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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북으로 향하는 길.

기자들 사이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타긴 했는데.

더럽게 불편하다.

좋은 차라 그런지 몸이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저 출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 침묵이 몹시 불편했다.

기차 타고 간다 그럴걸.

이럴 줄 알았으면 고생스럽더라도 혼자 가는 게 나았을 뻔했다.

"백운 님, 거기 조수석 박스 열어보세요."

…?

뜬금없이 조수석을 열어보라는 최리아.

딸칵.

가면?

박스 안에는 오페라의 유령이나 쓸 법한 흰색 가면이 놓여져 있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백운 님이 무기왕이란 걸 들키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그렇죠."

들키면 절대 안 된다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사방팔방으로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가져가세요.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국에 생중계가 될 거라 필요할 거예요."

"오… 감사합니다."

이런 세심한 배려라니.

슥.

슬쩍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최리아를 바라봤다.

어딜 가든 눈에 띌 외모를 가진 최리아.

이렇게 보면 배려심 깊고 착한 사람인 것 같은데, 말을 시작하면 항상 뒤에 숨겨진 가시가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묘한 감각도 그렇고.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느껴지는 묘한 찝찝함.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눈을 마주치는 게 꺼려지는 느낌이었다.

"어제 전수희 팀장이 토벌전 가이드 드렸죠?"

"네, 어제 받아서 읽어봤습니다. 생각보다 룰이 어렵진 않더라고요."

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할 것도 없죠. 쉽게 생각하면 데몬이 모여있는 던전을 정리한다… 가 토벌전이니까요."

가이드에 적힌 점수 룰은 간단했다.

하나의 던전이지만 각각 다른 입구에서 시작하게 되는 토벌전.

시작한 이후에는 일정 시간 동안 데몬을 잡을 때마다 점수가 카운트된다.

잡은 데몬 급수마다 얻는 점수가 달라지며 누군가와 함께 잡았을 경우엔 점수를 나눠 가지는 시스템.

오히려 잘됐어. 

만나는 족족 잡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룰이 복잡해서 누군가와 협동을 해야 한다거나 하면 훨씬 귀찮았을 것이다.

사북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토벌전에서는 철저히 혼자인 상황.

"이제 사북이네요."

최리아의 말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울에선 보기 힘든 푸른 숲과 논밭.

그리고 곳곳에 놓여 있는 옛 탄광의 흔적들까지.

"대산이 토벌전을 이런 비수도권 지역에서 하는 이유를 아시나요? 접근성도 떨어지고 편의 시설도 없는데 말이죠."

"음… 국가로부터 소외된 지역을 챙기는 기업, 대산! 이런 느낌을 위해서 아닌가요?"

"풉."

너무 직구로 말해서일까.

최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웃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해요. 한 가지가 빠지긴 했지만요."

"한 가지…?"

잠시 뜸을 들인 최리아가 입을 열었다.

"기업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백운 님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분야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인재 확보… 아닌가요? 강한 헌터를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려고 한다고 들었거든요."

"맞아요. 옛날엔 그저 기업의 영업이익이 얼마고, 그에 따른 시가총액이 얼마고를 따지며 순위를 매겼지만. 이젠 세상이 변했어요."

삑.

최리아가 버튼을 누르자 전방 창으로 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 암살에 특화된 헌터를 고용해 적대 기업 일가를 몰살시킨 기업 A.

"그런 시대인 거죠."

극단적인 케이스겠지만 최리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돈이 많을수록 좋은 헌터를 고용할 확률은 높아지긴 하지만, 만약 돈만 많고 기업을 지킬 수 있는 헌터가 없다면?

기사에 나온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삑.

다시 한번 버튼이 눌리고,

# 어려운 이웃을 돕던 헌터,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돌변.

얼마 전 일어났던 살인사건이 창에 나타났다.

헌터에 의해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데몬에 의해 죽는 사람의 수와 헌터 사건에 휘말며 죽는 사람의 수에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었다.

"강력한 능력을 가진 헌터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업들은 모두 긴장해요. 언제 비수가 되어 자신들한테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그래서예요. 비수가 되기 전에 자신의 칼로 만들기 위해 영입하려는 거죠. 그만큼 지금 기업에 있어서 헌터는 가장 중요한 인력이에요."

굳이 돈을 퍼부어 가며 토벌전을 개최하는 이유가 있었구만.

대산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방송을 통해 전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대산엔 이런 헌터가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강하다.

기어오를 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어쩐지… 게스트라고 온 사람들도 다 애매하더라.

처음엔 너무 유명하거나 강한 헌터들은 섭외에 실패한 건가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토벌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가장 빛나야 하는 헌터.

그건 어디까지나 대산의 헌터여야만 했다.

괜히 쎈 헌터를 불렀다간 큰돈들인 게 도루묵을 넘어 역효과를 일으킬 테니.

….

그래서 날 부른 거였어.

긴가민가했었는데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개미굴부터 구룡산의 동영상까지.

나에게 넘어와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한방에 뺏어 가겠다는 심산이었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난 2년 후에 발견될 무기를 가로채려고 대산을 이용하고, 대산은 스포트라이트를 끌어오기 위해 날 이용하는구만.

내 목적을 위해 대산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대산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거… 의욕이 더 불타오르는데?

단순히 이용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만약 이번 토벌전에서 대산이 내 스포트라이트를 뺏어 가는데 성공한다면?

이제 찬밥 신세지.

다시는 내가 대산 건물의 70층에 올라가는 일 따윈 없을 터였다.

안되지, 안돼.

내 목적을 다 이룰 때까지는 안될 말이지!

끼이익.

저 앞으로 먼저 출발했던 수송 차량들이 보였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백운 님."

옆에서 들려오는 최리아의 목소리.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네?"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돌린 순간.

덥썩.

최리아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았다.

"!!"

내 눈과 마주쳐 있는 최리아의 눈.

에메랄드색이었던 눈이 서서히 연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

"…?"

"넌 아무것도 아닌 들러리일 뿐이니까."

"…."

"주제를 알고… 아무것도 하지 마."

32화. D-1의 밤

"응?"

사북에 도착한 수송 버스.

버스에서 내린 김대석이 뒤를 돌아봤다.

'저건 불여우 찬데.'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파란색 스포츠카.

사북에 저런 차를 몰고 올만한 사람은 최리아 뿐이었다.

'허.'

조금 전 차에서 내린 건지 떠나가는 스포츠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남자, 백운.

머릿속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큽…크…,하하!'

육성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준 것만 해도 최리아에게 감사해 하고 있었는데.

만약의 변수마저 제거해버리는 최리아.

'날 못 믿는 거 같아서 기분은 더럽지만.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단 말이야.'

백운이 조금 전 당했을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눈을 쳐다봤겠지. 그리고 무언가 말을… 아니지. 명령을 들었을 테고.'

벗어날 수 없는 암시.

최리아가 개방한 능력이었다.

능력의 디테일 한 것까지는 김대석도 알지 못한다.

단지 한 번 호되게 당한 적이 있기에 그런 능력이구나를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한계가 있는 듯 하지만 저런 10급 나부랭이한테 해당될 내용은 아니지.'

김대석 외에도 용병단 안에서는 최리아의 능력에 대한 토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대상에게 암시를 걸어 조종하는 엄청난 능력이지만, 제약이 있다는 게 현재의 정설.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

이런 추측의 증거로는 최리아가 대산의 홍보 실장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제약 없이 모두에게 통했다면 대통령을 넘어 세계 정복도 꿈이 아닐 터.

건물 70층에 얌전히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높은의 기준이 직급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높은의 기준은 다들 추측성 발언만 넘쳐나고 있었다.

어찌 됐든, 그 생각만 하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당한 적이 있다는 건 높은의 기준이 뭐가 됐든 자신이 최리아보다 낮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쯧.'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현시점에 중요한 건 단 하나.

'무기왕은 끝났다.'

* * *

부우웅.

미련 없이 떠나가는 최리아의 차를 바라봤다.

….

차에서 내리기 직전, 최리아가 한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차에서 내리는 순간, 조금 전 암시를 들었다는 사실은 잊어라.

잊으라길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년.

처음엔 갑자기 반말을 뱉길래 뭐하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스아아…!

드문드문 느꼈던 그 찜찜한 기운이 물밀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 색깔까지 변해버린 최리아.

그 모습까지 보니 확신이 들었다.

능력을 쓰고 있구나.

확신이 든 후엔 나도 인생 연기를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최대한 멍한 표정을 지었고, 최리아가 뭐라뭐라 말할 때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 태워준다고 한 이유가 이거였구만.

사북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모자라 정체 숨기라고 가면까지 내준 최리아.

눈을 마주치거나 대화를 나눌 때 기분은 좀 찜찜하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등록하려고 했는데.

취소다.

불여우 같은 년.

토벌전에서 내게 쏠린 관심을 뺏어 가려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좀 놀랐다.

이렇게 능력까지 써야 해야 했단 말인가.

아니지, 최리아 입장에선 일 잘하는 거지.

동시에 최리아가 김대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완벽한 불신.

그렇기에 저런 암시를 나에게 시도한 거겠지.

- 토벌전이 시작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어 있어. 

- 데몬이 보이면 겁쟁이처럼 도망쳐.

무기왕을 아주 그냥 전국급 겁쟁이로 만들 심산이구만.

무기왕의 이미지가 밖에서 어떤지에 대해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어찌 됐든 지금 토벌전에 참가하게 된 것도 무기왕의 이름과 인기 덕분.

앞으로도 어딘가에 접근이 필요할 때 사람들을 납득 시키기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이런 소중한 나의 무기왕을 쫄보로 만드려 하다니.

으득.

대석이랑 리아.

나쁜 년놈들.

* * *

밤이 깊어지자 떠들썩 해진 사북의 임시 숙소.

토벌전 전날은 항상 이런지 시끌벅적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와작!

한쪽에선 술판이 벌어지든 말든.

난 내 앞에 있는 음식에 집중했다.

호텔 조식 이후에는 제대로 된 밥을 못 먹어서인지 쑥쑥 들어가는 음식들.

"안녕하세요, 무기왕 님."

움찔.

매번 들어도 닉네임으로 불리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간질간질한 느낌.

- 대산의 헌터들은 원래도 백운 님이 무기왕이란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참가하는 게스트 헌터분들은 서약을 했으니 외부에 발설할 일은 없을 거고요.

카메라와 외부 인원이 보는 토벌전 당일을 제외하면 가면을 쓰고 다닐 필요가 없단 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온 건 짧은 단발을 한 게스트 헌터였다.

"전 프리랜서 헌터를 하고 있는 유연경이라고 해요. 옆에 앉아도 되나요?"

"아! 저도요, 그 유명한 무기왕 님이라니."

텅 비어있던 좌석을 채우기 시작한 게스트 헌터들.

"저는 배이슬요!"

"하하…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눈 뒤 어색함을 풀기 위해 잔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대학교 MT의 유사 버전일까.

"와… 무기왕 님이 참가한다는 말이 돌아서 설마 했는데."

이젠 못 버티는 단계에 도달했다.

"전 백운이라고 합니다, 하하… 이름으로 편하게 불러주세요."

"오… 백운이라… 생각보다 훨씬 멀쩡한 이름이네요."

"네…?"

배이슬이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다 본명으로 하니까요. 이름이 너무 이상해서 닉네임으로 했나 했거든요."

다행이다.

이름 멀쩡해서.

"다른 게스트 분들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

초대된 게스트만 해도 열 명 가까이 된다고 들었었는데.

보이는 건 눈앞에 있는 둘이 다였다.

"아마 안 올걸요."

"그쵸, 보통은 안 오죠."

배이슬과 유연경이 손가락으로 한참 시끌벅적한 술판을 가리켰다.

"저분들을 위한 토벌전이니까요. 저희야 그냥 흥 돋우는 들러리들이고요."

그래서 안 왔구만.

대외적인 이유야 어쨌든 토벌전은 대산의 헌터들을 뽐내기 위한 행사였다.

행사의 전날 밤마다 열리는 이 자리도 마찬가지.

이미 들러리인 걸 알고 있기에 흥도 안 나는 상태, 게스트들이 굳이 올 이유가 없었다.

"기본 참가비라도 두둑하게 주니까 오는 거지. 어휴, 꼴 보기 싫어요."

주변에 게스트 헌터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자기들끼리 신이 난 대산.

토벌전에서의 입장 때문에 안 그래도 기를 못 펴고 있을 텐데 챙겨주긴커녕 더 대놓고 무시를 하고 있었다.

나도 빨리 먹고 올라가야지.

굶주린 배만 채우면 빠르게 올라갈 생각으로 음식에 손을 뻗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무기왕 님 아니십니까!"

그냥 들어갈걸.

맛있는 고기로 손을 뻗은 순간, 어디선가 술잔을 든 김대석이 나타났다.

그런 김대석의 외침 때문인지 자기들끼리 잘 놀던 헌터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야! 정말 영광입니다! 영광!"

이미 목소리에 한껏 비아냥이 묻어있는 김대석.

실망스러웠다.

대석이 새끼 동영상으로 볼 땐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더 시건방진 자식이었다.

"무기왕 님 능력은 뭐라고 했었죠? 뭐였지? 뽀록이었나? 하하하!"

"푸하하하하!"

술까지 들어가 눈에 뵈는 게 없어서인지 열심히 떠들어 재끼는 김대석.

대산 헌터들의 웃음이 잦아들자 김대석이 커다란 맥주통을 들고 와 내 앞으로 내려놨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리죠!"

"안 주셔도…."

애초에 내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던 듯하다.

꼴꼴꼴꼴!

잔에 한가득 따라지는 맥주.

아니지, 맥주 거품.

잔의 4/5를 하얀 거품이 채우고 있었다.

"자! 무기왕 님에 딱 맞게 따라드렸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들어가세요! 그럼! 하하하!"

맥주만 따라놓고 사라지는 김대석.

"배… 백운 님, 괜찮으세요…?"

"진짜 꼴불견이에요. 방송에서는 세상 사람 좋은 척 다 하면서, 원래 저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신경 안 써요. 취하면 저럴 수도 있죠."

덥썩.

따라 준 맥주를 원샷 한 후 신이 난 김대석을 바라봤다.

저럴 수도 있긴.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몇 대 갈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

그런데 뭐, 상관없다.

갚아 줄 기회는 올 테니까.

드륵.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아… 네! 내일 봬요, 백운 님."

"들어가세요."

빨리 자러 가야겠다.

그래야,

내일이 빨리 온다.

* * *

숙소로 향하는 길.

김대석을 어떻게 박살 내야 하나 고민을 하며 길을 걸었다.

훗날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대산과 척지는 건 안 될 일.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김대석을 밟아주고 싶었다.

먼지를 일으켜서 카메라의 시야를 가린 다음에 힘줄을 끊….

짝!

조금 전 당한 치욕에 잔인한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너무 잔인하니까 강도를 좀 낮추자.

그렇게 여러 방법을 고민하던 중.

"… 로… 옮겨."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 곳은 내일 토벌전이 열리는 광산 근처.

이 시간에 인적이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사삭.

자세를 바짝 낮추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 지역 일대는 대산이 관리하고 있을 터.

그럼에도 들어와 있다는 건 대산의 인원일 가능성이 컸다.

뭐하고 있는 거지?

열댓 명의 인원이 무언가를 옮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일 토벌전이 끝나면 바로 들어갈 거니까 준비해."

"여기에 있을까요? 괜한 곳에다 지원 요청한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지원 요청? 

토벌전이 열릴 곳에서 무슨 지원이 필요한 걸까.

"없어도 상관없어. 우리가 요청해서 토벌전이 열리긴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만 여는 건 아니니까."

"그렇군요. 야 이 대리, 해석은 제대로 한 거 맞지?"

"예, 책자에서는 분명 이곳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찾아갈 수 있는 길 정도는 이곳에 있을 겁니다."

무언가를 해석해 이곳을 지목했고 그 장소에 토벌전이 열릴 수 있도록 지원 요청을 했다… 가 되는 건가.

얼추 말들을 조합해봤을 때 도출되는 결론이었다.

말하는 걸로 봐선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도 대산의 직원들.

대산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 뭘 찾고 있을까.

작은 기업이 아니다 보니 여러 가지를 동시에 찾고 있겠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비전 수리검.

비전 수리검은 2년 뒤에 발견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수리검에 도달했는지는 몰라도, 얼추 시간을 계산해 봤을 때 지금은 이미 찾고 있어야 했다.

대산이 여기서 찾으려는 게 무엇에 대한 흔적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무언가를 찾기 위해 왔다는 건 분명한 사실.

그게 비전 수리검이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내 무기 찾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광산 안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흔적.

씨익.

내가 먼저 찾는다.

33화. 토벌전 (2)

오… 더럽게 크네.

날이 밝기 무섭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3번 도어.

도어들은 안에 있는 데몬을 못 나오게 함과 동시에 토벌전에 참가하는 헌터들을 분리하는데 사용되는 듯했다.

나눈다고 해봐야 세 개의 도어가 끝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 그런데 이거 너무 노골적이게 나눠 놓은 거 아닌가.

1번 도어엔 대산의 헌터들이, 2번 도어엔 초대된 게스트 헌터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3번 도어에 배정된 건 나 혼자.

아주 날 골로 보내려는 심산이구만.

개인전이다 보니 여러 명이 함께 있다고 해서 유리할 건 없었다.

오히려 같이 있으면 점수를 나눠 먹어 오히려 불리하다면 불리한 조건.

그럼에도 날 홀로 둔 이유는 명확했다.

사북에 도착하기 무섭게 암시를 걸었던 최리아.

아마 3번 도어에 날 배치한 것도 최리아의 생각일 게 분명했다.

외부에서 보기엔 대산이 참 배려심 넘치게 보일 거야.

대놓고 내가 점수를 획득하기 쉬운 환경을 준 것이니 말이다.

위이잉.

고개를 들어 위에 있는 카메라들을 쳐다봤다.

카메라가 분산되는 다른 도어와는 달리 모든 카메라가 나에게 집중되어있는 상황.

이런 다 갖춰진 환경에서 데몬을 잡긴커녕 이리저리 도망만 다닌다면?

거기서 무기왕은 끝이었다.

카메라를 통해 중계되는 영상은 전국으로 나가고 있을 테니까.

생각할수록 무서운 년이야.

최리아를 생각하니 다시 한번 고개가 내저어졌다.

어째서 나한테 최리아의 능력이 통하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국적으로 대치욕을 당할 뻔했는데 다행이다.

툭툭.

도어로 다가가 한 번 두드려 보았다.

전혀 안 울리는 걸 보니 엄청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대산이 돈이 많긴 많아.

토벌전을 위해 급조한 문일텐데도 이런 디테일이라니.

데몬의 할아버지가 와도 이 문은 안 뚫릴 것 같았다.

흠… 그나저나 어떻게 찾아야 되나.

어젯밤 대화에 의하면 광산 안에는 분명 뭔가 있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여기저기 최대한 돌아다녀 볼까.

원래라면 의심을 샀을 것이다.

데몬을 처치하며 목표 지점으로 달려가긴커녕 다른 곳을 들쑤신다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리아의 암시에 정상적으로 걸렸었다면 데몬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게 정상인 상황.

지금이라면 내가 다른 길로 세더라도 최소한 최리아에겐 큰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잘됐어.

거기다, 난 알 수 있으니까.

대산의 직원들조차 광산에서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고 있지만, 난 근처로 가기만 있다면 빛을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 토벌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도어 개방 10초 전.

잠시 후면 토벌전이 시작된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후우…!"

마음은 온통 혹시나 있을 무기의 흔적으로 가 있었지만.

막상 시작한다고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쩔 수 없나.

전국 생방송.

강철 심장이 와도 이건 떨릴 수밖에 없었다.

# 개방 3초 전.

어느덧 개방 직전.

# 2초 전.

우두둑.

# 1초 전.

가볼까.

# 개방.

* * *

"키라라!"

"크아아!"

우글우글.

더럽게 많네.

쫓아오는 데몬들을 피해 열심히 내달렸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란 공간은 다 들어가고 있는 상태.

하도 들쑤시고 다녀서인지 뒤에 붙은 데몬들의 수 역시 엄청났다.

그래도 다행이야, 광산이라고 해서 골렘이나 철덩이 같은 게 나오나 했는데.

그런 류의 데몬이었다면 조금 곤란할 뻔했다.

어찌 됐든 내 주력 무기는 쿨타임이 존재하지 않는 면도칼.

면도칼이 들어가지 않는 적이면 전투에 많은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당장 싸울 일은 없지만.

뒤에서 우글거리며 쫓아오는 데몬을 돌아봤다.

면도칼을 꺼내지 않아도 충분히 잡히지 않을 수 있는 스피드.

어차피 지금은 최리아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좀 더 몰고 다니며 공간을 탐색할 생각이었다.

고개를 들어 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시간과 점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김대석과 다른 헌터들의 점수가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 빠르진 않네.

조금은 걱정했었다.

대산의 헌터들이 김대석 주인공 만들기를 위해 꼼수를 쓰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러진 않는 모양이었다.

찍고 있는 카메라가 있기도 했고, 대산 외 헌터들의 점수 올라가는 속도가 무척 느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난 0점이고.

대산의 가장 큰 목적은 개미굴에서 무기왕에게 뺏겼던 대중의 관심을 다시 돌려놓는 것.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굳이 김대석을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대산 헌터들의 힘을 보여주면 되었다.

내가 점수를 바짝 쫓아오기라도 했다면 어느 정도 꼼수를 써서라도 몰아주기를 했겠지만 말이다.

내가 0점이라 낙오한 줄 알겠지만.

고개를 돌려 우글거리는 데몬들을 바라봤다.

미친건가, 왜 적립해놓은 마일리지처럼 보이지.

고개를 흔들며 앞에 보이는 샛길을 향해 달려갔다.

금빛이든 보랏빛이든 발견하는 순간,

연기는 끝이다.

* * *

# 아… 무기왕은 어째서 도망다니기만 하는 걸까요? 개미굴과 구룡산에서 보여줬던 그의 화력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걸까요?

중계되는 해설을 들으며 최리아가 미소를 머금었다.

사용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내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무조건 이행할 수밖에 없는 암시를 거는 것.

최리아가 개방한 능력이었다.

자신보다 높다고 인지하는 대상이나, 인지하진 못하더라도 실제로 사용자보다 높은 존재가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걸리게 되는 능력.

최리아는 백운이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기에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그렇게 도망 다니세요. 죽을 위기에라도 처하면 구해주긴 할 테니까.'

백운의 뒤를 쫓는 데몬의 수를 보니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렇게 달리다가 발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그대로 데몬 밥 행일 테니 말이다.

# 무기왕과 달리 김대석을 포함한 대산의 헌터들은 막힘이 없습니다! 개인전인 토벌전의 규칙을 지켜가며 각자가 맡은 데몬을 시원하게 처치하고 있는 모습! 역시 대산입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무기왕에게 쏠려 있던 카메라들 마저 지금은 대산의 헌터들에게 거의 다 옮겨 간 상태.

무기왕을 찍고 있는 건 CBC의 카메라 한 대 뿐이었다.

'게스트들도 딱 자기 역할만 해주고 있네.'

애초에 게스트 헌터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 겸 대산의 헌터들과 비교하기 편하라고 넣어둔 전투력 측정기 역할이었다.

'그나저나 저곳에 뭐가 있다는 걸까.'

- 사북의 광산을 정리 부탁드립니다.

대산의 용병단으로 온 탐사실의 지원 요청.

최리아는 용병단으로부터 그 지원 요청을 전해 듣고 토벌전을 계획했다.

'뭐가 있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긴 하니까.'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에 미소를 짓는 최리아.

최리아가 노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는 순간.

# 무… 무슨 일일까요! 무기왕이 방향을 틀어 데몬에게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

# 어… 어! 데몬 무리가 있는 옆으로 슬라이딩!!

달리다 말고 뒤를 돌아 우글거리는 데몬 쪽으로 슬라이딩해버리는 백운.

자리에서 일어난 최리아의 얼굴로 당혹감이 그려졌다.

"뭐… 뭐하는 거야!?"

당황한 건 최리아만이 아니었다.

홀로 중개하던 CBC의 송유빈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

# 아아 데몬들이 무기왕에게!! 어…!?

데몬들이 슬라이딩한 백운에게 덮쳐지려는 찰나,

스악!

백운이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데몬 무리를 벗어났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데몬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백운.

철컥.

"푸읍!"

최리아가 마시던 차를 내뿜었다.

"말…."

어느새 백운의 양손에 들려있는 두 자루의 권총.

백운이 모여있는 데몬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말도 안돼!!"

* * *

[앤 보니& 메리 리드]

망설임 없이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위험하다…!

조금 전, 옆 벽을 허물며 나타난 근육질의 데몬.

데몬의 등장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반짝.

데몬의 어깨에 달라붙은 채 영롱한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는 오래된 부적.

끼이이익!

너무 놀라 달리던 중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부적은 딱 봐도 오래되어 위태위태한 상태.

저대로 데몬 무리에 섞이게 뒀다간 찢어지거나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차피 공명의 순간엔 시간이 멈춘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후 녀석에게 달려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부적과의 공명을 통해 보게 된 오래전의 기억.

무기에 대한 흔적이었다.

그것도 비전 수리검에 대한 기억을 보게 됐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철컥.

데몬들에게 리볼버를 조준했다.

흔적을 찾아서도 있지만 지금은 최리아의 장단에 맞춰 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빛의 구원]

지금까지 몰이가 된 엄청난 수의 데몬에게 리볼버의 탄환이 퍼부어졌다.

* * *

# 드디어 나왔습니다! 무기왕의 전매특허! 포격에 가까운 탄환 세례!

# 지금까지 모여 있었던 데몬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갑니다!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

쾅!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이톤으로 팡팡 터지는 송유빈의 목소리에 최리아가 책상을 내리쳤다.

백운은 토벌전이 끝날 때까지 도망만 다녔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 아 점수가… 점수가아아아! 순식간에 대산 헌터들의 점수를 훌쩍 넘겨버립니다!

무기왕의 귀환에 대산의 헌터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들마저 백운에게 가버린 상황.

# 전부 계획이었나요! 일부러 데몬을 잡지 않고 몰아서 다른 도어에 있을 헌터들을 방심하게 한 뒤! 한 번에 점수를 끌어올리는 전략! 엄청납니다! 쏟아지는 탄환만큼이나 눈부신 전략입니다!

보고 있던 여러 개의 모니터에서 쉴새 없이 무기왕의 이름이 외쳐졌다.

# 대산의 헌터들! 순식간에 올라가는 무기왕의 점수에 당황한 것 같습니다!

# 김대석 헌터! 당황한 게 얼굴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아, 저희도 무기왕에게 가보겠습니다! 

'김대석 저 멍청이가!!'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해도 모자를 판에 저딴 얼굴을 하다니.

'전국으로 보여지고 있단 말이야!'

꾸욱.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지끈거리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왜 내 능력이 통하지 않은 거지?'

'애초에 통하지 않았다면 왜 데몬을 피해 다닌 거지?'

'갑자기 슬라이딩은 왜 했고!!'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슬라이딩을 하고 다시 빠져 나오는데 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찰나에 행해진 동작.

'….'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항상 차가운 평정심을 유지해왔던 최리아.

지금 그런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들과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들.

이것들이 가리키는 건 하나였기 때문이다.

망했다.

34화. 광산에 가두어진 것

서울 헌터 중앙처.

"기태랑이 요즘 아주 한가하지?"

대한민국 헌터의 대표이자 각 부서를 관리하는 헌터부 장관, 강태황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강태황 앞에서도 기태랑이 주눅 드는 것 없이 귀를 후비고 있었다.

"한가하면 다행이죠. 제가 한가하지 않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놈이 나왔다는 거니까요."

"그렇긴 하지."

생각보다 쉽게 수긍을 하며 강태황이 몸을 앉혔다.

"그래도 세상 참 좋아졌어. 처음엔 데몬 무섭다고 아무도 안 싸우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능력의 개방과 함께 등장한 데몬이란 존재.

처음에 사람들은 이런 데몬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었다.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싸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죠.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겠어요."

"넌 싸웠잖냐."

모두가 패닉에 빠져 데몬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때.

도망치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가 데몬에게 맞선 이들이 있었다.

1세대 헌터들.

지금 중앙처에 있는 대부분의 1급 헌터들은 이때 처음으로 데몬에게 맞섰던 1세대 헌터였다.

"하긴 넌 좀 미쳤으니까 그럴 수 있는 건가."

"제가 미친 거면 장관님도 똑같은 거죠. 같이 싸웠으면서 무슨."

"크하하하!"

강태황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강태황 역시 기태랑과 함께 처음부터 싸운 1세대 중 한 명이었다.

"요새는 데몬을 무슨 돈벌이 수단으로 밖에 안 보니…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데몬을 잡아 주니 고마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잊어서겠죠."

작은 한숨을 내쉰 기태랑이 입을 열었다.

지금 사람들이 인기와 돈을 벌겠다며 애써 데몬을 찾아다니며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이유.

잊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기태랑의 말에 강태황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노네임드 데몬.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이 잊어버린 존재였다.

"끔찍한 소리를 잘도 하는구만."

재수 없는 소리를 한다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강태황도 알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왜 나타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만큼 노네임드가 언제 어디서 다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과거에 나타났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국가의 전력도 많이 강해지지 않았나? 싸움에 나설 기업이나 시민들도 많고."

강태황의 말에 기태랑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에 비해 전력이 늘어나고 너도나도 데몬을 잡겠다며 나서고 있는 건 맞았다.

수적으로는 분명히 많이 늘어난 상황.

하지만, 중요한 건 수가 아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때 1세대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헌터들이 죽었는지요."

"…."

한국에 나타난 노네임드는 고작 네 마리였지만.

그 네 마리에 너무나 많은 생명이 죽고 말았다.

일반 시민들까지 포함하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숫자.

"기우면 좋겠지만…. 지금 분위기가 그때와 비슷합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개방과 능력에 조금씩 적응해 가며 데몬이란 존재를 느슨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나타난 네 마리의 노네임드.

돈과 인기에 눈이 먼 헌터들은 특이하게 생긴 노네임드에게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달려들었다.

그리고, 모두 죽고 말았다.

노네임드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채로, 무참히 찢겨서.

"지금 상황에 노네임드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지난번처럼 대참사가 일어날 겁니다."

"흐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끄덕이는 강태황.

강태황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태랑의 말대로였다.

데몬에 대한 경각심이 흐려져 있는 지금, 지금이 가장 위험했다.

"역사는 항상 반복 된다지만…."

강태황의 이마로 깊은 근심의 주름이 그려졌다.

"이번은 아니었으면 좋겠군."

* * *

[잭 더 리퍼]

면도칼을 꺼내 최대 속도로 내달렸다.

"크롸."

서걱!

데몬이 나왔다고 놀랄 틈 따윈 없었다.

순식간에 혈관을 긋고 각 도어의 헌터들이 모이고 있을 중앙홀로 향했다.

틱. 틱. 틱.

순식간에 점수를 역전당해서일까.

김대석과 대산 헌터들의 점수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끼고 닥치는 대로 데몬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씨. 몰이하던 거 놔두고 올 걸 그랬나.

빨리 가야 하기도 했고 혹시나 몰고 간 데몬들 때문에 다른 게스트 헌터들이 다칠까 걱정이 되어 전부 쓸어버린 건데.

그러면서 올라간 내 점수가 오히려 대산 헌터들에게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쾅! 쾅! 쾅!

얼마나 달려온 걸까.

저 멀리로 먼저 도착해 있는 헌터들이 보였다.

내가 있던 3도어를 제외하곤 전부 무리 지어 있어서인지 빠르게 도착한 듯했다.

"후웁…!"

폐에 최대한의 공기를 모은 뒤.

"잡지마아!!!"

모여있는 헌터들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 * *

"빨리 잡아!!"

백운의 점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다급해진 김대석과 팀원들.

팀원들은 카메라에 들키지 않게끔 조금씩 김대석에게 데몬을 몰아주고 있었다.

쾅!

김대석이 앞에 있는 데몬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마음이 조급했다.

조급해도 너무 조급했다.

'여기서 지면 개망신이다!'

쉬지 않고 대검을 휘두른 탓에 이마에는 땀이 가득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말도 안 되게 올라가 있는 백운의 점수.

'최리아 이 년은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속으로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오늘 아침, 배정된 도어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왜 무기왕한테 단독 도어를?

거품 투성이인 무기왕이 단독 도어의 이점을 제대로 취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한 변수를 주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물론, 최리아가 백운에게 암시를 걸었다는 걸 알고 있는 김대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독한 년.

단독 도어를 줘 아주 제대로 매장 시키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역시 일 처리 하나는 기가 막히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무기왕: 1141.

하늘에 떠 있는 저 말도 안 되는 점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저 정도 숫자면 단독 도어에 있는 데몬을 거의 몰살시킨 거나 다름없었다.

빠득.

쿵!

머리로 밀려오는 아찔함을 느끼며 김대석이 대검을 내리찍었다.

지금 있는 곳은 광산의 중앙 공간. 

각 도어에서 출발한 헌터들이 모이는 공간이었고, 가장 많은 데몬이 존재하는 장소였다.

"똑바로 막아, 한 마리도 건드리지 못하게."

"알겠습니다."

김대석이 옆에 있는 팀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뒤늦게 도착한 게스트 헌터들.

김대석의 1팀 팀원들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붙어 데몬 사냥을 방해하고 있었다.

물론, 보는 사람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동.

여러 토벌전에서 항상 해오던 거라 무척이나 익숙한 듯한 모습이었다.

"팀장님! 3번 도어 쪽에…!"

"…!?"

고개를 돌리니 백운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원래도 저렇게 빨랐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스피드.

"뭐라고 외치고 있는데요?"

옆에 있던 팀웜이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잡지말라고오오!!"

"!?"

어째선지 잡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백운.

팀원이 한참 대검을 휘두르고 있는 김대석을 바라봤다.

"자… 잡지 말라는데요?"

"미친 새끼!"

점수가 모자른 자신을 놀린다 생각해서일까.

분노한 김대석이 대검으로 힘을 모았다.

"다 비켜서라!!"

얼마나 얕잡아 봤으면 잡지 말라는 헛소리를 한단 말인가.

"다 밖으로 나와!"

"게스트 분들도 나오세요!"

썰물처럼 순식간에 중앙에서 벗어나는 헌터들.

그 때문인지 데몬들의 어그로가 전부 김대석에게로 쏟아졌다.

"크아아아아아!! 어스 브레이크!!"

잠시 후, 김대석이 기합과 함께 치켜 들었던 대검을 땅으로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

김대석이 기술에 붙인 이름은 어스 브레이크.

몸 안에 있는 힘을 한순간에 집중시켜 파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기술이었다.

띠리리리리리!!

한순간에 솟구치는 김대석의 점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아껴뒀던 필살기인데…!'

백운이 달려왔기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몇 마리만 더 잡으면 점수는 따라잡…

우우우웅!

'?'

다음 데몬에게 대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광산의 중앙이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 * *

망했다.

붉은 빛을 띠는 중앙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김대석 무식한 새끼!!

그렇게 잡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마지막 큰 기술까지 내리 꽂아버린 김대석.

김대석의 기술을 마지막으로,

우우우!

조금 전 기억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뭐야, 여긴.

부적을 통해 들어온 공간.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광산이 아니었다.

한국에 이렇게 큰 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사찰이었다.

무슨 무기의 흔적이길래 절이 나오지?

염주 같은 건가.

"준비되셨습니까?"

?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찰 뒤쪽에 모여있는 열댓 명의 스님들.

분명 고기 못 드실 텐데.

스치기만 해도 뼈가 나갈 것 같은 엄청난 두께의 팔 근육들.

모여있는 스님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장소는 준비되었습니다."

"도윤은…?"

"광산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겠다 하셨습니다."

대답을 들은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님들의 얼굴에는 엄청난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그럼… 출발하시죠."

화악!

출발하자는 말과 함께 배경이 바뀌었다.

여긴 광산.

구조가 좀 변하긴 했지만 토벌전을 치르던 광산이었다.

쾅! 쾅! 쾅!

…!

조금 전 사찰에서 봤던 스님들이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가까이 보기 위해 조금 더 다가가자 선명하게 보이는 스님들의 적수.

데… 데몬!?

지금까지 봐왔던 데몬들과는 체형이 많이 달랐지만, 분명 데몬이었다.

데몬이 왜 지금…?

아까 봤던 사찰만 얼추 봐도 공간의 배경은 최소 수백 년 전이었다.

개방이나 능력이 나타나기 전일 텐데 어떻게 데몬이 있는 걸까?

캉! 캉! 빠악!

어떻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삐쩍 마른 사람 체형에 눈을 제외한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데몬.

엄청… 강하다.

스님들도 분전하고 있지만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말도 안 되게 부드럽고 빠른 움직임으로 스님들에게 상처를 쌓아 가는 데몬.

"키킥!"

!!!

웃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스님을을 향해 양손에 든 단검을 휘두르고 있는 데몬.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데몬의 입가는 길게 찢어져 있었다.

즐… 기고 있다.

스님들에겐 목숨을 건 혈투였지만, 적어도 저 데몬에게는 아니었다.

여유롭게 스님들의 공격을 회피하며 이따금씩 칼을 내뻗고 있는 데몬.

일부러다.

충분히 스님들을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데몬은 그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싸움을 즐기려는 듯, 스님들이 조금이라도 더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 하게 만들려는 듯 싸움의 템포를 조절하고 있었다.

"피하십시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휘릭!!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데몬이 있던 장소로 날아들었다.

잠시 먼지가 일어나며 찾아온 정적.

!!

먼지가 걷힌 후, 조금 전 날아든 것의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회귀 전 대산의 발표 기사에서 봤던 무기.

비전 수리검이었다.

35화. 피렌조

수리검을 던진 건 거대한 삿갓의 남자.

"도윤!"

"물러나십시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도사들이나 입을 법한 나풀나풀한 도복과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

스님들에게 도윤이라 불린 남자가 데몬에게 다가갔다.

"킥…."

그런 도윤을 기다려 주겠다는 듯 공격을 멈추는 데몬.

"도윤, 우리도 같이…."

"아닙니다. 저 혼자 싸우겠습니다."

"하지만 몸이…."

딱 봐도 도윤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몸 곳곳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고 노출된 상체에는 붕대 투성이었다.

"괜찮습니다, 스님들은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네!"

도윤이 중앙에 서 있는 데몬을 바라봤다.

"피렌조, 끝을 내자꾸나."

이름?

데몬을 이름으로 부른건가?

"키르르."

피렌조라 불린 데몬도 이름을 알아듣는 듯한 반응이었다.

저 시대에 데몬이 있는 것도 모자라 이름이 있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헷갈렸다.

콰앙!

잠시 후 피렌조와 도윤의 싸움이 시작됐다.

상체만 한 수리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피렌조의 단검을 받아치는 도윤.

뭐야 이게….

내가 지금까지 알던 싸움이 아니었다.

한 번의 스탭, 한 번의 공격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살얼음판 위의 싸움.

도윤과 피렌조의 공격엔 서로를 죽이겠다는 살의 외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

도윤과 피렌조의 싸움을 보고 있자니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 오늘은 늑대 계열 데몬인 하인드를 잡아 보겠습니다! 타임아웃 걸어놓고 오늘도 100마리 도전!

시간이 지나며 헌터들의 동영상 컨텐츠는 점점 다양화되었다.

처음엔 데몬만 잡아도 사람들이 멋있다며 조회수를 올려주고 좋아요를 눌렀지만, 이젠 아니었다.

더 자극적이고 더 참신하지 않으면 아무도 봐주지 않게 된 것.

- 탕탕! 벌써 두 마리 잡았습니다! 탕! 한 번에 세 마리!

마치 게임 컨텐츠를 즐기듯 데몬 사냥을 하고 있는 헌터들.

순간 이게 맞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도 별다를 건 없네….

구룡산에서도 마지막 옹달샘에서는 정말 죽을 뻔했지만, 크럭커나 다른 데몬들과 싸울 때는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쉽게 생각했었다.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 없이 임했던 싸움들.

꿀꺽.

그래서일까.

목적이 있었다곤 하나 최리아가 제안한 토벌전에도 편한 마음으로 참가했었다.

들어가는 광산에 데몬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내가 강해서?

아니야.

지금까지 싸웠던 데몬들이 약했고, 그래서 착각하게 된 것이었다.

콰앙!

눈앞에서 펼쳐지는 싸움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깨닫고 말았다.

지금까지 만난 데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키르륵!"

푸확.

피렌조가 휘두른 칼이 도윤의 오른쪽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비등을 넘어 도윤이 앞서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르자 형세가 점점 피렌조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헉… 헉…."

피렌조에 비해 확실히 지쳐 보이는 도윤.

둘러져 있는 붕대에선 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푹!

푸확!

서걱.

싸움이 중반으로 접어들자 도윤은 피렌조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꺾여선 안 되는 방향으로 휘어지며 들어오는 피렌조의 다채로운 공격.

"도윤!! 완성됐습니다!!"

도윤이 얼마 버티지 못하겠다 싶은 순간.

스님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후웅… 콰앙!

스님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피렌조를 밀어내는 도윤.

도윤이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뒤 있는 힘을 다해 들고 있던 수리검을 전방으로 내던졌다.

날아가 수백 장의 부적이 붙어있는 문으로 꽂히는 수리검.

유일한 무기를 왜?!

푹!!

아니나 다를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찔러 들어온 피렌조.

피렌조의 단검이 도윤의 등에 꽂혔다.

"하아…."

덥썩.

그런 피렌조의 두 손을 붙잡는 도윤.

"같이 가자."

"키르!?"

도윤의 읊조림과 동시에 둘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는 꽂혀 있는 수리검으로 순간이동 해버렸다.

드드드드드!

도윤과 피렌조가 이동하기 무섭게 부적이 붙어있는 문에서 수천 개의 손이 뻗어 나와 둘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키르라라라!!!!"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는 피렌조와,

"도… 도윤!!"

"안돼!!"

함께 끌려가는 도윤을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는 스님들.

잘은 모르지만 이미 손 쓸 수 있는 단계는 지난 것 같았다.

"후우… 후우… 절대… 이곳에 피가 흐르게 해선… 안됩니다…."

도윤이 생명이 다 해가는 와중에도 힘을 줘 강조한 것.

피렌조가 갇힌 문이 있는 곳에 피가 흐르지 않게 하라였다.

쿵.

그렇게 문이 닫힌 뒤.

도윤과 피렌조가 사라진 문밖에는 튕겨 나온 수리검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 * *

그다음 기억이 보여 준 건 시간이 지나며 문이 있는 장소가 어떻게 변했는지였다.

문 위로 토사와 암석이 쌓이며 평평한 땅이 되어버린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바로 헌터들이 모여있는 광산의 중앙 홀이었다.

우우우우웅!

김대석이 죽인 데몬들의 피가 빠르게 땅 아래로 흡수되어 갔다.

다들 어디서 이런 빛이 나오는 건지 어리둥절 해하고 있었다.

그놈이 나온다.

"다들 도망쳐요!!"

뜬금없는 내 외침에 더욱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

"거기 있으면 다 죽는다고! 나오라…!!"

데몬들의 피가 스며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대산의 헌터 한 명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저건 또 뭐라고 소리 지르는 거야, 야 들리냐? 뭐라고 하는지?"

"대… 대리 님. 뒤… 뒤에…."

"뒤에 뭐…!?"

그게 등장한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붉은 빛이 잦아든다 싶은 순간, 대산 헌터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피렌조.

"키릭…."

스아아아!!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가 피렌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든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든 예외는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죽는다.

"어… 어… 너 뭐…."

푹.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처 하나 없이 데몬을 여유롭게 잡던 대산의 헌터들.

그중 한 명의 목에 오래되고 녹슨 단검이 박혔다.

"이 대리님!!"

"뭐야 이 새끼는!"

바로 옆에 있던 서너 명의 헌터가 무기를 휘둘렀다.

스륵!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여 헌터들의 공격을 피해내는 피렌조.

스가악!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정해져 있었다.

피렌조가 기괴한 팔의 움직임으로 주변에 있는 헌터 네 명을 도륙해버렸다.

"으… 으아아아!!"

"한 번에 덮쳐!!"

"원거리 스트라이커들은 거리를 벌려라!"

"지원 계열은 뒤로 물러나서 서포… 꺼억."

포지션을 잡는 와중에도 빠르게 달려들어 헌터들을 베어나가는 피렌조.

기억에서 보단 움직임이 둔하다.

지금도 기괴하고 따라잡기 힘들지만, 기억과 비교하면 피렌조는 몹시 약해져 있었다.

오래 갇혀 있어서인지, 아니면 여전히 몸에 묶인 부적과 사슬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약해졌더라도.

여기 있는 인원이 이길 적수가 아니었다.

"싸우지 말고 도망쳐!!"

"으… 으아아!"

"살려줘!"

조금 전의 살육을 봐서일까.

이번엔 내 목소리에 즉각 반응해 도어가 있는 곳으로 내달리는 사람들.

"티… 팀장님!"

"대석 팀장님!"

"대석이 형!"

피렌조와 대치하며 서서히 거리를 벌리는 헌터들이 김대석을 찾았지만.

주춤.

김대석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는 현재 여기 있는 헌터들 중 가장 강한 헌터인 김대석.

"으… 도… 도망쳐."

가장 강해서일 수도 있었다.

누구보다 피렌조와의 격차를 잘 느껴버린 것 같았다.

휙!

뒷걸음질 치던 팀장 김대석이 도어를 향해 몸을 돌려버리고.

"어…."

"팀장님…?"

그 순간 대산 헌터의 사기는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말았다.

"멍 때리지 말고 도망쳐!!"

"도망쳐!"

"도어까지 달려!"

포지션을 잡고 피렌조를 상대하려던 대산의 헌터들이 우루루 몸을 돌렸다.

푹! 푸확!

그런 헌터들을 상대로 피렌조의 일방적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자유로워진 몸에 적응되지 않는지 동작이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도망가는 헌터들을 따라잡는 것 정도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으득.

이대로면 다 죽는다.

중앙홀에서 도어까지는 꽤 먼 거리.

먼저 달렸더라도 속도의 차이 때문에 금방 따라잡힐 것 같았다.

끼긱. 끼긱.

고장난 태엽 인형처럼 움직이는 피렌조.

회귀하기 전에 뉴스 좀 잘 볼걸.

뒤늦은 후회가 드는 순간이었다.

토벌전에서 저런 게 깨어났다면 분명 뉴스에 크게 나왔을 텐데.

개방 조건 찾으러 다니겠다고 그런 것들과 멀게 살던 시기였다.

만약 저놈이 도달할 때까지 도어가 닫히지 않는다면.

대참사였다.

광산 밖엔 소식을 듣고 구경 온 사람들과 기자들이 잔뜩 모여있는 상태.

거기서 더 나아가면 사북 시민들 역시 녀석의 희생량이었다.

"으아아아!"

"나 좀 살려줘!"

현재 광산에서 정신이 온전한 건 나 혼자였다.

나머지는 피렌조의 공포에 모두 정신이 나가버린 듯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피렌조를 응시했다.

난 영웅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해야 할 의무나 책임 역시 없다.

….

없지만,

해볼 수 있는 건 해본 뒤에 도망쳐도 늦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감성보단 이성이 앞서는 사람일지언정.

가능성을 남겨 둔 채 밖의 사람들을 몰살로 밀어 넣는 짓은 할 수 없었다.

희생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100% 불가능이라 생각했다면 도망쳤겠지만.

지금 피렌조의 상태를 봤을 때 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가능성이 있다면.

저벅.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쳐오는 사람들과 함께 피렌조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는 아직 쿨타임이다.

남아있다 하더라도 저렇게 움직이는 놈을 원거리에서 맞추는 건 불가능해 보이고.

남은 건 면도칼과 유탈라스의 비늘.

지난 거북이를 때를 생각하면 비늘의 지속 시간은 딱 한 방이다.

한 방.

"키이키킥!"

피렌조는 오랜만에 피맛을 봐서인지 도망치는 헌터들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방심하고 있는 지금, 딱 한 방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간다.

최대한 도망치는 헌터들과 몸을 겹치며 피렌조에게 달려갔다.

면도칼까지 들고 있기에 지금의 피렌조에겐 스피드로도 지지 않는 상태다.

호흡을 정리하며 타이밍을 계산했다.

피렌조와 나 사이에 있는 게스트 헌터 한 명.

헌터와 피렌조의 거리는 약 5보.

나와 헌터의 사이는 약 7보.

"으… 으아아! 살려줘!!!"

바로 뒷통수까지 쫓아온 피렌조에 헌터가 소리를 지르고.

마음속으로 거리를 세기 시작했다.

3보.

"으아…!!"

2보.

헌터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기 위해 공중으로 도약한 피렌조.

"키륵!?"

그제야 피렌조가 목표물 너머의 날 발견했지만, 이미 허공에 떠오른 상태.

무조건 맞춰야 한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무조건 맞춘다!

"숙여!!!"

"히익!"

도망치던 헌터가 몸을 수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피렌조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36화. 탱커

강태황과 기태랑.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던 장관실로 전화벨이 울려왔다.

"강태황입니다."

"장관님! 50번 CBC 채널입니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채널명을 말하는 비서.

평소라면 인사부터 안 하냐며 농담이라도 건넸을 강태황이지만.

"알겠다."

삑.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군말 없이 TV를 틀어 채널을 돌렸다.

"!!"

그렇게 두 사람 앞에 틀어진 TV 속.

왼쪽 상단엔 기업 대산의 토벌전이란 제목이 달려있었다.

어느 광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토벌전.

문제는 지금 카메라가 찍고 있는 장면이었다.

# 저… 저건 대체….

중계를 하고 있는 리포터조차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설마…!"

모습을 드러낸 데몬이 헌터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사람과 비슷한 체형에 붕대를 감고 있는 데몬.

데몬은 일반적인 놈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 아아… 허… 헌터들이!

"노네임드!?"

데몬을 저지하려던 대산의 헌터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대검을 든 헌터의 뒷걸음질을 시작으로 데몬과 헌터들의 쥐와 고양이 게임이 시작되었다.

# 저… 저건 대체!

삐이이이----!

# 앗 화면이…!? 카메라! 카메라 무슨 상황인가요!

"제가 가겠습니다."

기태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사북에 있는 놈한테도 연락해놨으니 그 녀석이 먼저 갈 거다."

"알겠습니다."

입술을 깨문 기태랑.

아직 광산에 나타난 게 노네임드 급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어째서….'

저벅.

'불길한 생각은 한 번을 틀리지 않는거냐…!'

* * * 

"시… 실장님. 각 방송국에서 항의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전수희가 흔들리는 눈으로 최리아를 바라봤다.

- 회선이랑 전파 다 차단해요.

조금 전 최리아의 지시에 따라 전국으로 송출되던 전파를 다 차단 시켜 버렸다.

당연히 돈을 주고 방송권을 따낸 방송사들에선 난리가 난 상태.

대산에서 고의적으로 끊은 게 아니냐며 당장 켜라는 전화가 쏟아지고 있었다.

"송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세요. 방송사에서 피해입은 금액은 대산에서 전부 보상하겠다 하시고."

"괘… 괜찮을까요?"

전수희의 말에 최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저거 내보낼 거야?"

"…."

전수희가 최라아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방송사들의 영상은 끊겼지만 대산에서 직접 설치한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는 상황.

카메라 속에선 팀장 김대석과 대산의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어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끈.

최리아가 뜨거워진 머리에 두 눈을 감았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예상을 뒤집어버리는 백운의 행동도 모자라 저딴 게 나오다니.

'김대석 정말….'

그리고 궁지에 몰리자 밑바닥을 드러내며 제일 먼저 등을 보인 김대석.

다행히 빠르게 방송을 끊어 김대석의 추태가 송출되진 않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석을 능력 이상으로 띄워주며 인기를 얻게 해준 건 이유가 있었다.

다른 헌터들이 가지지 못한 걸 갖고 있었기 때문.

'인기에 대한 정신병적인 집착, 그리고 그걸 위해선 어떤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인간.'

카메라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까지 잘 가렸기에 대산에서도 굳이 김대석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팀장 자리까지 줘가며 키워줬는데.

'생각보다 밑바닥이 더 깊구나.'

아무리 쓰레기라도 오랫동안 함께 한 부하들을 저렇게 버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마음 같아선 전국으로 송출되는 카메라에 다 까발려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고 싶었지만, 김대석을 열심히 밀어줬던 만큼 회사에 끼치는 악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 막강한 전력인 용병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헌터!

'실수다.'

더 띄워주겠다며 너무 과한 수식어를 달아버렸다.

그런 김대석이 망가지는 순간 대산의 용병단의 이미지는 완전 나락행.

"어… 어!"

"…?"

전수희의 탄성에 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쳐다보기조차 힘든 일방적인 학살극.

학살극을 피해 모두가 도어로 달리고 있을 때, 단 한 명만이 반대로 달려 가고 있었다.

* * *

콰아아아앙!

엄청난 괴력에 걸맞은 굉음이 터져 나오고, 일직선으로 날아간 피렌조가 광산의 벽으로 박혀버렸다.

맞았다!

오른손에서 유탈라스의 비늘이 해제되는 게 느껴졌다.

"으… 으아!"

몸을 숙였던 헌터가 재빠르게 도어를 향해 달려갔다.

후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피렌조가 날아간 벽을 바라봤다.

단단한 광산의 벽이 파일 정도로 강하게 부딪힌 상태.

일반 사람이었다면 몸이 터지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제발 뒤졌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몸을 돌렸다.

리볼버와 함께 쿨타임에 들어간 유탈라스의 비늘.

이제 안 뒤졌더라도 어쩔 수 없다.

해볼 건 다 해봤다.

여전히 뛰고 있는 헌터들과 함께 도어를 향해 열심히 달렸다.

기억에서 본 피렌조는 분명 강했지만, 괴력이 있다거나 특수한 기술을 쓰는 건 아니었다.

다른 숨겨둔 힘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엄청난 두께의 도어를 뚫어내는 건 불가능.

외부랑 통하는 도어를 닫고 지원을 기다리….

드드드드!

…?

한참을 달리고 있을 때.

"무… 문이!!"

"문이 닫힌다!"

아직 들어가지 못한 헌터가 태반인데 도어가 닫히고 있었다.

그 도어의 뒤에서 잔뜩 겁에 질려 이빨을 부딪히고 있는 김대석.

저 새끼 설마….

김대석이었다.

문 옆에 위치한 비상레버로 문을 닫고 있는 것은.

"티… 팀장님!!"

"기다려요!"

"뭐하는 짓이야!!!"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려온 헌터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다른 문으로 돌아가려면 조금 전 피렌조가 나타났던 중앙홀을 거쳐야 했다.

"으… 으…!"

저렇게 겁쟁이 새끼였단 말인가.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얼굴이 구겨져 있는 김대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피렌조를 마주했던 탓인지 공포에 잡아 먹혀버린 듯했다.

"야! 김대석!!"

"미친놈아!!"

김대석은 중앙 홀에서 팀원들의 부름에도 제일 먼저 도망쳤었다.

그리고 이젠 아직 팀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도어를 내리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당장 멈…."

퍽!

…!

같이 도착해 있는 게스트 헌터 중 한 명이 말리자 김대석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입 닥쳐! 저 괴물한테 다 죽고 싶어!?"

스릉.

"레버에 손대지 마!!"

저 쓰레기 새끼가!

레버 옆엔 대검까지 꺼내든 김대석을 이길 수 있는 헌터가 없었다.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

그 상황 속에서도 도어는 반 이상 닫혀가고 있었다.

"야 김대석, 이 개새끼야!!"

아직 도착하지 못한 팀원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인간이 덜된 건 알았지만 일해 온 세월이 있는데 이렇게 버리다니.

쿵.

"…."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닫혀버린 2번 도어.

있는 힘껏 달리던 헌터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절망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천천히 중앙 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어가 닫혀 나갈 수 없는 이상, 바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부디 유탈라스의 한 방으로 놈이 뒤졌기를 바라는 것.

제발….

두근.

제발 그대로 누워 계세요.

두근두근.

하느님, 제발 저 새끼 그냥 누워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앞으로 꼭 교회 다닐게요!!

비척.

….

아주 미세한 소리였다.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게 아니라면 들리지 않을 아주 작고 미세한 소리.

환청이었으면 했지만,

비척.

분명히 들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질질 끌며 걷고 있는 듯한 소리.

"…."

"…."

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김대석을 욕하며 절규하던 이들도 지금은 모두 중앙 홀 쪽을 바라보며 얼어버린 상태.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소리는 분명 저들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비척… 뚝.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소리의 정체.

하느님… 부처님… 알라시여….

머리로 떠오르는 신들을 전부 찾아보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남아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 유탈라스의 주먹에 가격당한 피렌조의 좌측 가슴.

가슴을 기점으로 왼쪽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

그리고 무언가 질질 끌리던 소리.

피렌조는 오른손에 떨어져 나간 왼쪽 어깻죽지를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어깻죽지에서 떨어질랑말랑 달랑거리며 땅에 끌리고 있는 왼팔이 소리의 정체였다.

무섭다.

너무 무서우면 비명조차 안 나온다 했던가.

지금 내가 딱 그 상태였다.

저런 몸 상태가 되었는데도 피렌조의 입은 여전히 양옆으로 벌어져 있었다.

마치 이렇게 돼서 더 즐겁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트… 틀렸어…."

뒤에서 절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을 거야."

"흑흑. 누가 좀…."

"살고 싶어…. 살려줘…."

누가 보면 이미 다 죽어서 요단강 건너고 있는 줄 알 정도의 절망.

"포… 포기하지 마요!"

"저런 상태잖아요! 다 같이 싸워봐요!"

그나마 있었다.

정상인 사람들이.

어젯밤 만났던 게스트 헌터, 배이슬과 유연경이었다.

"맞… 맞아요! 수적으론 우리가 더 유리해요!"

그나마 공포에 집어 삼켜지지 않은 대산의 헌터 몇 명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네, 멀쩡한 인간들도 있어서.

"전 대상의 속도를 줄여나갈 수 있어요. 상대의 강함에 따라 줄어드는 속도나 맥스치는 존재하지만…."

"주변에 놓인 10개 내의 돌을 강화하고 움직일 수 있어요."

유연경과 배이슬을 시작으로 헌터들이 번갈아 가며 자신의 능력을 밝혔다.

어쨌든 함께 싸우게 되었으니 서로의 능력을 아는 게 필요했다.

….

마지막 헌터의 설명까지 들은 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있는 헌터들은 전부 서포터 혹은 원거리 딜러들이었다.

당연히 근접 전투에 있어선 취약한 상태.

이들이 무언가 할 수 있도록 피렌조로부터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네.

어렸을 때부터 굳이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역할을 나눠 플레이하는 MMORPG 게임을 할 때도 탱커 같은 부담이 큰 역할은 피해왔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내가 탱커라니.

꿀꺽.

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피렌조는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예상치 못했던 일격까지 맞으며 부상까지 얻은 상황.

해보….

비척… 비척… 비척… 비…. 타다다!!

시벌.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피렌조가 속도를 올려 달려오기 시작했다.

잘려나간 한쪽 팔을 든 채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정말… 무서웠다.

"키리리!!"

당한 부상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지금 상황이 즐거운 건지 미묘한 괴성을 내지르는 피렌조.

저벅.

그런 피렌조를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잭 더 리퍼]

오른손으로 생겨나는 면도칼.

지금 내겐 이것뿐이었다.

타닷.

나도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와라.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피렌조.

붕대 새끼야!!

37화. 죽음의 경계에서

후웅.

눈앞으로 피렌조의 왼팔이 날아들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며 빙글빙글 피를 뿌려대는 녀석의 왼팔.

…!

왼팔에 들려있던 단검이 없었다.

쐐엑!

왼팔이 위로 비껴가고 그 뒤에 숨겨뒀던 단검이 얼굴 앞으로 날아들었다.

크!

빠르게 몸을 젖혔지만 이마를 베고 지나간 피렌조의 단검.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나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캉!

어느새 다가온 피렌조가 단검을 휘둘렀다.

부적의 기억에서 봤던 것보단 느린 건 확실했지만.

쇄엑.

그래도 너무 빠르다.

내가 그 단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니 느려진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빠른데 도윤이 받아냈던 건 대체 얼마나 빠르단 걸까.

챙! 챙! 쾅!

한 손임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단검을 휘둘러대는 피렌조.

힘은 부족하지 않다.

다행인 점은 피렌조의 파워 자체가 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기괴하게 꺾이며 날아드는 단검의 다채로운 궤도와 저 속도, 그리고….

스륵.

저 짐승 같은 반사신경이었다.

이건 유효타라고 확신하며 휘둘러지는 면도칼을 쳐다보지도 않고 피해내는 말도 안 되는 감각.

피렌조는 항상 간발의 차로 피해내고 있었지만, 그걸 보면서도 아깝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극한의 효율.

내 면도칼이 위협적이고 빨라서 간발의 차로 피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딱 필요한 정도로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정도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도 피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행동하는 것.

"디버프는 걸었어요! 조금만 있으면 느려질 거예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시간은 나의 편이란 소리.

지금도 받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긴장을 늦출 순 없지만 그렇다고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충분히 면도칼의 속도와 반응으로 따라갈 수 있는 수준.

이대로 받아내며 시간을 보내면 유연경의 능력으로 피렌조는 느려질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자.

* * *

캉! 캉! 캉! 캉!

어째서!

카앙!

어째서 안 느려지는 거야!

푸확.

왼쪽 어깨로 피렌조의 단검이 박혀 들었다.

"끄아…."

더럽게 아프다.

후웅.

휘둘러지는 면도칼을 피해 피렌조가 거리를 벌렸다.

"키킥!"

유연경이 능력으로 슬로우를 건지 10분.

시간이 지날수록 느려질 거란 기대와 달리, 오히려 피렌조는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당황한 건 능력을 사용한 유연경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능력이 들어갔음에도 적이 느려지긴커녕 더욱 빨라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살짝 절망스럽네.

이 싸움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 탕! 탕!

- 돌이여!

싸움의 초반까지는 틈을 보며 원거리에서 지원 공격을 날려줬던 헌터들.

지금은 그 지원 공격마저 나와 피렌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사실상 유연경의 디버프를 제외하곤 피렌조와 나의 일 대 일 싸움이 된 셈.

돌아오고 있는 건가.

왜 빨라지는지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유연경의 능력은 제대로 통하고 있지만, 피렌조의 몸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며 유연경의 능력을 웃도는 것.

느려지는 속도보다 빨라지는 속도가 더 큰 것이었다.

상체 반쪽이 날아갔는데도 저런 여유라니… 끔찍하네.

감각이 돌아왔다는 걸 알아서일까.

피렌조 역시 처음보다 더 여유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후우…!"

피렌조의 여유와 반비례해 내 몸엔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조금씩 피렌조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고 그 여파로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쓰라림이 내 행동에 더 제약을 걸고 있었다.

다쳐본 적이 없구나.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크럭커를 피해 달리다 한두 군데 긁히긴 했지만, 처음 만난 데몬인 하운드를 시작으로 상처라고 할 만한 걸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대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며 실제로 부상을 당한 건 지금이 처음인 셈.

그래서인 것 같다.

몸이 낯선 상처의 고통에 반응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너무 쓰라렸고 이런 상처가 더 생기는 걸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

"키릭!"

잠시 여유를 즐기던 피렌조가 다시 쇄도해 들어왔다.

핏!

간발의 차로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

대체… 어떻게 휘두르는 거냐…!

오른쪽으로 휘둘러지는 단검.

단검을 피했다 생각하는 순간 여지없이 옆구리로 단검이 파고들었다.

기억을 통해 봤기에 알고는 있었다.

피렌조의 관절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이며 사각지대를 파고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푹!

다시 한번 왼쪽 어깨를 파고드는 단검.

알고 있는 거랑 직접 마주 보며 싸우는 건 천지 차이였다.

피렌조의 단검은 왼쪽인가 싶으면 오른쪽으로 날아들었고, 위인가 싶으면 아래에서 턱을 찔러 들어왔다.

면도칼이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다.

그나마 잭 더 리퍼의 반응속도 덕에 어찌어찌 치명상은 피하고 있었다.

공격을 해야 되는데….

카앙!

해야 되는데….

캉! 캉! 캉!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할 틈이 주어 지지 않았다.

녀석의 단검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지?

왼쪽인가, 아니면 속이는 척 하면서 오른쪽?

다시 눈앞에 단검이 나타날 때까지 머릿속을 괴롭히는 끝 없는 질문이었다.

사악.

!!

다시 한번 시야에서 사라지는 피렌조의 단검.

어디냐…!

굽어져 있는 녀석의 관절을 따라 눈을 돌렸다.

아무리 관절을 꺾는다 한들 찌르고 들어올 곳은 오른쪽.

…!

관절을 따라 도달한 피렌조의 손끝.

없다.

없었다.

저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할 단검이.

그럼 단검은 어디….

쐐에엑.

아….

입에 단검을 물고 있는 피렌조.

피렌조의 머리가 내 목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스아아아아.

찰나의 순간. 

몸으로 낯선 감각이 몰려들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죽음.

정확히는 느낄 일이 없었던 감각.

죽음이란 감각이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스걱.

단검의 날카로운 날이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주 찰나지만 알 수 있었다.

베였다.

단검이 지나가고 광산으로 짧은, 아주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

"배… 백운 님…?"

"으… 으어…."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을 뒤로 하고.

푸화아악!

목에서 터져 나온 피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 * *

끈적.

…?

손끝으로 불쾌한 끈적임이 느껴졌다.

이 느낌, 어디선가.

"오랜만이군."

낯설지 않은 감각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쇠를 갈아 넣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

회귀한 뒤 처음으로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잭 더 리퍼.

천천히 눈을 뜨니 그 공간이었다.

잭 더 리퍼와 처음으로 만났던, 사방이 끈적이는 피와 피비린내로 뒤덮여 있는 장소.

여전히 시뻘겋네.

장소 뿐 만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피로 도색을 해놓은 잭 더 리퍼.

새빨간 피 속에서 보이는 건 잭의 하얀 눈동자와 이빨 뿐이었다.

"어떠냐, 죽은 소감은."

"…."

다시 한번 느끼지만 역시 미친놈이다.

죽은 사람한테 죽은 소감을 묻다니.

그나저나, 나 죽은 건가. 

"저 죽은 건가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잭이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을 예정이지. 모가지를 베였으니 아마… 과다출혈일 거고."

참 무덤덤한 인간이다.

위로는 못 해줄망정 저렇게 사인을 읊고 있다니.

"다시 한번 묻지, 죽음의 소감은?"

진짜 미친놈이지만.

대답해주기로 한다.

어차피 죽었는데.

음…. 그런데 난 지금 어떤 소감일까.

죽으면 엄청 억울하고 슬플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기분이다.

이 기분은 억울보다는 오히려….

"무섭네요."

무서웠다.

"뭐가 무섭지? 너 뒤에 있던 헌터들이 앞으로 죽을 거라서? 밖에 있는 민간인들이 학살 당할까봐?"

"… 아뇨."

역시 난 히어로가 되기엔 틀린 것 같다.

보통 영화나 만화에서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라며 각성하곤 하는데.

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여기서 끝이라는 게 무섭네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불변의 법칙인데 뭐가 무섭다는 거지?"

"끝…. 이번엔 제가 정할 생각이었거든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나왔다.

"그 근처도 가지 못했는데 이렇게 끝난다는 게 무섭네요."

씨익.

무슨 의도로 물어본 걸까.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인지 잭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그려 보였다.

"피는 충분히 모였다."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뭘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데몬을 베면 벨수록 면도칼에 무언가 쌓여 가는 듯했던 감각.

단순히 경험치 같은 거겠지 했는데 피가 쌓이는 거였나.

"하지만 넌 은연중에 거부하고 있더군."

거부하다니?

"미치광이 연쇄 살인마의 광기를 받아들이는 걸 말이야."

…!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오래되진 않은 듯하다.

면도칼을 사용해 데몬을 베어낼 때마다 몸 깊숙이 파고들려는 무언가를 느꼈었다.

그때마다 묘한 불쾌감이 느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면도칼을 해제해버렸었다.

"죽는 순간마저 무서운 그 끝이란 거, 안 만나게 해줄 수 있다면 어찌 하겠느냐."

이러려고 물어봤구만.

처음 하운드에게 몰려 잭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 살기 위해서 그 칼을 잡은 거냐? 무고한 100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그 면도칼을?

"당신의 광기를 받아들이면 살려주겠단 건가요?"

"살려주겠다… 는 좀 맞지 않는 거 같군.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거다."

스윽.

가까이 피투성이 얼굴을 가져다 대는 잭.

"네가 면도칼을 통해 사용하는 힘이 온전히 나의 힘이라 생각하나?"

"…?"

당연히 나한테 이런 힘은 없었으니 잭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고개를 몇 번 저은 잭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난 살아있을 때 이 정도로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유명한 연쇄 살인마라 해도 결국엔 인간이었으니까."

나도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반응속도와 감각.

잭은 인간인데도 어떻게 이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걸까.

"내가 너의 무기이기에, 네가 나의 사용자이기에."

!!

어째서일까.

명쾌한 대답이 아닌데도 잭이 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내 무기가 잭 더 리퍼였기에, 내가 무기왕이었기에 모든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

내가 알아들은 듯 하자 잭이 멈췄던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묻지. 끝을 안 만나게 해주마."

스윽.

잭이 피로 물든 손을 내밀었다.

"잡겠느냐."

"… 대가는요?"

씨이익!!

잭의 입이 좌우로 넓게 찢어졌다.

기대돼서 미치겠다는 웃음이었다.

"더 많은 피를, 더 맛있는 피를 뿌리게 해다오!!"

역시… 미쳤다.

스윽.

그리고, 나도 살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덥썩.

미칠 예정이다.

* * *

탕! 탕! 탕!

"오… 오지마!!"

"으아아!"

사람들의 통하지 않는 발악과 절규가 들려왔다.

비척.

그런 사람들의 공포를 즐기며 걸어가고 있는 녀석의 발소리도 들렸다.

….

[잭 더 리퍼 - 동기화]

꿀렁.

목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을 적셨던 피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간에서 봤던 잭 더 리퍼의 모습처럼 조금씩 내 몸을 물들이는 붉은 피.

두근!!

동시에 온몸을 짜릿하게 만드는 감각이 퍼져나갔다.

죽이고 싶다.

"피렌조."

멈칫.

누운 상태에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아 멈춘 듯하다.

"이리 와."

38화. 킥

푸화악!

피렌조의 오른쪽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키르르!"

고통스러운지 피렌조가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러댔다.

느껴진다.

방향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쇄도해 왔지만, 피렌조의 단검은 더 이상 내게 닿지 않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내가 단검을 피하지 못했었는지.

단순히 피렌조의 공격 속도가 빨라서? 

아니다.

겁 먹었고, 동시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찰나의 반응으로 모든 게 판가름 나는 한 끗의 전투.

보이지 않는 단검이 어디 갔을까를 고민하며 행동을 결정할 만큼 전투는 여유롭지 않았다.

그런 전투에서 이리저리 눈알이랑 머리만 굴려댔으니 베일 수밖에.

본능에 맡긴다.

생각하는 걸 멈추고, 눈앞의 피렌조에게 집중했다.

또 베이면 어떡하지란 걱정을 멈추고, 보이는 빈틈으로 쉴 새 없이 면도칼을 찔러 넣었다.

걱정을 멈췄다가 또 베이면?

베이면 된다.

아픈 건 익숙해졌다.

그 대신, 적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면 된다.

쑤욱.

왼뺨을 지나 뒤로 뻗어진 피렌조의 팔과 단검.

스륵.

그대로 피렌조의 밑으로 파고들어 면도칼을 휘둘렀다.

목표는 뻗어져 있는 오른팔과 노출된 옆구리의 혈관들이었다.

푸확!!

"키라아악!"

피가 분수처럼 치솟으며 녀석의 오른팔이 축 처졌다.

스윽.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양팔을 못 쓰게 된 녀석의 다리로 다가가 빠르게 중요 혈관들을 끊어나갔다.

털썩.

무릎 뒤의 혈관까지 끊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릎을 꿇게 된 피렌조.

"키륵… 키르…."

녀석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아까와는 다른 소리였다.

더 이상 피렌조는 웃고 있지 않았다.

고통에 의해 새어 나오는 신음.

곧 죽을 거라는 공포에서 새어 나오는 절규.

양 귀까지 걸렸던 입꼬리도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왜 안 웃어?"

"키리…!?"

패배를 직감해서일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일까.

미세하지만 녀석이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두근.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럴 상황이 아닌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온몸으로 퍼져 가는 희열.

조금 전까지 날 가지고 놀며 비웃어대던 녀석이 지금은 날 보며 떨고 있었다.

스으.

"키…키르…!"

쿠드득.

면도칼이 다물어져 있는 피렌조의 입을 뚫고 들어갔다.

이제 잘 느껴지네.

맞닿아 있는 면도칼을 타고 올라오는 피렌조의 공포.

너도 공포란 걸 느끼는구나.

"킥."

나도 모르는 사이. 

입가엔 소름 돋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면도칼을 잡은 손에 서서히 힘을 줬다.

"웃어라."

푸화아아아악!!

* * *

광산 2번 도어 밖.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도어로 다가갔다.

은갈치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머리와 은색 정장, 그리고 선글라스까지.

영락없는 관광객으로 데몬이 나오는 광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도어로 다가간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에서 뭘 본 건지 잔뜩 겁에 질려 정신이 나가 있는 사람들.

눈물 콧물까지 줄줄 쏟아내고 있는 걸 보니 다시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문 여세요."

"레버 건들지 마!!"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문 열라는 소리에 광분하는 남자, 김대석.

눈에 광기 가득한 김대석이 남자를 향해 대검을 내밀었다.

"손목 잘라버리기 전에! 물러나!"

"…."

그런 김대석을 쳐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

위에서 아래로 왼쪽 눈을 찢어 놓은 커다란 흉터.

남자가 남은 오른쪽 눈을 번뜩이며 김대석을 노려봤다.

"니가 한 번의 판단에 손목이 날아가는 그 순간을 알아?"

"뭐… 뭐라는…."

"문 내가 열 테니까 꺼져, 새끼야. 뒤지기 전에."

걸걸하게 욕을 뱉어낸 남자가 레버로 걸음을 옮기고,

"거… 건들지 말라고!!"

제정신이 아닌 김대석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1월과 2월, 알리."

쿠득.

"꺼억…!"

찰나의 순간이었다.

은발 남자의 주변으로 1월과 2월의 화투 패가 나타났고, 동시에 김대석이 거품을 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

그 모습을 본 몇몇의 헌터가 입을 벌렸다.

워낙 신출귀몰이라 동영상에서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본 적이 있었다.

"비… 비광이다!"

"비광? 그 국가 1급 헌터?"

"살았다… 살았어!"

1급 헌터가 도착했다는 사실에 헌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비광이 그런 헌터들을 조용히 응시했다.

"안에 사람들이 있나요?"

"네… 네! 동료와 게스트 헌터들이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가서…."

"그런데 문을 닫았어?"

"…!!"

비광의 말이 존댓말에서 반말이 된 건 순간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천천히 레버로 걸어가는 비광.

"무… 문은 김대석이…."

"그렇게 주저앉아서 콧물 눈물이나 질질 짤 거면."

철컥.

"기어 나와서 헌터라고 까불지 말고 이불 속에 처박혀 있어라. 겁쟁이 새끼들아."

"!!"

비광의 한 마디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도어 밖의 헌터들.

문을 열고 들어간 비광이 정면을 바라봤다.

"허…?"

예상 밖의 상황에 비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어 시간 전.

카지노를 즐기고 있던 중 강태황 장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노네임드 급으로 추정된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하던 판을 뒤엎고 달려 나왔다.

꽤 오랜 시간 나타나지 않았던 노네임드 급 데몬.

'다 죽었겠군.'

문을 열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비광이 비관적인 성격이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노네임드와 한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체.

기적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뭐냐… 저건.'

그런 비광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

헌터로 보이는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열렸네요."

'와씨.'

하마터면 공격해버릴 뻔했다.

온몸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는 남자.

인간이 아니라 데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백운 님, 정말 괜찮으세요?"

"하하. 네, 괜찮아요."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하고 도어로 향하는 백운이란 남자.

잠시 멈춰 서 있던 비광이 천천히 걸어나갔다.

"…."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엉망진창이 된 데몬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엄청난 양의 피.

직접 보진 못 했지만 이곳이 죽음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싸움이 일어난 장소였다.

스윽.

손을 뻗어 데몬의 얼굴을 살폈다.

입으로 들어가 목의 급소를 찢어 놓으며 나온 날카로운 무언가.

뭐로 베어야 이렇게 깔끔하게 끊어놓을 수 있는 걸까.

"요것 봐라?"

고개를 내려 데몬의 전체적인 상처를 살폈다.

인간 체형에 몹시 흡사한 데몬의 몸.

그런 데몬의 몸엔 멀쩡하게 남아있는 혈관이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벨 수 있는 모든 혈관이 절단되어 피가 뿜어져 나온 것.

"그래서 이렇게 피바다였구만. 그리고 이렇게 한 건…."

비광이 고개를 돌려 백운이 떠나간 도어를 바라봤다.

얼굴에 그려지는 재밌다는 듯한 미소.

"대단한 미친놈일세."

* * *

아이고 삭신이야.

손을 들어 피렌조에게 베였던 목을 만져봤다.

끈적.

정체불명의 핏덩어리가 피가 더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상처를 틀어막고 있었다.

잠깐 죽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보통 사람은 목을 베이면 죽으니까 말이다.

어질어질.

피를 하도 많이 흘려서일까.

최대한 조심조심 걷는데도 시야가 약간 흐릿한 기분이다.

당장 달콤한 거랑 고기를 섭취하지 않으면 빈혈사 해버릴 듯한 느낌.

빨리 나가서 뭐 좀 먹어야….

우루루!

이제 지긋지긋한 광산 좀 벗어나겠구나 싶은 순간.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대산의 직원들이 우루루 길을 막아섰다.

또각. 또각.

광산에 어울리지 않는 신발의 소리.

에메랄드 머리를 흩날리며 최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독사 같은 년 저거, 왜 또 왔지.

등장과 동시에 불안한 기운을 뿜어내는 최리아.

최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피 투성이신데 괜찮으신 건가요!"

광산 밖.

밖으로 나오자 대기 중이던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저 저 독한 년 저거.

광산 안에 널렸던 게 카메라인데도 기자들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걸 보니.

내부에서 보여준 대산의 추함을 감추기 위해 최리아가 의도적으로 손을 쓴 듯했다.

"게스트 헌터분들! 말씀 좀 해주세요!"

"대산 소속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배이슬과 유연경 외 게스트 헌터들에게 마이크가 내밀어졌지만,

"…."

질문에 답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아시겠지만 초대된 게스트 헌터 분들은 모두 서약서를 쓰셨습니다. 어겼을 때의 조항은 숙지하고 싸인 하신 거겠죠?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란 말 대신 위반 사항에 대해 읊는 최리아.

게스트 헌터들이 밖으로 나가 안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도록 미리 단도리 지으러 온 듯했다.

계속되는 질문공세에도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배이슬과 유연경.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어쩔 수 없겠지.

대한민국에서도 손에 꼽는 대기업, 대산.

이런 대산과 척을 진다는 건 동영상과 여러 기업의 광고, 후원금을 통해 먹고 사는 게스트 헌터들에겐 치명적인 일이었다.

돈이 좀 덜 벌리는 걸 넘어 생계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

- 백운 님도 본인이 무기왕이라는 거, 계속 숨기고 싶으시겠죠?

가능하다면 숨기고 싶었다.

동일 인물이란 게 알려지는 순간 길을 갈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볼 터였고 그만큼 행동에도 제약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약점처럼 사용해대니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굳이?

행동에 제약은 생길 수 있겠지만 치명적인 건 아니다.

맨날 대로변을 거닐 것도 아니었고, 아직 국가의 유물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훔칠 수도 있겠지만.

스윽.

- 알아들으신 걸로 알겠습니다. 이 가면 쓰고 조용히 나가세요.

일단은 최리아가 건네준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도 잠시 고민 중이었다.

앞으로 대산에게 뽑아먹을 게 많은데 나라고 굳이 이제 와서 척을 질 필요가 있나 하는 고민이었다.

어차피 피렌조는 뒤졌고 난 살아남았으니까.

꼴 보기는 더럽게 싫지만 이쯤에서 그냥 넘어….

"무기왕님! 한 말씀 해주세요! 안에서 강한 데몬을 처치하고 사람들을 구한 게 대산의 김대석 팀장이라고 들었습니다!"

뭐?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정말 강한 데몬이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전 싸웠습니다. 뒤에서 절 믿어 주는 팀원들과 공포에 질린 게스트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죠!"

어느새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쏟아지던 눈물 콧물을 닦아낸 뒤 인터뷰에 임하고 있는 김대석.

….

개미굴에서 이제 갓 10급이 된 헌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다는 이유.

그 이유 하나만으로 최리아는 토벌전으로 날 초대했고, 그것도 모자라 능력을 사용해 암시를 걸었다.

도어에 혼자 배치한 것도 있지.

암시에 걸린 내게 최대한의 망신을 주기 위해 단독 도어 배정까지.

여기까지만 해도 참 지긋지긋하고 질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김대석.

어젯밤 내 맥주잔에 거품을 따르며 비아냥거리던 김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후우….

그리고 제일 먼저 사람들을, 같이 일하던 팀원까지 버리고 도어까지 닫아버린 새끼가.

저런 인터뷰를 한다고? 그다음엔 다시 영웅으로 떠받들 여지고?

개더럽네.

실소가 터질 정도로 더러웠다.

"무기왕님! 정말 아무 말씀도 안 하실 건가요!"

CBC 방송의 송유빈이 애타는 표정으로 질문을 건네왔다.

….

이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이 순간이 떠올라 잠을 설칠 것 같았다.

에라이… 씨.

잠은 편하게 자야지.

고개를 들어 질문하는 송유빈을 바라봤다.

"혹시 이거 생방송인가요?"

"!? 네… 네! 전국으로 실시간 송출되고 있습니다."

짝! 짝!

"전부 여기 좀 봐주실래요?"

"!?"

우루루.

함구하고 있던 내가 입을 열자 현장에 있던 모든 카메라가 나를 향했다.

- 그리고, 혹여나 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수의 주장은 언제나 쉽게 묵살되기 마련이니까요. 증거도 없는 한 사람 주장 지우는 건 일도 아닙니다.

허술한 년.

내 몸부터 뒤졌어야지.

"기자님, 혹시 태블릿 있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말하기 무섭게 송유빈이 거대한 태블릿을 건넸다.

스윽.

태블릿을 건네받은 뒤 옆을 바라봤다.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최리아.

만나서 더러웠고,

최리아를 보며 함박 미소를 지어줬다.

다신 보지 말자 독사 년아.

가면 때문에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후 무기들?

대산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됐다.

내가 알아서 다, 대산보다 빨리 어떻게든 찾아낼 거다.

삑.

송유빈이 준 태블릿에 메모리 카드를 꽂자 액션 캠에 녹화됐던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윽.

재생되는 영상이 잘 보이도록 수많은 카메라 앞으로 들어 올려줬다. 

"이… 이게 무슨 영상인가요!"

영상 속에선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김대석이 도어를 닫고 있었다.

씨익.

"진실입니다."

39화. 70층에서

토벌전이 끝난 다음 날.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난리가 나 있었다.

"와 미쳤다 진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유동 인구가 모이는 지역, 강남.

강남의 중앙에 위치한 스크린으로 어제 토벌전의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이… 이게 무슨 영상인가요!

# 진실입니다.

진실이라는 한 마디와 함께 재생된 영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대산에 가지고 있던 모든 이미지를 박살 내는 영상.

"저게 김대석이라고?"

"합성 아니야?"

합성이란 단어가 나올 정도로 영상엔 믿기 힘든 내용 들이 담겨 있었다.

나름 대산의 간판 헌터 역할을 해오던 김대석.

그 김대석이 제일 먼저 싸움에서 도망친 건 물론, 아직 팀원과 민간인인 게스트들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도어를 내려버리고 있었다.

"와 진짜 개쓰레기 새끼네."

"질질 짜는 거 봐."

평소 김대석을 응원하던 시민들도 이번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 개미굴 영상 분석한 사람 있지? 그 사람 말이 맞았네."

무기왕의 개미굴 영상이 퍼진 후.

마냥 환호하는 사람들 외에 몇몇은 대산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었다.

@ 저기 현장 지나가던 사람 말 들어보니까 대산 헌터들은 한참 전에 도착했다던데?

@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 왜 아직도 저기에 있음? 

@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기자들 기다리느라 안 들어갔다는 말이 있음.

@ 개소리 노노, 음모론자인 건 알겠는데 우리 지켜주는 사람들까지 의심하진 말자.

물론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은 대산과 김대석의 팬들에게 몰매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대산의 스타이자 대중들 사이에서도 위기에 처한 시민을 돕는 헌터로 알려진 김대석.

김대석이 카메라나 기다리자고 위기에 처한 시민을 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 저번에 음모론자라고 깠던 인간들 다 어디 갔음?

@ 내가 저 새끼 이상하다고 했제? 맨날 멋있는 최적의 타이밍에만 나온다고.

단단했던 김대석에 대한 옹호 여론은 어제 무기왕의 인터뷰로 한 방에 뒤집히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산산조각이나 가루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 정말 강한 데몬이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전 싸웠습니다!

"와 저 새끼 진짜 낯짝 두껍네."

"안에서 저 지랄을 하고 서는 우와."

"저게 사람 새끼가 아니여, 저게."

스크린 앞에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세상 믿을 사람 하나 없다지만 어떻게 대기업 대산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무기왕은 괜찮을까?"

한참 김대석을 씹어대던 사람들의 얼굴에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상의 파장이 센 만큼 무기왕은 현재 시민들의 영웅이었다.

노네임드로 의심되는 데몬을 상대로 모두가 도망칠 때도 홀로 맞서 싸운 헌터.

심지어는 엄청난 전투로 그 데몬을 잡아내기까지 한 영웅이 바로 무기왕이었다.

"아마 엄청 곤란하지 않을까?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상대가 대산이니까."

"진짜 무기왕 건드리면 쓰레기다, 쓰레기."

한숨을 내쉰 사람들이 스크린 속의 무기왕을 바라봤다.

"무기왕 화이팅."

* * *

여기서 죽이진 않겠지.

축축.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바싹 젖어있었다.

대기업의 본사다 보니 방마다 에어컨도 잘 돌아가고 있는데 여긴 왜 이렇게 더운 걸까.

아, 나만 더운 건가.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겄네.

엄청난 인원 배치였다.

현재 내가 위치한 곳은 대산의 70층, 최리아의 사무실.

당연히 정면엔 사무실의 주인인 최리아가, 양옆과 뒤로는 정장을 쫙 빼입은 대산의 직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난 애초에 도망갈 생각도 없었다.

오라 그러면 올 것이고 가라 그러면 갈 생각이었는데.

- 저희랑 함께 가시죠. 몸 상태도 안 좋으신 거 같으니까요.

기자들이 떠나자마자 날 둘러싼 최리아와 대산의 헌터들.

그대로 난 대산으로 점잖게 끌려오게 되었다.

- 치료 끝났습니다.

그나마 인간적이었던 건 하나 있었다.

데려오자마자 방에 가둔 게 아니라 본사 내부에 있는 의료시설로 보내준 것.

- 이거 설마? 진짜 치료만 해주고 보내주나.

잠시 기대했지만.

의사 선생님의 끝났다는 말과 함께 밖에서 대기 중이던 덩치들이 우루루 난입했다.

밤새도록 문밖을 지키고 있었겠지.

난 그때 코 골면서 자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덩치들과 함께 온 곳이 이곳, 최리아의 방.

도착하기 무섭게 최리아와 대산의 인원들을 날 가운데에 두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백운 님, 무슨 짓을 한지 아십니까?"

드디어 입을 여는 최리아.

저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걸까.

"토벌전에 참가해서 데몬을 잡았죠."

"지금은 말장난을 칠 기분도, 상황도 아닙니다. 그리고 데몬을 잡았다는 건 중요한 일도 아니고요."

"그 중요하지 않은 일을 제가 함으로써."

천천히 옆과 뒤를 둘러봤다.

어제 김대석이 문을 닫아 함께 갇혀 있던 대산의 헌터들이 섞여 있었다.

"대산의 헌터분들이 목숨을 구했죠."

"…."

몇몇의 헌터들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회사에 속해 있기에 이 자리에서 무언가 말해줄 순 없겠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광산을 떠나 다시 서울로 향하던 길.

최리아의 눈을 피해 몇몇의 헌터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었다.

"이거나 다시 한번 읽어보시죠."

잠시 미간을 찌푸린 최리아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토벌전 참가 요청을 받았을 때 싸인한 계약서였다.

"대산이 허하지 않은 정보를 유출했을 시엔 그에 따른 손해 배상을 한다."

음… 분명 엄청나겠지.

손해 배상을 들으니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도망갈까?

옛날의 아무 무능력 하던 내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딜 가든 먹고살 수 있었다.

무기 구하기도 마찬가지다.

굳이 한국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계속할 수 있었다.

회귀 전의 정보가 한국이 많아서 아쉬울 뿐이지.

사실 이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먼저 차지하지 않는다면 대산이 찾게 될 유물 무기들.

일단 찾으라고 둔 다음, 다른 곳에서 무기를 모아와 힘으로 뺏으면 될 일이다.

음…!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온들 난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계약서를 내밀었던 최리아가 오늘자 뉴스를 재생시켰다.

# 그건 완전 국민을 기만한 겁니다.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거예요, 대산!

# 저희가 대산과 교류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런 기업과 공생을 택할 바엔 죽는 걸 택하겠습니다!

오우, 맵네.

이때다 싶어 우루루 나와 대산을 공격하는 라이벌 기업들.

각 기업을 대표하는 대변인들이 나와 대산을 잘근잘근 씹어먹고 있었다.

"백운 님으로 인해 대산이 입은 막대한 이미지 손상. 계약서엔 없었지만 이것 역시 모조리 청구할 겁니다."

도망가자.

조금 전까진 진짜 도망가야 되나 했었는데.

저 말을 듣고 나니 오늘 밤에라도 밀입국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가기 전에 또 동영상 올리고 가야지.

만약 진짜 한국을 떠나게 된다면 그냥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다 까발리고 MSG까지 팍팍 쳐서 동영상을 뿌린 뒤에 도망갈 예정.

"왜 게스트 헌터들이 가만히 있었는지, 한 번만 생각해봤어도 그런 무모한 행동은 안 하셨을 텐데."

아니 근데 이 년이.

지금은 대기업의 힘으로 눌리고 있는 중이니 가만히 들어주려고 했는데 안될 것 같았다.

애초에 모두를 속여온 게 잘못인데 힘 좀 쎄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

난 어차피 도망갈 거니깐.

"그런데 최리아 님은 참 보면 볼수록 뻔뻔하네요."

---!!!

쳐다보고 있진 않았지만,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뭐라고요?"

"아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으셔서요. 안 창피해요?"

옛날부터 이랬었다.

머리를 굴리며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다가도 입이 한 번 열리기 시작하면 브레이크 없이 술술 내뱉어지기 시작하는 것.

"사북까지 데려다주는 척하면서 능력까지 건 인간이 말이야. 좀 쪽팔려 하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

최리아의 얼굴로 놀라움이 물들어갔다.

아마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머지 분들, 나가 계세요."

우루루.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고 싶었던 걸까.

사무실에 있던 인원을 내보낸 최리아가 조용히 날 응시했다.

"언제부터였죠?"

"?"

"제 능력에서 언제부터 자유로워졌냐는 겁니다."

역시 최리아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스타일이다.

언제부터 자유로웠냐니.

"자유로워지고 자시고 처음부터 안 걸렸는데요."

"?!"

그렇게 냉정을 유지하던 최리아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눈이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기세였다.

내가 연기를 잘한 것도 있긴 하지.

세상 멍청하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었으니.

아무리 최리아가 눈치가 빠르더라도 그걸 알아챈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한 거죠?"

"…."

아마 궁금해 죽겠지.

나였어도 이유도 없이 면도칼이나 리볼버가 안 나오면 저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윽.

그다음,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며 최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본인 능력이시잖아요. 누구한테 왜 안 걸리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

사실 나도 몰라.

짐작도 안 가지만 일단 최리아가 저런 표정을 짓게 했으니.

성공적이었다.

꽈아악.

오우야.

능력이 최리아의 아킬레스건인 것 같았다.

앞에 있는 종이를 저렇게 꾸길 정도로 화를 내다니.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있는 힘을 다해 날 노려보는 최리아.

분노를 넘어 거의 한이 맺힌 눈이었다.

땀 났던 몸이 식을 정도의 한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후회하게 만들어드리죠. 대한민국 안이라면 그 어디에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비참해지도록 말이에요!"

도… 독한 년.

독사도 울고 갈 년이다.

똑똑.

독사 년의 독기에 잠시 놀라고 있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누군지는 몰라도 욕먹겠네.

저렇게 화나 있는데 눈치 없이 노크를 해버렸으니.

미안합니다, 다 저 때문이에요.

"나중에!!"

아니나 다를까.

일단 꽤엑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최리아.

철컥.

방문이라 하기엔 몹시도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허… 이걸 들어온다고?

큰일이다.

죄 없는 사람이 나로 인해 불운의 희생자가 되게 생겼다.

"나중에 오라고 했잖…!!"

소리를 빼엑 지르려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최리아.

최라아가 문을 향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회… 회장님!"

뭐?

회장이라니?

일이 이 정도로 커진다고?

긴장되어 뻣뻣해진 목을 천천히 돌렸다.

"안녕하세요."

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다.

슥.

!!

고개를 돌리자 모습을 드러낸 외국인 소녀.

계단에서 봤던 소녀였다.

싱긋.

소녀가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또 뵙네요."

40화. 조건말고 약속

이게 머선 일이고.

갑자기 최리아의 방으로 난입한 대산의 회장.

아니지, 회장이면 자기 건물이니까 난입은 아니고.

어쨌든 갑작스럽게 등장한 대산의 회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애가 대산의 회장이라고?

내가 아무리 대기업이나 데몬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었다지만.

TV는 보며 살았기에 대산의 회장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완전 할아버지였는데.

내가 한참 개방하겠다며 돌아다니느라 세상에 관심이 없었을 때가 있었으니.

그때 회장이 바뀐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회장이 보통 바뀌나?

회장 밑의 대표나 이사들이 바뀌는 경우는 종종 봤었는데.

죽었을 때를 제외하고 회장이 바뀌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면 무언가에 책임을 지고 사퇴… 를 했다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내가 아는 한 대산은 항상 승승장구했었는데.

심지어 종말의 날 이후에도 대산의 권력은 그대로였다.

종말의 날.

많은 게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었다.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대기업들의 위상.

서울 외의 지역을 잃으며 약해질 법도 했지만 기업들의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해졌다.

동맹.

기존부터 물밑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손에 꼽는 대기업들이 종말의 날과 동시에 동맹을 맺었다.

그 뒤부턴?

- 일정 구역은 저희가 담당하겠습니다. 국가에서는 상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업 동맹의 힘은 하늘을 찔렀다.

종말의 날 전투로 전력의 대부분을 잃었던 국가.

이와 달리 기업들은 서로 눈치 싸움을 해가며 전력을 아꼈었다.

그러다 보니 종말의 날 이후 힘의 균형은 자연스럽게 국가에서 기업들의 동맹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대산의 회장, 소피아에요."

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소피이가 격식 있는 인사를 건네왔다.

"아… 안녕하세요."

나도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화사한 백금발과 맑은 물색 눈동자의 외국인 소녀.

그런 소녀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의 회장이라니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

분명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회귀한 뒤로 대산의 회장은 단 한 번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회귀 전에 봤던 건 전용 바지사장이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 소피아가 최리아에게 다가갔다.

지나치면서 눈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사성 밝은 애… 가 아니고 회장님이구만.

"최리아 실장님, 백운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제가 좀 모셔 가도 될까요?."

"예… 알겠습니다."

최리아한테도 저런 모습이 있구만.

최리아는 회장의 등장에 나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허리를 숙인 채 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

잘된 건지 더 나빠진 건지 감이 안 잡히네.

스릴러 영화에서 단골로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악당 팀장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의 회장.

초반엔 사람 좋은 모습으로 나오지만, 그런 모습은 많이 가봐야 중반까지였다.

후반으로 돌입하는 순간 악당 팀장도 안 했던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하며 찐 보스의 포스를 폭발시키기 때문이다.

부디 찐 보스가 아니시길.

내가 관상에 관련된 능력을 타고 난 건 아니지만.

소피아의 얼굴이나 평온한 말투만 봤을 때 찐 보스의 향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운 님, 아티라가 제 방까지 안내해드릴 테니 먼저 가 계세요."

저벅.

찐한 흑색 머리를 위로 올려 묶은 아티라가 내게 걸어왔다.

뭔가 비서다.

당연히 소피아의 비서겠지만.

단정한 머리와 복장, 커다랗고 지적인 안경까지.

아티라는 길가에서 봐도 어 비서다!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

소피아와 단둘이 남겨질 최리아를 뒤로 하고.

또각. 또각.

천천히 문으로 향하는 아티라를 따라갔다.

* * *

아티라를 따라 도착한 건물의 최고 층.

얼레.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드러난 방의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대산의 본사 건물은 외관부터 내부까지 삐까뻔쩍한 현대풍 건물이었는데, 지금 도착한 80층은 달랐다.

고딕한 취미신가.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오래된 나무의 향기와 은은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는 불빛까지.

80층은 회장실이라기보단 앤티크한 서재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뭔가… 좋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까지 회장실이라 하면 깔끔하고 딱딱하고 인간미 없는 이미지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스르르.

은은한 빛 때문이었을까.

의자에 앉아 있기라도 했다면 잠이 들고 말았을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선 사람을 긴장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보단, 편안히 있을 수 있는 안정감과 푸근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띵.

잠시 후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소피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평화로운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

"이쪽으로 앉으세요."

소피아의 안내를 따라 책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뒤이어 비서인 아티라가 내오는 향긋한 차까지.

오.

대기업의 회장실에 끌려왔음에도 마음이 편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백운 님은 얼굴이 평온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회장실의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군.

절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선 나름 여러 가지 의문이 바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소피아는 왜 나를 데려왔을까, 날 먼저 올려보낸 뒤 최리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앞으로 나에겐 어떤 보복이 되돌아오는 걸까 같은 의문들이었다.

역시 탈주뿐이다.

의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고 거기에 이어질 가능성까지 생각해봤지만.

야반도주 후 잠잠해진 뒤 돌아오는 방법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깜짝 놀랐어요."

소피아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회장마저 놀라게 한 건가.

물론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가 대산의 회장이라고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너무 어린데.

아무리 개방과 동시에 나이가 멈춘다고 해도 대기업의 회장을 하기에 소피아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기업의 회장이 비상계단 이용이라니.

애초에 회장은 맞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대산의 회장이 맞으니까요."

"!!"

개방한 능력이 독심술인가 의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산은 백운 님에 대한 어떠한 고소나 보복성 조치도 취하지 않을 거니까요."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최리아가 쏟아부었던 것들이 실제로 행해졌다면 정말 배를 탈 생각이었었다.

"가… 감사합니다."

일단 회장 파워로 최리아의 독기를 눌러 준 거니 감사를 표했다.

"아뇨,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운 님에게 선처를 하거나 베풀기 위해서가 아닌, 회사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니까요."

합리적인 선택이라니.

당연히 대인배의 자비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끌려오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밖은 백운 님 이야기로 난리가 났거든요. 정확히는 무기왕이지만요."

난리라.

굳이 밖을 보지 않았더라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개미굴과 구룡산 영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 광산에서 그렇게 해버렸으니.

"대산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깔려 버렸지만 백운 님은 그 반대입니다. 광산에서의 일로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라 불리고 있으니까요."

영웅이란 단어를 들으니 귀가 간지러웠다.

인터넷에서나 보던 낯선 단어였는데 내가 그 단어를 받고 있다니.

"그런 상태에서 저희가 백운 님에게 소송을 건다거나 그러면."

소피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최리아의 냉정함과는 달랐다.

살면서 화를 내거나 흥분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 어투와 목소리.

동시에 메세지가 귀로 잘 전달되는 묘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난리가 나겠죠. 반성하고 사과하기는커녕 자기들의 영웅을 건드리냐고."

영웅이라.

좀 과분하지만 그런 여론으로 인해 대산에서 저렇게 나오게 됐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대산이라면 이런 여론 정도는 무시하고도 보복을 해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소피아 님."

옆에 서 있던 아티라가 시계를 보더니 소피아를 조용히 불렀다.

회장과 비서의 관계임에도 보다 더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

"알겠습니다. 5분이면 돼요."

5분?

"인기가 하도 많으셔서 여유롭게 대화도 못 하겠군요. 시간이 없으니 제가 백운 님을 모셔온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꼴깍.

드디어 본론이란 생각에 괜한 긴장이 됐다.

대기업 회장이 날 부른 이유는 뭘까.

"이번에 대산이 백운 님께 한 행동에 대한 사과로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물이라면…?"

걱정하던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백운 님이 대산에게 바라는 것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소피아가 물색의 깊은 눈으로 날 응시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신비로운 눈이었다.

"무언가에 대한 정보가 될 수도 있겠죠."

!!

내가 무기를 찾고 있다는 걸 알리는 없겠지만.

어째서일까.

저 눈을 보고 있자니 소피아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되네.

달달한 제안이었다.

애초에 내가 토벌전에 참가한 이유 역시 대산이 가지고 있을 무기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비전 수리검은 됐고.

도윤과 피렌조의 전투 후에 수리검을 회수했던 스님들.

수리검이 어디에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되고 있었다.

그 외 한 가지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대산과 가까이 지낼 수도 없게 되었다.

좀 미뤄지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 손에 넣으려고 했었는데, 알려주겠다니.

뭘 고를까.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력을 총동원했다.

한 가지 밖에 못 고르는데 무기고에도 못 넣을 걸 고르는 순간 완전 꽝이었다.

"원하신다면 정보를 두 개 더 드리겠습니다."

!?

내 고민하는 모습을 보던 소피아의 파격적인 제안.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원 플러스 투라고?

"하지만 이건 저와 한 가지를 약속해 주시면 드리겠습니다."

일단 들어 봐야겠지만 정보를 세 개나 주겠다니.

이미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

끄덕.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나중에 딱 한 번."

소피아의 투명한 눈에 묘한 기운이 어렸다.

"저를 위해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 * *

조금 전, 백운이 회장실로 간 뒤의 70층.

소피아가 최리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최리아 실장님, 대산은 백운 님에 대한 어떠한 보복성 행위도 하지 않을 겁니다."

"!"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회사 내에서조차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손에 꼽는 회장, 소피아.

소피아의 말에 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겠습니다."

솔직히 묻고 싶었다.

어째서냐고.

회사의 이미지를 박살 낸 백운을 저대로 두면 대산을 무서워하던 이들마저 느슨해질 수도 있는데, 어째서?

"회사의 이미지는 중요합니다. 실추됐다면 반드시 원래대로 돌려놔야 하며 그것에 손상을 입힌 자는 정당한 대가를 치루어야겠죠."

"…?"

최리아의 얼굴에 물음표가 생겼다.

그런데 왜?

"하지만, 수지 타산이 안 맞거든요."

말끝을 흐린 소피아가 조금 전 백운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왕이 될 사람을 적수로 돌리는 건요."

41화. 수리검이 있는 곳

오늘 무슨 날인가.

80층에서 안내를 받아 내려온 회의실.

회의실엔 낯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만이군."

구룡산에서 봤던 기태랑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떡하지.

나도 손을 흔들어야 되나.

잠시 찾아온 혼란을 뒤로 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 저희가 백운 님을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 아침부터 오셨더군요.

소피아가 떠나는 나를 배웅하며 했던 말이었다.

"고문 당하거나 그러진 않은 거 같네."

기태랑 옆에 함께 앉아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광산 안에서 봤던 은갈치 정장의 남자, 비광.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일까.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해도 비광을 못 알아보다니.

기태랑만큼 영상에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비광 역시 화려한 전투 방식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헌터였다.

"하하…. 고문 같은 거는 안 당했습니다."

"위에서 워낙 쪼아대서 말이야. 대산이 우리 병아리 헌터 죽이기 전에 데려오라고."

그래서 달려온 듯했다.

이미지가 박살난 대산이 나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서.

70층에서는 그런 분위기긴 했지.

최리아를 중심으로 날 둘러싸고 있던 수십의 대산 헌터들.

집단 린치를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우스운 가면은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냐?"

비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아, 맞다.

1층에 기자들이 깔려있을 거란 아티라의 말에 가면을 쓰고 내려왔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필요 없지. 

어차피 기태랑과 비광은 내가 무기왕인 걸 알고 있으니까.

슥.

"미안한데 다시 써라."

!?

엄청난 태세변환을 보이는 비광.

내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걸까.

"밑에 기자들 있어서 말이야. 깜빡했네."

"아… 네."

호다닥 가면을 다시 장착하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1급 헌터 두 명이 날 데리러 오다니.

뭐지, 이 기분은.

나도 모르게 어깨가 하늘로 승천하고 콧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 어디로 가는 건가요?"

"어디 안 가는데?"

"네…?"

어디 헌터 중앙청이라던가 대통령실이라던가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집 데려다주고 우린 갈 거야."

"집 데려다주러 두 분이 오셨다고요?"

눈이 커진 채 묻자 비광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내 말이 말이다."

"보여주기다. 국가는 소속된 헌터를 이렇게 아낀다 뭐 그런?"

기태랑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영웅적 행동을 한 뒤 멋지게 악당 대기업에 끌려간 국가 헌터.

밖에서 대중들이 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욕먹었겠지.

국가에 소속된 헌터를 방치한다, 영웅을 악덕 기업의 손에 죽게 내 버려둔다 등등 여러 말이 나왔을 터.

그래서 기태랑과 비광이라는 1급 헌터 두 명을 대산으로 보낸 것이었다.

국가는 대기업 따위에 굴하지 않고 소속된 헌터를 챙깁니다! 라는 메세지와 쇼가 아닌 진심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보여주기식이어도 영광이네요."

"고럼, 그래야지. 장관급 말고는 이런 호위 받아본 적 없을걸."

비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걸어나갔다.

"집은 어디야? 어쨌든 데려다줘야 하니까."

"…."

기태랑의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 집 없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집 구해야 했는데.

음… 거기로 가자.

스윽.

집을 묻는 기태랑에게 바싹 몸을 밀착시켰다.

"여기로 좀 부탁드립니다."

* * *

"너 스님이야?"

도착한 장소에 어리둥절 해하는 비광과 기태랑.

집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커다란 절이 있는 산으로 가달라 했으니.

삐빅.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스님은 아니고. 좀 볼 일이 있어서요."

"허…."

볼 일이 있단 말에 비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 몸은 괜찮은 거냐?"

팔과 목을 돌리며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봤다.

칼에 베이고 찔린 곳들이 욱씬거리긴 했지만 멀쩡한 것 같았다.

역시 대기업 의사야.

속으로 공짜 치료를 해준 대산 의료실에 감사 인사를 건넸다.

"완전 멀쩡해요."

"대단하네."

비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얼굴.

"왜… 왜 그러세요?"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비광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쨌든 우린 잘 데려다준 거다."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턴 제가 갈게요."

운전석에 있던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또 보자고."

가벼운 인사 후 떠나려는 기태랑.

"잠시만요!"

잊을 뻔했다.

"?"

"싸… 싸인 좀…."

* * *

기태랑의 차 안.

"싸인이라니, 재밌는 친구네."

비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불러 세우길래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나 했는데, 싸인을 해달라니.

"종잡을 수가 없는 친구야."

기태랑도 웃음을 터뜨렸다.

낮은 급수의 헌터들은 1급 헌터를 보는 순간 얼음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여러 테스트와 시험을 통해 국가에 소속되는 순간, 1급이 얼마나 아득한 위치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진짜 국가 헌터는 왜 지원한 거지? 의문이네. 할 거면 더 높은 급수를 하던가."

"어디에 소속되는 게 싫다고 하던데. 10급 한 거는 최소한의 밥벌이 때문이고."

"허…?"

어이없어하는 비광에 기태랑도 동의한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룡산을 내려오며 들었을 땐 어이가 없긴 했다.

돈은 벌고 싶은데 어딘가에는 소속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10급을 지원했다니.

아마 이런 어이없는 이유는 백운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았다.

"이상한 놈이네."

백운에 대한 한 줄 평을 내린 비광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래서, 어때?"

기태랑이 그런 비광에게 질문을 건넸다.

"…."

대답 전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비광.

사실 비광까지 오늘 동행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강태황의 지시를 받은 건 기태랑이었기 때문이다. 

- 같이 가자.

혼자 가려는 기태랑에게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비광이었다.

- 한 번 봐야겠어.

전화가 왔을 땐 의외였다.

어디에 나서거나 눈에 띄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복장은 엄청 튀게 입고 다니는 이상한 놈.

자기와 마찬가지로 귀찮은 건 딱 질색하는 녀석이 비광이었다.

그런 비광이 먼저 전화를 해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다니.

"그냥 봤을 땐 상상이 잘 안 가네."

"동영상 말하는 거지?"

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안 믿겨. 그 영상을 찍고 있던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저 녀석이라는 게."

처음엔 광산 안에 있던 데몬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대산의 헌터들을 썰어버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산의 헌터들이 약해서 그런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상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뭔가 움직임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 데몬 움직임이 엄청났어."

듣고 있던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으로 퍼진 백운의 액션 캠 영상.

보통의 사람들은 백운이 데몬을 처치하고 모두를 구했다! 라는 것에 집중했지만, 기태랑과 비광은 달랐다.

"경계에 있었을 거야."

죽음의 경계.

데몬과 백운은 그 경계를 두고 서로에게 칼을 휘둘렀다.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목숨이 사라질 수 있는 아찔한 경계.

"그 경계를 두고 싸웠던 놈이 저렇게 멀쩡하다니. 실력은 둘째 치고 멘탈 하나는 미쳤네."

보통은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몸을 단련하고 강한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한다면 말이다.

"멘탈이 무너져 다시는 싸움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을 텐데."

"나도 너무 멀쩡해서 놀랐다."

백운은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마치 지난 일은 다 새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리고 분명히."

비광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동영상을 보며 가장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입에 단검을 문 채 백운의 목을 향해 달려들던 데몬.

"죽었어야 했다."

* * *

댕--- 댕---

귓가로 들려오는 풍경 소리.

좋구먼.

감성 부족으로 그다지 자연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구룡산의 옹달샘부터 지금 들리는 평화로운 종소리까지.

어쩌면 자연 친화형 인간이었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찰을 바라봤다.

부적의 기억에서 스님들이 모여있던 거대한 사찰이었다.

진짜 오래됐나 보다.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낡아 있는 사찰.

자세히 보지 않아도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고 있었다.

위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라오는 입구를 제외하곤 사방이 거대한 산으로 막혀 있는 사찰.

사찰 앞에 서 있자니 뭔가 거대한 요람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겠지.

부적의 기억에서 스님들은 수리검을 회수해 어딘가로 향했었다.

그걸로 기억은 끝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수리검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라는 걸.

저벅.

천천히 사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우.

입구의 양옆에 서 있는 거대한 조각상들.

오만상을 찌푸려 난 무서운 존재라는 걸 한껏 뽐내고 있는 조각상이었다.

밤에 왔으면 좀 무서웠겠네.

지금이야 밝은 낮이라 자연을 거닐며 풍경 소리를 즐기고 있었지만.

캄캄한 밤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 같았다.

으스스했겠어.

그나저나 버려진 사찰인 걸까.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도 사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왁!"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스님이 평온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하러 왔다고 해야 하나 약간 고민됐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애초에 수리검이 있다고 해서 강제로 훔치거나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달라붙어서 달라고 조르긴 하겠지만.

"수리검을 찾으러 왔습니다."

"!"

평온하던 얼굴에 잠시 파도가 이는 노승의 얼굴.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렇게 순순히?

사찰의 보물이라며 거절하면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문전박대당하는 분위기는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너무 순탄한 게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저벅.

스님을 따라 사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사찰에 새겨진 다양한 그림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새겨 놓은 듯한 그림이었다.

!!

낯익은 모습들이 보였다.

벽에 새겨져 있는 그림이다 보니 얼굴까진 자세히 알아볼 순 없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나 분위기를 봤을 땐 분명해 보였다.

피렌조와 도윤.

싸우고 있는 둘의 모습이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었다.

"익숙한 그림인가요?"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모습에 스님이 미소를 지었다.

질문이지만 정말 궁금하여 묻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당연히 넌 본 적이 있을 거라는 듯한 확신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사찰 안으로 얼마나 들어왔을까.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낡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안에서 문틈을 통해 흘러나오는 황금색 빛.

철컹.

스님이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연 뒤 옆으로 비켜섰다.

동시에 모습을 나타낸 비전 수리검.

방으로 들어가기 전, 비켜 서 있는 스님을 바라봤다.

내가 손을 대는 순간 수리검은 사라진다.

스님은 그걸 알고 있을까?

"저 스님."

사실대로 말하려는 찰나.

스님이 인자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십시오."

"!"

"자격이 있으니."

42화. 다음은

"!"

가져가라는 스님의 말에 수리검에 손을 뻗었었다.

서서히 사라지며 모습을 감춘 수리검.

왜 공간으로 안 들어가지지?

다른 무기들과 달리 수리검과의 공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수리검이 조용히 무기고 안으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설마 그 봉인에 집어 삼켜져서 그런가.

어째서 공명이 일어나지 않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추측해볼 수 있는 건 봉인으로 집어 삼켜지는 도윤을 보며 본능적으로 느껴졌던 기운이었다.

영혼의 소멸.

도윤과 다른 이들의 죽음은 달랐다.

도윤은 그냥 몸이 죽는 게 아닌 영혼 자체가 갈기갈기 소멸 되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공명에 필요한 공간을 형성하는데는 영혼이 필요하다… 인가.

그래서 영혼 자체가 소멸해버린 도윤에 대해선 공명이 발생하지 않은 듯했다.

주인 없는 무기라.

낯선 기분이었다.

주인을 잃은 채 그저 덩그러니 놓여 있던 무기라니.

"절 따라오시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눈앞에서 수리검이 사라지는 걸 봤음에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스님.

스님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벅.

앞서가는 스님을 따라 어두컴컴한 통로를 거닐었다.

작은 촛불에 의해 밝혀져 있는 통로.

잘 보이지 않았기에 무서울 법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무서움보단 경건함이 더 느껴지는 통로였다.

끼익.

통로를 벗어나자 작은 생활 공간이 나타났다.

스님이 지내는 곳인 듯 했다.

"잠시 앉으시지요. 차를 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이 가리킨 방석에 앉은 뒤 방을 둘러봤다.

은은한 향 냄새와 함께 놓여 있는 작은 불상.

와.

얼마나 오랫동안 절을 올려야 앞이 저렇게 파일 수 있는 걸까.

불상 앞의 방바닥은 딱 사람이 서 있을 공간 정도만 자연스럽게 패여 있었다.

그 외에는 평범하네.

살아가는데 딱 필요한 정도만 놓여 있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딸각.

어느새 차를 내온 스님이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스님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엉겁결에 두 사람이 불상을 바라보며 앉아 있게 되었다.

"저 스님, 조금 전에 자격이 있단 건 무슨 의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걸어오는 내내 궁금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자격은 무엇을 뜻하는 건지 말이다.

"이곳 사찰의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허허 웃어 보인 스님이 서랍에서 작은 그림을 꺼내 들었다.

피렌조.

그림에 그려져 있는 건 피렌조였다.

오래되어 흐릿흐릿한 그림이었지만 광산에서의 생김새와 완벽히 일치했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사찰을 지은 스님들의 숙적. 강한 도사의 도움을 받고도 잡지 못해 결국엔 봉인에 그쳤다는 아주 강력한 마귀죠."

"마귀…. 지금 데몬이라 불리는 놈들과 같은 건가요?"

스님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두 개가 같은 존재인지는 저로서도 알 수 없으니까요."

스님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해서 데몬과 마귀가 똑같은 존재라는 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데몬은 능력의 개방과 함께 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두 개가 동일한 존재라면 이야기가 이상하게 된다.

"물어보신 자격은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 처리하지 못한 원죄인 마귀를 잡아 주신 것."

"어떻게 그걸 아신 거죠?"

스님은 천리안 비슷한 능력을 개방하신 걸까?

스윽.

천천히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는 스님.

아.

스님이 가리킨 곳엔 오래된 TV가 놓여 있었다.

스님들은 속세를 떨쳐내려는 사람들이다 보니 당연히 TV 같은 건 안 볼 줄 알았다.

"TV… 보셔도 되는 거군요, 하하!"

"원래 보면 안 됩니다."

"!?"

스님이 너털웃음 터뜨리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차피 조금 후면 늙어 바스라 질 몸. 부처께서도 용서해주시겠지요."

슈퍼 긍정주의 스님이었다.

"스님은 개방하지 않으신 건가요?"

늙어 바스라 질 거라 말한 스님.

개방을 했다면 적어도 나이를 먹어 죽을 일은 없었다.

과거의 나처럼 스님도 개방의 조건을 찾지 못한 걸까.

"허허 글쎄요. 조건을 찾지도 않았지만, 찾았더라도 개방하지 않았을 겁니다."

"네…?"

차를 홀짝이며 불상을 응시하고 있는 스님.

스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 이번 생의 영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죽음과 윤회를 바랄 뿐이죠."

부처님이다.

부처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모든 걸 통달한 얼굴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죽음에 있어서도 달관한 모습.

100명이면 99.9명은 나이를 먹지 않는 개방을 원할 텐데 스님은 아니었다.

"하하. 부끄러워지네요."

개방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좌절하고 절망했던 과거.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살았었는데.

그런 개방에서조차 통달한 스님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마다 원하는 욕망도, 이상도 다르니까요. 각자의 길이 있는 만큼 그 길에 최선을 다해 걸어가면 되는 것이지요."

크으…!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스님의 경지에 취해버리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스님."

나도 모르게 좋은 말을 해준 스님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남겨뒀던 원죄를 없애 주셔서요."

덩달아 고개를 숙이는 스님.

"하하."

머쓱한 느낌에 뒷머리를 잠시 긁적였다.

그저 살기 위해서 피렌조를 죽였을 뿐인데 이런 감사를 받다니.

"스님, 혹시 마귀라 부르는 것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가요?"

데몬과 다른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피렌조 같은 놈들이 과거에도 존재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흐음. 저도 아는 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저 마귀란 존재들은 아주 멋 옛날부터 존재해왔고, 시간이 흐르며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 밖에는요."

설마 개방도 마찬가지인가.

부적의 기억에서 봤던 도윤을 떠올렸다.

이미 여기저기 부상을 당했음에도 도윤은 온전한 상태의 피렌조와 대등하게 싸웠었다.

도윤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어.

피렌조와 싸워봤기에 드는 확신이었다.

아무리 무술을 단련했다고 해도 피렌조는 일반적인 사람이 맞서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저도 TV 속에서 저 마귀를 봤을 땐 정말 놀랐습니다. 사찰 곳곳에 기록이 되어 있다곤 하나 이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직도 살아 움직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스님도 놀라시긴 하는구나.

하긴, 수십 년 동안 그림과 기록 속에서만 본 존재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안 놀랄 수가 없을 듯했다.

"분명한 건 저들이 항상 존재해왔다는 겁니다. 어느 시대에선 귀신으로, 어느 시대에선 악귀로…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요."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도깨비나 귀신 혹은 요괴.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설이나 이야기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존재들이었다.

만약 이것들이 극적 효과를 위해 들어간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이라면.

그저 시대마다 불리는 이름만 달랐을 뿐, 데몬과 같은 존재일 가능성이 있었다.

열심히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을 때.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네?"

얼굴 한가득 인자한 미소를 지은 스님.

"싸움의 이유가 뭐가 됐든."

스님이 조용히 내 눈을 응시했다.

"그것들과 맞서 싸운 사람들이요."

* * *

밤이 깊은 산 속.

찌륵--- 찌륵---.

산의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구먼."

풍경 소리와 함께 밝게 날 비추는 달빛까지.

고요한 마루에 앉아 이것들을 즐기고 있자니 이틀 전에 겪었던 광산에서의 일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 그러시지요.

갈 데가 없는데 하루만 묵어도 되겠냐는 말에 흔쾌히 방을 내준 스님.

좋은 스님이야.

스님은 저녁 시간이 되자 맛있는 나물 반찬과 밥까지 내주셨다.

꼬르륵.

물론 배를 가득 채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염치도 없이 스님 혼자 생활하시는 곳간을 더 축낼 수도 없는 노릇.

고기 먹고 싶….

짝!

나도 모르게 경을 칠 생각을 해버렸다.

유서 깊은 사찰 한 가운데에서 고기 생각이라니.

안될 말이었다.

엉금엉금.

조용히 기어가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안에 담겨 있는 두툼한 문서 더미.

- 다른 기업들 역시 그것들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문서를 내어주며 소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다른 기업의 일까지는 제가 어쩔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 약속드리겠습니다.

내가 달라고 한 유물에 한해서 대산은 깔끔히 포기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가로채거나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한 소피아.

음, 왜일까.

아직도 의문이었다.

내가 뭐라고 대기업의 회장이 그런 약속까지 하며 나에게 정보를 준 걸까.

- 저를 위해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다였다.

이 많은 것을 내어주며 소피아가 바란 것은 말이다.

소피아를 위해 싸워달라.

담긴 의미가 헷갈리긴 했다.

대산을 위해 싸워달라는 건지, 아니면 소피아 본인을 위해 싸워달라는 건지.

- 계약서 같은 건 안 써도 되나요…?

솔직히 계약서 같은 거라도 쓸 줄 알았다.

소피아와 난 처음 만난 사이.

먼저 정보를 내어주는 마당에 나의 뭘 믿고 구두 약속을 한단 말인가.

-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계약서를 백 장, 천 장 쓴다고 한들.

옅은 미소를 띠며 날 응시했던 소피아. 

- 그때가 왔을 때 약속대로 절 도울지, 안 도울지는 전적으로 백운 님의 선택일 테니까요.

음.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겠단 말이야.

보통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상대방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는 법인데.

소피아는 아니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신비로움이 더욱 깊어지는 느낌.

"흐음. 모르겠다."

어차피 고민해봐야 이 아리송함을 풀어낼 길은 없어 보였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니까."

해피엔딩도 이런 해피엔딩이 있을까.

하고 싶은 만큼 최리아와 김대석의 코를 뭉개줬음에도 내게 돌아온 피해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돌아온 건 대산으로 접근한 목적이었던 무기의 정보들.

"범죄 영화에서나 보던 밀입국 할 뻔했는데, 다행이야."

한편으론 스릴 넘치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찌 됐든 도망자가 되지 않았다는 건 다행인 점이었다.

"자. 그럼."

소피아에게 받았던 문서를 마루에 늘어놓았다.

아무리 빨라도 이것들이 발견되는 시간은 4년 뒤.

여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찾을 생각은 없었다.

"이거부터 찾아볼까."

가장 왼쪽에 있는 문서를 집어 들었다.

문서의 맨 앞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쓰인 무기의 명칭.

귀신의 검, 스이카.

43화. 곡성으로

날이 밝자마자 스님께 인사를 드린 뒤 하산을 시작했다.

다음 계획이 정해졌으니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곡성군.

다음 목적지였다.

스이카의 정보가 있을 것이라 특정되는 장소.

대기업의 정보치고는 좀 허술한데.

스이카에 대한 대산의 문서를 읽고 내린 결론이었다.

# 귀신의 검 스이카는 오랜 시간 동안 귀신의 비명에 벼려졌다고 알려진 검이다.

# 전라남도 곡성군에서는 귀신의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을 시작점으로 스이카를 찾아볼 것.

아무래도 선택을 잘못한 것 같았다.

정보의 양과 내용을 봤을 때 대산 역시 스이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건 최근인 듯한 느낌.

하긴, 대산이 스이카를 발견했다고 세상에 내놓은 건 거의 4년 뒤의 일이니까.

그로부터 4년 전인 지금.

대산이 스이카에 대한 정보를 모으지 못한 게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시간대였다.

그나저나 귀신의 비명에 벼려진 검이라니.

섬뜩한데.

설명만 들었을 땐 상당히 꺼려지는 검이었다.

왠지 사용자마저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뭔가 순탄치 않을 것 같단 말이야.

과거 대산이 스이카를 찾아냈을 때도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찾은 유물들 중 가장 힘든 과정을 거쳤었다고 말이다.

물론 찾았다는 사실을 더 뽐내기 위한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엄청 힘들어 보이긴 했었지.

유물의 발표 땐 항상 대산의 탐사팀이 함께 했었다.

밝은 표정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구른 팀의 얼굴은 초췌 그 자체였다.

다른 유물 때보다 더 고생을 한 표정이 역력했었다.

그때 당시 어떻게 찾은 건지 장소나 과정 같은 걸 자세히 공유하지 않았으니… 무섭네.

공개라도 했다면 어떤 고생길이 열려있을지 미리 알기라도 했을 텐데.

개고생했다는 것만 알고 있으니 미지의 고생길에 더 무서울 따름이었다.

척.

사찰을 떠나고 얼마 후.

드디어 차가 지나다니는 대로에 도착했다.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있던 터라 크게 힘들거나 하진 않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가지.

현재 위치한 곳은 서울의 산 아래.

전라도로 가려면 KTX를 타든 고속버스를 타든 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터미널이나 기차역으로 갈만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면도칼을 들고 뛰어간다? 오바지.

현재 주어진 최선의 선택지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낮에 시뻘건 면도칼을 들고 대로를 달리다니.

가능하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슥.

고개를 들어 대로를 살폈다.

도심지가 아닌 만큼 차가 많이 지나다니지는 않지만.

한두 대씩은 꾸준히 차가 지나다니고 있었다.

끄덕.

마음을 다 잡은 후 대로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면도칼을 들고 달리지 않으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히치하이킹.

외국의 사막 길에서나 하는 거라고 들었지만.

장소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지금 내게 필요한데.

부우웅.

저 멀리서 다가오는 차량이 보였다.

"후우."

작은 심호흡을 한 뒤 떨리는 가슴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척.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영화에서 봤던 히치하이킹을 완벽히 재현했다.

자.

부우우웅!

멈춰라!!

* * *

시발.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히치하이킹을 시작하고 다섯 시간.

한 대도 서지 않았다, 단 한 대도.

저벅. 저벅.

그냥 면도칼 들고 뛰어갈걸.

다섯 시간이나 손을 들고 있어서일까.

상당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대로에 가만히 서 있던 몸도 몸이었지만, 차가 지나갈 때마다 이번엔 세워주지 않을까란 쓸데없는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느라 마음이 무척이나 지친 상태.

너무 매정한 세상이야.

고개가 절레절레 내저어졌다.

어쩜 이렇게 차가울 수 있단 말인가.

한 명쯤은 차를 세우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줄만도 한데.

부우우우.

뒤에서 다가오는 차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안 해.

한 번 더 거절당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냥 심신의 기운을 회복시킨 다음에 면도칼 들고 뛰어가야지.

끼이이이.

!?

서서히 멈추는 차량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머선 일이고?

그렇게 세워달라고 손을 들 때는 안 서더니.

"총각, 위험하게 왜 차 길을 걷고 있어?"

내려진 창문으로 인심 좋게 생긴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시내로 가야 되는데 갈 방법이 없어서요. 그냥 치여 죽어야죠 뭐…. 어차피 가다가 굶어 죽을 텐데."

최대한 처량한 얼굴로 비관적인 말을 읊어 나갔다.

비를 쫄딱 다 맞으며 박스에 앉아 있는 불쌍한 강아지처럼 말이다.

"아이구! 젊은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어여 타! 내가 태워다 줄게!"

지져스.

"가… 감사합니다!"

기쁜 마음에 호다닥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로 탑승했다.

푸우욱.

앉자마자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 주는 포근한 차 시트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거야.

바로 이것이다.

네 시간 전부터 내가 원했던 것은.

"아이고 얼굴 보니 오랫동안 서 있었구만."

얼굴에서 지친 기색이 물씬 풍기고 있나 보다.

"네… 아무도 안 세워주더라고요.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거기 서랍에 바나나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어."

하느님, 천사가 여기에 계십니다.

다시 한번 90도로 고개를 숙인 뒤 조수석의 서랍을 열었다.

어?

바나나와 함께 놓여 있는 사진 한 장.

사진 속엔 운전 중인 아저씨와 딸로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가 찍혀 있었다.

"허허, 예쁘지? 내 딸이여, 하나밖에 없는 내 보물."

"정말 보기 좋네요."

가식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아저씨와 딸의 모습.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가 사진을 통해서 느껴지고 있었다.

"딸이 식물과 관련된 능력을 개방했거든. 뭐라고 했더라…. 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었나. 어쨌든 다양한 식물들의 소리를 듣겠다며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고 있어."

"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뭔가 신비롭네요."

"그치? 거의 없다시피한 능력을 개봉한 애비랑은 다르지, 허허!"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아저씨.

딸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시는 것 같았다.

"자네는 어디로 가려고 터미널에 가는가?"

우물거리던 바나나를 넘긴 뒤 입을 열었다.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가려는 중이에요. 거기에 볼일이 있어서요."

"곡성. 곡성… 거기 같은데 말이야."

"어? 아저씨 곡성 아세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던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딸이 이번에 간다고 했던 곳인 것 같거든."

"… 용기가 엄청나시네요."

곡성, 곡하는 소리.

물론 전라남도 곡성은 지역 이름일 뿐 이 곡성과는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개방과 데몬이 나타나면서 곡성으로 향하는 사람의 발길은 점점 끊기게 되었다.

- 귀신 소리가 들려요.

밤만 되면 귀신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목격담이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와 함께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까지 퍼지며 겁에 질린 사람들이 가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 곡성을 홀로 가다니, 엄청난 용기였다.

"당돌한 아이여, 어렸을 때부터 겁이 없어서 귀신 나온다 해도 그냥 뛰어들어가고 그랬거든."

"하하…. 곡성은 어떻다고 하던가요? 정말 귀신 울음소리가 들리나 궁금해서요."

내 물음과 동시에 아저씨의 얼굴로 걱정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거시…. 곡성 도착했다고 한 뒤로 연락이 안 되더라고."

"네…?"

"워낙 산간 지역이라 핸드폰이 안 터질 수도 있다곤 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는디. 벌써 2주일 째라 걱정되더라고, 허허. 주책이지 주책이야. 어련히 잘 있으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아저씨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전파 터지는 곳으로 나오면 바로 전화하실 거예요."

"그렇지? 나도 그러려니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네, 허허!"

웃음소리와는 반대로 여전히 걱정 가득한 아저씨의 얼굴.

음 곡성이면 어차피 내가 가는 곳이니까.

"어차피 잘 계시겠지만 제가 곡성 가는 김에 한 번 찾아가 볼까요?"

"아이고! 그래 줄 수 있겠어?"

내가 가본다는 소리에 아저씨의 얼굴이 급 밝아졌다.

괜찮다고는 말하지만 걱정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만나면 아저씨 걱정하고 계신다고 얼른 연락 드리라고 전해드릴게요."

"고맙네, 고마워. 내가 귀인을 태웠구만! 사실 걱정이 많이 됐거든. 하루에 한 번씩 꼭 전화를 잊지 않던 아인데 2주일이나 안 되니까 말이야."

그제야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놓은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통화를 하던 딸이 2주일이나 연락이 없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얼굴은 사진 봐서 아니까 이름만 알려주세요."

나라고 곡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스이카를 찾아가는 상태.

어차피 여기저기 뒤져봐야 했다.

겸사겸사 따님을 찾아 말도 전해드리면 오늘 태워 주신 거에 대한 감사 인사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이초희, 이초희라네. 잘 부탁혀."

"이초희요, 알겠습니다!"

아저씨를 향해 자신감 넘치는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저만 믿으세요! 꼭 연락 드리라고 전해드릴 테니까요!"

* * *

곡성의 산자락.

"살려주세요!"

깊은 산 속에서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르며 계속해서 산을 달리는 여자.

팍!

"꺅!"

돌멩이를 밟은 여자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아…."

피가 나고 있는 발바닥을 바라보며 여자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도망쳐야 돼.'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벗어나서 신고해야 했다.

지금도 갇혀 있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도.

[일어나!]

[힘내!]

귓가로 풀과 나무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포기하면 안돼!]

여자의 이름은 이초희.

개방을 통해 식물과 의사소통 할 수 있게 된 능력자였다.

"포기 안해! 으…!!"

이초희가 어금니를 깨문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찢긴 발에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견뎌내야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돼.'

사방이 캄캄해 길을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식물들의 안내를 받아 이곳까지 달려왔다.

조금만 더 가면 곧 대로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타닥.

몸을 일으킨 이초희가 계속해서 산 아래로 나아갔다.

번쩍.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차들의 불빛.

"아…!"

다 왔다는 생각에 이초희가 속도를 올렸다.

[빨리 가!]

[도움을 구헤!]

"고마워."

식물들이 이끌어줬기에 늦은 밤 산속임에도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대로까지 도착한 이초희가 다가오는 차량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끼이익!

한밤중에 엉망진창이 된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어서일까.

차례차례 멈춘 차량들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살았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포기할 수 없단 생각에 꾹 참고 있었지만 정말 무서웠었다.

[아니야!]

[도망쳐!]

[아니야!!]

"응…?"

울고 있는 이초희의 귓가로 식물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런 이초희에게 부부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다가왔다.

"아…."

다가온 사람들에 이초희가 절망에 찬 탄성을 내뱉었다.

얼굴 한가득 조소를 머금고 있는 사람들.

"이년 봐라?"

"아. 안돼…."

"뭘 안돼."

스윽.

절망에 찬 이초희에게 악마의 손길이 뻗어왔다.

44화. 곡성

드디어 왔네.

도착한 기쁨과 동시에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버스도 더럽게 없었지.

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끊겼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니 버스 편도 없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터미널에서 다음 버스 시간표를 보고 눈을 비비고 말았다.

쉽지 않았어.

여섯 시간을 기다리다니.

다행이라면 주변이 번화가라 맛있는 음식점이 널려있었다는 것.

한두 군데로 만족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먹방을 찍은 뒤에야 곡성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개미굴과 광산에 이은 먹방 영상… 은 한튜브에 안 올려주겠지.

세 번째 식당을 갔을 때 문뜩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맛있게 잘 먹는데 먹방 헌터로 이름을 떨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흠.

뭐 어쨌든, 도착했다.

그나저나.

돌아가고 싶네.

곡성이란 장소를 보며 떠올린 첫 소감이었다.

까악. 까악.

저게 독수리여 까마귀여.

산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검은 물체.

까악 하고 울지 않았다면 당연히 독수리라고 생각했을 만한 크기였다.

뭐가 이렇게 휑해.

사람이 살긴 하는 건지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을.

버스가 여기에 서는 걸 봤을 때 그나마 번화한 곳이라는 의미일 텐데. 

번… 번화의 기준은 지역마다 다른 거니까.

터미널까지만 해도 무슨 버스 간격이 이렇게 기냐고 욕을 했었는데.

막상 와보니 오는 버스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저벅.

천천히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휑하다 해도 사람 한둘쯤은 살고 있을 테니.

그곳에서 무언가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초희 님도 찾아야 하고.

올 때까지만 해도 이름과 얼굴만으로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었는데.

인적이 드문 정도를 보니 워낙 사람이 귀해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

길옆의 정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사람이 없어도 그러려니 싶을 동네에서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손을 휘적 들어 보이는 할머니.

쿠… 쿨하다.

"누구여?"

"서울에서 왔는데요."

다음 질문을 놓고 잠시 고민이 됐다.

내가 곡성에서 해야 하는 일은 두 가지.

스이카와 이초희 찾기.

뭔가 검에 대해서는 물어봐도 모르실 거 같으니.

"혹시 여기에 이런 분 오시지 않았나요?"

아저씨에게 받아뒀던 사진을 내밀었다.

무심한 얼굴로 사진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

"여기 왔던 처자네. 저어기 산으로 올라갔어."

어딘가를 가리키는 할머니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진짜 저기로 갔다고?

크거나 높진 않지만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으스스한 산이었다.

해까지 저물어서 그런지 더 소름 끼치는 모습.

"가지 말어."

"예?"

화가 나신 건지 아니면 귀찮아하시는 건지 애매한 표정의 할머니.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말라고. 올라간 사람들은 아무도 못 내려왔으니께."

보… 복선?

공포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이 위험한 곳으로 향하기 전.

항상 가지 말라며 주인공에게 경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주인공이 개고생을 안 할 수있는 유일한 기회.

- 아니 가지 말라면 가지 말아야지. 쯔쯧!

기회가 있었지만 그 경고를 무시하고 가버리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을 보며 얼마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는지 모른다.

주인공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갑자기 말 더럽게 안 듣는다 생각했던 주인공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고생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혹시 무슨 일 일었나요?"

아무리 무서운 얘기를 듣더라도 어차피 가겠지만.

모르고 무서운 것 보다 알고 무서운 게 낫지 않겠는가. 

"자네가 찾는 처자도 안 나왔어. 처자 전에 왔던 학생들도 안 돌아왔고. 그 전에 갔던 사람들도 전부 다 말이여."

꿀꺽.

100%라니.

한 명이라도 돌아온 사람이 있었으면 마음이 훨씬 편했을 텐데.

99%와 100%는 가능성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 와닿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리고 저 산, 저거 원래 없었어."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산이 없었다니.

구룡산의 케이스에서도 봤지만 산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 뚝딱 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

"어차피 자네도 갈 거지?"

뜨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처자도 그렇게 가부렀어. 가지 말라고 얼마나 말렸는디."

나 같아도 한숨 쉬겠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기어코 가서 못 돌아오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할머니."

조심스럽게 할머니께 고개를 숙였다.

걱정해서 말씀해주신 건데 안 들어 처먹는 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저… 저는 돌아올게요.

휘휘.

손을 내젓는 할머니께 다시 한번 인사를 한 뒤 산으로 향했다.

엄청나게 내키지 않았지만 올라가긴 해야 했다.

꼭 이초희를 찾는 게 아니더라도 스이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뒤지긴 해야 하니 말이다.

부디 귀신 안 나오기를 비나이다.

한 차례 기도를 올린 후 산의 입구로 발을 뻗었다.

"가… 가즈아아."

* * *

뭐지.

산으로 오른 지 한 시간.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데몬이 이렇게 안 나온다고?

몇 발자국 갈 때마다 데몬이 튀어나왔던 구룡산.

도심지에 위치한 구룡산도 그런데 사람의 발길이 끊긴 이곳은 얼마나 데몬이 득실댈까.

라는 생각을 하며 언제 데몬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0.

산을 오른 뒤 지금까지 나온 데몬의 숫자였다.

생각보다 안 나온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가 관리하는 건가.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반듯하게 잘려있는 나뭇가지들과 짧게 깎여 있는 풀까지.

귀신 나올 것처럼 우거져 있던 건 산의 초입 부분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이게 발길이 끊긴 지역에 있는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 아무도 못 돌아왔어.

심지어 출발 전 들었던 할머니의 경고까지.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모른다.

산으로 돌아오는 순간 무조건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척이나 의외인 상황이었다.

바스락.

나왔냐!?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힘차게 고개를 돌렸다.

얼레.

모습을 나타낸 건 데몬이 아니었다.

사람들.

그것도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다수의 사람이 숲 사이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잃어버리신 건가요?"

"어… 아직 잃어버린 건 아닌데요."

자신감 넘치게 아뇨! 라고 대답하긴 힘들었다.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발이 닿는 데로 뒤져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길을 잃어버린 거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하고.

"깜짝 놀랐네요. 데몬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시간대에 산에 홀로 계시다니. 위험해요, 위험해."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제각각 화기를 포함한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저벅.

무리의 가장 앞으로 화기를 든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전 윤명구라고 합니다. 무슨 일 때문에 올라오신 건가요?"

순박하실 것 같다.

질문을 건넨 윤명구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커다란 안경을 쓴 세상 착한 얼굴, 거기다 나긋나긋한 말투까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전 백운이라고 해요. 뭐 좀 찾고 있어서요."

"찾는다? 야밤에 이 산에서 무얼…?"

"사람을 찾고 있어요."

"네? 사람요? 이 산에서요?"

화들짝 놀란 윤명구가 되물어왔다.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의심해도 할 말은 없었다.

이 야밤에 산에 올라서 한다는 게 사람 찾기라니.

"음…."

윤명구가 고개를 돌려 함께 온 일행을 바라봤다.

끄덕.

무언가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다행이야.

아직 말은 안 했지만 날 도와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 때문에라도 부디 그래 줬으면 했다.

"일단 저희가 머무는 곳으로 가시죠. 너무 어두워져서 지금 사람 찾기는 위험하니까요."

나이스.

"고맙습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90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

내가 고개를 숙이는 있는 지금.

저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상하단 말이야.

법 없이도 살게 생긴 윤명구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의구심이 들었다.

할머니가 말에 따르면 이곳은 들어간 다음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산이었다.

곳곳을 다 뒤져본 건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데몬은 나오지 않은 상태.

그럼 왜?

왜 산으로 갔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한 걸까.

산을 완전히 넘어 반대로 나갔다?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곧 나오겠지라 생각했던 데몬이 아닌 윤명구와 일행이 등장했다.

아직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

어쩌면 데몬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절 따라오시죠."

* * *

허…. 산 속에 이런 곳이 있다고?

윤명구와 일행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계곡 옆에 위치한 마을… 이라기 보단 요새에 가까운 곳이었다.

어째서 산속에 이런 걸 지은 거지.

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은 데몬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산속.

마음만 먹는다면, 시간과 인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텅텅 빈 마을도 있는데 굳이 이런 첩첩산중에 요새를 짓는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힘드시죠?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하하. 아뇨, 아직이에요."

뒤에 있던 일행 중 한 명, 자신을 진선미라 소개했던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나이도 어리신 거 같은데 굶고 다니면 쓰나요. 식사를 준비해드릴 테니 절 따라오세요. 그동안 명구가 방을 준비해놓을 거예요."

"이야~ 식사까지. 너무 염치없네요."

"호호, 아니에오. 오랜만에 오신 손님인데 식사는 당연히 대접해드려야죠. 명구야?"

"맞아요, 마음 편하게 드세요. 전 주무실 방을 준비하고 가겠습니다.

사람 좋게 웃어 보인 윤명구가 자리를 떠나고.

눈웃음을 지은 진선미가 날 한쪽 건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 * *

요새의 가장 높은 방.

똑똑.

"진국이 형, 명구에요."

"들어와."

노크를 한 윤명구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래서, 뭐 하는 놈이야?"

피식!

웃음을 터뜨린 윤명구가 고개를 내저었다.

"국가 헌터래요. 10급짜리."

"풉."

요새를 이끄는 대장이자 무리의 맏형인 문진국이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10급이라니.

동네 코흘리개도 종종 합격하는 급수 아니던가.

"그래서 데려왔어요. 10급따리 하나 없어져도 찾는 사람 하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친척이나 가족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여기 오는 거 아는 사람도 없고."

"순수하긴 한데 좀 멍청한 것 같네. 겁대가리 없이 10급이 야밤에 산을 올라?"

으쓱.

어깨를 올려 보인 윤명구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다른 곳이었으면 데몬한테 죽었을 놈이에요. 그러니까."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의 소유자, 윤명구.

그의 얼굴로 소름 끼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어차피 죽었을 목숨, 저희가 좋은 곳에 쓰도록 하죠."

45화. 탈옥수

"형님, 그 죄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다 무너져 내린 폐허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 김태우가 입을 열었다.

청색 바탕의 제복을 입고 있는 김태우의 가슴팍엔 익산 교도소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모르지."

그 옆에서 같은 복장에 배가 불룩 나온 이철수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어디 가서 죽었기를 바라야지."

"흐음."

이철수의 말에 김태우가 걱정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익산 교도소.

정확히는 익산 교도소로 운영되던 곳이었다.

"시체는 발견 안 된 거죠?"

담배를 문 이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과 동시에 데몬이 나타난 날.

이곳 익산 교도소에도 거대한 데몬 두 마리가 나타났었다.

"잡아먹히지 않았을까?"

단 두 마리였지만 아무도 대처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괴물들이 뭔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죽이는지도 몰랐으니까.

속수무책으로 나타난 괴물들에 교도소는 함락당했고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아예 죽은 흔적조차 없는 놈들도 있잖아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교도소엔 단 한 명의 죄수도 남아있지 않았다.

갇혀 있던 특성상 대부분 데몬에 의해 살해당하긴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교도소 간수들의 바람일 뿐이었다.

"특히 그 싸이코 사형수들은 제발 죽었어야 하는데."

익산 교도소엔 사형수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싸이코들이 있었다.

시골 마을에 집을 지은 뒤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고문 후 살해한 싸이코 집단.

-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공포에 질린 그 표정이 너무 좋거든요.

정말 멀쩡하게 생긴 놈이 한 말이었다.

지나가다 봤으면 인상이 좋다고 저절로 느꼈을 얼굴.

-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죽일 때도 꼭 지켜보게 해요. 그렇게 놔두면 서서히 정신이 나가는 거죠, 키킥!

미친 건 그놈뿐만이 아니었다.

대장격인 녀석은 이런 싸이코들을 이끌며 집단을 운영해 나갔으며, 대장의 여자친구인 여자 한 명도 단단히 돌아버린 인간이었다.

"그 여자, 엄청 소름 돋았어.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안 들면 온갖 고문은 다 하다 죽였으니까."

"어휴… 지금 생각해도 소름 돋네요."

고개를 끄덕인 이철수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도나 하자고. 부디 죽었기를."

* * *

뭐야? 밥만 차려주고 어디 간 거야.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는 눈앞의 음식들.

당장에라도 집어먹고 싶은데 식사 준비를 하던 진선미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냥 집어먹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같이 먹자고 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스리슬쩍 주변을 살폈다.

오랜만의 손님이라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요새 안에서 살고 있는 집단이라.

맛있는 음식 냄새로 열심히 가리고 있긴 했지만 몹시 구린내가 났다.

과거야 탄압의 손을 피해 산  속에서 사는 경우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치안이 약해 데몬의 주 등장지가 되는 산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리 큰 산은 아니라지만 데몬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물론 산이라고 부르기는 살짝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조금 더 낮춘다면 집 뒤에 있는 동산이라고 해도 될 크기.

"배고프시면 먼저 드셔도 됩니다. 선미 누나가 잠시 어디 간 모양이에요."

내가 배고픈 걸 안 걸까.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하, 아니에요. 다 같이 먹어야 맛있죠."

손을 내저으며 극구 사양을 했다.

사실 원래였으면 그냥 먹었을 것이다.

찜찜해서 못 먹겠단 말이지.

웃는 척하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위화감.

애초에 의심을 가지고 따라와서 그런 걸수도 있지만, 마을 전체에선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굳이 합석해 웃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

"선미 누나는 손님 앉혀놓고 어딜 간 거야!"

"그러니까 손님 대접하는 방법이 글러 먹었다니까."

자연스럽게 대화는 나누고 있었지만 이 사람들의 눈은 항상 날 따라다니고 있었다.

조금 전 화장실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무언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두어 명이 굳이 날 따라왔었다.

앞에 음식들에도 무슨 장난질을 했을 줄 알고.

그렇다고 차려 준 걸 안 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저들이 먹는 모습을 본 뒤 나도 수저를 들 생각이었다.

"어! 저기 오네."

"뭐야 쟤 데리러 갔던 거야?"

쟤…?

"다들 기다렸지!"

!!

잠시 후 활짝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진선미.

진선미는 혼자가 아니었다.

잔뜩 겁에 질린 채 진선미에게 붙잡혀 있는 여자.

… 이 새끼들 봐라.

진선미와 함께 온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

날 태워줬던 아저씨가 애타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딸, 이초희였다.

* * *

조금 전 숲속 요새의 구석진 방.

짜악!

방 안으로 살과 살이 부딪히는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이 년이 능력 좀 특이하다고 오냐오냐해줬더니, 도망을 쳐?"

짜악!

다시 한번 진선미가 이초희의 뺨을 때렸다.

바닥에 엎드린 채 제대로 된 저항 한번조차 못하고 있는 이초희.

"제발… 살려주세요…."

꽈악.

이초희의 머리채를 잡은 진선미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뭘 살려줘 이 년아. 며칠 전에 대학생들 죽는 거 못 봤어?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 이초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 도망쳐, 도망쳐.

높지 않은 산.

산에 올라온 순간부터 풀들이 이초희에게 소리쳤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라고.

'풀들이 왜 이러지?'

처음엔 의아했었다.

구체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기에 이유까진 알 수 없었지만, 풀이 이렇게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날 지켜주는 분들도 계신데.'

산에는 종종 데몬이 출몰한다는 걸 알았기에 인터넷에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헌터들을 고용했었다.

모두 이곳 토박이라 산 지리까지 잘 알고 있던 사람들.

- 왜요?

그렇게 한참 풀들의 반응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세상 사람 좋게 생긴 윤명구가 다가왔었다.

산을 오르며 워낙 살가운 모습에 개방한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윤명구.

- 풀들이 도망가래요? 늦었는데?

그 뒤 잠시 정신을 잃고 눈을 떴을 땐 이 방 안이었다.

"그래도 혼자 죽을 팔자는 아닌가 보다 야. 같이 죽어주겠다고 10급 헌터 나부랭이가 왔네. 가기 전에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해."

* * *

모습을 나타낸 이초희와,

"큭…."

그런 이초희를 보며 웃음을 참고 있는 마을 사람들.

이야 대담한 놈들이네.

정확한 전후 사정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이초희의 겁에 질린 얼굴과 상처들을 보아 대강 추측이 될 뿐이었다.

드륵.

내 근처에 이초희를 앉힌 뒤 그사이에 자리를 잡는 진선미.

진선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아까보다 더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저벅.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을 문진국이라 밝힌 남자와 윤명구까지 나타나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백운 님은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요?"

고기를 한 점 집어 든 문진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대학교 친구들이 이곳으로 간다고 한 다음부터 연락이 안 되어서요."

나이가 비슷한 또래였기에 이초희 전에 이곳으로 올라온 대학생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하… 대학생들요."

대학생이란 단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문진국과 윤명구.

사라진 대학생들도 이놈들이랑 연관 있구만.

대학생들은 어디에 두고 이초희만 데려온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켜보자.

찾으려던 이초희도 바로 눈앞에 있는 상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백운 님, 혹시 올라오다가 이상한 점 못 느꼈나요?"

"해가 진 시간의 산인데도 데몬이 한 마리도 안 나타났다?"

"하하! 사실 뭐 이상한 점은 아니지만요. 없는 게 나타날 수는 없으니까."

문진국이 묘한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소탕을 잘 했다는 뜻일까?

"저희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문진국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지역의 한 야산에 데몬과의 타협이 가능한 탈옥수가 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강한 데몬과 타협을 한 거죠. 비용을 지불할 테니 이곳으로 들어오는 데몬을 잡아달라고요."

조용히 문진국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물어본 적도 없는데 술술 말하는 문진국.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남의 이야기인 척 자기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10급이 이런 장점이 있네.

국가 소속 헌터라고 소개를 했는데도 대놓고 자기소개를 하는 문진국과 이초희를 데려온 진선미까지.

아마 10급이 아니라 조금 더 높은 급수였다면 저러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요새화되어 있는 마을까지 들이지도 않았겠지.

"신기한 능력이네요."

문진국이 한 말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처음 보는 타입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타협은 했는데 문제가 한 가지 있더라고요."

문진국이 들고 있는 포크로 요리의 고기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비용은 드는데, 가진 자원만으로는 한계가 생긴 겁니다. 당연히 탈옥수의 마음은 급해졌죠. 비용을 조금이라도 늦게 지불하게 되면 자신마저 그 비용에 포함되게 될 테니까요."

쿠욱.

포크로 고기를 찍은 문진국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들이 알아서 걸어 들어오더라고요."

콰직.

터져 나온 육즙이 문진국의 입으로 흘러내렸다.

"그래서 잘 써줬습니다. 써달라고 들어오는데 어쩌겠어요?"

"키킥."

"큽."

문진국의 말이 끝나자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겨 죽겠는데 나 때문에 참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말하는 문진국이나 옆에서 비웃고 있는 놈들 꼬라지를 보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 비용이란 게 어떤 거죠?"

"비용요? 궁금하세요?"

옆에서 실실거리던 윤명구가 내 뒤쪽으로 걸어왔다.

"아무래도 데몬이다 보니까."

귀 바로 옆에서 윤명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사람을 좋아하더라고요, 살아서 팔딱거리는 거!"

"흑…!"

여기까지 말하자 앉아 있던 이초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윤명구의 말에 무언가 잊으려 했던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

"여기 올라왔던 대학생들은 어디 갔나요?"

"앗! 맞다! 친구들 찾는다고 하셨지."

내 질문에 진선미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거 그만하셔도 되겠어요. 저희가 친구들 곁으로 보내드릴게요!"

솔직히 아니길 바랐다.

내가 너무 나쁜 쪽으로 생각한 거겠지 했었는데.

"꺄하하하! 얼굴 봐! 이제야 알았나 봐!"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며 진선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년.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조금 전까지 고민했었다.

만약 저들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류의 인간들이 맞다면 난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그런데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이쯤 되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

딸그락.

들고 있던 포크를 책상에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혹시 근처에 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없어요, 없어! 아무리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안 온다니까요! 그치? 초희야? 이 년아!"

"흐읍…!"

이초희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스윽.

손을 귀 뒤로 가져가,

딸깍.

액션 캠의 녹화를 정지시켰다.

"잘됐네."

46화. 산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