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생도 (1)
그로부터 정확히 이틀이 지났다.
여명궁의 집무실, 내가 에스트로의 직인을 가져오자 태자가 크게 놀랐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건가? 이렇게 빨리 가져올 줄은 몰랐는데...."
"…어찌저찌 되덥니다."
답하면서도 묘한 떨떠름함이 목구멍에 남았다.
필리아를 생각하니 절로 그리되는 것이었다.
아직도 놀랍다.
빡통이라고 생각했던 필리아가 사실은 황실 최고의 두뇌였다는 게.
더불어,
'내가 그렇게 속 보였나?'
필리아가 내 목적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게.
이놈의 황족은 어찌 보는 인간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지, 오르테어가 괜히 오르테어는 아니라는 생각까지 치밀었다.
태자에게 이 일을 말하는 건 관뒀다.
나름 직인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이고, 그 머리 좋은 녀석과의 괜한 긁어 부스럼은 피하려는 판단이었다.
뭐가 됐든 직인은 얻었지 않나?
능력 있는 이들은 우호 관계를 만들어두는 게 좋다.
내가 약점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하여 물었다.
"벨기온의 직인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받아두었네. 애초에 우호적인 관계였으니."
태자가 품속에서 직인을 꺼내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두 개, 남은 하나는....
"…이제 대공가군요."
"으음, 당장은 얻기 힘들지."
태자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 또한 크게 다른 기분은 아니었다.
북부의 수호자이자, 마지막 황금 세대의 기수가 있는 헤이론 대공가.
그곳의 주인인 현 대공이 마지막 직인의 주인인 까닭으로.
나는 말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곳입니다. 이그로시아에서 정보가 오는 대로 움직여 보지요."
"음, 나는 그때까지는 신변 정리를 조금 해야 할 듯하네."
그 말에 내 키만큼이나 서류를 쌓아둔 태자의 안색을 살폈다.
항상 멀끔하던 꼴이 꽤나 초췌하다.
피로에 절어있는 행색이었는데, 이 인간의 체력을 생각하면 이건 꽤 놀라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바쁘십니까?"
"말도 마시게. 고작 몇 주 자리를 비웠다고 꼴이 아주...."
"아이고."
납득은 된다.
태자는 바쁘다.
항상 바빴고, 지금은 더욱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이그로시아로 떠난 몇 주간 대역을 쓰지 않았던가.
어지간한 대외 활동은 대역과 에릴다가 함께 처리해줬지만, 정작 결재가 필요한 일이나 중요한 접견은 모두 미뤄왔단 말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몇 주간 밀린 일에 더해 새로이 쌓이는 일까지.
태자는 이런 접견 시간조차 내기 힘들 정도로 바쁜 몸이 되어버렸다.
'수업은....'
당분간 쉴까.
바쁜 게 문제인지 내 설득이 먹힌 것인지 요즘엔 성질을 더 시험하려 들지도 않는다.
애초에 휴식도 수련이다.
나와 만난 이후로 꽤 험하게 몸을 굴렸으니 이렇듯 몸을 쉬어줄 시간은 필요하다.
그런 생각이나 하는 중이었다.
덜컥!
"서류 왔… 아? 소가주네요."
에릴다가 트레이 가득 서류를 싣고 나타났다.
태자가 질린 얼굴을 만들었고, 그 와중에 에릴다는 서류를 태자쪽으로 밀어내며 품에서 치즈 버거를 꺼냈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저 밥 좀 먹을게요. 더 있을 거예요?"
"…아니, 이제 갈 겁니다."
"그래요? 잘 가요. 아, 레시피 수정은 언제 되나요?"
이 여자는 볼 때마다 그것부터 물어보더라.
내가 무슨 버거 연구원인 줄 아나.
"당분간은 없습니다. 저도 바빠서."
"엥."
"뭐지 그 반응은?"
눈을 좁히니 태자 쪽에서 답이 돌아왔다.
"자네가 일이 있나?"
"쌍으로 무시하네. 저도 나름 바쁜 몸입니다."
"음?"
태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내 이미지, 이대로 괜찮은가.
생각하며 답했다.
"…전하, 기사단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 구하러 갑니다."
""
"일단은 그렇게 알고 계십쇼."
나는 그렇게 집무실을 떠났다.
* * *
지난 몇 번의 사고를 수습하며 느낀 것이 있었다.
'손이 모자라.'
일를 처리하려 해도 쓸 수 있는 카드가 나나 태자, 거기에 몇 명 정도밖에 없으니 항상 조사나 해결 과정에 손이 모자랐다.
그러니까, 직접 처리할 필요가 없는 일조차 스스로 하려니 불필요한 난관이 있었단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제 악마의 뒤처리까지 딱 하나가 남은 이 시점에 예전부터 생각해두었던 일을 하려고 한다.
'슬슬 찾아볼까.'
회귀 전의 부하 놈들을 모아야 했다.
명목상 태자의 친위대 형식으로 말이다.
사실 이미 절반 정도는 모았다.
'우선 페토.'
벌써부터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테야!" 하면서 포부가 당당한 놈이니 따로 설득 과정은 필요 없지.
거기에 히스토리아도 여차하면 끌어올 수 있는 전력이다.
수색대장과 의무대장이 있으니 이제 남은 건 본대.
여기에 외부에서 전력을 끌어오기 보단 아는 사람을 쓰려는 이유가 있었다.
'검증된 놈으로 쓰는 게 낫지. 특무대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것들이었으니까.'
대표적으로 목걸이의 원주인인 리암.
거기에 추가로 몇 명 정도.
개인적인 인연이 깊거나 당시 확인해본 바로 능력이 출중한 인간들이다.
이 시점이라 한들 훈련만 제대로 시킨다면 얼마든지 성장할 터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놈들을 끌고 오느냐.
'무대는 있긴 한데....'
그런 생각이나 하며 황성을 걷는 중이었다.
"파로스야!"
"앗! 어르신!"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 두 개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정원 나무 뒤쪽, 아리아와 필리아가 어설프게 몸을 숨긴 채로 날 향해 휘적휘적 손을 저었다.
저 조합은 뭘까.
아니, 조합은 그렇다 치고 왜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걸까.
그런 속내를 그대로 담아 물었다.
"거기서 뭐합니까?"
"치즈버거 왕국의 임무 수행이란다!"
"첩보 임무에요!"
둘이 한마디씩 답한다.
와중 신난 아리아가 내 근처로 와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필리아가 치즈버거 왕국의 재정관으로 임명되니 어쩌니, 왕국을 노리는 적들이 곳곳에 있는 터라 직접 조사에 나왔느니.
대강 설정 놀음인 건 알겠다.
다만, 시선이 필리아를 향했다.
생글생글 웃는 기운찬 모습이 작위적으로만 느껴졌다.
저 뒤에 숨은 진짜 얼굴을 알아서일까.
생각하는 순간 필리아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 그렇게 쳐다보시면 부끄러운 걸요. 오늘은 남자 찾는 게 아니니까!"
"웅! 둘째 언니야 전하가 말했다! 남자는 한동안 쉴 거다!"
"외로움에 떨지 않는 당당한 여자가 될 거니까요!"
"아리아도 외로움을 모른다!"
"어머, 아리아는 나보다 어른이구나!"
"엣헴…!"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대충 그렇구나 하고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어르신! 어르신도 치즈버거 왕국의 수호자시니까 알고 계셔야 해요!"
필리아가 다가와 까치발을 들고 내게 속삭였다.
"악당이 잠잠한 건 꾸미는 일이 있어서랍니다?"
"…?"
눈을 좁히며 필리아를 살피자, 의뭉스러운 기색으로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게 보였다.
"조심하셔야 해요. 특히 사람을 구할 때는."
그냥 들어넘기기 힘든 말이었다.
하나, 이 요망한 꼬맹이는 더 뭔가를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리아! 여긴 적이 없는 것 같으니까 다른 데로 가보자!"
"우웅? 파로스는?"
"어르신은 바쁘신가봐!"
"이잉… 알겠다아…! 파로스야! 나중에 보자꾸나…!"
아리아가 아쉬운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필리아는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멀어지는 모습을 봤다.
의도를 생각하니, 그 단어만이 확실히 인지된다.
'조심해라?'
무슨 의미일까.
* * *
필리아가 헛소리를 한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뭣보다, 내가 사람을 구하려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 신빙성이 더해진 까닭이다.
태자에게도 미리 말하지 않고 물밑에서 조사했던 일일진대 어찌 그것까지 아는지.
호의적으로 구는 듯하니 달리 꼬집어보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생각할 만한 거리는 만들어주는 행태였다.
그에 표정이 어두워지는 순간이었다.
"소가주, 입맛이 없으신지요."
"…아, 죄송합니다. 누님. 잠시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고민이 있는 건가요?"
"잠시 일 때문에."
식사 시간에 이게 무슨 실례인지.
사과를 드리자 누님이 고개를 저으셨다.
"직무에 관한 고민이라면 괜찮습니다. 책임의 무게를 아는 것은 마땅히 찬사받을 일이니."
또 머쓱하게 만드시는군.
작게 미소 지어 보인 후 물었다.
"아참, 누님. 제가 부탁드린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황실 기사 생도에 관한 것 말입니까?"
"예."
리암의 부친이 현 황실 기사다.
이 시점이라면 리암은 부친을 따라 황실 기사가 되기 위해 생도로 지내고 있다.
리암 뿐만 아니다.
나머지 둘, 그리고 그 외에 물망에 올라온 전쟁기의 기사 몇이 지금 생도로 지내고 있다.
그에 대한 조사를 누님께 부탁드렸다.
말했던가, 내가 모을 인간들은 명목상 태자의 친위대가 된다고.
그런 형태를 취해야 외부적인 압력 없이 놈들의 훈련 및 교육을 파로스가 전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우회법을 통한 병력 양성이라 해도 좋았다.
여하튼 누님에게 조사를 부탁드린 이유도 그것.
이윽고 누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주셨다.
"마침 시기가 생도들의 졸업 시험 때입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올해 시험은 외부 손님들을 초청한 무도 대회라 하더군요."
"아아, 마침 좋군요."
"전하의 친위대를 모집하시려는 겁니까?"
"예, 이제 성인식도 끝내셨으니."
무도 대회.
리암을 포함한 생도 출신 세 명이 이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엔 2학년이었지만… 외부 손님 초청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모습만 보인다면 스카우터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으니 저학년들에게도 기회가 있었습죠.
―개뿔이, 너 같은 모범생이나 나갔지. 난 나가지도 못했어.
―루빈, 너 같으면 출석도 아슬아슬한 놈을 거기 참석시켜줬겠냐?
―....
―에휴, 하여튼 꽤 재밌는 행사였습니다. 부관님도 참석하셨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저희 인연이 더 빨랐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생도들에게 명문 귀족가의 부름은 황실 기사단 입단을 제외하면 최고로 치는 영예였다.
그런 까닭으로 외부 초청 무도 대회 같은 때엔 생도들의 열기가 꽤 뜨거워진다.
왜, 귀족들과 직접 대담하는 시기가 아니던가.
귀족부터가 싸움 구경을 워낙 좋아하는 족속이라 그런 곳에 참석해 쇼핑하듯 생도들을 콕콕 집는 경우가 많았다.
달리 이르자면 그때가 바로 리암에게 접촉하기 가장 쉬워지는 때다.
하여 이번은 참석을 결심하던 순간이었다.
문득 시야에 누님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회귀 후 이렇게 식사 시간을 함께 가진 일은 많으나 달리 일정을 같이 소화하며 지낸 일은 없었다.
그래도 누님이신데 너무 일적으로만 마주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으음, 누님."
"네, 말씀하세요. 소가주."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곤 마음을 다스려 말했다.
"같이 구경하러 가시겠습니까? 무도 대회."
그러자 누님의 눈이 슬쩍 뜨였다.
놀란 기색, 하지만 꺼리는 건 확실히 아닌 듯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공무일 텐데."
나보다 공무가 많으신 분이 왜 이러실까.
괜한 겸양이라 느껴져 솔직히 답했다.
"그러니 함께 가는 것이지요. 사람 보는 눈은 누님이 저보다 좋으시니."
칭찬 받아치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름 기대하며 지켜보니 과연, 꽤 극적인 반응이 나왔다.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제가 필요하다면 예, 함께 가시지요."
누님이 얼굴을 붉히셨다.
아주 수줍어하시는 것이 역시 남 칭찬 좋아하는 사람은 본인 칭찬에 약한 게 맞는 듯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예, 그럼 염치불구 하고 도움을 받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지요."
"최선까지야."
누님과 나들이라.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 있는 행사였다.
* * *
제도 남쪽의 민가.
2층 저택의 거실에는 아직 앳된 기가 덜 빠진 청년이 비통한 표정으로 이를 꽉 물고 있었다.
"리암, 미안하구나."
씁쓸하게 웃는 아버지를 보며 리암은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코린 경은 리암이 아는 가장 명예로운 기사였다.
아무렴, 무예가 출중하며 도리를 알며 충성심이 강한 그게 바로 명예로운 기사가 아닌가.
그는 그런 이유로 언제나 리암의 목표였던 사람이다.
한데,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파직에 들게 생겼다.
리암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리암."
"…예."
"너의 소신을 지켜라."
코린이 리암을 끌어안았다.
굳은살이 가득 배인 손으로 리암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기사는 외압에 굴하지 않는다. 그러니, 날 복직시키겠다니 어쩌니 하며 승부조작에 응하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
"대답하거라. 리암."
리암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의 마음에 깃드는 것은 무력감과 분노였다.
―2황자 전하께서 눈여겨보는 생도가 있소. 경의 상대가 그분이더군.
―예! 최선을 다하겠…!
―아니, 져주시오. 전하의 기사가 어찌 공적인 곳에서 패하겠소.
―…!
―제7 기사단의 코린 경이 경의 부친이시더군.
비열한 공작이다.
대체 어찌 기사라는 작자들이 그런 수를 쓰려 드는가.
리암은 차마 그런 이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기사다운 아버지가 자신 탓에 파직하게 되는 것은 더욱 끔찍하게 싫었다.
"리암...."
아버지의 걱정 어린 기색에 리암은 그만 웃고 말았다.
"…걱정마세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잖아요."
내뱉는 것은 본인조차 우습게 느낄 거짓말이었다.
071화. 생도 (2)
황실 사관 학교.
그는 제국 최고의 기재들이 모인다는 말이 돌 정도로 이름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단순히 황실이 그 양성소를 운영하기에 그런 것이냐?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이는 양성소의 방침이 만든 결과라 볼 수 있었다.
―최고의 인력을 최고의 지원으로.
양성소의 기조였다.
하여 그곳은 생도를 받는 과정에 신분, 재물적 구분을 막론하며 성적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만 판단했다.
이렇게나 실력 지상주의의 환경이다.
옥이라 불릴 인재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 않겠나.
그러니 굴러다니는 옥을 주워 먹으려는 하이에나들도 더러 있는 편이었다.
귀족들이 황실 사관 학교의 생도를 노리는 건 그런 이유였다.
"벌써 4년이군. 저번 대회에선 체르막 경이 1등을 했었나?"
"아아, 압도적이었지. 이후의 행보는 더욱 놀라웠고."
"고향 땅의 기사가 되었다던가. 황실 기사단에 들 실력으로 의리를 지키다니 참 대쪽 같은 성정이긴하군."
"그런 자들을 기사라 부르는 게 아니겠나. 그리고...."
"그래, 우리들이 여기 오는 이유도 그것이지."
4년 주기로 도는 대회 날이 밝았다.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은 지난 대회를 회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나 같이 기대감에 차 있는 눈빛.
아무렴, 잘 키운 기사가 전력에 얼마나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지는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 아니던가.
그들로 인하여 영지의 전력을 보강하려는 속셈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하호호 웃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였다.
활기차고 뜨거운 분위기 아래는 살얼음 같은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있었다.
대회장의 귀빈석에 앉은 귀족들은 하나같이 흘끔흘끔 한 방향을 바라봤다.
귀빈석 중에서도 상석에 속하는 자리였다.
"누님, 이런 행사에 와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저희 가문은 기사와 연이 없다 보니...."
"으음, 저도 그렇습니다. 싸움이야 좋아하지만 대회 같은 건 영...."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남매는 잿빛 머리칼과 보랏빛 눈동자라는 특징을 공유했다.
하지만, 사내 쪽은 눈만 마주쳐도 시비를 걸어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이 불량했으며 여인 쪽은 절벽 위의 꽃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이질적이고 고아했다.
놀라운 점은 그렇게나 다른 느낌임에도 남매라는 확신은 들었다는 것.
말해 무엇할까.
유렌 파로스와 세실리아 파로스.
위대한 가문 파로스의 직계들이었다.
수군거림은 어쩔 수 없었다.
"파로스께서 왜…?"
"이유야 뻔하지 않나. 전하가 성인식을 치르셨네. 그리고 파로스께선 전하의 스승이시니...."
"…친위대를 뽑으시는 건가?"
"그렇다면 올해 일석은...."
귀족들은 침음을 흘렸다.
유렌이 칼리오스의 친위대를 뽑기 위해 행차했다.
드러난 인과만 보자면 그렇게만 보이는 상황이 아닌가.
황실 사관 학교에서 생도들이 최고의 영예로 치는 것은 황실 기사단의 입단이다.
개중 차기 황제의 친위대라는 것은 최고 중의 최고로 꼽을 영예였다.
그렇다면 그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경쟁 상대였다.
귀족들은 괜히 속이 쓰렸다.
개중엔 이 기회에 유렌과 안면을 터서 한둘 정도는 생도를 빼 올 마음을 먹은 자도 있었으나....
"…자중하시게. 자네, 전하의 성인식 때 있었던 일을 잊었는가?"
"끄응...."
이곳엔 유렌의 성정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지난 칼리오스의 성인식.
그 자리에서 유렌이 자작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며 아리아를 두둔했던 일은 아직도 사교계에 회자 되고 있었다.
결국 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제발 유렌이 자신들이 눈독들인 기사를 노리지 않길 바라는 것뿐.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렌은 외딴섬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 세실리아와의 외출을 즐길 뿐이었다.
"아참, 제가 간식거리를 좀 만들어 왔습니다."
"소가주… 어찌 가주가 될 자가 주방을 그리 즐기십니까."
"취미잖습니까. 이 정도는 봐주십쇼."
"...."
"자, 드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이건 초코파이라고 합니다. 초코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줄여 냉동시킨 것인데...."
유렌은 오늘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 * *
생도 대기실.
개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명상을 하고 있던 리암은 웬 소란에 눈을 떴다.
"리암! 야 임마! 속보야 속보!"
리암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이 있었다.
"…루빈."
밀짚색 머리칼, 능글맞은 인상에 팔다리가 길쭉한 사내.
동기 중 가장 뺀질거리는 불량아이자, 그럼에도 검재주만큼은 인정할 만해 리암이 근처에 두는 동기 루빈이었다.
그가 흥분에 찬 기색으로 다가와 말했다.
"올해 대회에 파로스 소가주님이 참석하셨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어? 친위대 모집이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말.
리암은 그 순간 공간이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의 주역인 4학년 선배들도 루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리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회를 앞둔 선배들 앞에서 괜한 이야기를 하는 루빈의 경솔함이 영 언짢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감상을 제외하면 글쎄,
'…하필.'
왜 이번 대회일까.
리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회에 참석하기 전 황실에서 은밀하게 접촉해왔다.
2황자 파벌의 귀족이 황자의 측근이 될 생도를 올해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대진 상대들에게 승부 조작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리암의 경우에는 그랬다.
'…아버지.'
승부 조작에 임하지 않는다면 리암이 가장 존경하는 기사인 아버지가 파직될지도 몰랐다.
기사단 내에서도 평판이 좋으며, 대외적으로도 신망 있는 기사인 코린 경이 고작 아들 탓에 기사로서의 삶을 잃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희망을 품기엔 그의 어조가 너무나도 진지했다.
더불어 아버지가 복무하는 7기사단은 2황자의 소관이었다.
리암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굳은살이 배인 손은 자신이 여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 노력을 어찌 아버지의 일생과 같은 저울에 두겠나.
'…괜찮아.'
리암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은 이번이 아니어도 기사가 될 기회가 남아있었다.
아직 2학년, 졸업까지 남은 기간은 2년.
조금 더 노력한다면 이번의 실수를 만회하고 황실 기사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 제안에 응하는 건 가장 원만한 해결법이자 모두를 위한 방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유일한 걸림돌은 신념이었다.
―리암, 너의 소신을 지켜라.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리암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하나, 루빈은 그런 기색도 눈치채지 못한 건지 그저 신나서 말했다.
"어이, 2학년 수석! 멋지게 이기고 와서 친위대로 가보자고! 네가 우리 기수 자랑이잖아!"
낄낄대는 목소리는 괜한 씁쓸함을 더했다.
리암은 차마 그에 웃어주지 못했다.
"…응원 고맙다. 이제 명상 좀 하고 싶으니까 가줘."
"에잉, 재미없는 놈. 그럼 난 관중석으로 간다! 수고해!"
루빈이 떠났다.
리암은 그에 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신념을 잃은 기사에게 무엇이 남는가.
그런 화두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 * *
누님이 말씀하셨다.
"아, 시작하는군요. 저까지 긴장되는 기분입니다. 저 생도들에게는 오늘이 아주 중요한 날일 터이니."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평생 기사나 무력 집단 하곤 연관이 없는 삶을 산 까닭인지, 누님의 기대감이 이렇게 무표정을 뚫고 나오는 게 참 보기 흐뭇했기 때문이다.
'음, 나중에 무도 대회라도 개최해볼까.'
태자가 황제가 된 이후에 건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취미가 없으신 누님이 아닌가, 오늘의 볼거리를 즐기신다면 훗날 필히 추진해 봐야겠다.
물론 그건 그거고.
당장은 대회에 집중해야지.
"봐둔 생도가 몇 명 있습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텐데."
"제게도 귀띔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비밀로 하지요. 누가 이길지 모르는 상태로 보는 게 더 재밌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지만 귀족들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저 새끼들은 음침하게 남 얘기 엿듣는 걸 왜 이리 좋아하는지.
"으음, 알겠습니다."
누님은 조금 안타까워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하곤 초코파이를 또 드셨는데, 벌써 세 개째다.
열량이 꽤 높은 간식인데도 저리 드시는 걸 보니 입맛에 맞으신 듯해 다행이었다.
'이제 주방에 가는 걸로 잔소리는 안 하시겠지.'
작전 성공.
여러모로 수확이 많은 외출이라 생각하며 대회장 위를 봤다.
총 32명.
대회는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며 리암의 순서는 네 번째.
그리고,
'나단. 그놈이 리암과 붙었지.'
꼭 데려와야 할 세 명 중 두 명이 이번 대회에 나왔고, 그 둘이 첫 경기에 붙는다.
개인적으로는 리암의 압도적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재능이 뛰어나다기보단… 내 부하 중에서 유독 성실하게 검을 수련한 놈이 그놈인 까닭이다.
기본기가 워낙 탄탄했고 그게 생도 시절부터 그랬다고 하니 이 시점에서 결과가 어떻겠나.
요행을 익히지 못한 나단은 심지가 굵은 리암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첫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림은 꽤 지루했다.
누님은 "앗." 하고 입까지 틀어막으며 흥미진진하게 대련을 봤지만, 내 입장에선 그렇지 않나.
태자랑 씨름한 세월이 있다 보니 이제 익스퍼트를 목전에 둔 햇병아리들 투닥거림은 영 심심하단 말이다.
'저기서 그냥 눈에 모래 뿌려버리지.'
좆밥 싸움이 재밌는 건 온갖 기상천외한 수가 나오기 때문인 것을....
저놈들은 영 바르게만 싸우는 게 글러 처먹었다.
그리 평가를 내리던 중이었다.
"네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2학년 수석 리암! 4학년 육석 나단!"
기다린 경기가 시작됐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 새낀 이때도 커다랬네.'
갈색 머리에 건장한 체격, 강건한 인상까지 리암은 그때나 지금이나 기사의 표본이나 다름 없는 인상이었다.
조금 까보면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어딘가 나사 빠진 놈이긴 했지만… 그걸 차치하고 보면 수준이 꽤 만족스럽다.
'익스퍼트 직전까지 왔네. 탄탄하고 좋아.'
다음으로 나단.
새치가 섞인 검은 머리에 나태해 보이는 인상.
저놈은 기도가 영 별로다.
사실 저게 맞긴 하다.
저놈은 전쟁기 때도 정면 승부보단 꼼수를 즐기던 놈이니까.
"개시!"
심판이 시작을 알린다.
나는 손깍지를 낀 채로 집중했다.
나단이 빠르게 돌진한다.
아마도 리암은 정면으로 막은 후 힘을 앞세워 찍어누르려 들겠지.
체격의 차이나 기본기의 차이 등등.
녀석은 생각이 많은 만큼 가장 이상적인 대처를 바로 알아냈을 것이다.
하여 그걸 기대했으나,
채앵―!
"…!"
"…아, 역시 4학년이란 걸까요. 힘에서 밀렸군요."
…리암이 밀려났다.
누님은 위화감을 못 느낀 듯했지만 나는 다르다.
내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리암이 밀려서?
아니다.
'…너 뭐하냐?'
저놈, 일부러 나단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마치 힘겹게 이기는 척이라도 하려는 듯이.
* * *
채앵―!
나단의 검이 하늘을 날았다.
리암은 숨을 헐떡이는 '척'하며 납검했다.
"리암! 승!"
"와아아아아!!!"
승리를 알리는 말도 환호성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실례가 됨을 알지만, 나단은 사실 첫수에서 찍어눌러 이길 수 있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나단이 멍하게 눈을 끔뻑이다, 이내 낄낄 웃었다.
"이야, 역시 수석은 다르구만! 한 수 배우고 간다!"
시원스러운 패배 인정이 리암의 속을 콕콕 찔렀다.
리암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저야말로 한 수 배웠습니다."
"어휴, 겸손하기까지."
탁탁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나단이 악수를 청해왔다.
리암은 그를 받는 것조차도 죄스러웠다.
이후엔 겨우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한 후엔 양심의 통증을 애써 외면하며 복도를 걸었다.
선배들을 상대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만 승부의 때에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고 질 수 있을 테니.
'져야 한다.'
져야 한다. 져야 한다.
그 사실을 연신 머릿속에 되새겼다. 치욕스러운 일조차도 생각하다 보면 무던해지리란 얄팍한 기대심을 품은 채로.
하나, 그럴수록 속에서는 천불이 일었다.
리암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분노를 짓씹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야."
우뚝―
리암의 걸음이 멎었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직후 리암의 숨이 멎었다.
"리암 앤더슨."
잿빛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
오만하고 신경질적인 인상.
리암은 그를 알았다.
유렌 파로스.
제국의 태사.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072화. 생도 (3)
리암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걸어온 이는 제국의 태사다.
일개 생도에 불과한 그에겐 높다 못해 까마득한 직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걸 떠나서도 이런 순간을 언제나 바라오지 않았던가.
리암의 꿈은 명예로운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미래의 제국 그 자체가 될 태자의 친위대.
이 사내는 그 인재를 뽑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임이 자명했다.
그렇기에 절망감은 더했다.
자신의 빼어남을 보여야 할 상대가 눈앞에 있을진대, 줄곧 못난 모습만 보이게 될 것이므로.
"…위대한 가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아직 주인은 아니고. 뭐, 그래. 반갑다."
다가온 유렌이 악수를 청해왔다.
격 없는 모습에 가장 먼저 차오른 것은 당황.
그에 리암이 어찌할 줄 모르자 유렌이 말했다.
"뭐해, 안 잡고."
"가, 감히 제가 어찌...."
"잡아."
툭, 유렌은 잡으라 말한 주제에 본인이 리암의 손을 낚아챘다.
리암은 당황스러운 감상을 느끼며 허둥댔다.
그런 순간이었다.
"리암 앤더슨. 2학년 수석. 7 기사단의 코린 경이 아버지가 맞나?"
"아, 예...."
"너한테 꽤 기대를 했어."
리암은 흠칫했다.
송구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진 까닭이다.
하나, 여기서 '사실 제 실력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의 악수는 또 없을 것이다.
리암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겨우 2학년 수준입니다. 호평에 감사합니다."
겸양을 떨며 넘어가려 했다.
일생일대의 기회라곤 하지만 아버지의 파직보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 친위대가 아니더라도 명예로운 기사는 될 수 있지 않던가.
아버지가 꼭 그렇지 않던가.
이 만남은 평생의 술안주가 생긴 것으로 치자.
어쩌면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지나면 추억으로 자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 마음을 정리하려는 순간, 유렌이 그런 질문을 해왔다.
"왜 봐줬냐."
"…!"
"설렁설렁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
리암의 숨이 멎었다.
조심스레 고개가 들렸다.
그리 유렌을 마주한 순간, 그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소가주님?"
"말해. 대충한 이유가 뭐냐. 선배에 대한 예의? 아니면 대련이 장난 같던가?"
유렌은 일말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하나, 그 속에 깃든 위압감은 리암이 평생을 겪어보지 못한 종류였다.
마치 맹수 앞에 놓인 초식 동물이 된 듯한 기분.
그제서야 리암은 한 가지 사실을 되새겼다.
'태자 전하의 검술 스승…!'
들려온 소문으로는 그랬다.
이미 하늘에 닿은 기예를 부리면서도, 불치의 병으로 소드 마스터에 오르지 못한 사내.
태자가 그리도 도전했음에도 옷자락 한 번 스치지 못한 고수.
정련된 기도의 끝이란 것이 이럴까.
자신과 비교하는 일 자체가 실례가 되리란 판단이 들 정도의 공력에 리암의 몸엔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유렌은 그걸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눈에 띄기 싫은 타입? 아니면 혹시 친위대로 발탁될까 걱정돼서?"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아, 아닙니다…! 저는…!"
친위대가 되고 싶다.
이곳의 누구보다 그 일에 진심임을 자부할 수 있었다.
억울함이 압박감을 뚫고 나왔다.
그러자 유렌이 재차 질문했다.
"그럼 뭔데. 왜 대충하냐고."
리암의 이가 악물렸다.
어떤 답도 시원스럽지 않을 것이란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치 상태는 한동안 이어졌다.
유렌은 한 치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연신 리암을 찍어눌렀다.
그런 끝, 리암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휴."
유렌은 한숨을 내쉬며 잡았던 손을 뗐다.
기도 또한 어느 순간 수습한 채였다.
리암은 고개를 숙였기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만, 열린 귀는 그 와중에도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라면 더 묻지 않으마. 그냥 궁금했다."
"...."
"실례했네."
처음 말을 걸던 순간처럼 평이해진 어조.
리암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기분을 느꼈다.
곧장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안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생각이 있었고, 동시에 해명하려 드는 일은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떠나는 것은 유렌이었다.
"대련은 잘 봤다. 이후로도 몇 번 더 보겠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오지랖이라고 생각하고 들어라."
"…예."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일은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마라.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라면 그것도 하지 마라."
리암은 헛숨을 들이켰다.
그가 무언가를 꿰뚫어 봤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하여 고개를 들었으나 보인 건 등뿐이었다.
"검으로 뭘 해야 할지 아는 게 기사다. 그것도 모르고 휘두르는 검은 왈패 새끼들 도살검이랑 다를 게 없어."
"소가주님...."
"생도잖냐. 기사가 되고 싶은 거 아니냐? 그럼 생각해보라고. 참견이었으면 미안."
유렌은 그렇게 복도를 떠났다.
리암은 오도카니 그가 떠난 자리를 지켰다.
그의 말이 왜인지, 너무나도 깊게 속을 파고든 까닭으로.
* * *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잠시 화장실을 좀...."
"아아, 그렇습니까. 그래도 다행입니다. 곧 16강이 시작된다고 하니."
누님의 말에 나는 생긋 미소 지었다.
어찌 나보다 이 대회를 더 즐기시는 듯한 모습에 훈훈함이 차올랐다.
물론, 짧은 평온일 뿐이었다.
'....'
시선은 무대 위를 향했다.
하나 신경은 직전의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한 가지,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쥐새끼가 있네.'
이 대회에 수작질을 부린 새끼가 있다.
어떻게 확인하냐고?
리암의 기색이 답을 말해줬다.
그래도 몇 년이나 부대낀 놈이다.
그놈이 어떤 놈이고, 어떤 습관을 가졌는지 모를 수가 없단 말이다.
―부관님, 리암 저 새끼 또 궁상 떠는뎁쇼.
―페토야, 또 뭔 짓거리 했냐.
―저 아임다!!!
부대에 있을 땐 주로 그랬다.
전쟁이란 것은 정의가 아닌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그런 만큼 선한 일만을 하지는 않으며, 특히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우리 부대는 꽤 더러운 일도 더러 했었다.
그런 걸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나.
그 정도로 처절해야 했기에 했을 뿐이었고, 우리 모두가 그런 일을 꽤 힘들어 했다.
개중 유달리 그런 일을 힘들어하던 게 리암이었다.
죄수가 된 이유도 아버지의 복수.
죄수 병사로 전선에 뛰어든 이유도, 자신을 버린 제국을 저버리지 못해서.
그 정도로 올곧은 인간이니 어땠겠나.
전쟁 중 정신적으로 몰려 무너지기 직전까지 간 일이 많았고, 그것이 내가 리암이 흔들리는 걸 단숨에 알아본 이유였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녀석은 당당하지 못할 때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한 변명을 하지 않는다.
평소의 유쾌함이란 것이 있는 만큼 그 기색은 더욱 도드라진다.
신념을 배신하게 되는 순간, 녀석은 꼭 그렇게 죽을 인간처럼 군단 말이다.
그러니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기도 아닌데 대회가 어떻길래 저리 죽상인가.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놈이 왜 승부에서 진심을 못 내고 있나.
그런 생각을 이어갈수록 답은 뻔해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아직은 어디까지나 심증.
하여 나는 이어지는 대련을 더욱 헤집듯 살피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승부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 놈들이 몇 보였다.
대진표상 그놈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결을 봤다.
윤곽은 그제야 드러났다.
'저건가.'
멀끔하게 생긴 주홍색 머리의 생도가 있다.
경지는 익스퍼트에 손가락 하나 담근 수준으로, 기량 자체는 우월한 놈.
올해 생도의 차석, 밀리엄.
놈이 상대를 꽤 일방적으로 찍어누르곤 검을 높이 치켜세웠다.
환호성이 인다.
면상에 주먹을 갈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걸 억누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각을 예민하게 벼려 주변의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허, 역시 차석은 다른 건가...."
"저리하면 수석과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군."
"그럼 올해 대회의 우승은...."
"친위대는...."
조작된 판 위에서 노는 놈이 친위대?
지랄하지 말라고 해라.
거슬리는 말을 흘려 넘겼다.
그렇게 오가는 대화를 모두 확인했고, 나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다음 경기는?"
"리암 앤더슨입니다. 이쪽도 처리를 끝냈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래, 최초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이쪽이 오히려 호재일 테니...."
슬며시 눈이 뜨였다.
대화가 오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는 얼굴.
그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 그거였나.'
이제야 필리아가 했던 말의 의미가 이해됐다.
―악당이 잠잠한 건 꾸미는 일이 있어서랍니다?
망할 꼬맹이, 처음부터 좀 제대로 말해주면 덧나나.
* * *
리암은 대기실에서 검을 다듬었다.
명상은 없었다.
그리한다고 마음이 다스려질 정도는 이미 넘어있었던 까닭으로.
다만 생각만큼은 이어가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고민에, 유렌의 말이 새로운 화두가 되어 그를 흔들고 있었다.
―검으로 뭘 해야 할지 아는 게 기사다. 그것도 모르고 휘두르는 검은 왈패 새끼들 도살검이랑 다를 게 없어.
쥐고 있는 이 검은 기사의 검인가, 왈패의 도살검인가.
이때까지라면 자신감 있게 기사의 검이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캬! 벌써 4강! 역시 2학년의 자랑! 내 동기! 네가 자랑스럽다 리암!"
옆에 있던 루빈이 시끄럽게 떠벌거렸다.
평소라면 타박했을 리암이지만, 지금만큼은 그 말조차도 양심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엉?"
"...."
명예롭지 않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마, 이대로 간다면 이 검은 명예를 잃을 것이다.
그런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 벌써 네 차례네!"
루빈이 어깨를 쳤다.
리암은 그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번만큼은 압도적으로 져야 한다.
상대를 빛낼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하게 깨져야만 했다.
그 방법이나 고민하는 자신의 꼴이 너무 병신 같았다.
리암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리암!"
덜컥, 리암이 멎었다.
루빈은 싱글벙글 웃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생각 없는 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하게도 차분한 기색 탓에 그랬다.
"부숴버려. 밀리엄이고 나발이고 다 이길 수 있잖아?"
"루빈...."
"뒷감당할 일 생기면 같이 맞아줄게. 그게 동기니까."
툭―
루빈이 리암의 가슴을 쳤다.
"가라. 2학년의 자랑!"
건네지는 말과 행동은 묘하게 속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
정확히는, 그것이 이전까지의 말들과 맞물리며 가슴을 흔들었다.
주먹이 고민에 닿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은 이윽고 스러졌다.
―너의 소신을 지켜라.
아버지의 말이.
―생도잖냐. 기사가 되고 싶은 거 아니냐? 그럼 생각해보라고.
유렌의 말이.
그리고 줄곧 해왔던 고민이, 자괴감이, 그리고 아직은 스러지지 않은 신념이.
그 모든 것들이 리암의 속을 콕콕 찔러왔다.
다만 찌르는 것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그가 끝내지 못한 의문을 다시 끄집어냈다.
정면에, 커다란 벽의 형태로 말이다.
'이대로 져야 하는가.'
그에 리암은 저도 모르게 그런 답을 내버렸다.
'…내가 왜?'
정의롭지 못하다.
명예롭지도 못하고 굳건하지도 못하다.
적어도 그 승부는 그랬으며, 리암이 생각하는 기사는 그런 외압에 굴해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걸 리암도 알았다.
사실, 답은 처음부터 리암에게 있었다.
리암은 허탈하게 미소를 흘렸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겁에 질려서 이유나 찾아대는 꼴이 어찌 이리 우스운지.
이 또한 고행일 뿐인 것을, 도리어 이곳에서 지는 것이 아버지를 명예롭지 못하게 만드는 일인 것을 왜 인정하지 못했는지.
리암은 그걸 인정한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하, 하하…!"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리도 바보같은 고민을 지금까지 했다는 것이 우스운 까닭이었다.
루빈은 "음음" 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웃음기를 털어낸 리암은 그리 말했다.
"…루빈."
"오냐!"
"같이 맞아준다는 말 잊지 마라."
"어엉…?"
루빈이 식은땀을 흘렸다.
미소가 어색해지고 있었다.
사뭇 유쾌한 모습을 뒤로한 채 리암은 경기장을 향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복도를 지나 그 끝으로, 펼쳐진 무대 위로.
경기장에 올라서자 맞은 편의 밀리엄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잘해라.'
리암은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밀리엄 그렉.
4학년 차석이라 떠받들어지지만 리암은 알았다.
그는 비겁하며 소신이 없고, 박쥐처럼 여기저기 붙어 이익을 챙기는 자였다.
기사라는 말도 아까운,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인 왈패였다.
이곳에서 저 말에 응한다면 그와 같아진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리암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 고개를 든 순간, 저 멀리 귀빈석에 앉은 유렌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묘하게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리암이 작게 웃자, 유렌의 눈썹이 들썩였다.
심판의 손이 들렸다.
밀리엄이 겉멋이 든 자세로 검을 들었다.
리암은 정신을 차리고 정자세를 취했다.
'하나만 생각하자.'
눈앞에 패줘야 할 왈패가 있고, 손에 들린 것은 기사의 검이었다.
굴하는 것은 기사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기사였다.
"개시!"
꽈아아앙―!
"끄얽…!"
리암의 검이 밀리엄을 바닥에 처박았다.
* * *
밀리엄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고통에 순간 정신을 잃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그가 '선공 당했다'라는 걸 깨달은 건 이후였다.
황망함이 차올랐다.
'배, 배신…!'
이건 자신이 빛날 수 있도록 조작되어야 할 승부였다.
저놈은 허우적대며 허공을 긋다가, 자신의 기예에 무릎을 꿇어야 할 놈이었다.
한데 역공을 해오다니.
이런 가증스러운 경우가 또 있던가.
하나, 그런 것보다 겨우 2학년의 일격에 당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밀리엄의 얼굴은 울긋불긋해졌다.
핏발선 눈으로 리암을 노려봤다.
하지만 리암은 굳은 표정으로 자세를 다잡을 뿐이었다.
"일어나시지요. 선배. 더 할 수 있으시잖습니까."
마치 거인을 마주하는 듯한 압박감.
밀리엄은 스스로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와중 눈치가 보였다.
흘긋 귀빈석을 보자 '후원자'의 표정이 험악해진 게 보였다.
'아, 안 돼…!'
이대로 가다간 출세길이 막힌다.
방법을 강구 해야 했고, 밀리엄에게 그게 있었다.
품속을 매만졌다.
―아티팩트라네.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켜줄 걸세. 자네 수준의 재능이라면 아마 익스퍼트 중위급까지의 힘은 낼 수 있을 테고....
결승에서나 만날 4학년 수석과의 전투에서 쓰려했던 것.
하지만 결승이고 뭐고 지금 당장 이기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민은 짧았다.
밀리엄은 과감히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그 행위는 참으로 은밀했으며, 아티팩트 자체도 발동의 은밀성에 초점을 둔 것이기에 밀리엄은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았다.
휘이이―!
"크흐…!"
마나가 밀리엄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감각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해졌다.
직전의 고통도 어느새 말끔히 사라졌다.
"바, 방심했네. 이젠 진심으로 해주마!"
고양감에 취한 밀리엄은 검을 고쳐 쥐었다.
'어깨를 부숴버리자.'
저놈이 자신에게 그랬듯 무릎을 꿇려버릴 것이다.
그런 판단으로 밀리엄이 출수했다.
쾅!
제어를 벗어난 속도.
하지만, 검은 정확히 리암의 어깨를 향하고 있었으며 눈엔 기겁한 리암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이대로 내려치면 저 건방진 놈이 무릎을 꿇을 것이다.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발악한 병신은 평생 반항했던 선택을 후회하겠지.
그런 꿈같은 상상을 하며 팔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톡―
검이 막혔다.
갑작스레 나타난 웬 검지 하나에.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다만 어느 순간 그게 눈앞에 있었다.
밀리엄은 일어난 일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일을 이해한 건, 목소리가 들려온 이후였다.
"대회에 왜 약쟁이가 쳐 나오지? 보는 사람 기분 좆같게."
밀리엄의 숨이 멎었다.
유렌 파로스, 그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073화. 생도 (4)
누구도 유렌이 경기장 한가운데까지 가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
그가 저 검을 틀어막은 방법을 헤아리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적어도 소드 마스터의 이름을 달고 있거나 그에 다다를 재능이 있어야 하고, 그 둘에 해당하는 드레노어와 칼리오스는 이 자리에 없기 때문이었다.
침묵.
누군가는 황당함에, 누군가는 분노에, 또 다른 누군가는 흥미에.
그들이 입을 다물며 수백의 사람이 모인 공간엔 침묵이 떠올랐다.
개중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유렌에게 검로가 막힌 밀리엄이었다.
"소, 소가주님. 이게 무스...."
"닥쳐."
꽈아아앙―!
밀리엄이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 역시 유렌의 출수를 파악한 자는 전무했다.
밀리엄은 고통에 꿈틀거렸다.
하나 그를 내려다보는 유렌은 지극히도 차가웠다.
침묵이 이유일 것이다.
그가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 공간 전체에 똑똑히 들린 것은.
"나름 기대했다. 그래도 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을 모은 학교니까. 황실이 직접 관여한 교육 기관이니까. 그런데 실망스럽네. 애들 수준이야 그렇다 쳐도 운영 수준이 이게 맞나?"
자리한 이들로선 한발 늦게 깨닫길, 유렌의 눈빛은 아주 험악했다.
마치 차오르는 화를 어떻게든 참아내려는 듯한 행색이었다.
긴장감이 공간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유렌 파로스가 화가 났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했으므로.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대야 하지? 좀 감이 안 잡히네."
사고가 생길 터였다.
그의 망나니 기질이 발동된 것이다.
약쟁이.
즉, 꼼수를 부린 자가 있다.
관객들이 그걸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아마 높은 확률로 저 밀리엄일 것이다.
거기에 주최측을 꼬집는 말은 이 대회의 투명하지 못함을 이르고 있었다.
관객들은 대체로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들이다.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우둔한 이는 없었다.
유렌이 밀리엄의 머리를 지근지근 밟았다.
그 순간이었다.
"파, 파로스 소가주! 이게 무슨 행패요!!!"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는 자가 있었다.
마른 체구에 작은 키, 염소수염이 특징적인 중년의 남자는 2황자 파벌의… 정확히 말하자면 에스트르 공작 파벌의 귀족인 휘튼 자작이었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삿대질까지 하며 말을 덧붙였다.
"황실이 주관하는 신성한 대회요! 난입도 모자라서 선수를 저 꼴로 만들다니! 이를 폐하께서 가만히 두고 볼 것으로 생각하는 거요!"
"야."
화아악!
"큽…!"
유렌의 기도가 그의 목을 죄었다.
이윽고 유렌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개새끼가 짖을 자리를 구분 못해. 폐하가 어쩌고 어째? 이런 찢어 죽일 새끼를 봤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것 같냐?"
"꺼억…!"
"넌 나중에 처리해 줄 테니까 거기 처박혀 있어라. 고개 처박고 있어도 모자란 새끼가 어딜 언성을 높여."
"그르륵…!"
휘튼 자작의 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깔이 뒤집어졌고,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범벅으로 만들었다.
하다하다 입에선 게거품까지 물었다.
유렌은 오로지 살의만으로 목을 졸라 그런 일을 해냈다.
몰골에 인근의 귀족들이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다만 행색이 더러운 것 외에도 그랬다.
유렌의 말은 참으로 분명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가까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귀족들의 속에 차오른 것이다.
어찌 멍청하게 태사의 앞에서 황실을 들먹이는가.
꼼수를 부린 게 들켰다는 생각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우둔함은 마찬가지.
구경꾼 입장이 된 귀족들은 속으로 그를 한껏 비웃었다.
그런 중 유렌은 학교의 교수진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문제야. 직접 가르친 애들이 빌빌대고 있는데 눈치 못 챘냐? 평소랑 뭔가 다르다는 생각은 안 했냐고."
교수진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만 컨디션 난조라고 생각했던 이는 안일함에, 일에 가담했던 이는 공포에.
"이딴 식으로 굴리면서 제국 최고를 자처해? 스승을 자처해?"
교수진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유렌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감사 있을 거다. 전하께 직접 요청 드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선고였다.
처음은 휘튼 자작.
다음으로는 교수진.
유렌은 그들에게 각기 처벌을 예고하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하나,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그를 꼬집을 수 없었다.
대놓고 깽판을 쳤다고 한들 마찬가지였다.
아무렴, 교육이라는 명제에 있어 부정함을 발견했다면 파로스는 이리 분노하는 게 옳지 않던가.
정당성을 손에 쥔 유렌을 막는다면 그 순간 역풍을 맞게 된단 말이다.
"그리고 너희."
마지막, 유렌은 이 공간에 남아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화살을 피했던 생도들을 짚었다.
그들의 몸이 굳자 유렌은 말했다.
"저 염소 새끼가 뭘 내걸었는지 난 몰라. 하는 짓거리 보면 그래, 너희 수준에선 감당하기 힘든 수를 쓴 걸 수도 있지."
그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그럼에도 힘이 있었고, 위엄으로 가득했다.
그런 목소리가 질타를 쏘아냈다.
"그래도 발악이라도 했어야지. 그게 기사다. 목숨보다 신념이 중요한 인종들이라고."
어느 순간, 유렌의 시선이 리암을 향했다.
리암의 표정이 굳었다.
유렌은 리암에게 무어라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저 밟고 있던 밀리엄을 들어 경기장 밖으로 던졌다.
쿵―
육중한 소음이 일었다.
직후 다시금 침묵이 공간에 차올랐다.
유렌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누구도 그런 그를 말리지 못했으며, 그 이전에 자리를 떠날 생각도 못했다.
그 한가운데서 유렌은 학생들에게도 선고를 내렸다.
"다 경기장으로 내려와. 출전한 새끼도, 구경 온 새끼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생도들이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쿠웅―!
바닥이 갈라지다 못해 부스러기가 됐다.
경기장과 입구의 구분이 모호해지며 공간이 훨씬 넓어졌다.
그가 소매를 걷었다.
"근성부터 썩어빠졌다. 그래도 다행이지. 내가 근성 썩은 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을 가르치는 사람이거든."
팔뚝의 근육은 세밀하게 조각되어 그의 힘을 어림하게 해주었다.
유렌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쳐맞으면 돼. 그럼 대체로 교정되더라."
거부권은 없다.
도망친다면 생도로서, 기사로서 끝이다.
그 정도 분위기는 다들 읽었다.
다만 상대가 상대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억울한 이도 있었고 더욱 겁먹은 사람도 있었다.
주춤주춤 경기장으로 내려오는 생도들의 표정은 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유렌 또한 그런 생도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아는 걸까.
이윽고 그런 말을 덧붙였다.
"내가 왜 왔는진 알 거다. 다시 생각해보면 일이 이렇게 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입을 빌어나오는 것은 생도들이 상상치도 못한 달콤한 보상이었다.
"앞으로 10분이다. 10분 뒤까지 서 있는 놈은 친위대다. 졸업생이고 신입생이고, 수석이건 낙제생이건 상관없이 이 자리에서 확정이야."
그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 순간이 시작.
먼저 움직인 것은 유렌이었다.
꽈아아앙―!
"가만히 있는 놈은 내가 가서 팬다. 움직여라."
그 상황을 무어라 해야 할까.
…그래, 구태여 빗대자면 양 떼 무리를 헤집는 늑대라 해야 할 터였다.
콰앙―!
"끄아악!!!"
유렌이 날뛰기 시작했다.
* * *
유렌 파로스.
그 이름이 망나니 이외의 단어를 수식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하여 제국인들은 여전히 유렌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가 태사의 자리에 오른 이유에 음모론이 더해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많은 의문이 있었다.
유렌이 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건국 황제의 재림이라 불리는 칼리오스를 가르치는가.
방만하게 살아온 그가 어떻게 노력의 학문인 검술로 대성을 말하는가.
누군가는 그가 하늘에 닿을 재능이 있음에도 육신의 병으로 망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망나니 성정은 하늘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한 것이라 말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모든 게 연극이라고 말한다.
칼리오스가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파로스의 이름을 필요로 했고, 그를 위해 유렌과 거래를 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 진짜 답은 이제껏 오리무중이었다.
당연했다.
유렌은 단 한 번도 대외적인 자리에서 무력을 선보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유렌 파로스라는 사내의 진짜 모습을 본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힘은 경이에 가까웠다.
"너, 10초나 멈춰있네."
꽈아아앙―!
검조차 뽑지 않았다.
그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맨손으로 백에 달하는 철검을 상대하고 있었다.
기색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데 그를 상대하는 생도들을 어떤가.
"으아아아!!!"
발악하듯 덤벼든다.
도망가려는 순간 바닥에 머리가 처박힘을 깨닫곤 악에 받쳐 검을 휘둘렀다.
누군가는 기절하며 안도를 띄우고 있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게 낫다 판단한 것이다.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하다면 이해가 될까.
현실성 없는 공방에 모든 이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나마 눈썰미가 있는 이들은 그 속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기술, 순수한 기술이네."
"으음…?"
"태사께선 마나를 발출하지 않고 있네. 익스퍼트 이상은 확실하실 터인데...."
유렌은 마나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가 생도들을 상대한 방도는 순전한 기술이었다.
그러니까, 그들과 유렌의 차이점은 육신을 얼마나 더 잘 다루느냐일 뿐이라는 뜻이다.
깨달은 이는 공포에 휩싸였다.
저 순간순간에 생도 하나하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판단하는 시야, 공방을 어떻게 이어 나갈 것인지 판단하는 사고능력, 그리고 그걸 수행할 육체적 능력과 체력 안배까지.
유렌은 범인의 수준에서는, 설령 수재나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라 하여도 시도하지 못할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관객은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검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나도 이걸 느꼈다.'
그렇다면, 유렌과 검을 맞대는 생도들이 과연 이걸 모를까?
'…아니.'
누구보다 크게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압도적 재능의 벽을.
같은 조건에서도 절대 같아질 수 없는 기량의 차이를.
생도들이 저리 악에 받쳐 발악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일지도 몰랐다.
* * *
리암은 비척비척 일어나며 유렌을 노려봤다.
저 주먹에 맞은 횟수가 몇 번이지?
생각해봐도 답을 낼 수 없었다.
세는 게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몸은 진즉에 한계에 도달했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고, 검은 도저히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차오르는 감정은 경악이었다.
'이게 같은 인간이라고…?'
리암은 학년 수석까지 차지할 정도의 수재였다.
그렇기에 유렌이 어떤 형태의 대련을 하는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딱 생도 수준의 힘과 기술만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걸 아주 섬세하게 조합해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재능의 차이를 실감하면 허탈함이 차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크게 리암의 속에 차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배우고 싶다.'
근본이 무인, 노력으로 치면 천재.
그는 호승심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더 일어나 저 무예를 눈에 새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외의 욕망을 말하자면 그랬다.
리암은 직전 경기장에 난입하던 유렌이 어떤 눈빛이었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봤었다.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순간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었다.
자신은 외압 따위에 굴복해 신념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인정받고, 친위대라는 명예를 손에 넣고 싶었다.
그 열망이 리암의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열망만으로 그게 될 리가.
"으아아아!!!"
"복부가 비었다."
콰앙―!
파리를 내쫓는 듯한 손짓에 리암의 몸이 붕 떠올랐다.
숨이 턱턱 막혀옴에 기침을 하며 다시 일어났다.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만신창이였고, 그런 중에도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 있었다.
'2할? 3할?'
모르겠다.
일단 서 있는 사람보단 누워있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리암은 주변을 둘러봤다.
'루빈은 아직 살아 있다.'
거기에 나단 선배와 4학년 수석인 프레드 선배.
그 외에 두각을 보이던 사람들까지 총 스물 남짓.
어떻게든 버티면 이기는 게임이다.
그러니 슬슬 협공을 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모르긴 몰라도 꽤 많이 흘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공방을 주고 받았던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2분 정도일 터다.
그리 생각하며 생도들이 눈짓을 나눈 순간이었다.
유렌이 잔혹하게 선고했다.
"5분 남았다."
쿵, 하고 리암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른 생도들의 얼굴 위로 절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하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진 말은,
"대충 떨거지들은 가려낸 거 같으니까...."
차오른 절망을 부추겼다.
"이제 제대로 해볼게."
휘이이―
유렌이 마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리암의 속에 위기감이 차오른 순간이었다.
쩌어엉―!
"끄어억…!"
이제껏 버티던 생도 하나가 단 한 수에 혼절해 버렸다.
074화. 생도 (5)
누군가 내게 지금 상황에 대해 화가 났느냐 묻는다면 답은 '애매하다'다.
물론 문제 해결이야 해야겠지만, 감정적으로는 분노보단 황당함이 먼저 차오르고 마는 것이다.
'속 보이네. 진짜.'
최초엔… 그래, 2황자 측이 황실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개입한 것일 터다.
걸출한 커리어를 가진 기사라면 훗날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 법이니까.
거기에 내가 끼어들며 상황이 바뀐 거겠지.
황실 기사가 아닌 친위대로, 그렇게 수족을 태자의 곁에 심어 동향을 파악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지 않나.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기대부터 하는 게 딱 2황자답다.
내가 대회 1등을 데려간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어찌 저리 생각이 짧은지.
아니, 저러니까 나라를 말아먹은 건가?
여하튼 그런 황당함이 내 감정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난 척을 해대며 이리 난동을 피우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명분을 주면 좋지.'
첫째로 염소수염을 조져봤자 꼬리를 자르려 들겠지만, 그럼에도 이 상황은 2황자에게 부담감을 준다.
당분간 놈을 조용하게 만들 수가 있단 말이다.
둘째로 내가 직접 친위대 인재를 고를 수 있다.
직접 하나하나 건드려보고, 개중 싹수가 보이는 것들을 발굴할 수 있단 말이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평가하는 건 총 2가지 항목.
근성, 그리고 재능이었다.
첫 5분은 쉴 새 없이 두들겨 팼다.
서 있는 놈 중 몸이 멀쩡한 놈은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미친 듯이 패대기쳤다.
그리 처맞고도 서 있는 정도의 근성과 독기는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그러지 않으면 어찌 앞으로의 훈련을 버틸 수 있겠나.
근성에서 합격한 놈들은 총 20명이었다.
오늘 당장 죽어도 서서 죽을 20명이었고, 그놈들을 대상으로 '재능'을 평가해봤다.
쩌어어엉―!
"끄허억…!"
"쿨럭…!"
"으으으…!"
"마나도 못 버티면 황실은 못 가. 포기하고 싶은 놈들은 그냥 쓰러지면 된다."
후반 5분, 지금까지 3분간 녀석들의 몸에 내 마나를 때려 박았다.
마나 적응도를 보는 중이다.
암만 육체 활성도가 좋아도 마나를 못 느끼면 무용하지 않던가.
언젠간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버린단 말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소질이 있는 놈들은 타인의 마나가 몸에 들어오는 걸 느끼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걸 억누른다.
조금 더 감각적인 놈들은 그걸 역으로 적에게 발출할 줄 안다.
이 수준이 세간에서 말하는 재능이다.
여기서 둘 다 못한다?
그럼 기절한다.
저기 널브러진 놈들이 딱 그런 놈들이었다.
"이제 넷 남았네."
주변을 둘러봤다.
리암이 피를 토하면서도 일어났다.
루빈과 나단이 또한 휘청거리면서도 또 일어난다.
거기에 4학년 수석이라는 놈도 아직 살아있었다.
중간중간 녀석들은 고함까지 질러대며 버텼다.
루빈 저 새끼는 나한테 욕까지 갈겼다.
'그건 나중에 교정하는 걸로 하고....'
총평은 그랬다.
넷 중 리암만이 범재였다.
범재였음에도 악과 깡으로 버티는 부류였다.
나머지 셋?
마나를 주입하니 그대로 내게 돌려주려고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4학년 수석.
잘만 키우면 익스퍼트 상위는 무난하게 갈 실력이다.
이 정도면 쇼핑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
흡족하다.
그 순간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찌 말해야 할까.
나는 잠시 혀를 굴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10분은 못 채우긴 했는데… 이 정도면 된 거 같다."
우뚝―
녀석들이 멎었다.
순간 표정이 멍해졌다.
내 말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사가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이란 뜻은 아닌데.
"너희 합격이라고."
그렇게 부연 설명을 더해준 순간이었다.
네 놈이 서로를 바라봤다.
감정이라도 격해졌는지 눈물까지 고인 채로 말이다.
그러다가,
"…더럽게 힘드네."
풀썩―!
동시에 쓰러졌다.
그리하고서야 킥킥 웃어댔다.
커다란 대회장 전체에 녀석들의 웃음소리만이 가득하다.
왜인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결말.
그에 나는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박수 안 치고 뭐해. 지금 친위대 뽑힌 거잖아."
이 새끼들은 무대 매너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한번 꼬집어주니 그제야 짝짝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흐뭇함을 느끼며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그렇게 대강의 수습은 끝.
이후의 일을 말하자면 그렇다.
"소가주, 불의를 밝혀내고 생도들을 훈계하는 것은 참으로 감명 깊었습니다. 파로스의 가주답더군요."
"감사합니다. 누니...."
"하지만 언행이 조금… 많이 거치셨습니다."
"...."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나쁜 말은 안 됩니다. 저는 소가주가 상냥한 사람임을 믿지만, 다른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믿는 법입니다."
"…죄송합니다."
누님께 혼났다.
누님은 화가 나셨다기보다는 슬퍼하시는 것 같았다.
거기서 차마 '저 새끼들이 꼬우면 어쩔 겁니까.'라는 말은 못 했다.
아는가?
내가 욕을 입에 담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슬퍼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괜히 착하게 굴어야 할 것만 같아진다.
그 사람이 평생 비속어를 써본 일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누님 앞에서는 욕을 참아봐야겠다.
* * *
생도 대회의 일이 제도 전체에 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관객층이 그러지 않던가.
절반은 귀족이니 귀족가에서 먼저 얘기가 퍼진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이 생도들이니, 빈사 상태로 돌아온 생도를 보며 가족들이 얼마나 경악했겠나.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환경인 것이다.
"파로스 소가주가 100대 1로 마나 한 톨 안 쓰고 생도들을 이겼다면서?"
"말도 마! 내 아버지의 친구의 동생의 동료가 그날 맞은 생도 중 하난데, 파로스 소가주의 기예가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대. 어쩌면 태자 전하와 맞먹을지도 모른다고...."
"아아,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 걸까?"
"무슨 소문?"
"왜, 파로스 소가주가 시한부라는 거.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나서 시시각각 죽어간다고… 그래서 깨달음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태자 전하를 가르친다는 소문 말이야."
"이, 일리가 있어…?!"
유렌의 평가는 그날부로 완벽히 뒤집어졌다.
수상한 점이 가득한 망나니에서 경이적인 무력을 가진 기사로.
하늘이 그 재능을 두려워해 불치의 병을 심은 천재로.
그리고....
"자네더러 여섯 번째 황금 세대의 기수라더군."
"진짜 개 좆같은 소리를 씨발. 내가 그 폐급 새끼들이랑 동급이라 이겁니까?"
"나도 그중 하나네만?"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
칼리오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 당당함에 답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 모시는 사람인데 말 좀 살살해 주면 안 되나.
섭섭함을 담아 바라봤으나, 태자가 찾아왔음에도 잠옷 바람으로 소파에 누워있던 유렌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전하,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진짜 화나는 거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봤다고 그러나?"
"꼭 마음 몰라준다고 삐지는 영애 같습니다."
"…비유가 끔찍하군."
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칼리오스는 차오르는 닭살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런 중이었다.
"그것보다 뒤처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거 말하러 오신 거 같은데."
누가 태자고 누가 가신인지.
누운 채로 보고를 받으려는 꼴에 또 헛웃음이 나왔으나, 칼리오스는 무어라 불만을 토해내진 않았다.
적어도 오늘의 유렌은 그럴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물갈이를 했네. 2황자측 인물이 꽤 끼어 있기에 조금 손봤지. 그리고 휘튼 자작은 옥으로 넣었네. 긁어보니 여기저기서 한 일이 꽤 많은 게 아니던가."
꿈틀거리던 2황자 세력이 이번에 확실히 밟혔다.
휘튼 자작을 옥에 처박은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교육기관을 손에 넣은 것은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에 관한 부연설명은 에릴다가 했다.
"2황자 쪽은 한동안 바쁠 거예요. 그동안 에스트로가 사관 학교에 미친 영향이 꽤 컸거든요. 부정부패야 그냥 쿡 찔러도 줄줄 새는 수준에 이번 일까지 한다면 뭐...."
에릴다는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적당히 해먹었어야지. 걔들은 항상 욕심이 문제라니까?"
칼리오스 또한 큭큭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오늘 있었던 회의에서조차 2황자의 측근들은 조용했다.
그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꼴을 보고 있자면,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더 바빠지긴 했지만 뭐 어떤가.
회의를 떠올리자 금방 기분이 좋아진 칼리오스는 유렌에게 그런 말을 했다.
"고생했네. 역시 자네가 우리의 보물이야."
인재는 암만 많아도 모자라다.
개중 칼리오스의 눈에 차는, 도리어 칼리오스에게 가르침을 주는 인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중 하나가 유렌인 것이 이리 감사할 수가 있겠나.
파로스라는 배경, 출중한 실력, 거기에 실질적인 도움까지.
무엇 하나 빠짐이 없으니 사람이 이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다.
물론, 유렌은 그런 애정을 원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예에 뭐, 그보다 이제 갈 때 안 되셨습니까? 바쁘실 텐데."
손까지 휘휘 젓는 게 그만 쉬고 싶다는 티를 아주 팍팍 내고 있었다.
오후까지 잠옷 차림으로 누워있는 것에서 알아챘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그 일 이후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모양이다.
저 행보가 본인이 그리 싫어하는 시한부설에 무게를 실어주는 걸 알기나 할까?
'…아니, 알고야 있겠지.'
아마 변명조차 귀찮은 게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남의 눈치를 보는 족속도 아니니 말이다.
칼리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말했다.
"친위대 관련해선 이후 논의하지. 그럼 가보겠네."
"예에, 살펴 가십시오."
칼리오스는 접견실을 나왔다.
그렇게 막 정문을 지나는 중이었다.
"…아, 태자 전하. 1황녀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음? 아, 파로스 영애."
막 저택으로 들어오던 세실리아를 만났다.
그에 칼리오스는 새삼스러운 감상을 느꼈다.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군.'
잿빛 머리칼에 보랏빛 눈동자.
그것만 아니면 유렌과는 정반대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분위기였다.
청초함을 넘어 가련하기까지 한 외형, 조곤조곤한 말투나, 고요한 기색까지.
귀족 영애의 표본이라 같다고 해야 할까.
'어찌 이 영애가 유렌의 누이란 말인가.'
칼리오스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감상을 느끼며 말했다.
"외출을 하신 모양이오."
"예, 다과회가 있었던지라."
"유렌과는 다르군. 그 친구는 영 대외활동을 즐기지 않는 듯하던데."
"어찌 파로스의 가주될 이가 함부로 걸음을 옮기겠습니까. 일정은 전하와 황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을."
백 점짜리 대답이었다.
이어 세실리아가 짧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실 줄 알았다면 저택에 남아있을 걸 그랬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아아, 내 다음엔 미리 이르고 오도록 하지."
그리 답했지만 칼리오스는 알았다.
다음에도 세실리아가 자신을 대접할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도 미리 말하고 왔건만.'
세실리아가 모르는 이유가 뭐겠나.
유렌이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 집밖으로 내보냈겠지.
그리 생각해도 될 정도로, 칼리오스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세실리아는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말이다.
도대체 누이를 자신에게 소개시켜 줄 수 없는 이유가 뭘까.
'내가 영애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한 건가?'
사실을 말하자면 칼리오스에게 욕은 하고 싶은데 세실리아 앞에서 황실에 불손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유렌의 양가적인 감정이 이유였으나, 그를 알지 못하는 칼리오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런 순간이었다.
"전하, 잠시 실례를."
세실리아가 다가왔다.
그리곤 가느다란 손을 뻗어 구겨져 있던 옷깃을 펼쳤다.
칼리오스가 눈을 끔뻑이자 세실리아가 말했다.
"제국의 주인이 되실 분이니 몸가짐이 바로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인의 시선이 따르는 것은 필히 부담이 되실 일이나, 부디 황좌의 무게를 생각해 주시옵소서."
한걸음 떨어진 세실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혼난 건가?
애매하긴 했으나 일단은 새로웠다.
"고맙네. 내 주의하도록 하지."
"더불어...."
"음?"
세실리아가 머뭇거렸다.
칼리오스는 작은 호기심을 느끼며 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윽고 세실리아가 말했다.
걱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이다.
"…소가주께서는, 혹시 정말 병이 있는 것입니까?"
"-"
"세간의 소문이라는 것이 있는 터라... 게다가 소가주께선 제게 나쁜 일을 영 말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병이 있다면 전하께는 말씀을 드리지 않으셨을까 하여 여쭙습니다. 혹여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일단 칼리오스는 웃음을 참았다.
유렌이 가진 병?
지랄병 말고는 잘 모르겠다.
다음으로 차오르는 것은 저 진솔한 걱정에 대한 감탄.
이상적인 누이란 이런 걸까.
일단 자신은 저럴 자신이 없었다.
에릴다가 병에 걸렸다면 '일은 누가 하지?'라는 생각을 먼저 할 터였다.
뭐가 됐든 사람이 선하고 순진하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런 주제에 옷깃을 고치며 훈계까지 하니, 그게 또 앙증맞은 면이 있다.
칼리오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가 아는 한 없소. 그저 해괴망측한 소문일 따름이니 영애께선 걱정 마시오."
세실리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을까요."
"아니, 나름 즐거웠소. 이만 가보지. 공무가 있는 터라."
"예, 살펴 가십시오."
세실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칼리오스는 걸어 나가 마차에 올라타며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실리아를 흘긋 봤다.
에릴다가 말했다.
"되게 고운 분이시네."
"음, 매력 있는 여인이군."
"그 말 소가주 앞에서 할 수 있어?"
"...."
칼리오스는 잠시 고민했다.
유렌에게 "자네 누님이 참 곱더군"이라고 말하는 자신을.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난 오래 살고 싶네."
누구나 목숨은 하나인 법이다.
칼리오스는 괜한 일로 목숨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075화. 친위대 (1)
하루하루를 집에 처박혀 있는 게 요즘이다.
일하기 싫다는 등의 게으름이 이유인 건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수련 중이었다.
경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놈의 몸뚱어리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엠마, 거기 더 꾹꾹 눌러봐."
"넵…!"
엠마가 엎드려 누운 내 등을 팔꿈치로 꾹꾹 눌렀다.
무리해서 움직이고 나면 항상 거쳐 가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누르는 건지 두드리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약하던 엠마도, 이젠 곧잘 시원하게 근육을 풀어준다.
물론 그게 위안이 되진 않지만 말이다.
'근육통은 왜 이렇게 심한 건지.'
망나니 시절을 떠올리면 이 몸뚱어리로 참 잘도 살았구나 싶다.
회귀 전의 시간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이럴 때면 그때의 육신만큼은 가져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쉽게 말해 역체감이었다.
소드 마스터의 육신은 피로를 모른다.
근육이 마나를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피로나 통증을 흩어내기 때문이다.
또한 성장이 가파르다.
경지에 닿는 순간 육신이 인간의 근력 성장 한계치를 뚫으며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걸 다 겪어봤는데 이제와서 이 허접한 몸이 성에 차겠나.
어서 소드 마스터에 닿아야지… 그런 생각만 든단 말이다.
'이제 익스퍼트 상위급인가....'
그간 꾸준히도 몸을 학대하며 근육을 키웠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무렴, 고작 몇 개월 만에 폐품 수준이던 몸이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일반적인 성장 속도를 넘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목걸이 덕이다.
회복력을 빌려 근육을 찢고, 다시 붙이는 과정을 압축한 게 유효했던 것이다.
"됐어. 이제 가봐. 방에 있을 테니까 저녁 시간 되면 불러줘."
"네! 아씨께는...."
"수련 중이라고 해."
"…진짜 하시는 거 맞죠?"
"사용인이 주인한테 대들기로 되어 있나?"
"힉…!"
오늘도 굳이 한마디를 보태는 엠마를 물리치고 거울 앞에 섰다.
세밀하게 잘 짜인 근육이 보였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소드 마스터에 오를 '기반'으로 말이다.
'전생에는 몸도 제대로 못 만들고 올라가서 고생했었지.'
소드 마스터의 육체 재구성은, 바탕이 되는 기존 육신이 어떤 형태로 짜여 있는가에 따라 성장 방향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드레노어 경은 익스퍼트 시절 근육 크기를 부풀린 덕택에 그걸 지지하는 뼈대가 단단해졌었다.
그게 성질에도 반영됐지.
내 경우?
돌이키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몸이 병신같으니 성질을 쓸 때마다 자살하려 드는군.
망나니 유렌 파로스는 수련 같은 건 몰랐다.
운동은커녕 매일 술이나 퍼먹기 바빴는데 어찌 육신이 멀쩡할 수 있었겠나?
그 고질병을 소드 마스터에 오를 때까지 못 고쳤다.
재구성이 되었다지만 본판이 병신. 사상누각이란 말이 딱 맞았다.
그리하여 일어난 현상이 있었다.
―파쇄의 반동을 몸이 못 버팁니다. 근육 탄력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밀도도 문제군. 근육이 흡수하지 못한 충격을 뼈가 받아내니 매번 골절이 생기는 것 아닌가.
―차라리 성질이 지배였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난 지배도 반동 없이 잘 쓰고 있네만.
―예예, 대~단하십니다.
내 성질인 '파쇄'는 여타 성질 중에도 유달리 포악한 편이었다.
형상이 짐승을 닮은 것도, 마주하는 놈이 포악한 맹수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지배보다야 덜하다지만 자아가 강하다고 해야 하나.
하여 사용할 때마다 내 몸으로 반동이 돌아오는 일이 잦았다.
그걸 방지하는 게 육신의 탄력.
즉, 성질 반동의 흡수력이었건만 당시의 나는 그 부분에서 모자랐다.
하여 지난 생엔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이후로도 몇 년이란 시간을 그 조율에 썼다.
이론적으로 접근하고, 그걸 내 몸으로 시험하면서 가장 '파쇄'에 어울리는 육신을 만든 것이다.
극한의 탄력과 밀도.
내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 그것이었다.
하여 이번 생은 그 점을 특히 신경 써 몸을 만들고 있었다.
같은 고생을 두 번 하기 힘든 게 첫째.
그리고,
―그랜드 마스터? 흠, 일단 중요한 건 조화였다네. 자네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는 그거 말일세.
―…예?
―그랜드 마스터도 결국 검의 경지라네. 육신이 뒷받침되어야 하건만 자네는 몸이 너무 허접해. 깨달음을 쫓아갈 정도로 강건하지 못하단 말일세.
―…계속 성장시키면 어떻습니까?
―적어도 몇십 년은 봐야 할 걸세.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첫 단추라면....
―소드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의 육신. 그 본판이 제대로 형성된 상태로 경지를 올려야 했단 말일세.
…그랜드 마스터.
이번 생엔 그 경지에 도달해 보고 싶어서.
달리 말하면 미련이었다.
그 미래의 태자조차 내겐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으나, 주먹구구식으로 경지를 올린 탓에 나는 한참이나 길을 돌아야 했다.
지금도 생각한다.
만약 그때 제대로 된 과정을 밟아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내가 주어진 시간 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면 전황은 달랐을까.
이제 와선 의미 없는 가정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내가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얼마나 괴물 같은 새끼들이 나올 줄 알고.'
적은 은밀하며, 규모가 크고 강하다.
그 편린 밖에 보지 못했지만, 벌써 나온 게 악마와 새로운 운명의 사도였다.
놈들을 상대함에 있어 당장 내 힘의 중요성 또한 두말하면 입이 아프지 않던가.
그랜드 마스터를 노려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다.
익스퍼트 상위급.
즉, 조금만 더 가면 싫어도 소드 마스터가 된다.
그전까지는 몸을 파쇄에 어울리도록 더 조형해야 하니 쉴 틈은 없었다.
그와 더불어 하나 더.
'내일인가....'
내일은 뽑은 친위대 놈들이 황실의 막사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아직 생도 수준의 햇병아리들을 즉시 전력으로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 * *
리암은 황성으로 들어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상기된 낯빛은 그가 이 순간에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아무렴, 꿈에만 그리던 황실 기사.
개중에서도 최고의 영예라 불리는 친위대로 발탁된 것이 아닌가.
단순히 그뿐만인 일이 아니었다.
그날, 대회에서 그렇게 쓰러지고 며칠을 기절해 있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기쁨보다도 걱정.
자신이 나선 탓에 아버지가 곤경에 처했으리란 생각이 있었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먼저 아버지를 찾아간 건 그런 이유.
하지만 이어진 아버지의 말은 리암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보직이 바뀌었단다. 제2 기사단으로.
―그 말씀은…?
―태자 전하 휘하의 기사가 되었으니 걱정은 말라는 뜻이다.
리암이 쓰러져 있던 동안 칼리오스는 분주하게 움직여 모든 외부적 문제를 지워놓은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리암의 약점이었던 부분까지 모두 해결되어 버렸다.
그것은 리암으로 하여금 큰 감사함을 느낄 일이었다.
아무렴, 일을 전면으로 까발려준 유렌과 그걸 해결해 준 칼리오스를 향한 충성심이 샘솟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진짜 친위대가 되는 거구나…!"
리암이 감격에 젖어 읊조리자 곁에 있던 루빈이 절망했다.
"아아, 왔다. 진짜 와버렸어…!"
리암은 큭큭 웃었다.
루빈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당시에는 본인의 출세를 위해 버틴 것이라 생각했지만, 루빈의 속내는 달랐다.
마찬가지로 부상에 골골대며 나타나 이르길, '너랑 같이 맞아주기로 약속한 거만 아니었으면 친위대 같은 건 안 했는데!!'라고 하지 않던가.
그랬다.
응원으로 했던 '같이 맞아주겠다'라는 말 하나로, 의리로 루빈은 버텼던 것이었다.
이런 것이 전우일 터다.
리암은 루빈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가자. 막사 생활 잘 부탁한다."
"아아, 가기 싫어억…!"
리암이 루빈의 뒷목을 잡아 질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직후 만난 것이 나단과 프레드.
친위대에 합격한 나머지 둘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
"됐다. 자식아. 이제 같은 대원인데 뭘."
"그래, 나단."
"…반말 빠르네. 한 번은 더 사양할 줄 알았는데."
나단이 떨떠름하게 답했고 프레드는 조용하게 웃었다.
이제야 깨닫길, 4학년 수석 프레드.
그는 호방한 외모와는 달리 꽤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이들도 함께할 동료.
리암은 또 두근거림을 느꼈다.
새로 부임한 기사들 중 목표가 큰 이들이 종종 겪는다는 '기사뽕'에 제대로 취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여하튼, 그렇게 네 사람이 걷던 중이었다.
"와아...."
수풀에서 여자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생도라지만 기사.
그 소리가 크지 않았음에도 네 사람은 모두 탄성을 들었다.
그들은 황실 정원을 저렇게 밟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직후 숨을 멈췄다.
"커다랗구나…!"
"화,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아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아리아를 실물로 본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 한들 정체 정도는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아무렴, 황실을 막 돌아다니는 비싼 옷을 입은 금발 푸른 눈의 여아가 둘이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리암은 특히 긴장했다.
아버지가 조언해 주신 내용이 있기 때문이었다.
―태사께서 3황녀 전하를 아끼시더구나. 황성에서 놀아주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곤 한다.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리고 앞으로 자신들의 스승이 될 유렌이 아끼는 황족이다.
밉보였다간 얼마나 기사 생활이 꼬일지 모른다.
제대로 각 잡힌 인사를 건넨 직후였다.
아리아가 눈을 끔뻑이며 '헤…' 입을 벌렸다.
"그 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아리아의 시선은 네 사람의 짐에 콕 틀어박혀 있었다.
아, 황실에 이렇게 등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사람은 잘 없겠지.
호기심이 돋을 만하다는 생각에, 또한 아기자기하고 순수한 모습에 리암은 답했다.
"저희들은 오늘부터 태자 전하의 친위대로 배속된 '기사'입니다! 막사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겨온 것이지요."
그 순간이었다.
"…오빠버니?"
아리아가 흠칫하며 눈을 좁혔다.
적개심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연유 모를 반응에 리암의 속에 당황이 차올랐다.
아리아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파르르 아리아의 몸이 떨렸다.
왜인지 울먹이기까지 했다.
"야, 야! 너 뭐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루빈의 타박에 리암은 황급히 반박했다.
그런 중 아리아가 삐죽 솟은 눈으로 말했다.
"저, 적의 수하였구나…! 아리아는 넘어가지 않는다!"
"자, 잠시…!"
"에잇!"
아리아가 도도도도 달아났다.
리암은 아리아를 향해 손을 뻗은 채로 굳었다.
속에선 황당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대, 대체 뭔데…!'
오늘 황실에 들어온 리암은 몰랐다.
바로 한 시간 전, 오랜만에 수업에서 칭찬을 들은 아리아가 포상으로 치즈 버거를 받았다는 사실을.
그걸 정원에서 먹으려고 들고 나왔다가, 마침 마주친 칼리오스가 "오! 아리아! 오라비를 위해 주전부리를 챙겨온 것이냐? 이리 기특할 수가!"라고 하며 냅다 강탈해 눈앞에서 맛있게 먹어 치웠다는 사실을.
하여 아리아가 시름을 달래기 위해 정원을 걷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뭐, 뭘 잘못한 거지…?"
구태여 따지면 상사를 잘못 둔 죄.
그러니까, 아리아에게 네 사람은 버거 강도의 부하였을 뿐인 것이다.
리암으로선 아직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 * *
얼마 뒤, 네 사람은 황족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생각에 와들와들 떨며 여명궁에 들어왔다.
그렇게 마주할 수 있었다.
"어, 왔냐."
"아앗…!"
유렌의 무릎 위에 앉아 행복한 얼굴로 오물오물 치즈 버거를 먹고 있는 아리아를 말이다.
"태, 태사님! 황녀 전하…!"
"어, 그래. 3황녀 전하. 앞으로 제가 가르칠 기사들입니다."
"움? 움… 흥!"
아리아는 멍하니 네 사람을 보다, 이내 콧김을 뿜으며 그들을 외면했다.
유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엥, 왜 이러십니까?"
"흥이란다!"
아리아의 원한은 치즈 버거 네 개만큼 무거웠다.
본인들은 아무런 잘못을 안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076화. 친위대 (2)
입궁하자마자 아리아가 울면서 치즈 버거를 달라더라.
마침 주려고 챙겨온 것도 있겠다, 한입 물려주니 그제야 울음을 그치기에 앉혀놓고 달래는 중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친위대 놈들과 아리아의 분위기가 영 이상했고, 이후에나 나는 사건의 원흉이 누군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여튼....'
태자 그 인간은 인성이 왜 이렇게 터져있나 모르겠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점은 태자에겐 아무런 악의도 없다는 것.
그 인간은 진심으로 아리아가 자기를 위해 버거를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란 것이다.
태자에게 언질이라도 줄까 했지만 포기했다.
그 자기중심적인 성정에 분명 내 말에 반박하려 들 터인데 내가 뭐하러 피곤하게 말싸움까지 하나.
여하튼 아리아는 대충 달래 돌려보냈다.
친위대 역시 막사에 짐을 던져놓고 연병장에 다시 모였다.
나는 페토에게 말했다.
"근데 넌 뭔데 내 뒤에서 무게 잡고 있어. 저 옆으로 가."
"엣, 저는 간부...."
"간부는 새끼야. 가라고."
그제야 페토가 시무룩해져선 친위대 옆으로 간다.
먼저 들어왔다고 짬질이라도 하고 싶었나.
어림도 없지 인마.
네 사람이 페토를 보곤 의아함을 토했다.
머리 위로 '-'가 떠있는 듯한 건 착각인가.
"뭐, 일단 다 모였네. 친위대는 너희 다섯이다."
내 말에 녀석들이 집중한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일었다.
리암, 루빈, 나단, 페토, 거기에 프레드는 뭐… 회귀로 인한 변동이니 그렇다 치자.
전장을 누비던 부하들을 다시 소집해 모아보니 앳된 얼굴 위로 그날의 거무죽죽하던 낯짝들이 겹쳐 보이는 게 아닌가.
물론, 그때처럼 비참하게 둘 생각은 없다.
기껏 찾아온 두 번째 기회.
잘 될 거면 챙길 놈들은 다 같이 잘되는 게 좋으니까.
"자기소개는 생략하자. 너희끼리도 막사에서 지지고 볶든지 하고. 바로 교육 들어간다."
"옙!"
"이것부터 묻자. 너희는 친위대가 뭐라고 생각하냐."
내 질문에 잠시 녀석들이 당황한다.
이내 손을 든 것은 리암이었다.
"태자 전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는 명예로운 기사입니다!"
흠, 기사뽕인가.
고개를 돌려 다른 녀석들에게 물었다.
"다른 의견은 없나?"
그리자 나단이 말했다.
"특무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황실기사단과는 구별되어 태자 전하의 일정을 보조하며 근거리 경호를 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의견은?"
이번엔 루빈이었다.
"태자 전하의 친우… 그런 역할도 맡지 않을깝쇼. 아무래도 평생을 곁에서 지키는 역할이니까."
"의, 의장대로서 기능하는 것 아닐까요? 전하의 직속으로 일정을 함께하니까 보이는 시선을 신경 써야 하고...."
반론한 건 프레드였다.
그나마 제일 정답에 가깝군.
하지만 저것도 틀렸다.
페토는 눈을 끔뻑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정답이 하나도 없냐."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그래, 친위대라는 게 겉으로 보면 참 화려하고 멋진 직책인 건 맞다.
더군다나 모시는 사람이 황제가 되고 붕어할 때까지 그 곁을 함께 지키며 늙어가니 친우의 역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친위대의 진짜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말했다.
"다 틀렸어. 프레드가 비슷하게 맞추긴 했는데, 정답이랑은 조금 거리가 멀지."
움찔, 내 말에 다섯 놈이 일제히 들썩였다.
나는 의문에 빠진 놈들에게 조금은 불편한 민낯을 보여줬다.
"너흰 고기 방패야. 좀 이쁘게 생긴 고기 방패."
"…!"
놈들의 숨이 멎었다.
눈빛이 흔들렸다.
하나,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리암, 친위대가 명예로운 기사라고 했냐? 맞다. 친위대는 명예롭지. 그런데 '친위'라는 역할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일이 뭐라고 생각하냐."
"그것은...."
리암이 답을 망설였다.
하여 나는 답해줬다.
"주군을 대신해서 죽는 거다.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아 죽고 암살자의 비수를 대신 맞아 죽고 짓쳐드는 저주를 대신 받아내 죽는 거다."
"…!"
충격받은 표정, 하나 리암은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다음으로 나단."
"예, 옙…!"
"특무대, 근거리 경호. 좋은 말이지. 능력 있는 경호 인력처럼 보이고. 하지만 말이다. 전원이 너희가 제1 기사단보다 강하냐? 익스퍼트가 우스운 실력자냐?"
"...."
"가장 강한 황실 기사는 제1 기사단이다. 너희 수준? 솔직히 생도잖냐. 성장한다고 해도 익스퍼트잖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제1 기사단보다 전하의 적을 잘 죽여줄 수 있나? 적을 잘 감지할 수 있나?"
"…없습니다."
"그래, 그래서 틀린 거다. 다음, 루빈. 넌 새끼야. 태자 전하가 네 친구야? 기사 문학이라도 봤냐? 뭐 주군과 호위의 끈끈한 유대 이런 거라도 꿈꿔?"
그러자 루빈이 기겁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말했다.
"태자 전하가 친구가 어딨냐. 황제는 오롯한 존재다. 무언가에 기대는 사람이 아니야."
분명 그런 황제도 있겠지만,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는 아니다.
그 인간은 독불장군으로 서 있을 때 가장 빛나는 인간이다.
"마지막 프레드."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프레드가 우뚝 굳어선 눈을 부릅떴다.
뭐 그렇게 긴장할 것까지야. 그나마 정답에 제일 가까웠으면서.
"의장대. 맞다. 친위대는 품위가 중요해. 너희들은 전하의 얼굴이야. 어딜 나갈 때마다 백성들은 마차 안의 전하가 아닌 너희들을 보니까."
프레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걸 부서줬다.
"근데 그건 덕목 중 하나지 목적이 아니잖냐. 발상이 너무 소극적이다."
프레드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나는 뒷짐을 지며 놈들을 한 바퀴 빙 둘러 걸었다.
"처음 말했듯이 예쁜 고기 방패. 그게 너희의 목적이다. 외유에서는 각 잡힌 제식으로 전하를 향한 선망을 만들고, 내부적으로는 스스로를 전하를 대신해 죽을 여벌 목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게 끝. 너희 용도는 그 정도다."
리암의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반항심 따위는 아닌 것이, 결연한 눈빛은 무언가를 수용하려는 듯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래서 이놈이 기껍다.
근성 하나는 끝내주게 좋거든.
"뭐, 그걸 이해했다 치고 이제 다음 얘기를 하자."
조금은 가라앉은 분위기.
하지만, 이놈들 기나 죽이겠다고 이런 얘기를 한 건 아니다.
"근데 그 고기 방패를 가르치는 게 나야.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반골 기질이 좀 심해."
말하자 놈들의 시선이 내게 몰린다.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가르친 새끼가 허무하게 죽으면 기분이 좆같다고. 태자 전하? 니들이 안 지켜도 알아서 살 인간이야. 그러니까 나는 내 자존심부터 세우려고."
신목을 꺼내 들어 어깨에 걸쳤다.
"니들은 죽으면 안 돼. 목적 수행하면서도, 웬 사고를 겪어도 살아서 친위대로 남아야 해. 알겠냐?"
"태, 태사님…!"
"고로 훈련 목적은 하나다."
그렇게 본론을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고기 방패. 강철도 찌그러뜨리는 최상의 육벽."
감동이라도 받은 건가.
열의가 느껴진다.
리암 저놈은 울먹거리기까지 한다.
"대답은?"
"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나 말고 전하한테 충성해."
쿵!
"예!!!"
놈들이 무릎을 꿇으며 고함쳤다.
눈빛이 타오른다.
음, 아주 좋다.
"실전부터 간다. 예로부터 맷집은 맞아서 기르는 거라고 했지."
이래야 패죽여 놔도 또 나올 것 아닌가.
내 얼굴 위로 웃음기가 짙어졌다.
쿠우우웅―!
"꾸헥?!"
"끄헉?!"
마나로 녀석들의 몸을 짓눌렀다.
하나같이 자빠지려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애썼고, 페토는… 쩝, 쓰러졌군.
아무튼 진행은 해야겠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멍하니 입을 벌리는 놈들에게 말했다.
"골고루 때려주마. 제일 먼저 기절하는 놈은 깨워서 저녁까지 팰 테니까 근성으로 버텨라."
그렇게 신목을 휘둘렀다.
빠아아악!!!
"으꺄아아악!!!"
기절했던 페토가 일어났다.
* * *
황실 기사 사관 학교.
페토를 제외한 친위대는 제국 전체에서도 유망주 중의 유망주만 간다는 기관에서 지냈던 만큼 하나하나가 자존심이 세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 만큼 이제껏 친위대가 받은 교육은 잘 짜인 커리큘럼 내에서의 규칙적인 훈련이었고, 그런 환경이 익숙한 그들에게 유렌의 수업은 새로운 세계였다.
좋은 뜻은 아니고, 그만큼 과격하다는 말이었다.
"끄으응…!"
루빈은 움찔움찔 몸을 떨어대며 고통을 호소했다.
나단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게거품을 물었다.
프레드는 어떻게든 서 있는 모습을 하려 했지만, 이미 눈엔 흰자만 남아 있었다.
페토는 옛저녁에 혼절.
남들보단 근육이 두꺼운 리암이 그나마 버티는 수준이었다.
오늘로 사흘째.
이들이 매일 한 일이라곤 유렌에게 맞는 것밖에 없었다.
그냥 맞는 것도 아니고 정성껏, 끔찍하도록 아프게 말이다.
부상으로 인한 훈련 불참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게, 유렌은 누구 하나가 깨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맞아 혼절해버리면 끼고 있던 목걸이를 그 사람의 손에 쥐여줬다.
그리하면 온몸의 부상이 다 나아버려, 정신만이 몰린 채로 또 유렌에게 맞아야 했다.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루빈이 눈물을 흘렸다.
리암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
"과격하지만 확실히 효용은 있는 훈련이야. 사흘 만에 근육이 더 딱딱해졌어."
"사후경직이 아닐까?"
"농담은 그만두고."
루빈은 한숨을 쉬었지만, 더 반박하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암이 보기에도 농땡이나 좋아하던 루빈의 신체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힘들긴 하지만 보람은 있다.
그걸 다 같이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하나 더,
"어이, 페토!"
"으으…! 말 걸지 마…!"
이렇게 함께 고생하니 사이가 더 긴밀해지지 않았나.
"망할 유렌…! 출세시켜준다면서…!"
"하하, 출세는 출세잖아."
"이게 무슨 출세야! 그냥 이그로시아에 남을걸! 오지 말걸!!!"
페토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모습에 어느새 깨어난 프레드가 웃었다.
공공의 적이라고 해야 하나.
유렌이 악역을 도맡아준 탓에 대원들은 지금도 시시각각 친해지고 있었다.
첫날만 해도 저게 뭐하는 놈인가 싶었던 페토와도 훨씬 사이가 좋아졌다.
훈련만 끝나면 이 생활이 꽤 재밌다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자자, 가서 씻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악당들이다!"
"엣, 진짜아?"
연병장 끄트머리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친위 대원들의 고개가 홱 돌아갔고, 이윽고 깜짝 놀란 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2, 2황녀님! 3황녀님!"
아리아가 활짝 웃으며 대원들을 삿대질했다.
그 뒤에선 필리아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진짜 악당?'하면서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왜인지 얼굴이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페토가 "히익?!"하며 몸서리를 쳤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아리아와 필리아가 다가왔고, 아리아가 말했다.
"여긴 왜 왔느냐!"
자기가 온 주제에 질문이 이상했으나, 황족에게 개길 수는 없었다.
"그, 훈련으로...."
"가, 강도 훈련…!"
아리아가 기겁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이유야 오늘은 치즈 버거를 뺏기지 않았고, 지난 일은 시원스럽게 잊어버리는 기억력 탓이지만 친위대 입장에선 그저 싫어하지 않으니 고마울 뿐.
그런 찰나에 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첫째 오라버니의 친위대분들이셨군요!"
짝!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모습이 꽤 사랑스러웠다.
페토는 땅에 시선을 박고 있지만 나머지 넷이야 흐뭇할 뿐이었다.
아무렴, 기사를 동경하는 소녀가 아닌가.
그것도 황녀씩이나 되는 분이니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이다.
"아직 모자란 몸입니다."
"훈련에 힘쓰고 있습죠."
"저, 전하의 힘이 되기 위해…!"
"아이쿠, 더워라."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어깨 뽕이 들어간 대원들과 동경 어린 필리아의 눈빛.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건 당사자들에겐 중요치 않았다.
이 맛에 기사를 하는 걸까.
대원들이 그런 생각까지 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여러분 중 대장은 누군가요?!"
그 질문에,
"하하!"
"당연히...."
"제가...."
"대장은 저...."
우뚝―
대원들이 표정을 굳히고 서로를 바라봤다.
하나같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랬다.
칼리오스의 친위대는 아직 대장을 뽑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서열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영원히 지속될 리는 없지 않은가?
대장은 언젠가 생길 것이고, 대원들은 그걸 떠올린 순간 내심 그런 답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감은 나밖에 없잖아?'
앞서 말했듯 생도 출신 네 사람은 자존심이 강했다.
거기에 페토는 자신이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이니 당연히 대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입 밖으로 꺼내자니 뭔가 그래선 안 될 것만 같은 기분.
"대장이 없나요?"
재차 건네진 질문에 대원들 사이에 신경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필리아는 웃었다.
아주… 아주 음흉하게 말이다.
그렇게,
딱콩!
"아얏!"
"왜 우리 애들 이간질합니까?"
마침 나타난 유렌에게 딱밤을 맞았다.
077화. 친위대 (3)
잠시 자리 좀 비웠다고 그새 사고를 치나.
대원 놈들은 곧장 막사로 돌려보냈다.
와중 리암이 그런 질문을 했다.
"태사님! 그래서 저희 중 대장이 누굽니까?"
"좆밥 중에 1등 해서 뭐하게? 대장질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학교 다시 가서 회장이라도 하던가."
"...."
침몰시켰다.
하나같이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로 돌아가는 게 어찌나 한심하던지.
그런 감상을 털어내고 이번엔 필리아를 상대했다.
내 눈이 좁아졌다.
"그래서 뭐하러 오셨습니까."
정체를 알고 나니 이 요망한 꼬맹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속셈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왜, 바로 저번만 해도 생도 대회의 부정을 넌지시 알려주고 가지 않았나.
하여 이번 역시 그러리란 생각에 질문을 건넸고, 그에 필리아가 힘차게 답했다.
"그야, 재밌으니까…!"
"어이쿠."
딱콩!
"아얏! 같은 데 또 맞았잖아요!"
"같은 데를 때렸으니까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필리아가 얼굴 위로 황당함을 띄웠다.
그러더니 뺨을 부풀리며 말했다.
"이, 이거 황족 모독이에요? 저 고자질할 거예요?"
"해보십쇼. 저 파로습니다. 반려하면 그만이지."
"어, 음...."
사실 이런 걸로 반려가 안 되는 건 나도 알고 얘도 안다.
그냥 말싸움이 하고 싶었겠지.
내가 당황하는 꼴을 보고싶었다거나.
그게 확실한 게, 말을 받아치니 녀석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재미없어."
"그래서 뭐하러 왔냐니까."
"나! 아리아는 모험을 하고 있었단다!"
"예에, 잘하셨습니다."
"엣헴!"
아리아는 어깨에 손을 얹곤 정수리를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눈이 뿌듯함을 담은 채 반짝거렸다.
어서 칭찬하라는 신호였다.
슥슥―
"헤헤...."
정수리를 쓸어주자 아리아가 흐물흐물해졌다.
와중 필리아가 맞은 부분을 문지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뭘 말입니까."
"태사 어르신의 목적이요."
움찔, 손끝이 떨렸다.
미간을 좁힌 채 시선을 주니 필리아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그동안 한 일이요. 가만 보면 황금 세대 기수들하고만 이리저리 엮였잖아요. 처음은 첫째 오라버니였고, 둘째는 위자드 베아트리스, 셋째는 법황청에 넷째는 이그로시아."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네."
"에이, 저는 다 아는 걸요. 오라버니랑 친해진 건 납치극이 있던 날 이후였잖아요. 얼마 전에 칩거하신 건 그냥 이그로시아로 떠나있던 거였고."
세작이 있나?
순간적으로 위기감이 치솟았으나 필리아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추리에요. 저한테 주어진 정보에서 가장 그럴싸한 인과를 엮어서 개연성을 보강하는 거죠. 만약 납치극이 소문대로 낭설이다?
그럼 어르신이랑 오라버니가 그날을 기점으로 가까워진 게 말이 안 되죠. 둘째 셋째야 당연히 공식으로 발표난 게 있으니 아는 거고… 그렇게 넷째. 이그로시아는 법황청 쪽을 긁으니까 나오던데요? 어르신 소개로 웬 검은 머리 남자가 치료를 받는다. 그것도 성녀님한테. 앞의 세 개랑 엮으면 정체가 꽤 빤히 보이잖아요?"
…놀랍긴 하군.
딱히 열심히 숨긴 건 아니었지만 한정된 단서만으로 정확히 사실을 짚어내는 능력은 인정할 만하다.
하나 내가 여기서 당황하면 저 꼬맹이가 또 기세등등해지겠지.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답했다.
"그게 뭐 어쨌단겁니까."
"말했잖아요? 궁금증이라고. 움직이신 걸 보면 어르신만 아는 뭔가가 있고, 거기에 황금 세대의 기수들이 끼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
척!
필리아가 북쪽을 가리켰다.
"헤이론이죠!"
계속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러자 필리아가 떠벌거렸다.
"이상하더라구요. 이그로시아는 직접 본 게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오라버니부터 시작해서 황금 세대라는 사람들, 하나 같이 묘한 사고에 엮였단 말이죠? 그 시점에 레베카가 사라졌구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헤이론 대공자도 사고를 칠 거 같아서요. 제 말 맞죠? 뭔 일 나죠?"
빙긋 웃으며 기대감에 차 묻는다.
답을 망설였다.
이 녀석에게 뭔가 말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문득 치솟았던 까닭이다.
그런 중이었다.
필리아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을 건넨 것은.
"저 조사 다 해봤어요! 북부에서 요청하는 물자가 축소됐더라구요? 그것도 비축 물자가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한 한파 시기에 말이죠! 거기에 북부로 향하는 상인들의 실종 사건까지! 이건 뭔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
"…응? 몰랐어요?"
필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끔뻑였다.
나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게 뭔데.'
단언컨대 처음 듣는 얘기였다.
* * *
필리아의 말을 듣곤 곧장 집으로 돌아와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헤이론 대공자가 뭔가 일을 벌일 건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전조현상이 분명해 곧장 알아채고 대비할 수 있으리란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기르고어에게 이미 관련한 것도 언질을 준 상태.
한데 어째서 일이 이리될 때까지 기르고어는 아무런 말이 없었는가.
그를 따지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연락을 걸었고, 그렇게 연결된 통신 너머로 기르고어가 건네온 답이 있었다.
[아,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갔구나. 맞아. 북부 쪽 물자 흐름이 이상해서 조사 중이었어. 확실한 게 나오기 전까지는 섣불리 알리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서 그랬는데… 음, 다음부턴 주의할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여 조금은 짜증스럽게 따지듯 말했으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어진 기르고어의 말을 들어보면 일이 극심한 지점에 닿지는 않았다.
[그 2황녀라는 여자, 확실히 난 사람이기는 한데 이번은 정보가 너무 없었던 것 같네. 단순히 심증일 뿐이야. 물자 축소는 단순히 올해 사냥 비축량이 많았던 거였고, 그나마 의미심장한 건 상인들 실종인데… 이 부분을 문제 삼기엔 올해 한파가 예년에 비해 극심한 게 변수라서 확실히 말할 건 못 돼.]
"…징조라기엔 애매하다?"
[적어도 상기한 문제들은 애매하다…라고 말해야겠지?]
"대공가 쪽은 어때?"
[이쪽도 몰라. 알잖아. 헤이론의 한파. 이 시기에 북부랑 통신은 꽤 힘들지.]
납득은 됐다.
북부의 한파는 끔찍하기로 유명하다.
심한 시기에는 현지인들도 자다가 죽어버릴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기에 외부인은 모닥불을 피워도 버틸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하던가.
그 한파가 통신 불량의 이유였다.
정확히는, 그 '한파의 원인'이 이유였다.
왜 같은 국가에서도 그곳만 유독 추운가.
더 북쪽인 외경이나 다른 종족의 터전은 안 그러하건만 그곳만 유독 한파가 몰아치는가.
"…망할 정령 새끼들."
[천년 넘게 거길 살아온 애들이야. 어쩌겠어.]
신비에 의한 추위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정령들이 만든 한파가 마력 간섭을 일으켜 그 시기의 헤이론은 외부와의 통신이 거의 단절된다.
여하튼, 이리되면 어쩔 수 없다.
"직접 가봐야 하나...."
나서서 확인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공의 실종이라는 사고를 어떻게든 파헤쳐야 한다.
그런 생각이 치솟는 순간이었다.
[…아니, 내 말 안 끝났어. 좀 들어줄래?]
기르고어가 곤란하다는 듯 뺨을 긁었다.
인상을 구기자, 기르고어가 말했다.
[대공의 움직임을 포착했어.]
"-"
통신구 너머 기르고어가 손을 까딱했다.
그러자 이아스가 나타나 녀석에게 서류를 건넸다.
기르고어는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헤이론 영지 접경지에 애들을 깔아놨었거든. 그러다 발견한 건데… 조사해보려 해도 가까이 가지는 못하겠더라고. 그나마 알아낸 게 대공이 직접 움직였다는 것 정도.]
"…대공이 제도로 오고 있다고?"
[경로만 보면 그렇다는 거지. 지금 북부의 문제에 대한 구원 요청이라고 생각 중이야.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캐봤는데 이게 끝. 나머지는 그 인간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네.]
기르고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상정 외였다.
'지난 생엔 이런 구원 요청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니, 옥에 있어서 몰랐던 걸 수도 있다.
아니면 이미 전쟁이 시작된 시기라서 몰랐다거나, 당시 집권 중이던 2황자가 구원 요청을 몰래 묵살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태자가 바로 알아야 할 상황.
다시 황실로 가려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아, 잠깐. 하나 더, 이건 네 개인적인 요청이야. 너희 가문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달라던 거 있었잖아.]
"…!"
[찾았어. 조금 공교롭긴 하지만.]
걸음이 멎었다.
눈이 부릅 뜨였다.
기르고어가 그런 내게 말했다.
[헤이론의 설산. 거기 토착민들 노래에 그런 게 있더라고.]
큼큼, 기르고어는 헛기침을 한 후에 어떤 구절을 읊조렸다.
[푸르름을 그러쥔 채로 노래하니, 겨울의 아이들아. 약속된 순간을 기억하라. 나, 쪽빛의 눈동자로 다시금 이 풍경을 담을 터이니.]
기르고어가 생긋 웃었다.
[어때? 조금이라도 그럴싸한 건 다 말해달랬잖아.]
그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은 시적인 뭔가로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이 인간은 북부에서도 지랄을 해놨네.'
약속. 겨울의 아이들이라는 단어를 상기하니, 이제는 익숙한 맥락으로 저것이 초대 파로스와 관련된 일이란 확신이 들었다.
* * *
여명궁의 기사 막사.
친위대는 간만의 휴식에 다들 늘어져 쉬고 있었다.
정식적인 휴식은 아니고, 유렌이 갑작스레 일정이 생겨 스케줄이 빈 것이었다.
"이게, 이게 삶일까…?"
나단이 행복에 겨워 모포 속에서 움찔거렸다.
그 근처엔 페토가 잠들어 있었다.
벌써 열 시간이 넘게 안 깨고 있었다.
루빈은 웬 기사문학을 읽고 있었고, 프레드는 명상 중이었다.
휴식.
참으로 좋다.
다만 리암은 그런 중 불안감을 느꼈다.
"…우리 쉬어도 되나?"
그것은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는 불안감이었다.
구태여 이유를 이르길, 하루가 멀다하고 두들겨 맞다가 맞지 않으니 안 맞는 게 도리어 불안해진 것이었다.
학습된 공포였다.
무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게 아닌가.
리암의 말에 다른 대원들도 움찔거렸다.
애써 외면했으나,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프레드가 넌지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우리 검 안 휘두른지 얼마나 됐지?"
다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유렌은 첫 교육이 있던 후 내내 이들의 손에 검을 쥐여주지 않았다.
그저 회초리로 몸을 두들겨대는 일만 해댔을 뿐.
그래도 기사 수업을 받던 이들인 만큼,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게 아닌가.
"대련이나 해볼까...."
리암이 말했다.
그제까지 쉬던 루빈과 나단도.
잠들어 있던 페토까지 흥미를 보였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걸 넘어서 아직 미완으로 끝난 대장결정.
그걸 실력으로 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진짜 남자는 말로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눈을 봤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막사를 나서 연병장으로.
목검을 든 채로 대련을 준비했다.
"…승패에는?"
"깔끔하게 승복."
"남자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하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성 생활 이후 첫 휴식으로 다들 체력이 꽉 차 있는 상태.
거기에 몸 상태 또한 고생을 한 까닭인지 이전과는 다른 수준에 올라 있었다.
호승심은 두말하면 잔소리,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첫 타자는 리암과 프레드였다.
각자 2학년과 4학년 수석인 만큼 자신감은 충분했다.
"준비…!"
루빈이 심판으로 서서 손을 들었고, 그걸 내리는 순간이었다.
"오! 젊은 기사들!"
호방한 기색이 가득한, 그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대원들이 멎었다.
시선은 곧장 목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뭔 여명궁 막사에 사람이 이리 자주 왕래하나.
그런 생각이 있었고, 이후 대원들의 숨이 멎었다.
"대련인가! 좋은 청춘이군. 역시 황실의 기사다운 기개다!"
연병장을 향해 걸어오는 이는 180cm 언저리의 키에 팔다리가 쭉 뻗은 마른 체형의 여인이었다.
생김새로 보면 검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렀고, 눈매는 맹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런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으니 위압감이 풍긴다고 해야 할까.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대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속이 다 비칠 정도로 얇은 셔츠와 검은 바지.
…그 너머의, 상처로 난도질 된 근육이 꽉 들어찬 몸이었다.
그녀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피가 끓는군. 내 이 대련에 동참해도 되겠나?"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에 대원들이 쩌적 굳어버린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계셨습니까. 대공 각하."
"으음? 오, 유렌!!!"
"…오랜만입니다."
대원들은 경악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유렌을 반기는 여인의 정체가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허어, 그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큰 건가!"
북부 헤이론의 주인이자, 익스퍼트 최상위의 기사.
그리하여 현 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기사.
그녀가 바로, 현 헤이론 대공인 티브리아 헤이론이었다.
078화. 대공 티브리아 (1)
대공을 마주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 기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외모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건 진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대공을 본 일이 30년 전, 회귀한 지금 시점으로 봐도 10여 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늙지 않은 것이다.
달리 말해, 지극한 수련으로 쌓인 마나가 대공의 노화를 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위가 아니다.
저 정도면 익스퍼트 최상위.
아니, 옷 아래로 얼핏 비치는 근육의 밀도와 통궤안에 의해 드러나는 마나의 정돈됨까지를 보면....
'…돌파 직전인데?'
대공은 언제 소드 마스터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왜 아직도 익스퍼트인 걸까.
깨달음의 결여? 아니면 성질이 아직 결정되지 않을 걸 수도 있겠지.
의문과 감탄이 함께 나와 말문이 막힌 중이었다.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일단 사고 수습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저 친구들과의 대련은 참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저 친구들도 간만에 얻은 휴식이라 무리를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대공의 '대련'은 유명하다.
주로 대련의 탈을 쓴 생사결로 말이다.
상대에 따라 어느 정도 손속을 두긴 하지만, 일단 대련이 끝나는 건 어느 한 쪽이 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 때까지다.
실제 과거엔 대련 중 본인이 죽을 위기까지 갔음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그런 이유로 인간 중에선 대공과 더 '대련'을 하려는 자가 없었다.
하여 대공이 고안한 게 마수와의 맨몸 결투.
그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싸움을 해야 할 정도의 전투광이었다.
한데 그런 전투광이 애들하고 싸운다고 생각해봐라.
암만 매일 두들겨 패는 놈들이라지만 이번엔 진짜 망가질지도 몰랐다.
그걸 염려해 부탁했다.
하지만 그에 돌아오는 답은 상정 외의 것이었다.
"으음, 오랜만에 만나서 건네는 첫마디가 그건가?"
섭섭하다는 듯한 어조, 표정.
그에 움찔, 몸이 떨리고 만다.
나는 차오르는 머쓱함을 삼켜낸 후에 답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대모님."
"항상 잘 지내지. 너는 정말 많이 컸구나."
흐뭇하게 건네는 말은 불편하다.
하지만 남들한테처럼 막 대할 수도 없다.
아무렴,
"힐라가 이 모습을 보면 참 좋아했겠어."
엄마 친구에게 예의 없이 굴 수는 없는 법이다.
* * *
귀족 영애들이 친목을 다진다면 보통은 티파티나 무도회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대공과 나의 어머니의 첫 만남은 달랐다.
두 사람은 황실의 기사 사관 학교에서 처음 만나, 라이벌로서 관계를 쌓았다고 한다.
파로스의 저택.
대공은 홀에 걸린 내 부모의 초상화를 보며, 추억에 잠긴 미소와 함께 그런 이야기를 했다.
꽤 많이 들은 이야기다.
"다시 생각해봐도 미친년이었지. 내가 살면서 나보다 미친 여자를 본 건 힐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단다."
"예, 대련에 미친 분이셨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미친 정도가 아니었다. 하도 쌈박질을 해대니 교관께선 자다가도 그년 이름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셨을 정도였어."
"그랬습니까?"
"입은 또 얼마나 거친지… 당최 남의 엄마를 들먹이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는 인간이었던 건 들었느냐? 그 덕에 나랑은 잘 맞았지. 서로 얼굴에 주먹질 한 번 하고 시작하면 개운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거든."
"...."
"저 표독스러운 눈 좀 보거라. 네 눈이 저기서 물려받은 것이란다."
어머니는 확실히 눈매가 사나운 편이었다.
그게 초상화 너머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했다.
곁에 있는 아버지와는 색채부터가 대비된다.
정오의 태양과 자정의 달을 보는 듯했다고… 내가 아니라 가신들이 그런 평가를 할 정도의 대비였다.
"저년이 네 아비를 쫓아다닌 방식도 참 지랄맞았지. 필립은 사관 학교에 온 주제에 책을 더 좋아하던 범생이였단다. 그래도 파로스 소가주라 괴롭힘은 당하지 않았지만… 그 성격에 친구가 있었겠느냐."
"예, 뭐...."
"힐라는 그게 좋다더구나. 친구가 없으면 나한테만 집중해줄 거 아니냐면서.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더니 생도 시절 내내 필립을 괴롭혔어. 딴에는 애정 표현이었겠지만, 분명 괴롭힘이었단다. 그러다 졸업식 때 고백했지."
"차였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차이지. 필립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그때 필립이 그런 말을 했단다. '네가 있는 모든 순간이 끔찍했어.' 그날 처음 힐라가 울었단다. 이후로 그년이 파로스 저택 앞으로 가 일주일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남들은 지극한 사랑이라고 했지만 직접 본 내 입장에선 끔찍했다. 아느냐? 그때 네 어미 눈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단다. 뺨은 홀쭉하고 눈가는 퀭하고 입술은 쩍쩍 갈라져선… 그 상태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게...."
새삼 돌이켜 보니 어머니가 미친 사람 같긴 하다.
3년 내내 한 사람만 괴롭히다가 그 사람한테 고백하고, 차이고 난 다음에는 미련을 못 버려 대문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니.
결국 이어져서 망정이지 잘못되었다간… 음, 여기까지 하자.
아무튼 지난 일을 회고하다 보니 어느덧 현재까지 왔다.
어머니의 유일한 친구이자 내 대모인 대공은… 아련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어깨 동무를 했다.
"그래도 재밌었다. 저년이나 필립이나 같이 있으면 심심할 틈은 없었거든."
"…예."
"세실리아가 태어나고 네가 태어나는 동안에도 우리 사이가 유지되지 않았더냐. 나쁜 말을 꽤 많이 한 것 같지만 그 정도로 본성은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병주고 약주고인가.
하지만 거짓말이 아님은 안다.
왜 아니겠나.
대공이 모든 게 완벽한 누님을 두고 나를 유달리 아끼는 게, 바로 내게서 어머니가 보이기 때문인 것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기억하는 모든 순간까지 대공은 언제나 나를 어여쁘게 여겼었다.
그 누님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말이다.
―어릴 땐 소가주가 참 부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대공께서 그만큼 소가주를 아끼셨으니까요.
처음 나를 만난 날, 대공은 세 살의 나를 품에서 한시도 떨어트리지 않은 채 제도를 거닐었다고 했다.
내가 15살이 되는 해에는 북부로 데려가 3년간 검술을 수행시키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고 했다.
그 정도로 나를 좋아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약속은 못 지켜서 미안하구나. 아들놈과 너를 친구로 만들어주고 싶었건만."
대공이 사과를 했다.
북부로 데려가 수련시킨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부모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는 소가주로서 파로스를 지켜야 했다.
…물론, 망나니짓이나 일삼으며 책무는 내다 던졌지만, 명목상 북부는 갈 수 없었단 말이다.
"그 외에도 자주 오지 못해 미안하다."
"대공 각하가 아니십니까. 책무 앞에서 사적인 정이 대숩니까."
"대모가 아니더냐. 그리 언약하고 자주 찾지 못했음은 분명 잘못한 것이 맞다."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지만 대공은 분명 의리를 다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때엔 북부를 내팽개치고 와 한 달이나 이곳에 머물렀다.
어렸던 누님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행정 절차를 대신해주고 우리의 후견인이 되어 파로스로 뻗치는 마수들을 걷어내 줬다.
위대한 가문이라는 이름 외엔 무엇도 남지 않은 당시의 파로스는… 대공이 없었다면 분명 무너졌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괜찮습니다. 각하께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여러 사양의 말로 죄책감을 덜어드리고자 했다.
그러고 나니 겨우 대공이 웃었다.
"암만 생각해도 신기하구나. 어떻게 힐라의 아들놈이 이렇게 의젓한지."
"반은 아버지의 피가 아닙니까."
"아니다. 내 장담하건대 네 아비 피는 세실리아가 다 가져갔다. 네가 망나니인 이유가 달리 있겠느냐? 이건 분명히 힐라의 피다."
탁탁, 대공이 내 등을 두드렸다.
머쓱함이 차올랐다. 망나니 시절의 일은 나 스스로 생각해봐도 꽤 부끄러운 과거였다.
대공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망나니 성정만 받은 게 아니라 다행이지. 몸이 많이 다부지구나."
"…감사합니다."
"검재도 잘 물려받았다. 어쩌면 힐라보다 네가 더 대단할지도 모르지. 아암, 너는 위대한 가문의 후계가 아니더냐."
"과찬이십니다."
"그놈 참 말투가 딱딱하구나."
"어찌 제가 대모께 함부로 말을 하겠습니까."
분위기는 꽤 부드러웠다.
솔직히 나로선 어린 내게 꿀밤이나 놓던 커다란 아줌마라 다시 봐도 친근하게 대하진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여 잊고 살았으나, 사적인 인연이란 건 어찌 꽤 질기게 이어지는 모양이다.
그리 옛날얘기나 들어주던 중이었다.
"각하, 식사부터 하시지요."
"오, 고맙구나. 세실리아."
누님이 왔다.
평소보다 더 예를 차리고 있으나, 그와 별개로 기분은 꽤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대공과 더 깊은 사이니 당연할까.
"언질을 주고 오셨다면 식재라도 더 준비해두는 것인데...."
"괜찮다. 밥이라면 황성에서 실컷 먹을 것이니."
"떠나기 전 한 번 더 들러주십시오. 그땐 제대로 준비해보겠습니다."
누님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은 호방하게 웃으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러다 한마디를 더하니,
"아, 그래도 밥은 조금만 있다 먹으마."
"예…?"
대공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내 고개가 기울었다.
그 순간이었다.
대공의 입가에 히죽 미소가 떠오른 것은.
"얼마나 컸는지 대련 한 번 하면서 확인해 봐야지! 요즘 그렇게 잘 나가던데!"
"...."
"유렌! 정원으로 따라 나오거라!"
"각하, 식사부터...."
"몸을 움직여야 밥이 맛있는 법이다!"
대공이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곧장 몸을 돌려 나섰다.
나는 누님의 기색을 살폈다.
"...."
누님의 눈빛이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 또한 곤란함을 느꼈다.
* * *
앞서 일렀듯 대공은 유명한 대련광이다.
아니, 정확히는 전투광이다.
대공이 한 번 대련을 시작한다면 끝나는 순간은 어느 한쪽이 정신을 잃는 순간.
그때가 될 때까지 몰아치지 않으면, 혹은 포기를 말하면 대공은 노발대발하며 상대를 질책한다.
이게 문제다.
"오거라! 그래도 내 조카나 다름없는 놈이니 심하게는 하지 않으마! 전력만 다하면 된다!!!"
대련을 피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듯하고.
그렇다고 봐주면서 하자니 상대가 익스퍼트 최상위.
대충한다면 곧장 눈치채는 경지다.
그렇다면 방법은 내가 이기는 것뿐인데… 저 봐준다는 말이 본인 몸이 망가지면 그만둔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 않겠나?
좀 몰아붙이면 더 신나서 달려들 게 분명하단 말이다.
하여 마지막으로 물었다.
"…꼭 하셔야겠습니까?"
"사내가 그리 겁을 먹어서야 쓰겠느냐! 기사는 혀가 아닌 주먹으로 말하는 것이다!"
주먹이 아니라 검으로 말하는 게 아닐는지.
한숨이 나왔다.
내가 질 일이야 없겠지만, 이건 일생일대의 난제였다.
엄마 친구를 패야 한다.
암만 내가 망나니라지만 이건 좀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꽈아아앙!
대공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응수해버렸다.
빠악!
"으극?!"
"앗."
…턱에 주먹을 꽂아버렸다.
079화. 대공 티브리아 (2)
주먹을 뻗고 나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감각이 예민하면 이게 문제라고 해야 하나.
호흡 중에 걸리는 위협에 관해서는, 사고보다 몸이 빠르게 판단을 내려버린다.
평소보다 그 현상이 극심한 것은… 그래, 대공의 경지가 경지라 그렇다.
'오랜만이네.'
소드 마스터에 가까운 적과 싸우는 것은.
성질도 없고 오러도 없지만, 이 수준까지 온 인간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넘어선 반응 기전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싸움이라는 것에 있어서 이성적 판단이 아닌 육신의 판단을 기반으로 수를 둔단 말이다.
달리 말하길 생각할 시간도 아까워 몸이 이끄는 대로 공방을 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알맞은 답을 찾아가도록 정답지를 만드는 과정이 '경험'.
소드 마스터의 싸움은 한 마디로, 짐승의 싸움에 가까웠다.
빠악!
"끄햑!"
그러니 승패는 성질의 상성, 깨달음의 형태, 거기에 오러의 잔량 따위로 결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죄송합니다. 져드리진 못해서.'
대공은 익스퍼트 최상위다.
즉 성질, 오러, 깨달음이 없다면 순수한 기량의 승부였고, 그것만큼은 이 시점에 나보다 나은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마나의 길을 본다.
근육의 맥동을 감지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수의 해법을 안다.
쐐액!
달려들기에 안면으로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콧대로 내 공격을 받아낸 대공이 그대로 무릎을 차올렸다.
그에 이번 역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콱, 무릎 뒤쪽을 팔꿈치 안쪽으로 받아 올려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대로 허리를 틀어서,
꽈직!
"끄헉…!"
명치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그러고 나니 뒤늦게 아차 싶다.
"…앗, 실수."
이건 좀 심했나?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끄윽…!"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대공이 흙바닥 위에 엎드려 끅끅 침을 뱉어댔다.
기른 머리칼 탓에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대공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괜찮으십니까?"
"흐, 흐하핫…!"
대공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번들거렸다.
"이건… 이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구나!!!"
콰아아앙―!
대공의 마나가 폭사해 정원의 땅거죽을 다 뒤집었다.
드러난 얼굴은 광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성을 놓은 듯한 행색에 머쓱함이 차올라 말했다.
"어, 음. 여기까지...."
"누구 마음대로! 이 썩을 놈의 제도는 더럽게도 덥구나!"
쫘아악!
대공이 셔츠를 찢었다.
조각처럼 새겨진 근육과 흉터, 그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마나와 얽혔다.
대공의 머리털이 거꾸로 솟았다.
아, 그거다.
'…헤이론의 비전.'
진짜 진심으로 할 생각이구나.
대공의 눈이 돌아갔다.
이렇게 되면 진짜 기절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겠지.
흘긋 누님 쪽을 봤다.
입까지 틀어막곤 놀라시는 게 곧 기절하기라도 할 모양.
판단은 그 시점에 끝났다.
'빨리 끝내야겠다.'
마나를 풀어헤쳤다.
* * *
티브리아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리 시원하게 얻어맞은 게 언제였더라.
그것을 되새기려면 꽤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맨몸 마수 사냥을 시작하기 전, 대공으로서 북부의 기사들과 대련하기 전, 제도의 기사들에게 수련을 받기 전.
그러니까,
'…힐라.'
생도 때까지 말이다.
―죽어어어어!!!
아직도 이따금 꿈에 나온다.
피를 토하면서도 달려들어 기어코 자신의 쇄골을 쥐어뜯던 그 정신 나간 눈빛이.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독기를 품고 울부짖던 목소리가.
그런 주제에 승부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희게 웃던 맑음이.
―흐아! 배고파졌다! 티브리아, 오늘 점심 뭐야?
―몰라 미친년아!!!
끔찍하게도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힐라와 함께할 때면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승부만을 즐길 수 있어서였다.
그때면 성적에 대한 압박도, 대공녀로서의 중압감도, 당장 내일에 대한 고민도 없이 순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런 걸 얼마나 오래 잊고 살았지?
'…아, 그래.'
힐라가 필립과 결혼한 이후였다.
검이고 뭐고 남자에 미쳐 온종일 엉겨 붙던 꼴이 얼마나 눈꼴 시리던지.
그런 주제에 그 괄괄한 성격은 못 고친 탓에 말싸움은 자주 했지만, 그게 영 시원스럽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또 대련하자더니.'
마지막으로 만난 날, 유렌이 다섯 살일 적.
힐라는 이제 후계도 낳았으니 다시 검을 잡으리라고, 10년 후엔 유렌을 데리고 북부로 와 온종일 싸워주겠다던 약속을 했었다.
―딱 기다려. 다음엔 콧대 한번 시원하게 부러뜨려 줄 테니까!
그리 호언장담하며 웃던 모습을 여전히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죽어버렸다.
고작 마차 사고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썩을 년....'
끝까지 제멋대로이지 않나.
생도 때나 후에나 지금이나, 힐라는 언제나 뒤처리나 맡기는 망할 여자였다.
그게 언젠가부터 속에 쌓였던 걸까.
"앗, 죄송."
쩌어엉―!
"쿨럭…!"
유렌의 주먹이 명치에 꽂혔다.
일순 호흡과 사고가 정지했다.
비전을 사용해도 호각.
아니, 열세다.
마나로 신체를 달궈 가속하는 힘이건만, 그 속도조차 유렌의 반응을 따라잡진 못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꼴사납게 패배한다.
그런 순간임에도, 티브리아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거, 시원하게 팰 거면서 사과는 왜 하느냐?"
"…저도 모르게 그만."
"왜, 뺨이라도 치...."
짜악!
"…빈틈이 있었네."
"크하하!!!"
이리 맞던 중 겨우 떠올린 것이다.
그놈의 불완전 연소를 끝낼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대련이 좋았다.'
힐라와 함께하는 대련이, 그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던 순간이 좋았다.
그랬다.
자신을 대련광 티브리아로 만든 건 힐라였다.
그런 주제에 멋대로 가버렸다.
내내 그게 불만이었다.
턱!
티브리아는 제 명치에 꽂힌 유렌의 주먹을 잡았다.
유렌이 손을 빼려고 했다.
회전하며 머리에 발차기를 날렸다.
꽈아아앙―!
"큽…!"
그걸 받아내며 유렌의 손목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으득!
유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미친...."
"좋구나. 네 애미를 쏙 닮은 발길질이다."
"그, 각하…?"
"…약속을 했었다."
꽈악―!
티브리아는 유렌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쥐며 말했다.
유렌의 인상이 구겨졌으나, 티브리아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너를 북부로 데려오는 날, 그년과 대련을 하기로 했다. 그 약속 탓에 꽤 고된 수련도 했었지."
마나가 들끓었다.
처음보다 거세게,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그년이 죽고 나서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다."
유렌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
이것이 꽤 즐거움을 자아냈다.
"오늘을 위해서였나 보구나."
"그, 이제 그만하심이...."
"네 애미가 뿌린 씨다. 거둬가거라."
그 순간이었다.
쿠과과과광!!!
공간이 열풍이 몰아쳤다.
마나가 신체의 열기를 흡수해 타오르는 것이었다.
몸이 더 뜨거워졌다.
티브리아는 전신에 화상을 입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차오르는 것은 희열이었다.
입이 열렸다.
"헤이론은 끔찍하리만큼 춥다. 그곳에 터전을 잡고 천 년. 선조들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추위였지."
그 순간 유렌이 눈이 휘둥그레하게 뜨였다.
고통도 잊은 듯 놀란 기색이었다.
물론 티브리아는 이유를 몰랐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얼어 붙게 만드는 한파. 하지만 그것을 마주하고도 우리는 걸어야 했다. 나아가야 했고, 싸워야 했다. 북부인이 이렇게나 투쟁에 미친 이유도 그것이다. 한데 나는 그게 의문이더구나."
그녀가 지금 사용하는 수의 근원이,
"왜 추위에 저항하여야 하느냐? 추위가 나를 두려워하게 만들면 되는 것을."
유렌과 칼리오스가 온갖 연구 끝에 만들어낸 '검의'와 맞닿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끝까지 가보자꾸나. 네가 쓰러지는 게 먼저인지, 내가 쓰러지는 게 먼저인지."
꽈아아아앙―!
제도 어딘가, 꽃밭이 만연해있던 정원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황성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높게.
* * *
'검의'라는 것은 근간이다.
무술에 '왜'라는 의문을 던져 그것에 필요성과 필연성을 부과하는… 고작 몸동작을 기적으로 완성시키는 무술의 핵심과도 같다.
미래의 태자는 소드마스터에 이르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제국 검술로부터 시작된 모든 무술에 깔린 근본적인 결핍을 해소하고자 나와 끊임없는 논검과 대련을 펼쳤고, 그 끝에 가장 인간적인 검의를 완성해 냈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검의는 우리가 '개발'한 게 아니라, '발견'한 개념이었다.
즉,
'스스로 닿았다…!'
누군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이라도 깨닫기만 한다면 검의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다.
'검의를 깨달은 건가?'
아니, 우연의 일치다. 저것은 '추위'라는 개념에 저항하고자 하는 대공의 발악이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그게 우연히 검의와 맞닿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웠다.
자연에 저항하기 위해 무술을 개발한다니.
그런 미친 짓을 시도하고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경이로운 업적에 가까웠으므로.
대공의 열기가 내 피부를 파고든다.
마나의 폭풍이 쉼 없이 나를 찢으려 든다.
단순히 내 마나로 막을 친다고 막을 수 있는 열풍이 아니다.
주술베기? 되겠나. 저 마나를 움직이는 건 규칙이 아닌 의지인 것을.
이 불꽃에 담긴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지는 건 나다.
조카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푸념 끝에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일단 대공이 이렇게까지 하는 게 어머니 때문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 똥을 쌌으면 치우고 가시지.'
쯧, 혀를 차며 마나를 움직였다.
검의를 상대하려면 나 또한 검의로 맞받아치는 수밖에.
저것이 담고자 한 것은 추위조차 두려워할 열기.
파고들어 위압감, 근본으로 가 공포의 형성.
검의의 상성은 그것을 아는 순간 끝난다.
어느 식을 쓸까.
짧은 고민 끝에 마나가 움직였다.
내 몸을 감싸던 마나의 막이 사라졌다.
열기에 피부가 찢겨나갔으나 괜찮다.
'그런 초식이니까.'
피가 끓는다.
고통이 옅어진다.
그리하여 흥분이 치솟는다.
과거엔 오우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
태산과 같은 적을 두고도 두려움 없이 출수하여야 하므로 고통스러울수록 강해지는 검.
이제와서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모든 통증을 지움으로써 시전 중엔 몸을 전투 기계로 만드는 식.
전쟁 중엔 꽤 애용했던, '광화식'이 발동됐다.
턱!
대공의 목을 졸랐고,
"크학?!"
"적당히 좀…!"
힘이 풀린 틈을 타 잡혔던 손을 빼서 주먹으로 대공의 뺨을 갈겼다.
"하십쇼!"
쩌어어엉―!
그 순간 열풍이 사그라들었다.
풀썩!
대공이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아니, 한 명 더.
털썩!
"누님…?"
저 멀리, 누님도 혼절하셨다. 눈이 질끈 감겼다.
'…아오.'
뒷골이 당겼다.
* * *
티브리아가 눈을 뜬 것은 약 한 시간 뒤였다.
낯선 천장.
왜인지 가뿐한 몸.
살펴보니 싸움에서 당했던 부위가 모두 멀쩡해져 있었다.
꿈인가?
생각했다가 이윽고 현실임을 깨달았다.
'음… 치유된 건가.'
몸에 걸리적거리는 감각이 남아있었다.
신성력의 흔적.
그새 신관을 부른 듯했다.
티브리아는 눈을 끔뻑이며 싸움을 회상했다.
그러다 큭큭 웃음을 흘려버렸다.
'졌구나.'
한데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할까.
보통 패배라고 하면 분하거나 치욕스러워야 할 것이건만 이렇게 개운한 기분은 또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지.
티브리아는 이런 시원스러운 패배를 알았다.
'힐라, 역시 유렌은 네 피가 짙다.'
힐라와 싸우고 나면 꼭 이렇게 승패와 상관없이 속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따라서 하나의 현상이 더 일었으니, 꼬르륵 배가 울려왔다.
―오늘 메뉴는 뭐야?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티브리아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자 보인 사람들이 있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유렌.
"어, 엇! 안녕하세요!"
법황청의 성녀… 아마 유렌이 부른 듯하다.
끝으로,
"...."
왜인지 불퉁해 보이는 세실리아.
그 눈빛을 보자 왜인지 뜨끔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이가 두 배보다 더 어린 조카에게 정말 죽일 듯이 달려든 꼴이 아닌가.
그래 놓고 지기까지 했으니 정말 어른으로서 면목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하! 벌써 식사 중이었구나. 성녀도 반갑소! 아, 치료해준 건 고맙소!"
"네? 아...."
티브리아는 세실리아의 눈치를 슬금슬금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맨손으로 고기를 잡아 뜯었다.
남편이 살아있었다면 분명 저 눈초리에 한 사람이 더 끼어 있었겠지.
이 순간만큼은 그 이가 먼저간 것이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유렌의 시선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티브리아는 수치심을 저 멀리 던지고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참 대단하더구나! 내 대련 중에 기절한 건 몇십 년만이다!"
"예,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만… 그보다 직전에 미처 질문드리지 못한 게 생각나서 말입니다."
"으음?"
"제도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이 시기에 연락도 없이."
그 질문에 티브리아가 덜컥 멈췄다.
그리곤 멍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아."
…까먹고 있었다.
080화. 대공 티브리아 (3)