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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설산에서 터널로

이른 아침.

카앙! 카앙!

귓가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에 눈을 떴다.

!!

호다닥.

뜨듯한 방바닥이 내 몸을 붙잡았지만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첫날부터 계속되는 망치 소리에 마음이 몹시 무거워진 상태.

이건 지옥행 확정이야.

검을 만들어주겠다 말한 뒤 척사율은 집 뒤편에 있는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그 날 밤부터 시작된 망치 소리.

의도치 않게 나이가 지긋이 든 분에게 일을 시켜버린 것이었다.

벌컥!

잠이 덜 깼지만 빠르게 문을 연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에 있어 봐야 방해만 될 게 뻔했기에 어제부터 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멧돼지쉨!

척사율과 유라가 먹을 식량과 불을 지필 장작을 구하는 것.

힘만 남아도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었다.

어디에 있어! 도야지쉨!

한창 겨울잠을 자고 있을 멧돼지들.

어제도 산 구석구석을 뒤지며 자고 있던 멧돼지와 멧돼지과 데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들였다.

- 아저씨.

한참 마당에서 멧돼지 고기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척사율을 돕다 나온 유라가 내게 다가왔었다.

친손녀는 아니지만 설산에 버려졌던 아이를 데려왔던 척사율.

척사율은 아이에게 척유라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 부탁 하나만 들어줘.

아저씨는 아니었지만 부탁이란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설산에 동태가 될 뻔한 걸 구해준 척유라였으니.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 수 있었다.

- 나중에 할머니 친구, 데려와 줄 수 있어?

의외의 부탁이었다.

산속에 있으니 무언가 구해달라는 부탁일 줄 알았는데.

유라의 부탁은 민쿠를 데려와 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알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민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는 유라.

유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민쿠에 대한 척사율의 그리움을 많이 느꼈다고 설명했다.

- 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 아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 거야.

너무 담담해서 듣던 내가 놀랄 정도였다.

유라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인 척사율.

그런 척사율이 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도 유라는 울거나 슬퍼하지 않았었다.

이미 바로 앞까지 다가온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동안에 자신이 척사율에게 해줄 수 있는 걸 해주려는 모습이었다.

- 할머니는 평생 친구를 그리워했어. 그래서 만나게 해주고 싶어.

마음 같아선 직접 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떠난 사이 척사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어 가지 못했다는 유라.

기특한 녀석이야.

민쿠를 데려와달라는 유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었다.

부산에서 이곳으로 다시 올 땐 꼭 민쿠를 데려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이다.

둘은 만나야 돼.

유라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악귀참도를 구한 후 어떻게든 민쿠를 척사율과 만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둘에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 조금이라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앙---!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울려 퍼지는 척사율의 망치 소리를 들으며.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향해 수리검을 던졌다.

* * *

"홀홀… 힘 하나는 장사구먼."

잔뜩 나무를 해온 날 바라보며.

툇마루에 앉은 척사율이 미소를 지었다.

"이리 와보게나."

날 부르는 척사율의 손짓에.

꼴깍.

마른침을 한 번 넘긴 뒤 걸음을 옮겼다.

기다란 천에 돌돌 말려 척사율의 손에 들있는 것.

끌러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약속했던 검이네."

내가 다가오기 무섭게 척사율이 검을 건넸다.

"검집은 없으니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게나."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든 후.

천을 풀어 검을 꺼내었다.

사아아…!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검날에 반사된 햇빛이 내 눈을 비추었다.

"내 마지막 검이지만 최고의 검이라 부를 순 없겠구먼. 힘이 모자라 길잡이의 능력을 불어넣는데 기력을 다 써버렸다네."

홀홀 인자한 웃음을 터뜨린 척사율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척사율 입장에서 난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일 터.

그럼에도 따듯한 방과 음식을 내어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엔 내게 꼭 필요한 검까지 만들어주었다.

검을 안 만들어준다 했어도 이상할 건 없었는데.

다짜고짜 한밤중에 들이닥쳐 검을 만들어 달라고 한 나였다.

그럼에도 내가 누구인지, 척준경의 악귀참도를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무엇 하나 묻지 않은 채 척사율은 내게 검을 건네줬다.

"의아해할 필요 없다네."

"…!?"

검을 받아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척사율이 홀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한눈에 알 수 있다네."

고개를 든 척사율이 내 얼굴을 응시했다.

"앞에 있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정도는 말이야."

숙였던 고개를 들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척사율이 마지막 말을 건넸다.

"자네는 충분히 자격이 있다네."

* * *

타다다다… 탓!

잭 더 리퍼의 면도칼을 손에 든 채.

눈 덮인 설산을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밝은 대낮이라 수리검을 던지면서 갈까도 했지만.

워낙 급격한 경사의 내리막이라 달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슥.

달리는 와중에 소중하게 품고 있는 검을 내려다봤다.

척사율이 자신의 마지막 검이라며 건네준 검.

이전의 검과 다른 게 있었다.

# 척사율.

칸이 가지고 있던 검의 손잡이엔 척사윤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와 달리 이번에 건네받은 손잡이에 적혀 있는 선명한 이름 세 글자, 척사율.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검만큼은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새겨 넣었다.

"키아아아!"

검에 적힌 이름을 보고 있을 때.

눈앞으로 곰을 닮은 데몬이 튀어나왔다.

"자러 가라."

쾅!

속도가 죽지 않게끔 그런 데몬을 단숨에 차낸 뒤.

계속해서 아래로 달려갔다.

계속 달리면 서울까진 갈 수 있으려나.

원래라면 칼데아를 사용할 수 있는 밤에 출발했을 것이었다.

이틀 동안 머무르며 칼데아의 연기도 충분히 채워진 상태.

날개를 이용해 하늘길로 가는 게 어떤 이동수단보다 빨랐을 테니 말이다.

빨리 가야 돼.

그럼에도 검을 받아 들기 무섭게 출발한 이유는 간단했다.

망자의 길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도윤도 있었지만.

- 할머니의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어요.

늦기 전에 민쿠를 데려와 달라는 척유라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

순식간에 스쳐가는 설산의 풍경을 뒤로하며.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내디뎠다.

무엇 하나 늦지 않도록.

탓!

서둘러야 한다.

* * *

쿠웅!

"후우!"

강물로 착지하며 눈앞의 터널을 응시했다.

열심히 달리긴 했지만 강원도에서 부산은 먼 거리였기에.

밤이 되어 칼데아를 사용할 수 있게 된 후에야 도착한 것이었다.

"왔어?"

한밤중이 돼서야 도착한 터널.

터널 앞엔 망토를 뒤집어쓴 민쿠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석이…!"

터널 입구를 막고 있던 비석이 사라져 있었다.

토족과 민쿠가 막아놨던 봉인석이었다.

"…!"

사라진 비석에 놀라고 있는 사이.

민쿠는 내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며 눈이 커지고 있었다.

어째서 놀랐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살아 계셨어요."

민쿠의 입가로 안도의 미소가 어렸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에 서 있던 민쿠.

민쿠가 터널로부터 천천히 비켜섰다.

무언가 복잡한 얼굴을 한 민쿠였다.

"터널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어."

민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아마 척사율이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일 터였다.

"괜찮아요."

걱정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터널로 다가갔다.

"꼭 돌아오길 바라."

"고맙습니다."

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민쿠를 향해 한차례 고개를 숙인 후.

터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터널의 어둠이 천천히 내 시야를 채워왔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서인지 눅눅한 공기가 가득한 공간.

"후우우."

작은 호흡을 내뱉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의 정면을 응시했다.

척사율과 민쿠의 말에 따르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이었다.

흠.

솔직히 말하면 무모한 행동이었다.

다시는 이쪽 세계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데 냅다 건너간다니.

누군가 들으면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차피 다른 길은 없어.

그럼에도 내가 망설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이 길이 아니라면 당장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어떻게든 돌아온다.

그렇다고 못 돌아오면 그만이지란 무책임한 생각도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해치운 뒤 돌아온다.

간단하지만 무조건 수행할 내 계획이었다.

만약 터널이 닫히기 전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다른 길을 찾는다.

아직까진 고려하지 않아도 될 루트였고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불가능한 루트는 아니었다.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로튼을 포함한 데몬들이 인간 세계로 넘어오는 문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말이다.

스윽.

검날의 기억에서 본 대로.

손에 들려 있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웅…!

검이 푸른빛을 뿜어내고.

잠시 후 터널을 따라 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길을 그렸다.

동시에 저 끝으로 보이기 시작한 다른 세계의 시작점. 

"후웁!"

한차례 호흡을 들이킨 뒤.

기다려라.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악귀참도.

* * *

"…."

설산 속 작은 집의 툇마루.

마루에 앉은 척사율과 척유라가 백운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홀홀… 무기를 모으는 사람이라.'

백운이 찾아온 첫날 밤.

척사율은 백운에게 누구인지 묻지 않았었다.

이틀이 지나고 검을 건넨 뒤에야 이름을 물었었다.

- 전 무기를 모으는 자, 백운입니다.

세상 겸손한 자기소개라고 생각했다.

살아온 세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척사율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백운이 두르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기운을 말이다.

'무신을 뛰어넘는 기운이라…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홀홀.'

척사율이 한밤중에 방문한 손님을 떠올리는 사이.

척유라가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그 아저씨 괜찮을까?"

함께 지낸 지는 이틀밖에 안 되었지만.

척유라는 내심 백운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괜찮고말고."

척사율이 걱정말라는 듯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척유라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거든."

"응…? 왕이라니."

의아해하는 척유라를 향해.

척사율이 입을 열었다.

"왕이 돌아오고자 한다면."

백운을 떠올린 척사율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느니라."

190화. 열리는 균열

"크라아… 아!"

"키릭… 키릭."

다양한 데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다."

울음소리의 중심에 앉은 거구의 데몬이 정면을 응시했다.

회색빛 피부와 머리로 돋아 있는 여섯 개의 뿔,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큰 덩치를 제외하면 인간과 몹시 유사한 생김새였다.

"균열이 곧 열린다."

꽈악.

데몬이 정면의 균열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굳게 닫혀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았던 균열이지만.

파직.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때가 온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너무 길었군."

서서히 번져 가는 금을 보며 뿔을 가진 데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한참 전에 바깥 세상으로 나가 자유를 누볐어야 했다.

자유를 누비며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살의를 마음껏 분출했어야 했다.

저벅.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데몬에게로 해골 형태를 가진 또 다른 데몬이 다가왔다.

"픽… 픽탄, 주… 준… 비 마쳤다."

어눌하게 건네어진 해골 데몬의 말에 거구의 뿔 데몬, 픽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슥.

고개를 돌려 넓지만 한정된 공간을 둘러봤다.

각자의 울음소리를 내며 픽탄을 올려다보고 있는 수천의 데몬.

픽탄과 마찬가지로 이제 곧 때가 온다는 걸 알아서인지 평소보다 더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드드… 쿠직!

공간을 바라보던 픽탄 옆으로 마지막 알이 부화하기 시작했다.

픽탄의 고유 능력인 배양.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데몬은 픽탄이 배양해낸 개체들이었다.

시간만 존재한다면 무한히 데몬을 생성할 수 있는 무적의 능력.

'….'

마침내 마지막 알까지 부화하자 픽탄이 새삼스러운 의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렸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훨씬 빨랐어야 했다.'

맨 처음 균열 안으로 들어온 건 픽탄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균열 속.

숨을 죽이고 힘을 키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들어오는 건 픽탄의 선택이었으나 나가는 건 아니었다.

- 때가 되었군.

정확한 시기가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천년 전의 일이었다.

충분한 군대를 모았다고 생각했었던 픽탄.

픽탄이 배양하는 개체들은 보통의 데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가졌었기에.

이 정도라면 데몬 세계는 무리여도 새로 발견됐다는 인간 세계 정도는 충분히 정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 세계를 정복 후 데몬 군세와 함께 왕으로 군림하는 것.

픽탄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자 열망이었다.

- 드드드…!

그 날도 오늘처럼 균열에 금이 가고 있었다.

열리고 닫히는데 있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균열.

안에 아무것도 없을 땐 항상 열려있지만 무언가 들어간 이후엔 내부에서 충분한 에너지가 차기 전까진 열리지 않았다.

- 쿠우우!

균열이 완벽하게 열린 후.

픽탄은 새로운 세계의 왕이라는 열망을 안고 균열의 출구를 향해 발을 뻗었었다.

더 이상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과 함께 말이다.

- 어딜 기어나가는 것이냐?

그런 픽탄의 앞에 나타난 한 명의 남자.

흑발을 가진 남자였다.

탄탄하긴 하지만 픽탄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체구를 가진 존재.

- 치워라.

한참 자신감이 넘치던 픽탄이었다.

남자를 발견하고도 표정의 변화조차 일어나지 않은 상태.

그저 조용히 손을 뻗어 남자를 치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 내 이름은 척준경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픽탄의 귀로 들려왔다.

아직도 몸이 떨려오는,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 기억해두거라.

으득.

픽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 스릉.

곧이어 소름 끼치는 쇠의 마찰음이 들려왔고.

잠시 후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픽탄 앞에서 펼쳐졌다.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 서걱!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검.

척준경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픽탄의 데몬들은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그렇게 픽탄은 단 한 명에게 대부분의 군대를 잃고 다시 균열 속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치욕스럽지만.'

꾸득.

'결국 이긴 건 나다.'

지난번 전투.

척준경과의 마지막 전투였다.

이미 첫 전투 이후 반복된 오랜 소모전과 인간에겐 극악인 데몬 세계의 환경으로 척준경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척준경에겐 검이 부족했다.

- 콰앙!

마지막 검마저 부러진 후.

척준경은 맨손으로 데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강함이었다.

무기가 없음에도 저런 전투력이라니.

- 끝내야 한다.

첫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한 이후.

배양 능력을 가진 픽탄은 한방의 정면 승부보단 자신에게 유리한 끈질긴 소모전을 선택했었다.

직접 앞으로 나서는 일이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 날은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든 지금 끝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이 말이다.

- 죽어라!!

원래는 직접 나서지 않는 픽탄이었지만.

약해질대로 약해진 척준경은 더 이상 위협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데몬들을 방패 삼으며 달려들었었다.

- 푹.

정확히는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척준경에게 뿔을 찔러 넣었었다.

데몬에겐 영양소지만 인간에겐 치명적인 독이 되는 뿔이었다.

그렇게 뿔에 담긴 모든 힘을 척준경에게 주입해버린 후.

- 균열로 돌아가라!

곧장 균열로 되돌아왔었다.

대부분 쓸려나가 소수만이 남은 군대를 챙겨서 말이다.

'분명 죽었다.'

서서히 닫히는 균열로 보였던 척준경.

분명 서 있었지만, 생명이 다한 모습이었다.

'….'

그 이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척준경에게 모든 걸 쏟아부은 탓에 픽탄의 회복과 배양은 몹시 느렸고.

균열이 다시 열리게끔 힘을 쌓는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려버렸다.

스윽… 쿵.

픽탄이 발을 뻗어 열리기 직전인 균열 앞에 섰다.

'과거는 과거일 뿐.'

씨익.

'마지막에 서 있는 내가 강한 것이다.'

드드드드---!

열리기 시작한 균열을 바라보며 픽탄이 눈을 빛냈다.

'드디어.'

드드--!

'출정이다.'

* * *

터널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이질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양옆으로 높은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 지대였다.

지도대로 가려면 길 따라서 가야겠는데.

처음엔 수리검으로 계속 비젼을 사용할까 했지만.

민쿠가 건네줬던 지도의 길은 단순하지 않았다.

절벽 지형이 하늘을 덮고 있는 곳도 있었기에 무지성으로 비젼하다간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드문드문이긴 해도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장면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한 번 떠올린 후.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세계에서의 첫 호흡을 개시했다.

"후웁… 큽!"

호흡을 할 때마다 공기에 섞인 거친 모래 입자가 느껴졌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공간.

타닷!

그런 공간을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민쿠가 건네줬던 지도는 이미 머릿속에 숙지한 상태. 

눈앞에 펼쳐진 길도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민쿠가 만들었다는 척준경의 무덤까지 금세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리 와봐서 다행이야.

물론 직접 온 건 아니었지만.

로튼의 장막과 부딪히며 들어갔던 카이안의 기억.

기억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데몬 세계를 체험해봤었다.

그 덕에 데몬 세계가 어떤 분위기와 공기를 가지고 있을지 예상 가능했기에.

직접 온 건 처음인 지금도 별 적응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 있었다.

"키아아아!"

저 새끼들만 없으면 완벽할 텐데.

지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때와 달리 지도가 가리키고 있는 길엔 데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서걱! 서걱!

면도칼을 휘두르며 최소한의 공격만을 가한 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체형이 두꺼워 면도칼로 한방에 죽이지 못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순 없었다.

급하다 급해.

10초 후에 닫힙니다… 하고 문이 닫히진 않겠지만.

어찌 됐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척준경 님이 가지고 계시던 검은 무덤 앞에 놓고 왔어.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정보를 전달해 준 민쿠.

악귀참도가 부디 민쿠가 놓아둔 그대로 있기를 바랐지만.

민쿠의 기억은 몇 백년 전의 기억이었다.

어찌 저찌 무덤을 잘 찾아갔다 해도 검이 없을 수도 있었다.

없으면 어쩌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게 악귀참도라면.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똑같은 검인데.

민쿠의 말에 따르면 척준경은 마지막 순간 맨손이었다고 했다.

악귀참도가 남아 있었음에도 말이다.

검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은 채 맨손으로 싸웠다라.

쉽게 납득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신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척준경은 어디까지나 삼국제일검이라 불렸던 검성.

검성이 멀쩡한 검을 놔둔 채 맨손으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다는 건 부자연스러웠다.

휙휙.

살짝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지금 생각할 필요 없다.

무덤 앞에 검이 있는지와 척준경이 어째서 악귀참도를 사용하지 못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도 곧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구루루루---!

구루루!

급한 마음에 생각마저 그만두고 달리고 있을 때.

길목으로 많은 수의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둥글둥글한 체형과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딱딱한 딱지까지.

옹달샘에서 만난 거북이쉨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제발 길 좀.

[앤 보니&메리 리드 - 작열탄]

"나와라 이 징글징글한 새끼들아!"

콰가아아아아---!

* * *

"후우!"

드디어 빠져나온 절벽 길.

사방을 감싸고 있던 절벽이 사라지며 시야가 트이자 마음마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런 시원한 기분도 잠시.

조금 전보다 더 숨 막히는 공기가 느껴졌다.

뭐냐 여기는.

분명 조금 전과 같은 세계임에도 몸을 감싸는 기운과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틀린 장소였다.

말 그대로 숨이 턱턱 막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진 분명 밝았는데 순식간에 깜깜해져 버린 하늘까지.

"키이이!"

"크라라라!"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길목에서 죽어라 쫓아오던 데몬들도 길이 끝나는 기점으로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뭐 어쨌든.

슥.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민쿠 님이 건네준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여기가 맞아.

검날의 기억으로 드문드문 봤던 곳도 여기였다.

그럼 이쯤에서 보여야 하는데.

드드드--!

있네.

잠시 도착한 지형을 살피던 눈앞으로.

말도 안 되게 높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색칠해 놓은 것처럼 새까만 절벽과 양 절벽을 잇고 있는 알 수 없는 균열까지.

척준경이 싸우던 균열과 절벽.

공명으로 봤기에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민쿠의 지도를 떠올리며.

절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를 바라봤다.

민쿠가 무덤이라고 표시해놓은 장소였다.

반짝.

!!

오랜만에 보는 빛이었다.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반가운 빛.

두근.

항상 반가웠지만 오늘은 좀 더 반갑고 기대가 되었다.

무신이자 검성으로 불린 척준경.

아직 만나지도 못한 사이라 염치없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악귀참도,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난 돌산에서의 수련 때 얻으려 했지만 얻지 못했던 것들을 말이다.

꿀꺽.

나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느끼며.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빛을 향해 연기를 터뜨렸다.

191화. 검 속의 무신

후두둑.

빛을 가리고 있던 모래와 잔여물을 훑어냈다.

무덤 앞에 놓이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지 손잡이의 바로 아래까지 쌓여있는 땅의 불순물들.

번쩍!

모래를 털어내자 그제야 선명한 황금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인지 민쿠가 말했던 무덤은 사라지고 검만이 덩그러니 남은 채였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날 기다리고 있는 검을 응시했다.

의외로 멀쩡하네.

수백 년의 세월 간 방치 됐을 텐데도 악귀참도는 몹시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검집이 없음에도 여전히 선명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검날까지.

검을 보호하고 있는 건 손잡이부터 시작한 흑색의 천이 다였다.

천도 신기하네.

생각해보니 검도 검이지만 천도 일반적인 게 아닐 것 같았다.

천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헤지고 찢어지기 마련인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단순히 좋은 천을 썼구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진짜 있었구나.

내 눈으로 직접 악귀참도를 확인하는 순간.

마음 한켠에 있던 불편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애써 생각은 안 하려고 했지만, 악귀참도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이 있었다.

대산을 제외하고라도 많은 이가 찾으려 했는데 검의 조각조차 발견하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피식.

이런 곳에 있으니 발견을 못 하지.

일반적인 방법으론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발견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구 어딘가에 있기라도 하면 찾을 수 있겠지만 아예 다른 세계에 있으니 방법이 없는 것.

뭐 어쨌든.

좁은 거리.

한 발자국 내디디며.

난 찾았다.

슥.

악귀참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짹짹짹.

응…?

황금빛이 주변을 감싸고 잠시.

귓가로 참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스으으.

곧이어 돌아오는 시야.

허.

눈앞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나무 사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과 볼을 간지럽히는 포근한 바람.

그리고 코로 스며들어오는 향긋한 풀의 내음까지.

조금 전까지 있던 황폐한 땅과는 정반대되는 장소였다.

샘까지 있네.

바로 마셔도 될 정도로 맑은 샘물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갖추어진 곳이었다.

신선놀음하기엔 그야말로 완벽한 장소.

장기 두면서 막걸리 한 사발 하면 딱이겠는데.

뜬금없이 떠오르는 술 생각에 침이 흐르려는 순간.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할 줄은 또 몰랐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라 하기에는 이곳에 있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지만 말이다.

슥.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람의 연속이네.

수백 년이 지난 검이 멀쩡한 것도, 검을 통해 도착한 장소가 공기 좋은 산속이란 것도 놀랐지만.

가장 놀란 건 눈앞에 나타난 척준경의 모습이었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타난 척준경은 끽해야 내 또래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네.

회귀 전까지 치면 내 또래는 두 개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푸른 샘 위에 위치한 바위.

척준경은 바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의 바른 친구구만."

스윽.

척준경이 바위에 쭈그려 앉은 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신기한 친구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굳이 복잡한 과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척준경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이미 알고 있을 터.

척준경이 알고 있는 건 시원하게 제외하고 말하면 되었다.

"기억을 따라 왔습니다."

"그렇구만."

한 번의 되물음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척준경.

첫 손님이어서인지 만났을 때부터 척준경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기분이 묘하네.

달라진 척준경의 생김새나 날 둘러싸고 있는 환경 때문은 아니었다.

고려제일검이자 무신이라 불렸던 역사적 인물, 척준경.

그런 척준경을 실제로 마주하고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두 번 막연한 상상은 해봤었지.

회귀한 뒤 잠에 들기 전 종종 생각했었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면 이야기나 기록만으로 보던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도 직접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좀 창피하네. 기억을 따라왔다는 거 보면 내 원래 모습을 봤을 텐데."

멋쩍게 웃는 척준경을 향해 나도 살며시 미소를 지어줬다.

기억에서 원래 모습을 봤다는 걸 고백하는 의미에서였다.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옛날 기억을 떠올린 건지 척준경이 말을 멈췄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걸로 보아 무척이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행복했던 시절이거든."

풀썩.

척준경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위에 몸을 앉혔다.

작은 한숨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는 척준경.

"좋은 곳이지?"

"정말 좋은 곳입니다."

그저 맞장구를 치려고 건넨 말은 아니었다.

2년 동안 수련했던 돌산도 좋았지만 이곳은 그보다 한 단계 위였다.

보자마자 휴식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아름답고 마음 편한 풍경.

"맞아, 완벽한 곳이야. 여긴 전쟁도, 살육도, 피도 없으니까."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척준경의 얼굴로 슬픈 빛이 스쳐 갔다.

"가장 소중한 게 없지만 말이야."

"…?"

"아 손님을 앞에 두고 계속 딴 얘기만 했네."

나지막이 들린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척준경이 슬픈 기색을 지우며 날 바라봤다.

"여기 온 목적은."

스윽.

"이걸 얻기 위해서겠지?"

척준경이 천으로 돌돌 말려진 검을 꺼내었다.

공명이 시작되기 전 봤던 검, 악귀참도였다.

"맞습니다."

애초에 검을 통해 공명까지 들어온 상황.

이제 와서 목적을 숨기거나 겸손한 척할 필욘 없었다.

그나저나. 

훨씬 찐한 색이었구만.

수백 년이란 세월 때문인지 여기저기 먼지가 묻고 조금 헤진 느낌이었는데.

척준경이 꺼낸 천은 칠흑이라 불러도 될 만큼 몹시 선명하고 찐한 검은색이었다.

얼레.

거기다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도 하나.

"이 천?"

의아한 내 눈을 발견해서일까.

척준경이 악귀참도를 감싸고 있던 칠흑의 천을 들어 올렸다.

이어져 있다.

단순히 감싸고 있던 게 아니었다.

천은 악귀참도의 손잡이와 이어져 있었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말이다.

"성해포라고 알려나 모르겠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덮혀졌다는 천…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동시에 봉인의 천이라 불리기도 하지."

봉인의 천이라.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었다.

회귀 전 스쳐 가듯 본 영상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성해포가 담겨있었다고 추정되는 상자를 발견했다는 영상이었다.

- 상자에 힘을 불어넣은 돌을 넣어보겠습니다.

영상의 헌터는 상자에 대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었다.

자신의 힘을 불어넣은 돌이나 데몬에게서 얻은 냉기석 등을 넣어보는 실험이었다.

- 상자를 닫자 힘이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상자에 넣기 무섭게 힘을 잃어버렸던 물건들.

물건들의 힘은 상자에서 꺼내고 나서야 다시 발현되었다.

- 봉인의 상자입니다.

몇 번의 실험을 더 한 이후.

영상의 헌터는 눈앞의 상자를 봉인의 상자라 정의 내리며 국가로 소유권을 넘겼었다.

성해포가 담겨있던 상자도 그 정도였는데.

눈앞에 있는 게 진짜 성해포라면 대체 어느 정도 봉인력을 가지고 있단 거지?

"무엇을 위한 봉인인가요?"

성해포의 위력을 떠나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외관으로 보기엔 일반적인 검과 다를 바 없는 악귀참도.

대체 뭐가 있길래 성해포를 둘둘 감싸다 못해 한 몸처럼 묶어놓은 걸까.

저벅.

척준경이 악귀참도와 함께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악귀참도를 찾아온 이유는?"

대답 대신 척준경이 또 다른 질문을 건네었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

꼴깍.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내 대답에 대해 척준경이 '악귀참도에 그런 능력은 없어!'라며 고개를 내저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벨 수 없는 걸 베어야 해서요."

대답을 듣기 무섭게 척준경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대로 찾아왔네."

"후우…!"

기다리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릉.

나무 바로 아래까지 간 척준경이 검을 뽑아 들었다.

오.

햇빛을 반사하며 예리한 빛을 뽐내는 악귀참도의 검날.

척준경이 날카로운 검날을 나뭇잎으로 가져갔다.

"악귀참도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벨 수 없는 걸 베는 힘. 바꾸어 말하면."

사악!

!!

척준경의 휘두름에 예리한 검날이 나뭇잎을 스쳐 지나갔지만.

베이지… 않았다…?

분명 베였어야 했다.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바로 베일 것 같은 예리함이었다.

슥.

"어."

곧이어 검날에 대고 손을 쭉 그어 보이는 척준경.

날에 손이 베였던 아찔한 경험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멀쩡하네.

베이긴커녕 기스조차 안 나 맨들맨들한 척준경의 손.

"벨 수 있는 걸 베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구나.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악귀참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척준경이 계속 검을 보급받았어야 하는 이유.

악귀참도가 있음에도 마지막엔 맨손으로 싸웠던 이유가 말이다.

"방금 봤듯이 악귀참도는 검이라면 베어야 하는 것들을 베지 못해. 그래서 사람을 상처 입히지도, 달려드는 적을 죽이지도 못하지."

툭 툭.

척준경이 악귀참도로 옆의 바위를 두드렸다.

"벨 수 없는 것을 벤다기보단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게 한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어."

척준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검으로 바위나 다이아몬드를 베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게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귀참도로 벨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검으로도 완전히 베진 못해도 약간의 기스를 내거나 상처를 입히는 건 가능하니까 말이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게 한다.

벨 수 없는 걸 벤다기보단 이쪽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았다.

악귀참도를 든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베는 게 불가능했던 바위나 다이아몬드를 다 벨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스릉… 철컥.

검을 집어넣은 척준경이 성해포로 검을 다시 싸매었다.

오랫동안 한 몸이었어서 그런지 마치 검에 달라붙듯 착 감기는 성해포였다. 

"반쪽짜리 검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성해포로 봉인하고 있는 건 그만큼 위험해서거든. 뭐, 그게 뭔지는 자네가 천천히 알아 나가면 될 테고 말이야." 

악귀참도를 든 척준경이 조용히 날 응시했다.

"뭐 하는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강하겠구만."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척준경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보다 강한 것도 인정."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척준경이었기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척준경.

척준경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자네한테 악귀참도를 줄 생각이 없어."

192화. 나의 검

내가 내 눈을 볼 순 없지만.

분명 몹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침 때문에 체할 뻔했어.

넘어가던 침이 다시 입으로 넘어올 정도로.

조금 전 척준경의 말에 깜짝 놀랐다.

검을 줄 생각이 없다니!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지금까지는 공명으로 들어온 이후 별 무리 없이 무기를 건네받았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주지 않으면 방법은 없어.

누가 말해 준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무기고로 들어간다는 건 단순히 무기를 얻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무기와 함께 무기의 주인이었던 이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무기가 무기고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강제도 불가능.

무기만이었다면 강제로 넣을 수도 있겠지만, 영혼은 아니었다.

나와 함께 해도 좋다는 영혼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

조금 전 척준경의 말은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전 악귀참도가 꼭 필요합니다."

진정이 불가능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힌 후.

척준경에게 말을 건넸다.

농담 같았다면 아 왜요! 빨리 주세요! 했을 테지만.

척준경이 농담으로 저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유는 간단해."

척준경이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검을 모르기 때문에."

"…."

예리한데.

티가 나는 건가.

무신이자 검성이어서일까.

척준경의 눈은 예리했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검을 배우지 않았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다니.

"검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휘둘러 본 적은?"

잠시 잭 더 리퍼의 면도칼과 코지로의 스이카를 떠올렸다.

둘 다 척준경의 휘둘러봤냐는 질문에 예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기엔 조금 애매했다.

면도칼은 선을 보는 잭의 살인 본능과 미친 듯한 유연성 및 반사 신경에 기댔던 것이었다.

스이카도 더 하면 더 했지 면도칼보다 덜하진 않아.

땅을 딛고 휘두르면 상관없었지만, 움직이면서 휘두르는 순간 팔의 인대가 끊어지는 스이카의 발도.

휘두를 때마다 내 팔이 아작났던 걸 휘둘러봤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없습니다."

"대답은 시원해서 좋네."

예상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척준경.

그런 척준경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제발요! 라는 빛의 촐망이는 눈동자로 말이다.

"검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악귀참도를 줄 순 없거든. 그래서 말인데."

"검을 알려주십시오!"

척준경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데몬의 세계에서 악귀참도로 공명하기 전.

내가 기대에 차 있던 건 단순히 악귀참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 적당한 사람을 못 찾았어.

2년 전 돌산에서의 수련.

검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기태랑과 비광은 백방으로 사람을 알아 봐줬었다.

결국에는 못 찾아서 보류해야 했지만 말이다.

이런 타이밍에 말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원래는 악귀참도를 받으며 무릎을 꿇을 생각이었다.

염치없지만 검을 알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악귀참도를 꺼내면 척준경의 검술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이 정도가 아니었다.

악귀참도를 꺼내더라도 쌓인 경험치와 발현된 정도가 부족하면 척준경의 검술을 온전히 따라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움직이며 휘두를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팔이 박살나는 스이카처럼 말이다.

무기의 힘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사용자인 나 스스로도 강해지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무기에만 기댔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후지산에서의 사로카 덕분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최상 중에서도 극최상이야.

"…."

약간은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척준경.

무신이자 검성으로 불렸던 척준경에게 검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고,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는 없을 게 분명했다.

무기고에 영혼이 있어서 새로운 능력이 발현될 때마다 만날 수 있긴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능력 개방 전까지 한 번도 못 만났던 영혼들도 있었다.

그것만 믿고서 지금 당장 공명으로 선명하게 마주하고 있는 척준경과 헤어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거야."

"상관없습니다."

정확히 공명이 얼마나 유지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공명 동안 밖의 시간이 멈춰있는 건 확실하기에.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밖의 시간이 흘렀어도 배우고 갔겠지만.

설령 시간이 그대로 흘러 세계를 잇는 터널이 닫힌다 할지라도.

척준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싱긋.

눈에서 굳은 결의가 뿜어진 탓일까.

척준경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문제가 있다면 내가 누굴 가르쳐 본 적이 없다는 정돈데… 뭐 상관없어.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탓.

가볍게 도약한 척준경이 내 바로 앞으로 착지했다.

스윽.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고 있는 척준경.

척준경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잘 해보자고."

내민 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전투를 하며 스이카를 사용할 때마다 검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검을 알게 된다면 스이카나 면도칼도 전보다 훨씬 잘 다룰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꿀꺽.

그리고 간절했던 그 바람이, 그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손이.

바로 그 손이 내 앞에 있었다.

스윽.

팔을 뻗어 내밀어져 있는 척준경의 손을.

나는 또 한 번.

위로 올라간다.

붙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척준경의 수련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좀 의외의 방법이었다.

쾅! 쾅! 쾅!

눈앞으로 휘둘러지는 적의 창과 검을 응시했다.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쳐 지나가는 창과 사각에서 날아드는 화살들.

어떻게든 날 죽이기 위해 내질러지는 수많은 칼날까지.

내가 마치 그 자리에서 적들과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척준경에게 빙의해 거쳐왔던 수많은 전투를 대리 경험 중이었지만 말이다. 

이건 할 때마다 신기하네.

공명 속의 공명.

정확히는 공명 속의 빙의.

척준경이 소개한 두 가지의 방법 중 한 가지였다.

- 여기 앉아.

수련을 시작하자는 말과 함께 척준경은 날 폭포수 아래로 안내했었다.

처음엔 이게 웬 신선 수련법이지 라고 생각했었다.

가부좌를 튼 채 폭포 아래서 물살을 이겨내는 건 흔한 수련법 중 하나였으니까.

- 눈을 감고 집중해.

하지만.

날 폭포 아래 앉힌 건 물살을 이겨내라는 게 아니었다.

앉힘과 동시에 손을 내밀어 내 머리에 가져다 댄 척준경.

손이 닿기 무섭게 무언가 일렁이기 시작했고.

- 화아악--!

공명으로 들어오듯 내 정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 이제부터 내가 거쳐온 싸움들을 경험시켜 줄 거야. 내가 검을 쥐는 순간부터 적을 가르며 목적지에 닿는 순간까지. 모든 감각을 반복해서 되새겨.

서걱!

검이 적의 몸을 반으로 가르는 순간과 공격을 느끼고 피하는 순간까지.

척준경의 말대로 모든 감각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검성이 겪어온 모든 전투를.

호흡을 통해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

정확히는 척준경의 숨과 호흡을 느끼며.

전부 내 것으로 만든다.

몸으로 퍼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 * *

"검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야. 몸의 일부라고 생각해."

빙의 수련이 끝난 후엔 척준경의 1:1 강습이 이어졌다.

부들부들.

"검에도 호흡이 있어. 너의 호흡이 검의 호흡이며, 동시에 검의 호흡이 너의 호흡이야."

바들바들바들…!

"어떤 순간에도 너의 호흡을, 검의 호흡을 놓쳐선 안 돼."

"네… 넵!!"

어떤 순간에도.

짧은 문장이었지만 지키기엔 몹시 힘든 문장임이 분명했다.

온몸에 쌓이고 묶여 있는 거대한 바위들.

조금 과장하자면 거의 산 하나를 묶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호흡을 느끼면서 천천히 휘둘러."

척준경의 말에 따라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둘러나갔다.

온몸을 억죄고 있는 엄청난 무게를 이겨내며 휘둘러야만 하는 검.

쉽지 않은 일이었다.

- 나도 그렇게 하진 않았어.

내게 돌을 달며 척준경은 말했었다.

내 몸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지, 자신은 이 정도로까지는 안 했었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 하지만 넌 해야 해. 그래야만 힘의 마지막 경계에서도 검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무식하게 튼튼한 몸이니 무식할 정도로 부담을 줘야 한다는 간단한 설명이었다.

힘들다.

오랜만에 떠오른 단어였다.

돌산에서의 수련 이후 비약적으로 신체 능력이 증가했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미 사람의 체력과 힘의 범주를 뛰어넘었던 상태.

그런 몸을 가지게 된 이후로 뭘 하든 딱히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었었는데, 지금은 힘들다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의 수련과 빙의를 통한 경험의 흡수. 이게 최단 루트야."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최단 루트란 말에 힘이 났다.

그리고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성 척준경의 검술을 얻는 것.

처음엔 과한 욕심이라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지만, 이 두 가지 방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이다.

"남은 힘을 모두 검에 담아 뿌려내듯이 휘둘러." 

"옛…."

드드드득…!

"썰!!"

쿠아아아--!

악에 바친 검날이 허공으로 휘둘러졌다.

* * *

"흐음."

자리에 앉아 정면의 폭포를 응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수련이 무척 고되어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날짜 새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찌 됐든 간에 많은 시간이 흐른 것만큼은 분명했다.

슥.

옆에 놓여 있던 검집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의 호흡을 느끼며.

"스으으."

내 호흡을 정돈한 후.

손에 들린 검의 감각을 느꼈다.

- 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 호흡과 흐름.

막 휘두르는 게 아니야.

손끝에서 검날의 끝까지 물이 흐르듯이.

철컥.

휘두른다.

스릉--!

검이 목표했던 곳까지 도달했음을 확인한 후.

"후우…!"

휘둘렀던 검을 천천히 되돌려 검집으로 가져왔다.

뽑기 전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스르르… 철컥.

검이 미끄러지듯 검집으로 들어간 직후.

콰아아아아---!

눈앞에 있던 폭포수가 검이 휘둘러진 결대로 크게 갈라졌다.

좋았어.

"배우는 게 빠른 것도 문제구만."

스스로의 휘두름에 잠시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사이.

폭포 밖에서 척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밧!

호다닥 폭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자.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척준경이 서 있었다. 

공명으로 들어오며 봤었던 악귀참도와 함께였다.

"이렇게 금세 알려 줄 게 없어져서야."

떠날 시간이구만.

얼마 전부터 척준경은 운을 띄웠었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저벅.

살가운 미소를 그리며 척준경이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는 순간.

똑바로 서 다가오는 척준경을 기다렸다.

척.

바로 앞까지 다가온 척준경이 장난기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슥.

시원한 표정을 지으며 척준경이 성해포에 싸인 악귀참도를 내밀었다.

"가져가."

"…."

척준경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의 검이다."

내밀어진 악귀참도를 잠시 바라본 후.

두 손을 내밀어 검을 받아 들었다.

"무신의 악귀참도."

슥.

약간의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어 척준경의 눈을 응시했다.

"확실히 받았습니다."

193화. 새로운

앞서가는 척준경과 약간의 텀을 둔 채.

천천히 뒤를 따라 걸었다.

눈에 안 익은 곳이 없구만.

이제는 익숙해 져버린 햇살과 바람, 숲, 그리고 공기.

살면서 가본 곳 중 공기가 가장 깨끗하다 단언할 수 있는 장소였다.

오래도 있었다.

무기와 공명한 공간에서 이렇게 오래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악귀참도와 공명하기 전부터 가능하다면 척준경에게 검을 배울 생각이긴 했지만.

이걸 감안하더라도 예상보다 몇 배는 더 오래 머물렀다.

공명 이거 엄청나네.

원래도 쩌는 능력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무기를 찾아야 하는 무기왕의 능력에 이보다 더 적합한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쩌는 능력이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바깥세상의 시간은 멈춘 채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다니. 

학생이었다면 시험 시작 직전에 시간을 멈춘 채 무한히 공부하는 게 가능한 엄청난 능력이었다.

뭐.

이번만일 수도 있지만.

물론 항상 이런 기나긴 공명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지금까지 무기와의 공명에선 어느 정도의 대화를 나눈 후 칼같이 종료됐었으니 말이다.

아닌가.

지금까지 영혼들이 날 호다닥 쫓아냈던 건가.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앞서가던 척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여유롭지만 평소와는 달리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네가 악귀참도까지 다다르기 전에 만났던 이들은… 잘 있어?"

애초에 길잡이 검이 없다면 건너오지 못했을 세계였다.

그런 세계로 올 수 있게 검을 만들어준 척사율과 그런 척사율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민쿠.

내가 먼저 따로 말한 적은 없지만, 척준경은 내가 공명으로 찾아오기 전 저 둘을 만났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언제 물어보나 했네.

공명으로 이곳으로 오게 된 첫날.

당연히 물어볼 거라 생각했었다.

자신의 딸인 척사율과 검을 전달해주던 딸의 친구에 대한 소식을 말이다.

- ….

하지만.

척준경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련을 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붙어 다녔지만 척사율과 민쿠에 대해선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던 것.

척.

걸음을 멈춘 척준경이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왜 이제야 묻냐는 얼굴이네."

언제나 표정을 잘 꿰뚫는 척준경이었다.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항상 궁금했었거든요. 궁금해하실 거 같은데 물어보질 않아서."

"자격이 없으니까."

작은 한숨을 내쉰 척준경이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뿐인 딸을 산속에 버려둔 것도 모자라 딸의 하나뿐인 친구를 위험한 곳까지 검 배달이나 시킨 인간이니까."

"…."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수련하는 내내 밝은 표정을 보여줬던 척준경이었다.

그랬던 척준경이 지금은 왠지 모르게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 얘기를 하면 안 그래도 슬픈 얼굴이 더 슬퍼 질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날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귀신 같네. 

이럴 때마다 독심술을 배운 게 아닐까 의심이 되었지만, 어쨌든.

척준경에게 악귀참도에 다다르기 위해 만났던 민쿠와 척사율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약간의 과장도 없이, 조금의 숨김도 없이 말이다.

"날 묻어 준 것도 모자라 평생 그런 죄책감을 지게 하다니… 못 씻을 죄를 지어버렸군."

민쿠의 이야기를 듣자 척준경이 두 눈을 감았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입술을 깨물진 않았지만.

민쿠에 대한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이었다.

"검의 여부를 떠나 난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어."

"…?"

의아해하는 얼굴에 척준경이 상의를 들어 올렸다.

서서히 드러나는 엄청난 수의 상처와 흉터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모습이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과 끊이지 않는 전투에, 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어."

검이 있었다 한들 적 몇몇을 더 죽이냐의 차이었을 뿐, 죽을 목숨인 건 변함 없었을 거라고 척준경이 덧붙였다.

"검이 떨어진 날, 그러니까 마지막 전투지. 그때 이미 내 몸은 한계였어. 머리는 기능을 멈춰 이미 판단 같은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검과 주먹을 휘두르는 게 최선이었지."

스윽.

척준경이 손을 들어 네 개의 구로 이루어진 흉터를 가리켰다.

"마지막 전투에서 날 죽인 공격이야."

데몬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이 없긴 했지만, 척준경은 뿔이 찔러 들어오는 걸 인지했었다고 말했다.

"인지했지만, 피할 순 없었지. 한계에 다다른 몸이 움직이라는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씁쓸한 얼굴로 흉터를 매만지던 척준경.

슥.

척준경이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거지?

오랫동안 지내며 여기저기 다 가보긴 했지만.

척준경이 걸어가고 있는 곳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방향이었다.

저벅.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걷던 척준경이.

"태어났을 때부터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걸."

한 번도 해준 적 없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지금.

여전히 걷고 있는 척준경을 따라가며.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들 곱씹었다.

어려서부터 말도 안 되는 검술로 이름을 떨쳤다는 척준경.

이름은 순식간에 퍼져 고려 왕에게까지 들어갔고, 길어진 전쟁으로 인재에 목이 말랐던 왕은 곧장 척준경에게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17살.

왕에게 등용된 척준경이 첫 전투를 나섰던 나이였다.

그렇게 첫 전투를 시작으로 끝나지 않는 살육의 길이 시작된 것이었다.

- 정신을 차려 보니 나이는 서른을 넘어갔고, 난 척준경이란 이름 대신 고려제일검, 무신, 검성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어.

고려를 넘어 삼국, 삼국을 넘어 현재의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던 척준경이지만.

드높아진 이름과 명성과는 반대로 척준경은 피와 죽음만이 존재하는 삶에 회의를 느꼈다고 말했다.

- 대의를 외치던 왕도 변하더라고.

처음엔 통일을 통해 전쟁의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고자 했다는 고려의 왕.

하지만 그런 왕의 대의는 얼마 가지 않아 변질되었다.

척준경이 나서는 전장마다 승승장구하자 왕은 한반도를 넘어 외나라의 땅까지 노리기 시작한 것.

자신 때문에 더 많은 이가 고통에 갇힐 거라 판단한 척준경은 그렇게 왕의 곁을 떠났다.

- 신분을 숨기고 산으로 숨어들었어. 그때부턴 사람을 베는 게 아닌, 사람을 구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

무신과 검성 외에 척준경에게 붙여진 이름이 하나 더 있었으니.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사람을 구해준다는 마물 사냥꾼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네.

마물은 오늘날 데몬이라 불리는 존재일 터였다.

척준경은 오래전부터 데몬을 사냥해온, 어찌 보면 지금의 헌터와 동일한 역할을 해온 것이었다.

대선배의 대대대대선배 쯤이려나.

-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어, 내가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언제부터였는지, 어째서인지는 척준경 본인 역시 모른다고 말했다.

그저 어느 날 알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 그쯤이었어. 마물에게 살해당한 부부의 집에서 갓난아기였던 율이를 만난 건.

그 날이 떠올라서일까.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척준경의 얼굴엔 따듯하고 온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만난 아기에게 척사율이란 이름을 지어 준 척준경은 산속으로 율을 데려와 소중히 키우기 시작했다.

-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시기였지.

척준경의 영향인지 척사율의 시간 역시 느리게 흘러갔다고 한다.

- 어떻게 보면 축복이었지. 아이의 가장 이쁜 시기를 남들보다 세 배는 더 오래 봤으니까.

이 말을 하며 척준경은 행복하게 웃어 보였었다.

젊은 날로 돌아가긴 했지만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구나라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 마물 사냥을 하는 날 돕고 싶다며 율이는 검을 만들기 시작했어. 처음엔 엉성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나라의 대장장이보다 잘 만들게 되었지.

저벅.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악귀참도를 얻게 되었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라고 척준경은 말했다.

본능적인 이끌림에 도착한 동굴 속.

그곳엔 성해포로 둘러싸인 악귀참도가 놓여 있었다.

- 검을 집은 순간, 지금까진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감각이 증폭되더군.

마물을 느끼는 기운.

정확히는 마물이 나타나기 직전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기운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 무언가에 홀렸던 거 같아. 그때부터 난 느껴지는 기운을 따라 방방곡곡을 다니며 마물을 베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균열을 악귀참도로 없애나갔어.

그때부터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고.

마지막엔 엄청난 균열의 힘을 느끼고 세계를 건너 데몬 땅의 절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는 척준경. 

절벽에 다다른 후 다시 한번 척준경의 끝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벅.

척준경이 들려준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슥.

앞서가는 척준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완전 영웅이네요, 척준경 님."

척준경은 오랜 시간 동안 데몬이 등장하는 균열을 제거했었다.

마지막엔 수천수만의 데몬이 쏟아질 수 있는 절벽의 균열을 막아내며 죽음을 맞이했고 말이다.

척준경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터였다.

"영웅이라."

척.

목적지에 다다라서일까.

걸음을 멈춘 척준경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난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 가장 소중한 걸 내팽개쳐 버렸으니까."

"….!"

척준경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 것.

배경이 달라 잠시 헷갈리긴 했지만, 분명했다.

척사율과 척유라가 살던 설산의 집이었다.

- 가장 행복하고 소중했던 시기지.

공명 첫날.

공간을 소개했던 척준경의 말이 떠올랐다.

척사율과 함께 했던 집과 시기.

척준경에게 있어 가장 행복하고 소중했던 장소이자 순간이었다.

- 가장 중요한 게 없으니까.

그 날의 장소와 시간은 있지만.

이곳엔 척사율이 없었다.

여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구나.

오랜 공명을 끝내기 전.

검을 가르치며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나에게.

척준경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장소와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민쿠와 율이를 다시 만난다면, 전해 줄래?"

가만히 서 있던 척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바라보는 척준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해 줄 생각이었다.

"정말 미안했다고. 그리고, 정말 고마웠다고."

"꼭 전할게요."

대답을 듣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척준경.

사아아…!

그런 척준경의 미소와 함께.

공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다 보여줬고, 알려주고 싶은 건 다 알려줬어."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내게 많은 걸 알려 준 척준경을 향해.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됐으니까."

척준경이 천천히 집의 툇마루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소중했던 이와 함께 했던 장소에 몸을 앉히는 척준경.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한 척준경이 내게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가라, 이제부턴 네가."

싱긋.

척준경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검성이다."

194화. 내가 사랑하는

뺨으로 닿는 따갑고 불쾌한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삭막하네.

되돌아온 데몬 세계에 대한 한 줄 평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공기와 함께였는데.

이젠 세상에서 가장 불쾌하고 더러운 공기와 함께라니.

인생 한순간이야.

새삼스레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벅.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곧 닫힐지도 모르는 터널로 달려가야겠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지지직--!

조금 떨어진 절벽에서 미친 듯이 일렁이고 있는 균열.

균열 속에선 당장에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 가능하다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척준경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건넸었다.

내가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데 타임리밋이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기에 건넸을 말이었다.

- 균열이 열릴 때가 되었을 거야. 한 번만 막아주고 가지 않을래?

간단한 부탁이었다.

검날의 기억에서 봤던 척준경의 전투.

수많은 데몬이 끝도 없이 밀려 나오는 균열이었다.

- 수백 년 만에 열리는 균열이라 좀 많이 나오긴 하겠지만, 한 번만 막아도 앞으로 백 년은 거뜬할 거야.

이전엔 하루가 멀다하고 열린 균열이었지만, 척준경에게 하도 썰려서인지 텀이 길어진 상태였다.

텀이 길어진 만큼 한 번 한 번에 쏟아지는 데몬은 많을 테지만 말이다.

- 균열은 그 녀석들의 진영과 이쪽 땅을 나누는 경계야. 마음 같아선 악귀참도로 균열을 가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때의 내 몸 상태로는 너무 큰 도박이었어.

데몬이 인간 세계로 뛰쳐나가지 못하게끔 절벽에 묶어 두고 있었던 척준경.

악귀참도로 균열을 찢고 들어가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면 베스트겠지만, 실패했을 때의 파장은 인간 세계에서의 끔찍한 학살극이었기에.

척준경은 안쪽의 전력이 얼마가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들어가기보단 균열 밖에서 일정한 주기로 나오는 데몬을 막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딱 봐도 심상치 않긴 해.

무지막지하게 큰 균열.

균열 안에는 항상 등장하던 녀석들만 있으란 법이 없었다.

원래는 안 나왔을 놈들까지 균열이 갈라지며 우수수 쏟아질 수도 있었다.

음.

팔짱을 낀 채 거의 다 갈라진 균열을 응시했다.

아마 회귀 전 금정산 사건도 이거 때문일 거 같았다.

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수를 자랑했던 데몬의 군세.

마지막엔 소식을 들은 헌터들의 합세로 진압되긴 했지만, 진압까지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었다.

그나마 개방으로 헌터가 있는 지금 시대에 일어났으니 피해가 덜한 거겠지.

개방의 시대 전.

척준경이나 도윤 같은 능력자가 드문드문 데몬을 상대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 시대에 비하면 그 수가 턱없이 부족했을 터였다.

그런 시대에 금정산에 나타났던 만큼의 데몬이 등장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어쩌면 역사가 바뀌는 큰 사태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척준경 님 활약 진짜 머선 일이야, 이거.

단 한 명이 막아낸 것이었다.

막아낸 이는 많은 걸 희생하게 됐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막아도 또 열린다는 거지.

척준경은 자신을 대신해 균열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고 외로운 싸움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흐음.

균열쉨, 괘씸한데.

척준경의 행복한 시절은 물론이고 민쿠와 척사율에게 아픈 기억을 남게 한 균열.

죄 많은 균열을 이대로 남기고 가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치지직---!!

열리기 시작한 균열을 바라보며.

음!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풀었다.

정했다.

* * *

백운이 나간 후의 숲속 집.

툇마루에 앉은 척준경이 조용히 정면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백운이 서 있던 장소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네.'

꽤 오랜 시간동안 백운에게 검을 알려준 척준경.

척준경은 검을 전수해주면서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을 느꼈었다.

'괴물 같은 신체.'

척준경 역시 괴물이라 불렸던 사람이었기에.

그의 괴물이란 기준의 잣대는 무척이나 높았었다.

그런 잣대를 충족하고도 남았던 백운의 신체.

힘의 한계를 느끼기 위해 바위를 하나하나 얹어가면서도 도통 믿기지가 않았었다.

과연 이게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몸인지가 말이다.

'전투 감각도 엄청나다.'

셀 수 없이 많은 전장과 적을 만났었다.

그 중엔 척준경에게 죽음의 경계를 보여 줄 정도로 강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운의 전투 감각엔 미치지 못했다.

'공격 한 번 한 번에 속임수와 심리전이 담겨있다.'

백운이 휘두르는 공격을 보며 척준경은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더라도 단순하고 정직하게 휘두르는 것이 아닌,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택과 갈등을 강요하는 공격.

지금 말로는 전투센스라 불리는 것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나지 않았다면 갈고 닦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것.

그런 걸 백운은 매 공격마다 본능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왼쪽인가 싶으면 아래에서, 위인가 싶으면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공격.'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케 하는 공격이었다.

속임수와 심리전의 천재라고 불러도 될 수준.

'단순히 감각이 뛰어난 것 때문만은 아니겠지.'

공격을 예측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백운과 대련하며 척준경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었다.

상대는 백운 한 명임에도 마치 여러 명의 적과 싸우는 듯한 느낌.

물론 한 명 한 명이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적이었고 말이다.

'배우는 속도 역시 발군.'

얼마 전부터 척준경은 깨닫게 되었다.

베이스는 자신의 검술이지만, 백운이 휘두르는 검엔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다.

척준경의 검술을 녹여내 자신만의 최적화된 검으로 만들어내는 능력.

어느 순간부터 백운의 검은 척준경의 검을 뛰어넘은 채 끝도 없이 위로 향하게 되었다.

싱긋.

'그 덕에 별걱정 없이 말할 수 있었지만.'

척준경은 백운에게 균열의 데몬을 한 번만 막아달라고 부탁했었다.

원래라면 정말 망설였을 부탁이었다.

균열에서 나오는 데몬은 강력했고 또 그 수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지내며 백운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부탁을 하며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균열에서 뭐가 나오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원래도 괴물인 존재를 더 말도 안 되는 괴물로 만들어버렸군.'

스스로 잘한 행동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감당은 고사하고 가늠조차 안 되는 괴물이 되게끔 가속 패달을 선물해버렸다.

"하아."

시원한 한숨과 함께 척준경이 고개를 들었다.

툇마루에서 바라보는 맑은 하늘.

백운이 떠난 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 하늘이었다.

"괴물의 검 스승이라."

척준경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구나."

* * *

갈라지기 시작한 균열 안.

모든 준비를 마친 픽탄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수백 년 기다림의 결말.

그 결말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다시 이 안으로 도망치는 일 따위는 없다.'

픽탄이 오랜 기다림을 떠올리며 균열 안을 둘러봤다.

본의 아니게 지겹도록 지내온 공간이었다.

패배와 힘의 비축을 반복하며 이제는 집처럼 포근한 공간이 되어버린 균열 속.

그런 균열 속이었지만.

픽탄이 하루라도 빨리 인간 세계로 나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유를 만끽하며 약한 존재들의 세계를 정복하고 싶다는 욕구 외의 이유. 

꿈틀.

자신들 외에.

무언가가 또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또 얼마나 있는 건지는 픽탄 역시 알 수 없었지만.

거대한 균열 안의 공간엔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단지 출구와 가장 가까운 공간에 픽탄과 군세가 배치되었을 뿐이며, 시간이 지나면 다른 균열 안의 공간까지도 출구가 열릴 것이었다.

'그 전에 나가 먼저 세계를 차지해야 한다.'

픽탄이 옆 공간의 데몬들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경계할 뿐이었다.

데몬 세계가 아닌 인간 세계를 지배하려는 이유.

그건 같은 데몬 중에 말도 안 되게 강한 개체들이 종종 존재했기 때문이다.

휙휙.

잠시 생각에 잠겼던 픽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균열 밖의 척준경에게 막혀 번번이 진출이 실패했을 땐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급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지난 마지막의 전투로 척준경은 확실히 죽었기에.

더 이상 픽탄의 출정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나와 이 군세를 막을 것이냐!'

꽈악.

픽탄이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며 자신의 군세를 바라봤다.

모두가 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개체들이었다.

"시간이 됐다! 우리는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공포로 자리 잡을 것이다!"

"크라아아아!!"

"키아아아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우렁찬 함성을 들으며.

파지지직---!

이젠 완전히 갈라진 균열을 향하여 픽탄이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그렇게 몇 걸음 나가자 느껴지는 스산한 땅의 공기와.

새로운 세계로의 출정을 반겨주는 익숙한 풍경까지.

"하아아--!"

픽탄이 크게 호흡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깥 공기였다.

'인간 세계로의 출구는 저쪽이겠지.'

그렇게 한시라도 빨리 인간 세계로 가려는 픽탄.

그런 픽탄의 귀로.

"스으으…."

누군가의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어두운 날씨의 절벽 앞이었다.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식별이 어려운 어두움.

'…?'

그런 어둠 속으로.

누군가의 호흡으로 인한 입김이 내뿜어졌다.

* * *

어느새 완벽하게 열린 균열을 바라봤다.

균열 사이로 시끄럽게 울부짖으며 몰려나오는 데몬들.

신났네, 신났어.

안 그래도 어두운데 균열이 열리며 더 어두워져서일까.

균열에서 나온 데몬들은 아직까지 날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충 세어봐도 몇천이네.

당장 나온 녀석들만 해도 수 천이었다.

끝까지 다 나오면 만에 육박할 듯한 엄청난 숫자.

척준경 님은 이런 걸 상대로 싸워왔던 건가.

오랜 시간 동안 절벽 앞에서 홀로 싸워왔을 척준경이 떠올랐다.

가장 소중한 이를 밖에 남겨두고 온 죄책감과.

자신의 싸움을 위해 소중한 이의 친구에게 검을 보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까지.

척준경은 그런 여러 죄책감을 안고 이곳에서 검을 휘둘렀다. 

"스으으…!"

척준경을 떠올리며 천천히 호흡을 뱉어냈다.

"누구냐!!"

그제야 날 발견한 건지 큰 소리로 물어오는 맨 앞의 데몬.

그러든 말든.

마지막 순간 척준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영웅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한 척준경의 답변이었다.

- 난 영웅 같은 게 아니야.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수호하기 위하여 같은 거창한 목적 때문에 이곳에서 싸운 게 아니거든.

척준경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후련한 미소와 함께.

- 내가 싸운 이유는 단 하나야.

사라져가는 나에게 고독한 싸움을 지속했던 이유를 말해줬었다.

그때 척준경이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고개를 들어 균열에서 나온 데몬을 응시했다.

"사랑하는 세상을 위하여." 

195화. 살육전

"누구냐!!"

뿔 달린 데몬 놈이 몇 번인가 누구냐고 물어왔지만.

물음에 대답하진 않았다.

당장 누구지도 모를 놈한테, 정확히는 이제 곧 뒤질 놈한테 굳이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뿔쟁이의 질문보단.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방금 꺼내든 스이카에 신경을 집중했다.

달라졌어.

스이카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스이카를 쥐고 있는 내가 달라졌다.

검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을 통해 전달되는 스이카의 기운.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기운이었다.

코지로가 혀를 찼겠는데.

이쯤되니 코지로의 인내심은 바다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검을 넘겨줬더니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지 팔이나 뿌개 먹었으니.

내가 코지로였다면 당장 뺨을 한 대 올려친 후 스이카를 도로 가져갔을 것이다.

후우.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스이카의 기운에 집중하며 검의 메커니즘을 떠올렸다.

검집에 힘을 응축시켰다 폭발적으로 뿌려내는 스이카의 발도.

이전까지는 무식하게 힘을 줘 검에 힘을 꾹꾹 눌러 담기만 했었다.

그러다 보니 뿌려냈을 때의 리바운드는 생각지도 못했고 말이다.

"감히!! 치워라!"

귓가로 조금 전 균열에서 기어 나온 데몬의 외침이 들려왔다.

몇 번이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자 단단히 뿔이 난 모양이었다.

원래도 뿔 난 새끼가 좀 참지 못하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키아아아---!"

"그르라아아--!!"

눈을 떠 나에게 달려오는 데몬들을 바라봤다.

숫자가 보통 많은 게 아니다 보니 발바닥 아래로 진동이 느껴졌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아는 가장 좋은 방법.

이전에 사용하던 걸 다시 한번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내 몸을 중심으로 백색 기운의 원형 경계가 그려진 후 그 안에 있는 모든 걸 베어내는 스이카의 발도.

스윽.

어느 정도 다가온 녀석들 바라보며.

철컥.

스이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자세를 낮췄다.

우우우웅---!!

…!

자세를 잡음과 동시에 내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백색의 경계.

내가 펼쳐낸 경계였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팔이 부서지면서까지 움직이며 발도를 사용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경계의 범위가 닿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팔을 버려가면서까지 움직이며 발도를 뿌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려진 백색의 경계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넓어진 경계의 범위.

"허어."

생각보다 더 극적인 변화였다.

데몬이 범위 안으로 들어오기 전 미리 펼쳐놓을 생각이었는데.

펼치고 나니 이미 꽤 많은 수의 데몬이 경계 안쪽에 발을 딛고 있었다.

"크르…?"

갑자기 자신을 포함 시킨 백색 경계에 잠시 당황하는 녀석들을 보며.

검집에서 나올 준비를 마친 스이카를 느꼈다.

"스으으."

한차례 정돈한 호흡을 스이카에게 맞춘 후.

발도.

스이카의 흐름을 느끼며 검을 뽑아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여전히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뿌려지는 백색의 검기.

순식간에 뿜어진 검기가 경계 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몬의 우렁찬 함성이 가득했던 절벽 앞의 땅.

시끄러웠던 땅으로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경계 안에 있던 데몬들은 순식간에 자신을 지나친 무언가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후우."

천천히 호흡을 뱉어내며 뿌렸던 검을 거둬들였다.

스릉… 철컥.

스이카가 다시 검집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푸화아아아악---!!

원형의 경계에서 붉은 선혈이 하늘로 솟구쳤다.

후두둑!

백색의 검기가 지나간 결대로 갈라져 떨어지는 데몬의 신체 부위들.

그제야 데몬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키아아악!!"

"키륵… 키르…!"

뭐가 자신을 죽인지도 모른 채 서서히 생명의 불씨를 꺼트리는 데몬들.

그런 녀석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가볍다.

미치도록 가벼웠다.

발을 딛고 스이카를 휘둘렀을 때도 팔에 무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응축되었던 힘을 뿌려내다 보니 그에 대한 반동은 전부 튼튼한 몸으로 버텨내고 있었던 것.

너무 가볍다.

지금은 달랐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넓은 검기를 뿌려냈음에도 부담은커녕 작은 찌릿함조차 없었다.

뿌리는 순간 묵직하게 느껴졌던 스이카도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씨익.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 전의 결과로 몸을 채워오는 엄청난 만족감.

돌산에서 내려온 뒤 사로카를 박살내며 느꼈던 희열이었다.

강해졌다.

아직 해볼 게 많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 한 번의 발도만으로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위로 도약하며 강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벅.

더 큰 만족감과 희열을 위해.

새까맣게 모여 있는 데몬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확신이 들었다.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채 발도를 사용해도 팔이 멀쩡할 거란 확신.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화아아아---!

어두운 하늘 아래.

주변보다 더 어두운 연기가 나타나 등 뒤에서 일렁거렸다.

저벅… 저벅.

조금씩 걸음의 속도를 올리며.

날개의 연기를 터뜨릴 준비를 했다.

인지조차 불가능한 귀신의 백색 검기.

그런 검기를 보이지 않는 속도로 돌며 사방에서 뿌려 줄 생각이었다.

저벅.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며.

간다.

날개의 연기를 터뜨렸다.

퍼엉!!

* * *

끼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악---!

'무… 무슨 일이냐!'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픽탄이 마른침을 삼켰다.

인간 세계의 정복을 꿈꾸며 호기롭게 나왔던 게 불과 5분 전이었다.

자신감과 기대감만이 가득했던 픽탄의 눈동자는 어느새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냐 대체!!'

균열을 나오며 누군가의 호흡을 발견했을 때.

픽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었었다.

마지막 전투 때 죽었다고 생각한 척준경이 살아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 척준경이 아니다.

호흡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에 익숙해진 눈.

눈에 들어온 사내의 모습에 픽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척준경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핏덩이 애송이였다.

- 척준경만 아니면 된다.

물론 그런 픽탄의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픽탄의 군대가 남자를 향해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

- 끼아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이 터지며 백색의 무언가가 흩뿌려졌다.

말도 안 되게 넓은 범위를 순식간에 채우며 군대를 훑은 검기.

몇 초간 픽탄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 푸화아아악--!

하늘로 부하들의 신체와 피가 솟구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예리하고 빠른 검기.

나름 강한 개체만 존재하는 픽탄의 부하들을 단 한 방에 베어버리는 엄청난 검기였다.

스멀.

부하들을 도륙한 게 검기라는 걸 알게 된 후.

픽탄의 안에서 정체불명의 불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몇 분간 안도하던 심장 역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인간이라 믿기지 않는 검을 보여줬던 척준경과 말도 안 되는 검기를 뿌리는 정체불명의 인간.

둘은 검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으득.

- 한꺼번에 달려들어라!!

계속해서 퍼지려는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픽탄이 부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막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

저런 검기를 뿌렸다면 사용자에게도 분명 리바운드가 있을 터였다.

- 다시 검을 뽑기 전에 죽여라!

남자가 회복해 다시 검기를 뿌리기 전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

여기까지가 몇 분 전의 픽탄이 내린 판단이었다.

픽탄의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체불명의 검은 연기와 함께.

- 끼아아아아아아악--!

지옥이 펼쳐졌다.

계속 사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픽탄의 판단을 비웃듯.

쉴새 없이 사방에서 백색 검기가 뿌려졌다.

'악… 악몽이다.'

잠깐으로 끝나지 않는 기나긴 악몽이었다.

이미 십 수 번의 검기가 뿌려지며 엄청난 수의 부하가 썰려 나갔음에도.

픽탄은 단 한 번도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검기가 뿌려지고 그곳으로 눈을 돌리면 이미 남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검기를 뿌리고 있었다.

주춤.

본능적인 공포에 픽탄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척준경만 없으면 될 거라 생각했었던 픽탄.

주춤.

뒤로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서며 픽탄은 깨닫게 되었다.

그토록 두려워해 만전에 만전을 기하며 상대했었던 괴물, 척준경.

'도… 도망… 가야 한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의 부하를 빠르게 도륙하고 있는 건.

당시 척준경이란 괴물보다 더 끔찍하고 압도적인 악마라는 사실을 말이다.

끼아아아아악--!

* * *

"후우우우!"

스르륵…!

큰 호흡을 한 번 뱉어내며 서서히 사라지는 칼데아의 연기를 바라봤다.

정신없이 여기저기 이동하며 스이카를 휘두른 탓에 빠르게 소진되어버린 연기.

칼데아와 함께 들고 있던 스이카가 모습을 감추었다.

우득.

빳빳해진 목을 한 번 돌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휘유.

절로 휘파람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는 군세였었다.

기세만으로는 누구든 씹어먹을 것 같았던 사기 충만한 군세.

그랬던 군세가 지금은 일부분만이 남아 사기는커녕 공포를 집어삼킨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안 베인 놈도 몇 마리 있네.

경계 안에는 있었지만 군데군데 단단한 갑주를 두른 녀석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운 좋게 갑주를 두른 부분에 검기가 닿아 목숨을 건진 것 같았다.

완전 지옥이 따로 없네.

내가 해놓고도 혀가 내둘러지는 광경이었다.

땅 한가득 신체가 굴러다니며 붉은 피가 넘쳐나고 있었다.

피가 넘쳐 흐르니.

쿨타임에 들어간 스이카와 칼데아.

이 둘을 대신하여 꺼낼 무기는 정해져 있었다.

[잭 더 리퍼 - 동기화]

조건은 이미 충분했기에.

기다릴 새도 없이 동기화를 해나갔다.

대부분 죽었다곤 하나 아직 꽤 많은 수의 데몬이 남아있는 상태.

다시 한번 살육전을 시작할 때였다.

스스스.

동기화와 함께 주변에 펼쳐져 있던 피가 몰려들었다.

"주… 죽여라!! 더 이상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내가 더 이상 스이카를 사용할 수 없단 걸 알아차린 뿔 데몬.

주춤거리는 부하들을 한 번에 몰아넣으려는 것 같았다.

저 새끼는 뒤에서 아주 그냥.

거구인 덩치에 비해 몹시 겁이 많은 것 같았다.

아까부터 직접 나서긴커녕 서서히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녀석.

넌 조금만 기다려라.

칼데아가 있을 때 죽일까 했지만.

척준경의 몸에 남았던 뿔 자국이 떠올라 잠시 남겨두기로 했다.

스르륵.

그렇게 평소의 동기화처럼 눈으로 붉은 피가 차올랐다.

응?

하지만.

잠시 후 깨달았다.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충분한 피와 광기가 몸과 정신을 감쌌지만. 

스며들기 시작한 피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긴커녕 끝도 없이 내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

그리고 잠시 후.

온 세상이 붉은 피로 뒤덮이며.

"최적이다."

쇠를 가는 듯한.

평소보다 훨씬 즐거워 보이는 듯한.

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96화. 피의 악마

여전히 한목소리 하는구만.

다른 이가 들으면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지만.

이미 충분히 단련이 된 상태였기에 반갑게 잭을 맞이했다.

이 배경만 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나타날 때마다 사방이 질척거리는 피로 물드는 배경.

이놈의 시뻘건 배경만큼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달콤한 향이 가득하다니, 황홀하군."

배경만큼이나 뻘건 모습을 한 잭이 감미롭다는 듯 눈을 감았다.

역시 미쳤어.

한 배를 탄 전우였으나 여전히 그의 광기는 엄청났다.

주변에 가득하다는 달콤한 향은 고민할 것도 없이 혈향이었다.

피를 마치 달콤한 사탕 마냥 표현하는 잭 더 리퍼.

사탕의 범주가 무척이나 달랐기에 마주할 때마다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이해해줘야지.

피가 사탕이라 치면 지금 잭은 사탕 왕국의 한복판에 있는 거니까.

수많은 전투를 거쳐오긴 했으나 오늘만큼 피가 뿌려졌던 적은 없었으니.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잭을 이해하며 내젓던 고개를 멈추었다.

그나저나.

잭이 나타났다는 건.

악귀참도를 찾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게이지가 가득 찼었던 면도칼.

그 이후부터 면도칼을 사용해 피를 뿌릴 때마다 묘한 감각을 느꼈었다.

흩뿌려지는 피에 반응해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만큼의 피가 갖춰져야 발현되는 거였군.

"준비는?"

한참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잭이 날 내려다봤다.

준비라.

어떤 준비인지는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이미 쌓이고 쌓여 터지기 직전인 피의 광기.

잭은 광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사실 궁금하긴 했어.

동기화 때도 어느 정도의 광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완벽히 내 자신을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동기화를 사용할 때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기에.

혹여나 아군마저 썰어버리는 불상사를 대비해 열심히 정신 줄을 붙잡고 있었다.

"준비는 됐죠." 

"그럼 뭘 망설이지? 최적의 장소 아니던가."

잭의 말대로였다.

나를 제외하고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장소.

정줄 놔보기에는 최상의 장소였다.

"제정신은 금방 돌아오겠죠?"

"걱정할 필요 없다. 피의 소모량이 엄청 날 테니. 피가 없으면 유지하고 싶어도 못하지."

음!

만족스러운 잭의 대답을 들으며.

"그럼."

뚜두둑.

"가볼까요."

광기에 몸을 맡겼다.

* * *

온 세상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몸으로 끝없이 흘러들어오는 피의 충만함.

비릿했던 피의 향기마저 지금은 달콤하게 느껴졌다.

몸에 달라붙어 끈적이던 피도 더 이상 찝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즐거움을 높여 주는 활력제 같았다.

그렇게 광기에 맡긴 채 멀어지는 정신을 느끼고 있을 때.

슈아아아아악--!

무언가 공기를 가르며 내게 날아들었다.

푸욱!

그대로 날아와 복부를 관통하는 데몬의 창.

"마… 맞았다! 몰아쳐라!"

스이카와 칼데아가 사라진 걸 반격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처음으로 자신들의 공격이 통하자 신이 난 데몬들이 쉬지 않고 무기와 공격을 날려댔다.

푹푹푹푹푹…!!

셀 수 없이 많은 창과 검, 그리고 녀석들의 발톱과 이빨이 내 몸에 박혔다.

꼬챙이도 이런 꼬챙이가 없겠다 싶을 정도로.

수많은 적의 공격이 내 몸을 꿰뚫고 찢어나갔다.

찌릿.

하지만.

약간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키킥…!"

오히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적의 공격에 몸 사방이 꿰뚫렸음에도.

내 입에선 참을 수 없는 웃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죽어라!!"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서일까.

뒤에만 있던 뿔 데몬이 내게 달려들었다.

척준경에게 했던 대로 독이 담긴 뿔을 박아 넣는 뿔 녀석.

"크… 크하하하하!"

이겼다고 생각해서인지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뿔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 치명적인 독이 담겨있는 듯했다.

가소롭다.

이겼다고 착각하며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니 너무 가소롭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백번 천번 피하고도 남았을 느린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맞아 준 이유는 하나였다.

굳이 피할 필요가 없으니까.

"크하하… 하…. 하…?"

나와 눈을 마주친 뿔 데몬.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꾸룩.

사방에 있던 피가 끊임없이 내 몸으로 몰려들었다.

툭… 툭 툭 툭.

마냥 몰려들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뚫린 상처를 메꾸며 날아들었던 적의 무기를 밀어내는 붉은 선혈.

죽지 않는다.

본능적인 확신이 들었다.

사방에 이렇게 많은 피가 있는 이상.

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한한 수혈.

툭.

그렇게 몸을 꿰뚫었던 마지막 무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몸속에 응축되어 있던 광기를 터뜨렸다.

[잭 더 리퍼 - 블라드]

"키하아아아아아아!!"

* * *

비틀.

"쿨럭!"

픽탄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었다.

푸확!

푸직!

콰드득!

뒤에선 듣기만 해도 다리가 풀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군세가 피를 두른 악마에게 무참히 도륙당하는 소리였다.

'도망가야 해.'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과 판단.

한 번의 판단으로 픽탄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 키하아아아아아!!

광기 섞인 웃음이 터지고.

정신 차렸을 때 자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인지하기도 전 양 다리가 날아간 채로 말이다.

'못 이긴다.'

악마.

저걸 정의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양손에 피로 만들어진 검을 들고 있는 악마.

악마는 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주변의 데몬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대체 뭐냔 말이다!!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픽탄 역시 데몬의 세계에서 나름 오랜 시간을 보낸 개체였다.

그동안 강하다는 데몬은 수도 없이 봤지만.

저 정도로 공포를 집어삼키게 하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콰직! 쿠득!

악마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모든 피가 악마를 뒤따랐다.

마치 주인의 주변을 보필하며 따라다니는 모양새였다.

흩뿌려진 피가 워낙 많아서인지 흡사 피의 폭풍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짐승…!'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유연함과 민첩성.

양손의 검을 휘두르는가 싶더니 집어 던지고, 검으로 찌르는가 싶더니 이빨로 목을 물어뜯었다.

집어 던져진 검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어느샌가 다시 손에 생성되어있는 피의 검.

목을 뜯을 때의 이빨도 피가 모여들어 거대한 이빨로 변한 상태였다.

푸욱!

그뿐만이 아니었다.

픽탄을 도망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불사신.'

눈앞의 악마는 죽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공격에 꿰뚫려도 약간의 경직조차 없었다.

계속해서 피를 몰고 다니며 학살을 즐길 뿐이었다.

파지직-- 지직.

악마가 학살에 눈이 먼 사이.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모았던 부하들을 다 던져주며 간신히 균열 앞까지 기어 온 픽탄.

픽탄이 어금니를 깨물며 열려있는 균열을 바라봤다.

모든 군세를 잃은 채 이런 부상마저 안고 들어간다면.

균열이 언제 다시 열릴지는 정말 미지수였다.

으드드득!

미칠 듯한 분함에 픽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물어 잇몸에선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째서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 가로막아 수백 년을 허비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쓰러뜨린 뒤 다시 힘을 모아 이번에야말로 밖을 향해 출정할 생각이었는데.

이번엔 아득한 경지의 괴물이 픽탄과 군대의 앞을 가로막다 못해 산산조각 내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

피의 짐승에게 들킬까 차마 밖으로 소리를 지르진 못한 픽탄이.

마음속으로 피를 토하며 울화 섞인 비명을 질렀다.

비척.

분함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기어 균열 안쪽으로 들어간 픽탄.

픽탄이 들어감과 동시에 균열이 닫히기 시작했다.

'분하다!'

픽탄이 피눈물을 흘리며 닫혀 가는 균열 사이로 밖을 바라봤다.

마무리를 하려는 건지 악마의 몸으로 모인 피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악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픽탄이 쌓인 응어리를 뱉어냈다.

"꼭 다시…! 다시 돌아오리라!!"

쿵…!!

* * *

광기에 몸을 맡긴 채 시작한 학살.

학살이 어느 정도 지겨워졌을 때, 본능적으로 이만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여라."

한 마디에 뿌려져 있던 모든 피가 모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양에 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모여든 피.

모여든 피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우우우우웅…!!

빠르게 회전한 탓일까.

주변으로 피 안개가 짙게 끼어지고.

충분한 회전력을 얻었다고 생각이 든 순간.

"피의 폭발."

모여들었던 피를 터뜨렸다.

푸화아아아아악!!

피는 수천 수만 개의 면도날이 되어 사방으로 뿜어졌고.

그나마 사지의 일부분만 날아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녀석들까지도 면도날의 폭풍에 집어 삼켜졌다.

….

조금 전까지 학살이 벌어졌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벽 앞 땅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스으으으…!

침묵과 함께 개이기 시작한 피의 안개.

눈앞을 뻘겋게 물들였던 피가 걷히며 정신이 맑아졌다.

"와…우."

맑아진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본 첫 소감이었다.

미쳤네.

순간 꿰뚫렸던 감각을 떠올리며 몸을 살폈다.

말끔했다.

입고 있던 옷에 구멍이 나긴 했지만.

몸엔 작은 생채기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얼레."

그렇게 몸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균열이 닫히고 있는 걸 발견했다.

틈 사이로 미세하게 보이는 픽탄의 모습.

뭐라고 울부짖는 걸 보니 복수를 다짐하는 것 같았다.

이 새끼는 끝까지 졸렬하네.

부하들은 다 던져놓고 혼자 균열 안으로 도망치다니.

아마 척준경과의 싸움에서 학습된 모양이었다.

호다닥.

빠르게 균열 앞으로 달려갔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 몸이기에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척준경 - 악귀참도]

균열은 딱 봐도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지체 없이 악귀참도를 꺼내 들었다.

사락.

둘둘 감긴 성해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악귀참도.

천천히 성해포를 푸는 동안 확신이 들었다.

눈앞의 균열을 벨 수 있다는 확신.

"후우."

작은 심호흡을 한 뒤.

성해포가 풀린 악귀참도를 균열로 가져다 댔다.

서걱.

신기한 감각이었다.

분명 형체가 없는 균열임에도 살을 베듯 파고 드는 악귀참도.

검날에 닿은 균열의 감각을 느끼며.

사아악--!

악귀참도를 위로 휘둘렀다.

* * * 

반으로 갈라진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

들어가기 무섭게 벙찐 뿔 데몬의 얼굴이 보였다.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겁에 질리다 못해 얼굴이 허옇게 질린 녀석.

"크아아아아---!"

"키이이이이익!!"

그리고.

뿔 데몬이 있던 공간을 감싸고 있던 균열이 사라지며 새로운 데몬의 군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균열을 나서는 출구가 하나일 뿐 그 뒤엔 얼마만큼의 데몬이 더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던 척준경.

척준경의 추측대로였다.

흠.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은 몹시 즐거운 듯한 얼굴들이었다.

내 덕에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듯한 얼굴들.

신이 나 소리를 질러대는 데몬들과 내가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면 출구가 없는 광활한 균열 안 공간을 바라본 후.

"야 뿔쟁이."

언어를 알고 있는 뿔 데몬을 불렀다.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녀석.

"너 불가마라고 아냐?"

겁에 집어 삼켜져 뇌가 정지한 탓일까.

뿔 데몬은 대답하지 못한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몰라도 돼."

[유탈라스 - 동기화]

[전신 의태 - 갑주]

비늘로 온몸을 빠짐없이 둘러싼 뒤.

뿔쟁이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알게 될 테니까."

[라 - 불꽃의 문양]

197화. 멈춰!

호다닥.

눈앞에 보이는 균열의 틈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푸화아…!

빨리 나가야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찔한 소리와 함께 뜨신 게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쏘옥.

균열을 빠져나와 얼마나 달렸을까.

화아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뜨끈한 바람이 느껴졌다.

뜨끈이라고 표현하기엔 저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구워졌겠지만, 어쨌든.

뒤통수에 맺히는 땀을 뒤로 하고 열심히 앞을 보며 달렸다.

가야 돼!

면도칼을 들고 신이 났을 때완 달리.

균열 안까지 통구이 화로로 만들고 나니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

인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터널이 끊긴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해야 할 일 만큼은 전부 수행할 생각이었다.

악귀참도를 찾는 건 물론이고 척준경에게 수련을 받는 것. 

또 검을 알려준 척준경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일을 다 끝내고 나자 욕심이 생겼다.

이왕이면 수월하게 나가는 게 베스트니깐.

터널이 닫히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모험도 재밌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저 시원한 물에 좀 씻고 몸에 맛있는 음식을 보충해주고 싶었다.

찝찝해 죽겠어!

안 찝찝하다면 그건 사람의 경지를, 정확히는 경지라기 보단 인간이 갖춰야 할 무언가를 많이 내려놓은 존재일 터였다.

끈적.

안 그래도 꿉꿉한 바람과 모래 먼지가 가득한 공간인데 데몬들을 학살하며 피까지 뒤집어 썼더니 찝찝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면도칼이 쿨타임이라니.

조금 전 알게 된 사실이었다.

냅다 달리기 위해 면도칼을 꺼내려는 순간.

면도칼에 쿨타임이 걸려있단 걸 알게 되었다.

무기를 모으며 쿨타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었던 면도칼이었다.

이유가 짐작가긴 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을 게 없었다.

새로 발현된 블라드의 사용.

기존 동기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힘이었다.

받아들인 광기는 둘째 치고 말도 안 되는 재생력과 전투 능력.

블라드 당시엔 정신이 광기에 맡겨져 몰랐으나 기억은 하나도 빠짐없이 남아 있었다.

몸이 꿰뚫려도 순식간에 데몬의 피로 회복을 했고 양손의 선혈 면도칼도 무한히 생겨났었다.

그야말로 주변의 피만 충분하다면 모두 소진하는 그 순간까지는 무적과 마찬가지였다.

블라드가 잭이 바랐던 이상향이려나.

블라드로 변한 이후 머리에 남았던 감각은 세 가지 정도였다.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자유로움.

이런 자유로움 때문이었을까.

블라드가 된 이후 내 공격에선 형식이란 게 사라졌었다.

양손의 칼로는 난도질을 하며 손이 모자를 땐 이빨로 물어뜯기까지 했다.

음.

한 번 더 해보면 더 잘 싸울 수 있을 거 같아.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시전한 피의 폭발.

이걸 봤을 때 블라드 상태라면 피를 이용한 기술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예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만 아니라면 다 가능할 듯한 느낌.

거기다 최종이라.

나중에 무기고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긴 해야겠지만.

면도칼에선 더 이상의 게이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블라드를 마지막으로 개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개방한 것 같았다.

쿨타임이 없던 무기도 최종 형태의 사용 이후엔 쿨타임이 걸린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인지하며.

그건 그렇고.

슥.

정면을 응시했다.

일단 달리자!!

호다다다닥!

* * *

[빛의 구원]

두두두두두두두두!

절벽 길로 접어듦과 동시에 전방으로 리볼버를 갈겼다.

끈질긴 놈들이었다.

징한 새끼들!

내가 절벽 길을 빠져나갔을 때 그대로 날 기다리고 있던 길목의 데몬들.

녀석들 입장에선 얼마 안 된 기다림의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내 입장에선 절로 징하다는 말이 나오는 그런 기다림이었다.

결국 너네가 받는 건 총알뿐이거늘!

오래 기다렸지만 돌아온 건 총알뿐인 불쌍한 데몬들을 쓸어내며.

길의 형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틀리면 끝장이다.

민쿠가 건네줬던 절벽 길의 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잃어버릴 일 없는 길이었지만.

한 번 잘못 들어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순간 바로 미궁행이었다.

타임리밋이 임박한 지금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고된 수련이 빛을 발하는구나!

신체 능력이 말도 안 되게 향상됐다는 것이다.

처음 이 길로 들어섰을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 꾸어어어어!

척준경과의 수련은 말 그대로 극한이었다.

보통 수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되기 마련인데.

적응이 되기 무섭게 척준경이 강도를 높여나갔기 때문이다.

척준경의 표현에 따르면 항상 몸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최상의 효율을 노리는 무신 수련법이라고 했다.

무신 수련법이라.

이름은 멋있어.

열매는 달콤하지만 힘들었던 그 날을 잠시 떠올리며.

"크라…!?"

쩌어억!

앞에서 달려오던 데몬의 뺨을 후려갈겼다.

찰지구나!

그대로 볼이 터지며 옆쪽의 벽으로 처박히는 데몬.

단순한 뺨 한 방이었지만 다시는 못 일어날 터였다.

반짝.

…!

그렇게 길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며 데몬들을 쳐내길 잠시.

저 멀리로 터널의 입구가 보였다.

파지지지… 지… 지.

뭐… 뭐가 저리 히마리가 없어.

한눈에 봐도 몹시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

지지지지--!

!!

제발 닫히지 마! 라고 기도할 시간조차 없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쪼그라들기 시작한 터널의 문.

직선상에 놓인 만큼 이제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비젼 수리검]

"크라라라!"

앞으로 달려드는 덩치 데몬의 어깨를 밟고 하늘 높이로 도약했다.

도약하며 몸을 회전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휘릭.

충분한 회전력이 생겼을 때쯤.

"문 닫힘."

후웅!!

손에 들고 있던 수리검을 터널 입구로 내던졌다.

"멈춰어어어!!"

* * *

파지지… 지.

금정산의 터널 앞.

민쿠가 닫히려는 문을 바라봤다.

'시간이 없어.'

율의 검은 여전히 길을 그리고 있었지만.

두 세계를 잇는 힘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아직 돌아오지 않은 백운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지만 민쿠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민쿠가 알고 있는 건 검을 통해 길을 여는 것뿐.

애초에 어떤 힘으로 세계가 이어진지도 몰랐기에 그저 제시간에 돌아오길 기도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려야 했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민쿠에게 검을 뺏었던 로튼과 칸을 백운이 처치했었기에.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길을 여는 방법과 길잡이 검을 만들 수 있는 척사율의 집을 알려줬었다.

지직… 직.

질끈.

거의 다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며 민쿠가 두 눈을 감았다.

아마 말도 안 되는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데몬이 득실거리는 세계로 넘어가는 미친 짓을 말리지 않은 건 말이다.

'대체 뭘 바란 거냐, 민쿠…!'

겁쟁이인 자신 때문에 꼬일대로 꼬이고 모든 게 망쳐진 과거.

백운이 말하는 공명이란 능력과 힘이 진짜라면, 척준경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망쳐버린 과거에 대한 사과를 전하며 조금이나마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기적이구나.'

꾸욱.

입술을 깨문 민쿠의 얼굴로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혐오로 인한 후회의 눈물이었다.

'난 존재만으로도 해가 되는 놈이야.'

끝도 없이 깊어지는 후회와 자책으로 토끼 귀는 이미 뺨까지 축 처진 상태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귀여운 토끼 귀가 뚝 떨어질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

쿠드득!

민쿠가 자책하며 모든 이에게 사과를 건네는 순간이었다.

"!?"

손가락 하나 정도의 크기로 닫혔던 작은 터널의 문틈.

누군가의 검날이 좁은 틈을 비집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계를 잇는 거대한 터널의 힘.

그런 힘이 완전히 닫히는 걸 검날 하나가 막아내고 있었다.

드득.

잠시 후.

힘을 주는 건지 미세하게 떨렸던 검날이.

"좀."

스가아악!

"열라아아아!"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길게 베어 올려졌다.

풍덩!

잠시 베어진 문 사이로 빠르게 몸을 밀어 넣은 백운.

백운이 들어옴과 동시에 검에 의해 억지로 넓혀졌던 문이 빠르게 소멸 되었다.

"…."

"후우우우우!!"

터널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백운이 담아뒀던 숨을 내뱉었다.

한참을 죽어라 달려서인지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백운.

"응?"

한숨 돌린 백운이 그제야 앞에 서 있는 민쿠를 발견했다.

* * *

"미… 민쿠 님?"

조심스럽게 민쿠를 불렀다.

귀신이라도 본 건가.

어두운 터널 안.

하마터면 터널로 들어옴과 동시에 심장마비가 올 뻔했다.

눈을 크게 뜬 상태로 입마저 쩌억 벌리고 있는 민쿠.

마치 못 볼 걸 제대로 봐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오죽했으면 잔뜩 풀 죽어있던 토끼 귀마저 쫑긋 세워졌을까.

역시 토끼 귀는 쫑긋해야 제맛이지!

알 수 없는 지론에 만족하며.

손에 들려 있는 악귀참도를 바라봤다.

이거 아니었으면 세계 미아 될 뻔했네.

닫혀 가는 문을 향해 수리검을 내던졌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비젼으로 이동은 했으나 이미 손바닥 크기 수준으로 줄어 들어버린 터널의 문.

억지로 손을 넣었다간 세계 미아에 더불어 손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 악귀참도.

순간 절벽에서 균열을 찢었던 악귀참도를 떠올렸다.

닿을 수 있는 걸 제외하고 모든 걸 벨 수 있는 검.

악귀참도라면 세계를 잇는 힘도 어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쿠드득!

무언가 더 고민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기에 곧장 악귀참도를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 드드드드…!

절벽의 균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힘이었다.

방해꾼인 악귀참도를 밀어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힘으로 검날을 밀어냈던 터널의 문.

힘을 증폭해주는 수리검까지 들고 있었음에도 한 번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운 힘이었다.

- 세계 미아….

조금씩 밀려 나가는 힘에 이를 악물었었다.

- 드드드드!!

- 사절이라고오!!

그렇게 간신히 휘두른 악귀참도.

휘두르고 나서야 알 것 같았다.

터널의 문이 그토록 악귀참도가 휘둘러지는 걸 막은 이유를 말이다.

- 쫘악!

악귀참도가 휘둘러진 결대로 갈라지며 내가 지나갈 수 있는 틈이 만들어진 문.

그렇게 세계를 잇는 힘은 악귀참도에 굴복하고 내게 길을 내주었다.

스르륵.

서서히 성해포에 감싸져 사라지는 악귀참도를 마지막으로.

무릎까지 차올라 있는 맑은 샘물을 바라봤다. 

발아래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샘물의 온도.

이건 못 참지.

스으… 풍덩!!

그대로 뒤로 몸을 눕혔다.

전신을 감싸오는 시원한 물에 정신마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괘… 괜찮아!?"

갑자기 시뻘건 인간이 문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이젠 뒤로 쓰러지기까지.

정신을 차린 민쿠가 호다닥 달려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샤워하는 거예요, 샤워."

샘물한텐 몹시 미안한 짓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이 꼬라지로 물을 만났는데 안 달려드는 건 불가능했다.

스으으.

샘물이 굳어진 피를 풀어내며.

조금씩 몸에 있던 피를 씻어 내려갔다.

하아.

유일하게 물 밖으로 빼꼼 나와있는 얼굴.

눈을 천천히 감으며 서서히 식혀지고 있는 열기의 감각을 즐겼다.

마지막까지 쫄리긴 했지만, 어쨌든.

싱긋.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전부.

손에 넣었다.

198화. 망태기

"푸에취!"

힘찬 재채기와 함께.

후룹.

민쿠가 건네준 차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몹시 의심스러운 차였는데.

콧물을 질질 흘리며 먹으니 이렇게 따듯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세계관 최강은 감기가 아닐까.

흐르는 콧물을 닦고 있다 보니 문뜩 생각이 들었다.

무려 척준경의 수련에서도 몸살 한 번 없이 거뜬했던 몸.

그랬던 몸이 옹달샘에 몇 시간 누워있었다고 감기가 들다니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슥.

차를 홀짝이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민쿠의 동굴 속.

타닥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건너편에서 민쿠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 그럼 넌 하루만에 돌아온 게 아니야?

데몬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민쿠는 혼란에 빠졌었다.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민쿠가 터널 앞에서 날 기다린 시간은 하루.

고작 하루인데 난 몇 년 간 수련을 했다고 말하니 혼란스러워하는 게 당연했다.

끄덕.

혼란스러울 거야.

나도 혼란스러우니까.

공명을 사용하며 무언가 제약이나 제한이 있다는 걸 느낀 적은 없었다.

단지, 항상 금방금방 끝나니 공명 속에서 오래 있을 생각을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영혼마다 다른 거 같긴 하지만.

그나마 척준경 외에 날 가장 오래 머무르게 해준 건 이카로스 정도였다.

정확히는 이카로스의 몸에 들어가 대리 체험을 했던지라 정작 이카로스 본인과 나눈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척준경 님은… 어떠셨어?"

고개를 숙인 채로.

민쿠가 망설임 가득한 질문을 건넸다.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이의 근황.

질문을 한 번 건넸을 뿐인데도 민쿠의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정말 좋아 보이셨어요."

여기에 덧붙여 척준경은 행복했던 시절과 장소로 돌아가 풍류를 즐기며 살고 있었다고.

평생을 함께 해온 피와 싸움에서 멀어져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구나."

행복한 장소지만 척사율이 없어 쓸쓸해한다는 건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책에 사로잡힌 민쿠인데 말도 안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탓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척준경 님이 민쿠 님에게 전해달란 말이 있었어요."

"…!"

전언이란 말에 민쿠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가 보면 지진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흔들리는 민쿠의 눈동자.

먼저 민쿠에게 당시 척준경의 상태에 대해 천천히 전해주었다.

이미 몸은 한계에 다다랐으며 검의 배달과 무관하게 최후를 맞이했을 거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전에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말해 준 후.

이미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인 민쿠에게 입을 열었다.

"민쿠 님한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고. 미안해 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책하지 말아달라고 하셨어요."

"!!"

아이고야.

아무래도 마지막 말이 수도꼭지를 틀어버린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그렁그렁했던 민쿠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폭포수 마냥 터져 나오고 있었다.

"끄윽… 끅."

흐느끼기까지 하며 우는 민쿠에.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나왔다.

몇 백 년이나 자책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산 민쿠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회귀 전의 나 역시 자책을 넘어 자기혐오 수준에까지 이르렀었다.

힘들었지.

당시의 내겐 아무 능력도 없었다.

전투는커녕 개방 자체를 못해 속절없이 나이를 먹어가던 시절.

계속해서 날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난 엄청난 죄책감과 무기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강하진 않더라도 친구들을 따라 나가 민폐가 안될 정도의 능력만 있었다면.

아무리 위험한 전투라도 따라나가 함께 했을 터였다.

- 조심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조심하라고 말을 건네는 것.

싸우러 가는 친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외에 말은 하지 않았었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었다.

나도 데려가 달라거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거나 하는 말들.

내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능력이 없어 친구들이 죽었다는 깊은 우울감과 자책이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했던 말이다.

어쩔 수 없으니까.

정말 어쩔 수 없기도 했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저 말 때문에 더 많은 자기혐오가 생겼었다.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정당화하려는 내 자신이 너무 추했기 때문이다.

"하아."

지금 생각해도 한숨의 푹 나오는 시절이었다.

동시에 쉬지 않고 무기를 모으는 동기가 된 시절이기도 했다.

다시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 뒤에 숨고 싶지 않았다.

스윽.

조금 결은 다를지 몰라도.

나 역시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기에.

"끅윽…끅."

손을 뻗어 흐느끼는 민쿠의 등을 토닥였다.

* * *

"끄어어어어어!!"

동굴을 나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뿌드드득!

뭉쳐 있던 근육과 뼈마디가 시원한 소리와 함께 풀어졌다.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

정확히는 민쿠와 나 둘만이 있을 깊은 산속으로 깊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오지게 자버렸네.

민쿠를 토닥이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었다.

척사율과 민쿠의 과거.

민쿠와 척준경의 인연과 토족의 이야기까지 말이다.

- ….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따듯한 모닥불과 아늑한 동굴의 분위기.

거기다 민쿠가 해준 요리로 낭낭하게 채워진 배까지.

데몬의 세계로 넘어가 몸까지 혹사 시켰으니, 잠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꾸벅.

이야기를 듣던 중 감겨오기 시작한 눈꺼풀.

그렇게 잠이 들고 호들짝 놀라며 눈을 뜬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 ….

하도 울어서인지 눈이 팅팅 불어 있었던 민쿠.

민쿠는 동굴 구석에서 무언가를 보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행복한 추억이 담긴 물건 같았다.

"흐음."

턱을 문지르며 고요한 금정산을 응시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야."

잠에서 깨어나고 잠시 후.

민쿠에게 말을 건넸었다.

척사율이 있는 집으로 함께 가자고 말이다.

- 아니야.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이길 바랐었는데.

민쿠는 내 바람과는 반대로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죄책감 가지지 말라는 척준경의 말을 듣긴 했으나 척사율에 대한 미안함은 여전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어. 그 시간 동안 난 도망쳤고, 율이를 홀로 내버려뒀어.

민쿠가 척사율에게 가진 미안함은 단순히 척준경에 대한 것 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 했을 친구를 몇 백 년이나 혼자 내버려뒀기에.

이제 와서 찾아갈 염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혼자 쓸쓸하게 있었으면서.

모든 걸 들은 건 아니었지만.

민쿠가 어떤 마음으로 첩첩산중 동굴에서 혼자 지냈을지는 짐작이 갔다.

아마 벌을 받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 토족에서 몇 번이나 돌아오라고 사람을 보냈었지만… 거절했어.

토족에 대해 잠시 물었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민쿠가 어디에 있든 여러 번 찾아와 토족의 땅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하자고 했지만.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기에 항상 거절하며 산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고 민쿠는 말했었다.

"흐으으음."

그 말을 듣고도 몇 번이나 설득을 해봤지만 민쿠는 요지부동이었다.

원래 이 정도라면 당신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하고 혼자 떠났겠지만.

- 할머니 친구, 데려와 줄 수 있어?

척사율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척유라가 했던 부탁이 떠올랐기에.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떠나버릴 순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지금 민쿠가 가장 보고 싶어할 사람, 척사율.

척사율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이자 지금까지 짊어졌던 걸 떨쳐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난 오작교야.

가만히 두면 절대 만나지 못할 두 사람이었다.

척유라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이쯤 되니 꼭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척준경 님도 그걸 바랄 테고.

척사율과 민쿠를 만나게 되면 미안했다와 고마웠다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한 척준경.

그 외에 척준경이 내게 따로 부탁한 건 없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알 수 있다기 보단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남아있을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 

궁극적으로 척준경이 가장 원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이런 거 밖에 없는데 괜찮아?"

동굴을 뒤적이던 민쿠가 거대한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 혹시 입을 거 없나요?

그냥 날아가면 추우니 입고 갈 것 좀 달라고 민쿠에게 부탁했었다. 

음.

민쿠가 가지고 나온 담요를 바라봤다.

성인 남성이 덮기엔 좀 모자란 담요였다.

충분해.

하지만 충분했다.

"네 괜찮습니다."

민쿠에게 엄지를 세워 보이며 담요를 받아 들었다.

담요를 널게 펼치며 크기를 가늠했다.

"혹시 몰라서 먹을 것도 좀 넣었어."

주섬주섬 주머니 꾸러미를 꺼내는 민쿠.

저벅.

담요를 펼친 채 주머니를 정리하는 민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건 말린 거니까 가다가…?"

주머니를 건네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담요를 발견한 민쿠.

민쿠가 뭐하는 거지…? 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망태기가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무슨 말이야…?"

자신을 노리는 내 눈동자를 봐서일까.

민쿠가 불안한 눈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와락!

"왜… 왜 이래!"

당황하는 민쿠를 담요로 휙휙 감아냈다.

숨을 쉴 수 있도록 쫑긋거리는 귀와 함께 얼굴만 남겨둔 채로 돌돌 감은 뒤.

떨어지지 않게 내 몸에 남은 담요 부분을 동여매었다.

꽉! 꽉!

"좋아!"

잘 매어진 매듭에 흡족해하는 사이.

"너… 너 설마…!"

내 의도를 알아챈 민쿠의 눈이 커졌다.

그런 민쿠에게 잔망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질문은 받지 않는다!"

민쿠 입장에선 얼탱이 터지는 대답과 함께. 

연기를 터뜨리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

* * *

여전히 더럽게 추운 강원도의 산골짜기.

딸랑 딸랑.

빨리!

한밤 중에 집으로 들이닥치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집 밖에서 방울을 울리며 척유라의 등장을 기다렸다.

왈왈왈!

멍멍멍!

방울이 울림과 동시에 먼저 달려 나오는 강아지들.

이전에 방문했던 날 알아본건지 강아지들은 몹시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갓댕댕.

날 기억하는구먼.

그렇게 달려온 댕댕이를 격하게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덥썩!

"…."

접근한 댕댕이들은 육포가 든 주머니만을 낚아챈 채 다시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역시 고양이가 최고야.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으며 고개를 젓는 사이.

끼익.

문이 열리며 척사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홀홀 역시 무사히 왔구먼."

마치 내가 돌아올 걸 확신했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척사율.

"추운데 뭐하느뇨, 얼른 들어오지 않고."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 하는 척사율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닌데 괜찮을까요?"

"….?"

혼자가 아니란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척사율.

척사율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려는 순간.

슬금.

옆에 숨어있던 민쿠가 고개를 숙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

민쿠를 보고 놀라며 잠시 말을 잃었던 척사율.

그런 척사율의 입가로.

잔잔하면서도 따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199화. 기나긴 기다림 후에

눈이 가득 쌓인 곳으로 발을 디뎠다.

뽀드득.

발을 디딘 곳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한해가 끝나 가는 12월이긴 했으나 이건 너무 심했다.

날씨가 춥긴 해도 서울엔 아직 첫눈조차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겨울 왕국이냐고.

지리상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칼데아의 연기만 있다면 한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

그런 거리임에도 방한 대책을 강구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움 따름이다.

"하아아."

공기로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붕에 솟은 굴뚝으로 눈 만큼이나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만 봐도 따듯함이 느껴지는, 추운 눈 속에서도 24시간 따듯한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집이었다.

알고 보니 좀 비슷해 보이네.

집을 중심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악귀참도의 공명 속에서 척준경을 만났던 장소.

척준경이 가장 행복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주변 풍경이나 집 자체는 꽤 많이 변했지만 말이다.

- 홀홀 미안하다니. 별말씀을 다 하셨구만.

척준경의 말을 전하자 척사율이 보인 반응이었다.

- 난 아버지를 한 번도 탓한 적이 없다네. 

척사율이라고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가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했었다고 척사율은 말했다.

- 아버지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죽을 테니까. 그 사람 중엔 나도 포함일 테고.

척사율은 척준경이 홀로 싸워나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데몬이 공간을 빠져나와 딸이 머무르는 세계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딸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피로 물들지 않도록 척준경은 싸운 것이었다.

다행이야.

척사율에게 말하기 전.

솔직히 조금 걱정했었다.

처음엔 이해했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며 자신을 떠난 척준경에 대한 원망이 깊어졌을지도 몰랐기에.

혹시나 척사율이 척준경을 사무치게 원망하고 있다면 어떻게 위로와 설득을 해야 할까 나름 고민했었다.

이제 만날 순 없겠지만 둘의 마음만큼은 엇갈리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하지 말자는 게 지론이지만.

이제 남이 아니니까.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내 무기고 안에 머무르고 있는 악귀참도와 척준경의 감각이 말이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네 해피엔딩이야.

척사율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 대신 새록새록 추억을 되살리며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척준경과 시장을 갔던 것과 꽃이 핀 봄날에 함께 거닐었던 이야기 등 듣기만 해도 마음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나저나.

척.

거닐던 걸음을 멈춘 뒤 집 문을 바라봤다.

애는 왜 이렇게 안 나와.

얼어 죽겠구만!

어젯밤.

민쿠와 척사율은 오랫동안 쌓인 이야기를 위해 방을 건너갔고.

난 혼자 남겨지기 무섭게 스르르 몸을 뉘였었다.

가만히 대고 있으면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신 방바닥.

가래떡 굽듯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온기와 평화를 즐겼었다.

- 벌컥!

척유라가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그아악!

갑자기 문이 열려 놀라기도 했지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무척 매서웠었다.

이미 따듯하게 구워진 몸이 이겨내기엔 상대적으로 몹시나 살인적인 추위였다.

그렇게 이불을 돌돌 말아 구석으로 피신한 사이.

힘차게 등장한 척유라가 입을 열었다.

- 가는 길에 나도 데려가.

첫 만남부터 당차기 짝이 없는 척유라였다.

처음엔 척사율과 민쿠가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심심해 침투한 줄 알았는데.

척유라가 한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 데… 데려가 달라니?

물론 말처럼 막무가내로 데려 가달란 건 아니었다.

이미 이야기와 절차는 끝나 있으니 서울에 있는 척사율의 지인에게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 나 학교 다니려고.

첩첩산중의, 댕댕이를 타고 다니는 대장장이 소녀 척유라.

척사율의 옆에서 지내며 검 만드는 법을 배웠었고.

얼마 전엔 검을 만들다 대장장이와 관련된 능력을 개방했다고 했다.

- 할머니가 알아서 다 해뒀다고 했으니까 몸만 가면 돼.

척유라는 그렇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대답을 기다렸었다.

내가 따신 이불을 벗어나지 못할 걸 알고 대답을 강요하는 모습이었다.

- 알았으니까 빨리 문 닫아줘.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준비는 해야 하니까.

목표했던 악귀참도를 얻었으니 앞으로 내가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도윤이 갇혀 있을 망자의 길.

데몬의 세계와 공기나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이상하게 공통점이 많은 장소였다.

공기가 별로고.

분위기가 별로고.

주변에 돌아다니는 것들이 별로야.

두 장소의 공통점이었다.

아 하나 더 있네.

가는 것보다 돌아오는 게 더 힘들다는 거.

어찌 보면 데몬의 세계보다 난이도 자체는 더 높았다.

마지막까지 시간에 쫓기며 간신히 들어오긴 했지만 어찌 됐든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없었다.

국제 미아… 보다 더 심각한 미아가 될 수도 있어.

스윽.

고개를 내려 목에 걸려있는 아테네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도윤이 갇혀 있는 마차에 바인딩 되어 있는 목걸이.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사용법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사용하는 순간 곧장 망자의 길로 향해진다는 사실도 말이다.

흠 돌아오는 방법이라.

이전에도 잠시 고민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리스에서 만난 사신 로인이었다.

망자의 길을 드나들 수 있는 능력.

로인이라면 무언가 방법을 알 것 같았다.

같이 가달라 하는 건 안 되겠지만.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그리스에서 한국까지 끌고 간 이후에 나도 잘 모르겠는 말을 대답이랍시고 해버렸으니.

아마 낫을 갈며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까.

페샨의 눈이 있는 나완 달리 일반 사람은 로인을 보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정보조차 모으기 힘든 상황.

그만큼 로인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찾는다 해도 같이 갈 순 없어.

단순히 이전의 일 때문에 양심이 찔려서는 아니었다.

저번을 떠올려 봤을 때 로인이 망자의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의 길뿐이었다.

사신인 로인조차 조심스레 이동을 하던 세계.

아테네의 목걸이가 바인딩 되어 있는 건 계속해서 이동 중인 가마였다.

로인이 다니던 길은 고사하고 이동하는 순간 망자의 군대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가도 나 혼자 가야지.

물론 죽으러 간단 말은 아니었다.

난 어느 상황에서도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기약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떠난다는 표현이었다.

끼익.

"어."

그렇게 망자의 세계에 대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척유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어디 피난 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 지 한 보따리를 싸들고 나타난 척유라.

그런 척유라를 데리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 살아야 하니까 다 챙겨온 거지."

"…?"

새로운 곳에서 살아간다니.

어린 나이다 보니 학교 가는 게 새로운 도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학교 갔다가 언제 또 돌아오는데?"

내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척유라.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던 척유라가 입을 열었다.

"한참 뒤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날 뒤로 하고.

척유라가 묘한 미소와 함께 정면을 응시했다.

그런 척유라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을 테니까."

* * *

고요한 산속의 집 툇마루.

온 세상을 백색으로 만든 눈과 함께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소리에 맞춰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 종 소리.

"예쁘네."

"그러게."

풍경 종의 아래.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눈으로 뒤덮인 산을 바라봤다.

얼마만 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 말이다.

"민쿠야 넌 보이지도 않겠구만 어떻게 아느뇨?"

"…."

밤새도록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대화에 둘은 결국 밤을 새워버렸고.

대화의 와중에 쉴새 없이 눈물을 흘린 민쿠의 눈은 퉁퉁 불어 눈동자가 가려져 있었다.

"율아 넌 어떻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려?"

눈은 퉁퉁 불었지만 이전과 달리 신나게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민쿠가 입을 열었다.

그런 민쿠의 질문에 척사율이 홀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울어서 민쿠처럼 앞이 안 보이면 안 되니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척사율이 민쿠를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민쿠를 보고 싶다 말한 적은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들었을 민쿠를 떠나게 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보고 싶어 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었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어제 백운이 데려온 민쿠를 본 순간.

척사율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얼굴도 많이 상하고 귀가 축 늘어져 있긴 했지만.

어디 다친 곳 없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만났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민쿠를 만날 수 있었기에.

척사율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산딸기 쥬스 맛있다."

"홀홀."

쥬스를 홀짝이는 민쿠에 척사율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줬구나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스윽.

척사율이 눈 내리는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보고 있자니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어렸을 적. 항상 아버지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봤었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말씀하셨어. 나와 툇마루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함이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말이야."

척사율의 말을 들으며 민쿠도 미소를 지었다.

당시 척준경이 느꼈을 행복이 어떤 느낌일지.

척사율과 툇마루에 앉아 있는 지금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하셨지. 인생에 있어 그런 친구 한 명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무척이나 행복하고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기대어지는 척사율을 느꼈다.

'….'

"민쿠야."

"응, 말해."

척사율의 입가로 행복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네 덕에 내 인생은 무척 행복하고, 또 축복받은 인생일 수 있었구나." 

"나도야."

스윽.

민쿠가 어깨에 기대어진 머리를 토닥였다.

"이 못난 친구가 소원이 있는데 당연히 들어주겠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목소리에.

민쿠가 목까지 올라온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무슨 소원이든 꼭 들어줄게."

민쿠의 대답이 만족스러워서일까.

잠시 숨을 고르던 척사율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행복하게 살아다오."

"…!!"

"길이 엇갈렸지만 이젠 제대로 찾아왔으니. 죄책감 같은 건 지나온 길에 묻고."

꼬옥.

척사율이 민쿠의 손을 잡았다.

"행복하게 살아다오." 

귀로 또박또박 들려온 친구의 소원에.

민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로 흩어지는 입김을 잠시 바라본 뒤 민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꼭… 그렇게 할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 덮인 고요한 산속 집.

집에서 들리는 건 지붕에 매달린 풍경 소리뿐이었다.

스윽.

잔잔히 퍼지는 풍경 소리와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민쿠가 척사율의 머리로 얼굴을 기대었다.

200화. 이번엔

옆에 서 있는 척유라를 바라봤다.

"정신 똑바로 차려."

비장한 눈과 목소리로 척유라에게 말을 건네었다.

"눈 깜빡이면 코 베이는 곳이니까!"

서울에 처음 와봤을 산골 소녀 척유라.

그런 척유라를 위해 나름 걱정하며 건넨 말이었는데.

척유라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

시원치 않은 걸 넘어서 뭐랄까.

약간의 혐오와 경멸이 섞여 있는 눈빛이었다.

"나 서울 많이 와봤어."

응?

척유라의 간단한 대답에 이번엔 내 쪽에서 할 말이 없어졌다.

겨울엔 내려오는 것조차 일인 험한 산골.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서울 근처에도 안 와봤을 거라 생각했었다.

왠지 태연하더라.

밤을 기다렸다 칼데아로 날아와도 됐겠지만.

처음 상경하는 척유라가 신문물에 놀라지 않도록, 점진적으로 문화를 주입해 적응할 수 있도록.

강원도서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해 왔었다.

괜히 귀찮게 왔네.

빨리 말하지.

이미 서울에 와본 줄 알았으면 편히 날개로 왔을 텐데 말이다.

"여기에 있으면 차로 데리러 온다고 했어."

슥.

!!

"약속 시간까지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네."

능숙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사용하는 척유라에 서울에 도착한 후 실행하려던 계획 하나를 삭제했다.

만난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길잡이 검을 만들어 준 것과 동상 직전이던 날 건져준 고마운 아이였다.

현대 생활의 필수품인 스마트폰을 하나 사주고 사용법까지 친절히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토독토독 거리며 자판을 두들기는 폼을 보니 하루 이틀 써본 게 아니었다.

"크흠."

가만히 있자.

중간이라도 가게.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판이었다.

배이슬과 유연경이 쓰는 법을 어느 정도 알려주긴 했지만 여전히 초심자였기 때문이다.

"밥 먹으러 가자. 근처에 맛집 있어."

무심한 얼굴로 말한 척유라가 몸을 휙 돌렸다.

머… 멋있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척유라가 멋있게 느껴졌다.

살아오던 터전을 떠나왔음에도 칭얼거리긴커녕 거침없이 나아가는 척유라.

"같이 가."

이미 서울 적응을 마친 척유라를 따라 호다닥 걸음을 옮겼다.

* * *

치이익!

츄릅.

구워지는 갈비를 보니 군침이 돌았다.

회귀 전의 나로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급 소갈비.

1인분에 무려 오만 원이 넘어가는 생갈비였다.

한국은 1인분에 대한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어.

150g 따위에 1인분이라니.

이걸 누구 입에 붙여야 1인분이 되는지 몹시 의문이었다.

자글자글.

어느 정도 익어 기름이 올라오는 소고기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 익으면 맛이 없으니 얼른 먹으라고 하려는 참이었다.

"오빠 얼른 먹어. 소고기는 너무 익히면 맛없어."

건네려던 말 리스트에서 한 줄을 삭제했다.

그래도 이제 아저씨는 아니네.

아저씨에서 오빠로 변경된 칭호에 흡족해하며.

얌전히 앞에 놓인 고기를 집었다.

쏙.

약간의 소금을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홀리 파덜.

조금 전까지만 1인분당 가격이 미쳤다고 욕을 했으나.

가격에 상응하는 엄청난 맛이었다.

입안으로 퍼지는 육향과 기름의 고소함까지.

이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구나 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유라야 서울은 언제 와본 거야?"

빠르게 고기쌈을 흡입하던 유라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할머니의 무기 제작법을 배우러 여러 곳에서 왔었어. 종종 서울로 와서 교육을 하기도 했는데 나도 그때 따라왔어."

다양한 능력이 개방된 시대였다.

이런 시대임에도 교육을 할 정도의 제작 실력이었다니.

척사율의 대장 기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 같았다.

"이번에 내 학교 입학을 지원해주는 곳도 그때 교육을 받았던 회사 중 하나야."

"척사율 님 대단하시네."

"응, 할머니의 대장 기술은 대단해. 따로 능력을 개방한 것도 아닌데 천부적이야."

척유라가 척사율의 이야기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무뚝뚝한듯하지만 척사율에게 만큼은 여느 손녀와 다름없는 척유라였다.

유라는 무슨 능력을 개방했으려나.

육즙 터지는 고기를 씹던 와중.

오는 길에 능력을 개방했다던 척유라의 말이 떠올랐다.

궁금한데.

능력에 대해 묻는 것에 몹시 예민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물어볼까 말까 갈등하며 와구와구 흡입 중인 척유라를 바라봤다.

"무기와 대화를 하는 것. 내가 개방한 능력이야."

"!?"

"사람과 대화하는 만큼의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은 아니야. 모든 무기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와 상관없이 척씨 성을 가진 사람들에겐 독심술이라도 있는 걸까 의심이 되었다.

내가 묻기도 전에 대답을 해버리는 척유라.

무기와의 대화라.

나름 무기왕의 길을 걷고 있어서일까.

무기와 대화할 수 있다는 척유라의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고기 먹는 걸 멈춘 척유라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오빠는 누구야?"

"응?" 

약간 당황스러웠다.

갑자스러운 질문이기도 했지만 누구냐니.

차라리 능력을 묻는 거였다면 대답이 명확했을 텐데 애매한 질문이었다.

잠시 뭐라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날 빤히 바라보던 척유라.

척유라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입을 열었다.

"한 명이 아니야."

내 무기들을 말하는 걸까 싶어 대답을 하려는 순간.

"어어어어!!"

옆에서 누군가의 탄성이 들려왔다.

"백운 님이다!!"

* * *

"와 고기 진짜 맛있네요."

어째서인진 모르겠다.

어느새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한 명 늘어나 버렸다.

웬 찹쌀떡이 고기를 먹고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굽는 전수희.

자신의 고기를 챙기면서도 나와 척유라에게 적절한 분배까지 해주는 능수능란함이었다.

많이 구워본 솜씨야.

최리아 밑에서 강하게 자란 탓일까.

이미 고기 마스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솜씨였다.

"유라를 지원해준다는 기업이 대산이었군요."

"네! 척사율 님은 대산한테 많은 걸 알려 주신 감사한 분이거든요. 유라도 척사율 님의 뒤를 잇는 슈퍼 인재고요!"

"별말씀을요. 과찬이세요."

뭐지.

존댓말 할 줄 알았던 건가.

산골 소녀라 예의나 존댓말 같은 걸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건 뭐란 말인가.

존댓말뿐만이 아니었다.

전수희에게 겸손함을 겸비한 적절한 아부까지 날리는 척유라.

그런 낯선 모습에 잠시 벙쪄있자 척유라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우린 엄청 친하잖아."

"그… 그렇지."

친하다니 좋은 거 같은데 어째선지 떨떠름한 맛이 느껴졌다.

"부럽네요, 백운 님! 유라랑 그렇게 친하다니."

여전히 싱글벙글한 전수희.

지난번 술을 들이켜던 때보다 훨씬 밝아진 모습이었다.

"잘 됐나 보네요."

"아!"

내 말에 이제야 기억이 난 걸까.

전수희가 깜짝 놀라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백운 님이 해주신 말씀 덕에 지금도 실장님 밑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독사 밑에서 계속 일하게 된 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본인이 행복해하니 됐지.

그렇게 연신 고개를 꾸벅이던 전수희가 날 빤히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같이 안 가실 거예요? 백운 님은 유라의 보호자를 떠나서라도 대산의 은인이세요. 정말 편하게 오셔도 돼요!"

조금 전 전수희는 척유라와 함께 대산으로 가자고 말했었다.

척유라를 환영하는 겸 팀원들과 파티를 하기로 했다는 것.

"백운 님이 오시면 아마 회장님을 포함한 모두가 좋아하실 거예요! 같이 가요! 네!?"

눈을 반짝이며 다시 한번 가자고 말하는 전수희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수희 님. 다음에 꼭 갈게요. 오늘은 제가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전수희가 정말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이나 거절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대신 다음에 꼭 오셔야 돼요!"

"네 꼭 갈게요."

꼭 간다는 말에 흡족스럽게 웃는 전수희.

"아 맞다!"

웃던 전수희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척유라를 바라봤다.

"유라야! 내가 너 묵을 숙소에…."

구워지는 고기를 집어 먹으며.

전수희와 재잘대는 척유라를 바라봤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다.

겨울 산에서 척유라를 서울까지 데려오는 것.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으로 가기 전 내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었다.

이제.

몸을 의자에 기대며 작은 호흡을 내뱉었다.

가야 한다.

* * *

질질질.

거대한 꾸러미를 끌고 인적이 드문 공터로 향했다.

이쯤이면 되겠지.

"후우."

한숨을 내쉬며 끌고 온 꾸러미를 바라봤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짐을 잔뜩 싼 척유라에게 피난 가냐고 물었었는데.

지금 내가 가져온 꾸러미는 척유라의 것보다 두세 배는 더 커 보였다.

식량은 필수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두 사람과 헤어진 다음 내가 찾은 곳은 거대한 상가였다.

철물점부터 식료품점까지 없는 가게가 없는 상가 구역.

상가를 돌며 생각해뒀던 물건들을 빠르게 구비했다.

라이터랑 성냥 다 챙겼고.

음식을 해먹을 때 불은 필수였다.

라의 불꽃이 있지만 이건 음식을 데우긴커녕 모든 식량을 태워버릴지도 몰랐다.

캠핑용품도 오케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망자의 세계는 황폐 그 자체였다.

사람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세계.

모래 바닥에 그냥 드러누워 잘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큰돈을 들여 고급 텐트를 구매했다.

안 본 사이에 돈이 꽤 쌓여있어서 다행이네.

집 구매에 대부분의 돈을 쏟아부은 뒤.

한동안 잔액을 확인할 새도 없이 바쁘게 다녔었다.

다행히 오늘 확인해보니 충분한 잔액이 있었고, 덕분에 비싼 장비들도 포기 없이 빠짐없이 다 사왔다.

바스락.

꾸러미가 풀어지지 않게끔 단단히 동여맨 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밤이 되어 하늘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스윽.

손을 올려 아테네의 목걸이를 붙잡았다.

"돌아오자."

소리 내어 말한 후 눈을 감았다.

돌아올 수단은 준비해두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 했다.

"돌아온다."

다시 한번 되뇌인 후.

우우웅…!

목걸이를 발동시켰다.

* * *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땅.

절그럭.

절그럭.

땅에 박힌 사슬과 함께 거대한 가마가 망자들에 의해 들려 가고 있었다.

가마의 주변으로 모여 있는 많은 수의 망자들.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휘이이.

망자의 땅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슬 끌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 그 자체인 땅.

그런 땅으로.

쿠웅!!

고요를 깨뜨리는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으으…?"

모여있던 망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그들이 끌고 가던 가마 위였다.

고오오--!

아직 잦아들지 않은 먼지 속에서.

"또 만나네."

망자들을 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스릉.

무언가 꺼내는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받은 무언가로부터 시린 빛이 번뜩였다.

"이번엔."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목소리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베어 줄게."

201화. 끊어지는 사슬

그어어--!

귓가로 소름 끼치는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날 발견하기 무섭게 소리를 질러대며 몸을 돌린 망자들.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이는 망자가 일순간 가마 위를 올려다보는 광경이란, 뭐랄까.

찌릿.

이유 모를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

괴성을 지르고 약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가마 위에 뜬금없는 인간이 나타나서인지 망자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대로 못 본 척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쿠아아아--!!!

날 바라보던 모든 망자가 가마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 있던 녀석들도 서로의 머리를 밟아가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저놈은 내 먹이란 느낌으로 말이다.

"후우."

가장 가까운 망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전에 베지 못했던 놈들이 날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모습.

일단 후퇴한 다음 어디 구석에 숨어 한 마리씩 처치해보는 게 현명했겠지만 어쩌겠는가.

목걸이가 바인딩 되어 떨어진 곳이 가마 위인데.

그어!

드디어 검의 범위에 들어온 망자 한 마리.

스릉.

제일 먼저 범위에 들어온 녀석에게 검을 휘둘렀다.

아마 찰나의 순간일 터였다.

악귀참도가 검집을 떠나 녀석에게 도달하는 순간은 말이다.

하지만.

스르르…!

내 눈엔 어째서인지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검성의 수련을 받게 되어서라던가 이제부턴 내가 제 2의 검성이라던가 하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 한 번의 휘두름에 많은 게 걸려있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검집을 떠나 천천히 망자의 목을 향해 날아가는 악귀참도.

그리고 그런 악귀참도를 따라가며 흩날리는 칠흑의 성해포까지.

벨 수 있다.

악귀참도라면 벨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망자의 세계로 들어왔다.

처음의 확신은 검을 휘두르는 이 순간까지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베여라.

악귀참도의 검날과 망자의 거리는 손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굳이 도착 시간을 따진다면 0.1초 정도 되는 시간.

"베여라아!!"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외침과 함께.

악귀참도의 검날이 망자에게 날아 들었다.

* * *

망자의 세계 어딘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땅 위로 거대한 건축물들이 구성되어 있다.

무언가 모여 사는 장소 같지만 마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압도적인 규모였다.

….

한 나라의 수도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넓은 면적을 가진 공간.

공간에 존재하는 건 정적과 어둠 뿐이었다.

무언가 살고 있다고는 보기 힘든 완벽한 적막.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수도는 과거에 쓰이다 버려졌다 생각이 들 법한 장소였다.

드득.

그런 장소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약간이지만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드득… 드드.

드드드… 드드득!

조금씩 커지나 싶던 소리가 공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것들이 깨어나는 듯한 소리였다.

드드드… 득.

잠시 후 소리가 멈추고.

그어어어어어!!!!

멈춘 소리 대신 귀를 찢는 외침이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살아있는 이가 들으면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온기나 생명따윈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

우우우웅--!

목소리와 함께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으로 푸른빛이 번져나갔다.

공간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무언가가 깨어났음을 알리는 빛.

수만을 넘어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에 이르는 이들의 안광이었다.

"…."

이제 막 깨어나 괴성을 질러대는 망자들 사이로 한 명의 망자가 서 있었다.

여기저기 몸이 상해 있는 다른 망자들과는 달리 온전하면서도 굵은 뼈를 가진 망자였다.

크기 역시 압도적이었으며 손에는 책을, 머리엔 빛이 바랠 대로 바랜 회색의 왕관을 쓰고 있는 고대의 존재. 

최초의 망자이자 망자들의 왕인 카사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규율이."

스윽.

아직까진 뻣뻣한 목을 돌려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 카사락.

"깨졌다."

* * *

멈춰 있는 망자를 바라봤다.

조금 전 달려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망자는 엉거주춤 몇 걸음을 물러서고 있었다.

조금 전에 쫄았나?

라고 누군가 물어봤다면.

솔직히 백퍼센트 아니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확신은 가지고 있었으나 사람인 이상 검을 휘두르는 순간 긴장을 안 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싱긋.

지금은 아니었다.

망자를 베며 손끝으로 느껴진 감각.

이전의 방문 때와는 명백하게 달라졌다.

허공을 가르는 느낌이 아니다.

확실히.

베었다.

손끝의 감각이 또렷해짐과 동시에.

스아아악!!

뒤로 물러나던 망자의 목에서, 정확히는 악귀참도가 지나친 곳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미 죽어서 피는 안 나오는 건가.

망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비어있는 초점이 내가 아닌 자신의 몸을 향하고 있다는 것.

망자는 신기한 듯 푸른빛과 함께 흩어지는 몸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아아.

잠시 후.

멈춰 있던 망자가 푸른빛과 함께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죽인 자를 또 죽인다라.

묘한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베어 오던 것과도 달랐다.

수분기 없는 푸석푸석한 모래를 베어내는 느낌이었다.

"그아아아아!!"

흐음.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인지 검을 휘두르며 낮게 낮춰졌던 몸.

몸을 반듯이 펴며 목을 좌우로 돌려 풀어줬다.

한 마리를 베긴 했지만 여전히 사방에선 많은 수의 망자가 달려들고 있었다.

뚜둑.

여유가 스며든다.

몸이 조금씩 풀리며 마음이 평온해졌다.

백 여마리 중 벤 건 고작 한 마리지만.

한 마리를 베기 전과 벤 후의 여유는 비교할 수 없었다.

베지 못할 수도 있지만 베어야 하던 것에서.

벨 수 있는 것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얘네들 봐라.

동족의 죽음을 봐서인지 미친 듯이 달려들어 이젠 코앞까지 와버린 망자들.

마치 한 마리뿐인 먹이를 향해 앞다투어 달려드는, 그런 굶주린 승냥이 떼 같은 망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황 파악 못 하시네 이분들."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냥하는 건."

[잭 더 리퍼]

남아있던 왼손으로 면도칼의 감촉이 느껴졌다.

"난데 말이야."

면도칼로 향상된 신체의 감각을 즐기며.

학살을.

밀려드는 망자 무리를 향해.

시작한다.

발을 내디뎠다.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철컥.

악귀참도를 검집으로 집어넣은 후.

스윽.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망자들이 둘러싸고 있던 주변.

사아아…!

지금은 비호감형으로 생긴 망자 대신 푸른 기운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두운 주변을 밝히며 하늘로 올라가는 푸른 기운.

비록 망자가 사라지며 나온 기운이긴 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예쁘네.

장관이었다.

어둡고 황폐한 땅.

그런 땅에서 난 백 여개의 푸른 빛 줄기 속에 서 있었다.

[해제]

풀러져 있던 성해포가 검집을 감싸나갔다.

빈 곳 없이 성해포가 둘러지고 나서야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악귀참도.

- 서걱! 스각!

악귀참도로 쉴새 없이 망자들을 베어나갔었다.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쓸려나갔던 망자 무리.

- 가장 중요한 건 호흡이다.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내면서도 척준경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정확히는 몸이 잊지 않고 있었다.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땐 온 신경을 다 쏟아도 호흡을 유지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신경을 쏟지 않아도 몸이 자연스럽게 검의 호흡을 따라갔다.

신경을 쏟으면 쏟을수록 검의 예리함이 더 살아나는거 같긴 하지만.

지금 망자를 베는데 그 정도까진 필요하지 않으니까.

스르.

동시에 왼손에 들려있던 면도칼도 제 역할을 다 한 뒤 사라졌다.

지난 번 데몬의 세계에서 최종 레벨에 이르렀던 잭 더 리퍼의 면도칼.

최종장에 이른 것 답게 면도칼을 꺼내기만 해도 향상되는 신체의 능력이 엄청났다.

처음엔 호흡 놓칠 뻔 했지.

면도칼로 인해 순식간에 올라간 속도와 움직임.

이미 몸에 익은 호흡이었지만 최종 레벨에 이른 후 처음 꺼내보는 면도칼에.

잠시지만 호흡을 놓칠 뻔 했었다.

면도칼과 수리검 정도인가.

망자의 땅에서 악귀참도와 함께 듀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이 두 개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망자가 나올지 모르는 세계.

유일하게 망자를 죽일 수 있는 악귀참도는 항상 꺼낼 수 있어야 했다.

악귀참도는 쿨타임이 없지만.

듀얼로 사용했을 땐 둘 중 하나의 쿨타임을 같이 적용받기에.

악귀참도를 쿨타임이 있는 무기와 함께 사용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애초에 망자를 죽일 수도 없고.

듀얼로 사용한다고 다른 무기가 악귀참도처럼 망자를 벨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각자 다른 능력의 무기를 내가 알아서 가능한 조합을 떠올려 사용하는 것이었다.

악귀참도와 함께 꺼낸다 한들 다른 무기로 망자를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흠.

단순히 두 개를 꺼내는 게 아니라 다른 무기의 특성까지 온전히 적용되면 좋을 텐데.

이게 가능했다면 많은 게 가능해졌을 터였다.

라의 불꽃에 악귀참도의 능력을 담아 터뜨린다던가.

리볼버에 악귀참도의 능력을 담아 난사한다던가 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말이다.

망자쉨들 운 좋은 줄 알아라.

이런 게 가능했어도 쿨타임 때문에 사용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한 번에 대량 학살이 가능한 무기는 꺼내더라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니 망자들 입장에선 몹시 다행이었다.

저벅.

무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마친 후 발을 뻗었다.

자신을 이끌던 망자들을 모두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봉인의 가마.

땅과 이어져 있던 사슬들 역시 악귀참도로 빠짐 없이 끊어놓았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비늘을 오른손에 두른 후.

덥썩.

가마의 문을 움켜쥐었다.

지난번엔 망자를 죽일 수 없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문.

꽈악.

문을 잡은 양손에 손아귀에 힘을 주어.

콰앙---!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 * *

사방이 백색으로 둘러싸인 공간.

이미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 앉아있던 도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절그럭… 절그럭.

오랜 시간 몸을 억죄고 있던 사슬들.

꽁꽁 묶어 도윤을 걷지조차 못하게 만들었던 사슬이 풀어지고 있었다.

'….'

지난번 백운이 다녀간 후.

공허했던 도윤의 마음속엔 희망의 불씨가 생겨났었다.

아무런 기약도 없던 허무에서 기다려야 할 것이 생겨났고, 덕분에 도윤은 여유를 되찾으며 허무에 집어 삼켜지지 않을 수 있었다.

'벌써 오다니.'

백운을 믿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었다.

인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망자의 세계.

아무리 백운이라 해도 방법을 찾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드드드…!

하지만.

이미 찾은 모양이었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냐.'

드드드…!!!

수백 년간 도윤을 가둬놨던 봉인의 문.

콰앙!!

문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열어 젖혀졌다.

잠깐 열렸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콰직!

열리다 못해 완전히 뜯겨 나가버린 문.

사라져버린 문 사이로.

"제가 왔습니다 하하하!!"

뭐 하는 녀석인지 모르겠는, 백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

멍한 표정으로 사라진 문과 나타난 백운을 바라보는 도윤.

그런 도윤의 입가로.

싱긋.

무척이나 반가운 미소가 그려졌다.

202화. 답은 라면이다

가만히 서 있는 도윤을 바라봤다.

신기한 일이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지난번 잠깐 문을 열었을 때가 끝인데.

어째서 이렇게 반가운 걸까.

도윤 님도 반가워하는 거 같고.

도윤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반가울 때 짓는 진짜 미소가 말이다.

"두 번째 보는 건데 낯설지 않은 게 신기하군."

도윤이 입을 열어 내가 느끼고 있는 바를 대신 말해주었다.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친구를 제대로 만난 느낌이었다.

수리검 덕이겠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리검을 통해 공명을 거치진 않아 본 적은 없지만,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도윤은 수리검을 아꼈으며 수리검 역시 그런 도윤을 따랐다는 사실이었다.

우웅.

도윤을 만나 반가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무기고의 수리검 역시 문을 뜯어내기 무섭게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수리검도 난리가 났는데요."

"황송하군.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다니."

도윤과 수리검에 대해 이것저것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사아아…!

문이 뜯겨나간 탓일까.

마차 안의 봉인 공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신기한 공간일세.

분명 마차가 옮겨지던 건 망자의 길이었다.

그럼에도 마차 안은 완벽히 다른 공간이라니.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게 많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었다.

스윽.

흩어지는 공간을 잠시 구경하다 도윤에게 손을 뻗었다.

"자 가시죠! 수리검 만나러."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으… 후웅!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순식간에 사라진 마차를 바라보며.

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무기고 안의 수리검과 도윤의 영혼이 말이다.

수리검에도 게이지가 생겼네.

영혼과 함께여야만 성장이 가능한 무기고의 무기들.

유일하게 영혼이 없어 게이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수리검도 이제 성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수리검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려나.

무기마다 특징이 있었고 성장의 방향 역시 뚜렷했다.

피를 갈망하던 잭 더 리퍼는 성장을 하면 할수록 광기와 피에 물들도록 발전했고.

절대 부서지지 않는 유탈라스의 비늘 역시 점점 더 날 보호하는 것에 최적화되도록 성장했다.

라의 문양에서 얼음이 나오는 일은 없겠지.

아직 다음 성장까지 게이지가 남아있는 라의 문양이었지만.

얼음이 나오지 않을 거란 건 명확했다.

태양의 신이라 알려졌던 라가 사실은 얼음의 신이었다! 라는 반전만 없다면 말이다.

음 수리검은 보자.

수리검이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은 비젼.

내 몸을 수리검이 있는 위치로 바꿔 주는 능력이었다.

나중엔 건물도 옮길 수 있게 해주려나.

수리검을 얻었을 때 여러 실험을 해봤었다.

사람을 데리고 옮기는 것까진 가능하지만 일정 부피를 넘어서는 건 옮겨지지 않았었다.

옮길 수 있게 해주면 많은 게 가능해질 텐데.

김칫국이지만 벌써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을, 사람뿐만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까지 옮겨버리는 능력.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무궁무진했다.

행복회로 풀가동이구만.

게이지가 조금도 차 있지 않은 수리검을 보며 행복회로를 잠시 돌린 후.

자 그럼.

슥.

몸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어쩐다.

조금 전 돌리던 행복회로가 무색해질 만큼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멋있게 가마 위로 등장해 달려들던 망자들도 도륙 내버렸고, 구하려던 도윤도 무사 구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나갈 방법을 모른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아직 해결 전이었다.

해결은커녕 길도 안 보이지.

황폐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망자의 세계.

잠시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펼쳐진 어둠뿐이었다.

휘이잉.

넌 낯선 땅에 버려진 세계 미아야! 라는 걸 알려주는 듯한 쌀쌀한 바람과 함께 말이다.

망자쉨도 한 마리 안 보이네.

현재 마차가 있던 위치는 이전과 달랐다.

지난번 로인과 함께 봤을 때보다 꽤 먼 곳까지 이동한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망자가 사방에 득실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망자는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황폐한 땅을 막막한 마음으로 구경하던 중.

꼬로록!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탓일까.

강력한 배의 외침이 들려왔다.

일을 했으니 이제 연료를 넣어달라는 신호였다.

평소보다 우렁차구먼.

생각해보니 시간이 꽤 지나긴 했다.

척유라, 찹쌀떡과 함께 고기를 먹은 게 마지막 식사였으니까.

긴장이 풀려서 한방에 몰려오는구만.

아테네의 목걸이를 사용하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솔직히 긴장 상태였었다.

나의 배 역시 이런 긴장에 억눌려 제 목소리를 내고 있지 못했던 것.

저벅.

열심히 자기주장을 펼치는 배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 나타나기 무섭게 휙 던져놨던 나의 짐꾸러미들.

당장 없으면 흙을 퍼먹어야 하는, 몹시 소중한 꾸러미인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무렇게나 던져버렸었다.

어디 보자.

주섬주섬 꾸러미를 펼쳤다.

군 시절 더블백으로 치면 열 개 정도는 될 거대한 꾸러미.

꾸러미 속엔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었다.

일단 눈에 보이면 다 쓸어 담은 덕분이었다.

역시 이건가.

잠시 고민을 하다 손을 뻗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야외의 쌀쌀한 날씨에서 땡길 수밖에 없는 음식, 라면.

유통기한이 긴 라면 만큼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많이 챙겨왔다.

자리부터 잡아볼까.

당장 부르스타에 불을 올릴까 했지만.

지금 서 있는 곳은 너무 한복판이었기에.

"오."

적당한 암벽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 * *

스륵.

백운이 라면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을 때.

멀지 않은 장소에 앉아있던 이가 몸을 일으켰다.

"얼레."

졸린 눈을 비비며 백운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남자.

백발의 더벅머리와 맑은 초록색 눈, 그런 눈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안경을 쓴 남자였다.

남자는 별일이 다 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다 있네."

신기할 따름이었다.

적막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 정도의 소란이라니.

꽤 오랜 시간을 망자의 세계에서 지내왔지만 처음 겪는 일이었다.

톡… 톡… 톡.

남자가 발을 까딱이며 턱을 어루만졌다.

툭.

발을 까딱일 때마다 발에 채는 여러 가지의 물건들.

정확히는 잡동사니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다.

여기저기 조립되고 변형되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 힘든 생김새였다.

"나 같이 들어오게 된 건가."

남자가 이곳에 들어왔던 순간을 떠올렸다.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끊겨있는 기억뿐이지만 어쨌든.

지금 생각해도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찔했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분명 오래도록 살았던 집의 지하였는데 1초도 안 된 순간에 이런 곳까지 와버렸으니.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 친구도 아찔하겠지."

물론 친구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일렀다.

막상 가보니 하늘을 뒤덮는 아찔한 망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좋아."

남자는 불확실성보단 자신의 직감을 믿는 주의였다.

세상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이론이나 근거에 반하는 감이더라도.

그 감을 따라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남자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슥슥.

오랜만에 느껴진 감에 남자가 턱을 빠르게 문질렀다.

감각이 느껴지는 곳은 꽤 먼 거리였지만 괜찮았다.

아무리 오래 걸리고 위험할지라도 자신이 믿고 있는 감을 확인하기 위해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이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해온 일이었으니까.

저벅.

"왠지 말이야."

툭툭.

남자가 발에 치이는 잡동사니들을 밀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조금 전 감각이 느껴진 장소였다.

"감이 왔단 말이지."

남자의 입가에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본능적인 직감에 의한 미소가 그려졌다.

"재밌을 것 같은 감이 말이야!"

* * *

보글보글.

츄릅.

침을 닦으며 끓어오르기 시작한 물을 응시했다.

물이 끓는 온도 100도.

시간의 진행은 상대적이라 하더니.

평소엔 그렇게 빨리 끓던 물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끓는 건지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지금!

뽀작!

물이 끓는 걸 확인한 후 빠르게 라면 세 봉지를 뜯어냈다.

누군가 보면 도야지라고 놀릴 법한 양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몸에 근육이 붙으며 필요한 열량도 그만큼 많아졌는데.

안 먹으면 근손실 확정이야.

물론 라면을 먹는다고 근손실이 막아질지는 의문이었지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스프가 풀어지며 코로 스며드는 맵싸한 라면의 냄새.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도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바스락.

라면 스프를 투하함에 이어 꾸러미에서 청양고추를 꺼냈다.

국물 음식에서 빠지면 서운한 식재료.

몇 개만 넣어도 얼큰하고 시원한 맛을 내주는 마법의 재료였다.

타타타!

신나게 청양고추를 넣고 면까지 입수시킨 후.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하아."

점점 익어가는 라면을 보다 주변을 둘러봤다.

마차가 사라진 곳에서 이삼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절벽 아래.

자연적으로 파인 건지 작은 동굴이 생겨 있었다.

세상일 참 알 수가 없어.

일주일도 안 되어 세 가지 세계를 오가다니.

어디 판타지 모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거기다 그런 곳에서 라면까지.

이건 소설에 나오지 않을 법한 이야기였다.

보통 다른 세계에 떨어지면 그 세계의 특이한 식재료와 음식을 만나기 마련인데 라면이라니.

거기다 보통 소설에선 새로운 동료를 만나는 장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었다.

밥을 먹더라도 같이 먹고 무언가와 싸우더라도 함께 싸우는 그런 동료와의 만남 말이다.

역시 소설과 현실의 괴리는 엄청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는커녕 망자만 안 나와도 감사한 세계였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이전에 갔던 데몬의 세계만 봐도 마찬가지였다.

공명으로 들어가 척준경을 만나긴 했지만 환경 자체는 사람이 사는 게 불가능한 곳이었다.

여기라고 다를 건 없겠지.

현실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세계에.

만약 판타지 소설처럼 동료가 나타난다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생각을 하며 라면을 내려다봤다.

망자의 세계에서만 나는 특산물이 들어간 화려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뭐 어때!

보글보글.

맛있으면 그만이지!

내 입에만 맛있게 느껴지면 된 거 아니겠는가.

열심히 긍정회로를 돌리며 냄비의 뚜껑을 열자 수증기와 함께 꼬들하게 잘 익은 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악!

잔뜩 집어온 나무젓가락을 하나 뜯어낸 후.

라면을 크게 한 젓가락 떠 입으로 집어넣었다.

후루룩!

시원하면서도 기분 좋은 면치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들었으면 요란하게 먹는다고 욕했겠지만 지금 주변엔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라면으로 면치기를 하든 두루치기를 하든 볼 사람이 없는 장소.

어찌 생각하면 편하기도 하네.

의도치 않게 발견한 망자의 세계의 장점을 느끼며 다시 한번 큼지막하게 라면을 뜨는 순간.

"맛있어?"

누군가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03화. 남자의 기억

허어어억!!

얼마 만이었을까.

이렇게 심장이 떨어질 뻔한 적이 말이다.

두… 큰.

농담이 아니라 심장박동이 느려진 느낌이었다.

하도 심하게 놀라 심장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뭐… 뭐야!"

누구냐는 물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뭐냐는 말로 질문을 대신했다.

후후 불어가며 신나게 면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여기서 뒤로 안 넘어가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깜짝 놀랐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갑작스럽게 나타난 귀신… 아직 귀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연령대와 짧은 백발 더벅머리, 그리고 순수한 초록색 눈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눈에 어울리는 맑은 웃음을 지으며 발라당 넘어가 있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하고 앉아 있냐는 말투였다.

"내가 더 놀랐구만 뭘 놀래!"

밀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날 넘어뜨린 남자를 향해.

왜 그렇게 놀라서 날 놀래키냐며 적반하장을 보이는 남자에게 강한 반론을 펼쳤다.

"이건 뭐야."

내가 그러든 말든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내 라면을 응시했다.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걸 바라보는 호기심 가득한 눈이었다.

앗.

그제야 꼬들꼬들에서 불어터짐으로 가고 있을 내 라면이 떠올랐다.

"라면… 몰라?"

놀란 가슴이 진정되며 천천히 남자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약간 옛날 옷이긴 하지만 분명 지구의 옷이었다.

근현대사 수업시간에 많이 본 차림새인데.

혹은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해주는 셔프라이즈 방송에 자주 나오던 복장이었다.

하얀 셔츠와 멜빵바지, 그리고 겉에 걸친 낡은 자켓까지.

오래전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의 차림새가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라면을 모르냔 질문에 대답 대신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남자.

남자가 옆에 놓인 새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응?

설마?

후루룹!

!?

사람의 등장까지야 그냥 놀랄 일이었지만.

남이 먹던 라면에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이밀다니.

이젠 앞에 있는 남자가 뭐 하는 놈인지 심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와우! 엄청 맛있네?"

후루룹!

저… 저…!

이대로 두면 다 먹어버릴 기세였기에.

호다닥 몸을 일으켜 떨어진 젓가락을 집어 든 뒤 냄비 옆으로 다가갔다.

후루룹!!

* * *

"…."

"…."

판타지 소설 작가가 무얼 상상하며 글을 썼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런 그림은 아닐 터였다.

소설에 나오던 동료와의 식사 장면은 말이다.

터엉.

숟가락으로 긁어먹어서인지 바닥까지 맨질해진 양은냄비.

조금만 더 긁었으면 구멍이 뚫릴 판이었다.

뭐냐고 이 인간.

기껏 끓인 라면이 없어질까 호다닥 달려와 모르는 인간과 같이 먹은 나도 레전드였지만.

생판 모르는 내 라면을 다짜고짜 뺏어 먹은 눈앞의 남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걸 뭐라고 한다고? 라면?"

"라면은 맞긴 맞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누구야!?"

너무나 뻔뻔한 태도였다.

라면 한 젓가락이라도 더 처먹겠다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있긴 했지만 이젠 알아야 했다.

나와 함께 라면을 먹은 이 인간이 대체 누구인지를.

"음… 내 이름은."

꼴깍.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망자의 세계.

그런 세계에서 갑자기 나타나 자기소개를 하려는 남자였다.

"… 뭐지?"

"…."

한참 뜸을 들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발의 남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갈 뻔했다.

아마 친한 사이였으면 바로 뺨을 올려붙였을 것이다.

"장난하지 말고."

"장난이 아니라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

남자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구라치는 거 같진 않은데.

그렇다고 납득이 가는 반응도 아니었다.

보통 자기 이름이 기억 안 날 정도면 심각한 상황일 텐데.

남자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래도 뭐라고는 불러야 되니까 노운이라고 불러."

"노운…?"

게임에 등장하는 종족 노움은 알지만 노운이라니.

무슨 의미가 담긴 걸까?

"알 수 없음이니까 언노운."

잠시나마 노운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내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영어라니.

역시 영어권 국가에 살던 사람이 분명했다.

"넌 누구야?"

자신의 이름을 언노운이라고 대충 밝혔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백운."

"저 꾸러미 안에는 뭐 있어?"

콱씨.

기껏 알려준 이름은 들은 척 만 척하며 노운이 꾸러미에 관심을 보였다.

배가 고프거나 해서 식량을 노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단지 노운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보고 확인하는 걸 좋아하거든."

여기 오기 전에 과학자였나.

개인적인 편견일 수도 있지만 심히 과학자스러운 느낌이었다.

빠안.

잠시 꾸러미와 날 번갈아보던 노운이 입을 열었다.

"혹시 과일도 있어?"

* * *

와삭!

기묘한 상황이었다.

라면 먹방에 이어 과일 먹방이라니.

착하게 생겼어.

노운의 강점이었다.

관상이 과학이라는 지조를 갖고 있는 입장에서 노운의 관상은 무척 선했다.

나쁜 생각일랑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을 듯한 얼굴.

노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맑고 깨끗한 느낌뿐이었다.

- 먹어.

아마 관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일은 없냐는 말에 뺨따구를 후리는 대신 꾸러미를 풀러준 건 말이다.

"달다 달아."

노운은 유독 많은 과일 중 사과만 먹고 있었다.

골라 먹는다기보단 집중 포격을 해 조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맛있게 사과를 먹고 있던 노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그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내 기준에서는 엄청 오래됐어."

애매한 답변이었다.

내 기준에서 오래됐다니.

과거사 코스프레를 하는 게 아닌 이상 옷차림만 봐도 족히 몇백 년은 지났을 듯했다.

"너는?"

"오늘 왔어."

그렇게 노운과 나 사이에 짤막한 질문과 답변이 몇 번 오갔다.

합의한 건 없었지만 서로 자연스럽게 말을 놔버린 상태.

심심하진 않네.

그렇게 몇 번의 말을 주고받다 보니 말동무가 생긴 느낌이었다.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구만."

어쩌다 보니 망자의 세계에 온 이유까지 말해버렸다.

"너 멋있구나. 동료를 구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머쓱.

뜬금없이 날아온 칭찬에 나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나도 모르게 노운에 대한 호감도가 약간 상승했다.

"흐음."

"…?"

노운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아까 뭘 좀 느꼈는데 말이야."

"뭘 느꼈는데?"

스윽.

"너."

깍지를 끼고 턱을 괸 노운이 입을 열었다.

"망자를 죽였지?"

"…!"

분명 망자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노운은 없었다.

눈으로 닿을 거리는 아니었으니 노운의 말대로 느낀 것이었다.

"정말 흥미롭다, 흥미로워. 죽은 망자를 또 죽이다니."

노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말했듯이 나도 여기서 나름 꽤 오래 있었거든."

잠시 뜸을 들이던 노운이 말을 이어갔다.

"처음 봤어, 망자가 죽는 건. 뭐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누군가는 죽였을지도 모르지만."

슥슥.

무언가 생각하던 노운이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대충 봤을 때 망자의 세계와 지구를 표시하는 듯했다.

"이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구, 그리고 이게 망자의 세계야. 완전히 독립되어 있지."

그림엔 두 개의 거대한 원이 있었다.

조금의 접점도 없이 완벽히 분리된 원이었다.

"이 두 세계는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어. 뭐 가끔 지구에 육체를 두고 이곳으로 넘어와서 약간의 접점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지만."

아마도 피렌조의 케이스였다.

도윤에게 봉인 당해 영혼은 망자의 세계로 왔지만, 육신은 광산에 존재했었다.

그러다 육체에 피를 수급받으며 육신이 영혼을 끌어당겼고 말이다.

"어쨌든 이 두 세계는 서로 간섭할 수 없어. 간섭해서도 안 되고."

처음 망자의 길에 왔을 때 로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해진 최소한의 길을 제외하곤 절대 벗어나선 안 된다는 말.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기 때문에 길을 벗어나는 순간 이쪽 세계의 망자들이 바로 알아볼 거란 말이었다.

말은 안 들었지만.

로인의 신신당부에도 수리검의 울림을 무시할 수 없어 뛰쳐나갔지만 어쨌든.

노운이 하는 말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았다.

스윽.

노운이 손가락으로 두 세계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런데 넌 모종의 방법을 이용해 간섭을 한 것도 모자라서."

그리고 그 선을 연장해 망자로 보이는 개체에 엑스자를 표시했다.

"망자를 죽여버렸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설명하는 내내 웃고 있는 노운.

한참을 웃던 노운이 말을 마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완전 규율 위반이지."

* * *

규율 위반이란 말을 강조해 말한 노운.

여기까지만 말하고 말을 멈춘 노운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규율 위반이면 어떻게 되는데?"

"큰일나지."

당연한 걸 묻냐며 노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지."

처음엔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몇 번 들으니 적응이 될 것 같았다.

어깨를 으쓱 올리며 노운이 옆에 있던 사과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마치 지금까지의 설명은 사과의 대가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얘는 안 나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너무 갑자기 등장해 생각하지 못했던 의문들이 떠올랐다.

꽤나 오랜 시간을 망자의 세계에서 보냈다는 노운.

노운에게선 이곳에 갇혔다는 어떠한 절망이나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당연한 것 인냥 덤덤한 자세였다.

"너는 어쩌다 여기에 온 거야?"

나는 내 발로 들어왔다 치더라도 노운은 어떻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로인과 같은 능력을 가졌던가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납치를 해 이곳에 버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정확히 뭘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해선 안 될 일을 해버린 거 같아."

슥.

노운이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기억이 안 나서 답답하긴 한데… 어쨌든 원래 살던 세계에서 추방당할만한 일을 저지른 거겠지."

추방당할만한 일이라.

로인을 제외하고 당장 떠오르는 건 도윤과 피렌조의 봉인뿐이었다.

그것 외엔 완전히 단절된 두 세계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하늘을 보고 있는 노운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 알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노운이었다.

그런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들 기억하고 있을 확률은 몹시 낮았다.

"응."

"응?"

예상을 깨부수는 답변이 들려왔다.

특유의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표정으로 응이라 답하는 노운.

내가 되묻자 확답을 주려는 듯 노운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여기 나가는 방법, 아는데?"

204화. 탈출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