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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망자의 길

며칠 전 그리스의 성당.

성당 꼭대기에 망토를 두른 남자, 로인이 앉아있다.

'….'

성당과 사신.

어떻게 보면 상극이라 부를 수도 있는 조합이지만.

로인은 이곳을 좋아했다.

시내에선 시끌벅적했던 사람들도 정숙을 지키는 장소.

로인은 성당의 고요함을 좋아했다.

"엄마! 오늘 저녁은 뭐해 줄 거야?"

로인의 아래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집에 간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이는 무척이나 신이 난 얼굴이었다.

"티나야, 조용히 해야지. 성당 앞이잖니."

그런 아이에게 엄격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는 어머니.

어머니의 꾸중에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슥.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의 머리로 어머니의 손이 올려졌다.

"오늘 저녁은 바베큐란다. 아주 맛있게 구워줄게."

어머니의 따듯한 음성이 들려오고.

이내 밝아진 아이가 어머니의 팔에 매달리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

누가 봐도 따듯한 모녀를 바라보고 있는 로인.

로인의 얼굴로 묘한 빛이 스쳤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웃을 수 있는 거지.'

기억이 닿는 한도 내에서 로인은 단 한 번도 저런 미소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제대로 웃어본 적이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로인에게 감정이 아예 없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저 정도 크기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 그 메토스란 놈을 박살내면?

로인의 머리로 이연화의 앞을 막았던 백운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로인을 만났던 이들의 행동은 가지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사신을 물리치겠다며 성경을 읽었고, 누군가는 죽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었다.

그들이 갖고 있던 공통된 감정은 단 하나.

사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달랐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쳐다본 건 말이다.

뒤에 있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다가왔다간 망설임 없이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킨다라….'

로인은 사신의 힘을 개방한 이후 수명이 다해가는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 왔다.

이미 몇 년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도록 반복한 일.

- 제발 살려줘!

처음 목숨을 거두러 간 날.

로인은 개방한 힘이 스스로에게 잘 어울리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보통은 살려달라고 비는 사람을 보면 한 번쯤은 망설여질 법도 한데 말이다.

- 스칵!

어차피 죽을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

그저 순리의 일부분이라 생각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으리라.

'….'

오랜 시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목숨을 거두기만 한 로인이기에.

몹시 어려운 개념이었다.

거두는 것이 아닌 지킨다는 개념은 말이다.

'무모하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연화를 지키기 위해 운명을 거스르는 길을 선택했던 백운.

그 선택으로 인해 모두가 죽을 거라 생각했지만. 

백운은 로인과 운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이연화를 지켜냈다.

'어떻게?'

그 날부터였다.

순리에 따라 목숨을 거두던 로인의 머릿속.

머릿속에 해결되지 않는 첫 번째 의문이 생겨나 버렸다.

어떻게 한낱 인간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며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가볍게 운명을 비웃어버린 방법.

그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어째서?'

로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두 번째 질문이었다.

메토스가 나타났던 부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로인은 이연화와 백운을 지키며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렇게 되게끔 만든 백운에게 묻고 싶었다.

슥.

하루가 멀다하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의문들.

자리에서 일어난 로인이 바닷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백운.'

당사자인 백운은 모르고 있겠지만, 로인을 걷어찬 순간부터 백운에게는 갑주의 파편이 묻어 있었다. 

파편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상황.

저벅.

몇 날을 고민하던 로인이 걸음을 옮겼다.

'물어봐야겠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

스륵.

성당 위에 있던 로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뜬금없이 나타난 로인.

저게 왜 여기에 있어.

부지에서의 전투 이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로인이었다.

무슨 의도로 도와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사라졌길래 여기까지인 인연이구나 했었다.

"셀린 님, 괜찮아요. 생긴 건 저래도 음… 아니다. 이상한 놈일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제가 있으니 괜찮아요."

"네… 네. 사신이라니."

누가 학자 아니랄까 봐.

로인을 보고 깜짝 놀라길래 덜덜 떨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반대였다.

눈을 반짝이며 로인의 여기저기를 관찰하고 있는 셀린.

흥미로운 걸 발견한 학자의 눈이었다.

"한국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스토커야 뭐야.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날 찾은 건지.

내가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물을까 했지만,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로인이 나를 한국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지였기 때문이다.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길을 열어주겠다는 로인을 응시했다.

사신과 관련된 능력을 개방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정확히 로인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슨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길로 가면 한국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거야?"

"하루면 갈 수 있습니다."

"!?"

하마터면 정체불명의 낫돌이한테 방긋 웃어버릴 뻔했다.

셀린이 비행기를 알아보고 그게 잘 풀린다 할지라도.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확정적으로 하루만에 갈 수 있다니 몹시 반가운 소리였다.

"인간이 아닌, 경계가 모호한 이들이 다닐 수 있는 망자의 길입니다."

오싹.

길 이름이 뭐가 저렇게 무서워.

망자의 길이란 이름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 새끼 이거 설마?

설마 저번에 걷어찬 것 때문에 자신의 홈그라운드로 끌고 들어가 죽이려는 건가 살짝 의심이 들었지만.

- 서걱!

이내 부지에서 우릴 도왔던 게 떠올라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묘하게 착하게 생겼단 말이야.

사신이란 능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엄청난 동안이 아닌 이상 10대로 보이는 어릿어릿함이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뭐, 허튼 짓 하더라도.

어떻게든 찢어내고 나오면 됐기에.

로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한국까지 빨리 가봐야 해서 말이야."

"조건이 있습니다."

설마 제 손에 죽어주십시오 이런 거 아니겠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바로 달려가 입을 쳐버릴 것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을 주시죠."

"오케이! 길 열어, 가자."

뭐가 궁금한지, 내가 대답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기에 일단 길로 들어가야 했다.

대답해 줄 수 없더라도 일단 길을 사용한 뒤여야 하니까.

"…."

대답이 너무 빨랐던 걸까.

조용히 날 응시하는 로인에 나도 모르게 뜨끔 해버렸다.

슥.

다행히 별말 없이 낫을 휘두르는 로인.

로인의 앞으로 흐릿한 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

괴기하게 생긴 문이었다.

로인의 모습과 비슷한 사신의 문양이 박혀 있는 문.

5m 정도 되는 높이로 그렇게 큰 문은 아니었다.

"가시죠."

로인이 손을 휘두르자 문이 열렸고.

문틈 사이로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음산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소피아 님만 아니었으면 들어갈 일 없었겠는데.

보통이라면 색다른 경험을 해보자 하고 신나서 들어갔겠지만.

앞에 있는 망자의 길은 달랐다.

온도적으로 차갑다! 라기보단 온몸을 소름 돋게 만드는 오싹한 느낌이었다.

부디 착한 사신이길 바랍니다.

스스로의 명운을 한 번 빌어 준 뒤.

뒤에서 멍하게 서 있는 셀린을 바라봤다.

식당 창문으로 참새가 날아든 뒤부터 전개가 너무 빨랐던 모양이다.

"셀린 님."

"아 네."

"저 가요!"

한층 더 멍해지던 셀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애는 무언가 상식적으로 따라가려 하면 안되는구나를 이제야 깨달은 듯한 웃음이었다.

"무하타 님이랑 헤리아 님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나중에 또 놀러 온다고."

"하하… 알겠어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겠네요. 한밤중에 갑자기 배에서 나타난 걸 시작으로 거대한 뱀을 잡아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피라미드로 홀로 들어가 다크메타를 없애버리기까지. 거기다 말도 안 되는 회복력에, 창문으로 날아든 참새와 사신 친구까지."

친구는 아니에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무언가 말을 이어가려는 듯한 셀린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백운 님, 정말이지… 뭐 하는 사람이에요?"

밝게 웃으며 물어오는 셀린.

내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셀린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농담이에요. 얼른 가세요, 백운 님."

"네 하하… 저 진짜 갑니다! 또 봐요."

"네, 또 봐요."

저벅.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울리는 속성 작별 인사.

인사를 마친 뒤 로인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 뭐 하는 사람이에요?

뭐 하는 사람이냐… 라.

조금 전 셀린이 물은 걸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망자의 길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척.

"…?"

망자의 길로 들어서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셀린에게 몸을 돌렸다.

나도 정확히 정리는 안 되지만.

"셀린 님, 아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셨죠."

열심히 손을 흔들다 내가 돌아서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셀린.

셀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설 사람이에요."

"네…?"

"올라가고 올라가서."

슥.

손을 쭉 뻗어 하늘 위를 가리켰다.

"저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점에 설 사람입니다!"

* * *

대산의 본사 건물 80층.

많은 문서를 책상에 펼친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대운, 세강, 마천, 정국… 전부 똑같아요."

소피아가 읊은 것은 대산과 함께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들이었다.

그리고 이 기업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회장들이 요 근래에 사라졌어요."

미간을 찌푸리는 아티라를 보며 소피아가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몸이 아프거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한 명이 되고, 둘이 되고 하면서 이상함을 느꼈고요."

사라진 회장들에 대한 공식적인 기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리 이상하게 보일 일도 아니었다.

그저 모종의 이유로 대외 활동을 줄인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함을 느낀 후부터 여러 방면으로 모습을 감춘 회장들에게 연락을 시도했어요. 결과는 당연히."

"닿지 않았군요."

고개를 끄덕인 소피아가 옆에서 서류 한 장을 건넸다.

"회장들이 없어진 기업들 간의 교류에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기업들이 물 밑 교류 뒤에 조용히 계약을 체결했죠."

거기다 이 일을 알아보기 위해 보냈던 인원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제가 만약 이들 중 한 명이라면. 다음 타겟은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사라지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회장, 동시에 그들에게 가장 눈엣가시일 사람."

톡.

"…!"

소피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저일 거예요."

"그런…."

소피아를 향해 아티라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쿠웅!

건물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대산의 건물이 어둠에 휩싸였다.

145화. 기묘한 동행

"어 뭐지?"

"불 왜 나가냐."

대산 본사의 1층.

대산 소속 시큐리티 헌터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물 전체 전기가 나간 것 같습니다."

"얼른 알아보고 복구하자. 건물에 남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두가 퇴근한 시간이라 건물에 남아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것.

"다른 건물은 어때?"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유성이 네가 나갔다 와봐."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기에 선임 시큐리티들이 막내인 김유성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1층을 담당하는 열 명의 시큐리티 중 막내인 김유성.

김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구로 향했다.

끼익.

"어…?"

문밖으로 나간 김유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에 무언가 있었다.

"뭐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에 취한 걸까 눈을 비벼보는 김유성.

눈을 비벼도 그대로인 걸 보니 잠에 취한 건 아니었다.

김유성이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장막…?"

정체불명의 희미한 장막이 대산 본사 주변을 빼곡하게 감싸고 있었다.

"이게 뭐야?"

장막을 향해 김유성이 손을 뻗었다.

투웅…!

만지기 무섭게 다시 튀어나오는 김유성의 손.

이상한 일이었다.

도시에서도 대산의 건물 크기는 손에 꼽았다.

그런 건물의 전기가 완전히 나가버렸음에도 장막 밖의 사람들은 건물에 눈길조차 한번 안 주고 있었다.

"저기요!!"

팔을 휙휙 저으며 소리를 질러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앞을 지나가면서도 김유성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지나치는 사람들.

마치 눈앞에 있는 장막이 대산 건물과 외부를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나눠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

꼴깍.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하자 목이 빳빳해지며 긴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앞에 펼쳐진 장막이 뭔지는 몰랐다.

단지 이 정도 기능을 하는 장막이라면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인 기계이거나 몹시 뛰어난 능력자의 짓일 터.

'뭔가 잘못됐어.'

타닥!

곧바로 몸을 돌린 김유성이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다른 시큐리티들에게 현 상황을 공유하고 경계 레벨을 올린 뒤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끼익!

"이상합니다! 밖이 전부…!?"

그렇게 조금 전까지 있던 1층으로 뛰어들어간 김유성.

선임들을 향해 달려가던 김유성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줄줄.

1층 로비를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한 액체.

불이 나가 그 액체가 무슨 색인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액체가 시작된 장소에 쓰러져 있는 것으로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유추해볼 뿐이었다.

"일루 와, 유성아. 놀랄 필요 없어."

본사 1층 로비에는 김유성을 제외하고 아홉 명의 시큐리티 헌터가 있었다.

지금 로비에 서 있는 건 모두 다섯 명.

나머지 네 명은 바닥에 누워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 이게 뭡니까?"

주춤.

뒤로 물러서며 김유성이 주머니에 있는 비상 신호기를 눌렀다.

실질적으로 대산의 안보를 책임지는 용병단.

비상시에 한해서 그들을 호출할 수 있게끔 나눠준 신호기였다.

삐빅--! 삐빅--!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유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김유성 뒤에 도착해 도열해 있는 대산의 용병단.

그 중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김… 김대석 팀장님!"

한때는 대산에서 내세우는 간판스타였던 김대석.

'어…?'

하지만 이상했다.

김대석은 저번 광산 사건 이후로 대산에서 사라졌을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현재 1층 로비는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진 상황.

그런 상황에 등장한 게 김대석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대산의 용병단이 도착해 있다는 것이었다.

"팀장님 지금…!"

얼굴에 반가운 빛이 돈 김유성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푹.

김대석의 팔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대검이 김유성의 몸을 파고들었다.

"꺼… 꺼억!"

김유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김대석을 쳐다봤지만.

"1층 정리됐습니다."

김대석의 눈은 김유성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작은 눈길조차 아깝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김대석.

잠시 후.

끼익.

본사의 입구를 통해 스무 남짓한 헌터가 들어왔다.

"마천 기업 특수대 헌터 20명 도착했습니다."

끼익.

그 뒤를 이어 속속 들어오는 비슷한 규모의 헌터들.

"정국 기업 특수대 헌터 30명 도착했습니다."

"세강 기업 특수대 헌터 20명 도착했습니다."

각 기업에서 보내온 헌터 부대였다.

몇 팀이 더 도착하고 나자 거의 가득 찬 대산의 로비.

그런 헌터들을 보는 김대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 대석이, 복귀해야지?

얼마 전, 광산 사건으로 폐인처럼 살고 있던 김대석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대산의 용병단을 맡고 있는.

부서로 친다면 거의 1개 본부를 맡고 있는 단장 이천호였다.

- 대산을 접수할 거야.

이천호가 건넨 말은 파격적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대기업이 보이지 않는 동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 남은 대산까지 손에 넣어 한국을 주무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거란 계획이었다.

- 이런 원대한 계획에 대산도 참가해야 하지 않겠나?

이천호가 말하는 요지는 간단했다.

회장인 소피아와 그녀의 측근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자는 것.

그럼으로써 바꿀 수 없는 큰 흐름에 대산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으득.

김대석은 이천호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실현 가능한 문제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을 내쳐버린 지금의 대산.

대산에 복수를 하고 싶었다.

특히 자신을 토벌전으로 밀어 넣었던 최리아에게 말이다.

'기다려라 이 여우년.'

푸확!

어느새 목숨이 끊어진 김유성을 옆으로 치워버리며.

김대석이 대산의 꼭대기를 바라봤다.

스윽.

곧이어 귀에 있는 인이어를 이용해 누군가에 말을 거는 김대석.

"전부 도착했습니다."

인이어 너머에서 김대석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이천호.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천호 특유의 눅눅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산 사냥을 시작한다.

* * *

신기한 장소였다.

공기 자체는 음산하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는 무척이나 높은.

기상청에서 말하는 불쾌지수가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은 듯한 장소였다.

지옥인가.

눈으로 보이는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황무지 배경에 붉은 모래가 둥둥 떠다니는 망자의 길.

쉴새 없이 불어오는 모래 먼지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스으윽.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걷고 있는 로인을 바라봤다.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도 이렇게 가까이서 걸어야 한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 저와 떨어지면 안 됩니다.

망자의 길은 망자만이 다닐 수 있는 길.

- 저 또한 비용을 지불합니다.

사신화를 개방한 로인조차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 제 범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망자들이 눈치챌 겁니다.

꼴깍.

처음엔 망자라는 개념이 잘 안 와닿아 단순히 겁을 주나 했는데.

망자의 길에 들어오자 단숨에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외에도 사방에 널려 있는 무언가들.

뭐라고 말로 설명하긴 힘든 생김새였다.

저건 구울인가.

영화에서 본 것 같았던 구울도 있었다.

피부가 썩고 눈이 빠져 있는 망자.

문제가 있다면 망자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더럽게 크다는 것이었다.

대충 봐도 수천이야.

저것들이 다 날 알아본다고?

안될 말이었다.

슬금슬금.

조금 더 로인의 옆으로 몸을 밀착시킨 후.

혹시나 서로의 발이 꼬일까 싶어 군대 시절처럼 발을 맞추었다.

그나저나 얘가 지불한다는 비용은 뭘까.

사신화를 개방했다고는 하나 로인이 망자는 아니었기에.

로인이 지불하는 비용이 뭘지 궁금했다.

"로인 지불해야 한다는 비용은 뭐야?"

"…."

잠시 몇 발자국 더 걷던 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숨입니다."

!?

괜히 물어봐서 마음만 무거워져 다시 입을 다물려는 찰나.

"제 목숨은 아닙니다. 제가 거둔 목숨들이죠."

"하하… 그렇구만."

다시 마음이 가벼워졌다.

누군가의 목숨을 이용해 걷고 있다는 게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로인은 죽기 직전의 목숨만 거두니 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흠.

말을 걸기 전까지는 먼저 입을 열지 않는 로인.

말수가 참 적은 친구야.

말수가 적은 걸 넘어서 표정도 몹시 무미건조한 로인이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하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얼굴.

같이 걷고 있으면서도 대체 왜? 라는 물음표가 뜨는 상황이었다.

-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을 주시죠.

음.

질문이 아직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한 가지 있었다.

조졌어.

로인이 뭘 궁금해하던 난 대답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로인이 풍기는 신비로움과 음울함을 봤을 때 내가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질문이 아닐 게 분명한 상황.

난 이제 거짓말을 한 죄로 평생 사신에게 쫓기게 되는 건가.

앞으로 닥칠 암울한 미래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럼 죽은 사람이 아닌데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닙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비슷한 힘을 개방한 이들이 있습니다."

로인의 말에 잠시 동공이 흔들렸다.

이전에 봤던 일본의 사신 만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멋있는데…?

"망자의 개념 또한 복잡합니다. 단순히 죽은 존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망자와 비슷한 존재가 된 이들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모든 케이스를 알진 못하지만. 무언가에 의해 봉인이 당한 존재들도 망자의 세계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봉인이 풀리면 다시 나갈 수도 있고요."

봉인이라 하니 광산의 피렌조가 떠올랐다.

이제 보니 고놈 생긴 게 딱 망자였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생김새였다.

망자가 아니면 이상할 것 같은 얼굴.

"사신인 저도 망자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곳은 오직 이 길뿐입니다. 길을 벗어나면 아무리 사신이라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죠."

여전히 무미건조하고 딱딱했지만.

물어본 것에 있어서는 무척 자세히 설명해주는 로인이었다.

묘한 녀석이야.

마치 감정이 없이 딱딱한 사신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말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그냥 나이에 맞는 청소년 같기도 하고 말이다.

죽이려고 걷어찼던 애한테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 하구만 아이러니해.

세상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당시 진짜 죽일 생각으로 했던 발차기.

그런 거에 걷어차인 사람이 도와준다는 말에 신나게 달려온 나도 염치가 없지만.

한 방에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을 도와주는 로인도 이상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염치없는 놈과 이상한 놈이라.

비슷비슷하구먼.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시전하며 걸어가던 중.

딸랑.

응?

어디선가 묘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어오는 망자의 땅인 만큼 처음 듣는 소리가 분명할 터인데.

왜 익숙하지?

딸랑.

걸음을 멈추고 방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무언가 낯이 익은 문양의 문이 거대한 망자들에게 들려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웅.

…!?

방울 소리와 문에 반응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내가 무기를 꺼내기도 전에 무기가 먼저 반응을 하다니.

스륵.

눈을 감고 들어간 무기고의 공간.

공간에선 무기 중 하나가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떨어져 있던,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소중한 이를 마주친 듯한 반응.

왜 그러는 거냐.

무기 중 유일하게 주인의 영혼이 없던 녀석.

비젼 수리검이 강한 빛을 뿜어냈다.

146화. 수리검의 외침

빛을 뿜어내고 있는 수리검을 향해 걸어갔다.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수리검의 빛.

어떻게 빛을 뿜어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영혼이 없는 수리검에게 감정이란 게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절박함.

수리검의 빛에선 알 수 없는 절박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공간에 나타나자 더 격렬하게 뿜어내기 시작한 빛.

수리검은 내게 외치고 있었다.

빨리 눈치채라고.

빨리 눈치채서 어떻게든 해보라는 빛이었다.

왜 그러는 거냐.

저벅.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심하게 요동치는 수리검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화악…!

….

익숙한 빛이 눈 앞을 가리고.

"키르르…!!"

시야 대신 먼저 들려오는 무언가의 울음소리.

낯설지 않은 울음소리였다.

스륵.

시… 시발.

욕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눈을 뜨기 무섭게 바로 앞에서 울어대고 있는 피렌조의 면상.

처음 발견했을 때조차 공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수리검이었다.

그런 수리검에 엉뚱한 타이밍에 공명이 되어버린 지금.

"같이 가자꾸나…!!"

난 공명을 통해 도윤의 시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배경은 토벌전 때 발견했던 부적을 통해 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도윤과 스님들이 피렌조를 상대로 마지막 싸움을 벌였던 곳이었다.

"키르륵!!"

그리고 지금은 당시에 봤던 기억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도윤이 봉인의 문으로 피렌조와 함께 이동해 무언가들의 손에 끌어 당겨지고 있었다.

여유 넘치던 피렌조도 울부짖는 걸 봐선 자신을 끌어 당기고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듯했다.

스스스…!

기분 더럽네.

도윤의 시점으로 와있어서일까.

실시간으로 문에서 튀어나온 손들에 의해 육체가 분해되어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손에 의해 시야까지 뺏긴 후.

쿵!

거대한 소리가 나며 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륵.

눈이 떠졌다.

뭐지?

내가 알고 있던 대로라면 봉인의 문에서 튀어나온 손들에 의해 도윤의 육체와 영혼은 전부 사라졌을 터였다.

그럼에도 지금 눈을 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건.

허.

도윤의 영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어디냐 여긴."

의아해하는 건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시야가 사라지기 전 도윤 역시 영혼의 소멸을 각오했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다시 무언가를 보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눈앞으로 펼쳐진 백색의 공간.

"키르르!"

백색의 공간에 있는 건 도윤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끌고 들어왔던 피렌조.

피렌조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있었다.

딱 봐도 끊을 수 없는 엄청난 사슬들을 몸에 두른 채로 말이다.

철컥.

"…."

몸이 묶여 있는 건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피렌조가 도윤과 다른 게 있다면 하늘로 뻗어있는 정체불명의 사슬이 있다는 것이었다.

육체의 유무인가.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안에서 도윤과 피렌조의 차이점은 그것뿐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완전히 육체가 분해된 도윤과 달리 데몬인 피렌조는 어느 정도의 육체가 남아있었고.

대산에서 개최한 토벌전으로 인해 피를 먹고 부활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사아아.

공명으로 보고 있는 기억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2배속 정도 되었던 빠르기는 5배, 10배, 30배, 50배로 차근차근 늘어갔다.

정확히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간의 인식 범주를 넘긴 시간대가 흘러간 것 같았다.

"…."

항상 똑같은 광경이었다.

변화가 있었다면 딱 하나.

중간에 사슬을 타고 흘러들어온 피로 인해 갇혀 있던 피렌조가 사라졌다는 것.

도윤은 그대로였다.

들어왔을 때의 자세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 그대로 억겁의 시간을 보냈다.

핏.

그리고.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 * *

눈을 뜨자 다시 망자의 길이었다.

가만히 멈춰 서 있는 날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로인.

딸랑.

다시 한번 귓가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망자들에 의해 천천히 짊어져 가고 있는 문.

그래서 난리를 부렸구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비젼 수리검이 미친 듯이 요동친 이유를 말이다.

수리검의 반응과 조금 전 공명을 본 기억.

이 두 가지는 하나의 결론으로 합쳐졌다.

도윤의 영혼은 소멸되지 않았다.

처음 저 문을 봤을 때 익숙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광산 토벌전에서 부적의 공명을 통해 봤던 봉인의 문.

망자들이 끌고 가는 문이 바로 그 문이었다.

스윽.

고개를 들어 멀어지고 있는 문을 바라봤다.

저 문 안에 도윤이 있다.

무기와의 직접 공명은 영혼이 있을 때만 가능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수리검과 공명이 되었다는 건 도윤의 영혼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터.

도윤이 있을 만한 곳은 저 문 너머뿐이었다.

나와 로인이 걷고 있는 길에서 한참 벗어난 곳으로 이동 중인 문.

- 제 범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망자들이 눈치챌 겁니다.

"망자들이 날 눈치채면 어떻게 돼?"

"…?"

갑작스러운 질문.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로인이 입을 열었다.

"같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어떻게든 망자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요."

"혹시 저 문은 뭔지 알아?"

로인의 눈이 들어 올려진 손으로 옮겨졌다.

잠시 문을 살피던 로인.

"귀문."

"귀문…?"

"아까 말한 겁니다. 망자가 아니지만 망자화가 되어버린 것. 셀 수 없이 많은 경우 중 하나가 귀문이죠."

현실과 망자의 세계를 이으며 특정 매개체를 통해 열 수 있는 문이라고 로인은 설명했다.

"망자의 기본 특성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어떻게든 끌어당겨 망자화 시키려고 하죠."

문에서 튀어나왔던 수천 개의 손이 떠올랐다.

그게 망자의 손이구만.

"만약 저 문에 누군가의 영혼이 들어있다면. 그걸 꺼내 줄 순 없는 거야?"

"한 가지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귀문이 열렸던 곳에 육체 같은 연결고리가 남아있는 거죠."

도윤에게 육체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잠시 생각하던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영혼은 살아있을지언정, 저 문에 갇혀 평생 망자의 세계를 떠돌겠죠."

조금 전 공명에서 흘렀던 시간을 떠올렸다.

최소 수백 년이었다.

기억 속에서의 도윤조차 무언가를 생각하는 걸 포기했던 기나긴 시간.

도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에 몸과 정신을 맡긴 채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었다.

"문을 옭아매고 있는 저것들이 다 없어진다면?"

"망자는 살아있는 것들과는 다른 법칙을 가집니다. 인간의 공격으로 인해 작은 상처도 입지 않습니다."

로인은 애초에 문을 옭아매고 있는 망자를 없애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건 바꿔 말하면.

망자를 없앨 수만 있다면 변수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한 가지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법칙이 다르다면 공격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지.

"앞에 가고 있는 문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다시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운명이라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희박합니다. 망자의 세계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세계. 지금 마주친 것도 수십억 분의 일에 가까운 확률이겠죠."

"그렇구만."

나중에 망자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생기더라도.

다시 망자의 세계에서 저 문을 마주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문이 평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지금 구하지 못하더라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은 확보해야 한다.

슥.

고개를 내려 목에 걸려 있는 아테네의 목걸이를 응시했다.

- 어떤 좌표든 새길 수 있는 바인딩석이다.

뒷골목에서 감정사인 에밀리가 알려 준 목걸이의 기능이었다.

음.

슬쩍 로인의 눈치를 살핀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끔 만화책이나 영화를 보면 꼭 하지 말라는 짓을 사서 하는 놈들이 있더라고."

뜬금없는 말 때문이었는지 로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급하단 놈이 아까부터 길을 따라 걷진 않고 이상한 말만 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볼 때마다 욕 엄청 했었는데. 고구마에 답답한 새끼라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한참 즐겁게 보던 만화도 주인공이 그런 행동을 하는 순간 욕을 박아버렸으니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고개를 내려 날 바라보고 있는 로인을 응시했다.

로인이 쌍욕을 박지 않도록 눈빛에 약간의 간절함을 담았다.

"넌 바로 욕하면서 가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문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게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간신히 갔는데 에밀리의 말이 틀려 목걸이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놓쳐버릴지도 모르는 도윤의 영혼.

이대로 못 본 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뭐 하려는 겁니까?"

수상쩍은 기운을 느껴서일까.

로인이 불안한 눈동자로 날 응시했다.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올게."

"무슨…!!"

로인이 무언가를 대꾸하기도 전.

[비젼 수리검]

수리검을 멀어지고 있는 마차를 향해 집어 던졌다.

* * *

대산의 본사 70층.

"한국에 오셨다면서요."

# 회장님이 웬일로 한국에 있는 업무를 맡겼더군.

자리에 앉은 최리아가 몸을 기댔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 

대산의 기둥 중 하나로 불리고 있는 헌터 장판석이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화로 최라아가 장판석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하세요.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소피아에게 들었던 말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 무슨 일이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본사로..

뚝.

"판석 님…?"

전기가 나감과 동시에 끊어져 버린 전화.

똑똑똑.

"실장님!"

마침 불렀던 전수희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허겁지겁 달려온 건지 전수희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무언가 이상해요!"

전수희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전 전기가 나가 시큐리티실로 했던 전화의 녹음.

# 지금 확인 중입니다. 저희도 갑자기 나… 탕탕탕!! 서걱!! 끄억!

"…!"

녹음의 끝엔 들려선 안 되는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공격당한 듯한 소리.

전수희가 다급히 달려온 이유였다.

슥.

최리아가 회장실로 향하는 전화를 들어봤지만.

# 띠--- 띠---

먹통이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대산 전체의 전기가 나가고 모든 통신이 먹통이 되어버리다니.

그렇게 잠시 최라아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띵.

"…?"

최리아의 사무실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

전기가 나가 움직여선 안 되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30층.

# 31층.

계속해서 위로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

"수희야 문 닫아."

"네… 네!"

끼이이… 텁!

"꺄악!!"

전수희가 커다란 문을 닫기 전.

문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뻗어져 들어왔다.

147화. 문으로

"꺄악!!"

갑자기 등장한 손에 전수희가 뒤로 넘어가고.

최리아가 그런 전수희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했다.

"대… 대현 님?!"

대외협력부서의 이대현과 전국현.

조금 전 불쑥 등장한 건 이대현의 손이었다.

꾸벅.

최리아를 발견하자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이대현과 전국현.

두 사람도 계단을 통해 올라온 건지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잠시 숨을 고른 이대현이 입을 열었다. 

"아래층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래층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총성과 전투 소리.

이대현과 전국현이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 이유였다.

"대화 소리가 들려서 와봤습니다."

그러던 와중 들려온 최리아와 전수희의 목소리에 이곳으로 온 것.

무언가를 생각하던 최리아가 두 사람을 향해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들어가겠습니다."

이대현과 전국현이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띵.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70층에 멈춰 서고.

열댓 명의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

끼릭… 쿠아아아!

"문에서 떨어져요!"

문을 마저 닫은 이대현이 전수희와 전국현을 안고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앙!

문밖에서 터지는 거대한 폭발음.

우당탕!

몸을 날린 이대현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문을 바라봤다.

"로… 로켓런처."

이대현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곳은 대산 본사의 70층.

어디 내전이 일어난 전쟁터 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있는 걸 확인한 뒤 로켓런처를 쏘다니.

현실감이 없는 일이었다.

쿠아아아… 쾅!

이젠 믿으라는 듯 다시 한 발 날아와 문을 두들기는 로켓런처.

굳게 닫혀 있는 사무실의 문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얼마 못 버틸 거예요."

최리아가 흔들리는 문을 바라봤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방탄의 기능을 가진 특수 소재로 만들어 놓긴 했지만.

건물 한가운데서 로켓런처가 쏘아질 것까지 대비된 건 아니었다.

"무기는 가지고 있나요?"

최리아가 묻자 이대현과 전국현이 품에서 몇 자루의 화기를 꺼냈다.

심상치 않은 듯한 상황에 혹시나 싶어 챙겨온 것들이었다.

"각자가 가진 능력은요?"

최리아의 물음에 이대현과 전국현이 각자의 능력을 설명했다.

'제대로 전투가 가능한 건 대현 님뿐인가.'

최리아 역시 암시 능력을 통해 전투에 도움은 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서포터의 능력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이상 발동할 수 없는 능력이었기에 총탄이 오가는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은 암시.

'금방 제압당할 거야.'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적만 열 명은 되어 보였다.

이대현 하나만으로 뚫기에는 무리인 상황.

쾅!

다시 한 발의 로켓이 문으로 날아들고.

사무실의 문에 생겼던 균열이 깊어졌다.

앞으로 문이 버텨낼 수 있는 건 한 발 정도였다.

철컥.

이대현 역시 이 사실을 안 건지 견착한 총을 문으로 겨누었다.

"나가는 길은 문 옆에 있는 계단뿐이에요."

최리아가 남은 총기를 집자 옆에 있던 전수희와 전국현도 각자의 무기를 챙겨 문을 향해 겨눴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몰라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쿠우우…!

문을 부수기 위한 마지막 한 발이 날아들고.

콰아아!

굉음과 함께 사무실을 지키던 문이 박살났다.

자욱해진 먼지 속에서 비춰지는 레이져 포인터를 보며 사무실의 인원들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쿠직!

쩌억!

"끄악!"

"누… 누구냐! 꺽!"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먼지 속에서 타격음이 들려왔다.

탕탕탕!! 쩌억!!

정렬되어 사무실로 향하던 적들의 레이져 포인터 역시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

도착한 누군가가 사무실로 향하던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누구지?'

용병단은 본사에 거주하고 있지 않은 상황.

전수희의 말을 들어봤을 때 본사에 있던 시큐리티 역시 이미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대현처럼 회사에 남아있던 누군가일 수도 있지만 다가오던 헌터들을 상대로 이 정도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은 없었다.

….

쩌억!

"끄… 억."

누군가의 신음을 마지막으로 정적이 찾아온 70층.

꼴깍.

들려오는 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침 넘김 소리뿐이었다.

마지막에 들려온 게 누구의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엔 강한 상대를 이겨낼 만한 전력이 없었기에 부디 같은 편이길 바라야 했다.

"최리아 실장님?"

아직 걷히지 않은 먼지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리나 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먼지를 뚫고 아티라의 직속 부대 마틸다의 일원, 세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에 있었던 작전으로 인해 부상을 입었는지 한쪽 팔과 목에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툭.

걸어 들어온 세리나가 잡고 있던 적 헌터 한 명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바닥으로 쓰러지며 벗겨진 헬멧에 헌터의 얼굴이 드러났다.

"…!"

누군지를 확인한 최리아의 눈이 커졌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대산 용병단에 속해 있는 헌터 중 한 명의 얼굴.

'어째서…?'

대산을 지켜야 하는 용병단이 건물 안에서 로켓을 쏴대다니.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저도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단순한 습격이 아닙니다."

세리나도 부상으로 인해 체력이 부치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띵.

언제 내려간 건지 다시 한번 70층을 향해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아군이 타고 있을 확률은 낮았다.

"80층으로 가시죠. 회장님과 아티라 님께 가봐야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최리아와 일행이 세리나를 따라 비상구로 향했다.

* * *

"그럼 소피아 회장님은…!"

계단을 오르며 세리나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은 최리아.

회장인 소피아는 얼마 전부터 주변 기업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주목을 했으며.

심상치 않은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는 것이었다.

"예,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대놓고 쳐들어올 줄은."

만약을 대비해 마틸다 전원을 본사에 대기 시켜놨다는 소피아.

그런 소피아조차 지금의 공격은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타이밍이었다.

'설마 판석 님도…?'

소피아의 명령을 받아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장판석의 말을 떠올렸다.

보통 대산의 기둥들은 해외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장판석을 직접 불러들였다는 건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거라 볼 수 있었다.

"적의 전력은 보통이 아닙니다. 아마 저희와 싸웠던 적보다 더 강한 전력이 현재 본사로 들어와 있겠죠."

앞장서고 있는 세리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포함한 마틸다를 기다리고 있던 함정.

가까스로 뿌리치고 빠져나오긴 했지만 함정에 대기 중이던 적들은 무척 강했었다.

"회장님께서 추가로 조치를 취해놓으셨을 겁니다. 80층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버텨야 합니다."

세리나의 말을 들으며 최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는 장판석.

인천과 본사는 꽤 거리가 되기에 도착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기둥 급 헌터가 오고 있다는 건, 어떻게든 버티면 희망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75층은 층을 가로질러야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옵니다."

세리나가 앞에 있는 75층의 문을 열어젖혔다.

"제가 앞장설 테니 뒤쳐지지 않게…."

쩌억!!

"!!"

세리나가 75층으로 발을 딛는 순간.

갑자기 날아온 공격이 세리나를 날려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의 몸이 굳은 상황.

뚜벅.

불이 꺼진 75층에서 복면의 남자가 서서히 걸어 나왔다.

"이거 이거… 마틸다도 한물 간 모양이구먼."

기계음이 섞여있지만 뭔가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가르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무르진 않았었는데 말이야. 아주 개판이 됐어."

'가르쳐…?'

"마틸다가 되기 위해서 마지막엔 5명이서 서로를 죽이게 시켰었지. 그게 마지막 관문이었거든. 요새는 개나소나 어느 정도 테스트만 통과하면 마틸다를 시켜 주는 것 같지만 말이야."

얘기를 듣던 최리아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당신은 설마…!"

직속 부대 마틸다가 아티라에게 소속되기 전.

재능 있는 인원들을 뽑아 마틸다에 소속될 수 있도록 키운 사람이 있었다.

"교관, 카리조."

"오호… 우리가 구면이던가?"

"유명하시니까요."

최리아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카리조가 유명한 인물이어서가 아니었다.

카리조를 부르는 이름은 두 가지가 있었다.

마틸다를 육성하는 죽음의 교관, 혹은 대산의 기둥.

카리조는 현 대산의 기둥 중 한 명이었다.

'기둥마저…!'

"그대로 내버려 뒀어야지. 날 밖으로 내쫓으니 마틸다가 이렇게 약해빠진 거 아니겠나? 그 덕분에."

서서히 다가오는 카리조.

"자네들도 죽는 거고 말이야."

카리조의 팔에서 뿜어져 나온 물체가 최리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잠깐…!!"

로인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

[비젼]

문 쪽으로 날린 수리검으로 몸을 옮겼다.

스윽!

오씨.

로인의 곁을 떠나 비젼하는 순간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망자의 눈길.

살면서 이렇게 많은 눈길을 받아본 적이 있나 싶었다.

"구어어어!"

생긴 거에 어울리는 소리를 내며 망자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수천의 망자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모습이라니.

무사히 빠져나가더라도 악몽은 확정이었다.

철그럭.

도윤이 갇혀 있을 문엔 수많은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땅 아래로 뻗어있어 정확히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졌다.

저 사슬을 처리하지 않으면 도윤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일단.

"구어!"

이거부터 치우자.

문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는 수 많은 망자들.

이것들부터 치워야 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앤 보니&메리 리드 - 동기화] 

숫자가 하도 많아 자기들끼리 타고 오르고 난리가 난 망자놈들.

발아래서부터 머리끝까지 채운 망자가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좋아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이거 좀 먹어봐라.

[데스페라도]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덮어지는 망자들을 향해 쏘아지는 빛의 탄환 세례.

날 덮어 오던 망자들이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스르르…!

뭔가 탄에 제대로 데미지를 받았다기보단 관통당한 길 그대로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사용 시간이 끝날 때까지 돌고 나자 사방을 덮어 오던 망자들이 모두 바스라진 상태.

그 틈을 타 사슬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팔이 나가지 않도록 땅에 발을 짚은 뒤.

[발도]

끼아아아아아아아----!

검기를 뿜어냈다.

서걱.

베였…!?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끊어진 듯한 사슬의 모습에 잠시 기대를 품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비웃듯 곧바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사슬.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는 건 사슬뿐만이 아니었다.

"구어어어어어!!"

조금 전 리볼버로 쓸어냈던 녀석들 역시 다시 모습을 되찾으며 내게 밀려들고 있었다.

"후우!"

로인의 말대로 공격이 통하지 않는 녀석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하늘로 몸을 도약했다.

지금 데려가진 못하더라도.

쐐에에엑.

조금씩 가까워지는 봉인의 문.

알려줘야 한다…!

뒤에서 밀려드는 망자들을 뒤로하고.

눈앞에 있는 문을 향해.

쑤욱!

힘껏 손을 뻗었다.

148화. 열리지 않았던 문

새하얀 백색의 공간.

공간에 존재하는 건 한 명의 남자, 도윤이었다.

쿠구구.

한 가지 더 존재하는 게 있다면.

도윤과 마주 보고 있는 거대한 문이었다.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채 굳게 닫혀 있는 문.

스윽.

도윤이 고개를 들어 오랫동안 닫혔던 문을 바라봤다.

망자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게 된 백색의 공간.

공간으로 들어올 때 한 번 열린 뒤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던 문이었다.

'한 번 있군.'

현생에 육체가 존재하던 피렌조가 사라진, 피렌조를 묶고 있던 육체의 사슬에서 피가 흘러내린 날을 제외하고 말이다.

'….'

도윤이 피렌조가 사라지던 날을 떠올렸다.

결국엔 자신이 이겼다는 듯 광적인 웃음을 토해내고 사라졌던 피렌조.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런 피렌조를 보면서도 도윤은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었다.

'수십 년을 쫓아왔던 녀석인데 어째서일까.'

도윤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피렌조는 도윤이 도사가 된 뒤로 오랜 시간을 쫓았던 악귀였다.

사람과 동물의 피를 먹으며 점점 강해지는 피렌조.

손 쓸 수 없을 때까지 강해지기 전에 처리하고자 하루도 쉬지 않고 쫓았었다.

결국 너무 강해져 봉인의 문으로 함께 몸을 던지게 됐지만 말이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응시했다.

매일 매일이 똑같은 것들의 연속이었다.

그저 백색인 공간뿐만이 아니었다.

몸을 묶고 있는 사슬로 인해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몸.

몸에서는 살아있을 때 느꼈던 수면욕이나 식욕 같은 것들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을 뜬 채 가늠조차 안 되는 시간을 보내온 도윤.

'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문뜩 궁금해졌다.

더 이상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공간에서 지내온 자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말이다.

'난 뭐지?'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고 있었다.

난 대체 왜 여기에 앉아있어야 하며 이 상태로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걸까란 의구심.

이렇게 눈만 뜨고 있는데 나는 과연 도윤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인가란 의구심.

이런 의구심을 떠올려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는 무용론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 이런 생각들이 도윤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

이럴 때마다 도윤은 애써 과거를 떠올렸다.

여러 의구심이 쌓이며 자신이란 존재를 지워가는 느낌이 들었기에.

조금이라도 도윤이라는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을 되살렸다.

도사 도윤.

피렌조와 함께 봉인 당하기 전 도윤이 불리던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되지 않는 힘과 신비로운 능력을 사용하며 조선에 나타났던 악귀들을 처치했기에.

많은 이들은 도윤을 도사라 부르며 악귀 사냥꾼이란 칭호도 붙여주었다.

- 콰앙!

악귀를 사냥하던 중 얻게 된 수리검.

어떤 연유로 만들어진 건진 알 수 없었다.

단지 엄청난 무게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들에게 외면받으며 먼지만 쌓여가던 녀석이었다.

- 제가 가져가죠.

애초에 도윤의 힘은 사람의 한계를 넘은 상태였다.

수리검의 엄청난 무게.

너무 많이 사용하면 팔에 무리가 가는 건 도윤도 마찬가지였지만.

도윤은 수리검이 좋았다.

손에 감기는 묵직함과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경도가 마음에 들었다.

- 팟.

수리검을 사용하게 되며 얻은 능력도 있었다.

도윤의 도력과 합쳐지자 수리검이 위치한 곳으로 몸을 이동시키는 게 가능해진 것.

- 우린 최고의 동지구나.

누군가에겐 단순히 무겁고 사용하기 힘든 무기에 불과했던 수리검.

도윤에게 있어선 아니었다.

항상 홀로 악귀를 사냥하며 방방곡곡을 떠돌았던 도윤이었기에.

수리검은 도윤에게 있어 무기인 동시에 함께 악귀를 사냥하는 동지 같은 존재였다.

'….'

마지막으로 수리검을 떠올리며 도윤이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게 가능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정신을 나가게 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 가능할 때까진… 놓지 말아보자.'

스스로를 놓치는 순간 자신이 사냥해 오던 악귀와 다름없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아무 기약도 없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놓지 않고 잡고 있었던 이유는 말이다.

가끔은 어차피 미치든 악귀가 되든 벗어나지 못하는 공간이기에 아예 내려놔 버리고 편해질까 생각도 들었었지만.

반짝.

아직까지 기억 속엔 작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함께 싸울 때 황금빛을 뿜어내던 수리검과 같은 빛이 말이다.

드드드…!

'…?'

여느 날과 같이 생각을 마치고 눈을 감은 도윤.

도윤의 귓가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끼긱… 끼긱!

어째서인지 흔들리고 있는 거대한 문.

도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응시했다.

도윤 역시 봉인의 문이 어떠한 원리로 이런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이곳에서 지내며 분명히 깨닫게 된 건 있었다.

저 문은 앞으로 절대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드드드… 콰앙!!

하지만.

그런 도윤의 깨달음을 비웃듯.

앞에 있던 문이 활짝 열어 젖혀졌다.

* * *

"으아아아!"

열린 문에서 힘을 쥐어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쏘옥.

그리고 도윤이 있는 공간 안으로 들이 밀어진 얼굴.

짙은 흑발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애초에 도윤이 살던 시대의 사람과는 무척이나 다른 생김새였다.

"응? 도윤!!"

하지만.

남자는 도윤을 알고 있었다.

간신히 내민 얼굴로 도윤을 발견하자마자 이름을 외치는 남자.

'…!!'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놀라움.

갑작스런 상황에 도윤이 말을 잃은 채 남자를 응시했다.

덥썩! 덥썩! 쩌적!

"아 좀!"

남자의 얼굴과 몸으로 달라붙는 망자의 손길들.

남자는 안간힘을 쓰며 손길의 힘을 버티고 있었다.

"놔봐 이 병신들아 좀!"

그렇게 몇 개의 손을 간신히 뿌리친 남자가 도윤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비젼 수리검.

수리검을 발견한 도윤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어찌 알아보지 못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을 자신과 동고동락해 온 동지였다.

'새로운 수리검의 주인.'

도윤이 수리검을 내밀고 있는 남자, 백운을 바라봤다.

수리검을 본 뒤에야 알 것 같았다.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원주인인 자신을 넘어 보다 더 수리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이었다.

"도윤… 조… 끄… 끄아아!"

도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백운이 수십 겹 쌓인 망자의 손길에 끌리기 시작했다.

드드드… 쿠웅!

그렇게 백운이 밖으로 끌려나가고.

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굳게 닫히며 공간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도윤조차 알 수 없었다.

문은 대체 어디에 연결되어 있으며 백운이 어떻게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건지 말이다.

….

그렇게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도윤이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콰아앙!!

"으랴아!!"

그리고 다시 한번 열어 젖혀지는 문.

문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백운은 온몸에 푸른 비늘을 감싸고 있었다.

조금 전과 비교조차 안 되는 망자의 손이 백운을 붙잡고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힘으로 버텨내고 있는 백운이었다.

"도윤!!"

고요하던 백색 공간으로 백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무기왕 백운이다!!"

어떻게든 앞으로 고개를 내민 백운이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도윤을 응시했다.

"딱 기다리고 있어!"

"…!"

수천 개의 손에 붙잡혀 있는 와중에도.

입가에 확신 가득한 미소를 짓는 백운.

망자들에게 끌려나가기 직전, 백운이 도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조건 데리러 온다!!!"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지른 백운이 망자들에 의해 문밖으로 끌려나갔다.

* * *

쿵!

있다.

문이 닫히고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문을 여는 순간까지 약간 걱정했었다.

- 만약 문 너머에 도윤이 없으면 어떡하지?

란 걱정이었다.

물론 로인의 곁을 떠나기 전에 마쳤어야 하는 걱정이었지만. 

이런 걸 따지며 무엇이 합리적인 행동인지를 계산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있으면 됐다.

고개를 내려 아테네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문에 손을 대며 들이대자 빛을 뿜어냈었던 목걸이.

한 번도 바인딩석을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목걸이에 무언가 기록되었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뿐이지만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길도 확보했다.

남은 문제는.

"구어어어어어!"

"크라아아아아!"

이런 구울 새끼들!

도윤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유탈라스까지 꺼내며 어떻게든 버텨봤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수천을 넘어 이제는 만을 거뜬히 넘어 보이는 손이 몸에 얽혀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괴력.

침입자에 광분한 망자들은 온 힘을 다해 날 끌어내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내가 여기서."

[라 - 불꽃의 문양]

화륵.

비늘로 만들어진 갑주 위로 라의 문양이 새겨졌다.

벌써부터 새어 나오기 시작한 엄청난 온도의 불꽃.

"망자가 되어 줄 거 같으냐!!"

화르르르… 퍼엉!!

전력을 다해 불꽃을 뿜어냈다.

상체에서부터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라의 불꽃.

"그어어…!!"

나를 감싸던 망자들이 불꽃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길 기대하진 않았다.

쯧.

문과 문을 묶고 있는 사슬들은 라의 불꽃에도 아랑곳 않고 멀쩡한 상태.

사라졌던 망자들 역시 잠시 후엔 다시 몰려들게 분명했다.

불꽃으로 인해 생긴 틈.

잠깐의 틈을 이용해 도윤이 있는 문을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려."

"그어어!"

잠시 사라졌던 망자들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무조건 돌아온다."

도윤에겐 닿지 않을 말을 남기고 수리검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문의 모습을 눈에 확실히 담은 후.

후웅…!

로인이 있는 길을 향해 수리검을 던졌다.

* * *

공간으로 들어온 백운에 의해 순간이지만 소란스러웠던 공간.

다시 고요함이 찾아온 공간에서 도윤이 문을 응시했다.

'문이 열렸다.'

절대 열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문.

작은 희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조금 전 그 문이 열렸다.

그것도 활짝 말이다.

'….'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희망도 변화도 없는 공간에서.

가늠하기 힘든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이지만 자신을 잃어가던 것을 말이다.

화륵.

하지만.

점점 비워지고 비워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던 도윤의 속에서.

무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 무조건 데리러 온다!!!

마지막으로 백운이 남겼던 말을 떠올리며.

"무조건."

싱긋.

도윤의 입가로 수백 년 만에 미소가 그려졌다.

"기다린다."

149화. 기둥의 싸움

우당탕!

흐트러진 자세로 너무 급하게 수리검을 던진 탓일까.

비젼과 동시에 눈앞으로 모래 바닥이 다가왔다.

"꾸억!"

그대로 모래에 박힌 얼굴.

그래도 브레이크 역할은 했는지 목적한 곳에 제대로 멈춰 선 모양이었다.

"세… 세이프."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망자들에 세이프를 외치며 눈을 떴다.

아까 내가 떠났던 그 자리에 서서 경멸 섞인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로인.

낫으로 찍으려나.

바로 찍히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로인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물론 다른 성질의 감정이 섞여 있는 건 아니었다.

분노와 살의, 경멸 등 당장에라도 눈앞의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일관된 성질의 감정들이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놀라움.

같다면 같고 다르다면 다를 수 있지만.

로인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 인간은 대체 뭘 처먹었길래 이런 짓이 가능한 걸까 하는 눈빛.

"미안해."

이대로 버리고 가도 무죄였기에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항상 무미건조했던 로인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로인이 지금 얼마나 놀란 상태인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버리고 가도 무죄지.

출발부터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냅다 뛰쳐나가 버렸으니.

나 같았으면 이미 자리를 벗어난 순간 버리고 길을 떠났을 것이다.

"뭘 하고 온 겁니까?"

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육두문자가 튀어나와도 얌전히 들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한 백배는 덜 매운 첫 마디였다.

"저 문 안에 친구가 있거든."

"망자들이 이끄는 문에… 친구가 있다고요?"

아무래도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방금 망자의 길을 들어온 놈이 다짜고짜 친구를 만나고 왔다니.

"그게."

로인에게 도윤과 수리검에 대한 간략한 요약 설명을 해주었다.

문에 진짜 도윤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뛰쳐나갔다는 약간의 자기변명도 섞어서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난 다시 저기에 가야 하거든. 물론 방법을 찾은 다음이어야겠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망자는 다른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망자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위험을 감수하며 그곳에 간 겁니까? 망자를 못 죽이면 저 사슬을 끊을 수 없고, 사슬을 끊을 수 없으면 당신의 친구는 어차피 구할 수 없습니다."

툭툭.

옷에 묻은 모래를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리볼버의 탄환도, 스이카의 검기도, 라의 불꽃도 망자를 죽이진 못했다.

지금 나에겐 망자를 죽일 수단이 없었다.

"나도 알고 있어."

명확히 알고 있으며 인정했기에 목걸이에 길만을 각인시킨 뒤 후퇴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에 한정된 얘기일 뿐."

"나중이 되면 망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겁니까? 당신 덕에 친구가 있는 문에는 훨씬 많은 망자가 들러붙게 되었습니다."

로인의 말대로였다.

이제 도윤이 있는 문에는 수천을 넘어 수만은 되어 보이는 망자가 함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어."

수만이든 수십만이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망자를 죽일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내가 손안에 넣는 순간.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저놈들은 모조리 죽을 테니까."

분명 있을 거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무기들.

분명 망자를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존재할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말하면서도 과한 확신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내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도대체 이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못 따라가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로인을 향해 조금 전보다 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그려주었다.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되게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앗.

잠시 말이 없는 로인을 바라보다 너무 염치가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낫으로 찍어 죽여도 모자른 놈이 이런 말이나 뱉고 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로인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는 훨씬 차분해졌다는 것이었다.

"가… 갈까."

약간의 어색함이 찾아오려는 찰나.

애써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다행히 순순히 따라 걷기 시작한 로인.

스윽.

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봤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약간은 지체됐기에.

일단은.

걷는 속도를 계속해서 올려갔다.

소피아다.

* * *

대산의 80층.

띵.

저층부터 시작된 전용 엘리베이터가 80층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제 불찰이군요."

소피아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이렇게 빠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이런 대담한 방법으로 본사를 치고 들어올 줄은 더더욱 말이다.

"내부 인원들과의 연락도 모두 끊겼습니다."

아티라의 말에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더 간과하게 있었다.

내부에 박혀 있는 가시의 크기와 깊이.

'훨씬 더 큰 가시가, 훨씬 더 깊게 박혀 있었구나.'

단순히 내통자 수준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진행되는 사태를 봤을 때 내부의 가시는 오랜 시간을 이빨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순식간에 뚫린다는 건 아마도."

"이천호 단장."

이쯤 되니 박혀 있는 가시가 누군지도 짐작이 갔다.

이천호가 아닌 이상 본사가 이렇게 쉽게 뚫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알아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요.'

소피아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소피아의 능력은 상대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단순한 빛이 아닌 상대방의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빛.

전투를 한다거나 특정 일을 해결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서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만난 상대를 평가 내리는데 있어서는 무척이나 유리한 능력이었다.

'이천호 단장의 빛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이천호를 만났을 때.

소피아는 능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과거 뜨거운 열정만이 가득했던 그의 빛이 점차 퇴색되다 탁한 검은색이 됐단 사실을 말이다.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그런 색이었다면 시도조차 안했을 터였다.

하지만.

소피아는 이천호의 열정 가득했던 빛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에.

자신이 노력하면 이천호의 빛을 다시 옛날의 그 색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 아집이 회사를 위험하게 만들었군요.'

- 회장님은 사람이 너무 좋은 게 흠입니다.

언젠가 장판석이 반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다.

장난스러운 농담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정이 많아 함께 해온 이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소피아.

장판석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말한 걸 수도 있었다.

언젠가 그런 소피아의 흠이 위험을 불러올 것이란 걸 말이다.

질끈.

소피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안일함 때문에 회사는 물론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티라마저 위험에 빠뜨리게 되었다.

"소피아 님."

아티라의 부름에 소피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혹시나 스스로를 책망하고 계신다면,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긴박한 상황임에도 차분히 말을 건네는 아티라.

아티라가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소피아를 바라봤다.

"저를 포함해 소피아 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소피아 님을 좋아하고 존경해서 모여있는 거니까요."

"아티라.."

"모두가 퇴근한 시간이라 큰 인명피해는 없을 겁니다. 70층에 있는 최리아 님 역시 마틸다가 데리러 갔을 테고요."

띵.

거의 다 올라온 엘리베이터를 보며 아티라가 쓰고 있는 안경을 치켜올렸다.

"소피아 님이 살아 계시다면 대산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철컥.

아티라가 옆에 뒀던 기다란 케이스를 열어젖혔다.

안에 들어있는 건 가늘고 긴 세검.

검투사의 능력을 개방한 아티라를 위한 무기였다.

저벅.

세검을 집어 든 아티라가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오랫동안 소피아의 곁을 지켜왔기에.

실전 경험 자체는 오래된 상태였다.

하지만.

초창기엔 지옥과도 같던 싸움을 헤쳐온 아티라였기에.

죽고 죽이는 전투에 대한 감각은 잠들어 있을 뿐 사라진 게 아니었다.

"적은 제가 막겠습니다."

끼이익.

아티라가 소피아가 있는 문을 닫기 시작하고.

"아티라 잠깐…!"

닫혀 가는 문틈으로 밝게 그려져 있는 아티라의 미소가 보였다.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쿵…!

완전히 닫혀 방어술식까지 발동한 회장실의 문을 확인한 후.

띵!

아티라가 80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를 응시했다.

조금 전 따듯한 미소를 지었던 아티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소피아를 위협하는 모든 위험을 제거하겠다는 일념을 가진 한 명의 검투사가 있을 뿐이었다.

스르륵.

"토베 5식."

낮게 중얼거린 아티라.

아티라의 세검 끝으로 에너지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끼이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회장실로 바로…!?"

"살."

쐐에에엑---!

순속에 가까운 아티라의 세검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카리조가 내뿜은 공격을 마지막으로.

질끈.

최리아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다름 아닌 대산의 기둥인 카리조였기에.

운이 좋아서 목숨을 건지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렇게 곧 닿아 자신의 목숨을 끊어 놓을 공격을 떠올리며 최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후두둑.

'…?'

하지만.

무언가에 막힌 세리조의 공격은 최라아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잠이 오나? 최리아 실장."

"…!!"

장난기 섞인 걸걸한 목소리에 최라아가 눈을 떴다.

190이 넘는 키와 사방으로 뻗어져 있는 무지막지한 근육.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겨진 샛노랑 머리까지.

여전히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카리조의 공격을 막은 남자.

대산의 기둥 헌터 중 한 명인 장판석이 최리아의 눈앞에 서 있었다.

"빌어먹을 노인네가 노망이 들었나. 이제 피아식별도 못 하는 건가?"

"클클… 많이 컸구나 장판석이."

"난 원래 컸어 노친네야. 당신은 원래 작았고."

스르르.

거침없는 입담 덕이었을까.

공격을 거둔 카리조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이미 많이 죽이면서 온 모양이군."

"맞아. 오는 길에 감히 대산에 침입한 벌레들이 있길래 밟아 죽이면서 왔지."

카리조의 말대로 장판석의 주먹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슥.

고개를 돌린 장판석이 최리아와 일행을 응시했다.

"가던 길 가라. 여긴 내가 맡을 테니."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고개를 끄덕인 최리아가 일행을 데리고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최리아를 응시하는 카리조.

그런 카리조를 향해 장판석이 입을 열었다.

"노친네가 아무리 노망이 들었어도. 날 앞에 두고 딴짓을 하진 않겠지?"

"클클."

카리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안 죽어도 어차피 죽을 것들. 굳이 내가 여기서 죽일 필요는 없겠지."

꿀렁.

카리조의 몸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거대한 팔과 다리 형상을 만들어낸 액체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자 그럼, 대산을 지키는 늑대 실력 좀 볼까?"

"실력 좀 보자니 말투가 좀 건방지구만."

우두두둑…!

안 그래도 거대한 덩치가 더 키워지고 있는 장판석.

몸으로 자라나는 백색 털과 함께 장판석의 입안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났다.

투둑.

자라난 손톱과 발톱을 끝으로.

장판석이 완벽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전투 준비를 마친 카리조와 장판석.

"웨어울프, 장판석."

"교관, 카리조."

잠시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이.

팟!

콰아아앙!

격돌하기 시작했다.

150화. 호출받은 사람

- 소피아, 소피아 일리스. 잘 부탁해요.

개방이 나타나기 전의 일이었다.

아티라가 소피아를 만난 것은 말이다.

- 똑똑한 친구라고 들었어요. 어때요? 저랑 같이 가지 않을래요?

갑자기 비싼 차를 타고 나타나 손을 내밀었던 소피아.

대부분의 이가 황당해할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찰나.

지내고 있는 곳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사람이 나타나 함께 가자고 하다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 ….

비현실적인 일이고 어린 나이의 아티라에겐 당장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누군지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같이 가자니.

따라가서 무슨 짓을 당할지 알고 함께 간단 말인가.

- 갈게요.

하지만, 아티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피아의 손을 잡았다.

어린 나이부터 부모님에게 버려져 시설에서 자랐던 아티라.

시설에서 지내며 아티라는 항상 생각했었다.

과연 여기서 발버둥 친다 한들 인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 나타난 소피아의 손길.

따라가서 뭘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이 없는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다.

- 좋아요.

머릿속에선 밑져야 본전이라는 계산이 있었지만.

단순히 이것 때문에 소피아의 손을 잡은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소피아에게선 빛이 났다.

무언가 포근하게 감싸주는 빛.

이 사람은 믿고 따라가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잘 부탁해요.

그렇게 따라나선 소피아의 길.

10년이 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길이었지만.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는커녕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푸확!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개방이 등장하며 생겨난 대산의 적들.

갑자기 생긴 힘은 사람들에게 무모함을 선물했다.

개방 전에는 기업의 경영과 전략으로 승부 했었다면.

이제는 새로 생긴 힘을 이용해 불리한 점을 메꾸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적들이 나타났고, 쉴새 없이 대산을 공격했다.

- 토베 3식.

그때마다 아티라는 조금의 불평도 없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싸움터로 나가 대산의 적을 제거했다.

상처가 쌓이고 쌓여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날에도 아티라는 주저 없이 적에게 향했다.

- 아티라!

소피아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대산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굳이 아티라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싸움에도.

아티라는 직접 소피아를 노리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검투사의 능력이 개방된 이유.'

자신에게 길을 열어 준.

손을 내밀어 빛으로 꺼내준 소피아를 지키는 것.

그것이 아티라가 싸우는 이유였다.

푸욱… 푹!!

"끄아악!"

아티라의 세검이 적 헌터의 어깨를 꿰뚫었다.

'대산을.'

푸화악!

'소피아 님을.'

피를 흩뿌리며 뒤로 물러나는 침입자.

'지킨다.'

"하아… 하아."

아티라가 숨을 몰아쉬며 물러난 적을 바라봤다.

저벅.

저벅.

조금 전의 적은 물러났지만 문제가 있었다.

물러난 자는 수많은 적들 중 한 명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짝. 짝. 짝.

아티라와 가장 떨어진 곳.

80층의 외곽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는 대산의 용병단장 이천호가 서 있었다.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천호.

"역시 대단하군요."

이천호가 널브러진 다수의 헌터를 보며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각 기업에서 착출되어 보내진 전투원들이었다.

"지난 싸움에서의 상처로 엣 기량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여전한 거 같은데요?"

"하아… 더러운 입 다무시죠, 배신자가."

"풉."

힘겹게 말한 아티라의 말에 이천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꼴이셔서 그런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어쩌죠?"

"…."

이천호의 말대로였다.

어느 수준 이상의 헌터들을 쓰러뜨리며 아티라에게도 상처가 없을 순 없었다.

치명상은 피해냈지만 아티라의 몸 역시 데미지가 쌓여 한계에 도달한 상태.

주륵.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왼쪽 시야도 온전치 못했다.

찌릿.

거기다 세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

오른팔에선 불길한 찌릿함이 계속해서 느껴지고 있었다.

- 다시는 예전처럼 싸우시면 안 됩니다.

한계에 맞닥뜨린 사람이 맞이하게 되는 결말은 두 가지였다.

한계를 뛰어넘어 괴물이 되거나, 한계에 부딪혀 무너지거나.

아티라는 후자였다.

기업 간의 전쟁이 끝나가던 쯤.

아티라의 몸은 지속된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팔도 좀 떨리시는 거 같은데 계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단장이 되더니… 말만 많아졌네요."

타닥!

"이년이!"

"토베 3식, 쐐기."

푹!!

"꺼억!"

달려들던 헌터 한 명이 다시 나가떨어지고.

그런 헌터를 보며 한심한 듯 혀를 차는 이천호.

"멍청한 놈, 혼자 달려들지 말라니까."

용병단장을 맡으며 가지각색의 능력을 꿰차고 있는 이천호였다.

아티라의 싸움도 수없이 봐왔기에.

검투사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었다.

"일대일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위용을 발휘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다수에겐 약하다."

'….'

검투사의 특성을 정확히 꿰뚫는 이천호에 아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습니까? 아티라 님. 좀 망가지긴 했어도 여기서 죽기엔 아깝지 않습니까? 나이도 젊은데."

스윽.

꽤 먼 거리.

닿지 못할 거리였지만.

이천호가 아티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당신은 대산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까? 새로운 대산에서 함께 하시죠."

"…."

"그게 아니면."

저벅.

저벅.

잠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아티라의 주변을 감싸나갔다.

이미 한계에 다다랐기에 이 숫자를 상대론 아마 일 분도 버티지 못할 터.

아티라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확정된 죽음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산은 훨씬 강해질 겁니다!"

"…."

피식.

조소를 터뜨리는 아티라에 이천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웃기죠?"

"웃겨서 웃은 건 아닙니다."

피로 얼굴 반이 가려진 아티라.

아티라가 고개를 들어 이천호의 내민 손을 가리켰다.

"너무 달라서요. 소피아 님에게선 빛이 났는데… 당신의 손에선 썩은 내가 풍기거든요."

"뭐…?"

"그 냄새 나는 손을 잡는 건 모두 썩어버린 것들뿐이겠죠. 전 죽을지언정 비위가 상해서 그 손을 잡진 못하겠습니다."

"어리석군. 결국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건가."

"그리고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아티라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이천호를 응시했다.

"전 단 한 번도 대산을 위해 싸운 적이 없습니다."

"…?"

"전 대산이 아닌, 소피아 님을 위해 싸웁니다. 이제껏 그래왔고."

슥.

아티라가 세검을 들어 눈앞에 위치시켰다.

"지금도 그럴 겁니다."

스륵.

눈을 감고 몇 번의 호흡을 하는 아티라.

- 잘 부탁해요.

소피아의 손을 붙잡았던 순간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검투사 아티라 토베.'

쿠우우우…!

아티라의 주변으로 공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피아 님을 위하여.'

"온다…!"

승리는 확실해져 있지만 누군가는 저 일격에 목숨을 잃을 것이기에.

둘러싸고 있는 헌터들이 무기를 치켜세웠다.

'내 마지막 검을…!!'

절정까지 모여든 공기가 터지려는 순간.

끼이익.

"…?"

아티라가 지키고 있던 문이 열렸다.

저벅.

멍하니 바라보는 아티라를 평온한 미소로 맞이해 주는 소피아.

"소… 소피아 님… 어째서?"

밖으로 나온 소피아가 피바다가 된 외곽 엘리베이터 앞을 살핀 후 입을 열었다.

"문 뒤에 숨어 있다고 한들 일 분은 더 버틸 수 있을까요?"

소피아의 말대로였다.

80층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던 이천호.

이천호는 이번 일을 준비할 때 회장실의 방어술식까지도 이미 계산에 넣어둔 상태였다.

술식을 깨기 위한 헌터들까지 데려왔기에, 문을 지키고 있는 아티라만 사라진다면 일 분이면 충분했다.

저벅.

아티라의 옆으로 걸어온 소피아.

"어차피 죽을 거라면 뒤에 숨은 채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소피아가 여전히 멍한 아티라를 올려다봤다.

"제가 무능력해 아티라 님을 살려줄 순 없겠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절 지켜 준 사람의 옆을 지키며 죽고 싶네요."

"…!!"

소피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지고.

스윽.

아티라가 치켜들었던 세검을 천천히 내려놨다.

몸이 버틸 수 있는 마지막 공격을 하려던 중이었다.

한 명을 더 죽이냐 못 죽이냐 정도의 차이였기에.

큰 의미가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잠시 후.

"하… 하!"

짝짝짝!!

80층으로 광적인 박수 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두 사람을 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천호.

"이거 참 감동적인 장면이군요…!! 훌륭합니다! 훌륭해!! 부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회장이라니!"

짝짝… 짝… 짝.

꾸드득.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이천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 무른 자세 때문에! 기업의 성장보다는 사람을 더 아끼는 그 무른 성정 때문에! 대산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여유가 넘치던 이천호였다.

하지만 소피아의 행동을 보기 무섭게 이천호의 평정심이 무너졌다.

"제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회사에 소속된 이들의 행복!? 그딴 게 뭐가 중요합니까! 결국 그 선택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겁니다! 소피아!"

광기 섞인 이천호의 외침.

그런 이천호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소피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광분한 이천호와 달리 소피아의 표정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딱한 사람."

"뭐…?"

"이천호… 당신의 빛은 뜨겁고 아름다웠습니다. 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을 샘솟게 만드는 빛이었죠."

소피아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탁해져서 빛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어버렸군요."

으드득.

소피아의 말에 이천호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당신 따위가 뭘 안다고…! 맨날 뒤에 앉아 감정에 치우쳐진 결정이나 내린 주제!"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딱 하나, 후회하는 선택이 있다면."

떨긴커녕 이천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소피아.

"탁해진 빛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당신을 내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딴 눈으로… 하."

무언가 말하려던 이천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죽을 사람을 상대로 제가 뭘 하는 건지."

스윽.

이천호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무기를 치켜든 채 아티라와 소피아를 향해 다가가는 수십의 헌터들. 

"지금까지의 정을 봐서 고통 없이 보내드리죠."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꼬옥.

소피아가 아티라의 손을 붙잡았다.

아티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그리는 소피아.

"지금까지 저 지키느라 수고 많았어요. 고마워요, 아티라."

"소피아 님…."

소피아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아티라의 얼굴에 괴로운 빛이 어렸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아티라가 아니었다면 옛날에 죽었을 목숨입니다."

"쯧."

그런 둘의 모습에 이천호가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까딱.

마침내 이천호가 신호를 보내고.

쐐에에에엑---!

수십 개의 무기가 두 사람을 향해 찔러졌다.

죽음을 직감하며 천천히 눈을 감는 소피아와 아티라.

"두 분 모두 안녕히 가십…."

콰아아앙!!

이천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

무언가에 의해 80층의 천장이 박살났다.

"콜록!! 뭐… 뭐냐…!"

순식간에 뒤덮인 먼지에 이천호가 코와 입을 가린 채 앞을 응시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등장과 동시에 80층의 공기를 바꾸었다.

스으으….

사방을 뒤덮었던 먼지가 서서히 걷히고.

드러난 시야의 일부분으로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끼긱… 끼긱!

3초.

사방에서 내질러진 칼이 소피아와 아티라에게 닿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이게!!"

"무슨…!!"

수십 개의 칼날은 무언가에 막혀 두 사람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단 하나.

짙은 불길함과 함께 일렁이는 검은 연기가 소피아와 아티라를 감싸고 있단 것이었다.

그리고.

"와씨."

조금 전까지의 80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슬아슬했네."

"웬 놈이냐!!"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불길함에 이천호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물었다.

슥.

그런 이천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목소리의 주인, 백운.

잠시 이천호를 응시하던 백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새한테 호출받은 사람이다!"

151화. 참새의 호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

대답을 들은 남자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내가 만든 정적인 것 같았다.

어이없을 수 있지.

갑자기 대기업 천장을 뚫고 내려온 놈이 한다는 소리가 참새한테 호출이라니.

내가 저 남자였다면 이미 뺨을 때리고도 남았을 듯했다.

그나저나.

슥.

고개를 들어 시원하게 뚫린 천장을 바라봤다.

괜찮겠지…?

망자의 길을 통해 서울에 도착한 뒤.

원래는 1층부터 올라오려는 참이었다.

건물 사방에 둘러진 장막과 회사 안에서 전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꽤 고층에서부터 이미 소리가 들려왔기에 아래에서부터 가면 늦을 듯한 느낌.

- 콰아아앙!

그래서 선택한 게 소피아가 있는 80층으로 도달하는 최단 루트, 천장.

기발한 아이디어였어.

저지르고 생각해도 훌륭한 역발상이었다.

정석대로 가라는 법은 없지.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끼긱…!

"이… 이게 왜 안 빠져…!"

여전히 빠지지 않는 무기로 끙끙대는 다수의 헌터.

방금 도착한 지라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단지 구도로 비추어보건대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놈과 무기를 들고 있는 헌터들이 소피아의 적으로 보였다.

거기다 나한테 질문한 저 아저씨.

왠지 낯이 익길래 어디서 봤나 했더니.

회귀 전에 대산의 회장이라고 TV에 나왔던 아저씨였다.

물론 저 상태로 좀 더 늙어야 TV에서 본 얼굴이 되겠지만.

반역으로 쟁취한 자리였구나.

아니지, 성공했었으니까 혁명이라고 불러야 하나.

"…."

고개를 내리니 날 올려다보고 있는 소피아의 얼굴이 보였다.

참 묘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부르긴 했어도 보통 이런 등장이면 놀란 척이라도 할 법한데.

소피아는 놀라기보단 무언가 평온한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분 외에는 다 적인 거 같고."

허락을 구하기 위해 소피아를 응시했다.

오자마자 무기 든 놈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였다.

다 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분위기로 보건대 대산의 헌터들도 섞여 있는 모양이기에.

회장의 허락 정도는 받아둔 다음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스윽.

내가 뭘 기다리는지 알아서일까.

소피아가 고개를 돌려 간신히 몸을 지탱 중인 아티라를 쳐다봤다.

80층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피의 양을 보니 이미 한바탕 한 모양이었다.

역시 쎈 누님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달랐던 포스.

올라와 있는 헌터들도 꽤 강한 거 같은데 이때까지 홀로 버텨낸 것이었다.

"백운 님."

잠시 아티라를 보던 소피아가 내게로 눈을 돌렸다.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피아.

조금 전 짓고 있던 안도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전 회장을 하기에는 유약한 성격일지도 모릅니다. 이천호의 말대로 정도 많아서 사람을 우선시하는 판단을 내릴 때가 많으니까요."

회귀 전 혁명가에서 곧 반역자가 될 아저씨. 

이름이 이천호였구만.

"하지만,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온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슥.

고개를 든 소피아가 차가운 눈으로 이천호와 쳐들어온 헌터들을 응시했다.

"대산에게, 제 사람에게 칼을 들이댄 적은 용서하지 않는다."

소피아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씨익.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과거엔 대산의 사람이었을지라도. 한 번 동료를 향해 칼을 댄 자는… 적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끈적.

무대도 깔려있겠다.

슥.

오랜만이구만.

[잭 더 리퍼 - 동기화]

* * *

이건 참 적응이 쉽지 않단 말이야.

80층에 흩뿌려져 있던 피가 모여들어 내 몸을 감싼 게 조금 전.

시야까지 핏빛으로 만드는 동기화가 완료된 후 가장 먼저 한 건.

푸화아아아---!

소피아와 아티라를 둘러싸고 있던 놈들의 동맥을 끊어 놓은 것이었다.

전이랑 비교도 할 수 없게 빨라졌다.

돌산에서 2년을 보낸 뒤 처음으로 발동한 잭 더 리퍼의 동기화였다.

동기화 없이 면도칼을 꺼낸 적은 있기에 수련으로 향상된 점은 어느 정도 체감했었다.

동기화를 하면 얼마나 더 빨라질지도 대략 예상은 해뒀었는데.

막상 동기화를 사용하니 차이는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끄… 끄륵!"

풀썩.

털썩.

2초? 3초?

얼마나 걸렸을까.

지금 쓰러지는 녀석들의 목을 베는데 말이다.

무기 없는 놈들이라 좀 그랬나.

칼데아의 연기로 인해 무기가 잡힌 헌터들.

물론 그 중엔 무기가 필요 없는 능력을 사용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잭 더 리퍼와 동기화까지 한 내 속도에 반응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 날개까지 있으니.

[잭 더 리퍼 - 동기화]

[이카루스 - 칼데아 윙]

안 그래도 불가능한 수준의 유연성과 움직임을 선물해주는 면도칼의 동기화인데.

더더욱 불가능한 방향으로의 이동을 칼데아가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좋은 조합이네.

"뭐… 뭘 쳐다만 보고 있어! 당장 죽여!!"

순식간에 쓰러진 헌터들에 잠시 당황했던 이천호.

이천호의 비명에 가까운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외쳐진 목소리가 채 공기로 흩어지기도 전.

파앙!

칼데아의 연기를 터뜨려 이천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

너무 놀란 건지 콧물까지 튀어나오는 이천호.

"꽥꽥거리지 마. 엄청 듣기 고통스러운 목소리니까."

시궁창 지하에 묻어 있는 오물 같은 목소리였다.

눅눅하고 끈적하고 냄새까지 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

"기다려, 넌 마지막이다."

"뒤져!!"

"죽어라!!"

사방에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같은 편이 섞여 있어서인지 원거리 능력을 가진 놈들은 눈만 끔뻑이고 있는 상황.

딱이네.

칼데아와 면도칼을 조합해서 사용하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적군 사이사이를 누비며 핏줄을 딸 수 있으니 말이다.

쐐에에에--!

날아드는 무기들을 날개의 연기나 면도칼로 막을 생각은 없었다.

스으…!

종이 한 장 수준으로 피할 수 있게끔 몸을 움직여 준 뒤.

서걱! 서걱! 서걱!

공격이 빗나갔다는 걸 인지조차 못 한 놈들의 혈관을 베어 나갔다.

푸확!

"끄아아아!!"

갑작스레 핏줄이 베여서일까.

조금 전까지 몸 곳곳을 순회하던 놈들의 피가 하늘로 솟구쳤다.

하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미소를 넘어 얼굴 가득히 번지는 웃음꽃.

왜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으로 피어나가는 피의 꽃.

꽃이 더욱더 만개하는 걸 보고 싶었다.

저벅.

적들의 사이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적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어봐야 1초 미만이었다.

그 말인즉슨.

놈들은 내가 바로 앞까지 온 걸 인지함과 동시에 동맥이 베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철퍽!

얼굴 한가득 흩뿌려진 적의 피.

평소였다면 으… 하며 역겹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즐거워지는 감각.

"으아아!!"

주먹에 푸른 기를 두르고 달려드는 헌터를 바라봤다.

잔뜩 겁에 질려있지만 애써 이겨내며 달려들고 있었다.

덥썩.

헌터의 팔을 붙잡아 팔꿈치 부분에 면도칼을 꽂아주고.

"아악!

그 아래를 지나 녀석의 뒤로 돌아갔다.

콰악!

나에게 붙잡혀진 턱이 뒤로 젖혀져서일까.

조금 전까진 어떻게든 공포를 억누르며 달려들었던 녀석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진동하고 있었다.

"끄… 끄아… 살… 살려줘."

대산이라는 대기업을 먹으려고 데려왔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내게 잡혀 있는 헌터는 꽤 강한 편에 속할 터였다.

그런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목숨 구걸.

아마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었으리라.

이미 수십의 피로 물들여진 면도칼이 젖혀진 목 바로 앞까지 와있으니 말이다.

슥.

고개를 들어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적들을 바라봤다.

사전에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저건 대체 뭘까?

사람은 맞는 걸까?

그리고 애써 티를 안 내려 하지만 얼굴 뒤에 숨겨진 속마음.

이길 수 없다.

저들의 이성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본능은 알고 있는 듯했다.

이건 싸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싸움이 아닌, 단순한 누군가의 학살이라는 것을.

"목숨을 구걸하기엔."

꾸국.

"끄아아아아!!"

"너무 늦었다."

푸화아악!!

* * *

뚝… 뚝.

"끄… 끄."

"꾸룩… 살… 려."

면도칼을 꺼내 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방엔 무언가 흘러내리는 소리와 살려달라는 신음만이 가득했다.

현재 80층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건 나를 제외하고 단 세 사람이었다.

소피아와 아티라, 그리고.

"자… 잠깐…!"

초반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대신 얼굴 한가득 죽음의 공포가 깃든 이천호까지.

동기화부터 풀자.

예전에도 느꼈지만 면도칼 동기화는 무언가 달랐다.

점점 물들어오는 피의 광기.

이번에는 특히 더 심했다.

적의 대부분을 베어 넘겼을 때였다.

광기 너머로 무언가 경계가 느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넘을 수 있을 거 같았던 느낌.

"잠깐만…!"

그 감각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눈앞에서 순식간에 겁쟁이로 돌변한 이천호를 바라봤다.

"네가 잠깐만이라고 해서 살려준 건 아니야."

뒤로 고개를 돌려 소피아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는 소피아.

다가온 소피아가 이천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해주시겠어요?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다른 기업들이 함께 했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심증만 있을 텐데!? 내게 모든 게 있다! 알고 싶다면 날 살려라!"

이거 완전 개쓰레기네.

머리 박고 살려달라 해도 모자랄 판에 딜을 걸어?

"정보가 우선입니다."

"…."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리는 이천호.

여기서 한 번 더 튕겼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소피아 회장, 당신이 알고 있는 건 빙산의 일부분이다."

본론만 말해 이 새끼야.

듣고 있자니 답답해 나도 모르게 한마디 할 뻔했다.

무슨 영화 서사도 아니고 저런 비장한 얼굴로 바탕을 깔고 앉았다니.

내가 소피아였으면 이미 뺨따귀를 철썩 후렸을 터였다.

"연관되어 있는 기업의 이름과 기관들의 이름을 대세요. 그거면 됩니다."

"후우…!"

말하기가 망설여지는지 심호흡을 한차례 하는 이천호.

만약 나라는 죽음이 앞에 없었다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듯했다.

"기업은 모두 열…."

삑.

응…? 삑…?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길한 신호음.

신호음을 들은 건 이천호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커지는 눈동자.

우우웅…!

신호음과 함께 이천호의 가슴팍에서 무언가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시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서서히 에너지를 응축시키고 있는 듯한 모습.

이런.

"여… 연수정 이 썅년이…!!"

욕지거리를 뱉어낸 이천호가 다급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날 살려!! 정보를 얻고 싶다면 빨리!!"

웬만하면 소피아를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빛은 이천호의 몸 안쪽에서 나고 있었다. 

반응을 봤을 땐 시간 또한 많지 않은 듯했다.

짧은 시간동안 내가 이천호의 배를 갈라서 무언가를 꺼낸다…?

"내가 신이냐 이 새끼야."

"안돼!! 날 살려!!!"

소피아와 날 향해 손을 뻗어오는 이천호.

참으로 목소리만큼이나 구질구질한 녀석이다.

뻐엉!

이천호를 엘리베이터 근처까지 걷어찬 후.

텁.

소피아와 아티라를 안은 채로 마지막 남은 칼데아의 연기를 터뜨렸다.

"무… 문을!"

회장실로 들어오는 순간 들려온 아티라의 외침.

문을 닫자 홀로그램 같은 술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안돼에에에에!!"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들려온 이천호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퍼어어어엉---!

거대한 폭발음이 80층을 집어삼켰다.

152화. 대산의 각층에선

쿠아아아아--!

방어술식이 걸려 있는데도 심하게 떨려오는 문.

군데군데 생긴 균열이 조금 전 폭발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엄청난데.

무엇에 의한 폭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인간이었다.

사람 몸에 이런 걸 심어 넣을 생각을 하다니.

가루만 남았겠어.

몸속에서 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으니 목숨은커녕 조각조차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슥.

감싸고 있던 몸을 치우며 소피아와 아티라를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아티라도 군데군데 상처는 많았지만 목숨이 위험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연수정이라.

- 여… 연수정 이 썅년이…!!

마지막에 이천호가 쌍욕을 박은 이름이었다.

아마도 이천호의 몸에 폭발을 심어 넣은 장본인일 터.

그리고 폭탄을 심었다는 건 곧 이번 대산 공격에 깊게 관여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백운 님, 방금 저희를 구해주셨는데 죄송하지만."

잠시 날 바라보던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얼굴 한가득 걱정이 퍼져있는 소피아.

"회사엔 최리아 실장과 전수희 팀장이 있습니다."

찹쌀떡!?

안 그래도 이제 가려던 참이었기에.

소피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바로 몸을 돌리긴 했지만 그렇게 마음이 다급하거나 하진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

안심하라며 말을 건네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소피아.

그런 소피아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줬다.

"아마 가 있을 거예요."

"가 있다니…?"

저벅.

문을 향해 걸어가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집트산 사신요."

* * *

끼긱…!

"뭐… 뭐야!!"

대산의 본사 77층.

자잘한 상처가 쌓인 최리아와 전수희가 구석에 몰린 채 앞에 있는 김대석을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지?'

장판석이 카리조를 막아선 사이 도착한 77층.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77층에도 적이 있었다.

그것도 까다로운 적이 말이다.

차라리 부상을 당해 76층에 남기로 한 이대현, 전국현과 함께 있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적.

- 드디어 찾았다! 이 여우년!

마치 최라아가 올 걸 알았다는 듯이 77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대석과 적 헌터들.

최리아를 보자마자 김대석은 얼굴 가득히 소름 돋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는 듯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던 김대석.

김대석은 대검을 휘두르며 천천히 두 사람을 구석으로 몰기 시작했다.

- 낄낄낄! 뭐야 이 숙녀분들은? 왜 이런 싸움터를 무방비하게 돌아다니는 거야?

- 날 대신해 싸워라…!

그 와중에 방심한 몇몇의 헌터에게 암시를 거는데 성공했지만.

- 콰득! 콰직!

김대석은 헌터들이 암시에 걸린 뒤 움직이는 걸 기다려주지 않았다.

암시가 걸리는 와중에 달려들어 헌터의 몸에 칼을 박아 넣은 김대석.

- 어차피 적이 되어서도 죽었을 테니, 억울해하진 마라.

숨이 끊어지는 헌터를 바라보며 한 마디를 읊조린 후.

- 쫘아아악!

김대석은 거침없이 최리아의 뺨을 갈겼다.

- 짜악!

그 앞을 가로막은 전수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굴욕적인 공격을 당하며 몰아 세워진 구석.

- 어떻게 죽여줄까? 응? 팔다리부터 날려줄까?

이죽거리며 다가오는 김대석을 보면서도 최라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상대의 눈을 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암시.

김대석은 누구보다 최리아의 암시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도저히 암시를 걸 틈이 나오지 않았다.

- 아니면 그렇게 싸고도는 부하년부터 죽여줄까?

빠득.

얼마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던 걸까.

그때의 상처로 입술에선 아직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 콰아아아아아--!

80층에서 들려온 엄청난 폭발음과 진동.

층마다의 간격을 생각하면 보통 크기의 폭발이 아니었다.

- …!?

당황한 건 김대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표정으로 보건대 무언가 일이 틀어진 게 분명했다.

문제가 있다면.

-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냥 죽어라, 여우년아.

잘못됨을 느낀 김대석이 바로 대검을 치켜들었다는 것이었다.

일이 잘못 될 땐 잘못되더라도 눈앞의 최리아 만큼은 죽이고 가겠다는 결정이었다.

- 슥.

그런 김대석을 앞에 두고.

최라아가 아끼는 부하인 전수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떨고 있는 전수희의 눈을 가려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 쐐에에에---!

잠시 뜸을 들인 뒤 두 사람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한 김대석의 대검.

어느 정도 대검이 다가오자 최리아 역시 눈을 감았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란 희망이 사라졌다.

지금 누군가 도착한다 하더라도 바로 앞까지 다가온 대검을 막아줄 순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끼긱!

김대석의 대검이 멈춰 섰다.

분명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대검은 무언가에 단단히 막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왜!!"

광산에서의 사고로 실체가 까발려지기 전.

김대석이 유명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거대한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괴력의 소유자로 시원시원한 전투 장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김대석이 아무리 용을 써도 꼼짝도 하지 않는 대검.

사아아…!

'…!'

잠시 후.

최리아와 대검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신에 칠흑 같은 망토를 걸친 채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남자.

남자는 어디선가 들었던 사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 사신…?"

놀란 건 옆에 있는 전수희도 마찬가지였다.

등장과 동시에 몸으로 서려오는 차가운 한기.

"뭐… 뭣들 하는 거냐! 당장 와서 이놈을 죽여!"

잠시 얼어있다 정신을 차린 김대석이 소리를 질렀다.

….

하지만.

김대석을 돕기 위해 달려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새끼들아 뭐 하는 거냐… 고…?!"

낫과 대치한 채 뒤로 고개를 돌린 김대석.

심상치 않은 적을 앞에 뒀음에도 한 번 돌아간 김대석의 고개는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슥.

조심스럽게 몸을 내민 전수희가 김대석의 시야를 쫓았다.

"헙…!"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진 전수희.

전수희가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집어삼켰다.

김대석을 제외하고도 족히 스물은 있었던 헌터들.

아까 있었던 헌터들 중 지금 77층에 서 있는 헌터는 김대석 한 명뿐이었다.

줄줄줄.

조금 전 일어났던 폭발에 의해 쓰러진 게 아니었다.

다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베여 죽은 것이었다.

'폭발이 일어난 그 짧은 순간에…!?'

폭발이 일어나 모두의 눈과 귀과 윗층을 향한 찰나의 순간.

그때 말곤 없었다.

그때가 아니라면 스물 남짓한 헌터들이 죽는 동안 김대석이 눈치채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다.

"모두 오늘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굳어 있는 사이.

감정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서늘케 하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죽을 운명이었다니…?'

물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만화에서 봐오던 사신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진짜 사신일 거라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 개새끼가!!"

스으으윽.

흥분한 김대석이 막혀 있는 대검을 뒤로 젖혔다.

더 이상 앞으로 미는 건 의미 없다는 걸 알았기에.

다시 한번 경로를 잡고 공격할 생각인 김대석.

"…."

김대석을 잠시 바라보던 사신, 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당신도."

"죽어!!"

쐐에에에엑---!

대검이 날아오든 말든.

로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낫을 틀어막을 생각 역시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낫으로 막은 건 어디까지나 최리아와 전수희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콰아앙!

김대석의 대검이 로인의 몸에 타격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

물론, 거기까지였다.

반으로 쪼개질 거란 김대석의 바람과는 달리.

로인은 약간의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뭐로 이루어진 건지 김대석의 풀스윙 대검을 막고도 멀쩡한 갑주.

"마… 말도 안 된다…!"

최선을 다한 공격이 허무하게 막혀서일까.

김대석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김대석을 향해 로인이 입을 열었다.

방금 하던 말을 끝맺기 위해서였다.

"당신 또한 오늘 죽을 운명입니다."

"뭐…."

서걱!!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사라졌다 생각한 낫이 김대석의 상체를 베어버린 것은 말이다.

"꺼… 꺼걱…!"

푸확!

공기 중으로 김대석의 피가 흩뿌려지고.

허망한 눈을 한 김대석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쿠웅.

"…."

쓰러진 김대석을 잠시 바라보던 로인.

슥.

"!!"

로인이 몸을 돌려 겁에 질린 최리아와 전수희를 바라봤다.

"…."

"당신은… 누구시죠? 어째서 저희를."

아무 말 없는 로인을 향해 질문을 건네는 최리아.

고민을 하는 건지 잠시 눈을 찌푸렸던 로인이 입을 열었다.

"백운이란 남자와 거래를 했습니다."

"…!"

사아아.

나타났을 때처럼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로인.

"거래의 일환일 뿐입니다."

차분하면서도 나지막한 말을 남긴 후.

이집트에서 온 사신 로인이 모습을 감추었다.

* * *

쾅! 쾅! 쾅!

"늙었어도 여전하구만!"

"애송이가…!"

'조금 전 폭발은 뭐냐…!'

교관 카리조.

한눈을 팔 수 없는 상대였지만.

장판석의 신경은 80층으로 향해 있었다.

'소피아 회장.'

으득.

"날 앞에 두고 누굴 걱정하는 건가!"

푹!

장판석의 어깨로 파고든 카리조의 공격.

피가 솟구쳐 나오는 상처였지만 장판석은 잠시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푸슉!

지금까지의 싸움으로 이미 몸엔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몸에 구멍 한두 개가 더 추가된다고 놀랄 일이 아니었다.

"후우…!"

데미지가 쌓인 건 카리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판석의 발톱에 깊게 베여 사방에서 피를 뿜고 있는 상태.

'끝내야 한다.'

장판석이 카리조를 응시하며 자세를 잡았다.

80층의 소피아가 걱정되어서도 있지만.

찌릿.

무엇보다 누적된 상처로 인해 몸이 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영감, 끝냅시다. 내가 갈 길이 좀 바빠서."

"클클… 좋지."

드드드드…!

장판석의 몸으로 바람이 모여들고.

양팔의 핏줄이 터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우우…!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카리조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으로 퍼져있던 검은 액체가 오른팔로 모여들고 있었다.

장판석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카리조.

"…."

"…."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늑대의 포효."

"악귀의 손톱."

스팟!

읊조림과 동시에 장판석과 카리조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콰드득!!

소름 돋는 마찰음을 남긴 채 서로를 지나쳐 간 두 사람.

….

이미 승부가 났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았기에.

뒤를 돌아 상대의 상태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늙은 모양이군."

말을 끝마치고 잠시 후.

푸하아아악!

카리조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는 카리조.

쿵!

카리조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잠시 후.

"쿨럭!"

장판석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출혈이 튀어나왔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조금 전의 공격에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데미지를 받고 말았다.

"이런."

80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보며 장판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띵.

그때 75층에 멈춰 서는 엘리베이터.

우루루!

한 무리의 헌터가 75층으로 발을 디뎠다.

"자… 장판석이다!"

"쫄지 마! 부상이 심하다! 지금 죽여둬야 해!"

장판석을 발견한 헌터들에게 잠시 동요가 일었지만.

그뿐이었다.

외관만 봐도 장판석의 상태는 심각했기에.

적들은 도망치긴커녕 오히려 장판석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또 적인가.'

분명 많은 수의 침입자들을 죽이며 올라왔었는데.

모두를 정리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움직이지 못한다! 원거리에서 죽여라!"

맨 앞에 선 헌터의 외침에 따라 늘어선 적들이 공격을 준비했다.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화기 혹은 마법과 비슷한 능력을 사용하는 헌터들인 듯했다.

'곤란하군.'

적의 말대로 장판석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평소라면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적들이었지만.

지금은 위험했다.

스윽.

장판석이 눈살을 찌푸린 채 간신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피하진 못하더라도 치명상은 피해야 했다.

"쏴라!"

적 헌터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빛의 구원."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말도 안 되는 화력이 쏟아졌다.

"…!!"

장판석의 반대 방향으로 말이다. 

장판석이 놀란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적들은 원거리 화기를 쏘지 못했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말도 안 되는 빛의 탄환이 적들을 덮쳤기 때문이다.

콰가가가가!!

경로에 있던 헌터들은 물론 건물마저 뚫고 밖으로까지 뻗어 나가는 탄환 세례.

그렇게 장판석을 죽이려던 헌터들이 쓸려나가고.

"깔끔하구만!"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그리고 잠시 후.

놀라 있는 장판석 앞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53화. 검은 천사

슥.

멍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장판석을 바라봤다.

- 아래층에 판석 님이 계세요…!

무슨 릴레이 구원도 아니고.

75층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에 찹쌀떡 전수희가 한 말이었다.

대충 소리만 들어봐도 무언가 거대한 힘끼리의 부딪힘이 분명했기에.

혹시나 싶어 아래로 내려와 보았다.

근육 봐라.

일단 내려오고 봤기에 정확히 장판석이 대산에서 어떤 위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풍겨오는 포스와 외관만을 봤을 때 알 수 있는 건 한 가지.

뭐가 됐든 겁나 센 사람이었고 대산에서도 한자리하고 있을 거란 것이었다.

휘이이.

뺨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조금 전 리볼버를 갈긴 벽을 응시했다.

음.

장판석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으려던 적 헌터들.

급한 마음에 일단 리볼버를 갈겨버렸었는데.

큰일이야.

날아가 버린 엘리베이터는 고사하고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뚫린 구멍을 보니 너무 막 갈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왕."

"!?"

잠시 날 응시하더니 한 단어를 말하는 장판석.

오랜만에 불려보는 이름이었다.

"무기왕이자 일본에서 최리아 실장을 구하고 시노카 암살대를 전멸시킨 백운… 맞지?"

의외였다.

얼굴을 보며 마주친 건 오늘이 처음일 터인데.

최리아가 말해준 건지 장판석은 나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선생님은 장판석 님 맞죠?"

장판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푸슉.

!?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뿜어져 나오는 붉은 선혈.

"괘… 괜찮으시죠? 그 구멍이 좀… 많이 나 있네요."

강한 사람인 만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냐만은.

피가 솟구치고 있는 여러 개의 구멍을 보고 있자니 괜찮냐는 말을 안 건넬 수가 없었다.

"별로 안 괜찮은데,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닌 거 같군."

쌍남자구만.

다름 아닌 자기의 몸인데도 남의 몸 말하듯이 하는 장판석.

장판석의 말대로 목숨에 지장은 없어 보였기에.

조금 전 물으려던 걸 묻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저거 괜찮겠죠? 아시다시피 불가항력이었거든요."

손을 들어 밤바람이 불어오는 구멍을 가리켰다.

그러자 놀란 듯 눈이 커지는 장판석.

지금 보신 건가.

너무나 시원하게 뚫려버린 구멍을.

저건 선 넘었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이 들었지만.

"큽… 하하하하!"

"…?"

걱정과 달리 장판석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 넘는 양심리스라 너무 어이가 없으신 건가.

적당히 뚫어놓고 물어보는 게 도리였나 잠시 생각하는 사이.

장판석이 입을 열었다.

"대산을 구해놓고는 뚫린 벽 걱정이라. 재밌는 친구네."

간신히 웃음을 그친 장판석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백 개는 더 뚫어놨어도 내가 메꿔줄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오…!"

왠지 쌍남자 같더라니.

역시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위에서 들렸던 폭발음은?"

이천호의 폭발에 대해 묻는 장판석에 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소피아와 아티라는 무사하다는 것과 80층이 시원하게 날아가 버렸다는 것.

"그런가."

장판석이 묘한 얼굴로 고개를 내려 부상투성이인 몸을 바라봤다.

호탕하게 웃던 조금 전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씁쓸한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해줬군."

아.

대충이지만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지켰어야 하는 사람인 소피아.

강적을 만난 탓이라고 해도 장판석은 소피아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있는 듯했다.

저건 아니지!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간섭 안 하는 성격이지만.

잘못된 자책이라고 생각했기에 입을 열었다.

"최리아 님과 전수희 님도 무사하세요. 이대현 님과 전국현 님도 마찬가지고요."

"…."

장판석이 이곳에서 적을 맡아줌으로써 목숨을 구한 이들.

전혀 자책할 필요가 없었다.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장판석 님이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을 거라고."

"…."

잠시 아무 말 없던 장판석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동영상만 봤을 땐 그냥 무지막지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묘하게 상냥하구만."

"사… 상냥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에 당황하는 사이.

저벅.

장판석이 힘겹게 다리를 끌어 내게 다가왔다.

얼굴에 있던 웃음기는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몸이 이래서 말이야."

"네?"

그렇게 다가와 조용히 날 응시하던 장판석이 입을 열었다.

"대산의 기둥 헌터 장판석."

"…?"

"날 대신해 대산을 구해준 은인에게."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장판석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네."

* * *

폭발의 여파가 남아있는 80층.

어딘가로 전화를 돌린 최리아가 소피아를 바라봤다.

"아직 대산을 감싸고 있는 장막은 유효한 것 같습니다. 밖의 사람들은 안에서의 일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건 다행이네요."

"장막이 어떤 시스템인지도 찾아낼 생각입니다만. 지금은 이대로 유지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저기 상처가 난 최리아와 전수희를 바라봤다.

"두 분께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저 때문에 죽을 뻔하셨으니."

"아… 아닙니다!"

침통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소피아에 전수희가 손을 내저었다.

대산의 회장을 직접 마주하고 있는 건 처음이었기에.

상처의 쓰림보단 놀라움과 경외심이 더 앞서는 중이었다.

띠링.

아티라가 핸드폰으로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시큐리티 헌터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마틸다가 동행할 예정입니다."

용병단이 아닌 대산을 담당하는 외부 시큐리티 업체.

이미 싸움은 끝난 뒤였지만 현재 상황의 뒷정리를 위해 부른 것이었다.

"그래요, 직원들에게도 연락해주세요. 한 달간 재택근무로 전환한다고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최리아가 곧장 핸드폰으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그런 최리아를 잠시 바라보던 소피아가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 엉망이 된 건물을 바라봤다.

자신의 모든 걸 받쳐 키워 온 회사, 대산.

대산의 성장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노력했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말이다.

"오랜만이네요. 회사 건물이 공격당한 건." 

엄밀히 따지면 대산의 건물이 공격받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각 기업들이 자리를 잡아 공식적으로 물리적인 충돌이 벌어지진 않지만.

개방이 처음 등장했을 때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공격이 비일비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네요."

옆에 있던 아티라도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티라와 장판석.

두 사람 모두가 소피아가 말한 시기에 함께 했던 이들이었다.

"판석 님은 무사하신가요?"

"예, 카리조 님과의 싸움으로 부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소피아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기둥 중 한 명인 웨어울프 장판석.

기둥들 중에서도 소피아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람이었다.

한 회사의 수장으로써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소피아는 속으로 알게 모르게 장판석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다.

"카리조 님은… 제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최리아의 말에 소피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교관 카리조.

다들 큰일을 치른 뒤라 따로 말하고 있진 않았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기둥 중 한 명이 반기를 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리조를 조사해보겠다는 말에 소피아가 고개를 젓는 이유는 명확했다.

"알 거 같거든요."

"예…?"

"카리조 님이 왜 반기를 들었는지요."

돈이나 명예 따위를 위해 적과 손을 잡은 건 아닐 터였다.

"카리조 님의 불만은 오래전부터 쌓이고 있었으니까요."

카리조를 떠올리며 소피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산은 그 어느 기업보다 강해야 하며 그걸 위해선 전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카리조.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만큼 더 이상 사람들의 희생을 보고 싶지 않았던 소피아와는 정반대되는 의견이었다.

"마틸다의 교관 자리까지 뺏어버렸으니. 어찌 보면 오늘 일은 예견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네요."

소피아가 카리조의 교육 방식을 알게 된 건 수십의 마틸다 후보생들이 죽은 이후였다.

사고가 날 때마다 소피아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작되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날로 카리조를 교관에서 물러나게 한 뒤 기둥의 임무를 맡겨 해외로 보냈었다.

"좀 더 확실히 마무리를 지었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제 불찰입니다."

"…."

자책하는 소피아를 보면서도 최리아는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자기가 그런 말을 건넨다고 해서 소피아의 자책이 줄어들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띠리리리.

핸드폰을 확인한 최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시큐리티 헌터들이 75층까지 도착했다고 합니다. 제가 내려가 보겠습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덩달아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전수희.

소피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꼭 마틸다와 동행하세요."

"알겠습니다."

끼익.

최리아와 전수희가 회장실을 떠나고.

소피아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아티라를 응시했다.

"백운 님… 인가요?"

"… 예."

정확히 맞췄는지 아티라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군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천장을 뚫고 등장한 백운.

외관이 바뀌거나 한 건 아니었다.

3년 전 광산의 일로 만났던 백운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나타난 백운에게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었다.

한튜브에 무기왕의 영상이 올라오면 항상 챙겨봐 왔음에도 말이다.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현장에서 물러나 있었다고는 하나.

아티라는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다양한 능력을 가진, 수많은 강적을 만나왔던 아티라.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움직임은."

아티라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이천호와 헌터들.

분명 수준 이상의 적들이었다.

- 서걱!

그런 적들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 가볍게 쓸어버린 백운.

속도도 속도지만, 백운이 보여준 유연함은 불가능에 가까운 곡예였다.

반응하지 못해야 정상인 걸 반응하고, 찌를 수 없어야 정상인 걸 찔러 넣었던 백운.

그 덕에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백운은 작은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대체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3년 전에 만났을 때도 백운이 어느 정도 강한 사람이란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운은 강하다, 많이 강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적불가."

"…!"

소피아의 말에 아티라의 눈이 커졌다.

아티라가 느끼고 있는 걸 한 단어로 설명한 소피아.

"저도 같은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스윽.

고개를 들어 뻥 뚫린 천장을 바라보는 소피아.

소피아가 옅은 미소를 띠며 백운이 등장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불길하고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검은 연기의 날개.

날개를 흩날리며 나타난 백운의 모습은 마치.

"검은 천사."

작은 한숨을 내쉰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에요."

"네…?"

의아해하는 아티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소피아.

얼굴에 그려져 있던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서요."

154화. 인지하다

다음 날 아침, 대산 근처의 레스토랑.

앞에서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는 고기를 집어 들었다.

와작!

이빨을 넣기 무섭게 터져 나오는 투뿔 한우의 육즙.

참새가 창문을 뚫은 다음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던 탓일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친듯이 배가 고팠다.

- 백운 님!

그러던 중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온 전수희.

얼굴 여기저기에 반창고를 붙인 전수희는 도착하자마자 내 팔을 붙들고 호텔 근처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끌고 갔다.

"백운 님! 더 드세요! 뭐 드실래요!"

"양갈비 3인분 더요!"

"네!"

고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문을 넣고 있는 전수희.

그 덕에 난 끊임없이 고기를 입으로 집어 넣을 수 있었다.

"수희 님 파산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엄청 비싸던데."

물론 실낯 같은 양심은 있던지라 먹던 중 전수희의 지갑 걱정도 한 번 해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최리아 실장님이 법인카드 주셨거든요."

전수희가 나름 최선을 다해 앞에 있는 고기를 뜯었다.

법인카드를 쥐고 있어서 그런지 오늘 만큼은 자신도 끝까지 먹어보겠다는 각오가 돋보였다.

"날 밝자마자 백운 님 식사 사드리라고요!"

- 감사합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장판석을 업은 채 올라갔던 80층.

80층으로 향하던 중 만난 최리아는 날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었다.

첫 만남 때를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

"어제 그분도 같이 드셨으면 좋을 텐데요. 감사하다고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거든요."

새로 나온 양갈비를 뜯으며 로인을 떠올렸다.

최리아와 전수희를 구한 뒤 사라져버린 로인.

분명 근처에 있을 텐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제가 만나면 대신 전해 줄게요. 부끄럼이 많은 친구라 잘 안 나타나요."

부끄럼인지 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잘 안 나타나는 건 맞으니 일단 아무렇게나 뱉어봤다.

"회사가 언제 정상화 될지 모르겠네요."

전수희가 대산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의 일로 한바탕 난리가 난 본사 건물.

건물의 천장이 뚫린 건 물론 이천호의 폭발로 80층 자체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각층별로 적 헌터들의 시체가 즐비한 것은 덤이고 말이다.

"어제 공격을 한 게 어떤 놈들인지는 밝혀진 건가요?"

"그게… 아직이요."

전수희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라고 들었어요."

단장인 이천호를 따라 대산을 공격했던 용병단.

어제의 싸움에서 몇몇은 살아남았지만 아는 게 전혀 없어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소속 헌터로 여겨지는 시체에서도 나온 건 없다고 하더라고요. 대놓고 의심이 가는 회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전수희가 답답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도심에 있는 회사가 습격받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기업과 기업 간에 얽혀있는 복잡한 관계로 무언가 강경 조치를 취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응?

빠아아안.

"…?"

다음 한 점을 입으로 집어넣으려는 순간.

대놓고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전수희에 잠시 손을 멈췄다.

뭐… 뭐야 찹쌀떡.

잠시 헛된 망상으로 떠올리려는 순간.

전수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뭐가요?"

눈을 가늘게 뜨며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전수희.

"80층의 일도 들었거든요. 백운 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소피아 회장님과 아티라 님도 위험하셨다고요."

"그… 렇죠."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 사망 100%였다.

어제 80층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 말이다.

"백운 님은 대산을 구하신 거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시는 게 뭐랄까… 대단해요."

"흐음."

별생각이 없었는데.

"그러게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대산을 구했다니!! 하며 들떠있었을 텐데.

들 뜨는 걸 떠나 어딘가에만 알려져도 대산의 영웅으로 우대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무뎌진 건가.

질겅질겅.

조금은 더 익어버린 고기를 씹으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찌 보면 무뎌지는 게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여기 오기 전만 해도 이집트를 구했다고 숱한 찬양을 받고 왔으니.

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요새 겪었던 일들의 스케일이 하나 같이 보통이 아니긴 했다.

유물관 골방에 처박혀 찬물에 세수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의 연속.

그 일들의 중심에 항상 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무뎌진 모양이었다.

"조금 다르지만 수희 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네?"

한점 집다 말고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전수희.

"어제 죽을 뻔했잖아요. 보통 죽을 뻔했던 사람이 다음날에 고기를 이렇게 먹진 않으니까."

"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건지 전수희의 새하얗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흠!"

잠시 포크를 내려놓더니 헛기침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전수희.

전수희가 애써 먼 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얼른 잡혀야 될 텐데 말이죠. 대산을 공격한 몹쓸 놈들!"

피식.

그런 전수희에 약간의 실소를 터뜨린 후.

어제 마지막에 이천호가 읊은 이름을 떠올렸다.

연수정.

암살대 놈들이랑 할배가 마지막이 아니었구나.

물증이 없기에 확정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 사건과 히메지 성에서 있었던 일들이 연관되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회귀 전 쿄스케를 죽였던 건 분명 암살대와 할배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암살대를 전멸시키며 쿄스케에게 위험이 될만한 요소는 제거되었다고 봐도 되겠지만.

대산을 기준으로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완전히 마음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쿄스케가 모시고 있는 히라이 쇼고가 계속해서 대산과 협력하는 관계이기에.

대산을 향하고 있는 칼날이 언제 또 쿄스케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당할 놈은 아니지만.

언력이란 능력은 희귀한 만큼 강했다.

문제가 있다면 저번처럼 누군가를 지키며 소모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약점이 드러난다는 것.

이번 대산을 공격했던 수준의 전력이 쿄스케를 공격한다면 또다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

잠시의 생각을 마친 뒤.

콰작!

앞에 놓인 고기를 물어뜯었다.

안 되겠어.

"그러게요, 빨리 잡혀야 할 텐데요."

지금은 해야 하는 일들이 있기에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

"아니면… 빨리 누군가한테 다 죽던가요."

찾아낸다.

* * *

무거운 침묵이 깔려있는 회의실.

화상이지만 꽤 많은 이가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무 말이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대산으로 향했던 헌터들은 모두 전멸했습니다.

# 살아 돌아온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 이천호에게 심어뒀던 폭발로 대산의 80층이 날아갔습니다.

# 소피아 회장은 살아있지만요.

"…."

이어져 들려오는 보고에 연수정이 쇼파에 몸을 파묻었다.

몽땅 절망적인 내용들 뿐이었지만,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입을 열 만한 자가 한 명도 살아있지 않다는 것은 말이다.

'이천호에게 술식을 심어 놓은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연수정이 이천호와 마주한 건 한 번뿐이었지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수정은 이천호에게 폭발 술식을 걸어놨었다.

이렇게 사용하려고 걸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으득.

대산의 공격이 마무리된 후.

이천호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할 때를 대비한 제어 수단으로 걸어두었던 것이었다.

처음의 목적과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론 정보를 뱉기 전에 이천호를 처단했으니 해야 할 바를 다하고 사라진 술식이었다.

'생각도 못 했다.'

연수정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마 지금 회의실에 모여 있는 모든 이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대산 공격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을 못 한 건 말이다.

'분명히 제로였다.'

미간을 찌푸린 연수정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막무가내로 벌인 공격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산을 통해 100%를 넘어 200%에 가까운 성공을 확신한 뒤 행한 일이었다.

'최후의 보험으로 카리조까지 끌어들였는데.'

카리조가 없었더라도 100%는 거뜬히 뛰어넘는 성공 확률이었다.

그럼에도 보험의 역할 및 이후의 대비를 위해 많은 자원을 소비해가며 카리조를 같은 편으로 회유한 것이었는데.

'대산은 공격을 막아낼 전력이 없었다.'

아티라가 강하다는 것.

그녀의 아래에 있는 마틸다도 상당한 전력이라는 것.

어느 하나 간과하지 않았었다.

'중간에 장판석이 도착한 건 예상 밖이었지만.'

이건 소피아에게 한 방 얻어맞고 말았다.

모든 정보망과 카리조의 정보를 동원해 각 기둥의 위치를 파악해뒀었는데.

유일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게 장판석의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번 공격을 알아채고 미리 한국으로 불러 들여놨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통제 가능한 변수였다.' 

장판석 같은 변수를 제거하고자 카리조까지 불러들인 것이었다.

객관적인 전력 차는 비슷하거나 카리조가 한 수 위인 상태.

설령 카리조가 졌더라도 가 있던 헌터들의 전력이 상당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 … 어째서 실패했다고 보십니까?

실패 보고를 들은 후 연수정이 끊임없이 생각해온 것.

생각해왔지만 아직까지 답을 얻지 못한 물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해선 안 되는 작전이었다.

'카리조는 장판석과 싸웠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많은 전력은 대체 누가…?'

"파악 중입니다."

#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 이천호로부터 약속받았던 대산의 지분도 물거품이 됐고요.

# 죽은 헌터들 역시 모두 비싼 자원이었습니다.

'입 닥쳐! 이 늙은이들아!!'

있는 힘껏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며 징징대는 회의의 늙은이들.

그 자리까지 올려준 게 누구인데 한 번 실패했다고 저렇게 징징대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다.

똑똑.

연수정이 화를 꾹꾹 눌러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연창환입니다.

"들어오세요."

누군가의 등장에 다시 한번 정적이 찾아온 회의실.

연수정의 친동생이자 정보부를 맡고 있는 연창환이 유에스비 하나를 건넸다.

"이건…?"

"대산 근처에 있던 드론 중 한 대에 담겨있던 자료입니다."

무언가에 휩쓸려 전부 파괴되었던 연창환의 드론들.

그중 하나에 담겨있던 자료를 되살린 것이었다.

슥.

자료를 건네받은 연수정이 앞에 놓인 노트북에 유에스비를 연결했다.

삐이---!

약간의 로딩 시간을 거치고.

유에스비에 있던 동영상과 사진이 연수정의 노트북 화면으로 띄워졌다.

"…!!"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란 연수정의 얼굴.

# 뭡니까?

# 빨리 공유하세요!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재촉이 이어졌지만.

연수정의 귓가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서거! 서걱! 콰득!

동영상에서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장면들이 연수정의 모든 사고를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거다.'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없었던 변수.

이번 공격을 실패로 이끈 변수.

눈앞의 남자가 그 변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삑.

동영상이 종료되고.

드론이 담은 마지막 장면에 화면이 멈추어졌다.

온몸을 붉은 피로 뒤덮은 채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검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남자.

'….'

자신의 일을 제대로 방해한 변수.

변수를 발견한 순간 분노가 치밀거라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꿀… 꺽.

연수정이 느끼고 있는 건 분노가 아니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기분.

아무리 계산을 하고 전략을 짜도 넘지 못할 존재.

전술을 뛰어넘는 무력을 목도하며 연수정이 분노 대신 느낀 감정은 두 가지였다.

경외심과.

꽈악.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본능에 의해 끌어올려진.

선명한 공포였다.

155화. 대리인

이거 참 부담스럽구만.

저벅.

대산 건물을 빠져나오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숙인 소피아와 아티라.

애초에 무기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으며 갚기로 한 빚이었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들과 대산을 구해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왔다.

- 계열사라도 하나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뒤에서 농담식으로 말을 건넸던 장판석까지.

순간 골방에 처박혀 있던 내가 대기업 계열사의 사장!?

이란 라노벨스러운 미래가 그려졌지만.

멀쩡한 회사를 말아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세차게 손을 내저었었다.

- 원하시는 걸 말씀해주세요. 가능한 거라면 대산에서 모두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지난번 정보에 대한 답례로 싸운 것이라 말해도 소용없었다.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원하는 걸 말하라는 소피아.

그런 소피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말았다.

양심 없는 새끼라고 생각하겠지.

무언가를 달라고 할 생각은 정말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받아와 버렸다.

두툼.

고개를 내려 손에 쥐어져 있는 문서 더미를 바라봤다.

몇 번이고 손을 내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필요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돈이나 건물 같은 물질적인 걸 넘어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필요해진 게 있었기 때문이다.

척준경의 악귀참도.

물론 이전에 이미 자료를 넘겨받긴 했었지만.

난 보다 더 디테일한 정보가 필요했다.

공식적인 보고 문서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악귀참도를 찾기 위해 대산의 이들이 행한 판단과 행동의 이유.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대산은 악귀참도를 찾지 못했어.

최종적으로 소실 되었을 거란 판단을 내리며 탐색을 포기했던 회귀 전의 대산.

그랬던 만큼 공식적인 자료만으로는 악귀참도까지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공명이 있는 만큼 자료를 따라가다 보면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여야 해.

그래서였다.

공식적인 자료 외에 보고서를 쓰기 직전까지 대산 탐사 전문가들의 판단 근거가 되었을 그들의 생각이 필요했다.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생각이라도 좋았다.

틀렸다고 판단하여 금방 잊어버린 생각도 괜찮았다.

아주 작은 단서가 되어 날 악귀참도의 공명까지만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가치는 충분했기에.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그래야 도윤을 데리러 갈 수 있어.

원래도 찾고는 싶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멋있으니까.

그리고 무기고에 넣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하지만.

망자의 길에 갇혀 있던 도윤을 발견하며 악귀참도를 꼭 찾아야 하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베지 못하는 걸 벨 수 있는 검.

악귀참도를 부르는 많은 이름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악귀를 유일하게 벨 수 있었다던 척준경.

고려 시대의 사람이었던 만큼 아주 오래전에 붙여진 수식어들이라 정확히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지금 가진 수단으로는 죽일 수 없는 망자.

악귀참도에는 망자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찾아낼 생각이었다.

전에 받았던 거랑 비교가 안 되네.

손에 있는 문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 여기 있습니다.

말하기 무섭게 소피아는 탐사팀에 연락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탐사 팀장이란 사람이 두툼한 문서 더미를 가지고 올라왔다.

보고서를 올리기 직전 어째서 이런 결정을 했는지 항상 적어두는 게 지침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보나.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약간 막막한 생각이 들었지만.

악귀참도를 찾을 수만 있다면, 찾아내서 도윤을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면.

이런 막막함 정도는 감사한 마음으로 얼마든지 감수할 생각이었다.

쏘옥.

메고 온 백팩에 문서를 집어넣은 후.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잭 더 리퍼와 동기화했을 때의 감각.

한 가지를 끝내니 잠시 미뤄뒀던 다음 생각이 떠올랐다.

신나게 헌터들을 베며 점점 퍼졌던 피의 광기.

나도 모르는 사이 흩뿌려지는 피를 바라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으.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다름 아닌 피를 보며 그런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꼈었다니.

괜히 동기화가 아닌 모양이었다.

- 찌릿.

그리고, 싸움의 막바지에 느껴졌던 경계.

그 경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게이지가 가득 차 있던 무기 중 유일하게 잭 더 리퍼만이 새로운 기술을 개방하지 않았었기에.

그것에 의한 경계라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유일하게 게이지가 차 있으니까.

가득 찬 게이지로 동기화가 발현됐던 비늘과 리볼버.

그리고 이동하며 발도가 가능하게 된 스이카까지.

세 무기에 차 있던 게이지는 동기화와 기술의 발현으로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흐으음."

순간의 감각을 떠올리며 턱을 문질렀다.

겁나 위험해 보였는데.

워낙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다 보니.

위험이라는 감각에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잭 더 리퍼에게서 느낀 경계가 위험하다고 느껴진 이유는 하나.

경계를 넘는 순간 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방으로 뿌려지는 피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것도 분명 광기의 영향이었어.

경계를 넘기 전에도 이 정도 수준인데.

넘는 순간 나 스스로가 어떻게 변할지 감이 잘 안 잡혔다.

넘는 방법은 알 것 같아.

명시적으로 경계 넘는 법이 쓰여있는 건 아니었지만.

잭 더 리퍼의 경계를 넘는 방법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너무 간단한 방법이었다.

더 많은 피를 뿌리는 것.

잭 더 리퍼를 이용해 더 많은 적의 혈관을 끊고 피를 솟구치게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혹시 모르니 주변에 적만 있을 때 해야지.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다고 가득 찬 게이지를 언제까지나 방치할 순 없는 노릇.

광기의 결과가 어떨지 모르기에 최소한의 예외처리만을 한 후.

잭 더 리퍼의 경계를 넘어 볼 생각이었다.

저벅.

"얼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어왔을까.

어느새 목적했던 곳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 국가 데몬 사건 기록실.

국가직 헌터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기록 보관소.

먼저 태랑 님부터 살려야지.

기태랑을 베었던 게 데몬인지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회귀 전에도 세기의 미스테리로 남았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왔다.

개방과 데몬이 나타난 이후 보고된 모든 사건 사고가 있는 장소.

어찌 보면 무모하다고 느껴지는 방식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회귀 전에 가지고 온 정보가 없는 이상 이제부터라도 찾아보는 것밖에는 말이다.

2주 정도 남으면 태랑 님 옆에 찰떡 모드로 달라붙어 있어야겠지만.

그 날까지 손가락만 빨며 기다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달라붙어 있음으로 기태랑이 죽는 장소에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한들.

아무것도 대비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대로 기태랑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꽈악.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저벅.

기록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찾는다.

* * *

예루살렘의 한 공터.

콰직! 콰득!

공터에 선 남자가 달려드는 데몬들을 처치해나갔다.

짧은 회색 머리와 강인한 신체를 가진 남자, 하킨.

이스라엘 국가직 헌터 소속으로 2급에 올라있는 남자였다.

"키아아악!"

"더럽게 많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끊임없이 달려드는 데몬들을 바라보면서도. 

홀로 대적하고 있는 하킨에겐 여유가 넘쳤다.

카앙!

캉!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지도 않았다.

하킨은 그저 자신의 공격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다른 공격은 없는 거냐! 간지럽다고!"

콰앙!

주먹을 치켜든 하킨이 앞에 있는 데몬의 머리를 부수었다.

스으으…!

데몬의 피를 뒤집어쓴 채 강한 힘을 뿜어내고 있는 하킨의 주먹.

하킨의 주먹은 사람의 살색과는 다른 색을 띄고 있었다.

- 불사의 몸을 가진 헌터. 철의 인간, 하킨.

하킨이 개방한 능력은 철강화.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 혹은 위협이 감지되었을 때 몸을 철로 바꾸는 능력이었다.

- 하… 하킨이다! 도망쳐!

개방이 나타나며 나타난 건 데몬만이 아니었다.

능력을 이용한 범죄자들 역시 늘어난 상태.

그런 이스라엘의 범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바로 하킨이었다.

칼을 휘둘러도, 총을 쏴도, 철로 이루어진 하킨의 몸에 상처를 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콰득!!

마지막 데몬의 머리를 부수며.

툭툭.

하킨이 몸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오늘도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데몬 토벌에 성공했다.

"시시하네."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싸움이었다.

애초에 다치지 않을 게 확정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싸움이었기에.

긴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저벅.

"응…?"

그런 하킨 앞에 모습을 드러낸 두 명의 남자.

'언제 다가온 거지?'

하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 거리까지 다가오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니.

'데몬놈들 쳐죽이느라 너무 신이 났었나 보군.'

"누구냐?"

하킨의 물음에 둘 중 앞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 뭐냐."

쿠드득.

하킨의 주먹이 철로 뒤덮여갔다.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엔 기괴한 문양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삐죽삐죽 솟은 날카로운 이빨과 초점 없는 눈동자까지.

인간이 아니었다.

'체형만 보면 완벽한 인간인데.'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모를 정도로 데몬은 인간에 가까운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도 데몬이냐?"

스윽.

하킨의 물음 때문이었을까.

뒤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인간…?'

하킨에게 약간의 혼란이 찾아왔다.

화사한 금발과 한없이 맑은 벽안을 가진 남자.

외모만 봤을 땐 영락없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데몬이랑?'

하킨이 의아해하는 사이.

벽안을 가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불사자 하킨."

"…!"

하킨을 알고 있는 벽안의 남자.

"불사자라는 오만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당신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왔습니다."

"뭐…?"

나지막이 읊조리는 남자에 하킨이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스릉.

앞에 있던 데몬이 기다란 검을 뽑아 들었다.

"허…? 날 알면서도 검쟁이를 데려온 거냐?"

하킨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온몸이 철로 뒤덮인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겠다는 남자.

그런 남자가 들고 온 건 고작 철로 된 검이었다.

"불사자라 불릴 수 있는 건 오직 한 분뿐입니다. 당신 따위가 가질 수 있는 칭호가 아니죠."

"입만 살은 건가? 그 깨달음이라는 거."

팟!

"줘보시지!"

먼저 움직인 하킨이 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전신 철강화.'

평소와 같이 온몸을 철로 뒤덮은 하킨.

눈으로 보이는 위험 요소는 한 자루의 검뿐이었기에.

상처 입을 일 따위는 없었다.

"불사자를 사칭하는 가짜의 죽음."

키잉…!

남자의 벽안이 빛을 뿜어내고.

"Deus Lo Vult,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눈에서 뿜어진 황금빛이 주변을 물들여나갔다.

156화. 실마리

날이 밝은 예루살렘의 공터.

"이쪽으로 와!"

"여기 맞아!?"

"예! 하킨 님의 신호는 여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 헌터가 공터로 들어섰다.

모두가 국가직에 속한 이들로 갑자기 신호가 끊긴 2급 헌터 하킨을 찾기 위해 온 것이었다.

"긴장해라! 데몬의 짓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지역 중 하나였던 예루살렘.

공식적으론 이스라엘에서 관리를 하며 헌터를 자유로이 파견할 수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 불만을 품은 팔레스타인 측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장소였다.

"데몬들 상처를 보니 하킨 님이 맞습니다."

공터에 늘어져 있는 데몬을 조사하던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한 무언가에 의한 타격흔.

철 인간 하킨의 토벌 장소를 많이 봐왔기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잘 찾아! 크기가 작을 테니까. 팔레스타인 놈들 손에 들어가지 않게 회수는 해야 한다."

공식적으로는 하킨을 찾으러 나왔지만.

이들은 하킨이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불사자로 분류되는 능력자 중 한 명인 하킨.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을 헤쳐오며 데몬과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온 헌터였기에.

싸우던 중 자기도 모르게 신호기를 잃어버린 것뿐이지 이런 공터에 누워있을 걸 가정하고 찾으러 온 건 아니었다.

"수색 끝나면 하킨 님에게 뭐라도 얻어먹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마 사주실 거다. 또 신호기 찾으러 왔다 말씀드리지 말고! 걱정돼서 미칠 뻔했다는 걸 어필하란 말이야!"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래서였다.

연락이 끊겼음에도 아무런 걱정 없이 수색을 벌일 수 있는 이유는 말이다.

어떤 적을 만나든 작은 생채기조차 입지 않았던 하킨이기에.

얼른 신호기만 찾고 돌아가 생색을 낼 생각이었다.

툭.

"응?"

감지기를 들고 걷던 헌터.

헌터가 발에 걸린 무언가를 내려다봤다.

삐--- 삐---

감지기와 반응해 붉게 점멸하고 있는 신호기.

"어…?"

정확히는 신호기가 장착되어 있는 하킨의 시계가 헌터의 눈에 들어왔다.

시계가 차져 있던 주인의 손목과 함께였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잠시 눈을 비비는 헌터.

"아셀 티… 팀장님…!"

"왜 뭔데! 얼른 신호기나 찾으라니깐 데몬 시체는 왜 보고 앉았…? 왜 그래?"

삐-- 삐---!

핀잔을 주려다 팀장 아셀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왠지 모르겠지만 심각한 얼굴로 얼이 빠져 있는 부하.

부하가 서 있는 장소였다.

들고 있는 감지기가 짚어낸 장소는 말이다.

'….'

꿀꺽.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셀의 목으로 넘어가는 마른침.

어째서 긴장되거나 초조할 때나 생기는 마른침이 넘어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찾고 있는 건 하킨이 아니라 하킨이 차고 있었던 신호기일 뿐인데.

감지기가 짚어내고 있는 저 장소에는 하킨이 아니라 신호기가 놓여 있을 터인데.

긴장된 아셀의 몸은 부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걸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정신차려라, 아셀! 그렇게 많은 공격을 맨몸으로 받고도 죽지 않은 분이다.'

저… 벅.

아셀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부하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은 다잡았지만 어째선지 자신감이 결여된 걸음걸이였다.

"…."

도착한 아셀이 여전히 굳어 있는 부하의 시선를 쫓았다.

"!!!"

시계가 차져 있는 손목을 따라 도달한 곳.

그곳엔 끔찍한 시체가 놓여 있었다.

죽은 뒤 한동안 방치된 건지 여기저기가 뜯어 먹혀 있는 시체.

시계가 있는 손목을 제외하곤 온전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아닐 거다.'

얼굴은커녕 신체의 본래 생김새마저 파악하기 힘든 상태였기에.

아셀이 부정하며 천천히 몸을 굽혔다.

감지기의 역할은 신호를 찾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대상이 국가직 헌터라면 지문이나 혈액을 이용해 간단한 신분 확인 역시 할 수 있었다.

꾸욱.

감지기에 시체의 피를 묻히고.

유일하게 온전한 손가락의 지문을 찍어 눌렀다.

삐이이이----!

감지기가 지문과 혈액을 인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어느새 다가온 수색 팀원들.

팀원들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감지기의 결과를 기다렸다.

겉으로는 모두가 아닐거라며 부정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안감에 모두가 사뭇 긴장한 얼굴이었다.

'제발…!'

삑!

아셀의 간절한 말과 함께 나타난 감지기의 결과.

털썩.

나타난 결과에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가고.

몸을 굽히고 있던 아셀은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 이스라엘 2급 국가직 헌터.

# 하킨 드라스.

# 생체 반응 없음.

# 사망.

* * *

삑. 삑. 삑.

흐음.

삑삑삑삑.

사건 사고 더럽게 많구나.

앞에 펼쳐진 기록소의 스크린.

스크린엔 정말이지 많다는 단어를 한참 뛰어넘는 양의 정보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에서 수영 중 가오리 데몬에게 물려 죽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밭에서 농사를 하다 데몬화 된 토끼의 발에 치여 죽은 사례도 있었다

아주 그냥 위험천만한 세상이야.

일단 했다 하면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되는 능력의 개방. 

모두가 개방을 하는 순간 영생을 손에 넣은 듯 기뻐했지만.

이런 데몬들에 의한 사건들을 보면 온전히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구심이 들었다.

응?

열심히 페이지를 넘기던 중.

눈에 익은 사건이 보였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사신 사건.

기록소엔 정체불명의 데몬에 의한 소행으로 적혀 있었다.

로인 이거 많이도 보냈구만.

그리스에서만 꽤 많은 건수가 기록되어 있는 사신 사건.

기록에는 극악무도한 데몬으로 처치 불가일 것이라 여겨져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죽을 운명인 사람의 목숨을 하루 전에 거둬간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그다지 극악무도해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데몬도 아니었고 말이다.

- 이제 제가 궁금한 것들을 대답해주시죠.

무… 무서운 녀석…!

다시 생각해보니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전수희와 고기 폭식을 한 뒤 호텔로 돌아가는 길.

방으로 들어가려는 내 뒤로 로인이 나타났었다.

- 제가 궁금한 건 두 가지입니다.

이집트에서 망자의 길로 들어가기 전부터도 직감하고 있었지만.

로인이 물어온 것들은 역시나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어려워서라기 보단 애매한 질문들.

어떻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거냐… 라.

"흐음."

굳이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나도 궁금하긴 했었다.

로인이 계속해서 말하는 운명이란 게 대체 뭔지 말이다.

회귀해서 돌아온 건… 확실히 운명이 바뀐 거긴 하지.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난 골방에 처박혀 재미없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일이기에 운명이 바꼈구나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연화의 경우는 달랐다.

거창하게 이연화의 운명을 바꾸려 했다기보단.

지켜야 하니까 지킨 건데.

메토스고 피안화고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친구인 이연화가 죽을 위기에 처했고.

그렇기에 구했을 뿐이었다.

- ….

이렇게 대답했을 때 로인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겨우 이딴 대답을 들으려 여기까지 따라왔나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진짜 이것뿐이었는데.

- … 두 번째 질문도 대답해주시죠.

첫 번째 대답에 몹시 실망해 기대는 안 되지만, 일단은 끝까지 들어주겠다는 얼굴이었다.

- 이상한 새끼네, 이거.

물론 육성으로 뱉은 말은 아니었다.

두 번째 질문을 들었을 때 나의 속마음이었다.

- 어째서입니까? 메토스가 나타난 공터에서 전 어째서 당신과 친구를 도운 겁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짜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말해줬겠지만.

로인 덕분에 도윤을 찾고 소피아 역시 구할 수 있었기에.

대답할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최대한 머리를 굴려댔었다.

날 죽일지도 몰라.

고마움도 고마움이었지만 약간 무서웠다.

뻥카로 일단 망자의 길로 들어간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혀 평생 사신에게 쫓기는 것이 말이다.

-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서… 가 아닐까? 당시 너의 감정과 생각을 내가 알 길은 없지만, 너도 모르게 미안함을 느낀 거지.

최대한 당시의 상황과 로인의 행동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었다.

미안이란 단어가 낯선 건지 약간이지만 눈살을 찌푸렸었던 로인.

- 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의 목숨을 거뒀던 거잖아. 그런데 거두려던 연화의 운명이 바뀌었고, 넌 원래 죽지 않을 수 있는 연화의 목숨을 거둬가려던 거였으니까. 네 말대로라면 나의 개입으로 인해 운명인 바뀐 거지만, 어쨌든 그거 때문에 미안해서 우리를 도왔다…?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이 이상 쥐어 짜내는 건 불가능.

대답을 듣고도 로인이 낫을 휘두른다면 뻥카를 친 대가로 한 대는 시원하게 맞아 줄 생각이었다.

- ….

하지만.

낫을 휘두를 거란 예상과 달리 로인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 미안…?

미안이란 단어를 읊조리면서 말이다.

마치 어떤 감정인지를 모른다는 듯한 읊조림이었지만, 애초에 모르는 감정을 내가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제발 낫만 휘두르지 말라고 기도하며 로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지금 굳이 알아야 할 필요 있을까? 살다 보면 알게 되는 날이 오지 않겠어?

무책임한 긍정론과 함께 말이다.

- ….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로인.

- 사아아.

로인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 전 돌아가겠습니다.

간략한 한 마디만을 남긴 후.

그리스산 사신 로인은 모습을 감추었다.

"이상한 놈이야."

이상한 놈이었지만 이상하게 싫진 않은 녀석이었다.

첫 만남 때는 불가항력으로 걷어차며 만나게 됐지만 말이다.

"친구 없을 거 같은데."

혼자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골방 히키코모리답게 나라고 친구가 많았던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나보다 더 친구가 없을 듯한 로인이었다.

과거에 지독한 외로움을 겪어 봐서인지 매일 홀로 사라져버리는 로인이 짠하게 느껴졌다.

"…."

뭐.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끼익!

힘차게 기댔던 의자를 세우며 스크린을 넘기기 시작했다.

부디 아주 작은 실마리라고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띠링.

응?

그때 스크린 하단으로 떠오르는 작은 메시지 박스.

조금 전 기록소에 새로운 사건이 등록되었다는 메시지였다.

하긴 정보의 대상이 세계이니.

끊임없이 올라오겠네.

꾸욱.

별생각 없이 새로 떠오른 메시지 박스를 클릭했다.

등록한 곳은 이스라엘.

# 하킨 드라스.

# 41세.

# 국가직 2급 헌터.

# 사망.

2급 헌터라.

국가마다 기준이 다르긴 해도 꽤 강한 사람인데.

왜 죽은 거지?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려봤지만.

아쉽게도 사망 원인은 정확히 쓰여 있지 않았다.

사망 이후에 사체 훼손이 심해 정확한 사인을 구분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으음.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는 기록에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

하킨의 죽음에 대한 한 줄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 하킨은 생전 몸을 철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개방했었다. 수많은 전투에서도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었기에, 불사자라 불리었다.

기사의 문장 중에서도 내 눈을 강하게 붙잡은 단어는 명확했다.

수많은 싸움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철의 몸, 그리고 상처 입지 않는 몸을 가져 죽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용어.

불사자.

157화. 불사자

과한 억측일 수도 있었다.

기록에 나온 불사자란 단어.

이 단어만을 보고 회귀 전 기태랑의 죽음과 연관 짓는 것은 말이다.

확인만 해보자.

하지만, 밑바닥에서부터 헤딩하는 입장이었기에.

과하고 아니고를 따질 여유 따윈 없었다.

약간의 실마리라도 보인다면 아니라는 판단이 설 때까지는 파보아야 했다.

# 대체 누가 철 인간 하킨을 죽였는가?

기록에 올라온 하킨이란 인물은 이스라엘에서 유명인이었다.

어느 전장을 나서던 상처 하나 없이 연전연승을 거뒀던 국가적 영웅.

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에서의 기태랑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태랑 님처럼 몸이 항상 철인 건 아니고.

기록에 링크된 수많은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태랑과 다른 게 있다면 하킨의 몸은 24시간 철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

평소엔 일반적인 사람의 몸이었다가 필요로 할 때 철강화를 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죽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닌데.

기태랑이 불사로 불리며 절대 죽지 않는 인간이라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능력을 굳이 발동시키지 않아도 디폴트로 몸이 다이아몬드였기 때문이다.

자고 있을 때 기습을 하던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뒤 공격을 하던.

24시간 다이아몬드기에 어떤 공격으로도 뚫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에 반해 하킨은 자신이 원할 때만 철강화를 시킬 수 있으니 무의식중이었다면 죽음이 불가능한 건 아닌 셈.

# 철 인간 하킨의 실험.

실험…?

하킨이 죽을 수 있는 여러 케이스를 떠올리던 중.

과거 하킨이 능력 개방 후 벌여온 실험들에 대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자신한테 실험을 한 건가.

스스로의 몸에 실험이라 하니 순간 괴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용을 살피니 그런 경악스러운 종류의 실험은 아니었다.

# 능력의 발동 조건.

하킨은 보다 자신의 능력을 잘 파악하기 위해 간단한 케이스를 통해 실험을 벌인 것이었다.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사된 총알에도 능력이 발동했다…?

내용을 보니 약간 괴짜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하킨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을 발사시켰고.

총알이 도달하는 찰나의 순간 하킨의 몸은 철로 변해 총알을 막아냈다.

발동을 원할 때만 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필요할 땐 저절로 변한다는 건가.

실험 중엔 내가 생각하던 케이스를 반박하는 내용이 하나 더 있었다.

수면제를 먹고 완벽한 가사 상태에 빠진 하킨에게 칼을 찔러 넣는 실험이었다.

이것도 철로 변해서 막았다고?

이 정도면 완벽 방어 아닌가.

톡… 톡.

책상을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래에 달린 실험 내용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하킨이 죽을 수 있는 케이스가 여럿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용들을 보니 사람들이 불사자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의식을 잃었을지라도 몸은 철로 변한다.

그럼 몸이 철강화가 안되어 죽었다는 가설은 가능성이 사리지는 건데.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철 자체의 파괴였다.

철이라고 안 부서지는 건 아니었기에.

견뎌낼 수 없는 강한 힘이나 높은 온도로 녹여내는 게 가능했다.

녹인 건… 아니겠지?

녹여 죽인 거라면 분명 몸에 흔적이 남았을 터.

강한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무언가에 의해 사체를 훼손당했다가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었다.

"흠."

불사자란 단어 하나만 보고 어떻게든 기태랑과 매칭시켜보려 했지만.

과도한 억측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체에 검흔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모를까 회귀 전 기태랑의 죽음과 비슷한 게 전혀 없었다.

"공통점이라곤 불사자라 불렸던 것 하나뿐인가."

잠시 생각을 하다 스크린의 검색창에 손을 올렸다.

# 불사자.

별생각 없이 적은 단어였다.

유일하게 내 이목을 끈 단어였기에.

안될 것 같지만 관련된 기록이라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딸칵.

띠링.

…?

"뭐야?"

눈앞에 나타난 많은 양의 기록.

불사자와 매칭되는 기록들에 몸이 스크린 쪽으로 쏠렸다.

# 요르단, 불사자라 불리던 헌터 실종.

# 세네갈, 불사자라 불리던 헌터의 사망.

# 불사자였지만 의문의 죽음, 대체 누가 그를 죽였는가.

두 페이지에 걸쳐 정렬되어 있는 기록들.

모두 각 나라에서 불사자라 불리던 존재들의 죽음 혹은 실종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 심장이 뚫려도 다시 재생했던 헌터 두락. 두락을 죽인 건 대체 무엇일까?

심장이 뚫려도 살아남는 능력자가 죽었다…?

이건 또 기태랑, 하킨과는 다른 케이스였다.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자기재생 관련 능력자인 듯한 두락.

두락은 깊은 정글 속에서 사망하여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덕분에 상당한 부패가 진행되어 사인은 역시 알기 힘들다는 것.

드륵… 드륵.

스크롤을 내리며 관련된 기사들을 모조리 살폈다.

항상 전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만큼 죽음과도 가까운 헌터였지만.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기록의 날짜가 전부… 2년이 되지 않았다."

개방이 나타나고 10년도 더 지난 지금이었다.

기록소 시스템이 도입된 것 역시 7년이 넘은 시점.

그런데도 불사자 죽음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최근 2년에 몰려 있었다.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기록만 봤을 때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2년 전부터 불사자의 죽음이 시작되었다.

기록된 모든 이가 각 국가에선 유명 인사들이었다.

2년 전에 죽었던 걸 늦게서야 발견하고 이제서야 보고하거나 한 게 아니란 말이었다.

"모두가 불사자라 불렸고, 이론적으로 죽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을 살펴보고 있는 사이.

나도 모르게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2년 전부터 누군가 이론적 불가능을 뚫고 불사자라 불린 능력자들을 죽이고 있다.

실제로 죽은 이들이 불사자는 아니었다.

단지 개방한 능력상 죽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 뿐이었다.

능력의 발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말이다. 

"흠."

눈에 띄는 건 한 가지 더 있었다.

진짜인지 아닌지를 떠나 모두가 불사자로 불리었다는 것.

누군가 불사자를 죽이고 타겟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불사자라 불린다는 것이 그 기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톡… 톡.

잠시 간의 생각을 마친 후.

드륵.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록을 통해 고민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국가에서 칭송받던 불사자에 대한 죽음을 비통해하는 기사가 대부분일 뿐.

자세한 조사나 당시 현장의 환경에 대해 기록된 건 없었기 때문이다.

가봐야겠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직접 가서 알아볼 생각이었다.

어째서 불사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2년 전부터 죽어 나가고 있는 건지.

만약 불사자를 죽이는 사람이 있다면.

저벅.

어째서 죽이는 건지를 말이다.

* * *

예루살렘의 한 신전.

신전의 성벽 위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다.

"어?"

그런 남자를 발견한 신전의 경비.

경비 유손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응시했다.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간 거야?'

아슬아슬한 성벽 위였다.

돈을 주고 올라가라 해도 거절할 아찔한 높이.

"저기요! 거기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내려오세요!"

유손이 두 남자를 향해 외치고.

남자 중 파란색 긴 머리를 가진 자가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

'크… 크르르…?'

소름 돋는 울음소리와 안대와 마스크를 차고 있는 기괴한 생김새까지.

왠지 모르게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에 유손이 주춤거렸지만.

"진정하세요, 칸."

곧이어 옆에 있던 남자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만드는 신비로운 목소리였다.

"…."

으르릉거리던 칸도 마찬가지였는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자세를 거두었다.

"와…."

칸의 옆에 있는 남자를 본 유손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노을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과 머리만큼이나 아름다운 벽안,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얼굴까지.

백이면 백 탄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생김새였다.

"제 이름은 로튼. 당신은요?"

"유… 유손입니다."

성벽에 올라있는 칸과 로튼을 쫓아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유손은 쫓아내긴커녕 로튼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사악!

"!!"

그렇게 유손이 로튼의 외모에 눈을 빼앗겨 있는 사이.

높은 성벽 위에 있던 두 명이 유손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땅으로 내려왔다.

'뭐… 뭐지…?'

내려왔다기보단 갑자기 나타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속도. 

유손이 눈을 비비며 가까워진 로튼을 바라봤다.

저벅.

칸에게 무언가를 말한 뒤.

로튼이 홀로 유손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꿀꺽.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는, 그런 신비로운 분위기를 로튼은 픙기고 있었다.

"유손."

"예… 예!"

어느새 유손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로튼.

로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손이 당황하자 로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개방으로 인해 당신들은 수명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어떤가요?"

"어… 그게… 좋습니다. 유한한 시간으로 항상 쫓기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아니거든요."

유손의 생각이자 인류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여전히 병이나 사고에 의한 죽음은 존재했지만.

적어도 나이가 들어 죽진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세상엔 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태어났으면 죽어야 하며, 죽으면 다시 태어나야 하죠."

'전도하시는 건가…?'

여러 종교의 집합체인 예루살렘이었기에.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종교 간의 전도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기존엔 수명이란 법칙이 태어난 것을 필연적으로 죽게 만드는 역할을 했었죠. 운이 좋아 모든 죽음을 피해내더라도 말입니다."

"그… 그렇죠."

다른 이였다면 시간 낭비라고 등을 돌렸겠지만.

어째서인지 로튼이 하는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명은 지금의 인간에겐 적용되지 않는 법칙이기에, 새로운 법칙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법칙이라니… 무엇을 위한 법칙을 말씀하시는 거죠?"

"인간의 죽음입니다."

"…!"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말하는 로튼.

"그래서 우리가 온 거죠. 새로운 법칙이 되기 위해서요."

'우… 우리…?'

우리란 단어에 유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묘한 단어였다.

분명 같은 사람일 텐데 로튼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이질감.

"하지만, 우리가 왔음에도 불사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끝끝내 법칙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그저 운이 좋아 얻은 능력으로 마치 영원히 죽지 않는 것마냥 떠받들어지는 사람들요."

저벅.

"!!"

한 발자국 더 다가와 유손의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미는 로튼.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꿀… 꺽.

여전히 아름다운 눈동자였지만.

유손의 눈에 그 눈동자는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웠다.

소름 끼치도록 말이다.

싱긋.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로튼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만한 착각에 빠진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요."

158화. 예루살렘

"웬일이야? 호출 없으면 맨날 카지노에 박혀 있더니."

'그러게나 말이다.'

기태랑의 질문에 여전히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은발을 가진, 국가직 헌터 소속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카지노를 출입하는 1급 헌터 비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휴식 기간이야."

"돈 다 잃은 건 아니고?"

"내가 언제 잃는 거 봤어? 카지노에서 제발 그만 와달라는 게 난데."

카지노에서 그만 와달라 해도 꿋꿋이 출석부를 찍는 비광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헌터청에 머무르며 기태랑을 쫓아다니게 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 태랑 님 옆에 좀 있어 주세요!

며칠 전 도박 중인 비광에게 걸려온 전화 한통.

'대한민국 기관들에서도 이렇게 막 전화하진 않는데.'

그야말로 다짜고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이해도 안 되는 부탁을 한 인간.

기관도 못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건 단 한 명 뿐이었다.

대한민국 10급 헌터 백운.

'제대로 설명도 안하고 자식이.'

부탁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약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기태랑 옆에 좀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 태랑 님이 알면 안 돼요!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구요! 자연스럽게!

'이미 내가 여기 있는 거 자체가 안 자연스러운데 멍청한 놈이.'

이후로 두어 번 더 이유를 물었지만.

꼭 해줘야 한다는 말만이 들린 후 전화는 끊겼었다.

백운이 의도적으로 끊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치직거리던 걸 보니 무언가 신호가 닿지 않게 되어 끊어진 걸로 보였다.

"진짜 돈 다 잃은 건 아니지?"

"거 좀!"

한 차례 더 도발을 한 후 능글맞게 웃어 보이는 기태랑.

그런 기태랑을 보며 비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놈 옆에 왜 있으라는 거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부탁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대신 좀 지켜주라나보다 하고 말았을 텐데.

눈앞에 있는 인간은 아무리 죽이려 들어도 안 죽는, 비광이 아는 한 불사신에 가까운 괴물이었다.

"쯧."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탁이었지만.

그럼에도 비광이 도박을 포기하고 기태랑을 따라다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부탁한 사람이 다름 아닌 백운이었기 때문.

그렇다고 단순히 친하다는 이유로 착실히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뭔가 있단 말이지.'

백운이 지금까지 보여온 행보는 엄청났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겪어볼까 말까 한 일을 이미 몇 번이나 겪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사건의 중심에서 주연으로.

'이번에 또 무슨 일에 휘말렸길래 이런 부탁을 한 거지.'

저벅.

앞서가는 기태랑을 따라가며.

비광이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봤다.

능력과 데몬의 등장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혼란을 겪고 있는 세계.

'탱탱볼 같은 놈아.'

그런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하늘이 창문 밖으로 펼쳐져 있었다.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냐.'

* * *

"끄아아아아!"

청명하고 푸르게 변해 가고 있는 새벽하늘.

운동회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될 것 같았다.

그런 하늘에서 운동회는 고사하고 자유낙하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거리 계산 실패.

히어로 랜딩…!

쿵!! 우당탕!

"끄억!"

오늘도 다시 한번 랜딩에 실패하며 모래 바닥을 뒹굴었다.

라의 불꽃 이후 꽤 늘어난 칼데아의 연기.

전보다 조금 넉넉해진 사정에 너무 생각 없이 써버린 탓이었다.

목표했던 곳까지 날아가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진 것은 말이다.

"…."

대자로 드러누워 하늘을 응시했다.

영화에서 봤던 랜딩이 하도 멋있어 따라 해보려고 했는데.

다음부턴 그냥 수리검을 꺼내 안전한 착지를 하기로 했다.

벌떡!

주저앉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중간에 추락하긴 했어도 어쨌든 예루살렘에는 도착했으니. 

목표한 바는 이루었다고 봐야 했다.

쉽지 않네.

정말 쉽지 않았다.

기록소에서 봤던 불사자들의 사망 장소.

요 며칠 간 한국을 떠나 그 장소들을 둘러보았다.

현장에 가면 뭐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어.

괜히 기록소에 남아 있던 기록들이 허술한 게 아니었다.

모든 국가가 한국처럼 CCTV나 첨단 수사 기술이 발달하진 않았기에.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건 몹시 제한적이었다.

눈으로 하는 현장 조사와 주변 인과 관계 확인이 끝이라.

- 황금빛이 보였습니다. 장막처럼 그 일대를 뒤덮는 아름다운 빛이었어요.

그나마 얻은 게 있다면 두 명의 목격자였다.

각기 다른 국가에 사는 목격자들.

둘 모두 불사자라 불리는 헌터가 죽었을 때 근처에 있던 사람이었다.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장막.

사진을 찍어두거나 한 건 아니었기에.

둘이 본 게 완벽히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

- 장막이 펼쳐지기 전까진 전투가 벌어진 건지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장막이 펼쳐진 뒤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죠.

당시의 정황이 무서울 정도로 비슷했다.

죽은 헌터들은 국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이었다.

수준 이상의 데몬이라도 일당백이 가능한 인물들.

죽은 날에도 여느 날과 같이 호출을 받고 나가 데몬을 상대 중이었다.

큰 소리는 아마도 데몬과 싸우면서 생긴 거였겠지.

그런데 장막이 펼쳐진 뒤에 조용해졌다…?

전투로 인해 시작된 소리가 장막이 펼쳐진 뒤에 사라진 걸로 봤을 때.

유추해볼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였다.

장막이 헌터들을 죽였거나.

그게 아니라면 헌터들을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거나.

툭툭.

몸을 완전히 일으킨 뒤 옷에 묻은 모래들을 털어냈다.

둘 중 뭐가 됐든 진짜 실존할까 싶은 능력이었다.

상대를 즉사시키거나 능력을 백지화시키는 장막이라니.

둘 중 굳이 고르라면 후자의 확률이 높겠지.

회귀 전 기태랑의 죽음.

기태랑은 무언가 미지의 힘에 의해 죽은 게 아니었다.

보도된 뉴스가 조작된 게 아니라면 분명 사인은 칼에 의한 부상 때문이었다.

"… 너무 사기 아닌가."

능력 무효화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능력이었다.

저벅.

내가 유추한 장막의 능력이 둘 다 아니길 바라며.

가려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멍하니 걷다 보니 떠오르는 기억.

비광 님은 밀착마크 잘하고 있나.

한국을 떠나기 직전 냅다 전화를 후리긴 했는데.

비광이 날 얼마나 욕하고 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회귀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얼마 후에 태랑 님이 죽어요!! 라고 할 수도 없고.

딜레마였다.

처음엔 기태랑에게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했었다.

전 당신의 죽음을 봤으니 준비해야 한다고.

안되지.

기태랑을 못 믿어서 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경계하는 건 따로 있었다.

미래를 말해줌으로써 찾아올 변화였다.

정확히는 변화에 의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생기는 것.

태랑 님이 경계를 가지면서 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당장은 안전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론 좋지 않았다.

어찌 됐든 적은 기태랑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였다.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이상 기태랑의 목숨은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었다.

태랑 님이 피해를 안 끼치려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거고.

더 최악의 경우였다.

내가 자신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적의 실체와 위험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내가 휘말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게 분명했다.

비광 님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렇듯 무언가 섣불리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기태랑 옆에 붙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자 대한민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 비광에게 부탁을 했다.

일단 둘이 함께 있는 이상, 정말 정신 나간 놈이 아니라면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응?"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으로 작은 부락이 보였다.

화려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은 3대 종교의 성지이자 관광 명소였다.

그런 예루살렘 근처에 이런 낙후된 부락이라니.

쉽게 매칭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사는 사람은 있는 거 같고.

저벅.

조금 더 다가가 기웃거리자.

"누구십니까?"

근처에 있던 노인이 내게 다가왔다.

…!

반 정도 사라진 다리을 대신하여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주변을 둘러보다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노인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힘겨워 보이는 미소였다.

"길을 잃어버리셨나 보군요. 보통 관광객들은 이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으니까요."

슥.

가까이 와서 보라는 듯 길을 터주는 노인.

조금 더 다가가자 부락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병들고 버려진 자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노인의 소개에 비해선 무척이나 밝은 분위기의 부락이었다.

넓진 않지만 곳곳을 뛰어다니며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

다른 마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전으로 인해 사지를 잃은 사람, 병이 들었지만 돈이 없어 고칠 수 없는 사람,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죠. 저 또한."

노인이 천천히 몸을 덮고 있던 망토를 들추어 보였다.

"!!"

괴사 되어서인지 검은색으로 변한 피부가 가슴 언저리까지 번져 있었다.

"썩은 다리를 제때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길어봐야 두 달이면 죽을 테고요."

슥.

자신의 죽음을 덤덤히 말한 노인이 고개를 돌려 부락을 응시했다.

"모두 저와 같습니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부락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따각.

옅게 웃어 보인 노인이 천천히 부락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이곳으론 더 들어오지 마십시오. 혹여나 죽음의 기운이 옮을 수도 있으니까요. 예루살렘 도심은 이쪽으로 쭉 가면 도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한쪽 방향을 가리킨 뒤 안쪽으로 사라지는 노인.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느낌.

회귀 전의 나랑 비슷해서 그런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였다.

개방을 하고 싶다는 희망도, 앞으로 행복할 거란 희망도 모두 내려놓았던 상태.

그래서인지 노인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차마 위로의 말은 안 나오네.

누군가는 노인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위로의 말이 저 노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거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묘한 기분으로 잠시 부락을 바라보다 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

등 뒤로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

숨김없는 적의에 몸을 돌리자 다가오고 있는 두 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둘 모두 망토를 뒤집어쓴 상태였지만 체형으로 봤을 땐 둘 모두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사아아…!

사라졌다…?

몸을 감싸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까이 다가왔기에 더 커질 거라 생각했는데.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저벅.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추는 두 사람.

그중 한 명이 얼굴까지 뒤집어썼던 망토를 천천히 내렸다.

와.

눈이 부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금발과 눈동자.

세상에 이렇게 선한 인상이 있나 싶을 정도의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인사에 답을 하고 나자.

싱긋.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넨 남자가 옅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미소의 의미를 궁금해하려는 찰나.

금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로튼이라고 합니다."

159화. 여행자 로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