줘야지.

아직 시작은 안 했지만 오늘부터 구해볼 생각이었다.

개방은 못 한 무능력자였지만, 이런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녀석이 있는데 인간답게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 이제 진짜 안 올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밥 알아서 잘 챙겨 먹어요."

"에이 또 그런다. 좀 기다려봐, 오늘부터 알바 구해서 소고기 사줄 테니까!"

"오 정말요? 또 말 바꾸지 말고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 굶어 죽지 않게끔 찾아와 주는 고마운 녀석.

진짜 알바 구해서 고기 사줘야지.

웃고 있는 쿄스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그 날 마음 먹은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었다.

아무리 무능력자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허드렛일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아르바이트비를 받은 뒤.

쿄스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던 날이었다.

똑똑.

드디어 왔구만!

이 반지하 집으로 찾아올 건 쿄스케 뿐이었다.

소고기를 먹여줄 생각에 반갑게 문으로 달려나갔다.

"이 짜식이 뭐하다 이제…?"

문 앞에 있는 건 쿄스케가 아니었다.

동네 지구대에 있는 경찰 헌터들.

"모리타 쿄스케 님이랑 어떤 사이시죠?"

사무적인 말투로 물어오는 경찰.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치… 친군데요."

"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제보를 받아서요. 최근에 만나신 적 있나요?"

쿄스케는 한동안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었다.

마땅히 연락할 수단도 없었기에 물어보는 것도 불가능.

그저 내가 굶어 죽을 걸 걱정해 조만간 오겠지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고개를 젓자 경찰이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꿀꺽.

"쿄… 쿄스케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

무슨 일이 있냐는 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열리는 경찰의 입을 바라봤다.

"모리타 쿄스케 님, 3일 전 근처 공사장에서 살해되었습니다."

57화. 흉터

쿄스케의 장례식.

덩그러니 놓인 관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밝게 웃으며 도시락을 가져오던 녀석이 지금은 움직이지 않게 되어 이 안에 누워있다니.

나밖에 없네.

들어오는 순간엔 좁은 공간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넓다 못해 공허할 만큼이나 넓은 느낌.

공간에 있는 거라곤 관 하나와 그 관에 있는 이를 찾아온 나 하나 뿐이었다.

톱니 모양의 칼자국.

시체를 보겠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봐둬야 할 것 같았다.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더라도, 무능력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 피해자가 가지고 있던 것들입니다. 가실 때 챙겨 가시기 바랍니다.

박스는 경찰서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건 매우 익숙한 것들이었다.

도시락 두 개와 군것질 거리들.

….

슥.

관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울어야 하는 모든 조건이 갖췄음에도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장례식에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몹시 차분한 상태였다.

이렇듯 겉모습은 차분할 터인데.

찌릿.

안에선 속이 찢기며 뒤집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친구가 살해당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의 표정 또한 심드렁했다.

처음에 날 찾아왔을 때부터 그랬다.

데몬이 등장하고 능력자 범죄가 판치는 세상.

이런 후미진 동네에서 사람 하나 죽는 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참 무능력하네.

현 세상에서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

이제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닌 듯했다.

그냥, 외면하며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통한 눈으로 관을 응시했다.

생각해보니 이런 나라도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하는 쓸데없는 후회와.

무능력자인 나 때문에 라는 의미 없는 자책.

그리고, 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사과까지.

쿄스케의 관을 보며 두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 * *

"절 아시나요? 어떻게 제 이름을…?"

의아하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쿄스케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의 쿄스케는 날 알지 못한다.

"아! 기사에서 봤던 거 같아서 한번 말해봤는데 진짜였군요."

"기사요…?"

점점 더 고개를 갸웃거리는 쿄스케에 빠르게 말을 돌렸다.

"이거 만두 드실 거죠?"

"아, 아닙니다. 저는 다른 거 먹을게요. 먼저 오셨으니까 가져가세요."

여전히 착한 녀석이다.

이렇게 모락모락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만두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양보하다니.

슥.

가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살 건지를 눈으로 묻고 있는 가게 아저씨.

"만두 하나 주세요!"

"예이!"

한 손으론 카드를 건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덥썩.

떠나려는 쿄스케의 옷을 잡았다.

"?"

"반 줄게요, 왕만두."

쿄스케의 눈동자가 떨리는 걸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친놈인가?

라는 생각일 게 100% 분명했다.

처음 보는 놈이 이름을 부르는가 싶더니 왕만두 하나를 나눠 먹자고 한다.

나라도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 성의니까 거절하지 마시고 꼭 같이 좀 먹어 주세요. 혼자 먹기 쓸쓸해서 그래요."

저 착한 쿄스케는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작은 한숨을 내쉰 쿄스케가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습니다."

* * *

"여기요, 반."

"!?"

반이라고 건네진 만두에 다시 한번 쿄스케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밀어져 있는 만두는 최소 2/3은 되어 보이는 크기였기 때문이다.

"얼른 먹어요, 식겠네."

"아… 네 네."

반박해봐야 별 의미 없겠다 생각한 건지 쿄스케가 만두를 받아 들었다.

"히메지 성에서는 처음 뵙는 거 같은데 언제 오신 건가요?"

"오늘 왔어요."

"그럼 한국에서 오셨다는 대산의?"

고개를 반쯤 끄덕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대산이 신분을 보증해주긴 했으니 대산과 같이 온 건 맞지만, 대산 소속은 아닌 그런 위치.

"맞습니다, 대산에 잠시 고용돼서 같이 왔어요."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일단 대산이라고 퉁치자.

"오…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전 모리타 쿄스케라고 합니다."

"백운이라고 해요."

덥석.

서로 만두를 잡고있는 반대 손으로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어.

그리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생각도 못했다.

앞에 쿄스케가 없었다면 스스로의 뺨을 올려쳤을 것이다.

쿄스케의 오른쪽 눈과 입에는 흉터가 없었다.

물어본 적도, 말해준 적도 없어서 흉터가 있는 걸 자연스럽게 여겼던 건가.

괜히 아픈 기억을 들춰내는 것 같아 흉터가 어쩌다 생긴 건지에 대해 묻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 놀다 생긴 건지, 어디선가 싸우다 생긴 건지 모르는 건 당연한 일.

그래서인지 놓쳐버리고 말았다.

반성하자.

지금은 회귀를 한 상태.

쿄스케의 흉터가 아주 어렸을 때 생긴 게 아니라면 내가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몇 년 뒤에 살해당한 쿄스케를 구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니.

멍청한 자식!

한 차례 자책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쿄스케 님은 히메지 성에서 일하시나 봐요. 무슨 회담 예정이라 아무나 못 들어온다고 들었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쿄스케가 손을 들어 가장 높게 솟은 중앙성을 가리켰다.

"오래전부터 이곳 성의 장군님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

자세히는 아니지만 말해준 적이 있었다.

누군가를 지켜야 했지만,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

오래전부터 지키고 있었다면… 설마.

히메지 성의 주인이라면 오늘 대산이 만난다는 장군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과거 쿄스케가 지키지 못한 건 히메지 성의 장군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성의 장군이 죽었을 정도면 작지 않은 전투가 있었겠지.

쿄스케의 흉터도 그때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무슨 회담이길래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거예요? 오는 길에도 계속 이해되지 않는 상황만 일어나고."

"음… 뭐 기밀사항은 아니니까요. 쉽게 말하자면 공식적인 평화협정 전의 친목 모임이라고나 할까요?"

무슨 친목 모임에 목숨까지 왔다갔다 하는 거지.

"한국이랑 일본이 전쟁하는 것도 아닌데 평화협정을 맺을 게 있나요?"

눈웃음을 지은 쿄스케가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공공연한 사실이거든요. 국가마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물 밑에서 정보전을 벌이는 건요."

"스파이나 비밀 요원 그런 건가요?"

쿄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역사부터 꼬여있는 한국과 일본은 더 심하죠. 그에 따라 희생이 많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고요."

"그럼 오늘 회담은…?"

이해가 가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안 가는 묘한 이야기였다.

국가끼리의 문제인데 기업일 뿐인 대산이 왜?

"크게는 국가와 국가지만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국가 대 국가의 평화협정 전에 작은 단위인 기업과 국가 일부 간의 평화적인 대화…? 그런 거죠." 

"대산이 스타트를 끊는 거군요."

"그렇죠. 오늘 대화가 잘 끝난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무언가 되는 건 아니지만, 둘이 만났다는 거 자체가 의미가 있거든요."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문질렀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언제나 평화를 원하는 쪽이 있으면 반대 쪽도 있기 마련이다… 겠네요."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다. 

전쟁은 나쁘고 최대한 빨리 끝나야 한다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

하지만, 

이런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무기를 파는 무기상이나 상대 국가의 무언가를 전쟁이 아니면 빼앗아 올 수 없는 그런 입장인 사람.

그런 사람들은 몇 명의 희생자가 나오든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다.

"정확합니다. 정보전으로 인한 싸움에서의 희생이 얼마나 크든 그 정보로 인해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으음…!"

턱을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쿄스케가 보호하고 있는 쪽은 평화를 지지하는 장군 측.

회귀 전 관련된 사건이나 사고 기사를 본 적이 없나 떠올려야 했다.

!!

떠오르라는 기사는 안 떠오르고 다른 게 떠올라버렸다.

전수희를 따라 대산의 70층에 처음 방문하며 가졌던 의문이 있었다.

회귀 전에 봤던 대산의 홍보 실장은 최리아가 아니었다는 것.

그때는 그냥 짤렸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보기엔 회장 소피아는 최리아를 무척이나 신뢰하며 아끼고 있었다.

짤린 게 아니라… 죽은 거라면?

너무 억측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들어맞았다.

오는 길에 받았던 공격들과 쿄스케가 지키던 장군의 죽음, 그리고 홍보 실장의 교체.

"하지만 히메지 성에 도착하셨으니 대산 분들은 안전하실 거예요. 여기는 경계에 특화된 헌터만 백 여명이 있거든요. 외부에서 침입하는 건 불가능해요."

가장 큰 위험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

누구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어쨌든 누군가 했던 말이다.

들어가 봐야겠어.

회담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대산과 더 안 엮이려고 했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쿄스케 님, 혹시 성으로 안내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먹을 거 찾다가 일행을 놓쳐서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쿄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 님은 대산에서 직접 신분을 검증해주셨으니까요. 최고 레벨까지는 못 들어가도 그 전까지는 안내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쿄스케.

"가시죠."

성으로 향하는 쿄스케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 얼굴에 다시 흉터가 새겨지는 일은….

꽈악.

절대 없다.

* * *

쿄스케를 따라 들어온 히메지 중앙성 안.

바깥도 마찬가지였지만 안쪽의 경계는 더 삼엄했다.

약간의 텀을 두고 3인 1조로 빽빽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히메지 성 측의 헌터들.

경비 확실하구만.

"중앙성 주변엔 경계형 헌터 외에도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배리어가 쳐져 있거든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하, 네."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기술이 발달하며 건물들의 외형도 전부 현대화되었지만, 이곳 히메지 성은 시간이 멈춘 듯 옛날의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딱 봐도 뭔가 고풍스러운 느낌이 풀풀 풍기는 내부 디자인.

척.

걸음을 멈춘 쿄스케가 나를 돌아봤다.

"여기서부터는 경계 최고 레벨이라 들어갈 수 없어요. 아마 대산 분들은 이 안쪽에 계실 거라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안내 해주셔서 감사…!?"

드륵.

쿄스케에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났다.

"어? 백운 님…?"

"장군 님."

전수희와 최리아의 옆에 서 있는, 딱 봐도 어려 보이는 남자.

쿄스케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난, 말을 걸어오는 전수희에게 대답을 하지도, 장군이라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반짝.

빛나고 있었다.

애초에 히메지 성을 방문한 이유.

귀신의 검 스이카가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58화. 왜 거기에 있어

말을 걸 수만 있다면 격하게 묻고 싶었다.

왜 거기에 있니.

영롱한 황금빛을 뿜어대고 있는 스이카.

열심히 찾던 녀석을 발견해서 기분이 좋음과 동시에 깊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문제였다.

작은 문제가 아니라 몹시 큰 문제.

스이카가 있는 위치가 곤란해도 너무 곤란했다.

꾸벅.

다급하게 고개를 숙인 후 곁눈질로 다시 빛을 살폈다.

장군의 허리춤.

스이카가 걸려 있는 위치였다.

조졌다.

차라리 어디 구석진 유물지에 묻혀 있는 게 나았다.

그랬다면 어떻게든 흔적을 따라 도착해 손에 넣었을 테니까.

하지만 장군의 허리춤이라니.

이건 반칙이다.

"아 대산에서 같이 왔다는 분이시군요. 히메지 성의 장군, 히라이 쇼고라고 합니다."

"백운이라고 합니다."

최리아와 전수희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몹시 의아하다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불편해하며 성에 도착하자마자 호다닥 사라진 놈이 제 발로 들어와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백운 님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중요한 회담이 틀어질 수도 있었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많아 봐야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장군, 쇼고.

국가에서의 공식적인 직책은 모르겠지만 한 성의 장군이라면 꽤 높은 위치일 터.

그럼에도 쇼고는 함께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이었다.

"쿄스케가 모시고 온 거구나. 둘은 어떻게…?"

의아해하는 쇼고에 잠시 대답이 망설여졌다.

왕만두를 나눠 먹은 사이?

"하나 남은 기라테 아저씨네 왕만두를 백운 님이 나눠줬습니다."

쿄스케의 대답에 내 동공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한다고?

"그 맛있는 만두를 나눠주다니 모시고 올만 했구나."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쇼고.

여기서도 유명한 맛집인 듯했다.

왠지 겁나 맛있더라.

킹정이었다.

베어 물자마자 터져 나오던 그 육즙.

가기 전에 또 먹어….

짝!

잠시 만두에 팔린 정신을 되찾아왔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스이카를 응시했다.

저걸 어쩐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스이카까지 저런 곳에 있다니.

쉽지 않겠어.

그냥 지나가다 쇼고만 만났다면 도둑질이라도 했을 텐데.

쿄스케가 오래전부터 모시고 있는 사람의 검을 도둑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차라도 한 잔 하려는 참이었는데 쿄스케랑 백운 님도 같이 가시죠."

* * *

"차가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시기 바랍니다."

후릅.

뜨거운 차가 혓바닥을 녹였지만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일까.

작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머리가 복잡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고개가 내저어지는 상황이었다.

"가실 때는 쿄스케가 함께 동행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쇼고가 최라아와 전수희를 향해 안심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오늘 공항으로 마중 나갔어야 하는 인원들은 시간을 잘못 전달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늦게 왔구만… 이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타 국가의 손님이 오는데 비행기 시간을 착각하다니.

그리고, 이런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개운하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는 쇼고.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 조작하지 않았다면요."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최리아와 전수희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에서 만난 건 데몬이긴 했지만, 그 데몬은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수상쩍었기 때문이었다.

히메지 성으로 향하며 대놓고 공격을 받았기도 하고.

"히메지 성 안에서 만큼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옆에 있는 쿄스케는 최고의 호위 무사니까요."

쇼고의 칭찬에 쿄스케가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친구가 이런 존재였단 말인가.

햇빛도 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함께 도시락을 먹어서인 듯했다.

마냥 친근하게만 느꼈었는데 성의 장군에게 이런 신뢰를 받고 있는 녀석이었다니.

제 친구가 이런 사람입니다, 여러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쇼고와 최리아, 전수희가 내일 있을 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회담과는 별 상관이 없는 난 쿄스케에게 스리슬쩍 몸을 기울였다.

"혹시… 장군님이 차고 계신 검은…?"

부디 장식용 검이길.

매일매일 달라지는 별 의미 없는 악세사리 같은 검이길!

"아 스이카요. 저건 장군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가보에요."

망했다.

"장군님도 무척 소중히 여기는 검이라 항상 저렇게 몸에 차고 다니시죠."

쫄딱 망했다.

악세사리라고 해도 망한 판국인데 가보라니.

또 검을 중요시하는 일본의 특성상 가보로 내려온 검이 갖는 상징성은 더 클 터였다.

"혹시 저 검이 없어진다거나 하면 장군님이 화내실까요? 엄청 유하고 부드러우신 거 같던데."

"그건 못 참으시지 않을까요?"

스이카는 못 참는군.

그나저나 가문 대대로 내려온 검이라니.

기억에서 봤던 백발의 남자도 장군과 같은 가문이었던 걸까.

후루루루룹.

차를 조금씩 흘려 넣으며 애가 타는 눈으로 스이카를 바라봤다.

어떡하지?

* * *

히메지 성의 지하.

우락부락한 몸의 남자가 복면을 벗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준비는?"

묵직한 남자의 물음에 맨 앞에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시노카 암살대 총원 1000명, 준비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지하를 나갈 수 있겠구나."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었던가.

히메지 성의 지하에 위치한 비밀 장소.

내일 회담을 위해 이곳에서 몇 달을 숨죽이고 기다렸다.

"나카지 님, 기업 대산 측에서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인물이 한 명 따라왔습니다."

"알고 있다. 길목에서 야구지 암살대 놈들을 막은 게 그놈이라고 하더군."

시노카 암살대의 대장, 나카지가 비릿한 웃음을 터뜨렸다.

"쓸모없는 놈들. 그렇게 히메지 성까지 도착할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애초에 믿지도 않았었다.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여있는 암살 집단의 말 따위를 누가 믿는단 말인가.

'역시 엄청난 혜안이시다.'

시노카 암살대의 대장은 나카지였지만 주인은 따로 있었다.

호언장담하는 야구지 암살대 앞에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뒤로는 직속 휘하에 있는 시노카 암살대를 성 안에 준비시킨 인물.

주인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내일 회담을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다.

"오히려 잘됐어. 몇 달을 기다렸는데 그냥 조용히 나갔으면 억울했을 게다."

"그놈은 어떻게 할까요? 뭐 하는 놈인지 조금 더 알아볼까요?"

부하의 물음에 나카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놈이 뭐 하는 놈이든 아무 상관없다. 한 명이 아니라 한 트럭이 오더라도 말이다."

"역시!"

감격한 건지 부하가 힘껏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간사이의 호랑이, 나카지.

공식적으로 대중에 알려진 적은 없지만 뒷세계에서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뒷세계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나카지.

나카지가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손에 묻힌 피는 셀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카지가 이끄는 시노카 암살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100%.

표적이 된 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인다는 암살대가 시노카였다.

"밖에 있는 녀석들은?"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노카는 지하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의 경비로, 가게의 주인으로, 지나가는 어린 아이로.

필요한 시기와 장소엔 항상 존재했다.

"크큭…!"

성 안으로 들어왔다고 마음 놓고 있을 표적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칼날이 턱밑까지 들어왔음에도 차나 즐기고 있을 텐데 어찌 안 웃을 수 있겠는가. 

"이럴 때 하는 말이 생각나는구나."

"예…?"

나카지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독 안에 든 쥐."

* * *

모두가 잠에든 시간.

"흐음."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중앙성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데도 삼엄한 신분 확인을 하는 경비들.

야심한 시간인 만큼 더 철저히 성을 지키는 듯했다.

스이카는 잠시 보류다.

일단은 내일 회담이었다.

확신은 잘 안 드네.

솔직히 내일 회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하는 건지 감이 잘 안 왔다.

가설의 시작은 회귀 전 최리아는 죽었고, 그 죽은 날이 쇼고와 같은 날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날에, 다른 이유로 죽었을 수도 있어.

사실 이게 더 자연스러운 가정이었다.

대기업의 사절이 타국으로 가 암살 당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며 난리가 났을 터였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이런 비슷한 기사조차 본 적이 없었다.

개방하겠다고 워낙 정신줄 놓고 살았던 시기긴 하지만.

지나가는 말로조차 못 들었다는 건 이상하단 말이지.

만약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비행기는 과연 추락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죽었을까?

아니면 비행기는 추락하고 다 살았지만 협정은 취소되었을까?

그리고 장군과 최리아는 각각 죽음을 맞이했다?

"으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였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 거라 강하게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확신하기에는 오는 길이 너무 흉흉했어.

확신은 못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이유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있는 듯한 상황들.

머리 아프구만.

만약 내일이 아니라면?

"으음…!"

존버 해야지 뭐.

방법이 없었다.

내일이 아니라고 홀라당 한국으로 갈 수는 없는 일.

스이카를 떠나서 쿄스케를 위해서라도 그럴 순 없었다.

흉터를 만든 것도, 한국에서 쿄스케를 죽인 것도 동일한 녀석일 수도 있어.

쿄스케는 살아남아서는 안 되는 상황에 살아버렸고 한국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숨어 지내던 쿄스케는 적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내가 세워둔 가설 중 하나였다.

누구든 상관없어.

그놈들 씨를 말릴 때까지는 쿄스케 옆에 붙어 있는다.

굳은 다짐을 하며 천천히 성곽 주변을 거닐었다.

낮과 마찬가지로 사방에 배치되어 경계 중인 히메지 성 측의 인원들.

주변에 희미한 막들이 처져있는 걸 봐선 몇 겹의 배리어도 존재하는 듯했다.

이 상태라면 밖에서 침투하는 건 힘들다.

팔짱을 끼고 주변을 한 바퀴 빙글 돌아봤다.

내가 내일 회담을 노린다면 어떻게 했을까?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쉽지 않은 배리어와 경비.

만약 적들이 이미 성 안에 들어와 있다면?

상황은 극적으로 뒤집힌다.

외부의 침입이 불가능한 안전한 공간에서, 탈출이 어려워지는 공간으로 말이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구먼.

* * *

회담의 시작을 알리는 해가 밝아왔다.

오늘만큼은 성에서 행해지던 모든 게 멈춰졌다.

동시에 성 주변으로 더욱 두껍게 깔리는 배리어.

이제부터 히메지 성은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고립된 공간이 되었다.

저벅.

몸을 일으킨 나카지가 지하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긋지긋하지만 나가고 나면 그리워질 것 같은 꿉꿉한 공기.

스릉.

암살대 앞에 선 나카지가 메고 있던 창을 뽑아 들었다.

"시노카 암살대."

씨익.

"쥐 사냥을 시작한다."

59화. 쥐는 찍찍

높이 솟아있는 중앙성을 바라봤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회담 장소에 꼭 붙어 있으려고 했는데.

시원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 미리 정해진 인원을 제외하곤 중앙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회담 당일 중앙성은 통째로 감시 시스템에 의해 지켜지며, 사전에 입력되지 않은 인원이 포함되는 경우 보안 유지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이유였다.

강경한 경비 측의 말에 장군인 쇼고도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히메지 성의 최고 책임자긴 했지만 경비를 맡고 있는 건 국가와 지원 기업에서 배정해 준 인력이라는 것.

타 조직에서 정한 룰을 마음대로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인 듯했다.

- 대산의 분들의 안전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내가 걱정하는 건 쿄스케인데.

라고 차마 말한 순 없었다. 

실제로 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상태. 

저렇게까지 말하는 쇼고에게 들어가겠다고 떼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 중앙성 내부 경비가 미친 건 사실이니까.

중앙성 내부를 지키고 있는 경비만 해도 수백은 되어 보였다.

낌새가 이상하면 금방 갈 수도 있고.

오래된 고성에 미친 무게의 수리검을 꽂아 넣는 일이 없었으면 했지만, 그래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던질 생각이었다.

저벅.

천천히 거닐며 근처를 살폈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각 장소에 경비가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게 한 가지 있다면,

훼엥.

경비를 제외하곤 단 한 명의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 낮엔 그래도 무언가를 파는 상인들이라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것 없이 텅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아포칼립스 영화 같네.

아무도 없는 도시에 혼자 있으면 무슨 느낌일까 궁금했었는데.

간접적이나마 그 느낌을 조금 느껴볼 수 있었다.

어차피 들어가지도 못하는 거.

중앙성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위이잉!!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기계음과 동시에 중앙성 주변으로 몇 겹의 배리어가 생성되었다.

성 밖에도 배리어, 그 성 안에 있는 중앙성에도 배리어라니.

철저해도 너무 철저한데.

히메지 성 측의 꼼꼼함에 혀를 내두르는 사이.

콰앙!!

!?

들려선 안 되는 굉음이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은 중앙성의 꼭대기 부근.

후두둑.

무언가에 의해 벽이 부서진 건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중앙성에서 나온지 10분도 안 됐는데!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여기에도 쥐새끼가 한 마리 있었군."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목소리의 주인공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말을 건넨 건 성 주변을 지키던 경비들이었다.

"어차피 배리어 때문에 들어갈 수도 없다. 얌전히 죽어라."

"안에 있는 네 친구들도 곧 죽을 테니 가는 길이 외롭진 않을 거다, 클클."

제일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

으득.

제일 위험한 장소였구만.

"뭐하는 놈들이냐!!"

"당장 배리어를 열어라!"

한쪽에서 등장한 또 다른 경비 인력들.

모두가 적인 건 아닌 듯했다.

"죽여라!"

똑같은 옷을 입고 서로를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경비들.

여기도 이런 상황이라면 안쪽도 물 보듯 뻔했다.

두두두두! 챙!

벌어진 전투에서 눈을 돌려 배리어를 응시했다.

성 안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배리어.

옆에서 싸우고 히메지 성 인원들을 도와주고 싶지만.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갈 길이 바빴다.

* * *

조금 전, 중앙성의 회담 장소.

"오늘은 의미 있는 날이 될 겁니다. 이번 회담을 시작으로 다른 기업과 조직들도 동참하기 시작할 테고요."

"네, 저희 대산에서도 회담 이후에 적극적으로 다른 기업들에 협정을 제안할 생각입니다."

소수만이 이득을 챙기는 무의미한 희생.

그런 희생을 막자는 쇼고의 제안에 제일 먼저 응답한 것이 대산의 회장 소피아였다.

"대산이 아니었다면 저 혼자 목소리를 높이고 묻혔을 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훈훈한 덕담 속에서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은 대산 하나뿐이었지만, 한국에서 대기업 대산이 차지하는 지분은 생각보다 컸다.

분명 다른 기업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터.

싱긋.

장군 히라이 쇼고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미 어느 정도의 대화를 나눈 상태에서 열렸던 오늘의 회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회담은 정상적으로 열렸고, 상대인 대산과도 예상보다 더 순조롭게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치 그룹의 기타이 님도 한 말씀 하시죠."

일본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중견 기업, 사치.

일본 측 기업에선 사치 그룹이 오늘 회담에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장군인 쇼고와 함께 일본의 기업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표하기 위해 참가한 것이었다.

"예, 장군님."

자신을 바라보는 쇼고에 기타이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같이 뜻깊은 회담에 저희 같은 소기업을 초대해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하하. 소기업이라뇨. 중견 기업이지만 대기업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일본 내의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하지만 대기업은 아니죠."

"…?"

단호한 기타이의 말에 회담에 있던 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그렸다.

그저 덕담만이 오가던 훈훈한 장소였기에 기타이의 단호함은 한층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대기업이 될 수 없을 테고요."

"기타이 님, 지금 무슨 말씀을…?"

"무한한 경쟁. 그 경쟁이 있어야만 소기업은 중견기업이 되고, 중견기업은 대기업이 될 수 있죠. 즉, 경쟁을 없앤다는 건 다른 모든 것들의 발전을 막겠다는 것."

장소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제일 당황하고 있는 건 기타이를 데려온 쇼고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평화를 외치던 사람이 어째서?

"저는… 아니, 사치 그룹은 이번 겁쟁이 회담에 공식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합니다."

"!!"

"기타이 님 지금 무슨!!"

끄아아아----!

"!?"

기타이에게 의중을 물으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탕! 탕! 콰앙!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한 전투의 소음.

척.

대산의 헌터들이 최리아와 전수희 옆으로 다가갔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뭔가 일이 잘못된 건 확실해 보였다.

"장군님."

한 발자국 더 쇼고에게 붙은 쿄스케.

현재 이 장소에서 여유를 가지고 있는 건 기타이 뿐이었다.

"당신…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

드륵.

자리에서 일어난 기타이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죽으실 분이."

기타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쐐엑… 푹!

"!!"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날아든 창이 기타이의 목을 관통했다.

"끄으…?"

"평화를 사랑해 개혁을 원했던 히라이 쇼고 장군과 대산의 인원들."

검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우락부락한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남자.

나카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피와 살육, 전쟁을 원하는 기업, 사치에 의해 목숨을 잃다."

푸화악!

피를 뿌리며 기타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당신은…?"

스윽.

나카지가 쇼고를 향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전 시노카 암살대를 이끄는 대장, 나카지라고 합니다."

시노카 암살대란 명칭에 쿄스케의 눈이 커졌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암살 확률 100%라는 살수 집단.

'그 살수 집단이 어째서 여기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밖은 고사하고 중앙성 자체도 엄청난 경비로 둘러싸여 있을 터.

회담장까지 닥쳐오는데 어째서 몰랐던 걸까.

"글쎄요, 제가 이곳 중앙성에 들어온 건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요."

"!!"

"놀랍죠? 거주하는 곳에 암살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니."

쇼고는 저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아무런 제약 없이 중앙성에 암살대를 숨길 수 있는 자.

누군진 몰라도 큰 권력을 가진 자가 뒤에 있다는 것이었다.

"안에 같이 있으면서도 그동안 왜 장군님을 죽이지 않았냐 하면… 간단합니다."

나카지가 창을 들어 최리아를 가리켰다.

"일본 장군의 초대를 받아 간 대기업 사절이 살해 당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안 그래도 한국과 일본은 깊은 골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비행기가 추락하든, 성으로 향하던 중 습격을 당하든, 성에 도착해 죽든.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이런 사건이 터지는 순간 두 나라의 평화는 물 건너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장군님은 그 후에 천천히 죽이려고 했는데 뭐… 일정을 좀 변경했습니다. 모처럼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주셨으니."

스윽.

쿄스케가 나카지의 뒤쪽 문을 바라봤다.

중앙성 내부에 있는 대부분의 인원들은 기존부터 쇼고를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충성심이 깊은 만큼 배신하거나 하지 않았을 터.

시간을 끌어서 그들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안 올 거다."

"…?"

나카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옷과 창을 가리켰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던 것들.

"누구의 피라고 생각하는가?"

"!!"

"남은 녀석들도 잠시 후면 다 죽을 거다. 즉… 잠시 후 이 중앙성에 존재하는 건."

나카지가 두 팔을 펼쳐 보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시노카 암살대 1000명 뿐이라는 얘기지."

쾅!

나카지의 말과 동시에 천장을 뚫고 내려오는 열댓 명의 암살자들.

쿄스케가 암살자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떨어져라---!!

콰아아앙!

쿄스케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

그 목소리가 옆에 있던 벽과 함께 암살자들을 날려버렸다.

"허!"

짝 짝 짝.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긴커녕 박수를 치고 있는 나카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히가이 쇼고 곁에는 강한 언약 능력자가 있다는 걸."

사용자의 목소리와 말을 물리력으로 변환시키는 희귀한 능력.

모리타 쿄스케가 가진 힘이었다.

"아주 강하고 희귀한 능력… 이지만."

우르르!

나카지의 뒤로 못해도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암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용하는데 비용이 꽤나 든다고 들었다. 한 번 언제까지 버티는지 볼까?"

으득.

쿄스케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카지의 말대로였다.

언약 능력을 사용하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했다. 

조금 전 나카지의 말대로 중앙성에 천 명이나 되는 암살자가 있다면.

'못 버틴다.'

대산의 헌터들이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나카지는 다른 레벨이었다.

다 대 일로 싸우더라도 당해낼 수 없는 실력 차이. 

언약의 힘이 다하는 순간 그걸로 끝이었다.

저벅.

몇 명의 암살자가 나카지를 지나 다가오기 시작했다.

적은 쿄스케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소수의 인원을 계속 보내 소모전을 할 생각.

'어떻게 해야…!'

"죽어라아!!"

품으로 손을 넘은 암살자가 무언가를 던지려는 순간.

쐐에에에에엑!

콰직!!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거대한 수리검.

수리검이 다가오던 암살자 셋을 짓뭉개버렸다.

"!?"

"저… 저건!"

전수희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져갔다.

비행기 안에서 봤던 수리검이었다.

잠시 후,

스르르.

수리검 위로 금색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백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쥐새끼가 한 마리 더 숨어있었나."

나카지가 눈썹을 찡그린 채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찍찍."

".?"

뜻밖의 소리에 나카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냐?"

"뭐긴 뭐야 새끼야, 친히 널 찢어 죽일 예정인."

백운이 미소를 띠며 나카지의 비웃음을 응수했다.

"존나 큰 쥐다."

60화. 검, 주시겠습니까?

타이밍 나이스 하고.

상처 하나 없는 쿄스케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배리어가 쳐져 있을 텐데 어떻게…?"

뒤에 있던 부하 중 한 명이 날 바라봤다.

회담 시작 전에 배리어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 아는 듯했다.

"그거? 부쉈어."

"뭐? 그게 몇 겹인데…!"

허술한 거 하나 쳐놓고 놀라기는.

굉음이 들려오기 무섭게 유탈라스의 비늘로 배리어를 부쉈다.

주먹이 닿기 무섭게 양파 껍질 까지듯 후루룩 다 날아 가버린 배리어.

그나저나 얼마 안 걸릴 거 같던데.

회담장으로 수리검을 던지기 전.

사람들의 위치를 보기 위해 근처 공중으로 먼저 비전을 했었다.

- 우르르!

몇 명이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최소 수백은 되어 보이는 복면들이 중앙성 외곽 벽을 타며 올라오고 있었다.

문 놔두고 벽을 오르는 걸 보니.

사람이 갈 수 있는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사방에서 덮치려는 듯했다.

"하…!"

내 수리검을 바라보던 나카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이동기가 있으면 성 밖으로 도망쳤어야지. 사서 목숨을 버리다니. 역시 무모한 조센진답구나."

"뭐 시발?"

욕이 절로 터져 나왔다.

조센진이라니.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저런 단어를 사용한단 말인가.

"네놈이 길목에서 야구지 놈들을 죽인 녀석이구나."

나카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러 인간을 겪다 보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더군. 무식한 자가 알량한 힘을 가지게 된다는 건 말이야."

아니 이런 병신이.

벽을 오르고 있는 놈들이 오기 전에 얼른 썰어줘야겠다.

"주제도 모르고 불인지 물인지 구분도 못한 채 뛰어드는 게 참으로 웃기구나!!"

쐐엑.

나카지와 암살자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잭 더 리퍼]

뒤는 쿄스케와 대산의 헌터들에게 맡긴 후 밀고 오는 암살대에게 달려들었다.

푸확! 푹! 

눈앞으로 쏟아지는 무기들을 피하며 면도칼을 휘둘렀다.

채앵!

…!

다가오던 암살자 중 한 명이 면도칼을 막아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길목에 있던 놈들과는 다르다.

확실히 몸놀림 자체가 훨씬 뛰어난 느낌이었다.

특히.

쐐엑.

콰아!

순식간에 찌르고 들어오는 나카지란 녀석의 창.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찌르고 들어오는 창은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처박혀라---!

오.

쿄스케가 소리를 지르자 다가서던 암살자 몇 명이 바닥으로 처박혀버렸다.

그 보기 힘들다는 언약 능력자였다니.

조금 더 마음 놓고 앞에 집중해도 될 것 같았다.

"뭐 하는 거냐! 기세등등하더니 하하하!"

저 새끼가.

부하들을 밀어 넣으며 그 사이로 계속해서 창을 찔러 넣는 나카지.

보통 놈이 아닌 건 분명했지만 건방져도 너무 건방졌다.

빨리 죽여 버려야 되는데.

밑에서는 암살자 놈들이 기어오르고 있는 상황.

마음 같아선 당장 피렌조와 싸울 때 사용했던 동기화를 꺼내고 싶었지만.

피가 부족하다.

동기화를 사용하기 위해선 몸을 흠뻑 적시고 남을 피가 필요했다.

발동 조건인 피가 한참 부족한 상태.

내 피일수록 조건은 빨리 채워졌기에 몸에 상처라도 낼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도 한 가지 우려가 더 있었다.

피의 광기.

동기화를 사용했을 때.

내 시야엔 피렌조 뿐이었다.

옆에 누가 있는지, 내가 누굴 지켜야 하고 다음엔 무얼 해야 하는지 같은 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피렌조의 혈관을 베고 적의 피를 뽑아내기 위해 본능에 따른 휘두르기를 계속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곤란하다.

언약의 힘으로 잘 막고는 있지만 분명 한계가 있을 터.

뒤를 완전히 버린 채 피에 취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한 번 지우자.

콰앙!

힘을 실어 앞에 있는 암살자들을 밀어냈다.

[앤 보니&메리 리드]

정면을 향해 리볼버를 겨눴다.

죄송합니다, 히메지 성님.

역사 깊은 성에다 총질을 한다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부터 살고 봐야지.

[빛의 구원]

"…! 쉴더!!"

두두두두두두두두!!

빛의 탄환이 쏟아짐과 동시에 다수의 암살자들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갖고 있던 무기를 버린 채 돌로 이루어진 방패와 에너지 배리어를 시전하며 나카지의 앞을 막는 녀석들.

콰아!

"끄악!"

"으… 으… 으악!"

"끄… 끄흑!"

리볼버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섰던 암살자들의 몸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카지 새끼가 이미 자리를 피했다는 것.

뒤쪽에 있던 암살대 녀석들도 화력을 버틸 수 없다는 걸 안 건지 어디론가 다 내빼버리고 말았다.

쉬이이이.

더 이상 쏠 표적이 사라진 상황.

이 새끼들… 빠르네.

얼마나 훈련을 빡세게 받은 건지 나카지의 지시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암살대 놈들.

심지어 죽을 걸 알면서도 나카지를 위해 앞으로 달려든 놈들에 혀가 내둘러졌다.

"후우… 후우.."

뒤를 돌아 쿄스케를 바라봤다.

목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돌아오는 후폭풍도 장난 아닌가 보네.

강한 능력인 만큼 그에 따른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했던가.

쿄스케의 상태를 보니 남은 언약의 횟수가 많지 않을 듯했다.

"혹시 새로 도착할 지원군은 없을까요?"

놈들을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과 상황만 된다면 나 혼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뒤에 있는 사람들.

지금은 초반이라 어찌어찌 버티고 있지만, 놈들의 숫자를 생각했을 때 장기전이 될 확률이 높았다.

"배리어가 부서졌다면 중앙성 밖에 있는 인력들이 곧 들어올 겁니다."

쇼고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밖에서 경계를 서던 인원들 중에도 대다수가 적이었어요. 아닌 인원들도 있었지만 지금쯤이면."

"!"

말을 들은 쇼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그래서 기존 인원들을 다 내보냈던 건가."

회담을 주최하기로 결정했을 때쯤.

국가와 사치 그룹 측에서 경비의 보충 및 강화를 이유로 많은 인원을 투입했다. 

동시에 전력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기존의 병력들은 히메지 성 밖으로 밀어냈다는 설명.

"기존 인원들을 잠시 내보낸다는 게 꺼림직했지만, 이번 회담을 위해서 사치와 국가의 도움이 꼭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지켜보고만 있었구만.

아무리 장군이라 해도 모든 걸 원하는 대로만 할 순 없었다.

도움이 필요할 땐 굽히는 것도 필요한 것.

그래서 본능의 꺼림직함을 억누르며 말을 따른 듯했다.

"그 인원들은 내일 날이 밝으면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까지도 성 외곽의 배리어가 꺼지지 않는다면 이상함을 느낄 테고요."

내일 아침이라.

안될 거 같은데.

리볼버의 화력 덕분에 잠시 숨 돌릴 틈 정도는 주어졌지만, 영원할 순 없었다.

"적들이 물러난 건 이 총의 화력 때문이에요."

리볼버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총은 곧 사라질 거고요."

"!"

"사라지면 저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겁니다."

고개를 돌려 쿄스케를 바라봤다.

"쿄스케 님은 앞으로 몇 번 남았나요?"

"… 다섯 번 정도입니다."

"대산 분들은 어떠세요?"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체력이 다 하진 않았지만.

대산 헌터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 전의 싸움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나카지를 떠나 암살대 한 명 한 명이 자신들과 비슷한 실력이기에 얼마 못 버틸 거란 사실을 말이다.

내일 아침이라면 리볼버의 쿨타임을 생각해봤을 때 세네 번은 더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의미가 있을까?

적의 인원은 못해도 수백.

그 사이에 적들이 놀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제부터 사방으로 몰려오는 적들을 상대로 여러분을 다 지키면서 싸우는 건 불가능해요."

"…."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적들을 상회하며 싸우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인 상황.

배리어 같은 방어 마법이 있지도 않은 이상 모두를 지킨다는 건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완벽히 지켜낼 수 있는 건 한 명에서 두 명 정도뿐.

그리고 지킨다면.

스윽.

쿄스케를 바라봤다.

난 무조건 쿄스케를 지킨다.

"방법이… 없는 거겠죠."

쇼고가 침통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장군님.

있습니다.

- 끼아아아아아아악!!

기억에서 봤던 전투를 떠올렸다.

한 명 한 명을 상대하는 게 아닌 공간 자체를 압도할 수 있는 무기, 스이카.

리볼버로 인해 잠시의 여유가 주어진 지금, 말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쇼고가 먼저 운을 떼줬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

모두가 지켜질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에 침통해하던 사람들.

방법이 있다는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빨리 말해보라는 듯 커다랗게 변한 사람들의 눈동자.

"모두가 살 수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쇼고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다 살릴 수 있습니다."

"!!"

"어… 어떻게!?"

스윽.

손을 들어 장군이 차고 있는 스이카를 가리켰다.

"…?"

순식간에 의아함으로 물드는 사람들의 얼굴.

"스이카, 그 검을 제게 주신다면 말이죠."

* * *

"어떻게 이 검이 스이카라는 걸…?"

여전히 리볼버로 정면을 겨눈 채 쇼고에게 대답을 했다.

"설명드리긴 힘들지만 전 알 수 있습니다."

"검은 얼마든지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허리춤에서 검을 푸는 쇼고에게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라집니다."

"네…?"

"제가 검을 사용하게 되면 사라지게 돼요, 스이카는. 제 능력은 무기를 사용하고 다시 돌려드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쇼고의 눈으로 망설임이 어렸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가보, 스이카.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기에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 사이,

스륵.

손에 있던 리볼버가 사라지고,

"죽여라!!"

정면에서 암살대들이 다시 밀려들기 시작했다.

1분.

[잭 더 리퍼]

딱 일 분만 기다리자.

밀려오고 있는 건 정면뿐.

아직 사방에서 덮쳐 오진 않고 있었다.

일 분 뒤엔 뺏는다.

상대가 일본의 장군이든 뭐든 안 준다고 하면 뺏을 수밖에 없었다.

푸확! 핏!

떨어져라---!!

면도칼을 휘두르며 쇼고의 대답을 기다렸다.

30초.

대답해.

쇼고의 본능적인 망설임을 이기적이라고 욕하고 싶진 않았다.

장군인 쇼고에게 있어선 오랫동안 소중하게 여겨온 물건일 터.

상황이 급박해도 갑자기 달라고 하니 망설여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래 못 기다려주니까.

강제로 뺏으면 쇼고는 검 하나를 다른 이들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 망설이다 결국 빼앗기게 된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강제로 뺏는다는 선택지는 최대한 보류하고 싶었다.

20초.

대답해.

10초.

"모두가 살 수만 있다면!!"

콰직! 콰직! 콰직!

방을 덮고 있던 지붕이 박살나며 수십의 암살자들이 떨어져 내렸다.

"드리겠습니다!"

허리춤에서 검을 푼 쇼고.

"받으세요!!"

쇼고가 나를 향해 스이카를 힘껏 집어던졌다.

[난도질]

푸화아악!

"끄악!"

"끄륵."

날아드는 스이카에 앞에 있는 놈들을 베어낸 후.

뒤쪽으로 몸을 날리며 손을 뻗었다.

귀신의 검, 스이카.

덥썩.

확실히 받았다.

61화. 스이카의 주인

이제 낯설지도 않구만.

빛에 손을 대는 순간 옮겨지는 공간.

몇 번 겪어봤다고 이젠 적응이 좀 되는 느낌이다.

자리에 서 주변을 둘러봤다.

옮겨질 때마다 워낙 특색이 있어 처음 도착하면 둘러보는 게 습관이 됐다.

전쟁… 터인가.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인 없는 무기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 봐라.

스산한 바람과 일몰의 옅은 햇빛이 주인 없는 무기를 비추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귀신님은 어디에 계시지.

고개를 휙휙 돌려봐도 기억에서 봤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비쥬얼만 봤을 땐 귀신도 울고 갈 느낌이었는데.

진짜 귀신은 아니겠….

"날 찾는 건가?"

"기에엑!"

쿵.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렸을 때부터 깜짝깜짝 놀래키는 거엔 몹시 나약한 나였다.

"거 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좀 일반적이게 나오면 안 되냐고 따지려고 했는데.

"…."

무심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남자.

기억에서 봤던 백발이었다.

바람에 흩날리기까지 하니 전에 봤던 것 보다 훨씬 음산한 느낌이었다.

조용히 있어야겠다.

깨갱하며 아무 말 않는 남자를 살폈다.

의외네.

기억에서 미카이의 시점으로 봤을 땐 긴 백발을 제외하곤 생김새를 잘 보지 못했었는데.

귀신과는 거리가 몹시 먼 생김새였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찐한 눈썹과 날카로운 코까지.

귀신형보다는 미남형에 훨씬 가까운 얼굴이었다.

오.

특히 눈이 놀라웠다.

워낙 많은 피를 뿌렸다보니 엄청 차갑고 무미건조한 눈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장난기가 가득한 선한 눈이었다.

"옛날부터 잘 생겼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으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

무심한 듯 건네는 농담까지.

농담의 내용이 좀 재수 없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넘어가 주자.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차고 있는 스이카에 손을 얹었다.

움찔.

미카이의 기억으로 한 차례 봐서인지 손을 얹는 동작만으로도 몸이 움찔거렸다.

"통성명은 나중에 하고."

고개를 든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일단 저것들부터 같이 처리 좀 하지."

저것들?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허.

분명 버려진 무기들만이 가득했던 땅이었는데.

어느새 그 땅 위엔 무기의 주인으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나타나 있었다.

해골… 아니지, 좀비인가.

인간이라 부르기엔 힘든 모양새였다.

해골이라 하기엔 살점이 남아있고, 사람이라고 하기엔 몸 여기저기가 너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저건 뭐죠?"

익숙한 듯한 표정을 보니 남자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망령 정도로 부를 수 있겠군."

망령이라, 나쁘지 않은 호칭이다.

그나저나 조금 전까진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몇천… 아니지. 몇만은 될 거 같은데 갑자기 왜 나타난 거죠?"

"내가 나타났으니까."

"?"

그러고 보니 같은 타이밍이었다.

귀신이라도 끌고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인 걸까.

"내가 죽인 자들이다."

"…."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그냥 많이 죽인 사람이었구먼.

"동기는 충분하네요."

크어어어어---!

꽂혀있던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망령들.

살해당했으니 저건 달려들어도 무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쨌든.

공간에서는 아무런 제약도 없으니.

[잭 더 리퍼 - 동기화]

"호오…?"

몸이 시뻘겋게 물들어가자 남자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인마 같구나."

뜨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도 모르게 뜨끔하고 말았다.

"예리하시네요."

점점 시야를 침투해오는 핏빛에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스으으!"

달려드는 망령들을 향해 면도칼을 휘둘러갔다.

뭔가 혈관 같은 게 없는 듯 했지만 풍화되어서인지 칼이 닿기 무섭게 뼈가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그냥 비늘이나 리볼버로 쓸어버릴 걸 그랬나.

무기를 바꿀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우웅.

익숙한 기운과 함께 발밑으로 푸른 원의 경계가 그려졌다.

응?

날 충분히 포함 시키고도 남아 더 앞으로 뻗어 나가는 경계.

불길한 기운에 남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저기요."

철컥.

오른발을 한 발 뒤로 빼며 자세를 낮추는 백발의 남자.

남자의 손은 스이카의 손잡이에 얹어져 있었다.

"저… 여기 안에 있거든요."

부정할 수 없는 발도의 자세였다.

경계 안에 있던 모든 걸 베어버렸던 발도.

심지어 보이지도 않아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스으으,"

"아니 잠깐만, 호흡하지 말고."

진짜 휘두를 것 같은 남자에 경계를 벗어나려는 순간.

끼아아아아아아악-----!!

남자의 검집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후웅! 후웅!

한 소년이 열심히 목도를 휘두르고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목도를 휘두르는 소년.

목도를 쥐고 있는 소년의 양손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윽!"

목도를 놓친 소년이 왼손을 움켜쥐었다.

너무 많이 휘둘러 살갗이 몽땅 벗겨져 있는 왼손.

왼손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잠시 피가 흐르는 손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놓쳤던 목도를 집어 들었다.

후웅!

입술을 깨문 소년이 계속해서 목도를 휘둘렀다.

양손에서 미칠 듯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쉴 시간 따윈 없다.'

후웅!

'귀신처럼 강해져서!'

후웅!

'세상에 내 이름을 알려주마!'

소년에겐 꿈이 있었다.

* * *

10년 뒤.

"죽여라!"

"이 괴물 자식!"

달려드는 괴한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끼아아아아아악---!

남자의 검집에서 터져 나오는 소름 끼치는 비명.

나라의 최고 대장장이가 남자를 위해 만들어 준 검, 스이카였다.

투둑.

기세 좋게 달려들던 괴한들의 머리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으… 으아아! 귀신이다!!"

간신히 검의 범위 밖에 있어 살아남은 괴한이 산 아래로 도망쳤다.

굳이 쫓지 않으며 그런 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백발의 남자.

"하."

귀신이란 호칭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심한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수련을 해서일까.

언젠가부터 하얗게 세어버리고만 머리.

"귀신처럼 강해지기는 했는데."

남자는 10년 전의 바람처럼 엄청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저 귀신처럼 강해지고 싶다는 의미였는데.

실제로 귀신이 사용할 것 같은 기술에만 특화된 무사가 되어버렸다.

"진짜 귀신이 되어버렸군."

슥.

고개를 내린 남자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사람의 핏줄이 퍼져 있는 듯한 검의 생김새.

그 대장장이를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남자의 검술을 보더니 영감이 떠올랐다며 검을 하나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귀신의 검.'

세간에서 스이카를 두고 부르는 이름이었다.

생김새도 생김새였지만 검집에서 뽑는 순간의 소리가 가장 큰 이유였다.

남자가 가장 많은 재능을 가지고 개량한 기술은 발도.

발도 속도만으로는 세상 그 누구도 남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검집이라도 바꿔야 하나.'

특이한 검과 검집의 모양 때문에 스이카는 검집에서 나오는 순간 귀신 울음소리를 냈다.

원래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지만 여기에 남자의 순속급 발도가 더해지니 귀를 째는 비명소리가 된 것이었다.

"하아."

앞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를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시체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다른 이의 죽음에 무뎌져 버렸다.

그만큼 베고 베고 또 베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내 이름을 아는 이가… 한 명은 있을까?'

10년 전의 바람처럼 강해졌지만.

10년 전의 꿈은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세상 모두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면 저절로 이름이 떨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의 이름을 아는 이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 입 닥쳐! 이 귀신아!

- 이 괴물새끼!!

- 죽어라 이 귀신아!

가서 이름을 알리라고 일부러 살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퍼지는 건 남자의 이름이 아닌 백발의 귀신이란 이명 뿐이었다.

'기가 차네.'

이쯤 되니 억울하기보단 허탈함이 느껴졌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꿈에서 멀어지는 꼴이라니.

이렇게 아이러니한 일이 또 있을까.

투두둑.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공허함을 함께 슬퍼해주려는 듯한 비였다.

'이름을 귀신이라고 개명해야 되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시원한 비를 맞이했다.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씻으며 내려가는 참으로 상쾌한 비였다.

그렇게 남자가 비를 즐기고 있을 때.

찰박.

"응…?"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남자가 있는 곳은 깊은 산골짜기.

거기에 비까지 이렇게 오는데 누군 걸까?

"누구냐?"

고개를 돌린 곳.

그곳에 서 있는 건 한 명이 아니었다.

말을 탄 최소 수백의 병력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 때문에 못 들은 건가.'

잠시 응시하고 있자 병력의 중앙에서 귀한 집안 자제처럼 생긴 남자가 등장했다.

병력이 길을 터주는 걸로 보아 무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히라이 테즈카."

예의 바르게 자기소개를 한 테즈카가 고개를 숙였다.

"이 산에 귀신의 검을 다루는 자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테즈카가 남자의 발밑에서 굴러다니는 몇 개의 머리를 응시했다.

"당신인 것 같군요. 그 귀신이."

귀신이란 단어에 남자가 혀를 찼다.

'쯧, 이놈이나 저놈이나.'

"가라. 오늘은 더 안 죽이고 싶으니까."

손을 휘휘 저으며 남자가 몸을 돌렸다.

비까지 와서인지 오늘따라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그 검, 절 위해서 휘두르지 않겠습니까?"

"뭐?"

걸음을 멈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란 말인가.

얼굴에 비웃음을 머금은 남자가 테즈카를 응시했다.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 심심해서 찾아온 거 같은데…. 난 그런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 없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가라."

마지막 경고를 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

"장난이 아니라면요?"

"…?"

멈춰있던 테즈카가 남자를 향해 발자국을 내디뎠다.

"테즈카님!"

그런 테즈카를 말리려는 병사에,

슥.

테즈카가 물러나라는 듯 손을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바로 앞까지 다가온 테즈카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인 줄 알면서도 당당하게 다가오다니.

배짱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소개하죠. 제 이름은 히라이 테즈카. 히메지 성의 주인입니다."

"!"

스윽.

테즈카가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전 성주로 생을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에 칼을 들이댈 예정입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

테즈카를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함께 간다면, 난 뭐를 얻을 수 있지?"

부와 권력 따위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다.

남자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뿐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새겨드리죠."

"!!"

"역사에 새겨진 당신의 이름은 이번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다음 다음 세대까지. 영원히 전해질 겁니다."

두근.

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테즈카를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좋다, 그대의 적. 내가 모조리 베어주지."

62화. 귀신의 이름

그렇게 붙잡은 테즈카의 손.

이름을 새기기 위해 붙잡은 손은 야차의 손이었다.

끼아아아아악---!

그 손을 잡은 뒤로 스이카의 비명이 멈춘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내가 무슨 손을 잡은 거냐.'

남자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역사에 새겨주겠다는 말에 혹해 덥썩 붙잡은 손이었는데.

끼아아아아악--!

'이렇게 싸웠는데도 제대로 안 새겨주면.'

서걱!

'바로 참수다!'

귀신이란 별명이 붙기까지 죽여왔던 사람보다 테즈카의 손을 잡은 뒤 죽인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만큼 테즈카가 걷는 길은 피가 가득한 수라의 길이었다.

"수고했다. 오늘 네 덕분에 고비를 넘겼구나."

싸움을 끝내고 돌아오면 언제나 테즈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성의 장군, 조금 있으면 한 나라를 지휘할 수도 있는 테즈카가 친히 행차를 해주는 것이었다.

"한 전투에 한 페이지 씩. 내 이름 분량 확실하게 하라고."

남자가 종종 하는 농담에 테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선 장군에게 반말을 한다며 남자를 안 좋게 보는 시선이 많았지만, 테즈카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예를 강요하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 수천의 적을 베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전투는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으니까요."

반농담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테즈카는 언제나 진지하게 대답을 해줬다.

"…."

남자가 그런 테즈카를 조용히 응시했다.

싫지 않았다.

처음엔 각자의 목적을 위해 협력한 사이였지만.

지금쯤 되니 테즈카를 위해 검을 휘두르는 행위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별로 안 남은 건가?"

남자가 테즈카 옆에 놓여 있는 지도를 바라봤다.

전부 붉은 색이었던 각 지역의 성이 테즈카의 푸른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세상을 향한 테즈카의 도전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예, 이 산등성이의 성만 차지한다면 승기는 저희 쪽으로 기웁니다."

테즈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만큼 이번엔 90% 이상의 병력을 전부 투입할 생각입니다."

선택과 집중.

테즈카가 구사하고 있는 전술이었다.

보통은 아군 진지의 방어를 고려해 병력을 배분하지만, 테즈카는 그러지 않았다.

손에 넣어야 하는 성이 있다면 아군의 방어는 어느 정도 포기한 채 전 병력을 쏟아부었고, 실제로 그 전술은 유효히게 적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과감한 배분이군."

테즈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남자를 응시했다.

'귀신이여, 당신 덕분입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테즈카의 전술은 무모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테즈카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술은 무모한 걸 넘어 도박에 가까운 전술이라는 것을.

하지만,

귀신이 같은 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박에 가까웠던 확률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전력.

그것이 귀신이었다.

- 테즈카는 실패할 겁니다.

일본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테즈카는 아닐 거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병력이 부족했다.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전력.

이건 가진 것을 방어하며 전쟁을 치룰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감사를 표합니다, 귀신이여.'

귀신으로 인해 얻은 건 공격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 뿐만이 아니었다.

적들의 많은 시도가 있었다.

공격에 집중한 테즈카를 빈집털이하기 위한 시도.

- 끼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빈집털이의 성공을 확신하고 온 자들을 반긴 게 백발의 귀신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은 적들.

테즈카는 그 덕에 공격을 더욱 쉽게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럼 난 이만 들어가지."

테즈카가 몸을 돌린 남자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존재만으로도 너무 강력해 전술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남자.

'계속… 계속 그렇게 저를 위해 싸워 주십시오. 제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죠.'

* * *

오래된 전쟁 속에서 승기는 테즈카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테즈카는 승리의 추를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는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고 그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 적 역시 히메지 성을 노리고 대군을 보내왔다.

"성을 함락시켜라!"

"히메지 성만 손에 들어온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평소보다 더 텅텅 비어버린 히메지 성을 함락시키고 적장인 테즈카를 잡기 위해 방어까지 포기해 가며 강수를 둔 것이었다.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진군하라!"

허술해도 너무 허술한 히메지 성의 방어.

공격을 온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승리를 확신했다.

안에 그 유명한 귀신이 있더라도 이건 한 사람이 막아낼 수 있는 군세가 아니었다.

쾅!

그렇게 확신과 함께 열어젖힌 히메지 성의 성문.

예상대로 백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두렵진 않았다.

뒤에 있는 건 수만의 군대였고, 세간에 퍼진 귀신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100%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 명이 전부를 막아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히메지 성을 지켜낸 백발의 남자.

도망친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든 병력이 죽어버렸다.

"가거라, 보내주마."

다다다다…!

마지막 적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걸 보며 남자가 검을 내렸다.

"후우…!"

정말 긴 전투였다.

지금까지 치뤘던 어떤 전투보다도 길고 힘들었다.

으득.

"으."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른 오른팔에서 뼈의 비명이 들려왔다.

너무 무리한 것 같았다.

몇 번만 더 휘둘렀다간 팔 자체가 박살 날 듯한 고통이었다.

비틀.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감각이 어색해진 다리까지.

남자가 간신히 다리를 끌며 성으로 몸을 돌렸다.

"…!"

그런 남자를 귀신 보듯 쳐다보고 있는 성의 사람들.

사람들 사이로 테즈카의 모습이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남자를 반겨주기 위해 나온 듯했다.

"오늘은 한 페이지가 아니라 열 페이지는 써줘야겠는데."

지친 상태에서도 농담을 건네는 남자에 테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이번 전투로 승기는 확실하게 넘어왔으니까요."

테즈카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도와드리지 않고 뭘 하느냐."

"예!"

남자의 곁으로 붙는 여럿의 병사들.

"뭘 새삼스럽게 도와줘. 치우고 방에 따듯한 물이나 준비…."

푹.

"…?"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남자가 고개를 내렸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꽂히는 검들.

울컥!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

피를 토한 남자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뭐… 냐…?"

간신히 고개를 든 남자가 테즈카를 응시했다.

테즈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입니다."

테즈카가 천천히 남자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가장 빛나야 하는 건 저고요."

척.

테즈카가 남자를 향해 몸을 수그렸다.

"함께 이름이 쓰이기엔… 당신의 빛은 너무 강합니다."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오랜 남자의 꿈이었다.

동시에 서서히 커져갔던 테즈카에 대한 신의.

꿈과 신의가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다.

"언제… 부터냐."

"처음부터입니다."

테즈카의 목소리가 차갑게 남자의 귀로 꽂혔다.

"빗속에서 손을 뻗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이름은 단 한 차례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

테즈카가 스이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좋은 검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안 남겠지만, 이 검은 제가 오래도록 남겨드리겠습니다."

스이카를 가져간 테즈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사라져 주시길."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조금씩 멀어지는 테즈카의 뒷모습.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피식.

남자의 등 뒤로 마지막 검이 내리꽂혔다.

* * *

….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망령은 사라진 뒤였다.

더듬.

조금 전 검이 지나갔던 몸을 만져봤다.

안 베였다…?

분명 상체 옆으로 서늘한 검기가 느껴졌는데 어떻게 된 걸까.

"베인 줄 알았나? 생각보다 겁이 많군."

원래의 위치에서 남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철컥.

스이카를 집어넣은 남자가 나를 응시했다.

"경계 안에서 무얼 벨지 정하는 건 검을 쥐고 있는 나다. 잊지 말아라."

내가 베이지 않은 이유를 말해주는 남자.

하지만, 내가 지금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 전 봤던 건 분명 남자의 과거였다.

그런 배신을 당했는데 어떻게?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

"내가 주저앉아서 절규에 찬 비명을 지르며 복수를 다짐하지 않아서?"

팔짱을 낀 남자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허.

끝이었다.

오래전의 이야기라서.

이 한 마디가 남자가 한 말의 전부였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후회하며 절규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 말한 남자가 개운하단 얼굴로 날 응시했다.

"멈춰있는 과거를 돌아보기보단,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현명하겠지."

스윽.

남자가 차고 있던 스이카를 건넸다.

"검을 가지러 온 거겠지? 가져가라."

"…."

내밀어진 스이카를 한 번 본 후 다시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검을 받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빨리 물어봐라, 팔 아프니까."

한 번 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귓가로 들린 이름을 되뇌며 머리에 새긴 뒤.

"제가 스이카를 받아 지키려는 사람 중에는 당신을 속이고 배신했던 자의 후손이 있습니다."

바깥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

좀 걱정되긴 했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그런 배신을 당했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냐, 오래전의 일이라고.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꿈도 이루었다."

"무슨…?"

저벅.

다가온 남자가 손을 들어 내 이마를 가리켰다.

"한 명이면 충분하다."

"…!!"

덥썩.

손으로 남자가 쥐여 준 스이카가 느껴졌다.

스르륵.

스이카를 넘겨주기 무섭게 남자의 모습이 하얀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찌 충분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남자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 될 남자이거늘."

"…!!"

스륵.

입자가 된 남자가 완벽히 사라지고, 손에 쥐어진 스이카의 감각을 느꼈다.

확실히… 새겼습니다.

당신의 이름.

* * *

쐐에엑!

"죽여라!"

"사방에서 덮치면 끝이다!"

복면의 암살자들이 정면과 옆, 천장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치지직.

왼발을 뒤로 빼며 자세를 낮추고,

"스으으…."

한 차례 호흡을 내쉬며 몸을 가라앉힌 뒤 두 눈을 감았다.

- 정하는 건 검을 쥐고 있는 나다. 잊지 말아라.

내가 베어야 할 것과 베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한 뒤.

깊숙이 새겨져 절대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떠올렸다.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철컥.

[발도]

끼아아아아아아아악----!!

63화. 스이카

스이카를 꺼낸 순간 주변으로 원형의 푸른 경계가 그려졌다.

그리고 검을 뽑기 위해 오른손에 힘을 준 순간.

찌릿.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집에서 뽑히기 전 검에 압축되기 시작한 힘.

스이카의 발도는 검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힘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뽑는다.

허리춤에서 귀를 찢는 비명이 터져 나오며 백색의 검기가 주변을 갈랐다.

스이카를 꺼내 검을 휘두르기까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나타난 암살자들이 발을 딛지도 못한 상태.

후두둑!

잠시 후, 바닥에 발을 디딘 건 발이 아닌 다른 부위들이었다.

옆과 정면에서 달려들던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검기에 갈라져 하나였던 게 둘이 되고, 둘이었던 게 넷이 되어버렸다.

"후우…."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다시 검을 거둬들였다.

철컥.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해진 방.

방 안엔 검집과 만난 검의 마찰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

소름이 돋으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간과했던 게 있었다.

덜덜.

온몸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쩡.

모든 게 멀쩡하게 붙어있는 최리아가 보였다.

휴우우우우!

본능적으로 최리아를 적으로 간주해 베어 버렸을까 봐 식겁했다.

큰일 날 뻔했네.

안도감을 느끼며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유롭게 승리를 확신하며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나카지와 암살대들.

지금은 그 여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

내 물음에 정신을 차린 나카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쥐가 너무 쎄서 당황스럽나 보네."

조롱하는 미소를 짓자 나카지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부하들 앞에서 조롱당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 분노한 느낌이었다.

"겨우 럭키 펀치 한 방으로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스윽.

내게 창을 겨눈 나카지가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잡았다.

사삭.

그런 나카지의 발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시전하는 암살대들.

나카지의 발아래로 묘한 기류가 중첩되기 시작했다.

버프 같은 건가.

나카지는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듯한 자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날 간사이의 호랑이로 불리게 했던 기술이다."

미친놈.

순간이지만 검을 놓칠 뻔했다.

지 입으로 저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손발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넌 나의 모습조차 보지 못할 것이다."

스포츠로 치면 나카지는 약쟁이 새끼였다.

지 스스로의 힘도 아니고 뒤에서 부하들이 걸어 주는 버프를 받는 프로 도핑러.

그러면서도 저렇게 기고만장한 모습이라니 혀가 내둘러졌다.

"나의 창은 속사의 창. 눈 깜짝할 사이 너의 심장을 꿰뚫는다."

"거 말 더럽게 많네. 입 닥치고 빨리해."

웬만하면 마지막 유언이다 하고 들어주려고 했는데.

더 이상 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더 들었다간 손발이 오그라들어 검을 휘두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쿠웅.

준비를 마친 건지 나카지의 발아래로 기류가 터져 나왔다.

"받아라! 최고속의 창을!"

허 참.

스프링처럼 폭발해 내게 날아오는 나카지.

어이가 없었다.

최고속의 창이라니.

아마 자기 창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줄 아는 것 같다.

"스으으…."

조금 전에 보고도 인정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저런 놈에겐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최고속이란 게 무엇인지를.

스릉!

비명과 함께 뿌려진 첫 번째 검기가 나카지의 다리를 갈랐다.

철컥. 스릉!

두 번째 검기가 나카지의 팔을 갈랐다.

멈칫.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걸까.

나카지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너의 창이 내게 닿을 시간이면."

"…?"

푸슉.

"백 번은 휘두르고도 남는다."

푸화아악!

"끄아아아아악!!"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 나카지의 몸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땅을 디뎠던 두 다리와 창을 들고 있던 두 팔을 뒤에 남겨둔 상체뿐이었다.

"!!!"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피.

"나… 나카지 님…!"

"잊지 마라."

"?"

"그 선, 넘으면 죽는다."

그렇게 믿고 있던 대장이 처참하게 당해서일까. 

암살대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철컥.

주춤.

검을 거둬들이기 무섭게 경계보다 더 멀리 뒷걸음질 치는 녀석들.

그런 암살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가능에 도전하지 마라. 쫓진 않을 테니."

크으…!

내가 말해놓고도 취하는 느낌이었다.

만화 속 주인공이나 할 법한 대사.

"끄아아아! 끄아아악!!"

울려퍼지는 나카지의 비명과 비례하여 암살대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가고 있었다.

마치 귀신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후… 후퇴해라!"

목표 제거률 100%를 자랑하던 시노카 암살대.

가장 앞에 있던 암살자를 시작으로 암살대 전체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휴.

다행이다.

나 못 움직이는데. 

스이카의 장점과 단점은 뚜렷했다.

사용 시간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었고, 두 발을 원래 있던 위치에서 떼는 순간 해제되는 게 단점이었다.

쿨타임도 긴 거 같고.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암살대는 확실히 내빼버린 것 같았다.

슥.

아고 쥐 나겠다.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자 스이카가 해제되어 사라졌다.

코지로는 어떻게 이 자세로 일주일 가까이 검을 휘두른 거지?

그 독함에 고개가 내저어졌다.

"…."

비명을 지르다 말고 기절해버린 나카지.

여전히 굳어 있는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놈 지혈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

"아직 죽으면 안 돼서요."

* * *

다음 날 아침.

난리가 난 히메지 성으로 장군의 연락을 받은 성의 병력이 돌아왔다.

오래전부터 성을 지켜온 충신들로 이루어진 부대.

부대에 의해 난리가 났던 성의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실장님, 괜찮으세요?"

중앙성 내부에 위치한 VIP 객실.

전수희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최리아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지만, 전수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수희 님은 어때요? 다친 데는 없나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전수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한숨을 내쉰 최리아가 어제를 떠올렸다.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꺼내고 있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백운이 아니었다면 전부 속수무책으로 죽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죽을 뻔… 했구나.'

대산에 들어간 이후 모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최리아였다.

수많은 토벌전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며 많은 싸움을 봐왔고, 소속 헌터들의 죽음 역시 많이 봐왔었다.

하지만, 모두 모니터 너머에서 본 것들이었다.

'이렇게… 다르구나.'

죽을 뻔했다는 것.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보는,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경험이었다.

대산의 높은 층에 앉아 있을 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어제의 최리아는 엄청난 무력감을 경험하고 말았다.

꿀꺽.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제.

최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백운만을 바라보며 응원하고 있었다.

백운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수희 님, 전 좀 쉴게요."

"아… 네! 조금 이따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전수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갔다.

찰칵.

방의 문이 닫히고.

벌떡!

자리에서 급히 일어난 최리아가 화장실로 향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변기를 열자마자 위액이 쏟아졌다.

"하아… 하아…."

백운에게 의지했기 때문에, 실제로 백운이 자신과 전수희를 구해줬기 때문에.

그래서 백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 부탁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백운은 조용히 최리아를 찾아왔다.

-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지금 향하는 곳은… 끔찍할 테니까요.

거절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구해준 걸 떠나서라도 백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우욱.

그렇게 도착한 히메지 성 외곽의 버려진 창고.

들어가마자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

코를 넘어 뇌까지 도달하는 끈적한 피비린내.

창고 안에는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넝마가 되어 목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나카지가 있었다.

- 암시를 걸어 주세요.

창고로 들어선 최리아에게 백운이 부탁한 것이었다.

- 저놈에게… 알아내야 할 게 있습니다.

"하아… 백운…."

화장실 벽에 몸을 기댄 최리아가 두 눈을 감았다.

백운을 토벌전으로 끌어들인 순간부터 광산, 그리고 70층에서 백운을 협박했던 일까지.

꿀꺽.

그 모든 일들이 몹시 무모한 행동이었다고 느껴졌다.

"귀신…."

창고에서 나카지의 피를 쓴 채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던 백운.

덜덜.

최리아의 몸으로 이제껏 느껴본 적 없었던, 공포란 감정이 또렷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 * *

고풍스러운 일본의 대저택.

엄청난 규모의 저택의 중심에 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카지는 죽었다고?"

눅눅하고 끈적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 앞에서 몸을 한껏 낮추고 있는 복면의 남자.

히메지 성에서 도망쳐 나온 시노카 암살대 중 한 명이었다.

"예, 히무라 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죽었을 겁니다. 사지가 모두 잘렸었습니다."

"흐음."

시노카 암살대의 주인이자 한국 기업들과 협력해 회담을 망치려 했던 히무라.

"살아남은 암살대는?"

"총 700명으로 현재 이 저택에 모두 대기 중입니다."

"알겠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히무라가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최악이라 가정했던 상황보다 훨씬 안 좋았다.

회담을 망치기는커녕 나카지마저 잃고 오다니.

'한낱 사냥개일 뿐이지만 여기서 잃을 놈은 아니었는데.'

무언가를 생각하던 히무라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물을 게 있었다.

"다시 들어오거라."

"…."

방금 전 시야에서 벗어난 암살대.

목소리가 닿는 가까운 곳에 있을 터였다.

"…? 다시 들어오…!!!"

텅.

데굴데굴.

무언가 히무라가 앉아 있는 앞으로 굴러들어왔다. 

조금 전 나갔던 암살대원이었다.

저벅.

"…!!"

잠시 후, 열려있는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사람이 아니었다.

온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고 있는,

'귀신…?!'

귀신이었다.

* * *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노인.

- 히… 히무라… 히무라다. 위치는.

최리아의 암시에 걸려 자신의 주인에 대해 술술 고백한 나카지.

나카지의 말을 따라 도달한 곳엔 도망쳤던 시노카 암살대가 있었다.

- 끄륵…!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대.

내가 지켜야 할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자유롭게 면도칼과 동기화를 할 수 있었다.

"너구나, 나카지를 죽였다는 게."

"정확히는 시노카 암살대겠지."

"…!"

약 3분 전부터 시노카 암살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내 다 들어줄 수 있는 힘이 있다. 권력이냐? 아니면 돈이냐?"

침착하게 말을 건네오는 노인을 뒤로 하고,

스윽.

고개를 들어 노인의 뒤를 바라봤다.

익숙한 모양의 톱니바퀴 검이 놓여져 있었다. 

본 건 오래 전 단 한 번뿐이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천천히 노인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태연한 듯 앉아있지만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노인은 겁에 질려있다는 것을.

"너의 죽음이다."

"어째서지? 날 죽인다고 해서 네가 얻는 건 없다. 그리고 난 너에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거늘."

"맞아, 너가 나한테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럼 왜 이렇게까지…?"

스윽.

조금 더 가까이 가 노인의 두 눈을 노려봤다.

"이번 생엔 말이야."

"뭐…?"

쐐엑!

노인이 인지하지 못할 속도로 면도칼을 휘둘렀다.

깔끔하게 노인의 목을 베고 지나간 면도칼.

"!?"

푸화아악!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가는 노인.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

그런 노인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것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해라."

64화. 이미 충분

어둠이 깔린 회의실.

#….

#….

화상 회의엔 많은 이들이 참석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

그건 연수정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불만을 가지고 회의에서 날카로운 뱉어내던 연수정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조금 전 들은 보고를 다시 한번 되물을 뿐이었다.

"… 히무라 님이 죽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조금 전에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같은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이긴 했지만, 화상 회의에 있는 모든 이들이 미래의 경쟁자였다.

그렇기에 필요한 정도만 협력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 위험한 노인네야.

그중에서도 연수정이 가장 경계했던 게 히무라였다.

일본의 보이지 않는 큰 손.

정치, 경제 등 히무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 위험한 암살대까지 거느리고.

연수정을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도 사적으로 부릴 수 있는 헌터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히무라의 암살대는 위험했다.

개방이란 게 나타나기 전부터 히무라는 암살대의 육성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기에 시노카의 규모와 강함은 항상 위험이 되는 요소였다.

# 한칼에 목의 대동맥과 대정맥이 끊어졌습니다. 발견했을 땐 몸에 있는 피가 대부분 빠져나간 뒤였다고 하더군요.

"…."

# 그리고 현장엔 약 700명 가량의 시노카 암살대의 시체들이 늘어져 있었고요. 그 시체들도 대부분 몸에 피가 남아있지 않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 히무라가 죽어버렸다.

그것도 혼자 비명횡사 한게 아니었다.

누군가 대저택을 지키고 있던 시노카 암살대 700명을 뚫고 죽인 것이었다.

# 시노카를 포함해 히무라까지… 전부 똑같은 상처였습니다.

제일 기가 찬 부분이었다.

시노카 암살대를 능가하는 병력이 습격한 거였다면 오히려 납득을 했을 것이다.

어떤 전력이든 그 전력을 뛰어넘는 이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가 모두 같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히무라를 포함해 시노라 암살대를 전멸시킨 건… 단 한 명.'

명확한 증거가 있었지만 쉽게 믿기지 않는 진실이었다.

'대체 어떻게?'

전해 들은 순간부터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들 중 일본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저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국가 소속 1급 헌터들이나 각 기업을 지키는 기둥급 헌터들, 혹은 타 국가의 비슷한 수준의 헌터.

이미 세간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괴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수정의 정보망에 의하면 그들은 어젯밤 일본에 있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괴물이 하나 더 있다.'

지금 연수정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요소였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보이지 않는 위험.

리스크를 가늠할 수조차 없기에 두려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 모임은… 잠시 멈추도록 하죠.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연수정뿐 만이 아니었다.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보이지 않는 괴물의 칼이 자신들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 지금은… 숨을 죽여야 할 때입니다.

평소라면 겁쟁이라고 비난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하죠."

고개를 끄덕인 연수정이 버튼을 눌러 회의를 종료했다.

꿀꺽.

'대체 누구냐…!'

연수정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 * *

와구와구!

리필되어 나온 닭다리를 집어 들었다.

와작!

시원한 소리와 함께 닭다리의 살이 쏘옥 분리되었다.

히라이 쇼고가 대산의 인원들을 위해 차려 준 만찬.

정확히는 대만찬이었다.

상다리가 안 부러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식탁.

단기 기억상실증인가.

회담 직전에 먹었던 밥을 제외하고는 오늘까지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바빴기 때문.

그래서인지 앞에 나온 만찬을 본 이후로 지금까지, 약 20분 가량의 기억이 끊어져 있었다.

흥건.

손에 범벅이 되어있는 기름과 든든한 배를 보니 기억이 사라진 사이에 뭘 했는지는 명확했다.

음! 제대로 먹었구만.

만족하며 다시 음식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

왠지 모르게 고요한 공기에 슬쩍 눈을 돌렸다.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는 것조차 까먹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의 눈은 전부 날 향하고 있었다.

"저… 정말 잘 드시네요, 백운 님. 안에 있는 요리사가 기뻐하겠군요."

쇼고에 이어 유난히 눈동자의 흔들림이 잘 보이는 전수희도 입을 열었다.

"백운 님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느낌이에요."

"하하…."

멋쩍게 웃으며 옆에 놓인 냅킨에 손을 슥슥 닦았다.

늦은 것 같지만 이제부터라도 지성인답게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잘 못 먹는구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 죽을 뻔한 건 물론이요 피가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걸 정면으로 봤으니 말이다.

스윽.

고개를 들어 최리아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특히 음식에 손을 못 대고 있는 모숩.

좀 미안하네.

- 차라리 죽여!! 이 악마 새끼야!!

창고에서 절규하던 나카지.

고문 스킬이 부족해서인지 거의 하루 넘게 괴롭혔는데도 나카지는 주인에 대한 정보를 말하지 않았다.

그때 떠오른 게 최리아의 암시였다.

정말 아쉬운 소리 하고 싶지 않았지만, 쿄스케에게 잠정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놈들을 남겨두고 떠날 순 없었다.

한국으로 갈 때 한 번 더 사과해야겠다.

토벌전에서의 일은 토벌전에서의 일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끔찍한 걸 보게 했으니 다시 한번 사과를 할 생각이다.

"백운 님, 식사가 끝나면 잠시 뵙도록 하죠."

예의 바른 쇼고가 말을 건네왔다.

아마 어젯밤 부탁했던 것 때문이리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쇼고가 뒤에서 대기 중인 요리사를 바라봤다.

"백운 님 자리에 닭고기 좀 더 가져다 주실래요?"

* * *

즐거운 식사가 끝난 후.

끼익… 탁.

쇼고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하인들과 함께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 사사키 코지로에 대한 기록을 찾아봐 주실 수 있나요?

어젯밤, 꽤 오랜 시간동안 스이카에서 본 것들을 쇼고에게 이야기해줬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경청한 쇼고.

- 일단 기록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쇼고는 기록을 찾아보겠다며 방을 나섰었다.

탁.

쇼고가 서랍에서 한 뭉치의 서적을 꺼내 들었다.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여기저기가 헤지고 찢어져 있었다.

제대로 된 기록이라기보단 개인적인 일기장 느낌이 더 강하게 나는 책.

"선조인 히라이 테즈카 대에 쓰여진 일기입니다. 역사를 기록하던 서기의 개인적인 내용이죠."

쇼고는 테즈카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들려주었다.

승기를 확실히 잡은 듯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적들의 동맹에 밀려 결국엔 일본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굴욕적인 협약을 통해 히메지 성을 포함한 좁은 영토만을 제외하고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된 것.

"그리고, 여기에 쓰여져 있더군요. 백발의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요."

"…!"

"솔직히 백운 님의 말을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이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며, 수백 년은 더 된 이야기를 백운 님은 어떻게 다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목숨을 구해주긴 했지만 난 타국의 이방인.

그런 이방인이 선조의 역사를 부정하며 조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니 어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완벽히 일치하더군요. 주군이 무서워 공식적인 항명은 못 했지만,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남긴 일기장. 백운 님이 들려주신 것과 완벽히… 같았습니다."

"…."

왠지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짓는 쇼고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슥.

고개를 든 쇼고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 기록을 가지고…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쉽게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 기록의 주인공인 사사키 코지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복수도, 잘못된 기록이 바로 잡히는 것도, 그저 오래된 일이라며 상관없다고 했었습니다."

"… 그렇군요."

"그리고 전 마지막으로 테즈카의 후손인 쇼고 님을 지키기 위해 스이카를 써도 되냐고 물었었습니다."

"…."

작은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도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그저… 오래된 일이라고."

"!!"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말씀해주세요."

약간의 숨을 들이쉬고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만약 사사키 코지로가 쇼고 님을 위해 스이카를 쓰길 원치 않았다면…."

말끝을 흐리며 쇼고의 눈을 바라봤다.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하… 그렇군요."

의자에 몸을 기댄 쇼고가 눈을 감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등에 칼을 꽂은 자의 후손을… 살려주었다라."

* * *

우글 우글 우글.

와작.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베어 물며 정면을 바라봤다.

히메지 성의 중앙에 새까맣게 모여있는 일본의 기자와 역사 학자들.

"백운 님, 엄청난 일을 저지르셨네요."

옆에 앉은 쿄스케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스이카를 넘긴 것도 그렇고.

좋은 장군님이야.

기자와 학자들이 모인 이유.

히라이 쇼고는 발견했던 사사키 코지로의 기록을 조금의 수정이나 숨김도 없이 세간에 공개해버렸다.

- 선조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선조가 한 행동에 대한 사과와 함께 말이다.

스윽.

옆에 있는 쿄스케에게 왕만두를 건넸다.

"…."

잠시 만두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리는 쿄스케.

와작.

쿄스케가 받아든 만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더 기뻐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역사를 바로 잡았잖아요."

"지금 간신히 인내하는 중이야."

비슷한 나이에 말을 놓기로 했다.

물론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쿄스케는 존댓말을 계속하고 있지만 말이다.

"속으로만 기뻐하는 타입이군요."

나도 처음 알았다.

기쁘면 항상 방방 뛰고 굴러다니고 그랬었는데.

한계선을 넘는 기쁨이 오니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어쨌든 속으로는 엄청 뿌듯해하고 있죠?"

"당연하지."

물론 쿄스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

내가 뿌듯함과 기쁨을 느끼는 건 역사를 바로 잡아서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쿄스케의 얼굴을 바라봤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

"미칠 듯이 뿌듯해하는 중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쿄스케.

쿄스케가 손에 들고 있는 만두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만나서부터 얻어먹기만 하네요. 백운 님 한국으로 가기 전에 제가 밥 한 번 사야 되는데 말이죠."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쿄스케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미소가 그려졌다.

"와… 백운 님 사양도 할 줄 아는 분이었어요?"

"그런 게 아니라, 받았으니까."

"네…? 받다뇨?"

의아해하는 쿄스케.

그런 쿄스케의 눈을 바라봤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충분히 받았으니까."

65화. 온천은 따듯하다

히메지 성을 떠나는 날.

"백운 님, 한국에서 봐요."

다음 회담을 위해 머지않은 시일 내에 한국으로 방문할 예정이라는 쇼고와 쿄스케. 

쿄스케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좀 못 본다고 모르는 척하지 마시고요."

"어허, 모르는 척이라니."

덥석.

쿄스케의 손을 잡으며 다른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배 터질 때까지 맛있는 거 먹여 줄 테니까 얼른 오도록."

"좋습니다, 비싼 걸로만 먹을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쿄스케와 편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옆에선 최리아와 쇼고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분위기가 훈훈한 걸로 보아 덕담을 주고받는 듯했다.

다행이네.

밝게 웃고 있는 쇼고를 보고 있자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히메지의 중앙성은 기자와 학자들로 가득 찼었다.

그들을 향해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최선의 행동을 보여 준 쇼고.

- 선대의 오점을 바로 잡으려는 용기 있는 장군!

- 그 누가 히라이 쇼고보다 더 솔직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쇼고를 향해 여론은 우호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쇼고가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내 지분이 컸던 건 사실.

이번 일로 여론이 돌아서고 쇼고가 큰 곤경에 처했다면 잘잘못을 떠나 매우 미안했을 것이다.

"저희가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면 좋을 텐데요."

쇼고의 말에 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대산에서 인원을 보내준다고 해서요. 곧 도착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 맞네.

어제 얼핏 들었었다.

히메지 성에서의 일을 보고 받은 대산이 인원들의 안전을 위해 헌터 한 명을 보내준단 것이었다.

그나저나 한 명이라니.

처음에 들었을 땐 좀 의외였다.

받았던 공격 규모를 봤을 땐 한 트럭 정도는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럼 백운 님은 이쪽 차량으로 타시죠."

두근.

어젯밤 일이었다.

첫 해외여행을 사람만 썰다 돌아가기가 왠지 아쉬웠던 찰나.

이제 대산과 동행할 필요도 없는데 잠시 관광이라도 즐기고 가자는 마음이 들었다.

온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일본 여행하면 뜨끈한 노천 온천이 생각나는 게 당연했다.

- 쿄스케, 공항 가는 길에 온천 없어? 난 거기서 좀 내릴까 하는데.

순간 흔들렸던 쿄스케의 동공을 잊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개고생을 한 이후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텐데 온천을 가겠다니.

난 돌아갈 집이 없단다.

고개를 끄덕이며 집이 없음을 눈빛으로 전달했고,

- 온천은 유후인이라고 하던데.

유후인을 원한다는 간접적인 의사도 잊지 않았다.

"하하… 이거 차까지 준비해주시다니."

예의상 말은 했지만 몸은 이미 준비된 차량으로 슬금슬금 나아가고 있었다.

온천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차와 료칸의 예약까지 진행해 준 쇼고와 쿄스케.

- 엄청 비싼 곳이에요.

쿄스케에게 슬쩍 듣기로 쇼고가 예약해 준 곳은 유후인에서도 손에 꼽히는 호화 료칸이라고 했다.

두근두근 하구만.

첫 해외여행에서 호화 료칸이라.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군 채 따듯하게 데운 사케를 한 잔.

크으.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오는 느낌이다.

"나중에 또 봬요, 백운 님."

이제는 대산 인원들과도 헤어져야 할 시간.

찹살떡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네, 수희 님 조심히 가세요."

스윽.

쇼고와 이야기를 마친 최리아도 천천히 고개를 숙여왔다.

-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제 최리아에게 창고에서의 일을 사과하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과거는 묻어 두고서라도 너무 멘탈 나갈만한 장면을 보여준 건 사실이니 한 건데 의외로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 최소한의 보답을 한 거니까요.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

당연하겠지만 최리아는 며칠간 함께 한 정이나 의리 때문에 도와준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받은 것에서 어느 정도는 다시 돌려준다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깔끔한 기브 앤 테이크 논리.

마음은 편하지만.

덩달아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역시 어려운 사람이야.

어려운 사람.

히메지 성으로 함께 향하기 전만 해도 마음속에서의 최리아는 그저 독한 년이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이 호전된 느낌이다.

어쨌든 진짜 볼 일 없겠지.

찹살떡을 못 보게 되는 건 좀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각자 갈 길이 다른 것을.

휘적휘적.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 * *

탁.

차 문을 닫는 최리아를 향해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구만, 최리아 실장."

차를 직접 운전하고 온 중년의 남자.

대산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급 헌터 중 한 명, 장판석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판석 님."

"안… 안녕하세요!"

뒤이어 차에 탄 전수희에 장판석의 눈이 커졌다.

"아니 뭐야, 이 찹쌀떡은."

"네… 네? 찹쌀떡요?"

작은 체구에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까지.

어릿어릿한 전수희의 모습에 놀란 모습이었다.

"이야."

전수희와 최리아를 번갈아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장판석.

"무슨 의미시죠?"

최리아의 물음에 장판석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둘 다 고생이겠구나 싶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당황하는 전수희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리는 최리아.

두 사람을 보며 웃은 장판석이 입을 열었다.

"죽을 뻔했다면서?"

"…."

최리아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뻔한 걸 넘어 확실히 죽는 상황이었다.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죠."

"그러게 회장님 말 좀 듣지 그랬어."

원래였다면 받아쳤겠지만 저 건에 있어선 할 말이 없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으니 장판석의 복귀를 기다렸다가 같이 가라고 말했던 소피아.

하지만 오래 기다려 온 회담인 만큼 일정을 미루고 싶지 않았기에 최리아는 강행군을 선택했다.

"부산에서 일은 잘 끝나셨나요?"

"대산이 매입한 부지 쪽은 다 정리 끝났어. 아마 잔챙이 몇 마리 정도나 남아있을 거다."

사업 확장을 위해 대산은 부산의 땅을 매입했다.

데몬이 들끓는 곳이라 모두가 기피해 땅값이 매우 낮은 곳이었지만.

장판석이 감으로써 이젠 데몬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변하게 되었다.

"아까 다른 차 타고 가던 게 그 유명인이고?

처음 보는 장판석에 조용히 쭈그러져 있던 전수희.

장펀석이 그런 전수희를 위해 질문을 던져줬다. 

"아… 네! 맞습니다."

"시노카 암살대를 박살 낸 것도 고놈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전수희에 장판석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노카 암살대와 나카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암살대치고는 큰 규모로 간사이의 호랑이라 불리는 나카지를 필두로 활약하는 살수들.

"소식 들었지? 히무라 그 노인네가 죽었고, 그곳에 시노카 암살대가 있었다는 거."

"네, 비공식 루트로 들었습니다."

일본 정재계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히무라.

그런 히무라가 암살대와 한 공간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껄끄러운 건지 일본 정부는 해당 사건을 철저히 은폐해버렸다.

워낙 큰 학살극이 벌어졌다 보니 완벽하게 숨기진 못해 이렇게 흘러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

잠시 침묵하고 있던 최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백운입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 제가 도와줬으니까요."

"!"

최리아의 말에 전수희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부탁을 받고 나카지란 남자에게 암시를 걸어줬고, 나카지가 말한 곳이 히무라 저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백운 님은 히메지 성에 없었고요."

"그렇군."

전수희와 달리 장판석은 그다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작은 한숨을 내쉬며 정면을 응시하는 최리아.

"찾아내야죠."

꿀꺽.

침을 삼킨 전수희가 최리아를 바라봤다.

최라아가 제대로 마음먹었을 때만 나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판석.

잠시 최리아를 쳐다보던 장판석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누가 더 쎈 거 같아?"

"예? 누가 더 쎄다니…?"

"나랑 백운이란 남자 중에서 누가 더 쎈 거 같냐고. 내가 싸우는 것도 본 적 있으니 대충 감이 올 거 아니야."

장판석이 생글생글 웃으며 장난스레 질문을 건넸다.

궁금했다.

싸움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타인이 봤을 때 누가 우위에 있을지 말이다.

"…."

잠시 고민하던 최리아가 말을 시작했다.

"글쎄요, 제가 싸움에 특화된 능력자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한 가지 있습니다."

장판석과 전수희가 최리아를 응시했다.

최리아의 머릿속에선 히메지 성에서 봤던 백운의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회담 장소에서 나카지와 암살대를 썰어버렸던 장면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나카지를 피떡으로 고문하던 악귀 같은 장면.

거기다 정보를 얻기 무섭게 찾아가 히무라와 암살대를 전멸시켜버린 것까지.

"절대… 적으로 돌려선 안 된다는 것."

* * *

푸우우우우우…!

"끄… 끄아…!"

누가 들으면 칼에 찔렸나 의심할 것 같았다.

온도 머선 일이고 이거.

조금 전 입수한 료칸의 야외 온천.

나를 위해 온도를 맞춘 건가 의심이 되는 최적의 온도였다.

서서히 잠기는 발끝을 시작으로 목까지 올라오는 이 간질거림.

극락이다.

히메지 성에서도 좋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긴 했지만, 뭔가 2% 부족한 느낌이었었다.

몸속까지 찌든 피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는 그런 느낌.

없어졌어.

확신이 들었다.

몸 안에 뭐가 있었든 지금은 이 온천물에 다 씻겨 내려갔다.

동동.

!?

잠시 후 온천의 한쪽 벽이 열리며 작디작은 소형 나룻배 하나가 들어왔다.

왜 밥을 안 주나 했더니.

나룻배 위에 밥이 있었다.

보통 밥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모여있는 거대한 나룻배.

모락모락.

그 위엔 조금 전에 데워진 건지 김이 나는 사케도 함께였다.

찔끔.

살짝이지만 눈물을 흘린 것 같았다.

백운, 성공했다 이거.

덥썩.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회를 한 점 먹은 후.

호로록.

데워져 있는 사케를 들이켰다.

"와… 뒤진다."

육성으로 찐 감동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아…!"

나른해지는 몸을 온천의 벽에 기댔다.

산속에 위치해서인지 별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

구름에 가려져 달빛이 잘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이거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스륵.

들어 올린 손을 바라봤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인 건지 세기도 힘들었다.

잭 더 리퍼 주니어가 되어버린 건가.

….

잠시 생각해보니 주니어가 아닌 것 같았다.

숫자의 절대치만 봤을 땐 잭 더 리퍼의 할아버지가 와도 혀를 내두를 수치.

인간 참 모를 일이란 말이야.

솔직히 놀랐었다.

사람을 죽이는데 이렇게까지 별생각이 안 들다니.

곡성에서의 탈옥수들부터 해서 이틀 전 시노카 암살대와 히무라까지.

천이 넘는 놈들을 죽여오며 난 한 번도 죄책감이라던가 망설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싸… 싸이코패슨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간의 고뇌를 마친 후.

호로록!

따라놨던 사케를 쭈욱 들이켰다.

히어로 되긴 글렀구만.

지금까지 봐온 히어로들은 대부분 불살이란 규칙을 중요시하며 지켜왔다.

어기게 되었을 땐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나 죽이겠단 말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길을 걷는데 있어 죽여야 한다고 판단이 든다면.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슥.

손을 들어 가려진 달을 향해 펼쳐 보였다.

최악의 빌런이 될지언정,

꽈악.

단 하나도 포기하거나 놓치지 않는다.

66화. 요정? 데몬?

"후우."

흐물흐물해진 몸을 이끌고 바위로 올라갔다.

온천에 조금만 더 담그고 있다간 흐물흐물을 넘어 몸이 풀어 헤쳐질 것 같았다.

뽀득뽀득.

뭐지, 힐링수인가.

한껏 반들반들하게 된 팔뚝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온천이란 말인가.

자 그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두 눈을 감았다.

화아악…!

깜깜한 밤하늘과 대비 되어 밝은 듯 하지만 동시에 시린 느낌이 드는 달빛.

익숙한 달빛에 반가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왕의 무기고.

이전까지는 의식 너머로 보기만 했을 뿐 무기고의 공간으로는 직접 들어오지 못했었다.

그랬던 무기고가 스이카를 얻은 뒤엔 최소한의 자격을 얻은 건지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졌다.

역시 왕좌는 없구만.

사실 있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맨 처음 만났을 때 카이안이 앉아있던 황금색의 왕좌.

얼마나 모아야 나오려나.

왕좌 주변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무기를 떠올렸다.

아득하구먼.

왕좌에 앉아보려면 삼만 년은 걸리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 주변을 둘러봤다.

흐뭇.

보기만 해도 기분이 뿌듯해지는 나의 작고 소중한 무기들이 꽂혀 있었다.

잭 더 리퍼의 면도칼.

쿨타임이 없어 이제는 내 기본 무기가 되어버린 무기다.

동기화 이후로는 별 기미가 없네.

피렌조와 싸울 때 발현된 기술, 동기화.

이후 기술도 일반적으로는 발현되지 않는다는 건가.

무기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경험치 비슷한 게 쌓여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치가 가득 해지고 적절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무기는 다음 기술을 발현하는 듯했다.

슥.

고개를 돌려 유탈라스의 비늘을 바라봤다.

이건 또 이해되지 않는 타이밍에 발현이 됐었다.

갑자기 만땅이 됐단 말이지.

분명 비늘의 게이지는 한참 부족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 만땅으로 차버린 게이지.

비늘은 게이지가 만땅으로 변함과 동시에 용의 숨결이 발현되었었다.

아주 그냥 제각각이구먼.

알다가도 모르겠는 무기고였다.

너는 왜 얌전하니.

면도칼 옆에 놓여 있는 앤 보니와 메리 리드의 리볼버가 눈에 들어왔다.

사용 시간의 차이 때문인지 리볼버는 면도칼에 비해 게이지가 늦게 차고 있었다.

히메지 성에서 꽉 채우긴 했는데.

야금야금 차더니 저번 히메지 성에서의 사용으로 가득 차게 된 게이지.

그럼에도 리볼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 넌 은연 중에 거부하고 있더군.

동기화를 발현했을 당시 잭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음… 이거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면도칼의 경우엔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간질간질하며 눈앞에 있는 건 다 썰어버리고자 하는 광기.

천 명 넘게 썰어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 광기를 처음 접하는 일반인에게는 거북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분이었다.

보니와 리드는 착하니까 그렇지 않을 거야.

- 널 구해 줄게.

서로를 껴안고 날 구해주겠다 말했던 보니와 리드.

살인광 잭과 비교하는 건 몹시 미안한 둘이었다.

운명에 맡겨야 하나.

면도칼과 비늘의 발현도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됐었다.

피렌조에게 목이 그이지 않았거나 마운티거를 만나 하늘에서 추락하지 않았다면 계속 발현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기다릴 테니까 빨리 되렴.

사삭.

조심스럽게 리볼버를 쓰다듬었다.

마치 얼른 부화하기를 바라는 어미 새의 느낌으로 말이다.

기분 나빠하려나.

보니와 리드를 떠올리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에 호다닥 손을 뗐다.

"후우…!"

달빛이 가득한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올 때마다 참 신기한 장소였다.

넓은 세상 속에 혼자만이 존재하는 듯한 고립감.

마음이 편하고 가벼워지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묘한 공간이었다.

여기도 뭔가 있는데.

분명 무언가 있었다.

무기가 늘어날 때마다 무기고도 뭔가 변해가고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무기마다 양은 다르지만, 확실히 쿨타임은 줄어들고 있어.

그 양이 컸던 면도칼은 이미 쿨타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

다른 무기들도 찔끔찔끔이지만 착실히 줄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뭐라고 명확하게 짚을 순 없지만 무기고의 주인으로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각각 게이지를 가지고 있는 무기와 달리 무기고 전체에도 게이지가 하나 있는 느낌이랄까.

묘하구만, 묘해.

게이지가 무기처럼 명확하게 보이면 참 좋겠지만 무기고는 그렇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게이지가 특정 수준에 이를 때까지 무기를 모아야만 정체를 알 수 있을 듯했다.

해봐야 의미 없는 고민을 마치고 예쁘게 꽂혀 있는 무기들을 바라봤다.

내가 어디 가서 비명횡사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함께할 동반자들이었다.

흐뭇.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어나기 무섭게 료칸을 나섰다.

아직 이틀은 더 묵어야 하는 료칸.

3일을 내리박혀만 있을 수 없으니 마을 구경이라도 할 심산이었다.

"이거 하나 가지고 가세요."

문을 나서려는 내게 꼬치 하나를 건네는 주인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감사히 받아들고 입으로 직행시켰다.

저벅.

우물우물.

꼬치에 있는 오징어를 우물거리며 걸음을 거닐었다.

확실히 이런 맛이 있단 말이야, 일본은.

유후인에선 고층 건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건물이 옛날에 지어진 전통 건물들.

그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것 하나 인위적인 만들어짐 없이 자연에 녹아 있는 다리와 강까지.

여기만 시간이 멈춘 느낌이야.

데몬도 이런 데는 안 나타날 것 같단 말이야.

끼잉….

!!

재수 없는 말을 한 탓일까.

내 말 때문에 데몬이 나타난 줄 알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아니네.

소리가 난 곳엔 작은 검은색 털뭉치 같은 게 하나 널브러져 있었다.

대낮인데도 바들바들거리고 있는 털뭉치.

강아지인지 고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멍멍."

….

"냐옹."

여전히 아무 반응 없는 털뭉치에게 다가갔다.

댕댕이 아니면 야옹이 중에 하나일 줄 알았는데.

내 소리가 잘못됐나.

쭈그리고 앉아 털뭉치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털의 감촉.

순간이지만 이건 킹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야옹아 어디가… 허."

여전히 낑낑거리고 있는 녀석.

녀석은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니었다.

털 북슬북슬한 고양이 같은 생김새긴 했지만, 이마 정중앙에 뿔이 나 있었다.

데몬이다.

회귀하자마자 만난 하운드처럼 강아지나 다른 동물을 닮은 데몬은 많이 있었다. 

발생 초반엔 데몬이 동물들로부터 생겨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로 종류 역시 다양 그 자체.

이건 본 적 없는데.

가운데 뿔을 떠나서 이렇게 귀여운 데몬 자체를 봤던 기억이 없었다.

하운드만 해도 댕댕이과인데도 정신 나간 미친개처럼 생겼고, 다른 과의 데몬들 역시 대부분 하운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끼잉.

!!

심장이 아픈 느낌이다.

데… 데몬이야!

머리와 달리 난 이미 털뭉치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갑자기 거대해져 날 잡아먹을 수도 있으니 긴장의 끈은 최대치로 당겨 놓은 상태였다.

덥썩.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크기.

끈적.

약지에서 느껴지는 끈적함에 돌려보니 피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날카로운 칼 같은 거에 베인 상처였다.

흐음.

묘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데몬들은 모두 만나는 순간 본능이 먼저 경고를 해줬었다.

날 공격할 것이며 당장 죽여야 한다는 경고.

애는 아니란 말이지.

새끼라서 그런가.

뿔만 없었다면 그냥 불쌍한 새끼 고양이었다.

- 모두가 사람을 해치는 데몬만 있는 건 아닙니다.

회귀 전 유물관에서 논물을 발표했던 박사가 있었다.

데몬 중에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는 종도 있었고, 이런 종이라면 우리가 거둬들여 공생해야 한다는 발표였다.

- 정신나간 년!

물론, 종말의 날을 맞은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발표였다.

쏟아진 욕이 주먹이었다면 이미 맞아 죽고도 남았을 정도로 얻어먹고 도망치듯이 유물관을 빠져나갔었다.

솔직히 그렇게 욕먹을 건 아니었는데.

대놓고 데몬을 데리고 싸우는 테이머 능력도 존재했다.

약간 다른 게 있다면 그건 공생이라기보단 힘의 차이로 굴복시켜 싸움에 내보내는 경우지만 말이다.

저번 마운티거랑 계약한 탈옥수도 그렇고.

이미 여러 사람이 능력을 통해 데몬과의 소통을 입증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본능적인 거부감은 어쩔 수 없지.

소통의 가능성을 떠나 데몬하면 무조건 죽여야 하는 걸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긋지긋하게 당해왔으니 말이다.

끼잉.

"수상한 짓하면 바로 하늘나라 행이다."

으름장을 놓은 후 몸을 돌렸다.

돌아가서 대일밴드라도 붙여줄 생각이었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는다.

"저기요!"

몸을 돌려 료칸으로 돌아가려는 길.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헐레벌떡 달려온 건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자.

그 뒤를 따라 일행으로 보이는 대여섯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어디 굴러다녔나.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흙투성이였다.

조금 전 각개전투를 마친 CS 전투복의 느낌이다.

"그거… 저희 거예요!"

"…?"

여자가 가리키고 있는 건 내 손 위에 있는 냥냥이었다.

끼이잉.

더 진한 울음소리를 내며 내 품으로 파고드는 냥냥이.

말이 통하는 건 아니었지만 바들바들 떠는 녀석의 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앞에 있는 여자를 두려워한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인간이 도망치긴커녕 데몬을 쫓고 있는 상황이라니.

거기다,

스윽.

앞에 여자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 뒤의 일행은 아니었다.

나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바들바들.

거기다 점점 떨림이 심해지는 냥냥이까지.

구린내가 나는데.

데몬 하나 잃어버렸다고 저렇게 허겁지겁 여럿이 찾아다니는 건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이거 데몬이잖아요."

"네?"

"데몬은 왜 데려가려고 하세요?"

워낙 급해 생각해놓은 이유가 없는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는 여자.

잠시 후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 통성명도 안하고 있었네요. 전 히리, 요시다 히리에요."

"전 백운이에요."

"아아 백운 님이셨군요!"

친한 척 봐라.

내가 의심병이 걸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뜬금없는 통성명에 이은 친근하게 부르기라니.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의심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끼잉.

"애가 좀 다친 거 같아서요. 치료부터 하고 얘기하시죠."

여전히 머리를 굴리기만 할 뿐 말할 기미가 안 보이는 히리.

날 새겠다는 생각에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아! 잠시만요!"

급하게 달려온 히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흴 의심하시는 거 같으니까 같이 가게라도 해주세요. 제발요!"

조용히 히리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히리가 절박하게 말해서는 아니었다.

냥냥이의 반응을 떠나 조금 전 이 상황에 몹시 흥미가 생기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며 일행과 날 따라오는 히리.

그런 히리와 무리를 뒤로하고 묵고 있는 료칸으로 향했다.

이 새끼들 봐라.

조금 전 정적이 찾아온 순간.

미세했지만 들리고 말았다.

- 스르릉.

- 스릉.

분명 쇠붙이를 꺼내는 소리.

그것도 한 둘이 꺼낸 게 아니었다.

히리를 제외한 모두가 꺼낸 듯했다.

데몬 하나 안 넘겨준다고 칼을 꺼내?

씨익.

이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뭔가 있다.

67화. 같이 가자

"일행 분들은 안 오시나 봐요."

료칸 내부의 의료실.

무언가 쑥덕거리던 일행은 밖에서 대기한 채 히리만이 날 따라 들어왔다.

나 같아도 안 들어오긴 하겠다.

초호화라는 명색에 맞게 숙박객의 안전을 위한 료칸의 보안은 철저했다.

들어오는 길에 센서를 통해 기본적인 쇠붙이 무기들을 걸러냈고, 능력자의 범죄를 대비한 보안 헌터들도 료칸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분명 무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히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분명 무기를 들고 있었다.

지금처럼 온갖 사람 좋은 척을 다 하고 있는데 료칸에 들어오며 우수수 날붙이를 반납하면 될 일도 안 될 터.

그래서 혼자 들어온 것 같았다.

"네, 아이를 치료하는데 많은 사람이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히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단발머리를 아무렇게나 올려 묶고 있는 히리.

햇빛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지내는 환경 자체가 거칠어서인지 거뭇거뭇한 히리의 얼굴엔 잔상처와 주근깨가 가득했다.

히리 역시 그런 외적인 것엔 아무 신경 쓰지 않는 듯하고 말이다.

"아이고, 작은 아간데 뭐하다 이렇게 다쳤대요."

료칸 소속 치유 능력자 선생님이 안쓰러운 눈으로 냥냥이를 바라봤다.

의사 선생님의 눈은 데몬이 아닌 일반 새끼 고양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진짜 되네.

- 그냥 치유실로 가도 돼요.

처음엔 치료할 연고나 소독약 등을 받아서 방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새끼라곤 하나 냥냥이는 뿔이 달린 데몬.

료칸 안으로 데몬을 들인다는 사실 때문에 작은 소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실이 있다는 걸 듣고는 그곳으로 향하자고 말한 히리.

-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워낙 자신만만한 히리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다 의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료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쭙잖게 치료하는 것보단 전문가의 손으로 하는 게 좋아 보였고, 설령 히리가 아무 대책 없이 말한 거라 해도 내가 데몬 테이머인 척 하면서 둘러대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 작고 귀여운 고양이네요!

냥냥이를 발견한 선생님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걱정했었는데.

데몬이 아닌 아기 고양이로 인식하며 기뻐하는 걸 보니 히리의 자신만만함에는 근거가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치료받고 있는 냥냥이를 보며 히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곡시킨 거예요. 이 데몬을 아기 고양이로 보도록."

"오…!"

히리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시작했다.

"특정 사물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그 사물을 다르게 보이도록 할 수 있거든요."

돌멩이를 금으로 보이게 하고 싶으면 돌의 표면에 금이라는 가짜 막을 한 번 덧씌우는 거라고 히리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생각하던 능력이랑은 조금 다르구나.

나한테는 여전히 뿔이 보이는 상태.

처음엔 특정인한테만 뿔이 안 보이도록 선생님에게 무언가 능력을 건 줄 알았었다.

- 한 번 실체를 본 사람에겐 안 통하고요.

신박한 능력이네.

난 이미 실체를 봤기 때문에 뿔이 보이는 것이고, 실체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선생님에겐 안 보이는 것 같았다.

100% 완전히 믿을 순 없지만.

히리가 내게 사실대로 말하고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의료실을 들어온 후 히리가 선생님에게 특별히 한 행동이 없어 보였다는 게 설명에 약간의 신뢰를 보태 줄 뿐이었다. 

그나저나 완전 사기에 특화된 능력 아닌가. 

머리가 범죄 쪽으로 굳어버린 걸까.

설명을 들으니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온갖 범죄 수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령 천 원짜리를 만 원짜리로 속여서 낸다던가, 돌멩이를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판다던가 하는 범죄들.

음… 금이나 다이아는 힘들겠네.

눈으로만 판별하는 게 아니라 기계로 측정까지 하니까.

혼자 저 능력이 나한테 있었다면 얼마나 잘 써먹었을까를 고민하는 사이.

"치료 끝났습니다."

선생님의 말에 잡생각을 떨치고 고개를 들었다.

피가 묻어 나오던 부위에 감겨 있는 미니 붕대.

냥냥이에 어울리는 몹시 미니미니한 붕대였다.

귀엽구먼.

데몬인 걸 떠나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오는 모습이었다.

"상처가 깊진 않은데 워낙 아가라 힘이 없었던 거예요. 데리고 가셔서 휴식을 취하게 해주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인 후 냥냥이를 안아 올렸다.

"시무야, 괜찮니?"

히리가 안아 올린 냥냥이를 향해 다가왔다.

시무라니, 아까도 듣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다.

차라리 냥냥이나 킹냥이가 더 좋겠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와중에도 시무의 떨림이 팔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이쯤 되니 더 의심스럽네.

처음 보는 선생님의 손길도 거절하지 않은 채 얌전히 치료를 받던 녀석이다.

그랬던 녀석이 히리가 다가오기 무섭게 덜덜 떨고 있는 상황.

히리는 세상 걱정스럽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나는 시무의 반응에 더 믿음이 가고 있었다.

"백운 님, 시무는 이제 제가 데려갈게요. 이렇게 치료까지 받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히리가 공손히 손을 모은 채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뭘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니에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일본 분이신데 김칫국 시원하게 드시네.

시무를 건네주길 기다리고 있는 히리.

히리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시무 안 드릴 거니까."

* * *

호화로운 시설의 료칸 밖.

백운과 안으로 들어갔던 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리, 시무는?"

"왜 혼자 나와요?"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우루루 달려왔다.

그런 일행을 향해 히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주겠다네."

히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료칸 쪽을 바라봤다.

시무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나오면 어떡해?"

"당장 데리러 들어가요!"

"아니야."

히리가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안에는 료칸 소속의 헌터들이 있었다.

한바탕 제대로 싸움을 벌이면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시무가 없으면 길을 알 수가 없잖아요."

히리와 일행은 숨겨진 던전을 탐색하며 보물을 찾는 트레져헌터 집단.

며칠 전 유후인 근처의 던전을 뒤지던 중 시무를 발견하게 됐다.

뿔이 달린 데몬의 모습에 바로 죽이려고 했지만, 시무는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슥.

히리가 주머니에서 빨간색 루비와 작은 열쇠 모양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목걸이를 건 채 루비를 물고 있었던 시무.

- 잠깐, 죽이지 말아봐.

시무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히리는 일행들을 막아섰었다.

일행이 방문했던 던전은 나무 데몬인 우덴이 거주하며 생성된 장소.

그런 장소에 이런 전혀 다른 종류의 데몬이 있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

시무를 보며 히리의 머리로 한 가지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시무는 다른 공간에서 넘어왔으며 그 공간에는 입에 물고 있던 루비 같은 보석이 가득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공간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시무가 걸고 있던 목걸이일 거라는 시나리오였다.

- 그 공간은 이 던전 어딘가에 있다.

아직 이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히리의 말을 들은 일행들은 흥분에 휩싸였었다.

시무가 물고 있는 루비만 해도 꽤 큰돈이 될 터인데 이런 게 가득하다면?

아직 한 가지 가설일 뿐이지만 확인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 그런데 이 넓은 던전에서 어떻게 찾지?

문제가 있다면 우덴의 던전은 몹시 넓다는 것이었다.

히리를 포함한 인원들 중에 전투에 특화된 능력자는 몇 없었다. 

그렇다보니 넓은 던전을 막무가내로 다 돌면서 우덴을 잡고, 어떻게 생겨 먹은지도 모르는 공간을 찾는다는 건 힘든 일.

이런 일에 다른 헌터를 고용하기에도 리스크가 너무 컸다.

- 새끼니까 돌아가겠지.

히리는 망설임 없이 시무의 목에서 목걸이를 뜯어냈었다.

- 크아앙!

그런 히리에게 시무가 강하게 반항했지만 너무나 갸날픈 크기.

꾸욱.

- 끼이잉!

시무를 발로 지그시 눌러 제압했다.

- 다시 받고 싶으면 안내하렴, 왔던 곳으로. 

그렇게 시작됐었다.

시무와 히리 일행의 만남은 말이다.

"하아…!"

지끈거리는 머리에 히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도 그대로면 그냥 죽여버려야겠어."

처음엔 온갖 회유를 다 하며 시무를 달랬었다.

하지만 고집불통으로 던전 안으로 향하는 걸 거부했던 시무.

새끼인 이상 언제까지나 밖에 나와 있진 못할 터였다.

언젠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은 했지만.

- 이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히리의 인내심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손에 쥐여져 있는 루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트레져헌터는 자기들만 있는 게 아니기에 속도전이 생명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데몬 새끼 한 마리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버리고 있다니.

"내일 아침까지 던전으로 갈 준비해."

"응…?"

의아해하는 일행들에 히리가 눈을 번뜩였다.

"저 안에 있는 남자도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 * *

골골골.

시무는 히리가 떠나기 무섭게 기운을 되찾았다.

료칸에서 나온 우유까지 먹이니 느릿느릿 하지만 걸어 다니고 있는 녀석.

아장아장 걷는 거 보소.

절로 아빠 미소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 던전에서 잃어버린 게 있어요. 그걸 찾으려면 시무가 필요하고요. 

자세히는 얘기할 수 없지만 시무가 꼭 필요하단 이야기만 연신 하다가 간 히리.

웃고 있었지만 눈은 살벌했지.

온갖 착한 척을 다 하다 막판에 차 안에서 암시를 걸었던 최리아의 덕일까.

웃고 있는 얼굴의 뒤를 볼 수 있는, 그런 의심병 말기의 눈이 생긴 것 같았다.

- 그렇게 정 못 믿으시겠다면 같이 가시는 건 어때요?

내가 시무를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히리가 한 제안이었다.

걱정이 되면 자신들과 함께 잃어버린 걸 찾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생각하는 게 맞다면… 만만한 게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히리에게 한국의 10급 헌터증을 보여줬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던 히리.

그래서였을 것이다.

애타게 찾고 있는 던전으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한 이유는.

10급 헌터 따위는 원할 때 없앨 수 있을 테니까.

히리의 머릿속을 상상해보며 몸을 부비는 시무를 바라봤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평범한 새끼 데몬인데 히리와 그 일행은 뭘 봤기에 시무에게 목을 매는 걸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드륵.

준비된 저녁 식사가 옮겨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나룻배였는데.

날마다 컨셉이 다른 모양이었다.

"어머, 귀여운 고양이네요."

료칸의 종업원 스미레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시무가 데몬인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히리가 어떤 인간인지는 몰라도 능력 하나는 확실한 것 같았다.

"처음엔 털뭉치인줄 알았어요."

"그쵸? 저도 처음에 봤을 땐 무슨 새까만 털이 뭉쳐있는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 들었던 요정님 같이 생겼네요."

"요정… 요?"

어렸을 때 들은 요정 이야기라니.

검은 털뭉치에서 갑자기 요정까지 간다고?

급전개에 잠시 당황하자 스미레가 엷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종종 해주시던 이야기에요."

68화. 숲속의 요정님

"이 유후인엔 요정님이 있단다."

스미레의 할머니, 요시코.

요시코는 잊을만하면 스미레에게 요정이나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요정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거잖아요."

그럴 때마다 스미레는 또 그러신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었다.

이제 완전 어린이라 부르기엔 많아진 나이.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도 아는 나이인데 요정이라니.

"정말이란다."

"할머니가 어떻게 알아요?"

끝까지 따져 물으면 요시코는 미소를 지으며 늠름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도깨비는 몰라도 이번 요정 이야기는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에에이!"

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미레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불분명 하지만 요시코가 나긋나긋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할미가 어렸을 때란다. 아직 유후인에 집보다는 산과 들이 훨씬 많았을 때지. 당연히 사는 사람도 적었고."

요시코는 유후인의 토박이였다.

유후인의 집이 정말 옛날에 지어진 게 아니라면 대다수가 요시코보다 나이가 적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미로의 숲이라는 곳이 있었단다. 알고 있니?"

스미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종종 들은 적이 있는 장소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에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이 사라졌다던 숲.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했어요. 지금은 대부분의 숲이 사라지고 길이 생겼지만, 어쨌든 귀신 들린 무서운 숲이라고요."

요시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레나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를 게야. 하지만 이 할미나 스미레의 선생님이 어렸을 때는 정말 많은 아이들이 없어졌었거든."

"저… 정말요?"

거짓말 같지 않은 요시코의 말에 스미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없어졌다니.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도록 겁을 주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럼. 나랑 같은 반이었던 친구도 사라졌었거든."

"네에…!? 친구분은 어떻게 되셨어요?"

요시코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못 찾았지. 마을의 모든 어른이 밤새도록 찾았지만, 작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어."

꿀꺽.

점점 심각해지는 이야기에 스미레가 되묻는 걸 멈추고 경청을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단다. 어린 치기 때문인지 반 아이들이랑 사라진 친구를 찾으러 가자고 미로의 숲으로 갔단다."

"어른들 없이요…?"

"그렇지. 어른들이 아셨으면 혼만 나고 못 갈게 뻔하니까."

요시코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천장을 바라봤다.

"숲으로 들어가서 하염없이 친구의 이름을 불렀단다. 길을 잃지 않도록 일직선으로만 걸으면서 말이지."

요시코는 아직도 그때의 소름 돋음을 잊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맨 앞에서 가던 난 어느 순간 깨달았단다. 친구의 이름을 함께 부르던 반 아이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 혼자만 애타게 친구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거를."

"으아…."

점점 무서워지는 이야기에 스미레가 눈을 가렸다.

"처음엔 친구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잠시 후에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구나."

"어… 어떻게요?"

요시코가 그때의 행동을 따라하려는 듯 손을 좌우로 휘저었다.

"내가 있는 곳은 아이들과 들어왔던 숲이 아니었어. 전혀 다른 곳이었단다. 어디선가 나타난 안개로 가득해진 낯선 장소였어."

그 후로 요시코는 몇 시간이나 길을 헤맸다고 한다.

시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다리가 저리고 부어오는 것에서 시간을 유추했다는 것.

"이제야 알겠더구나. 이 숲이 보통 숲이 아니며 사라졌던 친구들 역시 이렇게 길을 잃어버린 거구나 하는 걸. 그리고 나 역시 숲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걸 말이다."

"그… 그럼 할머니는 어떻게 나온 거예요…?"

"…."

스미레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난 사실 네 할미가 아니다! 하면서 놀래키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화악.

스미레의 걱정과 다르게.

심각한 표정이던 요시코의 얼굴에 웃음꽃이 번졌다.

"요정님이 도와주셨거든."

"네…?"

생각보다 싱거운 결말에 스미레가 벙찐 표정이 됐다.

"그렇게 한참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는데 네 발로 걷고 있는 거대한 게 다가왔단다. 난 잡아먹힐 거라고 생각했어. 어른들이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겁주던 도깨비인 줄 알았거든."

이젠 정말 잡아먹히는구나 생각이 들어 펑펑 울었다는 요시코.

"하지만, 아니더구나. 도깨비가 아니라 요정님이었어. 날 잡아먹긴커녕 곁으로 다가와 보살펴줬거든."

"옆으로 다가왔다고요…? 요정님 생김새는 어땠어요?"

요시코가 으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개 때문에 요정님의 생김새를 제대로 보진 못했단다. 그저… 나보다 두어배는 더 큰 몸집에 새까만 털이 몸을 뒤덮고 있었고, 아주 아름답게 생긴 파란 눈을 가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지."

"우와… 저도 보고 싶어요, 아름다운 파란 눈."

요정을 만난 순간이 떠올라서인지 요시코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정말이지… 맑은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단다."

"그럼 요정님이 할머니를 태워서 밖으로 데려다준 건가요?"

"아니, 요정님이 내 옆으로 온 건 잠시였어. 옆으로 와서 그 파란 눈을 크게 떴을 뿐이란다. 그뿐인데, 안개가 사라지고 난 어느새 친구들 옆으로 와있더구나."

"… 끝이에요?"

기승전결이 어찌 허술하다는 생각을 하며 스미레가 묻자 요시코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란다."

* * *

"좀 허무한 이야기죠?"

"…."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허무했다.

초등학교 때 읽었어도 시시하네 하면서 덮어버렸을 이야기.

"아닙니다, 흥미진진했어요."

거짓된 엄지를 세우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의를 중시하는 백의민족으로서 다른 이의 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를 허무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나이를 먹고 생각해보니 아마 제게 겁을 주려고 하셨던 거 같아요. 제가 곧잘 멀리까지 나가서 집에 안 들어오곤 했었거든요."

괜한 이야기를 했다며 손사래를 치는 스미레.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필요한 게 있으면 또 불러 주세요."

스미레가 한차례 고개를 숙인 후 문을 나섰다.

그런 스미레에게 인사를 건넨 후 옆에서 골골거리고 있는 시무를 바라봤다.

슥.

자길 바라보는 걸 안 건지 내 눈을 응시하는 시무.

음, 아니구먼.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다.

파란 눈은커녕 아주 그냥 새까만 눈동자였다.

"넌 요정이 아닌가 보다."

"끄아앙!"

!?

만난 이후 처음으로 시무가 소리를 질렀다.

다른 의미로 심장 떨어지게 만드는 소리였다.

"넌 역시 킹냥이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시무의 뿔을 만졌다.

요정이라.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기존에 알려진 생명 외의 모든 것을 데몬이라고 부르는 지금이 맞는가란 엉뚱한 생각이었다.

피렌조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었다.

고민해봐야 답이 안 나오니 생각을 멈춘 주제였다.

도깨비나 귀신, 요정 등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존재들.

만약 이들이 기존 데몬들과 다르다면.

머릿속으로 묘한 희망의 불씨가 밝혀졌다.

인간 외에 아군이 없다는 생각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 * *

히리 일행과 만나 도착한 던전 입구.

특이하게 생겼네.

우덴의 서식지라 그런가.

동굴이긴 동굴인데 질긴 넝쿨로 촘촘하게 생긴 곳이었다.

누가 나무떼기 던전 아니랄까봐.

우덴은 그리 위협적인 데몬은 아니었다.

나무다 보니 불에 약했고 내구성 역시 일반 나무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글우글 몰려서 찔러대면 위험하겠지만.

우덴은 날카로운 가지를 이용해 찌르는 공격을 했다.

갑옷을 입고 있거나 방패가 있다면 아무리 찔러도 뚫리진 않을 터.

슥.

조심스럽게 히리와 일행을 훑었다.

나를 제외하곤 전부 두툼한 갑옷을 장비한 상태였다.

야박하네.

예의상으로라도 낡은 갑옷 하나쯤은 건네야 하는 거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당장 뒤통수 안 치는 것만 해도 어디냐.

어제 보여 준 꼬라지를 봐서 이 동행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이 던전 안에서 시무를 이용해 뭘 찾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 순전히 시무 때문이었다.

필요한 걸 얻는 순간 이빨을 보일 게 분명한 상황.

나도 그때까지만 어울려주마.

그리고 너네가 뭘 찾든… 뺏어주마.

다짜고짜 뒤에서 칼부터 빼 들었던 이들에게 어부지리란 게 뭔지 알려 줄 참이었다.

"안은 온통 빽빽한 나무들로 길이 꼬여있어요. 시무가 안내해줘야 해요."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무를 내려다봤다.

같이 던전으로 가자고 했을 땐 잠시 고민했었다.

만나기만 해도 벌벌 떠는 애를 데려가도 될까란 고민.

내가 데려가서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디 정착해서 사는 삶이면 모를까 내 몸을 눕힐 집도 없었다.

거기다 한국에서 먼저 얻을 수 있는 무기를 다 얻은 후엔 그야말로 역마살 낀 떠돌이 인생 확정이었다.

바꿔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시기는 모두 기록 해놓은 상태.

이때가 아니라면 한국으로 돌아올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집으로 돌려보내야지.

그러기 위해서 찾은 던전이었다.

시무가 별 움직임이 없자 서로 난처한 눈빛을 주고받는 히리와 일행들.

어째서 인적이 드문 던전에 왔음에도 이들이 내게 이빨을 안 드러내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있으면 시무가 안내해 줄 거라 생각하는 거구만.

만난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무는 내가 자신을 구해줬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나만은 잘 따르는 모습.

저들은 이 모습 때문에 희망을 품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원하신다면 따라가 줘야지.

슥.

알아들을진 모르겠지만.

시무의 귀에 목소리를 속삭였다.

"괜찮으니까 안내해줘. 집으로 데려다줄게. 도착하면 저 떨거지들은 내가 치워줄 테니까 걱정말고."

….

료칸에서 스미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정신이 나간 걸까.

나도 모르게 시무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머쓱.

아무 반응도 없는 시무에 고개를 돌리려는 사이.

스르르…!

시무의 이마로 작은 빛의 입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반짝.

어느 정도 모이더니 야광 빛을 내는 시무의 뿔.

아… 알아들은 거냐구!

뿔이 빛난다는 사실보단 내 말에 반응했다는 사실이 몹시 뿌듯했다.

이것인가.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뿌듯한 순간이었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 봐라.

빛나는 시무의 뿔에 히리를 포함한 일행도 놀란 것 같았다.

물론 나와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눈에 아주 그냥 돈독이 바싹 오른 거 보소.

익숙한 눈빛이었다.

내가 마운티거에게 얻은 산삼을 바라보다 거울을 봤을 때 저런 눈빛이었으니까.

보면 볼수록 궁금해 죽겠네.

대체 시무한테서 뭘 봤길래 저러는 걸까.

열심히 여러 추측을 하는 사이.

스릉.

삭.

뒤에 있던 일행들이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사람 상체만 한 방패부터 곡도, 특이하게 생긴 화기까지.

가지고 있는 무기도 가지각색이었다.

"백운 님, 시무랑 같이 앞장서시죠."

"아, 네. 알겠습니다."

별걱정 없이 앞장을 서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언젠가 뒤통수 칠 걸 알면서도 앞장을 서야 하다니.

저벅.

발을 뻗는 와중에도 내 신경은 뒤를 향하고 있었다.

간질간질.

벌써부터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느낌.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히리와 일행이 서로 어떤 눈빛을 주고받고 있을지 궁금했다.

과연 얼마나 나쁜 인간들이려나.

지금까지의 행동을 봤을 때 확률은 몹시 낮지만, 날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굳이 무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물을 발견하더라도 홀라당 가져가기는 미안하니 조금은 나눠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 정도가 아니라 어제처럼 무기를 꺼내 날 죽이려 한다면.

흠, 자업자득이지.

우덴이랑 함께 이곳에 묻어줄 생각이다.

일단 가볼까.

시무의 빛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69화. 문의 열쇠

퍽! 쾅! 푸찍!

시무의 뿔을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누가 지들 서식지 아니랄까 봐 몇 발자국 갈 때마다 우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이 동굴에 얼마나 있는 거야.

어느 정도는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등장 중인 우덴의 숫자는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주섬주섬.

우덴을 잡을 때마다 무언가를 가방에 챙기는 히리의 일행들.

우덴마다 딱 하나씩만 달려있다는 잎사귀였다.

약으로 쓰인다더니 잘 줍네.

골방에 처박혀 봤던 데몬에 관련된 책.

그곳에서 가장 재밌는 카테고리는 데몬 별 획득 가능한 물품이었다.

책 출판 당시의 물품 가격까지 나와 있다 보니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

- 돈이 필요한 초급 헌터라면 우덴 잎사귀 모으기를 추천합니다.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답게 초급 헌터를 위한 목차도 있었다.

초급 헌터로 살아남는 법부터 중급 헌터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떤 장비와 자격을 갖춰야 하는지 등을 써놓은 목차였다.

초급으론 안 보이는데 돈 되는 건 다 줍나 보네.

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히리를 제외한 전원이 전방에 나서 우덴을 잡고 있었다.

방패를 든 인원이 전방에서 적을 막았고 그 뒤에서 나머지가 무기를 찔러 넣고 있는 모양새.

개개인이 강하거나 화려한 전투는 아니지만 합이 잘 맞는 걸 보니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듯했다.

그나저나 겁나 편하네.

우덴이 나타났을 때의 내 위치는 전방이 아니었다.

비전투 인원답게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히리.

내 자리는 그런 히리의 옆이었다.

기대감이 없다는 건 이럴 때 참 좋아.

가만히 서 있어도 알아서 데몬을 잡아주다니.

옛날 게임처럼 쩔을 받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쩌억!

앞에서 튀어나온 우덴을 마무리하는 사이.

동굴 곳곳에 뻗어있는 넝쿨을 바라봤다.

으음… 넝쿨 아닌 거 같은데.

동굴의 입구서부터 뻗어있던 넝쿨.

조금 깊게 들어오니 살짝 굵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몹시 얇아 넝쿨로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나무의 줄기 같은 모양새.

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많은 수의 우덴까지.

이거 우덴킹 각… 아니겠지.

초급 헌터를 위한 가이드에도 쓰여 있었다.

우덴 잎사귀를 모으는 걸 추천은 하되 이와 비슷한 낌새가 있으면 도망쳐 나와야 한단 말이었다.

첫째는 우덴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장소였다.

어미 곰이 있는 곳에 새끼 곰이 출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였다.

우덴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우덴킹이 있는 건 아니지만, 비정상적으로 개체 수가 많은 곳은 우덴킹이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우덴킹의 줄기가 뻗어있는 곳.

물론 이건 파악하기 힘든 요소였다.

우덴킹의 줄기는 땅 밑으로 뻗어있기에 땅을 파보지 않는 이상 알기 힘들었다.

우덴이 많이 나오는 건 첫 번째와 일치하지만.

만지작.

동굴에 뻗어있는 넝쿨을 우덴킹의 줄기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여러 도감을 읽었어도 우덴킹의 줄기가 땅 아래가 아닌 벽을 타고 뻗어있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덴킹이 나오면 조금 애매하긴 한데.

우덴킹이라고 해서 우덴과 별다른 공격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한 번에 쏘아내는 줄기가 너무 많았다.

우덴이 하나를 뻗는다면 우덴킹은 수십 개를 쏘아대니까.

거기다 미친 재생력이 문제였다.

뿌리까지 싸그리 태우지 않는 이상 잘려도 잘려도 줄기를 계속 재생해댔다.

항상 느끼지만 불 지를 수 있는 무기가 하나 필요하단 말이야.

마운티거 때도 어찌어찌 휘발유랑 가스통으로 불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언제까지 외부적인 우연에 기댈 순 없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딱히 강한 공격을 하지 않는 우덴킹이 나올까 우려되는 건 불이 없어서였다.

불만 스스로 지를 수 있으면 우덴킹 백 마리가 나와도 안 무서울 텐데.

나무 따위에 무기력한 스스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반짝.

응?

시무의 뿔 방향이 변경되었다.

"…?"

당황한 건 히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길이 아닌 막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는 뿔.

"지금 벽을 가리키는 건가요?"

"…?"

나한테 묻는 히리에 눈을 크게 떠보았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이것아.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된 건지 잠시 고민하던 히리가 입을 열었다.

"벽을 뚫죠."

뭘 뚫어…?

내 의아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뭘 저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왔나 했는데.

가방 속에서 속속 출몰하는 다이너마이트와 기폭 장치들.

"저거 터뜨린다고요?"

"어쩔 수 있나요? 길이 막혔잖아요."

잠시 두리번거리다 입을 열었다.

"좀 더 돌아서 가보죠."

원래라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든 머리 위로 수류탄을 뿌리든 별 상관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쎄했다.

옆에 뻗어있는 게 넝쿨이 아니라 우덴킹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아무리 우덴킹이 줄기를 땅 밑으로만 뻗는다지만.

동굴의 시작보다 넝쿨은 두꺼워져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조금 더 들어가면서 줄기인지 넝쿨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히리에게 뻗어있는 넝쿨을 가리켰다.

"이거 처음보다 더 두꺼워진 거 같지 않아요? 조금 더 들어가면서 확인해보…."

툭!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날 툭 밀치더니 벽으로 걸어가는 히리의 일행들.

"뒤에서 편하게 있으니까 싸우는 게 쉬운 일로 보이시나 보네."

"돌아서 가면 얼마나 더 많은 우덴과 싸워야 하는데… 하."

"우덴킹의 뿌리는 땅 아래로만 뻗는다. 초급 헌터 상식인데 모르세요?"

이 새끼야 너네보다 10년은 더 일찍 알았다.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와서일까.

히리의 일행들은 조금씩이지만 이빨을 보이고 있었다.

엔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의견 한 번 제시했을 뿐인데 저러다니.

시무를 안 돌려준 것부터 뒤에서 놀고 있는 꼬라지까지.

하나같이 전부 눈엣가시인 모양이다.

"그… 그러세요."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흠 안되겠지…?

잠시지만 지금 호다닥 처리해버리고 시무랑 둘이 계속 갈까 했지만.

애매한 상황이었다.

아직 내게 완전히 칼을 들이댄 것도 아니었고, 이놈들이 시무에게서 무얼 본 건지 역시 알지 못했다.

만약 이게 넝쿨이 아니라 우덴킹의 줄기라면?

고개를 돌려 동굴의 크기를 가늠했다.

이런 좁은 곳에서 줄기들이 날아드니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수리검으로 째야지.

당장 불이 없으니 최후의 수단이었다.

철컥.

나만의 탈출 루트를 정리하는 것도 잠시.

도굴단인가.

많이 해본 솜씨였다.

순식간에 벽면 여기저기에 다이너마이트와 기폭 장치를 연결한 후 뒤로 걸어 나오는 숙련된 모습.

"좀 물러나죠."

히리를 따라 벽면 뒤에 바싹 엎드린 뒤 시무를 감쌌다.

부디.

"폭파."

우덴킹이 안 나오기를.

딸깍.

* * *

이런 시발.

불운의 아이콘인 걸까.

퓩 퓩 푹 퓩.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는 나무 줄기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항상 현실이 되는 걸까.

"달려!!"

뒤에서 쫓아오는 줄기들에 뒤져라 달리는 히리와 일행들.

사사사삭!

더 최악인 건 우덴킹의 명령 때문인지 엄청난 수의 우덴까지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벽이 뚫리며 길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둘러싸였을 터였다.

"끄앙!"

덜컹거리는 속에서도 날 꼭 잡고 있는 시무.

우리 시무는 직선 길밖에 모르는구나.

대충 뛰며 주변을 둘러보니 돌아왔어도 충분히 올 수 있는 장소였다.

귀여우니까 됐어.

체념하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물론, 히리와의 속도는 맞추면서 말이다.

다른 놈들도 꿈뻑 죽는 거 보니 애가 브레인이야.

그래서 옆을 지키며 달리고 있었다.

시무의 무언가를 보고 판단을 내린 것 역시 히리일 터.

다른 애들은 버리더라도 히리는 데려가야 했다.

그나저나 이건 또 왜 안 움직여, 불안하게.

고개를 돌려 여전히 벽면에 달라붙어 있는 줄기를 바라봤다.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줄기와 같은 놈이었다면 뒤에서 쫓아올 필요 없이 벽면에 있는 줄기가 우릴 덮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벽면에 있는 줄기는 여전히 고요한 상태였다.

마치 뒤에서 쫓는 녀석과는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다다다다다.

그렇게 우덴킹의 공격을 피해 달리기를 한참.

허.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 * *

아주 작은 틈새였다.

틈새로는 대충 봐도 지금 있는 동굴과는 아예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꾸드득…!!

그리고 그 작은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있는 수많은 줄기들.

동굴 벽면을 타고 들어온 줄기들이 온통 저기에 꽂혀 있는 듯했다.

허허.

뒤에서 쫓아오는 것과 문을 비집고 있는 줄기.

두 마리네, 시벌.

우덴킹이 두 마리나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거기다 뒤에서 우글거리며 쫓아오는 우덴까지.

도망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끄아앙!"

문제는 찾은 문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문을 향해 소리만 질러대는 시무.

우덴킹이 비집고 있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문은 닫혀 있는 상태였다.

열려면 뭐라도 해야될 거 같은데.

대체 저 문은 어디로 향하는 문이며 어떻게 해야 들어갈….

후다닥!!

히리가 갑자기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히… 히리 님?"

쐐에에엑.

잠시 불러봤지만 돌아온 건 히리의 대답이 아니었다.

뒤에서 목으로 날아드는 곡도와 단검.

찾을 거 찾았다는 건가.

이로써 이놈들이 찾고 있던 게 저 문이란 건 확실해졌다.

그럼 이제 뭘로 여냐는 건데.

삭!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몸을 숙여 뒤에서 날아든 무기를 피한 후 뒤를 돌아봤다.

독한 새끼들이네.

세 명은 필사적으로 우덴킹의 공격과 몰려드는 우덴을 막고 있는 상황.

급박한 상황임에도 두 놈은 동료들을 도와주기보단 날 처리하러 온 것이었다.

빠악! 빡!

"끄악!"

발로 두 놈을 밀쳐낸 후.

[비전 수리검]

후웅…!

벌어져 있는 문 옆의 줄기로 수리검을 던졌다.

쾅!

히리의 옆을 지나 굉음과 함께 줄기에 깊숙이 박혀 든 수리검.

슥.

수리검이 자신을 지나쳐가자 달려가던 히리가 고개를 돌렸다.

피식!

저… 저년이…?

아마 자기를 맞추려다 못 맞췄다 생각하는 듯했다.

"이 새끼가!"

"가만히 안 있어!?"

밀려났다 다시 달려드는 두 녀석.

"너넨 좀."

짜아악!! 짜아악!!

"꺼져!"

수리검으로 업그레이드된 힘.

온 힘을 다해 뺨따기를 올려 붙여줬다.

"꺽…!"

쿵.

감당하기 힘든 힘에 잠시지만 두 놈의 몸이 붕 떠 나가떨어졌다.

다다다닥!

일부러 소리를 내며 히리를 쫓아갔다.

경찰과 도둑을 할 때 쫓기는 도둑 심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

달리던 중 뒤를 돌아보는 히리.

탁!

"악!"

내가 신경 쓰인 건지 달리던 히리가 돌부리에 넘어지며 손에 쥐고 있던 걸 놓쳤다.

팅!

바닥에 튕겨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희한한 생김새의 목걸이 열쇠.

삭!

방향을 틀어 열쇠를 향해 달려갔다.

눈은 히리에게 고정시킨 채 말이다.

슥.

내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당황하는 척하던 히리가 몸을 일으켰다.

저 저 여우 같은 년 저거.

고럼 고렇지.

- 제 능력은….

내 경계를 누그러뜨리겠다고 시무의 뿔을 감출 수 있는 능력을 말해줬던 히리.

그때의 히리가 무슨 생각일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10급 헌터따리니 문에 도달한 순간 일행들이 제거할 거라 확신한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오픈해도 충분하다는 오만감으로 말이다.

슥.

문 앞에 거의 도달한 히리가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 전은 훼이크, 저게 진짜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일행이 정리당하고 내가 쫓자 꾀를 낸 것.

넘어지는 척하며 흘린 건 가짜였다.

실체를 본 적이 없다면 히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왜곡 능력.

쉽게 흘릴 때부터 예상했다, 이것아.

진짜 열쇠를 꺼내든 히리가 문을 향해 마지막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 있었다.

[비전]

히리가 마지막 두어 발자국을 남겨둔 순간.

콰득.

"끄악!"

수리검으로 이동해 히리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이거 문 들어가자고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스윽.

히리가 꼭 쥐고 있는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내, 이년아."

영어로 인터셉트.

한글로는 약탈.

완료.

70화. 루비의 세계

몇 분 전.

히리의 얼굴엔 승리의 미소가 만연해 있었다.

'병신.'

솔직히 백운의 힘은 예상 밖이었다.

함께 온 트레져헌터들이 그렇게 쎈 게 아니기도 했지만, 이걸 감안하고라도 예상을 벗어났다.

'10급 맞아?'

조금 전 동료 둘을 순식간에 때려눕힌 백운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국가직 헌터의 기준은 나라마다 비슷하다고 들었다.

일본에서의 10급 헌터는 골방에 박혀 십자수나 하는 노인네도 할 수 있는 급수였다.

'상관없어.'

동료들이 쓰러지고 뒤에선 우덴킹이 쫓아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히리의 목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루비가 가득할 거야.

트레져헌터 동료들을 꼬신 말이었다.

어차피 다들 돈에 눈이 멀어있는 인간들.

이미 시무가 물고 있던 루비에 눈이 돌아갔기에 꼬드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앞밖에 보지 못하는 멍청이들.'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루비에 눈이 돌아간 건 히리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눈이 돌아간 이유는 달랐다.

- 유후인의 북쪽 숲엔 요정이 머무는 공간이 있다.

어느 날이었다.

유후인의 폐가에서 돈 될만한 걸 찾던 중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처음엔 누가 써놓은 동화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개방과 데몬이 나타난 시대라고 해도 요정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니.

- 그 요정은 네 발로 걸으며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롱한 색의 루비 산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히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책에 빠져들어 있었다.

빠져들었던 이유는 루비를 팔아 돈을 챙기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 루비엔 요정들의 힘이 담겨있으며, 그 힘을 얻으면 지금까지완 차원이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된다.

돈이 아닌 힘 때문이었다.

히리는 힘을 원했다.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 아니라 진짜 힘.'

물건을 다르게 보이는 히리의 왜곡 능력.

누군가는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히리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보안마저 철저해져 돈이 되지도 않는 능력.'

자신의 능력에 대한 히리의 평가였다.

개방으로 여러 능력에 의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돈을 주고받는 곳의 보안 역시 그 이상으로 철저해졌다.

아무리 왜곡으로 겉모습을 속여도 시골 구멍가게가 아니라면 속일 수 없는 시대인 것.

'저 인간들도 지긋지긋해.'

왜곡은 전투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기에 전투 헌터가 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전투 국가직 헌터는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평생을 가느다란 인생으로 연명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일단 손발로 부려먹을 수 있는 동료를 구했다.

어딘가엔 개방한 능력 외에도 힘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 ….

멍청한 트레져헌터들의 브레인 역할을 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발견하게 된 폐가의 책과 우덴의 동굴에서 만난 시무.

'책의 내용이… 진짜였어.'

루비를 물고 있는 시무를 본 순간 히리의 눈엔 불이 지펴졌다.

그토록 찾던 요정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 작은 데몬이 온 장소.

그곳을 찾아야 했다.

- 끄앙!

하지만, 이 작은 데몬 새끼는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마음은 조급한데, 조금만 더 가면 책에 나왔던 공간으로 갈 수 있을 텐데.

- 퍽! 퍽! 퍽!

때리면 때릴수록 시무의 반항은 거세졌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화를 못 이겨 들고 있던 단검을 휘두르고 말았다.

- 후우!

그렇게 잠시 화를 삭이기 위해 나갔다 온 사이, 시무는 사라져 버렸다.

발견했을 땐 이미 백운이란 인간의 품 안에 안겨버린 후였다.

'오히려 잘됐어.'

처음엔 백운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지만, 백운에게 살가운 시무의 행동에 다른 방향을 모색하게 됐다.

길을 탐색시킨 후 제거할 요량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던전까지 따라온 멍청한 이국인.

그 이국인 덕에 히리는 힘을 얻고 멍청한 동료들과 지긋지긋한 나약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다다!

그 계획의 완성이 눈앞에 있었다.

두세 발자국만 더 가면 열쇠와 함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됐어!'

확신이 들었다. 

얼굴엔 지나왔던 인내의 시간을 녹이는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덥썩!

그리고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강한 힘에 의해 뒤로 잡아 당겨지는 머리채.

"이리 내, 이년아."

목소리가 들려왔고.

휙.

쥐고 있던 열쇠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아."

잠시 후 몸이 뒤로 내던져졌다.

슥.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뺏은 열쇠를 들고 자기 대신 문 안으로 쏙 들어 가버리는 백운에게는 말이다.

* * *

정신없네.

바다 다음은 산인가.

일단 냅다 뺏어 들어오고 봤는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믿기 힘든 장소였다.

사아아…!

반짝이는 가루가 바람을 타고 흩날려왔다.

마치 루비를 작게 갈아 허공으로 흩뿌린 느낌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것도 달랐다.

붉고 뜨거운 하나의 해가 아닌, 여섯 개로 나누어진 작은 청색의 구체들이 떠 있었다.

공명… 은 아닌데.

무기를 통해서 다른 공간에 들어오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공명으로 들어왔다면 내가 알았을 것이다.

보물섬인가.

머리가 왜 이렇게 안 돌아가지 했는데.

아마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반짝반짝.

눈이 닿는 모든 곳을 채우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루비 산.

한 덩이만 떼어 팔아도 한강 뷰 아파트를 장만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니지, 서울 아파트 개비싸니까.

아무튼.

압도적인 광경에 뇌가 멈춘 사이.

"끄앙!"

품에 있던 시무가 폴짝 뛰어올라 바닥으로 착지했다.

여기저기를 왔다리갔다리 하며 뛰노는 걸 보니 익숙한 공간인 듯했다.

"시… 시무야, 이리와.'

좌우로 뛰고 있지만 약간씩 멀어지는 시무에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시무가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내가 무서웠다.

나랑 같이 있어줘!

몹시 낯선 공간.

낯선 걸 떠나 지구 외의 장소가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홀로 내버려 진다는 건 안 될 말이다.

[잭 더 리퍼]

정상적으로 손에 쥐어지는 면도칼.

괜한 걱정이었고.

너무 쌩뚱 맞은 공간이다 보니 혹시나 무기가 안 나올까 싶었다.

다시 면도칼을 집어넣은 후 천천히 시무를 따라갔다.

"같이 가…!"

시무를 따라가면서도 고개는 쉴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진짜 뭐냐.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든 걸 허구로 치부해버리는 세상.

개방 전의 세상은 그러했다.

그러던 중 나타난 개방에 과학을 믿던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적응의 동물답게 빠르게 순응하기 시작했다.

- 능력과 데몬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것, 나머지는 그대로.

능력과 데몬.

인간이 새로운 세계에서 인정하기로 한 두 가지였다.

단 두 가지, 이 두 개를 제외하곤 개방 전의 세계와 모든 게 같아야 했다.

꿀꺽.

같아야 할 터인데.

"여기는 대체 뭐냐고요."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과학 문명의 인간이라 그런지 들어와 실제로 서 있으면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부정하고 있던 건가.

무기의 기억에서부터 은연중에 가능성은 느끼고 있었다.

데몬이 없었어야 할 시대에 존재했던 피렌조.

그리고 개방이 없던 시대인데 그런 피렌조와 싸웠던 도윤까지.

생각해보니 사사키 코지로도 규격 외네.

나도 모르게 현시대에 빗대어 생각해버렸다.

개방이 없던 시기에 혼자서 몇 만을 썰어버린다는 건 비정상인 게 분명한데 말이다.

하긴 용도 있는데 뭐가 안 되겠냐.

솔직히 유탈라스를 처음 봤을 땐 놀랐지만.

동시에 친숙했었다.

환상 속의 동물이라곤 하지만 용은 옛날부터 다방면으로 워낙 많이 접한 것이었기 때문.

메갈로돈도 있는데 용이라고 없겠냐 싶었다.

하지만,

이세계는 아닌데.

별의별 걸 다 봤지만 내 안에서 믿지 않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이세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거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구 외의 세계는 없다고 말이다.

공명으로 들어간 건 이세계는 아니니까.

공명으로 여러 공간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건 각 인물이 만들어 낸 공간이었다.

실제하는 공간이 아닌 것.

….

실제한다라.

실제라는 기준은 무엇….

철썩.

점점 꼬리를 물고 깊어지는 생각에 뺨을 한 대 올려쳤다.

더 이상 깊어지면 답도 없다.

잘못하면 철학적인 고민까지 갈 판국.

흠.

뺨이 얼얼한 걸 보니 꿈은 아닌 모양.

설마 이건… 그건가.

슥슥.

턱을 빠르게 문지르며 새삼스레 깨닫게 된 사실을 떠올렸다.

어이어이… 인간 최초냐구!

종종 사후세계에 다녀왔다는 말을 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일단 거짓말로 치부해버렸다.

내가 최초의 이세계 방문자였다.

물론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만큼 거대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받아들이고 현실적인 생각을 해야 했다.

익숙한 듯 열심히 뛰어노는 걸 보면 시무의 집은 이곳이 맞아 보였다.

털뭉치 집 복귀 시키기는 완료했으니 남은 건 하나.

어떻게 가져가지.

걸음을 멈추고 번쩍이는 루비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다 들고 나갈 수 있을까.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온다더니.

흥부와 놀부를 보며 언젠가는 나도 제비를 도와줘야지 했었는데.

제비가 아니라 복덩이 냥냥이가 와버렸다.

이건 사실 착한 일을 한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이 아닐까.

아찔해지는 깨달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흥부도 선물 받은 박을 갈라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나라고 안될 게 뭐가 있겠는가.

가방을 구하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들어올 때 쥐고 있던 열쇠는 어느샌가 사라져 버린 상태.

지금 나가면 다시는 못 들어올 수도 있었다.

산을 들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톨스토이 명작 선에도 나오지 않던가.

걸어간 만큼 땅을 준다는 말에 눈이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 인간이 말이다.

난 적당히 가져갈 거야.

적당히 가져가서 한강에 아파트 사고.

비행기도 맨날 퍼스트만 타고 다니고.

자동차도 부가티로 사고 다 해야지.

"룰룰루."

상상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왔다.

마치 월요일에 로또를 사놓고 당첨됐을 때를 떠올리며 일주일을 행복하게 보내는 느낌.

"가방은 최대한 큰 가방이 좋지."

거대한 잎사귀를 가진 나무들이 널려있었다.

현실적인 가방은 불가능해도 잎사귀들을 묶어 보따리를 만들 생각이다.

"잎사귀르을 따러 가보즈아."

그렇게 제일 거대해 보이는 잎사귀 나무로 다가갔다.

다른 세계에 오자마자 나무를 베면 좀 그러니 잎사귀만 딸 생각이었다.

사사….

나무를 타고 잽싸게 올라가려는 순간.

"끄앙!!!"

응?

평소보다 우렁차게 우는 시무에 고개를 돌렸다.

….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면 기쁜 이유는 뭘까.

안락한 내 보금자리로 돌아와서?

이것도 맞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날 기다려주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

스미레 님.

갸르릉거리는 시무를 바라보며 료칸에서 만난 스미레를 떠올렸다.

요정을 만났다는 할머니 이야기를 해준 스미레.

옛 어른들 말씀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꿀꺽.

다 진짜예요.

71화. 요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